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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writing'에 해당되는 글 149

  1. 2017.10.22 열받은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미샤 + 춤과 담배와 알콜 (18)
  2. 2017.10.15 미샤의 안무 데뷔 - 루슬란과 류드밀라 (22)
  3. 2017.10.07 가방 챙겨, 온천에 보내야겠어 (20)
  4. 2017.09.24 벚꽃동산의 죽음(추리외전) 발췌 : 렐랴와 베르닌의 대화 (16)
  5. 2017.09.17 두 아이, Open Up And Bleed - 15년 전의 글 (22)
  6. 2017.09.08 트로이라는 남자,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를 불러내는 행위, 과정의 메모 (24)
  7. 2017.09.05 알리사 (10)
  8. 2017.09.02 5년 후의 라라, 프랑스 단파 라디오, 나무 십자가 (24)
  9. 2017.08.22 Dolls(부활절 이야기 half) 04(완결). 에벨 + 짧은 메모 (33)
  10. 2017.08.21 Dolls(부활절 이야기 half) 03 : 일린 (22)
  11. 2017.08.20 Dolls(부활절 이야기 half) 02 : 미샤 (27)
  12. 2017.08.19 Dolls(부활절 이야기 half) 01 : 에벨리나 (29)
  13. 2017.08.13 가브릴로프 KGB 지국장 스페호프와 미샤의 대면 (22)
  14. 2017.08.12 유배된 미샤와 감시요원 베르닌의 첫 대면 (21)
  15. 2017.08.05 면회 - 발광 페인트 토마토 수프 (26)
  16. 2017.07.30 자기 전 뒤적뒤적 2 : 다른 책들과 오래된 소설 노트들 (10)
  17. 2017.07.26 1인칭 시점을 선택하지 않았던 이유, 4년 전의 메모 두 개 (15)
  18. 2017.06.30 파트너들, 미샤의 스무번째 생일 + 지나와 미샤 스케치 (25)
  19. 2017.06.24 밤, 어둠, 불, 잠 (24)
  20. 2017.06.17 애송이 신임감독과 폐위된 후계자의 면담 (28)
  21. 2017.06.13 모든 장미가 시들지만 (14)
  22. 2017.06.13 자기 전, 파편들 2 (2)
  23. 2017.06.12 논쟁하는 미샤와 일린, 백야와 페트루슈카, 회색 고양이 (28)
  24. 2017.06.02 무수한 밤들, 료샤와 대화 후 떠올린 것 (24)
  25. 2017.05.22 지나이다의 회상, 보드카, 진짜 중요한 것 (28)


 

 

오늘 발췌하는 글은 a4 3장 정도로 꽤 짧은 장면이다. 에피소드 전체가 아니라 일부이고 실질적인 사건이라기보다는 트로이와 미샤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전에 이 장면 다음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 따로 올렸던 적이 있다. 그 링크는 글 아래에 달아보겠다.

 

 

배경은 1976년 초. 소련 레닌그라드. 지금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트로이의 작은 아파트 안이다. 예전에 여러번 등장했던 볼쇼이 안무가 스타니슬라프 일린이 키로프 극장 게스트 안무가로 초빙된 직후이다. 일린은 문화국과 윗분들이 키로프로 밀어넣은 '모스크바' 안무가이므로 키로프 윗선에서는 당연히 그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사실 일린이 온 것은 미샤와 지나이다를 위한 작품을 안무하라는 미션을 받았기 때문인데 소설에서는 자세히 묘사하진 않았다. (..사실은 미샤를 모스크바로 낚아가려는 그쪽 윗분들과 볼쇼이 측의 밑밥깔기....)

 

 

하여튼 새로운 것에 목말라 있던 미샤는 일린과 그의 작품, 그가 무용수를 대하는 태도 등에 감명을 받는다. 그래서 같이 작업을 하게 되는데 그게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다.

 

 

미샤에게는 극장 내부 적들도 많은데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울리얀 세레브랴코프 라는 남자 무용수이다. 정통 소련 무용수, 고전적이면서도 늘씬하고 근육질이고 강건한 왕자님/혁명영웅 스타일의 미남자이다. 미샤보다는 10여년 이상 선배이고 공훈예술가인데 미샤가 입단했을 때부터 그를 눈엣가시처럼 미워해 많이 괴롭혔다. (저수지에도 빠뜨리고...) 열받은 지나가 그의 여자친구인 옥사나의 허리를 비틀어 쥐어짠 적도 있음.

 

 

발췌된 부분은, 일린이 새로 안무해주는 작품인 '백야' 연습을 하다가 트로이의 집에 들른 미샤가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

 

 

위의 화보는 아르춈 옵차렌코. 볼쇼이 무용수.

 

 

..

 

스탄카는 미샤가 일린을 부르는 애칭이다.

 

 

나타샤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소설의 여주인공이다. 여기서 일린이 안무하는 춤은 유명한 나타샤의 첫 무도회 장면이다.

 

 

고리키는 그 '막심 고리키'이다.

 

 

프로파간다 발레는 말 그대로 프로파간다 목적을 띤 발레이다. 소설도 그림도 발레도 연극도 영화도 이런 거 많았다. 소련 시절 유명한 발레들 중에도 많다.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미샤는 고개를 젖히며 어깨를 한쪽으로 돌렸다. 작년에 다쳤던 곳이 계속 아픈 것이 분명했다. 얼굴을 찡그리며 몇 차례 어깨를 돌리더니 손가락으로 아픈 부위를 꾹꾹 눌렀다. 트로이는 끓는 물을 채운 보온병을 스팀 타월로 둘둘 말아 그에게 건네주었다. 미샤는 티셔츠를 벗더니 어깨를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수증기 때문에 흰 살갗이 금세 빨갛게 달아올랐다.

 

 

 트로이는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 붉게 달아오른 어깨와 팔 위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 미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오늘 스탄카가 세레브랴코프를 자기 세션에 출입 금지시켰어. ”

 

 


 “ 무슨 세션? 백야에 그 작자도 나와? 그 나스첸카 첫사랑 역이야? ”

 

 “ 아니, 백야가 메인이긴 한데 45분 정도 밖에 안돼. 하루 공연 무대로는 모자라지. 짧은 거 두 개가 더 있어. 하나는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지. 그건 나타샤의 독무야. 나머지 하나는 고리키의 인생을 모자이크한 프로파간다 발레고. 어쨌든 당국의 비위를 맞춰주긴 해야 하니까 스탄카가 끼워넣은 거야. 오늘 그 두 개 오디션을 봤거든. 연차와 급수에 관계없이. ”

 

 “ 백야는 너와 지나이다로 정해진 거야? ”

 

 “ 응. 오디션 없이. ”

 

 “ 세레브랴코프는 왜? ”

 

 “ 그 고리키를 추고 싶어 했으니까. 그자는 스탄카를 싫어하지만 어쨌든 포노마레바가 밀어주고 있으니까 같이 작업하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했겠지. 게다가 고리키 역이라면 구미가 당겼을 거고. 얘기했잖아, 프로파간다 발레로 뜬 놈이라고. ”

 

 “ 그럼 일린에게 건방지게 굴 리가 없잖아. 왜 출입 금지당한 거야? ”

 

 “ 백야 때문에 나도 그 방에 같이 있었거든. 오디션 보러 온 세레브랴코프는 그것 때문에 꼭지가 돌았지. 난 이미 역을 받았으니까. 그 작자는 해석도 괜찮았고 춤도 꽤 잘 췄어. 아마 곱게 나갔으면 스탄카가 고리키를 줬을 거야. 근데 그 얼간이가 나가면서 내 쪽으로 왔지. ”

 

 “ 그리고? ”

 

 “ 백야 하나로는 성이 안 차느냐, 나타샤 역 때문에 온 것 같은데 굳이 오디션을 보지 않아도 역을 받을 거라고 비아냥댔지. 무도회 드레스를 입고 토슈즈를 신을 수 있을 테니 좋겠다고 하던데. 넌 그런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다고 했지만 그자는 아주 상상이 잘되는 모양이었어. ”

 

 

 미샤가 휘파람을 불었다. 별로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 재수 없게 스탄카가 그 말을 들었거든. 그래서 정색을 하면서 세레브랴코프를 내쫓았어. 앞으로 자기 세션에는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했지. 고리키는 레냐에게 줬고. ”

 

 “ 나타샤는? ”

 

 “ 니넬한테 줬어, 아마 넌 걜 모를 거야. 작년에 들어온 애라서. 설마 스탄카가 정말 그걸 나한테 줬을 거라고 생각했어? ”

 

 “ 추고 싶지는 않았어? ”

 

 “ 글쎄, 백야 하나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고 드레스는 더 싫지만. 솔직히 말하면 추고 싶긴 하지. 그 작품 모스크바에서 봤었거든, 아주 재미있는 역이야. 하지만 세레브랴코프는 그런 뜻으로 한 얘기가 아니었으니까. 스탄카가 아니었다면 난 그때 화를 내야 했을지도 몰라. 그래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

 

 “ 그럼 화가 나지 않았단 말야? 그렇게 비열하게 구는 놈한테? ”

 

 “ 좀 열받긴 했지. 근데 어차피 난 그놈을 볼 때마다 구역질이 나니까 크게 다를 것도 없었어. 내가 열받는 것과 대놓고 화를 내는 건 좀 다른 거야. 그런 상황에서 화를 내지 않으면 입장이 아주 이상해져. ”

 

 “ 일린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싸웠겠네. ”

 

 “ 한 대 갈겨야 했겠지. 포노마레바와 놀아나서 역을 따냈다는 것과 계집애 역을 추려고 안달이 났다는 건 완전히 다른 얘기니까. ”

 

 

 타월로 싼 보온병을 어깨 위로 굴리면서 미샤가 바닥에 벗어놓았던 코트 주머니를 한 손으로 뒤져 담배를 꺼냈다.

 

 

 “ 끊었던 거 아냐? ”

 

 “ 어차피 세 개비 이상 피우지도 못하는데 끊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어. 알콜이랑 똑같아. ”

 

 “ 몸에서 안 받는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해. 건강에 좋지 않을 테니까. 춤에도 방해가 될 거야. ”

 

 


 “ 춤 자체가 비정상적으로 몸을 학대하는 거야. 발끝으로 서고 근육을 비정상적으로 잡아 늘이고 뼈가 부러질 만큼 휘어대는 거라구. 그깟 술 몇 잔, 담배 몇 개비 따위 더한다고 달라질 게 뭐가 있어. ”

 

 


 “ 춤 때문에 머리가 아프거나 필름이 끊기지는 않잖아. ”

 

 


 “ 춤도 가끔 그래. ”

 

 

 

 미샤가 보온병을 내려놓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깊게 연기를 빨아들이며 눈을 감았다. 광대뼈 아래로 뺨이 살짝 패이며 콧대가 두드러지게 솟아올랐다. 트로이는 라이터와 보온병을 한쪽으로 밀어버렸다. 그의 곁으로 다가가 미간과 콧등에 입술을 가져갔다. 미샤는 잠시 호흡을 멈췄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연기를 훅 뿜어버렸다.

 

 

 “ 미안, 간접 흡연시켜서 ”

 

 


 “ 전혀 미안한 것 같지 않은 표정인데. ”

 

 


 “ 어차피 넌 나보다 열 배쯤 더 마시잖아. ”

 

 

 트로이는 그의 손에서 담배를 빼앗았다. 카펫에 구멍이 나든 말든 개의치 않고 한 모금 밖에 피우지 않은 담배를 비벼 꺼버렸다.

 

 

 

...

 

 

 

이 다음 이야기를 전에 발췌한 적이 있다. 사실은 바로 다음은 아니고... 위의 분위기대로... 트로이와 미샤의 19금 장면이 조금 있는데 그부분 지나간 후.... 세레브랴코프와의 언쟁이 생각보다 깊이 마음속에 남아 있었던 미샤가 평소에 잘 드러내지 않았던 속내를 토로하고 자신의 춤과 교조주의, 강령에 대해 얘기하는 장면이다. 그 링크는 아래 :

 

http://tveye.tistory.com/4720 : 교조주의, 강령으로서의 예술, 세 개의 메모 :

 

 

..

 

 

울리얀 세레브랴코프와 미샤의 악연에 대해서는 전에 몇번 발췌한 적이 있다. 사실 세레브랴코프 쪽에서 일방적으로 괴롭히는 편이긴 했다만... 하여튼 페름에서의 싸움과 저수지 사건에 대한 두가지 이야기 링크를 각각 아래. 하나는 트로이와의 대화, 나머지 하나는 미샤의 후원자인 드미트리 마로조프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었던 단편에서 가져왔다. 둘다 같은 페름 투어에서 일어났던 일인데 미샤는 트로이에게는 저수지 사건만 얘기하고 마로조프에게는 치고받고 싸운 얘기만 한다.

 

http://tveye.tistory.com/3594 미샤의 첫 번째 시즌, 돈키호테, 축구팀과 군대처럼

 

http://tveye.tistory.com/5469 미샤의 신입 시절, 싸움의 이유

 

 

맨날 당하는 미샤가 답답해서... 세레브랴코프의 여자친구이자 역시 미샤의 적인 옥사나가 패악을 부리자 발끈해 그녀를 혼내주는 정의의 여자사람 친구 지나이다의 이야기도 있었음. 그건 아래

 

http://tveye.tistory.com/6176 의리 넘치는 파트너 지나이다

 

 

...

 

 

 

중력을 무시하는 듯한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화보 한 장으로 마무리.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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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예전에 이 폴더에 미샤와 그의 극장 동기 레냐(내 약혼자 아님), 그리고 궁전광장과 백야, 페테르부르크에 대한 단편 Illuminated wall 전문과 배경 사진들을 올린 적이 있다. (http://tveye.tistory.com/3385)



그 단편은 아주 오래 전, 페테르부르크에 대한 향수를 담아서 썼던 글인데 초창기에 내가 구상했던 미샤가 등장했다. 거기 등장하는 미샤는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미샤와는 많이 닮은 동시에 약간은 다른 면도 있다.



그 단편은 1975년 여름, 소련 레닌그라드(지금의 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권력자의 별장에 춤추러 오라는 명령을 받은 미샤는 그것을 어기고 백야의 레닌그라드 거리를 쏘다니고 궁전광장에서 춤을 춘다. 그때 그는 동료인 레냐에게 자신이 푸쉬킨의 원작을 바탕으로 안무를 할 거라고 얘기하고 광장에서 그 춤의 일부를 보여준다. 그 작품은 푸쉬킨의 '루슬란과 류드밀라'였다. 나의 옛 단편에서 미샤는 루슬란의 적수인 악당 로그다이의 춤을 보여준다.



나는 그 이야기를 잊지 않았다. 내 마음속에서 언제나 미샤가 처음으로 안무하게 되는 발레는 그 '루슬란과 류드밀라'였다. 루슬란과 로그다이, 파를라프, 라트미르 4인의 기사들만 등장하는 40분짜리 단막 발레.



몇년 전 다시 글을 쓰고 미샤를 불러낸 후, 나는 장편 하나를 썼다. 미샤의 친구이자 애인인 트로이가 심리적 화자로 나오는 꽤 긴 소설이었는데 거기서 나는 미샤가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안무하게 했다. 아래 발췌한 부분은 미샤가 그 작품을 안무하는 과정 일부와 작품을 실제로 무대에 올리는 장면이다. 이 소설은 발레계 인물이 아닌 트로이의 시점에서 전개되므로 안무 과정 자체에 대해서는 여기 나온 정도만 적었다.



...




루슬란과 류드밀라는 푸쉬킨이 불과 스무살때 썼던 근사한 작품이다. 어린 시절 러시아 동화로 읽은 분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도 잘 읽어보면 그냥 동화는 아니다. 꽤나 멋지고 매력적인 작품이다.




안 읽으신 분들을 위해 아주 간단한 줄거리(스포일러 있습니다) : 영웅 루슬란이 아름다운 왕녀 류드밀라와 결혼식을 올린다. 그러나 결혼식장에서 수염 기른 마법사 체르노모르가 나타나 류드밀라를 납치한다. 류드밀라의 아버지는 비탄에 빠져 루슬란을 탓하고, 류드밀라를 구해오는 남자에게 그녀와 결혼하게 해주겠다고 한다. 그리하여 4명의 기사가 길을 떠난다. 주인공인 루슬란. 음침하고 파괴적인 로그다이. 좀 비겁한 파를라프. 세속적이고 선량한 라트미르. 이야기는 이 네명의 모험을 번갈아 보여주고, 동시에 마법사의 성에 갇혀버린 류드밀라의 모험도 같이 그려낸다(사실 류드밀라 얘기가 제일 재미있고 생기넘친다. 푸쉬킨은 생기 넘치는 씩씩한 아가씨 묘사를 참 잘한다) 이러저러하여 루슬란은 결국 마법사를 물리치고 류드밀라를 구해낸다. 그 와중에 루슬란을 죽이려고 달려들던 로그다이는 결투에 패해서 죽고(물귀신에게 영혼 끌려감 ㅠㅠ), 라트미르는 온갖 여색과 사치를 즐긴 끝에 도를 깨쳐서 소박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고, 비겁한 파를라프는 마녀의 도움으로 막판에 루슬란을 궁지에 몰아넣고 류드밀라를 탈취하려다 결국 실패하게 된다.



미샤는 이 재미나는 이야기 전체를 어린이 발레처럼 안무하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그가 어떻게 안무했는지는 아래 발췌본에 나와 있다.



...



에피소드 도입부에 언급되는 알렉산더 트로치는 영국 현대 작가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레딩 감옥의 발라드'는 전에 올린 적이 있다.



보리스 아사예프는 키로프 발레단 예술감독, 이반 노비코프는 볼쇼이 발레단 행정감독이다. 물론 여기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내가 만들어냈음.



...



맨 위 화보는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사진은 David Paitschadse.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미샤는 런던에 가기 전에 딱 한번 트로이의 집에 찾아왔다. 알렉산더 트로치의 소설과 오스카 와일드의 ‘레딩 감옥의 발라드’ 때문이었다. 트로치 소설에 대해서는 30분 정도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맨 처음 함께 읽었던 책이었기 때문에 얘기가 잘 통했다. 미샤는 레딩 감옥의 발라드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트로이에게 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달라고 청했다. 그는 와일드 작품을 가져왔을 때는 항상 그랬다.



 “ 낭송 테이프 구해다줄까? ”




 “ 난 네가 읽어주는 게 더 좋아. ”



 미샤는 잠시 소파에 앉아 트로이가 시를 읽어주는 것을 듣다가 창가로 가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본 적이 없는 동작이었지만 아마 백야 안무의 일부일 거라고 생각하며 트로이는 계속해서 시를 읽었다.



 한참 읽다가 트로이는 입을 다물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큰 소리로 물었다.



 “ 그게 뭐야? 그게 춤이야? ”



 미샤는 그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듯 계속해서 움직였다. 전신을 너무 지독하게 경련하며 바닥에 몸을 굴리고 있어서 트로이는 순간 그가 간질 발작이라도 일으킨 것이 아닌가 하는 공포에 질렸다.



 “ 어디 아파? ”



 무릎으로 바닥을 찧어대면서 미샤가 말했다.



 “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읽어. ”


 “ 그게 백야야? ”


 “ 아니, 루슬란과 류드밀라야. 그냥 읽어. ”


 “ 왜 와일드를 들으면서 푸시킨 시를 춰? ”


 “ 도움이 돼. 제발 읽어. ” 
 




 그래서 트로이는 떨리는 음성으로 계속 읽었다. 나중에는 아예 등을 돌리고 읽었다. 낭송을 끝내고 뒤를 돌아보니 미샤가 소파에 거꾸로 누워 머리를 바닥에 댄 채 손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 일린의 새 작품이야? ”




 “ 내가 만드는 거야. 좀 됐어. ”




 “ 안무를 한다고? ”




 “ 응, 5월에 올릴 거야. ”




 “ 전혀 몰랐다, 그쪽에도 관심 있는 줄은. 일린 때문에 자극받았어? ”




 “ 아니, 작년 여름에 골자는 잡았는데 계속 정신이 없어서 손 놓고 있었어. ”




 “ 지금이 제일 바쁜 거 아냐? ”




 “ 바쁘지. ”




 미샤는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려와 다리를 길게 뻗고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셔츠가 말려 올라가며 등이 반쯤 노출되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근육 사이로 척추 마디들이 가지런하게 튀어 올랐다. 트로이는 얼굴을 찌푸렸다.




 “ 뼈가 다 불거지네, 너무 무리하고 있는 거 아냐? 잘 챙겨먹고 다녀. ”




 “ 바빠서 그래. 백야 올리고 나면 나아질 거야. ”




 “ 백야에 런던도 모자라서 그 오싹한 춤까지. ”




 “ 별로 오싹하지 않아, 아까 그 부분만 좀 그래. ”




 “ 무슨 장면이었는데? ” 




 “ 비겁한 짓이 일어나는 장면. 그래서 기분 나쁘게 느껴지는 거야. ”




 “ 루슬란과 류드밀라라며? ”




 “ 아, 근데 류드밀라는 안 나올 거야. 아까 그건 파를라프의 춤이야. ”




 “ 뭐, 자고 있는 사람 칼로 찌르고 여자 뺏는 그 놈? ”




 “ 응, 기분 나쁘게 출 만하지? ”
 




 트로이는 창가로 가서 전날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사왔던 치킨 샌드위치와 며칠 동안 굴러다니고 있던 오렌지를 가져왔다.



 “ 좀 먹어라, 맛은 별로 없을 테지만. ”




 
 미샤가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포장지를 벗기고 반으로 쪼갰지만 입에 가져가지는 않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 왜, 변했어? 차가운데 놔둬서 괜찮을 텐데. ”




 “ 있다가 먹을게. ”




 “ 그럼 오렌지라도 먹어. ”




 미샤가 오렌지 껍질을 까서 먹기 시작했다. 잔소리를 듣기 싫어서 기계적으로 먹는 게 분명했지만 어쨌든 뭔가를 입에 넣고 있었으므로 트로이는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다. 얼굴이 더 갸름해져서 얼핏 돌아보면 우물처럼 깊은 눈만 보일 지경이었다. 한동안 가위질도 하지 않았는지 길게 자라난 머리칼이 귀를 덮고 목덜미까지 흘러 내려와 있었다. 구겨진 셔츠와 낡은 청바지를 입고 바닥에 앉아 오렌지를 먹고 있는 그 야윈 모습을 보니 근육질의 클래식 무용수라기보다는 미국 음악 잡지에나 나오는 깡마른 락 가수에나 어울릴 것 같았다. 저질스럽고 별 뜻도 없는 가사로 노래하고 기타를 치고 가죽옷을 입고 그루피들과 난잡하게 뒤엉키고 타락한 자본주의 제국의 소산인 마약이나 찔러 넣는 인간들. 그러나 미샤 뿐만 아니라 그와 갈랴와 이고리, 다른 친구들도, 심지어 알리사까지도 그자들의 음반을 모았다.



 “ 일린과는 그래도 잘 맞는 것 같네. 이제 집에도 잘 들어가고. ”



 트로이는 자신이 왜 그 이름을 입에 올리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스타니슬라프 일린을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비이성적인 질투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미샤를 볼 때마다 그 조그맣고 사근사근한 남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스탄카는 좋아. 얘기가 잘 통해. ”




 “ 지나가 불편해 하지 않아? ”




 “ 지나는 남자들과 잘 지내. 나하고도 사는데 뭐. ”




 “ 그 사람은 혼자 온 거야? 가족은 없어? ”



 그는 차마 ‘그 자식하고도 같이 자고 있어?’ 라고 묻지 못했다.



 미샤는 그의 소리 없는 질문을 눈치 채지 못한 듯 했다. 하긴 알아차렸어도 내색하지 않을 게 뻔했다.



 “ 혼자 왔어. 공연 날 모스크바에서 애들이 올지도 모르지만. ”




 “ 애들? 결혼했어? ”




 “ 했었지, 두 번. 애들은 첫 부인한테서 난 거고. 큰 애가 벌써 열 살인가 그럴 걸. ” 




 “ 별로 애 아버지처럼 안 보이던데. ”




 “ 뭐 자기가 키우지는 않으니까. 그래도 바가노바에서 특강해주는 거 보니까 어린애들 잘 다루던데. ”




 
 그래서 미샤가 고집을 부려도 잘 받아넘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일린이 이성애자라는 사실에 희미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확신은 서지 않았다.



 “ 지금 안무하는 그 춤도 일린이 도와줘? ”




 
 미샤가 반쯤 먹은 오렌지를 남은 껍질에 싼 채 샌드위치 옆에 내려놓았다. 손바닥에 씨앗을 두어 개 뱉더니 바닥에 놓고 무심하게 굴렸다.



 “ 아니. 스탄카와 나는 많이 달라. ”




 “ 잘 맞는 줄 알았는데? ”




 “ 스탄카가 잘 맞춰주는 거지. 춤에 접근하는 방식은 달라. ”




 “ 일린이 감상적이라는 거야? ”



 미샤가 조금 놀란 듯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 아, 예리한데. 어떤 사람은 솜사탕처럼 부드럽다고 했지. ”



 물론 트로이는 마로조프와의 대화를 엿들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 백야 자체가 감상주의에 경도되어 있는 소설이잖아. ”




 “ 음, 스탄카가 그런 쪽을 좋아하긴 하지. 착하고 밝아, 사람을 잘 믿고 포용력도 있고. ”




 “ 그럼 왜 페트루슈카는 그렇게 만든 거야? ”




 “ 나한테 맞춰준 거지. 페트루슈카는 그 사람 원래 작업과는 색깔이 많이 달라. ”




 “ 난 네가 그렇게 우울한 걸 추는 게 싫어. ”




 미샤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창백하고 야윈 얼굴이 낯설고 쓸쓸하게 보였다. 종종 그 얼굴에는 따뜻한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라기보다는 정교하게 세공된 짐승 조각상을 연상시키는 표정이 떠오를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그는 갓 스무 살이 된 청년이 아니라 세월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래된 사원의 유물처럼 보였다. 트로이는 그런 순간을 목격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건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거리였기 때문이다.



 막 트로이가 오한으로 몸을 움츠렸을 때 미샤가 다가와 그의 이마 위에 입을 맞췄다. 부드럽게 머리를 쓸면서 뺨을 비볐다. 
 


 “ 런던 갔다 와서 봐. ”



 미샤가 외투를 껴입고 혹한의 거리로 나간 후 트로이는 천천히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거실 바닥에는 반쯤 먹은 오렌지, 두 개의 매끄러운 씨앗, 그리고 반으로 쪼갠 채 입도 대지 않은 샌드위치가 놓여 있었다. 소파 팔걸이에는 미샤가 잊고 간 흰색 울 스카프가 걸쳐져 있었다. 그는 차나 커피도 없이 샌드위치를 모두 먹어치우고 남은 오렌지 반쪽도 먹었다. 그리고 두 개의 오렌지 씨앗도 알약처럼 털어 넣은 후 씹지 않고 삼켰다.



 그날 밤 그는 그 울 스카프를 두르고 잤다. 무겁게 밀려드는 야생 꿀 냄새를 맡으면서. 꿈속에서 그는 암청색 단추가 세 개 달린 흰 스웨터 위로 짙은 녹색 목도리를 느슨하게 늘어뜨린 채 눈보라와 안개 속을 걷고 있는 미샤 야스민을 보았다.




 ...




 5월에 미샤는 안무가로 데뷔했다. 일린이 총연출을 맡아 세 개의 모던 발레 작품을 소개한 ‘새로운 발레의 밤’에서 마지막 순서로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올렸다. 막이 올라가기 직전까지 강력한 후원자들이나 팬들조차도 미샤가 안무를 시도하는 것에 대해 불안감을 품고 있었다. 뛰어난 무용수와 뛰어난 안무가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기 때문이다.



 안전한 데뷔 방법은 유명한 원작을 간단하게 손봐 재안무한다거나 짧고 서정적인 음악을 써서 무용수의 움직임에 초점을 맞춘 가벼운 소품을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샤 야스민은 4명의 젊은 무용수를 기용해 팽팽한 플롯의 40분짜리 드라마를 만들었다. 가벼운 음악 대신 보로딘과 무소르그스키를 사용했고 순수한 움직임 자체를 위한 동작은 전혀 쓰지 않았다. 무용수들의 모든 움직임은 철저하게 주제와 플롯에 따라 흘러갔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미샤의 첫 안무작이 일린의 스타일과 비슷할 것이라고 내다보았지만 막상 무대에 올라온 작품은 완급 조절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도 없다는 듯 40분 내내 격정적으로 내달렸다. 그 작품은 잘 짜인 연극처럼 시종일관 관객들의 감정을 철사처럼 죄어대며 흥분 상태로 몰아갔다. 그 무대에서 부드러운 로맨스나 우아한 감상주의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미샤는 젊은 안무가가 빠지기 쉬운 무모하고 비논리적인 실험주의도 피해갔다. 독설가인 루바노프스카야조차 ‘매우 성공적인 데뷔작’이라는 표제와 함께 미샤가 소위 ‘새로운 춤’이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무의미한 연출가의 자기 독백에 매몰되지 않고 제대로 된 이야기를 알맞은 형식으로 풀어냈다고 평가했다.



 미샤는 푸시킨의 그 유명한 서사시 전체를 다루지 않았다. 수염 기른 마법사 체르노모르도, 동굴의 은자와 황야의 거대한 머리도, 마녀 나이나도 등장하지 않았다. 가장 아이러니컬한 사실은 제목과는 달리 미샤의 작품에 류드밀라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미샤는 오직 네 명의 기사들만을 골랐다. 루슬란, 로그다이, 라트미르, 파를라프. 납치된 류드밀라를 찾아 떠난 경쟁자들. 주인공은 여전히 루슬란이었고 그의 존재는 작품 전체의 축을 이루고 있었지만 미샤는 4명의 인물들에게 동등한 무게를 부여했다. 격정적인 2인무와 4인무, 독무를 통해 발레는 그 인물들에게 내재된 감정의 본질을 그렸다. 전형적인 영웅 주인공인 루슬란의 용기와 고결함, 파멸로 치닫게 될 로그다이의 증오와 분노, 환락에서 벗어나 소박한 삶을 택하는 라트미르의 중용과 우정, 그리고 언제나 도망치면서 기회를 노리는 파를라프의 비겁함과 공포.



 그건 자칫하면 매우 작위적이고 추상적인 묘사로 끝나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미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무대를 보면서 트로이는 왜 미샤가 자신은 일린에게 의지하지 않는다고 그토록 단호하게 얘기했는지 알 것 같았다. 미샤에게는 추상적인 개념과 감정을 매우 구체적으로 형상화해내는 능력이 있었다. 오랫동안 트로이는 미샤의 그 능력이 자신의 육체와 움직임에 한정된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 날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보면서 트로이는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샤는 인간 내부로부터 실질적인 움직임을 끄집어내고 형식을 부여할 줄 알았다. 그건 창작자의 능력이었다. 관객들은 리브레토가 적힌 팸플릿을 읽지 않고도 루슬란과 로그다이, 라트미르와 파를라프가 왜 그런 식으로 움직이는지, 그들이 표출하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이해했다. 그건 논리적이고 계산적이라기보다는 직관적으로 날아오는 메시지들이었다.



 미샤는 루슬란을 추지 않았다. 고전적이며 우아한 레오니드 핀스키에게 그 역을 주었다. 2년 선배이자 성격 연기에 능한 안톤 볼로호프에게 까다로운 파를라프 역을 맡겼고 약간 수도사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잘생긴 이오시프 본다렌코에게 라트미르를 추게 했다. 미샤 자신은 로그다이를 췄다. 트로이는 그 어둡고 파괴적인 배역이 미샤에게 매우 잘 어울린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가 무대 위에서 죽거나 고통을 당하는 역을 출 때마다 관객들이 그토록 강력한 열광에 빠져드는 것이 싫었다. 루슬란과의 격투에서 살해당하는 그 검은 기사의 최후가 너무나 냉혹하고 처참해서 트로이는 가슴 깊이 공포를 느꼈다. 그 두려움이 지나치게 실질적이고 불쾌하게 와 닿았기 때문에 며칠 후 미샤를 만났을 때 왜 너는 항상 무대에서 죽는 역을 고르느냐고 묻기까지 했다.




 “ 그런 역은 몇 개 없는데... 고전 레퍼토리는 아사예프가 맡기는 거고. ”




 “ 네가 안무한 것도 그랬잖아. 로그다이를 췄잖아. ”




 “ 음, 난 사실 파를라프를 출까 했어. 근데 아사예프가 루슬란을 추든가 로그다이를 추지 않으면 무대에 올려주지 않겠다고 협박했어. 루슬란은 레냐에게 주기로 약속했었거든. ”




 “ 넌 파를라프를 추기엔 너무 눈에 띄어, 어울리지도 않고. 관객들도 이입이 잘 안됐을 걸, 등 뒤에서 칼을 꽂는 겁쟁이 야스민은. ”




 “ 언제나 비겁한 자가 끝까지 살아남아. ”



 미샤는 예의 플라스틱 케이스에서 하얀 알약을 꺼내 삼킨 후 덧붙였다.



 “ 하긴 로그다이를 제일 먼저 안무하긴 했어. 가장 쉬웠고. 제일 어려웠던 건 라트미르였어. 이오시프가 아니었으면 스탄카에게 춰달라고 했을지도 몰라. 이젠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져서 어려웠겠지만. ”




 발레는 다채로운 감정들을 호소력 있게 표출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고 흘러갔다. 종반부에서 로그다이는 살해당해 어두운 강물 속으로 사라지고 라트미르는 우정의 키스와 함께 루슬란과 작별했다. 주인공 루슬란은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류드밀라에 대한 사랑으로 무장한 채 환희에 차 퇴장하고 어둠이 가득한 무대 위에는 슬금슬금 기어나와 주변을 배회하는 파를라프만이 남았다.



 미샤가 류드밀라를 등장시키지 않은 것은 일린이 나스첸카의 첫사랑을 생략했을 때와는 달리 매우 영리한 선택이라는 평을 받았다. 루바노프스카야는 예의 그 평론에서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 류드밀라의 존재야말로 작품 전체를 끌고 가는 보이지 않는 힘이라고 썼다. 그녀는 보통 미샤에게 적대적인 입장이었으므로 공연이 정말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세레브랴코프는 믿었던 루바노프스카야의 호의적 평에 당황했다. 그녀가 유일하게 지적한 것은 미샤가 데뷔작을 통해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는 욕구에 사로잡혀 가끔 과격한 연출을 선보였다는 것뿐이었다.



 관객들은 그 작품에 매료되었다. 젊은 무용수의 첫 안무작에는 과분할 정도로 열정적인 호응이 쏟아졌다. 꽤 많은 사람들이 보리스 아사예프에게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계속해서 키로프 무대에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편지를 썼다. 아사예프는 그 반응에 흡족해하며 6월말 백야 축제에 그 작품을 다시 올리기로 결정했다. 이반 노비코프는 그리고로비치와 함께 오직 그 공연을 보기 위해 5월에 다시 레닌그라드에 들렀는데, 아사예프를 구슬려 크레믈린 축제와 볼쇼이 무대에서 각각 한 번씩 루슬란을 올리기로 했다. 볼쇼이에서 밀어 넣은 일린 때문에 자존심이 상했던 보리스 아사예프로서는 ‘우리 골칫거리’가 ‘우리 자랑거리’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미샤에게 괜찮은 작품을 하나 더 안무한다면 다음 시즌 무대에 올려주겠다고 제안했다.



 

...




위의 발췌본은 사실 두가지 장에서 각각 가져왔다. 앞부분의 트로이와 미샤의 대화, 그리고 뒷부분의 미샤의 데뷔 이야기 사이에는 미샤의 런던 공연과 알리사의 이야기, 그리고 일린이 미샤와 지나를 위해 안무해준 백야에 대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여기서는 루슬란과 류드밀라에 대한 이야기만 발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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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샤의 루슬란과 류드밀라 안무에 대해서는 전에 세가지 정도의 이야기를 올린 적이 있다.



http://tveye.tistory.com/3385 : 빛나는 벽(illuminated wall) 전문.



http://tveye.tistory.com/5589 : 벨스키와의 면회
(여기서 미샤가 '그 순진하고 무해한 루슬란'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http://tveye.tistory.com/6138  : 별장의 스비제르스키와 미샤.
(게르만 스비제르스키가 미샤의 수첩을 훔쳐본 후 그의 춤연습을 보면서 루슬란과 류드밀라에 대해 이야기한다)



...



트로이와 미샤의 대화에 등장하는 '페트루슈카'는 일린이 미샤의 영국 무대를 위해 안무해준 솔로이다. 포킨의 원작을 각색해 꼭두각시 인형 페트루슈카의 독백 장면만 재안무한 작품인데 물론 이것도 내가 만든 버전임. 미샤가 일린과 함께 이 작품을 연습하는 장면과, 영국에서 이 공연을 보고 알리사가 소회를 밝히는 장면을 각각 발췌한 적이 있다. 링크는 아래.


http://tveye.tistory.com/6544 페트루슈카를 연습하는 미샤와 일린


http://tveye.tistory.com/5178 알리사의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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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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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7.10.07 05:35

가방 챙겨, 온천에 보내야겠어 about writing2017.10.07 05:35







오랜만에 본편 약간 발췌해 본다. 미샤의 수용소 이야기 중 3부, 친구인 일린과의 면회 장면의 일부이다. 바로 앞부분은 전에 두 토막으로 나누어서 올린 적이 있다. 아래 링크 순서대로 읽고서 보면 이야기가 더 잘 이어진다. 굳이 읽지 않아도 어차피 토막토막 발췌하는 거라 큰 상관은 없다만....



http://tveye.tistory.com/5551 수용소 면회실에서, 얼룩들
http://tveye.tistory.com/7015 5년 후의 라라, 프랑스 단파 라디오, 나무 십자가



볼쇼이 극장 안무가인 스타니슬라프 일린이 수용소에 갇혔다가 고문 쇼크로 클리닉으로 이송된 친구 미샤를 면회하며 나누는 대화 일부이다. 일린에 대한 이야기는 전에 ㅣ이 about writing 폴더에 Jewels와 Dolls 단편 거의 전문을 게시한 적이 있고, 그외에도 본편들에서 여러차례 발췌한 적이 있다. 이 수용소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수용소 이야기는 총 3부로 되어 있고 1부와 2부는 3인칭, 3부만 일린의 1인칭으로 서술된다.



...




위의 그림은 여기 발췌한 내용이랑 연결되는 건 아니고.... 오늘 본치 카페 창가에 앉아서 그렸던 소년 시절 미샤 스케치 한컷. 사진 없이 올리려니 뭔가 허전해서 :) 스케치의 미샤는 아마도 16~17살 무렵. 아직 학생 시절이다. 일린을 알게 되기 전이고(극장에 들어가고 몇년 후 일린이 키로프로 게스트안무가 초청을 받아서 왔을때 친해짐), 이 그림은 트로이랑 알게 되었을 무렵이다. 그러니 트로이가 나오는 이야기를 발췌하는 게 더 나았으려나?? 트로이가 페테르부르크(당시 레닌그라드) 토박이니까 비 주룩주룩 내리는 지금 여기 페테르부르크 날씨랑도 더 잘 어울릴텐데 ㅎㅎ



..





* 이 글과 그림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미샤는 아직도 떨고 있었다. 내게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에어컨을 꺼줘야 할 것 같았지만 단 일 초도 그 애를 소파에 혼자 놔두고 싶지 않았다. 이마에 손을 얹자 금방이라도 물집이 잡힐 것처럼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 추워? ”


 “ 별로. ”


 “ 눈 얼마나 보여? ”


 “ 잘 보여. ”


 “ 내 안경테 색깔 뭔지 말해봐. ”


 “ 안경 안 꼈잖아. 그런 거 안 통해. ”


 “ 그럼 내 머리색은? ”



 미샤가 눈을 돌려 내 머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연한 금발. 염색한 적 한 번도 없었잖아. 이제 그만해. ”


 “ 미안하지만 지난주에 물들였어. ”


 “ 그럼 빨간색인가. 지나처럼. ”


 “ 내 얼굴 알아보기는 했어? ”


 “ 가까이서 보면 윤곽은 대충 알아볼 수 있어. 색깔은 아직 구분 잘 안되지만. 곧 나아질 거래. 근데 정말 염색한 거 맞아? ”


 “ 안 했어. 떠본 거야. ”


 “ 그럴 줄 알았어. ”


 “ 넘어왔잖아. ”


 “ 그러네. 너랑 얘기하면 항상 말려들어. ”


 “ 왼쪽 다리 불편한 거지? 그것도 괜찮아진대? ”


 “ 좋아지고 있어. 어제부터 걸었으니까 그 정도면 양호하지. ”


 “ 다른 데는 괜찮아? 아까 건드리니까 아파했잖아. 열도 나고. ”


 “ 좀 자면 괜찮아져. 못 믿겠으면 올가에게 물어봐. ”


 “ 올가가 누구야? ”


 “ 여기 의사. ”


 “ 그럼 좀 자. 지금 아프잖아. ”


 “ 싫어. 면회 30분 받았잖아, 벌써 반이나 지났는데. 깨고 나면 네가 없을 거야. ”


 “ 5분만 자. 깨워줄 테니까. ”


 “ 자기 아이들에게 쓰던 수법 아냐? ”




 투덜거리면서도 미샤는 내 어깨에 좀 더 체중을 실어왔다. 열이 점점 오르고 있는데다 많이 아파서 더 이상 괜찮다고 우기기가 어려운 것 같았다. 바닥에 내려놓았던 물병을 집어 손수건을 적신 후 이마와 관자놀이를 식혀주자 그 애가 길고 깊은 숨을 내쉬며 몸을 좀 더 편하게 뻗었다.



 “ 좀 야위었는데. 가방 챙겨. 온천에 보내야겠어. ”



 그 말에 미샤가 웃었다. 여전히 그 농담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올려 목과 가슴을 가볍게 누르듯 쓸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그러게. 다시 가고 싶네, 거기 좋았는데. ”




 미샤는 이전까지 단 한 번도 그렇게 대꾸한 적이 없었다. 그건 우리 사이에 통하는 일종의 농담이었다. 76년 가을에 미샤가 어깨 부상과 우울증으로 무대에 올라가지 못하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을 때 나는 그를 카를로비 바리로 데려간 적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제대로 놀거나 휴식을 취해본 적이 거의 없는 애였다. 한적한 휴양지의 맑은 공기와 온천은 그에게 잘 맞았다. 미샤는 곧 좋아졌고 심지어 그곳에서 새 작품 초안을 짜기까지 했다.



그 이후 나는 그 애가 피곤해 보이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의기소침해 있을 때면 항상 그렇게 말하곤 했다. 가방 챙겨. 온천에 보내야겠어. 그러면 미샤는 그냥 웃거나 ‘내 휴가부터 좀 받아다 줘’ 라고 응수했는데 어느 쪽이든 기분이 풀리곤 했다.



 “ 다시 가면 되지. 나오면 같이 가. ”


 “ 그래, 데려가. ”



 마지막 말은 잠에 취해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나는 잠든 그 애의 몸을 소파 위로 길게 눕히고 머리를 내 무릎 위로 올려놓았다. 그자들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면 시계를 가리키며 아직 15분이 남아 있다고 말해줄 것이다. 그 15분 동안은 아무도 그 애를 내게서 떼어놓을 수 없었다.




..





 미샤는 5분도 지나지 않아 깨어났다. 눈을 뜨지도 않은 채 손부터 뻗어 주변을 더듬었다. 내 팔이 만져지자 마음을 놓은 듯 천천히 눈을 떴다. 많은 사람들이 미샤를 도도한 성격 때문에 다가가기 힘든 인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애는 내게 언제나 다정하게 굴었다. 키로프에서 처음 만나 백야를 작업할 때 지나이다는 ‘저 바보가 저렇게 다른 사람 말을 잘 듣는 건 처음 봐요. 특히 자기보다 나이 많은 남자. 감독이나 선배들 말은 정말 안 듣는데’ 라고 말했었다. 미샤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내게 거의 완전한 신뢰를 보였기 때문에 나는 지나의 말에 조금 놀랐다.




 이후 그 애를 좀 더 잘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게 미샤에게는 아주 드문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그렇다고 미샤가 내게 눈에 띄는 애착을 표시한 적은 없었다.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의존하는 모습을 드러내느니 네바 강에 뛰어내릴 애였다. 그랬기 때문에 내가 떠나지 않고 남아 있다는 사실에 그렇게 안심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철사로 죄는 듯 아팠다.



 “ 좀 더 눈 붙여도 괜찮아. 아직 시간 남았어. ”


 “ 매일 얼마나 많이 자는지 알면 놀랄걸. ”


 “ 안 놀라. 넌 원래 아침에 못 일어나잖아. 라라도 알아. 아침에 너 깨우지 말라고 나한테 잔소리를 해댔지. ”


 “ 지금은 아침이 아니잖아. ”




...



일린이 미샤를 카를로비 바리로 데려가는 장면도 전에 짧게 발췌한 적이 있다. 이건 트로이가 등장하는 장편에 나온다.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5541

이 링크로 가면 카를로비 바리와 비엔나에 내가 갔던 이유에 대한 메모도 같이 붙어 있다.



(사실... 카를로비 바리는 본편 소설들을 위한 half 밑자료 소설에서 게르만 스비제르스키가 미샤를 데려가서 환락을 즐기는 곳이기도 했다 ㅠㅠ 물론 일린은 그런 거 모름... 미샤도 크레믈린 아저씨랑 온천 가는 건 싫었겠지만 친구인 일린이랑 온천 가는 건 좋았을 테니 별 말 안했을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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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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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한두번 발췌하기도 하고 언급한 적이 있지만 나는 미샤가 나오는 가브릴로프 본편을 쓰다가 글이 잘 안 풀려서 추리소설 외전을 한편 쓴 적이 있다. 이것도 배보다 배꼽이 더 커져서 500페이지를 육박하는 장편이 되어버렸는데, 가브릴로프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실제 본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대로 나오지만 완전한 외전이다. 즉, 이 추리외전에서 누가 죽거나 누구를 죽이거나 해도 실제 본편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제목은 '벚꽃동산의 죽음'이라고 장난으로 가제를 붙였다가 그대로 제목이 되었다. 서무의 슬픔도 그렇고 이 외전도 그렇고 장난치는 글은 쉽게쉽게 쓰기 때문이다.



