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무의 슬픔 #17. 운수 좋은 날 series : 서무의 슬픔2015. 4. 16. 14:27
본편으로 돌아가려고 노력 중이지만 원체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지 어찌어찌 서무의 슬픔 시리즈는 계속되고 있다. 오늘은 17편이다.
과연 우리의 불운한 단추청년 다닐 베르닌에게도 운수 좋은 날이란 것이 있을까? 그 해답은 이번 편에~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선배들을 모시고 대도시 출장을 다녀온 후 베르닌은 다시 서무의 일상을 계속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그의 자리로 스페호프 국장이 전화를 해 오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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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17
서무의 슬픔
- 운수 좋은 날 -
그날 베르닌은 아침부터 운이 좋았다. 전날 타자기 전원 차단을 깜박하고 간 것 때문에 벌벌 떨며 출근했으나 놀랍게도 주차장에는 국장 관용차가 보이지 않았다. 보통 스페호프는 한 시간 전에 출근해서 KGB 건물 전체를 순시하고 업무 시작 직전이 되면 서무를 불러서 이런저런 지적사항을 전달하기 때문에 국장의 차가 없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리에 앉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 예, 다닐 베르닌입니다. ”
“ 전화 멘트 똑바로 하지 못하나? ‘안녕하십니까, 가브릴로프 KGB 지국 감시분석부서 다닐 베르닌입니다‘ 라고 해야 할 것 아닌가! ”
“ 어, 예... 죄송합니다. 국장님, 그런데 왜... 국장실로 올라갈까요? ”
“ 아닐세. 오늘 내 휴가를 좀 내주게. 열이 펄펄 끓고 몸이 움직이지 않는군. 아무래도 회식 때 필로모프 녀석에게 독감이라도 옮은 것 같아.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미치겠군. ”
“ 어... 그러셨군요. 독감이면 푹 쉬셔야죠. 병원 예약이라도 잡아드릴까요? ”
“ 됐네! 병원은 무슨! 오늘 하루만 쉬면 나아지겠지. 하여튼 휴가니까 그리 알고, 어제 지시한 사항들은 모두 정리해서 내일 아침에 보고하게. 다른 부서에도 공지해주고. ”
스페호프가 전화를 끊었다. 베르닌은 뛸 듯이 기뻤다. 모든 부서 서무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 행복한 소식을 알렸다. 삽시간에 건물 전체에 화기애애하고 느긋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베르닌은 드물게 여유로운 오전을 보냈다. 국장이 지시한 사무실 환경 미화 건은 이미 전날 야근을 해서 보고서를 만들어 두었으므로 일상적인 서무 업무와 금주의 왕재수 감시 보고서 작성 외에는 가외 업무도 없었다. 그리고 왕재수는 요즘 극장과 집 외에는 따로 가는 곳도 없었기 때문에 감시 보고서 쓰는 것도 아주 수월했다. 요 며칠 코즐로프가 와서 자고 갔지만 물론 그 응응에 대한 부분은 베르닌의 임의대로 전부 생략해버렸고 그의 방문 목적도 자신과의 모스크바 정보 교환이라고 둘러댔다.
극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스페호프가 매수한 스태프 하나가 베르닌에게 매주 짧은 브리핑을 하고 있었다. 그건 내부 고발 증거가 남을까봐 구두로만 진행했다. 베르닌은 그 내용들도 간략하게 골자만 정리해서 추가했다. 젊은 감독에 대한 시기질투에서 비롯된 허위 고발내역은 대충 삭제하고 실제로 충돌이 일어난 부분만 간단하게 적었다.
‘ 근데 얘는 아직도 극장 사람들하고 부딪치네. 단원들은 말 잘 듣는 것 같던데. 하긴 극장이야 우리랑 다르니까 내가 신경 쓸 건 아니지. ’
* * *
11시가 되자 알렉산드라가 서무 업무 회의를 빙자해 각 부서 서무들을 휴게실로 불러 모았다. 주말에 고향에 다녀왔다면서 말린 살구를 한 봉지씩 나눠주었다. 서무들은 따뜻한 차에 살구를 곁들여 먹으며 오랜만에 국장 없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정말 여유로웠다. 베르닌은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출장에서 벌어진 일들을 얘기해주었고 다들 혀를 내두르며 그를 위로해 주었다. 역시 같은 입장이라 서무의 슬픔을 절절하게 이해해 주었다.
30분쯤 후 그들은 회의실을 나왔다. 자기 부서로 돌아가는 길에 베르닌은 등사실에 들렀다가 리자와 마주쳤다. 리자는 눈과 코가 빨개진 채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 어, 리자.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
“ 흑흑... 발따예프 선배가 아까 등록 서류 때문에 내려왔다가 처리가 늦는다고 막 화내고 소리 질러서요. ”
“ 엥, 왜요? 그 선배는 일도 안 하는데 웬 등록 서류를 당신한테 떼어 달라고 하고 화를 내요? ”
“ 자기 아는 사람이 이번에 이직을 준비한다고 우리 쪽에서 관리하는 신원 조회 서류를 갱신해야 하니까 빨리 해달라고 갈구더라고요. 근데 보니까 그 사람 여권도 어제 날짜로 만료됐고 사진도 10년 전 거라서 다 바꿔야 하는 거였어요. 필요한 서류 다 준비해 와야 해 줄 수 있다고, 최소한 일주일은 걸린다고 얘기해줬더니 막 성질내면서 나한테 선배가 해달라면 후딱 해줘야지 왜 말대답이냐면서 막 화내고... 소리 지르고... 흐흑, 쓸모없는 계집애라 그러고 어린 게 일 못한다고 그러고... ”
“ 아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람. 증빙 서류가 있어야 뭘 해주죠. 절차와 원칙이 있는 건데! 진짜 억울했겠네요. 그리고 그런 험한 말을 하다니! 리자, 마음 쓰지 말아요! 그 사람이 나쁜 거예요! 그 사람 진짜 나쁜 선배예요! ”
“ 막 장부를 뒤집어엎고 책상을 탕탕 치고 일 똑바로 하라고 고함치고... 우리 엄마아빠도 나한테 소리 한 번 안 질렀는데 엉엉... 나 집에 가면 엄청 귀염 받는 딸인데 흐흑... 하도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해서 무서워서 도망 왔어요. 오후까지 해결 안 해 놓으면 국장한테 얘기해서 잘라버리겠다고 막 고함치다 갔어요. 그것도 원래 당사자가 직접 와야 되는데 자기 친구라고, 출장 같이 다녀온 사이니까 빨리 해줘야 된다고... ”
“ 어, 그거 누군데요? ”
“ 무슨 주브치크가 어쩌고... ”
“ 어, 나 그 사람 알아요. 이번에 출장 같이 갔어요. 검열국 선전부장. 나한테 사진이랑 인적 증빙 서류 다 있어요. 그때도 여권 곧 만료된다 해서 내가 정신없이 임시 서류 만들었거든요. 모스크바랑 레닌그라드 가면 임시 등록해야 해서... 내가 갖다 줄게요. 울지 마요. ”
베르닌은 급하게 사무실로 갔다. 지난 주 출장 때 만들었던 서류철을 꺼냈다. 주브치크의 임시 등록용 증빙서류들을 한 뭉치 껴안고 등사실로 갔다. 리자는 아직도 훌쩍이고 있었지만 베르닌이 서류들을 건네주자 곧 울음을 그쳤고 딸꾹질을 하면서도 웃었다.
“ 어머, 정말 필요한 게 다 있네요! 고마워요 다냐! 이걸로 대충 해치워서 그 인간 얼굴에 집어 던져야지! ”
“ 리자, 당신 진짜 착하네요. 나 같으면 안 해줄 거예요. 아니면 최소한 주브치크에게 전화해서 한 마디 해줬을 것 같아요. 본인이 와서 요청해야지 어떻게 친분을 이용해 이런 식으로 스리슬쩍 넘어가려고 해요. 그리고 발따예프 선배가 지껄인 건 마음 쓰지 말아요. 그 인간 원래 자기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다른 사람 배려는 눈곱만큼도 없고... ”
“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당신 이번에 그 선배랑 출장 다녀왔죠? 알만하네요. 무지 고생했겠네... 알렉산드라 언니가 지난주에 당신 걱정하면서 발따예프 선배 엄청 욕했어요. 저번에 감사관 왔을 때도 당신한테 다 뒤집어씌웠다면서요. 나쁜 인간... 일단 이것부터 갖다 놓고. 벌써 점심시간이네요. 우리 같이 점심 먹어요. 이 인간들 다 꼴 보기 싫으니까 구내식당 가지 말고 나가서 먹고 오는 게 어때요! 항아리 닭고기 먹으러 갈까. 어제 먹긴 했지만 또 먹어도 괜찮은데. ”
“ 어, 그래요. 나가서 같이 먹어요. 항아리 닭고기 식당은 자주 가니까 새로운 데 가보는 게 어때요? 이번에 괜찮은 데 하나 알게 됐거든요. 극장 쪽에 있는데요, 항아리 닭고기 식당이랑 별로 안 멀어요. ”
베르닌은 리자를 데리고 왕재수가 발굴한 극장 근처 식당에 갔다. 점심시간에도 사람이 많았다. 줄을 서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점원이 베르닌을 보더니 ‘어, 그 꽃미남 감독님 친구 아니에요? 이쪽으로 오세요’ 라고 하며 구석에 있는 조그만 테이블을 내주었다.
