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 야채 싫어하던 레냐, 그리고 그보다 먼저였던 릴렌카와 메밀죽 이야기 about writing2014. 7. 6. 23:31
지난번에 내 러시아 친구와 그의 어린 아들에 대한 얘기 중 야채 먹기 싫어하는 에피소드에 대해 fragments 폴더에 쓴 적이 있다. 비트 샐러드 먹기 싫어하는 레냐에 대한 얘기였다. 링크는 아래.
그때 철없는 아빠와 아들이 귀여워서 웃었는데, 돌아와서 생각해보다 재미있는 사실을 떠올렸다. 실은 작년 초에 마쳤던 소설에 비슷한 에피소드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레냐랑 비트 샐러드 먹으러 갔을 때보다 더 전에 쓴 거였다. 때로는 현실이 허구를 따라가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그건 내가 만들어낸 허구가 현실 속에서 일어날 법한 보편적인 상황을 끌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 부분 발췌해본다. 사실 그렇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그래도 필요한 부분이다. 그 장편은 꽤나 뒤틀린 구석이 있었지만 이 부분은 그렇지 않다.
배경은 1977년 봄. 소련 시절 레닌그라드. 등장인물들 이름이 생소하니 잠깐 소개하면
갈랴(여), 료카(남) : 부부. + 릴렌카(여) : 이들의 어린 딸
트로이(남) : 주인공
코스챠 : 주인공의 친구
.. 이고 이들은 대학 때부터 아주 절친한 사이로 지하 문학을 읽는 서클을 운영하기도 했고 이때도 주말에 모여 실컷 놀고 술 마신 후 갈랴네 집에서 잠들었음... 정도가 이 에피소드의 배경이다. 연령대는 대부분 20대 후반. 릴렌카는 만 세 살.
* 이 글을 무단전재, 발췌,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그날 그는 술에 취해 갈랴의 집 소파에서 잠들었다. 토요일 아침에 깨어났을 때 릴렌카가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두 손으로는 뭔가 회색빛의 걸쭉한 것이 가득 들어 있는 사발을 들고 있었다.
“ 술 냄새 나. ”
“ 미안. ”
“ 우리 아빠랑 틀려, 턱이 까끌까끌해. ”
“ 면도를 안 해서 그래. 너희 아빠는 부지런하구나. ”
“ 늦잠 안돼! 일찍 일어나야지! ”
숙취에 시달리며 세 살짜리 꼬마로부터 설교를 듣는 아침은 결코 상쾌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트로이는 비좁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릴렌카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가 구부러져 있던 팔과 다리를 길게 펴는 것을 지켜보았다.
“ 어떻게 하면 그렇게 쭉쭉 늘어나? ”
“ 어른이 되면. ”
“ 우리 아빠는 안 그러는데. ”
“ 콩나무 같은 어른이 되면. ”
“ 이거 먹어. ”
“ 그게 뭐야? ”
“ 이거는 어른이 먹는 거야. ”
그때 갈랴가 나타나 엄한 목소리로 딸을 불렀다.
“ 누가 삼촌한테 아침밥 떠넘기래! 빨리 식탁으로 돌아와! 다 먹기 전까지는 만화 못 볼 줄 알아. ”
릴렌카가 칭얼거리면서 그릇을 들고 부엌으로 갔다. 갈랴가 고개를 저으며 트로이에게 와서 오렌지 주스가 담긴 컵을 주었다.
“ 딴 애들은 새벽에 다 갔어? ”
“ 코스챠랑 너 빼고. 걔 지금 샤워하고 있어. ”
“ 릴렌카가 나한테 먹이려고 했던 게 뭐야? ”
“ 메밀죽. ”
“ 윽, 어린애한테 좀 맛있는 걸 먹일 수는 없어? 토요일 아침인데! ”
“ 료카랑 똑같은 소릴 하고 있네. 남자들이란 정말 왜 그러는 거야! 네 것도 있으니까 와서 한 그릇 먹어. 몸에 좋으니까. ”
“ 갈린카, 제발 봐줘. 숙취 때문에 죽겠는데 메밀죽까지 먹으라고 하는 건 고문이야. ”
“ 까다롭게 굴지 마. 미샤는 내가 주는 건 다 먹었는데. 우리 집에 오는 남자들 중 제일 착했지. 그립다. ”
“ 설마. 네가 만드는 음식은 전부 엄청 달잖아. 그걸 먹었을 리가 없어. ”
“ 무슨 소리야, 내가 주는 아침밥은 다 먹었어. 메밀죽도 얼마나 잘 먹었는데, 릴류슈카가 안 먹고 있으면 무릎에 앉혀 놓고 같이 먹었어. ”
샤워를 하고 나와 인간의 몰골을 되찾은 코스챠가 끼어들었다.
“ 그건 네가 여자라서 그랬던 거야. 미슈카는 여자들에겐 절대 기분상할 짓 안해. 나도 배워보고 싶었는데 잘 안되더라, 그 기사도 정신. ”
트로이는 그 화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스를 재빨리 마신 후 욕실로 갔다. 잠시 후 부엌으로 가보니 릴렌카가 엄마보다는 훨씬 만만한 아빠에게 떼를 쓰고 있었다.
“ 이제 다 먹었어. 만화 볼래. ”
“ 반이나 남았잖아. ”
“ 남은 거 아냐. 이거 삼촌 거야. ”
릴렌카가 금발 곱슬머리 사이로 파란 눈을 인형처럼 깜박이면서 간절하게 트로이를 쳐다보았기 때문에 그는 결국 마음이 약해져서 메밀죽이 반쯤 남아 있는 그릇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 알았다, 내가 먹어줄게. 가서 만화 봐. ”
릴렌카가 좋아하며 거실로 내닫자 료카가 한숨을 쉬었다.
“ 야, 빨리 긁어먹어. 갈랴한테는 비밀이야. ”
“ 아빠가 대신 먹어줘야 하는 거 아냐? 난 해장이 필요한데! ”
“ 난 메밀죽이 정말 싫단 말야. 토요일 아침마다 꼬박꼬박 한 그릇씩 먹고 있다고. 너 알잖아, 옛날에 우리 집단농장에 파종하러 갔을 때 자꾸 메밀죽만 줘서 내가 식사 거부하다가 자아 비판할 뻔한 거. ”
“ 아, 기억난다. 난 네가 화내는 거 그때 처음 봤어. 그것도 먹을 걸로. ”
“ 지금은 화내면 큰일 나. 갈랴가 주는 대로 안 먹으면 뼈도 못 추려. ”
“ 그러면서도 빨리 결혼하라고 날 들들 볶아? ”
“ 그래도 좋은 점이 훨씬 많으니까 그렇지. ”
갈랴가 들어오려는 기색이 보였기 때문에 트로이는 괴로워하면서 릴렌카가 남긴 메밀죽을 두어 숟갈 만에 억지로 입안에 모두 밀어 넣었다.
...
분명히 쓸 때는 레냐나 료샤에 대한 생각은 1%도 안 했지만... 어쩐지 지금 보니 릴렌카와 료카는 성별만 다를 뿐 걔들과 좀 닮았다. (심지어 료캬는 얘랑 이름마저 비슷하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어린아이들은 몸에 좋지만 맛없는 음식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자들이란 개별적인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어른이 돼도 어린애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나중에 다시 만나면 이 얘기 해줘야지 :)
예약 포스팅 올라가는 동안은 저를 개인적으로 아는 분들은 댓글 다실 때 비밀 댓글 체크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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