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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5.24 2월의 페테르부르크, 얼어붙은 네바 강과 유빙 4
  2. 2015.05.24 쿠마도 나름대로 지적인 곰처럼 보이려고 애썼지만... + 이반 왕자와 회색 늑대 그림 10
  3. 2015.05.20 서무의 슬픔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57
  4. 2015.05.18 잠시 : 우리의 단추 베르닌은 이런 인물이기도 했다(추리 외전 중 발췌..) 10
  5. 2015.05.17 겨울비 내리는 저녁, 마린스키 극장과 운하 2
  6. 2015.05.16 힘든 심신의 위안을 위한 슈클랴로프 사진 몇 장
  7. 2015.05.13 서무의 슬픔 #21. 스페호프의 복수 55
  8. 2015.05.13 설경, 미하일로프스키 공원
  9. 2015.05.12 램프, 수정, 빛 4
  10. 2015.05.11 얼어붙은 운하 위의 까마귀
  11. 2015.05.08 마린스키 극장 내부, 좀 다른 구도로 찍은 사진 몇 장 6
  12. 2015.05.07 서무의 슬픔 20편에 이어 : 바질의 화려한 춤들(사라파노프, 루지마토프, 슈클랴로프, 바실리예프, 폴루닌 등) 2
  13. 2015.05.07 서무의 슬픔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58
  14. 2015.05.06 얼음 위에서 놀던 애들 한 장 더
  15. 2015.05.05 빛, 그림자, 눈 4
  16. 2015.05.04 마음의 위안을 위해 4
  17. 2015.05.03 환한 겨울 낮, 모이카 운하를 따라서 2
  18. 2015.05.03 ▶◀ 마야 플리세츠카야 (1925.11.20 ~ 2015.5.2)
  19. 2015.04.30 서무 19편에 이어 : 마린스키 발레 돈키호테 영상 클립 몇 개와 사진 몇 장(포노마료프, 노비코바, 슈클랴로프, 테료쉬키나 등) 4
  20. 2015.04.30 서무의 슬픔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52
  21. 2015.04.29 부드러운 빛에 잠긴 페테르부르크 4
  22. 2015.04.28 눈에 덮인 알렉산드로프스키 공원과 원로원 광장, 이삭 성당
  23. 2015.04.27 월요일이라 그런지 더 떠나고 싶네 4
  24. 2015.04.26 마린스키 극장 카페에서, '페트루슈카'와 '봄의 예감'에 대한 짧은 메모 덧붙임
  25. 2015.04.23 서무의 슬픔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53

 

 

 

지난 2월, 페테르부르크.

추운 겨울이었지만 그래도 정말 추운 한겨울은 지난 후여서 네바 강의 얼음도 군데군데 녹았고 파란 강물이 흐르는 모습도 조금씩 볼 수 있었다. 그때 찍었던 얼어붙은 네바 강과 그 위로 쌓인 눈, 그리고 유빙과 파란 강물 사진들 몇 장. 전에도 이때 풍경 몇번 올린 적 있다. 오늘은 주로 얼음 깨진 모습들 위주~

 

먼저 유빙이 안 보이는 사진부터. 스뜨렐까(활의 호 모양으로 뻗어내린 산책로이다)에서 찍은 네바 강과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와 사원.

 

 

 

 

저 배는 일종의 미니 쇄빙선 같았다. 배가 지나가자 그 뒤로 얼음이 깨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또 지금 생각하니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썰매처럼 지나갔나?? 그때 보면서는 전자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부터는 스뜨렐까에 갔다가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로 걸어가면서, 혹은 요새 앞 강가에서, 혹은 돌아오면서 찍은 사진들.

 

 

 

 

얼어붙은 강 위로 나가지 말라는 표지판이 그렇게 많이 붙어 있지만 보란듯이 여기저기 발자국들..

 

 

 

 

 

맞은편에 보이는 기다란 건물이 에르미타주 박물관이다.

 

 

 

이건 다리 건너가면서 교각 난간 사이로 (무서움을 무릅쓰고) 찍은 것. 이렇게 얼음 깨진 부분도 있고 유빙도 흘러다니고.. 으어 무서워...

 

 

 

꺅..

근데 또 마음 한구석으로는 빙수 생각도 났음...

 

 

 

그러니까 얼어붙은 강 위로 나가면 위험하다고요!

전에 올렸던 서무 시리즈 9편 '눈보라와 패딩코트'(http://tveye.tistory.com/3524)에서도 이런 풍경을 생각하며 썼다. 그거 맞다, 베르닌과 왕재수가 얼어붙은 강 건너다가 풍덩 빠졌던 거.. (미안하다 얘들아)

 

 

 

 

 

에르미타주 박물관 클로즈업..

가까이서 보면 이렇게 얼음 녹은 부분이 꽤 넓게 퍼져 있다. 날이 원체 쨍해서 강물이 더욱 더 시리도록 파래 보였다.

 

 

 

 

 

 

 

얼음 동동동..

잘 보면 얼음 위에는 갈매기도 앉아 있고 오리도 앉아 있음..

 

:
Posted by liontamer

 

 

휴일 오후. 내일도 쉬어서 참 다행이다.

오늘은 너무 피곤하기도 하고 기운이 없어서 좀 누워 있었다. 쿠마는 5월 들어 제대로 된 티타임과 간식이 없어 매우매우 뚜떼해진 상태...

쿠마야, 이 기회에 먹는 것만 밝히는 곰팅이가 아니라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지적인 곰둥이가 되어보자!!

 

그리하여 빅토르 바스네초프의 그림 '이반 왕자와 회색 늑대' 앞에서 포즈를 잡고 앉아 보았다.

 

그림은 예전에 러시아 박물관에서 사온 카피본이다. 액자에 들어 있어 흐릿하게 나와서.. 원래 이미지는 이렇다. 아주 좋아하는 그림이다. 러시아 민담 '이반 왕자와 불새'의 한 장면으로, 조력자인 회색 늑대 등에 올라타고 세상에서 제일 예쁜 미녀 옐레나와 함께 숲속을 달리고 있는 이반 왕자를 그렸다.

 

 

 

이 그림의 원형 민화인 '이반 왕자와 불새'에 대한 얘기는 이 링크를 : http://tveye.tistory.com/16)

(위 링크의 포스팅은 이미지가 많이 잘려서.. 마린스키 발레 '불새'에 대한 리뷰에도 바스네초프는 아니지만 불새에 대한 이미지들이 좀 있으니 그 링크도 : http://tveye.tistory.com/2770)

이반 왕자와 불새는 내게 아주 의미있는 이야기이다. 글 쓸 때도 수차례 중요한 주제나 모티프로 등장했고 지금 쓰는 미샤의 가브릴로프 우주에서도 주인공이 이 이야기를 놓고 춤을 안무하여 여러 사건에 휘말리게 되기도 했다.

 

 

 

이렇게...

어머나, 쿠마야.. 책도 많이 읽고 그림 앞에서 포즈도 잡고..어머나, 노어 원서도 읽는구나!

너 아주 문화적인 곰둥이구나!!

 

 

 

쿠마 : 장난해? 부르르...

 

 

 

토끼 : 쿠마야~ 뱃속의 양식만 탐내지 말고 마음의 양식도 쌓아야지~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어보는 거야~

쿠마 : 도스토예프스키가 뭔지 내가 알 게 뭐야! 딸기 케익 엉엉

 

 

 

쿠마 : 원망원망원망...

 

.. 이리하여 쿠마는 지적이고 문화적인 곰돌이가 되지 못하고 말았다 ㅠ

 

쿠마야 말 잘 들으면 어제 사온 아몬드 전병 한 개 줄게 ㅠㅠ

 

* 그건 그렇고 분류를 어디에 넣어야 할지.. 바스네초프 그림이 나오니 일단 ARTS 폴더에..

:
Posted by liontamer

 

서무 시리즈가 이렇게 길어질 줄이야.. 역시 길어지고 나니 본편과 혼재되면서 뒤로 갈수록 에피소드가 길어지기도 하고 때로 심각해지기도 한다. 분명히 맨처음에 음식투정하던 왕재수, 당직실 귀신 등장할 땐 독사과가 나올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뭐 이런 시리즈야 자체적으로 진화하는 법이니까 할 수 없다!

 

이번 22편은 지난 21편에서 그대로 이어지는 얘기이다. 스페호프의 음모로 백설공주처럼 독사과를 먹고 쓰러진 왕재수... 원체 나쁜 약물을 쓴 탓에 왕재수의 상태는 좀처럼 좋아지지를 않고.. 마음 착한 단추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22편은 아픈 왕재수를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단추의 이야기이다 :)

 

이번 편은 분량이 꽤 긴 편이라 반토막으로 나눠서 올릴까 하다가 흐름이 끊길 것 같아 그냥 전체 다 올려본다. 재밌게 읽으세요~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수차례 방해공작과 음모 끝에 드디어 스페호프는 눈엣가시 같은 왕재수에게 독사과를 먹이는 데 성공하고.. 왕재수는 위독한 상태에 빠진다. 아픈 왕재수는 헛소리를 하며 괴로워하고 베르닌은 어떻게든 그를 낫게 해주고 싶어 노력한다...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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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22

 

 

서무의 슬픔

-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베르닌은 수요일 아침에 20분이나 지각을 했다. 병원에서 쪽잠을 자고 일찍 일어났지만 차마 왕재수를 놓고 나올 수가 없어 머뭇거리다가 의사에게 쫓겨나다시피 나왔기 때문이다. 초췌한 몰골로 사무실에 들어서는데 발따예프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 다닐, 국장이 찾으니까 빨리 올라가 봐! ”

 

“ 저를요? 왜요? ”

 

“ 나도 모르지! 9시 되기 전부터 자네 왔냐고 묻던데! 또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쯧쯧... ”

 

 

베르닌은 잠시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페이퍼 나이프를 바라보았다. 가슴 속에 감추고 들어가서 국장을 확 찔러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울컥 치솟았지만 고개를 저으며 사무실을 나와 터벅터벅 계단을 올라갔다.

 

 

스페호프는 아주 기분이 좋았다.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심지어 대중가요였다. 베르닌을 보더니 책상을 톡톡 두들겼다.

 

 

“ 오, 다닐. 어서 오게. 얘기 들었네. 자네 병원에 아침까지 있었다면서. 그 불여우 곁에 붙어서. 극장에도 있었다고 들었는데 정말인가? ”

 

“ 예. ”

 

 

베르닌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왕재수에게 심폐소생을 해준데다 울고불고 병원에 연락하고 심지어 수혈까지 해주었으니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해고뿐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두렵지도 않았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려고 드는 인간들과 일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자르려면 자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스페호프가 활짝 웃었다.

 

 

잘했네. 자네 정말 일취월장했군. 따로 지시도 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위장 전술을 펼치다니. 대충 전해 들었네. 자네가 그 녀석을 병원으로 데려갔다지. 인공호흡도 좀 해주고. 아주 놀란 척 했다고. 훌륭한 연기였네. 덕분에 우리 쪽에 대한 의심은 받지 않겠어. 자네 아무래도 현장요원으로 전직해야겠어. 행정의 기본도 안 되고 서무 업무도 실수투성이라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자넨 현장 체질이었던 거야. 그래서 문서 작성이 엉망이었던 게지. 그 녀석 감시를 시킨 보람이 있군. 그래, 그 녀석이 사과를 몇 개나 먹었던가? ”

 

“ 사과... 역시 사과였군요. ”

 

“ 그렇지. 사과 껍질에 발라놨다네. 그 녀석이 사과를 좋아한다는 얘길 들었거든. 자네가 보는 앞에서 먹던가? 내가 그걸 봤다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고소했을까~!

 

“ 아닙니다. 제가 갔을 때는 이미 먹은 후였습니다. 한 알밖에 안 먹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약물 분량을 잘못 조절했는지 상태가 굉장히 심각했습니다. 숨도 못 쉬고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

 

“ 흠, 이상하군. 그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그렇게 쉽게 죽어버리면, 그것도 이목이 집중되는 극장에서 죽었으면 우리도 골치 아파서 안 되는데. 그래서 일부러 조금만 쓴 건데 그럴 리가 없어. 하긴 레베진스키가 애송이를 혼내주고 싶은 의욕이 앞서서 사과 한 알에 왕창 발라놨을지도 모르겠군. 내가 그렇게 세 알에 고루고루 펴 바르라고 했건만! ”

 

“ 의사가 그러는데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수용소 후유증 때문에 조금만 독성 있는 걸 먹어도 쇼크 일으킨다고...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이번엔 너무 나갔던 것 같아요... 정말 죽을 뻔했다고... ”

 

“ 흥, 아쉽군. 이왕 쇼크 일으킨 거 그냥 해치웠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그건 내 개인적인 희망이고, 자네 말이 일리가 있네. 냉정하게 생각하면 지금 그놈이 죽어버리면 안되지. 그러면 분명히 크레믈린에서 검시를 하라고 했을 거고, 약물이 검출됐으면 우리가 수세에 몰렸을 테니 그놈이 안 죽은 게 지금으로서는 낫네. 자네도 내 말 명심하게, 다닐. 나중에 정말로 그 녀석을 해치울 때는 증거가 남는 걸 쓰면 안 되네. 지난번 얼음물 수장 작전이 딱 좋았는데 다시 생각하니 아깝구먼. 하여튼 좋았어. 그놈이 많이 아픈가? ”

 

“ 예. 아직 의식이 없어요. 어젯밤에 잠깐 깨서 헛소리한 게 전부입니다. ”

 

뭐야? 의식이 없으면 무슨 소용인가! 깨어나서 많이 아파해야지! 아파서 펄쩍펄쩍 뛰고 바닥을 나뒹굴어야 약을 먹인 보람이 있지! 실컷 아파야 제대로 버릇을 고쳐주는 건데! 그래, 언제쯤 깨어난다던가? ”

 

“ 저어... 잘 모르겠습니다. 아침에도 계속 혼수 상태였고. 의사 얘기론 고비는 넘겼으니 아마 오늘 중 정신이 돌아올 거라고는 하던데... 국장님, 걔 정말 많이 아팠던 게 분명해요. 정신 잃기 전에 아프다면서 얼마나 울고 몸부림쳤는데요. 이제 그만... ”

 

 

베르닌은 다시금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꾹 참았다. 다행히 흥에 겨운 스페호프는 그의 마음을 눈치 채지 못하고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옳지 옳지, 그랬어야지! 싸가지 없는 애송이 녀석 그래야 버릇을 좀 고쳐주지! 자네 지난주처럼 특별 근무를 지시하겠네. 그놈 곁에 딱 붙어 있게. 아예 그놈의 보호자로 병원에 등록하는 거야. 그놈은 서류상 우리 소관이니 KGB 요원이 보호자가 되는 것이 당연하네. 게다가 자네는 그놈과 아침에 하고 저녁에 하고 밤에도 하는 사이니 구실도 있어. 그럼으로써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지. 첫째, 우리 쪽으로 쏠리는 의심을 없애는 것. 둘째, 그놈의 상태를 가장 먼저 파악할 수 있다는 것.

자네가 고생이 많네만 다 훌륭한 요원으로 커나가는 데 피가 되고 살이 된다고 생각하고 이만 가보게. 그놈이 퇴원할 때까지 자네의 서무 업무는 면제해 주겠네. 암, 지금 서무가 중요한 게 아니지. 괜찮은 현장요원 하나를 양성하고 있는 이 마당에! 어서 가게. 매일 오후 4시에 내게 보고를 하게. 직접 오기 어려운 상황일 때는 전화로 보고해도 좋네. 그럼 이상! ”

 

 

베르닌은 국장실을 나왔다. 분노가 들끓었지만 스페호프가 자신을 신뢰하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휴가를 내고 병원에 가버릴까 하고 고민하던 차였으니까.

 

 

 

*   *   *

 

 

 

 

베르닌은 곧장 병원으로 갔다. 스타브로프가 그를 발견하고 펄쩍 뛰었다.

 

 

“ 아니, 이 녀석은 등 떠밀어서 보내놨더니 왜 금방 돌아온 거야? 네 녀석 정말 사표라도 낸 거냐? ”

 

“ 아니오, 국장이 저보고 보호자 등록하고 옆에서 감시하랍니다. 다행히 절 의심하지는 않네요. 얘가 나을 때까지 여기 있으래요. 약을 사과 세 알에 고루고루 바르라고 했는데 한 알에 왕창 발라서 그런 것 같대요. ”

 

“ 어느 쪽이든 변할 건 없어! 그 자식은 인간 말종에 더러운 살인마야! 어린 애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런 짓을 하나! ”

 

“ 국장은... 걔가 자기 인사말을 중간에 끊었다고 앙심을 품은 것 같아요. ”

 

“ 인사말 한 번만 더 끊었다가는 대량학살이라도 하겠군! ”

 

 

노의사는 부르르 떨며 화를 냈다. 베르닌은 스타브로프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말대꾸를 하는 대신 조심스럽게 물었다.

 

 

“ 저, 선생님. 미샤는 정신이 들었나요? ”

 

“ 잠깐 깨긴 했는데 계속 헛소리만 하고 정신도 오락가락해서 도로 재웠어. 아마 오늘은 종일 그럴 거야. ”

 

“ 괜찮아지는 거죠? 그렇죠? ”

 

글쎄다, 부작용 때문에 약물을 전혀 못 쓰니... 그래도 어제 달여 준 약초가 좀 듣는 것 같으니 다행이긴 한데, 그나마 얼마 남지도 않았어. 그게 수도원 주변에만 자라는 건데 있다가 마누라에게 좀 캐 오라 해야겠어. ”

 

어, 제가 갔다 올게요. 저 여기서 근무하라고 지시받았어요. 시간 많아요. ”

 

“ 네 녀석은 약초 구분할 줄 모르잖아. ”

 

“ 가르쳐주시면 되잖아요. 저희 집에 식물도감 있는데 그거 가져오면... ”

 

“ 웬 식물도감 타령이냐, 책상물림이라더니 정말 그렇구나. 쯧쯧. 제냐, 이 녀석한테 흰머리천사날개풀 캐는 법 좀 알려줘라. 바구니랑 숟가락 갖다 주고. ”

 

 

아직 진료 시간 전이라 커피를 마시고 있던 예브게니가 약제실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접시와 바구니, 면장갑 한 켤레, 나무로 만든 숟가락 두 개를 가지고 나왔다. 베르닌은 접시 위에 놓여 있는 작은 식물을 주의 깊게 살폈다.

 

 

“ 이게 흰머리 어쩌고 하는 풀이에요? ”

 

흰머리천사날개풀이요. ”

 

“ 이름 진짜 어렵네요. ”

 

“ 이름 외워두는 게 찾기 편하실 거예요. 딱 그렇게 생겼거든요. 이거 보세요, 맨 위 끝부분은 흰색이고 동그랗게 고리 모양이잖아요. 여기 중간에 달린 두 장의 큰 풀잎이 날개예요. 얘들은 한데 모여 자라기는 하는데 키가 작고 지팡이 모양으로 처져 있어요. 그래서 다른 풀들 사이에 섞이면 잘 안 보여요. 그러니까 몸을 바짝 낮춰야 찾을 수 있어요. 큰 풀들이나 나무 주변에 바짝 붙어 자라거든요. 그리고 잎도 중요하지만 뿌리에 있는 진액이 해독 작용을 하니까 뿌리를 다치면 절대 안 돼요. 쇠붙이가 닿아도 안 되고요. 그래서 이 나무 숟가락을 드리는 거예요. 흙을 파내서 뿌리까지 조심해서 캐내야 돼요. ”

 

“ 어, 뭔가 어렵네요. 얼마나 캐야 돼요? ”

 

“ 많을수록 좋은데... 달이면 진짜 얼마 안 나오거든요. 이 바구니 꽉 채워도 세 컵 나올까 말까예요. 미샤한테는 지금 약을 못 쓰니까 이것밖에 못 주거든요. ”

 

“ 바구니 더 주세요. 많이 캐올 테니까. ”

 

“ 이 바구니 하나 채우는 것도 시간 오래 걸릴 거예요. ”

 

“ 그래도... 많이많이 캐올 거예요. 바구니 하나 더 줘요. 근데 아직 겨울인데 풀이 있을까요? ”

 

“ 원래 늦겨울부터 봄까지만 자라요. 그리고 수도원 뒤뜰이 다른 데보다 해도 잘 들고 따뜻하거든요. 그래서 요맘때는 거기서만 캘 수 있어요. 2월 중순부터 올라오니까 지금은 꽤 자랐을 거예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

 

 

베르닌은 곧장 숲으로 가려다가 잠깐 병실로 올라가보았다. 왕재수는 여전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쉭쉭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누워 있었다. 의식이 없으니 못 알아들을 게 뻔했지만 베르닌은 몸을 굽혀서 그의 귓가에 대고 조그맣게 말했다.

 

 

“ 미셴카, 내가 약초 캐올게. 그거 먹으면 안 아플 거래.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알았지? 나 올 때까지 꼭 정신 차려야 돼! ”

 

 

 

베르닌은 차를 몰고 강변도로를 쭉 달렸다. 검은 숲에 있는 가브리엘 수도원으로 갔다. 혁명 이후 수도원은 종교 박물관이 되어 있었고 미사도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여전히 신도들이 삼삼오오 찾아오곤 했다. 수도원은 가브릴로프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였지만 정교 신자가 아닌 베르닌은 어릴 때 외에는 이곳에 와본 적이 없었다.

 

차를 입구 쪽에 세워놓고 바구니 두 개에 풀 한 포기, 면장갑 한 켤레와 나무 숟가락 두 개를 든 채 한참 풀밭과 화단을 지나 걸어가자 수도원 건물들과 첨탑, 천사상이 나타났다. 뒤뜰이 어느 쪽인가 싶어 두리번거리는데 검정 옷을 입은 대머리 노인이 나타났다. 수도원의 책임자인 예고르 사제였다. 베르닌은 좀 움츠러들었지만 사제는 상냥한 어조로 그에게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 저, 신부님. 저는 다닐이라고 하는데요, 흰천사날개머리, 아니, 흰날개... 저... 하여튼 끝이 하얗고 고리가 달리고 날개모양 잎이 달린 약초를 캐러 왔어요. ”

 

“ 흰머리천사날개풀 얘기구먼. 그건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자네가 어떻게 아나? ”

 

“ 레프 사벨리예비치, 그러니까 스타브로프 선생님이 보내셨어요. 굉장히 아픈 애가 있는데 약초가 많이 필요하대요. 달여서 먹여야 한다고. ”

 

“ 저런, 레부슈카가 보냈구먼. 작년에도 내가 좀 캐서 보냈는데 벌써 다 쓴 모양이군. 이리 오게. 며칠 전에 왔으면 미리 캐 놓은 게 남아 있었을 텐데 벌목공 애들이 뱀에 물려서 내가 다 써버렸지 뭔가. 근데 시내 쪽이면 뱀에 물린 것도 아닐 텐데. 레부슈카가 웬만하면 이거 안 써도 애들 다 고치는데. ”

 

“ 다른 약이 안 듣는대요. 그래서 이 약초가 많이 필요하대요. 그런데 신부님은 의사 선생님과 잘 아시나 봐요. 애칭으로 부르시고. ”

 

“ 그 영감탱이랑 어릴 때부터 이웃사촌이었거든. 근데 죽어도 신앙은 안 받아들인다니까. 영감쟁이가 성질은 더러워도 착해. 사람도 많이 살렸고. 자, 이쪽으로 오게. 도와주겠네. 그런데 웬 바구니를 그렇게 큰 걸 두 개나 가져왔나. ”

 

“ 애가 너무 아파서요. 정신도 못 차리고, 이것밖에 희망이 없어서요. 많이많이 가져가야 돼요, 흑... ”

 

 

사제는 베르닌의 등짝을 토닥토닥해주더니 뒤뜰로 그를 안내했다. 말이 뒤뜰이지 아주 넓은 풀밭이었다. 예브게니의 말대로 해가 잘 드는 곳이어서 마치 이곳에만 봄이 온 것 같았다. 심지어 꽃도 드문드문 피어 있었다. 사제는 끙 소리를 내며 허리를 굽히더니 어딘가를 가리켰다.

 

 

“ 저기 있구먼. 숟가락 좀 줘보게. 내가 하는 거 보고 배우게. ”

 

 

사제가 순식간에 풀을 여러 포기 캐냈다. 베르닌은 두 눈으로 보면서도 약초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우왕좌왕하자 사제가 말했다.

 

 

“ 자세를 낮춰야지. 자네는 키도 큰데 그렇게 뻣뻣하게 서서 어떻게 약초를 찾나. 이건 천사가 주고 간 풀이야! 하느님과 천사도 우리 앞에 몸을 낮추지 않나, 인간도 당연히 무릎을 꿇어야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거야!

 

 

베르닌은 종교에 대해서는 잘 몰랐으므로 그냥 ‘네네’ 하면서 무릎을 꿇고 몸을 낮췄다. 그러자 사제의 말대로 바닥에 모여 있는 흰색 고리 달린 풀들이 보였다. 나무 숟가락으로 조심스럽게 흙을 파냈다. 검은 흙은 축축했고 다행히 얼어 있지도 않았다. 봄이 오고 있나 싶었다. 낑낑대며 간신히 풀 한 포기를 캐냈다. 사제가 칭찬했다.

 

 

“ 잘했네. 뿌리를 다치면 안 되거든. 자넨 여기서 캐게. 난 저쪽에서 캐고 있을 테니. 그 바구니 한 개는 나를 주고. ”

 

“ 어, 저... 신부님.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신부님 연세도 많으신데... 허리도 아프시잖아요. ”

 

“ 괜찮네. 사람이 많이 아프다는데 당연히 도와야지. 그리고 자네보다 내가 훨씬 빨리 캘 거야. 이맘때마다 이거 캐는 게 재미거든. 시작하세. ”

 

 

베르닌은 무릎을 꿇고 약초를 캐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포기 캐는데 몇 분이나 걸렸다. 줄기를 끊어 먹기도 하고 아까운 뿌리를 뭉개기도 했다. 하지만 점차 요령이 생겼다. 무릎과 허리가 뻐근했고 면장갑도 금세 닳았지만 힘든 줄도 몰랐다. 한쪽을 다 캐고 나서 다른 쪽을 또 찾아보니 이제 하얀 고리가 달린 풀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열심히 흙을 파내고 뿌리째 채취했다. 그러다가 너무 열심히 팠는지, 아니면 힘 조절을 못해서인지 나무 숟가락이 툭 부러졌다. 손으로 좀 파다가 다행히 부러진 나뭇가지 한 개를 발견해서 그것으로 다시 파기 시작했다.

 

젖은 흙을 파내자 지렁이도 나오고 처음 보는 벌레들도 많이 나왔다. 살살 한쪽으로 치워가며 약초를 계속 캤다.

 

 

“ 어휴, 그 녀석이랑 같이 안 와서 천만다행이네. 이거 봤으면 또 호들갑떨고 울고불고 시골이 어쩌고 난리쳤을 거 아니야. ”

 

 

투덜대다가 갑자기 목구멍이 당기면서 눈물콧물이 찍 나왔다. 장갑이고 소맷자락이고 온통 흙투성이라 닦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훌쩍 하고 콧물을 들이마시면서 그는 계속 약초를 캤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여기저기를 기어 다니며 약초를 캐고 있는데 사제가 다가와서 그를 불렀다.

 

 

“ 다닐, 그만 됐네. 바구니가 넘칠 지경이군. 나도 이쪽에 한 바구니 캐 놨으니 가져가면 될 거야. 추운데 갑자기 그렇게 땀을 흘리고 흙을 파면 감기 걸린다네. 이쪽으로 와서 뜨거운 거 한 잔 마시고 요기 좀 하고 가게. 점심때가 지났다네. ”

 

 

베르닌은 아직도 참나무 아래에 약초가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아서 더 캐고 싶었지만 사제의 말대로 바구니가 넘칠 지경이었기 때문에 무릎의 흙을 털고 일어났다.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팠다.

 

사제는 그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픈 아이가 빨리 낫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린 후 뜨겁게 데운 나무열매 음료에 꿀을 타서 허브 잎사귀를 띄워 한 잔 주었다. 쭉 마시자 차갑게 얼었던 몸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볶은 버섯과 으깬 감자로 속을 넣은 두툼한 블린과 비트 피클도 일품이었다. 베르닌은 허겁지겁 먹었다. 너무 맛있었다.

 

 

“ 신부님, 감사합니다. 약초도 캐주시고 점심까지 주시다니. ”

 

“ 뭘, 하느님의 종인데 당연한 걸 가지고. 바구니를 엎을 수도 있으니 이 상자에 담아 가게. 그리고 열매즙 한 병 넣었으니 아픈 애가 정신 좀 차리면 따끈하게 데워서 꿀 타서 먹이게나. 기력 보충에 도움이 될 거야. 레부슈카에게 안부 전해주고. 그럼 잘 가게. ”

 

 

베르닌은 흰머리천사날개풀을 가득 담은 상자와 나무열매즙 한 병을 들고 수도원을 나왔다. 차에 타기 전에 돌아서서 수도원 정문과 천사상을 향해. 순서도 헷갈리는 성호를 긋고 꾸벅 인사를 했다.

 

‘ 하느님 고마워요. 그 녀석이 빨리 낫게 해 주세요. 신부님 고마워요. 천사야 고마워. ’

 

 

 

*    *    *

 

 

 

 

상자에 가득 채워 온 약초를 보고 스타브로프는 처음으로 베르닌을 칭찬했다.

 

 

“ 잘했구나. 밤중까지 캐려나 싶었는데, 의외의 재주가 있군. ”

 

“ 저어, 신부님이 도와주셨어요. 선생님 동기라고 하시면서. ”

 

“ 그러면 그렇지, 예고르의 솜씨군. 오, 좋아. 열매즙도 챙겨줬네. 노인네가 그래도 쓸모는 있다니까. 그 친구 만났으면 점심도 얻어먹었겠군. ”

 

“ 네, 맛있었어요. 저 수도원에서 밥 처음 먹어봤는데 진짜 맛있었어요. 담백한 맛이라 미샤가 좋아할 것 같아요, 나중에 데려가야겠어요. ”

 

“ 걘 벌써 내가 데려갔었어. 예고르하고도 몇 번 봤고. 다들 네놈처럼 발랑 까진 무신론자 놈팽이는 아니라고! ”

 

“ 어, 근데 걔 무신론자랬는데. 그리고 선생님도 교회 안 가시잖아요. ”

 

“ 여기서 중요한 건 ‘무신론자’가 아니고 ‘발랑 까진 놈팽이’라는 것이야! ”

 

“ 억울해요. 발랑 까진 놈팽이란 말 처음 들어요. 전 책상물림인데.

 

“ KGB의 녹을 먹고 있으니 감수해! ”

 

 

베르닌은 의사와 마르가리타에게 약초를 맡기고 일단 집으로 갔다. 흙투성이가 된 옷을 벗고 깨끗하게 샤워를 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는데 엘리베이터 앞에서 로만 코즐로프와 마주쳤다. 표정이 아주 좋지 않았다.

 

 

“ 어, 당신... 언제 왔어요? ”

 

“ 그 자식 어디 사냐! ”

 

“ 누구요? ”

 

스페호프! 죽여 버릴 거야! 모가지를 비틀어버릴 거야!

 

“ 어, 저... 안돼요. 그럼 당신 체포된단 말이에요. 미샤가 당신 잡혀갈까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

 

일이 이렇게 됐는데 잡혀가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내 그 살인마 새끼를!

 

 

코즐로프는 이를 갈면서 주먹으로 엘리베이터 문을 꽝 하고 쳤다. 베르닌은 깜짝 놀랐다.

 

 

으아, 당신 뭐해요! 연주자는 손이 생명이라면서! 분명히 미샤가 그랬는데... 왜 손을 망가뜨려요! ”

 

“ 그놈 면상을 짓이겨주고 싶은데 여기 없으니까! ”

 

“ 어디까지 들었어요? ”

 

“ 들을 만큼 다. 류다한테 얘기 듣고 아까 병원에도 갔었어. 노인네가 악착같이 숨기잖아, 보호자 아니라고 나 못 들어오게 하고! 날 의심하다니... 그렇다고 우리 사이를 털어놓기도 뭐하고... 젠장! ”

 

“ 아... 그렇구나. 그럼 걔 못 본 거예요? 하긴 지금은 들어가 봤자 애가 정신도 못 차리니 별 소용이 없으니... ”

 

당장 나도 들어갈 수 있게 하란 말이야! 네놈 같은 앞잡이는 보호자 등록하고 나는 이게 뭐야!

 

“ 어, 알겠어요. 내가 선생님한테 얘기할게요. 근데... 류다에게 들은 거면 지금 극장에 소문 다 퍼졌겠네요? ”

 

“ 안 퍼졌어. 내가 류다 입 막았어. 어제 애 실려 가자마자 류다가 우리 집에 왔었어. ”

 

“ 집에요? 전화도 아니고? ”

 

“ 류다가 바보냐, 그 여자가 극장에서 비서 노릇만 20년이야. 돌아가는 꼴 보니 당연히 도청될 거 같으니까 직접 온 거지. 나랑 걔랑 제일 친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나마 믿을만하다고 생각해서. 못 참겠다면서 성명서 내고 애들한테 다 알리자는 걸 간신히 막았다니까. ”

 

“ 어, 당신 진짜 의외네요. 국장 때려죽이니 마니 난리면서 어떻게 또 류다한테는 입 다물라고 했어요? ”

 

“ 성명서 내고 애들한테 알리면 뭐, 스페호프가 눈이나 깜짝하겠냐? 수사 담당하는 것도 네놈들이고 우리 귀염둥이도 유배 상태라서 네놈들 소관인데. 증거도 없고 도리어 애들만 찍혀서 서류에 빨간 줄 가고. 우리 아기도 무시 안 당하려고 그렇게 기를 쓰고 있는데 KGB 끄나풀한테 이런 짓이나 당한다는 거 극장 애들한테 알려지면 못 참지. 걔가 왜 악착같이 매일 기어 나오는데. 아픈 거 보여주기 싫어서 그런 거잖아. 하여튼 류다도 이해했어. 지금 극장에서 이거 아는 거 그 여자랑 나밖에 없어. ”

 

“ 난 그렇게 생각 안 해요. ”

 

“ 어, 그래? 목격자가 더 있었냐? ”

 

“ 아뇨, 그게 아니고요. 국장이 눈 깜짝하든 말든 나쁜 짓을 했으니까 공론화되는 게 맞다고요. 나는, 나는 보안서약을 해서 내부고발을 할 수가 없게 돼 있어요. 그리고 설령 고발을 한다 해도 내가 잘리면 국장이 걔한테 ‘진짜’ 감시요원을 붙일 테니까 위험하다고요. 하지만 극장에서 들고 일어나는 건 다르잖아요. 걘 당신네 감독이니까. 당신들은 당연히 그럴 권리가 있고... 정의 실현을... ”

 

“ 휴, 이런 책상물림 같으니. 언제 철들래.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줄 아냐? 공적으로 이루어지는 정의 따윈 없어. 힘센 놈들이 이기는 거지. 그러니까 우리 아기가 이렇게 됐지. ”

 

 

베르닌은 우울해졌다. 고개를 떨어뜨렸다가 코즐로프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 걔도 그런 식으로 얘기하던데. 그래서 당신이랑 사귀는 건가 보네요. 생각이 같아서... ”

 

“ 걔랑 나는 해결 방식이 다르지. 우리 귀염둥이는 나쁜 짓 당해도 그냥 나 몰라라 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지만, 나는 그런 거 아니야! 나쁜 짓 당했으면 갚아야지! 공권력 따위 안 믿어. 내 손으로 그 더러운 놈 모가지를!

 

“ 으아, 제발 그만둬요. 당신 잡혀가면 쟤 정말 못 견딜 거라고요! 가뜩이나 아픈 애를 왜 더 괴롭히려고. ”

 

“ 안 잡혀가면 되지! 하여튼 그 자식 두고 봐! ”

 

 

베르닌은 코즐로프의 분노를 무마하기 위해 서둘러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 의사에게 코즐로프가 왕재수와 가장 친한 사이라고 말해주고 옆에서 돌봐줄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의사는 툴툴댔다.

 

 

“ 어찌 된 게 이 놈의 꼬맹이가 사람 보는 눈이 없다니까. 그나마 친구라고 있는 녀석들이 한 놈은 앞잡이, 한 놈은 키다리 깡패.

 

“ 말은 바로 하셔야죠! 이 녀석은 앞잡이 맞지만 저는 어엿한 오케스트라 수석이고 예술가란 말입니다! ”

 

“ 그러면 뭐해! 걸핏하면 주먹질이나 하면서. 에이, 하여튼 따라오게. 애 조금 전에 깼으니까. ”

 

 

베르닌은 뛸 듯이 기뻤다.

 

 

“ 정말요? 그럼 이제 괜찮은 거예요? ”

 

“ 아직 헛소리를 하는데, 그래도 어제보다는 좀 나아. 그냥 얼굴만 잠깐 보고 나와, 호들갑 떨고 소리 지르지 말고. 애 놀라니까. ”

 

 

왕재수는 정말 눈을 뜨고 있었다. 마르가리타가 머리를 받치고 초록색 액체를 숟가락으로 떠먹이고 있었다. 흰머리천사날개풀을 달여서 만든 약초즙이 분명했다. 한 숟가락 받아먹을 때마다 왕재수가 굉장히 싫어했다. 오만상을 다 찌푸리며 끙끙거렸다.

 

 

“ 아이 써... ”

 

“ 그래도 다 삼켜야 안 아파. ”

 

“ 얼마나 남았어요? ”

 

“ 세 숟가락. ”

 

“ 한꺼번에... ”

 

“ 많으면 못 삼켜서 안 돼. ”

 

 

왕재수는 아주 괴로워하며 느릿느릿 약초즙을 받아먹었다. 베르닌은 대체 무슨 맛일까 싶어서 컵 가장자리에 묻은 즙을 슬쩍 손가락으로 찍어 핥아먹어 보았다. 혀가 얼얼할 정도로 썼다. 초콜릿이나 사탕 생각이 간절했다.

 

 

마침내 약초즙을 다 먹이는데 성공한 마르가리타는 베개를 고쳐주고 왕재수를 다시 뉘어주었다. 왕재수는 기침을 좀 하더니 금방 눈을 감았다. 잠든 줄 알고 베르닌과 코즐로프가 나가려는데 다시 눈을 뜨더니 그들 쪽을 보았다. 금세 얼굴이 펴졌다. 자기 쪽으로 오라고 턱짓을 했다. 코즐로프가 후다닥 달려가 왕재수의 손을 꼭 잡고 뺨에 뽀뽀를 했다.

 

 

우리 아기, 귀염둥이 내 강아지. 얼마나 아팠니. 이제 괜찮아. 금방 나을 거야. ”

 

“ 손에 피 나. ”

 

“ 응? ”

 

“ 손 다쳤잖아! 손 다치면 안 되는데. 어휴... 맨날맨날... ”

 

 

코즐로프는 아까 엘리베이터 문을 치는 바람에 살갗이 벗겨진 손등을 내려다보더니 급하게 소매로 핏방울을 닦았다.

 

 

“ 아니야, 이거 밥 먹다가 토마토 소스 묻은 거야. 피 아니야. ”

 

“ 오늘 무슨 요일이야? ”

 

“ 수요일이야. ”

 

“ 나 극장 갈래. 오늘 공연... ”

 

“ 오늘 발레 공연 없어, 목요일하고 토요일에 있어. ”

 

“ 아니야, 있어! 나 오늘 무대 올라가는데. 오늘 로미오와 줄리엣이야! ”

 

“ 아가야, 우리 극장엔 로미오와 줄리엣 안 올리잖니. ”

 

“ 으응, 무슨 소리야. 나 벌써 몇 번이나 췄는데. 지나 어디 갔지? ”

 

 

코즐로프가 당황하고 있는데 마르가리타가 슬며시 옆구리를 찔렀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어르고 달랬다.

 

 

“ 미셴카, 로만이 잘못 말한 거야. 오늘 수요일 아니야. 오늘은 너 무대 안 올라가니까 이제 자야지. ”

 

“ 아닌데, 나 오늘 올라가야 되는데. 내 어마어마한 춤 보려고 팬들 엄청 많이 올 텐데. ”

 

“ 그래그래, 근데 좀 자야 무대도 올라갈 수 있어. 약 먹었으니까 자자. ”

 

“ 풀 맛 나는 거, 너무 써, 너무 싫어. 맛없어. 흑... 파인애플... ”

 

 

횡설수설하다가 왕재수는 뜬금없이 파인애플 타령을 하기 시작했다.

 

 

“ 파인애플. 엉엉... 파인애플 먹고 싶어. 파인애플... 아이 더워. 아이 써... 흑, 파인애플... ”

 

“ 그래그래, 자고 나서 파인애플 먹자. 지금은 자야 돼. 불 꺼줄게. ”

 

 

마르가리타가 급하게 불을 끄고 커튼을 쳤다. 캄캄해지자 왕재수가 조용해지더니 잠이 들었다.

 

 

병실에서 나온 코즐로프가 굉장히 속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손 다친 거 야단치길래 정신 든 줄 알았더니 아직 오락가락하는구나. ”

 

“ 의사 선생님이 오늘 하루종일 그럴 거랬어요. 너무 상심하지 말아요. 어젠 진짜 장난 아니었거든요. 근데 갑자기 파인애플을 찾네... 쟤 원래 그거 좋아했어요? ”

 

“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하냐. 쟤 밥이랑 간식 챙겨주는 건 너였잖아. ”

 

“ 사과 좋아하는 건 아는데... 과일은 다 잘 먹는데 파인애플은 한 번도 먹은 적 없거든요. ”

 

“ 먹기야 먹겠지. 우리 동네에 그런 부르주아 과일이 안 들어오니까 안 먹었겠지. 약 때문에 입맛이 쓰니까 그런가보다. 오렌지나 좀 사와야겠다. ”

 

“ 당신 극장 안 가도 돼요? 오늘 연주 없어요? ”

 

“ 있어. 있는데 안 갈 거야! 우리 아기가 이 모양인데! ”

 

“ 여긴 내가 있어줄 테니까 극장 가요. 쟤 저렇게 헛소리 하는 와중에도 당신 손 다친 건 알아보잖아요. 연주 빠졌다는 거 알면 화낼 거예요. ”

 

 

코즐로프는 한숨을 쉬었지만 그의 말이 맞다고 했다. 시계를 보더니 욕을 하면서 극장에 갔다. 베르닌은 딱히 할 일도 없고 왕재수가 자는 걸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마르가리타에게 갔다. 약초 손질하는 것을 도왔다. 흙을 살살 떨어내고 흐르는 물에 풀을 깨끗이 씻었다. 마르가리타는 절반은 채반에 받쳐 물기를 탈탈 털고 나머지 절반은 커다란 냄비에 넣고 물을 붓더니 약불로 달이기 시작했다.

 

 

“ 저, 마르가리타 이사예브나. 이 절반은 어떻게 하나요? ”

 

“ 그건 저쪽 창가에 펼쳐놔 주렴. 햇볕에 좀 말리게. 원래는 말려서 쓰는 게 더 약효가 좋은데 지금은 남은 게 별로 없어서... 급하니까 생으로 먼저 달여야지. 그대로 달이면 즙이 얼마 안 나온단다. ”

 

“ 이거 계속 먹이면 나아지는 거죠? ”

 

“ 음, 어젯밤보다는 아침이 나았고, 지금이 아침보다 좀 나으니까 아마 그럴 거야. 독소가 좀 빠지면 뭐라도 좀 먹여야 할 텐데. 열이 심해서 그런지 아침부터 계속 파인애플만 찾는구나. ”

 

“ 진짜 먹고 싶은가보네... 파인애플을 어디서 구하지... ”

 

그러게 말이야. 우리 동네에 파인애플이란 게 들어왔던 때가 있기나 한지 모르겠구나. 나도 옛날에 모스크바에 갔을 때 한 번 먹어본 게 전부니... ”

 

“ 과일 가게에 부탁하면 받아다 주지 않을까요? ”

 

“ 오렌지랑 레몬까지는 되는데 파인애플 같은 고급 과일은 안 될 거야. ”

 

“ 에이... 하여튼 입맛만 고급이야, 싸가지 없는 녀석. ”

 

 

베르닌은 투덜거리면서 병원을 나왔다. 밑져야 본전이니 과일 가게에나 가보자 싶어서. 아직 오후인데도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한참 기다렸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파인애플은 없었다. 점원에게 물어보았다가 욕을 먹었다.

 

 

“ 뭐라고요? 파인애플? 웬 뚱딴지같은 소리람. 여기가 무슨 동남아예요? 강 얼음도 다 안 녹았는데 사과도 배도 아니고 웬 파인애플! 완전 부르주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

 

 

그래서 베르닌은 시들시들한 오렌지를 두 알 사서 돌아왔다. 다섯 시쯤 왕재수가 다시 깨어났다. 여전히 헛소리를 하다가 또 파인애플을 찾았다. 의사가 오렌지는 줘도 된다고 했기 때문에 베르닌은 열심히 껍질을 까고 오렌지를 짜서 즙을 냈다. 하지만 왕재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 으응, 이거 아니야! 파인애플... 파인애플 먹고 싶어. ”

 

“ 나중에 갖다 줄게. 이거 먼저 먹어. 너 목마르잖아. ”

 

“ 흑, 파인애플 아니야... 이거 싫어. ”

 

 

입술에 컵을 대주고 오렌지즙을 흘려 넣자 왕재수가 반쯤 먹고 반쯤은 혀로 밀어내버렸다. 그리고는 베르닌을 꾸짖었다.

 

 

막 억지로 먹이고! 파인애플도 아닌데. 흑... 엄마... ”

 

“ 조금만 더 먹어봐. 그래야 기운을 차리지. 오렌지도 달고 시원해... ”

 

“ 엉엉, 시골... 파인애플 없어. 엄마... 아빠... ”

 

 

왕재수는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훌쩍훌쩍 울면서 허공에 대고 손가락질을 하다가 베르닌의 팔을 베고 잠이 들었다. 밤 아홉 시에도 한번 깨서 파인애플을 찾고 새벽 네 시에도 깨서 파인애플을 찾았다. 그럴 때마다 실망해서 울다가 열에 들떠서 잠들곤 했다. 베르닌은 안타까운 나머지 파인애플을 따러 가는 꿈을 계속 꿨다.

 

 

 

*   *   *

 

 

 

다음날이 되자 왕재수는 조금 나아졌다. 여전히 열이 나고 온몸에 힘이 전혀 없었지만 그래도 잠시 일어나 앉고 미음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오후에는 코즐로프와 베르닌의 얼굴도 알아보았다. 베르닌을 보고 눈을 깜박이며 걱정했다.

 

 

“ 너 왜 여기 있어? 국장이 자르면 어떡하니. 벌목공... ”

 

“ 안 잘라. 너 괜찮아질 때까지 여기 있기로 했어. ”

 

“ 면도도 안 했네. 아 지저분해. ”

 

“ 이제 안 아프냐, 면도 안 한 것도 보이고! ”

 

“ 아파. 근데 엄청엄청 아프진 않아. ”

 

 

왕재수는 그러더니 코즐로프에게는 쌀쌀맞게 빨리 극장에 가라고 했다. 코즐로프는 굉장히 섭섭한 눈치였다.

 

 

“ 우리 아가야, 어쩌면 그러니. 이 녀석한테는 그렇게 친절하게 말해주고 왜 나한테는 눈길 한 번 안 주니. ”

 

“ 잡혀간단 말이야. 빨리 가. ”

 

“ 안 잡혀가. 걱정하지 마. ”

 

“ 당신한테도 사과 먹이면 어떡해. 흑... ”

 

 

왕재수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또 울음보가 터지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베르닌이 급하게 그를 달랬다.

 

 

“ 아니야, 안 그래. 국장이 로만에 대해서는 하나도 몰라. 걱정하지 마. ”

 

“ 사과 맛있었어. 예뻤어. 달았어. 시원했어. 독 있는 건 줄 몰랐어. 엉엉, 몰라서 먹은 거야. 진짜야. ”

 

“ 그래그래, 네 잘못 아니야. 우리 아기는 사과 좋아하잖아. 독 묻혀놓은 놈이 나쁜 거야. 네 잘못 하나도 아니야. ”

 

“ 더워. 목말라. 파인애플 먹고 싶어. ”

 

“ 지금 겨울이라 파인애플 파는 데가 없어. 배 깎아줄게 그거 먹자. 배도 달고 시원해. ”

 

“ 아니야, 배는 퍽퍽하고 파삭파삭해. 파인애플... ”

 

 

왕재수는 다시 파인애플 타령을 하면서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베르닌이 배를 깎아서 한 조각 먹여주자 퍽퍽하고 떫다면서 뱉어버렸다. 두 남자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스타브로프가 들어와서는 왕재수에게 다시 약초 달인 즙을 먹였다. 왕재수는 싫다고 발버둥치려다가 의사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고분고분하게 쓰디쓴 약초즙을 마셨다. 스타브로프는 미지근하게 적신 수건으로 왕재수의 이마를 닦아준 후 토닥토닥 재웠다.

 

 

“ 아직 열이 오르락내리락해서 그렇지. 그게 신경계 약물이라 정신 착란 증세가 좀 있어. 몸이 나아지면 착란도 가실 거다. 파인애플 타령하면서 헛소리하기 시작하면 열 오르는 거니까 그러면 나나 제냐를 불러. ”

 

“ 불쌍한 자식, 언제까지 이럴지. ”

 

먹고 싶은 걸 먹여주면 좀 나아질 텐데. 하고많은 것 중에 하필 파인애플인지. 안타깝구나. ”

 

 

의사가 혀를 차며 나갔다. 베르닌은 기필코 파인애플을 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코즐로프는 입술을 깨물고 깊은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베르닌에게는 인사도 하지 않고 휙 나가버렸다.

 

 

 

베르닌은 곰곰 생각하다가 병원을 나섰다. 차를 몰고 다리를 건너 구시가지로 갔다. 출판문화국 옆 건물로 가서 비슈네브이 사드 편집실로 올라갔더니 깎아놓은 듯 잘생긴 남자 비서가 그를 맞아 주었다.

 

 

“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

 

“ 저는 다닐 베르닌인데요. 릴리아나 페트로브나를 잠깐 볼 수 있을까요? ”

 

“ 음, 선약은 없었던 것 같은데. 어디에서 오셨나요? ”

 

“ 저어... 그러니까... 보안위원회... ”

 

 

비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 검열국 쪽 공문은 벌써 다 처리했는데 또 무슨 문제가 있나요? ”

 

“ 아뇨, 그게 아니고요... 저, 개인적으로 볼 일이 있어서. ”

 

 

그러자 비서는 알만하다는 듯 비웃는 표정을 띠었다.

 

 

“ 우리 편집장님에게 개인적으로 볼 일 있다고 찾아오는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그냥 돌아가시죠. ”

 

“ 아니에요! 저... 저 데이트 신청하러 온 거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

 

“ 안드류샤!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야! ”

 

 

렐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 렐렌카. 아무것도 아니에요. 또 추종자 하나가 찾아와서 귀찮게 굴어서요. ”

 

“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저예요! 다닐 베르닌! 급한 일이 있어서 그래요. 1분만 시간 내주세요. 제발... 미샤 때문이에요. ”

 

다냐? 뭐라고요? 미샤?

 

 

렐랴가 문을 열더니 예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비서를 야단쳤다.

 

 

“ 왜 나 찾아온 손님을 못 들어오게 막고 있는 거야! 나한테 얘기도 안 해주고! 다냐는 나랑 잘 아는 사이인데. 앞으로 다냐 오면 곧장 들여보내!

 

 

베르닌은 잠시 의기양양하게 비서를 째려보고는 편집장실로 들어갔다. 렐랴의 사무실은 굉장히 예쁘고 아늑했다. 꽃향기가 떠돌았고 레이스 커튼에 결 좋은 나무 책장에 장식 달린 테이블에, 그야말로 여성적이고 우아한 방이었다. 티 테이블 위에는 사과와 오렌지, 초콜릿 캔디가 담겨 있는 예쁜 접시가 놓여 있었다. 과일 접시를 보니 희망이 솟았다.

 

렐랴는 그를 소파로 안내하며 상냥하게 물었다.

 

 

“ 차 마실래요, 다냐? ”

 

“ 어, 정말 감사한데요... 괜찮습니다. 시간이 없어서요. 저... ”

 

“ 미샤가 뭔가를 부탁했나요? 설마 제게 뭘 전해주라고? ”

 

 

렐랴가 기대에 찬 얼굴로 아름다운 회색 눈을 깜박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베르닌은 갑자기 미안해졌지만 솔직하게 말했다.

 

 

“ 저, 그게 아니고요.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밖에는 도와주실 분이 없을 것 같아서요. 사실은 미샤가 많이 아프거든요. 그래서... ”

 

뭐라고요? 미샤가 아프다고요? 어머나, 어디가요? 아이 참... 불쌍한 미샤. 수용소에서 고생했다더니... 지금 어디 있는데요? 간호가 필요한가요? ”

 

 

렐랴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주섬주섬 스카프를 매더니 옷걸이에서 코트를 낚아챘다.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기세였다. 당황한 베르닌은 더듬거렸다.

 

 

“ 어, 그게...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지금 면회는 안 되고요. 저, 그러니까... 파인애플... ”

 

“ 아니, 얼마나 아프면 면회도 안 된다는 건가요? 세상에... 불쌍한 미샤. 근데 뭐라고요? 파인애플? ”

 

“ 저어, 걔가 열이 많이 나서 그런지 자꾸 파인애플이 먹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과일 가게에 가도 파인애플이 없고, 지금 겨울이라 구할 데도 없다고 해서요.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당신은 우리 동네에서 요리도 제일 잘 하고 수입 식재료도 많이 쓰고 또 외국문학도 전공하셨고 집안도 좋으니까 파인애플도 구하실 수 있을 것 같아서... ”

 

“ 그랬군요. 고마워요, 다냐. 미샤가 아플 때 제일 먼저 나를 생각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음... 파인애플... 음... 어쩌죠? 아무리 생각해봐도 파인애플은 구할 데가 없는데. 내가 수입 식재료나 과일을 구해오는 루트가 있긴 한데 열대 과일은 취급을 안 해요. 내 요리에도 그쪽 과일들은 써본 적이 없거든요. 일단 모스크바에 있는 지인에게 한번 부탁해볼게요. 근데 아직 겨울이라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보통 모스크바에 있는 물건도 여기까지 받으려면 2~3일 걸리는데 지금은 아마 못 구할 거예요. 우리 연방 국가들 쪽이라면... 음, 중앙아시아 쪽에는 있으려나요? 아니지, 그쪽은 참외랑 수박이지... 아아, 어쩌면 좋죠. ”

 

 

렐랴가 속상해하다가 주먹을 불끈 쥐더니 비서에게 소리를 질렀다.

 

 

안드류샤, 모스크바에 전화 좀 넣어줘! 발레리야한테!

 

 

그리고는 잠시 후 전화가 연결되자 수화기를 꼭 붙들고 한동안 열띠게 대화를 나눴다. 베르닌은 제발 그 발레리야라는 모스크바 여인이 파인애플을 비행기로 특급 발송해줄 수 있다고 말해주기만을 빌었다. 그러나 잠시 후 렐랴가 전화를 끊더니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 파인애플은 안 된대요. 전에는 쿠바 쪽에서 들여왔는데 지금 그쪽에 무슨 병이 돌아서 검역 때문에 과일이 못 건너온대요. 어쩌죠, 다냐... 불쌍한 미샤, 다른 건 먹고 싶어 하는 거 없나요? 아참, 바나나 있어요. 바나나도 괜찮지 않을까요? 잠깐만요. ”

 

 

렐랴는 창가로 갔다. 바구니에서 바나나 한 송이를 꺼내고 냉장고에서 체리가 들어 있는 조그만 상자를 꺼냈다.

