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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젊은이와 죽음. 사진은 alex gouliaev)

 

 

며칠 전 내가 좋아하는 마린스키 무용수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가 아내와 함께 새 시즌에 뮌헨으로 옮겨갈 거라는 소문을 접했고 그게 소문이 아니라 거의 확정된 사실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http://tveye.tistory.com/4587, http://tveye.tistory.com/4592)

 

이 뉴스에 굉장히 심란했고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일 때문에 힘든 와중에도 그 사람이 옮겨간다는 사실에 이렇게 마음이 심란하니 아마 내가 진짜 팬이라 그런가보다.

 

사실 무용수의 입장에서는 13년이나 마린스키에서 췄고 이미 프린시펄로 남자무용수 중에는 최고의 자리에 있는데다 해외에서 인기도 많고 기량도 가장 원숙기에 달해 있으니 늦기 전에 다른 극장, 다른 무대에 나가고 좋은 대우를 받을 때가 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사람이 마린스키에 이렇게 오래 남아준 것도 고마운 일이기도 하다. 다른 동세대 무용수들을 보면...

 

게다가 러시아보다야 유럽이나 미국 쪽 대우가 훨씬 좋을 거고. 바이에른 쪽 예술감독으로 이고르 젤렌스키가 있고, 또 마린스키에서는 제2솔리스트에 머물러 있는 아내 마리야 쉬린키나도 아마 프린시펄 급으로 가는 것 같으니 아내를 매우 사랑하는 이 사람 입장에선 좋은 기회일 것이다. 똑똑한 사람이니 잘 판단해서 결정했을 것이다.

 

그래도 아쉬움과 심란함이 가시지 않는다. 아마 내가 슈클랴로프의 팬인 동시에 '마린스키'와 '페테르부르크'를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에 남아 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름에 다시 페테르부르크에 가고 일년에 한두번은 이 사람 무대를 보는 게 낙이었는데 ㅠ 물론 뮌헨에 가볼 수도 있겠지만 마린스키란 이름과는 다르다. 그리고 그냥 개인적으로는... 이 사람이 가는 극장이 마린스키만한 이름값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서 더 아쉬운 마음이 든다.

 

하여튼 일개 애호가이자 팬인 내가 심란하든 말든 재능 넘치는 무용수이자 예술가이니 슈클랴로프는 자기 앞길을 잘 꾸려나갈 거고... ㅠㅠ

 

..

 

 

이 소식 때문에 심란해하다 일종의 아이러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내가 쓰고 있는 미샤 야스민의 본편 우주에서 나는 비슷한 소재를 이미 다룬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설정한 세계에서 미샤는 레닌그라드 토박이로 레닌그라드 발레학교(즉 바가노바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곧장 키로프(지금의 마린스키)에서 데뷔해 곧 성공 가도를 달리다 4번째 시즌 중간쯤 모스크바의 볼쇼이로 옮겨가게 된다. 이 이야기는 몇년 전 썼던 트로이와 미샤의 장편 후반부에서 다룬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작가의 입장이었고 나와 미샤는 둘다 이유가 있었다. 그 순간의 미샤는 떠나야 했고 나 역시 그가 왜 떠나야 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던 팬들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혹은 부정하고 싶어하거나 그저 슬퍼했다. 나는 언제나 팬과 예술가 사이의 애정과 환상, 그 거리에 대해 관심이 있었다. 아마도 그것이 오래전 내가 토드 헤인즈의 영화 '벨벳 골드마인'을 처음 보았을때 그렇게 매료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그 영화는 지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남아 있다) 팬과 예술가, 혹은 우상 사이에는 분명 환상이 있고 거리가 있고 놀라울만큼 우스꽝스러운 어떤 것이 있다.

 

 

본편 우주에서 미샤는 매우 열렬한 팬덤을 거느린 무용수로 등장했다. 그의 유일무이한 재능과 사람을 끄는 자력 때문에. 그래서 미샤가 갑작스럽게 볼쇼이로 떠나게 되었을때 그의 팬들은 분노하고 경악하고 망연자실하게 된다.

 

 

..

