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가 모두 시들었다. 그나마도 형태를 유지하며 시든 이 녀석은 꽃송이를 따서 찻잔에 띄워두었다.
오늘은 재택근무를 했다. 이번주는 평소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이 덜 바빴다. 그래도 오전에는 상당히 정신없는 일들이 많았다. 그리고 꼭 재택근무를 해서 사무실을 비우는 드문 날이면 뭔가 현장에서 일이 생긴다. 어쨌든 하루를 잘 버텨냈고 이제 주말이라 참으로 다행이다. 요즘은 밤에 누워서도 즉시 잠들지 못해서 다시 수면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어버리거나 알람시계를 별도로 갖다놔야 하나 고민 중이다. 분명 이것은 보상심리 때문일 것이다. 종일 업무와 사람에 치어 보내고 돌아오니 밤에 누워서 그냥 잠드는 게 무의식적으로 아까운 것이다. 그렇다고 뭔가 제대로 된 걸 하지도 못하면서 흑흑. 차라리 글이라도 쓰고 늦게 자면 남는 거라도 있지. 하지만 글을 쓰려면 집중력과 에너지가 필요한데 그럴 기운은 없으니 잠자리에서 자꾸 판다 영상이나 보고 이것저것 알고리즘에 휩싸여 뒤적이다 늦게 자는 악순환이...
이번 주말은 쉬면서 지난 일요일에 시작한 글을 본격적으로 써보려고 한다. 재택근무 덕에 시간을 좀 벌어서 청소도 오늘 저녁에 미리 해두었으니 기운을 내야지.
오늘은 재택근무를 했다. 그래서 집에서 아침을 챙겨먹을 수 있었고 며칠 전부터 먹고 싶었던 자두잼 얹은 버터토스트 조식에 성공했다 :)
왼편이 자두잼. 이것은 영원한 휴가님이 빌니우스의 자두나무에서 떨어진 노란 자두들을 정성들여 손질해 직접 만드신 잼이다. 바르샤바에는 자두가 많았는데 폴란드는 자두가 특산물인지 각종 자두와 자두잼 케익, 초콜릿, 음료를 팔았다. 빌니우스에도 여러 종류의 자두가 있는 모양이었다(바르샤바랑 가깝긴 하다) 우리는 식당에서 메뉴판을 보다가 '미라벨 자두'라는 것을 읽고는 그 종류의 자두 주스나 뭐 그런 걸 먹어보려고 슈퍼와 가게를 다녔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과연 미라벨 자두는 무엇일까 궁금했다. 이후 빌니우스에 돌아간 영원한 휴가님이 '찾아보니 미라벨 자두는 호두알만큼 조그만 노란 자두라는데 아무래도 저 잼을 만든 자두가 그거 같아요'라고 얘기해주셨다. 그래서 '빌니우스 노란 자두잼'으로 부르던 저것에 '수제 미라벨 자두잼'이라고 부제를 붙여주었다.
어서빨리 저 자두잼을 먹고팠는데 사실 내가 게으르다보니 빵에 버터나 잼을 발라서 먹는 일이 생각보다 많지 않고, 빵은 조식이라는 개념이 박혀 있어서(저녁으로는 안먹음) 여행에서 돌아온 후 좀처럼 기회가 없었다. 출근하면 이른 아침에 보통 빵이나 과일, 견과로 때우긴 하지만 사무실에 앉아서 먹어야 하니 간편한 빵을 먹지 버터, 잼 같은 걸 발라서 먹는 노력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바르샤바 여행에서 아침 먹으러 갔던 어느 카페에서 내준 버터 토스트가 의외로 너무 맛있어서 그 기억이 많이 났다. 그래서 며칠 전 귀가하면서 빵집에 들러 웬만해서는 사지 않는 식빵까지 샀다. (바게트 같은 걸 더 좋아하고 식빵은 옛날부터 별로 안 좋아했음. 정성들여 토스트하는 게 귀찮은데 식빵은 토스트를 안하면 맛이 없어서...)
오늘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업무 시작하기 전에 정성들여 식빵에 버터를 발라 에어프라이어에 토스트를 하고(이것도 매우 드문 일임. 나는 게을러서 에어프라이어를 도통 써먹지 않는다. 기껏 한달에 두어번 연어 구워먹는 게 전부), 이럴때를 위해 아껴둔 twg 다즐링 티를 우렸다. 왜 아껴놓느냐면, 집에서는 웬만하면 찻잎으로 직접 우려 마시기 때문에 티백은 쓰지 않고, 사무실에서는 그럴 여유가 없으니 티백들을 놓고 먹는데 솔직히 말해서 일하면서 마시는 차는 그야말로 정신차리고 빨리 일하려고 마시는 거라서 고급 티백 대신 트와이닝, 아마드, 그리고 좀더 신경쓸 경우 로네펠트 티벨롭 정도를 마시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것보다 좀 좋은 찻잎으로 리넨 주머니에 채워둔 티백은 뭔가 애매하다. 집에서야 티백 마시느니 티포트에 제대로 차를 우리는 게 낫고. 여름 프라하 여행 때 면세에서 twg 티백 세트를 샀는데 그중에서도 별로 안 좋아하는 민트나 디카페인만 마시고 좋아하는 다즐링은 아껴놓았음. (가격대야 똑같지만 민트나 뭐 그런 건 딱히 좋아하는 차가 아니니 대충 마셔도 오히려 별로 안 아까움) 다즐링은 후딱 우려마시려니 사무실에서는 아까워서.
그리고 노란 자두잼 병을 꺼냈다. 영원한 휴가님이 오븐으로 병을 소독해 밀봉해놓아서 뚜껑을 여니 뽁 소리가 났다.
설탕을 많이 쓰지 않아 자두잼이 시큼할 거라는 얘기를 하셨기에 '그러면 무화과잼이랑 같이 먹지요~' 하며 역시 선물해주셨던 앙증맞은 무화과잼도 꺼냈다. 그게 사진 오른쪽. 과연 자두잼은 새콤했지만 버터를 잔뜩 발라 구운 토스트에 얹자 은근히 그 새콤함이 잘 어울려서 굳이 무화과잼을 개봉하지 않아도 됐다. 그래서 무화과잼은 그대로 냉장고로 귀가.
미라벨 자두로 추정되는 노란 자두잼. 수제!!!
버터 토스트 만들려고 심지어 이즈니 버터를 샀음. 좀 더 저렴한 버터도 아무 상관 없었을텐데, 나처럼 자주 먹지 않는 사람에겐 컵으로 소분되어 있어야 그나마 낭비가 적어서... (컵 대신 그냥 종이포장 소분된 것들도 많은데 나는 또 게으르고 손에 묻히는 걸 싫어해서 종이포장 버터를 별로 안 좋아함) 과연 비싼 버터를 양심의 가책을 느낄만큼 왕창 발라서 구운 토스트는 맛있었고(바르샤바 수크레 토스트만큼 맛있었다. 그 토스트도 버터를 엄청 발라 구웠다), 자두잼이 훌륭한 앙상블을 이루었다.
이른 아침이고 오늘은 좀 흐려서 어둡게 나왔다 ㅠㅠ
그런데 식빵 딱 한 장만 저렇게 반 갈라서 먹은 것처럼 위장하고 있지만 사실 두 장을 해동했고.. 다른 한 장은 식지 말라고 에어프라이어에 그대로 넣어둔 것이었다. 눈가리고 아웅.
영원한 휴가님 고마워요!
그건 그렇고 이건 제대로 기원을 거슬러올라가면 빌니우스에서 온 자두잼이니까 빌니우스 폴더로 가야 하나 싶지만, 바르샤바에서 받아왔으니까 바르샤바 폴더에 올려둔다 :)
점심 먹고 잠깐 공원 벤치에 앉아 햇볕을 쬐었다. 가을의 이런 파란 하늘과 낮의 햇볕은 너무나 귀중하기 때문에.
역시 점심 먹고 들어오다가 뒷골목에서 찍은 사진.
오늘은 많이 바쁘지는 않았지만 사람 때문에 무척 피곤했다. 원조 금쪽이(히스테리 장착 직원) 때문에 너무 지친다. 신흥 강자 독버섯 금쪽이도 문제이지만 원조가 갖는 엄청난 피곤함이 또 있다. 이런 사람들을 한군데 모아놓으면 다른 사람들은 좀 편해지겠지. 그런데 왜 하필 여기로 모아놓은 것인가 흑흑.
어제 늦지 않게 누웠지만 막상 잠은 늦게 들었다. 잘 자보려고 오늘 낮에도 저렇게 볕을 쬐어보았다. 오늘은 잘 자기를.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도 싫다. 금쪽이들 때문에 너무 피곤하다.
