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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올린 1~2장에 이어 세번째.

 

(1장 : http://tveye.tistory.com/3390
2장 : http://tveye.tistory.com/3391)

 

부활절을 앞둔 토요일 밤. 일린의 집에 모인 극장 동료들과 라라, 아냐, 그리고 미샤가 부활절 케익과 과자를 먹고 달걀에 색칠을 한다.

 

서두에 언급되는 쿨리치는 러시아 정교의 부활절 케익, 그리고 파스하는 부활절에 먹는 과자이다. 글 끝나고 맨 아래에 이미지 몇 장 있음.

 


* 이 글을 무단으로 전재, 배포, 복제, 인용하거나 퍼가지 말아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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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wels

пасхальный рассказ

 

 

 

- 3 -

  

 

 

 

저녁은 정말 즐거웠다. 그날 밤은 오페라 공연이 올라가는 날이라 아빠와 절친한 발레단 동료들이 여러 명 왔다. 발레 교사인 마르가리타 아줌마와 이그나트 아저씨, 분장사인 알렉산드라 아줌마, 의상 담당자인 율렌카 언니도 왔다. 마르가리타 아줌마는 엄청나게 크고 멋진 부활절 쿨리치 케익을 만들어 왔고 알렉산드라 아줌마는 파스하 과자를 만들어 왔다. 그리고 율렌카와 이그나트 아저씨는 달걀을 잔뜩 삶아 왔다. 푸짐한 저녁을 먹은 후 다 같이 테이블에 둘러 앉아 달걀 장식을 했다.

 

사실 진짜 정교 신자는 별로 없었다. 마르가리타 아줌마만 독실한 신자였고 아빠와 나, 아냐는 셋 다 세례를 받긴 했지만 교회에 나가지는 않았다. 엄마는 학교에서 교회나 세례 얘기 하지 말라고 했다. 괜히 선생님들에게 책잡힐 짓을 하지 말라는 거였다. 그래서인지 엄마와 아빠랑 함께 살았을 때는 부활절 음식을 만들어 먹었던 기억도, 계란에 색칠을 하며 놀았던 기억도 없지만 그땐 나도 워낙 어렸으니 정확하지는 않다. 이렇게 부활절 전날 모여 같이 식사하고 계란 장식을 하기 시작한 건 2~3년 전부터였는데 정말 신나는 일이었다. 아빠의 친구들은 전부 재미있는 사람들이었고 나와 아냐를 아주 귀여워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미샤도 있어서 백배는 더 좋았다.

 

미샤는 한 번도 부활절 파티를 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쿨리치와 파스하는 먹어봤지만 그것도 학교 다닐 때 친구가 가져다 줘서 한 입 먹은 게 전부라고 했다. 부활절 계란도 장식해본 적이 없다는 거였다.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 레닌그라드에선 이런 거 안 해? 혁명 도시라 안 하나? ”

“ 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난 안 해봤어. ”

“ 하긴 너야 직접 안 해도 주변에서 여자들이 가져다 줬겠지. ”

 

이그나트 아저씨가 농담을 했다. 이미 마르가리타 아줌마와 알렉산드라 아줌마, 율렌카 세 명이 미샤를 둘러싸고 계속해서 쿨리치와 차를 권하고 있는데다 아냐는 그의 무릎에 앉아 장식하던 계란을 까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샤는 쿨리치를 딱 한 조각만 먹었기 때문에 모두의 공분을 샀다. 마르가리타 아줌마의 그 맛있는 쿨리치를 한 조각만 먹는다는 건 범죄라는 거였다. 모두 미샤가 원래 케익이나 초콜릿을 잘 먹지 않는데다 늦은 저녁에는 가능하면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짓궂은 이그나트 아저씨는 계속해서 놀려댔다.

 

“ 내가 너 같았으면 저 쿨리치 두 판은 해치웠을걸. 살찌는 체질도 아니면서 너무 엄격한 거 아냐? ”

“ 내 체질에 대해 뭘 안다고. ”

“ 내가 여태껏 봐온 무용수가 얼마나 많은데. 딱 보면 알아. 넌 웬만해서는 살 안 붙어. 은퇴해도 그럴걸. 스탄카랑 비슷한 타입이야. 그러니까 그냥 먹어. ”

스탄카가 얼마나 많이 먹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야. 차에도 설탕이 아니라 잼을 가득 넣어 먹는다고! 보통 사람이 저렇게 먹으면 풍선처럼 부풀걸! ”

“ 극과 극이라니까. 누구는 차에 잼을 풀어먹고 누구는 설탕 한 톨도 안 넣으니. 라루샤, 어느 쪽이 더 좋아? 차에 아무 것도 안 넣은 거 마실 수 있어? ”

 

난 물론 설탕을 탄 차를 좋아했지만 이그나트 아저씨가 미샤를 놀리는 게 싫었기 때문에 고개를 쳐들고 쌀쌀맞게 대꾸했다.

 

“ 당연하죠. 차에 설탕이랑 잼 넣는 건 아기들이나 하는 건데. ”

“ 저렇게 단칼에 자기 아빠를 배신하다니. 역시 딸자식은 키워봐야 소용이 없어. 아무리 예뻐해도 잘생긴 오빠가 나타나면 대번에 그쪽으로 가버린다니까. ”

“ 나 그런 거 아니야! ”

“ 뭐가 아니야, 라라는 미셴카랑 결혼하고 싶은 거 아니었어? ”

 

가슴이 철렁했는데 다행히 미샤가 귀퉁이를 부숴버린 달걀을 보여주면서 이그나트 아저씨의 입을 막았다.

 

“ 이거 어떻게 하지? 벌써 세 개째야. ”

“ 세 개째 먹었다고 하는 거라면 참 좋을 텐데. ”

“ 포기해, 이그나트. 쟤가 이 시간에 계란을 세 개나 먹으면 레닌이 관에서 벌떡 일어날 걸. 그건 그렇고 미샤는 정말 계란 장식 한 번도 안 해봤나봐. 그렇게 꽉 쥐니까 껍질이 부서져버리지. 이쪽으로 와서 라라한테 좀 배워. 우리 중에 라라가 제일 잘해. ”

 

내 옆에 있던 마르가리타 아줌마가 일어나더니 미샤와 자리를 바꿔 주었다. 미샤는 부서진 계란과 물감 묻힌 붓을 양손에 쥔 채 내 옆에 와서 앉았다. 아냐가 다시 달려가 냉큼 무릎에 앉으려는 걸 아빠가 저지했다.

 

“ 아네츠카, 그렇게 무릎에 앉아 있으니까 미샤가 계란 색칠을 못하잖아. 너도 이제 다 컸는데 얼마나 무겁겠어. ”

난 아냐가 앉아 있어도 괜찮은데. 계란 색칠은 원래 할 줄 모르는 거고. ”

“ 안 돼. 그게 어떤 다리인데, 저리거나 뭉치면 내가 죄책감이 들 거라고. ”

 

아냐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 미셴카, 나 무거워? 다리 저려? ”

“ 아니, 하나도 안 무거워. 괜찮아. ”

“ 오래 앉아 있으면 무거워질 거야. 이리 와, 아네츠카. 어쩌면 이렇게 계란을 예쁘게 칠했니. 아줌마한테도 이렇게 예쁘게 칠하는 거 가르쳐줘. ”

 

알렉산드라 아줌마가 아냐를 옆에 데려다 앉히며 살살 구슬렸다. 사실 알렉산드라 아줌마의 달걀이 최고였다. 분장사라 그런지 물감을 칠하고 반짝이 장식을 붙이는 솜씨가 대단했다. 그 사이에 미샤는 내가 장식한 달걀들을 구경했고 정말로 감탄했다.

 

“ 진짜 예쁘다. 이건 절대 못 먹겠는데. 이 빨간색은 물감 섞은 거야? ”

“ 응, 빨강이랑 이 분홍색이랑 흰색을 섞는 거야. 이렇게. ”

 

난 붓을 들고 계란에 덧칠을 하면서 시범을 보여 주었다. 미샤는 새 계란을 들고 따라서 해보았지만 또 껍질을 잘못 건드려서 귀퉁이를 부수고 말았다.

 

“ 그렇게 잡으면 안 돼. 살살 쥐어야지. 아니면 여기 이렇게 올려놓고 해. ”

“ 파트너들은 그렇게도 고이고이 잘 받쳐주면서 애꿎은 계란은 왜 이렇게 박살을 내는지 모르겠네. ”

 

율렌카마저 웃으면서 미샤를 놀렸다. 미샤는 다들 놀려대자 조금 부아가 치민 것 같았지만 꾹 참고 있었다. 제일 나이가 많은 알렉산드라 아줌마가 미샤를 감싸주었다.

 

“ 안 해봤으니까 그렇지. 얜 무신론자잖아. 교회는 가본 적도 없는 앤데 잘 하는 게 이상하지. ”

“ 아, 알렉산드라 필리포브나. 저 세례 받았어요. ”

“ 그건 또 금시초문인데. 정교 신자였어? ”

“ 아니, 그냥 세례만 받은 거야. 학교 다닐 때 아는 사람이 데려갔었어. 무신론자인 건 맞아. ”

“ 그럼 세례는 왜 받았담. ”

“ 나중에 친구가 애를 낳으면 대부가 될 수 있다고 해서. ”

“ 조그만 게 그런 생각을 다 했단 말야? 학교 다닐 때였다면서. 이 친구도 웃긴 구석이 있단 말야. ”

“ 그런가? 난 진짜 그럴 생각이었는데. 그래서 받은 거라고. 스탄카를 조금만 더 빨리 알았으면 좋았을 걸, 그럼 라라는 안 되더라도 아냐한테는 대부가 될 수 있었을 텐데. ”

“ 산수 좀 해봐라, 아네츠카 태어났을 때도 기껏해야 열너덧 살이었을 텐데 어떻게 대부가 됐겠어. ”

“ 아 그렇구나. 어쩐지 불공평한데. 속은 것 같아. 세례 무르고 싶어. ”

 

다들 웃었지만 난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미샤가 스물한 살이라서 다행이었다. 나이가 더 많았거나 내가 더 어렸다면, 그리고 미샤가 아빠와 더 일찍 친해졌으면 정말 나나 아냐의 대부가 됐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친척이 아니더라도 대부와 결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진짜 큰일 날 뻔 했다. 내 속도 모르고 마르가리타 아줌마는 미샤가 나랑 아냐의 대부가 됐으면 정말 좋았을 거라고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동안 미샤는 내가 계란을 칠하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붓질을 하다가 미샤의 시선이 느껴지자 그때부터 손이 잘 움직이지 않아서 몇 번이나 색을 잘못 칠하고 구슬을 비뚤어지게 붙여버렸다.

 

“ 아, 오빠가 그렇게 쳐다봐서 망했어. ”

“ 왜 망했다고 해? ”

“ 색도 다 삐져나오고 구슬도 비뚤어졌잖아. ”

“ 그래? 난 이게 제일 예쁜데? 이제 어떻게 하는지 좀 알 것 같아. ”

 

미샤는 계란을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아까 껍질을 부숴버린 계란이었다. 내가 깨끗한 새 계란을 건네주자 미샤가 고개를 저었다.

 

“ 아니, 난 이걸로 할래. 그건 또 깰 것 같아. ”

“ 그건 다 부서졌잖아. ”

“ 괜찮아, 연습하는 거야. ”

“ 깨진 건 내가 먹으면 되는데. ”

“ 라루츠카, 계란 더 먹으면 자다가 배탈 날 지도 몰라. ”

 

아빠가 부드럽게 경고했다. 괜찮다고 우기고 싶었지만 사실 아빠 말이 맞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새 계란에 이번에는 노란색과 초록색을 칠하기 시작했다. 계란 장식을 하면서 어른들은 극장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낮의 라 바야데르 얘기도 나왔다. 다들 미샤의 춤을 칭찬했다. 뉴욕에서 백조의 호수를 올려서 엄청난 환호를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그 양키들이 우리의 제대로 된 라 바야데르를 봤다면 기절했을 거라고 쿡쿡 웃었다. 율렌카는 뉴욕 리셉션과 대사관 파티에서 누구누구를 만났느냐고 물었다. 미샤는 내가 잘 모르는 미국 사람들 이름을 몇 개 댔고 다들 그 높은 사람들을 만났느냐고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난 뿌듯했다. 하긴 미샤는 브레즈네프 서기장을 만난 적도 여러 번 있었고 국회의원들과도 많이 알았다. 우리 아빠도 높은 의원님들 몇 명과 잘 아는 사이였지만 미샤만큼은 아니었다. 그렇게 유명하고 대단한 미샤가 우리 집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고 지금도 내 옆에 앉아 부활절 계란 장식을 하고 있다는 것이 갑자기 생소하고 놀랍게만 여겨졌다. 왕자님을 곁에 앉히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미샤는 알렉산드라 아줌마가 대사관 행사와 정치가들에 대해 더 물어보려고 했을 때 갑자기 휘파람을 불더니 테이블 위에 계란을 가볍게 내려놓았다.

 

“ 라라, 어떤지 봐줘. ”

“ 다 했어? ”

“ 응. ”

 

난 미샤의 달걀에 깜짝 놀랐다. 그런 부활절 달걀은 처음이었다. 원래 부활절 계란은 표면을 매끈하게 칠하고 무늬를 넣거나 장식을 붙이는 건데 미샤는 껍데기를 핀으로 찔러서 전체를 우툴두툴하게 만들었다. 아마 색칠을 하지 않았다면 그냥 껍데기가 부서져 금이 간 계란으로 보였을 테지만 미샤는 거기 멋진 그림을 그렸다. 이마에 보석을 달고 있는 금빛 머리의 천사였다. 계란이 작아서 얼굴과 어깨까지만 그렸고 날개도 없었지만 그래도 천사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깨지고 금간 껍질 덕에 그건 꼭 정교한 모자이크처럼 보였다. 스테인드글라스 같았다. 투명한 래커를 칠하면 더 그렇게 보일 것 같았다.

 

“ 우와, 미셴카. 이거 너무 예뻐. 이콘 같아. 나 주면 안 돼? ”

“ 맘에 들어? ”

“ 응, 진짜 좋아. 갖고 싶어. ”

“ 그럼 라라 가져. ”

 

난 뛸 듯이 기뻐서 계란을 조심스럽게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아빠와 이그나트 아저씨, 아줌마들에게 자랑했다. 졸고 있던 아냐가 계란을 보더니 미샤에게 자기도 그려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사실 내 동생은 계란이 예뻐서라기보다는 나만 미샤에게서 선물을 받은 게 샘이 나서 그런 거였지만 미샤는 아냐를 달래면서 지금 그려주겠다고 했다. 미샤가 아까 깨진 계란을 한 개 더 끌어당겨 나머지 껍데기에 금을 내는 동안 알렉산드라 아줌마가 이콘 그리는 걸 배웠느냐고 물었다.

 

“ 아니요, 배우지는 않았지만 레닌그라드에 친구가 있어요. 박물관에서 이콘을 복원해요. 옆에서 좀 봤어요. ”

 

난 이콘에는 관심도 없었고 그 전까지는 그 고리타분한 성화가 아름답다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미샤의 달걀은 무척 예뻤기 때문에 박물관에 가서 이콘을 자세히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냐는 이콘이 뭔지도 잘 모르면서 발을 동동 구르며 미샤를 재촉했다.

 

“ 나도, 나도 이콘. 나도 언니처럼 예쁜 계란. ”

“ 무신론자에 부활절 계란은 처음이라는 친구가 이렇게 근사한 걸 만들어 버리면 우린 어떻게 하라고. 나도 베껴봐야겠어. 아네츠카, 내가 만들어 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누구 게 더 예쁜지 말해줘. ”

 

이그나트 아저씨가 웃으면서 자기 계란도 핀으로 찔러 모자이크 무늬를 만들기 시작했다. 다들 맞장구쳤고 너도나도 계란 껍데기를 핀으로 가볍게 부쉈다. 나도 합류했는데 핀이 모자라서 손톱으로 금을 냈다. 모두 모자이크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에 가장 가까이 앉아 있던 율렌카가 달려갔다. 난 혹시라도 툴라에서 엄마가 전화했나 싶어 벌떡 일어났지만 그건 미샤에게 온 전화였다. 율렌카가 이름을 부르자 미샤가 손짓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잠시 후 율렌카가 자리로 돌아왔다.

 

“ 왜 없다고 하랬어? 여기 있는 거 아는 것 같던데. 다시 한대. ”

“ 그때도 난 없는 거야. ”

“ 누군데 그래? ”

 

미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율렌카가 대답했다.

 

“ 바실리예프. ”

“ 어느 바실리예프? 한둘이어야지. ”

“ 의원님 비서. ”

“ 아, 빌어먹을. 게르만 스비제르스키 비서 말야? ”

 

자기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어버린 이그나트 아저씨가 급하게 입을 막으며 나와 아냐 쪽을 보았다.

 

“ 미안, 욕하면 안 되는데. 아저씨가 잘못했으니 못 들은 걸로 해줘. ”

“ 또 욕하면 내쫓을 거야. ”

 

우리는 가만히 있었지만 아빠가 핀잔을 주었다. 아빠는 평소에는 아주 다정하고 상냥했지만 우리 앞에서 욕을 하는 것만은 용납하지 않았다. 이그나트 아저씨를 더 야단치는 대신 아빠는 미샤에게 시선을 돌렸다.

 

“ 너 오늘 다른 일정 있었어? ”

“ 아니, 없었어. ”

“ 그런데 왜 의원실에서 전화가 와? 또 마음대로 파티에 안 간 거야? ”

“ 그런 거 없었어. ”

“ 애들 앞에서 거짓말하지 마. ”

 

아빠의 눈빛이 엄격해졌다.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표정이었다. 미샤도 아빠가 그렇게 쳐다보면 꼼짝도 못 했다. 눈을 돌리면서 미샤가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정말이야. 그런 거 없었어. 아까 극장에서 나올 때 갑자기 전화 왔던 거야. 별 것도 아니고. 문화국 간부들이 저녁 먹는다고 거기 오라고 해서 선약 때문에 안 된다고 했어. 그것뿐이야. ”

“ 그래, 거기 오는 사람들이 누구였는데? 포노마레바? ”

“ 아마도. ”

“ 그 여자 국장이잖아... 바실리예프가 전화한 걸 보니 그쪽 사람들만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스비제르스키도 있는 거 아냐? ”

“ 몰라. 생각하기 싫어. 벌써 저녁 식사 시간도 다 지나갔는데. ”

“ 아까 얘기하지 그랬어. 잠깐이라도 얼굴 비추고 오는 게 나았을 텐데. ”

“ 싫어. 뉴욕에서도 실컷 팔려 다녔어. 이쪽이 천 배는 더 좋아. ”

 

아빠는 말없이 미샤를 잠깐 바라보았다. 잘못을 저지른 나와 아냐를 타이를 때와 눈빛이 똑같았다. 하지만 미샤는 고개를 돌려버렸고 아냐의 계란을 마저 색칠하기 시작했다. 이그나트 아저씨와 알렉산드라 아줌마가 아무리 우리 나라가 무신론 국가라 해도 부활절 전날은 가족이랑 친구들과 보내는 날이지 높은 분들과 밥 먹는 날이 아니라고 열띠게 미샤의 편을 들어 주었다.

 

잠시 후 우리는 모두 모자이크 달걀을 완성했다. 아냐에게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고 심사를 맡긴 후 다들 조마조마하게 결정을 기다렸다. 난 아냐가 제일 좋아하는 분홍색과 보라색, 초록색을 섞어 알록달록하게 칠한 계란을 두 개나 만들어서 제일 앞으로 밀어준 후 간절하게 말했다.

 

“ 아누슈카, 이거 봐. 진짜 예쁘지, 그치? 언니 계란이 제일 예쁘지? ”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는 게 마냥 즐겁기만 한 아냐는 내 계란을 들어서 굴려보더니 신나게 귀퉁이를 부숴서 껍데기를 까버렸다. 내가 동생의 배신에 속상해서 토라지자 다들 웃기 시작했지만 아냐는 다른 계란들도 모두 부수기 시작했다. 일곱 살짜리 여자애에게 모자이크 계란이란 우툴두툴한 껍질을 벗기고 싶어 어쩔 줄 모르게 만드는 장난감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아냐는 미샤가 준 달걀은 깨지 않았다. 배신감에 젖은 이그나트 아저씨가 아냐의 조그만 손을 잡고 하소연했다.

 

“ 아네츠카, 왜 이 계란은 가만 놔두는 거니? 아저씨가 그려준 계란보다 이게 더 예뻐서 그러니? ”

“ 안 돼, 이건. 미셴카가 준 거야. 언니랑 나랑 하나씩 가져야 돼. ”

 

아냐는 이그나트 아저씨가 혹시라도 계란을 뺏을까봐 소매 속으로 숨겼다. 미샤가 아냐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는 의기양양하게 웃자 이그나트 아저씨가 투덜댔다.

 

“ 이건 불공평해. 심사위원이 계란의 예술성이 아니라 참가자에 대한 사적 감정을 우선시했어. ”

“ 예술성은 무슨, 이건 그냥 껍질을 찌그러뜨려서 5분 만에 색칠한 달걀이라고. 그냥 소련 미술이야. 그러니까 아냐는 제대로 한 거야. 제일 먼저 눈에 띈 걸 고른 거지. ”

 

미샤가 고개를 쳐들며 노래하듯 말했다. 어른들 모두 웃었다. 때로 미샤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얘기를 하곤 했다.

 

그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율렌카가 일어나려고 했지만 아냐가 달려갔다. 아냐는 전화나 라디오라면 무조건 좋아했다. 수화기를 들자마자 ‘엄마!’ 하고 소리친 걸 보니 그 애도 엄마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외할머니와 온천에 가느라 우리를 까맣게 잊은 것 같았다. 아냐는 잠깐 수화기를 들고 있다가 눈이 동그래지더니 금세 울먹이면서 아빠를 찾았다. 아빠가 얼른 달려가 아냐를 안아주면서 누구냐고 물었다.

 

“ 몰라, 미셴카를 찾아. 모르는 아저씨야. 목소리가 무서워. 미셴카 없다고 했더니 거짓말하면 잡혀간대. ”

 

아빠가 아냐를 달래면서 전화를 바꿔달라고 했을 때 미샤가 일어나서 그쪽으로 갔다. 수화기를 든 채 돌아서서 잠시 통화를 했다. 목소리가 낮아서 무슨 말을 하는지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미샤가 전화를 끊더니 창가로 갔다. 바깥을 내려다보더니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깜짝 놀랐다. 미샤가 욕을 하는 것도, 그리고 그걸 듣고도 아빠가 화를 내지 않는 것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울고 있는 아냐를 마르가리타 아줌마의 품에 내려놓고 창가로 갔다. 나도 따라갔다.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아파트 현관 앞에 차가 한 대 서 있을 뿐이었다. 크고 위압감 넘치는 차였다. 양복을 차려입은 덩치 큰 아저씨가 차에서 내려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냥 느낌에 지나지 않았지만 우리 집 창문을 올려다보며 층수를 세는 것처럼 보였다.

 

미샤가 커튼을 휙 쳤다. 그리고는 아빠가 입을 열기 전에 내 쪽을 보면서 사과하듯 말했다.

 

“ 미안, 라라. 좀 나갔다 올게. ”

“ 어디? 조금만 있으면 잠잘 시간인데. ”

“ 미안해. ”

 

미샤는 내 곁을 지나 욕실로 갔다. 손에 묻은 달걀 껍질 부스러기와 물감 자국을 깨끗하게 씻어낸 후 재킷을 걸쳤다. 아냐를 안고 있던 마르가리타 아줌마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 옷도 갈아입고 가. 셔츠에 물감 튀었어. 높은 사람들이라며. 아까 선물 받은 거 있잖아, 그 수트 멋지던데. ”

“ 버렸어. ”

“ 버리다니! 팬들이 준 선물 버린 적 없잖아. ”

“ 팬들이 준 거 아냐. ”

 

미샤는 심기가 불편한 것 같았지만 아냐가 다시 울음보를 터뜨리며 무릎을 잡고 늘어지자 곰 인형을 안겨 주며 부드럽게 그 애를 달랬다.

 

“ 잠깐 나갔다 오는 거야, 체브라슈카랑 놀고 있어. ”

“ 나도 갈래, 또 나 자는 동안 언니만 극장 데려가려고! ”

 

극장에 갔던 걸 어떻게 알았나 싶어 가슴이 뜨끔했다. 아냐가 울고불고 난리를 치자 아빠가 그 애를 안고 침실로 들어갔다. 그 때 초인종이 울렸다. 알렉산드라 아줌마가 문을 열자 아까 차에서 내렸던 아저씨가 서 있었다. 양복 차림이었지만 허리에 뭔가 까만 걸 차고 있었다. 무전기 같았지만 그냥 지갑일지도 몰랐다. 덩치도 크고 무섭게 생긴 아저씨였지만 알렉산드라 아줌마에게는 인사를 했고 정중하게 물었다.

 

“ 미하일 세르게예비치가 여기 계신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

 

그 말을 듣는 순간 난 그 아저씨가 정말 싫어졌다. 미샤는 자기를 그런 식으로 부르는 것을 아주 싫어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라 아줌마가 대꾸하기 전에 미샤가 내 손을 한 번 쥐고 흔든 후 현관으로 갔다.

 

미샤가 그 꼴 보기 싫은 아저씨와 나간 후 이그나트 아저씨가 한숨을 쉬며 투덜댔다.

 

“ 지나치게 유명한 것도 독이라니까. 뉴욕에서 돌아온지 얼마나 됐다고 이 시간에 차까지 보내서 애를 불러내나. 마리야 얘기론 거기서도 계속 여기저기 끌려 다녔다던데. 연습 시간도 두 시간 밖에 안 줬다더라고. 뉴욕 가서도 하루도 안돼서 무대에 올려놓고 좀 너무한 거 아냐? ”

“ 외교 행사로 가면 원래 좀 그래. 미국이니까 더 심했겠지. 쟨 많이 다녀봐서 익숙하긴 할 거야. ”

 

그때 아냐를 재우는 데 성공한 아빠가 나왔고 우리는 남은 계란들을 마저 장식했다. 쿨리치도 조금 더 먹었다. 이그나트 아저씨가 오리와 토끼에 대한 재미있는 노래를 가르쳐주었고 율렌카가 발레리나들이 쓰는 예쁜 머리띠를 줬지만 미샤가 없어서 그런지 아까처럼 흥이 나지 않았다. 율렌카가 머리띠를 씌워주고 귀엽다며 사진을 찍어주었지만 마음속으로는 미샤가 썼던 깃털 터번이 더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란 장식을 다 한 후 어른들은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눴고 난 소파에 앉아 앨리스 그림책을 보다가 꾸벅꾸벅 졸았다. 그러다 갑자기 아빠가 내 허리에 팔을 넣고 안아 올렸기 때문에 깜짝 놀라 깼다.

