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다녀온지 2주가 조금 넘었는데 이미 1년은 지난 듯하다. 너무 바쁘고 피곤한 하루하루의 연속임. 역시나 그럴 것 같았다만...
이번 빌니우스 여행에서 가장 맘에 든 카페였던 엘스카에서 보낸 순간들을 생각하며 마음의 위안 중. 어제 정말 힘들었는지 무의식적으로 막 엘스카 느낌의 무지개 무늬 비니도 주문하고 여기서 자주 내줬던 빨간 러브라믹스도 주문하고...
사진은 두번째로 엘스카 갔던 날. 여기는 워낙 볕이 잘 드는 카페인데 이곳에서 보냈던 시간들 중 통틀어 이 날 햇살이 가장 밝고 따스했다. 너무 찬란하고 예뻤다. 이 날 나는 아이패드를 들고 가서 카페 스케치를 했었다. 플랫 화이트를 주문했는데 컵이 다 떨어진 건지 아니면 내가 주문할때 정확히 말을 안해선지 종이컵에 줬다. (원래는 유리잔에 줌) 이 컵은 심지어 나랑 비행기도 같이 타고 왔다. 그런데 내가 이 컵 안의 커피얼룩을 씻다가 그만 저 엘스카 기사 문양이 좀 지워졌음 흐흐흑...
한달 가까이 머무른 곳이라 그냥 우리 집, 내 방처럼 친숙한 네링가 5층의 방. 사진은 10월 9일, 아직 빌니우스에 도착한지 일주일이 지나기 전. 이날 나는 필리모 거리를 횡단해 할레스 투르구스 시장과 새벽의 문까지 다녀왔었다. 방에 들어오다가 저녁 챙겨먹는 게 귀찮아 숙소에서 몇 분 거리인 맥도날드에서 빅맥을 테이크아웃해 와서 방에서 먹었다.
가깝고 편하다 보니 귀찮을 때 이용하느라 이 맥도날드에서 서너번이나 먹은 것 같은데... 통틀어 이 빅맥이 제일 맛있었다. 빅맥은 잘 안먹는데 드물게 먹고 싶을 때가 있다. 아마 오랜 옛날 러시아 시절에 대한 추억 때문인가보다. 그러면 또 추억보정 때문인지 이 드문 빅맥은 항상 맛있게 먹는다.
내 경우 여행의 저녁식사가 근사하고 화려할 때는 별로 없는 것 같다. 가장 큰 이유는 게으름 때문이다. 그런데 또 이렇게 방에서 먹었던 것들이 기억에 남는다.
애용했던 게디미나스 대로의 리미 수퍼에서 사왔던 체리복숭아(였던 것 같다. 그림을 보니) 탄산수와 함께. 캔은 참 이쁜데 사실 탄산수를 그리 즐기진 않아서 절반도 안 마셨던 듯. (이때는 아직 리미에서 사과복숭아 팀바크를 재발견하지 못했다)
돌아온지 며칠이나 되었고 모레부터는 복귀, 노동이라 어느새 엘스카의 환한 내부와 한적한 여유가 꿈결처럼 가물거리게 되었다. 이 사진은 아마도 10.17에 가서 처음으로 홍차를 시켜봤던 날이었던 것 같다. 빛이 아름다웠고 저쪽 창가 테이블에 예쁜 남녀 커플이 들어와 앉았다. 여자가 주문을 하러 갔는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남자는 등받이 없는 의자 두개에 앞으로 걸터앉아 폰을 확인하고 있었는데 스며들어오는 빛도, 엘스카도, 저 사람의 실루엣도 잘 어울리고 아름다워서 한 컷 담아두었다. 정면 사진은 아니니까 올려봄. 내가 엘스카에서 찍은 무수한 사진들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사진 중 하나이다.
창살 중 하나만 빨간색이라 찍어뒀던 사진. 필리모 거리. 떠나기 이틀 전 토요일. 엘스카에 갔다가 나와 필리모를 따라 트라쿠 거리로 걸어가던 길이었다. 필리모 거리는 길고 넓고 썰렁하고 트롤리버스와 차들이 많이 다닌다. 22년에 할레스 투르구스에 갔다가 맨첨 이 길을 따라 게디미나스 대로까지 걸어내려올때 ‘아 너무 길다. 여기는 응달이고 지루하구나’ 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머무를 땐 보키에치우와 더불어 제일 많이 지나다닌 거리가 되었다. 필리모는 나에게 딱 이 사진 같은 거리이다. 잿빛이고 길고 지루해보이지만 빨간색으로 반짝이는듯한 뭔가가 기억으로 남는 곳. 혹은, 엘스카로 시작하는 곳.
테이스트 맵에서 내리막길을 따라 쭉 걸어가다 옆으로 꺾어 조금 더 걷고 공원을 가로질러 내려가면 엘스카가 나온다. 맨처음 엘스카에 갔던 것도 딱 그때였다. 도착한 주의 첫 일요일, 흐린 날. 볼트를 타고 테이스트 맵에 갔다가 나와서 걸어가는 길에 엘스카에 처음 갔다. 첫눈에 사랑에 빠진 카페였다. 아마도 컬러와 스타일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기는 나에게 아마 카페 에벨과 좀 비슷한 느낌으로 남을 것 같다. 에벨보다는 좀더 개방적이고 밝고 쿨하긴 하지만, 여기서 글을 쓰지는 않았지만 책읽기가 좋았다. 처음에는 스케치도 두번이나 했다. 그 이후엔 책을 읽느라 좀 무거운 아이패드는 안 가지고 다니게 되었지만.
오늘은 하루를 일찍 시작했기 때문에 테이스트 맵에서 두시 좀 넘어서 나온 후 숙소로 가는 길에 역시 엘스카에 들렀다. 두시 반 즈음인데도 아직 만석이었다. 1층 입구 테이블에 앉았고 디카페인 플랫 화이트를 시켰다. 오늘은 첨 보는 점원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도 친절하게 잘해주었다. 1층과 바, 주문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책을 좀더 읽고, 오늘의 사진도 좀 정리한 후 카페를 나왔다. 시간이 되면 내일 떠나기 전에 한번 더 들르고 싶지만 만일 그러지 못한다 해도 섭섭하지 않도록 카페를 많이 보고 천천히 플랫 화이트도 마셨다. 그런데 설탕을 넣었는데도 전보다 쓰네. 디카페인이 더 쓴 걸까? 여기서 디카페인 카푸치노와 플랫 화이트를 시켜봤는데 내 느낌인가 모르겠지만 이것들이 더 쓴 맛인 것만 같음. 테이스트 맵 여파인가? ㅎㅎ
디카페인 플랫 화이트. 설탕 투하 전. 오늘도 이키 설탕이 나를 반겨주었다.
책 표지를 싸놓은 빌니우스 지도가 많이 헐었다. 엘스카에서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세상이 끝나기까지 아직 10억년', 피천득의 '인연', 하루키 잡문집(아니, 이건 여기까진 안 가져왔나 긴가민가. 이 책은 무거워서... 근데 가져왔던 것 같기도 하다. 엘스카는 워낙 자주 와서), 그리고 이 '미운 백조들'을 이어서 읽었다.
이 사거리와 빨간 트롤리버스도 그리울 것 같다.
맨 위 사진보다는 현관 쪽이 더 많이 나온 사진.
쿠야도 인사하렴. 쿠야는 내일 기내 캐리어에 먼저 들어가 있어야 하니 엘스카 한번 더 들러도 못 데려오니까 여기서 인사를 했다. 마치 자기가 이 카페 주인인양 당당하게.
커피를 잘 마시지 않는(못하는) 나에게 테이스트 맵은 많이 강력한 곳이라 '무적'이란 별명을 붙여줬는데 막상 떠나려니 여기가은근히 생각날 것 같아 오늘 다시 들렀다. 영원한 휴가님이 오후에 잠깐 나오실 수 있어서 여기서 뵈었다. 이딸랄라에서 숙소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 버스를 타고 세 정거장을 지나 테이스트 맵에 갔다. 이번에는 라떼를 시켰다. 그래, 그나마 내가 여기서 소화 가능한 건 라떼였어... 라떼도 다른 카페들의 카푸치노 수준으로 강했다. 영원한 휴가님은 내가 '사약'이라고 이름붙인 플랫 화이트를 드셨다. 나는 점심으로 모짜렐라 치킨 샌드위치를 시켰다. 루꼴라도 들어 있었다. 데워줬는데 맛은 무난한 정도. 라떼에 우유가 들어 있어서 샌드위치는 반만 먹었다.
검정색이 잘 어울리는 카페. 여기 때문에 돌아가면 검정 러브라믹스를 살 것 같다고 했는데, 영원한 휴가님이 오늘 잔을 유심히 살펴보신 후 이것은 러브라믹스가 아니라 다른 브랜드라고 하셨다. 그 말에 자세히 보니 손잡이가 다름! 근데 이 브랜드도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나? 결국 러브라믹스를 검정 빨강을 장만하는 게 아닐지... (후자는 엘스카 ㅎㅎ)
커피와 브런치 손님들이 미어터졌지만 그래도 제일 피크 시간은 아니어서 1층에 자리를 잡았다. 번호표도 받았다. 기다려야 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는 많이 기다리지 않았다. 내 샌드위치는 데워주기만 하면 되니까.
다른 카페 라떼보다 확실히 색도 진함!
그리고 설탕도 못 찾음. 흑흑 너무해 커피부심 하며 슬퍼했는데 영원한 휴가님이 설탕 어딨냐고 점원에 물어보니 카운터 위에 있긴 있는데 컵으로 덮어놔서 보이지도 않음. 엉엉... 하지만 설탕 받아서 아낌없이 투하. 설탕 없이 마실 수 없는 커피.
이건 사약 플랫화이트. 두번째 왔을 때 이거 도전했었음. (겁도 없음!)
기다리면서 찍음.
열심히 주문받고 커피 내려주던 점원. 세번째 오니 저분도 낯이 익었다. 영원한 휴가님 말씀으로는 거의 3년째 여기서 일하는 분이라 한다. 베테랑!
이건 우리가 마신 건 아니지만... 첨에 들어갈 때 야외 테이블에 놓여 있던 두개의 잔이 귀여워서.
보르쉬랑 키쉬로 든든한 조식을 먹고 나와서 필리에스와 디조이를 가로질러 루드닌쿠의 비르주 두오나에 팅기니스를 사러 갔는데 하얀 팅기니스가 없어서 캐러멜 팅기니스 한 조각만 산 후 입가심이 하고 싶고 책도 읽고파서 제일 가까운 이딸랄라에 갔다. 그때가 열시 반이 되기 전이었다. 아직 이른 시각이었고 한 단 위에 있는 책상 같은 테이블 하나가 비어서 거기 앉았다. 테이블 위에 막 손님들이 놓고 나간 커피잔과 물잔, 접시들이 가득해서 자리를 잡겠다는 급한 마음에 내가 그것들을 치우고 있는데 가게 운영하는 사장 여인(여인 두명을 자주 봄)이 직접 치워주고 안내해주었다. 이 분이 손님들을 살뜰하게 챙겨서 좋긴 했는데 알바들은 되게 긴장되겠다 싶었음. 오늘은 홍학청년이 없고 아주 친절하고 잘 웃는 곰돌이 같은 여자 점원이 있었다. 엄청 귀여웠다.
얼그레이랑 요거트 케익이란 게 있어서 이건 좀 가볍겠거니 하고 시켰는데 좀 실패함. 흑, 저번 치즈케익은 맛있었는데 이 요거트 케익은 그냥 아무 맛 자체가 안 났다. 달거나 시거나 뭐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혹시라도 빌니우스에 여행을 가셔서 이딸랄라에 가시려는 분께서는 요거트 케익은 패스해주세요.
내일 오후에 바르샤바행 비행기를 타러 가는지라 아마 이딸랄라에 갈 시간은 없을 것 같아서 겸사겸사 오늘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들렀다. 이딸랄라는 처음엔 별로였는데 점차 이미지를 만회해서 막판에는 제일 많이 들른 카페 톱2가 되었다. 아마 빛이 잘 드는데다 책 읽기가 좋아서였던 것 같다. 이딸랄라와 엘스카에서 책 읽기가 가장 좋았다. 여기는 돌아가면 많이 그리울 것 같다.
날씨 좋을 때 영원한 휴가님과 함께 앉았던 이 야외 테이블들도.