 

 

나는 아래 발췌한 에피소드를 쓰던 날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건 겨울이었다. 12월이었다. 춥고 쓸쓸한 날이었다. 나는 코다츠 테이블에 앉아 그 장면을 쓰고 있었다. 2012년 겨울이었다. 그날은 대통령 선거일이었다... 나는 투표를 마치고 돌아와 글을 쓰고 있었다. 그때 나는 바닥에 내려가 있었고 내게는 오직 그것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아마 그때 내가 그 소설을 쓰지 않았다면 나는 더욱 오랫동안 바닥에 있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몸이 아파서 잠시 직장을 쉬고 있었던 때였는데 사실 몸보다는 마음이 더 힘들었다.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한지 몇달쯤 된 시점이었고 그때 나는 중독자처럼 그 글을 썼다. 그래서 그 글의 완성도가 어떻든 내게는 매우 개인적이고 중요한 글이었다. 그리고 그 글을 쓰면서 처음으로 나는 나의 주인공을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주인공을 바라보는 심리적 화자 트로이의 안으로 들어갔고 더 깊이, 더 깊이 들어갔다가 나왔다.

 

 

하여튼 그래서 그 소설은 여전히 내겐 내밀하고 고통스럽고 소중한 무언가로 남았다.

 

 

..

 

 

아래 발췌한 에피소드는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미샤가 갑작스럽게 모스크바로 떠나게 되자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팬들의 이야기이다.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당시의 레닌그라드) 사이의 알력과 긴장감도 한몫 했고. (사실 모스크바가 수도이긴 하지만 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은 문화의 예술의 도시, 제국시절 수도, 봉쇄를 이겨낸 영웅도시로서 자기네 도시와 문화예술에 대한 자긍심이 아주 강하다. 그리고 지금도 좀 그렇긴 하지만 소련 시절엔 특히 키로프에서 열심히 좋은 무용수들 키워놓으면 당 차원에서 그들을 볼쇼이로 낼름 보내버리곤 했다)

 

 

이 장면을 쓸때 나는 반쯤 냉소적이기도 했고 또 그보다 더 슬프고 열렬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팬들이 아니라 미샤에게 더욱 가까이 있었다. 그래선지 이번에 슈클랴로프가 떠난다고 해서 심란해지자 이 에피소드를 쓰던 때가 생각났고 조금 씁쓸하게 웃게 되었다.  어쩌란 말이야... 작가로서의 나와 팬으로서의 나는 어쨌든 다르게 반응하고 다르게 느낄 수밖에 없지 않나 ㅜㅜ

 

 

..

 

 

사실 내가 무용수로서의 미샤라는 인물을 만들어낼 때 여러 무용수들의 특질을 따오기는 했지만 거기 슈클랴로프는 없었다. 왜냐하면 나와 미샤의 관계는 내가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라는 무용수를 좋아하게 되기 훨씬 오래 전에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글을 쓰면서 이따금 슈클랴로프를 떠올린 적은 있었다. 사실 미샤와 닮아서가 아니라 상반된 분위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에게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는 그 드라마틱한 재능과 비극을 표현하는 능력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는 빛과 에너지의 무용수, 햇살 같은 무용수이기 때문이다. 미샤는 그 반대이다.

 

 

하지만 저 트로이가 등장하는 장편을 쓸때 나는 가끔 사진 몇 장을 보곤 했다. 소년 시절, 그리고 20대 초반의 미샤를 떠올리려고. 그때 보던 사진 중 하나는 슈클랴로프의 초창기 시절 찍은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다.

 

 

 

 

물론 나의 주인공 미샤가 이 사람과 비슷한 타입의 외모는 아니다. 하지만 이 사진을 보고 있으면 소년 시절의 미샤가 좀 떠오르곤 했다. 아마 그 소년다움, 아직 앳된 얼굴, 아직 제대로 된 남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린애도 아닌 미묘한 순간에 놓여 있는 시절, 어딘가 양성적이고 어딘가 쓸쓸해보이고 또 어딘가 결핍되어 보이지만 동시에 한없는 매력을 숨기고 있는 모습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언제나 미샤가 어떤 경계에 놓여 있고 그 선을 넘나들며 끝없이 움직이는 존재라고 생각했고 그런 그에게 분명 근육질의 강인한 남성 무용수이지만 동시에 어딘지 양성적이고 어딘지 미처 덜 자란 사춘기 소년 같은 분위기를 남겨 놓고 싶었다. 그리고 이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의 옛 사진은 내게 그런 느낌을 조금 느끼게 해준다. 물론 이 사람은 나의 미샤와는 많이 다르지만.