" 저 자리에 두니까 원래 여기 있었던 것처럼 보여서 놔두고 갈까봐 걱정인데요. " 라고 영원한 휴가님께서 말씀하셨다. 다과와 티포트, 컵과 물병을 놓아두는 저 진열대 한가운데 살포시 놓아둔 하늘색 러브라믹스 티포트 얘기였다. 영원한 휴가님은 저 티포트를 빌니우스의 필리모 거리에 있는 엘스카 카페에서 골라 상자에 꼭꼭 넣어 캐리어에 태우고 이른 아침버스로 국경을 넘어 바르샤바까지 가져오셨다. 내가 프라하의 헤드샷 커피를 따라서 샀던 똑같은 색깔의 찻잔에 맞춰서.
이 사진을 찍기 전날 오후 우리는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더위와 습기에 지쳐 조금 일찍 숙소로 돌아왔다. 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대신 편안한 호텔 방에서 티타임을 하기로 했다. 이케아 느낌이 물씬 나는 타원형의 하얀 테이블 위에 호텔 방에 비치되어 있던 찻잔과 접시를 세팅하고 전기포트에 물을 끓이고, 빌니우스에서 온 23년산 퍼스트플러쉬 다즐링을 저 러브라믹스 포트에 정성들여 우렸다. 빌니우스의 또다른 카페에서 온 초콜릿 팅기니스와 바르샤바의 저렴한 슈퍼마켓 체인인 비에드론카에서 사온 너무 익은 무화과 두 알을 곁들여 차를 마셨다. 바르샤바에서 매일 차를 마셨지만 그 순간의 티타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차를 마신 후 나는 러브라믹스 티포트를 저 자리에 올려두었다. 너무 딱 들어맞았고 심지어 그 뒤에 있는 메뉴바 안내문마저도 보라색이라 컬러까지 잘 어울렸다. 그래서 '원래 여기 있는 것처럼' 보여서 숙소 옮길 때 놔두고 갈까봐 걱정이었다. 이틀 후 나는 숙소를 옮겼고 티포트를 뽁뽁이로 싸서 상자에 잘 넣어서 다음 숙소로 가져갔다. 바르샤바 공항에서 인천공항으로, 그리고 화정으로 비행기와 택시를 타고 잘 귀가했다. 나랑 티포트 둘다.
(사진을 잘 보면 영원한 휴가님과 내 여행가방도 한구석에 나란히 나와 있음. 티포트는 저 가방 두 개를 다 섭렵했음)
빌니우스 선물 한보따리. 팅기니스 두 덩어리와 수제 자두잼은 이때 냉장고에 들어가 있어서 이 떼샷에서 빠졌음 ㅜㅜ 왼편 상단의 박스가 저 티포트가 든 상자.
잊을 수 없는 바르샤바 카페 자이칙 분점 개장 인증 샷 :)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저때 홍차를 매우 잘 우렸음!
연휴 끝나자 역시나 귀신같이 쿠마 그림으로 컴백. 바쁘고 정신없는 하루였다. 회의가 엄청 많았고 챙겨야 할 일들도 잔뜩이었다. 금쪽이와 업무면담도 해야 했다. 여러가지로 지치는 하루였다. 잠도 매우 모자랐다. 다섯시간도 못 자고 출근했다. 너무 피곤했다.
수면부족에 과로가 겹쳐 허기가 져서 귀가하며 빵을 이것저것 사옴. 원래 식빵은 좀처럼 사먹지 않는데 영원한 휴가님이 주신 수제 자두잼을 바르샤바 수크레에서 내준 것 같은 버터토스트에 얹어 먹고파서 식빵도 사옴. 그러나 저녁엔 물론 이런 단것을 먹지 않고 밥을 먹어서 이 식빵과 그외 빵 두개가 냉동실로 ㅠㅠ 언제 버터토스트 해서 저 자두잼 얹어먹지. 주말까지 기다려야 해 엉엉... 자두잼 버터토스트 엉엉 그러면 오믈렛도 같이 먹어야 되는데, 내가 해먹는 거 아니고 다 남이 해줘야 되는데 흑흑 내가 만들면 무슨 소용 ㅠㅠ 신세한탄으로 급마무리.
나에게 있어 만족스러운 여행은 수많은 파편들과 반짝이는 빛들, 나직한 소음과 부드러운 바람의 기억들로 남는다. 아픈 다리, 갈증, 혼란, 허기, 짜증 등의 기억들은 쉽사리 녹아 없어진다. 대체로 좋은 것들이 남는다. 정말 나쁜 것들은 각인되어 잊혀지지 않지만 웬만한 것들은 흐려지고 약해진다.
오랫동안 남는 아주 작은 조각들은 의외로 숙소에서 온다. 아마도 내게 여행은 무엇보다도 휴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나 스스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노력과 돌봄으로 방에서 쉴 수 있다는 것이 좋아서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행에서 찍은 호텔 방의 작은 순간들을 좋아한다. 그런 사진들에는 물론 예쁘거나 근사하거나 새로운 뭔가는 없다. 하지만 약간의 안락함과 또 약간의 불편함이 공존하는 그 순간들을 떠올리면 다시 여행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나는 비행기나 공항보다는 호텔에서 온전한 여행자의 기분을 맛보는 것 같다.
바르샤바에서 프티치예 말라코 초콜릿을 두 종 가져왔다. 하나는 폴란드 수퍼마켓 체인인 비에드론카에서 발견한 폴란드 초콜릿 회사 Wedel의 유서깊은 '프타치예 믈레즈코' 한 상자, 다른 하나는 영원한 휴가님이 빌니우스에서 사다주신 리투아니아산 '파욱쉬치우 피에나스' 한 상자였다. 둘 다 프티치예 말라코(새의 우유)를 자국어로 표현한 것인데, 사실은 폴란드산이 오리지널이다. 소련에서 폴란드 것을 따라서 만들었으니까. 아마도 리투아니아는 당시 같은 소련 권역이었으니 블라디보스톡과 모스크바를 따라서 만든 게 아닌가 싶지만 아닐지도... '진짜 초콜릿'과는 좀 다른 초콜릿 코팅 안에 젤라틴과 수플레를 섞은 듯 말랑말랑하고 그렇다고 탄력은 또 없는 마시맬로 약간 비슷한 질감의 달착지근한 우유맛 하얀 필링이 들어 있다. 러시아에 가면 이따금 여기서 파생된 케익을 먹었다. 이 초콜릿 자체는 자주 먹지는 않았는데 직접 사먹은 적은 없고 누가 주면 먹었다. 러시아 쪽 초콜릿이 다 그렇듯 많이 달아서 한 입에 여러개 먹을 수는 없고 차에 곁들여 딱 1알이나 2알까지가 적당하다. 이번에 바르샤바 갔을 때 폴란드 오리지널을 사서 먹어봐야지 했는데 마침 수퍼에서 발견해서 '바닐라맛', '시트러스맛' 등을 모두 저버리고 가장 오리지널에 가까울 것으로 추정되는 '크림맛'을 골랐다. 그냥 우유맛이다. 리투아니아 쪽 초콜릿이 러시아 쪽 맛과 흡사했다. 폴란드 초콜릿은 더 연하고 부드러웠다.
영원한 휴가님이 지난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기념해 보내주신 소포에 이 초콜릿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먹다가 문득 글 하나를 구상했고(엄밀히 말하자면 글을 구상한 게 아니라 제목을), 올해 여름까지 그 단편을 썼다. 제목은 당연하게도 프티치예 말라코였다. 아래 그 글의 전반부 일부를 발췌한다. 20년 동안 짝사랑해온 여자와 재회해 옛날 생각을 하는 코스챠와 이 초콜릿에 대한 에피소드가 들어 있다. 초콜릿 얘기는 소설 내에서 두어번 더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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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섯 수프와 커피가 나왔다. 커피는 새까맣고 진했다. 코스챠는 맥주나 보드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커피를 마시면 가뜩이나 두근거리는 심장이 더 세게 뛸 것 같아서. 알리사는 그에게 냅킨을 건네주며 ‘흘릴 테니까’라고 빙긋 웃었다. 이제 그런 칠칠치 못하던 시절은 지나갔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실은 지금도 음식을 잘 흘리는 편이라 코스챠는 순순히 냅킨을 받아들었다. 수프는 묽었지만 의외로 맛은 나쁘지 않았다. 하긴 알리사와 함께 먹는 거라면 뭐든, 보드카도 없이 돼지비계만 맨입에 먹어도 맛있을 것 같았다.