 

 

“ 미샤가 체리도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이거 우리 별장에서 딴 거예요. 우리 벚나무는 양키들 체리처럼 열매가 달아요. 하나도 쓰지 않아요. 바나나도 어렵게 구한 거예요. 이거라도 가져가요, 다냐. ”

 

“ 고마워요,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이렇게 귀한 과일들을 챙겨주시다니. 정말 천사 같네요. 미샤도 고마워할 거예요. ”

 

“ 그런데 정말 내가 가서 간호해 주면 안 되나요? 여자의 손길이 필요할 것 같은데. ”

 

“ 의사 선생님이 지금은 안정해야 되니까 면회하면 안 된대요. 나아지면 말씀드릴게요. ”

 

“ 그래요, 다냐. 미샤가 아프다니 너무 속상해요. 바나나랑 체리 먹으면 나아질 거예요. 당신도 그 사람을 위해 파인애플 구하러 오고 착하네요. 혹시라도 발레리야가 파인애플 구하면 보내준다고 했으니까 들어오면 전화할게요. ”

 

 

렐랴는 예쁜 바구니에 바나나와 체리를 담아주고는 창가에 있는 커다란 유리병에서 아몬드 쿠키를 한줌 집어 손수건으로 싸주었다.

 

 

“ 다냐, 가면서 쿠키라도 먹어요. 왜 이렇게 뺨이 쏙 들어갔어요. 파인애플 구하러 다니느라 밥도 못 먹었나보네. 다음에 미샤 나으면 우리 집 놀러 와요, 맛있는 거 해 줄 테니까. 그럼 잘 가요. ”

 

 

베르닌은 바나나와 체리와 아몬드 쿠키가 담긴 바구니를 들고 병원으로 돌아왔다. 렐랴의 고운 마음씨에 가슴이 떨리도록 감동했다. 미모와 요리 솜씨와 비단결 같은 마음씨를 다 갖춘 보기 드문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자신까지 챙겨주며 쿠키를 싸주다니 정말 황홀할 지경이었다. 분명히 왕재수도 바나나와 체리를 보면 감동할 것이다. 바나나도 고급 과일 아닌가!

 

 

 

왕재수는 계속 자다 깨다 하고 있었다. 처음처럼 40도를 훨씬 넘는 고열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열이 계속 났기 때문에 좀처럼 기운을 못 차렸다. 저녁이 되자 스타브로프는 왕재수를 깨우더니 엄격하게 말했다.

 

 

“ 이제 죽이랑 수프는 먹어도 되니까 먹어보자. ”

 

“ 싫어요. 입맛 없어요. 잘래요. ”

 

“ 먹어야 열도 내려가고 기운도 나는 거야! 먹은 게 없으니까 자꾸 자고 싶은 거다. 먹고 나아야 극장에도 나가지. ”

 

“ 파인애플 먹고 싶은데... ”

 

엄동설한에 파인애플이 어디 있다고 그러느냐! 자꾸 어리광부리고 파인애플 타령만 하면 약초즙을 한 냄비 먹일 테다!

 

“ 약초즙 싫어... 흑... ”

 

 

왕재수가 흠칫 놀라더니 구슬만한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훌쩍훌쩍 울면서 의사가 주는 대로 묽은 오트밀을 한 숟가락씩 받아먹었다. 먹으면서도 계속 쓴 맛이 난다고 괴로워했다. 베르닌은 옆에서 살살 달랬다.

 

 

“ 야, 꾹 참고 다 먹어. 의사 선생님 말이 맞아. 먹어야 낫지. 다 먹으면 맛있는 거 줄게. ”

 

“ 파인애플? ”

 

“ 아니, 근데 파인애플보다 맛있는 거야. 그러니까 오트밀 다 먹어, 응? ”

 

 

왕재수는 꾸역꾸역 오트밀을 다 먹었다. 그래봤자 어린이용 접시에 담겨 있어 얼마 되지도 않았다. 의사가 베르닌에게 건더기 없이 맑은 국물만 우려낸 생선수프를 반 컵 건네주며 마저 먹이라고 말한 후 나가버렸다. 왕재수에게 음식 먹이는 것이 노의사에겐 크나큰 도전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왕재수는 냄새도 맡기 싫어했다. 베르닌이 살살 달랬다.

 

 

“ 이거 너 좋아하는 우하야. 생선 수프 좋아하잖아. 좀 먹어봐. 기름기도 하나도 없네. ”

 

“ 비린내 나. 엉엉... ”

 

“ 비린내 하나도 안 나. 내가 끓여주는 것도 잘 먹었잖아. 이건 마르가리타 이사예브나가 직접 만드신 거야. 진짜 맛있는 우하야. ”

 

“ 비린내 나고 쓰단 말이야. 흐흑... 파인애플... ”

 

“ 착하지, 코 막고 먹자. 의사 선생님이 그랬잖아, 먹어야 낫는다고. 이거 먹고 맛있는 거 먹자. ”

 

 

왕재수는 괴로워하면서도 손가락으로 코를 쥐고는 우하를 한 모금씩 꼴깍 삼켰다. 그래도 튜브로 주입하던 첫날이나 한 숟가락씩 힘들게 넘기던 둘째 날을 생각하면 많이 나아진 거였다. 간신히 반 컵을 다 먹은 왕재수가 헉헉거리면서 베르닌에게 파인애플을 내놓으라고 했다. 베르닌은 창가에 놔뒀던 바구니를 가져왔다. 바나나 껍질을 까 주었다.

 

“ 먹어, 바나나야. 렐랴가 줬어. 너 빨리 나으라고. ”

 

왕재수는 고개를 저었다.

 

“ 안 먹어. 바나나 싫어. ”

 

“ 좀 먹어봐. 파인애플보다 바나나가 더 달고 맛있어. 이것도 수입이야. 비싼 거잖아. ”

 

“ 바나나 텁텁해. 목말라. 싫어. ”

 

 

베르닌은 바나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달콤하고 부드럽고 정말 맛있었다. 일부러 더 맛있게 먹었다.

 

 

“ 으음, 맛있다. 진짜 달다. 먹어볼래? ”

 

“ 너 다 먹어. ”

 

“ 어휴. 그럼 체리 먹어. 너 체리 좋아한다며. 렐랴가 별장에서 딴 거래. 그때 버찌잼도 이걸로 만들었나봐. 그 잼도 진짜 맛있었어. ”

 

 

왕재수는 체리를 두 알쯤 먹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씨를 뱉더니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 파인애플 아니잖아. 분명히, 분명히 비린내 나는 거 먹으면 파인애플 준다고 했는데. ”

 

“ 내가 언제! 파인애플만큼 맛있는 거 준다고 했지! ”

 

“ 파인애플 왜 없어? 흑... ”

 

제발 그만 좀 해라! 이 겨울에 파인애플을 어디서 구하니! 여기가 무슨 미국이냐? 가게에도 없고 렐랴도 못 구한다잖아! 귀한 바나나까지 챙겨줬는데 그냥 이걸로 안 되니? 아프다고 자꾸 어리광만 부릴래?

 

 

“ 어... 다닐... 나한테 화내... 소리 질러. 흑... 무서워... 엉엉... ”

 

 

왕재수가 부들부들 떨더니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굉장히 서럽게 울었다. 당황한 베르닌이 다가가자 무서워하면서 몸을 홱 웅크렸다.

 

 

“ 엉엉, 다닐이 나한테 소리 질러. 안 그랬는데 막 화내. 흑, 이제 막 때리려고. 소리 지르고 때리고 가두려고. 엉엉, 무서워. 로만... 엉엉... 유라, 유라 어딨어. 엉엉... ”

 

 

왕재수가 이불 속으로 파고들면서 목을 놓아 울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어쩔 줄을 몰랐다. 최대한 목소리를 상냥하게 하려고 애를 썼다.

 

 

“ 아니야, 나 소리 안 질러. 화 안 내. 미안해, 네가 바나나 안 먹어서 그랬어. 안 그럴게. 울지 마. 안 무서워. 나 하나도 안 무서워. 아무도 안 때려, 가두는 사람 없어. 아이 참 어떡하지... ”

 

 

베르닌이 계속 달래자 왕재수가 이불 사이로 눈만 빼꼼 내밀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열이 나서 얼굴도 눈동자도 새빨갰다.

 

 

‘ 아 맞다, 파인애플 타령하면 열 올라서 헛소리하는 거랬지. 독약 때문에 착란증도 있다고. 화내면 안 되는 거였는데... 가뜩이나 소리 지르면 싫어하는 앤데. ’

 

 

다행히 왕재수는 베르닌이 어르고 달래자 곧 진정되었다. 울음도 그쳤다. 하지만 바나나와 체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아, 내 목걸이!

 

“ 어, 그거... 그거 그저께 의사 선생님이 풀어놨어. 너 열 때문에 막 몸부림쳐서 잘못하면 다친다고. ”

 

“ 안 돼... 내 목걸이. 유라가 준 건데... 목걸이... ”

 

 

왕재수는 엄마 잃은 어린애처럼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기 때문에 베르닌은 급하게 침대 곁에 있는 간이 캐비닛을 열었다. 손수건에 잘 싸놓았던 목걸이를 꺼냈다. 왕재수에게 보여주었다.

 

 

“ 자, 이거 봐. 여기 있잖아. 걱정하지 마. ”

 

“ 목걸이... 이리 줘. 흑... ”

 

 

왕재수가 목걸이를 홱 낚아챘다. 손으로 꼭 쥐었다. 하지만 손아귀에 힘이 없어서 목걸이가 주르르 미끄러져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왕재수가 또 기절할 것 같았기 때문에 베르닌은 재빨리 목걸이를 주웠다. 옷자락에 슥슥 닦은 후 왕재수의 목에 걸어주었다. 지금은 몸부림치지는 않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목걸이를 걸어주자 왕재수는 눈에 띄게 얌전해졌다. 손으로 십자가를 문지르더니 ‘아이, 파인애플...‘ 하고 두어 번 중얼거리고는 한숨을 폭 쉬고 갑자기 베개에 고개를 떨어뜨리고 잠이 들었다.

 

 

 

*   *   *

 

 

 

 

왕재수가 잠든 후 베르닌은 병실을 나왔다. 굳은 결심을 하고 구시가지의 작가 공방들을 지나 허름한 건물로 갔다. 이미 8시가 다 되어 있었기 때문에 문이 닫혀 있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계단에서 보랴와 마주쳤다. 지난번처럼 군복 조끼 차림에 험상궂은 몰골이었다. 베르닌은 청어 통조림이 없는데 어떡하지 하고 순간 움츠러들었지만 보랴가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 어, 너 왔구나. ”

 

“ 어, 안녕하세요. 기억하는군요. ”

 

“ 같이 보드카 마셨잖아. 당연히 기억하지. 바냐 보러 왔냐? ”

 

“ 예... ”

 

“ 근데 예쁜이는 어디 가고 너 혼자 와. ”

 

“ 어, 저... 무슨 얘긴지... ”

 

“ 우리 예쁜이 있잖아. 미셴카. 너랑 친하잖아. ”

 

“ 헉... 그걸 어떻게 알아요? 바냐가 분명히 고객들의 개인 정보에는 관심 없다 했는데! ”

 

“ 그거야 바냐가 그런 거지! 너 걔랑 친한 거 아니야? 식당에도 같이 몇 번 왔잖아. ”

 

“ 엥, 무슨 식당이요? ”

 

“ 너 우리 식당에 가끔 밥 먹으러 오잖아. 예쁜이는 더 자주 오고. ”

 

“ 엥? 식당? 당신 식당에서 일해요? ”

 

“ 스베촉. 나 거기 주방에 있거든. 예쁜이가 내가 해주는 요리 맛있다고 자주 오지. 여긴 부업 뛰는 거고. ”

 

 

베르닌은 기억을 더듬었다. 왕재수와 가끔 가는 극장과 이콘 박물관 사이에 있는 그 식당 이름이 스베촉이었던 것 같았다.

 

 

“ 엇, 당신 그 식당 요리사예요? 거기 음식 맛있던데. ”

 

“ 흠흠, 내가 좀 요리를 잘 하지. 지난 일요일에도 걔가 자기네 극장에 점심 좀 맞춰 달라 해서 내가 힘 좀 썼지. ”

 

“ 아, 맞아... 공연 때문에 무용수들 점심 그 식당에서 주문했다고... 그렇구나. 되게 의외네. ”

 

“ 뭐가 의외야! 내가 요리 잘 하는 게 의외냐? ”

 

“ 어... 예. 근데 뭐... 하여튼 엄청 맛있더라고요. 그렇구나. 아, 그래서 걔한테 요리책도 준 거구나. ”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보랴는 그를 안으로 데려갔다. 투레츠키가 예의 그 새빨간 소파에 비스듬하게 드러누워 담배를 피우며 음정과 박자가 전혀 안 맞는 노래를 흥얼대고 있었다. 랄라랄라 하고 휘파람을 불다가 베르닌을 보고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 어이 친구!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 감사는 잘 넘겼냐? 안 잘렸어? ”

 

“ 어, 응... 덕분에. ”

 

“ 그래? 역시 2번을 쓴 거야? 동료 팔아넘기기... ”

 

“ 아니. 다행히 감사관이랑 아는 사람이 있어서 도와줬어. 그래서 징계를 안 받았어. ”

 

아, 그건 0번이지. 근데 너는 딱 보니까 그런 줄 같은 건 없어보여서 말 안했던 건데 구르는 재주가 있었구나. 아쉽네, 차라리 그때 잘렸으면 나랑 동업하는 건데. 하여튼 어서 와. 술 한 잔 할래? ”

 

“ 어, 고마워. 근데 오늘은 물건 좀 구하려고... ”

 

“ 그래? 뭔데? 말만 해. 다 있어. 없으면 구해줄 수 있고. ”

 

 

베르닌은 심호흡을 했다. 정말 이곳만큼은 오고 싶지 않았다. 투레츠키를 다시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제 남은 희망이라고는 여기뿐이었다.

 

 

“ 파인애플. ”

 

“ 파인애플? 먹는 파인애플 말이야? ”

 

“ 응. 혹시 있어? 그거 수입이잖아. 너 밀수품들 다루잖... ”

 

야, 말조심해! 밀수품이라니. 다 내가 괜찮은 애들에게서 괜찮은 루트로 구해 오는 건데. 같은 말이라도 그렇게 하냐! ”

 

“ 어, 미안... 하여튼 넌 외제 다루니까... 파인애플 있어? 그러니까... 아픈 애가 있어서 자꾸 파인애플을... ”

 

“ 에이, 됐어. 사정 얘기할 필요 없어. 내가 그랬잖아, 고객의 개인적 정보는 취급 안 한다고. 그러니까 파인애플이 필요하다는 거지? 음, 파인애플이라... 지금은 없는 것 같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잠깐 기다려봐. 물건이 많으니까 어쩌면 있을지도 몰라. 좀 앉아라. 내가 찾아보고 올 테니까. 근데 파인애플은 좀 비싸. ”

 

“ 으응... 비싸겠지... 그래도 있으면 살 거야. ”

 

“ 알았어. 좀 기다려봐. ”

 

 

돈 문제를 확인한 후 투레츠키는 잡동사니들 사이를 여기저기 헤집고 다녔다. 뭔가 그만의 질서에 따라 물건들을 배열해 놓은 모양인지 기호와 숫자를 중얼중얼대며 한동안 계속 잡동사니를 뒤졌다. 그러더니 혀를 찼다.

 

 

“ 지금은 없구만. 급하게 필요한 거야? ”

 

“ 어, 구할 수 있는 거야? ”

 

“ 못 구하는 게 어딨냐. 돈만 있으면 다 구하지. ”

 

“ 그치만... 렐랴에게 물어보니 지금 쿠바에서 전염병이 돌아서 검역 때문에 과일이 못 들어온다고... 중앙아시아, 수박, 참외... ”

 

“ 야, 너 지금 나 무시하냐? 내가 누군데! 난 바냐 투레츠키라고! 내가 못 구하는 건 없어! 언제까지 필요해? ”

 

“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내일은 아무래도 안 되려나? ”

 

“ 글쎄다. 이건 멀리서 가져오는 거라. 내일은 어렵겠는데. 모레까지는 들어올 거야. ”

 

“ 저, 혹시라도 내일 늦게라도 들어오면 나한테 연락해줄 수 있어? 전화번호 적어줄게. ”

 

“ 그래. 알았어. 속달은 비용 더 붙는데. ”

 

“ 그래도 부탁 좀 할게. 진짜 너밖에 없어. 그거 구해줄 사람... 부탁이야. ”

 

“ 흠, 그래. 내 능력이라면 구할 수 있지. 걱정 마. 자, 이제 됐으니까 술 한 잔 하자! 참, 너 생각 좀 해봤냐? 그 왕꼴통 스페호프랑 일하는 거 때려치우고 나랑 동업. 짭짤하게 쳐준다니까. 재미없잖아, 공무원 노릇. 뭐하러 그 병신들 뒤치다꺼리 해주냐. 나라 위해 목숨 바칠 일 있냐. 그놈들 다 사기꾼인데. ”

 

 

베르닌은 평소 같았으면 ‘아니야! 나는 국가와 인민을 위해 일해! 사명 의식이 있어!’라고 반박했겠지만 왕재수가 이렇게 되고 나니 딱히 부정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 응, 네 말도 일리가 있는데... 그냥 난 적성에 안 맞는 거 같아. 책상물림이잖아. 그래도 생각해 줘서 고마워. 그럼 너만 믿고 갈게. ”

 

“ 에이, 나랑 동업하지. 그럼 파인애플쯤은 공짜로 구해줄 수 있는데. ”

 

 

투레츠키는 못내 아쉬워했지만 그것도 잠시, 베르닌이 문 쪽으로 걸어가자 다시 빨간 소파에 드러누워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건물을 나와서 차에 시동을 걸려고 하는데 보랴가 그를 툭 쳤다.

 

 

“ 야, 그 아프다는 애 혹시 우리 예쁜이야? ”

 

“ 어... 네. ”

 

“ 어쩐지. 그래서 어제 안 왔구나. 원래 어제 우리 집 와서 블린 구워먹기로 했었는데. 많이 아프냐? ”

 

“ 열도 많이 나고 헛소리도 하고 그래요. ”

 

쯧쯧. 그랬구만. 열나면 기력이 떨어지니까 보양식을 좀 먹어야 할 텐데. ”

 

“ 제대로 못 먹어요. 아파서 그런지 전부 다 씁쓸하고 비린내 난다고... 억지로 죽이랑 수프 먹이고 있어요. ”

 

“ 불쌍한 것. 그 조그맣고 귀여운 것이 아프다니. 나 일요일에 공연도 봤는데. 걔가 표 줘서. 춤도 엄청 잘 추더구만. 완전 날아다니고. 너무 열심히 춰서 몸살났나보구나. 그래, 지금 병원에 있냐? ”

 

“ 네. 근데 지금 면회는 안 돼요. ”

 

“ 알았다. 빨리 나아야 할 텐데. 나중에 우리 식당에 밥 먹으러 와라. 너 오면 많이 퍼 줄게. ”

 

 

보랴와 헤어진 후 베르닌은 병원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왕재수는 더 이상 칭얼거리지 않고 깊게 잠들어 있었다. 그는 바나나와 체리, 아몬드 쿠키를 좀 집어먹고 보호자용 간이침대에 누워서 또 하느님에게 ‘제발 파인애플을 구할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를 한 후 잠이 들었다.

 

 

 

*   *   *

 

 

 

다음날 아침에 베르닌은 잠깐 사무실에 들렀다. 전날도 정신이 없어 전화 보고를 깜박했기 때문이다. 스페호프는 여전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 그래, 그놈은 어떤가? 벌써 다 나았나? ”

 

“ 아니오, 아직도 아픕니다. 헛소리도 하고요, 열도 안 떨어지고. 잘 먹지도 못하고요. ”

 

“ 아이고 고소해라. 극장에서도 우리를 의심하는 기색은 없더군. 역시 그때 자네의 연기가 한 몫 했던 거야. 건방진 녀석, 이제 버릇이 좀 들었겠지. 내일 그 망할 돈키호테인지 뭔지를 또 하던데, 어디 다시 한 번 올라가서 그 방정맞은 춤을 춰보라 하고 싶군. 하하하. ”

 

“ 그런데 레베진스키가 사과에 약물을 묻혀놨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그 사람이 휴가를 냈던 건가 보네요. ”

 

“ 그렇지. 알리바이가 필요하니까 미리 약을 묻혀놓고 곧장 휴가를 가라고 했지. 불여우를 빨리 해치워야 그 친구가 감독직을 맡을 텐데. 우리 KGB를 위해 많이 애쓴 친구니까 잘 돼야 할 텐데. ”

 

“ 예. 저는 그럼 다시 병원으로 가 보겠습니다. 제가 여기 와 있는 걸 알면 혹시라도 의심받을지 모르니. ”

 

“ 옳지. 그러게나. 아참 그렇지. 가는 길에 총무부에 가서 업무추진비를 좀 타 가게. ”

 

“ 예? 무슨 명목으로... ”

 

“ 어쨌든 그놈은 우리 소관 죄수니까, 입원까지 했으니 문병용 과일바구니라도 좀 사가란 말일세. 이것은 우리 가브릴로프 KGB에서 공식적으로 보내는 것일세. 국장인 내 이름으로 말이지. 여기 내가 카드도 쓰고 리본도 준비했네. 이것을 달아서 주란 말일세. 그래야 우리 KGB가 그놈을 잘 돌봐주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도 있고 행여 있을지도 모르는 크레믈린의 의심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지. 암, 기관장인 내가 이렇게 공적으로 쾌유 카드와 선물까지 보내는데! ”

 

 

베르닌은 잠시 스페호프를 빤히 쳐다보았다. 뱃속이 뒤틀려왔다. 당장이라도 의자를 휘두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있는데 스페호프는 그것을 감탄의 시선으로 오해하고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자네도 나중에 연륜이 쌓이면 이 정도는 할 수 있게 된다네. 자, 이 리본과 카드를 가져가게나. 총무부에는 내가 얘기해뒀네. 국장 명의라 좀 두둑하게 편성하라 했으니 받아가게. 남은 걸로는 저녁이라도 사먹게. 불여우 녀석 간호해주는 척 하느라 얼굴이 많이 상했군. 그럼 어서 들어가게. ”

 

 

베르닌은 리본과 카드를 그 자리에서 찢어버리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총무부에 가서 업무추진비를 수령했다. 20루블이나 들어 있었다. 당장이라도 국장실에 달려가 스페호프의 면전에 돈을 집어던지고 싶었지만 다시 꾹 참고 병원을 나왔다. 투레츠키가 구해 주는 파인애플은 비싸게 먹힐 테니 그 값이나 치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병원으로 가려다가 너무 우울하기도 하고 극장 분위기가 어떤가 싶기도 해서 그는 차를 몰고 구시가지로 갔다. 가는 길에 잠깐 공원에 내려서 바람을 좀 쐬니 기분이 약간 나아지는 것 같았다. 여전히 추웠지만 그래도 바람이 약간 부드러워진 것을 보니 3월이 오긴 온 모양이었다.

 

벤치에 앉아 멍하게 스페호프의 카드와 리본을 뒤집으며 찢어버릴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그를 탁 쳤다.

 

 

“ 여기서 뭐하냐? ”

 

“ 어, 당신. 왜 극장에 안 들어가고... ”

 

“ 리허설은 오후부터라서. ”

 

 

코즐로프였다. 언제나처럼 말끔한 옷차림이었다. 베르닌은 그의 곁에 있는 커다란 개를 보고 깜짝 놀랐다.

 

 

“ 어, 당신 개 키워요? ”

 

“ 아, 우리 부모님 댁에서 키우는 놈인데 잠깐 데려왔어. ”

 

“ 몰랐어요, 당신 개 좋아하는 줄. 깔끔 떠는 성격이라 싫어할 거 같은데. ”

 

“ 별로 싫어하진 않는데 좋지도 않아. 개 털 빠지는 거 싫어. ”

 

“ 근데 왜 데리고 왔어요? 부모님이 여행이라도 가셨나요? ”

 

“ 어, 그게 말이지... 음, 우리 아기 때문에. ”

 

“ 엥, 미샤요? 왜요? ”

 

“ 그 녀석이 개를 좋아하는 거 같아서. 저번에 너랑 같이 주웠다는 그 멍멍이 말이야. 주인이 찾아가고 나서 어찌나 실망을 하는지. 전에도 갑자기 나보고 고향집에는 멍멍이 없느냐고 묻는 거야. 있다고 했더니 좋겠다면서, 멍멍이 귀엽다고, 벌레도 잡아주고 자기가 노래 불러주면 좋아하고 자기한테 재롱도 부린다면서. 멍멍이 있는 집 좋겠다는 거야. ”

 

“ 그랬구나. 벨라 가고 나서 막 울더니만. 쳇, 데리고 있을 때는 똥개라고 짜증내더니. ”

 

“ 그래서 우리 아기 기분 좀 전환될까 하고 부모님 댁에 가서 이놈 데리고 온 거지. 이름은 흘롑. 시커먼 색이라. ”

 

“ 어, 근데요... 그게... ”

 

 

베르닌은 개를 한 번 보고 코즐로프를 한 번 봤다. 한숨을 쉬었다.

 

 

“ 저 있잖아요, 그때 그 강아지, 벨라, 아니 뜨보록 걔는 엄청 작고 귀여웠거든요. 겨우 요만하고... 온통 하얀색에 털도 복슬복슬하고 눈도 동그랗고... 품에 쏙 들어오고 장난 아니게 재롱둥이였어요. 근데 이놈은 너무 크고 못생겼는데... ”

 

 

베르닌이 그렇게 말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흘롑은 사냥개와 농장견을 합쳐놓은 모양새의 잡종이었는데 덩치가 아주 컸고 털도 북슬북슬한데다 시커멓고 얼굴도 험상궂었다. 게다가 자기를 헐뜯는 것을 눈치 챘는지 베르닌 쪽을 노려보며 으르르르 하고 위협적으로 목을 울려댔다. 코즐로프는 흘롑의 목줄을 잡아당기며 엄하게 말했다.

 

 

안 돼.

 

“ 끼잉... ”

 

“ 어, 말은 잘 듣네요. ”

 

“ 내가 강아지 때부터 훈련시켰으니까. ”

 

“ 개 안 좋아한다면서요. ”

 

그건 그거고! 똥개 밥값은 시켜야 할 거 아냐! 내가 우리 부모님 농장 지키라고 사 드린 놈인데. 근데 정말 얘 안 귀엽냐? ”

 

“ 당신 눈엔 얘가 귀여워요? ”

 

“ 하긴... 좀 크긴 하지. 우리 아기는 안 좋아하려나. ”

 

 

베르닌은 어이가 없었다. 말이라고 하느냐고 하려다 갑자기 왕재수가 투레츠키는 못생겼다고 하고 보랴를 멋있다고 하던 게 떠올랐다.

 

 

“ 어, 음... 글쎄요. 귀여워할지도 모르겠네요. 근데 지금은 안 될 걸요. 걔 아프잖아요. 세균 옮을지도 모른다고 의사 선생님이 못 데리고 들어오게 할 거예요. 낫고 나면 모를까... ”

 

하긴 그렇지. 리허설 하는 동안 극장 뒤에 묶어놔야겠다. 근데 그건 뭐냐? ”

 

“ 아... 에잇! 나쁜 놈!!

 

 

베르닌은 갑자기 화가 치밀어서 리본을 내팽개쳤다. 그리고는 스페호프의 위선적인 행태에 대해 간단하게 말해 주었다. 코즐로프는 길길이 날뛰는 대신 가느다란 푸른 눈을 더욱 가느다랗게 뜨고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 그래, 그렇단 말이지. 우리 아기한테 독 묻은 사과 먹여놓고 보란 듯이 위문 선물이랑 카드를 보내겠단 말이지. ”

 

아뇨! 선물 안 사요! 카드도 안 줄 거예요! 내가 미쳤습니까! 이깟 놈의 카드! 에잇!

 

“ 뭐라고 썼는지나 좀 보자. ”

 

 

코즐로프가 베르닌의 손에서 리본과 카드를 빼앗았다.

 

 

수신 : 가브릴로프 시립극장 예술감독 미하일 야스민.

귀하의 빠른 쾌유를 기원합니다.

발신 :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지국장 블라지미르 스페호프.

흠. 재미없는 놈. 역시 얼간이야. ”

 

나쁜 인간이에요! 여태 나도 얼마나 들들 볶았는데... 서무랍시고 맨날 부려먹고 툭하면 불러다 설교하고... 다 찢어버릴 거야!

 

“ 놔둬. 가져가서 연구 좀 해 보게. 한방 먹여줄 거야. ”

 

 

코즐로프는 리본과 카드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시계를 보더니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다. 그래서 둘은 흘롑을 극장 뒤뜰에 묶어놓고 경비원에게 봐달라고 한 후 스베촉에 갔다. 본격적인 점심시간은 아직 아니었기 때문에 자리가 많았다. 주문을 하는데 보랴가 주방에서 나왔다.

 

 

“ 야, 너 왔구나. ”

 

“ 예. 지나가다 들렀어요. 여긴 로만. ”

 

알아. 지난번에 예쁜이가 소개시켜줬어. 로만하고는 벌써 술도 한 잔 같이 했지. 알고 보니 이 친구랑 나랑 초등학교 동기더라고. 귀염둥이 아프다며. 걱정 많겠네. ”

 

“ 뭘 좀 먹어야 할 텐데 그게 걱정이야. 못 먹으니까 자꾸 잠만 자려고 한다니까. ”

 

에그, 불쌍해라. 애기가 얼마나 아플꼬. 안 그래도 내가 어제 얘기 듣고 보양식 좀 만들어놨어. 있다가 싸 줄 테니까 가져다 좀 먹여. 그게 아플 때 진짜 좋은 거거든. 땀 한번 쭉 빼고 나면 금방 나아. 기력도 회복되고. ”

 

“ 그래, 고맙다. ”

 

 

점심을 먹으면서 베르닌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 보랴랑 아는 사이였다니. 심지어 초등학교 동기라고요? 근데 저 사람 미샤한테 집적대던데. 어째 그건 그냥 놔두나요? ”

 

“ 보랴가 귀여운 애를 좋아하긴 하는데 그렇다고 사내애랑 놀아나는 취미는 없거든. 저 친구가 십대 때 사고 쳐서 아들을 낳았는데 걔가 아파서 일찍 죽었어. 근데 미셴카가 죽은 아들이랑 닮았대. 저 친구 생긴 걸 보면 죽은 애가 그렇게 예뻤을 리야 없겠지만. 하여튼 그래서 우리 귀염둥이를 엄청 예뻐해. ”

 

“ 아, 그런 거였구나. 난 또... ”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했던 자신을 마음속으로 꾸짖었다. 식사를 다 하고 계산을 하는데 보랴가 나왔다. 보자기로 꼭꼭 싼 보온병을 건네주었다.

 

 

“ 이거 가져가서 애기 먹여라. 뜨거울 때 먹어야 돼. 식으면 한번 데워서 주고. 이거 진짜 몸에 좋은 거야. 소화 잘 되는 밤이랑 몸 따뜻하게 해주는 생강이랑 약초랑 넣어서 닭고기랑 푹푹 고았어. 예쁜이는 기름기 많으면 안 먹으니까 기름도 다 걷어내고 맑은 국물만 한번 걸러서 건더기랑 섞은 거야. 푹 고아서 건더기도 거의 젤리 형태니까 살살 먹으면 돼. 소화 잘돼. 토하는 것도 잡아주고. 꼭 가져가서 먹여라. ”

 

“ 어, 고마워요, 보랴. 당신이 줬다고 하면 분명히 먹을 거예요. ”

 

“ 그래그래. 빨리 나아야 할 텐데. 애기 나으면 데리고 너희들 다 놀러와. 우리 집에서 놀자. ”

 

“ 고맙다, 보랴. 나중에 보자. ”

 

 

보랴는 코즐로프의 등을 탁 치고는 주방으로 돌아갔다. 베르닌은 보자기에 싼 보온병을 소중하게 들고 나왔다. 코즐로프는 리허설을 한 후 저녁에 들르겠다면서 극장으로 돌아갔다. 베르닌은 병원으로 갔다.

 

 

 

*    *    *

 

 

 

 

왕재수는 깨어 있었다. 전날보다는 좀 나아진 것 같았다. 아직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눈의 초점도 흐렸지만 그래도 베르닌을 보자 좋아했다.

 

 

“ 너 어디 갔었어? 하루 종일 없고. ”

 

“ 뭐가 하루 종일이니. 이제 열두시 반이네. 점심 먹어야지. ”

 

“ 안 먹어. 먹기 싫어. ”

 

“ 먹기 싫어도 먹어야 낫지. ”

 

“ 너무 쓰단 말이야. 맛없고 비리고... ”

 

“ 이거 봐. 아까 보랴 만났어. 보랴가 너 아프다니까 걱정하면서 이거 만들어줬어. 너 꼭 먹으래. 이거 먹으면 낫는대. 보양식이라서 소화도 잘되고 몸도 따뜻해지고 기력도 보충된대. 그러니까 좀 먹어보자. ”

 

“ 싫어, 안 먹어. 먹기 싫단 말이야. ”

 

“ 그래도 보랴가 너 먹으라고 만든 거잖니. 너 보랴 멋있다며. ”

 

“ 으응, 보랴 멋있어. 흑, 그래도 먹기 싫은데. ”

 

“ 보랴 성의를 봐서 한 숟가락만 먹어보자. ”

 

“ 으응... ”

 

 

베르닌은 의사에게 보온병의 내용물을 보여주고 먹여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후였다. 뚜껑을 열자 김이 펄펄 올라오는 게 아직도 뜨끈뜨끈했다.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릇에 반쯤 부었다. 으깬 밤과 생강편, 닭고기가 푹 익어서 숟가락만 대도 젤리처럼 몽글거리며 으깨졌고 맑은 국물은 투명할 지경이었다. 베르닌은 혹시라도 너무 뜨거울까봐 자기가 먼저 한 숟가락 먹어보았다. 눈이 번쩍 뜨이는 맛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와, 이거 진짜 맛있다! 항아리 닭고기는 비교도 안 돼! 혀에서 그냥 녹는 거 같아. 와... 내가 떠줄게, 한번 먹어봐. ”

 

“ 맛있으면 너 다 먹어. ”

 

“ 무슨 소리야, 보랴가 너 먹으라고 만들었다잖아. 이 정도로 푹 고아서 만들려면 밤새 불에 얹어 놨을 텐데. 정성을 생각해야지. 아 해봐. ”

 

“ 힝... ”

 

 

왕재수는 내키지 않는 눈치였지만 베르닌이 숟가락을 내밀자 할 수 없이 받아먹었다. 두 번째 숟가락도 먹었다. 하지만 세 번째는 거부했다.

 

 

“ 이제 됐어. ”

 

“ 왜 그래, 더 먹어봐. 맛있는데. 진짜 정성들여 만든 건데. 보랴가 만들어 준 거잖아. ”

 

“ 먹기 싫어. 더워... ”

 

“ 먹고 땀 빼면 낫는 거래. ”

 

“ 더워. 달고 시원한 거 먹고 싶어. 파인애... ”

 

 

베르닌은 급하게 숟가락을 내려놓고 그릇을 치웠다. 왕재수가 또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하염없이 불쌍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파인애플 타령을 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재수는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저었다.

 

 

“ 흑... 파인애플 없는데... 없는 거 알면서 자꾸 달라 해서 미안해. 엉엉... ”

 

“ 어, 너 정신 좀 들었구나. 파인애플 못 구하는 것도 알고. ”

 

“ 어떻게 구해, 여기 시골인데. 미안해. ”

 

“ 괜찮아. 아프니까 먹고 싶은 거야. 미안해, 못 구해다 줘서. 근데 내가 어디 부탁해놨거든. 내일은 파인애플 구해올 수 있을지도 몰라. ”

 

“ 정말? 근데 내일이면... 나 지금 너무 더워. 여기도 뜨겁고 머리도 아프고... 여기 너무 답답해. 머리부터 몸 안이 다 쪼개지는 것 같아.

 

 

왕재수가 이마와 가슴을 손으로 문지르면서 괴롭게 숨을 몰아쉬었다. 심호흡을 해보려고 애를 썼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등을 쓸어주고 손목을 문질러 주면서 호흡을 도와주었다. 왕재수는 많이 힘든지 얼굴을 찡그리며 눈물을 흘렸다.

 

 

“ 아이, 독사과나 먹이고. 진짜 나빠. 흑... 달고 시원한 거... 파인애플... ”

 

“ 조금만 참아. 내일 파인애플 줄게. 그때까지 보랴가 만들어준 거랑 약초즙이랑 먹자. ”

 

“ 약초즙 싫어. 너무 써서 토할 거 같아. ”

 

“ 그래도 그거 먹어서 너 좀 나은 거야. 처음엔 이렇게 말도 못하고 나 알아보지도 못했어. 약초라도 있어서 다행이야. 그 풀 내가 수도원 가서 캐온 거니까 써도 참고 먹어야 돼. ”

 

“ 네가 캐왔어? 어떻게? ”

 

“ 응, 나무 숟가락이랑 바구니랑 들고 가서 수도원 뒤뜰에서 신부님이랑 같이 캤어. 신부님도 너 빨리 나으라고 같이 캐주시고 기도도 해주셨어. 그러니까 약초즙 먹어. ”

 

“ 시골이라서 풀도 캐는구나. ”

 

 

왕재수는 아픈 것도 잠시 잊었는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이때다 싶어서 베르닌은 닭고기 수프를 다시 한 숟가락 떴다.

 

 

“ 조금만 더 먹어. 먹을 땐 더워도 땀 흘리고 나면 시원해질 거야. 진짜야. 이렇게 뜨끈한 수프 먹고 땀 빼는 거 원래 우리 동네 민간요법이야. 이거 먹고 약초즙 먹고 한숨 자면 훨씬 나을 거야. ”

 

거짓말. 선생님도 그런 말 하면서 이상한 거 자꾸 먹였는데 계속 아픈데. ”

 

“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단 말이야. 어제보단 덜 아프잖아, 그치? 그저께보다는 더 많이 안 아프고. ”

 

“ 몰라. 그저께는 기억 안 나. 어제는 많이 아팠어. 지금도... ”

 

 

왕재수는 그래도 수프를 몇 숟가락 더 먹었다. 그릇의 절반쯤을 비웠다. 그리고는 고분고분하게 약초즙도 먹었다. 다 삼키고 나서는 물을 마셨다. 더운지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숨을 헐떡거렸다.

 

 

“ 더워. 너무 더워. ”

 

“ 창문도 열어 놨는데... 밖은 추워. ”

 

“ 너무 더워. 아... 파인애플... 흑... ”

 

 

왕재수가 훌쩍거리며 다시 파인애플을 찾기 시작했다. 수프 때문인지 아니면 아파서 열이 오르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베르닌은 의사를 데리러 갔다. 스타브로프가 왔을 때 왕재수는 이불을 모두 차 내고 얼굴이 빨개진 채 쌕쌕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이따금 깜짝깜짝 놀라면서 ‘파인애플...‘ 하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의사는 이불로 왕재수를 꽁꽁 싸주고는 몇 가지 검사를 했다.

 

 

“ 그래도 어제보다는 나아졌어. 헛소리도 덜 하고. 땀이 나면 한결 낫긴 할 텐데. 아직도 파인애플만 찾는구나. 그놈의 파인애플 하늘에서 좀 내려와 주면 좀 좋아. ”

 

“ 근데 정말 파인애플을 먹으면 나아질까요? ”

 

“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니까 도움이 되긴 하겠지. 감옥에 있을 때부터 하도 나쁜 일을 당해서 많이 놀란 것 같구나. ”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왕재수는 뜨거운 걸 먹었는데도 땀도 제대로 흘리지 않고 얼굴만 빨개진 채 계속 숨을 헐떡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자꾸 파인애플 타령을 할 땐 답답하기도 하고 얄밉기도 했지만 오죽 아프면 그럴까 싶기도 하고 자기가 소속된 조직에서 위해를 끼쳤다는 사실에 가책도 느껴져서 마음이 무척 불편했다.

 

 

옆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간호사가 들어왔다.

 

 

“ 다냐, 전화 왔어요. ”

 

“ 네? 어디서요? ”

 

“ 무슨 투레츠키라고... ”

 

“ 엇, 잠깐만요! ”

 

 

베르닌은 급하게 뛰어나갔다.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 야, 물건 들어왔어. 가지러 와. ”

 

“ 어, 진짜? 지금 갈게! ”

 

 

그는 코트를 걸치는 것도 잊고 후다닥 달려 내려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   *   *

 

 

 

 

투레츠키는 의기양양하게 그를 맞이했다.

 

 

“ 야, 내가 힘 좀 썼다. 원래 이틀이 기본인데 너랑 나랑 친구니까 속달로 해달라고 갈군 거야. ”

 

“ 고마워, 바냐. 진짜 고마워. 너 정말 대단하구나. 역시... 괜히 전설의 서무가 아니었어. ”

 

“ 내가 전설의 서무는 맞지만 서무랑 이건 차원이 다르지. 근데 속달 요금이 더 붙어. 나 외상 취급 안하는 거 알지? 원래는 무조건 선불 아니면 계약금 걸어야 되는데 넌 친구니까 내가 그냥 가져온 거야.

 

“ 고마워. 지금 돈 줄게. 얼마야? ”

 

“ 파인애플은 10루블, 운송비 10루블, 속달 추가요금 10루블. 30루블인데 넌 친구니까 5루블 깎아줄게. ”

 

 

엄청나게 비쌌지만 베르닌은 두말하지 않고 지갑을 꺼냈다. 스페호프가 준 20루블에 사비 5루블을 보탰다. 기관 업무추진비를 쓰는 것도 전혀 가책이 되지 않았다. 분명히 스페호프가 왕재수의 문병 과일바구니를 사라고 했다. 그리고 국장과 KGB가 왕재수에게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금고를 다 털어도 모자랐다. 투레츠키는 돈을 받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오우, 화끈한데. 너 의외로 돈 쓸 줄 아는구나. 여자냐? 좋아하는 여자가 먹고 싶어 하는 거구나. 그럼 돈이 문제가 아니지. ”

 

“ 아니, 그게 아니라 누가 아파서... ”

 

“ 됐어. 나도 참, 개인적인 거 안 물어보는 게 철칙인데 네가 너무 예상외로 돈을 척 내놔서 순간 궁금했네. 이리 와. 물건 줄 테니까. ”

 

 

베르닌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투레츠키를 따라 창가로 갔다. 투레츠키는 보따리 몇 개를 치우고는 커다란 종이 상자를 끌어당겼다. 베르닌도 파인애플을 실물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기대감이 증폭되었다. 파인애플은 큰 과일이니까 상자도 큰 것 같았다.

 

그때 투레츠키가 상자를 열고 손을 쑥 집어넣어 뭔가 부스럭부스럭하더니 조그만 깡통을 한 개 꺼냈다.

 

 

“ 자, 여기 있다. 힘들게 구했네. ”

 

 

베르닌은 두 눈을 의심했다.

 

 

이게 뭐야?

 

“ 뭐긴 뭐야, 파인애플이지. ”

 

아니야, 파인애플은, 파인애플은 과일이잖아! 아열대 과일. 커다랗고 삐죽삐죽하고 두꺼운 가시 같은 게 달려 있고 위에 이파리도 있고. 근데 이건, 이건 깡통이잖아!

 

“ 에이, 제대로 봐야지. 그냥 깡통이 아니잖아. ”

 

 

투레츠키가 베르닌의 눈앞에 깡통을 불쑥 들이밀었다. 삐죽삐죽하고 두꺼운 가시 같은 게 빽빽하게 달려 있고 이파리가 달린 파인애플 그림이 그려져 있고 노란색의 동그란 과육이 담긴 접시 그림도 그려져 있었다. 베르닌은 멍해졌다.

 

 

“ 어, 이건, 이건 그냥 통조림이잖아!

 

“ 그럼 당연히 통조림이지, 너 설마 생과일을 가져올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제정신이냐? 잘못하면 다 썩어 문드러지라고. 통조림이 최고지. 그리고 이거 미제야! 미제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줄 아냐? 이거 봐, 영어로 씌어 있잖아. 파인애플. PINEAPPLE!

 

“ 하지만... 난 당연히 생과일일 거라고... 파인애플이라고 하면 당연히 과일이라고 생각하지 누가 통조림을... ”

 

“ 아이고 답답해라. 여기 오는 사람들은 전부 통조림 구해달라고 한다고. 그럼 애초부터 ‘생과일’이라든지 ‘통조림 아닌’ 파인애플이라고 했어야지. 내가 이거 구하려고 얼마나 그쪽 녀석을 갈구고... 친구인 너를 위해서 손해도 무릅쓰고 내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까지 감수하면서 구해온 건데 너는 통조림이 어떻고 삐죽삐죽한 가시에 이파리가 어떻고 하면서! ”

 

“ 저... 바냐. 네가 나쁘다는 게 아니야. 고생해서 구해다 준 건 진짜 고마워. 근데... 아, 어떡하지. 밤이고 낮이고 파인애플 타령만 하면서 그렇게 괴로워하는데 통조림이라니... 파인애플 갖다 준다고 간신히 어르고 달래놨는데... 진짜 실망할 거야. 더 아프면 어떻게 하지... ”

 

 

베르닌은 망연자실해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어질어질했고 눈물이 났다. 투레츠키는 잠깐 당황한 듯했지만 곧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 에이, 뭘 그렇게 실망하고 그러냐.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통조림이 훨씬 더 맛있어. 그 여자도 분명히 이거 먹어보면 좋아할 거야. 가져가봐. ”

 

“ 하지만... ”

 

“ 그럼 안 가져갈 거니? 환불해줘? ”

 

“ 너 환불도 해주니? ”

 

“ 개봉 안 한 건 환불해줘. 난 정직한 상인이라고! 근데 운송비랑 속달비는 제하고 물건 값만 환불하는 거야. 원래 그래. 그러니까 10루블. 줄까? ”

 

 

멍해진 와중에도 베르닌은 15루블이나 떼이고 통조림조차 못 받는 건 너무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됐어, 그냥 통조림 가져갈래. 어휴... 너 완전 바가지야. 누가 통조림을 25루블이나 받아! ”

 

이게 소련 통조림이냐! 이건 미제야! 비행기 타고 온 거란 말이야! 심지어 위험을 무릅쓰고 지하로 거래해온 건데! 너 날 무시하고 심지어 악덕업자라고 누명까지 씌웠어. 나 이런 건 그냥 못 넘어가! 이 장사는 신뢰가 생명인데. ”

 

“ 화내지 마. 너무 비싸서 그런 거니까. 네 수완은 인정할게. ”

 

“ 그래! 난 수완이랑 신뢰 관계 두 개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고. 하여튼 내 말 믿어. 통조림이 최고야! 잘 가라. 또 오고. 다음에 올 땐 보드카 가져와. 그럼 내가 좋은 거 줄게. ”

 

 

베르닌은 다시 여기 오면 성을 갈겠다는 다짐을 하며 문을 열고 나왔다.

 

 

 

*    *    *

 

 

 

 

힘이 쭉 빠진 채 병원으로 돌아오니 코즐로프가 우울한 얼굴로 복도에 앉아 있었다.

 

 

“ 어, 당신 극장 안 가요? 오늘 저녁 공연 있잖아요. 연주... ”

 

“ 이제 가려고. 잠깐 들렀어, 우리 아기 보려고. ”

 

“ 근데 왜 복도에 나와 있어요? ”

 

“ 막 잠들었거든. 어휴, 나 정말 못 참겠다. 애 아픈 거 더 이상 못 보겠어. 왜 계속 저 상태인 거냐. 멀쩡해진 것 같다가도 금방 또 헛소리하고. 열도 떨어질 듯 떨어질 듯하다가 도로 올라가고. 아까는 계속 속이 다 타는 것 같다고 하고... 파인애플만 입이 닳도록 찾고. 여기 노인네가 명의인 건 아는데,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는데 도대체 믿을 수가 없으니. 나아지고 있는 거면 헛소리도 없어져야지. 아무래도 그 망할 놈이 먹인 독약이 머리로 간 거 아닐까 싶다. 저러다 영영 제정신 안 돌아오면... ”

 

 

베르닌은 바이올린 깡패가 이를 악물고 손등으로 눈을 지그시 누르는 것에 좀 놀랐지만 못 본 척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아니에요, 괜찮아질 거예요. 당신은 걔 옆에 내내 붙어 있지 않았잖아요.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거 맞아요. 의사 선생님이 그랬어요, 쟤 감옥에 있을 때도 그 약물 맞았다고요. 근데 주사 그만 놓게 하고 해독약 같은 것도 안 줬더니 혼자서 나았다고 했어요. 그냥 시간이 좀 걸리는 것뿐이에요. 분명히 나을 거예요. 그러니까 괜히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부정 탄단 말이에요! 신부님이 기도도 해줬는데! ”

 

“ 신부고 나발이고 하느님도 없는데 무슨. ”

 

그래도, 하느님 없어도 기도는 좋은 거란 말이에요! 그리고, 그리고... 의사 선생님이랑 신부님이랑 렐랴랑 보랴랑... 전부 걱정해주고 있잖아요. 걔 걱정해주는 사람이 더 많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괜찮아질 거예요! 다시는 그런 나쁜 말 하지 말아요!

 

“ 좋겠다, 너는. 아직 젊어서. 아직 세상이 장밋빛이구나. ”

 

 

코즐로프는 한숨을 쉬더니 일어섰다.

 

 

“ 나 극장 간다. 공연 끝나고 다시 올 테니까 그때까지만 있어줘. 밤엔 너도 집에 가서 좀 쉬어라. 계속 병원에서 잤잖아. 그러다 몸살 난다. 그 간이침대 불편하던데. 덩치도 큰 녀석이. ”

 

“ 당신보단 내가 낫죠! 당신은 그 침대에 반도 안 들어가겠네요. ”

 

“ 다리를 반으로 접으니까 되긴 되더라고. 하여튼 갔다 오마. ”

 

 

코즐로프가 떠난 후 베르닌은 병실로 들어갔다. 왕재수는 마트료슈카처럼 이불로 꽁꽁 싸인 채 누워 있었다. 얼굴은 여전히 빨갰다. 이마는 뜨거웠지만 보송보송했다.

 

 

‘ 왜 땀이 안 나는 걸까? 난 보랴가 만들어준 수프 한 숟가락만 먹어도 개운하고 땀나려고 하던데. 땀을 흘려서 바깥으로 열이 빠져나가야 좀 나아질 텐데 그게 안 되니까 자꾸 덥다고 하고 속이 뜨겁고 답답한 건가. 대체 무슨 약을 먹인 거야, 나쁜 놈들... ’

 

 

그때 왕재수가 꿈틀거리면서 눈을 떴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목걸이를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 목말라... 아... ”

 

 

베르닌은 급하게 물컵을 가져와 왕재수의 입에 대 주었다. 물을 조금 마신 후 왕재수가 뜨거운 숨결을 토해내며 몸을 조금 일으켰다.

 

 

“ 고마워. ”

 

“ 아직도 그렇게 아파? 땀 하나도 안 났어? ”

 

“ 응... 춤 좀 추면 땀도 나고 괜찮아질 텐데. ”

 

“ 안 돼, 걷지도 못하면서 무슨 춤이야. ”

 

“ 안에 뭐가 잔뜩 걸려 있는 것 같아. 자꾸 어지러워. 다닐, 나 자고 싶어. 자꾸 깨는 거 무서워. 처음엔 괜찮은데 이러다가 네가 막 세 명 네 명으로 보이기 시작할 거야. 그러면 막 더워지고 목마르고 아파. 그럼 파인애플 먹고 싶고... 하아...

 

 

왕재수가 숨을 몰아쉬었다. 베르닌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밑져야 본전이다 싶어서 안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파인애플 통조림을 꺼냈다.

 

 

“ 저기, 있잖아... 겨울이라서 진짜 파인애플은 못 구했어. 미안해. 통조림이라도 먹을래? 이것도 맛있대. 미제래... 투레츠키가 구해준 거야. ”

 

아, 아! 파인애플!

 

 

왕재수가 탄성을 질렀다. 초점이 흐렸던 두 눈에 반짝 하고 광채가 돌았다.

 

 

파인애플이다! 아아! 진짜 파인애플이야!

 

“ 어... 저... 이거 통조림이야. 진짜 아니야... ”

 

아니야! 파인애플이야! 이거... 이거 맞아! 아, 맛있겠다! 아...

 

“ 으잉? 이게 맞아? 파인애플은 삐죽삐죽하고 두꺼운 가시 같은 게 나 있고 위에 이파리가 달려 있는... ”

 

통조림! 파인애플 통조림! 아플 때 먹는 거... 달고 시원한 거!

 

 

왕재수가 흥분해서 다시 아플까봐 걱정이 된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 어, 그래. 그렇구나. 잠깐만 기다려. 파인애플 먹자. 내가 뚜껑 따가지고 올게. ”

 

 

탕비실에 가서 통조림 뚜껑을 따서 돌아왔을 때 왕재수는 일어나 앉아 있었다. 열에 들떠서 온통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독사과를 먹고 쓰러진 후 처음으로 표정이 밝아져 있었다.

 

베르닌은 접시에 통조림 파인애플 과육을 몇 개 꺼내 담았다. 동그랗고 납작하고 샛노란 과육을 한입 크기로 썰었다. 조그만 것 한 토막을 포크로 찍어서 왕재수의 입에 넣어 주었다. 왕재수는 오물오물 먹었다. 눈을 감고 행복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 아아... 파인애플. 달아, 시원해. ”

 

“ 맛있니? ”

 

“ 응. 맛있어. 진짜 달아! 아 시원해. 목말랐어. 파인애플 진짜 먹고 싶었어. 더 먹어도 돼? ”

 

“ 응, 더 줄게. ”

 

 

베르닌은 잘라놓은 파인애플을 먹여주었다. 천천히 조금씩 먹였다. 왕재수는 파인애플을 몇 조각 먹더니 국물 먹어도 되느냐고 물었다.

 

 

“ 국물이라니? ”

 

“ 깡통에 있는 거. 통조림 국물. ”

 

“ 에, 그건 설탕물 아니야? ”

 

“ 으응, 파인애플 물이야. 먹고 싶어. ”

 

 

베르닌은 깡통을 기울여서 컵에 국물을 따랐다. 파인애플 과즙과 설탕이 섞여 있어 굉장히 달 것 같았다. 왕재수는 반 컵이나 마셨다. 마시고 나더니 너무나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목을 울리는 소리를 냈다.

 

 

“ 아아... 살 것 같아. 시원해... 아... ”

 

다행이다... 근데 넌 단 거 안 먹잖아. 신기하다. 통조림이라 엄청 달 텐데 어떻게 이건 맛있어해? 난 네가 이거 안 먹을 줄 알았어. 진짜 파인애플만 입에 댈 줄 알았는데... ”

 

“ 아니야, 이거 맞아. 어릴 때 아프면 이거 먹었어. 아빠가 암시장에 가서 구해오셨어. 나 먹고 열 내리라고... 이거 먹으면 금방 나았어. 열도 내렸어. 아이 좋아, 아이 맛있어. ”

 

“ 그랬구나... 아기 때부터 먹었던 거라서 그렇게 찾았구나. 몰랐어. ”

 

“ 너도 먹어봐. 맛있어. ”

 

“ 너 있다가 더 먹어야지. ”

 

“ 아니야, 나 많이 먹었어. 맛있으니까 먹어봐. ”

 

“ 그래, 좀 있다 나도 먹을게. ”

 

“ 나 이제 나을 거 같아. 이제 안 더워. 아까만큼 안 아파. ”

 

“ 그래그래. 이제 나을 거야. ”

 

아이 땀 나. 아까만큼 덥지도 않은데 왜 땀이 나지?

 

아, 정말이네! 너 이마에 땀났어! 이제 열 내리려나봐! 파인애플 먹어서 그런가보다!

