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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번 주말에는 지난번에 써놓은 서무의 슬픔 38편을 올려볼까 했는데 딱히 내키지가 않았다. 써놓은지 꽤 된 그 38편은 하염없이 가볍고 즐거운 분위기의 에피소드인데 아마 요즘 내가 그런 마음이 아니라서 그런가보다. 사실 39편도 하나 구상해놨는데(회사의 부조리한 방침 때문에 짜증나서) 이것도 별로 쓰고 싶은 마음이 안 드는 것을 보니 요즘 내가 많이 지쳐 있긴 한가보다.

 

그래서 지난번에 발췌해 올렸던 가브릴로프 본편의 프리퀄인 수용소 이야기에서 조금 더 올려본다. 일전에 농담에 약한 미샤에 대해 그의 친구 스타니슬라프 일린이 충고를 하는 장면을 발췌한 적이 있다. 이것은 일린이 모스크바 비밀 클리닉의 면회실에서 미샤를 만나는 장면이다.

 

스타니슬라프 일린에 대한 설명과 예전 글들의 링크는 얼마전 올린 농담과 조셴코, 하름스 등에 대한 발췌문인http://tveye.tistory.com/4468 에 나와 있다. 이 수용소 프리퀄에서 일린은 미샤의 후원자 중 하나인 정치국 의원 게오르기 벨스키의 도움으로 친구를 면회하러 오게 된다.

 

.. 위의 그림은 미하일 브루벨의 '날아가는 악마'. 전에 두어번 올린 적이 있다. 이 그림은 브루벨 그림 중 내가 '백조 공주'와 더불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그 두 그림은 미샤라는 인물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미샤는 자기 발로 걸어서 들어왔다. 수갑은 차고 있지 않았다. 수의를 입고 있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환자복을 걸친 것도 아니었다. 암청색의 얇은 스웨터와 느슨한 진을 입고 있었고 목에는 자주색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놀랄 만큼 평소와 비슷한 차림새였지만 점차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모든 것이 어긋나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 옷들의 색깔과 모양새, 재질과 전체적인 조화, 그 모든 것들이 잘못 되어 있었다. 미샤라면 절대 저런 톤의 색깔을 고르지 않았을 것이다, 사이즈가 맞지 않아 어깨와 팔과 허리를 타고 볼품없이 늘어지는 옷이라면 더욱 더. 소매 끝의 라벨을 보니 적지 않은 금액이 들어간 수입품이 분명했지만 미샤는 단 한 번도 브랜드 라벨이 적나라하게 붙은 옷을 입은 적이 없었다. 해외 팬들이 선물한 옷들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 스카프. 내가 아는 미샤는 그런 우중충하고 끔찍한 색깔의 천 조각을, 그것도 그 조잡한 암청색 스웨터 위로 두르느니 엄동설한에도 목덜미를 그대로 노출하고 눈보라 속으로 나가버릴 인물이었다. 그 값비싸 보이지만 미묘하게 촌스럽고 마감 상태가 엉망인 옷과 지나치게 광택이 도는 구두, 이상한 모양으로 매듭을 지어 놓은 스카프의 부조화가 너무나 충격적이라 한동안 내 눈에는 다른 것은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 모든 것이 미적으로 완벽하게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미샤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를 꺼렸던 모습들을 꽤 많이 알고 있었다. 무대 뒤에서의 모습도, 부상 때문에 몸을 웅크리고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있던 모습도, 드물게 분노를 터뜨리며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던 모습도, 그리고 또 다른 몇 가지, 아주 개인적이고 부드러운 모습들. 그러나 단 한 번도 미샤가 그런 식으로 잘못된 미감을 전시하듯 드러낸 것을 본 적은 없었다. 마치 일부러 그런 의상을 걸쳐 입고 무대에 올라온 배우 같았다.

 

 

마침내 옷차림에 대한 충격에서 벗어났을 때 나는 그가 왼쪽 다리를 눈에 띄게 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나의 놀라움, 그 낯선 느낌은 그의 자세 때문일지도 몰랐다. 난 각오가 되어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미샤, 가장 끔찍한 경우에는 산소마스크를 쓰고 온 몸에 튜브를 달고 있는 미샤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똑바로 걷지 못하는 미샤 야스민, 무겁게 다리를 끌고 한쪽 어깨가 눈에 띄게 내려앉은 미샤를 마주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몇 발짝 걸어 들어왔을 때 미샤가 멈춰 섰다. 등 뒤로 문이 닫혔을 때 그가 고개를 들었고 한동안 눈을 깜박이며 가만히 서 있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가 바로 앞에 있는 나를 찾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방에는 창문도 없었고 천정에 달린 조명은 그렇게 밝지도, 어둡지도 않았다. 하지만 미샤는 갑자기 컴컴한 어둠 속으로 들어온 것처럼, 혹은 눈부신 일광이 쏟아지는 백사장에 내던져진 것처럼 초점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검은 눈을 깜박이며 천천히 사방으로 탐색하는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은 몇 번이나 내 쪽을 향했지만 공기를 통과하듯 그대로 길게 지나쳐버렸다.

 

 

나는 깊은 숨을 들이쉰 후 부드럽게 말했다.