메뉴판을 보고 베르닌은 전에 먹어봤던 살랸카와 쇠고기 롤, 왕재수가 시켰던 스메타나 닭가슴살이 맛있었다고 설명해주었다. 리자는 새로운 걸 먹어보자면서 양파 수프와 사과 소스로 조린 돼지고기 요리를 시켰다. 베르닌은 살랸카와 키예프식 치킨 커틀릿을 시켰다. 음식은 모두 아주 맛있었다. 나이프로 고기를 잘라 오물오물 씹더니 리자가 방긋 웃었다.
“ 어머, 다냐. 당신 의외네요. 이렇게 귀여운 식당도 알고, 심지어 줄 안 서고 자리도 얻고. 음식도 엄청 맛있어요. 맨날 구내식당에서만 밥 먹고 이런 맛집은 전혀 모르는 융통성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
“ 어... 맛집은 잘 몰라요. 근데 여기가 왕재수, 아니 미샤가 자주 오는 데라서요. 저번에 같이 와서 먹어봤는데 맛있더라고요. 가격도 안 비싸고요. ”
“ 아, 그러면 그렇지. 근데 당신들 아직도 뜨거운 사이인가보네요. 아침에 하고 저녁에 하고 밤에... ”
“ 으으, 리자. 우리 진짜 그런 사이 아니라니까요. 그거 다 헛소문이란 말이에요. 난 여자 좋아한다고요! 걔도 따로 애인 있고요! ”
“ 그래요? 근데 저번에 그 사람 물에 빠졌을 때 당신이 울고불고... ”
“ 그럼 애가 빠져죽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안 당황해요! 걘 겉으로만 잘났지 완전 애기란 말이에요. 잠시라도 한눈팔면 금세 사고를 치니... ”
“ 근데 당신은 그 꽃돌이 감독님 아니더라도 그런 의심 받을만하단 말이에요. 입사하고 나서 데이트하는 것도 한 번도 못 봤고 여자들한테도 목석처럼... ”
“ 아니에요! 나, 나도 데이트 한 적 있어요. 처음에... 잠깐 사귀던 여자 있었는데 입사하고 국장이 하도 일을 많이 시켜서 2주일도 안돼서 깨졌단 말이에요. 그리고 나서는 너무 바빠서 여자 만날 시간도 없고... 난 점점 책상물림만 되고... 그러다가 그 자식! 그 자식 감시 업무 때문에 갑자기 이상한 소문까지 나서... 흐흑... ”
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정말요? ”
“ 그렇다니까요! 사실 저번 모스크바 사람들 왔던 파티 때... 그때 옛날에 잘 될 뻔 했던 여자도 왔었거든요. 그래서 다시 잘 될 뻔 했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
“ 왜요? 왜 잘 안 됐어요? 그 여자가 이미 딴 남자가 생겼어요? ”
“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었는데요, 때를 놓쳤나 봐요. 다시 만나니까 예전 같은 마음이 안 생기더라고요. ”
“ 그렇구나. 근데 아무래도 그건 그 꽃돌이 감독님 때문인 것 같은데. 맨날 그렇게 예쁘고 근사한 꽃미남을 옆에 두고 있어서... ”
“ 꽃미남이면 뭐해요! 난 여자가 좋다니까요! 근데 이제 여자 만나기는 글렀어요. 맨날 야근만 하지, 주말에도 일하지. 시간 나면 맨날 그 왕재수 녀석 출퇴근에 밥해주고 청소해주고 뒷바라지하지... 툭하면 국장한테 불려가서 가외업무만 받지. 가뜩이나 책상물림에 재미없다고 여자들한테 인기 없었는데 갈수록 더 그럴 거 같아요. 결혼이나 할 수 있을지. 흑... 나이도 꽉 찼는데... 저번에도 부모님 뵈러 갔더니 언제 장가 가냐고 타박하시더라고요. ”
“ 책상물림은 맞지만 인기 없는 건 아닌데. ”
“ 내가 무슨 인기가 있어요. 대학 때도 여자들 만나면 계속 버벅거리고. 그때도 인기 하나도 없었어요. 책상물림이라고... ”
“ 그래요?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은데. 당신 처음 들어왔을 때 우리 부서에서 오랜만에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고 좋아했었는데. 그땐 풋풋하고 귀엽다고도 했는데. ”
“ 에... 누가요? 나이 많은 선배님들이나 그랬겠죠. ”
“ 선배들은 여자 아닌가요? 하여튼 다냐, 너무 자학하지 말아요. 당신 생각처럼 나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당신은 착하잖아요. 배려심도 많고 남 뒤통수도 안 치고. 분명히 좋은 여자가 생길 거예요. ”
“ 어, 고마워요. 근데 나 별로 안 착한데... 사람들이 자꾸 오해를... ”
“ 아니에요! 당신은 착해요! 난 알아요! ”
“ 어떻게 알아요? ”
“ 그때 강아지 주워왔을 때 잘 돌봐줬잖아요. 그리고 꽃돌이 감독님이랑 그런 사이도 아닌 거라면 정말 잘해주는 거잖아요. 출퇴근시켜줘, 밥해줘, 매일 돌봐줘... ”
“ 그건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에요! 공무라고요! 국장이 저한테 맡겼잖아요, 그 자식 감시 업무... 일거수일투족 감시해야 되니까 출퇴근에 밥까지 다 챙기라고... ”
“ 누가 공무를 그렇게 마음에서 우러나서 열심히 해요! ”
“ 마음에서 우러나긴요! 전부 할 수 없이... ”
“ 아닌 거 같은데. 저번에도 극장 앞에서 우연히 보니까 밥 안 챙겨먹는다고 야단치고 막 샌드위치도 싸다 주고... 진짜 걱정하는 거 같던데. 난 그거 보고 당신이랑 꽃돌이 감독님이랑 진짜 사귀는 줄 알았어요. ”
“ 진짜 아니라고요. ”
“ 아유, 알았어요. 정색하긴. 근데 그 사람 정말 애인 있어요? ”
“ 있대요. ”
“ 에이... 그럼 나랑 소개팅은 물 건너간 거네. ”
“ 리자, 그런 싸가지 없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놈은 별로 도움 안돼요!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생긴 줄 아는 놈인데! 당신 예쁘다고 해주고 아껴주는 남자를 만나야죠! ”
“ 요즘 세상에 어느 남자가 그런 말을 해줘요! 나 예쁘다고 해준 건 우리 엄마아빠밖에 없는데! ”
“ 엥? 당신은 예쁘잖아요. 귀엽고. ”
“ 어머, 정말요? 되게 웃기다. 당신 그런 말도 할 줄 알아요? ”
리자가 깔깔 웃었다. 베르닌은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그래도 솔직하게 말했다.
“ 객관적으로 볼 때 우리 회사에서 제일 예쁜 편이라고요. ”
“ 음, 그건 내가 여직원 중 제일 어리기 때문이겠죠! ”
“ 아닌데... 알렉산드라 선배는 나보다 나이 많아도 예쁜데. ”
“ 어머, 당신 되게 웃겨요, 다냐. 안 그런 줄 알았는데 여직원들 외모를 다 재고 있었군요! ”
“ 그게 아니라... 내 말은... 그러니까 나이랑 상관없다고요! ”
“ 됐어요. 누가 뭐래요. 근데 그런 얘기 하는 거 보니까 당신 정말 꽃돌이 감독님이랑 그런 사이 아닌가 보네요. 여자 얼굴 따지고. ”
점심 시간이 이미 다 지났기 때문에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베르닌은 계산을 하려고 했으나 리자는 서류 문제를 해결해준 보답으로 자기가 사겠다면서 급하게 쪼르르 달려가 돈을 치러버렸다.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도 리자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사무실로 들어가면서 리자는 앞으로도 종종 같이 점심을 먹자고 했다.
