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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반 후의 메모, 2016.5.14>

 

   

나는 아래 발췌한 에피소드를 3년 반 전, 2012년 12월에 썼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고서 몇달 후. 가장 바닥에 내려가 있을 때였다. 미샤를 되살려낸 후 두번째로 쓴 소설이었다. 소설의 심리적 화자는 그의 친구이자 애인인 안드레이 트로이츠키, 일반적으로는 트로이 라고 불리는 인물이었지만 진짜 주인공은 미샤였다. 이 소설의 에피소드들은 전에도 여러번 이 폴더에 발췌한 적이 있다.

 

발췌한 에피소드는 소설의 중후반부인 3부 14장 끝부분이다. 저 부분을 쓸때 나는 어느 정도 화가 나 있었고 어느 정도는 매우 지치고 슬픈 상태였다. 하지만 동시에 굉장히 솔직하기도 했다. 허구라는 렌즈를 통해 왜곡될 수 있을만큼만 왜곡시킨 정도로.

 

이 글을 쓴 바로 다음날 남긴 짧은 메모와 1년이 지난 후 쓴 역시 짧은 메모가 있는데 그것도 같이 올려본다. 그러니까 이건 하나의 에피소드에 대한 세가지 메모가 달려 있는 셈이다. 쓴 직후, 1년 후, 그리고 3년 반 후.

 

미샤와 트로이의 대화에서 언급되는 '지나'는 미샤의 발레학교와 키로프 발레단 시절 파트너 발레리나인 지나이다를 가리킨다. '세레브랴코프'는 미샤의 키로프 발레단 선배이자 일종의 라이벌이다. 세레브랴코프에 대한 에피소드는 전에 돈키호테와 페름 저수지 사건 등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그 이야기들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3594, http://tveye.tistory.com/4597

 

대화에 역시 언급되는 '스탄카'는 전에 여러번 발췌된 이야기들에 등장한 스타니슬라프 일린을 가리킨다. 볼쇼이 안무가이고 미샤의 친구이다. '아스케로프'는 미샤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의사인 유리 아스케로프이다.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이 폴더에 두어번 발췌했고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서도 한번 등장시킨 적 있다.

 

둘의 대화에서 나온 '안드레이'는 미샤가 트로이를 부르는 이름이다. 트로이는 자기 본명을 싫어해서 친구들 사이에서 트로이란 애칭으로 통하지만 미샤는 사적 자리에서는 항상 그를 본명으로 부른다.

 

 .. 맨 위의 사진은 라트만스키 안무의 신데렐라를 추는 디아나 비슈뇨바. 사진은 Mark Olich.

그 아래 그림은 러시아 화가 니콜라이 게의 '겟세마네 동산의 그리스도'.

 

 

 

<1년 후의 메모, 2013.11.7>

 


나는 이 부분을 거의 일 년 전 이맘때 썼다. 이 소설에서 미샤가 자신의 춤에 대해 직접 이야기하는 장면은 이 부분 밖에 없다. 그는 죽음과 성, 권력과 사회적 억압, 이데올로기와 젠더, 그리고 이 모든 외부에서 온 어둠과 더불어 자기 내부에서 비롯되는 어둠을 마주하며 춤춘다. 그건 그가 춤을 추는 이유인 동시에 춤을 포기한 이유이기도 했다.


본질적으로 저 소설은 재능에 대한 이야기였고 그건 성적 갈망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건 미샤가 아니라 친구이자 애인인 트로이였다. 심지어 저 순간, 미샤가 자기 입으로 솔직하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순간에도 트로이는 그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트로이는 창작자가 아니었고 그의 사랑은 이해를 기반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아래 발췌된 에피소드를 쓰고 난 직후, 그러니까 2012년 12월에 적었던 메모는 맨 아래에 있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트로이의 팔을 베고 누워 담배 연기를 천정으로 길게 뿜어낸 후 미샤가 말했다.

