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5

« 2024/5 »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매우 곤하게 중간에 안 깨고 일곱시간 가량 잤다. 더 잘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잘 안돼서 일어나 씻고 조식을 먹으러 갔다. 조식 레스토랑에 사람이 너무 없어서 좋다기보단 좀 민망했다. 보통 조식 레스토랑은 좀 널찍하고 테이블이 많고 북적거리는데 여기는 로비도 좀 작고 레스토랑도 시내에서 유명한 곳이라는데 자리는 별로 많지 않았음. 아마 야외에도 테이블들이 여럿 있기 때문인가 싶다. (그럼 겨울엔?) 아직 본격 관광 휴가철보단 좀 이르기도 하고 이 호텔(뿐만 아니라 빌니우스 통틀어)에 동양인 관광객이 눈 씻고 찾아봐도 없어서 아무래도 혼자 내려가니 뭔가 어딘가 편하진 않음. 둘만 돼도 좀 나은데 ㅜㅜ


하여튼 메뉴를 갖다주는데 리투아니아어와 영어로 되어 있었다. 팬케익 종류 중 프라이드 커드 어쩌고 되어 있는 것이 아무래도 시르니키 같아서 점원에게 이거 시르니키냐고 물어보니 ‘노어 할 줄 아느냐?’고 하며 그때부터 노어로 응대를 해줌. 시르니키가 맞다고 해서 시켰는데 나중에 갖다준 것을 보니 우와 이것은 내가 아는 시르니키와 좀 다름. 러시아에서 자주 먹던 시르니키는 뜨보록(코티지 치즈)과 달걀, 밀가루 따위를 반죽해 동글동글 조그맣고 폭신폭신하게 구워서 슈가파우더를 좀 뿌려주는데 여기서 가져다준 시르니키는 아마 재료와 구조는 비슷했겠으나 일단 크기가 컸고! 기름을 잔뜩 둘러 바삭하게 지져낸 부침개 같았다. 납작하고 바삭바삭한 튀김(옛날 도나스 같음)에 더 가까웠고 속에 뜨보록이 좀 들어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거기에 엄청 많은 스메타나(사워크림)과 체리잼을 곁들여 주었다. 맛있긴 했는데 너무 거해서 다 먹지는 못했다 ㅠㅠ 이렇게 많이 주는 줄 알았으면 오믈렛이라도 시키지 말걸. 내일은 그냥 아메리칸 팬케익으로 선회해야지.

 

 






조식을 잔뜩 먹은 후 방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밖에 나갔다. 오늘은 별다른 계획이 없었다. 오전에 기념품샵에 가보는 것과 오후에 제대로 된 애프터눈 티(삼단 트레이)를 마시는 것뿐이었다. 호텔이 대성당 광장 바로 맞은편에 있었으므로 오늘은 광장을 다시 한번 빙 돌아보았고 대성당 안에도 들어가 보았다. 성당 내부는 넓고 좀 썰렁했다. 하긴 나는 큰 성당을 별로 좋아해 본 적이 없어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광장에 발틱의 문이라는 붉은 포석이 있어(예전에 발트 3국 사람들이 인간 띠를 만들었는데 그 시작점이 이쪽이라고 했던 듯) 이것을 세 바퀴 돌면 소원이 이루어지는지 아니면 행운이 오는지 하여튼 좋다는 얘기를 여행서에서 읽은지라 빨간 포석 찾으려고 광장을 두 바퀴나 돌았지만 못 찾았다. 이건가 해서 가보면 배수구나 상수도 뚜껑이었다. 찾다가 지쳐서 영원한 휴가님께 톡을 드렸더니 원어를 알려주셔서(stebuklas – 기적이라는 뜻이라 함) 그것으로 구글 맵에 쳐보니 심지어 맵에도 magic brick이라고 나왔다. 지도를 보고 찾아가는데도 잘 안 보여서 좀 헤매다가 간신히 발견. 세 바퀴 돌며 소원을 빌어보았다.







