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5

« 2024/5 »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한달 쯤 전 마친 단편 <프티치예 말라코> 를 올려본다. 배경은 1981년 9월,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이다. (아직 소련 시절이었고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되기 전이다)

 

 

 

주인공은 초중고 동기인 코스챠와 알리사이다. 이 둘은 내가 오랫동안 써온 미샤의 70~90년대 우주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미샤와 트로이의 문학 서클 친구들이다. 알리사는 이 폴더에 올렸던 트로이의 이야기나 별도 단편 '핀란드 우하'에 등장한 적이 여러번 있고 코스챠도 단편 '새해 전야'나 다른 발췌문에 이따금 등장했었다. 알리사는 외교관이던 아버지를 따라서 어린 시절을 암스테르담과 런던에서 보내다 열두살 무렵 다시 소련으로 돌아와 레닌그라드의 학교에 들어가는데 거기서 트로이와 코스챠를 만난다. 코스챠는 알리사에게 첫눈에 반했지만 알리사는 그런 그의 마음을 받아준 적이 없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잘나가는 공산당 노멘클라투라 집안의 파벨이란 남자와 결혼했다가 곧 이혼하고 런던의 주영 소련대사관으로 떠나버린다. 트로이는 알리사의 가장 친한 친구이다. 이 글의 시간적 배경인 1981년 9월은 이들의 친구인 미샤가 파리에서 조국과 당에 대한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수용소로 끌려갔다가 가석방되어 가브릴로프로 유배되었던 시기이다. 이 정도라면 이 단편의 사전 배경으로는 충분하다. 

 

 

 

제목의 프티치예 말라코는 '새의 우유'라는 뜻인데 우유맛 필링이 채워진 러시아 초콜릿 캔디이다. 역시 비슷한 필링이 가득 든 동명의 케익도 있다. 이 초콜릿은 원래는 폴란드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동일한 뜻의 '프타치예 믈레즈코'라고 불렸는데, 소련의 블라디보스톡에서 60년대에 파일럿으로 생산했다가 70년대가 되었을 때는 모스크바의 '붉은 10월' 초콜릿 회사에서 대량생산을 하면서 소련 사람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코스칙, 알랴는 코스챠와 알리사의 애칭. 안드류샤는 트로이의 본명인 안드레이의 애칭이다. 이 사람은 자기 본명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어릴 때 이후로는 자기 성인 트로이츠키에서 따온 트로이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 이 단편은 20년 전 추억도 다루고 있어서 트로이가 이따금 안드류샤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고리, 갈랴, 료카, 스베타, 타냐는 모두 이들의 문학 서클 동기이다. 예전에 올렸던 단편 '새해 전야'에도 나왔었다. 로미오는 미샤의 별명이다. 발레학교 다니던 소년 시절부터 이 문학 서클에 드나들었던 터라 형님누나들인 이들이 미샤를 귀엽게 여겨 불렀던 별명 중 하나. (원체 로미오 역을 잘 춰서. 그외 왕자님, 아기, 귀염둥이, 꼬맹이 등등 여러가지가 있다) 특히 알리사가 여러가지 이유로 미샤의 이름을 부르기 어려울 때 쓰는 별명이다. 

 

 

 

단편은 그리 길지는 않지만 어쨌든 두 파트로 나누어서 올려본다. 내용은 접어둠.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프티치예 말라코

Птичье Молоко

 
 
 
 
 
 
 
 
 
 

 

더보기

 

 

 
 
 

19819, 프라하

 

 

 

 

