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무의 슬픔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series : 서무의 슬픔2015. 4. 30. 08:50
조금 우울했던 18편에 이어, 서무의 슬픔 19편은 다시 베르닌과 왕재수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19편에서는 이제껏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던 극장 예술감독이자 발레단의 리더, 그리고 왕년의 최고 무용수였던 왕재수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우리의 단추청년 베르닌이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번 편에는 왕재수가 감독으로 있는 극장이 주요 배경이라 발레 얘기가 좀 나오는데 발레에 대해 잘 몰라도 조금씩 상상하며 읽을 수 있도록 쉽게 풀어서 써보려고 했다.
... 제목의 '푸고비체프'는 러시아어 '푸고비차'에서 왔다. 단추라는 뜻이다 :)
.. 도입부에서 왕재수가 언급하는 '당직실 귀신'에 대한 얘긴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의 그 귀신 얘기다 :0 (http://tveye.tistory.com/3437)
왕재수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건 바퀴벌레 곱등이 뱀껍질. 그리고 베르닌이 무서워하는 건 당직실 귀신~~
그럼 재밌게 읽으세요~~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어느덧 2월말이 되고, 왕재수는 시골과 바퀴벌레 곱등이 뱀껍질의 괴로움을 이겨내며 예술감독으로서 극장과 발레단을 제대로 이끌어보려고 애를 쓰는 중이지만, 불여우가 항상 눈엣가시였던 스페호프 국장이 드디어 방해공작을 위해 발벗고 나서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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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19
서무의 슬픔
-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2월말이 되자 왕재수는 굉장히 바빴다. 집에 들어오는 날이 거의 없었다. 월요일에 베르닌은 밤중에 극장으로 왕재수를 데리러 갔다. 그 날은 공연도 없는 날인데 왕재수는 무대 도면을 펼쳐놓고 무슨 작업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는 도면을 둘둘 말아 한쪽에 던져버리고 왕재수에게 패딩을 뒤집어씌운 후 억지로 끌고 나와 차에 태웠다. 한 번만 더 극장에서 자거나 밤을 새기만 하면 검은 숲에 가서 뱀 껍질도 모자라 겨울잠을 자고 있는 뱀들을 파내와 감독실 여기저기에 풀어놓겠다고 협박을 했다. 왕재수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지 부르르 떨면서 항의했다.
“ 이 악마! 너무해! 치사하게, 남의 약점을 잡아서 막 협박하고... 너한테 당직실 귀신 데려다 주면 좋냐? ”
“ 난 의사한테 쉬라는 말 들은 적 없거든! 너 정말 말 안 들을래? 의사 할아버지가 과로하지 말고 밥 많이 먹고 일주일에 사흘만 출근하랬잖아. ”
“ 많이 먹고 있잖아! 요즘은 삼시세끼 다 먹는단 말이야. 너 아니면 로만이 챙겨주잖아! 그리고 지금은 사흘 출근 불가능해. 일주일에 공연이 여섯 번 있는데 그 중 발레가 네 번이야. 애들 연습도 시켜야 하고 신작 준비도 해야 하고, 일요일에는 돈키호테도 새로 올린단 말이야. 중요한 사람들도 오고. 그러니까 지금은 어쩔 수 없어. 일요일 지나면 의사 선생님 말대로 할 거야. 진짜야. 뱀은 안 돼, 제발... 어헝... ”
왕재수는 화를 내다가 결국 울먹이면서 베르닌의 어깨를 잡고 매달렸다. 어지간히 뱀이 무서운 모양이었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고 소매로 왕재수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 알았어, 징징대지 마. 뱀이 뭐 그리 무섭다고. 그래도 잠은 꼭 자야 돼. 다음 주엔 무조건 쉬는 거야, 알았어? ”
“ 으응. 일요일 공연만 잘 끝나면 한숨 돌리니까 그렇게 할게. ”
“ 일요일에 모스크바랑 레닌그라드에서 국회의원들이랑 문화국 간부들 온다면서. 그거 보러 오는 거지? ”
“ 누가 KGB 아니랄까봐 잘도 아네. ”
“ 중요 인사들이 오니까 당연히 알아야지. 지금 그것 때문에 국장이 얼마나 예민한데. 의회도 KGB도 아니고 극장 따위를 그것도 일요일에 당일치기 방문하고 가버린다고 짜증냈어. 우리 시 지금 현안이 얼마나 많은데 그건 관심도 없고 딴따라 공연이나 보러 온다고. ”
“ 흥, 너네 국장은 얼간이야. 그 사람들이 이 촌 동네에 무슨 관심이 있어서 오는 줄 아니? 그 사람들 전부 내 후원자들이었어. 내 공연은 다 챙겨봤다고. 이번에 올리는 것도 이 동네에서는 초연이나 다름없으니까 겸사겸사 보러 오는 거야. 나 체포당하게 해놓고 시골에 처박아놓은 것도 찔리니까 얼굴이라도 볼 겸. ”
“ 일요일 게 왜 초연이야? 너 신작은 4월에 올린다며. ”
“ 응. 일요일에는 돈키호테야. 그게 원래 고전발레에서는 중요한 레퍼토리인데 우리 극장은 5년 동안 안 올렸대. 복잡하고 애들 실력도 안 되고 인기도 없어서 전임감독이 빼 버렸다잖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지. 관객들이 돈키호테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재미있고 신나서 제일 인기 많은 레퍼토리인데. 애들은 가르치면 되는 거고, 실력이 안 되는 건 애들이 아니라 전임감독이었겠지.
하여튼 그거 손봐서 5년 만에 다시 올리는 거야. 규모도 있고 화려한 작품이라 손이 많이 간단 말이야. 무용수들 테크닉 자랑하는 작품이라 애들 연습도 더 많이 시켜야 되고. 그러니까 뱀 풀지 마. 뱀 풀면 너 정말 예술 탄압이야! ”
“ 어... 뭔가 어렵구나. 하여튼 알았어. 중요한 공연이라 이거네. 그래도 극장에서 밤샘하면 진짜 안 돼. 내가 다 확인할 거야. 그리고, 너 오늘 아침부터 저녁까지 먹은 거 다 대봐! ”
“ 어... 아침엔 극장 카페에서 우유랑 바나나, 차 한 잔. 점심 땐 박물관 앞 식당에서 대구 커틀릿하고 비트 샐러드... ”
“ 좋아, 커틀릿 잘했어. 지방질을 좀 섭취했구나. 저녁은? ”
“ 저녁은... 저... ”
“ 저녁은? ”
“ 어... 아직... ”
“ 뭐? 지금 밤 11신데! 점심 먹고 그럼 지금까지 아무 것도 안 먹었단 말이야? 저녁 굶은 거잖아! 그래놓고 무슨 삼시세끼를 챙겨먹어! ”
“ 아참, 먹었어! 먹었단 말이야! 진짜야. 애들 지도하는 것 때문에 얘기하다가 티무르 보리소비치가 삶은 감자 한 개 줬어. 그거랑 요구르트 먹었어. ”
“ 야! 그게 간식이지 밥이야? ”
“ 감자가 엄청 컸는데... ”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피곤해서 자겠다는 왕재수를 억지로 자기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식탁에 앉혀 놓고는 인스턴트 닭고기 수프를 데워서 흑빵을 한 조각 곁들여 들이밀었다. 왕재수는 밤늦게 뭘 먹으면 얼굴 붓는다고 툴툴댔지만 어쨌든 먹었다. 국물을 다 먹나 안 먹나 베르닌이 감시하자 울상이 되어 하소연했다.