* * *
밝고 귀여운 리자와 맛있는 점심까지 먹어서 그런지 베르닌은 내내 기분이 좋았다. 오후에는 급한 일도 없어서 그동안 미뤄뒀던 서류철 표지 작업을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향긋한 꽃 냄새가 풍겨왔다. 고개를 드니 눈부신 미모의 렐랴가 책상 옆에 선 채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 어, 안녕하세요.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오랜만이네요! ”
“ 와, 당신 완전히 서류철 기계 같네요! 구멍 뚫는 것부터 노끈 꿰는 것까지 오차도 하나도 없고 진짜 정확해요. 이런 거 처음 봤어요. ”
“ 아, 이거요? 별 거 아닙니다. 하도 서류철을 많이 해서 눈감고도... ”
“ 근데 당신 모스크바 법대 나왔다면서요. 성적도 좋았다면서, 당신 같은 엘리트를 이런 잡일로 낭비하다니 스페호프도 참 이상한 사람이라니까요. ”
“ 어, 서류철 만들기는. 음, 서무의 업무... 행정의 기본... ”
“ 뭐가 행정의 기본이에요, 그냥 잡일이지. 다냐, 지금 바빠요? ”
“ 아뇨. 별로 안 바쁩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
“ 당신네 국장이 우리 잡지에 무슨 정보 처리 승인을 추가로 받으라고 어제 공문 보냈더라고요. 그거 안 받으면 다음호 발간 무기한 중지시킬 거라잖아요. 근데 대체 아무리 읽어봐도 뭘 받으라는 건지 이해가 안 가요. ”
“ 공문이요? 전 그런 거 보낸 적 없는데. 이상하네요, 보통 언론사에 보내는 국장 공문은 제가 발송 처리하는데. ”
“ 지난주 금요일에 보낸 거던데... ”
“ 아, 지난주엔 제가 출장을 가느라 자리에 없었어요. 혹시 그 공문 가져오셨나요? ”
“ 여기요. ”
렐랴가 핸드백을 열더니 두 번 접은 서류를 꺼내서 건네주었다. 스페호프가 봤다면 신성한 공문을 접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행정의 기본 운운 불을 뿜었을 것이 뻔했다.
“ 아, 이거 별로 중요한 거 아닙니다. 검열국에 요청하시면 돼요. 그쪽에서 서류에 도장을 하나 찍어줄 건데요, 그것만 첨부해서 저희 쪽으로 ‘정보 처리 승인 완료’ 공문을 보내주시면 됩니다. ”
“ 그럼 또 일주일 걸릴 거잖아요! 접수번호 따고 발송번호 따고 우체국에 가고 공문 왔다갔다... ”
“ 어, 원래는 그렇게 해야 하는데... 오늘 국장이 없으니까 제가 검열국에 전화해 드릴게요. 잠깐만요. ”
베르닌은 검열국 담당부서에 전화를 해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고 수화기를 내려놓은 후 렐랴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다.
“ 됐습니다. 있다가 검열국 가셔서 서류 받아 가시면 돼요. 공문만 만들어 놓으세요. 그럼 내일 아침에 제가 출근하면서 당신 사무실에 들러서 공문이랑 서류 가지고 와서 처리해드릴게요. ”
“ 어머나, 다냐. 정말 고마워요! 난 당신이 또 행정이 어떻고 하면서 꽉 막힌 소리를 할 줄 알고 걱정했는데... 당신네 국장은 정말 문화예술 탄압에 맛 들린 것 같아요. 미샤한테도 그렇게 못되게 군다면서... 아주 예술계에 소문이 파다하더라고요. 신작 안무도 검열국 쪽 사람들 보내서 이것저것 간섭하고, 진보적인 예술가들이랑 의견이라도 나눌까봐 만나지도 못하게 한다고... ”
“ 어, 그래요? 전 처음 듣는 얘긴데요. 헛소문 아닐까요? 제가 걔 감시요원인데 어떻게 저도 모르게 그런 일이 있겠어요. ”
“ 아유, 다냐. 당신 왜 이렇게 순진해요. 당신은 극장 쪽 일은 모르잖아요. 온종일 극장에서 그 사람 곁에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루의 태반은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서. 아까 신작 리허설하는 거 취재하려고 극장 갔었는데 오늘도 검열 요원 두 명이나 거기 있던데요? 하도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으니까 미샤가 화나서 리허설도 중단해 버리더라고요. 내가 말리지 않았으면 크게 싸웠을 거예요. 미샤가 엄청 화냈어요. 그 사람 그러는 거 처음 봤어요. 화나니까 진짜 멋있더라고요. 눈이 이글이글 타면서 더 잘생겨 보이고... ”
베르닌은 렐랴의 마지막 두 문장은 무시하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 싸웠다고요? 혹시 그 사람들이 때리고 그런 거 아니죠? ”
“ 아뇨. 언성이 높아지고 그 사람들이 협박하니까 남자 무용수들이 다 몰려와서 미샤 편을 들고 예술 탄압하지 말라고 대들어서 다행히 주먹질 같은 건 없었어요. 알잖아요, 우리 극장 무용수들 덩치 좋은 거. 근데 아마 무용수들이 도와주지 않았어도 그 사람들 주먹질하진 못했을 거예요. 미샤가 화내니까 옆으로 다가가지 못하더라고요. 무서워서. ”
“ 무서울 리가... 화내봤자 막 울고 삐치기나 하는 앤데. ”
베르닌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렐랴는 사무실을 한 바퀴 휙 둘러보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오늘은 전화도 안 울리고 자리도 많이 비어 있네요. 원래 수요일엔 많이 바쁜 것 같더니. ”
“ 아, 오늘 국장이 휴가라서요. 한결 여유가 있어요. ”
“ 독재자. 당신네 국장 너무 싫어요. 인상도 음침하고 매일 꽉 막힌 소리만 하고... 그럼 당신도 별로 안 바빠요? 나 출판문화국 미팅까지 시간 좀 남는데. 차 한 잔 줄 수 있어요? ”
“ 그, 그럼요! 휴, 휴게실이 비어 있으니까 그리로 가시죠. 거, 거기 의자가 좀 편해요. ”
“ 왜 갑자기 그렇게 말을 더듬어요? 누가 보면 데이트라도 하자고 한 줄 알겠네. ”
“ 어,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게 아니고... 어... 하여튼 가시죠. ”
베르닌은 휴게실로 렐랴를 안내했다. 그날따라 낡은 소파가 더욱 마음에 안 들었지만 별 수 없었다. 그는 누군가가 흘리고 간 빵 부스러기를 급하게 털어내고 제일 깨끗해 보이는 쿠션을 가져와 푹 꺼진 등받이 안쪽에 괴어주었다.
렐랴는 소파에 앉더니 늘씬한 다리를 꼬았고 목덜미로 흘러내린 풍성한 갈색 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 올려 눈 깜짝할 사이에 구슬 박힌 예쁜 핀으로 고정시켰다. 베르닌은 넋을 놓고 그 유려한 손놀림을 바라보았다.
“ 다냐, 뭐해요? 차 준다더니 뭘 그렇게 멍하게 보고 있어요? ”
“ 어... 아닙니다. 저... 여자들이 머리 올리는 게 신기해서. ”
“ 어머. 당신 정말... 아유 싱거워. ”
렐랴가 소리 내어 웃었다. 베르닌은 렐랴가 웃는 모습이라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싫증나지 않을 것 같았지만 억지로 사모바르에서 뜨거운 물을 떠왔다. 찻잔에 차를 우렸다. 뭔가 간식이 없나 뒤졌지만 국장이 없는 날이라고 다들 신이 나서 휴게실을 들락거렸으므로 먹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베르닌이 실망하고 있는데 렐랴가 바스락거리더니 상자 두 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둘 다 리본으로 곱게 포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조그만 유리병도 한 개 꺼냈다.
“ 어, 그게 뭔가요? ”
“ 어제 파이랑 케익 구웠거든요. 이건 나무열매 파이. 검은 숲에서 따온 열매들로 만든 거예요. 그리고 이건 나폴레옹 케익. 가을에 수확한 배를 설탕과 꿀에 조려서 얹었어요. ”
“ 우와,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정말 대단해요. 나폴레옹 케익이라니... 어떻게 그런 걸 다 만드나요? ”
“ 우리 외가 쪽이 귀족 가문이었던 거 알잖아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던 레시피가 있어요. 비법은 신선한 버터를 듬뿍 쓰는 거죠. 이거 미샤한테 전해주세요. 파이랑 같이. ”
“ 어, 근데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사실은 걔는... 저, 걔는 무용을 해서 그런지 단 걸 잘 안 먹거든요. 앞으로 걔한테 이런 거 만들어 주시고 싶으면 사과파이를 구워주세요. 사과파이는 잘 먹어요. ”
“ 아, 미셴카가 몸매 관리하는 건 나도 알아요. 근데 예전에 발레 잡지에서 파트너가 했던 인터뷰 보니까 나폴레옹 케익은 먹는대요. 레닌그라드에 유명한 제과점이 있는데 미샤가 거기 나폴레옹 케익이 너무 맛있어서 못 참고 한 판 다 먹은 적 있다던데요. 그래서 며칠 동안 연습량을 무지 많이 늘렸다고 하더라고요. 그거 생각나서 구운 거예요. 만드는 김에 나무열매 파이도 한 판 구웠고요. 이건 단 거 아니니까 괜찮을 걸요. ”
분홍색 리본이 달린 두 개의 상자를 건네주면서 렐랴가 덧붙였다.
