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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writing'에 해당되는 글 239

  1. 2019.04.07 핀란드 우하 (알리사와 미샤의 이야기) 8
  2. 2019.03.31 어제와 몇년 전의 글들, 일부, 알리사 2
  3. 2019.03.30 오랜만에
  4. 2019.03.06 꼭 가보고 싶었던 카페 + 트로이의 이름 2
  5. 2019.02.02 극장으로 가는 길, 나는 그와 같이 걷는다 2
  6. 2019.01.14 키라와 미샤의 첫 만남 - 가브릴로프 본편에서
  7. 2019.01.06 옛 동네에 갔다가 떠올라서 : 스타차일드 에피소드 서두 발췌 등 2
  8. 2018.12.31 잠시, 새해 전야
  9. 2018.11.29 춤, 글쓰기 2
  10. 2018.11.18 붉은색 구름머리 카르멘 두 장
  11. 2018.11.03 립스틱 얼룩들 (스타차일드 초반부 단편) 6
  12. 2018.10.29 과거에서 온 아이, 카르멘 6
  13. 2018.10.29 이 도시의 운하들, 그리고 나를 사로잡는 것 4
  14. 2018.10.28 내 목적지는 별들(스타차일드 단편 중에서)
  15. 2018.10.20 쉡첸코 거리, 나는 이곳에서 그들을 만나게 했다 6
  16. 2018.10.20 고로호바야 거리, 몇몇 장소들을 되살리는 방식 2
  17. 2018.10.18 어떤 글을 시작할 때, 긴스버그와 와일드 등 2
  18. 2018.10.08 시체가 하나인 덕에 출마를 면한 베르닌, 미샤의 유머 감각
  19. 2018.10.08 나의 도시, 그들의 도시 : 페테르부르크와 레닌그라드
  20. 2018.10.03 (오래 전의 글) Incomparable Blind
  21. 2018.10.02
  22. 2018.09.18 트로이를 연상시키는 남자, 피아노 연주자 1
  23. 2018.07.02 어스름 속에서 부드럽게 춤을 추며 걷기 4
  24. 2018.06.17 새벽. 5년 전 노트 발췌
  25. 2018.03.11 The Repa, 지나간 겨울, 료샤 6

 

 

 

지난달에 몇 주 동안 주말에 쓴 아주 짧은 단편을 올려본다. 제목은 '핀란드 우하'. 우하는 생선 수프이다. 각종 생선과 야채를 넣어 끓이는데 보통 우하라고 하면 맑은 국물의 수프이다.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대구지리나 복지리 같은 것. 정석으로 끓이자면 생선뼈와 머리로 육수를 내고 비린내를 날리기 위해 보드카도 들어간다. 핀란드식 우하는 크림을 넣어서 끓이는 생선 수프이다. 나는 맑은 우하를 좋아하지만 몇년 전 페테르부르크에서 진눈깨비 오던 날 길을 잃고 헤매다 꽁꽁 얼었을 때 어느 카페에 들어갔다가 핀란드 우하를 먹고 몸이 녹았던 기억이 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핀란드 우하와 너무나도 친절했던 청년 데니스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단편은 아주 짧다. 12폰트로 A4용지 9~10페이지 가량. 플롯도 거의 없다.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었는데 몇주 전 저녁에 아무런 기승전결 없이 그저 단어 몇개와 한두 줄의 대화를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나는대로 대화들을 적어나갔고 거기서부터 시작했다. 어떤 글들은 그냥 그렇게 시작된다.

 

 

짧은 파편 스케치이다. 사실 독립적인 이야기라고 볼 수는 없다. 오랫동안 쓰고 있는 미샤와 레닌그라드, 가브릴로프 우주에 속해 있다. 이 글의 배경은 1970년대 초, 소련 레닌그라드이다. 예전에 썼던 레닌그라드 장편(미샤의 친구 트로이가 심리적 화자로 나온다)과 배경이 같고 등장인물도 그 글에 나왔던 알리사와 미샤이다. 화자는 알리사. 애칭은 알랴. 트로이와 가장 친한 친구이고 레닌그라드 국립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트로이와 함께 문학 모임을 조직해 외국 문학을 읽고 사미즈다트(지하문학)와 금지문학들을 돌려보며 토론하는 인물이다. 친구들과는 달리 노멘클라투라 집안의 딸이고 어릴 때는 정치가인 아버지를 따라 외국 생활을 좀 했다. 알리사에 대한 이야기들은 예전에 몇번 발췌한 적이 있다. 

 

 

아래 글에 이름만 언급되는 갈랴, 료카, 코스챠, 이고리, 스베타 등은 모두 이 문학 모임 멤버들이다. 이 글에서 미샤는 아직 발레학교 학생이다. 아파트 주인은 갈랴와 료카 부부이다. 예전에 쓴 레닌그라드 장편은 트로이와 미샤가 갈랴의 아파트에서 열리는 문학모임에서 만나는 것으로 시작했었다.

 

 

 어느 눈보라 치는 겨울 밤, 갈랴의 아파트에서 문학 모임이 열린다. 다들 만취해 뻗는다. 알리사 혼자 깨어 있다. 그리고 미샤가 문을 두드린다. 이야기는 짧고 가볍다.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핀란드 우하






 

 

 

 초인종은 고장 나 있었다. 갈랴는 2주일째 출장 중이었고 료카는 초인종을 고칠 줄 몰랐다. 수리 요청 서류를 쓰기가 싫다고 했다. 문을 잠그지 않으면 된다고 태평하게 굴었다. 결국 트로이가 서류를 써서 관리사무실에 갔다. 네 번쯤 갔고 수리 접수하는데 사흘이 걸렸다. 고치려면 한 달은 기다려야 할 것이다.

 


 어차피 불편한 건 없었다. 료카 뿐만 아니라 갈랴도 문을 잠그지 않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 모임은 툭하면 열렸다. 시간을 가리지 않았다. 별의별 어중이떠중이들이 다 드나들었다. 문제는 아파트 곳곳에 널려 있는 지하출판물들과 우리 번역 원고들이었다. 참다못해 내가 ‘제발 문 좀 잠가! 경찰들이라도 들이닥치면 어쩌려고 그래!’ 하고 성질을 내자 이고리가 ‘괜찮아, 나랑 트로이가 다 찢어서 먹어버리면 돼. 보드카 한 병만 있으면 금방 해치울 수 있으니까 5분만 벌어줘. 네가 미인계를 쓰면 되겠네.’ 라고 농담을 했다. 발칵 화를 내려는데 료카가 그 하염없이 상냥한 표정으로 빙긋 웃는 바람에 나도 결국 흐지부지 웃어버리고 말았다. 료카가 그렇게 유순하게 웃으면 너무나도 예세닌을 닮아서 나는 금방 허물어져버린다. 트로이는 나에게 ‘그런 게 어디 있어. 넌 예세닌 좋아하지도 않잖아. 비논리적이야’ 라고 투덜거린 적이 있다. 무슨 소리, 나는 예세닌을 좋아한다. 외모만. 

 


 그래서 2주일 동안 문을 벌컥벌컥 열거나 발로 걷어차는 녀석들에게 익숙해진 나머지 처음에는 노크 소리를 듣지도 못했다. 늦은 밤이었고 눈보라 때문에 창문이 엄청나게 덜컹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들 술에 떡이 되어 나자빠져 있었다. 눈을 뜨고 있는 건 나와 코스챠 뿐이었다. 우리는 누군가가 필사해 온 브로드스키 시들을 함께 읽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코스챠는 너무 취해서 그게 단어인지 가게 전표 숫자인지 구분도 못하는 상태였지만 그래도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그래, 알랴. 네가 다 맞아. 참 좋아’ 하고 추임새를 넣는 것을 잊지 않았다. 트로이는 그날 없었다. 있었다면 같이 재미없는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을 텐데. 

 


 꼬맹이는 지치지도 않고 끈질기게 노크를 했다. 마침내 나는 긴가민가하며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눈썹이 하얗게 얼어붙고 입술이 파래진 미샤가 환하게 웃으며 좋아했다.

 


 “ 다 자는 줄 알았어. 그냥 돌아갈까 했는데. ”

 

 

 “ 문 열려 있었는데. ”

 


 “ 예의를 지키느라. ”

 


 “ 예의바른 꼬마는 새벽 한시에 남의 집 문을 두들기지 않아. ”

 


 “ 그래도 소리치지는 않았잖아. ”

 


 “ 빨리 들어와. 얼어 죽겠네. ”

 

 


 미샤는 순식간에 모자와 목도리와 코트를 벗었다. 작은 눈 폭풍을 몰고 들어온 것 같았다. 바닥이 흥건하게 젖었다. 그래도 부츠를 벗고 슬리퍼를 신을 때 보니 양말은 보송보송하게 말라 있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꼬마가 어깨를 으쓱했다. 

 


 “ 신발은 좋은 거 신거든. ”

 


 “ 그래야겠지. 발로 먹고 살아야 되잖아. ”

 


 “ 음, 굳이 안 그래도 당이 먹여 살려주긴 할 거야. 소련 시민인데. ”

 


 미샤가 다시 한 번 활짝 웃었다. 이 녀석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주제에 돼먹지 않은 농담을 좋아한다. 나중에 키로프에라도 가면 저 말버릇 때문에 고생하게 될 것이다. 아니, 볼쇼이에 갈지도 모르지. 어쨌든 여기 우리끼리야 상관없다. 

 

 


 나는 미샤를 부엌으로 데리고 갔다. 옷걸이에 걸려 있던 코스챠의 재킷을 낚아채 꼬마의 어깨에 뒤집어 씌웠다. 미샤는 한쪽 무릎을 굽히며 우아하게 인사를 했다. 제대로 무용수 티를 냈다. 평소에는 애들이 아무리 ‘피루엣 한번만 보자. 점프면 더 좋고...’ 따위 간청을 해도 그냥 웃어넘기곤 했는데. 지금은 꽁꽁 얼어붙은 채 연달아 재채기를 하고 콧물을 훌쩍이면서도 무대 위의 왕자님이라도 된 것처럼 굴고 있었다. 귀여운 꼬맹이 같으니. 이 모습을 타냐가 봤어야 하는 건데. 

 


 
 찻물을 올리려고 보니 주전자도 없고 빈 냄비도 없었다. 전부 설거지통에 쌓여 있었다. 아니, 주전자는 아까 이고리가 깔고 앉아 찌그러뜨렸다. 료카는 하고많은 살림살이 중 하필 주전자냐며 울상을 지었다. 갈랴가 탈린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저 주전자를 도로 펴놓든지 아니면 어디서 하나 구해 오라고 투덜거렸다. 초인종 고장 난 건 아무렇지도 않아 하면서 기껏 주전자 하나에 세상 무너진 것처럼 구는 게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물을 끓이기가 어렵게 되자 나도 이고리를 한대 쥐어박고 싶어졌다. 그렇다고 설거지를 하기는 더 싫었다. 렌지 위에 있는 냄비 뚜껑을 열어보니 저녁에 스베타가 가져왔던 생선 수프가 좀 남아 있었다. 박박 긁으면 한 접시 정도 나올 것 같았다. 크림이 굳어서 엉겨 있었기 때문에 물을 좀 부었고 숟가락으로 살살 저으며 데우기 시작했다.

 


 미샤는 차를 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카펫도 깔려 있지 않은 부엌 바닥에서 슬리퍼를 신은 채 타닥타닥 발을 구르고 팔을 이리저리 뻗어보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옆으로 돌렸다 난리였다. 어깨에 걸쳐줬던 모직 재킷이 두터운 날개처럼 펄럭거렸다. 결국 나는 꾸짖었다.

 


 “ 먼지! ”

 


 “ 창문 열면 되는데. ”

 


 “ 집안까지 시베리아로 만들 셈이야? ”

 


 “ 아 그러면 안 되지. 마가단... ”

 


 미샤는 잠잠해졌다. 팔짝팔짝 뛴 덕에 몸이 좀 녹았는지 식탁 의자에 털썩 주저앉더니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뭔가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 그 동안 나는 다 데워진 생선 수프를 접시에 부었다. 

 

 


 수프 접시를 밀어주었을 때 꼬맹이가 콧잔등을 살짝 찡그렸다. 빵이라도 곁들여줘야겠다 싶어 찬장을 뒤지고 있는데 등 뒤에서 미샤가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 핀란드 우하야? 에이... ”

 


 “ 투정하지 말고 그냥 먹어. 꽁꽁 얼었잖아. ”

 


 “ 난 그냥 우하가 좋은데. 크림 넣은 건 별로야. ”

 


 “ 맑은 우하는 노인네나 보드카 마실 줄 아는 사람들한테 어울리는 거야. 넌 아니잖아. ”

 


 “ 뭐가 아니야? ”

 


 “ 보드카, 못 마시잖아. ”

 


 “ 무슨 소리. 마실 수 있어. 세 잔까지는 거뜬해. 많이 봤으면서. ”

 


 “ 거짓말 안 통해. ”

 


 나는 반쯤 말라붙은 흑빵 두 조각을 미샤의 접시 옆에 내려놓았다. 미샤는 숟가락조차 들지 않은 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까만 두 눈에 작은 파란 불빛이 반짝거렸다. 목덜미 어딘가가 따끔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 언제부터 알았어? ”

 


 “ 뭘? ”

 


 “ 나. 술 못 마시는 거. ”

 


 “ 처음부터. ”

 


 “ 다들 모르던데. ”

 


 “ 난 ‘다들’이 아니야. ”

 


 “ 안드레이도 모르던데. ”

 


 “ 트로이라고 불러. 걔 그 이름 싫어해. ”

 


 “ 난 좋은데, 그 이름. 안드레이 공작은 별로지만 우리 안드레이는 좋아. ”

 

 


 나는 미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그 애와 처음으로 눈을 마주치고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사실 그랬다. 우리는 항상 필사 원고나 갱지 인쇄본을 놓고 토론을 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나와 트로이가 이야기를 했고 꼬맹이는 듣고 있었다. 이따금 질문을 하는 게 전부였다. ‘이건 어떻게 읽는 거야?’, ‘세 번째랑 네 번째 행은 우리말로 번역하면 어떻게 돼?’ 등등. 미샤는 말수가 적은 애였다. 

 


 트로이는 그 애와 따로 만나 번역 노트를 보여주고 책도 같이 읽곤 했다. 나는 미샤와 그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 애에게 나는 원어민처럼 영어를 하는 똑똑한 누나였다. 그리고 나는 트로이만큼 상냥하고 배려심이 깊은 성격도 아니었다. 타냐처럼 그 애의 재능에 경탄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발레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극장에는 가끔 갔지만 무용보다는 연극을 더 좋아했다. 그리고 미샤에게는 어딘가 좀 신경을 긁는 구석이 있었다. 한마디로 좀 건방졌다. 하긴 어릴 때부터 무대에 올라간 데다 누구에게나 잘한다 잘한다 하고 인정을 받으니 그럴 만도 했다. 트로이는 꼬마의 그런 면에 매료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렇지 않았다. 

 

 


 미샤는 여전히 수프를 뜨지 않았다. 흑빵을 조금 뜯어서 먹고 있을 뿐이었다. 뺨이 불그스름했다. 다시 재채기를 했다. 

 


 “ 수프 먹으라고 했잖아. ”

 


 “ 모레 무대 올라가야 돼. 크림은 좋지 않아. 고지방. ”

 


 “ 그냥 먹어, 그깟 지방질 이틀이면 다 녹아 없어져. 핀란드 우하가 얼마나 맛있는데. 크림 들어 있어서 부드럽고 고소해. 몸도 따뜻해질 거야. 연어랑 대구가 들어 있어. 파슬리랑 우끄롭도. 스베타네 할머니가 끓여놓은 거 몰래 한 냄비 퍼왔댔어, 우리는 아까 다 한 그릇씩 먹었어. ”
 

 

 


 꼬마는 수프를 한 숟갈 떠서 먹었다. 까만 눈에 구슬 같은 광채가 돌았다.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먹어보니 맛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미샤가 뜬금없이 물었다.

 

 


 “ 알랴, 핀란드 가봤어? ”

 


 “ 가봤지. 가깝잖아. 너는? ”

 


 “ 엄마가 그러는데 어릴 때 아빠랑 엄마랑 같이 갔었대. 기억은 안 나. 너는 핀란드가 좋았어? ”

 


 “ 글쎄. ”

 


 “ 그러면 어디가 좋았어? 넌 어릴 때 외국에 살았잖아. 여기저기. ”

 


 “ 나는 런던이 좀 나았어. 암스테르담은 싫었고. ”

 


 “ 왜? 난 가보고 싶어, 암스테르담. 여기처럼 운하도 있고. ”

 


 “ 그래서 싫었어. ”

 

 


 나는 식탁 한가운데 놓여 있던 술병을 끌어당겼다. 기적적으로 보드카가 남아 있었다. 한 잔 따라서 마셨다. 미샤는 내 입술에 잔이 닿는 것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거의 갈망하는 눈빛으로 보였다. 내가 아니라 알콜을.

 

 


 “ 난 그래서 가보고 싶은데. 운하. 암스테르담. 아빠는 런던에 가본 적이 있다고 했어. 엄마가 말해줬어. 우리 엄마는 불어 공부했는데 프랑스에는 못 가봤대. 엄마는 모든 곳이 같을 거라고 했어. 그럴까? 런던과 암스테르담과 레닌그라드, 헬싱키가 같았어? ”

 

 


 보드카는 뜨거운 칼처럼 목구멍을 찌르고 태웠다. 말라서 딱딱해진 흑빵 조각을 오래 씹어 넘기자 취기 대신 축축하고 둔한 통증이 느껴졌다. 약간 달콤하면서도 구수하고 시큼하고 전반적으로는 씁쓸한 맛이 입 안과 목구멍 전체를 채웠다. 말 그대로, 흑빵의 맛.

 

 


 “ 아니, 같지 않았어. 그런데 똑같이 지루했어. ”

 


 “ 도시가? 사람들이? ”

 


 “ 사는 게. ”

 


 “ 그땐 어렸잖아. 어떻게 그래? ”

 


 “ 인생은 어른이든 어린애든 똑같은 거야. ”

 


 “ 아니, 사는 거 말고. 지루하다는 거. 애들일 땐 시간이 빨리 가는데. 모든 게 빨리 달아나. 안 가본 곳들도 너무 많아서 매일 새롭게 길을 잃기에도 시간이 모자라. 엄마랑 아빠, 친구들도 있고... ”

 

 “ 그거랑 지루한 건 다른 거야. ”

 


 “ 뭐가 다르지? 문학적인 표현인 거야? ”

 


 “ 아마도. ”

 


 “ 흐음. ”

 

 


 우리는 잠시 말없이 앉아 있었다. 미샤는 진한 크림이 엉겨 있는 뜨거운 수프를 떠먹었다. 먹다가 숟가락을 놓쳐서 테이블보에 연어 부스러기와 감자조각을 흘렸다. 꼬마는 빵 끄트머리로 크림 얼룩을 닦았다. 테이블보가 아니라 자기 입술에 묻은 자국을. 별처럼 반짝이는 까만 눈 어딘가에 취기가 어려 있었다. 그때에야 나는 이 망나니 녀석이 이미 다른 곳에서 코가 삐뚤어지게 퍼마시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긴 그러니까 살점이 떨어져 나갈듯 추운 길거리를 쏘다니고 아무도 문을 안 열어주는데도 줄기차게 노크를 해대고 실없는 소리들을 지껄이고 있는 거겠지. 술김에. 언제부터 나랑 이렇게 얘기하는 사이였다고. 말썽쟁이 꼬맹이 같으니. 기껏 열일곱도 안 된 주제에, 졸업하려면 일 년이나 남았는데 허세만은 이미 하늘을 찔렀다.

 

 


 나는 새 잔을 꺼내왔다. 이 집에 딴 건 몰라도 보드카와 술잔만은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갈랴와 료카는 은근히 그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잔에 보드카를 가득 따라서 미샤에게 건네주었다. 꼬마는 거부하지도 않고 잔을 받아 홀짝 마셨다. 쉬지도 않고, 한방에 끝까지. 그리고는 기침이 나오는 걸 숨기려고 수프를 잽싸게 두 숟가락이나 떠먹었다. 그래봤자 눈가와 코가 새빨개지고 있었다. 

 


 
 한 잔 더 따라주었을 때 미샤가 노래하듯 부드럽게 말했다.

 

 


 “ 그러면 새 수프로 바꿔줘. 크림 든 거 말고. 맑은 우하로. 나 지금 보드카 마시잖아. ”

 


 “ 아니, 크림 든 우하도 보드카랑 어울려. 수 쓰지 말고 다 먹어. ”

 


 “ 나 사실 노인네 입맛인데. ”

 


 “ 웃기지 마, 아이스크림 좋아하면서. ”

 


 “ 알랴는 엄마 같구나. 우리 엄마도 그랬는데. 내가 으깬 감자 먹기 싫다고 우니까 감자 다 안 먹으면 아이스크림 안 준다고 했었지. 아빠가 그거 몰래 먹어줬어. 아이스크림도 사주고. 어떤 날은 하루에 두 개나 사주셨어. 에스키모. 플롬비르. 너무 좋아서 밤에 잠이 안 올 정도였어. 아빠랑 아이스크림, 어느 쪽이 더 좋은지 헷갈리기까지 했어. 매일이 그런 하루라면 어떻게 지루할 수가 있어? 핀란드에도 아이스크림이 있겠지, 런던에도, 암스테르담에도. 아빠도. 그러면 모든 게 빨리 달아날 거야. 잠도 못 잘 거야. 날아다닐 거야. 지루한 게 뭔지 난 모를 거야. ”

 

 



 나는 아빠에 대해 생각했다. 대사관과 관리들, 제복들, 볼가 승용차들, 서류들, 라디오, 스모그, 물이끼, 운하, 안개, 바다, 호수, 작은 창문들, 책들, 회색의 거리들, 서로 다르지만 똑같이 지루한 도시들. 아빠에게 인사하는 사람들. 스몰니 집의 거실. 보드카. 그루지야 와인. 우유 넣은 홍차. 터키 과자. 아빠를 찾아오는 사람들. 당. 위원들. 파벨. 아빠는 상황이 좋지 않다고 했다. 돌마예프가 밀려났으니 아빠도 아마 몇 년 못 갈 거라고. 나를 위해서라도 안정적인 상대를 찾아줘야겠다고 했다. 그래서 아빠는 파벨을 골라왔다. 당과 모스크바가 밀어주는 모범적인 남자. 안정적이고 탄탄한 가문.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빠를 위해서. 그런데 이 모든 게 지루하지 않다고? 문학적인 표현이라고? 당돌하고 바보 같은 허세쟁이. 한 대 때려주고 싶지만 그러기엔 너무 귀여운 이 꼬맹이. 

 

 

 

 미샤는 새로 따라준 보드카를 한 모금 마시고 수프를 먹었다. 어느새 접시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흑빵으로 크림을 몽땅 닦아 먹었다. 남은 보드카를 홀랑 다 마셨고 결국 기침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빵이 목에 걸렸다고 뻥을 쳤다. 그리고는 여전히 노래하는 어조로 말했다.

 



 “ 아, 잊었네. ”

 


 “ 뭘? ”

 


 “ 건배. 알랴를 위해. 건강을 위해. 푸쉬킨을 위해. 우리 그렇게 하잖아. ”

 


 “ 나중에. 다같이 마실 때. ”

 


 “ 하긴 두 잔밖에 안 마셨으니까. 그럼 푸쉬킨은 남겼네. ”

 


 “ 이제 몸 녹았지? ”

 


 “ 응. 따뜻해졌어. 졸려. ”

 


 “ 너 잠은 잘 자니? ”

 


 “ 잘 때도 있고 못 잘 때도 있어. ”

 


 “ 오늘은 잠 잘 올 거야. 핀란드 우하도 먹고 보드카도 마셨으니까. ”

 


 “ 좋아. 잠이 오면 정말 좋아. ”

 


 “ 저쪽으로 가서 자. 소파 하나 비었어. ”

 


 “ 나중에. 다같이. 안드레이도 오면. 남은 한잔 같이. 푸쉬킨을 위해. 그때는 맑은 우하. ”

 

 



  꼬마는 취해서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거의 잠꼬대였다. 부엌 구석의 낡은 소파로 데려다 주자 금세 인사불성이 되어 잠들었다.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던 코스챠의 재킷을 주워서 덮어주자 담요라도 되는 양 두 손으로 옷깃을 꼭 쥐고 목까지 끌어올리며 쌕쌕 숨소리를 냈다.

 

 



 나는 크림 찌꺼기가 말라붙은 접시를 설거지통에 쑤셔 박았다. 그리고 남은 보드카를 따라 마셨다. 반 잔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덕분에 다 떨어진 수프와 흑빵을 아쉬워하지 않아도 됐다. 술 때문에 더워져서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졌지만 꼬맹이의 본을 받아 ‘나중에, 다같이. 트로이도 오면.’ 하고 혼잣말을 하며 거실로 돌아가 남은 필사본을 다 읽었다.

 

 

 

 



FIN
2019.3.9 ~ 3.30


 

 

..

 

 

 

 

 

 

 

미샤와 알리사의 대화에서 언급되는 단어 몇개.

 

마가단은 스탈린 시절 악명높은 강제노역수용소가 있었던 곳이다.

 

예세닌과 브로드스키는 러시아 시인. 에스키모와 플롬비르는 러시아 아이스크림 종류이다. 전자는 초콜릿 입힌 하드 아이스크림, 후자는 유지방이 높은 둥글고 부드러운 아이스크림 콘.

 

트로이가 본명인 안드레이란 이름을 싫어하고 이 이름을 택하게 된 유래는 예전에 발췌한 적이 있다. 여기 : https://tveye.tistory.com/7043

 

'알랴, 건강. 푸쉬킨을 위해' 라는 말은 전에 쓴 글들에서 유래했다. 갈랴의 문학 모임 멤버들의 습관이다. 보통 러시아인들은 건배할 때 첫잔부터 순서대로 여인을 위해 건배하고, 이후에는 건강, 그 다음엔 성공이나 뭐 이것저것 순서대로 하는데(물론 때에 따라 다르다) 이 친구들은 아무래도 문학 모임이다 보니 세번째 건배는 항상 '푸쉬킨을 위해!' 하고 외치는 버릇이 있다. 이 건배사는 미샤의 입에도 붙어 있기 때문에 예전에 쓴 단편 Frost 에서도 미샤가 비행기 안에서 드미트리 마로조프와 술을 마실 때 써먹는다.

 

알리사에 대한 발췌본 몇개는 여기 :

https://tveye.tistory.com/5016 (알리사와 기계벌레, 불가코프와 도스토예프스키)

https://tveye.tistory.com/5178 (문을 여는 사람, 악령과 성모)

https://tveye.tistory.com/5040 (파리의 알리사)

 

 

 

 

맨위에서 언급했던 그 카페 '두셰브나야 꾸흐냐'에서 내 몸을 녹여주었던 핀란드 우하. 이때 에피소드는 여기 : https://tveye.tistory.com/3535

 

언젠가 이 우하와 카페, 데니스에 대해 단편이나 에세이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대신 이 미니 단편을 쓰게 되었다.

 

 

 

 

이건 내가 집에서 끓였던 약식 핀란드 우하.

 

크림을 넣어 끓이는 핀란드 우하 레시피에 대해 전에 번역해 올린 적이 있다. 여기 : https://tveye.tistory.com/3538

 

 

 

 

갈랴와 료카의 아파트. 현재의 페테르부르크, 소련 시절 레닌그라드의 바실리예프스키 섬 쉡첸코 거리에 있다. 내가 예전에 지냈던 기숙사가 있던 동네이고 이 아파트는 그 근처에 있다. 이 건물 어딘가에 트로이와 알리사네 모임 아지트인 갈랴네 집이 있다. 이건 여름에 가서 찍은 사진이라 햇살이 좋고 밝게 나왔지만 겨울엔 물론 춥고 어둡다.

