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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7. 5. 22:34

bravebird님의 서프라이즈 선물 2016 petersburg2016. 7. 5. 22:34

 

 

 

 

몇주 전 페테르부르크로 날아간 다음날 bravebird님과 그곳에서 조우했다. 처음으로 뵙는 거였는데 2박3일 정도 너무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둘째날 같이 부끄보예드 서점에서 기념품을 산 후 아스토리아 로툰다 카페에 차를 마시러 갔는데 갑자기 bravebird님이 서프라이즈 선물을 주셨다 :) 그날 러시아 박물관에 다녀오시면서 내가 좋아하는 금발의 가브리엘과 박스트의 supper, 그리고 브루벨의 세라핌 천사 엽서를 사오신 것이다. 게다가 좀전에 서점에서 러시아어 알파벳 냉장고 자석들을 놓고 이거할까 저거할까 끝까지 망설이다 a를 택하느라 막판에 포기한 저 냉장고 자석도 마치 본인 기념품처럼 사는 척하더니 나에게 선물로 주심!

 

넘넘 감동했어요 >,<

 

감사해요 bravebird님!!

 

그래서 러시아 박물관 비닐봉투에 나의 입술로 감사의 뽀뽀 자국을 남겼습니다 ㅋㅋ 맨 위 사진이 대체 뭐였냐면 비닐봉투 귀퉁이의 내 뽀뽀 입술자국입니다... 근데 반만 찍혔네 ㅎㅎ

 

 

이렇게 :)

 

bravebird님, 감사해요~!!!

 

:
Posted by liontamer

 

근 1년만에 러시아 박물관에 다녀왔다. 이제는 페테르부르크에 오면 에르미타주보다도 러시아 박물관에 더 자주 들르게 된다. 내겐 더 편안한 곳이다.

 

이곳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은 12세기 이콘인 금발의 가브리엘, 레프 박스트의 'SUPPER', 그리고 미하일 브루벨의 날아가는 악마이다. 물론 크람스코이나 세로프, 게, 쿠스토디예프와 바스네초프 등도 좋아하지만 저 세 작품을 제일 좋아한다.

 

아쉽게도 박스트는 올해가 백몇십주년이라 전시 투어를 하고 있어 러시아 박물관에 있던 그림들이 통째로 없었다. 작년에 왔을때도 SUPPER가 없어 아쉬웠는데... 집에 있는 사본 액자로 만족해야 하나... 여기서 SUPPER 본 게 어느새 2년이 다 됐네...

 

나에게 가장 큰 위안을 주는 금발의 가브리엘 이콘. 항상 맨 마지막에 본다. 너무나 사랑하는 그림이라 예전에 쓴 소설 에필로그에도 등장시켰다. 저 그림과 저 전시실을,

 

옆 창문의 커튼이 액자에 반사되어서 잔뜩 흰 주름이 졌네... 안녕, 천사. 사랑해요.

 

 

그 전시실. 내 소설 에필로그는 2월의 해지는 저녁 무렵, 텅 빈 이 전시실에서 러시아 박물관 앞뜰, 그리고 예술광장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또다른 대천사 가브리엘 그림들.

 

 

 

 

그리고 성자. 용을 무찌르는 성 게오르기.

성 세바스찬과 더불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자이다. 좀 불경스럽긴 하군...

 

bravebird님이 좋아하셔서 꼭 엽서를 사고 싶어하셨던 그림. 근데 오늘도 샵에는 이 엽서는 없었어요 ㅠㅠ 다시 열심히 보니 역시 성 게오르기는 멋있구나...

 

 

 

그리고 미하일 브루벨. 날아가는 악마.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는 러시아 박물관,

 

안녕, 악마. 안녕, 브루벨. 사랑해요.

 

나는 글을 쓰면서 내 주인공의 외적 혹은 시적 이미지를 상상할때 브루벨의 이 악마를 조금 빌려왔었다. 물론 백조공주도 조금 있긴 하지만...

 

안녕, 악마.

 

:
Posted by liontamer

 

 

 

위의 그림은 미하일 브루벨의 '날아가는 악마'. 전에도 두세 번 올린 적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 중 하나이다. 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박물관(루스키 무제이)에 가면 볼 수 있다. 이 그림 앞에 가면 긴 의자에 앉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몇시간이고 머물러 있을 수도 있다. (시간에 쫓기니 그러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본편의 미샤는 무엇보다도 내 머리와 마음 속에서 온 인물이지만 무용수로서의 특성을 잡아내기 위해 실재하는 여러 무용수들의 일부를 모델로 차용해 왔듯 그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위해서는 브루벨 그림들을 많이 떠올렸다. 그렇다고 이 사람이 완벽하게 브루벨의 악마처럼 생긴 것은 아니지만(이전에 jewels와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브루벨의 악마보다는 그의 백조공주를 더 닮았을 수도 있다) 그래도 난 미샤를 불러내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브루벨 그림에 서려 있는 우아하면서도 치명적이고 어딘가 매우 어둡고 쓸쓸하고 고통스러운 분위기를 종종 떠올렸다.

 

 

그래서 본편 우주의 트로이는 브루벨 그림 사본을 오려서 몰래 간직하기도 한다. 미안해, 트로이... 뭔가 찌질해보이는구나 ㅠㅠ

 

 

발췌한 글은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트로이가 심리적 화자로 등장하는 그 장편의 1부에서 가져왔다. 이 이야기는 시간적 순서로 보면 예전에 발췌해 올렸던 1부 제4장, 썰매를 타러 갔던 미샤와 트로이, 그들의 친구들 에피소드 이후이다. 그때는 겨울이었고 이번 에피소드는 여름이다.

 

 

배경은 1973년 여름. 미샤는 발레학교를 졸업하고 키로프 발레단에 입단했으며 아직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친구들과 함께 여름 휴가를 보내러 흑해에 놀러간다. 여기서는 흑해 전체 에피소드가 아니라 제일 앞부분인 흑해로 가는 기차 안에서 있었던 짧은 이야기만 발췌했다. 미샤는 18세를 앞두고 있고 트로이는 석사 학위를 준비중인 대학원생이다. 둘은 문학 서클에서 만났고 금세 친구가 되었지만 트로이는 마음 속에 또다른 감정을 품고 있다. 아직은 그렇다.

 

 

여기 등장하는 트로이와 미샤의 친구들은 모두 전에 올렸던 썰매 에피소드에 나왔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http://tveye.tistory.com/4050 를 먼저 읽어보시길.

 

 

이 친구들은 표절과 푸쉬킨에 대한 이야기와 릴렌카와 메밀죽 얘기에도 등장했다. 이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나 트로이가 나오는 이야기들의 링크는 지난주에 올렸던 '산짐승 같은 '레닌그라드 아이' 에피소드 아래에 나열해놓았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여기로 : http://tveye.tistory.com/4647

 

 

중반에 트로이와 미샤의 대화에서 언급되는 '알렉세이 파블로비치'는 미샤의 발레학교 은사인 알렉세이 클리모프를 가리킨다(물론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

 

알리사는 전에도 몇번 등장한 적이 있다. 런던 대사관에서 kgb로 근무하게 되는 트로이의 친구인데 발췌한 이야기는 초반부라 아직 런던에 가기 전이다. 레나는 썰매 에피소드에 등장한 인물로 미샤의 팬이자 그를 사모하는 소녀이다.

 

레노츠카는 레나의 애칭이다. 미슈카는 미샤의 또다른 애칭이다. 파블릭은 파벨의 애칭이다. '로미오'라는 미샤의 별명은 그의 무대 때문에 붙었다. 썰매 에피소드에서 잠깐 나왔다.

 

흑해는 옛날부터 저 동네 사람들에겐 최고의 휴양지 중 하나였다. 러시아 제국 때도 그랬고 소련 때도 그랬다.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여름에 그들은 함께 흑해에 갔다. 갈랴와 료카 부부, 논문을 마무리한 트로이와 알리사, 타냐와 이고리, 코스챠와 레나였다. 호수에 썰매를 타러 갔던 멤버들과 비슷했다. 졸업 후 키로프 정식 입단까지 여름 휴가를 받은 미샤도 같이 갔다. 다들 3주 동안 신나게 놀 생각이었다. 열흘 후 무슨 연수 때문에 비엔나에 가야 하는 미샤만 빼고. 그건 키로프에서 보내는 연수나 투어가 아니었지만 언제나처럼 미샤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친구들에 비해 해외로 나가기 쉬운 자기 위치를 특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말을 아낀 것인지도 몰랐다.

 

 

 료카가 이틀 늦게 도착할 예정이라 모두 여덟 명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4인실 침대칸을 두 개 차지했다. 애초에는 남녀 객실로 나눴지만 타냐와 갈랴가 합심해 알리사를 트로이가 있는 칸으로 내쫓고 미샤를 자기들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쫓겨 온 알리사가 가방을 털썩 내려놓으며 트로이에게 2층 침대로 올라가라고 손짓했다.

 

 

“ 난 2층이 무서워, 떨어질 것 같아. ”

 

“ 내가 비켜줄게, 쟤는 굼떠서 올라가려면 한나절은 걸릴 거야. ”

 

 

코스챠가 대신 2층으로 올라가면서 알리사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알리사는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딱딱하고 좁은 매트리스 위에 몸을 던지고 꺅 소리를 질렀다. 논문 때문에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데다 최근 결혼 얘기가 오가고 있었기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진 것 같았다.

 

 

“ 왜 그래, 여자들한테서 쫓겨난 게 서러워? 우리가 잘해줄게. 저 방에선 어차피 레나 때문에 안 되지만 우리랑 있으면 공주님이 될 수 있잖아. ”

 

“ 너희들 사이에서 공주가 된다고 무슨 좋은 일이 있겠어. 기껏해야 커피나 타주고 샌드위치나 날라주겠지. 그리곤 내 속옷이나 들춰보겠지. ”

 

“ 그러고 싶지만 파벨 안토노비치가 무서워서 엄두를 못 내겠어. ”

 

 

그들 대부분은 알리사의 약혼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이도 많고 너무 근엄한 척하는데다 열렬한 당원이었기 때문이다.

 

 

“ 파블릭 너무 미워하지 마. 때론 나도 미워서 견딜 수가 없으니까. ”

 

“ 그럼 왜 결혼하려는 거야? ”

 

“ 결혼은 해야만 하는 거니까 그렇지. ”

 

“ 약혼녀를 사내들이 득실거리는 침대칸에 태워서 흑해에 보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남자와 꼭 결혼을 해야 해? 꼭 결혼을 해야 하는 거라면 트로이랑 해, 아니면 나랑 하든가. 이고리도 해줄 거야. 료카는 임자가 있으니 안되고 미슈카는 레나 때문에 안되지만 나머지는 다 자원할 수 있어. ”

 

“ 아, 헛소리 좀 하지 마. ”

 

 

 알리사는 신음하며 과히 깨끗해 보이지 않는 베개로 얼굴을 가렸다.

 

 

“ 너희랑은 절대 안돼. 친구랑 어떻게 잠을 자. ”

 

“ 왜 못 자? 갈랴랑 료카도 우리처럼 친구였는데. ”

 

“ 료카는 얼굴이 예세닌을 닮은 데다 몸매가 좋으니까 갈랴가 넘어간 거야. 근데 너네는 다 못난이에 료카보다도 몸매가 후져. ”

 

“ 그럼 로미오를 줄게. 미남에 몸매가 좋고 어리기까지 하잖아. 널 위해서라면 레나를 희생시키지 뭐. ”

 

“ 농담하지 마. 걘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 ”

 

 

 베갯잇에 붙어 있는 지푸라기를 떼어내며 알리사가 갑자기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노츠카가 좀 안됐어. 완전히 푹 빠져서는... 언니들이 저렇게 멍석을 깔아준다고 넘어올 애가 아닌데. ”

 

레나한텐 안됐지만 로미오는 그 여자애랑 사귀는 것 같던데? 그때 같이 췄던 애 있잖아. 빨간 머리 엄청 예쁜 애. ”

 

“ 지나이다. ”

 

“ 맞아, 지나이다. 생각 좀 해봐, 옆에 그렇게 예쁜 애들만 있는데 레나가 눈에 들어오겠어? 극장에 있는 애들은 자기들끼리 사귀고 결혼하는 게 보통이야. 우리 같은 사람들은 아마 감당하기 힘들 거야. ”

 

“ 내 말은 그게 아니야. 걔는 뭔가 문제가 있어. ”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잠을 청하려고 애쓰던 트로이가 처음으로 알리사 쪽으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 문제라니? 미샤가? 무슨 문제 말야? ”

 

“ 아, 말로 표현하기 어려워. 하여튼 문제가 있어. 걘 힘든 애야. 어쩌면 모스크바로 가는 게 나았을지도 몰라. ”

 

 

 썰매 사건 이후 알리사는 미샤에 대한 친구들의 열광과 애정에 전처럼 동참하지 않았다. 졸업 무대를 보러 가지도 않았고 어쩌다 만나도 외면하고 지나칠 뿐이었다. 그녀는 그 사고의 책임이 미샤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친구들 사이에서 알리사는 똑똑하고 까다로운 성격의 공주님으로 통했지만 트로이는 그녀가 실은 속마음이 여린데다 소꿉친구인 자신을 친남매처럼 소중하게 여긴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누구든 트로이를 폄하하거나 괴롭히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트로이는 그녀가 부당하게 미샤를 탓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자 마음이 불편했다.

 

 

 이고리가 배낭에 쑤셔 넣어 온 보드카를 한 병 꺼내자 불편한 대화가 중단되었고 모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알리사는 머리가 아프다며 음주에 끼어들지 않고 돌아누워 잠을 청했다. 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 안주도 거의 없이 술을 마시고 나자 트로이는 취기로 멀미가 나서 객실 밖으로 잠깐 나갔다.

 

 

 

 객차 연결 통로로 나가자 미샤가 계단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기차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아무 것도 붙잡지 않고도 전혀 비틀거리지 않았다. 트로이는 출입문에 한쪽 어깨를 기대고 앉았다. 열차 바퀴와 레일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올라와 이마와 얼굴을 식혀주자 멀미가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담배 피우는 건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가 펄펄 뛸 일에 속하지 않는 거야? ”

 

“ 글쎄, 아마 펄펄 뛸 일이겠지. ”

 

“ 넌 술도 거의 안 마시잖아, 담배는 왜 피워? ”

 

“ 많이 피우지 않아. 보드카도 세 잔, 담배도 세 개비야. ”

 

 

 미샤는 반쯤 피운 담배를 창틀에 비벼 끄더니 레일 너머로 버렸다. 바람 때문에 빗질하지 않은 머리가 검은 커튼처럼 부드럽게 나부꼈다. 그의 육체 모든 곳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런 요소가 있었다. 멈춰 있지 않는 그 무엇, 끊임없는 움직임, 어디론가 떠오르고 날아가려는 힘. 종종 트로이는 미샤가 어떻게 자신의 몸을 땅에 붙들어 놓을 수 있는지 경이로움을 느꼈다. 정교 사원에서는 하느님이 흙으로 인간을 빚었다고들 하지만 아마 그 하느님 뒤에는 악마가 있었을 것이다. 선행자를 흉내내 공기와 바람, 불꽃과 빛으로 새로운 인간을 빚었을 것이다. 우리들 뒤에 온 인간. 진화한 인간. 하지만 레닌과 소비에트가 자랑스럽게 선전하는 새로운 인간형과는 완전히 다른 부류의 존재.

 

 

미샤가 그의 곁에 와 앉았다. 호주머니를 뒤지더니 담배 대신 과일 사탕을 꺼내서 트로이에게 주었다.

 

 

“ 먹어, 멀미에 좋을 테니까. ”

 

“ 넌 이런 거 안 먹잖아. 레나가 줬지? ”

 

“ 갈랴가. ”

 

 

미샤가 하품을 하더니 트로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 좀 잘게. ”

 

“ 왜 안 들어가고 여기서? ”

 

“ 객실이 더워. ”

 

 

 트로이는 사랑에 빠진 레나와 극성스럽게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두 여자를 떠올리며 웃고 싶은 것을 참았다. 그는 레나가 조금도 가엾지 않았다. 미샤가 여자를 사귄다면 타냐의 말대로 극장의 발레리나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의 눈에 띄지 않을 테니까. 미샤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가 이름을 알 필요도 없는 여자들과 사귀고 키스를 하고 사랑을 나눴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껏 그래온 게 분명하듯이.

 

 

 미샤가 어깨에 기대어 자는 동안 트로이는 불꽃과 자갈을 튀기며 철로를 달려가는 기차 바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취기와 미샤의 온기 때문에 졸음이 밀려왔다. 꾸벅꾸벅 졸기 직전에 그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생각나는 대로 적었다.

 

 

 

강물 위로 원들이 불타고 있어

새로 온 인간, 새로 온 짐승

날아가는 악마, 앉아 있는 악마.

브루벨의 악마.

그건 악마가 아니었어, 브루벨은 취했고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야.

그건 악마가 아니라 새로 온 천사였어.

 

 

 

 그는 자기가 무슨 헛소리를 적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시 머리가 아팠다. 미샤가 기대고 있는 어깨가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수첩을 닫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눈앞에 알리사가 서 있었다.

 

 

“ 여기서 그렇게 웅크리고 자면 근육이 다 뭉칠 거야. 객실로 들어가. ”

 

“ 응, 조금만 있다가 들어갈게. ”

 

 

 알리사는 그에게 기대어 자고 있는 미샤를 굳어진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 깨우지 마. 잠이 모자란 것 같아. ”

 

“ 갈랴한테서 도망쳐 나왔겠지. ”

 

“ 레나가 아니고? ”

 

얜 레나한테는 관심도 없어. 누나들이 못살게 구는 게 귀찮을 뿐이지. ”

 

“ 그럼 객실 다시 바꿔줘. ”

 

“ 그러려고 나온 거야. ”

 

 

알리사가 반쯤 무릎을 꿇더니 평소에 하지 않는 행동을 했다. 한 손을 뻗어 미샤의 이마와 뺨을 엄마처럼 부드럽게 쓸었던 것이다. 갈색 눈에 우울하고 슬픈 표정이 떠올랐다.

 

 

“ 얜 고아야. 우리한테 안 왔으면 좋았을 걸. ”

 

“ 무슨 뜻이야? ”

 

“ 볼쇼이로 갔어야 했다구. ”

 

“ 미샤는 모스크바를 좋아하지 않았어. 원래 여기 남으려고 했었어. ”

 

“ 그건 상관없어. ”

 

 

 그녀는 전형적인 알리사다운 말투로 얘기했다. 아무런 논리도 이유도 없이, 이해할 수 없는 확신에 차서 상대를 얼간이가 된 것처럼 느끼게 하며 우울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쨌든 다행이야. 여름 지나고 시즌이 시작되면 바빠질 테니까. 우리 같은 건 잊겠지. 모임에도 오지 않을 거야. 잘됐어. ”

 

“ 그래도 친구잖아. ”

 

“ 친구는 너처럼 행동하지 않아. ”

 

 

알리사의 시선이 너무 어두웠기 때문에 그는 심장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 그게 무슨 소리야? ”

 

“ 무슨 소리긴. 너처럼 그렇게 응석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얘기야. ”

 

 

 그 말과 함께 알리사가 미샤를 세차게 흔들어 깨웠다.

 

 

“ 그만 일어나, 객실에 가서 자. 차장이 오고 있어. 이고리네로 가라구. ”

 

 

 미샤는 잠시 후 눈을 뜨더니 짜증을 내지도 않고 일어났다. 졸린 얼굴로 갈랴와 레나가 있는 객실 방향을 힐끗 쳐다봤다가 알리사를 보더니 고마운 듯 뺨에 키스를 하고 남자들이 있는 객실로 갔다.

 

 

 알리사가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며 트로이의 등을 떠밀었다.

 

 

“ 가서 이고리랑 코스챠 좀 말려. 계속 퍼마시고 있으니까. 술 냄새가 얼마나 진동하는지 숨을 쉴 수가 없었어. ”

 

“ 파벨은 왜 안 오는 거야? 휴가 아니었어? ”

 

내가 오지 말라고 했어. 이제 내 결혼 얘기 하지 말자. 파블릭 얘기도 절대 하지 마. 우리 놀러 가는 거니까. ”

 

 

 트로이는 소꿉친구를 쳐다보았다. 그는 처음으로 알리사가 결혼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파벨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결혼할 필요 없다고 얘기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겐 그럴 자격이 없었다. 그리고 알리사가 파벨과 결혼에 대해 얘기하지 말라고 못을 박았기 때문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

 

 

 

알리사에 대한 이야기는 전에 '젊은이와 죽음'에 대한 에피소드(http://tveye.tistory.com/2390)를 발췌했을 때 언급한 적이 있다. 조역이긴 했지만 내게는 개인적으로 의미있는 인물이었고 언젠가는 그녀에 대해 따로 글을 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긴 쓰고 싶은 이야기들은 많은데 대체 언제 ㅠㅠ)

 

 

..

 

 

그냥 마무리하자니 좀 섭섭해서. 브루벨 그림 하나 더. 트로이가 쓴 시에도 잠깐 등장하는 '앉아있는 악마'

이 그림은 모스크바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에 있다.

 

 

 

 

 

 

 

 

이건 러시아 박물관의 브루벨 전시실에서 내가 직접 찍은 사진. 실내에서 플래쉬 없이 찍어서 색은 좀 노르스름하게 나왔다.