 

“ 라라, 침대에 가서 자야지. 이러다 감기 걸린다. ”

“ 나 안 잤어. ”

“ 자야지. 아저씨랑 아줌마들도 다 갔어. ”

가다니? 미샤가 금방 돌아온다고 했는데. 그렇게 다 가버리면 어떻게 해. ”

“ 벌써 열두 시가 다 됐어. 잠잘 시간 한참 지났잖아. ”

“ 안 돼. 다 가버렸다면서. 미샤가 집에 왔는데 아무도 없고 다 자고 있으면 섭섭할 거야. ”

“ 미샤는 오늘 못 올 거야. 그러니까 그만 자자. ”

“ 아니야, 온다고 했어. 미샤는 나한테 거짓말 안 해. ”

 

그래도 아빠가 자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난 결국 울고 말았다. 아냐처럼 굴고 싶지는 않았지만 너무 서운하고 속상했다. 엄마였다면 호통을 치고 혼냈겠지만 아빠는 손수건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면서 가만히 달랬다.

 

“ 라루샤, 계속 울 거야? ”

“ 아빠가 억지로 자라고 하니까 그렇지. ”

“ 지금 많이 졸리잖아. 이렇게 늦게까지 안 자고 있으면 감기 걸려. 다음 주말에 미샤랑 다차에 가려고 했는데 너 감기 걸리면 아냐만 데려가야 할지도 몰라. ”

“ 안 돼, 나도 데려가. ”

“ 그러니까 가서 자자. ”

“ 잘 거야. 미샤 오는 것만 보고. 나 그냥 가만히 앉아서 책 보고 있을게. 미샤 오면 문만 열어주고 금방 잘 거야. 진짜야. ”

“ 라라야, 미샤는 오늘 못 올 거야. ”

“ 왜? 온다고 했는데. ”

“ 아까 차 타고 갔잖아. 혼자서는 못 와. 차로 데려다 줘야 하는데 그 사람들도 밤에는 자야 하잖아. 그러니까 내일 아침에 올 거야. 자고 일어나면 와 있을 테니까 그만 자는 게 좋겠어. ”

 

아빠 말이 맞긴 했다. 결국 난 아빠 손을 잡고 침실로 가서 아냐 옆에 누웠다. 하지만 아빠가 이마에 키스를 해 주고 불을 껐을 때 아직도 미련이 가시지 않아 훌쩍거리면서 투정을 부렸다.

 

“ 아빠가 차로 데리고 오면 될 텐데. 아니면 미셴카가 자기 차로 갔으면 좋았을 걸. ”

“ 미샤는 운전하는 거 싫어하잖아. 운전도 얼마나 못하는데. 이렇게 캄캄한데 잘못하면 사고 나. ”

“ 그럼 그냥 있으라고 해. ”

“ 그래, 착하지. 이제 자. ”

 

그래서 난 아냐의 손을 꼭 잡고 일단 자기로 했다. 하지만 미샤가 돌아오면 금방 나갈 수 있도록 방문은 열어 두었다. 미샤는 밤에 오면 우리가 깰까봐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아빠가 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오곤 했다. 캄캄하면 미샤가 발을 헛디딜 수도 있으니까 아빠에게 거실 램프를 켜놓으라고 했다. 물론 아빠는 내 말대로 해주었다. 안심하고 난 곧 잠들었다.

 

 

*   *   *

 

 

새벽에 난 벨 소리를 듣고 깼다. 초인종 소리인 줄 알고 잠결에 정신없이 침대에서 내려오다 굴러 떨어질 뻔 했다. 하지만 그건 전화벨 소리였다. 간신히 잠에서 조금 깬 후 창밖을 보았다. 아직 어두컴컴했다. 혹시 미샤가 왔나 싶어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왔는데 아빠가 옷을 입고 있었다.

 

“ 아빠 뭐해? ”

“ 왜 일어났니? 아직 아침 안됐는데. 가서 더 자렴. ”

“ 미셴카 왔어? ”

“ 아니. ”

“ 왜 옷 입어? ”

“ 아빠 잠깐 나갔다 올게, 얼른 자. ”

어디 가는데? 이렇게 캄캄한데 나랑 아냐만 놔두고 어디 가? 나도 갈래. ”

“ 안 돼. ”

 

그때 아빠의 목소리가 너무 단호했기 때문에 난 더 이상 떼를 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빠는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렇게나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램프에 비친 얼굴이 하얗게 굳어져 있었다. 아빠 표정이 너무 좋지 않아서 더럭 겁이 났다.

 

“ 아빠 왜 그래? 어디 아파? ”

“ 아니야. 아빠 지금 빨리 나가야 해. 금방 올 테니까 자고 있어. ”

 

아빠는 급하게 현관으로 뛰어나가려다 내가 너무 놀라서 눈물을 꾹 참으며 서 있는 걸 보고 어깨를 토닥이며 조금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 괜찮아, 라라. 미샤를 데리러 가는 거야. 아빠 보고 데려오라 했잖아. ”

“ 밤에는 못 온다면서. ”

“ 응, 그래서 아빠가 데리러 가는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자고 있어. ”

“ 그럼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

“ 밖에 추워서 안 돼. 아빠 지금 갈게. 안 그러면 미샤가 많이 기다려야 할 거야. ”

“ 그럼 빨리 다녀와. ”

 

아빠가 입 맞춰주는 것도 잊고 나가 버려서 좀 서운했지만 미샤가 빨리 올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잠이 좀 깼기 때문에 침실로 돌아가는 대신 소파에 앉아 앨리스 그림책을 다시 뒤적이며 아빠가 미샤를 데려오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왜 그렇게 늦게 가는지 이해가 안 갔다. 미샤와 함께 있을 때는 너무 금방 가서 아쉬웠는데.

 

책을 세 번이나 본 후에는 미샤가 만들어준 이콘 달걀을 가지고 놀았다. 아냐에게 만들어준 계란도 의자 아래에서 찾아냈다. 아냐 건 이콘이 아니라 하얀 백조와 빨간 꽃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도 굉장히 예뻤다. 둘 다 갖고 싶었지만 아냐를 놔두고 공연 보러 갔던 게 생각나서 계란을 동생의 과자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버텼지만 아빠와 미샤는 오지 않았고 결국 난 너무 졸려서 도로 아냐 곁으로 파고 들어가 잠들어 버렸다.

 

 

*   *   *

 

 

아빠는 아침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미샤도 마찬가지였다. 집은 텅 비어 있었고 색색으로 장식한 계란들만 가득했다. 간밤에 노느라 평소의 일요일보다 훨씬 늦게 일어났기 때문에 우리가 자는 동안 아빠가 벌써 왔다가 나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아빠는 극장에서 일했기 때문에 친구들 부모님과는 달리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도 나갈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미샤도 그랬고. 역시 안 자고 버텼어야 했는데...

 

잠시 후 아냐가 일어났다. 눈을 비비면서 제일 처음 한 말은 역시 미셴카가 왔느냐는 거였다. 그 다음에는 아빠를 찾았고 둘 다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또 울음보를 터뜨리려고 했다. 살살 달래서 식탁으로 데려갔다. 잔소리하는 엄마가 없으니까 아침에 케익을 먹자고 구슬리자 아냐는 금방 좋아했다.

 

우리는 단둘이 앉아 삶은 달걀과 쿨리치를 먹었다. 아냐는 우유를 마셨지만 난 차를 끓였다. 미샤처럼 설탕도 안 넣고 잼도 곁들이지 않고 마셔보았다. 하지만 너무 씁쓸하고 맛이 없어서 미샤가 어떻게 이런 차를 매일 마실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용수가 되는 건 너무 힘든 것 같다는 생각이 또 들었다.

 

쿨리치를 먹으면서 아냐는 어제 공연에 대해 물었다. 이미 다 들통났기 때문에 숨기는 것도 미안해져서 동생이 물어보는 대로 대답해 주었다. 미샤에게서 받은 초콜릿을 전부 꺼내 아냐에게 주었다. 아냐는 초콜릿 한 입, 우유 한 모금, 쿨리치 한 입을 번갈아 먹으면서 한결 기분이 좋아졌는지 방글방글 웃었고 미샤가 왕자님을 췄는지, 공주님과 결혼했는지 열심히 물었다.

 

“ 왕자님은 아니지만 귀족으로 나왔어. 막 호랑이도 잡아오고 코끼리 등에도 타고 그래! ”

“ 우와, 호랑이랑 코끼리 나와? ”

“ 호랑이는 가죽만 나오고, 이렇게 큰 코끼리 등에 예쁜 안장을 깔고 거기 미셴카가 타고 나와! ”

“ 진짜 코끼리? ”

“ 진짠 줄 알았는데 아빠가 아니래. 근데 진짜 코끼리 같아. ”

“ 미셴카가 코끼리 타고 와서 공주님이랑 결혼해? ”

“ 응. 근데 공주님이 못됐어. 좋은 공주님 아니야. ”

 

공주님이 솔로르의 사랑을 받는 무희를 질투해 죽인다는 얘길 해주자 아냐는 깜짝 놀랐지만 곧 공주 편을 들기 시작했다. 어린 아냐는 공주님이 나쁜 사람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긴 나도 지젤 남자 주인공을 이해하지 못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냐는 명쾌하게 결론을 내렸다.

 

“ 나도 공주님 될 거야. 그래서 미셴카랑 결혼해야지. ”

 

안 그래도 차고 넘치는 발레리나와 팬들도 모자라 나보다 훨씬 귀엽게 생긴 동생까지 라이벌이 된다는 생각에 깜짝 놀라서 난 급하게 말했다.

 

“ 에이, 안되지. 넌 아기잖아. 미셴카는 스무 살도 넘었는데. ”

“ 내가 스무 살 돼서 미셴카랑 동갑 되면 결혼할래. ”

“ 너 아빠랑 결혼한댔잖아. 아빠한테 이를 거야. ”

“ 안 돼! 아빠한테 말하지 마. 아빠랑도 결혼할 건데. ”

 

아냐는 울상이 되어 잠깐 고민하더니 또 명쾌한 답을 내놨다.

 

“ 월 수 금은 아빠랑 결혼하고 화 목 토는 미셴카랑 결혼해야지. ”

“ 그럼 일요일은? ”

“ 일요일엔 바냐랑 결혼할 거야. ”

 

좋은 생각이었다. 솔로르가 그런 생각을 했다면 굳이 니키야가 죽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지만 또 곰곰 생각하니 아냐와 나눠서 미샤와 결혼하는 것도 싫었다. 아무리 내 동생이지만 질투날 것 같았다.

 

쿨리치를 두 조각 째 먹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나보다도 아냐가 먼저 뛰어나갔지만 아빠가 아니라 마르가리타 아줌마였다. 아줌마는 우리가 아침 못 먹고 있을까봐 왔다면서 보자기를 풀어 생선 수프가 가득 담긴 냄비와 샌드위치 접시를 꺼냈다. 그리고는 우리 식탁을 보고 기절초풍했다.

 

“ 너희 아침부터 케익 먹었니? 초콜릿까지! ”

“ 이거 아줌마가 만든 거잖아요, 너무 맛있어서 또 먹은 거예요. ”

“ 그래도 애들이 아침에 밥을 먹어야지... ”

“ 밥이 없었는걸요. 아빠도 없고. ”

“ 하긴 그랬겠네. 너희 아빠도 워낙 정신이 없어서... 좀 전에야 나한테 전화했더라. 빨리 알았으면 아까 왔을 텐데. 둘 다 배고팠겠구나. ”

“ 우리 아빠 어디 있어요? ”

“ 아빠가 말 안 해줬어? ”

“ 몰라요. 새벽에 나갔어요. 미셴카 데리러 간댔는데 아침에 안 왔어요. 전화도 안 해주고. 우리 아빠 봤어요? 극장 갔어요? 미셴카랑? ”

“ 아니, 스탄카는 병원에 있어. 극장에는 오후에나 갈 거야. ”

“ 병원? 아빠 아파요? ”

 

난 깜짝 놀라서 수프 그릇을 엎을 뻔 했다. 갑자기 새벽에 봤던 아빠의 창백한 얼굴이 떠올랐다. 마르가리타 아줌마는 그릇을 똑바로 놔주면서 나와 아냐에게 아빠는 하나도 아프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럼 왜 병원에 있느냐고 캐묻자 아줌마는 미샤가 조금 아파서 아빠가 돌봐주러 갔다는 거였다. 미샤는 간밤까지 멀쩡했는데 어디가 아파서 새벽에 아빠가 그렇게 급하게 나간 거냐고 물었지만 아줌마도 잘 모른다고 했다. 아마 뉴욕 다녀온 여독 때문에 피곤해서 몸살이라도 났나보다고 했다. 낮의 무대에서 그렇게 날아다녔는데 몸살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갑자기 미샤의 등과 어깨에 번져 있던 피멍이 떠올랐다.

 

난 급하게 의자에서 내려가서 옷을 입었다. 아줌마가 미샤는 금방 괜찮아질 테니까 가만히 앉아서 아침 먹으라고 달랬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미샤는 평소에 몸이 아파도 약도 안 먹고 병원에도 가지 않았다. 그래서 아빠가 종종 야단치곤 했다. 그런 사람이 병원에 있다니 진짜 많이 아픈 게 분명했다.

 

아줌마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아빠였다. 난 아줌마에게서 수화기를 빼앗았고 울음이 나오는 걸 꾹 참으며 아빠에게 어느 병원이냐고 물었다. 아빠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 미샤가 많이 아픈 거냐고 묻자 아줌마랑 똑같은 대답을 했다.

 

“ 아니야, 조금 아픈 거야. 이제 괜찮아. ”

“ 나 병원에 갈래. ”

“ 안 와도 돼, 그냥 아냐랑 있어. 아빠가 조금 있다 집에 갈게. ”

“ 미샤가 아프다며. 아픈 사람은 옆에서 돌봐줘야 돼. 나 잘해. 전에 엄마가 아플 때도 간호해 줬어. 주스도 갖다 주고 안마도 해 줬어. 미셴카도 안마해 줘야 돼, 어제도 세료쟈 아저씨가 해 줬잖아. 어깨랑 등에 멍이 엄청 많았어. 나 같으면 울었을 거야. ”

“ 그래, 라루츠카는 간호를 잘 하지. 아빠도 알아. 근데 오늘은 안 오는 게 좋겠어. ”

“ 왜? 미샤가 그렇게 많이 아픈 거야? 아니면 다 나았어? 좀 있다 아빠랑 같이 올 거야? ”

“ 아니, 그렇게 많이 아픈 건 아닌데 그래도 조금은 여기 있어야 돼. ”

“ 내가 가면 왜 안 되는데? ”

“ 미샤는 아픈 걸 보여주는 게 부끄러운가봐. ”

“ 왜? ”

“ 남자들은 원래 그래. ”

“ 아빠한테는 괜찮아? ”

“ 아빠한테도 별로 안 보여주고 싶대. 그래서 아빠도 금방 갈 거야. ”

“ 아빠도 그래? 아프면 부끄러워? ”

“ 아니, 아빠는 안 그래. ”

“ 그럼 남자라서 그런 게 아니네. ”

“ 응, 라라 말이 맞네. 아닌가보다. ”

“ 난 알아. 미셴카는 왕자님이라서 그래. 왕자님들은 아픈 거 티 안 내. 그래야 공주님도 구해주고 신하들에게도 위엄 있게 보일 수 있어. ”

 

아빠는 잠시 아무 말도 안 했다. 병원 복도인지 수화기 너머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미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싶어 귀를 바짝 갖다 댔지만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가 뒤섞여 윙윙거릴 뿐이었다. 마침내 아빠가 입을 열었다. 내 말이 맞다면서 아냐와 함께 조금만 놀고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마르가리타 아줌마를 바꿔달라고 했다.

 

마르가리타 아줌마는 한참 동안 수화기에 귀를 대고 있었다. 그러다 달력을 힐끗 쳐다보며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 수요일이 로미오와 줄리엣인데 올라갈 수 있을까? 안될 것 같으면 지금 노비코프에게 얘기해야 돼. 그래야 대역 준비 시키지. 그 날 서기국 의원들 공연 보러 온다고 했는데 좀 걱정이네. ”

 

아빠가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줌마는 한숨을 쉬더니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우리를 식탁에 똑바로 앉혀놓고 생선 수프를 다 먹는지 안 먹는지 감시했다. 난 미샤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아빠의 말이 생각나서 입을 다물었다. 미샤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가 아픈 것에 대해 얘기하는 것도 싫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저녁이 다 되어서야 들어왔다. 잠을 설쳤는지 피곤해 보였다.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나와 아냐에게 하루 종일 집을 비워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커다란 오렌지를 두 개나 가져다 줬다. 키오스크에서 파는 조그맣고 껍질이 우툴두툴하고 시들어빠진 오렌지가 아니라 진짜 크고 동그랗고 매끈한 오렌지였다. 아냐는 그 자리에서 단숨에 오렌지를 해치웠다.

 

“ 라루샤는 안 먹니? 간식 많이 먹었어? ”

“ 안 먹을래. ”

“ 굉장히 달던데. 아빠가 까줄 테니까 조금만 먹어봐. ”

“ 싫어. 그냥 놔둘 거야. ”

“ 아빠가 늦게 와서 토라진 거야? ”

“ 아니야. 놔뒀다가 미샤 오면 같이 먹을 거야. 미샤는 오렌지 좋아해. 초콜릿보다 오렌지가 더 좋댔어. ”

 

아빠는 웃었고 나에게 착하다고 칭찬했다. 그러면서 오렌지는 미샤가 우리 먹으라고 준 거니까 다 먹어도 된다고 했다. 그 말에 좀 안심이 되었기 때문에 용기를 내어 미샤가 어떤지 물어보았다. 마르가리타 아줌마가 공연 걱정하던데 못 올라가는 거냐고도 물었다.

 

“ 내일까지만 쉬면 될 테니까 걱정하지 마. 공연도 올라갈 거야. ”

“ 그치만 전에 내가 감기 걸렸을 땐 일주일이나 학교 안 갔는걸. 선생님도 더 쉬라고 했었어. ”

“ 미샤는 어른이잖아. ”

“ 아니야, 어른은 아빠랑 이그나트 아저씨랑 마르가리타 아줌마 같은 사람들이야. 미샤는 오빠야. ”

“ 이그나트랑 미샤는 네 살밖에 차이 안 나는데 너무하네. 이그나트가 삐치겠는데. ”

“ 이그나트 아저씨는 수염 있잖아! ”

“ 수염이 없어야 오빠인 거야? ”

“ 응. 그리고 잘생겨야 돼. ”

“ 라루샤가 이그나트를 두 번 죽이는구나. ”

 

아빠는 소리 내어 웃더니 오렌지를 까주었다. 오렌지는 정말 맛있었다. 미샤가 준 거라서 더 그럴지도 몰랐다. 그래도 여전히 난 초콜릿이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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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4장으로 이어진다. 그건 내일..

 

러시아 정교 신자들은 부활절이 되면 쿨리치라는 케익과 파스하라는 과자를 굽는다. 쿨리치는 동그란 케익, 파스하는 사다리꼴 모양의 과자이다. 파스하에는 보통 XB라는 글자를 새기는데 이것은 '그리스도 부활하셨네' 라는 문장의 약자이다. 이미지 몇 장... 좀 작지만..

 

 

 

일반적인 쿨리치는 이렇게 생겼다. 촌스럽지만.. 원래 러시아 음식 모양새가 좀 촌스럽다. 그게 매력임^^; 아래에 이콘 그림이 그려진 부활절 달걀들이 늘어서 있다. 이건 시판용 달걀.

 

 

쿨리치~

마트료슈카와 달걀과 함께. 보통 집에서 색칠하는 달걀은 붉은색을 비롯해 저렇게 알록달록 칠한다.

 

 

 

전통적으로는 부활절 달걀은 붉은색으로 칠한다.

 

 

 

파스하 과자. 왼편엔 XB, 정면엔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파스하 과자 사진 몇 개 더.

 

 

 

쿨리치와 파스하, 색칠 달걀 함께.

 

 

 

 

 

러시아 정교 부활절 달걀 사진 몇 개.. 이 달걀에도 그리스도 부활하셨네 라고 적혀 있음.

 

 

 

 

 

모양은 촌스럽지만 맛있는 쿨리치와 파스하 과자.. 그런데 한 조각밖에 안 먹는 미샤.. 이것은 정신 승리 ㅠㅠ

 

 

 

 

:
Posted by liontamer

 

앞서 올린 첫번째 챕터(http://tveye.tistory.com/3390) 에 이어 두번째.

 

* 이 글을 무단으로 전재, 배포, 복제, 인용하거나 퍼가지 말아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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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wels

пасхальный рассказ

 

 

 

 

- 2 -

 

 

 

그건 부활절을 앞둔 주말이었다. 엄마는 목요일에 툴라의 외할머니 댁에 가면서 나와 아냐를 아빠에게 맡겼다. 좋은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뉴욕 공연에서 막 돌아온 미샤가 금요일 저녁에는 스케줄이 없다면서 아르바트에 새로 생긴 그루지야 레스토랑에 우리를 데려갔다. 나와 아냐는 맛있는 음식을 정신없이 먹으면서도 끊임없이 미샤에게 뉴욕 얘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아빠는 미샤가 아직 시차 적응도 안 됐고 하루 종일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다음날 공연 리허설을 했으니 좀 기다리라고 우리를 달랬지만 미샤는 먹는 것보다 우리와 얘기하는 게 더 좋다고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미샤는 뉴욕 관광 같은 건 하나도 못했다. 자유의 여신상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도 전부 못 가고 사흘 내내 극장과 리셉션 파티장과 호텔, 대사관 행사장만 돌았다면서 아쉬워했다. 아빠가 미샤의 접시에 음식을 얹어주면서 의아하게 물었다.

 

“ 마리야는 대사관엔 안 갔다던데. 어쩌다 거기까지 끌려갔어? ”

“ 스비제르스키가 자선 파티를 열었어. 백악관 관계자들을 불렀다나. 마리야는 행운이었지, 커튼 콜 때 무릎을 삐끗해서 호텔에 누워 있었거든. 안 그랬으면 같이 갔을 거야. 나도 그랬으면 좋았을 걸, 보드카나 들이부었으면 안 가도 됐을 텐데. ”

“ 그런 건 그냥 일이라고 생각하라고 했잖아. 농담이라도 그런 생각은 하지 마. 보드카 같은 소리. 한 모금만 마셔도 정신 못 차리는 주제에. ”

“ 어차피 내 방 미니바에는 물하고 우유 밖에 없었어. 알콜은 하나도 없더라고. 원래 그런 줄 알았는데 나중에 마리야 방에 갔더니 냉장고에 듣도 보도 못한 술병들이 가득 차 있었어. ”

“ 너 술 못 마시는 거 알고 미국인들이 신경써준 건가? ”

“ 아니. 크라베츠가 손쓴 거야. 대사관 가기 전에 불러서 엄포를 놓더라고. 거기 가서도 샴페인이고 와인이고 손도 대지 말라고. ”

“ 왜? 스비제르스키도 아니고 크라베츠가? 그렇게 자상한 인간은 아닐 텐데. 극장에 대해선 관심도 없고. 백조랑 호두까기 구분도 못할걸. ”

“ 글쎄. 그 대단하신 정치가들 속셈을 어떻게 알겠어. 아마 백악관 양키들 앞에서 볼쇼이 무용수가 취해 흐느적거리는 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그랬겠지. ”

 

아빠가 미샤의 접시를 포크로 탁 때렸다. 미샤는 나와 아냐 쪽을 힐끗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우리 앞에서 술 얘기도 모자라 양키 운운하는 단어를 써서 그런 것 같았다. 잠시 미샤는 말없이 가만히 있다가 생각난 듯 가방을 열더니 나와 아냐에게 선물을 주었다. 아냐는 굉장히 귀여운 곰 인형을 받자 꺅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애는 곰 인형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아냐가 인형을 안고 노래를 부르며 좋아하는 동안 미샤가 내게 크고 멋진 책을 한 권 주었다. 입체 그림책이었다. 근사한 그림들이 스프링처럼 튀어나와 좍 펼쳐졌다. 귀여운 여자애랑 토끼도 있고 도마뱀도 있고 과자와 티포트, 심지어 트럼프들도 있었다. 그렇게 호화스럽고 예쁜 책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너무 정신이 팔려서 아냐도 나도 고맙다는 인사조차 안 한 것 같았다. 미샤는 개의치 않았다. 우리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그날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시차 때문에 피곤해서 그런지 내내 얼굴에 그늘이 져 있었는데 그렇게 웃는 걸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았다. 마침내 나는 그림에서 시선을 돌려 동화책의 내용을 읽어보려고 했다. 그리고 꼬불꼬불하고 생소한 글자들을 발견했다.

 

“ 이게 뭐야? 영어야? ”

“ 응. 뉴욕 서점에서 샀더니 우리말로 된 게 없었어. ”

“ 난 영어 모르는데. 아빠는 알아? ”

“ 아빠는 조금밖에 몰라. 미샤가 알 거야. 읽어달라고 해봐. ”

 

그러자 미샤가 책을 읽어주었다. 그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였다. 맨 처음에 미샤는 우리말로 번역해서 읽어주었지만 나도 아냐도 생전 처음 보는 영어 그림책이 신기해서 영어로 읽어달라고 졸라댔다. 미샤는 아무도 우리 쪽을 보지 않는 것을 확인하더니 한 페이지씩 영어로 읽은 후 우리말로 번역해 가며 끝까지 책을 읽어주었다. 내용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어쨌든 그림책이었기 때문이다. 나와 아냐는 완전히 홀려서 꼼짝도 하지 않고 이야기를 들었다. 그 화려하고 아름다운 입체 그림보다도 책의 내용이 더 재미있었다. 어쩌면 미샤가 읽어줬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미샤는 목소리도 좋았지만 연기도 잘했기 때문이다. 발레 무대에서야 대사가 없으니 그럴 기회가 없었지만 이따금 푸시킨 동화책이나 시를 읽어줄 때면 진짜 훌륭했다. 나는 아직도 미샤가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읽어주는 걸 몰래 녹음했던 테이프를 간직하고 있다. 하도 많이 들어서 절반쯤은 완전히 늘어져버렸지만. 그 앨리스 얘기도 붉은 여왕이 목을 치라고 무시무시한 명령을 내리는 장면을 읽어줄 땐 소름이 오싹할 정도였다. 아빠조차도 휘파람을 불었다.

 

“ 미셴카, 그렇게 무서운 붉은 여왕은 태어나서 처음이야! 붉은 여왕이 아니라 이반 뇌제 아냐? ”

“ 너무한데, 나름대로 여자 목소리 내보려고 노력했다고. ”

“ 여왕 목소리 같았어! 진짜야! ”

 

아냐와 난 열띠게 편을 들어주면서 빨리 다음 장을 읽어달라고 아우성쳤다. 마침내 미샤가 책을 끝까지 다 읽어줬을 때 우리는 너무 아쉬워서 눈물을 흘릴 뻔 했다.