 

 

베르닌은 뛸 듯이 기뻤다. 손수건으로 왕재수의 이마와 콧등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닦아 주었다. 왕재수는 가만히 있더니 하품을 했다. 그리고는 다시 누웠다. 베르닌은 이불을 덮어주었다.

 

 

“ 이제 좀 자자. 자고 나면 훨씬 나아질 거야. 의사 선생님도 그랬어, 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진짜 다행이다. ”

 

“ 다닐, 고마워. ”

 

“ 통조림? 이거 투레츠키가 구해준 거야. ”

 

“ 너 바냐 싫어하잖아. 근데 통조림 구하러 가고... ”

 

“ 에이, 그게 뭐 어렵다고. ”

 

“ 풀도 캐오고... ”

 

“ 흰머리천사날개풀이래. 되게 재밌었어. 나중에 같이 캐러 가자. ”

 

“ 으응... 싫어. 손에 흙 묻잖아. ”

 

 

왕재수는 이미 눈꺼풀이 무거워진 것 같았다.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파인애플... 좋아. ”

 

“ 통조림인 줄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걸... ”

 

“ 아빠. 아빠 보고 싶어. ”

 

“ 그래, 얼른 낫자. 공연도 잘 했잖아. 그러니까 너 곧 레닌그라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그러면 아빠도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

 

“ 못 봐... 아빠 이제 못 봐. 나 어릴 때 돌아가셨어. ”

 

“ 아... 그랬구나. 미안해. ”

 

“ 아빠... 파인애플 맛있어. ”

 

 

왕재수는 조그맣게 웅얼거리더니 곧 잠이 들었다. 베르닌은 통조림 깡통을 접시로 잘 덮어 놓고는 의사에게 갔다.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스타브로프가 들어와서 왕재수의 체온과 맥을 재고 눈꺼풀과 혀, 목구멍, 피부 상태를 관찰했다. 고개를 끄덕거렸다.

 

 

열이 내리고 있구나. 맥박도 훨씬 안정적이고. 푹 자고 나면 좋아질 거다. ”

 

“ 정말 파인애플 덕분인가요? ”

 

“ 허허, 깡통 파인애플로 사람이 나으면 세상에 불치병 환자는 하나도 없겠구나. 그러면 참 좋을 텐데. 하여튼 도움이 됐을 거다. 잘했다, 이 녀석아. 그래도 소싯적 신동이었다고 어디서 또 통조림은 구해왔구나. 이제 너도 집에 가서 좀 쉬어라. 얘는 마누라와 내가 봐줄 테니. ”

 

“ 아니에요, 선생님은 응급환자도 많고 바쁘시잖아요. 연세도 많으신데. 밤에 로만이 오기로 했어요. 저 여기 있을게요. ”

 

“ 그러면 옆 병실이 지금 비어 있으니 거기 누워서 좀 자거라. 간이침대 좁아서 새우잠만 자고 힘들었을 텐데. 저녁 시간 되면 깨워주마. ”

 

 

그래서 베르닌은 빈 침대에 몸을 눕혔다. 무거운 잠이 쏟아졌다. 왕재수가 독사과를 먹고 쓰러진 후 처음으로 그 역시 깊고 개운하게 푹 잤다. 자고 일어나서 의사의 사택으로 올라가 마르가리타가 차려준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저녁을 먹고 병실로 가보니 왕재수는 아직 자고 있었지만 숨소리도 한결 나았고 안색도 거의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예브게니의 말로는 땀을 한바탕 쭉 흘리고 나서 열이 내렸다고 했다. 베르닌은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따뜻하게 적신 수건으로 왕재수의 얼굴과 몸을 닦아주고 환자복도 갈아입혀 주었다. 그는 왕재수가 다시 살이 빠진 것을 보고 속이 상했지만 퇴원하고 나서 맛있는 것을 잔뜩 먹이고 보랴에게도 데려가서 대접을 받으면 괜찮아질 거라고 위안했다.

 

 

자정이 다 되어갈 무렵 코즐로프가 왔다. 왕재수가 나아진 것을 보고 뛸 듯이 기뻐했다. 베르닌이 보란 듯이 깡통을 내밀자 눈을 둥그렇게 떴다.

 

 

“ 아니, 이거였단 말이야? 과일이 아니고? 통조림? ”

 

“ 이거였더라고요... 아기 때 아프면 이거 먹었대요. ”

 

으아... 이건 나도 구할 수 있는 거였는데! 으윽, 모스크바에 있는 내 친구 통조림 장사하는데... 아아, 내가 바보였어! 진작 부탁했으면 우리 아기가 빨리 먹고 나아졌을 텐데! ”

 

“ 통조림인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근데 당신 늦었네요. 공연이 그렇게 길었어요? ”

 

“ 아... 일이 좀 생겨서. 너 이제 들어가 봐라. 내가 있을 테니까. ”

 

“ 당신 내일도 극장 가야 되잖아요. 내일 돈키호테 다시 올린다고 들었는데. 그럼 오전에 드레스 리허설 있잖아요. ”

 

“ 드레스 리허설은 오늘 했어. 그때야 워낙 시간에 쫓기니까 당일 오전에 했던 거고. 오후에 가면 돼. 가서 좀 쉬어라. ”

 

 

그래서 베르닌은 집으로 돌아왔다. 깨끗하게 씻고 푹 잤다. 피로가 다 풀리는 기분이었다.

 

 

 

*    *    *

 

 

 

 

다음날인 토요일에 그는 다시 병원에 갔다. 왕재수는 깨어 있었고 의사의 말대로 열도 내리고 몸이 훨씬 나아져서 이제 혼자서 걸어 다닐 수도 있었다. 베르닌을 보자 좋아했다. 코즐로프와 베르닌에게 통조림 파인애플을 먹어보라고 극구 권했다. 그래서 셋은 파인애플을 나눠먹었다. 꿀처럼 달았다. 베르닌은 그렇게 맛있는 통조림을 처음 먹어보는 것 같았다.

 

 

파인애플을 다 먹은 후 왕재수는 그들에게 극장에 가보라 했다. 베르닌에게도 가서 오후 돈키호테 공연을 꼭 보고 자기한테 얘기해 달라고 했다.

 

 

“ 내가 지휘해야 하는데. 애들한테 너무 미안해. 걔들 스네고로드에 끌려가서 눈 치우느라 초연 무대 서지도 못하고... 오늘 처음 무대 올라가는 건데 내가 이러고 있으니. ”

 

“ 괜찮아, 우리 귀염둥이 아픈 거 아는데 뭐. 애들이 병원 오겠다는 것도 내가 막았어. 빨리 낫는 게 더 중요해. 그래야 다시 극장에도 나가지. 하여튼 우리 갔다 올게. ”

 

 

베르닌은 코즐로프와 함께 극장에 갔다. 코즐로프는 연주 준비를 하러 가고 그는 류드밀라에게 갔다. 왕재수가 많이 좋아졌다고 하자 류드밀라가 매우 기뻐했다. 그리고는 베르닌에게 차와 쿠키를 주면서 생각난 듯 말했다.

 

 

“ 참, 콜랴 있잖아요. ”

 

“ 콜랴가 누구에요? ”

 

“ 아참, 당신은 그 사람이랑 안 친하지. 레베진스키요. 우리 감독님만 그런 거 아니고 그 사람도 병가 냈어요. ”

 

“ 그 사람은 집에 일 있다고 휴가였잖아요. ”

 

 

베르닌은 ‘독사과, 알리바이, 끄나풀’이란 단어들을 간신히 입안으로 삼켰다.

 

 

“ 아, 그건 수요일까지였는데. 그저께 술 한 잔 하고 집에 가는데 좀도둑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뒤에서 누가 덮쳐서 뒤통수를 한 방 맞고 강에 빠졌대요. 맞은 건 심하지 않은데 강에 빠졌다 나와서 감기가 지독하게 들었다지 뭐예요. 하여튼 밤늦게 술 마시고 다니는 건 위험한 것 같아요. 당신도 조심해요, 야근 많이 한다면서. ”

 

“ 아, 그래요? 잘됐... 아니, 안됐네요. ”

 

 

짐작 가는 데가 있었던 베르닌은 비죽비죽 밀려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얼버무렸다. 그리고 오후 5시의 돈키호테 공연을 봤다. 무대에 올라가서 연기를 해봐서 그런지 공연이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굉장히 재미있었다. 특히 돈키호테 연기를 하는 무용수를 집중해서 봤다. 확실히 자신의 어설픈 연기와 크게 차이가 났다. 다시 하면 이 부분은 이렇게 할 텐데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바질 역의 무용수는 열심히 추기는 했지만 역시 왕재수와는 하늘과 땅 차이란 생각도 들었다.

 

 

로비에서 그는 생각지 않게 리자와 마주쳤다.

 

 

“ 어머, 다냐! 역시 꽃돌이 감독님 때문에 온 거군요! ”

 

“ 어, 리자... 당신은 웬일이에요? ”

 

“ 우리 엄마가 발레 좋아하셔서요. 같이 공연 보러 왔어요. 엄마, 여기 우리 회사 다냐예요. ”

 

 

베르닌은 리자의 어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리자는 방긋방긋 웃더니 손뼉을 딱 쳤다.

 

 

“ 아참, 다냐. 그 얘기 들었어요? ”

 

“ 무슨 얘기요? ”

 

“ 우리 국장이요! 오늘 병원에 입원했대요. 잘만 하면 월요일에도 안 나올지도 몰라요! ”

 

“ 엥? 국장이요? 왜요? 어디가 아프대요? ”

 

“ 있잖아요, 국장이 밤마다 집 근처를 산책한다나 봐요. 어제도 밤에 산책하고 있는데 갑자기 웬 집채만한 들개가 나타나서 국장한테 달려들었다지 뭐예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대요. 냅다 달려들어서 목줄기를 물어뜯으려는 걸 국장이 간신히 떼굴떼굴 굴러서 치명상은 안 입었는데요, 그래도 여기저기 물렸대요. 구르면서 다치기도 하고. 광견병 주사 맞고 다친 데 치료 중인데 타박상도 입었고 다리도 좀 삐었대요. 아유, 근데 난 그 얘기 들으니까 왜 이렇게 고소하지. ”

 

“ 들개... 집채만한... ”

 

“ 월요일에 국장 휴가였으면 좋겠어요. 엇, 우리 엄마가 빨리 오라고 하시네요. 우리 월요일에 봐요. 안녕! ”

 

 

베르닌은 주차장으로 갔다. 잠시 후 코즐로프가 나왔다. 연주복을 채 갈아입지도 않은 채였다. 그는 코즐로프를 태우고 병원으로 향했다.

 

 

강을 건너면서 베르닌이 입을 열었다.

 

 

“ 레베진스키 두들겨 맞고 강에 빠졌다면서요. ”

 

“ 그랬다더라. ”

 

“ 밤길 조심을 안 했네요. ”

 

“ 흥, 제깟 놈이 조심해봤자. ”

 

“ 근데 우리 국장은 개한테 물려서 입원했대요. ”

 

“ 아주 잘 됐구나. ”

 

“ 집채만한 개였대요. ”

 

“ 개도 악당을 알아본 모양이지. ”

 

“ 근데 어떻게 한 거예요? ”

 

“ 뭐가? ”

 

“ 레베진스키는 알겠는데, 국장 말이에요. 우리 국장 현장요원 출신이라 눈치 되게 빠른데. 개한테 ‘물어!’하고 소리 지르면 금방 눈치 채고 대응했을 텐데.

 

“ 우리 흘롑이 얼마나 똑똑한데. 그리고 소리 지르고 명령할 필요 하나도 없었지. 다 사전훈련을 시켜놔서. ”

 

“ 엥, 어떻게요? ”

 

위문 카드.

 

“ 예? ”

 

“ 그 개자식이 쓴 카드랑 리본 있잖아. 너한테 맡겼던 거. 그거 내가 가져갔잖아. ”

 

“ 아, 그거요? 근데 그걸로 어떻게... ”

 

“ 미련하긴. 그놈 냄새가 배어 있잖아. 우리 흘롑이 사냥개 출신이거든. 허수아비에 그거 붙여놓고 공격 훈련 시켰지. 아주 한 방에! ”

 

“ 흘롑은 참 좋은 개네요. ”

 

“ 그렇지! 훌륭한 멍멍이지. 우리 아기가 좋아해야 할 텐데. 잘 뜯어보면 귀엽고 앙증맞은 멍멍이거든. ”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끄덕했고 오랜만에 큰소리로 웃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벨라가 훨씬 귀여운 멍멍이라고 생각했다.

 

 

 

 

 

FIN

- 2015. 4. 17 ~ 4.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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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머리천사날개풀은 가상의 약초로 내가 붙인 이름이다 :)

물론 파인애플은 실재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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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시절 러시아 정교는 핍박을 받았고 수도원이나 정교 교회들은 모두 폐쇄되어 병원, 도서관, 보관소, 공장, 대부분은 박물관으로 변모했다. 여기 등장하는 예고르 사제는 본편에도 등장한다. 가브릴로프는 정교 전통이 깊은 도시라 사제님, 신부님이란 호칭으로 불리고 있지만 사실 이 수도원도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고 예고르 신부도 박물관 총괄 관리자이다. 가브릴로프 본편에서 이 수도원은 중요한 장소 중 하나로 등장한다.

 

예고르 사제가 단추에게 대접하는 감자 블린과 열매즙은 내가 지난 2월에 페테르부르크에 갔을 때 징게르 카페에서 마슬레니짜 기간에 먹었던 맛있는 블린과 따뜻한 열매즙 음료에서 따왔다. 그건 나중에 따로 소개해보겠다.

 

..

 

'흘롑'은 흑빵이란 뜻의 러시아어이다 :)

뜨보록은 흰색이라 뜨보록. 흘롑은 검정개라 흘롑~

 

..

 

우리 나라도 옛날엔 바나나랑 파인애플이 엄청 고급 과일이었다. 지금이야 바나나가 흔해빠졌지만 내가 아주 어렸을때만 해도 바나나는 진짜 고급 과일이라 그거 하나 먹는 게 쉽지 않았다. 파인애플도 마찬가지...

이것은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 특히 추운 동네일 수록 더했다.

 

사실 이 에피소드 쓸 때 내가 떠올렸던 건 어릴 때 엄청 아팠을 때 먹었던 황도 백도 깐포도였다 :) 요즘 세대는 잘 모르실지도 ㅠㅠ

 

그런데 요즘 내가 위장이 너무 아파서 고생하다 보니 오늘은 집에 가다 황도라도 사다 먹어야 할 거 같다.. 아무래도 왕재수를 너무 괴롭혀서 벌받은 것 같다 ㅠㅠ

 

(드디어 사다 먹은 황도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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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재수가 파인애플과 아빠를 결부시켜 생각하는 내용은 사실 본편 우주에서 미샤가 어린 시절 잃은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 거기에서 좀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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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23편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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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은 저에게 정말 큰 힘이 된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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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서무 시리즈 때문에 본편이 안 써진다고 투덜대고는 있지만.. 사실 가브릴로프 본편의 외전은 서무 시리즈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재작년부터 본편 시작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끙끙 앓다가 렐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추리소설 외전을 한 편 쓴 적이 있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 이때도 이 추리 소설 외전은 상당한 장편이 되었음... 본편 빼곤 뭐든 다 쉬워요 엉엉...

 

이때 이미 본편 등장인물들과 플롯은 거의 구성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 외전에는 본편 캐릭터들을 그대로 데려왔다. 물론 성격이라든지 특징 등은 비슷한 사람도 있고 완전히 다른 사람도 있었다. 인물들 간의 관계도 물론 비슷한 것도 있지만 완전히 다른 점도 많았다.

 

미샤는 본편과 비슷한 성격이지만 좀더 다정한 타입으로 변했고(물론 서무 시리즈의 왕재수와는 전혀 다르다!) 렐랴는 본편에서는 버릇없는 귀족 아가씨였지만 이 외전에서는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인물이다 보니 좀 철은 없어도 당차고 똑똑한 인물이 되었다. 코즐로프도 본편과는 꽤 다른 성격이 되어버렸는데 여기서 나온 들이받는 성격이 서무 시리즈로 가버렸다.. (미안해 코즐로프야..)

 

완전히 다른 것은 바로 다닐 베르닌, 서무 시리즈 주인공 단추인데... 이 사람은 본편과 이 추리 외전, 그리고 서무 시리즈 세가지에서 모두 성격도 특징도 꽤 다르다! 본편에서는 무모하고 열정적인 메피스토펠레스 같은 인물(살짝 뺀질거리기도 한다)이라면 서무 시리즈에서는 고지식한 책상물림에 하염없는 순둥이 말단 서무, 그리고 이 추리 외전에서는 역시 고지식한 책상물림 기질이 있기는 하지만 명예욕도 있고 앞장서서 사건을 해결하고자 하는 탐정 역할이었다. 천의 얼굴 베르닌~ 이래서 서무 시리즈에서 하를람피 푸고비체프도 소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목요일쯤 서무 22편 올라갈 예정이지만, 그 전에 머리 식힐 겸 추리 외전에서의 베르닌과 렐랴, 코즐로프에 대한 내용을 조금 발췌해 본다~ 서무 시리즈의 단추, 렐랴, 코즐로프와 한번 비교해 보세요 :) 잘 보면 스페호프에 대한 묘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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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먼저 단추와 코즐로프에 대한 묘사. 소설 프롤로그 부분이다. 이야기는 아리따운 엄친딸 렐랴가 근사한 만찬을 준비하고 열두 명의 손님을 초대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만찬의 목적은 갓 부임해온 시립극장 예술감독인 미샤를 유혹하려는 것임^^;) 단추 베르닌과 코즐로프도 그 손님 명단에 들어 있다. 렐랴가 그 둘을 초대한 이유에 대해...

 

 

 

마음에 들지 않는 손님은 두 명 더 있었다. 불청객까지는 아니었지만 로만 코즐로프가 거기 속했다. 코즐로프는 가브릴로프 오케스트라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원래 렐랴는 지휘자인 콘스탄틴 볼코프를 초청하려고 했었다. 친분도 있는 사이인데다 파티에서 사랑받는 타입의 둥글둥글한 아저씨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볼코프는 손녀의 생일과 겹친다며 난색을 표했고 대신 코즐로프를 밀어 넣었다. 가브릴로프 문화예술계를 꽉 잡고 있는 숙녀답게 렐랴는 코즐로프와도 안면이 있었지만 둘은 전혀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코즐로프는 오케스트라의 실세였는데 현학적이고 냉소적인 인물이었고 이따금 싸움꾼으로 변모하기도 했다. 모스크바 물을 먹은 적이 있기 때문에 거만하게 구는 적도 많았고 보통은 음울하기 짝이 없었다. 렐랴는 그를 키라의 옆자리에 배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까칠한 화가와 냉소적인 바이올리니스트 둘이서 잘해보라지.

 

마지막은 진짜 불청객이었다. 그녀가 별장에서 파티를 여는 것은 가끔 있는 일이었고 누구를 손님으로 부르든 지금껏 간섭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사정이 달랐다. 명단에 미샤 야스민이 들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가브릴로프 KGB 지부에서 렐랴에게 연락을 해왔던 것이다. 자신들 쪽 사람을 하나 끼워 넣지 않으면 파티를 취소하거나 그 요주의 인물을 제외해야 할 거라고 조용하지만 명령에 가까운 경고를 해왔다. 미샤는 당연하게도 보안위원회의 특별 감시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렐랴는 아버지와 친척들에게 얘기해서 한바탕 소란을 일으킬까 하다가 국장인 블라지미르 스페호프가 친히 전화를 해왔기 때문에 그만두었다. 스페호프의 비위를 건드려서 좋을 일은 별로 없었으니까. 그자는 심사가 뒤틀린 사이코였다. 원래는 모스크바 KGB 본부에 있었지만 어떤 일에 휘말려 가브릴로프로 전출당해 지부 국장을 맡고 있었는데 한번 앙심을 품으면 잊는 법이 없었고 의심스러운 사상이 엿보이는 젊은이들이라면 악착같이 감시했다. 그러니 그가 미샤 야스민이 초청된 파티에 감시자를 딸려 보내려고 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그나마 스페호프 자신이 오는 것이 아니라 다닐 베르닌을 보내는 것이 다행이었다. 베르닌은 가브릴로프 KGB 지부에서 서기 업무를 보고 있었고 스페호프의 비서 중 하나이기도 했다. 렐랴는 베르닌의 조그맣고 광택 없는 까만 단추 같은 눈을 아주 싫어했고 그의 촌스러운 매너와 그보다 더 엉망인 옷차림은 더욱 싫어했다. 이미 서른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꼭 풋내기 대학생 같은 몰골이었다. 그녀는 스페호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베르닌에게도 초청장을 보냈지만 마음 속으로는 어떻게든 미묘하게 모욕을 주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

 

 

  그리고 이번엔 소설 전반부. 갑작스럽게 시체가 발견된 후, 손님들을 모두 거실에 몰아넣고 나서 베르닌과 렐랴가 나누는 대화이다 :) 여기 인용되는 키라, 데니스, 알렉세이 등등은 모두 본편에도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키라는 미샤의 화가 친구이며(전에 about writing 폴더에도 둘이 미술관 갔던 얘기를 잠깐 발췌한 적 있다), 데니스와 알렉세이는 가브릴로프 극장의 무용수들이다.

 

 

모포를 들고 다시 복도를 돌아 나왔을 때 렐랴는 베르닌이 시체 곁에 무릎을 꿇고 뭔가를 살피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찌나 열중해 있는지 그녀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 뭐 새로운 거라도 있어요? ”

 

베르닌이 희미하게 움찔하더니 시체의 손을 내려놓았다. 렐랴는 어렴풋이 베르닌의 소매 안쪽으로 초록색 광채가 반짝 사라지는 것을 본 것 같았지만 램프 불빛이 시계에 반사된 것인지도 몰랐다.

 

“ 별로. 가서 얘기하죠. 모포가 꽤 크군요. 혼자 들고 오기 힘들었겠어요. 그럴 줄 알았으면 같이 갈 걸 그랬네요. ”

 

“ 이제 와서 그런 말 해봤자 소용없어요. 매너와는 담쌓은 사람이란 건 애초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

 

“ 매너는 극장 남자들에게나 기대해요. 왕자님 역할이 몸에 밴 사람들이 우글거리잖아요. 데니스도 그렇고 야스민도. 하긴 알렉세이도 키라에게 잘 해주더군요. 그나마 이불이 흰색이 아니라서 기분은 좀 나은데. ”

 

베르닌은 렐랴의 도움을 받아 모포를 펼쳐 시체를 덮었다. 모포 아래로 맨발이 빠져나와 있는 것을 보자 렐랴는 다시금 소름이 돋았다. 가까스로 마음을 가다듬고 모포를 끌어당겨 시체를 완전히 덮으면서 렐랴가 중얼거렸다.

 

뜨거운 차와 파이라도 좀 갖다 줘야겠어. 다들 숙취 때문에 괴로울 거야. ”

 

“ 그러는 게 좋을 겁니다. 진술하려면 다들 정신을 차려야 할 테니까. 차와 음식 준비는 타마라 니콜라예브나의 도움을 받는 게 좋겠군요. 혼자 준비하려면 번거로울 테니까. ”

 

“ 가지가지 하는군요. 무매너에 성차별주의 발언까지. 나 혼자 할 수 있어요. 내가 여자라서가 아니라 주인이기 때문이죠. ”

 

“ 사과하라는 뜻인가요? 다시 봤습니다,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예쁜 얼굴과 살림 솜씨로 맘에 드는 남자를 유혹하려고 파티를 연 전형적인 귀족 아가씨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사과해야겠네요. ”

 

 

렐랴는 어째서 베르닌의 그 형편없는 매너와 끔찍할 정도로 무례한 발언에 화조차 나지 않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그럴 가치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싸늘한 미소를 띠며 침착하게 대꾸했다.

 

 

“ 당연히 사과해야죠. 그리고, 잊지 말아요, 다냐. 당신도 그 잠재적 용의자에 해당된다는 사실. 내가 심문하겠다고 했잖아요. ”

 

“ 잊었을 리가. 그래, 언제 하려고요. 지금? ”

 

“ 다른 사람들 얘기 좀 들어보고요. ”

 

“ 뜻대로 하시죠, 비슈네브이 사드 편집장님. 아마 맘 상할 얘기가 좀 많이 나올 겁니다. 그래도 당신은 키라처럼 울지는 않겠죠. 그 아가씨처럼 누구에게 목맬 정도로 빠져 있지는 않으니까. 그런 타입도 아니고. ”

 

“ 내기라도 하고 싶네요, 다냐. ”

 

“ 뭘 말인가요. 범인을 누가 먼저 밝혀내는지? ”

 

“ 아뇨. 난 당신처럼 탐정 놀이에 빠져 있는 철없는 사내애가 아니에요. 그런 내기 따윈 안 해요. ”

 

 

렐랴는 부드럽고 도톰한 입술을 치켜 올리며 도도하게 말했다.

 

 

“ 당신 지금까지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못해봤죠? 여자가 정말 싫어하는 타입이니까. ”

 

“ 얼마 걸겠어요? ”

 

“ 글쎄요, 이 목걸이라도 걸까요? ”

 

“ 진짜 진주 같은데? 공연한 짓 하지 말아요,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가서 뜨거운 차나 준비해 주시죠. 아까 키라 모이세예브나 말 못 들었어요? 그 레닌그라드 친구에겐 뜨거운 게 필요할 걸요. 아직 고문 후유증이 있어서. 물론 신경통 앓고 있는 당신 외삼촌과 기억이 오락가락하는 신부님에게도 뜨거운 차가 필요하겠죠. ”

 

“ 당신, 내기에 응하지 않았어요. 결론이 났네요. ”

 

“ 마음대로 생각하시죠,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

 

 

다닐 베르닌이 웃기 시작했다. 렐랴는 처음으로 그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미소와 마찬가지로 그다지 기분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

 

이 외전은 3인칭 시점이긴 하지만 다분히 렐랴의 관점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초반부의 베르닌은 이런 사람으로 보인다.. 요즘은 하도 서무 시리즈를 많이 써서 그런지 오랜만에 저 추리소설의 베르닌을 보니 굉장히 뺀질거리는 것처럼 보이네.. 서무 시리즈였다면 시체를 발견한 단추는 훌쩍훌쩍 울며 책상물림 짓을 하고 있을텐데 :) 하지만 이 외전도 후반부로 가면 베르닌의 다른 면모가 드러난다~ 렐랴도 그렇고 :)

 

이 추리 외전은 분량이 꽤 길긴 한데... 서무 시리즈도 잘 안 풀릴 때가 오면 이 외전을 한번 소개해보도록 하겠다~

 

그래도 베르닌은 서무 시리즈 단추가 더 귀엽긴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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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몇번 올렸던 날, 2월 21일. 마린스키 신관에서 로파트키나와 예르마코프가 나오는 안나 카레니나 보러 갔던 날. 다음날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무척 아쉬웠던 날이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이었다. 입장 기다리면서 비 좀 맞으며 구극장과 신관 사이 운하를 따라 좀 걸었다. 오른편의 부드러운 민트 그린 건물이 마린스키 극장, 그리고 왼편의 유리건물이 신관이다.

 

며칠 전만 해도 저 운하는 꽁꽁 얼어붙은 수면 위로 눈이 쌓여 있었으나 기온이 좀 올라가서 비가 내리면서 저렇게 얼음 위로 물이 또 고이기 시작했다.

 

 

 

운하 너머로 니콜스키 사원의 아름다운 첨탑이 보인다. 이 사원은 개인적으로 페테르부르크에서 제일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원들 중 하나이다. (원래 금빛과 푸른빛 사원을 좋아한다)

 

 

 

지금쯤 저 운하는 언제 얼었냐는듯 물이 찰랑찰랑하겠지. 6월이면 백야다... 가고 싶어라.

 

* 태그의 니콜스키 사원을 클릭하면 전에 올렸던 이 사원 풍경을 볼 수 있다. 겨울 눈보라에 휩싸인 모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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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서 쉬는 게 쉬는 것이 아닌 주말이다.

몸은 괴롭고 마음은 지쳐서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고자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발레 화보 몇 장.

 

유리 스메칼로프가 안무한 '나르키소스를 위한 레퀴엠' 중.

 

 

 

사진은 svetlana avvakum.

파트너는 빅토리야 테료쉬키나. 그리고로비치의 '사랑의 전설' 중.

 

 

 

사진은 katya kravtzova.

얼마 전 마린스키 발레 페스티벌에서 선보인 '젊은 안무가 창작 발표 공연' 중 유리 스메칼로프가 안무했던 '지하왕국의 오르페우스' 중. 상대역은 옥사나 본다레바.

 

 

 

이것도 위와 마찬가지. 역시 사진은 katya kravtzova.

 

 

 

젊은이와 죽음을 리허설 중인 슈클랴로프와 예카테리나 콘다우로바

사진은 alex gouliaev.

 

 

역시 젊은이와 죽음 리허설.

사진은 alex gouliaev.

 

 

마지막 사진도 alex gouliaev.

앙줄랭 프렐조카주의 le parc. 상대역은 올레샤 노비코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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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시리즈도 이제 20편이 넘어갔다. 0편부터 시작했으니 엄밀히 말하자면 숫자보다 하나가 더 많다. 여기에 외전으로 들어갔던 등장인물 20문답이 있다.

 

본편이 답보 상태에 접어든 대신 서무 시리즈는 꼬박꼬박 잘 써져서 24편까지 완료가 된 상태이다. 그 뒤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계속 쓸 것 같긴 하다. 문제는 자꾸 본편이랑 섞인다는 것이 ㅠㅠ

 

하여튼 그건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고. 어느덧 21편.

 

지난 20편에서 왕재수는 스페호프의 갖은 방해공작을 무릅쓰고 돈키호테 공연을 잘 올렸다. 물론 하를람피 푸고비체프의 도움을 받아서 :) 21편은 여기서 이어지는 얘기다.

 

* 전에 몇 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루뱐카는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를 가리키는 속어이다. 모스크바의 루뱐카 지역에 있어서 그렇게 불린다.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높은 사람들 앞에서 왕재수의 공연을 망치려고 했던 방해공작이 실패로 돌아간 후 스페호프 국장은 복수심에 불타고...새로운 음모를 짜낸다. 과연 베르닌은 그 음모를 분쇄하고 왕재수를 위험에서 지켜낼 수 있을 것인지...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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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21

 

 

 

 

서무의 슬픔

- 스페호프의 복수 -

 

 

 

 

 

 

월요일 아침부터 가브릴로프 KGB 지국의 모든 직원들은 공포에 질려 벌벌 떨었다. 국장실로부터 공산당 찬가와 콤소몰 행진곡이 꽝꽝거리며 울려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블라지미르 스페호프 국장은 예술과는 담을 쌓았지만 당이 인정한 음악에 대해서는 굉장한 애호가였다. 국장실 벽 삼면을 차지하고 있는 책장에는 레닌과 스탈린을 비롯한 서기장들의 연설 모음집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주해 등을 비롯한 가지각색의 공산당 관련 서적과 각종 레코드, 테이프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특히 프로파간다 음악들을 매우 좋아했다. 그러니 국장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지만 공산당 찬가와 콤소몰 행진곡이 나온다는 것은 일급 경고였다! 최악의 저기압일 때만 틀어놓는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베르닌은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 전날의 돈키호테 공연 때문에 국장의 심기가 매우 나쁘리라고 예상하며 출근했기 때문이다. 분명 주간 회의를 시작하기도 전에 그를 호출해 극장에서의 일을 추궁할 거라고 각오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9시가 되자 스페호프가 직접 그에게 전화를 걸어서 국장실로 올라오라고 했다.

 

 

베르닌은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머리를 짜내며 계단을 올라갔다. 자기도 모르게 돈키호테처럼 다리를 높이 들고 휘적휘적 걷고 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랐다. 자신이 공연을 방해하기는커녕 출연까지 했다는 사실을 국장이 알게 된다면 큰일이었다.

 

 

국장실 문은 열려 있었고 여전히 콤소몰 행진곡이 우렁차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베르닌은 심호흡을 한 후 노크를 하고 들어갔다. 스페호프가 서류를 뒤적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안경 너머로 날카로운 눈이 번쩍 빛났다.

 

 

“ 국장님, 안녕하십니까. ”

 

“ 그놈이 주인공인지 뭔지를 출 거라는 걸 끝까지 몰랐나? ”

 

“ 어, 예... 철저히 비밀로 해서요... 그 나이 많은 선생이 출 거라고 생각했어요. 죄송합니다. 제가 공연이랑 극장은 잘 몰라서 그만... ”

 

“ 하긴 발레단 내부에 있는 놈도 몰랐는데 자네가 무슨 수로 알았겠나. 그 여우같은 놈이 우리 모두를 속였어, 보기 좋게 갖고 놀았어! 망할 자식. 의원들이 얼마나 넋을 빼고 보던지. 내참 구역질이 나서. 사내자식들이 민망한 타이츠를 입고 펄쩍펄쩍 뛰지를 않나, 얼굴에 분칠을 하고 속눈썹을 붙이지 않나, 계집애들이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지를 않나. 연방과 당을 이끄는 인물들이 그딴 지저분한 짓거리를 보면서 천재가 어쩌고 뮤즈가 어쩌고 하고 있으니... 아주 그 더러운 불여우 꼬마한테 제대로 홀렸다니까. 그 자식이 무대에 올라간다는 건 나도 3시에야 알았네, 레베진스키가 헐레벌떡 달려와서 알려주더군. 의원님들이 공항에서 들이닥치는 시간이라 도저히 그 자식을 손봐 줄 수는 없었어. 시간도 그렇고 잘못하면 의심받기 쉬우니... 그래서 그 풍차인지 뭔지를 건드려놨는데 망할 놈의 키다리 놈팽이 대가리가 박살날 줄 알았더니만 돌머리인지 멀쩡하게 나오지 뭔가! 그 자식은 대체 어디서 굴러온 건달 녀석인지! 무슨 푸고비체프인지 뭔지. 서류에도 그런 이름은 없더군! 그 불여우 꼬마가 분명 어딘가에서 끌어온 악당일 거야! 자네도 잘 찾아보도록 하게! 이상하게 그놈이 아주 꼴 보기 싫더군! 제일 먼저 제거한 배역이었는데 어디서 그런 녀석이 굴러 들어와서... ”

 

“ 어, 예... 그 푸고비체프란 사람은 무슨 벌목공 출신인데 다른 지역에서 잠깐 놀러왔다가 어젯밤에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

 

 

베르닌은 자기보호 본능이 발동해 무의식적으로 급하게 둘러댔다. 스페호프는 족히 5분도 넘게 욕설을 퍼붓더니 물을 한 컵 꿀꺽꿀꺽 마셨다.

 

 

“ 알았네. 하여튼 호락호락하지 않은 놈이야. 막판에 그렇게 받아치다니. 그 깜찍한 녀석이 전에 내 인사말도 40초 만에 끊어버렸지. 그거야말로 정말 용서할 수 없어! 그래도 하나 알게 된 사실이 있지. 그때 내가 VIP석에 앉았지 않나, 의원들 옆에. 그 인간들이 나누는 얘길 들었지. 애송이가 아프긴 정말 아픈 모양이더군. 그 망할 놈의 의사 영감탱이가 우리에겐 조작된 차트를 제출하고 있었어. 모스크바 의원들은 그 영감이 크레믈린 쪽으로 보낸 차트 원본을 본 모양이야. 조금만 삐끗하면 수용소 후유증이 도지니까 조심조심해야 한다지. 그래서 윗분들이 그놈을 우리 동네로 보냈다는 거야! 공기 맑은 곳에서 요양하라고! 흥, 아주 잘됐어! 대놓고 암살하는 건 그 불여우 녀석한테 혹한 윗분들이 많으니 아직은 위험하지. 이미 극장 쪽에 얘길 해뒀네. 제깟 게 펑크 난 배역은 땜빵할 수 있을지 몰라도 L-950은 못 버티지!

 

“ 어, 저... 국장님. L-950이 뭔가요? ”

 

“ 아참, 그렇지. 자넨 현장요원이 아니지. 자세히 알 것 없네. 루뱐카 본부에서 쓰는 거라서. 뭐 조금만 쓰니까 검출도 안 될 거고, 일반인한테는 별 문제도 안 되는 분량이지만 그 꼴 보기 싫은 애송이는 알콜을 분해 못 시키니까 제대로 작용할 것이야! 자넨 오늘부터 그 자식을 면밀하게 관찰하게. 열이 나고 아프기 시작하면 제대로 걸려든 거지! 당장 죽이진 못해도 혼쭐을 좀 내줘야겠어! ”

 

“ 저...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설마 그건 약물 얘긴가요? 극장에 심어놓은 내부 스파이에게 전달하셨다는 건가요? 그래서 그걸 몰래 야스민에게 먹여서 아프게 한다고요? ”

 

“ 음, 다닐. 자네 많이 늘었군. 역시 그 불여우 감시 업무를 분장해 줬던 보람이 있다니까. 이제야 감시분석부의 어엿한 일원이 되어 가는군. 잘해 보게. 그 망할 불여우 때문에 힘들겠지만 이 경험을 토대로 행정의 기본뿐만 아니라 현장요원으로서의 역량도 서서히 배양할 수 있을 것이네. ”

 

“ 저, 국장님. 그럼 차라리 그 약물, 무슨 L이 어쩌고 하는 걸 저에게 주시면 제가 직접... ”

 

“ 아니, 안 되네. 불여우를 직접 처치하고자 하는 자네의 열정과 공명심은 높이 사네만 그건 위험하지. 이미 자네가 감시요원인 걸 온 천하가 다 아는데 약물까지 맡기면 즉시 크레믈린에서 의심대상이 될 걸세. 발레단 쪽에 있는 친구가 몰래 먹이는 게 낫지.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는 말게, 나중에 진짜 기회가 올 테니까. 이번 것은 죽이려는 것까지는 아니거든. 그저 그 싸가지 없는 개자식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을 뿐이야! 가만 안 두겠어! 버릇없는 반동분자 녀석!!!! 자, 그렇게 알고 오늘 저녁부터 그놈의 일거수일투족을 잘 살펴주게! 이상! 주간 회의에서 보세! ”

 

 

베르닌은 묵묵히 자리로 돌아왔다. 주위를 살폈다. 주간 회의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배나무 거리 교차로 앞 공중전화로 갔다. 극장 감독실로 다이얼을 돌렸다. 하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왜 비서도 전화를 안 받는지 불안해하며 동동 구르다가 문득 깨달았다.

 

 

‘ 아 맞다, 오늘 월요일이지. 극장 노는 날. ’

 

 

왕재수는 보통 월요일에도 출근하곤 했지만 전날까지 돈키호테 때문에 그렇게 과로를 했으니 못 나온 것도 무리는 아닐 것 같았다. 그래도 오후에 기어 나올지도 모르니 걱정이 되었다. 왕재수의 집으로 전화를 했다. 그 집 전화에는 도청장치가 부착되어 있었지만 어차피 그 내용을 정리하는 건 자신이니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왕재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 아직 자나... 하긴 아침잠이 엄청 많은 애니까. 어제 집에 들어오긴 했나 모르겠네... 국회의원들한테 인사하고 같이 저녁 먹으러 간다고 했었는데. ’

 

 

걱정이 된 베르닌은 잠시 우왕좌왕하다가 수첩을 뒤져서 코즐로프의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다이얼을 돌리니 한참 후에 코즐로프의 까칠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못 걸었어요!

 

“ 어, 나 다닐인데요. ”

 

“ 왜 뜬새벽부터 전화야! ”

 

“ 9시 넘었는데... ”

 

“ 9시면 뜬새벽이지! 월요일이라 밀린 잠 자고 있는데! 무슨 일이야? ”

 

“ 어, 저... 미샤 거기 있어요? ”

 

“ 우리 아기는 왜! ”

 

“ 할 얘기가 있어서요. 당신이랑 같이 있어요? ”

 

“ 있긴 한데 지금 자. ”

 

“ 잠깐만 깨워 주면 안 돼요? 진짜 중요한 얘기가... ”

 

안 돼. 우리 아기 잘 때는 절대 못 깨워! 가뜩이나 동 다 텄을 때 들어와서 잠든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너도 알잖아, 우리 비둘기가 요 며칠 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 망할 놈의 공연인지 뭔지 때문에! ”

 

“ 어... 왜 그렇게 늦게 들어온 거예요? ”

 

“ 높은 분들한테 인사하고 저녁 먹고 술자리에도 끌려갔으니까 그렇지. ”

 

“ 엥, 술 마신 거 아니죠? 걔 술 마시면 안 되는데. ”

 

“ 술 마셨으면 제 발로 걸어 들어왔겠냐. 그놈들이 옆에 끼고 노느라 늦었겠지. 에이, 개자식들. 우리 아기 감옥 끌려갈 때 나 몰라라 했던 건 언제고 이제 와서... 중요한 얘기가 뭔데? 내가 전해주면 안 되냐? ”

 

“ 아니, 저... 걔 오늘 극장 안 가죠? ”

 

“ 안 가! 간다 해도 내가 못 가게 할 거야. 사람 몸이 무슨 무쇠도 아니고. 오늘은 우리 집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가! ”

 

“ 다행이다... 그럼 내일은 나가요? 내일 공연 없는 거 같았는데. ”

 

“ 나는 오케스트라 연습 때문에 나가고, 얘도 나가겠지 뭐. 신작 때문에 할 거 많으니까. ”

 

“ 저, 공연 없으면 내일까지 쉬게 하면 안 되나요? 의사 선생님도 일주일에 3일만 나가라고 했잖아요. 가뜩이나 과로했는데. ”

 

“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이 녀석 성깔에 내 말 듣겠냐. ”

 

 

베르닌은 시계를 보았다. 주간 회의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 어, 그럼 있잖아요, 이거 중요한 얘기니까 꼭 전해주세요. 당분간 극장에서는 물이나 음료수 절대 마시지 말라고. ”

 

“ 왜? 스페호프 그 자식이 독이라도 탄다든? ”

 

“ 엇... 어... 당신 정말 예리하네요. 어떻게 알았지? ”

 

“ 그러고도 남을 놈이니까! ”

 

“ 어, 그래요. 국장이 어제 공연 때문에 엄청 열 받았어요. 이상한 약물 써서 아프게 만들 거랬어요. 알콜 약물이라 했으니까 분명히 음료수에 탈 거예요. 걔 목마른 거 못 참잖아요, 보이는 대로 물이랑 주스랑 막 마시잖아요. 집에서 물이랑 주스 싸가라고 해요. 절대, 절대 극장에서 뭐 받아 마시면 안 돼요. 차도 마시면 안 돼요. 내일까지 쉬게 하고요. ”

 

“ 알았다. 내가 그 더러운 놈 죽여 버릴 거야. 밤길 조심하라 해라, 등짝에 칼을...

 

 

코즐로프가 점차 잠이 깨면서 화가 머리끝까지 치미는 것 같은 눈치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주간 회의에 늦지 않기 위해 정신없이 뛰었다.

 

 

 

*    *    *

 

 

 

베르닌은 바쁜 와중에도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화요일 오전에 그는 다시 극장에 전화를 해보았다. 류드밀라가 받았다.

 

 

“ 감독님은 오늘 안 나오세요. ”

 

“ 어, 그래요? 휴가예요? ”

 

“ 네, 대휴예요. 2주일 동안 하루도 안 쉬고 계속 나왔었거든요. ”

 

 

다행이라 생각하며 베르닌은 전화를 끊었다. 밤에 코즐로프의 집에 들러서 왕재수에게 직접 위험을 알려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긴 바이올린 깡패가 어련히 옆에서 잘 막아주려나 싶기도 했다.

 

 

오후 늦게 그는 구시가지에 갈 일이 생겼다. 얼마 전 다녀온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의 발표 자료로 만들었던 ‘레닌과 스탈린,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의 경제 모델에 따른 가브릴로프의 공산당원 교육 정책’ 원고가 필요하다는 교육국의 공문 때문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발송 대장에 적고 우편으로 보냈겠지만 직접 가져다주겠다고 자청했다. 극장이 교육국에서 10분 거리였기 때문이다. 외출부에 적고 사인을 받으러 갔더니 스페호프는 칭찬을 했다.

 

 

“ 그렇지, 바로 이거야. 드디어 자네가 서무 업무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 KGB 직원의 전문성을 강화하고 정보 공유의 범위를 확대했구먼! 교육국에 가면 담당자에게 전해주지 말고 반드시 이 공문의 전결권자인 본부장에게 직접 가서 원고를 건네주게! 그래야 우리 KGB가 이 정도로 공부하는 조직이라는 것을 어필할 수 있는 것이네! 어서 다녀오게. ”

 

 

베르닌은 차를 몰고 다리를 건넜다. 교육국에 갔다. 본부장인 우니보프에게 가서 원고를 전해 주었다. 우니보프는 고개를 갸웃했다.

 

 

“ 아니,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건가? 이건 우리 부서 플레타노프가 요청한 자료일 텐데. ”

 

“ 예, 본부장님이 공문에 사인을 하셨기 때문에 직접 전해드리라고 우리 국장님이 지시했습니다. ”

 

“ 허참, 하여튼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는 꼼꼼하다니까. 책상 위에 놓고 가게. 그냥 플레타노프에게 갖다 줬으면 좋았을 텐데. 하여튼 잘 가게. ”

 

 

 

귀찮아하는 우니보프의 책상 위에 원고를 내려놓은 후 베르닌은 극장으로 갔다. 스페호프가 정확히 누구를 매수했는지, 그리고 음료수가 투입될만한 루트가 무엇인지 파악해 볼 생각이었다. 내심 그는 안무가인 레베진스키를 의심하고 있었다. 왕재수 때문에 감독직도 빼앗긴데다 신작이 반동적이라고 검열국에 찌른 적도 있고 스페호프에게 공연에 대한 정보도 제공했으니까.

 

 

마침 그는 분장사인 타치야나와 마주쳤다. 타치야나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더니 눈을 찡긋하며 인사를 했다.

 

 

“ 안녕, 하를람피. ”

 

“ 안녕하세요, 타치야나 이바노브나. 혹시 레베진스키가 지금 어디 있는지 보셨나요? ”

 

“ 콜랴? 오후 반차 내고 나갔대. 내일도 휴가야, 집에 일이 있다고. ”

 

“ 아, 그래요? ”

 

 

다행이다 싶어서 그는 1층 카페 차이카로 내려가 보았다. 맛없고 질 나쁜 음식만 내놓는 곳이니 음료수에 약을 타도 티가 나지 않을 게 뻔했다. 그런데 차이카는 문이 닫혀 있었고 ‘기술적인 문제로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영업을 중단함’이라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그나마 나쁜 가능성 하나가 사라진 셈이니 다행이었다. 극장 2층에서 5층까지 작은 카페가 하나씩 있었지만 그건 공연을 할 때만 열고 관객을 대상으로 하니까 왕재수가 가서 뭘 마실 일은 거의 없었다.

 

조금 마음이 놓인 그는 복도로 나왔다. 그러다가 왕재수와 마주쳤다.

 

 

“ 어, 너 웬일이야? ”

 

“ 앗, 너 왜 여기 있어! 오늘 대휴라고 했잖아! 안 나온다며! ”

 

어, 그건 어떻게 알아? 대휴 내긴 했는데, 할 게 많아서 점심 먹고 나왔어. ”

 

“ 너 미쳤냐, 그렇게 무리해놓고. 쉴 때 푹 쉬어야지, 어제도 아침에 들어갔다면서 기껏 하루 쉬고 나오면 어떻게 해. ”

 

“ 괜찮은데. 푹 자서 피로 다 풀렸어. 어젯밤에 우리 애들 스네고로드에서 다 돌아왔거든. 자기들 없이 돈키호테 올라갔다고 얼마나 상심하는지. 그거 토요일에 한 번 더 있잖아. 걔들 올려야 해서 연습도 봐줘야 하고. ”

 

 

베르닌은 급하게 주변을 둘러본 후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 너 얘기 들었지? 절대 뭐 마시면 안 돼. ”

 

“ 어휴, 어떻게 하루종일 아무 것도 안 마시니. ”

 

“ 집에서 가져오란 말이야. 여기서 주는 건 안 돼. 국장 진짜 화났어. 너 가만 안 둔대. ”

 

“ 그 자식 하나도 안 무서워, 얼간이 앞잡이. 애들 괴롭히고 공연 망치려 들고 풍차도 고장 내고. 예술 탄압자! 두고 봐! ”

 

“ 두고 보는 건 좋은데, 너 진짜 내 말 들어야 돼. 오늘 극장 와서 뭐 마신 거 있어? ”

 

“ 안 마셨어! 주스 마시고 싶은데 안 된다 하고... 아까도 류다가 차 우려 주고 토냐가 오렌지 주스 갖다 주고 가릭이 우유 갖다 줬는데 하나도 못 마셨어. 우리 애들이 주는 건 마셔도 되는 거 아니야? ”

 

“ 안 돼, 누가 걔들 몰래 약 탈 수도 있잖아. 입에 대지 마. ”

 

“ 칫, 시어머니. 맘먹으면 무슨 짓으로든 못 먹이겠니. 그런 거 하나하나 신경 쓰다가는 아무 것도 못해. 아프면 할 수 없지 뭐. ”

 

“ 야! 뭐가 할 수 없어! 약속해, 음료수 입에 안 댄다고! 안 그러면 뱀 껍질, 바퀴벌레, 곱등이... ”

 

“ 어휴, 또 시작이야! 맨날 너는 그렇게 협박... ”

 

 

왕재수가 갑자기 말을 뚝 그쳤다. 베르닌은 누가 있나 싶어 급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 왜? 무슨 소리라도 들었어? ”

 

 

왕재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베르닌의 팔을 움켜쥐었다. 어찌나 꽉 잡았는지 팔이 부러지는 것 같았다.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면서 입을 벌렸다. 그러더니 베르닌의 팔을 놓치고 심하게 비틀거렸다. 베르닌은 너무 놀라서 급하게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야! 너 왜 그래!

 

“ 어... ”

 

 

왕재수가 머리를 뒤로 젖히더니 춤을 추듯이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그리고는 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숨을 헐떡이며 두 손으로 귀를 감쌌다. 무릎으로 허공을 찼다. 베르닌은 공포에 질렸다. 급하게 왕재수 곁에 무릎을 꿇었다. 이마와 목에 손을 대 보았다. 불덩어리처럼 뜨거웠다. 왕재수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괴롭게 헐떡거렸다. 순식간에 얼굴이 파래지면서 숨소리가 약해졌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스웨터를 벗기고 셔츠 단추를 두 개 풀었다. 정신없이 가슴을 압박하고 인공호흡을 했다. 반응이 거의 없었다. 베르닌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미친 듯이 심폐소생술을 반복했다.

 

다행히 왕재수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열이 펄펄 끓었다. 베르닌은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참으며 다급하게 물었다.

 

 

“ 미하일, 너 내 목소리 들려? ”

 

“ 왜 때려... 아파... ”

 

“ 너 솔직히 말해! 뭐 마셨어! 극장 와서 뭐 마셨냐고! ”

 

“ 아무 것도... 마시지 말랬잖아. ”

 

“ 하지만... 너 분명히 뭔가를 입에 댔어! 그래서 아픈 거야! 열 나잖아! ”

 

“ 아니야, 안 마셨어... 나 자고 싶어. 추워. 집에 갈래. ”

 

 

베르닌은 왕재수를 들쳐 업고 감독실로 갔다. 류드밀라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려는 것을 손사래를 치며 막았다.

 

 

“ 류다, 의사 선생님한테 전화 좀 해줘요. 빨리. ”

 

 

류드밀라가 전화를 거는 사이에 그는 소파에 왕재수를 눕혀 주었다. 왕재수는 거의 의식을 잃고 있었다. 눈꺼풀까지 새빨갰다. 베르닌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류드밀라가 불렀다.

 

 

“ 의사 선생님이 바꿔 달래요, 다냐. ”

 

 

베르닌은 급하게 수화기를 낚아챘다. 의사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목소리를 낮추려고 애쓰며 생각나는 대로 전부 말했다.

 

 

“ 미하일, 갑자기 열이 펄펄 끓고 숨을 못 쉬고 쓰러졌어요. 약을 탄 것 같아요. 국장... 혼내 줄 거라고 했어요. 루뱐카, 약물... 음료수에 탄 것 같은데 얜 마신 게 없대요. 빨리 와주세요. ”

 

 

횡설수설하는 베르닌과는 달리 수화기 너머로 노의사의 침착한 음성이 들려왔다.

 

 

“ 이름. 약물 이름 들었나? ”

 

“ 어, 저... 기억이 안 나요. 무슨 L 어쩌고였어요, 뒤에 숫자가 있고... 루뱐카에서 쓰는 거랬어요. 알콜... 열 나고 아프게 만드는 거라고 국장이 그랬어요. 숨도 못 쉬어서 인공호흡 했어요. 근데 아무 것도 안 마셨다고... 물도 주스도 차도 안 마셨다고... ”

 

“ 담요로 싸주고 아무 것도 먹이지 마. 애 의식은 있나? ”

 

“ 있다가 없다가 해요. ”

 

“ 마신 거 말고, 먹은 게 있는지 물어봐. 지금. ”

 

 

베르닌은 소파로 갔다. 류드밀라가 이미 무릎담요로 왕재수의 몸을 덮어주고 있었다. 베르닌은 손으로 왕재수의 뺨을 쓸어보았다. 아주 뜨거웠다. 왕재수가 눈을 깜박였기 때문에 급하게 물었다.

 

 

“ 너 여기 와서 먹은 거 있어? 마신 거 말고, 먹은 거. 음식이든 뭐든. ”

 

“ 안 먹었어. ”

 

“ 아무 것도? ”

 

“ 으응... ”

 

 

그때 류드밀라가 끼어들었다.

 

 

아니에요! 하나 있어요! 감독님, 기억 안 나세요? 사과! 아까 그 사과!

 

“ 아... 사과 먹었어. ”

 

“ 사과라니! 무슨 사과! 어디서 난 건데! ”

 

“ 방에 있어서... 맛있었어. ”

 

 

류드밀라가 잠자코 티 테이블을 가리켰다. 사과 두 알이 접시 위에 놓여 있었다. 빨갛고 반질거리는 예쁜 사과였다.

 

 

“ 류다, 저 사과 누가 가져온 거예요? ”

 

“ 모르겠어요. 와보니까 사과가 있었어요. 우리 감독님은 워낙 인기가 많으니까 너도나도 꽃이니 과일이니 케익이니 갖다 바치거든요. ”

 

 

베르닌은 전화기로 달려갔다. 의사에게 사과 얘기를 했다.

 

 

“ 남은 거 잘 보관하고 있어. 지금 갈 테니까. ”

 

 

류드밀라가 훌쩍훌쩍 울었다.

 

 

“ 내 잘못이에요, 누가 들어오는지 봤어야 했는데 오늘 감독님 휴가라고 해서 타치야나 이바노브나 방에 가서 차 마시느라 자리를 비웠었어요. 대체 누가 그랬을까요, 흐흑... ”

 

“ 당신 잘못 아니에요. 일단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해주세요. ”

 

 

울고 있는 류드밀라를 뒤로 하고 베르닌은 왕재수의 손을 꼭 잡았다. 갑작스럽게 분통이 치밀어서 꾸짖었다.

 

 

이 바보야! 어디서 난 건지도 모르는 사과를 왜 먹어!

 

“ 네가 아무 것도 마시지 말라며. 목말랐어... 사과 좋아해. 맛있었어. 흑... 너 왜 자꾸 왔다갔다 해, 아이 어지러워. ”

 

“ 뭐가 왔다갔다 해, 나 가만히 있는데. ”

 

“ 막 빙글빙글 돌고, 왔다갔다 하고... 아유 이제 세 명 네 명 되네. 어, 이제 열 명 됐다. 자꾸 늘어나. ”

 

열 나서 그래. 눈 감고 있어. 의사 선생님 금방 올 거니까 조금만 참아. ”

 

“ 나 안 아파. 애들한테 갈래. 연습시켜야 되는데. ”

 

“ 시끄러워, 이 바보야! 내가 열 명으로 보인다며! 근데 어떻게 안 아파! ”

 

“ 아니야! 이제 안 보여! 하나도 없어! 소리만 들... ”

 

 

왕재수가 마취 주사라도 맞은 듯 다시 조용해졌다. 류드밀라가 엉엉 울면서 베르닌의 뺨을 찰싹 때렸다.