 

 

..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늘어놨는데, 하여튼 발췌한 이야기는 몇년 전 쓴 장편의 후반부. 미샤가 3년 반 동안 키로프 무대에 올라다가 갑작스럽게 모스크바 볼쇼이로 떠났을때 일어난 해프닝이다. 앞부분에서 발레애호가들이 분노해 떠드는 대화에 등장하는 세레브랴코프는 미샤를 싫어하는 선배 무용수로 예전에 이 사람과의 충돌에 대한 이야기도 잠깐 발췌한 적이 있다.

 

 

이반 노비코프는 미샤를 낚아채간 볼쇼이 행정감독, 게오르기 다닐로프는 키로프의 행정감독, 아사예프는 예술감독이다. 물론 다들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다. 극장 지도 체계도 좀 다르고. 당시 내겐 그 체계의 재구성이 좀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허구의 세계니까. 스타니슬라프 일린은 이전에 몇번 발췌한 미샤의 친구이자 볼쇼이 안무가이다. 전에 일린의 딸 라라의 관점으로 전개된 부활절 단편 jewels를 올린적이 있는데 그 이야기는 여기서 미샤가 볼쇼이로 옮겨간 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잠깐 언급되는 고르차긴과 마이야 로스포바는 둘다 레닌그라드의 유력자로 미샤의 열렬한 후원자이다.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와 벨스키는 서무 시리즈에도 몇번 언급되었고 발췌한 적도 있지만 미샤를 후원하는 고위직 당 간부이다. 미샤를 따라가는 타마라는 키로프 발레단 코디네이터이다. (역시 모두들 가상의 인물들이다)

 

 

이 에피소드를 쓸 때, 특히 발레애호가들이나 팬들을 묘사할 때 나는 약간은 장난을 치고 있었지만 사실은 많이 진지하고 심각했었다. 사실 이 글을 쓰는 내내 그랬다. 숨을 쉬려고 애쓰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 에피소드를 쓴 날이 대통령 선거일이었고 그 다음날부터 세상은 좀더 어두워졌다 ㅠㅠ)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미샤 야스민이 볼쇼이로 떠난다는 뉴스는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키로프 뿐만 아니라 레닌그라드 문화예술계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몇몇은 스타니슬라프 일린이 왔을 때부터, 그리고 미샤가 세레브랴코프와의 싸움으로 징계를 받고 이후 가을에 두 달이나 휴가를 얻었을 때부터 이런 결과를 예견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극장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노비코프가 미샤를 크레믈린 무대에 세웠을 때부터 이미 모든 시나리오를 짜놓고 있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심지어 극단적인 볼쇼이 혐오자인 유력 인사 하나는 이반 노비코프가 이런 상도에 어긋나는 짓을 하기 위해 일린을 빌려줬던 거라고 화를 내기까지 했다. 음모론이 들끓었다.

 

 

“ 생각해 봐! 포노마레바, 그 여자도 모스크바에서 왔지. 이건 모스크바의 음모야. 그 여자가 다닐로프를 협박해서 일린을 박아 넣었지. 그리고는 어떻게 했어. 그 런던 페스티벌에 야스민을 보낼 때 일린이 만들어준 춤을 가져가게 했지, 게다가 같이 갔던 건 누구야! 게르만 스비제르스키! 모스크바 의원이잖아. 크레믈린 축제는 또 어떻고! 볼쇼이로 빼가는 걸 벨스키가 거들었다잖아. 노비코프는 다닐로프나 아사예프 따위와는 로비 능력 차원이 달라. 그 루슬란을 볼쇼이 무대에 올린다고 했을 때 키로프에서는 으쓱해했지. 얼간이 같긴, 그게 다 노비코프의 포석이었던 거야! ”