 

이 동네와 아파트들에 대한 사진들은 여기 : https://tveye.tistory.com/8509

 

 

 

 

이런 창문들 중 하나가 갈랴네 집 창문일 것이다.

 

 

 

겨울의 그쪽 동네. 이 겨울 풍경은 몇년 전 찍은 거지만 사실 레닌그라드 시절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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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마친 글은 알리사의 1인칭 시점으로 썼다. 아주 짧고 가볍고 조용한 미니 단편이었다. 알리사는 예전에 트로이에게 자기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지만 서술자로 나선 적은 없었다.



아마 몇주 전 무의식적으로 단어 하나와 대화 몇개를 떠올리고 곧 그녀를 불러내 쓰기 시작한 것은 언제 어느 순간이든 내가 알리사와 뭔가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말 역시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쓰는 순간이면 그게 어느 누구가 되었든 작가는 그 인물과 어떤 것이든 무엇이든 최소한의 일부를 공유하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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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물을 올리려고 보니 주전자도 없고 빈 냄비도 없었다. 전부 설거지통에 쌓여 있었다. 아니, 주전자는 아까 이고리가 깔고 앉아 찌그러뜨렸다. 료카는 하고많은 살림살이 중 하필 주전자냐며 울상을 지었다. 갈랴가 탈린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저 주전자를 펴놓든지 아니면 어디서 하나 구해 오라고 투덜거렸다. 초인종 고장 난 건 아무렇지도 않아 하면서 기껏 주전자 하나에 세상 무너진 것처럼 구는 게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물을 끓이기가 어렵게 되자 나도 이고리를 한대 쥐어박고 싶어졌다. 그렇다고 설거지를 하기는 더 싫었다.




...





우린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얘기했어. 아직도 내가 빌려줬던 번역 노트들을 기억하더라. 시 같은 건 난 구절도 가물가물한데 걘 다 외고 있었어. 난 춤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지만 걔는 자기 얘기는 별로 안 했어. 나에 대해 물었지. 런던에서 내가 어떻게 사는지, 일은 힘들지 않은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음악을 듣는지. 사람들과는 잘 지내는지.



난 하마터면 울 뻔 했어. 왜냐하면, 트로이. 걔가 정말로 묻고 있었던 건 내가 그곳에서는 덜 외로운지, 조금이라도 자신에 대한 엄격함을 놓고 관대해졌는지, 그래서 자신을 조금이라도 사랑하게 됐는지에 대한 거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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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그러진 주전자에 대한 단락은 어제 마친 글에서, 아래의 대사는 몇년 전 쓴 글에서 발췌했다. 둘다 화자는 알리사이다.



어제 마친 글은 퇴고를 마치고 맘이 내키면 이 폴더에 전문을 올려보겠다. 겨울밤 알리사와 미샤가 나누는 대화로 이루어진 스케치 파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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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9. 3. 30. 23:44

오랜만에 about writing2019. 3. 30. 23:44

 

 

아주 오랜만에 글을 한 편 썼다. 3주 전 토요일 밤에 무심코 시작해서 주말에 한두페이지씩 썼고 오늘 남은 절반을 몰아서 썼다. 아주 짧다. 9페이지 가량. 미니 단편이고 이렇다 할 플롯도 없고 절반 이상은 대화로 이루어져 있는 그냥 스케치이지만 다시 뭔가를 쓴 것 자체로 충분하다. 지금은.

 

다 쓴 후에는 일단 글을 덮어둔다. 완성하자마자 오타를 찾고 문장이나 앞뒤를 수정하는 것이 무리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이 순간의 감정적 상태를 잠시 간직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게 전부일지도 모른다. 단편은 짧고, 쉽게 썼다. 그러니 자고 나서 내일이면 아마 퇴고를 할 것이다. 딱 그 정도의 작고 얕고 부드러운 스케치니까.

 

이제 자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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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카 운하변을 따라 네프스키 대로 쪽으로 나오는 방향으로 걷다 보면 이 카페가 나온다. 트로이츠키 모스트 카페. 즉 트로이츠키 다리 카페라는 이름이다. 트로이츠키 다리는 네바 강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교각 중 하나이다. 네바 강의 다리 중 제일 유명한 건 역시 궁전 다리이지만 이 다리도 상당히 유명하고 랜드 마크 중 하나이다. 에펠의 작품. (그 에펠 맞다)



이 카페를 지나칠 때마다 한번 들어가보고 싶었는데 어쩐지 이 카페는 혼자서 불쑥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다음에 가면 료샤랑 같이 가봐야지. 



카페 간판도 촌스러운데 왜 들어가고 싶었느냐면, 이름 때문이다. 전에 쓴 글의 심리적 화자로 등장했던 인물의 이름이랑 같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그의 본명은 안드레이 트로이츠키였는데 보통은 애칭인 트로이로 불린다. 이 이름을 지을 때 안드레이라는 이름은 톨스토이의 등장인물에서 따왔고(전쟁과 평화의 그 안드레이 공작 맞다), 성인 트로이츠키는 페테르부르크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원 중 하나인 트로이츠키 사원에서 따왔다. 더불어서 같은 이름을 달고 있는 트로이츠키 다리에서도. 



그래서 이 카페 들어가보고 싶은데 이쪽 길은 공사를 할 때가 많아서 한적하게 산책하는 일이 별로 없고 대로 건너편 방향 산책길이 더 예쁘기 때문에 잘 안 다니게 되고... 카페도 좀 투박해 보여서 혼자 들어갈 마음이 확 내키진 않았었다. 나중에 보니 여기는 소련식 카페라고 한다. 더더욱 들어가봐야 하는데! 담에 페테르부르크 가면 료샤를 꼬셔서 꼭 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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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의 이름과 그에 대한 메모, 소설의 소개 부분은 아래. 여기 트로이츠키 사원 사진도 있다




트로이츠키 다리에 대한 메모와 사진들은 아래. 이때 한참 그 글을 쓰고 있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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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린스키 극장 가는 길. 2015년 2월. 겨울에 공연 보러 갈땐 추우니까 보통은 버스를 타고 간다. 이 날은 엄청 추웠지만 햇살이 좋아서 그냥 운하 따라서 극장까지 쭉 산책했었다. 공연은 아마 전날 밤과 다음날 밤 보러 갔던 듯.

 

 

꽁꽁 얼어붙은 모이카 운하. 흰눈과 얼음, 그리고 새파란 하늘. 이런 날씨엔 추워도 산책하기 좋다.

 

 

내가 생각하고 상상하고 실지로 썼던 글들 속에서 미샤가 트로이네 집에서 잘 때면 아침에 이 길을 따라 극장으로 걸어가곤 했다. 물론 소련 시절 그 극장은 마린스키가 아니라 키로프 극장이었고 이 길의 주변 풍경도 조금은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운하는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살을 에는 듯 차디찬 공기와 하얗게 빛나는 수면 위 얼음, 눈이 멀도록 새파란 하늘은 변함없을 것이다.

 

 

 

 

 

 

 

 

 

 

 

 

 

 

 

 

이렇게 극장까지 걸어오는 것이다. 아름답고 또 아름다운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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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다시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을 때 나는 오래 전에 구상했던 인물을 어떤 곳으로 보내려고 했다.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도시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전형적인 소도시. 그곳에는 생각 끝에 가브릴로프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최근 몇년 동안 이 폴더나 서무의 슬픔 폴더에 수차례 언급했듯 그 글을 쓰기가 어려웠다. 쉽지 않았다. 그래서 워밍업으로 단편, 중편, 꽤 길고 복잡한 장편, 심지어 추리소설 외전도 쓰고 패러디인 서무의 슬픔 시리즈도 썼다. 



그 사이에 어느새 '가브릴로프 본편'이라고 부르게 된 그 원래 쓰려던 글도 조금씩 쓰기는 했다. 약 120페이지 정도. 이 소설의 구조와 플롯을 생각해보자면 아주 적은 분량이고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겨우 4장으로 이루어진 1부를 마쳤을 뿐이었고 거기서는 주요 인물들 몇몇에 대한 스케치만 그려놓았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회사를 비롯해 여러가지 외적, 내적 어려움을 좀 심하게 겪었고 그 이후 글을 쓰기가 너무 어려워졌다. 심적으로 어느 정도 회복된 후에도 글을 다시 이어쓰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 가브릴로프 본편은 2부 첫장의 몇페이지 정도에서 멈추었다. 이따금 써놓은 글들을 다시 훑어보고 메모와 노트 등을 다시 읽고 추가로 떠오르는 생각들과 플롯 등을 덧붙여놓기도 했다. 내가 이 글을 다시 쓰게 될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해가 지고 밤이 오고 다시 해가 뜨리라는 것을 아는 것처럼. 그냥 아는 것이다. 그런데 에너지가 모자란다. 



아래 발췌한 에피소드는 그 얼마 안되는 분량의 1부 4장 초입과 마지막 부분이다. 1부 전체에서 이 4장만 분위기가 좀 다르고 등장인물의 성격도 다르다. 수용소를 거친 후 어찌어찌 풀려나 가브릴로프 시립극장 예술감독으로 부임해 온 미샤가 그 소도시(서무의 슬픔 시리즈에서는 미샤의 패러디인 왕재수가 맨날 '시골!'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곳)의 작은 광장 카페에서 한 여자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녀는 화가이다. 이름은 키라. (이 이름은 니진스키의 딸에게서 따왔다. 성격이나 배경 등의 연관은 없는데 등장인물들 이름 지을 때 마침 눈 앞에 니진스키의 일기 영어본과 러시아어본이 둘다 있었음) 가브릴로프 본편의 인물들은 웬만하면 거의가 다 패러디 외전인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나왔는데 중요 인물 중 두명은 등장시키지 않았었다. 그중 하나가 이 사람이다. 본편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다. (... 그렇게 구상했는데 결국 아직까지는 이 1부 4장에만 등장했음 ㅠㅠ 미안해 키라야...)



조금씩 다시 에너지를 모아보려고 노력 중이라, 키라와 미샤가 만나는 장면과 헤어지는 장면을 좀 발췌해 본다. 후반부의 이콘 박물관 파트 일부는 몇년 전에 이 폴더에 좀 발췌해 올렸던 적이 있다. (http://tveye.tistory.com/3408) 그때는 이 파트를 쓰고 난 직후였다. 그런데 그 이후 이 글이 거의 멈춰버렸어 엉엉...



위의 사진은 지난 9월 페테르부르크에 갔을 때 모이카 운하 난간에 앉아 있던 비둘기 두마리 찍은 것. 이야기 서두에 하얀 비둘기가 등장하기 때문에 가져와 봤다. 어차피 가브릴로프는 가상의 도시이고... 미샤는 레닌그라드, 즉 지금의 페테르부르크에서 왔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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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검은 눈의 청년이 말을 걸어왔을 때 키라는 그가 외지인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동사의 어미를 질질 끌지도 않았고 단모음과 장모음을 정확히 구분했다. 강세와 억양, 말투, 그리고 단어조차 달랐다. 소위 ‘수도’ 식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대다수의 가브릴로프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말투를 구분할 수가 없었다. 키라는 오직 한 가지만을 이해했다. 그가 대도시에서 왔다는 것. 



 그는 옆자리가 비어 있는지, 그리고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거기 앉아도 되는지 물었을 뿐이었다. 무의식적으로 키라는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야외 테이블은 꽉 차 있었다. 따스하고 찬란한 가을 오후였고 말라야 안겔스카야 광장의 그 작은 카페는 언제나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대다수는 가브릴로프 시립대학 학생들이었지만 교수들도 종종 왔고 산책하던 주민들도 목을 축이러 들르곤 했다. 스카프로 머리를 싸맨 노파들도 가끔 차 한 잔을 시켜놓고 천사상을 바라보며 한두 시간씩 앉아 있곤 했다. 



 “ 네, 앉으세요. 빈자리니까요. ”


 “ 고마워요. ”



 가벼운 인사와 함께 남자가 곁에 앉았다. 김이 오르는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을 때 비둘기가 날아왔다. 과자 부스러기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찬 것이 분명했다. 어쨌든 티타임이었으니까. 흰색의 자그마한 놈이었다. 머리에는 검정색 얼룩이 있었고 날개 끝이 회청색이었다. 비둘기는 잠시 테이블을 살피더니 찻잔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에 실망한 나머지 접시를 콕콕 쪼았다. 하지만 날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키라와 검은 눈의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테이블에 날개를 접고 얌전히 앉았다. 



 “ 이곳 분이 아니군요. ” 


 “ 네, 어떻게 아셨죠? ”


 “ 여기선 빈자리가 보이면 물어보지 않고 그냥 앉거든요. ”


 “ 일행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


 “ 그래도 일단 앉아요. 늦게 온 사람이 다른 의자를 가져오면 되니까요. ”


 “ 합리적이군요. ”


 “ 그리고 하나 더 있어요. ”


 “ 뭐죠? ”


 “ 비둘기를 쫓지 않았어요. ”


 “ 저쪽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쫓지 않던데요. 빵도 던져주고. ”


 “ 이 녀석이라면 쫓았을 거예요. 흰색이니까요. 우리 동네에서는 하얀 새는 인기가 없거든요. ”


 “ 내륙 도시라서 그런가보군요. 갈매기가 많은 곳이라면 안 그럴 텐데. ”



 
 키라는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냅킨으로 덮어 두었던 샌드위치를 끄집어내 흑빵 귀퉁이를 조금 잘라 새에게 던져주었다. 비둘기는 서두르지도 않고 천천히 다가와 빵 부스러기를 쿡 쪼아 먹고는 다시 테이블 구석에 자리를 잡고 졸기 시작했다.  



 “ 인기 없는 녀석치곤 많이 얻어먹은 것 같은데요. ”


 “ 먹을 게 많은 계절이에요. 가는 데마다 널려 있거든요. 숲도 그렇고. ”


 “ 그렇군요. ”



 남자가 미소를 띠었다. 눈과 입으로 웃었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 제 이름은 미샤예요. ”


 “ 전 키라예요. ”


 “ 만나서 반가워요. 혹시 제가 방해가 된 건 아니겠죠? ”



 미샤는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는 스케치북을 보면서 그렇게 물었다. 키라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니에요. 다 그렸는걸요. 심심풀이예요. ”


 “ 화가라고 생각했는데요. ”


 “ 글쎄요, 미대생일 수도 있잖아요. ”


 “ 학생은 아닐 거예요. ”


 “ 왜 그렇게 생각하셨죠? ”


 “ 머리 색깔 때문에요. 여기 대학은 교칙이 엄한 것 같던데요. ”



 키라는 붉은색과 자주색, 오렌지색과 푸른색이 뒤섞인 자신의 짧은 머리칼을 무의식적으로 쓸어 넘겼다. 그녀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미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 미안해요, 기분 상하게 하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 스케치하는 걸 봤어요. 학생처럼 그리지 않았거든요. ”


 “ 화난 게 아니에요. 잠깐 의심했을 뿐이에요. ”


 “ KGB일까봐요? ”


 “ 네. 하지만 아니에요. ”


 “ 어떻게 확신하시죠? ”


 “ 보안요원들은 그런 식으로 그림을 보지 않거든요. 애초에 관심이 없어요. ”



 키라는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덧붙였다.



 “ 그리고, 전 그런 사람들이 와서 감시할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고요. ”


 “ 대단한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 스케치는 근사해요. ”



 입 발린 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의 시선은 목탄으로 휘갈긴 천사상 스케치에 못 박혀 있었다. 키라는 목덜미가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가 스케치북을 넘기지 않기를 빌었다. 




... 중략 ...





 키라는 고개를 들어 천사상의 머리와 어깨, 날개 위에 다닥다닥 앉아 있는 새들을 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비둘기와 참새들뿐이었다. 까마귀는 보통 울타리나 나뭇가지 위에 앉곤 했다. 



 그녀가 반쯤 남은 샌드위치와 스케치북을 가방에 넣는 동안 미샤는 천사 앞으로 갔다. 손을 뻗어 천사의 발아래 조각된 덤불과 칼과 방패, 꽃과 열매를 만졌다. 그 부분은 이미 200년 동안 소원을 비는 사람들의 손을 타서 반질반질하게 닳아 있었다. 날개 귀퉁이는 벌써 수십 번 이상 떨어져나갔는데 5년 전 시 의회에서는 매년 날개를 땜질해야 하는 천사상 때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미신을 조장하는 저 낡아빠진 유물 따위는 귀퉁이가 떨어지든 다리가 부러지든 이제부터는 그냥 놔두자고 결정했다. 시민들은 반발했지만 의회는 강경했다. 그래서 천사는 왼쪽 날개 끝이 떨어져 나간 채 남았지만 신기하게도 그 이후부터는 더 이상 날개를 떼어내거나 부수는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키라가 그 얘기를 해주자 미샤는 재미있어 했다. 그리고 수도원의 천사상과 이콘들에 대해서도 물었다. 



 “ 수도원에 있는 건 훨씬 작아요. 그래도 제일 오래됐죠. 청동으로 된 것 말고도 대리석, 테라코타, 나무로 된 조각상이 하나씩 있어요. 흑단과 상아로 만든 성물도 하나 있는데 그건 전시실에 있죠. 이콘도 많고요. ”


 “ 수도원은 많이 먼가요? ”


 “ 아뇨, 구시가지에서 그렇게 멀지는 않아요. 그래도 여기서부터 걸어가면 한 시간 가까이 걸리긴 하겠네요. 어쨌든 강도 건너야 하고 숲으로 들어가야 하니까요. 대신 이콘 박물관은 가까워요. 공원을 따라가다가 포나르나야 거리 쪽에서 길을 건너면 되거든요. ”


 “ 극장 거리 쪽이요? ”


 “ 아, 맞아요. 드라마 극장 옆에 있어요. 거기도 옛날에는 교회였는데 지금은 박물관이거든요. 작아서 눈여겨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죠. 전 공방이 그 뒤에 있어서 가끔 가요. 오늘도 원래 가려고 했었죠. 궁금하시면 같이 가도 좋아요. 네 시 반에 문을 닫지만 저랑 가면 들여보내 줄 거예요. 안내원 할머니와 친하거든요. ”


 “ 데려가 주신다면 좋겠네요. 안내원들과 친한 건 중요한 덕목이죠. ”



 키라는 미샤와 함께 광장을 나왔고 함께 이콘 박물관을 향해 걸어갔다. 키라는 그가 왼쪽 다리를 약간 끌면서 걷는다는 것을 포나르나야 거리와 극장 거리 교차로에 다다를 무렵에야 깨달았다. 눈치 챘다면 더 천천히 걸었을 텐데 하고 후회했다. 그녀는 키가 껑충하게 컸고 보폭도 넓은데다 사내아이처럼 빨리 걷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함께 박물관에 들어갔고 텅 빈 전시실에서 이콘을 보았다. 미샤는 이콘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았고 굳이 하나하나 설명해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전시실 구조를 가르쳐 주었다. 미샤는 제일 먼저 검은 천사 전시실로 갔다. 조각상과 키라가 들려준 이야기 때문에 궁금했던 것 같았다. 그 이후 그리스도와 성모 전시실로 갔다. 키라는 그가 다리를 절면서도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고 움직이는 것에 놀랐다. 전시실 마룻바닥은 툭하면 삐걱거렸기 때문이다. 



 키라가 옆방 사무실에서 안내원 노파와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성모 전시실로 돌아왔을 때 미샤는 긴 의자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댄 채 자고 있었다. 작은 창문 사이로 밀려들어오는 석양 때문에 꼭 붉은 모포를 덮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키라는 다시 스케치북을 꺼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녀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미샤의 머리를 감싸 자기 어깨에 기대 주었다. 오래된 교회 건물이라 벽은 틈새로 가득했고 냉기가 스며 나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낯선 남자와 그렇게 몸을 마주 대고 앉아본 적이 없었다. 어깨를 빌려준 적은 더욱 없었다. 키라는 그가 어린아이처럼 잔다고 생각했다. 미동도 없이, 암흑처럼 깊게, 온몸이 사모바르처럼 뜨겁게 달아오른 채. 그의 몸이 너무 뜨거워서 꼭 전시실 한복판에 모닥불을 피워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에게서는 검은 숲의 흙과 나무, 무겁게 깔려드는 야생 꿀의 냄새가 났다, 그리고 그 모든 체취와 어울리지 않는 차갑고 인위적인 냄새도 났다. 약간 소독약 냄새 같기도 했고 금속 냄새 같기도 했다. 키라는 하얀 가운과 수술대를 떠올렸고 어쩐지 소름이 끼쳐서 몸을 가만히 떨었다. 



 미샤는 그녀에게 자연스럽게 몸을 기댄 채 10분 정도 더 잤다. 키라는 그가 오랫동안 제대로 된 잠을 잔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녀 자신이 불면증에 시달린 적이 많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해가 점점 기울어졌다. 창으로 스며들던 빛이 거의 사라져서 어두컴컴해졌을 때 미샤가 눈을 떴다. 한동안 자신이 어디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키라가 어깨를 빌려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몸을 똑바로 일으키면서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 고마워요. ”



 
 그때 키라는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아마도 그가 미안하다고 하지 않고 고맙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왜 그런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함께 박물관을 나왔다. 키라가 동료들과 저녁 약속이 있다는 얘기를 기억하고 있었던 미샤는 그녀를 작업실까지 데려다 주었다. 전시도 하느냐고 물었다. 



 “ 겨울에 할지도 몰라요. 소규모지만. 친구들과 같이 할 거예요. 전 아직 개인전은 해본 적이 없거든요. ”


 “ 회화만 하는 거 아니죠? ”


 “ 전시는 거의 회화 쪽이긴 한데, 가끔 잡지 삽화를 그려요. ”


 “ 보여줄 수 있어요? 다음에 만나면. ”


 “ 언제든 작업실로 오세요. 제 친구들도 소개시켜 드릴게요. 좋은 사람들이에요. ”


 “ 분명 그럴 것 같군요. ”


 “ 미술 쪽을 공부하신 건가요? 아니면 역사? ”


 “ 전 극장에서 일해요. ”


 “ 아... 드라마 극장? 배우예요? ”


 “ 아뇨, 가브릴로프 극장. 아직 일을 시작하진 않았지만. 드라마 배우는 아니에요. 그냥 극장 쪽에 오래 있었어요. ”
 


 키라는 그가 말하는 ‘오래’가 대체 몇 년을 얘기하는지 궁금했다. 미샤는 자신 또래거나 더 어려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며칠 후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키라는 작업실로 곧장 올라가는 대신 계단 모퉁이의 창문 너머로 그가 박물관을 지나쳐 가브릴로프 극장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가 배우가 아니라는 사실에 흐릿한 아쉬움을 느꼈다. 동시에 그를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외모와 말투, 몸가짐을 지닌 사람을 한 번 보고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랬다면 그녀는 이미 그를 그렸을 것이다. 백지마다 스케치를 가득 채웠을 것이다. 마치 그 카페에서 그녀가 몰래 그를 스케치했던 것처럼. 그가 다가오기 전, 빈자리에 앉아도 되는지 묻기도 전에. 그가 천사상 곁을 지나쳐 카페로 들어왔을 때, 차를 주문하기 위해 줄을 서 있을 때. 비밀스럽게, 천사상을 그리던 목탄과 연필로, 맨 마지막 페이지를 펼쳐서. 



 비둘기를 그렸어야 했어.



 키라는 입안으로 그렇게 되뇌며 작업실로 올라갔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한 손으로는 연필을 쥔 채 그 하얀색과 회청색의 작은 비둘기를 그려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새가 어떻게 생겼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계속해서 그 젊은 남자, 극장에서 일하고 까마귀에 대해 궁금해 하고 천사상의 발치를 만져보던 청년, 왼쪽 다리를 무겁게 끌면서도 소리 없이 걷고 웃을 때는 눈과 입술로 조용히 웃는 남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





중략 부분에서 키라와 미샤는 천사와 까마귀와 가브릴로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건 나중에 이 글을 다시 쓰게 되면 한번 올려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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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이문동에서 영원한 휴가님과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왔다. 그 동네는 예전에 쥬인과 꽤 오래 살았던 곳인데 직장도 이사를 가고 나도 이사를 가면서 근 7년 이상 가지 않았었다. 



이번에 가니 역이 좀 바뀌고 출구도 몇개 더 생겨 있었다. 내리자마자 영원한 휴가님과 재회하는 기쁨에 젖어 건널목이 아직도 있는지 확인을 못했다. 이쪽은 전철이 지상으로 다니기 때문에 건널목이 있다. 예전에 살 때 종종 그 건널목을 건너가야 했다. 원래부터 개발이 안된 곳인데다 전철 건널목까지 있어 짤랑짤랑 종도 울리고 되게 구식/옛날 기분이 느껴지는 동네였다. 



그 건널목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억이 있다. 어느 겨울 아침 출근길에 그 건널목 앞에서 길을 건너려다 어떤 생각을 했었다. 별거 아니고 좀 우스운 생각이었지만 찬란한 아침 햇살 탓에 약간 환각에 취한 기분이 들었다. 



아래 글은 그 순간을 겪고 나서 며칠 후 쓴 스타차일드 단편의 서두이다. 글은 그 순간의 이미지에서 시작한다. 철도 건널목 앞에 멈춰선 카르멘이 햇살을 받으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한다. 사실 내가 겪은 순간을 재생시킨 것이었다. 그 생각과 환상은 사실 이 글 전체의 플롯과는 큰 연관이 없다. (이 단편 자체는 조금 진지했고 사람들의 관계에 대한 얘기였다) 하지만 글이란 것은, 특히 단편이란 것은 이따금 그런 식으로 시작되곤 하는 것이다. 작은 이미지. 환각. 빛. 건널목의 종소리. 뭐 그런 거. 



위의 사진은 당연히 그 이문동 건널목은 아니고...(살던 동네라 막상 그 건널목 찍은 적이 없음) 몇년 전 6월 페테르부르크의 어느 카페 창가에 앉아서 찍은 것이다. 회상하고 있는 순간과 발췌한 글과는 달리 햇살은 전혀 없고 사실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음습했었다. 이때 너무 몸이 아팠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죄어와서 괴로워하며 카페에 들어가 앉아 뭔가 케익 한조각을 먹고 허브 티를 좀 마셨던 기억이 난다. 마린스키 극장에서 직선으로 쭈욱 내려와 센나야 광장 반대방향으로 꺾으면 나오는 카페였다. 카페 이름은 무려 '프라하'였다. 건널목 사진 찾다가 못 찾고 그냥 이 사진 이미지도 어딘가 통하는 것 같아 올려본다.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빛 바랜 붉은 포석이 깔린 좁은 골목을 걷던 카르멘의 귓가에 요란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전철이 들어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골목을 지나 거리로 뛰어나갔다. 자동차와 버스들이 줄지어 멈춰 있었고 전철 한 대가 철도 건널목을 지나가고 있었다. 



 습관처럼 카르멘은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이었고 미끄러지듯 건널목을 지나가는 전철의 지붕 위로 햇살이 빛나고 있었다. 빨리 뛰기만 하면 아슬아슬하게 그 전철을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처럼 운이 없었다. 반짝이는 지붕을 인 전철은 쏜살같이 건널목을 지나 플랫폼으로 들어가 버렸고 그녀가 길을 채 반도 건너기 전에 차단기가 올라가면서 멈추어 있던 자동차와 버스들이 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욕설을 내뱉으며 카르멘은 재빨리 발을 움직여 중앙선까지 갔다. 하지만 차들이 너무 빨리 지나갔기 때문에 더 이상 발을 내디딜 수가 없었다. 멈춰 있었던 차들이 일단 좀 빠져나가면 마저 길을 건너야 할 것 같았다. 



 눈이 부셔왔다. 전철 지붕에 반사되던 햇살이 이제 곧장 길 저편으로부터 날아오고 있었다. 동쪽 하늘이 온통 창백한 금빛으로 타는 듯 했다.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아침 햇살이었다. 심지어 하늘과 차도, 인도의 구별조차도 사라졌다. 