 

 

“ 이 악마! 금쪽같은 우리 감독님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

 

“ 저, 류다. 제가 안 그랬어요. ”

 

“ 당신네 KGB가 한 짓이잖아! 누가 모를 줄 알고! 그저께 돈키호테도 못 올리게 하려고 갖은 해코지를 다 하더니! 어흑, 난 왜 자리를 비웠을까... 왜 사과 먹게 놔뒀을까, 엉엉... ”

 

“ 아니에요, 당신은 아무 것도 몰랐잖아요. 의사 선생님 오시면 괜찮아질 거예요. 근데 알콜 약물이면 액체일 텐데 어떻게 사과에 들어 있을까... 주사기로 주입했을까? ”

 

아아, 이 살인자들 같으니!

 

 

류드밀라가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왕재수가 꿈틀거리더니 눈도 뜨지 않고 그녀를 꾸짖었다.

 

 

“ 류다, 조용히 좀 해요! 애들 놀라서 내일 공연 망친단 말이에요! ”

 

“ 지금 공연이 중요하냐고요! 사람이 이렇게 됐는데... ”

 

“ 지난번에도 팔 찢어졌을 때 애들이 울고불고 난리치다가 공연 말아먹었는데! 나 지금 피도 안 나고 아프지도 않으니까 애들한테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

 

“ 너 진짜 안 아파? ”

 

“ 안 아파! ”

 

 

왕재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더니 갑자기 깜짝 놀라며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 어, 아파... 너무 아파... ”

 

“ 안 아프다며! ”

 

“ 너무 아파, 엉엉. 여기, 여기, 여기 너무 아파. ”

 

 

왕재수가 몸부림치면서 목과 가슴과 다리를 쾅쾅 때렸다. 베르닌의 손을 끌어당겨서 자기 가슴 위에 올려놓고 마구 비벼댔다. 베르닌의 손등 위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끓는 물을 엎지른 것 같았다. 베르닌은 어쩔 줄을 몰랐다. 무섭기도 했고 괴롭기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왕재수는 다시 정신을 잃어버렸다.

 

 

잠시 후 스타브로프가 도착했다. 소파에 누워 있는 왕재수의 눈꺼풀을 벌려보고 맥박과 체온을 재고 입을 벌려서 목구멍 안쪽을 살폈다. 셔츠 단추를 모두 풀어서 피부 상태를 확인했다. 

 

의사는 베르닌에게 남은 사과가 있으면 달라고 했다. 베르닌은 떨리는 손으로 접시를 가져다주었다. 의사는 사과를 쥐고 꼼꼼하게 살폈다. 새빨갛게 반질거리는 표면을 쓸어보았다. 그리고는 굳어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뭔지는 모르겠지만 껍질에 바른 것 같군. 그냥 알콜 계열이었으면 애가 먹기 전에 휘발돼 버렸을 테니 다른 약물과 섞었을 거야. 이 바보 같은 녀석, 도시에서 왔으니 이쪽 동네 사과치곤 색깔이 너무 빨갛다는 생각 같은 건 못했겠지. 여기 애였으면 의심했을 텐데. 이건 내가 가져가겠네. 무슨 약인지 알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군. ”

 

“ 저, 선생님. 얜 괜찮을까요? 이렇게 아파하는 거 처음 봤어요. 헛소리도 하고 정신도 오락가락해요. 멀쩡했다가 헛소리했다가... ”

 

“ 스페호프가 약물 이름을 말했나? ”

 

“ 네. 근데 기억이 안 나요. L... 숫자... 0이 들어간 것 같아요. ”

 

“ 알아내. 당장. 그거 알아내서 병원으로 튀어와. 전화는 하지 말고. ”

 

“ 이러다 괜찮아지는 거죠? 국장이 그랬어요, 죽이진 않을 거라고. 그냥 좀 아프게만 할 거라고. 어흑... 나쁜 국장... ”

 

뭘 잘했다고 울어, 이 앞잡이 녀석아! 빨리 가서 약 이름 알아와! 뭔지 알기 전까진 주사도 못 놓고 약도 못 써. 난 얘 데리고 갈 테니까!

 

 

 

 

*    *    *

 

 

 

 

베르닌은 눈물콧물을 쏟으며 극장을 나왔다. 모든 신호와 속도를 위반하며 다리를 건너 순식간에 사무실까지 왔다. 국장실로 허겁지겁 달려가려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 맞아, 이러고 들어가면 국장이 분명 의심할 거야. 정신 차려야 돼. 국장한테 가면 안 돼! ’

 

 

이미 퇴근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사무실들은 거의가 텅 비어 있었다. 등록 부서 앞을 지나가는데 알렉산드라가 나왔다.

 

 

“ 어머, 다냐. 왜 그렇게 안색이 안 좋니? 무슨 일 있어? ”

 

“ 아... 아니에요. 앗, 선배님! 저 하나 물어볼 게 있어요. 저... ”

 

 

베르닌은 급하게 주위를 살핀 후 물었다.

 

 

“ 선배님, 새로 맡으신 업무 중에 현장요원 물품 관리도 있었던 것 같은데 맞아요? ”

 

“ 응, 맞아. 지난주에도 엄청 들어왔어. 오자마자 그거 장부 적고 대금 요청하느라 혼났어. ”

 

“ 약품도 있어요? ”

 

“ 응, 있어. 근데 약품이랑 무기 같은 건 장부를 따로 관리해. 기밀사항이라서. 왜? ”

 

“ 국장이 저한테 약품 이름을 하나 말해줬는데 까먹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안 나요. 잊어버리면 혼날 텐데... ”

 

 

알렉산드라는 금세 연민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 장부 보면 생각나지 않을까? ”

 

“ 예,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근데 기밀사항이라면서 저 보여줘도 돼요? ”

 

“ 뭐 어때. 너 안 혼나는 게 더 중요해! 이깟 놈의 회사 내가 뭐하러 충성하니. 이리 와. ”

 

 

알렉산드라는 베르닌을 데리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안쪽 캐비닛을 열더니 장부를 한 권 꺼냈다. 최근 페이지를 펼쳤다.

 

 

“ 들어온 게 언제래? ”

 

“ 어, 잘 모르겠어요. 그렇게 오래 되진 않았을 것 같아요. 본부에서 쓰는 거라고 했거든요. ”

 

“ 응, 그럼 여기부터 봐. 나 약속 때문에 나가봐야 하는데, 다 보면 캐비닛 안에 넣어놓고 잠가놔. 열쇠는 여기 컵 아래 두고. ”

 

“ 고마워요, 선배님. ”

 

“ 고맙긴, 내일 보자. ”

 

 

알렉산드라가 나간 후 베르닌은 급하게 장부의 약품 목록을 살폈다. 지난주 목록에는 L로 시작하는 이름이 없었다. 조급해진 그는 계속 페이지를 넘겼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어지러웠고 식은땀이 났다.

 

 

‘ 어떡하지... 빨리 찾아내야 되는데. 그냥 아픈 것도 아니고... 의사 선생님도 약이 뭔지 모르면 애를 치료할 수도 없다고 했는데. 혹시 새로 들여온 약이 아니고 우리 비품 관리실에 원래 있었던 게 아닐까? 현장요원용으로... 그치만 여긴 시골이라 현장요원이나마나 다들 그냥 땡땡이치는 분위기인데 그런 약을 쟁여둘 필요가 없었을 텐데... ’

 

 

베르닌은 미칠 것 같았다. 장부는 작년 가을부터 기록되어 있었다. 9월치까지 모두 뒤졌지만 L로 시작하는 약물은 없었다. 그때 갑자기 베르닌은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 L은 약품 이름이 아니었어! 그건 루뱐카(Lubyanka)를 가리키는 거야! 그건 분류목록 번호였어! 이름은 그냥 숫자로만 되어 있는 거야!

 

 

그는 장부를 다시 넘겼다. 1주일 전 목록에서 L-약품 카테고리를 찾아냈다. 루뱐카에서 반입한 약품이란 뜻이었다. 놀랍게도 숫자가 있었다. 세 자리 숫자가 있었고 오로지 하나 뿐이었다. 그리고 0이 들어 있었다.

 

 

950. 맞아, L-950이라고 했어!

 

 

베르닌은 급하게 장부를 집어넣고 캐비닛 문을 잠갔다. 열쇠를 알렉산드라의 컵 아래에 쑤셔 넣었다. 정신없이 전화 다이얼을 돌리려다가 의사가 전화하지 말고 직접 오라고 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는 급하게 뛰어나갔다.

 

 

 

*    *    *

 

 

 

 

왕재수는 얼굴과 목덜미와 팔에 새빨갛게 두드러기가 돋은 채 알아들을 수 도 없는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간호사가 주머니 같은 것을 몸에 대 주면서 열을 식혀주고 있었는데 별로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옆에서는 스타브로프가 스포이트로 핏방울을 톡톡 떨어뜨리며 무슨 시약 검사 같은 것을 하고 있었다. 베르닌이 뛰어 들어오자 의사는 실험을 멈추고 거칠게 물었다.

 

 

“ 뭔지 알아냈나? ”

 

“ 950! 국장은 L-950이라고 했어요. L은 루뱐카의 머리글자였어요. 이제 된 거죠? 무슨 약인지 알았으니까 해독제 찾을 수 있는 거죠? ”

 

“ 950... L-950... ”

 

 

노의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몇 번이나 숫자를 입안으로 뇌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한숨을 쉬며 욕설을 내뱉었다. 얼굴에 패인 주름이 더 깊어졌다.

 

 

“ 저, 선생님. 왜 그러시나요? 그렇게 나쁜 약인가요? 국장이 그랬어요, 그 정도 분량이면 보통 사람들한테는 별 문제 안 된다고... ”

 

의심 가는 것들이 있긴 한데 정확하게 뭔지 모르겠군. 그 숫자는 별로 도움이 안 돼. KGB 살인마들이 쓰는 기호는 나도 몰라. 이름을 알아내야 해. 피 검사를 하고 있는데 알콜 계열이라는 것 외엔 너무 정보가 없어. ”

 

“ 저, 해열제 놔주면 안 되나요? 두드러기 완화해주는 약이랑... ”

 

“ 무슨 약을 먹었는지 모르니 아무 거나 놔주면 안 돼. 잘못하면 큰일 나. 죽이려고 작정한 거지. 더러운 놈 같으니. ”

 

 

베르닌은 겁에 질렸다. 울음이 터지려는 것을 꾹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 아니에요, 국장이 그랬어요. 죽이려는 건 아니라고... 조금 아프게만 할 거라고 했어요. 겨우 사과 한 알 먹었는데 왜 죽어요? 선생님은 우리 시에서 제일 훌륭한 의사잖아요. 그런데 왜 무슨 약인지 못 알아내요? 얘 차트도 다 있잖아요, 무슨 약 써야 괜찮은지 다 아시잖아요. 엉엉, 제발 어떻게 좀 해보세요. ”

 

“ 그놈이 쓴 약물 이름! 그거 알아내야 돼! 그거 모르면 다른 약은 아무 것도 못 써! 그냥 계속 이렇게 놔두면서 나아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단 말이야! 이 얼간이 천치야, 너 모스크바에 아는 놈 없어? 정보 얻어낼 놈 없냔 말이야! ”

 

 

베르닌은 하마터면 왕재수의 크레믈린 아저씨에 대해 얘기할 뻔 했다. KGB 출신인데다 지금도 본부를 좌지우지하고 있다고 했으니 연락만 하면 금세 모든 정보가 흘러들어올 게 뻔했다. 하지만 그렇게 높은 사람에게 어떻게 연락을 해야 할지도 몰랐고 무엇보다도 무서웠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그 무서운 아저씨가 자기부터 죽여 버릴 것 같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여워한다는 왕재수조차 말을 안 들으면 뼈도 부러뜨리고 마구 괴롭혔다고 했으니 자기처럼 하찮은 감시요원은 그 자리에서 없애버릴 게 뻔했다. ‘눈앞에서 내 귀염둥이가 약을 먹고 쓰러지게 놔두다니, 너 따위 천치는 모가지를 베어버리겠다!’ 하면서 정말 그의 목을 자를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순간 베르닌은 자신을 호되게 질책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어떻게 이 상황에서 나 혼자 살자고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어! 크레믈린 아저씨한테 연락을 해야 돼! 그 방법뿐이야! ’

 

 

순간 베르닌의 머릿속에 밝은 빛이 번쩍했다.

 

 

나타샤!

 

“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이 와중에 웬 여자를 찾아! ”

 

 

스타브로프가 화를 버럭 냈다.

 

 

“ 나타샤! 제 동기예요! 지난번 파티에 왔었어요. 루뱐카 본부에 있어요! 전화번호가... 그래! 전화번호 받았어! 잠깐만요! ”

 

 

베르닌은 호주머니를 뒤집어 수첩을 꺼냈다. 전화번호를 뒤지기 시작했다. 분명히 나타샤가 그에게 번호를 적어줬었다. 그 파티에서. 아르마니와 에르메스에 감탄하면서.

 

 

“ 여기 있다! 선생님, 잠깐만요. 전화 좀 쓸게요! 아, 안 돼... 선생님은 반동분자 리스트에 들어 있으니까 전화 도청될지도 몰라요. 저 밖에서 전화 좀 하고 올게요! ”

 

 

그는 병원에서 달려 나왔다. 근처 빵집까지 갔다. 빵집 앞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다행히 시외전화가 가능한 부스였다. 토큰을 집어넣고 급하게 다이얼을 돌렸다. 나타샤가 과연 집에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나타샤는 미인이니 추종자와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 몰랐다.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아서 동동 구르는 순간 나타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보세요. ”

 

“ 나타샤. 안녕, 저... 나 다닐이야. 다닐 베르닌. 기억나? 우리 지난 가을에 잠깐 봤잖아, 여기 가브릴로프 파티에서... ”

 

“ 어머, 다냐! 안녕! 오랜만이야! 어쩜 너 그때 나랑 커피 마시기로 해놓고 그냥 가버리고! 내가 얼마나 섭섭했는지 아니? ”

 

“ 아, 그때... 미안해. 그때 갑자기 급한 일이 터져서 그랬어. 미안해. ”

 

“ 그 동안 잘 지냈니? 너 모스크바 안 와? 보고 싶다, 다냐~ ”

 

“ 아... 그러게. 모스크바 가게 되면 꼭 한번 보자. 저, 있잖아, 나타샤. 나 부탁이 하나 있는데. ”

 

“ 뭔데? ”

 

“ 본부에서 쓰는 약물들 있잖아. 내가 지금 비품 정리를 하고 있거든. 근데 번호만 있고 이름이 없어서 너무 헷갈려서... 혹시 네가 알까 해서. ”

 

“ 아, 요원들이랑 실험실에서 쓰는 거? 맞아, 우린 번호로 기재하니까 다른 기관들에서는 못 알아듣더라. 근데 너는 같은 KGB인데 왜 몰라? ”

 

“ 어... 나는 그쪽 담당이 아니라서 몰랐어. 근데 이번에 분장이 좀 바뀌어서... 950번인데 혹시 알아? ”

 

“ 950? 글쎄, 나도 그렇게 말하니까 잘 모르겠네. 장부를 봐야 아는데 나 지금 퇴근해서... 내일 사무실 가야 알 수 있을 거 같아. 내일 아침에 내 자리로 전화할래? ”

 

“ 아... 내일 아침이면 늦을 것 같아. 어쩌지... ”

 

 

온몸이 새빨개져서 열이 펄펄 끓고 있는 왕재수를 떠올리며 베르닌은 쏟아지는 눈물을 억눌렀다. 그때 나타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근데 너네 지국에는 약물 색인 없어? 그거 본부에서 다 배포해줬을 텐데. 1월에도 수정본 인쇄해서 지부별로 다 보냈는데? 그거 보면 번호랑 이름 다 적혀 있잖아. ”

 

“ 색인... 1월... 아!!!

 

 

베르닌이 탄성을 질렀다. 나타샤가 뭐라고 하는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마터면 수화기를 그대로 내던지고 뛰쳐나갈 뻔 했다.

 

 

고마워, 나타샤. 정말 고마워. 우리 모스크바에서 꼭 보자! 저녁 잘 보내! ”

 

 

 

그는 급하게 차를 몰고 다시 사무실로 갔다. 자신의 자리로 달려갔다. 등 뒤의 캐비닛을 열었다. 온갖 책자들이 어지럽게 꽂혀 있었다. 나타샤의 말이 맞았다. 약물 색인이 있었다. 1월에 본부에서 보내온 자료였다. 그가 수령해서 접수 대장에 기록까지 했었다. 검정 표지에 ‘1982년 소비에트 연방 보안위원회 업무용 화학약품 색인’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 책자를 찾아냈다. 갱지에 빽빽하게 약품 목록이 인쇄되어 있었다. 번호 순이었다. 그는 급하게 페이지를 넘겼다. 950번을 찾아냈다. 있었다. 이름이 있었다. 러시아어가 아니었다. 영어도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되어 있었다. 생긴 걸 보니 독일어 같았다. 일단 수첩에 옮겨 적었다. 혹시 몰라서 손바닥에도 적었다.

 

 

‘ 제발, 제발 조금만 더 버텨봐 이 바보야. 금방 갈게. 아프지 마. 제발... ’

 

 

베르닌은 의자를 쿠당탕 넘어뜨리며 정신없이 사무실을 달려 나갔다.

 

 

 

 

*   *   *

 

 

 

 

베르닌이 약물의 이름을 휘갈겨 적은 수첩을 내밀었을 때 스타브로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표정이 굳어졌을 뿐이었다. 곧장 왕재수의 침대로 다가가더니 팔목에 주사 바늘을 찔러 넣었다. 피를 뽑아냈다. 피가 계속 빨려나왔다. 베르닌은 공포에 질렸다.

 

 

“ 선생님, 왜 그러시는 거예요? 가뜩이나 아픈 애한테서 피를 그렇게 많이 뽑으면 어떻게 하나요! 빈혈이라도 오면... ”

 

“ 시끄러워. ”

 

 

노의사는 한결 냉정해져 있었다. 피를 잔뜩 뽑아낸 후 베르닌을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 너 O형이지? ”

 

“ 어, 예. 어떻게 아세요? ”

 

“ 내가 받아준 놈인데 왜 몰라! ”

 

“ 어... 진짜 대단하시네요. 선생님이 받아주신 애들 진짜 많잖아요. 근데 그 많은 사람들 혈액형을 다 기억하신단 말이에요? ”

 

“ 아니, 다는 기억 못해. 근데 네 녀석은 기억하지. 아기 때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다가 코가 깨져서 피 철철 나고 네 어머니가 울고불고 난리를 치며 안고 왔었거든. ”

 

“ 어, 맞아요. 그랬다고 했어요. 그래서 콧대가 죽었다고 엄마가 안타까워하셨어요. 그것 때문에 장가를 못 가나 하고 자책하시고... ”

 

“ 시끄러워. 지난 일주일 동안 음주한 적 있어 없어! ”

 

“ 어... 없어요. 바빠서... ”

 

“ 아팠던 적은? 다른 질환은 없는 거 알고. ”

 

“ 저기... 지난번 출장 갔을 때 후두염. 그리고 레닌그라드에서 본 의사 얘기론 위염이랑 역류성 식도염... ”

 

“ 그건 됐고. 작년 검진 차트 보니까 간 질환이나 그런 건 없었고. 저쪽 가서 키랑 체중 좀 재봐. ”

 

“ 아니 왜요? ”

 

“ 빨리 재! 제냐, 이 녀석 좀 봐줘! ”

 

 

스타브로프의 병원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젊은 의사 예브게니가 다가와서 베르닌을 체중계로 인도했다. 베르닌은 몸무게를 쟀고 깜짝 놀랐다. 작년보다 3킬로나 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의 충격은 아랑곳하지 않고 예브게니가 명확한 음성으로 말했다.

 

 

“ 선생님, 183.4센티미터, 81.2킬로그램입니다. ”

 

“ 흠, 좋아. 알았어. 너 저리 가서 준비해. 수혈 좀 해야겠어. ”

 

“ 수혈이요? 얘 O형이에요? ”

 

“ 앞잡이 감시꾼 주제에 그것도 몰라? ”

 

“ 다행이다... ”

 

 

베르닌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혈액형이 같아서, 수혈을 해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예브게니가 그를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갔다. 피를 약간 뽑는 것부터 시작해 이런저런 검사를 했다. 심지어 소변 검사도 했다. 그리고는 또 무슨 실험을 했다. 1시간 쯤 후 고개를 끄덕였다.

 

 

“ 괜찮을 것 같네요. 다행입니다. 지금 병원에 O형 혈액이 없거든요. 저 정도 환자는 원래는 대도시로 데리고 나가야 하는데 레프 사벨리예비치가 절대로 다른 데로 내보내면 안 된다고 해서. 저 상태면 수혈도 그렇게 안전한 건 아니거든요. ”

 

“ 저, 제냐. 쟤는, 그러니까 미하일은 많이 위험한 거예요? 약을 많이 쓰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냥 아프기만 할 거라고 들었는데... ”

 

“ 굉장히 위험했어요. 맨 처음에 심폐소생 안 해주셨으면 그때 못 깨어났을지도 몰라요. 레프 사벨리예비치 얘기로는 저 분이 알콜 분해를 못하는 체질이라고 하시더군요. 수용소에서 안 좋은 약을 많이 맞아서 조금만 잘못하면 쇼크 일으킨다고. 아까 같은 약물은 소량만 먹어도 치명적이에요. 술도 입에 대면 절대 안 되는데 독물이라니요, 정말 위험하죠. ”

 

“ 그럼... 그럼 이제 괜찮은 거예요? 무슨 약인 줄 알았으니까 레프 사벨리예비치가 해독제도 뭔지 알겠네요? 이제 안 위험한 거죠? ”

 

“ 저, 잘 모르겠어요. 저도 그쪽은 전문 분야가 아니라서요. 근데 어쨌든 열이 빨리 내려야 해요. 피도 일부러 뽑으신 것 같아요. 독소가 퍼지는 것도 막고 열도 내리려고요. 이쪽으로 오세요, 수혈 준비해야 하니까. ”

 

 

베르닌은 왕재수에게 수혈을 했다. 왕재수의 팔로 자신의 피가 흘러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왕재수는 하얘진 얼굴로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나마 두드러기는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눈꺼풀이 푹 꺼진데다 입술이 부르터 있었고 가슴팍에는 심폐소생술 때문에 시커멓게 멍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전혀 나아보이지 않았다.

 

 

수혈을 하고 난 후 예브게니가 그에게 초콜릿과 빵, 우유를 주었다. 베르닌은 그제야 허기를 느꼈다. 점심 이후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정신없이 뛰어다녔으니까. 허겁지겁 빵을 먹고 우유를 마시고 초콜릿을 먹는데 스타브로프가 들어왔다. 왕재수의 체온을 재고 피를 약간 뽑더니 또 무슨 검사를 했다. 그리고는 왕재수의 코에 가느다란 튜브를 꽂아 넣었다. 튜브를 타고 짙은 녹색 액체가 흘러들어가자 왕재수가 희미하게 몸을 떨었다. 괴로운지 얼굴을 찌푸리며 ‘응...응...’ 하고 가냘픈 소리를 냈다. 베르닌은 속이 뒤집힐 듯 구역질이 났지만 꾹 참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그게 뭔가요, 선생님? 해독제인가요? 왜 혈관에 안 놓고 코로 주입하나요? 진짜 괴로울 것 같은데... ”

 

“ 약물이 아니라서. 원래는 먹여야 하는데 지금 자기 힘으로 삼키지를 못하니 어쩔 수 없어. ”

 

“ 뭔데요? 그게 뭔데요? ”

 

“ 약초 달인 거. 넌 설명해줘도 모를 거야. ”

 

“ 왜 해독제를 안 놔주고 그런 걸 먹이는데요? ”

 

“ 왜 그러겠나, 이 앞잡아... 생각이란 걸 좀 해봐라. 해독제가 있으면 뭘 하나, 얘한테는 못 쓰는 약인데. 네 녀석은 그래, 그 망할 놈의 스페호프가 죽이진 않을 거라고 한 말을 그렇게 철석같이 믿는 거냐? 그 약은 수용소에서 얘한테 놨던 거야. 하긴 그땐 다른 것들도 잔뜩 섞었지. 거기서 그거 맞고 죽을 뻔 했어! 해독제에도 부작용 일으켜서 모스크바로 옮겼다고! 그걸 그 더러운 놈이 몰랐을 것 같나? 다 알고서 한 짓이야! 조금 아프고 말다니, 개소리 하지 마! 해독제 따윈 못 놔. 방금 준 게 전부야. 화학물질은 절대 못 써. 이걸로 열이 내리면 다행인데 안 내려가면... ”

 

 

의사가 치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욕을 했다. 굉장히 늙어 보였다. 베르닌은 스타브로프가 두 번이나 수용소 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너무나 무서웠다. 더 이상 초콜릿을 먹을 수가 없었다. 두 손을 부여잡은 채 훌쩍훌쩍 울었다.

 

 

‘ 어떡하지? 열이 안 내려가면 어떡하지? 정말 잘못되면 어떡하지... 나 때문이야. 난 어제부터 알았는데. 국장 얘기 다 들었는데... 내가 못 막았어. 극장 가게 놔뒀어. 사과 먹게 놔뒀어. 다 나 때문이야. ’

 

 

베르닌이 울자 의사가 혀를 찼다. 분노가 좀 진정된 것 같았다.

 

 

“ 울긴 왜 울어, 못난 놈아. 좀 기다려볼 수밖에. ”

 

“ 열이 안 내리면... 그럼 얜 주, 죽나요? ”

 

“ 죽긴 왜 죽어! 안 죽어! ”

 

“ 그치만... 약도 못 쓰고... 흑... ”

 

“ 그때도 해독제 안 쓰고 다른 약 아무 것도 안 주고 오래오래 돌봐줬더니 혼자 일어났다고 했어. 그때보다 훨씬 적게 썼고 약 섞지도 않았으니까, 그리고 여기 와서 맑은 공기 쐬고 몸도 나아졌으니까 괜찮아질 거야. 열만 좀 내리면... ”

 

“ 아까보다 열 내린 거 아니에요? 두드러기도 없어지고... ”

 

“ 그건 피 뽑아서 내린 거야. 그래도 아직 40도야. 적어도 2도는 더 떨어져야 돼. ”

 

“ 안 내리면... ”

 

“ 시끄러워! 내릴 거야. 안 내려가도 내리게 할 거니까 네놈은 이제 입 닥치고 꺼져! ”

 

“ 싫어요, 여기 있을래요. 흐흑, 얘 괜찮아질 때까지 있을래요. ”

 

“ 에잇, 망할 놈의 KGB 스파이 자식. 다닐 네놈은 신동이라고 소문났던 놈이 대체 왜 거긴 들어가 가지고! ”

 

엉엉... 저 그만 둘 거예요. 이런 나쁜 짓 하는 데인 줄 몰랐어요... 아무 잘못 없는 애한테 해코지하고 죽이려고 하는 곳인 줄 몰랐어요. 어헝... 으앙... 미하일, 제발 일어나. 엉엉... 잘못했어, 엉엉...

 

 

그때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 시끄러워... 뭐라는 거야...

 

 

베르닌은 불에 덴 듯이 놀라서 펄쩍 뛰었다. 왕재수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시끄러워.

 

“ 너, 너 괜찮은 거야? 정신이 들어? 이제 안 아파? ”

 

너 왜 울어? 또 국장이 자른대? 벌목공... ”

 

“ 아니야, 안 잘라. 흑... ”

 

 

베르닌이 울음보를 터뜨리려는데 스타브로프가 그를 밀쳤다. 왕재수에게 바짝 다가가서 뺨을 살며시 토닥거리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 아가야, 추운지 더운지 말해보렴. ”

 

더워요.

 

“ 기분은 어떠냐? ”

 

쟤가 너무 시끄럽게 해요.

 

“ 그건 기분이 아니잖니. ”

 

둥둥 뜨는 것 같아요. 몸이 막 갈라져서 풍선들 되는 거 같아요. 풍선이 엄청 많아요. 점점 더 많아져요.

 

 

스타브로프가 왕재수의 맥박과 체온을 쟀다. 머리를 쓸어주더니 손을 꼭 잡아주었다. 왕재수가 좋아했다. 포르르 한숨을 쉬더니 도로 눈을 감았다.

 

 

“ 이제 푹 자렴. ”

 

쟤 왜 울어요?

 

“ 아니야, 안 울어. 나 안 울었어. 너 빨리 자. 자고 빨리 열 내려야 돼. ”

 

 

베르닌이 눈물콧물을 삼키면서 왕재수의 다른 쪽 손을 꼭 쥐었다. 여전히 불처럼 뜨거웠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조금 덜 뜨거운 것 같기도 했다.

 

 

왕재수는 곧 다시 잠들었다. 스타브로프는 한숨을 쉬며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았다. 베르닌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저, 이제 괜찮은 거예요? 깨고, 저도 알아보고, 말도 하고... ”

 

“ 안 괜찮아도 헛소리는 할 수 있어. ”

 

“ 그럼... ”

 

“ 열은 좀 내렸어. 30분만 더 기다려 보자. ”

 

 

그건 베르닌의 인생에서 가장 긴 30분이었다. 마침내 30분 후 의사가 왕재수의 체온과 맥박을 다시 쟀다. 그리고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 아주 위험한 상황은 넘겼구나. 고생은 많이 하겠지만 며칠 여기서 데리고 돌봐주면 천천히 나아질 거야. ”

 

“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

 

“ 너도 이제 그만 들어가거라. ”

 

“ 아니에요, 저 여기 있을 거예요. 제가 얘 보호자예요. 흑... 나을 때까지 여기 있을 거예요. ”

 

“ 이런 철없는 녀석 같으니. 출근은 안 하겠다는 말이냐? ”

 

“ 출근은 무슨 출근이에요! 사람 죽이려드는 나쁜 놈들하고는 일 안해요! 그만 둘 거예요! 국장... 내가 가만 안 둘 거예요!! ”

 

“ 이 멍충아. 네가 뭘 가만 안 둬. 무슨 힘이 있다고. 그냥 모른 척하고 출근해! 그래야 스페호프 그 개자식이 안심을 하지. 네놈이 그만둔다고 끝날 것 같아? 다른 놈을 붙이겠지. 진짜 악질적인 놈으로. 그러느니 네 녀석이 붙어 있는 게 낫지! ”

 

“ 그래요, 그건 맞는데요... 저 너무 괴로워서... 흑... ”

 

 

베르닌이 훌쩍훌쩍 울자 의사는 더 이상 그를 야단치지 않았다. 등짝을 두어 번 쓸어주더니 팔을 잡아당겼다.

 

 

“ 알았다. 오늘은 여기서 자렴. 그래도 너 보호자로는 등록 못시켜. 스페호프가 알면 의심받으니까. 일단 저녁 먹으러 올라가자. 얜 어차피 계속 잘 거고 제냐가 옆에서 봐줄 거야. ”

 

“ 전 저녁 안 먹을래요. 우유랑 빵 먹었어요. 여기 있을래요. ”

 

“ 이런 등신아, 그건 피 뽑아서 먹은 거고! 저녁 제대로 안 먹으면 너도 몸살 나고 그럼 옆에서 돌봐줄 수도 없잖아! 잔말 말고 따라와, 마누라가 저녁 해놨다니까 가서 같이 먹게. ”

 

 

그래서 베르닌은 스타브로프의 사택으로 갔다. 노의사의 아내인 마르가리타가 차려준 뜨끈한 수프와 고기파이를 먹었다. 마르가리타는 음식 솜씨가 아주 뛰어났지만 베르닌은 아무 맛도 느낄 수가 없었다. 안 먹어서 몸살이 나면 왕재수를 돌봐줄 수 없다는 생각에 열심히 꾸역꾸역 먹었을 뿐이었다.

 

 

저녁을 먹은 후 베르닌은 의사를 따라 다시 병실로 내려왔다. 왕재수는 쇳소리가 섞인 숨결을 내뱉으면서 자고 있었다. 전혀 편해 보이지 않았다. 베르닌은 침대 곁에 의자를 바짝 붙이고 거기 앉았다. 왕재수의 손목을 잡고 자기도 모르게 투덜댔다.

 

 

“ 바보, 무슨 백설공주라도 되냐? 사과 예쁘다고 덥석 받아먹고. 하여튼 말도 더럽게 안 듣고. 분명히 내가 극장 가지 말고 쉬라 했는데! 씨... 너 두고 봐. 고양이 시켜서 쥐랑 바퀴벌레랑 곱등이 다 물어오라 할 거야! 검은 숲에 가서 뱀 껍질 주워 올 거야. 땅 속에서 잠자는 뱀들도 전부 파내서 잡아 올 거야. 많이많이 파올 거야! 진짜 혼내줄 거야! ”

 

 

발갛게 달아올라 있던 왕재수의 얼굴에 잠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베르닌은 혹시나 해서 물었다.

 

 

“ 미셴카. 너 깼어? 내 얘기 듣고 있는 거야? ”

 

 

왕재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남아 있었다. 손으로 뺨을 쓰다듬어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깊이 잠들어 있었다. 베르닌은 투덜댔다.

 

 

“ 바보 멍충이. 백설공주 얘기만 들었구나. 그러니까 좋다고 웃지. 어휴... 하여튼 너란 놈은 정말... 에잇... ”

 

 

그는 왕재수의 손을 꼭 쥔 채 계속 투덜거렸고 그러다가 앉은 채로 잠이 들었다. 예브게니와 간호사가 와서 그를 옆쪽 침대에 뉘어 주었다. 밤중에 그는 여러 차례 깨어났고 그럴 때마다 스타브로프가 곁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안심하고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는 왕재수가 한 손에는 과일접시를, 다른 한 손에는 새빨간 사과를 들고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는 것을 보았다. 춤이 너무 멋져서 그는 박수를 짝짝짝 쳤다. 그런데 왕재수가 춤을 추면서 사과를 먹으려고 했기 때문에 베르닌은 후다닥 달려갔다. 사과를 빼앗아서 바닥에 내팽개치고 마구 밟았다. 과일접시도 낚아채서 멀리멀리 던져버렸다. 왕재수는 짜증을 내면서 그를 꾸짖었다.

 

 

“ 아유, 왜 사과 못 먹게 하니! 나 얼마나 목말랐는데! ”

 

안 돼! 사과 먹으면 안 돼! 독 있어서 안 돼!

 

“ 그럼 나 뭐 먹어! 너 빨리 나 맛있는 거 해줘! 많이많이 해줘! ”

 

“ 알았어, 뭐 해줄까? 먹고 싶은 거 다 말해. 다 해줄게. ”

 

“ 보르쉬랑 펠메니! ”

 

“ 왜 하필 그거야! 깡통이랑 공장에서 나온 냉동 만두인데. ”

 

“ 그래도 우리 엄마가 해준 것만큼 맛있어. 빨리 해줘. ”

 

“ 그래그래. 우리 같이 보르쉬랑 펠메니 먹자. ”

 

 

그래서 베르닌은 꿈속에서 깡통을 따서 보르쉬를 데우고 냉동실에서 펠메니를 꺼내 삶았다. 그리고 왕재수와 마주앉아 맛있게 먹었다. 꿈속에서도 맛있는 걸 느낄 수 있다니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떻게 꿈에서 꿈인 줄 알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또 신기해하면서 계속 먹었다. 다음날 아침에 깨어날 때까지 그는 꿈속에서 왕재수와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었다.

 

 

   

 

 

 

FIN

- 2015. 4. 12 ~ 16 -

 

....

 

 

이야기는 22편으로 이어진다.

 

..

 

L-950은 내가 여러가지 특징을 조합해서 설정한 가상의 약물이다. 그러나 루뱐카를 비롯하여 소련의 정신교화 수용소 등지에서는 정치범의 교화를 위해 약물치료나 고문이 자행되곤 했다.

이번 21편은 사실 본편 우주와 연관이 있다. 미샤가 가브릴로프로 유배되기 전에 정신교화 수용소에서 재교화를 받고 또 L-950을 비롯한 약물 칵테일 요법으로 심신에 큰 타격을 받는 이야기를 전에 쓴 적이 있다. 가브릴로프 본편의 프리퀄이다. 상당히 우울한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 중 두어 군데는 전에 ABOUT WRITING 폴더에 발췌한 적이 있다. 주로 그의 친구 일린의 시점에서 전개된 3부에서 발췌한 부분들이었다.

그 발췌문은 여기..

http://tveye.tistory.com/3613,
http://tveye.tistory.com/3221

 

..

 

중반부에서 베르닌이 전화하는 모스크바 동기 나타샤는 5편 '무도회에 간 베르닌'(http://tveye.tistory.com/3458)에서 등장한 적이 있다. 베르닌이 모스크바 대학 시절 짝사랑했던 상대이다 :)

 

 

..

 

서무 시리즈답지 않게 웃을 일이 없었던 에피소드이지만... 하여튼 22편으로~ 과연 왕재수가 나아질지... 그건 다음주에..

 

..

 

댓글은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

 

 

 

:
Posted by liontamer
2015. 5. 13. 15:08

설경, 미하일로프스키 공원 russia2015. 5. 13. 15:08

 

 

 

지난 2월 14일, 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박물관(루스끼 무제이)이 있는 미하일로프스키 공원 풍경 몇 장. 산책하러 나가서 찍었다.

눈이 많이 쌓여 있었고 날이 흐렸다. 잠시 후 진눈깨비가 마구 흩날리기 시작했다. 날씨 때문에 고생했는데 사진 속 풍경은 예쁘다 :)

 

 

 

 

 

 

미하일로프스키 공원은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피의 구세주 사원) 맞은편에 있어서 이렇게 공원 너머로 사원이 보인다.

 

 

 

아름다운 공원 울타리 기둥.

 

열주가 쭈욱 늘어서 있는 이 곳 풍경은 여름이고 겨울이고 근사하다.

 

 

** 태그의 미하일로프스키 공원 을 클릭하면 이 공원 풍경 사진들 몇 장을 볼 수 있다.

 

:
Posted by liontamer
2015. 5. 12. 20:35

램프, 수정, 빛 russia2015. 5. 12. 20:35

 

 

지난 2월 21일. 마린스키 극장 신관 앞.

설날 연휴에 휴가를 붙여 다녀왔을 때였다. 이 날이 마지막 날. 2월에 갔을 땐 공연만 6개 봤다... 짧은 일정이었으므로 진짜 강행군이었다. 공연 본 거 외엔 산책밖에 한 일이 없을 정도... 아, 친구네 가서 한국식 집밥 해준 거 하나 있구나..

 

이 날은 마린스키 신관에서 라트만스키 안무의 발레 안나 카레니나를 보았다. 좀 일찍 도착해 극장이 열릴 때까지 주변을 좀 산책했는데 차디찬 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좀 힘들긴 했다.

 

극장 문 열 시간 다돼서 신관 입구에 와서 기다리다 찍은 사진. 신관은 이렇게 현대적인 스타일이다. 해진 직후, 비오는 겨울 저녁. 젖은 바닥과 푸르스름한 빛, 램프의 붉은 빛이 반사된 바닥이 아름다웠다.

 

 

 

 

공연 막간.

마린스키 신관 내부 사진은 이전에도 몇번 올린 적이 있다. 아주 호화스러운 극장이다. 천정에 이렇게 스와로브스키 수정들이 알알이 매달려 있는데 실제로 보면 화려하고 참 예쁘다.

 

 

 

 

이건 공연 끝나고 숙소 돌아오면서.. 호텔 램프 사진 한 장...

아아, 이때 정말 너무 아쉬웠다.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었다 ㅠ

 

:
Posted by liontamer
2015. 5. 11. 15:32

얼어붙은 운하 위의 까마귀 russia2015. 5. 11. 15:32

 

 

지난 2월 16일.

페테르부르크 그리보예도프 운하.

까마귀 한 마리 :) 세 장 연속~

 

 

 

:
Posted by liontamer

 

 

서무 20편(http://tveye.tistory.com/3708)을 올리고 나니 극장 생각이 많이 나서...

지난 2월 20일. 마린스키 극장. 구관. 페트루슈카 보러 갔을 때 찍은 내부 사진 몇 장.

 

이건 4층인가 5층의 복도 카페에서 주스 마시다가 아치의 틈새 사이로 찍은 것. 2층에 커다란 홀이 있는데 그 홀의 샹들리에가 반쯤 보인다.

 

 

 

복도의 의자. 쉬는 시간에 관객들이 여기 앉아 쉰다. 나는 보통 이런 의자에 앉아 미리 챙겨온 물을 마시고 초코바를 까먹는다.. (공연 보면 배고픈데 막간에는 카페에 줄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못 기다림..)

 

 

 

1층에 있는 아트샵. 마린스키에 가면 꼭 가서.. 모든 엽서와 사진을 전부 살펴보고.. 가끔 슈클랴로프의 근사한 사진이나 더 운 좋으면 왕년의 루지마토프 사진을 득템한다.. 이번에 갔을 때 파루흐 루지마토프의 아주 멋진 사진을 하나 건졌다!!

 

 

 

 

복도 여기저기에 이렇게 코트 보관소(가르제로브)가 있다. 구극장 리노베이션하면 이 구석구석 보관소를 혹시 없애려나 ㅠㅠ 이건 그냥 놔뒀음 좋겠다... 신관은 지하가 모두 코트 보관소인데 줄 엄청 서야 함... 이쪽이 더 좋다. 5층까지 있는데 각 층별로 여기저기 보관소가 흩어져 있어 편한데...

 

 

 

1층 박스석. 베누아르, 오른편 윙.

 

베누아르는 이렇게 칸칸으로 나뉘어져 있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안에 의자 5~6개가 늘어서 있다. 앞에 3석, 뒤에 3석 식인데 의자가 요즘 극장처럼 붙어 있지 않고 그냥 파란 빌로드 방석 깔린 의자라서 움직일 수가 있다. 고로 나처럼 작은 사람은 앞자리 앉으면 의자를 더욱 앞으로 바짝 당겨서 볼 수 있다.

 

첫번째 벨이 울리고 두번째 벨이 울릴 즈음이면 안내원 할머니들이 열쇠꾸러미를 가져와서 각 칸마다 문을 열어준다. 문 안 열어주면 못 들어감 :)

 

물론 현대적인 신관에는 이런 거 없다... 아아, 이거 다 그대로 놔둬주세요 ㅠㅠ 미로처럼 뻗어 있고 칸칸이 나뉘어진 구극장의 매력인데...

 

(그래도 공연 보기에는 사실 신관이 더 편하긴 하다 ㅠㅠ 앞사람 머리에도 덜 가리고.. 그러나 이 오리지널 극장의 아우라는 결코 신관이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뒤로는 마린스키의 유명한 파란 막이 보이고... 내 자리였던 베누아르 칸막이에 들어와서 머리 위에 달려 있던 샹들리에 찍음

 

 

 

비스듬하게 찍어서 좀 그렇긴 하지만... 가운데로는 마린스키의 아름다운 푸른 천정과 찬란한 샹들리에가 보이고.. 정가운데 커다란 샹들리에는 역시 칸막이 위에 달려 있던 샹들리에.

 

다시 가고 싶구나.

리노베이션한다고 하는데.. 제발제발제발 화장실이랑 앞사람 머리 가리는 의자만 좀 손보고 전체 구조는 놔둬줬으면 ㅠㅠ 제발... 구극장의 아름다움과 세월 속에서 쌓여온 묵중함과 신비로움을 가져가지 말아주세요.. 제발!! 가뜩이나 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은 신관을 멸시하고 구극장만이 '진짜 극장'이라고들 하는데..

 

 

** 태그의 마린스키 극장을 클릭하면 이 극장 내외부 사진들이나 극장 공연들, 혹은 리뷰 등등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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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올린 서무의 슬픔 20편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http://tveye.tistory.com/3708)와 관련해..

발레 돈키호테에서 바질이 보여주는 화려한 춤들 영상 몇 개 더 소개.

 

 1. 1막의 바질과 꽃파는 처녀들 3인무 클립

 

: 6명의 러시아 무용수들 춤 모음~ 이건 전에 한번 소개한 적 있는 영상이다.

순서대로 이반 바실리예프, 레오니드 사라파노프, 빅토르 레베제프.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안드레이 메르쿠리예프, 그리고 세르게이 폴루닌. 다들 바질을 해석하는 스타일이 조금씩 다르고 동작도 다르기 때문에 같은 파 드 트루아라도 전부 느낌이 다르다. 

이 6명 중에서 내 개인적인 취향은 사라파노프 바질이 제일 깔끔하고 맘에 든다. 바실리예프나 메르쿠리예프의 바질은 내 취향보다는 너무 서커스 같아서... 슈클랴로프는 몇년 전 클립이라 지금보다 훨씬 소년 같은데, 이 사람은 테크닉보다는 번져나오는 생기와 해맑은 기운이 좋다.

 

 

 

2. 3막. 바질의 자살 쇼~ 바질 역 무용수의 통통 튀면서도 능글맞은 연기력이 매우 중요하다. 먼저 레오니드 사라파노프와 올레샤 노비코바 버전.

 

블라지미르 포노마료프의 돈키호테 연기를 잘 보세요~ 단추청년 베르닌, 하를람피 푸고비체프는 이렇게 연기를 해야 함 :)

 

 

 

 

 

3. 바질의 자살 쇼 하나 더. 옛날 영상이라 화질이 안 좋다만.. 아마 89년인지 90년대 초반일 것이다. 바질은 바로 파루흐 루지마토프. 키트리는 타치야나 체레호바. 말이 필요없는 톱이다!  여기 돈키호테도 위의 2006년과 마찬가지로 블라지미르 포노마료프.

 

 

 

 

4. 그리고 결혼식 2인무 중 바질과 키트리의 화려한 솔로와 파이널.

먼저 사라파노프와 노비코바. 사라파노프는 정말 깔끔한 테크닉을 보여준다!!! 좀 얄미운 밤톨같이 생기긴 했지만 춤을 너무너무 잘 추니 다 용서되는 바질이다!!

 

 

 

 

 

5. 결혼식 2인무 하나 더. 마지막이니 역시 사심을 담아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파트너는 빅토리야 테료쉬키나.

 

이건 팬이 찍은 거라서 구도가 좀 나쁘다... 나야 슈클랴로프의 팬이고 그를 무척이나 예뻐하지만 확실히 테크닉으로 보면 4번의 사라파노프가 한 수 위이다. 슈클랴로프는 turner보다는 jumper 쪽이라 그런지 가끔 피루엣이나 푸에테가 좀 불안정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이 사람의 도약과 쾌활한 에너지는 영상으로는 다 전달이 되지 않는다. 무대에서 그가 뛰어오르고 춤추고 웃기 시작하면 같이 즐거워진다.

테료쉬키나는 아주 훌륭한 키트리이다. 난 노비코바가 김기민씨와 춘 키트리를 무대에서 봤는데 개인적으로는 키트리 쪽은 테료쉬키나가 한 수 위라는 생각이 든다. 노비코바는 키트리 치고는 너무 청순하고 파워가 좀 떨어지는 편이고 테료쉬키나는 키트리처럼 화려하거나 메흐베네 바누처럼 강렬한 역이 어울린다.

 

 

 

 

 

사족으로 서무 시리즈에서 왕재수, 즉 본편의 미샤가 추는 바질은 기본적인 테크닉이나 스타일은 파루흐 루지마토프와 레오니드 사라파노프 쪽에 가깝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레닌그라드 바가노바 아카데미 출신에 정통 키로프 무용수였기 때문인데, 아마도 그의 바질은 사라파노프의 깔끔한 테크닉에 루지마토프의 양성적이고 표범같은 움직임이 결합된 스타일이었을 것이다. 사모두로프처럼 가볍게 뛰어올랐을테고.

 

본편의 미샤는 진지한 성격이라는 평을 듣는 인물이지만 의외로 무대에서는 희극적인 역할도 잘 소화해서 바질 역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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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편으로 돌아가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서무의 슬픔 시리즈는 계속된다~

 

20편은 지난 19편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에서 그대로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드디어 공연은 코앞으로 닥치고.. 무대라면 아무 것도 모르는 베르닌은 과연 돈키호테 역을 잘 소화해 낼 수 있을지! 그리고 왕재수는 스페호프의 방해공작을 물리치고 제대로 공연을 올릴 수 있을지~~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그러던 어느날, 왕재수는 야심차게 고전발레 돈키호테를 리메이크해 무대에 올리려고 하고 스페호프는 공연을 망치기 위해 갖은 술수를 동원해 배역을 맡은 무용수들을 시골에 보내버린다. 이에 왕재수는 베르닌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과연 왕재수는 공연을 제대로 올릴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생애 최초로 무대에 올라가게 된 베르닌, 예명 하를람피 푸고비체프는 문제의 돈키호테를 소화해 낼 수 있을 것인가!!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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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20

 

 

 

서무의 슬픔

-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토요일에 베르닌은 든든하게 아침 식사를 한 후 10시쯤 극장에 갔다. 어디로 가야 하나 두리번거리다 제1 연습실로 갔다. 남녀 군무 연습이 한창이었는데 슬며시 들어가자 이즈마일로프가 그에게 손짓을 했다.

 

“ 하를람피, 자넨 3연습실로 가게. 감독님이 2막 지도해준다고 하니까. ”

 

 

그래서 베르닌은 3연습실로 갔다. 왕재수는 주역과 중요 조역 무용수들을 데리고 동작을 교정해주고 있었다. 언제 그렇게 피곤해했느냐는 듯 활기차게 박자를 세고 이해할 수 없는 프랑스어 용어를 쏟아내면서 무용수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토냐는 이미 멋쟁이 감독님에게 넋이 빠지도록 반해버린 것 같았다. 토슈즈가 찢어져 달아날 정도로 열심히 돌고 뛰었다. 메인 투우사로 발탁된 가릭도 어제보다 훨씬 몸놀림이 유연해지고 보자기도 휙휙 잘 돌렸다. 다른 무용수들도 열심이었다. 잠시 후 베르닌을 발견한 왕재수가 가까이 오라고 했다.

 

 

너 이리 와. 산초랑 맞춰보는 건 좀 있다 티무르 보리소비치가 봐줄 거고, 인형극장 뒤집는 거랑 풍차 장면 먼저 나랑 해 보자. 풍차 매달리는 건 미리 해봐야 되니까 지하로 내려가서... 토냐, 막심은 아직 연락 없어? ”

 

“ 네, 아직이요. 이상하네요. 전화도 안 받고... 분명히 오늘 8시까지 온다고 했거든요. 저 아직 1막이 잘 안돼서 감독님 오시기 전에 먼저 맞춰보기로 했는데... ”

 

“ 알았어. 일단 솔로 파트 연습하고 있어. ”

 

 

왕재수는 베르닌을 데리고 지하의 무대 아래로 갔다. 베르닌은 거대한 풍차 모형을 보고 깜짝 놀랐다. 가까이서 보니 엄청나게 컸다. 뒤쪽에는 복잡한 장치가 되어 있었다. 왕재수가 뭔가를 만지작거리자 풍차가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입을 벌리고 구경하다 문득 겁이 났다.

 

 

“ 야, 여기 매달리란 말야? 이거 엄청 크잖아! 되게 높아!

 

“ 응, 근데 반쯤 돌아가다가 커튼 내려올 거야. 걱정하지 마. 뒤에 매트도 다 깔아놓을 거니까. 이렇게 하는 거야. ”

 

 

왕재수가 음악을 틀더니 소품용 창을 들고 풍차로 돌진하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는 날개 끝의 손잡이에 팔을 걸치더니 어깨와 가슴을 기대고 매달렸다. 한 손으로는 창을 휘두르고 나머지 한 팔과 몸으로 날개에 의지한 채 온몸을 퍼덕이며 천천히 올라갔다. 반쯤 올라갔을 때 왕재수는 창을 던지더니 훌쩍 뛰어내렸다. 베르닌은 그가 다칠까봐 급하게 뛰어갔지만 물론 숙련된 왕재수는 가볍게 착지했다.

 

 

“ 어... 난 너처럼 못 내려와... ”

 

“ 네가 올라갈 땐 아까 정도에서 멈추면서 막이 내릴 거야. 그리고 나면 날개가 도로 내려오니까 넌 그냥 매달려 있기만 하면 돼. 혹시 놓치더라도 뒤에 매트 다 깔아놓으니까 위험하지 않아. 한 번 해보자. 풍차는 내가 조작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

 

 

그래서 베르닌은 풍차로 돌진해 날개에 매달렸다. 막상 매달리니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날개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생각보다 빠른 것 같고 몸이 붕 뜨는 것이 무서워서 도저히 왕재수처럼 창을 휘두르고 몸을 버둥거릴 수가 없었다. 죽은 듯이 뻣뻣하게 매달려 있는데 잠시 후 풍차가 멈추더니 거꾸로 내려왔다. 바닥에 내려오자 좀 싱겁다는 생각이 들면서 무서워했던 자신이 창피했다.

 

 

“ 생각보다 쉽지? 이번엔 한번 움직이면서 해봐. ”

 

 

베르닌은 왕재수의 독려를 받아가며 연습을 했다. 오히려 마임을 하는 것보다 더 쉬웠다. 다섯 번 만에 꽤 잘 소화했다는 칭찬을 받았고 내친 김에 인형극장 부수는 연기도 배웠다. 그것도 생각보다 잘 된 것 같았다.

 

 

“ 음, 넌 의외로 폭력적인 연기를 잘 하는구나. 국장한테 맺힌 게 많아서 그런가. 하긴 저번에 보니까 의자도 잘 휘둘렀지. 잘했어. 이제 티무르 보리소비치한테 가서 나머지 배워. 오후에 다 같이 리허설해 볼 거야. ”

 

“ 어, 그래. 근데 넌 맨날 나보고 바보 멍충이라 하면서 극장에선 안 그러는구나. ”

 

“ 애초부터 넌 프로가 아니니까 기대치가 낮거든! ”

 

“ 야, 그럼 역시 내가 못한다는 거네. ”

 

“ 아니야, 기대했던 것보다는 훨씬 나아. ”

 

 

베르닌은 왕재수에게 교묘하게 조종당하는 느낌이었지만 어쨌든 뿌듯하기도 했고 재미도 있었으므로 슬슬 신이 나서 빠르게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왕재수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터벅터벅 따라왔다.

 

 

“ 야, 조심해. 거기 계단 턱 튀어나왔어. 앗, 그럴 줄 알았어! ”

 

 

베르닌은 발을 헛디딘 왕재수를 급하게 붙잡아주었다.

 

 

“ 너 왜 그래? ”

 

“ 불안해서 그래. 막심이 안 와서. ”

 

“ 막심이 누구야? ”

 

“ 바질. ”

 

“ 아, 어제 그 말총머리 남자애? ”

 

“ 응, 되게 열심인 애거든. 벌써 왔어야 되는데. ”

 

“ 어제 늦게까지 연습했잖아. 피곤해서 늦잠 자는 거 아닐까? ”

 

“ 스무 살밖에 안된 앤데. ”

 

 

계단을 다 올라왔을 때 류드밀라가 헉헉거리며 뛰어왔다.

 

 

미셴카! 큰일났어요!

 

“ 왜 그래요, 류다? ”

 

“ 방금 의사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막심이 아침에 병원으로 찾아왔대요. 근데 들어오자마자 막 토사곽란하고... 배가 아프다고 바닥에 뒹굴더래요. 의사 선생님은 일단 응급조치를 해줬대요. 근데 계속 토한대요. 좀 전에 정신 차리자마자 막 당신을 찾더래요. 울면서 극장에 가야 한다는 걸 의사 선생님이 못 가게 막고 전화하셨어요. ”

 

 

베르닌은 왕재수가 기절할까봐 걱정이 돼서 급하게 그의 팔을 잡았다. 갑자기 전날 저녁 스페호프가 한 가지 잊은 게 있지만 밤에 처리할 거라고 했던 말이 퍼뜩 생각났다.

