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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토요일이고 본편이든 서무든 써볼까 하고 앉았는데 집중이 잘 안 된다. 심신이 많이 피로한 상태라 그런가보다. 예전에는 아무리 피로해도 글을 쓸 에너지는 뽑아낼 수 있었던 것 같은데 확실히 이렇게 나이를 먹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지금은 몇달 간 너무 지쳐 있기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발췌한 글은 몇년 전 다시 글을 쓰기로 마음먹고 미샤를 되살려내 쓴 첫 단편이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것은 거의 10년 만이었다. 지금 쓰는 가브릴로프 본편을 위한 일종의 프리퀄 단편이다. 다시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을 때 구상한 플롯이 가브릴로프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도 역시 어렵지만 그때도 가브릴로프 이야기를 시작하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나는 다시 글을 쓰는 호흡법을 익혀야 했고 두명의 인물만 나오는 단순한 구조의 단편으로 시작했다.

 

이 단편의 배경은 가브릴로프 본편이 시작되기 몇달 전이다, 미샤가 반체제주의자라는 이유로 파리에서 체포되어 모스크바행 비행기에 오르고 그 안에서 10여년 동안 후원자이자 사적 관계를 지속해왔던 당 고위직 간부 드미트리 마로조프와 대화를 나누는 이야기였다. 화자는 미샤가 아니라 후자인 노회한 권력자이자 정치가인 마로조프이다. 이 단편은 이전에 두어번 발췌한 적이 있다. http://tveye.tistory.com/4267, http://tveye.tistory.com/2877

 

아래 발췌한 부분은 단편의 초반부이다. 70년대 초반, 미샤가 발레학교 학생이던 시절 마로조프와 첫 만남을 가졌을 때의 이야기이다. 나의 주인공은 이제 열여섯살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단편은 마로조프의 회상과 모스크바행 비행기 안에서의 현재를 몇차례 오가며 전개된다.

 

지난주에 또다른 프리퀄이었던 수용소 이야기(그건 아래 발췌한 단편보다 반년 후에 쓴 것이었다)에서 나는 미샤의 농담에 대해 발췌한 적이 있다. http://tveye.tistory.com/4468

 

그 글에서 화자인 일린은 미샤에게 '네 농담은 조셴코가 아니라 하름스 식이고 잡혀가기 딱 알맞다'고 하기도 하고 미샤도 아무도 자기 농담에 웃지 않는다고 상심한다. 사실 이 우주에서 미샤는 끝없이 농담을 하고 있다. 그것이 그가 살아가는 방식이고 그가 예술가로서 존재하는 방식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단편의 화자인 마로조프, 노회한 정치가이자 어쩌면 위선적일 정도의 심미안을 가진 이 사람은 미샤가 무대와 삶을 통해 보여주는 농담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게 미샤에게 별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지만.

 

 

하여튼 지난주에 농담 얘길 발췌하고 나니 이 부분이 생각나서 조금 올려본다. 그리고 미샤가 춤을 추는 방식에 대해서도.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그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전히 내 팔은 그 아이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고 언젠가부터 불규칙하게 뛰고 있던 가슴이 그의 등에 닿아 있었다. 맞닿아 있는 피부와 스쳐 지나가는 뜨거운 숨결 사이에 그 간극이 있었다. 그건 금방이라도 좁혀질 듯한 수십년 세월만큼의 거리였고 공동아파트로부터 일류 호텔 스위트룸, 정신교화 수용소로부터 중앙위원회 회의실까지의 거리였다. 무엇보다도, 무수한 스텝으로 반질반질해진 무대로부터 푸른 벨벳 방석이 깔린 극장 좌석 사이의 거리였다.

 

 

결국 미샤는 가운을 입어보지 않았다. 크리스탈 잔에 담긴 와인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하지만 미지근해진 보드카는 한 잔 마셨고 굳어져버린 블린에 캐비아를 얹어 먹어보기도 했다. 몇 입 먹더니 얼굴을 찌푸리며 보드카를 한 잔 더 따랐지만 절반밖에 마시지 못했다. 내게는 잔 한번 권하지 않았다. 나는 유리컵에 탄산수를 가득 부어 마신 후 그에게 요즘 연습하고 있는 춤을 보여 달라고 했다. 물론 춤을 춰주리라고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 아이가 어떤 식으로 대꾸할지 궁금했다. 가가린에 대한 첫마디를 들었을 때부터 나는 반쯤 발기해 있었다. 체스 말을 내려놓듯 견고하고 정확하게 발음된 몇 개의 숫자, 1961년 4월에도. 그리고 마로즈. 서리예요,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

 

 