 부신 눈을 깜박이며 카르멘은 멍하게 길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한순간 그녀에게는 이 모든 것이 환상처럼 느껴졌다. 마치 환상의 도시에서 환상의 도로를 건너다 환상의 자동차들이 만들어낸 벽에 갇힌 것 같았다. 이 모든 것들은 창백한 황금빛 햇살로 만들어진 신기루여서 그저 발을 내딛기만 하면 공기를 통과하듯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카르멘은 실지로 발을 내디디려고 했다. 그 순간 거대한 트럭 한 대가 귀청이 떨어져나갈 듯한 경적을 울리며 그녀의 곁을 쌩 하고 스치고 지나갔고 카르멘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아침 출근 도로의 한가운데 홀로 서 있었다. 



 카르멘은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다시 종소리가 울리기를 기다렸다. 더 이상 태양은 마법을 부리지 않았고 자동차와 버스들은 중앙선에 서 있는 작은 소녀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바쁘게 지나갔다. 



 부신 눈을 깜박이며 카르멘은 질주하는 바퀴 달린 기계들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 맹렬한 물결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는 꼼짝도 하지 않고 중앙선 위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자 카르멘은 이미 오래 전에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수학 증명 문제가 생각났다. 그녀는 수학적 공간에서는 선과 마찬가지로 점도 면적이나 무게를 지니지 않는다는 문제를 증명해야만 했었다. 이제 이른 아침의 도로 한가운데 서서, 카르멘은 자신의 육체가 평행으로 그어진 어떤 선 위에 찍힌 점과 같아서 면적도 없고 무게도 없으며 그 외의 모든 물질적 특성과도 무관한 것은 아닐까 하고 의문했다. 그녀의 육체가 추상적인 개념으로 변화했다면 바퀴 달린 기계들이 무슨 힘으로 그녀를 깔아뭉갤 수 있겠는가. 



 막 카르멘이 이 미친 이론에 따라 발을 내디디는 순간 다시 종이 울렸고 멀리서 전철이 들어왔으며 차단기가 내려갔다. 그녀는 무사히 길을 건너 전철역 계단을 올라갔다. 




 출근 시간이었기 때문에 전철 안은 매우 혼잡했다. 카르멘은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남자들의 넓은 어깨 아래 파묻힌 채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며 꾸벅꾸벅 졸았고 흐릿하게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그녀는 레스와 함께 뭔가를 먹으며 중앙선 위에 서 있는 사람은 기계들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대해 열띠게 토론하고 있었다. 레스는 중앙선 자체의 중립성을 의심했고 카르멘은 애초부터 선이라는 것은 점과 마찬가지로 중립적인 거라고 우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끊임없이 뭔가를 먹고 있었다. 무리도 아닌 것이 그녀는 언제나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 ... 2003년 1월, Emerald Cell 중에서 ... 




이 단편은 스타차일드 시리즈의 스물세번째 이야기였다, 전체 30여개 에피소드들 중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했던 이야기였는데 저 서두 때문은 아니었지만 하여튼 그게 좀 영향을 미친 것 같기도 하다. 전철 안에서 졸다가 카르멘은 누군가와 마주치게 된다.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간다. 



** 여기 about  writing 폴더에 스타차일드 에피소드들 몇개를 발췌 혹은 전문을 올린 적이 있다. 링크는 아래. 블로그에 올린 순서가 아니라 에피소드 순서대로 배열했다.


Lipstick traces(ep.3) : http://tveye.tistory.com/8556


open up and bleed(ep.14) : http://tveye.tistory.com/7072


staying in the dark(ep.20) : http://tveye.tistory.com/5413 


Incomparble blind(ep.25) : http://tveye.tistory.com/8448


Not enough(ep.26) : http://tveye.tistory.com/4774


The stars my destination(ep.27) : http://tveye.tistory.com/8536


크리스마스 파편(데본 펠) : http://tveye.tistory.com/4287 



**



이 시리즈 전체 제목인 스타차일드는 많이들 짐작하신 대로 오스카 와일드의 단편 The Star Child 에서 따온 것이다. 와일드 작품들 중에서는 그 단편과 젊은 왕, 어부와 그의 영혼, 살로메, 레딩 감옥의 발라드. 이 다섯 작품을 가장 좋아한다. (역시 나는 재기 넘치는 문장들보다는 드라마틱한 쪽을 더 선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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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8. 12. 31. 23:36

잠시, 새해 전야 about writing2018. 12. 31. 23:36

 

 

아래의 글은 2012년 가을에서 2013년 초까지 썼던 꽤 긴 글의 중반부에서 발췌한 것이다. 어느 해의 마지막 날 밤, 소련 레닌그라드 시내의 어느 아파트에서, 내 글의 주인공과 또 다른 주요 인물이 이야기를 한다. 아주 조금. 그리고 밤을 보낸다. 에피소드는 아주 짧다. 그리고 저 글을 쓰고 난 이후부터 매년, 새해 전야가 되면 앞의 메모에서 적었던 시의 한 구절과 함께 항상 이 에피소드를 쓰던 때를 떠올리곤 한다.

 

 이 부분은 2013년 12월 31일에도 이 about writing 폴더에 발췌해 올린 적이 있다(http://tveye.tistory.com/2554)

그리고 오늘, 다시 한번 올려본다.

 

 

..

 

 

* 이 글을 무단전재, 배포, 도용, 복제,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연말에 미샤는 호두까기 인형을 그럭저럭 잘 췄고 언제나처럼 팬들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평론가들도 간략한 칭찬 기사를 실었다. 하지만 미샤는 그 작품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분장실로 타냐가 찾아가 찬사를 늘어놓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새해 전야에 그는 그 어떤 파티에도 가지 않고 텅 빈 아파트에 혼자 남아 있었다. 혹시나 해서 트로이가 잠깐 들러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미샤는 거실 램프 하나만 켜 놓고 마룻바닥 위에 한쪽 발로 선 채 양 팔을 벌리고 새처럼 몸을 위로 뻗고 있었다. 소파와 바닥 위에 노트와 책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음악조차 틀어놓지 않고 그는 희미한 불빛 속에서 날아갈 듯한 포즈로 미동도 없이 정지해 있었다.

 

 

 “ 연습해? ”


 “ 생각해. ”


 “ 집이 추운데. 왜 아무데도 가지 않았어? 극장에서 파티 안 해? ”


 “ 먼저 나왔어. ”


 “ 너 있으면 갈랴가 데리고 오라고 했어, 같이 텔레비전 보고 샴페인 터뜨리자고. ”


 “ 괜찮아, 그냥 가. ”


 “ 새해를 혼자 맞으면 일 년 내내 재수가 없을 걸. ”


 “ 그럼 여기 있어. ”

 

 

 그래서 트로이는 거기 머물렀다. 텔레비전도 틀지 않고, 샴페인은 더더욱 따지 않고. 어둠과 희미한 램프 불빛 속에서. 미샤는 0시가 될 때까지 두세 번 포즈를 바꿔가며 불편한 자세로 생각에 잠겨 있었고 트로이는 소파에 앉아 그런 그를 보고 있었다. 마침내 시계 바늘이 12를 가리켰을 때 미샤가 그의 곁으로 와서 앉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키스를 한 후 소파에서 옷을 벗었다. 사랑을 나누는 내내 트로이는 소파 커버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지나이다가 파티에서 돌아오지 않기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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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8. 11. 29. 22:51

춤, 글쓰기 about writing2018. 11. 29. 22:51





오랜만에 춤추는 미샤 스케치. 위는 오늘 그린 것. 아래는 예전에 그린 것.








...



 미샤는 한 손을 들어올려 자기 눈 위에 갖다 댔다. 무대 위에서 춤출 때처럼. 포즈를 취할 때처럼. 무의식적으로. 그는 결코 그런 습관들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공기와 바람을 딛는 듯한 걸음걸이도, 자연스럽게 스텝을 세는 버릇도, 음악이 들려올 때마다 보일 듯 말 듯 손을 움직이는 동작도, 틈이 날 때마다 스트레칭을 하는 것도 그대로일 것이다. 그의 몸이 언제나 의식을 앞설 것이다.





...  위의 짧은 문단은 몇년 전 쓴 단편의 일부이다. 제목은 '서리'. 다시 글쓰기를 시작하는 것은 어렵고 또 쉬웠다. 그리고 행복하고 또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행복이 더 앞섰다. 언제나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이다. 아무리 고통스럽다 해도 그 속에는 어떤 행복과 열락이 있고 그것을 대체할만한 것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그래서 글쓰기라는 것, 이것도 하나의 중독이라고, 실은 가장 강력한 중독 중 하나라고 나는 남몰래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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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1. 18. 00:52

붉은색 구름머리 카르멘 두 장 about writing2018. 11. 18. 00:52

 

 

 

오늘 오후에 그린 카르멘 스케치 두 장. 크로키로 빨리 그렸다. 오래 전 썼던 옴니버스 단편 시리즈인 스타차일드 시리즈의 주인공 소녀이다. 본명은 미나.  

 

 

내가 똥손인데다 얘도 빨간 곱슬머리라 역시 지나랑 비슷해짐 ㅠㅠ 나중에 두명 스케치를 대조해 올려봐야겠음. 카르멘 머리색이 더 어둡고 짙은 붉은색이고 더 구름처럼 부풀어오른 곱슬머리이다. 지나 머리색은 밝은 빨강과 핑크가 좀 섞여 있음. 그리고 카르멘은 밝은 푸른색 눈이고 지나는 녹색 눈이다(흑흑 이 두개 빼고는 구분하기가 어려우니 다 내가 똥손이라 그렇다..) 불같은 성질인 건 둘이 비슷하지만 지나가 좀더 밝고 단순하고 정의감 넘치는 타입이다. 카르멘은 쫌 삐뚤어짐. 정키 이력도 있고 하여튼 이래저래...

 

 

근데 오늘 스케치는 둘 다 예전에 글쓰며 맘속으로 떠올렸던 카르멘보다는 좀 나이들게 그려졌다. 사실은 고딩이라 쫌더 앳된 모습일텐데 그리다 보니... 카르멘은 그려본 적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손에 잘 안 익는다. 전에 그렸던 콘크리트 담장에 기댄 모습(http://tveye.tistory.com/8544)이 그나마 마음 속에서 떠올렸던 모습과 좀 비슷한 편이다

 

 

 

 

하여튼.. 쫌 노안으로 그려지긴 했지만... (미안해 카르멘아 엉엉.. 화장 지우면 애기처럼 될 거야ㅠㅠ)

 

수업 땡땡이 까고 옥상에 앉아 구름과자 피우고 있음... (이런 걸 보면 미샤랑 좀 통하는 데가 있어 보이지만... 오래 전 스타차일드 시리즈에서 미샤를 젤 처음 등장시켰을 때 카르멘이랑 미샤가 마주치는 장면이 있었는데, 카르멘은 미샤를 별로 맘에 안 들어 했음. 카르멘 눈에 비친 미샤는 속을 알수도 없어 보이고 좀 음울한 느낌이어서...)

 

..

 

스타차일드 시리즈는 몇개의 단편을 전문, 혹은 일부 발췌해 올렸던 적이 있다. 각각의 링크는 아래 :

 

Lipstick traces(ep.3) : http://tveye.tistory.com/8556

 

open up and bleed(ep.14) : http://tveye.tistory.com/7072

 

staying in the dark(ep.20) : http://tveye.tistory.com/5413

 

Incomparble blind(ep.25) : http://tveye.tistory.com/8448

 

Not enough(ep.26) : http://tveye.tistory.com/4774

 

The stars my destination(ep.27) : http://tveye.tistory.com/8536

 

크리스마스 파편(데본 펠) : http://tveye.tistory.com/4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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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요즘 오래 전에 썼던 단편 시리즈인 스타차일드 시리즈의 에피소드를 이따금 전문이나 일부 발췌해 올리고 있다. 최근 올렸던 두어편은 시리즈 후반부의 이야기들이었다. 오늘은 초반부 이야기를 한편 올려본다. 세번째 에피소드였다. ep.1은 마약에 찌든 소녀 미나(카르멘)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길거리에서 커트를 만나는 이야기였고 ep.2는 카르멘이 커트의 도움을 받아 약을 끊는 에피소드였다. 그리고 이 세번째 이야기는 오랜만에 학교로 돌아온 카르멘에 대한 얘기이다. 초반부의 카르멘은 훨씬 더 모나고 훨씬 더 거칠고 동시에 훨씬 더 연약한 아이이다.

 

 

초기 에피소드라 쓴지도 무지 오래됐다. 2001년에 썼으니까 세상에나, 17년 전에 쓴 글이네. 흑흑 나 늙는 건 생각도 안해 엉엉.... 옛날 글이라 지금 쓰는 글과는 문체나 어휘, 접근법 등이 좀 다르다. 하여튼 내용 수정 없이 두어군데 오타만 고쳐서 올려본다. 이 글의 카르멘에게는 지금의 나보다는 그 당시의 내가 훨씬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뭐 당연한 얘기지만.

 

 

별건 아니지만. 스타차일드 시리즈의 단편들 절반 가량이 그렇긴 한데 여기에도 경미한 폭력 등의 묘사가 있음.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Lipstick Traces

 

 

 

 

 

 


 1981년 2월.

 

 

 

 아무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녀는 수업이 시작되기 몇 분 전에 교실로 들어왔다. 검은 리본으로 느슨하게 잡아맨 청동빛 곱슬머리와 희미한 붉은빛이 도는 입술, 창백하고 작은 얼굴과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흰색 겨울 코트, 눈을 밟아 더럽혀진 운동화가 책상들 사이를 가로질러 갔다. 어떤 아이들은 놀란 표정을 짓거나 옆자리 친구를 쿡쿡 찌르기도 했지만 그녀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 손을 흔들거나 인사하는 아이도 없었다.

 

 

 심지어 교사조차 그녀에게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 젊은 영어 교사는 단지 출석부에 이름을 체크했을 뿐 공기를 통과하듯 눈을 돌렸다. 그녀는 수업 시간 내내 문에서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등을 의자에 기대고 머리를 세운 채, 맑은 눈에서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하늘빛 광채를 쏟아내며.

 

 

 그녀에게는 역사 퀴즈의 질문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

 

 


 점심시간이었고 아이들은 떠들썩하게 식당으로 내려갔다. 아직 겨울이었고 추운 날씨였지만 비싼 사립 학교였으므로 난방 시설도 좋아서 식당은 아주 따뜻하고 쾌적했다.

 

 

 그녀는 배식대로 가서 줄을 섰다. 뒤에서 키 큰 금발 머리 소녀 하나가 서두르다 어깨를 부딪쳐왔다.

 


 
 “ 어, 미안. ”

 

 

 그리고는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금발 머리 소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괜찮아’라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앞줄에 서 있는 친구들에게 가버렸다.

 

 

 그 아이는 변함없이 창백하고 부드러운 얼굴로 배식대에서 따뜻한 오믈렛과 토마토와 사과 주스를 받아 쟁반에 얹었다. 그리고 잠시 식당 안을 훑었다. 드문드문 비어 있는 자리들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어디에 앉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 곳에도 그녀를 위한 자리는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고, 얼굴이 붉어지거나 혹은 더 창백해지지는 않았다. 그저 쟁반을 들고 창가 쪽으로 돌아서 쭉 걸어가 기다란 식탁 가장자리에 앉았을 뿐이었다. 근처에 앉아 있던 여자아이들이 일어나 쟁반을 들고 다른 식탁으로 옮겨갔다. 그들은 이전에 함께 수업을 듣고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들이었지만 양쪽 다 서로 아는 체를 하거나 함께 점심을 먹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던 것이다.

 

 

 신기한 일은 당신이 모두에게 유리되어 홀로 떠도는 우주선처럼 앉아 있는 순간에도 청신경은 레이더처럼, 혹은 주 엔진처럼 꺼지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 소리를 듣는 것처럼, 웅웅거리는 소음이 살아있는 성운처럼 당신을 덮쳐온다. 인간이란 종자의 대단하기 이를 데 없는 신비이다.

 

 

 그 소음은 다음과 같다.

 

 

 " 걔 왔더라, 봤어? "

 

“ 응, 재수 없게 하얀 옷 입고 얌전한 척 하고 왔더라. ”


 “ 눈 밑에 까만 거 봤어? 팔 감추려고 교실에서도 코트 안 벗는 거 있지. 난방 때문에 반팔 입고 있어도 땀나는데. ”

 


 “ 그런다고 누가 모르냐? 우리 학교 애들 다 알지.

 

 

 

 

 

 

 


 혹은.

 


 “ 쟤 퇴학당한 줄 알았는데... 아니면 전학 갔거나. 저번에 분명히 라커룸에서 헤로인 하다가 걸리지 않았어? ”


 “ 너 코니 말 못 들었어? 아랫동네 쓰레기들하고 쟤하고 뒤엉켜서 약 하고 있는 거 봤다잖아. ”


 “ 아, 나도 봤어. 길거리에 아예 쭈그려 앉아서 거지가 따로 없더라고. ”


 “ 근데 어떻게 다시 학교에 왔지? ”


 “ 뻔하지 뭐. 선생들하고 뒹굴었겠지. ”

 

 


 

 그리고.

 

 


 “ 그래봤자 며칠 나오다가 또 마약이나 찌르러 가겠지. 정말 싫어. ”


 “ 야, 너 그래도 쟤 듣는데서 그런 말하지 마. 쟤 얼마나 성격 더러운 줄 알아? ”

 

 

 

 

 

 그것은 소음이다. 당신의 귀를 아프게 하고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웅웅거림. 침묵은 사람을 상처 입히고 소음은 사람을 무감각하게 만든다. 그녀는 침묵의 무게에 짓눌려 아파하는 남자를 하나 알고 있다. 그 남자도 정키였다, 이전에는.

 

 

 그녀는 오랫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었다. 그녀는 아이들의 수군거림이나 질시, 경멸과 혐오가 두렵지 않았다. 오래 전부터 그녀는 겉돌고 있었다. 함께 앉고 점심을 먹는 친구들은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이전에, 그녀가 독한 마약을 손대기 시작하기 전에는 그녀와 사귀고 싶어 하는 남자애들도 꽤 있었다. 그녀는 우아한 얼음 공주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많은 남학생들과 사귀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함께 자고 가벼운 마약을 조금 하는 것. 고급 사립학교의 얌전한 학생들.

 

 

 그녀가 막 헤로인의 유혹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청바지를 모델처럼 잘 입는 멋진 선배 하나가 그녀와 사귀고 싶어했던 적이 있었다. 단순하고 착하고 부드러운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는 게이였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그는 모욕을 받은 표정으로 돌아섰다. 왜 그것이 모욕일까 하고 그녀는 한동안 의문했다. 그 애가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일까? 분명한 것은 정말로 좋은 것은 결코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스며들지 않았다.

 

 


 이제 아이들은 그녀를 밀어내고 두려워하고 싫어하고 무시했다. 문제는 헤로인이 아니었다. 그녀의 거친 말투도 아니었다.

 

 

 그건 그녀의 안에 있는 무언가였다. 땅에 스며들지 못하고 뿌리를 내릴 수 없는 무엇, 마치 플라스틱처럼 유해하고 다른 분자들과 결합하는 것을 방해하는 구조를 가진 밀폐된 무엇.

 

 

 아마도 그녀가 아는 옛 정키 친구는 그것을 피라고 할 것이다. 오염된 피.

 

 

 그녀는 오믈렛 위에 케첩을 쏟아 부었고 무감각한 눈으로 피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포크로 케첩 범벅이 된 오믈렛을 먹었다. 오믈렛은 별로 맛이 없었다. 보통 헤로인은 입맛을 달아나게 만들지만 약을 끊은 지금도 그녀는 입맛이 없었다.

 

 

 오믈렛을 포기하고 사과 주스를 마시고 있는데 남자애들 몇 명이 쟁반을 들고 와서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 오랜만이네. 여기 자리 있는 거 아니지? ”

 

 

 그녀는 무심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그들을 알고 있었다. 작년에 한 두 수업을 같이 들었었다. 하지만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스코틀랜드 식 체크무늬의 값비싼 스웨터를 입은 남자애가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서 카르멘은 즉석에서 그놈을 ‘스코티쉬’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녀에게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 여자애들은 헤로인을 하면 예뻐진다면서? 정말인 것 같은데? ”

 

 

 그녀는 주스를 마시다 말고 물어뜯는 어조로 쏘아붙였다.

 

 

 “ 꺼져. ”

 

 

 체크무늬 스코티쉬 옆에 앉은 녀석들이 낄낄거렸다. 약을 사고 싶든지 사생활이 지저분하다고 알려진 그녀와 값싸게 자고 싶든지 둘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 둘 중 어느 쪽에도 관심이 없었다. 직접 약을 구하러 다니기에는 너무 잘나고 고결한 상류층 도련님들 따위는 그녀에겐 너무 고급이어서 역겨웠다.

 

 

 스코티쉬가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 이거 왜 그래, 오랜만에 학교 와 가지고. 너 혼자 좋은 거 다 하기야? 예쁜 코트네, 이 안에 뭐가 있는지 궁금한데. ”

 

 

 그녀는 참기로 했다가 녀석이 코트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가슴을 건드리는 순간 마음을 바꿔먹었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 주스 컵을 테이블에 내리쳐 깨고 의자를 휘둘러 놈을 두들겨 팼다.

 

 

 “ 꺼지랬잖아, 개새끼야! 귀가 먹었어? ”

 

 

 운동화를 신은 작은 발로 바닥에 나동그라진 체크무늬 스코티쉬를 걷어차고 의자를 집어던지며 그녀가 욕설을 퍼부었다. 한 손에는 깨진 유리컵 조각을 쥐고 창백한 이마에 흘러 내려온 붉은 머리카락 아래서 격렬한 푸른 눈을 불길처럼 태우며 악을 써대는 작은 악마 같은 그녀를 스코티쉬에게서 떼어놓을 만큼 용기 있는 패거리는 하나도 없었다. 욕을 하고 때리고 걷어찬 뒤 그녀는 유리 조각을 그대로 쥔 채 식당 밖으로 나가 버렸다.

 

 

*           *            *

 

 

 


 ‘ 학교에 불을 질러 버릴까? ’

 

 

 카르멘이 눈이 쌓인 운동장으로 나오면서 제일 먼저 한 생각이었다. 혹은 기관총을 들고 들어가 식당과 교실에 난사하거나.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웃었다. 아마 불을 지를 수는 있을 것이다. 지저분한 눈밭에 불길이 비치는 모습은 참 볼만할 것이다. 하지만 기관총을 들고 사람들을 쏴 죽이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미움이나 분노, 혹은 억울한 감정이 있어야만 한다. 카르멘에겐 그런 감정이 없었다. 몇 대 때려 주면 그 뿐이다. 그것도 그 스코티쉬 놈이 그녀의 가슴을 만지작거렸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실없는 소리를 지껄이게 내버려두었을 것이다. 어쩌면 기관총으로 사람들을 쏴 죽이는 사이코들은 단순히 그게 재미있기 때문에 총질을 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런 것이 전혀 재미있지 않았다.

 

 

 카르멘은 입술을 깨물었다. 학교에 오기로 한 것은 따분한 실수였다. 그건 부모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약을 끊었으니 건전한 모범생이 되어 보기로 결심한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잘나가는 양친은 그녀에게 별 관심도 없었고 서로 정부를 만나느라 정신이 없었다. 카르멘은 양쪽의 정부들을 시내의 인접한 카페들에서 동시에 본 적도 있었다. 아버지 쪽이 보다 취미가 고상해서 그레타 가르보를 닮은 젊은 여자를 만나고 있었다. 어머니의 남자는 검은 물개수염을 기른 느끼한 마초였는데 그녀는 그런 남자가 섹시하다고 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카르멘은 정부를 끼고 있고 자신에게 신경을 쓰지 않으며 종종 학교에서 호출을 받으면 잠시 의무적으로 그녀의 불량기에 대해 야단을 치고 그녀가 길거리 정키 아지트에서 며칠째 뒹굴다 들어와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신의 부모들이 쿨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성적이 나쁜 편은 아니었다. 초창기에는 교사들이 귀여워할 만큼 공부도 잘 했고 예쁜 아이였다. 물론 몇 달 동안의 무단결석(어쨌든 카르멘은 자신의 부모가 아무렇게나 변명을 지어내기는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한 학기를 깡그리 다시 다녀야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성적은 좋았다. 그리고 매력적인 소녀였다. 한때는 치어리더들이 그녀를 끌어들이려고 한 적도 있었다. 그녀의 눈이 굶주리고 황폐한 하늘빛 푸른색으로 변하기 전이었다.

 

 

 아마도 변화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카르멘 자신도 왜 학교에 다시 올 생각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유행하는 화장을 하고 비싼 머리를 하고 연예인과 모델 잡지를 주고받으며 뜻 없이 떠들고 웃는, 졸업 파티의 여왕이 누가 될까 점치고 댄스 상대를 기다리는 단순하고 생각 없는 여학생이 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특별 활동을 잔뜩 하고 성적을 몽땅 에이 플러스로 채워 넣는 학생회장 같은 존재가 되려고 했거나. 하지만 그녀는 위선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제 눈이 쌓인 운동장을 터덜터덜 걸으면서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혹은 아이들이 무엇을 오해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아이들에겐 잘못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문제는 그녀 자신에게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그녀도 몰랐다. 정말로 오염된 피일까?

 

 

 카르멘은 얼굴을 찡그리며 손바닥을 폈다. 유리 조각이 박혀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유리 조각을 뽑아내 교문 근처의 휴지통에 버렸고 나무 아래 쌓인 눈 위에 손바닥을 문질렀다. 몹시 쓰리고 아팠다. 흰 눈 위로 피가 번져 새빨갛게 물들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 어쩌면 약을 끊은 건 바보짓이었는지도 몰라. ’

 

 

 그녀는 화난 표정으로 입을 앙 다물며 교문을 나갔다. 어디로 갈까? 당분간 학교에는 다시 발을 들여놓지 않을 것 같았다. 집에 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흰 눈처럼 순결한 헤로인의 세계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일곱 블럭쯤 떨어진 곳에 지하 정키 아지트가 하나 있었다. 시간은 좀 이르지만 그녀와 잘 알고 지내는 정키 패거리 한둘은 있을 것이다. 그녀는 호주머니의 돈을 확인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            *

 

 


 찢어진 운동화 속으로 눈이 스며들어왔다. 잠시 카르멘은 슈팅 갤러리에 가기 전에 쇼핑 몰에 들러 새 운동화를 살까 말까 망설였다.

 

 


 * 첫번째 선택 : 쇼핑 몰에 가서 운동화를 산다.


   ... 부정적 측면 : 일단 헤로인을 팔뚝에 찔러넣기 시작하면 며칠 동안은 아지트에서 뒹굴어야 한다. 나갈 곳도 없고 약 때문에 돈이 필요하다.

 

 

 * 두번째 선택 : 젖은 운동화를 신고 아지트에 가 뒹군다.


   ... 부정적 측면 : 아지트는 몹시 추워서 운동화와 발을 말리지 않으면 동상에 걸릴 위험이 있다.

 

 


  
 ** 변수 : 아지트의 정키 패거리들은 고물 스토브를 팔아 치웠을까?

 

 

 


 그녀는 좁은 길을 건너 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아지트에 전화해서 아직 스토브가 남아 있는지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부스는 두 칸 다 비어 있었다.

 

 

 동전을 찾아 호주머니를 뒤지는데 갑자기 탕탕탕 하는 총성이 울리며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는 순간 옆 부스의 유리가 와장창 깨지며 수화기가 박살났다. 꺄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카르멘은 부스 바닥에 엎드렸다.