코스챠는 언제 어디서든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20년 전 운동장 구석의 오래된 은행나무와 낙엽 더미 뒤에 숨어서 울고 있는 알리사를 봤을 때도 첫눈에 그 전학생이구나!’ 하고 알아차린 것처럼. 하늘색 리본에 물방울무늬의 연노랑 원피스, 광택이 도는 버클이 달린 파란 구두까지 누가 봐도 외제 일색으로 쫙 빼입은 여자애를 그냥 지나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양키 액센트에 러시아어도 제대로 못 한다는 소문이 정말인가보다 싶었다. 얼마 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소문은 절반만 진짜였다. 알리사는 러시아어를 제대로 할 줄 알았다. 특히 문법은 동급생들보다도 더 정확했다. 꼭 어른처럼 문장을 만들었고 선생님들과도 길게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푸쉬킨 뿐만 아니라 레르몬토프와 페트까지도 줄줄 외웠다. 막상 아이들끼리 통하는 단어들, 특히 장난치며 놀 때 쓰는 말들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지만. 경자음 발음과 액센트도 좀 이상했다. 하지만 코스챠가 양키라는 단어를 쓰자 알리사는 발칵 화를 내며 양키는 미국인이기 때문에 자기 액센트와는 다르다고 정정해주었다. 미국에는 가본 적이 없다고, 영국 영어와 미국 영어는 다르다고. 자기는 런던에서 왔으니까 양키가 아니라고. 그러다 흥분해 말문이 막히면 코스챠가 단 한마디도 알아먹을 수 없는 외국어를 와르르 쏟아냈는데, 아마 그것이 영국 영어인 모양이었다. 코스챠는 그저 입을 벌린 채 경탄하며 그녀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고 알리사는 그런 그의 바보 같은 표정에 한풀 꺾여 웃어버렸다. 아니,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코스챠는 상관없었다. 알리사는 웃을 때도 예뻤고 울 때도 예뻤으니까. 몇 년 전 여름 캠프에 갔을 때 넋을 놓고 봤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그림책이 생각났다. 당시에는 아직 안드류샤로 통했던 트로이는 그게 영국 작가가 쓴 이야기라고 했다. 그러니까 딱 맞았다. 런던에서 온 아이. 이름마저 똑같은데다 그림책 속의 앨리스처럼 예쁘고 똑똑하고 당찬 애였으니까. 게다가 울음보가 터졌다 하면 앨리스가 그랬던 것처럼 주위를 온통 눈물바다로 만들어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코스챠는 하늘색 리본과 연노랑 원피스, 파란 구두의 알리사에게 첫눈에 반해버렸다, 그림책의 앨리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알리사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촬영장에 나타났다. 촬영은 구시가지 광장의 시계탑 아래에서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전날까지 계속된 악천후와 프라하 당국의 고집 때문에 야외 촬영을 반나절 만에 몰아서 해치워야 하는 상황에 몰린 감독 라주모프는 완전히 저기압이라 걸핏하면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고 시나리오 작가는 그 옆에서 부루퉁하게 시비를 걸었다. 주연 배우 올가 골란츠카야는 툭하면 앞으로 굴러가며 촬영을 방해하는 마차 바퀴와 감독의 꾸지람에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이따위 저질 영화는 그만두겠다고 히스테리를 일으키며 울부짖었다. 코스챠는 지저분하게 쌓여 있는 상자들과 부품 어딘가가 맛이 가서 계속 깜박거리는 2번 조명과 카메라 삼각대, 아무렇게나 뒤엉킨 케이블들 사이를 요리조리 누비며 마차 바퀴 뒤에 받쳐둘 쇳조각을 찾아오라고 소품담당자를 독촉하고 촬영감독에게 조명을 고쳐야 한다고 소리치고 골란츠카야에게 손수건과 물을 가져다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기는 분명 총무부에서 행정 지원을 하는 업무로 입사했는데 대체 왜 이렇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쯤 되면 최소한 조감독 감투는 달아줘야 하는 게 아닌지 아주 정당한 의구심이 들었다. 애초부터 이고리의 마수에 넘어온 게 잘못이었다. 게다가 그 녀석은 라주모프에게 만능 황금손 코스칙이라는 가증스러운 칭찬과 함께 코스챠를 적극 추천해 놓고는 정작 자기는 무슨 영화제 출품작을 편집해야 한다는 이유를 대며 이번 체코 로케에는 쏙 빠져버렸다. 그래서 만능 황금손 코스칙은 벌써 나흘째 프라하와 브르노를 오가며 아주아주 유명한 바로 그 올레그 라주모프감독의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엄청난 성질머리에 시달리며 현장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시 비까지 쏟아지기 시작했다. 골란츠카야는 내 머리! 내 메이크업!’하고 비명을 질러댔고 라주모프는 아니, 이제 안돼! 비 와도 그냥 가야 돼! 열두 시까지 광장을 비워주기로 했단 말이야!’ 하고 표트르 대제처럼 외쳐댔다. 다 좋다, 계속 찍는 쪽이라면 대환영이다. 비 좀 맞는다고 큰일나는 것도 아니고, 최소한 정오가 지나면 이 난리법석에서 잠시라도 탈출할 수 있을 테니까. 조감독은 어디론가 도망쳤는지 눈에 보이지 않았고 코스챠는 이러다 운 나쁘게 라주모프의 눈에 탁 띄어서 촬영 연장 승인을 받아와, 만능 코스칙!’하는 명령이라도 받을까봐 마차 바퀴 뒤에 숨어서 쇳조각을 고정시키느라 여념이 없는 척했다. 바퀴는 굴대에 딱 한 개만 붙어 있었고 마차는 없었다. 생각지 않은 브르노와 카를로비 바리 로케가 추가된 바람에 제작비가 모자라서 마차를 세팅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경리부장의 선언에 라주모프는 반쯤 발작을 일으켰고 코스챠는 이리 뛰고 저리 뛰어서 프라하 쪽 촬영소 창고를 뒤져 바퀴 하나와 반쪽짜리 문짝이 붙어 있는 굴대를 조달해왔다. 카메라로 아래만 비추면 되지 않느냐고 우기면서. 불벼락을 맞을 줄 알았지만 감독은 의외로 현실과 타협했고 코스챠에게 좋은 아이디어라고 칭찬하기까지 했다. 하여튼 그것까지는 뿌듯했지만 굴대는 낡아서 금이 가 있었고 바퀴는 하나만 달려 있었기 때문에 균형이 맞지 않아서 자꾸만 나사가 풀리며 앞으로 굴러가곤 했다.

 

 

 

그때 코스챠는 알리사를 보았다. 굴대 안쪽으로 못을 하나 박고 바퀴 아래 쇳조각을 억지로 밀어 넣던 중이었다. 처음에는 지나가는 여자를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 쏟아지는 비 때문에 바큇살 사이로 물안개가 아른거렸으니까. 아니면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코스챠는 꿈에서 알리사를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원래 꿈을 꾸지 않았다. 옛날에 갈랴의 아파트에서 술을 마시다가 코스챠가 자기는 꿈을 꾸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알리사는 꿈 안 꾸는 사람은 없어. 기억 못 하는 거지라고 쌀쌀맞게 쏘아붙였다. 모자란 인간 취급당한 기분에 코스챠가 시무룩해지자 알리사는 좀 당황한 듯 나쁜 거 아니야. 잠을 푹 잔다는 뜻이지. 좋은 거야라고 덧붙였다. 그 말이 맞는 것 같긴 했다. 그는 베개든 어디든 머리만 닿으면 단잠을 자니까. 어쨌든 잠을 자면서도 꿈을 꿔본 적이 없는데 갑자기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 시계탑 아래에서 그것도 두 눈을 뜬 채 심지어 마차 바퀴를 고정시키고 있는 중에 알리사 꿈을 꾼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간밤에 스태프들과 함께 마셨던 흑맥주와 보드카 때문에 헛것을 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편이 더 그럴싸했다.