파스텔톤의 이 색채들도.
오늘도 여기 앉아서 (단어를 뒤져가며) 책을 열심히 읽음. 엘스카에서도 이어 읽어서 이 책을 67페이지까지 읽었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꼭 끝까지 다 읽어야지.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어제 늦은 점심 먹으려다 만석이라 실패한 Karštos galvos 카페. 오늘 아침 9시 오픈에 맞춰서 안개낀 게디미나스 대로와 대성당을 지나 필리에스 거리로 갔다. 그런데 이미 손님들이 몇몇 자리잡고 있음. 역시 인기많은 카페. 리뷰를 보니 필리에스 쪽에 묵는 관광객들 중 호텔 조식을 신청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기도 하는 것 같다. 내가 워낙 일찍 가긴 했지만 손님이 계속 왔는데 외국인들의 비중이 더 많았다. 아무래도 필리에스 거리가 관광지라 그런 것 같다. 그리고 카운터의 점원들이 러시아어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기는 아침과 브런치에 수프가 있어서 선택했다. 어제 지나가다가 보니 우크라이나 보르쉬가 메뉴에 있었다. 보르쉬는 6유로로 마늘기름과 데운 빵, 스메타나를 곁들여준다. 양이 어떨지 가늠이 안돼서 치킨과 볶은 양파 키쉬를 추가하고 페퍼민트 티를 주문했다. 페퍼민트를 좋아하지는 않는데 다른 카페들에서 카페인을 섭취해야 할 것 같아서.
이 카페는 필리에스 초입에 있어서 눈에 아주 잘 띄는데 이제껏 가지 않았던 이유는 의자가 불편해보여서였다. (의자와 테이블이 가느다란 다리로 지탱되는 스타일을 안 좋아함) 내부에 들어가보니 알록달록 원색으로 꾸며져 놀이터 같았다. 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았다. 사진은 아주 선명하게 잘 나온다.
원두와 좀 중국이나 대만의 버블티집 느낌 나는 포장지의 허브차, 홍차를 판매했다. 배지 같은 것도 팔았다. 디저트도 여럿 있었다.
보르쉬는 양이 아주 많지는 않았지만 내 위장으로는 사실 저것만 시켜도 됐을 걸 그랬다. 빵을 주니까. 수프 그릇이 기우뚱해서 바로 세워보려 했으나 디자인 자체가 기우뚱하게 되어 있었다. 쏟을까봐 조마조마... 조그만 탁자에 가득가득... (손님 많은 카페라 넓은 탁자 혼자 차지하기 뭐해서 작은 테이블에 앉았더니만... 점원도 어쩔줄 모르더니 키쉬 접시는 옆 테이블에 놔주었음. 흑흑 그냥 샥슈카 시켰어야 되나 ㅎㅎㅎ 근데 샥슈카도 큰 팬이랑 빵 얹은 도마를 주니까 모자랐을 듯.
보르쉬는 그냥저냥이었다. 국물이 묽었다. 소고기가 아니라 닭고기로 육수를 내서 가벼웠는데 닭고기가 좀 오래되었는지 잡내가 좀 났다. 스메타나를 왕창 풀어서 잡내를 가리고 고기는 남기고 감자랑 비트 위주로 건져먹음. 마늘기름은 맛있었다. 여기는 전에 갔던 우크라이나 식당도 그렇고 보르쉬에 뽐뿌슈까를 제대로 주지는 않고 대신 데운 빵과 마늘기름을 따로 준다. 마늘기름/버터에 푹 적셔서 구운 브리오쉬 뽐뿌슈까가 더 좋긴 하지만 이것도 이것대로 나쁘지 않았다. 보르쉬는 100점 만점에 65점 정도...
그런데 키쉬는 맛있었다. 충분히 볶은 양파와 치킨이 잘 어울렸다. 일반적인 키쉬보다 덜 짰다. 대신 많이 촉촉한 편이라 포크로 뜨면 금방 뭉개지므로 평소 먹는 키쉬랑은 좀 식감이 다름. 이거랑 보르쉬랑 먹으니 괜찮았다.
보르쉬는 좀 남기고 키쉬는 다 먹고 카페를 나왔다. 카페 내부 사진 몇 장.
알록달록! 몬드리안 그림 생각남.
Karštos galvos는 '머리에 열이 난다' 비슷한 뜻으로 의역하면 '머리 펄펄 끓으니까 커피 마셔야돼' 정도라고 이해함(영원한 휴가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임. 그러고보니 galvos는 노어에서 머리를 뜻하는 '갈라바'랑 비슷해보이네.
저 파란 의자 테이블이 내가 앉은 자리. 저땐 아직 페퍼민트 티만 나왔음.
다 먹고 나가기 전 쿠야에게도 카페 구경시켜줌. 여태 쿠야가 가본 빌니우스 카페 중 제일 쿠야랑 잘 어울림. 쿠야는 인형이라서 그런가보다 ㅎㅎㅎ
배지랑 이것저것 파는 진열대 귀퉁이에 잠시... 우리 쿠야가 제일 귀엽네. 어린이 손님들이 와서 '엄마 나 쟤 사줘' 할까봐 이 사진만 얼른 찍고 데리고 나왔음 :)
엘스카에서 나왔을 때 영원한 휴가님이 도서관에 예약해둔 책을 받으러 나오신다고 해서 트라쿠 거리에서 만났다. 잠깐 시간이 난다고 하셔서 새벽의 문 근처 후라칸에 다시 가보았는데 자리가 거의 없었고 디저트나 먹을 것도 텅텅 비어 있고 구석에는 뭔가 촬영을 했는지 마이크와 앰프, 카메라가 그대로 세팅되어 있었다. 후라카나스는 없었고 다른 점원이 있었다. 그리고 족히 7~10개는 되어보이는 커피잔과 찻잔, 접시가 설거지가 전혀 되지 않은 채 바 한구석에 쌓여 있었다. 설거지 안하고 미뤄놓는게 후라칸 스타일인가, 저 촬영한 사람들이 먹었나 하면서 우리는 그 후라칸을 포기하고 나와서 근처에 있는 카페인에 갔다.
이 카페인은 새벽의 문 근처에 있는데 옛 은행 건물이라고 한다. 역시나 모퉁이에 자리잡고 있는데 층고가 높고 소파도 푹신하고 타 지점들과는 분위기가 다르고 좀더 깔끔한 느낌이었다. 주말이어서 그런가, 새벽의 문 근처에서 아주 잘보이는 카페라서 그런가 계속해서 손님들이 들어왔다. 카페인도 여러 지점을 가봤는데 색채나 디자인 등이 일관적이긴 하지만 건물 자체의 특성에 따라 약간씩 달라지는 것 같다. 이 카페인은 은근히 마음에 들었다.
바깥에서 보면 이렇다.
사진을 너무 대충 찍어서 이쁘게는 안 나왔지만. 영원한 휴가님은 플랫 화이트와 초코 에클레어(내가 어제 이것을 숙소 근처 카페인에 딱 하나 남아 있는 걸 발견하고 사와서는 그만 밤중에 먹어버렸다!), 나는 실론 티와 치즈케익을 먹었다. 초코 에클레어는 간밤에 먹었으니... 치즈케익을 시킨 이유는 카페인이 빌니우스에서 제일 먼저 치즈케익을 선보인 카페라는 말씀을 전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항상 카페인만 가면 초코 에클레어만 찾았고 ㅎㅎㅎ 그래서 '가기 전에 최초의 치즈케익을 먹어보자' 란 마음으로 선택. 생각보다 맛있었다. 무난하고 꾸덕한 치즈케익이었다. 커피랑은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빌니우스 최초의 치즈케익!
내부 사진 두 장.
다 먹어치우고 일어날 무렵에야 '아 맞다 쿠야도 왔는데' 하며 앉혀주었다. 쿠야가 '야, 다 먹었잖아! 나를 이렇게 경시해도 되는 거야?' 하며 못마땅해하는 것 같음.
11시 반이 넘어 느지막하게 방에서 나왔다. 어디를 갈까 고민했는데 몇군데 다시 들러볼까 한 카페들은 모두 브런치를 하고 있어 만석일 것 같았다. 테이스트 맵도 브런치를 한다고 해서 예전의 일요일 오전 기억에 '아 가봤자 장난아니겠는걸' 하는 생각에 일단 가까운 엘스카로 가보았다. 여기도 주말 이 시간대에는 자리가 거의 없지만 그래도 가까우니까 혹시나 해서. 만약에 자리가 없으면 카페인이나 뭔가 다른 데 가야지 하면서.
다행히 엘스카 1층에 자리가 있었다. 입구 쪽 테이블과 창가 쪽 테이블 하나가 비어 있어 얼른 창가 테이블에 앉았다. 이 자리는 앉아보지 않았던 자리라서. 여기는 창문이 커서 빛이 아주 잘 들어오기 때문인지 거의 항상 차 있다. 나는 2층을 더 좋아하긴 하지만. 이 자리에 빨간 의자가 있어 좋아하며 앉았음.
카푸치노 작은 사이즈를 주문하고 설탕을 가지러 갔다. 오 그런데 드디어 여기 설탕 바뀌었네! 그런데 이키 설탕... 보통 음식점이나 카페는 설탕을 도매로 주문해다 쓸 것 같은데 이건 아무래도 길 건너편에 있는 이키 슈퍼에서 급조해 사온 것 같다. 하긴 그저께까지 갔을 때마다 설탕 봉지를 뜯으면 설탕이 굳어져 있었어... 아마 마지막 남은 오래된 설탕이었던 것 같다. 그 설탕이 다 돼서 급조한 것 같음. 이키 가서 빨리 사오자~ 하면서. 드디어 새로 산 설탕이라 그런가 이건 습기로 굳어져 있지 않고 아주 잘 뿌려졌음. 이 이키 설탕봉지는 <미운 백조들> 책갈피로 활용.
이 자리.
쿠야도 당당하게. 자기가 이 카페 주인인 것처럼. 쿠야야, 이제 한국 돌아가면 카페 자이칙 밖에 없는데 너 만족할 수 있겠니? ㅠㅠ
창가 배경으로도 찍어봄. 여기는 사거리 모퉁이에 있는 카페라서 계속해 트롤리버스들이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빨간 버스가 지나가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다.
이렇게... 빨간 버스...
<미운 백조들>을 이어서 읽었다. 흥미진진해지고 있는 파트에서 책을 덮고 일어났다. 오늘 사람이 아주 많았다. 그리고 토요일이라 모두가 브런치를 먹으러 왔다. 다들 빨간 번호표를 테이블에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내 카푸치노도 늦게 나왔지만 나보다 먼저 온 남자 손님은 내가 나갈 때까지도 밥이 안 나와서 하염없이 빨간 번호표를 놓고 기다리는 것 같았다. 카페가 크지 않은데 브런치를 다들 시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긴 했다. 손님들이 들어왔다가 자리가 없어서 그냥 나가기도 했다. 엘스카의 브런치를 고대하며 토요일에 찾아온 손님들을 생각해서 나도 마침 카푸치노를 다 마셨기에 한시간 안되어 일어났다. 원래는 오후 2~4시 사이에 왔으면 좀 한적할테지만.
이키 설탕과 카푸치노 풀샷. 설탕봉지가 이쁜 건 아닌데 이키 설탕이란 게 좀 재미있었다. 설탕 떨어졌다고 막 길 건너 슈퍼에 사러 가는 점원들이 상상돼서 그런가보다.
화장실에 이런 문구가 붙어 있었다. 3~4일 전에 왔을 때에도 변기 일부가 좀 떨어져서 덜컥거리고 있었는데 그대로인데다 문구만 추가됨. 근데 이 문구 붙일 시간에 수리를 하면 되지 않을까, 별로 어려운 건 아니고 새로 사서 갈아끼우면 되는 건데... 하긴 쓰지 못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조금 불편할 뿐이지. 러시아 같았으면 '기술적 이유로 화장실 못 씀' 이렇게 붙어 있었을지도 몰라. 여기는 쓸 수는 있지만 안 고치고 안내문구를 친절하게... 카페 스티커도 아낌없이 붙여서. 우리나라 같았으면 손님들 민원과 별점 테러가...