 

 

 바닥에 몸을 붙이고 공처럼 둥글게 웅크린 채 그녀는 부들부들 떨며 유리문 너머로 바깥을 살펴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눈이 쌓인 길바닥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총성이 울렸다. 이번에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자동차 바퀴가 끼익 하고 길바닥을 미끄러지는 소리와 욕설, 비명이 꼬리를 이었다. 사방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흑인이나 히스패닉 갱들이 총격전을 하는 모양이었다, 혹은 마피아, 혹은 살인자와 경찰들..

 

 

 그녀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좁은 부스 안에 무릎을 말고 옆으로 엎드린 채 아무도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기를 빌었다. 무서워서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 조금만, 조금만 있으면 끝날 거야, 조금만... ’

 

 

 길 위의 눈에 총알이 튀어 박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눈을 감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총성은 그치지 않았고 여기저기서 유리 깨지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어쩌면 그건 그녀 자신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였는지도 몰랐다. 카르멘은 정키 뒷골목에는 훤했고 상당히 거친 패거리들과도 안면이 있었지만 총격전의 와중에 말려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마약 쇼크로 죽은 사람은 본 적이 있었지만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껏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총성과 고함 소리, 길을 달려가는 발소리 등으로 미루어 보아 두 패거리가 전화 부스가 있는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총격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건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는 꼼짝도 하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숨을 죽이고 엎드려 있었다. 부스 바닥에 달라붙어 있는 담배꽁초와 껌, 진흙과 맥주병 뚜껑 따위를 하나하나 세고 관찰하면서. 그녀는 손톱으로 반쯤 파묻혀 버린 찌그러진 버드와이저 병뚜껑을 파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발에 밟히고 짓눌려 바닥에 화석처럼 파고 들어가 버린 병뚜껑은 잘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뚜껑을 파냈다. 손톱이 부러지고 상처가 났다. 그래도 미친 듯이 악착같이 뚜껑을 긁고 당기고 바닥을 팠다. 숨을 헐떡이고 이를 악문 채 세상에서 가장 값비싸고 눈부신 보석이라도 되는 양 헌 병뚜껑을 파냈다.

 

 

 파낸 병뚜껑을 더러워진 손으로 꼭 쥔 채 그녀는 눈물을 참으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녀는 체크무늬 스코티쉬를 두들겨 패지 말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집에서 나올 때 늙은 고양이인 로로를 한번 안아줄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길을 지나가다 마주친 아버지의 그레타 가르보의 발을 슬쩍 걸어 넘어뜨리지 말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스꽝스럽게도, 하얀 코트를 입고 온 것을 후회했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머리와 등 위로 유리 조각들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어디선가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고, 유리 파편들을 눈처럼 뒤집어쓴 채 헌 병뚜껑을 꽉 움켜쥐고 부스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울거나 고함을 지르거나 떨지도 않고 숨소리도 죽인 채 기묘한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그녀는 지금 미치도록 약이 필요했다. 헤로인,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그 독액이 미친 듯이 필요했다.

 

 

 그녀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희미하게 신음과 비명, 거리를 가로질러 달려가는 수많은 발소리를 들었을 뿐이었다. 경찰들이 온 모양이라고 카르멘은 생각했다. 그럼 역시 길거리의 어린 갱들이었을까?

 

 

 경찰들은 정말로 왔다. 그들은 총에 맞아 피를 흘리며 울부짖는 조무래기 두세 명을 옮기고 주변을 수색했지만 모두가 쏜살같이 도망쳤기 때문에 남은 것은 깨진 유리와 펑크 난 타이어, 엉망이 된 거리와 겁에 질린 행인들뿐이었다. 경찰들은 행인들에게서 목격 진술을 받고 거리를 훑었다. 카르멘은 유니폼을 입은 경찰 두 명이 전화 부스 쪽으로 오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경찰이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것에 깜짝 놀랐다. 제복 차림의 두 경찰관은 유리가 산산이 깨진 부스와 옆 칸의 부서진 수화기를 살피고 수첩에 기록한 후 바닥에 엎드린 카르멘을 공기처럼 지나쳐 갔던 것이다. 심지어 경찰관 하나는 그녀가 엎드려 있는 부스 바닥에 담배꽁초를 버리기까지 했다. 그녀는 잠시 멍한 얼굴로 멀어져 가는 경찰들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하얀 코트를 입고 우박처럼 유리 파편을 뒤집어쓰고 웅크린 그녀는 우스꽝스런 눈사람으로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도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기도가 효력을 발휘하여 하느님이 그녀를 투명인간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갑작스럽게 다시 돌아온 공포에 질려 카르멘은 손을 펴보았다. 병뚜껑이 반쯤 파고 들어가 있는 손바닥이 보였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카르멘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도저히 부스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위험이 지나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말 그대로 한 발짝도 밖으로 내디딜 수가 없었다. 어리석은 일이다. 어차피 갱들이 아직 설치고 있다 해도 그녀는 투명인간이니 무슨 상관인가?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비되어 저린 손을 코트 주머니에 쑤셔 넣어 동전을 꺼냈다. 어린애처럼 엉엉 울며 카르멘은 투입구에 동전을 집어넣고 헤로인 아지트의 번호를 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세상의 어느 미친 정키가 눈이 쌓인 위험한 뒷골목으로 그녀를 데리러 기어 나오겠는가. 게다가 거기엔 스토브도 없다.

 

 

 수화기를 든 채 그녀는 길 잃은 아이처럼 울면서 서 있었다. 빌어먹을, 이건 정말 좋지가 않다, 안 좋은 상황이다. 그녀는 수십 개의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었다. 하지만 투명인간인 그녀에겐 전화할 상대가 없었다. 더러운 일이었다. 누가 그녀를 볼 수 있겠는가?

 

 

 카르멘은 울면서 굳은 손가락으로 정신없이 다이얼을 돌렸다.

 

 


*           *            *

 

 


 커트는 곧 그녀를 데리러 왔다. 이전처럼 친구의 차를 가지고 왔는데 울고불고 횡설수설하는 카르멘의 전화에 놀란 나머지 신호와 행인들을 전부 무시하고 기록적인 속도로 도로와 골목을 주파해 경찰차 수십 대를 뒤에 달고 올 뻔 했다.

 

 

 전화 부스 안에 웅크리고 앉아 흐느끼고 있는 카르멘을 본 커트는 그녀가 놀랄까봐 걱정하며 부드럽게 이름을 불렀다.

 

 

 “ 카르멘. ”

 

 

 그녀는 고개를 들었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푸른 눈으로 커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 내가 보여요? ”


 “ 응. ”

 

 

 커트는 카르멘을 안아서 차로 옮겼다. 그녀는 두 팔로 커트의 목에 매달리고 무릎으로 그의 허리를 감은 채 여전히 코를 훌쩍이며 투명인간과 그레타 가르보와 고양이, 병뚜껑에 대해 횡설수설했다. 그리고 무슨 체크무늬 스코티쉬에 대해서도 지껄여댔다. 커트는 카르멘을 조금 진정시킨 후 차를 몰아 그녀를 자기 아파트로 데려갔다.

 

 


*           *            *

 

 

 


 거품이 이는 뜨거운 우유와 위스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알콜을 섞은 칵테일을 두 잔 마시고 나자 카르멘은 훨씬 진정되었다. 커트는 이미 흰색과는 거리가 멀게 더럽혀진 그녀의 코트와 젖은 운동화와 양말을 벗긴 후 타월로 발을 닦고 슬리퍼를 신겼다. 그리고 그녀를 모포에 감싸 소파에 기대게 한 후 간이 스토브를 가져와 따뜻한 불을 쬐게 해주었다.

 

 

 그녀는 두서없이 학교에 갔던 얘기를 했다. 아이들이 지껄이던 소리와 그녀의 사과를 받고 싶어 하지 않았던 키 큰 금발 머리 여자애와 자리를 피하던 애들과 재수 없는 체크무늬 스코티쉬 패거리들에 대해 얘기했다.

 

 

 “ 난 학교가 싫어요. ”


 “ 나도 학교가 싫었어. ”

 

 

 커트는 머리를 완전히 뒤로 넘겨 묶고 있었다. 가느다란 앞머리가 몇 가닥 흘러내려와 있었는데 은색 블론드로 탈색한 머리카락 뿌리 부분이 어두운 붉은 갈색으로 자라나 있었다. 마치 그가 이마 위에 가느다란 갈색 머리띠를 한 것처럼 보였다. 카르멘은 잠시 커트가 다녔던 미시간의 학교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그녀보다도 더 일찍 학교와 연을 끊었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건 그의 선택이 아니었다. 그의 부모가 열세 살밖에 안 된 아들을 정신병원에 보내 뇌세포를 매일 태워대게 했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는 커트의 어두운 적갈색 머리카락이 전기에 그을린 흔적으로 보였다. 그녀는 커트의 머리카락을 다시 뿌리까지 탈색해 주고 싶었다.

 

 

 “ 하지만 왜죠? 내 무엇이 잘못된 거죠? ”

 

 

 그녀는 커트가 오염된 피에 대해 이야기할 거라고 생각했다.

 

 

 커트는 스웨터를 벗고 검은 반팔 티셔츠로 갈아입으면서 대꾸했다.

 

 

 “ 그건 질투야. 그 애들이 너를 질투하는 거야. ”


 “ 왜요? ”

 

 

 커트는 잠시 카르멘을 빤히 바라보았다.

 

 

 “ 아름다우니까. ”

 

 

 그녀는 웃기 시작했다.

 

 

 “ 학교에 예쁜 공주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요? ”


 “ 그래. 하지만 그건 달라. 찌르고 흔적을 남기는 아름다움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해. 그것도 일종의 병이야. ”


 “ 그럼 정말로 내 안에 잘못된 것이 있는 건가요? ”


 “ 난 그게 좋아. ”

 

 

 커트의 음성은 낮고 솔직했다. 카르멘은 어쩐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커트 때문에 가슴이 아파졌다. 그녀는 바지 주머니에서 병뚜껑을 꺼내 커트에게 보여주었다.

 

 

 “ 부스에서 파냈어요. 내 새 부적이에요. ”

 

 

 커트는 찌그러진 버드와이저 뚜껑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들여다보더니 연장 상자를 가져와 송곳으로 구멍을 뚫고 자신의 목에 걸려 있던 여러 겹의 가죽끈 목걸이를 벗어 뚜껑을 끼웠다. 그리고 부적 목걸이를 카르멘의 목에 걸어 주었다.

 

 

 “ 멋있다. ”

 

 

 카르멘은 기분이 좋아져서 커트의 뺨에 입을 맞추곤 소파에서 일어나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던 가방에서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 이리 와요, 목걸이 만들어준 상이에요. ”

 

 

 그녀는 립스틱을 들고 커트에게 다가갔다. 커트는 뒷걸음질을 치며 말했다.

 

 

 “ 취했구나, 너. ”


 “ 맞아요, 취했어요. 누가 그 독한 칵테일을 만들었더라? 맛있었어요. 한잔 더 만들어줘요. ”


 
 그러면서 카르멘은 커트를 소파에 앉혀놓고 붉은 립스틱을 칠해 주었다. 커트는 신음하며 중얼거렸다.

 

 

 “ 너 즐기고 있지? ”


 “ 왜 빼고 그래요? 내가 자기 팬이었던 거 몰라요? 립스틱이랑 마스카라에 칵테일 드레스까지 차려입고 레코드 재킷 찍던 사람이. ”

 

 

 커트는 웃기 시작했다. 그는 전혀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래서 그를 좋아했다.

 

 

 

 카르멘은 립스틱을 들고 발코니로 나가 유리창에 온통 낙서를 하고 커트가 만들어 준 칵테일을 한 잔 더 마셨다. 그리고는 지독하게 취해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커트는 취한 카르멘이 아무렇게나 칠해서 입술 옆으로 번진 붉은 립스틱을 닦아낼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그는 카르멘을 안아서 자신의 침대에 눕히고 리본을 풀어 풍성한 머리채를 베개 위에 펼쳐 주었다. 그리고 발코니로 나가 우스꽝스러운 동물과 나비, 기호와 글자가 붉은색으로 어지럽게 널려 있는 유리창을 바라보며 노래를 하나 썼다. 하지만 거기에는 멜로디가 없었다. 오직 붉은 흔적만 있었다.

 

 

 


FIN
2001. 6. 27

 

..

 

 

맨 위 사진은 2016년 겨울에 페테르부르크 갔을 때 눈보라 맞으며 걷다 찍은 것. 카르멘은 1981년의 뉴욕에 있으니 아무런 관련 없는 사진이다만 눈과 거리에 대한 사진을 올리고 싶어서 마침 눈에 얻어걸린 사진 올림. 하긴 돌이켜보니 저 당시 무지 힘들고 우울한 시기였으니 감정적으로는 조금 통하는 데가 있으려나 싶기도 하다.

 

 

..

 

 

두들겨 맞은 (성희롱범) 체크무늬 스코티쉬는 이후에도 계속 나온다. 뒤로 갈수록 주요인물 중 하나가 됨. 마크 :)

 

 

..

 

전에 올렸던 스타차일드 시리즈의 몇가지 에피소드 링크는 아래. 전문 또는 일부를 올렸었다.

 

 


open up and bleed(ep.14) : http://tveye.tistory.com/7072


staying in the dark(ep.20) : http://tveye.tistory.com/5413 


Incomparble blind(ep.25) : http://tveye.tistory.com/8448


Not enough(ep.26) : http://tveye.tistory.com/4774

 

The stars my destination(ep.27) : http://tveye.tistory.com/8536


크리스마스 파편(데본 펠) : http://tveye.tistory.com/4287 


 ** 카르멘 스케치 : http://tveye.tistory.com/8544

 

:
Posted by liontamer
2018. 10. 29. 22:43

과거에서 온 아이, 카르멘 about writing2018. 10. 29. 22:43





며칠 전 오랜 옛날의 글을 한편 올리고 났더니(http://tveye.tistory.com/8536  : 내 목적지는 별들) 한번 그려보고 싶어서, 오늘 그려봄. 빨간 곱슬머리이긴 하지만 지나 아님. 지나처럼 보이는 것은 내가 똥손이라서 ㅋㅋ 잘 보면 빨간색 톤도 좀 다르고 눈색깔도 다릅니다. 



오래 전에 썼던 스타차일드 단편 시리즈의 주인공인 카르멘. 본명은 미나. 이 시리즈의 마지막 편을 썼던 것도 거의 십몇년 전이다. 그러니 내 글에 나오는 빨간머리는 얘가 지나보다 먼저였습니다. 성깔은 지나보다 훨씬 윗길이라 고딩임에도 불구하고 마약 폭력 응응 3종세트 마스터... 추근대는 남자애를 두들겨패 늑골에 금가게 만든 전력도 있음. 학교에서 불리는 별명은 펑크 폭력녀(ㅜㅜ)



딱히 넣을 폴더가 없어서 그냥 지나와 말썽쟁이 폴더에 넣음.



... 그랬다가 about writing 폴더로 다시 옮겨놓음.


:
Posted by liontamer





이 도시의 운하는 베네치아나 암스테르담과는 다르다. 셋 중 가장 늦은 도시. 하지만 가장 문학적이고 환상적인 도시. 전자의 두 도시가 상업과 교역으로 역사 깊은 곳이었다면 페테르부르크는 한 사람의 권력자, 한 인간의 의지에서 태어난 도시, 애초에 견고한 디딤돌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늪 위에 세워진 도시, 물과 안개와 바람과 진창을 돌로 메운 도시, 인간의 의지로 세워진 도시, 그로 인해 역설적으로 비인간적인 도시, 언제나 악마와 홍수와 멸망 신화에서 자유롭지 못한 도시이다. 바닥이 존재하지 않는 도시. 




이 도시는 운하 때문에 북방의 베네치아라고 불리기도 하고 암스테르담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세 도시를 모두 쏘다녔고 운하들 사이사이를 걸어보았다. 베네치아의 좁다랗고 꼬불꼬불한 운하들은 여기서 손을 뻗으면 건너편의 건물 벽이 만져질 것만 같다. 햇살로 씻겨나간 듯 밝고 화려한 색채들. 온통 빛들. 거기에 이곳의 어둠과 추위는 없다. 암스테르담은 베네치아보다는 춥다. 운하도 훨씬 널찍널찍하다. 온통 힙한 느낌이지만 문학적인 깊이는 느껴지지 않는다. 페테르부르크의 운하는 그 두 도시와는 다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어디에도 같은 도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도시에 대해 형용할 수 없는 애착과 동질감을 느낀다. 그리고 동시에, 당연하고도 두려운 이질감을. 나는 서울에 대해서도 그런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다. 인생의 극히 일부만을 보낸 도시가 그토록 강력한 마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에 경이로워지는 순간이 있다. 



아래는 내가 쓰는 글의 주인공인 미샤가 도시와 운하, 자신에 대해 하는 말 일부이다. 이전에 저 파트를 좀 발췌해서 올린 적이 있다. 페테르부르크. 소련 시절 레닌그라드. 운하.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6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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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을 다 가질 수 있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건 이상한데. ”



 그는 심각하게 들리지 않도록 애쓰며 팔 안의 몸을 천천히 끌어당겼다. 땀이 식으면서 한기가 느껴졌다. 미샤의 몸에는 아직도 열기가 남아 있었다.



 “ 세상이란 게 뭔데. 소비에트 연방? 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




 
 그는 키로프라고 하지 않고 마린스키라고 했다. 레닌그라드 대신 페테르부르크라고 얘기한 것처럼.



 “ 우리 주위의 모든 것. 전부. ”



 “ 레닌그라드. ”



 미샤가 결론을 내리듯 단호하게 말했다. 트로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레닌그라드. ”



 그는 미샤가 이 도시에 대해 품고 있는 애정의 깊이에 전율했다. 물 위에 돌로 지어진 도시, 학살과 절망의 도시, 피와 바람의 도시, 허위와 모방의 역사로 가득 찬 옛 수도, 이제는 모스크바의 광휘에 밀려나 퇴색하고 있는 도시를 향해 그런 절대적이고 강력한 사랑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 나하고 레닌그라드는 같을지도 몰라. ”



 미샤는 트로이의 귓가에 입술을 마주 댄 채 따스한 숨결을 내쉬며 말했다.



 “ 뿌리가 없어. 돌이킬 수 없이 안이 비었어. 파이프처럼. 운하의 검은 물이 그 안으로 차올랐다가 어디론가 빠져나가. 그래서 사람들을 잡을 수가 없어. 친구를 만들기가 너무 어려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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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아래 단편은 2004년 가을에 썼던 글이다. 이 폴더에 몇차례 올린 적이 있는 스타차일드 시리즈에 속한 단편이다. 시리즈는 총 27개의 에피소드와 크리스마스 등의 외전 두어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단편이 마지막 에피소드인 27편이다. 딱히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쓴 건 아니고, 저 당시에 원래 28편, 29편도 구상하고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더 이상 쓰지 못했다. 그렇다고 미완성 시리즈라고 하기엔 애초부터 완성과 결말의 개념을 갖춘 시리즈가 아니었다. 



27편의 제목은 'The Stars, My Destination' 이다. 이 근사한 제목은 유명한 sf 작가인 알프레드 베스터의 동명 소설에서 따왔다. 이 이야기 자체가 카르멘이 베스터의 이 소설책을 훑어보다 저 구절이 마음에 들어서 수첩에 베껴쓰는 것으로 시작한다. 우리 나라에는 오래 전에 '타이거, 타이거'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는데 지금은 절판되었을 것 같긴 하다. 베스터의 장편소설은 이 소설과 '파괴된 사나이'가 번역되었는데 둘다 굉장히 재미있다. 둘 중에선 나는 전자를 더 좋아했다. 더 시적이고 화려해서.



27편의 주요 등장인물은 시리즈의 주인공인 카르멘(학교에서 불리는 본명은 미나. 카르멘은 친구인 커트가 지어준 이름)과 동급생인 마크, 그리고 어떤 여자아이이다. 전문을 올려본다. 이것도 이미 십몇년 전의 글이네(흐흑 시간 왜 이렇게 빨리 가는 거야...)



이 이야기는 스타차일드 시리즈의 이전 에피소드들과는 약간 성격이나 결이 다르다. 바로 앞의 26편을 쓰고서 5개월 정도의 텀을 둔 후 썼는데, 그 당시엔 워낙 계속 글을 쓰던 시절이라 이 정도 간격이면 매우 긴 것이었다. 그래서 이 에피소드를 쓰고 나서 '그 동안 뭔가가 약간 변한 것 같다' 라고 느끼기도 했었다. 



에피소드 앞에 붙어 있는 메모는 저 글을 완성한 직후 적은 아주 짧은 후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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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9월의 메모>




정말 오랜만에 글을 한편 완성했다. 스타차일드 시리즈 27편이다.



사실 알프레드 베스터의 소설과는 내용적으로 아무런 연관도 없다. 다만 작가들의 언어가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지 오랜 생각을 했을 뿐이다. 독자들은 그 작가가 결코 생각도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그 글을 읽는다. 그리고, 가끔은 행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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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ars, my destination






Deep space is my dwelling place,
The stars, my destination.
.. Alfred Bester, The stars my destination ..






 1981년 11월.




 그날의 메뉴는 커틀릿과 감자튀김이었고 카르멘은 일찌감치 점심을 포기한 채 핼로윈의 부산물인 커다란 초콜릿 봉지와 빨간 수첩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학교 옥상 한 귀퉁이에는 그녀의 비밀 장소가 있었다. 레스의 스튜디오 옥상이 목요일 밤마다 친밀한 마법을 공유하는 곳이라면 이곳은 그녀만의 장소였다. 그녀는 난간 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며 책을 읽거나 수첩에 글을 쓰곤 했다. 



 아주 가끔씩은 데본 펠이 올라오곤 했다. 하지만 그들 둘은 모두 야생 짐승들처럼 자신의 구역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수첩에 글을 쓰는 동안 데본은 저만치 떨어진 곳에 앉거나 누워 악마만이 짐작할 수 있는 뭔가를 하곤 했다.



 입에는 아몬드 초콜릿 바를 가득 물고 눈으로는 펼쳐든 수첩의 구절들을 읽으면서 카르멘은 계단을 올라갔다. 옥상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보라색 잉크로 휘갈겨 놓은 네 줄의 시를 읽고 있었다.



내 이름은 걸리버 포일
내 나라는 지구
내가 머무는 곳은 깊은 우주
내 목적지는 별들


Gully Foyle is my name
And Terra is my nation.
Deep space is my dwelling place,
The stars, my destination.






 그녀는 그 구절을 아침에 레스의 낡은 SF 소설책에서 발견했다. 레스와는 달리 추리나 SF 소설에 큰 관심은 없었지만 평소와 달리 일찍 일어난 데다 레스가 토스트를 굽고 있었으므로 식탁에 앉아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책을 뒤적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구절을 발견했다. 마지막 행은 카르멘의 마음을 잡아끌었고 그녀는 레스에게 소리쳐 물었다.



 “ 걸리버 포일이란 놈이 나오는 책 내용이 뭐야? ”


 “ 아, 행성과 행성 사이를 순간 이동할 수 있는 남자에 대한 얘기야. ”



 카르멘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첩을 꺼내 그 네 줄을 옮겨 적었다. 그리고 책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은 채 레스가 가져다 준 토스트를 먹기 시작했다...



 아침에 먹고 온 맛있는 토스트를 생각하자 카르멘은 학교 식당 메뉴에 부아가 치밀었다. 새로 온 요리사는 이른바 베지테리안의 적이나 다름없었다. 가을 학기부터 그들의 점심은 모두가 기름진 고기 요리 일색으로 변했다. 학부모들은 학교에서 드디어 학비에 걸맞게 메뉴를 고급화했다고 좋아했지만 카르멘은 죽을 지경이었다.



 초코바 토막을 입 안에 전부 밀어 넣고 우물거리며 카르멘은 옥상으로 발을 내디뎠다.




*          *           *




 그녀는 오랫동안 두 팔로 무릎을 감싼 채, 난간 벽에 기대앉아 뭔가를 수첩에 적고 있는 붉은 머리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가 잘 알고 있듯 그 애의 이름은 미나였다. 학교를 떠들썩하게 했던 문제아, 헤로인 중독자, 폭력을 밥 먹듯 휘두르는 펑크 소녀. 하지만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그런 일반적인 사실들이 아니라 그 애가 쉴 새 없이 초콜릿을 먹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그런 달콤한 것들을 먹어대도 결코 살이 찌지 않는 운 좋은 부류에 속한 아이가 분명했다. 



 그녀는 꽤 오랫동안 저녁을 먹지 않았다. 그리고 이틀 전부터는 점심도 거르기로 마음먹었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이전보다 조금 살이 빠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마음에 드는 예쁜 옷을 입을 수가 없었고 여전히 그 누구도 그녀에게 인사를 하거나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가 점심을 거르기 시작한 것은 다이어트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사실 때문인지도 모른다.



 붉은 머리의 깡패 소녀는 하트 모양의 창백한 얼굴에 텔레비전이나 잡지에서나 볼 수 있는 짙은 검은색 마스카라와 타들어가는 듯한 붉은 립스틱을 칠하고 있었다. 날씬한 아이들만 입을 수 있는 흰색 니트 스웨터와 골반에 걸쳐진 검은색 진을 입고 여러 겹의 끈이 달린 낡은 부츠 뒷굽으로 시멘트 바닥을 탁탁 치며 수첩을 뒤적이고 있었다.



 세상은 불공평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예쁜 아이들, 날씬한 아이들, 쿨한 아이들도 그런 것들 중 하나였다. 혹은, 친구가 많은 아이들, 언제나 바쁘게 놀러 다니는 아이들도. 



 그녀가 이해할 수 있는 거라곤 수업 시간에 집중하면 시험을 잘 볼 수 있다는 것, 좋은 성적표를 받아오면 부모님이 기뻐하며 착한 딸이라고 칭찬을 해 준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전교 1등을 도맡아 놓고 하는 아이는 그녀의 절반만큼도 노력하는 것 같지 않았고 그녀의 금발머리 여동생은 언제나 부모님의 귀염둥이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녀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뭔가에 열중하는 사람들이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너무나 열정적인 사랑에 휩싸인 연인들에 대해, 예술혼에 사로잡혀 미쳐가는 비극적인 음악가에 대해, 목숨을 걸고 빙벽을 오르는 도전자에 대해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하지만 과연 실제로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뭔가에 열중한다는 것은 그저 뭔가를 좋아한다는 것을 과장되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 뭔가에 집중한 나머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어이없는 허풍에 지나지 않았다. 그 무엇을 한다 해도, 아무리 좋아하는 일을 한다 해도 그녀는 자신의 외모를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붉은 머리의 펑크 소녀를 지켜보았다. 미나, 그 애의 이름은 미나였다. 그녀는 미나를 알고 있었다. 이야기 한번 나눠본 적이 없고 (물론 그건 미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애들과도 마찬가지였지만) 옆자리 한번 앉아본 적이 없지만 알고 있었다. 



 미나는 차가운 시멘트벽에 등을 대고 고개를 숙인 채 초코바를 우물대며 끊임없이 볼펜을 놀리고 있었다. 아마도 뭔가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숙제는 아니었다. 어느 누구도 표지가 빨간 작은 수첩에 숙제를 하지는 않았다. 그럼 편지일까? 좋아하는 사람에게 쓰는 편지, 연애편지. 그녀가 겨우 한 차례 썼던 것, 하지만 남들이 보면 전혀 연애편지라고 여길 수 없는 어눌한 편지. 그녀가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것. 하긴 일반적인 편지 자체도 주고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아주 가까운 곳에 앉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나는 전혀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싸늘한 바람에 붉은 곱슬머리가 파도처럼 이마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나방이 한 마리 날아와 이마와 뺨에 앉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했지만 그것조차 내버려두고 있었다.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거는 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          *           *




 싸늘한 바람이 옥상의 시멘트 바닥을 때리고 지나갔다. 거센 바람이었고 카르멘의 무릎에 있던 초콜릿 봉지가 저만치 데구르르 굴러갔다.