 

우리는 미샤가 평소처럼 아빠의 집으로 같이 가서 놀다가 자고 갈 거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그가 극장으로 돌아간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아냐는 엉엉 울었다. 미샤는 아냐를 안아주면서 부드럽게 달랬다. 언니가 된다는 건 참 불공평했다. 나도 아냐처럼 어렸다면, 아니, 동생이었다면 저렇게 막무가내로 울 수 있었을 텐데. 그럼 미샤가 저렇게 번쩍 안아줬을 텐데.

 

아빠는 아냐에게 미샤가 내일 낮에 무대에 올라가야 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대신 저녁에 우리 집에 올 거고 같이 부활절 계란에 색칠을 하며 놀 거라고 했다. 우리는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연신 진짜냐고 물었고 미샤는 정말 올 거라고 약속했다. 안심한 아냐가 곰 인형을 다시 안고 깜박 잠들었을 때 미샤는 아빠에게 날 공연에 데리고 오라고 했다. 아빠는 잠깐 고민하는 눈치였다.

 

“ 그거 봐도 될까? ”

“ 왜, 지젤도 봤는데. 비슷하잖아. ”

“ 얘가 지젤을 보다니, 언제? 나스챠가 못 보게 했는데. ”

“ 작년에 키로프에서 내가 데려갔었어. ”

 

미샤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아빠는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내 쪽을 보면서 앞으로 이런 일은 아빠에게도 알려줘야 한다고 했다. 미샤와 둘이 비밀을 만들면 아빠가 속상할 거라고 했다. 어쩐지 큰 잘못을 한 것 같아서 울기 직전이었지만 미샤가 편을 들어주었다.

 

“ 애들이라고 못 보는 게 어디 있어. 우리도 열 살 때 발레학교 들어갔잖아. 그때부터 극장 무대에도 올라갔는데. ”

“ 그건 호두까기나 엄지동자 같은 거였지. 라 바야데르는 아니잖아. ”

“ 난 그거 일곱 살 때 봤다고. 라라 나이 땐 키로프 레퍼토리는 전부 다 꿰고 다녔어. ”

“ 아, 누가 말렸겠어. 어마어마한 말썽꾸러기였겠지. 안 봐도 뻔해. 밤마다 기숙사 창문을 넘었겠지. ”

 

아빠는 웃더니 날 데리고 낮 공연에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미샤에게 연습실에 오래 있지 말고 빨리 들어가 자라고 했다.

 

 

*   *   *

 

 

토요일 낮에 아빠는 약속대로 날 극장에 데려가 주었다. 아냐가 친구 생일 파티에 가서 다행이었다. 만약 나 혼자 미샤의 공연을 보러 간다는 걸 알았다면 하루 종일 울고불고 난리를 쳤을 것이다.

 

낮 공연이었는데도 좌석은 매진이었다. 아빠의 손을 잡고 위층 카페에 올라가다 꽃다발을 든 여자들이 안내원 할머니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는 할머니도 있었지만 인사를 할 수도 없었다. 주스를 마시면서 아빠에게 이유를 물어보았다.

 

“ 미샤 팬들이야. 꽃은 안내원들에게 맡겨야 되는데 자꾸 가지고 들어가려고 해서 그래. ”

“ 그 언니들은 극장에 안 와봐서 그런 거야? 가지고 들어가도 소용없잖아. 무대에 올라가서 줄 수도 없는데. ”

“ 오케스트라 핏 앞으로 와서 무대로 꽃을 던지는 여자들이 있어. ”

“ 우와, 거기까지 꽃을 던지려면 팔 힘이 세야겠네. 나도 해보고 싶어! ”

“ 라루샤, 그러면 안 되지. ”

“ 왜? 나도 미샤한테 꽃 주고 싶어. 무대로 못 올라가더라도 커튼 콜 때 얼굴 보면서 주고 싶단 말이야. ”

“ 연주자들 머리 위로 꽃이 떨어지잖아. 무례한 행동이야. 극장에서 그렇게 행동하면 안 돼.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중간에 미샤가 추고 나면 그 자리에서 꽃을 던지거든. 그건 무용수한테도 결례야. ”

“ 왜? 나 같으면 기분 좋을 텐데. 잘했다고 칭찬해주는 거잖아. ”

“ 발레는 나 혼자만 잘하고 칭찬받는다고 되는 게 아니야. 남자가 추고 나면 발레리나가 이어서 또 추잖아. 파트너에 대한 결례야. 그리고 바닥에 꽃이 떨어져 있으면 밟고 미끄러질 수도 있어서 위험해. 키로프에 있을 때도 그래서 미샤가 꽃을 다 줍고 들어가야 했어. ”

 

난 아빠의 말을 이해하긴 했지만 그래도 무대로 곧장 꽃을 던지는 게 굉장히 낭만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날 미샤가 춘 건 라 바야데르의 솔로르였다. 그 공연을 보았을 때에야 난 미샤가 지젤에 대해 했던 말을 이해했다.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며 무대의 배역은 누가 언제 어떻게 추느냐에 따라 언제나 다르다고.

 

라 바야데르는 여러 모로 지젤과 비슷했다. 사랑을 약속한 무희를 공주님과 약혼한다고 버려서 죽게 만드는 남자 주인공이 나왔다. 하지만 이쪽은 좀 더 무시무시해서 여주인공 니키야가 공주님과 칼부림을 하며 사랑싸움을 하고 급기야 꽃바구니에 숨겨진 뱀에 물려 죽어버렸다. 그런데도 남자 주인공 솔로르는 니키야를 구해주지도 않고 그녀가 보는 앞에서 공주님 손을 잡고 사랑을 속삭이기까지 했다. 마음 한 구석으로는 진짜 나쁜 놈이란 생각이 들었고 화가 나야 당연할 것 같았는데 놀랍게도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나중에 친구들은 내가 솔로르를 본 게 아니라 내내 미샤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 거라고 했지만 그건 그렇지가 않았다. 그 세 시간짜리 공연 내내 난 무대 위에서 날아오르고 춤을 추고 때로는 사랑을 속삭이고 때로는 괴롭게 몸부림치는 솔로르를 보고 있었다. 그게 미샤라는 생각은 커튼 콜 전까지는 전혀 들지 않았다. 깃털 달린 터번과 보석처럼 빛나는 구슬이 박힌 아름다운 의상을 입고 무대를 오가는 그 솔로르는 지그프리드 왕자님은 아니었지만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심지어 연적을 없애려고 했던 공주님의 심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상 속에서 온통 새하얀 유령들에게 휩싸여 사랑하던 여자의 영혼 앞에서 무릎을 꿇는 그 솔로르라면 용서해주고 싶었다.

 

이후 몇 년 동안 나는 다른 무용수가 솔로르를 춘 라 바야데르를 꽤 여러 번 보았다. 하지만 미샤의 그 공연만큼 날 사로잡았던 솔로르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공주의 살인을 정당화해주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솔로르, 그리고 어떻게든 용서해주고 싶은 솔로르도 다시는 보지 못했다.

 

공연을 마치고 무용수들이 인사를 하러 나왔을 때 결국 안내원 몰래 꽃을 반입하는 데 성공한 열성 팬들이 달려 나와 오케스트라 핏 너머로 꽃다발을 내던지고 정신없이 미샤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과 환성과 갈채를 보냈다. 놀랍게도 꽃다발들은 전혀 연주자들 머리 위로 떨어지지 않았고 꽃잎이 흩날리지도 않았다. 나중에 백스테이지에 가서 미샤를 만났을 때 그 이유를 알았다. 꽃다발들 아래쪽에 예쁜 리본이나 스카프로 묶인 묵직한 상자가 달려 있었다. 상자 무게 덕에 휙 날아간 것 같았다. 상자 안의 내용물들은 각양각색이었는데 미샤는 힐끗 보더니 초콜릿 상자를 찾아내 내게 주었다. 까만 레이스 리본이 달린 화려한 상자를 보고 궁금해서 만져보려는데 아빠가 내 손을 잡아당기며 경고하는 말투로 이름을 불렀다.

 

“ 라라. ”

“ 잘못했어. 너무 예뻐서 궁금해서 그런 거야. 미셴카, 열어보면 안 돼? ”

“ 돼. 열어봐. ”

“ 아니, 라라는 안 보는 게 좋겠어. 그 초콜릿 먹고 잠깐 나가 있자. 미샤는 옷도 갈아입어야 하잖아. ”

“ 이럴 때면 영락없는 아저씨라니까. 늙고 있어, 스탄카. 보지 말라고 하면 더 보고 싶다는 걸 벌써 잊다니. ”

 

미샤가 악의 없는 태도로 아빠를 놀렸다. 둘은 말을 놓는 사이이긴 했지만 아빠는 미샤보다 열네 살이나 나이가 많았다. 미샤에게 아저씨 소리를 들은 아빠는 한숨을 쉬었지만 결국 내가 상자를 열도록 내버려 두었다. 뚜껑을 연 순간 난 아빠 말을 들을 걸 하고 후회했다. 안이 다 비치는 얇고 까만 레이스로 그물처럼 엮여 있는 엄청나게 야한 여자 속옷이 굴러 나왔기 때문이다. 너무 놀라서 난 상자를 떨어뜨렸고 아빠 뒤로 달려가 화끈 달아오른 얼굴을 감췄다. 아빠는 날 야단치는 대신 웃어버렸지만 잠시 후 미샤를 꾸짖었다.

 

“ 애한테 이런 거 보여주지 마. ”

“ 뭐가 어때서. 이상하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거지. 라루츠카, 1막이랑 2막에서 니키야가 입었던 의상 생각 안나? 그거랑 비슷한 거야. ”

 

그 말에 용기를 얻은 난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져서 그 예쁘고 야한 속옷을 집어 올려 샅샅이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 근데 왜 이런 걸 주는 거야? 이건 여자 거잖아. 입을 수도 없는데. ”

“ 나야 당연히 못 입지. 그래도 가끔 이런 선물을 주는 사람들이 있어. ”

“ 왜? ”

“ 자기가 입은 걸 보여주고 싶지만 그게 어려우니까 옷만 주는 거야. ”

“ 오빠랑 결혼하고 싶어서? 그 공주님처럼? ”

“ 글쎄. 그건 잘 모르겠어. ”

“ 저런 거 선물해주는 여자들 하나하나랑 다 결혼하려면 참 힘들겠네. 자, 라루샤. 나가 있자. 그래야 미샤가 빨리 갈아입고 나올 수 있지. 분장도 지워야 하잖아. ”

사진 한 장만 찍으면 안 돼? 나쟈랑 비카가 꼭 미샤랑 찍은 사진 보여 달랬어. 분장하고 의상 입은 걸로... 지금까지 입었던 것 중에 이 옷이 제일 예쁘단 말이야. ”

“ 아, 라라는 푸른색을 좋아하는구나. 해적에서 입은 옷도 좋다고 했잖아. 이리 와, 같이 찍어. 스탄카가 찍어줄 거야. ”

“ 파란 옷도 예쁘지만 그 팔찌랑, 허리띠랑 깃털 터번이랑... 전부 예뻐. 진짜 보석 같아. ”

 

그러자 미샤가 팔찌를 풀어 내 손목에 채워 주었다. 내겐 너무 커서 두 번 돌려야 했다. 물론 그건 진짜 보석이 아니라 예쁜 구슬과 섬세하게 세공된 테두리가 달린 장신구였지만 그래도 난 너무 흥분해서 기절할 뻔 했다. 미샤는 터번도 풀어주려고 했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그 새하얀 깃털과 보석 구슬 박힌 터번을 두르고 있는 미샤가 너무 근사했기 때문이다. 미샤는 뒤에서 내 허리를 잡고 살짝 발레리나 같은 포즈를 취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난 있는 힘껏 발끝으로 서서 버텼지만 아빠가 셔터를 누르고 나자 헉헉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리가 부러지는 것 같았다. 엄마 아빠가 둘 다 무용수였는데 난 왜 이렇게 뻣뻣한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미샤는 배운 적이 없어서 그런 거지 이만하면 꽤 유연하다고 칭찬해 주었다.

 

사진을 찍은 후 아빠는 내 손목에서 팔찌를 풀었다. 극장에 반납해야 하기 때문에 안 된다고 했다. 너무 갖고 싶었지만 무대 의상과 장신구에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나오려고 했을 때 세료쟈 아저씨가 들어와 미샤에게 마사지를 해 주었다. 무용수들은 공연 후에 가끔 마사지를 받는 편이었으므로 별다른 일은 아니었지만 아빠는 얼굴을 찌푸렸다.

 

“ 어깨는 다 나은 줄 알았는데. 무대에서도 티 안 났는데 다시 아픈가? ”

“ 미셴카 어깨 아파? ”

“ 아니야, 내려가자. 너 초콜릿 자꾸 먹으면 저녁 못 먹는다. ”

 

걱정이 되어 문을 닫으면서 안을 다시 들여다보다 미샤가 상의를 벗는 것을 발견하고 부끄러워져서 딸꾹질이 나왔다. 장식이 많이 달려 있어서 그런지 세료쟈 아저씨가 벗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다가 미샤의 어깨와 등 위쪽에 피멍이 여러 개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굉장히 아팠을 것 같았다. 처음으로 무용수는 너무 힘든 직업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발레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엄마가 반대했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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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3장의 부활절 파티로 이어진다. (http://tveye.tistory.com/3393)

물론 소련 시절에야 러시아 정교는 탄압을 받았고 교회들은 폐쇄되었지만 정교 신자들은 많이 남아 있었고 부활절 달걀이나 과자 만드는 풍습도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 얘기는 내일..

 

라 바야데르와 솔로르에 대한 이야기들은 dance 폴더에서 라 바야데르로 검색하면 여러 동영상과 리뷰, 사진 등을 볼 수 있다. 그래도 아쉬우니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의 솔로르 사진 한 장. 전에 올렸었지만..

 

 

 

 한 장으로는 아쉬우니.. 코끼리 타고 등장하시는 슈클랴로프 솔로르 사진 한 컷 더 :0

 

** 미샤가 키로프에서 췄던 라 바야데르에 대한 얘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2195

 

** 미샤와 라라 자매, 일린이 아르바트의 그루지야 식당에서 밥을 먹는 장면이 있어서..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 풍경 사진들 : http://tveye.tistory.com/3398

 

 

:
Posted by liontamer

 

이 단편은 작년 4월에서 5월 초에 쓴 것으로 일종의 부활절 기념 픽션이었다. 구조적으로는 내가 몇 년 동안 손대고 있는 레닌그라드 우주의 주인공인 미샤의 연대기에 속해 있다. 원래 쓰려던 글을 시작하기 전에 머리도 정리하고 싶었고 마침 부활절 시즌이었기 때문에 좀 가벼운 느낌으로 쓴 소품이다. 화자도 열 살짜리 소녀이고 1인칭으로 서술되기 때문에 더 그렇다.

 

배경은 1977년 4월, 소련 모스크바이다. 내 주인공 미샤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레닌그라드를 배경으로 전개되고 지금 쓰는 글은 가상의 지방 소도시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모스크바를 배경으로 쓴 글은 이 단편이 유일하다. 이 시리즈에서 미샤는 레닌그라드 발레학교를 졸업하고 키로프 극장에 들어가 스타가 되고 또 안무가로도 활동하게 되는데, 화려한 커리어를 이어가던 도중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게 1977년이다. 그가 볼쇼이로 옮겨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재작년 초에 완성한 장편에서 다룬 적이 있다(미샤의 친구인 트로이가 심리적 화자로 등장하는 그 장편이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가상의 인물들이다. 미샤를 제외한 주요 인물로는 화자인 라라, 그리고 라라의 아빠이자 볼쇼이 극장 안무가이며 미샤의 절친한 친구인 스타니슬라프 일린이 있다. 라라는 가끔 라루샤, 라루츠카 등의 애칭으로 불린다. 미샤는 일린을 스탄카라고 부른다. 미셴카 역시 미샤의 애칭이다. (러시아 이름은 이게 복잡.. ㅠㅠ)

 

그 외에 라라의 여동생인 일곱살짜리 아냐, 라라의 엄마이자 일린의 전처인 나스챠, 그리고 일린의 극장 동료들이 등장한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에벨리나 크리셴스카야 역시 볼쇼이 무용수이다.

 

일린과 라라에 대한 이야기는 전에 한번 발췌한 적이 있다. 수용소에 수감된 미샤를 면회하러 간 일린의 이야기였는데 그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221

 

단편 제목은 발란신의 모던 발레인 Jewels 에서 따왔다. 그냥 '보석'이라고 할까 했는데 복수형의 s를 번역하기도 그렇고 리듬감도 참 껄끄럽다. 그래서 그냥 영어로 붙여놨다. 사실은 노어인 'Драгоценности'라고 붙이고 싶었지만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제목..^^;

 

단편은 총 5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여기에도 5토막으로 끊어서 올려본다. 오늘은 이야기가 좀 이어지는 1~2를 먼저 올려본다. 1~2에는 발레 작품 얘기도 좀 나온다.

 

어쨌든 열 살짜리 여자애의 시점으로 글을 전개하는 건 오랜만이라 재미있었다. 특히 짝사랑에 빠진 어린 여자애라서 더 그랬던 것 같다.

 

* 이 글을 무단으로 전재, 배포, 복제, 인용하거나 퍼가지 말아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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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wels

пасхальный расска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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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강을 따라 걸으며 보석을 찾아내는 게 얼마나 쉬운지 아는가? 그런 일을 하기에는 밤이 좋지만 미샤는 낮도 상관없다고 했다. 아니, 낮이 더 좋다고 했다. 물론 그건 레닌그라드 얘기다. 그 동네는 이곳보다 훨씬 춥고 음습하지만 대신 소위 백야라는 게 있고 여름날 한낮의 빛살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밝고 투명하니까 미샤의 말이 맞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엄마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엄마는 미샤를 싫어했고 레닌그라드 출신이라 쓸데없이 자존심이 센데다 콤소몰에도 안 나가는 문제 있는 성격이라고 헐뜯곤 했지만 사실 우리 엄마는 아빠와 친한 사람들이라면 모두 미워했으므로 그리 신빙성은 없었다.

 

엄마의 의견이란 내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아빠도 좋아했고 아빠가 일하는 근사하고 화려한 극장도, 그리고 아빠의 친구들도 모두 좋아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미샤를 제일 좋아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미샤에게는 완전히 반해 있었지만 물론 엄마 아빠에게는 비밀로 하고 있었다.

 

친구들은 내게 바보 같다고 했다. 엄마야 미샤를 워낙 싫어하니 그렇다 치지만 아빠는 매일같이 극장에서 미샤와 함께 일하는데다 집에서 같이 지내는 경우도 많았고 무엇보다도 아빠는 항상 내 편이니까 솔직하게 얘길 해야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걔들은 뭘 모른다. 아빠에게는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 법이다. 우리 아빠가 날 얼마나 사랑하고 예뻐하는데, 정작 귀여운 딸이 벌써부터 아빠가 아닌 다른 남자에게 푹 빠져 있다는 걸 알면 상처받을 게 뻔하다. 그리고 이것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당연한 거 아닌가? 겨우 열 살짜리 소녀라 해도 첫사랑은 첫사랑이다. 친구들에게는 얘기할 수 있지만 가족에게는 절대 말할 수 없는 비밀인 것이다.

 

그건 1977년 봄이었다. 내게는 최고의 해였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건 변함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든다. 1월에 미샤가 볼쇼이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맨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난 너무 좋아서 기절할 뻔 했고 잠시 후에는 걱정이 되어 아빠를 붙잡고 늘어졌다.

 

“ 근데 거기서 어떻게 와? 공연 있을 때마다 비행기 타야 하는 거야? 기차로는 열 시간이나 걸리잖아. 작년에도 비행기 타러 간다고 빨리 가버려서 인사도 못 했는데. ”

“ 작년처럼 게스트로 공연 오는 게 아니라 아예 볼쇼이로 옮겨오는 거야. 적어도 일 년은 여기서 살 거야. ”

 

아빠는 미샤가 모스크바로 이사 올 거라고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내가 미샤를 만날 때마다 귀가 닳도록 모스크바 자랑을 한 게 드디어 효과를 본 것 같았다. 미샤는 내게 트레치야코프 미술관과 아르바트 거리는 좋지만 그래도 레닌그라드를 떠날 생각은 없다고 했었다. 오히려 나한테 아빠랑 같이 레닌그라드로 이사 오라고 했다. 그리고는 날 데리고 다니며 레닌그라드 구석구석을 구경시켜 주었다. 운하를 누비는 작은 보트도 태워 주었고 분수가 나오는 궁전에도 데려갔다. 분수 궁전은 정말 끝내줬다. 게다가 사자 분수 앞에서 미샤가 사준 아이스크림은 더 끝내줬다. 하마터면 넘어갈 뻔 했지만 마침 소나기가 쏟아진 덕에 꿋꿋하게 계속 우길 수 있었다.

 

“ 그래도 모스크바가 더 좋아. 훨씬 크고 날씨도 더 좋아. 여기는 비가 너무 자주 와. 어제도 보트 타다 비 맞고. ”

“ 6월 되면 여기 날씨가 더 좋을 거야. 백야도 있는데. ”

“ 그러면 미셴카가 모스크바에 살면서 백야에만 여기 와 있으면 되잖아. ”

“ 그럼 공연 있을 때마다 열 시간씩 기차 타고 와야 하잖아. 연습은 어떻게 하고. ”

“ 키로프가 모스크바에 있었으면 좋겠어. 그럼 다 해결될 텐데. ”

“ 라루츠카, 레닌그라드는 싫어? ”

“ 별로야. ”

“ 날씨가 안 좋아서? ”

“ 모스크바는 빌딩도 더 크고 가게도 더 많고 나무도 훨씬 많아. ”

“ 여긴 천사도 많고 분수도 많은데, 운하도 있고 에르미타주도 있고. ”

“ 우리도 있어, 트레치야코프랑 푸시킨 미술관. ”

“ 여긴 새벽이면 다리도 반으로 갈라지는걸. 불빛이 반짝반짝하고 그 아래로 큰 배도 지나가. 곧장 바다로 나가고. ”

 

지금 같았으면 지형적 차이로 생겨난 조건을 내세우는 건 불공평하다고 항의했겠지만 그땐 어렸고 다리가 갈라지는 건 정말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난 곧 납득해버렸다. 그래서 집에 돌아온 후 다리가 갈라지고 배가 바다로 나가는 레닌그라드로 이사 가자고 졸라대서 엄마에게 눈물 쏙 빠지게 혼났다. 엄마는 어린애한테 공연히 바람을 넣었다고 미샤와 아빠를 싸잡아서 욕했다. 그때는 정말 짐을 싸서 아빠에게 가버릴까 했는데 전화를 했더니 아빠가 6월이면 모스크바로 돌아올 거라고 달래서 그만두었다.

 

아빠가 모스크바로 돌아와서 행복했다. 물론 엄마도 사랑하고 새아빠도 나름대로 자상하게 잘 대해주긴 하지만 그래도 난 어릴 때부터 항상 아빠가 제일 좋았다. 엄마와 아빠가 이혼했을 때 난 다섯 살이었지만 그래도 뭔가 잘못됐다는 건 이해했다. 그리고 여덟 살쯤 됐을 때는 그때 아무도 내게 누구와 살고 싶으냐고 묻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가 났다. 아냐는 나보다 세 살이나 어렸으므로 그렇다 치고, 적어도 내게 물었다면 난 아빠를 골랐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항상 엄격했고 규칙을 강조했으며 거의 매일같이 야단을 쳤지만 아빠는 웬만하면 화를 내지 않았다. 내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눈을 보며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리고 엄마와는 달리 날 극장에 데리고 갔다. 엄마도 한때는 발레리나였고 지금은 공연 잡지사에서 비서로 일했지만 웬만해서는 나나 아냐를 극장에 가지 못하게 했다. 그것 때문에 아빠와도 가끔 다퉜다. 우리가 너무 어려서 교육에 좋지 않다는 거였다.

 

심지어 엄마는 발레 공연을 보는 것도 탐탁찮게 생각했다. 아빠는 아냐에 대해서는 동의했지만 나는 이미 충분히 컸으니 괜찮다고 했다. 결국 아빠는 엄마와 타협을 했다. 발레 공연의 경우 반드시 아빠나 마르가리타 아줌마가 데리고 갈 것. 연습실에는 절대 데려가지 말 것. 엄마는 그것도 모자라 내가 갈 수 있는 공연 리스트를 만들어서 아빠에게 건네주었다. 맨 처음엔 호두까기 인형, 코펠리아, 잠자는 미녀 세 개 뿐이었다. 난 울면서 어떻게 백조의 호수도 없고 지젤도 없느냐고 난리를 쳤고 아빠는 며칠 동안 엄마를 설득한 끝에 백조의 호수와 곱사등이 망아지를 추가하는데 성공했다. 난 백조의 호수가 되면 해적과 지젤도 돼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졌지만 엄마는 그걸 보기엔 내가 너무 어리다고 딱 잘라 말했다.

 

내가 해적과 지젤을 본 건 아빠를 보러 처음 레닌그라드에 갔던 아홉 살 때였다. 그때 아빠는 키로프 극장의 초청을 받아 레닌그라드에서 신작을 안무하고 있었다. 사실 그 공연들을 보여준 건 아빠가 아니라 미샤였다. 내가 겨우 다섯 개 뿐인 리스트를 들먹이며 억울함을 호소하자 미샤는 진지하게 들어주었고 엄마가 그걸 못 보게 한 이유에 대해서도 말해주었다.

 

“ 지젤은 남자 주인공이 여자를 배신해서 그래. 착한 사람이 아니라서. ”

“ 주인공이 악당이란 말이야? ”

“ 음, 꼭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자기 생각만 하는 사람이었던 거지. ”

“ 그럼 왕자님이 아닌 거네. ”

“ 왕자는 아니지만 백작이야. 비슷한 거야. ”

“ 어떻게 왕자님이 그렇게 나쁜 짓을 할 수가 있어? ”

“ 왕자라고 다 착하고 멋있는 건 아니니까. ”

“ 안 그래. 왕자님은 착하고 멋있어야 해. ”

 

미샤는 웃더니 공연을 보면 이해가 될 거라고 했다. 지젤을 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뛸 듯이 기뻐진 나는 해적에 대해서도 물었다.

 

“ 그럼 해적은 주인공들이 다 도둑놈들이라 엄마가 못 보게 하는 거야? ”

“ 아니. 그건 아닐 걸. ”

“ 그럼 엄마는 왜 그러는 거야? ”

“ 남자 주인공 중 하나가 옷을 벗고 나와서 그럴 거야. ”

“ 발가벗고? ”

“ 아니, 바지만 입고 나와서. ”

“ 그럼 수영장이랑 똑같은 거잖아. 근데 왜 수영장은 가도 되는데 극장은 안 되는 거야? ”

“ 글쎄. 그 두 개가 다르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어. ”

“ 오빠도 그런 사람이야? ”

“ 모르겠네. 난 믿는 사람이 아니고 춤을 추는 사람이니까. ”

 

나는 미샤의 옆에 앉아서 지젤을 봤다. 1막 마지막 장면에서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휴식 시간 내내 울었다. 미샤는 날 달래주는 대신 눈물을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었다.