어제 백스테이지 카페가 가는 족족 만석이라 포기하고 숙소 근처 영화관에 딸린 분점에 갔다는 이야기를 썼다. 그런데 오늘 어떻게 자리가 있어서 이 인기많은 카페에서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 오늘도 8시 전에 깨어났는데, 조식을 먹으러 내려가야겠지 하며 뒹굴고 있는 중 영원한 휴가님이 나와서 아침 먹지 않겠느냐고 하셔서 나는 '그럴까, 어차피 깼는데' 하고 혹해서 얼른 씻고 방을 나섰다. 원래는 몬에 다시 가서 이번엔 간단한 크루아상 같은 빵을 먹을까 싶었는데 영원한 휴가님이 몬이 아니라 우리가 예전부터 조우하는 장소로 잘 활용한 돈 폰타나스(보키에치우 거리의 분수에 우리가 붙인 이름. 예전에 아이들이 이 분수에서 동전을 주웠기 때문에 돈 분수라는 뜻으로 ㅋㅋ) 앞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어딜 갈까 하다가 바로 앞에 있는 백스테이지 카페에 다시 도전해보기로 했다. 설마 9시밖에 안됐는데 벌써 만석이겠어? 하면서.
그런데! 출입구에 또 줄이 가득 늘어서 있고 우리 앞의 영어를 쓰는 두분은 우리에게 '사람이 너무 많네요' 하고 아쉽게 웃으며 포기하고 떠났다. 나는 '에이 그럼 미련없어요. 우리 몬이나 테이스트 맵에 가요' 라고 했는데 안에 잘 보니 뭔가 비어 있는 테이블이 있었다. 우리 앞에 줄선 사람들은 자리를 맡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먼저 안으로 들어가 조그만 빈 테이블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빌니우스 도착 22일만에 백스테이지 카페 입성 성공. 아니 여기 이렇게 어려운 곳이었다니! 예전엔 몰랐었네.
여기는 브런치 메뉴가 많다. 그런데 브런치에 김치 오믈렛이 있어서 전부터 궁금했다. 크루아상이나 하나 먹지 했었던 나는 '김치 오믈렛 궁금하니 도전해보겠어요~' 라고 마음이 바뀌었다. 다른 브런치에도 사이드메뉴로 김치를 3.5유로엔가 내주고 있었다. 신기신기! 그래서 김치오믈렛과 페퍼민트 티, 영원한 휴가님은 플랫 화이트와 체리파이를 주문.
김치오믈렛이 나왔다. 앗 생각보다 김치가 그래도 그럴듯한 볶음김치야... 막 맛있고 잘만들고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볶음김치였고 심지어 많이 넣어줌! 계란은 2개와 3개 중 고를 수 있었는데 나는 2개로 만들어달라고 했다. 거기에 빵 한조각과... 이게 뭐지? 하고 처음에 혼란을 일으킨 소스 같은 게 나왔으니... 소스 치고는 묽은데, 아니 이거 설마 참기름인가? 냄새를 맡아보니 참기름이었다! 참기름을 마치 올리브유나 발사믹처럼 종지에 상당히 많이 담아줌. 우리는 깜짝 놀랐다. 어, 참기름 비쌀텐데... 참기름 이렇게 먹는 거 아닌데... 우와, 비싼 식재료 이렇게 막 써도 되나?
하여튼 그래서 나는 심지어 빵을 참기름에 찍어먹기도 해보았다. 괴식은 아니었고 먹을만은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참기름 너무 많이 줌. 그럼 여기 사람들은 저 참기름을 다 닦아먹는건가? 우리는 '저 참기름이면 간장계란밥이 몇그릇이야...' 하며 웃었다. 김치 오믈렛과 체리 파이도 나누어 먹었는데 나름대로 맛있었다.
먹는 동안에도 손님이 좀 빠졌다가 또 꽉 차기를 반복했다. 로컬 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많았다. 여기는 빌니우스의 카페라기보다는 활기찬 분위기가 좀 미국이나 뭔가 프렌즈 같은 시트콤에 나오는 카페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은 제각각 무리지어 신나고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뭔가를 먹고 마시고, 카운터와 바에 있는 점원들은 젊고 예쁘고 활기차고. 좀 업되어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영원한 휴가님은 여기는 모여든 사람들끼리 좀 큰소리로 얘기를 하는데도 각자의 대화는 또 잘 들리고 나름대로 작업도 잘 되는 것 같다고, 이런 분위기 때문에 손님들이 몰리는 것 같다고 하심.
그리하여 나는 삐쳐있었던 백스테이지 카페 보키에치우 거리 본점에도 재입성에 성공하게 되었다. 김치 오믈렛과 카페 사진 몇 장.
디저트가 많지는 않다. 전에 먹었던 티라미수와 쿠키는 별로였는데 오늘 체리 파이가 달지 않아서 의외로 괜찮았음. 커피는 묽고 맛이 그냥저냥이라고 하신다.
이게 체리파이.
두둥. 김치 오믈렛, 빵, 그리고 참기름!
오믈렛 위에 치즈를 갈아서 뿌려줬다. 깨도 뿌려주고 ㅎㅎㅎ 김치도 저렇게 아낌없이 넣어주었다. 근데 이 김치가 리미 김치보다 훨씬 낫네. 타마고는 차라리 여기를 벤치마킹하라, 계란밥을 브런치로 내주느니...
빌니우스에서 '인기많은' 카페란 의미에 따라 좀 달라지겠지만, 보키에치우 거리에 있는 백스테이지 카페는 확실히 그 축에 속한다. 갈때마다 자리가 없다. 재작년 여름에는 할레스 투르구스 시장에 갔다가 그 카페에 갔을 때 북적이긴 했어도 자리를 잡았었는데. 그때 운이 좋았던 건지 아니면 그 사이 여기가 더욱더 인기많은 카페가 된 건지 잘 모르겠다.
하여튼 2년 전 갔을 때의 느낌은 '오 좋긴 한데 엄청 북적대네. 근데 디저트는 그렇게까지 맛은 없는데... 좀 힙한 스타일이긴 하네' 정도였기 때문에 이 인기의 이유가 확 와닿지는 않았다. 랩탑 등으로 작업하는 사람들이 애용하는 곳이고 또 단골들이 자기들만의 분위기 때문에 좋아하는 곳이라고도 한다. (나의 정보들과 유추는 대부분 최고의 정보제공자인 영원한 휴가님으로부터...)
하여튼 몇차례나 백스테이지 카페에 가보았으나 가는 족족 실패했고 결국 나는 짜증이 나서 '아니 여기 내가 엘스카나 이딸랄라만큼 맘에 드는 곳도 아닌데 맨날 만석이고... 어차피 여기서 브런치 먹을 것도 아닌데-여기는 특이하게 김치 오믈렛이 브런치 메뉴에 있었는데 지금도 있는지는 모름. 좀 궁금하긴 했음- 디저트가 맛있는 것도 아니고... 굳이 안 가, 백스테이지!' 하고 삐쳤다.
그런데 영원한 휴가님이 '지금 숙소인 네링가 근처 영화관에 백스테이지 2호점이 있어요' 라고 알려주셨다. 아니, 도보로 5분 거리! 엘스카보다 조금 더 가까움! 심지어 길도 안 건넘. 호텔에서 나와 약간만 올라가다 코너로 돌아 쭉 걸어가면 영화관 건물이 나오고 거기 1층 입구 복도 쪽에 조그맣게 백스테이지 카페 Skalvija 지점이 있었다(저게 영화관 이름인 것 같음) 그래서 오늘 후라칸에서 나왔다가 방에 들러 책을 바꾼 후 여기에 가보게 되었다. 오늘 카페 5곳 기록달성. 역시 아침에 일찍 나와야 하는구나. 일어나는 건 비슷하게 일어났지만 후다닥 나갔더니만...
여기는 보키에치우의 원래 백스테이지 카페와는 많이 달랐다. 그냥 극장 카페였다. 거기에 브랜드를 가져온 정도? 강아지 얼굴 로고랑 메뉴 일부는 비슷했지만 분위기 자체는 전혀 달랐다. 매우 한적했다. 원 지점에 비해 디저트도 별로 없고 음식은 아예 없었다. 시나몬 번, 라임파이, 크림 많이 얹은 캐러멜 케익 같은 것만 좀 있었다. 여기는 오랜 옛날 내가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종로의 코아아트홀을 연상시켰다. 코아아트홀, 시네코아, 동숭아트센터 영화관을 많이 다녔는데 그중에서도 코아랑 제일 많이 닮았다. 영화 시작 얼마 전이었는지 그때쯤 나이 지긋한 부인들이 두세분씩 오셔서 앉아계시다 또 금세 비었다. 여기 앉아 있으니 그 오랜 옛날, 수많은 영화를 보러 다녔던 시절, 별로 하는 일도 없지만 그때는 세상에서 제일 진지하고 심각한 인간이 되어 종로 거리를 쏘다녔던 시절이 많이 생각났다.
사진 몇 장. 보기엔 그냥 그래보이는데 의외로 편안했다. 이 건물은 네리스 강변에 면하고 있어서 창 밖으로 버스와 차들이 지나다녔다. 그래서 더 코아아트홀이나 종로 느낌이 났나... 구시가지 내의 카페들은 그런 느낌이 아니니까.
나는 저 단 위의 창가 테이블 중 하나에 앉았다.
찻잔을 엎어서 줬는데 그저께 내가 엘스카에서 봤던 더블 에스프레소 잔의 상표를 기억 못해서 우왕좌왕했던 게 생각나서 '어 그 브랜드네' 하고 재밌어서 찍어둠. 근데 내 스타일은 아니긴 하다.
데이지 차를 시켰다. 카페인 든 음료는 더 못 마실 것 같아서. 허브 차가 메뉴에 있어서 뭐뭐 있냐고 물어봤더니 페퍼민트, 데이지, 루이보스로 시작해 센차, 겐마이차, 블랙티 등등 이어지길래 데이지 주세요 함. 국화차 맛이었다. 생강차도 있었는데 그건 아침에 브루에서 마셨으므로 이걸 택함. 양이 많아서 절반만 마심.
영화 정보지나 리플렛(..로 추정)과 엽서, 그리고 아이들 색칠놀이가 있었다.
이건 창가에 콘센트가 당당하게 '나를 쓰세요!' 하고 놓여 있어서 기특해서 찍어놓음. 보키에치우 백스테이지에는 작업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콘센트도 많다고 함. 하여튼 내 폰도 얼른 여기서 충전함.
이건 나오면서 찍음. 이게 영화관 입구.
** 2년 전 보키에치우의 백스테이지 카페 얘긴 여기. 근데 그때도 막 큰 인상 남긴 건 아니었는데 왜 맨날 만석인가.
게디미나스 대로, 내가 머무는 숙소 근처에도 후라칸이 하나 있다. 대성당 광장 방면 토토리우 지점 말고 반대방향의 큰 공원(며칠 전 내가 가서 책 읽었던 곳)과 바닥분수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건물 모퉁이에 자리잡고 있음. 후라칸도 대부분 건물 모퉁이에 자리잡고 있다(베로 카페도, 카페인도 대부분 그런 것 같다) 여기는 영원한 휴가님이 예전에 자주 들르던 곳이라 하시기도 했고 또 후라칸은 지점마다 특색이 있는 것 같아서 한번 가보았다. 여기는 오늘의 네번째 카페였다. BREW에서 나와 엘스카에 잠깐 들렀기 때문이다.
창가에 앉으면 바닥분수를 볼 수 있는데 내가 들어갔을 땐 그쪽 자리들은 다 차 있었다. 이 지점은 뭔가 구석구석 미로처럼 되어 있었다. 작은 방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야 하나. 그건 새벽의 문 후라칸과도 좀 비슷한 구조였지만 거기는 좀더 널찍하고 흰색이라 더 밝았고 여기는 뭔가 좀 썰렁하고 휑한 느낌이었다. 이 지점의 가장 큰 특징은 벽면의 레코드 장식들 정도. 나는 맘에 드는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벽에 등을 대고 앉았다. 테이블이 조금 높긴 했는데 의자는 편했다. 이미 아침부터 가향 홍차, 생강차, 그리고 엘스카 카푸치노까지 마시고 왔기 때문에 여기서는 콤부차를 마셨다. 체리 향 비슷한 맛이었는데 긴가민가.