“ 케익이랑 파이 둘 다 꽤 크니까 미샤랑 나눠먹어요. ”
“ 어, 하지만 이건 걔 먹으라고 당신이 손수 구운 거잖아요. 왜 제가... ”
“ 그래야 미셴카가 가책 없이 먹을 거 아녜요. 원래 다이어트할 땐 그렇거든요, 옆 사람이 먹어야 죄책감이 분담돼서 먹기 편해요. ”
“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
“ 그렇다고 당신이 다 먹으면 안돼요! ”
“ 네, 그럼요. ”
베르닌이 들떠 있는데 렐랴가 유리병을 내밀더니 뚜껑을 열었다.
“ 자, 이건 지금 먹어요. ”
“ 어, 이건 뭐예요? ”
“ 우유 푸딩이에요. 차랑 먹으면 맛있어요. ”
“ 이것도 직접 만드신 건가요? ”
“ 네. 우리 편집실 직원들 나눠주고 남아서 가져왔어요. ”
“ 저, 감사합니다. 근데 당신은 안 드시나요? ”
“ 지독하게 감기에 걸렸거든요. 벌써 사흘짼데 나아지질 않아요. 냄새도 못 맡고 맛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뜨거운 차만 마실래요. 설탕이나 두 숟가락 타 주세요. ”
“ 저런. 설탕보다는 꿀이 낫겠네요. 잠시만요. ”
베르닌은 찬장을 뒤져 꿀을 찾아냈다. 뜨거운 차에 꿀을 녹여주자 렐랴가 방긋 웃었고 베르닌의 뺨에 뽀뽀를 했다.
“ 고마워요, 다냐. 친절하기도 하지. ”
베르닌은 심장이 멈추고 두 다리가 다 풀리는 것 같았다! 너무너무 황홀해서 기절할 것 같았다. 렐랴가 먹으라고 건네준 우유푸딩도 탱글탱글한 식감에 맛도 달콤했지만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렐랴는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를 홀짝 마시더니 시계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 그럼 이만 가볼게요. 미샤랑 꼭 나눠먹어야 해요! 오늘 극장에서 기분 안 좋았을 테니까 꼭 잘 달래주세요. 내일 아침에 공문 가지러 꼭 와주고요! ”
“ 그럼요, 물론이죠! 저,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저... ”
“ 뭐죠? ”
“ 아, 아니에요. 조심해서 가세요. 내일 아침에 뵐게요. ”
“ 안녕! ”
렐랴가 떠난 후 베르닌은 자리로 돌아왔다. 남은 서류철 표지 작업을 계속했다. 바보처럼 계속 실실 웃으면서. 정말 신나는 하루가 아닐 수 없었다.
* * *
베르닌은 정시에 퇴근했다. 국장의 휴가가 이토록 그의 인생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리라고는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게다가 귀여운 리자와 점심을 먹은 것도 모자라 가브릴로프 최고의 미인인 렐랴와 차를 마시고 맛있는 우유푸딩도 먹고 근사한 케익과 파이까지 얻어오고... 심지어 렐랴가 뺨에 뽀뽀까지 해주었으니 그의 인생에 이토록 운 좋은 날도 드물었다.
그의 행운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빵을 사려고 잠깐 차를 세웠는데 얼어붙은 눈 더미 사이에서 10루블 지폐를 발견했다. 주인을 찾아주려고 했지만 지갑도 아니고 지폐 한 장이라 불가능했다. 행인들이 지나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누가 잃어버렸는지는 알아낼 수가 없었다. 조금 가책이 되었지만 어쨌든 10루블이 하늘에서 떨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주운 돈으로 식재료를 사서 왕재수에게 맛있는 거나 만들어주면 가책도 좀 가실 것 같아서 그는 흑빵을 산 후 옆에 있는 생선 가게에 갔다. 왕재수가 좋아한다는 건 알지만 가격이 비싸서 한 번도 사본 적이 없었던 새우와 연어를 샀다. 막 전표를 끊고 계산을 하려는데 갑자기 펑 소리가 나면서 조그만 폭죽이 터지고 점원들이 박수를 쳤다. 어리둥절한 베르닌은 하마터면 지갑을 떨어뜨릴 뻔 했다.
“ 축하합니다! ”
“ 엥? 뭐죠? ”
“ 오늘이 우리 생선 가게 50주년이라 어업조합에서 50번째 손님에게 특별이용권을 제공하기로 했거든요! 당신이 50번째예요! ”
“ 어, 특별이용권... 그게 뭔데요? ”
“ 우리 가게 공짜 이용권이죠. 총 세 번으로 분할해 쓸 수 있고요, 생선 5마리까지 가능하고요, 종류는 상관없어요. ”
“ 어, 감사합니다. 그럼 오늘 산 것도 되는 거예요? ”
“ 아뇨, 오늘 건 이미 전표를 끊었으니 안 되고요. 내일부터 쓸 수 있어요. 축하합니다! ”
베르닌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뭔가에 당첨이 되어 봤다. 게다가 가게 점원들이 친절하게 서비스를 해주다니,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너무나도 신이 났다. 생선 종류는 상관이 없다니, 그러면 연어나 철갑상어, 대게 등 비싼 놈을 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 근데 대게는 생선이 아니라서 안 되나? 나중에 물어봐야지. 그 녀석이 대게도 좋아하던데. ’
정말 운이 좋은 날이었다. 베르닌은 휘파람을 불며 집으로 들어왔다. 그날은 마지막 수요일이었다. 극장에서는 어린이와 학생들을 대상으로 5시에 공연을 올리는 날이었다. 그러니 왕재수도 8시 전에 돌아올 것이다. 코즐로프도 같이 오겠거니 싶어서 베르닌은 넉넉하게 저녁을 준비하기로 했다.
* * *
그는 연어와 새우 요리를 위해 사진이 실려 있는 생선요리책을 펼쳤다. 어제 왕재수가 가져다 준 책이었다. 베르닌은 맨 처음에 그 책을 보고 깜짝 놀랐다.
“ 야, 이거 불어로 돼 있잖아! 내가 이걸 어떻게 읽어! ”
“ 뒷장에 우리 말 번역 있어. ”
“ 근데 나한테 왜 이런 걸 사다 주는 거야? ”
“ 난 고기보다 생선이 더 좋은데 가만 보니까 넌 생선 요리를 많이 안 해본 거 같아. 그래서 좀 배워서 나 해주라고. ”
“ 그러니까 나 부려먹으려고 사온 거구나! ”
“ 아니야! 알아두면 너한테도 유익한 거니까 그렇지! ”
“ 뭐가 유익해, 너 먹고 싶은 거 해달라는 거네. 근데 너 이 책 어디서 구했어? 이거 우리 동네 서점에서는 안 팔 텐데. 어, 이거 프랑스에서 나온 거네. 이거 망명 러시아인이 쓴 거 아냐? 야, 이거 금지 서적... ”
“ 요리책이 무슨 금지 서적이야! ”
“ 하여튼... 야! 너, 너 나 출장 갔을 때 거기 갔었어? 엉? ”
“ 어디? ”
“ 투레츠키! 이거 거기서 구한 책이지! 척 보면 알아! 이런 거 구할만한 데가 거기밖에 더 있냐! ”
“ 알면서 왜 묻니? 근데 이거 바냐한테서 얻은 거 아냐. 보랴가 준 거야. 내가 부야베스도 좋아하고 해산물 좋아하니까 보면 좋아할 거 같다고 줬어. 보랴 착해. 멋있고. ”
“ 너, 너... 거기 가지 말랬잖아! 투레츠키 그 자식 위험하다고 했잖아! ”
“ 바냐가 아니라 보랴가 준 거라니까. ”
“ 하여튼! 그 자들 다 똑같아! 앞으로는 거기 가지 마! 보랴고 뭐고 그놈도 만나지 말고! ”
“ 아 지겨워. 다들 나한테 이거 하지 마라, 누구 보지 마라. 으윽! ”
어쨌든 왕재수는 그에게 프랑스에서 출간된 생선요리책을 떠맡겼고, 베르닌은 페이지를 넘겨서 연어와 새우로 만들 만한 요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오븐에 집어넣기만 하면 된다는 설명을 보고 혹해서 해산물 야채 구이 레시피를 읽어보았다.
별로 어렵지 않은 것 같아서 그는 열심히 준비를 했다. 오븐용 쟁반에 손질한 연어와 새우들을 깔고 왕재수가 주말에 사왔던 토마토를 좀 잘라서 넣고 마늘과 양파도 썰어서 넣었다. 야채를 많이 넣으면 좋을 것 같아서 감자도 잘라서 깔았다. 올리브유가 없어서 해바라기씨유를 뿌렸다. 둘 다 기름이니 별 차이 없겠지 싶었다. 레몬도 썰어서 생선 위에 올렸다. 오븐에 넣고 30분 동안 구우라고 되어 있었다. 만들어 놓고 왕재수가 오면 살짝 데우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예열을 하고 오븐 다이얼을 돌렸다.
