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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writing'에 해당되는 글 239

  1. 2016.07.11 파편들, 수프와 아이스크림처럼, 다시 쓰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10
  2. 2016.07.09 잠시) 미샤의 로미오와 이바누슈카, 정장에 샴페인 엎지르기 39
  3. 2016.06.28 내가 마린스키 앞을 지날 때마다 생각하는 것, 그가 계속 가야 하는 이유 18
  4. 2016.05.29 단 한 잔의 물, 핼로윈, 증오와 폭력, Not enough 44
  5. 2016.05.22 수용소, 심문자들, 유령들, 인체발화, 다시 세 개의 메모 52
  6. 2016.05.15 잠시 : 교조주의, 강령으로서의 예술, 세 개의 메모 - 쓰던 순간, 1년 후, 3년 반 후 55
  7. 2016.05.01 잠시) 흑해로 가는 기차, 새로 온 인간, 새로 온 천사 + 브루벨의 악마, 예세닌 59
  8. 2016.04.24 잠시 : 산짐승 같은 아이, 레닌그라드 아이, 레닌그라드 시절 사진 등 37
  9. 2016.04.10 잠시 : 볼쇼이로 떠나는 미샤, 슈클랴로프 소식에 덧붙여, 팬과 예술가의 거리, 그 글을 쓰던 때 40
  10. 2016.04.03 잠시 : 그가 읽었던 불가코프의 문장, 비행기에서, 거장과 마르가리타 32
  11. 2016.03.20 잠시 :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을 때, 수용소 면회실에서의 조우 26
  12. 2016.03.13 잠시 : 불과 바람, 물과 돌 21
  13. 2016.03.06 잠시 : 마지막 동작이 완성되지 않은 춤, 운하를 건너는 미샤 23
  14. 2016.02.29 잠시 : 농담에 약한 주인공, 타협, 장식품 애완견 샴페인 캐비아.. 28
  15. 2016.02.21 잠시 : 햇살, 본편의 베르닌과 서무의 단추 사이 25
  16. 2015.10.31 서무 시리즈 대신 : 리가에 간 미샤와 트로이 39
  17. 2015.09.29 루빈슈테인 거리를 따라 산책하며, 그 의사가 온 곳 6
  18. 2015.09.18 서무 시리즈 대신 : 썰매를 타러 간 미샤와 트로이 47
  19. 2015.06.21 잠시 : 표절에 대해, 춤추는 푸쉬킨에 대해 트로이와 이고리가 나눈 대화 49
  20. 2015.05.25 잠시 : 모스크바로 가는 길에서, 미샤와 트로이의 이야기 발췌 20
  21. 2015.03.31 잠시 : 미샤와 일린의 면회실에서의 짧은 대화 발췌 19
  22. 2015.03.24 잠시 : 미샤의 첫 번째 시즌, 돈키호테, 축구팀과 군대처럼 등 24
  23. 2015.01.22 연말정산 패러디 드라마 : 토끼의 비극 (부제 : 쿠마와 유리지갑의 망령들) 16
  24. 2015.01.07 부활절 단편) Jewels 05, 파베르제 보석 달걀과 블린 이미지 몇 장 4
  25. 2015.01.06 부활절 단편) Jewels 04, 브루벨의 백조공주와 악마 그림, 보르쉬 사진 몇 장 8

 

 

 

계속 글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글을 쓴 건 거의 몇달 전이었고 그나마도 가벼운 서무 시리즈가 마지막이었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중심과 정점이 필요하다. 그런데 최근 몇달 동안 내겐 그럴 기력도 집중력도 생겨나지 않았다.

 

러시아로 날아가면서 나는 오래되고 무거운 넷북을 챙겼다. 아마도 조금 쉬면 글을 좀 쓸 수 있을 거야 라고 생각하고서. 하지만 나는 그곳에서 한줄도 쓰지 않았다.

 

돌아와서도 며칠 동안은 이런저런 밀려 있던 일을 보고 며칠은 몸살과 피로로 드러눕고 며칠은 또 우울해하느라 전혀 쓰지 않았다. 머릿속이 백지가 된 기분과 비슷했다.

 

2~3일 전부터 몇가지 파편들이 떠돌아다녔다. 그리고 어제 불현듯 생각했다.

 

지금 내겐 완전한 허구의 세계로 돌아가 그것을 축조하고 재구성하고 확장해나갈 기력이 돌아오지 않았어. 그러니까 원래 쓰던 본편 우주는 지금은 안돼. 거기 연연하면 안돼. 써야 하는 순간, 쓸 수 있는 순간 써야 해. 그건 그때가 되면 내게 올 거야. 십몇년 만에 그 우주가 내게 다시 왔듯이.

 

그리고 이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완전한 허구가 아닌 절반만 허구로 들어가서 그것을 재구성하는 작업이 지금 내겐 더 용이할 거야. 그리고 그게 지금 내게 필요한 일이고 자기 치유의 방식일지도 몰라.

 

어제까지는 저 생각에 기반해 1개의 안을 떠올렸다. 그리 가벼운 방식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어쨌든 소설적 인물들과 어떤 야망, 어떤 형식과 구조에 대한 갈망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오늘, 엽님을 만나기 전에 다른 일로 좀 일찍 나갔다가 시간이 남아서 서촌의 혼잡한 이디야 카페에 앉아 수첩을 꺼내면서 다른 생각이 또 떠올랐다.

 

아니, 지금 나는 더 가벼워야 해. 난 스치듯 써야 하고 떠들듯 써야 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가벼워야 해. 최근의 기억들과 사건들과 장소와 소재들의 파편들.

나는 수프를 떠먹고 아이스크림을 먹듯이 써야 해.

 

그래서 1안과 2안을 간단하게 적었다. 1안을 포기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그건 어쩌면 내가 가브릴로프 본편에서 쓰고자 하는 구조와 중첩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항상 그런 형식에 이끌리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2안을 선택하고 거기에 1안의 최소한의 아이디어를 집어넣을 것이다.

 

그것은 치유의 과정이 될 것이다. 아마도.

 

 

 

 

 

그리고 시작이든 끝이든 중간이든, 그 과정 속에서는 종소리가 등장할 것이다. 사원의 종이.

 

..

 

 

이제 메모를 쓰는 단계인데 다시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 회사로 돌아가기 전에 제대로 쓰기 시작했으면 좋겠다...

 

수호천사. 용감한 성 게오르기. 제게 용기와 힘을 주세요.

 

 

..

 

 

 

그런데...

 

맨날맨날 지방의 집2에 가 있기나 하고 어느날 갑자기 가방 싸서 올라오더니만 다음날 비행기 타고 휙 떠나서 3주만에 돌아온 토끼... 그리고는 딸기도 안 주고 갑자기 한 집안에 곰이 세마리가 되어 귀여운 건 자기 하나로만 족하다 믿었던 쿠마에겐 하늘이 무너지는 나날이었는데..

 

이 망할 토끼가 갑자기 또 무슨 글을 쓰겠다고 이러는가, 또 나를 방치하려는가... 하고 분노한 쿠마...

 

 

 

 

홱 돌아누우심..

 

쿠마야 잉잉... 삐치지 마. 사랑해 헝겊눈 곰팅아 ㅋㅋ

 

..

 

 

11일 밤에 추가.

 

오늘은 뭔가 기운이 없어서 그런지 생각을 펼치지 못했다. 그냥 어떤어떤 내용들을 밑자료 구축을 위해 좀 긁어놔야겠다 하는 정도만 생각했다.

 

:
Posted by liontamer

 

 

 

 

 

 

 

이번에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공연을 여러 차례 봤다. 마린스키에서 5회, 미하일로프스키에서 2회, 알렉산드린스키에서 에이프만 발레까지 총 8번을 봤는데 아주 좋았던 것도 있고 그럭저럭이었던 공연도 있었다.

 

극장에 가면 종종 나는 쓰고 있는 글에 대해 생각하거나 인물들에 대해 생각한다. 특히 마린스키에 가면 더 그렇다. 내가 데리고 쓰는 주인공이 그곳 출신이기 때문이다. 근 10년만에 에이프만의 공연을 보았을 때는 내가 왜 이 인물을 만들어내게 되었는지 오랜 옛날로 되돌아간 듯한 기분도 들었다.

 

발췌한 부분은 3년 전에 쓴 장편의 중반부이다. 배경은 1974년에서 1975년 초. 주인공 미샤가 키로프 극장에 입단해서 두번째 시즌을 맞이했을 때이다. 이 부분에서 그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 그리고 곱사등이 망아지의 이바누슈카를 춘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라브로프스키 버전. 여기의 곱사등이 망아지는 요즘 마린스키에 올라가는 라트만스키 버전이 아니고 나의 본편 우주에서 당시 키로프 예술감독(허구의 인물) 보리스 아사예프가 새롭게 안무한 버전이다. 둘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고 배역도 마찬가지인데 여기서 미샤는 조금 다른 식으로 춤춘다.

 

하지만 이 글을 쓸때 나는 춤에 대해서만 쓰지는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이 글의 진짜 화자는 트로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샤가 정장에 샴페인을 엎지르는 얘기도 나왔다. 그 얘기는 아래...

 

 

(... 글에 언급되는 보리스 아사예프는 키로프 예술감독, 다닐로프는 행정감독이다. 물론 이것은 내가 허구로 만들어낸 극장 구조와 인물들이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두번째로 맞이한 가을 시즌에서 미샤는 지나이다와 짝을 이루어 춤추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더 이상 크류코바나 다른 인민예술가 파트너가 필요하지 않았다. 관객들은 그 젊은 무용수가 무대 위에 꼼짝도 않고 두 시간 동안 앉아 있기만 해도 극장에 찾아올 기세였다. 그와 지나이다는 첫해에 미처 추지 못했던 주요 레퍼토리들의 배역을 거의 모두 섭렵했다. 키로프 무대에서 채 보여주지 못한 것들 중 몇 가지는 연방과 해외 투어에서 췄다.

 

 발레단의 예술감독인 보리스 아사예프는 미샤에게서 몸을 새로운 방식으로 사용하는 능력과 음악에 대한 타고난 감각을 발견했다. 혹독한 교육과 훈련으로 다져져 고전 발레의 테크닉을 완벽하게 소화하는 무용수였지만 미샤 야스민에게는 끊임없이 새로운 움직임을 추구하고 전통적 방식을 훌쩍 뛰어넘으려는 성향이 있었다. 그건 자칫 잘못하면 천박하고 지저분한 스타일로 전락할 수도 있었지만 미샤는 휘파람을 불 듯 가볍고 우아하게 그런 시도를 계속했고 대부분 성공했다. 관객들은 그가 뭔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키로프의 전통을 박살내며 야만인처럼 무대를 더럽히고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전통주의자에 가까운 아사예프는 미샤의 그런 특질 때문에 분노에 사로잡힐 때도 많았지만 보통은 매료되거나 고민에 빠졌다. 당에서 박아 넣은 밋밋한 예술감독이라는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그는 나름대로의 심미안을 갖추고 있었고 재능에 대한 감별력도 뛰어났다. 아사예프는 미샤와 새 배역을 놓고 리허설을 할 때마다 그의 새로운 해석과 놀라운 움직임에 감탄을 해야 할지 아니면 그 반항적이며 타협하지 않으려 드는 태도를 들어 역을 빼앗아버려야 할지 골치를 썩여야 했다.

 

 울리얀 세레브랴코프를 축으로 한 남성 무용수들 다수는 그런 미샤를 미워했다. 그건 순식간에 톱스타가 된 후배에 대한 질시 뿐만은 아니었다. 미샤는 선천적으로 집단에 포함되거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바깥에서는 예의도 제법 지키고 차분한 편이었지만 춤과 관련된 일에서는 연공서열이나 소모적인 명령 따위를 경멸하고 무시하기 일쑤였다. 새 시즌에도 선배들과 미샤 사이에는 일촉즉발의 험악한 분위기가 여러 번 생겨났다. 미샤는 별 말을 하지 않았지만 트로이는 꽤 친해진 발레단 코디네이터 타마라로부터 가끔 그런 이야기들을 전해 들었고 걱정에 사로잡히곤 했다.

 

 여자 파트너들은 미샤에게 별로 불만을 갖지 않았다. 존재감이 강력해서 어디서나 훌쩍 튀어버리는 경향은 있었지만 미샤는 기본이 잘 되어 있는 파트너였고 상대를 안정적으로 받쳐주면서 움직임이나 포즈를 아름답게 뽑아내 주는 기량이 탁월했다. 미샤와 춤을 췄던 여자 무용수들은 한결같이 그의 음악적 감각과 무대 장악력에 대해 얘기했고 다시 파트너가 되고 싶어했다. 그는 자신의 존재감으로 상대를 압살하기보다는 파트너를 그 경이로움 속으로 함께 데려갈 때가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떠나갈 듯한 갈채와 기록적인 커튼콜 앞에서 무심할 수 있는 무용수들은 별로 없었다.

 

 

 12월 중순에 그는 지나이다와 로미오와 줄리엣을 췄다. 부다페스트에서 춘 이래 두 번째였지만 레닌그라드에서는 처음이었다. 발레단에서 가장 젊고 아름다운 커플인데다 로미오와 줄리엣이란 배역의 상징성 때문에 공연 당일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다들 미샤 야스민과 지나이다 세도바의 테라스 장면을 보고 싶어 몸이 달았다.

 

 그 날은 극장과 관련된 기념행사가 있었기 때문에 당 중앙위원들과 정부 관료들이 좋은 자리를 모두 차지했고 표를 구하지 못한 팬들은 극장 바깥에 모여 발을 동동 굴렀다. 대담한 몇몇은 몰래 칸막이 자리로 숨어들기도 했다. 방송사에서도 취재를 왔고 렌필름에서도 무대를 녹화하러 왔다.

 

 후끈 달아오른 관객들의 기대와는 달리 극장 내부와 몇몇 전문가들로부터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둘 다 사랑스럽고 달콤한 연인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었고 가냘프고 섬세하다기보다는 역동적이고 드라마틱한 스타일의 배우들이었기 때문이다. 아사예프는 한때 미샤와 지나이다에게 부드러운 이미지를 위해 금발로 염색할 것을 제안하기까지 했지만 둘 다 거부했다. 트로이는 세레브랴코프가 스페이싱 리허설을 마치고 내려오던 지나이다에게 기껏해야 머큐시오에나 어울리는 파트너를 얻어서 참 안됐다고 비아냥거렸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타마라는 두 손을 마구 휘저으며 과장된 어조로 외쳤다.

 

 

 “ 오오, 난 지나가 울어버릴 줄 알았어, 트로이! 울리얀은 본성이 못된 건 아니지만 원하기만 하면 엄청 기분 나쁘게 말할 수 있거든. 그 사람 독설 때문에 신입 남자애들도 여럿 우는 거 봤어. ”

 

 “ 그런데? ”

 

 “ 와, 지나가 그렇게 성깔 있는 앤 줄 상상도 못했지. 눈을 똑바로 뜨면서 나이 값 못하는 선배와 추느니 머큐시오 따위와 추는 게 백배 낫다고 쏘아붙이던데. 너도 그때 지나를 봤어야 해. 눈이 이글거리는 게 미샤랑 똑같았어. 무섭기는 걔보다 훨씬 무서웠지. 역시 빨간 머리는 달라. 둘이 정말 딱 어울려. ”

 

 

 그래서 트로이는 성깔 넘치는 반항아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게 되리라고 생각하며 극장에 갔다. 촬영에 여념이 없는 이고리 옆에 앉아 타냐와 갈랴, 료카와 함께 공연을 봤다. 갈랴는 우리 로미오가 진짜 로미오를 추는 걸 어떻게 보지 않을 수가 있느냐며 아기도 어머니에게 맡기고는 새 옷을 차려입고 왔다. 그들 모두 미샤가 발레학교 시절 췄던 짧은 2인무를 떠올리며 감개무량해 하고 있었다.

 

 

 이고리가 막이 드리워져 있는 무대를 향해 카메라를 길게 빼며 말했다.

 

 

 “ 이봐, 저 앞자리에 쿨리마코프가 앉아 있어. 스비제르스키도. ”

 

 “ 그래, 돔브로프스키와 불리첸코도 같이 들어가더라. 아까 기념식 했잖아. 오늘 다닐로프 완전 긴장 타겠는데. 높으신 분들이 대체 몇 명이야. ”

 

 “ 더 장난 아닌 거 얘기해줄까? 마로조프도 왔어. 그 드미트리 마로조프. ”

 

 “ 그 도살자? 추기경? 젠장, 우리 저쪽 줄에 폭탄이라도 하나 던져버리자, 구국영웅이 되는 거야! ”

 

 “ 안되지, 우리 로미오가 다치잖아. 폭탄은 커튼 콜 끝난 다음이야. ”

 

 

 그때 오케스트라 연주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주변에 앉아 있던 관객들이 그들에게 쉿 하며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현대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셰익스피어를 좋아했다. 그리고 로미오와 줄리엣에 대해서는 언제나 보석 같은 언어로 교묘하게 치장된 섬세한 포르노라고 생각했다. 그는 대학 초년생 시절 셰익스피어 연구회 친구들과 알렉산드린스키 극장에 그 발레를 보러 갔었다. 발레는 떠들썩하고 장황한 음악과 호화스런 볼거리로 가득 차 있었지만 셰익스피어의 에로틱한 언어를 형상화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곧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미샤는 로미오 역을 준비하면서 트로이에게 그 희곡의 영어 낭송 테이프를 구해달라고 했었다. 그리고 한 달 동안 밤마다 그 대사를 들으며 잤다. 트로이는 그가 프로코피예프의 음악보다도 그 영어 테이프를 더 많이 들은 건 아닌지 궁금했다.

 

 

 미샤와 지나이다가 테라스에 등장해 춤을 추기 시작했을 때 극장 안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우려와는 달리 그들은 전혀 타타르 전사나 그루지야 미녀처럼 춤추지 않았다. 그건 정말로 사춘기 연인들의 춤이었다. 미샤와 지나이다는 첫 번째 아다지오를 청순하고 조심스러운 아이들처럼 시작했다. 하지만 순수함과 건전함으로 표백된 피오네르 소년소녀들의 춤은 아니었다. 음악이 고조됨에 따라 그들은 성에 눈뜨는 사춘기 연인들의 경이와 탐색을 거의 짐승과도 같은 예민한 감각으로 점점 생생하게 형상화해냈다. 그건 셰익스피어의 언어와 마찬가지로 섬세하게 정련된 우아한 포르노였다.

 

 트로이는 미샤가 어떻게 섹스를 무대 위로 가지고 올라와 저토록 소년답고 사랑스러운 방식으로 천연덕스럽게 춤출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어떤 관객들과 전문가들도 그 무대를 외설적이라고 비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트로이는 알았다. 관객들 대부분도 알았을 것이다. 미샤와 지나이다는 어린 연인들의 섹스와 욕망을 얘기하고 있었다. 중앙위원회 간부들과 문화예술계 인사들 앞에서 당과 소비에트의 명예를 드높이는 키로프 극장의 스타 커플이 섹스를 형상화한 춤을 추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젊은 연인들의 풋풋하고 애처로운 사랑과 이제껏 겪어보지 못했던 성의 쾌락에 대한 노골적이며 호기심 넘치는 탐색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며 미샤와 지나이다는 관객들을 유사 오르가즘으로 몰고 갔다.

 

 

 침실에서 미샤는 대담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애인이었다. 당과 사회의 지탄을 받는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죄책감이나 두려움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소심하고 폐쇄적인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그에 비하면 경험이 일천한 풋내기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랑을 나누는 도중, 드문 순간이면 트로이는 그에게서 길 잃은 아이처럼 쓸쓸하고 순진한 모습을 보았다. 경이로움과 공포. 그리고 무대 위의 로미오에게도 그 모습이 있었다. 그 모습은 드라마틱하게 극대화되었고 관객들을 무방비 상태로 만들었다. 사랑에 빠뜨렸다. 미샤의 로미오와 지나이다의 줄리엣이 종말을 맞았을 때 관객들은 진심으로 슬퍼하며 자기 첫사랑이 죽은 것처럼 눈물을 쏟았다. 아사예프의 선택이 성공했던 것이다. 세레브랴코프조차도 더 이상 미샤를 머큐시오 역에나 어울리는 풋내기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였다.

 

 

 이고리와 영화사 동료들이 촬영한 필름은 연말에 국영채널에서 방영되었다. 미샤는 호두까기인형을 추지는 못했지만 대신 아사예프가 야심차게 리메이크한 ‘곱사등이 망아지’의 새해 초연에서 이바누슈카를 췄다. 파트너인 공주 역을 춘 것은 지나이다가 아니라 코펠리아 역으로 유명했던 옥사나 셰먀코바였다. 그 공연에서 미샤는 드라마와 비극 뿐만이 아니라 희극도 잘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돈키호테를 췄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관객들을 웃게 만드는 방법을 알았다. 그건 축복받은 재능이었다.

 

 

 이바누슈카를 출 때 미샤는 머리색을 금발로 물들였다. 아사예프는 자기가 제안했을 때는 무시해놓고 왜 이제 와서 그런 짓을 하느냐고 짜증을 냈지만 미샤에게는 자기 나름대로의 배역 해석 방법이 있었고 감독에게 구구절절 설명하려 들지도 않았다. 트로이가 강의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미샤는 욕조에 앉아서 직접 머리칼을 자르고 블론드로 염색을 시도하고 있었다. 트로이는 뒷머리에 약을 바르는 것을 도와주었다.

 

 

 “ 이거 너무 밝은 거 아냐? ”

 

 “ 아주 밝아야 해. 색이 빠지려면 한참 기다려야 할 거야. ”

 

 

 미샤는 참을성 있게 탈색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색을 덧입혀서 아주 엷고 밝은 꿀 색깔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그 와중에 뒷목덜미에 잠깐 두드러기가 일어나서 트로이는 얼음을 가져와야 했다. 미샤는 따끔거리는 것도 개의치 않고 눈썹까지 물을 들였다.

 

 

 “ 그냥 스프레이로 물들이면 안돼? 분장사한테 해달라고 하면 되잖아. ”

 

 “ 머리가 너무 까매서 스프레이는 잘 안 들어, 분장사도 포기했어. ”

 

 

 미샤는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에도 몇 주 정도 머리색을 되돌리지 않고 다녔다. 키로프에서 새로 제작하는 화보집 촬영 작가가 블론드의 이바누슈카 사진을 넣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엷은 꿀 빛깔의 머리와 금빛 눈썹의 미샤는 완전히 낯선 존재로 보였다. 트로이는 길게 흐트러진 검은 머리의 미샤가 더 좋다고 생각했지만 학생처럼 짧은 금발 머리로 열쇠를 따고 들어와 현관에서부터 수트 재킷과 드레스 셔츠와 타이를 벗어 내팽개치는 미샤를 볼 때마다 갈랴의 집에서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제어하기 힘들만큼 격한 욕망을 느꼈다.

 

 

 미샤는 정장을 싫어했지만 연초부터 각종 행사에 불려 다니느라 어쩔 수가 없었다. 그가 정장이 없다는 거짓말을 하며 고집을 부리자 다닐로프는 새해 선물로 그에게 새 수트를 한 벌 떠안긴 후 무조건 입고 나오라고 엄포를 놨다. 미샤는 당 지역위원회 서기가 주최한 파티에서 고의로 자기 옷에 샴페인을 엎지르고는 다음날 비슷한 행사에 전혀 얌전하지 않은 스웨이드 재킷을 입고 나갔다. 화가 난 다닐로프는 타마라를 시켜서 서로 다른 디자인의 수트를 세 벌이나 사오게 한 후 옷들을 말 그대로 미샤의 얼굴에 냅다 집어던졌다.

 

 

 “ 그래서, 또 샴페인을 엎질러야 하는 거야? 아니면 와인? ”

 

내 급료에서 제할 줄 알았는데 공금으로 지출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냥 입기로 했어. 스타일은 후졌지만 소비에트에서 무려 공금으로 하사하신 거니까. ”

 

 

 패션에 대해 잘 모르는 트로이는 그 정장들의 스타일이 어디가 어떻게 후졌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알 수 있는 거라곤 짧은 금발을 하고 나타나 재킷과 드레스 셔츠와 넥타이를 기록적인 속도로 벗어던지는 미샤의 앞에서 도저히 태연하게 견딜 수 없다는 것 뿐이었다. 그는 사춘기 줄리엣처럼 몸이 달았고 가끔은 침실이나 소파까지 가지도 못했다.

 

 

 마침내 그는 미샤에게 머리색을 되돌리라고 종용했다. 화보 촬영도 다 끝났으므로 미샤는 순순히 검은 머리로 돌아왔는데 그때서야 트로이는 머리색이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계속해서 사랑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충족되지 않는 갈망으로 불타고 있을 뿐이었다. 검은 머리의 미샤 야스민과 갈색 머리의 미샤 야스민, 금빛 머리의 미샤 야스민, 심지어 붉은 머리와 푸른 머리, 자주색 머리의 미샤 야스민조차도 모두 그의 곁에 존재하는 동시에 다른 무수한 남자들의 곁에 존재할 것이다. 그 무수한 남자들에게도 미지의 이름이 주어져 있고 미지의 욕망이 타오르고 있을 것이다. 트로이는 그 사실을 오랫동안 무시하려고 노력했다.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예전에 미샤가 키로프에 데뷔해 해적의 알리와 지젤의 알브레히트를 추는 장면을 발췌한 적이 있다. 그 글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3128

 

 

 

 

그냥 지나가면 아쉬우니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의 로미오와 곱사등이 망아지의 이바누슈카 사진 몇 장. 사진은 alex gouliaev.

 

 

 

 

 

상대역은 디아나 비슈뇨바

 

 

 

이것부터 세장은 상대역이 알리나 소모바

 

 

 

 

 

마지막은 곱사등이 망아지에서 이바누슈카를 추는 슈클랴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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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페테르부르크에 와서 그런지 오랜만에 본편 우주의 글 일부를 발췌해 본다.

 

지금 머물고 있는 숙소는 마린스키 극장에서 도보로 15분쯤 떨어져 있는 림스키 코르사코프 거리 초입에 있다. 예전부터 이 호텔에 한번 묵어보고 싶었는데 그 이유는 극장에서 가깝기도 했지만 내가 쓰던 글에서 주인공이 키로프 시절 이 근방 동네에 살았기 때문이다. 주인공 미샤는 어릴때는 어머니와 함께 바실리예프스키 섬의 프리모르스카야 지하철역 근처 공동아파트에 살았고 이후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키로프 입단 후 사도바야 거리에 있는 아파트에서 동료 무용수 4명과 1년동안 지낸다. 그리고 곧 스타가 된 후 위에서 내려준 고급 아파트에서 파트너 발레리나와 둘이 지내게 되는데 그 집이 이쪽 동네에 있는 것으로 설정했었다.

 

나는 이 동네를 모르지는 않지만 그래도 살아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고부터는 페테르부르크에 올때마다, 마린스키에 올때마다 주변을 걸어보고 그 아이가 어떤 경로로 걸어다녔는지, 그리고 운하와 운하 사이를 어떤 모습으로 누비고 다녔는지 상상하곤 했다. 무엇보다도, 마린스키 극장에 들어갈때면 언제나 그에 대한 생각을 한다.

 

아래에 발췌한 글은 몇년 전 쓴 장편의 후반부 일부이다. 미샤의 친구 트로이가 심리적 화자로 나오는 그 장편이다. 정말 짧고 아무것도 아닌 장면이다. 하지만 내게는 중요하고 또 마음에 남는 장면이었다. 그래선지 다시 이곳에 와서도, 마린스키 극장 앞과 뒤를 지날때마다, 운하와 다리를 건널때마다 잠시 그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저때 나는 미샤의 입을 빌려 내 얘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긴 진실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어차피 소설쓰기란 거짓말하기이며 거기에 일부의 진실을 숨기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그 반대도 성립할 것이다.

 

발췌한 이야기는 이 동네가 아니라 트로이가 사는 고로호바야 거리 쪽에서 시작된다. 고로호바야 거리는 사도바야와 말라야 모르스카야 거리가 교차하는 쪽에 있는데 마린스키까지 걸어오면 내 걸음으로는 30분 정도 걸린다. 지름길로 가면 미샤 같이 날렵한 아이는 15분만에도 주파할 것이다. 미샤의 아파트는 마린스키 근처에 있지만(이 림스키 코르사코프 거리와 글린카 거리, 크류코바 운하 사이의 어딘가로 설정했다) 평소에는 트로이의 집에서 자고 다닌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시즌이 시작되자 미샤는 새벽에 들어와 죽은 듯 잠만 자고 다시 극장으로 나가곤 했다. 스케줄을 보면 전처럼 다른 애인들을 만나고 다닐 시간을 짜낼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주역 무용수였기 때문에 매일같이 무대에 올라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리허설을 비롯해 각종 세션이 잡혀 있었다. 키로프 일정 외에도 다른 극장의 지인들과 이런저런 협업 계획이 있었고 틈날 때마다 러시아 미술관과 에르미타주와 도서관을 드나들었다. 차로 이동할 때도 가능하면 다른 사람에게 운전대를 맡기고 책을 읽거나 노트에 계속해서 뭔가를 메모했다. 일찍 일어나는 것을 그렇게 버거워하던 인물이 이제는 이른 오전에도 연습실에 나갔다.

 

어느 날 아침에 트로이는 미샤가 반쯤 눈을 감은 채 침대 모서리에 부딪쳐 가며 옷을 주워입는 것을 보았다. 트로이의 바지를 끌어올리며 옷이 맞지 않는다고 투덜대고 있었다. 일어난지 10분도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샤워를 했는지 얼굴과 머리에는 아직도 차가운 물기가 남아 있었지만 여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고 트로이가 바지를 바꿔준 후에도 단추와 지퍼를 채우는데 몇 분이 걸렸다.

 

“ 잠 좀 깨고 가라. 한 시간은 있어야 정신 차리면서. 커피라도 줄까? 차 가지고 가야 하잖아. ”

 

“ 운전하기 싫어. 버스 탈래. ”

 

“ 너 출퇴근 시간엔 버스 안 타잖아. ”

 

“ 시간이 없어. ”

 

“ 이렇게 일찍 가서 뭘 하려고? ”

 

“ 넬레츠카하고 좀 맞춰볼게 있어. ”

 

“ 걘 네 파트너도 아니잖아. 계속 이러다간 정말 쓰러진다. ”

 

“ 말도 안돼. 정량의 칼로리 섭취. 정량의 운동. 다 하고 있어. ”

 

근사한 어휘를 가져다 쓴 건 좋았지만 졸음 때문에 대부분의 자음들은 뭉개져 잘 들리지도 않았다. 현관에 앉아 운동화 끈을 매다가 벽에 머리를 대고 깜박 졸기까지 했다. 트로이가 차가운 초콜릿 우유를 가져다주자 뭔지도 모르고 한 컵 다 마신 후 얼굴을 찌푸렸다.

 

 

“ 이게 뭐야? 애들 먹는 거 아냐? ”

 

“ 정량의 칼로리 섭취를 위해 먹었다고 생각해. ”

 

 

트로이는 대신 차를 운전해서 극장까지 그를 데려다 주었다. 조금이라도 더 재우기 위해서였다. 극장 앞에 차를 세웠을 때도 미샤는 졸고 있었다. 트로이는 그가 자도록 내버려두었다. 반쯤 풀어져 있는 셔츠 단추를 제대로 채워주고 입가에 묻어 있는 초콜릿 우유 얼룩을 닦아주었을 때 미샤가 눈을 뜨더니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끌어당기며 키스를 했다. 트로이는 확 달아올랐지만 차 창문 너머로 누가 보지 않을까 두려워서 조심스럽게 몸을 떼었다. 미샤가 창 너머를 힐끗 보더니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 다시 집에 갈까. ”

 

“ 그래, 오후에 다시 나와. 힘들잖아. ”

 

힘든 것보다는 섹스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트로이는 여전히 그 단어를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대신 미샤의 무릎을 가만히 감싸쥐었다. 그에게 바짝 다가붙어 있는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꼭 맞는 청바지가 점점 불편해지는 듯 미샤가 허리와 엉덩이를 꿈틀거리며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 밤에. 지금은 가야겠다. 넬레츠카가 기다릴 거야. ”

 

“ 왜 그렇게 자신에게 가혹해? 넌 지금 몇 사람 몫을 하고 있는데. ”

 

“ 계속 가야 해. 멈추면 안돼. ”

 

“ 잠깐 멈춰도 돼. 조금 쉰다고 생각해. ”

 

“ 아니, 난 계속 가야 해. 멈추면 일어나고 싶지 않을 테니까. ”

 

 

미샤는 바깥에서 누가 들여다보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그의 입술에 길게 입을 맞춘 후 차 문을 열고 나갔다. 극장 뒷문으로 달려가는 미샤 야스민의 모습은 너무나 가볍고 나는 듯해서 무게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무대 위에서처럼. 전시실에 걸린 화보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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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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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린스키 극장과 주변 풍경 몇장. 이번에 와서 찍은 것들.

 

 

마린스키 극장 램프들.

 

마린스키 극장에서 곧장 보이는 성 니콜스키 사원.

이날은 비가 왔다.

 

 

림스키 코르사코프 거리를 지나가다 나타나는 그리보예도프 운하.

저런 집들 중 한군데에 미샤가 살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저 건물들은 아니지만.

 

 

요 며칠 간 나는 이 다리를 건너 쭈욱 걸어서 숙소로 돌아오곤 한다. 이제 그것도 하루밖에 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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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여기 발췌한 글은 12년 전에 썼던 단편의 후반부이다. 나는 2000년대 초반에 어떤 인물들을 데리고 여러 가지 실험을 하며 글을 썼는데 단편과 장편들, 중편들이 하나의 우주 속에서 여러 갈래로 뒤섞여 있었다. 그 중 약 30여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옴니버스 시리즈가 있었는데 아마 오래전 내가 운영하던 영화 카페와 문학 카페에 드나들던 분들은 읽은 적도 있을 것이다. 시리즈의 제목은 a star-child 였다. 오스카 와일드의 the star child에 대한 오마쥬 제목이었다.

 

 

이 시리즈의 번외편으로 썼던 크리스마스 옴니버스 단편 중 하나를 작년 성탄절 즈음 발췌한 적이 있다. 그건 여기 : http://tveye.tistory.com/4287

 

 

그 단편 시리즈는 내게 여러 가지 의미로 중요했는데, 나는 그 시리즈에서 사람들의 관계를 주로 다뤘다. 배경은 1980년대 초반 뉴욕이었다. 주인공은 열여섯 살짜리의 미나라는 소녀였는데 그녀는 본명 대신 길거리에서 만난 로커 청년 커트로부터 선물받은 카르멘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시리즈는 카르멘과 커트, 그리고 그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였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의 관계들이 깊어지고 또 확장되는 양태를 다뤘다.

 

 

그리고 내가 다시 살려내 지금도 쓰고 있는 본편 우주의 미샤가 제일 처음 등장했던 것도 실은 이 시리즈에서였다. 미샤의 이야기들과 이 카르멘과 커트의 세계는 하나의 원형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사실은 러시아 민담의 무수한 변용들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미샤는 이 시리즈의 제5편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 5편에서 미샤는 뉴욕 쪽 발레단과 협업을 통해 뉴욕에서 이반왕자와 불새를 모티브로 한 발레를 안무하고 춤을 춘다. 미샤의 본편 우주에서 그 발레는 그가 무대에서 보여준 마지막 춤이 된다. 그리고 시리즈의 19편에서 미샤는 다시 한번 등장한다. 지금 쓰고 있는 미샤의 본편 우주는 사실 그 시기 직후부터 전개되는 이야기들이다.

 

 

생각해보니 그 19편에서 미샤와 뉴욕 발레단의 안무가 주드 헤이즈가 나누는 대화를 예전에 발췌했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다시 글을 쓰기 몇달 전이었고 미샤에 대해 떠올리며 그에 대해 다시 글을 쓰지 못해 안타까워 하고 있었다.  그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1242

 

 

여기 발췌한 이야기에는 미샤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은 26번째 이야기였던 'not enough'의 후반부이다. 제목은 당시 좋아하던 our lady of peace의 노래에서 따왔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네 명이다. 주인공 중 하나인 커트는 30대 중반의 옛 락 스타이며 지금은 더 이상 노래를 하지 않는다(그랬기 때문에 나는 미샤라는 인물을 제일 처음 등장시켰을 때 바로 이 사람과 만나게 만들었다. 사실 미샤와 커트는 여러 가지 면에서 통하는 곳이 있는 사람들이다. 어떤 면에서는 완전히 반대이지만) 그는 펑크 락 스타였고 정키였으며 게이 정체성을 가진 인물이다. (그의 모델은 내가 무척 좋아했던 영화 벨벳 골드마인의 주요 배역인 커트 와일드였는데 점차 내 시리즈의 커트는 그와는 완전히 독립된 새로운 인물이 되었다) 발췌문의 첫 이야기에서 독백하는 것이 바로 커트이다.

 

 

그리고 두번째 이야기부터 심리적 화자로 등장하는 인물은 그의 애인인 그레이라는 청년이다. 그는 이른바 아이비 리그 정치학과 대학생이고 상류층이며 커트를 만나기 전까지는 보수적이고 건전한 '미국 청년'이었다. 그는 커트를 만난 순간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른다.

 

 

나머지 두 인물, 가브리엘과 차르는 커트의 지인들이다. 가브리엘은 커트의 오랜 애인이자 친구이며 유명한 포르노 배우이고 차르는 뉴욕 거리의 흑인 갱이다.

 

 

배경은 1981년, 핼로윈 밤이다. 커트는 뉴욕 밤거리 퀴어 서브 컬처가 응축된 어느 뒷골목의 클럽으로 그레이를 데려간다. 클럽의 이름은 비비안즈 레이크인데 물론 가상의 공간이다. 핼로윈이기 때문에 그곳은 근사하게 분장한 젊은 남자들로 가득하다. 그곳에서 그들은 커트의 지인인 가브리엘과 차르를 만나고 그레이는 의혹과 고통, 질투심에 휩싸인다. 그리고 오로지 육체와 섹스 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그 클럽의 어둠 속에서 이질감에 사로잡힌다. 왜냐하면 그는 모범생이며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온 인간이기 때문이다.

 

 

발췌한 이야기는 맨 마지막 부분 일부이다. 몹시 취한 커트는 마음에 드는 음악이 나온다면서 그레이에게 플로어로 나가 춤을 추자고 하고 그레이는 거절한다. 그러자 가브리엘의 남자친구인 차르가 그와 함께 플로어로 나간다. 첫번째 이야기는 커트의 독백, 두번째부터는 그레이의 시점으로 이어진다.

 

 

이야기에서 언급되는 황금의 용이나 악마는 커트가 오랜 애인이자 친구인 가브리엘에게 붙인 별명, '가브리엘의 괴물'은 커트가 차르에게 붙인 애칭이다.

 

 

내가 왜 갑자기 십몇년 전에 쓴 이 글을 뒤적이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강남역 살인사건 때문일 수도 있다. 이 끔찍한 혐오와 증오, 몰이해와 모든 것이 뒤엉켜버린 사회에 대한 슬픔 때문일 수도 있다. 하여튼 나는 오래전 이 글을 쓸때도 슬펐고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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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음악이야. 단지 그뿐이야. 좋은 음악. 단 한 번도 이런 음악에 무관심해본 적은 없어. 헤로인 따윈 이런 음악의 대용품에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꿈꾸곤 하지. 진정 변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야. 예쁘장한 남자애들과 미끈한 카우보이 마초들이 가죽옷을 잘 차려입고 메이크업을 하고 허리를 빙빙 돌리면서 레이크의 지하계단을 내려오는 이유도 실은 그것뿐일지도 몰라.

 

 

일단 이 어둠 속에 머리를 들이밀고 미친 듯이 술을 퍼마시고 미친 듯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다보면 모든 건 똑같아져. 어제와 오늘, 내일을 구분할 수 없어지는 거야. 엉덩이 아래를 움켜쥐는 거칠고 뜨거운 그 손길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어. 마치 모든 시간이 정지해버린 것처럼, 아니,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레이크의 어둠은 우릴 속이지. 존재하는 거라곤 애초부터 사악하고 강렬한 욕망뿐인 것처럼, 오로지 어둠 속의 육체만이 진실한 것인 양 우릴 속이는 거야. 실은 그 육체들조차 모두가 변하고 있는데, 1분 전의 숨결과 1분 후의 숨결이 서로 다른 것처럼.

 

 

레이크에 드나드는 풋내기들은 그런 걸 몰라. 아무것도 모르고 속아 넘어갈 뿐이야. 그 환상을 현실이라고 믿으면서. 그런데 난 지금 속는 걸 알면서도 술을 마시고 음악에 몸을 맡기고 있어.

 

 

가끔은 속고 싶어질 때가 있어. 지독한 거짓말이란 걸 알면서도 그걸 철석같이 믿어보고 싶어. 때로는 거짓말을 믿으며 죽고 싶어. 무대 위에서 내가 그랬던 것처럼. 우스운 일이지.

 

 

가브리엘이 말했어, 인간들은 30살이 넘으면 자기 목숨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거라고, 자살 따윈 젊은 애들만 할 수 있는 거라고. 난 그때 개같은 나이프로 개같이 가슴을 쑤셔 대서 좆같은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지. 가브리엘은 내게 비겁하게 때를 넘겨버렸다고 했어, 애초부터 무대에 올라갈 필요도 없었다고 했어, 갈증으로 고생하는 인간은 무대에 올라가면 안 된다고, 자기처럼 카메라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뒹굴기만 하면 된다고 했어. 그는 내가 아무 말도 듣지 못하고 바보처럼 잠들어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건 아니야. 잠들어 있으면서도 들을 수 있는 말이 있어. 가브리엘이 하는 말 같은 건 전부 다 들린다구.

 

 

난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어. 그래, 난 내 목숨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가 없다고.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난 단 한 번도 내 목숨이 내 것이라고 여겨본 적이 없다고. 그 악취 나는 웨인 카운티의 철제 침대에 묶여 가시관을 쓰고 하얀 빛을 쬐기도 전부터 내 목숨은 내 것인 적이 없었다고. 그러니까 난 지금껏 허세를 부리며 살아온 거라고. 마치 내 목숨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듯 무대에 올라갔고 내 목숨이 내 것인 양 노래를 불러왔다고.

 

 

그런데 결국은 가브리엘이 옳았어. 언제나처럼. 하느님은 말씀으로 용과 천사를 만들고 이후에야 숨을 불어넣어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언제나 용과 천사는 인간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 난 노래를 그만뒀어. 무대에 올라가는 것도 집어치웠어. 그는 내가 침묵하게 될 거라고 했어. 그리고 난 침묵했어. 그것만큼 쉬운 일은 없었어. 그런데 쉬운 일만큼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도 없어.

 

 

핼로윈, 귀신 가면과 사탕을 팔아먹기 위해 만들어낸 날. 가브리엘이 괴물을 거느리고 레이크에 나타난 건 바보 같은 농담에 불과해. 귀신 들린 밤 따윈 존재하지 않아. 유령은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내부에 있어.

 

 

가브리엘의 괴물은 더럽게 춤을 못 추지만 심장이 떨려올 만큼 멋진 친구야. 하지만 그가 좋은 음악이라고 한 건 진심이 아니야. 그는 음악이 뭔지도 몰라. 그는 다만 어둠 속에서 홀로 춤추는 것만큼 끔찍한 일은 없다는 걸 이해했을 뿐이야. 가브리엘의 괴물은 무척 동정심이 많은 친구지. 맘만 먹으면 에메랄드 앨리에 모여든 무리 전부를 죽여 버릴 수 있는 놈을 두고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느냐고 하겠지만 그건 사실이야.

 

 

나의 그레이는 해적처럼 차려입고 혼을 빼놓는 미소로 레이크의 어둠을 밝히고 있어. 그 누구도 내가 그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없을 거야. 하지만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게 있어.

 

 

갈증으로 고생하는 인간. 하지만 죽어야만 하는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거라곤 단 한 잔의 물 뿐이야. 이르든 늦든 언젠가는 물을 다 마셔버리게 돼. 누군가는 단숨에, 누군가는 한 방울씩, 누군가는 목구멍에, 누군가는 말라버린 대지에 쏟아 붓겠지. 가브리엘은 그걸 이해하지 못할 거야. 어쩌면 그의 괴물은 이해하겠지. 하지만 이름이 두개 있는 친구, 어둠 숲의 주인이자 황금의 용인 녀석은 절대 이해할 수 없어.

 

 

나의 그레이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런 미소를 짓고 가장 아름다운 검은 눈으로 날 바라보곤 하지. 그리고 그럴 때면 난 아무 것도 믿고 싶지 않아. 그에게 주어진 것 역시 단 한 잔의 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아무것도 충분하지 않다는 걸.

 

 

때로는 거짓말을 믿으며 죽어야만 해. 그레이 역시 언젠가는 그걸 알게 되겠지. 하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야.

 

 

 

*   *   *

 

 

 

 

음악은 무척이나 길었다. 그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는 커트와 차르를 볼 수가 없었다. 그는 가슴을 에는 듯한 질투를 느꼈다.

 

 

하지만 그는 플로어로 내려가 차르를 밀어젖히고 커트를 끌어낼 수는 없었다. 그는 단 한 번도 그런 짓을 해본 적이 없었다. 마치 커트와 이상한 얘기를 나누는 가브리엘에게 욕설을 퍼붓거나 주먹질을 할 수 없었던 것처럼. 

 

 

가브리엘은 그에게 잔을 내밀었다. 단 한 번도 비열하고 비신사적인 행동을 해본 적이 없는 그레이는 그 잔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잔을 부딪쳤고 말없이 술을 들이켰다. 쓰디쓴 알콜이 불처럼 목구멍을 태웠다. 눈물이 고일만큼 독한 술이었다. 바텐더는 그와 가브리엘이 다른 남자들처럼 곧 밀실을 찾아 들어가리라고 생각한 것일까?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온몸에 전류를 흐르게 하는 강렬한 술. 레이크의 바텐더에게 있어 그는 가브리엘 던컨의 앞에 무릎을 꿇고 언제라도 서비스를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젊은 그루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커트와 함께 있는 그의 모습 역시 별다를 게 없을지도 모른다.

 

 

가브리엘은 기침을 했다.

 

 

“ 술인지 타르인지 구분이 안 가는걸. ”

 

 

그레이는 눈을 깜박였다. 가브리엘 던컨은 눈으로 웃고 있었다.

 

 

 

 

*    *    *

 

 

 

 

 

 

 

 

 

그들이 비비안즈 레이크로부터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는 새벽 1시였고 커트는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취했다. 분명 아침이 되면 무시무시한 숙취로 고생하게 될 것이다. 그의 눈동자는 완전히 풀려 있었고 그레이의 팔에 매달리지 않고서는 한 발짝도 제대로 떼어놓지 못했다.

 

 

그레이는 커트를 부축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에메랄드 앨리는 스트립 바들과 게이 클럽들, 그리고 기묘한 모텔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는 이곳을 어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커트는 어지럼증을 느끼는 것 같았고 조금 걷다가 가로등에 머리를 기대며 멈춰 섰다.

 

 

“ 괜찮아? ”

 

 

커트는 대답하는 대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분명 마지막에 마신 술 때문일 것이다. 가브리엘과 차르가 자리를 뜬 후에도 커트는 몇 잔이나 더 마셨던 것이다.

 

 

“ 잠깐만 기대 있어. 약 사올 테니까. ”

 

 

그레이는 조금 전에 지나쳐 온 드럭 스토어를 가리키며 말했다. 커트는 그의 말을 알아들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놓았다.

 

 

약국은 앨리 모퉁이에 있던 섹스 숍을 연상시켰다. 핑크빛과 붉은빛 네온이 휘황했고 색색의 콘돔과 윤활유 튜브와 용도를 상상도 할 수 없는 도구들이 진열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에메랄드 앨리 전체에 감도는 기운이 이곳에도 스며 있었다. 어딘지 값싸고 천박한 창부 같은 느낌. 그는 한동안 현기증을 느끼며 핑크빛 드럭 스토어 안에 서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 역시 과음한 것 같았다.

 

 

깊은 숨을 들이쉰 후 그레이는 카운터로 갔다. 하지만 무슨 약을 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아는 거라곤 아스피린과 축구선수 시절 복용했던 몇 가지 진통제뿐이었지만 이런 경우에는 별 효과가 없을 것 같았다. 보통 커트는 숙취로 괴로워하는 밤이면 욕실의 캐비닛에서 이상한 핑크색 알약을 꺼내 삼키곤 했지만 그건 처방전이 없으면 약국에서 살 수 없는 종류의 약이었다. 적어도 그레이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가 커트의 상태를 대충 설명하기도 전에 카운터의 점원이 플라스틱 병에 든 짙은 갈색 물약과 녹색 캡슐을 몇 알 건네주었다. 가격은 아스피린의 네배였고 그레이는 혹시 이 낯선 시럽과 알약이 불법 마약은 아닐까 의심했다. 에메랄드 앨리의 드럭 스토어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그는 재킷 주머니에 약을 쑤셔 넣고 약국을 나왔다. 늦가을에 접어들고 있었고 밤 공기가 싸늘하게 목덜미를 스쳤다. 소매 없는 재킷만 걸친 커트가 감기에 걸릴까봐 걱정이 된 그레이는 빠른 걸음으로 가로등 쪽을 향해 걸어갔다.

 

 

“ 커트? ”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커트는 혼자가 아니었다.

 

 

세 명의 스킨헤드들이 커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레이는 가죽 재킷을 입은 스킨헤드들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이 소위 ‘호모 새끼’에게 어떤 욕설을 퍼붓고 어떤 끔찍한 짓을 하는지 들어 알고 있었다. 커트의 옛 드랙 퀸 친구 하나는 밤거리에서 나치 펑크들에게 린치를 당해 한쪽 귀가 잘려나갔다고 했다.

 

 

커트는 가로등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아 있었다. 그레이는 흐릿한 가로등 불빛에 비추어진 그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커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레이는 이성을 잃었다. 그는 고함을 지르며 달려가 세 명의 스킨헤드들에게 달려들었다. 뭔가 딱딱한 것이 주먹에 부딪치며 으스러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가 그의 배와 무릎을 쳤다. 하지만 아픈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주먹을 휘둘렀고 손에 잡히는 놈의 재킷 칼라를 휘어잡고 상대의 머리를 가로등에 마구 부딪쳐댔다. 그때 그가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리겠어!’ 하고 소리치고 있었는지 아니면 ‘더러운 자식들, 가만 안 두겠어!’ 하고 외쳐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기억나는 거라곤 커트가 피를 흘리고 있다는 것, 나치 기장이 달린 가죽 재킷 차림의 스킨헤드들이 그의 커트에게 더러운 손을 댔다는 것뿐이었다.

 

 

스킨헤드 펑크들은 당황했다. 그들은 다만 핼로윈 기념으로 마약 칵테일을 섞어 먹고 무리지어 거리를 쏘다니다가 에메랄드 앨리로 접어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만취 상태로 가로등에 기대 있는 호모를 하나 발견했을 뿐이었다. 길게 늘어뜨린 금발머리에 몸에 착 붙는 가죽 바지, 그리고 반쯤 녹아내린 짙은 아이라인의 잘빠진 호모 새끼가 하나 있었다. 분명 더러운 게이 바에서 놀아났거나 매춘부 거리에서 손님들을 낚고 돌아오는 길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지저분하고 재수 없는 호모 새끼에게 시비를 걸었고 잇달아 주먹질을 해주었을 뿐이었다. 그 금발머리 호모 새끼에게 6피트를 훌쩍 넘기는 운동선수 같은 체격의 성질 더러운 호모 애인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에겐 다행히도 다른 골목으로 접어들었던 나머지 무리가 소란을 듣고 나타나 주었다. 모두들 취해 있었기 때문에 이성을 잃었고 더러운 호모 새끼들은 가만 둬선 안 된다고 악을 써댔다.

 

 

그레이는 손등으로 눈을 닦았다. 눈앞이 흐렸다. 그는 상대가 몇 명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싸움을 해본 적이 없었다. 쿼터백으로 몇 차례나 학교를 우승으로 이끈 적이 있었지만 그건 언제나 운동장에서 이루어지는 정정당당한 게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는 처음으로 살기를 느꼈다. 스킨헤드 펑크들은 너무나 많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커트는 여전히 가로등에 기댄 채 주저앉아 있었다. 머리를 감싸고 있던 두 손은 바닥에 내려와 있었고 입가의 피는 멎어 있었다. 하지만 관자놀이 부근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머리를 맞은 모양이었다.

 

 

커트는 눈을 반쯤 뜬 채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꿈꾸는 듯한 눈, 어딘가 홀린 듯한 눈이었다. 하지만 그건 취기 때문이 아니라 머리를 맞아 정신이 몽롱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그레이를 도와주지도 않았고 싸움을 말리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멍하게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스킨헤드 펑크들이 그와 커트를 둘러쌌다. 그레이는 나이프가 둔한 금속빛을 내뿜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승리감에 젖어 더러운 호모 새끼들을 죽여 없애겠다고 외치고 있었다. 도취된 눈, 피에 취한 웃음이었다.

 

 

그레이는 오직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그토록 증오하고 경멸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남자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폭력과 살인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직 그 이유만으로도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거라곤 자신의 등 뒤에 커트가 있다는 사실, 커트가 피를 흘리고 있다는 사실, 그 누구도 커트에게 피를 흘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 뿐이었다. 심지어 그는 팔목을 파고드는 칼날의 아픔도 느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서로를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서로를 진정으로 미워하지도 않으면서도 미워한다고 믿으며 칼을 휘두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결코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커트가 오래 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도. 그는 다만 그들로부터 커트를 막아서야 한다는 것만 알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들이 좁혀 들어왔다. 여전히 그레이는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모든 것이 비현실적인 환상처럼 느껴졌다. 마치 핼로윈의 모든 유령들과 악마들이 에메랄드 앨리의 어두컴컴한 뒷골목으로 쏟아져 나온 것 같았다. 그리고 어렴풋한 어둠 속에서 그는 비늘을 사각거리는 거대한 황금빛 용과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진 얼굴의 괴물을 본 것 같았다. 그는 눈을 깜박였다.

 

 

차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미쳐 날뛰는 스킨헤드 펑크들을 향해 곧장 걸어왔을 뿐이었다. 그의 손에는 아무런 무기도 없었다. 오직 화상을 입은 듯 일그러진 검은 얼굴과 동공이 크게 확대된 왼쪽 눈동자뿐이었다. 스킨헤드들이 그가 누구인지를 깨닫는 데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마약 칵테일과 끓어오르는 살의조차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패잔병들처럼 달아났다. 마치 짙은 유령의 안개가 골목 너머로 스러져 버리는 것 같았다.