 

 

“ 지나가 그러더라, 세레브랴코프의 낯짝을 한방 날려주고 나면 모든 게 나아질 거라고. ”

 

“ 그 아가씨답네. ”

 

“ 정말 나아질 거라고 생각해? ”

 

“ 글쎄. 진작 했어야 하는 거 아냐? 좀 늦었지. 그리고 넌 누굴 제대로 쳐본 적도 없잖아. ”

 

“ 그건 그래. 스탄카가 그때 끼어들어줘서 다행이야. 정말 그 자식 치고 싶지 않았거든. ”

 

“ 열받았다면서 어떻게 치고 싶은 마음이 안 들 수가 있어? ”

 

“ 모르겠네, 하여튼 난 누굴 패고 싶었던 적은 별로 없어. 그래봤자 별 소용없잖아. ”

 

“ 지나 말이 맞을지도 몰라. 주먹질을 한번 하거나 적어도 욕이라도 해주면 그 자식도 한풀 꺾일 거야. 그런 놈들은 항상 그래. 네가 계속 내버려두니까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

 

“ 뭐, 나타샤? 계집애 같다는 말? 그건 춤 때문이야. 그러니까 두들겨 패봤자 해결이 안돼. ”

 

“ 세레브랴코프는 왜 그렇게 네 춤을 싫어해? ”

 

“ 그는 교조주의자야. 가장 끔찍한 게 뭔지 알아? 그건 자기 예술을 강령처럼 믿는 것, 그걸 다른 모두에게 강요하는 거야. 우리의 잘난 공산주의와 일당 독재와 집단주의처럼. 근데 세상 어디에도 그렇게 단순한 건 없어. 예술은 더 그래. 아니, 내게는 춤 말고 다른 걸 얘기할 자격이 없지. 울리얀 세레브랴코프에게 자기가 내키는 대로 추라고 해, 난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 작자의 참견은 받고 싶지 않아. 그자는 자기 강령을 따라 깃발을 휘두르며 춤을 추고 나는 내 몫의 허공으로 나가면 돼. 길을 잃든 헛디디든 추락하든 그건 온전히 내가 감당할 무게일 뿐이야. 난 그자의 이상과 꿈을 믿지 않아. 춤이 종교가 될 수도 없고 규율이나 원칙이 될 수도 없어. 공산주의자였던 적도 없고 소비에트 이념을 믿어본 적도 없는 내가 왜 그 얼간이의 질서를 따라야 해. ”

 

“ 세레브랴코프의 질서는 뭔데? ”

 

“ 그는 자기 고환으로 춤을 추지. ”

 

 

땀이 식으면서 한기가 드는 듯 미샤가 옆으로 돌아누우며 트로이에게 몸을 밀착시켰다. 필터 언저리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카펫 귀퉁이에 문질러 끈 후 나머지 연기를 트로이의 가슴팍에 천천히 불어 날렸다. 트로이는 미샤의 코트를 끌어당겨 활짝 펼친 후 서로의 몸을 덮었다. 담배 연기 사이로도 코트 안쪽에 배어 있는 낯익은 고급 향수 내음과 은밀하게 깔려 있는 체취를 맡을 수 있었다. 젖은 숲의 흙 냄새, 그리고 딱히 규명하기 힘든 쏘는 듯하고 무겁고 달콤한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후자는 처음에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몸 구석구석에 키스를 하거나 혀와 이로 빨아 당겼을 때 그 냄새가 났다. 그 냄새를 맡을 때마다 트로이는 사라토프의 할머니가 직접 만들어 유리병 속에 채워놓았던 끈끈하고 짙은 색깔의 꿀을 생각했다. 숲의 꽃과 나무에서 채취해 만든 그 꿀은 너무 진하고 독했기 때문에 할머니는 어린 손자가 아무리 졸라도 몇 방울 이상은 결코 주지 않았다. 아주 아플 때만 홍차에 한 숟가락을 통째로 녹여 주었다. 어린 시절 트로이는 그 차를 마실 때마다 심하게 취해서 24시간을 내리 잤다.

