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 표절에 대해, 춤추는 푸쉬킨에 대해 트로이와 이고리가 나눈 대화 about writing2015. 6. 21. 20:02
요즘 신경숙 표절 얘기로 시끌시끌하다. 부끄러운 일이다. 수치심을 알아야 한다. 당사자도, 출판사도, 문학계도 모두.
글을 쓰기 위해서는 많이 읽고 경험하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다른 작가들에게서 영향을 받을 수도 있고 무의식적으로 문체가 닮아갈 수도 있다. 의도적으로 패러디를 하거나 인용을 하거나 오마쥬를 바칠 수도 있다. 후자와 표절의 영역은 어쩌면 아주 미묘하게 겹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일은 그런 미묘함의 영역도 아니다.
표절은 도둑질이고 수치스러운 행위이다. 작가로서의 양심을 저버리는 행위이다. 그런 짓을 하고 나면 무엇보다도 자기 스스로가 부끄러워서 못 견뎌야 한다. 그런데 안 그런 경우도 참 많은 것 같다.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타인의 텍스트를 해체하고 조립해 재축조할 수도 있다. 그것도 일종의 창작 행위이다. 중요한 것은 그때 그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누구에게서, 어떤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 어느어느 부분을 인용했다. 누구에게 바치는 글이다 등등... 그 최소한의 행위조차 없이 타인의 창작물을 떼내고 가져가는 것은 범죄 행위이며 수치스럽고 더러운 짓이다. 경의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작가는 진정한 작가가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래에 발췌한 글은 몇 년 전 쓴 장편의 중반부에서 가져왔다. 이전에 몇번 발췌한 적이 있는 미샤와 그의 친구 트로이의 장편이다. 배경은 1970년대 소련 레닌그라드. 심리적 화자인 트로이는 레닌그라드 대학의 영문학과 강사인데 학생 시절부터 친구들과 비밀 문학 서클 활동을 하고 있다. (미샤와 처음 만난 것도 이 서클에서였음) 발췌한 부분은 트로이가 그 문학 서클 친구들과 정례 모임을 갖던 중 생긴 일이다. 표절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그래서 생각나서 발췌해본다.
처음에 나오는 막심 쥬진스키란 인물은 이들의 서클 멤버이며 작가로 데뷔한지 몇 년 정도 된 사람이다. 갈랴, 료카, 이고리, 스베타, 코스챠(애칭은 코스칙)는 모두 트로이의 친구들이며 미샤의 친구들이기도 하다.
이 사람들의 대화에서 언급만 되는 알리사(애칭 : 알랴)는 트로이의 단짝 친구로 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시점에서는 영국의 소련 대사관에 파견을 나가 있다. (알리사의 이야기도 전에 한번 발췌한 적이 있다. 런던에서 사라져버린 미샤를 찾으러 갔다가 젊은이와 죽음을 추는 걸 봤다는 얘기이다 : http://tveye.tistory.com/2390 )
중간에 나오는 '미슈카'와 '미셴카'는 모두 미샤의 애칭이다. 트로이의 친구인 이고리는 영화학교 출신으로 레닌그라드의 영화사인 렌필름에서 촬영기사로 일하고 있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시점은 1975년 10월이다. 미샤가 키로프 극장 3년차에 접어들었을 때이다.
쥬진스키가 표절한 작가인 부닌은 '그' 이반 부닌이다. 러시아 출신 작가로 혁명 후 망명했고 1933년에 노벨상을 수상했다. 여린 숨결,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 안토노프 사과 등의 작품이 있다. 여기서 쥬진스키가 표절한 작품은 그의 유명한 단편 '정결한 월요일'이다. 나 역시 미샤와 비슷한 문학적 취향을 갖고 있어 부닌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취향과는 별개로 부닌의 문학적 재능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훌륭한 작가였다.
인용된 부닌의 문장은 파란색 궁서체로 표시했다. 내가 직접 번역한 것은 아니고, '행복한 책읽기'에서 번역출간한 '러시아 단편소설 걸작선', '양장선'님 번역본 인용. 325페이지.
