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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바이올리니스트가 화자로 등장하는 단편(http://tveye.tistory.com/3165, http://tveye.tistory.com/3146)을 마무리하고 나서, 이제 원래 쓰려던 글을 시작하려던 참인데 머리도 식히고 전체적인 흐름을 정리하려고 예전에 썼던 글들을 훑어보고 있다.

 

작년 초에 마무리했던 꽤 긴 글이 있는데 그 글의 화자는 지난번에 몇 번 발췌했던 부분에 등장한 적이 있는 트로이라는 인물이다. 레닌그라드의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강사이고 주인공인 미샤의 친구이다. 이 사람은 해외 문학과 지하 문학 등을 몰래 공유하는 모임을 조직한 적이 있는데 주인공과도 그곳에서 만난다. (메밀죽 안 먹으려는 릴렌카와 그 꼬마의 아빠 이야기: http://tveye.tistory.com/2952 도 이 글에서 발췌했다) 이 글의 배경은 1970년대 초반에서 중후반, 레닌그라드이다. 이 글에서 다루는 시기에 주인공은 미샤는 발레학교 학생이었다가 키로프에 입단해서 몇 년 동안 춤을 춘다.

 

지난주에 발췌했던 사과 파이 에피소드(http://tveye.tistory.com/3165)에서 미샤는 화자인 바이올리니스트 코즐로프에게 자기 친구를 좀 닮았다고 말하는데 이 글에 나오는 트로이 얘기다. 트로이는 이 인물의 성에서 따온 애칭이고 본명은 안드레이인데, 당사자는 자기 이름을 싫어해서 친구들 사이에서는 언제나 트로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주인공은 꿋꿋하게 이 사람의 본명을 부른다(주인공이라서 ㅋㅋ)

 

이미 마무리한지 2년이 다 되어가는 글인데, 오늘 훑어보다가 딱 이맘때 가을 얘기가 있어 올려본다. 발췌한 부분의 배경은 1976년 10월 초. 레닌그라드 국립대학교 교정이다. 미샤는 어깨 부상 때문에 모스크바에서 치료를 받고 돌아온 직후이다. 이 소설은 전체적으로 좀 어두운 편이지만 이 부분 쓸 때는 즐거웠다.

 

발췌한 부분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다닐로프와 세레브랴코프, 베론스카야 등은 키로프 극장 쪽 사람들로 물론 가상의 인물들이다. 뒤에 나오는 이고리, 타냐 등은 트로이의 문학 모임 친구들이다.

 

사과 파이 얘기 말미에 나는 이 주인공을 두고 뭔가를 먹이는 얘기를 쓴 적이 거의 없다고 했는데, 사실 이 부분에서도 이 사람이 뭘 먹기는 한다. 사과 파이처럼 맛있게 먹지 않아서 그렇지..

 

* 이 글을 무단으로 발췌, 인용, 전재, 배포하지 말아 주세요 *

 

..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날 미샤는 트로이의 학교로 찾아왔다. 퇴원 후 거의 3주 만이었다. 강의를 모두 마치고 학과 사무실에 들렀다 나오는데 미샤가 교정 잔디밭 앞 벤치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이미 10월이었고 햇살에도 불구하고 날씨가 싸늘한 편이었지만 미샤는 더블 버튼 재킷 외에는 스카프조차 두르지 않고 벤치 위에 편하게 누워 있었다. 목덜미까지 자라났던 머리칼도 단정하게 자른 데다 쏟아지는 햇살 때문인지 알이 큰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맨 처음에 트로이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곁을 지나칠 뻔 했다. 그러자 미샤가 그를 불렀다.

 

 “ 안드레이, 그냥 가면 안 되지. 난 아침부터 굶었는데. ”


 
 트로이는 그를 학교 식당으로 데려갔다. 미샤는 대학교 식당에 처음 들어와 본다며 신기해했고 생각보다 음식 종류가 많고 가격도 싸다고 또 신기해했다. 더블 단추가 달린 암청색 재킷과 꼭 맞는 검은색 진을 입고 운동화를 신은 채 진열대를 구경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신입생처럼 보였다. 물론 그가 걸치고 있는 옷들이야 일반적인 대학 신입생이라면 구하기도 힘들고 구한다 해도 가격을 치르기 어려울 정도일 테지만. 미샤는 연습실에 드나들 때나 거리를 쏘다닐 때는 편한 차림을 하고 다녔지만 필요할 때는 꽤 세련되게 옷을 입는 편이었다. 그의 열성팬들 중에는 계절별로 유명한 외국 브랜드의 옷을 보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반적인 러시아 남자답게 패션에 큰 관심이 없는 트로이가 밀수품 아니냐고 물으면 미샤는 어차피 소련 공장에서 나오는 옷들 외엔 전부 밀수품이라고 대꾸하며 개의치 않고 그 옷들을 입었다.

 

 한번은 당국에서 의류공장 활성화를 위해 다닐로프에게 무용수들의 모델 협조를 부탁한 적이 있었다. 다닐로프는 외모와 비율이 뛰어난 울리얀 세레브랴코프와 올가 베론스카야, 그리고 지나이다와 미샤를 보내기로 했다. 타마라의 말에 따르면 다들 촬영에 협조하기로 했지만 미샤는 거절했다. 물론 다닐로프는 버럭 화를 냈다.