그런데 나는 세 바퀴 돌라고 해서 포석 주위를 돌았는데 내 뒤에 있던 아이들과 선생님은 포석을 꽉꽉 밟으며 그 위에서 빙글 도는 거였다! 앗 밟아야 하는 것인가? 주변을 돌면 효과가 없는 것인가? 하지만 소원을 들어주는 돌도 뭔가 꽉 밟히면 기분 나빠서 들어줄 것도 안 들어주지 않을까? 받들어 모시며 주변을 경건하게 돌아야 하는 거 아닐까 싶지만, 또 반대로 꽉꽉 밟아야 포석의 기운을 받을 수 있는 것인가 싶기도 함. 그러나 이렇게 의문하는 것도 또 우스운 것이 기껏 몇십 년도 안 된 포석인데 고대와 중세의 기운이 결집된 오랜 행운의 상징도 아닐 텐데 주변을 돌든 밟든 상관없지 않을까 하는 결론을...









기적의 포석 찾으려고 헤매다 웬 발바닥 음각을 발견. 비 와서 물이 고여 있고 비둘기들이 물을 마시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저 발바닥 안에 내 발을 넣어야 하는 거 아닐까 했지만 물이 많이 고여 있어서 가죽 운동화 신은 발을 넣을 수가 없었다. 영원한 휴가님께서 그것은 ‘발틱의 발’이라고 부른다고 하셨다. 이것도 그 인간 띠와 관계된 자리였음. 사진 끄트머리에 나온 게 내 발.


어쨌든 방향 감각이 없어서 호텔 맞은편으로 곧장 걸어오면 즉시 발견할 수 있는 기적의 포석을 광장 두 바퀴 넘게 돌고서야 찾아낸 후, 필리에스 거리에 있는 로컬 하우스라는 기념품 샵에 갔다. 그저께도 들렀는데 그때는 아무것도 안 사고 나왔었지만 이제 돌아갈 날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아무것도 산 게 없어서 내 것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엄마랑 쥬인 거는 사야 하지 않을까 하며. 이번엔 꼼꼼히 보고서 발틱 전통 문양이 칼라풀하게 그려진(누가 봐도 ‘이 동네 와서 샀음!’ 하는 느낌의) 에코백 두 장과 스카프 한 장, 빌니우스가 아기자기하게 그려진 엽서 한 장을 샀다. 그리곤 주변에 있는 발틱 수공예점에도 갔는데 향을 피워놔서 좋긴 했지만 발틱 민속신앙 등을 모티프로 하고 있어 어딘가 좀 어둑어둑했다. 종이로 만든 부활절 달걀을 살까 했는데 검정색으로 칠해져 있고 발틱 무속 문양도 그려져 있어서 ‘아니 부활절 달걀인데 이렇게 어둠의 달걀이면 좀 이상하지 않은가’ 하는 마음에 안 샀음. 어쩐지 부활절 달걀이 아니라 이교도 신을 소환하는 아티팩트 같은 느낌이...

그리고는 주변을 좀 걸었는데 오늘도 무지 더웠고 습했다. 그래서 필리에스 거리로 돌아와 리미 수퍼를 찾아내 거기 가서 물과 초콜릿, 홍차 두 팩 등을 사서 호텔로 돌아왔다. 물 때문에 무거워서 헥헥대면서... 호텔에서 물을 두 병 주긴 하는데 0.3짜리라 모자라서. (나는 물을 자주 많이 마시는 편이라 항상 1.5리터짜리를 예비로 한 병 사 들고 온다) 그런데 호텔에서 주는 이 생수가 좀 맛있음. 미네랄 성분이 많은가 봄. 갑자기 아스토리야에서 주던 바이칼 생수가 그리워짐. 그 생수는 특이하게 네모진 병에 들어 있고 0.4리터라 용량도 아주 적절했는데. 한때 잠시 국내 편의점에서 이 바이칼 생수를 팔았던 적이 있는데-좀 비싸긴 했지만 1+1 행사를 했었음- 안 팔렸는지 금세 사라져서 아쉬웠다. 이제 러시아가 이 모양이니 더더욱 다시는 안 들어오겠지 흐흑. 어째서 빌니우스에 놀러 와서 바이칼 생수 타령인지 나도 모르겠지만.

더위와 습기 때문에 그 사이에 또 지쳐서 한동안 방에서 다리를 뻗고 좀 쉬었다. 영원한 휴가님과 호텔 라운지에서 애프터눈 티를 마시기로 하여 두 시 좀 넘어 내려갔다.