 

 

왕재수는 기절하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더니 제일 가까운 사무실로 들어가 스타브로프의 병원에 전화를 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더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울고 싶어진 베르닌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 어떻게 된 거야? 막심 많이 아파? 못 온대? ”

 

급성 식중독이래. 막심 말로는 어젯밤까진 괜찮았고 새벽에 목말라서 우유를 한 잔 마셨는데 맛도 이상하지 않았대. 의사 선생님이 그러는데 우유에 나쁜 게 섞여 있었던 것 같다고. 자세한 건 피 검사 해봐야 한대.

 

“ 뭐야? 그건 독살 시도... ”

 

“ 그 정도로 심각한 건 아닌데 하여튼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어야 한대. 죽이기까지 하면 일이 너무 커지니까 딱 며칠 아플 정도만 약물 썼겠지. 더러운 놈들. 다 나 때문이야. 불쌍한 막심. 얼마나 아플까. ”

 

 

왕재수는 매우 상심한 것처럼 보였다. 의자에 주저앉더니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한숨을 쉬었다. 베르닌은 어쩔 줄을 몰랐다.

 

 

“ 저... 야, 그거 네 잘못 아니야. 우리 국장이 나쁜 거야. 자책하지 마. 막심 괜찮아질 거야. ”

 

그냥 공연 접을 걸 그랬나봐. 괜히 애들 끌려가서 눈 치우게 해서 근육 미워지게 만들고, 막심은 아프고. 너네 국장은 나 때문에 그러는 건데 공연히 애꿎은 애들만 고생하고... 어중이떠중이들 억지로 무대에 올리고... ”

 

야, 뭐가 어중이떠중이야! 네가 그렇게 말하면 지금 저 위에서 땀 빼고 발이 닳게 연습하는 애들은 뭐가 되니! 어제 토냐 보니까 처음으로 주역 맡았다고 엄청 좋아하던데! 애들 실력 좀 떨어지면 어때! 열심히 하잖아! 너 믿고 그렇게 죽어라 하고 있는데! 넌 천재라서 그런 거 몰라! 재능 좀 없어도 열심히 하면 그 걸로도 족하다고 한번이라도 생각해주면 안 돼? ”

 

 

왕재수는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안 돼. 재능은 재능이야. 열심히 하는 건 당연히 중요하지. 90퍼센트까지는 커버할 수 있어. 그치만 나머지 10퍼센트는 안된다고. 그 10퍼센트 때문에 무대가 달라져. ”

 

“ 공연 보러 오는 사람들은 90퍼센트만 돼도 기뻐할 거야! ”

 

“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야, 다닐. 이건 더하기 빼기 산수가 아니거든. ”

 

난 그런 거 몰라! 위에서 애들 죽어라 연습하는 것만 알아! 나도, 나도 웃기는 이름 달고 연습하잖아. 근데 네가 이러면 어떡하니. 한 번만 더 쟤들 어중이떠중이라고 해봐. 한 대 팰 거야!

 

“ 언제는 나 때릴 데 하나도 없다고 하더니. ”

 

 

왕재수가 목을 울리며 쿡쿡 웃었다. 베르닌은 이 와중에 웃는 왕재수 때문에 더럭 겁이 났다. 스트레스 때문에 머리가 이상해졌나 싶었다. 하지만 왕재수는 고개를 들더니 훨씬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 점심 먹어야겠어. 같이 가자. ”

 

“ 어... 아직 점심시간 안됐어. 열한시 반인데. ”

 

“ 좀 일찍 가지 뭐. ”

 

 

왕재수는 밖으로 나가더니 류드밀라를 불렀다.

 

 

“ 류다, 위에 있는 사람들한테 열두 시 되면 점심 먹으러 가라고 해요. 한 시 반부터 다시 연습 시작한다고. 그리고 다섯 시에 스페이스 리허설 하는 거 스태프들한테 다시 환기시켜 주고요. 드레스 리허설은 내일 열 시예요. ”

 

 

 

*    *    *

 

 

 

 

왕재수는 베르닌과 함께 자주 가던 박물관 앞 식당에 갔다. 그러더니 지금껏 베르닌이 봐온 중 가장 많은 음식을 주문했다. 마카로니 샐러드에 살랸카, 구운 감자, 쇠고기찜, 우유, 심지어 초콜릿 무스까지 주문했다. 베르닌은 이 녀석이 왜 자기한테 묻지도 않고 2인분을 시키나 했지만 왕재수는 그에게 뭘 먹을 거냐고 물었다.

 

 

“ 어... 나, 나는 감자수프랑 사과소스 돼지구이. 근데 너 왜 이렇게 많이 시켜? 누가 또 와? ”

 

“ 안 와. 내가 다 먹을 거야. ”

 

“ 으잉? ”

 

 

음식이 나왔다. 왕재수는 먹기 시작했다. 부지런히, 꼭꼭 씹어서 열심히 먹었다. 무슨 숙제를 하는 아이처럼 순서대로 점진적으로 꾸역꾸역 먹었다. 왕재수가 쇠고기찜을 먹다가 목에 걸려 기침을 하기 시작했을 때 베르닌은 우유를 밀어주고 접시를 빼앗았다.

 

 

너 그만 먹어!

 

“ 언제는 많이 먹으라고 하더니! ”

 

“ 이렇게 많이 안 먹었었잖아! 너 지금 스트레스 받아서 막 먹는 거잖아! 이러다 탈 나! ”

 

“ 아니, 탈 안 나. 다 필요한 만큼 계산해서 먹는 거야. ”

 

“ 진작 좀 이렇게 먹었으면 참 좋았겠네! 너 설마 지금 그 초콜릿 무스까지 먹으려는 거야? ”

 

“ 왜, 먹고 싶어? 잘라줄게 먹어. ”

 

 

왕재수가 포크로 초콜릿 무스를 반토막내서 베르닌 앞으로 밀어주었다.

 

 

“ 아니, 내가 달라는 게 아니고... ”

 

“ 먹어둬. 오후에 연습 많이 해야 할 테니까. 무용수들이랑 합도 맞춰봐야 하니 당분이 필요할 거야. ”

 

 

베르닌은 디저트를 먹었다. 엄청나게 맛있었다. 혀가 녹는 것 같았다. 왕재수는 무스를 한 입에 긁어먹은 후 물을 한 모금 꿀꺽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을 하고 나왔다. 극장으로 돌아오면서 베르닌이 짜증을 냈다.

 

 

“ 야, 너 왜 내 것까지 돈 내? ”

 

“ 내가 고용한 배우라서. ”

 

“ 출연료도 안 주면서 밥 한 끼 사주는 걸로 때우냐! ”

 

“ 출연료 줄 거야. 하를람피 푸고비체프 앞으로. ”

 

“ 엥, 정말? ”

 

“ 당연하잖아! 배우로서 무대에 출연하는데 당연히 대가를 받아야지! ”

 

“ 어... 난 그냥 땜빵이잖아. ”

 

아니야! 넌 땜빵이 아니야. 그런 마음가짐 따위 버려! 너는 돈키호테야. 그 역 피땀 흘려 연습해서 당당히 얻은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무대 올라가! 자기가 땜빵이란 생각하면 정말 땜빵밖에 안 돼!

 

“ 그런가... 근데 자꾸 푸고비체프라고 하면 웃겨서... ”

 

“ 웃지 말란 말이야. 이거 봐, 포스터랑 팸플릿 벌써 나왔어. 너 이름 인쇄되어 있잖아. 돈키호테 : 하를람피 푸고비체프. ”

 

“ 어, 정말이네. ”

 

 

베르닌은 홀린 듯이 포스터를 응시했다. 포스터의 중앙에는 바질과 키트리가 화려한 포즈를 취하고 서 있었지만 배경으로는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의 실루엣이 그려져 있었다. 아랫단에 배역과 무용수들 이름이 씌어 있었는데 토냐와 막심에 이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무려 세 번째에 있었다. 베르닌은 멍해졌다. 물론 자신의 진짜 이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황홀했다.

 

 

왕재수가 그의 등짝을 탁 쳤다.

 

 

“ 야, 정신 차려. ”

 

“ 와, 나 이런 적 한 번도 없었거든. 학예회 때도 연극이나 발표회 같은 거 안 나가봤어. 나보고 책상물림이니까 못할 거라고 역을 안 줬어. ”

 

“ 흥, 바보들, 좋은 기회 놓쳤네. 너 잘만 하는구만. ”

 

 

베르닌은 포스터와 팸플릿을 한 장씩 챙겼다. 둘둘 말아서 가방에 넣어놓고 연습실로 갔다. 왕재수는 그에게 조금 쉬다가 이즈마일로프에게서 추가 지도를 받고 산초를 비롯한 나머지 무용수들과 모든 장면을 하나하나 맞춰보라고 했다.

 

 

“ 어, 근데 1막도 그렇고, 3막 자살 쇼 때도 그렇고 바질이 있어야 내가 연기를 할 수 있잖아. 막심 못 온다며. ”

 

“ 다른 애 넣을 거야. 연습시켜서. 오늘 스페이스 리허설 때까진 일단 안톤한테 바질 역할 해달라고 할거니까 그 사람이랑 맞춰봐. ”

 

“ 어, 그 안무 선생님? 마흔다섯은 되지 않았어? ”

 

“ 그러니까 그림만 맞춰보라는 거지. 연습하고 있어, 난 토냐 지도 좀 해줄 테니까. 걔 올 때까지 눈 좀 붙여야겠어. 있다 봐. ”

 

 

왕재수는 감독실로 가더니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먹고 나서 절대 곧장 눕지 않는 애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조금 불안했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있든지 몸이 아주 힘들든지 둘 중 하나였다. 어쨌든 왕재수가 조금이라도 자는 것은 좋은 일이란 생각에 그는 옷걸이에서 코트를 내려서 이미 잠든 왕재수의 몸 위에 덮어주고 나왔다. 문득 정오에 스페호프에게 전화하는 것을 잊었다는 생각이 났다. 드라마 극장 앞 전화를 쓰라고 했지만 다 귀찮았다. 못된 국장은 꼴도 보기 싫었다. 사무실 전화로 다이얼을 돌렸다.

 

 

스페호프는 공연이 어떻게 되고 있느냐, 바질 역을 구했느냐 하고 물었다.

 

 

“ 어, 그 바질이란 게 남자 주인공이라면... 그 역 맡은 무용수가 아프다고 하네요. 입원해서 못 올 것 같답니다. 그래서 야스민이 굉장히 충격을 받고... 지금은 소파에 드러누워 있어요. ”

 

하하하, 바로 그것이야! 됐어! 이제 됐어! 제깟 게 아무리 기를 써봤자, 주인공들이 다 없는데 뭘 어쩌겠나! 그럼 내일 공연은 취소되겠군! ”

 

“ 취소할 것 같지는 않고요. 무용수들에게 연습은 계속 시킬 모양입니다. ”

 

“ 뭐라고? 분명히 끌어다 쓸 놈들도 다 떨어져서 이제 죽었다 깨나도 방법이 없다고 레베진스키가 그랬는데! 연습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바질인지 뭔지 하는 놈팽이가 없는데! ”

 

“ 춤 가르쳐주는 선생이 하나 있는데 그 사람으로 쓴대요. ”

 

“ 선생이라면 나이가 많을 텐데? ”

 

“ 예, 40대 중반쯤 됐어요. 머리도 벗겨지고... ”

 

“ 흥, 그럼 잘해보라고 하게! 그런 어중이떠중이들 데리고 억지로 공연 올려봤자 엉망일 테니. 거지같은 무대를 보고 나면 그놈 떠받들고 귀여워하던 의원들도 이제 정신을 차리고 그 불여우 녀석을 헌신짝처럼 버리겠지. 차라리 공연 그대로 올라가는 게 우리한테는 더 좋아. 그럼 그 자식 이제 퇴물 된 거 알고 크레믈린에서도 손 뗄 테니까. 그러고 나면 그 불여우를 쥐도 새도 모르게...

 

“ 어,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이만 끊어야겠습니다. 사람들이 오는군요. ”

 

 

베르닌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굉장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국장은 왜 그렇게 왕재수를 미워할까 싶었다.

 

 

‘ 싸가지가 없어서 그렇지 나쁜 앤 아닌데. 자기 일은 열심히 하고. 하긴 국장은 자기한테 고분고분하게 굴어도 들들 볶으니... ’

 

 

그는 1연습실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도를 받고 연습을 하고 다른 무용수들과 맞춰보았다. 키트리에게 반해서 어설프게 춤을 추는 장면과 숲속 요정 나라 장면은 토냐가 올 때까지 한참 기다려야 했다. 토냐는 왕재수에게서 개인 지도를 받고 난 여파로 얼굴이 온통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게 옆에서도 느껴질 정도였다.

 

 

5시 스페이스 리허설 때 베르닌은 처음으로 극장 무대에 올라가 보았다. 기분이 묘했다. 무대 배경도 없고 의상도 걸치지 않은 상태였지만 이미 흥분이 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근 2시간 30분 동안 연습을 하고 나니 공연의 흐름을 알 것 같았다. 스페이스 리허설은 중간 중간 왕재수의 코멘트로 중단되긴 했지만 그래도 큰 무리 없이 흘러갔다. 바질 역을 안톤이 추느라 모양새가 좀 이상하긴 했다. 리허설을 마친 후 가릭이 불안하게 물었다.

 

 

“ 감독님, 막심은 못 오나요? 식중독이라면서요. ”

 

“ 올 거야. 내일. 하지만 다들 비밀로 해줘. ”

 

“ 어, 왜요? ”

 

“ 그래야 더 이상 문제가 안 생겨. ”

 

“ 예. ”

 

 

베르닌은 무용수들이 스페호프의 공작에 대해 어디까지 눈치를 채고 있을지 궁금했다. 분위기를 보니 어느 정도 알고는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무용수들은 이제 그와도 친해져서 걸핏하면 ‘하를람피, 이쪽으로 와서 초콜릿 먹어요!’, ‘하를람피, 결혼했어요? 애들 몇 살이에요?’ 등등 말을 걸어왔고 ‘당신 외모만 보면 우리 원래 돈키호테 역 하던 선배보다 더 잘 어울려요’ 라고 칭찬을 하기도 했다. 그들은 베르닌이 무용수나 배우 출신이 아닌 일반인이라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뻣뻣하다고 타박하는 대신 가능한 한 도와주려고 애썼다. 호기심 많은 무용수들은 그의 직업이 뭔지도 궁금해 했다. 베르닌은 벌목공이라고 둘러댔다.

 

 

스페이스 리허설을 마친 후 왕재수는 무용수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집에 들어가 쉬라고 했다. 의욕에 찬 무용수들은 모두 밤늦게까지 남아서 더 연습하겠다고 아우성을 쳤지만 왕재수는 단호했다.

 

 

“ 아니, 이제 가서 쉬어야 돼. 잘 자고 쉬어야 내일 무대에서 잘 할 수 있어. 빨리 가서 자. 오늘은 다른 데로 새지 말고 무조건 가서 씻고 자! ”

 

 

왕재수는 슬며시 다가온 베르닌에게도 이즈마일로프에게서 30분만 더 동작 교정 받은 후 가서 자라고 했다.

 

 

“ 너는? ”

 

“ 난 오늘 극장에 있어야 해.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자. ”

 

“ 안 돼! 어제도 바닥에 쓰러져 자는 거 내가 데려왔었는데. ”

 

“ 오늘은 로만이 있어줄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

 

“ 다른 애들은 집에 다 보내면서 왜! ”

 

“ 너네 국장이 또 무슨 짓할지 모르니까 극장에 남아서 지켜봐야 돼. ”

 

“ 그럼 나도 있을 거야! 너 혼자 남는다고 뭘 할 수 있다고! ”

 

“ 제발 집에 가서 쉬어라. 무대를 위해서니까. 아마추어나 초짜들이 제일 많이 하는 실수가 그거야. 전날까지 미친 듯이 연습하고 흥분해서 밤잠 다 설치고 막상 무대에 올라가서는 백지가 된다고. 그냥 가서 자. 이건 감독으로서의 명령이야.

 

“ 야! 난 KGB지 배우가 아닌데 왜 네 명령을 들어야 되니? ”

 

“ 너는 지금 다닐 베르닌이 아니라 하를람피 푸고비체프니까 그렇지. 하를람피는 배우야. 그러니까 내 지시에 따라야 돼. ”

 

 

베르닌은 할 수 없이 왕재수의 지시에 따랐다. 이즈마일로프에게서 특히 어색한 부분을 교정 받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나가면서 보니까 왕재수는 토냐와 꽃 파는 처녀 역 발레리나들을 데리고 한창 열띠게 연습을 시키고 있었다. 저러다 탈나지 싶었지만 어쩔 수 없어서 그냥 돌아갔다.

 

 

 

*    *    *

 

 

 

 

마침내 일요일이 되었다. 베르닌은 일찍 일어났다. 어쩐지 입맛도 없고 뱃속이 울렁거렸다. 따뜻한 차 한 잔만 마시고 집을 나섰다. 날씨는 꽤 싸늘했다. 극장 계단을 올라가는데 자기도 모르게 돈키호테처럼 팔을 휘두르며 휘적휘적 걷고 있었다.

 

 

연습실은 텅 비어 있었다. 아직 8시도 되지 않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무대 쪽으로 가보자 그쪽은 10시의 드레스 리허설 때문에 스태프들이 무대 배경을 설치하고 조명을 손보고 청소를 하는 등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왕재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감독실로 가보았다.

 

 

감독실은 비어 있었지만 복도 끝에 있는 욕실 문이 열려 있었다. 혹시나 해서 힐끗 훔쳐보자 왕재수가 등을 돌린 채 간이욕조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기도라도 하나 싶었지만 무신론자라고 얘기했던 게 생각났다. 헛기침을 했다.

 

 

“ 어, 음... 너 좀 잤어? ”

 

“ 아. 너 왔구나. 밖에서 좀 기다릴래? ”

 

 

베르닌은 간이욕조에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을 보고 식겁했다.

 

 

“ 어! 야, 코피 나는 거야? ”

 

“ 아이 시끄러워. 조용히 좀 해. ”

 

“ 엄청 많이 나잖아! ”

 

 

베르닌은 급하게 휴지를 뜯어왔다. 코를 틀어막아 주려고 했다. 왕재수는 휴지를 빼앗아서 코를 감싸 누르며 투덜댔다.

 

 

“ 막아봤자 지금 소용없어. 그냥 이러다 멈출 거야. ”

 

이 바보천치야. 공연 한번만 더 올렸다간 사람 죽겠다! 자기 몸 축나는 건 생각도 안 하냐!

 

“ 나 이거 과로해서 나는 거 아니야. 넘어지는 바람에 코를 찧었어. 아파 죽는 줄 알았네. 그나마 내 잘생긴 콧대가 무사해서 망정이지. ”

 

“ 뻥치지 마! ”

 

“ 진짜야. 스텝이 꼬여서... ”

 

“ 스텝이 왜 꼬여! 애들 잡아주고 가르쳐주기만 하면서! ”

 

“ 언제부터 춤 잘 알았다고. 아, 이제 멈췄다. ”

 

 

왕재수는 찬물로 얼굴을 닦고 감독실로 나왔다. 베르닌은 욕조를 물로 씻어 내린 후 따라 나왔다. 의심스러운 눈으로 왕재수를 훑어보았다. 얼굴이 창백했지만 그렇다고 어디가 많이 아파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목이 늘어난 티셔츠에 운동복 바지를 입고 있는 것을 보니 더럭 걱정이 됐다. 차려입는 것에 목숨을 거는 놈이 저런 옷을 걸치고 있다니!

 

 

“ 너 막 일어난 거야? 그래서 잠옷 입고 있는 거야? ”

 

“ 아니, 나 6시에 일어났어. 8시 됐니? 우리 카페 열었겠다. 아침 먹으러 가야겠어. 너도 같이 가자. ”

 

 

왕재수는 옷을 갈아입거나 재킷을 걸치지도 않고 그대로 1층 카페에 내려갔다. 카운터로 가더니 속사포처럼 주문을 했다.

 

 

“ 우유 한 잔, 연어 샌드위치 한 개, 보르쉬 한 그릇, 사과 한 알, 차 한 잔. 초코바 두 개. 계산은 달아놔요. 이 사람도 같은 걸로. ”

 

“ 어, 나는 칼바사 샌드위치... ”

 

“ 하나는 칼바사 샌드위치로 바꿔줘요. ”

 

 

왕재수는 낡은 쟁반에 음식을 한 아름 담아서 창가 테이블로 갔다. 맨 먼저 보르쉬를 먹었다. 몇 숟갈 만에 보르쉬를 해치운 후 투덜댔다.

 

 

“ 에이, 진짜 맛없어. 깡통에 들어 있는 거 데워주는 것도 모자라 물까지 타고. 어떻게 변하지가 않는지. 우리 극장 카페 개선 좀 하라 해야겠어. 극장장이랑 얘기해야지. ”

 

“ 맛없는 줄 알면서 왜 시켰냐. 그것도 내 것까지... 진짜 맛없네. ”

 

“ 철분 섭취하려고. 아침에 피 봤잖아. ”

 

“ 난 코피 안 났는데! ”

 

“ 그래도 먹어둬! 아침에 뜨끈한 국물 좀 먹어야 몸이 풀리고 땀도 나. ”

 

 

아침을 먹은 후 왕재수는 연습실로 올라갔다. 스트레칭을 했다. 평소보다 훨씬 오랫동안 했다. 베르닌이 이제껏 보지 못한 동작들도 차근차근 했다. 잠시 후 로만 코즐로프가 악보와 바이올린을 옆에 낀 채 불쑥 들어왔다. 일자 눈썹에 콧수염을 붙이고 있는 베르닌을 보더니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인사를 했다.

 

 

안녕하시오, 하를람피 푸고비체프.

 

“ 안녕하세요... ”

 

“ 허, 이 녀석 진짜 감쪽같네. 이름은 또 어디서 그런 걸 주워 붙였나. ”

 

“ 어, 내 얼굴 알아보겠어요? 들키면 안 되는데... ”

 

“ 아니, 우리 비둘기가 말해줘서 안 거야. 그 눈썹이 신의 한 수인데. ”

 

 

왕재수가 끼어들어 둘의 대화를 끊었다.

 

 

“ 로만, 연주 좀 해줘. ”

 

“ 어느 장면? ”

 

“ 솔로 전부. 그리고 1막의 3인무랑. 그거부터 해줘. ”

 

“ 너 정말 괜찮겠어? 무대 한참 안 올라갔잖아. 다치면 어쩌려고. ”

 

“ 그러게! 몸 다 굳었는데. 내 명성에 누가 되겠지. 에휴, 할 수 없지. ”

 

 

코즐로프는 혀를 차더니 바이올린을 들었다. 왕재수가 몸을 곧게 펴고 섰다. 심호흡을 했다. 베르닌은 대체 쟤가 왜 저러나 싶었다. 코즐로프가 바이올린을 켜는 순간 왕재수가 움직였다. 점프를 하고 앞으로 달려 나가며 발을 구르고 빙글 돌고 경쾌하게 춤을 췄다. 음악이 귀에 익었다. 잘 보니 1막에서 바질이 꽃 파는 처녀들과 추는 3인무였다. 왕재수가 어찌나 가볍게 추는지 저절로 어깨가 들썩였다. 춤은 금방 끝났다.

 

 

“ 한 번 더 해줘? ”

 

“ 아니, 이건 괜찮아. ”

 

“ 다음 갈까? ”

 

“ 음, 결혼식 솔로부터 해줘. 불안해. ”

 

“ 알았어. 셋 세고 간다. ”

 

 

음악과 함께 왕재수가 춤을 추기 시작했을 때 베르닌은 멍해졌다. 왕재수는 너무나 가볍게 훌쩍 뛰어올랐고 공중에서 나사처럼 회전을 했고 다리를 탁탁 맞부딪쳤다. 나중에는 연습실 전체를 빙글빙글 돌며 가로질러 뛰었다. 마지막으로는 그 자리에서 다리를 뻗으며 힘차게 돌았는데 키트리의 32회 푸에테인지 뭔지를 출 때보다 훨씬 더 박력 있었다.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있었다. 연주를 마친 코즐로프도 활을 내려놓고 짝짝 박수를 쳤다. 왕재수는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우와, 진짜 멋있다! 나 네가 이 정도로 잘 추는 줄 몰랐어! 맨날 말만 들었지... 막심이랑 안톤이 추던 거랑 완전 비교돼. 이야.

 

 

왕재수는 숨을 몰아쉬며 근심스럽게 중얼거렸다.

 

 

“ 날 걔들이랑 비교하면 안 되지. 아아, 큰일이다. 몸이 무거워. 이런 꼴로 무대에 올라가다니... 오늘 보러 오는 사람들 전부 키로프에서 내가 이거 추는 거 닳도록 봤는데. 완전 실망하겠어. ”

 

야, 잠깐! 그게 무슨 소리야? 무대에 올라가다니? ”

 

 

왕재수가 일어나 앉았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으면서 대꾸했다.

 

 

“ 막심은 못 올 거야. 공연은 올려야 돼. 그래서 내가 출 거야. 토냐랑은 어제 따로 맞춰봤어. ”

 

“ 어... 그렇구나! 바질이 없는 게 아니었네. 네가 있었구나! ”

 

“ ‘내가 있었구나’가 아니지. 난 은퇴했는데... 난 이 극장 감독이지 무용수가 아니라고! ”

 

“ 그래도, 네가 올라간다니 진짜 다행이다! 넌 우리 나라에서 제일 잘 추는 무용수... ”

 

“ ...였지. 그리고 말은 바로 하자. ‘우리 나라’가 아니고 ‘전 세계’에서였어. 지금은 아니야. 나 마지막으로 무대 올라갔던 게 1년 전이야. 몸이 다 굳었어. 이건 정말 자살 행위야. 이런 꼴을 관객에게 보여 줘야 하다니... ”

 

 

왕재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베르닌은 그가 왜 그렇게 우울해 하는지, 어째서 수심에 잠기는지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았다.

 

 

“ 야, 너 그러지 마. 나 태어나서 이런 거 처음 봤어. 진짜 장난 아냐. 춤 보면서 심장 떨리는 거 처음이었어. 관객들도 좋아할 거야. 당신도 한 마디 해봐요! ”

 

 

코즐로프는 바이올린을 한쪽으로 얌전하게 밀어놓고는 왕재수에게 와서 꼭 안아주고 어깨를 토닥토닥 해주었다. 그리고는 등을 쓸어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 우리 아기가 원래 실력이 안 나와서 속상한 거구나. 1년이나 쉬었는데 이 정도로 출 수 있는 게 대단한 거야. 다시 연습하면 금방 옛날처럼 될 수 있을 거야. 오늘은 공연 올리는 게 제일 중요한 거니까 네 실력이 성에 안 차도 마음을 비워. 그래야 세상 사는 게 좀 편해진다. 무대는 앞으로도 계속 올라갈 수 있잖아. ”

 

아니야, 무대는 항상 한 번뿐이야! 제대로 못 추고 세상 편하게 사느니 잘 추고 힘들게 사는 게 백 배 나아.

 

“ 그건 우리 아기가 아직 아기라서 그런 거야. 예술가는 아기로 남아도 상관없지만 너는 이제 감독이니까 계속 그렇게 아기처럼 굴면 못써. ”

 

“ 흑... ”

 

 

왕재수가 코즐로프의 품에 안겨서 훌쩍훌쩍 울었다. 옛날만큼 실력이 안 나오는 게 속상한 건지 스페호프의 방해공작에 맞서 공연을 올리는 게 힘들어서 그런 건지 베르닌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했다. 국장이 이 사실을 알아서는 절대 안 된다! 마지막까지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그것도 왕재수가 주인공을 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는 헛기침을 했다.

 

 

“ 저, 난 티무르 보리소비치에게 갈게. 10시에 드레스 리허설 가면 되지? ”

 

“ 의상부터 챙겨 입어야 돼. 어제 네 사이즈에 맞게 수선은 다 한 거 같은데 혹시 모르니까 지금 가서 입어봐. 있다 보자. ”

 

 

왕재수가 언제 울었냐는 듯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코즐로프의 품에 꼭 안겨 있었다. 베르닌은 연습실을 나왔다. 잠깐 박물관 앞으로 가서 전화를 했다. 스페호프가 받았다.

 

 

“ 자네 웬일인가, 아직 10시도 안됐는데 빨리 전화를 했군. 그래, 어떻게 됐나? 오늘 공연을 올리긴 올리나? ”

 

“ 예. ”

 

“ 배역은 어제와 그대로고? ”

 

“ 그런 것 같습니다. 아침에 보니까 야스민이 많이 아픈 것 같더라고요. 코피도 엄청 흘리고. ”

 

암, 그래야지! 제깟 게 아무리 잘난척한다 해도 오냐오냐 자란 애송이가 어떻게 이 모든 재앙을 다 견딘담. 꼬마가 아프다는 건 나도 들었네. 분명 화병이 난 게지! 오죽하면 오후에 의원님들이 오실 때도 극장장이 직접 수행하고 극장 견학을 시킬 예정이라는군. 원래 그놈이 하게 되어 있었거든. 아주 잘됐지 뭔가! 오늘만 지나면 끈 다 떨어지고 그 조그만 불여우를 완전히 매장시켜버릴 수 있을 거야! 하여튼 며칠 동안 수고 많았네, 다닐. 나는 5시 공연에 맞춰서 가겠네. 그 망할 녀석이 나한테는 초대장도 안 보냈더군. 하지만 극장장이 내 자리도 의원님들 옆으로 빼놓았지. 있다 보세! ”

 

 

 

10시에 베르닌은 의상을 차려입고 드레스 리허설에 들어갔다. 무대 배경도 설치되어 있고 오케스트라도 들어오는 등 관객만 없다 뿐이지 모든 것이 진짜 공연과 흡사했다. 리허설 시작 직전 왕재수가 무용수들을 모아놓고 막심의 불참과 자신이 바질을 출 거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전날 미리 맞춰봤던 토냐와 꽃 파는 처녀 역의 두 무용수를 제외하고는 다들 금시초문이었기 때문에 깜짝 놀랐지만 곧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드레스 리허설은 스페이스 리허설보다 훨씬 진짜 같았지만 관객이 없어서 그런지 베르닌은 한결 안정되었다. 놀랍게도 무용수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실수도 훨씬 줄어들었다. 아마 왕재수가 무대 한가운데 나와 바질을 춰주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한결 의지가 되는 기분이라고 떠들었다. 일단 무대 위로 올라오자 베르닌은 아직도 서툰 마임을 순서대로 소화하고 키트리와 어설픈 춤을 추고 집시 인형극장에 뛰어들고 풍차에 매달리느라 왕재수가 뭘 어떻게 추는지 제대로 볼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왕재수가 토냐와 2인무를 추고 나중에 솔로를 출 때마다 백스테이지로부터 환호성이 들려왔다. 왕재수는 심지어 의상을 차려입지도 않고 운동복 차림으로 끝까지 췄다.

 

 

리허설이 끝난 후 왕재수는 무용수들에게 다가가서 마지막으로 몇 가지 교정을 해 주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절대 극장에서 나가지 말 것이며 연습실에서 휴식을 취하라고 했다. 점심은 연습실로 가져다 줄 테니 그것만 먹으라고 신신당부했다. 무용수들이 연습실로 이동한 후 베르닌이 물었다.

 

 

“ 점심을 시켰어? 어디서? ”

 

“ 박물관 앞 식당. ”

 

“ 어, 그랬구나. 국장이 또 음식에 뭐 탈까봐 그랬구나. ”

 

“ 응. 너도 딴 거 먹지 마. 나 이제 의상 맞춰봐야 돼. 옛날보다 근육이 줄어서 큰일이야, 안 멋있어 보일 텐데... 장식 좀 많이 달아 달라 해야겠어. 아... 난 왜 그렇게 죽어라고 다이어트를 했을까. 흐흑... ”

 

“ 바이올린 아저씨에게 잘 보이려고. ”

 

“ 그러게. 근데 아까 로만이 그러는데 나 근육 붙은 게 더 좋대. 에이... ”

 

“ 너무 걱정하지 마. 넌 예쁘잖아. 의상 입으면 멋있어 보일 거야. ”

 

“ 응, 내가 예쁜 거야 알지. 그치만 무대 올라갈 땐 지금보단 더 체격이 있는 게 낫거든. 작아 보이면 안 돼. ”

 

“ 너 안 작잖아. 키도 그 정도면 괜찮고 비율도 좋잖아. 아까 토냐랑 추는 거 보니까 커 보이던데. ”

 

“ 응. 근데 무대가 크니까 잘못하면 작아 보이거든. 전에는 내 카리스마로 커버해서 관객들은 다 나 180 넘는 줄 알았어. 근데 지금은 모르겠어. 에이, 걱정해봤자 무슨 소용이야. 그냥 해야지. ”

 

 

베르닌은 왕재수가 의상을 맞춰보는 내내 곁에 있었다. 나와서도 계속 옆에 딱 붙어 있었다. 왕재수가 투덜댔다.

 

 

“ 야, 연습실 가서 애들이랑 같이 있어! 귀찮아 죽겠네. 나 원래 공연 시작 전에는 혼자 있어야 한단 말이야. ”

 

“ 안 돼! 국장이 정보 입수하면 너한테도 해코지할 거란 말이야! 나 없다고 생각하고 할 거 해! ”

 

 

왕재수는 한숨을 쉬었지만 베르닌이 붙어 있게 내버려두었다. 4시에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국회의원들이 도착했을 때 왕재수는 수트로 갈아입고 잠깐 로비로 나가서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하지만 의원들이 그를 포옹하고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았냐느니, 극장을 구경시켜달라느니 하는 얘기를 쏟아내려고 했을 때 그는 딱 잘라 말했다.

 

 

“ 극장장님이 안내해 주실 겁니다. 저는 공연 준비 때문에 들어가 봐야 해서요. 끝나고 뵙죠. ”

 

그게 사실인가? 로비에 붙어 있는 알림 보니까 자네가 오늘 바질을 춘다고... 생각지도 않았는데 이게 웬 횡재인지!

 

“ 예. 원래 주역이 아파서요. 그럼 이만. ”

 

 

 

왕재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분장실로 가버렸다. 베르닌은 급하게 따라갔지만 왕재수가 단호하게 그를 밀어냈다.

 

 

“ 넌 저쪽으로 가. 3번으로. 이제 금방 공연 시작하니까 분장도 해야지. ”

 

“ 아니, 안 돼. 여기서 분장할 거야. 곧 국장이 올 거라고. 무대 올라갈 때까진 안심 안 돼. 너 보고 있어야 돼. ”

 

“ 아, 진짜 감시요원 노릇 제대로 하네. 맘대로 해! ”

 

 

그때 타치야나가 들어왔다. 베르닌에게 먼저 분장을 해 주었다. 베르닌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얼굴에 파운데이션과 파우더를 바르고 눈화장이란 것을 하고 블러셔니 셰이드니 하는 것을 칠하게 되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니 너무나도 어색했다.

 

 

“ 저, 타치야나 드미트리예브나... 화장이 너무 진한 거 같아요. 아이라인도 너무 두껍고. 이상해요. 웃길 거 같아요. ”

 

“ 관객석에서 보면 괜찮아. 무대 분장은 원래 그런 거야. 걱정하지 마. ”

 

“ 그런가... ”

 

 

타치야나는 베르닌의 등을 탁 치더니 웃으면서 왕재수 쪽으로 갔다. 머리를 손질해 주고 분장을 해주면서 아주 만족해했다.

 

 

“ 30년 동안 여기서 일했는데 이렇게 수월한 사람은 처음이네. 우리 감독님은 어쩜 이렇게 조금만 손대도 확 사는지. 원래 잘생긴 건 알았지만 딱 무대 체질이네. 콧대도 세울 필요도 없고. 아이라인만 그리고 볼살만 좀 부풀릴게. 요 며칠 야위어가지고. ”

 

“ 파운데이션 한 톤 낮춰 주세요. ”

 

“ 아니 왜? 이렇게 하얗고 고운 피부를? 다른 애들은 더 하얗게 해달라고 난리인데. ”

 

토냐보다 하얗게 보이면 안 되니까요. 2인무 출 땐 발레리나가 살아야 하는데 제 미모가 튀면 안 돼요. ”

 

 

베르닌은 왕재수에게 ‘너 자기만 잘나 보이고 싶어 하는 놈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왕재수가 눈을 감고 명상인지 뭔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분장을 마친 후 왕재수는 1막의 바질 의상으로 갈아입었고 스트레칭을 좀 했다. 그리고는 다시 화장대 앞에 앉았다. 목에 걸고 있던 십자가 목걸이를 풀더니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눈을 감은 채 오랫동안 가만히 있었다. 무신론자라고 했지만 베르닌이 레닌그라드에서 목걸이를 가져다 준 날부터 왕재수는 단 한 번도 그걸 목에서 푼 적이 없었다. 베르닌은 눈을 감았고 신앙심도 없었지만 어쨌든 기도를 했다.

 

 

하느님, 제가 실수 안 하게 해주세요. 풍차 잘 매달리게 해 주세요. 국장한테 안 들키게 해 주세요. 제발 공연이 무사히 끝나게 해 주세요. 저 녀석이 옛날만큼 못 춰도 높은 분들이 못 알아차리게 해 주세요. 공연 꼭 잘 끝나야 돼요. 안 그러면 쟤가 울 거예요. 저 싸가지 없는 놈이 아픈데 죽어라고 노력하고 있어요. 코피도 막 쏟아놓고 넘어졌다고 거짓말도 했어요. 쟤 오랜만에 춤 춰보려고 밥도 많이 먹고 초콜릿도 막 먹었어요. 그러니까 도와주세요. ’

 

 

기도를 하니 어쩐지 마음이 편해졌다. 그때 첫 번째 벨이 울렸다. 왕재수가 일어섰다.

 

 

“ 가자, 무대 나갈 준비하게. ”

 

 

 

*    *    *

 

 

 

 

다닐 베르닌, 아니 하를람피 푸고비체프의 생애 첫 무대 데뷔는 흥분과 우왕좌왕으로 점철되었다. 무대에 등장한 순간 그는 멍해졌다. 분명 드레스 리허설을 해봐서 괜찮을 것 같았는데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프롤로그에서 기사가 되리라 다짐하고 떠나는 장면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는데 본격적인 1막에서 그가 갑옷을 입고 냄비를 머리에 쓰고 긴 창을 들고 산초와 함께 휘적휘적 나오자 관객석에서 박수가 일었다. 머리가 핑 돌았다. 조명은 또 왜 이렇게 눈부신지, 음악은 어째서 이렇게 빨리 흘러가는 것 같은지 이해가 안 갔다. 한순간 그는 어느 쪽으로 움직여야 할지 백지가 되었다. 다행히 키트리 아빠 역 무용수가 그를 콕콕 찔러서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구석으로 이동했다. 그래도 걱정했던 키트리 둘시네아 착각 장면과 키트리 손잡고 춤추기는 다행히 그럭저럭 큰 실수 없이 해냈다. 몸이 엄청나게 뻣뻣했을 뿐이었다.

 

 

사실 그가 실수를 했어도 관객들은 몰랐을 것이다. 관객들은 바질을 추는 왕재수 때문에 완전히 흥분했다. 포스터와 팸플릿에는 여전히 막심의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고 주역이 바뀌었다는 내용은 오로지 극장 로비와 홀 앞에 붙은 종이에 손으로 갈겨 쓴 게 전부였지만 원체 왕재수가 유명한 무용수였기 때문인지 대부분은 그가 나오자마자 믿을 수 없다는 듯 웅성거리며 소리를 질러댔다. 왕재수가 한 번 뛰어오를 때마다, 한 바퀴 돌 때마다 박수를 쳤다. 토냐를 두 번이나 한 손으로 번쩍 들었을 때는 함성도 나왔다.

 

 

투우사 춤도 큰 환호를 받았다. 가릭이 망토를 휘두르며 무대를 휘젓자 여자들이 꺅 하고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쳐댔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돈키호테를 관객이 얼마나 좋아하는데‘ 라고 말한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1막을 마친 후 베르닌은 보드카에 취한 듯 황홀해졌다. 흥분이 되어서 백스테이지에서도 펄쩍 뛰고 휘적휘적 걸어 다니고 창을 휘둘렀다. 완전히 돈키호테가 된 기분이었다. 다른 무용수들도 흥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 보였다. 그때 왕재수가 다가왔기 때문에 다들 1막에서 저지른 실수에 대해 꾸중을 들을 줄 알고 좀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왕재수는 전혀 꾸중을 하지 않았다. 밝게 웃으며 격려를 해줬을 뿐이었다.

 

 

다들 잘했어! 너희는 3막 준비하고. 집시들, 요정들 이쪽으로. 하를람피, 풍차 돌진 준비됐지? 커튼 내려오면 잽싸게 준비해서 1분 만에 배경 올리고 요정 가는 거야. ”

 

 

베르닌은 아직도 어떻게 무대 배경이 그렇게 휘리릭 바뀌는지 신기했지만 물론 물어볼 겨를은 없었다. 2막에 올라갈 생각을 하니 더욱 흥분이 됐다. 베르닌으로서는 무용수들이 많이 나오고 그 사이에 끼어 밀려다녀야 하는 1막이나 근엄한 연기를 해야 하는 3막에 비해 2막이 제일 재미있었다. 폭력적인 연기를 잘한다고 왕재수에게서 칭찬까지 받지 않았는가!

 

 

베르닌은 인형극장 뒤집어엎는 연기를 실감나게 해냈다. 드디어 대망의 풍차 돌격을 할 차례였다. 그는 창을 꼬나 쥐고 으아아아 하고 소리를 지르며 풍차로 내달았다. 기세 좋게 풍차 날개에 매달렸다. 한 손으로 창을 휘두르며 발버둥을 쳤다. 풍차가 돌아가며 베르닌이 위로 올라가기 시작하자 관객들이 ‘우와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베르닌도 신이 났지만 그때 풍차가 엄청나게 빨리 돌기 시작했다. 연습할 때보다 세 배는 빠른 것 같았다. 심지어 중간에 멈추지도 않았다. 베르닌은 너무나 놀라고 어지럽고 두려워서 비명을 지를 뻔 했지만 꾹 참았다. ‘국장! 국장이 그런 거야!’ 란 생각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풍차가 휙휙 돌며 순식간에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베르닌은 악착같이 매달려 보려 했지만 원심력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튕겨져 나갔다. 머리가 어딘가에 부딪치는 것 같았다. 관객들의 박수와 함성이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베르닌은 정신을 잃었다.

 

 

잠시 후 베르닌은 눈을 떴다. 막이 내려와 있었고 그는 백스테이지 쪽으로 옮겨져 있었다. 무용수들이 걱정스럽게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한목소리로 외쳤다.

 

 

“ 하를람피! 하를람피, 정신 차려요! ”

 

 

베르닌은 눈을 떴다. 그때 무용수들을 밀어젖히고 왕재수가 달려왔다. 그의 곁에 털썩 주저앉더니 두 손으로 베르닌의 머리와 얼굴을 거칠게 쓰다듬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너 괜찮아? 미안해. 진짜 미안해. 다 나 때문이야... 아... 으흑... 어떡하면 좋아, 엉엉... ”

 

“ 어... 나 괜찮아. ”

 

 

“ 뭐가 괜찮아, 그 높은 데서 튕겨 나왔는데... 흑... 그 개자식이 풍차 손 댈 거란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 잘못했어, 정말 잘못했어. 너 끌어들여서 미안해. 미안... 아... 공연 접을게. 중단할게. 잘못했어. 다들 나 때문에 끌려가고 아프고 다치고... 이제 안 할게. 공연 접을게. 엉엉...

 

 

왕재수가 베르닌의 두 손을 와락 부여잡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괴롭게 몸부림쳤다. 베르닌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 나 진짜 괜찮아. 매트 위로 떨어졌어. 혹만 조금 난 거야. 1분 지나지 않았어? 요정 장면 가야 하잖아! ”

 

“ 아니야, 중단할 거야. 지금 내가 무대 위로 올라가서 관객들한테 얘기할 거야. 더 이상 너희들 다치게 놔둘 수 없어. 엉엉... ”

 

안 다쳤다고! 그리고 네가 그랬잖아! 공연은 올라가야 하는 거라고! 관객과의 약속이라며! 얘들 다 연습했잖아! 너도 그 몸으로 지금 바질 추잖아! 빨랑 요정들 내보내고 오케스트라에 얘기해! 나도 지금 나갈 거야!

 

 

왕재수가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그 와중에도 베르닌은 왕재수가 분장을 손봐야 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무용수들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 감독님. 저희 진짜 괜찮아요. 공연 나갈래요. 겨우 몇 분밖에 안 지났으니까 관객들도 모를 거예요. 풍차처럼 위험한 거 이제 안 나오잖아요. 저희 조심해서 할게요. 저희 이렇게 신나는 공연 처음이에요. ”

 

 

왕재수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 아휴, 누가 너희들 걱정돼서 그러는 줄 알아? 무대 사고 나서 내 명성에 누가 될까봐 그러지! 알았어, 1분 내로 막 올릴 거니까 요정들 빨리 가서 준비해. 하를람피, 너도 나가서 꿈꾸는 포즈로 누워 있고. 가! ”

 

 

그래서 베르닌은 다시 무대로 나갔다. 음악이 다시 연주되었고 막이 서서히 올랐다. 다행히 관객들은 갑자기 화사한 요정 나라가 나타나자 아무런 의심도 없이 ‘와아...’ 하고 감탄을 내뱉었다. 베르닌은 한쪽에 앉아 있다가 요정들 사이를 천천히 헤집고 팔을 허우적거리며 다니는 등 느릿느릿한 연기만 하면 됐다. 뒤통수가 좀 띵하고 바닥에 부딪친 팔다리가 아팠지만 그나마 매트 위로 떨어져서 심하게 아프지는 않았다.

 

 

2막이 끝나자 왕재수는 곧장 의료요원을 불렀다. 다행히 베르닌의 생각대로 다친 곳은 거의 없었다. 멍만 좀 들었을 뿐이었다. 왕재수가 이를 딱딱 부딪치면서 화를 냈다.

 

 

너네 국장 가만 안 둘 거야! 나쁜 자식!

 

“ 어, 제발 또 이상한 짓 저지를 생각은 하지 마. ”

 

너 검은 숲에 가서 뱀 껍질 파와! 곱등이랑 바퀴벌레랑 쥐랑 다 잡아와서 국장실에 풀어!

 

“ 알았어. 공연 끝나고 그렇게 할게. ”

 

뱀 껍질 많이많이 파와!

 

 

 

3막이 되었다. 관객들은 왕재수의 자살 쇼를 너무너무 좋아했다. 왕재수가 죽은 척하고 누워 있다가 토냐의 손에 뽀뽀를 쪽 하고, 돈키호테 베르닌의 종용에 못 이겨 키트리 아빠가 결혼을 허락하자마자 폴짝 뛰어 일어나자 커다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베르닌도 덩달아 신이 났다.

 

 

결혼식 장면이 되었다. 하객 역의 솔리스트들이 열심히 춰서 박수를 받았다. 토냐는 32회 푸에테를 무리 없이 췄다! 갈채도 많이 받고 환호도 받았다. 그리고 왕재수가 바질의 솔로를 추기 시작하자 다들 넋이 나갔다. 첫 번째 점프에서 다들 숨을 죽였다.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이 흘렀다. 두 번째 점프에서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고함과 환성을 지르고 휘파람을 불었다. 무대를 가로지르며 날아다니듯 뛰기 시작하자 미친 듯이 박수를 치고 브라보를 외쳐댔다. 난리가 났다. 음악 소리가 하나도 안 들렸다. 마지막 푸에테에서는 다들 기립했다. 베르닌은 스페호프가 VIP석에 앉은 채 ‘기립이라니! 저 불여우 반동분자에게 웬 호강이란 말이냐!’ 라고 욕설을 퍼붓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았고 속으로 쿡쿡 웃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이 되었다. 베르닌, 아니 하를람피 푸고비체프, 아니 돈키호테는 위엄 있게 바질과 키트리를 축복한 후 산초를 거느리고 먼 길을 떠났다. 무대를 떠나 백스테이지로 돌아오자 베르닌은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막이 내리는 동시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왕재수가 활짝 웃으며 무용수들을 칭찬했다.

 

 

“ 다들 정말 잘했어! 며칠 만에 일취월장했어! 연습 많이 하면 스네고로드 간 애들 돌아오더라도 진짜 주역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죽어라고 연습해라! 그리고 하를람피! 잘했어. ”

 

“ 맞아, 잘했어! 잘했어요! 무용수도 아닌데! 일반인인데 진짜 잘했어요! ”

 

“ 맞아맞아! ”

 

 

베르닌은 찡했다. 막 눈물을 흘리려는데 왕재수가 등짝을 찰싹 갈겼다.

 

 

“ 야! 인사해야지! 나갈 준비해! ”

 

 

그래서 베르닌은 무대 인사를 하러 나갔다. 영광스럽게도 그는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나가게 되어 있었다! 인사를 하자 관객들이 큰 박수를 보내 주었다. 휘파람도 불어주었다. 너무나 행복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왕재수와 토냐가 나오자 극장이 떠나갈 듯한 환호가 일었다. 공연 때보다 조명이 밝아져서 VIP석에 있던 높으신 분들이 일어나 박수를 치고 있는 게 보였다. 스페호프로 추정되는 검은 그림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관객들을 헤치고 밖으로 나가는 것도 보였다.

 

 

다시 한 번 인사를 하고 나자 안내원 아주머니들이 꽃다발을 바리바리 싸들고 무대로 나왔다. 토냐와 가릭에게 꽃다발을 한두 개씩 전해주었다. 그러더니 왕재수에게 나머지 꽃을 모두 주었다. 꽃에 파묻혀 얼굴이 안 보일 지경이었다. 왕재수는 자기 팔로 껴안을 수 있는 꽃다발을 모조리 모아서 토냐에게 바쳤다. 더욱 큰 박수갈채가 일었다. 베르닌도 박수를 치고 있는데 안내원 아주머니가 그에게 다가와 빨간 장미가 가득한 꽃다발을 하나 건네주었다. 베르닌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 엥? 이걸 왜 저한테 주시나요? ”

 

이건 당신한테 온 거예요. 하를람피 푸고비체프라고 카드도 있잖아요.

 

 

베르닌은 얼떨떨해졌다. 장미 꽃다발을 꼭 껴안았다. 황홀했다. 하마터면 다 같이 인사를 하다가 발을 헛디딜 뻔 했다. 커튼콜이 계속 반복됐다. 예전에 베르닌은 왕재수를 감시하느라 울며 겨자 먹기로 공연을 보게 될 때마다 저 망할 놈의 커튼콜은 왜 하는지, 왜 끝날 것 같으면서도 다시 막이 올라가고 무용수들이 우르르 나와 다시 인사를 하는지 이해가 안 갔지만 막상 무대에 올라와보니 커튼콜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수와 환호를 받는 것이 너무나 행복했다.

 

 

마침내 커튼콜이 끝났다. 막이 내려왔고 홀에는 불이 밝게 들어왔다. 관객들이 물밀 듯 빠져나갔다. 왕재수는 무용수들을 하나하나 토닥여 주었다. 마지막으로 베르닌에게 다가오더니 와락 포옹을 했다.

 

 

“ 고마워, 덕분에 공연 끝냈어. ”

 

이거 봐, 나 꽃 받았어!

 

“ 좋겠구나, 꽃도 받고. ”

 

“ 근데 누가 준 걸까? 나 여기 나오는 거 아무도 모르는데. ”

 

“ 그러게. 꽃이 남았나보네. ”

 

“ 아니야! 여기 내 이름 쓴 카드도 있어! 어, 근데 이거 네 글씨 아니야? ”

 

 

베르닌은 카드를 펼쳐 보았다. 딱 한 줄 씌어 있었다. 소리 내어 읽었다.

 

 

‘첫 무대 축하’, 야 이거 네가 준 거구나! 내 데뷔 축하해주려고! 고마워! ”

 

내가 왜! 바빠 죽겠는데 왜 그런 짓을 하니! 하여튼 좋겠구나, 꽃 받아서. 난 빨리 씻고 의원 아저씨들한테 인사하러 가야 돼. 고생했으니까 그만 들어가서 푹 쉬렴. 내일 삭신이 쑤실 걸. 잘 자! ”

 

 

왕재수는 급하게 분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베르닌은 복도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왕재수가 분장을 모두 지우고 말갛게 된 얼굴로 나왔다. 수트 차림이었지만 재킷은 팔에 걸치고 있었다. 셔츠 칼라 사이로 목걸이가 힐끗 보였다. 금색의 조그만 십자가가 반질거리는 것을 보니 또 손에 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 너 아직 안 갔어? 분장도 안 지웠네. 옷도 안 갈아입고. 그러다 감기 걸린다. 빨리 씻고 들어가서 쉬어. ”

 

“ 응, 이제 들어갈 거야. 저기, 있잖아. ”

 

“ 왜? ”

 

“ 너 계속 무대 올라가면 안 돼? 오늘 진짜 멋있었어. 빈 말이 아니야. 그런 거 처음 봤어. 관객들도 좋아했잖아. ”

 

“ 칫, 여긴 시골이니까 그렇지. 그런 걸 언제 봤겠니. ”

 

“ 시골 관객들한테 네 춤 계속 보여주면 안 되는 거야? ”

 

“ 나 은퇴했다고 했잖아. 오늘은 공연 빵꾸날까 봐 억지로 올라간 거야. ”

 

“ 은퇴 무르면 안 돼? ”

 

“ 쳇, 아무 것도 모르면서. ”

 

 

왕재수는 툴툴거렸지만 기분이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베르닌에게 빨리 가서 자라고 했을 뿐이었다.

 

 

베르닌은 분장을 지웠다. 일자 눈썹을 지우고 콧수염을 떼어냈다. 샤워를 했다. 극장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하를람피 푸고비체프와 돈키호테는 사라지고 그는 다닐 베르닌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눕자 아직도 짜릿하게 남아 있는 흥분과 함께 텅 빈 듯한 허무함이 몰려왔다. 그래서 그는 물병에 꽂아서 부엌 식탁에 올려두었던 꽃다발을 침실로 가져왔다. 나이트 테이블 위에 병을 내려놓았다. 풍성하게 피어 있는 빨간 장미꽃들과 카드를 보자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그는 행복하게 잠이 들었다.

 

 

 

 

 

 

 

FIN

- 2015. 4. 9 ~ 4. 12 -

 

..

 

 

왕재수가 올리는 돈키호테는 기본적으로는 키로프 극장(현 마린스키) 버전을 따르고 있다. 풍차에 사람 매달리는 얘긴 전에 얘기했듯 극장마다 다른데, 인형을 쓰는 곳들도 많다.

 

..

 

 

베르닌은 당연히 티팬티를 입었다! 그런데 이거 쓸 때는 그냥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서 묘사를 안했는데 19편에 달아주신 댓글들을 보고 좀 아까웠다. 티팬티 에피소드 넣을 걸 ㅎㅎㅎ

 

글에는 빠졌지만, 베르닌은 드레스 리허설 때 의상 담당자가 가져다준 티팬티와 타이츠에 매우매우 당황하고.. 그나마 돈키호테 역은 타이츠 위에 짧은 하의를 겹쳐 입어 불행중 다행이 되었다. 그는 왕재수에게 티팬티 안 입으면 안되느냐고 애걸하고 싶었겠지만 알다시피 그때 왕재수는 갑작스럽게 무대에 올라가느라 정신도 없고 매우 스트레스 받는 상황이므로 착한 베르닌은 꾹 참고 그냥 입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얼마나 불편했을꼬 ㅎㅎ)

 

공연 끝난 후... 왕재수는 그에게 기념으로 그 티팬티를 가지라고 했을 거고... 이리하여 베르닌은 하를람피 푸고비체프라는 예명과 티팬티를 기념으로 얻게 되었다... 이건 원글에는 없는 내용이니 디렉터스 컷인가 ㅎㅎ

 

..