 

내가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 이 전시실. 그런 장소가 러시아 박물관에는 여기 말고 한군데가 더 있다. 그 전시실은 트로이의 이야기에도 잠깐 등장한 적이 있다.

 

 

 

 

 

브루벨, 악마의 두상.

 

 

 

 

 

그리고... 친구들하고 어떻게 자느냐고 투덜대던 알리사가 료카와 갈랴 부부 얘기에 '료카는 예세닌을 닮았잖아'라고 하는 이유는.. 예세닌이 이렇게 생겼기 때문이다. 이사도라 던컨과 결혼한 적이 있고... 비극적인 최후를 마친 시인이다. 트로이와 알리사, 친구들 모두 비밀문학 서클이고 예세닌을 좋아하기 때문에 '예세닌을 닮았다!'라는 것은 료카에게는 크나큰 칭찬임 :)

 

예세닌의 최후와 그의 시에 대해 예전에 몇번 포스팅한 적이 있다. 블로그에서 예세닌으로 검색하면 몇개 나온다. 마로조프와 미샤가 등장하는 단편을 쓸때 당초에는 예세닌의 시를 에피그라프로 차용할 생각이었고 쓰는 내내 그의 시에 등장하는 눈의 이미지를 상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마음이 바뀌었다. 예세닌의 시는 그 단편에 비해 너무 부드럽고 순수하고 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예세닌 대신 아흐마토바의 시로 대체했다.

 

예세닌의 그 시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1524

 

 

 

예세닌 사진 한 장 더 .

 

목가적이고 서정적인 시인이라 러시아인들이 매우 사랑하는 시인이다.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

:
Posted by liontamer

 

 

 

 

 

원래 이번 주말에는 지난번에 써놓은 서무의 슬픔 38편을 올려볼까 했는데 딱히 내키지가 않았다. 써놓은지 꽤 된 그 38편은 하염없이 가볍고 즐거운 분위기의 에피소드인데 아마 요즘 내가 그런 마음이 아니라서 그런가보다. 사실 39편도 하나 구상해놨는데(회사의 부조리한 방침 때문에 짜증나서) 이것도 별로 쓰고 싶은 마음이 안 드는 것을 보니 요즘 내가 많이 지쳐 있긴 한가보다.

 

그래서 지난번에 발췌해 올렸던 가브릴로프 본편의 프리퀄인 수용소 이야기에서 조금 더 올려본다. 일전에 농담에 약한 미샤에 대해 그의 친구 스타니슬라프 일린이 충고를 하는 장면을 발췌한 적이 있다. 이것은 일린이 모스크바 비밀 클리닉의 면회실에서 미샤를 만나는 장면이다.

 

스타니슬라프 일린에 대한 설명과 예전 글들의 링크는 얼마전 올린 농담과 조셴코, 하름스 등에 대한 발췌문인http://tveye.tistory.com/4468 에 나와 있다. 이 수용소 프리퀄에서 일린은 미샤의 후원자 중 하나인 정치국 의원 게오르기 벨스키의 도움으로 친구를 면회하러 오게 된다.

 

.. 위의 그림은 미하일 브루벨의 '날아가는 악마'. 전에 두어번 올린 적이 있다. 이 그림은 브루벨 그림 중 내가 '백조 공주'와 더불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그 두 그림은 미샤라는 인물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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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샤는 자기 발로 걸어서 들어왔다. 수갑은 차고 있지 않았다. 수의를 입고 있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환자복을 걸친 것도 아니었다. 암청색의 얇은 스웨터와 느슨한 진을 입고 있었고 목에는 자주색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놀랄 만큼 평소와 비슷한 차림새였지만 점차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모든 것이 어긋나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 옷들의 색깔과 모양새, 재질과 전체적인 조화, 그 모든 것들이 잘못 되어 있었다. 미샤라면 절대 저런 톤의 색깔을 고르지 않았을 것이다, 사이즈가 맞지 않아 어깨와 팔과 허리를 타고 볼품없이 늘어지는 옷이라면 더욱 더. 소매 끝의 라벨을 보니 적지 않은 금액이 들어간 수입품이 분명했지만 미샤는 단 한 번도 브랜드 라벨이 적나라하게 붙은 옷을 입은 적이 없었다. 해외 팬들이 선물한 옷들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 스카프. 내가 아는 미샤는 그런 우중충하고 끔찍한 색깔의 천 조각을, 그것도 그 조잡한 암청색 스웨터 위로 두르느니 엄동설한에도 목덜미를 그대로 노출하고 눈보라 속으로 나가버릴 인물이었다. 그 값비싸 보이지만 미묘하게 촌스럽고 마감 상태가 엉망인 옷과 지나치게 광택이 도는 구두, 이상한 모양으로 매듭을 지어 놓은 스카프의 부조화가 너무나 충격적이라 한동안 내 눈에는 다른 것은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 모든 것이 미적으로 완벽하게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미샤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를 꺼렸던 모습들을 꽤 많이 알고 있었다. 무대 뒤에서의 모습도, 부상 때문에 몸을 웅크리고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있던 모습도, 드물게 분노를 터뜨리며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던 모습도, 그리고 또 다른 몇 가지, 아주 개인적이고 부드러운 모습들. 그러나 단 한 번도 미샤가 그런 식으로 잘못된 미감을 전시하듯 드러낸 것을 본 적은 없었다. 마치 일부러 그런 의상을 걸쳐 입고 무대에 올라온 배우 같았다.

 

 

마침내 옷차림에 대한 충격에서 벗어났을 때 나는 그가 왼쪽 다리를 눈에 띄게 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나의 놀라움, 그 낯선 느낌은 그의 자세 때문일지도 몰랐다. 난 각오가 되어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미샤, 가장 끔찍한 경우에는 산소마스크를 쓰고 온 몸에 튜브를 달고 있는 미샤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똑바로 걷지 못하는 미샤 야스민, 무겁게 다리를 끌고 한쪽 어깨가 눈에 띄게 내려앉은 미샤를 마주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몇 발짝 걸어 들어왔을 때 미샤가 멈춰 섰다. 등 뒤로 문이 닫혔을 때 그가 고개를 들었고 한동안 눈을 깜박이며 가만히 서 있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가 바로 앞에 있는 나를 찾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방에는 창문도 없었고 천정에 달린 조명은 그렇게 밝지도, 어둡지도 않았다. 하지만 미샤는 갑자기 컴컴한 어둠 속으로 들어온 것처럼, 혹은 눈부신 일광이 쏟아지는 백사장에 내던져진 것처럼 초점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검은 눈을 깜박이며 천천히 사방으로 탐색하는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은 몇 번이나 내 쪽을 향했지만 공기를 통과하듯 그대로 길게 지나쳐버렸다.

 

 

나는 깊은 숨을 들이쉰 후 부드럽게 말했다.

 

 

“ 나 여기 있어, 미셴카. ”

 

 

미샤가 곧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여전히 그 검은 눈에는 제대로 된 초점이 잡혀 있지 않았다.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을 때 미샤는 몸을 움찔했지만 내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그 손은 내가 알던 미샤의 손보다 훨씬 차가웠고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작게 느껴졌다. 손가락의 길이나 손등의 크기가 줄어들 리는 없으니 내 심리 상태 때문인 것이 분명했다.

 

 

미샤는 내 손을 곧 놓았다. 두어 발짝 더 앞으로 다가섰다. 그에게서 스프레이와 화장품과 새 옷, 그리고 소독약과 아주 인위적이고 거의 금속 냄새에 가까운 화학 약품 냄새가 풍겨왔다. 나는 두 팔을 벌려 그를 포옹하고 싶었지만 악수를 했을 때의 반응을 생각하며 꾹 참았다.

 

 

포옹을 해 온 것은 미샤였다. 암청색 니트 스웨터에 휘감긴 두 팔이 내 목을 느슨하게 감싸 안았을 때 갑작스럽게 목구멍까지 뜨거운 덩어리가 울컥 치솟았다. 이상한 색깔과 조잡한 재질, 불균형한 디자인, 그 모든 것은 여전히 유효했다. 하지만 그건 그저 맞는 치수의 옷을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치밀어 올랐다. 내 목에 감긴 두 팔과 가슴팍에 맞닿은 그 몸이 너무나 야위어 있어서 현기증이 났다.

 

 

그의 뺨은 손보다 더 차가웠다. 뺨이라기보다는 광대뼈와 그 위에 팽팽하게 씌워진 피부에 가까웠다. 포옹을 풀었을 때 미샤가 입을 열었다.

 

 

“ 너무 비웃지 마, 공금으로 입혀준 거니까. ”

 

 

그는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적어도 그 말투는 내가 알던 미샤와 아주 비슷했기 때문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비록 그 목소리는 훨씬 미약하고 공기를 스치는 것처럼 들렸지만.

 

 

“ 거의 국영 의류공장 카탈로그 찍었을 때와 맞먹는 수준인데. ”

 

“ 그거 봤어? 레닌그라드에만 풀었다고 했는데... ”

 

“ 라라 스크랩북에서. ”

 

“ 태워버려. ”

 

 

이런 상황에서도 그 애가 그 촌스러웠던 국영 의류공장 신제품 모델로 끌려갔던 옛 기억을 되살리며 치를 떨 수 있다는 사실에 웃어야 할지 혀를 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미샤는 별로 고민하는 것 같지 않았다. 웃었기 때문이다.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눈을 살짝 내리뜨는 정도였지만 그래도 분명 미소였다. 희미하게 웃자 얼굴이 한결 나아보였다. 아니, 사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안색은 창백했지만 그래도 병색이 완연할 정도로 하얗지는 않았고 짧게 잘린 머리도 제법 잘 다듬어진 상태였다. 뺨과 입술에는 희미하게나마 핏기가 돌고 있었다. 그 사진에 비하면 거의 정상인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심하게 야위었을 뿐이었다.

 

 

미샤가 다시 한 팔을 내 목에 감았다. 평소보다 훨씬 다정하게 군다고 생각했을 때 미샤가 낮고 깔깔한 음성으로 귀에 대고 속삭였다.

 

 

“ 스탄카, 좀 잡아줘. 넘어지기 싫어. ”

 

 

마지막 문장에는 두 개의 단어가 생략되어 있었다.

 

 넘어지기 싫어, 저자들 앞에서.

 

6년 가까이 친하게 지낸 사이라면 그 문장과 단어를 잘라먹는 버릇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나는 한 팔로 그의 팔을 꽉 잡고 다른 한 팔로 허리를 감았다. 어깨를 부축해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키가 맞지 않았다. 미샤가 몸을 숙이더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몇 잔 안 되는 술에 취했을 때조차 나나 친구들이 부축해 주려고 하면 화를 내던 애였다. 아주 잠깐 동안 나는 레닌그라드에 있는 미샤의 친구 중 하나를 떠올렸다. 키가 껑충하게 큰 영문학자. 취한 자신을 부축해줘도 미샤가 화를 내지 않는 유일한 친구. 지금 그가 여기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순전히 미샤를 붙잡아 이끌기에는 내가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천히 소파 쪽으로 발을 옮기면서 나는 우울하고 기분 나쁜 사실을 깨달았다. 그를 잡아주는 것, 체중을 지탱하며 소파까지 데려가는 것이 더 이상 힘에 부치지 않았다. 내 어깨와 팔에 그가 자기 몸무게의 대부분을 실은 채 완전히 의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갑작스럽게 소름이 끼쳤다. 그가, 미샤 야스민이 누군가에게 몸을 완전히 내맡기다니, 붙잡아 달라고 부탁하다니. 그건 색깔과 모양이 엉망인 옷보다도, 짧게 잘린 머리칼보다도 더 끔찍하게 잘못된 일이었다.

 

 

 

..

 

 

 

일린과 미샤의 대화에 언급되는 국영 의류공장 카탈로그 얘기는 전에 발췌한 적이 있다. 그 얘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183

 

라라는 일린의 딸이다. 라라가 화자로 나오는 부활절 단편 jewels를 이 about writing 폴더에 전문 게재한 적이 있다. 이 소설은 그 부활절 이야기로부터 4년 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거의 한 달 전에 서무의 슬픔 26편을 올린 후 번외편으로 러시아 민담 패러디 곱사등이 흑염소 편을 올렸고 이후 바쁜 업무와 러시아 여행으로 잠시 휴지기가 있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서무 27편!

 

사실 본편을 써야 하는데 어쩌다보니 외전인 서무 시리즈의 늪에 빠져서 어느덧 27편까지 왔다... (지금은 29편 쓰고 있음)

 

전에도 몇 번 얘기한 적이 있지만 서무 시리즈도 후반부로 오다보니 점점 본편 색채가 짙어지고 있어서... 어서 빨리 본편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긴 하다만...

 

27편에서는 우리의 단추청년 베르닌이 KGB 요원으로서 어떤 임무를 부여받게 되는데... 과연 그 임무는 무엇일지. 그리고 책상물림 단추가 요원 활동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궁금하신 분들은 이번 편을 읽어주세요~

 

** 도입부에서 언급되는 시계탑 사건은 24편, 독사과 사건은 21~22편에 나온다. 얼음물 사건은 9편이다. 베르닌이 언급하는 권총 규격 보고서 얘긴 3편에 나왔다.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어느덧 4월초로 접어들고, 왕재수는 신작 발표 준비에 여념이 없고 베르닌은 감시 업무와 서무 업무에 매진하고 있는 중인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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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27

 

 

 

 

서무의 슬픔

- 밀사 베르닌 -

 

 

 

 

 

4월 초가 되었다. 왕재수의 신작 공연이 다가오자 스페호프는 점점 심기가 불편해져서 매일 아침마다 베르닌에게 전날의 왕재수 감시 결과를 브리핑할 것을 요구했다.

 

 

“ 어제는 수석 안무가인 레베진스키가 야스민의 신작 안무가 너무 파격적이라고 지적해서 잠깐 의견 충돌이 있었습니다. 파격적이라고 했던 부분은 무용이 음악을 따라가지 않고 불협화음이 일어나는 부분과 여자 무용수들이 남자 무용수를 들어 올리는 부분이었습니다. 야스민은 후자의 경우 이미 자신을 비롯해 연방의 여러 창작 발레에서도 선보인 적이 있는 동작이며 국제 발레 무대에서는 이미 오래된 시도라면서 레베진스키의 지적을 일축했습니다. 무용과 음악의 불협화음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 대신 레베진스키에게 19세기를 살고 있는 모양이라면서 비아냥거렸습니다. 이에 레베진스키가 화를 내며 나가버렸지만 야스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연습을 진행했습니다. 무용수들은 전반적으로 야스민의 편을 들었고 이후 순조롭게 연습에 참여했습니다. 이상입니다. ”

 

“ 골치 아프군. ”

 

“ 예, 뭐가요? ”

 

“ 그 망할 놈의 무용이란 것 말야! 대체 들어도 들어도 지루하고 머리만 아프니. 불협화음이고 나발이고. 중요한 건 그 불여우 자식이 윗분들에게 잘 보이려고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것이지! 레베진스키를 그런 식으로 깔아뭉개는 것을 보니 이제 극장이 완전히 자기 손아귀에 들어왔다고 기고만장한 게 틀림없어. 에잇, 그 시계탑에서 완전히 끝냈어야 했는데. 자네가 그렇게 몸까지 내던졌는데도 실패하다니.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은 놈이야. 파이프를 타고 내려오지를 않나, 눈더미로 뛰어내리지를 않나. 계집애처럼 생긴 놈이라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틀렸어. 분명 그 불여우는 스비제르스키한테서 현장 요원들이나 받는 훈련을 받은 거야. 그러니까 얼음물에 빠져도 살아나고 불을 질러도 살아나지! 불여우 녀석이 그 무자비한 작자의 무릎에 앉아서 꼬리만 치고 뒹굴기만 한 게 아니었던 거야! 자네도 앞으로 조심하게, 그 녀석이 언제 돌변해서 자넬 해치우려 들지 모르니... 아무래도 자네에게도 일신의 안전을 위해 현장 요원 교육을 좀 시켜야 할 것 같아. ”

 

 

베르닌은 갑자기 가슴 한 구석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시계탑과 눈더미, 연기와 불길이 떠올랐다. 그는 꽉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 시계탑이요? 그때 화재 났던... 그게 우연이 아니었다는 말씀이신가요? ”

 

“ 허허, 자네도 알면서 그러나. 그 자식이 매일 다섯 시에 시계탑 전망대에 석양을 보러 올라간다는 얘기를 레베진스키에게서 들었지. 그래서 인부 하나를 매수해서 불씨를 남겨두고 오게 한 건데 타이밍은 잘 맞았다만 그 녀석이 그렇게 날랜 놈일 거란 생각은 못했지. 하필 그때 자네가 따라들어 가다니, 그때는 그놈이 크레믈린에 고해바칠까봐 일부러 입 다물고 있었네만 사실 자네가 따라 들어갔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나는 정말로 감동했다네. 그놈을 끝까지 따라가서 해치우려고 위험을 무릅쓰다니... 그 녀석만 남겨두고 밧줄을 타고 내려온 것까지 정말 더할 나위 없었네만... 자네 잘못은 하나도 없네. 오히려 표창감이지. 그놈이 현장 요원 뺨치는 재난 대응 능력을 갖췄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나. 갈대처럼 삐쩍 말라서 계집애처럼 반반한 얼굴에 의원님들 침대로나 기어드는 꼬마를...

하여튼 다닐, 기밀사항들이라 내가 자네를 공개적으로 포상하지는 못하고 있네만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네. 잊지 않음세, 자네의 이 헌신적인 노력을. 이런 자네를 서무로 키우려고 했다니... 물론 서무도 아주 중요한 직무이지만 자네라면 서무와 현장요원을 겸할 수 있는 재원으로 키우고 싶군.

 

 

베르닌은 다른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멍하게 되풀이했을 뿐이었다.

 

 

“ 화재. 일부러. 죽이려고. ”

 

“ 그렇지. 하지만 뭐 그놈이 죽을 거라고까지는 생각 안 했어. 불이 그렇게 잘 붙을 거란 기대는 안 했거든. 독사과처럼 좀 겁을 주는 용도였지. 운 좋게 불이 잘 옮겨 붙어서 그놈을 해치울 수 있다면 물론 더 좋다고 생각했지만... 원래 자네에게 레베진스키나 그 인부가 귀띔을 해주기로 되어 있었는데 동선이 엇갈렸는지 못 들었던 모양이군.

하여튼 위험을 무릅썼던 자네의 용기는 늦었지만 정말 칭찬해 주고 싶네. 뭐 한동안은 그런 시도를 하기 힘들 거야. 독사과와 시계탑의 간격도 사실 너무 촘촘했거든. 벨스키야 온순한 편이고 정치 경력도 그렇게까지 오래 되지는 않았으니 모르고 넘어가겠지만 스비제르스키는 완전히 여우에 호랑이거든. 그 작자는 현장 요원 출신에 해외 스파이 지국 총괄에 우리 보안위원회를 십몇 년 동안 주무르며 가지고 놀았던 인간이니 얼마나 눈치가 빠른지 몰라. 가뜩이나 독사과인지 시계탑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얘기가 새어들어 갔는지 요 며칠 동안 그 불여우에게 직접 전화까지 했더군. 세 번이나! 그 작자의 전화는 도청도 할 수 없단 말이야. 들키면 말 그대로 모가지인데다 기술력도 우리보다 한 수 위니까. 그러니 이제 신작 발표까지는 함부로 그 불여우를 제거할 수가 없단 말일세. 자네도 조심해야 해. 그건 그렇고 그놈은 아직도 자네를 신뢰하고 있나? ”

 

“ ... 예. 그런 것 같아요. ”

 

“ 아직도 아침 저녁 밤으로 해주고 있겠지? ”

 

“ 아니오, 그건 좀... ”

 

“ 그래, 피곤하긴 하겠지. 하지만 그것도 자네 임무 중 하나이니 잠자리도 소홀히 하면 안 되네. 그래야 그 불여우의 신뢰를 계속 유지하고 스비제르스키의 의심으로부터 우리 지국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어. 그럼 오후에도 극장에 가 보게. 고생이 많군. ”

 

 

사무실로 돌아온 후 베르닌은 산더미처럼 밀린 일을 하느라 허덕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국장의 말을 무한재생하고 있었다. 온몸이 떨리고 괴로웠다. 지금 일이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았다.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 왕재수의 곁에 붙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국장이 인부를 매수해 불까지 지르게 했다니 이것은 독사과 이상으로 심각한 문제였다. 가책도 되고 걱정이 되어서 미칠 것 같았다. 너무 심란한 나머지 그는 서류철에 노끈 구멍을 두 개나 잘못 뚫었다.

 

 

 

*   *   *

 

 

 

 

오후에 베르닌은 극장으로 갔다. 언제나처럼 비서인 류드밀라가 그를 맞아 주었다. 이제는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대답을 해주었다.