“ 이거 정말 아니야. 넌 감자랑 요구르트 보고 간식이라고 무시하지만 그게 훨씬 건강식이야. 이건 인스턴트잖아... 나트륨도 많이 들어 있고... 그러면서 무조건 밥 챙겨먹어야 된다고... ”
“ 인스턴트고 뭐고 넌 동물성 음식, 지방질을 섭취해야 돼! 하루에 두 끼 이상! ”
“ 네가 무슨 의사야? 레프 사벨리예비치도 식사량 늘리라고만 했지 동물성이니 지방질이니 얘긴 안 하셨어! ”
“ 아니, 다른 의사가 그랬어! 살 빠졌으니까 고기 먹으라고 했어! 그때 레닌그라드에서 그 유리인지 뭔지 하는 의사가 그랬단 말이야. 그러니까 잔말 말고 주는 대로 다 먹어! ”
왕재수는 잠잠해졌다. 풀이 죽어서 접시를 들고 수프 국물을 꿀꺽 마셨다. 남은 건더기도 긁어 먹었다. 먹여 놓으니 혈색도 돌고 덜 피곤해 보였다. 운동하고 잔다는 것을 윽박질러서 곧장 잠자리에 들게 만들었다.
“ 고칼로리의 짜디짠 걸 먹었으니 운동이라도 좀 하고 자야 한다고! ”
“ 웃기지 마! 기껏 먹은 거 왜 땀 빼서 도루묵 만들어! 너는 최소한 5킬로 이상 더 늘려야 돼. 그냥 자! 안 그러면 고양이, 곱등이, 바퀴벌레... ”
“ 흑... 나빠... ”
왕재수는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베르닌을 쳐다보았지만 순순히 자러 갔다. 베르닌도 설거지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 * *
금요일 오전이었고 베르닌은 미친 듯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왕재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지금 극장에 좀 와줘, 다닐. ”
“ 엉? 무슨 일 있어? 나 지금 바쁜데... ”
“ 극장에 와줘. 부탁이야. ”
“ 어... 알았어. 점심 때 잠깐 들를게. 나 할 일이 많... ”
“ 아니, 안 돼. 지금. 조퇴하고 와. 제발. 부탁... ”
“ 무슨 일인지 말해주면 안 돼? ”
“ 오면 얘기해줄게. 제발... ”
왕재수의 말투가 평소와 달랐고 심지어 ‘부탁’이란 단어까지 썼기 때문에 베르닌은 슬며시 불안해졌다. 아무래도 극장에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다. 할 일이 많았지만 일단 모두 미뤘다. 직원의 외출이나 조퇴는 담당 부서장의 결재 권한이었지만, 베르닌은 총괄서무였고 스페호프가 서무란 월요일이나 금요일에 휴가나 조퇴를 하면 안 된다고 귀가 닳도록 얘기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국장에게 갔다. 스페호프는 누군가와 열심히 통화를 하고 있었다.
“ 그렇지, 잘했네! 이제 됐어. 그 자식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 줄 수 있겠군. 그나마 남은 끈도 떨어지게 되겠지. 그러면 이제 마음 놓고 없애버릴 수 있을 거야! 스네고로드 쪽을 잘 감시하게! ”
전화를 끊고 나서 스페호프는 베르닌을 힐끗 바라보았다.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 아, 다닐. 마침 잘 왔군. 그렇지 않아도 올라오라고 할 참이었는데. ”
“ 어, 국장님... 무슨 일이라도... ”
“ 자네 지금 당장 시립극장으로 가보게. 그 불여우가 일요일 공연을 준비하고 있을 거야. 일요일까지 극장에 붙어 있게나. 준비 상황부터 일요일 공연까지 모든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보고해 주게. 이건 비밀 임무니까 서면 자료는 남기지 말고, 하루에 두 번, 정오와 오후 5시에 내 자리로 전화를 해주게. 전화는 드라마 극장 앞 공중전화를 이용하도록. 알다시피 난 주말에도 출근하니 개의치 말고 전화하게. ”
“ 어, 예... 그런데 뭘 보고해야 할지... ”
“ 일요일 공연! 그게 어떻게 되어 가는지! 그 자식이 우왕좌왕하는 꼴을 보고하란 말이야. 그리고 혹시라도 그 불여우가 크레믈린이나 레닌그라드 쪽에 전화를 걸지나 않는지도 꼼꼼히 감시하게. 이것은 중요한 임무일세. 어서 가 보게! ”
그래서 베르닌은 극장으로 갔다. 감독실로 갔지만 비어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왕재수의 비서인 류드밀라가 아는 척을 했다.
“ 아, 다냐. 왔군요. 미샤가 연습실로 와 달래요. ”
“ 연습실이요? ”
“ 2층 오른쪽 윙의 제1 연습실로 가면 돼요. 빨리 가보세요, 아까부터 10분마다 전화해서 묻고 있어요. 당신 왔냐고. ”
베르닌은 2층으로 갔다. 제1 연습실은 복도 끝에 있었는데 아주 넓었다. 레오타드 차림의 무용수들이 바글거렸다. 오른편 구석에서는 나이 든 남녀 두세 명이 무용수들을 몇 명씩 데리고 이것저것 동작을 지도하고 있었다. 왕재수는 왼쪽에 있었다. 빨간색의 커다란 보자기를 들고 있는 남자 무용수들 예닐곱 명을 좌우로 몰아가며 호통을 치고 있었다.
“ 망토 좀 똑바로 못 돌려? 1막 하이라이트가 뭔데! 투우사 망토춤이라고! 다른 거 아무리 잘 춰도 소용없어, 망토 제대로 못 돌리면 허사란 말이야! 너, 가릭! 어깨를 더 젖혀야지! 자, 음악! ”
베르닌은 눈을 둥그렇게 뜬 채 건장한 남자들이 빨간 보자기를 휙휙 휘두르며 춤추는 것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왕재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 됐어, 있다가 다시 한 번 볼 거니까 저쪽 가서 연습해와! 가릭 너는 두 배로 연습해. 한 시간 후에도 이 모양이면 넌 빼버릴 거야! 그리고 토냐! 이리 와봐. 32회 푸에테 다시 해보자. ”
“ 아우, 감독님. 아무리 해도 안 돼요... 25번으로 살짝 줄여주면 안 될까요? 아잉... ”
붉은 곱슬머리의 인형 같은 발레리나 토냐가 속눈썹을 깜박거리며 애교를 부렸다. 왕재수는 서릿발처럼 매섭게 그녀를 야단쳤다.