 

“ 2막 보기 싫어? ”

“ 그 나쁜 남자 벌 받아? ”

“ 벌 받았으면 좋겠어? ”

“ 응. ”

“ 그래도 지젤이 구해주고 싶어 하면? ”

“ 왜 구해주고 싶어야 돼? 그 악당 때문에 죽었는데. ”

“ 지젤은 아직도 그 남자를 사랑하니까. 알브레히트는 악당이 아니고 주인공이야. 왕자 같은 거라니까. ”

“ 아니야, 왕자님은 그렇게 못되게 굴지 않아. 악당이야. ”

 

나는 두 번째 벨이 울릴 때까지도 버티다가 너무 궁금해서 결국 2막을 보러 들어갔다. 2막은 예쁘긴 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그 못된 남자 주인공이 결국 벌도 안 받고 지젤 덕에 목숨을 구하는 게 이해가 안됐다. 나오면서 솔직하게 감상을 얘기하자 미샤는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 대답했다.

 

“ 다음에 한 번 더 보면 느낌이 달라질지도 몰라. 그러니까 또 봐. ”

“ 달라질 리가 없어. 나쁜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 ”

“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야. 누가 어떻게 추느냐에 따라서도 항상 달라. 같은 사람이 춰도 달라질 수 있어. ”

 

이틀 후 미샤는 내게 해적 공연 표를 주었다. 날 데려간 건 미샤가 아니라 지나였다. 미샤는 그 무대에서 춤을 추기로 되어 있었다. 지나가 내용을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내가 궁금한 건 단 두 가지 뿐이었다. 누가 옷을 벗고 나오는가. 수영장과 무대는 다른가 같은가. 하지만 어쩐지 쑥스러워서 묻지는 못했다. 지나는 친절했지만 미샤처럼 가깝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사실 질투도 좀 났다. 사람들이 다들 지나와 미샤가 사귄다고 했기 때문이다. 지나는 엄청나게 예뻤다. 그리고 미샤와 같은 집에서 살았다. 우리 아빠도 작품 준비 때문에 바빠지자 그 집에 들어가 살고 있긴 했지만 그것과는 다른 게 분명했다. 그 해 겨울에 지나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솔직히 기뻤지만 미샤가 많이 슬퍼할 것 같아서 티는 내지 않았다. 속으로는 지나가 나쁜 여자란 생각이 들었다. 거의 지젤의 남자 주인공만큼. 내가 지나였다면 절대 미샤와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그런 남자를 두고 나이도 많고 얼굴도 못생긴데다 지루하게도 무슨 교수 노릇을 하는 아저씨와 결혼할 수 있단 말인가.

 

해적은 그 이후로도 여러 번 봤지만 지금도 난 그 발레의 내용을 정확히 모른다. 내 기억 속에 있는 거라곤 오로지 미샤가 눈이 시릴 정도로 새파랗고 예쁜 아라비아 스타일 바지를 펄럭이며 날아오르고 또 날아오르는 모습뿐이기 때문이다. 그 역을 출 때 미샤는 정말로 상의를 입지 않았다. 그리고 난 수영장과 무대가 왜 다른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미샤에게는 얘기하지 않았다. 어쩐지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볼쇼이에서 미샤가 처음으로 해적 무대에 올라왔을 때 난 아빠를 졸라서 엄마 몰래 2층 발코니에서 그 공연을 보았다. 2막에서 미샤가 그 파란 옷을 입고 춤추기 시작했을 때 객석 군데군데가 시끌시끌해졌고 귀가 멀 정도로 큰 갈채와 브라보가 이어지는 동안 여자 몇 명이 홀 밖으로 실려 나갔다. 그런 광경은 난생 처음이었다. 아빠는 고개를 저으며 내게 말했다.

 

“ 엄마 말이 맞았어, 이건 안 되겠는데. 열 살짜리에겐 별로 안 좋아. ”

 

아빠는 내가 레닌그라드에서 이미 그 공연을 봤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모른 척 하며 정말 궁금한 걸 물었다.

 

“ 저 여자들은 왜 기절하는 거야? ”

“ 공연에 몰입하면 가끔 그럴 수도 있단다. ”

“ 난 알아. 미샤가 옷을 벗고 춤을 춰서 그래. ”

 

웬만하면 내 말을 모두 받아주는 아빠조차 그 때는 너무 충격을 받았는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날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공연이 끝난 후 내게 코트를 입혀주면서 아주 심각하게 물었다.

 

“ 라라, 너 남자친구 생겼니? ”

“ 비챠랑 료바가 자꾸 쫓아다녀. 그치만 꼴도 보기 싫어. ”

“ 왜? 둘 다 착하던데. ”

“ 걔들은 유치해. 남자친구 같은 거 안 만들 거야. ”

“ 그럼 좋아하는 선생님이나 오빠라도 생겼어? ”

“ 없어, 그런 거! 난 아빠랑 결혼할 거라고 했잖아! ”

 

아빠는 웃었지만 뭔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돌이켜보면 아빠는 그때부터 내 뜨거운 짝사랑을 눈치 챈 것 같았지만 날 놀리거나 아는 척 티를 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빠는 아주 좋은 사람이었다. 우리 아빠라서가 아니라 정말 그랬다. 극장 동료들도 무용수들도 전부 다 그렇게 말했다. 마르가리타 아줌마는 아빠가 정말 상냥한 분이라면서 우리 엄마가 복에 겨워서 이혼한 거라고 투덜거렸다. 미샤는 남에 대한 말을 거의 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어느 날인가 샴페인을 두어 잔 마시고 취했을 때 아빠가 침대로 데려다 주자 불쑥 이런 말을 했다.

 

“ 난 스탄카가 아니었으면 여기 안 왔을 텐데. ”

“ 그 스탄카는 날 얘기하는 거야? ”

“ 그럼 다른 스탄카가 있나? ”

“ 내일도 술을 먹여봐야겠어. 그럼 또 감동적인 말을 해줄지 모르니까. ”

“ 그게 감동적인 말이야? 난 지금 비난하는 거라고. 모스크바 따위로 날 데려오다니. ”

 

그때 난 아빠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미샤를 설득해 모스크바로 데려온 아빠가 자랑스러웠다. 극장 감독님과 다른 높은 분들이 옛날부터 미샤를 볼쇼이로 데리고 오려고 무진 노력을 했지만 전부 허사였다고 했기 때문이다. 마르가리타 아줌마는 미샤가 다른 사람들 말은 안 들어도 우리 아빠 말은 듣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아줌마가 좀 잘못 알고 있는 거였다. 미샤는 내 말도 아주 잘 들었다. 그리고 날 어린애로 취급하는 대신 친구처럼 대해줬다. 어리다고 무시한 적도 없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귀여워한 적도 없었다. 어른들은 그게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인지 잘 모른다.

 

맨 처음 미샤를 만났을 때 그는 내 손등에 키스를 해 주었다. 그 날 그는 백조의 호수에서 지그프리드 왕자를 췄고 극장이 떠나갈 듯한 박수와 환호, 끝없이 반복되는 커튼 콜을 받았다. 공연 내내 난 넋을 놓고 무대를 보고 있었다. 아니, 지그프리드만 봤다. 아빠가 날 백스테이지로 데려가서 미샤를 소개시켜 주었을 때는 너무 멍해진데다 긴장해서 아무 말도 못했다. 인사도 못했다. 미샤는 말 그대로 꽃에 파묻혀 있었다. 두 팔로 안고 있는 것도 모자라 바닥에도 꽃다발이 잔뜩 놓여 있었다. 나를 보자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내 손등에 입을 맞춰 주었다. 그리고는 제일 예쁘고 화려한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난 공주님이 나오는 그림책을 좋아해본 적도 없고 이제껏 발레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지만 그때 미샤는 정말로 왕자님 같았다. 반짝거리는 장식이 달린 하얀 의상도 그랬고 그림 속에서 나온 것처럼 근사한 외모도 그랬다. 무엇보다도 그 품위 있고 다정한 태도가 그랬다. 나중에 아빠는 내가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이름도 얘기하지 못한 채 ‘진짜 왕자님이에요?’ 라는 말만 되풀이했다고 재미있어 했다.

 

이후 난 미샤와 아주 친해졌지만 항상 마음속으로는 그 생각을 품고 있었다. 화려한 무대 의상과 분장과 배역 없이도 미샤는 언제나 왕자님 같았다. 잉크처럼 검은 머리와 눈처럼 하얗고 깨끗한 피부가 놀랄 만큼 잘 어울렸다. 그리고 눈이 밤하늘처럼 새까맸다. 내 주위에는 그렇게 까맣고 예쁜 눈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볼쇼이에 몰려든 관객들은 미샤를 검은 눈의 야스민이라고 불렀다. 어떤 사람들은 천사라는 별명을 붙였다. 주변이나 잡지 등에서 그런 찬사를 들을 때마다 난 뿌듯했지만 한편으로는 미샤가 너무 인기가 많아지는 게 싫기도 했다. 또 지나 같은 여자친구가 생길까봐 걱정이었다. 어쨌든 난 미샤보다 열한 살이나 어렸기 때문이다.

 

언니가 있는 친구들은 내게 굳이 어른이 안 되더라도 열대여섯 살만 먹으면 남자들이 숙녀로 봐주는 것 같으니 몇 년만 잘 버티면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럼 최소한 5년은 더 기다려야 했는데 그동안 그 많은 발레리나들과 예쁜 여자들이 미샤를 내버려둘 것 같지가 않았다. 우리 아빠도 스물두 살 때 엄마와 결혼했는데 그 땐 두 분 다 볼쇼이에서 춤추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게다가 내 외모도 별로 예쁘지 않았다. 잿빛에 가까운 갈색 곱슬머리에 아빠처럼 아주 밝은 회색 눈이었는데 아무리 잘 봐줘도 예쁘다기보다는 약간 귀여운 정도였고 키도 동급생들보다 훨씬 작았다. 아빠나 엄마 둘 다 별로 키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건지도 몰랐다. 미샤는 우리 아빠보다 키도 컸고 몸매도 늘씬해서 같이 걸으면 내 머리가 그의 가슴 아래에 닿을까 말까했다. 어느 날은 너무 불안해서 미샤에게 솔직하게 고민을 토로한 적도 있었다.

 

“ 엄마랑 아빠 둘 다 작으면 나도 키가 작겠지? ”

“ 그럴 가능성이 있지. ”

“ 키 크는 수술이 있었으면 좋겠어. ”

“ 사춘기가 되면 지금보다 커질 거야. 아직 모르는 일이잖아. ”

“ 그래도 다른 애들보다 작으면 무시당할 거야. ”

“ 나도 친구들보다 작았어. ”

“ 지금은 크잖아. ”

“ 아니야. 지금도 나보다 큰 동료들이 많아. 키로프는 더 그랬어. 난 180이 안 되거든. ”

 

그 말은 의외였다. 내게 미샤는 언제나 고개를 쳐들어야 눈을 마주칠 수 있을 정도로 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 정말? 우리 엄마는 남자가 발레 무용수로 성공하려면 180센티가 넘어야 한댔어. 안 그러면 왕자나 기사 역을 안 준다고. 우리 아빠도 그래서 춤 그만 두고 안무하는 거랬어. ”

“ 스탄카가 안무를 하는 건 춤보다 그쪽에 더 재능이 뛰어나기 때문이야. ”

“ 엄마는 그렇게 말 안했는데. ”

“ 나스챠 말이 꼭 틀린 건 아냐. 위에서는 키 큰 애들한테 좋은 역을 주는 경우가 많거든. ”

“ 그럼 어떻게 그 역들을 다 얻었어? ”

“ 키 큰 애들보다 더 잘 춰서. ”

“ 노력하면 되는 거야? ”

“ 아주 많이. ”

 

지금은 그때 미샤가 진실을 전부 얘기해준 건 아니란 걸 알고 있다. 세상에는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있으니까. 미샤가 아주 많이 노력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 열심히 했다. 공연이 없어도 극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집에서도 연습했고 아빠의 아파트에 와 있을 때도 연습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아빠는 미샤가 타고난 무용수라고 했다. 그런 재능은 진짜 드물다고 했다. 무대 위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100미터 너머에 있던 사람들까지 몰려올 거라고 했다. 난 그 말을 믿었다. 세상에는 타고난 무용수란 게 있을 것이다. 타고난 왕자님이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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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번째 파트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391

 

** 미샤가 라라에게 다리 갈라지는 것을 내세워 레닌그라드로 오라고 꼬드기는 것과 관련해..

 

새벽이면 다리가 이렇게 갈라진다 :) 근사한 퀄리티를 보시면 알겠지만 내가 찍은 사진 아님. 웹에서 전에 얻었다.

 

 

.. 미샤가 라라를 데려간 분수 궁전은 여름 궁전인 페테르고프이다. russia 폴더에서 페테르고프나 뻬쩨르고프로 검색하면 그곳 풍경들을 볼 수 있다.

 

 ** 발레 지젤과 해적에 대한 애기들은 dance 폴더에서 지젤, 해적으로 검색하면 전에 올린 동영상이나 사진들, 공연 리뷰들이 꽤 있다.

그리고 지젤의 알브레히트에 대한 메모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127

 

** 지젤과 해적은 미샤가 데뷔해서 췄던 주요 작품이기도 하다. 그 얘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128

 

** 추가) 미샤가 라라를 데려갔던 분수 궁전 페테르고프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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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새해가 되었다. 올해는 2012년 여름에 구상해서 작년에 시작한 글을 반드시 끝내리라는 목표를 세웠다.

 

내가 이 글의 주인공을 제일 처음 떠올렸던 것은 아주 오래 전이었다. 90년대 후반이었으니까. 그때 나는 러시아에서 돌아온 직후였다. 극장과 발레와 사람들, 예술가와 창작, 욕망과 재능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는 물론 나이도 어렸고 경험도 자료도 부족했다. 이후 나는 극장과 직접적 관계가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문화예술계에 속한 바닥에서 일하게 되었다. 매우 부족하지만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고, 또 사고의 지평도 넓어졌다.

 

내가 맨처음 이 사람을 떠올렸을 때 그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주인공은 따로 있었고 배경도 90년대였다. 미샤는 그 글의 조역이었고 일종의 안티 히어로, 메피스토펠레스 같은 존재였는데 아마도 그건 그때 내가 아직 어렸고 다분히 낭만적인 환상과 우울증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당시 내가 생각했던 미샤는 훨씬 예리하고 어둡고 속을 전혀 알 수 없는 인물, 정치적이고 지배적인 인물이었다. 물론 지금 내가 되살려낸 미샤는 당시의 그와는 많이 다르다. 본질적인 몇 가지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그래도 여러 가지로 변형되었다.

 

어쨌든 당시 내게 있어 '발레 소설'(그땐 그렇게 가제를 붙였다)은 좀더 경험이 쌓였을 때 쓸 수 있는 미래의 소설이었다. 그래서 난 다른 글들을 썼고 이후 직장에 들어가고 삶에 짓눌리면서 서서히 글을 쓰지 않게 되었다. 다만 중간중간에 그 다른 글들에 삽입되는 에피소드 몇개에 미샤를 등장시켰을 뿐이었다.

 

그리고 2012년 여름에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이전에 구상했던 여러 가지 이야기들과 여러 인물들을 모두 놓아둔 채 이 사람을 되살려냈다. 아마도 그때가 '그때'였던 것 같다. 그를 되살려내고 그와 이야기를 나눌 때. 이제 나는 그를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 해 가을에 페테르부르크로 날아갔고 그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원래 구상했던 장편은 작년 10월에야 시작할 수 있었지만...

 

아래의 이야기는 오래 전에 썼던 글이다. 2002년. 미샤를 등장시켰던 세번째 단편이었다. 다른 글에 삽입되는 에피소드가 아니라 독립적인 단편으로는 처음이었다. 이때 이미 미샤는 내가 맨 처음 생각했던 인물과는 꽤 달라져 있었다. 그런데 이 당시 내가 이 글을 썼던 이유는 이 인물에 대한 갈망보다는 이미 다녀온지 오래되어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던 도시, 페테르부르크에 대한 향수 때문이었다.

 

그때는 통역대학원을 휴학한 상태였고 백수로 놀고 있었다. 지금 직장에 입사하기 한 달 전이었고 이때까지만 해도 미래는 불투명했다. 다시 그곳에 갈 수 있을지조차 전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이 짧은 단편은 사실 페테르부르크라는 도시에 대한 나의 연서와 같았다.

 

단편의 제목은 앨런 긴스버그의 시 howl의 어느 구절에서 따왔다. 이 시는 어제 발췌했던 장편의 서두에서도 중요하게 언급된다.

 

내용은 매우 간단하다. 백야의 레닌그라드(소련 시절 페테르부르크의 이름) 거리를 걷는 두 남자에 대한 얘기다. 둘은 키로프 극장(지금의 마린스키) 무용수이다. 화자는 두 남자 중 하나인 레오니드 핀스키이다. 애칭은 레냐.

 

이 단편은 이전에 내가 쓴 몇 편 안되는 미샤의 이야기들 중 가장 투명하고 부드러운 소설이었다. 왜냐하면 단편의 화자 자체가 선량하고 맑은 심성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그 순진한 화자의 필터링 속에서 미샤는 일종의 낭만적인 반항아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이 글을 쓸 때 나는 이미 미샤가 본질적으로는 좀 더 어둡고 뒤틀린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간적 배경은 1975년 7월. 주인공인 미샤는 스무살이다. 키로프 극장 제1 솔리스트. 9월 시즌이 되면 수석무용수로 승급하게 될테지만 그건 이 단편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가상의 인물들이다. 지나이다는 미샤와 오랫동안 같이 무대에 올라간 파트너 발레리나. 다닐로프는 극장 행정감독, 아사예프는 예술감독이다. (이건 내가 소설 속 현실을 구축하기 위해 변형을 가한 것이다. 실제의 키로프 체계와는 다르다)

 

미샤의 본명은 미하일이다. 미샤는 애칭. 친한 사이인 레냐는 종종 미셴카라고도 부른다. (이건 더 친밀하게 부르는 애칭임)

 

십년도 더 전에 썼던 글이라 지금 다시 읽으면 조금 뒷목덜미가 따끔거리긴 하지만.. 어쨌든 올려본다. 초심으로 돌아가는 의미에서.

 

글은 약 13페이지 분량이라 짧다. 끝나고 나면 배경으로 등장하는 장소 사진 몇 장.

 

** 이 글을 무단으로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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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minated wall

  

  

 

   

 

 

 

 

 

illuminating all the motionless world of Time between.. 

... Allen Ginsberg, Howl ...

     

 

1975년 7월, 레닌그라드

 

 

미샤와 마주친 곳은 카잔 성당의 분수 앞이었다.

 

이미 열 시를 훌쩍 넘긴 늦은 시간이었지만 7월 초의 레닌그라드는 백야의 도시였다. 주위는 여전히 부드러운 광채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홀로 네프스키 거리를 걷고 있었다. 보통 때 같으면 무대에서 내려와 동료들과 함께 있을 시간이었지만 단원들의 반수 이상은 유럽으로 여름 투어를 떠나서 남아 있는 동료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원래는 나도 투어에 끼어야 했지만 여름이 시작될 무렵 발목을 다치는 바람에 남게 되었다. 아쉬운 일이긴 했지만 레닌그라드의 여름보다 아름다운 여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딱딱하게 얼어붙은 아이스크림을 한손에 든 채 걸음을 옮기면서 가을 시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부상은 그리 심각한 편이 아니었고 디렉터인 아사예프는 ‘라 바야데르’의 안무를 새로 손보고 있었다. 리허설은 다음 주부터였는데 솔로르 역으로는 나와 미샤가 더블 캐스팅되어 있었다. 위에서는 미샤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지만 그 무렵 미샤 야스민은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고 까다로운 배역인 솔로르의 심리를 탁월하게 해석하는 무용수였기 때문에 그도 도리가 없었다. 나와 미샤의 스타일은 무척 달랐기 때문에 아사예프는 새로운 버전에서 솔로르를 이중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셈이었다.

 

나는 서늘한 바람을 맞으면서 판탄카를 거쳐 알렉산드린스키 공원 앞을 지났다. 여왕의 거대한 동상이 위압적인 표정으로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낮이나 이런 백야에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한겨울 저녁 발레학교 시절 공원으로 나왔다가 문득 이 동상을 올려다보면 그 푸르스름한 청동빛을 발산하는 자태에 오싹한 느낌이 들곤 했다.

 

다리가 조금 아팠기 때문에 나는 카잔 성당의 벤치에서 좀 쉬었다 가기로 했다. 예카테리나 여왕과 마찬가지로 한밤중의 카잔 성당은 어딘지 악마적인 위압감을 느끼게 했지만 다행히 지금은 7월이었고 밤은 낮처럼 환했다.

 

분수가 하얀 물보라를 뿜고 있었다. 나는 분수 쪽으로 다가가다가 미샤를 발견했다. 그는 물방울이 튀어 반쯤 젖어 있는 벤치 귀퉁이에 홀로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이곳에서 미샤와 마주친다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카잔 성당의 분수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고 그는 자주 그 벤치에 와서 책을 읽곤 했다. 주로 도스토예프스키나 푸시킨, 혹은 레르몬토프였는데 가끔은 구하기 힘든 영어 소설들이기도 했다. 그는 금지된 원서들을 구할 수 있는 지하 루트들을 잘 알고 있었다. 종종 그는 내게 락 음악 잡지나 갱지에 인쇄된 비트 작가들의 시집을 빌려주곤 했다. 내킬 때면 그 자리에서 번역해 읽어주기도 했다.

 

그렇다, 이곳에서 미샤와 마주친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 단 한 가지 사실만 제외한다면.

 

나는 벤치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 안녕, 미셴카. ”

“ 레냐. ”

 

미샤는 고개를 들더니 내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가 혼자 책을 읽고 있는 동안에는 방해받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쨌든 우리는 발레학교에서 바로 옆 침대를 썼으니까.

 

“ 여기서 뭘 하는 거야? 열 시에 출발한다고 그러지 않았어? 다닐로프가 극장 앞으로 오라고 했잖아. ”

“ 그건 다닐로프가 해결할 문제지. ”

 

미샤는 책장을 덮고 잠시 분수의 물줄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책표지를 힐끗 보았다. 안드레예프의 단편집이었다. 책갈피가 끼워져 있는 부분을 보지 않아도 그가 어느 곳을 읽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단편집에는 미샤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가 실려 있었다. ‘그는 다시는 지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라는 마지막 문장은 학창 시절의 미샤에게 있어서는 성서 구절과도 같았다. 졸업하기 일 년 전인가 우리는 연극학교 친구들의 발표회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단편을 각색한 작품이 올라갔다. 미샤는 연출가였던 루벤의 청을 수락해 나레이션을 맡았는데 난 그가 그 까다로운 문장들을 푸시킨 시처럼 줄줄 외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 설마, 미하일. 농담이겠지? 다닐로프가 널 가만히 놔둘 것 같아? 잘못하면 새 시즌에 못 나가! ”

 

그건 전혀 과장된 말이 아니었다. 나와는 달리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은 미샤가 이번 유럽 투어에서 제외된 것은 일종의 징계 조치였다. 지난 해 겨울에 우리는 베를린에 투어를 갔는데 미샤는 한밤중에 호텔을 몰래 빠져나가 락 가수들의 공연을 보러 갔던 것이다. 다닐로프는 펄펄 뛰었고 당과 극장의 명예를 운운하며 여름 투어를 보내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물론 그는 사죄하며 근신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키로프의 지도부에게 있어 미샤 야스민은 골치 아픈 무용수였다.

 

지금은 사정이 좀 나아졌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여름이나 가을이면 무용수들은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 근교의 호화롭고 아름다운 별장으로 불려가곤 했다. 그런 별장의 소유주들은 (소유주라는 어휘에 어폐가 있다 해도 할 수 없다. 그들은 진짜 소유주들이었으니까. 그게 소비에트 시대의 진짜 러시아어라는 것이다) 거의가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유력한 정치가들과 당의 권력자들이었다. 그들은 종종 별장에서 파티를 열었고 키로프나 볼쇼이 등 유명 극장의 무용수들을 불러서 춤을 추게 하거나 오페라 가수들을 데려와 아리아를 부르게 했다.

 

그 날 미샤는 다닐로프의 인솔 아래 파트너인 지나이다 세도바와 함께 페테르고프의 별장에 가게 되어 있었다. 역시 당의 권력자인 별장 주인은 대단한 발레 애호가였기 때문에 측근들을 불러 파티를 열기로 했던 것이다. 1군에 속한 무용수들은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투어를 떠나버렸고 나는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미샤가 빠져나갈 방법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지난 시즌에 미샤가 보여준 무대들은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에 애호가인 주인은 특별히 그와 세도바의 이름을 거명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내 기억으로 그 때 페테르고프로 가게 되어 있던 무용수들은 미샤와 지나이다 세도바, 그리고 올가 베론스카야와 세르게이 카로빈스키였던 것 같다. 비록 후자의 둘은 확신하기가 어렵지만.

 

그런데 지금, 페테르고프로 향하는 차에 타고 있어야 할 미샤 야스민이 내 곁에 앉아 분수를 구경하고 있는 것이다. 태평스럽게 책을 읽으면서.

 

“ 못 나가게 하라지. ”

“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미셴카! 널 주시하고 있는 게 다닐로프 뿐만이 아니란 걸 몰라? ”

“ 그래, 저기도 하나 있군. ”

 

미샤가 손을 들어 성당 쪽을 가리켰다. 나는 무심코 성당의 거대한 기둥 쪽을 보았고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사복을 입은 대머리 남자가 기둥 뒤에 서 있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키로프 극장 무용수 정도 되면 감시 요원들 얼굴 한둘은 알고 있기 마련이다. 비교적 말썽 없이 지냈던 나 역시 외국 투어를 나갈 때마다 길거리에서 그런 얼굴을 발견하곤 했다. 하지만 대낮처럼 환한 네프스키 거리에서, 단독 감시 요원이라니! 언제 미샤는 그렇게 요주의 인물이 된 것일까?

 

차가운 공포가 나를 사로잡았다. 미샤는 흔히 말하는 편안한 우정을 나누는 친구는 아니었다. 아마 그는 누구와도 그런 식의 우정을 나누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와 함께 발레학교를 다녔고 극장에서도 좋은 동료로 지내고 있었다. 키로프에 들어가고 처음 일 년 동안은 함께 아파트를 쓰기도 했다. 그 후 극장 측에서는 공동 아파트에서 미샤를 끌어내 지나이다와 함께 2인 단독 아파트에 살게 해 주었다. 극장 측은 젊은 무용수들이 가정을 이루게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내게 류다를 붙여 준 것처럼. 류다와 나는 학창 시절부터 서로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곧 결혼을 약속하게 되었지만 미샤와 지나이다는 사적으로는 그런 기미가 전혀 없었다. 무대 위에서 그 둘이 보여준 듀엣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에 관객들이 환상을 품고 있는 것뿐이었다. 이따금 나는 지나이다가 그에게 품고 있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어쨌든 그는 나의 친구였다. 극히 짧은 순간 내 머리 속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린 몇 명의 지인들과 먼 키예프 부근으로 추방당한 드라마 극장 배우가 스치고 지나갔다. 미샤에게도 그런 일이 생기게 될까? 그에게는 자기 몸을 보존할 만큼 충분한 공포심이 없는 것 같았다.