사실 발췌한 부분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표절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미샤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쥬진스키는 이 장편에서 이 부분 외에는 등장 비중도 거의 없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나름대로 중요한 인물이었다. 이 장편을 쓸 때 나는 줄곧 재능과 욕망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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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 갈랴 부부의 집에서 쥬진스키와 이고리가 대판 싸웠다. 발단은 쥬진스키의 새 소설이었다. 네프스키 거리에서 만난 남녀의 사랑과 일상을 다룬 소설이었는데 이미 두 권의 책을 출간해 의기양양해진 쥬진스키가 제 1장을 소리 높여 낭독하는 동안 이고리가 소파에 벌렁 드러누워 시끄럽게 휘파람을 불어댔다. 쥬진스키는 30초 정도 참다가 원고를 내려놓으며 이고리에게 대체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이고리는 솔직하게 대꾸했다.
“ 부닌이잖아. 똑같잖아. ”
“ 뭐가! 어디가 부닌이야! ”
“ 첫 문장부터. 모스크바를 레닌그라드로 바꾼 거 밖에 뭐가 있어. ”
“ 웬 헛소리야! 난 부닌 좋아하지도 않아! 그 부르주아 나부랭이. ”
“ 난 아까 그 부분 외어줄 수도 있는데? 거리의 가스등에 차가운 불빛이 점화되고 상점 진열창에 따뜻한 조명이 들어오자 일과에서 해방된 모스크바는 새롭게 밤의 활기로 되살아났다. ”
쥬진스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고리가 말을 이었다.
“ 더 해줘? 짙어가는 어둠 속에서 전차의 전깃줄이 치지직 소리를 내며 푸른 별을 수없이 뿌려대고 있었다. 넌 노란 별로 바꿨지. ”
“ 말도 안돼, 우연일 뿐이야. ”
“ 세상 어떤 놈도 우연히 부닌처럼 쓸 수는 없어. 망명 부르주아든 귀족 나부랭이든 부닌은 부닌이야. ”
“ 그래서 지금 내가 부닌을 베꼈다는 거야? ”
“ 그럼 아냐? ‘정결한 월요일’이잖아. 지금 교육받은 독자들 무시해? 하긴 네 독자들은 모를 수도 있겠다. 집단농장하고 콤비나트, 우주비행사 밖에 모를 테니까. ”
작가로서의 자존심에 엄청나게 타격을 입은 쥬진스키가 고함을 지르며 이고리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날렸지만 빗나갔다. 곰처럼 떡 벌어진 체구의 이고리는 벌떡 일어나 쥬진스키의 멱살을 휘어잡더니 유도선수처럼 그를 바닥에 메쳤다. 운 나쁘게도 료카와 트로이는 그 지루한 낭독이 시작되었을 때 안주를 가지러 간다는 핑계로 부엌에 숨었고 코스챠는 술에 떡이 되어 ‘잘한다 잘한다’ 하고 소리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그들을 떼어놓으려고 달려든 사람들은 여자들 뿐이었다. 스베타가 부엌으로 달려와서 소리쳤다.
“ 이봐 사나이들, 빨리 와줘! 이고리가 막심을 깔아뭉개고 있어! ”
료카와 트로이가 달려가 간신히 둘을 떼어놓았다. 눈에 커다랗게 멍이 들고 입술이 터진 쥬진스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이고리와 나머지들을 싸잡아 욕했다. 너희들은 모두 실패자들이며 성공한 작가인 날 질투해서 트집을 잡는 것 뿐이라고 악을 썼다. 타냐에게서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트로이는 원고뭉치를 집어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 그만해, 막심. 부닌 맞잖아. ”
“ 너까지 헛소리야! ”
“ 뒷장은 나보코프한테서도 따왔네. ”
다시 폭발한 쥬진스키가 트로이에게 달려들어 머리로 들이받으려는 것을 료카가 말렸다. 집 주인이자 평화주의자답게 상처받은 작가를 어르고 달랬다.