사람들마다 여행을 가면 꼭 해보는 게 있을 텐데, 나 같은 경우는 애프터눈 티 세트를 맛보기와 숙소의 바에서 김릿을 마셔보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웬만하면 거의 하지 않고 여행을 왔을 때, 그리고 좀 괜찮은 호텔에 묵을 때만. 우리 나라에서는 카페에 갈 때도 많긴 하지만 보통 티타임은 우리 집(카페 자이칙)에서 세팅해놓고 마시는 것을 더 좋아하고(심지어 내가 우린 차가 보통은 더 나음) 집-회사-집의 노동노예 생활을 하다 보니 바에 갈 일도 거의 없어서 어쩌다보니 나에게 3단 트레이 본격 애프터눈 티와 밤에 편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편하지도 않은 옷을 입고 내려와 김릿 한잔 마시는 것이 여행에 있어 일종의 상징 같은 것이 되었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애프터눈 티세트를 발견하고 좋아하며 라운지에서 여유있고 아름다운 티타임~을 꿈꾸며 내려갔음.

 








영원한 휴가님과 애프터눈 티타임은 매우 즐거웠다. 중간에 시간을 내주신 것도 정말 감사했다. 아마 돌아가서도 생각날 것 같은 시간이었다. 나는 다즐링 서머를 마셨고 영원한 휴가님은 ‘가학적인’ 랍상소총(아마 차이나 어쩌고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었던 듯)과 밀키 우롱티를 드셨다.


그런데 미리 예약을 안 했더니 세트 준비하는데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좀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샌드위치, 디저트는 3단 트레이에 나왔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스콘이 나오지 않았다! 보통 스콘을 먼저 먹은 후 더 달달한 디저트를 먹는데. 우리는 ‘여기는 정말 느리고 여유롭군요. 근데 그래도 왜 아직도 스콘이 안 나오는 걸까요’ 하다가 ‘앗 혹시 코스처럼 나오는 것인가? 트레이에 담긴 모든 것을 다 먹어야 스콘을 갖다주나?’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에 내가 황급히 내 앞접시에다 남아 있던 미니 유자 타르트와 샌드위치를 옮겨 담았다. 그랬더니 정말로 트레이를 치워가고 그제야 스콘이 나왔다. 아니 이럴 수가!

하도 디저트도 안 나오고 스콘은 더더욱 나오지 않아서 그동안 우리는 ‘여기 이거 시키는 사람이 너무 없어서 카페 주방에서 당황했나 봐요. 스콘 이제 반죽해서 굽나 봐요. 샌드위치도 틀에 넣어 찍어내고 속 만드느라 한참 걸리나 봐요’ 운운, ‘비타우타스가 정말 고생하겠어요. 왜 갑자기 어렵고 손 많이 가는 애프터눈 삼단 트레이를 시켜가지고 하며 슬퍼하고 있나 봐요’ 운운 농담을 하고 있었다(비타우타스는 이 동네의 흔한 남자 이름)

그런데 아무래도 이 농담이 정말인 것만 같다 ㅋㅋ 왜냐하면 이 호텔 라운지는 한산했고 어쩌다 뭔가를 시키는 손님도 이렇게 거한 티세트가 아니라 차 한 잔, 에스프레소 한 잔, 물 한 병 정도만 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전에 갔었던 곳 같은 본격 티타임 라운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하여튼 그래서 우리는 생각보다 많이 기다렸다가 스콘까지 먹었다. 미안합니다 비타우타스 씨. 그냥 탄산수 한 병, 차나 한 잔 시킬 것을 거창한 3단 접시를 시켜서 생각지 않은 중노동을 시켜드렸습니다. 그리고 스퍼드 닮은 다른 점원분도 미안합니다... (나는 그 생각을 안 했는데 안경 끼고 머리를 짧게 깎은 남자 점원을 보고 영원한 휴가님이 스퍼드 닮았다 해서 이제 계속 웃길 것 같음 ㅠㅠ 그건 그렇고 스퍼드가 누군지 다들 모를 것 같음. 이미 오래된 영화인 트레인스포팅에 나왔던 등장인물임)

 

 