 

 

“ 그럼 넌? ”

 

아, 나도 그런 부분이 있지. 어쨌든 사내자식이니까. 하지만 전부는 아냐. ”

 

 

코트 아래에서 몸을 좀 더 바짝 붙여오며 미샤가 약간 졸린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세레브랴코프가 날 미워하는 이유는 내가 자기 자리를 빼앗는 게 두려워서가 아냐. 내가 무대 위에서 그 굳건한 남성성의 환각을 쉽게 무시하기 때문이지. 신사적이고 기사도 넘치고 파트너를 견고하게 지지해 주는 남자, 필요한 순간 검을 빼들고 달려가 적을 무너뜨릴 준비가 되어 있는 남자, 언제나 확신과 신념에 가득 찬 남자, 왕자님, 기사, 귀족, 깃발 든 혁명가, 전쟁터의 장군, 여자를 지켜주는 남자, 당의 기치를 앞장서서 체현하는 진짜 남자. 반듯하고 우아하며 강인하고 흔들림 없는 파트너.

그렇게 추는 게 어렵지는 않아, 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은 거기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지. 난 연습을 많이 했어, 엄청나게 혹독하게 배웠어. 꼭 춰야 한다면 그렇게 추겠지. 그게 바로 키로프의 기본기라는 거니까. 남자 무용수의 기본기.

그런데 말야, 안드레이. 그 모든 건 사실 고환과 음경과 정액으로 이루어진 환상에 지나지 않아. 발레리나들이 유방과 질과 눈물로 우아하고 연약한 공주님의 환각을 만들어내듯 남자 무용수들도 마찬가지야. 세레브랴코프의 가차 없는 남성성이 빚어낸 질서 맞은편에 발레리나들의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아성이 도사리고 있어. 난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어. 그건 단순한 섹스의 문제가 아냐. 성이란 건, 아니 인간이란 건 그렇게 이분법으로 설명할 수가 없어. 한편에는 빛, 한편에는 어둠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과 몸이 완전하게 분리되어 있다면 행복할 텐데.

안드레이, 어쩌면 그건 인간 전체에 대한 얘기가 아닌지도 몰라. 그저 나 자신에 대한 얘기일 뿐인지도 몰라. 난 사람 마음을 모른다면서. 그러니 인간에 대해서도 함부로 얘기해서는 안되겠지. 난 틈새로 들어가고 바닥도 출구도 없는 안개 속에서 춤을 춰. 내가 원해서 그렇게 하는 게 아냐, 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 그곳에서 난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냐, 마음도 아니고 몸도 아냐. 그곳에는 빛이 있고 어둠이 있겠지. 황혼도, 수면도, 어쩌면 눈보라도. 하지만 난 단지 움직임일 뿐이야. 계속해서 뛰고 날고 떨어지고 넘어지는 것 뿐이야. 멈추면 사라질 테니까. 거기 고통이 있어, 두려움이 있어. 나는, 난 멈추게 될까봐 두려워. 사라지고 싶지 않아. 세레브랴코프는 그런 공포를 이해하지 못할 거야. 그는 강령을 선택했으니까. ”

 

 

미샤는 더 이상 트로이에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았다. 교회 종탑을 마주하고 고해하듯 나직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고백이 너무나 괴롭고도 개인적이어서, 또 한없이 조용하고 부드러워서 트로이는 마음을 뒤흔드는 감동과 죄책감을 느꼈다. 동시에 그의 말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어 고통스러웠다. 그는 춤을 춰본 적도 없고 단 한 번도 진정한 재능을 가진 예술가인 적이 없었으니까.

 

 

아마도 스타니슬라프 일린은 이해할지도 모른다. 모스크바에서 온 그 안무가, 스탄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미지의 남자. 어쩌면 유리 아스케로프도 전부 이해해 줄지도 모른다. 어릴 때부터 미샤를 알았으니까, 미샤는 움직일 수 없는 그 무서운 순간 아스케로프가 곁에 와주기를 원했으니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아스케로프는 미샤의 춤에 관심이 없었다. 춤 나부랭이라고 비하했고 미샤에게 하잘것없는 춤을 포기하고 그만 내려오는 게 낫다고 꾸짖었다. 그자는 오직 미샤에게 성적으로 완전히 반해 있을 뿐이다. 어쩌면 마음 속 깊이 품고 있는 사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온전히 그 아이의 몸과 마음에 대한 욕망과 애정일 뿐 춤과 재능에 대한 갈망은 아니었다. 그 루빈슈테인 거리의 의사는 그만큼 복잡하고 음울한 남자가 아니었다.