 

 

 

갑작스럽게 천둥이 치면서 번개가 번쩍거렸고 그녀가 소스라치며 우산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코스챠는 자기가 꿈을 꾸는 것도, 숙취로 헛것을 보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알리사는 언제나 뇌우를 무서워했다. 어릴 때는 울었고 커서도 천둥소리가 들려오면 놀란 토끼처럼 펄쩍 뛰거나 옆 사람의 팔에 매달렸다. 그때부터 코스챠는 비 오는 레닌그라드를 사랑하게 되었다.

 

 

 

코스챠는 손등으로 두 눈을 문질렀다. 이제 그녀를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어쩌면 거짓말처럼 갑자기 비가 그쳐 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알리사는 버클 허리띠가 달린 베이지색 코트를 걸치고 있었고 긴 머리를 한쪽으로 느슨하게 묶어 늘어뜨린 채 우산에서 물기를 떨어내고 있었다. 코스챠가 막 소리쳐 그녀를 부르려고 했을 때 감독이 시작 사인을 보냈고 그사이 머리를 매만진 골란츠카야가 언제 히스테리를 일으켰느냐는 듯 우아한 귀족 아가씨 연기를 시작했다. 촬영기사 하나가 코스챠에게 턱짓을 해댔다. 카메라가 마차 바퀴와 광장의 돌바닥을 클로즈업해야 하는 순간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코스챠는 잽싸게 일어나 조명팀 쪽으로 이동했다. 알리사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촬영 앵글 때문에 그쪽 방향으로는 갈 수가 없었다. 부디 골란츠카야와 상대역인 필란트로프가 잘 해내기를, 라주모프의 완벽주의가 발동하지 않기를 빌면서 코스챠는 필사적으로 알리사에게 손을 흔들어댔다. 그녀가 왜 왔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자기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녀는 이쪽을 보지 않았다. 어떤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키가 훤칠하고 짧게 깎은 금발에 양복을 차려입은 멋진 남자였다. 남자는 웃으며 알리사의 팔짱을 끼었다. 애인인가 보구나. 남편인지도 몰라. 코스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다시금 그 얼어붙을 듯한 영하 25도의 마르스 광장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벌써 7년 전인데. 그때 알리사는 하얀 레이스들이 가득한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이고리가 카메라를 내려놓을 때마다 덜덜 떨며 맨어깨 위로 짧은 모피 숄을 두르곤 했다. 파벨과 포즈를 취할 때면 갈랴가 그 모피 숄을 잽싸게 낚아채 카메라 앵글로부터 치웠다. 그때 코스챠는 한겨울에 결혼 날짜를 잡아서 신부에게 저런 얇은 드레스를 입히는 남자라면 당 간부든 잘나가는 노멘클라투라든 상관없이 개자식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때 그들이 어디로 신혼여행을 갔는지 코스챠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피로연에서 술을 퍼마셨던 것만 생각났다. 하지만 알리사는 파벨과 헤어졌는데. 그사이에 다시 결혼을 한 건지도 모른다. 비록 친구들에게 그녀가 아무런 연락도 해주지 않았지만. 그녀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예쁘고 똑똑하니까. 외국에서 살다 왔고 영국식 영어를 하니까. 개자식을 차버린 후 다시 외국으로 훌쩍 떠나버렸고 코스챠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대단한 일들을 하니까. 금발에 양복을 입은 남자는 외국인처럼 보였다. 외국인과 결혼을 했구나.

 

 

 

고개를 들었을 때 알리사가 그의 앞에 와 있었다. 금발의 외국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알리사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했지만 코스챠는 아무 말도 못했다. 눈이 커진 채 얼간이처럼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웃었고 그녀가 포옹을 했을 때에야 딸꾹질을 하며 알랴, 정말 너야?’ 하고 되풀이하며 물었을 뿐이었다. 알리사는 바보 코스칙, 그럼 나지 누구야하며 웃었고 차갑고 매끄러운 뺨을 마주 대며 소리 내어 가볍게 입을 맞췄다. 코스챠는 알리사에게서 그 익숙한 마법 물약 냄새를 맡았다. 복숭아와 라일락, 아이스크림,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들만 모아서 달여낸 물약. 앨리스의 물약.

 

 

 

*   *   *

 

 

 

골란츠카야와 필란트로프가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줬기 때문인지, 마차 바퀴가 제대로 고정된 덕인지, 그것도 아니면 일정과 제작비의 압박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라주모프는 일사천리로 달렸다. 코스챠는 내내 긴장했고 발을 굴러댔고 무릎을 떨었다. 다시 비가 올까 봐. 촬영이 지연될까 봐. 그녀가 가버릴까 봐. 아주 중요하고 급한 일이 생겼다면서 공항으로 떠났을까 봐. 그 금발 외국인 남자와 데이트를 하러 가버릴까 봐.

 

 

 

촬영은 정오에 끝났다. 코스챠는 안절부절못했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주역 배우인 필란트로프에게 거울을 빌려달라고까지 했다. 다행히 필란트로프는 호인이었기 때문에 선선히 손거울을 꺼내주었다. 분장사만 짜증을 냈을 뿐이었다. 하긴 거울을 보지 않는 편이 나았을 뻔했다. 재킷은 마구 구겨져 있었고 전날 밤의 굴라쉬인지 흑맥주인지 하여튼 거무죽죽한 얼룩마저 튀어 있었다. 비 때문에 가뜩이나 곱슬거리는 머리는 완전히 까치집이 되어 있었다. 코스챠는 절망적으로 생각했다. 면도라도 했어야 되는데. 지금이라도 할까? 필란트로프한테는 면도칼도 있을 텐데. 아니야, 그 사이에 알랴가 가버릴지도 몰라. 바쁜 애니까. 벌써 두 시간이나 기다렸잖아.