 

“ 우리 감독님 오늘 점심은 잘 챙겨 먹었어요. 극장장님하고 의회 의장님이 오셔서 같이 드셨거든요. ”

 

“ 어, 다행이네요. 지금 연습해요? ”

 

“ 아니요, 리허설은 한 시간 후예요. 안에 계시니까 가보세요. ”

 

“ 엥, 정말요? 연습실 아니면 창고니 무대니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느라 바쁜 애가 웬일로 감독실에 있지? ”

 

“ 책을 좀 봐야 한다던데요. 하여튼 너무 방해하지 마세요. 감시고 뭐고 가만히 앉아만 있으라고요! 또 독사과 따위 먹게 하지 말고! ”

 

“ 독사과는 제가 그런 게 아니잖아요. ”

 

“ 어쨌든 스페호프가 배후에 있는 거잖아요! ”

 

“ 어, 그건... 저, 레베진스키는 나왔나요? 어제 걔랑 싸웠잖아요. ”

 

“ 나오긴 했는데 백조의 호수 군무 지도하고 있어서 연습실에 있어요. 아마 이제 감독님 신작 연습할 땐 안 들어갈 거예요. 뭐 그 인간이랑 미셴카랑 싸운 게 한두 번이 아니라서 말이죠. 하여튼 옛날부터 능력도 없었던 사람이 계속 감독 자리 욕심만 내더니... 괜히 밸이 꼴리니까 우리 감독님한테 못되게 굴고 여기저기 헐뜯고 다니기나 하고. ”

 

 

베르닌은 류드밀라에게 레베진스키를 잘 감시하라고 말할까 하다가 괜히 왕재수의 입장이 난처해질까봐 꾹 참았다. 감독실 문을 똑똑 노크했다.

 

 

“ 야, 나야. 들어간다. ”

 

 

아무 대답이 없었다. 자나 싶어서 베르닌은 조심스럽게 문을 밀고 들어갔다. 왕재수는 등을 돌리고 선 채 전화를 받고 있었다. 별다른 말은 하지도 않고 계속 듣기만 하는 것 같았다. 베르닌은 의아했다.

 

 

‘ 저 녀석 원래 감독실로 걸려오는 전화는 안 받는데. 걸지도 않고. 도청 때문에 싫다고... ’

 

 

한참 가만히 듣고 있다가 왕재수가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뭐라고 두어 마디 했다. 그리고는 전화를 끊더니 베르닌 쪽을 힐끗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파로 가서 벌렁 드러누웠다. 쿠션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누운 채 심호흡을 여러 번 했다. 잠을 못 잤나 싶어서 커튼을 쳐주려고 창가로 가다가 베르닌은 소파 곁에 멈춰 섰다.

 

 

“ 어, 야... 너 울어? ”

 

“ 내가 왜. ”

 

“ 눈물이 뚝뚝... ”

 

“ 먼지 들어가서 그래. ”

 

“ 먼지투성이 쿠션으로 얼굴을 누르고 있으니까 그렇잖아! ”

 

 

베르닌은 왕재수의 얼굴에서 쿠션을 치워 주었다. 왕재수가 얼굴을 옆으로 돌리더니 눈을 깜박깜박하면서 손등으로 급하게 뺨을 문질렀다. 베르닌은 혀를 찼다.

 

 

“ 눈물만 닦는다고 되는 줄 아냐, 콧물도 줄줄 흘리고 있는데! ”

 

“ 감기 걸렸나보지! ”

 

“ 아니잖아. 무슨 일 있었어? 설마 바이올린 아저씨가 바람이라도... ”

 

“ 아니야. 로만이랑은 아무 일 없어. ”

 

“ 그럼 방금 전화 때문이야? 누군데? ”

 

“ 너랑 무슨 상관이니. ”

 

좋아, 그럼 나 도청 녹음된 거 들어본다!

 

“ 맘대로 해. 어차피 그 사람 전화는 도청 안 된댔어. ”

 

 

베르닌은 손수건을 꺼내서 왕재수의 뺨과 코를 닦아 주었다. 왕재수는 심호흡을 하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소파 구석에 나뒹굴고 있던 책을 집어 들어 펼치더니 열심히 읽는 척 했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 거꾸로 들었잖아. ”

 

“ 뭐가! 네가 어떻게 알아, 이거 불어로 된 건데! ”

 

“ 야, 내가 아무리 불어를 몰라도 글자 거꾸로 뒤집힌 건 알아! ”

 

“ 에이... ”

 

 

왕재수는 책을 내려놓았다. 입술을 꼭 깨물었지만 눈가에 다시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 모스크바에서 전화 온 거지? 그 크레믈린 아저씨... ”

 

“ 어휴, 다른 때는 책상물림이면서 쓸데없을 때만 머리 잘 돌아가. ”

 

“ 무슨 일 있어? 너 원래 그 아저씨랑 통화하면 막 애교부리잖아. ”

 

“ 내가 언제. ”

 

“ 지난번에도... 나 권총 규격 보고서 써야 했을 때도 그 아저씨한테 전화해서 애교부리고... 그러니까 그 아저씨가 한방에 해결해줬잖아. 너 되게 귀염 받잖아. ”

 

“ 바보, 그건 네가 국장한테 볶이니까 불쌍해서 그랬던 거지. 아저씨도 내가 안 하던 짓 하니까 놀라서 금방 들어준 거야. 그 인간 툭하면 나보고 애교 부려보라고 했거든. 안 해서 맨날 혼났어. ”

 

“ 엥, 그래? 너 바이올린 아저씨한텐 맨날 애교 부리잖아. ”

 

“ 로만은 진짜 좋으니까 그렇지! 좋아하면 무슨 짓을 못해! ”

 

“ 아... 그렇구나... 난 네가 원래 그런 줄 알았어. ”

 

“ 뭐가. 원래 아무한테나 꼬리친다고? ”

 

“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기분 나빠하지 마. 그게 아니고 난 네가 원래 애교가 많은 줄 알았어. ”

 

 

왕재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가로 가더니 커튼을 젖히고 바깥을 내다보았을 뿐이었다. 어깨가 축 처진 게 보기만 해도 수심이 가득해 보였다. 마음이 쓰인 베르닌이 곁으로 갔을 때 왕재수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 우리 엄마 많이 아팠대. 한 달 가까이 병원에 계셨대. 나 전혀 몰랐어. ”

 

“ 아, 그랬구나... 지금은 괜찮아지신 거야? ”

 

“ 응, 좀 나아지셨대. 나쁜 놈들, 아무도 나한테 말 안 해줬어... ”

 

 

베르닌은 왕재수의 등을 토닥토닥해 주었다. 왕재수가 손등으로 눈을 다시 닦았다. 왕재수는 레닌그라드에 있는 가족이나 친구에 대해 얘기한 적이 거의 없었다. 딱 한번, 베르닌이 출장을 갔을 때 엄마가 걱정할까봐 편지 따윈 안 쓴다고 얘기했던 게 전부였다.

 

 

“ 그래도 좀 나아지셨다니까 다행이네. 이제 날씨도 따뜻해질 테니까 괜찮아지실 거야. ”

 

“ 우리 엄마는 여름 좋아하는데... 아직 한참 남았어. 레닌그라드는 여기보다 추워. ”

 

“ 에이, 4월 금방 갈 거야. 어머니한테 전화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저, 아니면 너 지금 레닌그라드로 전화해 볼래? 어머니한테. 내가 보고 안 하면 되잖아. ”

 

“ 네가 보고 안 한다고 그놈들이 모르겠니? ”

 

“ 국장한테 여기 전화 내용 보고하는 게 나거든. ”

 

“ 바보. 너네 국장은 얼간이니까 상관없어. 다른 놈들도 다 아는 게 문제지. 우리 엄마한테도 도청 붙여 놨는걸. 그 인간이 방금 나한테 그랬어, 엄마한테 전화하게 해줄 수 있다고. 레닌그라드로 잠깐 보내주겠다고, 엄마 만나게 해준다고. 그래서 싫다고 했어. ”

 

“ 엥? 그 크레믈린 아저씨가 얘기해준 거야? 어머니 편찮으셨다고? 전화하게 해주고 만나게까지 해준다고 했으면 좋다고 해야지 왜 거절을 해! 게다가 레닌그라드! 아무리 잠깐이라도... 너 진짜 돌아가고 싶어 했잖아. ”

 

“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 그렇지. 그 인간이 나랑 엄마를 위해서 레닌그라드에 보내준다는 게 아니니까. 또 더러운 짓 시키려고... 베를린에서 무슨 외교관인지 뭔지가 레닌그라드에 온다고... 가서 그놈이랑 놀아주면 엄마한테 하루 보내주겠다고 하잖아. 그래서 싫다고 했어. ”

 

 

베르닌은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로서는 연방을 좌지우지하는 높은 사람들의 정치질과 온갖 모략, 지저분한 뒷공작들이 너무나 낯설었다. 왕재수에게 높은 곳에 있는 아저씨들이 여럿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게 어떤 의미일지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사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로서는 그 아저씨들도 제2, 제3의 코즐로프 같은 존재라고 믿는 것이 더 마음이 편했다. 왕재수를 귀여워해주고 애교를 받아주고 천재에 예쁜 꼬마라면서 오냐오냐 해주는 아저씨들. 그냥 그게 전부라고 믿고 싶었다. 왕재수는 나이 많은 아저씨들을 좋아하는 취향이니까 그 정치인들과도 나름대로 즐겼던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던 건지도 몰랐다. 이제 베르닌은 몹시 기분이 좋지 않았고 마음이 무거웠다. 위로해 주려고 했는데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 ‘’는 뭐야... 전에도 그런 일 있었던 거야? ”

 

“ 응. 여러 번. ”

 

“ 그땐 갔었어? ”

 

“ 응... ”

 

 

베르닌은 어색하게 왕재수의 어깨에 팔을 둘러 주었다. 왕재수는 한동안 베르닌에게 머리를 기대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닐, 우리 엄마 계속 아프면 어떡하지? 나 그냥 간다고 할 걸 그랬나봐. ”

 

“ 아니야, 안 간다고 한 거 잘했어. 어머니는 괜찮으실 거야. 가책 느끼지 마. 그런 거 어머니가 아시면 네가 와도 기뻐하지 않으실 거야. ”

 

“ 나 엄마한테 그런 거 한 번도 얘기한 적 없어. 그런 짓 하고 다닌 거 엄마가 알면 안 되는데. 나 체포돼서 엄마가 진짜 많이 슬퍼했댔어. 그래서 아프게 된 건가봐. 나 때문에 아픈 건데 내가 고집부리고 안 가면... ”

 

 

왕재수가 창가 아래 벽에 등을 기대며 웅크리고 앉았다. 항상 전신을 곧게 펴거나 펄쩍펄쩍 뛰어오르는 습관이 있는 애가 그렇게 몸을 움츠리자 굉장히 낯설게 보였다. 베르닌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 고집부리는 거 아니야. 안 가는 게 맞는 거야. 얼굴 한번 안 본 사람한테 가서 그런 일 하라고 하는 놈이 나쁜 거야. 내가 어머니에게 전화할 수 있게 도청 안 되는 회선 따줄게. 오늘은 어렵겠지만 내일까지 한번 노력해볼게. ”

 

“ 고마워, 다닐. ”

 

 

왕재수가 일어나더니 스트레칭을 했다. 다시 평온한 표정을 되찾았다. 심지어 베르닌의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까지 했다.

 

 

“ 또 손목 토시를 하고 왔네. 내가 언제 너네 집 가서 토시들 다 태워 버릴 거야.

 

야, 이 토시가 얼마나 편한데! 이거 안 하면 소매 금방 더러워진단 말야! 넌 사무직의 슬픔을 모른다고! 특히 서무!

 

“ 토시랑 아가일 무늬 셔츠들! 다 태워버리고 파묻어버릴 거야! ”

 

“ 그럼 난 뭐 입고 출근하냐! 내복 바람으로 나가라고! ”

 

“ 너 아직도 내복 입어? 4월인데! ”

 

우리 사무실 춥단 말이야! 그리고 내복이나 너네 애들이 입는 타이츠나! ”

 

“ 어떻게 타이츠랑 내복을 비교할 수 있냐! 타이츠는 무대 의상이야, 제작 단가도 더 비싸다고! 자기도 지난번에 입어놓고... ”

 

“ 하긴 그게 내복보다 더 불편하긴 하더라. 하여튼 타이츠 입고 무대 올라가던 놈이 남의 토시랑 셔츠랑 내복 가지고 뭐라 할 자격 없다고! ”

 

너 한번만 더 타이츠 모독하기만 해봐!

 

 

왕재수가 진짜로 얼굴을 빨갛게 붉히면서 푸르르 화를 냈다. 그러다가 시계를 보더니 깜짝 놀랐다.

 

 

“ 나 연습실 가야 돼. 리허설 전에 데니스랑 타마라 동작부터 잡아주기로 했어. 정신이 하나도 없네. ”

 

 

베르닌은 왕재수를 따라 연습실로 갔다. 그나마 손목 토시와 타이츠 얘기로 왕재수가 다른 데 관심이 쏠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리허설을 한 시간 정도 지켜보고 있는데 레베진스키가 슬며시 들어왔다. 왕재수는 무용수들 연습시키느라 정신이 팔려서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신작 연습할 때는 이제 안 들어오겠다더니 왜 왔나 싶어서 의아해하고 있는데 레베진스키는 왕재수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베르닌에게 바짝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춰서 속삭였다.

 

“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가 지금 당장 사무실로 돌아오랍니다. ”

 

“ 예? 국장이? 근데 왜 당신이 이 얘길... ”

 

“ 극장에서 믿을만한 건 나 뿐이니까 그랬겠죠. ”

 

“ 난 당신 안 믿는데... ”

 

“ 하긴 우리가 제대로 접선했던 적이 없으니... 못 믿겠으면 전화를 해보든가요. 극장 밖 공중전화로 하랍니다. ”

 

 

베르닌은 반신반의하며 연습실을 나갔다. 극장 밖에 있는 공중전화로 가서 스페호프에게 전화를 걸었다. 국장은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명령했다.

 

 

“ 다닐, 지금 당장 돌아오게. 5호실로 오도록. ”

 

 

 

 

*   *   *

 

 

 

 

 

베르닌은 5호실에 들어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5호실은 지하 문서고 옆에 있었지만 이중문을 열고 들어가야 했고 일반 직원들에게는 출입금지 구역이었다. 스페호프와 현장요원들만 드나드는 곳이었다. 건물 설계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비밀 장소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그런 곳이 있는지도 몰랐었다. 지난 특별 감사 때 다른 선배들의 자료를 정리해주다 알게 되었는데 현장요원들의 무기 따위가 보관되어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 스탈린 시절 고문실로 악명 높았던 6호실도 허물어버렸다는 공식 발표와는 달리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건 꽤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이후 일에 짓눌려서 금세 잊어버렸다.

 

 

베르닌이 막 지하로 내려가려는데 나이든 현장요원인 글리셰프가 그에게 다가왔다. 말없이 주머니 속으로 열쇠 꾸러미를 밀어 넣었다. 베르닌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 이게 뭔가요? ”

 

“ 5호실 열쇠. ”

 

“ 국장님이 먼저 가 계신 거 아니에요? ”

 

“ 문 닫으면 자동으로 잠기게 되어 있어. 열쇠 없으면 안 열려. ”

 

 

글리셰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휙 가버렸다. 현장요원들은 언제나 무게를 잡고 잘난 척 하곤 했다. 행정요원들과는 말도 섞지 않았다. 베르닌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지하로 내려갔다. 문서고를 지나니 무거운 이중문이 나타났다. 열쇠로 문 두 개를 열고 들어가자 회색으로 칠해진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좁은 방이 나타났다. 등 뒤에서 문이 스르르 닫히더니 철컥 하고 잠겼다. 구석에 조그만 책상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거기 스페호프가 앉아서 안경을 치켜 올리며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다.

 

 

“ 국장님, 부르셨습니까. ”

 

“ 거기 앉게. ”

 

 

베르닌은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았다. 밀폐된 지하 공간이라서 그런지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스페호프가 고개를 들더니 딱딱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네 지금 모스크바로 가줘야겠어. 출장명령서는 글리셰프가 대신 써줄 걸세. 하지만 모스크바행은 비밀이야. 자넨 오늘부터 2박 3일간 스네고로드에 가축 전염병 예방요원으로 협조 출장을 가는 것으로 되어 있네. 돌아와서 누가 묻거든 그렇게 답해야 하네. 스네고로드 쪽과는 말을 다 맞춰놨으니 걱정할 거 없어. ”

 

“ 예? 모스크바요? 스네고로드... 비밀... 대체 왜... ”

 

“ 중요한 기밀문서를 전해야 하네. 필로모프나 글리셰프를 보내려고 했지만 모스크바 본부에서는 우리 현장요원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꿰뚫고 있어. 이번 일은 그쪽이 알아서는 절대 안 되네. 그래서 기존 요원들은 보낼 수가 없어. 가장 의심받지 않을만한 위치에 있는 직원, 그리고 동시에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직원을 보낼 수밖에 없네. 그것이 바로 자네야. 이번 일은 상당히 위험한 임무일세. 하지만 난 자네를 신뢰하네. 이번 임무를 제대로 수행한다면 자네는 제대로 된 현장요원으로 거듭날 수 있을 거야. 물론 자네는 9밀리 마카로프를 다룰 수 있겠지. 요원 연수도 받았고 작년에 그 불여우 인계 때문에 사격 재훈련도 받았으니. 여기 자네의 권총이 있네. 여분의 탄창은 없네. 흔적을 남겨서 좋을 일이 없으니까. 자네가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총을 쓰게 될 일이야 당연히 없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 ”

 

“ 어, 저... 권총까지... 대체 이게 무슨 임무인가요? 기밀문서라니, 무슨 내용인지... 누구에게 전하라는 건지... ”

 

“ 내용은 자네가 알 것 없네. 오히려 알면 더 위험하지. 밀사는 자신이 전하는 문서의 내용을 몰라야 해. 그래야 모두가 안전해져. 문서는 암호로 작성되어 있기 때문에 만의 하나 문제가 생겨서 자네가 붙잡히고 문서를 압수당하게 된다 해도 그들이 그 내용을 해독할 수는 없어. 행여 자네를 고문하게 된다고 생각해보게. 자네는 제대로 된 현장요원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 즉시 발설해버리게 될 걸세. 그러니 당연히 자네는 내용을 몰라야 하네. 아, 그렇게 긴장할 것 없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난 어디까지나 원칙적인 얘기를 한 것뿐이니까. 그자들도 자네에 대해서는 파악하지 못할 거야.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지, 그 불여우의 감시요원을 직접 보낼 거라고는 상상도 못할 테니까. ”

 

 

베르닌은 멍했다. 그나마 마지막의 ‘불여우’ 얘기에 정신이 좀 들었다.

 

 

“ 저, 국장님. 이번 임무가 야스민과 관련된 일인가요? ”

 

“ 그 불여우와도 관련은 있지. 타겟은 그놈이 아니지만. 더 알 것 없네. 내가 그랬잖나, 자네가 모르는 편이 모두가 안전하다고. 자네는 지금 공항으로 가게. 두 시간 후 출발하는 모스크바 행 비행기를 타는 거야. 여기 자네가 쓸 여권이 있네. 자네는 학생으로 위장하는 거야. 도착하면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기숙사 3동으로 가게. 글리셰프가 이미 모든 것을 다 처리해 두었네. 수위에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온 수학과 신입생 표트르 트뵤르도피로고프라고 말하면 자네를 기숙사 방으로 인도해 줄 걸세. 오늘 밤은 거기서 자도록 하게. 내일 아침 9시에 학교를 나와서 정문에서 제일 가까운 빵집으로 가는 거야. 흑빵 한 덩어리와 버찌잼 파이 한 개를 사서 종이 봉지에 넣어달라고 하게. 아침에는 줄을 서야 하니 빵을 사서 나오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그리고 이제부터가 중요한 부분이야. 흑빵을 반으로 가르되 끝까지 가르지는 말고 그 사이에 이 봉투를 집어넣은 후 다시 빵을 하나로 합쳐놓고 봉지에 집어넣게. 빵집에서 두 블록을 내려가면 공원이 나오지. 10시에 분수대 앞 벤치로 가서 앉게. 레닌동상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벤치여야 해. 옆에 봉지를 내려놓고 앉아서 비둘기에게 빵 귀퉁이를 떼어서 던져주게. 모이를 주는 것처럼. 그러고 있으면 중년 여자 하나가 유모차를 밀고 산책하러 와서 자네 곁에 앉을 거야. 여자도 자네와 같은 빵 봉지를 가지고 있을 걸세. 이때 암호를 확인해야 하네. 여자가 먼저 ‘회색 비둘기는 많은데 흰 비둘기는 요즘 찾아보기 힘들군요’ 라고 말할 거야. 그럼 자네는 ‘조금 전까지 한 마리가 있었는데 날아갔어요’라고 대답하게. 친절하게 얘기할 필요는 없어. 얼굴을 볼 필요도 없고. 귀찮은 듯이 대꾸하는 거야. 여자가 먼저 일어날 걸세. 그때 여자가 빵 봉지를 바꿔쳐서 가져갈 거야. 

자네는 여자가 떠난 후 곧장 일어나지 말고 3분 정도 더 앉아 있다가 빵 봉지를 들고 일어나게. 그러면 임무 완수일세. 하지만 곧장 공항으로 가면 안 돼. 오히려 의심을 받을 수 있으니. 모스크바 지리는 자네도 잘 알고 있을 테니 학교 쪽이든 아르바트든 학생들이 잘 가는 동네에 가서 놀게. 돌아오는 비행기는 4시에 뜰 거야. 그러니 시간 맞춰서 공항으로 가게나.

일단 모스크바에 도착하면 여기 돌아올 때까지 절대 여기로 전화를 하지 말게. 모스크바에서도 지인을 만나거나 연락을 해서는 안 돼. 돌아오면 곧장 집으로 돌아가게. 내게 전화할 필요는 없어. 다음날은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집에 처박혀 있게. 2박 3일간 스네고로드 출장으로 되어 있으니까. 금요일에 출근하면 곧장 여기 5호실로 내려오게. 보고는 그 때 하는 거야. 자네가 임무를 완수하면 그 즉시 나는 모스크바에서 그 소식을 받게 될 테니 금요일에 자네 얘기를 들어도 늦지는 않아.