“ 쟤네 취해서 그런 거야, 네가 참아. 네 문장이 좋아서 그렇게 보였나보다 하고 생각해. ”
“ 문장이 좋긴! 부닌하고 나보코프 빼면 프라브다 선동 칼럼이야! ”
이고리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분노한 쥬진스키는 료카를 거칠게 밀치고 재킷을 주워 입더니 원고뭉치를 소중하게 한 팔로 끼고 집을 뛰쳐나갔다. 당황한 료카가 그를 잡으러 나가려는 것을 갈랴가 말렸다.
“ 놔둬,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지. ”
“ 다시 안 오면 어떻게 해. ”
“ 안와도 돼, 표절해놓고 잘난 척이라니. 속이 다 시원하네. “
료카는 난처한 얼굴로 아내와 친구들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 음, 사실 파스테르나크도 있었던 것 같아. ”
“ 그래, 네 번째 문장. ”
그들은 다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씁쓸하고 우울한 웃음이었다. 만취해서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한 코스챠만이 투덜댔다.
“ 뭐야, 자기들끼리 놀다가 웃고. 막심은 어디 갔어. ”
“ 그냥 잠이나 자. ”
“ 알랴가 보고 싶어. 알랴 불러와. ”
“ 알리사는 런던에 있잖아. 불쌍한 코스칙, 이제 그만 잊어. ”
“ 내가, 내가 알랴 보러 런던 갈 거야. 밀, 밀항해서라도 가야지. 아니면 그래, 미슈카, 우리 미슈카 트렁크에 숨어서 갈 거야. ”
“ 걔도 런던은 못 갔잖아. ”
“ 조만간 갈 거 아냐, 우리 중 제일 잘난 앤데. 잘 보였다가 따라가야지. ”
“ 뭐 제일 잘나긴 했지. 그나마 오늘 걔가 없어서 다행이다. 이 꼴을 안 봐도 돼서. ”
“ 미샤는 부닌 별로 안 좋아해. 나보코프도. ”
트로이의 말에 이고리가 픽 웃었다.
“ 아, 그래. 걘 도스토예프스키, 안드레예프, 바벨, 아흐마토바 뭐 그런 취향이지. 젊은 녀석이 칙칙해가지고. 근데 난 그 얘기 한 거 아냐. 걘 진짜 천재잖아, 걔한테는 쥬진스키가 저런 짓을 하는 걸 보여주고 싶지 않아. 우리 춤추는 푸쉬킨은 재능 없는 놈들이 몸부림치는 걸 이해 못할 거야. 그거 좀 슬프잖아. ”
트로이는 친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네가 그런 생각도 하는 줄 몰랐는데. ”
“ 한때는 나도 에이젠슈테인처럼 될 줄 알았지. 근데 재능이 눈곱만큼도 없다는 걸 알고 얼마나 절망했는지 알아? 난 기껏해야 촬영 기사밖에 안돼. 좀 더 가면 편집자까진 되겠지. 근데 그게 전부야. 쥬진스키가 능력도 없는 주제에 동맹에 빌붙어서 책을 내고 있는 건 그 새끼한테 자존심이란 게 아예 없기 때문이야. 병신 같은 놈. 그런 놈들이 책을 내고 있어, 버젓하게 작가동맹에 등록되어 있다고. 그러니까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인 거야. 그래서 난 우리 미셴카를 좋아하지. 아니, 사랑해. 숭배한다고. 걘 타고났어. 하늘이 내려준 애야. 온통 반짝거리는 놈이라구. 그 자식 성격은 뭐, 아주 많이 문제가 있지만. 그런 재능을 갖고 사는 건 쉬운 일이 아냐, 그것도 이 나라에선. 그러니까 우리가 잘해줘야 돼. ”
트로이는 이고리에게도 그런 고민이 있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고리는 언제나 단순하고 쾌활한 친구였고 도량이 넓었다. 자기 일에 열심이었고 동료들 사이에서 인기도 많았다. 재능에 대해 고민할 것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건 정말로 우중충하고 미지근하기 짝이 없는 자신에게나 어울릴 고민이었다. 하지만 트로이는 그에게 다른 것을 물었다.