 

 

.. 2004년 4월, Not Enough 중에서 ..

 

 

 

 

 

 

 

 

 

 

..

 

 

저 글을 쓸 때 나는 그레이보다는 커트에게 더 가까웠던 것 같다. 아마 나는 항상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저 우주 속에서 그레이는 언제까지나 <사람들이 서로를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서로를 진정으로 미워하지도 않으면서도 미워한다고 믿으며 칼을 휘두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결코 알지 못했다> 의 세계에 있을 것이고 커트는 <죽어야만 하는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거라곤 단 한 잔의 물 뿐이야. 이르든 늦든 언젠가는 물을 다 마셔버리게 돼>의 세계에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첫번째 메모 : 2016.5.21>

 

 

지난주에 발췌했던 강령과 교조주의에 대한 이야기에 세번의 메모를 덧붙였는데 오늘 올리는 글도 비슷하다. 다만 두개의 글에 대한 세개의 메모라는 것이 좀 다를 뿐이다.

 

 

첫번째 글은 2013년 2월부터 두달 동안 프라하에 체류할 때 쓴 것이다. 지금 쓰고 있는 가브릴로프 본편의 프리퀄에 해당한다. 그 소설은 나의 주인공 미샤가 정신교화 수용소에 끌려가 겪는 일과 그 이후 클리닉, 면회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루고 있다. 순서대로 1부, 2부, 3부로 구성된다.

 

 

여기 발췌한 글은 1부 초중반부에 해당한다. 1부는 의대생 출신의 수용소 간수이자 약물 심문관 라브로프의 조수인 이오시프 흘레브니코프라는 청년의 심리적 관점에서 서술된다(이름이 너무 길고 어려운가ㅠㅠ) 2부는 미샤의 후원자 중 하나인 당 고위직 의원 게오르기 벨스키, 3부는 미샤의 친구 스타니슬라프 일린의 관점에서 서술되는데 이 두 파트는 이전에도 두어번 발췌해 올린 적이 있다. 1부는 처음이다.

 

 

그리고 아래에 짧게 인용된 두번째 글은 2012년 겨울부터 2013년 1월까지 썼던 소설의 중반부에 해당된다. 플롯 전개상 일일이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이유로 인해 모르핀에 취한 미샤가 친구이자 애인인 트로이에게 자신의 첫 수용소 기억을 털어놓는 장면 일부이다. 첫번째 글과 두번째 글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물론 시간적인 배경은 다르지만. 두번째 글에서 언급되는 미샤의 회상은 첫번째 글보다 약 8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앞서 언급했듯 첫번째 글의 심리적 화자는 간수이자 심문 조수인 이오시프 흘레브니코프이다. 파벨 슈스코프와 데미얀 라브로프는 둘다 정신교화 수용소의 심문관으로 전자는 심리조작과 교화, 후자는 약물교화를 책임지고 있다. 33번은 미샤에게 매겨진 죄수 번호이다. 슈스코프가 말하는 'ШЛ. No 2'는 '슈스코프-라브로프 요법'이라는 정신교화 프로그램들 중 하나이다. 둘의 성 약자를 딴 것이다.

 

 

슈스코프가 중간에 언급하는 슈로프스카야는 이전에 트로이와 친구들 에피소드에서 몇번 등장했던 알리사의 성이다.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인 1981년 즈음 그녀는 런던의 러시아 대사관에서 KGB 요원으로 일하고 있다.

 

 

흘레브니코프의 독백에 등장하는 토냐는 그의 옛 여자친구이다. (서무 시리즈에 나오는 발레리나 토냐와는 다른 인물이다. 노어 이름 짓기 귀찮아 ㅠㅠ)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그는 슈스코프가 어떤 식으로 교육을 진행하는지 전혀 몰랐다. 그쪽에 대한 임무는 담당 죄수를 슈스코프의 교육실까지 호송하고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 라브로프의 방으로 다시 데리고 오는 데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슈스코프에게는 별도의 보조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흘레브니코프와는 달리 전문가들이었고 하잘것없는 간수 신분이 아니었다. 주워듣기로는 파벨 슈스코프의 재교육은 폴츠키의 사정없는 물리적 폭력보다, 그리고 라브로프의 끔찍한 화학 실험보다 더 지독하다고 했다. 어떤 정치범 하나는 프로그램 시작 사흘 만에 그 재교육실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라브로프의 마약을 계속 맞겠다고 울부짖으며 소동을 피우기도 했다. 흘레브니코프는 그놈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센터 내에서 가장 음산하고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인물은 소장인 글루크도, 새디스트인 라브로프도, 뼈와 근육을 손대지 않고도 최악의 고통을 선사하는 데 도가 튼 폴츠키도 아니고 바로 파벨 슈스코프였기 때문이다.

 

 

슈스코프는 완전한 대머리에 광택 없는 조그만 단추 같은 갈색 눈과 끝이 치켜 올라간 얇은 입술의 조그만 남자였는데 전신이 둥글었고 무두질한 양가죽을 뒤집어쓴 듯 반질반질하고 부드러웠다.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흘레브니코프는 그 매끄럽고 부드러우며 아무런 음률 변화가 없는 단조로운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소름이 끼쳤고 전혀 깜박이는 일이 없는 듯한 그 조그맣고 둥근 눈을 보면 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마치 아주 오래된 흑백 만화에서 일어나 나온 사람처럼 완벽한 잉크로 그려진 선과 매끄러운 감촉만을 지닌 채 피도 살도 무게도 없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뱀 같기도 했는데 그렇게 느낀 건 흘레브니코프 뿐 만이 아니어서 죄수들은 그를 코브라라고 불렀다. 사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간수들도 종종 그 별명을 불렀다. 그리고 죄수들 못지않게 그를 두려워했다.

 

 

그건 글루크나 라브로프를 향한 감정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였다. 사람들은 글루크를 경멸했고 라브로프는 혐오했다. 그러나 슈스코프만은 두려워했다. 보그단조차도 슈스코프 앞에서는 설설 기었고 사상 재교육은 받아 본 적도 없으면서도 그 음습하고 어두운 교육실 얘기만 나오면 남몰래 부르르 떨곤 했다. 그 교육실에 들어갔다 나온 정치범들은 며칠 이상 버티지 못했다. 대부분 얌전해졌고 일시적인 효과에 지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어쨌든 뜨거운 충심과 후회로 가득한 선언문을 몇 장씩 쓰고 모범수로 탈바꿈하는 노력을 보여주었다. 물론 그게 모두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일 리는 없었다. 그 변모의 밑바닥을 지배하고 있는 건 윤리적 개심이라기보다는 공포였다.

 

 

33번은 그런 축에 속하지 않았다. 그는 슈스코프 앞에서 단 한 번도 고개를 숙이거나 공포에 떤 적이 없었다. 물론 흘레브니코프는 그 어두컴컴한 교육실 안에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그 안에서 33번이 어떻게 구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나왔을 때도 33번은 다른 죄수들처럼 울거나 공포에 질리거나 분노에 차 고함을 지르지 않았다. 복도나 라브로프의 방, 혹은 센터 내의 다른 곳에서 슈스코프와 마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흘레브니코프는 파벨 슈스코프의 그 광택 없는 조그만 눈을 똑바로 응시하는 죄수를 그전까지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슈스코프가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도 그 전까지는 본 적이 없었다.

 

 

그때 33번은 재교육실이 아니라 라브로프의 방에 있었다. 라브로프는 슈스코프나 폴츠키와는 달리 자신의 교육실을 언제나 ‘방’이라고 불렀다. 흘레브니코프는 ‘실험실’이란 표현이 더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프로그램을 시작한지 닷새 째였고 라브로프는 칸막이 뒤로 자리를 비킨 후였다. 표면적으로는 그날의 칵테일 제조를 위해서였지만 실은 슈스코프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오전에 진행된 사상 재교육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던 것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슈스코프가 자신의 교육실을 떠나 그것도 라브로프의 방에 들어오는 일은 거의 없었으므로 흘레브니코프는 자신과는 관계도 없으면서도 공연히 긴장했다. 행여 폭력성 발작을 일으킬 경우 재빠르게 제압하기 위해 33번의 뒤에 서 있긴 했지만 사실 그건 불필요한 행위였다. 첫날의 소동 이후 라브로프는 약물을 주사할 때마다 33번의 양 손목에 모두 수갑을 채웠기 때문이다.

 

 

슈스코프는 수갑을 쓰지 않았다.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죄수를 결박하거나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의 프로그램에서 육체적 폭력은 오로지 1단계에서만 찾아볼 수 있었다. 그것도 보그단 같은 대리인을 통해서만 이루어졌다. 슈스코프 자신은 결코 죄수에게 손을 대지 않았고 욕설이나 비속어를 쓰는 일도 없었다. 결코 서두르는 적도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파벨 슈스코프가 약간 상기된 얼굴로 갑자기 불쑥 들어와 33번의 성을 호명했을 때 흘레브니코프뿐만 아니라 라브로프마저도 놀랐다. 라브로프가 약물을 섞으러 들어갔을 때 슈스코프는 그 자리에 선 채 낮은 목소리로 몇 가지를 묻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는 33번을 자리에 앉히는 것도 잊었다. 키가 작은 슈스코프는 언제나 죄수를 앉힌 후 위에서 내려다보곤 했는데 지금은 깜박임도 없는 조그만 단추 같은 눈을 위로 향한 채 33번의 창백하고 갸름한 얼굴에 구멍이라도 뚫을 듯 날카로운 시선을 내쏘고 있었다.

 

 

흘레브니코프는 물론 슈스코프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가능한 한 빨리 그 섬뜩한 인물이 용건을 마치고 나가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33번은 슈스코프의 질문에 거의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않았고 두어 번 아주 짧게 ‘아니오’, ‘모릅니다’ 라는 단어를 내뱉었을 뿐이었다. 그러자 슈스코프의 목소리가 변했다. 요철 없는 부드러운 실크 같던 목소리가 사라지고 역시 매끈하지만 차디찬 알루미늄 같은 음성이 울려나왔다. 완벽하게 단조롭고 차가운 말투였지만 깊은 곳 어딘가에 증오와 분노가 스며들어 있었다. 흘레브니코프조차도 고개를 돌려 슈스코프 쪽을 힐끗 쳐다봤을 정도였다.

 

 

“ 그래, 정말 아는 게 없다고 우기고 싶은 모양이군. 르 몽드도, 타임즈도, 그 우스꽝스러운 구명위원회도. 그 방송 말이야, 네가 이송된 날짜까지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던데. 비공개 재판 정보도. 그런데도 전혀 모른다고? 본부에 줄을 대고 있는 놈이 없다고? 그 슈로프스카야는 어때? 뛰어난 요원이지, 네 친구잖아. ”

 

 

그때 처음으로 33번이 몸을 희미하게 떨었다. 하지만 그건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그 검은 눈에 다시 그 파란 불꽃이 일었기 때문이다.

 

 

“ 그 여잔 대사관 직원이에요.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건 5년 전이고. ”

 

“ 아, 대사관 직원. 정말 그렇게 믿었던 건 아니잖아. 그랬을 리가. 넌 똑똑하잖아, 그 바닥에서 보기 드물 정도로. 애초부터 직업을 잘못 택했어. 작가가 되지 그랬나, 아니면 물리학자라도. 안 그래도 파리에서 널 솔제니친, 사하로프 운운하며 헛소리를 하고 있으니까. 어차피 이제 그 몸은 쓰지도 못하게 될 텐데. ”

 

 

이제 슈스코프의 매끄러운 목소리에는 노골적인 증오가 뒤섞이고 있었다.

 

 

“ 어떨까, 런던에 소환장을 보내면. 그 여자와 마주앉아 보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지. ”

 

“ 소환해봤자 달라질 건 없어요. 정말 모르는 일이니까. ”

 

“ 상관없어. 누구든 하나는 잡아들여야 할 테니까. ”

 

 

그때 흘레브니코프는 그 빨간 불빛을 보았다. 한순간 라브로프의 방 전체로 페인트를 끼얹은 듯, 화재가 난 듯 이글거리는 붉은색 그림자가 밀려드는 것 같았다. 30센티미터 이상 떨어진 뒤에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흘레브니코프는 33번의 몸에서, 수갑이 채워진 채 미동도 없이 똑바로 서 있는 그 야윈 몸에서 달궈진 쇠처럼 뜨거운 열기가 폭발하듯 번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마치 그놈이 횃불처럼 순식간에 확 타올라 사방으로 불꽃을 내뿜을 것 같았다.

 

 

슈스코프도 그 빨간 불빛을 본 것이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아무런 광채도 감각도 없는 그 둥근 눈에 붉은 그림자가 반사되면서 당혹스러운 분노가 스멀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33번의 입에서 발음이 또렷하고 명료하며 아주 침착하고 건조해서 마치 라디오 방송을 연상시키는 음성이 밀려나왔을 때 그 분노는 슈스코프의 광대뼈와 입술 언저리까지 퍼져 나갔다.

 

 

“ 아, 당신들은 항상 그런 식이지. 일단 약한 자를 제물로 삼지. 그런 연결 고리가 없으면 만들어내면 그만이야. 그 여잔 희생양으로 삼기엔 너무 뻔한 인물이라는 생각은 안 드나? ”

 

 

흘레브니코프는 슈스코프가 33번의 얼굴을 내리칠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파벨 슈스코프는 오른손을 거의 어깨 높이까지 들어올렸다. 반질반질하고 매끄럽던 얼굴 전체가 바싹 구겨진 양피지처럼 쭈글쭈글하게 주름졌다. 갈색의 구슬을 박아 넣은 듯한 두 눈이 순간 파삭 하는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날 것 같았다. 그는 슈스코프가 그토록 평정을 잃은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파벨 슈스코프는 잠시 손바닥을 들어 올린 채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다섯 개의 뭉툭하고 통통한 손가락이 부채처럼 활짝 펼쳐져 희미하게 꿈틀거렸다. 33번은 여전히 붉은 불빛을 켠 까만 눈으로 그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흘레브니코프는 그 미친놈이 타고 있다고 생각했다.

 

 

‘ 타고 있어, 불타고 있어. 인체발화에 대한 얘길 토냐가 해준 적이 있었는데. 난 그걸 믿어본 적이 없었지. 저 자식 타고 있어, 완전히 타버릴 거야. 재도 안 남기고 불타 없어질 거야. 오 하느님, 실험실에 불이 옮겨 붙을 거예요. 센터가 다 타버릴 거예요. 토냐, 저 자식 타고 있어. 코브라는 왜 저렇게 심호흡만 하면서 손을 파닥이고 있는 거지? 아, 저 미친놈. ’

 

 

 

마침내 슈스코프가 들어 올렸던 손을 내렸다. 일그러졌던 얼굴에서 주름이 사라지며 다시 부드러운 가죽을 뒤집어씌운 듯 매끄럽게 변했다. 그는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고 33번의 주위를 아주 천천히 반 바퀴 돌았다. 왼쪽으로 돌아왔을 때 슈스코프는 멈추었고 오른손 검지와 중지로 그 젊은 죄수의 목을 가볍게 눌렀다. 맥이 뛰는 곳 바로 위를.

 

 

“ 아주 좋아, 미하일. 계속 그렇게 멀쩡한 척 하고 있어. 허세 부려봐. 만사가 잘돼가고 있는 것처럼. 무서운 것도 없고 다 괜찮은 것처럼. 아프지도 않은 것처럼. 이토록 태연하고 침착한 연기를 할 수 있다니, 진작 인민예술가 쯤 달아줬어야 할 걸 그랬지. 하긴 훈장도 두어 개 받았지, 공훈예술가 직함도. 다 박탈당한 게 문제지만. ”

 

 

그는 라브로프의 칸막이 쪽에 힐끗 시선을 던지며 더욱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 안됐지만 난 알아, 지금 아프다는 거. 네가 무서워한다는 것도. 모든 프로그램들에는 예외가 존재하지. 과학자들과 심리학자들, 의사들은 그걸 잘 알아. 그 예외들이 반응하는 법칙도. 넌 'ШЛ. No 2'의 예외지. 그런데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아? 그 프로그램의 효과가 아예 없다는 게 아냐. 설마 그럴 리가. 그저 다르게 작용한다는 것뿐이지. 넌 아마 내 앞에선 끝까지 버틸 수도 있을 거야. 사상 재교육 따위 끝까지 무시하겠지, 거기선 네 목을 비틀고 죽인다 해도 아마 두려워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애초부터 그렇게 생겨먹은 놈이니까. 그런데 이 방에서는 다르지.

 

난 알고 있어, 넌 내 교육보다 약물 교화를 더 두려워해. 정신이 나가버리는 것보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걸 더 끔찍하게 생각하지. 아, 지금은 좀 견딜 만하겠지, 마지막 주사로부터 24시간이 지났으니까. 아픈 것도 덜하고 다리도 뜻대로 움직이겠지. 잘 알잖아, 곧 다시 아파질 거야. 어지러워질 거고 열이 오르고 마비될 거야. 울게 될 거야. 아무도 널 위해 와주지 않아. 파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든 그건 너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네가 여기서 팔다리가 잘리든 숨이 넘어가서 관에 실려 나가든 이제 그놈들은 절대 모를 테니까.

 

네 교화나 개심 따위 사실 관심 없어. 백만에 한 놈 꼴로 끝까지 안 넘어오는 놈이 있어. 그게 너라고 해도 놀랍지 않아. 상관도 없고. 우리끼리니까 좀 솔직하게 얘기해줄까? 난 네가 넘어오지 않는 편이 더 좋아. 그래야 이 방에 계속 집어넣을 수 있으니까. 난 너 같은 놈을 좋아하지 않아. 넌 우리에겐 아무런 쓸모도 없는 인간이야. 네 그 알량한 재능 따윈 우리에겐 그냥 쓰레기야, 아니, 쓰레기보다 더 나쁘지. 더럽고 유해한 것도 모자라 전염성까지 갖췄으니까. 그건 박멸해야 할 해충이나 다름없어. 그냥 허세 부려, 그렇게 고개 쳐들고 괜찮은 척 버티고 있어. 난 네 시체를 치우는 걸 정말 보고 싶으니까. 그땐 이미 꼼짝도 할 수 없을 거야, 눈썹 하나 움직이지 못하겠지. 네 아비처럼. ”

 

 

 

그 순간 33번의 눈에서 불빛이 꺼졌다. 빨간 불빛과 파란 불꽃 모두, 한 순간에 전구가 터진 것처럼 완벽하게 모든 광채와 열기가 사라졌다. 하지만 흘레브니코프는 그게 슈스코프의 말 때문이라기보다는 칸막이 뒤에서 라브로프가 나왔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흘레브니코프는 슈스코프의 그 부드럽고 음산한 장광설 중에서 딱 한 가지만 제대로 이해하고 공감했다. 33번은 슈스코프보다 라브로프를 더 두려워했다. 아니, 그 약물을.

 

 

그는 33번이 첫인상처럼 부드럽고 가냘픈 타입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아주 단단하고 강한 몸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보그단은 그 곱상한 얼굴에 눈이 멀었던 게 분명했다. 날씬하고 사지가 긴 그 몸은 사실 강철과 채찍에 가까웠다. 흘레브니코프는 토냐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열심히 체육관에 다니던 시절에도 그렇게 섬세하고 단단한 근육으로 치밀하게 조직된 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약물 프로그램을 시작한지 사흘 째 되던 날 라브로프가 그의 어깨와 등에 찬물을 쏟아 부었을 때 33번은 거의 호흡이 멎을 만큼 괴롭게 경련을 일으키며 나뒹굴었다. 2단계. 흘레브니코프는 입 안으로 중얼거렸다. 기말시험을 앞둔 의대생처럼. 모든 감각이 수십 수백 배로 예민해지는 단계. 스쳐지나가는 입김조차 칼날처럼 파고드는 통증으로 변형되는 단계. 차디찬 물을 뒤집어썼을 때 33번은 아무리 그게 물이라고 현실을 인식해보려고 애써도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그건 차라리 황산을 뒤집어쓴 듯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차갑다기보다는 뜨거웠을 것이고 그보다는 아팠을 것이다. 뼈와 가죽을 태워 들어가는 것처럼. 라브로프가 물을 마저 쏟아 부었을 때 33번은 기절했는데 3단계로 돌입해 독방으로 옮겨지기 전에 그런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라브로프가 보는 앞에서는 더더욱.

 

 

“ 정말 실망이야, 잘 버틸 줄 알았는데. 넌 심지어 안경잡이 인텔리겐치야 나부랭이들보다 더 금방 나가떨어지잖아. 그런 몸을 갖고도. 이제 겨우 사흘밖에 안됐는데. ”

 

 

흘레브니코프는 라브로프가 다소 과장된 표현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전 대상자들에게는 3일 연속으로 그 약물을 주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라브로프의 실망에도 일리는 있었다. 33번은 다른 정치범보다 반응 속도가 빠른 편이었고 약 기운에서 풀려나는데도 더 오래 걸렸다. 보통 미성년자이거나 신체가 허약한 경우 그럴 가능성이 많았지만 물론 그는 양쪽 모두 해당되지 않았다. 라브로프의 명령에 따라 흘레브니코프는 그 성가신 죄수를 독방으로 옮겼다. 흠뻑 젖은 옷을 벗긴 후 보풀이 가득한 얇은 모포를 대충 뒤집어씌우면서 그는 왜 라브로프가 ‘그런 몸을 갖고도’ 라고 비아냥거렸는지 깨달았다. 그렇게 탄탄하고 강해 보이는 몸을 갖고도. 그때에야 흘레브니코프는 그 미친놈이 두 손만 가지고 보그단을 병신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납득했고 동시에 라브로프의 약물 칵테일은 체질량 지수나 근력과는 별도로 작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라브로프가 칸막이 뒤에서 나왔을 때 슈스코프가 손짓을 했다. 둘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는데 흘레브니코프는 단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프로그램에 대한 전문 용어와 자신들만의 속어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슈스코프가 완벽하게 평정을 찾은 모습으로 방을 나갔다. 33번에게는 눈 한 번 돌리지 않았다. 라브로프는 다시 칸막이 뒤로 들어갔고 10여 분 후에 나와서 자신의 실험 대상자 곁으로 다가왔다.

 

 

“ 그래, 파리에서 그렇게 난리란 말이지. 그런데 당사자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누가 정보를 실어 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거지? 뭐 그럴 수도 있겠지. 난 파벨처럼 널 과대평가하지 않으니까. 그래봤자 너 별로 똑똑하지도 않잖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더 모르겠지. 그전까지는 매사가 아주 쉬웠을 테니까.

 

파벨이 믿어주지 않는다고 너무 억울해할 것 없어. 이제 진짜 아무 것도 모르게 될 거야. 그럼 파벨도 더 이상 널 의심하지 않을 걸. 아니, 어쩌면 귀여워하게 될지도 몰라. 아주 착해질 테니까. 이제껏 내가 이걸로 실패한 적은 없었거든. 파벨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화학이 언제나 심리학에 우선해. 난 너 바꿔놓을 거야, 미셰츠카. 착한 애가 되고 나면 나한테 감사하게 될 걸. 난 극장 좋아해. 파벨과 달라. 널 잘 만져서 다시 태어나게 해줄 거야. 그럼 정말 나한테 감사하게 되겠지. 모스크바에서 다시 불러줄지 누가 알아? 그럼 난 네 무대 보러 가서 감동해 울지도 몰라. 그러니까 먼저 착해져야지, 안 그래? ”

 

 

그날 라브로프는 새 칵테일을 만들었다. 흘레브니코프는 약물의 색깔을 보고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마 33번도 알았을 것이다. 바늘을 찔러 넣고 천천히 약물을 주입했을 때 33번이 처음으로 욕을 했다. 아주 낮아서 짐승들이나 낼 수 있을 것 같은 소리였다. 아랫배와 흉곽 안쪽 어딘가에서 밀려올라오는 조그맣고 낮은 울음소리 같았는데 자음은 거의 모두 뭉개져 있었다. 1단계는 5분으로 급속하게 축소되었다. 2단계와 3단계는 거의 동시에 왔다. 라브로프가 촉매제를 추가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날 라브로프는 투약 회수를 2회로 늘렸다. 주임 의사는 매우 바쁘고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저녁의 두 번째 주사는 흘레브니코프에게 일임했다. 매우 바쁘지만 하찮은 인물인 이오시프 흘레브니코프는 물론 명령에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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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와 첫번째 메모 : 2013.3월~5월>

 

 

라브로프와 슈스코프는 그 전형성에도 불구하고 쓰는 즐거움이 적지 않은 인물들이었다. 거의 언제나, 재수 없는 인물에 대해 쓰는 것이 고결한 인물을 그리는 것보다 흥미롭고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전에 1부를 쓰는 도중에 슈스코프에 대한 메모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 적이 있다. 1부를 마칠 때까지 그 인물의 성격은 거의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잠깐 발췌해 본다.

 

 

이 글을 위해 나는 수용소에 존재하는 인물들 몇명을 새로 만들었다. 그 중 하나가 1부의 심리적 화자인 흘레브니코프이다.(흑빵이란 어근 가진 그 사람) 발췌한 부분에 등장하는 파벨 슈스코프는 일종의 사상 재교육관이다.

 

저자의 원형은 1월에 마친 장편에서 잠깐 등장한 루뱐카 KGB 본부의 그라도프 라는 인물이다. 그라도프는 환각에 취한 주인공의 기억 속에서 기술되기 때문에 다분히 환상적이며 일종의 캐리커처에 가까웠다. 그 일그러진 만화 같은 인물을 좀더 동글동글하게 빚어서 뭉쳐내고 확장시킨 인물이 파벨 슈스코프이다. 저 사람은 꽤나 중요한 인물이지만 그렇게 많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의 짝패이자 2인자이며 약물 교화를 진행하는 주임 의사인 라브로프가 훨씬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런 성격의 두 분신이 존재하는 경우 진짜는 언제나 슈스코프 같은 인물이다.

(2013.3.15)

 

 

나는 ‘진짜’라는 표현을 썼지만 어쩌면 라브로프가 슈스코프의 덜돼먹은 유령이듯 파벨 슈스코프도 ‘Nights With No Shadows’에 등장했던 심문관 그라도프의 뒤틀린 시뮬라크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들 전형적이고 가학적인 꼭두각시들, 전체주의의 메아리 유령들로 얼기설기 구축된 피라미드 맨 위에는 아마도 게르만 스비제르스키가 있을 것이다. 그 사악한 인물이야 성격이 좀 다르긴 하지만.

(2013.4.2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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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래의 두번째 글은 위의 메모에 등장한 모스크바 KGB 루뱐카 본부의 심문관 그라도프에 대한 미샤의 뒤틀린 기억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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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긴 일반적인 사무실이나 다름이 없었어. 책상이 있고 의자가 있었어. 서랍과 캐비닛이. 회색 벽이 있었어. 그림도 걸려 있었지. 말레비치 모사품이. 거기 그자가 기다리고 있었어. 성은 그라도프. 이름은 몰라. 직위도 계급도. 채찍을 몇 갈래로 꼬아서 맨 위에 이콘 후광처럼 둥그런 머리를 얹어놓은 것처럼 보였어. 그런데 그 실루엣 밖에는 기억이 나지 않아. 키도, 체격도, 얼굴도, 아무 것도. 기억나는 건 채찍 위의 이콘 후광뿐이야. 건드리면 굴러 떨어질 것처럼 보였어.

 

심지어 목소리조차 기억나지 않아. 그는 낮고 툭툭 긁히는 어조로 말했는데 그 모든 말들은 타자기로 찍어내는 단어들처럼 하나하나 튀어나와 지루한 공산주의 선언문처럼 눈앞의 잿빛 벽에 등사되는 것 같았어. 나는 그의 말을 듣는다기보다는 읽었어. 어쩌면 그건 주사 때문이었을지도 몰라. 그자의 사무실에 들어오기 직전에 비서실에 앉아 있던 어떤 여자가 내 소매를 걷더니 바늘을 찔러 넣었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마치 검역이나 예방접종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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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광을 얹은 채찍이 천천히 몸을 흔들면서 노래하듯 말하기 시작했어. 그건 장조였어, 그것도 4분의 2박자짜리 경박한 춤곡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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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글이 수록된 수용소 프리퀄에 대해서는 이전에 ABOUT WRTING 폴더에 몇번 발췌한 적이 있다. 그 링크는 아래.

 

 

<2부 : 게오르기 벨스키와의 면회>

불과 바람, 물과 돌 : http://tveye.tistory.com/4502

 

<3부 : 스타니슬라프 일린과의 면회>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을때, 수용소 면회실에서의 조우 : http://tveye.tistory.com/4521

푸에테와 이반 왕자와 불새 : http://tveye.tistory.com/3613

농담에 약한 주인공, 타협, 장식품 애완견 샴페인 캐비아 : http://tveye.tistory.com/4468

견딜 수 있을만한 압력, 눈을 돌리고 넘어갈 수 있을만한 더러움 : http://tveye.tistory.com/4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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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얘기였다만...

 

아래 사진은 명확히 위의 글들과 연관은 없지만 흘레브니코프가 인체발화와 짐승에 대해 생각하는 장면과 조금 느낌이 비슷해서 올려본다. 미하일 바리쉬니코프. 그는 1970년대 중반 미국으로 망명했다. 라트비아태생. 아직도 러시아에는 돌아와 공연한 적이 없다. 누레예프는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레닌그라드와 우파를 방문했고 키로프 무대에도 올라간 적이 있었다.

 

이 사진은 정말로 마음을 사로잡는다.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노 무용수의 얼굴에 새겨진 연륜과 여전히 타오르는 불꽃, 치열한 시선. 그는 미하일 바리쉬니코프이고 역시 유일무이한 인간이다.

 

 

 

 

...

 

그리고 진짜 우울했으니까, 조금 마음을 달래는 사진 :)

 

본편의 미샤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산짐승이나 숲고양이, 표범 등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지녔지만 본편 패러디인 서무의 슬픔 시리즈의 왕재수는 오리지널 미샤보다 무엇이든 조금씩 귀여워지고 어린애 같아지기 때문에... 단추 베르닌 역시 그를 고양이 같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눈에 비친 왕재수 미샤의 고양이 이미지는 이런 것...

 

 

이 사진 처음 본 순간 기절할만큼 귀엽다고 생각했다 >.<

진짜 고양이는 아니고 표범, 살쾡이 등등 고양이과 친척 동물들 중 하나의 새끼임.. 아아, 저 눈 좀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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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아주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3년 반 후의 메모, 2016.5.14>

 

   

나는 아래 발췌한 에피소드를 3년 반 전, 2012년 12월에 썼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고서 몇달 후. 가장 바닥에 내려가 있을 때였다. 미샤를 되살려낸 후 두번째로 쓴 소설이었다. 소설의 심리적 화자는 그의 친구이자 애인인 안드레이 트로이츠키, 일반적으로는 트로이 라고 불리는 인물이었지만 진짜 주인공은 미샤였다. 이 소설의 에피소드들은 전에도 여러번 이 폴더에 발췌한 적이 있다.

 

발췌한 에피소드는 소설의 중후반부인 3부 14장 끝부분이다. 저 부분을 쓸때 나는 어느 정도 화가 나 있었고 어느 정도는 매우 지치고 슬픈 상태였다. 하지만 동시에 굉장히 솔직하기도 했다. 허구라는 렌즈를 통해 왜곡될 수 있을만큼만 왜곡시킨 정도로.

 

이 글을 쓴 바로 다음날 남긴 짧은 메모와 1년이 지난 후 쓴 역시 짧은 메모가 있는데 그것도 같이 올려본다. 그러니까 이건 하나의 에피소드에 대한 세가지 메모가 달려 있는 셈이다. 쓴 직후, 1년 후, 그리고 3년 반 후.

 

미샤와 트로이의 대화에서 언급되는 '지나'는 미샤의 발레학교와 키로프 발레단 시절 파트너 발레리나인 지나이다를 가리킨다. '세레브랴코프'는 미샤의 키로프 발레단 선배이자 일종의 라이벌이다. 세레브랴코프에 대한 에피소드는 전에 돈키호테와 페름 저수지 사건 등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그 이야기들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3594, http://tveye.tistory.com/4597

 

대화에 역시 언급되는 '스탄카'는 전에 여러번 발췌된 이야기들에 등장한 스타니슬라프 일린을 가리킨다. 볼쇼이 안무가이고 미샤의 친구이다. '아스케로프'는 미샤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의사인 유리 아스케로프이다.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이 폴더에 두어번 발췌했고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서도 한번 등장시킨 적 있다.

 

둘의 대화에서 나온 '안드레이'는 미샤가 트로이를 부르는 이름이다. 트로이는 자기 본명을 싫어해서 친구들 사이에서 트로이란 애칭으로 통하지만 미샤는 사적 자리에서는 항상 그를 본명으로 부른다.

 

 .. 맨 위의 사진은 라트만스키 안무의 신데렐라를 추는 디아나 비슈뇨바. 사진은 Mark Olich.

그 아래 그림은 러시아 화가 니콜라이 게의 '겟세마네 동산의 그리스도'.

 

 

 

<1년 후의 메모, 2013.11.7>

 


나는 이 부분을 거의 일 년 전 이맘때 썼다. 이 소설에서 미샤가 자신의 춤에 대해 직접 이야기하는 장면은 이 부분 밖에 없다. 그는 죽음과 성, 권력과 사회적 억압, 이데올로기와 젠더, 그리고 이 모든 외부에서 온 어둠과 더불어 자기 내부에서 비롯되는 어둠을 마주하며 춤춘다. 그건 그가 춤을 추는 이유인 동시에 춤을 포기한 이유이기도 했다.


본질적으로 저 소설은 재능에 대한 이야기였고 그건 성적 갈망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건 미샤가 아니라 친구이자 애인인 트로이였다. 심지어 저 순간, 미샤가 자기 입으로 솔직하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순간에도 트로이는 그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트로이는 창작자가 아니었고 그의 사랑은 이해를 기반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아래 발췌된 에피소드를 쓰고 난 직후, 그러니까 2012년 12월에 적었던 메모는 맨 아래에 있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트로이의 팔을 베고 누워 담배 연기를 천정으로 길게 뿜어낸 후 미샤가 말했다.

 

 

“ 지나가 그러더라, 세레브랴코프의 낯짝을 한방 날려주고 나면 모든 게 나아질 거라고. ”

 

“ 그 아가씨답네. ”

 

“ 정말 나아질 거라고 생각해? ”

 

“ 글쎄. 진작 했어야 하는 거 아냐? 좀 늦었지. 그리고 넌 누굴 제대로 쳐본 적도 없잖아. ”

 

“ 그건 그래. 스탄카가 그때 끼어들어줘서 다행이야. 정말 그 자식 치고 싶지 않았거든. ”

 

“ 열받았다면서 어떻게 치고 싶은 마음이 안 들 수가 있어? ”

 

“ 모르겠네, 하여튼 난 누굴 패고 싶었던 적은 별로 없어. 그래봤자 별 소용없잖아. ”

 

“ 지나 말이 맞을지도 몰라. 주먹질을 한번 하거나 적어도 욕이라도 해주면 그 자식도 한풀 꺾일 거야. 그런 놈들은 항상 그래. 네가 계속 내버려두니까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

 

“ 뭐, 나타샤? 계집애 같다는 말? 그건 춤 때문이야. 그러니까 두들겨 패봤자 해결이 안돼. ”

 

“ 세레브랴코프는 왜 그렇게 네 춤을 싫어해? ”

 

“ 그는 교조주의자야. 가장 끔찍한 게 뭔지 알아? 그건 자기 예술을 강령처럼 믿는 것, 그걸 다른 모두에게 강요하는 거야. 우리의 잘난 공산주의와 일당 독재와 집단주의처럼. 근데 세상 어디에도 그렇게 단순한 건 없어. 예술은 더 그래. 아니, 내게는 춤 말고 다른 걸 얘기할 자격이 없지. 울리얀 세레브랴코프에게 자기가 내키는 대로 추라고 해, 난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 작자의 참견은 받고 싶지 않아. 그자는 자기 강령을 따라 깃발을 휘두르며 춤을 추고 나는 내 몫의 허공으로 나가면 돼. 길을 잃든 헛디디든 추락하든 그건 온전히 내가 감당할 무게일 뿐이야. 난 그자의 이상과 꿈을 믿지 않아. 춤이 종교가 될 수도 없고 규율이나 원칙이 될 수도 없어. 공산주의자였던 적도 없고 소비에트 이념을 믿어본 적도 없는 내가 왜 그 얼간이의 질서를 따라야 해. ”

 

“ 세레브랴코프의 질서는 뭔데? ”

 

“ 그는 자기 고환으로 춤을 추지. ”

 

 

땀이 식으면서 한기가 드는 듯 미샤가 옆으로 돌아누우며 트로이에게 몸을 밀착시켰다. 필터 언저리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카펫 귀퉁이에 문질러 끈 후 나머지 연기를 트로이의 가슴팍에 천천히 불어 날렸다. 트로이는 미샤의 코트를 끌어당겨 활짝 펼친 후 서로의 몸을 덮었다. 담배 연기 사이로도 코트 안쪽에 배어 있는 낯익은 고급 향수 내음과 은밀하게 깔려 있는 체취를 맡을 수 있었다. 젖은 숲의 흙 냄새, 그리고 딱히 규명하기 힘든 쏘는 듯하고 무겁고 달콤한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후자는 처음에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몸 구석구석에 키스를 하거나 혀와 이로 빨아 당겼을 때 그 냄새가 났다. 그 냄새를 맡을 때마다 트로이는 사라토프의 할머니가 직접 만들어 유리병 속에 채워놓았던 끈끈하고 짙은 색깔의 꿀을 생각했다. 숲의 꽃과 나무에서 채취해 만든 그 꿀은 너무 진하고 독했기 때문에 할머니는 어린 손자가 아무리 졸라도 몇 방울 이상은 결코 주지 않았다. 아주 아플 때만 홍차에 한 숟가락을 통째로 녹여 주었다. 어린 시절 트로이는 그 차를 마실 때마다 심하게 취해서 24시간을 내리 잤다.

 

 

“ 그럼 넌? ”

 

아, 나도 그런 부분이 있지. 어쨌든 사내자식이니까. 하지만 전부는 아냐. ”

 

 

코트 아래에서 몸을 좀 더 바짝 붙여오며 미샤가 약간 졸린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세레브랴코프가 날 미워하는 이유는 내가 자기 자리를 빼앗는 게 두려워서가 아냐. 내가 무대 위에서 그 굳건한 남성성의 환각을 쉽게 무시하기 때문이지. 신사적이고 기사도 넘치고 파트너를 견고하게 지지해 주는 남자, 필요한 순간 검을 빼들고 달려가 적을 무너뜨릴 준비가 되어 있는 남자, 언제나 확신과 신념에 가득 찬 남자, 왕자님, 기사, 귀족, 깃발 든 혁명가, 전쟁터의 장군, 여자를 지켜주는 남자, 당의 기치를 앞장서서 체현하는 진짜 남자. 반듯하고 우아하며 강인하고 흔들림 없는 파트너.

그렇게 추는 게 어렵지는 않아, 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은 거기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지. 난 연습을 많이 했어, 엄청나게 혹독하게 배웠어. 꼭 춰야 한다면 그렇게 추겠지. 그게 바로 키로프의 기본기라는 거니까. 남자 무용수의 기본기.

그런데 말야, 안드레이. 그 모든 건 사실 고환과 음경과 정액으로 이루어진 환상에 지나지 않아. 발레리나들이 유방과 질과 눈물로 우아하고 연약한 공주님의 환각을 만들어내듯 남자 무용수들도 마찬가지야. 세레브랴코프의 가차 없는 남성성이 빚어낸 질서 맞은편에 발레리나들의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아성이 도사리고 있어. 난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어. 그건 단순한 섹스의 문제가 아냐. 성이란 건, 아니 인간이란 건 그렇게 이분법으로 설명할 수가 없어. 한편에는 빛, 한편에는 어둠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과 몸이 완전하게 분리되어 있다면 행복할 텐데.

안드레이, 어쩌면 그건 인간 전체에 대한 얘기가 아닌지도 몰라. 그저 나 자신에 대한 얘기일 뿐인지도 몰라. 난 사람 마음을 모른다면서. 그러니 인간에 대해서도 함부로 얘기해서는 안되겠지. 난 틈새로 들어가고 바닥도 출구도 없는 안개 속에서 춤을 춰. 내가 원해서 그렇게 하는 게 아냐, 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 그곳에서 난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냐, 마음도 아니고 몸도 아냐. 그곳에는 빛이 있고 어둠이 있겠지. 황혼도, 수면도, 어쩌면 눈보라도. 하지만 난 단지 움직임일 뿐이야. 계속해서 뛰고 날고 떨어지고 넘어지는 것 뿐이야. 멈추면 사라질 테니까. 거기 고통이 있어, 두려움이 있어. 나는, 난 멈추게 될까봐 두려워. 사라지고 싶지 않아. 세레브랴코프는 그런 공포를 이해하지 못할 거야. 그는 강령을 선택했으니까. ”

 

 

미샤는 더 이상 트로이에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았다. 교회 종탑을 마주하고 고해하듯 나직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고백이 너무나 괴롭고도 개인적이어서, 또 한없이 조용하고 부드러워서 트로이는 마음을 뒤흔드는 감동과 죄책감을 느꼈다. 동시에 그의 말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어 고통스러웠다. 그는 춤을 춰본 적도 없고 단 한 번도 진정한 재능을 가진 예술가인 적이 없었으니까.

 

 

아마도 스타니슬라프 일린은 이해할지도 모른다. 모스크바에서 온 그 안무가, 스탄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미지의 남자. 어쩌면 유리 아스케로프도 전부 이해해 줄지도 모른다. 어릴 때부터 미샤를 알았으니까, 미샤는 움직일 수 없는 그 무서운 순간 아스케로프가 곁에 와주기를 원했으니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아스케로프는 미샤의 춤에 관심이 없었다. 춤 나부랭이라고 비하했고 미샤에게 하잘것없는 춤을 포기하고 그만 내려오는 게 낫다고 꾸짖었다. 그자는 오직 미샤에게 성적으로 완전히 반해 있을 뿐이다. 어쩌면 마음 속 깊이 품고 있는 사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온전히 그 아이의 몸과 마음에 대한 욕망과 애정일 뿐 춤과 재능에 대한 갈망은 아니었다. 그 루빈슈테인 거리의 의사는 그만큼 복잡하고 음울한 남자가 아니었다.

 

 

미샤는 갑작스럽게 말을 뚝 끊었다.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있던 생각을 토로한 것이 부끄러워서 그럴 수도 있었고 졸려서 그랬을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울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아스케로프와는 달리 트로이는 미샤가 우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 후 트로이는 쑤시고 결리는 몸을 거실 바닥에서 일으켰다. 미샤는 그가 일어난 것도 모르고 고른 숨소리를 내며 깊게 잠들어 있었다. 그는 코트 째로 미샤를 쓸어안아 침대로 데려갔다. 옷을 치우고 모포를 덮어주면서 트로이는 그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목덜미의 상처는 다시 하얀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허벅지의 칼자국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랫배와 허리, 골반과 옆구리 구석구석에 찍혀 있는 트로이의 손자국은 반쯤은 자주색이고 반쯤은 검붉은 색으로 변해 일그러진 꽃처럼 옆으로 퍼지며 증식하고 있었다.

 

 

아마 미샤가 무대에 올라가야 하지 않았다면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그의 몸에 깨끗하게 남아 있는 하얀 살갗 구석구석 전부를 붉고 검은 자국으로 뒤덮었을 것이다. 이마와 뺨과 턱도 예외 없이, 부드러운 눈꺼풀과 입술조차 피해가지 않고. 할 수만 있다면 머리카락과 눈동자와 치아와 혓바닥 위에, 살갗 아래 혈관과 근육과 신경 위에도 자국을 냈을 것이다. 해독할 수도 없는 문자를 써내려갔을 것이다. 그런 순간에도 차마 자기 이름을 쓸 용기는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서랍 속에 숨어 있는 노트와 수첩과 종이쪽지 위에 잉크 범벅이 되어 도사리고 있는 단어와 구절들이었을 것이다. 그 어눌하고 수치스러운 언어들은 그 찬란하게 타오르는 애에게 닿는 순간 녹아내려 사라질 것이다. 아무런 자국도 남기지 못할 것이다.

 

 

 

..

 

 



<쓰고 난 다음날 : 교조주의, 강령으로서의 예술, 2012.12.7>



어제 저 주제에 대한 부분을 쓰면서 내가 겪었던 몇가지 좌절과 절망스러웠던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물론 저 글의 주인공이 살아가는 사회는 지금 서울과는 많이 다르다. 그는 천박한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메가폴리스가 아니라 전체주의와 집단주의가 지배하는 70년대 공산사회의 레닌그라드에서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점은 존재한다.


 
.. 중략 ..


 
여전히 난 예술이 강령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믿는다. 나의 가치관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표현 양태는 무수하게 존재하며 어느 한가지만 옳다고 우기는 것은 교만이며 폭력이다.

 

...

 

 

 

좀 우울한 얘기였으니까 무용수들 화보 몇 장.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저 글을 쓸때 가졌던 느낌과 약간은 비슷한 사진들을 골라봤다.

 

 

 

 

 

세르게이 폴루닌.

 

 

마린스키 무용수들. 슈클랴로프와 테료쉬키나, 스코릭, 김기민씨 등이 섞여 있다.

웨인 맥그리거의 인프라 추는 중. 재작년에 마린스키 무대에서 이 작품 보고 반했었다.

 

 

미하일 바리쉬니코프

 

 

 

매우 유명한 사진. 루돌프 누레예프.

 

 

 

파루흐 루지마토프.

 

 

 

파루흐 루지마토프

 

 

 

울리야나 로파트키나.

사진은 Mark Olich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젊은이와 죽음.

사진은 Alex Gouliaev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젊은이와 죽음. 한장 더.

사진은 Alex Gouliaev.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위의 그림은 미하일 브루벨의 '날아가는 악마'. 전에도 두세 번 올린 적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 중 하나이다. 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박물관(루스키 무제이)에 가면 볼 수 있다. 이 그림 앞에 가면 긴 의자에 앉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몇시간이고 머물러 있을 수도 있다. (시간에 쫓기니 그러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본편의 미샤는 무엇보다도 내 머리와 마음 속에서 온 인물이지만 무용수로서의 특성을 잡아내기 위해 실재하는 여러 무용수들의 일부를 모델로 차용해 왔듯 그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위해서는 브루벨 그림들을 많이 떠올렸다. 그렇다고 이 사람이 완벽하게 브루벨의 악마처럼 생긴 것은 아니지만(이전에 jewels와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브루벨의 악마보다는 그의 백조공주를 더 닮았을 수도 있다) 그래도 난 미샤를 불러내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브루벨 그림에 서려 있는 우아하면서도 치명적이고 어딘가 매우 어둡고 쓸쓸하고 고통스러운 분위기를 종종 떠올렸다.

 

 

그래서 본편 우주의 트로이는 브루벨 그림 사본을 오려서 몰래 간직하기도 한다. 미안해, 트로이... 뭔가 찌질해보이는구나 ㅠㅠ

 

 

발췌한 글은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트로이가 심리적 화자로 등장하는 그 장편의 1부에서 가져왔다. 이 이야기는 시간적 순서로 보면 예전에 발췌해 올렸던 1부 제4장, 썰매를 타러 갔던 미샤와 트로이, 그들의 친구들 에피소드 이후이다. 그때는 겨울이었고 이번 에피소드는 여름이다.

 

 

배경은 1973년 여름. 미샤는 발레학교를 졸업하고 키로프 발레단에 입단했으며 아직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친구들과 함께 여름 휴가를 보내러 흑해에 놀러간다. 여기서는 흑해 전체 에피소드가 아니라 제일 앞부분인 흑해로 가는 기차 안에서 있었던 짧은 이야기만 발췌했다. 미샤는 18세를 앞두고 있고 트로이는 석사 학위를 준비중인 대학원생이다. 둘은 문학 서클에서 만났고 금세 친구가 되었지만 트로이는 마음 속에 또다른 감정을 품고 있다. 아직은 그렇다.

 

 

여기 등장하는 트로이와 미샤의 친구들은 모두 전에 올렸던 썰매 에피소드에 나왔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http://tveye.tistory.com/4050 를 먼저 읽어보시길.

 

 

이 친구들은 표절과 푸쉬킨에 대한 이야기와 릴렌카와 메밀죽 얘기에도 등장했다. 이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나 트로이가 나오는 이야기들의 링크는 지난주에 올렸던 '산짐승 같은 '레닌그라드 아이' 에피소드 아래에 나열해놓았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여기로 : http://tveye.tistory.com/4647

 

 

중반에 트로이와 미샤의 대화에서 언급되는 '알렉세이 파블로비치'는 미샤의 발레학교 은사인 알렉세이 클리모프를 가리킨다(물론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

 

알리사는 전에도 몇번 등장한 적이 있다. 런던 대사관에서 kgb로 근무하게 되는 트로이의 친구인데 발췌한 이야기는 초반부라 아직 런던에 가기 전이다. 레나는 썰매 에피소드에 등장한 인물로 미샤의 팬이자 그를 사모하는 소녀이다.

 

레노츠카는 레나의 애칭이다. 미슈카는 미샤의 또다른 애칭이다. 파블릭은 파벨의 애칭이다. '로미오'라는 미샤의 별명은 그의 무대 때문에 붙었다. 썰매 에피소드에서 잠깐 나왔다.

 

흑해는 옛날부터 저 동네 사람들에겐 최고의 휴양지 중 하나였다. 러시아 제국 때도 그랬고 소련 때도 그랬다.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여름에 그들은 함께 흑해에 갔다. 갈랴와 료카 부부, 논문을 마무리한 트로이와 알리사, 타냐와 이고리, 코스챠와 레나였다. 호수에 썰매를 타러 갔던 멤버들과 비슷했다. 졸업 후 키로프 정식 입단까지 여름 휴가를 받은 미샤도 같이 갔다. 다들 3주 동안 신나게 놀 생각이었다. 열흘 후 무슨 연수 때문에 비엔나에 가야 하는 미샤만 빼고. 그건 키로프에서 보내는 연수나 투어가 아니었지만 언제나처럼 미샤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친구들에 비해 해외로 나가기 쉬운 자기 위치를 특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말을 아낀 것인지도 몰랐다.

 

 

 료카가 이틀 늦게 도착할 예정이라 모두 여덟 명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4인실 침대칸을 두 개 차지했다. 애초에는 남녀 객실로 나눴지만 타냐와 갈랴가 합심해 알리사를 트로이가 있는 칸으로 내쫓고 미샤를 자기들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쫓겨 온 알리사가 가방을 털썩 내려놓으며 트로이에게 2층 침대로 올라가라고 손짓했다.

 

 

“ 난 2층이 무서워, 떨어질 것 같아. ”

 

“ 내가 비켜줄게, 쟤는 굼떠서 올라가려면 한나절은 걸릴 거야. ”

 

 

코스챠가 대신 2층으로 올라가면서 알리사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알리사는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딱딱하고 좁은 매트리스 위에 몸을 던지고 꺅 소리를 질렀다. 논문 때문에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데다 최근 결혼 얘기가 오가고 있었기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진 것 같았다.

 

 

“ 왜 그래, 여자들한테서 쫓겨난 게 서러워? 우리가 잘해줄게. 저 방에선 어차피 레나 때문에 안 되지만 우리랑 있으면 공주님이 될 수 있잖아. ”

 

“ 너희들 사이에서 공주가 된다고 무슨 좋은 일이 있겠어. 기껏해야 커피나 타주고 샌드위치나 날라주겠지. 그리곤 내 속옷이나 들춰보겠지. ”

 

“ 그러고 싶지만 파벨 안토노비치가 무서워서 엄두를 못 내겠어. ”

 

 

그들 대부분은 알리사의 약혼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이도 많고 너무 근엄한 척하는데다 열렬한 당원이었기 때문이다.

 

 

“ 파블릭 너무 미워하지 마. 때론 나도 미워서 견딜 수가 없으니까. ”

 

“ 그럼 왜 결혼하려는 거야? ”

 

“ 결혼은 해야만 하는 거니까 그렇지. ”

 

“ 약혼녀를 사내들이 득실거리는 침대칸에 태워서 흑해에 보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남자와 꼭 결혼을 해야 해? 꼭 결혼을 해야 하는 거라면 트로이랑 해, 아니면 나랑 하든가. 이고리도 해줄 거야. 료카는 임자가 있으니 안되고 미슈카는 레나 때문에 안되지만 나머지는 다 자원할 수 있어. ”

 

“ 아, 헛소리 좀 하지 마. ”

 

 

 알리사는 신음하며 과히 깨끗해 보이지 않는 베개로 얼굴을 가렸다.

 

 

“ 너희랑은 절대 안돼. 친구랑 어떻게 잠을 자. ”

 

“ 왜 못 자? 갈랴랑 료카도 우리처럼 친구였는데. ”

 

“ 료카는 얼굴이 예세닌을 닮은 데다 몸매가 좋으니까 갈랴가 넘어간 거야. 근데 너네는 다 못난이에 료카보다도 몸매가 후져. ”

 

“ 그럼 로미오를 줄게. 미남에 몸매가 좋고 어리기까지 하잖아. 널 위해서라면 레나를 희생시키지 뭐. ”

 

“ 농담하지 마. 걘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 ”

 

 

 베갯잇에 붙어 있는 지푸라기를 떼어내며 알리사가 갑자기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노츠카가 좀 안됐어. 완전히 푹 빠져서는... 언니들이 저렇게 멍석을 깔아준다고 넘어올 애가 아닌데. ”

 

레나한텐 안됐지만 로미오는 그 여자애랑 사귀는 것 같던데? 그때 같이 췄던 애 있잖아. 빨간 머리 엄청 예쁜 애. ”

 

“ 지나이다. ”

 

“ 맞아, 지나이다. 생각 좀 해봐, 옆에 그렇게 예쁜 애들만 있는데 레나가 눈에 들어오겠어? 극장에 있는 애들은 자기들끼리 사귀고 결혼하는 게 보통이야. 우리 같은 사람들은 아마 감당하기 힘들 거야. ”

 

“ 내 말은 그게 아니야. 걔는 뭔가 문제가 있어. ”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잠을 청하려고 애쓰던 트로이가 처음으로 알리사 쪽으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 문제라니? 미샤가? 무슨 문제 말야? ”

 

“ 아, 말로 표현하기 어려워. 하여튼 문제가 있어. 걘 힘든 애야. 어쩌면 모스크바로 가는 게 나았을지도 몰라. ”

 

 

 썰매 사건 이후 알리사는 미샤에 대한 친구들의 열광과 애정에 전처럼 동참하지 않았다. 졸업 무대를 보러 가지도 않았고 어쩌다 만나도 외면하고 지나칠 뿐이었다. 그녀는 그 사고의 책임이 미샤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친구들 사이에서 알리사는 똑똑하고 까다로운 성격의 공주님으로 통했지만 트로이는 그녀가 실은 속마음이 여린데다 소꿉친구인 자신을 친남매처럼 소중하게 여긴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누구든 트로이를 폄하하거나 괴롭히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트로이는 그녀가 부당하게 미샤를 탓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자 마음이 불편했다.