만의 하나 모스크바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그럴 리가 없겠지만 공원 접선이 실패한다면 내 자리가 아닌 당직실 번호로 전화를 하게. 접선에 실패했을 때는 연결음이 두 번 울리면 끊고 다시 걸게. 이것을 세 번 반복하면 되네. 통화는 하지 않는 거야. 접선은 성공했지만 미행이 붙은 것 같다면 상대가 받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4월인데 아직 춥네요’라고 말하게. 그러면 모스크바 쪽에 있는 내 심복이 자네를 도우러 갈 걸세. 자, 전부 이해했나? “

 

 

베르닌은 심호흡을 했다. 수첩에 메모라도 하고 싶었지만 스페호프가 기밀사항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암호도 헷갈렸고 자기 가명도 헷갈렸다. 결국 자기가 해야 할 일은 빵집에서 흑빵을 사서 그 안에 봉투를 집어넣고 봉한 후 빵 봉지를 바꿔치게 하는 것이 전부였으니 그렇게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뭔가 계속 찜찜했다.

 

 

“ 저... 그런데 권총은 왜 필요한가요? 말씀대로라면 그냥 빵 봉지만 들고 공원에 가서 앉아 있으면 되는 일인데. ”

 

“ 다른 때 같으면 아무런 위험성이 없겠지만 아무래도 호랑이가 연루된 일은 매사에 조심하는 게 좋지. 권총을 쓸 일은 물론 없을 거야. 하지만 만일을 위해 가져가게. 그렇다고 함부로 총질을 해서는 안 돼. 문서를 빼앗길 위기에 처했을 때만 쓰게. 그리고 주변에 사람이 있으면 절대 총을 쏴서는 안 돼. ”

 

“ 호랑이요? 동물원과 관계된 일인가요? ”

 

“ 자네 정말... 많이 나아졌다 생각했는데 그 고지식한 기질은 여전하군. 이번 임무는 고위직과 연관되어 있어. 실세이지만 연방과 정부에 큰 해악을 끼치고 있는 자야. 그자가 알게 될 일은 없을 테지만 그래도 만의 하나를 대비해 조심하라는 거야. 행여 임무 수행에 실패하거나 그자의 부하들에게 붙잡힌다 해도 절대 이번 일에 대해 입 하나 뻥긋해서는 안 되네! 자네는 그저 모스크바에 공부하러 온 블라디보스토크의 표트르 트뵤르도피로고프인 거야. 혹시라도 그자들이 자네의 정체를 이미 알아챘다면 모스크바에 바람 쐬러 놀러왔다고 하게. 다른 말은 일절 해서는 안 돼. 이건 공무야. 보안요원으로서의 신성한 임무라고. 알아들었나? ”

 

“ 어... 예... 그런데 그자들에게 붙잡히면 저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

 

“ 그럴 일은 전혀 없네! 그리고 붙잡힌다 해도 내가 꺼내줄 거야! 걱정 말고 다녀오게! 여기 비행기 표와 여권, 여비, 현장 업무추진비가 있네. 두 시간 후 비행기이니 어서 공항으로 가게. 글리셰프가 태워다 줄 걸세. 그럼 성공을 빌겠네. 잘 다녀오게. ”

 

 

 

 

*   *   *

 

 

 

 

베르닌은 기밀문서와 함께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했다. 권총 때문에 검색대에서 걸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스페호프가 손을 미리 써두었는지 가브릴로프 공항에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외교관 출구를 이용했고 검색도 받지 않았다. 기밀문서는 편지봉투 안에 들어 있었는데 두께가 얄팍한 걸 보니 분량이 많지 않은 것 같았다.

 

 

사실 봉투보다도 총 때문에 내내 좌불안석이었다. 그에게 있어 총이란 군대에 있을 때와 요원 연수를 받을 때나 만져본 것일 뿐 이렇게 민간인들 사이에서 소지하고 다니는 물건이 아니었다. 문서 봉투는 안주머니 속에 쑤셔 넣었지만 대체 이놈의 권총은 어디에 숨겨야 할지 골치가 아팠다. 요원 연수를 받을 때도 그런 실용적인 지식을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 현장요원들은 배웠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행정직이 아닌가!

 

 

처음에 베르닌은 권총을 벨트와 허리춤 사이에 꽂고 재킷으로 가려 보았다. 그랬더니 벨트가 축 처지면서 하마터면 허리 밴드가 찢어질 뻔 했다. 그래서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고 또 재킷으로 가려 보았다. 주머니가 불룩 튀어나와서 누가 봐도 이상해 보일 것 같았다. 게다가 걸을 때마다 권총이 걸리적거렸고 심지어 중요부위를 툭툭 건드리기까지 했다! 너무 불편해서 결국 그는 화장실에 가서 총을 꺼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무슨 띠라도 하나 구해서 안쪽에 차고 있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는 총을 안주머니에 집어넣고 재킷 단추를 꼭 잠그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기밀문서와 총이 한 주머니에 들어 있어 뭔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또 들었다. 그래서 다시 화장실로 가서 문서 봉투를 꺼냈고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은 후 옷핀으로 주머니를 봉해버렸다. 그나마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길이의 재킷을 입고 와서 다행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그는 내내 불안에 떨었다. 스페호프는 왜 하필 자신에게 이런 임무를 맡긴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책상물림에 굼뜨기로 소문난 인물인데 현장요원들이나 맡는 임무를, 그것도 기밀문서를 전하는 일을 맡기다니! 베르닌은 그 새해에 왕재수를 데리고 얼어붙은 강을 건넜던 것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국장에게 오해를 산 덕분에 왕재수를 비호한다는 의심에서는 벗어난 것까지는 좋은데 팔자에 없는 현장요원 노릇을 하게 되다니! 아무래도 고위직이 연관되어 있는 임무 같은데 내용을 모르니 더욱 답답했다. 실수를 해서 빵 봉지를 제대로 바꿔치지 못하면 어쩌지 하고 생각하니 걱정이 돼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차라리 다시 발따예프 일당을 수발해 모스크바에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공항에 내려서 버스를 타러 가는 와중에도 경찰들이 눈에 띄자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는 어엿한 KGB였고 신분증도 있었으니 경찰들에게 검문을 받아도 위험하지는 않았지만 맡은 임무가 있어 그런지 굉장히 긴장이 됐다. 모스크바 시내로 진입해 학교에 도착하자 이미 캄캄한 밤중이 다 되어 있었다.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야 그의 모교였고 학창 시절에는 기숙사에서 살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익숙한 곳이었지만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졌다. 간신히 기숙사 3동으로 갔더니 늦은 시각이라 정문이 닫혀 있었다. 스페호프가 이런 얘기는 해준 적이 없었다. 원래 이 시간에는 수위에게 학생증을 제시해야 들어갈 수 있었다. 무거운 문을 똑똑 노크했더니 잿빛 머리의 뚱뚱한 수위가 나왔다.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더니 통금 시간이 지나서 들여보내 줄 수 없다고 했다.

 

 

어, 저... 저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막 도착해서요... 비행기 시간 때문에... ”

 

“ 블라디보스토크? 흠, 거기서 오기로 한 녀석이 하나 있긴 하지. 자네 이름이 뭔가? ”

 

“ 저... 표트르 트뵤르도피로고프요. 수, 수학과예요. ”

 

“ 여권 좀 내놔봐. ”

 

 

베르닌은 떨리는 손으로 위조 여권을 내밀었다. 그의 사진이 붙어 있었고 가명과 여권 번호도 기재되어 있었지만 긴장이 되어 다리가 후들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수위는 대충 여권을 훑어보더니 심드렁하게 말했다.

 

 

“ 이렇게 늦게 올 줄은 몰랐네. 따라와. ”

 

 

수위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서도 베르닌의 머릿속에는 별의별 생각이 오고갔다. 수위가 자기를 복도에서 두들겨 패는 것부터 시작해서 방문을 열면 악당들이 매복해 있다가 그에게 총을 쏘는 상상까지 들었다. 심장이 너무 쿵쿵거려서 수위가 들을까봐 겁이 났다. 기숙사 엘리베이터라 원체 좁아서 수위와 거의 딱 붙어 서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위는 그에게 별로 관심이 없어보였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수위가 앞장서더니 문 하나를 열고는 열쇠를 건네주었다.

 

 

“ 창문은 고장 나서 안 열릴 거야. 내일 학생처에 등록부터 하고 시설 관리 사감에게 고쳐 달라고 하게. ”

 

 

수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베르닌은 잠시 멍하게 서 있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예전에 지냈던 기숙사와 비슷한 구조였다. 문을 열자 좁은 직사각형의 방이 하나 덜렁 나타났다. 가방을 내려놓고 옷을 벗고 싶었지만 공동 부엌과 화장실, 욕실은 복도 끝에 있었다. 잠시라도 방을 비운 사이에 누가 들어와 수색을 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에 일단 방문을 다시 잠근 후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본 후 공동욕실로 갔다. 너무나도 샤워를 하고 싶었지만 긴장이 풀리지 않았고 혹시라도 습격을 당할까 두려워서 그냥 손만 씻고 세수와 양치질만 했다. 발은 물수건으로 닦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으로 돌아온 베르닌은 문부터 꼭꼭 걸어 잠갔다. 불안한 나머지 창가에 붙어 있는 책상을 문 앞으로 옮겨놓았다. 창문은 수위의 말대로 고장이 나서 열리지 않았다. 공기가 답답했지만 그래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바깥에 창살이 쳐져 있는 건 더욱 다행이었다. 커튼을 친 후 한숨을 쉬며 딱딱하고 좁은 침대에 주저앉았다. 너무 털썩 주저앉은 나머지 하마터면 침대 합판이 내려앉을 뻔 했다. 분명 왕재수가 옆에 있었다면 ‘그러니까 살 좀 빼라고 했잖아!’ 하고 구박했을 게 뻔했다. 베르닌은 너무 긴장이 된 나머지 왕재수의 잔소리가 그리울 지경이었다.

 

 

‘ 그러고 보니 그 자식 어머니 걱정으로 많이 괴로워하고 있을 텐데. 내가 도청 안 되는 회선 따주기로 해놓고 여기 와 있으니... 오늘 같은 날은 혼자 있지 말고 바이올린 아저씨한테라도 가서 자면 좋으련만. ’

 

 

눈물이 글썽글썽하던 왕재수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그는 일단 안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베개 아래에 쑤셔 넣고 재킷을 벗었다. 날아갈 것처럼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재킷과 셔츠를 벗어 의자에 걸쳐놓고 바지 주머니에서 옷핀을 빼냈다. 반으로 접힌 봉투를 꺼냈다. 잠시 베르닌은 봉투를 뜯어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곧 ‘내가 미쳤지, 왜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국장 말이 맞아, 알면 나한테만 더 불리해져’ 라는 생각에 봉투를 도로 접어서 바지 주머니에 넣고 옷핀으로 봉했다. 벗은 바지를 의자에 걸쳐놓으려니 또 괜히 불안해졌다. 결국 바지도 착착 개켜서 베개 아래로 쑤셔 넣었다.

 

 

시계를 보니 이미 자정이 다 되어 있었다. 불을 끄려니 슬며시 무서웠다. 불을 켜고 잘까 했지만 또 곰곰 생각해보니 바깥에서 불 켜진 창을 보고 의심을 하며 침입해올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는 불을 끄고는 좁은 침대로 올라가 누웠다. 학생 때도 침대가 좁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지금 다시 눕자 대체 이런 열악한 침대에서 어떻게 몇 년 동안 잤는지 놀라울 지경이었다. 스프링은 물론 없고 합판 위에 손바닥 두께의 매트리스를 깔아놓고 시트를 덮어씌운 수준이니 등이 배기고 불편한 게 당연하긴 했다. 게다가 베개 아래에 바지와 권총을 모두 쑤셔 넣었더니 뒤통수도 엄청나게 배겼다. 잠자리도 불편한데다 다음날의 임무가 너무 걱정이 되어서 베르닌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   *   *

 

 

 

 

베르닌은 새벽이 다 되어서야 잠이 들었고 그나마도 악몽에 시달리느라 제대로 눈을 붙이지도 못한 채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7시였다. 머리도 지끈지끈 아프고 배도 고팠다.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고 권총을 다시 재킷 안주머니에 집어넣은 후 복도로 나갔다. 그는 대충 세수와 양치질을 하고 머리에 물을 묻힌 후 나왔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재킷 안주머니의 권총과 바지 주머니의 봉투 때문에 꿈도 꿀 수 없었다.

 

부엌 쪽으로 돌아 나오니 이른 시간이었지만 가스렌지에서는 이미 찻물이 끓고 있었고 남학생 몇 명이 싱크대 앞에 선 채 햄과 오이를 얹은 부체르브로드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배가 고파서 그런지 엄청 맛있어 보였다. 베르닌을 발견한 학생 하나가 붙임성 좋게 인사를 했다.

 

 

“ 안녕, 처음 보네. 대학원생인가? ”

 

“ 어, 어... 어제 도착해서... ”

 

“ 너 모스크바 출신 아니구나? 난 일류샤라고 해. ”

 

“ 어... 난 표, 표트르. ”

 

“ 이거 하나 먹어볼래? 식당 것보다 맛있어. 빵이 안 말랐거든. ”

 

“ 고마워. ”

 

 

베르닌은 샌드위치를 하나 받아먹었다. 굉장히 맛있었다. 곱슬머리에 살짝 들려올라간 코, 발그스름한 뺨 등 척 봐도 스무 살도 안 돼 보이는 일류샤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시종일관 빙긋빙긋 웃었고 친구들과도 농담을 주고받으며 재미있어 했다.

 

 

“ 우린 법학과야. 너는? ”

 

“ 나, 나는 수학과... ”

 

“ 어휴, 엄청 어렵겠다. 무슨 공식에 문제에 그런 것만 풀어야 되는 거 아니야? 샌드위치 하나 더 먹어. ”

 

어, 고, 고마워... 나는 이제 가봐야 할 거 같아. 만나서 반가웠어, 일류샤. ”

 

“ 그래, 잘 가. 앞으로 종종 보자. 수학 골치 아프면 법대로 옮겨. 법학이 지루하긴 해도 보람 있거든. ”

 

“ 응, 분명 그럴 거야. ”

 

 

베르닌은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기숙사를 나왔다. 뜻하지 않게 법학과 후배를 만나서 샌드위치를 얻어먹었더니 무겁던 마음이 약간 나아지는 것 같았다. 일류샤야 그에게는 까마득한 후배일 테지만...

 

 

‘ 나도 공부할 땐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법학이 지루하긴 해도 보람 있는 공부라고... 그래서 KGB도 들어온 건데... ’

 

 

끝없는 서무 업무와 스페호프가 생각나고 독사과와 시계탑이 떠오르자 베르닌은 마음이 무거웠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무엇인지 알게 된 것 같았다. 후배인 일류샤에게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빌었다.

 

 

그는 찬바람을 쐬면서 교정을 좀 거닐었다. 그래도 부체르브로드를 두 쪽 먹었더니 정신이 좀 들었다. 어느덧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학교를 나왔다. 스페호프가 얘기한 빵집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학창 시절 종종 이용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곧 그의 차례가 되었다. 먼저 주문을 했다.

 

 

“ 흑빵 한 덩어리, 버찌잼 파이 하나 주세요. ”

 

“ 흑빵 어떤 종류요? 모스콥스키, 보야르스키, 곡물 박힌 거, 밀가루랑 섞인 거, 어떤 거요? ”

 

 

베르닌은 순간 당황했다. 너무나 당연한 질문이었지만 머릿속으로 계속 흑빵 한 덩어리와 버찌잼 파이만 외고 있었기 때문이다. 점원이 그를 째려보고 있었기 때문에 간신히 더듬거리며 대꾸했다.

 

 

“ 모, 모스콥스키요. ”

 

 

점원이 전표를 찢어서 건네주고 등 뒤의 진열대에서 모스콥스키 흑빵과 파이를 꺼내는 동안 베르닌은 옆 칸으로 가서 전표를 내밀고 돈을 냈다. 영수증을 받아서 보여주고 빵과 파이를 받았다. 그러다 뭔가 이상해서 도로 계산대로 갔다.

 

 

“ 어... 저... 종이 봉지를 주셔야 하는데... ”

 

그럼 처음부터 얘길 했어야죠! 종이 봉지는 10코페이카를 더 내야 돼요!

 

“ 예... 여기 10코페이카 드릴게요. ”

 

 

그래서 베르닌은 다시 전표를 끊고 10코페이카를 내고 영수증을 보여주고 갈색 종이 봉지를 받았다. 빵 봉지를 껴안고 빵집을 나왔는데 대체 어디로 가야 사람 눈에 띄지 않고 흑빵을 갈라 봉투를 숨길지 알 수가 없었다. 스페호프도 그런 얘기는 해준 적이 없었다.

 

 

‘ 아아, 뭐가 이렇게 복잡해... 현장요원들도 다 이런 식으로 하나? 설마 해외 나가는 스파이들도 이렇게 어설픈 방법을 쓰는 건 아니겠지? 꼭 흑빵 속에다 봉투를 숨겨야 하는 이유가 대체 뭐야... ’

 

 

결국 그는 도로 학교로 들어갔다. 정문에서 제일 가까운 화장실로 가서 문을 걸어 잠근 후 흑빵을 꺼내서 반으로 쪼갰다. 힘 조절을 못해서 하마터면 끝까지 다 갈라질 뻔 했다. 바지 주머니를 봉하고 있던 옷핀을 뽑은 후 봉투를 꺼냈다. 바지와 베개에 눌린 데다 반으로 접혀 있어서 봉투는 쭈글쭈글하게 주름이 가 있었다. 심지어 봉투 겉면에는 얼룩도 있었다. 아무래도 주머니 안에 쑤셔 넣었던 초콜릿 포장지 때문인 것 같았다. 중요한 기밀문서를 이런 식으로 보냈다고 모스크바 쪽 수신자가 스페호프에게 화를 내지나 않을까 걱정이 됐다. 그러면 국장은 자신을 들들 볶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는 손수건에 침을 묻혀서 봉투의 얼룩을 문질러 보았지만 자국은 더 지저분하게 번질 뿐이었다. 결국 그는 포기하고 봉투를 빵 사이에 쑤셔 넣었다. 그런데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빵 부스러기가 포슬포슬 일어났고 봉투를 넣었더니 빵이 양쪽으로 벌어졌다. 낑낑거리다가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 아, 그렇구나. 빵을 위에서부터 반으로 가르면 안 되는 거였어... 칼 같은 걸로 가운데에만 금을 그어서 봉투를 쑤셔 넣었어야 하는데. 어휴, 국장은 왜 이런 얘기는 안 해준 거야... 난 현장요원이 아니잖아. 내가 빵에 봉투를 어떻게 넣는지 알 게 뭐야. ’

 

 

결국 베르닌은 봉투를 한 번 더 접은 후 흑빵 안쪽으로 깊숙하게 쑤셔 넣었다. 그리고는 있는 힘껏 빵을 양쪽에서 밀어붙여 꼭 눌렀다. 그러자 빵이 붙었다. 너무 눌러 대서 원래 부피의 절반으로 줄어들어버렸지만 어쨌든 옆으로 벌어지지는 않았다. 급하게 봉지에 쑤셔 넣고 흑빵 위에 버찌잼 파이를 얹었다. 허둥거리다 하마터면 봉지 째 바닥에 떨어뜨릴 뻔 했다. 그나마 변기 뚜껑을 닫아놔서 다행이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베르닌은 학교를 나왔다. 빵과 씨름하느라 시간을 보냈더니 이미 10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급하게 걸어서 블록 두 개를 지나 공원에 갔다. 그런데 레닌 동상 정면의 벤치에 하필 할머니 하나가 앉아서 비둘기에게 빵을 주고 있었다! 다른 벤치는 전부 비어 있었다. 베르닌은 난감했다. 할머니가 자리를 비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지, 아니면 옆의 다른 벤치에 앉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 어휴, 왜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법은 안 가르쳐준 거야... 난 행정직인데. 이럴 땐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할머니가 베르닌 쪽을 보더니 손짓을 하며 ‘이봐, 젊은이’ 하고 그를 불렀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 어... 왜 그러시죠? ”

 

“ 불 좀 있나? ”

 

“ 저... 죄송합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아서요... ”

 

“ 에이, 요즘 젊은이들은 참 재미없게 산다니까. 노인네 담뱃불 하나 빌리기도 쉽지 않으니... ”

 

 

할머니는 툴툴대며 일어나더니 엉덩이를 툭툭 털고 느릿느릿 공원을 떠났다. 베르닌은 주위를 둘러본 후 벤치에 얼른 앉았다. 옆자리에 접선자가 앉아야 하니 자리를 비워놔야 할 것 같아서 귀퉁이에 앉았다가 또 아까 그 할머니 같은 사람이 올까봐 걱정이 되어서 다시 옆으로 좀 더 가서 앉았다. 빵 봉지를 옆에 내려놓자 가슴이 쿵쿵쿵 뛰었다. 멍해진 베르닌은 심호흡을 했고 자기도 모르게 자꾸 주변을 둘러보았다.