 

 

“ 맞아. 게다가 최근 2년 동안 키로프에서 야스민을 어떻게 대했어! 제대로 대우해 줬다는 놈들은 수석으로 만들어준 것만 보고 다른 건 못 보는 거지. 무대에 서는 날과 징계로 처박혀 있는 날이 거의 비슷할 정도였을 걸! 그 세레브랴코프 서클에서 무슨 짓들을 했는지 정말 몰라? 음해와 뒷공론, 협박이 전부가 아냐. 별의별 유치한 짓들을 다 했어. 첫 시즌에는 공연 시작 직전에 소품 창고에 가뒀지. 볼고그라드에 갔을 때는 인솔자를 속여서 걜 거리에 내버리고 버스를 출발시켰어. 야스민이 지난 네 번의 시즌 동안 잃어버린 그 많은 의상과 슈즈가 전부 어디로 갔다고 생각해? 팬들이 가져갔다고? 그 절반 이상은 잘난 선배들이 쓰레기통에 처넣었을걸. 그런 게 애들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고? 페름 저수지 사건 몰라? 분장 상자 안에 양날 송곳이 잔뜩 박혀 있던 사건 기억 못해? 손가락이 잘릴 뻔 했지. 조명 나사를 풀어서 어깨를 박살낼 뻔한 적도 있었어. 그래, 그 다쳤던 어깨 말야. 그게 실패하니까 세레브랴코프가 자기 손으로 뼈를 부러뜨리려고 했지. 그런 와중에 노비코프가 미끼를 던졌는데 제정신인 무용수 치고 그걸 물지 않을 인간이 어디 있어! ”

 

 

“ 노비코프가 1월에 야스민을 곧장 백조 무대에 세운대. 거의 모스크바에 도착하자마자일 걸. 그 표 구하려고 그 바닥이 발칵 뒤집혔대. 벌써부터 그 친구가 스파르타쿠스를 출 거라고 모스크바 무용계가 시끌시끌해. 스비제르스키에 벨스키까지 고위직도 양쪽 서클에서 다 걜 밀잖아. 그런 앨 뺏기다니. 그것도 여름도 아니고 시즌 중에 데려가게 놔두다니! 키로프 위신이 땅에 떨어졌어. 멍청한 인간들. 이제 시작이야. 그놈들이 하나하나 다 빼 갈 거야. 모스크바 놈들에게 다 뺏기게 될 거야! ”

 

 

좋은 것은 모두 모스크바와 볼쇼이에 빼앗긴다는 피해의식과 뿌리 깊은 경쟁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극장과 예술계 인사들 뿐만이 아니었다. 공식적인 뉴스가 1월 초에 터져 나오자 관객들도 크게 실망했는데 특히 미샤의 팬들은 하늘이 무너질 듯한 충격에 사로잡혔다. 그 충격의 첫 번째 반응은 극장에 대한 무시무시한 분노로 나타났다. 그들은 키로프 상부의 무능함과 고참 무용수들의 텃세를 강력하게 비판하는 연판장을 써서 문화국과 지역 의회에 공식적인 항의 서한을 제출했고 리디야 포노마레바의 사무실을 급습해 한 시간이나 뜨거운 성토를 벌였다. 불행하게도 그런 점잖고 교양 있는 행동으로 그친 것만은 아니었다. 열성팬들은 극장으로 몰려갔고 게오르기 다닐로프와 울리얀 세레브랴코프의 자동차에 휘발유를 부은 후 불을 질렀다. 다행히 수위가 달려와 재빨리 불을 껐기 때문에 큰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두 대의 차는 심하게 망가지고 말았다. 다닐로프는 공포에 질려 세레브랴코프에게 미샤가 떠날 때까지 억지로 휴가를 주었고 경찰에 연락해 그 공훈예술가의 신변 보호를 요청하기까지 했다.