 

 

 

알리사는 카페 슬라비아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코스챠는 그곳에 가본 적은 없었지만 어디인지는 알았다. 강변 근처였다. 전차를 타기에는 골목을 돌아서 한참 나가야 했고 그렇다고 걸어가려니 알리사가 가버릴까 봐 조바심이 났다. 그때 하느님이든 레닌이든 우주의 섭리든 하여튼 도움이 임했다. 라주모프와 시나리오 작가 불라노바가 국립극장에 간다는 것이었다. 국립극장이면 슬라비아 맞은편이었다. 그는 잽싸게 그 차에 올라탔다. 우주의 섭리가 다시 한번 작용하여 라주모프는 그에게는 관심도 두지 않고 브르노에서 찍은 사흘 치 분량이 몽땅 쓰레기라는 둥, 배경을 카를로비 바리로 바꿔서 다시 찍어야 하니 자정까지 대사를 다 고쳐오라는 둥 불라노바와 무시무시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코스챠는 자기가 시나리오 작가가 아니라는 것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혹시라도 만능 코스칙이 모종의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논리로 극장 미팅에 끌려갈까 봐 조마조마했지만 차에서 내렸을 때도 라주모프는 여전히 불라노바와 논쟁을 벌이느라 바빴고 코스챠는 그 사이에 슬라비아 쪽으로 직진했다.

 

 

카페는 담배 연기로 자욱했고 손님들로 붐볐다. 점심시간이라 그럴지도 몰랐다. 코스챠는 프라하에 몇 번 왔었지만 카페에 들어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선술집이나 숙소에서 맥주, 돼지족발, , 크네들리키와 양파 수프 따위를 먹은 게 전부였다. 여자랑 데이트를 하러 온 것도 아니니까. 이제 학생도 아니고 청춘도 다 지났으니까. 문득 코스챠는 알리사와 단둘이 카페나 레스토랑에 갔던 적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학 식당에서 한두 번. 아니, 그때도 항상 트로이가 함께 있었다. 알리사의 단짝은 그가 아니라 트로이였으니까. 그가 얼마나 트로이의 자리를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알리사는 트로이의 집에는 아주 편하게 드나들었고 책도 같이 읽었고 심지어 대학 전공까지 똑같이 선택했다. 코스챠는 노력했다. 둘을 졸졸 따라다니며 도서관을 드나들기도 하고, 아무리 사전에서 단어를 찾아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 영어 소설을 읽고 더듬더듬 번역도 해보았다. 둘을 따라서 영문학과에 진학해보려고 했지만 그는 외국어에는 별 재능이 없었고 오히려 뭔가를 만지고 고치고 조달해오는 데에만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결국 알리사가 트로이와 팔짱을 끼고 네바 강변의 국립대 언어학부로 등교하는 동안 그는 공과대학에 다녔다. 대신 갈랴의 아파트에서 매주 열리는 문학 모임에는 꼬박꼬박 갔다. 모임에는 외국 문학 전공자나 풋내기 시인, 작가들이 많이 왔다. 코스챠처럼 공대에 다니는 애는 별로 없었다. 엔지니어의 손과 문학청년의 가슴이라고 갈랴가 추어주곤 했지만 그럴 때마다 코스챠는 양심이 좀 찔렸다. , 그가 문학을 좋아하긴 했다. 특히 사미즈다트는 더욱. 하지만 뭔가를 쓰거나 지어내는 데는 한 톨도 재능이 없었다. 그가 <서클>에 꼬박꼬박 갔던 건 오로지 알리사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클을 만든 건 알리사와 트로이, 갈랴였으니까. 하지만 알리사가 떠나버린 후에도 그가 계속해서 서클에 남았던 이유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갈랴의 말이 아주 조금은 맞았을지도 모른다. 엔지니어의 손과 문학청년의 가슴.

 

 

알리사는 창가 맨 안쪽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 반쯤 타들어 간 담배를 끼운 채 책을 읽고 있었다. 코스챠는 멋모르던 사춘기 시절 이후엔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고 흡연하는 여자들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키스할 때 담배 맛이 나면 흥이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여자들과 데이트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알리사가 책장을 넘기며 거의 무의식적으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가 떼었을 때, 하얀 연기를 안개처럼 포르르 내뿜었을 때 코스챠는 현기증이 났고 담배를 피우는 여자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여자라는 인생의 진리를 깨달았다.

 

 

코스챠가 사람들을 헤치고 테이블 앞까지 다가왔을 때 알리사는 담배를 찻잔 모서리에 비벼 껐고 눈부신 미소를 지었다. 코스챠는 잠시 숨이 멎는 듯했다. 그는 알리사를 마지막으로 봤던 게 언제인지 떠올려보려고 했다. 그렇게까지 오래전은 아니었다. 재작년 새해에 그녀는 갈랴의 집에 왔었다. 그건 확실했다. 하지만 그때도 그녀는 너무나 바빴고 겨우 두어 시간밖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나마도 트로이가 그녀를 데려온 거였다. 레닌그라드에는 사흘밖에 있을 수 없다고, 그것도 나머지 이틀은 꼬박 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새해에도 사람을 톱니바퀴처럼 갈아대며 혹사시키는 직장 따윈 그만둬버리리라고 이고리가 버럭 화를 냈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이고리는 그녀에게도 렌 필름에 들어오라고 꼬드겼던 것 같다. 문학 전공이잖아, 시나리오를 써, 아니면 제작부장 같은 것도 괜찮을 거야 운운. 그때 코스챠는 알리사 정도 미인에게는 적어도 주역 배우 제안은 해야지 시나리오 작가에 제작부장 나부랭이를 늘어놓는 건 모독이라고 생각했었다. 알리사는 트로이와 갈랴 곁에 앉아 있었고 스베타에게는 프랑스 잡지들을 여러 권 건네주면서 무슨 패션 얘기를 나눴다. 언제나 코스챠의 짝사랑을 애석하게 여겼던 갈랴가 그와 자리를 바꿔주었지만, 그때쯤 그는 이미 술에 떡이 되어 있었고 알리사와는 제대로 이야기조차 나누지 못했다. 알랴가 너무 늦게 왔어, 이게 다 트로이 그 자식 때문이야. 알랴가 온다고 미리 말을 해줬어야지, 그러면 안 마셨을 거 아니야. 뒤늦게 술에서 깬 코스챠는 갈랴의 품에 머리를 처박고 서럽게 푸념을 해댔지만 이미 알리사는 가버린 후였다.