서서히 맛있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좋은 책이었다. 건달 투레츠키의 동업자인데다 깡패가 분명했지만 그래도 보랴가 요리 쪽에는 일가견이 있는 게 분명했다.
오븐을 켜고 10분쯤 지났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베르닌은 문을 열어주었다. 왕재수가 목도리로 얼굴을 칭칭 감은 채 씩씩거리며 들어왔다.
“ 왜 너 혼자 와? 바이올린 아저씨는? ”
“ 악기에 문제가 있어서 수리공한테 갔어. 시간 오래 걸린다고 아예 그 집에서 잔대. ”
“ 어, 그럼 너 어떻게 왔어? 차도 안 가져갔었잖아. 설마 걸어온 거야? 이렇게 추운데? ”
“ 의사 선생님 차로. ”
“ 의사 선생님은 또 왜! 너 또 아팠어? ”
“ 아, 뭘 자꾸 꼬치꼬치 물어. 으윽! ”
왕재수는 왈칵 화를 냈다. 목도리를 한 손으로 풀어서 내팽개쳤다. 그리고는 코트 단추를 풀더니 한 손으로 낑낑대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
“ 너 왜 그래? 왜 한 손만 써? 이것도 무슨 춤 연습이야? ”
“ 왼팔 다쳤어. ”
“ 엥? ”
베르닌은 왕재수의 코트를 벗겨주었다. 정말 왼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심지어 붕대 위로 희미하게 피가 배어나와 있었다. 베르닌은 깜짝 놀랐다.
“ 야, 너 괜찮아? 심하게 다친 거 같은데... ”
“ 아니야, 많이 다치진 않았어. ”
“ 그치만 붕대도 이렇게 두툼하게 감고. 피까지 비치는데... ”
“ 근육은 괜찮아. 심한 상처는 아닌데 살갗이 찢어져서 피가 좀 많이 나서 그래. ”
“ 뭐야? 너 피부 엄청 챙기잖아. 흉터라도 남으면 어떡해! ”
“ 그러게, 내 백옥 같은 피부에 이런 흠집이 나다니... 그래도 의사 선생님이 지혈해주고 드레싱 해줘서 흉은 지지 않을 거라고 걱정하지 말래. 선생님 아니었으면... 으윽... ”
“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쩌다 이랬어! ”
“ 시골이라서 그렇지 뭘 어쩌다 이래! 아, 정말... 속상해 죽겠네. 오늘 진짜 재수 옴 붙었나봐. 으윽! ”
왕재수는 부르르 떨더니 소파에 몸을 던지고 벌렁 드러누웠다. 분을 참을 수 없는지 계속 씩씩거렸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심지어 욕까지 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심한 욕설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으므로 깜짝 놀랐다.
“ 어, 너 왜 그래. 극장에서 많이 힘들었어? 아니면 많이 아픈 거야? 붕대 갈아줄까? 피 배어나오는 거 같은데... ”
“ 아니야, 붕대는 자기 전에 갈면 된다고 했어. 아, 나쁜 자식들. 에잇! ”
“ 저... 너 검열국 사람들 때문에 그래? 오늘 극장에 와서 간섭했다면서. ”
“ 잘도 아네. 역시 감시 요원이라 다 아는구나. 너도 다 똑같아. 앞잡이! ”
베르닌은 싸잡혀 비난을 받는 게 속이 상했지만 왕재수가 화를 내는 것도 이해가 갔기 때문에 꾹 참았다. 왕재수는 생각할수록 분한지 숨을 몰아쉬며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 도대체 그 사람들이 얼마나 심하게 굴었기에 그러니? 너 원래 이렇게 욕 안 하잖아. 너 같은 천재를 몰라줘서 그러는 거라고 비웃고 끝냈잖아. ”
“ 오늘은, 오늘은 전부 다 엉망이니까 그렇지... ”
“ 왜? 다른 일도 있었던 거야? ”
“ 어... 아침부터... 오늘 진짜 이상해.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아침에 정신 차리려고 극장 카페에 갔는데 아르카지 그 인간이 내 식성 뻔히 알면서 차에 설탕을 잔뜩 타서 준 거야! 얼마나 단지 혀가 마비되는 줄 알았어! 그때부터 다 꼬였어. 가뜩이나 오늘 리허설에 공연에 정신없는 날인데 아침부터 레베진스키가 면담 좀 하자고 들어오더니 우리 극장에 내 신작이 안 어울린다고 헛소리를 하는 거야. ”
“ 레베진스키가 누구야? ”
“ 있어, 철밥통 안무가. ”
“ 아, 생각났다. 그 사람 너 오기 전까지 실세였어. 너 안 왔으면 원래 이번에 감독 유력 후보였다고... ”
“ 그 인간 완전 얼간이야! 레퍼토리도 몇 개밖에 모르고 안무가라고 이름만 달았지 십몇 년 동안 자기가 안무한 거라곤 어린이 발레 5분짜리 딱 하나밖에 없는 허풍선이라고! 그러면서 내가 뭐 하려고만 하면 그건 우리 극장에 안 어울리느니, 우리 애들 능력으로는 못 한다느니 트집만 잡고 애들 연습도 방해하고! 진짜 확 잘라버리고 싶은데 극장장이 그 자식을 감싸고돌잖아! ”
“ 어, 그렇구나. 그래서 오늘도 너한테 불평불만 늘어놓은 거야? ”
“ 그냥 불평만 했으면 무시할 수 있는데 이 자식이 갑자기 나한테 설교를 하잖아! 자기가 나보다 스무 살이나 더 많으니까 인생 선배로서 훈계 좀 하겠다면서, 어린 게 인생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가뜩이나 나 반동분자라서 애들한테 나쁜 물 들일까봐 다들 걱정하는데 왜 그렇게 안하무인이냐고, 이번 신작도 완전 양키놈들 스타일 아니냐고, 인생 경험 많은 자기 얘기 들으라고 막 헛소리를 하는 거야! 바보 멍충이 개자식이... ”
“ 그래서, 싸운 거야? ”
“ 그런 얼간이하고 뭘 싸워. 하도 개소리를 해대니까 지겨워서 그냥 음악 크게 틀어버렸어. 그랬더니 자기를 무시한다는 둥 나보고 싸가지 없는 놈이라는 둥 감독이면 다냐는 둥 소리 지르더니 두고 보자면서 나가버리더라고. 완전 기분 잡쳤어. ”
“ 그랬구나. 그래도 잘했어. 그런 사람하고 소리 높여 싸워봤자 득 될 거 없으니까. ”
“ 근데 그 자식이 검열국에 전화를 한 거야. 내 작품에 이념적 문제가 있다고 찔렀어. 그래서 그거 리허설하고 있는데 검열국 개자식들이 둘이나 와가지고 막 방해하고 시비 걸고... 이번 거 정말 그런 내용 아니란 말이야. 그냥 남자애들이랑 여자애들이 서로 좋아했다가 싸웠다가 다시 좋아하고 뭐 그런 진짜 통속적인 내용이라고. 우리 애들이 하도 기본기도 없고 고전 발레 몇 개밖에 모르니까 새로운 동작들 좀 배워보라고 일부러 재밌게 만든 건데 그걸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고... 그래서 대판 싸우고 리허설도 중간까지밖에 못 했어. ”
“ 그랬구나, 진짜 화났겠다. 근데 너... 그 사람들한테 뭐라고 했어? 설마 꼬투리 잡힐 말 한 거 아니지? ”
“ 뭘 뭐라고 해! 앞잡이들, 병신들, 얼간이들! 예술이랑 담 쌓은 멍청이들이라고 해줬지. 꼬투리 잡든 말든! ”
“ 야, 아무리 화나도 참아야지. 또 이상한 누명 쓰면 어쩌려고 그러니. 가뜩이나 넌 반체제주의자라고 낙인도 찍히고... 그것도 검열국에서 온 사람들한테 그러면 어떡해. 공공기관 쪽 사람들 앞에선 특히 조심해야지! 나니까 가만히 있는 거지 딴 데서는 말조심하라고 했잖아. ”
“ 으윽, 숨 막혀!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 바보를 바보라고 말도 못하니? ”
왕재수는 팔을 다친 것도 잊은 듯 두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쳤다. 그러다가 금방 왼팔을 부여안고 끙끙댔다.
