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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한 달 가량 써오고 있는 글이 있는데 오늘이나 내일쯤 끝내고 퇴고에 들어갈 듯하다. 원래 구상한 꽤 복잡한 구조의 장편이 있는데 그거 서두 시작하기가 힘들어서 중간에 삽입되는 에피소드를 먼저 쓴 것이다. 어차피 다성악 구조로 이루어져 있어 나중에 끼워맞춰도 된다만. 생각보다 길어져서 나중에 삽입 버전으로는 훨씬 간결하게 다듬어야 할 것 같다.

 

배경은 1981년. 아직 페레스트로이카가 닥쳐오기 전이고 브레즈네프 정체기가 막바지에 접어든 무렵의 소련이다. 이전에 몇번 발췌했던 글에 등장했던 무용수이자 안무가인 주인공 미샤는 이 시기에 큰 시련을 겪고 있는데, 반체제주의를 비롯한 몇몇 정치적 혐의로 체포되어 정신교화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정치적 후원자들과 해외 지지자들의 도움으로 풀려난다. 다만 완전한 사면은 아니어서 소련 내의 어느 지방 도시(가상의 도시이다)에 유배되어 그곳 극장 예술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이러한 배경으로 그 문제의 글을 2년 전부터 구상했는데 이게 참 생각처럼 잘 안 풀려서 모든 플롯과 인물도 다 구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쉽지 않다. (그래서 이거 준비하려다 주인공의 다른 시기를 다룬 글들만 몇개나 더 썼다)

 

발췌한 부분은 주인공이 촌동네 극장에 부임해 와서 한참 어려움을 겪는 초기에 일어난 일이다. 화자는 극장 오케스트라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 둘은 오케스트라 연주 문제로 계속 심하게 충돌해왔는데 이번에 쓴 에피소드에서는 그 둘이 어떻게 관계를 맺고 오해를 풀게 되는지를 다룬다. 발췌 부분에서는 미샤가 잠깐 춤을 보여주지만 그건 드문 일이고 꽤 사적인 순간인데, 배경이 되는 1981년에는 그가 이미 은퇴하여 더 이상 무대에 올라가지 않는데다 수용소 이후 육체적으로도 손상을 입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프라하에 머물 때 나는 그의 수용소 시기를 다루는 경장편을 하나 썼는데 그건 총 3부로 이루어져 있었고 세 사람의 시점으로 묘사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내가 그곳에 있지 않았다면 그 글은 씌어지지 않았을 것 같다. 지금 쓰는 글이 내가 다른 곳에 존재한다면 또 다른 식으로 씌어질지도 모르듯이.

 

발췌한 내용은 미샤가 화자인 바이올리니스트에게 한 곡 켜달라고 청한 후 벌어지는 일이다. 뭐 별다른 사건이랄 건 전혀 없지만.

 

* 이 글을 무단으로 복사, 전재하거나 배포하지 말아주세요 *

 

...

 

 

나는 뒷골이 띵하도록 부담감을 느꼈다. 그러다가 어차피 차원이 다른 놈이니 내가 뭘 어떻게 하든 삼류로 들릴 게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홧김에 아무 거나 켜기 시작했다.

 

지금도 나는 그때 무슨 곡을 연주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미샤는 바닥에 누운 채 가만히 연주를 들었다. 나는 단 한 번도 관객과 눈을 맞추며 연주하는 타입이 아니었고 사귀거나 잠자리를 같이 하는 상대에게 바이올린을 켜준 적도 없었기 때문에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아마 내 연주는 형편없었을 것이다.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연주하는 내내 내 시선은 바닥에 누워 있는 미샤에게 쏠려 있었다. 오후 햇살 때문에 몸에 반쯤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다행히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면 분명 박자를 더듬었을 것이다.

 

활을 내려놓았을 때 미샤가 말했다.

 

“ 더, 로만. ”

 

자식은 꼭 침대 위에 있을 때처럼 그런 말을 했다. 이름을 부르면서. 더 세게, 로만. 입 맞춰, 로만. 그 조그맣고 예쁜 입에서 애칭 따위는 밀려나오지 않았다.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까지도. 그저 간결하고 정확한 진짜 이름 하나 뿐이었다. 그 아이가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현기증이 났다.

 

나는 다시 활을 움직였다. 여전히 기억나지 않는 곡을 켰다. 짧고 빠르고 격렬한 곡이었다는 것만 생각난다. 어쩌면 프로코피예프였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쇼스타코비치. 자식은 분명 그자들의 음악을 좋아할 것이다. 저토록 이글거리는 까만 눈을 가진 아이를 사로잡고도 남았을 것이다.