 

 

‘ 안 돼... 이렇게 자꾸 옆을 두리번거리면 더 수상해 보일 거야. 태연하게 있어야 돼. 난 그냥 산책하다가 잠깐 벤치에 앉아서 쉬는 거야. 아참, 그렇지. 비둘기한테 빵을 주라고 했지... ’

 

 

베르닌은 급하게 빵 봉지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런데 흑빵 위에 버찌잼 파이를 얹어놓았다는 것을 깜박한 나머지 그만 손에 잼이 찐득찐득하게 묻고 말았다. 손수건에 침을 묻혀서 대충 닦았지만 아주 찜찜했다. 흑빵 귀퉁이를 떼어냈더니 빵이 다시 옆으로 벌어지려고 해서 다시 손으로 꼭꼭 눌러야 했다.

 

 

빵조각을 떼어내서 던져주자 비둘기들이 모여 들었다. 빵을 쪼아 먹는 새들을 보고 있으니 왕재수 생각이 났다.

 

 

‘ 그러고 보니 오리한테 먹이 주는 건 봤는데 비둘기한테 주는 건 못 봤네. 비둘기는 안 좋아하나? 아침 출근은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네. 분명히 밥도 안 먹었겠지. 오늘도 집에는 밤에나 도착하니까 저녁 못 챙겨주는데. 그 녀석 요즘 신작 때문에 계속 무리하던데 밥이라도 잘 먹어야 하는데 로만이나 류다한테 얘기라도 해놓고 올걸... 어제도 내가 데리러 올 줄 알고 기다렸을 텐데. 또 극장에서 잔 거 아니야? 전화도 못 하고... ’

 

 

그는 왕재수 생각을 하느라 잠시 불안하던 것도 잊었다. 긴장이 풀려서 비둘기들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달칵거리는 바퀴 소리가 났다. 순간 가슴을 뻣뻣하게 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곁눈질을 했다. 스카프로 머리를 감싼 중년 여인 하나가 유모차를 밀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그의 곁에 앉으며 빵 봉지를 내려놓았다. 베르닌은 차마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 유모차 쪽을 보았다. 조그만 아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누워 있었는데 베르닌은 그렇게 못생기고 심술궂게 생긴 아기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여자가 담배를 꺼냈다. 아기 얼굴에 연기를 뿜어도 되나 하고 베르닌이 의문하고 있는데 여자가 무뚝뚝하게 말을 걸었다.

 

 

“ 불 있어요? ”

 

 

베르닌은 매우 당황했다. 분명히 회색 비둘기 흰 비둘기 암호를 얘기해야 하는데 어째서 불 있느냐고 묻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 어... 아까 그 할머니도 불 있느냐고 했는데... 설마 암호가 바뀐 건가? 아니면 이 여자가 접선자가 아닌가? 그냥 우연히 비슷한 스타일인 건가? ’

 

 

여자가 짜증스럽게 다시 물었다.

 

 

“ 불 있느냐고요. ”

 

“ 저, 아니요. 전 담배 안 피워서요. 죄송해요. ”

 

“ 흠. ”

 

 

여자는 호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베르닌이 황당해 하고 있는데 여자가 연기를 내뿜더니 비둘기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회색 비둘기는 많은데 흰 비둘기는 요즘 찾아보기 힘들군요.

 

아, 어... 조금 전까지 한 마리 있었는데 날아갔어요.

 

 

베르닌은 심장이 뛰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입 안이 바짝 말랐고 머릿속에서 천둥이 치는 것 같았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유모차의 아기를 어르고 달래며 노래를 불러 주었다. 베르닌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손에 쥐고 있던 빵을 더욱 잘게 부숴서 비둘기들에게 던져 주었다. 잠시 후 여자가 반쯤 탄 담배를 벤치 귀퉁이에 짓이겨 끄더니 꽁초를 휙 던져버리고는 일어섰다. 빵 봉지를 옆구리에 끼더니 베르닌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유모차를 밀면서 가버렸다.

 

 

베르닌은 꼼짝도 못하고 죽은 듯이 앉아 있었다. 여자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후 더듬더듬 손을 뻗어 빵 봉지를 집었다. 떨리는 손으로 봉지 안에 손을 넣었다. 버찌잼 파이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흑빵을 만져 보았다. 반으로 갈라져 있지 않았다. 온전한 덩어리였다. 자기도 모르게 ‘휴우’ 하고 한숨이 새어나왔다.

 

 

잠시 후 베르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돌덩이 하나가 떨어져 나간 기분이었다. 다 끝났다는 생각에 날아갈 것 같았다. 마치고 나니 별 것도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빵 봉지를 집어 들고 빠른 걸음으로 공원을 빠져나갔다.

 

 

 

 

*   *   *

 

 

 

 

베르닌은 아르바트 거리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주변에 있으면 어쩐지 의심을 살 것 같아서였다. 미행을 당할지도 모르니 직행 버스 대신 중간에 내려서 갈아타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문서를 전달하고 나니 불안감은 거의 다 가셨고 아무리 생각해도 미행이 따라붙은 것 같지도 않았다. 하긴 스페호프의 말이 옳았다. 누가 봐도 평범한 타입에 책상물림인 그를 비밀문서를 전달하는 KGB 요원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돌이켜보면 빵 봉지를 바꿔친 접선자도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여인이었다. 누가 봐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봉투를 직접 전달한 것도 아니고 빵 안에 숨겼으니 들킬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베르닌은 가브릴로프에 돌아갈 때까지는 조심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버스를 갈아타려고 내렸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 아르바트는 너무 번화하니까 다른 데를 가야겠다. 그래,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에 가야지. 거기는 지하철을 타고 가야 하니까. 오늘은 평일이니까 오전에 사람도 별로 없을 거고. 역에서 미술관 가는 길도 한적하고. 거기 있다가 공항으로 가면 되겠어. ’

 

 

그는 지하철역으로 갔다.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으로 가기 위해서는 지하철도 갈아타야 했다. 미로처럼 뻗은 넓고 어두운 지하철역으로 내려가자 마음이 한결 놓였다. 한 정거장을 간 후 환승을 했다. 승객은 별로 없었다. 싸늘한 지하철 좌석에 앉자 배가 고파왔다. 봉지에서 버찌잼 파이를 꺼내서 먹었다. 꿀맛이었다. 파이를 다 해치운 후에야 이 봉지를 계속 들고 다니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 두고 내릴까 하다가 친절한 누군가가 빵 놓고 내렸다며 따라올 것 같아서 할 수 없이 봉지를 들고 내렸다. 누가 볼까 심장을 졸이며 휴지통에 빵 봉지를 던져 넣고는 급하게 몸을 돌려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갔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역에서 나온 베르닌은 어쩐지 점점 빨라지는 발걸음으로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을 향해 걸었다. 4월 초의 모스크바는 따뜻했고 햇살도 밝았다. 시계를 보니 11시가 좀 넘어 있었다. 꼭 옛날에 학교 다니던 때 같았다. 모처럼 휴강이 되었을 때 동기들과 함께 놀러 나갔을 때가 생각났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럴 때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에 갔던 기억은 없었다. 맨 처음 모스크바에 왔을 때 그래도 유명한 곳이니 가봐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딱 한 번 갔을 뿐이었다.

 

 

미술관은 한적했다. 관람객은 거의 없었다. 도슨트를 따라다니며 설명을 듣는 중학생들이 한 무리 있었을 뿐이었다. 베르닌은 학생들을 피해서 다른 전시실로 갔다. 그는 원래 미술에는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그림을 봐도 별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전날부터 밀서 전달 임무 때문에 너무 불안에 떨었던 터라 텅 빈 전시실에서 알록달록한 색깔이 칠해진 그림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멍하게 이 전시실 저 전시실을 돌아다니다가 그는 거대한 그림 앞에 멈춰섰다. 짙은 청색과 흰색과 검은색이 섞여 있는 여자의 초상화였다. 깃털 날개가 달려 있고 하얀 드레스를 입은 검은 머리의 예쁜 여자였는데 베르닌도 책에서 본 기억이 났다. 유명한 그림 같았지만 제목은 생각나지 않았다. 어쩐지 그림에 눈이 계속 갔다.

 

 

‘ 어, 근데 이 그림 누구 좀 닮은 거 같아. 왜 이렇게 낯익지. 내 주위에 저렇게 생긴 여자는 없는데. ’

 

 

베르닌은 고개를 갸웃했다. 제목과 화가 이름을 보려고 앞으로 다가가려는데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브루벨, 백조 공주. 학창 시절에 공부를 제대로 안 했나보군. ”

 

 

베르닌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말쑥한 수트 차림의 중년 남자가 하나 서 있었다. 거의 코즐로프만큼 키가 컸는데 체격은 훨씬 더 컸다. 어딘가 매를 연상시키는 외모의 풍채 좋은 남자였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마 그의 두 눈 색깔이 서로 달라서 그런 것 같았다. 오른쪽 눈은 푸른색이었고 왼쪽 눈은 갈색이었다. 베르닌은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소름이 오싹 끼쳐오는 것을 느꼈다. 모른 척하고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뭔가에 사로잡힌 듯 눈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남자가 목을 울려 웃었다.

 

 

“ 아니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나? 닮긴 닮았지. 그것도 많이. 뭐 그 자식도 알 거야. 한두 번 들은 얘기도 아니고. ”

 

“ 저... 무슨 말씀이신지 전혀 모르겠군요. 아무래도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만. ”

 

 

남자가 다시 웃었다. 이번에는 소리 없는 미소였다. 그때 베르닌은 갑작스럽게 깨달았다.

 

 

저 그림, 그 자식 닮았어... 많이...

 

 

그리고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며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나 이 사람 알아... 텔레비전에서 본 적 있어... 분명히 본 적 있어.

 

 

온몸에서 피가 빠져 달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베르닌은 몸을 돌렸다. 거의 본능적으로 행동했다. 전시실을 빠져나왔다. 남자는 쫓아오지 않았다. 잰걸음으로 미술관을 나온 후 주변을 살펴보았다. 장바구니를 들고 가는 노파 한두 명 뿐이었다. 뒷골목 쪽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뛰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 당직실... 당직실로 전화하라고 했어. 암호가 있었는데... 신호 두 번 가면 끊으라고 했나? 아니야, 그건 접선에 실패했을 때야. 미행 붙었을 때 하는 말이 있었어. 뭔가 추운 거랑 연관된 거였는데... ’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일단 지하철역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지하철을 타고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그러다가 지하로 내려가면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와 전차를 번갈아가며 타다가 공항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막 버스 정류장 쪽으로 가려고 골목을 돌았을 때 누가 그의 어깨를 탁 쳤다.

 

 

“ 어, 표트르! 여기 웬일이야? 수업 끝났어? ”

 

 

베르닌은 깜짝 놀라 멈춰 섰다. 곱슬머리의 앳된 청년이 그를 보고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침에 기숙사 부엌에서 샌드위치를 건네준 법학과 후배 일류샤였다.

 

 

“ 어, 어... ”

 

“ 어디 가? 혹시 트레치야코프? 나 지금 거기 가는 길인데. 같이 갈래? ”

 

“ 어, 아니야... 난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다음에 봐. ”

 

“ 에이, 아쉽네. 그럼 잘 가. ”

 

 

베르닌은 일류샤가 골목을 돌아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는 다시 뛰려다가 건너편 골목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를 발견했다. 전화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스페호프가 미행이 붙으면 모스크바의 심복을 보내주겠다고 했었다. 암호가 아직도 생각이 잘 나지 않았지만 일단 부스로 갔다.

 

 

막 주머니에서 전화 토큰을 꺼내고 있는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거 시내 전화야. 가브릴로프로는 전화 안 될 걸. 너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구나. ”

 

 

베르닌은 불에 덴 듯 부르르 떨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일류샤가 서 있었다. 여전히 해맑게 웃고 있었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물으려고 했을 때 일류샤가 다가왔다. 베르닌은 일류샤가 한 손을 들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아무 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일류샤가 그의 관자놀이를 내리쳤다. 베르닌은 뒷걸음질치려고 했지만 등에 전화 부스 벽이 와 닿았다. ‘잘됐네, 쓰러지지는 않겠어’ 라는 생각이 들었고 동시에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란 생각도 들었다. 아마 ‘샌드위치 같은 거 받아먹으면 안 되는 거였어!’라고 자책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곧 눈앞이 캄캄해졌고 베르닌은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FIN

- 2015. 6. 24 ~ 6. 30 -

 

 

...

 

 

 

과연 베르닌은 무사할 것인가! 그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28편에서...

 

..

 

 

이번 편은 내용상 스파이 첩보 소설과 하드보일드 장르 소설의 문체를 좀 섞어서 썼다. 점점 서무 시리즈는 내 맘대로 이 장르 저 장르 잡탕 놀이터로 변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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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호프가 베르닌에게 부여한 가명인 표트르 트뵤르도피로고프에 대해.

 

'트뵤르드이'는 '단단한', 딱딱한', '굳은'이란 뜻의 형용사이고 '피로그'는 '파이'란 뜻이다. 그래서 트뵤르도피로고프는 '딱딱하게 굳은 파이'란 뜻이 내재되어 있다. 내가 만들어낸 성이지만 분명 어딘가에 이런 성도 있긴 있을 거다. 실제로 트뵤르도흘레브니코프(딱딱한 빵)란 성이 있기 때문이지...

 

그리고 일류샤는 러시아 남자 이름인 '일리야'의 애칭이다. 러시아 이름들은 별로 많지 않아서 동명이인이 참 많다. 대신 성이 아주 다양함.

 

 

..

 

왕재수가 크레믈린 아저씨의 명령에 대해 얘기하는 장면은 다분히 본편 색채가 짙은데, 본편 우주에서 미샤는 후원자이자 지배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의 지시에 따라 국내외 주요인사와 그런 일을 수행한 적이 좀 있다. 왕재수가 어머니에 대해 걱정하는 장면도 본편 우주의 미샤와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가져왔다. 본편 우주에서 미샤는 어릴 때 아버지를 잃었기 때문에 어머니에게 자신의 일로 걱정을 끼치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성격으로 설정했다.

 

..

 

 

여기서 묘사하고 있는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기숙사에 대한 얘기는 실제와는 다를 수 있다. 나는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기숙사에서는 지내본 적이 없고 페테르부르그 국립대학교 기숙사에서 지냈기 때문에 여기서의 묘사는 그곳 기숙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공동부엌과 욕실을 쓰는 기숙사도 있고 각 방별로 욕실과 부엌이 딸려 있는 기숙사도 있었다.

 

베르닌이 침대에 주저앉다가 합판이 내려앉을 뻔 한건 내 실제 경험에서 가져왔다. 오랜 옛날 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기숙사에서 지낼때 어느 춥고 힘든날 녹초가 되어 돌아와 침대에 주저앉았는데 침대가 반토막으로 내려앉았다! (내가 엄청 무거워서가 아님!! 워낙 침대가 좁고 열악해서 그런 것임...) 놀라서 침대를 해체해보니 아주 얇은 매트리스 아래 합판이 이어져 있었는데 그 합판이 반토막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청테이프로 합판을 붙인 후 다시 매트리스를 깔았고 이후 몇달 동안 그 위에서 잤다...

 

 

..

 

9밀리 마카로프는 러시아제 권총이다. 총기에 관심 많으신 분들이라면 잘 알듯. 28편에서 이 권총 사진도 한번 올려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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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치야코프 미술관은 모스크바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관이다.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나 러시아 박물관만한 규모는 아니지만 유명한 그림들이 많다.

 

베르닌과 미지의 남자가 조우하게 된 청색과 흰색, 검은색의 아름다운 여인 초상화는 미하일 브루벨의 '백조공주' 이다. 이 그림에 대해서는 전에 두어차례 포스팅한 적이 있고 about writing 폴더에 올렸던 본편 우주의 단편 Jewels에서도 화자 라라가 미샤를 놓고 백조공주랑 닮았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 링크들은 아래..

http://tveye.tistory.com/3394  : 단편 Jewels 04편 중에서

http://tveye.tistory.com/1819 : 브루벨의 악마와 백조공주 이미지

 

그래도 아쉬우니 백조공주 이미지를 여기 다시...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그림이기도 하다. 이미지 파일은 크기도 작고 색채도 어두운데, 실제 그림은 정말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본편의 미샤를 구상할 때 이 사람이 브루벨 그림의 악마와 백조공주를 연상시키는 타입이라고 설정했는데, 실질적으로는 백조공주를 더 닮았을 거라고 내밀하게 생각하곤 했다.

 

 

..

 

 

그럼 다음 이야기는 28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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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주시면 큰 힘이 됩니다.

 

 

:
Posted by liontamer

부활절 이야기 네번째 파트.

1장 : http://tveye.tistory.com/3390
2장 : http://tveye.tistory.com/3391
3장 : http://tveye.tistory.com/3393

 

4장은 분량이 좀 길다.

 


* 이 글을 무단으로 전재, 배포, 복제, 인용하거나 퍼가지 말아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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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wels

пасхальный рассказ

 

 

 

 

 

- 4 -

 

 

 

 

다음날 난 수업을 마치자마자 곧장 버스를 타고 미샤가 사는 동네로 갔다. 점심 때 마르가리타 아줌마에게 전화해서 물어보니 미샤가 이미 퇴원해서 집에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엄마가 알면 야단칠 게 뻔했기 때문에 나쟈에게 걔네 집에서 숙제하고 노는 걸로 해달라고 말을 맞춰두었다. 아냐도 데려가고 싶었지만 동생은 아직 어려서 비밀을 지키지 못할 것 같았고 같이 버스 타는 것도 불안해서 그냥 혼자 가기로 했다.

 

미샤의 집은 극장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5분만 걸어내려 오면 바로 모스크바 강가였지만 녹지와 큰 울타리가 쳐진 건물들 때문에 버스에서 막 내려서는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스베타 얘기로는 국회의원들과 당 간부들, 별 달린 장군들, 훈장 받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굉장한 동네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난 너무 감탄해서 미샤에게 어떻게 그렇게 좋은 동네에 아파트를 얻었느냐고 물어보았다. 미샤는 자기가 얻은 게 아니고 극장에서 구해 줬다고 했다.

 

“ 난 스탄카 집이 더 좋은데. 여긴 극장에서 너무 멀어. 걸어가면 한참 걸리는걸. ”

“ 그래서 우리 아빠 집에 와 있는 거야? ”

“ 응. 스탄카가 와 있어도 된다고 했어. 레닌그라드에서도 같이 있으니까 일하기 좋았어. ”

 

난 딱 한 번 미샤의 아파트에 올라가본 적이 있었다. 막 이사 와서 아빠가 짐 정리를 도와주러 갔을 때였다. 집이 엄청나게 넓었다. 우리 집이 몇 개나 들어갈 것 같았다. 한 층 전체가 그냥 집 하나였다. 레닌그라드에서 미샤가 지나와 같이 살던 아파트도 넓고 근사했었지만 그 집보다도 더 컸다. 미샤는 이삿짐 상자 몇 개를 한쪽에 그대로 쌓아놓은 채 정리할 생각도 하지 않고 소파에 누워 자고 있었다. 그땐 1월이었고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비행기가 뜨지 않았기 때문에 레닌그라드에서 올라오는 데 무척 고생을 했다고 들었다. 고급 아파트였지만 오랫동안 비어 있었던 탓인지 난방이 다음날부터 된다고 해서 집안은 꽤 추웠다. 그래선지 미샤는 코트를 입고 스카프도 풀지 않은 채 소파에 길게 누워 자고 있었다. 얼마나 깊게 자는지 우리가 들어온 것도 몰랐다. 아빠는 미샤를 깨우는 대신 상자를 하나하나 열어 옷과 책들을 대충 정리해 주었다. 아빠는 우리가 잘 때도 절대로 깨우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랑 같이 살 때도 가끔 핀잔을 듣곤 했다. ‘당신이 라라를 늦잠꾸러기로 만들 거야!’ 라고. 하지만 아빠는 곤하게 자는 사람은 가만히 놔둬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나에게도 미샤를 깨우지 말고 책 정리를 도와주거나 한쪽에서 조용히 놀고 있으라고 당부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미샤는 진짜 늦잠꾸러기였다. 공연 때문에 극장에서 늦게 돌아오는 탓도 있겠지만 웬만하면 9시 이전에는 일어나지 않았다. 눈을 뜬 후에도 한동안은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으려고 했다. 주말에 미샤가 와 있는 날 아침이면 아빠는 나와 아냐에게 그를 깨우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아냐는 침실로 기어들어가 미샤를 깨워 놀고 싶어 안달이었지만 난 텔레비전 만화 볼륨을 열심히 낮추곤 했다.

 

그 날 난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빠가 아닌 남자에게 키스를 했다. 잠자는 미녀에서 왕자님이 오로라 공주에게 입 맞추듯이. 미샤는 내가 발끝을 들고 살금살금 소파 곁으로 다가갔을 때도, 목에 두르고 있는 스카프를 살짝 젖혔을 때도, 가슴에 머리를 기댔을 때도 깨지 않았다. 용기를 내어 입술에 살짝 키스를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땐 너무 긴장해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하마터면 어지러워서 뒤로 자빠질 뻔 했다.