 

 

미샤는 갑작스럽게 말을 뚝 끊었다.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있던 생각을 토로한 것이 부끄러워서 그럴 수도 있었고 졸려서 그랬을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울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아스케로프와는 달리 트로이는 미샤가 우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 후 트로이는 쑤시고 결리는 몸을 거실 바닥에서 일으켰다. 미샤는 그가 일어난 것도 모르고 고른 숨소리를 내며 깊게 잠들어 있었다. 그는 코트 째로 미샤를 쓸어안아 침대로 데려갔다. 옷을 치우고 모포를 덮어주면서 트로이는 그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목덜미의 상처는 다시 하얀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허벅지의 칼자국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랫배와 허리, 골반과 옆구리 구석구석에 찍혀 있는 트로이의 손자국은 반쯤은 자주색이고 반쯤은 검붉은 색으로 변해 일그러진 꽃처럼 옆으로 퍼지며 증식하고 있었다.

 

 

아마 미샤가 무대에 올라가야 하지 않았다면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그의 몸에 깨끗하게 남아 있는 하얀 살갗 구석구석 전부를 붉고 검은 자국으로 뒤덮었을 것이다. 이마와 뺨과 턱도 예외 없이, 부드러운 눈꺼풀과 입술조차 피해가지 않고. 할 수만 있다면 머리카락과 눈동자와 치아와 혓바닥 위에, 살갗 아래 혈관과 근육과 신경 위에도 자국을 냈을 것이다. 해독할 수도 없는 문자를 써내려갔을 것이다. 그런 순간에도 차마 자기 이름을 쓸 용기는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서랍 속에 숨어 있는 노트와 수첩과 종이쪽지 위에 잉크 범벅이 되어 도사리고 있는 단어와 구절들이었을 것이다. 그 어눌하고 수치스러운 언어들은 그 찬란하게 타오르는 애에게 닿는 순간 녹아내려 사라질 것이다. 아무런 자국도 남기지 못할 것이다.

 

 

 

..

 

 



<쓰고 난 다음날 : 교조주의, 강령으로서의 예술, 2012.12.7>



어제 저 주제에 대한 부분을 쓰면서 내가 겪었던 몇가지 좌절과 절망스러웠던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물론 저 글의 주인공이 살아가는 사회는 지금 서울과는 많이 다르다. 그는 천박한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메가폴리스가 아니라 전체주의와 집단주의가 지배하는 70년대 공산사회의 레닌그라드에서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점은 존재한다.


 
.. 중략 ..


 
여전히 난 예술이 강령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믿는다. 나의 가치관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표현 양태는 무수하게 존재하며 어느 한가지만 옳다고 우기는 것은 교만이며 폭력이다.

 

...

 

 

 

좀 우울한 얘기였으니까 무용수들 화보 몇 장.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저 글을 쓸때 가졌던 느낌과 약간은 비슷한 사진들을 골라봤다.

 

 

 

 

 

세르게이 폴루닌.

 

 

마린스키 무용수들. 슈클랴로프와 테료쉬키나, 스코릭, 김기민씨 등이 섞여 있다.

웨인 맥그리거의 인프라 추는 중. 재작년에 마린스키 무대에서 이 작품 보고 반했었다.

 

 

미하일 바리쉬니코프

 

 

 

매우 유명한 사진. 루돌프 누레예프.

 

 

 

파루흐 루지마토프.

 

 

 

파루흐 루지마토프

 

 

 

울리야나 로파트키나.

사진은 Mark Olich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젊은이와 죽음.

사진은 Alex Gouliaev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젊은이와 죽음. 한장 더.

사진은 Alex Gouliaev.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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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