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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albaricoque님이 블로그에 올리신(http://albaricoque.tistory.com/92) 거장과 마르가리타 후기에 댓글을 달다가 생각나서 쓰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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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러시아어를 전공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전에 petersburg diary 폴더에 쓴 적이 있다. 나는 책 한 권과 영화 한 편 때문에 러시아어를 전공하게 되었는데 전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었고 후자는 미하일 바리쉬니코프의 백야였다. 그 이야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1606

 

 

이후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나의 사랑은 변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의 러시아 문학을 향한 사랑을 더 깊고 넓게 만들어준 것은 미하일 불가코프와의 만남이었다. 지금 내게 가장 좋아하는 러시아 작가 셋을 꼽으라면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와 미하일 불가코프, 그리고 세르게이 도블라토프가 될 것이다.

 

 

내가 가장 처음 읽었던 불가코프의 소설은 대표작인 거장과 마르가리타였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페테르부르크의 허름하고 추운 기숙사 방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사진 속 맨 왼쪽에 보이는 한길사 번역 판본이었다(사진 속의 책은 같은 건 아니고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 내가 따로 산 것이다) 당시 친구가 또 다른 친구에게서 빌린 책이었는데 어쩌다 내가 먼저 읽게 되었다.

 

 

그때까지 나는 (부끄럽지만) 러시아어과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불가코프라는 작가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책 제목도 처음이었다. 나에게 있어 그때까지의 러시아 작가들은 대부분 19세기 작가들이었고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체호프, 푸쉬킨 등을 벗어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저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읽기 시작했을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초반부에 안누슈카가 해바라기 기름을 이미 쏟아버린 결과로 편집장 베를리오즈의 머리가 전차에 잘려나가는 순간 전율을 느꼈다. 전반부에서는 충격과 공포와 묘한 흥분에 사로잡혔고 후반부에서 마르가리타가 마녀로 변신해 하늘을 날아가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연인 거장을 구하기 위해 무도회의 여주인이 되는 장면부터는 반쯤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그리고 결말에서는 가슴을 찌르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많은 소설들이 내게 기쁨과 슬픔과 쾌감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불가코프의 이 소설만큼 나를 완벽하게 흥분시킨 작품은 거의 없었다. 이것은 작가들의 소설이었다. 쓰는 자의 소설이었다. 정말이었다.

 

 

이후 나는 불가코프의 단편과 다른 장편들을 거의 모두 구해 읽었다. 국내에 번역된 책들도 읽었고 원서도 가능하면 구해 읽었다. 사진의 책장에 꽂혀 있는 불가코프 책들 중 왼편의 거장과 마르가리타 번역본은 세가지인데 제일 왼쪽이 내가 처음 읽었던 버전이고 노어 발음에 가깝게 거장과 마르가리따로 되어 있다. 이후 외국어표기법에 따라 '거장과 마르가리타'라고 손질되어 나온 버전이 옆의 좀더 새책, 그리고 오른편의 한권짜리는 다른 분이 번역한 책이다. 원서와 단편집 등 몇권은 부모님 댁에 있다. 원어로 되어 있는 저 책은 '어둠의 대공'이라는 제목인데 불가코프가 거장과 마르가리타 완성본을 쓰기 전에 썼던 초본 등을 엮은 것이다.

 

 

 

 

 

 

 

 몇년 전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호흡법을 새로 익혀야 했다. 그래서 원래 구상했던 장편 대신 워밍업을 위한 단편을 썼다. 이전에도 몇번 발췌한 단편이다. 레닌그라드의 정치가 드미트리 마로조프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나의 주인공 미샤의 이야기로 소설은 파리에서 체포된 미샤가 비행기 안에서 마로조프와 나누는 대화와 마로조프의 회상으로 이루어졌다.

 

 

그때 나는 아마도 미샤에 대해 지금만큼 친밀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만큼 그를 이해하고 있지 않았고 지금만큼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으며 지금만큼 그의 내부에 다가가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소설은 마로조프와 마찬가지로 내게도 미샤를 만나고 이야기하고 느끼고 내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되었다.

 

 

그 소설에서 나는 불가코프의 이 소설을 몇 문장 인용했다. 정말 몇 문장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소설 속에서, 그리고 그 순간의 미샤와 나에게는 중요한 문장들이었다. 그 이유는 아마 그와 나만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용한 문장은 아래 발췌문에서 푸른색으로 표시하였다.

 

 

발췌문은 지난번 올렸던 '마지막 동작이 완성되지 않은 춤, 운하를 건너는 미샤'(http://tveye.tistory.com/4485) 파트에서 이어지는 내용이다. 드미트리 마로조프가 파리에서 체포된 미샤와 비행기 안에서 조우하고 그들의 두번째 만남에 대해 회상하는 장면이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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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한 고도에 접어들어 더 이상 기체가 흔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미샤가 커튼을 젖히고 내 쪽으로 건너왔다. 앞뒤를 가로막고 있는 두 명의 거대한 요원들 사이에서 그는 거의 어린애처럼 보였다. 그를 내버려두고 자리로 돌아가라고 했을 때 요원 중 하나가 반쯤 의무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 하지만 명령을 받아서요,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 위험인물이라. ”

 

 

나는 미샤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파리에서부터 내내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있었던 요원들에게는 비웃음이라고 여겨질 만한 미소였다.

    

 

 

 

요원들이 뒷자리로 돌아간 후 미샤가 맞은편 자리에 앉았을 때 내가 물었다.