“ 알랴, 블린 나왔어. 잘라줄까? ”
“ 팔라친키. ”
“ 그게 뭐야? ”
“ 여기서는 팔라친키라고 해. 블린이 아니라. ”
“ 역시 체코슬로바키아어 다 아는구나. ”
“ 그게 다야. 그렇게 치면 폴란드어도 아는걸. 너한테 배웠잖아. ”
“ 내가 뭘 가르쳐줬지? 나도 이제 한 마디도 안 나오는데. ”
“ 프타치예 믈레즈코(ptasie mleczko). ”
“ 아, 그건 우리 말이랑 똑같잖아. ”
“ 아니야, 네가 다르다고 했어. 맛이 다르면 단어도 다른 거라고. 그때 엄청 화냈잖아. 프타치예 믈레즈코랑 프티치예 말라코(птичье молоко) 완전 다르다고, 이름이랑 레시피 베껴봤자 라고, 폴란드 게 더 맛있다고. ”
“ 아, 그랬나. 그랬지. 근데 너한테 화낸 건 아니었어. 그 뺀질대는 놈 때문에 빡친 거였지. 블라디보스톡 자랑하면서 엄청 뻐기고, 그깟 초콜릿 우리가 모르는 것처럼. ”
“ 그걸 블라디보스톡에서 온 애가 줬었나? 난 기억도 안 나. 나한테 화낸 건 당연히 아니었겠지. 넌 나한테 한 번도 화 안 냈잖아. ”
코스챠는 커피를 쏟을 뻔했다. 알리사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웃었기 때문에, ‘넌 나한테 한 번도 화 안 냈잖아’라는 그 말투가 너무나 다정했기 때문에. 어떻게 알리사 같은 여자에게 화를 낼 수 있다는 말인가. 제정신을 가진 남자라면 그녀 앞에선 넋이 나가는 게 당연하다. 그 블라디보스톡 바람둥이도 그랬다, 그녀를 보자마자 홀딱 빠져서 갖은 수작을 다 부렸다. 서클에 찾아와서 악쇼노프니 부닌이니 헤밍웨이니 엄청 아는 척을 했지만 실상은 책과는 담을 쌓았고 입 발린 말만 할 줄 아는 놈이었다. 그때는 대학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됐고 모임 초기였던 터라 갈랴와 료카가 결혼하기도 전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보통 트로이네 집에서 모이곤 했다. 그 녀석의 엄마가 없을 때만 골라서. 그 블라디보스톡 망나니는 그들보다 나이가 많았고 어엿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잔뜩 뻐기곤 했다. 번지르르한 선원 복장을 갖춰 입고 광이 번쩍거리는 구두를 신고 나타났다. 심지어 선원도 아니었다. 본인 말로는 무역 화물을 관리하는 책임자라고 했지만 코스챠는 그것도 믿어지지 않았다. 하여튼 여자들은 선원 스타일로 쫙 빼입고 온갖 무역용어를 지껄이는,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이지만, 아폴론처럼 금발 곱슬머리를 바짝 붙여 자르고 어딘지 나른한 푸른 눈의 미남자인 그 자식에게 한동안 매료되어 있었고 그놈이 아무리 헛소리를 지껄여도 그냥 웃기만 했다.
두번째로 왔을 때 그 인간이 알리사에게 초콜릿을 주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만 구할 수 있는 거라고, 완전 신상이라고. 정말 맛있는 거라고. 프티치예 말라코라는 이름이라고, 비밀 생산 중인데 앞으로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 쫙 깔릴 거라고. 멋진 여자에겐 비밀 신상 초콜릿이 잘 어울린다고. 완전 청산유수로 지껄여댔다. 그때 코스챠는 취해 있었고 어째선지 욱해서 버럭 화를 냈다. 신상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거 폴란드에 가면 지천에 깔렸는데! 이름도 완전 베낀 거잖아! 프타치예 믈레즈코잖아! 분명히 그는 그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똑같은 걸 가지고 어디서 유세하냐고 성질을 냈던 것 같은데 알리사는 전혀 다르게 기억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코스챠는 그 바람둥이 자식과 치고받고 싸울 뻔했지만 이런 일에 익숙한 트로이가 잽싸게 그를 끌어다 재웠기 때문에 일은 싱겁게 끝나버렸다. 깨어났을 때는 모두 가버리고 없었다. 그는 반쯤 울고 싶은 심정으로 트로이에게 ‘알랴가 그놈이랑 나간 거야?’라고 물어봤다. 트로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알랴가 바보냐, 그런 허세에 쩐 놈이랑 나가게. 근데 나쟈는 걸려들었어. 둘이 페테르고프에 갔거든. 코스챠는 나쟈가 누구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마 스베타가 데려온 애였던 것 같았다. 알리사가 그놈과 어울리지 않았다는 사실만이 기쁠 뿐이었다. 테이블 위에 그 블라디보스톡 공장에서 나온 프티치예 말라코 초콜릿 상자가 그대로 놓여 있어서 더욱 기뻤다. 알리사가 ‘너네 어머니한테 드려, 초콜릿 좋아하시잖아’하고 놓고 갔다는 말에 숙취가 다 풀리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그는 일터에서 돌아온 트로이 어머니와 함께 앉아 차를 마시면서 그 가증스러운 프티치예 말라코를 몇 알 먹기까지 했다. 마음속으로는 ‘흥, 역시 폴란드 거 베낀 거잖아. 이름이라도 좀 바꾸든가’라고 투덜대면서.
...
오늘 차에 곁들여 먹으려고 개봉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산 이름이 다르고 맛도 좀 다른 프티치예 말라코들 사진 몇 장. 앞의 티타임 사진에도 두어 장 들어 있다.
왼편이 리투아니아, 오른편에 폴란드. 폴란드 건 요즘 분위기로 좀 귀엽게 포장을 바꾼것 같다. 리투아니아 초코는 비닐포장이 되어 있어 뿌옇게 나왔다. 저걸 벗기고 찍었어야 했는데 흐흑.
앞 포스팅에도 적었지만 색깔과 크기가 다르다. 앞의 연한 갈색 캐러멜 같은 게 폴란드, 뒤의 까만 녀석이 리투아니아.
그런데 이렇게 개봉해버린 이상 공기가 들어가면 아무리 냉동실에 넣어두어도 맛이 변할 것 같아서, 리투아니아 초콜릿은 락앤락 용기에 차곡차곡 넣고 상자의 포장만 잘 오려내어 안쪽을 덮어두었다. 폴란드 거랑 리투아니아 거 다 먹으려면 일년은 걸릴 것 같음.
연휴가 다 지나갔다. 추석 연휴 때는 여행을 다녀왔고, 지난주 월요일에 도착해서 하루 쉬고 노동으로 복귀, 그래도 사흘만에 다시 주말이 오고 오늘까지 연휴라 한결 여유가 있었는데 이제는 다 끝. 다시 폭풍노동과 압박의 나날이 기다리고 있다. 여행과 휴식으로 조금이라도 기운이 채워졌으니 이번 주를 잘 버텨낼 수 있기를.
새벽에 잠들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시차에 적응하려고 노력해서 일찍 자고 충분히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생활을 사흘 쯤 해냈는데 연휴에 차를 우려마시느라 카페인을 섭취하고 오전엔 늦게까지 게으름피우며 누워 있다 보니 도로 리듬이 깨졌다. 그래도 오늘 너무 늦지 않게 잠들어야 내일이 덜 힘들텐데.
연휴 전까지 업무와 인적 문제로 아주 정신없고 힘들었다. 금쪽이들의 문제도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내일은 그것들과도 대면해야 한다. 아주 어려운 과제 하나는 다른 팀으로 일시적 이관을 시켰는데 어떤 면에서는 다행이고 또 어떤 면에서는 타격도 있다. 좋은 점만 생각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회사와 내 업무 자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외적 요인들은 더욱 나빠지고 있어 좀 걱정이 된다. 매일 밤마다 서재 한구석에 마련해 놓은 끄라스느이 우골 앞에 선 채 시련이 오지 않게 해달라고 짧은 기도를 마치고 잠자리에 든다.
좋은 일 하나는 간밤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짧은 문단 하나였지만 첫 문장을 쓰는 순간 스스로의 동력으로 말이 풀려나가기 시작했고 이것은 좋은 징조이다. 메모를 마치고 조금 더 써보려 한다. 그런데 역시나 오늘도 실컷 게으름피우다 지금까지 하나도 안 썼음. 흑흑. 역시 원래는 야행성 인간인 것이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면서 손이 움직이려면 밤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일을 해야 하니 늦지 않게 잠자리에 들어야 하고 새벽에 일어나고... 어쨌든 조금이라도 쓰다 자야겠다.