 

 

다닐로프의 그런 행동은 결코 과민한 반응이 아니었다. 차에 불을 지른 후 팬들은 극장 광장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무시할 수 없는 숫자로 불어났을 때는 키로프 정문 앞으로 옮겨와 시위를 시작했다. 그들은 다닐로프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부르며 당장 관객들 앞에 나와 제대로 된 해명을 해 줄 것을 요구했다. 점차 거기에는 보리스 아사예프의 이름도 뒤섞였다. 다닐로프는 경찰들에게 연락했지만 어째서인지 그들은 좀처럼 와주지 않았다. 아마도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팬들 배후에 지역 유력 인사가 몇 명 끼어 있었고 그들이 연줄을 동원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혹자는 고르차긴이나 마이야 로스포바의 이름을 거론하기도 했다.

 

 

시위가 점차 격화되어 작은 폭동으로 번질 조짐이 보이는 데다 저녁 공연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겁에 질린 다닐로프는 마침 서류 문제를 마무리하기 위해 들렀던 미샤를 붙들고 거의 빌다시피 소리쳤다.

 

 

“ 자네 추종자들이니까 가서 좀 해결해봐! 제발 내 기억 속에서 마지막까지 골칫거리로 남지는 말아줘. ”

 

“ 게오르기 페트로비치, 당신은 제가 어떻게 행동하든 골칫거리로 기억하실 게 뻔해요. ”

 

“ 그래, 하지만 우리 골칫거리였지. ”

 

 

그때 게오르기 다닐로프는 결코 극장 소속 예술가들에게 하지 않던 행동을 했다. 그 깐깐하고 관료적인 인물이 자리에서 일어나 미샤를 포옹하고 뺨과 입술에 세 번 입을 맞춘 것이다. 사무실 구석에 서 있었던 타마라는 그 광경에 기절할 만큼 놀랐다.

 

 

“ 다시 돌아와. 자네 자리는 항상 있을 테니까. ”

 

 

물론 그 따뜻하고 정감 넘치는 대사 후 다닐로프는 미샤의 등을 떠밀어 정문 앞으로 내보냈다. 극장 쪽 직원으로 타마라를 딸려 보내기는 했지만 그녀는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었다. 격하게 시위하고 있던 팬들은 미샤가 나왔을 때 놀라서 한동안 잠잠해졌지만 곧 다시 흥분해서 그를 에워쌌고 소리를 지르고 항의하고 울부짖고 제발 남아달라고 간청하기 시작했다. 미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문 앞에 멍하게 서 있었다. 그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그저 귀찮아서였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타마라는 미샤가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얼이 빠졌던 거라고 생각했다. 떠나기로 결정하기 전부터 극장에서 미샤가 가끔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멍하게 서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타마라는 그가 너무 무리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곤 했다.

 

 

미샤가 별다른 변명도 위로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기 때문에 팬들의 슬픔은 점차 분노와 원망으로 변했다. 그들은 우상 무용수를 벌떼처럼 에워싼 채 시베리아에서 짐승을 사냥해 몰듯 소란스럽게 극장 문 앞에서 끌어냈다. 타마라는 그들이 미샤를 납치해 무서운 짓을 저지를 것 같다는 비이성적인 공포에 사로잡혀 발을 동동 구르며 뒤를 쫓아갔다. 남녀가 뒤섞인 추종자 무리는 웅성대고 소리치며 운하를 따라 이시도로프 사원 쪽으로 내려가다가 도로를 건넜고 마침내 쇼틀레로 미샤를 밀어 넣은 후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평화로운 오후의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던 몇몇 중년 여인들과 젊은이들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고 팬들은 ‘꺼져요 꺼져!’를 반복하며 그들을 내쫓았다. 타마라는 문이 닫히기 전에 간신히 안으로 달려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몇 시간은 타마라에게 끔찍한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팬들은 카페 앞문과 뒷문을 모두 걸어 잠그고 교대로 문 안팎을 지켰으며 점원들을 협박해 안쪽의 조리실로 몰아넣었다. 전화선을 모두 뽑아버렸다. 무기만 없다 뿐이지 인질극이나 다름없었다고 타마라는 이후 공포에 떨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카페 안을 구름처럼 메운 팬들의 숫자를 세다가 100명까지 세었을 때 공포에 떨며 그 무용한 일을 그만 두었다. 100명이든 1,000명이든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너무 흥분해서 이성을 잃었고 푸치니 오페라나 드라마 극장 무대에나 나올 법한 광적인 감정 폭발과 눈물과 고성을 마구 쏟아냈다.