 

 

 

하긴 그는 어린 시절 이후로는 알리사와 단둘이 앉아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눠본 적도 없었다. 카페와 레스토랑에 갔던 적이 없는 것처럼. 항상 친구들과 함께 있었다. 갈랴나 타냐, 스베타가 이따금 그를 도와주려고 슬며시 자리를 비워주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말을 더듬거리거나 실없는 소리를 하거나 취해버리곤 했다. 알리사 곁에 있으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입술이 바짝 말랐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20년이나 지났는데. 그는 더 이상 어린애도 아니고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이도 아닌데. 친구들은 대부분 결혼해서 아이들을 한둘씩 키우고 있는데. 다른 여자들 앞에서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연애를 안 해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알리사 앞에서는 언제나 20년 전의 그 순간으로 돌아가 버리곤 했다. 바보 코스칙.

 

 

 

 

 

*    *    *

 

 

 

 

 

알리사는 우아하고 세련된 태도로 주문을 했다. 라주모프는 이 장면을 찍어야 해. 기껏해야 블린과 버섯 수프, 커피 두 잔을 시키는 것뿐인데 마치 나타샤 로스토바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섞어놓은 것처럼 멋졌다. 코스챠가 넋을 놓고 바라보자 알리사는 다시 웃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

 

체코슬로바키아어도 할 줄 아는구나. ”

 

겨우 주문만 하는 정도인걸. 너도 폴란드어 할 줄 알잖아. ”

 

다 까먹었어. 할머니 돌아가신 후엔 바르샤바 안 갔으니까. ”

 

그래도 들으면 이해할 거야. 말이란 건 그런 거니까. ”

 

기억하는구나, 나랑 폴란드. ”

 

그럼. 폴란드 촌뜨기라고 비챠가 놀려서 싸웠잖아. 반성문 엄청 쓰고. ”

 

아 맞아. 반성문 쓰는 거 네가 도와줬는데. 맞춤법도 고쳐주고. 안 그랬으면 벌점 더 받았을 거야. 아무도 안 도와줬는데 너만 남아서 도와줬어. ”

 

너 그건 까먹었구나? 네가 나한테 도와주면 초콜릿 준다고 했었는데. 폴란드 초콜릿 기가 막히게 맛있다고. ”

 

 

 

코스챠는 얼굴을 붉혔다. 물론 기억했다. 하지만 알리사가 그런 하찮은 일을 기억할 줄은 몰랐다. 비챠가 폴란드 촌뜨기라고 놀렸던 건 맞았다. 하지만 알리사는 그 앞부분은 듣지 못했다. 바보 코스칙, 거지 같은 폴란드 초코로 양키 계집애를 꼬시려 한대요. 비챠는 그가 초콜릿을 나눠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던 거였다. ‘안돼, 알랴한테 줘야 돼. 알랴만 줄 거야라고 그가 초콜릿 상자를 품속에 쑤셔 넣으며 고집을 부렸기 때문에. 덩치가 좋았던 비챠는 그를 때려눕히고 초콜릿 상자를 강탈하려 했고 코스챠는 박치기와 물어뜯기로 반격했다. 둘 다 벌을 받긴 했지만 코스챠 쪽이 더 손해를 봤다. 학교에 초콜릿을 가져왔다고 선생님이 그걸 압수해 버렸기 때문이다. 훌쩍거리며 울자 그때는 아직 안드류샤였던 트로이가 위로해준답시고 선생님 분명 자기가 먹으려고 뺏아간 거야. 초콜릿 좀 가져온 게 뭐가 잘못이냐따위의 말을 늘어놓았다. 불행하게 선생님은 아직 교실에서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을 들어버렸고 트로이도 함께 반성문을 써야 했다. 트로이는 작문을 잘했으므로 금세 반성문을 다 썼지만 코스챠는 고전했다.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더 그랬다. 그때 그가 알리사에게 부탁했다. 폴란드 초코 줄게, 엄청 맛있어. 나 좀 도와줘, 알랴. 그녀가 왜 남아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분명 트로이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둘은 단짝이었으니까.

 

 

 

출장 온 거야? ”

 

. 근데 오후에 떠나야 해. 렌필름에서 촬영 왔다는 얘기를 듣고 혹시 네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와봤어. 트로이가 말해줬거든, 너 이고리 마수에 걸렸다고. 프라하랑 부다페스트 갔다고. ”

 

, 그래... 그 녀석은 너랑 자주 통화하니까. ”

 

누구, 트로이? 전화는 무슨. 난 갈랴하고밖에 전화 안 해, 그나마도 두어 달에 한 번쯤. 전화번호가 자주 바뀌거든. 너하고도 안 하잖아. ”

 

 

 

어쩐지 코스챠는 기분이 나아졌다. 알리사가 갈랴하고만 전화를 해서. 트로이와도 통화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전화번호가 왜 자주 바뀌는지 물어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정도는 그도 알았다.