“ 어디서 지금 누구한테 아잉이야! 25회 푸에테란 건 들어본 적도 없어!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게 아니고 네가 자꾸 균형을 잃어서 안 되는 거야. 이걸 잘해야 나중에 오딜도 출 거 아니야! ”
“ 어머나, 감독님. 정말이에요? 저 이거 잘 하면 백조의 호수 나갈 수 있는 거예요? ”
“ ‘잘’ 해야 생각해보는 거지! 키트리도 못 추면서 오데트랑 오딜을 어떻게 추려고 그래! 지금처럼 휘청거려서는 멀었어. ”
“ 아아, 저 잘해볼게요. 이거 잘해서 꼭 백조도 추고 말겠어요. ”
토냐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회전 수를 세어보았다. 30번쯤 돌고는 토냐가 비틀거리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왕재수가 일으켜주었다. 엄청 혼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부드럽게 북돋워주었다.
“ 아까보다 훨씬 나아졌네. 30번 돌았잖아. 다시 해봐. 회전축을 고정해야지. 발레학교에서 배웠잖아. ”
“ 배우긴 했는데요, 그게 벌써 한참 전이고... 극장 와서는 몇 년 동안 군무랑 조역만 시키니까 32회 푸에테는 출 기회가 없어서 다 까먹었어요. ”
“ 까먹는 게 어디 있어, 자전거나 수영이랑 똑같은 거지. 일단 시선부터 고쳐야 돼. 지금 내가 하는 거 잘 보면 뭐가 다른지 알 수 있을 거야. 그 부채 좀 줘봐. 카챠, 피아노 좀 다시 쳐줘요. ”
갑자기 연습실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져서 베르닌은 깜짝 놀랐다. 삼삼오오 연습하던 무용수들과 지도교사들 전부 그쪽으로 몸을 돌리고 왕재수에게 시선을 집중하는 것이었다. 왕재수가 쿵짝거리는 피아노 반주에 맞춰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자 베르닌도 멍해졌다. 왕재수는 채찍질하듯 다리를 뻗었다 구부렸다 하면서 세차고 빠르게 연속 회전을 했고 심지어 부채도 휙휙 폈다 접었다 하는 것이었다. 나중엔 무용수들이 소리 내어 숫자를 셌다. 30번을 넘게 도는데 몸이 전혀 기울어지지도 않았고 동작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베르닌은 발레 무대를 몇 번 보긴 했지만 그렇게 정확하고 동시에 음악과 완전히 일치하는 연속회전은 처음이었다. 32를 외치자마자 무용수들이 짝짝짝 박수를 치고 와 하고 환호를 했다.
“ 우와, 진짜 장난 아니다! ”
“ 너무 멋있어요, 꺅! 감독님 사랑해요~ ”
“ 완벽해요! 브라보! ”
왕재수는 벌컥 짜증을 냈다.
“ 너희들 누가 여기 보고 있으래! 연습하라 했잖아! 가뜩이나 시간도 없는데. 투우사! 거기 군무! 무희! 꽃 파는 처녀들, 빨랑 연습 안 해? ”
무용수들이 화들짝 놀라며 다시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왕재수는 언제 화를 냈느냐는 듯 토냐에게 이제 좀 이해가 가느냐고 물었다. 토냐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다시 돌게 시켰더니 정말 이번에는 넘어지지도 않고 그렇게 많이 기울어지지도 않고 서른두 번을 다 돌았다. 왕재수가 칭찬을 해주더니 느낌을 잊지 않도록 지금 더 연습하라고 했다.
베르닌은 감명을 받았다. 왕재수의 푸에테도 근사했지만 토냐를 잘 어르고 달래는 기술에도 감탄했다. 남자 무용수들은 쥐 잡듯 하면서 여자에겐 상냥하다니 좀 어이가 없기도 했다. 그때 왕재수가 그를 발견했다. 금세 얼굴이 밝아졌다.
“ 아, 다닐! 왔구나! 다행이다! ”
“ 뭐가 다행이야? 연습 때문에 엄청 바빠 보이는데 날 왜 부른 거야? ”
“ 우리 잠깐 얘기 좀 하자. 티무르 보리소비치! 애들 연습 좀 시켜주세요. 저쪽 투우사 애들 끝나면 집시들 춤 좀 봐주시고요. 안나 니콜라예브나, 무희 칼춤이랑 메르세데스 상체 동작 교정 부탁드려요. 전 10분만 얘기 좀 하고 올 테니까. 야, 가릭! 망토 놓치지 말고! ”
* * *
왕재수는 베르닌을 데리고 1층으로 내려가더니 구불구불한 복도를 돌아 분장실로 갔다. 문을 잠그더니 번개같이 화장대 위로 기어 올라가 거울 후면과 천정, 전등 주위를 살폈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 야, 너 뭐해? 도청장치라도 찾냐? 여긴 없어. 감독실, 접견실, 극장장실에만 있어. 여기 도청 보고서도 내가 받아서 정리하잖아. ”
“ 바보. 더 있어. 백스테이지에 두 개 있고 로열박스에 하나, 제2 연습실에 하나 있다고. 스페호프가 매수한 녀석이 지난주에 추가로 붙여놨어. 있는 거 다 알면서 모르는 척 해주는 거라고. 그래야 그 개자식이 안심하지. 분장실에도 하나쯤 있을 법한데, 여긴 메인이 아니니까 없을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
왕재수는 방 안 전체를 샅샅이 뒤진 후 고개를 끄덕였다.