“ 아야... ”
“ 팔은 왜 다친 건데! 그 사람들하고 주먹질했어? 그건 아니라며... 무용수들이 막아줬다며. ”
“ 너 어떻게 그런 것까지 다 알아? 극장에 도청기 말고 카메라도 달았어? ”
“ 아니. 아까 렐랴가 왔다가 얘기해주더라고. 취재 때문에 갔었다며. ”
“ 아, 맞다. 렐랴 왔었는데 한 마디도 못했어. 그 난리가 나서. 좀 미안하네, 가는 것도 몰랐어. ”
“ 너 이거 심각해. 그 사람들이 팔 이렇게 만든 거야? 정말 그런 거면 내가 문제 제기할 거야. 넌 우리 소관으로 돼 있으니까 검열국에서 너한테 손대면 안 된다고 할 거야. 그것도 폭행이라니,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
“ 어, 가만 안 둔다니 고맙긴 한데 그 자식들이 그런 거 아니야. 오늘 공연 때문에 오후에 드레스 리허설했거든. 근데 그때 수리 공사할 때 그 인부 자식들 기억나? 그 개자식들 보드카만 퍼마시고 뺀질대더니 무대 쪽 마무리를 제대로 안 하고 간 거야! 발레리나들 의상 다 입고 그쪽에 서 있는데 배경 장치 톱니가 툭 튀어나오면서 막 돌아가는 바람에 하마터면 애들 크게 다칠 뻔 했어! ”
“ 헉, 정말 큰일 날 뻔 했구나! 너 그 장치에 다친 거야? ”
“ 응. 그거 멈추다가... ”
“ 그걸 왜 네가 멈추니! 무대 장치 담당자 있을 거 아냐! 기술자한테 맡겨야지 왜 네가... ”
“ 그럴 겨를이 없었단 말이야! 그게 엄청 크고 무거운 수레바퀴 같은 건데 고정 장치가 빠졌는지 갑자기 막 돌아가면서 굴러 와서 애들 덮칠 뻔 했단 말이야. 내가 잽싸게 몸으로 막았는데 계속 톱니가 돌아가서 팔이 좀 찢어졌어. ”
“ 이 멍청아! 다른 사람들보고 얼간이라고 할 거 하나도 없어! 그냥 소리 질러서 애들 피하게 했어야지! 그걸 왜 네가 막아! 네가 무슨 힘이 있다고 수레바퀴를 멈추니! 삐쩍 말라서 갈대 같은 게... 거기 깔렸으면 어쩔 뻔 했어! ”
“ 야, 넌 무대가 어떤 건지 몰라서 그래! 그 상황에서 소리만 지르면 다 해결되는 줄 아니? 몇 분의 일초 만에 사고 난단 말이야! 그럼 레이스 쪼가리 하나 달랑 걸친 가냘픈 여자애들이 떼거지로 톱니에 깔리는 거 보고만 있으란 말이야? 난 심지어 무용수도 아니고 감독인데! 걔들 다 내가 책임져야지! ”
베르닌은 매우 감명을 받았다. 왕재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 왜! ”
“ 어, 아니... 그냥. 난 네가 맨날 자기 생각만 하는 줄 알았어. ”
“ 내 생각하는 거야! 애들 다치면 무대도 엉망 되고! 그럼 내 어마어마한 명성에 누를 끼치잖아! 어휴! 망할 놈의 시골... 극장도 엉망, 무대도, 장치도 다 엉망이야! 덕분에 팔만 다치고... 피 철철 나고... ”
“ 그래서 의사 선생님 왔던 거야? ”
“ 응. 난 그냥 극장 의료실에 가려고 했는데 여자애들이 호들갑 떨면서 의사 선생님한테 전화해서 막 울고불고... 그래서 의사 선생님 와서 나만 막 혼내고... 오늘 완전 재수 옴 붙었어. 우리 애들 너무 간이 작아. 리허설 때 검열국 놈들 때문에 그 난리치고, 무대 장치 때문에 또 난리... 그러고 났더니 애들이 놀라서 몸이 다 굳어가지고... 공연도 완전 망했어. 빅토르 그 자식이 문제야. 들어 올리는 건 이제 되는데 여자를 제대로 돌려주지를 못해. 놓쳐서 레나가 넘어졌어... 제일 중요한 순간에 엉덩방아 찧고... 관객들 다 웃고... 진짜 창피했어. 죽고 싶었어. 으윽... 어떻게 왕자란 놈이 공주를 넘어뜨려! 그 자식 앞으로 한 달 동안 역 다 뺏고 특훈이야! ”
“ 야, 너 의사 선생님이 일주일에 3일만 출근하고 절대 과로하지 말라고 했잖아. 근데 심지어 다치기까지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집에 와서도 일 생각만 하고 있냐! ”
“ 그럼 무슨 생각을 하니! 가뜩이나 시골이라 다른 거 할 것도 없는데. ”
“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쉬어야지! 생각 너무 하면 몸에 나빠! ”
“ 어휴, 너까지 똑같은 말만 해! 아까도 의사 선생님이 붕대 감아주면서 혼냈는데. 유라도 그러고... ”
“ 유라가 누구야? ”
“ 있어, 그런 사람! ”
베르닌은 문득 레닌그라드에서 만났던 의사가 떠올랐지만 입을 다물었다. 왕재수는 실컷 떠들고 나자 분이 풀린 건지, 아니면 지친 건지 한결 누그러졌다.
“ 근데 엄청 맛있는 냄새 나. 이거 무슨 냄새야? ”
“ 어, 맞다. 나 오늘 진짜 운 좋은 날이었어. 국장도 휴가에 리자가 점심 사주고, 나보고 그렇게 별로인 남자는 아니라고 하고. 렐랴가 와서 같이 차도 마시고. 돈도 줍고, 생선 가게에서 이벤트에도 당첨되고. 돈 주운 김에 너 좋아하는 연어랑 새우 사왔어. 그 요리책에 레시피 있더라고. 해산물 야채 오븐 구이래. 나도 처음 해 본 건데 맛이 있을지 모르겠네. ”
“ 우와, 연어랑 새우? 정말? 해산물 야채 구이 나 진짜 좋아하는데. 이런 시골에서 그런 호화스런 음식을 먹을 수 있다니! ”
왕재수는 화났던 것도 잊고 소파에서 구르듯 달려 내려갔다. 부엌으로 가서 오븐 문을 열어보았다. 베르닌은 음식이 새까맣게 탔거나 완전히 망했을까봐 전전긍긍했지만 왕재수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탄성을 질렀다.
“ 우와! 그럴싸한데! 전에 먹어본 거랑 비슷하게 생겼어. 레몬도 얹었네. 꺼내봐! 빨리 먹어보자! ”
베르닌은 쟁반을 꺼냈다. 좀 뭉개지고 감자가 들러붙긴 했지만 그래도 요리책의 사진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색깔도 분홍 빨강 하양 노랑 등 화려했고 새우 때문인지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가 솔솔 풍겼다. 소금을 약간 뿌린 후 쟁반 째 들고 가서 식탁에 올려놓았다. 왼손을 쓰기 불편한 왕재수를 위해 연어를 한입 크기로 잘라 주고 새우 껍질도 전부 까 주었다. 왕재수가 좋아했다.
“ 아, 나 정말 여기선 새우 못 먹는 줄 알았어. 시골이라... ”
“ 야, 우리도 있을 건 다 있어! 바깥에서 식료품 트럭 들어오잖아! ”
“ 그래도 여긴 바다가 없으니까 해산물은 비싸잖아. ”
“ 그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과일이랑 야채는 너네보다 훨씬 낫지 않아? ”
“ 응, 과일은 더 맛있어. 특히 사과. 그래서 사과파이가 맛있나봐. ”
왕재수가 맛있게 먹는 것을 보자 베르닌은 기분이 좋았다. 처음 만든 음식인데, 그것도 프랑스 요리책에 나온 음식인데 성공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역시 운이 좋은 날이었다.
맛있는 저녁을 먹고 나자 왕재수는 기분이 좀 나아진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베르닌은 렌지에 찻물을 얹은 후 렐랴가 준 파이와 케익 상자를 들고 왔다.
“ 이거 렐랴가 너 먹으라고 어제 구웠대. 차랑 같이 먹어. ”
“ 나 단 거 안 먹잖아. ”
“ 한 조각만 먹어봐. 일부러 너 좋아하는 나폴레옹 케익 구운 거래. ”
“ 나폴레옹? 렐랴 대단하다. 만들기 어려운 거라던데. ”
왕재수가 처음으로 렐랴의 솜씨에 관심을 보였다. 베르닌이 분홍색 리본을 풀자 근사한 나폴레옹 케익과 나무열매 파이가 나타났다. 부드러운 황금빛 서양배 슬라이스가 얹혀 있는 케익은 윤기가 자르르 돌았다. 선명한 빨간색과 보라색 나무열매들이 빼곡하게 뿌려져 있는 파이도 정말 근사해 보였다. 베르닌은 감탄을 멈출 수가 없었다.