 

 

 

근데 어떻게 얘기를 들은 거야? 전화도 안 했다면서. ”

 

나 그저께 레닌그라드 갔었거든. 학교에 들렀었어. 서류 뗄 게 있어서. 거기서 트로이 잠깐 봤어. 걔 말고는 아무도 못 만났어, 출장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 ”

 

그래도 내 얘기 물어봐 줬네. ”

 

그럼, 친구들 어떻게 지내는지는 꼭 물어보지. 스베타, 타냐, , 료카, 이고리... ”

 

 

 

알리사는 갑자기 뭔가가 목에 걸린 듯 입을 다물었다. 코스챠는 자기도 목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건 이름일 거야. 왕자님. 로미오. 그들에겐 언제나 귀여운 꼬맹이. 미샤가 파리에서 체포되고 조국과 당의 반역자라는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뜬 이래, 그 여름 내내 그들은 공포와 불안, 막막한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고리는 영화계 인사들에게 서명을 받으러 다녔다. 오랫동안 미샤를 숭배해왔던 라주모프 외에는 모두가 모른 척했다. 하긴 키로프에서도 쉬쉬하며 납작 엎드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머지 친구들에게는 그런 인맥도 정보도 없었다. 그저 슬퍼하고 걱정하고 기도를 했을 뿐이었다. 신앙 따위 없었지만 모두가 신자가 되었다. 철저한 무신론자인 트로이만 빼놓고. 정작 가장 걱정하고 괴로워했던 것도 그 녀석이었지만. 여름 동안 트로이는 체중이 10킬로 가까이 빠졌고 폭음을 했다. 예전에는 코스챠가 취하면 트로이가 돌봐줬지만 이제는 정반대가 되었다. 찌는 듯 무더웠던 어느 날 밤 코스챠는 만취해서 모이카 운하에 무릎까지 빠져 있던 트로이를 간신히 끌어냈다. 백야가 거의 끝나서, 이제 밤이면 어둑어둑해져서 정말 다행이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린 덕에 운하에서 노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서. 왜냐하면 트로이 그 멍청한 자식의 손에는 구겨진 르 피가로가 그대로 쥐어져 있었으니까. 그들의 꼬맹이,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로미오가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면서 무슨 꼭두각시 인형처럼 온몸을 늘어뜨린 채 어디론가 옮겨지고 있는 그 무서운 사진이 아주 정면으로 나와 있었으니까. 코스챠는 스베타에게서 연락을 받아 소식은 알고 있었지만 사진을 실제로 보니 온몸이 떨려왔다. 트로이가 어떻게 그 신문을 구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건 그날 아침에 나온 신문이었으니까. 아마 학교에서였을 것이다. 어쨌든 그 녀석은 외국어학부에 있으니까. 코스챠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신문을 꼬챙이처럼 기다랗게 돌돌 말아 운하 난간 아래 굴러다니던 술병 안으로 쑤셔 넣고는 병을 물속으로 던져버렸다. ‘이 미친놈, 잡혀가려고 아주 작정을 했네하며 트로이를 걷어차고 따귀를 철썩철썩 때려 깨웠다. 그때 코스챠는 트로이가 우는 것을 처음으로 보았다. 어릴 적 입학식에서 만난 이래 단 한 번도 그 꺽다리가 우는 걸 본 적이 없었는데.

 

 

 

버섯 수프와 커피가 나왔다. 커피는 새까맣고 진했다. 코스챠는 맥주나 보드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커피를 마시면 가뜩이나 두근거리는 심장이 더 세게 뛸 것 같아서. 알리사는 그에게 냅킨을 건네주며 흘릴 테니까라고 빙긋 웃었다. 이제 그런 칠칠치 못하던 시절은 지나갔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실은 지금도 음식을 잘 흘리는 편이라 코스챠는 순순히 냅킨을 받아들었다. 수프는 묽었지만 의외로 맛은 나쁘지 않았다. 하긴 알리사와 함께 먹는 거라면 뭐든, 보드카도 없이 돼지비계만 맨입에 먹어도 맛있을 것 같았다.

 

 

알랴, 블린 나왔어. 잘라줄까? ”

 

팔라친키. ”

 

그게 뭐야? ”

 

여기서는 팔라친키라고 해. 블린이 아니라. ”

 

역시 체코슬로바키아어 다 아는구나. ”

 

그게 다야. 그렇게 치면 폴란드어도 아는걸. 너한테 배웠잖아. ”

 

내가 뭘 가르쳐줬지? 나도 이제 한 마디도 안 나오는데. ”

 

프타치예 믈레즈코(ptasie mleczko). ”

 

, 그건 우리 말이랑 똑같잖아. ”

 

아니야, 네가 다르다고 했어. 맛이 다르면 단어도 다른 거라고. 그때 엄청 화냈잖아. 프타치예 믈레즈코랑 프티치예 말라코(птичье молоко) 완전 다르다고, 이름이랑 레시피 베껴봤자 라고, 폴란드 게 더 맛있다고. ”

 

, 그랬나. 그랬지. 근데 너한테 화낸 건 아니었어. 그 뺀질대는 놈 때문에 빡친 거였지. 블라디보스톡 자랑하면서 엄청 뻐기고, 그깟 초콜릿 우리가 모르는 것처럼. ”

 

그걸 블라디보스톡에서 온 애가 줬었나? 난 기억도 안 나. 나한테 화낸 건 당연히 아니었겠지. 넌 나한테 한 번도 화 안 냈잖아. ”

 

 

 

코스챠는 커피를 쏟을 뻔했다. 알리사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웃었기 때문에, ‘넌 나한테 한 번도 화 안 냈잖아라는 그 말투가 너무나 다정했기 때문에. 어떻게 알리사 같은 여자에게 화를 낼 수 있다는 말인가. 제정신을 가진 남자라면 그녀 앞에선 넋이 나가는 게 당연하다. 그 블라디보스톡 바람둥이도 그랬다, 그녀를 보자마자 홀딱 빠져서 갖은 수작을 다 부렸다. 서클에 찾아와서 악쇼노프니 부닌이니 헤밍웨이니 엄청 아는 척을 했지만 실상은 책과는 담을 쌓았고 입 발린 말만 할 줄 아는 놈이었다. 그때는 대학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됐고 모임 초기였던 터라 갈랴와 료카가 결혼하기도 전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보통 트로이네 집에서 모이곤 했다. 그 녀석의 엄마가 없을 때만 골라서. 그 블라디보스톡 망나니는 그들보다 나이가 많았고 어엿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잔뜩 뻐기곤 했다. 번지르르한 선원 복장을 갖춰 입고 광이 번쩍거리는 구두를 신고 나타났다. 심지어 선원도 아니었다. 본인 말로는 무역 화물을 관리하는 책임자라고 했지만 코스챠는 그것도 믿어지지 않았다. 하여튼 여자들은 선원 스타일로 쫙 빼입고 온갖 무역용어를 지껄이는,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이지만, 아폴론처럼 금발 곱슬머리를 바짝 붙여 자르고 어딘지 나른한 푸른 눈의 미남자인 그 자식에게 한동안 매료되어 있었고 그놈이 아무리 헛소리를 지껄여도 그냥 웃기만 했다.