연휴 마지막 날 오후 티타임. 이제 이렇게 여유로운 평일 오후의 티타임도 끝이라니 너무 아쉽다.
오늘 오후 티타임은 프티치예 말라코 초콜릿을 곁들여서. 그런데 막상 러시아산은 없고 폴란드 오리지널인 wedel사의 프타치예 믈레즈코와 영원한 휴가님이 가져다주신 리투아니아산 파욱쉬치우 피에나스 각 한 알씩. (셋 다 '새의 우유'라는 뜻이다) 사진에도 적어두었지만 연한 색깔이 폴란드 오리지널, 진한 색이 리투아니아 초콜릿이다. 둘 중에는 후자가 러시아에서 먹던 프티치예 말라코 맛에 더 가깝다. 초콜릿이 좀더 설탕 섞인 다크한 맛이고 훨씬 더 달다. 맛있긴 한데 이 초콜릿은 한번에 1~2알 이상 먹기에는 너무 달다. 이 초콜릿들에 대해선 별도 포스팅을 하나 더. 아래 링크.
시차 적응을 그런대로 잘 했다고 생각했지만 어제 오후에 차를 제대로 우려 마신데다 저녁 약속까지 있었기 때문에 일찍 잠들던 리듬이 흐트러져서 새벽 1시가 넘어 잠들었다. 아침에는 8시쯤 깼는데 한동안 뒹굴며 게으름피우다가 살풋 다시 잠이 들어서 늦게 일어났다.
사진 속 조그만 밤톨 세 알은 빌니우스에서 영원한 휴가님이 가져다 주신 것이다. 밤톨은 행운의 상징이라고들 한다. 나는 서울의 마로니에 세 알을, 영원한 휴가님은 빌니우스의 밤톨 세 알을 주고받았다. 이제 멀리 빌니우스에서 비행기 타고 온 밤톨 세 알은 도자기 짐승들과 엽서와 짧게 피었다 사라지는 꽃들, 오래가는 녹색 식물, 바르샤바 엽서와 오래된 러시아 그림 사본과 함께 자리를 잡았다. 이 집에 행운이 깃들기를.
그러고보니 푸른 줄무늬 깔개는 오래전 탈린의 어느 리넨 가게에서 사온 티타월이다. 자기도 모르게 발트 2국이 모인 거네. 리가에 못 간 게 역시 아쉽다. 원래는 옛날부터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세 도시 중에서는 제일 가고 싶었던 곳인데.
폴란드 물병에는 소국 한 송이를 꽂아두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소주병 같이 생겼고 또 원래 기대했던 것만큼은 예쁘지 않아서 앞으로도 꽃병으로 쓸지는 미지수임. (이런 것에는 냉정함. 별거 아니지만 나름대로 또 엄격한 잣대가 있음. 바로 옆의 에비앙 유리병은 테스트를 통과해서 이제껏 꽃병으로 잘 살아남아 있음)
침실에서 늦게 기어나와 아점을 먹고 차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원래 오늘 부모님을 보려고 했는데 일정이 조정되어 집에서 쉬었다. 아점 먹다가 왼쪽 볼 안쪽 살을 세게 씹었다 ㅠㅠ 그래서 지금 좀 부어 있음.
오늘은 글을 시작하고 싶은데 이 메모를 마친 후 몇 줄이라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저녁 늦게 욕조에 몸을 담근 채 이야기의 실마리를 조금씩 더 풀었다. 1인칭으로 쓸지 3인칭으로 쓸지 아직 결정을 하지 못했음. 이 글은 1인칭이 더 어울리기는 하는데 주인공의 특성상 그만큼 화술에 대해 신경을 써야 하는터라 아직 고민이다. 그리고 좀 가벼운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도 들어서 이 글을 지금 시작하는 게 맞나 싶다. 하긴 프티치예 말라코도 사실은 가벼운 글을 쓰려고 시작했던 건데 막상 써나가니 그렇게 가볍지 않았던 것을 떠올려보면, 아예 맘먹고 서무 시리즈 같은 글을 쓰지 않는 한 나는 정말로 가벼운 글은 잘 쓰지 못하는 것 같다 ㅜㅜ
어제 그리 편치 않은 약속 장소에 나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들어와 잠을 청하기 전에 문득 생각했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취미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혹은 쉬는 날 뭐하냐고 묻는다. 그런데 막상 그 취미에 대해 답하는 것은 쉽지 않다. 누구에게나 잘 통하는 안전하고 지루한 취미가 있고, 분명 진짜 취미이건만 교과서처럼 느껴지는 취미도 있다. 그리고 그다지 말하고 싶지 않은 취미가 있다. 가령 등산이라고 대답하는 것은 안전하다. 모두가 납득할만한 취미의 영역에 속한다. 그렇구나, 이 사람은 등산을 좋아하는구나. 그렇구나, 주말이면 산에 가는구나 등. 수영이에요, 배드민턴이에요 등등. 무해하고 안전하다. 나 같은 경우는 너무나도 고전적이고 지루하고 모범적인 답안이라 오히려 '안전하고 무해한' 느낌에서 벗어난다. 즉, '취미는 독서에요' 라고 말하는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도 어렵고 설령 그런가보다 하더라도 즉시 '아 지루한 사람이군. 그러니까 진짜 취미는 없는 거군' 으로 도약하기 쉽다. 티타임이나 꽃 다듬기는 어떤 취미라기보다는 그냥 일상에 가까우니 취미라고 하기가 선뜻 내키지 않고, 글쓰기에 대해서는 정말 친해진 사이라 하더라도 쉽사리 얘기하고 싶지 않다. 그건 취미라고 하기에는 또 너무 내밀하고 깊은 영역이기 때문이다.
내일 하루 더 쉬어서 참 다행이다. 월요병이 하루 미뤄짐. 꽃 사진 몇 장 접어두고 오늘 메모는 여기서 마친다.
... 자기 전에 추가
글을 시작해서 3분의 1페이지 가량 썼다. 처음에 생각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화자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인물은 쓰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
일요일 오후 티타임. 바르샤바 구시가지 기념품 시장에서 사온 할바를 조금 잘라서 먹었다. 시식해보고 맛있어서 한 통 사왔는데 양이 상당히 많아서 귀퉁이의 이 정도만 잘라내고 나머지는 칼로 금을 그어둔 후 잘 싸서 냉동실에 넣어두었다. 피스타치오와 바닐라 맛의 할바인데 끝에서 후추 맛이 난다. 향신료가 이것저것 들어가긴 했는데 정말 후추인지 아니면 후추랑 비슷한 다른 향료인지 잘 모르겠다. 질감은 아주 부드러워서 쉽게 부스러진다.
시리아 수제 할바라고 적혀 있긴 한데 :0 그런데 왜 바르샤바 기념품 시장에서 할바를 파는지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이 좌판에서는 할바 뿐만 아니라 인도와 아랍 관련 이것저것을 팔고 있었고 수반에서 물이 퐁퐁 솟아났으며 기분좋은 향 냄새도 났다. 이 할바를 맨 위 사진처럼 아주 조그맣게 조각내서 시식할 수 있게 해두었고 나는 그것을 먹어본 후 주인 아주머니에게 '이 통에 들어 있는게 이거 맞아요?' 하고 확인한 후 한 통 사왔다.
근데 언제 다 먹지. 쥬인이 놀러오면 잘라서 나눠먹을텐데.
할바를 잘랐으므로 무화과도 잘랐다.
그리고 좀 터키풍의 찻잔을 고름. 색채나 무늬는 터키풍이지만 사실은 역시 로모노소프이다. 좋아하는 찻잔이다.
간판이나 메뉴판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렇다고 옆을 두리번거리거나 위를 올려다보는 편은 아니어서 길거리에 놓여 있는 애들이나 눈높이 근처에 있는 녀석들 위주로 보게 된다. 손글씨나 직접 그린 그림이 가미되어 있으면 더 눈여겨 본다. 이건 바르샤바 중심가, 구시가지 가는 길에서 발견.