 

 

미샤는 한가운데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팬들이 동심원을 그리며 온통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에 빠져나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타마라는 그들을 잘못 자극했다가는 미샤를 폭행하거나 말 그대로 짓눌러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벌벌 떨고 있었다. 다행히 추종자들은 미샤에게 육체적 폭력을 가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손을 댔던 것은 귀부인처럼 차려입은 중년 여인 두 명 뿐이었는데 그것도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테이블 위로 올라가 앉으라고 팔을 잡으며 종용했던 것 뿐이었다. 미샤는 순순히 테이블 위로 올라가 앉았는데 그때에야 타마라도 그의 얼굴을 보고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미샤는 겁에 질려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긴 타마라는 그가 어떤 일에든 두려움에 휩싸이거나 주눅 드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다만 무척 피곤해 보였을 뿐이었다. 그는 짜증을 내거나 내보내달라고 부탁하지도 않고 테이블 위에 앉아 흥분한 팬들의 아우성을 그대로 듣고 있었다.

 

 

추종자들은 한꺼번에 소리치기도 하고 이따금 누군가의 지도에 따라 돌아가면서 성토나 항의, 분노와 슬픔을 표출하기도 했다. 과격한 팬들이 삿대질과 함께 미샤에게 모스크바와 볼쇼이에 창녀처럼 팔려갔다며 고함을 질렀을 때 타마라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그때쯤 그녀는 미샤가 살아서 나갈 수 없을 거라는 확신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카페 전체를 불태울 듯 솟구쳤던 배반감과 노여움은 점차 크나큰 상실감으로 바뀌었는데 아마도 미샤가 침묵하면서도 그들의 말을 모두 들어주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나중에는 여자들 여러 명이 테이블 바로 앞에 몸을 던지고 통곡하면서 가지 말라고 애걸했다.

 

 

우리 죽는 걸 보고 싶어요? 제발 가지 말아요! 모스크바에 가지 말아요! ”

 

 

그러자 모여든 팬들이 콤소몰 청년가를 부르듯 한 목소리로 합창했다.

 

 

“ 가지 말아요! 모스크바에 가지 말아요! ”

 

 

그 무서운 와중에도 타마라는 미샤가 반듯하게 다물고 있는 입술 너머로 웃음을 참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더럭 들었다. 그 비현실적이면서도 너무나 러시아적인 합창에는 소름끼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주 우스꽝스러운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마라가 아는 미샤 야스민은 충분히 그런 상황에서 웃어버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으며 두 손을 모아쥐고 마음 속으로 열렬히 외쳐댔다.

 

 

‘ 제발, 웃지 마. 이 말썽쟁이 꼬마야, 제발 참아. 비웃는 줄 알 거야. 이 사람들이 지금 장난치는 걸로 보여? 널 갈기갈기 찢어 죽여버릴 거야. 오 하느님, 예수님. 전 몰래 세례도 받았고 고난주간에는 금식도 해요, 콤소몰 회합에는 꼬박꼬박 나가지만 그래도 신앙을 지켰다고요. 제발 제 기도 좀 들어주세요. 저 골칫거리 귀염둥이가 제발 웃지 않게 해주세요. 제발 살아서 나갈 수 있게 해주세요. 손 끝 하나 다치지 않게 해주세요! 우릴 떠나는 건 밉지만 그래도 저 애가 볼쇼이 무대에 제대로 설 수 있게 해주세요! ’

 

 

하느님이 그녀의 기도를 들어줬는지는 모르겠지만 미샤는 웃지 않았다. 대신 처음으로 입을 열었고 그 연극적인 과잉으로 흘러넘치는 합창을 일상적인 대화를 받아넘기듯 대꾸했다.