미샤는 스트레칭을 몇 번 하더니 춤을 보여주었다. 처음 몇 동작을 보고 금방 알 수 있었다, 빈사의 백조였다. 남녀 구분이 엄격한 레닌그라드 발레학교나 키로프 무대에서는 결코 볼 수 없을 춤이었다. 영광으로 생각해야 할지 농담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헷갈렸다. 그 아이는 빈사의 백조를 사냥총에 맞아 퍼덕이며 죽어가는 커다란 새처럼 췄다. 음악도 없이 맨발로 췄는데 파블로바나 울라노바의 처연한 아름다움은 눈을 씻어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내 앞에 있는 것은 핏방울로 얼룩진 깃털을 흩날리며 부서진 뼈가 튀어나온 날갯죽지를 꿈틀대는 날짐승이었다. 아마도 이건 농담 쪽에 더 가까운 모양이었다. 그것도 나를 향한 농담.

 

 

무대 위의 백조에서 환상과 우아함을 제거한 후 남는 것이 뭘까요,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 진짜 새는 그런 식으로 죽지 않을 거예요. 피를 튀기며 몸부림치다 꼬르륵거리며 숨이 넘어갈 테죠. 당신 앞에 죽은 백조가 한 마리 있어요, 그저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죠. 상관없지 않아요? 당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란 사람들을 고깃덩어리로 만드는 것 뿐인데.

 

 

물론 그건 내 착각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지막 죽음의 장면에서 그 아이는 바닥에 내팽개쳤던 실크 가운에 발목이 휘감겨 우스꽝스럽게 넘어진 후 화를 내며 진지하게 욕을 했기 때문이다. 에메랄드 녹색 줄무늬가 들어간 얇고 사치스런 가운 위에 사지를 뒤튼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서 그 나이 또래 사내아이들 외에는 무슨 뜻일지도 모를 욕설을 줄줄이 내뱉고 있었다.

 

 

“ 무대 위에는 이런 장애물이 없을 테니까 괜찮아. ”

 

 

순전히 위로하기 위해 그런 말을 하면서 나는 그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 어차피 넘어지게 돼 있었어요. 마지막 동작이 완성되지 않았거든요. ”

 

“ 포킨의 백조는 그런 식으로 죽지 않았던 것 같은데. ”

 

“ 백조가 아니니까요. 그냥 새예요. ”

 

 

미샤는 꼬여 있는 발목을 펴고 있었다. 나는 수건으로 얼음덩어리들을 감싸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순식간에 부어오르는 모양을 보니 꽤 아플 것 같았지만 넘어졌을 때와는 달리 미샤는 얼굴을 찌푸리거나 투덜대지는 않았다. 얼음 수건으로 발목을 문지르면서 생 상의 곡조를 휘파람으로 불고 있을 뿐이었다. 음률과 박자가 완벽했다. 상기된 뺨 위로 까만 눈이 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를 끌어당겨 안았다. 눈 위에 입을 맞추었다. 제멋대로 파닥이는 속눈썹에, 단거리 주자처럼 빠르게 맥이 뛰는 관자놀이에, 반쯤 젖혀진 하얀 목 위로 솟아오른 파란 혈관 위에도.

 

 

 

한 시간 후 나는 예산심의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호텔을 떠났다. 미샤는 태워다주겠다는 제의를 거절하고 걸어서 발레학교로 돌아갔다. 신호 때문에 차가 잠깐 멈췄을 때 나는 창문 너머로 미샤가 운하를 건너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두워진 하늘로부터 회색 가루눈이 가느다란 빗줄기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그 아이는 모자도 쓰지 않고 코트도 없이 얇은 재킷 차림이었지만 어깨를 펴고 느긋하게 걷고 있었다. 검은 머리칼과 붉은색 모직 스카프가 운하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아 가볍게 나부끼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가 얼어붙은 수면과 안개 사이로도 날아오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진의 운하는 미샤가 저때 걸어서 건넜던 그 운하는 아니다. 같은 운하이긴 하지만 훨씬 뒤로 더 걸어내려가야 한다. 겨울에 찍은 그쪽 사진이 없어서 그냥 이 사진 올려본다. 이때도 가루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

 

 

미샤가 추는 '백조가 아니라 그냥 새'에 대한 춤은 원래 미하일 포킨이 생 상의 곡에 맞춰 안무했던 '빈사의 백조'를 변형한 것이다. 예전에 이 글 쓸때 울리야나 로파트키나와 블라지미르 말라호프가 춘 빈사의 백조 클립을 올린 적이 있다. 그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2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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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편의 후반부에서 마로조프는 저 춤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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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나오는 빈사의 백조는 아니지만, 미샤가 유명한 백조의 호수 중 백조 오데트의 솔로를 자기 식으로 추는 장면을 발췌한 적이 있다. 그건 가브릴로프 본편에 삽입될 코즐로프와의 단편에서 발췌한 장면이었다.

그건 여기 : http://tveye.tistory.com/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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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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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