이 추리소설의 주인공은 미샤라기보다는 렐랴이다. 서무의 슬픔 시리즈를 보신 분들이라면 가브릴로프 최고 미녀이자 엄친딸이며 미샤를 사모하지만 은근히 허당이고 실속도 없는 렐랴 비슈네바를 기억하실 것이다. 그녀의 성은 내가 좋아하는 무용수 디아나 비슈뇨바에서 따왔다. 다만 강세를 앞으로 옮겨서 비슈뇨바가 아니라 비슈네바로 만들었음. 제목의 벚꽃동산(비슈네브이 사드)은 렐랴네 집안 별장이 있는 언덕 이름이기도 하고 렐랴가 편집장으로 있는 잡지 이름이기도 하다. (물론! 원래는 체호프의 희곡 제목입니다)



두번째 주인공은 역시 서무 시리즈에 나왔던 우리의 가엾은 단추 집사 다닐 베르닌이다. 이 외전에서는 서무 시리즈와는 상당히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렐랴와 베르닌은 이 추리외전에서 이른바 '탐정'의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미샤도 나온다. 꽤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애초에 이 추리소설 자체가 미샤 때문에 시작된다. 가브릴로프에 극장 감독으로 부임해온 미샤를 보고 한눈에 반한 렐랴가 그를 꼬시기 위해 별장에서 만찬을 개최하게 된 거라서.... 그러나 우리의 렐랴는 교양있는 아가씨인 탓에 미샤 하나만 초대하면 너무 속보이니까 동네의 유력인사들을 여럿 같이 초대하게 된다. 미샤와 극장장을 비롯한 가브릴로프 극장 사람들, 정교 수도원 신부, 의사 등등. 그리고 kgb 직원 다닐 베르닌.



우리의 단추남 다닐 베르닌은 렐랴 맘에 안 들어서 초대하기 싫었던 상대이지만 kgb국장인 스페호프가 미샤를 감시해야 한다면서 억지로 파티에 밀어넣어버린다. 그리고 전형적인 추리소설 플롯대로 흘러간다. 즉, 폭우로 인해 손님들이 모두 별장에 갇히고, 한밤중에 시체가 발견되고... 등등~



이 소설을 쓴 건 사실 가브릴로프 본편이 너무 안 풀려서 장난치듯 그 세계를 한번 축조해보자고 생각해서 쓴 거였는데... 결국 또 불타올라 열심히 썼었고... 이거 끝나고 가브릴로프 본편 쓰려다 또 글이 잘 안 풀려서 '그럼 또 놀지 뭐' 하면서 쓴게 서무의 슬픔 시리즈... 그것도 불타서 30편 넘게 썼었다. 근데 정작 진짜 본편은 아직도 100여페이지 밖에 못 썼어 엉엉...



아래 발췌한 에피소드는 추리소설 매우 전반부. 만찬이 끝나고 폭우 때문에 렐랴의 별장에 머무르게 된 손님들. 렐랴는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극장 수석안무가이자 미샤가 오기 전까지는 차기 예술감독 후보로 거론되었던 니콜라이 레베진스키와 함께 덧창을 닫으러 간다. (레베진스키도 서무 시리즈에 나왔습니다 ㅋㅋ) 레베진스키는 렐랴보다 스무살 넘게 나이가 많은 바람둥이인데 전부터 최고미녀 렐랴를 짝사랑해오고 있었음.



예전에 이 추리소설 전반부 다른 에피소드를 두개 발췌한 적이 있었다. 궁금하신 분들은 먼저 읽어보셔도 됨. 나중에 읽어도 크게 상관없음.



바로 여기 :

http://tveye.tistory.com/3738 렐랴와 베르닌, 코즐로프



서무 시리즈는 이 블로그에 '서무의 슬픔'이라는 폴더가 따로 있어서 거기 가면 0편부터 쭉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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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아나 페트로브나는 렐랴의 본명과 부칭이다. 존대할때 이렇게 부칭을 붙여 부른다.



다냐는 다닐 베르닌의 애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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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위의 고양이 사진은... 소설과는 별 상관없지만 그냥 귀여워서... 사진 안 올리려니 뭔가 허전해서... 렐랴도 미샤도 좀 고양이 같은 구석이 있는 미인들이므로 갖다붙여 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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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이 늦어질수록 비바람이 점점 더 심해졌기 때문에 렐랴는 데니스와 레베진스키의 도움을 받아 덧창을 모두 내렸다. 데니스에게 1층을 맡기고 렐랴는 레베진스키와 함께 좀 더 까다로운 2층으로 올라갔다. 덧창을 모두 잠그고 계단으로 내려가려는데 레베진스키가 조심스럽게 렐랴를 불렀다.



 “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할 말이 있어요. ”


 “ 얘기하세요. ”


 “ 잠깐만 여기서. 아래는 시끄러우니까요. ”


 “ 전 거실이 더 좋은데. 그건 그렇고 왜 갑자기 그렇게 부르시는 거예요? 내내 렐랴라고 불러놓고. ”


 “ 이렇게 멋진 만찬을 준비한 여인에겐 그 격에 맞는 호칭이 필요하니까요. 렐랴 동지라고 부를 수야 없죠. 정말 훌륭한 만찬이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초대해줘서 고마워요. ”


 “ 왜 갑자기 예브게니 오네긴에나 등장할 법한 문장을 늘어놓으시는지 모르겠네요. 어쨌든 만찬이 마음에 드셨다니 저도 기뻐요. 그럼 이제 내려갈까요? ”


 “ 아니, 잠깐만요... ”




 레베진스키가 그녀의 어깨에 한 손을 가만히 올려놓았다. 손이 차가웠다. 덧창을 닫았기 때문이겠지만 렐랴는 그 냉기가 싫었다. 손을 뿌리칠까 하다가 호기심 때문에 잠깐 내버려두기로 했다.



 “ 꼭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그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문제가 생길 거예요. 보기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니까. ”


 “ 누구 말이죠? 뭐가 그 사람이고 뭐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거예요? 전 이렇게 말을 돌리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할 말이 있으면 속 시원하게 털어놓으세요. ”
 



 레베진스키는 당황한 듯 잠깐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극장에서는 폭군처럼 구는데다 사교성이 좋고 약간 뻔뻔한 타입이었기 때문에 여자 앞에서 그렇게 쩔쩔 매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하긴 레베진스키는 렐랴 앞에서는 언제나 그랬다.




 “ 야스민 말입니다. 그 사람 감시 대상이에요. 베르닌이 그냥 와 있는 게 아니에요. 파리에서도 스파이 혐의로 체포됐던 거라는 얘기가 많아요. 사상도 불순하고. 원래 즉결처형 판결 받을 뻔했는데 벨스키가 힘을 써서 빼내준 거예요. 우리야 극장에서 공적인 업무로 얽히는 사이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잖아요. 절대 가까이 하지 마세요. 키로프에서도 발레단 전체에게 서명까지 받았어요, 저 친구와 불순한 사상을 공유한 적 없다고. 당신처럼 순수한 여자가 가까워져서 좋을 사람이 아니에요. ”


 “ 새로운 얘긴 하나도 없네요. 다 알고 있는 얘긴데. 그 중 절반은 헛소문이고. 누구와 친해지든 말든 그건 제가 결정할 일이에요. 당신은 제게 그런 충고를 할 자격이 없어요. 이제 그만 내려갈까요? ”


 “ 렐랴. ”




 레베진스키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자기 쪽으로 돌려세웠다. 처음으로 렐랴는 그의 양쪽 관자놀이에서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퇴색한 자주색에 가까운 갈색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레베진스키는 외모에 꽤 신경을 썼는데 점차 숱이 적어지는 갈색 머리도 꼼꼼히 빗어 관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목구멍까지 ‘당신 염색했어요?’ 라는 질문이 올라오는 것을 꾹 참았다. 게다가 향수 냄새도 어찌나 짙은지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 그런 말은 좀 서운하군요. 내겐 그 정도 자격쯤은 있다고 믿었는데. ”


 “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죠? ”


 “ 다 알고 있으면서 그런 표정을 짓다니. 세상 물정은 하나도 모르는 꼬마 아가씨가 어떻게 이럴 때는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이해가 안가. ”


 “ 이건 또 뭐예요? 왜 또 반말을 하는 거예요? 혼자 연극 대사라도 읊고 있는 거예요? 이 손 치워요. ”


 “ 이만하면 내 마음을 받아줘도 되지 않아? 오늘 하루라도? ”




 레베진스키가 키스를 하려고 했을 때 렐랴는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래도 레베진스키가 어깨를 놔주지 않았기 때문에 렐랴는 너무 화가 나서 하마터면 온 별장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손님들 앞에서 낯 뜨거운 장면을 연출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꾹 참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레베진스키가 그녀를 안고 복도 벽으로 밀어붙였을 때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렐랴는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며 그의 뺨을 철썩 때렸다.




 “ 그만 하라니까요, 감옥에 처넣을 거야! ”



 “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괜찮아요? ”




 누군가가 급하게 달려 올라와 그녀에게서 레베진스키를 떼어놓았다. 렐랴는 다리가 풀려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잠깐 혼미해진 정신을 수습한 후 그녀는 자신의 구원자가 누구인지 확인하려고 고개를 들었다.




 ‘ 제발 미샤는 안 돼. 이런 꼴 보여줬다간 만사 끝이야. ’




 다행히 미샤는 아니었다. 의외로 다닐 베르닌이었다. 레베진스키는 급하게 계단을 내려가 버린 후였다. 아니면 복도를 돌아 자기 방으로 숨었는지도 몰랐다. 베르닌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 일어설 수 있어요? ”



 “ 좀 잡아줘요. ”




 상대가 베르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자 렐랴는 마음이 놓였다. 베르닌의 손을 잡고 일어선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며 가능한 한 침착하고 도도하게 말했다.




 “ 저 사람 보드카를 너무 많이 마셨어요. 술 깨면 부끄러워하게 되겠죠. ”


 “ 전 아무 것도 못 봤습니다만. ”




 렐랴는 잠깐 베르닌의 광택 없는 단추 같은 눈을 마주보면서 이 남자가 정말 신사답게 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블라지미르 스페호프 식의 야비한 KGB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인지 의문했다. 전자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베르닌은 이 집안에서 목격한 모든 일을 스페호프에게 보고할 게 뻔했다. 갑자기 부아가 치민 렐랴는 자기도 모르게 불쑥 물었다.



 
 “ 다냐, 왜 거기 들어갔어요? 당신도 모스크바에서 공부했잖아요. 거기서 스페호프와 알게 된 거예요? ”




 베르닌은 어깨를 으쓱했다. 많이 듣는 질문인 모양이었다. 스페호프는 그를 급진적인 대학생들의 모임에도 쑤셔 넣곤 했는데 의외로 친하게 지내는 젊은이들도 몇몇 있었다.




 “ 그냥 그렇게 됐어요.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는 돌아와서 알게 된 거고요. ”


 “ 법학 공부했잖아요. 모스크바에서 취직할 수도 있었을 텐데. ”


 “ 중퇴했어요. ”


 “ 지금 하는 일이 좋아요? ”


 “ 자기 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당신이나 저 무용수 한둘만 제외하면 다 비슷하죠. ”


 “ 그건 너무 슬픈 일이잖아요.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굳이 이렇게 해야 해요? 당신이 거기서 온 게 아니라면 훨씬 더 좋았을 거예요. ”


 “ 글쎄요, 제가 어디서 왔든 당신은 별 관심 없었을 거예요. ”




 렐랴는 베르닌과 가까이 마주서서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잠깐 그의 무감각한 검은 눈에 부싯돌이 맞부딪치듯 밝은 불꽃이 일었다.




 “ 나 같으면,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이런 만찬을 열지는 않았을 거예요.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밤늦게 극장으로 찾아갔을 거예요, 그 사람은 늦게까지 남아서 일하거든요. 아니면 아침 10시에 즐라타야 강변으로 갔을 거예요. 스타브로프가 그에게 아침 산책을 처방했으니까. 매일 걷고 있죠. 뛰는 편이 더 좋겠지만 아직 전력질주는 못하는 상태라서. 의사 선생이야 이른 아침을 의미한 거겠지만 극장 사람들은 다들 야행성이니까요. ”




 렐랴는 대체 이 별장 안에 있는 손님들 중 자신의 짝사랑을 눈치 챈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 건지 의아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황하거나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그녀는 다닐 베르닌을 위협적인 존재로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 정말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는 것 같군요. 조언은 고맙지만 당신 보고서에 이름을 올리고 싶지는 않아요. ”


 “ 아, 이름이야 언급되겠죠. 하지만 그게 전부예요. 게다가, 우린 당신이 그 사람과 가까워지는 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좋은 일이죠. ”


 “ 왜요? ”


 “ 당신은 좋은 환경에서 자란 좋은 사람이니까요. 야스민이 당신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기엔 당신은 아주 확고한 사람이니까요. 그 반대일 수는 있겠지만. ”


 “ 보안위원회에서 저를 반동분자 말썽꾼을 감화시킬 만큼 훌륭한 여자로 봐주고 있다니 영광이라고 생각해야 하나요? 아까 도와주지 않았다면 당신도 벌써 따귀 한 대 맞았을 거예요. ”




 베르닌은 소리 없이 웃었다. 어쩐지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렐랴는 당장 그 뻔뻔한 남자를 발로 차서 폭풍우 속으로 내쫓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대신 그녀는 계단 쪽으로 몸을 돌리며 정말로 궁금해진 것을 물었다.




 “ 그렇게 말을 잘 하면서 왜 평소에는 그렇게 어눌하게 굴어요? ”


 “ 얘기하고 싶을 때만 하니까요. ”


 “ 거기서 나와요. 그럼 얘기하고 싶어질 때가 훨씬 많아질 거예요. ”


 “ 언젠가는. 지금은 안돼요. 이제 그만 내려가시죠. 어르신들이 과음하고 있던데. ”




 렐랴는 거실로 내려왔다. 베르닌의 말대로 과음한 먀흐킨은 소파에 누워 끄덕끄덕 졸고 있었다. 쿠즈네초프는 아직도 미샤를 붙잡고 잘 돌아가지 않는 혀로 끊임없이 장광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워낙 술이 센 사람이었기 때문에 렐랴의 생각보다 많이 마신 것 같았다. 데니스와 타마라는 전임 감독과 신임 감독의 논쟁에 진력이 났는지 구석 소파에 딱 붙어 앉아 가벼운 애정 행각을 벌이는 중이었고 료샤 자이체프는 혼자서 보드카를 따라 마시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타마라와 데니스가 아니라 미샤 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갈색 눈에 우울한 적의가 어려 있었다. 렐랴는 한숨을 쉬면서 자신의 손님들은 미샤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




맨뒤에 등장한 이름인 료샤 자이체프의 료샤는... 내 친구 료샤에게서 이름을 따온 건 아닌데... 어쩌다보니... 그 이름 흔해서 ㅠㅠ 이 사람은 가브릴로프 발레단 무용수이다. 발레단 수석무용수 커플인 데니스와 타마라(이 둘은 서무 시리즈에도 나왔음)의 소꿉친구이다.



근데 이런 인물이 나온다는 것은 내 친구 료샤에겐 비밀이다. 왜냐면 이 소설도 그렇고 가브릴로프 본편도 그렇고 이 료샤란 남자가 어느 정도 중요 인물인데 좀 열등감 있고 찌질한 구석이 있어서 ㅠㅠ 가브릴로프 본편은 아예 1장 자체가 이 료샤 자이체프의 1인칭 서술로 시작된다.



...



요즘 하도 글이 안 써지니... 언제 이 추리소설을 전체 연재해볼까 생각 중이다. 아직은 생각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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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아주 오래 전에 나는 스타차일드 시리즈라는 제목의 옴니버스 단편들을 썼었다. 27개의 단편과 두세개의 크리스마스단편, 특별편 등으로 구성된 시리즈였는데 각 단편들은 독립적인 이야기들이었고 그 안에서 완결구조를 지녔지만 결국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세계는 점차 친밀해지고 깊어지고 동시에 확장되었다. 시리즈의 끝은 내지 않았다. 중간에 입사를 하게 되었고 회사를 다니면서도 몇편 더 썼지만 시간에 쫓기고 여유를 잃게 되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나이를 먹고 세상에 스며들게 되면서 거의 자연스럽게 이 시리즈는 더 쓰지 않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시리즈의 주인공은 열여섯 살의 소녀였기 때문이다. 상당한 문제아 소녀. 본명은 미나. 그녀의 펑크 로커 친구가 붙여준 이름은 카르멘. 빨간 곱슬머리와 하늘빛 푸른 눈동자의 작은 소녀. 별명은 펑크 폭력녀. 마약 중독과 가출 경력이 있는 아이. 하지만 부드럽고 달콤하고 격렬한 아이. 결국은 학교로 돌아온 아이. 시인. 카르멘.

 

 

당시 나는 카르멘의 모든 것을 이해했고 그녀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다. 지금은? 노력한다면. 하지만 이미 그건 자연스러운 시선은 아닐 것이다. 나는 지금도 이 시리즈를 쓰라고 한다면 뒷이야기들을 쓸 수 있지만 아마 그러고 싶지 않을 것이다. 카르멘의 이야기들은 그 순간의 나였기에 쓸 수 있는 글들이었다. 지금의 나라면 조금 다른 식으로 쓰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건 이미 카르멘의 이야기들이 아닐 것이다. 저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으면서도 다르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방식도 마찬가지이다. 동일하면서도 다르다. 문체도 조금 다르다. 나는 이 시리즈를 통해 단편들을 쓰고 있었다. 나에게 이 시리즈는 단편을 쓰는 연습이었고 무엇보다도 사람들과 그 관계에 대해 쓰는 일이었다.

 

 

전에 몇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미샤를 처음 등장시켰던 것도 이 스타차일드 시리즈의 단편 중 하나였다. 그때 미샤는 뉴욕의 주요 발레단과 협업해 작품을 올리는 소련 레닌그라드의 키로프 발레단 무용수이자 안무가로 등장했고 카르멘의 친구이자 동거인인 펑크 로커 커트와 하룻밤을 보냈다. 미샤는 이 시리즈의 후반부 단편 중 하나에 다시 등장했다. 그 이야기는 전에 따로 발췌해 올린 적이 있다. 바로 미샤가 파리에서 감시를 피해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에피소드였다. 지금 쓰고 있는 본편들의 직전 프리퀄이나 마찬가지의 이야기인데 그 소설을 쓴 게 거의 13~4년쯤 전이었다.

 

 

그러고 보니 미샤가 처음 나왔던 단편의 아주 일부를 발췌한 적이 있다.

http://tveye.tistory.com/5498 몇 발짝 떨어져 있을때, 15년 전

 

 

파리의 미샤에 대한 얘기 대부분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5413 어둠 속에 머물며, 아스토리아 호텔

 

그리고 미샤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고 이 시리즈의 두 주인공 중 하나인 락 가수 커트에 대한 단편도 어느 정도 발췌해 올린 적이 있다. 그건 아래 : 

단 한 잔의 물, Not enough : http://tveye.tistory.com/4774

 

 

아래의 이야기는 시리즈의 14번째 단편이다. 거의 딱 중간 단계의 에피소드이다. 주인공은 카르멘. 그리고 동급생인 데본이라는 소년이다. 글을 썼을 당시는 콜럼바인 총격이 일어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초반부에 잠깐 등장하는 마크는 카르멘의 동급생이고 이른바 엄친아로 소문난 학교 최고의 인기남이다. 미식축구, 공부, 외모, 집안 다 갖췄음. 카르멘을 좋아해서 집적거리는데 카르멘은 그를 차별주의자에 역겨운 부르주아라 생각해 매우 싫어한다. 이 이야기의 배경에서 카르멘은 집을 나와서 친구인 펑크 로커 커트와 동거하고 있다. (물론 아주 플라토닉한 관계임)

 

 

에피그라프로 인용한 시는 비트족 시인 앨런 긴스버그의 howl이다. 저때도 지금도 내가 무척 좋아하는 시이다. 실은 그래서 미샤가 등장하는 단편 'illuminated wall'에도 다른 일부분을 에피그라프로 썼고 트로이와 미샤가 나오는 소설 초반부에도 마지막 연이 나온다.

 

 

제목인 open up and bleed는 이기 팝의 곡에서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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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 Up And Bleed

 

 

 

 

 

 

 

 

I saw the best minds of my generation destroyed by
madness, starving hysterical naked,

who wandered around and around at midnight in the
railroad yard wondering where to go, and went,
leaving no broken hearts,

 ... Allen Ginsberg, Howl ...

 

 

 

 

1981년 6월.

 

 

 

 그 날 아침 카르멘은 소호의 레코드 가게에 들러 래츠의 1972년 라이브 앨범과 커트 트리뷰트 앨범을 샀다. 그 날은 목요일이었고 카르멘은 인디언 화가 레스와 저녁 약속이 있었다.

 

 

 햇살이 보석처럼 찬란하게 쏟아지는 날이었다. 초여름이었고 아침부터 거리에는 활기가 넘쳤다. 지하철역을 나와 학교를 향해 걷고 있는데 클랙션이 울렸다. 마크가 차를 세우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 타, 같이 가자. ” 

 


 “ 됐어. ”

 

 


 “ 요즘 왜 그래? 나하고 정말 말도 안 할 거야? ”

 

 

 

 카르멘은 마크를 가만히 쏘아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커트의 아파트에 있다는 사실을 엄마에게 고해바친 것이 마크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엄마가 얼마나 냉정하고 역겨운 행동을 하는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커트는 자세히 얘기해주지 않았지만 카르멘은 엄마가 그에게 어떤 식으로 굴었을지 상상하면 화가 나서 토할 것 같았다.

 

 

 그녀는 말없이 차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러자 마크가 차에서 내려 따라왔고 카르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내뱉었다.

 

 

 “ 꺼져. ”

 

 

 마크는 그녀를 돌려세웠다. 화난 얼굴은 아니었지만 카르멘은 그 얼굴에서 엄격하고 순수한 질투를 보았다.

 

 

 마크가 낮고 조용하게 물었다.

 

 

 “ 그 늙어빠진 호모새끼랑도 잤니? ”

 

 

 그녀는 마크의 따귀를 때렸다.

 

 

 그들은 학교로 진입하는 가로수길에 서 있었다. 등교하던 아이들이 수군거리며 시선을 던졌다.

 

 

 카르멘은 불타는 듯한 눈으로 마크를 노려보며 말했다.

 

 

 ‘ 넌 더러운 속물이야. 가서 치어리더들하고나 뒹굴지 그래. “

 

 

 그리고는 그녀는 등을 돌려 걸어갔다, 교문을 들어서기가 무섭게 늘씬한 부르주아 공주들의 공격 목표가 되리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          *          *

 

 

 


 그건 그녀의 눈에 있었다. 사로잡힌 듯 절망적이고 뜨겁게 빛나는 눈, 믿을 수 없을 만큼 고독하고 언제나 화난 눈. 죄수들이 감옥 창문 사이로 보는 청명하고도 가혹한 하늘의 광채.

 

 

 

 그는 그녀가 역겹도록 미끈한 귀족 개자식을 후려갈기고 교문을 들어서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눈부신 미모와 명품 브랜드로 치장한 상류층 아가씨들이 그녀에게 시비를 거는 것을, 그녀가 가방으로 상대 여자애들을 두들겨 패지 않으려고 억지로 참는 것을, 지나가던 상담 교사가 그녀를 불러 세워 너덜너덜한 넝마 같은 옷차림에 대해 주의를 주는 것을, 아이들이 홍해가 갈라지듯이 그녀의 옆을 피해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항상 그랬다. 그는 2년 동안 그녀를 보았다. 한 학기를 빠진 후 돌아온 그녀는 더욱 외롭고 절망적인 모습으로 위선적 얼굴들 사이를 배회하고 있었다.

 

 

 위선. 교만. 허위. 더러운 우월 의식.

 

 

 그는 몇 주 전에도 영사실에 불을 질렀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았다. 그의 내부에서 분노와 증오가 불처럼 탔다. 그는 위선적인 얼굴들을 증오했고 아름다운 대리석 성처럼 솟은 이 학교를 경멸했다.

 

 

 그건 그녀의 눈에도 있었다. 따돌림 당하고 몰이해되고 거친 울분으로 가득 찬 눈. 하지만 수천수만 명 사이에 끼어 있어도 불꽃처럼 타올라 거리를 텅 비게 만드는 눈.

 

 

 오로지 그녀만이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오로지 그녀만이 그와 함께 이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말없이 그녀와 함께 기하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식당으로 내려가는 그녀를 붙잡았다.

 

 

 


*          *          *

 

 

 


 “ 뭐야? ”

 

 

 팔목을 빼려고 힘을 주며 카르멘이 돌아섰다.

 

 

 “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 ”

 

 


 “ 해. ”

 

 

 검은 눈이 날카롭게 번쩍였다.

 

 

 “ 여기서는 안 돼. ”

 

 


 “ 그럼 꺼져. ”

 

 

 짜증스럽게 카르멘이 쏘아붙였다. 그녀는 한쪽 어깨에 가방을 메고 있었다. 오후 수업을 빼먹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고 무척 배가 고팠다. 그리고 잡힌 팔목이 아팠다. 그녀는 상대방과 전혀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 잠깐이면 돼. ”

 

 

 그녀는 헐렁한 티셔츠 사이로 들이밀어진 차갑고 딱딱한 물체를 느꼈다.

 

 

 “ 학교에 권총을 가지고 다니는 게 습관이니? ”

 

 

 그녀는 웃음기도 없이 농담처럼 물었다.

 

 

 상대는 대꾸하지 않았다. 더욱더 그녀의 팔목을 아프게 비틀었을 뿐이었다.

 

 

 “ 좋아, 얘기를 하자. ”

 

 

 허리의 맨살에 권총의 차디찬 감촉을 느끼며 카르멘은 걸음을 내디뎠다. 그녀는 발 아래 닿는 땅을 느낄 수가 없었다.

 

 


*          *          *

 

 

 


 그들은 계단들을 지나 본관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은 텅 비어 있었다.

 

 

 “ 얘기해. ”

 

 

 카르멘은 태연한 음성을 내려고 애쓰며 말했다. 그녀는 태어나서 총격전을 경험한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하지만 허리에 총구가 와 닿은 적은 없었다. 아마도 가짜 총일 것이다. 혹은 장전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 내겐 권총이 두 자루 있어. ”

 

 

 그 음성은 나직하고 부드러웠다. 그녀는 단 한 번도 그 아이가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니, 단 한 번도 그 아이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단지 그의 이름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데본 펠. 그는 따돌림을 당하는 소년이었다. 그에게는 동양인과 흑인의 피가 4분의 1씩 섞여 있었는데 피부색과 혈통에 연연하는 더럽게 잘난 학생들은 언제나 그 사실을 놓고 쑥덕거렸다. 그의 돈 많은 부모는 아들을 아이비리그에 진학시키기 위해 비싼 사립학교에 보냈지만 그건 실수였다. 카르멘은 작년 초에 그가 시비를 걸어오는 남학생 세 명과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는 대걸레 자루를 휘어잡고 격렬하게 싸웠다. 그녀는 싸움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몰랐다. 한참 헤로인에 흠뻑 취해 라커룸으로 어슬렁거리며 들어가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그것이 아이들의 놀림과 시비의 또 다른 이유가 되었다. 데본에게는 친구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혼자 점심을 먹었다. 성적도 좋은 편은 아니었다. 어떤 아이들은 그가 악마주의 교단에 들어 있다고 했고 어떤 아이들은 그가 정신병원 경력이 있을 거라고 떠들어댔다.

 

 

 카르멘은 물끄러미 데본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는 짧게 깎은 검은 머리와 가늘고 날카로운 검은 눈, 음울한 입매를 갖고 있었다. 피부는 그을린 듯한 엷은 갈색을 띠고 있었다. 더운 6월 날씨에도 불구하고 목까지 올라오는 검은 재킷을 입고 있었고 등에는 검은색 가방을 메고 있었다.

 

 

 “ 그런데? ”

 

 

 데본은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도 않고서 천천히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 학교 개자식들을 쏴 죽여 버리자. ”

 

 


*          *          *

 

 

 


 그녀의 허리에 닿아 있던 권총은 이제 데본의 가방 속으로 돌아가 있었다. 하지만 데본은 한 손에 길이가 족히 8인치는 되어 보이는 블레이드 나이프를 쥐고 있었다.

 

 

 “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지? ”

 

 

 데본은 천천히 나이프를 펴서 칼날을 햇살에 비춰보며 대답했다.

 

 

 “ 네 눈에 증오가 있어. ”

 

 

 카르멘은 데본의 가방과 나이프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를 이해했다. 그의 외로움, 그의 절망, 그리고 그의 분노를, 그의 경멸을 이해했다. 그녀 자신도 기관총으로 얼간이들의 뒤통수를 날려버리고 싶어 했던 적이 있었다.

 

 

 “ 영사실에 불을 지른 것도 너니? ”

 

 


 “ 그래. ”

 

 

 그건 지루하던 학교생활에서 유일하게 재미있었던 일이었다. 2층 영사실에서 불길이 치솟았고 소방차가 학교 안까지 들어왔었다. 아무도 말이 없고 음울한 외톨이 소년이 그런 짓을 했으리라고 추측하지 못했다.

 

 

 그녀는 옥상의 시멘트 바닥에 다리를 뻗고 앉았다. 학교 옥상은 레스의 옥상보다 몇 배는 넓었다. 그리고 밝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있는 곳이 레스의 옥상이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랬다.

 

 

 “ 언제 할 건데? ”

 

 


 “ 지금. ”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야. 카르멘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데본의 눈을 보았다. 맹렬하고 음울한 검은 눈. 하지만 낯익은 눈.

 

 

 “ 내가 하지 않겠다면? ”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데본의 입술 양 끝이 희미하게 치켜 올라갔다. 아마도 미소를 지으려고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카르멘은 그가 웃는 방법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8인치 칼날이 그녀의 턱 아래를 부드럽게 스쳤다.

 

 

 “ 연습 삼아 너부터 죽일 거야. ”

 

 

 그녀는 칼날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숨결이 약간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데본은 심각하고 어두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 내 선의를 거부한다면 너도 저것들하고 다를 게 없으니까. ”

 

 


 “ 네가 선의로 그런다는 건 나도 알아, 데본. ”

 

 

 그는 마치 자기 이름을 처음 듣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카르멘은 눈을 깜박였다. 데본이 한 말은 아마 옳을 것이다. 그녀의 눈에 증오가 있다. 그녀의 눈에 분노가 있고, 자신에게 칼을 들이대고 있는 소년의 눈과 마찬가지로 절망적이고 음울한 광채가 있다.

 

 

 그것은 고통이다.

 

 

 

 그녀는 가만히 물었다.

 

 

 

 “ 어떤 식으로 죽일 건데? 애들 머리를 총으로 날려버릴 거니? 교장실부터 갈 거니? ”

 


 “ 어떤 놈이든 상관없어. 먼저 마주치는 놈들부터야. 그 자식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으니까. 속물들이잖아. ”

 

 

 

 속물. 그녀는 아침에 마크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더러운 속물.

 

 

 

 그녀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 속물들을 가엾게 여기고 있는 것일까? 그들이 머리가 날아가 뇌수와 피를 쏟으며 죽는다 해도 그녀에게는 그들을 위해 준비된 슬픔이 없을 것이다.

 

 

 “ 네 고통 때문이니? ”

 

 

 

 그녀는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보다 진실하기 위해서는 그녀는 ‘고통’ 대신 ‘고독’이란 단어를 썼어야 했다. 오직 그녀만이 그 두 단어 간의 간극을 알 수 있었다. 오직 그녀만이 데본과 함께 지금 이 옥상 위에 있을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사실을 이해했다. 그리고 데본이 절망적으로 그녀를 끌고 올라왔다는 것을 알았다.

 

 

 데본이 휘파람을 불었다.

 

 

 

 “ 네겐 하나하나 설명할 필요가 없어. 너는 교실 복도를 유형 당한 맹수처럼 걸어가고 네 두 눈에는 증오가 있어. 세상의 어떤 자식도 내가 놈들을 쏴 죽인 이유를 알아낼 수 없을 거야. 그건 눈이야, 미나. 눈을 보면 알 수 있어. 너하고 나는 같아. 우린 같은 종족이야. 그래서 너를 부른 거야. 내 총을 집고 함께 내려가서 구역질나는 개새끼들 머리를 쏴버리자. 나와 함께 손에 피를 묻힐 수 있는 건 너 밖에 없어. ”

 

 

 왜 그가 커트와 똑같은 말을 할까? 왜 그가 눈에 대해 얘기할까?

 

 

 

 카르멘은 턱 아래 닿아 있는 8인치 칼날을 두 손가락으로 가볍게 쥐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손가락을 파고들며 아주 희미하게 핏방울이 솟아올랐다.

 

 

 “ 네가 피에 대해 알고 있니, 데본? 피에 대해 뭘 알고 있다는 거니? ”

 

 

 

 그녀는 데본의 손에서 나이프를 빼앗았다. 그리고 넝마처럼 너덜거리는 얇은 검은색 티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 칼날을 똑바로 세워서 팔의 안쪽, 연하고 부드러운 살을 가위질을 하듯이 단숨에 잘랐다. 쉬익 하고 차가운 금속 날이 예리하게 살을 자르고 지나갔고 달콤한 과일이 썰려 나가듯이 피부와 모세 혈관, 조직과 세포가 순식간에 베이고 갈라지며 새빨간 피가 솟구쳤다. 그녀는 아픔으로 얼굴을 찡그리지도 않았고 두려움으로 떨지도 않았다. 그녀는 다만 창백한 얼굴과 타는 듯한 눈으로 단호하게 자신의 팔을 칼로 그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새빨간 피가 뚝뚝 흐르는 하얀 팔을 데본의 눈높이까지 들어올렸다.

 

 

 “ 날 죽여 봐, 데본. 난 네가 전혀 무섭지 않아. 내 피로 네 손을 더럽혀 봐. 자기 피를 묻히지 않고 남을 죽이러 갈 수는 없어. ”

 

 

 그녀는 머리가 윙 하고 돌아갈 만큼 거세게 따귀를 맞았다.

 

 

 데본이 덮쳐 왔다. 그녀의 손에서 나이프를 낚아채 내던져 버리고 온몸으로 그녀를 덮쳐 쓰러뜨렸다.

 

 

 무릎과 두 손으로 그녀를 시멘트 바닥에 찍어 누르며 데본이 끔찍하게 일그러진 음성으로 외쳤다.

 

 

 “ 잘난 체 하지 마, 위선자 계집애야! 그렇게 지껄인다고 널 놓아줄 것 같아? 넌 도피하고 있는 거야. 네 피가 어떻다는 거야, 내가 네 피를 두려워할 것 같아? 나와 함께 가지 않겠다면 입 닥치고 가만히 있어, 비겁한 자식은 필요 없으니까. 난 피를 두려워하지 않아. 수십 억 갤런의 피가 흐른다 해도 땅이 갈라져 인간들을 집어삼켜 주지는 않을 거야. 원한다면 먼저 죽여주겠어, 아예 강간도 해 줄게. 비겁한 인간에겐 그게 어울리니까. ”

 

 

 

 카르멘은 뜨겁고 거친 숨결과 호흡이 불가능할 정도로 아랫배를 짓누르는 무게를 느꼈다. 데본은 그녀의 너덜너덜한 검은 티셔츠를 거칠게 찢었고 검은 레이스 탑도 찢었다. 그녀는 그의 손이 가슴을 움켜쥐는 것을 느꼈다. 데본의 손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웠다. 청바지 단추가 벨트와 함께 거세게 뜯겨 나갔다. 그녀는 저항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 그럼 강간하렴. ”

 

 

 그 말이 데본을 멈추게 했다. 그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이 부르르 떨며 자기 아래 누워 있는 소녀의 얼굴을 보았다. 카르멘의 하늘빛 눈은 크게 열려져 있었고 눈부신 황금빛 햇살이 하느님의 나팔처럼 울려 퍼지는 하늘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눈처럼 창백했고 하트 모양의 입술은 견고하게 닫혀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자리잡은 깊고 뿌리를 모르는 고독이 그를 멈추게 했다.

 

 

 

 카르멘은 데본의 아래 깔린 채 팔에서 피를 흘리며 대양처럼 펼쳐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서서히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지구가 돌고 있었다. 하늘은 둥글고 파랬다. 왜 옛날 사람들은 하늘이 평평하다고 믿었을까? 그들은 눈이 멀었던 걸까? 하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눈이 멀어 있었다.

 

 

 그녀는 죽음을 생각했고 자신이 그것에 전혀 무감각하게 누워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아마 그건 무감각이 아닐 것이다. 반응 속도가 느려진 것뿐이다. 심지어 그녀는 데본이 자신을 강간하고 총을 쏘는 순간까지도 무감각할 것이다. 공포를 느끼는 것은 죽고 난 후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너무 빨리, 혹은 너무 늦게 공포를 느낀다.

 

 

 그녀는 커트를 생각했다. 그편이 그녀에게는 좋았다.

 

 

 

 데본이 이를 갈며 으르렁거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 더러운 계집애. ”

 

 

 카르멘은 데본의 무게가 자신을 떠나는 것을 느꼈다. 가방에 넣어둔 권총을 꺼내러 간 모양이었다.

 

 

 그녀는 기다렸다. 꼼짝도 않고 누워서 그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데본은 가방 옆에 앉아 두 팔로 무릎을 감싼 채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죽은 사람처럼 창백했다. 그녀는 그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녀는 나직하게 말했다. 마치 혼잣말을 하듯이.

 

 

 “ 그건 고독이야. 넌 틀렸어, 데본. 두 눈에는 고독이 있어. 그게 전부야. ”

 

 

 데본은 타는 듯한 검은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두 눈에 뿌리도 바닥도 없는 고독이 있었다.

 

 

 


*          *          *

 

 

 


 그들은 한 시간 정도 그렇게 머물렀다. 카르멘은 시멘트 바닥에 누워 있었고 데본은 두 팔로 무릎을 감싼 채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침내 데본이 일어섰다. 뻣뻣해진 근육 때문에 낮게 신음을 내뱉으면서 그는 반대편으로 걸어가 바닥에 떨어진 나이프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카르멘을 향해 돌아섰다.

 

 

 “ 피 많이 흘렸잖아. ”

 

 

 그녀는 팔을 보았다. 보기 싫게 벌어진 깊은 칼자국 사이로 다량의 피가 흘러나와 말라붙어 있었다. 시멘트 바닥에도 새빨갛고 작은 웅덩이가 생겨나 있었다. 마치 옥상에서 무서운 살인이 일어난 것 같았다.

 

 

 “ 괜찮아, 아프지 않으니까. ”

 

 


 “ 진짜 이름이 뭐지? ”

 

 

 그녀는 데본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낯익은 눈.

 

 

 “ 카르멘. ”

 

 

 데본 펠은 입술 양 끝을 움직였다. 그는 웃는 방법을 몰랐다. 대신 그는 아무렇게나 뒹굴어 있는 카르멘의 가방을 열었고 포장을 뜯지 않은 레코드 두 장을 꺼냈다. 그는 최근에 나온 앨범은 내려놓고 검은색 재킷에 래츠와 바텀 라인 클럽의 로고가 낙서처럼 휘갈겨진 라이브 레코드를 잠시 살펴보았다.

 

 

 “ 쓰레기 음악이잖아. ”


 “ 그래, 그치만 좋은 쓰레기야. ”


 “ 알아. ”

 

 

 그는 라이브 레코드를 옆에 끼고 자기 가방을 집어들더니 문을 열고 옥상을 내려갔다. 그의 등 뒤로 문이 닫히며 희미한 바람이 일었다.

 

 

 

 카르멘은 잠시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녀는 옥상에 혼자 남았다.

 

 

 

... 후략 ...

 

- 2002. 1. 23 -

 

 

 

 

...

 

 

 

중간에 사실 커트와 그의 애인 중 한명의 이야기가 좀 끼어들고 후략된 부분에는 카르멘과 커트가 만나 대화를 나누는 부분이 있는데 시리즈 전체와 연관이 있고 이 에피소드 자체와는 크게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뺐다.

 

 

래츠는 이 시리즈의 배경에서 커트가 활동했던 락 밴드 이름이다. (사실 영화 벨벳 골드마인에서 좀 따왔다)

 

 

데본 펠은 이후 이 시리즈 단편에 몇번 더 나온다. (사실 좋아하는 캐릭터였음) 이 녀석이 나오는 크리스마스 에피소드를 예전에 올린 적이 있다. 이 시리즈의 등장인물들 열몇명이 각각 크리스마스 이브를 어떻게 보내는지 쓴 시리즈였는데 데본은 여기서도 혼자 삐뚤어져서 나무 위에 올라가 있음. 그 얘기는 아래 링크(엄청 짧음)

 

http://tveye.tistory.com/4287 : 크리스마스 파편(데본 펠)

 

 

...

 

 

2002년에 썼던 단편이니 진짜 오래 전의 글이긴 하다. 15년!!! 꺅!!!!

(그런데 저때나 지금이나 나에게는 여전히 좀 데본 펠 같은 삐뚤어진 마음이 남아 있다 ㅠㅠ)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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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몇년 전 나는 미샤의 10대 후반에서부터 20대 초반까지, 발레학교 상급생에서 키로프 발레단 수석무용수로 춤추던 초기 4년까지의 시기를 배경으로 꽤 긴 소설을 썼었다. 원래 쓰려던 소설은 아니었다.



그때 나는 다시 글을 쓰기로 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가브릴로프 본편을 구상했었다. 워밍업으로 드미트리 마로조프와 미샤가 비행기에서 나누는 대화를 주축으로 한 단편 Frost를 먼저 썼고(이 글에 대해서는 여러번 포스팅한 적이 있다) 그 후 가브릴로프 본편을 시작하려고 플롯과 인물들을 직조하기 시작했다. 트로이는 이 시기에 떠오른 인물이다. 떠오르기보다는 거의 필연적으로 왔다.



그리고 어쩌면 쓸데없이, 어쩌면 과잉, 혹은 게으름, 주제일탈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트로이에 대해 생각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 이 사람은 왜 여기에 있을까. 이 사람은 왜 이렇게 행동하고 왜 이렇게 이야기할까. 그것은 내가 미샤 야스민이란 인물에게 다가갔던 과정과 조금 비슷했다.



그때는 글을 쓰기가 좀 힘든 시기였다. 역설적으로 글을 쓰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시기이기도 했다. 나는 트로이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 아니, 트로이의 렌즈를 통해 미샤라는 인물에 대해 좀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고 해야 더 정확할 것이다.



완성된 소설은 내밀했고 여기저기 금이 가 있는 유리조각 같았고 조용했고 동시에 시끄러웠다. 나는 트로이를 심리적 화자로 등장시켰고 다분히 고의적으로 미샤의 곁을 맴돌게 했다. 그는 행성이 되었고 때로는 그보다도 못한 위성이 되었다. 하지만 우주에 존재하는 물질들 모두가 항성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의 본명은 '안드레이 트로이츠키'이지만 분명한 이유로 '트로이'라고 불린다. 그 이유는 아래 발췌문에 나온다.



아래 발췌문은 이 소설의 1부 3장, 아주 초반부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것은 안드레이 트로이츠키, 소설에서는 트로이라고 불리며 오로지 미샤 야스민으로부터만 '안드레이'라고 불리는 인물에 대한 간략한 소개의 장이다. 사실 이것은 내가 일반적으로 인물에 대해 쓰는 스타일은 아니다. 어떤 등장인물에 대해 이런 식으로 줄줄이 설명하는 것은 양날의 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이런 방식이 필요했다. 오직 안드레이 트로이츠키에 대해서만.



발췌된 글 말미에는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내가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라는 인물을 어떻게 불러냈는지에 대한 짧은 메모가 붙어 있다.



맨 위 사진은 페테르부르크의 이즈마일로프 사원, 별칭으로는 트로이츠키 사원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와 결혼식을 올렸던 사원. 그리고 내가 트로이의 이름을 따온 곳이다. 그의 성은 이 사원에서 가져왔다. 그의 이름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아래 발췌문에 나온다. 맨 위와 아래의 트로이츠키 사원 사진은 둘다 웹에서 가져옴(내가 이렇게 잘 찍으면 얼마나 좋을까 ㅎㅎ)



갈랴, 알리사 등은 모두 트로이의 친구들이다.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다. 보통 그 정도로 키가 큰 사람들은 시선을 끌기 마련이지만 트로이츠키는 그렇지 않다. 아마 그의 별 특징 없는 머리색과 흐릿한 얼굴 윤곽, 언제나 앞으로 굽어 있는 어깨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197센티미터의 키에 언제나 뻣뻣하게 뒤엉키는 긴 팔다리를 늘어뜨린 나무인형 같은 사람이다. 새치가 드문드문 섞인 우중충하고 어두운 금발을 전형적인 문과 대학원생 스타일로 멋대가리 없이 짧게 깎은 데다 아무리 다림질을 해도 결국은 어딘가가 구겨지고 마는 셔츠와 소매가 접히는 재킷을 입고 다닌다. 구두 뒤축은 언제나 찌그러져 있고 바짓단에는 자주 진창 얼룩이 진다. 그는 구부정한 자세로 왼쪽 발을 살짝 끌면서 걷는다.




   
 부드러운 잿빛 눈의 뼈대가 굵고 조금 야윈 남자, 두세 명만 옆에 있어도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사람이다. 아마 당신은 네프스키 거리나 국립대학 앞 강변을 걷다가 안드레이 트로이츠키와 수십 차례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모임이나 파티에서 당신에게 그를 소개해준다면 생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인사를 한 후 돌아서자마자 그의 얼굴을 잊어버릴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굵고 낮으며 부드러운 편이지만 무릎을 떨리게 할 만큼 섹시하지도 않고 콤소몰 중창단에 들어갈 만큼 근사한 것도 아니다. 딱히 안타까워할 일은 아니다, 그는 당과 강령에 충성을 다하는 붉은 영웅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눈에 띄는 사고를 친 적도 없고 경찰서에 끌려간 적은 더더욱 없다. 그가 알기로는 KGB 요원을 달고 다닌 적도 없다. 물론 밝은 대낮에 마주친다 해도 그는 그게 보안요원인지도 모를 것이다. 그에게는 예리한 직감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1949년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중학교에서 러시아 문학을 가르쳤고 아버지는 수학 교수였다. 그는 단 한 번도 레닌그라드를 떠나서 산 적이 없다. 해외에 가본 적도 없다. 이혼 후 리가의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있는 아버지 때문에 여름 방학 때 두어 번 그곳에 가본 적이 있지만 물론 연방은 해외가 아니다.



 껑충한 키 때문에 그는 농구나 배구를 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실상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모든 종류의 운동에 소질이 없으며 피오네르 캠프 교사는 그에게 수영을 가르치기 위해 알고 있는 모든 종류의 교육법을 다 동원해야 했다. 지금 그가 친구들과 흑해에 가서 물에 몸을 띄울 수 있는 것은 모두 그 책임감 강한 교사 덕분이다. 어린 시절 그는 기다랗게 튀어나온 자기 다리에 걸려 넘어지곤 했다. 아무도 그에게 별명을 붙여준 적이 없지만 트로이츠키는 남몰래 자신을 회색 거미라고 생각하며 우울해하곤 한다.