    

 

“ 뭐가 그렇게 재미있나, 위험인물이라고 해서? ”

 

“ 명령을 내리는 사람 앞에서 명령 얘기를 하고 있으니까요. ”

 

“ 자넨 내 관할이 아니야. ”

 

“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죠. ”

 

 

 

나는 그에게 담배를 건네고 불을 붙여 주었다. 미샤는 연기를 깊게 빨아들인 후 잠시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좌석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처음으로 나는 그의 얼굴을 정면에서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호텔 앞과 공항은 파도처럼 밀려드는 외신 기자들과 극장 관계자들, 피켓을 든 각종 단체와 예술가들로 꽉 차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오늘 아침 르 피가로에 실린 사진이 가장 선명했는데, 물론 그때도 위장한 요원들 사이에 끼어 있었기 때문에 검은 머리칼과 창백한 얼굴, 호리호리한 실루엣 외에는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골치 아픈 기자들과 인권운동가 나부랭이들을 따돌리기 위해 그를 예정되어 있던 레닌그라드 직항 여객기 대신 한 시간 먼저 출발하는 모스크바행 특별편에 탑승시키라는 지시를 내린 것은 나였지만, 정말로 이 자리에서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미샤 야스민에게는 나를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는 게 분명했다.

 

  

미샤는 피곤해 보였다. 얼굴은 창백했고 길게 뒤엉킨 속눈썹 아래로 어두운 그림자가 패여 있었다. 항상 제멋대로 치솟는 경향이 있던 검은 머리칼은 이마 위로 단정하게 빗어 넘겼지만 갸름한 얼굴 위로 광대뼈 윤곽이 더 날카롭게 두드러져 있었다. 파리의 더운 날씨 때문인지 소위 위험인물이라 무기를 감출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 때문에 빼앗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재킷은 걸치지 않았고 주머니가 없는 검은색의 긴 소매 리넨 셔츠와 짙은 회색의 슬랙스 차림이었다. 웅웅거리는 소음과 둥근 창 너머로 보이는 두터운 구름이 아니었다면 연습실에서 막 나온 것 같다고 착각할만한 모습이었다.

 

 

미샤가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안개처럼 빽빽하고 불투명한 연기에 휩싸여 그 창백하고 지친 듯한 얼굴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     *     *

   

 

 

 

서쪽에서 다가온 어둠이 거대한 도시를 뒤덮었다. 다리도, 궁전들도 사라졌다. 마치 결코 이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사라졌다. 실처럼 가느다란 섬광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내달렸고 천둥이 도시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울리는 천둥과 함께 뇌우가 시작되었다. 어둠 속에 휩싸여 볼란드는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두 번째로 만났을 때 나는 미샤를 모스크바로 데려갔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미샤는 볼쇼이나 므하트 극장보다는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을 더 좋아했다. 미술관에서 나와 저녁을 먹으러 갔을 때 나는 몇 년 전 파리에서 출간된 무삭제판 불가코프 소설을 선물했지만 그 아이는 벌써 지하 루트로 그 책을 입수해 읽은 후였다.

    

 

“ 실망하실 필요는 없어요,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 ”

 

 

식어가고 있는 수프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책장을 넘기면서 미샤가 말했다.

 

 

그건 갱지 복사물이었거든요. 돌려가며 읽었는데 제 차례가 왔을 땐 잉크가 번져서 여기저기 지워져 있었어요. ”

 

    

 

그날 밤 잠들기 전에 나는 그에게 책에서 마음에 들었던 장면을 몇 장 읽어달라고 청했다. 마음속으로는 어느 부분을 읽어줄지 예측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마르가리타가 빗자루를 타고 모스크바 밤하늘을 날아가는 장면이나 사도바야에서 악마 무도회를 여는 장면이다. 혹은 반항심 많은 사춘기 소년답게 나를 권력과 체제의 상징으로 설정해 놓고는 보란 듯이 ‘원고는 불타지 않는다’ 라는 대사를 읊어 주리라고 생각했다.

 

 

미샤는 밑도 끝도 없이 대여섯 문장만을 읽었다. 어둠과 뇌우에 대한 장면이었다. 왜 그 부분을 읽어주었는지에 대해서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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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조프의 시점으로 씌어진 이 소설의 다른 발췌 장면들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4267, http://tveye.tistory.com/2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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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과 마르가리타는 불가코프 생전에는 출판되지 않았다. 검열로 고통받았던 작가였기 때문이다. 소련에서는 불가코프 사후, 그리고 스탈린이 죽은 후에야 그나마도 군데군데 삭제된 버전으로 처음 출판되었다. 무삭제본은 그리고도 한참 후에야 나왔다. 그래도 60년대 말 즈음 파리 등 해외에서는 무삭제판이 출간되었는데 이 소설에서 마로조프가 미샤에게 건네주는 것이 바로 그 무삭제판이다.

 

 

 

 

마로조프가 이야기하는 거장과 마르가리타와 '원고는 불타지 않는다'에 대한 이야기는 오래 전 웹진 기사로 포스팅했던 적이 있다. 왜 이 소설이 스탈린 시대에 출판될 수 없었는지, 그리고 무삭제판이 나오기까지는 왜 더 오랜 세월이 지나야 했는지도 이 포스팅에 간략히 쓴 적 있다. 

그 포스팅은 여기 : "원고는 불타지 않는다" http://tveye.tistory.com/13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러브 스토리에 대한 짧은 발췌는 여기 :

반지하 창문을 볼때마다 http://tveye.tistory.com/979

 

 

** 추가 : 이 글을 발췌하게 된 이유 중 약간 : http://tveye.tistory.com/4575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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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