내 옆쪽 창가 테이블에는 인도 출신으로 보이는 남자가 랩탑을 놓고 일하고 있었다. 빌니우스에는 인도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그리고 은근히 영어를 쓰는 외국인들도 많다. 본격적 관광지가 아닌데다 규모가 작은 도시라 어떻게 보면 좀 신기하기도 하다만 그래도 EU니까 당연한 건가 싶기도 하고... 그리고 맞은편에는 대학생 같은 남녀가 앉아 랩탑을 펼쳐놓고 떠들썩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꼭 조별 발표 준비하는 애들 같았다. 그런데 옷걸이가 그쪽에만 있었고 첨엔 남자애 하나만 앉아 있었기 때문에 내 코트를 걸어놨다가 점점 학생들이 늘어나는 바람에 '엥 내 코트 못 꺼내겠네' 싶어서 학생 하나가 잠깐 자리를 비웠을 때 얼른 가서 '미안미안합니다~' 하며 옷을 가져와야 했다.
여기서 나는 너무너무 졸렸다. 오늘 일찍 일어나 보키에치우 쪽까지 좀 빨리 걸어가서 카페 아침을 먹었고 종일 돌아다니며 마시고 먹고 한데다 날씨가 매우 흐리고 짓누르는 느낌이라 그랬나보다. 그래서 여기서는 책 보다가 사진 정리하다가 졸았던 기억이 가장 크다.
여기서 챙겨온 하루키 잡문집을 다 읽었다. 이래서 한국어로 된 책들은 (몇권 안 가져왔지만) 전부 다 재독 완료. 책을 다 읽은 후 바닥분수 후라칸에서 나왔다.
이건 입구에서 가까운 다른 공간. 이 후라칸은 공간별 테이블 배치가 뭔가 좀 뻘쭘하다. 날씨가 꾸무룩해지고 추워져서 야외테이블은 다 접어두었다. 참, 이 후라칸에도 그 후라카나스는 없었다.
그러고보니 이 하루키 잡문집도 빌니우스에서 이 카페 저 카페 다녔음!! 좀 무겁고 두꺼워서 스트루가츠키의 10억이나 미운 백조만큼 많이 다니진 않았지만 그래도 가까운 카페들과 심지어 공원에도 같이 갔다.
이 파트는 내가 좋아하는 얘기라 찍어둠.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가로서는 내 취향이 아니고 글을 쓰는 시선도 100% 일치하는 건 아니다만 방과 밀실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항상 마음에 와닿는다.
나와서 한 컷. 7시에 오픈한다고 적혀 있는 것 같다. (아닌가 7유로 어쩌고인가? 매일 아침 7시라고 적혀 있는거 같긴 한데... 아아 한달 가까이 있었는데도 리투아니아어 거의 하나도 몰라 엉엉 의지박약 언어능력 감퇴자...)
여기는 빌니우스에서 내가 갔던 카페 중 반경 상 가장 멀리 있는 곳이다. algirdo 거리에 있는데 테이스트 맵보다 더 떨어져 있다. 그런데 이것이 실제 거리 상 가장 멀리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구시가지를 중심으로 여기저기 길이 퍼져 있기 때문이다. 하여튼 체감 상으로는 가장 멀었음. 언덕길을 올라가서 걸어가면 나오는 주택가 쪽에 있다. 며칠 전 공원 언덕을 따라 올라가서 계란밥을 먹었던 '타마고'가 있는 윗동네인데 거기서도 좀더 걸어가야 한다. 테이스트 맵도 쭉 따라 걸어가면 나온다는데 여기서 나와서 테이스트 맵을 갈까 하다가 나는 엘스카로 갔다.
이름이 낯익다면, 맞다, 그 언덕 올라가기 전에 갔었던 곳. 공부카페라고 생각하고 갔는데 막상 공부카페는 그 옆의 카페인이어서 '아악 가짜 공부카페!'라고 나에게 매도당한 BREW의 로스터리 지점이다. 처음 갔던 브루 지점은 작고 좁고 좀 답답하고 특색이 별로 없었는데 여기는 주택가와 회사 쪽에 있었고 공유 오피스 건물에 입주해 있어서 그런지 상당히 쾌적했고 작업하기 좋은 조용한 카페였다. 영원한 휴가님이 자택과 가까운 곳이라 자주 오시는 곳이라고 한다. '몬'에서 아침을 먹은 후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가서(거리 이름은 기억 안남 ㅠㅠ N자로 시작했던 것 같은데... 아닐지도 몰라) 그릇 도매상가에 잠깐 들르고 이후 조금 더 걸어가서 이 카페에 갔다. 가짜 공부카페라고 놀린 거 미안해요, 브루. 이 지점 덕분에 이미지 매우 만회하셨습니다!
여기는 서울에서 많이 보이는 스타일의 카페이다. 인테리어 스타일도 그렇고. 혼자 와서 노트북이나 태블릿으로 일하는 손님도 그렇고. 하지만 우리 나라 카페에는 옷걸이가 없지. 오늘 여기 앉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 나라도 점점 겨울도 길어지는데 카페에 옷걸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하긴 근데 난 사무실에 옷걸이가 있어도 결국 코트랑 점퍼 전부 벗어서 내 의자 등받이에 걸쳐놓긴 하지만...'이라고 말했다. 카페에 옷걸이가 있으면 기분이 좋다. 그런데 이 얘기를 하자 영원한 휴가님이 한국 식당에서 뚜껑 열면 옷 넣을 수 있는 의자나 옷 넣는 통 얘기를 하셔서 '아앗 우리에게는 또 그런 것이 있지!' 하고 새삼 상기함 ㅎㅎ
여기는 약간 커피빈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좀 좋았던 시절의 커피빈. 난 별다방보다 콩다방을 좋아했었는데 갈수록 콩다방의 입지가 흔들리고 가격만 비싸지고 그냥저냥이 되어가서 아쉽다. 갑자기 콩다방에 대한 아쉬움으로 마무리. 이미지 쇄신한 브루 사진 몇 장과 함께.
오르막길 걸어올라오고 공구상가 들렀다 오는 길에 약간 추워진데다 치즈 샌드위치랑 홍차를 먹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강차를 주문했다. 꿀이 든 작은 병을 줘서 이때 이미 매우매우 점수를 높게 받으면서 가짜 공부카페의 (억울한) 오명 탈출. 근데 그러고보니 이 지점이야말로 공부카페란 말에 어울리는 스타일인데... 공부라기보단 작업카페. 꿀은 본 마망이었다. 본 마망 잼은 많이 먹어봤는데 미니 꿀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아니, 전에 아스토리야에서 줬었나? 거긴 다른 브랜드였는데... 하여튼 생강차는 좀 싱거웠다. 전에 커피도 그랬고 전반적으로 음료가 좀 싱거운 것 같다만 꿀 따로 줬으니까 괜찮아.
안쪽에 로스터리가 있었다. 원두 자루도 많이 쌓여 있음.
여기서도 인증된 10억 책. 그리고 영원한 휴가님의 플랫 화이트는... 설탕을 넣고 너무 힘차게 휘저으셨는지 철퍽 쏟아짐. 달리의 라떼 아트 같다고 하셔서 웃었다. 근데 막상 설탕이 다 녹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데 설탕 넣으면 정말 잘 안 녹음. 처음부터 넣고 녹이지 않는 한 어쩔 수 없나보다.
** (순전 내 착각의 결과) 가짜 공부카페로 매도당했던 모 뮤지엄 앞 BREW 지점 얘기는 여기
오늘 무려 8:45에 숙소를 나서서 어제 발굴한 몬 카페(mon.)에 가서 아침을 먹었다. 영원한 휴가님이 아이들을 등원시킨 후 더블 에스프레소를 드셨고(내가 온 후 크림 든 도넛 추가하시고 조금 남은 커피에 우유 추가하심. 추가 우유는 식물성만 되는듯 오트밀크였다) 9시쯤 내가 합류하였다.
아침 메뉴가 이것저것 있었는데 라클레트, 체다, 그라나 파다노 치즈를 얹어 구운 사워도우 샌드위치인 ‘수퍼 치즈 샌드위치’와 아몬드향 홍차(블랙티는 이것뿐)를 골랐다. 샌드위치가 엄청 컸다! 맛없을수 없는 조합이라 당연히 맛있었는데 너무 커서 반만 먹고 반은 싸옴. 이번 여행에서 카페 아침 첨 먹어봄. 고마워요, 영원한 휴가님!
아침 먹으러 오는 사람들이 은근히 많았다. 귀국해 다시 업무 복귀하면 여기 가끔 생각날 것 같다.
샌드위치는 치즈 얹어 구워 나와야 하므로 번호표를 줌
내가 다 읽고 영원한 휴가님께 드린 스트루갸츠키 형제의 <세상이 끝나기까지 아직 10억년> 우리는 그냥 10억이라 부른다. 이 책은 빌니우스의 온갖 카페를 다 가보고 있음 :)
몬(mon.)은 미칼로야우스 거리에 있는 카페이다. 거리 이름 발음이 정확한지 잘 모르겠네. 아이고 헷갈려. 미콜라유스 미칼로야우스 흐흐흑... 이 거리는 보키에치우 거리에서 좁은 골목처럼 이어져 있다. 여기 말고 좀더 넓은 트라쿠 거리도 있다. 트라쿠 거리에는 컵룸 카페가 있고 거기를 따라 올라가면 필리모 거리로 가서 엘스카로 갈 수 있다. (으앙 지리를 이렇게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뭔가 뿌듯해... 방향치라서. 여행에서 뭔가 지식이 남은 것 같아)
여기는 영원한 휴가님이 아침에 아이들을 유치원에 데려다주신 후 이따금 들르신다고 했었다. 궁금해서 얼마전 구글맵 리뷰를 검색해보니 '크게 색다를 건 없지만 깔끔하고 좋은 카페입니다. 화장실에서도 좋은 향이 납니다' 라는 리뷰가 인상적이었다. 색다르지 않아도 깔끔하고 좋은 카페 찾기가 은근히 어렵고, 화장실에서 좋은 향이 난다니까 그래? 정말? 무슨 향이 날까 하고 호기심 발동. 그래서 가기 전에 한번은 들러봐야지 하고 있던 터에 오늘 오후에 영원한 휴가님이 여기 들르신다 하여 나도 가보았다.
여기는 스타일을 보면 컵룸 카페를 좀더 크고 고객친화적으로 만든 느낌이었다. 하지만 디저트와 빵이 은근히 많았고(에클레어와 케익과 크루아상, 도넛 등이 카운터 위에 매우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점원이 매우 친절했다. 나는 이미 홍차, 라떼, 레모네이드를 마셨고 저녁도 먹어야 했으므로 콤부차를 시켰다(콤부차 있는 것도 신기신기. 빌니우스 카페들은 콤부차, 말차, 말차라떼 같은 것들을 많이 내놓는다. 그런데 왜 홍차 종류는 별로 없는지 여전히 나에게는 미스터리 ㅎㅎㅎ)
그런데 이때 나는 또 아우구스타스 때처럼 헷갈림/물고기 기억력. 콤부차랑 다른 차를 헷갈려서 철석같이 이것은 따뜻한 차라고 믿음. 그런데 지금도 무슨 차랑 헷갈렸던 건지 모르겠다. 점원이 무슨 맛 무슨 맛 있다고 말해주는데 순간 나는 '응?' 하는 상태가 되어 '추천해주세요' 라고 말했고 홀리 바질 맛을 추천해줘서 그것을 시킴. 차가운 탄산 콤부차를 마시면서 '으응?' 하는 상태가 됨. 아 근데 콤부차 안 마셔본 것도 아닌데 나는 무슨 차랑 헷갈렸던 걸까??? 아직도 기억이 안 남. 흑흑 물고기 기억력.
하여튼 막 콤부차를 받아서 자리에 앉았는데 미니멀리즘 같으면서도 의외로 의자가 편했고 예상보다 조용하고 아늑한 느낌이었다. 리뷰에서 '색다를 건 없지만 깔끔하고 좋은' 이라고 한 게 이해가 됐다. 오 이런 카페 사무실 근처에 있으면 자주 들를 것 같다.
영원한 휴가님이 곧 오셔서 우리는 야외로 나갔다. (더블 에스프레소 시키신 것으로 추정됨) 이 카페는 안뜰이 있는 건물에 입주해 있었고 그 안뜰에는 지붕도 조그맣게 있고 뭔가 아늑했다. 야외 테이블들이 여럿 있었고 한쪽에는 난로도 있었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씨였지만 그렇게 춥지 않았다. 여기도 엘스카처럼 흡연자 친화적인 카페로 보였다. (테이스트 맵은 커피부심이 강력한 카페라 야외 테이블을 많이 놓긴 했지만 거기서 흡연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함) 자리에 앉아 콤부차를 마시면서 가방에 넣어두었던 미니 킨더 초콜릿을 먹으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문을 열고 안뜰의 야외 테이블로 나오는 손님들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드디어 피우고 싶은 담배를 피울 수 있다!' 하는 기대감과 충족감으로 가득한 표정 같았다. 행복해보여서 보는 것도 좋다.