 

미샤가 옆으로 몸을 굴려 일어났다. 더 이상 휘청거리지 않았다. 눈에는 완벽하게 초점이 돌아와 있었다. 두 눈에 불길을 간직한 아이. 나는 반쯤 오기로, 그리고 반쯤은 농담을 섞어서 차이코프스키를 켜 주었다. 문제의 그 백조 아다지오를, 그리고 그 망할 오데트의 솔로를. 그때 미샤가 춤을 췄다.

 

그건 아주 짧은 솔로였다. 기껏해야 2분 30초도 안 되는 곡이었다. 난 바로 그 곡 때문에 자식과 싸웠다. 뭐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그때 춤을 췄던 건 타마라 루세츠카야였다. 우리 극장에서 제일 잘 나가는 프리마 발레리나. 그런데 그 자식은 연주를 바꿔야 한다고 볼코프와 나를 들들 볶았다. 무용수와 맞지 않는다고...

 

그건 계집애의 춤이었다. 백조 여왕이 레이스 달린 튀튀를 펄럭이며 발가락 끝으로 선 채 휘청휘청 빙글빙글 도는 춤. 그런 지루하고 재미없는 춤을 보면서 갈채를 보내는 관객들이 별로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뭐 차이코프스키를 연주해 급료를 받아먹고 사는 입장으로서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미샤는 처음부터 시작하지도 않았다. 30초 쯤 연주했을 때 예고도 없이 몸을 길게 내뻗으며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왔다. 물결이 이는 듯했다. 자식이 춤을 추기 시작했을 때, 그 갑작스러운 움직임은 내 연주와 그 어떤 충돌도 없었다. 그 애는 그저 공기처럼, 스치는 바람처럼 들어왔다. 한순간 그 자리에 있었다.

 

 듣고 따라가는 게 아니라 같이 가야 해. 음악 안으로 들어가고 나올 줄 알아야 해.

 

자식이 그렇게 말했을 때 난 화가 치밀었고 이용당했다고 생각했었다. 주먹을 휘둘렀다. 그런데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 빌어먹을 꼬마가 말했던 건 모두 옳았다.

 

자식은 믿을 수 없이 우아하고 근사하게 춤을 췄다. 낡은 티셔츠 사이로 뻗어 나온 두 팔이 인간의 것이 아니라 진짜 백조에게 돋아난 날개처럼 보였다. 부드럽게 굽혔다가 길게 내뻗고 빙그르르 도는 다리를 보자 전율이 느껴졌다. 거기에는 어떤 무게도,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나 가볍고 너무나 투명했다. 토슈즈도 없이, 맨발로 카펫을 밟으면서 그렇게 출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건 여자 무용수의 춤이었고 가느다랗고 하늘하늘한 팔다리를 과시하는 여성적인 동작들이었지만 자식은 물론 전혀 계집애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내아이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이상한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새 같았고 유령 같았고 천사 같았다. 어쩌면 바로 그래야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차이코프스키의 그 곡에 서려 있는 투명하고 슬픈 음률에는 어딘가 비인간적인 곳이 있었다. 마법에 걸린 백조 여왕 따위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환상에서 태어난 존재였다. 안개처럼. 그리고 미샤는 그렇게 췄다. 안개처럼, 환상처럼 몸을 놀렸다. 자식이 회전했다. 하지만 내가 청했던 정신 나간 푸에테, 다리를 채찍처럼 휘젓는 곡예는 아니었다. 아주 느리고 비현실적으로, 깃털이 부유하듯 돌았다. 온몸이 날개와 깃털과 공기, 그리고 그 자욱하고 달콤한 냄새로 이루어진 것처럼 돌았다. 그리고 음악이 끝나는 순간 자식이 나갔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스며들고 증발하는 기체처럼. 이제껏 이 곡을 연주하면서 그런 충격을 받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바이올린과 활을 내려놓았다. 미샤에게 갔다. 단 두 발짝 만에. 미샤는 경탄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린애처럼 보였다. 춤을 췄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표정이었다.

 

“ 당신 정말 큰데. 강물도 뛰어서 건너겠어. ”

 

넌 날아서 건너겠지. 하마터면 얼간이처럼 그렇게 지껄일 뻔 했다. 다행히 나는 입을 다물었다.

 

..

 

 

미샤가 추는 춤은 키로프 발레단 버전 백조의 호수에서 오데트가 추는 솔로이다. 물론 그는 그 춤을 소위 '여자처럼' 추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배역이 갖는 환상성과 투명함,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듯한 비현실성과 무중력 상태의 분위기를 온전하게 포착했을 것이다.

 

이전에 올린 적이 있지만, 그 부분을 추는 울리야나 로파트키나의 솔로 클립. 최고의 백조답게 그녀의 솔로는 아주 근사하다. 위의 글을 쓰면서 이 클립을 다시 여러 번 돌려봤다. 물론 그는 로파트키나처럼 추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통하는 부분들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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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