“ 됐다. 이제 얘기하자. ”
“ 대체 뭔데 그래! 바빠 죽겠는데 불러내더니 도청장치나 검사하고! ”
“ 너 나 좀 도와줘. 지금 너 밖에 없어. 부탁이야. ”
“ 어... 뭔데? ”
“ 도와준다고 약속해줘. 제발. ”
“ 뭔지를 알아야 약속을 하지! ”
“ 너 나 안 도와줄 거야? 나 정말 큰일이란 말이야. 제발... ”
왕재수가 울상이 되어 그를 쳐다보았다. 또 사슴 같은 눈망울이 되어 눈물을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 그거 하지 말라고 했잖아! 나한텐 안 통한다고! ”
“ 접때 보니까 쪼금 살짝 통하는 것 같던데... ”
“ 아니야! 안 통해! 솔직히 말을 해줘야 도와주든 말든지 할 거 아냐! ”
“ 일요일 공연. 거기 좀 출연해 줘. ”
“ 뭐야?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
“ 역이 하나 비어. 너 말고는 도저히 생각이 안 나. 제발 부탁이야. 제발... 너네 국장이 공연 망치려고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임기응변으로 지금 다 때려 막는 중인데 죽어도 하나가 해결이 안 돼. 너뿐이야, 다닐. 부탁이야. ”
베르닌은 완전히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다가 스페호프가 그를 비밀 모니터링 요원으로 급파한 것이 생각났다.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보았지만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 일요일 공연 얘기야? 그거 잘 준비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 무슨 역이 빈다는 거야? 우리 국장은 또 뭐고? 뭘 때려 막아? ”
“ 일요일 공연에 모스크바랑 레닌그라드에서 국회의원들 온다고 했잖아. 내 후원자들이었다고. 내가 여기 애들 손봐서 올리는 돈키호테 궁금해서 오는 거잖아. 너네 국장이 그 꼴 보기 싫어서 제대로 방해공작 펴고 있단 말이야. 이번 달 내내 검열국이랑 손잡고 장난 아니었어. 그래도 내 능력으로 잘 헤쳐 왔는데 그 자식이 막판에 제대로 한 방 먹였다고. 일요일 공연 못 올릴 지경까지 갔었어. 지금도 억지로 땜질하고 있는 거야. ”
“ 어, 난 이해가 안 되는데. 우리 국장은 공연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알지도 못하는데 뭘 어떻게 방해한다는 거야? 아까 보니까 무용수들 열심히 연습하고 있던데. 검열국에서 이념 문제로 걸어서 승인 안 해준다는 거야? 그 신작처럼? ”
“ 아니, 이건 고전 발레라서 이념 문제가 나올 여지가 없어. 볼쇼이랑 키로프에서도 최고 인기 레퍼토리거든. 그런 걸로 안 되니까 그 자식이 머리를 굴렸어. 문화국이랑 농업국을 매수해서 일요일 출연 주역들하고 주요 조역들을 집단농장 투어에 보냈단 말이야. ”
“ 어, 나도 그거 알아. 무슨 협조 공문 있었어. 근데 그건 화요일에 갔다가 벌써 돌아온 거 아냐? 공연은 일요일이잖아. ”
“ 화요일에 갔었지. 원래대로면 어제 돌아왔어야 돼. 어쩐지 불길해서 내가 걔들 못 가게 하려고 극장장한테 얼마나 화를 냈는데. 극장장이 날 어르고 달래면서 자매도시에서 요청한 건데 어떻게 안 보내느냐고, 애들 목요일 저녁에 돌아오니까 걱정 말라고 애걸을 했어. 난 끝까지 안 보내려고 했는데 그러면 애들 서류에 빨간 줄 간다고 해서 할 수 없이 보냈거든. 근데 그게 다 너네 국장 음모였단 말이야. 애들 지금 거기서 못 나와. 일요일까지 꼼짝도 못해. ”
“ 아니, 왜? 어디로 갔는데? ”
“ 스네고로드! ”
“ 헉, 스네고로드? 맙소사... ”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야 왕재수가 왜 국장의 음모 운운하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스네고로드는 가브릴로프에서 기차로 10시간, 버스로는 15시간 거리에 있는 조그만 집단농장 촌이었다. 시골 동네라 공항은 물론 없었다. 제일 가까운 공항이 가브릴로프 공항이었다. 거기까지 가는 교통수단은 기차와 버스뿐이었다. 커다란 산을 네 개 넘어야 했다. 문제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폭설이 밥 먹듯 오는 동네라는 거였다. 한 번 눈이 오면 어마어마하게 왔고 걸핏하면 도로가 막혀서 고립되곤 했다.
“ 뉴스 봤어. 거기 지금 눈 장난 아니던데. 수요일 밤부터 어마어마하게 내리고 있잖아. 주말까지 온다던데. ”
“ 그러니까. 다 알고 보낸 거야. 더러운 놈들. 길 다 막혔어. 눈이 2미터가 넘게 왔대. 심지어 거기 농장들도 무슨 축대가 무너지고 가축이 파묻혀서 주민들 손이 모자라서 우리 애들도 전부 동원돼서 눈 치우고 있대. 아아... 무용수들이 심지어 눈까지 치우고... 근육 미워지는데. 걔들 죽었다 깨나도 일요일까지 못 돌아와. 더러운 스페호프 자식... 아... ”
왕재수가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탄식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내 잠도 못 자고 쉬지도 못하면서 공연을 준비했는데 타격이 클 것 같았다. 문득 그는 몇 달 동안 왕재수를 감시하면서 주워들었던 게 생각났다.
“ 어, 근데 원래 한 작품에는 두 명 이상 캐스팅하지 않아? 오늘 빅토르가 나오면 내일 데니스가 나오고. ”
“ 응. 네 말이 맞아. 백조의 호수처럼 자주 올라가는 건 주역이 여러 명 있어서 돌아가면서 맡아. 이번 것처럼 처음 올라가는 건 일단 더블 캐스팅으로 두 명 준비하고는 있었어. 더 하고 싶어도 원체 애들 역량이 딸려서 어려웠거든. 근데 망할 놈들이 대역까지 다 데려갔어. 바질, 키트리, 투우사, 무희, 요정, 돈키호테... 그나마 바질 대역 하나는 남아서 불행 중 다행이야. 군무진도 3분의 1이나 데려갔어. 땜빵 못하게 하려고 한 거야. ”
“ 어... 근데 바질은 뭐고 키트리는 뭐야? 투우사는 뭐고? 돈키호테가 주인공 아니야? ”
“ 휴... ”
왕재수는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굉장히 지친 듯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 그래, 뭐... 발레 모르면 그럴 수도 있지. 발레 돈키호테의 주인공은 바질이라는 이발사하고 키트리라는 선술집 딸이야. 둘이 좋아하는 사이인데 바질이 가난하니까 키트리 아빠가 딸을 나이 많고 멍청한 부자한테 시집보내려고 하는 거야. 그래서 바질은 키트리를 잃느니 죽어버리겠다면서 칼로 자살하는 척 하거든. 바질이 죽은 줄 알고 키트리 아빠가 둘의 사랑을 허락하니까 바질이 짠하고 살아나는 거야. 그래서 마지막에 키트리랑 바질이 결혼하고 다들 축하해주면서 끝나.