 그는 별다른 노력 없이 레닌그라드 국립대학에 진학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그는 언제나 5점을 받는 우등생은 아니었지만 꾸준히 좋은 점수를 받는 학생이었다. 교사들은 그를 모범생이라고 여겼지만 특별히 사랑하거나 챙겨주지는 않았다. 그는 평균 이상의 언어적 재능을 갖추고 있었고 작문도 곧잘 하는 편이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학부를 선택해야 할 때 같은 반 단짝이었던 알리사가 외국어학부에 가서 영어를 공부하자고 꼬드겼다. 트로이츠키는 친한 친구를 잃고 싶지 않은데다 오래 전부터 영미 문학에 대한 은밀한 사랑을 품고 있었으므로 그러기로 했다. 그의 부모는 어쨌든 유망한 학과이므로 찬성했다.



 영어권 국가에 나가본 적이 없고 원어민에게 교습을 받은 적이 없는 것을 감안한다면 안드레이 트로이츠키의 영어 실력은 상당히 좋은 편이다. 졸업을 앞두고 있을 때 담당 교수 스베들로프는 그에게 넌지시 KGB 관련 진로를 추천한 적이 있다. 트로이츠키는 나름대로는 외교적인 태도로 품위 있게 거절했다고 생각했지만 그 후 일 년 동안 교수는 그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석사 학위를 마쳤을 때 스베들로프는 다시 한 번 그 제안을 하게 된다.



 트로이츠키가 해외 진출과 출세가 반쯤 보장된 그 길을 택하지 않은 것은 그가 격렬한 반 소비에트 주의자여서가 아니라 나약하고 소심한 성격 때문이다. 어느 정도는 레닌그라드와 친구들 때문이다. 그리고 절반쯤은 미샤 야스민 때문이다. 몇 년 후 그는 동베를린과 오슬로 측으로부터 연구직 초청을 받게 되지만 고민 끝에 그 기회를 거절하게 될 것이다. 그때 미샤 야스민이란 이름은 어느 정도도 아니고 절반도 아닐 것이다. 그 이유의 완벽한 전부를 차지할 것이다.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딱히 그리스 신화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멸망한 고대 국가 트로이를 동경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이름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친구들에게 성을 따서 트로이라고 불러달라고 청했을 뿐이다. 톨스토이를 좋아했던 그의 부모가 ‘전쟁과 평화‘의 안드레이 공작에서 그의 이름을 가져왔다. 트로이츠키는 톨스토이를 싫어하며 안드레이 공작은 더더욱 좋아하지 않는다. 그 인물의 따분하고 비관적인 회의주의 때문이 아니라 그를 집어삼킨 길고 고통스러우며 무의미한 죽음 때문이다.



 그의 선량한 친구들은 부탁을 받아들여 그를 트로이라고 부른다. 멸망한 고대 국가의 러시아식 이름은 트로야이지 트로이가 아니며, 더구나 트로이란 별명은 트로이카, 즉 기껏 3점짜리 점수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친구를 그렇게 부를 수 없다는 갈랴 예피모바만 빼고. 트로이츠키는 오랜 친구 갈랴가 자신을 안드류샤라고 부르도록 허락하지만 내심 그렇게 부르지 않기를 바란다.



 드물게 미샤 야스민이 그를 안드레이라고 부르는 순간이면 트로이츠키는 톨스토이와 죽은 공작에 대한 자신의 뿌리 깊은 혐오를 완전히 망각한다.





 ...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남몰래 습작을 한다. 10대 소년 시절부터 모눈 공책에 시를 써 왔고 가끔은 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완성된 소설은 거의 없다. 피오네르 시절 그는 영웅도시 레닌그라드와 폭격에서 청동기사상을 구하기 위해 모래주머니를 날랐던 시민들에 대한 시를 써서 상을 받은 적이 있지만 알리사를 제외한 모임 친구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그는 친구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될까봐 걱정했던 적이 몇 번 있다. 그의 수많은 시들과 미완성 소설이 적힌 노트들을 들춰보았던 건 알리사와 미샤 야스민 뿐이다.



 알리사와는 중고등학교 시절 서로의 습작 노트를 공유하며 토론하던 사이지만 트로이츠키는 항상 알리사가 순수 문학보다는 풍자와 비판을 더 좋아한다는 것과 그녀가 언젠가는 글쓰기를 그만두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리사는 대학에 진학한 후 더 이상 습작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독서와 토론은 여전히 좋아해서 그와 함께 모임을 시작했다. 그녀는 트로이츠키에게 요즘 쓰는 글이 있으면 좀 보여 달라고 습관처럼 말을 걸지만 그는 번역 필사본과 평론, 영문학 수업과 관련된 메모가 아니면 더 이상 알리사에게도 자기 노트를 보여주지 않는다. 자신의 재능이 매우 흐릿하며 끈질기게 노력하고 매달려야만 간신히 조그만 꽃을 피울 수 있을까 말까 하는 정도란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불꽃을 가지고 태어나긴 했지만 그건 미지근하고 어둡게 깜박이는 촛불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깊은 우울증에 잠겨 한밤중에 네바 강으로 가서 빠져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미샤 야스민은 알리사와는 완전히 다른 경우다. 그때 트로이츠키는 논문이 잘 풀리지 않아 머리를 식히려고 대청소를 하고 있었다. 미샤는 언제나처럼 불쑥 들렀다가 뒤집혀진 책상 서랍과 너저분하게 널려 있는 상자들 사이에서 펼쳐진 모눈 공책을 발견하고 모든 금서와 사미즈다트 애호가답게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뒤늦게 트로이츠키가 그 재앙을 알아차리고 사색이 되어 뛰어왔을 때 미샤는 유일하게 깨끗한 공간인 부엌 식탁 위에 걸터앉아 공책을 네 권 째 읽고 있었다. 트로이츠키가 얼굴이 붉어져서 심하게 말을 더듬거리며 공책을 빼앗았을 때 미샤 야스민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 영어로 쓰면 바깥에서 출판할 수 있지 않을까? ”



 그때 미샤가 시의 내용이나 형태에 대해, 그 무엇보다도 재능에 대해 침묵해 준 것에 대해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마움을 느꼈다.



 몇 년 후 미샤 야스민이 드라마 극장 무대에 프로코피예프 음악을 짜깁기한 15분짜리 모던 발레를 안무해 올렸을 때 그는 트로이츠키의 노트에 적혀 있던 시 몇 편을 제멋대로 해체하고 오려붙여 브이소츠키 풍의 발라드를 만들어 에피그라프처럼 삽입했다. 그건 안드레이 트로이츠키의 생애에서 분명 가장 영광스런 순간 중 하나였다.




 트로이츠키는 여전히 글을 쓴다. 때로는 자신의 문장과 단어와 인물에 홀려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따금 그는 사랑의 시를 쓴다. 밤이 지나고 나면 그 자신조차 다시 읽기 부끄러운 시들을.




 ...





 그리 눈에 띄지 않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학교의 몇몇 여학생들과 연상의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다. 여자들은 그가 자상하고 선량한 남자이지만 수줍음이 많아 좀처럼 사귀자는 말을 먼저 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눈에 비친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이따금 끼는 안경이 잘 어울리는 전형적인 공부벌레이며 어디를 가나 나서는 것은 싫어하지만 그렇다고 친구를 배신하거나 꼭 필요한 순간 그 자리에 없는 얄미운 부류에는 절대 속하지 않을 사람이다. 그는 남성적 매력이 넘치는 섹시한 상대는 아니지만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옆에 있어줄 수 있는 안정적인 파트너로 보인다. 즉 연애 상대라기보다는 결혼 상대로 적합한 남자이다.




 트로이츠키는 오랜 기간 동안 여자를 사귄 적이 없다. 고등학교 시절 주변 사람들은 그와 알리사가 커플이라고 오해하곤 했다. 사실 그들은 아주 친한 친구였을 뿐이며 트로이츠키는 단 한번도 알리사에게 연애 감정이나 성적 충동을 느낀 적이 없다. 알리사는 일 년에 두어 번씩 남자친구를 바꿨고 가끔은 트로이츠키에게 자신의 연애사를 상담하기도 했다. 알리사는 석사를 마친 후 아버지가 소개해 준 남자와 결혼하지만 6개월 만에 이혼하게 된다. 이혼 후 알리사는 곧장 트로이츠키의 아파트로 와서 밤새 울고는 기분 전환을 하겠다며 냉장고를 몽땅 뒤집어 일주일 동안 먹어도 모자랄 만큼의 보르쉬와 펠메니, 감자 샐러드, 다진 고기파이와 버섯파이, 온갖 종류의 피클, 꼬치구이, 콤포트, 거의 보드카 도수에 육박하는 정체불명의 강력한 펀치를 만들어 놓고 떠난다. 그 산더미 같은 음식들을 처리하기 위해 트로이츠키는 모임 장소를 갈랴의 집에서 자기 아파트로 바꿔야 할 것이다.



 알리사 외에도 그에게는 여자 친구들이 많지만 애인은 없다. 그가 가장 오래 사귀었던 여자는 대학원 동기인 이라 티호노바였지만 그것도 6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친구들은 가끔 그에게 여자를 소개시켜 주기도 하고 소심증을 극복해보라고 각종 조언을 해주지만 그럴 때마다 트로이츠키는 언젠가 자기 짝을 만나면 결혼할 거라고 판에 박힌 대답을 하며 넘긴다.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자신이 결코 좋은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가족이나 친구들 그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않는다.





...








아래 노트는 2013년 1월 말에 이 소설을 마치고 퇴고를 거듭한 후 쓴 후기의 일부이다. 이 노트에서 나는 그로부터 몇달 전, 처음 이 소설을 구상하고 트로이란 인물을 떠올렸을 때의 메모를 그대로 첨부했다. 그리고 이 메모는 위에 발췌했던 실제 소설의 일부에도 그대로 들어가 있기도 했다.




<2012년 가을의 메모에 대한 2013년 1월의 노트> 





 .... 소설을 시작할 때 나는 트로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메모를 적었다. 두 번째 단락은 1부 3장에서 그에 대한 소개를 할 때 거의 그대로 집어넣었다.




 나는 적당한 만큼의 엘리트이며 적당한 만큼 재능이 있고 그래서 우울하게도 사실은 평범한 사람들에 해당되는 인물을 만들기로 했다. 그의 이름은 안드레이 트로이츠키이며 1949년생이다. 배경은 1971년~ 1977년의 레닌그라드이다. 트로이츠키는 레닌그라드 국립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박사 과정을 밟는 일종의 지식인이며 회색 종자다.
  


 키가 껑충하게 큰 그는 어깨를 구부정하게 굽히고 다니며 긴 팔다리가 언제나 볼품없이 뒤엉키는 나무인형 같은 사람이다. 새치가 섞인 우중충한 블론드를 당시 소련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멋없이 짧게 깎고 있으며 부드러운 잿빛 눈을 가진 남자, 두세 명만 옆에 있어도 전혀 눈에 띄지 않는 타입의 사람이다. 아마 당신은 네프스키 거리나 국립대학 앞 강변을 걷다가 안드레이 트로이츠키와 수십 차례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모임이나 파티에서 당신에게 그를 소개해준다면 생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인사를 한 후 돌아서자마자 그의 얼굴을 잊어버릴 것이다.
  


 그런데 모든 인간에게는 내부에 은밀한 뭔가가 있으며 그건 브레즈네프 시대 소련의 평범한 대학생 청년도 마찬가지다. 안타깝게도 누군가는 불꽃과 빛을 타고 나며 누군가는 굳어져가는 촛농에 남아 있는 희미한 온기에 매달려 있을 뿐이다.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물론 후자이다. 그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어둠이 있고 두려움이 있으며 물론, 욕망과 사랑도 있다. 사실 그건 아주 강력한 것이다. 결코 우스꽝스럽지도 않고 약하지도 않다. 
  


 글을 쓰는 입장에서든 읽는 입장에서든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그렇게 어려운 인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재능은 우리들 많은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흐릿하고 나약하기 때문이다.



 'Frost'와는 달리 나는 3인칭을 골랐다. 따라서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드미트리 마로조프처럼 관대함을 얻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전이는 있을 것이다. 그것도 강력하게. 이번에는 관대함과 전이 사이의 틈새를 따라가는 글쓰기가 필요할 것이다.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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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7.09.05 01:09

알리사 about writing2017.09.05 01:09







피곤한데 잠이 잘 안 와서 아직 한번도 안 그렸던 인물 그려봄.


알리사.


학생 시절엔 아마 이랬을 것이다. 이 당시엔 자신이 미래에 런던으로 떠나고 혐오해마지 않는 당과 권력의 집합체이자 하수인인 보안위원회의 일원이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외롭고 동시에 도도하고 그러면서도 부서지기 쉬운 인물, 그리고 매우 내밀한 존재였다. 나는 항상 그녀에 대해 제대로 된 하나의 소설을 쓰고 싶었다. 언젠가는. 아마도.



..




알리사에 대해 전에 발췌해 올린 글 두개의 링크와 대사 일부는 아래. 그녀는 트로이의 소꿉친구이자 그들의 지하문학 서클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



이 글과 그림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그럼 답답하지 않아? 우리가 왜 갈랴네 집에서 모이기 시작했는데, 우리가 괜찮은 곳에서 괜찮게 살고 있다면 왜 그런 허세를 부리게 됐겠어. 우린 말이야, 그냥 벌레 같은 거야. 그것도 머리 가슴 배와 다리가 달린 진짜 벌레도 아냐. 우린 플라스틱과 톱니로 만든 기계 벌레야, 공장에서 찍어낸 완제품들이라구. 심지어 다들 불량품이야. 그냥 회색 벌레들, 공산품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우리가 모인 거야, 그나마 진짜 벌레인 척이라도 해보려고.




http://tveye.tistory.com/m/5016



알리사는 기계벌레와 도스토예프스키, 불가코프에 대해 무슨 말을 했나, 항의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불멸입니다!)




...





​우린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얘기했어. 아직도 내가 빌려줬던 번역 노트들을 기억하더라. 시 같은 건 난 구절도 가물가물한데 걘 다 외고 있었어. 난 춤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지만 걔는 자기 얘기는 별로 안 했어. 나에 대해 물었지. 런던에서 내가 어떻게 사는지, 일은 힘들지 않은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음악을 듣는지. 사람들과는 잘 지내는지.



난 하마터면 울 뻔 했어. 왜냐하면, 트로이. 걔가 정말로 묻고 있었던 건 내가 그곳에서는 덜 외로운지, 조금이라도 자신에 대한 엄격함을 놓고 관대해졌는지, 그래서 자신을 조금이라도 사랑하게 됐는지에 대한 거였으니까.





http://tveye.tistory.com/5178​

프라하의 두 개 메모, 문을 여는 사람, 악령과 성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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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간만에 전에 쓴 본편 중 일부를 발췌해 본다. 전에 종종 올렸던 수용소 중편 중 제3부, 미샤의 절친한 벗인 스타니슬라프 일린이 그를 면회하는 장면 중 일부이다. 궁금하신 분들은 그 부분을 먼저 읽고 여기로 넘어오면 된다.

 

앞부분 : http://tveye.tistory.com/5551 (수용소 면회실에서, 얼룩들)

 

 

 

이 이야기는 바로 앞부분을 전에 발췌한 적이 있다. 사실 그 부분의 후반부 문단 몇개와 대화 몇개는 지금 올리는 이야기 맨 앞과 겹친다. 잘라내자니 앞이 너무 휑해져서.

 

 

고문을 당해 피폐해진 미샤 때문에 일린은 분노하고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 미샤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간 있었던 일들을 떠올린다.

 

 

...

 

 

여기 발췌한 이야기 후반부에는 일린의 딸인 라라가 등장한다. 라라는 예전에 올렸던 부활절 단편 Jewels의 1인칭 화자로 나왔던 인물이다. 일린의 큰딸로 그 이야기에서는 열살짜리 소녀로 등장했었다. 이 수용소 이야기는 jewels에서 5년 후를 다루고 있으므로 라라는 이제 15세의 사춘기 소녀이다.

 

 

사실은 jewels보다 이 소설을 먼저 썼고 라라도 여기서 제일 먼저 등장했다. 그 후 어린 라라는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면서 라라를 일인칭 화자로 만들어 jewels를 쓰게 된 것이었다.

 

 

'나스챠'는 일린의 전 부인이자 라라의 엄마이다. 라라는 엄마 나스챠와 새아버지, 그리고 여동생 아냐와 함께 살고 있다. 지나이다는 본편에 등장하는 미샤의 파트너인 '그' 지나이다('지나와 말썽쟁이'의 그 지나이기도 합니다), 마르가리타와 이그나트는 일린의 볼쇼이 동료이다. 후자 두명은 jewels에서 일린네 집에 모여 같이 부활절 달걀 색칠하던 사람들이기도 하다.

 

 

세자르 모렐은 프랑스 출신의 위대한 안무가로 미샤의 춤에 매료되어 그를 위해 여러개의 작품을 안무해주었던 인물이다. 물론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다.

 

 

 

jewels와 거기서 파생된 밑자료 half 소설인 dolls의 링크는 포스팅 맨 아래에 붙여 두었다.

 

 

맨 위 사진은 페테르부르크 궁전광장의 알렉산드르 기념원주 천사 조각상. 예전에 올린 단편 illuminated wall에서 미샤가 저 천사 원주 아래에서 춤을 췄다.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나는 그 애의 손을 떼어내는 대신 잠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자 정수리까지 치솟았던 열기와 분노가 조금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 폭발할 듯한 감정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심장 한가운데 그대로 고여 있었다. 태어나서 지금껏 그런 분노와 증오를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미샤는 내가 잠잠해지자 한숨을 내쉬었고 손을 내려놓았다. 여전히 몸을 심하게 떨고 있었다. 여름이 아니었다면 벗어줄 재킷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꼴도 보기 싫은 스카프를 다시 주워 그 애의 목과 어깨에 둘러 줘야 했다. 마치 자주색의 죽은 뱀을 둘러주는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미샤는 추워서 그런지 스카프를 감아주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초점이 흐릿한 검은 눈만이 불안하게 문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감시자들이 들어와 나를 끌어내 체포할까봐 두려운 것 같았다. 그 애가, 나의 미셴카가,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그 어떤 권위와 위협 앞에서도 굴복할 줄 모르던 미샤 야스민이 그런 시선으로 문을 바라보다니, 두려움으로 내 입을 막고 몸을 떨다니. 문득 이 모든 것이 꿈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건 아주 설득력이 있어서 난 거의 넘어갈 뻔 했다. 그 애의 몸에서 발산되는 불처럼 뜨거운 열기와 죽어 넘어진 페트루슈카를 연상시킬 정도로 심한 경련이 아니었다면 분명 난 꿈에서 깨어나려고 몸부림쳤을 것이다.

 

 


 나는 한 팔을 미샤의 팔 아래로 넣어 그의 몸을 부드럽게 감아 안았다. 다른 팔을 뻗어 허리에 둘렀다. 그러자 경련이 조금 잦아들었다.

 

 

 “ 어깨에 기대. 그럼 좀 편해질 거야. ”

 

 

 “ 네 어깨는 작은데. ”

 

 

 “ 그래도 너 하나쯤은 기대게 해 줄 수 있어. 전에도 그랬잖아. ”

 

 

 “ 그랬지. ”

 

 

 미샤가 순순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짧은 머리칼이 얇은 셔츠를 파고들며 살갗을 찔렀다. 그 애의 이마와 뺨이 닿은 자리가 불로 지지는 것처럼 뜨거웠다.

 

 

 

 “ 걱정하지 마. 날 체포하지는 않을 테니까. 벨스키가 보냈다고 했잖아. ”

 

 

 “ 왜 흥분하는 거야? 제일 안전할 줄 알고 네 이름 댔는데. 좀 무서운걸. ”

 

 

 “ 난 약과야. 지나가 왔으면 더 소리 지르고 화냈을 걸. ”

 

 

 “ 지나가 그러는 건 무섭지 않아. 걘 조용한 게 무섭지. 넌 반대잖아. 내 앞에서 화낸 적 없었는데. ”

 

 

 “ 너한테 화내는 게 아냐. ”

 

 

 “ 음, 나한테 화를 내면 안되지. 그럼 라라에게 이를 거야. ”

 

 

 “ 지금 농담한 거야? ”

 

 

 “ 미안, 여전히 재미없어서. ”

 

 

 나는 그의 허리에 두른 팔을 좀 더 바짝 끌어당겼다. 발레리나의 조그맣고 야윈 몸을 품에 안은 것 같았다. 이제 그 애의 열기가 퍼져 와서 내 온몸도 불을 놓은 것처럼 뜨거웠다. 주사를 놓든 약을 먹이든 조치가 필요할 것 같았지만 저 문을 열면 그 혐오스러운 알렉산드르 크냐제프가 기다렸다는 듯 들어와 뱀처럼 웃으며 ‘역시 30분을 다 채우기란 무리였겠죠. 이 친구 상태가 아주 안 좋아서’ 라고 사근사근한 어조로 떠들어댈 것이 분명했다. 그놈들의 손에 미샤를 돌려보내느니 아프더라도 단 5분, 10분이라도 더 내 어깨에 기대 있게 하는 것이 백배 천배 나았다. 미샤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자기 몸을 완전히 내 팔에 맡기고 있었다. 등을 두어 번 쓸자 스웨터 아래로 뼈마디가 그대로 만져졌다. 나는 잠긴 목소리로 다시 한 번, 그러나 아주 조용하고 차분하게 말했다.

 

 

 “ 얘기해봐, 미셴카. 그자들이 어떻게 했는지. ”

 

 

 “ 왜? 네겐 그런 게 중요해? ”

 

 

 “ 응. ”

 

 

 “ 왜 중요하지? 어차피 해결되는 일도 없는데. ”

 

 

 “ 그냥 얘기해봐. ”

 

 

 “ 기억이 잘 안나. ”

 

 

 “ 넌 대답하기 싫으면 항상 그렇게 얘기하잖아. ”

 

 

 “ 그럼 양치기 소년인가. ”

 

 

 

 미샤는 목을 울리며 낮게 웃었다. 그 애가 어떻게 아직도 웃을 수 있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 근데 정말이야, 스탄카. 기억이 나지 않아. 그자들 이름도 생각이 안나. 주사는 좀 맞았던 것 같아. 아팠던 것 같기도 해. 잘 모르겠어. ”

 

 

 “ 피 흘리고 있었어. ”

 

 

 “ 누가? ”

 

 

 “ 너. 사진에서 봤어. ”

 

 

 “ 무슨 사진? ”

 

 

 

 그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자신이 레닌그라드로 소환된 후 파리가 얼마나 시끌시끌했는지. 해외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지식인들, 사상가들, 인권단체들이 그의 구명을 위해 어떤 시위를 벌였는지. 오히려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 있던 우리들보다도 그쪽 사람들이 재판에 대한 정보를 더 먼저 알아냈다. 며칠째 뜬눈으로 밤을 보내고 있던 라라는 단파 라디오로 프랑스 방송을 잡아냈지만 그 아이의 프랑스어 실력은 뉴스를 이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라라는 수차례 반복되는 미샤의 이름과 몇몇 단어밖에 알아듣지 못했고 새벽에 엉엉 울면서 내게 전화를 했다.

 

 

 

 “ 아빠, 프랑스 라디오에서 미셴카 얘길 하고 있어. 심각한 얘기 같은데 못 알아들었어. 방금 엄마가 라디오 뺏아갔어. 그런 거 들으면 잡혀간대. 어떻게 해, 못 알아들었어... 그 주파수 기억도 안나. 다시 못 찾을 거야... 무서운 얘기였으면 어떻게 하지? 뉴스였어. 자꾸 이름이 나왔어. 나쁜 일인 거야? 미셴카에게 나쁜 일 생긴 거야? 아빠, 구해줘. 그 사람 구해줘. 제발 어떻게 좀 해봐, 아빠 아는 의원님들에게 부탁 좀 해봐... ”

 

 

 

 라라를 달래고 안심시킨 후 나는 볼쇼이 발레교사인 마르가리타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집으로 와 달라고 했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극장에서 프랑스통으로 불렸고 원어민처럼 불어를 구사했다. 이른 새벽이었지만 마르가리타는 동료인 이그나트를 데리고 왔다. 둘 다 미샤가 볼쇼이에 있을 때 친하게 지냈던 사이였다. 들어오자마자 마르가리타는 문을 잠그고 창문마다 커튼을 친 후 싱크대와 욕실의 물을 틀어놓았다. 그녀는 내가 왜 전화를 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 그 뉴스 듣고 있었어. 안 그래도 여기 오려던 중이었어. ”

 

 

 “ 난 라라가 전화해서 알았어. 내용이 뭐였어? 안 좋은 얘기였어? 걔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

 

 

 “ 재판 얘기였어. 파리에서 정보를 입수했대. ”

 

 

 

 그때까지 우리는 미샤가 비공개 재판을 받아 어딘가에 수감되었다는 사실밖에 모르고 있었다. 그 프랑스 방송은 훨씬 자세한 내용을 알려주었다. 허술하고 형식적인 재판 절차에 대해 지적했고, 재판정에 소환된 증인들의 이름까지 몇 명 폭로했다. 모두 당 강경파의 측근들과 미샤의 격렬한 반대파들이었다. 그런데 그자들이 증언대에 올라가 온갖 밀고와 음해를 쏟아 붓는 동안 그 애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우리들, 제대로 된 증언을 해 줄 수 있는 동료들은 단 한 명도 소환되지 않았다. 우리는 재판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조차 뒤늦게 알았다.

 

 

 그 라디오 방송은 미샤의 자기 변론이 겨우 2분도 안되어 중단되었다는 사실을 밝혔고 30분도 걸리지 않아 판결이 내려졌다는 얘기와 더불어 당 내 강경파 일부는 훨씬 가혹한 처벌을 주장했기 때문에 재판 결과에 실망했다는 정보를 흘리기까지 했다. 순진한 이그나트는 모스크바에 있는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파리에서 이 모든 끔찍한 사실들을 알아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건 별로 놀랄 일도 아니었다. 우리는 언제나 벨벳 덮개를 뒤집어씌운 어항 안에 갇혀 있는 물고기들이었으니까.

 

 

 그 방송을 듣고서야 우리는 그 애가 7년형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반체제 선동과 당에 대한 불복종, 체제 전복 위협 등 그 애에게 씌워진 죄목은 끝이 없었다. 이후 파리에서 조직된 구명위원회의 팸플릿에 따르면 그 더러운 놈들은 스파이 죄목까지 씌우려고 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마지막에 떨어져 나갔다고 했다.

 

 

 

 그리고 그 사진. 그건 르 피가로와 뉴욕 타임즈 등 유명 일간지에 컬러로 실렸다. 마르가리타가 이즈베스티야 뭉치 안에 르 피가로를 숨긴 채 사색이 되어 달려왔을 때 우리 집에는 이미 여러 가지 경로로 그 사진을 입수한 지인들이 다섯 명이나 와 있었다. 극장 직원들과 예술가들이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까봐 걱정에 빠진 노비코프가 감시받고 있을지도 모르니 한동안 모여 다니지 말라고 전화로 경고하지 않았다면 아마 미샤의 지인이나 팬들 여럿이 더 몰려왔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미샤와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모스크바에서는.

 

 

 

 누구도 그 사진의 출처를 알지 못했다. 신문사들은 익명으로 사진을 제공받았다고 입을 모았지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신문에 실린 사진은 총 세 장이었는데 두 장은 측면이었고 한 장은 정면이었다.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그 애를 들어 옮기고 있었다. 측면 사진 한 장은 산소마스크를 쓰고 팔목에 튜브를 꽂고 있어 얼굴을 알아볼 수도 없었다. 정면 사진을 보았을 때 내 머리 속에 든 생각은 단 하나 뿐이었다. 그자들이 결국 저 애를 죽였구나...

 

 

 

 사진 속에서 그는 완전히 뻣뻣하게 굳어진 채 머리를 젖히고 있었다. 들쭉날쭉하게 잘린 검은 머리칼이 이마 위에 유화 페인트처럼 불규칙하게 엉겨 있었고 피부는 시체처럼 푸른빛이 도는 흰색이었다. 감긴 눈 아래로 속눈썹이 머리칼과 마찬가지로 검은 페인트를 칠한 듯 무겁게 처진 채 마구 뒤엉켜 있었다. 코와 입에서 시작되어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줄기는 너무 붉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무엇보다도 끔찍했던 것은 그 애의 팔과 다리가 나무인형처럼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의료 요원들은 그 애를 죽은 짐승처럼 들어 옮기고 있었다. 
 

 

 

 


 그날 지나이다가 모스크바로 왔다. 키로프 오케스트라 수석 바이올리니스트 딤카 아르부조프와 함께였다. 그녀는 이제 울지도 않았고 흥분하거나 공포에 질리지도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나 분노해 있었던 것이다.

 

 

 “ 세자르 모렐이 내일 모스크바에 올 거예요. 파리 공산당원 자격으로. 로쉬도 함께 입국하려고 했지만 물론 거절당했어요. ”

 

 

 “ 그자들은 세자르가 와도 만나주지 않을 거야. ”

 

 

 

 실제로 그랬다. 당에서는 형식적인 예의와 절차를 갖춰 모렐을 맞이했지만 그의 면담 요청은 거부했고 그가 직접 가져온 파리 공산당 지부와 프랑스 문화예술계의 탄원서도 무시했다. 그 유명한 인물이, 전후 30여년 이상 유럽 무용계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그 거장, 한결같이 사회주의를 지지하며 열렬한 공산당원으로 활동했던 세자르 모렐이 노구를 이끌고 직접 왔는데도.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모스크바에서는 모렐을 초청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모렐이 미샤의 춤을 보고 반해서 그를 위한 작품을 안무해 볼쇼이로 날아왔을 때 당에서는 대대적인 선전을 펼쳤고 모렐을 서방의 공산 영웅이자 진정한 예술가로 숭배하고 떠받들었던 것이다.

 

 

 지나이다는 키로프를 비롯한 레닌그라드 극장들에서 미샤를 위한 탄원서에 서명을 받고 있다고 했다. 해외에서 그렇게 구명 운동을 하고 있는데 동료들이 모른 척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치를 떨었다. 나도 볼쇼이와 므하트를 포함한 몇몇 극장에서 서명을 받았다. 그건 꽤 위험한 일이었고 후환이 생길 가능성도 많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그날 우리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같은 시각에 성명을 발표하고 당에 탄원서를 제출하게 되어 있었다. 성명서를 낭독하는 중에 보안위원회에서 들이닥쳤다. 나는 다섯 시간 동안 구금되어 있었지만 별다른 심문 없이 풀려났다. 탄원서는 압수당했다. 레닌그라드에서 연행되었던 지나는 한 시간도 안 되어 풀려났고 아무 것도 압수당하지 않았다. 이후 나는 벨스키가 나를 풀어주도록 했다는 것을 알았다. 지나 쪽은 드미트리 마로조프가 힘을 쓴 것 같았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나는 미샤가 살아 있을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진이 공개되고 이곳에서 자행되는 끔찍하고 더러운 일들이 서방 제국주의자들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나 좋은 먹잇감이 된 상황에서 그자들이 미샤를 살려놓을 것 같지가 않았다. 해외 언론들에서는 미샤가 수용소에서 고문을 당해 중태에 빠져 있다고 떠들었고 모스크바 측에서는 말도 안 되는 억측이라 대꾸할 가치조차 없다고 했다. 미하일 야스민은 반체제 선동 죄목으로 체포되었으며 소비에트 법률에 따라 정상적으로 수감되어 있으니 남의 나라 일에 쓸데없는 참견 따위는 그만두라는 식이었다.

 

 

 

 라라는 나스챠에게 한동안 아빠와 지내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나스챠는 그 애를 보내주지 않았다. 내가 그 애를 위험에 빠뜨릴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라디오를 숨겼고 딸아이의 스크랩북들도 몽땅 태워버렸다. 한 번만 더 집에서 미샤의 이름을 거론하거나 외국 신문 따위가 발견되면 일 년 동안 외출을 금지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딸아이가 울면서 전화했을 때 내가 나스챠와 이혼했던 이유를 생생하게 되새길 수 있었다.

 

 

 

 라라는 학교를 빼먹고 극장으로 나를 찾아왔다. 열다섯 살도 채 안된 아이가 어디서 정보를 입수하는 건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라라는 이미 사진과 기사를 보았고 내가 잠깐 연행되었던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잠을 못 자고 너무 울어서 얼굴이 퀭했다. 라라는 내가 무용수들을 데리고 월말에 올릴 작품 리허설을 하는 동안 얌전하게 복도에서 기다렸다. 마침내 내가 나왔을 때 딸아이는 바람처럼 달려와 두 팔로 날 끌어안았다. 사춘기에 접어든 후에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던 애였다.

 

 

 “ 아빠, 아빠! 너무 무서웠어! 아빠가 미셴카처럼 끌려갈까봐, 못 돌아올까봐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어! ”

 

 

 

 내 품 안에 파고든 라라의 심장이 너무 팔딱거려서 조그만 새를 안고 있는 것 같았다. 라라는 흐느껴 울면서 나를 더 꼭 껴안았다.

 

 

 

 “ 그래도 그 사람 살아 있는 거지? 죽는 거 아니지? 그냥 조금 아프기만 한 거지? 아빠, 기도해. 아침에, 자기 전에. 미샤 구해달라고 기도해, 그럼 괜찮을지도 몰라. 나 계속 하고 있어, 엄마 몰래. 내 친구들도 같이 하고 있어. 아냐한테는 얘기 못 했어, 사진 보면 충격 받을까봐. 근데 아냐가 어제는 갑자기 우리 같이 별장에 갔던 얘길 하면서 다시 가고 싶다고, 미셴카 보고 싶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 ”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으면서 라라가 주머니에서 나무로 깎은 십자가를 꺼내 내 팔목에 걸어주었다.

 

 

 “ 이거 내가 만들었어, 아빠도 하나 가지고 있어. 여기 입 맞추고 기도하면 하느님이 들어 주실지도 몰라. 꼭 해야 해, 최소한 하루에 두 번. 바빠도 두 번은 꼭 기도해야 돼, 아빠. 약속해. ”

 

 

 

 그래서 나는 약속했다. 하루에 두 번, 아니, 사실은 틈나는 대로 기도했다. 나는 단 한 번도 독실한 신자였던 적이 없었다. 그건 라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투박하고 살짝 비스듬하게 깎인 나무 십자가에 입을 맞추고 기도를 되풀이하는 순간이면 나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변했다. 어쩌면 우리의 별 것 아닌 신앙, 이성과 과학과 당의 탄압 속에서 옛 시대의 그림자처럼 변해버린 낡은 정교가 결국 옳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벨스키가 내게 전화를 했고 나는 지금 살아 있는 미샤, 만신창이가 되어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온몸에서 열기를 뿜어내고 있지만 그래도 내 어깨에 기댄 채 여전히 재미없는 농담을 하고 있는 내 친구의 옆에 앉아 있으니까.

 

 

 


 미샤는 다시 한 번 물었다.

 

 

 “ 스탄카, 무슨 사진? ”

 

 

 나는 소파와 벽과 책상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도청 장치는 눈에 띄지 않았다. 하긴 나 같은 일반인에게 그런 대단한 장치가 보일 리가 없었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모두가 다 아는 얘기였다.

 

 

 

 “ 의료진이 너 옮기는 사진. 누가 몰래 찍어서 파리와 뉴욕에 보냈어. 그것 때문에 해외에서 난리였어. ”

 

 

 “ 아, 그랬군. ”

 

 

 “ 벨스키가 말 안 해줬어? ”

 

 

 “ 사진 얘긴 안 해줬어. 내 허락도 없이 그런 걸 찍다니. ”

 

 

 “ 누가 찍었는지는 모르는 걸. ”

 

 

 

 미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어쨌든, 그 사진에서 너 피 흘리고 있었어. 그래서 맞았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

 

 

 “ 엄청 보기 싫게 나왔겠네. 태워버려. ”

 

 

 “ 외신에 다 났는데 어떻게 태워. 뉴욕에서 그걸로 전시도 했어. ”

 

 

 “ 라라한테 절대 보여주지 마. ”

 

 

 “ 아, 그래. ”

 

 

 

 미샤는 아직도 떨고 있었다. 내게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에어컨을 꺼줘야 할 것 같았지만 단 일 초도 그 애를 소파에 혼자 놔두고 싶지 않았다. 이마에 손을 얹자 금방이라도 물집이 잡힐 것처럼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

 

 

 

 

맨 위 메모에서 언급했던 jewels와 dolls 링크는 여기.

 

 

부활절 단편 Jewels

1장 : http://tveye.tistory.com/3390
2장 : http://tveye.tistory.com/3391
3장 : http://tveye.tistory.com/3393 
4장 : http://tveye.tistory.com/3394
5장 : http://tveye.tistory.com/3395

 

 

밑자료 half : Dolls


01. 에벨리나(http://tveye.tistory.com/6960),
02. 미샤(http://tveye.tistory.com/6964)
03. 일린(http://tveye.tistory.com/6969)
04. 에벨: http://tveye.tistory.com/6972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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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주말부터 올려본 부활절 half 중편 Dolls 마지막 부분이다. 긴 밤을 보내고 귀가한 에벨리나가 눈을 붙이고 일어난다. 그리고 그녀는 극장에 간다.




이 글은 첫번째 파트인 01. 에벨리나(http://tveye.tistory.com/6960),
두번째 파트인 02. 미샤(http://tveye.tistory.com/6964)
세번째 파트인 03. 일린(http://tveye.tistory.com/6969)에서 이어진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나 성격에 대해서는 01에 간략한 메모를 올려두었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Dolls










 집으로 돌아오자 이미 날이 밝아 있었다. 폴루넨코가 붙여준 기사에게 차를 맡겨서 시트를 갈게 할까 망설였지만 그 도적놈들이 내 차에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으므로 그만두었다. 너무 피곤해서 옷조차 벗지 않고 그대로 침대로 기어들어가 여섯 시간을 내리 잤다.





 
 깨어났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 일요일인데다 계속 쉬고 싶었지만 노비코프로부터 로미오와 줄리엣에 대한 공식적인 얘길 들어야 했으므로 일단 극장에 갔다. 차를 쓸 수가 없어 근 몇 년 만에 버스를 타야 했다. 극장에 다 와 갈 무렵 옆자리에 앉아 있던 중년 여자가 날 알아보고 사인을 요청했다. 사인을 해주자 그녀는 매우 기뻐하면서 내 무대를 아주 좋아한다고 했다.



 “ 특히 그 오딜! 제일 최근 백조의 호수에서 춘 오딜은 정말 근사했어요. 당신은 야스민과 정말 잘 어울리더군요. 외모도 그렇고 스타일도! 둘이 또 출 계획은 없나요? ”



 나는 그녀에게 수요일 로미오와 줄리엣에 대해 말해줄까 하다가 그만뒀다. 대신 스타니슬라프 일린이 이번 시즌이 끝나기 전에 새 작품을 안무할 예정이며 거기서 미샤와 같이 출지도 모른다고 귀띔해 주었다.



 “ 하지만 아직 정해진 건 아니에요. 비밀이니 꼭 입 다물어 주세요. ”




 
 여자는 너무나 좋아했다. 은밀한 작업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기쁨에 넋이 나간 것 같았다. 전형적인 발레 팬이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이 여자가 비밀을 공유했다는 생각에 부쩍 친근감을 느꼈는지 바짝 다가앉으며 미샤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고 볼쇼이에서 그의 평판이 어떤지 묻기 시작했다. 1월에 그의 볼쇼이 첫 무대를 보고 완전히 반했다면서 왜 키로프에서 그렇게 유명했는지 금세 알았다고 경탄을 늘어놓았다. 검은 눈의 야스민이니 천사니 하며 젊은 여자들이나 부를법한 그 낯간지러운 별명들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문득 간밤에 미샤가 윗분들의 발아래 기면서 무슨 짓을 했는지 얘기해주면 이 여자가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는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극장까지 들어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머리와 어깨가 젖어버렸다. 빨리 차 수리를 맡겨야 할 것 같았다. 다시금 내 차에서 그런 짓을 한 얼간이 꼬마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미샤는 당연히 나오지 않았다. 일린도 없었다. 아직 그 병원에 있을지, 아니면 퇴원해서 그 애의 집에 있을지 궁금했다. 노비코프는 있었다. 내가 왔다는 얘기를 수위로부터 들었는지 미처 연습실에 들어가기도 전에 날 사무실로 호출했다. 마리야가 무릎 부상 때문에 빠지게 됐으니 수요일 로미오와 줄리엣을 준비하라고 했다. 난 크게 좋아하는 기색을 내비치는 대신 차분하게 그 소식을 받아들였다. 그 역시 내가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듯했다. 하긴 어제 저녁에 내가 게르만과 포노마레바를 만난 걸 모를 리가 없었다. 어쩌면 미샤에 대해서도 다 알지도 몰랐다. 그래서 난 슬쩍 떠보듯 물었다.



 “ 마리야와 저만 바뀌는 건가요? 미샤는 그대로예요? ”




 “ 그건 당연하지 않나. 그 친구 바꿨다간 관객석에서 폭동이 날 걸. ”




 “ 맞춰봐야 할 것 같은데. 미샤 나왔어요? ”




 “ 오늘은 안 나올 거야. 컨디션이 안 좋아서 쉰다더군. 하루만 맞춰 봐도 충분할 것 같은데. 걔야 로미오라면 눈 감고도 출 거고. 왜, 자신 없어? ”




 “ 설마요. ”




 노비코프의 사무실을 나와 연습실로 가는 길에 안무 교사인 마르가리타와 마주쳤다. 일린과는 단짝이었고 미샤와도 친했다. 그리고 제법 수다쟁이였다. 그녀는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간밤에 일린의 집에서 부활절 파티를 했는데 미샤가 중간에 가버렸다고 투덜댔다. 그리고 뉴욕 여독이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어제 라 바야데르 무대에 올라가서 그랬는지 미샤가 몸이 아파서 일린이 병원에 데려갔다는 둥, 아침에 일린의 집에 들러 어린 딸들에게 밥을 챙겨 먹이고 왔다는 둥 계속 떠들었다. 어쨌든 아프다는 것까지는 알려진 모양이었다.




 연습실에 들어갔더니 마리야 아브라모바가 먼저 와 있었다. 무릎에 테이핑을 한 채였지만 평소와 다름없이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인민예술가인데다 극장 최고의 스타답게 그녀는 언제나 우리에게 도도하게 굴었다. 그녀가 나이와 부상, 매너리즘 때문에 그 자리에서 밀려날까봐 노이로제에 걸려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랬으니 미샤가 왔을 때 그녀가 그렇게 기뻐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여우같은 아브라모바는 노비코프를 구워삶아 당장 미샤를 자기 파트너로 만들었고 그 한 달 동안 백조의 호수, 지젤, 돈키호테를 줄줄이 췄다. 하긴 미샤가 입단했던 첫 해 키로프에서 니나 크류코바도 그랬으니 별로 새로운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는 단순히 파트너로서가 아니라 정말로 미샤에게 홀딱 반한 게 틀림없었다. 대놓고 다른 발레리나들에게 미샤는 자기 파트너니까 넘보지 말라고 경고를 던졌다. 전에 내가 미샤와 백조의 호수를 췄을 때도 기분 나쁜 기색을 보였다. 워낙 선배인데다 발레단을 쥐고 흔들던 여자라 나도 대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두렵지는 않았다. 아브라모바는 오랫동안 표도르 구세프의 정부였지만 그 노인네는 이제 좌천당해서 끈이 떨어진 신세였던 것이다. 물론 그녀에게는 다른 후원자도 많았지만 그 중 누구도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에 필적할 영향력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아브라모바는 나를 보더니 노골적으로 증오를 표출했다. 두 눈을 길게 뜨면서 날카롭게 말했다.



 “ 아, 왜 안 오나 했지. 감독한테서 좋은 말 듣고 왔나보지? 어제 그 독일 놈한테 갔다더니 제대로 로비했나봐. 축하라도 해줄까? ”
 




 독일 놈이란 말을 듣자 기분이 나빴다. 그건 게르만의 정적들이 그를 헐뜯을 때 쓰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베를린에서 오랫동안 KGB를 이끈 데다 이름도 그래서 독일인이라는 별명을 얻은 모양이었지만 게르만은 개의치 않았다. 그의 면전에서 그 별명을 부를 수 있는 인간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실지로 그는 독일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저 늙은 여우같은 아브라모바의 입에서 감히 게르만을 비꼬는 단어가 나오다니 화가 나서 그녀의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었다.



 “ 그 표정은 또 뭐람.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어? 내 역 꿰찼잖아. 독일인한테서 부활절 선물 받은 거 아닌가? 겨우 나흘 앞두고 그것도 내 걸 훔쳐가다니. 다른 역도 많을 텐데 하필 그거야? 내가 걔랑 그거 처음 추는 거 몰라? ”




 “ 누구에게나 처음이죠, 미샤는 1월에 왔으니까. 우리 중 걔랑 그거 춰본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요. ”




 “ 주제에 감히 줄리엣을 넘보다니... 수석도 아닌 게... ”




 “ 난 전에도 줄리엣은 많이 췄어요. ”




 “ 그 얘기가 아닌 거 알잖아! 무릎 때문에 무대를 망칠지도 모르니 수요일엔 빠지라니... 감히 나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다들 정신이 나갔어! ”




 “ 감독이 그렇게 말했어요? ”




 난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 아픈 게 아니란 말이에요? 난 당신이 무릎 부상 때문에 빠진 거라고 생각했어요. 뉴욕에서 다쳤다고 들었는데... 어제 라 바야데르에서도 삐끗했다고... 감독이야 마음이 급하니까 날 집어넣은 거겠죠. 미샤와 전에 맞춰 본 적이 있으니까. ”




 “ 뻔뻔스러운 계집애, 어쩌면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지껄이는지. 무릎은 그냥 쑤시는 것뿐이야, 무대에는 아무 지장도 없다고! 어디 얼마나 잘 추는지 봐주지, 그날 평론가들에 윗분들도 줄줄이 오기로 되어 있는데... 전부 날 보러 오기로 되어 있었어. 네 주제에 그 사람들 실망시키지 않으려면 무슨 짓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다들 눈높이가 나한테 맞춰져 있는데 갑자기 별 실력도 없는 계집애가 튀어나와 줄리엣이라니... ”




 나는 날카롭게 실소를 터뜨렸다. 웬만하면 착하고 고분고분한 후배 연기를 하며 넘어가려고 했지만 독일 놈 욕설에 이어 별 실력도 없는 계집애 운운은 더 이상 참아줄 수가 없었다.



 “ 어머나, 마리야 블라지미로브나.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분들은 당신이 아니라 미샤를 보러 오는 거죠. 그러니 수요일에 줄리엣을 누가 추든 별 상관없을 거예요. 내가 발을 헛디디든 자빠지든 별 관심도 없을 거라고요. 다들 로미오에게 정신이 팔려 있을 테니까. 그건 게르만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




 아브라모바의 얼굴이 분노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손찌검이라도 해주길 기대했다. 그러면 나도 그녀의 뺨을 올려붙일 기회를 얻게 될 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꾹 눌러 참았다. 분명 게르만의 이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 이고리와 안무 지도교사인 도브렌스카야가 들어와서 우리의 논쟁은 중단되었다. 도브렌스카야는 아브라모바에게 무릎 상태가 악화되면 안 되니까 일단 앉아서 리허설을 지켜보라고 명령했다. 워낙 대선배라 아브라모바도 대들지 못했다.