 

 

“ 나 여기 있어, 미셴카. ”

 

 

미샤가 곧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여전히 그 검은 눈에는 제대로 된 초점이 잡혀 있지 않았다.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을 때 미샤는 몸을 움찔했지만 내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그 손은 내가 알던 미샤의 손보다 훨씬 차가웠고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작게 느껴졌다. 손가락의 길이나 손등의 크기가 줄어들 리는 없으니 내 심리 상태 때문인 것이 분명했다.

 

 

미샤는 내 손을 곧 놓았다. 두어 발짝 더 앞으로 다가섰다. 그에게서 스프레이와 화장품과 새 옷, 그리고 소독약과 아주 인위적이고 거의 금속 냄새에 가까운 화학 약품 냄새가 풍겨왔다. 나는 두 팔을 벌려 그를 포옹하고 싶었지만 악수를 했을 때의 반응을 생각하며 꾹 참았다.

 

 

포옹을 해 온 것은 미샤였다. 암청색 니트 스웨터에 휘감긴 두 팔이 내 목을 느슨하게 감싸 안았을 때 갑작스럽게 목구멍까지 뜨거운 덩어리가 울컥 치솟았다. 이상한 색깔과 조잡한 재질, 불균형한 디자인, 그 모든 것은 여전히 유효했다. 하지만 그건 그저 맞는 치수의 옷을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치밀어 올랐다. 내 목에 감긴 두 팔과 가슴팍에 맞닿은 그 몸이 너무나 야위어 있어서 현기증이 났다.

 

 

그의 뺨은 손보다 더 차가웠다. 뺨이라기보다는 광대뼈와 그 위에 팽팽하게 씌워진 피부에 가까웠다. 포옹을 풀었을 때 미샤가 입을 열었다.

 

 

“ 너무 비웃지 마, 공금으로 입혀준 거니까. ”

 

 

그는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적어도 그 말투는 내가 알던 미샤와 아주 비슷했기 때문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비록 그 목소리는 훨씬 미약하고 공기를 스치는 것처럼 들렸지만.

 

 

“ 거의 국영 의류공장 카탈로그 찍었을 때와 맞먹는 수준인데. ”

 

“ 그거 봤어? 레닌그라드에만 풀었다고 했는데... ”

 

“ 라라 스크랩북에서. ”

 

“ 태워버려. ”

 

 

이런 상황에서도 그 애가 그 촌스러웠던 국영 의류공장 신제품 모델로 끌려갔던 옛 기억을 되살리며 치를 떨 수 있다는 사실에 웃어야 할지 혀를 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미샤는 별로 고민하는 것 같지 않았다. 웃었기 때문이다.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눈을 살짝 내리뜨는 정도였지만 그래도 분명 미소였다. 희미하게 웃자 얼굴이 한결 나아보였다. 아니, 사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안색은 창백했지만 그래도 병색이 완연할 정도로 하얗지는 않았고 짧게 잘린 머리도 제법 잘 다듬어진 상태였다. 뺨과 입술에는 희미하게나마 핏기가 돌고 있었다. 그 사진에 비하면 거의 정상인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심하게 야위었을 뿐이었다.

 

 

미샤가 다시 한 팔을 내 목에 감았다. 평소보다 훨씬 다정하게 군다고 생각했을 때 미샤가 낮고 깔깔한 음성으로 귀에 대고 속삭였다.

 

 

“ 스탄카, 좀 잡아줘. 넘어지기 싫어. ”

 

 

마지막 문장에는 두 개의 단어가 생략되어 있었다.

 

 넘어지기 싫어, 저자들 앞에서.

 

6년 가까이 친하게 지낸 사이라면 그 문장과 단어를 잘라먹는 버릇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나는 한 팔로 그의 팔을 꽉 잡고 다른 한 팔로 허리를 감았다. 어깨를 부축해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키가 맞지 않았다. 미샤가 몸을 숙이더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몇 잔 안 되는 술에 취했을 때조차 나나 친구들이 부축해 주려고 하면 화를 내던 애였다. 아주 잠깐 동안 나는 레닌그라드에 있는 미샤의 친구 중 하나를 떠올렸다. 키가 껑충하게 큰 영문학자. 취한 자신을 부축해줘도 미샤가 화를 내지 않는 유일한 친구. 지금 그가 여기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순전히 미샤를 붙잡아 이끌기에는 내가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천히 소파 쪽으로 발을 옮기면서 나는 우울하고 기분 나쁜 사실을 깨달았다. 그를 잡아주는 것, 체중을 지탱하며 소파까지 데려가는 것이 더 이상 힘에 부치지 않았다. 내 어깨와 팔에 그가 자기 몸무게의 대부분을 실은 채 완전히 의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갑작스럽게 소름이 끼쳤다. 그가, 미샤 야스민이 누군가에게 몸을 완전히 내맡기다니, 붙잡아 달라고 부탁하다니. 그건 색깔과 모양이 엉망인 옷보다도, 짧게 잘린 머리칼보다도 더 끔찍하게 잘못된 일이었다.

 

 

 

..

 

 

 

일린과 미샤의 대화에 언급되는 국영 의류공장 카탈로그 얘기는 전에 발췌한 적이 있다. 그 얘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183

 

라라는 일린의 딸이다. 라라가 화자로 나오는 부활절 단편 jewels를 이 about writing 폴더에 전문 게재한 적이 있다. 이 소설은 그 부활절 이야기로부터 4년 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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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