너도 잠자는 미녀나 호두까기 같은 건 봤잖아. 마지막에 주역 남녀가 결혼식 춤 멋있게 추는 거. 거기에 투우사랑 거리의 무희, 메르세데스가 근사한 춤도 추고. 집시들도 나오고 키트리 친구들 바질 친구들 등등이 군무도 추고 그래. 중간에 돈키호테가 보는 환상 속에서는 요정들도 나오고. 근데 너네 국장은 발레랑 담 쌓아서 바질이 주인공이란 건 몰랐나봐. 바질 역 한 명은 남겨놨더라고. ”
“ 그렇구나. 아 복잡해. 근데 아까 보니까 애들 데리고 연습하고 있었잖아. 어떻게 된 거야? 다 끌려갔다며. ”
“ 억지로 땜빵하고 있는 거야. 남은 애들 중에 그나마 좀 될 거 같은 애들 뽑아서 부랴부랴 연습시키고 있다고. 군무 모자라는 건 발레학교 고학년들로 채워서 맨 뒤에 세울 거야. 메인 투우사도 군무 투우사 중에서 그나마 젤 키 크고 스타일 좋은 애로 급조하고. 그게 가릭이야. 근데 너무 뻣뻣해서 다른 애로 갈아야 할지 고민이야. 하여튼 걜 뽑아내는 바람에 투우사도 원래 8명인데 6명으로 줄여버렸어. 키트리랑 무희랑 메르세데스랑 숲속 여왕이랑 어제 대역 뽑아서 어찌어찌 땜질하고 있는데 진짜 절망적이야. 그나마 바질이 있어서 다행이야, 초연 시키려던 앤 아니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으니까. 돈키호테는 원래 주역들만 좀 잘 춰주면 그래도 커버되거든. ”
“ 어, 그럼 어쨌든 땜질해서 공연은 올릴 수 있는 거잖아. 근데 왜 그렇게 다급하게 전화한 거야? 국장한테서 정보 빼내달라고? ”
“ 아니, 그게 아니고. 다른 역은 어떻게든 제2솔리스트랑 코리페에서 뽑아서 다 쑤셔 넣었는데 하나가 죽어도 안 돼. 그래서 네가 필요해. 그 역 좀 맡아 줘, 제발. ”
“ 야, 난 춤이라곤 한 번도 춰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대역을 맡니!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
“ 아니야, 그 역은 춤 안 춰. 마임만 좀 하면 돼. 진짜 중요한 역이야. 제발. ”
“ 춤도 안 추는데 뭐가 중요한 역이라는 거야? 대체 뭔데? ”
“ 돈키호테. ”
“ 엥, 돈키호테? 그럼 주인공... 너 미쳤냐? ”
“ 어휴, 너 내 말 제대로 안 들었지. 주인공은 바질이랑 키트리라니까. 여기서 돈키호테는 춤 안 춰. 그냥 얘기를 이끌고 가는 사람이야. 돈키호테가 처음에 환상의 여인 둘시네아를 그리면서 기사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길을 떠나는 걸로 시작하는 거야. 그래서 스페인의 어느 마을 광장에 왔다가 바질이랑 키트리의 사연을 알게 되는 거고. 나중에 바질이 자살 쇼 했을 때 걔들을 도와서 키트리 아버지에게 결혼 허락하라고 협박해서 둘의 사랑을 이루어주는 역할이란 말이야. 춤은 없어. 그냥 갑옷 입고 창 들고 위엄 있게 걸어 다니고 손가락질 좀 하고 요정들 환상 볼 때 팔 뻗으며 허우적거리고 결혼식장에서도 바질이랑 키트리 축복해주면 된다고. 중간에 집시들 장면에서 연극을 진짜로 착각하고는 인형극장 뒤집어엎고 풍차에 달려드는 연기만 조금 하면 돼. 안 어려워. 넌 잘 할 수 있어. ”
“ 아니, 잠깐! 누가 한대? 그리고 안 어려운 거면 다른 사람 시키면 되잖아, 왜 할 사람이 없다는 거야! 심지어 춤도 안 춘다며. ”
“ 중요한 조건이 하나 있어. 돈키호테는 키가 커야 해. 위엄도 있어야 하고. 근데 지금 남은 애들 중엔 키 큰 애가 없어. 큰 애들은 투우사 춰야 되거든. 나머지는 다 스네고로드에 끌려갔고. 드라마 극장에서 빌려볼까 했는데 거기도 지금 연수 가서 딱 맞는 사람이 없어. 아무리 안 돼도 180은 넘어야 한다고. 너밖에 없어, 다닐. 넌 키도 크고 어깨도 넓고 허우대도 좋잖아. 딱 돈키호테야. ”
“ 싫어. 나 그런 거 못해. 학교 다닐 때도 연극 한 번 안 해 봤는걸. 알잖아, 나 책상물림인 거. ”
“ 괜찮아, 그냥 무대에만 올라가주면 돼. ”
“ 야, 바이올린 아저씨 있잖아! 키 엄청 크잖아! 그 인간 시켜! ”
“ 로만은 절대 안 돼. 그 사람은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잖아. 가뜩이나 우리 오케스트라는 실력이 별로인데 돈키호테는 너무 오랜만에 연주하는 거라서 로만이 빠져버리면 진짜 덜컹거릴 거야. 무용수들 안 그래도 지금 다 초짠데 음악 삐걱거리면 더 망한다고. 부탁이야, 다닐. 네가 안 도와주면 이 공연 못 올려. 나 이거 올리려고 진짜 노력했어. 땜빵으로 들어온 애들도 처음으로 중요한 역 맡았다고 엄청 의욕 충천해 있다고. 제발. 나 정말... ”
왕재수가 베르닌의 손목을 붙들고 매달렸다. 얼굴이 창백하고 눈이 퀭했다. 왕재수가 다른 건 몰라도 극장 쪽 일이라면 죽어라고 노력한다는 것을 아는 베르닌은 그만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 어, 알았어. 진짜 그냥 올라가기만 하면 되는 거지? ”
“ 고마워, 다닐! 진짜 고마워! 올라가기만 하면 돼. 분장 좀 하고. 연기는 지도 좀 받으면 되고... 풍차 매달리는 것만 잘하면 돼. ”
“ 앗, 잠깐! 왜 말이 달라지는데! 연기 지도는 뭐고 풍차 매달리는 건 뭐야! ”
“ 그럼 무대 위에 올라가서 뻣뻣하게 서 있을래? 극 전개를 위해 최소의 연기는 해야지. 걱정하지 마, 티무르 보리소비치가 잘 가르쳐줄 거야. 풍차는... 돈키호테니까 풍차랑 싸우는 장면이 잠깐 있어. 그냥 소품용 창 들고 풍차로 돌진해서 끝을 붙잡으면 풍차가 돌아가면서 조금 올라갈 거야. 많이도 안 올라가. 반쯤 올라가면 커튼 내려올 거거든. 좀 과장되게 허우적대기만 하면 돼. ”
“ 어... 나 자신 없어... ”
“ 아니야, 할 수 있어. 나 사실 맨 처음에 너 봤을 때부터 돈키호테 세워보고 싶었어. 돈키호테는 이상주의자에 착한 사람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너랑 어울려. 잘 할 수 있어. ”
“ 으응, 너 지금 나 칭찬하는 거야? ”
“ 칭찬까지야. 그냥 이미지가 비슷하단 얘기야. ”
“ 근데 왜 돈키호테는 대역이 없어? 춤도 안 추는 역인데? ”
“ 그게... 스페호프도 너처럼 생각했나봐. 제목이 돈키호테니까 돈키호테가 주인공인 줄 알았는지 더블 캐스팅된 애들 두 명 다 스네고로드로 보내버렸어. 멍청이. 다행이지 뭐. 바질만 있으면 그래도 최악의 재앙은 아니니까. ”
“ 바질이 그렇게 중요해? 원래 여주인공이 제일 중요한 거 아니야? ”
“ 돈키호테는 좀 달라. 투우사들도 나오고 남자들 춤이 볼만하거든. 특히 바질이 화려한 테크닉을 많이 보여줘. 점프도 하고 회전도 하고 여자를 막 한 손으로 들고. 그래서 바질만 잘 뛰고 투우사가 망토만 잘 돌려줘도 공연 체면은 살릴 수 있거든. 스페호프가 그걸 몰라서 다행이야. ”
베르닌은 스페호프의 명령을 생각했다. 갑자기 불안해졌다.