 “ 에이씨. ”



 카르멘은 수첩을 덮고 봉지 쪽으로 손을 뻗었고 그때 다른 아이를 보았다. 연한 갈색 머리의 뚱뚱한 여자아이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난간의 시멘트벽에 등을 대고 앉아 있었다. 초콜릿 봉지는 그녀의 발치 가까이 굴러가 있었다. 카르멘은 그 아이가 대체 언제부터 거기 앉아 있었던 걸까 하고 의문했다. 



 “ 좀 집어줄래? ”



 그녀는 뭔가를 들킨 사람처럼 움찔하더니 봉지를 주워 주었다. 어쩐지 카르멘은 그녀가 오랫동안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르멘은 봉지를 받았고 건포도와 땅콩이 박힌 초콜릿 캔디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 먹을래? 맛있어. ”


 “ 어... 나 단 거 안 먹거든.. ”



 여자아이는 잠시 후 어색하게 덧붙였다.



 “ 고마워. ”



 카르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수첩으로 시선을 돌렸다. 단어 하나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바람에 초콜릿 봉지가 굴러가지만 않았어도 그녀는 시를 끝마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람은 이미 가 버렸고 단어도 가 버렸다. 혀끝에서 맴돌고 손끝을 간지럽히는 단어였지만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 ... 역사 퀴즈 준비는 다 했어? ”



 웅얼대는 듯한 음성으로 여자애가 물었고 혀끝에서 맴돌던 단어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억울하고 속상한 마음에 카르멘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 퀴즈 따위 알게 뭐야, 어차피 나한테는 물어보지도 않는데. 숙제나 내면 되지. ”


 “ 나, 나한테도 안 물어봐. 그래도 시험이니까 긴장되잖아. ”



 카르멘은 고개를 들어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파이처럼 희끄무레하고 넓적한 얼굴에 불분명한 이목구비, 숱이 거의 없는 눈썹 때문인지 무척이나 흐릿한 인상이었다. 두꺼운 안경에 가려진 조그만 회색 눈과 두툼한 양 볼 사이에 파묻혀 잘 보이지 않는 작은 코, 연분홍색의 얇은 입술, 그리고 카르멘 같은 아이가 두 명은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사이즈의 촌스러운 회록색 스웨터와 허벅지에 꽉 끼는 체크무늬 면바지. 분명 수업 한두 개 쯤은 같이 들었던 것 같은데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단지 성이 A로 시작하는 아이라는 것뿐이었다. 그것도 언젠가 신체검사 때 제일 앞줄에 서 있었던 것 같은 기억 때문이었다.



 “ 그럼 여기 있는 것보다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하는 게 낫지 않아? ”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카르멘은 원래부터 이런 스타일의 모범생들과는 전혀 마음이 맞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대화가 끊긴 것에 아무런 아쉬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막 잃어버린 단어를 다시 혀끝으로 끌어올리고 있을 때 소녀가 다시 말했다.



 “ 근데 요즘은 왜 마크랑 안 다녀? ”


 “ 그 개자식이랑 뭐가 좋은 일이 있다고 같이 다녀. ”


 “ ... 멋진 애잖아. ”


 “ 속물이지. ”



 카르멘은 귓가에 울리는 자신의 음성이 너무나 짜증스럽고 퉁명스러운데 놀랐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데 익숙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로 짜증이 났다. 기름덩어리 고기 요리를 내놓는 학교 식당 때문에,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애 때문에, 그리고 완전히 잃어버린 단어 때문에.



 그녀는 시계를 보았다. 점심시간은 벌써 끝나가고 있었고 그녀는 역사 수업에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단어 하나가 없는 시는 쓰레기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볼펜으로 시를 쫙쫙 그어버렸고 분이 풀리지 않아 종이를 부욱 뜯어냈다. 그리곤 바싹 구겨서 시멘트 바닥에 집어던졌다.



 “ 안 내려가? 점심시간 다 끝났어. ”



 여자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 나 시험 안 볼 거야. ”



 그 음성은 무심하고 부드러웠다. 



 “ 그래, 맘대로 해. ” 



 카르멘은 건포도 초콜릿 캔디를 입안에 쑤셔 넣었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카르멘은 그 여자아이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애가 입 밖으로 낸 말은 ‘나 시험 안 볼 거야’란 말이 전부였고 카르멘은 ‘그래서,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뭔데?’라고 묻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 그녀는 마지막 남은 캔디의 포장을 뜯고 있었고 여자아이에 대해서는 전부 잊어버린 채 아침에 레스의 책에서 읽었던 구절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내가 머무는 곳은 깊은 우주, 내 목적지는 별들. 더럽게 멋진 구절이었다.




*          *           *





 역사 시간은 언제나처럼 지루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카르멘에게는 퀴즈의 질문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그게 편했다.



 치어리더 공주들은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자랑스럽게 퀴즈의 답을 외쳐댔다. 그리고 마크가 마지막 질문에 답을 했을 때는 모두가 박수를 쳐댔다. 



 의도적인지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마크는 수업 벨이 울린 후에야 들어왔고 카르멘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가을 학기가 시작된 후 카르멘은 마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거의 없었다. 그녀가 보기에 마크는 갑작스럽게 여윈 것 같았다. 마치 자고 나서 한 뼘이 커진 사춘기 소년처럼. 하지만 그 부르주아 나치 녀석이 여위든 말든 그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다음 수업은 기하였고 마크는 여전히 그녀 곁에 자리를 잡았다. 삼각형을 가지고 기묘한 증명 문제를 푸는 동안 교사는 마크에게 다가와 그의 성적을 칭찬했다.



 “ 2주일 후에 수학 경시대회가 있는데 우리 학교 대표로 너와 앤더슨을 추천할 생각이야. 준비 잘 해둬라. 진학에도 도움이 될 거야. ”



 그리고 언제나처럼 교사는 카르멘을 스쳐지나갔다. 공기를 투과하듯.




*          *           *




 마침내 벨이 울렸고 아이들이 시끌시끌하게 떠들며 복도로 쏟아져 나왔다. 카르멘은 복도를 돌아 나오다 공주 무리를 이끌고 나온 금발 치어리더에게서 팔꿈치 공격을 당했고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이었기 때문에 냅다 정강이를 걷어차 주었다. 싸움이 나야 할 상황이었지만 누군가가 뒤에서 그녀를 슬며시 떠밀었고 그녀는 치어리더 패거리들에게서 벗어나 하교하는 아이들의 물결 속으로 파묻혔다. 운동장으로 나와 뒤를 돌아보니 마크였고 카르멘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 끼어들 필요는 없어. ”



 마크가 뭐라고 대꾸하려고 했을 때 근처에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비정상적으로 날카롭고 히스테릭한 비명 소리였다.



 마치 커다란 블랙홀에 빨려들듯 아이들이 와르르 몰려들기 시작했고 카르멘은 다시 파도에 떠밀렸다. 그리고 시멘트 보도 위에 사지를 뻗고 누워 있는 여자아이를 보았다.



 성이 A로 시작하는 아이.



 소녀는 타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는 피 웅덩이 위에 누워 있었다. 희끄무레하던 얼굴에는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고 코와 입에서 끈끈한 선홍색 피가 두 줄기 흘러내리고 있었다. 엷은 갈색 머리칼에는 피와 뇌수가 엉겨 있었다. 시멘트 바닥에 정통으로 부딪쳐 두개골이 박살난 것 같았다. 두 팔과 다리는 기이하게 왼쪽으로 구부러져 있었다. 마치 꼭두각시 춤을 추다가 부러져버린 나무인형 같았다. 



 “ 옥상에서 뛰어내렸나봐.. ”


 “ 누, 누구야? ”


 “ 누구지? ”


 “ 처음 보는 앤데.. ”



 시체는 작고 둥근 눈을 말없이 뜬 채 허공을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금발머리 치어리더가 비명을 지르며 기절해 넘어졌고 곁에 있던 남학생 하나가 재빨리 그녀를 안아들고 자리를 피했다.



 “ 대체 누구야...? ”


 “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 너무 끔찍해.. ”


 “ 선생님을 불러.. ”


 “ 앤더슨... 앤더슨 아냐? ”


 “ 무슨 앤더슨인데? ”


 “ 몰라. ”



 카르멘은 침을 삼켰다.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흘러내렸다. 비명을 지르게 될까봐 두려웠다. 한번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 너무하잖아, 하필이면 수업 끝날 때 뛰어내릴게 뭐야... 30분만 참아줘도 됐잖아.. ”



 카르멘은 욕설을 퍼부으며 아이들을 밀어젖히고 시체 곁으로 달려갔다. 두 손으로 죽은 여자아이의 머리를 껴안았다. 손바닥에 뭔가 끈끈하고 기분 나쁜 점액이 엉겨들었다. 현기증이 났다. 시멘트 바닥이 핑그르르 돌며 그녀에게로 달려드는 것 같았다.



 불과 두어 시간 전까지 옥상에 같이 앉아 있던 애였다. 그들 사이에 오고간 대화라곤 서로 이어지지도 않는 몇 마디뿐이었다. 



 앤더슨. 성이 A로 시작하는 아이. 



 카르멘은 그 애의 이름을 물어본 적도 없었다. 그 애가 마지막으로 입 밖으로 낸 말은 ‘나 시험 안 볼 거야’란 말이 전부였다. 그녀는 ‘그래서,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뭔데?’ 라는 물음조차 던지지 않았다. 귀찮았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짜증이 났기 때문에. 그 흔한 이름 하나 물어본 적이 없었다. 



 10여 분 후 교사들이 달려와 앤더슨의 시체로부터 그녀를 떼어냈다.




*          *           *





 정신이 들었을 때 카르멘은 낯익은 양호실 커튼 아래 누워 있었다. 이미 창밖은 캄캄했고 누군가가 목까지 담요를 덮어준 모양이었지만 한기가 느껴졌다. 지독한 악몽을 꾸고 일어난 것 같았다. 잠에서 깨어나기 전부터 그녀는 죽은 여자아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플라스틱 컵이 그녀의 입술에 와 닿았다.



 “ 마셔, 기분이 좀 나아질 거야. ”



 뜨거운 코코아가 목구멍으로 한 모금 흘러들었고 카르멘은 고통스런 온기를 느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컵을 감싸고 천천히 코코아를 전부 마셨다.



 컵을 받아들며 마크가 말했다.



 “ 집에 데려다줄게 그만 가자. 여덟 시가 넘었어. ”



 
 카르멘은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모래가 들어간 것처럼 따끔거렸다.



 “ 걔는 어떻게 됐어? ”


 “ 앰뷸런스가 와서 병원으로 실어갔어. ”


 “ 죽었어, 그렇지? ”



 
 마크는 한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 너랑 잘 아는 사이였어? ”


 “ 아니. ”



 카르멘은 구토기를 삼키며 중얼거렸다.



 “ 아까 옥상에서 잠깐 얘길 했을 뿐이야. 아마 내가 걜 마지막으로 봤던 사람일 거야. "



 카르멘은 차마 ‘살아 있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마크를 보았다. 그리고 그의 셔츠에 묻어 있는 지저분한 피 얼룩을 보았다. 맨 처음에 카르멘은 마크가 앤더슨의 시체를 안고 온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앰뷸런스가 그녀를 실어갔다고 했다. 그리고 마크가 품에 안아 옮기기엔 앤더슨은 너무나, 너무나 컸다. 아마도 그의 셔츠에 얼룩을 묻힌 것은 앤더슨이 아니라 카르멘 자신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손과 스웨터를 내려다보았고 검붉게 변색된 핏자국을 발견했다. 



 “ 이거 입어. ”



 마크가 학교 엠블럼이 찍힌 미식축구 티셔츠를 건네주었다.



 “ 너는? ”


 “ 난 됐어. 별로 안 묻었어. ”



 카르멘은 머리 위로 스웨터를 벗었고 맨살에 와 닿는 한기에 몸을 움츠리며 티셔츠를 뒤집어썼다. 토할 것 같았다. 하지만 기껏 갈아입은 옷을 더럽히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꾹 참았다.  



 마크는 그녀가 침대에서 내려오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녀는 완전히 무감각해져 있었다.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이 누구든 상관없었다. 확실한 건 지금 상태로는 도저히 혼자 일어설 수 없다는 것, 한 발짝도 혼자 내디디고 싶지 않다는 것뿐이었다. 그게 마크라 해도 상관없었다. 그녀를 괴롭혔던 금발머리 치어리더라 해도 괜찮았다.



 그녀는 거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난 걔 이름도 몰랐어. ”   


 “ 타냐 앤더슨이야. ”



 카르멘은 놀란 눈으로 마크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도 그 애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 분명 뒤늦게 달려온 교사들 역시 그 애의 이름을 몰랐을 것이다. 앤더슨이라는 성 외에는. 그걸 아는 사람들도 거의 없었을 것이다.



 마크는 그녀로부터 시선을 돌리며 나직하게 뇌까렸다.



 “ 편지를 받은 적이 있어. ”


 “ 발렌타인 편지? ”



 
 카르멘은 자신이 왜 그런 것을 묻는지 알 수가 없었다.



 “ 그래, 발렌타인 편지. 별 내용은 없었어. ”



 카르멘은 잠시 마크의 조각 같은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마 그는 교내에서 발렌타인 카드를 제일 많이 받는 남학생 중 하나일 것이다. 그에게 있어 뚱뚱하고 못생긴, 그리고 아무런 존재감도 없는 여자애의 발렌타인 카드란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건 마크의 잘못이 아니었다. 다른 잘생긴 남자애들 역시 똑같을 것이다.



 
 “ 근데 요즘은 왜 마크랑 안 다녀? ”


 “ 그 개자식이랑 뭐가 좋은 일이 있다고 같이 다녀. ”


 “ ... 멋진 애잖아. ”


 “ 속물이지. ”



 그녀는 타냐와 나눴던 그 대화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을 마크에게 전한다는 것은 너무나 잔인하고 끔찍한 짓처럼 느껴졌다. 타냐는 마크를 좋아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죽은 것은 아니었다. 분명 그것 때문은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다. 혹은 자신의 쌀쌀맞은 태도 때문도. 분명 뭔가 큰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부모로부터 혼이 났거나 어디선가 모욕을 당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아주 사소한 그 무엇 때문에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스쳐 지나가는 몇 마디 때문에 그녀 또래의 한 소녀가 옥상에서 뛰어내릴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책임은 어딘가 다른 곳에 있을 거라고, 그 어떤 것으로도 그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마크가 바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 네 거야. ”


 “ 뭔데? ”



 카르멘은 손바닥 위에 있는 종이쪽지를 내려다보았다. 구겨진 종이쪽지였다. 검은 볼펜 잉크로 휘갈겨진 글자들이 보였다. 그녀가 수첩에서 뜯어냈던 종이쪽지였다.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찍찍 줄을 긋고 집어던졌던 종이쪽지.



 
 “ 어디서 났어? ”


 “ 타냐 옆에 떨어져 있었어. ”


 “ 근데 왜 들고 왔어? ”



 마크는 말문이 막힌 것 같았다. 잠시 침묵한 후 그는 어눌하게 대꾸했다.



 “ 네 글씨잖아. 네가 휘말릴까봐 그랬어. ”



 카르멘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학교 측에서는 타냐의 자살 동기를 찾기 시작할 것이다. 유서 깊은 귀족 사립학교에서 학생이 자살한 건 불명예스런 오점이 될 것이다. 자살한 소녀가 문제아로 소문난 아이의 필체가 적힌 종잇조각을 쥐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희생양을 하나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마크는 언제나처럼 그녀보다 영리했다.



 “ 그래, 고마워. ”



 처음으로 카르멘은 마크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녀는 천천히 쪽지를 폈다. 열 줄 정도 써 내려갔던 시는 마지막 단어에서 막혀 있었고 돌이킬 수 없게 지워져 있었다. 너무나 거칠게 줄을 북북 그어놓아서 글씨를 거의 판독할 수가 없었다. 카르멘 자신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아무런 의미도 없는 쓰레기였다. 그러니까 결국 타냐는 이 종이쪽지를 쥐고 뛰어내린 게 아니었다. 싸늘한 11월의 바람이 옥상에서 이 종이를 불어 떨어뜨린 것일 뿐이었다. 



 그녀는 종이쪽지를 뒤집었다. 그리고 보라색 잉크로 휘갈겨진 네 줄의 시를 발견했다.



  
 마지막 두 행에는 희미한 밑줄이 쳐져 있었다.  



내 이름은 걸리버 포일
내 나라는 지구
내가 머무는 곳은 깊은 우주
내 목적지는 별들




 카르멘은 종이를 바싹 구겼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마크로부터 등을 돌리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          *           *




 옥상은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마크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서 발을 내디뎠다. 계단은 가파르고 길었다. 문은 잠겨 있었지만 그녀는 오래 전부터 잠긴 문을 여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문을 열었을 때 싸늘한 바람이 불어왔고 그녀의 곱슬머리가 붕 나부꼈다. 뒤따라오던 마크가 재채기를 했다. 그녀는 마크에게 같이 가자고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뒤에 아무도 없었다면 정말 무서웠을 것이 분명했다. 마크는 양호실 어딘가에서 찾아낸 손전등을 켰다. 



 그리고 그들은 천천히 옥상 위로 올라갔다. 넓고 텅 빈 옥상. 



 담배꽁초와 초콜릿 캔디 포장지들이 몇 개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 것도. 오직 바람 외에는.



 마크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 내려가자. 벌써 학교에서 다 보고 갔을 거야. ”



 카르멘은 고개를 저었고 마크의 손에서 손전등을 빼앗았다. 그리고 뭔가에 홀린 듯 자신과 타냐가 앉아 있었던 자리를 비추었다.



 그곳에 네 줄의 시가 있었다. 울퉁불퉁한 시멘트 바닥 위에 검정색 사인펜으로 한껏 커다랗게 흘려 쓴 글자들이 저 먼 곳으로부터 밀려드는 네온 불빛과 손전등 불빛, 그리고 흐릿한 달빛 아래 거대한 형광 캔디처럼 깜박이고 있었다.


 


내 이름은 타냐 앤더슨
내 나라는 지구
내가 머무는 곳은 깊은 우주
내 목적지는 별들




 카르멘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흐릿한 은빛을 띤 달이 떠 있었다. 하지만 별은 없었다. 뉴욕의 밤하늘에서 진짜 별을 찾는 것만큼 힘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마크에게 손전등을 돌려주었고 나직하게 말했다.



 “ 내려가자. ”




*          *           *





 때로는 단어 하나가 시를 완성한다. 인간의 삶조차도 그렇다. 스쳐 지나가는 한 단어가 모든 것을 바꿔놓는다. 그건 이름도 마찬가지다. 희미하게 일렁이며 사라지는 숨결 하나만으로도 살인을 저지를 수 있을 것이다. 머나먼 곳에서 번쩍이는 네온 불빛도, 바람을 타고 흘러드는 부드러운 노랫소리도, 바닥에 패인 작은 구멍에 모여 있는 개미떼도, 구겨져 버려진 작은 종이쪽지에 휘갈겨진 몇 줄의 시도.



 타냐는 그게 어디서 온 시인지도 몰랐다. 심지어 미나가 종이를 찢는 것조차 보지 못했다. 단지 그녀는 역사 시험을 보러 가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뿐이었다. 



 미나가 내려간 후 그녀는 결국 마음을 바꿔먹었다. 시험을 보지 않는다면 분명 나쁜 점수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누구에게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타냐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고 저려오는 무릎을 잠시 주물렀다. 그리고 시멘트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종이쪽지를 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타냐는 보라색 잉크로 휘갈겨진 네 줄의 시를 읽었다. 마치 그 네 줄의 시가 그녀의 피부로 문신처럼 파고드는 것 같았다. 그녀의 심장 한가운데로 깊게 낙인이 새겨지는 것 같았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의 언어가 그녀를 뒤흔든 적이 없었다. 그녀 자신의 존재를 잊게 해 준 적도 없었다. 그 무엇으로도 타냐 앤더슨이라는 존재를 잊게 해 줄 수 없었다.



 타냐는 검은색 사인펜을 꺼내 그 네 줄의 시를 베껴 썼다. 시멘트 바닥은 울퉁불퉁해서 글씨를 쓰기가 힘들었다. 마지막 단어를 쓰는 순간 사인펜의 펠트 팁이 부러지며 검은 잉크가 손가락 끝에 튀었다. 



 난생 처음으로 타냐는 온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심장으로부터 전신의 혈관으로 부드럽고 달콤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타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어둠이 밀려오며 하늘을 따스한 검은색으로 뒤덮었고 커다랗게 반짝이는 별들이 무리를 지어 나타났다. 그녀의 발 아래에는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없었다. 오직 부드럽고 달콤하게 불어오는 바람 뿐.



 
 타냐는 소리 내어 웃었다. 처음으로, 처음으로 그녀는 충동적인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유로웠다. 그녀는 네 줄의 시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녀가 잃어버린 단어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녀는 사방을 둘러싼 별들을 보았다.



 타냐는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그녀는 바람을 디디며 걷는 법을 익혔다. 이제 별들은 도처에 있었다. 그녀는 두 팔로 바람을 껴안았다. 그리고 자신의 목적지에 도착하는 순간 부드럽고 달콤한 숨결을 내쉬었다.
 





FIN
2004. 9. 29



..



아주 오래전에 쓴 글이라 다시 읽으면서 기분이 새로웠다. 




예전에 이 폴더에 스타차일드 시리즈 에피소드들 중 일부를 발췌하거나 거의 전문을 올린 경우들이 있다. 각 링크는 아래. 옴니버스 단편들이라 각각 완결성을 띠고 있다만 하여튼 순서가 있다. 쓴 순서와 거의 일치한다. 뒤로 갈수록 인물들은 성장하거나 변화한다. 두번째 링크의 스테잉 인 더 다크는 미샤가 파리에서 체포되기 직전에 보냈던 (그런데 의외로 아주 평온한) 밤을 다루고 있다. 26편인 낫 이너프는 후반부의 일부만 발췌했었다.




open up and bleed(ep.14) : http://tveye.tistory.com/7072


staying in the dark(ep.20) : http://tveye.tistory.com/5413 


Incomparble blind(ep.25) : http://tveye.tistory.com/8448


Not enough(ep.26) : http://tveye.tistory.com/4774


크리스마스 파편(데본 펠) : http://tveye.tistory.com/42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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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고로호바야 거리 사진(http://tveye.tistory.com/8505)에 이어 오늘은 쉡첸코 거리 사진 몇 장.

 

 

여기는 내가 러시아에 두번째로 연수를 갔을 때 살았던 기숙사가 있는 곳이다. 첫 연수 때는 바닷가에 있는 까라블레스뜨로이쩰레이 거리의 기숙사에서 살았고(이때 쥬인과 만났음) 세월이 흘러 다시 갔을 때는 이곳 쉡첸코에 있는 기숙사에 살았다. 이쪽 기숙사 시설이 더 좋고 더 비싸다. 분명 첫 연수 시절엔 이쪽에 있는 기숙사 시설이 더 안 좋았는데 그 사이에 바뀌어 있었음.

 

 

 

 

 

이게 내가 지냈던 기숙사 건물이다 :) 여기는 나름대로 보안이 잘 되어 있었고 외부인은 들어갈 때 여권을 맡겨야 하며 밤 9시인가 10시가 되면 나가야 했다.

 

 

고로호바야 거리에 트로이를 입주시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이 쉡첸코 거리에 갈랴와 료카의 보금자리이자 트로이네 문학 서클의 아지트가 있는 것으로 설정했다. 사실 기숙사 양옆과 맞은편에 진짜로 아파트들이 있었고 그 중 한두 집에는 가보기도 했었다.

 

 

 

 

이렇게...

 

 

쉡첸코 거리는 꽤나 조용하고 한적하다. 근처엔 널찍한 공원이 있어 산책하기도 좋고 주거 지역이다. 대신 조금만 올라가면 공동묘지가 있다(ㅜㅜ) 그래서 그쪽으로 가면 쫌 무섭다.

 

 

이 사진들은 트로이와 미샤의 장편을 쓰고 난 이듬해 여름에 뻬쩨르에 갔을 때 들러서 찍은 것이다. 사실 여기는 관광지도 아니거니와 바실리예프스키 섬에서도 꽤 안쪽으로 들어와야 하는 동네라서 맘먹고 가지 않으면 다시 가기가 어렵다. 옛 추억을 되살릴 겸, 그리고 실제로 갈랴와 료카의 아파트가 어디쯤이고 지금 풍경은 어떤지 찍어놓고 싶어서 카메라를 들고 갔었다. 여행을 가면 주로 네프스키 거리나 이삭 성당 근처의 중심지에 묵게 되므로 여기 오려면 항상 잘 안 오는 7번 버스나 무지 느린 트롤리버스인 10번을 타야 한다.

 

 

이 버스들은 궁전교각을 따라 네바 강을 건너고 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우니베르시쩻)을 거쳐 바실리예프스키 섬 안쪽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이 버스들은 쉡첸코 거리에서는 서지도 않으므로 날리치나야 거리나 가반스까야 거리에서 내려서 걸어들어와야 한다. (아니면 미니버스인 마르쉬루트카를 타야 하는데 나는 '~에서 내려주세요' 하는 게 피곤해서 웬만하면 그걸 안 타는 편임)

 

 

나는 트로이와 미샤의 장편을 바로 이 장소에서 시작했다. 소설 1부 1장에서 트로이는 이 거리의 이 아파트에서 미샤를 처음으로 만난다. 금서를 읽고 토론하는 문학 서클의 아지트, 그들이 '엄마'라고 부르곤 하는 갈랴와 그녀의 남편 료카가 이 아파트 건물에 산다. 친구들은 일주일에 한두번씩 저녁에 이곳으로 모여들고 금서나 지하출판물, 외국어 문학을 읽고 토론을 하고... 주로 술을 마시며 논다. 그러던 어느 늦가을 밤, 미샤가 우연히 알게 된 서클 멤버를 따라 이곳에 오고 트로이는 창가에 기대어 있는 그를 본다.

 

 

나는 그들이 나의 루트를 따라 걷게 했다. 그들은 쉡첸코 거리에서 말르이 대로를 따라 걸어나와 길을 건너고 날리치나야 거리의 정류장에서 트롤리 버스를 탄다. 트롤리 버스는 진눈깨비가 몰아치는 레닌그라드를 느릿느릿 횡단한다. 바실리예프스키 섬을 지나 궁전교각을 따라 네바 강을 건너고 네프스키 대로로 들어서 미샤의 기숙사 가까이 있는 알렉산드린스키 공원까지 간다. 나는 눈을 감고도 그 길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길을 떠올리면서 글을 쓰던 순간과, 이미 글을 마치고 나서 그 길을 다시 따라 오가는 순간은 같으면서도 달랐다. 하지만 둘다 행복하고 충만한 순간이었다.

 

쉡첸코 거리의 아파트들 사진 몇 장. 여기 어딘가에 갈랴와 료카의 집이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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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페테르부르크. 고로호바야 거리. 모이카 운하를 끼고 있다. 쭉 걸어가면 양쪽으로 각각 해군성 공원과 사도바야 거리/센나야 광장이 나온다. 중간에 발샤야 모르스카야 거리와 말라야 모르스카야 거리가 교차된다.



여기는 글을 쓸때 주요 인물 중 하나인 트로이의 집이 있는 곳으로 상정해서 자주 나오는 동네이다. 여기서 운하 따라 걸어가면 마린스키(레닌그라드 당시엔 키로프) 극장까지 2-30여분 걸린다. 내 걸음으로 그런 거니까 다리 길고 발빠른 미샤 같은 애는 훨씬 금방 오갈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극장 바로 근처로 이사한 후에도 트로이네 집에서 자주 자고 가긴 했지만.