 난 이고리와 맞춰보기로 했다. 원래 5월에 이고리와 함께 올라가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불편한 점은 전혀 없었다. 봄 시즌 로미오와 줄리엣 캐스팅은 아브라모바와 미샤, 그리고 나와 이고리였던 것이다.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지만... 이고리는 이렇게 되었으니 혹시 5월에 자기가 아브라모바와 추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눈을 반짝이고 있었지만 아마 그녀는 그 무대에 다시 미샤를 올리라고 노비코프를 들들 볶을 게 분명했다. 미샤가 자기 것이라고 굳게 믿는 걸 보니 그토록 여우같던 아브라모바도 이제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트너를 고르는 건 아브라모바가 아니라 미샤의 권리였다. 미샤의 계약서에 대해 전혀 모를 리는 없을 텐데. 아마도 자신의 전성기가 지나버렸다는 현실을 무시하고 싶은 게 분명했다. 서른다섯이 넘은 주제에 겨우 스물을 갓 넘긴 꼬마를 자기 파트너라고 사방팔방에 떠들고 다니는 모습이 추하게 보였지만 내가 그 자리에 올라갔을 때 그러지 않으리라는 확신은 들지 않았다. 그러자 오히려 아브라모바가 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브라모바는 중간에 나가버렸다. 나는 이고리와 함께 두 시간 동안 연습을 했다. 도브렌스카야는 내게 작년보다 훨씬 좋아졌다고 칭찬을 늘어놓았다. 전에는 반항적인 줄리엣으로만 보였지만 이제 정말 사랑에 빠진 줄리엣으로 보인다고 감탄했다. 아마 그건 사실일지도 모른다. 이고리와 연습하는 내내 나는 게르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연습을 마치고 나오자 이미 늦은 저녁이 다 되어 있었다. 이고리가 중요한 무대를 얻은 걸 축하해주고 싶다면서 저녁을 사겠다고 나섰다. 그는 나처럼 제1 솔리스트였고 벌써 2년 동안 내 파트너였다. 그리고 그 2년 동안 한결같이 내게 반해 있었지만 난 물론 모른 척하고 있었다.




 우리는 극장 근처의 꽤 괜찮은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이고리는 내게 안색이 창백하다면서 걱정을 했다. 새벽의 수혈 때문일 테지만 립스틱을 바르지 않아서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라고 대꾸해 주었다.



 수요일 무대에 올라가게 된 것을 축하해주던 이고리가 잠깐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 너 미샤와 사귀는 거야? ”




 “ 그게 무슨 소리야? ”




 “ 노비코프는 웬만하면 마리야에게서 역을 뺏지 않잖아. 전에 더 부상 심했을 때도 그대로 췄는걸. 그 여자가 빼달라고 했을 리는 없고, 그럼 미샤가 너로 바꿔달라고 한 거 아닌가? ”




 “ 아니, 난 그런 어린애에겐 흥미 없어. 그리고 설령 미샤가 바꿔달라고 청한 거라 해도, 왜 그게 걔가 나랑 사귀는 사이여서 그런다고 생각해? 그냥 나와 추고 싶어서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 내가 아브라모바보다 그렇게 수준이 떨어져? ” 




 
 이고리는 황급히 사과했다. 전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변명했다. 그리고는 미샤가 배역뿐만 아니라 파트너들도 마음대로 골라잡도록 되어 있어 남자 무용수들 사이에서 질시와 불안감이 교차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 바보들. 질투할 시간에 연습이나 더 하지. 아니면 외모나 가꾸든가. 둘 중 하나도 안 되는 주제에 연방에서 제일 잘 나가는 앨 욕해봤자 무슨 소용이야. ”




 “ 다들 왜 그렇게 걔한테 열광하는지 정말 모르겠어. 춤이야 잘 추지. 하지만 여자들이 넋 나가는 건 이해가 안 돼. 그냥 예쁘장한 어린애잖아. 관객들이야 그렇다 치고 극장 여자들까지 전부... ”




 이고리가 어젯밤 그 별장에 있었다면, 약을 먹고 사지를 늘어뜨린 채 쇼플린의 품에 안겨 지저분한 짓을 하고 있는 미샤를 봤다면 어땠을지 문득 궁금했다. 아마 파벨처럼 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크라베츠처럼 변할까?



 “ 왜, 기껏 사춘기 티도 못 벗은 애한테 진짜 사내들이 밀려나는 게 그렇게 섭섭해? 걔 너무 무시하지 마, 자기들처럼 180 넘는 아킬레스 타입이 아니라서 그렇지 몸매는 근사하던데. 혹시 알아, 침대에서도 당신들보다 훨씬 셀지. 당장 마리야도 걔한테 목매고 있잖아. 그 밝히는 여자가... ”





 이고리는 내 농담을 가볍게 넘길 기분이 아닌 것 같았다.




 “ 에벨, 행여 걔랑 얽힐 생각은 하지도 마. 레닌그라드에 있을 때도 쫓아다니던 여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했어. 학교 다닐 때도 정신 나간 팬 계집애가 걔 파트너 얼굴을 가위로 찢어놓으려고 했다고. 지나이다 세도바한테 협박 편지가 얼마나 많이 왔는지 알아? 쫓아다니는 여자들이 하도 극성을 부리니까 세도바가 지쳐서 걔랑 헤어졌다는 얘기 못 들었어? ”




 “ 세도바? 참 순진하네, 이고류슈카. 둘이 정말 사귄 거라고 생각해? 그건 키로프에서 홍보용으로 떠벌린 거지. 그래서 아파트도 같이 쓰라고 내주고. 우리 귀염둥이 꼬마는 말야, 세도바하고는 아무 관계도 아니었어. 여기로 온 것도 그 여자가 결혼한 것과는 전혀 상관없고. 그런 루머 떠들 시간에 연습이나 더 해. ”
 





 이고리는 포크를 내려놓고 날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제 정말로 내가 그 꼬마와 자는 사이라고 생각하게 된 모양이었다. 이고리가 무슨 생각을 하건 내 알 바 아니었지만 문제는 발레단에 헛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할지도 모른다는 데 있었다. 아브라모바도 합세한다면 꽤 골치 아파질 게 뻔했다. 그래서 난 차갑게 덧붙였다.




 “ 어쨌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난 극장 남자들하고는 얽히지 않으니까. 일과 엮이면 피차 힘들어져. 그리고 걘 내 취향도 아니고. 알잖아, 내가 어떤 남자 좋아하는지. 우리 검은머리 꼬마는 어디에도 해당 안 돼. ”




 “ 거인. 나이 많은 남자. 지배자 스타일. 전부 아니긴 하지. ”



 이고리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 역시 내가 게르만의 여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말을 잊지 않았다.




 “ 하나 있잖아. 최고의 자리에 있는 남자. 넌 그런 남자를 좋아해. 걔도 마찬가지야. ”




 “ 난 얼굴 예쁜 사내애는 질색이라서. ”




 이고리는 집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했다. 내가 차를 놓고 온 걸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했다. 딱히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다시 버스를 타고 가기는 싫었으므로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차 안에서 그는 쭈뼛거리며 구애를 시도하려고 했지만 물론 잘 되지 않았다. 극장 남자들과 얽히지 않겠다는 내 말에 기가 죽은 게 분명했다. 아니면 결국 미샤와 내 관계를 의심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아파트 앞에 도착했을 때 이고리는 내게 키스하려고 했다. 난 고개를 돌렸고 차에서 내렸다. 어차피 거절당할 걸 알면서도 마지막 남은 사내의 자존심 때문에 시도해본 게 분명했다.



 “ 태워다 줘서 고마워, 내일 극장에서 봐. ”



 이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실패한 키스 때문에 멋쩍어서 그런가 싶었지만 그의 시선은 창밖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어 그쪽으로 눈을 돌려보니 아파트 앞 벤치에 일린이 앉아 있었다. 가로등 램프 아래라 그 연한 금발 머리가 하얀 눈처럼 빛나고 있었다.



 이고리가 아주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 인기 많아서 좋겠어, 에벨. 그래도 스타니슬라프 리보비치라니, 이건 상상도 못했는걸. ”




 
 난 일린이 새 작품 때문에 온 거라고 말해주려다 문득 걷잡을 수 없이 피곤해져서 그만두었다. 이고리는 오 초 간 내 대답을 기다렸고 결국 고개를 저으며 떠났다.





*   *   *





 이고리의 차가 떠난 후에야 일린은 벤치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걸어왔다. 램프 불빛에 비친 얼굴이 해쓱했다. 하루 사이에 늙어버린 것 같았다. 하긴 그는 이미 30대 중반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 왜 온 거야? ”



 난 인사를 생략하고 곧장 물었다. 그는 잠자코 내게 지갑을 내밀었다.



 “ 잊고 갔더라. ”




 “ 극장으로 오지 그랬어. 왜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우리가 그럴 사이는 아니잖아. ”




 “ 네가 오늘 극장에 갈 줄 몰랐었지. ”




 “ 내일 극장에서 줘도 되잖아. ”




 “ 여권도 들어 있던걸. 곤란해질까 봐. ”



 난 급하게 지갑을 펴 보았다. 정말 여권이 구겨진 채 끼어 있었다.



 “ 아, 그 경비대 병신들... 신분증이 어쩌고 제한구역이 어쩌고 난리치더니... ”



 그자들과 실랑이하며 여권을 꺼내 흔들었던 건 기억났다. 하지만 왜 그걸 핸드백이 아니라 지갑에 쑤셔 넣었는지, 그리고 지갑은 왜 흘리고 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 어디서 찾았어? 기억도 안 나네. ”




 “ 폴루넨코가 줬어. 경비대한테 압수당했었다며. ”




 “ 그랬나, 생각도 안 나. 없는 것도 몰랐어. ”




 “ 지갑도 없이 극장에는 어떻게 갔어? ”




 “ 동전지갑은 따로 있었으니까. 지갑이 없는지도 몰랐어. 내가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하다니. ”




 “ 경황이 없어서 그랬겠지. 충분히 그럴만해. 새벽이었잖아. 취해 있었고 상황도 그랬고. ”




 “ 그렇긴 했지. 애는 피를 철철 흘리고 숨이 넘어가기 직전인데 그 망할 놈들이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었으니까. ”




 갑작스럽게 소름이 끼치면서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술이 깨서 그랬을 것이다. 아니면 현실로 돌아와서 그런 건지도 몰랐다. 사람을 때리고 약을 먹이고 겁탈하는 것이 범죄로 간주되는 곳, 극히 상식적이고 윤리적이며 정상적인 곳. 아무리 게르만의 세계를 동경한다 해도 결국 내가 속한 곳은 역겹고 우울하며 깨끗하기 짝이 없는 노예들의 세계, 피를 쏟아내며 죽어가는 아이를 방관하는 순간 나 역시 살인자와 다름없는 가책에 시달리게 될 수밖에 없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극도의 혐오로 현기증이 일었다.




 눈에 띄게 휘청거렸던 것 같았다. 일린이 내 팔을 붙잡고 벤치로 데려가 앉혔기 때문이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자 일린이 사탕 껍데기를 까서 내밀고 있었다.



 “ 뭐야, 이건. ”




 “ 지쳐서 그런 거야. 먹으면 좀 나을 걸. ”




 “ 자기 애들 주고 남은 거야? ”




 “ 아냐가 좋아하지. ”



 사탕에서는 달착지근한 딸기향이 났다. 그 맛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별로였지만 그래도 당분이 들어가자 머리가 좀 맑아지는 것 같았다. 이 사이에 끼우고 사탕을 마구 부스러뜨려 먹자 일린이 처음으로 웃었다.



 “ 뭐가 우스워? ”




 “ 아냐처럼 먹어서. ”




 “ 지난번 백조 무대 때 당신이 데려왔던 애? ”




 “ 아니, 걘 라라. 큰애야. 아냐는 작은애. ”




 “ 몇 살인데? ”




 “ 큰애는 열 살, 작은애는 일곱 살. ”




 “ 그래서 그 건방진 꼬마 비위를 잘 맞춰주는 거군. 걔 완전히 애던데. 극장에서는 그렇게 도도한 척 하더니... 취하니까 얼마나 어린애 같던지... ”




 “ 어린애 맞아. 이제 겨우 스무 살 넘긴 애야. 그런 아이를... ”




 일린이 치솟는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난 사탕 부스러기를 혀로 녹이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 글쎄, 난 그 나이 때 안 그랬는데. 하긴 나도 게르만이랑 처음 잤을 때는 울었지. 6년 전이니까 지금 걔 또래였겠네. 그 사람 굉장히 무서웠거든. 그리고 상대가 울면 좋아하지. 반항하고 비명 지르면 더. 그럼 더 괴롭혀주고 싶어 하지. 어제 보니 걘 아직도 그걸 모르는 것 같더라. 그러니까 어린애라는 거지. 학습이 안 되는 거잖아. ”





 
 일린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반박하지는 않았다. 몹시 지치고 슬퍼 보였다. 스탈린에게 숙청당해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사람들의 사진이 생각났다. 덩달아 우울해진 난 빨리 이 대화를 끊고 올라가기 위해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 걘 어떤데. 정신은 차렸어? ”




 “ 아침에. 약 기운 때문에 계속 괴로워하더라. 그래도 오후쯤 되니까 많이 나아졌어. ”





 
 그럴 만도 했다. 스치기만 해도 칼로 찢는 것처럼 아파진다고 했으니까.




 “ 퇴원한 거야? ”




 “ 아니. 아직 병원에 있어. ”




 “ 왜? 약 기운은 다 빠졌다면서. 크게 다친 데 없잖아. 수혈도 받았고. ”




 “ 옆에 누가 있어야 하니까. 내일 아침에 내가 데리고 나올 거야. ”




 “ 다시 칼질이라도 할까봐? 안 그럴걸. 게르만이 그랬어, 그 약 먹고 나면 다 잊어버린다고.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를 거야. 아니면, 혹시 기억해? 물어봤어? ”




 “ 글쎄...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아. 손목에 그렇게 붕대가 감겨 있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 전적도 있다는데... 정신과 의사가 와서 상담도 했어.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




 “ 왜 그랬대? ”




 “ 기억 안 난대. ”




 “ 어디까지 기억하는지 물어봤어? ”




 “ 별장에 간 것까지. 그 다음부터는 필름 끊겨서 모른대. ”




 “ 누가 있었는지도? ”




 “ 안 물어봤어. 굳이 그럴 필요 없잖아, 기억나면 더 괴로울 텐데. ”




 “ 내가 같이 있었던 것도 생각 안 난대? ”





 
 일린은 고개를 저었다. 돌덩이를 매단 것 같던 심장 한구석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 그가 무거운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 헛소리할 때, 그 때 네 이름 부르긴 했어. 날 그 개자식인줄 알고 매달리면서... 널 건드리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 그게 전부야. 너무 걱정하지는 마. 무슨 말 했는지 전혀 기억 못하더라고. 네가 같이 있었던 것도 모를 거야. 전에도 그랬어, 술에 취하기만 해도 기억 거의 못해. 약까지 먹였다니까 더 그렇겠지. ”




 나는 입을 다물었다. 뜨거운 분노와 증오가 혈관을 타고 전류처럼 흘렀다. 그것까지는 괜찮았다. 그 얼간이에 대한 경멸과 미움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왜 뺨을 태우는 듯 뜨거운 눈물이 쏟아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린은 당황하지도 않았다. 내가 울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어린애들을 잘 다루는 남자. 언제 어깨를 빌려줘야 할지, 언제 내버려둬야 할지 거의 본능적으로 분위기를 파악하는 남자. 그래서 미샤가 그를 졸졸 따라다니는 거겠지. 멍청이.




 잠시 후 내가 울음을 멈췄을 때 일린이 손수건을 주었다. 그가 항상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는지 궁금했다. 하긴 어린 딸들이 있으니 사탕을 챙기는 것처럼 손수건도 가지고 다닐 게 뻔했다. 이제 그가 가만히 내 어깨를 토닥였다. 거의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거리감을 조절하고 적당한 순간 위안의 몸짓을 선사하는 것. 왜냐하면 우리는 딱 그런 정도의 사이였기 때문이다.



 “ 미안해, 에벨. ”




 “ 왜? ”




 “ 너도 거기 있었는데... 분명 끔찍했을 텐데. 미샤 때문에 놀라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




 “ 내가 끔찍할 일이야 별로 없었지. 약을 먹은 것도 아닌데. ”




 “ 넌 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 ”




 “ 전혀. ”




 “ 하지만... 미셴카는 많이 맞은 것 같던데. 넌... ”




 “ 그건 크라베츠가 그랬던 거야. 꼭지가 돌아 있었으니까. 그자는 내가 거기 있는지도 몰랐을 걸. ”




 “ 그 애는 크라베츠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 했어. 그 더러운 놈, 스비제르스키 이름만 불렀어. 널 놔주라고 계속... 그러니까 너도... ”




 “ 걘 제정신이 아니었어. 헛것을 보고 있었던 거야. 게르만을 무서워하니까 자기 멋대로 상상한 거지. 게르만과 나는 꽤 좋은 사이야. 난 걔처럼 그 사람을 싫어하지 않거든. 그러니까 내 걱정은 그만 둬. 멀쩡하니까. 어쩌면 난 말이야, 심지어 그 사람을 사랑하는지도 모르지. 아주 많이. 우습지 않아? 게르만은 걔 때문에 날 버렸어. 자기를 몸서리치게 싫어하는 그 바보 같은 꼬마 때문에. 내가 자기를 그렇게 사랑한 걸 알면서도... ”




 “ 그자가 널 망칠 거야, 에벨리나. 그냥 떠나. 그러면 모든 게 훨씬 나아질 거야. ”





 “ 떠나다니? 게르만을? 당신 정말 아직도 전혀 이해 못하는군. 아무도 그 사람에게서 벗어날 수 없어. 일단 그 사람 것이 되면 죽을 때까지 못 떠나. 아니, 죽어서도 벗어날 수 없을 걸. 내가 왜 게르만에게 걜 데려가지 않았는지 알아? 그 짓거리를 한 걸 알았다면 그 사람은 미샤에게 간밤에 해줬던 건 새발에 피가 될 만큼 심하게 벌을 줬을 거야. 두 눈에서 눈물 대신 피가 줄줄 쏟아지게 해줬을 거라고.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의 것이 된다는 건 말야, 스타니슬라프 리보비치, 모든 게 그 사람에게 속하게 된다는 걸 의미해. 무슨 말인지 알아? 우린 그 사람을 거부할 권리가 없어. 도망칠 수도 없고 심지어 자살할 권리도 없어. 그 사람은 일단 자기 걸로 만든 상대는 결코 놔주지 않아. 마음이 식어도 끝까지 버리지 않는다고. 선반에 올려놓은 예쁜 인형들처럼. 그냥 내버려두는 거야. 하지만 절대 도망치게 해주지는 않아. 잊지도 않지. 그것들 중 하나가 죽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자기 손으로 죽일 거야. 그게 전부야. 그런데 그 꼬마가, 그 바보 같은 애가 감히 거기서 벗어나려고 했어. 걔가 왜 실패했는지 알아? 운 좋게 내 눈에 띄어서가 아냐. 그때 내가 차고에 가지 않았어도 걘 죽지 못했을 거야. 게르만이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소중한 친구가 정말 자살해 버릴까봐 너무 걱정할 것 없어. 게르만이 죽이기 전에는 절대 안 죽을 테니까. 무슨 짓을 해도 안 죽어. 그 사람은... ”





 나는 거의 오페라 가수처럼 악을 쓰고 있었다. 근처에 있던 사람 몇 명이 우리 쪽을 멍하게 쳐다보았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곁을 지나쳐 가버렸다. 숨이 탁 막혀왔다. 몹시 취한 것 같았다. 어쩌면 나도 그 약물을 먹었던 건지도 몰랐다. 헛소리를 하고 헛것을 보고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약물. 루뱐카. 고문용 약물. 이제 온몸이 아파질 것이다. 건드리기만 해도 몸이 조각조각 저며지는 것처럼 아프겠지. 존재하지도 않는 페이퍼 나이프를 찾아 헤매게 될지도 모른다.




 일린이 나를 껴안았다. 어깨를 팔로 감은 채 한 손으로 뒷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힘을 주어 포옹했다. 스타니슬라프 일린은 왜소하고 야윈 남자였다. 키도 나보다 몇 센티 정도밖에 크지 않았다. 굳이 게르만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수많은 내 파트너들의 넓고 탄탄한 가슴팍에 비하면 품도 작고 좁았다. 하지만 그 역겨울 정도로 다정한 남자의 품은 아주 따뜻했다. 뜨거운 게 아니었다. 그저 아주 따뜻할 뿐이었다. 처음으로 나는 미샤가 왜 모스크바로 왔는지, 게르만에 대한 그 모든 공포와 크레믈린을 향한 증오를 무릅쓰고 볼쇼이로 건너올 용기를 어디로부터 짜냈는지 알 것 같았다. 



 목과 가슴으로부터 새어나오던 날카로운 비명과 흐느낌이 잦아들었을 때 비로소 나는 귓가에 스며드는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었다. 일린이 속삭이고 있었다. 괜찮아, 에벨. 전부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그가 계속해서 그렇게 말했다. 노래하듯, 다정하고 상냥하게. 네 잘못이 아니야. 괜찮아, 에벨. 네 잘못이 아니야.



 그건 마치 멀리 강 너머로부터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교회 종소리 같았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정교 신자인 적이 없었던 나, 게르만과 마찬가지로, 아니, 제대로 정신이 박힌 모든 소련 시민과 마찬가지로 그 낡아빠진 미신을 경멸해온 내 머리 위로 그 종소리가 햇살처럼, 샤워 호스에서 쏟아지는 물줄기처럼 쇄도해 내려오는 것 같았다. 그 모든 것이 기만이었고 보기 좋은 연극이라는 건 알았다.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는 전부 알았다. 하지만 그 순간 내겐 바로 그 말이 필요했던 건지도 모른다. 허세와 거짓 위안으로 가득한 부드럽고 달콤한 그 말. 네 잘못이 아니야. 전부 괜찮아. 어쩌면 그 아이에게도 그 말이 필요했던 건지도 몰랐다. 전부 괜찮아, 미셴카. 네 잘못이 아니야. 내 말 들어. 네 잘못이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 아이는 의식이 없었어. 게르만이 안아주고 있었을 때 이미 정신이 나가 있었다고. 귓가에 뭐라고 속삭인들 알아듣지도 못했을 거야. 난 상처를 닦아줬어. 담뱃불 상처에 연고를 발라줬고 게르만의 체액을 씻어줬어. 그러니까 그걸로 된 거야. 난 차를 몰았어. 그자들에게 여권을 내줬고 게르만의 이름을 팔면서 큰소리치고 폴루넨코를 불러냈어. 피를 줬어. 그 누구에게도 준 적이 없었던 내 피를. 그러니까 전부 괜찮아. 다 괜찮은 거야. 내 잘못이 아니야. 스탄카의 말대로. 내 잘못은 없어.




 나는 다시 흐느끼고 있었다. 일린이 등을 천천히 쓸면서 내 머리를 품에 바짝 끌어당겨 안았다. 여전히 따뜻했다. 그 순간에야 나는 내 입에서 쏟아지고 있는 토막나고 뭉개진 단어들을 들었다. 그 모든 말들. 심장을 저미고 온몸을 불태우는 말들. 그 자존심 강하던 아이가 게르만의 품에서 머리를 뒤로 젖힌 채 끝없이 애원하며 헛소리를 지껄였던 것처럼. 그자가 내게도 보이지 않는 주사를 놓고 보이지 않는 앰풀을 뜯어 목구멍으로 약물을 흘려 넣었던 게 틀림없었다. 아니, 그건 미샤였다. 내가 그 애를 포옹했을 때, 목 졸려 신음하며 뜨겁게 달아오른 그 애의 몸 위에 올라탔을 때, 내 안으로 그 애를 받아들였을 때, 열기와 쾌감에 휩싸여 내가 온몸을 적시고 또 적셨을 때, 그때 그 아이가 내 안에 어떤 짓을 한 것이다. 게르만이 가져온 약물, 루뱐카에서 온 그 고문용 약물을 흘려 넣은 것이다. 아니, 그건 약물도 아니었다. 그 애가 날 감염시킨 것이다. 고통과 죄책감, 한없는 증오와 혼란스러움, 그리고 공포. 어둠에 대한 공포. 게르만에 대한 공포. 왜냐하면 증오와 공포는 사랑보다도 쉽게 전염되기 때문이다. 나의 사랑이 그 아이를 감동시키지 못했던 것처럼. 그 아이의 공포가 나를 감염시켰고 나약하게 만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의 인형들이었고 줄에 함께 엮인 채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전부였다.




 “ 그렇지 않아, 에벨. 넌 모든 것을 다 했어. 네 잘못이 아니야. 네가 거기 있었기 때문에 미샤가 살아난 거야. 그 애가 거기 혼자 있었다면... 그 어둠 속에 혼자 남았다면 결코 되돌아 나오지 못했을 거야. 괜찮아, 에벨리나. 전부 다 괜찮은 거야. ”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 절반만 이해하고 절반은 영영 모르는 채 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게르만이 고른 상대가 아니니까. 아마도 미샤는 이해할 것이다. 내 설명을 듣기도 전에, 내 눈을 보기도 전에. 아니, 내가 곁에 가 앉기도 전에 이미 전부 이해할 것이다.




 잠시 후 난 술에서 깨어난 것처럼 멀쩡해졌다. 소매로 눈과 코를 닦았고 일린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이고리가 근처에 숨어서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관없었다. 나는 일린에게 사탕 남은 게 있으면 하나 더 달라고 했다. 그는 호주머니를 뒤져서 불투명한 셀로판지로 싸여 있는 사탕을 꺼내 주었다. 남자들은 언제나 주머니에 모든 것을 쑤셔 넣고 다닌다. 아무리 깔끔하고 번듯해 보이는 남자들도 예외란 거의 없다. 껍데기를 까 사탕을 입에 넣고 아까처럼 부스러뜨려 먹었다. 이번에는 오렌지 맛이었다.




 “ 이건 맛이 전부 달라? ”




 “ 응. 껍질만 보면 모르지만. ”




 “ 무슨 맛인지는 먹어봐야 아는 거야? 아니면 껍데기를 까봐야? ”




 “ 응. 그래서 아냐가 좋아해. 항상 기대하게 해주니까. ”




 “ 글쎄. 지독하게 맛없는 걸. 딸기도 오렌지도. 아마 다른 것들도 맛이 없을 거야. ”




 “ 그래도 넌 먹을 걸. 궁금하니까. ”




 “ 그럴지도 모르지. ”




 일린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굽 높은 구두 덕에 우리의 눈높이는 같았다. 어둠 속에서 그의 밝은 회색 눈이 등불을 켜 놓은 것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밝고 슬픈 눈이었다.



 “ 미샤는 안 먹었어. ”




 “ 사탕? 맛이 없으니까 안 먹었겠지. ”




 “ 아니, 사탕이라서 안 먹은 거야. 아무리 맛있는 거라도 안 먹어. ”




 “ 우리보다 관리를 더 지독하게 하는군. 하긴 그러니까 그런 몸매를 유지하고 있겠지. ”





 
 일린은 엘리베이터까지 나를 데려다 주었다. 하지만 같이 타고 올라가지는 않았다. 우리는 딱 그 정도인 사이였고 스타니슬라프 일린은 거리와 타이밍에 대해 천부적인 감각을 가진 남자였다.




 막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일린이 말했다.



 “ 화요일 열 시. 도브렌스카야에게 전화로 얘기해놨어. 그때 미샤량 맞춰보면 될 거야. 좀 빠듯하긴 하겠지만. ”




 “ 수요일 무대 올라올 거래? 자기 입으로 그랬어? ”




 “ 공연 얘기밖에 안 했어. 오늘도 극장에 가야 한다고 저녁에 퇴원하려는 걸 말린 거야.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 잊지 마. 새 작품. 나한테 주기로 한 거. ”




 “ 여자 무용수가 나오면 주기로 했지. ”




 “ 나오게 만들어. ”




 일린은 미소를 지었지만 확답은 해주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사실 별로 기대하고 있지도 않았다. 더 이상 승급도, 수요일 로미오와 줄리엣도, 그리고 새 작품도 중요하지 않았다. 자고 싶을 뿐이었다. 모든 것을 잊고. 아주 깊이. 암흑 속에서.




 그리고 나는 그렇게 했다. 집에 올라와서 문을 걸어 잠그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 후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보드카를 한 잔 마시고 곧 잠들었다. 모든 것을 잊고. 아주 깊이. 암흑 속에서. 그러자 더 이상 어둠이 두렵지 않았다. 모든 것이 괜찮았다. 자고 일어나도 그럴 것이다.






 

 

FIN

2014. 5. 5 - 6. 10



...





Jewels 04에서 에벨리나가 미샤의 아파트로 찾아가는 것은 이 에피소드 다음날 저녁이다.




...





Dolls는 제대로 축조된 소설이라기보다는 미샤의 본편들을 위한 데이터 구축용 밑자료 글이라 따로 퇴고나 정제는 별로 하지 않았다. 다만 너무 수위높은 부분들과 거친 표현들만 들어내거나 수정해서 올렸다. 보통 이런 글들은 올리지 않는데 어쩌다 보니 올렸음. 하지만 글의 종류가 다를뿐 쓰는 것은 같다. 그리고 과정마다 어떤 특질과 의미가 생겨난다.




이 글은 상당히 쉽게 썼다. 그도 그럴 것이 폭력과 심적 격동에 대해 별다른 여과 없이 썼고 굳이 화자와의 거리감 확보를 위해 애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의 언제나, 내게는 에벨리나나 스비제르스키 같은 인물에 대해 쓰는 것이 더 쉽고 자유롭다. 그것은 내가 그들과 동일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쓰는 것이 더 편안하고 쉽다. 왜냐하면 나는 자기방어적이며 견고하고 등을 돌리기를 좋아하는 부류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떠나가지는 않는다. 그저 고개나 등을 돌릴 뿐. 아마도 현실에서 나는 에벨리나보다는 미샤처럼 생각하거나 행동할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건 그렇고 글을 올리면서 마지막의 날짜를 보니 벌써 3년 전에 쓴 글이네.





...




맨 위의 사진은 작년 가을에 프라하의 카페 에벨에서 찍은 천정 램프 사진이다.



이 글의 화자인 에벨리나의 이름은 사실 카페 에벨에서 가져온 것은 아니다. 예전에 읽은 러시아 소설에서 이 이름을 발견했는데 좀 옛날 이름이긴 하지만 당시 이 인물에게 어울린다 생각해 붙인 것이었다. 에벨리나, 지나이다 모두 좀 옛날 이름들이다. 물론 러시아어 특성상 에벨리나라고 완전하게 부르는 일은 별로 없고 보통 일린처럼 에벨이라고 부르거나 스비제르스키처럼 좀더 친근하게 에벨랴라고 부른다. 미샤는 그녀를 동료이자 선배 발레리나로 깍듯이 대우하고 있으므로 온전한 이름과 부칭까지 다 써서 '에벨리나 드미트리예브나'라고 부른다. 하여튼.... 쓰다 보니 에벨이란 이름을 종종 부르게 되어서, 카페 에벨 사진 한 장 붙여봤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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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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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주말부터 올리고 있는 Dolls 세번째 이야기이다.



이 글은 첫번째 파트인 01. 에벨리나(http://tveye.tistory.com/6960),

그리고 두번째 파트인 02. 미샤(http://tveye.tistory.com/6964) 에서 이어진다.

본래는 이 글보다 먼저 썼던 부활절 단편 jewels에서 파생된 데이터 구축용 소품이다. 01의 링크를 클릭하면 이 글에 대한 메모가 좀 붙어 있다.




02까지는 들어낸 장면들이나 순화해 수정한 표현들이 꽤 많은데 이번 03부터 04는 원 버전에 가깝다. 수정한 내용 별로 없음. (이제 잔인한 폭력 장면 안 나옵니다! 정말입니다!!!!)



..



'스탄카'는 스타니슬라프 일린의 애칭이다. 이 본편들에서 미샤가 일린을 그렇게 부르곤 한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Dolls






 

 



 클리닉에 도착했을 때 미샤는 이미 자기 힘으로 숨을 쉬기 힘든 상태였다. 안색은 희미한 납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내가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그건 루뱐카 클리닉에 일반인이 결코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경비대가 여권과 출입증을 요구했을 때 난 거의 미치기 직전이었다. 그래서 난 고압적인 자세로 반말을 쓰며 큰소리를 쳤다.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의 이름을 대고 내가 누군지 모르냐고 화를 냈다. 내가 워낙 강하게 나갔기 때문에 움츠러든 경비대원은 클리닉 내부에 전화를 걸어 보고를 했다.



 “ 당신들 미쳤어? 쟤부터 어떻게 해봐! 놔두면 금방 죽을 거야! 쟤가 죽으면 당신들 전부 모가지란 말야! ”



 난 거의 절망적으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그때 보안 부책임자인 폴루넨코가 나왔다. 그나마 그 작자가 당직이라 다행이었다. 전에 무릎 치료를 받으러 왔을 때 만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권력자들을 잘 모시는 인간이었다. 폴루넨코는 날 알아보더니 금세 저자세로 변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뒷좌석에 누워 있는 미샤를 가리켰을 때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그게 누구인지 대번에 알아봤던 것이다. 그는 급하게 응급요원들을 호출했다. 순식간에 들것과 산소마스크가 나타났다. 




 미샤를 응급실로 실어간 후 폴루넨코는 날 자기 사무실로 데려갔다. 뜨거운 차를 한 잔 주면서 자초지종을 물었다. 난 아무 것도 모른다고 했다. 차에서 그 애를 발견해서 데려왔다고만 했다.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똑똑한 인간이었다.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치 챈 것 같았다. 그자가 게르만에게 보고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었다. 빨리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폴루넨코는 날 보내주지 않았다. 적어도 한 사람은 보호자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보호자라니. 그런 건 질색이었다. 그래서 진짜 보호자를 하나 불러주겠다고 대꾸한 후 그의 사무실에서 일린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일린은 한참 후에야 전화를 받았다. 깊게 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새벽에 내 전화를 받자 적잖게 놀랐는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우리는 극장에서 나름대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친한 친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린은 사교성이 좋았기 때문에 극장 사람들과는 대부분 잘 지냈고 특히 젊은 무용수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게다가 건방지기로 소문난 미샤를 키로프에서 낚아온 후 그의 입지는 훨씬 탄탄해져 있었다. 게르만도 그의 작업을 좋아해서 종종 자기 파티에 부르곤 했지만 다행히 데리고 자는 상대는 아니었다. 일린은 그러기엔 너무 나이가 많고 또 체구도 너무 작았다.



 난 그에게 딱 두 마디만 했다. 미샤가 자살 미수로 클리닉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는 것과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것. 일린은 굉장히 놀란 것 같았지만 내게 병원 주소를 물을 정신은 있었다. 주소를 받아 적자마자 그는 전화를 끊었다. 아마 나처럼 미친 듯이 차를 몰고 달려올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난 화장실로 가서 얼굴에 찬물을 끼얹은 후 밖으로 나갔다. 4월이었지만 아직 추웠다. 그래도 바깥 공기를 쐬니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일린이 올 때까지 차에 앉아 있을까 했지만 피 냄새가 너무 많이 나서 속이 울렁거렸다. 병원에서 타월을 두어 개 가져와 뒷좌석과 바닥을 대충 훔쳐냈지만 얼룩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시트를 몽땅 갈아야 할 것 같았다. 그 아이가 어떻게 문을 따고 들어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별장에서 빠져나가고 싶었겠지. 그 애가 걸핏하면 파티나 행사에서 도망쳐나가곤 했다는 건 볼쇼이에도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해외 투어를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부러 내 차에 들어갔을 것 같지는 않았다. 차고엔 차가 두 대뿐이었으니까 지굴리보다는 내 차가 더 눈에 띄었겠지. 그래서 기어들어갔을 것이다. 왜 그런 짓을 했는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피를 닦아내다가 뒷좌석 시트 사이에서 페이퍼 나이프를 발견했다. 화려한 세공이 된 손잡이를 보니 기억이 났다. 거실에 있었던 거였다. 화가 난 크라베츠가 미샤를 찌를까봐 파벨이 한쪽으로 치워놨던 나이프였다. 칼날은 피로 끔찍하게 얼룩져 있었다. 거실로 기어 나왔을 때 발견한 모양이었다.



 대체 그 아이는 무슨 생각으로 칼을 집어 들었던 걸까.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주제에 칼을 주워들 정신이 있었다는 게 그저 놀랍기만 했다. 미샤의 매무새는 엉망이었다. 소매와 칼라가 찢겨진 셔츠와 지퍼가 망가진 청바지를 아무렇게나 사지에 반쯤 끼워 넣었을 뿐이었다. 들것에 실려 갈 때 보니 속옷도 입지 않았고 신발조차 신고 있지 않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더듬더듬 주워 입고 기어 나온 게 분명했다. 난 몸서리를 치면서 나이프를 집어 수풀 너머로 던져 버렸다.




 복도로 돌아왔을 때 주임 의사가 나를 불렀다. 심각한 얼굴로 내게 혈액형을 물었다.



 “ O형이에요. 왜요? ”



 의사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스쳐가는 순간 거짓말을 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미샤가 너무 피를 많이 흘려서 수혈이 필요한데 혈액이 모자란다고 했다. 하필 혈액형까지 같을 게 뭐냐는 생각이 들었다.



 “ 수혈만 받으면 안 죽어요? ”




 “ 지혈을 잘해 주셨더군요. 조금만 늦었어도 돌이킬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도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에요. 혹시 음주를 했나요? ”




 “ 보드카. 샴페인 잔으로 가득 마셨어요. ”




 “ 미친 짓을 했군... 알콜 분해를 아예 못 시키는 앤데. 그러니 그렇게 피를 많이 흘렸겠죠. 혈관을 크게 다친 게 아니라서 다행이에요. 취해서 빗나간 게 분명해요. 칼이 조금만 더 들어갔으면 동맥이 잘렸을 거에요. ”




 “ 전에도 걜 본 적이 있나보군요, 술 못 마시는 것도 알고. ”




 “ 아시다시피, 에벨리나 드미트리예브나. 여기서는 환자의 이력에 대해 얘기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




 “ 뻔하지, 전에도 여기 실려 왔겠죠. 게르만이 데리고 논 후에. 그래서 폴루넨코가 입을 다물고 있는 거겠지. 그때도 저런 짓을 했나요? ”




 의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난감한 표정이었다. 수혈을 하러 들어가면서 난 그에게 미샤가 술만 마신 게 아니라 약을 먹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쪽 동네에서 쓰는 심문용 약물이라고 하자 의사가 약물의 이름을 들었느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하자 증상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게르만이 얘기해준 내용과 내가 목격한 증상을 대충 간단하게 설명해주자 의사의 얼굴이 아주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욕은 하지 않았다. 어쨌든 루뱐카 소속 의사였으니까.




 미샤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표백한 것처럼 하얗게 보였다. 여전히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난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수혈을 했다. 하필 그게 저 꼴 보기 싫은 꼬마라니,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꽤 많은 양의 피를 뽑고 나자 현기증이 났다. 간호사가 내게 따뜻한 우유와 초콜릿을 주면서 먹으라고 했다. 비릿한 우유 냄새를 맡자 토할 것 같았기 때문에 초콜릿만 그 자리에서 전부 먹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 망할 꼬마의 손목에는 압박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침대에 앉아 초콜릿을 먹고 있는데 의사가 다가와서 심각한 표정으로 약물 외에 다른 일은 없었는지 물었다. 의사라면 그냥 보고도 전부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쏘아붙이자 그는 한숨을 쉬었고 나직하게 말했다.



 “ 최소한 몇 명이었는지는 얘기해주시죠. ”



 “ 네 명. 됐나요? ”




 “ 골반의 그 화상은 뭘로 그런 겁니까? ”




 “ 담뱃불. 이제 그만해요. 궁금하면 쟬 깨워서 들어요. 아니면 게르만 알렉세예비치에게서 직접 듣든가. ”




 물론 게르만의 이름에는 마법적인 효과가 있었다. 성가신 의사가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그는 내게 현기증이 가실 때까지 좀 누워 있으라고 했다. 초콜릿을 먹자 한결 나아졌기 때문에 난 그의 말을 무시하고 복도로 나왔다.




 그때 일린이 도착했다. 난 그가 극장 근처에 산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생각보다 훨씬 빨리 도착한 거였다. 정말 타이어가 터질 정도로 과속해서 달려온 것 같았다. 폴루넨코가 정문에 얘기를 해둔 덕에 나처럼 경비대에게 가로막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는 한 손에는 여권을 들고 한 손에는 출입증을 구겨 쥔 채 복도로 뛰어 들어왔다. 자다가 나와서 머리가 사방으로 치솟아 있었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재킷도 뒤집어 입은 채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나를 발견하자 그는 인사도 하지 않고 다급하게 물었다.



 “ 미샤는? 괜찮은 거야? ”



 “ 안 죽었으니까 괜찮은 거겠지. ”


 “ 지금 어디 있어? 정신은 차린 거야? ”


 “ 보호자 서류 썼어? ”



 “ 시키는 건 다 썼어. 미샤는... ”



 
 난 일린을 병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난 그가 그렇게 흥분한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스타니슬라프 일린은 볼쇼이에서 가장 온순하고 상냥한 남자였다. 이따금 반대파들에게 핍박을 당하기도 했지만 전혀 누군가를 험담하거나 부정적인 음모를 꾸미는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무용수들을 데리고 자기 작품을 지도할 때도 좀처럼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게르만이 작년에 볼쇼이의 하고많은 안무가들 중 딱 그를 찍어서 키로프로 보낸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는 미샤가 어떤 상대에게 약한지 전부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별장에서 몇 시간을 보내고 나자 이제 나도 좀 알 것 같았다. 미샤는 명령과 규율에는 본질적으로 알레르기가 있었다. 한 마디로 부르주아 반동분자 기질이 있는 애였다. 그러니 아이처럼 어르고 달래며 곱게 다뤄주는 일린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린은 내가 알기로는 사내애를 건드리는 습관이 없었다. 그러니 둘이 같이 잤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미샤야 워낙 매춘부 기질이 강한 애니까 모르는 일이다. 일린이 저렇게 넋을 놓고 뛰어온 걸 보니 역시 같이 자는 사이 같기도 했다.




 침대에 누워 있는 미샤를 보자 일린의 낯빛이 창백하게 변했다. 다른 것보다도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는 모습에 놀란 것 같았다. 다행히 그때 주임 의사가 돌아왔고 미샤의 맥박과 숨소리를 체크하더니 마스크를 벗겨내고 튜브 하나를 뺐다. 그동안 일린은 마비된 것처럼 그 자리에 선 채 미샤를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가 일린에게 보호자냐고 물었다. 일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위기는 넘겼으니 괜찮아질 거라고 그를 안심시켰다. 그리고는 그에게도 혈액형을 물었다. 루뱐카 직속 클리닉 주제에 여분의 혈액도 없다니 한심한 노릇이었다. 게르만에게 그대로 일러바쳐서 혼쭐을 내주고 싶었다. 갑자기 피를 뽑아낸 팔뚝이 욱신거리며 아파왔다.



 일린은 AB형이었다. 그는 아까보다 두 배는 더 창백해진 얼굴로 물었다.



 “ 그 정도로 심각한 건가요? "




 “ 아뇨, 에벨리나 드미트리예브나가 수혈을 해주셔서 급한 불은 껐습니다. 다만 만약을 대비하는 게 좋겠다는 것뿐이죠. 원체 피를 많이 흘려서... ”




 “ 있어요, 극장에... O형인 친구들... 지금 부르면... ”





 
 의사는 고개를 저었고 아침에 모스크바 쪽 클리닉에서 예비 혈액이 도착할 거라고 대꾸했다. 아마 맞는 말이겠지만 사실은 더 이상 일반인들을 여기 부르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는 일린에게 걱정할 것 없으며 미샤는 두어 시간 자고 나면 정신을 차릴 거라고 안심시켰다.



 일린은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미샤가 뭘 했기에 피를 그렇게 흘린 것인지 물었지만 의사는 다른 환자를 봐야 하니 곧 돌아오겠다면서 자세한 건 내가 설명해 줄 거라고 하고는 급하게 병실을 나갔다. 비겁한 인간이었다. 진짜 설명은 하나도 해주지 않았다. 뭐가 그렇게 껄끄러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자는 모든 것을 나에게 떠넘기고 자리를 피했다. 난 보호자도 아니었고 미샤와는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이제 일린이 왔으니 전부 내버려두고 자리를 뜨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미샤를 멍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일린의 표정을 보자 어쩐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연민 때문은 아니었다. 나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일린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 아, 미셴카... 무슨 짓을 한 거야. ”




 
 난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복도로 데리고 나가려고 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의사도 없으니 옆에 있어줘야 한다고 했다.



 “ 마음대로 해. 난 이제 돌아갈 테니까. ”




 “ 어떻게 된 건지만 얘기해줘... 제발. ”




 “ 무슨 짓을 했겠어, 손목을 그은 거지. 괜찮아질 거라고 했잖아. 수요일 무대는 걱정 마. 내가 의사에게 물어봤어. 피만 흘린 거지 근육 다친 건 아니니까 후유증 없으면 올라갈 수 있을 거래. 됐지? ”



수요일 무대라니...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어? ”

 


 “ 그럼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쟤도 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공연 타령만 하던데. ‘하지 마세요, 공연 있어요, 수요일 공연 있어요’ 하면서 그렇게 매달리는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안 해? ”




 “ 뭘 하지 말라는 거야. 매달리는 건 뭐고. 에벨,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네가 여기 있는 거야. 그 파티에 너도 갔었던 거야? ”




 “ 파티에 갔던 건 아나보네. ”




 “ 알아, 스비제르스키가 부른 거잖아. 포노마레바랑... 문화국 사람들. 우리 집으로 전화 왔었어. 마르가리타와 이그나트도 있었다고. 미샤는 가기 싫어했는데 바실리예프가 두 번이나 전화하고 차까지 보냈어. 너도 거기 초대받은 줄은 몰랐어. ”




 “ 포노마레바? 하! ”



 난 웃음을 터뜨렸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극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 세상 물정을 모르지도 않고 필요할 때는 꽤 정치적으로 행동할 수도 있는 인물이, 스비제르스키의 후원을 받는 안무가가 어쩌면 그렇게도 순진한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 당신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거야? 게르만이 쟬 왜 불렀는지? 그게 무슨 극장 얘기하며 교양 찾는 살롱 같은 건 줄 알아? 정치가들 앞에서 춤추고 인사하고 맛있는 거 먹고 들어오는 리셉션 같은 건 줄 아냐고. 하긴 당신이 참석한 파티야 다 그런 거였겠지. 당신이야 그냥 스타니슬라프 일린이지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니까. 쟨 아냐. 게르만이 날 부르는 거랑 똑같아. 그것보다 더하지. 쟤가 뉴욕에 왜 갔는지나 알아? 그런 거 다 알면서 모스크바로 데려온 거 아니었어? ”




 
 일린이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직도 정신을 가다듬기 힘든 모양인지 다시 한 번 물었다.