 

 

 이고리가 배낭에 쑤셔 넣어 온 보드카를 한 병 꺼내자 불편한 대화가 중단되었고 모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알리사는 머리가 아프다며 음주에 끼어들지 않고 돌아누워 잠을 청했다. 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 안주도 거의 없이 술을 마시고 나자 트로이는 취기로 멀미가 나서 객실 밖으로 잠깐 나갔다.

 

 

 

 객차 연결 통로로 나가자 미샤가 계단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기차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아무 것도 붙잡지 않고도 전혀 비틀거리지 않았다. 트로이는 출입문에 한쪽 어깨를 기대고 앉았다. 열차 바퀴와 레일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올라와 이마와 얼굴을 식혀주자 멀미가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담배 피우는 건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가 펄펄 뛸 일에 속하지 않는 거야? ”

 

“ 글쎄, 아마 펄펄 뛸 일이겠지. ”

 

“ 넌 술도 거의 안 마시잖아, 담배는 왜 피워? ”

 

“ 많이 피우지 않아. 보드카도 세 잔, 담배도 세 개비야. ”

 

 

 미샤는 반쯤 피운 담배를 창틀에 비벼 끄더니 레일 너머로 버렸다. 바람 때문에 빗질하지 않은 머리가 검은 커튼처럼 부드럽게 나부꼈다. 그의 육체 모든 곳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런 요소가 있었다. 멈춰 있지 않는 그 무엇, 끊임없는 움직임, 어디론가 떠오르고 날아가려는 힘. 종종 트로이는 미샤가 어떻게 자신의 몸을 땅에 붙들어 놓을 수 있는지 경이로움을 느꼈다. 정교 사원에서는 하느님이 흙으로 인간을 빚었다고들 하지만 아마 그 하느님 뒤에는 악마가 있었을 것이다. 선행자를 흉내내 공기와 바람, 불꽃과 빛으로 새로운 인간을 빚었을 것이다. 우리들 뒤에 온 인간. 진화한 인간. 하지만 레닌과 소비에트가 자랑스럽게 선전하는 새로운 인간형과는 완전히 다른 부류의 존재.

 

 

미샤가 그의 곁에 와 앉았다. 호주머니를 뒤지더니 담배 대신 과일 사탕을 꺼내서 트로이에게 주었다.

 

 

“ 먹어, 멀미에 좋을 테니까. ”

 

“ 넌 이런 거 안 먹잖아. 레나가 줬지? ”

 

“ 갈랴가. ”

 

 

미샤가 하품을 하더니 트로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 좀 잘게. ”

 

“ 왜 안 들어가고 여기서? ”

 

“ 객실이 더워. ”

 

 

 트로이는 사랑에 빠진 레나와 극성스럽게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두 여자를 떠올리며 웃고 싶은 것을 참았다. 그는 레나가 조금도 가엾지 않았다. 미샤가 여자를 사귄다면 타냐의 말대로 극장의 발레리나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의 눈에 띄지 않을 테니까. 미샤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가 이름을 알 필요도 없는 여자들과 사귀고 키스를 하고 사랑을 나눴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껏 그래온 게 분명하듯이.

 

 

 미샤가 어깨에 기대어 자는 동안 트로이는 불꽃과 자갈을 튀기며 철로를 달려가는 기차 바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취기와 미샤의 온기 때문에 졸음이 밀려왔다. 꾸벅꾸벅 졸기 직전에 그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생각나는 대로 적었다.

 

 

 

강물 위로 원들이 불타고 있어

새로 온 인간, 새로 온 짐승

날아가는 악마, 앉아 있는 악마.

브루벨의 악마.

그건 악마가 아니었어, 브루벨은 취했고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야.

그건 악마가 아니라 새로 온 천사였어.

 

 

 

 그는 자기가 무슨 헛소리를 적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시 머리가 아팠다. 미샤가 기대고 있는 어깨가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수첩을 닫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눈앞에 알리사가 서 있었다.

 

 

“ 여기서 그렇게 웅크리고 자면 근육이 다 뭉칠 거야. 객실로 들어가. ”

 

“ 응, 조금만 있다가 들어갈게. ”

 

 

 알리사는 그에게 기대어 자고 있는 미샤를 굳어진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 깨우지 마. 잠이 모자란 것 같아. ”

 

“ 갈랴한테서 도망쳐 나왔겠지. ”

 

“ 레나가 아니고? ”

 

얜 레나한테는 관심도 없어. 누나들이 못살게 구는 게 귀찮을 뿐이지. ”

 

“ 그럼 객실 다시 바꿔줘. ”

 

“ 그러려고 나온 거야. ”

 

 

알리사가 반쯤 무릎을 꿇더니 평소에 하지 않는 행동을 했다. 한 손을 뻗어 미샤의 이마와 뺨을 엄마처럼 부드럽게 쓸었던 것이다. 갈색 눈에 우울하고 슬픈 표정이 떠올랐다.

 

 

“ 얜 고아야. 우리한테 안 왔으면 좋았을 걸. ”

 

“ 무슨 뜻이야? ”

 

“ 볼쇼이로 갔어야 했다구. ”

 

“ 미샤는 모스크바를 좋아하지 않았어. 원래 여기 남으려고 했었어. ”

 

“ 그건 상관없어. ”

 

 

 그녀는 전형적인 알리사다운 말투로 얘기했다. 아무런 논리도 이유도 없이, 이해할 수 없는 확신에 차서 상대를 얼간이가 된 것처럼 느끼게 하며 우울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쨌든 다행이야. 여름 지나고 시즌이 시작되면 바빠질 테니까. 우리 같은 건 잊겠지. 모임에도 오지 않을 거야. 잘됐어. ”

 

“ 그래도 친구잖아. ”

 

“ 친구는 너처럼 행동하지 않아. ”

 

 

알리사의 시선이 너무 어두웠기 때문에 그는 심장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 그게 무슨 소리야? ”

 

“ 무슨 소리긴. 너처럼 그렇게 응석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얘기야. ”

 

 

 그 말과 함께 알리사가 미샤를 세차게 흔들어 깨웠다.

 

 

“ 그만 일어나, 객실에 가서 자. 차장이 오고 있어. 이고리네로 가라구. ”

 

 

 미샤는 잠시 후 눈을 뜨더니 짜증을 내지도 않고 일어났다. 졸린 얼굴로 갈랴와 레나가 있는 객실 방향을 힐끗 쳐다봤다가 알리사를 보더니 고마운 듯 뺨에 키스를 하고 남자들이 있는 객실로 갔다.

 

 

 알리사가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며 트로이의 등을 떠밀었다.

 

 

“ 가서 이고리랑 코스챠 좀 말려. 계속 퍼마시고 있으니까. 술 냄새가 얼마나 진동하는지 숨을 쉴 수가 없었어. ”

 

“ 파벨은 왜 안 오는 거야? 휴가 아니었어? ”

 

내가 오지 말라고 했어. 이제 내 결혼 얘기 하지 말자. 파블릭 얘기도 절대 하지 마. 우리 놀러 가는 거니까. ”

 

 

 트로이는 소꿉친구를 쳐다보았다. 그는 처음으로 알리사가 결혼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파벨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결혼할 필요 없다고 얘기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겐 그럴 자격이 없었다. 그리고 알리사가 파벨과 결혼에 대해 얘기하지 말라고 못을 박았기 때문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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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사에 대한 이야기는 전에 '젊은이와 죽음'에 대한 에피소드(http://tveye.tistory.com/2390)를 발췌했을 때 언급한 적이 있다. 조역이긴 했지만 내게는 개인적으로 의미있는 인물이었고 언젠가는 그녀에 대해 따로 글을 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긴 쓰고 싶은 이야기들은 많은데 대체 언제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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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마무리하자니 좀 섭섭해서. 브루벨 그림 하나 더. 트로이가 쓴 시에도 잠깐 등장하는 '앉아있는 악마'

이 그림은 모스크바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에 있다.

 

 

 

 

 

 

 

 

이건 러시아 박물관의 브루벨 전시실에서 내가 직접 찍은 사진. 실내에서 플래쉬 없이 찍어서 색은 좀 노르스름하게 나왔다.

 

내가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 이 전시실. 그런 장소가 러시아 박물관에는 여기 말고 한군데가 더 있다. 그 전시실은 트로이의 이야기에도 잠깐 등장한 적이 있다.

 

 

 

 

 

브루벨, 악마의 두상.

 

 

 

 

 

그리고... 친구들하고 어떻게 자느냐고 투덜대던 알리사가 료카와 갈랴 부부 얘기에 '료카는 예세닌을 닮았잖아'라고 하는 이유는.. 예세닌이 이렇게 생겼기 때문이다. 이사도라 던컨과 결혼한 적이 있고... 비극적인 최후를 마친 시인이다. 트로이와 알리사, 친구들 모두 비밀문학 서클이고 예세닌을 좋아하기 때문에 '예세닌을 닮았다!'라는 것은 료카에게는 크나큰 칭찬임 :)

 

예세닌의 최후와 그의 시에 대해 예전에 몇번 포스팅한 적이 있다. 블로그에서 예세닌으로 검색하면 몇개 나온다. 마로조프와 미샤가 등장하는 단편을 쓸때 당초에는 예세닌의 시를 에피그라프로 차용할 생각이었고 쓰는 내내 그의 시에 등장하는 눈의 이미지를 상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마음이 바뀌었다. 예세닌의 시는 그 단편에 비해 너무 부드럽고 순수하고 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예세닌 대신 아흐마토바의 시로 대체했다.

 

예세닌의 그 시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1524

 

 

 

예세닌 사진 한 장 더 .

 

목가적이고 서정적인 시인이라 러시아인들이 매우 사랑하는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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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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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위의 사진은 1980년대~90년대 초의 레닌그라드, 마린스키 극장과 그 앞을 지나가는 전차의 풍경이다. 내가 90년대 후반에 처음 갔을때도 저 전차가 다녔던 기억이 난다.

 

사진은 아직 소련 시절, 페테르부르크가 아직 레닌그라드로 불리던 시절이다. 미샤를 데리고 쓰는 본편 우주는 대부분 1970년대와 80년대 초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원래 맨처음 그라는 인물을 만들어냈을 때는 90년대가 배경이었다만.. 그땐 주인공도 미샤가 아니었지.. 그리고 그 90년대는 대체 언제 쓰게 될 것인가ㅠㅠ)

 

중단된 본편을 다시 써보려고 120페이지쯤 썼던 가브릴로프 본편을 다시 읽어보고 있다. 근데 읽어보는 것만 대체 몇번이야...

 

아래 발췌한 글은 가브릴로프 본편은 아니고, 전에 여러 차례 발췌했던 트로이가 심리적 화자로 나오는 장편의 중반부이다. 아주 짧다.

 

나에게 미샤는 언제나 레닌그라드 - 페테르부르크 아이였다. 그건 트로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황제의 의지로 늪지대에 건설된 페테르부르크가 돌과 뼈와 유령과 환상과 안개와 피와 바람, 어둠과 빛과 물의 도시이듯 미샤와 트로이가 이 도시에 연계된 방식은 서로 다르고 동시에 또 같다.

 

 

이 소설을 쓸 때 나는 아주 바닥에 내려가 있었고 또 아주 급박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순간이 그립기도 하다. 지금은 역시 바닥에 있고 급박하지만 '쓸 수 있는 힘'이 딸린다. 하루하루 버티고 숨을 쉬고 나아가기 벅차서 그런가보다. 하지만 '정말로' 숨을 쉬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다시 글을 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정말로' 나아질 것이고 '정말로' 위로 올라가게 될 것이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지나이다와 한 아파트에 살기 시작한 이래 미샤는 일 년이 넘도록 그 집에서 제대로 된 밤을 보내지 않았다. 트로이는 그가 그런 식으로 살다가는 건강을 해칠 거라고 생각했고 그냥 자기 집에 들어와 살라고 했다. 미샤는 옷이나 책, 음반 등 자기 짐 일부를 갖다놓았고 자주 와서 자고 갔지만 그렇다고 그의 제안을 완전히 받아들인 것도 아니었다.

 

 

 미샤에게는 산짐승 같은 특성이 있었다. 한곳에 얌전히 머물러 있지를 못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같은 레닌그라드 토박이인 트로이조차도 알지 못하는 도시 뒷골목들 여기저기를 밤낮으로 헤매 다녔다. 학창 시절 툭하면 기숙사를 빠져나가고 새벽에 창문으로 기어들어가던 습관도 그런 성격 때문인 것 같았다. 그건 해외 투어를 갔을 때도 변함이 없어서 감시요원들이 따라다니는 데도 불구하고 수차례 숙소를 빠져나가거나 집단에서 이탈하곤 했다. 74년 겨울 베를린 투어에서는 대사관 연말 파티에 불참하고 퇴폐적인 락 밴드들의 공연을 보러 가버렸다가 현지 KGB 지부에 소환되었다. 충격을 받은 다닐로프는 그에게 두 달 간의 감봉 징계를 내린 후 이듬해 여름의 런던 공연에서 그를 빼버렸다. 그래도 미샤는 별로 실망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속해서 분방하게 쏘다녔고 알게 모르게 이탈을 반복했다. 하지만 공연과 리허설을 비롯해 춤과 관련된 일이라면 결코 이탈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아주 열성적인 무용수였다. 끝없이 연습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했다. 관객들의 사랑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극장의 간판스타가 되었다.

 

 

 아마도 미샤의 실력과 재능이 아니었다면 다닐로프는 그 문제아를 내쫓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닐로프도 아사예프도 그 천재적인 젊은 애를 볼쇼이에 빼앗기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다닐로프가 폭발할 때마다 아사예프는 골칫거리라도 ‘우리’ 골칫거리인 편이 낫다고 투덜댔다.

 

 

 가끔 한밤중에 미샤가 차가운 바깥 공기를 휘감고 불쑥 들어와 공부하는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갈 때나 침대 위로 기어 올라와 그의 목에 두 팔을 감았을 때 트로이는 질 나쁜 코롱이나 싸구려 독주 냄새, 코를 찌르는 듯한 담배 연기 냄새를 맡았다. 무엇보다도 낯선 남자들의 체취를 맡았다. 팬들이 선물해준 좋은 향수를 쓰고 술도 별로 마시지 않으며 담배라면 세 개비 이상 피우지도 않는 인물에게서 그런 냄새가 안개처럼 끼쳐올 때마다 트로이는 그 숲고양이 같은 애를 잡아 흔들며 상대에 대해 묻고 싶었다. 누구와 함께 뒹굴었는지, 어떤 놈들에게 그에게 준 것과 다름없는 키스와 애무를 흩뿌리고 다녔는지 추궁하고 싶었다. 그런 밤이면 그는 자기도 모르게 운하와 네바 강을 생각했다. 깊은 바닥으로 흘러드는 검은 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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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가 심리적 화자로 등장하는 이 장편의 일부는 이 about writing 폴더에 꽤 여러번 발췌한 적이 있다. 꽤 장편이라 내킬 때마다 아주 일부를 시간 순서 없이 토막토막 올려놓은 것이긴 하지만 그 파편들에도 전체의 정서는 어느 정도 남아 있다. 그 링크들은 아래.

 

눈보라 속에서 길을 건너는 트로이와 미샤 : http://tveye.tistory.com/4421

냉동 옥수수와 썰매, 커피 : http://tveye.tistory.com/4206

리가에 간 미샤와 트로이 : http://tveye.tistory.com/4156

썰매를 타러 간 미샤와 트로이 : http://tveye.tistory.com/4050

물 속에서 글쓰기 : http://tveye.tistory.com/3985

표절에 대해, 춤추는 푸쉬킨에 대해 트로이와 이고리가 나눈 대화 : http://tveye.tistory.com/3825

모스크바로 가는 길 : http://tveye.tistory.com/3759

미샤의 첫번째 시즌, 돈키호테, 축구팀과 군대 : http://tveye.tistory.com/3594

흙탕물 색깔 재킷과 기름기 많은 수프 : http://tveye.tistory.com/3183

알브레히트로 데뷔한 미샤 : http://tveye.tistory.com/3128

릴렌카와 메밀죽 이야기 : http://tveye.tistory.com/2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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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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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그라드-페테르부르크 사진 몇장. 페테르부르크에 자주 가는 편이고 갈때마다 쏘다니며 사진도 찍지만 다른 사람들이 찍은 사진들도 많이 모은다. 특히 7-80년대 레닌그라드 사진들은 글을 쓸때 도움도 된다. 당시의 풍경을 복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시의 공기를 상상하기 위해서.

 

 

 

 

1983년, 네프스키 거리.

왼편 하단에 보면 러시아어로 '레닌그라드'라는 도시 표지가 보인다.

 

 

 

이건 요즘 사진이다만.. 거의 사라진 레닌 동상이 어딘가 남아 있는 모양이다. 그림자가 절묘해서 어쩐지 레닌그라드 생각이 나서 갈무리해두었다.

 

 

 

 

이곳은 내가 산책하기 좋아하는 길 중 하나. 네바 강변으로 나오는 길이다. 강 건너로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사원의 황금빛 첨탑이 보인다. 빛과 어둠, 그림자와 바람, 네바 강의 검고 푸른 물. 레닌그라드. 페테르부르크. 미샤의 도시. 그리고 내가 어쩌면 서울보다 더 사랑하는 도시.

 

:
Posted by liontamer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젊은이와 죽음. 사진은 alex gouliaev)

 

 

며칠 전 내가 좋아하는 마린스키 무용수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가 아내와 함께 새 시즌에 뮌헨으로 옮겨갈 거라는 소문을 접했고 그게 소문이 아니라 거의 확정된 사실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http://tveye.tistory.com/4587, http://tveye.tistory.com/4592)

 

이 뉴스에 굉장히 심란했고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일 때문에 힘든 와중에도 그 사람이 옮겨간다는 사실에 이렇게 마음이 심란하니 아마 내가 진짜 팬이라 그런가보다.

 

사실 무용수의 입장에서는 13년이나 마린스키에서 췄고 이미 프린시펄로 남자무용수 중에는 최고의 자리에 있는데다 해외에서 인기도 많고 기량도 가장 원숙기에 달해 있으니 늦기 전에 다른 극장, 다른 무대에 나가고 좋은 대우를 받을 때가 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사람이 마린스키에 이렇게 오래 남아준 것도 고마운 일이기도 하다. 다른 동세대 무용수들을 보면...

 

게다가 러시아보다야 유럽이나 미국 쪽 대우가 훨씬 좋을 거고. 바이에른 쪽 예술감독으로 이고르 젤렌스키가 있고, 또 마린스키에서는 제2솔리스트에 머물러 있는 아내 마리야 쉬린키나도 아마 프린시펄 급으로 가는 것 같으니 아내를 매우 사랑하는 이 사람 입장에선 좋은 기회일 것이다. 똑똑한 사람이니 잘 판단해서 결정했을 것이다.

 

그래도 아쉬움과 심란함이 가시지 않는다. 아마 내가 슈클랴로프의 팬인 동시에 '마린스키'와 '페테르부르크'를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에 남아 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름에 다시 페테르부르크에 가고 일년에 한두번은 이 사람 무대를 보는 게 낙이었는데 ㅠ 물론 뮌헨에 가볼 수도 있겠지만 마린스키란 이름과는 다르다. 그리고 그냥 개인적으로는... 이 사람이 가는 극장이 마린스키만한 이름값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서 더 아쉬운 마음이 든다.

 

하여튼 일개 애호가이자 팬인 내가 심란하든 말든 재능 넘치는 무용수이자 예술가이니 슈클랴로프는 자기 앞길을 잘 꾸려나갈 거고...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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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식 때문에 심란해하다 일종의 아이러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내가 쓰고 있는 미샤 야스민의 본편 우주에서 나는 비슷한 소재를 이미 다룬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설정한 세계에서 미샤는 레닌그라드 토박이로 레닌그라드 발레학교(즉 바가노바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곧장 키로프(지금의 마린스키)에서 데뷔해 곧 성공 가도를 달리다 4번째 시즌 중간쯤 모스크바의 볼쇼이로 옮겨가게 된다. 이 이야기는 몇년 전 썼던 트로이와 미샤의 장편 후반부에서 다룬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작가의 입장이었고 나와 미샤는 둘다 이유가 있었다. 그 순간의 미샤는 떠나야 했고 나 역시 그가 왜 떠나야 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던 팬들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혹은 부정하고 싶어하거나 그저 슬퍼했다. 나는 언제나 팬과 예술가 사이의 애정과 환상, 그 거리에 대해 관심이 있었다. 아마도 그것이 오래전 내가 토드 헤인즈의 영화 '벨벳 골드마인'을 처음 보았을때 그렇게 매료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그 영화는 지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남아 있다) 팬과 예술가, 혹은 우상 사이에는 분명 환상이 있고 거리가 있고 놀라울만큼 우스꽝스러운 어떤 것이 있다.

 

 

본편 우주에서 미샤는 매우 열렬한 팬덤을 거느린 무용수로 등장했다. 그의 유일무이한 재능과 사람을 끄는 자력 때문에. 그래서 미샤가 갑작스럽게 볼쇼이로 떠나게 되었을때 그의 팬들은 분노하고 경악하고 망연자실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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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래 발췌한 에피소드를 쓰던 날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건 겨울이었다. 12월이었다. 춥고 쓸쓸한 날이었다. 나는 코다츠 테이블에 앉아 그 장면을 쓰고 있었다. 2012년 겨울이었다. 그날은 대통령 선거일이었다... 나는 투표를 마치고 돌아와 글을 쓰고 있었다. 그때 나는 바닥에 내려가 있었고 내게는 오직 그것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아마 그때 내가 그 소설을 쓰지 않았다면 나는 더욱 오랫동안 바닥에 있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몸이 아파서 잠시 직장을 쉬고 있었던 때였는데 사실 몸보다는 마음이 더 힘들었다.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한지 몇달쯤 된 시점이었고 그때 나는 중독자처럼 그 글을 썼다. 그래서 그 글의 완성도가 어떻든 내게는 매우 개인적이고 중요한 글이었다. 그리고 그 글을 쓰면서 처음으로 나는 나의 주인공을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주인공을 바라보는 심리적 화자 트로이의 안으로 들어갔고 더 깊이, 더 깊이 들어갔다가 나왔다.

 

 

하여튼 그래서 그 소설은 여전히 내겐 내밀하고 고통스럽고 소중한 무언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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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발췌한 에피소드는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미샤가 갑작스럽게 모스크바로 떠나게 되자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팬들의 이야기이다.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당시의 레닌그라드) 사이의 알력과 긴장감도 한몫 했고. (사실 모스크바가 수도이긴 하지만 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은 문화의 예술의 도시, 제국시절 수도, 봉쇄를 이겨낸 영웅도시로서 자기네 도시와 문화예술에 대한 자긍심이 아주 강하다. 그리고 지금도 좀 그렇긴 하지만 소련 시절엔 특히 키로프에서 열심히 좋은 무용수들 키워놓으면 당 차원에서 그들을 볼쇼이로 낼름 보내버리곤 했다)

 

 

이 장면을 쓸때 나는 반쯤 냉소적이기도 했고 또 그보다 더 슬프고 열렬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팬들이 아니라 미샤에게 더욱 가까이 있었다. 그래선지 이번에 슈클랴로프가 떠난다고 해서 심란해지자 이 에피소드를 쓰던 때가 생각났고 조금 씁쓸하게 웃게 되었다.  어쩌란 말이야... 작가로서의 나와 팬으로서의 나는 어쨌든 다르게 반응하고 다르게 느낄 수밖에 없지 않나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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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내가 무용수로서의 미샤라는 인물을 만들어낼 때 여러 무용수들의 특질을 따오기는 했지만 거기 슈클랴로프는 없었다. 왜냐하면 나와 미샤의 관계는 내가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라는 무용수를 좋아하게 되기 훨씬 오래 전에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글을 쓰면서 이따금 슈클랴로프를 떠올린 적은 있었다. 사실 미샤와 닮아서가 아니라 상반된 분위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에게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는 그 드라마틱한 재능과 비극을 표현하는 능력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는 빛과 에너지의 무용수, 햇살 같은 무용수이기 때문이다. 미샤는 그 반대이다.

 

 

하지만 저 트로이가 등장하는 장편을 쓸때 나는 가끔 사진 몇 장을 보곤 했다. 소년 시절, 그리고 20대 초반의 미샤를 떠올리려고. 그때 보던 사진 중 하나는 슈클랴로프의 초창기 시절 찍은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다.

 

 

 

 

물론 나의 주인공 미샤가 이 사람과 비슷한 타입의 외모는 아니다. 하지만 이 사진을 보고 있으면 소년 시절의 미샤가 좀 떠오르곤 했다. 아마 그 소년다움, 아직 앳된 얼굴, 아직 제대로 된 남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린애도 아닌 미묘한 순간에 놓여 있는 시절, 어딘가 양성적이고 어딘가 쓸쓸해보이고 또 어딘가 결핍되어 보이지만 동시에 한없는 매력을 숨기고 있는 모습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언제나 미샤가 어떤 경계에 놓여 있고 그 선을 넘나들며 끝없이 움직이는 존재라고 생각했고 그런 그에게 분명 근육질의 강인한 남성 무용수이지만 동시에 어딘지 양성적이고 어딘지 미처 덜 자란 사춘기 소년 같은 분위기를 남겨 놓고 싶었다. 그리고 이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의 옛 사진은 내게 그런 느낌을 조금 느끼게 해준다. 물론 이 사람은 나의 미샤와는 많이 다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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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늘어놨는데, 하여튼 발췌한 이야기는 몇년 전 쓴 장편의 후반부. 미샤가 3년 반 동안 키로프 무대에 올라다가 갑작스럽게 모스크바 볼쇼이로 떠났을때 일어난 해프닝이다. 앞부분에서 발레애호가들이 분노해 떠드는 대화에 등장하는 세레브랴코프는 미샤를 싫어하는 선배 무용수로 예전에 이 사람과의 충돌에 대한 이야기도 잠깐 발췌한 적이 있다.

 

 

이반 노비코프는 미샤를 낚아채간 볼쇼이 행정감독, 게오르기 다닐로프는 키로프의 행정감독, 아사예프는 예술감독이다. 물론 다들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다. 극장 지도 체계도 좀 다르고. 당시 내겐 그 체계의 재구성이 좀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허구의 세계니까. 스타니슬라프 일린은 이전에 몇번 발췌한 미샤의 친구이자 볼쇼이 안무가이다. 전에 일린의 딸 라라의 관점으로 전개된 부활절 단편 jewels를 올린적이 있는데 그 이야기는 여기서 미샤가 볼쇼이로 옮겨간 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잠깐 언급되는 고르차긴과 마이야 로스포바는 둘다 레닌그라드의 유력자로 미샤의 열렬한 후원자이다.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와 벨스키는 서무 시리즈에도 몇번 언급되었고 발췌한 적도 있지만 미샤를 후원하는 고위직 당 간부이다. 미샤를 따라가는 타마라는 키로프 발레단 코디네이터이다. (역시 모두들 가상의 인물들이다)

 

 

이 에피소드를 쓸 때, 특히 발레애호가들이나 팬들을 묘사할 때 나는 약간은 장난을 치고 있었지만 사실은 많이 진지하고 심각했었다. 사실 이 글을 쓰는 내내 그랬다. 숨을 쉬려고 애쓰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 에피소드를 쓴 날이 대통령 선거일이었고 그 다음날부터 세상은 좀더 어두워졌다 ㅠㅠ)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미샤 야스민이 볼쇼이로 떠난다는 뉴스는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키로프 뿐만 아니라 레닌그라드 문화예술계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몇몇은 스타니슬라프 일린이 왔을 때부터, 그리고 미샤가 세레브랴코프와의 싸움으로 징계를 받고 이후 가을에 두 달이나 휴가를 얻었을 때부터 이런 결과를 예견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극장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노비코프가 미샤를 크레믈린 무대에 세웠을 때부터 이미 모든 시나리오를 짜놓고 있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심지어 극단적인 볼쇼이 혐오자인 유력 인사 하나는 이반 노비코프가 이런 상도에 어긋나는 짓을 하기 위해 일린을 빌려줬던 거라고 화를 내기까지 했다. 음모론이 들끓었다.

 

 

“ 생각해 봐! 포노마레바, 그 여자도 모스크바에서 왔지. 이건 모스크바의 음모야. 그 여자가 다닐로프를 협박해서 일린을 박아 넣었지. 그리고는 어떻게 했어. 그 런던 페스티벌에 야스민을 보낼 때 일린이 만들어준 춤을 가져가게 했지, 게다가 같이 갔던 건 누구야! 게르만 스비제르스키! 모스크바 의원이잖아. 크레믈린 축제는 또 어떻고! 볼쇼이로 빼가는 걸 벨스키가 거들었다잖아. 노비코프는 다닐로프나 아사예프 따위와는 로비 능력 차원이 달라. 그 루슬란을 볼쇼이 무대에 올린다고 했을 때 키로프에서는 으쓱해했지. 얼간이 같긴, 그게 다 노비코프의 포석이었던 거야! ”

 

 

“ 맞아. 게다가 최근 2년 동안 키로프에서 야스민을 어떻게 대했어! 제대로 대우해 줬다는 놈들은 수석으로 만들어준 것만 보고 다른 건 못 보는 거지. 무대에 서는 날과 징계로 처박혀 있는 날이 거의 비슷할 정도였을 걸! 그 세레브랴코프 서클에서 무슨 짓들을 했는지 정말 몰라? 음해와 뒷공론, 협박이 전부가 아냐. 별의별 유치한 짓들을 다 했어. 첫 시즌에는 공연 시작 직전에 소품 창고에 가뒀지. 볼고그라드에 갔을 때는 인솔자를 속여서 걜 거리에 내버리고 버스를 출발시켰어. 야스민이 지난 네 번의 시즌 동안 잃어버린 그 많은 의상과 슈즈가 전부 어디로 갔다고 생각해? 팬들이 가져갔다고? 그 절반 이상은 잘난 선배들이 쓰레기통에 처넣었을걸. 그런 게 애들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고? 페름 저수지 사건 몰라? 분장 상자 안에 양날 송곳이 잔뜩 박혀 있던 사건 기억 못해? 손가락이 잘릴 뻔 했지. 조명 나사를 풀어서 어깨를 박살낼 뻔한 적도 있었어. 그래, 그 다쳤던 어깨 말야. 그게 실패하니까 세레브랴코프가 자기 손으로 뼈를 부러뜨리려고 했지. 그런 와중에 노비코프가 미끼를 던졌는데 제정신인 무용수 치고 그걸 물지 않을 인간이 어디 있어! ”

 

 

“ 노비코프가 1월에 야스민을 곧장 백조 무대에 세운대. 거의 모스크바에 도착하자마자일 걸. 그 표 구하려고 그 바닥이 발칵 뒤집혔대. 벌써부터 그 친구가 스파르타쿠스를 출 거라고 모스크바 무용계가 시끌시끌해. 스비제르스키에 벨스키까지 고위직도 양쪽 서클에서 다 걜 밀잖아. 그런 앨 뺏기다니. 그것도 여름도 아니고 시즌 중에 데려가게 놔두다니! 키로프 위신이 땅에 떨어졌어. 멍청한 인간들. 이제 시작이야. 그놈들이 하나하나 다 빼 갈 거야. 모스크바 놈들에게 다 뺏기게 될 거야! ”

 

 

좋은 것은 모두 모스크바와 볼쇼이에 빼앗긴다는 피해의식과 뿌리 깊은 경쟁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극장과 예술계 인사들 뿐만이 아니었다. 공식적인 뉴스가 1월 초에 터져 나오자 관객들도 크게 실망했는데 특히 미샤의 팬들은 하늘이 무너질 듯한 충격에 사로잡혔다. 그 충격의 첫 번째 반응은 극장에 대한 무시무시한 분노로 나타났다. 그들은 키로프 상부의 무능함과 고참 무용수들의 텃세를 강력하게 비판하는 연판장을 써서 문화국과 지역 의회에 공식적인 항의 서한을 제출했고 리디야 포노마레바의 사무실을 급습해 한 시간이나 뜨거운 성토를 벌였다. 불행하게도 그런 점잖고 교양 있는 행동으로 그친 것만은 아니었다. 열성팬들은 극장으로 몰려갔고 게오르기 다닐로프와 울리얀 세레브랴코프의 자동차에 휘발유를 부은 후 불을 질렀다. 다행히 수위가 달려와 재빨리 불을 껐기 때문에 큰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두 대의 차는 심하게 망가지고 말았다. 다닐로프는 공포에 질려 세레브랴코프에게 미샤가 떠날 때까지 억지로 휴가를 주었고 경찰에 연락해 그 공훈예술가의 신변 보호를 요청하기까지 했다.

 

 

다닐로프의 그런 행동은 결코 과민한 반응이 아니었다. 차에 불을 지른 후 팬들은 극장 광장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무시할 수 없는 숫자로 불어났을 때는 키로프 정문 앞으로 옮겨와 시위를 시작했다. 그들은 다닐로프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부르며 당장 관객들 앞에 나와 제대로 된 해명을 해 줄 것을 요구했다. 점차 거기에는 보리스 아사예프의 이름도 뒤섞였다. 다닐로프는 경찰들에게 연락했지만 어째서인지 그들은 좀처럼 와주지 않았다. 아마도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팬들 배후에 지역 유력 인사가 몇 명 끼어 있었고 그들이 연줄을 동원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혹자는 고르차긴이나 마이야 로스포바의 이름을 거론하기도 했다.

 

 

시위가 점차 격화되어 작은 폭동으로 번질 조짐이 보이는 데다 저녁 공연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겁에 질린 다닐로프는 마침 서류 문제를 마무리하기 위해 들렀던 미샤를 붙들고 거의 빌다시피 소리쳤다.

 

 

“ 자네 추종자들이니까 가서 좀 해결해봐! 제발 내 기억 속에서 마지막까지 골칫거리로 남지는 말아줘. ”

 

“ 게오르기 페트로비치, 당신은 제가 어떻게 행동하든 골칫거리로 기억하실 게 뻔해요. ”

 

“ 그래, 하지만 우리 골칫거리였지. ”

 

 

그때 게오르기 다닐로프는 결코 극장 소속 예술가들에게 하지 않던 행동을 했다. 그 깐깐하고 관료적인 인물이 자리에서 일어나 미샤를 포옹하고 뺨과 입술에 세 번 입을 맞춘 것이다. 사무실 구석에 서 있었던 타마라는 그 광경에 기절할 만큼 놀랐다.

 

 

“ 다시 돌아와. 자네 자리는 항상 있을 테니까. ”

 

 

물론 그 따뜻하고 정감 넘치는 대사 후 다닐로프는 미샤의 등을 떠밀어 정문 앞으로 내보냈다. 극장 쪽 직원으로 타마라를 딸려 보내기는 했지만 그녀는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었다. 격하게 시위하고 있던 팬들은 미샤가 나왔을 때 놀라서 한동안 잠잠해졌지만 곧 다시 흥분해서 그를 에워쌌고 소리를 지르고 항의하고 울부짖고 제발 남아달라고 간청하기 시작했다. 미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문 앞에 멍하게 서 있었다. 그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그저 귀찮아서였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타마라는 미샤가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얼이 빠졌던 거라고 생각했다. 떠나기로 결정하기 전부터 극장에서 미샤가 가끔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멍하게 서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타마라는 그가 너무 무리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곤 했다.

 

 

미샤가 별다른 변명도 위로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기 때문에 팬들의 슬픔은 점차 분노와 원망으로 변했다. 그들은 우상 무용수를 벌떼처럼 에워싼 채 시베리아에서 짐승을 사냥해 몰듯 소란스럽게 극장 문 앞에서 끌어냈다. 타마라는 그들이 미샤를 납치해 무서운 짓을 저지를 것 같다는 비이성적인 공포에 사로잡혀 발을 동동 구르며 뒤를 쫓아갔다. 남녀가 뒤섞인 추종자 무리는 웅성대고 소리치며 운하를 따라 이시도로프 사원 쪽으로 내려가다가 도로를 건넜고 마침내 쇼틀레로 미샤를 밀어 넣은 후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평화로운 오후의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던 몇몇 중년 여인들과 젊은이들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고 팬들은 ‘꺼져요 꺼져!’를 반복하며 그들을 내쫓았다. 타마라는 문이 닫히기 전에 간신히 안으로 달려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몇 시간은 타마라에게 끔찍한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팬들은 카페 앞문과 뒷문을 모두 걸어 잠그고 교대로 문 안팎을 지켰으며 점원들을 협박해 안쪽의 조리실로 몰아넣었다. 전화선을 모두 뽑아버렸다. 무기만 없다 뿐이지 인질극이나 다름없었다고 타마라는 이후 공포에 떨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카페 안을 구름처럼 메운 팬들의 숫자를 세다가 100명까지 세었을 때 공포에 떨며 그 무용한 일을 그만 두었다. 100명이든 1,000명이든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너무 흥분해서 이성을 잃었고 푸치니 오페라나 드라마 극장 무대에나 나올 법한 광적인 감정 폭발과 눈물과 고성을 마구 쏟아냈다.

 

 

미샤는 한가운데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팬들이 동심원을 그리며 온통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에 빠져나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타마라는 그들을 잘못 자극했다가는 미샤를 폭행하거나 말 그대로 짓눌러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벌벌 떨고 있었다. 다행히 추종자들은 미샤에게 육체적 폭력을 가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손을 댔던 것은 귀부인처럼 차려입은 중년 여인 두 명 뿐이었는데 그것도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테이블 위로 올라가 앉으라고 팔을 잡으며 종용했던 것 뿐이었다. 미샤는 순순히 테이블 위로 올라가 앉았는데 그때에야 타마라도 그의 얼굴을 보고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미샤는 겁에 질려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긴 타마라는 그가 어떤 일에든 두려움에 휩싸이거나 주눅 드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다만 무척 피곤해 보였을 뿐이었다. 그는 짜증을 내거나 내보내달라고 부탁하지도 않고 테이블 위에 앉아 흥분한 팬들의 아우성을 그대로 듣고 있었다.

 

 

추종자들은 한꺼번에 소리치기도 하고 이따금 누군가의 지도에 따라 돌아가면서 성토나 항의, 분노와 슬픔을 표출하기도 했다. 과격한 팬들이 삿대질과 함께 미샤에게 모스크바와 볼쇼이에 창녀처럼 팔려갔다며 고함을 질렀을 때 타마라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그때쯤 그녀는 미샤가 살아서 나갈 수 없을 거라는 확신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카페 전체를 불태울 듯 솟구쳤던 배반감과 노여움은 점차 크나큰 상실감으로 바뀌었는데 아마도 미샤가 침묵하면서도 그들의 말을 모두 들어주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나중에는 여자들 여러 명이 테이블 바로 앞에 몸을 던지고 통곡하면서 가지 말라고 애걸했다.

 

 

우리 죽는 걸 보고 싶어요? 제발 가지 말아요! 모스크바에 가지 말아요! ”

 

 

그러자 모여든 팬들이 콤소몰 청년가를 부르듯 한 목소리로 합창했다.

 

 

“ 가지 말아요! 모스크바에 가지 말아요! ”

 

 

그 무서운 와중에도 타마라는 미샤가 반듯하게 다물고 있는 입술 너머로 웃음을 참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더럭 들었다. 그 비현실적이면서도 너무나 러시아적인 합창에는 소름끼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주 우스꽝스러운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마라가 아는 미샤 야스민은 충분히 그런 상황에서 웃어버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으며 두 손을 모아쥐고 마음 속으로 열렬히 외쳐댔다.

 

 

‘ 제발, 웃지 마. 이 말썽쟁이 꼬마야, 제발 참아. 비웃는 줄 알 거야. 이 사람들이 지금 장난치는 걸로 보여? 널 갈기갈기 찢어 죽여버릴 거야. 오 하느님, 예수님. 전 몰래 세례도 받았고 고난주간에는 금식도 해요, 콤소몰 회합에는 꼬박꼬박 나가지만 그래도 신앙을 지켰다고요. 제발 제 기도 좀 들어주세요. 저 골칫거리 귀염둥이가 제발 웃지 않게 해주세요. 제발 살아서 나갈 수 있게 해주세요. 손 끝 하나 다치지 않게 해주세요! 우릴 떠나는 건 밉지만 그래도 저 애가 볼쇼이 무대에 제대로 설 수 있게 해주세요! ’

 

 

하느님이 그녀의 기도를 들어줬는지는 모르겠지만 미샤는 웃지 않았다. 대신 처음으로 입을 열었고 그 연극적인 과잉으로 흘러넘치는 합창을 일상적인 대화를 받아넘기듯 대꾸했다.

 

 

“ 돌아올 거예요. 그러니까 보내주세요. ”

 

 

아마도 너무나 침착하고 조용한 어조 때문인지도 몰랐다. 소음으로 가득하던 카페 안에 갑작스런 침묵이 내리덮였다. 잠시 후 한 여자가 날카롭게 떨리는 음성으로 소리쳤을 뿐이었다.

 

 

“ 그걸 어떻게 믿어? 결국 모스크바를 선택한 거잖아요! ”

 

 

미샤는 소리친 여자 쪽을 보지도 않은 채 낮고 부드럽게 말했다.

 

 

“ 모스크바라서 가는 게 아니에요. 새로운 뭔가를 춰보고 싶을 뿐이에요. 돌아오면 좀 더 나아질 거예요. 모든 게 나아질 거예요. 그러니까 보내주세요. ”

 

 

그때 미샤 야스민의 얼굴이 너무나 창백하고 두 눈이 깊은 터널처럼 검게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차라리 주문처럼 그 말을 자기 자신에게 되풀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주위를 둘러싼 팬들은 모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타마라는 미샤와 그 빽빽한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불꽃을 두른 완벽한 원형의 벽이 세워져 있다는 것을 갑작스럽게 알아차렸다. 그들 중 누구도 그를 끌어내 갈기갈기 찢어버릴 수 없었다. 키스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미샤에게서 그런 슬픈 얼굴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울기 시작했다.

 

 

그때 경찰들이 마침내 도착했다. 카페 문을 뜯어내고 들어와 사람들을 해산시키고 미샤를 빼내주었다. 불법 시위와 차량 방화, 납치와 감금, 협박 등등 갖다 붙일 죄목은 넘쳐났지만 놀랍게도 쇼틀레에 모여든 미샤의 팬들 중 경찰서에 연행되거나 심문을 받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대단한 사람들, 대단한 연줄이라고 타마라는 생각했다. 딱히 틀린 생각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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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틀레는 옛날에 내가 종종 들렀던 마린스키 극장 근처의 베이커리 카페 슈톨레를 모델로 만들어낸 가상의 공간이다. 피로슈카 파이와 타르트 등을 파는 곳이었다.

 

 

 

 

이건 이시도로프 사원 가는 길. 마린스키 쪽에서 찍은 건 아니고 반대편에서 찍은 것.

 

팬들은 마린스키 극장에서 이시도로프 사원 가는 쪽으로 쭉 거슬러 올라가는 길로 미샤를 몰아갔다(거기 내가 다니던 슈톨레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설정했음)

 

 

 

사진 추가) 이게 마린스키 극장에서 이시도로프 사원으로 올라가는 바로 그 길. 2010년 겨울에 내가 찍었던 사진 한 장 찾았다. 이땐 아직 마린스키 신관이 생기기 전이니 미샤의 레닌그라드 시절과 비슷한 지리적 조건이다. 왼편 멀리 보이는 게 이시도로프 사원. 이 길 아래쪽으로 내려오면 마린스키 극장이 있다. 쇼틀레는 가운데 도로 건너 오른편 어딘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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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무용수 세레브랴코프와 미샤의 악연에 대한 에피소드를 전에 짧게 발췌한 적이 있다. 애호가들의 대화에 나오는 페름 저수지 사건에 대한 것이다. 그건 여기 : http://tveye.tistory.com/3594

 

레닌그라드 애호가들이 '미샤를 낚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보낸 첩자'로 매도하는 안무가 스타니슬라프 일린의 시점으로 묘사된 발췌문은 여기. 둘다 수용소에서 미샤를 면회할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 http://tveye.tistory.com/4521, http://tveye.tistory.com/4468

 

일린의 딸 라라의 시점으로 묘사된 미샤의 모스크바 시절 이야기인 jewels는 여기

1장 : http://tveye.tistory.com/3390
2장 : http://tveye.tistory.com/3391
3장 : http://tveye.tistory.com/3393 
4장 : http://tveye.tistory.com/3394
5장 : http://tveye.tistory.com/3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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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 이 글은 albaricoque님이 블로그에 올리신(http://albaricoque.tistory.com/92) 거장과 마르가리타 후기에 댓글을 달다가 생각나서 쓰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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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러시아어를 전공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전에 petersburg diary 폴더에 쓴 적이 있다. 나는 책 한 권과 영화 한 편 때문에 러시아어를 전공하게 되었는데 전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었고 후자는 미하일 바리쉬니코프의 백야였다. 그 이야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1606

 

 

이후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나의 사랑은 변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의 러시아 문학을 향한 사랑을 더 깊고 넓게 만들어준 것은 미하일 불가코프와의 만남이었다. 지금 내게 가장 좋아하는 러시아 작가 셋을 꼽으라면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와 미하일 불가코프, 그리고 세르게이 도블라토프가 될 것이다.

 

 

내가 가장 처음 읽었던 불가코프의 소설은 대표작인 거장과 마르가리타였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페테르부르크의 허름하고 추운 기숙사 방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사진 속 맨 왼쪽에 보이는 한길사 번역 판본이었다(사진 속의 책은 같은 건 아니고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 내가 따로 산 것이다) 당시 친구가 또 다른 친구에게서 빌린 책이었는데 어쩌다 내가 먼저 읽게 되었다.

 

 

그때까지 나는 (부끄럽지만) 러시아어과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불가코프라는 작가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책 제목도 처음이었다. 나에게 있어 그때까지의 러시아 작가들은 대부분 19세기 작가들이었고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체호프, 푸쉬킨 등을 벗어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저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읽기 시작했을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초반부에 안누슈카가 해바라기 기름을 이미 쏟아버린 결과로 편집장 베를리오즈의 머리가 전차에 잘려나가는 순간 전율을 느꼈다. 전반부에서는 충격과 공포와 묘한 흥분에 사로잡혔고 후반부에서 마르가리타가 마녀로 변신해 하늘을 날아가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연인 거장을 구하기 위해 무도회의 여주인이 되는 장면부터는 반쯤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그리고 결말에서는 가슴을 찌르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많은 소설들이 내게 기쁨과 슬픔과 쾌감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불가코프의 이 소설만큼 나를 완벽하게 흥분시킨 작품은 거의 없었다. 이것은 작가들의 소설이었다. 쓰는 자의 소설이었다. 정말이었다.

 

 

이후 나는 불가코프의 단편과 다른 장편들을 거의 모두 구해 읽었다. 국내에 번역된 책들도 읽었고 원서도 가능하면 구해 읽었다. 사진의 책장에 꽂혀 있는 불가코프 책들 중 왼편의 거장과 마르가리타 번역본은 세가지인데 제일 왼쪽이 내가 처음 읽었던 버전이고 노어 발음에 가깝게 거장과 마르가리따로 되어 있다. 이후 외국어표기법에 따라 '거장과 마르가리타'라고 손질되어 나온 버전이 옆의 좀더 새책, 그리고 오른편의 한권짜리는 다른 분이 번역한 책이다. 원서와 단편집 등 몇권은 부모님 댁에 있다. 원어로 되어 있는 저 책은 '어둠의 대공'이라는 제목인데 불가코프가 거장과 마르가리타 완성본을 쓰기 전에 썼던 초본 등을 엮은 것이다.

 

 

 

 

 

 

 

 몇년 전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호흡법을 새로 익혀야 했다. 그래서 원래 구상했던 장편 대신 워밍업을 위한 단편을 썼다. 이전에도 몇번 발췌한 단편이다. 레닌그라드의 정치가 드미트리 마로조프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나의 주인공 미샤의 이야기로 소설은 파리에서 체포된 미샤가 비행기 안에서 마로조프와 나누는 대화와 마로조프의 회상으로 이루어졌다.

 

 

그때 나는 아마도 미샤에 대해 지금만큼 친밀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만큼 그를 이해하고 있지 않았고 지금만큼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으며 지금만큼 그의 내부에 다가가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소설은 마로조프와 마찬가지로 내게도 미샤를 만나고 이야기하고 느끼고 내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되었다.

 

 

그 소설에서 나는 불가코프의 이 소설을 몇 문장 인용했다. 정말 몇 문장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소설 속에서, 그리고 그 순간의 미샤와 나에게는 중요한 문장들이었다. 그 이유는 아마 그와 나만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용한 문장은 아래 발췌문에서 푸른색으로 표시하였다.

 

 

발췌문은 지난번 올렸던 '마지막 동작이 완성되지 않은 춤, 운하를 건너는 미샤'(http://tveye.tistory.com/4485) 파트에서 이어지는 내용이다. 드미트리 마로조프가 파리에서 체포된 미샤와 비행기 안에서 조우하고 그들의 두번째 만남에 대해 회상하는 장면이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적당한 고도에 접어들어 더 이상 기체가 흔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미샤가 커튼을 젖히고 내 쪽으로 건너왔다. 앞뒤를 가로막고 있는 두 명의 거대한 요원들 사이에서 그는 거의 어린애처럼 보였다. 그를 내버려두고 자리로 돌아가라고 했을 때 요원 중 하나가 반쯤 의무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 하지만 명령을 받아서요,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 위험인물이라. ”

 

 

나는 미샤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파리에서부터 내내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있었던 요원들에게는 비웃음이라고 여겨질 만한 미소였다.

    

 

 

 

요원들이 뒷자리로 돌아간 후 미샤가 맞은편 자리에 앉았을 때 내가 물었다.

    

 

“ 뭐가 그렇게 재미있나, 위험인물이라고 해서? ”

 

“ 명령을 내리는 사람 앞에서 명령 얘기를 하고 있으니까요. ”

 

“ 자넨 내 관할이 아니야. ”

 

“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죠. ”

 

 

 

나는 그에게 담배를 건네고 불을 붙여 주었다. 미샤는 연기를 깊게 빨아들인 후 잠시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좌석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처음으로 나는 그의 얼굴을 정면에서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호텔 앞과 공항은 파도처럼 밀려드는 외신 기자들과 극장 관계자들, 피켓을 든 각종 단체와 예술가들로 꽉 차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오늘 아침 르 피가로에 실린 사진이 가장 선명했는데, 물론 그때도 위장한 요원들 사이에 끼어 있었기 때문에 검은 머리칼과 창백한 얼굴, 호리호리한 실루엣 외에는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골치 아픈 기자들과 인권운동가 나부랭이들을 따돌리기 위해 그를 예정되어 있던 레닌그라드 직항 여객기 대신 한 시간 먼저 출발하는 모스크바행 특별편에 탑승시키라는 지시를 내린 것은 나였지만, 정말로 이 자리에서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미샤 야스민에게는 나를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는 게 분명했다.

 

  

미샤는 피곤해 보였다. 얼굴은 창백했고 길게 뒤엉킨 속눈썹 아래로 어두운 그림자가 패여 있었다. 항상 제멋대로 치솟는 경향이 있던 검은 머리칼은 이마 위로 단정하게 빗어 넘겼지만 갸름한 얼굴 위로 광대뼈 윤곽이 더 날카롭게 두드러져 있었다. 파리의 더운 날씨 때문인지 소위 위험인물이라 무기를 감출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 때문에 빼앗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재킷은 걸치지 않았고 주머니가 없는 검은색의 긴 소매 리넨 셔츠와 짙은 회색의 슬랙스 차림이었다. 웅웅거리는 소음과 둥근 창 너머로 보이는 두터운 구름이 아니었다면 연습실에서 막 나온 것 같다고 착각할만한 모습이었다.

 

 

미샤가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안개처럼 빽빽하고 불투명한 연기에 휩싸여 그 창백하고 지친 듯한 얼굴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     *     *

   

 

 

 

서쪽에서 다가온 어둠이 거대한 도시를 뒤덮었다. 다리도, 궁전들도 사라졌다. 마치 결코 이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사라졌다. 실처럼 가느다란 섬광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내달렸고 천둥이 도시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울리는 천둥과 함께 뇌우가 시작되었다. 어둠 속에 휩싸여 볼란드는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두 번째로 만났을 때 나는 미샤를 모스크바로 데려갔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미샤는 볼쇼이나 므하트 극장보다는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을 더 좋아했다. 미술관에서 나와 저녁을 먹으러 갔을 때 나는 몇 년 전 파리에서 출간된 무삭제판 불가코프 소설을 선물했지만 그 아이는 벌써 지하 루트로 그 책을 입수해 읽은 후였다.

    

 

“ 실망하실 필요는 없어요,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 ”

 

 

식어가고 있는 수프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책장을 넘기면서 미샤가 말했다.

 

 

그건 갱지 복사물이었거든요. 돌려가며 읽었는데 제 차례가 왔을 땐 잉크가 번져서 여기저기 지워져 있었어요. ”

 

    

 

그날 밤 잠들기 전에 나는 그에게 책에서 마음에 들었던 장면을 몇 장 읽어달라고 청했다. 마음속으로는 어느 부분을 읽어줄지 예측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마르가리타가 빗자루를 타고 모스크바 밤하늘을 날아가는 장면이나 사도바야에서 악마 무도회를 여는 장면이다. 혹은 반항심 많은 사춘기 소년답게 나를 권력과 체제의 상징으로 설정해 놓고는 보란 듯이 ‘원고는 불타지 않는다’ 라는 대사를 읊어 주리라고 생각했다.

 

 

미샤는 밑도 끝도 없이 대여섯 문장만을 읽었다. 어둠과 뇌우에 대한 장면이었다. 왜 그 부분을 읽어주었는지에 대해서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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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조프의 시점으로 씌어진 이 소설의 다른 발췌 장면들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4267, http://tveye.tistory.com/2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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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과 마르가리타는 불가코프 생전에는 출판되지 않았다. 검열로 고통받았던 작가였기 때문이다. 소련에서는 불가코프 사후, 그리고 스탈린이 죽은 후에야 그나마도 군데군데 삭제된 버전으로 처음 출판되었다. 무삭제본은 그리고도 한참 후에야 나왔다. 그래도 60년대 말 즈음 파리 등 해외에서는 무삭제판이 출간되었는데 이 소설에서 마로조프가 미샤에게 건네주는 것이 바로 그 무삭제판이다.