 

나쟈와 비카는 그 얘길 듣고 완전히 흥분해서 느낌이 어땠느냐고 캐물었다. 난 솔직하게 대꾸했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고 그냥 어지러웠다고, 미샤와 아빠에게 들킬까봐 너무 긴장돼서 정신이 없었다고. 그러자 언니가 있는 나쟈는 고개를 저으면서 내가 키스를 안 해봐서 그렇다고, 처음 해봐서 제대로 못해서 그런 거라고 했다. 진짜 키스를 하면 남자가 꼭 안아주고 답례로 자기도 키스를 해준다고 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어쨌든 미샤는 너무 곤히 자느라 내가 키스한 것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내가 나쟈와 비카에게 말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부끄럽기도 했고 어쩐지 말하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미샤는 입술이 부드러웠다. 꼭 아냐의 입술처럼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그리고 좋은 냄새가 났다. 사실 레닌그라드에서 같이 보트를 탔을 때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우리 엄마보다, 학교에서 제일 예쁜 타치야나 선생님보다 더 좋은 향기가 나.'  미샤는 향수를 쓰니까 아마도 그것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아빠의 집에서 막 씻고 나와서 우리와 놀아줬을 때도 희미하게 그 냄새를 맡았기 때문에 그냥 체취라는 걸 알았다. 아냐에게서 우유 냄새가 나고 우리 엄마에게서 희미한 파우더 냄새가 나는 것처럼.

 

미샤는 30분 후에야 깨어났고 키스는커녕 내가 와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아빠가 짐을 정리하고 있는 걸 보고는 그냥 놔두라고 미안해하더니 나랑 아냐를 데려와 같이 저녁 먹자고 했다. 난 그때까지도 어지럽고 부끄러워서 피아노 뒤에 숨어 있었고 아빠가 불렀을 때에야 쭈뼛거리며 기어나갈 수 있었다. 미샤는 날 보더니 굉장히 반가워했고 코트 주머니에서 무척 귀여운 머리핀을 꺼내 주었다. 폭신하고 보드라운 은빛 솜털이 달려 있는 자작나무 핀이었다. 미샤에게는 언제나 예쁘고 근사한 물건들을 골라내는 재주가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부활절 달걀도 그렇게 잘 만들었을지도 몰랐다.

 

버스에서 내린 후 난 전에 봐 두었던 빵집 간판을 찾아냈고 조금 헤맨 끝에 공원 왼편의 작은 문을 통과해 미샤의 아파트를 간신히 찾아냈다. 수프가 든 보온병과 보자기에 싼 쿨리치를 양손에 들고 가는 게 너무 힘들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수프는 놓고 올 걸 하고 후회했지만 아플 때는 뜨끈한 보르쉬를 먹어야 했다. 엄마는 나와 아냐가 아플 때 항상 그렇게 말했다. 그래야 비타민과 철분을 섭취할 수 있다고. 아침에 엄마 몰래 냄비에서 덜어내느라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겨우겨우 울타리들을 지나 아파트 건물 앞에 도착했지만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생각하지도 않았던 장애물과 부딪쳤다. 그 아파트는 1층 전체가 경비실로 되어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두 겹의 문으로 막혀 있었고 뒤편으로 나 있는 계단으로 가는 문도 무섭게 생긴 아저씨가 지키고 있었다. 꼭 외국인들이 가는 호텔 같았다. 전에는 아빠랑 같이 왔었고 아빠는 열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제복을 입고 모자를 쓴 아저씨가 날 보더니 여기 사는 사람이 아니면 들어올 수 없다고 했다. 난 미샤의 이름과 아파트 호수를 댔고 아빠 친구라서 보러 왔으니 들여보내달라고 부탁했지만 아저씨는 안 된다고 했다.

 

“ 왜 안돼요? 1월에도 왔었는데. 우리 아빠 진짜 미샤 친구예요. 볼쇼이에서 안무해요. 우리 아빠도 유명해요, 스타니슬라프 일린이에요. 국영채널 방송에도 나왔어요. 내 이름은 라라예요. 미샤는 그저께도 우리 집에서 같이 저녁 먹었어요. 진짜예요. ”

 

경비 아저씨는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무뚝뚝한 목소리로 그래도 안 된다고 했다. 옆에 있던 다른 아저씨도 거들었다.

 

“ 그래, 네 말이 맞다고 치자.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정 올라가고 싶으면 아빠와 같이 오든가. ”

“ 우리 아빤 지금 극장에 있단 말이에요! ”

“ 그런 말을 하는 여자들이 여기 얼마나 많이 오는지 아니? 꽃다발에 선물에 거짓말에... 이젠 이런 꼬마까지 와서 떼를 쓰니 참... ”

“ 난 꼬마가 아니에요! 학교 다녀요! 열 살도 넘었어요! 진짜예요, 미샤랑 정말 아는 사이예요. 미샤가 아프댔어요, 그래서 보르쉬 가지고 왔어요. 미샤는 아파도 참는단 말이에요, 저녁에는 밥도 잘 안 먹어요. 우리 엄마가 아프면 잘 먹어야 된다고 했는데. 그냥 놔두면 계속 아플 거예요. 제발 들여보내 주세요. ”

 

난 결국 답답하고 억울해서 엉엉 울어버렸다. 내가 울자 아저씨들은 굉장히 난처해했다. 무뚝뚝하던 아저씨가 날 달래주면서 보르쉬를 놓고 가면 자기가 미샤에게 전해주겠다고 했다.

 

“ 안돼요! 미셴카한테 안 주고 아저씨가 먹어버릴지 어떻게 알아요! ”

 

아저씨는 절대 안 먹을 테니 믿어달라고 했지만 난 악착같이 버텼다. 들여보내달라고 계속 떼를 쓰며 울었다. 아저씨들이 못 들어가게 하자 더럭 겁이 나고 걱정이 됐다. 이 아저씨들이 이렇게 아무도 못 들어가게 해서 미샤가 진짜 많이 아픈데도 위에서 혼자 누워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너무 슬퍼서 자꾸 눈물이 나왔다. 미샤는 자기 집이 너무 넓어서 싫다고 했고 아늑한 우리 아빠의 아파트가 훨씬 좋다고 했었는데.

 

내가 주저앉아서 계속 울자 안쪽 사무실에서 어떤 아줌마가 나왔다. 매부리코에 굉장히 무섭게 생긴 아줌마였다. 당장이라도 보온병과 케익을 빼앗아 바닥에 집어던지고 날 내쫓을 것 같아서 무서웠지만 그래도 계속 울면서 버텼다. 아줌마는 경비 아저씨들에게 자초지종을 듣더니 나에게 이름과 아빠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는 거짓말하면 가만 안 두겠다, 부모님과 학교에 얘기해서 혼쭐을 내주겠다고 협박하더니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전화를 하는 것 같았다. 난 그 무서운 아줌마가 엄마에게 전화하는 줄 알고 겁에 질렸다. 하지만 잠시 후 아줌마가 나오더니 손수건으로 눈물과 콧물을 닦아 주었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아줌마는 내 손을 잡고 두 겹의 육중한 문을 열더니 엘리베이터로 데려다 주었다. 보온병과 쿨리치도 들어 주었다. 알고 보니 친절한 아줌마였다. 미샤의 집으로 직접 전화를 해서 나랑 아는 사이가 맞는지 물어봤다고 했다.

 

“ 미샤 집에 있어요? ”

“ 있으니까 전화를 받았지. ”

“ 안 아파요? ”

“ 모르겠는데, 목소리는 괜찮았어. ”

“ 왜 아저씨들이 지키면서 못 들어가게 해요? ”

“ 여기는 중요한 사람들이 많이 살아서 그래. 아무나 못 들어가. ”

“ 미샤는 중요한 사람이에요? ”

“ 글쎄, 여기 사니까 아마 그렇겠지. ”

“ 중요한 사람은 배 나온 아저씨들인데... 막 당에서 연설하고... ”

 

매부리코 아줌마가 웃었다.

 

“ 그러니? 그럼 미하일 세르게예비치는 중요한 사람이 아니구나. 모델처럼 날씬하니까. ”

“ 모델이 아니고 무용수예요. 볼쇼이에서 제일 잘 춰요. 외국에도 많이 갔어요. 상도 많이 받았어요. ”

“ 아줌마도 알아, 사인도 받았는걸. 표 받아서 공연도 봤어. ”

“ 미샤는 중요한 사람이 아니고 좋은 사람이에요. ”

“ 그래, 좋은 사람 같긴 하더라. 그러니까 표도 줬지. ”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아줌마는 7층을 눌러준 후 보온병과 쿨리치를 내게 돌려주었다. 난 주머니에서 장식 계란을 한 개 꺼내 아줌마에게 주었다. 아저씨들 것까지 주고 싶었지만 두 개밖에 안 가져왔고 하나는 미샤 몫이었다. 아줌마는 무척 좋아했고 나에게 잘 놀다 가라고 인사도 해줬다.

 

 

*    *    *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미샤가 복도에 나와 있었다. 내가 괜찮으냐고 묻기도 전에 먼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물었다.

 

“ 라루츠카, 왜 이렇게 울었어? ”

“ 안 울었어. ”

“ 눈이 퉁퉁 부었는걸. ”

“ 아저씨들이 못 올라가게 해서. ”

“ 나한테 전화하지, 그럼 내려갔을 텐데. 비까지 맞고... 우산 없었어? ”

“ 버스 탈 때까진 비 안 왔어. ”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미샤는 수건을 가져와 내 얼굴과 머리를 닦아 주었다. 보르쉬가 든 보온병과 쿨리치는 뭐냐고 묻지도 않고 받아서 티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내 머리의 물기를 털어주기 바빴다.

 

“ 옷 갈아입어야겠다. 감기 걸릴 거야. 잠깐만 있어봐. ”

 

미샤는 현관에서 제일 가까운 쪽 방문을 열었다. 큰 거울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옷장이 여러 개 있었고 얇은 커튼으로 가려진 바퀴 달린 옷걸이도 보였다. 극장 의상실에서나 보던 거였다. 그는 옷장 서랍을 열어 안을 뒤지더니 티셔츠를 하나 꺼내서 내게 주었다.

 

“ 젖은 거 벗고 이거 잠깐만 입고 있어. 라디에이터에 널어놓으면 금방 마를 거야. ”

“ 이거 누구 옷이야? ”

“ 내 거야. 미안하네, 라라가 입을만한 옷이 없어서. 예쁘진 않지만 잠시만 입고 있어. ”

 

예쁜 옷보다 미샤가 입었던 옷이 천 배는 좋았지만 부끄러워서 그 말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아냐라면 서슴없이 말했을 텐데. 미샤는 날 침실로 데려다 주며 옷을 갈아입으라고 한 뒤 나갔다. 난 점퍼와 스웨터와 바지와 양말을 벗었다. 그래도 속옷은 젖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낸 후 미샤가 준 티셔츠를 입었다. 물론 나한테는 엄청 컸다. 무릎 아래까지 펄럭이며 내려왔고 반소매 티셔츠였지만 소매 끝이 거의 팔목에 닿았다. 원래는 짙은 파란색이었던 것 같았지만 많이 빨아서 그런지 흐릿한 푸른색으로 물이 빠져 있었고 감촉이 보들보들했다. 잠옷은 아니고 연습할 때 입는 옷 같았다. 카펫 위에 선 채 잠시 두 팔로 어깨를 꼭 감싸고 티셔츠의 보드라운 감촉을 느껴 보았다. 세탁해서 개켜 두었던 옷이라 희미한 세제 냄새 밖에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미샤가 입었던 옷이라고 생각하니 행복했다.

 

침대 시트와 담요는 잘 정돈되어 있었다. 아프니까 당연히 누워 있었을 줄 알았는데. 커튼이 젖혀져 있지 않아 스탠드 램프를 켰는데도 어두웠다. 나이트 테이블 위에는 장미 몇 송이가 꽂힌 꽃병과 책이 두어 권 놓여 있었다. 레닌그라드에 있을 때도 미샤의 집에는 언제나 꽃이 가득했다. 팬들이 매일같이 꽃다발을 가져다주기 때문이었다. 모스크바로 이사 온 후에는 우리 집에 올 때 자주 꽃을 가져왔고 극장 동료들에게도 꽃을 나눠주곤 했다. 그 중에서도 장미가 제일 많았다. 한겨울에도 장미를 잔뜩 받았다. 미샤가 장미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 사람들이 어디서 그렇게 꽃을 구하는지 놀라울 지경이었다.

 

난 맨발로 부드러운 카펫을 밟으며 잠깐 미샤의 침실을 구경했다. 엄마는 허락받지 않고 남의 침실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들쑤시면 안 된다고 했지만 분명히 미샤가 안에 들어가서 옷 갈아입으라고 했고 아무 것도 만지지 않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다. 화려하고 넓은 아파트에 비해 침실은 간소했다. 침대와 나이트 테이블, 램프와 꽃이 전부였다. 벽에 그림이 하나 걸려 있을 뿐이었다. 연필인지 목탄인지는 모르겠지만 휘갈겨 그린 스케치였다. 어두워서 무슨 그림인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밖에서 미샤가 날 불렀다.

 

“ 라루츠카, 옷 불편해? 다른 거 줄까? ”

“ 아니야, 좋아. 다 입었어. ”

 

난 급하게 옷 뭉치를 껴안고 침실에서 나왔다. 미샤는 내게서 젖은 옷들과 양말을 받아 거실 라디에이터에 널었다. 자리가 모자라자 침실 라디에이터에도 마저 널었다. 마침 잘됐다 싶어서 따라 들어가 물었다.

 

“ 저 그림은 뭐야? 그리다 만 거 같아. ”

“ 아, 스케치야. 브루벨이 날아가는 악마 구상할 때 그린 거래. ”

“ 정말? 진짜 브루벨 그림이야? 트레치야코프에 있는 거? ”

“ 응. 근데 날아가는 악마는 레닌그라드에 있어, 러시아 미술관에. ”

“ 어떻게 구했어? 미술관에 있어야 되는 거 아냐? ”

“ 스케치나 소품들은 별도로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대. 예전에 누가 선물해 줬어. 생일에. ”

“ 난 저 그림은 못 봤는데. 레닌그라드 갔을 때도 에르미타주만 갔었어. ”

“ 화집 보여줄까? ”

“ 응. ”

 

미샤는 서재로 가서 굉장히 크고 두꺼운 브루벨 화집을 꺼내왔다. 난 거실 소파에 앉아 화집을 넘겨보았다. 모르는 그림도 많았다. 미샤는 브루벨을 좋아해서 종종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에 가곤 했다. 난 풍경화와 화려한 초상화들이 더 좋았고 브루벨 그림은 어두워서 그런지 좀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미샤와 트레치야코프에 가면 그가 브루벨 전시실에 있는 동안 다른 방에 가 있곤 했다. 하지만 백조 공주는 좋았다. 환상적으로 예뻤다. 전에 미샤가 그 그림 앞에 서 있을 때 터무니없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백조 공주가 미셴카랑 좀 닮았다고. 미샤는 남자니까 그런 말을 들으면 당연히 싫어할 것 같아서 마음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했지만, 화집을 펼쳐 보니 역시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조 공주도 검은 머리였고 피부가 하얬다. 그리고 눈이 깊고 아름다웠다.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것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매처럼. 그러자 갑자기 좀 슬퍼져서 화집을 덮어버렸다.

 

그때 미샤가 내 발에 슬리퍼를 신기고는 목과 어깨에 폭이 넓고 보드라운 스카프를 둘러 주었다. 하얀 줄이 두 개 들어간 녹색 스카프였는데 무척 따뜻하고 예뻤다. 미샤에게는 멋진 스카프가 많았다. 직접 사기도 했지만 선물도 많이 받았다. 아빠는 미샤가 팬들에게서 받은 스카프가 굼 백화점에 있는 스카프들보다 더 많을 거라고 했다. 나중에 극장 박물관에 방을 하나 내줄테니 거기 그 예쁜 스카프들과 옷가지들을 전시하라고 농담도 했다. 내가 스카프를 만지면서 좋아하는 동안 미샤가 몸을 녹이라고 김이 올라오는 뜨거운 차를 한 잔 주었다.

 

“ 나 안 마실래. ”

“ 쓴 거 아니야, 설탕 넣었어. ”

 

그 말에 안심하고 차를 마셨다. 여전히 별로 달지는 않았다. 미샤는 차에 설탕을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스카프를 두르고 차를 마시자 몸이 한결 따뜻해졌고 그제야 난 내가 여기 왜 왔는지 깨달았다. 도리어 미샤가 날 돌봐주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부끄럽고 미안했다. 내가 찻잔을 내려놓고 한참동안 쳐다보자 미샤가 물었다.

 

“ 라라,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

“ 왜? ”

“ 비 맞고 여기까지 왔잖아. 울었고. ”

“ 안 울었어. 조금, 조금 눈물만 난 거야. ”

 

다시 눈물이 나오는 것 같아서 급하게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그리고는 미샤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 이제 안 아파? ”

“ 누가 그래, 내가 아프다고. ”

“ 아빠가 새벽에 데리러 갔잖아. 어제 병원에 있었고. 내가 가려고 했는데 아빠가 안 된다고 했어. ”

“ 아, 그랬구나. 별 거 아니었는데. 스탄카도 안 와도 됐는데. ”

“ 부끄러워서? ”

“ 뭐가? ”

“ 아빠가 그러는데 미셴카는 아픈 걸 보여주는 게 부끄럽다고 했대. 그래서 나보고 오지 말라고 했어. ”

“ 내가 그랬대? ”

“ 아니야? ”

“ 글쎄, 스탄카가 그렇게 말했으면 그런 거겠지. ”

 

미샤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티 테이블 앞에 서 있었다. 전혀 아파 보이지 않았다. 안색이 좀 창백한 정도였다. 눈은 여전히 밤하늘처럼 까맸고 벨벳처럼 부드러웠다. 잠옷이나 가운을 입고 있지도 않았다. 나에게 준 옷과 비슷한 반소매 티셔츠와 물 빠진 청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왼쪽 손목에 붕대를 감고 있을 뿐이었다.

 

“ 거기 다친 거야? ”

“ 어디? ”

“ 손목. ”

“ 아... ”

 

미샤는 흠칫 놀라면서 왼손을 등 뒤로 감췄다.

 

“ 아니야, 살짝 긁힌 것뿐이야. ”

“ 피났어? ”

“ 조금. ”

“ 보르쉬 먹어야 돼. ”

 

까맣게 잊고 있었던 수프 생각이 나서 난 벌떡 일어났다.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던 보온병을 들고 부엌으로 갔다. 눈에 띄는 그릇을 찾아내 수프를 부었다. 아직도 김이 살짝 올라왔다. 뭔가 더 먹을 만한 게 없나 하고 냉장고와 찬장을 뒤졌지만 요리를 하지 않아도 먹을 수 있는 거라곤 케피르와 주스, 흑빵과 오렌지 외에는 없었다. 할 수 없이 흑빵을 좀 잘라서 버터를 발랐다.

 

쟁반을 들고 거실로 돌아왔을 때 미샤는 바를 잡고 다리를 길게 뻗고 있었다. 거실은 아주 넓었고 한쪽은 완전히 극장 연습실처럼 되어 있었다. 벽 한 면은 완전히 거울로 되어 있었고 기다란 바도 있었다. 구석에는 조그만 피아노도 있었다. 아빠는 안무가였고 거의 매일같이 무용수들과 저런 연습실에서 같이 일했지만 엄마 때문에 난 한 번도 그걸 구경해본 적이 없었다. 음악도 없고 의상도 갖춰 입지 않은 채 미샤가 연습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나중에는 바를 완전히 놓고서도 한쪽 발로 서서 반대쪽 다리를 뒤로 쭉 뻗은 채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런데도 넘어지지 않았다. 전혀 비틀거리지도 않았다.

 

“ 비행기 같아, 미셴카. 한 바퀴 돌 수도 있어? ”

“ 도는 게 좋아? ”

“ 응. ”

 

그러자 미샤가 그 자세에서 천천히 도는 것을 보여주었다. 근사했다. 이제 비행기가 아니라 진짜 새처럼 보였다. 날개를 편 백조 같았다. 나도 해 보고 싶어서 한쪽 다리를 뒤로 들어보았지만 물론 도는 건커녕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었다. 내가 엉덩방아를 찧자 미샤가 와서 일으켜 주었다. 진짜 아팠지만 그보다는 창피했기 때문에 괜찮은 척 하며 미샤의 손을 잡아끌고 티 테이블 앞으로 데려왔다. 그는 긴 소매 셔츠로 갈아입은 후였다. 붕대가 보이지 않자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난 미샤에게 보르쉬와 쿨리치, 그리고 버터 바른 빵을 먹으라고 했다. 미샤는 무척 고마워했다. 무거운데 어떻게 들고 왔느냐고 하면서 그래서 우산을 못 가져왔느냐고 정확히 짚어내 날 깜짝 놀라게 했다. 그리고는 같이 먹자고 했다.

 

우리는 함께 수프와 흑빵과 케익을 먹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빵과 쿨리치는 나 혼자 먹었다. 미샤는 별로 배가 고프지 않은 것 같았다. 보르쉬는 맛있다고 했지만 많이 먹지는 않았다. 한 입 먹고 나서는 한참 있다가 다음 숟가락을 떴다. 그것도 나 때문에 억지로 먹는 것 같았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미 내 표정에 실망감이 드러났는지 미샤가 미안해하면서 저녁에 꼭 다 먹겠다고 약속했다.