그런데 이 녀석은 딱히 예뻐서라기보다는 '우와 정말 정성들여서 썼구나' 라는 마음이 들어서 찍어둠. 너무 이렇게 반듯반듯한 글씨체는 손글씨의 자유분방이 덜해서 내 타입은 아니지만, 분필로 저렇게 반듯하게 글씨를 써놓고 심지어 색칠도 저렇게 꼼꼼하게... 균일한 저 빗금들까지... 진짜 정성들여 쓰셨군요, 모범상을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이 카페에 들어가지는 않았음 ㅎㅎㅎ)
이때 너무 더워서 목도 마르고 뭔가 마시고 싶어 허덕이고 있었지만, 정성들여 쓴 저 녀석을 무시하고 바로 옆에 있는 미니 까르푸 가게에 들어가 물을 사 마셨다. (그 가게에서는 첫날 영원한 휴가님과 함께 피에로기 군만두 찐만두의 여파로 목말라 괴로워하며 사과복숭아 주스와 리치 주스를 사마셨었고 또 며칠 후엔 더워서 아이스크림 사먹음. 그러고보니 세번이나 간 드문 곳이네. 사진 한장 없이 뜬금없이 까르푸 매점 얘기로 마무리)
아직도 시차의 여파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만 정말 정신없이 잤다. 새벽 두시쯤 깼다가 다시 암흑으로 빠져들었음. 퍼뜩 깼더니 이미 9시가 넘어 있었다. 새벽 꽃과 식료품 배송이 와 있어서 괴로워하며 현관으로 기어나가 박스들만 안으로 당겨 넣어놓고는 도로 침대로 들어가 한시간 넘게 더 붙어 있었다.
이렇게 정신없이 자던 중 깨어나기 직전의 꿈에서는 난데없이 그루지야에 갔다. 아무래도 바르샤바 여행에서 그루지야 식당에 갔던 여파인가 싶다. 꿈속에서는 내가 다른 나라에 갔다가 당일치기인지 몇시간 짜리로 잠깐 국경을 넘어 그루지야에 갔는데, 관광지가 아니고 그냥 언덕배기가 있는 골목 같은 곳이었다. (꿈에서 그루지야라고 생각해서 그렇지 전혀 그곳 느낌이 아니었음) 작은 카페에 들렀는데 카페 겸 문구와 빵을 파는 곳이었고 하차푸리와 처음 보는 그루지야 빵들이 있었다(근데 좀 브레첼 비슷한 것들과 앙금 든 빵들이 섞여 있어 지금 생각하면 전혀 그루지야 아님) 뭘 살까 이것저것 고르다 보니 계산대에 있는 사람이 한국 아주머니였다. 뭔가 이것저것 기억이 섞인 것 같다. 장사가 힘들다는 얘기를 했던 듯함. 나는 시계를 보니 곧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도대체 숙소에 들를 수는 있는지, 짐을 챙길 수는 있는지, 버스인지 기차인지를 탈 수는 있는지 모르겠어서 좀 혼란에 빠졌다가 깼다. 아무래도 이 꿈은 다음에는 그루지야에 가라는 계시인가보다(응?)
오늘의 꽃은 연분홍색 소국(이름이 무려 첫사랑 소국이라고 한다, 아이고 오글거려)과 하젤 장미였다. 오랜만에 장미를 주문했다. 이 장미는 향기가 좋고 또 꽃송이도 튼튼해서 좋아한다. 첫사랑 소국은 생각보다 꽃송이가 많이 큰 편이어서 놀랐다. 소국은 향기도 좋고 오래 가고 다 좋은데 잔잎사귀 제거하는 게 너무 귀찮다. 하지만 이 잔잎들을 제거해주지 않으면 물 속에서 줄기가 쉽게 상하고 물러지고 꽃의 수명이 짧아지니 좀 귀찮아도 처음에 잘 다듬어줘야 한다. 졸음에 취해 잔잎을 따내면서 생각해보니 근 한달 만에 꽃을 주문해 다듬고 있는 거였다. 마음 수양의 시간.
하기 싫은 청소를 하고 아점을 먹고 차를 마시며 책을 좀 읽었다. 원래는 오늘 발레를 보러 가려고 예매를 해놨었다. 내가 좋아하는 유니버설의 돈키호테였고 주역도 내가 좋아하는 무용수 페어였는데 좀 신경쓰이는 약속이 생긴 바람에 하는 수 없이 공연을 취소했다. 무척 아쉬웠다. 발레 못 본지 오래됐는데. 어쨌든 늦은 오후에 준비를 하고 신기 싫은 구두까지 꺼내 신고 나갔다 왔다. 부담스러운 약속이었는데 어쨌든 그럭저럭 별 문제없이 지나갔다.
집에 돌아오니 아홉시가 다 되어 있었다. 내일은 부모님을 뵈러 가려는데 여독이 덜 풀렸는지 몸이 너무 피곤하다. 책을 좀 읽다가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꽃 사진 몇 장과 함께 마무리.
여행에서 돌아와 첫 주말을 맞이하면 아쉬움과 함께 미묘한 즐거움과 안식의 느낌이 뒤섞인다. 여행에서 온 새 찻잔과 홍차로 티타임을 준비하면 희미한 설렘과 기쁨이 스멀거린다.
이번 바르샤바 여행에서 유일하게 사온 찻잔. 폴란드 찻잔은 여럿 가지고 있는 터라(정작 우리 나라와 프라하에서 샀던 것들이다) 여행을 가서도 꼭 사야겠다는 마음도 없었고 특유의 알록달록함과 묵직한 도자기가 티타임 자체에 아주 잘 어울리는 건 아니어서 무심하게 다녔다. 그러다 여행 후반부에 구시가지 인어 광장에 갔는데 뒷길의 기념품 가게 한켠이 폴란드 도자기들로 가득 차 있는 걸 보고 들어갔다가 이것을 발견했다. 일반적인 알록달록 꽃무늬나 기하학 무늬와는 좀 다른 타입이었고 다양한 푸른색을 엷게 채색해서 우아한 맛이 있었다. 크기는 일반적 찻잔보다 훨씬 작다.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지만 가격이 명확히 표시되어 있지 않아 주인에게 들고 가 물어보았다. 이것은 다른 찻잔보다 만원 가까이 비쌌다. 하지만 무늬나 정성을 보면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것을 건져오게 되었다. 푸른색 찻잔들이 대세를 차지하는 우리 집 카페 자이칙과도 잘 어울린다 :)
홍차는 영원한 휴가님께서 빌니우스의 스코니스 이르 크바파스 홍차 가게에서 나를 위해 사오신 올해산 다즐링 퍼스트 플러쉬. 햇차라서 향이 아주 좋고 부드럽다. 이것은 우리가 묵었던 소피텔의 방에서 먼저 한번 개봉해 우려 마셨다(카페 자이칙 바르샤바 분점) 그때 무척 맛있게 마셨다. 홍차는 경수로 우려야 더 맛있기 때문에 아마 우리 나라에서 우리면 그 맛은 안 나겠지 싶었지만 정성들여 찻잎을 좀더 많이 넣고 우리자 오늘도 무척 향긋하고 맛있었다. 스코니스 이르 크바파스 가게에 갔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바르샤바 찻잔과 빌니우스 홍차. 뭐 엄밀히 말하면 다즐링이니까 인도에서 왔지만 그래도 빌니우스 홍차가게에서 왔으니까 빌니우스 홍차.
티스토리는 가뜩이나 편집이 별로 편하지 않은데 갈수록 더 안 좋아진다. 얼마 전 서명 입력이 바뀌어서 이미 불편해졌는데 며칠 전부터는 더 이상해졌음. 그래서 이미지에 서명 넣기가 너무 안 좋음. 저장해놓아도 아무 소용도 없고.
사진의 엽서는 바르샤바의 구시가지 광장. 인어상을 찾으러 헤매다녔던 바로 그곳이다. 왼편 하단에 보이는 푸르스름한 동상 그림이 인어상. 바르샤바 엽서는 이것과 냉장고에 붙여둔 와지엔키 공원 엽서 딱 두 장 사왔다. 엽서 앞 도자기 짐승들 중 오른쪽에 깨알같이 폴란드 도자기 토끼가 한마리 있다. 그런데 이 녀석은 폴란드에서 사온 게 아니고 6년 전쯤 안국동의 어느 도자기 가게에서 건져온 것이다. 막상 요번에 바르샤바의 기념품 가게 한켠에 우르르 모여있던 조그만 도자기 짐승들에는 눈도 가지 않았음. 저런 녀석들이 눈에 들어오고 하나하나 소중하게 손에 쥐던 시기가 있었는데. 모르겠다, 다시 러시아에 가게 되는 날이 오면 로모노소프 가게에 들러 언제나처럼 도자기 토끼나 곰 한 마리를 집어들지도 모르지. 사진 속 폴란드 토끼 양쪽의 하얀 도자기 짐승들이 모두 그런 식으로 한 마리 한 마리씩 왔으니까. (절대로 한번에 두 마리를 산 적이 없음. 항상 딱 하나씩만 골랐음)
오늘은 재택근무를 했다. 붉은 군대 때문에 어제와 오늘 무척 몸이 아팠고 약으로 버텼다. 너무 피곤해서 어제도 열시 즈음 쓰러져 잤고 오늘은 재택이라 평소보단 좀 늦게 일어나서 수면은 충분히 취했는데 아직 여독이 안 풀린 건지 시차가 좀 남아 있는 건지 오후에 너무 졸리고 머리가 무거웠다. 재택근무라고 일이 적은 건 아니어서 계속해서 일을 하고 업무연락을 취했지만 그래도 한참 바쁠 때보다는 좀 나았다. 이번주에 여행에서 돌아온 게 믿어지지 않음. 그래도 사흘만 일하고 다시 쉬게 되어 다행이다. 다음주 월요일도 쉬니까 그것도 다행이다.