 

아마도 나는 질책하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본 것 같았다. 미샤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책을 옆에 끼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불쑥 물었다.

 

“ 다닐로프가 몇 시까지 기다려줄 것 같아? ”

 

나는 시계를 보았다. 열시 반이었다.

 

“ 최대한 30분? 극장에 전화를 해. 아니면 차라리 이쪽으로 차를 가지고 오라고 하는 편이 낫겠어. ”

“ 30분이면 걸어가도 충분해. ”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성당 기둥 쪽을 바라보았다. 대머리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      *      *

 

 

우리는 별 말 없이 카잔 성당을 나와 거리를 따라 걸었다. 그리보예도프 운하를 지나면서 미샤는 가판대에서 낡은 책을 한 권 샀다. 이번에는 푸시킨의 ‘루슬란과 류드밀라’였다.

 

채색 삽화가 들어가 있는 책장을 넘기면서 미샤가 입을 열었다.

 

“ 누굴 출래? ”

“ 뭐? ”

“ 이걸 안무한다면 누굴 추고 싶냐고. ”

 

나는 잠시 흥미진진한 그 서사시의 등장인물들을 떠올려 보았다. 수염을 기른 마법사 체르노모르, 혼인 잔치 때 마법사에게 납치된 아름답고 활기찬 왕녀 류드밀라. 아내를 찾아 떠나는 정의의 용사 루슬란, 루슬란이 마주치게 되는 황야의 거대한 머리, 루슬란을 돕는 노인, 마녀 나이나. 그리고 류드밀라의 구애자들이자 루슬란의 적 세 명, 루슬란과 싸우다 패해 물에 빠져 죽는 검은 기사 로그다이와 비겁하게 기회를 노리는 파를라프, 그리고 순결한 아가씨에게 반해 평온한 호반의 어부로 변하는 라트미르... 모두가 한 번쯤은 무대에서 재현해 볼만한 역이었다.

 

“ 당연히 루슬란이지. 주인공이잖아. ”

“ 난 루슬란에게 주역을 주지 않을 건데? ”

“ 그럼 누구? 류드밀라를 출 생각은 아닐 테고. ”

“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지만 난 로그다이를 출 거야. ”

“ 잘 어울리는데 그래. 막판에 물의 요정에게 끌려가는 걸로 끝나겠군. ”

“ 내 발레에는 네 명 밖에 안 나와. 루슬란, 로그다이, 파를라프, 라트미르. 그게 전부야. ”

“ 그리고 주인공은 로그다이고 말이지? ”

“ 그래. 주인공이 아니어도 루슬란을 춰주겠어? ”

 

내 머리 속에는 그 책의 중반부가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루슬란의 칼에 찔려 검은 강물로 떨어지는 로그다이, 깊은 물속으로부터 올라와 젊은 기사의 싸늘한 시체를 품에 안고 만족한 듯 웃으며 사라지는 물의 요정...

 

“ 그래, 물론이지. 네가 안무를 한다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

“ 조만간 할 거야. ”

“ 아사예프가 가만히 있을까? ”

“ 아마 극장 레퍼토리에 들어갈 수는 없을 거야. ”

 

생각에 잠긴 얼굴로 미샤가 말했다. 나는 그가 안무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발레학교 시절에도 그는 종종 짧은 춤들을 고안하곤 했다. 극장에서도 역할의 해석을 놓고 아사예프와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 다반사였다.

 

미샤는 운하를 지나 방향을 틀었다. 계속해서 루슬란과 로그다이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나는 문득 우리가 궁전 광장 쪽으로 가고 있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 미셴카! 이쪽으로 가면 안 되잖아, 저쪽으로 돌았어야지! ”

“ 저쪽? 저쪽에 뭐가 있다고. ”

“ 농담이 아니잖아, 극장으로 가려면 반대편으로 갔어야 하잖아. 이쪽은 에르미타주라구! ”

 

물론 내 얘기는 헛된 설명에 지나지 않았다. 미샤는 나와 마찬가지로 레닌그라드 토박이였고 누구보다도 도시 골목골목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 극장엔 안 가. ”

“ 다닐로프는? ”

“ 말했잖아. 그건 다닐로프의 문제야. ”

 

미샤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검은 눈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부드러운 에메랄드 청록색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을 지나 궁전 광장으로 걸어가면서 미샤가 말했다.

 

“ 그 돼지 같은 놈들 앞에서 춤을 추라고? 뭐가 좋아서? ”

 

가슴이 답답하게 당겨왔다. 나는 뒤를 돌아보며 사복 차림의 대머리 남자를 찾았다. 눈에는 띄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우리를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엇이 미샤에게 그런 고집을 부리게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그런 별장에 불려가 춤추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나름대로 발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고 우리는 무용수였다. 모두가 쉬쉬하고 있는 얘기긴 했지만 발레리나들과 밤을 보내기 위해 무용수들을 부르는 역겨운 나리님들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미샤는 그런 경우에 해당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문제는 다닐로프가 아니었다. 다닐로프나 아사예프 같은 지도부와 미샤의 마찰은 만성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미샤는 본능적으로 선을 그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내 말은, 불같은 성격의 다닐로프조차도 미샤를 극장에서 쫓아낼 생각까지는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 권력자들의 분노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내가 아는 미샤는 타협하지 않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런 순간 고집을 부리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궁전 광장으로 접어들었다. 꼭대기에 천사상이 조각된 알렉산드르 기념 원주가 엷은 핑크색을 띤 하늘에 반사되어 어렴풋한 황금빛을 발하고 있었다. 관광객들과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광장을 거닐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미샤를 설득해 보기로 했다.

 

“ 하루뿐이잖아. 네가 전에 그런 곳에 가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

“ 그래, 이제 그만둘 때가 됐어. 레냐, 그만둘 때가 됐다고. ”

 

미샤는 기념비를 둘러싼 울타리에 한 손을 대고서 여전히 나직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언성을 높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 우린 아직도 20년을 기다려야 할 거야. 어쩌면 20년이 지나고도 아무 것도 오지 않을지도 몰라. 페테르고프 별장의 주인들은 단지 그 이름만 바뀔 뿐 똑같은 얼굴과 똑같은 뱃속으로 그곳에 머무르면서 우릴 부를 거야. 당이 뭐가 어떻다는 거야, 우리에겐 아무 상관없는 얘기야. 다닐로프더러 별장에 가서 춤을 추라고 해. 이런 밤에는 그 자들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

 

미샤는 엷은 핑크빛 띠가 드리워진 듯한 파르스름한 하늘을 가리켰다.

 

“ 흘러넘치는 빛이야, 레냐. 흘러넘치는 빛. ”

 

나는 그가 당에 대한 말을 내뱉은 순간부터 귀를 막고 아무 것도 듣지 않으려고 애썼다. 에메랄드 청록색 에르미타주 궁전 기둥 너머로 대머리 남자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맙소사, 그들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미샤가 더 이상 과격한 말을 내뱉지 않기를 빌었다. 그들이 나를 호출한다면 지금 들은 모든 이야기는 그를 시베리아까지는 아니더라도 민스크나 카프카즈 등지로 보내는 데는 충분하고도 남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심문 앞에서 침묵을 지킬 자신이 없었다. 공포에 질려 나는 미샤가 입을 다물어 주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때 그가 말했다.

 

“ 흘러넘치는 빛이야, 레냐. 흘러넘치는 빛. ”

 

나는 그가 들어 올린 손끝을 보았다. 한밤의 여름 하늘이 부드러운 붉은 보랏빛과 푸른빛 광채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여름의 레닌그라드 밤하늘이었다. 눈부신 빛으로 흘러넘치는 하늘.

 

미샤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두 권의 책을 바닥에 내려놓고, 한 손을 허리 뒤로 하고 한 손은 여전히 하늘을 향한 채, 기념비 원주 주위를 돌며 천천히 춤추기 시작했다.

 

광장을 거닐던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미샤는 고개를 가볍게 젖히고 두 팔로 원을 그리며 춤추고 있었다. 서늘한 바람에 그의 검은 머리칼이 비단 스카프처럼 나부꼈고 딱딱한 돌바닥을 스치는 두 발은 흰 섬광 같았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그것이 무슨 작품에 나오는 춤인지 떠올리려고 했지만 헛수고였다. 나는 한 번도 그런 춤을 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이제 미샤는 그늘진 쪽으로 옮겨가 격렬한 스텝으로 도약하고 무시무시하게 빠른 속도로 회전하고 있었다. 역광이 그의 젖혀진 목덜미와 가슴을 따라 기묘한 십자 모양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고 기념비 기둥 위의 천사상을 보았다. 한 손에 십자가를 든 천사상을.

 

로그다이. 나는 자기도 모르게 속삭였다. 로그다이.

 

사방에 빛이 있었다. 미샤는 광채를 발산하며 춤추고 있었다. 궁전 광장은 흘러넘치는 빛들로 가득했고 미샤는 두 손으로 보이지 않는 벽을 어루만지며 춤추는 것 같았다. 어둠의 장막을 두들기는 검은 기사처럼. 백야의 부드러운 빛으로 투명해진 어둠의 장막을.

 

나는 미샤가 보이지 않는 루슬란과 마지막 격투를 벌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록 미샤가 홀로 춤추고 있었지만 나는 그의 눈앞에 있는 루슬란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었다. 홀린 눈으로 나는 보이지 않는 루슬란의 모든 동작과 스텝을 따라갔다. 마치 그 보이지 않는 기사의 춤이 내 온몸에 지도를 그리고 도장을 찍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침내 로그다이의 최후가 왔다. 미샤는 가슴을 움켜쥐고 빙그르르 돌더니 뭔가에 거세게 떠밀린 듯 앞으로 넘어져 무릎을 꿇었다. 천사상의 손에 들린 십자가가 황금빛을 내쏘며 그의 어깨와 등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마치 검은 강물에서 올라온 물의 요정이 싸늘한 두 팔을 벌려 죽은 기사의 몸을 뒤에서 안고 있는 것처럼.

 

갈채와 환호가 내게 정신을 차리게 했다. 몰려든 사람들이 원을 이룬 채 박수를 치고 탄성을 지르고 있었다. 무수한 극장의 무대들을 밟았지만 나는 그토록 경이에 찬 환호와 갈채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건 아주 작은 환호였고 작은 갈채였지만 그 한순간을 위해서라면 내가 지금껏 올라간 모든 무대와 지금껏 받아온 모든 꽃다발과 찬사를 아낌없이 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빛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미샤는 천천히 일어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타는 듯한 열기가 어린 시선이었다. 그는 허리를 굽혀 가볍게 인사를 하고 바닥에 내려놓았던 책들을 집어 들었다.

 

“ 가자. ”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 어디로? ”

블린이나 먹으러 가자. 센나야 광장 쪽에 카페가 하나 생겼는데 블린을 잘 만들어. ”

 

나는 에르미타주 궁전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사복 차림의 대머리 남자가 기둥 곁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역시 사복 차림의 키 큰 금발 머리 남자가 함께 있었다.

 

나는 미샤와 함께 궁전 광장을 나와 센나야 쪽으로 걸어갔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서도 나는 두 남자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미샤의 옆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그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하고 마음속으로 물었다. 그리고 그들의 호출이 언제 있을까 하고 의문했다. 다닐로프에 대해, 심문에 대해, 내가 해야 할 대답에 대해 생각했다. 엷은 핑크빛을 띤 하늘에 대해, 투명해진 어둠의 장막에 대해, 십자가를 든 천사상에 대해 대답할 수 있을까? ‘흘러넘치는 빛이야, 레냐. 흘러넘치는 빛이야’ 라는 미샤의 말을 그들에게 옮길 수 있을까?

 

우리는 센나야 광장 뒤편에 있는 카페에 가서 블린을 먹었다. 미샤가 옳았다. 블린은 무척 맛있었다.

 

  

 

2002.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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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샤가 카잔 성당 분수 앞에서 읽고 있었던 소설은 레오니드 안드레예프의 단편 '비행'이다. 이 글에 대한 이야기는 예전에 '러시아 일기'에서 쓴 적이 있다.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98

 

루슬란과 류드밀라는 언급했던 것과 같이 푸시킨의 유명한 서사시이다. 혹시 안 읽어보셨다면 정말 재미있으니 한번 읽어보셔도 후회 없을듯.

 

어제 올렸던 그 장편 후반부에서 나는 미샤가 저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안무해 키로프 극장 무대에 올리는 이야기를 삽입했다. 그건 일년 후인 1976년이 될 것이다. 그리고 로그다이가 주인공이라는 미샤의 말과는 달리 실제 작품에서는 네 명의 남자가 균일한 비중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 무대에서 미샤는 로그다이를 춘다. 그리고 루슬란은, 여기서 약속한대로 레냐에게 준다 :) 물론 이것은 가상의 작품으로 내가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데 누가 좀 안무해 줬으면 좋겠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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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몇 장. 2012~2014년 페테르부르크에 갔을 때 찍은 것들이다.

 

먼저 미샤의 비밀 장소인 카잔 성당 앞 분수. 네프스키 대로 한복판에 있다. 시민들의 휴식처. 명소이다. 맞은편에는 돔 크니기와 그리보예도프 운하가 있다. 물론 소련 시절 카잔 성당은 성당이 아니라 종교 박물관이었지만...

 

 

 

 

 

 

분수 앞에 이렇게 벤치들이 있다.

 

 

 

 

이렇게 사람들이 옹기종기 앉아서 쉰다.

 

 

왼편으로 보이는 건물이 돔 크니기.

 

이때가 7월 초. 소설의 배경과 같은 시즌. 다만 사진 찍은 건 이른 오후.

 

 

 

 

이 벤치가 미샤가 앉아 책 읽던 자리 :)

 

 

 

나무들 너머로 보면 이렇다. 왼쪽 벤치.

 

 

 

그리고 궁전광장. 예전에 여러 번 올렸었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옛 겨울 궁전) 앞 광장이라 궁전광장이라 불린다. 가운데의 저 알렉산드르 기념 원주도 페테르부르크의 상징적 풍경. 미샤는 저 기념 원주 앞에서 춤을 춘다.

 

 

7월, 자정 직전의 하늘. 천사상.

 

미샤는 조금 더 이른 7월 초에 춤을 춘다. 그래서 하늘은 이것보다 훨씬 핑크빛 석양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낮에는 이렇다.

 

 

 

궁전광장.

 

사실 저 돌바닥 위에서 춤추면 발이 꽤 아팠을 듯...

 

 

 

 

알렉산드르 기념 원주를 둘러싼 울타리. 엄밀히 말하면 저 울타리 앞에서 췄다.

 

 

 

 

 울타리 가장자리에 서 있는 가로등. 왼편으로 이삭 성당, 오른편으로 해군성 첨탑이 보인다.

 

..

 

그럼 이제 심기일전해서 다시 쓰던 글로 돌아가야지...

 

 

 

** 2015년 7월에 찍은 카잔 성당과 분수 사진들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4059

 

 

:
Posted by liontamer
2014. 12. 31. 23:07

잠시, 2년 전 이맘때 쓰던 글 발췌 about writing2014. 12. 31. 23:07

 

2014년도 한 시간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2년 전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아주 오래 전 만들어냈던 인물을 되살려냈다.

 

그 2년 전은 내게 상당히 혹독한 한 해였다. 깊은 우울증에 시달렸다. 아마도 그 시기를 버틸 수 있었던 유일한 힘은 그 당시 쓰던 글이었을 것이다. 그 글과 함께 바닥까지 내려갔다가 올라올 수 있었다. 나는 그 글을 2012년 10월부터 2013년 1월까지 썼다. 아마 지금이라면 그런 식으로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달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의 주인공을 되살려내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이래 여러 편을 썼는데 그 글은 상당히 개인적이고 또 내밀한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 그래서 그 글을 마친 후 '어쩌면 나중에 이 이야기들이 하나로 묶이게 된다면 이 글은 거기서 빼버려야 할지도 모르겠네' 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배경은 1970년대의 소련 레닌그라드. 나의 주인공인 미샤의 10대 후반부터 20대 초중반까지의 시기를 다뤘다. 심리적 화자는 레닌그라드 국립대 강사이자 미샤의 친구인 안드레이 트로이츠키, 애칭은 트로이였다. 소설은 약 7년 동안 주인공과 트로이, 극장, 그리고 그들의 주변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꽤나 긴 이야기였지만 키워드는 언제나 명확했다. 그건 재능과 욕망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쨌든, 재작년 연말, 이맘때에 쓰던 부분 발췌해 본다. 소설의 후반부. 배경은 1976년 가을. 주인공 미샤는 스물 한살이다. 키로프 수석무용수로 승승장구하고 있던 무렵, 그리고 안무가로도 데뷔해 호평을 받기 시작한 시기. 그러나 부상과 다른 몇 가지 이유로 두어 달 휴가를 받았을 때이다.

 

후반의 대화에서 언급되는 '스탄카'는 미샤의 친구이자 볼쇼이 안무가인 스타니슬라프 일린의 애칭이다. 일린은 전에 발췌했던 글의 화자로 등장한 적이 있다. (http://tveye.tistory.com/3221)

세레브랴코프, 레냐, 지나 등 언급되는 인물들은 미샤의 극장 동료들이다. 물론 가상의 인물들이다. (저 레냐는 내 친구네 아들내미 레냐가 아님! 그 꼬맹이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냈던 인물이었음 ㅎㅎ)

트로이가 등장하는 부분들은 이전에 이 writing 폴더에 몇번 발췌했던 적이 있다.

 

** 이 글을 무단으로 전재, 배포, 복제하거나 가져가지 말아주세요 **

 

....

 

 

한밤중에 트로이는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담요 밖으로 나와 있던 맨 어깨에 선뜩한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창문이 열려 있나 싶었지만 조금 정신이 들자 그 이유를 알았다. 옆이 비어 있었다. 미샤는 그와 함께 침대를 쓸 때는 항상 베개를 같이 베거나 그의 어깨와 가슴 사이에 머리를 대고 몸을 바짝 밀착시킨 채 잤다. 여름에는 좀 더웠지만 이런 계절에는 조그만 스토브를 켜놓은 것처럼 따뜻했다.

 

그는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어둠에 점차 익숙해진 눈을 옆으로 돌리자 미샤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벽에 기대지도 않고 몸을 둥글게 웅크린 채 턱을 무릎에 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두 눈이 밝은 회색과 푸른색으로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창 너머에서 스며들어오는 빛 때문인지, 아니면 그 검은 눈 안쪽에서 발화한 불꽃 때문인지 모호했다. 그 애는 아무 말도 없이 방 안에 안개처럼 뭉쳐져 있는 어둠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쓸쓸하고 고통스럽고 두려움에 잠긴 눈빛으로.

 

트로이는 눈을 감았다. 못본 척 해주는 것이 나을지, 아니면 자리에서 일어나 그 애를 껴안고 키스를 해줘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미샤는 언제나 그의 곁에 누울 때면 순식간에 잠들곤 했다. 잠을 못 이루며 뒤척이는 일도, 중간에 깨어나는 일도 없었다. 이제 그가 고로호바야의 침실에서도 제대로 잠들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런 건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다. 나쁜 꿈을 꾸고 잠깐 깨어난 것 뿐이다.

 

잠시 후 미샤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여전히 스토브처럼 따뜻한 온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트로이는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러자 미샤가 한 손을 뻗어 그의 손가락 끝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더 꽉 잡고 싶었지만 그를 깨울까봐 망설이는 것 같았다. 손가락 끝을 쥐고 있는 그 애의 손이 너무 뜨겁게 달아오르며 촉촉하게 젖어들고 있어서, 그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고 있어서 트로이는 더 이상 자는 척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옆으로 돌아누우며 한 팔로 미샤를 끌어당겼다.

 

“ 아, 미안. 안드레이, 계속 자. ”

“ 악몽이라도 꿨어? ”

“ 그냥, 잠이 안 와서. 신경 쓰지 말고 자. ”

“ 이리 와, 재워줄 테니까. ”

“ 피곤하게 자던데. ”

“ 그래도 재워줄 수 있어. ”

 

미샤가 담요 안으로 기어들어왔다. 트로이는 그의 머리를 끌어당겨 자신의 가슴 위에 얹고 한 팔로 허리를 안았다. 가슴팍 위로 미샤의 귀와 뺨이 따스한 열기를 내뿜으며 와 닿았다. 미샤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귀를 댄 채 옆으로 누워 있었다. 심장 소리를 세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스케로프가 쓰는 방법대로. 다른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하지만 어둠이 걷힐 때까지 그 아이는 트로이의 심장 소리를 들었고 그대로 머물렀고 아마 잠든 적도 없었던 것 같았다.

 

 

...

 

 

트로이는 새벽에 잠시 깊은 잠에 빠졌고 자명종이 울렸을 때 퍼뜩 놀라 깨어났다. 그때 미샤는 거실 창가에 선 채 두 팔을 위로 쭉 뻗고 금방이라도 대기권을 빠져나갈 듯한 자세로 로켓처럼 몸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차갑고 희미한 아침 햇살 속에서 그 애의 몸은 끝없이 이어지는 광선처럼 길게 솟아올랐고 거기에는 그 어떤 뼈와 살도, 장애물과 가림막도 없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투명했고 한없이 길고 높이 뻗어 올랐고 형체 없이 빛났다. 그림자조차 없었다. 오로지 끝이 보이지 않는 선과 빛, 바람, 주변을 달아오르게 하는 열기 뿐이었다.

 

트로이는 오랫동안 침실 문가에 선 채 그 비밀스러운 변형의 순간을 응시했다. 한참 후 미샤는 바닥으로 내려왔고 두 다리를 반듯한 일자로 뻗으며 머리와 팔과 상체를 서서히 앞으로 굽혔다. 책장을 접듯 몸을 절반으로 접어 아랫배로부터 가슴과 어깨, 두 팔과 이마를 완벽하게 바닥에 밀착시켰다. 양옆으로 길게 펼쳐진 두 다리를 감싼 슬랙스의 얇은 천 위로 근육이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솟아올랐다. 바닥에 엎드려 완전히 정지한 순간에도 그 육체 내부에서는 소용돌이치는 움직임이 끓어올라 흘러넘칠 듯 했다.

 

트로이는 등을 돌려 욕실로 갔다. 어쩐지 일기장을 훔쳐보는 듯한 느낌에 얼굴을 붉히며. 그가 나왔을 때 미샤는 부엌 식탁 위에 걸터앉아 뜨거운 차를 마시고 있었다. 트로이를 보더니 주전자에서 펄펄 끓는 커피를 한 잔 따라주기까지 했다. 알리사의 말이 맞았다. 그 애가 끓여준 커피는 갈랴의 집에서 마신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모이카 운하 뒤편에 있는 단골 카페에서 내주는 커피만큼 훌륭했다.

 

“ 너 이런 실력을 왜 이제야 발휘하는 거야? 5년 동안 한 번도 안 끓여줬잖아. ”

 

“ 냉동 옥수수로 여물 같은 걸 만들어 먹는 게 불쌍해서. ”

 

“ 먹어보지도 않고 그렇게 확신하다니. 맛은 나쁘지 않았는데. ”

 

“ 그냥 커피나 마셔. ”

 

“ 커피 잘 마시지도 않으면서 어디서 이렇게 만드는 걸 배웠어? ”

 

“ 우리 엄마. 아침에 진한 거 두 잔 마시지 않으면 절대 못 깨어나. ”

 

“ 아, 넌 어머니 닮은 거구나, 잠에서 빨리 못 깨는 거. ”

 

“ 생각 안 해봤는데 그런 것 같기도 하네. 엄마도 아침엔 졸려서 그런지 다른 사람이 만들어주는 걸 마시고 싶어해. 그래서 내가 배웠어. 지금은 아리나 바실리예브나가 끓여주지만. ”

 

“ 아리나 바실리예브나가 누구야? ”

 

“ 엄마 아파트에 같이 사는 할머니. 봉쇄 때 가족 다 잃고 혼자야. 음식 솜씨가 형편없어. 커피도 별로야. 엄마가 나한테 집에 들르라고 하는 건 90퍼센트는 커피 때문이라고까지 하더라. ”

 

“ 네 어머니 취향이 나랑 똑같은가봐. 딱 좋은데. ”

 

“ 우리 엄마는 더 진하게 마셔. 설탕은 4분의 1 스푼만 넣고, 크림은 절대 안 넣어. 넌 절대 안 마실 걸. ”

 

“ 그래? 지금 건 어떻게 맞췄어? 레시피 있어? ”

 

“ 모르겠는데, 대충 끓여서.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마셨을 걸. 엄마가 아버지 생일이면 이렇게 만들어서 나한테 줬으니까. ”

 

“ 아... 너희 아버진 달콤한 걸 좋아하셨나 보다. 미식가셨어? ”

 

“ 글쎄. 난 커피는 별로 안 좋아해서. 엄마가 주면 마시는 척만 했어. 차가 더 좋아. ”

 

미샤는 찻잔을 내려놓은 후 냉장고에서 케피르를 꺼냈다. 팩을 뜯어 입에 대고 마시다가 등 뒤에서 트로이가 찬장 문을 열었을 때 경고하듯 말했다.