“ 진짜 렐랴는 대단해.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니까. 똑똑하지 세련됐지 요리도 잘하지... 어떻게 세상에 그렇게 완벽한 여자가 있을 수가... ”
“ 렐랴가 그 정도까지야? 난 잘 모르겠던데. 레닌그라드에서도 그런 스타일 많이 본 것 같은데. ”
“ 야, 너 지금 도시 놈이라고 자랑하냐? 나도 모스크바에서 공부했다고! 모스크바에도 세련된 여자들 많았어. 근데 렐랴가 제일 예쁘단 말이야! ”
“ 어, 왜 성질내. 누가 렐랴 안 예쁘대? 난 그냥, 내 취향엔 너무 글래머... ”
“ 야! 넌 맨날 삐쩍 마른 발레리나들하고만 다녀서 그렇지! 렐랴가 얼마나 완벽한데! 완전 여신 같은... ”
“ 아, 그럴지도 모르겠네. 나한테야 글래머가 무슨 소용. 근데 그렇게 좋으면 잘 좀 해보지 왜 맨날 뒤에서 예쁘다고만 하고 말도 못 거니? ”
“ 올라가지 못할 나무라서... 렐랴 엄청 인기 많아. 쫓아다니는 남자만도 한 트럭에 전부 무슨 정치인에 공장장에 노멘클라투라 가문에... 나 같은 게 어떻게 감히 그런 여자를 넘보니. 내 주제가 있지. ”
“ 네가 뭐! 어때서! 학벌 좋아, 키 커, 뭐가 딸려! 촌스럽긴 하지만 그거야 꾸미면 되는 거고! 얼굴은 그냥 그렇지만 남자가 얼굴이 전부는 아니잖아. 근데 너 책상물림이라 뽀뽀는 못할 거 같다... 그건 좀 치명적... ”
“ 야, 넌 내 편을 들어주는 거니, 아니면 나 별로라고 확인사살 하는 거니! ”
“ 너는 별로 아냐. 별로는 바냐 같은 놈이 별로지. ”
“ 투레츠키 안경 벗으니까 엄청 잘생겼던데... ”
“ 에이 그깟 게 뭐가 잘생겼어! 얍삽한 자식... 바냐 그놈보단 네가 백 배 나아! 보랴라면 몰라도... ”
베르닌은 리자에 이어 왕재수도 자기 편을 들어줘서 굉장히 기뻤으나, 그 마지막의 ‘보랴’ 운운에 김이 팍 샜다. 역시 왕재수가 남자를 보는 미적 기준은 뭔가 이상했다. 믿을 게 못 됐다. 그래서 고개를 저으며 나폴레옹 케익을 한 조각 잘라서 왕재수의 접시에 덜어주었다.
“ 먹어. 너 이거 좋아한다며. 렐랴가 일부러 너 먹으라고 만든 거래. ”
“ 맞아, 나 이거 진짜 좋아해. 학교 다닐 때부터 좋아했어. 근데 어떻게 알았을까? 여긴 시골이라 이런 거 못 먹을 줄 알았는데. 렐랴한테 고맙다고 전해주렴. ”
“ 네가 직접 얘기해. 전화하든 만나든. 그 정도 성의는 좀 보여라. 렐랴가 그렇게 너 좋다고 이것저것 해다 바치는데. 그게 얼마나 영광인지 아냐? ”
“ 싫어. 하나 받아주기 시작하면 여자가 희망을 갖는단 말이야. 사귈 것도 아닌데 그러면 안 돼. ”
“ 그래도 렐랴는... ”
“ 알았어! 나중에 극장에서 만나면 고맙다고 할게! ”
왕재수는 포크로 케익을 크게 잘랐다. 베르닌은 이미 나무열매 파이를 입 안 가득 물고 있었다. 정말 맛있었다. 온몸이 녹아버릴 것 같았다. 왕재수는 케익을 입 안에 넣었고 두 눈을 감은 채 천천히 맛을 음미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안색이 변하면서 화들짝 놀랐다.
“ 우욱, 이게 뭐야! 우웩! ”
왕재수는 입 안의 내용물을 접시 위에 그대로 퉤퉤 뱉어 버리더니 부르르 떨고 펄쩍 뛰었다. 간신히 컵을 집더니 꿀꺽꿀꺽 물을 마셨다. 하지만 곧 안색이 안 좋아지더니 손으로 입을 막고 ‘우욱’ 하면서 화장실로 뛰어갔다. 베르닌은 멍해져서 쟤가 대체 왜 이러나 하고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왕재수가 손등으로 입을 닦으며 돌아왔다.
“ 야, 지저분하게 이게 무슨 짓이야! 렐랴가 정성스레 구워준 케익을 그것도 접시에 뱉지를 않나... 레닌그라드에선 식사 예절을 이렇게 배웠냐! ”
“ 우욱... 이거... 이거 대체 뭐야! 뭘 넣은 거야! 으아 속 뒤집혀... ”
“ 왜 그래? 맛이 이상해? ”
“ 이건 나폴레옹이 아냐! 이렇게 역한 건 처음 먹어봐! 이상한 기름 냄새 나고... 우욱... ”
베르닌은 포크로 케익 귀퉁이를 잘라서 먹어보았다. 동물성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살짝 역하면서도 미끄덩미끄덩하고 느끼하면서도 어딘가 구수한 게 익숙한 맛이 감돌았다. 그는 조금 더 먹어보았다. 입 안에 케익을 넣고 이리저리 굴리며 크림을 녹여 보았다. 고개를 끄덕였다.
“ 아... 네 말 맞아. 이거 돼지기름이네. 엄청 많이 넣었네. 네 입맛엔 안 맞겠다. ”
“ 돼지기름... 으윽, 어째서... 어째서 케익에 돼지기름이 들어가는데! ”
“ 렐랴 감기 걸려서 냄새 못 맡는다더니.. 신선한 버터 잔뜩 써서 만들었댔는데 버터랑 돼지기름이랑 헷갈렸나보다. 돼지기름 굳어 있으면 색깔도 비슷하고... ”
“ 으으, 속 울렁거려 미칠 거 같아. 오늘 진짜 끝까지 왜 이러니... 야, 넌 왜 그 끔찍한 걸 계속 먹는 거야? ”
“ 어, 난 괜찮아. 이것도 맛있어. ”
“ 냄새 장난 아니잖아! 한 입 넣는데 정말 내장이 다 뒤집히는 줄... ”
“ 우린 어릴 때부터 음식에 돼지기름 많이 넣어 먹어서 괜찮은데. 이것도 은근히 구수하고 중독성 있는걸. 역시 렐랴는 대단해. 버터 대신 돼지기름 넣었는데도 이렇게 맛있다니. ”
“ 으아, 정말 너... 그건 렐랴한테 콩깍지가 껴서 그런 거야! 우욱... 나 그만 갈래. 속 안 좋아. 토할 거 같아. 시골 싫어, 흐흑... ”
왕재수는 냄새도 맡기 싫은 듯 손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나가버렸다. 베르닌은 혀를 찼고 설거지를 한 후 여유롭게 쉬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 * *
한밤중에 베르닌이 곤하게 자고 있는데 누군가가 침실 문을 똑똑 두들겼다. 꿈인 줄 알고 무시했지만 노크 소리가 계속 나서 베르닌은 괴로워하며 눈을 떴다.
“ 누구세요? ”
“ 저... 나야. 나 들어가도 돼? ”
“ 으엉? ”
베르닌은 나이트 램프를 켰다. 간신히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문을 여니 하얀 잠옷 차림의 왕재수가 베개를 들고 서 있었다. 베르닌은 꿈인가 싶어 눈을 비볐다.
“ 어... 너 뭐야.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
“ 흑... 나 너무 무서워. 오늘만 여기서 자면 안 돼? 엉엉... 혼자 못 자겠어. ”
“ 뭐가 무섭다는 거야? 왜 그러는데! 혹시 누가 왔었어? 수상한 사람이라도? 아니면 투레츠키 그 자식이... ”
“ 흑흑... 너무 무서운 꿈 꿨어. 나쁜 놈들이 와서 막 때리고 무섭게 하고 깜깜한 데 가둬놓고... 엄청 깊고 캄캄한 동굴 같은 데 갇혔는데 눈알이 주렁주렁 달린 뱀이 나와서 날름날름하면서 잡아먹으려고 하고... 막 바퀴벌레랑 곱등이가 사방에서 쏟아지고... 도망치려고 했는데 움직이지도 못하고 뱀이 옷 속으로 막 기어들어오고... 근데 아무리 깨도 다시 꿈속이고, 계속계속 때리고 가두고 뱀 나와. 엉엉... 무서워. 소리 질렀는데 아무도 안 와. 목소리도 안 나와, 흐흑... ”
“ 어, 너 가위 눌렸구나. 하루종일 운 나쁘고 고생했다더니 그래서 꿈자리도 안 좋았나보다. 이제 괜찮아. 깼으니까 그런 꿈 안 꿀 거야. ”
“ 아니야... 아까도 깼다가 다시 잤는데 또 무서운 꿈 꿨어. 무서워... ”
왕재수가 훌쩍훌쩍 울었다. 베르닌은 왕재수를 일단 침실로 데리고 들어와서 침대에 앉혔다. 램프 불빛 아래에서 보니 얼굴이 파랗게 질린 데다 눈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 눈도 퀭했고 뺨도 쑥 들어가 있었다.