 

 

서무 시리즈는 기본적으로 코미디 풍자이기 때문에 완전 초짜 베르닌이 3일 연습해서 돈키호테 역을 어떻게든 해냈다만.. 사실 현실에서는 많이 힘든 일이다 :) 돈키호테가 결코 쉬운 역이 아니라서... 뭐 모르지. 베르닌이 사실은 연기 천재였던 걸지도!!!

 

..

 

 

공연을 올리는 왕재수의 마음가짐이라든지, 바질을 준비하는 왕재수와 코즐로프의 대화는 서무 시리즈라 조금 가볍고 때로는 우습게 표현했지만 사실 이쪽은 본편의 미샤와 더 맥이 닿아 있다.

 

본편 우주에서도 바질은 미샤에게 특별한 역 중 하나였다. 이전에 about writing 폴더에 발췌했던 글(http://tveye.tistory.com/3594) 에서도 미샤가 폐렴을 무릅쓰고 바질 데뷔 무대를 추는 내용이 나온다.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내가 설정한 미샤의 경력 노트에서 이 사람은 발레학교 시절에도 국제 콩쿠르에서 바질 역으로 상을 받은 적이 있다. 미샤는 소년 시절 콩쿠르 입상 경력이 많은데 바질, 알리 등 화려한 역을 추곤 했다.

 

왕재수가 19편에서 얘기했듯 돈키호테는 남성 무용수들의 화려한 춤이 눈에 들어오는 발레이다. 특히 바질의 춤은 관객들을 아주 사로잡는다. 화려하고 역동적이어서 결혼식 솔로에서 바질이 그랑 주테(두 다리를 쫙 뻗고 공중을 가로질러 점프하며 무대를 한 바퀴 도는 것)를 시작하면 관객들이 박수를 치며 즐거워한다.

 

내 인생 첫 돈키호테는 오랜 옛날 마린스키 무대에서 본 거였는데 그땐 기본지식이 없어서 그런 장면이 나오는줄도 몰랐기에 결혼식 장면에서 바질(아래 첨부한 영상의 뱌체슬라프 사모두로프가 췄다)이 펄쩍 날아오르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는데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다. 내 인생에서 공연 보고 그렇게 흥분했던 적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모든 관객들이 말 그대로 박수를 치고 환호하고 기립했다.

 

이후 많은 공연들을 보았지만 그토록 관객들이 흥분하고 모두가 혼연일체가 됐던 때는 없었던 것 같다. 아마 그때가 90년대였고 아직 러시아 관객들은 소련식으로 발레를 보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소련 시절 관객들의 반응은 지금 러시아 관객들 반응보다 훨씬 열정적이었다) 본편과 이 20편에서 미샤(=왕재수)가 바질을 출 때 관객들이 박수치고 환호하고 발 구르는 장면은 저때의 경험에서 그대로 가져왔다.

 

 

..

 

 

19편과 20편 쓸 때는 물론 민쿠스의 돈키호테 음악을 많이 들었다 :)

 

유튜브에서 발레 돈키호테를 검색하시면 여러 극장들의 여러 영상들이 많이 나오니 궁금하신 분들은 한번 찾아보셔도 좋을 듯. 추천하는 것은 2006년 마린스키 버전. 깨끗한 테크니션이자 원더키드인 레오니드 사라파노프와 그의 아름다운 아내인 올레샤 노비코바가 바질과 키트리, 그리고 최고의 연기파 돈키호테인 블라지미르 포노마료프가 나온다. 요즘은 이반 바실리예프와 나탈리야 오시포바의 돈키호테도 많이들 좋아하지만 나는 모스크바보다는 페테르부르크 쪽 입맛이라 전자가 더 좋다.

 

조금 아쉬우니 다음 포스팅에서 바질의 화려한 춤 영상 클립을 몇 개 소개하도록 하고..

여기서도 바질의 춤 아주 짧은 클립 두 개만.

 

먼저 바질이 키트리의 두 친구인 꽃파는 아가씨들과 추는 짧은 3인무. 1막이다. 짧지만 신나서 내가 아주 좋아하는 춤이다. 20편에서 왕재수가 연습실에서 코즐로프에게 제일 먼저 켜달라고 해서 춰보는 춤이기도 하다.  

 

사심을 담아~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가 추는 버전~

 

 

 

 

두번째는 위에서 말했던 뱌체슬라프 사모두로프가 춘 결혼식 바질 솔로 중 첫번째 춤이다. 90년대 녹화본이라 화질은 나쁘지만 가볍고 통통 튀는 춤이 일품이다. 이 영상은 전에도 올린 적이 있다. 이건 갈라 콘서트나 콩쿠르 수상 무대인 것 같다. 사모두로프는 이것으로 국제콩쿠르 수상도 했었다.

 

이 사람은 말 그대로 jumper였다. 바질 역은 정말 최고였다. 얼마나 가볍고 탄력있게 날아오르는지. 내 인생 첫 바질이라 그런지 정말 잊지 못할 것이다. 이 사람은 이후 로열발레단으로 건너갔다가 지금은 러시아 어느 극장(아, 갑자기 이름 생각이 안나ㅠㅠ)의 예술감독이자 안무가로 활동 중이고 겨기서 선보인 작품으로 올해 황금 마스크 상도 탔다.

 

 

 

 

다른 무용수들의 바질 영상은 다음 포스팅에.. (http://tveye.tistory.com/3711)

 

..

 

이야기는 21편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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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은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비타민이에요 :)

 

 

 

:
Posted by liontamer
2015. 5. 6. 21:11

얼음 위에서 놀던 애들 한 장 더 russia2015. 5. 6. 21:11

 

 

그저껜가 마음의 위안을 위해 올렸던 사진(http://tveye.tistory.com/3706)에 나왔던 얼음 위에서 놀던 두 아이들.

사진 한 장 더 있어서 올려봄. 이것도 얼굴 안 나왔으니까..

 

그건 그렇고 저 바닥 진짜진짜 미끄러웠다!

 

 

:
Posted by liontamer
2015. 5. 5. 19:52

빛, 그림자, 눈 russia2015. 5. 5. 19:52

 

 

지난 2월 17일. 페테르부르크.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
Posted by liontamer
2015. 5. 4. 21:20

마음의 위안을 위해 russia2015. 5. 4. 21:20

 

 

우울한 하루였다.

우울함과 약간의 불안감을 달랠 겸, 마음의 위안을 위해 지난 2월 페테르부르크에 갔을 때 찍은 사진 두 장.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안으로 들어가서.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사원의 황금빛 돔과 십자가. 그리고 조각상.

 

 

 

이날은 영하 17도였다. 아주 추웠지만 햇살이 쨍한 날이었다. 요새 안으로 들어가자 바닥에 쌓인 눈이 반질반질하게 얼어붙어 스케이트장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넘어질까봐 조심조심 걸었지만 아이들은 신나게 미끄러지며 놀았다.

 

예쁜 아이들이었다. 노는 걸 보니 형제 같았다. 얼굴 안 나왔으니 올려본다.. 작은 아이는 함께 산책하고 있었던 레냐 또래였다. 그래서 레냐가 자기도 저렇게 놀고 싶어했다 :)

 

 

:
Posted by liontamer
2015. 5. 3. 14:40

환한 겨울 낮, 모이카 운하를 따라서 russia2015. 5. 3. 14:40

 

 

지난 2월 15일. 페테르부르크. 모이카 운하변 따라 산책하며 찍은 사진들 몇 장.

찬란하고 싸늘한 날이었다.

 

마린스키 극장에서부터 모이카 운하변을 따라 쭉 걷고 이후 네바 강변까지 갔다.

 

페테르부르크야 물론 여름의 백야 때가 가장 근사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싸늘하고 찬란한 겨울날의 정취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가운데 상단에 보이는 창백한 황금빛 돔은 이삭 성당이다. 이 운하 쭉 따라 걸어가면 유명한 시느이 모스뜨(푸른 다리)가 나오고 그걸 건너면 이삭 성당이 나온다.

 

 

 

이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바로 운하로 통한다. 이때야 꽁꽁 얼어붙어 있다.

 

안 추울 땐 이런 계단마다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술마시고 있음. 이전에 마무리했던 장편에서 심리적 화자였던 트로이가 가끔 이런 운하 계단에 앉아 술을 마시기도 하고 친구랑 얘기를 나누기도 한다.

 

 

 

빛이 약간 누그러들어서 이삭 성당 돔이 좀더 선명하게 보인다.

 

 

 

 

 

운하는 꽁꽁 얼어붙고 그 위로 흰 눈이 쌓여서 눈부신 하얀색으로 매끄럽게 빛났다.

 

 

 

 

 

.. 항상 결론은.. 다시 가고 싶다!!

 

:
Posted by liontamer

 

 

2015년 5월 2일, 마야 플리세츠카야가 9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위대한 발레리나였고 꿋꿋한 여성이었다.

명복을 빕니다.

 

 

 

 

..

 

이전에 올렸던 플리세츠카야 사진 : http://tveye.tistory.com/3320, http://tveye.tistory.com/2204 

모리스 베자르의 볼레로를 추는 플리세츠카야 영상 : http://tveye.tistory.com/2549

 

:
Posted by liontamer

 

앞서 올린 서무의 슬픔 19편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http://tveye.tistory.com/3692)과 관련하여...

 

베르닌이 덜컥 떠맡게 된 발레 돈키호테의 '돈키호테' 배역이란 대체 어떤 연기를 해야 하는가! 여기 사진 몇 장과 돈키호테가 나오는 부분을 발췌한 영상 클립 몇 개를 올려본다 :) 모두 마린스키 발레단의 돈키호테이다.

 

먼저 화보 몇 장. 출처는 모두 Mariinsky Theatre 홈페이지.

 

 

돈키호테 등장 장면.

 

마린스키 버전에선 이렇게 진짜 말을 타고 나오고 산초는 당나귀를 타고 나온다. 그러나 많은 극장들에서는 말과 당나귀를 출연시키기 어려우니 모형 말을 타고 나오기도 하고 가끔은 돈키호테와 산초가 그냥 걸어서 등장한다.

 

 

 

이건 먼젓번 포스팅에서도 올렸던 사진.

 

 

환상 속에서 숲속 요정과 꿈의 여인 둘시네아(키트리가 1인 2역을 연기한다)를 만나 행복해하는 돈키호테.

 

 

 

돈키호테의 환상 속에서 펼쳐지는 숲속 요정 장면.

사실 나는 이 꿈속 요정 씬이 좀 쥐약이라... ㅋㅋ 아무리 돈키호테를 많이 봐도 이 요정 장면은 좀 괴롭다. 아마 내가 오글거리는 걸 안 좋아해서 그런 것 같다. 여기서 큐피드 역의 귀엽고 작은 발레리나가 종종대며 춤을 추는데 그 귀여움을 못 견딤 ㅎㅎㅎ

 

 

이것이 투우사 망토춤~~~

내 개인적으로는 돈키호테에서 아무리 다른 애들이 잘춰도 투우사가 망토를 멋지게 못 휘두르면 그것은 앙꼬없는 찐빵이다!!!!

왕재수가 가릭에게 망토 멋지게 휘두르라고 야단치는 부분의 춤이 바로 이 사진에 나오는 장면이다 :)

 

 

 

빠지면 섭섭한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바질 역을 추고 있음. 파트너는 빅토리야 테료쉬키나 :)

 

그러면 이제 베르닌, 아니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연기해야 할 돈키호테가 나오는 영상 클립 몇 개만~ 다들 몇 분 안되는 짧은 클립이니 한번 보셔도 좋을듯. 재미있어요~

 

 

 

1. 공연 시작. 프롤로그. 기사가 되어 환상의 여인 둘시네아를 찾기 위해 떠나는 돈키호테와 그의 하인 산초~

 

돈키호테는 마린스키 발레단 최고의 연기파 배우 블라지미르 포노마료프. 이 사람은 진짜 최고다. 돈키호테, 라 바야데르의 브라만 등등...

여기 올리는 동영상 클립에 나오는 돈키호테는 모두 이 사람이 연기한 버전이다.

여기 발췌한 영상 클립은 중간의 슈클랴로프와 테료쉬키나가 나오는 클립 빼고는 모두 2006년에 마린스키에서 올린 레오니드 사라파노프와 올레샤 노비코바가 주역으로 나온 돈키호테의 발췌 클립이다.

단추야, 이렇게 연기해야 한단다. 잘 할수 있겠니?

 

 

 

 

2. 대망의 돈키호테 등장 씬~

 

말 타고 근엄하게 등장하심.

다행히 서무 시리즈에서 왕재수가 가브릴로프 극장을 위해 준비하는 돈키호테는 극장 무대도 작고 규모나 예산 상황 등도 모두 대도시보다 딸리기 때문에 진짜 말과 당나귀는 안 나온다. 베르닌은 걸어 나오면 된다 :)

 

 

 

 

3. 돈키호테가 키트리를 둘시네아로 착각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그 장면.

 

나의 사심을 담아~ 이건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가 바질, 빅토리야 테료쉬키나가 키트리를 춘 버전에서 발췌.

바질은 키트리랑 알콩달콩 놀려고 장미꽃도 주고 신나려는 찰나.. 갑자기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르는 노인네 돈키호테가 나타나 키트리에게 절을 하고.. 키트리는 냉큼 그와 춤을 추고 바질이 준 꽃은 휙 던져버리니..

열받은 바질... 질투에 휩싸이지만 곧 질투는 질투로 받아치고.. 키트리의 친구를 집적대는 모션을 취한다. 이에 키트리는 '어머 바질 왜 저래~' 하면서 금세 바질을 끌어당기고.. 삐쳤던 바질은 키트리의 뽀뽀 한방에 헤벌레 하며 도로 '내 사랑~' 모드.

1막에서 내가 좋아하는 장면이다. 바질의 삐치는 연기가 포인트인데 슈클랴로프는 이걸 꽤 귀엽게 잘 한다 :)

 

서무 19편에서 베르닌이 돈키호테 마임이랑 연기가 너무 어렵다고 한탄하자 왕재수가 한번 해보라고 시켜보는 장면이 바로 이 장면이다.

사실 어렵다.. 돈키호테 역이 결코 쉬운 역이 아니고.. 배우로서의 역량이 필요하다. 하지만 어쩌겠나.. 왕재수는 마음이 급하고, 키큰 땜빵은 오로지 우리 단추 뿐~~

 

 

 

 

 

4. 집시들의 야영지에서 인형극장 뒤집어엎고 풍차에 돌격하는 돈키호테

 

바질과 키트리는 집시 야영지로 사랑의 도피를 하고.. 집시들이 그들을 맞아준다. 돈키호테와 산초도 온다. 집시들은 그들에게 인형극장 연극을 보여준다. 돈키호테는 연극을 실제로 착각하여 나쁜놈이 숙녀를 괴롭힌다 생각해 작은 무대를 뒤집어엎는다. 그리고는 풍차를 보고 괴물이라 착각, 돌진한다!!

 

이건 마린스키 버전인데 인형극장 장면에서 어린이들이 나와 연기를 한다.

풍차 돌격 장면도 극장별로 꽤 다르다. 옛날에는 마린스키 무대에서도 풍차에 사람이 직접 매달렸던 걸로 난 기억하는데(내가 본 무대는 그랬던듯) 이 영상에선 그냥 돌격만 하고 딸려올라가진 않는다. 미하일로프스키 발레는 무대를 보니 풍차 돌격 후 돈키호테 모양의 인형이 날개에 매달려 날아간다.

서무 시리즈에선 왕재수가 극의 스펙터클과 재미를 위해 풍차에 직접 사람을 매달리게 한다 :) 베르닌의 최고의 도전!!!!

 

 

 

 

 

5. 이건 보너스. 32회 푸에테를 추는 키트리.

 

돈키호테에서 가장 유명한 씬이라면 역시 마지막 결혼식의 바질과 키트리의 춤이다. 바질의 춤이 원체 화려해서 주목을 받지만 키트리가 추는 이 32회 푸에테도 백미.

물론 다른 고전발레에도 32회 푸에테가 종종 나온다. 하지만 제일 유명한 건 역시 백조의 호수에서 흑조 오딜이 추는 32회 푸에테와 이 돈키호테의 키트리가 추는 32회 푸에테이다. 신난다~

 

키트리를 추는 발레리나는 올레샤 노비코바 :)

 

서무 19편에서 토냐가 이걸 못춰서 자꾸 25회로 줄여달라고 하고 엉덩방아를 찧는 것이다. 그래서 왕재수가 (남자의 몸으로 ㅎㅎ) 이 춤을 직접 시연해서 토냐에게 뭐가 잘못됐는지 가르쳐준다~ 물론 왕재수는 토슈즈를 신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발가락 끝으로 서서 돌지는 않았겠지만~ 그의 춤은 명불허전~

 

 

** 태그의 돈키호테 나 발레 돈키호테 를 클릭하면 전에 이 발레에 대해 올렸던 리뷰와 메모, 동영상 클립들과 사진들을 여럿 볼 수 있다.

 

** 과연 우리의 단추남 베르닌, 예명 하를람피 푸고비체프는 위에 나온 클립에서처럼 돈키호테를 멋지게 소화할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왕재수는 스페호프의 방해공작을 물리치고 공연을 제대로 올릴 수 있을지... 그건 다음주의 20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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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조금 우울했던 18편에 이어, 서무의 슬픔 19편은 다시 베르닌과 왕재수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19편에서는 이제껏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던 극장 예술감독이자 발레단의 리더, 그리고 왕년의 최고 무용수였던 왕재수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우리의 단추청년 베르닌이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번 편에는 왕재수가 감독으로 있는 극장이 주요 배경이라 발레 얘기가 좀 나오는데 발레에 대해 잘 몰라도 조금씩 상상하며 읽을 수 있도록 쉽게 풀어서 써보려고 했다.

 

 

... 제목의 '푸고비체프'는 러시아어 '푸고비차'에서 왔다. 단추라는 뜻이다 :)

 

.. 도입부에서 왕재수가 언급하는 '당직실 귀신'에 대한 얘긴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의 그 귀신 얘기다 :0 (http://tveye.tistory.com/3437)

왕재수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건 바퀴벌레 곱등이 뱀껍질. 그리고 베르닌이 무서워하는 건 당직실 귀신~~

 

 

그럼 재밌게 읽으세요~~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어느덧 2월말이 되고, 왕재수는 시골과 바퀴벌레 곱등이 뱀껍질의 괴로움을 이겨내며 예술감독으로서 극장과 발레단을 제대로 이끌어보려고 애를 쓰는 중이지만, 불여우가 항상 눈엣가시였던 스페호프 국장이 드디어 방해공작을 위해 발벗고 나서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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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19

 

 

 

서무의 슬픔

-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2월말이 되자 왕재수는 굉장히 바빴다. 집에 들어오는 날이 거의 없었다. 월요일에 베르닌은 밤중에 극장으로 왕재수를 데리러 갔다. 그 날은 공연도 없는 날인데 왕재수는 무대 도면을 펼쳐놓고 무슨 작업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는 도면을 둘둘 말아 한쪽에 던져버리고 왕재수에게 패딩을 뒤집어씌운 후 억지로 끌고 나와 차에 태웠다. 한 번만 더 극장에서 자거나 밤을 새기만 하면 검은 숲에 가서 뱀 껍질도 모자라 겨울잠을 자고 있는 뱀들을 파내와 감독실 여기저기에 풀어놓겠다고 협박을 했다. 왕재수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지 부르르 떨면서 항의했다.

 

 

“ 이 악마! 너무해! 치사하게, 남의 약점을 잡아서 막 협박하고... 너한테 당직실 귀신 데려다 주면 좋냐? ”

 

“ 난 의사한테 쉬라는 말 들은 적 없거든! 너 정말 말 안 들을래? 의사 할아버지가 과로하지 말고 밥 많이 먹고 일주일에 사흘만 출근하랬잖아. ”

 

“ 많이 먹고 있잖아! 요즘은 삼시세끼 다 먹는단 말이야. 너 아니면 로만이 챙겨주잖아! 그리고 지금은 사흘 출근 불가능해. 일주일에 공연이 여섯 번 있는데 그 중 발레가 네 번이야. 애들 연습도 시켜야 하고 신작 준비도 해야 하고, 일요일에는 돈키호테도 새로 올린단 말이야. 중요한 사람들도 오고. 그러니까 지금은 어쩔 수 없어. 일요일 지나면 의사 선생님 말대로 할 거야. 진짜야. 뱀은 안 돼, 제발... 어헝... ”

 

 

왕재수는 화를 내다가 결국 울먹이면서 베르닌의 어깨를 잡고 매달렸다. 어지간히 뱀이 무서운 모양이었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고 소매로 왕재수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 알았어, 징징대지 마. 뱀이 뭐 그리 무섭다고. 그래도 잠은 꼭 자야 돼. 다음 주엔 무조건 쉬는 거야, 알았어? ”

 

“ 으응. 일요일 공연만 잘 끝나면 한숨 돌리니까 그렇게 할게. ”

 

“ 일요일에 모스크바랑 레닌그라드에서 국회의원들이랑 문화국 간부들 온다면서. 그거 보러 오는 거지? ”

 

“ 누가 KGB 아니랄까봐 잘도 아네. ”

 

“ 중요 인사들이 오니까 당연히 알아야지. 지금 그것 때문에 국장이 얼마나 예민한데. 의회도 KGB도 아니고 극장 따위를 그것도 일요일에 당일치기 방문하고 가버린다고 짜증냈어. 우리 시 지금 현안이 얼마나 많은데 그건 관심도 없고 딴따라 공연이나 보러 온다고. ”

 

흥, 너네 국장은 얼간이야. 그 사람들이 이 촌 동네에 무슨 관심이 있어서 오는 줄 아니? 그 사람들 전부 내 후원자들이었어. 내 공연은 다 챙겨봤다고. 이번에 올리는 것도 이 동네에서는 초연이나 다름없으니까 겸사겸사 보러 오는 거야. 나 체포당하게 해놓고 시골에 처박아놓은 것도 찔리니까 얼굴이라도 볼 겸. ”

 

“ 일요일 게 왜 초연이야? 너 신작은 4월에 올린다며. ”

 

“ 응. 일요일에는 돈키호테야. 그게 원래 고전발레에서는 중요한 레퍼토리인데 우리 극장은 5년 동안 안 올렸대. 복잡하고 애들 실력도 안 되고 인기도 없어서 전임감독이 빼 버렸다잖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지. 관객들이 돈키호테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재미있고 신나서 제일 인기 많은 레퍼토리인데. 애들은 가르치면 되는 거고, 실력이 안 되는 건 애들이 아니라 전임감독이었겠지.

하여튼 그거 손봐서 5년 만에 다시 올리는 거야. 규모도 있고 화려한 작품이라 손이 많이 간단 말이야. 무용수들 테크닉 자랑하는 작품이라 애들 연습도 더 많이 시켜야 되고. 그러니까 뱀 풀지 마. 뱀 풀면 너 정말 예술 탄압이야!

 

“ 어... 뭔가 어렵구나. 하여튼 알았어. 중요한 공연이라 이거네. 그래도 극장에서 밤샘하면 진짜 안 돼. 내가 다 확인할 거야. 그리고, 너 오늘 아침부터 저녁까지 먹은 거 다 대봐!

 

“ 어... 아침엔 극장 카페에서 우유랑 바나나, 차 한 잔. 점심 땐 박물관 앞 식당에서 대구 커틀릿하고 비트 샐러드... ”

 

“ 좋아, 커틀릿 잘했어. 지방질을 좀 섭취했구나. 저녁은? ”

 

저녁은... 저...

 

“ 저녁은? ”

 

“ 어... 아직... ”

 

뭐? 지금 밤 11신데! 점심 먹고 그럼 지금까지 아무 것도 안 먹었단 말이야? 저녁 굶은 거잖아! 그래놓고 무슨 삼시세끼를 챙겨먹어! ”

 

“ 아참, 먹었어! 먹었단 말이야! 진짜야. 애들 지도하는 것 때문에 얘기하다가 티무르 보리소비치가 삶은 감자 한 개 줬어. 그거랑 요구르트 먹었어. ”

 

야! 그게 간식이지 밥이야?

 

“ 감자가 엄청 컸는데... ”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피곤해서 자겠다는 왕재수를 억지로 자기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식탁에 앉혀 놓고는 인스턴트 닭고기 수프를 데워서 흑빵을 한 조각 곁들여 들이밀었다. 왕재수는 밤늦게 뭘 먹으면 얼굴 붓는다고 툴툴댔지만 어쨌든 먹었다. 국물을 다 먹나 안 먹나 베르닌이 감시하자 울상이 되어 하소연했다.

 

 

“ 이거 정말 아니야. 넌 감자랑 요구르트 보고 간식이라고 무시하지만 그게 훨씬 건강식이야. 이건 인스턴트잖아... 나트륨도 많이 들어 있고... 그러면서 무조건 밥 챙겨먹어야 된다고... ”

 

“ 인스턴트고 뭐고 넌 동물성 음식, 지방질을 섭취해야 돼! 하루에 두 끼 이상! ”

 

“ 네가 무슨 의사야? 레프 사벨리예비치도 식사량 늘리라고만 했지 동물성이니 지방질이니 얘긴 안 하셨어! ”

 

“ 아니, 다른 의사가 그랬어! 살 빠졌으니까 고기 먹으라고 했어! 그때 레닌그라드에서 그 유리인지 뭔지 하는 의사가 그랬단 말이야. 그러니까 잔말 말고 주는 대로 다 먹어!

 

 

왕재수는 잠잠해졌다. 풀이 죽어서 접시를 들고 수프 국물을 꿀꺽 마셨다. 남은 건더기도 긁어 먹었다. 먹여 놓으니 혈색도 돌고 덜 피곤해 보였다. 운동하고 잔다는 것을 윽박질러서 곧장 잠자리에 들게 만들었다.

 

 

“ 고칼로리의 짜디짠 걸 먹었으니 운동이라도 좀 하고 자야 한다고! ”

 

“ 웃기지 마! 기껏 먹은 거 왜 땀 빼서 도루묵 만들어! 너는 최소한 5킬로 이상 더 늘려야 돼. 그냥 자! 안 그러면 고양이, 곱등이, 바퀴벌레... ”

 

“ 흑... 나빠... ”

 

 

왕재수는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베르닌을 쳐다보았지만 순순히 자러 갔다. 베르닌도 설거지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    *    *

 

 

 

 

금요일 오전이었고 베르닌은 미친 듯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왕재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지금 극장에 좀 와줘, 다닐. ”

 

“ 엉? 무슨 일 있어? 나 지금 바쁜데... ”

 

“ 극장에 와줘. 부탁이야. ”

 

“ 어... 알았어. 점심 때 잠깐 들를게. 나 할 일이 많... ”

 

“ 아니, 안 돼. 지금. 조퇴하고 와. 제발. 부탁... ”

 

“ 무슨 일인지 말해주면 안 돼? ”

 

“ 오면 얘기해줄게. 제발... ”

 

 

왕재수의 말투가 평소와 달랐고 심지어 ‘부탁’이란 단어까지 썼기 때문에 베르닌은 슬며시 불안해졌다. 아무래도 극장에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다. 할 일이 많았지만 일단 모두 미뤘다. 직원의 외출이나 조퇴는 담당 부서장의 결재 권한이었지만, 베르닌은 총괄서무였고 스페호프가 서무란 월요일이나 금요일에 휴가나 조퇴를 하면 안 된다고 귀가 닳도록 얘기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국장에게 갔다. 스페호프는 누군가와 열심히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렇지, 잘했네! 이제 됐어. 그 자식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 줄 수 있겠군. 그나마 남은 끈도 떨어지게 되겠지. 그러면 이제 마음 놓고 없애버릴 수 있을 거야! 스네고로드 쪽을 잘 감시하게! ”

 

 

전화를 끊고 나서 스페호프는 베르닌을 힐끗 바라보았다.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 아, 다닐. 마침 잘 왔군. 그렇지 않아도 올라오라고 할 참이었는데. ”

 

“ 어, 국장님... 무슨 일이라도... ”

 

“ 자네 지금 당장 시립극장으로 가보게. 그 불여우가 일요일 공연을 준비하고 있을 거야. 일요일까지 극장에 붙어 있게나. 준비 상황부터 일요일 공연까지 모든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보고해 주게. 이건 비밀 임무니까 서면 자료는 남기지 말고, 하루에 두 번, 정오와 오후 5시에 내 자리로 전화를 해주게. 전화는 드라마 극장 앞 공중전화를 이용하도록. 알다시피 난 주말에도 출근하니 개의치 말고 전화하게. ”

 

“ 어, 예... 그런데 뭘 보고해야 할지... ”

 

일요일 공연! 그게 어떻게 되어 가는지! 그 자식이 우왕좌왕하는 꼴을 보고하란 말이야. 그리고 혹시라도 그 불여우가 크레믈린이나 레닌그라드 쪽에 전화를 걸지나 않는지도 꼼꼼히 감시하게. 이것은 중요한 임무일세. 어서 가 보게! ”

 

 

그래서 베르닌은 극장으로 갔다. 감독실로 갔지만 비어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왕재수의 비서인 류드밀라가 아는 척을 했다.

 

 

“ 아, 다냐. 왔군요. 미샤가 연습실로 와 달래요. ”

 

“ 연습실이요? ”

 

“ 2층 오른쪽 윙의 제1 연습실로 가면 돼요. 빨리 가보세요, 아까부터 10분마다 전화해서 묻고 있어요. 당신 왔냐고. ”

 

 

베르닌은 2층으로 갔다. 제1 연습실은 복도 끝에 있었는데 아주 넓었다. 레오타드 차림의 무용수들이 바글거렸다. 오른편 구석에서는 나이 든 남녀 두세 명이 무용수들을 몇 명씩 데리고 이것저것 동작을 지도하고 있었다. 왕재수는 왼쪽에 있었다. 빨간색의 커다란 보자기를 들고 있는 남자 무용수들 예닐곱 명을 좌우로 몰아가며 호통을 치고 있었다.

 

 

망토 좀 똑바로 못 돌려? 1막 하이라이트가 뭔데! 투우사 망토춤이라고! 다른 거 아무리 잘 춰도 소용없어, 망토 제대로 못 돌리면 허사란 말이야! 너, 가릭! 어깨를 더 젖혀야지! 자, 음악! ”

 

 

베르닌은 눈을 둥그렇게 뜬 채 건장한 남자들이 빨간 보자기를 휙휙 휘두르며 춤추는 것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왕재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 됐어, 있다가 다시 한 번 볼 거니까 저쪽 가서 연습해와! 가릭 너는 두 배로 연습해. 한 시간 후에도 이 모양이면 넌 빼버릴 거야! 그리고 토냐! 이리 와봐. 32회 푸에테 다시 해보자. ”

 

아우, 감독님. 아무리 해도 안 돼요... 25번으로 살짝 줄여주면 안 될까요? 아잉...

 

 

붉은 곱슬머리의 인형 같은 발레리나 토냐가 속눈썹을 깜박거리며 애교를 부렸다. 왕재수는 서릿발처럼 매섭게 그녀를 야단쳤다.

 

 

어디서 지금 누구한테 아잉이야! 25회 푸에테란 건 들어본 적도 없어!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게 아니고 네가 자꾸 균형을 잃어서 안 되는 거야. 이걸 잘해야 나중에 오딜도 출 거 아니야! ”

 

“ 어머나, 감독님. 정말이에요? 저 이거 잘 하면 백조의 호수 나갈 수 있는 거예요? ”

 

“ ‘잘’ 해야 생각해보는 거지! 키트리도 못 추면서 오데트랑 오딜을 어떻게 추려고 그래! 지금처럼 휘청거려서는 멀었어. ”

 

“ 아아, 저 잘해볼게요. 이거 잘해서 꼭 백조도 추고 말겠어요. ”

 

 

토냐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회전 수를 세어보았다. 30번쯤 돌고는 토냐가 비틀거리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왕재수가 일으켜주었다. 엄청 혼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부드럽게 북돋워주었다.

 

 

“ 아까보다 훨씬 나아졌네. 30번 돌았잖아. 다시 해봐. 회전축을 고정해야지. 발레학교에서 배웠잖아. ”

 

“ 배우긴 했는데요, 그게 벌써 한참 전이고... 극장 와서는 몇 년 동안 군무랑 조역만 시키니까 32회 푸에테는 출 기회가 없어서 다 까먹었어요. ”

 

“ 까먹는 게 어디 있어, 자전거나 수영이랑 똑같은 거지. 일단 시선부터 고쳐야 돼. 지금 내가 하는 거 잘 보면 뭐가 다른지 알 수 있을 거야. 그 부채 좀 줘봐. 카챠, 피아노 좀 다시 쳐줘요. ”

 

 

갑자기 연습실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져서 베르닌은 깜짝 놀랐다. 삼삼오오 연습하던 무용수들과 지도교사들 전부 그쪽으로 몸을 돌리고 왕재수에게 시선을 집중하는 것이었다. 왕재수가 쿵짝거리는 피아노 반주에 맞춰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자 베르닌도 멍해졌다. 왕재수는 채찍질하듯 다리를 뻗었다 구부렸다 하면서 세차고 빠르게 연속 회전을 했고 심지어 부채도 휙휙 폈다 접었다 하는 것이었다. 나중엔 무용수들이 소리 내어 숫자를 셌다. 30번을 넘게 도는데 몸이 전혀 기울어지지도 않았고 동작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베르닌은 발레 무대를 몇 번 보긴 했지만 그렇게 정확하고 동시에 음악과 완전히 일치하는 연속회전은 처음이었다. 32를 외치자마자 무용수들이 짝짝짝 박수를 치고 와 하고 환호를 했다.

 

 

“ 우와, 진짜 장난 아니다! ”

 

“ 너무 멋있어요, 꺅! 감독님 사랑해요~ ”

 

“ 완벽해요! 브라보! ”

 

 

왕재수는 벌컥 짜증을 냈다.

 

 

너희들 누가 여기 보고 있으래! 연습하라 했잖아! 가뜩이나 시간도 없는데. 투우사! 거기 군무! 무희! 꽃 파는 처녀들, 빨랑 연습 안 해? ”

 

 

무용수들이 화들짝 놀라며 다시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왕재수는 언제 화를 냈느냐는 듯 토냐에게 이제 좀 이해가 가느냐고 물었다. 토냐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다시 돌게 시켰더니 정말 이번에는 넘어지지도 않고 그렇게 많이 기울어지지도 않고 서른두 번을 다 돌았다. 왕재수가 칭찬을 해주더니 느낌을 잊지 않도록 지금 더 연습하라고 했다.

 

베르닌은 감명을 받았다. 왕재수의 푸에테도 근사했지만 토냐를 잘 어르고 달래는 기술에도 감탄했다. 남자 무용수들은 쥐 잡듯 하면서 여자에겐 상냥하다니 좀 어이가 없기도 했다. 그때 왕재수가 그를 발견했다. 금세 얼굴이 밝아졌다.

 

 

“ 아, 다닐! 왔구나! 다행이다! ”

 

“ 뭐가 다행이야? 연습 때문에 엄청 바빠 보이는데 날 왜 부른 거야? ”

 

“ 우리 잠깐 얘기 좀 하자. 티무르 보리소비치! 애들 연습 좀 시켜주세요. 저쪽 투우사 애들 끝나면 집시들 춤 좀 봐주시고요. 안나 니콜라예브나, 무희 칼춤이랑 메르세데스 상체 동작 교정 부탁드려요. 전 10분만 얘기 좀 하고 올 테니까. 야, 가릭! 망토 놓치지 말고!

 

 

 

*    *    *

 

 

 

 

왕재수는 베르닌을 데리고 1층으로 내려가더니 구불구불한 복도를 돌아 분장실로 갔다. 문을 잠그더니 번개같이 화장대 위로 기어 올라가 거울 후면과 천정, 전등 주위를 살폈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 야, 너 뭐해? 도청장치라도 찾냐? 여긴 없어. 감독실, 접견실, 극장장실에만 있어. 여기 도청 보고서도 내가 받아서 정리하잖아. ”

 

“ 바보. 더 있어. 백스테이지에 두 개 있고 로열박스에 하나, 제2 연습실에 하나 있다고. 스페호프가 매수한 녀석이 지난주에 추가로 붙여놨어. 있는 거 다 알면서 모르는 척 해주는 거라고. 그래야 그 개자식이 안심하지. 분장실에도 하나쯤 있을 법한데, 여긴 메인이 아니니까 없을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

 

왕재수는 방 안 전체를 샅샅이 뒤진 후 고개를 끄덕였다.

 

 

“ 됐다. 이제 얘기하자. ”

 

“ 대체 뭔데 그래! 바빠 죽겠는데 불러내더니 도청장치나 검사하고! ”

 

“ 너 나 좀 도와줘. 지금 너 밖에 없어. 부탁이야. ”

 

“ 어... 뭔데? ”

 

“ 도와준다고 약속해줘. 제발. ”

 

“ 뭔지를 알아야 약속을 하지! ”

 

“ 너 나 안 도와줄 거야? 나 정말 큰일이란 말이야. 제발... ”

 

 

왕재수가 울상이 되어 그를 쳐다보았다. 또 사슴 같은 눈망울이 되어 눈물을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그거 하지 말라고 했잖아! 나한텐 안 통한다고!

 

“ 접때 보니까 쪼금 살짝 통하는 것 같던데... ”

 

“ 아니야! 안 통해! 솔직히 말을 해줘야 도와주든 말든지 할 거 아냐! ”

 

“ 일요일 공연. 거기 좀 출연해 줘. ”

 

“ 뭐야?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

 

“ 역이 하나 비어. 너 말고는 도저히 생각이 안 나. 제발 부탁이야. 제발... 너네 국장이 공연 망치려고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임기응변으로 지금 다 때려 막는 중인데 죽어도 하나가 해결이 안 돼. 너뿐이야, 다닐. 부탁이야. ”

 

 

베르닌은 완전히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다가 스페호프가 그를 비밀 모니터링 요원으로 급파한 것이 생각났다.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보았지만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 일요일 공연 얘기야? 그거 잘 준비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 무슨 역이 빈다는 거야? 우리 국장은 또 뭐고? 뭘 때려 막아? ”

 

“ 일요일 공연에 모스크바랑 레닌그라드에서 국회의원들 온다고 했잖아. 내 후원자들이었다고. 내가 여기 애들 손봐서 올리는 돈키호테 궁금해서 오는 거잖아. 너네 국장이 그 꼴 보기 싫어서 제대로 방해공작 펴고 있단 말이야. 이번 달 내내 검열국이랑 손잡고 장난 아니었어. 그래도 내 능력으로 잘 헤쳐 왔는데 그 자식이 막판에 제대로 한 방 먹였다고. 일요일 공연 못 올릴 지경까지 갔었어. 지금도 억지로 땜질하고 있는 거야. ”

 

“ 어, 난 이해가 안 되는데. 우리 국장은 공연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알지도 못하는데 뭘 어떻게 방해한다는 거야? 아까 보니까 무용수들 열심히 연습하고 있던데. 검열국에서 이념 문제로 걸어서 승인 안 해준다는 거야? 그 신작처럼? ”

 

“ 아니, 이건 고전 발레라서 이념 문제가 나올 여지가 없어. 볼쇼이랑 키로프에서도 최고 인기 레퍼토리거든. 그런 걸로 안 되니까 그 자식이 머리를 굴렸어. 문화국이랑 농업국을 매수해서 일요일 출연 주역들하고 주요 조역들을 집단농장 투어에 보냈단 말이야. ”

 

“ 어, 나도 그거 알아. 무슨 협조 공문 있었어. 근데 그건 화요일에 갔다가 벌써 돌아온 거 아냐? 공연은 일요일이잖아. ”

 

“ 화요일에 갔었지. 원래대로면 어제 돌아왔어야 돼. 어쩐지 불길해서 내가 걔들 못 가게 하려고 극장장한테 얼마나 화를 냈는데. 극장장이 날 어르고 달래면서 자매도시에서 요청한 건데 어떻게 안 보내느냐고, 애들 목요일 저녁에 돌아오니까 걱정 말라고 애걸을 했어. 난 끝까지 안 보내려고 했는데 그러면 애들 서류에 빨간 줄 간다고 해서 할 수 없이 보냈거든. 근데 그게 다 너네 국장 음모였단 말이야. 애들 지금 거기서 못 나와. 일요일까지 꼼짝도 못해. ”

 

“ 아니, 왜? 어디로 갔는데? ”

 

“ 스네고로드! ”

 

“ 헉, 스네고로드? 맙소사... ”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야 왕재수가 왜 국장의 음모 운운하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스네고로드는 가브릴로프에서 기차로 10시간, 버스로는 15시간 거리에 있는 조그만 집단농장 촌이었다. 시골 동네라 공항은 물론 없었다. 제일 가까운 공항이 가브릴로프 공항이었다. 거기까지 가는 교통수단은 기차와 버스뿐이었다. 커다란 산을 네 개 넘어야 했다. 문제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폭설이 밥 먹듯 오는 동네라는 거였다. 한 번 눈이 오면 어마어마하게 왔고 걸핏하면 도로가 막혀서 고립되곤 했다.

 

 

“ 뉴스 봤어. 거기 지금 눈 장난 아니던데. 수요일 밤부터 어마어마하게 내리고 있잖아. 주말까지 온다던데. ”

 

“ 그러니까. 다 알고 보낸 거야. 더러운 놈들. 길 다 막혔어. 눈이 2미터가 넘게 왔대. 심지어 거기 농장들도 무슨 축대가 무너지고 가축이 파묻혀서 주민들 손이 모자라서 우리 애들도 전부 동원돼서 눈 치우고 있대. 아아... 무용수들이 심지어 눈까지 치우고... 근육 미워지는데. 걔들 죽었다 깨나도 일요일까지 못 돌아와. 더러운 스페호프 자식... 아... ”

 

 

왕재수가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탄식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내 잠도 못 자고 쉬지도 못하면서 공연을 준비했는데 타격이 클 것 같았다. 문득 그는 몇 달 동안 왕재수를 감시하면서 주워들었던 게 생각났다.

 

 

“ 어, 근데 원래 한 작품에는 두 명 이상 캐스팅하지 않아? 오늘 빅토르가 나오면 내일 데니스가 나오고. ”

 

“ 응. 네 말이 맞아. 백조의 호수처럼 자주 올라가는 건 주역이 여러 명 있어서 돌아가면서 맡아. 이번 것처럼 처음 올라가는 건 일단 더블 캐스팅으로 두 명 준비하고는 있었어. 더 하고 싶어도 원체 애들 역량이 딸려서 어려웠거든. 근데 망할 놈들이 대역까지 다 데려갔어. 바질, 키트리, 투우사, 무희, 요정, 돈키호테... 그나마 바질 대역 하나는 남아서 불행 중 다행이야. 군무진도 3분의 1이나 데려갔어. 땜빵 못하게 하려고 한 거야. ”

 

“ 어... 근데 바질은 뭐고 키트리는 뭐야? 투우사는 뭐고? 돈키호테가 주인공 아니야? ”

 

“ 휴... ”

 

 

왕재수는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굉장히 지친 듯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 그래, 뭐... 발레 모르면 그럴 수도 있지. 발레 돈키호테의 주인공은 바질이라는 이발사하고 키트리라는 선술집 딸이야. 둘이 좋아하는 사이인데 바질이 가난하니까 키트리 아빠가 딸을 나이 많고 멍청한 부자한테 시집보내려고 하는 거야. 그래서 바질은 키트리를 잃느니 죽어버리겠다면서 칼로 자살하는 척 하거든. 바질이 죽은 줄 알고 키트리 아빠가 둘의 사랑을 허락하니까 바질이 짠하고 살아나는 거야. 그래서 마지막에 키트리랑 바질이 결혼하고 다들 축하해주면서 끝나.

너도 잠자는 미녀나 호두까기 같은 건 봤잖아. 마지막에 주역 남녀가 결혼식 춤 멋있게 추는 거. 거기에 투우사랑 거리의 무희, 메르세데스가 근사한 춤도 추고. 집시들도 나오고 키트리 친구들 바질 친구들 등등이 군무도 추고 그래. 중간에 돈키호테가 보는 환상 속에서는 요정들도 나오고. 근데 너네 국장은 발레랑 담 쌓아서 바질이 주인공이란 건 몰랐나봐. 바질 역 한 명은 남겨놨더라고. ”

 

“ 그렇구나. 아 복잡해. 근데 아까 보니까 애들 데리고 연습하고 있었잖아. 어떻게 된 거야? 다 끌려갔다며. ”

 

“ 억지로 땜빵하고 있는 거야. 남은 애들 중에 그나마 좀 될 거 같은 애들 뽑아서 부랴부랴 연습시키고 있다고. 군무 모자라는 건 발레학교 고학년들로 채워서 맨 뒤에 세울 거야. 메인 투우사도 군무 투우사 중에서 그나마 젤 키 크고 스타일 좋은 애로 급조하고. 그게 가릭이야. 근데 너무 뻣뻣해서 다른 애로 갈아야 할지 고민이야. 하여튼 걜 뽑아내는 바람에 투우사도 원래 8명인데 6명으로 줄여버렸어. 키트리랑 무희랑 메르세데스랑 숲속 여왕이랑 어제 대역 뽑아서 어찌어찌 땜질하고 있는데 진짜 절망적이야. 그나마 바질이 있어서 다행이야, 초연 시키려던 앤 아니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으니까. 돈키호테는 원래 주역들만 좀 잘 춰주면 그래도 커버되거든. ”

 

“ 어, 그럼 어쨌든 땜질해서 공연은 올릴 수 있는 거잖아. 근데 왜 그렇게 다급하게 전화한 거야? 국장한테서 정보 빼내달라고? ”

 

“ 아니, 그게 아니고. 다른 역은 어떻게든 제2솔리스트랑 코리페에서 뽑아서 다 쑤셔 넣었는데 하나가 죽어도 안 돼. 그래서 네가 필요해. 그 역 좀 맡아 줘, 제발. ”

 

야, 난 춤이라곤 한 번도 춰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대역을 맡니!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

 

아니야, 그 역은 춤 안 춰. 마임만 좀 하면 돼. 진짜 중요한 역이야. 제발. ”

 

“ 춤도 안 추는데 뭐가 중요한 역이라는 거야? 대체 뭔데? ”

 

돈키호테.

 

엥, 돈키호테? 그럼 주인공... 너 미쳤냐?

 

“ 어휴, 너 내 말 제대로 안 들었지. 주인공은 바질이랑 키트리라니까. 여기서 돈키호테는 춤 안 춰. 그냥 얘기를 이끌고 가는 사람이야. 돈키호테가 처음에 환상의 여인 둘시네아를 그리면서 기사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길을 떠나는 걸로 시작하는 거야. 그래서 스페인의 어느 마을 광장에 왔다가 바질이랑 키트리의 사연을 알게 되는 거고. 나중에 바질이 자살 쇼 했을 때 걔들을 도와서 키트리 아버지에게 결혼 허락하라고 협박해서 둘의 사랑을 이루어주는 역할이란 말이야. 춤은 없어. 그냥 갑옷 입고 창 들고 위엄 있게 걸어 다니고 손가락질 좀 하고 요정들 환상 볼 때 팔 뻗으며 허우적거리고 결혼식장에서도 바질이랑 키트리 축복해주면 된다고. 중간에 집시들 장면에서 연극을 진짜로 착각하고는 인형극장 뒤집어엎고 풍차에 달려드는 연기만 조금 하면 돼. 안 어려워. 넌 잘 할 수 있어. ”

 

“ 아니, 잠깐! 누가 한대? 그리고 안 어려운 거면 다른 사람 시키면 되잖아, 왜 할 사람이 없다는 거야! 심지어 춤도 안 춘다며. ”

 

“ 중요한 조건이 하나 있어. 돈키호테는 키가 커야 해. 위엄도 있어야 하고. 근데 지금 남은 애들 중엔 키 큰 애가 없어. 큰 애들은 투우사 춰야 되거든. 나머지는 다 스네고로드에 끌려갔고. 드라마 극장에서 빌려볼까 했는데 거기도 지금 연수 가서 딱 맞는 사람이 없어. 아무리 안 돼도 180은 넘어야 한다고. 너밖에 없어, 다닐. 넌 키도 크고 어깨도 넓고 허우대도 좋잖아. 딱 돈키호테야.

 

“ 싫어. 나 그런 거 못해. 학교 다닐 때도 연극 한 번 안 해 봤는걸. 알잖아, 나 책상물림인 거. ”

 

“ 괜찮아, 그냥 무대에만 올라가주면 돼. ”

 

“ 야, 바이올린 아저씨 있잖아! 키 엄청 크잖아! 그 인간 시켜! ”

 

로만은 절대 안 돼. 그 사람은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잖아. 가뜩이나 우리 오케스트라는 실력이 별로인데 돈키호테는 너무 오랜만에 연주하는 거라서 로만이 빠져버리면 진짜 덜컹거릴 거야. 무용수들 안 그래도 지금 다 초짠데 음악 삐걱거리면 더 망한다고. 부탁이야, 다닐. 네가 안 도와주면 이 공연 못 올려. 나 이거 올리려고 진짜 노력했어. 땜빵으로 들어온 애들도 처음으로 중요한 역 맡았다고 엄청 의욕 충천해 있다고. 제발. 나 정말... ”

 

 

왕재수가 베르닌의 손목을 붙들고 매달렸다. 얼굴이 창백하고 눈이 퀭했다. 왕재수가 다른 건 몰라도 극장 쪽 일이라면 죽어라고 노력한다는 것을 아는 베르닌은 그만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 어, 알았어. 진짜 그냥 올라가기만 하면 되는 거지? ”

 

“ 고마워, 다닐! 진짜 고마워! 올라가기만 하면 돼. 분장 좀 하고. 연기는 지도 좀 받으면 되고... 풍차 매달리는 것만 잘하면 돼. ”

 

앗, 잠깐! 왜 말이 달라지는데! 연기 지도는 뭐고 풍차 매달리는 건 뭐야! ”

 

“ 그럼 무대 위에 올라가서 뻣뻣하게 서 있을래? 극 전개를 위해 최소의 연기는 해야지. 걱정하지 마, 티무르 보리소비치가 잘 가르쳐줄 거야. 풍차는... 돈키호테니까 풍차랑 싸우는 장면이 잠깐 있어. 그냥 소품용 창 들고 풍차로 돌진해서 끝을 붙잡으면 풍차가 돌아가면서 조금 올라갈 거야. 많이도 안 올라가. 반쯤 올라가면 커튼 내려올 거거든. 좀 과장되게 허우적대기만 하면 돼. ”

 

“ 어... 나 자신 없어... ”

 

“ 아니야, 할 수 있어. 나 사실 맨 처음에 너 봤을 때부터 돈키호테 세워보고 싶었어. 돈키호테는 이상주의자에 착한 사람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너랑 어울려. 잘 할 수 있어. ”

 

“ 으응, 너 지금 나 칭찬하는 거야? ”

 

“ 칭찬까지야. 그냥 이미지가 비슷하단 얘기야. ”

 

“ 근데 왜 돈키호테는 대역이 없어? 춤도 안 추는 역인데? ”

 

“ 그게... 스페호프도 너처럼 생각했나봐. 제목이 돈키호테니까 돈키호테가 주인공인 줄 알았는지 더블 캐스팅된 애들 두 명 다 스네고로드로 보내버렸어. 멍청이. 다행이지 뭐. 바질만 있으면 그래도 최악의 재앙은 아니니까. ”

 

“ 바질이 그렇게 중요해? 원래 여주인공이 제일 중요한 거 아니야? ”

 

“ 돈키호테는 좀 달라. 투우사들도 나오고 남자들 춤이 볼만하거든. 특히 바질이 화려한 테크닉을 많이 보여줘. 점프도 하고 회전도 하고 여자를 막 한 손으로 들고. 그래서 바질만 잘 뛰고 투우사가 망토만 잘 돌려줘도 공연 체면은 살릴 수 있거든. 스페호프가 그걸 몰라서 다행이야. ”

 

 

베르닌은 스페호프의 명령을 생각했다. 갑자기 불안해졌다.

 

 

“ 저기, 있잖아. 국장이 이 공연 망치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잖아. 난 너 감시요원인데... 내가 너 도와서 무대 올라가는 거 들키면 나 잘릴 거야. 벌목공도 못하게 될... ”

 

아니야! 절대 그런 일 없게 할 거야! 분장하면 돼! 넌 줄 모르게 해줄게! 그건 걱정하지 마! ”

 

“ 하지만... 정말 나인 줄 모를까? ”

 

“ 모른다니까. 너 전에 나타샤 보러 파티 갔을 때 내가 꾸며주니까 국장이 못 알아봤다고 했잖아. 무대 분장은 훨씬 더 정교하다고. 투구도 쓰고 콧수염도 달 거라서 진짜 못 알아봐. 우리 무용수들도 못 알아보게 해줄게. 혹시라도 스파이가 있을지 모르니까... 지금 나랑 분장사한테 가자. 콧수염 붙이고 눈썹만 좀 그려놔도 넌 줄 모를 거야. ”

 

 

왕재수는 전화를 했다. 잠시 후 나이든 분장사인 타치야나가 나타났다. 왕재수가 빠르게 설명을 하자 타치야나가 끄덕끄덕했다. 베르닌의 얼굴을 잠시 살피더니 연필과 붓을 꺼내 눈썹 위로 슥슥 문질렀다. 아주 짙은 일자 눈썹을 만들어 놓았다. 머리털 위로 스프레이를 좍좍 뿌려서 검은 머리를 희끗희끗하게 바꾸었다. 그러더니 콧수염을 붙였다. 10분 만에 손뼉을 딱 쳤다.

 

 

“ 됐네! 감쪽같지? 완전 딴 사람 됐어. ”

 

“ 정말이네요, 역시 누님 실력은 대단해요. 비밀로 해주시는 거 알죠? ”

 

“ 당연하지, 우리 미셴카가 부탁하는데. 일요일 공연 땐 제대로 분장할 거니까 얘 부모님이 와도 못 알아볼 거야. ”

 

 

베르닌은 거울을 보았다. 새치가 가득한 머리칼에 일자 눈썹, 콧수염을 기른 어딘지 우스꽝스러운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열 살은 늙어보였다! 베르닌은 이왕 분장을 해주는 김에 좀 잘생기게 바꿔주면 안되나 싶었지만 어쨌든 스페호프가 못 알아볼 거라는 생각은 들었다. 타치야나가 나간 후 왕재수가 베르닌을 찬찬히 뜯어보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 생각보다 더 괜찮네. 무대 분장하면 진짜 돈키호테 같겠어. 그럼 이제 이름을 지어야지. ”

 

“ 이름이라니? ”

 

“ 네 이름 그대로 쓰면 국장한테 들키잖아. 주역들은 프로그램 팸플릿이랑 포스터에도 이름 박혀. 지금 빨리 정해야겠다, 오늘 오후에 인쇄 맡길 거니까. ”

 

“ 춤도 안 추는데 왜 내 이름까지 들어가? ”

 

“ 그래도 중요 인물이니까 이름 들어가야 돼. 그리고 애들이랑 같이 연습도 해야 되는데 네 이름 부를 순 없잖아. 걔들도 넌 줄 몰라야 되는데. ”

 

“ 아, 그럼 예명이구나. 뭐라고 해야 멋있을까. ”

 

 

베르닌이 잠시 멋진 영화배우들을 떠올리며 이름을 궁리하고 있는데 왕재수가 손뼉을 딱 쳤다.

 

 

푸고비체프! 하를람피 푸고비체프!

 

야! 그게 뭐야! 절대 싫어! 어디서 그런 이름을... ”

 

“ 왜! 딱인데! ”

 

“ 예명인데 멋있게 지어야지! ”

 

안 돼! 이름 멋있으면 눈에 띈단 말이야. 시골이니까 촌스럽게 지어야 돼! ”

 

그래도 푸고비체프가 뭐야! 어째서 성에 단추가 들어가는데!