 

 

두번째로 왔을 때 그 인간이 알리사에게 초콜릿을 주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만 구할 수 있는 거라고, 완전 신상이라고. 정말 맛있는 거라고. 프티치예 말라코라는 이름이라고, 비밀 생산 중인데 앞으로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 쫙 깔릴 거라고. 멋진 여자에겐 비밀 신상 초콜릿이 잘 어울린다고. 완전 청산유수로 지껄여댔다. 그때 코스챠는 취해 있었고 어째선지 욱해서 버럭 화를 냈다. 신상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거 폴란드에 가면 지천에 깔렸는데! 이름도 완전 베낀 거잖아! 프타치예 믈레즈코잖아! 분명히 그는 그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똑같은 걸 가지고 어디서 유세하냐고 성질을 냈던 것 같은데 알리사는 전혀 다르게 기억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코스챠는 그 바람둥이 자식과 치고받고 싸울 뻔했지만 이런 일에 익숙한 트로이가 잽싸게 그를 끌어다 재웠기 때문에 일은 싱겁게 끝나버렸다. 깨어났을 때는 모두 가버리고 없었다. 그는 반쯤 울고 싶은 심정으로 트로이에게 알랴가 그놈이랑 나간 거야?’라고 물어봤다. 트로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알랴가 바보냐, 그런 허세에 쩐 놈이랑 나가게. 근데 나쟈는 걸려들었어. 둘이 페테르고프에 갔거든. 코스챠는 나쟈가 누구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마 스베타가 데려온 애였던 것 같았다. 알리사가 그놈과 어울리지 않았다는 사실만이 기쁠 뿐이었다. 테이블 위에 그 블라디보스톡 공장에서 나온 프티치예 말라코 초콜릿 상자가 그대로 놓여 있어서 더욱 기뻤다. 알리사가 너네 어머니한테 드려, 초콜릿 좋아하시잖아하고 놓고 갔다는 말에 숙취가 다 풀리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그는 일터에서 돌아온 트로이 어머니와 함께 앉아 차를 마시면서 그 가증스러운 프티치예 말라코를 몇 알 먹기까지 했다. 마음속으로는 , 역시 폴란드 거 베낀 거잖아. 이름이라도 좀 바꾸든가라고 투덜대면서.

 

 

 

알리사는 여전히 그를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코스챠는 가슴이 뛰었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커피는 한 모금도 안 마셨는데. 그는 결국 블린, 아니 팔라친키를 흘렸고 재킷에 버터 얼룩을 추가로 묻히고 말았다. 그래도 냅킨이 있어 다행이었다. 알랴는 뭐든지 다 알아, 내가 흘릴 거라는 것도, 냅킨이 필요하다는 것도. 그러자 코스챠는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쩌면 알리사가 내내 나직하고 조용한 음성으로, 천천히 말하고 갈색 눈동자가 벨벳처럼 부드럽고 따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예전의 그녀는 항상 빠르게 말했는데, 정확하게, 따박따박, 낭랑하게.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그 누구도 그녀를 말싸움으로 이겨내지 못할 정도로. 갈색 눈은 미러볼처럼 반짝거렸는데. 그녀의 아몬드 모양 갈색 눈동자 위로 검은색 속눈썹이 커튼처럼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코스챠는 그녀의 속눈썹이 원래는 연한 갈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스카라나 뭐 그런 것을 칠했을 것이다. 알리사는 언제나 화장을 멋지게 했고 유행의 최첨단을 달렸으니까. 그는 알리사의 연한 갈색 속눈썹도, 새까맣고 기다란 속눈썹도 모두 좋았다. 미러볼과 벨벳 어느 쪽이든 좋았다. 처음으로 코스챠는 알리사의 미간과 눈가에 투명한 실처럼 그어진 가느다란 잔주름을 보았다. 가슴 한구석을 꽉 쥐어짜는 느낌이 들었다. 아 젠장, 알랴, 너 많이 지친 거구나.

 

 

 

알랴, 출장 끝나면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 ”

 

그럼 어디로 가겠어. ”

 

계속 런던에 있을 거야? ”

 

 

알리사는 대답을 망설였다. 간의 가느다란 선이 조금 더 깊어졌다. 코스챠는 괜한 말을 했다고 후회했다. 내가 뭐라고. 갈랴가 그랬는데, 알랴가 무엇을 하든 걔 선택이니까 한마디도 하지 말라고. 우리는 친구니까 다 이해해 줘야 하는 거라고. 아무리 어리숙한 코스칙이라 해도 알았다. 런던에 있는 대사관이라고. 대사관이 아니라 다른 일을 한다고 해도 그냥 대사관에서 일하는 거라고. 트로이는 당연히 알았겠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나중에 이고리가 술에 취했을 때 원래 그 제안은 네가 먼저 받았던 거잖아. 알랴는 그때 그 망할 자식이랑 결혼하려던 참이었으니까. 하여튼 네가 안 가서 다행이다. 마타하리는 아무나 하냐라고 지껄이며 트로이의 등짝을 두들기고 연달아 보드카를 권하다 코스챠 쪽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이고리도 알고 있는 거였다. 아마 타냐와 스베타도 알았을 것이다. 친구들은 거의 다 알았다. 그러면서도 코스챠 앞에서는 부득부득 입을 다물고 쉬쉬했다. 마치 그가 어린애라도 되는 것처럼. 가혹한 세상의 진실을 알게 되면 돌이킬 수 없이 상처받고 밤새 사탕 뺏긴 아기처럼 울어대는 순진무구한 바보처럼 다뤘다. 뭐 틀린 건 아니었다. 그는 정말 그런 녀석이었으니까.