 “ 그런 거라니, 에벨. 뭐가 그런 거라는 거야? ”




 “ 아, 지겨워. 당신 정말 바보야? 나이는 전부 어디로 먹었는지 모르겠네. 쟤가 게르만 스비제르스키 노리개란 거 아는 사람은 다 알아. 키로프 들어가자마자 게르만이 자기 걸로 만들었어. 벌써 3년도 넘었다고. 나처럼. 그래서 모스크바로 불러온 거야. 그래서 당신을 미끼로 썼던 거고. 게르만이 쟬 얼마나 귀여워하는지 알아? 그러니까 하루가 멀다 하고 쟬 호출하는 거지. 아파트도 자기 집 근처에 줬잖아. 노비코프 힘으로 그런 동네에 집을 얻어줬을 것 같아? ”



 일린이 비틀거렸다. 연극 무대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는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난 그의 어깨를 밀어 의자에 앉혔다. 순전히 여기서 그가 충격으로 졸도라도 하면 내가 이곳을 나가는 게 더 어려워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 물이라도 좀 줘? ”




 “ 동료에 대해 그런 헛소문 퍼뜨리고 다니면 안 돼, 에벨리나... ”




 “ 헛소문? ”




 난 기가 차서 웃기 시작했다.




 “ 고결한 척 집어치워, 스탄카. 우리 극장 애들이 높으신 분들한테 성 상납하는 거 모른다고 잡아떼지 마. 마리야가 누구 애인인지는 당신도 알잖아. 설마 나에 대해서도 몰랐다고 할 거야? 내가 게르만과 그런 사이란 건 온 모스크바에 소문이 파다한데. ”




 “ 네가 그 사람과 예전부터 사귀는 사이라는 건 알아, 노비코프가 위에 애들 보내는 것도... 하지만 그건 여자애들... ”




 “ 아, 스타니슬라프 리보비치. 건전한 소련 시민이라 참 좋겠네요. 당신 게르만에 대해 정말 아무 것도 몰라? 그 사람 계집애고 사내애고 안 가리는 거 유명한데. 뭐 쟬 가지고 노는 거 보니까 심지어 후자를 더 좋아하는 것 같던데. 게르만만 그런 것도 아니야, 사내애 건드리는 윗분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긴 이름 줄줄이 대면 루뱐카에 끌려가려나. 그래도, 스탄카. 적어도 쟤에 대해서는 알아두는 게 좋을 걸, 어쨌든 쟬 모스크바로 데려온 건 당신이니까. 당신 친구 미셴카는 말이지, 완전히 높은 분들 노리개야. 키로프 들어가기 전부터, 게르만이 손대기 전부터 말이지. 바가노바 다닐 때부터 드미트리 마로조프가 품에 끼고 있었다고. 게르만이 모스크바로 데려오면서 그 노인네를 완전히 물 먹인 거지. 그래도 그 양반 아직 쟤한테서 손 안 뗐을 걸. 돔브로프스키도 건드렸고. 또 누가 있더라. 다 외지도 못하겠네, 어제 있었던 사람들 얘기해 줄까? 아니면 걔가 왜 뉴욕에 갔었는지? ”




 “ 입 다물어, 에벨. ”




 일린이 분노와 충격으로 뒤섞인 얼굴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낮게 위협했다. 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 왜? 난 사실을 말해주는 것뿐이야.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야, 정말 쟤랑 자는 사이야? 다른 남자들이 있다는 걸 알게 돼서 질투하는 거야? 쟨 끝까지 아니라고 우기던데. 당신이랑 그런 사이 아니라고. 게르만이 그거 심문용 약물이라 그랬는데, 거짓말 못한다고... 아니었나보네. 개자식. 그렇게 악착같이 잡아떼더니... ”




 그때 일린이 내 뺨을 쳤다. 아프게 때린 것은 아니었다.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손이 올라갔던 것 같았다. 스타니슬라프 일린이 화를 내는 것도,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모두 기록적인 일이었다. 그 역시 너무 놀랐는지 급하게 손을 움츠리며 내게 사과했다.

 



 “ 미안해, 에벨리나. 용서해. 고의가 아니었어. ”




 “ 자는 사이 맞나보군. ”




 “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난 전혀 몰랐어. 아, 미셴카... ”




 일린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괴롭게 신음했다. 볼쇼이에서 가장 낙천적이고 온순하며 밝은 사람이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낯설었다. 흐느끼기라도 할 기세였다.




 “ 징징대면서 드라마 찍지 마, 낫살이나 먹어가지고 순진한 척 굴긴. 하여튼 난 이제 갈 거야. 또 허튼 짓 못하게 옆에서 잘 감시해. 수요일에 쟤랑 로미오와 줄리엣 추게 됐거든. 파트너 바뀌는 건 싫어. ”




 “ 약물은... 그건 무슨 소리야. 하지 말라고 매달렸다는 건 뭐고... ”




 “ 직접 듣지 그래, 소중한 친구가 깨어나면. ”




 
 일린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연한 회색 눈이 불그스름하게 충혈되어 있었다. 눈가에 흐릿한 물기가 배어나왔다.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그가 중얼거렸다.



 “ 얘기 안 할 거야, 미샤는. 전에도 얘기한 적 없어, 속마음에 대해서는 죽을 것처럼 괴로워도 절대 말 안 해. 한 마디만, 한 마디만이라도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적어도 내게... ”




 “ 착각도 유분수지. 쟤가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해? 다른 사람들 다 알아도 당신한테는 알리고 싶지 않을 걸. 당신한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그렇게 게르만에게 매달렸는데. 얼마나 울던지 역겨워서 토할 것 같았어. 사내애가 어쩌면 그렇게 눈물을 쏟는지. 아무리 약을 먹였어도 그렇지. ”




 “ 그 약이란 건... ”




 슬슬 참을성이 달아난 데다 침대에 누워 있는 미샤를 힐끗 보니 갑자기 게르만이 그 애를 포옹하며 밀어를 속삭이던 게 생각나서 현기증이 일었다. 그래서 난 전부 말해주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뉴욕과 모튼에 대해, 크라베츠에 대해, 별장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전부. 보드카와 약물, 폭행과 난교에 대해. 파벨과 쇼플린과 크라베츠와 게르만이 어떤 식으로 그 아이를 가지고 놀았는지 자세하게 얘기해 주었다. 내가 약을 먹였다는 것과 게르만이 보는 앞에서 그 애와 놀아났다는 것만 빼고.



 한 마디 한 마디마다 일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 것을 보자 마음 한구석이 찌르는 듯 아팠지만 동시에 게르만이 안아줬을 때처럼, 그리고 의식이 가물거리는 미샤를 안고 뒹굴었을 때처럼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듯 사악하고 짜릿한 쾌감이 느껴졌다. 그건 일린 때문이 아니었다. 나에게 스타니슬라프 일린이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 어떤 의미도 없는 인간이었다. 스탄카가 알면 안 돼, 내가 이렇게... 더러운...’ 이라고 신음하며 흐느껴 울던 미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손목에 붕대를 감고 튜브를 주렁주렁 단 채 잠자는 미녀처럼 누워 있는 그 꼬마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쳐주고 싶었다.





 자, 미셰츠카. 이제 어떻게 할 건데? 네 그 소중한 스탄카가 전부 알아버렸는데. 네가 얼마나 더러운 창부새낀지, 높으신 분들이 얼마나 수치스럽고 지저분하게 가지고 놀았는지 다 알아버렸는데. 다시 손목이라도 그을 거야? 차라리 목을 매지 그래. 뒤처리하기 훨씬 편할 테니까. 아니면 모스크바 강에 뛰어들어. 그 호화스런 아파트 베란다에서 뛰어내리든가. 내 눈앞에만 보이지 않으면 돼. 다시 내 차에서 그런 짓했다간 감방 한복판에 던져줄 거야, 십년도 넘게 계집애 맛을 못 본 놈들에게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질 때까지 돌려줄 거야. 크라베츠에게 얘기하면 그렇게 해 줄 거야. 게르만이 알아도 상관없어. 그때쯤 넌 만신창이가 돼 있을 테니까. 다시는 게르만의 품에서 그렇게 몸을 꼬면서 위선적으로 꼬리를 치지 못하겠지. 춤은커녕 걷지도 못하게 될 거야. 그래도 너무 슬퍼할 거 없어, 네 소중한 스탄카가 잘 보살펴 줄 테니까. 하긴, 스탄카에게 불구가 된 무용수 따윈 아무 필요 없을지도 모르지. 아, 누구였더라. 유라. 유라라고 했나? 그자한테 가면 될 거야. 좋겠어, 미셴카. 안아주고 달래줄 남자들이 많아서. 그러니까 꺼져! 게르만의 품에서 사라지란 말이야! 그는 내 거야... 내 것, 영원히... 제발 그를 놔줘. 사라져줘.





 일린은 단 한 번도 내 말을 끊지 않았다. 게르만이 의식을 잃은 그 애를 뉘어놓고 침실을 떠났다고 했을 때에야 무겁게 잠기고 반쯤 갈라진 음성으로 속삭였을 뿐이었다.



 “ 그리고? 거기서 그랬던 거야? 네가 보는 앞에서? 그래? ”




 “ 왜, 쟤가 내 앞에서 손목 자르는 걸 내버려두고도 남을 것 같아서? 마약 먹이고 폭행하는 걸 구경했으니까 자살 쇼를 하는 것도 기분 좋게 감상했을 거라고 믿어? 내가 그렇게 못된 년처럼 보여? 나도 취해 있었어, 스탄카. 게르만이 두려워서 꼼짝도 할 수 없었어. 그 사람 화나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처음에 아무 것도 모르고 대들었을 땐 팔이 부러질 뻔했어. 하긴 쟨 아직도 대들던데. 그래도 너무 걱정할 거 없어, 게르만은 쟤가 성질부리는 거 귀여워하는 것 같았으니까. 어찌나 인형처럼 끼고 어루만지는지... 그러니까 대들어도 부러뜨리지는 않을 거야. ”




 “ 네가 발견한 거야? ”




 일린은 내 말을 모두 무시한 채 질문을 되풀이했다. 게르만의 품에서 신음하는 미샤에 대해서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주차장에 내려갔다가 차 안에서 미샤를 발견해 병원으로 데려왔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불쑥 물었다.



 “ 왜 스비제르스키에게 연락하지 않았어? ”




 “ 몰라. 아마 무서워서 그랬겠지. 내 차였잖아... 거기서 쟤가 죽었다면 나도 무사하지 못했을 거야. 게르만이 날 죽였겠지. ”




 “ 네 잘못이 아니잖아. ”




 “ 폭군의 사고방식에 대해 전혀 모르는군. ”




 난 한숨을 내쉬었고 간이 테이블에 놓여 있던 컵을 집어 완전히 식어버린 우유를 마셨다. 차가워진 우유에서는 아까처럼 비린내가 나지 않았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 난 이제 돌아갈 거야. 더 이상 묻지 마. 할 수 있는 얘긴 다 해줬으니까. 게르만이 들이닥쳐도 당신이 알아서 해결해. ”




 “ 그자는 베를린에 갔다면서. ”




 “ 글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꼬마가 손목을 그었다는 걸 알게 되면 다시 날아올지도 모르지. ”




 “ 무슨 염치로! 전부 그자가 그런 거잖아! 살인자... 그놈은 살인자야! ”




 “ 대사가 쟤랑 똑같네. 그래서 그렇게 죽고 못 사는 친구가 된 건가? 수요일 공연 잊지 마. 내일까지는 병원에 있어야겠지만 근육 다친 거 아니라고 했으니까 의사한테 잘 얘기하면 퇴원시켜줄 거야. 나 쟤랑 로미오와 줄리엣은 한 번도 안 맞춰봤어. 무대 올라가려면 아무리 늦어도 화요일 아침에는 맞춰봐야 해. 책임지고 리허설 데려와. ”




 “ 아니, 절대 안 돼. 넌 이고리와 올라가면 되잖아. 얜 안 돼. 어떻게 이런 몸으로... ”




 “ 마음대로 해. 노비코프에겐 당신이 말하면 되겠네. 비싼 값을 주고 키로프에서 낚아채온 귀염둥이가 의원님들에게 밤새 봉사하느라 몸이 엉망이 돼서 공연 못 올라간다고. 그것까지야 괜찮아. 노비코프도 다 아는 얘길 테니까. 그래도 손목 난도질한 건 입 다무는 게 나을 걸. 자살하려고 했다는 거 알면 곧장 정신병원에 처박을지도 모르니까. 아니면 게르만이 아예 자기 아파트에 데려다 박아놓을 거야. 허튼 짓 못하게. 그 편이 좋다면 알아서 해. ”




 일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미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미샤는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안색은 여전히 눈처럼 창백했다. 크라베츠와 게르만에게 얻어맞은 광대뼈와 입술 언저리만 보랏빛으로 변해 있을 뿐이었다.




 그때 의사가 돌아왔다. 나와 일린에게는 눈도 돌리지 않고 미샤의 맥박과 체온을 재더니 고개를 저으며 그 애의 오른팔에 꽂혀 있던 튜브를 뽑아내고 다른 바늘을 꽂아 넣었다. 수액이 흘러들어가자 미샤가 거친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 하지만 깨어나지는 않았다. 의사는 그 애의 상의를 걷고 바지를 골반 아래로 끌어내린 후 담뱃불 상처를 꼼꼼하게 드레싱하고 화상 붕대를 감았다. 상처를 보고 일린이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분노를 견딜 수 없는 듯 했다. 그래봤자 그 자리에 있었다면 아무 말도 못했을 게 뻔했다. 가만히 있었을 것이다. 게르만이 두려워서. 게르만이 없었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크라베츠와 쇼플린도 상당한 권력자들이었으니까. 스타니슬라프 일린은 권력자들에게 호감을 사는 타입이었고 단 한 번도 그들에 대한 반감을 표명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살아남을 인간. 분쟁을 싫어하고 누구에게나 상냥하게 대하는 사람. 대놓고 아첨하지 않아도 제대로 된 처세에 능한 인물. 아마도 그에게는 결코 어둠 속에서 피를 쏟아내며 웅크리고 있을 일도, 산소마스크를 쓰고 튜브를 매단 채 저 침대 위에 누워 있을 일도 없을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아주 뜨겁고 거친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그런 인간, 매사가 편안하고 순조로운데다 낙천적이기 짝이 없는 스타니슬라프 일린에게 낚여서 모스크바로 건너온 미샤의 어리석음에 대고 조롱을 퍼부어 주고 싶었다. 그 아이가 몰랐을 리가 없었다. 모스크바로 건너오는 순간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의 완벽한 철망 안에 갇히게 될 거란 사실을. 드미트리 마로조프의 비호 따위는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다. 레닌그라드가 그 노인네의 영토였다면 이곳은 온전하게 게르만의 지배하에 있었다. 감히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에게 도살자라고 욕을 퍼붓고 나쁜 인간이라고 비난할 정도로 뒤틀리고 반항적인 아이가 나처럼 그를 사랑할 리가 없었다. 그 무모한 아이가 호랑이의 입 안으로 걸어 들어오면서도 뒤를 돌아보지 않은 이유가 스타니슬라프 일린 때문이라면 그에게도 분명 책임이 있었다. 아니, 모든 것이 그의 탓이었다. 적어도 일린 자신만큼은 그렇게 생각하기를 바랐다. 세상천지에 자기 혼자 깨끗하다고 생각하며 언제나 환하게 웃고 다니는 그 남자의 심장을 마구 헤집어주고 싶었다. 상처를 후벼 파 피고름을 짜내주고 싶었다. 마치 내가 미샤의 담뱃불 상처를 손톱으로 긁어내렸던 것처럼.




 막 나가려는데 미샤가 조그맣게 신음하며 눈을 떴다. 아마 소독 때문에 골반의 상처가 아파서 잠깐 깬 것 같았다. 일린이 급하게 곁으로 다가갔지만 그 애는 곧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일린이 부드럽게 이름을 불렀을 때도 대답하지 않았다. 의사가 고개를 저었다.



 “ 그냥 내버려둬요. 아직 제정신이 아닐 테니까. 워낙 안 좋은 걸 먹어서. ”




 “ 열이 펄펄 끓잖아요. 많이 아픈 것 같은데... 진통제라도 놔줘요. ”




 “ 아침까지는 아무 것도 못 놓습니다. 진통제도 그렇고 해열제도. 잘못하면 먼저 먹은 약물 때문에 쇼크 일으킬 가능성이 많아서. ”




 “ 그럼 지금 놓고 있는 건... ”




 “ 저건 수액과 철분보충제예요. 다른 건 못 놔요. 지금은 차라리 열이 나는 편이 나아요. 새벽에 혈액 검사해 보고 괜찮아지면 그때 얘기하죠. ”




 “ 쟤 수요일 무대에 올라갈 수 있는지 말해줘요. 솔직하게. ”




 내 질문에 의사가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시선을 돌리지는 않았다.




 “ 글쎄요, 열만 내리면 몸 상태야 괜찮아질 겁니다. 환자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게 문제죠. 알다시피 자살미수자들은... ”




 “ 그건 취해서 그런 거죠. 깨고 나면 기억 못한다고 했어요.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전혀 기억 못할 거예요. ”




 “ 아니오, 에벨리나 드미트리예브나. 이건 심각한 겁니다. 당신도 잘 들어요, 스타니슬라프 리보비치. 이건 그냥 취해서 홧김에 저지른 실수가 아니에요. 차트에 적혀 있는 것만도 몇 차례나 이런 짓을 했어요. 십대 중반부터 기록이 있단 말입니다. 상습적으로 그래왔을 가능성이 커요. 아마 병원에 실려 오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을 겁니다. 아니면 윗분이 기록을 지워버렸든지. 지금까지는 운이 좋아서 살아났겠죠. 하지만 언젠가는 성공할지도 몰라요. 그게 내일 아침이 될지 수요일이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 환자는 격리시켜야 해요. 몸이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




 일린이 검은 그림자가 패인 눈을 들어 의사를 응시했다. 그의 음성은 한없이 낮고 또 부드러웠다, 다시 스타니슬라프 일린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 그래서 정신병원에 가두라고요? 당신들의 그 관대한 손길에 맡기라는 건가요? 얠 이렇게 만든 게 누군데. 필요 없어요, 병원도, 당신들의 상담과 약물도. 여지껏 그걸로 죽인 사람들이 얼만데... ”
 




 의사는 그 반동적인 뇌까림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 글쎄요, 어쩌면 정신 교정이 필요한 건지도 모르죠. 그럼 훨씬 안정될 겁니다, 자기 파괴적 성향도 가라앉고... 어쨌든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면 지금이야 그냥 내버려둘 수밖에요. 성인이니까. 하지만 위에서 알게 되면 강제 조치를 취할지도 모릅니다. ”




 
 난 게르만이 미샤의 전적에 대해 이미 모두 다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차트에 적혀 있는 내용은 말할 것도 없고 몰래 저지른 일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였고 루뱐카의 숨겨진 지배자였으니까.




 나는 곧장 병실을 나가려고 했지만 의사가 저지했다. 날 옆 침대에 앉히더니 혈압과 맥박, 체온을 다시 쟀다. 피를 많이 뽑았기 때문에 아침까지는 병원에 남아 쉬는 게 낫겠다고 했다.



 “ 아니, 난 돌아갈 거예요. 환자는 저 사람이 돌볼 거고. ”




 “ 지금 운전하면 안 됩니다. 혈중 알콜 농도가... ”




 “ 수혈할 땐 아무 문제없었던 피가 운전할 때는 문제가 된다는 건가요? ” 




 “ 그건 워낙 급했기 때문이었어요. 위험한 상황이었으니까. 원칙대로 했다면 수혈하지 않았을 겁니다. ”




 “ 좋아요, 운전은 하지 않겠어요. 대신 폴루넨코를 좀 불러줘요. 그 사람이라면 내게 기사를 붙여주겠죠. ”
 





 의사는 무척 화가 난 것 같았지만 감히 내 명령을 거부하지는 못했다. 그자가 병실을 나갔을 때 난 폴루넨코가 직접 내려올지, 아니면 기사를 보낼지 궁금했다. 비틀어진 구두 굽을 매만지고 있는데 일린이 다가왔다. 머뭇거리다가 어색하게 말했다.




 “ 고마워, 에벨리나. ”




 “ 뭐가? 피 뽑아준 거? 재수도 더럽게 없지, 하필 같은 혈액형일게 뭐야. ”




 “ 그것도 그렇고... 여기까지 데려와준 것도. 네가 아니었으면 정말 잘못됐을지도 몰라. 네가 미샤를 살린 거야. 고마워. ”




 “ 착각하지 마, 그러고 싶어서 한 게 아니니까. 수요일 무대 올라가고 싶었을 뿐이야. 수석 승급에 필요하니까. 나우모바랑 날 놓고 노비코프가 재고 있는 거 알아. 쟤랑 추면 훨씬 유리해질 거야. 그것뿐이야. ”




 “ 어쨌든 고마워. ”




 “ 그럼 새로 만드는 거 나한테 줘. 쟤하고 같이 추게 해주면 되겠네. 뭐 오디션은 진행해도 좋아, 안 그러면 애들이 수군거릴 테니까. 이 정도면 괜찮은 거래겠네. ”




 “ 아직 새 작품 구상도 안 했어. ”




 “ 곧 할 거잖아. 쟬 감언이설로 낚아온 게 뻔한데, 새로운 것들을 잔뜩 추게 해주겠다고 꼬드겼겠지. 제일 처음 건 나한테 줘. 잊지 마. ”




 “ 여자 무용수가 나오는 거라면... ”




 “ 나오게 만들어. ”




 그때 미샤가 몸을 일으켰다. 팔에 튜브를 매단 채 그대로 일어나 침대 아래로 내려서더니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면서 몇 발짝이나 걸었다. 눈동자에는 여전히 잿빛 막이 씌워져 있었다. 몽유병에 걸린 애 같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게 분명했다. 일린이 급하게 달려가 그의 팔을 부축해 주려고 했다. 그러자 미샤가 소스라쳤다. 낮고 괴롭게 비명을 지르면서 일린을 떠밀었다. 그 와중에 튜브가 뽑혀나갔고 미샤는 균형을 잃은 채 바닥에 나뒹굴었다. 일린이 일으켜주려고 했을 때 그 애가 두 팔로 무릎을 껴안고 웅크리면서 가냘프고 떨리는 음성으로 간절하게 속삭였다.




 “ 갈게요, 그 사람에게 갈 테니까 제발 그거 먹이지 마세요. 진짜예요, 말 들을게요. 도망치지 않을게요. 게르만 알렉세예비치, 제발... ”




 “ 아무 데도 안 보내, 미셴카. 그자는 여기 없어. 나야, 스탄카라고.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아무 것도 못 먹이게 할 거야. 괜찮아. ”




 “ 스탄카에게 얘기하지 마. 아무 것도 얘기하지 마. ”




 미샤가 한 손으로 심장 부근을 누르면서 바닥을 기었다. 일린이 어깨와 허리에 팔을 둘러 일으키자 심하게 몸을 떨면서 얼굴을 옆으로 돌렸지만 그래도 빠져나가려고 하지는 않았다. 조그맣게 애원했을 뿐이었다.



 “ 조금만 있다가... 제발, 게르만 알렉세예비치... 전부 다 할게요. 지금은 너무... ”




 난 스타니슬라프 일린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입술을 떨며 눈물을 흘리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렇게 기분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 어리석은 남자에게 싸늘하게 쏘아붙여 주었다.



 “ 그냥 내버려둬. 헛소리하는 거니까. 그럼 다시 잘 거야. 아까 별장에서도 계속 저랬어. 깨면 기억 못할 거야. ”




 “ 죽여 버릴 거야... 그 더러운 놈들 전부... ”




 일린이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온순한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 당신 여기가 어딘지 몰라? 말 가려가면서 해. 안 그러면 쟤처럼 그 약 먹게 될지도 모르니까. 극장엔 한 마디도 하지 마. 피차 골치 아파질 테니까. 쟨 더 그렇지. 하여튼 난 이제 갈 거야. 화요일 아침 열 시. 새 작품. 잊지 마. ”




 일린은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두 팔로 미샤의 몸을 껴안은 채 망연자실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라 바야데르가 생각났다. 하긴 저 정신 나간 꼬마는 지젤에 더 어울릴지도 몰랐다.



 병실을 나가면서 난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미샤는 이제 머리를 완전히 뒤로 젖힌 채 사지를 늘어뜨리고 누워 있었다. 역시 약 때문에 헛소리를 지껄인 게 분명했다. 일린은 그 아이를 품에 안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차라리 한 번 자주면 나아질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더 이상 말려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문을 쾅 닫았다.




 복도로 나오자 폴루넨코가 기다리고 있었다. 젊은 남자도 함께였다.



 “ 집까지 태워다 드릴 겁니다, 에벨리나 드미트리예브나. 고생 많으셨어요. ”




 “ 뭐라고 보고할 건가요? ”




 “ 글쎄요, 그건 제 일이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




 “ 게르만이 화내는 건 싫어요. 그래서 여기까지 달려온 건데. ”




 “ 물론이죠. 당신이 살린 겁니다. 모든 게 당신 덕분이죠. 그러니 돌아가서 푹 쉬십시오. ”




 난 그가 이미 게르만에게 연락해서 모든 것을 샅샅이 보고했을 거라고 확신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온몸이 젖은 솜처럼 무거워지면서 현기증이 일었다. 하지만 그 얼간이 같은 작자 앞에서 지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 책임지고 내일 퇴원시켜요. 수요일 무대에 올라갈 수 있게 만들어요. 게르만도 보러 온다고 했으니까. ”




 “ 그분은 베를린에 가시자마자 다시 날아오실 예정인가 보군요. ”




 “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무대가 될 테니까요. ”




 폴루넨코는 입술만 움직여 로봇처럼 웃었다. 그자가 평생 제대로 된 공연을 본 적이나 있을지 궁금했다. 어쨌든 내 알 바 아니었다.





...





이야기는 04로 이어진다. 이 중편은 그것으로 끝난다.




..





** 예전에 서무의 슬픔 시리즈 21화(스페호프의 복수)에서 독사과를 먹고 쓰러진 왕재수에게 단추 베르닌이 수혈을 해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장면은 사실 이 Dolls에서 에벨리나가 미샤에게 수혈해주는 에피소드를 변주한 것이었다. 일종의 자기패러디였음.




그 서무의 슬픔 21화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726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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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어제부터 올리고 있는 부활절 half 중편 Dolls 두번째 이야기이다. 사실 그냥 하나의 중편이라 아무런 파트도 없고 쭉 이어지는 이야기인데 분량이 길어서 흐름을 보면서 네 토막을 냈다. 원래는 다섯 토막 정도인데 두번째 토막은 여기 올릴 때는 자기편집을 통해 들어냈다. 



원글에는 * * * 로 표기되는 구분 외에는 파트도 없고 소제목도 없긴 한데 블로그에 올리자니 좀 헷갈려서 그냥 01~04까지 번호를 매기고 각 토막마다 내용에 어울리는 등장인물들 이름을 붙였다. 화자가 바뀌는 건 아니다. 화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에벨리나 크리셴스카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01은 에벨리나, 02는 미샤, 03은 일린, 04는 아직 안 정했다. 올리면서 대충 붙일 듯.



이 글은 첫번째 파트인 01. 에벨리나(http://tveye.tistory.com/6960) 에서 이어진다. 본래는 이 글보다 먼저 썼던 부활절 단편 jewels에서 파생된 데이터 구축용 소품이다. 위의 링크를 클릭하면 이 글에 대한 메모가 좀 붙어 있다.




** 앞글에서 얘기했지만 원글에는 좀더 거칠고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표현들이나 내용들이 섞여 있어서 공개 블로그에 올릴 때에는 어느 정도 표현을 수정하고 어떤 부분은 그대로 들어냈다. 이 02가 특히 그런데 앞부분과 중간부분 이야기들을 좀 생략했음. 앞부분에 생략된 이야기는 대부분 난교와 폭력에 대한 건조한 묘사와 이를 바라보는 에벨리나의 심리적 독백들이고 중간부분은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와 미샤, 에벨리나의 침실 씬인데 나름대로는 유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삭제했다. 후자는 사실 올려볼까 생각도 했는데 아무래도 좀 그래서 안 올림.




** 이번 02는 01보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약간 폭력적이거나 파괴적인 묘사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꺼림칙하신 분들은 그냥 넘어가주세요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Dolls











(중략)
*    *    *





 크라베츠가 떠난 후 게르만이 일어났다. 파벨에게 비키라고 손짓한 후 티 테이블에 있던 물병 뚜껑을 땄다. 그리고는 병에 담긴 물 전부를 미샤의 얼굴에 그대로 쏟아 부었다.



 “ 그만 정신 차려, 미하일. 술에 타지도 않았잖아. 주사도 아니었고. 그때보다 더 약하게 줬어. 일어날 때도 됐지. ”
 




 미샤는 기계적으로 명령에 복종했다. 힘겹게 눈을 뜨더니 가만히 천정을 보며 누워 있었다. 게르만이 이름을 불렀지만 잠시 움찔했을 뿐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발끝으로 머리를 슬며시 돌리자 미샤는 신음하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또 토하고 싶은 것 같았다.



 “ 정말 유치원생이라니까. 탁아소에라도 맡겨야 하나? 술도 약도 전부 못 견디니. 그러니까 총으로 쏴 죽여 달라고 했겠지. 토해. 어차피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뭘 망설이나. ”



 게르만이 허리를 잡아 비스듬하게 엎드리도록 해주자 미샤가 토했다. 파벨 말이 맞았다. 섞여 나온 피 색깔이 아주 빨갰다. 저 정도로 여러 번 토했으니 약기운도 가셔야 할 것 같은데 고문용 약물이라 그런지 미샤는 전혀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게르만이 안아들고 일어났을 때도 낮게 신음했을 뿐 기대거나 저항하지 않았다. 나중에 무대로 돌아갔을 때 어떻게 미샤와 춤을 출 수 있을지 살짝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는 탁월한 파트너였고 모든 발레리나들에겐 최고의 왕자님이었지만 이제 내 눈에는 약에 취해 뒹굴다 흐느껴 우는 어린애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쇼플린이 보드카를 마시며 부드럽게 말했다.



 “ 정말 귀여운 애라니까. 솔직히 놀랐어, 게르만. 3년이나 끼고 있었는데 저 성깔은 그대로군. 약 안 먹였으면 크라베츠 그 병신을 진짜로 짓뭉개놨겠어. ”




 “ 그렇게 놔둘걸 그랬나? 그럼 더 재미있었을 텐데. 이 자식 발끝에도 못 오는 멍청이 주제에 참 기고만장하더군. 뭐 좋아. 그놈 이걸로 그 일은 한동안 입 밖에 못 낼 거야. 정신 차리고 나면 아차 싶겠지. ”




 “ 오를릭을 부를 줄 알았는데... ”




 “ 카메라야 있었지. 없는 줄 알았나? ”



 쇼플린은 잠시 게르만을 빤히 쳐다보더니 낄낄 웃었다.



 “ 하긴, 내가 누굴 과소평가했군. 루뱐카를 좌지우지하는 분인데. 저 귀염둥이를 더 예뻐해 주고 싶긴 한데 꼴을 보니 더 건드리면 안 될 것 같군. 다음에 다시 불러. 저 약 대신 다른 걸 먹였을 때. 돔브로프스키가 썼다는 그게 좋을 것 같군. 그럼 저렇게 아파하지도 않고 진짜 귀엽게 엉기겠지. 그런 모습도 궁금해. ”




 “ 그것도 마찬가지야. 고열 때문에 두 번이나 실려 갔으니까. ”




 “ 아, 불쌍하기도 하지. 우리 미셰츠카. 넌 정말 게르만에게 찰싹 붙어 있어야겠어. 안 그러면 다른 놈들이 금세 낚아채겠지. 잘못 다뤄서 금방 망가져버릴 거야. 이 사람이 널 낚아준 걸 다행으로 생각하라고. ”



 쇼플린은 미샤의 눈꺼풀과 입술에 부드럽게 키스를 했다. 그리고는 게르만에게는 인사도 하지 않고 나에게만 윙크를 날린 후 나갔다. 소름끼치게 역겨운 자였지만 타이밍을 잘 아는 놈이긴 했다.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파벨도 머뭇거리다가 옷을 입고 급하게 나갔다. 이제 거실에는 게르만과 미샤, 그리고 나 밖에 남지 않았다.



 난 옷을 입는 대신 게르만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 저도 돌아갈까요? ”




 “ 아니, 넌 있어. ”




 “ 관심도 없으면서. 약에 취한 사내애 뒤치다꺼리는 하고 싶지 않아요. ”




 “ 누가 그런 걸 하랬나? 시켜봤자 제대로 하지도 못할 텐데. 목 졸라 죽이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




 “ 그런 짓은 안 해요. 당신이 날 죽일 게 뻔하잖아요. ”




 “ 그래서 네가 좋다니까. 똑똑하고 예쁜 애야. 동료를 목 졸라 죽이는 건 상관없지만 보복당하는 건 무섭다는 거지. 너도 기다릴 건가? 저 얼간이 크라베츠처럼, 내가 이 꼬마한테 싫증나길? ”




 “ 아뇨. 나와는 상관없는 일인걸요. 당신이 미셴카에게 싫증이 난다고 해서 나한테 돌아오지는 않을 텐데... ”




 보드카를 마시지도 않았는데 취해버린 건가 싶었다. 내가 그런 말을 입 밖에 내다니. 하긴 게르만은 내 속마음을 열린 책처럼 꿰뚫어보는 남자니까 어차피 상관없었다.




 “ 글쎄. 넌 똑똑하고 귀여우니까 데리고는 있을 거야. 내가 그랬잖나, 한번 내 걸로 만들면 안 버린다고. 그러니 너무 상심하진 말라고. ”




 “ 손대지 않으면 버린 거나 마찬가지예요. ”




 
 게르만이 다가왔다. 고개를 숙여 내 입술에 키스를 했지만 포옹해 주지는 않았다. 여전히 품에 미샤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애는 아직도 혼수 상태였다.




 “ 정말 안 죽어요? ”




 “ 죽긴. 그 얼간이 때문에 연방에서 제일 잘 추는 무용수를 죽여야 하나? ”




 “ 숨넘어갈 것처럼 울던데요. ”




 “ 궁금해? 그 약 먹으면 어떤 느낌인지? ”




 “ 아뇨. 절대. ”




 게르만은 미샤를 안고 욕실로 갔다. 내게도 들어오라고 했다.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의 별장은 어디나 호화스러웠고 이곳도 예외는 아니었다. 욕조는 실내 수영장처럼 넓었다. 수도꼭지도 세 개나 달려 있어 따뜻한 물을 틀자 금세 호수처럼 차올랐다.



 그는 미샤를 욕조 구석에 앉히더니 머리에 튜브 쿠션을 괴고 한쪽 팔을 난간에 타월로 잡아맸다. 의식을 잃은 그 애가 물속으로 가라앉아 버릴까봐 그런 것 같았다. 지금껏 난 게르만이 상대에게 그런 배려를 해주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어쨌든 필요한 조치였다. 게르만이 놔주자마자 미샤의 몸이 그대로 축 늘어져버렸기 때문이다. 게르만은 그 애가 완전히 빠져버리지 않도록 곁에 앉았고 내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난 게르만이 좋아하는 향의 입욕제를 물에 부었다. 그는 폭군이었지만 취향만은 언제나 고상했다. 옷과 차, 음식, 극장, 모든 것에 있어 귀족적이었다. 혹자는 그런 사람이 골수 공산당 노선을 대표하는 동시에 루뱐카를 좌지우지한다는 것에 놀라움을 느끼지 않느냐고 묻겠지만 그건 순진한 소리다. 아마 미샤 같은 애는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게르만은 내 허리를 껴안고 자기 무릎 위에 앉혔다. 부글거리며 올라오는 비누 거품을 손에 묻혀 내 얼굴을 어루만지며 그가 속삭였다.



 “ 수요일, 로미오와 줄리엣. 그때 추는 거 보러 가지. ”




 “ 수요일은 마리야가 추게 되어 있어요. ”




 “ 아니, 네가 출 거야. 걘 무릎 때문에 쉬게 될 걸. ”




 “ 출 수 있다고 했어요. 테이핑하고 연습하던데. ”




 “ 그건 걔 생각이지. ”




 나는 고개를 들어 게르만을 빤히 쳐다보았다. 내 눈에 비친 기쁨이 너무나 적나라했는지 게르만이 목을 울리며 웃기 시작했다.




 “ 아, 에벨리나. 그런 표정 오랜만에 보는군. 눈이 활활 타는데. 그래, 인민예술가를 밀어내고 줄리엣을 추는 게 그렇게 좋아? 전에도 춰봤잖아. ”




 “ 달라요. 올해 첫 로미오와 줄리엣인걸요. 이제껏 마리야가 내준 적이 없는 자리였어요. 게다가... ”


 “ 쟤가 로미오를 추기로 되어 있지. 그래서 다른 거야. 관객들이 벌떼처럼 몰려들겠지. 난리가 날 걸. ” 




 “ 백조 때도 그랬죠. 오늘 라 바야데르도... ”




 “ 쟤가 추는 로미오 본 적 있나, 에벨랴? ”




 “ 텔레비전으로만요. 몇 번이나 방송해줬잖아요. ”




 “ 같이 추고 싶다는 생각 안 들었나? ”
 





 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질문에 부정적인 답을 하는 발레리나가 있다면 정신 나간 여자가 분명했다. 게다가 그 수요일 공연. 그 줄리엣이라면 볼쇼이 어느 발레리나든 영혼이라도 팔고 싶을 것이다. 마리야 아브라모바의 자리. 그리고 미샤의 파트너가 되는 것. 지금 이 순간 그건 프리마 발레리나 승급에 가장 필요한 조건이었다. 그리고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는 내게 그런 보상을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단 한 가지만 제외한다면.



 난 게르만의 목을 껴안고 뜨겁게 입을 맞췄다. 눈물도 흘릴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내 눈물 같은 건 그에게 별 감명을 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




 “ 꼭 보러 와주세요, 게르만. 정말 잘 출 테니까. 하지만... ”




 “ 그 하지만은 뭐지? ”




 “ 수요일이면 나흘 밖에 안 남았어요. 쟤가... ”




 게르만이 아직도 정신을 잃고 욕조에 기대 있는 미샤 쪽을 힐끗 보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 쟨 걱정할 거 없어. 다리 부러진 것만 아니면 무슨 일이 있어도 올라갈 테니까. 그러니 준비나 잘하라고. 지나이다보다 네가 낫다는 소리는 들어야 하지 않겠어? ”




 “ 어느 쪽인가요, 침대에서는? 그 계집애와 나. ”




 “ 이런, 에벨랴. 이 귀여운 머릿속에는 오직 그 생각뿐인가? 이렇게 질투심이 많아서야. 이건 비교가 안 되는군. 지나는 내 타입이 아니라서 말이지. 한 번도 건드린 적 없거든. 만족하나? ”




 “ 하긴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건 저 불쌍한 꼬마겠죠. ”




 게르만이 낮게 웃었다. 여전히 날 무릎에 앉힌 채 한 팔로 미샤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미샤가 힘없는 인형처럼 끌려왔다. 튜브 쿠션이 빠져나가며 게르만의 어깨 위로 그 애의 머리가 무겁게 처졌다.



 “ 그것도 춤이 아니라 침대 얘기겠지? 어쩌겠나, 에벨. 얜 노력 같은 건 안 해도 그냥 그렇게 태어난걸. 그 병신 같은 크라베츠 기억 안나? 그놈 지금까지 사내애는 건드린 적도 없어. 그런 걸 얼마나 역겨워하는지 아나? 그래놓고 아깐 완전히 미치더군. ”




 “ 그자는 얘한테 미친 게 아니라 당신이 만들어놓은 덫에 걸린 거예요. 고문하고 갖고 노는 상황에 낚인 거라고요. ”




 “ 그럴지도 모르지. ”





(중략)
*    *    *






 마침내 게르만이 만족한 호랑이처럼 목을 울리며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미샤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구겨진 인형처럼 매트리스 위에 내던져져 있었다. 게르만이 그 몸을 껴안고 자기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마구 헝클어지고 뒤엉킨 검은 머리 타래 사이에 손을 넣고 어루만지면서 새빨갛게 달아오른 뺨과 입술에 입을 맞췄다. 미샤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게르만이 키스할 때마다 그쪽으로 머리가 힘없이 흔들렸다. 허리 아래 타들어간 담뱃불 상처에 입술이 닿았을 때 미샤가 눈을 떴다. 입술을 떨면서 뭐라고 웅얼거렸다. 욕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게르만이 쿡쿡 웃었다.



 “ 뭐라고 했나, 나쁜 놈이라고? 벌써 아는 사실 아닌가? 또 살인자라고 소리질러보지 그래. ”




 “ 당신 소리 지르면 좋아하잖아... 사람 죽이는 것도... 이런 것도. ”




 “ 글쎄. 아마 널 좋아하는 거겠지. 넌 죽어라고 안 믿지만. ”




 “ 돌아가게 해주세요. ”




 “ 한밤중에 이 꼴로 돌아가겠다고? 일어서지도 못하는 주제에. 안됐지만 난 지금 다른 곳에 가봐야 하거든. 널 데려다 줄 시간은 없어. 에벨랴와 곱게 자고 가지 그래. 어차피 아침까지는 움직이지도 못할 텐데. 가만히 누워서 자고 나면 아침에 칼리닌이 와서 봐줄 거야. 해독제야 그때 쇼크 일으키는 거 봤으니 안 놔줄 거고. 그래도 걸을 수 있게는 해주겠지. 이 정도면 벌 받은 것 치고는 대우가 좋지 않나? ”




 “ 있어요... 걸을 수 있... ”




 “ 있기는. 한 발짝 떼기는커녕 혼자 일어나 앉지도 못할 걸. 그렇게 돌아가고 싶으면 소중한 친구 일린을 부르지 그러나. 전화라도 해 줄까? ”
 




 미샤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닫히면서 길고 까만 속눈썹이 거의 광대뼈까지 내려와 나비처럼 파르르 떨렸다.



 “ 안 돼... 스탄카에게 말하지 마. 절대... ”




 “ 그건 유라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거랑 같은 건가? 역시 일린하고도 자는 사이라서? 아니면 부끄러워서 그런가? ”




 “ 스탄카가 알면 안 돼. 내가 이렇게... 더러운... ”



 미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깊고 고통스러운 흐느낌이 가슴과 목을 타고 밀려나왔다. 그 애는 잠시 짓눌린 듯 흐느껴 울었지만 오래 가지는 않았다. 게르만이 얼굴에서 억지로 손을 떼어냈을 때는 이미 의식을 잃고 몸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런 약을 먹인 후 심문을 한다면 몽땅 다 불어버릴 게 뻔했다.




 게르만은 정신을 잃은 미샤의 몸을 안고 한동안 모로 누워 있었다. 작은 짐승이나 아기를 껴안은 것처럼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포옹이었다. 기절한 그 아이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아주 지저분한 찬사와 욕정이 뒤섞인 단어들을 낮고 조용하게 속삭이고 있었다. 그건 진짜 밀어였다. 게르만이 정작 그 애가 깨어 있을 때는 그런 식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되새기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나와는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그는 기분이 좋을 때면 날 무척 귀여워해줬고 공주처럼 어르고 달래며 애무해줬지만 잠자리가 끝난 후나 내가 아플 때면 단 한 번도 저런 식으로 안아준 적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 누구에게도 그런 적이 없을지도 몰랐다. 대체 저 조그맣고 건방진 꼬마가 무엇이기에 게르만 스비제르스키가, 연방의 실질적 지배자나 다름없는 사람이, 저 폭군이 저렇게 완전히 넘어가야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잠시 후 게르만이 일어났다. 침대 발치에 뒹굴고 있는 가운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몸에 걸치는 대신 가운을 잠시 목덜미와 가슴에 갖다 댄 채 천천히 거기 키스를 했다. 욕조에서 미샤를 끄집어내 침대로 데려올 때 그 애의 몸을 감쌌던 가운이었다. 게르만이 두렵지만 않았다면 나는 그 가운을 낚아채 불태워버렸을 것이다.



 그는 가운의 젖은 소매로 몸을 가볍게 훔친 후 옷장을 열어 새 속옷과 빳빳하게 다려진 수트를 꺼내 입었다. 그리고 방을 나가려다 처음으로 내 쪽에 시선을 던졌다. 난 침대 한쪽에 웅크리고 누운 채 자는 척 하고 있었다. 그와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조롱 섞인 부드러운 인사도, 귀엽고 똑똑한 에벨랴라는 말도, 그래서 날 좋아한다는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가 미샤에 대해 한 마디라도 입 밖에 낸다면 견딜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게르만이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 어깨까지 담요를 덮어 주었다. 키스는 해 주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아마 내가 깨어 있다는 걸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보통 모든 걸 다 알았다.



 게르만이 등을 돌렸을 때 난 모포 사이로 실눈을 뜨고 몰래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곧장 나가는 대신 고개를 숙여 미샤의 이마와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그리고는 그 애의 베개 곁에 조그만 상자를 하나 올려두고는 물을 한 잔 마신 후 침실을 떠났다.





 게르만이 방을 나간 후 난 한동안 그대로 몸을 웅크리고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 남아 있고 싶지는 않았지만 몇 잔 마셨던 술과 격렬한 난교의 여파 때문인지 몸이 무거웠다.