 

“ 됐어, 그냥 푸고비체프 해. 돈키호테는 원래 코믹한 역이니까 이름도 좀 웃긴 게 좋아. ”

 

 

베르닌은 항의했지만 왕재수는 굽히지 않았다. 결국 두 손을 든 베르닌은 이름이라도 건져보려고 애걸했다.

 

 

“ 푸고비체프도 모자라서 하를람피가 뭐야... 완전 할아버지 이름이잖아. ”

 

“ 푸고비체프랑 어감도 딱 맞고 좋은데 뭘. 싫으면 아파나시, 니키포르... ”

 

으윽, 그것도 다 촌스러운 이름이잖아. 이름은 그냥 내 이름 쓰면 안 돼? ”

 

“ 안 돼! 꼬리 잡히면 안 되잖아! 하를람피, 아파나시, 니키포르... 아, 그래. 판텔레이몬! 네 개 중에 골라! ”

 

“ 야, 넌 대도시에서 왔다고 으스대는 놈이 어떻게 그런 촌티 나는 이름들만 쏙쏙 뽑아내는 거야! ”

 

“ 아 정말, 나 시간 없어. 애들 가르쳐야 돼! 너도 당장 가서 티무르 보리소비치한테 연기 배워야 되고. 그냥 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 끝!

 

 

졸지에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베르닌은 울상이 되어 왕재수를 따라 연습실로 갔다.

 

 

 

*    *    *

 

 

 

 

왕재수는 베르닌을 지도 교사이자 발레마스터인 티무르 이즈마일로프에게 넘겨주었다. 일반인이라 연기나 춤은 전혀 모르니 돈키호테를 소화할 수 있도록 속성으로 지도해달라고 했다. 이즈마일로프는 체구도 작고 온화한 인상에 이미 예순도 넘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내심 안심했다. 설마 왕재수처럼 사람을 들들 볶겠느냐 싶었다.

 

그러나 첫인상은 사기였다. 이즈마일로프는 그야말로 호랑이 선생이었다! 베르닌은 자세부터 교정을 받아야 했다.

 

 

“ 전 춤을 안 추는데 왜... ”

 

“ 춤을 추든 마임을 하든 무대에 올라가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세가 똑바르고 꼿꼿해야 돼! 어깨가 왜 이리 구부정하담. 똑바로 펴고 고개 들고! 걸을 때도 마찬가지야! 다리를 이렇게 들어! 기사답게! ”

 

 

베르닌은 몇 시간 동안 자세와 걸음걸이 교정을 받았다. 그 이후 기본적인 마임을 배웠다. 엄청나게 어려웠다. 무대로 볼 때는 그냥 지나쳤던 손동작과 몸짓들에 그렇게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니 놀라웠다. 그는 책상물림이라 암기는 금방 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머리와 몸이 따로 논다는 데 있었다. 이즈마일로프는 그를 가르치랴 동시에 다른 무용수들을 교정하랴 정신이 없었다.

 

베르닌이 절망하고 있는데 바질과 키트리를 데리고 연습하던 왕재수가 힐끗 그를 보더니 옆으로 왔다.

 

 

“ 잘 돼가? ”

 

“ 아니, 나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나 때문에 공연 망치면 어떡해. 다른 사람 구하면 안 되니? 마임은 배웠는데 나 너무 몸이 뻣뻣한 거 같아... 생각처럼 안 돼. ”

 

“ 한 번 해봐. 키트리 만나서 둘시네아로 착각하는 장면. ”

 

 

베르닌은 쭈뼛거리다가 토냐를 상대로 동작을 시연했다. 너무 어색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왕재수는 유심히 지켜보았다.

 

 

음, 넌 몸이 뻣뻣한 게 문제가 아니야. 동작이 너무 작아서 그래. 무대에서는 네 생각보다 두 배로 동작을 크게 해야 돼. 표정도 그렇고. 이거 봐. ”

 

 

왕재수가 토냐를 바라보더니 깜짝 놀랐다가 홀린 표정을 지었고 무릎을 꿇으며 절을 한 후 그녀의 손등에 키스를 했다. 베르닌은 그가 멋진 왕자님이 아니라 꿈에 취해 머리가 살짝 이상해진 노인네 돈키호테처럼 보이는 것에 깜짝 놀랐다.

 

 

“ 웃기게 보일까봐 걱정하지 말고 다시 해봐. 웃기게 보이면 더 좋은 거야. 무대는 현실이 아니야. 아무도 너를 몰라. 그러니까 마음을 그냥 놔.

 

 

이상하게 왕재수의 그 말이 위로가 되었다. 베르닌은 다시 해보았다. 왕재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 잘했어. 아까보다 훨씬 나아. 이쪽으로 와서 거울 보면서 연습해. 네 모습을 보면서 하면 어디를 어떻게 고쳐야 할지 보일 거야. ”

 

 

베르닌은 왕재수에게서 칭찬을 들어본 적이 거의 없었던 데다 아무리 봐도 자신의 연기가 엉망이었으므로 좀 멍해졌다. 하지만 용기가 생겼다. 그래서 다시 열심히 연습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왕재수는 바쁘게 연습실을 오가면서 무용수들에게 차례로 동작을 가르치고 연습을 시키고 교정하고 뭔가 베르닌은 이해할 수 없는 용어로 지시를 내렸다. 프랑스어가 난무했다. 무용수들은 강행군에 지쳐서 허덕댔지만 의외로 왕재수의 지시에 잘 따르는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새 다섯 시가 되었다. 왕재수는 무용수들에게 저녁을 먹고 오라고 했다. 퇴근은 없었다! 최소 일곱 시까지 모두 모이라고 했다. 키트리와 투우사, 바질은 심지어 여섯 시까지 오라는 것이었다. 무용수들이 한숨을 쉬며 우르르 몰려나간 후 베르닌은 왕재수의 곁으로 갔다.

 

 

“ 야, 넌 밥 안 먹어? ”

 

“ 별로 생각이 없어. 너 빨리 가서 먹고 와. 있다가 꿈 속 요정 장면이랑 바질 자살 쇼 연기 좀 가르쳐줄게. ”

 

“ 너 그러다 쓰러져. 당장 밥 먹으러 가자! 극장이랑 박물관 사이에 있는 그 식당 가면 되잖아. ”

 

시간이 없어. 선술집이랑 결혼식, 요정 장면에서 사람이 줄었으니까 안무랑 무대 배치를 조금씩 수정해야 돼. 아무도 없을 때 머리 좀 굴려보려고. ”

 

안 돼! 굶고서 무슨 머리를 굴려! 지금 밥 먹으러 안 가면 나 무대 안 올라가! 뱀 껍질...

 

“ 미워... ”

 

 

왕재수는 손등으로 이마를 문지르더니 할 수 없이 베르닌을 따라 나갔다. 베르닌은 왕재수를 식당에 앉혀놓고 주문을 한 후 급하게 드라마 극장 앞 공중전화로 갔다.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스페호프가 받았다.

 

 

“ 그래, 어떻게 됐나? 불여우는 어떤가? ”

 

“ 어, 저... 완전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무슨 스네고로드가 어떻고 주역들이 다 못 나오고 하면서... ”

 

그래! 그래야지! 공연은 취소한다던가? ”

 

“ 저, 그건 아닌 것 같고요. 연습을 하고는 있습니다만... 잘 안 되는 분위기입니다. ”

 

“ 알았네. 제깟 게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봤자. ”

 

 

스페호프는 몇 가지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베르닌은 진땀을 흘리며 대충 둘러댔다.

 

 

좋아. 계속 감시하고 내일 다시 전화로 보고하게. 그러고 보니 하나 놓친 게 있긴 한데 뭐 문제없어. 그건 밤에 해결될 테니까. 수고하게. ”

 

 

그는 전화를 끊고 식당으로 돌아갔다. 어딘지 찜찜했지만 너무 배가 고팠기 때문에 음식이 나오자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살랸카와 햄 치즈 롤을 미친 듯이 흡입했다. 그러다 왕재수를 보니 역시나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베르닌은 엄격한 말투로 경고했다.

 

 

“ 그거 다 먹어. 지금. ”

 

“ 많이 먹었어. ”

 

“ 뭐가 많이 먹어! 게살 샐러드랑 흑빵 한 조각밖에 안 시켰잖아. 한 숟갈 밖에 안 떴잖아! ”

 

“ 다닐, 공연 망치면 어떡하지. ”

 

으잉? 너 그 걱정 때문에 못 먹고 있는 거야? 너 천재잖아. 여태 잘했잖아. ”

 

“ 나야 천재지. 하지만 공연은 나 혼자 하는 게 아니잖아. 이건 그러니까... 축구팀 전체가 다 빠져서 2군도 아니고 3군으로 경기에 내보내는 거 같은 거야. ”

 

“ 너 축구 모르잖아! 축구랑 달라. 걱정 말고 먹어. 할 것도 많은데 먹어야 기운을 차리지. 이러다 네가 아프기라도 해봐, 공연 진짜 못 올려. ”

 

“ 그렇긴 하지. ”

 

 

왕재수는 게살 샐러드를 긁어 먹고는 버터도 없이 흑빵을 맨 입에 쑤셔 넣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공연 때문에 그렇게 수심에 잠긴 모습을 처음 봤기 때문에 의아했다.

 

 

“ 너 높은 사람들 오는데 망칠까봐 걱정돼서 그래? 이번에 잘하면 레닌그라드로 돌아갈 수도 있는데 안 될까봐? ”

 

“ 아니. 기껏 이런 걸로 날 돌려보내 주지야 않겠지. 그건 기대도 안 해. 그보다도... 공연이란 건 관객들을 위한 거야. 5년 만에 처음 보여주는 건데... 극장에 와주는 사람들한테 발레도 재미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열심히 준비했던 건데 망치고 싶지 않아. 그것도 더러운 KGB 앞잡이랑 검열국의 개들 때문에 접고 싶진 않단 말이야. ”

 

“ 꼭 내 앞에서 그렇게 말해야겠냐. 나 KGB인데. ”

 

“ 너는 다르지. ”

 

 

왕재수는 자기 앞에 놓인 우유 컵은 무시하고 베르닌의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 베르닌은 그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 너 차 그만 마셔. 아까도 계속 마시는 거 봤어. ”

 

“ 아니 왜 이제 차까지 못 마시게 하는 거야! ”

 

“ 의사가 카페인 줄이고 우유 마시랬잖아! ”

 

“ 어떻게 그런 것까지 다 알아? 앞잡이... 앞잡이. ”

 

“ 의사 선생님이 너 책상 앞에 써놓고 갔잖아! ”

 

“ 일요일까지만 좀 봐줘. 비상사태니까. 차라도 안 마시면 정신 못 차릴 것 같아. 밥 먹으니까 너무 졸려. ”

 

“ 그렇겠지. 쉬어야 되는데 강행군하고 있으니. 너무 완벽하게 해낼 생각을 버리면 되잖아! 정 안 되면 그냥 공연 미뤄. 그 후원자들한테 사정 얘기하면 이해해 줄 거고. ”

 

너는 이 바닥 사람이 아니니까 이해 못해! 공연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건 내 책임이야. 문제가 일어나면 그걸 해결하는 것도 감독이 해야 할 일이고. 공연은 취소할 수 없어. 관객과의 약속이고...

 

“ 아, 어려워. 맨날 싸가지 없게 굴고 자기만 아는 놈이 그놈의 공연 얘기만 나오면 거품을 무니. 하여튼 우유 마셔. 걱정하지 말고. ”

 

 

왕재수는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차 대신 우유를 마셨다. 극장으로 들어가는 길에 베르닌은 키오스크에서 사과를 한 알 샀다. 옷자락에 슥슥 닦아서 왕재수에게 먹으라고 주었다. 왕재수는 지저분하다면서도 사과를 반으로 쪼개서 한쪽 먹고 남은 한쪽은 베르닌에게 주었다.

 

 

“ 난 밥 많이 먹었어. 너 다 먹어. 그래야 무용수들한테 또 소리 지르지. ”

 

“ 오늘 봄이 왔으면 좋겠어. 그럼 눈 녹아서 주역들이 돌아올 텐데. ”

 

“ 지금 애들 열심히 연습하잖아. 걔들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주역들 돌아오면 바꾸겠다고 그렇게 쉽게 얘기하고. ”

 

“ 걔들한테야 당연히 고맙지. 하지만 무대는 고마운 걸로만 되는 게 아니니까. 실력이 우선이라고. 에이, 걱정해봐야 무슨 소용이야. 연습하면 되겠지. 하여튼 들어가자. 고마워, 하를람피. ”

 

야! 그 이름 좀 부르지 마. 아까 네가 소개해줬을 때 애들 다 웃었어!

 

“ 그러니까 성공이지. ”

 

 

베르닌은 왕재수와 함께 연습실로 갔고 또 열심히 이것저것 배웠다. 열 시가 되었을 때 왕재수가 그에게 집에 가라고 했다.

 

 

“ 너는! ”

 

“ 난 요정 군무만 좀 더 잡아주고 갈게. 티무르 보리소비치가 태워다 주신댔으니까 빨리 가. 내일도 연습할 거 많으니까 빨리 가서 쉬어. ”

 

 

 

그래서 베르닌은 집에 갔다. 샤워를 하자마자 그대로 뻗었다. 곤하게 자다가 새벽 두 시에 퍼뜩 깼다. 왕재수의 집으로 가보았다. 물론 텅 비어 있었다.

 

 

“ 에이, 이 망할 자식. ”

 

 

그는 차를 몰고 극장으로 갔다. 연습실 불은 다 꺼져 있었기 때문에 감독실로 가 보았다. 왕재수가 소파도 아니고 카펫 바닥에 엎드려서 자고 있었다. 요정 군무 배치도를 휘갈겨 그려놓은 종이가 옆에 나뒹굴고 있었다. 베르닌은 그의 어깨를 살살 흔들면서 깨워보았다.

 

 

“ 야, 일어나. 집에 가게. ”

 

“ 으응... 나 안 자. 일하고 있어. ”

 

“ 뭐가 일하고 있어! 미쳤냐, 이러다 또 얼마나 아프려고! ”

 

“ 안 잔다고... ”

 

“ 잠꼬대도 어쩌면 이렇게 진짜같이 하냐. ”

 

 

베르닌은 왕재수를 코트로 둘둘 말아서 등에 업고 차로 갔다. 찬바람을 맞으면서도 깨지 않는 것을 보니 정말 피곤했던 것 같았다. 왕재수를 침대에 뉘어주고 이불을 덮어준 후 베르닌은 자기 방으로 돌아갔고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FIN

- 2015. 4. 5 ~ 4. 9 -

 

 

 

...

 

이야기는 20편으로 이어진다. 과연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베르닌이 제대로 무대에 올라가 돈키호테 역을 소화할 수 있을지!!!

 

..

 

맨처음에 언급했듯 푸고비차 는 노어로 단추란 뜻이다. 그러므로 푸고비체프는 '단추남'~ (진짜 있는 성이다!)

하를람피를 비롯해 왕재수가 언급하는 이름들은 다들 좀 노티나는 이름들임 :)

 

..

 

스페호프가 공연을 망치려고 무용수들을 보낸 곳인 '스네고로드'는 러시아어로 '눈'을 나타내는 '스네그'와 '도시'를 나타내는 '고로드'를 합성해 내가 만든 이름이다. 한마디로 눈의 도시!! 그러니 폭설에 갇힐 수밖에 :)

 

..

 

왕재수가 준비하고 있는 발레 '돈키호테'는 우리 나라에서도 국립발레단이나 유니버설발레단이 종종 공연한다. 고전발레라면 하얀 의상 입은 발레리나들이 우아하게 포즈 취하는 좀 지루한 무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진입장벽을 낮추기 위해 권해드리는 발레이다. 일단 음악도 흥겹고, 스페인풍 의상과 춤도 신나고, 망토를 펄럭이는 투우사들은 남성적이고 화려하고, 군무도 신이 나고, 주역인 바질과 키트리의 춤도 흥겹고 화려하다.

 

미하일 바리쉬니코프가 미국으로 망명해서 ABT에서 돈키호테를 올리고 지금도 성황리에 공연되고는 있지만, 각국 내노라하는 발레단이라면 이 레퍼토리를 보유하고 있지만 그래도 최고는 역시 마린스키 발레단이다. 오죽하면 옛날부터 마린스키의 트레이드마크로 백조의 호수와 돈키호테를 꼽았을까.

 

이 시리즈와 본편에서 왕재수 미샤는 마린스키 극장의 소련 시절 이름인 키로프 극장 출신의 톱스타였기 때문에 물론 마린스키 버전의 돈키호테를 준비하고 있다. 당연히 촌도시 가브릴로프 극장의 수준은 키로프와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ㅠㅠ

 

원래 본편의 가브릴로프 이야기에서도 미샤는 극장 레퍼토리를 확장하고 관객들의 발레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오랫동안 사장되어 있었던 돈키호테를 부활시킨다... 사실 아직 그 부분까지는 쓰지도 못했는데 대신 서무 시리즈에서 쓰고 있네. (이게 뭐야.. 엉엉 주객전도) 물론 본편에서는 돈키호테 올릴 때 이런 스네고로드 사건이나 무용수 땜빵 등은 안 일어난다만..

 

..

 

베르닌이 맡게 되는 돈키호테가 어떤 모습인지, 그는 어떤 연기를 해야 하는지 등은 이 다음 포스팅에 따로 사진과 영상을 올려보겠다~

그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694

 

여기서는 사진 하나만~~

 

요런 모습. 중간에 있는 키 큰 검정옷 차림 남자가 돈키호테. 마린스키 발레단의 바짐 벨랴예프.

왼편 키작고 땅딸막한 남자는 산초. 오른편 노란색 의상의 우스꽝스러운 남자는 키트리에게 청혼하는 부유한 얼간이 가마슈.

 

..

 

 

댓글은 언제나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

 

 

:
Posted by liontamer
2015. 4. 29. 15:53

부드러운 빛에 잠긴 페테르부르크 russia2015. 4. 29. 15:53

 

 

오늘은 내내 비가 온다. 더운 것보단 낫지만 퇴근할 땐 그쳤으면 좋겠다.

비오니까 맑은 날씨의 페테르부르크 사진 몇 장.

이건 2013년 9월에 갔을 때 찍은 사진들이다.

원로원 광장, 가운데 멀리 청동기사상이 보인다 :) 여기는 내가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사랑하는 장소 중 하나다.

 

 

 

 

 

원로원 광장에서 에르미타주 박물관까지 이어지는 네바 강변의 도로와 공원.

 

 

연두색과 초록색 잎사귀들 사이로 빛이 일렁이는 광경은 정말 좋다. 언제 봐도 좋다.

 

 

 

잎사귀 사진만 잔뜩 있었으니 마지막은 보너스로 네바 강 사진.

구름이 뭉게뭉게~

구름 때문에 네바 강은 짙은 코발트 블루로 보였다. 물결도 넘실넘실..

왼편부터 쿤스트카메라 건물. 그리고 등대. 궁전 다리. 맨 오른쪽에 보이는 첨탑은 페트로파블로스크 사원 첨탑.

 

:
Posted by liontamer

 

 

지난 2월 15일.

 

날씨가 좋아서 료샤와 레냐랑 네바 강변과 이삭 성당 부근을 산책했다. 여기는 해군성 앞에 있는 공원이라 내키는대로 항상 해군성 공원이라고 부르고는 있지만 사실 원래 이름은 알렉산드로프스키 공원이다. 예전에 레냐랑 같이 뜨보록 산책시키고 원반 던지던 공원이기도 하다.

 

이 공원은 오랜 옛날 내가 맨처음 페테르부르크에 연수하러 왔을 때, 첫 주말에 제일 처음 시내로 놀러나와 마주했던 공원이다. 그래서인지 내겐 뜻깊은 곳이다.

 

예전에 해군성 공원이란 태그로 이 공원 사진 많이 올렸었다.

 

 

 

이 공원은 이삭 성당과 청동기사상 사이에 있다.

 

눈밭과 검게 물든 나무들 너머로 이삭 성당이 보인다. 내가 좋아하는 풍경이다.

 

 

 

이삭 성당의 황금빛 돔 클로즈업.

 

추웠고 길바닥에는 눈이 깔려 있고 네바 강은 얼어붙어 있었지만 하늘은 파랬고 햇살은 찬란했다. 이삭 성당의 황금빛 돔은 빛살 때문에 거의 탈색된 것처럼 보였다. 내가 무척 사랑하는 페테르부르크식의 창백한 찬란함이다.

 

 

 

알렉산드로프스키 공원을 따라 걸어가면 청동기사상이 있는 세나트스카야 광장, 즉 원로원 광장이 나온다.

 

 

바로 이 길 따라가면 곧장 광장. 그리고 청동기사상이 나온다. 그 너머는 도로, 그리고 네바 강이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쭈욱 걸어가서 길을 건너면 에르미타주가 나온다 :)

 

다시 가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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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liontamer
2015. 4. 27. 17:48

월요일이라 그런지 더 떠나고 싶네 russia2015. 4. 27. 17:48

 

 

오늘 진짜 바쁘게 일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월요일이라 그런지, 바빠서 그런지 더욱더 떠나고 싶다!!

 

사진은 지난 2월, 페테르부르크.

그러나 슬프게도 이 사진은 떠나는 날 아침.. 체크아웃하기 직전에 찍은 것이다 ㅠㅠ 여행 가면 이때가 제일 슬프다.

작년에 큰 가방이 필요해서 집 근처 마트에 가서 급하게 샀다가 망한 저 가방 ㅠㅠ 외피가 너무 얄팍하고 내구성이 약하다. 이전에 쓰던 가방은 튼튼해서 그렇게 찻잔들을 넣어 부쳤어도 한번도 깨진 적 없는데 이건.. 로모노소프 찻잔 하나 깨먹었다. 역시 여행가방은 비싸고 튼튼한 걸 사야 하는데... 맘에 안 드는 저 가방 ㅠㅠ 지금은 유리지갑 박살이라 물론 좋은 가방 사는 건 불가능..

 

 

 

떠나는 날. 페테르부르크 풀코보 공항.

 

이때는 겨울이라 인천-페테르부르크 직항이 없어서 모스크바에서 갈아타야 했다. 무지 힘들었다. 풀코보에서 국내선 타러 와서.. 탑승 기다리면서 찍었다. 신청사라 깔끔하다. 그러나 내 기억 속 풀코보는 언제나 시외버스 터미널처럼 좁고 후진 옛 풀코보로 남을 것 같다..

 

.. 아아, 비행공포증 환자라 공항은 무섭지만 지금은 너무너무 떠나고 싶어서 그런지 이 사진마저 보니 그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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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월요병에 시달리는 중. 지난 2월 페테르부르크 사진 보며 위안..

이건 2월 20일. 마린스키 극장(오리지널. 구관) 카페. 보통 마린스키에 가면 2야루스 레프트 윙에 있는 카페에 가는데, 이때는 거기 사람이 꽉 차서 평소에 안 가던 쪽으로 갔다. 복도에 있는 좁은 테이블 쪽인데 여기는 의자가 없어서 서서 차 마셔야 함.

그런데 이 테이블이 놓인 복도 난간 너머로는 2층 벨에타쥐 쪽의 메인 홀이 보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괜찮았다.

 

이날은 유리 스메칼로프가 안무한 '봄의 예감'과 포킨의 '페트루슈카'를 보러 갔다.

 

물론 후자를 보러 간 거였는데, 페트루슈카는 시각적으로도 화려한 성찬이고 음악도 무척 좋다. 발레 자체는, 아마도 더 어릴 때 봤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겐 옛날부터 중요한 발레 중 하나였는데(글쓰기부터 시작해서 여러 의미로) 확실히 영상과 무대는 큰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실제 무대를 보니 페트루슈카라는 주인공에 대해 내가 갖고 있었던 오랜 느낌과 내가 부여했던 상징은 의외로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페트루슈카는 언제나 그런 작품이었고 내가 거기에 니진스키부터 시작해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봄의 예감은.. 음... 난 안무가로서의 유리 스메칼로프를 괜찮게 생각하지만 이 작품은 너무 작위적이었고 지루했다. 안무 자체도 그렇고.. 이 무대 보고 나서 느낀 건.. 콘스탄틴 즈베레프가 불쌍하다는 거였다. 왜냐하면 즈베레프는 여기서 태양신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엄청 기다랗고 무거운 금빛 천을 내내 끌고 다니고 막 휘두르며 빙빙 돌아야 하고.. 하여튼 중노동을 ㅠㅠ

 

흑흑 불쌍한 코스챠... 키 크고 풍채 좋다는 이유로 태양신이 되어 고생하고.. 최근 스메칼로프가 안무하고 슈클랴로프가 주역을 춘 저승세계의 오르페우스에서도 흉칙한 의상과 분장을 한 저승 뱃사공 카론으로 등장하고.. (즈베레프가 그 역이라는 자막을 봐서 망정이지 얼굴도 못 알아볼 지경 ㅠㅠ)

 

이 두 작품 리뷰도 아직 못 썼네. 생각해보니 2월에 가서 6개나 공연을 봤는데 제대로 리뷰 쓴 건 하나도 없고.. 그나마도 미하일로프스키에서 라 바야데르 보고 와서 빅토르 레베제프의 나무토막 연기에 분노해 쓴 게 제일 긴 거네 ㅠ (그 분노의 메모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504)

 

 

 

이땐 아직 오페라 글라스 사기 전이라... (마지막 날 샀다 ㅠㅠ)

코트 보관소에서 빌린 오래된 오페라 글라스. 이거 빌릴 때마다 옛날에 가난한 학생 시절 마린스키 오면 이거 빌려서 윗층으로 올라가 공연 보던 생각이 난다. 메이드 인 USSR!!

 

 

테이블 너머로 아래의 메인 홀이 슬쩍 보인다.

이날은 차를 많이 마시고 가서 차 대신 사과주스랑 티라미수..

 

 

천정의 샹들리에 보너스로 한 컷.

 

아, 다시 가고 싶구나!

 

* 이 날 공연 보고 와서 남긴 짧은 메모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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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이제 목요일이다. 이틀만 버티면 주말이다. 매우 힘든 일주일을 보내고 있다만. 월요일이 돌아오듯 서무 시리즈도 돌아와서 이제 18편이다. 쓰고 보니 많이도 썼네.

 

서무 시리즈도 재미로 쓰고는 있지만 회가 거듭되다보니 시리즈의 당연한 특성상 인물도 늘어나고 관계도 확장된다. 에피소드별로 내용이나 스타일, 무게, 문체, 장르 등등이 조금씩 다르기도 하고. 특히 18편은 이전 에피소드들과는 성격이나 양태가 조금보다는 더 다른 편이다.

 

어쨌든 18편~ 많은 직장인들에게는 괴로움의 상징인 회식! 심지어 각자 회비를 걷는다... 당일 통보 회식!!! 총괄서무인 단추청년 베르닌은 물론 회비도 걷어야 하는 입장이다. 합동회식을 하기로 했는데 그나마 옆부서가 알렉산드라가 근무하는 대외교류부라서 다행인 건지 아닌건지...

 

(제목과 에피소드 도입부에 나오는 선술집 이름인 '메드베지'는 러시아어로 '곰'이란 뜻이다)

(사샤, 사셴카는 모두 알렉산드라의 애칭이다)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그러던 어느날, 베르닌이 서무로 근무하는 감시분석부는 옆부서인 대외교류부와 합동회식을 하게 되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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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18

 

 

 

 

 

서무의 슬픔

-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그 날도 베르닌은 자질구레한 일들로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오후 4시가 되었을 때 감시분석부장이 책상을 탁탁 두들겼다.

 

“ 자, 주목! 오늘은 모두 퇴근 후 메드베지로 집합. 부서 간 친목 도모를 위해 오늘 대외교류부와 공동 회식을 하기로 했네! 회비는 각 5루블. 5시 정각에 다 정리하고 나올 것. 개인 사정으로 빠지는 것은 용납되지 않네! 서무는 지금 회비를 걷을 것. 대외교류부 쪽은 그쪽 서무가 걷을 거고, 다닐 자네가 총괄이니까 전체 비용을 관리하게. 이상! ”

 

베르닌은 술자리를 딱히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부서 회식은 예외였다. 선배들은 계속 폭탄주를 권했고 ‘내가 젊었을 때는‘으로 시작되는 비슷비슷한 레퍼토리가 끝도 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미 얼마 전 발따예프 등 세 명을 모시고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출장을 가서 평생 마실 술을 다 먹고 온갖 고생을 했기 때문에 더욱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전 부서가 다 참석하는데 심지어 막내인 그가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그는 극장에 전화를 했다. 왕재수에게 회식 때문에 오늘은 데리러 못 가고 저녁도 못 챙겨준다고 했다. 수화기 너머로 실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오늘 블린 구워준다더니... ”

 

“ 내일 해줄게. ”

 

“ 알았어. ”

 

“ 야, 너 내가 안 챙겨준다고 저녁 굶으면 바퀴벌레 곱등이를...

 

 

왕재수는 이미 전화를 끊은 후였다. 베르닌은 조금 걱정이 되어서 코즐로프에게 전화를 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바이올린 깡패야 왕재수처럼 사무실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오케스트라 연습실에 있을 테니 별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 회비를 걷으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어서 왕재수에 대해서는 곧 잊어버렸다.

 

대외교류부 쪽 회비를 수령하기 위해 옆방으로 가보니 알렉산드라가 분주하게 책상 사이를 돌아다니며 돈을 걷고 있었다. 베르닌은 곧 되겠거니 하고 기다렸는데 마지막 책상에 앉아 있는 만년과장 아나톨리 타라카노프가 알렉산드라에게 짜증을 냈다.

 

 

“ 지금 돈 없다고 했잖아. 누가 매일 지갑을 가득 채우고 다니나? 그런 건 싱글 여직원이나 그런 거지,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허덕이는 남자가 월말에 무슨 돈이 있나! ”

 

“ 아나톨리 표도로비치, 그러면 어떻게 하나요. 전부 5루블씩 내라는데. ”

 

“ 일단 네가 내! 서무잖아! 나중에 줄 테니까! ”

 

“ 지난번 회식 때도 5루블 내드렸는데 갚지 않으셨잖아요. ”

 

“ 몰아서 주면 되잖아! 너 지금 날 의심하는 거야? 허참, 그깟 5루블에 선배를 아주 도둑놈 취급을 하는군! 이래서 여자애들이란. ”

 

“ 제가 여자란 것하고 회비하고 무슨 상관인가요? ”

 

“ 남자애들은 쪼잔하지 않거든! 네 선배님! 하고 제깍제깍 회비를 내준단 말이야! 남자들 사이에선 돈보다 의리거든! 어련히 알아서 줄까 하고 달라는 말도 안 해! ”

 

 

알렉산드라는 타라카노프를 빤히 노려보았다. 그녀가 물러설 기색을 보이지 않자 타라카노프는 버럭 화를 냈다.

 

 

“ 뭘 그렇게 쳐다보고 있는 거야! 좀 빌려달라고 했잖아! ”

 

“ 저도 없어요, 5루블. 제 거 내고 나니 돈이 없거든요. ”

 

“ 혼자 사는 여자가 쓸 데가 어디 있다고 지갑에 10루블도 없어! 난 모르니까 다른 애들한테 빌려서 메꾸든지. ”

 

 

알렉산드라는 화가 잔뜩 난 것 같았지만 다행히 옆자리에 앉아 있던 세묜 모브린이 주머니를 뒤지더니 5루블을 꺼내 주었다.

 

 

“ 자, 사셴카. 내가 빌려줄게. 아나톨리 표도로비치, 천천히 갚으시죠. ”

 

“ 그렇지! 이래야지! 동기인데 이렇게 차이가 나서야! 역시 여자들이란. ”

 

 

알렉산드라는 돈을 봉투에 쑤셔 넣더니 고개를 홱 돌리고 나가버렸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며 복도로 따라 나갔다. 회비도 받아야 했지만 알렉산드라가 걱정이 되어서였다. 알렉산드라는 탕비실로 들어가더니 문을 닫아 버렸다. 베르닌은 바깥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알렉산드라가 나왔다.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베르닌을 보더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 아, 다냐. 맞아, 우리 쪽 회비 줘야 되는데. 너 보고 한꺼번에 관리하랬지. 그냥 내가 할까? 너 안 그래도 바쁘잖아. ”

 

“ 아니에요, 선배님. 저한테 주세요. 저희 부서 사람들이 더 많잖아요. ”

 

 

알렉산드라가 봉투를 건네주었다. 한숨을 폭 쉬었다.

 

 

“ 정말 싫다. 그것도 퇴근 한 시간 전에 갑자기 회식이라니... 오늘 원래 약속도 있었는데... ”

 

“ 어, 그럼 선배님 먼저 가시면 안 되나요? 선약이 있는 거잖아요. ”

 

“ 개인 사정으로 빠지는 거 용납 안 된다고 부장이 난리였어. ”

 

“ 하긴, 우리도 그랬어요. 그럼 얼굴만 가서 비추고 먼저 가시면... ”

 

“ 나 지난번 회식 때도 집안일 때문에 먼저 나갔다가 엄청 욕먹었거든. 오늘까지 그러면 정말 찍힐 거야. 안 그래도 우리 부서는 여직원 나 하나뿐이라서 걸핏하면 여자라서 그렇다고 욕먹거든. ”

 

“ 아, 그 부서는 그런 게 또 있군요. 이해가 안 되네. 여자인 거랑 무슨 상관이지? 아까 아나톨리 선배도 말도 안 되는 트집 잡더니. 우리 부서는 다 남자들뿐이라 그런 분위기인 줄 몰랐어요. 등록부서랑 현장부서엔 그래도 여직원들 많아서 좀 나을 텐데. 선배님, 그래도 1차만 하고 가실 수 있게 문가에 앉으세요. ”

 

“ 고마워, 다냐. 슬슬 정리하고 갈 준비하자. 제발 오늘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사람들 이상한 짓 좀 하지 말고. 난 회식이 제일 싫어. 국장 설교보다 더 싫어. ”

 

어휴, 전 국장 설교가 세상에서 제일 싫은데... 회식은 그에 비하면 양반... ”

 

 

알렉산드라는 희미하게 웃더니 자기 부서로 돌아갔다. 베르닌도 회비 봉투와 함께 자리로 돌아와 업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   *   *

 

 

 

메드베지는 볼쇼이 대로와 배나무 거리 교차로 근처에 있는 선술집으로 KGB와 의회 직원들이 자주 이용하는 곳이었다. 이름 그대로 홀 벽에는 곰 가죽이 하나 걸려 있었고 깔개도 있었다. 아무래도 KGB 쪽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다 보니 일반인 손님들은 꺼리는 곳이었다. 스페호프도 좋아하는 장소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내심 국장이 회식에 끼겠다고 나타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모든 부서원들이 똑같은 마음이었는지, 스페호프가 시 의회 의장과 저녁 약속이 생겨서 다른 식당에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들 환호성을 질렀다.

 

 

대외교류부장과 감시분석부장은 학창 시절부터 동기 사이인데다 성격도 잘 맞아서 툭하면 의기투합하는 사이였다. 스페호프에 대해서야 KGB 내의 모든 간부들 및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뿌리 깊은 반감을 품고 있었지만 물론 국장의 카리스마에 대들만큼 배포가 크지는 않았다. 이제껏 블라지미르 스페호프에게 대들었던 유일한 인물은 바냐 투레츠키 뿐이었지만 그는 이미 퇴사해서 전설의 서무로 남았고 베르닌이 보기에 그 전설은 영영 깨지지 않을 것 같았다.

 

두 부장은 오른팔로 여기는 부하 직원들을 하나씩 옆에 앉혀 놓고 모두에게 건배를 제의한 후 신나게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다른 직원들도 긴 테이블에 둘러앉아 파도타기를 하기 시작했다. 운 나쁘게도 베르닌은 출장을 다녀온 후 이상하게 친한 척하는 발따예프와 특별감사 때 그를 아주 힘들게 했던 두블린스키 사이에 앉아 있었다. 그는 원래 알렉산드라와 함께 문가에 앉을 생각이었다. 자신의 키와 체구로 가려주면 그녀가 눈에 띄지 않고 중간에 살짝 나갈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들어가자마자 발따예프에게 걸려들어서 질질 끌려갔고 문가에 앉으려던 알렉산드라도 대외교류부 직원들이 그래도 여자가 있어야 분위기가 산다고 떠들어대는 통에 중간 자리로 붙들려갔다.

 

 

베르닌은 한참동안 선배들 사이에 끼어서 술을 마시고 술을 따라주고 뻔한 레퍼토리를 듣고 때때로 술을 더 시키고 안주를 시키러 가는 등 정신이 없었다. 발따예프는 레닌그라드 출장 때 갔었던 마지막 선술집, 즉 목걸이와 그곳의 근사한 감자튀김에 대해 뻥을 10배는 섞어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베르닌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싶었지만 꾹 참고 일어나 혹시 술이 모자라지 않나 살핀다는 핑계로 다른 테이블 쪽을 돌았다.

 

 

그러다가 알렉산드라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아나톨리 타라카노프가 그녀에게 계속 말을 걸고 있었는데 같은 부서 직원들도 끼어서 웃고 있었기 때문에 얼핏 보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빈 술병을 치우러 가까이 가서 대화를 듣자 그렇게 기분 좋은 내용은 아니었다. 술이 들어가 얼굴이 불그스름해진 타라카노프가 알렉산드라를 집적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 우리 사셴카는 언제 시집을 가려고 그러는지. 여자 나이 서른이면 볼 장 다 본 건데 참 걱정이네. 어리고 예쁜 여자애들이 득실대는데 어쩌려고 그러나. 좋은 값 쳐줄 때 갔어야 되는데. ”

 

“ 맞아, 사샤도 빨리 결혼해야 할 텐데. 남자들이 눈이 삐었나, 이만하면 동안이고 귀여운데 왜 남자가 안 생길까. 우리 회사쯤이면 직장 좋지, 안정적이지 괜찮은데. ”

 

 

그러자 타라카노프가 혀를 찼다.

 

 

“ 귀여우면 뭘 해, 하고 다니는 걸 좀 보게. 일단 얘는 입고 다니는 걸 고쳐야 돼. 맨날 스웨터에 바지에, 아니면 치마도 너무 통 넓은 거. 다리도 다 가리는 두꺼운 스타킹에, 그 투박한 단화는 또 뭔지. 가뜩이나 키도 작으니 신발도 뾰족구두를 신어야 조금이라도 늘씬해 보이고 다리도 예뻐 보일 판에 여학생도 아니고... 화장도 잘 안 하고. 그러니 남자들이 못 알아보지! ”

 

“ 제가 어떻게 하고 다니든 제 마음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아나톨리 표도로비치. ”

 

 

알렉산드라가 싸늘하게 말했다. 무척 화가 난 표정이었다. 하지만 타라카노프는 개의치 않았다. 즐겁게 말을 이었다.

 

 

“ 내가 말이야, 저번에 건강 검진하러 갔을 때 보니까 사셴카가 대기실에서 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진짜 볼만하더라고. 밤에 같이 있으면 남자들이 은근히 좋아할 타입인데 그 좋은 걸 다 가리고 있으니 원. 애가 작아서 눈에 안 띄어서 그런 거지 좀 꾸며놓고 노출 좀 시켜놓으면 글래머라니까. ”

 

 

다른 남자 직원들이 맞장구를 쳤다.

 

 

“ 그래그래, 맞아! 알렉산드라가 은근히 몸매가 좋아. 지난번에 우리 행사 때문에 원피스를 입고 왔는데 다리도 예쁘고 볼륨도 있고 아주 눈이 즐겁더라고! 너 평소에도 그렇게 좀 입고 다녀. 그래야 딴 부서 어린 여자애들한테도 안 꿀리지. ”

 

“ 그러니까, 옷 좀 신경 쓰고 성격만 좀 고치라 이거지. 선배들한테 틱틱대고 까칠하게 굴고. 애교도 없고. 계집애가 좀 눈웃음도 치고 목소리도 상냥하게 내고 애교 좀 부리면 어련히 남자들이 잘해주려고! 우리한테도 좀 귀엽게 굴면 얼마나 우리가 잘 도와주겠어! ”

 

 

알렉산드라가 낮게 쏘아붙였다.

 

 

“ 저는 일하러 직장에 오는 거지 선배님들에게 애교 부리러 오는 게 아니에요. 제 일만 잘하면 되는 거죠! ”

 

“ 꼭 인기 없고 애인 없는 여자들이 저런다니까. 이봐, 사셴카. 난 정말 네가 여동생 같아서 하는 말이야. 귀여워서 그런다니까. 다 널 위해서 하는 충고니까 내 말 들어. 그래야 노처녀 신세에서도 탈출하고 선배들에게 귀염도 받지. 옷도 이런 거 입고 다니지 말고. 볼륨이 이렇게 빵빵한데 왜 가리고 다니냐는 거지. ”

 

 

타라카노프가 알렉산드라를 툭툭 쳤다. 미묘하게 가슴 언저리를 건드렸기 때문에 알렉산드라가 확 째려보았지만 아까 돈을 빌려주었던 모브린이 재빨리 술병을 들었다.

 

 

“ 어, 다들 술잔이 비었네요! 채워 드릴 테니 다 같이 건배하시죠. 사셴카가 알면 알수록 진짜 귀여운 앤 건 맞아요. 저희 동기라서 잘 알거든요. 우리 사셴카를 위해 건배! ”

 

 

모브린 덕에 분위기가 좀 나아지는가 싶었지만 건배를 한 후 타라카노프가 알렉산드라의 어깨를 다시 토닥거리며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 너 내 말 그냥 흘려듣지 마, 다 너 좋으라고 해주는 말이니까. 계집애가 그렇게 뻣뻣하게 굴면 승진도 못해. 봐봐, 너 동기들 다 승급했는데 너만 아직도 서무나 하고 있고 말야. 여자가 좀 나긋나긋한 맛도 있고 귀염 부릴 줄도 알아야지. 회식도 툭하면 빠지고 말이지. 사회생활 그렇게 하면 쓰겠어? 선배들하고 술도 가끔 마셔주고. 이거 봐, 한 잔 마시니까 얼굴도 빨개지고 훨씬 귀여워지잖아. 이래야 남자들이 잘해주지. 예쁜 척 좀 하고 다니란 말이야. ”

 

 

알렉산드라는 이를 악물고 꾹 참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타라카노프가 어깨를 껴안고 뺨을 비비며 한 손으로 허벅지를 움켜쥐었을 때는 참지 못했다. 베르닌이 이건 너무 심하다 싶어서 그 느물거리는 선배를 떼어놓으려고 다가갔을 때 알렉산드라가 두 손으로 타라카노프를 홱 떠밀었다.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 그만 좀 하라고요! 지저분하게 왜 이러는 거예요! 선배면 다야? 왜 성희롱이에요! ”

 

“ 아니, 얘가 왜 이래! 취했나, 감히 선배한테 소리 지르고 밀치고! 술자리에서 여자가 이 정도는 해줘야 술맛이 나지! 조직생활 처음 하는 것도 아니고. 너 남자랑 안 놀아봤어? 기껏 귀여워서 좀 툭툭 친 거 가지고! 이런 거 가지고 난리를 치면 애인이랑 잠자리는 어떻게 하나? ”

 

 

타라카노프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버럭 고함을 치더니 알렉산드라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뺨에 얼굴을 마주 대며 등을 쓰다듬고 몸을 비벼댔다. 베르닌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뒤에서 타라카노프를 붙잡고 확 잡아당겼다.

 

 

“ 아나톨리 표도로비치, 왜 이러시나요. 많이 취하셨네요! ”

 

뭐야, 너는! 에이, 재미없게!

 

 

타라카노프가 성을 내며 베르닌을 밀어내려고 했다. 물론 베르닌은 놓아주지 않았다. 타라카노프를 꽉 붙들고 있는데 알렉산드라가 벌떡 일어나더니 있는 힘껏 그의 뺨을 후려쳤다. 부들부들 떨면서 눈물을 글썽이며 소리쳤다.

 

 

당신 고발할 거야! 이 더러운 인간! 참을 만큼 참았어! 한두 번도 아니고 당신 같은 개자식은 쓴 맛을 봐야 돼!

 

뭐야? 이 조그만 계집애가 대체 뭐라는 거야! 술자리 망쳐놓고 뭐? 개자식? 지금 선배한테 뭐라 했어!

 

 

타라카노프가 분통을 터뜨리며 솟구쳐 일어나려는 것을 베르닌이 두 팔로 꽉 끌어안고 막는 동안 동료 직원들과 대외교류부장이 주위로 다가왔다. 부장이 알렉산드라를 꾸짖었다.

 

 

아니, 이게 웬 소란이야! 기분 좋게 회식하는 자리에서 왜 선배에게 막말을 하고 손찌검까지 하나! 하여튼 여자애가 성질이 더러워서... ”

 

 

알렉산드라는 부장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의자를 콰당탕 넘어뜨리고 테이블에 부딪치면서 홀을 나가버렸다. 타라카노프가 욕설을 퍼부었지만 돌아보지도 않았다. 알렉산드라가 나간 후 직원들이 삼삼오오 타라카노프 곁으로 다가왔다. 모브린이 베르닌에게 그만 놔주라면서 어깨를 툭 쳤다.

 

 

“ 안돼요, 아나톨리 표도로비치가 많이 취했어요. 알렉산드라 선배를 따라 나가서 또 싸움을 걸면 어떡해요. ”

 

“ 싸움은 무슨. 둘 다 그냥 취해서 그런 건데. 그러려니 하고 넘겨. 자고 나면 다 잊어버릴 거. 술자리가 그렇지 뭐. 빨리 놔드려. 덩치도 커가지고 그렇게 꽉 잡고 있으면 선배님 어깨에 멍들어. ”

 

“ 하지만... 알렉산드라 선배는 취하지 않았어요. 이건 아나톨리 표도로비치가 잘못... ”

 

“ 웬 과민반응이야. 술자리에서 일어난 일에 잘못이 어디 있담. 자, 분위기가 좀 꿀꿀해졌네요. 잔이나 채우시죠. 아직 술도 많이 남았는데. ”

 

 

모브린이 술병을 들자 다들 그래그래 하며 자리로 돌아갔고 잔을 들었다. 타라카노프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씩씩거리며 재수 없는 계집애니 못돼먹은 년이니 하고 욕을 하고 있었지만 부장이 ‘아나톨리 자네도 진정하고 한 잔 하지’ 라고 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잔을 채워달라며 내밀었다. 발따예프가 베르닌을 불렀다.

 

 

“ 이봐, 다냐! 자넨 왜 남의 부서 일에 간섭하고 그러나! 빨리 자리로 돌아오란 말이야! 우리 안주 다 떨어졌으니까 오면서 칼바사 좀 더 시키고! ”

 

 

베르닌은 주방 쪽으로 가서 안주를 더 시켰다. 그리고는 슬쩍 밖으로 나가 보았다. 혹시나 알렉산드라가 있나 술집 주위를 한 바퀴 돌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베르닌은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고 걱정이 되었다. 알렉산드라는 항상 그에게 잘해주는 선배였다. 입사 초기에 아무 것도 몰라서 헤매고 툭하면 스페호프에게 불려가 행정의 기본에 대해 설교를 듣고 부서장에게 깨질 때도 알게 모르게 그의 업무를 도와주고 서무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조곤조곤 알려줘서 항상 고마운 마음이 있었다. 운이 나빠서 6년째 서무를 맡고 있는데다 남자들만 있는 대외교류부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것 같긴 했지만 타라카노프가 저런 식으로 못살게 군다는 건 전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베르닌은 버스 정류장으로 가볼까 했지만 그때 담배를 피우러 나왔던 두블린스키가 그를 발견하고는 등짝을 철썩 때렸다.

 

 

“ 야! 서무가 여기 나와 있으면 어떡하냐! 이제 1차 파장하는 분위기니까 가서 돈부터 내고! 2차는 알료누슈카 이바누슈카로 가기로 했으니까 빨랑 가서 자리 잡아놔! ”

 

 

그래서 베르닌은 결국 돈을 치른 후 2차를 갔고 거기서 폭탄주 몇 잔을 연속으로 마시고 또 무슨 게임에서 져서 특제 폭탄주를 한 사발 원 샷한 후 화장실에 가서 두 번 토하고 비틀거리며 자정이 넘어 귀가했다.

 

 

 

*    *    *

 

 

 

 

다음날 베르닌은 알람 소리에 끙끙거리며 깨어났다. 숙취 때문에 죽을 지경이었다. 술도 깨지 않았고 어지러워서 도저히 차를 가지고 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왕재수의 집으로 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답이 없었다. 혹시나 해서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았다. 텅 비어 있고 침실에도 잠잔 흔적이 없는 걸 보니 간밤에는 코즐로프의 아파트에서 잔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극장까지 못 태워다 준다는 얘기에 왕재수가 짜증을 냈을 테니까.

 

 

베르닌은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붙잡고 간신히 출근했다. 심지어 검열국에 들러 스페호프가 시킨 사적인 자료 심부름까지 하고 가야 했다. 게다가 거기서 마주친 주브치크가 지난번 출장 얘기를 늘어놓으며 붙잡는 바람에 시간이 더 걸렸다. 그는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사무실에 도착했다.

 

 

막 자리에 와서 앉았는데 사무실이 시끌시끌했다. 부장이 자리를 비우긴 했지만 평소보다 훨씬 소란스러웠기 때문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간간이 알렉산드라와 타라카노프의 이름이 들려왔기 때문에 결국 그는 옆자리의 콜로긴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았다.

 

 

“ 아, 너 늦게 와서 모르는구나. 대외교류부 지금 발칵 뒤집혔거든. 어제 회식 때 너 있었지? ”

 

“ 예, 제가 회비도 걷고 계산도 했잖아요. 2차 때 너무 마셔서 지금도 힘들어요. ”

 

“ 알렉산드라 그 계집애가 아주 보통내기가 아니더라고. 그 맹랑한 게 감사실에 아나톨리를 성희롱으로 찔렀어. 아예 진정서도 내고 인민재판 회부까지 요청했더라고. 술자리에서 일어난 일 가지고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을 하니 허참 앞으로 회식이나 하겠나. 여직원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

 

 

베르닌은 대외교류부로 가보았다. 역시 시끌시끌했다. 알렉산드라는 보이지 않았다. 타라카노프는 부장과 면담 중이라고 했다. 그나마 안면이 있는 모브린에게 물었다.

 

 

“ 저, 알렉산드라 선배는 어디 있나요? ”

 

“ 몰라. 등사실에 갔나. ”

 

“ 어떻게 되는 건가요? 감사실... 인민재판... ”

 

“ 재판은 무슨 재판이야. 그런 거 가지고 인민재판까지 가면 우리 KGB 체면이 뭐가 되라고. 사셴카가 어제 좀 예민해서 발끈했던 건데... 잘 달래면 풀어질 거야. 자네도 모른 척하고 있어. ”

 

 

그때 대외교류부장이 나왔다. 모브린에게 손짓을 하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 걔 어디 갔어? ”

 

모르겠습니다. 20분 전쯤 서류 가지고 나갔는데. 등사하러 간 것 같네요. ”

 

“ 감사실에 또 가 있는 거 아냐? 자네가 점심이라도 먹으면서 얘기해서 취하시켜. 그래도 자네 동기잖아. 직원들 사기 띄워주려고 없는 돈에 회식도 한 건데 계집애가 웬 소란인지... ”

 

“ 너무 걱정 마시죠, 말씀대로 제가 잘 얘기해보겠습니다. 사샤가 어린애도 아니고 조직 생활 한두 해 한 것도 아닌데 얘기하면 알아듣겠죠. 오후에 부장님께 가보라고 하겠습니다. ”

 

“ 젠장, 이래서 여직원은 받는 게 아니야. 감시분석부처럼 남자들만 있어야 조용한데. 계집애가 항상 매사에 모나게 굴더니만. 골치 아파 죽겠네. ”

 

 

베르닌은 복도로 나갔다. 등사실로 가보았다. 비어 있었다. 탕비실에도 가보았지만 알렉산드라는 없었다. 건물 전체를 돌아보았지만 그녀를 찾을 수가 없었다. 감사실에 있나 싶어 슬며시 그 앞으로 가보았지만 문도 열려 있고 감사부장과 직원들은 일찍 점심을 먹으러 갔는지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너무 걱정이 되어서 바깥으로 나가 보았다. 서무들의 안식처인 배추밭 쪽으로 가니 알렉산드라가 넓적한 돌멩이 위에 걸터앉아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있었다. 검정고양이는 사료를 먹다가 베르닌을 보고는 초록색 눈을 가늘게 치켜뜨고 천천히 다가왔다. 베르닌은 호주머니를 뒤졌지만 줄 게 없었다.

 

 

“ 어, 미안. 미셴카. 오늘은 없는데. 아직 점심시간 전이라 못 챙겼어. ”

 

“ 냐아옹... ”

 

 

고양이는 기대한 적도 없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는 사뿐사뿐 걸어서 배추밭 너머로 사라졌다. 그는 머뭇거리며 알렉산드라의 곁으로 다가갔다. 알렉산드라는 얼굴이 창백했고 뺨이 쏙 들어가 있었다. 눈도 퉁퉁 부어 있었다. 한숨도 못 잔 것처럼 보였다.

 

 

“ 저, 선배님. ”

 

“ 안녕, 다냐. ”

 

“ 괜찮으세요? 어젠... ”

 

“ 괜찮아야지 어쩌겠어. ”

 

“ 얘기 들었어요. 감사실... ”

 

“ 감사부장이 나한테 쓸데없이 일 키우지 말래. 별 거 아닌 걸로 들쑤셔서 괜히 회사 소문만 안 좋게 나고 중견직원 앞길 막는다고. ”

 

“ 쓸데없이 일을 키우다니요? 어제 다들 봤는데. 아나톨리 표도로비치가 백번 잘못한 거잖아요. 가만히 있는 선배님을 집적대고 계속 나쁜 말도 하고. 그게 어떻게 선배님 탓인가요. ”

 

“ 그냥 술자리에서 남자들 취해서 하는 말에 예민하게 군다고, 나보고 그 사람한테 욕하고 손찌검까지 하지 않았냐면서 내 잘못도 크니까 그냥 넘어가라는 거야. ”

 

“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감사부장이 그런 말을 했다고요? ”

 

“ 감사부장. 우리 부장. 우리 부서 사람들 전부. ”

 

“ 말도 안 돼... ”

 

“ 증거도 없다고... ”

 

“ 증거가 없다니요? 거기 있었던 사람들이 몇 명인데. 선배님 부서랑 우리 부서 사람들이 다 봤잖아요. ”

 

“ 다들 모른 척할 거라서... ”

 

“ 저도 봤는데요. 처음부터 듣진 못했어도 아나톨리 표도로비치가 옷 얘기할 때부터 들었어요. 성희롱 발언하고 손도 댔잖아요. 선배님, 제가 증인 서드릴게요. ”

 

“ 고마워, 다냐. ”

 

 

알렉산드라는 갑자기 감정이 북받친 듯 흑 하더니 울기 시작했다. 조그만 어깨를 떨면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엉엉 울었다. 베르닌은 당황했다. 어쩔 줄 몰랐다. 왕재수가 울어도 당황스러운 판에 여자가 울면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감이 안 잡혔다. 쭈뼛거리며 서 있다가 주머니에서 구겨진 손수건을 꺼내 알렉산드라에게 내밀었다.

 

 

“ 어... 저... 선배님... 저... ”

 

 

알렉산드라가 손수건을 받아서 눈과 코에 댔다. 심호흡을 하며 진정하려 했지만 자꾸 눈물이 나는 듯 계속 흑흑 흐느껴 울었다. 너무 서럽게 울어서 베르닌은 절로 속이 상했고 타라카노프의 멱살을 쥐고 끌어내 두들겨 패주고 싶었다. 한참 울다가 알렉산드라는 간신히 진정했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는데 눈물콧물이 너무 많이 나와서 수건을 두 번이나 꾹꾹 짜야 했다.