“ 저기, 있잖아. 국장이 이 공연 망치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잖아. 난 너 감시요원인데... 내가 너 도와서 무대 올라가는 거 들키면 나 잘릴 거야. 벌목공도 못하게 될... ”
“ 아니야! 절대 그런 일 없게 할 거야! 분장하면 돼! 넌 줄 모르게 해줄게! 그건 걱정하지 마! ”
“ 하지만... 정말 나인 줄 모를까? ”
“ 모른다니까. 너 전에 나타샤 보러 파티 갔을 때 내가 꾸며주니까 국장이 못 알아봤다고 했잖아. 무대 분장은 훨씬 더 정교하다고. 투구도 쓰고 콧수염도 달 거라서 진짜 못 알아봐. 우리 무용수들도 못 알아보게 해줄게. 혹시라도 스파이가 있을지 모르니까... 지금 나랑 분장사한테 가자. 콧수염 붙이고 눈썹만 좀 그려놔도 넌 줄 모를 거야. ”
왕재수는 전화를 했다. 잠시 후 나이든 분장사인 타치야나가 나타났다. 왕재수가 빠르게 설명을 하자 타치야나가 끄덕끄덕했다. 베르닌의 얼굴을 잠시 살피더니 연필과 붓을 꺼내 눈썹 위로 슥슥 문질렀다. 아주 짙은 일자 눈썹을 만들어 놓았다. 머리털 위로 스프레이를 좍좍 뿌려서 검은 머리를 희끗희끗하게 바꾸었다. 그러더니 콧수염을 붙였다. 10분 만에 손뼉을 딱 쳤다.
“ 됐네! 감쪽같지? 완전 딴 사람 됐어. ”
“ 정말이네요, 역시 누님 실력은 대단해요. 비밀로 해주시는 거 알죠? ”
“ 당연하지, 우리 미셴카가 부탁하는데. 일요일 공연 땐 제대로 분장할 거니까 얘 부모님이 와도 못 알아볼 거야. ”
베르닌은 거울을 보았다. 새치가 가득한 머리칼에 일자 눈썹, 콧수염을 기른 어딘지 우스꽝스러운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열 살은 늙어보였다! 베르닌은 이왕 분장을 해주는 김에 좀 잘생기게 바꿔주면 안되나 싶었지만 어쨌든 스페호프가 못 알아볼 거라는 생각은 들었다. 타치야나가 나간 후 왕재수가 베르닌을 찬찬히 뜯어보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 생각보다 더 괜찮네. 무대 분장하면 진짜 돈키호테 같겠어. 그럼 이제 이름을 지어야지. ”
“ 이름이라니? ”
“ 네 이름 그대로 쓰면 국장한테 들키잖아. 주역들은 프로그램 팸플릿이랑 포스터에도 이름 박혀. 지금 빨리 정해야겠다, 오늘 오후에 인쇄 맡길 거니까. ”
“ 춤도 안 추는데 왜 내 이름까지 들어가? ”
“ 그래도 중요 인물이니까 이름 들어가야 돼. 그리고 애들이랑 같이 연습도 해야 되는데 네 이름 부를 순 없잖아. 걔들도 넌 줄 몰라야 되는데. ”
“ 아, 그럼 예명이구나. 뭐라고 해야 멋있을까. ”
베르닌이 잠시 멋진 영화배우들을 떠올리며 이름을 궁리하고 있는데 왕재수가 손뼉을 딱 쳤다.
“ 푸고비체프! 하를람피 푸고비체프! ”
“ 야! 그게 뭐야! 절대 싫어! 어디서 그런 이름을... ”
“ 왜! 딱인데! ”
“ 예명인데 멋있게 지어야지! ”
“ 안 돼! 이름 멋있으면 눈에 띈단 말이야. 시골이니까 촌스럽게 지어야 돼! ”
“ 그래도 푸고비체프가 뭐야! 어째서 성에 단추가 들어가는데! ”
“ 됐어, 그냥 푸고비체프 해. 돈키호테는 원래 코믹한 역이니까 이름도 좀 웃긴 게 좋아. ”
베르닌은 항의했지만 왕재수는 굽히지 않았다. 결국 두 손을 든 베르닌은 이름이라도 건져보려고 애걸했다.
“ 푸고비체프도 모자라서 하를람피가 뭐야... 완전 할아버지 이름이잖아. ”
“ 푸고비체프랑 어감도 딱 맞고 좋은데 뭘. 싫으면 아파나시, 니키포르... ”
“ 으윽, 그것도 다 촌스러운 이름이잖아. 이름은 그냥 내 이름 쓰면 안 돼? ”
“ 안 돼! 꼬리 잡히면 안 되잖아! 하를람피, 아파나시, 니키포르... 아, 그래. 판텔레이몬! 네 개 중에 골라! ”
“ 야, 넌 대도시에서 왔다고 으스대는 놈이 어떻게 그런 촌티 나는 이름들만 쏙쏙 뽑아내는 거야! ”
“ 아 정말, 나 시간 없어. 애들 가르쳐야 돼! 너도 당장 가서 티무르 보리소비치한테 연기 배워야 되고. 그냥 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 끝! ”
졸지에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베르닌은 울상이 되어 왕재수를 따라 연습실로 갔다.
* * *
왕재수는 베르닌을 지도 교사이자 발레마스터인 티무르 이즈마일로프에게 넘겨주었다. 일반인이라 연기나 춤은 전혀 모르니 돈키호테를 소화할 수 있도록 속성으로 지도해달라고 했다. 이즈마일로프는 체구도 작고 온화한 인상에 이미 예순도 넘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내심 안심했다. 설마 왕재수처럼 사람을 들들 볶겠느냐 싶었다.
그러나 첫인상은 사기였다. 이즈마일로프는 그야말로 호랑이 선생이었다! 베르닌은 자세부터 교정을 받아야 했다.
“ 전 춤을 안 추는데 왜... ”
“ 춤을 추든 마임을 하든 무대에 올라가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세가 똑바르고 꼿꼿해야 돼! 어깨가 왜 이리 구부정하담. 똑바로 펴고 고개 들고! 걸을 때도 마찬가지야! 다리를 이렇게 들어! 기사답게! ”
베르닌은 몇 시간 동안 자세와 걸음걸이 교정을 받았다. 그 이후 기본적인 마임을 배웠다. 엄청나게 어려웠다. 무대로 볼 때는 그냥 지나쳤던 손동작과 몸짓들에 그렇게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니 놀라웠다. 그는 책상물림이라 암기는 금방 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머리와 몸이 따로 논다는 데 있었다. 이즈마일로프는 그를 가르치랴 동시에 다른 무용수들을 교정하랴 정신이 없었다.
베르닌이 절망하고 있는데 바질과 키트리를 데리고 연습하던 왕재수가 힐끗 그를 보더니 옆으로 왔다.
“ 잘 돼가? ”
“ 아니, 나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나 때문에 공연 망치면 어떡해. 다른 사람 구하면 안 되니? 마임은 배웠는데 나 너무 몸이 뻣뻣한 거 같아... 생각처럼 안 돼. ”
“ 한 번 해봐. 키트리 만나서 둘시네아로 착각하는 장면. ”
베르닌은 쭈뼛거리다가 토냐를 상대로 동작을 시연했다. 너무 어색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왕재수는 유심히 지켜보았다.