 미샤는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피곤하고 온몸이 쑤셨지만 좀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에 난 무릎으로 기어서 그 애의 곁으로 옮겨 갔다. 미샤는 내가 어깨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누웠는데도 깨지 않았다. 게르만이 덮어 주고 간 담요는 가슴 언저리까지 밀려 내려가 있었다. 그 애는 완전히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불규칙한 숨소리도 그렇고 몸을 늘어뜨린 자세도 그렇고 정상적인 수면 상태와는 거리가 멀었다. 독한 약물이긴 한 모양이었다. 겨우 스물을 갓 넘긴 사내아이, 그것도 무용수의 강인한 육체를 지닌 젊은 남자를 이렇게 무력하게 만드는 게 이토록 쉬운 일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베개 옆에는 게르만이 놓고 나간 상자가 놓여 있었다. 자작나무를 연마해 만든 작은 상자였는데 자잘한 유색 보석이 박혀 있었고 금빛 잠금쇠가 달려 있었다. 상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파베르제였다. 부활절 선물이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게르만은 진짜 자기 것으로 만든 상대에게는 종종 값비싼 선물을 주곤 했다. 그는 아주 안목이 높은 사람이었다. 저녁 식사 때 게르만은 내게 작은 새 모양의 브로치를 주었다. 순금 세공에 루비가 박혀 있는 물건이었다. 부활절 선물로 나에게는 새를 주고 미샤에게는 달걀을 주다니, 어쩐지 일관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파베르제라면 내 브로치보다 훨씬 값나가는 선물일 테지만 어쩐지 그건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그 애는 눈을 꼭 감은 채 입술을 살짝 벌리고 종잇장처럼 새하얀 얼굴로 누워 있었다. 입술 언저리와 턱에는 아직도 핏자국이 약간 남아 있었다. 광대뼈와 뺨 아래쪽으로는 얻어맞아서 생긴 푸르스름한 멍이 몇 개 보였다. 하지만 그렇게 가혹하게 폭행당한 것 치고 얼굴은 깨끗한 편이었다. 게르만은 자기 마음에 드는 얼굴을 심하게 망가뜨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마 쇼플린이나 크라베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목덜미에는 심하게 멍이 들어 있었다. 누가 봐도 목 졸린 흔적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도자기처럼 하얗고 고운 피부를 가진 애니까 무리도 아니었다.




 순전히 호기심으로 난 모포를 아래로 들추고 그 애의 허리 쪽을 살펴보았다. 담뱃불 상처에는 이제 진물 맺힌 딱지가 앉아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꽤 보기 싫은 흉터로 변할 것 같았다. 그때 어이없게도 내 가슴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연민이 되살아났다. 아마 무용수끼리의 동료 의식이었던 것 같다. 우리에게 있어 최고의 재산은 흠집 없는 아름다운 육체뿐이었으니까.



 나는 욕실로 가서 캐비닛을 뒤졌고 구급상자를 찾아냈다. 소독하고 화상 연고를 발라 주었을 때도 미샤는 깨어나지 않았다. 소독약 때문에 상처가 꽤 쓰라렸을 텐데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약상자를 가져온 김에 다른 곳도 봐줄까 하고 모포를 완전히 걷어내고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그래도 목 졸린 상처와 담뱃불 화상 외에는 그렇게까지 심한 상처는 없었다. 술에 취한 듯 머리가 무겁고 띵했다. 마비된 듯 멍한 상태에 빠진 채 난 젖은 수건으로 그 애의 몸을 닦아냈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수건으로 무릎 안쪽을 닦아냈을 때 미샤가 희미한 신음을 토해내며 경련했다. 하지만 다리를 움츠리지는 않았다. 그저 고개를 미약하게 흔들며 잠꼬대처럼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 하지 마... ”




 난 수건을 내던졌다. 갑자기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미지근한 연민이 그 한순간 타들어가는 듯한 증오로 바뀌었다. 그 애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나의 게르만을 빼앗아간 아이, 아무런 노력도 없이, 사랑은커녕 욕망조차 없이 나의 왕으로부터 모든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해버린 더럽고 가증스런 그 매춘부 꼬마가 너무나도 미웠다.




 베개를 집어 들어 얼굴에 덮어씌우고 마구 눌러댔을 때도 그 애는 저항하지 않았다. 내가 베개 위에 올라타고 점점 심하게 짓누르자 팔과 무릎을 약간 버둥거렸을 뿐이었다. 하긴 약에 취해서 더 이상 몸부림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 애가 죽어버리기를 마음속 깊이 기도했다. 하지만 그때 내 눈에 담뱃불 상처가 들어왔고 그 순간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모두 소용없는 짓이었다.




 베개를 들어 올렸을 때 미샤는 본능적으로 기침을 하면서 괴롭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도 깨어나지는 않았다. 감겨진 눈꺼풀 사이로 눈물이 몇 방울 흘러내렸을 뿐이었다. 난 그 애의 곁에 누운 채 등을 돌렸고 담요를 목 아래까지 바짝 끌어당긴 채 마취된 듯 깊고 무거운 잠에 빠져들었다.





*    *    *






 새벽에 난 뭔가에 얻어맞은 듯 깜짝 놀라 깨어났다. 악몽을 꾼 것 같았지만 기억은 나지 않았다. 어쩌면 불을 끄지 않고 잠들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단순히 술에서 깼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시계를 보니 세시 반이었다. 피곤하긴 했지만 아침까지 남아 있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게르만이 아침에 돌아올 확률은 전혀 없었다. 그는 베를린에 가서 최소 2주는 머무를 계획이라고 했다. 분명 KGB의 해외 작전과 관계가 있겠지만 별로 알고 싶지는 않았다. 미샤는 다음 주 초에 사흘 일정으로 베를린에 가기로 되어 있었다. 뉴욕과 마찬가지로 외교 행사 때문에 베를린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무대에 올라가기로 되어 있었다. 무대보다는 게르만이 베를린 창녀들이 성에 차지 않아 그 아이를 끼고 놀려고 부른 게 분명했다.



 베를린 생각을 하자 퍼뜩 간밤의 일이 기억났다. 고개를 돌려 보았지만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모포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미샤가 누워 있었던 쪽의 시트는 간밤의 흔적 때문에 마구 구겨진데다 베개 언저리에 군데군데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파베르제 달걀이 든 자작나무 상자만 그대로 놓여 있었다. 약 기운에서 깨어나 돌아간 건지, 아니면 날 발견하고 다른 방으로 기어들어간 건지 알 도리가 없었지만 어쨌든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정신이 든 그 애와 한 침대에서 깨어난다는 건 별로 즐거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극장에서 만나면 꽤나 껄끄러워질 것 같았지만 게르만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 마음을 좀 놓았다. 그 약을 맞으면 기억을 거의 못한다고 했지. 그나마 다행이었다. 당장 수요일 공연에 같이 올라가야 하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로미오와 줄리엣을 춰야 하는데 로맨틱한 감정은커녕 온갖 적나라한 짓을 했던 기억만 떠오를 것 같아 짜증이 나기는 했다.



 욕실 문을 열면서 잠시 미샤가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역시 비어 있었다. 그렇게 괴로워하고 맛이 가 버리더니 그래도 자고 나니 나아진 모양이었다. 아니면 의사가 와서 데려갔던 건지도 몰랐다. 게르만이 칼리닌을 보내겠다고 했으니까. 게르만의 사촌. 온갖 지저분한 뒤처리를 전부 도맡아 해주는 루뱐카 클리닉의 의사.



 샤워를 할까 하다가 아까 목욕도 한데다 너무 귀찮아서 그냥 물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아냈다. 베개 옆에 놓여 있는 파베르제 상자도 챙겼다. 유치하게 선물을 가로챌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극장에서 만나면 전해줄 생각이었다. 거실로 나와 벗어던졌던 옷을 주워 입고 소파 구석에서 핸드백을 찾아낸 후 복도로 나가면서 아무 생각 없이 다른 침실들 문을 열어 보았다. 모두 비어 있었다. 정말 돌아간 모양이었다.



 미샤가 깨어나서 옆자리에 누워 있는 날 발견하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 조금 궁금했다. 나와 섹스를 한 걸 잊어주길 바랐지만 동시에 하나하나 생생하게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었다. 적어도 단 한 가지만은 그 꼬마보다 우위에 서고 싶었다. 넌 그자들에게 빌었고 울면서 기었고 지저분하게 짓밟혔지만 난 그러지 않았어. 내가 이전에 그런 적이 있다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 애가 보는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는 사실 하나로 족했다.




 현관을 나와 정원을 가로질러 가면서 수위에게 미샤가 나오는 걸 봤느냐고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왜 자꾸 그 꼬마 생각이 나는지 알 수가 없었고 그런 자신이 싫었다. 그 애에게 약을 먹인 것도, 더러운 짓을 당하는 걸 구경하며 흥분한 것도, 게르만을 부추겨 그 애와 잔 것도 전혀 후회하고 있지 않았다. 그럴 일도 아니었다. 아마 그 건방지고 재수 없는 창부 꼬마가 날 바라보던 눈빛 때문이었을 것이다. 날 어루만지고 있던 파벨에게 내쏘았던 섬광. 내게 약을 먹이려던 게르만에게 매달리며 애원하던 눈빛. 내게서 약물을 받아 마실 때의 그 눈. 두려움과 고통, 그리고 체념이 뒤섞인 그 작은 짐승 같은 눈.



 그 애가 그러지 않았다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그냥 생긴 대로 재수 없게 굴었다면, 내 목을 부러뜨리려고 덤벼들었다면, 게르만이 내 입에 그 약을 부어넣게 내버려뒀다면. 그럼 이렇게까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다들 돌아갔기 때문에 차고에는 내 차와 낡은 지굴리 한 대 뿐이었다. 호화스런 별장에 어울리지 않는 지굴리는 아마 수위의 차가 분명했다. 반질반질하고 멋진 내 차를 보자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건 게르만에게서 받은 차였다. 겉보기에는 관용차처럼 크게 나온 볼가와 다름없었지만 내부는 근사하게 개조되어 있었다. 내가 갖고 싶어 하자 게르만이 자기 차와 비슷한 시설을 내장해서 선물했기 때문이다. 미니바와 작은 드레스 서랍까지 달려 있었고 칸막이와 방음장치까지 되어 있었다. 게르만에게서는 보석이나 예쁜 옷도 가끔 받았지만 그래도 내가 가장 아끼는 선물은 바로 차였다. 웬만하면 다른 사람을 태워주지도 않았다. 미샤가 볼쇼이에 왔을 때 내가 제일 먼저 확인한 것도 그 애의 차였다. 우스꽝스럽지만 차고까지 가서 수위에게 미샤의 차가 뭔지 물어보기까지 했다. 내가 알아낸 거라곤 그 애가 일린의 차를 타고 왔다는 것뿐이었다. 나중에 그 애가 몰고 온 차는 그리 나쁘지는 않았지만 내 것처럼 좋은 차는 아니었다. 게르만이 선물해준 것도 아니었다. 키로프에 있을 때 팬들이 하도 따라다녀서 할 수 없이 샀다고 했다. 운전도 차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키를 꽂았을 때 난 깜짝 놀랐다. 뒷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강도가 든 걸까 더럭 겁이 났지만 이곳은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의 별장이었다. 외부에서 침입자가 들어올 리가 없었다. 수위가 주차를 해주면서 실수한 게 아닐까 싶었지만 갑자기 등줄기가 오싹했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난 심호흡을 하고 뒤로 물러났다. 차에 타는 대신 급하게 차고 입구로 가서 안쪽의 불을 모두 켰다. 아무 것도 아니었다. 문이 살짝 열려 있을 뿐이었고 뒷좌석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수위의 실수였다.



 그래도 불안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수위를 불러올까 하다가 여차하면 냅다 뛰려고 구두를 벗은 후 차로 다가가 뒷문을 열었다. 곧 난 그러지 않았어야 했다는 걸 깨달았다.




 창문 너머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은 건 당연했다. 그 애는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문을 열어젖히자 거기 기대 있었던 미샤의 머리와 어깨가 그대로 바깥으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조금만 더 세게 열었다면 몸이 완전히 밖으로 밀려나와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를 부딪쳤을 것 같았다.



 “ 아, 정말... 너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거야! 문은 어떻게 열었어! ”




 짜증이 솟구치는 것을 억누르며 난 미샤의 어깨를 잡아 시트 위로 밀어 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난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을 보았다.





 
 뒷좌석 시트와 아래 바닥에 검고 축축한 웅덩이 같은 게 괴어 있었다. 비릿한 냄새가 확 끼쳐왔다. 소스라치게 놀라 미샤의 몸을 억지로 밀어붙이자 허리 아래 깔려 있던 왼쪽 팔이 나무토막처럼 빠져 나왔다. 어두컴컴한 차 안에서도 그 팔이 너무 하얗게 보여서 소름이 끼쳤다. 그리고 그 아래쪽, 손목에서 검은 액체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시트와 바닥을 온통 더럽히면서 흥건한 연못처럼 고이고 있었다.




 하마터면 난 비명을 지를 뻔했다. 수위를 부르러 갈까 하다가 잘못 본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차 안의 등을 켰다. 그러자 검은색이 사라졌다. 온통 끔찍한 빨간색뿐이었다. 차 시트도, 바닥도. 그리고 그 애의 팔목도.




 “ 아, 맙소사... 이 멍청이... 어떻게,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 그것도 내 차에서... 오 하느님,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




 그때 내가 왜 수위를 부르러 가지 않았는지, 왜 바실리예프에게 전화하지 않았는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정신이 들었을 때 난 이미 그 애의 손목을 스카프로 꽉 조여매고 있었다. 피가 계속 쏟아지고 있어서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대체 뭘 가지고 그런 짓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손목이 너덜너덜하게 찢겨 있지는 않은 걸 보니 깨진 유리에 대고 그은 것 같지는 않았다. 내 차에는 칼도 가위도 없었다. 그러니까 내 탓이 아니었다.




 있는 힘껏 스카프를 조여매고 그 위에 다시 손수건을 꽉 감아 묶자 피가 멎는 것 같았다. 적어도 더 이상 쏟아져 나오지는 않았다. 턱을 잡아 고개를 정면으로 돌린 후 숨소리를 확인했다. 불규칙하고 약하긴 했지만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건 확실했다. 그 애의 얼굴은 물에 씻긴 석고보다 더 하얬다. 이마에 흘러내려온 머리카락과 눈썹과 마구 뒤엉킨 속눈썹만 잉크를 떨어뜨려 놓은 것처럼 새까맸다. 눈꺼풀과 입술도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난 미친 듯이 차를 몰았다. 구급차를 부르거나 수위에게 맡겼어야 했는데. 그때 아마 정신이 나갔던 것 같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게르만이 알면 끝장이라는 어이없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모스크바로 진입했을 때쯤 난 미샤가 내 차 안에서 죽을 거라는 자명한 사실을 깨닫고 너무나 두려웠던 나머지 그 애의 몸을 도로변에 내버리고 가려고 했다. 하지만 게르만이 알아낼 게 뻔했다. 내가 그 애를 죽였다고 의심할지도 몰랐다.




 “ 멍청이, 바보, 병신... 아, 하느님... 제발 쟤가 죽지 않게 해주세요... 아니, 죽어도 좋아요. 제발 내 차에서만은 안돼요.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만 숨이 붙어 있게 해 주세요. 거기서 죽는 건 상관없어요. ”




 난 아무 생각 없이 모스크바 시내까지 밟아댈 뻔 했다. 아마 그랬다면 미샤는 정말로 내 차 안에서 죽었을 것이다. 워낙 피를 많이 쏟았으니까. 하지만 거의 기적적으로, 저 멀리 황금빛 사원 지붕이 어둠 속에 살짝 떠올랐을 때 난 바로 근방에 루뱐카 클리닉이 있다는 것을 퍼뜩 기억해냈다. 내가 무릎 부상을 당했을 때 게르만이 그곳 요양소 티켓을 준 적이 있었다. 그곳으로 데려가면 게르만이 금세 알아챌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어차피 어디로 간다 해도 그의 정보망을 벗어날 수는 없을 터였다.




 샛길로 급하게 방향을 틀면서 뒷좌석을 돌아보았다. 미샤는 물론 아무런 의식이 없었다. 불을 껐는데도 그 애의 이마와 뺨과 콧날이 어둠 속에서 하얀 안개처럼 떠올라 있었다. 창문을 열었는데도 피 냄새가 자욱해서 멀미가 났다. 술 때문이야. 그래서 그렇게 순식간에 피를 쏟아낸 거야. 아니면 그 약물 때문일지도 몰라. 그 바보 같은 꼬마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내 탓은 아니었다. 그 애는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조차 기억 못할 것이다. 하지만 게르만은 약 기운에서 풀려나면 아무 것도 기억 못할 거라고 했다. 아무 것도 기억 못하는 아이가 왜 자기 손목을 그어댄 건지 묻고 싶었다. 게르만은 알 것이다. 그는 언제나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알았다.




...




이야기는 03. 일린(http://tveye.tistory.com/6969)으로 이어짐.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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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예전에 이 폴더에 미샤와 그의 모스크바 친구 스타니슬라프 일린, 그리고 일린의 어린 딸인 라라가 등장하는 부활절 단편 Jewels 전문을 올렸던 적이 있다. 그 이야기들의 링크는 여기 :


1장 : http://tveye.tistory.com/3390
2장 : http://tveye.tistory.com/3391
3장 : http://tveye.tistory.com/3393 
4장 : http://tveye.tistory.com/3394
5장 : http://tveye.tistory.com/3395



그 단편 이후 나는 거기서 파생된 중편을 하나 썼다. 제목은 Dolls. 즉, 인형들.



이 글은 길이로 따지자면 경장편에 가까웠지만 플롯이나 구조를 보면 세 토막 정도로 나눠지는 중편이었다. 그건 본편이라기보다는 내가 미샤나 그 주변인물들의 성격과 배경을 연구하기 위해 쓰는 데이터 구축용 글들인 half에 속해 있었다. (half는 내가 이런 종류의 글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냥 내 맘대로 지어낸 것이다) 이 half들은 정제되지 않고 거친 날것의 '자료'들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좋은 날이 와서 내가 자신의 글들을 발표하게 된다고 해도 이 half들은 거기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글쓰기를 위한 데이터용 허구들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끔 이 half에 속하는 글들을 약간씩 발췌한 적이 있다. 주로 미샤의 후원자이자 포악한 권력자인 게르만 스비제르스키가 등장하는 이야기들이었다. 이 사람은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서도 등장한 적이 있다. 그리고 가브릴로프 본편의 프리퀄인 미샤의 수용소 이야기에도 잠깐 등장했고 거기서 미샤가 보는 환상 속에 등장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나쁜놈이라서 ㅠㅠ)



나에게 이 half 시리즈에 속하는 글들은 파편적이면서도 쓰기 수월하다. '진짜' 소설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 표현은 모순이다. 소설이 맞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더욱 '진짜' 소설이다. 하지만 결코 정전이 될수도 없고 심지어 외전이 될수도 없다. 서무 시리즈는 외전 우주에 속한다. 패러디 속에서 자신만의 질서를 획득한다. 하지만 이 half들은 그저 데이터 구축을 위한 자료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half들을 쓰는 것은 많은 면에서 나에게는 의미가 있는 행위이다.



Dolls는 앞에서 얘기한 대로 부활절 단편 Jewels에서 파생된 half이다. Jewels 후반부(위의 링크에서는 제4장 http://tveye.tistory.com/3394)에서 화자인 라라는 미샤의 아파트에 찾아온 동료 발레리나 에벨리나 크리셴스카야의 무례하고 거친 언사에 놀라고 공포에 질린다. 미샤와 에벨리나는 어린 라라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에벨리나는 미샤에게 파베르제 보석달걀을 건네주고 나가버린다.



나는 이 에벨리나 크리셴스카야를 1인칭 화자로 내세워 Dolls라는 half 소설을 썼다. 내용은 간단하다. Jewels의 그 부활절 주간에 미샤에게는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가.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다'보다는 일종의 감정과 혼돈, 그리고 여러가지의 폭력과 고통에 대해 썼다고 하는 쪽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건 미샤라기보다는 에벨리나에 대한 이야기에 더 가깝다.



내가 쓴 글들에서 에벨리나는 jewels와 이 소설 외에는 등장한 적이 없다. 소설에도 간략하게 언급되지만, 여기서 에벨리나는 볼쇼이 발레단의 제1 솔리스트이자 미샤와 가끔 파트너로 춤을 추는 발레리나이다. (물론 다른 모든 캐릭터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임) 이 우주에서 그녀는 미샤의 후원자이자 억압적 애인인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의 오랜 정부이기도 하다. 그 부활절 주간에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는 그녀와 미샤를 내밀한 파티에 부른다. 거기에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목적이 있다. 그리고 에벨리나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Dolls는 소재 특성상 폭력적이고 거친 표현이 많고 수위가 높은 부분들도 꽤 있었다. 그래서 여기 올리는 버전은 자기검열과 편집을 좀 거쳤다. 즉, 중간중간 조금씩 잘라내거나 아예 파트를 좀 들어내거나 표현 수위를 조절했다. 어쨌든 공개 블로그이니까. 그래도 조금 폭력적인 묘사들이 종종 등장하니 꺼림칙하신 분들은 피해 가시기를.



하여튼 그런 부분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문을 올려보려고 한다. (잘라낸 부분들이 2~30% 정도 될 것 같긴 하다) 길이 때문에 서너 토막으로 나눠서 올릴 듯하다.  



전후관계나 이 글이 나온 이유를 따져보면 역시 'Jewels'를 먼저 읽고서 보면 좀더 좋겠지만, 순서가 바뀌어도 크게 상관은 없다. 뭐 이 글만 읽어도 되고.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Dolls









 1977년 4월, 모스크바




 미샤는 밤 열 시가 다 되어서야 도착했다. 분명히 포노마레바가 메모를 남겼고 바실리예프도 두 번이나 전화를 했기 때문에 몰랐다는 핑계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 꼬마의 건방진 태도에 조금 놀랐다. 감히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의 호출을 세 번이나 무시하다니, 어디서 그런 배짱이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직 게르만의 성격을 몰라서 그렇다고 치부하기엔 이미 레닌그라드에서 최소 3년은 넘도록 귀여운 정부 노릇을 해온 애였기 때문이다. 게르만이 그 정도로 오랫동안 품에 끼고 있었던 상대는 극히 드물었다. 요즘 들어서는 기껏해야 나와 그 꼬마뿐이었다. 하긴 나에 대한 관심은 이제 차디차게 식어가고 있었지만...




 어차피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자 기분이 과히 좋지는 않았다. 어쨌든 나는 6년 동안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의 공공연한 애인이었으니까. 발레계에서도 전부 아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 부분만큼은 내가 미샤보다 훨씬 유리했다. 아무리 게르만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해도 사내애를 공식적인 애인으로 내세울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다고 사람들이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니었지만. 우리 극장에서도 몇몇은 이미 눈치 챘을 것이다. 노비코프는 몇 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니, 게르만이 그 꼬마를 수중에 넣기 전부터, 모스크바 콩쿠르 시절부터 알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눈에 불을 켜고 그 애가 졸업하기도 전에 볼쇼이로 끌어오려고 애를 썼겠지. 게르만 스비제르스키가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꼬마. 미리 데려다 놓으면 극장으로서는 큰 이득이라고 생각했을 게 틀림없다.




 결국 노비코프는 소원을 이뤘다. 그 작자가 미샤를 볼쇼이로 데려오기 위해 쏟아 부은 노력과 물질적 보상이 하도 대단해서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물론 노비코프는 그에게 수석 자리를 주었다. 공정하게 얘기하자면 어쨌든 미샤는 키로프에서도 수석 무용수였으니까 그 부분을 트집 잡을 여지는 없다. 하지만 그 계약서. 그 꼬마는 1년 계약밖에 하지 않았다. 노비코프는 최소한 3년 계약을 맺으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영악한 꼬마는 뻣뻣하게 버텼다. 그런데도 노비코프는 그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줬다. 아무리 키로프 최고의 스타였다 해도 기껏 스물한 살 밖에 안 된 애였다. 그런 애에게, 극장에 들어온지 4년 밖에 되지 않은 애에게 20년차 인민예술가와 비등한 수준의 급료를 책정해 줬다. 그 꼬마가 추고 싶은 레퍼토리라면 전부 우선순위를 주기로 되어 있었고 파트너 선택 권한도 부여했다. 게다가 고위 간부들 전용 아파트까지 내줬다. 하긴 그 아파트야 노비코프가 아니라 게르만이 개입한 게 뻔하지만.




 미샤가 시즌 중에 갑자기 떠나는 바람에 키로프가 발칵 뒤집혔다지만 그건 우리 극장도 마찬가지였다. 새파랗게 젊은 애가 새로운 수석 무용수를 꿰차고 들어왔는데, 그것도 그런 파격적 대우를 받게 됐는데 무용수들 기분이 좋을 리가 만무했다. 하긴 그것도 남자 무용수들 얘기였다. 생각 없는 계집애들은 그의 외모에 혹했고 일단 한번이라도 무대에 같이 올라가고 나면 갈채와 환호에 혹했다. 나도 그와 백조의 호수를 한번 추긴 했다. 솔직히 말해 파트너로서는 훌륭했다. 재능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애였다. 하지만 내게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게르만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그게 공공연하게 자신의 호출을 무시한 미샤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계획 몇 개에 계속 딴지를 걸고 있는 막심 크라베츠 때문인지 궁금했다. 크라베츠는 저녁 식사에는 불참하고 나중에 별장으로 직접 왔다. 어차피 문화국 간부들과의 식사에는 관심도 없었을 터였다. 그자는 내가 아는 고위직 의원들 중 소위 문화예술과는 가장 담을 쌓은 인간이었으니까. 발레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자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고 그걸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내가 있는 자리에서도 대놓고 분노를 터뜨렸기 때문에 10분도 안되어 모든 진상을 알게 되었다. 그자가 뉴욕에서 꾸미고 있던 야심찬 계획 하나가 완전히 틀어졌기 때문이다. 무슨 미사일과 관련된 일이었는데 국방성의 양키 하나를 포섭하려고 했지만 막판에 실패했다는 거였다. 단지 그것 만이었다면 굳이 게르만이 그를 이 자리에 부를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게르만은 실패자를 싫어했고 멍청한 인간이라면 더 싫어했으니까. 그게 상당한 지위를 가진 인간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하긴 연방에서 게르만에게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크라베츠는 족히 30분 가까이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절반 이상은 미샤에 대한 욕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덕에 지난주에 미샤가 아브라모바와 뉴욕 공연에 간 진짜 이유를 알게 되었다. 공연은 연막이었고 실은 그 펜타곤 간부를 낚기 위한 미끼였다. 크라베츠는 미샤가 순순히 그 양키에게 안겨주기만 했어도 미사일 계획이 성공했을 거라고 믿는 눈치였다. 그 말은 물론 미샤가 성깔을 부리며 반항했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그 미국인에게 가지도 않았다.




 게르만은 크라베츠가 그렇게 분노를 터뜨리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 작자가 미샤를 더러운 매춘부 주제에 잘난 척하는 개새끼라고 욕했을 때는 쿡쿡 웃기까지 했다. 난 크라베츠가 감히 어떻게 게르만의 앞에서 그런 단어를 쓸 수 있는지 궁금했다. 미샤가 어떤 욕을 들어먹든 상관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그 꼬마는 게르만의 정부였으니까. 그건 게르만의 면전에서 창부를 데리고 자는 인간이라고 지껄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게르만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짧게 대꾸했을 뿐이었다.



 “ 내가 분명히 얘기했잖아. 걘 절대 말 안 들을 거라고. ”




 “ 아, 그랬지. 당신이야 당연히 그렇게 말할 수밖에. 그 귀염둥이를 양키놈 품에 안겨주기 싫었을 테니까. ”




 “ 당신 방법이 잘못됐던 거야. ”
 





 그 말에 크라베츠가 다시 벌컥 화를 내려고 했을 때 미샤가 도착했다. 바실리예프는 직접 미샤를 데리고 들어온 후 게르만에게 다가가 한두 마디를 나눴고 곧 밖으로 나갔다.





*    *    *






 미샤는 언제나처럼 고개를 똑바로 들고 찌르는 듯한 눈으로 정면을 쳐다보면서 들어왔다. 크라베츠와 빅토르 쇼플린을 발견했을 때도 그 시선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의식적으로인지는 모르겠지만 게르만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 꼬마가 게르만과 단둘이 있을 때는 어떻게 구는지 호기심이 일었다. 극장이나 공식적 리셉션 외에는 그들이 같이 있는 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 도도한 표정에 눈에 띄게 금이 갔다. 사실 꽤 놀란 것 같았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다. 다만 내게 간단하게 목례를 했을 뿐이었다. 극장에서도 그는 나나 다른 여자 선배들에게는 깍듯하게 굴었다. 나와 게르만의 관계에 대해서도 물론 알고 있었을 테니 그리 놀랄 일도 아닐 텐데 왜 당황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곧 내 곁에 앉아 있는 파벨에게로 눈을 돌렸다. 상의를 입지 않은 파벨이 내 허벅지와 무릎을 어루만지고 있는 것을 보고 그 표정이 두 번째로 변했다. 그 언짢은 표정의 정확한 의미가 궁금했기 때문에 난 파벨의 목에 한 팔을 감고 그의 귓불을 살짝 문 채 혀로 핥았다. 미샤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이런 자리에 한두 번 와본 건 아닐 테니 아마 내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미샤는 나 외에는 누구에게도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극장에서만 건방진 애가 아니었다. 크라베츠가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지만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가장 먼저 아는 척을 한 건 쇼플린이었다.



 “ 아, 미셴카. 이거 정말 오랜만인데. 벌써 3년 전이군. ”




 “ 전 기억이 안 나는데요. ”




 “ 이런, 섭섭한데. 파블로프스크. 기억 안 나? ”




 미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색이 약간 창백해졌을 뿐이었다. 쇼플린은 모스크바 의원이었고 게르만과는 달리 키로프 쪽에는 큰 관심도 없었으므로 아마 극장과는 관련 없는 모종의 접대 파티에서 만난 게 틀림없었다. 나도 쇼플린과 밤을 보낸 적이 있었다. 완전한 쓰레기였다. 하긴 게르만 곁에 모여들어 아첨하고 더러운 짓에 동참하는 놈들은 모두 쓰레기였다.




 빅토르 쇼플린이 낮게 휘파람을 불며 미샤를 아래위로 천천히 훑어보았다. 작고 가느다란 두 눈이 번쩍 빛났다. 그 눈에 어린 욕망이 너무나 노골적이어서 이런 일에 이골이 나 있는 나조차도 조금 놀랐다. 그자는 기세 좋게 뻗대는 사내애보다는 고분고분하고 연약한 여자들을 훨씬 좋아했기 때문이다.



 “ 맞아, 이런 애였는데. 그동안 깜박 잊고 있었군. 그때보다 더 근사해졌는걸. 톱스타가 돼서 그런가? ”



 미샤는 쇼플린이 한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했을 때 두어 발짝 뒤로 물러났다. 쇼플린은 화를 내는 대신 게르만 쪽을 돌아보며 웃었다.



 “ 이거 헷갈리는데. 얘가 정말 기억을 못하는 건지 아니면 부끄러워서 시치미 떼고 있는 건지. ”




 “ 둘 다겠지. ”




 게르만이 목을 울리는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지도 않은 채 미샤를 향해 무뚝뚝하게 말했다.



 “ 의원들을 보면 인사하는 게 예의라고 했을 텐데. ”



 미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게르만과 눈이 마주쳤을 때는 희미하게 몸을 움츠렸지만 쇼플린이나 크라베츠는커녕 게르만에게조차 고개를 숙일 생각도, 인사를 할 생각도 없는 듯 했다.




 게르만은 두 번 얘기하지 않았다. 곧장 미샤의 앞으로 다가갔고 얼굴을 거칠게 후려쳤다. 아마 미샤가 제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면 코뼈가 부러졌거나 입술이 완전히 터졌을 것이다. 대부분의 타격은 왼쪽 뺨과 턱에 쏠린 것 같았다. 게르만은 잠시의 틈도 없이 한 대 더 때렸다. 처음보다 더 둔탁한 소리가 났다. 미샤의 몸이 팽이처럼 돌았다. 웬만한 풋내기 무용수의 피루엣보다 더 근사했다. 난 예전에 게르만이 저런 식으로 따귀를 때려서 어떤 가냘픈 계집애의 광대뼈를 으스러뜨리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그게 내가 아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미샤는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지만 결국 무릎을 꺾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맞은 부위가 금세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래도 사내애라서 그런지 비명은 지르지 않았다.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게르만이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 일어나. ”




 미샤가 일어났다. 무릎을 펴고 똑바로 섰지만 눈은 내리깔고 있었다. 그러자 게르만이 다시 따귀를 때렸다. 아랫입술이 찢어지면서 피가 흘러내렸다. 게르만이 어깨를 잡고 돌려세웠을 때 미샤가 쇼플린과 크라베츠에게 인사를 했다. 짤막하고 건조한 인사였다. 그렇게 맞았는데 목소리가 흐트러지지도 않았다. 대단한 허세였다. 숨을 제대로 쉬기도 힘들 게 분명했다.




 크라베츠는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지만 쇼플린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미샤의 입술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주기까지 했다.




 “ 게르만이 그렇게 아껴줬는데도 성깔은 변함이 없는 것 같군. 그래도 이제 철 들 때도 되지 않았나, 미하일? 더 이상 십대도 아니고 세상 물정도 알만큼 알게 됐을 텐데. 뉴욕에서도 제대로 사고 쳤다지. 그래서 막심이 저렇게 화가 나 있고 말이지. 대체 왜 그랬나 모르겠네. 곱게 가서 한번 안겨줬으면 다 끝나는 일이었을 텐데. 그것도 안보위원회 간부의 명령을 무시하다니. 말만 잘 들었으면 훈장도 받았을 텐데. ”




 “ 벌써 두 개나 받았어! 그 망할 놈의 외국 페스티벌 덕분에. 저런 놈에게 훈장을 주다니. 다들 정신이 나간 거야! 훈장이고 뭐고 전부 박탈해야 해! 그 공연만 아니었어도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을 거야! ”



 크라베츠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솟구치는 분노를 참을 수 없는지 벌떡 일어나 미샤의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어깨를 휘어잡고 거칠게 흔들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아무 데서나 몸을 굴리는 지저분한 매춘부 주제에 콧대 높게 굴었다면서 너 때문에 국가 안보에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고 소리쳤다. 미샤는 잠시 가만히 있었지만 크라베츠가 부상당했던 어깨를 잡아 비틀자 몸을 홱 빼내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 실패했다면 잘된 거 아닌가요? 어차피 사람들 죽이려고 미사일 따위 만드는 거잖아요. ”




 아마 게르만이 아니었다면 크라베츠는 그 자리에서 미샤를 찔러 죽였을 것이다. 별장에 들어올 때 게르만의 경호원들이 총기를 모두 압수하긴 했지만 어쨌든 티 테이블 위에는 포크도 있었고 심지어 페이퍼 나이프도 있었다. 다행히 쇼플린이 나이프를 낚아채 파벨에게 건네주었다. 크라베츠는 무기를 쥘 타이밍을 놓치자 이를 갈면서 미샤의 셔츠 칼라를 휘어잡았고 왼손을 닥치는 대로 휘둘렀다. 머리와 얼굴, 목, 어깨 등등 손닿는 곳 어디든 마구 후려쳤다. 미샤가 저항했다. 한 손으로 크라베츠의 팔목을 꽉 잡더니 어깨를 거세게 떠밀었다. 아마 쇼플린이 뒤에서 잡아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자빠졌을 것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크라베츠가 다시 주먹을 휘두르려고 했을 때 게르만이 벨벳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그렇게 패봤자 별 소용없을 걸. 내가 그랬잖아, 당신 방법이 잘못됐던 거라고. ”





 “ 잘도 지껄이는군. 이번 일은 잊지 않을 거야, 게르만. 난 농담하는 게 아니야. 당신과 당신 매춘부 꼬마. 둘 다. ”




 “ 왜 날 끌어들이는지 모르겠군. 난 그쪽에는 개입한 적도 없고 관심 둔 적도 없는데. 미하일에 대해서라면, 난 분명히 사실을 말해줬어. ”




 “ 그래, 내 방법이 잘못됐다면, 어떻게 했어야 했는데. 한번 말해보지 그러나, 잘난 의원 양반. 저 미친 망나니 새끼가 저렇게 날뛰는데, 모튼에게 밀어 넣기만 하면 그놈 물건을 물어뜯어 잘라버리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대드는데 대체 무슨 방법이 있었다는 건지 정말 궁금해. 저건 그냥 미친놈이야. 반동분자라고. 그 자리에서 쏴죽였어야 했는데... ”



“ 아, 그런 말도 했나? ”




 게르만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미샤는 그의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 눈에 띄게 몸을 떨었다.




 “ 좀 보고 싶은데, 억지로 밀어 넣고 구경했으면 좋았을 걸 그랬군. 어때, 미셴카. 넌 정말 그렇게 했겠지. 더 심한 짓을 하고도 남았을 거야. 재미있었겠어. ”




 그 부드러운 음성과는 달리 게르만의 얼굴에는 전혀 웃음기가 없었다. 이제 나도 몸이 살짝 떨려왔다. 난 그 말투와 표정을 잘 알고 있었다.




 게르만은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크라베츠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 그래, 내가 잊었군. 방법을 알려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땐 몰랐지, 당신이 모튼에게 그렇게 목을 매고 있는 줄은. 그 정도로 중요한 계획이었다면 당연히 다른 복안들도 여러 개 가지고 있을 줄 알았거든. 이제라도 가르쳐 줄 테니 날 너무 원망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말 잘 듣게 하는 방법 말이지. 소련 무용수에게 넋이 나간 변태 양키 놈 품에 저 망나니를 순순히 안기게 만들 방법이 하나 있긴 했어. 지금 알려줄 테니 혹시라도 나중에 그 미사일 계획 다시 추진하려면 이 방법을 써보라고. ”




 게르만은 막심 크라베츠의 분노와 증오로 이글거리는 눈빛 따위는 완벽하게 무시했다. 크라베츠가 아무리 멍청하다 해도 게르만이 자신을 조롱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게르만은 크라베츠를 완전히 바보로 만들 생각은 아니었다. 어쨌든 크라베츠는 무시하기에는 꽤 입지가 탄탄한 인물이었으니까.




 게르만은 파벨과 쇼플린에게 가만히 눈짓을 했다. 파벨이 일어나 미샤의 뒤로 갔다. 그리고 그의 양쪽 팔을 뒤로 홱 꺾어 꽉 붙잡았다. 미샤가 저항하려고 했을 때 게르만이 조용하게 말했다.




 “ 움직이지 마. 삼보 선수니까. 목 꺾어버릴 거야. ”





 
 물론 그건 사실이었다. 그것도 아주 훌륭한 선수였다. 조만간 금메달도 몇 개 따 올 것이다. 유망주였다. 게다가 파벨은 헤라클레스처럼 근육이 솟아오른 팔을 가지고 있었다. 키와 체격도 게르만과 비슷할 정도였다. 미샤는 체구에 비해 상당히 힘이 센 애였지만 전문적 훈련을 받은 운동선수에게는 당연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미샤는 그런데도 버둥거렸다. 위협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쇼플린이 얼음 버킷 안에서 차갑게 이슬이 맺힌 스톨리츠나야 보드카 병을 꺼내와 마개를 땄다. 그리고 잔을 끌어당겼다. 보드카 잔이 아니라 기다란 샴페인 잔이었다. 보드카를 가득 따르면서 쇼플린이 노래하듯 말했다.



 “ 옛날 생각나는데, 미셴카. 그땐 샴페인이었지만. 한 잔 마시고 뻗었었지. 보드카는 더 심하려나? ”



 쇼플린은 보드카가 담긴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고 호주머니에서 유리 앰풀을 하나 꺼냈다. 고무마개를 비틀어 열고는 약간 끈적하게 엉기는 은백색 액체를 잔에 그대로 쏟아 부었다. 맑은 보드카 표면 위로 비눗방울처럼 거품이 일었다가 금세 잔잔해졌다.




 미샤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난 그 건방진 꼬마가 그렇게 사색이 되는 걸 처음 봤다. 솔직히 말해서 꽤 볼만한 광경이었다. 까만 눈이 공처럼 둥그렇게 커지면서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입술도 마찬가지였다. 게르만은 그런 미샤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면서 천천히 말했다.



 “ 똑똑하기도 하지, 설명 안 해 줘도 뭔지 금방 알아차리는군. 이걸 직접 보여준 건 이번이 처음인데. 사실 난 주사 쪽이 더 좋지만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겠지. 이쪽이 더 편하긴 해. 막심에게 실험 과정을 보여주기도 더 편하고. 저 친구도 항상 루뱐카에서 쓰는 약물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미셴카. 소련 시민이 말야, 그것도 소비에트에서 키워준 볼쇼이 수석무용수께서 국가의 이익에 봉사할 의무를 저버리다니. 그건 반역죄야. 당연히 벌 받을 줄 알고 있었겠지. 안 그래? 알고서 그렇게 깜찍하게 뻗댄 거 아닌가? 이제 벌을 받아야지. 막심에게 사죄도 하고. 그 훌륭한 계획을 망쳐놨으니 당연히 혼이 나야지. ”




 미샤가 미친 듯이 저항했다. 어떻게든 파벨의 손아귀로부터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쳤다. 하지만 게르만이 앞으로 바짝 다가붙어 자기 몸으로 그를 눌렀고 한 손으로 목을 움켜잡았다. 게르만이 천천히 목을 조이자 미샤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같이 춤출 때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지만 파벨과 게르만 사이에 끼어 있자 그 꼬마는 정말 가냘픈 소년처럼 보였다.




 게르만이 잠깐 손의 힘을 풀었을 때 미샤가 다급하게 속삭였다.



 “ 게르만 알렉세예비치,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




 “ 번지수가 잘못됐는걸. 그건 내 계획이 아니었잖아. 안보위원께 빌어야지. ”




 게르만은 크라베츠 쪽으로 미샤의 얼굴을 반쯤 돌렸다. 그 꼬마의 눈에 파란 불꽃이 일었다. 심지어 그건 꺼지지도 않았다. 그는 잠깐 입술을 달싹거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단어 하나, 음절 하나조차 새어나오지 않았다. 크라베츠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욕설을 내뱉는 대신 그자는 차갑게 웃기 시작했다. 




 
 “ 뭐 좋아, 어차피 빌어봤자 소용없었을 테니까.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보여주는 게 좋을 거야, 게르만. 그 방법이란 거. 그걸 먹여야 하나? ”




 “ 음. 당신 마음대로 해. 모튼에게 안겨줄 방법이 궁금하면 먹이고 그런 것 따위 관심 없다면 두들겨 패. 두 가지만 지켜주면 돼. 죽이지 말 것. 불구로 만들지 말 것. 어쨌든 베를린 무대에 올라가야 하거든. 외교 행사라 그건 취소 못해. ”




 “ 당신 그 말 후회하게 될 거야. ”




 크라베츠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게르만을 노려보았다. 이제 그자는 거칠게 웃고 있었다.



 “ 나한테 저 자식 넘겨준 거 말이지. ”



 반쯤 도전적으로 쏘아붙이며 크라베츠가 쇼플린으로부터 보드카가 담긴 잔을 홱 낚아챘다. 미샤의 입에 보드카를 부어넣으려고 했다. 미샤가 고개를 숙이며 저항했다. 게르만이 목을 놔줬기 때문이었다. 아마 일부러 그랬을 것이다. 크라베츠가 뺨과 턱을 움켜쥐며 앙 다문 이 사이로 억지로 잔을 들이댔을 때 그 정신 나간 꼬마가 볼만한 짓을 했다. 유리잔을 콱 깨물어 부숴버렸던 것이다. 혀가 잘리든 입술이 찢기든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잔은 금이 가면서 몇 조각으로 파싹 깨졌고 보드카는 카펫 위로 모조리 쏟아져버렸다. 난 그 귀여운 짓에 웃음을 터뜨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공연히 크라베츠에게 찍히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게르만이 날 지켜줄 것 같지는 않았다. 저 얼간이의 성미를 풀어주기 위해 당장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염둥이를 저렇게 내주고 있는 와중인데.




 크라베츠는 그 애의 짐승 같은 반항에 얼이 빠진 것 같았다. 잠깐 마비된 듯 멍하게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자가 다시 폭발하기 직전 게르만이 일어나더니 내게 다가왔다.




 “ 저런, 막심. 당신 아직도 이해를 못하는군. 그런 식으로는 안 된다니까. 그렇게 땀 뺄 필요도 없어. 다른 쪽을 살짝 건드려주면 돼. 안 그런가, 에벨랴? ”



 게르만의 눈빛은 차가웠지만 목소리는 벨벳처럼 부드러웠다. 그의 손이 내 가슴 안쪽으로 미끄러져 들어왔을 때 잠시 술에 취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키스하고 싶었지만 그는 내가 매달리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내 허리를 안아 일으키더니 미샤 쪽으로 끌고 갔을 뿐이었다. 그가 나를 테이블 위에 거칠게 앉히고 머리채를 잡아 뒤로 젖혔을 때 사지에 몰린 야수처럼 눈을 불태우던 미샤가 움찔했다.




 게르만은 한 손으로는 내 머리채를 잡고 한 손으로는 멀쩡한 잔에 보드카를 다시 따랐다. 쇼플린이 주머니에서 여분의 앰풀을 꺼내 마개를 열려고 했을 때 게르만이 고개를 저었다.




 “ 아니, 그거 섞지 마. 막심에게 좀 보여주고 싶어서 말이지. 얘한테는 굳이 약을 먹이지 않아도, 이거 한 잔만 먹였어도 모튼에게 안겨줄 수 있었거든. 워낙 술이 약한 애라서. 넌 안 그렇지, 에벨리나. 보드카 따윈 웬만한 사내들보다 더 잘 마시니까. ”




 “ 줘 봐요, 게르만. 보여줄 테니까. 내가 얼마나 잘 마시는지. ”




 “ 아니, 그럼 재미가 없지. 너한테 효력을 발휘하려면 루뱐카 약물 정도는 돼야지. 쟤가 저렇게 안 마시려고 뻗대는데 그렇다고 저걸 썩힐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저건 네가 좀 마셔줘야겠어. ”




 나는 게르만을 빤히 노려보았다. 그자가 그런 식으로 나올 거라는 걸 당연히 예상했어야 했다. 내가 너무 무뎌진 게 분명했다. 그가 날 찾지 않은지 너무 오래 돼서 그런 것이다. 나의 게르만, 그 더럽고 비열한 자가 얼마나 끔찍한 인간인지 잠시 잊었던 것이다.




 난 저항하지는 않았다. 게르만은 화가 나면 정말 내 목을 부러뜨릴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예전에도 손목에 금이 간 적이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불복종하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막 약물이 든 유리 앰풀이 입술에 와 닿았을 때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 여자 놔두세요, 게르만 알렉세예비치. 제발. ”




 “ 글쎄, 난 이쪽이 더 편한 걸. 누구처럼 버둥거리지도 않고 잔을 이빨로 물어 부수지도 않으니까. 너도 궁금하지 않아? 이 약 먹고 어떻게 되는지 직접 본 적은 없잖아. 너 이거 먹고 바닥에 기면서 울었던 건 기억나? 에벨리나는 어떨지 모르겠군. 이렇게 조그맣고 가냘프니 아마 너보다 두 배는 더 아플지도 모르지. 그래도 워낙 강단 있는 계집애라서 말야, 너처럼 울지는 않을지도 몰라. ”




 그때 파벨이 미샤를 놔준 것 같았다. 그 애는 정신없이 테이블 쪽으로 달려 왔다. 도저히 게르만에게서 날 잡아챌 용기는 나지 않았는지 무릎을 꿇고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 제발, 에벨리나 드미트리예브나는 아무 잘못도 안 했잖아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




 “ 당연히 얜 잘못 같은 건 안 했지. 아, 하나 있군. 네 동료잖아. 춤도 같이 추고. 동료가 잘못했으면 연좌 처벌을 받아야지. ”




 “ 제가, 제가 마실 테니까 제발... ”




 미샤가 숨을 몰아쉬며 간절하게 애원했다. 난 처음으로 그 당돌하고 건방진 꼬마가 눈물을 글썽이는 걸 보았다. 역시 아직 어린애였다.