 

 

 

 

마로조프가 이야기하는 거장과 마르가리타와 '원고는 불타지 않는다'에 대한 이야기는 오래 전 웹진 기사로 포스팅했던 적이 있다. 왜 이 소설이 스탈린 시대에 출판될 수 없었는지, 그리고 무삭제판이 나오기까지는 왜 더 오랜 세월이 지나야 했는지도 이 포스팅에 간략히 쓴 적 있다. 

그 포스팅은 여기 : "원고는 불타지 않는다" http://tveye.tistory.com/13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러브 스토리에 대한 짧은 발췌는 여기 :

반지하 창문을 볼때마다 http://tveye.tistory.com/979

 

 

** 추가 : 이 글을 발췌하게 된 이유 중 약간 : http://tveye.tistory.com/4575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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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원래 이번 주말에는 지난번에 써놓은 서무의 슬픔 38편을 올려볼까 했는데 딱히 내키지가 않았다. 써놓은지 꽤 된 그 38편은 하염없이 가볍고 즐거운 분위기의 에피소드인데 아마 요즘 내가 그런 마음이 아니라서 그런가보다. 사실 39편도 하나 구상해놨는데(회사의 부조리한 방침 때문에 짜증나서) 이것도 별로 쓰고 싶은 마음이 안 드는 것을 보니 요즘 내가 많이 지쳐 있긴 한가보다.

 

그래서 지난번에 발췌해 올렸던 가브릴로프 본편의 프리퀄인 수용소 이야기에서 조금 더 올려본다. 일전에 농담에 약한 미샤에 대해 그의 친구 스타니슬라프 일린이 충고를 하는 장면을 발췌한 적이 있다. 이것은 일린이 모스크바 비밀 클리닉의 면회실에서 미샤를 만나는 장면이다.

 

스타니슬라프 일린에 대한 설명과 예전 글들의 링크는 얼마전 올린 농담과 조셴코, 하름스 등에 대한 발췌문인http://tveye.tistory.com/4468 에 나와 있다. 이 수용소 프리퀄에서 일린은 미샤의 후원자 중 하나인 정치국 의원 게오르기 벨스키의 도움으로 친구를 면회하러 오게 된다.

 

.. 위의 그림은 미하일 브루벨의 '날아가는 악마'. 전에 두어번 올린 적이 있다. 이 그림은 브루벨 그림 중 내가 '백조 공주'와 더불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그 두 그림은 미샤라는 인물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미샤는 자기 발로 걸어서 들어왔다. 수갑은 차고 있지 않았다. 수의를 입고 있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환자복을 걸친 것도 아니었다. 암청색의 얇은 스웨터와 느슨한 진을 입고 있었고 목에는 자주색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놀랄 만큼 평소와 비슷한 차림새였지만 점차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모든 것이 어긋나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 옷들의 색깔과 모양새, 재질과 전체적인 조화, 그 모든 것들이 잘못 되어 있었다. 미샤라면 절대 저런 톤의 색깔을 고르지 않았을 것이다, 사이즈가 맞지 않아 어깨와 팔과 허리를 타고 볼품없이 늘어지는 옷이라면 더욱 더. 소매 끝의 라벨을 보니 적지 않은 금액이 들어간 수입품이 분명했지만 미샤는 단 한 번도 브랜드 라벨이 적나라하게 붙은 옷을 입은 적이 없었다. 해외 팬들이 선물한 옷들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 스카프. 내가 아는 미샤는 그런 우중충하고 끔찍한 색깔의 천 조각을, 그것도 그 조잡한 암청색 스웨터 위로 두르느니 엄동설한에도 목덜미를 그대로 노출하고 눈보라 속으로 나가버릴 인물이었다. 그 값비싸 보이지만 미묘하게 촌스럽고 마감 상태가 엉망인 옷과 지나치게 광택이 도는 구두, 이상한 모양으로 매듭을 지어 놓은 스카프의 부조화가 너무나 충격적이라 한동안 내 눈에는 다른 것은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 모든 것이 미적으로 완벽하게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미샤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를 꺼렸던 모습들을 꽤 많이 알고 있었다. 무대 뒤에서의 모습도, 부상 때문에 몸을 웅크리고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있던 모습도, 드물게 분노를 터뜨리며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던 모습도, 그리고 또 다른 몇 가지, 아주 개인적이고 부드러운 모습들. 그러나 단 한 번도 미샤가 그런 식으로 잘못된 미감을 전시하듯 드러낸 것을 본 적은 없었다. 마치 일부러 그런 의상을 걸쳐 입고 무대에 올라온 배우 같았다.

 

 

마침내 옷차림에 대한 충격에서 벗어났을 때 나는 그가 왼쪽 다리를 눈에 띄게 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나의 놀라움, 그 낯선 느낌은 그의 자세 때문일지도 몰랐다. 난 각오가 되어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미샤, 가장 끔찍한 경우에는 산소마스크를 쓰고 온 몸에 튜브를 달고 있는 미샤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똑바로 걷지 못하는 미샤 야스민, 무겁게 다리를 끌고 한쪽 어깨가 눈에 띄게 내려앉은 미샤를 마주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몇 발짝 걸어 들어왔을 때 미샤가 멈춰 섰다. 등 뒤로 문이 닫혔을 때 그가 고개를 들었고 한동안 눈을 깜박이며 가만히 서 있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가 바로 앞에 있는 나를 찾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방에는 창문도 없었고 천정에 달린 조명은 그렇게 밝지도, 어둡지도 않았다. 하지만 미샤는 갑자기 컴컴한 어둠 속으로 들어온 것처럼, 혹은 눈부신 일광이 쏟아지는 백사장에 내던져진 것처럼 초점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검은 눈을 깜박이며 천천히 사방으로 탐색하는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은 몇 번이나 내 쪽을 향했지만 공기를 통과하듯 그대로 길게 지나쳐버렸다.

 

 

나는 깊은 숨을 들이쉰 후 부드럽게 말했다.

 

 

“ 나 여기 있어, 미셴카. ”

 

 

미샤가 곧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여전히 그 검은 눈에는 제대로 된 초점이 잡혀 있지 않았다.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을 때 미샤는 몸을 움찔했지만 내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그 손은 내가 알던 미샤의 손보다 훨씬 차가웠고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작게 느껴졌다. 손가락의 길이나 손등의 크기가 줄어들 리는 없으니 내 심리 상태 때문인 것이 분명했다.

 

 

미샤는 내 손을 곧 놓았다. 두어 발짝 더 앞으로 다가섰다. 그에게서 스프레이와 화장품과 새 옷, 그리고 소독약과 아주 인위적이고 거의 금속 냄새에 가까운 화학 약품 냄새가 풍겨왔다. 나는 두 팔을 벌려 그를 포옹하고 싶었지만 악수를 했을 때의 반응을 생각하며 꾹 참았다.

 

 

포옹을 해 온 것은 미샤였다. 암청색 니트 스웨터에 휘감긴 두 팔이 내 목을 느슨하게 감싸 안았을 때 갑작스럽게 목구멍까지 뜨거운 덩어리가 울컥 치솟았다. 이상한 색깔과 조잡한 재질, 불균형한 디자인, 그 모든 것은 여전히 유효했다. 하지만 그건 그저 맞는 치수의 옷을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치밀어 올랐다. 내 목에 감긴 두 팔과 가슴팍에 맞닿은 그 몸이 너무나 야위어 있어서 현기증이 났다.

 

 

그의 뺨은 손보다 더 차가웠다. 뺨이라기보다는 광대뼈와 그 위에 팽팽하게 씌워진 피부에 가까웠다. 포옹을 풀었을 때 미샤가 입을 열었다.

 

 

“ 너무 비웃지 마, 공금으로 입혀준 거니까. ”

 

 

그는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적어도 그 말투는 내가 알던 미샤와 아주 비슷했기 때문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비록 그 목소리는 훨씬 미약하고 공기를 스치는 것처럼 들렸지만.

 

 

“ 거의 국영 의류공장 카탈로그 찍었을 때와 맞먹는 수준인데. ”

 

“ 그거 봤어? 레닌그라드에만 풀었다고 했는데... ”

 

“ 라라 스크랩북에서. ”

 

“ 태워버려. ”

 

 

이런 상황에서도 그 애가 그 촌스러웠던 국영 의류공장 신제품 모델로 끌려갔던 옛 기억을 되살리며 치를 떨 수 있다는 사실에 웃어야 할지 혀를 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미샤는 별로 고민하는 것 같지 않았다. 웃었기 때문이다.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눈을 살짝 내리뜨는 정도였지만 그래도 분명 미소였다. 희미하게 웃자 얼굴이 한결 나아보였다. 아니, 사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안색은 창백했지만 그래도 병색이 완연할 정도로 하얗지는 않았고 짧게 잘린 머리도 제법 잘 다듬어진 상태였다. 뺨과 입술에는 희미하게나마 핏기가 돌고 있었다. 그 사진에 비하면 거의 정상인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심하게 야위었을 뿐이었다.

 

 

미샤가 다시 한 팔을 내 목에 감았다. 평소보다 훨씬 다정하게 군다고 생각했을 때 미샤가 낮고 깔깔한 음성으로 귀에 대고 속삭였다.

 

 

“ 스탄카, 좀 잡아줘. 넘어지기 싫어. ”

 

 

마지막 문장에는 두 개의 단어가 생략되어 있었다.

 

 넘어지기 싫어, 저자들 앞에서.

 

6년 가까이 친하게 지낸 사이라면 그 문장과 단어를 잘라먹는 버릇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나는 한 팔로 그의 팔을 꽉 잡고 다른 한 팔로 허리를 감았다. 어깨를 부축해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키가 맞지 않았다. 미샤가 몸을 숙이더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몇 잔 안 되는 술에 취했을 때조차 나나 친구들이 부축해 주려고 하면 화를 내던 애였다. 아주 잠깐 동안 나는 레닌그라드에 있는 미샤의 친구 중 하나를 떠올렸다. 키가 껑충하게 큰 영문학자. 취한 자신을 부축해줘도 미샤가 화를 내지 않는 유일한 친구. 지금 그가 여기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순전히 미샤를 붙잡아 이끌기에는 내가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천히 소파 쪽으로 발을 옮기면서 나는 우울하고 기분 나쁜 사실을 깨달았다. 그를 잡아주는 것, 체중을 지탱하며 소파까지 데려가는 것이 더 이상 힘에 부치지 않았다. 내 어깨와 팔에 그가 자기 몸무게의 대부분을 실은 채 완전히 의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갑작스럽게 소름이 끼쳤다. 그가, 미샤 야스민이 누군가에게 몸을 완전히 내맡기다니, 붙잡아 달라고 부탁하다니. 그건 색깔과 모양이 엉망인 옷보다도, 짧게 잘린 머리칼보다도 더 끔찍하게 잘못된 일이었다.

 

 

 

..

 

 

 

일린과 미샤의 대화에 언급되는 국영 의류공장 카탈로그 얘기는 전에 발췌한 적이 있다. 그 얘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183

 

라라는 일린의 딸이다. 라라가 화자로 나오는 부활절 단편 jewels를 이 about writing 폴더에 전문 게재한 적이 있다. 이 소설은 그 부활절 이야기로부터 4년 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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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2016. 3. 13. 18:32

잠시 : 불과 바람, 물과 돌 about writing2016. 3. 13. 18:32

 

 

 

 

지난주에 소년 시절의 미샤와 그의 오랜 후원자이자 정부인 드미트리 마로조프의 첫 만남에 대한 단편 초반부를 약간 발췌한 적이 있다. 아래는 그 이후 쓴 수용소 배경의 프리퀄 2부에서 발췌한 것이다. 2부의 심리적 화자는 게오르기 벨스키이다. 역시 미샤의 예술적 후원자이며 그를 현재 본편인 가브릴로프로 보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정치적으로는 드미트리 마로조프의 후계자이기도 하다.

 

나는 지난주의 그 단편과 마찬가지로 이 수용소 소설도 지금처럼 많이 우울하고 힘들 때 썼다. 그때의 감정과 괴로움, 고민은 지금과 그 강도가 달랐고 이유도 조금은 달랐지만 어쨌든 그때도 나는 전락과 추락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추락에 대해 생각할 때 나는 사실 함께 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를 내버려두고 올라왔다고 믿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나에게 있어 미샤는 언제나 페테르부르크, 당시의 레닌그라드와 분리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 아이 역시 그 사실을 잘 안다. 물론, 나보다도 더 잘 안다. 나에게 그 아이는 운하와 네바 강의 물결, 습한 안개와 차디찬 대리석의 도시, 그 유령의 도시에서 태어나 불길을 내뿜으며 날아다니고 때로는 빙글빙글 돌며 추락하고 꺼졌다 다시 켜지고 또 사라졌다 나타나는 바람일 것이다. 아마도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5년이 지난 지금도 벨스키는 미샤가 왜 그렇게 주변 사람들에게 강력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지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웠다. 사람들은 그를 격렬하게 원하거나 격렬하게 미워했다. 중간은 없었다. 그게 다양하게 뒤섞인 혈통에서만 나올 수 있는 외모의 아름다움 때문인지, 아주 강인하고 단단하면서도 때로는 사춘기 소년 같고 때로는 양성적으로 느껴지는 그 무용수의 육체 때문인지, 혹은 언제나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 찌르는 듯한 시선과 결코 타인 앞에서 겁먹거나 물러서지 않는 태도 때문인지 똑바로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단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미샤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심신을 산란하게 만들었는데 완벽하게 정상이며 성적 도착과는 거리가 먼 벨스키도 그 자력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애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적이 거의 없고 미샤 야스민의 경우라면 정식 후원 입장조차 밝힌 적이 없는 드미트리 마로조프는 딱 한 번, 벨스키와 대규모 예술행사 추진 관련 회의를 진행하다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 야스민? 걘 불로 만들어진 애야. 가슴을 갈라보면 불과 바람 밖에 없을 걸. 그런데 레닌그라드에 꽉 잡혀 있어. 물과 돌의 도시에. ”

 

 

 

..

 

 

벨스키가 회상하는 드미트리 마로조프의 시점으로 전개된 단편의 지난주 발췌본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4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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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비오는 토요일이고 본편이든 서무든 써볼까 하고 앉았는데 집중이 잘 안 된다. 심신이 많이 피로한 상태라 그런가보다. 예전에는 아무리 피로해도 글을 쓸 에너지는 뽑아낼 수 있었던 것 같은데 확실히 이렇게 나이를 먹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지금은 몇달 간 너무 지쳐 있기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발췌한 글은 몇년 전 다시 글을 쓰기로 마음먹고 미샤를 되살려내 쓴 첫 단편이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것은 거의 10년 만이었다. 지금 쓰는 가브릴로프 본편을 위한 일종의 프리퀄 단편이다. 다시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을 때 구상한 플롯이 가브릴로프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도 역시 어렵지만 그때도 가브릴로프 이야기를 시작하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나는 다시 글을 쓰는 호흡법을 익혀야 했고 두명의 인물만 나오는 단순한 구조의 단편으로 시작했다.

 

이 단편의 배경은 가브릴로프 본편이 시작되기 몇달 전이다, 미샤가 반체제주의자라는 이유로 파리에서 체포되어 모스크바행 비행기에 오르고 그 안에서 10여년 동안 후원자이자 사적 관계를 지속해왔던 당 고위직 간부 드미트리 마로조프와 대화를 나누는 이야기였다. 화자는 미샤가 아니라 후자인 노회한 권력자이자 정치가인 마로조프이다. 이 단편은 이전에 두어번 발췌한 적이 있다. http://tveye.tistory.com/4267, http://tveye.tistory.com/2877

 

아래 발췌한 부분은 단편의 초반부이다. 70년대 초반, 미샤가 발레학교 학생이던 시절 마로조프와 첫 만남을 가졌을 때의 이야기이다. 나의 주인공은 이제 열여섯살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단편은 마로조프의 회상과 모스크바행 비행기 안에서의 현재를 몇차례 오가며 전개된다.

 

지난주에 또다른 프리퀄이었던 수용소 이야기(그건 아래 발췌한 단편보다 반년 후에 쓴 것이었다)에서 나는 미샤의 농담에 대해 발췌한 적이 있다. http://tveye.tistory.com/4468

 

그 글에서 화자인 일린은 미샤에게 '네 농담은 조셴코가 아니라 하름스 식이고 잡혀가기 딱 알맞다'고 하기도 하고 미샤도 아무도 자기 농담에 웃지 않는다고 상심한다. 사실 이 우주에서 미샤는 끝없이 농담을 하고 있다. 그것이 그가 살아가는 방식이고 그가 예술가로서 존재하는 방식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단편의 화자인 마로조프, 노회한 정치가이자 어쩌면 위선적일 정도의 심미안을 가진 이 사람은 미샤가 무대와 삶을 통해 보여주는 농담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게 미샤에게 별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지만.

 

 

하여튼 지난주에 농담 얘길 발췌하고 나니 이 부분이 생각나서 조금 올려본다. 그리고 미샤가 춤을 추는 방식에 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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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그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전히 내 팔은 그 아이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고 언젠가부터 불규칙하게 뛰고 있던 가슴이 그의 등에 닿아 있었다. 맞닿아 있는 피부와 스쳐 지나가는 뜨거운 숨결 사이에 그 간극이 있었다. 그건 금방이라도 좁혀질 듯한 수십년 세월만큼의 거리였고 공동아파트로부터 일류 호텔 스위트룸, 정신교화 수용소로부터 중앙위원회 회의실까지의 거리였다. 무엇보다도, 무수한 스텝으로 반질반질해진 무대로부터 푸른 벨벳 방석이 깔린 극장 좌석 사이의 거리였다.

 

 

결국 미샤는 가운을 입어보지 않았다. 크리스탈 잔에 담긴 와인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하지만 미지근해진 보드카는 한 잔 마셨고 굳어져버린 블린에 캐비아를 얹어 먹어보기도 했다. 몇 입 먹더니 얼굴을 찌푸리며 보드카를 한 잔 더 따랐지만 절반밖에 마시지 못했다. 내게는 잔 한번 권하지 않았다. 나는 유리컵에 탄산수를 가득 부어 마신 후 그에게 요즘 연습하고 있는 춤을 보여 달라고 했다. 물론 춤을 춰주리라고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 아이가 어떤 식으로 대꾸할지 궁금했다. 가가린에 대한 첫마디를 들었을 때부터 나는 반쯤 발기해 있었다. 체스 말을 내려놓듯 견고하고 정확하게 발음된 몇 개의 숫자, 1961년 4월에도. 그리고 마로즈. 서리예요,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

 

 

미샤는 스트레칭을 몇 번 하더니 춤을 보여주었다. 처음 몇 동작을 보고 금방 알 수 있었다, 빈사의 백조였다. 남녀 구분이 엄격한 레닌그라드 발레학교나 키로프 무대에서는 결코 볼 수 없을 춤이었다. 영광으로 생각해야 할지 농담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헷갈렸다. 그 아이는 빈사의 백조를 사냥총에 맞아 퍼덕이며 죽어가는 커다란 새처럼 췄다. 음악도 없이 맨발로 췄는데 파블로바나 울라노바의 처연한 아름다움은 눈을 씻어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내 앞에 있는 것은 핏방울로 얼룩진 깃털을 흩날리며 부서진 뼈가 튀어나온 날갯죽지를 꿈틀대는 날짐승이었다. 아마도 이건 농담 쪽에 더 가까운 모양이었다. 그것도 나를 향한 농담.

 

 

무대 위의 백조에서 환상과 우아함을 제거한 후 남는 것이 뭘까요,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 진짜 새는 그런 식으로 죽지 않을 거예요. 피를 튀기며 몸부림치다 꼬르륵거리며 숨이 넘어갈 테죠. 당신 앞에 죽은 백조가 한 마리 있어요, 그저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죠. 상관없지 않아요? 당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란 사람들을 고깃덩어리로 만드는 것 뿐인데.

 

 

물론 그건 내 착각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지막 죽음의 장면에서 그 아이는 바닥에 내팽개쳤던 실크 가운에 발목이 휘감겨 우스꽝스럽게 넘어진 후 화를 내며 진지하게 욕을 했기 때문이다. 에메랄드 녹색 줄무늬가 들어간 얇고 사치스런 가운 위에 사지를 뒤튼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서 그 나이 또래 사내아이들 외에는 무슨 뜻일지도 모를 욕설을 줄줄이 내뱉고 있었다.

 

 

“ 무대 위에는 이런 장애물이 없을 테니까 괜찮아. ”

 

 

순전히 위로하기 위해 그런 말을 하면서 나는 그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 어차피 넘어지게 돼 있었어요. 마지막 동작이 완성되지 않았거든요. ”

 

“ 포킨의 백조는 그런 식으로 죽지 않았던 것 같은데. ”

 

“ 백조가 아니니까요. 그냥 새예요. ”

 

 

미샤는 꼬여 있는 발목을 펴고 있었다. 나는 수건으로 얼음덩어리들을 감싸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순식간에 부어오르는 모양을 보니 꽤 아플 것 같았지만 넘어졌을 때와는 달리 미샤는 얼굴을 찌푸리거나 투덜대지는 않았다. 얼음 수건으로 발목을 문지르면서 생 상의 곡조를 휘파람으로 불고 있을 뿐이었다. 음률과 박자가 완벽했다. 상기된 뺨 위로 까만 눈이 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를 끌어당겨 안았다. 눈 위에 입을 맞추었다. 제멋대로 파닥이는 속눈썹에, 단거리 주자처럼 빠르게 맥이 뛰는 관자놀이에, 반쯤 젖혀진 하얀 목 위로 솟아오른 파란 혈관 위에도.

 

 

 

한 시간 후 나는 예산심의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호텔을 떠났다. 미샤는 태워다주겠다는 제의를 거절하고 걸어서 발레학교로 돌아갔다. 신호 때문에 차가 잠깐 멈췄을 때 나는 창문 너머로 미샤가 운하를 건너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두워진 하늘로부터 회색 가루눈이 가느다란 빗줄기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그 아이는 모자도 쓰지 않고 코트도 없이 얇은 재킷 차림이었지만 어깨를 펴고 느긋하게 걷고 있었다. 검은 머리칼과 붉은색 모직 스카프가 운하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아 가볍게 나부끼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가 얼어붙은 수면과 안개 사이로도 날아오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진의 운하는 미샤가 저때 걸어서 건넜던 그 운하는 아니다. 같은 운하이긴 하지만 훨씬 뒤로 더 걸어내려가야 한다. 겨울에 찍은 그쪽 사진이 없어서 그냥 이 사진 올려본다. 이때도 가루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

 

 

미샤가 추는 '백조가 아니라 그냥 새'에 대한 춤은 원래 미하일 포킨이 생 상의 곡에 맞춰 안무했던 '빈사의 백조'를 변형한 것이다. 예전에 이 글 쓸때 울리야나 로파트키나와 블라지미르 말라호프가 춘 빈사의 백조 클립을 올린 적이 있다. 그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2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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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편의 후반부에서 마로조프는 저 춤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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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나오는 빈사의 백조는 아니지만, 미샤가 유명한 백조의 호수 중 백조 오데트의 솔로를 자기 식으로 추는 장면을 발췌한 적이 있다. 그건 가브릴로프 본편에 삽입될 코즐로프와의 단편에서 발췌한 장면이었다.

그건 여기 : http://tveye.tistory.com/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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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아래 발췌한 글은 2013년 초에 프라하에 머물면서 쓰기 시작해 서울에 돌아와 완성한 소설의 일부이다. 가브릴로프 본편을 시작하기 위한 프리퀄로 수용소와 클리닉에서 미샤가 겪은 일을 다뤘다. 그 글을 어떻게 쓰기 시작했는지, 왜 쓰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전에도 about writing 폴더에 몇번 올린 적이 있다.

 

그 글은 총 3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발췌한 부분은 마지막 3부로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안무가인 스타니슬라프 일린의 시점으로 기술된다. (이 사람의 시점으로 기술된 이 3부의 다른 부분도 두어번 전에 발췌한 적이 있다) 이 사람 스타니슬라프 일린의 딸 라라가 화자로 나오는 부활절 기념 단편 Jewels를 작년 초에 전문 모두 올린 적이 있는데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링크로 가면 읽을 수 있다.

1장 : http://tveye.tistory.com/3390
2장 : http://tveye.tistory.com/3391
3장 : http://tveye.tistory.com/3393 
4장 : http://tveye.tistory.com/3394
5장 : http://tveye.tistory.com/3395

 

 

글을 쓰고 인물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함께 걷고 뒤엉키는 모든 과정이기도 하다. 모든 인물들은 허구의 산물이다. 하지만 그 중 많은 경우 나 자신의 무언가가 반영된다. 그대로 반영되는 경우는 물론 거의 없다. 보통은 왜곡시키거나 재구성한다. 아마도 주인공의 경우는 더 그럴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비록 나의 주인공 미샤가 나 자신과는 많은 부분에서 다른 인물이기는 하지만 내적으로는 여전히 은밀하고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연결 고리는 물론 명료하지 않고 복잡하고 얼룩덜룩하게 물들고 변형되어 있다. 그래도 그와 나는 집단주의에 대한 공포와 혐오, 일종의 원칙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공유한다. 내가 그의 자리에서 그의 재능을 지닌 채 살아야 했다면 나는 아마 버텨내지 못했겠지만.

 

중간에 미샤와 일린이 언급하는 '조셴코'와 '하름스'는 둘다 소련 시절 풍자 작가이다. 미하일 조셴코(1895~ 1958)는 소련 사회 서민들의 일상을 뛰어난 풍자와 유머로 묘사한 단편들을 주로 썼으며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으나 1946년 공산당 정책의 희생양으로 반체제 작가로 낙인찍혀 안나 아흐마토바와 함께 작가동맹에서 제명된 후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 이 사람 단편들은 정말 재미있는데 유머러스한 글과는 달리 실제로는 우울증에 시달린 염세주의자이기도 했다. 이 사람에 대한 글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2016

 

다닐 하름스(1905~ 1942)는 소련 아방가르드 작가로 부조리하고 그로테스크한 풍자 문학과 희곡을 썼다. 당의 기치에 어긋나는 작품을 쓴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출판을 금지 당했다. 1941년 패배주의적 선전을 유포했다는 죄목으로 레닌그라드에서 체포되었으며 이후 이송된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1942년 아사했다. 이 사람에 대해서도 전에 글을 쓴 적이 있다. 그건 여기 : http://tveye.tistory.com/54

하름스의 19세기 작가들에 대한 농담 글을 내가 번역한 것들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55

 

뒤에 언급되는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는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서도 등장했다(그 무서운 크레믈린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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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미샤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라라를 다루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사람들은 그를 아주 진지한 성격에 나이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보통은 맞는 말이었다, 특히 춤을 대하는 태도라면 미샤는 타협을 몰랐다. 하지만 친해지고 나자 다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에게는 아주 어린애 같은 면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사람들은 그걸 눈치 채지 못했다. 오랜 지인들도 마찬가지여서 예외는 파트너였던 지나이다 정도였다. 그녀는 백야 리허설 초기에 몽상가 역의 해석을 두고 내가 미샤와 열띤 논쟁을 벌였을 때 가만히 나를 불러 귀띔했다.

 

 그냥 여섯 살짜리 데리고 일한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가만히 놔두면 나중엔 알아들어요.

 

그 사실을 깨달은 후부터 나는 리허설 도중에 의견이 부딪칠 때마다 가능하면 그를 살살 달래는 쪽을 택했다. 미샤는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편이었지만 춤에 대해서는 자기 주장을 굽히는 것을 죽도록 싫어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 딸들을 다루는 방법을 썼다. 일단 그의 의견을 대폭 수용한 후 상냥하게 구슬리면서 논리적으로 설득하면 절반 이상은 타협에 동의했다.

 

일 년 쯤 지나자 미샤는 내 전략을 알아차렸지만 그렇다고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 방법의 효과가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미샤는 가끔 ‘아, 또 그 눈빛을 준비하고 있군. 어르고 달래서 다 들어주는 척 하면서 결국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어디 해봐, 갈수록 기술이 더 는다니까’ 라며 대놓고 말하기까지 했지만 결국은 잘 따라왔다. 그리고 농담도 종종 했는데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데 있었다.

 

 

“ 그냥 원래 성격대로 살아, 이상한 농담 하지 말고. ”

 

“ 다들 착각하는데 난 그렇게 심각한 인간이 아냐. ”

 

“ 그것도 농담이지? 재미없는데. ”

 

“ 그런가. 어떻게 해야 하지. ”

 

“ 노력하지 마. 그럴수록 더 심각해지니까. 네 농담은 텍스트용이야, 문자로 변환해서 읽어봐야 무슨 뜻인지 안다고. 그건 스탈린 시절 작가들 식이야. 높은 분들 속을 뒤집어놓기 딱 알맞아. 끌려가거나 금지 조치 당하기 딱 좋아. ”

 

“ 그 시절이면 조셴코도 금지 당했는걸. 그 사람 농담은 엄청나게 재미있었는데. 다들 웃었는데. 아무도 내 얘기엔 안 웃어. ”

 

“ 아니, 넌 조셴코가 아니고 하름스에 가까워. 그러니까 그냥 포기해. 특히 높은 사람들 앞에서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 ”

 

“ 그 인간들 앞에서 춤추는 것보다는 나아. ”

 

 

데뷔 몇 년도 안 되어 이미 닳도록 국가 행사나 당 고위 간부들의 파티에 불려가는 데 이골이 난 상태였지만 미샤는 단 한 번도 그런 일을 내켜한 적이 없었다. 모스크바에서 함께 지냈던 1년 동안 내가 아는 것만으로도 거의 열 번 정도는 그런 행사에 불참했는데 핑계를 대거나 말 그대로 도망치는 등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다. 예외는 게르만 스비제르스키 정도였다. 그에게서 행사나 파티 호출이 오면 살인적인 스케줄이 잡혀 있을 때도 순순히 가곤 했다. 서기장을 제외하고는 가장 강력한 인물 중 하나인데다 미샤는 이미 오래 전 주니어 콩쿠르 당시부터 그의 아낌없는 후원을 받고 있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스비제르스키는 일 년에 서너 번 정도는 나도 불렀는데 정치적 악명과는 별개로 그자의 심미안만은 훌륭했고 특히 볼쇼이의 발레와 내 작품들에 대해서는 꾸준히 지지 입장을 표명하고 있었으므로 별다른 불편함은 느끼지 않았다. 그런 자리에 불려 가면 밝고 정중한 태도로 적당히 맞장구쳐 주고 작품이나 후원과 직접적 연관이 없는 내용이라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된다. 물론 그렇게 기분 좋은 건 아니지만 나는 언제나 이 모든 것이 일의 연장이라고 여겼다.

 

그 확고한 믿음, 엄밀히 말하자면 자기 최면은 꽤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나는 구제불능의 반항아이자 모든 종류의 당 행사와 노멘클라투라 파티 혐오자인 미샤에게도 이 방법을 전수해 주려고 했다. 그가 추락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반대파들에게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권력자들로부터 미움을 살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무엇보다도 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만들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샤는 고개를 저었다.

 

 

“ 그건 일이 아냐, 그냥 그놈들 앞에서 아양 떠는 거지. 장식품, 애완견, 샴페인, 캐비아. 그런 거랑 똑같아. ”

 

“ 그냥 일인 척 하는 거야. 무대에 올라갈 때처럼. ”

 

“ 해봤어. 잘 안돼. ”

 

“ 노력하지 않았잖아. 안되진 않을 거야, 키로프에서도 그렇고 여기서도 너보다 연기력이 좋은 무용수는 없잖아. ”

 

“ 연기 엄청나게 하고 있어. 최대로. 안 그랬으면 다 때려 부수고 소리치고 사방에 토했을 걸. ”

 

“ 그래도 정말 제대로 된 관객들도 있잖아. 벨스키도 그렇고. 스비제르스키도 그 정도면 당 의원들 치곤 심미안이 상당히 좋으니까. 어쨌든 그 사람은 네가 데뷔하기 전부터 한눈에 재능을 알아봐 줬잖아. ”

 

“ 다시는 제 앞에서 그 이름 운운하지 마시죠, 스타니슬라프 리보비치. ”

 

 

우리는 열네 살 정도 차이가 났고 76년 초에 키로프에서 만났을 때는 안무가와 무용수라는 서로 다른 위치에 속해 있었지만 미샤는 내게 경어를 쓴 적이 없었다.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말을 텄고 서로를 애칭으로 불렀는데 둘 다 그게 편했다. 다가가기 힘들고 까다로운데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건방진 성격이라는 평판과는 달리 미샤는 처음부터 나와 잘 맞았다. 그는 건방지고 예의를 모르는 되바라진 꼬마가 아니라 내리누르는 권위와 무조건적인 위계질서를 견디지 못하는 애일 뿐이었다. 실제로 그 애는 키로프 상부나 세레브랴코프 같은 남자 선배들을 제외한 동료나 후배들과는 관계가 꽤 좋았다. 그리고 나 역시 후배들이나 무용수들을 엄격하게 휘어잡고 군기를 잡는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리는 아주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미샤가 나를 향해 경어도 모자라 이름과 부칭까지 깍듯하게 갖춰 부른다는 건 정말 화가 났다는 신호였다. 그는 스비제르스키를 매우 싫어했고 가능하면 그 이름을 언급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긴 그는 그 온건하고 교양 넘치는 인물, 정치인들의 기준에서 본다면 상당히 신사적이기까지 한 벨스키마저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당 관계자들이라면 거의 모두 싫어했다. 하지만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에 대한 그의 혐오는 훨씬 깊고 강렬한 것이어서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아마 오랫동안 알아왔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았다. 그 애가 스비제르스키를 그토록 혐오하는 진짜 이유를 알게 된 건 얼마 후였지만 우리는 단 한 번도 그 문제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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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 글을 발췌하게 된 것은 며칠 전 반말과 경어에 대해(http://tveye.tistory.com/4460), 그리고 자신의 상하관계 설정(http://tveye.tistory.com/4441)에 대해 끄적거렸던 메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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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 연휴 즈음부터 다시 본편을 쓰기 시작했다. 근 1년 만이다. 1부까지만 쓰다가 글도 잘 안 풀리고 직장 스트레스도 심해서 장난치는 외전으로 서무의 슬픔 시리즈를 쓰기 시작해서 배보다 배꼽이 더 커져서 일년동안 그것만 쓰고 놀았다. 서무 시리즈로 잘 놀긴 했고 앞으로도 가끔 놀겠지만 하여튼 본편을 매우 어렵게 다시 시작했다. 물론 잘 안된다. 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집중이 어려운 상황이라서 더 그럴 것이다.

 

오늘도 겨우 한 페이지 정도 썼다. 본격적인 사건들이 일어나고 인물들 간의 친밀도나 관계가 강력해질수록 글은 가속이 붙고 스스로의 생명력을 얻게 되어 내달리게 되겠지만 아직은 그 단계가 아니다.

 

아래 발췌한 두세 페이지는 이미 쓴지 일년도 넘었다. 1부 2장에 속하니까 초입부이다. 가브릴로프로 유배된 미샤와 그의 감시요원인 다닐 베르닌이 처음 만나 KGB 사무실에 가서 서류등록을 한 후 신시가지 시내로 나오는 부분이다. 사실 베르닌보다는 미샤 쪽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긴 하지만. 그거야 주인공이니까 :)

 

서무 시리즈는 이 본편에서 나왔지만 그 시리즈가 훨씬 많아지고 방대해진 관계로 어쩐지 전세가 역전된 것 같다만... 원래는 베르닌은 이런 스타일의 인물이다. 서무의 고지식한 책상물림 단추청년과는 좀 다른데 그만큼 귀엽지는 않다. 물론 미샤도 왕재수와는 다르다. 서무 시리즈에서는 둘의 첫 만남을 완전히 다르게 묘사했다. 그 에피소드는 0편인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http://tveye.tistory.com/3429)였는데 물론 그 에피소드 0은 아래 발췌된 문단이 들어 있는 제2장을 다 쓴 후에 나중에 패러디해 쓴 거라서 쓰는 내내 즐겁긴 했다.

 

지금 쓰고 있는 부분도 베르닌과 스페호프의 사무실 장면이기 때문에 그간 서무 단추로 오염된(ㅜㅜ) 베르닌의 본모습을 다시 찾으려고 앞부분을 들춰보고 있는 중이다. 아래는 그 앞부분 중 약간 발췌한 부분. 가브릴로프에 대한 간단한 설명도 나온다. 물론 내가 설정한 가상의 소도시이다. 서무 시리즈에서도 공간적 배경은 거의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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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샤는 정문 밖으로 나간 후였다. 베르닌은 정문 경비요원에게 자신의 허가도 없이 감시대상을 내보낸 이유를 추궁할까 했지만 그만 두었다. 자기가 그 자리에 있었다 해도 그를 멈춰 세웠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무장 상태에 아무런 폭력성도 느껴지지 않는 젊은 남자, 한없이 무해하고 어려 보이는데다 심지어 한쪽 다리를 끌면서 천천히 걷는 야윈 청년. 눈부신 햇살 속에서 화관처럼 흐트러진 검은 머리와 하얗고 매끄러운 얼굴, 호리호리한 몸매의 미샤 야스민은 차라리 소년에 가깝게 보였다. 그는 총을 들고 서 있는 경비 요원들의 곁을 자연스럽게 지나 밖으로 나갔다. 아무런 공포나 놀라움, 호기심조차 없이. 경비 요원들은 그가 지나쳐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나비나 새가 스쳐간 것처럼.

 

 

베르닌은 볼쇼이 대로와 그루셰바야 거리 교차로에서 그를 발견했다. KGB의 붉은 담장이 끝나는 곳에서. 미샤는 커다란 배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있었다. 길게 뻗은 두 다리는 그늘에 가려져 있었지만 머리와 어깨로는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꼭 따스한 볕을 쬐고 있는 고양이처럼 보였다. 불과 5분 전까지 거친 몸수색을 당하고 KGB 국장으로부터 상당한 수위의 협박과 모욕을 받았던 남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재킷은 벤치 위에 아무렇게나 걸쳐져 있었다. 어쩌면 몇 달 만에 처음으로 햇볕을 받으며 바람을 쐬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잠시 베르닌은 스타브로프의 병원까지 걸어서 갈까 하고 망설였다. 어쨌든 그루셰바야 거리를 따라가면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2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고 미샤에게 배정된 아파트도 그 근처였으니까. 아마 그 어둡고 붉은 얼룩이 다시 눈에 띄지 않았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얼룩은 이제 지퍼 장식 아래 포켓까지 타원형으로 번져 있었다.

 

 

미샤는 별 말 없이 차에 탔다. 벗었던 재킷을 다시 걸쳤고 가방에서 스카프를 꺼내 주름을 편 후 목에 둘렀다. 좁고 어두운 차 안으로 들어오자 그는 다시 야위고 창백해 보였다. 검은 눈이 우물처럼 깊게 패여 있었다. 목덜미 전체에 잉크 얼룩처럼 여기저기 퍼져 있는 잿빛의 흐릿한 멍 자국들이 스카프 사이로 여전히 눈에 띄었다.

 

 

“ 여기는 그루셰바야 거리입니다. 예전에는 배나무 숲이었는데 길을 내면서 많이 밀어버리고 가로수로만 남겨뒀죠. 하긴 이쪽 신시가지가 거의 그렇습니다만. 당신의 페테르부르크가 돌로 늪을 메워서 만든 도시라면 가브릴로프는 숲을 조금씩 밀어내고 세운 도시죠. 불행하게도 여기는 황제의 손이 닿은 곳이 아니라서 숲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답니다. 당장 이 그루셰바야 거리 끝에도 조그만 숲이 있죠. 그래도 이곳은 도시에서 가장 번화가에 속합니다.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당신 도시의 네프스키가 있다면 여긴 볼쇼이 대로와 그루셰바야 거리죠. 뭐 당신들 예술가들이야 극장에 박물관에 공방들이 우글거리는 구시가지가 더 마음에 들겠지만 그래도 살기는 이쪽이 훨씬 편하죠. 아까는 시간에 쫓겨 미처 보여주지 못했지만 우리 사무실 옆에는 시 의회와 공공기관들이 밀집해 있습니다. 저쪽으로는 백화점과 상점가들이 있죠. 아, 지금 보이는 분홍색 건물은 시립 유치원입니다. 저기는 오블라츠느이 공원이고요. 시적인 이름이지만 구름과는 별 관계가 없답니다. 혁명 당시 이 동네 적위군 사령관 이름을 딴 거죠. 조금만 더 가면 당신 집이 보일 겁니다. 좋은 아파트죠, 스탈린 시절 세워진 겁니다. 이 동네 노멘클라투라들도 탐내는 곳이죠. 보안도 잘 되는 곳이고. 당국에서 신경을 쓰긴 한 모양이더군요. 어쨌든 팬들이 집까지 숨어들면 힘들지 않겠습니까? 레닌그라드에서는 그런 일이 종종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하여튼 아파트가 스타브로프의 병원 근처니까 편할 겁니다. 아니, 그렇다고 당신이 환자라는 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병원은 가까이 있는 게 좋지요. 그는 괴팍한 노인네지만 시에서는 최고의 의사죠. 아참, 잊을 뻔 했군. 앞으로 최소 두 달 동안은 일주일에 한 번씩 검진을 받으셔야 합니다. 루뱐카 본부에 서류를 제출하게 되어 있거든요. 극장 일로 아무리 바빠도 그건 빼먹으면 안 됩니다. 무려 벨스키 의원이 직접 지시한 사항이거든요. 아시다시피 이 동네에서 그 분의 말씀은 법이나 다름없죠. 하긴 그 분도 어릴 땐 우리 극장에서 뛰어놀며 컸다고 하더군요. 먀흐킨 극장장과 동창이라던가. ”

 

“ 당신은... 이름이 뭐라고 했었죠? ”

 

 

미샤가 잠시 기억을 더듬는 표정을 지었다.

 

 

“ 아, 내 이름이요. 다닐 베르닌입니다. 부칭까지는 필요 없겠죠. ”

 

“ 다닐, 당신은 원래 그렇게 말이 많은 건가요. 아니면 정보 제공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건가요? ”

 

“ 흠, 어느 쪽이든 편할 대로 생각하시죠. ”

 

“ 후자라면 이제 충분한 것 같군요. ”

 

 

베르닌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 하긴 피곤하긴 하겠군요, 그렇게 기차에 시달리고 국장에게도 볶였으니. 조금만 견디시죠. 의사 선생에게 검진을 받고 나면 오늘 일정은 끝이니까. 집으로 안내해 드릴 겁니다. 그리고 정보 제공 업무라면, 언제든 궁금한 게 생기면 물어보셔도 좋습니다. 꽤 유용한 정보들을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전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요. ”

 

 

미샤는 아주 잠깐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베르닌은 그의 관통하는 듯한 검은 눈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일주일 이상 혼수상태로 사경을 헤맸고 자기 발로 다시 걷게 된지도 얼마 되지 않은 사람에게서 쉽게 볼 수 있는 눈초리는 아니었다.

 

 

...

 

사진은 지난 여름에 페테르부르크를 산책하다 찍은 것이다. 가브릴로프는 물론 아니지만(실재하지 않으니) 아마 미샤 역시 저렇게 찬란하고 따스하게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앉아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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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는 서무 34편 '딸기 아가씨들과 자선 바자회'(http://tveye.tistory.com/4140)를 올렸지만 35편은 반쯤 쓰다가 너무너무 바쁘고 정신도 없고 심적으로 매우 심란해서 이번주는 거의 글을 쓰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주에는 2주 전에 코즐로프와 미샤의 얘기를 발췌했던 것처럼(http://tveye.tistory.com/4118) 서무 대신 본편 일부를 발췌해 본다.

 

전에 몇번 발췌했던 트로이가 심리적 화자로 나오는 장편의 중반부이다. 아주 작은 에피소드라 2부 첫장의 일부로 삽입되었다.

 

1975년 여름, 미샤는 키로프 발레단에서 두번의 시즌을 보내고 이제 세번째 시즌을 맞이하기 직전이다. 그의 친구인  트로이는 레닌그라드 국립대에서 박사후보 논문을 준비하며 강사 노릇을 하는 중이다. 그리고 미샤와 깊은 관계로 접어든지 1년쯤 되어 여러 가지로 모호함과 고통을 겪고 있는 상태이다.

 

여름에 트로이는 아버지가 교수로 일하고 있는 라트비아의 리가로 간다. 그리고 미샤도 그를 따라간다. 이것은 리가에서 있었던 아주 짧은 에피소드이다. 하지만 이 소설을 쓸때 내게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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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여름에 미샤는 트로이와 함께 리가와 탈린에 갔다. 트로이의 아버지가 리가 현지 대학에서 만난 여자와 재혼했기 때문이다. 보통 미샤는 여름에도 휴가를 제대로 쓰지 못할 만큼 바빴지만 그 해에는 베를린 무단이탈 건 때문에 여름 해외 투어에서 일찌감치 제외되었고 트로이가 알지 못하는 이유로 다닐로프에게서 또 다른 징계를 받아 백야 축제와 8월에 잡혀 있던 한두 차례의 외부 공연에서도 하차한 상태였다. 그래도 꾸준히 극장 연습실에 나가고는 있었지만 8월에 트로이가 리가에 간다고 하자 미샤는 가릭의 밴드가 에스토니아 투어 중이라며 자기도 같이 가겠다고 나섰다. 잠깐 트로이는 크세니야를 떠올렸다.

 

 

“ 그럼 탈린에서 만날까? 어차피 리가엔 이틀 밖에 안 있을 거야. ”

 

“ 리가에도 갈래. ”

 

 

미샤는 별다른 이유를 대지 않았다. 리가까지는 기차를 타고 갔다. 그리 멀지도 않았고 트로이가 요금도 비싸고 멀미만 나는 비행기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차 안에서 미샤는 몰래 입수한 브로드스키의 시집을 읽느라 여념이 없었다. 트로이는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킬까봐 그를 창가로 밀어넣은 후 몸을 옆으로 틀어 책을 가렸다. 미샤는 어차피 표지도 없는데다 흐릿하게 인쇄된 내용은 주변 사람들에게 보이지도 않을 거라며 투덜댔지만 그는 아직도 그 시집에 서문을 써줬다는 이유로 작년에 체포된 작가를 잊을 수가 없었다. 다 읽은 후 미샤는 만족해하며 책을 트로이에게 건네주었지만 그는 리가의 숙소에 도착해서야 첫 장을 펼 수 있었다.

 

 

트로이는 아버지의 재혼 상대인 라리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생각보다 젊었다. 통통한 체구의 평범한 여인이었는데 화장이 지나치게 진한 편이었다. 그리고 너무 큰 소리로 웃었다. 아버지가 그녀에게서 어떤 매력을 발견했는지 궁금했다. 하긴 그렇게 따지면 라리사가 한참 연상인데다 자기처럼 구부러진 거미를 닮은 아버지와 사랑에 빠진 이유가 더 궁금한 일이었다. 라리사는 트로이가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자 리가의 예쁜 아가씨들을 소개시켜주겠다고 수선을 피웠다. 그동안 아버지는 흐뭇한 미소를 띠며 새 아내와 아들을 번갈아가며 바라보고 있었다.

 

 

늦은 오후였고 그들은 호텔에 딸려 있는 작은 카페에서 만나 차를 마시고 있었다. 미샤는 트로이가 일어나기도 전에 해변으로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목을 축이러 카페에 들렀다. 미샤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아버지 부부에게 소개를 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트로이가 고민할 겨를도 없이 라리사가 호들갑을 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어머, 저 사람 나 알아! 볼쇼이 댄서야! 작년에 여기 와서 백조의 호수 췄어! 나 사인도 받았었어! ”

 

 

아마 라리사에게는 볼쇼이나 키로프나 똑같을 거라고 생각하며 트로이는 미샤를 불러 그들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볼쇼이에서 온 유명한 무용수가 남편 아들의 친구라는 사실에 더욱 흥분한 라리사는 그 자리에서 그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트로이는 가능하면 카페에서의 만남으로 끝내고 싶었지만 이제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미샤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초대를 받아들였다.

 

 

 

아버지의 집으로 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으면서 트로이가 미안함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 너 꼭 가지 않아도 돼. 나도 라리사는 오늘 처음 봤어. ”

 

“ 왜, 난 가고 싶어. ”

 

“ 라리사가 '볼쇼이' 무용수한테 사인받았다고 좋아하는 팬이라서? ”

 

“ 라리사는 네 생각처럼 나쁘지 않아. ”

 

 

자꾸 치솟는 머리를 어떻게든 가라앉혀 보려고 물을 묻혀 빗질을 하면서 미샤가 말을 이었다.

 

 

“ 넌 아버지를 닮았더라. ”

 

“ 아... 그래. 비극이지, 엄마를 닮았으면 좀 나았을 텐데. ”

 

“ 그럼 교회 첨탑이 될 수 없었을 거 아냐. 그랬으면 난 너하고 그때 버스 타러 안 나갔을 거야. ”

 

 

트로이는 단추를 채우다 멈춘 채 미샤를 빤히 응시했다. 미샤는 언제나 그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편이었지만 그건 고양이의 상냥함에 가까웠다. 그런 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애써 농담조로 물었다.

 

 

“ 왜, 눈보라를 막아주는데 도움이 안됐을까봐? ”

 

 

미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침내 포기하고 빗을 집어던지더니 그의 곁으로 와서 잘못 꿴 단추를 풀고 다시 채워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에 천천히 키스를 하고는 신발을 신으러 가버렸다.

 

 

 

*   *   *

 

 

 

아버지와 라리사의 새 아파트는 좁은 편이었지만 레닌그라드의 집보다 훨씬 아늑하고 화사했다. 라리사는 구슬 공예와 수예 공방에 다녔기 때문에 집 안 전체에 쿠션과 레이스와 구슬 장식품들이 가득했다. 트로이는 아버지가 수학자 특유의 정연하고 고리타분한 분위기와 자신만의 질서로 배열된 물건들을 그대로 보유한 채 라리사의 한없이 여성적이고 지나칠 정도로 달콤하며 부드러운 그 공간 속으로 불쑥 들어와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의 아버지는 조그마한 분홍색 방석이 놓여 있는 의자와 레이스 보가 깔려 있는 식탁 사이를 뻣뻣하고 거대한 거미처럼 마구 부딪치며 다녔지만 기묘하게도 그 모습이 불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아버지와 키가 비슷한 트로이는 가구들이 늘어서 있는 좁은 공간에 그만큼 익숙해져 있지 않아서 하마터면 의자 다리에 걸려서 넘어질 뻔 했지만 언제나처럼 뒤에 있던 미샤가 잡아주었다. 미샤는 소파와 쿠션과 티 테이블과 식탁과 의자, 인형과 찻잔들이 줄지어 있는 진열장들 사이의 좁은 통로를 편하게 오갔고 그 어느 귀퉁이에도 몸이 걸리지 않았다.

 

 

준비할 시간이 별로 없었을 텐데도 라리사는 푸짐하고 근사한 저녁 식사를 차려냈다. 음식 맛은 매우 뛰어났고 트로이는 아버지가 이것 때문에 그녀와 결혼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그의 어머니는 요리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라리사는 연신 그들의 접시에 음식을 덜어주면서 둘 다 대도시 분위기가 난다는 둥 같은 공방에 있는 참한 아가씨들을 소개시켜주고 싶다는 둥 계속해서 수다를 떨었는데 그 아가씨들의 이름만 해도 사샤, 아니타, 류하, 발랴, 다슐랴 등 끝없이 이어졌다. 특히 그녀는 ‘볼쇼이 댄서’인 미샤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서 비쩍 마른 근육질의 발레리나들하고만 시간을 보내는 건 슬픈 일이며 남자란 풍만한 몸매의 가정적이고 착한 여자를 만나야 한다고 어머니처럼 충고를 늘어놓았다.

 

 

미샤는 불편한 기색도 없이 라리사의 수다를 잘 받아 넘겼고 그녀가 덜어주는 커틀릿이나 생선 완자, 크림을 넣은 오믈렛, 너무 달콤해서 혀가 녹아버릴 것 같은 산딸기 파이 따위도 거부하지 않고 먹었다. 트로이는 그가 너무 기름지거나 단 음식은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좀 놀랐다. 예의 때문에 입을 다문 트로이 대신 아버지가 라리사에게 무용수의 몸매 관리를 위해 당신의 맛있는 음식들을 너무 권하지 말라고 농담을 했다. 그러자 그녀는 눈을 둥그렇게 뜨며 하루쯤은 그런 것들을 물리도록 먹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무대에서 봤을 때는 몰랐는데 생각보다 말라서 하루아침에 키만 커버린 학생처럼 보인다, 발레리나들을 번쩍번쩍 들어올리려면 스메타나에 적신 커틀릿과 펠메니와 절인 돼지비계를 많이 먹어야 한다 등등의 말을 열성적으로 쏟아냈다. 트로이는 미샤가 겉보기처럼 깡마른 애가 아니며 아니치코프 교각의 청동조각상에서나 볼 수 있는 단단하고 강한 허벅지와 활시위처럼 당겨진 어깨를 가졌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갑작스럽게 얼굴이 달아올랐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미샤가 그렇게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을 본 적이 별로 없었다. 모임에서도 미샤는 묻는 말에 대답하는 것 외에는 별로 말이 없었다. 트로이와 책을 읽고 영어 강습을 받을 때는 예외였지만 그건 뚜렷한 목적이 있는 경우였다. 그는 미샤가 원하기만 한다면 아주 사교적으로 굴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라리사와 트로이의 아버지는 그 싹싹한 청년에게 반했고 트로이는 자기들 둘 중 누가 진짜 아들인지 모르겠다고 농담을 해야 했다.

 

 

 

숙소는 버스로 두세 정거장 거리에 있었지만 그들은 걸어서 돌아왔다. 미샤는 라리사의 음식들을 거절하지 않은 것에 대한 대가라도 치르듯 계속해서 뛰었다. 숙소에 거의 다 와 갈 무렵 트로이는 그의 뒤를 쫓아가는 데 너무 지쳐서 길가의 벤치에 주저앉았다.