 

“ 나 수요일에 공연 보러 가도 돼? ”

“ 로미오와 줄리엣은 나스챠의 리스트에 없었던 것 같은데. ”

“ 그치만 내용은 다 아는걸. 도서관에서 책도 빌려 읽었어. ”

“ 스탄카가 된다고 하면. ”

“ 아빠가 안 된다고 하면 미셴카가 설득해줘. ”

“ 너희 아빠는 설득하기 힘들어. 도리어 내가 항상 넘어가는걸. ”

“ 어제 주사 맞았어? ”

“ 아니. 주사 맞을 만큼 아프지 않았어. ”

 

그럼 왜 아빠가 병원에 그렇게 오래 있어야 했느냐고 물어보려 했지만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미샤는 현관문에 달린 작은 거울로 바깥을 확인하더니 문을 열어 주었다.

 

눈에 띄게 예쁜 여자가 들어왔다. 이미 4월이었지만 은회색 모피 목도리를 두르고 화려한 빨간색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입술도 꽃잎처럼 빨갛게 칠하고 있었다. 짙은 밤색 머리칼은 반짝거리는 구슬이 박힌 핀으로 틀어 올리고 있었다. 새파란 눈이 꼭 고양이 같았다.

 

물론 난 그 여자를 금방 알아봤다. 직접 만나본 적은 없었지만 화려한 옷차림과 짙은 화장 때문인지 무대 위에서 볼 때와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에벨리나 크리셴스카야였다. 볼쇼이 발레리나였다. 엄마는 극장 쪽 친구들과 얘기할 때 크리셴스카야를 실력보다는 외모로 뜬 여자라면서 어찌어찌 제1 솔리스트는 됐지만 프리마 발레리나가 되려면 더 노력해야 할 거라고 헐뜯은 적이 있었다. 아빠는 같이 일하는 무용수들에 대해서는 절대로 그런 혹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몇 년 전에는 그녀를 위해 짧은 춤을 고안해 무대에 올려준 적도 있었다. 난 미샤가 크리셴스카야와 춘 백조의 호수를 한 달 전에 봤다. 그녀는 화려한 외모 때문인지 오데트보다는 오딜에 훨씬 잘 어울렸다. 하긴 그때도 내 관심은 온통 미샤에게 쏠려 있긴 했지만.

 

“ 안녕하세요, 에벨리나 드미트리예브나. ”

 

미샤는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는 훨씬 나이가 많은 우리 아빠나 마르가리타 아줌마에게도 편하게 말을 놓곤 했기 때문에 크리셴스카야에게 그렇게 깍듯하게 대하는 게 낯설었다.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닌 것 같았다. 하긴 그녀는 미샤보다 나이도 몇 살 많았고 볼쇼이에서는 훨씬 선배니까 무용수들 사이에서는 그래야 할지도 몰랐다. 비록 미샤는 수석무용수였고 크리셴스카야는 아니었지만. 극장에서는 그런 것보다도 선후배 사이의 예의를 많이 따진다고 들었다. 미샤가 목도리와 코트를 받아 주려고 했지만 크리셴스카야는 고개를 저었다.

 

“ 됐어, 금방 나갈 거야. 수요일 로미오 그대로 가는 거야? ”

“ 바뀔 이유가 없잖아요. ”

“ 줄리엣 내가 추기로 했어. 마리야가 무릎 때문에 빠졌어. 너도 솔직하게 말해, 안 될 것 같으면 빠져. 그럼 이고리와 맞춰볼 테니까. ”

“ 왜 제가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하시죠? 키로프에서도 로미오는 많이 췄는데. 저랑 다른 건 같이 춰 보셨잖아요. ”

“ 네가 별로라는 게 아냐. 너처럼 잘 나가는 애랑 호흡 안 맞는다고 얘기했다간 극장에서 쫓겨나라고. 내가 미쳤어, 그런 얘기 하게? ”

 

크리셴스카야는 휘파람을 불었고 잠깐 미샤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 뭐 멀쩡한 것 같네. 그래도 불안해. 테라스 파 드 두도 그렇고 피날레도 그렇다고. 머리 위로 들어 올려야 하잖아. ”

“ 어깨 부상은 작년에 다 나았는걸요. ”

“ 진짜 연기도 잘한다니까. 그 얘기 아닌 거 알잖아. ”

 

그녀는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와 미샤의 왼쪽 팔을 잡아당겼다. 소매 위로 손목 부근을 가볍게 톡톡 건드렸다. 미샤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팔을 뒤로 빼냈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 누구한테 들었어요? ”

“ 지금 스탄카가 얘기했을까봐 배신감 느끼는 거야? 그 사람이야 절대 말 안하지. 정말 스탄카가 거기 와서 널 데려간 줄 알았어? 말이 안 되잖아. 그 사람이 거기가 어딘 줄 알고 찾아왔겠어. ”

“ 그럼... ”

 

난 미샤가 그렇게 창백해지는 걸 처음 봤다. 무대 조명을 그대로 얼굴에 받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시 보니 비가 그쳐서 창문 너머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인 것 같았다. 크리셴스카야는 낮게 웃었다. 연극배우처럼 멋지고 과장된 웃음이었다. 그 여자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게 없었지만 미샤와는 사이가 나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빨리 나가줬으면 싶었다. 우리 아빠 이름을 자꾸 말하는 것도 싫었다.

 

“ 왜, 게르만 알렉세예비치였을까봐? 그랬으면 네가 지금 여기 와 있겠어? 그 사람이 발견했으면 공연이고 뭐고 곧장 클리닉에 처박았겠지. 아예 어제 베를린에 데려갔을지 누가 알아. 그거 내 차였어. 문도 잠가 놨었는데 어떻게 땄는지 모르겠네. 게르만이 선물해 준 차였는데... 일부러 거기서 그런 거야? ”

“ 몰랐어요. 미안해요. ”

“ 됐어, 시트만 바꾸면 되니까. ”

“ 스탄카 말고 누구에게 또 얘기했어요? ”

“ 그게 그렇게 중요해? 감독이 알면 자르기라도 할까봐? 키로프에서 뺏아오려고 별의별 짓을 다 했는데 기껏 그런 바보짓 했다고 널 자르겠어? 그러다 자기가 잘리겠지.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어. 뭐 좋은 일이라고. ”

“ 미안해요, 에벨리나 드미트리예브나. 불편하게 만들어서. ”

“ 불편하게? 그런 짓을 해놓고 기껏 한다는 말이 그거 밖에 없어? 하긴 피곤하긴 했지. 집에 가고 싶었는데... 나한테 미안해 할 건 없어, 그런 꼴 전에 안 본 것도 아니고. 너도 어차피 맨 정신도 아니었을 테니까. 그렇게 술 못 마시는 줄은 몰랐어. 게르만에게서 듣긴 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지. 그거 한 잔 먹이니까 그냥 가버리던데. ”

“ 저, 제가 선배님에게 실수라도 했어요? 그러니까, 그 집에서... ”

 

크리셴스카야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미샤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정말 고양이 같은 눈초리였다. 난 그 여자가 미샤를 할퀴거나 한 대 때릴 것 같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에 쟁반을 꼭 쥐고 여차하면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숨을 쉬었고 훨씬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 너 어디까지 기억나? ”

“ 뭐가요? ”

“ 그거 마시고 나서. ”

 

미샤는 갑자기 생각난 듯 내 쪽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 나중에 얘기해요, 에벨리나. ”

“ 쟤 누구야? ”

“ 라라요. ”

“ 아, 스탄카 딸이구나. 닮았네. ”

 

크리셴스카야는 내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목소리를 약간 낮추었을 뿐이었지만 귓가에는 그대로 다 들렸다.

 

“ 크라베츠는 기억나? ”

“ 모르겠어요, 취해서. 그 자리에 같이 계셨던 거예요? ”

연기인지 진짜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니까. 마음대로 해. 기억 안 나는 편이 더 좋으면 그렇게 해 둬. 나도 그 쪽이 더 좋아. 그래야 수요일 무대도 더 편해. 내일 아침부터 맞춰보면 되겠지. 열 시까지 나올 수 있어? ”

“ 네. ”

“ 보르쉬 먹어, 철분이 많으니까. 너 나한테 빚졌어. 혈액형 같아서. ”

“ 고마워요. ”

“ 정말 고맙기는 해? 원망하는 건 아니고? 난 후회하는데. 그냥 놔뒀으면 좋았을걸. ”

 

크리셴스카야는 고개를 돌려 거실 쪽을 힐끗 훑어보았다. 날 본 건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내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집 좋다더니 정말이네. 나한테는 차 밖에 안 줬는데. 금방 인민예술가 만들어주겠어. 그 사람 여기로 와? ”

“ 전 스탄카 집에서 자요. 극장에서 가까워서. ”

“ 반항은 적당히 해둬. 게르만은 성깔 부리는 애 좋아하긴 하지만 수틀리면 그저께보다 더 끔찍하게 굴 테니까. 아, 하긴 넌 기억 안 난다고 했지. 그냥 곱게 여기 머물러 있어. 주는 대로 받고 말도 잘 듣고. 공연히 다른 사람 집에 드나들지 마. 그 사람은 화나면 무슨 짓 할지 모르니까. ”

 

미샤는 잠시 조용히 있다가 현관으로 나가서 문을 열면서 혼잣말처럼 가만히 물었다.

 

“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에벨리나 드미트리예브나? ”

“ 뭐가? ”

“ 그 사람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

“ 진짜 웃긴다니까.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양보라도 해 주려고? 그 사람이 그런 거 신경이나 쓸 것 같아? 전부 자기 뜻대로 하는데. ”

“ 그자는 도살자예요. 더러운 인간이라고요. ”

“ 말 좀 가려서 하시지. 여기 도청될 걸. 이렇게 좋은 아파트를 안겨주고 도청 마이크 하나 안 달아놨을 줄 알았어? 또 얼마나 혼이 나고 싶어서. 뉴욕에서 말 안 들었다고 그렇게 벌 받아 놓고서. ”

“ 전 기억 안 나요. ”

“ 그래, 그렇게 우겨. ”

 

크리셴스카야는 모피 목도리를 여미고 복도로 나가다가 생각난 듯 핸드백에서 조그만 상자를 꺼냈다.

 

“ 이거 네 거지? 차에서 나왔어. ”

“ 제 거 아니에요. ”

“ 아니긴. 게르만이 주는 거 봤는데. ”

 

그녀는 미샤에게 상자를 쥐어준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미샤는 문을 닫은 후 현관 구석에 상자를 내팽개쳤다. 그리고는 욕실로 들어가서 문도 닫지 않고 세면대 수도꼭지 아래 머리를 들이밀더니 물을 틀었다.

 

“ 미셴카, 뭐해? ”

“ 세수해. ”

“ 세수하면서 머리도 감아? ”

“ 응. ”

 

난 미샤가 부러웠다. 나도 남자였다면 세수하면서 머리를 감을 수 있을 테고 엄마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될 텐데.

 

미샤가 욕실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머리에 물을 맞고 있었기 때문에 난 안으로 들어가서 수도꼭지를 잠갔다. 물이 얼음장처럼 찼기 때문에 깜짝 놀랐다.

 

“ 엄마가 찬물로 머리 감으면 폐렴 걸린댔어. ”

“ 어른은 안 그래. ”

“ 미셴카는 어른이 아니잖아. ”

“ 난 어른인데. ”

“ 어른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

“ 왜? ”

 

난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야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 많이 기다릴 필요가 없지’ 라고 말해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가 어른이었다면 크리셴스카야가 그렇게 날 무시하지도 않았을 거고 그렇게 쌀쌀맞은 태도로 미샤를 야단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미샤가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나왔을 때 난 두 팔로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매달렸다. 이제껏 내가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미샤는 놀란 것 같았지만 뿌리치지는 않았다. 아냐에게 그랬던 것처럼 몸을 굽혀 안아 주었다.

 

“ 라루츠카, 우는 거야? ”

 

그 말을 듣자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정말 그전까지는 울고 있지 않았는데. 몸이 떨리면서 심하게 울음이 나왔다. 미샤는 날 좀 더 꼭 안아 주면서 머리를 쓸어 주었다. 그는 이전에는 단 한 번도 내 머리를 쓸어준 적이 없었다. 그건 아냐 같은 어린애한테만 하던 거였는데. 하지만 전혀 화나지 않았다. 난 미샤에게 더욱 찰싹 달라붙어서 서럽게 울었다. 미샤는 한동안 가만히 날 안고 있다가 내가 좀 진정되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 라라, 에벨리나 때문에 놀라서 그래? ”

“ 그 여잔 왜 그래? 왜 미셴카한테 그렇게 무섭게 해? ”

“ 그냥 얘기만 한 거야. 에벨리나는 목소리가 커서 그래. ”

“ 아니야, 화냈어. 미워했어. 무서운 눈으로 쳐다봤어. ”

그렇지 않아. 좋은 사람이야. 그냥 내가 걱정이 돼서 그랬던 거야. ”

“ 왜? ”

“ 어... 내가 술 못 마시는데 마셔서... ”

“ 그 언니는 잘 마셔? ”

“ 그런가봐. ”

“ 그것 봐, 나쁜 여자야. 엄마가 그랬어, 술 많이 마시는 여잔 나쁘다고. ”

“ 술 많이 마시는 여자가 나쁘면 많이 마시는 남자도 나쁜 거야. ”

“ 왜 미셴카가 술 마셨다고 그 여자가 화내? ”

“ 음.... 수요일에 로미오와 줄리엣 같이 춰야 하는데 내가 아플까봐. 그럼 무대를 망치잖아. ”

“ 술 마셔서 아팠던 거였어? 그래서 우리 아빠가 병원 갔던 거야? ”

“ 응. ”

“ 다시는 술 마시지 마. ”

“ 알았어. ”

“ 그 여자랑 로미오와 줄리엣 안 췄으면 좋겠어. 마리야 언니랑 춰. ”

“ 마리야는 무릎 다쳐서 못 나온대. 에벨리나도 잘 추는데. ”

“ 여기 다시는 못 오게 해. ”

“ 라라가 싫다면 그렇게 할게. ”

 

미샤는 찬물로 머리를 감았는데도 무척 따뜻했다. 큰 라디에이터나 사모바르를 안고 있는 것 같았다. 운 게 창피해서 여전히 미샤의 품에 얼굴을 처박은 채 가만히 서 있다가 문득 궁금해진 게 있어서 불쑥 물었다.

 

“ 근데 도살자가 무슨 뜻이야? ”

“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어? ”

“ 아까 미셴카가 그랬잖아. 그 여자랑 얘기하다가. ”

“ 어... 미안해. 그냥 못 들은 걸로 해줘. ”

“ 왜? 그럼 엄마한테 물어볼 거야. 오빠가 그랬잖아, 못 하게 하면 더 하고 싶은 거라고. ”

“ 별로 좋은 말이 아니라서 그래. ”

“ 뭔데? ”

“ 살인자란 뜻이야. ”

“ 우와, 그런 악당을 알아? 그런 건 영화에 나오는 거잖아. ”

“ 맞아. 영화랑 발레에 나오는 거야. 로미오와 줄리엣에도 나오고... 그래서 그 얘기한 거야, 공연 때문에. 근데 나쁜 말이니까 라라는 쓰지 마. ”

“ 응. ”

 

궁금증도 풀렸고 눈물도 다 말랐기 때문에 난 미샤의 팔에서 빠져나와 오렌지를 가져왔다. 껍질을 벗겨서 반을 쪼개어 주자 미샤도 오렌지를 먹었다. 하지만 케익은 여전히 먹지 않았다. 주머니에 있던 장식 달걀을 꺼내주자 미샤는 예뻐서 먹기가 아깝다면서 꽃병 옆에 있던 조그만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만든 계란을 예쁘다고 해줘서 기분이 좋았다.

 

“ 그때 만들어준 이콘 계란 깨져버렸어. 아냐가 밟아서 부서졌어. ”

“ 원래 내가 많이 부쉈던 거라 그럴 거야. ”

“ 속상해, 정말 예뻤는데. ”

“ 다음에 또 만들어 줄게. ”

“ 그건 부활절에만 만드는 거야. ”

“ 그럼 내년 부활절에 만들어 주면 되지. ”

“ 내년에도 여기 있을 거야? 레닌그라드 안 돌아가고? ”

“ 글쎄. 그건 아직 모르겠어. ”

“ 모스크바에 계속 살아, 응? ”

 

미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난 마음을 바꿨다.

 

“ 미셴카가 레닌그라드로 돌아가면 나도 따라가야지. ”

“ 전에도 이사 온다 했다가 엄마한테 야단맞았다면서. ”

“ 아빠랑 갈 거야. ”

“ 라라는 엄마보다 아빠를 더 좋아하는구나. ”

“ 딸은 원래 그런 거랬어. 그래서 엄마가 아들 없다고 섭섭하댔어. 오빤 아빠보다 엄마가 더 좋았어? ”

“ 우리 아빠는 내가 어릴 때 돌아가셨어. ”

“ 병 걸리셨던 거야? ”

“ 잘 몰라. 어릴 때라서. 아무도 안 가르쳐줬어. ”

“ 많이 슬펐어? ”

“ 응. 나중에 알게 돼서 많이 슬펐어. ”

“ 신부님이 그러는데 사람은 죽고 나면 다시 살아난댔어. 예수님이 그렇게 해준대. 우리는 부활절 계란도 만들었고 쿨리치도 먹었으니까 분명히 그럴 거야. 그럼 나중에 미셴카도 아빠랑 만날 수 있을 거야. ”

“ 우리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난 아냐처럼 어렸는데. 아빠가 지금 보면 날 알아볼 수 있을까? ”

미셴카가 늙은이가 되어도 알아볼 수 있을 거야. 아빠들은 다 그런댔어. ”

“ 누가 그래? 신부님이? ”

“ 아니, 우리 아빠가. ”

“ 아, 스탄카가 한 말이면 믿을 수 있겠네. ”

“ 우리 아빠 말은 다 믿어? ”

“ 응. 스탄카 말은 웬만하면 다 맞아. ”

 

난 미샤가 아빠 칭찬을 해서 기분이 좋아졌다. 오렌지 껍질을 휴지통에 버리러 갔다가 현관 구석에 나뒹굴고 있는 상자를 발견하고 가져왔다. 미샤는 부엌으로 가서 남은 보르쉬를 뚜껑 달린 그릇에 붓고 있었다. 수첩을 뜯어서 ‘꼭 먹을 것’이라고 써 붙여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샤가 돌아오면 허락을 받고 열어보려 했지만 그 상자는 무척 예뻐서 나도 모르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조그만 구슬이 한 줄로 박혀 있는 자작나무 상자였는데 테두리는 금색과 은색으로 되어 있었다. 나비 모양의 잠금쇠도 달려 있었다. 잠금쇠를 비틀자 뚜껑이 저절로 열렸다. 깜짝 놀라서 도로 닫으려고 했지만 안을 보자 탄성이 나왔다.

 

“ 우와! ”

 

태어나서 그렇게 예쁜 물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미샤가 둘렀던 구슬 달린 팔찌도, 백조의 호수에서 오데트가 머리에 썼던 왕관도 그 정도로 찬란하고 화려하지는 않았다. 부활절 달걀이었다. 하지만 진짜 달걀은 아니었다. 매끄러운 도자기와 황금빛 금속으로 만들어진 장식품이었다. 휘황하게 반짝이는 녹색 구슬과 파란색 구슬들이 가느다란 황금색 그물 무늬를 따라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달걀 가운데에는 상자와 마찬가지로 아주 조그맣고 우아한 나비 모양 잠금쇠가 달려 있었고 옆으로 비틀자 부드럽게 열렸다. 속은 텅 비어 있었지만 붉은색 벨벳 안감이 들어가 있었다. 난 그렇게도 반짝반짝 빛나는 구슬을 본 적이 없었다. 진짜 보석처럼 밝고 찬란했다.

 

“ 미셴카, 이것 좀 봐! 부활절 계란이야. 너무 예뻐! ”

 

거실로 돌아온 미샤는 내가 치켜든 보석 달걀을 힐끗 쳐다봤지만 만져 보지는 않았다.

 

“ 꼭 진짜 보석 같아. 램프에 비추니까 더 반짝반짝 빛나. 세상에서 제일 예쁜 부활절 계란이야! ”

“ 그럼 가져갈래? ”

“ 나 빌려주는 거야? ”

“ 아니, 가져. 난 그런 달걀 별로 안 좋아해. 라라가 만든 게 더 좋아. ”

“ 정말? 가져도 돼? ”

 

난 기뻐서 펄쩍 뛰었다. 한참동안 계란을 만지작거리다가 구슬이 하나라도 빠질까봐 걱정이 돼서 상자 속에 도로 곱게 집어넣었다. 하지만 뚜껑을 닫지는 않았다. 무릎에 상자를 올려놓고 계속 달걀을 구경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자 미샤와 눈이 마주쳤다. 미샤는 내가 준 장식 계란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굴리면서 날 바라보더니 살짝 웃었다. 그 날 처음으로 웃는 거였다. 미샤가 웃자 해가 져서 어두컴컴해진 거실 전체에 전등을 켠 것 같았다.

 

그 때 또 초인종이 울렸다. 그 무서운 여자가 다시 왔나 싶어서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다행히 그건 아빠였다. 발레 공연이 없는 날이어서 그랬는지 일찍 끝난 모양이었다. 미샤가 괜찮은지 보러 온 것 같았다.

 

아빠는 날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여기 어떻게 왔느냐고 몇 번이나 물었다.