이야기 나누느라 카페 안쪽이랑 안뜰의 야외 사진은 별로 못 찍었지만 그래도 맘에 드는 카페라 따로 남겨둔다. 생각날 것 같은 카페라 잘 들러본 것 같다 :)
출입문도 미니멀리즘 느낌.
내부는 이렇다. 뭔가 휑해보이는데 의외로 안에 들어가 앉으면 그렇게 썰렁한 느낌은 아님. 의자가 편해서 그런가.
우드 톤이라 덜 차가워보이는지도 모르겠음. 하여튼 쿠야와 콤부차. 맨 위 사진보다 이 사진이 좀더 카페를 길게 잡았기 때문에 비슷하지만 올려봄.
이번 빌니우스 여행에서 엘스카 다음으로 자주 간 곳은 이딸랄라 카페, 그리고 그 다음은 후라칸이다. 그런데 후라칸은 여러 지점이 있고 보통은 야외에 잠깐 앉았던 터라 역시 투 톱은 엘스카와 이딸랄라이다. 둘다 밝고 환하다는 특징이 있다. 이딸랄라는 손님들로 북적거려서 산만하고 복잡한 편이지만 운좋을 땐 괜찮은 자리에 앉을 수 있고 해가 날 때는 야외에 앉을 수 있다. 그리고 참 묘하게도 손님들이 많아서 웅성웅성 시끌시끌한데도 나는 이 카페에서 독서가 참 잘된다. 엘스카보다도 더 집중이 잘되는 경우도 있다. 우리 말로 된 책 말고.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소설 말이다. 아마 외국인 손님들이 많이 오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다. 나는 소음에 민감해서 노래도 우리 말 가사가 들어오면 힘들어하는 편인데(그래서 연극이나 뮤지컬, 오페라보다 발레와 클래식 연주를 더 좋아한다. 락음악은 좀 예외) 여기서는 여러 나라 말들이 백색 소음으로 들려와서 그런 것 같다. 생각해보면 카페 에벨에서도 그랬던 것 같다. 하여튼 그래서 여기 오면 의외로 책 읽는 게 좋다.
오늘은 아우구스타스와 바르보라 카페에서 나온 후 조금 걷다가 이딸랄라로 갔다. 엘스카에게 좀 미안하긴 했지만(게다가 햇살까지 드니까 더욱) 동선도 그렇고 여기가 오늘은 더 편했다. 이미 후라칸에서 얼그레이, 아우구스타스에서 라떼를 마셨으므로 여기서는 그냥 레모네이드 주문. 목이 마르기도 했다. 레모네이드는 그냥저냥 무난한 맛이었다. 달달했다. 자리가 꽉 차 있었고 중간 복도 자리는 싫었는데 창가 그네 바로 뒤에 큰 단체 테이블이 있어 거기 앉았다. 여기는 등받이 없는 의자라 좀 망설였으나 막상 앉으니 편했고 또 볕도 잘 들어오고 책읽기도 좋았다. 옆에는 혼자 와서 열심히 노트북으로 일하던 젊은 남자(랩탑 옆에 업무다이어리 같은 걸 여러개 쌓아놓고 그 위에 빈 카푸치노 잔과 물컵을 올려두고 집중...), 그리고 열띠게 얘기를 나누던 독일 여자분 두명이 앉아 있었다. 나중에 노트북으로 일하던 청년이 나가서 그 자리로 옮겼음. 책을 여러 페이지 읽어서 그래도 이 소설을 이제 40여페이지 가량 읽었다. 아아 이거 한국 돌아가면 과연 이어서 쭉 다 클리어할 수 있을까?
책을 읽다가 4시 좀 안되어 일어났다. 떠나기 전에 한번쯤은 더 들를 것 같은 이딸랄라 카페. 뭔가 산만한데 어째선지 뭔가 편한 곳이다. (하지만 비싸다!)
아우구스타스와 바르보라의 러브 스토리 카페(너무 이름이 길어서 제목엔 그냥 사람 이름만 넣었음)는 스티클리우 거리에 자리잡고 있다. 스티클리우 거리는 좁은 골목인데 디조이 거리에서 진입하는 쪽에는 천사 조형물을 달아두었고(시즌별로 장식 조형물을 바꾼다), 이 카페와 바로 근처의 포뉴 라이메(오래된 전통의 과자/케익 카페)가 어마어마한 꽃장식으로 시선을 잡아끈다. 그런데 포뉴 라이메가 내가 도착했을 무렵 공사를 하며 기존 장식을 뜯어내길래 뭔가 또 새로운 엄청난 장식을 하려나보다 하고 기대 아닌 기대를 하였으나 기본 베이스인 거대 마카롱 장식 외엔 추가 장식이 되어 있지 않아서(아마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새 장식을 하려는 듯하다) 이 아우구스타스 바르보라 카페만 아주 독보적으로 화려하게 보인다. 그래도 가을이라 이 색상과 장식은 한결 나은 것 같다. 재작년에 왔을 땐 온통 분홍분홍 꽃장식이 가득해서 너무너무 부담됐었다 ㅎㅎㅎ 이 컬러는 나쁘지 않다.
몇번이나 이 앞을 지나가면서도 내가 요즘 선글라스나 변색렌즈 안경을 쓰고 다녀서인가 색깔 구분을 정확히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저 색채를 검정과 주황이라 착각하고는 '아니 저것은 너무나도 러시아의 성 게오르기 무공훈장 문양과 컬러 아닌가, 여기는 우크라이나 지지하는 곳인데 어떻게 저리도 대담하게...' 라고 걱정했었는데 오늘 자세히 보니 저것은 녹색과 오렌지색이었음. 흑흑... 여기가 그늘진 곳이라 그랬을 거야 엉엉...
여기도 일종의 명소 카페이고 관광객들이 저 화려한 장식 앞에서 사진찍는 스팟이기도 한데 지금은 관광 성수기가 아니다 보니 카페가 전처럼 북적이지는 않았다. 사실 나는 재작년 6월에 왔을 때 새벽의 문에 다녀왔다가 너무 지치고 더워서 여기 들어가 아페롤 스피리츠와 케익을 시켜서 먹었는데 스피리츠는 괜찮았지만 케익이 너무 작은데 돼먹지 않게 비싸고(8유로!) 게다가 맛이 별로라 크게 실망하여 올해는 여기 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내외부의 분홍장미 장식도 너무 과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또 여행이 막바지에 이르자 '아 그런데 또 안 가보면 나중에 섭섭할 거 같다... 다시 가보면 또 좋을 수도 있다' 라는 생각에 오늘 오후에 가보았다.
여기는 여름보다는 좀 싸늘할 때 오는 게 더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카페가 작고 테이블이 몇개 없고 조명이 어두우며 커피와 차 외에도 칵테일이나 알콜 등 바 메뉴들이 있고, 테이블에는 초를 켜준다. 혼자 오는 것보다는 커플이 오는 쪽이 잘 어울리는 카페이다. 나는 이번에는 그냥 라떼를 주문했다. 케익은 주문하지 않음. 라떼는 매우 연하고 부드러워서 나도 마실만 했다. 커피의 진한 맛을 좋아하는 분에게는 좀 싱거울지도 모르겠다만 나는 만족함(진하면 힘들어하는 자) 어둑어둑한 겨울에 연인과 함께 오거나, 온기와 작은 빛을 찾아 잠깐 몸을 녹이고 가고 싶은 손님에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재작년에 비해 이미지가 상당히 만회되었음. 역시 카페는 한번 가서 판단하면 안되는 것 같다.
아우구스타스와 바르보라는 리투아니아의 로미오와 줄리엣 비슷한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이라고 한다. 그래서 카페 이름도 이렇게 로맨틱하게 붙인 것 같다. 케익도 아우구스타스 왕자, 바르보라 공주 뭐 이런 이름들인데 나는 전에 바르보라 공주를 먹었다가 실망했던 것 같음. (아닌가, 왕자였나? 가물가물... 기억에서 지웠나보다)
사진 몇 장. 내부가 어두웠고 역광이 들어서 많이 찍지는 못했다. 쿠야도 데려갔는데 이녀석도 역광을 받아서 생각보다 이쁘게 나온 사진이 없음. 쿠야는 역시 엘스카에서 제일 이쁘게 나오는 것 같다.
저 장미들은 당연히 모두 조화입니다. 저게 자나 장미를 많이 닮았다. 나는 이따금 자나 장미를 주문했었는데(작고 동글동글한 화형이 귀여워서) 재작년 이후엔 자나 장미만 보면 이 카페의 조화 장식이 생각나서 '가짜 꽃...' 하는 느낌에 주문을 거의 안 하게 되었다. 자나 장미는 웬 날벼락인가 ㅠㅠ
재작년엔 웨슬리 스나입스를 닮은 남자분이 고독하게 독주를 드시고 계셨는데 오늘은 또 누군가 어떤 배우를 연상시키는 이 분이 혼자 앉아 계셨다.
사람들마다 여행을 가면 해보고 싶어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누구는 액티비티를 즐기고 누구는 수영을 즐기고 누구는 식도락을 즐기고 누구는 사진을 찍고 등등... 나는 편향적 여행자이므로 한없이 게으른 취향인데, 시간적 여유가 좀 있고 또 묵는 숙소가 괜찮을때, 그 호텔에서 애프터눈 티 세트가 있으면 이따금 마셔보며 행복해한다. 혹은 그 숙소에 멋진 바가 있을 경우에는 김릿이나 다른 칵테일을 한잔 정도 마셔보는데 후자는 점점 게을러지면서 드물어지고 있다. 지금 머무르는 숙소도 로비 바가 있는데 그렇게 멋진 바가 아니라서 그런가 여태 딱히 당기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머무르는 숙소'에 딸려 있어서 맘편하게 슥 한잔 마시고 대충 올라올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임. 나다니면서 바에 가기에는 너무 게으르기 때문에 ㅠㅠ 그리고 일단 한번 숙소에 돌아오면 다시 나가기 어려운 인간이기 때문에.
재작년에 왔을 땐 대성당 앞 켐핀스키에 묵었고 거기서 애프터눈 티를 마셔보았다. 그때 2% 부족한 점이 있긴 했지만 즐거웠고 티 자체도 맛있었기 때문에 다시 거기 가볼까 했는데 켐핀스키가 힐튼으로 넘어가면서 뭔가 좀 바뀌기도 했고 또 새로운 곳에서 마셔보고 싶어서 슈가무어에도 애프터눈 티세트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여기 예약을 해두었다. 그 얘기는 어제. 근데 이걸 시키는 사람이 별로 없는지 어제도 남자 점원이 당황하며 산드라를 찾았고 오늘도 시간 맞춰 가서 애프터눈 티 예약했다고 했더니 점원이 제대로 못 알아먹고 그냥 차 마시러 왔다는 줄 알고 아무 자리나 앉으라고 하여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는 어색한 순간이 발생함. 하여튼 예약을 다시 확인했고 티 세트는 준비되고 있었으므로 우리는 2층에 가서 앉았다.
슈가무어는 케익이 맛있기 때문에 기대를 많이 했는데 생각보다는 그냥 무난한 정도였다. 샌드위치는 특히 그냥 집에서 만든 샌드위치 같았고 디저트도 생각보다는 적었다. 스콘은 조금만 더 따뜻했으면, 그리고 휘핑버터 대신 클로티드 크림을 줬으면 좋았을텐데 좀 아쉬웠다. 근데 켐핀스키에서도 클로티드 크림 대신 크림치즈를 줬었으므로 빌니우스에서는 스콘과 클로티드 크림 페어링이 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좀 아쉬웠다(뭐 우리 나라도 안 주지만) 가격 자체가 호텔 애프터눈 티보다는 저렴했기 때문에 이 정도면 그냥 무난하다고 생각했지만 하여튼 '그냥 구 켐핀스키 현 힐튼에 다시 가볼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약간 들었다. 홍차는 가향차를 제외하면 얼그레이와 브렉퍼스트(아삼, 실론, 다즐링 배합이라고 함)만 있어서 나와 영원한 휴가님이 순서대로 각각 시켰다.