“ 너도 알리사처럼 얘기하네. 걔 문제가 대체 뭔데? ”
“ 아, 문제가 많지. 원래 그런 애들은 전부 문제가 있어. ”
한순간 트로이는 이고리가 미샤의 성 정체성에 대해 눈치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이고리도 그와 자는 사이일지도 모른다는 망상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고리는 한숨을 쉬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 너도 걔 좀 잘 봐. 안 그러면 정말 언제 다리에서 뛰어내릴지 몰라. ”
“ 앞날이 창창한 애를 놓고 왜 그런 말을 해. ”
“ 정말 몰라서 그래? 요원들이 따라다녀, 그것도 대낮에. 차라리 그게 전부였으면 좋겠다. ”
“ 또 뭐가 있는데? 다 터놓고 말해. ”
차가운 공포를 느끼며 트로이가 이고리를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이제 이고리가 얘기할 것이다. '걔는 정상이 아냐. 남자를 좋아하거든. 차이코프스키처럼. 그 데이빗 보위처럼. 그런데 너도 마찬가지 아냐? 다 알고 있었어. 친구라서 입 다물고 있었을 뿐이야, 알리사처럼. 우린 다 알아.'
담배 연기를 훅 내뿜고 나서 이고리가 화난 목소리로 불쑥 말했다.
“ 우리 소품 창고에서 밧줄로 목을 맸어. 밤에. 편집실에서 영화 보다가 내가 조는 사이에 나가서. ”
충격으로 입을 벌린 트로이를 우울하게 응시하며 이고리가 말을 이었다.
“ 걱정 마, 내가 빨리 발견했으니까. 어쩐지 그날 기분이 이상했어. ”
“ 언제? ”
“ 작년에. 12월에. ”
“ 로미오와 줄리엣 때? ”
“ 그래, 그맘때. ”
“ 왜... 다 잘되고 있을 때였잖아. 뭐가 문제였는데... 아무 말 안해? ”
“ 너도 걔 알잖아. 말 안해, 절대로. 나도 모른 척 했어. ”
“ 내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런 기색 없었어. ”
“ 그렇겠지. 우리 같은 놈들이 걔한테 대체 뭐라고. ”
트로이는 이고리에게서 담배를 빼앗아 연기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평소에는 거의 피우지 않았지만 견딜 수가 없었다. 12월, 거의 1년 전이었다. 그때 미샤는 그의 집에서 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한 침대를 쓰고 있었다. 지금이나 다름없이.
“ 그때 한 번도 아냐. 난 그런 애들 알아. 영화학교에서도 본 적 있어. 제일 뛰어난 애들이 가장 못 견뎌. 걔 손목엔 칼로 자른 자국이 있지. 눈에 잘 띄지 않을 뿐이야. ”
“ 아니, 그럴 리 없어. 춤추다 다쳤을 거야. 무대에서 떨어진 적이 있으니까. 팔이 부러졌었어. ”
“ 미샤한테 너무 환상을 갖지 마. 그래봤자 무대에 올라가지 않을 땐 아직 애니까. 스무 살이 됐어도 애야. 걘 보기만큼 강하지 않아. 그래도 네 말은 들을지도 몰라. “
“ 누구 말도 안 들을 걸. ”
“ 그래도 그때 딱 한 마디밖에 안했어. 너한테 얘기하지 말라던데. ”
트로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어쩌면 걔는 떠나야 할지도 몰라. 때가 되면 가야 할 거야.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아무 위험 없이 잘 건너갔으면 좋겠어. 미국이든 어디든. ”
“ 조용히 해. 그런 말 다른 데선 절대로 하지 마. ”
“ 안하지, 내가 미쳤냐? ”
“ 여기서도 하지 마. 다시는. ”
이고리는 놀란 눈으로 트로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 그만두고 담배를 창틀에 비벼 껐다. 그때 트로이가 주먹으로 유리창을 깼다. 박살난 파편이 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 번 세 번 쳤다. 이고리는 그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소파로 데리고 가서 술을 먹여 재웠다. 다음날 트로이는 직접 유리창을 갈아 끼우고 갈랴와 료카에게 사과했다. 마음 좋은 부부는 신경 쓰지 말라고 그를 위로했다. 어차피 모임에 오는 친구들은 다들 고주망태가 되기 일쑤였고 일 년에 두어 번은 꼭 창문을 깼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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