트로이를 이 동네에 살게 한 이유는 좀 싱겁게도, 예전에 내가 출장왔을때(페테르부르크엔 맨날 개인적으로 왔는데 딱 한번 무슨 정책연구조사 출장을 온 적 있음) 이 거리의 어느 낡은 아파트에 있는 민박에 묵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위치도 그렇고, 아파트들과 이 도시 특유의 안뜰(드보르)도 그렇고 잘 어울리는 장소라 그냥 여기 살게 만들었음.



사실 트로이랑 미샤가 젤 처음 만나는 곳(문학 서클 친구들의 아지트)인 갈랴와 료카의 아파트는 내가 예전에 지냈던 기숙사가 있는 쉡첸코 거리에 있다. 여기는 네바 강을 건너 바실리예스키 섬으로 들어가야 있다. 실제로 기숙사 근처에 있는 아파트를 모델로 했음.



그래서 글 다시 쓰기 시작할 무렵인 2012년부터 몇년 동안은 뻬쩨르 갈때면 고로호바야나 쉡첸코 거리를 비롯해 바가노바 아카데미가 있는 조드쳬고 로시 거리, 마린스키 극장, 그외 여러 동네를 많이 걸었고 사진도 많이 찍고 그랬다.



특히 트로이 나오는 소설의 주요 장소들 여럿은 내가 정말 살았거나 머물렀던 곳들, 잠시라도 다녔던 학교 등 개인적 기억이 서린 곳들을 골라서 썼기 때문에 내밀한 즐거움도 있었다. 물론 소련 시절 레닌그라드와 지금의 페테르부르크는 많이 다르지만. 도시가 갖는 어떤 특성 자체, 영혼 자체는 존속하기 마련이다.

 

* 추가 : 쉡첸코 거리에 대한 얘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8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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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아래 글은 근 5년 전에 개인 홈피에 적었던 글쓰기 관련 노트이다. 당시 나는 몸이 좋지 않아 잠깐 휴직을 하고 두어달 동안 프라하에서 지내고 있었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고 반년 쯤 지난 후였다. 나는 프라하에 가기 전에 워밍업으로 미샤에 대한 단편 하나와 장편 하나를 썼다. 그리고 원래 쓰려고 했던 가브릴로프 본편을 시작하려 했는데 잘 되지 않아 한달 가까이 끙끙대다가 프리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 글을 시작했다. 그게 가끔 이 폴더에 발췌해 올렸던 수용소 이야기이다. 총 3부로 되어 있는데 1~2부는 프라하에서 썼고 3부는 한국에 돌아와서 썼다. 프라하에서는 당시 빌려서 머물던 아파트의 창가 책상과 카페 에벨에서 썼다. 돌아와서는 화정 집에서 썼다. 



아래 메모는 그 글을 쓰기 시작한 직후 남긴 것이다. 긴스버그와 와일드의 시를 각 장마다 에피그라프로 썼는데 그 파트들을 다 고른 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적었던 기억이 난다.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홈피 대문 문구를 바꾸었다. 꽤 오래 걸어두었던 장 주네의 문구 대신 앨런 긴스버그의 Howl 1장 후반부의 3행을 가져왔다. 정렬 때문에 조금 손을 댔지만 원래는 행이 이렇게 배열된다.
 
 


ah, Carl, while you are not safe I am not safe, and
     now you're really in the total animal soup of
     time

 



마야코프스키와 마찬가지로 긴스버그의 시에서도 행 배열이 중요하다. 그래서 전에 이 시 3장 번역할 때도 나름대로 배열에 맞게 해봤었는데 역시 시를 번역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Howl은 3장을 가장 좋아하지만, 1장도 꽤 좋다. 특히 북받치는 감정으로 내달리다가 저 후반부의 칼 솔로몬을 향한 부드러운 독백 3행에 맞닥뜨리게 되면 어쩐지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이 구절로 대문을 바꾼 이유는 어제부터 새로 시작한 글의 마지막 파트에 삽입될 에피그라프이기 때문이다. 전체 글의 에피그라프는 오스카 와일드의 레딩 감옥의 발라드 중 다음 연이다.




It is sweet to dance to violins
When Love and Life are fair:
To dance to flutes, to dance to lutes
Is delicate and rare:
But it is not sweet with nimble feet
To dance upon the air!


.. Oscar Wilde, The Ballade of Reading Gaol ..





 
인용구들을 보면 알겠지만 꽤 슬프고 무겁다. 그 이유는 새로 시작한 글이 원래 쓰고자 했던 가브릴로프 장편의 프리퀄이며(파트 0 정도 되는데, 본편에 삽입하기에는 내용이 무겁고 분위기가 좀 달라서 독립적인 단편이 된다) 수용소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는 'Frost' 직후를 다룬다. 즉 무단이탈과 반체제 행위 때문에 파리에서 레닌그라드로 소환된 미샤가 1981년 7월~ 8월 동안 겪는 일을 다루는데 실지로 미샤는 총 3장으로 구성될 이 단편에서 별로 말이 없다. 행동은 더더욱 하지 않는다. 각 파트는 서로 다른 인물들의 시점에서 기술된다. (그렇다고 전부 1인칭으로 서술되지는 않는다. 1인칭은 아마도 3장에서만 등장할 것이다)
 



원래는 각 장마다 에피그라프를 따로 두려고 했다. 레딩 감옥의 발라드 중에는 가슴을 찌르는, 그리고 지금 쓰려는 글과 정서가 잘 맞는 연들이 몇개 있다. 그것들은 아래와 같다.
 



He does not sit with silent men
Who watch him night and day;
Who watch him when he tries to weep,
And when he tries to pray;
Who watch him lest himself should rob
The prison of its prey.

 
 
..
  



For strange it was to see him pass
With a step so light and gay,
And strange it was to see him look
So wistfully at the day,
And strange it was to think that he
Had such a debt to pay.

 



.. 원래는 순서대로 1장, 2장에 삽입하고 전체 에피그라프로 넣은 연을 3장에 삽입할 생각이었지만 Howl의 저 글귀가 더 어울려서 전체적으로 바꿨다. 



 
새 글에서 미샤는 춤을 추지 않는다. 이미 그가 몇달 전 무대에 올라가는 것을 완전히 그만두기도 했고 그가 처해 있는 상황 상 춤을 추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체 에피그라프를 와일드의 저 구절들로 선택했듯 이 우울하고 고통스러운 단편에서도 춤과 움직임이 갖는 이미지는 여전히 강렬하게 등장할 것이다.



 
근 한달 만에 다시 글을 시작해서 좋긴 한데, 등장인물을 괴롭힐 생각을 하니 마음이 그렇게 가볍지는 않다. 나이든 게 분명하다, 옛날에는 주인공을 괴롭히고 마구 고통을 가해도 별로 가책을 느끼지 않았는데.





(... 후기 : 그런데 저런 메모를 남기긴 했지만 하여튼 그 수용소 이야기에서 미샤를 실컷 괴롭히긴 했음^^;)



사진은 맨 위와 아래 둘다 이번 페테르부르크에서 찍은 것. 메모와는 큰 상관은 없다만 느낌 닿는 대로 두 컷 갖다 붙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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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아직 다시 글쓰기에 돌입하진 못했지만 감각을 되살리기 위해 전에 썼던 글들을 마구 뒤섞어가며 읽고 있다. 본편도 읽고 외전도 읽고 데이터구축용 자료들도 읽고 등등... 좀전에 뒤적였던 추리 외전 전반부의 몇 문단 발췌해봄. 이것도 쓴지 4년쯤 됐다. 가브릴로프 본편 쓰려는데 하도 잘 안돼서 '그래, 등장인물들을 데리고 패러디를 먼저 가볍게 써보면 뭔가 실마리가 풀리겠지' 하고는 그 동네 배경으로 등장인물들을 우르르 어느 별장 저택에 밀어넣고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만드는 글을 썼었다. 나름대로 코미디였는데 다 쓰고 나니 생각만큼 코미디가 아니었음 흑... 



이 추리 외전의 주인공은 다닐 베르닌과 렐랴였는데 이 외전을 서무 시리즈보다 먼저 썼다. 여기 나오는 베르닌은 본편 베르닌만큼 뺀질거리는 타입도 아니고 그렇다고 서무에 나오는 단추 베르닌만큼 답없는 불쌍한 책상물림 집사도 아니다. 고지식하긴 하지만 하여튼 탐정1이다. 그리고 렐랴도 서무의 렐랴처럼 실속없는 허당이 아니고 여기선 어엿하게 주인공격으로 행동과 추리를 이끌어나감. 탐정1은 베르닌, 탐정2는 렐랴다 :) 



발췌한 부분은 두 토막인데 앞부분은 비오는 날 새벽에 저택에서 시체를 발견한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다닐 베르닌이 앞으로 나서는 장면이고, 뒷부분은 역시 같은 씬의 좀 후반부에서 미샤가 베르닌과 얘기를 나누는 장면임. 나름대로 두 장면 모두에서 나는 코미디를 쓰고 있다 생각했는데 역시나 뭔가 쫌 안 웃김. 나 아무래도 미샤랑 유머감각이 비슷한가봄 ㅠㅠ



위의 사진은 이번 뻬쩨르 여행 가서 묵었던 첫번째 호텔의 복도랑 전화기. 이미지 하나 넣고 싶었는데 대화들로 이루어진 장면들이라 딱히 맞는건 없고. 근데 첫번째 얘기에서 베르닌이 전화 운운해서 ㅋㅋ 렐랴네 별장은 옛 귀족이 쓰던 저택이니까 저런 전화기가 있을 법함.



레베진스키, 먀흐킨(이름은 알렉산드르 콘스탄티노비치), 코즐로프는 가브릴로프 극장 사람들, 키라는 미샤의 여자친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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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베진스키가 반론을 제기했다. 그리고는 생각난 듯 얼굴을 찌푸리며 베르닌을 노려보았다.



 “ 그건 그렇고 자네가 뭔데 살해가 어떻고 아무 데도 못 가니 마니 하는 말을 지껄이는 거지? 얘기하는 걸 보니 제일 처음 발견한 것 같은데, 그럼 병원에 연락을 했어야지. 아니면 경찰에. 완장이라도 찬 듯한 그 말투는 대체 뭐야! ”



 “ 시체를 제일 처음 발견한 건 내가 아니라 키라 모이세예브나입니다. 전 비명을 듣고 내려온 거고. 어쨌든, 병원이고 경찰이고 지금은 아무 데도 연락이 안 돼요. 폭풍우 때문에 전화가 불통이니까. 적어도 아침까지는 복구 안 될 겁니다. 그 말은, 지금 이 집안에서 수사권을 가진 사람은 나 하나뿐이라는 얘기죠. ”



 “ 기가 막혀서! 스페호프 따까리 주제에, 비서 나부랭이나 해먹고 있는 풋내기가 수사권 운운하다니! ”



 먀흐킨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역시 화가 치밀어 오른 레베진스키가 거들었다.



 “ 자네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것 아닌가, 주제 파악 좀 하시지. 여기 알렉산드르 콘스탄티노비치가 계셔. 시 의원인데다 극장장이야. 여기 절반 이상이 극장 수석에 시에서 표창을 받은 사람들이고. 자네가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



 “ 시 의원이고 수석이고 아무 상관없습니다. 경찰이 올 때까지, 사인이 밝혀질 때까지 여긴 범죄 현장으로 간주됩니다. 그리고 이런 말 하고 싶지는 않지만 자초지종이 드러날 때까지는 이 집안에 있는 모두가 잠재적 용의자라고 할 수 있죠. 다시 말하지만, 다들 아무 데도 못 갑니다. ”



 먀흐킨과 레베진스키가 입을 딱 벌렸다. 시체를 살펴보던 코즐로프가 냉소적으로 중얼거렸다.



 “ 나 참, 저렇게 달변이었다니. 어젯밤엔 입이 근질거려서 어떻게 참았을까. 시체가 하나 더 나오면 의회 출마라도 하겠군. ”




..





미샤는 화를 내거나 짜증스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웃었을 뿐이었다. 아마 키라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그는 곧 웃음기 가신 얼굴로 베르닌 쪽을 보면서 물었다.



 “ 우릴 하나하나 다 심문하려고? ”



 “ 그럴 거야. ”



 “ 서기가 필요하겠는데. ”



 “ 필요 없어, 내가 직접 기록할 테니까. ”



 “ 수첩은 있어? ”




 베르닌이 고개를 들어 미샤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제서야 미샤가 농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물론 베르닌은 전혀 웃지 않았다. 렐랴는 미샤의 유머 감각은 보통 사람들과 좀 다른 것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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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페테르부르크. 내가 소속된 곳은 아니지만 주저없이 ‘나의 도시’라 부르는 곳. 언제나 이방인일지라도 상관없이, ‘나의 도시’. 물론 나는 나의 인물들이 이곳, 페테르부르크, 당시 이름 레닌그라드를 주저없이 ‘나의 도시’, ‘나의 세계’라고 부르는 만큼의 자격과 소속감과 일체감을 가질 수 없다. 그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 역시 이 도시를 사랑한다.



도시를 산책하며 찍은 사진들 몇장. 전부 아이폰 6s로 찍음. 많은 부분 변화했겠지만, 이 길들은 내가 되살려낸 미샤와 안드레이/트로이가 함께 걸었을 것이다. 레닌그라드이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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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이란 게 뭔데. 소비에트 연방? 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




그는 키로프라고 하지 않고 마린스키라고 했다. 레닌그라드 대신 페테르부르크라고 얘기한 것처럼.





“ 우리 주위의 모든 것. 전부. ”




“ 레닌그라드. ”




미샤가 결론을 내리듯 단호하게 말했다. 트로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레닌그라드. ”




그는 미샤가 이 도시에 대해 품고 있는 애정의 깊이에 전율했다. 물 위에 돌로 지어진 도시, 학살과 절망의 도시, 피와 바람의 도시, 허위와 모방의 역사로 가득 찬 옛 수도, 이제는 모스크바의 광휘에 밀려나 퇴색하고 있는 도시를 향해 그런 절대적이고 강력한 사랑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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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8. 10. 3. 22:24

(오래 전의 글) Incomparable Blind about writing2018. 10. 3. 22:24





오래 전에 스타차일드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단편들을 여럿 썼었는데 이 about writing 폴더에도 서너편 발췌하거나 전문을 올린 적이 있다. 지금 쓰고 있는 본편의 미샤가 제일 먼저 등장했던 것도 이 시리즈에서였다(물론 그때의 미샤는 초기라서 지금의 모습과는 좀 달랐지만)



며칠 전 이웃님과 블로그를 통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이 단편이 생각났다. 주제도 그렇고 이것저것 맥락이 통하는 느낌이 있었다. 종교와 신앙과 심지어 도스토예프스키 등등... 좀 거창한 거 같지만 별로 그렇진 않다. 2003년에 쓴 거니까 15년 전에 쓴 글이다. 엄청 오래됐다. 스타차일드 시리즈 자체가 2000년대 초반에 썼던 거긴 하다. 



전에 다른 에피소드 올리면서도 적었지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는 분명 변화가 있고 나이와 경험을 통해 생겨난 주름들이 있다. 글을 쓰는 방식이나 문체도 조금은 변했다. 이 시리즈는 당시의 나였기 때문에 쓸 수 있었던 이야기들이다. 마치 지금의 글들이 지금의 나이기에 쓸 수 있는 것처럼. 그래서 스타차일드 시리즈의 약 30편에 달하는 단편들을 오랜만에 다시 뒤적이게 되면 가끔 좀 오글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릴 때도 있지만 그래도 수정하거나 손을 볼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어떤 것들은 그대로 놓아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는 가장 진실하고 가장 뜨겁게 썼기 때문이다. 과거의 불꽃은 현재의 눈으로 보면 빛바래고 좀 우스꽝스러워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그건 그 순간엔 불꽃이었고 그대로 놓아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인공 카르멘은 열여섯 살의 고급 사립학교 학생(이라 쓰고 문제아라 읽는다. 마약중독에 길거리 생활 등등 이것저것 하다가 겉으로는 좀 마음을 잡고 학교로 돌아와 있다)이고 이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마크와 데본은 같은 학교 아이들이다. 마크는 소위 엄친아로 공부와 운동 다 잘하고 번듯하고 쿨한데다 있는 집 자식이다. 데본에 대해서는 전에 올렸던 open up and bleed란 단편(http://tveye.tistory.com/7072)에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있는 집 자식이긴 한데 혼혈이고 학교에선 사이코패스로 통해서 왕따당하는 애다. 오픈 업 앤 블리드에선 카르멘에게 '학교 애들을 다 쏴죽이자~'라고 꼬드기기까지 한다. 시리즈 초반 에피소드에서 마크는 카르멘에게 들이대다 된통 얻어맞은 적도 있고 그러다가 또 하룻밤 보낸 적도 있긴 하다만 보통은 카르멘에게서 '부르주아 나치넘' 이란 욕을 듣는다. 한마디로, '나에게 이런 건 네가 처음...' 이다 ㅋㅋ 



이 단편 Incomparable Blind는 시리즈의 25번째 이야기였다. 제목은 아마 앨런 긴스버그의 어떤 시에서 따왔던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스타차일드 시리즈 제목들 중 절반 이상은 시나 노래 가사에서 따왔었음. 전문 올려본다. 



이야기 초입에서 마크가 회상하는 클레이튼 템플은 맨뒤에 등장하는 그레이와 동일 인물이다. 이 사람이 주요 인물로 나왔던 바로 다음 에피소드인 not enough의 일부를 전에 발췌했던 적이 있다.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47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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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omparable Blind

 

  

 

 

 

 





 

With the absolute heart of the poem of life butchered 

out of their own bodies good to eat a thousand years.

 

... Allen Ginsberg, Howl ...

 


 



 

.. 1981년 9월 ..

 

 

 


연한 노란색이 감도는 타원형의 작고 매끄러운 캡슐 세 개. 처음에는 오직 그것뿐이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환각제를 몇 알 먹고 양호실 침대에 누워 기분 전환을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교실들은 텅 비어 있었다. 전교생이 운동장에 몰려나가 열띤 응원을 하고 있었다. 매년 열리는 미식축구 대회 결승전 때문이었다. 그 지역의 이름난 사립학교들 사이에 벌어지는 리그였는데 그들의 학교는 3년 만에 결승에 올라갔기 때문에 축제 분위기가 완연했다.

 


양호실 쪽으로 길게 이어진 복도는 눈이 멀 것 같은 은빛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열린 창들 사이로 가차 없는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귀를 찢는 듯한 소음도 함께였다.

 


마크는 양호실 문을 열었다.

 


 

*  *  *

 


 

사람들은 그를 사랑했고 동경했다. 교사들은 그를 두뇌가 명석하고 리더십이 풍부한 좋은 학생이라고 여겼고 동급생들은 무슨 일이든 잘 하는 그의 재능을 부러워했다. 그는 공부도 잘했고 운동도 잘했다. 사실 지금 운동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기에서 뛰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였다. 하지만 여름이 되기 전에 그는 발목을 약간 다쳤고 그것을 핑계로 팀에서 빠져나왔다.

 


3년 전 팀의 부주장이었던 클레이튼 템플은 그가 연습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멋있게 보이기 위해 경기를 하면 절대 이길 수 없어. ’

 


그는 선배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멋있게 보이기 위해 경기를 하는 사람들이 과연 정말로 존재하는 걸까? 게임은 이기기 위한 것이다. 단지 승자이기 때문에 멋지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심지어 3년 전 그 결승전에서 템플이 무릎이 박살난 채 일그러진 얼굴로 신음하며 들것에 실려 나갔을 때조차 그랬다. 왜냐하면 그는 팀을 역전시켰고 승자로서 경기장을 떠났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대학에 가서도 운동을 계속하리라고 생각했지만 템플은 그 날 이후 미식축구를 그만두었다



마크는 복도나 강당에서 템플이 카르멘과 함께 있는 모습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는 그때 카르멘을 처음으로 보았다. 아마 그가 카르멘에게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클레이튼 템플 때문이었으리라. 졸업반이었던 템플은 한동안 마크의 역할 모델과 같았다. 그런 템플이 카르멘을 선택했다면 그녀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인생이란 신기한 것이었다. 스쳐 지나가는 눈빛, 아주 사소한 무엇이 인간을 뒤흔들고 지나간다. 그리고 삶이 바뀌어버린다. 마크는 어느 한순간을 기점으로 모든 것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몇 년 전, 복도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클레이튼 템플과 당시에는 아직 애티를 벗지 못한 카르멘을 보았을 때를 기억한다면 그는 그 사소한 순간이 자신의 삶에 끼친 영향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아무도 자신의 삶이 변하는 순간을 인지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이 지나가고 난 후에야 깨닫는다. 때로는 영원히 깨닫지 못할 것이다.


 

리비에라에서 여름 방학을 보내고 돌아온 후 마크는 변했다. 마치 그의 내부에서 무언가가 통째로 빠져나가 버린 것 같았다. 끊임없는 눈짓을 던지는 해변의 예쁜 여자아이들도, 달아오른 맨몸을 식혀주는 차가운 파도조차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고 마크는 여전히 선망의 대상이었다. 여전히 모두는 그를 아주 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쿨함을 믿을 수가 없었다.

 



카르멘은 그를 공기나 되는 것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여전히 혼자였다. 하지만 그녀를 욕하고 비웃는 아이들의 시선은 그녀가 마크에게 던지는 시선만큼 예리하고 무심하지는 않았다. 이제 마크는 조금씩 알 것 같았다. 왜 바비 인형처럼 차려입은 치어리더들이 그녀를 그토록 미워하고 싫어하는지. 그들은 결코 카르멘의 존재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사람들의 눈을 불편하게 했다. 벽에 불쑥 튀어나온 못처럼 거슬렸다. 혹은 매혹적이었다. 마크는 그 둘 사이에는 사실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카르멘은 그를 완전히 무시했다. 그녀에게 있어 마크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길바닥에 걸리적거리는 돌멩이보다도 더. 그녀의 시야는 기묘했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앞을 똑바로 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항상 틈새에 매혹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마치 공기를 뚫고 나아가듯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카르멘의 행동들을 어느 만큼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녀가 헤로인을 찔러 넣는다고 해서 어떻단 말인가. 그런 것이 역겹게 느껴졌다면 애초부터 그녀에게 접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얌전한 마리화나와 안전한 환각제에서 조금 더 깊게 들어가기 시작하면 결국 헤로인의 품으로 다이빙하게 되어 있다. 마크 자신은 아직 독한 마약을 손댄 적이 없었지만 유혹을 느낀 적은 몇 번 있었다. 그건 카르멘이 그를 무시하기 시작한 때부터였다. 순전히 그녀가 어떤 기분으로 헤로인을 맞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걸핏하면 주먹과 발이 올라가는 그녀의 폭력성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마음속으로 수십 차례 미워하는 사람을 때리고 죽이는 위선자들에 비해 그녀가 좀 더 솔직하고 참을성이 없는 것뿐이었다. 그녀가 소다수를 마시러 가듯 아무렇지도 않게 섹스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카르멘의 행동들에서 혐오를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의식적으로 마크는 그녀와 동거하고 있는 남자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려고 애썼다. 때때로 그는 그 남자의 이집트 여왕처럼 긴 머리와 기묘하게 거칠고 나지막한 음성을 떠올리며 전율하곤 했다. 카르멘과는 달리 그 남자의 행위는 그에게 혐오감을 느끼게 했다. 왜냐하면 그건 더러운 짓이기 때문이다. 카르멘의 마약과 폭력은 어리석은 짓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더러운 짓을 하고 있었다. 호모 짓거리를 한다는 것만큼 끔찍한 일이 또 있을까? 우스운 일이었다. 마크는 그가 남자 애인과 함께 있는 것조차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알았다. 맨 처음 본 순간부터 그 남자가 호모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았다. 1 더하기 12라는 것만큼 분명하게. 그 남자는 자신의 더러운 호모 섹슈얼리티를 온몸에 두르고 다녔다. 이마 깊숙하게 타들어간 낙인처럼.. 그 누구든 그걸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다른 사람들 역시 자신을 보는 순간 내부의 무언가를 들여다볼 수 있을까? 마크는 의문했다. 왜냐하면 그조차도 자신의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카르멘은 항상 그에게 부르주아 나치 스킨헤드 같은 사고방식을 가졌다고 욕을 했지만 그는 자신이 왜 그런 식으로 취급되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부르주아 나치 스킨헤드의 사고방식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카르멘의 질책과 욕설이 생소했다. 마치 모든 사람들이 낯선 시선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것처럼, 마크는 몰이해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는 것을 배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그에게 필요한 일일까?

 


 

*   *   *

 



 “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홀로 태어나서 홀로 죽어야만 하기 때문이야. 그 절망감이 서로를 사랑하게 하는 거야. ”

 

  “ 그건 환상에 지나지 않아. 사랑이란 건 존재하지 않아. 그건 그저 사람들이 만들어낸 자기 위안거리에 지나지 않아. 마치 자신들의 나약함을 위장하기 위해 신을 만들어낸 것처럼. ”

 
“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뭔가를 만들어낸다는 것, 그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 본 적 있어? 우리 내부에서는 상상에 지나지 않았던 것, 어쩌면 거짓에 지나지 않았던 것들이 외부로 나온 순간 실체를 가진 그 무엇이 되는 건지도 몰라. 사람들이 외로움과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랑이란 감정을 만들어냈다고 해서, 거짓으로 우리를 위안하기 시작했다고 해서 나쁠 게 뭐가 있어? 결국 허위에서 진실이 태어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

 
“ 그건 로맨티스트들이 하는 말이야. 너와는 어울리지 않아. 허위에서 진실이 태어난다는 건 불가능해. 진실은 오직 한 가지 뿐이야. 인간이란 끔찍한 존재란 것. 파괴하고 서로 죽이는 존재란 것. 우리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건 그것 밖에 없어. ”


 
카르멘은 물끄러미 데본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처럼 강렬하고 날카로웠다. 하지만 거기에는 평소에는 결코 볼 수 없는 희미한 부드러움이 숨어 있었다.


 
그들은 하얀 시트가 깔려 있는 좁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1인용 침대였지만 둘 다 몸집이 작은 편이었기 때문에 그리 불편하지는 않았다. 카르멘은 데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누워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데본은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창밖으로부터 환호성이 들려왔다. 어느 편이든 골을 성공시킨 모양이었다.


 
“ 담배를 끄든가 머리를 치우든가 둘 중 하나야, 너. 질식해서 죽을 지경이라고. ”


“ 한번만 더 투덜거리면 입을 틀어막아 버릴 거야. ”

 

카르멘은 위협적인 표정을 지으며 거의 필터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바닥에 내던졌다. 빨간 불꽃이 희미하게 일었고 연기가 피어올랐다. 잠시 데본은 홀린 듯한 시선으로 바닥에 떨어진 꽁초를 바라보았다. 불꽃은 언제나 그를 매혹시켰다. 


 
“ 왜 그런 짓을 했어? ”
 


카르멘의 음성은 나직하고 부드러웠다. 데본은 그녀의 질문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 알고 있었다. 



 
기묘한 일이었다. 그는 언제나 침묵을 지켰다. 수줍음을 타는 성격이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입을 열기를 원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대화들은 어리석고 저열했다. 사람들은 진정한 관심이나 필요가 아니라 몇천 년 동안 몸에 배어온 관습에 의해 뜻 없는 이야기들을 반복했다. 얼마나 끔찍한 낭비일까? 데본은 종종 모든 인간들이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표현 외에는 완벽하게 침묵하며 살아가는 세계를 상상했다. 어쩌면 그편이 더 나았다. 최소한 입술과 혀에서 밀려나오는 위선과 허위는 없을 테니까. 그것이 그가 침묵하는 이유였다. 사람들의 음성, 그들의 언어와 그들의 표현은 그를 역겹게 했다.


