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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8. 13. 16:50

호밀 포대와 포슬포슬 비스킷 about writing2023. 8. 13. 16:50

 

 

 

 

한달 쯤 전에 마친 알리사와 코스챠의 단편 후반부의 작은 에피소드를 발췌해 본다. 아직 새 글을 구상하지는 못했다. 

 

 

'프티치예 말라코'라는 제목의 이 단편은 1981년 가을 프라하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주인공인 코스챠의 회상 속에서 오랜 옛날의 이야기가 종종 등장한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코스챠, 알리사, 트로이는 모두 초등~고등학교 동창이고 후자의 둘은 대학도 같이 갔다. 알리사는 외교관이었던 아버지 때문에 어린 시절을 암스테르담과 런던에서 보내다 열한두 살 무렵 아버지의 복귀 때문에 레닌그라드의 일반 학교로 전학을 오고 코스챠와 트로이랑 한 반이 되었다. 이야기는 소설 속의 현재인 1981년과 20여년 전인 어린 시절, 그리고 그 중간을 오간다. 트로이는 어린 시절에는 아직 안드레이 라는 본명을 쓰고 있어서 코스챠의 회상에서는 종종 안드류샤(안드레이의 애칭)로 등장한다. 발췌한 에피소드는 알리사가 전학와서 아직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던 초창기의 이야기이다. 알랴, 코스칙은 각각 알리사와 코스챠의 애칭이다. 

 

 

날씨가 더우니 눈오는 날 이야기로...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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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대를 발견한 건 코스챠였다. 알리사가 전학온지 두어 달 후였고 눈이 많이 내렸던 날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에도 모두 운동장에 모여 눈싸움을 하며 놀았다. 코스챠는 눈뭉치를 엄청 빨리, 무지 많이 만들었고 매사에 그를 폴란드 촌뜨기라고 놀려댔던 골목대장 비챠에게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눈투성이가 되어 부아가 치민 비챠는 집채만한 눈덩이를 양손으로 쳐들고 탱크처럼 돌진해왔다. 코스챠는 비챠의 약을 올리다가 충돌 직전에 잽싸게 옆으로 피했다. 그는 언제나 맨땅보다는 눈밭과 진흙탕 웅덩이에서 더 날쌨다. 복수에 실패한 비챠는 화가 나서 팔을 윙윙 돌리며 눈덩이를 홱 내팽개쳤는데 하필 그때 도서실에서 책을 빌리느라 늦게 나왔던 알리사가 옆을 지나가다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눈 세례를 받았다. 꼭 만화나 코미디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순식간에 머리와 얼굴, 온몸에 눈을 하얗게 뒤집어썼고 아이들이 눈사람이다, 눈사람!’ 하고 왁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알리사는 하나도 즐겁지 않은 것 같았다. 바르르 떨더니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이런 일은 흔하지 않았다. 여자애들도 눈싸움을 많이 했으니까. 눈 같은 건 맞아도 별로 아프지 않으니까. 그냥 다 같이 노는 중이었으니까. 아이들은 모두 당황했고 평소 알리사를 양키 계집애라고 놀렸던 비챠도 선생님이 올까 봐 무서웠는지 뻣뻣하게 굳었다. 코스챠도 어쩔 줄을 몰랐다. 자기가 피하지 않았다면, 애초부터 비챠에게 눈뭉치를 던지지 않았다면 괜찮았을 텐데. 알랴는 눈을 본 적이 없나 봐, 눈싸움 같은 건 안 해봤나 봐. 런던에서 와서 그런가 봐.

 

 

 그때 안드류샤, 그러니까 트로이가 알리사의 곁으로 가서 머리와 어깨에 내려앉은 눈을 털어주고는 자기 목도리를 풀어서 칭칭 둘러주었다. 그 자식은 평소에는 굼뜨기 이를 바 없는 주제에 이럴 때는 잘도 나섰다. 트로이가 알리사를 달래주는 동안 아이들은 괜히 선생님에게 들켜 혼이 날까봐 뿔뿔이 흩어졌다. 비챠도 당연히 도망갔다. 코스챠는 뻘쭘하게 남아 있다가 눈더미 사이에서 거뭇거뭇하고 납작한 뭔가를 발견했다. 잡아당겨 보니 커다란 포대가 딸려 나왔다. 붉은 글씨로 <호밀 50킬로>라고 적혀 있었다. 포대는 비어 있었고 아주 튼튼했다. 한마디로 횡재였다. 코스챠는 포대를 질질 끌고 알리사에게 가서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말했다. 알랴, 울지 마. 내가 썰매 태워줄게.

 

 

 그날 그들은 셋이서 호밀 포대를 타고 실컷 놀았다. 코스챠와 트로이가 돌아가며 포대 썰매를 끌어주었다. 알리사는 당연히 눈을 본 적이 있다고, 런던에도 눈이 온다고 말했다. 눈싸움 같은 건 어린애들이나 하는 거니까 싫다고 자못 새침하게 말했지만 포대 썰매는 사족을 못 썼다. 나중에는 포대를 셋이서 뒤집어쓰고 눈더미 위를 떼굴떼굴 굴러 내려가는 놀이도 했다. 그러다 안드류샤-트로이는 안경다리를 날려 먹었고 코스챠는 감기에 걸렸고 알리사는 장갑 한 짝을 잃어버렸다. 코스챠는 주도면밀하게 포대를 전나무 뒤에 숨겨놓았다. 다음날 가보니 포대는 사라지고 없었지만 별로 실망하지는 않았다. 방과 후에 알리사가 그와 트로이를 자기네 집으로 초대해서 같이 차를 마시고 꾸덕꾸덕한 크림과 잼을 바른 포슬포슬한 비스킷을 먹었기 때문이다. 차에는 우유를 넣었다. 런던에서는 이렇게 먹는다고 했다. 코스챠는 빵부스러기를 흘리고 잼을 잔뜩 묻혔다. 알리사는 바보 코스칙 다 흘리네, 애기처럼’  하면서 손수건으로 그의 입을 닦아주었다. 트로이는 알리사의 책들을 넘겨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

 

 
 
사진은 옛날 소련 시절 눈오는 날 노는 아이들 모습들. 코스챠와 트로이, 알리사 삼총사는 이미 열두 살이 다 되어갈 무렵이라 사진의 아이들보다는 좀 더 컸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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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