차를 마시고 스콘까지 클리어한 후에 당분과 탄수화물과 지방과 카페인으로 꽉 찬 상태로 일어났다. 영원한 휴가님이 가시는 것을 조금 바래다 드린 후 우니베르시테토 거리를 따라 걸어내려왔고 유레카라는 이름의 작은 서점(여기도 알려주신 곳)에 들렀다. 작가들과 유명한 구절이 프린트된 티셔츠를 팔고 있었는데 잘 보니 앨런 긴스버그 셔츠가 하나 있었다. 그런데 슬프게도 긴스버그는 결코 잘생기지도, 카리스마 있지도 않은 시인이었다 보니 티셔츠가 별로 예쁘지 않아서 미모지수 부족이란 이유로 안 샀음. 미안합니다 긴스버그씨... 혹시 셔츠에 내가 정말 좋아하는 시인 Howl의 인용구라도 적혀 있었으면 미모 불충분에도 불구하고 샀을지도 모르는데 그것도 아니었기에... 그 시는 엄청 길기도 하지만 이 사람 시 중 제일 유명하니 이왕이면 거기서 몇 줄 따왔어도 됐을 텐데... 오늘은 어찌 된 것이 비타우타스에게도 미안하고 스퍼드에게도 미안하고 심지어 긴스버그에게도 미안한 날임 ㅋㅋ

 

 
 





티타임 찍으려고 dslr을 가지고 나왔던 터라 가방이 무거워서 일단 방에 들어왔다. 6시 전이라 아직 이른 시간이었고 다시 나갈 수도 있었는데 방에 들어오자 급피곤해졌다. 이제 놀 수 있는 날은 금토 딱 이틀뿐이라 아깝긴 했지만 새 호텔이니까 방에서 좀 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쉬기로 했다. 그런데 목욕을 하고 나왔더니 창밖으로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것이 아닌가. 어제보다 더 심하게 쏟아져서 대성당 광장 종탑 옆으로 물보라가 쏴 일고 있었다. 창가로 기어올라가 창문을 열고 비 구경을 잠깐 하는데 심지어 우박까지 요란하게 쏟아져서 그 짧은 시간 동안 창가와 내 다리가 다 젖음! 그냥 일찍 들어와 쉬기로 한 것이 참으로 다행! 지금은 비는 그친 것 같은데 순간적으로 많이 왔는지 길이 많이 젖어 있는 것이 보인다.


내일은 트라카이에 갈까 망설였는데 결국 안 가고 아마 빌니우스 대학 교정에 들어가보고 김릿도 한 잔 마실 것 같다. 사실은 오늘 저녁 방에 들어왔을 때 잠깐 김릿 마시러 바에 내려갈까 했지만... 이미 거창한 애프터눈 티세트로 비타우타스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겨주었으므로 김릿은 내일 마시기로 함 ㅋㅋ (이 호텔이 생각보다 규모가 작고 바도 작아서 일하는 사람이 다 거기서 거기일 것만 같고 하여튼 투숙객이 좀 많고 나 같은 손님도 여럿 있어야 더 편한데 ㅎㅎ) 아니면 돌아다니다 찍어놓은 바가 몇 개 있어서 거기 들러 마실 수도 있을 듯. (하지만 ‘묵고 있는 호텔’ 바에 내려가 편안하게 한 잔...에 방점이 있긴 한데~ 비타우타스 혹은 그 동료들이여 내일은 김릿이오 ㅋㅋ)

 



어제 네링가 호텔에서 택시 타고 오면서 기내 캐리어에 체리 팩과 함께 비닐포장해 넣어왔던 수레국화. 체크인까지 몇 시간 동안 짐을 리셉션에 맡겨 놓았던 동안 꽃이 캐리어 안에서 팍 시들었고 갖은 정성으로 찬물에 설탕을 타주면서도 내내 시들해서 슬펐는데, 오늘 아침에 대를 좀 자르고 다시 설탕물에 담가놨더니 돌아와서 보니까 좀 살아났음! 덜 시들시들함 :) 그래서 저녁에도 설탕 반 봉지 넣어줌. 남은 설탕은 내일 아침 주려고 접어놓았다.


** 오늘은 4.7킬로, 6,782보 걸었다. 대폭 줄었음. 피곤해서 + 비타우타스의 수난을 야기한 티타임 덕에 ㅋㅋ

:
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