 
하지만 카르멘과 함께 있으면 그런 역겨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그의 살갗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생각과 감정이 똑같아서가 아니었다. 심지어 그들이 서로를 완전하게 이해하고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건 불가능했다. 그건 단지 그녀의 눈에 있는 불꽃 때문이었다. 그에겐 아주 낯익은 불꽃.


 

“ 하고 싶었으니까. ”


“ 흠, 나 같으면 영사실에 불을 지르느니 한 방 찌르고 뒹굴었겠다. ”


“ 넌 왜 헤로인을 찔러댔는데? ”



 
이번에는 카르멘이 홀린 듯한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할 차례였다.



 
“ 마리화나 한번 손대보지 않은 너한테 이런 얘길 해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을 테지만.. 사실 헤로인은 사용하기 편한 약은 아냐. 백 명의 정키에게 그걸 왜 하느냐고 묻는다면 백가지의 대답이 나올 거야. 헤로인은 모순덩어리야. 그건 모든 감각을 잊을 수 있게 해줘. 하지만 그건 사실 헤로인이 감각의 극점을 찾아내기 때문이야. 태양을 똑바로 바라보면 장님이 되는 이유는 그 빛이 너무 강렬해서 시각을 마비시키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 멍한 마비 상태, 그 무거운 암흑에 사로잡힌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그 사람의 내부엔 안구를 불태우던 광채가 어른거릴 거야. 그런 거야, 헤로인이 주는 건. 암흑, 침묵, 빛, 색깔. 한 가지는 분명해. 헤로인이 혈관을 가득 채우고 있을 때 찾아오는 침묵은 두렵지 않아. 그건 그냥 잠과 같은 거야. 심장 박동이나 다름없어. 내 친구 커트는 그것 때문에 낮이고 밤이고 미친 듯이 주사를 찔러댔다고 했어. 왜냐하면 그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침묵이었거든. 거기 이빨이 있다고, 뇌수를 찢어발기는 소음이 있다고 했어. 헤로인은 착한 마녀처럼 그 무서운 침묵을 데려가서 편안한 심장 소리로 바꿔준다고 했어. 내가 느낀 게 똑같은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있었어. 결론은 똑같아. 원점으로 돌아오는 거야. 우리가 홀로 죽어야만 한다는 것. 사람들은 그 끔찍한 사실에서 도망치기 위해 헤로인을 주사하지만 결국은 자신들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되지. 헤로인은 우릴 도망치게 해주는 게 아니라 그 외로움의 한가운데 데려다놓는 약이야. 하지만 이미 공포와 절망은 마비되고 말아. 남는 것은... 남는 것은 어쩌면 침묵이 전부일지도 몰라. ”

 
“ 그럼 끊은 이유는 뭐지? ”

 
“ 진짜 심장 박동을 들을 수 있다면 약 따윈 필요하지 않아. ”


 
카르멘은 맑은 하늘빛 눈으로 데본의 얼굴을 응시하며 한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쓸었다.


 
“ 결국 헤로인은 수많은 마약과 마찬가지로 대용품에 지나지 않아. 온기. 심장 박동. 너를 사랑한다는 말. 헤로인은 그것들에게 닿기 위한 끔찍한 몸부림일 뿐이야. 심지어 무대조차도 그런 거라고 커트가 말했어. 어떤 면에선 그게 옳을지도 몰라. 무대 위에서 그가 보는 건 암흑뿐이었다고, 그래서 자신을 모두 부어버려야 했다고, 바닥에 내던져진 술잔처럼 내용물을 깡그리 쏟아버리고 마침내는 깨진 유리처럼 산산조각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고 했어. 그에겐 아무 것도 충분하지 않았어. 왜냐하면 심장에 난 구멍은 어떤 대용품으로도, 헤로인으로도 무대로도 메울 수가 없는 거니까. ”


 
데본은 그녀가 누구에 대해 얘기하는지 알고 있었다. 커트 와일드. 70년대 유명 락 밴드의 리드 보컬. 그가 유일하게 들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밴드.
 



갑자기 궁금증을 느낀 대본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카르멘의 손을 붙잡아 아래로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는 친밀한 스킨십에 익숙하지 않았다.


 
“ 그런데도 그놈하곤 안 잤단 말이지? 왜? ”

 
“ 그렇게 뻔한 질문이 어디 있어? 커트는 게이야. ”

 
“ 그래, 에메랄드 앨리의 던컨 가브리엘 그 자식처럼 말이지. 내가 궁금한 건, 그 자식이 게이여서 너와 섹스를 하지 않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선지 하는 거야. ”

 
“ 왜 그런 게 궁금한데? ”
 

“ 완벽한 게이란 건 없으니까. 완벽한 스트레이트가 없는 것처럼. 둘 다 원칙이란 틀에 매여 있는 것뿐이야. 후자가 사회가 정한 원칙에 사로잡혀 있다면 전자는 스스로가 자신에게 강요한 틀에 사로잡혀 있는 거라고. ‘난 게이니까 여자랑은 결코 할 수 없어’란 자기 최면에 지나지 않아. 그건 스스로를 제한하는 거야. 어쩐지 ‘너의 커트’란 놈은 그런 인간 같지는 않아. ”

 
“ 그래, 기억해뒀다가 커트한테 말해줘야겠네. 어쨌든, 그가 게이이기 때문은 아냐.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난 그런 식으로는 섹스를 할 수 없어. 우리 사이에 욕망이 없는데 어떻게 그걸 하겠어? 욕망이 존재하든지, 이미 습관이 되었든지, 아니면 상대가 너무 밉살스러워서 입을 다물게 하고 싶든지 셋 중 하나인 걸. ”

 
“ 세 번째 이유 때문인지도 몰라. 내가 그때 너한테 그거 하려고 했던 건. ”



 
데본의 입술이 가볍게 위로 치켜 올라갔다. 여전히 서툰 미소. 카르멘은 콘크리트 옥상과 눈부시게 푸르던 하늘을 떠올렸다.



 
“ 근데 왜 안 했어? ”


“ 그걸 알고 싶어서 너와 커트에 대해 물었던 거야. 난 아직도 그 욕망이란 걸 이해할 수가 없어. ”


“ 난 네가 던컨을 찾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어쩌면 그 사람은 너한테 그걸 알게 해줄지도 몰라. 갱 애인한테만 안 들키면 될 거야. ”


 
카르멘은 쿡쿡 웃기 시작했다.


 
“ 난 그 인간 싫어. ”


“ 왜? 피를 철철 흘리고 쓰러진 널 업고 8층 계단을 올라가서 치료도 해주고 저녁도 먹여주고 잠까지 재워줬다고. 요즘도 종종 만나면 네 안부를 묻는 걸. ”


“ 그래서야. 무슨 선행이라도 베푸는 것처럼 날 보살핀 게 맘에 안 들어. 난 그런 걸 부탁한 적이 없어. ”



 
그는 겨우 열여섯 살이었다. 카르멘보다도 몇 개월이나 어렸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데본의 표정은 돌처럼 단호하고 견고했다.



 
“ 넌 지금 다른 사람에게 빚을 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거니? ”


“ 그래. ”



 
카르멘은 이해했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에게 의지한다는 것은 자신의 약한 모습을 인정하는 것이다. 틈을 보이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틈을 발견하는 순간 그녀를 파괴해 버릴 것이다. 가장 무심하고 뜻 없는 방식으로. 하지만 때로는 그녀 스스로가 그것을 원했다. 틈을 파헤치고 그녀 자신을 깨뜨려 주기를 원했다. 커트가 그랬고 레스가 그랬다. 하지만 그건 파괴가 아니라 사랑이었다. 그 둘 사이에는 수평선과 같은 간극이 있었다. 과연 그 둘을 구분할 수 있을까?



 
그녀는 데본의 단호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에게 있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순순히 틈을 보이고 타인에게 의지하려들 수 있겠는가. 그러기엔 데본의 내부는 지나치게 깊었고 지나치게 오만했다.



 
“ 그 누구에게도? ”


“ 그 누구에게도. ”



*   *   *

 
 
 

마크는 얕고 힘든 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나직하고 조용하게 얘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크는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가 앰프를 켜놓은 것처럼, 혹은 그의 귀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아마도 그가 삼킨 환각제 때문일 것이다. 너무나 불공평한 일이었다. 그는 단지 노란 캡슐 세 개를 삼키고 양호실 침대에 누워 아무런 해도 없는 환각에 빠지고 싶었을 뿐이었다.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약한 환각제.
 


마크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는 1인용 침대에 홀로 누워 있었다. 양호실의 침대들은 칸막이 대신 얇은 커튼으로 차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얇은 커튼 너머, 그의 침대 건너편에 그들이 있었다. 그들은 나직하고 조용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눈가가 축축하게 젖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는 못했다.



*   *   *

 
 

 


“ 매일 지니고 다니기엔 너무 무겁지 않아? ”



“ 매일 심장을 가지고 다니는 걸 생각해봐. 그 무게엔 결코 익숙해질 수 없지만 이건 안 그래. ”



 
카르멘은 손을 내밀어 매끄럽고 차가운 금속 총구를 건드렸다. 데본은 마치 수화기를 들고 있는 것처럼 권총을 쥐고 있었다. 그는 무심하게 눈을 깜박이더니 카르멘에게 총을 건네주었다.



 
“ 갖고 싶으면 가져. 난 하나 더 있어. ”



“ 난 총이 싫어. ”



“ 그래, 넌 블레이드 타입이었지. ”




 
여전히 권총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광택이 나는 총신을 응시하면서 카르멘이 대꾸했다.



 
“ 네가 심장 얘길 한 건 옳을지도 몰라. 내가 블레이드를 가지고 다니는 것도 그래서야. 뭔가를 너무 오래 가지고 다니면 이미 몸의 일부가 돼. 목걸이나 반지와 다를 게 없어, 심지어 네 말대로 심장처럼 느껴질 수도 있어. 내가 그걸로 남을 공격한 적은 손으로 꼽을 정도 밖에 안 돼. 그것도 먼저 공격한 적은 한 번도 없어. 어쩌면 그게 아주 추하게 생긴 칼이었다면 난 이미 오래 전에 그걸 쓰레기통에 던져버렸을지도 몰라. 문제는 내 블레이드가 너무 예쁘다는 거야.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기에는 언제나 이상한 아름다움이 있어. 이 총도 그래. 만일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사랑의 신이라기보다는 파괴의 신일 거야. 언제나 파괴하는 쪽이 더 쉬우니까. 어쩌면 인간의 손에 가장 먼저 칼을 쥐어준 것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인간을 공격하는 짐승들이 아니라 바로 신이었는지도 몰라. 심장과 칼은 어쩌면 같은 건지도 몰라.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것. 역겨운 일이지. ”



 
그러자 데본이 자신의 가방에서 문고본 책을 한권 꺼냈다. 그리고 책갈피가 끼워진 페이지를 펼치더니 또렷한 목소리로 읽었다.



 
“ 사람들은 자살하지 않기 위해 신을 만들어냈다. ”



 
카르멘은 힐끗 책 표지를 보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이었다.



 
“ 다시 한 번 읽어줘. ”
 



데본은 카르멘의 하늘빛 눈을 잠시 바라보더니 다시 읽었다.



 
“ 사람들은 자살하지 않기 위해 신을 만들어냈다. ”



 
카르멘은 권총을 침대 위에 내려놓고 데본의 손에서 책을 받아들었다.



 
“ 이 사람은 알고 있어. 내가 하고 싶었던 말도 어쩌면 그건지도 몰라. ”



 
그녀는 두 눈을 감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 다른 사람을 죽이지 않기 위해 신을 만들어냈다는 말은 그렇지가 않아. 살인을 금하기 위해서는 그렇게까지 묵중한 존재가 필요 없어. 자살하지 않기 위해 신을 만들어냈다는 말은 도덕성을 만들어냈다는 말이야. 도덕은 언제나 인간 위에 있어. 그건 상위의 질서야. 아무도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명령할 수 없을 거야, 오직 신적인 존재만이 가능해. 자살하지 않기 위해 신을 만들어냈다는 말은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신을 만들어냈다는 말과 같은 건지도 몰라. ”



“ 신을 믿어? ”



 
카르멘은 눈을 뜨고 데본을 보았다. 그의 검은 눈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그의 표정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의 눈빛은 언제나 두 가지 뿐이었다. 무심하고 차가운 눈, 그리고 격렬하게 타오르는 눈. 그런데 지금 그의 눈에는 부드러운 광채가 돌고 있었다. 제 3자가 본다면 ‘신을 믿어?’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강아지 좋아해?’ 혹은 ‘날 사랑해?’ 하고 묻고 있다고 착각할지도 모르는 광채였다.



 
“ 모르겠어. 때로는 그랬으면 좋겠어. 뭔가를 조건 없이 믿을 수 있다는 게 부러워. 그건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는다는 것과 달라. 어쩌면 자기 자신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다는 건지도 몰라. 우습지만 우리 엄마는 카톨릭 신자야. 지금도 가끔은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가곤 하지. 하지만 난 알고 있어. 엄만 정말로 뭔가를 믿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는 게 아니야. 다만 그 의식이 필요할 뿐이야. 미사에 참석해본 적이 있다면 너도 알지도 모르지. 신부님과 성가곡과 촛불과 성찬식, 그리고 고해.. 그 모든 게 뜻하는 건 하나의 의식이야. 자신을 정화시키기 위한 의식. 혹은 ‘정화시키는 척’ 하기 위한 의식. 단지 한 시간 동안만이라도 좋으니 현실 세계에서 자신을 격리시키고 싶은 거야. 어쩌면 엄마도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있는지도 몰라. 왜냐하면 우리 엄마는..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거든. 엄만 자신을 절대 포기할 수 없어. ”




 
카르멘은 희미한 오한을 느끼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녀는 단 한 번도 엄마에 대해 그렇게 말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내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엄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엄마의 내부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그녀는 처음으로 엄마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오한을 느꼈다.



 
“ 그게 바로 너의 헤로인이야. 네 엄마는 마약보다 고상하고 세련된 걸 택한 거야. 비난받지 않는 무엇, 안전한 무엇. 하지만 본질은 똑같아. ”




 
데본은 카르멘의 부드러운 붉은 곱슬머리를 무심하게 만지고 있었다. 그에게는 드문 일이었다. 카르멘은 기이한 보호 본능을 느꼈다. 그건 레스를 향해 느끼는 감정과도 달랐고 심지어 커트를 향해 느끼는 감정과도 달랐다. 데본은 그녀를 불편하게 했다. 긴장감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느낌이 좋았다. 그들은 결코 커트와 주드 같은 사이의 친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아무 말도 없이, 아무런 의미 없이, 그저 해가 질 무렵 창가에 앉아 네온이 반짝이기 시작하는 도시를 내려다보며 서로의 존재에서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친구.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필요가 없는 사이. 왜냐하면 커트와 주드는 자신들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친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그건 열정이나 사랑이 아니었다. 그런데 데본은 그녀에게 그런 우정을 줄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는 그들 둘다 너무 불안정하고 너무 모가 나 있었다. 하지만 카르멘은 그것이 좋았다. 그리고 데본을 지켜주고 싶었다. 무엇으로부터인지는 그녀 자신도 몰랐다.
 



“ 그럼 너는, 데본? 네가 택한 건 뭔데? ”


 
“ 아무것도 택하지 않는 것. ”


 
“ 그건 대답이 안 돼. ”


 
“ 난 안전한 뭔가가 필요 없어. 너의 헤로인도, 커트의 무대도, 너희 엄마의 미사도, 사랑이라고 불리는 이상한 감정도.. 그것 하나는 네가 옳아. 자살하지 않기 위해 신을 만들어냈다는 말은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아니 사랑이라는 단어 대신 보호라는 말을 쓰는 편이 더 나아,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신을 만들어냈다는 말이야. 신이라는 존재로 하여금 자살을 죄악으로 규정하게 해서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인 자기 파괴를 가로막게 한 거야. ‘타인을 죽이지 않기 위해서’라는 말은 부차적인 결과에 지나지 않아. 왜냐하면, 카르멘, 모든 파괴와 살인은 궁극적으로는 자기 파괴에서 비롯되기 때문이야. 그건 너 자신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야. ”



 
그의 단호함과 견고한 확신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건 열여섯 살짜리 소년의 음성이 아니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카르멘은 단 한번도 외적인 연령과 내부에 간직된 사상을 동일시해본 적이 없었다. 나이는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다. 어떤 사람은 80살에도 어린애였고 어떤 사람은 열두 살에 이미 노인이 되어 있었다. 커트가 한때 한 화가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나이 들고 현명한 화가, 심장이 화석으로 변해가는 화가. 



 
그녀는 책장을 넘겼고 눈에 띄는 구절을 소리 내어 읽었다.



 
“ 나는 평생 동안 신에 의해 고통을 당해왔다. ”



“ 그래, 그건 끼릴로프야. 인간이 자살하지 않기 위해 신을 만들어냈다고 한 것도 그 자식이지. ”



“ 철학을 하는 주인공이군. ”



“ 주인공은 아냐. 주변인물이지. 철학가라기보다는 행동주의자고. 신이 없기 때문에 정말로 자살하는 사람이야. ”



“ 그게 그에겐 그렇게 중요해? ”




 
그러자 데본은 책갈피로 끼워놓았던 작은 종이쪽지를 빼냈다. 그리고 여러 번 접혀 있는 종이를 펼치더니 카르멘에게 건네주었다. 노트에서 찢어낸 것이 분명한 그 종이에는 검은 잉크로 빽빽하게 글이 씌어져 있었다. 카르멘은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 끼릴로프는 신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동시에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끼릴로프 자신이 신이다. 신이 된다는 것, 그것은 독립과 자유의 속성을 나타낸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모든 것은 신에게 달려 있고 인간들은 그 의지에 반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신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모든 것은 이를 깨달은 자에게 달려 있다. 이것은 인신 사상, 저 신적 반역의 최정점에서 인식한 인간 자체가 신이라는 주장을 외치는 단호한 사상이다. 그리스도는 신인이지 인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조차도 신이 없는 이 세계의 허위 속에 사라져 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자살해야 하는가? 곧 자신이 신임을 인식한 존재, 자유의 정복자가 왜 자살을 해야 하는가? '인간들은 자살하지 않기 위해 신을 만들어냈다.'고 끼릴로프는 말한다. 자신이 신임을 인식한 자는 행복과 영광, 자유의 절정에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신이 없다는 것, 그러므로 그들 자신이 신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언제나 첫번째 인식자가 문제이다. 끼릴로프는 자신이야말로 그 첫번째 인식자이며 때문에 이를 증명하기 위해 자살을 한다. '나에게는 나의 뜻을 주장할 의무가 있다'고 그는 외친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절대 자유를 증명하기 위해 죽는다. 그것은 처절한 자기주장이자 인류에 대한 사랑이다. 기독교적 그리스도의 사랑 저편에서 끼릴로프는 무신론의 이름으로 인류에 대한 사랑을 역설한다. 까뮈가 지적한 대로 끼릴로프는 이 세계의 부조리함을 알고 받아들인다. 그가 '모든 것은 좋은 것입니다.' 라고 했을 때 그는 확실히 자기 사상의 중심에 있는 것이다.


 
끼릴로프가 말하는 신의 경지, 그 자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조화된 순간'이다. 인간은 5초 이상 그 순간을 견뎌낼 수 없다. 만일 십 초 이상을 견뎌내려면, 그 조화의 순간을 견뎌내려면 인간은 육체적으로 변화되거나 죽어야 한다. 신이 창조 후 '참 좋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환희, 그 순간은 극도로 선명하고 즐거운 조화의 시간이다. 그 오 초 동안에 그는 일생을 산다. 그 순간을 위해서라면 그는 일생을 내던질 수가 있다. 인간은 육체적으로 변화하여 번식과 진보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될 것이다...
 

 




“ 결국 그가 자살하는 건 사랑 때문인 거야? 다른 사람들을 향한 사랑? 전혀 모르는 다른 사람들을 향한 사랑 때문에?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


 
“ 그가 자살한 건 인간이 절대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야. ”



 
“ 난 그걸 이해할 수 없어, 데본. 절대적인 자유가 뭔데? 자유란 건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해.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어. 자유를 증명하기 위해 자살한다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만약 자유란 게 정말로 존재한다면 그건 증명할 필요가 없을 거야. 뭔가를 증명해야 한다면, 공식이 필요하다면, 남에게 그 타당성을 보여줘야만 한다면 그건 자유가 아니야. 태어나서 지금까지, 텔레비전과 신문에서, 책에서, 수업 시간에 귀가 닳도록 들은 얘기를 기억해? 우리나라는 자유 국가라는 말. 그건 거짓말이야. 보기 좋게 포장된 선전 문구에 불과해. 그런 건 자유가 아니야. 우린 과대망상 속에서 살고 있어. 아무도 자유가 뭔지 몰라. ”


 
“ 그래, 네가 옳아. 그는 절대적인 자유를 위해 자살한 게 아니야. 다만 그렇게 믿었을 뿐이지. 그는 망상 때문에 자살했어. 인류를 사랑할 수 있다는 망상, 가장 멀리 있는 사람들까지 사랑할 수 있다는 과장된 믿음. 그는 환상 속에서 자살한 거야. ”
 


“ 결국 그 역시 환상을 자유로 오해한 거야. 오 초의 조화된 순간이라는 건 자유가 아니라 명멸해 사라지는 헤로인의 환각일 수도 있고 우리 엄마의 미사일 수도 있고 커트의 무대일 수도 있어. 어쩌면 그게 바로 자유일 수도 있는 걸까? 그토록 오랫동안 인류가 갈망해 온 것, 존재한다고 믿어온 것 말야. 난 여전히 아무것도 이해할 수가 없어. ”
 


“ 이해할 필요 없어. 우린 한 가지 사실만 알면 돼. ”


 
“ 그게 뭔데? ”


 
“ 인간들은 모두 눈이 멀었다는 것. 가망 없이. ”




 
 
*   *   *




 
 
세상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고 간헐적으로 네온 불빛들이 발광충처럼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두 눈을 비볐다. 아직 한낮이었다. 어쩌면 그의 눈을 아프게 한 것은 햇살이었는지도 몰랐다.
 




무해한 환각제라는 이름으로 상류층 학생들 사이에 돌아다니는 그 노란 캡슐 속에는 믿을 수 없는 어둠과 끝을 모르는 깊이, 그리고 폭죽처럼 터지는 불꽃들이 숨어 있었다. 감각을 마비시키고 눈을 뜰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정키들은 헤로인이 바로 그런 약이라고 우길 것이다. 그 외의 어떤 약도 그런 세계를 맛보게 해줄 수 없을 거라고. 하지만 마크는 알았다, 그들이 틀렸다는 것을. 결국 모든 약은 똑같다는 것을. 정맥으로 밀려들어가는 액체든 목구멍을 넘어가는 작고 매끄러운 캡슐이든 상관없이, 인간이 만들어낸 화학물질은 같은 목적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것을 흡수하는 존재를 파괴하는 것. 혹은 파괴한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것.



 
마크는 현기증을 느끼며 거리를 배회했다. 그는 카르멘과 데본의 뒤를 따라 학교를 나왔다. 그들이 그를 목격했는지 혹은 그냥 지나쳤는지 마크는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카르멘과 데본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손을 잡지도 않았고 그리 가까이 서지도 않았다. 그들은 일정한 개인적 거리를 유지한 채 그저 함께 걷고 있었다.
 




갈림길이 나타났고 카르멘과 데본은 별 말도 없이 헤어졌다. 그들 중 누구도 고급 사립학교의 귀족 학생으로 보이지 않았다. 데본은 언제나처럼 검은 옷으로 몸을 감싼 채 무심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카르멘은 넝마 같은 무지개 티셔츠와 허리를 졸라맨 너덜너덜한 남자 청바지를 입고 지저분한 운동화를 신은 채 사람들 사이를 뚫고 사라져 가고 있었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마크는 자신이 카르멘의 뒤를 쫓아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이 희미하게 밝아졌을 때 그의 앞을 걸어가고 있는 것은 데본 펠이었다. 



 
그는 데본의 말을 생각했다. 영사실에 불을 지른 장본인. 학교에 무기를 가지고 다니는 위험인물, 그는 당장이라도 상담 교사에게 가서 모든 것을 말해버릴 수 있었다. 그의 한 마디는 데본을 퇴학시킬 수 있을 것이다. 혐오스런 쥐새끼 같은 데본 펠을. 하지만 마크는 그것이 데본에게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방식으로는 결코 데본을 상처 입힐 수 없었다. 그의 눈앞을 걸어가고 있는 건 그의 상식이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괴물이었다. 



 
마크는 발끝에 채여 나뒹구는 빈 병을 주워들었다. 그는 오직 한 가지 사실만을 이해했다. 그의 마음속에 뭔가 불꽃이 있고, 그것이 그의 눈을 멀게 한다는 것. 심지어 그것이 카르멘을 향한 갈망인지 데본을 향한 혐오인지조차 알 수 없지만, 그 불꽃은 그의 내부를 끔찍하게 태우고 그의 손을 경련하게 만들었다. 




 
그는 유리병을 꽉 쥐고 데본의 뒤로 다가갔다. 데본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골목은 텅 비어 있었다. 오로지 그와 데본, 그리고 바닥을 태워 없앨 듯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만이 존재했다. 



 
겨우 오 초도 지나지 않는 순간이었다. 그 짧은 순간 마크는 소용돌이치는 빛살의 폭포 속에 서 있었다. 그 순간 전 우주가 그의 손 안으로 쇄도해 들어오는 것 같았다. 바닥을 딛고 있는 발의 감각조차 사라졌다. 우주의 비밀이 유리병을 움켜쥔 그의 손 안에 있었다. 



 
 
마크는 유리병을 휘둘렀다. 
 




둔탁한 충격이 손끝을 타고 올라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병이 박살나며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 파편들은 토네이도에 휩쓸린 듯 햇살 속으로 산산이 흩어졌고 암흑이 시야를 가렸다.


 
 

마침내 그는 깨달았다. 불꽃은 그 노란 캡슐 안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내부에 있었다. 애초부터 다른 어디로도 달아난 적이 없었다. 모든 인간이 내부에 그것을 갖고 있었다. 



 

마크는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그리고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갔다.

 


 

데본 펠은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시멘트 바닥에 모로 누워 있었다. 깨진 유리 조각들이 주위에 널려 있었고 끈끈하고 붉은 피가 잿빛 바닥에 엉겨 있었다. 


 
마크는 비명을 지르기 위해 입을 벌렸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새어나온 것은 나직하고 숨찬 신음 소리뿐이었다.

 


그는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그의 손은 아직도 충격으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환각제의 약효가 썰물처럼 순식간에 그의 몸에서 빠져나갔고 정신을 잃을 만큼 지독한 경련만 남았다.


 
“ ...데....본? ”

 


처음이었다. 마크가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은.

 


데본 펠은 한동안 아무런 반응도 없이 누워 있었다. 마크는 자신이 그를 죽였다고 생각했다. 가책은 없었다. 공포조차도. 오직 감각을 마비시키는 현기증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기계적으로 되풀이했다.


 

“ 데본.... ” 


 

데본은 서서히 몸을 뒤척였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두 눈 아래에는 검은 그림자가 패여 있었다. 마크는 그를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본 적이 없었다. 


 
“ 기분이 어때? ”

 


그의 음성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했다. 마치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머리에서는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관자놀이 부근의 검은 머리칼 사이로는 산산조각난 유리 파편들이 빛을 내쏘고 있었다. 


 

마크는 눈을 깜박였다. 처음으로 공포가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일어나서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데본의 시선이 그에게 고정되어 있었고 그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데본이 다시 물었다.


 

“ 기분이 어때? ”


 

마크는 마비된 혀를 가까스로 움직였다.