차가 나왔을 때 부모님과 통화를 하고 있느라 좀 정신이 없었고 자리가 넓지 않아서 구도 잡기가 어려워서 사진을 대충 찍었더니 찻잔 두개가 제대로 잡힌 사진은 없음. 조명이 밝아서 생각만큼 이쁘게는 안 나왔다. 하여튼 슈가무어의 애프터눈 티 세트. 근데 여기는 그냥 차 한 잔에 원하는 케익 한조각을 시키는 게 더 나은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음.
그래도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티타임이었다. 거의 다 먹고 매우 배부르고 또 너무 졸린 상태로 '안되겠다 바람 쐬야겠다' 하며 카페를 나오게 되었다. 사진 몇 장.
근데 방에서 나와 게디미나스 대로로 막 걸어나왔을 때 '앗, 쿠야 안 데려왔네' 하고 깨달았다. 흑흑 쿠야에게는 비밀임. 근데 쿠야야, 켐핀스키만큼 근사하진 않았으니까 좀 놓쳤어도 그냥 양해해.
어제는 이딸랄라에 가고 또 몸이 좀 피곤해서 빨리 들어오느라 엘스카에 안 갔다. 오늘은 후라칸에 갔다가 방에 들어가는 길에 아쉬워서,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들를 수 있는 루트라서 오후 늦게 엘스카에 들렀다. 4시 50분 다 되어 갔으니 평소보다 늦은 시각이었고 이미 그때는 햇살이 사라지고 흐려져서 빛이 들어오진 않았지만 그래도 매우 한적한 시간대였고 좀 어둑어둑해진 엘스카도 또 이뻤다. 그리고 내가 앉고 싶었던 저 don't ask why 자리가 비어 있어 오늘 드디어 앉아보았다. 테이블이 낮은 건 안 좋았지만 책 읽기엔 괜찮았고 또 저 의자가 기대기에 참 편해서 좋았다.
디카페인으로도 해준다고 되어 있어서 플랫 화이트를 디카페인으로 주문했다. 커피 초보이므로 맛의 차이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플랫 화이트는 설탕을 넣어도 조금 씁쓸하다. 하여튼 디카페인이라서 걱정 없이 마시며 책을 읽었다. 편안하고 좋았다. 5시 반 정도에 일어났다. 엘스카가 우리 나라에도 있으면 참 좋겠다. 카페 에벨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했었지. 엘스카는 에벨만큼 '뭔가를 쓰고 싶게 만드는' 카페는 아니지만 그래도 참 좋다. 이제 며칠 안 남았네 흐흑...
늦은 오후 좀 어둑어둑하고 한적한 엘스카 사진 몇 장. 원래 여러번 간 카페는 따로 포스팅 안하고 메모에 같이 적는 편인데 엘스카는 매일 따로 올리고 있음. (사진이 많아서. 카페가 예쁘니까 사진을 자꾸 찍게 됨)
후라칸 커피는 체인이기 때문에 빌니우스 여기저기서 볼 수 있는데 그렇다고 카페인만큼 많지는 않다. 그런데 후라칸은 지점마다 건물의 공간적 특성도 있겠지만 뭔가 제각각의 스타일이 있어서 가면 구경하며 다른 점 찾는 게 재미있다. 이 후라칸은 새벽의 문 근처, 디조이 거리와 에트모누(? 이름 정확하지 않음) 거리 교차점에 있는데, 오후에 영원한 휴가님과 만나서 어디 갈까 하다가 한적한 분위기가 좋다고 하신 이 후라칸에 같이 와보게 되었다.
이 후라칸은 토토리우와 보키에치우의 후라칸과는 많이 달랐다. 덜 북적거렸고 좀더 아늑했고 흰색 계열로 밝았다. 그리고 테이블과 테이블 간격이 넓고 안쪽 홀과 옆쪽 복도 등 공간들이 묘하게 분할되어 있어 실제보다 왜곡이 느껴져서 미묘하게 아늑한 느낌이 있었다. 공간과 공간 사이가 넓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작은 방들로 이루어진 느낌이라 해야 하나. 테이블들보다는 입구 쪽 홀에 크게 자리잡고 있는 카운터와 바가 주인공인 느낌이다. 그리고 그 바 한가운데 카페 점원(역시나 1인만 있었는데 좀 매니저나 점장 같은 느낌이었다)이 여유롭게 계심.
그런데! 그 점원이 바로 얼마전 보키에치우 후라칸에서 봤던 그 점원. 내가 후라카나스라고 이름붙인 사람이었다. 영원한 휴가님이 아마 체인이기 때문에 이 지점 저 지점을 돌면서 근무할 거라고 하셨다. 그 사람이다. 손님 너무 많아서 설거지를 못해서 컵도 없어서 플랫 화이트 종이컵에 줘도 되냐고 하고, 머그컵 구매하자 포장 박스 없다고 난감해 하고, 또 초짜 직원 가르치느라 더더욱 힘들어보였던 그 후라카나스! 근데 이 지점은 손님도 별로 없고, 바의 진열장에도 디저트 종류도 별로 없고 전체적으로 헐렁해보였다. 그래선지 후라카나스가 아주 여유있고 행복해 보였다! 심지어 문가 테이블에 앉은 두명의 아가씨와 즐겁게 대화를 하고 뭔가 농담따먹기로 추정되는 이야기도 하고 웃고(리투아니아어 모르므로 느낌만) 같이 과자도 먹고! 엄청 신나보였다. 가게 전체를 편안하게 장악하고 있는 느낌! 우리 나라로 치환하면 건물주가 하는 카페 주인같은 느낌! 분명 보키에치우에선 허덕거리고 있었는데... 후라카나스가 행복하니 나도 행복하다 ㅎㅎㅎ
나는 얼그레이를 시켰고 영원한 휴가님은 더블 에스프레소. 그 이후 블랙 커피를 추가주문하셨다. (내가 매일 카페 메모를 적으면서도 커피 종류를 몰라서 물어보기 때문에 미리 알려주심 ㅎㅎ) 그런데 블랙 커피는 아메리카노랑은 다른것인가, 시킨 것을 보니 찐한 것이 꼭 러시아에서 쥬인이 시켜 마시던 그 타르처럼 진한 커피 닮았다고 묻자 아마 그거랑 비슷할 거 같다고 하심. 블랙도 카페에 따라 묽게 아메리카노 같은 곳도 있는데 후라칸은 진하다고. 생각해보니 후라칸 플랫화이트 엄청 썼음 ㅎㅎㅎ (그래서 감히 무적 테이스트 맵보다 쓰다고 내가 잘못 속단하기까지 함) 전에는 후라칸에서 얼그레이를 티포트에 마셨는데 여기선 주문할때 후라카나스가 '레귤러 사이즈?'라고 물어서 '뭐가 다른가? 어차피 티포트 아닌가?' 하며 네네 했더니 유리잔에 주었다. 유리잔에 주는 건 양도 조금 더 적고 아마도 좀더 저렴했을 것 같음(여러개 시키면 가격 잘 체크 못하는 자)
그리고 진열장에 디저트도 거의 없었는데 나는 그루지야 음식을 먹고 온 터라 단게 먹고파서 초콜릿 푸딩(갑자기 그 불어로 된 이름이 생각안나네. 데우면 안에서 초콜릿이 녹아서 흐르는 그거... 아아아 이름 뭐지... 기억력 다 감퇴됨. 하여튼 여기서는 초코 푸딩이라 적혀 있었음)을 시켰고 영원한 휴가님이 버터맛 타르트(브르타뉴 피라가스라고 적혀 있음)를 시키심. 후라칸은 디저트들은 그닥 뛰어나진 않지만 그래도 차랑 커피랑 먹으니 또 나쁘지 않게 잘 먹었다. (디저트는 이딸랄라가 더 좋은 걸로 결론. 비싸지만)
이 후라칸은 무척 맘에 들었고 후라카나스를 보는 것도 즐거웠다.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너무 좋았다. 많이 기억날 것 같은 곳이다. 근데 얘기하느라 정신팔려 사진은 별로 못 찍음. 그나마 찍은 사진 몇 장. 맨 위는 다 먹고 나가면서 찍은 우리 테이블의 잔해들. 여기는 역시 컵들이 이쁘단 말이야.
손님들의 테이블이 아니라 바가 주인공인 카페! 그리고 후라카나스의 옆모습.
조명 때문에 이쁘게는 안나왔다만. 하여튼 첨에 시켰을 때.
내 찻잔 너머로 보이는, 손님들과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계시는 후라카나스.
후라카나스만 계속 등장... 이게 내 자리에서 보이는 게 저 카운터가 제일 컸음.
이건 외관 사진인데 오늘 찍은 게 아니고 10월 9일에 새벽의 문 다녀오다가 찍었던 사진 두 장
야외 테이블은 오늘 다 접혀 있었다. 해가 좀 났는데... 분명 후라카나스가 야외 테이블 펴면 잔도 치워야 되고 힘드니까 안 폈을 거라고 우리끼리 중상했다 ㅋㅋ
커피 스펠은 필리모 거리에 있다. 엘스카에서도 두세 정거장을 더 가야 한다. 여기서 좀더 올라가면 할레스 투르구스 시장과 새벽의 문이 나오니 숙소에서는 꽤 떨어져 있고 구시가지 관광지와도 떨어져 있다. 필리모 거리는 넓고 쭉 뻗어 있고 트롤리버스들과 자동차가 휙휙 지나다니는 거리로 구시가지만 놓고 보면 대중교통이 제일 많이 다니는 넓은 도로인 것 같다. 나는 이 거리를 걸어가면 페테르부르크의 리고프스키 대로가 좀 생각나곤 한다. 게디미나스 대로가 네프스키 대로라면(그만큼의 상징성과 매력은 없다만) 필리모는 좀 썰렁하고 관광지는 없고 버스랑 차가 많이 다니는, 그리고 기차역으로 이어지는 길이라는 면에서. 그러나 물론 나는 리고프스키 대로를 좋아해본 적이 없고 자주 걸어다니지도 않았으며 어쩌다 거기 가게 되면 '으으 여기는 힘든 곳...' 하고 괴로워했는데 필리모는 엘스카 때문에, 그리고 다른 동네들로 갈 때 이어지는 길목이 되기 때문에 거의 매일 가는 곳이 되었다!
하여튼 이 커피 스펠은 재작년에 처음 왔을 때 영원한 휴가님이 적어주신 빌니우스 구시가지 쪽의 가볼만한 카페 리스트에 들어 있었는데 그땐 짧게 머물렀고 숙소에서도 가깝지 않은데다 관광지 쪽도 아니어서 결국 못 갔다. 커피 스펠과 테이스트 맵이 그런 곳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꼭 가봐야지 했는데 위치도 그렇고 이래저래 가는 게 쉽지 않았다. 그리고 구글맵의 사진을 보니 테이블과 의자가 좀 식당 같은 느낌이었고 브런치 위주로 바뀌어서 음식 냄새가 날것 같고 볕이 잘 안 드는 위치일 것 같아서 차일피일 미뤘다. 그러다가 '뭐 나 가고 싶은 데만 가지뭐, 엘스카랑 이딸랄라, 후라칸만 가도 뭐 어때' 하게 되었다가... 여행이 일주일밖에 안 남게 되자 '그래도 안 가보면 나중에 돌아갔을 때 아 그래도 가볼걸 하고 아쉬워할거야' 란 생각에 오늘 분연히! 버스를 타고 커피 스펠에 갔다.
여기는 정말 카페가 있을 법하지 않은 곳에 있다. 썰렁한 필리모 거리 한복판...보다는 조금 더 위에 있는데 건너편에는 시나고그가 있다. 그래서 창 너머로 시나고그가 보이는 것만이 이 카페의 위치적 장점인가 싶다. 영원한 휴가님 말씀으론 이 카페가 첨 생겼을 땐 테이블 위에 램프를 놓아두어서 어두운 겨울 아침에 지나가다 보면 창 너머로 램프 불빛이 새어나와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하셨는데 그 마음에 이입이 많이 된다. 어둡고 추운 겨울의 이른 아침, 컴컴한 건물들 사이로 창문을 희미한 오렌지빛으로 물들이며 스며나오는 램프 불빛만큼 사람을 끌어당기는 게 또 있을까?