 

“ 버스 타고. ”

“ 너 혼자서 버스 타고 왔단 말이야? 길은 어떻게 찾았어? ”

“ 나 길 잘 찾아. 빵집 간판 외워놨어. ”

“ 엄마한테 얘기하고 온 거야? ”

“ ... 응. ”

“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 ”

“ 잘못했어. 나쟈네 집에서 논다고 했어. ”

오고 싶었으면 아빠한테 얘길 했어야지. 그럼 아빠가 데리고 왔을 텐데. ”

“ 아니야, 아빤 안 데려왔을 거야. 병원에도 못 오게 했잖아. ”

 

아빠는 날 꾸짖으려고 했지만 미샤가 감싸주었다.

 

“ 그렇게 야단치지 마. 나 때문이니까. ”

“ 너한테 온 게 잘못이란 게 아냐. 말 안 하고 혼자서 버스 탄 게 문제지. 위험하잖아. ”

“ 라라는 어린애가 아냐. 다 컸는걸. 버스쯤은 아무 것도 아니야. ”

“ 모스크바는 레닌그라드가 아냐. 훨씬 복잡하고 위험해. 길도 더 넓고. 너 어렸을 때와는 다르다고. ”

“ 난 버스 안 탔는데. 걸어 다녔어. 사람도 너무 많고 떠밀리면 다리 다칠까봐. ”

“ 하긴. 나도 웬만하면 걸어 다녔지. 축구도 안 했고. ”

 

아빠가 옛날에 발레학교 다니던 추억을 떠올려서 천만다행이었다. 날 야단치려던 마음이 누그러졌기 때문이다. 아빠는 미샤의 커다란 티셔츠를 입고 스카프를 두른 날 보고 웃더니 옷이 말랐으면 갈아입으라고 했다. 라디에이터로 달려갔더니 옷은 이미 다 말라 있었다. 아직 안 말랐다고 해볼까 하다가 아빠가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했던 게 떠올라서 솔직하게 부탁했다.

 

“ 미셴카, 나 이거 입고 가면 안 돼? ”

“ 입고 가. 근데 추울 텐데. 위에 걸칠 거 있는지 찾아볼게. ”

“ 괜찮아, 그냥 바지만 입어. 차 가져왔으니까. 양말도 신어야지. ”

 

아빠가 바지와 양말을 건네주며 내 스웨터와 점퍼를 뭉쳐서 옆구리에 꼈다. 그리고는 미샤 쪽을 보면서 엄하게 말했다.

 

“ 너도 겉옷 입어. 비 와서 추워졌으니까 두꺼운 거 입어. ”

“ 왜? 집은 따뜻한데. 난방 때문에 더워. ”

“ 우리랑 같이 나갈 거니까. 여기 혼자 있지 마. ”

“ 그런 식으로 말하면 혼자 있고 싶어지는 법이야. ”

“ 아니, 넌 혼자 있으면 안 돼. 옷 입어. 지금. ”

“ 명령하는 거야? 나한테? ”

 

난 미샤가 우리 아빠에게 그런 목소리로 말하는 걸 처음 들었다. 두 눈이 너무 새까매져서 커튼을 친 것 같았다. 미샤가 화낼까봐 무서워서 여차하면 또 울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빠가 부드럽게 말했다.

 

“ 아니. 부탁하는 거야. 넌 명령 같은 건 안 듣잖아. 누구 명령도. ”

 

미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옷장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고 잠시 후 짧은 재킷을 걸치고 나왔다. 아빠가 모자와 스카프도 챙기라고 하자 순순히 따랐다.

 

아파트를 나가기 전에 미샤는 부엌으로 갔다. 보르쉬가 담긴 그릇을 내가 가져왔던 보자기로 싸더니 보온병과 함께 가지고 나왔다. 그렇게 예쁜 옷을 입고 근사한 스카프를 두르고서 보자기로 싼 그릇을 들고 있는 미샤의 모습이 좀 우스웠지만 수프를 다 먹겠다는 약속을 지킬 것 같아 뿌듯했다.

 

 

*   *   *

 

 

아빠는 날 먼저 데려다줘야 했다. 난 제발 엄마에게 얘기하지 말라고 애원했다. 아빠는 어차피 아파트 앞에 내려주고 갈 거니까 엄마랑 마주칠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내가 혼날까봐 걱정되기보다는 가뜩이나 미샤를 싫어하는 엄마와 부딪치고 싶지 않은 것 같았지만 어쨌든 내겐 다행이었다.

 

미샤는 날 데려다주고 나서 극장에 내려달라고 했지만 아빠는 거절했다.

 

“ 수요일 거 에벨리나로 바뀌어서 연습해봐야 해. ”

“ 내일 열 시에 맞춰보기로 했잖아. ”

“ 어떻게 알았어? ”

“ 내가 연습실 사용 시간 바꿔달라고 콜랴한테 얘기했으니까. ”

“ 같이 맞춰보는 거 말고... 어제랑 오늘 계속 연습을 안 했어... ”

“ 극장에 안 간 것뿐이지 집에서는 계속 연습했잖아. 내가 널 몰라? 어제 병원 복도에서도... ”

“ 그건 다르잖아. ”

“ 어쨌든 오늘은 안 돼. 쉬어야 하니까. ”

“ 오늘도 하루 종일 쉬었어. ”

“ 오늘 먹은 거 말해봐. ”

“ 보르쉬. 쿨리치. 오렌지... ”

“ 쿨리치는 안 먹었잖아. 보르쉬도 두세 숟갈 먹다 말았겠지. ”

 

거울에 미샤의 놀란 얼굴이 비쳤다. 눈이 두 배로 커지고 공처럼 동그래져 있었다. 아빠가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 아무리 봐도 지나와 비슷하다니까. 내 주위 사람들은 왜 다 그렇지. ”

“ 그렇다는 게 무슨 뜻인데? ”

“ 감시꾼처럼. 쉬어라 먹어라 자라... ”

“ 필요할 때 쉬고 먹고 잔다면 그런 말 들을 이유가 없겠지. ”

“ 보르쉬는 다 먹을 거야. 라라가 가져다 줬고 맛있으니까. ”

“ 그래. 집에 가자마자 먹어. ”

“ 정말 극장에 안 내려줄 거야? 조금만 연습하고 가면 되잖아. 못 믿겠으면 같이 가든가. 옆에서 감시하면 되겠네. ”

“ 아니, 난 너 믿어. 네 말은 항상 믿어. ”

 

아빠는 핸들을 옆으로 돌려 강변도로로 접어들면서 조용히 말했다.

 

“ 그냥 오늘은 네가 쉬었으면 좋겠다는 것뿐이야. 우리 집에서. ”

 

미샤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난 안 믿는데. 한 번도 믿어본 적 없어. 나도, 내 춤도. ”

“ 그래. 그래서 그렇게 출 수 있는 걸지도 몰라. ”

 

난 아빠와 미샤가 춤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을 때쯤 걷잡을 수 없이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손발이 풀려 와서 잠시 꾸벅꾸벅 졸았다. 그 와중에 꿈까지 꾼 것 같았다. 그 못된 고양이처럼 생긴 크리셴스카야가 나타나 보르쉬와 쿨리치를 내놓으라고 날 다그치는 거였다. 안 그러면 목을 치겠다고 협박했다. 붉은 여왕처럼... 소리를 지르려고 했는데 그때 차가 다시 커브를 틀면서 어딘가에 부딪쳐 좀 덜컹거렸기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뒤에서 미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모스크바는 정말 빙글빙글 돈다니까. 가도 가도 끝이 없어. 강에 뛰어들어 헤엄쳐가고 싶어. ”

“ 하긴 레닌그라드는 쭉 뻗은 길이 많지. 동네가 작아서 그렇지. ”

“ 여긴 너무 넓어. 복잡하고 지나치게 크고. 회색이고. 극장까지 걸어가지도 못하고. ”

“ 미안해, 미셰츠카. ”

“ 뭐가? ”

“ 볼쇼이로 데려와서. ”

“ 왜? 계약서에 사인한 건 난데. 내가 오고 싶어서 온 거야. ”

“ 그자들이 그런 식으로 널 부를 줄 알았다면 모스크바로 오라고 하지 않았을 거야. 절대로. ”

 

그때 아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기 때문에 난 살짝 눈을 떴다. 하지만 차 안이 어두워서 그런지 아빠의 옆얼굴 밖에 보이지 않았다.

 

미샤가 나직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 그건 레닌그라드에서도 마찬가지였어. 그냥 그런 거라고. 일이잖아. ”

“ 아니, 그건 일이 아니야. 내가 잘못 말했던 거야. ”

“ 그래도 달라질 건 없어. 그러니까 이 얘긴 하지 말자. 안 그러면 정말 강에 뛰어들어서 헤엄쳐 갈 거야. ”

“ 여기 크레믈린 앞인 거 몰라? 뛰어들자마자 경비정에서 그물로 낚아 올릴 걸. ”

“ 그래서 모스크바는 별로라니까. ”

 

난 다시 꾸벅꾸벅 졸다가 아빠 말에 창밖을 힐끗 쳐다보았다. 크레믈린과 바실리 사원이 강 너머로 어른거리고 있었다. 우리 아빠는 크레믈린에서 열린 축제에 작품을 두 번이나 올렸다. 아빤 정말 대단했다. 미샤도 몇 번이나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아빠는 작품을 만드는 것보다 직접 춤을 추는 쪽이 더 훌륭하다고 했다. 아빠도 미샤처럼 출 수 있었다면 춤을 그만 두지 않았을 거라고 말했다. 미샤가 작년에 크레믈린 축제 개막식에서 춤을 췄을 때 브레즈네프 서기장이 직접 꽃을 줬다. 다른 높은 사람들도 가까이 와서 칭찬을 했다. 그때 난 아빠 손을 잡고 무대에서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미샤에게는 다가갈 엄두도 못 냈다. 크레믈린보다는 극장이 훨씬 좋았다.

 

아빠가 부드럽게 말했다.

 

“ 수요일에 로미오 추고 나면 따로 같이 맞춰볼 거 있어. ”

“ 뭔데? 스파르타쿠스? ”

“ 아니. 그건 나랑 맞춰볼 필요 없지. 어차피 잘 출 테니까. ”

“ 그럼 뭐? 내가 못 출 것 같은 역이 뭔데? ”

“ 흥분하지 마. 우리 레퍼토리 중에 네가 못 출 역은 없으니까. ”

“ 노비코프도 안 주던데, 투우사. ”

“ 줄 거야, 시간 좀 지나면. 지금은 좀 참아. 벌써 웬만한 건 다 췄잖아, 넉 달도 안 됐는데. 지금 투우사까지 추면 우리 애들도 폭발할 걸. 정말 모스크바 강에 집어던질지도 몰라. ”

“ 놀랍지도 않아. 신입일 때 정말 그랬거든. 강은 아니고 저수지였지만. ”

“ 페름에서? ”

“ 어떻게 알아? ”

“ 지나에게서 들었어. 세레브랴코프가 그랬다면서. ”

“ 그랬지. 그때도 지나가 펄펄 뛰었어, 왜 두들겨 패주지 않았느냐고. ”

“ 왜 안 그랬어? 그땐 지금보다 훨씬 어렸잖아. 피가 거꾸로 솟았을 텐데. ”

“ 열 받긴 했는데 패줄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 ”

“ 왜, 물이 깊어서? 수영 잘하면서. ”

“ 물이 너무 더러워서 숨을 쉴 수가 없었어. 바닥도 진흙 뻘이라 한 번 빠지니까 나올 수도 없었고. 그래서 화낼 타이밍을 놓쳤어. ”

“ 하긴 저수지니까 더럽긴 했겠다. ”

 

아빠는 다시 한 번 핸들을 꺾었다. 이제 우리 동네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 새 거 시작했어. 6월에 올리려고. 아까 노비코프하고도 잠깐 얘기했어. 긍정적이더라고. ”

“ 나보다 노비코프와 먼저 얘기했단 말이야? ”

“ 어젯밤에 구상했으니까 그렇지. 안무도 이제 짜야 돼. ”

“ 음악은? ”

“ 프로코피예프. 피아노협주곡. 2번. ”

“ 네 취향 아니잖아, 프로코피예프는. 그것도 2번? ”

“ 난 그렇지만 너한테는 잘 맞잖아. ”

“ 아... ”

“ 새로운 거야. 백야하고는 달라. ”

“ 조금 페트루슈카 같은 거야? ”

“ 아니. 그럼 새로운 게 아니잖아. 그건 작년에 벌써 췄는데. 잘 췄지. ”

“ 그것도 네 취향 아니었지. 나한테 맞춰준 거였는데. ”

“ 맞춰준 게 아니야. 그렇게 하고 싶었던 거야. ”

“ 왜? ”

“ 너니까. 네가 그렇게 추는 걸 보고 싶었으니까. 그걸 출 수 있는 건 너 밖에 없었으니까. 그 프로코피예프도 마찬가지야. 완전히 새로운 동작들을 만들 거야. 나 혼자서는 어려워. 그러니까 도와줘. 페트루슈카 때처럼. 재미있을 거야. ”

 

미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문 쪽으로 몸을 틀었지만 거울에 옆얼굴이 비쳤다. 나는 불빛이 일렁이는 모스크바 강을 내다보고 있는 미샤의 눈가에 반짝이는 물기가 고여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미샤가 완전히 고개를 돌렸기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빠가 내 손을 살짝 토닥였다.

 

“ 라라, 겉옷 입어. 거의 다 왔잖아. ”

 

그래서 난 바로 앉아서 점퍼를 대충 걸쳤다. 미샤의 티셔츠만 입고 들어가면 엄마가 분명히 꼬치꼬치 캐물을 테니까. 그때 뒤에서 미샤가 낮게 노래하듯 말했다.

 

“ 강에 비친 불빛 좀 봐, 라루츠카. 보석 같아. ”

 

그래서 나도 고개를 돌려 창 너머로 바깥을 바라보았다. 이미 멀어져 가는 바실리 사원의 알록달록한 지붕으로부터 모스크바 강의 검은 물 위로 환하고 예쁜 불빛들이 비춰져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자주 보던 풍경이었지만 미샤가 그렇게 말하자 정말 보석처럼 보였다.

 

“ 예쁘다. 레닌그라드 생각 나. 거기도 밤에 이랬는데. ”

“ 한밤중에 네바 강을 따라 걸으면 좋아. 강변을 걷다가 다리를 건너면 운하가 나와. ”

“ 그리보예도프 운하! 판탄카! 우리 같이 보트 탔어! 근데 갑자기 비 와서 머리가 다 젖었어. ”

“ 여름에는 안 그래. 비가 와도 금방 그치고 언제든 어디에든 빛이 있어. 한밤중에도 환해. 해가 없어도. 네바 강 위로 교회 종탑들이 길게 내려와, 천사상들도 반짝반짝 빛나. 백야가 되면 사방에서 보석들이 흩뿌려지는 것 같아. ”

“ 밝아도 보석이 잘 보여? ”

“ 가끔은. 아주 밝아야 빛을 볼 수 있어. ”

 

난 미샤의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웠지만 그때 아빠가 차를 돌려 우리 집이 있는 골목 쪽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내릴 준비를 했다. 그리고 미샤의 눈가에 비쳤던 물방울은 모스크바 강물의 보석들이 반사된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어쨌든 미샤는 어른이고 남자인데다 왕자님이었으니까. 왕자님은 나나 아냐처럼 울지 않을 게 분명했다. 아파도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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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5장에서 끝난다. 그건 내일..

 

일린과 미샤가 언급하는 '백야'와 '페트루슈카'는 둘다 일린이 미샤를 위해 안무해준 작품이다. 전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단편 '백야'를 원작으로 주인공 청년과 나스첸카를 내세운 모던 발레로 일린은 76년에 키로프에 가서 게스트 안무가로 그 작품을 무대에 올린다.

 

페트루슈카는 미하일 포킨의 원작 발레를 바탕으로 일린이 광대 페트루슈카의 비극적인 운명을 재구성한 10분짜리 모놀로그 발레이다. 일린은 76년에 미샤가 런던의 유력한 무용 페스티벌 경쟁 부문에 나가게 되자 그를 위해 그 작품을 안무했고 호평과 함께 미샤는 좋은 상을 받는다. 물론 저 두개의 발레 모두 실재하지 않는다. 내가 만들었음. 저 두 작품에 대한 얘기도 트로이가 심리적 화자로 등장하는 그 장편에 나온다.

 

에벨리나와 미샤의 대화에서 언급되는 게르만 알렉세예비치 스비제르스키는 다른 글들에서 꾸준히 등장하는 인물이다. KGB 출신이며 막강한 당 권력자로 소설들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미샤에게는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인물이다. 따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에벨리나는 오랫동안 스비제르스키의 정부였다.

 

미샤가 자기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드문 일인데, 사실 이 사람이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긴 하다. 이 사람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한번 발췌해 보겠다.

 

좀 우울한 파트였기 때문에... 라라가 얘기하는 미하일 브루벨의 백조 공주 이미지로 기분 전환. 전에 두어번 올린 적 있지만..

 

 

 

라라는 미샤가 백조 공주를 닮았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맨처음 이 사람을 구상할 때 브루벨 그림에서 이미지를 좀 따오긴 했다. 그래서 그의 레닌그라드 친구 트로이는 맨 처음 10대의 미샤를 만났을 때 그가 그림에서 나온 것 같다고 생각하고 나중에는 브루벨 그림을 떠올린다. 이 사람이야 사내아이니까 백조 공주보다는 유명한 브루벨의 악마와 더 닮았다고 해줘야겠지만.. 사실은 라라 말대로 백조 공주와 더 닮았을 거라고 비밀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미하일 브루벨, 앉아 있는 악마

 

 

미하일 브루벨, 날아가는 악마

 

라라가 미샤의 침실에서 발견하는 스케치는 이 그림의 스케치이다. 물론 가상의 스케치임.. 이 날아가는 악마 그림은 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미술관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그림 중 하나이다. 정말로 아름답다. 개인적으로 트레치야코프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 백조 공주였다면 러시아 미술관에서는 이 그림과 금발의 가브리엘 이콘, 그리고 레프 박스트의 SUPPER였다.

 

.. 그리고 라라가 가져가는 수프 보르쉬. 내가 끓였던 보르쉬 사진 두 장. 전에 쓴 적 있지만 스뵤클라(비트), 양배추, 쇠고기 등을 넣어 만드는 우크라이나 수프이다. 철분이 많아 빈혈에도 좋다. 아플 때 먹으면 몸이 따뜻해진다.

 

 

 

** 보석을 흩뿌려놓은 듯 찬란하게 빛나는 네바 강 사진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3401

 

:
Posted by liontamer
2013. 1. 22. 15:46

미하일 브루벨의 악마들과 백조 공주 arts2013. 1. 22. 15:46

 

앉아 있는 악마, 미하일 브루벨

 전에 브루벨의 악마 그림 두어점과 백조 공주 그림을 올린 적이 있긴 하지만, 이번에 쓴 글에 잠깐 소재로 등장하기 때문에 다른 그림들과 함께 올려본다.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건 역시 브루벨의 그림들이었다. 그리고 이바노프의 민중 앞에 나타나신 그리스도 정도..

그림 파일은 원작의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터치와 질감들이 살아나지 않아 무척 아쉽지만..

브루벨의 악마는 레르몬토프의 시에 등장하는 사랑에 빠진 젊고 불행한 악마를 소재로 하고 있다, 그의 그림 속의 악마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공존하는 아름답고 비극적인 존재다. 그 그림들은 아름답고 무척 슬프다.

 

 미하일 브루벨, 의기소침한 악마

 

 미하일 브루벨, 날아가는 악마

브루벨의 악마 시리즈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다. 실지로 이 그림 앞에 서면 숨이 막힌다.

 

 미하일 브루벨, 백조 공주

정말이지 아름다운 그림이다. 이 그림 하나 때문에 다시 모스크바에 가고 싶다.

 

이건 백조 공주 스케치

* 브루벨의 다른 그림들은 아래를~

http://tveye.tistory.com/895
http://tveye.tistory.com/428
http://tveye.tistory.com/410
http://tveye.tistory.com/187
http://tveye.tistory.com/80
http://tveye.tistory.com/33

:
Posted by liontamer

미하일 브루벨, Портрет Т.С. Любатович в роли Кармен (카르멘 역의 류바토비치 초상화)

아마도 류바토비치는 당대 오페라 가수였겠지요? 카르멘 분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그런 것 같아요
노어로 Т.С. Любатович 라고 되어 있습니다.  Т.С.는 이름과 부칭의 약자예요. 영어식으로 하면 T.S 가 되겠죠. 저 약자가 들어갈 수 있는 러시아 여자 이름은... 조심스럽게 타마라 세르게예브나 정도로 예측해봅니다.

블로그 내에서 브루벨 태그로 검색하시면 그의 다른 그림들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
Posted by liontamer
2009. 2. 23. 21:20

미하일 브루벨, 스페인 arts2009. 2. 23. 21:20


미하일 브루벨, 스페인

한동안 포스팅이 뜸했네요. 무척 바빠요.. 이번주도 많이 바쁠 것 같고.
아, 바쁜 게 싫어요, 게으름 피우고 싶어요 흐흑
:
Posted by liontamer
2009. 1. 20. 21:34

미하일 브루벨, 바다 공주 arts2009. 1. 20. 21:34


미하일 브루벨, 바다 공주

우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브루벨의 그림 한점 올려봅니다.
브루벨의 다른 근사한 그림들은 아래를 클릭
http://tveye.tistory.com/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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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브루벨, '모짜르트의 잔에 독을 타는 살리에리'


백조공주와 악마 그림들로 유명한 미하일 브루벨의 삽화입니다.
어쩌면 푸시킨의 희곡 '모짜르트와 살리에리'를 위한 삽화인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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