 

 

“ 라리사 말이 맞아, 하루쯤은 그런 거 물리도록 먹어도 괜찮을 거야. ”

 

“ 알아, 그것 때문이 아냐. 저녁은 맛있었어. ”

 

“ 그럼 왜 육상선수처럼 뛰는 거야, 직업을 바꾸려고? ”

 

“ 아, 난 기분이 좋으면 뛰어. ”

 

“ 여태껏 그런 거 본 적이 별로 없는데. ”

 

“ 보통은 춤을 추니까 그렇지. 근데 뛰고 싶을 때가 있어. ”

 

왜 그렇게 기분이 좋은데? 너무 오랜만에 제대로 된 저녁을 먹어서? 아니면 라리사 때문에? ”

 

“ 음, 라리사 때문에. 그리고 네 아버지 때문에. ”

 

“ 그래? ”

 

“ 응, 난 사랑에 빠진 부부와 같이 있는 게 좋아. 특히 나이 많은 사람들. ”

 

 

미샤는 트로이가 숨을 돌릴 때까지 기다려주었지만 친구가 벤치에서 일어나기가 무섭게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날 밤 불을 껐을 때 미샤가 어둠 속에서 말했다.

 

 

“ 난 네 아버지를 보고 싶었어. ”

 

“ 왜? ”

 

“ 몰라. 그냥. ”

 

 

그 말과 함께 미샤가 그의 좁은 침대로 건너왔다. 파자마 하나만 걸친 따스한 몸을 그의 등 뒤에 찰싹 밀착시키며 뒷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두 팔을 감은 채 피오네르 캠프에 온 아이처럼 금세 잠이 들었다. 트로이는 밤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

 

 

 

초반부에 미샤가 읽고 있는 시집을 쓴 브로드스키는 '이오시프 브로드스키'(1940~ 1996)라는 소련 출신 망명 시인이다. 영어식으로는 조지프 브로드스키. 사회 기생충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된 후 1972년 소련에서 추방되었고, 1980년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198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트로이가 브로드스키 시집에 서문을 써줬다고 체포된 작가 얘기를 하는 것은 미하일 헤이페츠라는 작가의 실화다.

 

 

..

 

리가는 라트비아, 탈린은 에스토니아의 도시이다. 탈린은 특히 페테르부르크와 가깝다. 발트 3국은 당시 레닌그라드 시민들에게 연방 동맹국가니 딱히 '외국'은 아니지만 그래도 '러시아'는 아닌 곳이었다.

 

..

 

미샤는 당시 키로프(지금의 마린스키) 무용수였다. 라리사가 볼쇼이 무용수라고 하는 건 발레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볼쇼이와 키로프를 구분 못해서...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많은 힘이 됩니다.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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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러시아 사진들 뒤적이다 발견한 2013년 페테르부르크 사진들.

 

이건 당시 면세점에서 샀던 조그만 소니 똑딱이로 찍은 것인데 카메라가 너무 작기도 하고 소니의 색감은 나와 영 맞지 않아서 이때 좀 찍은 후 안 가지고 다녔다. 이따금 바보사업 행사를 할때 자료사진 촬영용으로 대충 찍으려고 썼을 뿐이다. 그래서 2013년에 페테르부르크 갔을때도 이걸로 찍은 사진들은 따로 폴더를 만들어 처박아놓고 잊고 있었다.

 

다시 봐도 화질도 색감도 맘에 안 들지만.. 하여튼 잊고 있었던 사진들이라 반가워서 올려본다. 너무 맘에 안 드는 사진 몇 장은 살짝 필터를 넣어 보정을 조금 했다. 이때 이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은 사이즈 설정을 실수해서 이렇게 기다란 비율로 찍혔다. 지나고 보니 좀 색다르긴 하다.

 

이건 2013년 9월에 페테르부르크에 갔을 때이다. 2012년과 2013년에 갔을 때에는 한창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던 무렵이라서 페테르부르크 골목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이 글의 주인공 미샤와 그의 친구들이 주로 다니던 곳들이나 글의 중요한 배경이 되는 곳들을 산책하고 사진도 많이 찍었다. 이 골목도 그런 목적으로 다시 갔었다. 바로 루빈슈테인 거리이다.

 

루빈슈테인 거리는 네프스키 대로에서 뻗어나온 조그만 골목 같은 거리이다. 위치는 모스크바 기차역과 판탄카 사이, 블라지미르스카야 거리와 자고로드느이 대로 근방에 있다. 조그맣고 좁은 골목이지만 이곳은 요즘 페테르부르크의 소위 '힙'한 카페와 음식점들이 많이 몰려 있는 곳이다.

 

물론 내가 쓴 글에서 이 루빈슈테인 거리는 음식점 거리가 아니라 다른 배경으로 나온다. 루빈슈테인 거리는 미샤의 본편 우주 중 트로이가 나오는 장편에 종종 등장하는 곳인데, 이곳에 미샤의 오랜 연인인 의사 유리 아스케로프가 근무하는 시립병원이 있는 것으로 설정했다. (유리 아스케로프는 서무 시리즈에서도 왕재수의 편지를 전해주러 온 베르닌에게 자신의 목걸이를 건네주는 것으로 특별 출연했었다) 실제의 루빈슈테인 거리에는 병원도 없고 상당히 조그만 골목이므로 이것은 어디까지나 소설적 허구이다.

 

어쨌든 그 본편에서 이 거리는 일종의 상징성을 띠는 곳이었다. 심리적 화자인 트로이는 일련의 질투심과 복잡한 감정 때문에 아스케로프를 종종 '루빈슈테인 거리의 의사'라고 칭한다. 소설의 몇몇 이야기도 그 병원에서 전개되기도 하고... 이전에 about writing 폴더에 발췌했던 미샤의 키로프 첫 시즌에 대한 이야기에서 그가 폐렴에 걸려 입원했다가 아스케로프로부터 정체불명의 약물을 투약받고 돈키호테를 추러 나갔던 곳도 바로 이 거리의 병원에서였다. 

(그 이야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594)

 

이 사진을 찍으며 산책했던 것은 그 장편을 모두 마친 후였는데, 오랜만에 루빈슈테인 거리를 산책하면서 다시 주변을 둘러보니 역시 병원이 들어설만한 장소는 없었다 :) 하여튼 소설적 상상력의 공간으로 변형시킨 것으로 해두자. 나는 1970년대 소련의 레닌그라드를 생각하며 썼지만... 사진은 2013년 9월,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이다.

 

 

 

이건 루빈슈테인 거리는 아니고, 블라지미르스카야 거리. 이 길을 따라 쭉 가다가 루빈슈테인 쪽으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페테르부르크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비둘기들. 비둘기 외에도 까마귀와 갈매기가 많다.

 

 

 

연극 광고들이 붙어 있다. 그 이유는...

 

 

 

여기 유명한 MDT, 즉 말르이 드라마 극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엔 아마 말리 극장이라고 번역되었을 것이다. 예전에 엘지아트센터에서도 몇번 공연해서 연극 좋아하는 분들은 잘 아는 곳. 유명한 레프 도진이 이끄는 극장이다. 오른편을 보면 9월 공연작들의 리스트가 주욱 늘어서있다. 체호프의 세 자매를 비롯해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 등 쟁쟁한 작품들이 줄줄...

 

 

 

건너편에서 전면을 찍어보았다. 그런데 구도가 완전히 비뚤어졌네.. 길이 좁아서 주차된 차들을 피해 찍을 수 없었음..

 

 

 

루빈슈테인 거리 11번지 표지판. 그리고 왼편에는 음식점 간판. 이 거리에는 근사한 카페와 레스토랑들이 많다.

 

 

 

 

 

카페-바 '레오나르도'의 메뉴 간판. 따뜻한 닭고기를 곁들인 샐러드가 370루블,  에클레어 70루블 등등..

 

 

이건 수공예 선물가게.

 

 

 

여기도 카페 앞. 비즈니스 런치 간판이 붙어 있는데 그 앞 의자에 젊은 남자가 앉아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다가오는 여자도 그렇고 골목 풍경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굉장히 '페테르부르크' 느낌이라서 사진 찍었다.

 

 

 

 

 

 

 

 

 

거리 전경은 이렇다. 짧고 좁다. 지금이야 이렇게 차가 빽빽하게 늘어서 있지만 소련 시절엔 안 그랬을 것이다.

 

 

 

창가의 이 남자는 내가 좋아하는 창문 사진 찍다가 우연히 렌즈에 들어왔다.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과 전체적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남겨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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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원래 금요일마다 서무 시리즈를 올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아직 33편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우수한 단추 시리즈가 생각보다 길어지기도 했고... 그래서 이번주에는 서무 대신 예전에 쓴 본편 중 에피소드 하나를 발췌해 올려본다.

 

예전에도 몇번 트로이와 미샤가 나오는 본편을 조금씩 발췌해 올린 적이 있다. 이번 에피소드는 그 장편의 전반부에서 통째로 발췌했다. 그 소설은 총 4부 23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부는 미샤가 발레학교에 다니던 소년 시절을 잠깐 다루고 있고 2부부터는 그가 키로프에 입단해 무용수로서 활동했던 초기 몇 년을 다뤘다.

 

배경은 1973년 1월, 소련의 레닌그라드(현재의 페테르부르크). 심리적 화자인 트로이는 레닌그라드 국립대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이며 미샤는 바가노바 발레학교 졸업반이다. 함께 등장하는 알리사, 갈랴, 료카, 이고리, 코스챠 등은 트로이의 비밀 문학 서클 멤버들이다. (이전에 이들이 등장하는 에피소드를 몇 개 발췌한 적이 있다. 표절에 대한 에피소드, 메밀죽 에피소드 등. about writing 폴더에 있음)

 

알리사는 트로이의 소꿉친구이자 대학교 동기이다. 그녀는 이후 런던 대사관에서 KGB 요원으로 근무하게 된다. 서무 시리즈에서 우수한 단추 드미트리 베르닌이 왕재수가 런던에서 사고친 것을 선배 누나가 수습해줬다고 언급했는데 그게 바로 알리사임. 그 이야기도 전에 발췌한 적 있다. 런던에 투어를 갔던 미샤가 사라져서 알리사가 찾으러 다닌 에피소드임 : http://tveye.tistory.com/2390

 

여기 발췌한 에피소드는 1부 4장. 상당히 전반부에 해당된다. 미샤는 아직 17살이다. 트로이와는 문학 서클에서 만나 매우 친하게 지내고 있다. 트로이는 자신의 정체성과 미샤에 대한 갈망을 꼭꼭 숨기고 있다.

 

이 에피소드에서 서무 시리즈 중 한 가지 에피소드가 나왔다. 읽어보면 금방 아실듯~ 그 외에도 조금 연결된 에피소드가 두어 개 있다.

 

** 초반에 친구들이 미샤에게 '키로프야, 볼쇼이야? 스파스 나 크로비야, 바실리야? 에르미타주야, 트레치야코프야?'라고 추궁하는 것과 관련해. 전자는 레닌그라드, 후자는 모스크바의 명소들이다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3일째 계속된 지긋지긋한 폭설이 그치고 잠시 해가 났을 때 알리사가 전화를 걸어왔다.

 

 

“ 뭐해? ”

 

“ 뭘 하겠어, 논문 붙잡고 있지. ”

 

“ 오늘은 그만 해, 날씨가 아깝잖아. 썰매나 타러 가자. 이고리랑 코스챠랑 레나도 올 거야. 갈랴랑 료카도 시간 되면 온대. ”

 

“ 어디로 갈 건데? ”

 

“ 우리 다차 ”

 

 

트로이는 알리사네 집 별장에 몇 번 가본 적이 있었다. 전차를 타고 한 시간 정도만 가면 되는 거리였고 아담한 별장 앞에는 호수가 있었다. 썰매 타기에는 최고의 장소였다.

 

 

“ 로미오도 데려와. 걔도 새해라 휴가잖아. ”

 

“ 아, 물어보고. 걘 워낙 바빠서. ”

 

“ 네가 오라고 하면 올 거야. 걔도 졸업하기 전에 좀 놀아야 돼. ”

 

 

연말에 미샤의 발레학교 갈라 콘서트 무대를 보러 갔다 온 후로 알리사를 비롯한 친구들은 미샤를 로미오라고 불렀다. 동기 여학생과 함께 로미오와 줄리엣 2인무를 췄기 때문이다. 배역에 따라 별명이 바뀌었기 때문에 지난번 백조의 호수 갈라 때는 왕자님이라고 불렀고 백야 축제 발표회 때는 투우사라고 불렀다. 그들은 모두 미샤가 이번 여름에 졸업하면 키로프에 들어갈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오직 트로이만이 그가 모스크바로 떠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도 친구들의 믿음이 강력했기 때문에 어느 날 트로이가 진지하게 ‘근데 볼쇼이에서 이전부터 걜 찍었다던데. 같은 조건이면 모스크바로 가지 않을까?’ 라고 운을 떼어 보았다. 그러자 타냐를 비롯해 발레에 대해서는 오직 타이츠 차림의 몸매 좋은 남녀가 나와서 떼를 이루어 춤춘다는 것 밖에 모르는 코스챠까지도 한목소리로 정색을 하며 소리쳤다.

 

 

무슨 소리야, 로미오는 우리 거야! 우리 레닌그라드에서 낳아 기른 애라구! 감히 모스크바 따위가 어떻게 걔를 넘봐! 근본도 없는 볼쇼이 따위! ”

 

 

그들은 정색을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다음 모임에 미샤가 왔을 때 그를 둘러싸고 강력하게 추궁하기까지 했다.

 

 

너 똑바로 대답해. 레닌그라드야, 모스크바야? 키로프야, 볼쇼이야? 스파스 나 크로비야, 바실리야? 에르미타주야, 트레치야코프야?”

 

 

미샤는 망설이지도 않고 빠르게 대답했다.

 

 

“ 레닌그라드, 키로프, 스파스 나 크로비, 에르미타주. 당연하잖아. ”

 

 

친구들은 모두 환호하며 술잔을 돌렸지만 트로이는 여전히 그가 모스크바로 떠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프리모르스카야 역 근처에 사는 미샤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마침 휴가라 집에 와 있었던 미샤가 전화를 받았고 트로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샤의 어머니는 아직 젊은 편이었고 미인이었지만 말도 별로 없고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를 풍겼기 때문에 트로이는 항상 위축되곤 했다.

 

미샤는 그날 약속도 없고 할 일도 없다며 같이 가겠다고 했다. 그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트로이는 서랍을 뒤져 여분의 모자와 장갑을 챙겼다.

 

 

 

*   *   *

 

 

 

 

호수는 꽁꽁 얼어 있었고 여기저기 눈더미가 봉긋하게 솟아 있었다. 그들은 알리사네 별장에서 2인용 썰매를 몇 대 끌어냈다. 얼어붙은 호수는 이미 어린 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썰매와 스케이트를 타러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면적이 넓었기 때문에 그렇게 혼잡하지는 않았다. 더욱 근사한 것은 호수 뒤편으로부터 경사를 그리며 뻗어 내려온 눈 덮인 언덕이었다.

 

 

날씨는 여전히 코끝이 시릴 정도로 추웠지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랬고 오랜만에 나온 태양이 차가운 황금빛을 발하며 하얀 눈과 얼음 위로 광채를 흩뿌리고 있었다. 다들 좋은 날씨 때문에 즐겁게 흥분했다. 한참 호수 위에서 썰매를 타고 놀다가 이고리가 신나게 외쳤다.

 

 

“ 우리 언덕에 올라가자! 꼭대기부터 타고 내려오자! ”

 

“ 그래, 그러자! ”

 

 

그들은 썰매를 끌고 언덕 뒷길을 따라 우우 올라갔다. 트로이는 가장 큰 썰매를 끌고 가다가 그루터기에 걸려 하마터면 나자빠질 뻔 했다. 눈 위에서 절대로 미끄러지는 법이 없는 미샤가 재빨리 손을 뻗어 그를 잡아 주었다.

 

 

“ 고마워. ”

 

“ 부츠를 그렇게 끌지 말고 이렇게 걸어봐. ”

 

 

미샤가 얼어붙은 눈길 위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시범을 보여주었다. 트로이는 그렇게 걸을 수만 있다면 자기도 지금쯤 로미오라고 불리고 있을 거라고 대꾸할 수도 있었지만 두툼한 스키 점퍼를 입고도 새처럼 가볍게 움직이는 그의 몸놀림에 시선을 빼앗겨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트로이가 챙겨준 보라색 니트 모자 아래로 검은 머리칼이 빠져나와 춤을 추듯 솟아오르기 직전이었다. 치수가 큰 모자를 이마까지 푹 눌러쓰고 있는데도 어떻게 그 머리카락들이 제멋대로 빠져나올 수 있는지 트로이처럼 짧은 금발 머리로서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꼭대기에 올라왔을 때는 이미 알리사와 코스챠, 갈랴와 료카가 먼저 짝을 지어 썰매를 출발시키고 있었다. 이고리와 레나가 함께 썰매에 올라앉으면서 그들에게 혀를 끌끌 찼다.

 

 

“ 안됐다, 늦게 올라온 팀은 아가씨들이 없네. 그냥 둘이 타. ”

 

 

트로이는 이고리의 농담을 가볍게 무시했지만 미샤는 어린애처럼 궁금해 하며 물었다.

 

 

“ 썰매는 꼭 아가씨와 타야 하는 거야? 왜? ”

 

“ 썰렁하게 무슨 소리야, 꼭 한 번도 안 타 본 것처럼. 이거 여자 꼬시려고 타는 거잖아. 넌 로미오가 돼갖고 그것도 모르냐? ”

 

 

농담과 함께 윙크를 던지며 이고리와 레나의 썰매가 휙 미끄러져 내려갔다. 트로이는 썰매를 눈 위에 똑바로 고정시키면서 미샤에게 물었다.

 

 

“ 너 진짜 썰매 한 번도 안 타 봤어? ”

 

“ 어릴 땐 타 봤지. 여섯 살 때까지 아버지랑 네바 강에 타러 갔었어. ”

 

“ 그럼 그 다음엔 안 탔어? ”

 

“ 응, 춤추기 시작하고부터는 못 탔지. 지금도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가 알면 길길이 날뛸걸. ”

 

 

알렉산드르 클리모프는 미샤의 은사였다. 발레학교 최고의 교사이자 옛 키로프 스타였는데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온순한 사람으로 유명했다.

 

 

“ 왜? 그분 진짜 성인군자라며. ”

 

“ 다리 다칠까봐. ”

 

“ 아... 그렇구나. ”

 

 

트로이는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미샤는 출퇴근 시간처럼 사람이 붐빌 때에는 지하철이나 버스도 타지 않았다. 눈이나 비가 많이 오지 않을 때면 거리가 멀어도 걸어 다니는 것을 선호했다. 이제껏 트로이는 그게 단순히 미샤가 산책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언제 어디에서나 틈이 날 때마다 스트레칭을 하고 몸을 움직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떠밀려 넘어질 위험이 따르는 장소를 피하는 것도 습관이 되어 있었다.

 

 

“ 그럼 우리 그냥 내려가자. 경사가 생각보다 가파른데. ”

 

“ 괜찮아, 너하고 타니까 별 일 없을 거야. ”

 

 

두터운 점퍼와 스웨터를 껴입고 부츠와 모자로 무장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트로이는 몸을 떨었다. 견딜 수 없는 애정과 뜨거운 갈망이 내부에서 치솟아 사방으로 넘쳐흐를 것 같았다. 그는 열기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미샤에게 들킬까봐 고개를 돌렸다.

 

 

썰매가 꽤 커서 남자 두 명이 앉을 수는 있었지만 트로이는 팔과 다리가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힘겹게 몸을 구겨 넣어야 했다. 미샤가 그의 팔과 무릎을 앞으로 잡아당겼고 편한 자세를 취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 네 자리가 없잖아. ”

 

“ 앞에 앉으면 돼. ”

 

 

미샤는 앞쪽의 좁은 공간에 몸을 밀어넣고 무릎을 세우더니 트로이의 어깨와 가슴에 바짝 기댔다. 아무리 조그맣고 날씬한 여자애들이라도 그렇게 유연하게 몸을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터번처럼 뒤로 늘어지는 보라색 모자에 감싸인 미샤의 머리가 그의 어깨와 턱 사이에 와 닿았을 때 트로이는 도저히 썰매를 탈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깃털로 부풀려진 스키 점퍼 사이로도 그 아이의 단단한 견갑골과 미끈한 등의 윤곽을 느낄 수 있었다. 미샤는 거미처럼 길게 구부러진 트로이의 다리와 허벅지 안쪽에 자기 다리를 밀착시키고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인양 앉아 휘파람을 불었다.

 

 

“ 그땐 띠로 묶었어. ”

 

“ 언제? ”

 

“ 네바 강에 갔을 때 말야. 우리 아버지도 너처럼 컸거든. 내가 떨어질까봐 커튼 띠로 허리를 묶었어. ”

 

 

미샤는 자기 이야기를 하는 적이 별로 없었다. 어릴 때 얘기는 더욱 더. 다른 상황이었다면 트로이는 궁금해서 이것저것 더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든 미샤의 몸에서 조금이라도 떨어지기 위해 뻣뻣한 등과 허리를 억지로 젖히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았다. 자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 천둥치듯 울려대는 심장 소리를 그 애가 눈치챌까봐 너무나 두려웠다.

 

 

트로이가 꼼짝도 하지 않자 빨리 내달리고 싶어 안달이 났던 미샤가 몸을 홱 틀며 썰매를 출발시켰다. 썰매는 미끄러진다기보다는 반쯤 허공을 날아 언덕 아래로 쇳소리를 내며 달려 내려갔다. 넘어져서 중간에 멈췄다가 다시 내려가고 있던 갈랴와 료카가 자신들의 곁을 바람처럼 스쳐 내려가는 썰매를 보며 경이롭게 소리쳤다.

 

 

“ 와, 너희 건 로켓 같아! ”

 

 

로켓은 길고 경사진 언덕을 단숨에 달려 내려와 호수 언저리까지 미끄러져 와서야 멈춰섰다. 눈과 얼음 가루가 분수처럼 튀었다. 트로이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고 머리가 멍멍했다. 온 몸이 불덩어리가 된 것 같았다. 어렴풋이 귓가에 웃음소리가 들렸다. 미샤가 머리를 그의 어깨 위에 내려놓고 소파에 기댄 것처럼 편안하게 앉아 웃고 있었다.

 

 

“ 들었어? 로켓이래. ”

 

 

트로이는 미샤가 그렇게 어린애처럼 웃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추위와 흥분 때문에 뺨과 콧날과 입술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눈썹 언저리까지 늘어진 털실 모자 아래로 까만 눈이 폭죽처럼 빛을 퍼뜨리고 있었다. 일어날 수만 있다면 트로이는 눈 속으로 도망쳤을 것이다. 일리야 드보르킨이 내뻗은 손으로부터 물 속으로 도망쳤듯이.

 

 

미샤가 훌쩍 일어나 그의 팔을 끌어당겼다.

 

 

“ 다시 올라가자. ”

 

 

그들은 다시 썰매를 끌고 언덕을 올라갔다. 반쯤 올라갔을 때 미샤가 트로이의 손에서 썰매를 빼앗았다. 끌어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투박하고 커다란 나무 썰매를 발레리나 파트너를 들어올리듯 가볍게 끌었다. 잠깐이었지만 트로이는 그가 눈 위에서 춤을 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로미오처럼, 황금빛과 광택 나는 검정색으로 무늬를 놓은 흰 옷을 입고 백조를 사냥하러 갔던 왕자처럼, 거대한 붉은 천을 휘두르며 허세를 부리던 투우사처럼.

 

 

그들은 여러 차례 썰매를 더 탔다. 한번은 레나가 끼어들어 트로이를 이고리 쪽으로 내쫓았다. 미샤는 레나를 앞에 앉히고 능숙하게 썰매를 몰았다. 비좁은 썰매를 거의 자신만큼 뻣뻣한 이고리와 함께 타고 내려오다가 하마터면 눈더미에 처박힐 뻔한 트로이는 언덕 중턱에 앉아 레나가 행복한 웃음을 터뜨리며 미샤의 팔에 안겨 썰매를 타고 내려가는 것을 구경했다.

 

 

“ 로미오와 줄리엣이네. ”

 

 

알리사가 트로이 뒤로 다가와 모자에서 눈을 털어주면서 그렇게 말했다.

 

 

“ 둘이 사귀면 좋겠어, 레노츠카는 쟤 때문에 우리한테 오는 건데. ”

 

 

트로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모임에 오는 여자애들의 대부분이 미샤에게 반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레나라고 다를 이유가 없었다. 그는 대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로켓 같지 않은데. 느려졌어. ”

 

“ 무게가 확 줄어들었잖아. 레노츠카 얼마나 날씬하다구. ”

 

 

알리사가 옳았다. 미샤는 레나를 허공으로 들어 올릴 수 있을 것이다, 파트너 발레리나를 손쉽게 띄워 올리고 빙글빙글 돌리듯이. 조그맣고 아름다운 금발머리 인형 같은 레나를 끌어당겨 키스를 하며 포옹할 것이다. 심장을 짓누르는 듯 산란한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밀어를 속삭이며 뜨겁게 사랑을 나눌 것이다. 레나는 봇물처럼 흘러넘치는 욕망으로 온몸을 적시고 정신을 잃을 것이다.

 

 

해가 지고 있었다. 멀리서 구름이 몰려오는 것을 목격한 트로이는 돌아가자고 했다.

 

 

“ 다시 눈이 올 것 같아. 바람 소리가 심상치 않아. ”

 

“ 딱 한 번만 더 타고 가자. 그냥 가면 자다가 아쉬워서 울 거야. ”

 

 

내키지 않았지만 트로이는 알리사와 함께 썰매를 끌고 언덕으로 올라갔다. 결혼한지 3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신혼부부처럼 사이가 좋은 갈랴와 료카가 서로를 꼭 껴안고 키스를 하다가 그들을 보고는 멋쩍은 듯 웃더니 잽싸게 썰매를 타고 휙 내려갔다. 트로이는 알리사와 함께 타려고 했지만 까다로운 알리사는 고개를 저었다.

 

 

“ 난 너랑 안 탈래. 내 썰매는 너하고 타기엔 너무 좁아. ”

 

“ 나 아까 이고리랑 같이 탔다가 넘어질 뻔 했단 말이야. ”

 

“ 그건 이고리 탓이 아니지. 네가 커서 그런 거잖아. 볼래? ”

 

 

그러더니 알리사는 마침 올라온 이고리에게 손짓을 해 자기 썰매에 태우고는 방울 소리를 짤랑이며 바람처럼 미끄러져 내려갔다. 트로이는 그냥 걸어서 내려갈까 하고 망설였다. 더 이상 썰매를 타고 싶지 않았다. 레나와 미샤가 함께 날아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코스챠가 빨간 칠이 되어 있는 썰매를 끌고 터덜터덜 올라왔다. 전부터 흠모하던 알리사가 파트너인 자기를 버리고 이고리와 가버린 것에 상심하고 말았다며 투덜대고 있었다.

 

 

나도 아가씨를 뺏아야지. 로미오는 여자들이 줄을 섰으니까 좀 뺏겨도 괜찮아. ”

 

 

레나와 미샤가 마지막으로 올라왔다. 코스챠는 신부를 강탈하는 카자크 전사처럼 레나의 가냘픈 손목을 낚아채 자기 썰매에 태웠다. 그리고는 웃음과 짜증이 반쯤 섞인 레나의 비명과 함께 의기양양하게 언덕 아래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 아가씨를 뺏겼어. 썰매로 여자 꼬드기는 건 대실패야. ”

 

 

코스챠의 썰매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미샤가 노래하듯 말했다. 화가 난 기색은커녕 밝게 웃고 있었다.

 

 

“ 썰매로 여자를 낚을 수 있었으면 난 벌써 열두 번은 결혼했겠다. ”

 

“ 위안이 좀 되는군. ”

 

 

미샤는 썰매에 올라탔다. 모자가 반쯤 벗겨져 흘러내리고 있는데다 목도리의 매듭도 풀려 있었다. 트로이는 미샤의 뒤에 타면서 모자를 제대로 씌워주었다. 목도리도 묶어주려고 하는데 미샤가 고개를 저었다.

 

 

“ 더워, 답답해. ”

 

 

그리고는 목도리를 훌훌 풀어 무릎 아래로 내던졌다. 스키 점퍼 칼라 사이로 우아하게 뻗어 내린 목과 어깨가 힐끗 보였다. 트로이는 고개를 돌렸다. 이제 해가 반쯤 넘어가고 있었다. 거대한 구름이 밀려오고 있었고 차디찬 바람이 불어와 언덕에 쌓인 눈을 안개처럼 날려대고 있었다. 그는 몸을 가능한 한 뒤로 젖히고 두 손으로는 썰매 가장자리를 꽉 움켜쥐었다.

 

 

“ 어두워졌어, 빨리 내려가자. ”

 

 

썰매가 쉭쉭 소리를 내며 솟아올랐다. 맹렬한 기세로 날아올랐다. 귀를 찢는 듯한 바람이 일었다. 트로이는 정말 로켓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떻게 엔진조차 없는 썰매가 이런 기계음과 폭발음을 내며 허공으로 튀어나가는 걸까 하고 경이로움에 사로잡혔다. 한순간 그는 거대하고 끈적거리는 검은 덩어리가 번개처럼 눈앞으로 달려드는 듯한 환상을 보았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서쪽 하늘로부터 몰려온 세찬 돌풍이 로켓을 장난감처럼 들어올려 언덕 가장자리로 내팽개쳤다. 로켓은 굉음과 함께 두어 차례 뒤집히며 눈과 얼음 위로 굴러갔다.

 

 

커튼 띠로 허리를 묶었어.

너하고 타니까 별 일 없을 거야.

 

 

트로이는 공포로 비명을 지르며 두 팔과 다리를 거미처럼 구부려 미샤를 감쌌다. 뭔가가 산산조각나며 어깨를 때렸다. 이상하게도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자기 자신의 고함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머리를 부딪치기 전에 트로이는 사방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하얀 눈보라 사이로 보라색 반점을 남기며 날아가는 작은 새를 보았다. 물론 그건 새가 아니었다. 터번처럼 늘어진 보라색 모자였다. 그는 입을 벌려 다시 한 번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단단한 뭔가에 머리를 부딪쳤고 정신을 잃었다.

 

 

 

 

*   *   *

 

 

 

 

 

깨어났을 때 트로이는 차갑고 푹신한 눈더미 위에 누워 있었다. 친구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우렁우렁 울렸다. 조율이 되지 않은 나팔을 한꺼번에 불어대는 것 같았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고 온 몸이 부서지는 듯 쑤셨다.

 

 

“ 트로이, 정신 들어? 나 보여? ”

 

 

나팔 소음 가운데 알리사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는 눈을 떴고 오래된 흑백 필름처럼 희뿌옇게 번져 있는 알리사의 얼굴을 바로 앞에서 보았다. 눈이 비로 바뀐 모양인지 뺨 위로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이렇게 추운데 비가 올 리가 없었다. 알리사가 엉엉 울고 있는 거였다.

 

 

“ 왜 울어? ”

 

“ 어떻게 안 울어! ”

 

 

이고리와 료카가 그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트로이는 지독한 현기증을 느꼈다. 두 팔이 나사 빠진 기계처럼 철컥거리며 축 늘어졌다. 팔 안이 텅 비어 있었다. 한순간 그는 무시무시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 왜, 왜 나만 있어? 미샤는? ”

 

 

다친 거야. 다리가 부러졌을 거야.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가 펄펄 뛰겠지. 썰매 바깥으로 튀어나갔을 거야, 걘 나만큼 크고 무겁지 않으니까. 온통 팔과 다리와 공기 뿐인 애야. 띠로 묶었어야 해. 목도리를 풀지 않았어야 했어. 나 때문이야. 내가 그런 거야, 다리를 부러뜨렸어. 무대에 못 올라갈지도 몰라.

 

 

모스크바로 가지 못할지도 몰라. 여기 남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 마지막 생각이 너무나 끔찍하고 두려워서 트로이는 신음하며 고개를 돌리고 눈 위에 왈칵 토하기 시작했다. 료카가 그의 등과 어깨를 문지르며 구토를 도와주었다.

 

 

“ 그냥 다 토해. 이제 괜찮아질 거야. ”

 

“ 미샤는? ”

 

“ 너보다 훨씬 나아. 걱정하지 마. ”

 

 

 

트로이는 눈을 한 움큼 떠 입을 닦고 일어나려고 했다. 료카가 부축해주려는데 어디선가 미샤가 나타나서 그의 어깨를 잡았다.

 

 

“ 아직 일어나지 마. 함부로 움직이면 안 돼. ”

 

 

 

언제나처럼 침착하고 나직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트로이는 마음이 놓이면서 정신을 차렸다. 눈앞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미샤가 손가락을 흔들고 있었다.

 

 

“ 몇 개로 보여? ”

 

“ 세 개. 아니, 흔들지 말아봐. 두 개. ”

 

 

등 뒤에서 레나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속삭이는 게 들려왔다.

 

 

“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뇌진탕이면 어떻게 해. ”

 

“ 조용히 해. ”

 

 

트로이는 미샤가 그렇게 단호한 어조로 얘기하는 것을 처음 들었다. 레나는 움츠러들며 입을 다물었다.

 

 

미샤가 그의 곁에 어깨를 대고 앉았다. 한 손으로 지끈거리는 뒤통수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면서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조용히 말했다.

 

 

잠깐만 기대 있어. 코스챠가 차를 가지러 갔으니까. 며칠 정도는 어지러울 거야. ”

 

“ 넌 괜찮아? ”

 

“ 입술 터졌어. ”

 

 

미샤는 손가락으로 자기 아랫입술을 가리켰다. 피가 고여 있었지만 흘러내리지는 않았다. 스키 점퍼 한쪽 칼라와 지퍼는 크게 뜯겨 달아나 있었고 목덜미와 턱에 불분명한 형체의 커다란 멍이 들어 있었다. 하얀 피부 때문인지 자신의 뇌진탕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멍이 점점 더 진한 보라색으로 바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쨌든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는 길길이 날뛸 것이다, 무대에 올라가는 애의 얼굴이 망가졌으니까. 흉터가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제발 아니어야 했다.

 

 

“ 아파? ”

 

 

미샤는 트로이의 시선이 목덜미에 고정되어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 안 아파. 그냥 멍만 들었어. ”

 

 

‘ 칼라를 뜯은 건 나였어. 잡아주려고 그랬던 거야. 다행이야, 튀어나가지 않았어. ’

 

 

트로이는 미샤의 목에 나 있는 일그러진 아메바 모양의 커다란 보라색 멍 위로 자기 손을 뻗어 손가락 모양을 맞춰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헛구역질을 했다. 알리사가 손수건을 눈에 적셔 그의 이마와 얼굴을 닦아주었다.

 

 

“ 바보 멍청이. 그렇게 돌풍이 부는데 내려오는 얼간이가 어디 있어. ”

 

“ 내가 그랬어. 구름이 도착하기 전에 내려갈 수 있을 줄 알았어. ”

 

 

미샤가 무심하게 말했다. 알리사가 잠깐 눈물이 가득한 갈색 눈으로 미샤를 노려보았다.

 

 

“ 너 미쳤어? 몸이 재산인 애가 바람에 휩쓸릴 걸 알면서 그런 짓을 해? ”

 

“ 미안해. ”

 

 

트로이는 알리사의 책망하는 시선을 견딜 수가 없었다. 미샤가 사과하는 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섯 살 이후 썰매를 타본 적이 없는 애였다. 퇴근 시간에는 버스를 타지도 않고 주말 축구 시합에도 한 번 끼지 않는 애였다. 언덕으로 그를 데리고 올라온 것도, 썰매에 태운 것도 트로이 자신이었다.

 

 

어쩌면 그가 그런 게 아닐까? 그는 구름이 몰려오는 것을 보았고 돌풍이 올 거라는 것도 알았다. 추락할 걸 알았던 사람은 미샤가 아니라 트로이 자신이었을지도 몰랐다.

 

 

‘ 다리가 부러졌다 해도 결국은 모스크바로 떠나게 될 거야. ’

 

 

미샤가 그의 왼쪽 손목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다. 추위 때문인지 감각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반대편 옆에 와서 웅크리고 앉은 레나가 울음을 터뜨렸다.

 

 

“ 왜 그렇게 흐느적거려? 부러진 거야? ”

 

 

미샤가 다시 레나에게 돌처럼 굳은 시선을 던졌다.

 

 

“ 울지 마, 부러지지 않았으니까. 좀 어긋난 거야. ”

 

 

트로이는 자기 손목의 상태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미샤가 레나에게 싸늘하게 구는 게 기뻤다.

 

 

“ 좀 아플지도 몰라. ”

 

 

손목은 별로 아프지 않은데 왜 그런 말을 할까 하고 의문하는 순간 트로이는 자기도 모르게 날카로운 숨을 들이쉬었다. 미샤가 그의 손목을 몇 번 만지더니 세게 비틀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비튼 게 아니라 살짝 옆으로 움직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너무 아파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현기증도 구역질도 단숨에 사라졌다.

 

 

“ 움직여봐. ”

 

 

그는 왼손을 움직였다. 아팠지만 더 이상 흐느적거리지는 않았다. 조금 부어올랐을 뿐이었다. 미샤가 손수건을 꺼내 그의 손목을 묶었다. 그리고 목도리로는 머리와 이마를 동여맸다.

 

 

“ 응급 처치까진 아니지만 심리적으로는 도움이 될 걸. ”

 

 

그때 코스챠가 어디선가 차를 몰고 왔다. 친구들은 그를 병원으로 데려갔고 트로이는 경미한 뇌진탕과 3주 정도의 타박상 진단을 받았다. 왼쪽 손목은 부러지지 않았고 어긋났던 부위도 제대로 돌아와 있었다. 미샤는 터진 입술과 목덜미의 멍 외에는 멀쩡했다.

 

 

 

 

 

*   *   *

 

 

 

 

 

“ 썰매 바깥으로 튀어나갔었어. ”

 

 

이틀 후 아파트로 병문안을 온 알리사가 트로이에게 오렌지를 까주면서 그렇게 말했다.

 

 

“ 무슨 소리야? ”

 

“ 로미오 말야. 썰매 바깥으로 튀어나갔다구. 그래서 우린 전부 다 걔한테 먼저 뛰어갔었어. 호숫가까지 떨어졌어. 구르지도 않고 순식간에 추락하길래 죽은 줄 알았어. 그거 보고 레노츠카는 기절했었어. ”

 

“ 호수라니, 우리 썰매는 꼭대기에서 뒤집혔는데... 어떻게 거기까지 떨어질 수가 있어? 어떻게 안 다쳤지? ”

 

“ 몰라. 정말 큰일 날 뻔 했어. 걔 눈더미에 처박혀서 한쪽 팔 밖에 나와 있지 않았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 혹시라도 어떻게 됐을까봐.... ”

 

 

알리사는 부르르 떨다가 생각난 듯이 트로이의 입에 오렌지를 밀어 넣으며 말을 이었다.

 

 

“ 근데 멀쩡하더라구. 걘 너처럼 기절하지도 않았어. 혼자서 일어나길래 깜짝 놀랐어. 걔가 아니었으면 난 널 찾으러 올라가지도 못했을 거야, 넋이 빠져서. 로미오가 널 썰매 아래에서 끌어냈어. ”

 

“ 아, 난 썰매랑 같이 뒤집혔었구나. ”

 

“ 기억 안 나? ”

 

“ 잘 안 나. ”

 

너 썰매랑 울타리 사이에 끼어 있었어. 다리가 너무 꽉 끼어 있어서 다른 남자애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는데 걔가 혼자 끌어냈어. 어떻게 했는지 알아? 썰매 날을 떼어내서 그걸로 울타리를 쪼갰어. 난 로미오가 그렇게 힘이 센 줄 몰랐어.

 

“ 어딜 쳐야 하는지 아는 거야. ”

 

“ 그럴지도 모르지. 몸을 쓰는 애니까. 그래서 안 다쳤을지도 몰라. 넘어지는 방법을 배운 애잖아. ”

 

 

그가 잡아준 게 아니었다. 기껏해야 칼라를 잡아 뜯고 목에 상처를 남겼을 뿐이다. 그 애가 바깥으로 튀어나가 추락하는 동안 트로이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썰매와 나뒹굴며 천치처럼 울타리 사이에 끼어 기절했을 뿐이었다. 조금만 방향이 잘못되었다면, 푹신한 눈더미가 아니라 호수의 얼음 위로 떨어졌다면 온몸의 뼈가 부러졌을 것이다, 얼음을 부수고 차가운 물 속으로 곤두박질쳤을지도 모른다. 익사했을 것이다.

 

 

트로이는 몸을 떨었다. 알리사는 그가 추워서 그러는 줄 알고 담요를 두 겹으로 덮어준 후 하루종일 함께 있어주었다. 저녁에 돌아온 트로이의 어머니는 그 광경을 보고 마침내 아들과 알리사가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은밀한 희망을 품고 미소를 지었다.

 

 

 

트로이는 열흘 정도 집에 누워 있었다. 미샤는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전화 한 번 없었다. 타냐의 말에 따르면 키로프에서 밤 공연 무대의 꽤 비중 있는 배역을 맡겨서 새해 휴가도 반납하고 연습을 하러 극장에 가 있다는 것이었다. 공연 당일에는 눈이 많이 왔기 때문에 다리가 불편한 트로이는 극장에 가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 몇몇은 보러 갔다. 돌아온 타냐와 레나가 눈을 반짝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 잠자는 미녀였어, 파랑새를 췄어! 졸업도 안 한 애한테 그 역을 줬다구. 키로프에서 정말 걜 잡고 싶은가봐. 분명히 여기 남을 거야. ”

 

 

트로이는 잠자는 미녀가 어떻다는 건지, 동화에서나 어울릴 법한 파랑새를 춘다는 게 뭐가 그렇게 대단한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게 미샤를 레닌그라드에 남게 할 만큼 괜찮은 대우이기를 간절히 빌었다.

 

 

공연이 끝나고 며칠 후 미샤가 말도 없이 들렀다. 언제나처럼 몸에 잘 맞는 옷을 입고 따뜻한 신발을 신고 있었다. 입술과 목덜미는 깨끗했다. 흉터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 천사처럼 완전한 모습이었다. 하긴 검은 머리 때문에 천사라기보다는 브루벨 그림의 악마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트로이는 오래된 화집에서 그 그림을 오려 논문 원고 사이에 감춰놓고 있었다.

 

 

“ 많이 좋아진 것 같네. 이거 들어봐. 노래가 좋아. ”

 

 

미샤는 무척 바쁜 모양인지 그 말과 함께 레코드 한 장을 놓고 가버렸다. 뉴욕에서 나온 레코드였다. 재킷에는 예쁘장한 젊은 로커가 몸에서 피를 흘리며 악마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악을 쓰는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 클래식 무용수답지 않게 미샤에게는 언제나 극단적인 미국 락 음악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 트로이는 그 무시무시한 커버가 보이지 않도록 재킷을 엎어놓고 레코드를 들었다. 나중에는 아랫집에서 항의할까봐 소리를 줄여야 했다. 노래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그는 1월 내내 그 레코드를 들으며 논문 작업을 했다.

 

 

 

...

 

 

서무 시리즈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http://tveye.tistory.com/3785) 에서 왕재수가 탑에서 눈더미로 뛰어내린 후 어릴 때 썰매 타다 떨어진 적 있다고 하는데 그때 그는 이때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비행과 추락은 미샤가 등장하는 소설들에서 자주 반복되는 모티프 중 하나이다. 서무 에피소드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 별장' (http://tveye.tistory.com/3785)의 결말도 본편의 이 모티프와 연결된다.

 

마지막에 미샤가 트로이에게 가져다주는 음반은 내가 예전에 썼던 소설들에 등장했던 미국인 펑크 로커의 음반이다. 내가 미샤라는 인물을 처음 글로 형상화했던 것도 그 캐릭터가 등장하는 어느 단편에서였다. 그 글에서 미샤는 뉴욕에 가서 현지 발레단과의 협업을 통해 발레 불새를 무대에 올렸고 공연 당일 저 가수와 짧은 만남을 갖게 된다. 여기 발췌한 썰매 에피소드로부터 8년 후, 그리고 가브릴로프 우주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의 배경이 되는 시기이다. 그때는 미샤가 가브릴로프로 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지만...

 

 

** 썰매 에피소드이므로, 눈에 덮여 얼어붙은 페테르부르크 바다와 거기 썰매 타러 가는 사람들 사진을 올려봤다. 여기 : http://tveye.tistory.com/4052

 

.. 댓글은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
Posted by liontamer

 

 

요즘 신경숙 표절 얘기로 시끌시끌하다. 부끄러운 일이다. 수치심을 알아야 한다. 당사자도, 출판사도, 문학계도 모두.

 

글을 쓰기 위해서는 많이 읽고 경험하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다른 작가들에게서 영향을 받을 수도 있고 무의식적으로 문체가 닮아갈 수도 있다. 의도적으로 패러디를 하거나 인용을 하거나 오마쥬를 바칠 수도 있다. 후자와 표절의 영역은 어쩌면 아주 미묘하게 겹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일은 그런 미묘함의 영역도 아니다.

 

표절은 도둑질이고 수치스러운 행위이다. 작가로서의 양심을 저버리는 행위이다. 그런 짓을 하고 나면 무엇보다도 자기 스스로가 부끄러워서 못 견뎌야 한다. 그런데 안 그런 경우도 참 많은 것 같다.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타인의 텍스트를 해체하고 조립해 재축조할 수도 있다. 그것도 일종의 창작 행위이다. 중요한 것은 그때 그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누구에게서, 어떤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 어느어느 부분을 인용했다. 누구에게 바치는 글이다 등등... 그 최소한의 행위조차 없이 타인의 창작물을 떼내고 가져가는 것은 범죄 행위이며 수치스럽고 더러운 짓이다. 경의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작가는 진정한 작가가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래에 발췌한 글은 몇 년 전 쓴 장편의 중반부에서 가져왔다. 이전에 몇번 발췌한 적이 있는 미샤와 그의 친구 트로이의 장편이다. 배경은 1970년대 소련 레닌그라드. 심리적 화자인 트로이는 레닌그라드 대학의 영문학과 강사인데 학생 시절부터 친구들과 비밀 문학 서클 활동을 하고 있다. (미샤와 처음 만난 것도 이 서클에서였음) 발췌한 부분은 트로이가 그 문학 서클 친구들과 정례 모임을 갖던 중 생긴 일이다. 표절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그래서 생각나서 발췌해본다.

 

 

처음에 나오는 막심 쥬진스키란 인물은 이들의 서클 멤버이며 작가로 데뷔한지 몇 년 정도 된 사람이다. 갈랴, 료카, 이고리, 스베타, 코스챠(애칭은 코스칙)는 모두 트로이의 친구들이며 미샤의 친구들이기도 하다.

 

이 사람들의 대화에서 언급만 되는 알리사(애칭 : 알랴)는 트로이의 단짝 친구로 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시점에서는 영국의 소련 대사관에 파견을 나가 있다. (알리사의 이야기도 전에 한번 발췌한 적이 있다. 런던에서 사라져버린 미샤를 찾으러 갔다가 젊은이와 죽음을 추는 걸 봤다는 얘기이다 : http://tveye.tistory.com/2390 )

 

중간에 나오는 '미슈카'와 '미셴카'는 모두 미샤의 애칭이다. 트로이의 친구인 이고리는 영화학교 출신으로 레닌그라드의 영화사인 렌필름에서 촬영기사로 일하고 있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시점은 1975년 10월이다. 미샤가 키로프 극장 3년차에 접어들었을 때이다.

 

쥬진스키가 표절한 작가인 부닌은 '그' 이반 부닌이다. 러시아 출신 작가로 혁명 후 망명했고 1933년에 노벨상을 수상했다. 여린 숨결,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 안토노프 사과 등의 작품이 있다. 여기서 쥬진스키가 표절한 작품은 그의 유명한 단편 '정결한 월요일'이다. 나 역시 미샤와 비슷한 문학적 취향을 갖고 있어 부닌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취향과는 별개로 부닌의 문학적 재능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훌륭한 작가였다.

 

인용된 부닌의 문장은 파란색 궁서체로 표시했다. 내가 직접 번역한 것은 아니고, '행복한 책읽기'에서 번역출간한 '러시아 단편소설 걸작선', '양장선'님 번역본 인용. 325페이지. 

 

 

사실 발췌한 부분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표절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미샤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쥬진스키는 이 장편에서 이 부분 외에는 등장 비중도 거의 없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나름대로 중요한 인물이었다. 이 장편을 쓸 때 나는 줄곧 재능과 욕망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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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에 갈랴 부부의 집에서 쥬진스키와 이고리가 대판 싸웠다. 발단은 쥬진스키의 새 소설이었다. 네프스키 거리에서 만난 남녀의 사랑과 일상을 다룬 소설이었는데 이미 두 권의 책을 출간해 의기양양해진 쥬진스키가 제 1장을 소리 높여 낭독하는 동안 이고리가 소파에 벌렁 드러누워 시끄럽게 휘파람을 불어댔다. 쥬진스키는 30초 정도 참다가 원고를 내려놓으며 이고리에게 대체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이고리는 솔직하게 대꾸했다.

 

 

“ 부닌이잖아. 똑같잖아. ”

 

“ 뭐가! 어디가 부닌이야! ”

 

“ 첫 문장부터. 모스크바를 레닌그라드로 바꾼 거 밖에 뭐가 있어. ”

 

“ 웬 헛소리야! 난 부닌 좋아하지도 않아! 그 부르주아 나부랭이. ”

 

“ 난 아까 그 부분 외어줄 수도 있는데? 거리의 가스등에 차가운 불빛이 점화되고 상점 진열창에 따뜻한 조명이 들어오자 일과에서 해방된 모스크바는 새롭게 밤의 활기로 되살아났다.

 

 

쥬진스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고리가 말을 이었다.

 

“ 더 해줘? 짙어가는 어둠 속에서 전차의 전깃줄이 치지직 소리를 내며 푸른 별을 수없이 뿌려대고 있었다. 넌 노란 별로 바꿨지. ”

 

“ 말도 안돼, 우연일 뿐이야. ”

 

“ 세상 어떤 놈도 우연히 부닌처럼 쓸 수는 없어. 망명 부르주아든 귀족 나부랭이든 부닌은 부닌이야. ”

 

“ 그래서 지금 내가 부닌을 베꼈다는 거야? ”

 

“ 그럼 아냐? ‘정결한 월요일’이잖아. 지금 교육받은 독자들 무시해? 하긴 네 독자들은 모를 수도 있겠다. 집단농장하고 콤비나트, 우주비행사 밖에 모를 테니까. ”

 

 

 

작가로서의 자존심에 엄청나게 타격을 입은 쥬진스키가 고함을 지르며 이고리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날렸지만 빗나갔다. 곰처럼 떡 벌어진 체구의 이고리는 벌떡 일어나 쥬진스키의 멱살을 휘어잡더니 유도선수처럼 그를 바닥에 메쳤다. 운 나쁘게도 료카와 트로이는 그 지루한 낭독이 시작되었을 때 안주를 가지러 간다는 핑계로 부엌에 숨었고 코스챠는 술에 떡이 되어 ‘잘한다 잘한다’ 하고 소리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그들을 떼어놓으려고 달려든 사람들은 여자들 뿐이었다. 스베타가 부엌으로 달려와서 소리쳤다.

 

 

“ 이봐 사나이들, 빨리 와줘! 이고리가 막심을 깔아뭉개고 있어! ”

 

 

료카와 트로이가 달려가 간신히 둘을 떼어놓았다. 눈에 커다랗게 멍이 들고 입술이 터진 쥬진스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이고리와 나머지들을 싸잡아 욕했다. 너희들은 모두 실패자들이며 성공한 작가인 날 질투해서 트집을 잡는 것 뿐이라고 악을 썼다. 타냐에게서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트로이는 원고뭉치를 집어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 그만해, 막심. 부닌 맞잖아. ”

 

“ 너까지 헛소리야! ”

 

“ 뒷장은 나보코프한테서도 따왔네. ”

 

 

다시 폭발한 쥬진스키가 트로이에게 달려들어 머리로 들이받으려는 것을 료카가 말렸다. 집 주인이자 평화주의자답게 상처받은 작가를 어르고 달랬다.

 

 

“ 쟤네 취해서 그런 거야, 네가 참아. 네 문장이 좋아서 그렇게 보였나보다 하고 생각해. ”

 

“ 문장이 좋긴! 부닌하고 나보코프 빼면 프라브다 선동 칼럼이야! ”

 

 

이고리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분노한 쥬진스키는 료카를 거칠게 밀치고 재킷을 주워 입더니 원고뭉치를 소중하게 한 팔로 끼고 집을 뛰쳐나갔다. 당황한 료카가 그를 잡으러 나가려는 것을 갈랴가 말렸다.

 

 

“ 놔둬,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지. ”

 

“ 다시 안 오면 어떻게 해. ”

 

“ 안와도 돼, 표절해놓고 잘난 척이라니. 속이 다 시원하네. “

 

 

료카는 난처한 얼굴로 아내와 친구들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 음, 사실 파스테르나크도 있었던 것 같아. ”

 

“ 그래, 네 번째 문장. ”

 

 

그들은 다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씁쓸하고 우울한 웃음이었다. 만취해서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한 코스챠만이 투덜댔다.

 

 

“ 뭐야, 자기들끼리 놀다가 웃고. 막심은 어디 갔어. ”

 

“ 그냥 잠이나 자. ”

 

“ 알랴가 보고 싶어. 알랴 불러와. ”

 

“ 알리사는 런던에 있잖아. 불쌍한 코스칙, 이제 그만 잊어. ”

 

“ 내가, 내가 알랴 보러 런던 갈 거야. 밀, 밀항해서라도 가야지. 아니면 그래, 미슈카, 우리 미슈카 트렁크에 숨어서 갈 거야. ”

 

“ 걔도 런던은 못 갔잖아. ”

 

“ 조만간 갈 거 아냐, 우리 중 제일 잘난 앤데. 잘 보였다가 따라가야지. ”

 

뭐 제일 잘나긴 했지. 그나마 오늘 걔가 없어서 다행이다. 이 꼴을 안 봐도 돼서. ”

 

“ 미샤는 부닌 별로 안 좋아해. 나보코프도. ”

 

 

트로이의 말에 이고리가 픽 웃었다.