 

 

“ 미안해, 다냐. 윽... 흑... 미안. 이러면 안 되는데. ”

 

“ 아니에요, 선배님. 속상할 땐 울어야 된댔어요. 괜찮아요. ”

 

“ 회사에서 울면 얕보여서 안 되는데... 안 그래도 맨날 여자라서 하찮게 보이는데. 엉엉... ”

 

 

알렉산드라는 서러움이 솟구치는지 다시 몸을 떨면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그녀가 너무 안 돼 보여서 꼭 안아주고 싶었지만 어제 타라카노프의 행동을 생각하니 오해받을 수도 있을 것 같아 꾹 참았다.

 

 

“ 선배님, 안 그래요. 하찮게 안 보여요. 선배님이 일도 얼마나 잘하고 저한테도 얼마나 많이 가르쳐주셨는데요.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

 

“ 넌 착하니까 그렇지. 윗사람들은 안 그래. 선배들, 동료들도 마찬가지야. 알잖아, 우리 회사 군대문화에 남자 위주인 거. 국장부터... 여자 간부는 하나도 없고 공채도 여직원은 거의 없어. 이 사람들에게 여직원은 커피나 타고 등사나 하고 도장만 찍어주는 존재일 뿐이야. 난 공채로 들어왔는데, 우리 기수에서 성적도 제일 좋았는데 다른 남자애들에겐 처음부터 주요 업무 맡기고 나한테는 서무 하라는 거야. 그때도 왜 그러는지 물었더니 원래 서무는 여자가 하는 거라고 했어. 그러더니 작년에 남자 후배가 들어왔는데도 서무는 여자 업무라면서 그대로 6년째... 툭하면 차 끓이고 커피 타오라고 시키고... 내 동기들 세묜까지 다섯 명이나 되는데 걔들은 벌써 승급하고... 이해할 수가 없어서 부장에게 면담까지 했는데 내 업무가 서무라서 평가 점수를 잘 줄 수가 없다는 거야. 그러면 다른 업무를 맡게 해달라고 했더니 그것도 안 된대. 여자라서. ”

 

“ 어... 그래서 6년째 서무였단 말이에요? 전 선배님이 막내라서 그런 건 줄 알았어요, 후배가 안 들어와서. ”

 

“ 후배가 있어. 다른 지부에서 왔는데 3년차라 후배거든. 근데 남자라서 곧장 주무를 맡더라고. ”

 

“ 그랬구나... 너무한데요. ”

 

“ 그리고 부장들은 내가 예민하게 군다고 하지만 타라카노프는 어제만 그랬던 게 아니야. 6년 동안 내내 그랬어. 신입 직원 환영회할 때부터 옆에서 계속 술 권하고 러브 샷 하자고 하고 술 먹여달라고 하고... 그땐 나도 조직 생활도 처음이고 너무 당황해서 가만히 있었거든. 회식 때마다 항상 옆자리 앉아서 집적대고... 등사실이나 우편보관함 앞에서 마주치면 손으로 이렇게 벽을 짚고 못 빠져나가게 하고서 바짝 들이대고... 건드리고... 더러운 말도 얼마나 많이 했는데. 다른 남자 선배들도 그런 적 많아. 툭하면 여자가 이래야지 저래야지 하면서... 지나가면서 훑어보고 집적대고... 술자리 가면 옆에서 술 따라달라고 하고. 회식만 하면 타라카노프가 화장실 갈 때마다 따라와서 취한 척하면서 기대고 팔 두르고... 내가 작으니까 만만해보여서 더 그런 거야. ”

 

“ 뭐라고요? 어제 그게 처음이 아니었단 말이에요? 어떻게 그럴 수가... ”

 

“ 그러니까 이제 더는 못 참아. 부장들이 뭐라고 하든... 진정서는 취소 안 할 거고, 그 더러운 인간 인민재판에 회부해서 벌 받게 할 거야. ”

 

“ 선배님, 제가 도와드릴게요. 필요한 거 다 말씀해 주세요. 어제 제가 목격한 것만으로도 엄연히 성희롱에 해당돼요. 저 법학과 나왔잖아요. 일단 서류부터 작성할게요. ”

 

“ 고마워, 다냐. 일단 감사실 쪽에서 먼저 내부 절차를 밟아야 돼. 필요하면 얘기할게. 정말 고마워. 아무도 내 편 안 들어줬는데 너 밖에 없구나. ”

 

 

알렉산드라가 또 울먹거렸기 때문에 베르닌은 가슴이 아팠다. 정의감이 용솟음쳤다. 기필코 그녀를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알렉산드라가 너무 초췌해 보였기 때문에 점심이라도 같이 먹으러 가자고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다냐. 나 지금 입맛이 없어. 샌드위치 싸왔으니까 있다가 배고프면 먹을게. 너 얼른 가서 점심 먹어. ”

 

 

베르닌은 왕재수에게 하던 대로 바퀴벌레 곱등이 협박을 써볼까 했지만 여자한테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할 수 없이 그녀를 남겨두고 구내식당으로 갔다. 식당에서도 다들 그 얘기를 하려나 싶었는데 의외로 조용했다. 회식에 가지 않았던 부서들에서는 모르는 것 같았다. 베르닌은 잠자코 비계와 힘줄이 섞여 있는 커틀릿과 건더기가 두어 개 떠 있는 양배추 수프를 배식 받아서 먹기 시작했다. 커틀릿은 구내식당에서는 특식에 가까웠으므로 평소 같았으면 신나 하며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겠지만 어쩐지 입맛이 없었다. 숙취 때문인가 싶었다. 따뜻한 수프를 후루룩 마시자 속은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대충 점심을 먹은 후 그는 극장에 전화를 해 보았다. 왕재수 대신 비서인 류드밀라가 받았다.

 

 

“ 미샤는 단원들이랑 점심 먹으러 갔어요. ”

 

“ 아, 그래요. 알겠습니다. 아침은 먹었나... 혹시 아세요? ”

 

“ 안 먹었어요. 아침에 제가 출근해서 보니까 감독실에서 자고 있더라고요. 피곤해 보여서 안 깨웠는데 11시에 부스스 일어나더니 저한테 화냈어요. 애들 연습시켜야 되는데 늦잠 자게 놔뒀다고. ”

 

“ 어... 어제 극장에서 잤단 말이에요? ”

 

“ 네. 요즘 바빠서 가끔 극장에서 주무세요. 그래서 제가 시설팀에 얘기해서 밤에 감독실 쪽만 난방 돌려 달라고 했어요. 좀 걱정이긴 하네요. 계속 저러면 몸이 남아나지 않겠어요. ”

 

“ 오늘 공연 있어요? 몇 시에 끝나요? ”

 

“ 있어요, 잠자는 미녀. 3막짜리니까 10시 반쯤 끝나겠네요. ”

 

 

전화를 끊고 나서 베르닌은 더욱 기분이 좋지 않았다. 분명히 의사가 과로하지 말라고 했는데 매일 출근도 모자라 극장에서 자다니! 코즐로프 쪽을 들들 볶아볼까 고민하다가 점심시간이 다 끝나서 다시 일을 하러 갔다. 하지만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는 옛날에 공부했던 기억을 되살려 책상 아래 쌓아두었던 법전과 각종 판례집, 인민재판 사례집을 들춰보았고 전날 메드베지에서 있었던 일들을 시간 순서대로 하나하나 정리했다. 타라카노프와 주변 사람들의 언행도 생각나는 대로 모두 기록했다. 진술의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 주변 정황도 간략하게 묘사했고 대화도 시간 순서대로 기록했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 그는 대외교류부에 가보았다. 알렉산드라는 캐비닛들을 돌면서 서류철 작업 중이었다. 조그만 손을 놀려가며 두꺼운 서류뭉치들에 구멍을 뚫고 표지를 달고 노끈을 끼우고 있었다. 전부 다른 사람들이 담당하는 사업에 대한 서류들이었지만 모두 알렉산드라를 못 본 체 하고 있었다. 타라카노프는 자리에 버티고 앉아 손톱을 깎으면서 계속 입에 담을 수 없는 비속어를 지껄이고 있었는데, 이름을 부르지는 않았지만 누가 들어도 알렉산드라를 지칭하는 것이 분명했다. 베르닌은 알렉산드라의 곁으로 갔고 서류철 끼우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자기가 정리한 자료들을 건네주었다.

 

 

“ 선배님, 저... 이거... 제가 정리해봤어요. 감사실에서 증거 자료 얘기하면 이거 제출하세요. 그리고 저 정말 증언해줄 수 있으니까 위에서 증인 요구하면 제 이름 얘기하세요. ”

 

“ 다냐... 고마워. 근데 너 이래도 되니. 괜히 너 휘말리게 하기 싫어. ”

 

“ 휘말리는 거 아니에요. 사실을 말하는 것뿐인데 뭐가 휘말리는 거예요. 힘을 내세요. ”

 

“ 고마워... ”

 

 

베르닌은 서류철 작업을 좀 더 도와주고 싶었지만 대외교류부 사람들이 계속 자기들 쪽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알렉산드라에게 방해가 될 것 같아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는 야근을 한 후 10시 반에 맞춰서 극장 앞으로 갔다. 마침 커튼콜을 마치고 무용수들에게 한바탕 꾸지람을 늘어놓은 후 나오고 있는 왕재수를 복도에서 붙들었다.

 

 

“ 야! 너 어제 왜 극장에서 잤어! ”

 

“ 오늘 공연 때문에. ”

 

“ 이거 맨날 올리는 공연이잖아, 신작도 아닌데 왜! ”

 

“ 네가 어제 안 왔잖아. ”

 

“ 그렇다고 극장에서 자냐! 너 정말 죽을래? 앞으로 여기서 자면 고양이, 쥐, 바퀴벌레, 곱등이, 뱀 껍질 다 풀어놓을 거야!

 

“ 이 악마... 어젠 나 혼자 안 있었어. 로만이랑 있었어. ”

 

“ 그럼 그 집 가서 자야지 왜 여기서 자! 추운데! ”

 

“ 안 추워. 로만이랑 꼭 껴안고 있으면 얼마나 뜨끈뜨끈한데. 그리고 신작에 쓸 음악 때문에 둘이 할 얘기도 많았어. ”

 

“ 못살아... 하여튼 집에 가자! ”

 

“ 오늘은 로만한테 가서 잘 거야. ”

 

“ 어 그래? 정말이지? 여기서 자면 안 돼! 바이올린 아저씨한테 확인한다! ”

 

 

마침 그때 코즐로프가 다가왔다. 아파트에 데려가서 잘 거라고 확인을 해주었다. 베르닌은 괜시리 짜증이 나서 코즐로프에게도 화를 냈다.

 

 

“ 의사 선생님이 말하고 간 거 당신이 잘 챙긴다더니! 앞으로 이 자식 한번만 더 극장에서 자게 놔두면 당신 책임이에요! ”

 

“ 어휴, 이 망할 놈의 스파이 나부랭이. 알았으니까 빨랑 집에나 가! 네가 난리 안 쳐도 내가 어련히 알아서 챙길까! ”

 

“ 안 챙겼잖아요! 아무리 난방해 줘도 극장은 집이 아닌데... 소파도 불편하고... 그리고 당신 어쩌자고 감독실에서 쟤랑 놀아날 생각을 해요! 들키면 어쩌려고! 도청 장치 있는 거 알잖아요. 내가 담당자니 망정이지... ”

 

“ 야, 넌 우리가 같이 있으면 맨날 그 짓만 하는 줄 아냐? 우리 어젠 신작 얘기하느라 밤 샜어! 추우니까 그냥 꼭 안고 누워서 얘기했을 뿐이야! 넌 참... 얜 진짜 천잰데 네 녀석은 예술이랑은 담 쌓은 녀석이니 그런 건 모르고 맨날 놀아나는 생각만 하니... ”

 

“ 으윽, 누가 그런 생각을 해요! 그런 말은 이 녀석이 하니까 그러는 거지. 하여튼 알았어요. 너 내일은 어떻게 할 거야? 데리러 와 말아? ”

 

“ 데리러 와. 내일은 로만이 동기들 모임 있댔어. 내일 블린도 구워줘. ”

 

“ 블린을 나한테 맡겨놨냐! ”

 

“ 네가 어제 안 해줬잖아. 술 마시러 간다고... ”

 

“ 알았어. 극장에 남지 말고 지금 빨리 가! ”

 

 

그래서 왕재수는 코즐로프의 차를 타고 갔고 베르닌은 혼자서 집으로 돌아왔다. 알렉산드라 생각에 무거운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   *   *

 

 

 

다음날 정신없이 일하고 있는데 감사실에서 그를 호출했다. 들어갔더니 감사부장과 사내 고충처리 담당자 이그노리로프, 대외교류부장이 앉아 있었다. 감사부장이 그에게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 자네가 알렉산드라 크롤리코바의 증인을 자청했나? ”

 

“ 어, 그 성희롱 건이라면, 예. ”

 

“ 이 자료도 자네가 정리한 건가? ”

 

 

감사부장이 두툼한 종이뭉치를 홱 던졌다. 베르닌은 종이들을 넘겨보았다. 앞은 알렉산드라가 직접 작성한 서류였다. 진정서 양식에 맞춰서 기록되어 있었다. 지난 6년간 타라카노프가 그녀에게 지속적으로 가해온 폭언과 성희롱 발언, 근무지와 술자리에서 해온 추행에 대해서도 길게 적혀 있었다. 내용을 훑어보기만 해도 화가 났다.

 

 

“ 예, 뒤의 절반쯤은요. 수요일 밤에 메드베지에서 있었던 일을 시간 순서대로 기록했습니다. 뒤에 첨부한 것은 관련 법규와 판례들입니다. 물론 잘 아시겠지만... ”

 

“ 자네 혼자만 목격자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나? ”

 

“ 주장이 아니라 사실을 기술한 건데요. ”

 

“ 허참, 답답하기는... ”

 

 

감사부장이 나직하게 욕을 했다.

 

 

“ 자네 지금 뭐하자는 건가. 같은 남자끼리 술자리에서 일어나는 일도 이해 못 하나? 얘기 들어보니까 그냥 가벼운 농담 좀 하고 취해서 가볍게 스친 정도였던데 알렉산드라가 노처녀 히스테리인지 아니면 생리라도 하고 있었는지 민감하게 반응해서 이렇게 된 거 아닌가. ”

 

“ 제가 거기 쓴 내용을 읽어 보셨을 텐데요. 가벼운 농담이 아니라 성희롱 발언이었습니다. 그리고 취해서 가볍게 스친 게 아니라 다분히 의도적인 추행이었고요. 알렉산드라 선배가 싫다는 의사를 밝혔는데도 얼굴을 비비고 껴안고 몸을 만졌다고요. 다른 분들은 아나톨리 표도로비치와 같은 부서라서 불편하니까 모른 척하고 있겠죠. 당장 부장님께서도 그 자리 계셨잖아요. 알렉산드라 선배의 얘기나 제 기록에 잘못된 게 어디 있나요? ”

 

 

베르닌은 대외교류부장 쪽을 보며 물었다. 부장은 발끈했다.

 

 

뭣이? 아주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애송이 주제에 왜 남의 부서 일에 이래라 저래라야! 너 예전부터 그 계집애랑 친하게 지낸 거 모르는 줄 알아? 둘이 무슨 그렇고 그런 사이라도 되냐? 들어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들이 꼭 조직 분위기를 흐린다니까! 아나톨리가 뭘 얼마나 집적댔다고. 나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정말 별 거 아니었어! 농담 조금 한 것 가지고. 어디서 건방지게... ”

 

 

베르닌은 기가 막혔다. 부장이라는 인간이 부하 직원을 대놓고 차별하는 것도 모자라 엄연한 가해자를 감싸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 고충처리 담당자인 이그노리로프가 슬슬 달래듯 말했다.

 

 

“ 다닐, 자네가 아직 사회 경험이 별로 없어서 그러는 거야. 원래 회사에서는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일어나는 법이야. 지금 이렇게 일을 크게 만들면 좋을 거 하나도 없어. 아나톨리가 몇 년째 승진 못하고 있는 거 알잖아. 3월에 승진 심사 있는데 이번엔 딱 아나톨리 차례란 말이야. 이 일이 커지면 승진은커녕 서류에도 줄 그어져서 앞으로도 힘들어져. 알렉산드라처럼 싱글에 젊은 여자애야 죽었다 깨나도 그런 거 이해 못한단 말이지. 처자식 딸린 40대 가장이 승진도 미끄러지고 주변에서 손가락질 받으면서 어떻게 버티란 말인가. ”

 

“ 처자식 딸린 40대 가장이면 애초부터 후배 여직원에게 부적절한 짓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

 

“ 그러니까 지금 내가 얘기하잖아! 술자리였고 취해 있었다고. 알렉산드라 걔가 원래 좀 까칠하고 신경질적인 거 다 알고. ”

 

“ 아니에요, 알렉산드라 선배는 신경질적이지 않아요. 성실하고 상냥해요. 후배들에게도 얼마나 잘 해줬는데요. 그리고 선배님은 인사부서 소속에 직원 고충처리 담당자잖아요. 그러면 공정하게 사안을 판단해야지 왜 무조건 아나톨리 표도로비치의 편만 드시는 건가요? ”

 

“ 아니, 이 친구가 정말 건방지기 짝이 없군! 애초부터 알렉산드라 걔가 행실을 똑바로 하고 다녔으면 왜 그런 일이 있었겠나! 아나톨리에게 물어보니 걔가 자기 옆에 와서 앉고 술도 따라주고 애교도 부리고 하니까 자기도 술김에 조금 실수한 것 같다고 하던데!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나? 계집애가 끼를 부렸으니까 그런 거지!

 

“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옆에서 다 봤는데요! 절대 그렇지 않았어요. 알렉산드라가 옆에 가서 앉은 게 아니라 그쪽 부서 선배들이 억지로 끌어다 앉혔어요. 술도 따르라고 강요하고요. 알렉산드라 선배는 피해자인데 어째서 다들 선배에게 잘못이 있는 것처럼 몰아가나요? ”

 

 

감사부장이 헛기침을 했다.

 

 

“ 그래서, 자네 지금 여기 적은 게 전부 사실이라고 주장하겠다 이건가? ”

 

“ 주장이 아니라 사실을 기술한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

 

“ 자네 정말 왜 이러는지 모르겠군. 국장님이 매일같이 책상물림에 답답한 녀석이라고 하던 이유가 있었어. 왜 이렇게 상황 파악을 못하나. 이게 그냥 알렉산드라와 아나톨리 두 사람의 문제로 끝날 줄 아나? 이 문제가 불거지면 그 자리에 있었던 부서장들도 곤란해져.

그뿐인가, 가뜩이나 요즘 모스크바 본부에서 연방 지부들에 대한 감사가 강화되고 있는데 여기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있다는 얘기가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나. 자네 지난달에 특별감사 받아봐서 알잖아. 그보다 더 심하게 탈탈 털 거란 말이야. 몇 명 옷 벗어야 될지도 몰라. 그냥 잘 무마하고 화해하고 넘어가면 될 일을 왜 크게 만든단 말인가. 요즘 우리 가브릴로프도 수도 쪽에서 못된 물이 들어온 애들이 많아서 가뜩이나 당과 KGB를 스탈린주의의 온상이 어쩌고 하며 공격하고 선동하는 일이 잦은데 말도 안 되는 성희롱 소문까지 퍼져보게. 회사 이름에 먹칠할 셈인가.

알렉산드라 걔도 그렇지. 이렇게 되면 누가 걜 데리고 일하려고 하겠나! 언제 또 히스테리 부리며 선배에게 누명 씌울지 모르는데. 자네라고 괜찮을 거 같나? 20년 된 선배 하나 매장시키는데 발 벗고 나선 건방진 막내라고 낙인찍히고... 자넨 알렉산드라와는 또 다르잖나. 학벌도 더 좋고 군필자에 요즘 그 반동분자 녀석 감시하는 중요 업무까지 맡아서 앞으로 국장이 키워주려고 하는 와중에 왜 이렇게 판을 뒤집으려고 하냔 말이야. 국장조차도 아직 진정서를 정식으로 수리하지 않았어, 당사자끼리 잘 화해시키라는 특명을 내렸단 말이야. 그런데 자네가 이렇게 눈치 없이 끼어들다니. 일단 국장이 이걸 수리하게 되면 정식 기록에 남게 되고 타라카노프를 인민재판에 세워야 한단 말이네. 회사와 당의 명예에도 크나큰... ”

 

“ 부장님, 회사와 당의 명예만 중요하고 알렉산드라 선배의 명예는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요? ”

 

아니, 이 녀석이 그래도 말귀를 못 알아듣고... 에이, 답답해. 알았네! 일단 나가보게! 허참, 아무리 고지식하다 해도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니까. 괜히 끗발도 없는 여직원 편들어주다 자네 앞길 막힐 거 생각도 해야지. 답답한 녀석 같으니... ”

 

 

베르닌은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며 감사실을 나왔다. 그런데 복도에서 세묜 모브린이 기다리고 있었다.

 

 

“ 자네 나 좀 봐. ”

 

“ 어, 웬일이신가요, 선배님. ”

 

“ 나랑 담배 한 대 필까? ”

 

“ 전 담배 안 피우는데요. ”

 

“ 하여튼, 잠깐 바람이라도 쐬자고. ”

 

 

베르닌은 내키지 않았지만 모브린을 따라 나갔다. 모브린은 건물 밖으로 나가서 배나무 아래 벤치에 앉더니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연기를 빨아들였다가 훅 내뿜었다. 그리고는 친근한 어조로 말했다.

 

 

“ 자네 이제 3년차지? ”

 

“ 어, 예... 햇수로는. 들어온 지는 2년 좀 넘었고요. ”

 

“ 응, 그럼 아직 원칙주의가 남아 있을 때니까 이해해. 아직 20대고. 근데 이번 일 말이야. 증인을 자청했다고 들었는데 사실 자네가 나서지 않는 게 사셴카를 위해서도 훨씬 낫거든. 자네를 위해서도 그렇고. ”

 

“ 그건 어째서죠? ”

 

“ 사셴카가 내 동기라서 잘 아는데, 걘 좀 결벽증이거든. 그러니까 상사한테 잘 보이지도 못하고, 선배들에게도 틱틱거리는 편이야. 가뜩이나 우리 부서에선 유일한 여직원이라 나머지 부서원들과 비교가 안 될 수가 없는 상황이야. 신체 능력도 떨어지고 출장 같은 거 갈 때 방도 같이 못 쓰니까 여비도 더 들고. 단합대회 같은 거 갈 때도 1차만 하고 자꾸 빠지려고 해서 부장도 별로 안 좋아해. 근데 여기서 이렇게까지 문제를 일으키면 걘 정말 앞길 완전히 막힌단 말이야. 알지? 우리 동기 중에 걔만 승급 못한 거. 이번에 아나톨리 선배만 승진 심사 대상인 거 아니야. 사셴카도 마찬가지라고. 근데 이 난리를 쳐놨으니 당연히 승급은 안 될 거고... 앞으로도 안 될 거라고. 우린 공무원이잖아, 최소 20년은 다녀야 하는데 한순간의 화를 못 참아서 왜 긴 앞날을 망치냐고. ”

 

“ 아니에요, 한순간의 화가 아니었어요. 입사하고 지금까지 6년 동안 괴롭혔다고 했어요. ”

 

“ 자넨 여자 말을 곧이곧대로 다 믿나? 아나톨리 선배 입장에선 생각 안 해? 그 선배는 원래 후배들에게 허물없이 대하는 타입이야. 악의가 있어서 그러는 건 절대 아니라고. 취하면 좀 풀어지는 사람이라 그렇지, 솔직히 러시아 남자치고 술 먹고 목석같은 사람이 어디 있나. ”

 

“ 선배님은 알렉산드라와 동기인데 왜 아나톨리 표도로비치 편을 드시는 건가요? ”

 

“ 동기니까 그렇지! 이 바보야, 사셴카를 위해서 그러는 거라니까! ”

 

아니에요, 알렉산드라 선배를 위한다면 도와주고 진실을 밝혀줘야죠. 동기가 이러고 있는 거 알면 알렉산드라 선배는 더 속상하겠네요. 이럴 거면 제가 동기 없이 혼자 들어온 게 다행이네요. ”

 

“ 자네 정말... 내가 솔직하게 말하는데, 사셴카는 그렇다 치고, 자네도 내년이면 승진 심사 대상에 들어갈 텐데 지금 윗분들에게 이렇게 찍히면 답 없어. 국장도 보고받고 엄청 화냈다고 했어. ”

 

“ 선배님, 말씀 마치셨으면 전 들어가겠어요. 금요일이라서 일이 엄청나게 밀려 있거든요. ”

 

 

베르닌은 혀를 차는 모브린을 남겨두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알렉산드라를 위해 증언을 하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   *   *

 

 

 

오후 늦게 스페호프가 그를 국장실로 호출했다. 또 배추밭 고양이 얘길 하려나 걱정이 되었다. 최근 고양이들이 발정기인지 밤마다 배추밭에 모여들어 시끄럽게 울어대고 있었다. 게다가 이 구역의 지배자인 검정고양이 미셴카가 짝짓기를 독점하고 싶은 건지 다른 수놈들을 마구 할퀴고 잡아 뜯어서 매일같이 소란스러웠다. 베르닌은 고양이들의 짝짓기 장소를 옮겨줄 방안을 고심하며 국장실로 올라갔다.

 

 

스페호프는 그가 들어오자마자 이마를 잔뜩 찌푸린 채 본론으로 들어갔다.

 

 

“ 자네가 크롤리코바의 진정서에 첨부한 서류는 공적으로 접수할 수 없으니 그리 알게. 반려야. ”

 

“ 예? 어째서인가요? 양식에 맞게 작성했고 법규와 판례도 기재했는데요. 있었던 일만 기재했고 저의 주관적 판단은 완전히 배제했는걸요. ”

 

“ 자넨 당사자도 아니고, 그 부서 직원도 아니니까. 참견할 자격이 없단 말이네. 대체 정신이 있나 없나, 무마를 시켜도 모자랄 판에 눈치 없게 끼어들어서 일을 키우긴. 행정의 기본 중 하나는 연공서열을 존중하는 거야. 어디 감히 20년 된 선배를 밀고하려는 건가. 젊은 친구가 벌써부터 못된 짓만 배워가지고. 하여튼 인민재판은 없을 거야. 증언도 필요 없고. 마음 같아선 자네의 버릇없는 행동에 징계라도 내리고 싶지만 치기어린 마음에 돼먹지 않은 기사도를 발휘한 걸로 알고 이걸로 접겠네. 앞으로는 조심하게.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생각이란 걸 좀 하고. ”

 

“ 접다니요? 알렉산드라 선배가 진정서를 제출했고 인민재판을 요구했으니 당연히 절차에 따라 증인이 필요하고... ”

 

“ 재판은 없을 거야. 크롤리코바가 진정을 취소했으니까. 당사자끼리 화해했고 다 잘 끝났어. 공연히 자네가 설레발만 떨지 않았으면 더 깔끔했을 텐데. 하여튼 그렇게 알게. 자네 부서장에게도 다 마무리됐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해뒀네. 앞으로는 조심하게. 쯧쯧, 요즘 좀 업무 역량이 나아지나 싶었더니만... 명심하게, 자네에게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해도 모자란단 말이야. 서무 업무도 그렇고 그 불여우 감시도 그렇지. 며칠 전에도 검열국 쪽에서 별도 보고가 들어왔더군. 그 녀석이 준비하는 신작에 이념적 문제가 있다고 말이야. 심지어 검열국 직원들에게 폭언을 하고 성질까지 부렸다는데 어째서 그쪽 보고는 빼먹었나? ”

 

“ 그 충돌 건은 보고서에 요약해서 올렸는데요, 그리고 검열국 쪽 얘기는 과장된 거였고요. 그 신작은 무용수들에게 새로운 동작을 익히기 위해 만든 거라서 이념적인 내용은 전혀 없고 남녀가 밀고 당기며 연애하는 얘기더라고요. 제가 극장장과 발레마스터, 무용수들, 오케스트라 쪽 사람들에게도 확인해봤습니다. 이념적인 작품은 아니었어요. ”

 

“ 허, 그래? 그렇다 치지. 그래도 검열국 쪽 보고는 무시하면 안 돼. 그 불여우는 옛날부터 전적이 화려하니까. 작년에 뉴욕에서도 얼마나 당돌한 짓을 했는지 아나? 온갖 반체제적인 내용에 심지어 야하기 그지없는 것을 작품이라고 만들어서는, 검열요원에겐 그런 내용 싹 빼고 보여준 다음에 정작 무대에선 그런 지저분한 걸 췄단 말이지! 파리에서도 별의별 짓을 다 하고. 예술이니 뭐니 하며 우기고 말이야. 예술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앞으로는 검열국 쪽 보고도 하나하나 다 챙기도록 하게. 그 자식은 정말 골칫거리야. 크레믈린에서 또 끼어들기 전에 빨리 없애버려야 할 텐데. 하여튼 그쪽은 자넬 믿네. 나중에 이 문제는 따로 얘기하도록 하세. 그만 들어가 보게. ”

 

 

베르닌은 알렉산드라와 타라카노프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스페호프의 심기가 좋지 않아 보였기 때문에 그대로 국장실을 나왔다. 터덜터덜 내려오는데 등록부서 앞에 여직원들이 나와서 떠들고 있었다. 그 사이에 있던 리자와 마주쳤다.

 

 

“ 다냐, 또 국장실에 불려갔던 거예요? 또 혼났어요? ”

 

“ 아뇨. 일 때문에요. 근데 여긴 왜 다들 나와 있어요? ”

 

“ 아, 방금 인사부서에서 들었는데요, 알렉산드라 언니가 우리 부서로 온대요. 그런 얘기 없었는데 갑자기 발령이 나서 웬일인가 싶어요. 하여튼 우린 좋죠 뭐. 언니가 일도 잘하고 후배도 잘 챙겨주니까. 전 언니랑 친했거든요. ”

 

뭐라고요? 등록부서로 발령? 언제요?

 

“ 월요일 자래요. 언니 방금 왔다 갔어요. 우리 부장님한테 인사도 하고. 짐도 벌써 옮겨놨어요. 인수인계는 월요일에 하기로 했고요. ”

 

 

베르닌은 얼떨떨해졌다. 너무 어이가 없었다. 그는 대외교류부에 가 보았다. 타라카노프가 동료들과 큰 소리로 떠들고 있다가 베르닌을 발견하더니 증오 어린 시선을 던지며 입을 다물었다. 모브린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돌렸다. 알렉산드라의 책상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배추밭으로 갔다. 알렉산드라가 거기 있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넓적한 돌멩이에 걸터앉아 있었다. 고양이는 눈에 띄지 않았다. 사료 그릇은 비어 있고 물그릇에만 반쯤 물이 남아 있는 걸 보니 이미 밥을 먹고 간 것 같았다.

 

 

“ 선배님, 어떻게 된 거예요? 인사이동이라니. 그리고 감사실 진정 낸 것도 취소하셨다면서요. ”

 

“ 응. 다냐, 미안해. 나 도와주려고 그렇게 애썼는데. 미리 얘기라도 할 걸. 아까 너무 경황이 없어서. ”

 

“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국장이 그러던데요, 아나톨리 표도로비치랑 화해하셨다고. ”

 

“ 응. 그렇게 됐어. 그냥 그렇게 가기로 했어. ”

 

“ 그냥 그렇게라니요... 그럼 아나톨리 선배는 하나도 징계 안 받고... 어째서 선배님이 다른 부서로 가셔야 하는데요? 등록 부서는 선배님 전공하고 맞지도 않고... 원래 대외교류부 쪽 지원하셨잖아요. 그 부서는 지금 업무보다 더 단순 업무인데... 이건 좌천이나 마찬가지잖아요. ”

 

“ 차라리 그 부서가 나아. 여자애들도 많고. ”

 

“ 그렇지 않아요... 거긴 정말 스태프 부서인데... 선배님은 대외사업 쪽... ”

 

“ 어차피 대외교류부에서도 서무나 하고 있었는데 뭐. 걱정해줘서 고마워. ”

 

 

알렉산드라는 어제처럼 울지도 않았다. 얼굴은 창백했지만 표정은 무심했고 목소리도 건조했다. 베르닌은 속이 터질 것 같았다.

 

 

“ 정말 화해하신 거예요? 아니면 국장이 협박한 건가요? ”

 

“ 협박이라니. ”

 

“ 저 다 알아요! 아침에 감사실에서 불러서 갔는데 감사부장이랑 대외교류부장이랑 고충처리 담당자가 저한테 막 증언 서류 취소하라고 협박했어요. 좀 전에는 국장도... ”

 

“ 그랬구나. 미안해, 다냐. 내가 내 성질을 못 이겨서 소란피우고 너한테까지 피해 주고... 정말 미안해. 이제 해결된 거니까 더 이상 신경 쓰지 마. 고마웠어. ”

 

해결된 거 아니잖아요! 선배님이 그냥 포기한 거잖아요, 눈감아주고... 위에서 협박해서... ”

 

“ 어쩔 수 없었어, 다냐. 국장이랑 감사부장이 인민재판해 봤자 나만 손해라고 하루종일 설득했거든. 재판해서 타라카노프 처벌해봤자 그 사람은 잠깐 징계만 먹은 후 승진할 거고 나는 이 동네도 아니고 저쪽 시베리아 쪽 지부로 전출시킬 거라고 했어. 회사 입장에선 20년 된 남자 중견직원이 더 필요하다는 거지. 그리고 국장 말이 맞아. 일 크게 만들었다가 나도 그렇고 괜히 너한테까지 불똥 튀잖아. 국장이 자기 방으로 나랑 타라카노프 불렀어. 그 작자가 나한테 사과했어. 거짓 사과지만 어쨌든... 그렇게 마무리된 거야. ”

 

“ 그게 어떻게 마무리예요. 협박인데... 선배님, 이렇게 물러나시면 안돼요. 그리고 잘못한 건 아나톨리 표도로비치인데 좌천시키려면 그 사람을 보내야지 왜 선배님을 등록부서로 보내요! 이건 보복성 인사... ”

 

“ 일이 이렇게 됐는데 한 부서에서 마주치며 얼굴 붉히는 것도 그러니까. 난 차라리 잘됐어. 등록부서에는 여자애들도 많으니 지저분하게 구는 놈들은 덜하겠지. 등록부장 말로는 거기 지금 서무는 나보다 후배 여자애니까 나한테는 다른 업무 줄 거래. ”

 

“ 하지만... ”

 

“ 다냐, 고마워. 나 위해서 나서준 거 안 잊을게. 그러니까 이제 이 얘긴 그만 하자. 주말 잘 보내. ”

 

 

알렉산드라는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나더니 배추밭을 떠나 사무실 쪽으로 가버렸다. 베르닌은 멍해져서 한동안 찬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   *   *

 

 

 

 

베르닌은 화가 나고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타라카노프는 말할 것도 없고 국장을 비롯한 간부들과 대외교류부 직원들, 아니 회식 현장에 있었던 모든 동료들이 가증스러웠다.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가해자가 이토록 확실한 상황에서 결국은 피해자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심지어 더 하위 부서로 좌천까지 당하다니 정말 더러운 노릇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알렉산드라의 태도였다. 그렇게 오랫동안 괴롭힘을 당했으면서, 그렇게 분노해서 감사실에 진정을 하고 인민재판을 요청했으면서 어째서 막판에 그렇게 쉽게 포기해버렸는지 이해가 안 갔다. 답답하고 속상했다.

 

 

그는 화가 나서 씩씩거리다가 시계를 보고 화들짝 놀라 급하게 차를 몰고 극장으로 갔다. 왕재수가 모자도 쓰지 않고 주차장 계단에 앉아 있었다. 그는 급하게 빵빵 하고 경적을 울렸다. 차에 올라탄 왕재수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 야! 추운데 왜 거기 앉아 있어! 감독실에서 기다렸어야지! 모자도 안 쓰고, 패딩도 안 입고 또 그 얇은 코트 입고! ”

 

“ 네가 금방 올 줄 알았지. 그리고 패딩은 안 돼! 오늘 외부에서 손님들도 왔었는데 패딩 입은 꼴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고! ”

 

“ 에잇, 정말 너란 놈은... ”

 

“ 왜 성질내. 늦게 와 놓고. 오늘 블린 구워주는 거야? ”

 

“ 아니, 나 오늘 블린 같은 거 구울 기력이 없어. 선택해. 냉동 펠메니 삶아주는 거랑, 요 앞 식당에서 먹고 들어가는 거. ”

 

“ 펠메니. ”

 

“ 엥? 너 그 식당 좋아했잖아. 닭가슴살이랑 샐러드... 딴 것들도 맛있던데. 집에 가면 진짜 그 냉동 펠메니 삶아주는 거 밖에 없어. ”

 

“ 집에서 밥 먹고 싶어. 계속 식당 밥 먹었더니 질려. ”

 

“ 펠메니도 공장에서 나온 거잖아. ”

 

“ 그래도 네가 삶는 게 더 낫단 말이야. ”

 

“ 말도 안 돼. 삶는 건 다 똑같지. ”

 

“ 너 귀찮아서 그러는 거야? ”

 

귀찮아! 당연하잖아! 여태 그렇게 밥을 해다 바쳤는데 안 귀찮으면 그게 사람이냐? 오늘은 일도 많았고 피곤하다고. 내가 네 종도 아니고. ”

 

“ 언제는 연어랑 새우랑 채소랑 구워주더니... 생선가게에서 특별이용권 받았으니까 맛있는 거 해줄 거라고 뻥만 치고. 오늘은 펠메니 삶아주는 것도 싫다고... ”

 

야, 어떻게 매일 네 비위를 맞추고 사냐!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 거지! 다들 천재다 예쁘다 해주니까 팔자 늘어져가지고... 넌 보통 인민들이 얼마나 고생하며 사는지 하나도 몰라!

 

“ 왜 소리 질러. 난 사람들이 나한테 소리 지르는 거 너무 싫어. 펠메니 삶기 싫으면 관둬. 차려줄 필요 없어. 난 저녁 안 먹어도 돼. ”

 

“ 그 얘기가 아니잖아! 저녁은 또 왜 안 먹는데! ”

 

“ 네가 요리하기 싫다며. 보통 인민들이 고생한다며. 나도 별로 입맛 없어. 원래 저녁 꼬박꼬박 챙겨먹었던 것도 아닌데 뭐. 펠메니도 별로야. 공장제는 맛없어. 안 먹어. ”

 

“ 의사가 많이 먹어야 된다고 했잖아! 펠메니 싫으면 지금 내려. 저기 식당에서 먹고 가게. ”

 

“ 싫어. 식당 안 가. ”

 

 

왕재수는 그 말까지만 하고 입을 꽉 다물었다. 베르닌은 지치고 피곤해서 왕재수와 입씨름하기 싫었기 때문에 묵묵히 차를 몰았다. 하지만 강을 건너 배나무 거리로 접어들자 내심 기분이 좋지 않았고 슬그머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왕재수가 창밖만 바라보며 입술을 꼭 깨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코즐로프에게 애 끼니 잘 챙겨 먹여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던 게 생각나면서 가슴 한구석이 찔렸다. 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어가면서 베르닌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야, 펠메니 삶아줄 테니까 먹어. ”

 

“ 됐어. 배 안 고파. ”

 

“ 뭘 배 안 고파, 아까 배에서 꼬로록 소리 나는 거 들었는데. ”

 

“ 물 마셔서 그래. 배 안 고파. ”

 

“ 미안해, 오늘 회사 일이 힘들어서 그랬어. 펠메니 삶는 건 안 어려워. 그러니까 저녁 먹자. 너 요즘 계속 과로하고 있잖아. ”

 

 

왕재수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표정은 좀 풀린 것 같았다. 베르닌의 집으로 순순히 따라 들어왔다. 하지만 베르닌이 냉동실에서 펠메니를 꺼내자 봉지를 뺏아서 도로 넣었다.

 

 

“ 됐어. 나 그냥 사과랑 요구르트 먹을래. ”

 

“ 그게 무슨 밥이야! ”

 

“ 배만 채우면 됐지. 물 끓이고 삶고 차리는 거 귀찮잖아. ”

 

“ 내가 하지 네가 하냐? ”

 

“ 너 힘들다며. ”

 

“ 언제부터 그런 거 신경 썼다고! 고양이 쥐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

 

“ 오늘은 너 진짜 기분 안 좋아 보이니까 그렇지. 국장이 또 자른다고 협박한 것처럼. 벌목공... ”

 

아니야! 벌목공 운운 없었어! 공연히 또 사고 칠 생각하지 마! 그리고 나도 배고파. 먹어야겠어. ”

 

 

베르닌은 물을 끓이고 펠메니를 삶았다. 스메타나를 곁들여 접시에 담았는데 아무래도 뭔가 허전해서 양배추와 당근을 썰어 마요네즈에 버무려 샐러드도 만들고 오이와 고추피클도 좀 꺼냈다. 왕재수는 배 안 고프고 입맛 없다더니 정신없이 만두를 먹었다. 샐러드도 토끼라도 된 양 포크로 쓸어 담아 막 먹었다. 피클도 집어먹었다. 딱 보니 점심도 안 먹은 게 분명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잘 먹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자신은 영 입맛이 나지 않았다. 만두 몇 개만 스메타나에 찍어먹고 오이피클 두 개를 먹은 후 포크를 내려놓았다. 왕재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너 다 먹었어? ”

 

“ 응. ”

 

“ 왜 이렇게 조금 먹어? 어디 아파? ”

 

“ 아니, 입맛이 없어서 그래.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어. ”

 

“ 역시 스페호프 그 자식이 자른다고 했구나. 벌목공... ”

 

아니라고!

 

 

왕재수가 다 먹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식탁을 치웠다. 차를 우려주고 무가당 초콜릿 캔디를 몇 알 건네주었다. 그러다가 베르닌은 답답한 심정을 이기지 못하고 사흘 전의 회식부터 시작해 알렉산드라와 타라카노프, 자신의 증인 자청과 간부들의 협박, 알렉산드라의 좌천 등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간단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원체 분하고 답답해서 그런지 봇물 터지듯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왕재수는 보통 그가 횡설수설하기 시작하면 ‘아 지겨워!’ 하면서 중간에 끊고 나가버리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끊지도 않고 끼어들지도 않고 베르닌이 떠들게 내버려두었다. 그러면서 차도 마시고 초콜릿도 먹었다. 보나마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는 게 분명했지만 어쨌든 베르닌은 왕재수가 듣든 말든 말이라도 하면 좀 속이 시원해질 것 같아서 전부 다 얘기했다.

 

 

마침내 베르닌이 이야기를 마치자 왕재수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물었다.

 

 

“ 그래서 화난 거야? ”

 

“ 그래. ”

 

“ 누구한테 화난 건데? ”

 

전부! 타라카노프 그 개자식이랑... 국장, 감사부장. 이그노리로프. 대외교류부장. 그 부서 인간들 전부! 그리고, 그리고... 알렉산드라 선배도 너무 답답해. 끝까지 갔어야지! 고발해서 재판에 세웠어야지. 내가 그렇게 자료도 다 정리해주고 증인도 서주겠다고 했는데. 결국 손해만 보고... 알렉산드라도 바보 같아. 그리고는 어떻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렇게 평온한 표정으로 나한테 이제 이 얘기 하지 말자고... 여자들은 정말 모르겠어. ”

 

“ 너 다시는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 마. ”

 

“ 응? 뭐가? ”

 

“ 알렉산드라가 잘못한 것처럼 얘기하고 있잖아. ”

 

“ 아니야! 성희롱은 분명히 타라카노프가 잘못했어. 협박한 건 간부들 잘못이고. 근데 알렉산드라도 이해가 안 가니까 그렇지. 6년 동안 그랬다잖아. 그럼 맨 처음에 그 개자식이 그랬을 때 주변에 말했어야지. 그때 문제를 제기했어야지. 꾹꾹 참고 말 안 했기 때문에 다들 몇 년 동안 타라카노프가 그럴 땐 좋다고 가만있다가 왜 이제 와서 난리를 치냐고 하는 거라고. 잘못된 일이 있으면 당연히 문제를 제기했어야지. 심지어 자기가 피해자인데... ”

 

그러니까! 너 그렇게 얘기하지 말라고! 왜 약자에게 잘못을 돌려! 알렉산드라는 약자잖아. 제일 비겁한 게 약자한테 잘못을 돌리는 짓이야.

 

 

왕재수가 정색을 했기 때문에 베르닌은 움찔했고 어쩐지 억울해서 항변했다.

 

 

“ 하지만... 알렉산드라는 왜 그랬던 걸까? 나 솔직히 이해가 안 가. 처음에야 놀라서 말 못했다지만 몇 년 동안 그랬다잖아. 진작 좀 대들지. ”

 

“ 너는 국장이 들들 볶고 괴롭힐 때 대들었어? ”

 

“ 어... 아니... ”

 

“ 똑같은 거야. 그것보다 더 심한 거라고. 그 여자 위치에서 저항하기가 쉬운 줄 알아? 세상에 더러운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권력이 뭐 별거냐? 나보다 조금이라도 위에 있고 조금이라도 힘세면 그게 다 권력이지. 그 여자가 뭘 더 어떻게 할 수 있었겠어. 심지어 너도 협박했다며. 그럼 그놈들이 알렉산드라 불러서 네 얘기도 했을 걸. 뻔하잖아. 고발 취소 안 하면 그 여자 좌천시키는 것도 모자라 너한테도 불이익 줄 거라고 협박했겠지. 걘 너한테 피해 주기 싫었을 거고. 그냥 그런 거야. ”

 

“ 아... 그래. 나보고 앞길 막힐 거라고 하긴 했지만... 그치만... ”

 

 

베르닌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너무나 속이 상했다.

 

 

“ 불쌍한 알렉산드라. 어떻게 하지. 나 그만두고 싶어. 뻔히 더러운 수작 벌어진 거 다 알면서 아무 것도 못하고...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

 

“ 뭘 어떻게 하니. 더러운 놈들 안 보고 살아야지. 내가 제일 잘나면 돼. ”

 

“ 야, 너야 천재니까 그런 말이 쉽게 나오지. 나나 알렉산드라는 너처럼 잘나지 않았잖아!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데? ”

 

몰라! 그 방법을 알았으면 내가 지금 시골에 와 있겠니?

 

 

왕재수가 찻잔을 쨍 하고 내려놓더니 일어섰다. 안색이 창백해지면서 까만 눈에 불꽃이 이글거렸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깜짝 놀랐다. 왕재수는 한 손으로 가슴을 탁 치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그게 다 그런 거란 말이야. 나보다 센 놈이 짓밟을 때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비웃는 것밖에는 없어. 근데 그것도 때로는 안 되거든. 그럼 포기할 수밖에 없는 거야. ”

 

“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돼! 그건 자본주의 양키들이나 그러는 거야! 우리 선조들이 왜 혁명을 했는데. 잘못된 건 고치고 뒤집어야지! 약자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해야지!

 

 

왕재수는 가만히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검은 눈에 이글거리던 불꽃은 사라지고 없었다. 졸리고 지쳐 보였다.

 

 

“ 혁명으로 끝나는 게 아니니까 그렇지. 혁명을 한 놈들이 결국은 다시 윗자리에 올라간다니까. 인간이란 게 원래 그래. 뭘 바라니? ”

 

 

베르닌은 말문이 막혔다.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그 순간 왕재수가 아플 때 크레믈린 아저씨에 대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온천에서 했던 얘기도. 그는 입을 벌렸다 다물었고 다시 벌렸다. 그리고 목구멍을 철사로 쑤시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 너 그래서 그런 거야? ”

 

“ 뭐가? ”

 

“ 투레츠키. 가만히 있었던 거. ”

 

“ 웬 투레츠키. 너 정말 바냐한테 무슨 억하심정 있냐? 툭하면 걔 얘기야. ”

 

“ 알았어, 투레츠키는 아니라고 쳐. 하지만... 그 인간. 크레믈린에 있다는 그 아저씨. 너도 그랬던 거야? ”

 

“ 뭘 그랬다는 거야? 아 머리 아파. 졸려. ”

 

“ 타라카노프가 알렉산드라에게 그랬던 것처럼. 싫은데 못살게 굴고... ”

 

“ 몰라. 기억 안 나. 난 자러 갈 거야. ”

 

“ 나쁜 짓 하고 이상한 사진 찍었다고 했잖아. 그때 알릭 얘기하다가. 내가 그런 명령 받은 줄 알았다고. 크레믈린 아저씨도 그랬다고 했잖아. ”

 

“ 얜 대체 왜 이렇게 쓸데없는 소릴 다 기억하는 거야. 그거 다 헛소리야. 에이, 그때 온천 괜히 갔어. 피곤해 죽겠네. ”

 

“ 하지만... 너도... ”

 

 

베르닌은 다시금 솟구치는 분노를 느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너는 우리 같은 일반인도 아니잖아. 천재잖아. 엄청 잘 나가는 애였잖아. 완전 스타였잖아. 외국에서도 다 알아줬다며. 근데 어떻게 그놈이 나쁜 짓하게 놔둘 수가 있어? 네가 싫으면 싫다고 했어야지 왜 그 사람 마음대로 하게 놔둬? 아무리 국회의원이라도 그렇지. 네가 대놓고 문제 제기했으면... ”

 

이 바보 멍충아. 내가 천재면 뭐하고 잘 나가면 뭐해. 그 인간 한 마디면 그 자리에서 모가지 날아가는데. 그 사람이 손 하나만 까딱하면 다리 부러지고 근육 끊어질 거 뻔히 아는데, 다시는 춤 못 추게 될지도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싫다고 해! 아무도 내 편 안 들어줄 거 뻔한데 무슨 대놓고 문제를 제기해. 내가 무슨 고위직 집안 출신도 아니고. 그거 다 환상이야. 천재에 스타니까 내 말 먹힐 거라는 거. 내가 몇 번을 말해, 그랬으면 내가 시골에 와 있겠냐? ”

 

 

왕재수는 흥분한 말투로 빠르게 쏘아붙이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베르닌은 당황해서 가만히 있었다. 머릿속이 빙빙 돌았다. 울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만 또렷하게 들었다. 하지만 왕재수는 울지도 않았다. 빨개졌던 얼굴도 금세 정상으로 돌아왔다. 완전히 누그러진 목소리로 덧붙였을 뿐이었다.

 

 

“ 바보 멍충이. 그러니까 펠메니 남은 거 다 먹으란 말이야. 안 먹으면 너만 손해라고. ”

 

“ 삶은 지 한참 돼서 식었잖아. 다 불어터졌어. ”

 

“ 그건 네 팔자고. 하여튼 난 간다. 잘 자. ”

 

 

왕재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베르닌은 소파에 내팽개쳐진 왕재수의 코트와 가방을 발견하고 뒤따라갈까 하다가 그만뒀다. 어차피 왕재수는 토요일에도 출근하니까 아침에 태워다 주러 가면서 갖다 주면 될 것 같았다.

 

 

그는 싱크대 위에 올려두었던 남은 펠메니를 선 채로 모두 먹어치웠다. 양배추 샐러드도 먹었다. 설거지를 했다. 머릿속은 여전히 빙빙 돌았다. 그는 착잡한 마음으로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FIN

- 2015. 3. 30 ~ 4.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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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편은 이렇게 끝난다. 좀 찝찝하긴 하지만 뭐 인생이 그런 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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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라가 겪는 일들 중 일부는 내가 실제로 겪었던 일들에서 소재를 따왔다. 물론 조금씩 변형시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저 정도로 심각한 일에 휘말린 건 아니지만. 저런 일이 일어나는 곳은 상당히 많다.

 

알렉산드라에게 내가 여성 사무직 노동자로서 겪었던 일들이 좀 투영되어 있긴 하지만 물론 그녀는 허구의 인물이다. 스타일도 나랑은 좀 다르지만.. 하여튼 조금은 닮은 면도 있다. 하긴 그렇게 따지만 난 단추랑 제일 닮은 거잖아!! 단추가 겪은 일들을 생각하니 그렇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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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부에서 왕재수가 정색을 하며 쏟아놓는 얘기들은 사실 본편에 더 가까운 얘기들이라.. 하여튼 서무 시리즈도 본편에서 태어난 거니까 뒤로 갈 수록 어쩔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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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호프가 왕재수의 뉴욕 공연에 대해 떠드는 내용은 본편과 맥이 닿아 있다. 뉴욕 공연은 '불새', 파리 공연은 '니진스키 트리뷰트'에 대한 얘기인데 본편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이다. 뉴욕에서 올렸던 불새에 대한 짧은 언급과 초창기 리허설에 대한 미샤의 친구 일린의 회상 장면은 전에 about writing 폴더에 발췌한 적이 있다. 그건 여기 : http://tveye.tistory.com/3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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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우울한 에피소드였기 때문에. 기분 전환용으로.

등장인물 이름들을 지을 때 가끔은 여기저기서 빌려오기도 하고(특히 무용수나 예술가들 이름에서 잘 따온다), 인물의 성격을 풍자하기 위해 특정 형용사나 명사에서 파생시키기도 한다. 러시아 성들 자체가 형용사나 명사에서 나온 것들이 많아서 그렇게 무리수는 아니다. 이번 편이 특히 그렇다.

 

먼저 알렉산드라를 집적대는 아나톨리 타라카노프. 타라칸은 노어로 바퀴벌레란 뜻이다.

 

알렉산드라의 성인 크롤리코바. 크롤릭은 산토끼란 뜻이다 (ㅎㅎ)

 

고충 처리 담당자인 이그노리로프. '무시하다'란 뜻의 이그노리로바찌 란 동사에서 따왔다.

 

발따예프에 대해서는 전에 얘기한 적 있다. '발따찌'(수다떨다)란 동사에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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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서.. 주요 인물들 성 몇 개도.. 이 사람들 성이야 서무 시리즈 나오기 전에 본편 구상할 때 나온 거라서 위와 같이 웃긴 건 아니고...

 

 

우리의 주인공 단추청년 다닐 베르닌. '베르느이'란 형용사는 '성실한, 믿음직한, 충성스러운' 이란 뜻이다 :)

 

 

본편의 주인공이자 서무 시리즈의 왕재수인 미하일 야스민. 이 사람이야 십몇년 전에 처음 구상한 인물이라서.. 그의 성인 야스민은 다들 알겠지만 꽃 이름이다. 영어로는 재스민. 노어로는 야스민인데 뭐 이 사람 성격이나 외모가 재스민 꽃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렇다고 장미니 아이리스니 수선화니 이런 건 노어 이름이 좀 이상하기도 하고... 

우크라이나 계열 성이 가끔 ~in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본편에서 미샤의 아버지 쪽 혈통에 백러시아/우크라이나 쪽 피가 섞여 있어서 이런 성을 가졌다. 러시아에서도 그렇게 흔한 성은 아니고 보통은 꽃 이름이다.

 

 

렐랴 비슈네바의 성인 비슈네바는 전에 얘기한 적 있지만 마린스키의 프리마 발레리나인 디아나 비슈네바에서 따왔다. 액센트가 뒤에 있으니 원래 발음은 디아나 비슈뇨바가 맞지만..

 

하여튼 렐랴의 성은 액센트가 앞에 있어서 비슈뇨바가 아니고 비슈네바이다.'비슈냐'가 버찌/체리란 뜻이고 '비슈네브이 사드'는 '벚나무동산'이란 뜻이다. 체호프의 유명한 희곡 제목 말이다. 우리나라엔 벚꽃동산으로 번역됐지만. 원래는 벚나무 정원에 더 가까울 듯. 그래서 본편과 서무 시리즈에서 렐랴가 간행하는 문예지 제목도 '비슈네브이 사드'이다. 자기 성을 따기도 했고 :)

 

 

그리고 이건 좀 웃기지만.. 로만 코즐로프. 코젤은 염소란 뜻이다 :) 열받으면 들이받는다~

 

 

.. 근데 위의 성들 다 실재하는 성이다.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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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19편으로 이어진다. 19편은 이렇게 우울하지 않아요~

 

 

 

.. 댓글은 저에게 언제나 큰 힘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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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