주말과 월요일까지 푹 쉬고 싶은데 내일 저녁에 내키지 않는 약속이 하나 있어서 별로 편한 마음이 아니다. 게다가 입을 옷도 마땅치 않아서 우울해하고 있음. 이것은 대부분 둥실둥실해진 여파이다! 뭐 어쩔 수 없지 ㅠㅠ 그 외에는 그냥 쉬고, 또 글도 좀 시작해보려고 한다. 이미 너무 졸려온다. 오늘도 늦지 않게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첫날 구시가지에 갔을 때 들렀던 조그만 기념품 시장. 그 시장에서 나중에 할바를 한 통 샀다. 왼편에는 헌책들을 쌓아놓고 파는 좌판이 있었는데 무심코 눈을 돌렸을 때 도스토예프스키가 눈에 들어왔다. 저 초상은 힐끗 봐도 결코 헷갈릴 수 없다. 잘 보면 아래에는 불가코프 책도 깔려 있고. 이 책방은 나중에 안쪽을 훑어보니 옛날 공산주의 시절에 대한 책들, 그리고 러시아어로 된 책들이 많았다. 오랜 역사, 소련과 그 이후,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현재 러시아와 폴란드의 관계를 생각하며 뭔가 묘한 마음이 되었다.
새벽 출근하는데 너무 춥고 썰렁했다. 스카프를 절로 여미게 되는 날씨였다. 낮에도 선선했고 하늘이 무척 파래서 좋은 날씨였다(그러나 빡세게 일하느라 날씨 만끽 못함) 사실 이런 날씨면 우리 나라에서도 공원에 가서 빛 보며 책 읽으면 좋은데 흑흑, 노동하느라 불가능.
어제 너무 잠이 모자라서 허덕거리다 쓰러져 잤다. 한두시간 후 퍼뜩 밤 11시 좀 넘어서 깨어나서는 도대체 이 11시라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아침까지 자버린 것인지, 아니면 우리 나라가 아니라 다른 곳에 있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잠시 후 '아 조금 자다 깬 거구나' 하고는 도로 잤고 알람 울릴 때 깨어났다. 그런데 아직도 잠이 모자라는 건지, 아니면 역시 시차 때문인지 내내 졸리고 머리가 멍했다. 어쨌든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출근했다.
종일 바쁘게 일했고 정신이 없었다. 머리가 굵을대로 굵어져 제멋대로 꼼수를 쓰는 전통의 강호 금쪽이 히스테리 직원을 보면서 '쟤는 자기가 꼼수 쓰는 게 남의 눈에 안 보인다고 믿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해보았다. 그래봤자 별 소용이 없다. 이런 인간은 안 고쳐지니까. 최악의 금쪽이인 독버섯은 이번주까지 휴가라 다음주에 컴백한다. 그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내가 웬만하면 동료나 특히 부하, 후배 직원에 대해서는 이런 마음까지 드는 적이 없는데 이 사람은 정말 상종하기가 싫다. 그런데도 부서를 아우르고 업무를 진행하기 위해 사회적 가면을 쓰고 이 사람까지 품어야 하니 너무 피곤하고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처음엔 히스테리 금쪽이 하나만으로도 너무 힘들었는데 거기 더해 더더욱 상식이 안통하는 슈퍼 자기중심주의자 독버섯의 득세로 정말이지 피곤하기 그지없다.
곧 자러 가야겠다. 너무 피곤하고 졸리다. 오늘까지는 그날로 아픈 날이라 좀전에도 진통제를 먹었다. 토요일 저녁에는 별로 내키지 않는 약속까지 잡혔다. 많이 피곤하고 부담이 된다. 이런저런 생각 말고 어서 자야겠다.
보름달 쿠마는 추석 그림이지만 막상 추석날 바르샤바 밤하늘에 구름이 어려 달을 못 봤으니 오늘...
시차 적응이 되지 않아 세시간 남짓 자고 출근해서 무척 피곤했다. 일은 당연히 몰려 있었고 매우 바빴다.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퇴근. 간밤에 잠을 못 잔 건 시차 + pms 였다. 퇴근 무렵 붉은 군대도 도래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잠이 더 안오고 힘들었지... 귀가해 저녁 먹은 후 진통제를 먹었다. 오늘은 곧 자러 가야겠다. 퇴근 지하철에서 정신없이 졸았었다. 내일도 바쁜 일정이다. 흑흑 다시 놀고 싶다ㅠㅠ
사진은 거실과 부엌 사이에 놓아둔 냉장고. 자석 대신 페테르부르크 사진과 엽서 몇 장을 붙여두곤 했는데 작년에 빌니우스 엽서가 하나 추가되었고 어제 저녁에 바르샤바 엽서도 아래 한 장 붙였다. 여기는 와지엔키 공원이다. 사스키 공원 엽서가 있으면 사려고 했는데 사실 그 공원은 큰 분수 하나만 덜렁 있고 그외에는 그냥 녹지가 많은 곳일 뿐이라 큰 특색이 없고 일요일에 쇼팽 연주회를 하는 이 공원이 더 유명하고 그리기도 쉬워서 이 엽서를 팔았던 게 아닌가 싶다. 바르샤바 대학 앞 서점에서 산 엽서인데 그래도 이건 귀여웠다. 맨 위 귀퉁이만 나온 건 페테르부르크 지도 엽서. 그러니까 위부터 아래로 순서대로 페테르부르크, 빌니우스, 바르샤바이다. 이건 위도 순서이기도 하려나. 대충 그럴 것 같기는 한데....
어제 열한시 좀 넘어서 잠들었다. 여독이 심했는지 너무 정신없이 잤다. 꿈도 이것저것 꿨던 것 같은데 기억이 별로 안 나는 걸로 봐서 그래도 잘 잔 것 같다. 드물게 여덟시간 정도 내리 잤다. 자다가 몸이 너무 쑤시고 뒷골이 아파서 괴로워했던 기억이 좀 나지만 도로 잤고, 퍼뜩 깼을 때는 '분명히 새벽 서너시겠지... 지금 깨버리면 다시 못 자고 괴롭겠지' 라 생각하며 어떻게든 도로 자려고 했다. 그러다 헐거운 안대 아래로 희미한 빛이 스며드는 것을 깨달았고 '이 정도면 여섯시는 넘었을지도...' 라 생각하며 더듬더듬 폰을 끌어당겨 시간을 확인하니 일곱시 반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 간밤엔 잘 잔 건데... 본시 여독 때문에 첫날은 시차 괴로움이 덜하고 그 다음날부터가 힘든 거라서, 오늘 밤에 잘 자는 것이 관건이다. 내일부터는 다시 다섯시 반에 일어나 출근해야 하니까. 늦지 않게 잠자리에 들려고 한다.
아침 일찍 깨긴 했지만 이마트에서 아침 배송 온 식료품과 생필품 중 과일만 하나 냉장고에 넣어두고 나머지는 그냥 미뤄둔 채 침대에 계속 누워 비몽사몽 게으름 피웠다. 그렇게 침대와 한몸이 되어 있다가 열한시 다 되어서야 일어났다. 목욕을 하고 아점을 챙겨먹은 후 좀 이르게 오후의 차를 마셨다. 부모님과 동생과 통화를 하고(엄마의 칠순이 다가오고 있어서 이것저것...) 책을 좀 읽고 쉬었다. 분명 일찍 깨어났지만 오늘 하루는 순식간에 다 지나갔다. 여독이 풀린 건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하루를 통째로 쉴 수 있어 다행이다. 오늘은 여행 전에 구상했던 글을 시작해보고 싶었지만 휴식이 더 필요한 것 같아서 그냥 쉬었다. 이번 주말에 쓰기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제 내일부터는 다시 빡센 노동의 나날이다. 여행 전날까지 너무 바빴고 온갖 골칫거리들이 터져나왔기 때문에 내일 출근하면 해결해야 할 일들이 어마어마하게 산적해 있을 것이다. 속썩이는 사람 문제도 있고 업무 조정 문제도 있다. 아 모르겠다, 어차피 내일 일찍 출근할 거니까 내일부터 또 정신없이 일하면서 대처하겠지 ㅜㅜ 그러고보니 지갑에서 유로와 즈워티 몇 장을 빼야 하는구나. 엉엉 여행이 끝났어. 이럴 때 제일 실감남.