 

“ 그 빵, 어제처럼 버터 떡칠하려는 거지? 난 안 먹어. ”

 

“ 버터 없이 먹을 수는 없어, 벌써 굳었단 말야. 잼도 바를 거야. 잔뜩. 99퍼센트의 러시아 남자들이 버터와 잼이랑 같이 살아. 나머지 1퍼센트가 너 같은 불쌍한 무용수야. ”

 

“ 1퍼센트도 안 될걸. 레냐도 잼 없이는 차를 안 마셔. 스탄카도. ”

 

“ 일린? 차에 잼을 곁들여 마시는 사람치곤 굉장히 말랐던데. ”

 

“ 음, 나보다 두 배는 더 먹을 걸. 타고 난 거야. 아무리 먹어도 체중이 늘지 않아. 근육도 잘 안 붙고. ”

 

“ 그런 게 부러워? ”

 

“ 전혀. 스탄카는 너무 작아서 밀려났는걸. 볼쇼이나 키로프나 마찬가지야. 어느 정도 외모나 체형이 안 되면 제대로 된 역을 주지 않아. 군무 첫 줄에 제일 잘 빠진 애들을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야. 스탄카 같은 무용수는 아무리 잘 춰도 캐릭터 댄스나 바리아시옹 정도 밖에 못 얻어. 그런 면에선 세레브랴코프 같은 인간이 유리하지. ”

 

“ 너도 못 얻는 역이 있어? ”

 

“ 나한테도 돈키호테 투우사 같은 건 안 줘. 그건 180센티미터 넘는 애들이 가져가. 아사예프는 185 정도를 선호해. ”

 

“ 넌 작지도 않잖아! 기껏 몇 센티미터 밖에 차이 안 나는데도 안 줘? ”

 

“ 발레만큼 편견과 전형으로 가득 찬 공연예술은 없어. 세레브랴코프나 레냐에게는 투우사를 주고 내게는 바질을 주는 거야. 틀에 박힌 이미지도 마찬가지야. 요즘도 아사예프는 로미오 출 때 내게 금발로 물들이라고 하지. 지나가 백조 출 때도. 우린 둘 다 말 안 듣지만. 니나마저도 키트리 출 때는 검은 머리로 바꿔.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아. ”

 

“ 난 네가 원하는 역은 다 가질 수 있는 줄 알았어. ”

 

“ 다 가질 수도 있겠지, 언젠가는. ”

 

미샤는 케피르 팩을 구겨 휴지통에 집어던지면서 돌아섰다. 검은 눈에 회색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 그때도 원할지는 모르겠지만. ”

 

버터와 잼을 바른 빵을 두 조각 먹고 주전자에서 커피를 한 잔 더 따라 마신 후 트로이는 미샤와 함께 집을 나갔다. 그는 학교로 강의를 하러 갔고 미샤는 러시아 미술관에 그림을 보러 간다면서 반대편 방향으로 갔다.

 

트로이는 그가 전날 주워섬긴 곳들을 모두 쏘다닐지 궁금했다. 돔 크니기. 피의 사원. 판탄카. 블라지미르 사원. 쿠즈네츠느이 시장. 스타로 칼린킨 다리... 네프스키 일대와 네바 강변과 핏줄처럼 뻗어나간 운하들 구석구석. 그리고 뒷골목들. 어둠과 습기가 덮쳐와 눈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물과 돌의 도시, 순찰 경찰들과 보안요원들의 눈조차 가로막는 안개가 차오르는 뒷골목들. 미샤는 10월이 다 가도록 극장과 연습실 대신 도시 곳곳을 쏘다녔고 단 한 번도 트로이에게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얘기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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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작년 초 프라하에 머물렀던 동안 썼던 글이 있는데, 분량은 약 200페이지가 좀 안되는 경장편이었고 총 세 파트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글을 쓰게 된 배경은 예전에 올렸던 카페 엘리펀트와 카를로비 바리에 대한 얘기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http://tveye.tistory.com/2022)

 

당시 프라하로 떠났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는 그 글을 시작하지 못했다. 그 글은 1년 반이 지난 지금에서야 쓰기 시작했다. 그곳, 프라하는 추웠고 어딘가 음습했고, 또 외로운 곳이었다. 그리고 추락과 변절, 깊이 스며든 어둠에 대해 생각하기 좋은 곳이었다. 어떤 면에서 러시아와 비슷했지만 그것과는 또 달랐다. 아마도 그랬기 때문에 내가 그곳에서 수용소에 대한 글을 쓰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봐도, 만일 내가 그때 페테르부르크에 머물렀다면, 혹은 한국에 남아 있었다면 내가 그 글을 썼을 것 같지는 않다. 아니, 어쩌면 썼을지도 모른다. 필요한 글이었으니까. 하지만 방식은 달랐을 것이다. 감정도 달랐을 것이다.

 

그 글은 총 3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1부는 수용소 간수, 2부는 주인공을 후원하던 어느 당 간부, 3부는 주인공의 친구를 심리적 화자로 내세우고 있었다. 1~2부는 3인칭 시점으로 썼고 3부는 1인칭으로 썼다. 대부분은 소설의 구조 때문이다. 그리고 화자와 주인공 간의 심리적 거리 때문이기도 했다. 내겐 거의 언제나, 1인칭이 3인칭보다 쓰기에는 쉽다. 보통은 3인칭 시점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이 글은 주로 카페 에벨에서 많이 썼다. 그리운 카페 에벨)

 

발췌한 부분은 3부의 도입부이다. 화자는 스타니슬라프 리보비치 일린이라는 인물로, 볼쇼이 극장 안무가이자 주인공인 미샤와는 절친한 친구이다. 이 도입부에서 화자인 일린은 죄수 면회실에 앉아 있다. 반체제 혐의로 체포된 후 정신교화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약물 쇼크를 일으키고 모스크바 비밀 요양소로 이송된 친구를 면회하러 온 것이다. 물론 그 면회는 죄수의 의지로 이루어진 것도, 화자의 의지도 아니다.

 

새 글 쓰다가 잠깐 구조를 정리하기 위해 작년에 썼던 이 글을 다시 뒤적였다. 잠시 그 때 생각이 나서 몇 문단 발췌해 본다.

 

처음 나오는 크냐제프 라는 인물은 보안위원회, 속칭 루뱐카, 그러니까 KGB 측에서 붙여준 담당 요원. 대화에서 언급되는 게오르기 이바노비치는 주인공을 후원하는 고위직 당 간부이자 2부의 심리적 화자이다. 그리고 라라는 일린의 딸이다. 라라가 미샤를 미하일 세르게예비치라고 부르는 건 이름과 부칭을 모두 붙이는 러시아식 존칭이다.

 

* 이 글을 무단으로 발췌, 인용, 전재, 배포하지 말아주세요 *

 

..

 

 

 크냐제프는 한동안 내게 주의사항을 늘어놓았다. 주로 면회 중 언급해서는 안 되는 내용들에 대한 경고였다. 내게 면회를 허가해준 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했다. 그는 특히 반체제적 발언이나 서방 국가를 찬양하는 언사를 엄금했다. 나처럼 정상적인 소비에트 시민에게 그렇게 죄질이 과중하고 사상이 불온한 정치범과 단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주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라고 입에 발린 걱정을 늘어놓았다. 마침내 나는 가능한 한 차분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쓰며 말했다.

 

 “ 지나친 표현 아닌가요. 게오르기 이바노비치는 미샤가 곧 석방될 거라고 하시던데요. ”

 

 “ 아, 게오르기 이바노비치가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아마 그렇게 되겠죠. 하지만 아직 결재가 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때까지는 여전히 구금 상태고 연방에 위협을 가한 반체제 선동분자로 남아 있다고 해야 가장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뭐 서류상으로는 그렇다 이겁니다. 우리는 명령과 규칙에 따를 뿐이죠, 잘 아실 테지만. 그러니 신중하게 얘길 나누시는 게 좋을 겁니다. 당신 작품의 팬으로서 충고해 드리는 겁니다. 전 볼쇼이를 좋아해서. ”

 

 “ 왜, 아예 그 친구의 팬이라고 얘기하시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은데요. ”

 

 “ 아뇨, 절대 그런 말은 안 할 겁니다. 애초부터 그런 스타일의 무용수는 제 취향에 맞지 않아서요. 안무한 작품들도 표현이 좀 지나친 편이고. 설령 말이죠, 완벽한 가정입니다만, 제가 그 젊은 친구 춤을 조금 맘에 들어한 적이 있다 쳐도, 그 야하게 뒹굴어댔던 마지막 작품을 꽤 높이 평가한다 해도 전 절대 그런 말은 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현명하신 분이니 무슨 뜻인지 잘 아시겠지요. ”

 

 “ 글쎄요, 전 머리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라서. ”

 

 크냐제프는 소리도 내지 않고 웃더니 부드럽게 말했다.

 

 “ 면회 시간은 30분 드릴 겁니다. 꽤 긴 시간이죠. 감시자는 없을 겁니다. 게오르기 이바노비치가 보내신 분이니까요. ”

 

 문을 열고 방을 나가다가 문득 생각난 듯 크냐제프가 덧붙였다. 그 혐오스러운 인간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 아, 스타니슬라프 리보비치. 꼭 30분을 다 채울 필요는 없어요. 그 친구 아직 그럴만한 상태가 아니라서. ”

 

 보안위원회 쪽 작자들은 모두 저렇게 밉살스러운 화법을 교육받는지 궁금했다. 아마 분명히 매뉴얼이 있을 것이다. 전에 미샤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루뱐카 심문관 매뉴얼처럼’ 이란 표현을 무심코 내뱉고는 곧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시치미를 뗐다.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그’ 라는 수식어였지만 억지로 묻지는 않았다. 미샤는 하기 싫은 얘기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 입 밖에 내지 않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내 딸 라라는 전에 미샤에 대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미하일 세르게예비치는 시대를 잘못 탔어요. 십자가와 천사와 성인들, 악마와 용이 득실댈 때 태어났어야 했어’

 

 열네 살짜리 소녀치고는 꽤 예리한 말이었다. 평소에는 미샤나 미셴카라고 부르는 주제에 그때는 이름과 부칭을 제대로 갖춰 불렀고 자못 점잔을 빼며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자신이 벌써 5년 동안 그를 열렬히 짝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전혀 모른다고 철석같이 믿는 모양이었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그 애에게 ‘그럼 그 때 태어났으면 미샤가 무슨 일을 했을 것 같은데, 성 게오르기처럼 용이라도 잡아 죽일까?’ 하고 물었다. 라라는 발칵 화를 내면서 ‘아빠는 몇 년이나 그렇게 가깝게 지냈으면서 아직도 미하일 세르게예비치를 잘 모르는 거야? 절대 남의 피를 자기 손에 묻힐 사람이 아닌데. 그게 악마든 용이든 마찬가지야. 아마 사자한테 던져지거나 화살을 비 오듯 맞고 순교해 성자가 되겠죠.’ 라고 대꾸했다.

 

 처음으로 나는 딸이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내가 ‘그건 너무 끔찍한 상상인데. 게다가 미셴카는 무신론자야’ 라고 말하자 라라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그러니까 아빤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라고 대꾸하고는 자기 방으로 홱 들어가 버렸다.

 

 나중에 나는 미샤에게 라라의 말을 그대로 들려주었다. 미샤는 별로 충격을 받거나 기분 나빠하지도 않고 언제나처럼 낮고 조용한 어조로 대꾸했다.

 

 “ 종 치는 사람. ”

 

 “ 뭐? ”

 

 “ 종 치는 사람 쪽이 더 좋아. 난 교회 첨탑 좋아하거든, 종소리 듣는 것도. 사자한테 물어뜯기거나 화살 맞으면 진짜 아플 거야. 그런 건 별로야. ”

 

 “ 겨우 종지기가 될 거라고 하면 라라가 실망할 텐데. 장엄하거나 영웅적인 맛이 하나도 없잖아. ”

 

 “ 장엄하거나 영웅적인 건 벌써 무대에서 수도 없이 췄는걸. 세상은 그렇게 거창하고 드라마틱하지 않아. ”

 

 그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아주 평범한 사무실 소파에 홀로 앉아 면회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미샤가 틀렸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현실은 거창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무대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끔찍할 수는 있었다. 적어도 미샤 자신에게는 그랬다. 아마 그때도 그는 자기 말을 완전히 믿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

 

 

 

카페 에벨 사진 두 장 더.

 

 

 

지난 4월에 나는 일린의 회상에 등장하는 그의 딸 라라를 화자로 부활절 단편을 하나 쓴 적이 있다. 그 이야기에서 라라는 당시 볼쇼이에서 춤추기 위해 모스크바로 옮겨온 미샤를 짝사랑하는 열 살짜리 소녀로 등장한다. 70페이지 정도의 중편인데 나중에 시간 나면 올려보겠다.

 

** 추가 : 라라가 화자로 나오는 그 단편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3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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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오늘은 비 올 거라고 생각 안 했는데.. 아침에 나가려고 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심지어 어제보다 더 추적추적 내리는 듯 했다.


비를 싫어하지는 않는데 이맘때 내리는 비는 싫다. 춥기도 하고 너무 어두컴컴해서. 이렇게 비가 오면 페테르부르크의 10월이 생각난다. 춥고 습하고 진눈깨비가 날리기 시작하고.. 거기 있을 때도 그맘때 날씨는 싫었다. 사람을 참 우울하게 만든다.


아아, 나는 아직 가을 햇살과 하늘을 만끽하지도 못했고 광합성도 제대로 못했는데!! 안돼애애..


..


날씨 탓에 심신이 처져서 오늘도 끝내려던 일을 반밖에 못함 ㅠ


..


손석희씨와 태지의 인터뷰 기사만 보고 영상은 아직 못 봤다. 아껴뒀다 기분 전환하고 싶을 때 봐야지. 울고 싶을 때 그러지 못하게 하는 건 폭력이라는 그의 말이 당연하면서도 참 좋다.


이번 앨범은 주문해서 들을 생각.



..



오늘 집중이 안돼서 친구랑 잠시 메신저하다가.. 2년 전 이맘때부터 몇 달 간 썼던 글의 플롯 일부에 대한 얘길 나눴다. 그 주인공을 데리고 쓴 여러 편 중 가장 길고 우울하고 감정적으로 격렬했던 글이다. 거기서 벌어지는 몇 가지 사건과 그 인물의 배경, 그가 겪는 몇몇 일들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 후..


친구가 '그 얘기는 너무 암울하다, 날씨도 꿀꿀한데 더 우울하고 처진다, 너무 애를 학대한다, 냉장고에 넣고 싶다..'고 했다.


(냉장고 얘긴 프렌즈를 보신 분들은 알 듯.. 무서운 이야기책을 차마 뒤를 볼 엄두가 안 나 냉장고에 넣는데.. 레이첼은 '샤이닝', 조이는 '작은 아씨들'이었음 ㅎㅎ)


그 글이 좀 우울하고 감정적으로 꽤나 격하게 서술된 것은 사실인데, 등장인물들이나 배경 등등을 생각해보면 개연성은 있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나 좀 뒤틀리고 어둡고 혹은 비극적이거나 격렬한 인물, 상황, 이야기를 쓰는 것이 더 쉬웠다. 사실 거의 언제나 그렇다. 왜냐하면 진정 위대한 것은 희극이며 사람을 웃게 만드는 것은 울게 만드는 것보다 어렵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적 성향 역시 글쓰기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리고 또 이런 중요한 문제도 있다. 글을 쓰거나 써본 사람은 거의 한 번 이상 생각해 본 문제일 것이다. 흔한 얘기다. 작자와 화자(그것이 1인칭이든 3인칭이든, 2인칭이든 어느 시점이든 관계없다), 그리고 삶과 텍스트의 문제다.


물론 작자와 화자는 별개의 인물이다. 작가의 심적 상태와 실제 삶은 텍스트와 등장인물, 텍스트에서 벌어지는 사건들과는 다르다. 대부분은 허구이다. 설령 그 사건들이 실재하는 경험에서 태동되었다 해도 그건 렌즈를 통해 왜곡되고 걸러지고 재창조된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어떤 작품들에 따라붙는 '자전적'이란 표현이 상당히 손쉽게, 혹은 무책임하게 쓰인다고 생각했다. 어떤 의미에서 소위 '자전적'이 아닌 소설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지 모른다. 동시에 그건 반대로도 마찬가지이다.


어제부터 날 괴롭히던 그 글을 '정말로' 시작했는데, 고민과는 달리 그 글은 상당히 힘을 뺀 어조로 시작되었다. 나중에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일단 그렇게 가야겠다. 그 글을 시작하기 전까지, 하나하나에 의미를 담아 아주 정교한 구조를 축조하기 위해 너무 생각이 많았다. 그런데 때로 너무 생각과 고민이 많은 건 독이다.


나는 언제나 글쓰기가 기본적으로는 사랑하는 행위와 같다고 여겨왔다.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비슷하다. 때로는 그저 빠져야 하고 그저 흥분해야 하고 오로지 몰입해야 한다. 이 글에서도 다시 그런 순간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수 있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건 예고 없이 찾아오는 순간이며 일종의 선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사랑을 나누는 것과 흡사할지도 모르겠다.


.. 그건 그렇고 하여튼 저 대화의 결론은, 주인공을 학대하지 말고 우울하지 않은 글을 쓰라는 것 :)

난 별로 학대하는 것 같지 않았는데.. 시대적 배경과 인물의 행동/사고 양태 상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거지 내가 가학적인 건 아니라고요 ㅠ



.. 후반부에 글쓰기 얘기를 길게 늘어놓아서 오늘의 메모는 프래그먼트가 아니라 어바웃 라이팅 폴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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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지난주에 바이올리니스트가 화자로 등장하는 단편(http://tveye.tistory.com/3165, http://tveye.tistory.com/3146)을 마무리하고 나서, 이제 원래 쓰려던 글을 시작하려던 참인데 머리도 식히고 전체적인 흐름을 정리하려고 예전에 썼던 글들을 훑어보고 있다.

 

작년 초에 마무리했던 꽤 긴 글이 있는데 그 글의 화자는 지난번에 몇 번 발췌했던 부분에 등장한 적이 있는 트로이라는 인물이다. 레닌그라드의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강사이고 주인공인 미샤의 친구이다. 이 사람은 해외 문학과 지하 문학 등을 몰래 공유하는 모임을 조직한 적이 있는데 주인공과도 그곳에서 만난다. (메밀죽 안 먹으려는 릴렌카와 그 꼬마의 아빠 이야기: http://tveye.tistory.com/2952 도 이 글에서 발췌했다) 이 글의 배경은 1970년대 초반에서 중후반, 레닌그라드이다. 이 글에서 다루는 시기에 주인공은 미샤는 발레학교 학생이었다가 키로프에 입단해서 몇 년 동안 춤을 춘다.

 

지난주에 발췌했던 사과 파이 에피소드(http://tveye.tistory.com/3165)에서 미샤는 화자인 바이올리니스트 코즐로프에게 자기 친구를 좀 닮았다고 말하는데 이 글에 나오는 트로이 얘기다. 트로이는 이 인물의 성에서 따온 애칭이고 본명은 안드레이인데, 당사자는 자기 이름을 싫어해서 친구들 사이에서는 언제나 트로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주인공은 꿋꿋하게 이 사람의 본명을 부른다(주인공이라서 ㅋㅋ)

 

이미 마무리한지 2년이 다 되어가는 글인데, 오늘 훑어보다가 딱 이맘때 가을 얘기가 있어 올려본다. 발췌한 부분의 배경은 1976년 10월 초. 레닌그라드 국립대학교 교정이다. 미샤는 어깨 부상 때문에 모스크바에서 치료를 받고 돌아온 직후이다. 이 소설은 전체적으로 좀 어두운 편이지만 이 부분 쓸 때는 즐거웠다.

 

발췌한 부분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다닐로프와 세레브랴코프, 베론스카야 등은 키로프 극장 쪽 사람들로 물론 가상의 인물들이다. 뒤에 나오는 이고리, 타냐 등은 트로이의 문학 모임 친구들이다.

 

사과 파이 얘기 말미에 나는 이 주인공을 두고 뭔가를 먹이는 얘기를 쓴 적이 거의 없다고 했는데, 사실 이 부분에서도 이 사람이 뭘 먹기는 한다. 사과 파이처럼 맛있게 먹지 않아서 그렇지..

 

* 이 글을 무단으로 발췌, 인용, 전재, 배포하지 말아 주세요 *

 

..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날 미샤는 트로이의 학교로 찾아왔다. 퇴원 후 거의 3주 만이었다. 강의를 모두 마치고 학과 사무실에 들렀다 나오는데 미샤가 교정 잔디밭 앞 벤치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이미 10월이었고 햇살에도 불구하고 날씨가 싸늘한 편이었지만 미샤는 더블 버튼 재킷 외에는 스카프조차 두르지 않고 벤치 위에 편하게 누워 있었다. 목덜미까지 자라났던 머리칼도 단정하게 자른 데다 쏟아지는 햇살 때문인지 알이 큰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맨 처음에 트로이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곁을 지나칠 뻔 했다. 그러자 미샤가 그를 불렀다.

 

 “ 안드레이, 그냥 가면 안 되지. 난 아침부터 굶었는데. ”


 
 트로이는 그를 학교 식당으로 데려갔다. 미샤는 대학교 식당에 처음 들어와 본다며 신기해했고 생각보다 음식 종류가 많고 가격도 싸다고 또 신기해했다. 더블 단추가 달린 암청색 재킷과 꼭 맞는 검은색 진을 입고 운동화를 신은 채 진열대를 구경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신입생처럼 보였다. 물론 그가 걸치고 있는 옷들이야 일반적인 대학 신입생이라면 구하기도 힘들고 구한다 해도 가격을 치르기 어려울 정도일 테지만. 미샤는 연습실에 드나들 때나 거리를 쏘다닐 때는 편한 차림을 하고 다녔지만 필요할 때는 꽤 세련되게 옷을 입는 편이었다. 그의 열성팬들 중에는 계절별로 유명한 외국 브랜드의 옷을 보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반적인 러시아 남자답게 패션에 큰 관심이 없는 트로이가 밀수품 아니냐고 물으면 미샤는 어차피 소련 공장에서 나오는 옷들 외엔 전부 밀수품이라고 대꾸하며 개의치 않고 그 옷들을 입었다.

 

 한번은 당국에서 의류공장 활성화를 위해 다닐로프에게 무용수들의 모델 협조를 부탁한 적이 있었다. 다닐로프는 외모와 비율이 뛰어난 울리얀 세레브랴코프와 올가 베론스카야, 그리고 지나이다와 미샤를 보내기로 했다. 타마라의 말에 따르면 다들 촬영에 협조하기로 했지만 미샤는 거절했다. 물론 다닐로프는 버럭 화를 냈다.

 

 “ 이건 가기 싫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냐. 가서 두어 시간만 찍고 와. ”


 “ 레오니드를 보내시죠, 그 멋진 옷들을 소화하려면 그 친구 정도 체격은 돼야 어울릴 테니까. ”

 

 다닐로프도 미샤가 비꼬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 그렇게 큰 사람은 울리얀 하나로 족해. 남자는 금발과 흑발이 필요하고. ”

 

 그러자 미샤가 극장의 검은 머리 남자 무용수들의 이름을 읊기 시작했기 때문에 다닐로프가 소리를 지르며 가로막았다.

 

 “ 공장 책임자가 자네 이름을 찍어서 보냈어. 다른 사람들은 바꿔도 자넨 못 바꿔. 당장 안 가면 징계야. ”

 

 미샤는 결국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처럼 촬영을 하러 갔다. 타냐는 국영 백화점과 의류상점마다 쫙 깔린 그 옷들의 카탈로그를 몇 부 얻어 와서 좋아했지만 미샤는 그 사진을 볼 때마다 괴로워했다. 그 별 것 아닌 촬영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순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짜증을 냈다. 고스치니 드보르의 의류상점 진열창에 그 체크무늬 재킷과 폴리에스테르 바지를 입고 있는 자신의 화보가 걸려 있는 동안에는 네프스키 대로를 걷지도 않으려고 했다. 모임의 친구들은 미샤가 평소의 침착하고 서늘한 태도와는 달리 그 일에 짜증을 내고 부끄러워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한동안 국영 의류공장 모델이라고 놀려댔다. 특히 이고리가 그랬다. 

 

 “ 화내지 마라, 모델 양반. 네가 입은 재킷을 적어도 수백만명이 입을 텐데. 소비에트 사회 아니면 어느 나라에서 그런 놀라운 일이 있겠냐. 거의 인민예술가 수준의 영광이지. ”


 “ 수백만명! ”

 

 미샤가 토할 것 같은 표정으로 이고리를 노려보더니 타냐가 들고 있던 카탈로그를 구겨서 휴지통에 집어던졌다.

 

 “ 왜 그래, 인민을 선도하는 미남자가 됐다고 생각해. 그 옷 연방이랑 동맹국에도 수출할지 누가 알아? 오늘만도 네프스키에서 그거 입은 남자 다섯 명은 봤어. 뭐가 그렇게 수치스러워? 수백만장 찍는 질 나쁜 공산품 모델이 돼서? ”


 “ 단추가 잘못 달렸어. 칼라도 비뚤어졌어. 진창과 토사물을 섞어놓은 것 같은 색깔이야. 어떻게 이런 걸 수백만장을 찍어낼 수가 있어! ”

 

 미샤의 그 재킷 카탈로그를 보면서 나름대로 괜찮으니 자기도 한 벌 사볼까 하고 생각했던 트로이는 깜짝 놀라서 그 말을 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미샤가 몇백만장 찍어내는 질 나쁜 공산품 모델이 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촌스러운 옷을 입고 촬영한 사실에 화가 났다는 것이 아주 우스웠지만 그 말도 입 밖에 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근사한 재킷과 진을 입고 진열대의 음식을 구경하고 있는 미샤를 보면서 트로이는 잠시 단추와 칼라가 비뚤어진 흙탕물 색깔의 소련 공장 재킷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때 미샤는 촌스러운 옷 때문이 아니라 그게 당국의 명령이었기 때문에 화가 났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미샤의 옆으로 가서 조그만 단지에 들어 있는 닭고기 수프나 펠메니를 먹으라고 했다. 미샤는 물론 그의 조언을 거부하고 우하 수프와 게살 샐러드를 시켰다.

 

 “ 우리 학교 식당 우하는 맛없어. 닭고기 수프가 제일 맛있다니까, 알랴도 런던에서 왔을 때 그것부터 찾았는데. ”


 “ 저쪽 테이블에서 먹고 있는 저거잖아. 기름이 이렇게 두껍게 떠 있어! 게다가 노란색이야! ”


 “ 기름기가 많을수록 좋다는 속담 몰라? ”

 “ 그럼 네가 시켜. 나한테 한입 주면 되겠네. ”

 

 미샤는 주문한 음식을 다 먹었고 트로이의 닭고기 수프도 정말 한두 입 먹었다. 안색도 전보다 나아 보였고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야윈 것도 덜했다. 눈 아래 패여 있던 그림자도 거의 사라져 있었다. 짧아진 머리와 옷차림 때문인지 스무 살도 안돼 보였다.

 

..

 

여기 등장하는 레닌그라드 국립대 학생식당은 나도 가끔 가던 곳이다 :) 단지에 든 닭고기 수프 엄청 느끼하지만 먹고 나면 몸이 따뜻해진다고 친구들은 좋아했었다. 나는 차마 못 먹고 가끔 몇 숟가락 뺏아먹기만 했는데 심대하게 느끼했다!! 물론 내가 다닐 때는 이미 소련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저 글 속 식당과는 좀 달랐을 테지만.

 

이 부분을 쓸때 즐거웠던 이유는 저 주인공이 사람들 앞에서 좀처럼 저런 식으로 짜증을 내거나 유치하게 굴지 않기 때문이다. 뭐 미감이 뛰어난 사람에게 흙탕물 색깔의 이상한 소련 옷을 입히고 사진까지 찍어서 진열하게 한다면 열받긴 했겠지. 심지어 반체제주의자라면 더.