 게르만은 어깨를 으쓱했다.




 “ 저건 너한테 지금 먹이고 싶지 않아. 그럼 막심이 안 믿을 것 같거든, 보드카만으로도 고분고분해진다는 거. 가뜩이나 내가 널 감싸고돈다고 오해하고 있어서 말이지. 그렇다고 네가 기꺼이 보드카를 마셔줄 것 같지도 않고. ”




 미샤가 일어났다. 게르만의 손에서 보드카가 든 유리잔을 낚아채더니 단숨에 전부 마셔버렸다. 진짜 보드카 잔이었다면 서너 잔은 나올 분량이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행동이었기 때문에 심지어 크라베츠조차도 움찔했다.



 게르만이 날 놔주었다. 하마터면 테이블 아래로 굴러 떨어질 뻔 했지만 파벨이 얼른 잡아 주었다.




 미샤는 심하게 숨을 헐떡였다. 그 애가 술을 못 마신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볼쇼이에 처음 왔을 때 노비코프가 열어준 파티에서도 두어 잔 밖에 마시지 않았고 그나마 나중에 준 술은 마시는 척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애는 유리잔을 쥔 채 잠시 똑바로 서 있으려고 애썼지만 곧 잔을 놓쳤다. 그리고 무릎을 휘청거렸고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기침을 하면서 몸을 웅크렸다. 기침을 할 때마다 삼켰던 술이 조금씩 밀려나왔다. 금방이라도 왈칵 토해버릴 것 같았다. 얼굴과 목덜미, 심지어 귀까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게르만이 허리에 팔을 감고 억지로 일으키자 꼭두각시 인형처럼 비틀거렸다.



 크라베츠가 이를 갈았다. 군인처럼 뚜벅뚜벅 걸어와 게르만의 팔에서 미샤를 거칠게 낚아챘다. 미샤는 취한 와중에도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차리고는 나직하게 신음하며 빠져나가려고 애를 썼다. 크라베츠는 욕을 하며 그 아이를 질질 끌고 가더니 곧 카펫 위에 내동댕이쳤다.




 게르만은 내게도 온갖 지저분한 짓을 했고 쇼플린을 비롯한 자기 패거리나 정치적 포섭이 필요한 고위 간부의 침실에 밀어 넣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오늘처럼 여럿이 모여 집단으로 놀아난 적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저런 식으로 공공연하게 ‘처벌’하고 자신이 보는 앞에서 폭행을 허락한 적은 다행히 없었다. 아마 그가 날 더 사랑해서가 아니라 내가 미샤보다는 더 똑똑하고 신중하게 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의 명령에 불복종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물론 게르만 스비제르스키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분명했다. 그저 소유하고 망가뜨릴 뿐이었다. 저 당돌하고 가엾은 꼬마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노리개일 뿐이었다. 나보다 더 어리고 더 재능 있고 더 예쁜 노리개. 마지막 묘사에 대해서는 나도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어쨌든 사내애였으니까. 게르만이 사내애든 계집애든 가리지 않는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미적 기준에 대해서는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물론 몇 가지 취향은 잘 알았다. 그는 금발보다는 브루넷을 더 좋아했다. 나도 그렇고 미샤도 그랬다. 너무 키가 크거나 작은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하긴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에게 웬만한 상대는 모두 요정처럼 작게 느껴질지도 몰랐다. 그는 청순하고 얌전한 스타일보다는 화려하고 눈에 띄는 타입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가 내 볼쇼이 주역 데뷔 무대를 보고 다음날 날 불러냈던 것이다. 미샤는 남자아이라 나처럼 메이크업이나 의상의 도움을 받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굉장히 눈에 띄는 애였다. 예쁜 애였다. 그 펜타곤 간부라는 작자가 단번에 그 애를 찍어냈다는 것도 이해가 갔다. 얼마 전 극장 기념식 때문에 무용수들이 똑같은 옷을 입고 열을 맞춰 집단 촬영을 했는데 그 흑백 사진 속에서도 미샤는 정말 튀어 보였다. 발레에 대해 잘 모르는 내 사촌들조차 사진을 보더니 저 근사한 애가 누구냐고 물었다. 어쩌면 그래서 게르만이 날 버리고 저 꼬마를 택한 건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으니까. 미샤가 아니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왔을 것이다. 어쨌든 지금 크라베츠에게 얻어맞고 억지로 보드카를 마신 채 나뒹구는 건 내가 아니라 미샤였으니까 다행이었다. 솔직히 좀 궁금하기도 했다. 저 꼬마가 얼마나 능숙한지, 얼마나 매력적이기에 게르만이 그렇게 푹 빠졌는지.




 크라베츠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기를 길게 내뿜은 후 파벨에게 미샤를 일으키라고 명령했다. 파벨이 허리를 안고 일으키려고 하자 미샤가 저항했다. 마구 버둥거리자 쇼플린이 뒤에서 그의 목과 어깨를 휘감으며 파벨을 도와주었다. 미샤는 낮게 욕설을 퍼부으며 계속 몸부림쳤다. 크라베츠가 허리 아래쪽에 아직도 시뻘겋게 번쩍이고 있는 담배 끝을 갖다 댔을 때 미샤가 짐승처럼 비명을 질렀다. 파벨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살이 타들어가는 냄새가 확 끼쳐왔다. 크라베츠가 담배를 옆으로 천천히 비틀었을 때 미샤가 거친 숨을 헐떡이며 팔과 무릎을 꼬았다. 보드카 때문에 빨개졌던 얼굴이 금세 눈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다.



 “ 욕하지 마. 한번만 더 나한테 지저분한 소리 지껄이면 죽여 버릴 거야. ”



 미샤는 고통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쇼플린이 혀를 찼다.



 “ 너무한데, 막심. 이제 그만하지. 차라리 두들겨 패. 이런 도자기 같은 피부에 화상 자국을 남기다니. ”




 “ 제대로 용서를 빌기 전에는 안 되지. 아까도 입 꾹 다물던데. 어때, 미하일. 아파? 빌어. 제대로. 나한테. ”



 크라베츠가 담배를 떼었다가 비벼대는 행위를 반복했다. 미샤는 통증으로 거의 기절하기 직전처럼 보였다. 감긴 두 눈 사이로 눈물이 스며 나왔다. 입술과 턱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파벨이 입을 막았던 손을 치웠을 때 미샤가 숨을 몰아쉬며 속삭였다.



 “ 용서해 주세요, 막심 블라소비치. 제가 잘못했어요. ”




 “ 뭘 잘못했는지 빼먹었어. ”




 “ 그 사람에게... 안 가겠다고 한 것... 아... ”




 미샤가 이를 악물었다. 뺨을 타고 눈물이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눈을 깜박여서 참아보려고 했지만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크라베츠가 담배꽁초를 떼어내 카펫 위에 내던졌을 때 미샤가 신음하며 자유로운 쪽 손으로 상처 부위를 감싸 쥐려고 했다. 쇼플린이 그의 손목을 잡아채며 역겨울 정도로 다정하게 말했다.



 “ 만지면 안 되지, 미셴카. 그럼 덧날지도 몰라. 파벨이 식혀줄 거야. 나중에 물집 터뜨리면 멀쩡해질 테니 너무 겁내지 마. 흉터 생겨도 게르만이 좋은 데 보내서 없애줄 거야. 말만 잘 들으면. ”




 상처는 끔찍했다. 쇼플린 말대로 도자기 같은 피부였다. 그렇게 하얀 피부에 낙인처럼 타들어간 꽁초 자국을 보니 어쩐지 속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동시에 자업자득이란 생각도 들었다. 바보 같은 꼬마였다. 그깟 양키 자식에게 한 번 안겨주면 그 뿐이었을 텐데. 어쨌든 그 덕에 뉴욕에도 가지 않았는가. 우린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아니면 꼬리를 치며 변명을 늘어놓든가. 마리야처럼 무릎을 다친 척이라도 한다든가. 엎질러진 물이긴 했지만 적어도 여기 들어왔을 때 처음부터 크라베츠에게 넙죽 엎드려 빌었다면 이 정도로 혼이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파벨이 얼음 채운 유리잔을 가져와 상처에 갖다 댔을 때 미샤는 간신히 비명을 참았다. 난 게르만 쪽을 힐끗 보았다. 그는 소파에 앉아 보드카를 마시면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차가운 미소가 입가에 떠올라 있었지만 색이 다른 두 눈은 뜨겁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크라베츠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미샤의 턱을 들어 올렸고 아직도 눈물로 젖어 있는 얼굴을 두어 차례 내리쳤다. 그리고는 갑작스럽게 미샤에게 키스를 했다. 얼간이 같으니. 게르만은 아마 애초부터 이렇게 될 거라는 계산을 했을지도 모른다. 나의 게르만은 보통 모든 것을 다 내다보고 있다. 저 단순한 멍청이 크라베츠의 패턴이라면 더더욱 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작자가 하는대로 가만히 있는 게 미샤에게도 더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바보 같은 꼬마는 그걸 몰랐다. 쾌감으로 크라베츠의 손아귀에서 힘이 조금 빠져나갔을 때 미샤가 그자의 입술을 미친개처럼 물어뜯었다.



 크라베츠가 구둣발로 미샤의 머리를 걷어찼다. 파벨이 손을 놔주지 않았다면 정통으로 맞아서 두개골이 박살났을지도 몰랐다. 미샤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몸을 반으로 접고 엎드렸을 뿐이었다. 그리고 왈칵 토했다. 보드카와 타액이 뒤섞여 턱을 타고 카펫으로 줄줄 흘러내렸다. 그렇게 취한 상태에서도 물어뜯고 저항했다는 게 놀라울 지경이었다. 크라베츠가 다시 걷어차려고 했을 때 미샤가 어깨로 그의 다리를 들이받았다. 두 손으로 발목과 종아리를 휘어잡고 비틀었다. 하마터면 바닥에 나뒹굴 뻔한 크라베츠는 결국 뒤로 물러났다. 그자가 이를 딱딱 부딪치며 낮게 속삭이듯 말했다.



 “ 기필코 죽여 버릴 거야, 이 반동분자 새끼. 언제가 됐든. 그땐 아무도 구해주지 않을 거야. 편 들어주는 사람도 없을 걸. ”



 미샤가 기어서 다시 달려들려고 했을 때 파벨이 그를 꽉 붙잡고 바닥에 짓눌렀다. 게르만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 흠, 에벨리나. 막심은 저렇게 날뛰는 타입은 별로인 것 같은데. 얌전하게 만들어주는 게 낫겠어. 어쨌든 네 파트너잖아. ”



 그는 내 손에 물이 반쯤 찬 컵을 들려주었다. 그리고는 쇼플린이 내민 유리 앰풀을 따서 약물을 그대로 부어넣고 손가락으로 한 바퀴 돌렸다. 난 의구심이 가득한 눈으로 게르만을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 쟨 지금 제정신이 아니에요. 내 목을 부러뜨릴 거예요... ”




 “ 안 그럴 걸. 가서 먹여. ”




 그 명령이 아니라 게르만의 차가운 눈빛이 비수처럼 내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았다. 난 컵을 들고 미샤에게 갔다. 그 애는 완전히 엎드린 채였다. 파벨에게 등과 어깨가 짓눌려 있었던 것이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턱을 들어 올렸을 때 미샤가 부르르 떨었다. 꼼짝도 못하는 주제에 다시 덤벼들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경련을 멈췄다. 토해서 그런지 눈에 약간 초점이 돌아와 있었다. 나는 그의 입술 앞에 컵을 갖다 대며 말했다.




 “ 삼켜. 빨리. ”




 물론 그는 거부했다. 고개를 미친 듯이 저었다. 두 눈에 공포가 가득했다. 정말 무서운 것 같았다. 대체 어떤 약물이기에 그러는지 궁금했다. 난 손가락으로 그 애의 입술을 벌렸고 컵을 더 바짝 들이대며 낮게 속삭였다.



 “ 마셔. 당장. 안 그러면 내가 마셔야 해. ”




 게르만이 옳았다. 그 애는 내 목을 부러뜨리지 않았다. 심지어 파벨이 물러났는데도 저항하지 않았다. 난 미샤의 입술을 벌리고 희석된 약물을 부어넣었다. 약물이 입 안으로 흘러들어간 순간 그 애가 몸을 떨면서 본능적으로 그걸 뱉어내려고 했다.



 “ 안 돼. 삼켜. ”




 그 애에게 그걸 먹이는 것, 완전히 삼키게 하는 것은 너무나도 쉬웠다. 컵을 비스듬히 기울여 입 안으로 내용물을 모두 부어넣은 후 한 손으로 그 애의 고개를 쳐들고 목을 쓸어내렸을 뿐이었다. 어쩌면 게르만은 바로 이것 때문에 날 여기 불렀던 건지도 몰랐다. 끔찍하게 어리석은 꼬마 같으니... 연방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자들에게는 겁도 없이 야수처럼 덤벼들면서 전혀 친하지도 않은 계집애가 털끝이라도 다칠까봐 공포에 질려 보드카를 털어 넣고 정체불명의 마약을 순순히 받아 마시는 멍청이. 윗분들의 노리개 주제에 여자 앞에서는 백마 탄 기사 노릇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이었다.  




 
 약물을 삼킨 후 미샤는 한동안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사지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게 육안으로도 보였다. 쇼플린이 그 애의 몸을 뒤집었다. 머리가 무겁게 처지면서 옆으로 돌아갔다. 안색은 완전히 새하얬다. 입술이 아래로 축 늘어지면서 부르르 떨렸다. 두 눈은 감겨 있었지만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희미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나는 게르만의 곁으로 돌아왔다. 용기를 내어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몸을 밀착시켰다. 그가 나를 안아주었다. 귓가에 대고 ‘꽤 잘했어, 에벨랴’ 라고 속삭였을 때 몽롱한 행복감을 느꼈다.






...



이야기는 02. 미샤(http://tveye.tistory.com/6964)로 이어진다.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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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어제 가브릴로프 본편의 전반부 중 그 소도시로 유배된 미샤가 자신의 감시요원인 다닐 베르닌과 첫 대면하는 장면을 발췌했다. (http://tveye.tistory.com/6931) 오늘 올리는 에피소드는 베르닌이 미샤를 KGB 지국으로 데리고 와서 블라지미르 스페호프의 국장실로 안내한 후의 일이다.

 

 

사실 어제 에피소드와 오늘 에피소드 사이에는 아주 짧은 에피소드가 하나 더 있는데 그건 전에 따로 올렸었다. 궁금하신 분들은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검색대를 통과하는 미샤' : http://tveye.tistory.com/5368 를 먼저 읽고 아래의 에피소드를 읽으세요.

 

 

위의 사진은 이 이야기와 직접적 관계는 없지만 어쩐지 어울리는 느낌이라 올려봄. 작년 6월에 페테르부르크의 어느 호텔에 머무를때 찍은 창문 사진.

 

 

 

베르닌이 '소도시 가브릴로프를 실질적으로 손에 쥐고 있는 인물'이라고 칭했던 블라지미르 스페호프는 본편에서 이런 모습으로 첫 등장한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블라지미르 스페호프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사람이었다. 중키에 야윈 몸매, 잿빛이 섞인 어두운 금발과 전형적인 슬라브족의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였다. 엷은 갈색 눈동자는 테 없는 안경에 가려져 항상 흐릿하게 보였다. 옷차림이나 스타일도 전형적인 공무원 같았다. 도시를 쥐락펴락하며 웬만한 유명인사들 조차도 슬슬 눈치를 보게 만드는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책임자였지만 그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설명을 듣기 전까지는 그런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하긴 모스크바에서는 진짜 스파이로 경력을 쌓았던 인물이니 어떻게 보면 그 평범한 외모가 가장 걸맞았을 수도 있었다. 다닐 베르닌은 미샤에게 허풍을 떤 것이 아니었다. 루뱐카 시절부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막심 크라베츠가 최근 실각해서 정치적으로 타격을 입기는 했지만 그래도 스페호프는 여전히 가브릴로프의 진짜 실력자 중 하나였다.

 

 

 

드미트리 마로조프의 후원으로 크레믈린에 입성해 권력을 잡은 후 고향 도시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게오르기 벨스키조차도 스페호프를 갈아치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벨스키는 온건한 편인데다 그 소도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스페호프를 다른 인물로 교체한다면 KGB에 아직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게르만 스비제르스키가 개입할 것이 뻔했다. 벨스키는 고향인 가브릴로프를 자신의 소유물처럼 아꼈기 때문에 스비제르스키가 끼어들 여지를 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스비제르스키는 최근 상당히 개인적인 원한으로 정적이었던 크라베츠와 제믈랴코프를 제거해버렸으니 그들의 측근이라면 더욱 흔쾌히 없애버릴 수 있을 테니까. 베르닌은 모스크바의 꽤 믿을만한 소식통으로부터 벨스키가 미샤를 가브릴로프로 보내도록 손을 썼을 때 스비제르스키가 스페호프를 놓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얼간이’라고 평했다는 소문을 주워들었지만 물론 그런 이야기를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스페호프는 램프 불빛 아래에서 서류를 읽고 있었다. 한낮이라 바깥은 아주 밝았지만 커튼을 모두 쳐놓은 탓에 실내는 어두웠다. 베르닌은 잠시 기다렸지만 국장이 눈을 들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 국장님, 야스민이 도착했습니다. ”

 

 

스페호프는 읽던 서류를 천천히 옆으로 밀어놓고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미샤 쪽을 보지는 않았다. 고의적으로 그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베르닌을 향해 말했다.

 

 

 

“ 30분이나 늦었군. ”

 

 

기차는 정시에 도착했습니다만 등록 절차 때문에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

 

 

“ 기차라. 참 의외야. 그렇게 세심한 분들이 전용차나 비행기를 내주는 건 잊다니. 정치국 업무로 많이 바쁘셨던 모양이지. 난 사실 자네가 모스크바 애들 한 소대를 데리고 돌아올 줄 알았다네. 유명인에게 그 정도 경호는 붙여줄 거라고 생각했지. 루뱐카에서는 아무도 안 왔나? ”

 

 

“ 두 명의 요원이 동행했습니다만 제게 저 친구를 인계한 후 모스크바로 곧장 돌아갔습니다. ”

 

 

“ 아, 그래. 좋아. ”

 

 

 

스페호프는 손바닥을 마주쳐 딱 소리를 냈다. 그리고 처음으로 미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위아래를 대충 훑어본 후 안경을 천천히 위로 밀어 올렸다.

 

 

 

“ 그러니까 당신이 그 야스민이란 말이지. 사진에 난 것과는 다르군. 뭐가 그렇게 특별한지 잘 모르겠는데. 조명이 없어서 그런가? ”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커튼을 모두 걷었다. 갑작스럽게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자 눈이 멀 것처럼 환해졌다. 베르닌과 미샤는 둘 다 눈을 찌푸렸지만 스페호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했다. 하긴 창문을 등지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는 잠깐 미샤를 정면으로 응시한 후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 밝은 데서 봐도 잘 모르겠군. 평범해 보이는걸. 하긴 난 극장에는 가본 적이 없어서. 무대 위에서는 달라 보이는 뭔가가 있겠지. 아니면 파티 테이블 앞에서. 그것도 아니면 침대에서. ”

 

 

 

베르닌은 낮게 헛기침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

 

 

“ 아니, 자넨 여기 있어. 보고서를 써야 하니까. ”

 

 

“ 개인 면담을 진행하시기로 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요. ”

 

 

“ 사적인 대화라면 굳이 보안위원회 사무실에서 나눌 필요가 없지. 기차역에서부터 있었던 모든 일은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전부 기록해 제출하도록 하게. 특히 지금은 더. 이건 공적인 업무니까. 모든 대화를 기록해서 내일 아침까지 내 책상 위에 올려놓도록.

 

당신도 잘 알아두는 게 좋아, 야스민. 나는 이곳의 방침을 얘기하고 있는 거야. 지금 여기서 나오는 내 모든 얘기는 당신이 지켜야 하는 공식 지침이야. 난 죄수를 넘겨받았어. 여분의 짐이지. 원칙적으로 따지자면 모스크바 당국은 우리에게 당신을 떠넘길 권한이 없어. 당신은 모스크바에서 재판을 받았고 절차에 따라 레닌그라드로 넘겨졌지. 이곳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어. 하긴 모스크바 클리닉으로 이감된 것부터 법과 절차를 무시한 특혜였으니까 여기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긴 해. 하지만 너무 으스대지는 않는 게 좋아. 벨스키에게 어떤 식으로 설명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은 공식적으로 석방된 게 아니야. 사면을 받은 건 더더욱 아니지. 당신은 7년형을 받았어. 그 말은 공식 사면이 있기 전까지는 7년 동안 여기 있어야 한다는 뜻이야. 그리고 내가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국장으로 있는 한 당신은 내 소관이야. 내 허가 없이는 시 바깥으로 나갈 수 없고 외부인들과 접촉할 수 없어. 법규를 위반하거나 반체제적인 행위를 했을 때에는 내 직권으로 재판에 상정할 거야. 물론 거기에는 공연, 언사, 모든 방식의 표현, 그 외 불순한 모임이나 교사 행위도 포함되지. 한 번이라도 유죄 항목에 해당되는 일을 저지른다면 휴가는 끝이야. 신속하게 소환될 거야. 모스크바든 레닌그라드든 내 알 바 아냐. 시베리아나 키르기즈일 수도 있겠지. 어쨌든 여기서는 내쫓을 거야. 연금 기간 동안 다시 범법 행위를 저지른다면 최소한 무기 징역이야. 굳이 총살형 운운하며 겁을 주고 싶지는 않아. 뭐 윗분들이 내키면 한번쯤은 더 구해주겠지. 하지만 그게 끝이야. 그때는 여기보다 좋아지지는 않을 테니까. 내 말 알아듣겠나? 똑똑한 친구라고 소문났으니 전혀 이해 못하지는 않겠지. ”

 

 

 

스페호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가락을 부딪치며 미샤에게 가까이 오라는 신호를 했다. 미샤는 다가가지 않았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카펫 위로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 속에서 그의 얼굴은 하얗게 표백되어 씻겨나간 것처럼 보였다. 스페호프는 한동안 그를 뚫어지게 노려보았고 낮고 조용한 음성으로 목을 울리며 말했다.

 

 

 

“ 아직도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미하일 야스민. 넌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어. 예전처럼 제멋대로 굴었다가는 끝장이야. 스비제르스키가 이곳에 한번이라도 와본 적이 있다고 생각하나? 그자가 여기 들를 일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을 거야. 그럼 벨스키에게 달라붙겠다고 협박이라도 해보고 싶나? 안됐지만 그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가 끝이야. 정치국 의원은 바쁘신 몸이니까. 넌 내 소관이고 그건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그 건방진 태도는 그만 접는 게 좋아. 벨스키는 네게 우리 극장을 건네줬지만 그건 하찮은 연막일 뿐이야. 그깟 삼류 극장 따윈 언제라도 닫아버릴 수 있어. 여긴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와는 달라. 꼬리쳐서 부탁할 상대도 없을 거야. 널 관장하는 건 여기 보안위원회 뿐이고 책임자는 나니까.

 

난 원칙주의자야. 법을 어기고 체제에 반역하는 자들은 좋아하지 않아. 질서를 들쑤시고 다니면서 주변 사람들을 선동하는 놈은 더욱 더. 스비제르스키고 벨스키고 내 알 바 아니야. 이 도시에서 말썽을 부렸다간 다시는 햇빛을 보지 못하게 될 거야. 벌목공들 사이에서 강제 노역조차 할 수 없게 될 걸. 여기보다 좋아질 일은 없을 거라고 했지.

 

그 레닌그라드 센터에서는 운이 좋았어. 용케 잘 빠져나왔더군. 행운은 두 번 찾아오지 않아. 다시 그런 곳에 처박히게 되면 그대로 끝날 거야. 그땐 약물도 필요 없을 걸. 전적이 있으니 프시후슈카로는 보내지 않을 거야. 집단 수용소가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네 착각이지. 이송되자마자 굶주린 죄수들 손에 넘어갈 테니까. 네가 센터에서 만났던 얼간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진짜 범죄자들, 살인자들, 폭력범들. 손 하나 까딱 못할 걸. 아니면 그런 걸 좋아하나? 거친 놈들을? 난 그런 쪽은 잘 몰라서. 어쨌든 오래 버티지는 못할 걸. 그러니까 얌전하게 구는 게 좋을 거야. 순진한 애들 꼬드겨서 헛소리를 늘어놓고 조금이라도 물을 들이는 기색이 보인다면 그 자리에서 체포할 테니까. 내 말 알아들었나? ”

 

 

 

블라지미르 스페호프가 거의 숨도 쉬지 않고 그 긴 연설을 늘어놓는 동안 미샤는 단 한 번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별다른 움직임도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어깨를 펴고 머리를 똑바로 든 채. 하지만 뻣뻣한 자세는 아니었다. 베르닌은 그가 조명이 환하게 켜진 무대 위에 서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스페호프는 기다렸다. 족히 20초 가까이. 그리고 다시 한 번,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가라앉은 음성으로 알아들었는지 되물었다. 미샤는 놀랄 만큼 차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 그게 당신들의 지침이라면. ”

 

 

그때 베르닌은 깨달았다. 그의 충고는 애초부터 무익한 것이었다. 미샤가 어떻게 대답했든 국장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거기 아주 깊고 격렬한 증오가 있었다. 그리고 블라지미르 스페호프가 미샤가 도착하기 오래 전부터 그 증오를 예비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뒤늦게 깨달았다. 그건 일 분 일 초도 만나본 적 없는 상대를 향해 품을 수 있는 가장 강렬한 감정일 것이다. 그는 미샤가 그런 종류의 증오를 몇 번이나 마주해 보았는지 궁금했다. 저자는 이 친구를 죽이고 말겠군. 그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이미 며칠 동안 품고 있던 가정을, 그리고 그 가정은 이제 확신으로 바뀌고 있었다.

 

 

 

...

 


 

 

 

어제 포스팅에도 링크를 걸었지만, 이 대면을 마치고 나온 후의 짧은 장면을 조금 발췌했던 적이 있다. 중간에 한두장 빠지긴 했지만. 그건 여기.

햇살. 본편의 베르닌과 서무의 단추 사이 : http://tveye.tistory.com/4451

 

 

저 햇살 장면 후 베르닌은 의사 스타브로프에게 미샤를 데려간다. 그 내용은 올리지 않았지만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올린 적이 있다. 이 파트의 마지막 부분. 숙소에 도착한 미샤와 베르닌이 나누는 이야기이다.

이웃사촌 미샤와 베르닌, 미샤가 생각한 해법 두가지 : http://tveye.tistory.com/4971

 

 

그리고 이 다음 파트인 3장의 일부인 렐랴의 인터뷰 : http://tveye.tistory.com/5114 

이 인터뷰에서는 극장의 예술감독이자 안무가로서의 미샤가 관객과 극장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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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브릴로프 본편을 자가패러디해 웃기게 만든 서무 시리즈에서 블라지미르 스페호프는 걸핏하면 베르닌에게 '벌목공으로도 일하지 못하게 만들어주겠다!' 하고 협박을 하는 어딘가 좀 모자라지만 못된 상사로 등장하는데... 사실 그 벌목공 타령은 오늘 올린 이 에피소드에서 스페호프가 미샤에게 하는 협박 속에서 처음 나왔다. 이거 쓸땐 분명 웃긴 협박이 아니었는데 ㅎㅎㅎ

 

 

서무 시리즈는 블로그의 '서무의 슬픔' 시리즈 폴더로 가면 처음부터 볼 수 있다. 38번째 에피소드까지 올라가 있고 중간중간 번외편도 몇개 들어 있다. 등장인물 인터뷰 앙케이트라든지, 민담 패러디라든지 ㅋㅋ 가끔 다시 서무 시리즈 쓰고 싶기도 하다. 쓸 때 즐거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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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지금 쓰고 있는 글이 뭐야? 라고 묻는다면 나는 항상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다. '몇년 째 쓰고 있는 글이 있는데 오랫동안 멈춰 있어. 중간중간 다른 글들을 써서 마치기도 하고 미완으로 남겨두기도 했지만 그래도 '지금', '정말로' 쓰고 있는 글은 하나야.' 라고. 그게 바로 가브릴로프 본편이다. 몇년 전 다시 글을 쓰기로 결심했을 때 구상했고 계속해서 머릿속과 마음속에 아주 깊게 자리잡고 있는 글이다.

 

 

다른 글들은 사실 다 여기서 새끼친 것들이다. 서무 시리즈도. 게다가 트로이를 내세운 장편 역시 사실은 이 본편에서 나왔다. 트로이는 원래 이 본편에 잠깐 등장하는 인물이었는데 플롯을 구상하면서 '그런데 이 사람은 왜 이렇게 행동할까?' 라는 의문을 품었고 결국 그의 목소리와 그의 시선을 빌려 꽤나 긴 소설을 썼었다. 최근 여러번 발췌한 미샤의 수용소 단편은 이 가브릴로프 본편을 위한 프리퀄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본편은 이미 몇년째 120여페이지에 머물러 있다. 뒤를 이어서 쓰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고, 사실 전체 플롯과 구조, 메인이 되는 이야기들과 작은 에피소드들도 근 7~80% 정도는 모두 구상되어 있는데 쓰기가 그리 쉽지 않다. 나는 보통 글을 자유롭게 춤추듯이 쓰는 것을 좋아하고 한번 몰입하면 쉽게 써나가는 편인데 이 가브릴로프 본편만은 그렇지 않다. 이 글은 아마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오직 여기에만 집중했을 때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몇년 동안 나는 너무 여러가지로 산란해져 있었고 특히 회사 때문에 더욱 집중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래도 이 본편을 꼭 쓰기는 할 것이다. 언제가 됐든 마칠 것이다. 그럴 거란 사실을 자신의 마음 속으로 알고 있다.

 

 

아래 발췌한 부분은 이 가브릴로프 본편의 2장이다. 1장은 미샤가 부임해오는 극장의 무용수 하나의 시선으로 전개되었고 이 2장은 기차로 가브릴로프에 호송된 미샤가 그의 KGB 감시요원인 다닐 베르닌과 처음 대면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맞다, 서무 시리즈의 그 다닐 베르닌, 단추청년, 왕재수 미샤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집사 베르닌이다. 하지만 본편의 베르닌은 서무 시리즈에서 희화화시킨 단추 베르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리고 이 모습이 사실 진짜인데...어느새 그는 단추청년이 되었지 ㅠㅠ 이 장면 중 중간 정도는 전에 좀 발췌한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첫 대면 에피소드를 온전하게 올리지는 않았기 때문에 여기 다시 올려본다.

 

 

..

 

 

맨 위 사진은 가브릴로프...는 당연히 아니고, 2년 전 페테르부르크에서 내가 찍은 사진. 레트니 사드(여름 정원). 발췌한 에피소드에서 미샤와 베르닌이 숲을 지나 시내로 들어가는 장면이 나와서 뭔가 숲 느낌 나는 사진이 어울릴 것 같아서 올려봄.

 

 

...

 

 

가브릴로프는 물론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도시이다. 하지만, 드넓은 러시아(및 구소련) 땅 어딘가에 이 이름 붙은 소도시가 실제로 있을 것 같긴 하다. 그리 어렵지 않은 이름이고... 대천사 가브리엘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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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샤 야스민이 가브릴로프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했던 일은 보안위원회에 제출할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꽤 두툼한 보안 서약 서류에 서명을 하는 일이었다. 그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지만 다닐 베르닌은 거의 친절하기까지 한 어조로 서류에 그가 가브릴로프에서 지켜야 할 사항들이 나열되어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미샤가 서류를 들춰볼 기색을 보이지 않자 베르닌은 허가 없이는 시계를 넘어갈 수 없으며 모든 시외전화는 보안위원회의 승인을 거쳐야만 걸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상대의 침묵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서류의 제본 상태가 좋지 않은 것에 대해 양해를 부탁했다. 약 20페이지 가량의 서류는 갱지에 타이핑되어 있었고 노끈으로 허술하게 묶여 있었다.

 

 

“ 붉은 담장 도착하기 전에 차 안에서 읽어두는 게 좋을 걸요. 일단 제출하고 나면 내용 확인할 기회 없을 테니까. ”

 

 

미샤는 서류를 읽는 대신 붉은 담장이 뭐냐고 물었을 뿐이었다. 아마도 가브릴로프에 도착해서 그가 제일 처음 했던 말일 것이다. 기차역에서 베르닌에게 인계된 이래 그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 아, 그렇지. 당신은 여기 사람이 아닌데. 붉은 담장은 말이죠, 우리 사무실을 가리키는 겁니다. 오해는 말아요, 담장이 있긴 하지만 붉은색은 아니니까요. 크라스나야 강변에 있어서 그런 겁니다. 모스크바에서는 루뱐카라고 부르듯이. 뭐 그런 식인 거죠. 쓸데없는 설명인가요? ”

 

 

미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베르닌은 약 10여분 정도 기다렸고 그가 전혀 서류를 읽을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맨 마지막 장을 펼쳐주며 서명을 하라고 했다. 미샤가 서명을 한 후 펜과 서류를 돌려주자 베르닌은 그것들을 봉투에 다시 집어넣으며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 의외인데. 전 사실 서류를 한 부 더 준비했답니다. ”

 

 

“ 왜죠? ”

 

 

“ 찢어버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

 

 

“ 그런다고 달라질 게 있나요? ”

 

 

“ 하긴 그렇죠. 안 읽은 것도 그래서겠지. 현명한 사람이군요. ”

 

 

 

미샤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베르닌은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상대방의 검은 눈을 찬찬히 응시하면서 조금 전보다 훨씬 진지한 어조로 덧붙였을 뿐이었다.

 

 

 

“ 이제부터 충고 하나 하죠. 강을 건너기 전에. 일단 시내로 들어가면 우리 대화는 전부 기록해야 할 테니까. 난 77년에 모스크바에 있었어요. 당신이 볼쇼이에 있었을 때죠. 당신 무대는 여러 번 봤습니다. 내 심미안이야 교양 있는 관객들에겐 비웃음을 살 수준이지만, 일단 팬이라고 해둡시다. 그래서 말인데, 블라지미르 스페호프 앞에서는 그런 식으로 굴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그는 지루한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온건한 사람은 아니지요. 가브릴로프를 손에 쥐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곳은 말이지요, 미하일, 작은 도시입니다.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와는 다르지요. 저 숲들이 보이시나요? 이쪽에는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습니다. 공항과 기차역과 저 울창한 숲, 그리고 즐라타야 강. 우리는 지금 강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도로를 달리고 있습니다. 곧 다리를 건너게 되겠죠. 그곳에 시내가 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손바닥만 한 도심과 주거지. 그리고 숲. 공장들. 아, 하나 빼먹었군. 교회들. 이젠 쓸모없는 곳들이지만. 어쨌든 이게 전부입니다. 운 좋게 도시란 이름을 달고는 있지만 당신처럼 대도시에서 온 분에게 이곳은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겠죠. 그러니 이곳을 손에 넣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이곳에도 시 의원들이 있지요. 당원들도 있고 노멘클라투라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는 블라지미르 스페호프 한 사람뿐입니다.

 

 

내가 이렇게 유치한 얘기를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당신이 서류를 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찢어버렸다면 아예 입을 다물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훌륭한 당원이자 폭군이죠. 표면적으로 볼 때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자기 권위를 무시하는 겁니다. 하지만 더 싫어하는 게 하나 있다면 그건 혼자 생각하고 혼자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스페호프를 만나게 되면 그걸 감추는 쪽이 피차 좋을 겁니다. 그도 알고 싶어 하지 않을 겁니다. 말썽을 부릴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만 보여주면 됩니다. 그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겠다는 제스처 하나만으로도 족해요. 더는 필요 없습니다. 훌륭한 배우였으니 물론 그 정도는 쉬운 일이겠죠. 아마 10분도 안 걸릴 겁니다. 그리고 난 그 10분이 걱정돼서 이렇게 길게 떠들어댄 거고요. 내 말 아시겠습니까? ”

 

 

“ 그게 당신의 충고인가요? ”

 

 

“ 글쎄요, 난 충고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들리지 않았나보군요. ”

 

 

 

베르닌은 낮게 웃었다. 그리고 화제를 바꿨다.

 

 

 

“ 우리는 곧 노브이 다리로 접어들 겁니다. 당신이 비행기를 타고 왔다면 아마 배를 타고 곧장 강을 가로질러 갔겠지요. 사실 그게 시내로 들어가는 가장 빠른 방법입니다만 기차역에서 내렸으니 좀 돌아가는 수밖에요. 오른편으로 강이 보이시나요? 즐라타야 강입니다. 당신들의 네바 강보다는 덜 화려하겠지만 그래도 이 동네에서 가장 내세울만한 풍경이죠. 지금 건너는 게 노브이 다리입니다. 물론 스타르이 다리도 있지요. 그건 검은 숲 지대를 연결하는 다리입니다. 가장 먼저 생긴 다리는 아니지만요. 그건 가브릴로프 다리죠. 구시가지 쪽에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니 이곳도 꽤 넓게 느껴지는군요. 우리의 즐라타야 강이 마음에 드십니까? 당신은 레닌그라드에서 왔으니 도심 한가운데 강이 흐르면 한결 마음이 안정되겠군요. 그래도 우리 쪽 강이 더 낫지요. 범람하는 일이 거의 없으니까요. 여기는 늪을 갈아엎어 만든 도시가 아니거든요. 대부분이 숲이죠. 추위도 덜할 겁니다. 기온이야 당신 살던 곳과 비슷하겠지만 어쨌든 그 정도로 습한 기후는 아니니까요. 수도원 근방으로 가면 온천도 있습니다. 여러 모로 당신에겐 훨씬 낫겠죠. 그런데 더우십니까? 창문을 좀 여는 게 낫겠군요. 오늘은 햇살이 강해서 좀 답답하군요. ”

 

 

 

쉴 새 없이 떠들다가 미샤의 상기된 옆얼굴을 힐끗 쳐다본 베르닌이 창문을 반쯤 열었다. 찬바람이 불어 들어오자 미샤가 몸을 희미하게 움츠렸다. 베르닌은 상냥하게 말을 이었다.

 

 

 

“ 아니면 열이 나서 그런지도 모르겠군요. 추우면 창을 닫겠습니다. 어쨌든 기차로 열네 시간은 그렇게 짧은 거리는 아니지요. 비행기를 탔다면 좋았겠지만 아마 여의치 않았겠죠. 정 힘드시다면 병원에 먼저 들르도록 해드리죠. ”

 

 

“ 그럴 필요 없어요. 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

 

 

“ 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그런데 아직 20분은 더 가야 하거든요. 혹시, 그러니까 만약에 말입니다, 견딜 수 없을 것 같으면 주저 말고 얘기하세요. 어차피 병원 검진은 오늘 일정에 포함되어 있는 거니까요. 국장 면담 후 곧장 그쪽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

 

 

“ 내 일정표를 다 외고 있는 모양이죠? ”

 

 

“ 적어도 오늘 일정은. ”

 

 

 

미샤는 입을 꽉 다물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 열린 창문을 닫을 생각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마와 뺨은 여전히 상기되어 있었다. 열기가 퍼져서 눈동자까지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베르닌은 자신의 가방 안에 루뱐카 클리닉으로부터 인계받은 앰풀 두 개와 주사기가 있다는 것을 말해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장시간의 기차 여행을 견딜 수 있었다면 남은 20분도 넘길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국장과의 면담 시간을 조정할 수 있다고 다소 허세를 부렸지만 그 주사를 놓으면 적어도 두 시간 이상은 지체될 것이다. 그리고 스페호프 국장은 기다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도 모스크바에서 보낸 인물, 자신의 권위를 짓밟아가며 밀어 넣은 반역자에 대해서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는 불과 사흘 전에 스페호프가 모스크바 본부로 호출되었던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건 비공식 출장도 아니었다.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는 아주 은밀하게 행동하는 방법도 잘 아는 인물이었지만 그건 대단한 정적들을 다룰 때에나 해당되는 얘기였다. 그는 몇 가지 이유를 달아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지국장을 정식으로 호출했다. 스비제르스키가 공식적으로는 더 이상 보안위원회 소속이 아니라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연방에서 공식적인 권력이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스페호프는 몹시 분노한 상태로 돌아왔다. 좀처럼 부하 직원들 앞에서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그날은 베르닌이 있는 자리에서도 화를 참지 못했다. 공항에서 사무실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그는 모스크바와 크레믈린에 대해, 루뱐카에 대해,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에 대해 욕을 퍼부었다. 역겨운 반역자 주제에 줄을 잘 타서 빠져나온 애송이에 대해서도. 그러나 대부분의 욕설은 총살형 대신 정신교화 수용소 쪽을 관철시켰던 제믈랴코프와 그 애송이를 제대로 처치하지 못하고 미적거리며 약물을 찔끔찔끔 놓다가 결국 자기 무덤을 판 레닌그라드 쪽 책임자에게 돌아갔다. 베르닌은 모든 서류를 아주 꼼꼼히 읽었다. 그리고 스페호프가 그렇게 화가 난 진짜 이유 두어 가지를 눈치 챘지만 물론 내색하지는 않았다.

 

 

 

관용차가 다리를 건너 크라스나야 강변을 달리기 시작했다. 미샤의 시선이 자작나무 숲에 못 박혀 있는 것을 보고 베르닌이 쾌활하게 말했다.

 

 

 

“ 자작나무를 좋아하시나보군요. 하긴 자작나무를 싫어하는 러시아인은 없지요. 그런데 저건 진짜 숲이 아니랍니다. 여기서는 그냥 공원이나 화단 정도죠. 구시가지 쪽으로 넘어가면 진짜 숲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검은 숲은 정말 크고 울창하죠. 극장 주변 공원에도 나무는 많답니다. 아마 이곳에 나무가 없다는 말과 공기가 안 좋다는 말만은 못할 겁니다. 다른 건 없어도 나무와 물은 많죠. 살기에는 좋을 거예요, 물자는 좀 부족한 편이지만 그거야 일반인들 얘기고 적어도 국가에서 운영되는 극장의 감독이라면 사는 게 불편하지는 않을 겁니다. 좀 지루하긴 하겠지만. ”

 

 

 

미샤는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 같았다. 생판 모르는 도시에 던져진 사람치고는 별로 현명한 태도는 아니었다. 베르닌은 그가 완전히 체념한 상태인지, 아니면 열 때문에 정신이 몽롱한 것인지 궁금했다.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숙련된 기자가 초점을 맞춰 놓은 카메라 렌즈처럼 보였다. 어쩌면 그는 KGB 감시요원의 친절한 설명보다는 자기 눈을 믿기로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쁜 징조는 아니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는 마음이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그게 스페호프가 좋아하는 방식일지는 미지수였지만.

 

 

 

마침내 관용차가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본관 앞에 도착했다. 미샤는 베르닌이 미처 차 문을 열어주기도 전에 먼저 내렸다. 가방은 뒷좌석에 그대로 팽개쳐둔 채였다. 가방과 보안 서약 서류가 든 봉투를 들고 내린 베르닌이 솔직하게 놀랐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 여권을 챙기지 않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그것도 당국에 출두하면서. ”

 

 

“ 챙기기 전에 항상 압수당했거든요. ”

 

 

 

미샤는 웃지도 않고 무심하게 대꾸하며 시멘트 담장을 따라 정문으로 들어갔다. 베르닌은 그에게 스페호프 앞에서는 그런 식의 농담을 하지 않는 편이 나을 거라는 충고를 추가해 주고 싶었지만 그만 두었다. 이미 그는 차 안에서 너무 많은 말을 했다.

 

 

 

...

 

 

 

내일이나 모레쯤은 가브릴로프 KGB 국장 스페호프와 미샤의 첫 대면 에피소드를 이어서...

 

 

전에 이 본편의 에피소드 몇개를 발췌한 적이 있다.

 

먼저 위의 이야기에서 곧장 연결되는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검색대를 통과하는 미샤' : http://tveye.tistory.com/5368

 

 

그리고 스페호프와의 대면을 마치고 나온 후의 짧은 장면인

햇살. 본편의 베르닌과 서무의 단추 사이 : http://tveye.tistory.com/4451

 

 

같은 파트의 마지막 부분. 숙소에 도착한 미샤와 베르닌이 나누는 이야기는 여기

이웃사촌 미샤와 베르닌, 미샤가 생각한 해법 두가지 : http://tveye.tistory.com/4971

 

 

그리고 이 다음 파트인 3장의 일부인 렐랴의 인터뷰 : http://tveye.tistory.com/5114

 

 

 

이 가브릴로프 본편은 파트별로 시점이나 심리적 화자, 혹은 구조가 조금씩 다르게 서술된다. 나는 다성악 구조를 좋아하는 편이고 쓰기에 그렇게 어렵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이 본편은 좀 어렵다. 그만큼 집중하고 싶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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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며칠 전 이 폴더에 글쓰기와 시점에 대한 메모를 올린 적이 있다. 몇년 전 쓴 미샤의 수용소 단편에 대한 글쓰기 메모와 일기였다. 제목은 '1인칭 시점을 선택하지 않았던 이유'. 링크는 http://tveye.tistory.com/6836

 

 

그 수용소 단편은 총 3부로 이루어져 있었다. 수용소 간수가 심리적 화자로 등장하는 3인칭의 1부, 미샤의 후원자였던 공산당 고위간부 게오르기 벨스키가 심리적 화자로 등장하는 3인칭의 2부, 그리고 미샤의 절친한 벗 스타니슬라프 일린의 1인칭으로 전개된 3부인데 각 파트별로 꽤 여러 토막을 이 폴더에 발췌해 올린 적이 있다.

 

 

오늘 발췌하는 부분은 2부. 게오르기 벨스키가 모스크바 비밀클리닉에 입원한 미샤를 후원하러 가서 나누는 대화의 일부이다. 이 파트 바로 앞부분을 전에 발췌한 적이 있다. 여기 발췌문 맨 앞 미샤와 벨스키가 재판에 대해 나누는 이야기 몇 문단은 그때 발췌문 맨뒤와 겹치는데, 그걸 잘라버리면 너무 흐름이 끊겨서 그냥 살려두었다.

 

 

 

이 폴더에야 거의 항상 글을 토막토막 잘라 올리고 있으니 이 부분만 독립적으로 읽어도 크게 문제는 없지만 그래도 앞의 상황이 궁금하시다면 http://tveye.tistory.com/6068 (모스크바 요양소, 재판)를 먼저 읽고 이 파트를 읽으면 된다.

 

 

..