 

 

“ 돌아올 거예요. 그러니까 보내주세요. ”

 

 

아마도 너무나 침착하고 조용한 어조 때문인지도 몰랐다. 소음으로 가득하던 카페 안에 갑작스런 침묵이 내리덮였다. 잠시 후 한 여자가 날카롭게 떨리는 음성으로 소리쳤을 뿐이었다.

 

 

“ 그걸 어떻게 믿어? 결국 모스크바를 선택한 거잖아요! ”

 

 

미샤는 소리친 여자 쪽을 보지도 않은 채 낮고 부드럽게 말했다.

 

 

“ 모스크바라서 가는 게 아니에요. 새로운 뭔가를 춰보고 싶을 뿐이에요. 돌아오면 좀 더 나아질 거예요. 모든 게 나아질 거예요. 그러니까 보내주세요. ”

 

 

그때 미샤 야스민의 얼굴이 너무나 창백하고 두 눈이 깊은 터널처럼 검게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차라리 주문처럼 그 말을 자기 자신에게 되풀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주위를 둘러싼 팬들은 모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타마라는 미샤와 그 빽빽한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불꽃을 두른 완벽한 원형의 벽이 세워져 있다는 것을 갑작스럽게 알아차렸다. 그들 중 누구도 그를 끌어내 갈기갈기 찢어버릴 수 없었다. 키스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미샤에게서 그런 슬픈 얼굴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울기 시작했다.

 

 

그때 경찰들이 마침내 도착했다. 카페 문을 뜯어내고 들어와 사람들을 해산시키고 미샤를 빼내주었다. 불법 시위와 차량 방화, 납치와 감금, 협박 등등 갖다 붙일 죄목은 넘쳐났지만 놀랍게도 쇼틀레에 모여든 미샤의 팬들 중 경찰서에 연행되거나 심문을 받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대단한 사람들, 대단한 연줄이라고 타마라는 생각했다. 딱히 틀린 생각도 아니었다.

 

 

 

 

..

 

 

 

쇼틀레는 옛날에 내가 종종 들렀던 마린스키 극장 근처의 베이커리 카페 슈톨레를 모델로 만들어낸 가상의 공간이다. 피로슈카 파이와 타르트 등을 파는 곳이었다.

 

 

 

 

이건 이시도로프 사원 가는 길. 마린스키 쪽에서 찍은 건 아니고 반대편에서 찍은 것.

 

팬들은 마린스키 극장에서 이시도로프 사원 가는 쪽으로 쭉 거슬러 올라가는 길로 미샤를 몰아갔다(거기 내가 다니던 슈톨레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설정했음)

 

 

 

사진 추가) 이게 마린스키 극장에서 이시도로프 사원으로 올라가는 바로 그 길. 2010년 겨울에 내가 찍었던 사진 한 장 찾았다. 이땐 아직 마린스키 신관이 생기기 전이니 미샤의 레닌그라드 시절과 비슷한 지리적 조건이다. 왼편 멀리 보이는 게 이시도로프 사원. 이 길 아래쪽으로 내려오면 마린스키 극장이 있다. 쇼틀레는 가운데 도로 건너 오른편 어딘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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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무용수 세레브랴코프와 미샤의 악연에 대한 에피소드를 전에 짧게 발췌한 적이 있다. 애호가들의 대화에 나오는 페름 저수지 사건에 대한 것이다. 그건 여기 : http://tveye.tistory.com/3594

 

레닌그라드 애호가들이 '미샤를 낚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보낸 첩자'로 매도하는 안무가 스타니슬라프 일린의 시점으로 묘사된 발췌문은 여기. 둘다 수용소에서 미샤를 면회할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 http://tveye.tistory.com/4521, http://tveye.tistory.com/4468

 

일린의 딸 라라의 시점으로 묘사된 미샤의 모스크바 시절 이야기인 jewels는 여기

1장 : http://tveye.tistory.com/3390
2장 : http://tveye.tistory.com/3391
3장 : http://tveye.tistory.com/3393 
4장 : http://tveye.tistory.com/3394
5장 : http://tveye.tistory.com/3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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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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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