폴란드는 뭔가 예쁘게 꾸며서 잘 팔아먹는 자본주의 상술이 아직 발달하지 않은 것 같다. 곳곳에 예쁜 것들도 아예 없지는 않은데 기념품들은 어딘가 허술하다. 나도 이제 나이도 먹고 매사 귀차니즘이 발동되어 예전처럼 이것저것 귀여운 것들을 사오는 일도 거의 없어졌고 또 이곳의 가장 유명한 기념품이라면 역시 폴란드 도자기겠지만 이건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구할수 있다보니 '찻잔 사야 해' 하고 악착같이 찾으러 다니지도 않았다(그런데 결국 우연히 발견한 가게에서 이쁜거 하나 사긴 했음)
어쨌든 명소나 기념품을 이쁘게 포장해 팔아먹는 기술이 별로 없는 동네라, 기념품 쇼핑이라고는 마지막날 산 그나마 귀여운 스케치 엽서 두장, 그리고 위에서 얘기한 찻잔 하나가 전부였다. 이 사진은 첫날 구시가지 기념품샵에서 발견해 좀 우스워서 찍어둔 양말들. 폴란드에서 그나마 가장 메인으로 밀고 있는 게 바로 이것들이다. 즉, 유명인은 3명이다. 쇼팽, 퀴리부인, 코페르니쿠스. 그리고 저 폴란드 만두, 피에로기. 맨 아래는 문화과학궁전 그림 양말인데 이건 호불호가 갈리니 패스. 영원한 휴가님은 나에게 저 양말 3종 사가라고 했는데 좀 웃기고 귀엽긴 했지만 위대하신 분들을 양말로 신고 깔아뭉개려니 뭔가 쉽지 않았다 ㅎㅎㅎㅎ
쇼팽이야 원체 유명하니 좀더 노력해서 멋지게 팔아먹어도 될텐데 너무 제대로 된 물건이 없어서 뭔가 홍보와 디자인을 좀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또 생각해보면 이런게 폴란드의 매력인가 싶다. 너도나도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는. 그리고 피에로기는 사실 좀 우스운 느낌이 많이 든다. 왜냐면 저거 그냥 만두라서 ㅠㅠ 어느 나라에 가도 웬만하면 자기네 식 만두가 있는데 유독 폴란드는 이 피에로기야말로 폴란드의 전통음식이라고 엄청 밀어붙이는 느낌이었다. 맛은 러시아 펠메니나 우리나라 만두와 크게 다르진 않고, 필링이 좀더 다양하다. 과일 들어간 디저트용도 많고(근데 이건 러시아도 그렇다. 러시아에서는 고기 든 건 펠메니, 과일 든 건 바레니키라고 한다만) 찐 것과 기름에 구운 것 둘다 있는데 나와 영원한 휴가님은 첫날 전문점에서 두가지를 다 시켰다가 양이 너무 많아서 배가 터지는 줄 알았음. 그날 우리는 점심땐 피에로기를 먹고 저녁엔 베트남 식당에서 스프링롤을 먹고 이틀후엔 그루지야 음식점에서 그동네식 만두인 힌칼리를 먹어서 사흘 동안 만두 파티였음. 아마 앞으로 한동안 만두는 못 먹을 것 같다. 그리고 러시아어로 피로그는 속이 든 파이이고 만두는 펠메니인데 폴란드에서는 만두를 피에로기라고 해서 첨엔 좀 헷갈렸다.
심지어 만두모양 냉장고 자석까지. 근데 이것도 잘 보면 정말 대충 만들었다. 아니, 만두 자석 만들 거면 좀 윤도 내고 더 귀엽게 만들 수도 있을텐데 그냥 밀가루 반죽 색깔로 철푸덕...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적인 폴란드 :) 근데 이런게 또 어쩐지 귀엽다. (하지만 예쁘지 않아서 결국 하나도 안 샀다. 미감 앞에선 냉정한 토끼의 마음 ㅋㅋ) 저 만두 자석은 아예 글씨가 하나도 씌어 있지 않은 민자도 있다. 그건 아마 구매자가 직접 쓰라는 건가 싶기도 함.
작년 프라하에서 발견한 헤드샷 커피의 색감에 매료되어, 돌아온 후 그 카페에서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러브라믹스 찻잔을 주문했었다. 이번에 바르샤바에서 만났을 때 영원한 휴가님이 빌니우스의 엘스카 카페에서 발견했다면서 같은 색의 러브라믹스 티포트를 선물해주셨다. (작년 빌니우스에서 가보고 싶었지만 다른 곳들 가느라 결국 들러보진 못하고 필리모 거리를 걸어가며 지나쳐가기만 했던 카페) 바르샤바 숙소에서 먼저 개봉해 차 우려 마시고, 오늘 집에서 카페 자이칙 본점 개장, 러브라믹스 세트로 티타임.
홍차는 어제 실패했던 네팔 골드에 다시 도전. 이번엔 찻잎을 두배로 넣고, 찻집 주인이 3분만 우리라 했던 말을 어기고 4분 정도 우렸다. 진하게 우려내니 맛이 훨씬 나았다. 풀맛과 세컨드플러쉬가 섞인 다즐링 느낌인데 확실히 깊은 맛은 좀 부족해서 아쉬웠다. 저 러브라믹스 티포트가 내가 평소 쓰던 포트보다는 작아서 물의 양에 비해 찻잎이 너무 많긴 했지만 그래서 어제보다 맛이 좀 잘 우러난 게 아닐까 싶다.
러브라믹스 찻잔이 두개라 받침접시 하나를 디저트 접시로 이용. 그래도 접시가 모자랐는데 저 색깔에 딱 들어맞는 건 없어서 이럴때 전천후로 쓰는 마리메꼬 파란 접시 추가.
이 티포트는 형제인 찻잔, 커피잔과 마찬가지로 아주 완벽하게 동글동글하다. 그리고 찻잎 거름망이 아주 튼튼하고 훌륭하다. 거름망에 손잡이도 달려 있어서 편하다. 유일하게 안 좋은 건 주둥이가 너무 짧다는 것임. 이게 디자인을 중시하면 주둥이가 좀 짧은 경향이 있다. 알토 카페의 티포트도 이렇게 딱 떨어지는 디자인이었는데 주둥이가 짧았음. 그리고 뚜껑엔 손잡이 대신 동그란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것이 무척 귀엽고 의외로 잡고 빼기에도 편하다. 다만 설거지할때 저 구멍 안으로 물이 들어가서 물 빼고 잘 말리기가 어렵다. 귀여운 것엔 뭔가 대가가 따르는 것인가 싶다. 용량은 아마 500밀리 정도 들어가는 것 같음. 그러니 딱 1인용 티포트이다 (나는 보통 800밀리짜리 4th market 티포트를 쓰는지라 이 포트가 조금 작게 느껴지긴 하지만 사실 항상 두번 우려마시니 이 크기도 괜찮다)
서양배는 어제 래플스 조식 테이블에서 챙겨온 것이다. 아니, 이미 그저께구나. 그런데 슬프게도 이 녀석은 서양배 맛은 거의 하나도 안 나고 그냥 사과 맛이었다. 과육이 아주 부드럽다는 거 빼고는 그냥 사과 느낌. 사과 맛 나는 사과는 우리나라에도 많은데 ㅠㅠ 우리 나라에도 서양배가 나오면 좋겠는데 우리 정통 배가 워낙 막강하고 맛있어서 아마 서양배는 재배를 안하겠지. 사람 입맛이 신기한게 나는 예전에 서양배를 좋아하지 않았고 '푸석푸석하고 떫고 싱겁고 맛없다, 디저트나 해먹으면 딱이다, 우리나라 배랑 비교가 안된다' 하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여행 가면 조식 테이블에서 이것부터 찾게 되고... 우리 배도 좋아하는데 아무래도 우리 배는 너무 큰데다 껍질을 반드시 깎아야 하고 한번에 다 먹기도 힘들다 보니 조그만 서양배가 먹기 편한 점도 있다. 이렇게 쓰고 보니 결국 게으름 때문에 서양배에 익숙해진 것인가 싶다.