카페 내부는 미니멀리즘과 식당 테이블의 결합처럼 느껴졌다. 맨벽과 바닥으로 이루어져 있고 장식도 거의 없었다. 카운터 뒤에 거대한 녹색과 청색 계열의 패널 같은 게 덧대어져 있는 것이 인테리어의 전부였다. 나는 그게 장식 패널이라 생각했는데(나올 때까지 끝끝내) 영원한 휴가님이 그건 이 건물의 옛날 벽면 일부를 그대로 유지한 채 카페가 들어온 거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듣고 사진을 잘 보니 정말 옛날 벽이었다. 칠 벗겨진 자리까지 그대로... 아아 나는 정말 뭘 보고 다니는 건가... 그런데 이 카페의 유일한 인테리어처럼 느껴지는 게 바로 이 옛날 벽임. 나에게는 좀 춥고 썰렁한 느낌이었다.
나는 카푸치노를 시켰다. 커피 스펠이라고 하니까 좀 궁금해서. 그리고 점심을 먹어야 하므로 커피를 조금만 마시고 디저트 같은 건 안 먹으려고. 카푸치노는 조금 썼지만 아주 진하지는 않았다. 설탕 투하.
카페는 조금 추운 편이었다. 처음엔 한적했지만 12시 무렵이 되자 사람들이 이어서 들어왔다. 대부분은 브런치를 먹었다. 팬케이크 종류와 베이글류, 샥슈카 등의 브런치가 많은데 사람들은 보통 팬케이크를 주문하는 것 같다. 나는 처음에는 홀에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가 시나고그가 잘 보이는 창가의 높은 바 테이블로 기어올라가 앉았다. 그쪽은 의자에 등받이가 없어 불편했지만 어차피 오래 앉아 있지는 않을 거라서. 근데 역시 책을 읽기엔 테이블이 나에겐 좀 높았다. 맨 위 사진이 기어올라간 창가 테이블. 대부분의 사람들은 브런치를 먹었으므로 아래 테이블들에 앉았다.
카푸치노는 반 잔쯤 마셨다. 이미 수차례 읽었던 책이라 가볍게 넘겨가며 읽었다. 오늘은 스트루가츠키가 아니라 하루키의 잡문집을 들고 왔다. 그 이유는... 맨 아래에도 사진이 있지만 여기가 문앞에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푸틴 쿨하다 생각하면 들어오지 마라' 고 적혀 있기 때문이다. 너무 단언적인 그 명령에 사실 '전쟁도 푸틴도 싫지만 이런 건 좀 불편하다' 라는 느낌에 커피 스펠에 오는 걸 미루게 된 것도 좀 있다. 하여튼 소심한 나는 '푸틴 편이라고 오해되면 우째, 노어로 된 책 들고 가서 당당히 못 읽겠어, 무싸와' 라는 생각에 우리말로 된 책 들고옴. 흑흑...
그리고 여기서 나는 막판에 화장실에 갇혀서 못나오는 줄 알았다. 빌니우스 카페들은 화장실에 가면 문 잠그고 열때 가끔 고생을 하는데, 여기도 그랬다. 분명히 한번 돌려서 잠갔는데 나가려고 아무리 돌려도 열리지 않음. 한번 돌려도 두번 돌려도 세번 돌려도 안 열리고... 침착하자, 다시 해보자, 열릴 것이다 하고 정말 스무번을 돌려도 안 열림. 허헉, 소리쳐야 하나... 열어달라고 도움을 요청? 밖에서 손잡이를 뽀개야 하나... 정말 너무 안열려서 고생고생했는데 어쩌다 막판에 열렸다. 이게 어쩌면 잠긴 건 열렸는데 내가 요령이나 힘이 없어서 손잡이와 문을 힘차게 팍 열지 못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그런 곳들도 많기 때문이다. 대체로 문이 무겁고... 하여튼 그래서 커피 스펠은 '화장실에 갇힐 뻔한 곳'으로 마지막 인상이 남아버릴 뻔 했는데 나갈 때 결국 그 '푸틴 좋으면 들어오지 마' 로 각인되었음. 이 카페는 나에게는 한번쯤 들르고 족한 카페로 남을 것 같다. 아래 사진들.
이게 필리모 거리 따라서 올라가다 보이는 모습. 간판도 작고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래도 오늘 오후까진 생각보다 해가 나서 좋았다.
내부. 첨에 앉았던 홀의 테이블. 설탕 투하 전의 라떼 아트가 살아있는 카푸치노.
정말 별 장식 없는 내부 공간. 나는 이 의자들이 너무 식당 느낌이라 맘에 안 들었는데, 생각해보니 프라하의 카피치코도 의자가 좀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카피치코는 좀 아기자기한 스타일이라서 다르긴 하다. 그리고 여기는 벽에 콘센트가 많았다.
카운터 뒤의 옛날 벽. 저렇게 버젓이 벗겨진 칠과 벽돌 등등 '나 옛날 벽이오' 하고 있고 심지어 안으로 들어가 있는데! 나는 저것을 장식 패널이라고 착각하고(패널이었으면 튀어나와 있어야 하는데)
가려져서 뭔지는 안보이지만 월요일 오전에 브런치를 먹으며 즐거운 사람들.
그런데 여기서 인상깊었던 점 하나. 내가 창가 테이블로 기어올라갔을 때. 특이하게 이 아래 벽에 콘센트와 함께 가방걸이가 있었다! 옷걸이라기에는 너무 낮게 달려 있어서 이것은 가방걸이가 분명했다. 우와 이건 너무 좋다! 안그래도 '가방을 바닥에 놓으면 부자가 될 수 없다!'라는 리투아니아의 전승에 대해 몇년 전 영원한 휴가님께 들은 이래 바닥에 가방 놓는 게 너무 신경쓰였는데... 그래서 빈 의자에 놓거나 심지어 내 등 뒤에 가방을 놓아야 했는데... 이거 세심하고 좋다. 커피 스펠에서 제일 맘에 들었던 건 바로 이거였습니다 :)
반쯤 마신 후 일어나면서 찍은 창가 사진. 이쪽에서 보면 시나고그가 안 보임.
하루키 잡문집은 어제도 얘기했듯 편차가 심한데, 특히 음악에 대한 얘기들은 좀 피곤하다(어쩌면 나랑 취향이 달라서 그럴테지만 이 사람은 재즈 얘길 하면 좀 스노브처럼 변함. 내용보다는 문체가...) 그러나 역시 글쓰기나 번역에 대한 쪽으로 가면 재미있다. 이 파트는 '언더그라운드'를 집필하는 과정과 인터뷰에 대한 이야기인데 사진의 저 부분은 읽을 때마다 '흐흑, 이입돼...' 상태가 되어서 찍어둠.
내부 모습 한 컷 더.
이게 그 푸틴 관련 문구. 영원한 휴가님이 '거기 이런 문구 적혀 있어요' 라고 말씀해주셔서 좀 그랬는데 들어갈 땐 이걸 못봐서 '그 문구 이제 없어요' 라고 알려드렸다. 그런데 나오면서 보니 여전히 있었다. 심적으로는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지만 아마도 저 문구의 단정적인 스타일 때문에 '쿨하다 생각하지 않고 전쟁도 푸틴도 지지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의 명령조 문구를 보면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막 생기진 않는걸' 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 같음. 그리고 맞은편엔 시나고그가 있고... 시나고그에는 가자에서 납치된 사람들을 돌려달라는 내용으로 추정되는 전단들이 붙어 있는데(아닐지도 모름. 자세히 안 봤음) 그렇게만 보기엔 또 팔레스타인에서 학살되고 있는 생명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니 여러 모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점심을 먹은 후 원래는 엘스카에 가서 볕을 쬐며 차를 마실 생각이었다. 사실 이것저것 고려하여 동선을 짜서 오전 카페를 엘스카에서 도보로 멀지 않은 필리모 거리 쪽에 있는 공부 카페로 잡았던 것이다. 점심도 공부 카페에서 걸어올라가면 나오는 중식당에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생각 외로 점심을 다른 데서 먹었고, 그 점심을 먹고 나자 좀 짜서 그런지 너무너무 달콤한 디저트가 먹고팠다.
그리하여 나는 엘스카를 배신했다. 그 이유는 엘스카가 다 좋은데 디저트가 너무 약하기 때문이다. 무슨 치아푸딩 라이스푸딩 이런것, 그리고 비건 디저트 4종이 전부. 그 비건 디저트 중 땅콩, 망고, 라임크림케익(...이라 하지만 사실 크림 얹은 아주 작은 타르틀렛 같은 것)은 이미 먹어봤고 남은 건 비건 브라우니인데... 흑흑, 나는 맛있는 케익이 먹고팠다. 이런 경우 최고의 케익이 있는 슈가무어가 좋을 수도 있겠지만 거기는 또 내부가 별로 편안하지 않고 주문도 엄청 늦게 받는다. 그래서 환하고 따뜻하면서 디저트도 잘 구비하고 있는 이딸랄라에 가기로 했다. 엘스카보다는 멀었지만 그래도 내리막이라 걸어갈만 했다(점심 먹은 곳이 언덕 위에 있었음) 근데 오늘까지만 맑고 해 난댔는데 흑흑...
오늘 볕이 나니까 이딸랄라는 분명 안에 자리가 있을 것 같았다. 생각대로 자리가 있었는데 그래도 일요일이라 맨 안쪽 창가 자리(전에 내가 잠깐 앉았던 곳)과 문 옆 창가의 그네 자리만 비어 있었다. 그 자리가 빛이 잘 들어서 앉아볼까 했지만 그네에 시험삼아 앉아보자 그네가 약한 느낌이고 너무 흔들려서 포기하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자리는 힐끗 보면 좋아보이지만 사실은 좀 응달 쪽이라 손님들이 비워놓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하여튼 거기 앉았다가 나중에 입구 근처의 빛 들어오는 쪽 테이블이 나서 또 옮겼다.
야외 테이블들은 이미 이렇게 우글우글! '이게 10월의 마지막 햇볕이래, 아니 그럼 올해의 마지막 광합성 아닐까?' 하며 악착같이 밖에 앉은 빌니우스 사람들의 마음이 막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내가 나중에 옮긴 자리는 저 한 단 위에 있는 책상 같은 테이블 중 하나. 저게 엄청 불편해보이겠지만 사실 앉으면 편하고 책 읽기도 좋다. 실제로 불편한 자리는 저 복도에 놓여 있는 이케아 스타일 테이블들 자리...
이딸랄라 전에도 두어번 따로 올렸는데 왜 오늘도 따로 올리느냐면, 오늘 내가 주문한 메뉴 때문이다.
감기 기운이 있어 오늘 약을 먹고 나왔기 때문에 카페인이 너무 강한 건 마시고 싶지 않았다. 여기는 홍차도 잎으로 우려주긴 하는데 좀 진한 편이었다. 그런데 메뉴판에 말차와 호지차가 있었다. 라떼 표시는 되어 있지 않았다. 호지차가 있다니 하며 점원에게 '호지차 저거 우유 안 들어가는 스트레이트에요?' 하고 물어보았다. 친절한 남자점원은 '네, 워터 베이스에요. 우유 안 들어가요' 라고 대답하며 혹시 우유 들어가는 걸 달라는 걸까 하는 눈으로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나는 '오, 네, 좋아요. 그 호지차를 주세요' 라고 말했는데... 이 점원이 등록기에 타닥타닥 치는 걸 보니 '호지차 라떼'라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내가 눈이 동그래져서 '엥, 우유 안 들어간다면서 왜 라떼에요?' 라고 묻자 점원이 '아니 뭐 이런것까지 주시하고 있는 거야?' 하고 좀 놀랐는지 본인도 당황하면서 '아니, 우유 안 들어가는 거 맞아요. 이거 기계라서 그래요' 라고 대답함. 보통 사람들은 라떼를 시킬 것 같긴 한데 또 모르지.