 

“ ....앰뷸런스를 부를게... ”


“ 필요없어. 제대로 맞지도 않았어. ”



 

데본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희미하게 얼굴을 찡그리며 한 손을 뒤통수로 가져갔다. 그리고 피 묻은 유리 파편을 뽑아내 바닥에 내던진 후 뒤통수를 여러 차례 문질렀다. 마크는 구토기가 치미는 것을 느꼈고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 ...병원에 가야 해. ”


“ 병원에 가야 할 건 내가 아니라 너 같은데, 귀족 도련님. ”



 

데본은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간 웃음, 눈과 코와 뺨은 전혀 무감각한 웃음이었다. 



 

" 빛이 있었어? “



 

이제 데본은 다른 질문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첫 번째 질문과 마찬가지로 마크는 두 번째 질문에도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다만 부들부들 떨며 피가 흘러나오는 데본의 머리에 손을 뻗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손이 닿기도 전에 데본은 몸을 움츠렸고 차가운 검은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 건드리지 마. ”


“ ....미안해. ”


“ 미안할 건 없어. ”



 

데본은 서서히 일어섰고 한 손을 들어 햇살과 눈 사이를 가렸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그림자 속에 잠겼다. 



 
“ 이제 그만 꺼져. ”

 



그 말에도 불구하고 마크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마비된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어렴풋하게 그는 뺨과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축축한 습기를 느꼈다. 하지만 그게 식은땀인지 눈물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데본은 바닥에 뒹굴고 있는 깨진 유리병을 주워들었다. 있는 힘껏 내리쳤기 때문에 반쯤은 깨져 달아나고 남은 것은 들쭉날쭉하고 흉측하게 날이 선 병목 부분뿐이었다. 처음으로 마크는 병의 색깔과 모양을 보았다. 그건 하이네켄 맥주병이었다. 데본은 깨진 병을 들어 올려 햇살에 비추어보고 있었다. 그건 버드와이저나 밀러 병처럼 갈색이 아니고 마음을 사로잡는 녹색이었다. 햇살이 일렁이는 가운데 깨진 병은 기이한 심해의 녹색을 발산하고 있었고 군데군데 튄 핏자국들이 어두운 얼룩을 이루고 있었다. 그 얼룩들은 마치 바다를 유영하는 해파리처럼 보였다. 마크는 거기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데본 역시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그렇게 서 있었다. 


 
갑작스럽게 데본은 시멘트 바닥에 병을 내던지고 걷기 시작했다. 마크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머리에서 여전히 피를 흘리며 언제나처럼 느릿느릿하고 무심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대부분의 피는 정수리로부터 내려와 오른쪽 관자놀이로 향하는 부분에서 흐르고 있었다. 파편을 뽑아낸 부위가 길게 찢어져 틈새처럼 벌어져 있었고 흘러내리는 핏방울 아래로 검붉은 피가 엉기고 있었다.

 



마크는 꼼짝도 하지 않고 시멘트 바닥 위에 앉아 있었다.

 



 

*   *   *




 
 

카르멘은 그레이와 함께 햇살을 받으며 공원의 잔디밭에 누워 있었다. 그레이는 야구 모자를 눈 아래로 내려쓰고 편안하게 누워 있었고 카르멘은 그의 무릎을 베고 있었다. 


 

“ 눈 아프지 않아? ”


“ 괜찮아. 태양을 보는 게 아니라 그 옆의 구름을 보고 있어. ”



 

그레이는 모자를 벗어 카르멘의 머리에 씌웠다. 그리고 조금 전에 카르멘이 하던 대로 눈을 커다랗게 뜨고 하늘을 응시했다. 눈부신 태양과 주위를 맴도는 흐릿한 흰 구름떼를 보았다. 하지만 그는 카르멘의 말대로 구름에 시선을 고정시킬 수가 없었다. 하늘은 서서히 회전하고 있었고 구름들은 미소를 짓듯 그의 시선에서 도망쳐 달아났다. 결국 눈을 멀게 할 듯한 황금빛 태양만이 남았다. 그레이는 눈을 깜박였다. 


 

“ 그도 그래. ”


“ 누구? ”


 
하지만 카르멘은 그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잘 알고 있었다.

 



“ 내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결국 주위의 모든 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아. 내 눈 앞에 남는 건 그의 존재 밖에 없어. 눈을 돌릴 수도 없고 그러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아. 카르멘, 맨 처음에 그를 봤을 때 내 머리 속에 든 생각은 하나 밖에 없었어. 피할 수 없는 게 왔다는 것. ”


 

그레이는 여전히 태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피할 수가 없어. 우리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매일매일 찾아오는 아침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가끔은 숨이 멎어버릴 것처럼 두려워. ”


“ 피할 수 없다는 그 느낌이? ”


“ 터무니없는 상상이 들 때마다. 눈을 떴을 때 내 곁에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마다, 그가 내게서 도망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언젠가는 그가 내 곁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 순간을 떠올리게 돼. 피할 수 없는 뭔가가 내게 왔던 그 순간 말이야. ”


 

그레이는 마치 혼잣말을 하듯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 난 이해할 수가 없었어, 카르멘. 난 심지어 남자들을 좋아해본 적도 없어. 그런데 거기 그가 있었어. 난 사랑에 빠졌지. 하지만 그 순간은 그게 사랑인지 뭔지조차 알 수가 없었어. 그저 이건 피할 수 없는 거라는 깨달음뿐이었어. 그런데 그가 느낀 것도 그런 식이었을까? 때때로 그는 너무나 멀리 있어.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곳. 내겐 열리지 않는 곳. 그에겐 그런 곳이 있어. 그리고 그가 그 안으로 들어가 버리면 난 혼자야. 그건 한밤중에 잠이 깼을 때 그가 내 곁에 없는 것보다 더 무섭게 느껴져. 종종 그는 악몽을 꾸고 일어나 홀로 창가에 앉아 있곤 하지. 침대 곁을 쓸었을 때 차가운 시트가 만져지면 물론 난 두려움에 떨게 되지만, 그래도 그럴 땐 그의 이름을 부를 수는 있어. 그럼 그가 대답하지. 아니면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와 누워. 하지만 일단 그가 그 이상한 곳으로 들어가 버리면 아무리 이름을 부르고 아무리 손을 잡아당겨도 난 그를 데리고 나올 수가 없어. 그럴 때면 그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난 혼자야. 그것만큼 두려운 일은 없어. ”



 

카르멘은 레슬러 지미를 바라보던 커트, 자신의 오래된 데모 테이프를 들으며 무의식적으로 몸을 흔들던 커트를 생각했다. 그리고 가브리엘 던컨의 부드러운 속삭임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보통 이해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그녀는 모자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고 활짝 열린 커다란 하늘빛 눈동자로 태양을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황금빛 광선에 눈이 멀 것 같았다. 그녀는 태양 옆에 무리지은 흰 구름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레이는 여전히 태양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반쯤 감겨 있었고 속눈썹 언저리에는 쏟아지는 빛 때문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FIN
2003. 9. 17

 
 



..





카르멘이 책 사이에서 발견해 읽는 종이쪽지에 씌어 있는 데본의 메모는 사실 내가 대학 시절 도스토예프스키 수업 듣고서 작성해 냈던 리포트의 일부에서 따온 것이다. 주제는 도스토예프스키 장편들에 나오는 신에 대한 반역자들에 대한 비교분석이었는데, 이반 카라마조프, 키릴로프, 스타브로긴 등을 주력으로 썼었다. 지금은 표기법에 맞게 키릴로프라고 쓰고 있다만 당시에는 발음에 가깝게 '까라마조프', '끼릴로프' 등으로 표기했고 이 단편에도 끼릴로프라고 썼다. 안 고쳤다. 



여기서 쓴 자유와 신과 종교에 대한 이야기는 이후 회사 웹진에 연재했던 러시아 이야기들 중 한 편인 '빵과 자유'란 글에도 인용했다. 내용은 좀 다르지만 하여튼. 그 글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17



오초에 대한 이야기는 악령에서 끼릴로프가 하는 이야기와 백치에서 므이쉬킨 공작이 하는 이야기에서 파생된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도, 끼릴로프도, 므이쉬킨도 모두 간질병 환자였다. 




..




아래는 이 글을 쓰고 몇달쯤 후 썼던 아주 짧은 메모이다. 이건 당시 아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던 동생에게 쓴 편지에 첨부했던 글이었다. 그 당시 우리에게는 고민이 많았다. 관념적으로든 실제적으로든. 





note (2004. 2월)
 


 

아마 내가 스타차일드 시리즈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가장 나 자신과 가깝다고 생각하는 녀석은 카르멘이나 커트가 아니라 바로 데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의 나는 데본과 다를지도 모른다. 데본은 지금의 내가 아니라 몇 년 전까지의 나, 무엇보다도 사춘기 학창시절과 러시아에 다녀오기 전까지의 내 모습에 가장 가깝다고 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나와 몇 년 전의 나 사이에 유사성과 연속성이 있고 둘 사이의 거리는 너무나 좁다는 사실을 상기해 본다면, 결국 데본은 나 자신의 조금 일그러진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데본이 등장할 때면 너무나 쓸 말도 많고 플롯이나 논리가 금세 완벽하게 구성됨에도 불구하고 글을 완성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왜냐하면 데본에 대해 쓴다는 것, 데본의 언어에 대해 쓴다는 것은 나 자신을 거울에 놓고 들여다보는 행위와 너무나 유사하기 때문이다. 


 

난 언제나 자신에 대해 쓰거나 자신을 모델로 놓고 쓰는 경우에는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해왔다. 그것은 타인에게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오는 자기 보호본능일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을 똑바로 이해하고 싶은 욕망 때문일 수도 있다. 


 

스타차일드 25편을 쓰면서 난 데본을 사랑했다. 그리고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있어 아마 데본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은 카르멘을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더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들었다. 데본은 나 자신, 혹은 내가 생각하는 나 자신의 모습에 무척 가까웠다. 그리고 카르멘은 내가 되고 싶어 하는 나 자신이라고 하는 편이 더 가까울 것이다. 


 
그리고 카르멘이 틈새에 대해 말하는 것, 틈을 보이고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에 대해 말하는 것 역시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한 개념일 것이다. 자신의 틈새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 자신의 약하고 무섭고 혐오스런 부분까지 보여줄 수 있다는 것, 그럼으로써 자신을 깨뜨려줄 수 있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 바로 그것이 사랑의 신비가 아닐까. 

 



..





전에 올렸던 스타차일드 다른 이야기들 링크는 아래.


open up and bleed : http://tveye.tistory.com/7072
staying in the darkhttp://tveye.tistory.com/5413 
크리스마스 파편(데본 펠) : http://tveye.tistory.com/4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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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8. 10. 2. 00:04

about writing2018. 10. 2. 00:04





월요일이라 피곤해서 일찍 자려고 누웠는데 잠이 잘 안 들어서 예전에 쓴 글 일부 발췌해 본다. 전에 이 부분 포함한 문단을 따로 올렸던 적이 있다.



사진은 이번에 페테르부르크 갔을때 길바닥에서 발견해 찍은 깃털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그는 그저, 이상한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새 같았고 유령 같았고 천사 같았다. 어쩌면 바로 그래야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차이코프스키의 그 곡에 서려 있는 투명하고 슬픈 음률에는 어딘가 비인간적인 곳이 있었다. 마법에 걸린 백조 여왕 따위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환상에서 태어난 존재였다. 안개처럼. 그리고 그는 그렇게 췄다. 안개처럼, 환상처럼 몸을 놀렸다. 자식이 회전했다. 하지만 내가 청했던 정신 나간 푸에테, 다리를 채찍처럼 휘젓는 곡예는 아니었다. 아주 느리고 비현실적으로, 깃털이 부유하듯 돌았다. 온몸이 날개와 깃털과 공기, 그리고 그 자욱하고 달콤한 냄새로 이루어진 것처럼 돌았다. 그리고 음악이 끝나는 순간 자식이 나갔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스며들고 증발하는 기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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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이번 여행에선 두군데 숙소에 머물렀다.


두번째 숙소는 내가 여기서 가장 좋아하는 아스토리야 호텔인데 여기는 로비 카페가 아름다운 푸른색과 녹색, 편안한 소파, 로모노소프 찻잔, 맛있는 디저트 등 여러가지로 내 마음에 쏙 들어서 페테르부르크 올때마다 이 카페에 자주 온다. 딴데 묵어도 들르고, 묵을땐 거의 격일에 한번은 가서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거나 한번쯤 김릿을 마신다.




이 카페는 이렇게 피아노 연주를 해주는데 음악은 항상 같다. 올드팝, 이지 리스닝 팝 등등. 헤이 주드, 아이 저스트 콜드 투 세이 아이 러브 유, 플라이 미 투 더 문 등.. 몇년째 같다. 배경음악, 백색 소음에 충실하다.



이번에도 여기 카페에 자주 가서 차 마셨는데 내가 좋아하는 창가 자리는 피아노랑 가깝다. 피아니스트 뒷모습과 옆모습을 보곤 했다. 늘상 저렇게 연주복을 입은 채, 조금은 뻣뻣하고 조금은 심드렁한듯, 하지만 또 조금은 어색한듯, 그리고 ‘자 오늘도 똑같은 거 쳐야 하지만 그래도 해보자’ 하는 듯한 표정(이건 사실 내 상상임. 옆얼굴까지만 보여서 ㅋㅋ)으로 피아노 앞에 앉아 몇곡 치고. 잠깐 자리 비웠다 돌아와 다시 치고 등등..



이번에 이 연주자를 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몇년 전 쓴 글의 주요 인물이었던 트로이가 떠오르곤 했다. 트로이가 훨씬 키가 크고 머리색도 더 연하고 이따금 쓰는 안경도 훨씬 촌스러울테지만. 저 남자의 어깻짓이나 표정(그러니까 반쯤은 내가 상상한 표정), 늘상 같은 곡들을 연주하며 화려한 호텔 카페 한가운데에서 투명인간이나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인물. 어딘가 뻣뻣하면서도 살짝 부끄럼타는 듯한 느낌 때문에.



뭐 사실 다 내 상상이고 이미지다. 저분이 실제로 어떤지는 당연히 모른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여기 카페에 앉아 있을때마다 저 피아노 연주자를 보고 같은 곡들을 듣고 있자니 다시 글이 쓰고 싶고 트로이에 대해 쓰던 순간들과 그를 불러내던 과정들이 떠올라서 조금 행복했다.



...




아래는 그 글 초반부에서 트로이(본명은 안드레이 트로이츠키)에 대해 서술한 부분 일부이다. 실제로는 이 인물에 대한 구상노트였는데 그것들을 거의 그대로 소설에 옮겼기 때문에 과정이자 결과물이다.



전에 about writing 폴더에 이 부분 포함 조금 더 길게 발췌하고 그 과정에 대한 메모 남긴 적이 있다. 링크는 맨 아래. 근데 폰으로 올리고 있어서 링크가 제대로 안걸릴수도 있음.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다. 보통 그 정도로 키가 큰 사람들은 시선을 끌기 마련이지만 트로이츠키는 그렇지 않다. 아마 그의 별 특징 없는 머리색과 흐릿한 얼굴 윤곽, 언제나 앞으로 굽어 있는 어깨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197센티미터의 키에 언제나 뻣뻣하게 뒤엉키는 긴 팔다리를 늘어뜨린 나무인형 같은 사람이다. 새치가 드문드문 섞인 우중충하고 어두운 금발을 전형적인 문과 대학원생 스타일로 멋대가리 없이 짧게 깎은 데다 아무리 다림질을 해도 결국은 어딘가가 구겨지고 마는 셔츠와 소매가 접히는 재킷을 입고 다닌다. 구두 뒤축은 언제나 찌그러져 있고 바짓단에는 자주 진창 얼룩이 진다. 그는 구부정한 자세로 왼쪽 발을 살짝 끌면서 걷는다.



   
 부드러운 잿빛 눈의 뼈대가 굵고 조금 야윈 남자, 두세 명만 옆에 있어도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사람이다. 아마 당신은 네프스키 거리나 국립대학 앞 강변을 걷다가 안드레이 트로이츠키와 수십 차례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모임이나 파티에서 당신에게 그를 소개해준다면 생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인사를 한 후 돌아서자마자 그의 얼굴을 잊어버릴 것이다.




http://tveye.tistory.com/m/7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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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넘어가는 밤이면 항상 잠이 잘 안 온다. 예전엔 이런 시간이라면 글을 썼다. 최근 1~2년간은 제대로 글을 쓰지 못했다. 그래도 글을 쓴다는 건 내게 여전히 가장 좋아하는 일이고 가장 소중한 일이다. 그저 지금 잠시 멈춰 있는 것 뿐이다. 에너지를 되찾고 내부의 불을 다시 켜기 위해.




잠이 잘 안와서. 몇년 전에 쓴 단편 몇문단 발췌. 예전에 about writing 폴더에 이 단편의 전반부인 1/3 정도와 그외 토막토막을 올렸던 적이 있다. 제목은 밤. Night. Ночь. 지방 소도시 시립극장 오케스트라 바이올린 연주자인 로만 코즐로프의 1인칭으로 썼다. 발췌한 부분은 거의 맨 마지막.



.. 위의 사진 두 장은 전에 페테르부르크 산책하며 찍은 것이다. 글의 배경은 페테르부르크가 아니라 시골 소도시지만 뭐 어때.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나는 커튼을 젖히고 창 너머로 그 아이가 아파트 안뜰을 지나 무거운 정문을 밀고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해가 져서 이미 어둑어둑했다. 어딘가에서 까마귀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스름 속에서 그 아이는 더 이상 취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조금씩 휘청거리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지만 점차 시야에서 멀어지고 작아지자 그는 다시 새처럼 보였다. 유령처럼, 천사처럼. 그리고 안개처럼. 자식은 부드럽게 춤을 추며 걸었다.



미샤는 내게 주소를 묻지도 않았다. 곧장 좁은 도로를 따라 나가는 것을 보니 돌아가는 길을 잘 아는 것 같았다. 사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도. 하긴 헤매든 넘어지든 곧 자기 집을 찾아갈 수는 있을 것이다. 이곳은 레닌그라드가 아니라 촌동네고 검은 숲으로 들어가지만 않는다면 어느 길로 가든 30분 만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으니까.



잠시 후 그 아이는 내 눈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파란 잉크 같은 저녁 어둠만이 남았다. 극장 같은 어둠, 무대 불이 꺼진 후 깔려드는 소리 없고 부드러운 어둠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건 그 애의 눈에 차오르던 검은 불꽃같기도 했다.



...




이 단편 전반부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4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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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8. 6. 17. 04:08

새벽. 5년 전 노트 발췌 about writing2018. 6. 17. 04:08





낮잠 여파로 새벽 네시가 되도록 아직 잠 못 이루는 중. 예전에 글 한편 마무리하고 나서 썼던 후기 노트 맨 앞부분을 조금 발췌해 본다.



..



​​어떤 소설을 쓸 때 작가를 사로잡는 것은 주인공일 수도 있고 주제 의식일 수도 있고 때로는 문체나 구조적 실험, 혹은 폭발적인 결말에 대한 욕망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건 열망이다. 열망 없는 글쓰기는 불행한 타이핑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각 소설들은 일련의 정서와 결부되어 진행된다.



... 2013년 4월 ...




.. 그리고 이것은 여전히 나에게 중요한 문제이다. 적어도 새로운 세계를 축조한다는 것, 어떤 대가를 위한 노동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은 열망과 사랑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감정이 배제된 글쓰기는 타이핑이지 진짜 의미의 창작이 아니라고, 나는 여전히 믿는다. 이런 점에선 구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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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8. 3. 11. 21:25

The Repa, 지나간 겨울, 료샤 about writing2018. 3. 11. 21:25





마린스키 극장과 크류코프 운하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 The Repa.



오래전부터 마린스키 무용수들을 비롯해 극장 사람들이 많이 가던 곳인데 2년 전쯤인가 유명 체인에서 인수해 근사하게 새단장을 해 영업 중이다. 오픈 즈음엔 게르기예프도 갔었고 네트렙코도 갔다. 슈클랴로프님도 절친인 유리 스메칼로프 등과 함께 이따금 여기 들르는 모양이다.



여기는 옛날에도 무용수들이 오던 곳이라 창가에 앉아 잘 찾아보면 파루흐 루지마토프나 디아나 비슈뇨바 등의 이름도 적혀 있고 무용수들의 사인과 팬들의 글귀도 남아 있다. 그것들 찾는 재미가 있다. 비슈뇨바라는 이름의 디저트도 있다. 지난번에 갔을때 비슈뇨바 디저트 먹어보려 했는데 너무 배불러서 못 먹었다 (그러고보니 얼마 전 아스토리야 호텔 카페에서도 비슈뇨바란 이름의 디저트를 새로 내놓았다) 



나는 구독하는 페테르부르크 잡지에서 이곳의 재오픈 소식을 읽고 오픈한지 한달쯤 만에 료샤와 함께 갔었다. 이후 페테르부르크 가면 극장 갈때 한두번쯤은 꼭 들른다. 혼자 간 적도 한번 있긴 한데 주로 료샤랑 같이 갔다. 여기는 음식도 맛있고 인테리어도 화려하고 근사하다. 식기들도 너무 예뻐서 갖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든다. 이곳은 빵도 맛있고 가장 단순한 양배추수프마저도 무척 맛있어서 나는 여기 가면 항상 양배추수프를 주문한다. 료샤는 나보고 '에잇, 촌스럽구나! 양배추수프 아무데서나 먹을 수 있는 것을 이런 곳에서도 그걸 먹냐!'라고 하지만... 여기 양배추수프가 맛있단 말이야 ㅠㅠ



실내 조명이 어두워서, 플래시 안 터뜨리고 찍었더니 화질은 별로 좋지 않다만 사진 몇 장. 료샤랑 같이 가서 뭘 먹으면 사진 찍기가 쉽지 않아서 몇 장 없다. 






유명 디자이너 솜씨의 접시. 이 접시 엄청 이쁨.







이건 2016년 12월 겨울에 갔을 때이다. 겨울이면 해가 금방 져버린다. 저녁 7시 공연이라 5시 즈음 료샤랑 이른 저녁 먹으러 갔었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손님이 거의 없었다. 바깥은 이미 어두웠다. 점원이 초를 켜주었다. 일렁이는 촛불을 보고 있자니 료샤가 '야! 머리카락 탄다!' 하고 초를 쳤다. 






..



좋아하는 레스토랑이다. 혼자 가기는 살짝 그렇긴 한데(그래도 꿋꿋하게 혼자 간 적도 있지), 혹시 마린스키에 가신다면 시간이 나면 근처의 이곳에 한번 들러보시길. 예약하고 가시면 더 좋고... 공연 끝나고 늦은 시각에 간 적은 없어서 잘 모르겠다. 보통 극장 사람들이 뒷풀이 파티를 하곤 했던 것 같다. 가격대는 페테르부르크 음식점 물가를 비교해보면 저렴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비싸지도 않다.



이곳은 나에겐 좀 특별한 곳이다. 2016년 초여름에 처음 갔는데 이곳도 재오픈한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료샤가 나를 데려갔다. 그때 난 좀 많이 힘든 상태였다. 료샤는 극장과 발레를 좋아하는 나에게 기분전환을 시켜주고 싶어했다. 나는 여기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때 음식은 잘 먹지 못했다. 하지만 예쁜 접시와 화려한 백조와 빨간 드레스 카르멘 벽화들을 보며 행복해했다. 이곳에서도 그때 나는 모르스를 마셨다. 료샤는 나에게 한국에 돌아가지 말라고 다시 한번 말했다. 거의 부드럽게, 하지만 반쯤은 책망을 섞어서. 그는 '너는 그곳에서 행복하지 않아' 라고 말했다.



내가 말했다. '나는 거기서 행복하지 않지. 하지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돌아가지 않아도 해결되는 건 없어. '



료샤는 투덜거렸다. '돌아가도 해결되는 거 없어! 그 새끼들 나빠! 결국 너만 계속 힘들거야!' 



나도 알고 있었다. 뭐라고 말하기 힘들었다. 그냥 모르스를 마셨다. 양배추수프를 먹었다. 수프는 맛있었다. 따뜻하고 시큼하고 맛있었다. 



복직 일주일 전 다시 페테르부르크로 갔고 료샤와 함께 다시 이곳에 왔다. 사진은 그때 찍은 것들이다. 나는 다시 양배추수프를 먹었다. 생선요리와 무슨 샐러드도 먹었다. 수프는 여전히 맛있었다. 나는 아주 힘든 상태였다. 료샤는 나에게 '정말, 정말 돌아가?' 라고 물었다. 나는 '응' 이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나왔다. 나는 창틀에 휘갈겨진 루지마토프와 비슈뇨바의 이름들을 카메라로 찍었다. 극장은 주차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료샤는 그냥 차를 레스토랑 근처에 대어 놓았다. 우리는 같이 극장까지 걸어갔다. 추웠다. 축축한 바람이 불었다. 







우리는 마린스키에 가서 같이 공연을 보았다. 료샤는 발레고 뭐고 클래식이나 예술과는 담을 쌓았지만 나를 위해 극장에 몇번쯤 같이 가주는 친구이다. 료샤보다는 내가 마린스키에 훨씬 많이 드나들었다. 그래도 료샤는 소심한 나 대신 마린스키 샵의 아주머니에게 '그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인지 뭔지 하는 무용수 사진 있어요?' 라고 대신 물어봐주기도 하는 좋은 놈이다. 물론 사진을 고르는 내 옆에서 '타이즈 -_-' 하며 투덜거리기는 하지만.




...




이 레스토랑 사진을 올리고 그때 일을 떠올리니 문득 그날 밤 공연을 보고 나와 숙소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료샤가 물었던 말이 생각난다.



" 거기 음식 네 취향이야? 너는 거기가 뻬쩨르에서 제일 좋아? "


" The Repa? 아니, 음식은 고스찌나 수프 비노가 더 내 입맛에 맞아. 양배추수프 빼고. "


" 그럼 백조랑 빨간 드레스 여자 벽화 때문에? 너는 거기 인테리어가 뻬쩨르에서 제일 좋아? "


" 음, 무용을 다룬 인테리어라면 나는 아스토리야 카페 쪽이 더 좋아. "


" 근데 왜 너는 거기 가면 좀 다르지? "


" 어떻게 달라? "


" 몰라, 눈빛도 다르고 느낌도 달라. 많이 좋아하는 느낌이야. "


" 음, 거긴 루지마토프와 비슈뇨바 이름들이 적혀 있어. "


" 왕 유치하다! "

 


물론 나는 유치하다. 그래서 나는 도망쳤었고 또 돌아왔다. 일도 계속 하고 있다. 여전히 발레를 좋아한다. 이 나이에도 팬심에 불타올라 좋아하는 무용수 보러 다니고 꽃도 바치고 사인도 받고 평소보다 훨씬 엉망이 되어버리는 러시아어로 인사도 나눈다. 혼자서도 잘 논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솔직히 말하자면, 료슈카, 아마 나에게 The Repa는 너 때문에 특별했던 것 같아. 곁에 친구가 있어서 고마웠던 순간들이었으니까. 



나는 너에게 해외에서 손님이 오면 거기로 모시고 가서 대접을 하라고 했지. 그때 너는 '엑, 싫어! 여자같아! 오글거려! 막 드레스 입은 여자 그려져 있고 백조 그려져 있어! 나는 못가!' 라고 대답했어. '여자 손님 데려가면 되잖아!'라고 했을 때 너는 '그런 데는 너처럼 극장 좋아하고 타이즈 입은 남자들 좋아하는 바보나 같이 데려가는 데야!' 라고 말했지.



뭐 그건 그것대로 좋다. 여름에 다시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극장 좋아하고 타이즈 입은 남자들이나 좋아하는 바보는 The Repa에 다시 가고 싶다, 료샤랑. 




...




그 당시 이야기인데다 페테르부르크 음식점 얘기니까 2016 petersburg 폴더에 올렸었는데 한동안 쓰던 글과 연관이 조금 있는 것 같아 about writing 폴더로 옮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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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