“ 음, 넌 몸이 뻣뻣한 게 문제가 아니야. 동작이 너무 작아서 그래. 무대에서는 네 생각보다 두 배로 동작을 크게 해야 돼. 표정도 그렇고. 이거 봐. ”
왕재수가 토냐를 바라보더니 깜짝 놀랐다가 홀린 표정을 지었고 무릎을 꿇으며 절을 한 후 그녀의 손등에 키스를 했다. 베르닌은 그가 멋진 왕자님이 아니라 꿈에 취해 머리가 살짝 이상해진 노인네 돈키호테처럼 보이는 것에 깜짝 놀랐다.
“ 웃기게 보일까봐 걱정하지 말고 다시 해봐. 웃기게 보이면 더 좋은 거야. 무대는 현실이 아니야. 아무도 너를 몰라. 그러니까 마음을 그냥 놔. ”
이상하게 왕재수의 그 말이 위로가 되었다. 베르닌은 다시 해보았다. 왕재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 잘했어. 아까보다 훨씬 나아. 이쪽으로 와서 거울 보면서 연습해. 네 모습을 보면서 하면 어디를 어떻게 고쳐야 할지 보일 거야. ”
베르닌은 왕재수에게서 칭찬을 들어본 적이 거의 없었던 데다 아무리 봐도 자신의 연기가 엉망이었으므로 좀 멍해졌다. 하지만 용기가 생겼다. 그래서 다시 열심히 연습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왕재수는 바쁘게 연습실을 오가면서 무용수들에게 차례로 동작을 가르치고 연습을 시키고 교정하고 뭔가 베르닌은 이해할 수 없는 용어로 지시를 내렸다. 프랑스어가 난무했다. 무용수들은 강행군에 지쳐서 허덕댔지만 의외로 왕재수의 지시에 잘 따르는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새 다섯 시가 되었다. 왕재수는 무용수들에게 저녁을 먹고 오라고 했다. 퇴근은 없었다! 최소 일곱 시까지 모두 모이라고 했다. 키트리와 투우사, 바질은 심지어 여섯 시까지 오라는 것이었다. 무용수들이 한숨을 쉬며 우르르 몰려나간 후 베르닌은 왕재수의 곁으로 갔다.
“ 야, 넌 밥 안 먹어? ”
“ 별로 생각이 없어. 너 빨리 가서 먹고 와. 있다가 꿈 속 요정 장면이랑 바질 자살 쇼 연기 좀 가르쳐줄게. ”
“ 너 그러다 쓰러져. 당장 밥 먹으러 가자! 극장이랑 박물관 사이에 있는 그 식당 가면 되잖아. ”
“ 시간이 없어. 선술집이랑 결혼식, 요정 장면에서 사람이 줄었으니까 안무랑 무대 배치를 조금씩 수정해야 돼. 아무도 없을 때 머리 좀 굴려보려고. ”
“ 안 돼! 굶고서 무슨 머리를 굴려! 지금 밥 먹으러 안 가면 나 무대 안 올라가! 뱀 껍질... ”
“ 미워... ”
왕재수는 손등으로 이마를 문지르더니 할 수 없이 베르닌을 따라 나갔다. 베르닌은 왕재수를 식당에 앉혀놓고 주문을 한 후 급하게 드라마 극장 앞 공중전화로 갔다.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스페호프가 받았다.
“ 그래, 어떻게 됐나? 불여우는 어떤가? ”
“ 어, 저... 완전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무슨 스네고로드가 어떻고 주역들이 다 못 나오고 하면서... ”
“ 그래! 그래야지! 공연은 취소한다던가? ”
“ 저, 그건 아닌 것 같고요. 연습을 하고는 있습니다만... 잘 안 되는 분위기입니다. ”
“ 알았네. 제깟 게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봤자. ”
스페호프는 몇 가지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베르닌은 진땀을 흘리며 대충 둘러댔다.
“ 좋아. 계속 감시하고 내일 다시 전화로 보고하게. 그러고 보니 하나 놓친 게 있긴 한데 뭐 문제없어. 그건 밤에 해결될 테니까. 수고하게. ”
그는 전화를 끊고 식당으로 돌아갔다. 어딘지 찜찜했지만 너무 배가 고팠기 때문에 음식이 나오자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살랸카와 햄 치즈 롤을 미친 듯이 흡입했다. 그러다 왕재수를 보니 역시나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베르닌은 엄격한 말투로 경고했다.
“ 그거 다 먹어. 지금. ”
“ 많이 먹었어. ”
“ 뭐가 많이 먹어! 게살 샐러드랑 흑빵 한 조각밖에 안 시켰잖아. 한 숟갈 밖에 안 떴잖아! ”
“ 다닐, 공연 망치면 어떡하지. ”
“ 으잉? 너 그 걱정 때문에 못 먹고 있는 거야? 너 천재잖아. 여태 잘했잖아. ”
“ 나야 천재지. 하지만 공연은 나 혼자 하는 게 아니잖아. 이건 그러니까... 축구팀 전체가 다 빠져서 2군도 아니고 3군으로 경기에 내보내는 거 같은 거야. ”
“ 너 축구 모르잖아! 축구랑 달라. 걱정 말고 먹어. 할 것도 많은데 먹어야 기운을 차리지. 이러다 네가 아프기라도 해봐, 공연 진짜 못 올려. ”
“ 그렇긴 하지. ”
왕재수는 게살 샐러드를 긁어 먹고는 버터도 없이 흑빵을 맨 입에 쑤셔 넣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공연 때문에 그렇게 수심에 잠긴 모습을 처음 봤기 때문에 의아했다.
“ 너 높은 사람들 오는데 망칠까봐 걱정돼서 그래? 이번에 잘하면 레닌그라드로 돌아갈 수도 있는데 안 될까봐? ”
“ 아니. 기껏 이런 걸로 날 돌려보내 주지야 않겠지. 그건 기대도 안 해. 그보다도... 공연이란 건 관객들을 위한 거야. 5년 만에 처음 보여주는 건데... 극장에 와주는 사람들한테 발레도 재미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열심히 준비했던 건데 망치고 싶지 않아. 그것도 더러운 KGB 앞잡이랑 검열국의 개들 때문에 접고 싶진 않단 말이야. ”
“ 꼭 내 앞에서 그렇게 말해야겠냐. 나 KGB인데. ”
“ 너는 다르지. ”
왕재수는 자기 앞에 놓인 우유 컵은 무시하고 베르닌의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 베르닌은 그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 너 차 그만 마셔. 아까도 계속 마시는 거 봤어. ”
“ 아니 왜 이제 차까지 못 마시게 하는 거야! ”
“ 의사가 카페인 줄이고 우유 마시랬잖아! ”
“ 어떻게 그런 것까지 다 알아? 앞잡이... 앞잡이. ”
“ 의사 선생님이 너 책상 앞에 써놓고 갔잖아! ”
“ 일요일까지만 좀 봐줘. 비상사태니까. 차라도 안 마시면 정신 못 차릴 것 같아. 밥 먹으니까 너무 졸려. ”
“ 그렇겠지. 쉬어야 되는데 강행군하고 있으니. 너무 완벽하게 해낼 생각을 버리면 되잖아! 정 안 되면 그냥 공연 미뤄. 그 후원자들한테 사정 얘기하면 이해해 줄 거고. ”
“ 너는 이 바닥 사람이 아니니까 이해 못해! 공연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건 내 책임이야. 문제가 일어나면 그걸 해결하는 것도 감독이 해야 할 일이고. 공연은 취소할 수 없어. 관객과의 약속이고... ”
“ 아, 어려워. 맨날 싸가지 없게 굴고 자기만 아는 놈이 그놈의 공연 얘기만 나오면 거품을 무니. 하여튼 우유 마셔. 걱정하지 말고. ”
왕재수는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차 대신 우유를 마셨다. 극장으로 들어가는 길에 베르닌은 키오스크에서 사과를 한 알 샀다. 옷자락에 슥슥 닦아서 왕재수에게 먹으라고 주었다. 왕재수는 지저분하다면서도 사과를 반으로 쪼개서 한쪽 먹고 남은 한쪽은 베르닌에게 주었다.