 

 

아, 그래. 걘 도스토예프스키, 안드레예프, 바벨, 아흐마토바 뭐 그런 취향이지. 젊은 녀석이 칙칙해가지고. 근데 난 그 얘기 한 거 아냐. 걘 진짜 천재잖아, 걔한테는 쥬진스키가 저런 짓을 하는 걸 보여주고 싶지 않아. 우리 춤추는 푸쉬킨은 재능 없는 놈들이 몸부림치는 걸 이해 못할 거야. 그거 좀 슬프잖아. ”

 

 

트로이는 친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네가 그런 생각도 하는 줄 몰랐는데. ”

 

“ 한때는 나도 에이젠슈테인처럼 될 줄 알았지. 근데 재능이 눈곱만큼도 없다는 걸 알고 얼마나 절망했는지 알아? 난 기껏해야 촬영 기사밖에 안돼. 좀 더 가면 편집자까진 되겠지. 근데 그게 전부야. 쥬진스키가 능력도 없는 주제에 동맹에 빌붙어서 책을 내고 있는 건 그 새끼한테 자존심이란 게 아예 없기 때문이야. 병신 같은 놈. 그런 놈들이 책을 내고 있어, 버젓하게 작가동맹에 등록되어 있다고. 그러니까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인 거야. 그래서 난 우리 미셴카를 좋아하지. 아니, 사랑해. 숭배한다고. 걘 타고났어. 하늘이 내려준 애야. 온통 반짝거리는 놈이라구. 그 자식 성격은 뭐, 아주 많이 문제가 있지만. 그런 재능을 갖고 사는 건 쉬운 일이 아냐, 그것도 이 나라에선. 그러니까 우리가 잘해줘야 돼. ”

 

 

트로이는 이고리에게도 그런 고민이 있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고리는 언제나 단순하고 쾌활한 친구였고 도량이 넓었다. 자기 일에 열심이었고 동료들 사이에서 인기도 많았다. 재능에 대해 고민할 것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건 정말로 우중충하고 미지근하기 짝이 없는 자신에게나 어울릴 고민이었다. 하지만 트로이는 그에게 다른 것을 물었다.

 

 

“ 너도 알리사처럼 얘기하네. 걔 문제가 대체 뭔데? ”

 

“ 아, 문제가 많지. 원래 그런 애들은 전부 문제가 있어. ”

 

 

한순간 트로이는 이고리가 미샤의 성 정체성에 대해 눈치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이고리도 그와 자는 사이일지도 모른다는 망상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고리는 한숨을 쉬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 너도 걔 좀 잘 봐. 안 그러면 정말 언제 다리에서 뛰어내릴지 몰라. ”

 

“ 앞날이 창창한 애를 놓고 왜 그런 말을 해. ”

 

“ 정말 몰라서 그래? 요원들이 따라다녀, 그것도 대낮에. 차라리 그게 전부였으면 좋겠다. ”

 

“ 또 뭐가 있는데? 다 터놓고 말해. ”

 

 

차가운 공포를 느끼며 트로이가 이고리를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이제 이고리가 얘기할 것이다. '걔는 정상이 아냐. 남자를 좋아하거든. 차이코프스키처럼. 그 데이빗 보위처럼. 그런데 너도 마찬가지 아냐? 다 알고 있었어. 친구라서 입 다물고 있었을 뿐이야, 알리사처럼. 우린 다 알아.'

 

 

담배 연기를 훅 내뿜고 나서 이고리가 화난 목소리로 불쑥 말했다.

 

 

“ 우리 소품 창고에서 밧줄로 목을 맸어. 밤에. 편집실에서 영화 보다가 내가 조는 사이에 나가서. ”

 

 

충격으로 입을 벌린 트로이를 우울하게 응시하며 이고리가 말을 이었다.

 

 

“ 걱정 마, 내가 빨리 발견했으니까. 어쩐지 그날 기분이 이상했어. ”

 

“ 언제? ”

 

“ 작년에. 12월에. ”

 

“ 로미오와 줄리엣 때? ”

 

“ 그래, 그맘때. ”

 

“ 왜... 다 잘되고 있을 때였잖아. 뭐가 문제였는데... 아무 말 안해? ”

 

너도 걔 알잖아. 말 안해, 절대로. 나도 모른 척 했어. ”

 

“ 내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런 기색 없었어. ”

 

“ 그렇겠지. 우리 같은 놈들이 걔한테 대체 뭐라고. ”

 

 

트로이는 이고리에게서 담배를 빼앗아 연기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평소에는 거의 피우지 않았지만 견딜 수가 없었다. 12월, 거의 1년 전이었다. 그때 미샤는 그의 집에서 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한 침대를 쓰고 있었다. 지금이나 다름없이.

 

 

“ 그때 한 번도 아냐. 난 그런 애들 알아. 영화학교에서도 본 적 있어. 제일 뛰어난 애들이 가장 못 견뎌. 걔 손목엔 칼로 자른 자국이 있지. 눈에 잘 띄지 않을 뿐이야. ”

 

“ 아니, 그럴 리 없어. 춤추다 다쳤을 거야. 무대에서 떨어진 적이 있으니까. 팔이 부러졌었어. ”

 

“ 미샤한테 너무 환상을 갖지 마. 그래봤자 무대에 올라가지 않을 땐 아직 애니까. 스무 살이 됐어도 애야. 걘 보기만큼 강하지 않아. 그래도 네 말은 들을지도 몰라. “

 

“ 누구 말도 안 들을 걸. ”

 

“ 그래도 그때 딱 한 마디밖에 안했어. 너한테 얘기하지 말라던데. ”

 

 

트로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어쩌면 걔는 떠나야 할지도 몰라. 때가 되면 가야 할 거야.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아무 위험 없이 잘 건너갔으면 좋겠어. 미국이든 어디든. ”

 

“ 조용히 해. 그런 말 다른 데선 절대로 하지 마. ”

 

“ 안하지, 내가 미쳤냐? ”

 

“ 여기서도 하지 마. 다시는. ”

 

 

이고리는 놀란 눈으로 트로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 그만두고 담배를 창틀에 비벼 껐다. 그때 트로이가 주먹으로 유리창을 깼다. 박살난 파편이 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 번 세 번 쳤다. 이고리는 그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소파로 데리고 가서 술을 먹여 재웠다. 다음날 트로이는 직접 유리창을 갈아 끼우고 갈랴와 료카에게 사과했다. 마음 좋은 부부는 신경 쓰지 말라고 그를 위로했다. 어차피 모임에 오는 친구들은 다들 고주망태가 되기 일쑤였고 일 년에 두어 번은 꼭 창문을 깼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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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liontamer

 

잠 안 오는 휴일 새벽이다.

 

몇 년 전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상당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랜 기억 속에서 미샤를 되살려내 단편 하나를 쓴 후, 원래는 가브릴로프 본편을 쓰려다 도저히 그게 되지 않았다. 그 당시 내겐 그런 성격의 글을 쓸 여력이 없었고 감정적으로도 많이 취약했다. 그래서 나는 본편에 잠시 등장하게 될, 하지만 꽤 중요한 인물 하나를 심리적 화자로 내세우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인물의 이름은 안드레이 트로이츠키, 하지만 친구들 사이에서는 트로이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그를 안드레이라고 부르는 것은 친구인 미샤가 유일하다. 그리고 트로이는 미샤가 자신의 진짜 친구라고 여기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 글을 쓰면서 나는 바닥까지 내려갔다. 그리고 조금씩 올라왔다. 아마도 다른 순간이었다면 그런 식으로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샤를 등장시킨 여러 이야기들 중, 아니, 이제껏 내가 써왔던 또다른 여러 이야기들을 통틀어 트로이가 등장하는 이 긴 소설은 가장 개인적이고 가장 부드럽고 상처입기 쉬운 글이었다. 이후 나는 이 글을 본편 우주에서 제외시켜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바로 앞에서 언급한 저 이유 때문에.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트로이가 등장하는 이 글은 가장 본편 우주에 어울리는 글일지도 모르겠다.

 

최근 불안함과 우울함으로 좀 고생하고 있어 그 당시 생각이 나서 글을 다시 뒤적여 보았다. 도움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발췌한 부분은 소설의 후반부이다. 이전에 한번 발췌한 적이 있는 극장의 경쟁자이자 선배인 울리얀 세레브랴코프와의 충돌로 징계를 받은 미샤가 고질적인 어깨 부상 때문에 모스크바에 진료를 받으러 가는 길에 대한 부분이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강의하는 박사후보생 트로이도 세미나 때문에 함께 간다. 둘은 차를 타고 모스크바 대로로 들어서고, 주유소 카페에서 요기를 한다. 대화를 나눈다. 별다른 사건은 없다. 대화와 트로이의 마음속 독백이 전부일 뿐이다.

 

서두에 등장하는 다닐로프는 키로프 극장의 행정책임자, 타마라는 발레단 코디네이터이다. (물론 가상의 인물들이다) 언급되는 세레브랴코프와 스타니슬라프 일린에 대해서는 전에 몇 번 발췌한 적이 있다. 니콜카는 소설 중반부에 등장하는 미샤의 애인 중 하나이다. 지나이다는 미샤의 발레학교 동기이자 파트너 발레리나이며 이 커플의 무대는 아주 인기가 많다. 이 소설에서는 몇 년동안 미샤와 같은 아파트에서 살기도 한다.

 

루빈슈테인 거리의 의사로 표현되는 인물은 유리 아스케로프로 이 사람에 대해서도 전에 미샤가 아플 때 돈키호테 무대에 올라갔던 얘기에서 나온 적이 있다. (이 사람은 서무 시리즈 16편에서 베르닌이 미샤의 편지를 전해주는 그 사람이기도 하다) '고로호바야'는 트로이의 집이 있는 레닌그라드의 거리 이름이다(지금도 있는 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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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징계를 받은 후에도 미샤는 백야 축제 준비 때문에 극장에 계속 나갔다. 6월에 다닐로프는 보다 못해 그의 등을 떠밀어 모스크바로 진료를 받도록 보냈다. 의사에게 직접 전화까지 건 후 극장 측에서 왕복 항공권을 비롯해 진료에 수반되는 모든 비용과 숙박비를 부담하도록 했다. 미샤는 타마라에게 차를 가지고 갈 테니 비행기 표 따위는 끊을 필요 없다고 말해주었다.

 

 

트로이는 미샤와 함께 모스크바에 갔다. 일린의 생일 파티에서 알게 된 마르크 카라바노프가 모스크바 국립대에서 열리는 국제 세미나에 그를 발제자로 초청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가 참석했던 행사 중 가장 규모가 컸기 때문에 트로이는 꽤 신경이 쓰였고 차에 앉아 잠시 발제 원고를 수정하기까지 했다. 모스크바 대로로 접어들기 위해 미샤가 핸들을 한 손으로 꺾으며 물었다.

 

 

“ 긴장했어? 세미나 준비하면서 그런 표정 짓는 건 처음 봐. ”

 

“ 아니, 난폭운전 때문에 긴장한 거야. ”

 

“ 어쩔 수 없어, 멀리 끌고 나간 적이 거의 없으니까. 그냥 날 믿든가 목숨을 걸어. ”

 

 

너무 바빠서 연초에 할 수 없이 차를 사기는 했지만 미샤는 그다지 운전을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모든 질서와 규율을 무시하는 성격답게 교통 법규도 예사로 어길 게 분명했다. 막 커브를 틀어 대로를 탔을 때 미샤가 속도를 줄이지 않은 덕분에 차가 크게 흔들리며 펄쩍 뛰어올랐다. 트로이는 원고를 덮으며 투덜댔다.

 

 

“ 믿을 수도 없고 목숨 걸기도 싫어. 가다가 세워라, 운전 바꿔줄 테니까. ”

 

“ 편하게 원고 수정이나 하면서 친구를 좀 믿어봐. ”

 

“ 지금도 신호 무시했잖아. ”

 

 

출발한지 한 시간도 안 되어 트로이는 미샤를 옆자리로 내몰고 운전대를 빼앗았다. 사실 난폭운전보다는 아픈 어깨에 무리가 갈까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미샤는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꺼렸고 진료에 대해서도 별 말 하지 않았다.

 

 

“ 네 발표는 언제야? ”

 

“ 모레. 오후 3시야. ”

 

“ 마르크와 같은 세션이야? ”

 

“ 아니, 그 사람은 첫날에 해. 난 베를린과 오슬로 쪽 팀이고. ”

 

 

트로이는 수첩을 미샤에게 건네주었다. 미샤는 주제와 일정표를 눈으로 한번 훑더니 흥미로워하며 물었다.

 

 

“ 나도 들어가 봐도 돼? 외부인도 참석할 수 있나? 많이 어려울까? ”

 

“ 전공자들 대상이긴 한데, 상관없어. 학생으로 봐주겠지. 근데 KGB는 좀 깔려있을 거야. 외국에서 온 발제자들이 있어서. “

 

“ KGB 없는 데가 어디 있다고. ”

 

 

미샤가 좌석 위로 무릎을 끌어당기더니 발목과 종아리와 허벅지를 문지르듯 마사지했다. 그 모습을 보니 트로이는 정신이 조금 산란했지만 운전대를 잡고 있었으므로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라디오를 켰다. 미샤가 채널을 맞춰놓았는지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다행히 졸린 음악이 아니라 차이코프스키의 슬라브 행진곡이었다. 트로이조차 아는 곡이었다.

 

 

“ 대낮부터 표트르 일리치를 틀어주시다니 감사 편지라도 보내야 하나. ”

 

 

미샤가 휘파람을 불더니 왼쪽 어깨를 원을 그리며 몇 차례 돌렸다. 티셔츠 사이로 붕대가 힐끗 보였다. 목 한가운데에는 아직도 거무스름한 멍이 남아 있었다. 울리얀 세레브랴코프를 생각하자 심장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펄떡거리는 것 같았다. 아마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는 아무런 죄책감이나 충격도 없이 세레브랴코프의 두개골을 박살내 죽였을 것이다. 그는 키가 큰 세레브랴코프보다 더 크고 팔이 긴 그 자보다 더 길게 구부러지는 거미 같은 팔을 가졌으니까. 그러면 미샤는 어떻게 했을까? 니콜카를 사정없이 내리치는 그의 일격 앞에 몸을 내던졌듯 세레브랴코프의 앞을 막아섰을까? 아니면 트로이가 그 더러운 놈을 죽이는 것을 그 가늠할 수 없는 검은 눈으로 가만히 보고 있었을까?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자는 스타니슬라프 일린을 모욕했기 때문이다. 트로이는 미샤가 웬만하면 자신에 대한 모욕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건 일린을 욕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자신의 작품을. 세레브랴코프가 그랬다고 했지, 루슬란을 일린이 만들어 주었다고. 계속 아양을 떨면 다른 작품도 만들어줄 거라고. 그는 미샤의 단호하고 우울한 음성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나는 스탄카에게 의지하지 않아.'

 

 

미샤는 창문에 머리를 기대더니 순식간에 잠들었다. 트로이는 아무 데서나 몸을 기대는 순간 잠들 수 있는 그의 능력이 부러웠다. 하지만 눈 아래 패인 그림자를 보니 그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것 같기도 했다. 그 애가 다시 고로호바야에 와서 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샤는 항상 그의 곁에서는 깊게 잘 잤기 때문이다. 아마 일린이 아니었다면 극장 앞의 그 아파트에 그렇게 꾸준히 머무르지 않았을 것이다. 트로이는 일린이 빨리 모스크바로 돌아가기를 원했지만 동시에 그런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미샤는 자기 춤이나 안무에 대해서라면 단호하고 자주적일지 몰라도 감정적으로는 일린에게 깊은 애착을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미샤가 왜 그렇게까지 자신의 독립성과 비의존성에 매달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애착과 갈망 역시 타인에 대한 의존의 일부라는 사실을 그 영리한 애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미샤가 루빈슈테인 거리의 의사를 갈망하듯 일린에게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트로이 자신에 대한 우정이나 신뢰와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었다. 그리고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그 무조건적 신뢰의 깊이에 가끔 전율하면서도 할 수만 있다면 유리 아스케로프나 스타니슬라프 일린과 자리를 바꾸고 싶었다. 드문 순간에는 니콜카를 생각했는데, 그럴 때면 미샤의 수많은 애인들 중 자신과 가장 닮은 인물이 어쩌면 그 정신 나간 살인자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히곤 했다.

 

 

 

몇 시간 후 트로이는 주유소를 발견하고 차를 세웠다. 미샤는 정말 차에 관심이 없는 모양인지 모스크바까지 가면서 기름도 제대로 채워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유소 옆에는 허름한 카페가 하나 있었기 때문에 그는 미샤를 흔들어 깨웠다.

 

 

“ 뭐 좀 먹고 가자. 도착하려면 아직 두어 시간 더 가야 해. ”

 

 

미샤는 귀찮아하며 다시 자려고 했다. 트로이는 지나이다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의 행태를 낱낱이 알려주겠다고 협박했다. 세상 천지에 미샤가 두려워하는 인물은 오직 그 자그마한 빨간 머리 아가씨 밖에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미샤는 모두가 한통속이라느니 지나를 소개해주는 게 아니었다느니 하고 투덜대며 그를 따라 차 밖으로 나갔다.

 

 

오후였지만 카페 안은 어두침침했다. 그나마 가장 깨끗해 보이는 테이블을 찾아내 미샤를 앉혀 놓고 트로이는 주문을 하러 갔다. 미샤에게 맡겨놓으면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없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불친절하고 계산이 느린 점원 덕에 꽤 시간이 흐른 후에야 무거운 쟁반을 들고 자리에 돌아와 보니 귀엽게 생긴 아가씨 두 명이 합석해 미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자들은 좀 더 남아 있고 싶은 눈치였지만 시계를 보더니 아쉬워하며 일어섰다.

 

“ 전화해요! ”

 

 

여자들이 나간 후 트로이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냅킨 두 장을 집어들었다. 립스틱으로 부드럽게 휘갈긴 전화번호와 이름이 붉은 꽃잎처럼 번져 있었다. 아니타와 카챠. 아니타는 모스크바 주소도 남겼다. 카챠의 이름 옆에는 조그만 하트.

 

 

“ 누가 누군지 분간이나 해? ”

 

“ 보라색 옷에 파란 눈이 아니타, 하이힐에 금발이 카챠. ”

 

“ 뭐하는 애들이야? ”

 

“ 아니타는 프룬젠스카야 전철역에서 일하고 카챠는 타자수야. 카챠는 이혼했고 세 살짜리 아들이 하나 있어. 아니타는 레닌그라드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해. 모스크바 남자들은 여자를 등쳐먹는대. ”

 

 

트로이는 새삼 놀란 눈으로 미샤를 쳐다보았다.

 

 

“ 넌 저런 여자들이 와서 하는 말을 다 기억해? 한둘이 아닐 텐데. 팬도 아니고. ”

 

“ 대부분. 남자들 얘기보다는 더 재미있으니까. ”

 

“ 팬들이 보내는 편지들도 다 읽어? ”

 

“ 그러진 못해, 시간이 없어서. 가끔 잠 안 올 때 조금 읽어. 재미있는 거 많아. ”

 

“ 연애편지라서? ”

 

“ 여자들이 얘길 하거나 편지를 쓰는 건 꼭 사랑 때문만은 아냐. 자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자기 얘길 하는 거야, 들어줬으면 해서. ”

 

“ 들어주면 뭐해, 답장도 안 쓰고 전화도 안 할 거면서. ”

 

“ 그건 그렇네. 안무나 춤에는 도움이 되지만. 이기적이지. ”

 

“ 미안한 마음은 들어? ”

 

“ 미안해야 정상인 거야? ”

 

 

미샤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트로이는 그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그런 쪽으로는 사춘기 소년처럼 남을 거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원하는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는 모를 것이다, 혹은 모르는 척 할 것이다.

 

 

“ 수프 식는다, 빨리 먹어. ”

 

 

얼룩진 사기그릇에 담겨 있는 보르쉬와 데친 소시지, 가시가 그대로 남아 있는 버터 끼얹은 대구와 흑빵, 토마토 샐러드, 잼을 얹은 블린 접시, 팩에 든 우유와 크바스 컵을 힐끗 보더니 미샤가 눈썹을 찌푸렸다.

 

 

“ 내 차는? ”

 

“ 다 먹으면. ”

 

“ 점점 지나를 닮아가고 있군. 좋지 않아. ”

 

 

수프를 한 숟갈 뜨면서 미샤가 진한 차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카운터 쪽을 바라보았다. 트로이는 우유팩을 뜯어 탁 소리를 내며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대구도 반으로 잘라 한 토막을 접시 앞쪽으로 밀었다. 미샤는 녹은 버터에 잠겨 있는 생선 토막과 소시지를 불행한 강아지 같은 눈으로 내려다보면서도 별 말 없이 음식을 먹었다.

 

 

이 빠진 컵에 담긴 진한 차를 마시면서 미샤가 물었다.

 

 

“ 너는 교수가 될 거야? ”

 

“ 한동안은 학교에 있겠지. 학위를 따려면 몇 년 더 걸릴 테니까. ”

 

“ 그 다음엔? ”

 

“ 아직 모르겠네, 교수가 되든지 학교 밖으로 나가든지 하겠지. ”

 

“ 밖으로? 모스크바로? 외국으로? ”

 

“ 외국은 무슨. 철의 장막 안에서 영문학 전공하는 사람이 나갈 수 있는 영어권이 어디 있다고. ”

 

“ 영어권이 아닌 쪽도 있잖아. 이번에도 베를린과 오슬로에서 온다면서. ”

 

 

미샤가 차를 다 마신 후 컵을 내려놓으면서 덧붙였다.

 

 

“ 마르크는 원래 블라디보스토크 출신인데 모스크바 대학에서 발탁해 갔잖아. 지나 때문에 레닌그라드로 옮겨 오려는 중이지만. 너도 모스크바로 갈 수도 있겠지. ”

 

“ 마르크는 인재잖아. ”

 

“ 왜, 너도 마찬가지야. ”

 

 

미샤가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카페를 나갔다. 트로이가 쟁반을 치우고 뒤따라 나갔을 때 그는 차 보닛에 반쯤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따스한 바람이 불어와 검은 머리칼이 연기와 함께 날개처럼 펄럭였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다른 쪽 다리를 길게 뻗은 채 앉아 연기를 뿜어내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 모습이 믿을 수 없을 만큼 괴롭고 쓸쓸해 보여서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가슴을 에는 듯한 한기를 느꼈다. 세상을 다 가질 수 있는 애가, 이미 반쯤은 가진 애가 그런 고독과 슬픔에 잠길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괴롭히는지도.

 

 

그때 카페 문을 열고 점원이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지 않았다면 트로이는 미샤를 끌어당겨 그 수그러진 뒷목과 펄럭이는 머리칼 위에 입맞추고 또 입맞췄을 것이다. 차 안으로 그를 밀어 넣고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급박하고 거세게 포옹했을 것이다. 그 애가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도록, 섹스의 취기와 누적된 피로에 젖어 다시 잠들 수 있도록 해줬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미샤가 담배를 다 피울 때까지 두어 발짝 떨어진 곳에 서서 기다렸고 이후 별 말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30분 쯤 후 트로이는 미샤에게 맥주 캔을 하나 따서 건네주었고 그 애가 열기로 미지근해진 술을 단숨에 마시도록 내버려두었다. 그 결과 미샤는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죽은 사람처럼 잠들어 있었다.

  

 

..

 

 

 

글 남겨주시면 힘이 될 것 같아요.

 

:
Posted by liontamer

 

노보시비르스크 극장장 해임 소식과 관련 기사들(http://tveye.tistory.com/3612) 때문에 간밤에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좀 복잡했다. 아마도 예술과 창작의 자유, 권력의 개입과 탄압에 대한 주제는 언제나 내게 중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좋든 싫든 우리 사회에서 나도 창작자의 위치는 아니지만 그쪽과 연관된 바닥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가면 갈수록 이쪽 상황도 갑갑해지고 있기 때문에 더 그렇다. 

 

몇 년 전부터 다시 쓰기 시작했고 종종 about writing 폴더에 약간씩 발췌하고 있는 일련의 미샤 야스민과 레닌그라드 우주에 대한 시리즈(이게 본편이고 서무의 슬픔 시리즈는 이걸 웃기게 변형한 패러디 장난..)에서도 이러한 주제는 계속 변주된다. 지금 쓰는 가브릴로프 본편의 배경 자체도 그렇다. 주인공인 미샤가 뉴욕 측과 협업해 올린 신작이 체제 도전과 금기 위반 요소로 공격당하고 기존 작품들도 체제 풍자 요소를 지적받는 와중에 이런저런 문제들이 얽혀 체포당한 후 일련의 고난을 거쳐 지방 소도시로 좌천되었기 때문이다. (그 소도시가 서무 시리즈에 나오는 베르닌의 도시... 왕재수식으로 말하면 ‘시골’...) 

 

노보시비르스크 기사들을 읽고 생각나서 이전에 썼던 글에서 잠깐 발췌해 본다. 이건 가브릴로프 본편의 프리퀄로 썼던 글이다. 프라하에서 쓴 글인데 총 3부로 이루어져 있고 심리적 화자가 모두 다르다. 발췌 부분은 3부의 중반. 3부의 화자는 미샤의 친구이자 볼쇼이 극장 안무가인 스타니슬라프 일린이다. 일린과 그의 딸 라라가 등장하는 단편 Jewels는 전에 여기 전편을 올린 적이 있다. 

 

여기서 일린은 수용소에 갇혔다가 고문 쇼크로 모스크바 비밀 클리닉으로 옮겨진 미샤를 면회하며 짧은 대화를 나눈다. 일린은 더 이상 춤을 추지 않겠다는 미샤를 회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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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샤는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 요즘 새로 작업하는 거 있어? 마지막 거 올린지 일 년 다 돼 가잖아. ”

 

“ 있었지. 누가 뜬금없이 춤을 안 추겠다고 해서 정말인지 확인해보려고 재미있는 거 만들고 있었는데. ”

 

“ 어떻게 재미있는 건데? ”

 

“ 말로는 설명하기 힘들어. ”

 

“ 그럼 좀 보여줘 봐. ”

 

“ 안 출 거라면서. 무대에 이제 안 올라간다더니. ”

 

“ 그래도 보여줘. 궁금하니까. ”

 

“ 사실은 계속 추고 싶은 거지? 홧김에 그랬던 거지? ”

 

“ 그런 거였으면 좋겠는데. ”

 

 

미샤는 조그맣게 휘파람을 불었다. 제대로 불지 못해서 쌕쌕거리며 바람이 빠져 달아나는 소리가 났다.

 

 

“ 추든 안 추든 상관없어. 네 작업은 항상 궁금해. 그러니까 보여줘. ”

 

“ 눈도 잘 안 보이면서. ”

 

“ 움직임은 보여. ”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한가운데로 갔다. 카펫이 깔린 바닥 위에서 구두를 신고 출 수 있는 동작 몇 개를 골라내 보여주었다. 마지막 동작을 보자 미샤의 표정이 변했다. 이 방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그 애의 얼굴에 아주 진지하고 강렬한 기운이 돌았다. 물감을 왈칵 쏟아놓은 듯 초점 없이 옆으로 길게 퍼져 있던 검은 눈동자에 예리한 광채가 떠올랐다. 그는 등을 똑바로 펴면서 살짝 거칠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 방금 그거 다시 해봐. ”

 

 

나는 다시 그 동작을 보여주었다.

 

 

“ 원래는 허리를 뒤로 더 젖혀야 해. 다음은 푸에테. 모렐 식으로 변형해서. 신발 때문에 그건 못 보여주겠다, 너무 좁고. ”

 

“ 뻣뻣해져서 그런 거 아니고? ”

 

“ 그것도 있지. 좀 봐줘. 난 무대 안 올라간지 10년 넘었잖아. ”

 

“ 그거 하고 나서 푸에테까지 추면 다시 체포되겠는데. 침대로 직행하는 키트리처럼 보일 거야. ”

 

“ 그러니까 모렐 식으로 변형하는 거지. 너 키트리 춰보고 싶어 했잖아. ”

 

“ 췄어. 뉴욕에서. ”

 

“ 뉴욕 어디? 언제? ”

 

“ 불새 작업할 때. 그쪽 무대 잡아놓고 비공개로 공연했었어. 한 시간짜리로 축소해서. 관객은 스무 명 정도밖에 안됐지만. ”

 

“ 바질은 누가 췄어? ”

 

“ 주드. 그 친구도 무릎 때문에 힘들어해서 스텝을 좀 바꿨지. ”

 

“ 의상도 입었어? ”

 

“ 왜, 키트리 의상 입은 거 보고 싶어? 아깝지만 전부 레오타드에 스카프만 둘렀어. 불새랑 비슷한 스타일이었지. 사실은 뉴욕 쪽 애들이 처음에 불새 안무를 따라오기 힘들어해서 그거 춰보게 한 거야. 바질 빼고 남녀 역할 다 바꿔서 췄어. 진짜 재미있었어, 주드가 날 두 번 떨어뜨린 거 빼면. ”

 

“ 야쿠쉬킨은 물론 몰랐겠지? ”

 

“ 응, 우리 쪽 애들도 몰랐으니까. 발각됐으면 공연 못 올리고 곧장 소환됐을걸. ”

 

“ 그래도 이 푸에테는 달라. 45회 연속 회전이니까. ”

 

“ 누가 출지 모르겠지만 사람 하나 잡겠군. 돌다가 피 토하겠어. 박자는 어떻게 맞춘담. ”

 

“ 아키모프가 편곡해줄 거니까 괜찮아. 마흔 다섯 번 도는 거 자신 없어? ”

 

“ 그걸 누가 자신 있다고 해. ”

 

“ 너. 전에 그랬잖아. 50번 돌 수 있다고. 연습실에서 도는 거 봤는데. 숫자도 세 봤어. 55번 돌았지. ”

 

“ 기억력이 정말 좋네. 그게 몇 년 전인데. ”

 

“ 작년이었어. 빼지 마. ”

 

“ 이젠 그렇게 못 돌 거야. ”

 

“ 헛소리야. 회복되면 전처럼 출 수 있어. ”

 

“ 항상 이렇다니까. 네 말 듣다 보면 자꾸 휘말려. 거의 넘어갈 뻔 했어. 무대 다시 올라가지 않기로 했는데. ”

 

“ 그냥 넘어와. 내 말은 항상 옳았으니까. 반대 못할걸. ”

 

“ 너무 과장된 거 아냐? 10분의 1 정도는 틀린 적 있잖아. ”

 

“ 그건 일부러 틀려준 거야. 그래야 네가 기분 상하지 않지. ”

 

“ 어쩐지 그것도 진짜처럼 들리는군. ”

 

“ 그래. 그러니까 빨리 낫기나 해. 나오면 45번 돌게 해줄 테니까. ”

 

“ 고마워. 그런데 나는 무대에 안 올라갈 거야. ”

 

 

나는 그 창백한 얼굴과 이제 희미한 불꽃이 살아난 검은 눈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 애가 지난 2월 뉴욕에서 돌아온 후 우리는 딱 한 번 만났을 뿐이었다. 6월 백야 축제에 그 불새를 올렸을 때였다. 아사예프가 안무와 엔딩을 모두 뜯어고쳤기 때문에 작품은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나는 뉴욕에서 그 공연을 보지 못했지만 마르가리타가 입수해 온 필름으로는 봤다. 미샤가 작년에 니진스키 트리뷰트를 작업하기 전부터 그 작품을 준비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공연이나 행사 때문에 모스크바에 올 일이 생기면 그는 시간을 쪼개서 나를 보러 오곤 했는데 한 번은 내게 몇몇 동작을 가르쳐 주고 이반 왕자 부분을 조금 춰보게 한 적도 있었다.

 

 

“ 이거 어려운데. 2인무지? 이런 식이면 파트너가 아주 힘들겠어. 여기서 이반을 들어서 돌려야 그림이 나올 것 같은데, 그 동작을 제대로 할 만한 여자애가 있을까? 이반 왕자를 거의 나만큼 작은 친구가 추지 않으면 불가능할 것 같은데 염두에 둔 무용수라도 있어? ”

 

2인무 맞아, 들어서 돌리는 것도 맞는데 상대는 내가 출 거니까 괜찮아. ”

 

“ 옐레나를 출 거라고? 아사예프가 혈압으로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는군. 이거 무대에는 못 올리겠네. ”

 

“ 이반과 불새가 추는 거야. 옐레나 파트는 아직 작업 중이야. ”

 

 

그러면서 미샤는 내 앞으로 와서 그 부분을 추기 시작했다. 내 예상대로 아주 어려운 동작이었지만 그 애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췄다. 제대로 된 파트너 역할을 하기에 난 이미 나이도 들고 몸도 굳었지만 미샤는 별로 어려워하지도 않았다. 그는 나를 40킬로도 안 나가는 가냘픈 발레리나 다루듯 쉽게 들어 올려 허공에서 돌렸고 내가 한창 무대에 올라가던 시절에도 엄두를 내지 못했던 동작들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마치 그 애가 자신과 나, 두 개의 육체를 자유롭게 오가는 것 같았다.

 

 

“ 대역은 어떻게 쓰려고 이런 걸 연속으로 집어넣지? 이걸 너 말고 누가 소화할 수 있다고. ”

 

“ 대역은 안 쓸 거야. 내가 추려고 만든 거라서. ”

 

 

그건 아다지오였다, 격정적인 사랑의 춤이었다. 그 2인무는 그 애가 옐레나를 추는 것보다도 더 문제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얘기해봤자 소용없는 일이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 애가 그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싶었다, 무대 위에서. 그 어느 곳에도 미샤처럼 추는 무용수는 없었다. 이전에 미샤의 그 영문학자 친구와 이야기하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저렇게 출 수 있었다면 목숨이라도 내놨을 걸요.

 

그건 지금도 유효했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 애처럼 출 수만 있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목숨이라도 내놨을 것이다. 나는 안무가였지만 그 이전에 무용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출 수 있었다면 결코 안무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애에게 그때 뉴욕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왜 춤을 그만 두겠다고 선언했던 것인지 묻고 싶었다. 6월에 레닌그라드에서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우리는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도 없었다. 이미 그에게는 보안 요원들이 여럿 딸려 있었다. 아파트는 두 번이나 수색당한 후였고 전화도 도청되고 있었다. 게다가 그 불새는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무대를 보는 것이 괴로울 정도였다. 물론 전후사정을 무시한다면 공연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안무를 대폭 수정해서 지나가 췄던 불새는 나름대로 매력적이었고 관객들은 백조의 호수를 연상시키는 해피엔딩에 즐거워했다. 하지만 그건 미샤가 원래 만들었던 작품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 화려하고 생기 넘치는 불새는 원본에 대한 조롱이자 끔찍한 패러디처럼 보였다.

 

 

 

..

 

 

 

 

일린이 안무해서 보여주는 작품, 미샤가 안무한 돈키호테, 불새, 니진스키 트리뷰트 등은 모두 실존하지 않으며 이 글을 위해 내가 만들어낸 것들이다. 후자의 두 작품은 미샤가 반대파들에게 공격을 받고 추락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이 두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전에 쓴 다른 소설에 자세히 묘사한 적이 있다. 나중에 올려보도록 하겠다.

 

위의 발췌문 화자인 스타니슬라프 일린이 등장하는 부활절 단편 Jewels는 아래 링크에.. 그러고보니 이제 부활절이네.. 

 

1장 : http://tveye.tistory.com/3390

2장 : http://tveye.tistory.com/3391

3장 : http://tveye.tistory.com/3393

4장 : http://tveye.tistory.com/3394

5장 : http://tveye.tistory.com/3395

 

  

 

:
Posted by liontamer

 

본편을 계속 손대지 못하고 서무 시리즈만 쓰고 있어서.. 아무래도 안될 것 같아 본편 우주에 속한 글들을 다시 뒤적이고 있다. (안 그러면 미샤는 사라지고 왕재수만 남을 것 같아 ㅜㅜ)

 

발췌한 부분은 2년 전 완성한 레닌그라드 배경의 장편 전반부이다. 전에 몇 번 발췌한 적이 있는데, 레닌그라드 대학 강사 트로이와 소년 시절~ 키로프 시절의 미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아래 내용은 소설의 2부, 시간적 배경은 1974년 4월, 미샤의 키로프 극장 첫 시즌이다. 미샤는 18살이다. 전에 그의 키로프 데뷔에 대해 발췌한 적이 있다. (거기서는 해적의 알리를 췄고 이후 지젤의 알브레히트를 췄다) 

 

그때 그가 키로프 정상의 프리마 발레리나인 니나 크류코바의 낙점을 받아 그녀의 파트너로 주요 레퍼토리를 추게 되었다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 시즌 후반부에서도 그녀와 함께 돈키호테의 주역을 추게 된다. 이건 그 첫 공연에 대한 얘기다. (엄밀히 말하면 공연 얘긴 별로 없지만)

 

물론 여기 언급되는 감독 게오르기 다닐로프, 미샤를 눈엣가시처럼 생각하는 선배 무용수 울리얀 세레브랴코프, 그의 친구 레오니드 핀스키, 니나 크류코바 등 등장인물은 모두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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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간의 연방 투어를 마치고 돌아온 후 미샤는 폐렴에 걸렸다. 의사와 극장 동료들은 열악한 버스 투어와 궂은 날씨 때문이라고 했지만 트로이는 그게 흠뻑 젖은 채 운하의 바람을 맞으며 걸어왔기 때문이라는 의심을 버릴 수가 없었다. 증세가 심각한 편이라 담당 의사는 그를 병원에 입원시켰고 며칠 동안은 가족을 제외하고는 면회도 시켜주지 않았다.

 

트로이는 걱정이 되어서 병원 근처를 맴돌았다. 사흘 째 되던 날에는 새로 온 간호사를 속여 형제라고 둘러대고 몰래 병실에 들어갔다. 그는 미샤에게 2인용 병실을 준 것에 놀랐다. 환자가 터져나가는 레닌그라드 병원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병실에는 다른 환자가 아예 없었다.

 

미샤는 뺨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환자복을 입고 초조한 얼굴로 병실 안을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링거 줄이 바닥에 질질 끌려 다녔다. 트로이를 보자 잠깐 반가운 표정을 지었지만 손을 흔들었을 뿐 다시 침대와 창문 사이를 도약이라도 하듯 큰 보폭으로 오갔다.

 

“ 누워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열이 장난 아닌 것 같네. ”

 

“ 오늘 공연이 있어. ”

 

“ 대역이 있을 거 아냐. ”

 

“ 세레브랴코프가 추는 꼴을 볼 수는 없어. ”

 

미샤의 눈에 잠깐 분노의 불이 확 일었다가 사라졌다. 트로이는 그게 누군지 몰랐지만 아마 사이가 좋지 않은 동료일 거라고 생각했다. 미샤는 자기 춤에 대해서는 겸양이란 것을 몰랐고 위계질서에 대한 개념 자체가 별로 없었다.

 

“ 지금 나가려던 참이었어. ”

 

“ 무슨 소리야, 거울이라도 좀 봐. 열 때문에 눈까지 빨개졌어. ”

 

“ 넌 의사가 아니잖아. ”

 

미샤는 손등으로 눈을 문지르며 짜증을 냈다. 평소의 차분한 태도는 사라지고 없었다. 자기처럼 건강하기 짝이 없는 젊은이가 어떻게 폐렴 따위에 걸려 병실에 갇혀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미샤는 짜증이 가신 목소리로 급하게 말했다.

 

“ 안드레이, 내과에 가서 아스케로프란 의사 좀 불러다 줘. ”

 

“ 그게 누구야? 너 담당의사는 그론스키란 사람 아니었어? ”

 

“ 그냥 아는 사람이야. 내 이름 얘기하고 좀 데려다 줘. ”

 

그래서 트로이는 2층으로 갔다. 복도 끝 방문에 유리 아스케로프라는 명찰이 붙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대기실에 환자들이 바글바글했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간호사가 다음 환자를 호명하러 나왔을 때 문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갔다. 환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화가 난 의사가 그를 쫓아내기 직전에 트로이는 미샤의 이름과 와 달라는 부탁을 전했다.

 

의사는 열린 문 사이로 환자들을 힐끗 보더니 간호사를 불렀다.

 

마리야, 10분만 급한 환자를 보고 올 테니 기다리라고 해줘요. 그리고 저기 세묜 그리고리예비치한테는 피부터 뽑고 오라고 해요. ”

 

병실로 가면서 의사가 물었다.

 

“ 극장에서 왔어요? ”

 

“ 아뇨, 친구예요. ”

 

“ 친구가 있긴 있었군. ”

 

혼잣말이었기 때문에 트로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유리 아스케로프는 짙은 갈색 곱슬머리에 키는 작지만 운동선수처럼 다부진 체격의 30대 의사였는데 안경과 흰 가운 때문에 그렇게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아스케로프가 들어오자마자 미샤는 인사도 하지 않고 대뜸 말했다.

 

“ 유라, 나갈 수 있게 도와줘. ”

 

“ 헛소리 하지 마. 그론스키가 날 죽이려고 할 걸. ”

 

“ 네 얘기 안 하면 되잖아. ”

 

“ 그저께 마로조프 비서가 데려다준 거 모르는 줄 알아? 난 모가지가 잘리고 싶진 않다고. 정 가고 싶으면 창문으로 나가. ”

 

창문은 왜? 복도로 나가면 되지. 나가는 건 문제가 아냐. 오늘 춤춰야 해. ”

 

“ 그래, 내일 관 속에 들어가고 싶으면 그렇게 하시지. ”

 

아스케로프가 나가려는데 미샤가 앞을 막아서며 단어에 힘을 주어 뚝뚝 끊어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 열만 좀 내려줘. 몇 시간만. ”

 

“ 그론스키가 처방해 준 거 있잖아. 그거 맞고 좀 자. ”

 

“ 자면 안 되니까 그렇지. 나가야 해. ”

 

아스케로프는 욕지거리를 하며 병실을 나갔다가 잠시 후 다시 돌아왔다. 가운 안에서 앰풀과 주사기를 꺼내면서도 계속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 침대에 좀 앉아. 정신 사납게 움직이지 말고. ”

 

미샤는 목적이 곧 달성되리라는 것을 알자 얌전하게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스케로프는 미샤의 입에 체온계를 쑤셔 넣은 후 손등에서 링거 바늘을 뽑았다. 잠시 후 체온계를 빼내 숫자를 들여다 본 의사는 한숨을 쉬었다.

 

“ 미친놈. 이제 나도 모르겠다. ”

 

아스케로프가 정체 모를 주사를 놔주자 미샤는 눈에 띄게 표정이 풀렸다. 눈으로 웃기까지 했다.

 

“ 너무 좋아하지 마. 몇 시간 안 갈 테니까. 난 여기 없었던 거야. ”

 

“ 그래, 고마워. ”

 

복도에서 아스케로프가 트로이에게 조그만 유리병을 하나 주었다.

 

“ 따라가요. 다시 열이 올라가면 이거 마시게 해요. 안 그러면 골치 아파질 수도 있으니까. ”

 

“ 그냥 미샤한테 주는 게 낫지 않았어요? 아니면 주사랑 같이 주거나. ”

 

정신 나갔어요? 아까 놔준 거랑 이걸 같이 하면 정말 관을 치우게 될 텐데. 그렇다고 저 자식한테 주면 극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다 마셔버릴 게 뻔한데. ”

 

“ 당신 생각보다 자기 관리를 잘 하는 애에요. ”

 

“ 자기 관리? 웃기는 소리. ”

 

병실로 들어왔을 때 미샤는 벌써 옷을 갈아입은 후였다. 환자복은 베개와 시트 위로 뭉쳐 넣고 담요로 씌워두었지만 누가 봐도 사람이 없다는 게 훤히 보였다.

 

“ 넌 영화도 안 봤냐? 이렇게 허술한 위장은 처음 봐. ”

 

“ 어젠 모르던데. ”

 

“ 어제도 나갔었어? ”

 

“ 리허설이 있었어. ”

 

트로이는 포기하고 미샤를 따라 극장까지 갔다. 그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니나 크류코바를 아주 가까이에서 보았다. 동료들은 미샤가 입원했었다는 것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미샤가 최종 점검 때문에 무대에 올라가 있는 동안 트로이는 오케스트라 핏 바로 앞의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하지만 점차 공연 시간이 다가오자 관계자들이 와서 그를 몰아냈고 아무리 트로이가 사정을 꾸며내도 통하지 않았다. 미샤는 크류코바와 공연에 대해 얘기하러 분장실로 가버린 후였다. 그날따라 분장실 출입도 엄격하게 막혔다. 할 수 없이 그는 안면이 있는 안내원 노파를 찾아내 유리병을 맡기며 미샤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트로이는 미샤가 그 물약을 마셨는지 걱정이 되어 공연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필이면 돈키호테여서 4막까지 있는 공연이었다. 좌석은 완전히 매진이었고 미샤는 그에게 자리를 마련해 줄 정신이 없었으므로 그는 안내원의 도움을 받아 3층 가장자리 칸막이 좌석 뒤에 서서 공연을 봐야 했다. 기억나는 거라곤 화려한 스페인 의상을 입은 니나 크류코바를 미샤가 한 손으로 들어올려 포즈를 취하던 것과 4막의 결혼식 장면에서 그가 무대를 빙글빙글 돌며 로켓처럼 날았을 때 관객들 모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전쟁터의 군인들처럼 함성을 질러댄 것뿐이었다.

 

‘ 다행이야, 약을 마셨구나. ’

 

트로이는 커튼 콜이 계속되는 동안 칸막이를 나가 분장실 쪽으로 갔다. 그러나 분장실 앞도 이미 상기된 얼굴의 여자들로 꽉 차 있었다. 머리가 새하얀 안내원 노파가 꽃만 두고 썩 나가라며 그들을 꾸짖고 있었다. 그녀는 팬들 때문인지 트로이도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그는 계단 구석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가서 한참 동안 기다렸다. 극성팬들도 모두 쫓겨나가고 다른 무용수들도 하나둘 사복으로 갈아입고 나오기 시작했지만 미샤는 나오지 않았다. 마침 같은 무대에 올라갔던 레오니드 핀스키가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트로이는 그에게 갔다. 사교성이 좋은 핀스키는 그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 공연 봤어요? 오늘 정말 대단했죠? ”

 

“ 그래요, 대단했어요. ”

 

건성으로 대답한 후 그는 핀스키에게 정말 궁금한 것을 물었다.

 

“ 미샤 봤어요? 크류코바와 함께 있나요? ”

 

“ 벌써 나갔을 텐데. 제가 가장 늦게 나왔을걸요. 니나는 오늘 남편이 오기로 되어 있고. ”

 

“ 분장실에 가서 봐줄 수 있어요? 계속 아팠거든요. ”

 

“ 괜찮다고 하던데요. 아까도 기침만 좀 하더라고요. ”

 

핀스키는 트로이가 지나치게 걱정이 많다고 생각하는 눈치였지만 순순히 미샤의 분장실로 갔다. 트로이도 안내원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따라 들어가다가 핀스키가 소리를 지르는 것을 들었다.

 

미샤는 물약을 제때 마시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샤워를 하고 나오다 정신을 잃었는지 젖은 타월을 머리에 두르고 바지도 다 끌어올리지 못한 채 바닥에 모로 누워 있었다. 얼굴과 목, 드러난 상체 전체가 온통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감겨 있는 눈꺼풀만 하얗게 보였다.

 

“ 아, 이런. 너 정말 사람 놀라게 할 거야? 그냥 울리얀이 추게 내버려둘 것이지. ”

 

핀스키는 울상이 되어 욕을 하면서 자기 재킷을 벗어 동료의 몸을 덮었다. 그리고는 복도 밖으로 뛰어나가며 소리쳤다.

 

“ 안나 미하일로브나, 루키얀한테 빨리 와달라고 해 주세요! 게오르기 페트로비치도 계시면 좀 불러주세요! ”

 

트로이는 화장대 위에서 유리병을 발견했다. 뚜껑도 따지 않은 채였다. 그는 급하게 뚜껑을 열고 미샤의 입을 벌려 물약을 쏟아 넣었다. 별로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그는 손놀림이 너무 둔했고 미샤는 기침을 하더니 약을 반 이상 뱉어내 버렸다.

 

다행히 그때 책임자인 게오르기 다닐로프가 극장 의료요원과 함께 분장실로 들이닥쳤다. 고집쟁이라느니 말썽꾸러기라느니 문제아라느니 하는 욕을 줄줄이 쏟아 부으면서도 사색이 되어 미샤를 자기 차로 데려갔다.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트로이는 다닐로프를 따라가서 병원 주소를 알려주었다.

 

“ 폐렴? 병원에서 빠져나온 거라니, 입원을 했었다니! 이 미친 녀석을 내가 기필코 잘라 버리고 말겠어! ”

 

물론 그건 다닐로프의 진심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정부 관료 못지않게 권위적이라고 소문난 데다 때 이른 요통으로 고생하고 있는 그 깐깐한 인물이 직접 미샤를 들쳐 업고 계단을 달려 내려갔을 리가 없었다. 어쨌든 그 문제아는 키로프가 지난 가을에 발굴한 최상급의 보물이었으니까.

 

 

트로이는 다닐로프의 차에 함께 타고 갔다. 순전히 병원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빈슈테인 거리까지 차를 몰고 가는 내내 다닐로프는 투어가 어떻고 알렉세이와 울리얀이 어떻고 하며 지껄이다가 저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주제에 성깔이 보통이 아닌 애송이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고 탄식했다. 트로이는 발레단의 모든 행정을 책임진 번듯한 고위직 신사가 그렇게 북받친 어조로 끝없이 푸념을 늘어놓을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장광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트로이는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미샤의 불처럼 뜨거운 이마에 줄곧 손을 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아스케로프를 불러다주고 극장에 가도록 내버려둔 자기 때문이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병원에서 해열 조치를 받은 후 미샤는 곧 정신을 차렸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트로이에게 공연을 봤느냐고 물었고 1막에서 스텝을 한번 실수했다고 투덜거렸다. 다닐로프의 존재는 완전히 무시했다. 마침내 안도의 한숨이 분노로 바뀐 다닐로프가 그에게 다음 시즌에도 충분히 출 수 있는 역인데 왜 미친 짓을 했느냐고 꾸짖었다. 아픈 건 징계 사유가 되지 않지만 그걸 숨기고 무대에 올라가서 공연을 망치는 건 완벽한 징계감이라고 소리를 높였다. 미샤는 열이 올라 토끼처럼 빨개진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대꾸했다.

 

“ 망치지 않았잖아요. ”

 

물론 사실이긴 했지만 다닐로프는 그 대답 때문에 더욱 화가 났다.

 

“ 울리얀이 있잖아, 자네보다 열 배는 경험이 많은 친구가! 니나와도 수십 번은 더 췄어! ”

 

“ 당신의 그 공훈예술가는 도약을 못해요, 게오르기 페트로비치. ”

 

문외한인 트로이조차 미샤가 동료 무용수를 폄하하면 안 된다는 불문율을 건드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얘기가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니 대선배인 모양이었다. 트로이는 걱정이 되어서 미샤의 등을 세게 찔렀다.

 

“ 자네 징계야, 퇴원하자마자 내 사무실로 곧장 튀어와. ”

 

화가 난 다닐로프가 발을 쿵쿵 구르며 나간 후 트로이는 미샤를 책망했다.

 

“ 너 왜 그래, 감독한테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해. ”

 

“ 세레브랴코프가 내 신발에 못을 숨겨 놨다고. 페름에선 집단농장 저수지에 밀어 넣었어. 그래서 지금 이 모양이 된 거야. ”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미샤는 주먹으로 매트리스를 두어 번 내리치며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 그런데 내가 그 자식한테 역을 내줘야겠어? 공훈예술가든 선배든 상관 안 해. 과거의 영광에 매달려 유유자적하는 놈이야, 역겨운 프로파간다 발레로 떴던 인간이라고. ”

 

분을 참을 수 없는지 미샤는 숨을 몰아쉬며 이를 딱딱 부딪쳤다.

 

못을 숨겨놓다니! 저수지에 밀어 넣어? 왜 그런 얘긴 감독한테 하지 않는 거야? ”

 

“ 그럼 진짜 얼간이가 되니까. 축구팀이나 군대와 똑같은 거야. ”

 

“ 둘 다 발을 들여놓은 적도 없는 주제에 말은 잘 하는군. 다른 동료들은 몰라? ”

 

미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 손으로 가슴을 누르며 기침을 참아보려고 애썼다. 얼굴에 다시 열꽃이 확 올라왔다.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향한 살의를 느꼈다. 농장 저수지에 밀어 넣었다니. 세균이 득실거릴 게 뻔한 그 더러운 저수지에. 폐렴으로 끝난 게 운이 좋은 건지도 몰랐다. 얼굴도 모르는 그 인간의 목을 부러뜨리고 싶었다. 뱃가죽에 식칼을 쑤셔 박고 싶었다.

 

트로이가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는 동안 미샤는 10분 가까이 멈추지도 않고 심하게 기침을 해댔다. 기침을 멈춰보려고 물을 반 컵 정도 마셨다가 다시 시트 위에 물을 왈칵 뱉어냈다. 트로이는 경련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고 그를 뒤에서 껴안았다. 등과 가슴이 격심하게 들먹이고 있었다. 한참 후 기침을 멈추고 좀 안정된 후 미샤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 그러지 마. ”

 

“ 뭘? ”

 

“ 죽이러 가지 말라고. ”

 

“ 이젠 독심술이라도 하는 거야? ”

 

“ 그런 표정이라면 세 살짜리 애도 알아차릴걸. ”

 

미샤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뒤로 기댔다. 열에 들떠 입술이 부르터 있었다. 트로이는 그의 입술과 턱을 타고 흘러내린 물을 소매로 닦아주었다.

 

“ 신경 쓸 거 없어. 곧 지나갈 일이니까. ”

 

“ 그놈이 잘 나가는 선배라며. ”

 

“ 선배들이 아주 많아. ”

 

생각에 잠긴 얼굴로 미샤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열기로 흐려진 검은 눈에 파란 불꽃이 반짝였다.

 

“ 상관없어. 실력으로 보여주면 되는 거니까. ”

 

트로이는 웃기 시작했다. 그 침착하고 도도한 미샤 야스민이 대중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말을 어린애처럼, 그것도 솔직하고 진지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트로이는 갑작스럽게 너무나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혀 머리가 핑 돌았다. 병실이 아니었다면 미샤가 그렇게 아픈데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포옹하며 사랑을 나눴을 것 같았다.

 

물론 그는 그렇게 하지 않을 만큼의 이성은 있었다. 미샤가 다시 열이 올라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당직을 서고 있던 아스케로프를 데리러 갔다. 아스케로프가 담당의사의 처방보다 좀 더 센 주사를 놔준 후에야 그는 기침을 멈추고 잠을 잘 수 있었다. 트로이는 다음날까지 병실에 남아 있었고 걱정에 빠진 율리야가 아들을 보러 왔을 때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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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편을 쓸 때 등장인물 이름 짓는 게 너무 피곤해서(사람이 너무 많이 나와서..) 가끔은 좋아하는 예술가 이름에서 따오기도 하고 마린스키 무용수들 이름에서 따오기도 했다. 울리얀 세레브랴코프는 화가 지나이다 세레브랴코바에서 따왔다.  세레브랴코프와 미샤의 악연은 꽤 오래 지속된다. 의사 유리 아스케로프의 성은 현재 마린스키 제1 솔리스트인 티무르 아스케로프에서 따왔다. 그냥 성만 따온 거라 아무 관계 없음. 