하여튼 그래서 좀 기다린 후 나의 호지차가 나왔다. 오, 우유 안 들어갔어. 근데 왜 이렇게 양이 적지? 호지차 커피보다 비쌌는데! 카푸치노 잔에 나왔다. 그리고 호지차는 뜨거운 물에 빨리 우려야 구수하고 맛있는데 이건 분명 라떼를 만들기 위한 호지차 가루! 찻잔 바닥에 가루가 덜 녹아 뭉쳐져 있었다. 그리고 양을 너무 많이 넣었는지 구수한 맛보다는 말차처럼 쓴맛이 압도함... 흐앙... 뭐 케익 곁들여 마시기에 나쁘지는 않았는데 이분들에게 호지차에 대해 좀 알려드리고 싶구나 ㅎㅎㅎ
어쩌면 내 주문이 들어간 후 의연하던 그 남자점원은 카운터 뒤로 가서 선배 점원들과 급하게 얘기를 나눴을지도 몰라. '클났어요, '호이차' 우유 없이 주문하는 토끼가 나타났어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그냥 라떼라고 쓰자고 했잖아요 엉엉... 물만 넣고 어떻게 만들지? 그냥 우유에 넣는 것과 동량으로 가루를 타면 되겠죠? 근데 라떼 아니니까 컵은 라떼 컵 말고 작은 컵에...' 운운... (리투아니아어로 j는 i로 읽으니 호지차도 아마 호이차라고 할 것 같다고 영원한 휴가님이 알려주심. 잡채도 막 얍채, 옙채 그런다고) 이것은 키라스의 랍상소총 마스터 이후의 호이차 스트레이트 토끼 출몰 아닌가 하고 말도 안되는 상상을 하니 너무 우스웠다. (실제로는 뭐 원래 이렇게 만드는 거라 생각하며 만들어줬을 듯. 이 카페도 일본 쪽 영향을 받았는지 킨토 커피잔과 말차 다구도 판매하고 있음)
사진이 그 호지차. 흑흑 쓰고 양 적어... 가루 다 안 녹았어... 아무리 생각해도 라떼용 호지차 가루인 것 같음. 그냥 '호지차 라떼 주세요' 할 걸 그랬나 ㅎㅎㅎ
그런데 또 함께 시킨 베리 치즈케익이 맛있었다. 여기는 케익 가격이 비싼 게 흠이지만(슈가무어보다 1~2유로 비쌈) 맛있긴 하다. 맨첨 시켰던 미니 초코슈가 너무 작아서 빈정상했지만. 심지어 치즈케익 달라고 했더니 바스크냐 베리냐 물어본다. 여기도 바스크 치즈케익이 유행하나? 치즈케익이 예상외로 은근히 맛있었는데 호지차가 너무 적어서 케익 한 조각을 다 먹을 수 없었다 엉엉... 그래서 오늘의 결론은 아쉬운 호지차. 근데 호지차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해서 시켰던 거라서 이 정도면 만족하자.
호지차 구경 중인 쿠야. 이때는 아직 안쪽 창가 자리.
진열장 안의 케익은 멀쩡했는데 갖다줄 때 보니 또 시럽같은 걸 왕창 뿌려놨길래 '어휴 여기도 러시아랑 비슷하구나... 저건 왜 뿌려서 케익 본연의 맛을 해치나' 했는데 저 딸기 소스가 또 맛있었다. 생각해보니 재작년에 필리에스 케피클렐레에서 딸기 블린 시켰을 때 딸기쭈쭈바 색깔 소스 부어줘서 그때도 '어휴 이거 왜 부어줘' 했는데 그게 맛있었음. 같은 소스인가? 하여튼 러시아 생각이 나며 좀 그리웠다. 거기도 케익 시키면 막 저렇게 뭔가 그렇게 예쁘진 않은 장식을 해서 가져다 줌.
간만에 맛있어보이는 디저트를 앞에 둔 쿠야.
그러다 자리가 나서 옮김. 역광 때문에 이 구도는 좀 어둡게 나왔다만. 이 자리가 보기와는 달리 아까 그 창가 자리보다 더 좋다. 책 읽기도 편하다.
이딸랄라 구경 중인 쿠야.
여기서 책을 여러 페이지 읽었다. 단어를 조금 찾아가면서... 근데 이때쯤 볕이 들어오고 감기 기운에 피곤했는지 너무 졸려서 의자에 기대어 하염없이 졸고 싶었다. 졸지는 않고 책을 더 읽고... 좀더 앉아 있고 싶었지만 손님들이 계속 들어왔고 이때는 엘스카에도 추가로 갈 마음이 있었기에 한시간 반쯤 있다가 일어섰다.
이딸랄라는 처음 왔을 땐 사람도 너무 많고 자리도 저 중간의 복도쪽 자리였던데다 뭔가 여러가지 스타일이 뒤섞여 있고 점원들도 너무 바빠보이고 디저트도 작은데 비싸서 마음에 안 들었는데 볕이 잘 들어서 야외에 앉기가 좋고 또 자리가 날 때면 의외로 괜찮아서 점점 이미지 만회되어 지금은 볕이 좋으면 엘스카랑 이딸랄라!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근데 이제 날씨 안좋아지면 이 내부도 맨첨 왔을 때처럼 또 정신없어지려나 흐흑...
빌니우스에도 물론 카공족이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랩탑과 태블릿을 장착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카페에서 한둘 이상은 찾아볼 수 있다. 이 카페가 빌니우스에서 가장 카공족이 많다고 영원한 휴가님이 전에 말씀해주셔서 궁금해서 오늘 가봤다. 이 카페는 필리모 거리의 MO 미술관 옆으로 꺾으면 나오는데 근처에 대학교가 있어서 학생들이 공부하러 엄청 많이 온다고 한다. 그 옆에는 카페인 로스터리가 있는데 사실 나는 그쪽이 더 가고팠지만 카페인은 체인이고 여기는 무려 '빌니우스 최고의 공부 카페'이니 어떤지 구경하고 싶었다. 그리고 오늘은 일요일이니까 학생들이 별로 없으니 좀 한가할 거라는 생각에 오전에 버스를 타고 모미술관 앞에서 내렸다. 숙소 앞 정류장에선 두 정거장만 가면 되는데 이게 걸어가면 또 꽤 가야 해서... 엘스카를 지나 문방구 카페도 지나야 한다.
이름은 BREW이지만 나는 여기를 <공부 카페>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리뷰를 보니 뭔가 원두도 팔고 카페 이름도 저렇고 커피가 훌륭한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에 들어가니 사람들로 우글우글해서 거의 만석이었다. 카페가 생각보다 작고 좁았다. 테이블 간격도 좁았다. 맨 안쪽 구석에 테이블 하나가 있어 거기 자리를 잡은 후 주문을 하러 갔다. 주문하는 줄도 늘어서 있었다. 어, 뭔가 테이스트 맵 같은 커피부심 커피엘리트 커피맛집인가 하며 카푸치노 작은 것을 주문해보았다. 제대로 된 차와 디저트는 오후에 가기로 하고 여기는 점심 먹기 전에 가볍게 들르는 곳으로 생각해서 왔기 때문이다. 어차피 커피는 다 마실 수 없으므로 그럼 작은 걸 하나 시켜보기로 함.
카푸치노는 내 생각보다 훨씬 연했다. 테이스트 맵 같은 곳은 아닌가보다. 설탕을 넣긴 했지만 하여튼 연했고 맛이나 풍미는 잘 모르겠다. 나는 두세 모금만 마셨다.
일요일인데 학생으로 추정되는 사람들, 강아지 데리고 나와 수다떠는 친구들, 아기 데리고 나온 가족들 등 사람들이 많았다. 옆의 미술관 때문인가, 왜 여기는 이렇게 사람이 많은가. 막상 공부하는 사람은 거의 안 보인다. 평일에만 공부 카페인가보다. 근데 공부 카페는 이해가 되는데 일요일에 이렇게 터져나가는 이유는 뭘까? 카페가 딱히 예쁘지도 않고 그렇다고 디저트가 엄청나보이지도 않고 커피도 비록 과문하지만 그냥 그런 것 같은데. 궁금궁금. 영원한 휴가님은 그냥 사람들이 많이 가니까 또 많아지나보다 라고 하셨음. 내 눈엔 카페인이랑 비슷해보였다. 인테리어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하긴 공부하기 제일 좋은 카페는 역시 체인 카페들이니까, 카페인이랑 비슷한 스타일이라 공부 카페로 잘되나 싶기도 했음.
책을 두세 페이지 읽고 카푸치노도 두세 모금만 마시고 큰 인상 없이 카페를 나왔다. 그래도 공부 카페라는 별명으로 기억될 것 같긴 하다. 사진들 아래 몇 장.
*** 앗, 정정!
공부 카페능 여기가 아니라 내가 가고팠던 그 옆 카페인 로스터리라고 방금 영원한 휴가님이 말씀해주심. 으앙... 뭐야뭐야... 근데 이미 여기다 공부 카페라고 붙여줬어... 공부 카페 아닌 공부 카페ㅠㅠ 홍철 없는 홍철 팀 같다... 어쩐지 그 카페인에 가고프더라니 ㅎㅎㅎ
내가 앉은 구석 자리. 좀 밍밍한 맛의 카푸치노.
<미운 백조들>은 책이 작고 가볍다는 이유로 암울하지만 그래도 매일 가지고 다니며 카페들에서 조금씩 읽고 있음. 근데 이거 한국 돌아가면 과연 이어서 읽을 수 있을까 ㅠㅠ 이런 여유 자체가 없을텐데.
출입문이 두군데 있었음. 이쪽은 측면 출입문. 여기도 호박 장식. 빌니우스 거리는 여기저기 온통 호박 장식으로 가득하다.
이게 다른 출입문. 근데 건물 모양을 보면 이게 정면 출입문 같지만 생각해보니 그 위 사진의 문으로 들어가자 곧장 카운터가 나왔으니 그쪽이 정면인가보다.
비건 디저트들이 맨 위에... 어딜 가나 비건 디저트들이 대세인가보다. 흑흑 나는 비건 디저트는 안 좋아하는데... 근데 아래에 메도빅이 있어서 좀 먹고프긴 했다.
'공부 카페라니 될 말이야?' 하고 뿌루퉁해져서 쳐다보는 쿠야.
무서운 표지를 빌니우스 지도로 싸버린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미운 백조들>. 근데 이 지도의 재질이 좀 두껍고 잘 허는 타입이라 가방에 계속 넣어다녔더니 이미 귀퉁이들이 헐고 있음 ㅠㅠ
내 앞 테이블 손님들이 데려온 큰 강아지. 삽살개 같은 종류인데 이 종류 강아지들이 빌니우스에 좀 많다. 엄청 애교가 많아서 주인한테 계속 낑낑대며 관심과 간식을 요구했고 나한테도 와서 엉기고 다른 손님들한테도 가서 엉김.
오전에 머리도 아프고 졸려서 너무너무 엘스카에 가고팠지만 며칠간의 경험으로 유추해보니 브런치를 먹는 11-1시 사이는 자리가 없고 바글바글, 햇살이 완연해지는 1시 이후엔 다들 야외로 나가기 바빠 안이 한적할 것 같았다. 그래서 꾹 참고 아침에 필리에스 거리(그러다 추워서 에스케다르 커피 바에 들어감. 거기서도 엘스카를 그리워함), 이후 보키에치우에서 롤과 미소로 점심을 먹은 후 이딸랄라와 후라칸을 모른척 뒤로 하고 엘스카로 갔다. 우와, 나의 유추대로 내부가 아주 한적했다! 1층도 다 비어 있고...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위의 무지개 자리 가서 앉음.
한적해서 전에 찍지 못한 방향 사진도 몇장 찍음. 빛이 너무 이쁘다. 저 don't ask why 자리에도 앉아보고픈데(1층이 정면으로 내려다보이는 자리) 내가 들어올땐 항상 차 있어서 못 앉음. 일단 자리잡고 나면 옮기기 귀찮음...
여기가 1층 자리. 해가 잘 들어서 인기많은 자리라 비어 있는 거 오늘 첨 봄.
이건 여럿이 앉는 높은 테이블. 귀퉁이에 내가 시킨 라임크림케익 올려봄.
이게 땅콩버터, 망고, 라임 3가지인데(다 비건) 오늘 마지막 라임까지 먹어봄... 맛은 제일 떨어짐 ㅠㅠ 얼그레이랑 같이 먹었더니 꼭 민트초코 먹는 것처럼 양치질하는 느낌... 이 케익 시리즈와 브라우니 외엔 디저트가 없는데 브라우니 시키려다 보니 그것도 비건이었다... 어차피 다 비건이면 땅콩, 망고 케익은 나쁘지 않았으니 이걸 먹자고 생각... 브라우니 먹을걸.
1층 맨 안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소설 몇페이지씩 계속 읽음. 암울해 흑... 근데 주인공 소설가 아저씨의 모델이 블라지미르 브이소츠키라는 얘기를 위키에서 읽고 흥미로워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