불그스름한 것이 이때부터 뭔가 사과 느낌이...
여태 항상 서양배는 그냥 베어먹어서 요렇게 잘라본 적이 없는데, 며칠전 영원한 휴가님이 티타임 사진 보내주신 것에 서양배를 길고 이쁘게 썰어놓은 것을 보고 나도 접시에 잘라서 담아봄. 근데 그렇게 길고 날씬하고 이쁘게 썰지 못함 ㅎㅎㅎ (원래 칼질 못하는데다 성질이 급해서 대충대충 슥슥 썰어버림. 아마 요리를 배웠어도 절대로 디저트 요리사나 플레이팅 같은 건 못했을 거 같다ㅠㅠ)
이 물은 폴란드 공항 라운지에서 한병 챙겨온 것이다. 비행기에서 마시려 했는데 물을 줘서 그냥 가방에 넣어왔다. 이 물은 맛있다. 생각해보니 래플스에서 준 물도 맛있었다. 전체적으로 폴란드 물이 체코 물보다는 맛있었다. 그러나 가장 맛있었던 물은 역시 빌니우스의 <티셰>였다. 그건 켐핀스키에서 준 물이었는데 맛있어서 마트에 가서도 따로 사 마셨다. 리투아니아산 물로 언젠가 제일 맛있는 생수 1위로도 뽑혔다고 한다. 티셰가 우리 나라에 수입되면 좋겠다. 조금 비싸더라도 사 마실텐데(심지어 리투아니아에서도 다른 물과 비교해 약간 비싸긴 했지만 그렇게 비싼 편도 아니었음) 어쨌든 이 폴란드 물은 다 마시면 병은 꽃병으로 활용하려는데... 잘 보니 병 양 옆으로 기다란 금이 가 있다. 비행기 타고 오면서 가방 안에서 부딪쳐 금간 건가... 아니면 원래 장식 금인가... 이게 330밀리짜리라 작은 꽃 한두송이 꽂기 딱 좋은 사이즈인데. 근데 지금 잘 보니 또 좀 소주병 같기도 하네. 일단 한번쯤 꽃을 꽂아보겠음.
연휴에 돌아왔기 때문에 꽃 사이트가 배송을 쉬어서 오늘은 꽃 없는 카페 자이칙. 꽃은 주말에...
집에 돌아와서 10월 달력을 넘겼다. 얼마전 새로 만든 달력. 10월 사진은 아스토리야 페테르부르크.
어제 비행기가 원래 12:10에 출발이었고 전혀 지연 메시지가 없었다. 심지어 보딩 사인도 일찍 떴다. 알고보니 비행기가 탑승교 없이 비행장 저 멀리 구석에 있었고 모두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이것까지야 우리 나라 아닌 다른 공항에서 종종 있는 일이니 그러려니 했는데, 버스가 비행기 앞에 도착하고서도 문을 열어주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밀폐공간 내에서 더위에 지쳐 허덕였다. 그러다가 버스가 되돌아서 다시 공항으로... 메일을 확인해보니 12:30으로 조금 지연된다고 한다. 아니 겨우 20분 지연된다고 이렇게 해야 하나. 다 내리라고 해서 모두 투덜대며 다시 올라갔는데 1분도 안되어 다시 또 버스에 타라고 했다. 그런데 버스를 타고 왔던 길을 재탕해 다시 비행기 앞에 갔는데 또 문을 안 열어주고 이번에 또 메일이 와서 기체 정비 문제로 2:40으로 두시간이나 더 지연된다고 했다. '망할넘의 폴란드항공 또 시작이야!' 하고 욕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버스 문이 열렸고 승객들에게 비행기에 타라고 함. 그런데 이러면 더 불안한게, 분명 기체 정비를 해야 해서 지연이랬는데 '아니야 지금 타' 라고 하면 '대충 정비하고 때운거 아닌가' 하는 의심이 뭉게뭉게... (나는 작년 빌니우스 갈때 연착으로 바르샤바-빌니우스행 비행기를 놓치고 느닷없이 바르샤바에서 1박한 이후 폴란드항공과 폴란드공항에 뿌리깊은 불신을 갖게 되었음)
어쨌든 탑승을 했고 비행기는 1시가 조금 안되어 이륙했다. 오고 갈 때 모두 흑해를 지날 때 터뷸런스가 잦아서 많이 흔들린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기류 문제가 별로 없어 비교적 평온한 비행이었다. 잠이 너무 모자란 상태였으나 약간 졸았을 뿐 많이 눈을 붙이진 못했다.
인천공항에는 6시 반에 도착해서 그리 늦어지지 않았다. 입국수속도 빨리 했으나 가방이 늦게 나왔고, 택시를 타고 집에 오니 8시가 좀 안되어 있었다. 환기를 시키고 대충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은 후 침대로 들어갔는데 빨리 잠들지 못해서 9시 넘어서 잠들었다. 4시간 정도 정신없이 자고 일어났다.
일어나서는 밥을 챙겨먹고(엄마가 명절 음식을 갖다놓으셨다), 괴로워하며 1시간 가량 가방을 풀었다. 그리고 빨래도 돌리고(내일 한번 더 돌려야 한다. 빨랫줄에 널어둘 공간이 모자라서), 끙끙거리며 우렁이를 갈망하며 청소도 했다. 헉헉. 그리고 차를 한 잔 우려마셨다.
다시 돌아온 화정 카페 자이칙 본점.
파제르 초콜릿은 영원한 휴가님이 주신 초코 박스 안에서 한 알 꺼냈다. 라즈베리 요거트 맛이 새로 나온 모양인데 맛있었다. 옆은 폴란드항공 쪽에서 집어온 캐러멜. 설탕이 버석거린다. 이 녀석은 모양도 포장의 형태도 러시아 초코나 사탕과 너무 비슷하다.
새 찻잔과 영원한 휴가님이 선물해주신 티포트는 이때 싱크대에 들어가 있었기에 오늘은 기존 찻잔. 바르샤바 노비 쉬비아트 거리의 홍차 가게에서 사온 '네팔 골드' 홍차를 우렸는데 이미 네시가 넘은 늦은 오후였고 시차 적응 걱정이 되어 첫물을 버리고 연하게 우려마셨더니 밍밍하고 아무 맛이 없었다. 맛있어야 하는데... 내가 연하게 우려서 그런거겠지 했는데 같은 차를 사가셨던 영원한 휴가님도 '연하든 진하든 둘다 무슨 맛인지 특색이 없다'고 하셔서 좀 불안함. 내일 다시 도전을...
차를 마시면서 폰으로 업무 메일을 좀 확인했다. 역시 산더미처럼... 3분의 1쯤 체크하다가 포기하고 그냥 모레로 미뤘다. 이번 여행은 항공 스케줄 때문에 하루 일찍 돌아왔는데, 이른 아침 도착이기도 해서 결과적으로는 내일까지 쉬면서 여독을 좀 풀 수 있어 이것이 좋은 점인 것 같다. 예전엔 항상 도착하자마자 다음날 출근을 했기 때문이다. 힘들게 시간 빼서 나가는 여행이니 돈과 시간을 생각하면 하루라도 더 있다 오는게 좋지만 이제 몸도 부실하고 쉽지 않으니.
늦게 차를 마시고 집안일을 좀 하고 부모님과 동생과 통화를 마치고 나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오늘 밤 11시 전에 잠자리에 들어서 시차 적응을 하는 것이 목표인데. 지금 잠은 매우 모자란 상태이긴 하다만 과연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내일 쉬니까 다행이다. 일 생각은 출근날부터 하는 걸로... (그러나 사실 비행기에서 자려고 애쓰면서도 물밀듯 온갖 업무 문제가 떠올라서 괴로웠음)
이 메모는 다시 fragments 폴더로 가야 하는 게 맞는데, 앞부분에 폴란드항공 때문에 고생한 얘기가 있으니 그냥 바르샤바 폴더에 남겨둔다. 그리고 오늘 티타임 사진 두어 장 더 붙여놓고 마무리.
막판에 좀 연착되고 비행장으로 우리를 태우고 간 버스가 되돌아갔다가 다시 가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비행 자체는 초반 흑해 지날때 터뷸런스가 여러번 있었던 것 외엔 다행히 순조로웠다. 6시 반에 착륙. 빨리 수속을 했지만 가방이 좀 늦게 나왔다. 그래도 바르샤바 공항에 비하면 인천공항은 역시 최고 ㅠㅠ
입국수속 받으러 바삐 걷다가, 빛이 너무 찬란해서 찍음. 흑흑 내 여행은 끝났지만 누군가는 저거 타고 여행 시작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