 

초반부에 아스케로프가 언급하는 '마로조프'는 레닌그라드 출신 고위 당 간부로 미샤의 후원자이다. 이 사람은 전에 가끔 언급된 소위 '크레믈린 아저씨'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와는 다른 인물이다(그리고 정치적인 라이벌이기도 하다)

 

..

 

중간에 트로이를 분장실로 안내해주는 레오니드 핀스키는 전에 올렸던 단편 illuminated wall의 화자이다. 그 글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385

 

서두에 언급한 미샤의 키로프 데뷔와 알리, 알브레히트에 대한 얘긴 여기 : http://tveye.tistory.com/3128 

 

이 글의 심리적 화자인 트로이와 미샤의 이야기들은 about writing 폴더에 몇 번 발췌한 적이 있다.

 

dance 폴더에서 돈키호테로 검색하면 이 발레에 대한 화보와 리뷰, 각종 동영상 클립들을 볼 수 있다.

 

 

:
Posted by liontamer

 

연말정산 때문에 너무 화딱지 나서, 원래 쓰던 본편도, 서무의 슬픔 시리즈도 잠시 미뤄두고 토끼(나)와 쿠마가 등장하는 짧은 패러디 드라마를 하나 썼다. 연말정산 때문에 망하는 토끼 얘기로, 발레 '지젤'의 오마쥬이다. 연말정산 때문에 짜증내며 친구랑 대화하다 아이디어가 나왔다.

 

제목은 '토끼의 비극', 부제는 '쿠마와 유리지갑의 망령들'이다. 평소 나의 TASTY AND HAPPY 폴더를 보신 분들이라면 쿠마와 케익에 대한 이야기들을 잘 아실듯. 등장인물들은 모두 우리 집 인형들 ㅋㅋ + 내 친구('쥬인'이란 이름으로 등장. 토끼의 옛 룸메이트이자 주인 노릇했었음)

 

발레 '지젤' 오마쥬이므로 드라마 올리기 전에 지젤 줄거리 먼저. 내가 이 얘기에서 필요한 부분을 중점적으로 다시 정리했음.

 

 

<발레 '지젤' 줄거리>

 

1막

 

춤 잘 추고 아름다운 시골 처녀 지젤은 로이스라는 청년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로이스는 사실 평민으로 변장한 알브레히트 백작이었다. 둘은 사랑에 빠져 희희낙락한다. 지젤은 ‘사랑한다 - 사랑하지 않는다’ 꽃점을 치는데 꽃잎을 세어보니 후자인 것 같아 절망하지만 이때 알브레히트가 꽃잎을 한 개 떼어버리고는 ‘사랑한다’라는 결과를 보여준다. 둘은 행복하게 춤을 추고 논다. 지젤의 엄마는 심장이 약한 딸을 걱정하며 그렇게 춤추기를 좋아하다 남자에게 농락당해 죽으면 밤마다 모여들어 춤을 추며 남자를 꼬여 죽이는 윌리 유령이 된다고 경고한다.

 

시골 마을에 귀족들이 사냥 행차를 온다. 지젤 엄마가 귀족들을 집으로 모신다. 지젤은 아름다운 귀족 아가씨 바틸드 앞에서 춤을 추고 목걸이도 상으로 받는다.

 

지젤을 짝사랑하는 산지기 힐라리온은 아무래도 수상해서 알브레히트의 뒤를 밟아 그의 망토와 칼을 찾아내고 그가 귀족임을 알아낸다. 그는 지젤에게 이 사실을 폭로하지만 지젤은 알브레히트가 ‘아니야 아니야~’라고 말하자 사랑의 콩깍지 때문에 그 말을 믿는다.

 

화가 난 힐라리온은 사냥 나온 귀족들을 호출, 알고 보니 바틸드는 알브레히트의 약혼녀였다. 충격을 받은 지젤은 광란하다 심장마비로 죽는다. 알브레히트는 힐라리온을 비난하다 절망하며 퇴장한다.

 

2막

 

한밤중 묘지. 남자들에게 배신당해 죽은 여자들이 윌리 유령들이 되어 모여든다. 이들의 여왕은 매정하고 아름다운 미르타. 오늘은 새 윌리가 오는 날이다. 미르타가 묘지에서 지젤을 소환한다. 지젤은 여왕의 명령에 따라 춤을 춘다.

 

알브레히트가 참회하며 묘지를 찾아온다. 지젤의 무덤에 꽃을 바치고 뉘우치며 고뇌하는데 지젤의 유령이 나타나 그를 품어준다.

 

그러나 이때 힐라리온이 윌리들에게 휩싸여 나타난다. 미친 듯이 춤을 추며 살려달라고 애원하지만 미르타는 외면하고 힐라리온은 결국 윌리들에게 희생당한다.

 

다음 차례로 알브레히트가 등장한다. 힐라리온과 같은 운명을 겪을 찰나 지젤이 나타나 그를 감싸고 용서를 구한다. 지젤은 그를 구하기 위해 계속해서 춤을 춘다. 미르타는 알브레히트를 용서하지 않으려고 하고 알브레히트도 미친 듯이 춤을 추며 파멸의 위기로 접어들지만 그때 닭이 울고 새벽이 온다. 윌리들은 사라지고 지젤은 사랑하는 남자를 구원한 후 천천히 무덤 너머로 사라진다. 알브레히트는 참회하며 무릎 꿇는다.

 

...

 

그럼 이제 본격적인 토끼의 비극~

 

** 이 글을 무단 복제, 전재, 배포하지 말아주세요 **

 

 

** 이 글을 아이디어를 내준 친구 '쥬인'과 그간 쿠마를 아주 이뻐해주신 '치즈홍차님'께 바칩니다 **

 

 

 

토끼의 비극

- 부제 : 쿠마와 유리지갑의 망령들 -

(발레 ‘지젤’에 대한 오마쥬)

 

 

 

 

<등장인물>

 

 

토끼(지젤)

 

쿠마(알브레히트)

쥬인(토끼의 주인, 지젤 엄마)

과모츠카(힐라리온)

용감한 조지, 마샤, 타마라 등등(지젤 친구들)

국세청(알브레히트 약혼녀 바틸드)

여왕과 유리지갑들(미르타, 윌리들)

 

 

 

 

<제 1막>

 

(막이 오르면 조그만 오피스텔 소파에 토끼가 앉아 쿠마를 무릎에 앉혀놓고 놀고 있다. 주변에는 마샤, 타마라 등 마트료슈카들과 용감한 조지를 비롯한 영 플레이모빌 등이 늘어서 있지만 토끼의 관심은 오로지 쿠마에게 쏠려 있다. 찻잔에 차를 따라주고 케익을 차려준다. 쿠마의 귀여움에 토끼는 정신이 혼미하지만 어딘가 근심스러운 표정이다.)

 

 

쿠마 : 토끼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나만 봐야지~

 

토끼 : 쿠마야, 연말정산 시즌이 돌아왔는데 이번에 바뀐 게 많아서 돈을 토해내야 할지도 모른대. 이전까지는 환급을 받아서 2월에 좀 숨통이 트여서 너한테 맛있는 케익도 더 많이 사줬잖아. 근데 토해내게 되면 너와 이렇게 행복한 티타임을 갖는 것도 못하게 될지도 몰라. 돈을 토해내면 난 파산하게 되고 그럼 케익을 사주지 못할 거야. 그럼 쿠마는 날 버릴지도 몰라 ㅠ

 

쿠마 : 토끼야, 걱정 마. 너는 부양가족이 많으니까 공제를 많이 받을 수 있잖아. 나도 있고 용감한 조지와 그 외 이름 없는 놈들, 마샤, 타마라, 로조치카가 있잖아. 게다가 마샤랑 타마라랑 로조치카는 뱃속에 새끼들도 엄청 많잖아.

 

(토끼의 부양가족들)

 

 

 

 

 

 

토끼 : 그렇지만 정부에서 제도를 바꿨대. 바뀐 거 읽어봐도 하나도 모르겠어. 혹시라도 토해내면 어쩌지.

 

(토끼, 갑자기 옆에 있던 꽃을 한 송이 뽑아내 꽃잎을 한 장 한 장 세어보기 시작한다)

 

 

 

토끼 : (꽃잎을 세면서) 환급된다, 토한다, 환급된다, 토한다, 환급된다.... 토한다!!! 으흑...

 

(토끼 : OTL 포즈가 되어 극도로 절망한다)

 

 

 

쿠마 : (꽃잎을 잽싸게 한 장 뜯어낸 후 토끼에게 꽃을 보여주면서 하나하나 센다) 환급된다, 토한다, 환급된다, 토한다, 환급된다!

 

토끼 : (반색한다) 환급되는구나! 꺄하하!!

 

(신난 토끼는 쿠마의 손을 잡고 소파에서 팔짝팔짝 뛰더니 그 길로 외출, 온 동네 케익 가게를 순회하며 온갖 종류의 크림과 딸기가 얹힌 케익들을 사들인다. 쿠마와 함께 마음껏 먹으며 기뻐한다)

 

 

 

 

(이 광경을 과모츠카가 지켜보고 있다.)

 

 

 

과모츠카 : (독백) 난 무려 괌에서 온 예쁜 애인데 토끼는 맨날 저 미련하고 식탐 많은 곰팅이한테만 정신이 팔려서 날 봐주지도 않아. 분명 저 곰팅이 때문에 토끼가 망할 거야.

 

        

 

(모두가 과모츠카를 무시한다.)

 

(이때 토끼가 쿠마와 함께 케익 상자들을 한 아름 안고 들어온다. 마침 놀러온 쥬인이 토끼를 타이른다)

 

  (사진 제공 : 쥬인)

 

쥬인 : 이 철없는 토끼야, 케익 좀 작작 사들여. 곰한테 오냐오냐하면서 자꾸자꾸 케익을 사 먹이다가는 연말정산 때 파산하고 유리지갑이 된다!

 

토끼 : 아니야, 나 환급받아. 여태까지 꼬박꼬박 환급받았어.

 

쥬인 : 이번에 연말정산 제도가 바뀌었단 말이야. 잘못하면 싱글세 폭탄을 맞게 될지도 모르니 낭비 좀 그만해. 저 숲속에 파산해서 죽은 유리지갑들 많아.

 

토끼 : 걱정 마 쥬인. 난 부양가족도 많고 신용카드, 체크카드, 현금영수증을 잘 섞어서 써왔고 심지어 올해는 월세까지 추가로 생기고 기부금도 더 냈는걸. 난 안 토할 거야~

 

쥬인 : 제발 그러길 빈다. 그래도 쿠마한테 너무 현혹되지 마.

 

(토끼와 쿠마, 아랑곳하지 않고 케익을 퍼먹으며 신나게 논다. 이때 사랑받지 못해 화가 난 과모츠카가 불쑥 등장한다)

 

 

 

과모츠카 : (쿠마를 가리키며) 토끼야! 넌 저 곰팅이에게 속고 있어! 저놈은 널 현혹해서 파멸로 이끌고 있는 거야! 저건 식충이 곰팅이일 뿐 부양가족이 아니란 말야! 넌 이러다 다 토해내고 파산할 거야!

 

토끼 : (깜짝 놀람) 그게 무슨 소리야!

 

 

 

쿠마 : (과모츠카에게 주먹질 하는 시늉, 토끼에겐 귀여운 눈망울 어택) 토끼야 저런 찌질한 애 말 듣지 마. 괜히 우리 질투하는 거야. 넌 환급받을 거야. 아까 꽃점도 쳤잖아. 부양가족도 많고...

 

토끼 : 그렇지? 맞아, 쿠마가 맞아. 과모츠카 넌 왜 그러니!

 

과모츠카 : (분노) 뭐야? 좋아, 현실을 직시하게 해주지. 나와라 국세청!!

 

(과모츠카의 소환에 국세청의 화신이 등장한다. 연말정산 매뉴얼과 기타 잡다한 수첩을 들고 있다. 모두가 깜짝 놀란다)

 

 

 

국세청 : 에, 그러니까.. 토끼. 당신은 월급쟁이에 1인가구로군요. 토해낼 게 좀 많겠는데.

 

토끼 : 엥? 그게 무슨 소리에요. 난 부양가족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요. 여기 우리 쿠마부터 시작해 마샤(새끼 열 마리), 타마라(새끼 다섯 마리), 로조치카(새끼 스무 마리), 여기 용감한 조지, 나머지 애들 넷... 부양가족 공제만 받아도... 그리고 없었던 월세도 추가됐고 기부금도 전보다 훨씬 많이 냈는걸요.

 

 

 

 

국세청 : 어휴, 어딜 가나 이놈의 월급쟁이들이란. 여기 바뀐 산식과 매뉴얼을 보란 말이오! 게다가 저런 곰팅이와 나무인형들, 플라스틱 인형들은 부양가족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법령이 있소! 토끼 당신은 1인가구란 말이오! 이번에 싱글세가 생긴 거 모르시오? 공제 범위도 대폭 축소됐소! 월세와 기부금 그까짓 것 추가해봤자 복구는 불가능하오! 자, 여기 당신의 가상 연말정산 결과가 있소! 엄청 토해 내는구만. 두 눈으로 확인하시오!

 

(국세청, 가상 연말정산 결과가 적힌 쪽지를 토끼의 눈앞에 들이댄다. 토끼, 쪽지에 적힌 숫자를 보고 경악한다)

 

 

 

 

토끼 : (횡설수설한다) 마이너스여야 환급인데 왜 마이너스가 안 보이지? 왜 음수가 아니라 양수지? 응? 환급받아야 하는데? 응? 나 왜 1인가구지? 응? 이거 환급받는 거지? 오타 난 거지? 어? 나 토하나? 나 토하는구나! 어, 나 파산하나? 꺄하하 나 파산하는구나!

 

(토끼, 절망해 귀를 휘두르고 팔짝팔짝 뛰며 광란한다. 쥬인이 토끼를 껴안고 위로한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토끼, 충격으로 귀를 접고 쓰러져 죽는다. 모두 충격에 빠진다)

 

쿠마 : 헉! 토끼야아!! 이게 다 너 때문이야, 과모츠카!

 

과모츠카 : 헛소리 마랏! 다 너 때문이야! 네놈이 토끼를 현혹해서 자꾸 케익을 사게 만들고 결국 파산으로 몰고 간 거야! 귀여움으로 토끼를 파멸시켰어!

 

쿠마 : 아아악!!!

 

(쿠마, 오열한다. 막이 내린다)

 

 

 

<제 2막>

 

(숲 속 묘지. 토끼의 비석이 서 있다. 과모츠카가 슬퍼하며 나타난다)

 

 

 

과모츠카 : 흑흑, 불쌍한 토끼. 곰한테 속아서 파산하고 죽었어. 극락왕생하거라... (꽃을 바치고 퇴장한다)

 

(텅 빈 숲속에 젊은 남녀의 유령들이 나타난다. 남자는 넥타이를 맨 경우도 많다. 이들은 연말정산 결과 싱글세 폭탄을 맞아 돈을 토해낸 충격으로 파산하고 사망한 유리지갑의 망령들이다. 모두들 한 손에는 깨진 유리지갑을 들고 있다. 이들을 이끄는 것은 유리지갑 여왕이다)

 

   

 

유리지갑 여왕 : 오늘 토끼 한 마리가 우리 대열에 합류하였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부양하던 귀여운 인형들의 배신으로 1인가구가 되어 싱글세 폭탄을 맞고 죽었다고 한다. 그럼 우리의 일원인 토끼를 소환하도록 하겠다. 토끼야 나오너라~

 

(비석 뒤에서 깨진 유리지갑을 든 토끼가 귀를 축 늘어뜨리고 불쌍한 표정으로 등장한다) 

 

 

유리지갑 여왕 : 토끼, 너도 이제부터 유리지갑이 되었다. 우리를 파멸시킨 원흉인 귀여운 인형들이 묘지에 찾아오면 다 같이 유리지갑으로 두들겨 패서 응징하도록!

 

토끼 : 근데 우리를 파멸시킨 원흉은 귀여운 인형들이 아니라 국세청...

 

유리지갑 여왕 : 국세청이란 놈은 원체 무시무시한 놈이라 유리지갑으로 아무리 패도 끄떡없으니 우리 힘으로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인형들을 먼저 처치하는 것이야! 시범을 보여주마. 얘들아, 가서 하나 잡아 오너라~!

 

(유리지갑들, 여왕과 함께 퇴장. 토끼, 두리번거리다 일단 퇴장)

 

(쿠마, 담요 드레스를 두르고 한손에 케익 상자를 들고 침통한 표정으로 등장한다. 토끼의 비석 앞에 케익을 바친다)

 

 

 

쿠마 : 흑흑, 토끼야. 잘못했어. 케익은 맛있었는데... 놀 때는 좋았는데. 이제 토끼 없어. 아무도 나한테 케익 안 사줘 ㅠㅠ 토끼야 보고 싶어. 토끼야아아!

 

(토끼가 깡충깡충 뛰어와 쿠마를 꼭 안아준다. 함께 케익을 먹는다)

 

 

 

 

토끼 : (케익을 다 먹고 나서) 쿠마야, 여기는 위험한 곳이니 어서 돌아가도록 해. 새 주인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야 해.

 

쿠마 : 싫어 싫어, 난 토끼가 좋아. 토끼가 주인이어야지! 다른 주인들은 토끼처럼 케익 많이 안 사줄 거야!

 

토끼 : 아이 참 쿠마야. 나도 너랑 같이 살고 싶지만 난 유리지갑들과 같이 살게 됐어. 너 여깄으면 큰일나. 얼른 가.

 

 

 

쿠마 : 잉잉, 토끼야. 잉잉...

 

토끼 : 앗, 유리지갑들이 온다! 숨어!

 

(토끼와 쿠마, 함께 숨는다. 이때 유리지갑들이 과모츠카를 끌고 우르르 몰려온다. 유리지갑 여왕이 준엄하게 가운데로 나선다)

 

 

 

 

유리지갑 여왕 : 이 요망한 인형을 매우 쳐라!

 

과모츠카 : 으앙, 내가 무슨 죄가 있다는 거야! 토끼를 파멸시킨 건 내가 아니라 쿠마란 말이야!

 

유리지갑 여왕 : 시끄럽다! 얘들아 응징해라!!

 

(유리지갑 망령들, 한 손에 든 깨진 유리지갑으로 과모츠카를 마구 때린다. 과모츠카는 만신창이가 되어 빈사 상태로 끌려나간다)

 

 

유리지갑 여왕 : 그 다음 차례!!

 

(유리지갑 망령들이 쿠마를 끌고 우르르 몰려나온다. 쿠마, 겁에 질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여왕을 보고 실낱같은 희망으로 속삭이듯 묻는다)

 

 

 

쿠마 : 케익 사주나?

 

유리지갑 여왕 : 뭣이! 저것이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얘들아 저 미련한 곰팅이를 응징해라!!

 

(유리지갑 망령들이 쿠마를 둘러싸고 깨진 유리지갑으로 두들겨 패려는 찰나 토끼가 깡충깡충 뛰어온다. 쿠마를 꼭 껴안고 방어한다)

 

 

 

토끼 : 우리 쿠마 때리지 마! 그래도 내 새끼...

 

유리지갑 여왕 : 아니, 저 토끼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저놈 때문에 네가 파멸한 것이야! 저 곰팅이는 두들겨패야 돼!

 

토끼 : 아니야! 우리 쿠마는 귀여우니까 괜찮아! 국세청이 나빠! 정부가 나빠! 증세 없는 복지라고 뻥친 놈들이 나빠! 스리슬쩍 싱글세 만들어놓고 부자감세에 기업만 싸고 도는 놈들이 나빠! 만국의 유리지갑들아 단결하라, 유리지갑들아 봉기하라~

 

유리지갑들 : 그래그래 봉기하자~

 

유리지갑 여왕 : (뭔가 말렸다는 느낌이지만) 그래그래 봉기하자~ 가자 그놈들 응징하러!!

 

(유리지갑 망령들과 여왕, 다 함께 깨진 유리지갑을 휘두르며 숲을 나가서 정부 쪽으로 행진해 간다. 토끼는 쿠마에게 간다)

 

토끼 : 쿠마야, 나도 이제 가봐야 돼. 우리 쿠마 나 없어도 꿋꿋하게 잘 살고 새 주인 찾아서 예쁨 받고 케익 많이 먹으렴!

 

쿠마 : 아앙, 토끼야아...

 

토끼 : 쿠마야 잘 있어!

 

(토끼, 유리지갑들이 행진해 간 쪽으로 천천히 사라진다. 쿠마, 하염없이 토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앞발을 뻗어 절규하며 케익 상자 위에 엎어진다)

 

 

쿠마 : 토끼야아!!!!! 케익 ㅠㅠ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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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간의 쥬인 사진은 친구인 쥬인이 자기 얼굴만 없다면서 자신의 페르소나를 제공함

** DANCE 폴더에서 '지젤'로 검색하면 이 발레 영상이나 리뷰, 사진들을 많이 볼 수 있다.

 

:
Posted by liontamer

일요일부터 올렸던 부활절 단편 Jewels. 마지막 장.

 

1~4장은 여기..

1장 : http://tveye.tistory.com/3390
2장 : http://tveye.tistory.com/3391
3장 : http://tveye.tistory.com/3393 
4장 : http://tveye.tistory.com/3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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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wels

пасхальный рассказ

 

 

 

 

 

- 5 -

  

 

 

 

난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러 가지 못했다. 비카의 생일이라서 친구들과 수영장에 가서 논 후 비카 엄마가 만들어준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미샤의 춤을 보고 싶기는 했지만 아빠가 전화로 그 공연은 내년에 보는 게 좋겠다고 날 설득했다. 살인자가 나와서 그러는 거냐고 물었더니 아빠는 좀 놀란 눈치였지만 발레가 너무 심각해서 내가 보기엔 좀 이르다고 설명해줬다. 나도 미샤가 크리셴스카야와 추는 건 싫었기 때문에 다른 때처럼 조르지는 않았다.

 

대신 난 토요일에 극장에 갔다. 공연을 보러 간 건 아니었다. 금요일 저녁에 엄마가 보석 달걀을 발견하고 한바탕 난리가 났기 때문이다.

 

“ 너 이거 어디서 났어? ”

“ 어, 이거? 친구가 줬어. ”

“ 친구라니! 누가 이런 걸 줘! 너 이게 뭔지나 알아? ”

“ 알아, 부활절 계란이야. 진짜 계란은 아니지만 장식용으로 만든 거야. ”

 

엄마는 달걀과 상자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어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이제 내 말을 이해하고 달걀을 돌려주겠지 싶었지만 엄마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 라라, 솔직히 말해. 이거 어디서 났어? ”

“ 친구가 줬다니까. ”

“ 네 친구들 중에 이런 걸 줄 애들이 어디 있다고 그래. 이게 얼마나 고급품인지 아니? 이건 진짜 파베르제야. 그것도 오래된 거야. ”

“ 파베르제가 뭐야? ”

 

엄마는 한숨을 쉬더니 좀 누그러진 목소리로 내게 파베르제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혁명 전에 살았던 보석세공사라고 했다. 그 사람이 만든 보석 달걀들이 너무 유명해서 달걀도 그렇게 불린다고 했다. 요즘도 후손들이 만든 달걀들이 나오긴 하지만 이건 정말 옛날 물건이고 박물관이나 외국 부자들의 집에나 가야 볼 수 있는 거라고 했다.

 

“ 여기 박혀 있는 거 전부 진짜 보석이야, 라렌카. 에메랄드랑 사파이어야. 이것도 진짜 금이고. 우리 같은 사람들이 이런 거 가지고 있으면 절도죄로 체포될지도 몰라.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 어디서 났어? ”

 

결국 난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엄마는 아빠와 마찬가지로 내가 거짓말한 것과 버스를 혼자 타고 간 것을 나무랐다. 그건 내가 잘못한 거니까 괜찮았다. 하지만 엄마가 낯선 남자의 집에 찾아갔다고 야단친 것만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미셴카는 ‘낯선 남자’가 아니야. 아빠랑 제일 친한 친구야. 나하고도 친해. 아냐하고도. ”

“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어린 여자애가 혼자 사는 남자 집에 찾아가면 안 돼! 그것도 하필 그런 사람한테. ”

“ 미샤가 어때서? 하필 그렇다는 게 무슨 뜻인데? ”

 

엄마는 고개를 저으며 말이 잘못 나왔다고 했다. 내가 미샤와 너무 친하게 지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빠랑 같이 있을 때 만나는 건 좋지만 절대 집으로 찾아가면 안 된다고 했다.

 

“ 공연도 보면 안 돼? ”

“ 공연은 돼. 엄마가 허락해준 것들만. ”

“ 엄마는 왜 미샤를 그렇게 싫어해? 미샤는 착해. 내 말은 다 들어주고. 정말 좋은 사람이야. 엄마가 미샤랑 얘기를 안 해봐서 그래. ”

“ 미샤가 나쁘다는 게 아니야. 극장에 있는 사람이라서 그렇지. 나중에 크면 엄마가 왜 그랬는지 이해하게 될 거야. ”

“ 볼쇼이에 있는 언니오빠들이 미샤를 질투해서? ”

“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니? ”

“ 알아. 너무 잘하면 질투해. 전에 나 혼자 사생대회 상 받았더니 나쟈랑 비카가 이틀 동안 말도 안 했어. ”

“ 그런 것 때문이 아니야. ”

 

엄마는 결국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았다. 달걀을 돌려줘야 한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너무 속상하고 억울해서 울고 싶었지만 엄마에겐 눈물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꾹 참았다. 달걀보다도 엄마가 미샤를 싫어하는 게 더 슬펐다.

 

“ 계란 엄마한테 줘. 가서 돌려주고 올 테니까. ”

“ 내가 돌려주면 안 돼? ”

“ 그 집에 가면 안 된다고 했잖아. ”

“ 엄마가 가면 미샤를 혼낼 거잖아. 미샤는 그냥 내가 갖고 싶어 하니까 준 건데. 아무 잘못도 없는데. 그때도 많이 아파서 병원에도 갔었는데. 그럼 미셴카가 아파도 내버려둬야 하는 거야? ”

 

난 결국 울기 시작했다. 견딜 수가 없었다. 엄마는 평소에 내가 울면 야단을 치거나 그칠 때까지 가만히 내버려 두곤 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안아주면서 날 야단치는 게 아니라고 했다. 아픈 친구를 돌봐주러 간 건 나쁜 일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반드시 엄마나 아빠와 같이 가야 한다고 했다. 미샤를 야단치지도 않을 거고 그냥 달걀만 돌려주고 올 거라고 했다. 난 엄마에게 미샤가 극장에 있을 거고 아빠와 새 작품을 연습하기로 해서 늦을 거라고 말해 주었다. 엄마는 극장에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옛날에 춤추던 곳이었는데 왜 그런지 이해가 잘 안 갔다. 나쟈는 엄마가 극장에 가면 아빠랑 좋아했던 시절이 떠올라서 속상하기 때문에 그럴 거라고 했다. 엄마가 좀 고민하는 눈치였기 때문에 재빨리 말했다.

 

“ 내일 아빠 만나면 돌려주라고 할게. 그럼 미셴카 집에 안 가도 되잖아. ”

 

난 보통 주말마다 아빠를 만나러 가니까 엄마는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값비싼 보석 달걀을 내 손에 들려 보낸다는 게 걱정이라고 했다. 그러더니 새아빠에게 나를 차로 극장 앞까지 데려다 주라고 했다. 어차피 새아빠는 오후에 시내에 나가야 했으므로 흔쾌히 승낙했다.

 

 

*   *   *

 

 

새아빠는 날 극장 앞에 내려주고 가버렸다. 원래 엄마는 아빠를 만나 달걀을 돌려줄 때까지 같이 있으라고 했지만 차 안에서 내가 혼자 가도 괜찮다고 말했다. 새아빠는 보석 달걀에 대해서도 잘 몰랐고 또 우리 아빠와도 친한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해줬다.

 

난 무거운 극장 문을 열고 들어갔다. 토요일이었지만 그 날은 낮 공연이 없어서 홀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다행히 매표소 앞에 앉아 있던 안내원이 전부터 잘 아는 엘리자베타 할머니였다. 아빠 보러 왔다고 하자 할머니가 사무실에 전화를 하고는 좀 기다리라고 했다.

 

난 매표소 앞을 서성이며 기다렸다. 아침을 잔뜩 먹었는데도 이상하게 극장에 들어오면 배가 고팠다. 하긴 열두 시가 넘었으니까 점심 먹을 즈음이기도 했다. 10분 쯤 후에 카펫 깔린 계단을 따라 미샤가 내려왔다. 아빠는 감독님과 중요한 회의 중이라 대신 내려왔다고 했다.

 

“ 아빠 기다렸을 텐데, 실망한 거 아니지? 스탄카 나오려면 한 시간은 더 걸릴 거야. 점심 먹었어? ”

“ 안 먹었어. 미셴카는 먹었어? ”

“ 나도 안 먹었어. 난 일어난 지 얼마 안됐거든. 점심 먹으러 갈래? 스탄카는 회의하면서 먹는대. ”

 

당연히 좋았다. 미샤는 내게 뭘 먹고 싶은지 물었다. 마침 아침에 본 만화에서 체브라슈카가 블린을 먹는 장면이 나왔기 때문에 망설일 겨를도 없이 대답했다.

 

“ 블린, 연유랑 꿀이랑. ”

“ 아, 맛있는 집 아는데. 네가 걸어가기는 좀 멀어. 차로 가도 괜찮아? ”

“ 응. ”

 

난 미샤를 따라 주차장으로 갔다. 미샤는 우리 아빠 집에 있을 때는 극장까지 같이 걸어오곤 했기 때문에 아마 전날 자기 집에서 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샤의 차는 새아빠나 아빠 차보다 훨씬 크고 넓었다. 그리고 산지 몇 년 된 것 같은데도 진짜 새것이었다. 이그나트 아저씨는 미샤의 차는 십 년이 넘어도 그렇게 새것처럼 반짝반짝할 거라고 했다. 워낙 운전하는 것도 싫어하고 차를 끌고 다니는 것도 싫어해서였다. 차를 싫어하는 남자라니 천연기념물이라고 놀려댔다.

 

“ 난 차를 싫어하는 게 아니야. 내가 운전하는 게 싫을 뿐이야. ”

“ 기사가 운전해 주면 좋겠다는 거야? 여기서 루뱐카 가까운 거 몰라? 그런 얘기 하면 부르주아라고 잡혀간다. ”

“ 그런 게 아냐. 신호 지키는 게 힘들단 말이야. 줄 맞추는 것도. ”

“ 그러면서 어떻게 발레를 하게 됐담. 넌 수석무용수라서 다행인 줄 알아. 안 봐도 뻔해. 군무 출 때 어땠을지. 줄도 못 맞추고 혼자 엇나가서 엄청 혼났겠지. ”

“ 군무 세웠으면 진짜 그랬을지도 몰라. 나 한 번도 안 춰봤거든. ”

“ 아참, 잊었네. 졸업하기도 전에 키로프에서 잠자는 미녀랑 호두까기 왕자 춘 앤데. 입단하자마자 솔리스트 달았지. 그쪽 감독도 알았던 거야, 군무에 넣었다가는 대재앙이 일어날 거란 걸. ”

 

난 미샤가 뭐든지 잘 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말이 이해가 안 갔고 나중에 아빠에게 물어보았다. 아빠는 무용수마다 어울리는 역이 있다고 했다.

 

“ 군무는 조화가 제일 중요한데 혼자 튀어버리면 안되잖아. 그건 주인공이나 솔리스트 몫이야. ”

“ 왕자님이라서 그런 거야? ”

“ 비슷해. ”

 

나중에 미샤와 아르바트 거리를 걸을 때 깨달았다. 아빠 말이 맞다는 걸. 미샤는 어디서나 튀었다. 무대가 아닌 곳에서도. 인파에 뒤섞여 있어도 금방 미샤가 어디 있는지 발견할 수 있었다.

 

미샤는 날 뒤에 앉히고는 안전벨트를 꼭 매라고 했다. 그리고는 조금만 가면 되니까 차가 흔들려도 참아달라고 했다. 그래놓고 정작 자기는 안전벨트를 매지 않았다. 내가 지적하자 잊어버렸다고 둘러댔다.

 

블린 가게는 좁은 골목 안에 숨어 있었다. 미샤는 근처에 차를 대고는 내가 내리는 걸 도와주면서 멀미 안 했느냐고 물어보았다. 자기 운전 실력이 엉망이란 걸 알기는 아는 모양이었다.

 

가게는 살짝 어두웠고 좁은 편이었지만 이미 사람들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거의가 대학생 언니오빠들이었다. 자리가 없어서 줄을 서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미샤가 구석 창가 쪽에 딱 하나 남아 있는 테이블을 발견해서 날 데리고 들어갔다.

 

블린은 무척 맛있었다. 난 연유와 꿀 얹은 걸 각각 한 장씩 먹고 아주 달콤한 크랜베리 주스를 마셨다. 미샤는 스메타나와 연어 알 올린 블린을 한 장 주문해서 내게 반을 잘라 주고 채친 닭가슴살과 양배추, 토마토가 섞인 샐러드를 먹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아무 것도 타지 않은 차를 마셨다.

 

“ 왜 그런 걸 먹어? 아침도 안 먹었다면서? ”

“ 어제 저녁에 이그나트가 자기 생일이라고 아이스크림이랑 케익을 잔뜩 먹여서. ”

“ 저녁에 먹은 건데 무슨 상관이야? ”

“ 단 걸 많이 먹었으니까 균형을 맞추는 거야. ”

“ 난 발레리나 못 될 것 같아. ”

“ 왜? ”

“ 너무 조금 먹어야 되고, 맛있는 건 하나도 못 먹고... ”

“ 아니야. 그건 사람들이 오해하는 거야. 무용수들 많이 먹어. 조금 먹으면 힘이 안 나서 춤 못 춰. 초콜릿도 가끔 먹어. ”

“ 미셴카는 초콜릿 안 좋아하잖아. ”

“ 나도 연습하다 힘들면 먹어. 당분 때문에 빨리 기운이 회복되거든. ”

 

초콜릿은 맛있어서 먹는 건데 밥 먹으러 갈 시간도 없이 빨리 힘을 내려고 먹는다니 생각만 해도 우울했고 미샤가 좀 불쌍했다. 그리고 엄마가 발레학교에 가지 말라고 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이제 아픈 거 다 나았어? ”

“ 응. 그때 보르쉬 먹고 다 나았어. ”

 

내가 가져다 준 보르쉬 덕에 나았다니 무척 뿌듯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지 못한 게 새삼 아쉬워서 다음 주에는 무대에 안 올라오느냐고 물었다.

 

“ 아니, 다음 주엔 없어. 베를린에 가. ”

“ 놀러? ”

“ 공연 때문에. ”

“ 누구랑? 마리야 언니 무릎 다쳤다면서. ”

“ 아무도 안 가. 나 혼자. ”

“ 혼자 가서 어떻게 춰? ”

“ 그쪽 극장 사람들이랑 추는 거야. ”

“ 좋겠다, 미셴카는. 뉴욕도 가고 베를린도 가고. 파리랑 런던도 가봤잖아. 다른 데들도... ”

“ 라라가 크면 더 많이 갈 수 있을 거야. ”

“ 어떻게? 난 발레도 안 하는데. 외국에 어떻게 가? ”

“ 그때가 되면 외국에 가기 쉬워질 거야. ”

“ 나쟈네 언니가 그러는데 서기장님이 외국 가는 거 계속 막을 거랬어. 우리 같은 사람들은 도장 안 찍어준대. 나가려면 당원이 돼야 한댔어. ”

“ 난 당원이 아닌걸. ”

“ 그래도 미셴카는 국회의원들하고 친하잖아. ”

“ 안 친해. ”

 

처음으로 미샤가 내 앞에서 화난 표정을 지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분명히 화난 얼굴이었다. 내가 빤히 쳐다보자 미샤는 곧 사과했다.

 

“ 미안해. 너한테 화내면 안 되는데. ”

“ 왜 국회의원들을 안 좋아해? ”

“ 난 중요한 사람들은 안 좋아해. ”

 

그 말은 어쩐지 이해가 됐다. 나도 중요한 사람보다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난 내 몫의 블린을 다 먹은 후 미샤가 준 반쪽도 다 먹었다. 배는 불렀지만 너무 맛있어서 자꾸 먹고 싶었다. 그래서 손님이 그렇게 많은 모양이었다. 모스크바에 온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맛있는 집을 알아냈느냐고 묻자 미샤가 웃었다.

 

“ 작년에 모스크바 대학 교수가 데려와 줘서 알았어. ”

“ 어떻게 교수님을 알아? ”

“ 아, 지나 남편이야. 그땐 결혼하기 전이었지만. 지금은 레닌그라드 대학에 있어. 5월에 세미나 때문에 온다고 했는데 그때도 여기서 보자고 하더라. 마르크는 블린 진짜 좋아하거든. ”

“ 어떻게 계속 친하게 지내? 지나 언니랑 결혼한 남자가 밉지 않아? ”

“ 왜 미워야 돼? ”

“ 나 같으면 미울 텐데... 그 아저씨가 지나를 뺏아 갔잖아. ”

“ 뺏다니. 내가 지나한테 마르크 소개시켜줬는걸. ”

“ 난 오빠가 지나 언니랑 결혼하려고 하는 줄 알았는데. ”

“ 그랬구나. 아닌데. 지나랑은 좋은 친구였어, 지금도 그렇고. ”

 

어쩐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지나 말고 혹시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가슴이 뛰어서 도저히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때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 몇 명이 머뭇거리며 다가오더니 미샤에게 사인을 해달라고 했다. 자주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난 그냥 주스를 마시면서 미샤가 사인을 해주는 걸 구경했다. 그러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다른 테이블에 있던 언니오빠들도 우르르 몰려왔다. 백조의 호수를 봤다는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 수요일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본 언니도 있었다. 어떤 오빠는 미샤가 이런 학생들 카페에 와서 점심을 먹을 줄 몰랐다며 깜짝 놀라기도 했다.

 

미샤는 별로 귀찮아하지도 않고 사인을 해 주었다. 몇 명이 사진 찍자고 했을 때도 친절하게 응해 주었다. 촬영이 끝났을 때 로미오와 줄리엣 봤다는 언니가 열렬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 볼쇼이에 계속 있을 거죠? 모스크바 떠나지 마세요. 약속해 주세요. ”

 

난 미샤가 고개를 끄덕이며 약속해 주기를 간절하게 기도했다. 어쩌면 그 언니보다도 더. 하지만 미샤는 그냥 웃었고 그 언니가 내민 손수건 위에도 마저 사인을 해 주었다. 가게를 나가기 전에 다른 사람들이 더 왔고 그 질문도 몇 번이나 더 나왔지만 미샤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   *   *

 

 

점심을 먹은 후 우리는 잠시 모스크바 강가를 산책했다. 미샤는 재킷 주머니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자꾸 사람들이 알아보고 다가와서 그런 것 같았다. 난 선글라스를 끼지 않은 미샤가 더 좋았지만 그래도 산책을 방해받는 것보다는 나았다.

 

날씨는 많이 따뜻해져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라일락이 필 거란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미샤는 나와 보폭을 맞춰서 천천히 걸었다. 그럴 땐 꼭 우리 아빠 같았다. 하지만 미샤는 우리 아빠보다 키도 크고 다리도 더 기니까 내 걸음에 맞춰주려면 더 천천히 걸어야 했다. 바람이 불어와 미샤의 검은 머리와 스카프가 부드럽게 펄럭거렸다. 스카프가 흰색이라 꼭 백조 날개처럼 보였다. 바람이 조금만 더 세게 불면 날개를 펼치고 공중으로 날아올라갈 것 같았다. 처음으로 난 미샤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무대처럼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난 미샤를 올려다보며 잔디밭을 걷다가 돌멩이에 걸려 삐끗할 뻔 했다. 다행히 미샤의 팔을 잡고 꼭 매달려서 넘어지지는 않았다.

 

“ 라루샤, 괜찮아? ”

“ 응. 돌멩이가 있었어. ”

 

난 미샤의 손목을 꼭 쥐고 있다가 소매 사이로 두툼하게 도드라진 붕대의 감촉을 느끼고 아플까봐 얼른 손을 놨다. 조금 긁혔다면서 왜 아직도 붕대를 풀지 않았는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미샤가 먼저 입을 열었다.

 

“ 라라, 가방에 든 건 뭐야? 아까부터 계속 메고 있네. ”

“ 아, 맞다! ”

 

난 까맣게 잊고 있었던 보석 달걀을 떠올리곤 등에 메고 있던 가방에서 상자를 꺼냈다. 입술을 삐죽거리며 엄마가 한 얘기를 전해 주었다. 상자를 돌려주면서 덧붙였다.

 

“ 엄마가 그러는데 여기 박힌 거 전부 진짜 보석이래. 미셴카가 몰라서 그랬을 거라고. 잘 간수해야 할 거래. 금고에 넣어놔야 한대. ”

 

미샤는 내게서 상자를 받았고 뚜껑을 열어 보석 달걀을 꺼냈다. 아주 잠깐 햇빛에 비춰보더니 망설이지도 않고 강물에 던져 버렸다. 달걀은 원반처럼 빙그르르 돌더니 바람을 타고 휙 날아갔다. 반짝반짝 빛나면서 수면 위를 날다가 물거품을 일으키며 가라앉았다. 난 강물에 뛰어들어서 계란을 건져 오고 싶었지만 그건 너무 멀리 날아가서 헤엄쳐 갈 수도 없었고 잠수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미샤는 상자를 잔디밭 위에 내려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계속 걷기 시작했다. 내 손을 잡아 주었다. 여전히 나와 걸음을 맞춰주고 있었다. 마침내 난 햇살이 자잘하게 부서지는 강물을 보면서 물었다.

 

“ 그래서 그런 거야? ”

“ 뭐가? ”

“ 밤에 보석처럼 보이는 거, 강물. 바닥에 진짜 보석이 가라앉아 있어서 그런 거야? 방금 그런 것처럼? 그래서 밤에 빛을 내는 거야? ”

“ 그럴지도. ”

“ 그럼 레닌그라드는? 백야는? 강이 전부 보석인 거야? ”

 

미샤는 소리 내어 웃었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냥 내 손을 잡고 계속 강가를 따라 걷기만 했다. 난 다시 한 번 물어보고 싶었지만 포기했다. 원래 왕자님들은 그런 법이니까. 정말 궁금한 질문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야 멋있어 보이니까 그런가보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중에 아빠에게 물어보면 된다. 아빠는 언제나 대답을 해주니까. 미샤의 말대로, 아빠 말은 언제나 맞으니까.

 

 

 

 

- FIN -

2014.4.20 -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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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부활절 단편이 끝난다.

 

파베르제 달걀들 이미지 몇 장.. 지금도 러시아 가면 파베르제 이름 달고 나오는 아름다운 달걀들이 많지만 옛날에 만든 오리지널들은 정말 박물관이나 부호, 수집가의 손에...

 

나스챠는 라라에게 '이거 진짜 옛날 파베르제야..'라고 하는데 진짜 오리지널인지, 후손들이 만든 값비싼 세공품인지는 이제 강에 가라앉아서 아마 끝까지 모를테지만 어쨌든 박혀 있는 것들이 전부 진짜 보석이니 귀중품인 건 맞다. 단편에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그 보석 달걀을 미샤에게 준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는 가학적 권력자이긴 해도 심미안은 뛰어난 사람이니 아마 그 달걀은 아주 아름다웠을 것이다.

 

아래 이미지의 파베르제 달걀들 중에는 오리지널도 몇 점 있다.

 

 

 

 

 

 

 

 

 

그리고 보석 달걀보다 라라가 더 좋아하는 맛있는 블린 이미지도 하나.. 올리고 보니 미샤가 주문했던 연어알과 스메타나 얹은 블린이네 :) 어쨌든 부활절 단편이므로 달걀과 블린으로 끝난다.

 

 

 

:
Posted by liontamer

부활절 이야기 네번째 파트.

1장 : http://tveye.tistory.com/3390
2장 : http://tveye.tistory.com/3391
3장 : http://tveye.tistory.com/3393

 

4장은 분량이 좀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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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wels

пасхальный рассказ

 

 

 

 

 

- 4 -

 

 

 

 

다음날 난 수업을 마치자마자 곧장 버스를 타고 미샤가 사는 동네로 갔다. 점심 때 마르가리타 아줌마에게 전화해서 물어보니 미샤가 이미 퇴원해서 집에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엄마가 알면 야단칠 게 뻔했기 때문에 나쟈에게 걔네 집에서 숙제하고 노는 걸로 해달라고 말을 맞춰두었다. 아냐도 데려가고 싶었지만 동생은 아직 어려서 비밀을 지키지 못할 것 같았고 같이 버스 타는 것도 불안해서 그냥 혼자 가기로 했다.

 

미샤의 집은 극장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5분만 걸어내려 오면 바로 모스크바 강가였지만 녹지와 큰 울타리가 쳐진 건물들 때문에 버스에서 막 내려서는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스베타 얘기로는 국회의원들과 당 간부들, 별 달린 장군들, 훈장 받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굉장한 동네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난 너무 감탄해서 미샤에게 어떻게 그렇게 좋은 동네에 아파트를 얻었느냐고 물어보았다. 미샤는 자기가 얻은 게 아니고 극장에서 구해 줬다고 했다.

 

“ 난 스탄카 집이 더 좋은데. 여긴 극장에서 너무 멀어. 걸어가면 한참 걸리는걸. ”

“ 그래서 우리 아빠 집에 와 있는 거야? ”

“ 응. 스탄카가 와 있어도 된다고 했어. 레닌그라드에서도 같이 있으니까 일하기 좋았어. ”

 

난 딱 한 번 미샤의 아파트에 올라가본 적이 있었다. 막 이사 와서 아빠가 짐 정리를 도와주러 갔을 때였다. 집이 엄청나게 넓었다. 우리 집이 몇 개나 들어갈 것 같았다. 한 층 전체가 그냥 집 하나였다. 레닌그라드에서 미샤가 지나와 같이 살던 아파트도 넓고 근사했었지만 그 집보다도 더 컸다. 미샤는 이삿짐 상자 몇 개를 한쪽에 그대로 쌓아놓은 채 정리할 생각도 하지 않고 소파에 누워 자고 있었다. 그땐 1월이었고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비행기가 뜨지 않았기 때문에 레닌그라드에서 올라오는 데 무척 고생을 했다고 들었다. 고급 아파트였지만 오랫동안 비어 있었던 탓인지 난방이 다음날부터 된다고 해서 집안은 꽤 추웠다. 그래선지 미샤는 코트를 입고 스카프도 풀지 않은 채 소파에 길게 누워 자고 있었다. 얼마나 깊게 자는지 우리가 들어온 것도 몰랐다. 아빠는 미샤를 깨우는 대신 상자를 하나하나 열어 옷과 책들을 대충 정리해 주었다. 아빠는 우리가 잘 때도 절대로 깨우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랑 같이 살 때도 가끔 핀잔을 듣곤 했다. ‘당신이 라라를 늦잠꾸러기로 만들 거야!’ 라고. 하지만 아빠는 곤하게 자는 사람은 가만히 놔둬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나에게도 미샤를 깨우지 말고 책 정리를 도와주거나 한쪽에서 조용히 놀고 있으라고 당부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미샤는 진짜 늦잠꾸러기였다. 공연 때문에 극장에서 늦게 돌아오는 탓도 있겠지만 웬만하면 9시 이전에는 일어나지 않았다. 눈을 뜬 후에도 한동안은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으려고 했다. 주말에 미샤가 와 있는 날 아침이면 아빠는 나와 아냐에게 그를 깨우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아냐는 침실로 기어들어가 미샤를 깨워 놀고 싶어 안달이었지만 난 텔레비전 만화 볼륨을 열심히 낮추곤 했다.

 

그 날 난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빠가 아닌 남자에게 키스를 했다. 잠자는 미녀에서 왕자님이 오로라 공주에게 입 맞추듯이. 미샤는 내가 발끝을 들고 살금살금 소파 곁으로 다가갔을 때도, 목에 두르고 있는 스카프를 살짝 젖혔을 때도, 가슴에 머리를 기댔을 때도 깨지 않았다. 용기를 내어 입술에 살짝 키스를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땐 너무 긴장해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하마터면 어지러워서 뒤로 자빠질 뻔 했다.

 

나쟈와 비카는 그 얘길 듣고 완전히 흥분해서 느낌이 어땠느냐고 캐물었다. 난 솔직하게 대꾸했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고 그냥 어지러웠다고, 미샤와 아빠에게 들킬까봐 너무 긴장돼서 정신이 없었다고. 그러자 언니가 있는 나쟈는 고개를 저으면서 내가 키스를 안 해봐서 그렇다고, 처음 해봐서 제대로 못해서 그런 거라고 했다. 진짜 키스를 하면 남자가 꼭 안아주고 답례로 자기도 키스를 해준다고 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어쨌든 미샤는 너무 곤히 자느라 내가 키스한 것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내가 나쟈와 비카에게 말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부끄럽기도 했고 어쩐지 말하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미샤는 입술이 부드러웠다. 꼭 아냐의 입술처럼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그리고 좋은 냄새가 났다. 사실 레닌그라드에서 같이 보트를 탔을 때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우리 엄마보다, 학교에서 제일 예쁜 타치야나 선생님보다 더 좋은 향기가 나.'  미샤는 향수를 쓰니까 아마도 그것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아빠의 집에서 막 씻고 나와서 우리와 놀아줬을 때도 희미하게 그 냄새를 맡았기 때문에 그냥 체취라는 걸 알았다. 아냐에게서 우유 냄새가 나고 우리 엄마에게서 희미한 파우더 냄새가 나는 것처럼.

 

미샤는 30분 후에야 깨어났고 키스는커녕 내가 와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아빠가 짐을 정리하고 있는 걸 보고는 그냥 놔두라고 미안해하더니 나랑 아냐를 데려와 같이 저녁 먹자고 했다. 난 그때까지도 어지럽고 부끄러워서 피아노 뒤에 숨어 있었고 아빠가 불렀을 때에야 쭈뼛거리며 기어나갈 수 있었다. 미샤는 날 보더니 굉장히 반가워했고 코트 주머니에서 무척 귀여운 머리핀을 꺼내 주었다. 폭신하고 보드라운 은빛 솜털이 달려 있는 자작나무 핀이었다. 미샤에게는 언제나 예쁘고 근사한 물건들을 골라내는 재주가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부활절 달걀도 그렇게 잘 만들었을지도 몰랐다.

 

버스에서 내린 후 난 전에 봐 두었던 빵집 간판을 찾아냈고 조금 헤맨 끝에 공원 왼편의 작은 문을 통과해 미샤의 아파트를 간신히 찾아냈다. 수프가 든 보온병과 보자기에 싼 쿨리치를 양손에 들고 가는 게 너무 힘들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수프는 놓고 올 걸 하고 후회했지만 아플 때는 뜨끈한 보르쉬를 먹어야 했다. 엄마는 나와 아냐가 아플 때 항상 그렇게 말했다. 그래야 비타민과 철분을 섭취할 수 있다고. 아침에 엄마 몰래 냄비에서 덜어내느라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겨우겨우 울타리들을 지나 아파트 건물 앞에 도착했지만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생각하지도 않았던 장애물과 부딪쳤다. 그 아파트는 1층 전체가 경비실로 되어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두 겹의 문으로 막혀 있었고 뒤편으로 나 있는 계단으로 가는 문도 무섭게 생긴 아저씨가 지키고 있었다. 꼭 외국인들이 가는 호텔 같았다. 전에는 아빠랑 같이 왔었고 아빠는 열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제복을 입고 모자를 쓴 아저씨가 날 보더니 여기 사는 사람이 아니면 들어올 수 없다고 했다. 난 미샤의 이름과 아파트 호수를 댔고 아빠 친구라서 보러 왔으니 들여보내달라고 부탁했지만 아저씨는 안 된다고 했다.

 

“ 왜 안돼요? 1월에도 왔었는데. 우리 아빠 진짜 미샤 친구예요. 볼쇼이에서 안무해요. 우리 아빠도 유명해요, 스타니슬라프 일린이에요. 국영채널 방송에도 나왔어요. 내 이름은 라라예요. 미샤는 그저께도 우리 집에서 같이 저녁 먹었어요. 진짜예요. ”

 

경비 아저씨는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무뚝뚝한 목소리로 그래도 안 된다고 했다. 옆에 있던 다른 아저씨도 거들었다.

 

“ 그래, 네 말이 맞다고 치자.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정 올라가고 싶으면 아빠와 같이 오든가. ”

“ 우리 아빤 지금 극장에 있단 말이에요! ”

“ 그런 말을 하는 여자들이 여기 얼마나 많이 오는지 아니? 꽃다발에 선물에 거짓말에... 이젠 이런 꼬마까지 와서 떼를 쓰니 참... ”

“ 난 꼬마가 아니에요! 학교 다녀요! 열 살도 넘었어요! 진짜예요, 미샤랑 정말 아는 사이예요. 미샤가 아프댔어요, 그래서 보르쉬 가지고 왔어요. 미샤는 아파도 참는단 말이에요, 저녁에는 밥도 잘 안 먹어요. 우리 엄마가 아프면 잘 먹어야 된다고 했는데. 그냥 놔두면 계속 아플 거예요. 제발 들여보내 주세요. ”

 

난 결국 답답하고 억울해서 엉엉 울어버렸다. 내가 울자 아저씨들은 굉장히 난처해했다. 무뚝뚝하던 아저씨가 날 달래주면서 보르쉬를 놓고 가면 자기가 미샤에게 전해주겠다고 했다.

 

“ 안돼요! 미셴카한테 안 주고 아저씨가 먹어버릴지 어떻게 알아요! ”

 

아저씨는 절대 안 먹을 테니 믿어달라고 했지만 난 악착같이 버텼다. 들여보내달라고 계속 떼를 쓰며 울었다. 아저씨들이 못 들어가게 하자 더럭 겁이 나고 걱정이 됐다. 이 아저씨들이 이렇게 아무도 못 들어가게 해서 미샤가 진짜 많이 아픈데도 위에서 혼자 누워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너무 슬퍼서 자꾸 눈물이 나왔다. 미샤는 자기 집이 너무 넓어서 싫다고 했고 아늑한 우리 아빠의 아파트가 훨씬 좋다고 했었는데.