“ 난 밥 많이 먹었어. 너 다 먹어. 그래야 무용수들한테 또 소리 지르지. ”
“ 오늘 봄이 왔으면 좋겠어. 그럼 눈 녹아서 주역들이 돌아올 텐데. ”
“ 지금 애들 열심히 연습하잖아. 걔들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주역들 돌아오면 바꾸겠다고 그렇게 쉽게 얘기하고. ”
“ 걔들한테야 당연히 고맙지. 하지만 무대는 고마운 걸로만 되는 게 아니니까. 실력이 우선이라고. 에이, 걱정해봐야 무슨 소용이야. 연습하면 되겠지. 하여튼 들어가자. 고마워, 하를람피. ”
“ 야! 그 이름 좀 부르지 마. 아까 네가 소개해줬을 때 애들 다 웃었어! ”
“ 그러니까 성공이지. ”
베르닌은 왕재수와 함께 연습실로 갔고 또 열심히 이것저것 배웠다. 열 시가 되었을 때 왕재수가 그에게 집에 가라고 했다.
“ 너는! ”
“ 난 요정 군무만 좀 더 잡아주고 갈게. 티무르 보리소비치가 태워다 주신댔으니까 빨리 가. 내일도 연습할 거 많으니까 빨리 가서 쉬어. ”
그래서 베르닌은 집에 갔다. 샤워를 하자마자 그대로 뻗었다. 곤하게 자다가 새벽 두 시에 퍼뜩 깼다. 왕재수의 집으로 가보았다. 물론 텅 비어 있었다.
“ 에이, 이 망할 자식. ”
그는 차를 몰고 극장으로 갔다. 연습실 불은 다 꺼져 있었기 때문에 감독실로 가 보았다. 왕재수가 소파도 아니고 카펫 바닥에 엎드려서 자고 있었다. 요정 군무 배치도를 휘갈겨 그려놓은 종이가 옆에 나뒹굴고 있었다. 베르닌은 그의 어깨를 살살 흔들면서 깨워보았다.
“ 야, 일어나. 집에 가게. ”
“ 으응... 나 안 자. 일하고 있어. ”
“ 뭐가 일하고 있어! 미쳤냐, 이러다 또 얼마나 아프려고! ”
“ 안 잔다고... ”
“ 잠꼬대도 어쩌면 이렇게 진짜같이 하냐. ”
베르닌은 왕재수를 코트로 둘둘 말아서 등에 업고 차로 갔다. 찬바람을 맞으면서도 깨지 않는 것을 보니 정말 피곤했던 것 같았다. 왕재수를 침대에 뉘어주고 이불을 덮어준 후 베르닌은 자기 방으로 돌아갔고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FIN
- 2015. 4. 5 ~ 4.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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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20편으로 이어진다. 과연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베르닌이 제대로 무대에 올라가 돈키호테 역을 소화할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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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처음에 언급했듯 푸고비차 는 노어로 단추란 뜻이다. 그러므로 푸고비체프는 '단추남'~ (진짜 있는 성이다!)
하를람피를 비롯해 왕재수가 언급하는 이름들은 다들 좀 노티나는 이름들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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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호프가 공연을 망치려고 무용수들을 보낸 곳인 '스네고로드'는 러시아어로 '눈'을 나타내는 '스네그'와 '도시'를 나타내는 '고로드'를 합성해 내가 만든 이름이다. 한마디로 눈의 도시!! 그러니 폭설에 갇힐 수밖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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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재수가 준비하고 있는 발레 '돈키호테'는 우리 나라에서도 국립발레단이나 유니버설발레단이 종종 공연한다. 고전발레라면 하얀 의상 입은 발레리나들이 우아하게 포즈 취하는 좀 지루한 무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진입장벽을 낮추기 위해 권해드리는 발레이다. 일단 음악도 흥겹고, 스페인풍 의상과 춤도 신나고, 망토를 펄럭이는 투우사들은 남성적이고 화려하고, 군무도 신이 나고, 주역인 바질과 키트리의 춤도 흥겹고 화려하다.
미하일 바리쉬니코프가 미국으로 망명해서 ABT에서 돈키호테를 올리고 지금도 성황리에 공연되고는 있지만, 각국 내노라하는 발레단이라면 이 레퍼토리를 보유하고 있지만 그래도 최고는 역시 마린스키 발레단이다. 오죽하면 옛날부터 마린스키의 트레이드마크로 백조의 호수와 돈키호테를 꼽았을까.
이 시리즈와 본편에서 왕재수 미샤는 마린스키 극장의 소련 시절 이름인 키로프 극장 출신의 톱스타였기 때문에 물론 마린스키 버전의 돈키호테를 준비하고 있다. 당연히 촌도시 가브릴로프 극장의 수준은 키로프와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ㅠㅠ
원래 본편의 가브릴로프 이야기에서도 미샤는 극장 레퍼토리를 확장하고 관객들의 발레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오랫동안 사장되어 있었던 돈키호테를 부활시킨다... 사실 아직 그 부분까지는 쓰지도 못했는데 대신 서무 시리즈에서 쓰고 있네. (이게 뭐야.. 엉엉 주객전도) 물론 본편에서는 돈키호테 올릴 때 이런 스네고로드 사건이나 무용수 땜빵 등은 안 일어난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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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닌이 맡게 되는 돈키호테가 어떤 모습인지, 그는 어떤 연기를 해야 하는지 등은 이 다음 포스팅에 따로 사진과 영상을 올려보겠다~
그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694
여기서는 사진 하나만~~
요런 모습. 중간에 있는 키 큰 검정옷 차림 남자가 돈키호테. 마린스키 발레단의 바짐 벨랴예프.
왼편 키작고 땅딸막한 남자는 산초. 오른편 노란색 의상의 우스꽝스러운 남자는 키트리에게 청혼하는 부유한 얼간이 가마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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