 

** 이 주인공에 대해 료샤가 불쌍히 여길 뻔한 얘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187

:
Posted by liontamer
2014. 10. 4. 21:51

잠시 : 글, 사과 파이 등 about writing2014. 10. 4. 21:51

지난주에 끝낸 글 퇴고 중인데, 앞선 오늘 메모(http://tveye.tistory.com/3164)에서 잠깐 얘기했듯 거의 마지막 부분에 주인공과 화자가 함께 늦은 점심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 사과파이가 나오는데 덕분에 오늘 사러 갔었다.

 

지금 내 상황에서 사과파이를 먹는 것은 식이요법을 마구 무너뜨리는 짓이라 반쯤 농담조로 '사과파이 대신 버섯 샐러드나 보르쉬나 먹일걸' 하고 투덜댔지만, 사실 이 글에서는 그게 사과파이여야만 했다. 뭐 논리적으로야 다른 나무열매 파이가 될수도 있고 심지어 잼을 가득 얹은 케익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주 달콤한 무엇인가라면 되는 거였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쓰는 사람의 구상과 사고 구조 속에서 그건 사과파이여야 했다. 

 

지난번 잠깐 발췌했던 글(http://tveye.tistory.com/3146)과 같은 소설이다. 거기서는 화자가 주인공의 청에 따라 바이올린을 켰다. 여기 발췌한 부분은 그 이후 이어지는 내용이다. 중간에 좀 생략된 부분들이 있긴 하지만.

 

화자는 지방의 소도시 시립극장 오케스트라 바이올리니스트. 이름은 로만 코즐로프. 주인공인 미샤는 그 극장의 신임 예술감독으로 부임한지 한달 정도 된 상태이다.

 

글에 나오는 '칼바사'는 러시아식 소시지의 일종으로 기름기가 많고 꽤 짭짤한 편이다. 짙고 어두운 붉은색의 밀도높은 소시지를 잘라보면 단면에 하얀색 기름이 송송 박혀 있다. (난 못 먹는 음식이었다 ㅋㅋ) 러시아식 오픈 샌드위치인 부체르브로드 위에 올라가는 경우가 많다.

 

* 이 글을 무단으로 발췌, 인용, 전재, 배포하지 마세요 *

 

...

 


 미샤가 소파에 기대어 다시 조는 동안 나는 칼바사와 치즈를 얹어 간단한 샌드위치를 만들고 통조림을 따서 토마토 수프를 데웠다. 뭐든 먹여야 취기에서 좀 풀려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도 무척 배가 고팠지만 요리를 하기에는 만사가 귀찮았다. 그래서 볼코프가 손녀의 솜씨라며 가져다주었던 사과파이에 연유를 잔뜩 끼얹었다. 여섯 살짜리처럼 구는 놈이니 분명히 입맛도 그럴 것이다.

 

 자식은 아무 것도 먹지 않으려고 했다. 두들겨 패겠다고 협박해서 식탁으로 끌고 왔다. 샌드위치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하긴 그렇게 계속 토했으니 기름진 칼바사가 당기지 않을 만도 했다. 그래서 수프를 먹으라고 강요했다. 어쨌든 토마토 수프는 숙취 해소에 좋기 때문이다. 미샤는 수프를 한 숟가락 삼킨 후 투덜거렸다.

 

 “ 그건 진짜 토마토 얘기지. ”


 “ 가짜 토마토도 있나? ”


 “ 우리 공장에서 나온 통조림은 전부 가짜라고. ”


 “ 어쩌면 저렇게 입에서 나오는 소리 하나하나가 전부 잡혀갈 내용인지. ”


 “ 잘됐네, 누구는 말 때문에 잡혀가고 누구는 폭행으로... ”


 “ 난 그런 적 없어. ”


 “ 전형적인 가해자의 논리를 구사하시는군. ”


 “ 심신상실자의 증언은 아무도 안 믿어줘. ”


 “ 심신상실자? 내가? ”

 

 미샤가 숟가락으로 그릇을 땅 쳤다. 그 돼먹지 못한 식사예절에 뒤통수를 한 방 갈겨줄까 하다 참았다.

 

 “ 떡이 되게 취했었잖아. 기억이나 제대로 나나? ”


 “ 기억하고 말 게 어디 있어. 당신이 팼겠지. 그러니까 멍도 들고 이렇게 아픈 거지, 설마 내가 자해를 했겠어? ”


 “ 정말 기억 못하는군. 술 마시면 원래 그래? 필름 끊기고 기억 못해? ”


 “ 중요한 건 기억해. ”

 

 미샤는 수프를 한 모금 더 삼켰고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덧붙였다.

 

 “ 아마도. ”

 

 어디까지가 중요한 것인지 묻고 싶었다. 그리고 간밤의 일을 어디까지 기억하는지. 알콜로 엉망이 되어버린 저 귀엽고 조그만 머릿속에서 간밤부터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을 하나하나 꺼내보고 싶었다.

 

 반쯤은 내 협박에 질려서, 반쯤은 관성적으로 미샤는 수프를 다 먹었다. 하지만 사과파이는 거부했다.

 

 “ 먹어두는 게 좋을 걸. 사과도 숙취 해소에 좋아. 통조림도 아니고. 볼코프 손녀가 직접 따서 만든 거라고. 꽤 맛있어. ”


 “ 단 거 잘 안 먹거든. ”


 
 의외였다. 나는 관찰력이 꽤 좋은 편이었고 특히 사람들의 식성에 대해서는 틀린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 남자 무용수들도 그런가? 발레리나 계집애들처럼 몸매 관리하고 음식 조절하고? ”


 “ 사람에 따라 달라. 안 그런 애들이 더 많지만. 난 학교 다닐 때부터 안 먹었어. 춤에 방해될까봐. ”


 “ 어차피 은퇴했다면서. 그냥 먹어. 속이 울렁거릴 테니까. 당분이 도움이 될 걸. ”


 “ 당신은 꼭 내 친구처럼 말하는데. ”


 “ 참 놀랍군, 친구가 다 있다니. 그 성깔에. ”


 “ 있어. 많지는 않지만. ”

 

 미샤는 잠시 침묵했다가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 좀 닮았어. 교회 첨탑처럼 큰 것도. ”

 

 어쩐지 그 말은 오케스트라 때문에 낚았다는 말보다 더 기분이 나빴지만 또 한 대 팼다가는 자식이 영영 나가버릴 것 같아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다.

 

 미샤는 포크로 사과파이를 조금 잘라서 먹었다. 그래도 연유는 한쪽으로 긁어냈다. 나는 그 애가 파이를 먹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조그만 파이 조각을 지독하게 천천히 먹었다. 남은 파이를 한꺼번에 입 안으로 밀어 넣고 싶었지만 참았다. 자식이 눈을 가늘게 뜨며 행복하게 웃었기 때문이다.

 

 “ 당신 말이 맞네.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 먹어봐. ”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 나는 심장 한 구석을 칼로 베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뱃속이 뭉클거렸다. 팔을 뻗어 그 애를 껴안고 싶었다. 뺨을 쓰다듬고 싶었다.

 

 “ 사과가 좋기 때문이지, 여기 숲에서 난 건 레닌그라드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될 걸. ”


 “ 이렇게 단 건 정말 오랜만에 먹어. ”


 
 파이 접시를 앞으로 밀어주자 미샤는 나머지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뜨거운 차를 주자 좋아했다. 하지만 차에 설탕을 넣지는 않았다. 레몬조차 넣지 않았다. 연유를 계속 접시 귀퉁이로 밀어내고 있었다. 마침내 나는 남은 파이를 포크로 끌어당겨 연유를 잔뜩 묻혀 주었다. 자식은 좋아하는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처럼 원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한번쯤 먹어봐도 괜찮을걸. 어차피 단 거 먹고 있잖아. ”

 “ 차원이 다르잖아. ”


 “ 단 걸 먹는 것도 배워야 할 거야. 여기서 겨울을 나려면. ”


 “ 레닌그라드도 추워. ”


 “ 그땐 감독이 아니었겠지. 춤만 추면 됐잖아. ”


 “ 감독이 된 거 하고 설탕이 잔뜩 들어 있는 연유를 먹는 게 무슨 관계가 있는데? ”


 “ 뭐든 처음이 있다는 얘기지. ”


 “ 볼셰비키 식 논리인데. 대전제를 아무 데나 다 이입하는. ”


 “ 어쨌든 먹어봐. 더 맛있을 테니까. ”

 

 미샤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한없이 부드럽고 조용한 눈빛이었다. 아직 취기에 잠겨 있는 눈. 자식이 영영 술기운에서 깨어나지 않기를 빌고 싶을 정도였다.

 

 미샤는 남은 파이를 전부 먹었다. 연유와 함께. 너무 달아서 속이 뒤집힐 것 같다고 툴툴거렸지만 끝까지 먹는 걸 보니 내심 맛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 애가 파이를 먹는 동안 나는 샌드위치를 전부 해치우고 설탕을 탄 차를 마셨다. 미샤는 한참 먹다가 뒤늦게 파이를 반 토막으로 잘라 내게도 먹으라고 했다. 볼코프가 통째로 한 판 가져다 줘서 많이 남아 있다고 하자 좋아하는 눈치였다.

 

 미샤는 어두워질 때까지 우리 집에 머물렀다. 점심을 먹고 난 후에는 더 이상 토하거나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내내 취해 있었다.

 

...

 

소설은 이후 한 페이지 정도 더 지속된다. 하지만 실질적인 에피소드는 여기서 끝난다. 나는 이제껏 이 주인공을 놓고 단편이나 중편, 장편 등 몇 편의 글을 썼지만, 이 사람이 뭔가를 먹는 장면을 쓴 적은 별로 없다. 뭐 몇 차례 있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쓴 적은 없다. 어쩌면 그래서 사과파이여야 했던 건지도 모른다.

 

소설의 배경은 1981년이고 당시 주인공은 스물여섯 살을 앞두고 있다. 다소 까칠하고 다혈질인 화자 코즐로프는 마흔 살이다. 이미 40대로 접어든 소도시 바이올리니스트의 시점으로 글을 전개하는 것은 즐거우면서도 어딘가 슬픈 일이었다. 아마 내가 더 이상 이전처럼 젊은 심장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이미 미샤보다는 코즐로프의 나이에 더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코즐로프가 사과파이에 연유를 끼얹는 것은 사실 생각하면 좀 괴로운 일인데... 무지무지 달콤한데다 어딘지 참 촌스러운 맛일 것 같긴 하지만.. 글의 배경이 물자가 풍족하지 않은 소련 시절이라서(ㅜ.ㅜ) 그리고 러시아 사람들은 단 것을 아주 좋아한다. 연유와 잼도 좋아한다. 고백하자면 나도 블린에 연유를 흠뻑 끼얹어 먹는 걸 좋아했었다.

 

** 결국 사와서 먹어버린 사과 파이 : http://tveye.tistory.com/3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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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약 한 달 가량 써오고 있는 글이 있는데 오늘이나 내일쯤 끝내고 퇴고에 들어갈 듯하다. 원래 구상한 꽤 복잡한 구조의 장편이 있는데 그거 서두 시작하기가 힘들어서 중간에 삽입되는 에피소드를 먼저 쓴 것이다. 어차피 다성악 구조로 이루어져 있어 나중에 끼워맞춰도 된다만. 생각보다 길어져서 나중에 삽입 버전으로는 훨씬 간결하게 다듬어야 할 것 같다.

 

배경은 1981년. 아직 페레스트로이카가 닥쳐오기 전이고 브레즈네프 정체기가 막바지에 접어든 무렵의 소련이다. 이전에 몇번 발췌했던 글에 등장했던 무용수이자 안무가인 주인공 미샤는 이 시기에 큰 시련을 겪고 있는데, 반체제주의를 비롯한 몇몇 정치적 혐의로 체포되어 정신교화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정치적 후원자들과 해외 지지자들의 도움으로 풀려난다. 다만 완전한 사면은 아니어서 소련 내의 어느 지방 도시(가상의 도시이다)에 유배되어 그곳 극장 예술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이러한 배경으로 그 문제의 글을 2년 전부터 구상했는데 이게 참 생각처럼 잘 안 풀려서 모든 플롯과 인물도 다 구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쉽지 않다. (그래서 이거 준비하려다 주인공의 다른 시기를 다룬 글들만 몇개나 더 썼다)

 

발췌한 부분은 주인공이 촌동네 극장에 부임해 와서 한참 어려움을 겪는 초기에 일어난 일이다. 화자는 극장 오케스트라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 둘은 오케스트라 연주 문제로 계속 심하게 충돌해왔는데 이번에 쓴 에피소드에서는 그 둘이 어떻게 관계를 맺고 오해를 풀게 되는지를 다룬다. 발췌 부분에서는 미샤가 잠깐 춤을 보여주지만 그건 드문 일이고 꽤 사적인 순간인데, 배경이 되는 1981년에는 그가 이미 은퇴하여 더 이상 무대에 올라가지 않는데다 수용소 이후 육체적으로도 손상을 입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프라하에 머물 때 나는 그의 수용소 시기를 다루는 경장편을 하나 썼는데 그건 총 3부로 이루어져 있었고 세 사람의 시점으로 묘사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내가 그곳에 있지 않았다면 그 글은 씌어지지 않았을 것 같다. 지금 쓰는 글이 내가 다른 곳에 존재한다면 또 다른 식으로 씌어질지도 모르듯이.

 

발췌한 내용은 미샤가 화자인 바이올리니스트에게 한 곡 켜달라고 청한 후 벌어지는 일이다. 뭐 별다른 사건이랄 건 전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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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뒷골이 띵하도록 부담감을 느꼈다. 그러다가 어차피 차원이 다른 놈이니 내가 뭘 어떻게 하든 삼류로 들릴 게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홧김에 아무 거나 켜기 시작했다.

 

지금도 나는 그때 무슨 곡을 연주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미샤는 바닥에 누운 채 가만히 연주를 들었다. 나는 단 한 번도 관객과 눈을 맞추며 연주하는 타입이 아니었고 사귀거나 잠자리를 같이 하는 상대에게 바이올린을 켜준 적도 없었기 때문에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아마 내 연주는 형편없었을 것이다.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연주하는 내내 내 시선은 바닥에 누워 있는 미샤에게 쏠려 있었다. 오후 햇살 때문에 몸에 반쯤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다행히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면 분명 박자를 더듬었을 것이다.

 

활을 내려놓았을 때 미샤가 말했다.

 

“ 더, 로만. ”

 

자식은 꼭 침대 위에 있을 때처럼 그런 말을 했다. 이름을 부르면서. 더 세게, 로만. 입 맞춰, 로만. 그 조그맣고 예쁜 입에서 애칭 따위는 밀려나오지 않았다.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까지도. 그저 간결하고 정확한 진짜 이름 하나 뿐이었다. 그 아이가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현기증이 났다.

 

나는 다시 활을 움직였다. 여전히 기억나지 않는 곡을 켰다. 짧고 빠르고 격렬한 곡이었다는 것만 생각난다. 어쩌면 프로코피예프였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쇼스타코비치. 자식은 분명 그자들의 음악을 좋아할 것이다. 저토록 이글거리는 까만 눈을 가진 아이를 사로잡고도 남았을 것이다.

 

미샤가 옆으로 몸을 굴려 일어났다. 더 이상 휘청거리지 않았다. 눈에는 완벽하게 초점이 돌아와 있었다. 두 눈에 불길을 간직한 아이. 나는 반쯤 오기로, 그리고 반쯤은 농담을 섞어서 차이코프스키를 켜 주었다. 문제의 그 백조 아다지오를, 그리고 그 망할 오데트의 솔로를. 그때 미샤가 춤을 췄다.

 

그건 아주 짧은 솔로였다. 기껏해야 2분 30초도 안 되는 곡이었다. 난 바로 그 곡 때문에 자식과 싸웠다. 뭐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그때 춤을 췄던 건 타마라 루세츠카야였다. 우리 극장에서 제일 잘 나가는 프리마 발레리나. 그런데 그 자식은 연주를 바꿔야 한다고 볼코프와 나를 들들 볶았다. 무용수와 맞지 않는다고...

 

그건 계집애의 춤이었다. 백조 여왕이 레이스 달린 튀튀를 펄럭이며 발가락 끝으로 선 채 휘청휘청 빙글빙글 도는 춤. 그런 지루하고 재미없는 춤을 보면서 갈채를 보내는 관객들이 별로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뭐 차이코프스키를 연주해 급료를 받아먹고 사는 입장으로서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미샤는 처음부터 시작하지도 않았다. 30초 쯤 연주했을 때 예고도 없이 몸을 길게 내뻗으며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왔다. 물결이 이는 듯했다. 자식이 춤을 추기 시작했을 때, 그 갑작스러운 움직임은 내 연주와 그 어떤 충돌도 없었다. 그 애는 그저 공기처럼, 스치는 바람처럼 들어왔다. 한순간 그 자리에 있었다.

 

 듣고 따라가는 게 아니라 같이 가야 해. 음악 안으로 들어가고 나올 줄 알아야 해.

 

자식이 그렇게 말했을 때 난 화가 치밀었고 이용당했다고 생각했었다. 주먹을 휘둘렀다. 그런데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 빌어먹을 꼬마가 말했던 건 모두 옳았다.

 

자식은 믿을 수 없이 우아하고 근사하게 춤을 췄다. 낡은 티셔츠 사이로 뻗어 나온 두 팔이 인간의 것이 아니라 진짜 백조에게 돋아난 날개처럼 보였다. 부드럽게 굽혔다가 길게 내뻗고 빙그르르 도는 다리를 보자 전율이 느껴졌다. 거기에는 어떤 무게도,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나 가볍고 너무나 투명했다. 토슈즈도 없이, 맨발로 카펫을 밟으면서 그렇게 출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건 여자 무용수의 춤이었고 가느다랗고 하늘하늘한 팔다리를 과시하는 여성적인 동작들이었지만 자식은 물론 전혀 계집애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내아이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이상한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새 같았고 유령 같았고 천사 같았다. 어쩌면 바로 그래야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차이코프스키의 그 곡에 서려 있는 투명하고 슬픈 음률에는 어딘가 비인간적인 곳이 있었다. 마법에 걸린 백조 여왕 따위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환상에서 태어난 존재였다. 안개처럼. 그리고 미샤는 그렇게 췄다. 안개처럼, 환상처럼 몸을 놀렸다. 자식이 회전했다. 하지만 내가 청했던 정신 나간 푸에테, 다리를 채찍처럼 휘젓는 곡예는 아니었다. 아주 느리고 비현실적으로, 깃털이 부유하듯 돌았다. 온몸이 날개와 깃털과 공기, 그리고 그 자욱하고 달콤한 냄새로 이루어진 것처럼 돌았다. 그리고 음악이 끝나는 순간 자식이 나갔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스며들고 증발하는 기체처럼. 이제껏 이 곡을 연주하면서 그런 충격을 받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바이올린과 활을 내려놓았다. 미샤에게 갔다. 단 두 발짝 만에. 미샤는 경탄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린애처럼 보였다. 춤을 췄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표정이었다.

 

“ 당신 정말 큰데. 강물도 뛰어서 건너겠어. ”

 

넌 날아서 건너겠지. 하마터면 얼간이처럼 그렇게 지껄일 뻔 했다. 다행히 나는 입을 다물었다.

 

..

 

 

미샤가 추는 춤은 키로프 발레단 버전 백조의 호수에서 오데트가 추는 솔로이다. 물론 그는 그 춤을 소위 '여자처럼' 추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배역이 갖는 환상성과 투명함,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듯한 비현실성과 무중력 상태의 분위기를 온전하게 포착했을 것이다.

 

이전에 올린 적이 있지만, 그 부분을 추는 울리야나 로파트키나의 솔로 클립. 최고의 백조답게 그녀의 솔로는 아주 근사하다. 위의 글을 쓰면서 이 클립을 다시 여러 번 돌려봤다. 물론 그는 로파트키나처럼 추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통하는 부분들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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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먼저 올린 지젤의 알브레히트에 대한 메모와 알브레히트를 추는 루지마토프, 슈클랴로프 영상 클립과 연관해서.(http://tveye.tistory.com/3127)

 

작년 초에 마무리했던 글에서 발췌.

 

배경은 1970년대 소련 레닌그라드. 발췌된 부분은 1973년 가을. 주인공은 레닌그라드 출신 무용수로 이후 안무가가 된다. 발췌된 글에 나오는 트로이는 그의 친구. 율리야는 주인공의 어머니. 트로이에 대해서는 전에 몇번 다른 부분에서 발췌한 적이 있다.

 

크류코바를 비롯해 여기 등장하는 무용수들은 모두 허구의 인물들이다. 그러나 재능 넘치는 신인 무용수의 데뷔나 반응, 출세 등등에 대한 이야기들은 여러 무용수들에게 실제로 있었던 내용에서 일부를 참고하기도 했다. (프리마 발레리나인 크류코바가 미샤를 낙점해 파트너로 만드는 건 사실 크셰신스카야와 니진스키, 두딘스카야와 누레예프의 예에서 따왔다. 워낙 유명한 얘기들이기도 하고)

 

이 글을 쓸 당시 나는 심신 양쪽으로 매우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쓰는 행위를 통해 바닥으로 내려갔다가 올라올 수 있었다. 그래서 완성도나 정교함을 떠나서 내겐 중요한 글이었다. 굉장히 오랜만에 다시 장편을 쓸 수 있었고 그것도 중요했다.

 

 

* 이 글을 퍼가거나 도용/배포하지 마세요 *

 

...

 

 

 키로프에 입단한 후 미샤 야스민은 스타가 되었다. 그는 일반적인 신입 단원이 거치는 단계들을 훌쩍 뛰어넘었다. 극장에서는 순전히 위계질서를 너무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 시즌 첫 한 달 동안은 그에게 두세 차례의 디베르티스망을 추게 했다. 그리고는 곧장 해적의 알리 역을 주었다.

 

 머리에 높은 깃털을 달고 반짝이는 구슬이 박힌 푸른색 하렘 팬츠를 펄럭이며 미샤 야스민이 무대 위로 날듯이 뛰어나왔을 때 어두운 극장 안의 관객들은 놀라움과 흥분으로 몸을 떨었다. 트로이는 몇 년 전 콩쿠르 얘기만 들었을 뿐 미샤가 그 역을 추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미샤는 파란 천을 휘감은 흑표범처럼 뛰어올랐고 중력을 경멸하듯 공중에 머물렀다. 그날 밤 옛 황실극장의 황금빛과 푸른빛 벨벳 좌석에 앉아 있던 관객들 모두는 최면에 걸린 듯 집단으로 사랑에 빠졌다. 아직 18살도 되지 않은 신인 무용수에게, 발레학교를 갓 졸업한 풋내기에게. 완벽하게. 주역인 콘라드와 메도라는 기억 저 편으로 사라졌다. 그 무대 위에는 오직 아랍 의상을 입고 우아한 야수처럼 날아오르는 젊은 알리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트로이는 바로 옆 칸에 앉아 있던 잘 차려입은 여자 하나가 연신 소리를 지르다 머리를 뒤로 젖히며 실신하는 것을 보았다. 기절한 여자는 곧 그의 뇌리에서 지워졌다. 옆에 앉아 훌쩍이고 있는 타냐의 온기와 스베타의 향수 냄새도 지워졌다. 그는 두 손으로 얇은 프로그램 종이를 움켜쥔 채 거대하고 텅 빈 구체처럼 어둠 속에 떠 있었다. 폭발하지 않기 위해 싸우면서.

 

 해적으로 인정받은 후 미샤는 수직으로 올라갔다. 가을 중에 지젤의 주역을 맡았다. 프리마 발레리나인 니나 크류코바가 그를 상대역으로 낙점했던 것이다. 트로이조차도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크류코바는 평범한 스타 발레리나가 아니었다. 그녀는 키로프의 얼굴이나 마찬가지였다. 인민예술가였고 대스타였다. 가장 완벽한 지젤로 불리는 무용수였다. 그 소식을 들은 타냐는 반쯤 심장 발작을 일으킬 뻔 했다.

 

 트로이는 미샤의 어머니를 모시고 그 공연을 보러 갔다. 율리야 야스미나는 평소에는 감정을 별로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지만 그날은 긴장 때문에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팽팽하게 당기며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아들과 마찬가지로 늘씬하고 우아한 몸매에 파도처럼 뒤엉키는 검은 머리와 찌르는 듯한 눈빛의 미인이었다. 흐트러진 긴 머리를 핀으로 틀어 올려 고정시키고 수수한 검은 원피스 외에는 목걸이나 귀걸이 따위로 치장하지도 않았다. 다만 긴 손가락에 가느다란 금반지를 하나 끼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무대에 미샤가 등장했을 때 그녀는 몸이 떨리는 듯 아들이 비엔나에서 사다준 커다랗고 아름다운 숄로 어깨를 감쌌다.

 

 타냐는 미샤가 대스타인 크류코바의 존재감에 너무 파묻히지만 않아도 큰 성공일 거라고 말했다. 트로이는 로미오처럼 순진하고 철없는 알브레히트를 기대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지나치게 젊은 귀족, 마음에 드는 여자를 가볍게 건드리고 불장난을 쳤다가 나비처럼 휙 돌아서는 사춘기 소년 같은 알브레히트를. 그건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다. 20년에 가까운 크류코바와 그의 나이 차이도 그렇고 지난 해적 공연에서 보여준 공기와 바람 같은 특질도 그랬다. 관객들은 이미 니진스키 같은 아이, 날개 달린 천사처럼 춤춘다는 새로 온 무용수에 대해 떠들고 있었고 그 젊은 애의 알브레히트라면 생각 없이 말썽을 피워도 마냥 귀엽게 받아들여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미샤는 그들의 기대와 예상을 단숨에 박살냈다. 그 무대에서 미샤 야스민이 보여준 알브레히트는 철없고 사랑스러운 귀족 소년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이기적이고 사악하며 야비한 탕아였다. 맨 처음 그가 크류코바의 지젤에게 다가가 손을 얹는 순간부터 관객들은 충격에 빠지기 시작했다. 미샤는 1막 전체를 숨막히는 유혹의 드라마로 바꿔버렸다. 그 알브레히트는 크류코바의 순수하고 청순한 지젤, 완벽하게 성적으로 무지한 그 시골 아가씨에게 아랫배에 불을 당겨놓았다. 트로이는 타이츠와 레이스 의상을 입고 춤추는 고전 발레 무대에서 그런 식의 성적 긴장감을 느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알브레히트는 검은 눈의 악마처럼 무대를 휩쓸고 다니며 여자를 정복하고 관객들을 공공연하게 유혹했다. 1막이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 관객석에서 분노 어린 탄식들이 메아리처럼 울려퍼졌다. 그건 배반당한 여주인공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알브레히트에 대한 순수한 증오였다.