 

 

하지만 코스챠는 그녀가 떠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대사관으로 간다고 했을 때, 그게 말 그대로의 대사관이 아니라는 걸.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그냥 알았다. 사실은 그 몇 년 전에 트로이와 알리사가 지도교수에게서 받은 제안에 대해 속닥거리는 것도 들은 적이 있었다. 둘은 코스챠가 들으리라 생각하지 않았고 설령 들어도 이해할 거라 여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뭐 거의 항상 만취해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그 애들에게 있어 코스챠는 귀여운 동생 같은 존재였으니까. 분명 동갑내기인데도 항상 막내 취급했다. 어쨌든 코스챠는 언제나 그 둘 곁에 있었고 취기에 젖은 채로도 들을 건 다 들었다. 때로는 다른 애들이 듣지 못하는 것도. 그리고 알리사가 하는 일이라면 뭐든 옳다고 생각했다. 그 망할 개자식, 파벨과 결혼한 것만 빼고. 하지만 그건 알리사가 결정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역시나 망할 개자식인 그녀의 아버지가 정한 거였으니까. 런던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녀의 아버지가 뒤에서 움직인 건지, 아니면 그녀 자신이 결정한 것인지조차 모르니까. 어느 쪽이든 그가 판단할 자격은 없으니까. 다른 놈들이었다면, 심지어 그게 트로이였다 해도 그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욕을 했을 것이다. 어차피 금방 용서해주고 받아들였을 테지만, 친구니까 다 이해해 주긴 했겠지만 그래도 판단을 하긴 했을 것이다. 알리사에게는 그럴 수 없었다.

 

 

 

알리사는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움직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은 팔라친키를 한입에 밀어 넣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코스챠의 빈 접시를 힐끗 보더니 다시 웃었다.

 

 

너 배고팠구나, 코스칙. 뭐 좀 더 먹을래? ”

 

아니. 난 세 장이나 먹었잖아. 네가 너무 조금 먹었지. 케이크라도 먹을래? 메도빅 같은 거 있지 않을까? 너 좋아하잖아, 그거. ”

 

벌써 먹었어, 너 오기 전에. 그럼 우리 나가서 산책할래? 나 아직 한 시간쯤은 있어. ”

 

 

 

겨우 한 시간이라니. 코스챠는 급속도로 슬퍼지고 우울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촬영 따위 내팽개치고 광장에서 그냥 달려 나왔어야 했는데. 너무 마음이 급해져서 코스챠는 후다닥 일어서다가 커피잔을 팔꿈치로 쳐서 깨뜨릴 뻔했다.

 

 

 

 
(02로 계속)
 

 

 

 

 

 

 

 

...

 

 

 

 
 
 
 

 

 

 

이 글은  작년 말에 영원한 휴가님께서 보내주셨던 소포에 들어있던 리투아니아 초콜릿을 먹다가 떠올랐다. 제목도 거기서 가져왔다. 옛날 소련 시절 같은 문화권으로 엮여 있었기 때문에 이 동네에도 프티치예 말라코가 있었나 보다. 이름은 더 어려워서 파욱쉬치우 피에나스 라고 부른다고... (리투아니아어는 발음도 더 어려운 느낌...) 사진 속 초콜릿들 중 프티치예 말라코는 저 토끼 그려진 놈이었고 둥근 건 술 들어있는 초코, 노란건 과일잼 같은 게 들어 있었던 것 같다. 제목 짓는 게 제일 어려운데 이 단편은 시작할 때부터 아예 프티치예 말라코였다. 영원한 휴가님께 참 감사하다. 

 

 

'프타치예 믈레즈코'라며 버럭 화내기도 하고 비챠로부터 폴란드 촌뜨기라고 놀림받는 코스챠는 할머니와 아버지가 폴란드계라서 폴란드 초코를 어릴때부터 먹어봤고 바르샤바에도 여러번 가봤던 적이 있다. 그러고보면 알리사만 외국물 먹은 애는 아니었던 것이지만, 폴란드는 철의 장막의 일원으로 간주되었으니 어쨌든 알리사와는 많이 다른 경우이다. 

 

 

맨 위 사진은 2016년 프라하, 지금은 문을 닫고 없는 레테조바 거리의 카페 에벨 앞 테이블. 사실은 알리사와 코스챠가 재회해 식사를 하는 카페 슬라비아의 사진을 올렸으면 좋았겠지만 나는 그 카페를 딱히 좋아하지 않았던 터라 사진이 없어서 그냥 이 사진을 올려본다. 담배꽁초도 있고... 

 

 

중간에 코스챠가 언급하는 나타샤 로스토바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여주인공 이름이다. (트로이의 본명인 안드레이는 그의 부모님이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 안드레이 공작에서 따온 건데 정작 본인은 그 소설도, 톨스토이도, 주인공도 좋아하지 않아서 자기 이름을 트로이로 바꿔버림)

 

다음 파트는 내일 올려보겠다. 전문 공개는 내키지 않아서 파트 2는 암호를 걸어두려고 한다. 파트 2를 읽으실 분은 milk를 입력해보세요. 

 

 

... (추가) 다음 파트는 여기

 

moonage daydream :: 프티치예 말라코 02 (코스챠와 알리사의 이야기) (tistory.com)

 

프티치예 말라코 02 (코스챠와 알리사의 이야기)

 

tveye.tistory.com

 

:
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