 

 “ 이건 가기 싫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냐. 가서 두어 시간만 찍고 와. ”


 “ 레오니드를 보내시죠, 그 멋진 옷들을 소화하려면 그 친구 정도 체격은 돼야 어울릴 테니까. ”

 

 다닐로프도 미샤가 비꼬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 그렇게 큰 사람은 울리얀 하나로 족해. 남자는 금발과 흑발이 필요하고. ”

 

 그러자 미샤가 극장의 검은 머리 남자 무용수들의 이름을 읊기 시작했기 때문에 다닐로프가 소리를 지르며 가로막았다.

 

 “ 공장 책임자가 자네 이름을 찍어서 보냈어. 다른 사람들은 바꿔도 자넨 못 바꿔. 당장 안 가면 징계야. ”

 

 미샤는 결국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처럼 촬영을 하러 갔다. 타냐는 국영 백화점과 의류상점마다 쫙 깔린 그 옷들의 카탈로그를 몇 부 얻어 와서 좋아했지만 미샤는 그 사진을 볼 때마다 괴로워했다. 그 별 것 아닌 촬영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순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짜증을 냈다. 고스치니 드보르의 의류상점 진열창에 그 체크무늬 재킷과 폴리에스테르 바지를 입고 있는 자신의 화보가 걸려 있는 동안에는 네프스키 대로를 걷지도 않으려고 했다. 모임의 친구들은 미샤가 평소의 침착하고 서늘한 태도와는 달리 그 일에 짜증을 내고 부끄러워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한동안 국영 의류공장 모델이라고 놀려댔다. 특히 이고리가 그랬다. 

 

 “ 화내지 마라, 모델 양반. 네가 입은 재킷을 적어도 수백만명이 입을 텐데. 소비에트 사회 아니면 어느 나라에서 그런 놀라운 일이 있겠냐. 거의 인민예술가 수준의 영광이지. ”


 “ 수백만명! ”

 

 미샤가 토할 것 같은 표정으로 이고리를 노려보더니 타냐가 들고 있던 카탈로그를 구겨서 휴지통에 집어던졌다.

 

 “ 왜 그래, 인민을 선도하는 미남자가 됐다고 생각해. 그 옷 연방이랑 동맹국에도 수출할지 누가 알아? 오늘만도 네프스키에서 그거 입은 남자 다섯 명은 봤어. 뭐가 그렇게 수치스러워? 수백만장 찍는 질 나쁜 공산품 모델이 돼서? ”


 “ 단추가 잘못 달렸어. 칼라도 비뚤어졌어. 진창과 토사물을 섞어놓은 것 같은 색깔이야. 어떻게 이런 걸 수백만장을 찍어낼 수가 있어! ”

 

 미샤의 그 재킷 카탈로그를 보면서 나름대로 괜찮으니 자기도 한 벌 사볼까 하고 생각했던 트로이는 깜짝 놀라서 그 말을 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미샤가 몇백만장 찍어내는 질 나쁜 공산품 모델이 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촌스러운 옷을 입고 촬영한 사실에 화가 났다는 것이 아주 우스웠지만 그 말도 입 밖에 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근사한 재킷과 진을 입고 진열대의 음식을 구경하고 있는 미샤를 보면서 트로이는 잠시 단추와 칼라가 비뚤어진 흙탕물 색깔의 소련 공장 재킷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때 미샤는 촌스러운 옷 때문이 아니라 그게 당국의 명령이었기 때문에 화가 났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미샤의 옆으로 가서 조그만 단지에 들어 있는 닭고기 수프나 펠메니를 먹으라고 했다. 미샤는 물론 그의 조언을 거부하고 우하 수프와 게살 샐러드를 시켰다.

 

 “ 우리 학교 식당 우하는 맛없어. 닭고기 수프가 제일 맛있다니까, 알랴도 런던에서 왔을 때 그것부터 찾았는데. ”


 “ 저쪽 테이블에서 먹고 있는 저거잖아. 기름이 이렇게 두껍게 떠 있어! 게다가 노란색이야! ”


 “ 기름기가 많을수록 좋다는 속담 몰라? ”

 “ 그럼 네가 시켜. 나한테 한입 주면 되겠네. ”

 

 미샤는 주문한 음식을 다 먹었고 트로이의 닭고기 수프도 정말 한두 입 먹었다. 안색도 전보다 나아 보였고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야윈 것도 덜했다. 눈 아래 패여 있던 그림자도 거의 사라져 있었다. 짧아진 머리와 옷차림 때문인지 스무 살도 안돼 보였다.

 

..

 

여기 등장하는 레닌그라드 국립대 학생식당은 나도 가끔 가던 곳이다 :) 단지에 든 닭고기 수프 엄청 느끼하지만 먹고 나면 몸이 따뜻해진다고 친구들은 좋아했었다. 나는 차마 못 먹고 가끔 몇 숟가락 뺏아먹기만 했는데 심대하게 느끼했다!! 물론 내가 다닐 때는 이미 소련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저 글 속 식당과는 좀 달랐을 테지만.

 

이 부분을 쓸때 즐거웠던 이유는 저 주인공이 사람들 앞에서 좀처럼 저런 식으로 짜증을 내거나 유치하게 굴지 않기 때문이다. 뭐 미감이 뛰어난 사람에게 흙탕물 색깔의 이상한 소련 옷을 입히고 사진까지 찍어서 진열하게 한다면 열받긴 했겠지. 심지어 반체제주의자라면 더.

 

** 이 주인공에 대해 료샤가 불쌍히 여길 뻔한 얘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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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