 

 막간 휴식시간에 트로이는 율리야를 데리고 홀로 올라가 시원한 샴페인을 두 잔 주문했다. 율리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주변 관객들이 흥분해 떠드는 소리를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대부분이 새로 온 무용수, 아니, 알브레히트에 대한 얘기였다. 미샤와 친해진 후 여러 차례 극장에 와 보았지만 트로이는 관객들이 그렇게 공연에 몰입해서 무용수가 아니라 배역의 이름을 부르고 생생한 증오로 두 눈을 불태우며 그 망나니를 죽여버리고 싶다고 아우성치는 광경을 처음 보았다. 어서 빨리 2막이 되어 그 개 같은 놈이 유령들에게 혼쭐이 났으면 좋겠다고, 결말이라도 바꿔서 유령 여왕이 그 방탕한 자식을 새벽이 되기 전에 죽여버리는 꼴을 봤으면 속이 시원하겠다고 떠들었다. 마치 교양 있는 레닌그라드 시민들이 아니라 난생처음 천막극장에 몰려들어 무대와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고 홀려버린 시골 농민들 같았다.

 

 크세니야가 그렇게 말했었다. ‘렌스키는 여자를 모르는 애였어. 내게 안겨서도 아무 것도 몰랐어.’ 아무 것도 몰랐던 건 크세니야 자신이었다. 그 알브레히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성적 자력으로 휩싸여 있었다. 트로이는 관객들의 격렬한 반응이 그 탕아에 대한 분노 때문인지 아니면 온몸을 떨리게 하는 성적 흥분 때문인지 궁금했다. 어쩌면 둘 다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2막에서 미샤는 다시 한 번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 그 사악하고 음란한 탕아가 흰 옷을 입고 무게도 없이 자기 앞에 나타난 여자의 유령 앞에서 공포와 놀라움으로 소스라쳤다. 2인무를 추는 동안 그 감정은 점차 깊은 죄책감으로, 그리고 그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사랑으로 바뀌었다. 그 짧은 춤을 추는 동안 미샤의 알브레히트는 타락한 악마에서 첫사랑에 빠진 젊은이로 변모했다. 충족되지 않는 욕망으로 불타던 정복자에서 자기 감정과 육체를 가눌 방법조차 모르는 길 잃은 소년이 되었다. 트로이는 어떻게 그런 변형이 가능한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관객들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런 의문을 가질 틈이 없었다. 흰 옷 입은 유령들이 줄지어 늘어서고 화관을 쓴 여왕이 얼음처럼 차갑게 돌아서는 순간, 미샤의 알브레히트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추락해 나뒹구는 것을 반복하며 고통스럽게 몸부림치고 또 애원하는 순간 극장 여기저기에서 관객들의 신음과 낮은 비명 소리가 오케스트라 연주와 뒤섞이며 튀어나왔다. 진짜 공포에 질려서, 안타까움으로 발을 구르며 너도나도 애타게 속삭이고 흐느꼈다. 죽이지 말아요, 그만 용서해 줘요. 제발 살려줘요. 트로이는 맨 앞줄에 앉아 있던 나이든 부인이 지휘자를 향해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 음악 좀 멈춰요, 저렇게 추다 정말 죽을지도 몰라요!

 

 그들 중 누구도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장면이 가공의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정말 어떻게? 이 사람들 모두가 넋이 나간 바보들일까? 수십 번 이 공연을 본 사람들도 부지기수일 텐데? 하지만 트로이도 그 순간에는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는 숨도 쉬지 못하고 율리야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그는 굉음을 내며 뒤집힌 썰매에서 튀어나가 눈보라 속으로 추락하는 미샤를 보고 있었다. 현기증과 구역질이 엄습해와 머리와 턱이 덜덜 떨렸다.

 

 관객들은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유령들이 하나둘 무대 너머로 사라지고 창백하고 아름다운 크류코바의 지젤이 두 팔을 뻗어 바닥에 누워 있는 알브레히트를 포옹했을 때도 모든 것이 끝났으며 제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쉽사리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침내 미샤가 몸을 일으켰을 때 극장 안은 안도의 탄식으로 가득 찼다. 


 
 그 날 크류코바의 숭배자들 중 절반 이상이 우상을 배신하고 자신들이 가져온 꽃을 미샤에게 주었다. 미샤가 인사를 할 때 무대 위로 로켓처럼 꽃다발들을 내던졌다. 조준이 잘 되지 않았거나 너무 가벼운 꽃다발은 오케스트라 석 안으로 떨어지며 꽃잎을 비처럼 흩뿌렸다. 트로이는 그 미친 듯한 열기와 사랑이 일상적인 광경이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율리야는 복도로 나가 코트를 찾아 입고 극장의 무거운 문을 두 손으로 밀었다. 트로이는 문을 대신 열어주면서 물었다.

 

 “ 분장실에 모셔다 드릴까요? 담당자가 제 얼굴을 알아요. ”
 “ 아니, 그냥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 잠깐이라도 보고 싶지 않으세요? ”
 “ 우리 앞줄에 당 간부들이 앉아 있었어요. 아마 그 사람들과 저녁을 먹으러 갈 걸요. ”


 
 그녀의 어조에서 아들에 대한 자부심과 씁쓸한 분노가 동시에 배어나왔다. 트로이는 당의 이름으로 가족이 체포되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 어떤 상처를 남기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침묵했고 율리야를 바실리예프스키 섬의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네프스키로 나올 때는 버스 대신 지하철을 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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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지난번에 내 러시아 친구와 그의 어린 아들에 대한 얘기 중 야채 먹기 싫어하는 에피소드에 대해 fragments 폴더에 쓴 적이 있다. 비트 샐러드 먹기 싫어하는 레냐에 대한 얘기였다. 링크는 아래.

 

http://tveye.tistory.com/2915

 

그때 철없는 아빠와 아들이 귀여워서 웃었는데, 돌아와서 생각해보다 재미있는 사실을 떠올렸다. 실은 작년 초에 마쳤던 소설에 비슷한 에피소드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레냐랑 비트 샐러드 먹으러 갔을 때보다 더 전에 쓴 거였다. 때로는 현실이 허구를 따라가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그건 내가 만들어낸 허구가 현실 속에서 일어날 법한 보편적인 상황을 끌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 부분 발췌해본다. 사실 그렇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그래도 필요한 부분이다. 그 장편은 꽤나 뒤틀린 구석이 있었지만 이 부분은 그렇지 않다.

 

배경은 1977년 봄. 소련 시절 레닌그라드. 등장인물들 이름이 생소하니 잠깐 소개하면

 

갈랴(여), 료카(남) : 부부. + 릴렌카(여) : 이들의 어린 딸

트로이(남) : 주인공

코스챠 : 주인공의 친구

 

.. 이고 이들은 대학 때부터 아주 절친한 사이로 지하 문학을 읽는 서클을 운영하기도 했고 이때도 주말에 모여 실컷 놀고 술 마신 후 갈랴네 집에서 잠들었음... 정도가 이 에피소드의 배경이다. 연령대는 대부분 20대 후반. 릴렌카는 만 세 살.

 

* 이 글을 무단전재, 발췌,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그날 그는 술에 취해 갈랴의 집 소파에서 잠들었다. 토요일 아침에 깨어났을 때 릴렌카가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두 손으로는 뭔가 회색빛의 걸쭉한 것이 가득 들어 있는 사발을 들고 있었다.

 

 “ 술 냄새 나. ”


 “ 미안. ”


 “ 우리 아빠랑 틀려, 턱이 까끌까끌해. ”


 “ 면도를 안 해서 그래. 너희 아빠는 부지런하구나. ”


 “ 늦잠 안돼! 일찍 일어나야지! ”

 

 숙취에 시달리며 세 살짜리 꼬마로부터 설교를 듣는 아침은 결코 상쾌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트로이는 비좁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릴렌카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가 구부러져 있던 팔과 다리를 길게 펴는 것을 지켜보았다.

 

 “ 어떻게 하면 그렇게 쭉쭉 늘어나? ”


 “ 어른이 되면. ”


 “ 우리 아빠는 안 그러는데. ”


 “ 콩나무 같은 어른이 되면. ”

 “ 이거 먹어. ”

 “ 그게 뭐야? ”

 “ 이거는 어른이 먹는 거야. ”

 

 그때 갈랴가 나타나 엄한 목소리로 딸을 불렀다.

 

 “ 누가 삼촌한테 아침밥 떠넘기래! 빨리 식탁으로 돌아와! 다 먹기 전까지는 만화 못 볼 줄 알아. ”

 

 릴렌카가 칭얼거리면서 그릇을 들고 부엌으로 갔다. 갈랴가 고개를 저으며 트로이에게 와서 오렌지 주스가 담긴 컵을 주었다.

 

 “ 딴 애들은 새벽에 다 갔어? ”

 “ 코스챠랑 너 빼고. 걔 지금 샤워하고 있어. ”

 “ 릴렌카가 나한테 먹이려고 했던 게 뭐야? ”

 “ 메밀죽. ”

 “ 윽, 어린애한테 좀 맛있는 걸 먹일 수는 없어? 토요일 아침인데! ”

 “ 료카랑 똑같은 소릴 하고 있네. 남자들이란 정말 왜 그러는 거야! 네 것도 있으니까 와서 한 그릇 먹어. 몸에 좋으니까. ”

 “ 갈린카, 제발 봐줘. 숙취 때문에 죽겠는데 메밀죽까지 먹으라고 하는 건 고문이야. ”

 “ 까다롭게 굴지 마. 미샤는 내가 주는 건 다 먹었는데. 우리 집에 오는 남자들 중 제일 착했지. 그립다. ”

 “ 설마. 네가 만드는 음식은 전부 엄청 달잖아. 그걸 먹었을 리가 없어. ”

 “ 무슨 소리야, 내가 주는 아침밥은 다 먹었어. 메밀죽도 얼마나 잘 먹었는데, 릴류슈카가 안 먹고 있으면 무릎에 앉혀 놓고 같이 먹었어. ”
 

 샤워를 하고 나와 인간의 몰골을 되찾은 코스챠가 끼어들었다.

 

 “ 그건 네가 여자라서 그랬던 거야. 미슈카는 여자들에겐 절대 기분상할 짓 안해. 나도 배워보고 싶었는데 잘 안되더라, 그 기사도 정신. ”
 

 트로이는 그 화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스를 재빨리 마신 후 욕실로 갔다. 잠시 후 부엌으로 가보니 릴렌카가 엄마보다는 훨씬 만만한 아빠에게 떼를 쓰고 있었다.

 

 “ 이제 다 먹었어. 만화 볼래. ”

 “ 반이나 남았잖아. ”

 “ 남은 거 아냐. 이거 삼촌 거야. ”

 

 릴렌카가 금발 곱슬머리 사이로 파란 눈을 인형처럼 깜박이면서 간절하게 트로이를 쳐다보았기 때문에 그는 결국 마음이 약해져서 메밀죽이 반쯤 남아 있는 그릇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 알았다, 내가 먹어줄게. 가서 만화 봐. ”

 

 릴렌카가 좋아하며 거실로 내닫자 료카가 한숨을 쉬었다.

 

 “ 야, 빨리 긁어먹어. 갈랴한테는 비밀이야. ”

 “ 아빠가 대신 먹어줘야 하는 거 아냐? 난 해장이 필요한데! ”

 “ 난 메밀죽이 정말 싫단 말야. 토요일 아침마다 꼬박꼬박 한 그릇씩 먹고 있다고. 너 알잖아, 옛날에 우리 집단농장에 파종하러 갔을 때 자꾸 메밀죽만 줘서 내가 식사 거부하다가 자아 비판할 뻔한 거. ”

 “ 아, 기억난다. 난 네가 화내는 거 그때 처음 봤어. 그것도 먹을 걸로. ”

 “ 지금은 화내면 큰일 나. 갈랴가 주는 대로 안 먹으면 뼈도 못 추려. ”

 “ 그러면서도 빨리 결혼하라고 날 들들 볶아? ”

 “ 그래도 좋은 점이 훨씬 많으니까 그렇지. ”

 

 갈랴가 들어오려는 기색이 보였기 때문에 트로이는 괴로워하면서 릴렌카가 남긴 메밀죽을 두어 숟갈 만에 억지로 입안에 모두 밀어 넣었다.

 

...

 

 

분명히 쓸 때는 레냐나 료샤에 대한 생각은 1%도 안 했지만... 어쩐지 지금 보니 릴렌카와 료카는 성별만 다를 뿐 걔들과 좀 닮았다. (심지어 료캬는 얘랑 이름마저 비슷하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어린아이들은 몸에 좋지만 맛없는 음식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자들이란 개별적인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어른이 돼도 어린애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나중에 다시 만나면 이 얘기 해줘야지 :)

 

 

예약 포스팅 올라가는 동안은 저를 개인적으로 아는 분들은 댓글 다실 때 비밀 댓글 체크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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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3. 4. 28. 14:12

카페 엘리펀트, 카를로비 바리 about writing2013. 4. 28. 14:12

 

 

 

 

내가 지난 2월 프라하로 떠났던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고 누구에게도 그 모든 이유들에 대해 시시콜콜하게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곳에서 어떤 것은 해결이 되었고 어떤 것은 그대로 남았다. 뭐 겨우 두 달 머물렀으니 그럴만도 하다.

 

글쓰기도 큰 이유 중 하나였는데, 실은 도착해서 거의 한 달 가량 쓰기를 시작할 수 없었다. 우울하고 무기력한 나날이 한동안 계속되었는데 그러다가 친구가 나를 만나러 와줘서 카를로비 바리에 잠깐 갔었다.

 

친구는 일 때문에 늦게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먼저 카를로비 바리에 도착해 거리를 산책하다가 호텔 근처에 있는 저 카페 엘리펀트에 들어갔다.

 

 

사실 저 카페에 들어갈 때만 해도 난 엉망이었다. 몸이 아팠고 열이 나고 정신도 산란했다. 나중에 도착해 숙소에서 날 만난 친구는 아픈 애를 괜히 데려왔다고 미안해했다. (그 친구임. 복지리를 갈망하는 애. 뭐 그래서 얘가 카를로비 바리 있는 내내 날 잘 먹이고 짐도 다 들어주고 보살펴주고 챙겨줬기 때문에 신났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ㅋㅋ)

 

 

그런데 사실 나는 그때 기분이 꽤 좋았었다. 몸은 아팠지만 카페 엘리펀트에서 보낸 한 시간이 지금껏 프라하에서 보냈던 20여일의 시간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카를로비 바리에 갔을 때 나는 노트북이나 아이패드 따위를 들고 가지 않았다. 오로지 도블라토프의 소설 한 권, 펜 한 자루와 스프링 노트 한 권을 챙겼을 뿐이었다. 그리고 때로는 그게 전부다. 

 

 

나는 그곳 창가에 앉아 계속해서 나를 괴롭히던 글의 전체 흐름을 정리해보았다. 이건 플롯이 아니라 슈젯을 정리하는 편에 가까웠다. 내가 그토록 힘들었던 것은 이 글에 너무나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이미 나는 그 글을 쓰려다 두 번이나 포기한 후 워밍업을 위해 다른 글을 두 편이나 썼다. 때로 어떤 글을 시작한다는 것은 사랑을 새로 시작하는 것만큼, 아니,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버리는 것만큼 어렵다. 이제 카페 엘리펀트 창가에 앉아 스프링 노트를 가로로 펼치고 펜을 잡은 나는 단순하게 시간적 흐름에 따라 사건과 인물과 내용의 골자를 배열하고 전체적 맥락을 다시 잡았다. 힘을 빼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몇 페이지에 걸쳐 기다란 흐름을 정리하고 나자 뭔가가 명확해졌다. 그리고 이 소설을 위해 마지막으로 하나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인물이 어떤 일을 겪고 그곳에 존재하게 되는지, 이 소설에서 그의 행동 패턴이 왜 변화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그와 나 둘을 모두 납득시켜야 했다. 그건 단순히 그가 나이를 먹거나 철이 들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서 원래 쓰고자 했던 글을 위한 프리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원래는 짧게 툭툭 던져지는 배경으로만 묘사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프라하에 돌아와서 그 글을 시작했고 꾸준히 썼다. 그리고 서울에 와서 글을 끝냈다.

 

 

다음날 아침 호텔의 조그만 식당 창가에 앉아 아침을 먹으면서 친구가 말했다.

 

" 다 나 덕분인 줄 알아라. "

 

" 뭐가? "

 

" 안 아프게 된 거. "

 

" 아직 좀 아픈데. "

 

" 그래도 얼굴이 동그래졌어. 어제 온천 시키고 슈니첼을 먹였더니 이제 사람다워진 거야. 이제 가방 들고 다닐 수 있겠지. 사람 구실을 하겠지. "

 

" 슈니첼 먹고 자서 얼굴이 부은 거야! 좋은 게 아니잖아 ㅠㅠ "

 

" 아니야, 좋아진 거야. 눈에 빛이 돌아왔어. "

 

" 그래, 어떻게 보면 네 덕분이 맞아. 엄밀히 얘기하면 카페 엘리펀트 때문이야. "

 

" 온천보다, 맛있는 음식보다, 좋은 호텔보다 카페 따위가 더 좋단 말이냐! 어딜 가나 널려 있는 카페 따위가! "

 

" 엉... 그게 꼭 그런 건 아닌데... 좀 그래. "

 

" 근데 왜 아직도 결혼을 못했지? 이 여자는 저비용으로 꼬시기에 아주 적합한 타입인데. "

 

" 이 자식이.. 상대를 앞에 두고 3인칭으로 칭하지 마라. "

 

 

사실 친구 말이 맞다. 네 덕분이다. 카를로비 바리에 가자고 꼬셔줬잖아. 세번째 찾는 카를로비 바리였지만 이때가 가장 즐거웠다. 그리고 여기서 카페 엘리펀트에 갔고 다시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었으니까. 고맙다 :)

 

 

 

 

 

 

카페 엘리펀트는 카를로비 바리 온천지대를 따라 쭈욱 걸어가다가 이 동네에서 아마 가장 유명한 호텔일 GRAND HOTEL PUPP으로 접어들기 좀 전에 나타난다. (그 호텔엔 전에 출장와서 행사만 들어가봤다. 이번에 묵었던 곳은 다른 곳)

 

휴양지인 카를로비 바리라는 동네 특성이 그렇듯, 이 카페에도 두터운 외투를 벗고 앉아 쉬는 중년이나 노년 부부들이 많았다. 카페는 널찍한 그랜드 카페 스타일이었다. 이른 오후였고 창가에 앉자 싸늘한 바깥 날씨와는 달리 햇살이 스며들어와서 좋았다.

 

점심 먹을 때 차를 마셨기 때문에 평소엔 잘 마시지 않지만 카푸치노를 주문해봤다. 그리고 모양이 예뻐서 마블 케익 주문. 케익은 커스터드가 진했고 꽤 달아서 다 먹지는 못했다. 카푸치노는 부드럽고 맛있었다.

 

 

 

 

 

 

 

 

내부는 이렇게 생겼다. 좀 호텔 커피숍 같은 분위기인가..

 

 

 

 

고맙구나, 카페 엘리펀트. 그리고 카페 에벨도. 친구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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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  주말에 비엔나에 다녀올 예정이다. 원래는 화-목 정도를 생각했는데 일기예보를 보니 눈이 오고 추워진다고 해서 토~월로 변경했다. 덕분에 어젯밤에 버스 티켓 예매와 호텔 예약하느라 피곤했다.

기차를 타고 갈까 했는데 스튜던트 에이전시가 기차보다 훨씬 저렴해서 버스 표를 끊었다. 카를로비 바리 두시간 타고 가는 것도 살짝 버거웠는데 과연 5시간 동안 잘 타고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다녀올 듯.

날씨 때문에 앞당기긴 했지만 주말도 역시 춥다는 예보가 있다. 체감온도가 영하 4~5도라나. 부츠를 신고 가야 할지 고민 중이다.

여기 와서 후회한 것 중 하나가 백팩을 안 가져왔다는 것이다. 심지어 레스포삭 가방도 안 가져왔다. 뭘 얼마나 쏘다니겠어 싶어서. 막상 이렇게 다른 곳에서 자야 하는 경우엔 가방 들고 가기가 참 난감하다. 그렇다고 기내 가방을 끌고 갈 수도 없고. 하루를 자든 이틀을 자든 화장품과 세면도구와 잠옷을 챙겨가야 하니 부피와 무게가 늘어난다.

다시금 루키야넨코의 명언을 되새기는 중. 돈 없는 자들만이 여행가방을 바리바리 꾸려가지고 다닌다. 부자는 현지에서 모든 것을 조달할 수 있다.

 

*  전에는 혼자 쏘다니는 것이 좋았다. 게으르고 겁도 많은 편이지만 혼자 출장도 잘 다니고 여행도 잘 다녔다. 그런데 요즘은 피곤해서 그런 건지,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가보지 않았던 나라와 도시들을 찾아 떠나는 것이 전처럼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설레는 마음도 훨씬 덜하다. 이렇게 사람이 칙칙해지나 보다.

전 같으면 벌써 비엔나 관련 모든 정보를 검색해서 메모를 하고 근처 서점에 가서 지도라도 사 와서 체크를 하고 있었을 텐데 지금은 한국에서 몇장 뜯어온 비엔나 관련 여행 책자를 한번 들춰보고 지하철, 트램 노선을 폰에 저장한 것이 끝. 호텔에 가면 지도를 주겠지, 가서 대충 쏘다니자 이런 마음이다.

이제 혼자 열심히 찾아서 챙기고 쏘다닐만큼 부지런하거나 열망으로 넘쳐나지 않게 된 것 같아 좀 씁쓸하다. 이렇게 해서 나이를 먹고 급기야는 패키지 여행에 끼게 되나보다. 지금까지는 패키지, 단체여행이라면 정말 토할 것처럼 싫지만. 

그 좋아하던 미술관들과 음악, 공연들에 대한 갈망도 전 같지 않다. 아마 이건 내가 작년부터 이쪽에 서서히 피로를 느끼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특히 미술 쪽이 그렇다. 업무 관련해서 심적으로 많이 소진되었는지 프라하에 와서도 미술이나 건축 쪽은 그렇게 많이 보러 다니지 않았다. 꼭 가보고 싶었던 현대 미술 갤러리가 몇 군데 있었는데 곁을 지나치면서도 들어가본 적도 없다.

 

*  패키지, 단체 여행 얘기가 나와서 잠시.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들이 몇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집단으로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수학여행을 비롯해 교련, 운동회, 매스 게임 등등을 모두 싫어했다. '우리'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집단주의의 횡포를 견딜 수가 없다. 아니, 이게 꼭 횡포가 아닐 수도 있다. 순기능적인 면이 강조될 때도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횡포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내겐 그게 횡포였다.

직장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인데. 그나마 우리 회사는 그런 면이 꽤 덜한 편이라 다행이지만. 그래도 부임해오는 임원에 따라 가끔 주말 산행이 생겨나기도 했다. 나는 '조직 문화'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이러한 단체행동이 사실은 강압이며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굳이 주말이 아니라 해도, 본래 회사에서 봄이나 가을에 정례적으로 개최하는 체육대회나 산행도 좋아하지 않는다. 게을러서 그런 것도 있지만, 난 줄을 서서 다 같이 뭔가를 하는 것을 견딜 수가 없다. 그리고 집단 행동을 함으로써 단결력이 강화되고 '우리'라는 끈끈한 정이 생겨난다는 말을 믿지도 않는다. 그래본 적이 없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상당히 개인주의적인 성향이며 단점이라고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 집단 행동을 통해 '우리'라는 이름의 뜨거운 결속력을 획득하고 팀으로서 거듭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쪽에 포함되지 않았다. 단 한번도. 아마 내가 소련 시절에 태어났다면 정치 이념이나 먹고살기 힘든 사회나 그런걸 다 떠나서 그 망할 놈의 집단주의 때문에 미치거나 수용소에 끌려갔을 것 같다.

작년부터 쓰고 있는 시리즈의 주인공에게도 그런 성향이 어느 정도 존재한다. 물론 그는 나와는 꽤 다른 인물이지만, '우리'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집단주의를 견뎌내지 못하는 것은 비슷하다. 그래서 보안위원회의 어느 인물은 어느 날 그 애를 불러다놓고 이런 말을 한다. '애'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것이 저 당시 주인공은 아직 학교를 졸업하기 전이었다.

 

... 그런데 내가 아주 미워하는 애들이 있어. 정말 마음에 안 드는 놈들, 이토록 선량하고 교양 있는 나조차도 그런 녀석들은 아주 싫다는 생각이 들 정도야. 그건 말이지, 혼자 다니는 놈들이야. 모두가 노래할 때 혼자 침묵하는 녀석, 다같이 컨베이어 벨트를 돌릴 때 혼자 뒤돌아 서 있는 녀석, 동지들끼리 모여 차를 마실 때 길거리로 사라지는 녀석. 가끔 가다 보면 꼭 그런 인간이 있어. 차라리 떠들고 선동하는 놈들이 나아, 왜냐하면 그것들은 항상 여럿이 모여 있으니까. 그리고 무리 짓는 인간들은 언제나 소비에트의 품에 안길 준비가 되어 있는 놈들이야. 문제는 바로 혼자 다니는 애들이야. 도무지 집단에 끼어들지 않는 놈, 미제 자본주의자들의 타락한 정신을 따라가는 놈. 줄을 서는 게 싫다는 이유로 빵과 우유를 사러 가지 않고 꼬박 며칠 동안 처자식을 굶기는 놈, 존경하는 레닌 동지와 레오니드 일리치 동지를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시해버리는 건방진 놈들. 차라리 소리 높여 욕하는 놈들이 훨씬 나아. 언제나 혼자 있으려고 하는 놈들, 자기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정하며 이 세상에서 혼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정신 나간 놈들, 그런 놈들이 제일 나빠....

 

.. 저 자의 장광설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물론 저 설교가 주인공을 바꿔놓지는 못한다. 저때 꽤 혼이 나고 고생을 하게 되지만 그래도 그 애는 여전히 '혼자 다니는 놈'으로 남는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  오늘은 8시간을 자고 일어났다. 그래도 중간에 한번 깨서 1시간 넘게 뒤척이긴 했다. 계속 자고 싶어서 괴로웠는데 바깥을 보니 어제보다 날씨가 더 흐렸다. 오늘은 나가지 않고 내일 비엔나 갈 준비와 다른 이것저것들을 했는데 열어놓은 창 너머에서 불어들어오는 바람이 매우 찼다.

틈날 때마다 꾸준히 걷고는 있지만 운동 부족이 분명하다. 그런데 따뜻한 날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더 움직이고 싶어도 힘들었다. 며칠 동안 입맛도 없고 몸이 힘들었는데 내일 5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가야 하기 때문에 좀전에 힘을 내어 카프레제 샐러드를 만들어 먹었다. 여기는 아주 조그만 모짜렐라 치즈 덩어리를 한팩씩 포장해 팔기 때문에 편하다. 가격도 싸고.

 

* 아이팟 랜덤 재생을 해놨더니 new kids on the block의 time is on our side 가 나오고 있다. 좋아했던 노래인데. 역시 세대가 나오는군 :) 요즘 아이들은 뉴키즈 잘 모르겠지 ㅠ.ㅠ

 

... 그러고 보니 이걸 어느 폴더에 넣어야 할지 모르겠다. 글 얘기가 있으니 about writing 에 일단 넣어 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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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