 

내가 주저앉아서 계속 울자 안쪽 사무실에서 어떤 아줌마가 나왔다. 매부리코에 굉장히 무섭게 생긴 아줌마였다. 당장이라도 보온병과 케익을 빼앗아 바닥에 집어던지고 날 내쫓을 것 같아서 무서웠지만 그래도 계속 울면서 버텼다. 아줌마는 경비 아저씨들에게 자초지종을 듣더니 나에게 이름과 아빠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는 거짓말하면 가만 안 두겠다, 부모님과 학교에 얘기해서 혼쭐을 내주겠다고 협박하더니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전화를 하는 것 같았다. 난 그 무서운 아줌마가 엄마에게 전화하는 줄 알고 겁에 질렸다. 하지만 잠시 후 아줌마가 나오더니 손수건으로 눈물과 콧물을 닦아 주었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아줌마는 내 손을 잡고 두 겹의 육중한 문을 열더니 엘리베이터로 데려다 주었다. 보온병과 쿨리치도 들어 주었다. 알고 보니 친절한 아줌마였다. 미샤의 집으로 직접 전화를 해서 나랑 아는 사이가 맞는지 물어봤다고 했다.

 

“ 미샤 집에 있어요? ”

“ 있으니까 전화를 받았지. ”

“ 안 아파요? ”

“ 모르겠는데, 목소리는 괜찮았어. ”

“ 왜 아저씨들이 지키면서 못 들어가게 해요? ”

“ 여기는 중요한 사람들이 많이 살아서 그래. 아무나 못 들어가. ”

“ 미샤는 중요한 사람이에요? ”

“ 글쎄, 여기 사니까 아마 그렇겠지. ”

“ 중요한 사람은 배 나온 아저씨들인데... 막 당에서 연설하고... ”

 

매부리코 아줌마가 웃었다.

 

“ 그러니? 그럼 미하일 세르게예비치는 중요한 사람이 아니구나. 모델처럼 날씬하니까. ”

“ 모델이 아니고 무용수예요. 볼쇼이에서 제일 잘 춰요. 외국에도 많이 갔어요. 상도 많이 받았어요. ”

“ 아줌마도 알아, 사인도 받았는걸. 표 받아서 공연도 봤어. ”

“ 미샤는 중요한 사람이 아니고 좋은 사람이에요. ”

“ 그래, 좋은 사람 같긴 하더라. 그러니까 표도 줬지. ”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아줌마는 7층을 눌러준 후 보온병과 쿨리치를 내게 돌려주었다. 난 주머니에서 장식 계란을 한 개 꺼내 아줌마에게 주었다. 아저씨들 것까지 주고 싶었지만 두 개밖에 안 가져왔고 하나는 미샤 몫이었다. 아줌마는 무척 좋아했고 나에게 잘 놀다 가라고 인사도 해줬다.

 

 

*    *    *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미샤가 복도에 나와 있었다. 내가 괜찮으냐고 묻기도 전에 먼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물었다.

 

“ 라루츠카, 왜 이렇게 울었어? ”

“ 안 울었어. ”

“ 눈이 퉁퉁 부었는걸. ”

“ 아저씨들이 못 올라가게 해서. ”

“ 나한테 전화하지, 그럼 내려갔을 텐데. 비까지 맞고... 우산 없었어? ”

“ 버스 탈 때까진 비 안 왔어. ”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미샤는 수건을 가져와 내 얼굴과 머리를 닦아 주었다. 보르쉬가 든 보온병과 쿨리치는 뭐냐고 묻지도 않고 받아서 티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내 머리의 물기를 털어주기 바빴다.

 

“ 옷 갈아입어야겠다. 감기 걸릴 거야. 잠깐만 있어봐. ”

 

미샤는 현관에서 제일 가까운 쪽 방문을 열었다. 큰 거울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옷장이 여러 개 있었고 얇은 커튼으로 가려진 바퀴 달린 옷걸이도 보였다. 극장 의상실에서나 보던 거였다. 그는 옷장 서랍을 열어 안을 뒤지더니 티셔츠를 하나 꺼내서 내게 주었다.

 

“ 젖은 거 벗고 이거 잠깐만 입고 있어. 라디에이터에 널어놓으면 금방 마를 거야. ”

“ 이거 누구 옷이야? ”

“ 내 거야. 미안하네, 라라가 입을만한 옷이 없어서. 예쁘진 않지만 잠시만 입고 있어. ”

 

예쁜 옷보다 미샤가 입었던 옷이 천 배는 좋았지만 부끄러워서 그 말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아냐라면 서슴없이 말했을 텐데. 미샤는 날 침실로 데려다 주며 옷을 갈아입으라고 한 뒤 나갔다. 난 점퍼와 스웨터와 바지와 양말을 벗었다. 그래도 속옷은 젖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낸 후 미샤가 준 티셔츠를 입었다. 물론 나한테는 엄청 컸다. 무릎 아래까지 펄럭이며 내려왔고 반소매 티셔츠였지만 소매 끝이 거의 팔목에 닿았다. 원래는 짙은 파란색이었던 것 같았지만 많이 빨아서 그런지 흐릿한 푸른색으로 물이 빠져 있었고 감촉이 보들보들했다. 잠옷은 아니고 연습할 때 입는 옷 같았다. 카펫 위에 선 채 잠시 두 팔로 어깨를 꼭 감싸고 티셔츠의 보드라운 감촉을 느껴 보았다. 세탁해서 개켜 두었던 옷이라 희미한 세제 냄새 밖에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미샤가 입었던 옷이라고 생각하니 행복했다.

 

침대 시트와 담요는 잘 정돈되어 있었다. 아프니까 당연히 누워 있었을 줄 알았는데. 커튼이 젖혀져 있지 않아 스탠드 램프를 켰는데도 어두웠다. 나이트 테이블 위에는 장미 몇 송이가 꽂힌 꽃병과 책이 두어 권 놓여 있었다. 레닌그라드에 있을 때도 미샤의 집에는 언제나 꽃이 가득했다. 팬들이 매일같이 꽃다발을 가져다주기 때문이었다. 모스크바로 이사 온 후에는 우리 집에 올 때 자주 꽃을 가져왔고 극장 동료들에게도 꽃을 나눠주곤 했다. 그 중에서도 장미가 제일 많았다. 한겨울에도 장미를 잔뜩 받았다. 미샤가 장미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 사람들이 어디서 그렇게 꽃을 구하는지 놀라울 지경이었다.

 

난 맨발로 부드러운 카펫을 밟으며 잠깐 미샤의 침실을 구경했다. 엄마는 허락받지 않고 남의 침실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들쑤시면 안 된다고 했지만 분명히 미샤가 안에 들어가서 옷 갈아입으라고 했고 아무 것도 만지지 않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다. 화려하고 넓은 아파트에 비해 침실은 간소했다. 침대와 나이트 테이블, 램프와 꽃이 전부였다. 벽에 그림이 하나 걸려 있을 뿐이었다. 연필인지 목탄인지는 모르겠지만 휘갈겨 그린 스케치였다. 어두워서 무슨 그림인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밖에서 미샤가 날 불렀다.

 

“ 라루츠카, 옷 불편해? 다른 거 줄까? ”

“ 아니야, 좋아. 다 입었어. ”

 

난 급하게 옷 뭉치를 껴안고 침실에서 나왔다. 미샤는 내게서 젖은 옷들과 양말을 받아 거실 라디에이터에 널었다. 자리가 모자라자 침실 라디에이터에도 마저 널었다. 마침 잘됐다 싶어서 따라 들어가 물었다.

 

“ 저 그림은 뭐야? 그리다 만 거 같아. ”

“ 아, 스케치야. 브루벨이 날아가는 악마 구상할 때 그린 거래. ”

“ 정말? 진짜 브루벨 그림이야? 트레치야코프에 있는 거? ”

“ 응. 근데 날아가는 악마는 레닌그라드에 있어, 러시아 미술관에. ”

“ 어떻게 구했어? 미술관에 있어야 되는 거 아냐? ”

“ 스케치나 소품들은 별도로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대. 예전에 누가 선물해 줬어. 생일에. ”

“ 난 저 그림은 못 봤는데. 레닌그라드 갔을 때도 에르미타주만 갔었어. ”

“ 화집 보여줄까? ”

“ 응. ”

 

미샤는 서재로 가서 굉장히 크고 두꺼운 브루벨 화집을 꺼내왔다. 난 거실 소파에 앉아 화집을 넘겨보았다. 모르는 그림도 많았다. 미샤는 브루벨을 좋아해서 종종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에 가곤 했다. 난 풍경화와 화려한 초상화들이 더 좋았고 브루벨 그림은 어두워서 그런지 좀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미샤와 트레치야코프에 가면 그가 브루벨 전시실에 있는 동안 다른 방에 가 있곤 했다. 하지만 백조 공주는 좋았다. 환상적으로 예뻤다. 전에 미샤가 그 그림 앞에 서 있을 때 터무니없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백조 공주가 미셴카랑 좀 닮았다고. 미샤는 남자니까 그런 말을 들으면 당연히 싫어할 것 같아서 마음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했지만, 화집을 펼쳐 보니 역시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조 공주도 검은 머리였고 피부가 하얬다. 그리고 눈이 깊고 아름다웠다.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것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매처럼. 그러자 갑자기 좀 슬퍼져서 화집을 덮어버렸다.

 

그때 미샤가 내 발에 슬리퍼를 신기고는 목과 어깨에 폭이 넓고 보드라운 스카프를 둘러 주었다. 하얀 줄이 두 개 들어간 녹색 스카프였는데 무척 따뜻하고 예뻤다. 미샤에게는 멋진 스카프가 많았다. 직접 사기도 했지만 선물도 많이 받았다. 아빠는 미샤가 팬들에게서 받은 스카프가 굼 백화점에 있는 스카프들보다 더 많을 거라고 했다. 나중에 극장 박물관에 방을 하나 내줄테니 거기 그 예쁜 스카프들과 옷가지들을 전시하라고 농담도 했다. 내가 스카프를 만지면서 좋아하는 동안 미샤가 몸을 녹이라고 김이 올라오는 뜨거운 차를 한 잔 주었다.

 

“ 나 안 마실래. ”

“ 쓴 거 아니야, 설탕 넣었어. ”

 

그 말에 안심하고 차를 마셨다. 여전히 별로 달지는 않았다. 미샤는 차에 설탕을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스카프를 두르고 차를 마시자 몸이 한결 따뜻해졌고 그제야 난 내가 여기 왜 왔는지 깨달았다. 도리어 미샤가 날 돌봐주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부끄럽고 미안했다. 내가 찻잔을 내려놓고 한참동안 쳐다보자 미샤가 물었다.

 

“ 라라,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

“ 왜? ”

“ 비 맞고 여기까지 왔잖아. 울었고. ”

“ 안 울었어. 조금, 조금 눈물만 난 거야. ”

 

다시 눈물이 나오는 것 같아서 급하게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그리고는 미샤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 이제 안 아파? ”

“ 누가 그래, 내가 아프다고. ”

“ 아빠가 새벽에 데리러 갔잖아. 어제 병원에 있었고. 내가 가려고 했는데 아빠가 안 된다고 했어. ”

“ 아, 그랬구나. 별 거 아니었는데. 스탄카도 안 와도 됐는데. ”

“ 부끄러워서? ”

“ 뭐가? ”

“ 아빠가 그러는데 미셴카는 아픈 걸 보여주는 게 부끄럽다고 했대. 그래서 나보고 오지 말라고 했어. ”

“ 내가 그랬대? ”

“ 아니야? ”

“ 글쎄, 스탄카가 그렇게 말했으면 그런 거겠지. ”

 

미샤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티 테이블 앞에 서 있었다. 전혀 아파 보이지 않았다. 안색이 좀 창백한 정도였다. 눈은 여전히 밤하늘처럼 까맸고 벨벳처럼 부드러웠다. 잠옷이나 가운을 입고 있지도 않았다. 나에게 준 옷과 비슷한 반소매 티셔츠와 물 빠진 청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왼쪽 손목에 붕대를 감고 있을 뿐이었다.

 

“ 거기 다친 거야? ”

“ 어디? ”

“ 손목. ”

“ 아... ”

 

미샤는 흠칫 놀라면서 왼손을 등 뒤로 감췄다.

 

“ 아니야, 살짝 긁힌 것뿐이야. ”

“ 피났어? ”

“ 조금. ”

“ 보르쉬 먹어야 돼. ”

 

까맣게 잊고 있었던 수프 생각이 나서 난 벌떡 일어났다.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던 보온병을 들고 부엌으로 갔다. 눈에 띄는 그릇을 찾아내 수프를 부었다. 아직도 김이 살짝 올라왔다. 뭔가 더 먹을 만한 게 없나 하고 냉장고와 찬장을 뒤졌지만 요리를 하지 않아도 먹을 수 있는 거라곤 케피르와 주스, 흑빵과 오렌지 외에는 없었다. 할 수 없이 흑빵을 좀 잘라서 버터를 발랐다.

 

쟁반을 들고 거실로 돌아왔을 때 미샤는 바를 잡고 다리를 길게 뻗고 있었다. 거실은 아주 넓었고 한쪽은 완전히 극장 연습실처럼 되어 있었다. 벽 한 면은 완전히 거울로 되어 있었고 기다란 바도 있었다. 구석에는 조그만 피아노도 있었다. 아빠는 안무가였고 거의 매일같이 무용수들과 저런 연습실에서 같이 일했지만 엄마 때문에 난 한 번도 그걸 구경해본 적이 없었다. 음악도 없고 의상도 갖춰 입지 않은 채 미샤가 연습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나중에는 바를 완전히 놓고서도 한쪽 발로 서서 반대쪽 다리를 뒤로 쭉 뻗은 채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런데도 넘어지지 않았다. 전혀 비틀거리지도 않았다.

 

“ 비행기 같아, 미셴카. 한 바퀴 돌 수도 있어? ”

“ 도는 게 좋아? ”

“ 응. ”

 

그러자 미샤가 그 자세에서 천천히 도는 것을 보여주었다. 근사했다. 이제 비행기가 아니라 진짜 새처럼 보였다. 날개를 편 백조 같았다. 나도 해 보고 싶어서 한쪽 다리를 뒤로 들어보았지만 물론 도는 건커녕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었다. 내가 엉덩방아를 찧자 미샤가 와서 일으켜 주었다. 진짜 아팠지만 그보다는 창피했기 때문에 괜찮은 척 하며 미샤의 손을 잡아끌고 티 테이블 앞으로 데려왔다. 그는 긴 소매 셔츠로 갈아입은 후였다. 붕대가 보이지 않자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난 미샤에게 보르쉬와 쿨리치, 그리고 버터 바른 빵을 먹으라고 했다. 미샤는 무척 고마워했다. 무거운데 어떻게 들고 왔느냐고 하면서 그래서 우산을 못 가져왔느냐고 정확히 짚어내 날 깜짝 놀라게 했다. 그리고는 같이 먹자고 했다.

 

우리는 함께 수프와 흑빵과 케익을 먹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빵과 쿨리치는 나 혼자 먹었다. 미샤는 별로 배가 고프지 않은 것 같았다. 보르쉬는 맛있다고 했지만 많이 먹지는 않았다. 한 입 먹고 나서는 한참 있다가 다음 숟가락을 떴다. 그것도 나 때문에 억지로 먹는 것 같았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미 내 표정에 실망감이 드러났는지 미샤가 미안해하면서 저녁에 꼭 다 먹겠다고 약속했다.

 

“ 나 수요일에 공연 보러 가도 돼? ”

“ 로미오와 줄리엣은 나스챠의 리스트에 없었던 것 같은데. ”

“ 그치만 내용은 다 아는걸. 도서관에서 책도 빌려 읽었어. ”

“ 스탄카가 된다고 하면. ”

“ 아빠가 안 된다고 하면 미셴카가 설득해줘. ”

“ 너희 아빠는 설득하기 힘들어. 도리어 내가 항상 넘어가는걸. ”

“ 어제 주사 맞았어? ”

“ 아니. 주사 맞을 만큼 아프지 않았어. ”

 

그럼 왜 아빠가 병원에 그렇게 오래 있어야 했느냐고 물어보려 했지만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미샤는 현관문에 달린 작은 거울로 바깥을 확인하더니 문을 열어 주었다.

 

눈에 띄게 예쁜 여자가 들어왔다. 이미 4월이었지만 은회색 모피 목도리를 두르고 화려한 빨간색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입술도 꽃잎처럼 빨갛게 칠하고 있었다. 짙은 밤색 머리칼은 반짝거리는 구슬이 박힌 핀으로 틀어 올리고 있었다. 새파란 눈이 꼭 고양이 같았다.

 

물론 난 그 여자를 금방 알아봤다. 직접 만나본 적은 없었지만 화려한 옷차림과 짙은 화장 때문인지 무대 위에서 볼 때와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에벨리나 크리셴스카야였다. 볼쇼이 발레리나였다. 엄마는 극장 쪽 친구들과 얘기할 때 크리셴스카야를 실력보다는 외모로 뜬 여자라면서 어찌어찌 제1 솔리스트는 됐지만 프리마 발레리나가 되려면 더 노력해야 할 거라고 헐뜯은 적이 있었다. 아빠는 같이 일하는 무용수들에 대해서는 절대로 그런 혹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몇 년 전에는 그녀를 위해 짧은 춤을 고안해 무대에 올려준 적도 있었다. 난 미샤가 크리셴스카야와 춘 백조의 호수를 한 달 전에 봤다. 그녀는 화려한 외모 때문인지 오데트보다는 오딜에 훨씬 잘 어울렸다. 하긴 그때도 내 관심은 온통 미샤에게 쏠려 있긴 했지만.

 

“ 안녕하세요, 에벨리나 드미트리예브나. ”

 

미샤는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는 훨씬 나이가 많은 우리 아빠나 마르가리타 아줌마에게도 편하게 말을 놓곤 했기 때문에 크리셴스카야에게 그렇게 깍듯하게 대하는 게 낯설었다.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닌 것 같았다. 하긴 그녀는 미샤보다 나이도 몇 살 많았고 볼쇼이에서는 훨씬 선배니까 무용수들 사이에서는 그래야 할지도 몰랐다. 비록 미샤는 수석무용수였고 크리셴스카야는 아니었지만. 극장에서는 그런 것보다도 선후배 사이의 예의를 많이 따진다고 들었다. 미샤가 목도리와 코트를 받아 주려고 했지만 크리셴스카야는 고개를 저었다.

 

“ 됐어, 금방 나갈 거야. 수요일 로미오 그대로 가는 거야? ”

“ 바뀔 이유가 없잖아요. ”

“ 줄리엣 내가 추기로 했어. 마리야가 무릎 때문에 빠졌어. 너도 솔직하게 말해, 안 될 것 같으면 빠져. 그럼 이고리와 맞춰볼 테니까. ”

“ 왜 제가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하시죠? 키로프에서도 로미오는 많이 췄는데. 저랑 다른 건 같이 춰 보셨잖아요. ”

“ 네가 별로라는 게 아냐. 너처럼 잘 나가는 애랑 호흡 안 맞는다고 얘기했다간 극장에서 쫓겨나라고. 내가 미쳤어, 그런 얘기 하게? ”

 

크리셴스카야는 휘파람을 불었고 잠깐 미샤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 뭐 멀쩡한 것 같네. 그래도 불안해. 테라스 파 드 두도 그렇고 피날레도 그렇다고. 머리 위로 들어 올려야 하잖아. ”

“ 어깨 부상은 작년에 다 나았는걸요. ”

“ 진짜 연기도 잘한다니까. 그 얘기 아닌 거 알잖아. ”

 

그녀는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와 미샤의 왼쪽 팔을 잡아당겼다. 소매 위로 손목 부근을 가볍게 톡톡 건드렸다. 미샤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팔을 뒤로 빼냈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 누구한테 들었어요? ”

“ 지금 스탄카가 얘기했을까봐 배신감 느끼는 거야? 그 사람이야 절대 말 안하지. 정말 스탄카가 거기 와서 널 데려간 줄 알았어? 말이 안 되잖아. 그 사람이 거기가 어딘 줄 알고 찾아왔겠어. ”

“ 그럼... ”

 

난 미샤가 그렇게 창백해지는 걸 처음 봤다. 무대 조명을 그대로 얼굴에 받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시 보니 비가 그쳐서 창문 너머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인 것 같았다. 크리셴스카야는 낮게 웃었다. 연극배우처럼 멋지고 과장된 웃음이었다. 그 여자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게 없었지만 미샤와는 사이가 나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빨리 나가줬으면 싶었다. 우리 아빠 이름을 자꾸 말하는 것도 싫었다.

 

“ 왜, 게르만 알렉세예비치였을까봐? 그랬으면 네가 지금 여기 와 있겠어? 그 사람이 발견했으면 공연이고 뭐고 곧장 클리닉에 처박았겠지. 아예 어제 베를린에 데려갔을지 누가 알아. 그거 내 차였어. 문도 잠가 놨었는데 어떻게 땄는지 모르겠네. 게르만이 선물해 준 차였는데... 일부러 거기서 그런 거야? ”

“ 몰랐어요. 미안해요. ”

“ 됐어, 시트만 바꾸면 되니까. ”

“ 스탄카 말고 누구에게 또 얘기했어요? ”

“ 그게 그렇게 중요해? 감독이 알면 자르기라도 할까봐? 키로프에서 뺏아오려고 별의별 짓을 다 했는데 기껏 그런 바보짓 했다고 널 자르겠어? 그러다 자기가 잘리겠지.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어. 뭐 좋은 일이라고. ”

“ 미안해요, 에벨리나 드미트리예브나. 불편하게 만들어서. ”

“ 불편하게? 그런 짓을 해놓고 기껏 한다는 말이 그거 밖에 없어? 하긴 피곤하긴 했지. 집에 가고 싶었는데... 나한테 미안해 할 건 없어, 그런 꼴 전에 안 본 것도 아니고. 너도 어차피 맨 정신도 아니었을 테니까. 그렇게 술 못 마시는 줄은 몰랐어. 게르만에게서 듣긴 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지. 그거 한 잔 먹이니까 그냥 가버리던데. ”

“ 저, 제가 선배님에게 실수라도 했어요? 그러니까, 그 집에서... ”

 

크리셴스카야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미샤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정말 고양이 같은 눈초리였다. 난 그 여자가 미샤를 할퀴거나 한 대 때릴 것 같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에 쟁반을 꼭 쥐고 여차하면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숨을 쉬었고 훨씬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 너 어디까지 기억나? ”

“ 뭐가요? ”

“ 그거 마시고 나서. ”

 

미샤는 갑자기 생각난 듯 내 쪽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 나중에 얘기해요, 에벨리나. ”

“ 쟤 누구야? ”

“ 라라요. ”

“ 아, 스탄카 딸이구나. 닮았네. ”

 

크리셴스카야는 내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목소리를 약간 낮추었을 뿐이었지만 귓가에는 그대로 다 들렸다.

 

“ 크라베츠는 기억나? ”

“ 모르겠어요, 취해서. 그 자리에 같이 계셨던 거예요? ”

연기인지 진짜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니까. 마음대로 해. 기억 안 나는 편이 더 좋으면 그렇게 해 둬. 나도 그 쪽이 더 좋아. 그래야 수요일 무대도 더 편해. 내일 아침부터 맞춰보면 되겠지. 열 시까지 나올 수 있어? ”

“ 네. ”

“ 보르쉬 먹어, 철분이 많으니까. 너 나한테 빚졌어. 혈액형 같아서. ”

“ 고마워요. ”

“ 정말 고맙기는 해? 원망하는 건 아니고? 난 후회하는데. 그냥 놔뒀으면 좋았을걸. ”

 

크리셴스카야는 고개를 돌려 거실 쪽을 힐끗 훑어보았다. 날 본 건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내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집 좋다더니 정말이네. 나한테는 차 밖에 안 줬는데. 금방 인민예술가 만들어주겠어. 그 사람 여기로 와? ”

“ 전 스탄카 집에서 자요. 극장에서 가까워서. ”

“ 반항은 적당히 해둬. 게르만은 성깔 부리는 애 좋아하긴 하지만 수틀리면 그저께보다 더 끔찍하게 굴 테니까. 아, 하긴 넌 기억 안 난다고 했지. 그냥 곱게 여기 머물러 있어. 주는 대로 받고 말도 잘 듣고. 공연히 다른 사람 집에 드나들지 마. 그 사람은 화나면 무슨 짓 할지 모르니까. ”

 

미샤는 잠시 조용히 있다가 현관으로 나가서 문을 열면서 혼잣말처럼 가만히 물었다.

 

“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에벨리나 드미트리예브나? ”

“ 뭐가? ”

“ 그 사람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

“ 진짜 웃긴다니까.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양보라도 해 주려고? 그 사람이 그런 거 신경이나 쓸 것 같아? 전부 자기 뜻대로 하는데. ”

“ 그자는 도살자예요. 더러운 인간이라고요. ”

“ 말 좀 가려서 하시지. 여기 도청될 걸. 이렇게 좋은 아파트를 안겨주고 도청 마이크 하나 안 달아놨을 줄 알았어? 또 얼마나 혼이 나고 싶어서. 뉴욕에서 말 안 들었다고 그렇게 벌 받아 놓고서. ”

“ 전 기억 안 나요. ”

“ 그래, 그렇게 우겨. ”

 

크리셴스카야는 모피 목도리를 여미고 복도로 나가다가 생각난 듯 핸드백에서 조그만 상자를 꺼냈다.

 

“ 이거 네 거지? 차에서 나왔어. ”

“ 제 거 아니에요. ”

“ 아니긴. 게르만이 주는 거 봤는데. ”

 

그녀는 미샤에게 상자를 쥐어준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미샤는 문을 닫은 후 현관 구석에 상자를 내팽개쳤다. 그리고는 욕실로 들어가서 문도 닫지 않고 세면대 수도꼭지 아래 머리를 들이밀더니 물을 틀었다.

 

“ 미셴카, 뭐해? ”

“ 세수해. ”

“ 세수하면서 머리도 감아? ”

“ 응. ”

 

난 미샤가 부러웠다. 나도 남자였다면 세수하면서 머리를 감을 수 있을 테고 엄마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될 텐데.

 

미샤가 욕실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머리에 물을 맞고 있었기 때문에 난 안으로 들어가서 수도꼭지를 잠갔다. 물이 얼음장처럼 찼기 때문에 깜짝 놀랐다.

 

“ 엄마가 찬물로 머리 감으면 폐렴 걸린댔어. ”

“ 어른은 안 그래. ”

“ 미셴카는 어른이 아니잖아. ”

“ 난 어른인데. ”

“ 어른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

“ 왜? ”

 

난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야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 많이 기다릴 필요가 없지’ 라고 말해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가 어른이었다면 크리셴스카야가 그렇게 날 무시하지도 않았을 거고 그렇게 쌀쌀맞은 태도로 미샤를 야단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미샤가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나왔을 때 난 두 팔로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매달렸다. 이제껏 내가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미샤는 놀란 것 같았지만 뿌리치지는 않았다. 아냐에게 그랬던 것처럼 몸을 굽혀 안아 주었다.

 

“ 라루츠카, 우는 거야? ”

 

그 말을 듣자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정말 그전까지는 울고 있지 않았는데. 몸이 떨리면서 심하게 울음이 나왔다. 미샤는 날 좀 더 꼭 안아 주면서 머리를 쓸어 주었다. 그는 이전에는 단 한 번도 내 머리를 쓸어준 적이 없었다. 그건 아냐 같은 어린애한테만 하던 거였는데. 하지만 전혀 화나지 않았다. 난 미샤에게 더욱 찰싹 달라붙어서 서럽게 울었다. 미샤는 한동안 가만히 날 안고 있다가 내가 좀 진정되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 라라, 에벨리나 때문에 놀라서 그래? ”

“ 그 여잔 왜 그래? 왜 미셴카한테 그렇게 무섭게 해? ”

“ 그냥 얘기만 한 거야. 에벨리나는 목소리가 커서 그래. ”

“ 아니야, 화냈어. 미워했어. 무서운 눈으로 쳐다봤어. ”

그렇지 않아. 좋은 사람이야. 그냥 내가 걱정이 돼서 그랬던 거야. ”

“ 왜? ”

“ 어... 내가 술 못 마시는데 마셔서... ”

“ 그 언니는 잘 마셔? ”

“ 그런가봐. ”

“ 그것 봐, 나쁜 여자야. 엄마가 그랬어, 술 많이 마시는 여잔 나쁘다고. ”

“ 술 많이 마시는 여자가 나쁘면 많이 마시는 남자도 나쁜 거야. ”

“ 왜 미셴카가 술 마셨다고 그 여자가 화내? ”

“ 음.... 수요일에 로미오와 줄리엣 같이 춰야 하는데 내가 아플까봐. 그럼 무대를 망치잖아. ”

“ 술 마셔서 아팠던 거였어? 그래서 우리 아빠가 병원 갔던 거야? ”

“ 응. ”

“ 다시는 술 마시지 마. ”

“ 알았어. ”

“ 그 여자랑 로미오와 줄리엣 안 췄으면 좋겠어. 마리야 언니랑 춰. ”

“ 마리야는 무릎 다쳐서 못 나온대. 에벨리나도 잘 추는데. ”

“ 여기 다시는 못 오게 해. ”

“ 라라가 싫다면 그렇게 할게. ”

 

미샤는 찬물로 머리를 감았는데도 무척 따뜻했다. 큰 라디에이터나 사모바르를 안고 있는 것 같았다. 운 게 창피해서 여전히 미샤의 품에 얼굴을 처박은 채 가만히 서 있다가 문득 궁금해진 게 있어서 불쑥 물었다.

 

“ 근데 도살자가 무슨 뜻이야? ”

“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어? ”

“ 아까 미셴카가 그랬잖아. 그 여자랑 얘기하다가. ”

“ 어... 미안해. 그냥 못 들은 걸로 해줘. ”

“ 왜? 그럼 엄마한테 물어볼 거야. 오빠가 그랬잖아, 못 하게 하면 더 하고 싶은 거라고. ”

“ 별로 좋은 말이 아니라서 그래. ”

“ 뭔데? ”

“ 살인자란 뜻이야. ”

“ 우와, 그런 악당을 알아? 그런 건 영화에 나오는 거잖아. ”

“ 맞아. 영화랑 발레에 나오는 거야. 로미오와 줄리엣에도 나오고... 그래서 그 얘기한 거야, 공연 때문에. 근데 나쁜 말이니까 라라는 쓰지 마. ”

“ 응. ”

 

궁금증도 풀렸고 눈물도 다 말랐기 때문에 난 미샤의 팔에서 빠져나와 오렌지를 가져왔다. 껍질을 벗겨서 반을 쪼개어 주자 미샤도 오렌지를 먹었다. 하지만 케익은 여전히 먹지 않았다. 주머니에 있던 장식 달걀을 꺼내주자 미샤는 예뻐서 먹기가 아깝다면서 꽃병 옆에 있던 조그만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만든 계란을 예쁘다고 해줘서 기분이 좋았다.

 

“ 그때 만들어준 이콘 계란 깨져버렸어. 아냐가 밟아서 부서졌어. ”

“ 원래 내가 많이 부쉈던 거라 그럴 거야. ”

“ 속상해, 정말 예뻤는데. ”

“ 다음에 또 만들어 줄게. ”

“ 그건 부활절에만 만드는 거야. ”

“ 그럼 내년 부활절에 만들어 주면 되지. ”

“ 내년에도 여기 있을 거야? 레닌그라드 안 돌아가고? ”

“ 글쎄. 그건 아직 모르겠어. ”

“ 모스크바에 계속 살아, 응? ”

 

미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난 마음을 바꿨다.

 

“ 미셴카가 레닌그라드로 돌아가면 나도 따라가야지. ”

“ 전에도 이사 온다 했다가 엄마한테 야단맞았다면서. ”

“ 아빠랑 갈 거야. ”

“ 라라는 엄마보다 아빠를 더 좋아하는구나. ”

“ 딸은 원래 그런 거랬어. 그래서 엄마가 아들 없다고 섭섭하댔어. 오빤 아빠보다 엄마가 더 좋았어? ”

“ 우리 아빠는 내가 어릴 때 돌아가셨어. ”

“ 병 걸리셨던 거야? ”

“ 잘 몰라. 어릴 때라서. 아무도 안 가르쳐줬어. ”

“ 많이 슬펐어? ”

“ 응. 나중에 알게 돼서 많이 슬펐어. ”

“ 신부님이 그러는데 사람은 죽고 나면 다시 살아난댔어. 예수님이 그렇게 해준대. 우리는 부활절 계란도 만들었고 쿨리치도 먹었으니까 분명히 그럴 거야. 그럼 나중에 미셴카도 아빠랑 만날 수 있을 거야. ”

“ 우리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난 아냐처럼 어렸는데. 아빠가 지금 보면 날 알아볼 수 있을까? ”

미셴카가 늙은이가 되어도 알아볼 수 있을 거야. 아빠들은 다 그런댔어. ”

“ 누가 그래? 신부님이? ”

“ 아니, 우리 아빠가. ”

“ 아, 스탄카가 한 말이면 믿을 수 있겠네. ”

“ 우리 아빠 말은 다 믿어? ”

“ 응. 스탄카 말은 웬만하면 다 맞아. ”

 

난 미샤가 아빠 칭찬을 해서 기분이 좋아졌다. 오렌지 껍질을 휴지통에 버리러 갔다가 현관 구석에 나뒹굴고 있는 상자를 발견하고 가져왔다. 미샤는 부엌으로 가서 남은 보르쉬를 뚜껑 달린 그릇에 붓고 있었다. 수첩을 뜯어서 ‘꼭 먹을 것’이라고 써 붙여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샤가 돌아오면 허락을 받고 열어보려 했지만 그 상자는 무척 예뻐서 나도 모르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조그만 구슬이 한 줄로 박혀 있는 자작나무 상자였는데 테두리는 금색과 은색으로 되어 있었다. 나비 모양의 잠금쇠도 달려 있었다. 잠금쇠를 비틀자 뚜껑이 저절로 열렸다. 깜짝 놀라서 도로 닫으려고 했지만 안을 보자 탄성이 나왔다.

 

“ 우와! ”

 

태어나서 그렇게 예쁜 물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미샤가 둘렀던 구슬 달린 팔찌도, 백조의 호수에서 오데트가 머리에 썼던 왕관도 그 정도로 찬란하고 화려하지는 않았다. 부활절 달걀이었다. 하지만 진짜 달걀은 아니었다. 매끄러운 도자기와 황금빛 금속으로 만들어진 장식품이었다. 휘황하게 반짝이는 녹색 구슬과 파란색 구슬들이 가느다란 황금색 그물 무늬를 따라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달걀 가운데에는 상자와 마찬가지로 아주 조그맣고 우아한 나비 모양 잠금쇠가 달려 있었고 옆으로 비틀자 부드럽게 열렸다. 속은 텅 비어 있었지만 붉은색 벨벳 안감이 들어가 있었다. 난 그렇게도 반짝반짝 빛나는 구슬을 본 적이 없었다. 진짜 보석처럼 밝고 찬란했다.

 

“ 미셴카, 이것 좀 봐! 부활절 계란이야. 너무 예뻐! ”

 

거실로 돌아온 미샤는 내가 치켜든 보석 달걀을 힐끗 쳐다봤지만 만져 보지는 않았다.

 

“ 꼭 진짜 보석 같아. 램프에 비추니까 더 반짝반짝 빛나. 세상에서 제일 예쁜 부활절 계란이야! ”

“ 그럼 가져갈래? ”

“ 나 빌려주는 거야? ”

“ 아니, 가져. 난 그런 달걀 별로 안 좋아해. 라라가 만든 게 더 좋아. ”

“ 정말? 가져도 돼? ”

 

난 기뻐서 펄쩍 뛰었다. 한참동안 계란을 만지작거리다가 구슬이 하나라도 빠질까봐 걱정이 돼서 상자 속에 도로 곱게 집어넣었다. 하지만 뚜껑을 닫지는 않았다. 무릎에 상자를 올려놓고 계속 달걀을 구경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자 미샤와 눈이 마주쳤다. 미샤는 내가 준 장식 계란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굴리면서 날 바라보더니 살짝 웃었다. 그 날 처음으로 웃는 거였다. 미샤가 웃자 해가 져서 어두컴컴해진 거실 전체에 전등을 켠 것 같았다.

 

그 때 또 초인종이 울렸다. 그 무서운 여자가 다시 왔나 싶어서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다행히 그건 아빠였다. 발레 공연이 없는 날이어서 그랬는지 일찍 끝난 모양이었다. 미샤가 괜찮은지 보러 온 것 같았다.

 

아빠는 날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여기 어떻게 왔느냐고 몇 번이나 물었다.

 

“ 버스 타고. ”

“ 너 혼자서 버스 타고 왔단 말이야? 길은 어떻게 찾았어? ”

“ 나 길 잘 찾아. 빵집 간판 외워놨어. ”

“ 엄마한테 얘기하고 온 거야? ”

“ ... 응. ”

“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 ”

“ 잘못했어. 나쟈네 집에서 논다고 했어. ”

오고 싶었으면 아빠한테 얘길 했어야지. 그럼 아빠가 데리고 왔을 텐데. ”

“ 아니야, 아빤 안 데려왔을 거야. 병원에도 못 오게 했잖아. ”

 

아빠는 날 꾸짖으려고 했지만 미샤가 감싸주었다.

 

“ 그렇게 야단치지 마. 나 때문이니까. ”

“ 너한테 온 게 잘못이란 게 아냐. 말 안 하고 혼자서 버스 탄 게 문제지. 위험하잖아. ”

“ 라라는 어린애가 아냐. 다 컸는걸. 버스쯤은 아무 것도 아니야. ”

“ 모스크바는 레닌그라드가 아냐. 훨씬 복잡하고 위험해. 길도 더 넓고. 너 어렸을 때와는 다르다고. ”

“ 난 버스 안 탔는데. 걸어 다녔어. 사람도 너무 많고 떠밀리면 다리 다칠까봐. ”

“ 하긴. 나도 웬만하면 걸어 다녔지. 축구도 안 했고. ”

 

아빠가 옛날에 발레학교 다니던 추억을 떠올려서 천만다행이었다. 날 야단치려던 마음이 누그러졌기 때문이다. 아빠는 미샤의 커다란 티셔츠를 입고 스카프를 두른 날 보고 웃더니 옷이 말랐으면 갈아입으라고 했다. 라디에이터로 달려갔더니 옷은 이미 다 말라 있었다. 아직 안 말랐다고 해볼까 하다가 아빠가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했던 게 떠올라서 솔직하게 부탁했다.

 

“ 미셴카, 나 이거 입고 가면 안 돼? ”

“ 입고 가. 근데 추울 텐데. 위에 걸칠 거 있는지 찾아볼게. ”

“ 괜찮아, 그냥 바지만 입어. 차 가져왔으니까. 양말도 신어야지. ”

 

아빠가 바지와 양말을 건네주며 내 스웨터와 점퍼를 뭉쳐서 옆구리에 꼈다. 그리고는 미샤 쪽을 보면서 엄하게 말했다.

 

“ 너도 겉옷 입어. 비 와서 추워졌으니까 두꺼운 거 입어. ”

“ 왜? 집은 따뜻한데. 난방 때문에 더워. ”

“ 우리랑 같이 나갈 거니까. 여기 혼자 있지 마. ”

“ 그런 식으로 말하면 혼자 있고 싶어지는 법이야. ”

“ 아니, 넌 혼자 있으면 안 돼. 옷 입어. 지금. ”

“ 명령하는 거야? 나한테? ”

 

난 미샤가 우리 아빠에게 그런 목소리로 말하는 걸 처음 들었다. 두 눈이 너무 새까매져서 커튼을 친 것 같았다. 미샤가 화낼까봐 무서워서 여차하면 또 울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빠가 부드럽게 말했다.

 

“ 아니. 부탁하는 거야. 넌 명령 같은 건 안 듣잖아. 누구 명령도. ”

 

미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옷장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고 잠시 후 짧은 재킷을 걸치고 나왔다. 아빠가 모자와 스카프도 챙기라고 하자 순순히 따랐다.

 

아파트를 나가기 전에 미샤는 부엌으로 갔다. 보르쉬가 담긴 그릇을 내가 가져왔던 보자기로 싸더니 보온병과 함께 가지고 나왔다. 그렇게 예쁜 옷을 입고 근사한 스카프를 두르고서 보자기로 싼 그릇을 들고 있는 미샤의 모습이 좀 우스웠지만 수프를 다 먹겠다는 약속을 지킬 것 같아 뿌듯했다.

 

 

*   *   *

 

 

아빠는 날 먼저 데려다줘야 했다. 난 제발 엄마에게 얘기하지 말라고 애원했다. 아빠는 어차피 아파트 앞에 내려주고 갈 거니까 엄마랑 마주칠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내가 혼날까봐 걱정되기보다는 가뜩이나 미샤를 싫어하는 엄마와 부딪치고 싶지 않은 것 같았지만 어쨌든 내겐 다행이었다.

 

미샤는 날 데려다주고 나서 극장에 내려달라고 했지만 아빠는 거절했다.

 

“ 수요일 거 에벨리나로 바뀌어서 연습해봐야 해. ”

“ 내일 열 시에 맞춰보기로 했잖아. ”

“ 어떻게 알았어? ”

“ 내가 연습실 사용 시간 바꿔달라고 콜랴한테 얘기했으니까. ”

“ 같이 맞춰보는 거 말고... 어제랑 오늘 계속 연습을 안 했어... ”

“ 극장에 안 간 것뿐이지 집에서는 계속 연습했잖아. 내가 널 몰라? 어제 병원 복도에서도... ”

“ 그건 다르잖아. ”

“ 어쨌든 오늘은 안 돼. 쉬어야 하니까. ”

“ 오늘도 하루 종일 쉬었어. ”

“ 오늘 먹은 거 말해봐. ”

“ 보르쉬. 쿨리치. 오렌지... ”

“ 쿨리치는 안 먹었잖아. 보르쉬도 두세 숟갈 먹다 말았겠지. ”

 

거울에 미샤의 놀란 얼굴이 비쳤다. 눈이 두 배로 커지고 공처럼 동그래져 있었다. 아빠가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 아무리 봐도 지나와 비슷하다니까. 내 주위 사람들은 왜 다 그렇지. ”

“ 그렇다는 게 무슨 뜻인데? ”

“ 감시꾼처럼. 쉬어라 먹어라 자라... ”

“ 필요할 때 쉬고 먹고 잔다면 그런 말 들을 이유가 없겠지. ”

“ 보르쉬는 다 먹을 거야. 라라가 가져다 줬고 맛있으니까. ”

“ 그래. 집에 가자마자 먹어. ”

“ 정말 극장에 안 내려줄 거야? 조금만 연습하고 가면 되잖아. 못 믿겠으면 같이 가든가. 옆에서 감시하면 되겠네. ”

“ 아니, 난 너 믿어. 네 말은 항상 믿어. ”

 

아빠는 핸들을 옆으로 돌려 강변도로로 접어들면서 조용히 말했다.

 

“ 그냥 오늘은 네가 쉬었으면 좋겠다는 것뿐이야. 우리 집에서. ”

 

미샤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난 안 믿는데. 한 번도 믿어본 적 없어. 나도, 내 춤도. ”

“ 그래. 그래서 그렇게 출 수 있는 걸지도 몰라. ”

 

난 아빠와 미샤가 춤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을 때쯤 걷잡을 수 없이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손발이 풀려 와서 잠시 꾸벅꾸벅 졸았다. 그 와중에 꿈까지 꾼 것 같았다. 그 못된 고양이처럼 생긴 크리셴스카야가 나타나 보르쉬와 쿨리치를 내놓으라고 날 다그치는 거였다. 안 그러면 목을 치겠다고 협박했다. 붉은 여왕처럼... 소리를 지르려고 했는데 그때 차가 다시 커브를 틀면서 어딘가에 부딪쳐 좀 덜컹거렸기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뒤에서 미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모스크바는 정말 빙글빙글 돈다니까. 가도 가도 끝이 없어. 강에 뛰어들어 헤엄쳐가고 싶어. ”

“ 하긴 레닌그라드는 쭉 뻗은 길이 많지. 동네가 작아서 그렇지. ”

“ 여긴 너무 넓어. 복잡하고 지나치게 크고. 회색이고. 극장까지 걸어가지도 못하고. ”

“ 미안해, 미셰츠카. ”

“ 뭐가? ”

“ 볼쇼이로 데려와서. ”

“ 왜? 계약서에 사인한 건 난데. 내가 오고 싶어서 온 거야. ”

“ 그자들이 그런 식으로 널 부를 줄 알았다면 모스크바로 오라고 하지 않았을 거야. 절대로. ”

 

그때 아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기 때문에 난 살짝 눈을 떴다. 하지만 차 안이 어두워서 그런지 아빠의 옆얼굴 밖에 보이지 않았다.

 

미샤가 나직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 그건 레닌그라드에서도 마찬가지였어. 그냥 그런 거라고. 일이잖아. ”

“ 아니, 그건 일이 아니야. 내가 잘못 말했던 거야. ”

“ 그래도 달라질 건 없어. 그러니까 이 얘긴 하지 말자. 안 그러면 정말 강에 뛰어들어서 헤엄쳐 갈 거야. ”

“ 여기 크레믈린 앞인 거 몰라? 뛰어들자마자 경비정에서 그물로 낚아 올릴 걸. ”

“ 그래서 모스크바는 별로라니까. ”

 

난 다시 꾸벅꾸벅 졸다가 아빠 말에 창밖을 힐끗 쳐다보았다. 크레믈린과 바실리 사원이 강 너머로 어른거리고 있었다. 우리 아빠는 크레믈린에서 열린 축제에 작품을 두 번이나 올렸다. 아빤 정말 대단했다. 미샤도 몇 번이나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아빠는 작품을 만드는 것보다 직접 춤을 추는 쪽이 더 훌륭하다고 했다. 아빠도 미샤처럼 출 수 있었다면 춤을 그만 두지 않았을 거라고 말했다. 미샤가 작년에 크레믈린 축제 개막식에서 춤을 췄을 때 브레즈네프 서기장이 직접 꽃을 줬다. 다른 높은 사람들도 가까이 와서 칭찬을 했다. 그때 난 아빠 손을 잡고 무대에서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미샤에게는 다가갈 엄두도 못 냈다. 크레믈린보다는 극장이 훨씬 좋았다.

 

아빠가 부드럽게 말했다.

 

“ 수요일에 로미오 추고 나면 따로 같이 맞춰볼 거 있어. ”

“ 뭔데? 스파르타쿠스? ”

“ 아니. 그건 나랑 맞춰볼 필요 없지. 어차피 잘 출 테니까. ”

“ 그럼 뭐? 내가 못 출 것 같은 역이 뭔데? ”

“ 흥분하지 마. 우리 레퍼토리 중에 네가 못 출 역은 없으니까. ”

“ 노비코프도 안 주던데, 투우사. ”

“ 줄 거야, 시간 좀 지나면. 지금은 좀 참아. 벌써 웬만한 건 다 췄잖아, 넉 달도 안 됐는데. 지금 투우사까지 추면 우리 애들도 폭발할 걸. 정말 모스크바 강에 집어던질지도 몰라. ”

“ 놀랍지도 않아. 신입일 때 정말 그랬거든. 강은 아니고 저수지였지만. ”

“ 페름에서? ”

“ 어떻게 알아? ”

“ 지나에게서 들었어. 세레브랴코프가 그랬다면서. ”

“ 그랬지. 그때도 지나가 펄펄 뛰었어, 왜 두들겨 패주지 않았느냐고. ”

“ 왜 안 그랬어? 그땐 지금보다 훨씬 어렸잖아. 피가 거꾸로 솟았을 텐데. ”

“ 열 받긴 했는데 패줄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 ”

“ 왜, 물이 깊어서? 수영 잘하면서. ”

“ 물이 너무 더러워서 숨을 쉴 수가 없었어. 바닥도 진흙 뻘이라 한 번 빠지니까 나올 수도 없었고. 그래서 화낼 타이밍을 놓쳤어. ”

“ 하긴 저수지니까 더럽긴 했겠다. ”

 

아빠는 다시 한 번 핸들을 꺾었다. 이제 우리 동네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 새 거 시작했어. 6월에 올리려고. 아까 노비코프하고도 잠깐 얘기했어. 긍정적이더라고. ”

“ 나보다 노비코프와 먼저 얘기했단 말이야? ”

“ 어젯밤에 구상했으니까 그렇지. 안무도 이제 짜야 돼. ”

“ 음악은? ”

“ 프로코피예프. 피아노협주곡. 2번. ”

“ 네 취향 아니잖아, 프로코피예프는. 그것도 2번? ”

“ 난 그렇지만 너한테는 잘 맞잖아. ”

“ 아... ”

“ 새로운 거야. 백야하고는 달라. ”

“ 조금 페트루슈카 같은 거야? ”

“ 아니. 그럼 새로운 게 아니잖아. 그건 작년에 벌써 췄는데. 잘 췄지. ”

“ 그것도 네 취향 아니었지. 나한테 맞춰준 거였는데. ”

“ 맞춰준 게 아니야. 그렇게 하고 싶었던 거야. ”

“ 왜? ”

“ 너니까. 네가 그렇게 추는 걸 보고 싶었으니까. 그걸 출 수 있는 건 너 밖에 없었으니까. 그 프로코피예프도 마찬가지야. 완전히 새로운 동작들을 만들 거야. 나 혼자서는 어려워. 그러니까 도와줘. 페트루슈카 때처럼. 재미있을 거야. ”

 

미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문 쪽으로 몸을 틀었지만 거울에 옆얼굴이 비쳤다. 나는 불빛이 일렁이는 모스크바 강을 내다보고 있는 미샤의 눈가에 반짝이는 물기가 고여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미샤가 완전히 고개를 돌렸기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빠가 내 손을 살짝 토닥였다.

 

“ 라라, 겉옷 입어. 거의 다 왔잖아. ”

 

그래서 난 바로 앉아서 점퍼를 대충 걸쳤다. 미샤의 티셔츠만 입고 들어가면 엄마가 분명히 꼬치꼬치 캐물을 테니까. 그때 뒤에서 미샤가 낮게 노래하듯 말했다.

 

“ 강에 비친 불빛 좀 봐, 라루츠카. 보석 같아. ”

 

그래서 나도 고개를 돌려 창 너머로 바깥을 바라보았다. 이미 멀어져 가는 바실리 사원의 알록달록한 지붕으로부터 모스크바 강의 검은 물 위로 환하고 예쁜 불빛들이 비춰져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자주 보던 풍경이었지만 미샤가 그렇게 말하자 정말 보석처럼 보였다.

 

“ 예쁘다. 레닌그라드 생각 나. 거기도 밤에 이랬는데. ”

“ 한밤중에 네바 강을 따라 걸으면 좋아. 강변을 걷다가 다리를 건너면 운하가 나와. ”

“ 그리보예도프 운하! 판탄카! 우리 같이 보트 탔어! 근데 갑자기 비 와서 머리가 다 젖었어. ”

“ 여름에는 안 그래. 비가 와도 금방 그치고 언제든 어디에든 빛이 있어. 한밤중에도 환해. 해가 없어도. 네바 강 위로 교회 종탑들이 길게 내려와, 천사상들도 반짝반짝 빛나. 백야가 되면 사방에서 보석들이 흩뿌려지는 것 같아. ”

“ 밝아도 보석이 잘 보여? ”

“ 가끔은. 아주 밝아야 빛을 볼 수 있어. ”

 

난 미샤의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웠지만 그때 아빠가 차를 돌려 우리 집이 있는 골목 쪽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내릴 준비를 했다. 그리고 미샤의 눈가에 비쳤던 물방울은 모스크바 강물의 보석들이 반사된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어쨌든 미샤는 어른이고 남자인데다 왕자님이었으니까. 왕자님은 나나 아냐처럼 울지 않을 게 분명했다. 아파도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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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5장에서 끝난다. 그건 내일..

 

일린과 미샤가 언급하는 '백야'와 '페트루슈카'는 둘다 일린이 미샤를 위해 안무해준 작품이다. 전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단편 '백야'를 원작으로 주인공 청년과 나스첸카를 내세운 모던 발레로 일린은 76년에 키로프에 가서 게스트 안무가로 그 작품을 무대에 올린다.

 

페트루슈카는 미하일 포킨의 원작 발레를 바탕으로 일린이 광대 페트루슈카의 비극적인 운명을 재구성한 10분짜리 모놀로그 발레이다. 일린은 76년에 미샤가 런던의 유력한 무용 페스티벌 경쟁 부문에 나가게 되자 그를 위해 그 작품을 안무했고 호평과 함께 미샤는 좋은 상을 받는다. 물론 저 두개의 발레 모두 실재하지 않는다. 내가 만들었음. 저 두 작품에 대한 얘기도 트로이가 심리적 화자로 등장하는 그 장편에 나온다.

 

에벨리나와 미샤의 대화에서 언급되는 게르만 알렉세예비치 스비제르스키는 다른 글들에서 꾸준히 등장하는 인물이다. KGB 출신이며 막강한 당 권력자로 소설들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미샤에게는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인물이다. 따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에벨리나는 오랫동안 스비제르스키의 정부였다.

 

미샤가 자기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드문 일인데, 사실 이 사람이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긴 하다. 이 사람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한번 발췌해 보겠다.

 

좀 우울한 파트였기 때문에... 라라가 얘기하는 미하일 브루벨의 백조 공주 이미지로 기분 전환. 전에 두어번 올린 적 있지만..

 

 

 

라라는 미샤가 백조 공주를 닮았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맨처음 이 사람을 구상할 때 브루벨 그림에서 이미지를 좀 따오긴 했다. 그래서 그의 레닌그라드 친구 트로이는 맨 처음 10대의 미샤를 만났을 때 그가 그림에서 나온 것 같다고 생각하고 나중에는 브루벨 그림을 떠올린다. 이 사람이야 사내아이니까 백조 공주보다는 유명한 브루벨의 악마와 더 닮았다고 해줘야겠지만.. 사실은 라라 말대로 백조 공주와 더 닮았을 거라고 비밀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미하일 브루벨, 앉아 있는 악마

 

 

미하일 브루벨, 날아가는 악마

 

라라가 미샤의 침실에서 발견하는 스케치는 이 그림의 스케치이다. 물론 가상의 스케치임.. 이 날아가는 악마 그림은 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미술관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그림 중 하나이다. 정말로 아름답다. 개인적으로 트레치야코프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 백조 공주였다면 러시아 미술관에서는 이 그림과 금발의 가브리엘 이콘, 그리고 레프 박스트의 SUPPER였다.

 

.. 그리고 라라가 가져가는 수프 보르쉬. 내가 끓였던 보르쉬 사진 두 장. 전에 쓴 적 있지만 스뵤클라(비트), 양배추, 쇠고기 등을 넣어 만드는 우크라이나 수프이다. 철분이 많아 빈혈에도 좋다. 아플 때 먹으면 몸이 따뜻해진다.

 

 

 

** 보석을 흩뿌려놓은 듯 찬란하게 빛나는 네바 강 사진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3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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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