 

 

 

게오르기 이바노비치 벨스키는 앞에서 언급한대로 이 소설의 배경인 1970년대~80년대 초반의 소련 공산당 고위 간부이다.

 

파나예바는 모스크바 비밀클리닉에서 미샤를 담당하고 있는 주치의이다.

 

글루크, 슈스코프는 미샤가 1부에서 갇혀 있었던 수용소의 원장과 정신교화 책임자이다.

 

게르만 알렉세예비치 스비제르스키는 역시 미샤의 오랜 후원자인 공산당 고위 당 간부이자 옛 KGB 고위직 출신이다. 이전에 jewels에서 미샤를 파티에 불러낸 인물이기도 하고 이 본편 우주에서 미샤와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 마로조프 역시 미샤의 오랜 후원자이자 애인인 당 간부이다. 스비제르스키는 모스크바 의원이고 마로조프는 레닌그라드 의원이다. 그는 이 2부의 심리적 화자인 게오르기 벨스키를 정치적으로 발굴한 대부이기도 하다.

 

 

아사예프는 미샤가 춤췄던 레닌그라드 키로프 극장의 발레단 예술감독, 지나는 미샤의 발레학교 동기이자 발레리나 파트너이다. (지나와 말썽쟁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그 두둥실 지나 ㅋㅋ) 울리얀 세레브랴코프와 옥사나 셰먀코바는 극장 동료 무용수들이다.

 

 

...

 

 

위의 사진은 alex gouliaev가 찍은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의 '젊은이와 죽음' 화보.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왜 오셨어요, 게오르기 이바노비치? ”

 

“ 파리 때문에. 그 외 다른 문제도. ”

 

“ 파리? 모스크바라고 하셨잖아요. ”

 

 

벨스키는 언제까지 미샤와 이런 식으로 대화를 주고받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엉망으로 뒤엉켜 있는 머릿속에 간단하게 정보들을 밀어 넣기로 했다.

 

 

“ 여기 오기 전에. 글루크가 있는 수용소에 가기 전에. 파리에 갔었잖아. 그 니진스키 트리뷰트 때문에. 그 전에는 뉴욕에 갔었고. 자네 그 파리에서 도망쳤었잖아. 그래서 문제가 생겼지. 돌아와서 재판 받았잖아, 그래서 그 수용소로 보낸 거고. ”

 

 

미샤가 오른손을 뻗어 허공을 두어 차례 휘저었다. 눈에는 여전히 초점이 없었다. 기억을 되살리려는 듯 고개를 뒤로 젖히며 가볍게 흔들자 거무스름한 멍들로 뒤덮인 목덜미가 드러났다. 맞아서 생긴 상처 같지는 않았다. 그곳을 맞았다면 쇄골이 부러졌을 터였다.

 

 

“ 도망치지 않았어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러 갔었을 뿐이에요. ”

 

 

갑작스럽게 미샤가 아주 또렷하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 비공개 재판에서도 아마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무도 그를 변호하려고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미샤는 직접 변론을 했다. 극장 동료들 몇몇이 유리한 증언을 해주려고 자원했지만 모두 자격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참석을 금지 당했다. 벨스키는 그 재판의 일지와 보고서를 훑어보았지만 중간 쯤 읽다가 그만두었다. 미샤의 변론 대부분에는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고 그나마 끝까지 이어지지도 않았다. 재판관이 그의 발언을 중단시킨 후 휴정을 선언했고 30분 만에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벨스키는 그런 종류의 재판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아,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 정말 도망친 거였다면 지금 여기 있지도 않았겠지. 그래도 기억이 되살아난 것 같군. 자네 소환됐을 때 파리에서 시끌시끌했던 건 생각나나? 호텔 앞부터 공항까지 피켓 시위자들이 몰렸었지. 기자들도. 자네 가고 나서 그 시위가 좀 커졌거든. 게다가 이상한 오해가 생겼지. 헛소문이 퍼져서 상황이 좋지 않았어. ”

 

 

“ 무슨 소문이요? ”

 

 

“ 뻔하잖아. 자넬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에 처박았다는 얘기. 벌써 루뱐카에서 총살했다는 얘기. 제국주의자들 입맛에 맞는 얘기들. ”

 

 

“ 그게 제국주의자들 입맛에 맞는 얘기예요? ”

 

 

 

미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몸을 가누기가 힘든 듯 점점 어깨가 비스듬하게 기울어지고 있었다. 볼품없이 들쭉날쭉 잘린 검은 머리칼이 한 움큼 이마 위로 흘러내려왔다.

 

 

 

“ 그 얼간이가 이상한 소리를 했는데... 누굴 소환한다고. 하지만 걘 아무 것도 몰라요. 절 좋아한 적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걘 놔주세요. 그 여자 정말 아무 것도 몰라요. ”

 

 

“ 누구 얘길 하는 거지? 그 여자가 누구야? 얼간이는 누구고? ”

 

 

“ 아, 소환 같은 건 없었군요. 어차피 허풍이라고 생각했었어요. 진짜 역겨운 놈이었어. ”

 

 

벨스키는 그가 글루크나 슈스코프 중 한 명을 언급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파나예바가 정해준 10분은 이미 흘러가버렸고 미샤와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결론부터 말해주기로 했다.

 

 

“ 자네 석방될 수도 있어, 회복되면. ”

 

 

미샤는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다. 거의 무관심한 표정으로 오른손 손가락들을 오므렸다 폈다 하며 왼팔을 들어 올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손목이 3센티미터 쯤 올라갔다가 무겁게 툭 떨어지자 짜증도 내지 않고 계속해서 그 무익한 시도를 반복했다.

 

 

“ 왜, 믿지 않아? 내 말인데도? ”

 

 

“ 믿어요. 의원님이 제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어디 있어요. ”

 

 

“ 그런데 별로 관심이 없나? 수용소가 좋아? 자네 7년형 받았잖아. 다시 돌아가고 싶어? 그 약물 치료 다시 받고 싶을 리가 없잖아. ”

 

 

“ 전 선언문 안 읽을 거예요. 인터뷰도. ”

 

 

미샤가 툭 끊어지듯 거친 음성을 내뱉더니 무겁게 처져 있던 어깨와 허리를 억지로 다시 세웠다. 이마와 목에 파란 핏줄이 돋아 오르며 아랫입술이 덜덜 떨렸다. 벨스키는 파나예바의 경고를 어기고 그의 가슴에 손을 얹어 가볍게 뒤로 밀었다. 미샤는 저항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벨스키가 조금 힘을 실어 누르자 다시 베개에 몸을 완전히 기댔다.

 

 

인터뷰 할 필요 없어. 그리고 선언문 수준도 아냐. 몇 줄만 읽으면 끝나. ”

 

 

“ 당신들 다 똑같아. ”

 

 

미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돌려 기침을 했다. 베개에 피가 튀었다. 가슴에서 짐승들이 내는 듯 낮게 끓어오르는 소리가 났다. 이제 기침은 하지 않았지만 오른손으로 목을 감싸 누른 채 다시 한 번 피를 토했다. 베개에 쏟아진 피는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발광 페인트처럼 새빨간 색이라 벨스키는 파나예바를 불러야 할지 망설였다. 하지만 지금 파나예바를 부른다면 그녀는 면담을 완전히 중지시킬 것이 분명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벨스키는 테이블에 놓여 있는 조그만 타월을 미샤에게 건네주었다. 병실에 있는 물품들은 모두 소독을 마쳤을 테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미샤가 타월로 입과 턱에 흘러내린 피를 닦는 동안 그는 아주 부드럽게 말했다.

 

 

“ 어쩔 수 없잖아. 최소한의 명분은 있어야지. 나나 스비제르스키도, 아니,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라도 마찬가지야. 서기장이라 해도 그건 어쩔 수 없어. ”

 

 

“ 무슨 명분이요. 거짓말해서 풀려나라고요? 아니면 창녀짓해서? 다른 이름들도 얘기하시지 그래요. ”

 

 

미샤가 몸을 떨었다. 벨스키는 그가 그렇게 감정을 표출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폭발적 열기와는 달리 사석에서의 미하일 야스민은 아주 침착하고 서늘한 인물이었다. 훨씬 어렸을 때도 그랬다. 하긴 그는 미샤가 자기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도 본 적이 없었다.

 

 

 

“ 자네 지금 아파서 제대로 생각이 안 되고 있어. 그냥 내 제안대로 해. 원한다면 문구도 자네가 써. 싫으면 내가 써서 보여줄 테니 고쳐도 좋아. ”

 

“ 정치국 위원님은 바쁘실 텐데... ”

 

 

벨스키는 온건한 개혁파 의원이었지만 나이 차이가 두 배 가까이 나는 애에게서 그런 비아냥거리는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미샤가 구겨진 타월 위로 다시 피를 뱉은 후 몸을 심하게 떨면서 완전히 옆으로 누웠기 때문이다. 수척한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지, 많이 아프잖아. 자네 정말 죽을 뻔 했어. 스비제르스키 의원이 들르지 않았다면 아마 죽었을 거야. 난 자네가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이렇게 망가지는 것도. 내가 왜 여기까지 직접 왔겠어. 내가 자네 아꼈던 거 몰라? 3분만 자존심 버려. 그러면 여기서 나갈 수 있어. ”

 

 

“ 지금 보내주실 수 있어요? 리허설에 가야 해요. ”

 

 

 

벨스키는 그를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미샤는 오른쪽으로 몸을 튼 채 창문과 벽 사이의 어딘가를 바라보면서 완전히 달라진 어조로 간청하듯 속삭였다.

 

 

“ 제발 보내주세요. 다시 올 테니까. 이 방으로 다시 오면 되잖아요. 지금은 안돼요. 저한테 약속하셨잖아요, 말 잘 들으면 다시는 그 약 안 먹일 거라고. 주사도 안 놓을 거라고 하셨잖아요. 게르만 알렉세예비치, 제발 놔주세요. 너무 아파요. 내일, 내일 다시 올게요. ”

 

 

“ 정신 좀 차려, 난 그 사람이 아니야. 아무래도 파나예바를 불러야겠군. ”

 

 

미샤가 오른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았다. 손이 타들어가는 듯 뜨거웠지만 여섯 살짜리 어린애처럼 미약해서 슬쩍 움직여도 털어낼 수 있을 정도였다.

 

 

“ 더 이상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이해가 안 가. 난 말을 들었는데. 시키는 건 다 했는데. 당신 말은 다 들었어, 하나 빼고. 내가 그랬잖아. 당 이름으로 창녀 짓 하는 건 못한다고. 이제 상관없어. 그거 계속 놔도, 가둬도, 못 움직이게 해도. 그냥 죽여주면 좋을 텐데 당신 절대 그런 짓은 안 해. 자꾸 날 막아. 이제 그만 가. ”

 

 

게오르기 벨스키는 군 출신이었고 레닌그라드 국립대학 동문 서클과 그 도시의 실권자인 드미트리 마로조프를 통해 정치계에 들어온 인물이었다. 그 냉철한 마로조프가 그를 실질적 후계자로 점찍고 모스크바 권력의 중심지까지 단숨에 밀어준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벨스키가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데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점진적 개혁파에 속했고 결코 정적들을 원색적으로 비난하거나 모함과 숙청이라는 자연스러운 무기를 대놓고 쓴 적도 없는 온건한 인물이었지만 그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충격을 가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마로조프는 벨스키를 정치국으로 입성시켰고 놀랍게도 그의 오랜 정적이었던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조차도 거기에 방해 공작을 펼치지 않았다. 스비제르스키는 사석에서 벨스키에게 ‘당신 뱃속은 쇠망치로 두들겨 패도 충격을 전부 흡수해버릴 쿠션들로 꽉 차 있다니까’ 라고 노골적인 농담을 건네기까지 했다. 그만큼 그를 놀라게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게오르기 벨스키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어서 자기 앞에 누워 있는 젊은 죄수, 한때 그가 열렬하게 후원했던 무용수를 한동안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그에게는 드문 일이었다.

 

 

 

미샤가 다시 기침을 했다.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반 숟갈 가량의 피가 밀려나왔다. 괴로운 듯 베개에 이마를 부딪쳐댔다. 벨스키는 그의 머리를 가볍게 감싸 진정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미샤가 오른손을 들어 벨스키의 손목을 쳐냈다.

 

 

“ 만지지 마. 제발 내 몸에 손대지 마. 나 좀 놔둬. ”

 

 

벨스키는 더 이상 면담을 계속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을 열고 파나예바를 부르자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녀가 곧장 들어왔다. 파나예바는 미샤를 보더니 벨스키에게 책망하는 시선을 던졌다.

 

 

“ 심문하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

 

 

“ 잠깐 얘기를 나눴을 뿐이야, 소장이 너무 낙관적으로 얘기했던 것 아닌가 모르겠군. 전혀 회복이 안된 것 같은데. ”

 

 

“ 의원님께서 그 면담을 고집하지 않으셨으면 훨씬 나았을 거예요. 10분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 이상은 집중을 못 해요. ”

 

 

파나예바가 미샤의 자세를 바꿔주고 출혈이 멎도록 조치를 취하는 동안 벨스키는 병실에서 나가는 대신 창가에 선 채 생각에 잠겼다. 주로 자신의 스케줄을 한 번 더 비울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었지만 미샤가 파나예바의 손길은 순순히 받아들인다는 사실에 대해 화를 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뒤섞였다. 어쨌든 그는 5년 이상 미샤를 알았고 가장 강력한 후원자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올가 파나예바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몇 마디 말을 걸었다. 벨스키가 서 있는 자리에서는 내용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미샤의 대답은 잘 들렸다. 체포되기 이전처럼 또렷하고 정확한 발음으로 말했기 때문이다.

 

 

“ 아니, 그건 부다페스트에서였어요. 아사예프가 저와 지나의 호흡을 점검해보고 싶어서 투어 무대에 먼저 올라가게 했죠. 키로프 첫 무대는 12월이었어요. 74년. 폴랴코바가 테라스 장면에서 배경을 바꿨는데 아사예프가 무대가 죽어 보인다고 화를 냈어요. 그 사람 그때 공연 직전까지 계속 화만 냈죠. 진짜 이유는 저와 지나가 금발로 염색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집시 로맨스를 출 작정이냐고 한 시간 동안 설교를 늘어놓았어요. 지나가 빨간 머리 줄리엣이 뭐가 문제냐고 발끈하더니 저에게 아사예프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집시 분장을 하고 추자고 했어요. 걔는 화를 내면 무섭기 때문에 잠깐 집시 의상까지 입어봤는데 그걸 보고 지나가 포기했어요. ”

 

 

 

파나예바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다시 뭐라고 속삭이자 미샤가 대꾸했다.

 

 

 

“ 아, 다른 건 다 됐는데 피부색을 바꿔야 했어요. 집시처럼 보이려면 진한 파우더가 필요했는데 마침 다 떨어졌거든요. 그러고 있는데 아사예프가 들어와서 기겁을 하더니 염색 얘길 더 이상 안 했어요. 그래서 원래대로 췄죠. 이후에도 그거 출 때 금발로 물들인 적 없었어요, 단 한 번도. ”

 

 

‘ 로미오와 줄리엣에 대해 얘기하고 있군. ’

 

 

 

벨스키는 잠시 매혹된 채 파나예바와 미샤 쪽에 시선을 던졌다. 자신이 췄던 작품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미샤는 완전히 정상처럼 얘기했다. 파나예바가 백조의 호수에 대해 묻자 미샤는 니나 크류코바와 췄던 첫 무대나 크레믈린, 해외 투어 무대가 아니라 헝가리 춤을 추고 들어간 발레리나가 떨어뜨렸던 머리장식을 밟고 미끄러질 뻔 했던 무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뒤엉킨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최고의 찬사를 받은 무대가 아니라 실수를 할 뻔 했던 무대라는 것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벨스키는 미샤가 얘기하는 공연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옥사나 셰먀코바가 고의적으로 장식을 떨어뜨렸다는 소문이 무용계에 파다하게 퍼졌기 때문이다. 당시 셰먀코바는 미샤의 오랜 반대파였던 울리얀 세레브랴코프의 연인이었고 그 서클에서는 끊임없이 각종 방법을 동원해 그를 괴롭히고 있었으므로 꽤 신빙성 있는 소문이었다. 실제로 미샤는 이듬해 볼쇼이로 옮겼는데 벨스키는 세레브랴코프 서클이 그를 조금만 더 심하게 볶아댔으면 더 빨리 옮겨오지 않았을까 하고 아쉬워하기까지 했다.

 

 

벨스키는 자신도 모르게 파나예바가 지젤이나 라 바야데르에 대해 물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미샤 야스민의 알브레히트나 솔로르를 따라갈 무용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무수한 팬들이 미샤의 무게 없는 도약과 고속 회전, 화려한 테크닉에 푹 빠졌지만 벨스키는 항상 그의 진정한 강점은 드라마 배우로서 타고난 연기력과 음악에 대한 완벽한 감각에 있다고 생각해 왔다. 서방 관객들과 전문가들이 그 젊은 무용수 앞에서 넋을 놓았던 것도 당연했다. 그자들이 어디에서 그런 춤을 볼 수 있었겠는가. 볼쇼이나 키로프에서도 그렇게 춤추는 무용수는 없었다. 그런 재능은 유일무이했다.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는 온전한 재능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재능이, 그 완벽했던 육체가 부서지고 찢어진 채 반쯤 마비되어 있었고 무용수답지 않게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명료한 이성은 으깬 토마토 수프처럼 뒤섞여 있었다.

 

 

 

... 

 

 

 

 

이 면회의 후반부 대화를 일부 발췌한 적이 있다.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5589 (체제의 이름, 비행사, 천사 이름 붙은 도시)

 

 

이 링크에 발췌된 이야기에는 이 단편의 다른 파트들에 대한 링크들도 좀 붙어 있다.

 

 

..

 

 

이 발췌문에 붙인 제목은 그냥 충동적으로 여기 나오는 단어들을 조합했음. 원래 이 단편은 1부 1~3장, 2부 1~3장, 3부 1~3장으로만 되어 있어 이런 소제목 같은 건 없기 때문에 여기 발췌해 올릴 때 내 맘대로 대충 붙이고 있다. 주인공이 피 토하고 정신 흐릿해진 상태이니 뭐 어울리는 듯... (미샤 : 뭐 임마 ㅠㅠ)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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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정말정말 새벽기차를 타야 함!!! 알람 재확인해야겠다.



5시에 일어나야 하니 이제 자야 되는데 물론 아직 졸리지 않다 ㅠㅠㅠ 흑흑



책 뒤적거리는 중. 어제에 이어 거실과 침실 책장이랑 냉장고 자석, 심지어 선풍기랑 dvd 따위도 함께 ;)


























이건 대학 시절 쓰던 소설 노트들.. 공책에 펜으로 썼다. pc로 타이핑하며 글을 쓰기 시작한건 거의 대학 졸업 후라서..



저 글은 꽤 길었다. 아주 치열하게 생각하던 시절, 아직 어리고 치기 넘치고 또 뜨겁고 모든 것이 의아하고 기이하게 느껴지던 시절 쓰던 글인데 거의 5분의 4정도 쓰고는 완결을 내지 못했다. 아마 끝내는 게 겁났던 것 같다.



종종 저 글을 다시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너무나 오래 전의 글이라 지금의 내가 손을 대면 소설의 내밀한 감정과 정서 자체가 변질될 것 같아 그러지 않고 있다. 어쩌면 미완성인 채로 그대로 놔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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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이웃님의 블로그 포스팅에서 글쓰기와 시점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고 짧게 댓글로 의견을 나눈 적이 있다. 오래 전부터 글을 써오면서 시점의 문제는 항상 나를 매혹시킨 것 중 하나였다. 시점과 시제, 문체, 글의 구조, 작가와 화자의 거리감 등 이 모든 문제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나는 1인칭, 3인칭, 2인칭을 모두 써보았다. 셋 다 각각의 매력이 있고 장단점이 있다. 주로 글의 성격에 따라 시점을 고른다. 특히 등장인물이나 주인공과 작가 혹은 화자의 거리, 접근법에 따라 시점을 고르게 된다.



아래 발췌한 메모는 4년 전 쓴 가브릴로프 본편의 프리퀄인 미샤의 수용소 단편에 딸려 있는 writing note이다. 이 수용소 단편은 전에 몇차례 토막토막 발췌한 적이 있다. 앞의 메모는 소설을 모두 마치고 퇴고까지 마친 후 덧붙인 후기 노트이고 뒤의 메모는 그 글을 쓰던 도중, 완전히 그 글에 몰입해 있을 때 쓴 노트이다. 첫번째 노트가 조금 정제된 상태에서 쓴 후기라면 두번째 노트는 당시 쓰던 일기의 일부에 더 가깝다.



나는 이 단편을 총 세개의 파트로 나누었는데 1부와 2부는 3인칭, 3부는 1인칭으로 썼다. 하지만 완전히 객관적인 3인칭도, 또한 주인공격인 1인칭도 아니었다. 주인공의 특성상, 그리고 소설의 특성상 나는 미샤와 가브릴로프 우주를 보통 3인칭으로 서술하지만 그것은 온전한 3인칭도, 전지적 작가 시점도 아니다. 나는 이 우주에 속한 소설들을 쓰면서 내 마음대로 '심리적 화자'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심리적 화자가 존재하는 3인칭이다. 그것은 완전히 관찰자적인 3인칭과 내밀한 1인칭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다. 그리고 같은 3인칭이며 심리적 화자가 등장하는 소설들이라 해도 주인공과 그 심리적 화자의 관계에 따라 내적 거리와 접근성은 많이 달라진다. 수용소 간수와 공산당 고위직 위원이 등장하는 이 소설의 3인칭보다는 트로이가 등장하는 장편소설의 3인칭이 훨씬 더 1인칭 쪽 스펙트럼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스타니슬라프 일린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3부는 1인칭 관찰자 시점에 가깝다. 주인공은 별도로 존재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나'의 렌즈를 통해 전개되고 왜곡되고 재구성된다. 이것 역시 내밀한 1인칭과 관찰자적 3인칭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다. 하지만 전자와 후자는 물론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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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4월의 메모 : 소설을 마친 후 >





 .... 맨 처음 구상했을 때 이 소설의 형태나 내용은 좀 달랐다. 그건 완성된 소설의 3부에 해당하는 내용으로만 이루어져 있었고 훨씬 짧고 간결했다. 일린과 미샤의 면회를 일린의 1인칭으로 서술하는 단편이었는데 곧 나는 그게 너무 부드러워서 정말로 필요한 부분들을 많이 잃어버리고 오로지 연민으로 가득 찬 감상주의 독백으로 변질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소설은 총 세 개의 파트로 이루어져야 했다. 1부는 정신교화 수용소 간수의 시점에서, 2부는 미샤의 후원자이자 정치국 위원인 게오르기 벨스키의 시점에서, 그리고 3부는 원래 구상했던 것처럼 일린의 시점에서 전개하기로 했다. 1부와 2부는 3인칭에서 서술되지만 간수와 벨스키가 심리적 화자가 된다. 3부는 1인칭이다. 그리고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




 아마도 오래 전이었다면 나는 이 소설을 주인공의 1인칭으로 전개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소설은 일종의 의식의 흐름 기법에 의해 서술되는 사이코 심리극이 되었을 것이다. 그 편이 훨씬 쉬웠을 것이고 쓰는 재미도 더 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주인공을 놓고 자기 독백으로 가득한 폐쇄적 드라마를 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일기를 출판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이며 이 우주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   *   *






< 2013년 3월의 메모 : 소설을 쓰는 중 >





이틀 전에 지금 쓰는 글의 1부를 마치고 2부로 넘어갔는데, 사실 1부 자체가 나머지 2~3부와는 성격이 좀 다르고 독립적인 단편 성격이 강해서 2부를 시작하는데 좀 힘들었다. 어쨌든 에벨에 앉아 다행히 서두를 잡았고 지금은 몇 페이지 가량 쓰고 있다.



1부를 쓰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10년 전이었다면 난 1인칭 시점으로 썼을지도 몰라. 그렇지 않다 해도 주인공의 시선에서 사건을 전개해 나갔을 거야. 그 편이 훨씬 쉽고 감정적으로 이입도 잘 되기 때문이지.



거의 언제나, 1인칭이 가장 쉬워. 그렇기 때문에 작가에게 있어서 1인칭은 쉽게 타협의 수단이 되곤 하지. 사실 그런 걸 떠나서, 내용상 이 글은 1인칭일 때 더 끔찍하고 더 사실적이고 더 잘 와 닿았을 거야, 작가에게든 독자에게든.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어.



이런 종류의 글을 쓸 때 인물을 너무 사랑하는 건 치명적인 덫에 걸리는 것과 같아. 1인칭을 선택했다면 그 사랑과 나 사이에는 수백 수천 개의 어휘들 외에는 그 어떤 배리어도 남아 있지 않게 되겠지. 제 아무리 심사숙고를 거쳐 뽑아낸 어휘라 해도 그건 투명하게 남을 거야, 인물에 대한 사랑이 흘러넘쳐 모든 단어들을 잠식하게 될 거야. 이미 그 사랑은 아주 강렬하고 견고하게 뿌리를 내렸고 도처에 존재하고 있어. 먹고 자고 걷고 주변을 바라보고 새로운 것들을 만나게 될 때에도 그 사랑이 내부로부터 흘러나와. 그 애에 대해 생각하게 돼.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텍스트 속에서는 그 사랑을 그대로 쏟아 부어서는 안 돼. 그건 역설이지. 왜냐하면 그 애가 진정 존재하는 건 오로지 텍스트를 통해서일 뿐이기 때문에. 작가의 머리와 가슴 속에서 움직이고 타오르고 말을 걸어오는 그 사랑스럽고 골치 아픈 애는 결국 실재하지 않는 개념일 뿐이기 때문이야. 그런데 그것도 일종의 사랑이지. 글쓰기는 그런 사랑 없이는 지속될 수 없을 거야. 모든 작가들이 그럴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 적어도 나는. 





...




라브로프는 그날 33번에게 수갑을 채우지 않았다.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다시 이마에 주사를 놓았는데 그건 첫날처럼 약효를 빨리 돌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계속 바늘을 찔러 넣었던 왼팔의 혈관이 전날 저녁에 터졌기 때문이었다.

 


약물이 주입되자 투명할 정도로 창백하던 33번의 얼굴과 목덜미가 잠시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비정상적으로 확장된 검은 눈동자 전체에 붉은 기운이 차올랐지만 물론 그건 흘레브니코프가 보고 기겁했던 그 야수 같은 불빛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붉은색이었다. 라브로프가 바늘을 빼내고 약물이 모두 흡수되자 붉은 기운도 썰물이 빠져 달아나듯 순식간에 사라졌고 다시 창백한 흰색과 눈동자의 검은색만 남았다.

 


33번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의자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두 손으로 목과 가슴을 누르며 몸을 웅크렸는데 전날까지의 반응과는 또 달랐기 때문에 라브로프가 투약량만 늘린 것이 아니라 약물 배합을 다시 바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라브로프가 혀를 차더니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콤소몰 행진곡이었기 때문에 흘레브니코프는 하마터면 쿡쿡 웃을 뻔 했다. 라브로프가 콤소몰에 있던 시절은 적어도 20년은 지났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33번은 전혀 다르게 반응했다. 목과 가슴을 움켜쥐고 있던 두 손을 억지로 움직여 귀를 틀어막았던 것이다. 그게 콤소몰 행진곡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무시무시하게 확장된 청신경 때문에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인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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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한 4개의 단락은 이틀 전 마친 1부의 후반부. 아마 1인칭으로 썼다면 매우 자세한 의식의 흐름 서술로 채워졌을 것이다. 사실 그런 유혹을 느끼긴 했다. 작가로서는 그 방법이 훨씬 쓰는 재미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다행히 참았다.



그런데 확실히 나약해졌다. 옛날에는 별다른 가책도 없이 가혹하고 무자비하게 기술했는데 지금은 너무 상세하거나 잔인한 서술은 생략하게 된다. 그게 마음이 나약해져서인 건지, 그런 서술이 일종의 가학적인 포르노일지도 모른다는 자기비판과 검열 때문인 건지, 아니면 효율적인 전개를 위해서인 건지 나도 좀 헷갈린다.



어쨌든 요즘 몸이 부실해진 것이 쟤를 너무 구박해서 그런 것 같다는 느낌이 좀 든다 -_- 이제 1부 끝났으니 저주를 그만 거둬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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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메모에서 발췌한 소설의 일부는 전에 이 writing 폴더에 조금 더 긴 버전으로 올려본 적이 있다. 주인공인 미샤가 수용소에서 화학요법 교화를 받는 장면이다.


그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5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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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스케치는 지나와 말썽쟁이 시리즈의 두둥실 지나랑은 조금 다른 지나 스케치 :) 1981년, 20대 중반에 접어든 지나의 모습은 대충 이랬겠거니. 뭐 내가 똥손이라 그렇고 본편 속 지나는 훨씬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ㅠㅠ

 

근데 대충대충 그리다 보니 목이 너무 길쭉해졌네..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처럼 ㅠㅠ 미안하다 지나야. 발레리나니까 목이 길고 미끈하다고 우겨보자~

 

지나 : 뭐 임마~ 둥실두둥실 아니면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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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발췌한 짧은 글은 1975년 가을, 미샤와 지나가 스무살 무렵, 키로프 발레단 무대에서 톱스타로 쭉쭉 크고 있을 때를 묘사한 것이다. 역시 트로이가 심리적 화자로 나오는 그 장편의 중후반부에서 발췌했다. 미샤가 지나보다 더 먼저 주역 데뷔를 했고 골수팬들도 더 많은 편이긴 했지만 둘이 파트너를 이루어 추기 시작하면서 인기는 더욱 쑥쑥 올라갔고 미샤+지나 항상 이렇게 한 세트로 생각하는 팬들이 무척 많았다.

 

 

그들은 라 바야데르를 추고 스튜디오에서 잠자는 미녀 2인무를 녹화하고 해적을 춘다. 그리고 미샤의 생일 파티에 함께 참석한다. 아래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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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에 지나이다와 함께 춘 라 바야데르에서 미샤는 매우 신경질적이고 비겁하며 마약중독자 냄새가 물씬 나는 솔로르 역으로 논쟁을 일으켰다. 무희 니키야나 질투심에 찬 공주와는 달리 남자 주인공인 솔로르는 역 자체의 개성이 뛰어난 편이 아니었고 잘못하면 알브레히트의 아류로 전락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미샤는 거대한 규모의 화려한 종이 성곽 같은 작품인 라 바야데르를 사이코 심리극으로 바꿨다. 가장 유명하면서도 관객들로부터 지루하다는 평을 듣기 일쑤인 3막의 망령의 왕국 장면은 정신병자의 무시무시한 환각으로 변했고 지나이다의 니키야는 불쌍하게 희생된 무희 아가씨가 아니라 꾸짖고 비난하는 심판의 여신처럼 보였다.

 

 

 평은 극단적으로 나뉘었고 유명한 평론가이자 전통주의자인 루바노프스카야는 미샤와 지나이다가 키로프 무대를 실험극장과 착각한 것 같다고 비판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역시 전통주의자인 아사예프는 그 무대를 옹호했고 그들의 해석이 자기 의도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자기가 안무한 작품인데다 끝까지 미샤와 지나이다를 개막 캐스팅으로 밀었던 사람이니 그럴 만도 했다. 시끌시끌한 평론이나 무용계와는 상관없이 관객들은 그 무대에 감명을 받았고 젊은 커플이 새로운 뭔가를 보여줬다며 흥분했다. 미샤의 광팬들 몇몇은 루바노프스카야의 집 창문에 계란을 던지고 벽에는 ‘시대정신을 모르는 보수주의자’라고 붉은색 낙서를 해놓고 도망갔다.  

 

 


 
 미샤는 지나이다에게 약속한 대로 9월말에 복귀했고 라 바야데르를 추기 전에 백조의 호수 무대에도 일정대로 올라갔다. 워낙 인기 많은 레퍼토리였고 전에도 여러 번 춰본 작품이라 성공적으로 끝냈다. 발레단에서 가장 체격이 큰 폴리나를 들어 올리느라 어깨 상처가 도져서 한동안 진통제 신세를 져야 했지만 혼자서 잘 견뎠고 라 바야데르를 비롯한 다음 무대들에서도 티를 내지는 않았다.

 

 

 라 바야데르를 춘 직후 국영채널에서 그와 지나이다를 스튜디오에 초대해 특별 무대를 녹화했다. 라 바야데르의 아다지오와 잠자는 미녀 그랑 파이널 2인무를 춘 후 가벼운 인터뷰를 했다. 방송국에서 상당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던 연출자 몰레도프가 피사체로서의 그들을 너무 마음에 들어 해서 인터뷰 편집 분량을 늘리는 바람에 당초 30분짜리로 기획되었던 방송은 45분 동안 나갔고 루바노프스카야의 비판 기사가 무색하게 팬들은 더 늘어났다. 마침 그때 미샤가 수석무용수로 파격적 승급을 해서 더 주목을 받았다.

 

 

 

 11월에 미샤는 해적 무대에서 다시 알리를 췄다. 그날은 그의 스무 번째 생일이었다. 일찌감치 정보를 입수한 팬들이 맨 앞줄 4열을 모두 점령해 서방 국가의 로큰롤 그루피들에 버금갈 정도로 환성을 지르고 갈채를 보냈다. 공연이 끝나자 그와 지나이다를 납치하다시피 데려가 유럽 호텔에서 생일 파티를 열어주었다. 팬들 뿐만 아니라 동료들과 다른 극장의 젊은 무용수들, 안무가들도 왔다.

 

 

 춥고 습한 11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팬들이 장미와 튤립을 얼마나 많이 공수해왔는지 그날 새벽 미샤는 어쩔 수 없이 지나이다와 함께 돌아가 꽃들을 온 집안에 늘어놔야 했다. 그래도 꽃이 넘쳐나서 다음날 타냐와 갈랴, 스베타, 심지어 트로이에게까지 나눠주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나 볼만한 광경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팬 중 하나가 화훼 무역회사 책임자였다. 유럽 호텔 레스토랑에서 산더미처럼 쏟아진 꽃다발을 보고 튤립을 좋아하는 지나이다가 ‘너와 파트너가 된 이후 가장 보람 있는 날이야’ 라고 농담하자 팬들은 흥분해서 곧 둘이 결혼할지도 모른다고 온갖 환상의 나래를 펼쳤다.

 

 

 

...

 

 

맨 위에 지나 스케치를 올렸으니 맨 아래는 미샤 스케치로 마무리. 사실 지나 그리는 것보다 미샤 그리는 게 더 어려운게... 내가 그림을 잘 못 그리니 자꾸 애를 망가뜨리고 있어서 ㅠㅠ

 

 

 

 

 

 

1972년 무렵, 아직 발레학교 학생 시절의 소년 미샤는 아마 이런 스타일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뭐 더 미남이고 더 매력적이었을테지만 토끼는 똥손 앞발이니 그러려니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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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7.06.24 20:36

밤, 어둠, 불, 잠 about writing2017.06.24 20:36






아래 글은 예전에 많은 부분 발췌했던 단편 Night의 일부이다. 세 토막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중간중간 생략된 부분들이 존재한다. 화자는 로만 코즐로프. 소도시 가브릴로프 시립극장 오케스트라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이자 그 악단의 실세이다. 아래 세 토막은 모두 그와 미샤가 처음으로 밤을 보내는 순간에서 잘라냈다.



... 음, 12금 정도? 하긴 별로 의미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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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포옹하면서 나는 그 애가 울음을 터뜨릴까봐 공포에 질렸다. 왜냐하면 램프 스위치를 내리려고 했을 때 미샤가 ‘불 끄지 마, 제발 끄지 마’ 라고 속삭였기 때문이다. 그 망할 자식은 단 한 번도 ‘제발’이란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불 끄는 편이 더 좋다고까지 했었다. 그 빌어먹을 망나니로부터, 그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예쁜 입에서 ‘캄캄하게 하지 마’ 라고 다급하면서도 애처로운 목소리가 튀어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마터면 나는 자식을 끌어안으며 더 이상 수용소는 없으며 어둠도 없고 무서운 일도, 때리는 놈들도, 더러운 짓을 하는 놈들도 없다고 낯간지러운 위로를 퍼부을 뻔 했다. 그런 어리석은 말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





 미샤의 몸은 지나치게 뜨거웠다. 불덩어리보다 더. 녹아 흐르는 금 같았고 바닥에 구멍을 뚫는 황산 같았다. 쾌감으로 혼미한 중에도 정상적인 인간에게서 이런 열기가 발산될 리가 없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그 고문실에서, 정신교정 실험실에서 이상한 약물을 주입했던 게 분명했다. 중독된 아이, 약물로 내부의 열 조절 회로가 변형되어 버린 아이, 아픈 아이, 집행유예를 받고 추방된 죄수, 어쨌든 아직 회복되지 않은 아이, 정상이 아닌 열기. 하지만 상관없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설령 있다 해도 지금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





 자식은 완전히 맛이 간 것 같았다. 키스를 했을 때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두 팔과 다리를 아무렇게나 벌린 채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잠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이마 위로 흘러내려 마구 뒤엉킨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뺨에 입술을 댔을 때 미샤가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아직도 옆으로 길게 퍼져 있었다. 이제 거기 파란 불빛은 켜져 있지 않았다. 램프의 붉은 그림자도 없었다. 완전히 까맸다. 작은 짐승의 눈 같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나는 멍하게 그 눈을 마주 응시했다. 머릿속이 백지로 변하는 것 같았다. 키스를 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모든 것이 끝난 후에도 저 변덕쟁이가 그런 친밀함을 받아들일 것 같지는 않았다. 취기가 좀 가시고 몸에 힘이 돌아오면 벌떡 일어나 나가버릴 게 뻔했다.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났다고 생각하는 애송이들이 흔히 그러는 것처럼.



 미샤가 키스를 했다. 그리고 내 허리를 한 팔로 껴안으며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뜨겁고 축축하게 젖어 있는 등을 쓸어내리자 살갗에 새겨진 시트 자국이 그대로 만져졌다. 어깨와 등을 어루만지자 미샤가 기침을 했다. 한 손으로 목을 감싼 채. 감기라도 걸렸나 싶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나 때문인 것 같았다. 아주 약간 죄책감이 들었다.



 품 안에 늘어져 있는 그 아이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작고 연약하게 느껴졌다. 더 이상 폭주기관차도 아니었고 강철과 근육으로 뭉쳐진 코사크도 아니었다. 조금만 힘을 주어 끌어안으면 부러지고 흩어져 버릴 것 같았다. 어쩌면 그 눈 때문일지도 몰랐다. 완전히 까맣고 끝없이 깊은 눈. 졸음과 취기로 몽롱하게 풀려 있는 눈. 그 눈을 물끄러미 응시하자 내 몸도 무겁게 빨려드는 듯했다. 나른하고 졸렸다. 미샤는 이미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손을 뻗어 램프 불을 껐을 때 미샤가 토막토막 끊어지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 끄지 말라고 했는데... ”


 “ 자야 하니까. 늦었어. ”


 “ 그럼 당신 못가. 캄캄하면. 있어야 돼. ”


 “ 우리 집이라고 했잖아. ”




 
 꼬마는 아직도 자기가 어디 있는지 잘 모르는 게 분명했다. 어둠 속에서 그는 내 품으로 좀 더 파고들었고 내 어깨와 목덜미 사이에 짐승처럼 얼굴을 묻은 채 고른 숨소리를 내며 10초도 안되어 깊은 잠에 빠졌다.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자식이 달라붙어 있어 자세도 불편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나도 곧 필름이 끊기듯 잠들었다.




...



이 단편은 가브릴로프 장편에 삽입할 거라는 전제를 두고 씌어졌다. 물론 전체 소설이 완성된다면 이 단편이 삽입될때는 어느 정도 재구성이나 축약이 필요할 것 같긴 하다. 지금으로서는 이 단편 하나로 그냥 완결된 이야기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삽입되는 에피소드 치고는 좀 길다.



이 단편은 거의 3분의 2가량 전에 토막토막 발췌한 적이 있다. 여기 올리지 않은 부분들은 대부분 자기검열 때문에 안 올렸음(그러니까.. 제목이 night이거든요...)


전에 발췌했던 이야기들을 소설의 시간 순서대로 배열한 링크는 아래와 같다. 위의 이야기는 저 링크들 중 네번째에 들어가면 순서가 맞다. '밤, 흉터와 얼룩' 다음이다.




맨 앞 부분(Night : 코즐로프와 미샤의 이야기 중에서) : http://tveye.tistory.com/4118

밤, 운석 : http://tveye.tistory.com/6218

밤, 흉터와 얼룩 : http://tveye.tistory.com/5624

숙취로 고생하는 미샤와 차이코프스키에 대한 대화 : http://tveye.tistory.com/3253

아침, 여분의 수완, 바느질 : http://tveye.tistory.com/3465

다들 똑같아지면 재미없음, 싫지 않은 것과 보통과 별로 사이 : http://tveye.tistory.com/5087

백조 솔로를 추는 미샤 : http://tveye.tistory.com/3146 

사과파이를 먹는 코즐로프와 미샤 : http://tveye.tistory.com/3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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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꽤 빨리 썼다. 이야기 자체가 하나의 호흡으로 진행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쓸 때는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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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위의 사진은 루돌프 누레예프. 이야기와는 별 관계 없는 이미지인데 그냥 올렸다. 이미지 없으면 심심하기도 하고... 미샤에 대해 처음 구상할때 누레예프도 약간 영감을 제공한 사람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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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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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내가 몇년 전 다시 글을 쓰기로 하고 미샤를 되살려냈을 때 구상했던 소설은 이른바 가브릴로프 이야기였다. 미샤가 체포된 후 지방 소도시의 보잘것없는 극장 감독으로 전출되고(사실은 유배) 그곳에서 겪는 일들을 그릴 생각이었다. 플롯과 인물들도 거의 다 구성했고 나 자신에겐 꽤나 흥미로운 프로젝트인데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쓰기가 무척 힘들었다. 아마 이 소설은 다른 일을 하면서는 쓰기 어려운 종류의 글인 것 같았다. 그러니까, 틀어박혀 글만 쓸때 잘 풀릴 것 같은 종류의 소설이다. 나머지 글들은 거의 일을 하면서 짬짬이 썼는데...

 

 

하여튼 이 소설에서 최근 몇년 간 쓴 미샤에 대한 모든 글들이 나왔다. 이거 시작하려다 워밍업하려고 마로조프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frost' 단편을 썼고 그러고 나서는 이 소설에 잠깐 등장하는 트로이라는 남자가 궁금해져서 트로이가 심리적 화자로 나오는 소설을 심지어 장편으로 쓰고, 나중에는 또 미샤와 렐랴가 나오는 추리소설 패러디 외전을 쓰고, 그러다 코즐로프가 나오는 단편도 하나 쓰고, 그러다 서무의 슬픔 시리즈를 쓰면서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고 등등등...

 

 

이 가브릴로프 소설을 쓰기는 할 것이다. 다른 글을 쓸때에도 항상 내 마음 속 가운데를 채우고 있는 글이기 때문이다. 사실, '매우 잘 쓰고 싶다'라는 욕망 때문에 쓰기가 어려운 게 분명하다.

 

 

 

발췌한 에피소드는 예전에 먼저 발췌했던 http://tveye.tistory.com/3332 (요즘 쓰는 글, 행정 체계라는 간편한 대답)에서 그대로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실은, 서무의 슬픔 시리즈는 저 행정체계 얘기랑 이 에피소드를 쓰다가 새끼쳐서 나왔음... 

 

 

 

시골 소도시 가브릴로프의 삼류극장에 예술감독으로 부임한 미샤! 하지만 극장에는 구세력들이 우글거리고... 밖으로는 KGB 국장 스페호프, 극장 안에서는 전임 감독 쿠즈네초프와 그 후계자인 니콜라이 레베진스키, 그리고 그의 일파들이 으르렁거리고 있으니~ 이 와중에 폐세자나 다름없이 되어버린 레베진스키가 면담을 요청하는데... 과연 20대 중반의 애송이 감독인 미샤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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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미샤는 오페라에 대해서도 물었다. 사람들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비록 미샤가 극장 전체를 총괄하는 예술감독직을 맡기는 했지만 발레계 출신인데다 가브릴로프 극장 자체가 오랜 세월 동안 무용에 특화되어 있었고 오페라는 구색 맞추기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임 감독이었던 쿠즈네초프 역시 오페라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고정 레퍼토리는 발레와 마찬가지로 4~5개뿐이었고 그나마도 한 달에 두세 번 공연하는 것이 전부였다. 미샤는 첫 2주 동안 피가로의 결혼과 라 보엠 무대를 보았고 근 20년 가까이 오페라단을 총괄하고 있는 말레도프스키와도 한 시간 정도 따로 미팅을 했다. 가수들도 만났다. 하지만 정작 무용에 대해서는 별다른 지적을 하지 않았다.

 

 

쿠즈네초프 체제에서 2인자의 자리를 공고히 해왔고 최근 1~2년 동안은 실질적으로 발레단의 레퍼토리와 무용수들의 지도를 총괄해온 것이나 다름없는 수석 안무가 니콜라이 레베진스키는 초조해져서 닷새째 되던 날 류다를 통해 미샤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류다는 전보다 두 배로 아이라인을 두껍게 칠한 눈꺼풀을 무겁게 깜박이며 끝을 길게 끄는 말투로 대꾸했다.

 

 

“ 그냥 노크하고 들어가면 될 거예요. ”

 

 

“ 안에 전화 한 통 넣어주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유세야! 아무 것도 안 하고 죽치고 앉아서... 새 상사 덕에 팔자가 늘어졌군. 우리 감독님은 사람 만나는 걸 지독하게 싫어하나보지. 일이 줄어서 참 좋겠어. ”

 

 

“ 적어도 커피 타다 주고 두어 시간마다 간식 쟁반 갖다 바치는 일은 안 해도 되니 얼마나 좋은지! 그리고 미샤는 사람 만나는 걸 싫어하는 게 아니에요. 일일이 전화 받는 걸 좋아하지 않는 거지. 문은 열려 있으니까 이름 부르고 들어오면 된다고 했어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아까 차이카에서 마주쳤을 때 해도 됐을 텐데. 아니면 무대 점검하러 갔을 때나. ”

 

 

“ 난 공식적인 면담을 요청하는 거라고. ”

 

 

“ 하세요, 누가 말리나요. 지금 들어가세요. 조금 전에 티무르 보리소비치가 나왔으니까 아마 미샤 혼자 있을 거예요. ”

 

 

“ 빨리도 친해지셨군. 감독을 애칭으로 부르지를 않나. ”

 

 

“ 취임 파티 기억 안 나요? 감독님이 부칭 같은 거 붙이지 말고 그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했잖아요. 예전부터 다들 그렇게 부른다고. 하긴 그때 당신은 심기가 불편해서 계속 술만 마시느라 못 들었나 보군요. ”

 

 

레베진스키는 류다를 노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책상을 서류철로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