“ 어, 몇 시간 만에 왜 이렇게 얼굴 살이 쑥 빠졌냐! ”
“ 아까 계속 토했어. 그 기름 케익... 흐흑... 너무 아팠어. ”
“ 난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어휴... 가만 있어봐. ”
이마를 짚어보자 열도 났기 때문에 베르닌은 해열제를 가져왔다. 생각난 김에 팔의 붕대도 갈아주었다. 붕대 안쪽에 피가 많이 묻어 있었다.
“ 야, 너 이거 자기 전에 갈면 된다더니 안 갈았구나! ”
“ 어... 아까 토하느라 까먹었어. ”
“ 상처에서 열이 나서 아픈 거잖아! 그래서 꿈도 안 좋게 꾼 거야! ”
“ 아야... ”
“ 가만히 있어. 어, 많이 찢어졌었구나. 꿰맸잖아. 몇 바늘이나 꿰맨 거니. 이래놓고 별 거 아니라고. ”
“ 춤 출 땐 뼈도 부러지고 근육 상한 적도 있었는데 이 정도면 별 거 아닌 거지. 아야! ”
“ 그럼 별 거 아니라면서 아프다고 엄살은 왜 부려! ”
“ 별 거 아닌 거랑 아픈 건 다르단 말이야! ”
붕대를 갈아주고 해열제를 먹인 후 베르닌은 물에 적신 수건으로 왕재수의 이마와 얼굴을 닦아 주었다. 왕재수는 아직도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이따금 부들부들 떨면서 나쁜 놈들과 동굴과 뱀과 바퀴벌레가 무섭다며 훌쩍훌쩍 울었다.
“ 야, 이제 진정해. 그거 꿈이야. 괜찮아. 나도 여기 있잖아. ”
“ 그치만 누우면 또 나올 거야... ”
“ 이제 안 나와. 붕대도 갈고 약도 먹었잖아. 꿈 안 꾸고 잘 거야. ”
“ 무서워, 엉엉. 로만 보고 싶어. 왜 하필 오늘 바이올린은 망가뜨려서... 집에 가기 싫어. 혼자 있기 싫어. ”
“ 어휴, 이거 완전 애기가 따로 없어! 우리 집에서 재워 줄 테니까 무서워하지 말고 자! ”
“ 그치만... 무서운 꿈 꾸면 옆에 누가 있어야 잘 수 있는데. 흑흑... ”
“ 내가 있어줄 테니까 자라고! ”
“ 너는 꼭 안고 못 자잖아... ”
“ 어휴, 안아주기까지 해야 되냐! 그건 좀 심하잖아! ”
“ 소리 지르지 마, 엉엉... 무서워... 꿈에서도 막 그놈들이 소리 질렀어. ”
왕재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훌쩍거렸다. 생각할수록 무서운지 눈물콧물을 줄줄 흘리며 울었다. 베르닌은 처음에는 자다 깨서 짜증이 났지만 왕재수가 서럽게 우는 걸 보니 안됐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깨를 안아주고 등을 토닥토닥하며 달래 주었다.
“ 괜찮아, 다 꿈이라니까. 이제 자자. ”
“ 또 나오면... ”
“ 에이, 이제 안 나와. 내가 옆에 있어줄게. ”
“ 넌 옆에 누워서 못 자잖아. 난 무서울 땐 꼭 안아줘야 자는데. ”
“ 어휴, 해줄게! 안아주면 되잖아! 너 잠들 때까지만! ”
베르닌은 왕재수를 침대에 뉘어주고 옆으로 기어들어갔다. 전에 몸살이 나서 오한으로 괴로워할 때 왕재수가 안아주고 녹여줬던 게 생각났다. 엉거주춤하게 옆으로 누워서 한 팔로 왕재수의 몸을 감싸주었다.
“ 됐지? 이제 자. 하나도 안 무섭네. 자고 나면 아프지도 않고 기분도 좋아질 거야. 자자. ”
“ 다닐, 나 오늘 정말 힘들었어. 왜 이렇게 나쁜 일만 생길까... ”
“ 누구나 그런 날이 있는 거야. 오늘 액땜했으니까 내일은 괜찮을 거야. ”
“ 칫, 그때 뱀 껍질 나왔을 때도 액땜했으니 좋아진다 했잖아. 근데 하나도 좋은 일 안 생기고... 시골... ”
“ 이제 생길 거야. 나 오늘 엄청 운 좋은 날이었으니까 내 행운 너한테 나눠줄게. 내 행운 받아서 너도 좋아질 거야. ”
“ 가뜩이나 맨날 국장한테 들들 볶이기나 하고 벌목공도 못한다고 질질 짜면서 그깟 쥐꼬리만한 행운 누굴 나눠준다고... ”
“ 야, 그래도 너 나눠줄 만큼은 있어! ”
“ 칫, 나한테는 엄청 많이 줘야 되는데! 난 천재니까... ”
“ 내 거 먼저 조금 가져가고 딴 사람들한테서도 받으면 되잖아. 넌 인기 많으니까 다들 나눠줄 거야. ”
“ 맨날 유치한 말만 하고... ”
왕재수는 두려움이 많이 가셨는지 고양이처럼 팔다리를 쭉 폈다가 다시 웅크렸다. 베르닌의 어깨를 베고 몸을 기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꼭 사모바르처럼 뜨끈뜨끈했다. 열이 나서 그런가 하고 걱정이 좀 됐지만 점차 더 따끈해지는 것을 보니 잠이 와서 그런 것 같았다. 베르닌은 자유로운 왼팔을 쭉 뻗어 램프 불을 껐다. 어깨가 살짝 저렸지만 움직이면 간신히 진정된 왕재수가 놀라서 또 울까봐 가만히 있었다. 잠들었나 싶었는데 짙은 어둠 속에서 왕재수가 졸린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 고마워. ”
“ 뭐가? ”
“ 쥐꼬리만한 행운 나눠줘서. ”
“ 끝까지 쥐꼬리래. ”
“ 저녁은 맛있었어. ”
“ 그래. 주말에 다른 거 또 해줄게. 생선가게 특별이용권... ”
“ 나 오늘만 이러는 거야. 진짜야. ”
“ 알았어. 누가 뭐래. ”
“ 그러니까 가지 말고 있어, 응? ”
“ 어... 너 잠들면 소파로 가려고 했는데... ”
“ 나 잘 때도 있어주면 안 돼? 그래야 꿈 안 꾸지. ”
“ 알았어. ”
왕재수는 안심하고 잠들었다. 베르닌은 소파로 옮겨갈까 하다가 왕재수가 또 악몽을 꿀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냥 침대에 남아 있었다. 서서히 졸려왔다. 그런데 밤중이라 그런지 출출하기도 했다. 남아 있는 나폴레옹 케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 맛있었는데 이 녀석은 왜 그렇게 질색을 할까. 심지어 토하기까지 하고. 너무 오냐오냐 컸다니까. 바보, 돼지기름이 얼마나 맛있는데. ’
하여튼 잘된 일이었다. 왕재수는 입도 안 댈 테니까 남은 나폴레옹 케익은 그가 다 먹을 수 있었다. 역시 운 좋은 날이었다.
FIN
- 2015. 3. 26 ~ 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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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닌이 만든 해산물 오븐 구이는 엄밀히 말하자면 프랑스 요리라기보단 지중해 근방이나 해산물이 풍부한 동네에서는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요리에 가깝다. 베르닌이 쓴 재료야 소련에서 긁어모은 거니까 신선도도 좀 떨어지고 종류도 별로 다양하지 않다만..
베르닌이 만든 것과 재료는 좀 다르지만 하여튼 이런 거다. (출처는 구글)
나도 이거 좋아해서 이번 주말에 만들어볼까 생각 중. 얼마 전부터 해먹고팠는데 우리집 오븐에 들어갈만한 커다란 트레이가 없어서...금속 트레이는 있는데 그건 씻기가 귀찮아서..
..
왕재수와 나폴레옹 케익 이야기는 사실 예전에 내가 동대문의 어느 러시아 빵집에서 샀다가 피를 본 나폴레옹, 일명 '기름케익' 사건에서 소재를 따왔다 :) 그 얘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2011
그 기름케익 사진.
렐랴의 명예를 위해서 얘기하자면.. 그녀가 원래 기름케익을 만드는 사람은 아니고.. 원래는 이렇게 근사하게 만드는데 ㅠㅠ
(페테르부르크의 디저트 카페 고스찌의 서양배 나폴레옹 : http://tveye.tistory.com/2052)
..
이야기는 18편으로 이어진다 :) 그건 다음주에..
..
댓글은 언제나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추가
가엾은 리자님과 치즈홍차님께서 궁금해하셨던 사과소스 돼지고기 구이 사진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3663
** 추가 2
베르닌이 왕재수에게 만들어준 해산물 야채 오븐 구이, 토끼 작가 버전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3665
(재료 등 거의 단추가 만든 것과 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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