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토요일 밤 : 필리모에서 새벽의 문, 작은 벼룩시장 구경, 보르쉬의 비밀, 15센트, 가방 좀 꾸림, 종이컵과 방 2024 riga_vilnius2024. 10. 27. 04:51
사진은 필리모 거리 중간에 있는 벤치에서, 낙엽이랑 쿠야랑. 쿠야의 퍼스널 컬러는 가을 웜인가보다.
새벽에 깼다가 도로 잠들었는데 뭔가 내가 아주 어렵고 억울하고 슬픈 상황이라 낮고 슬프게 울면서 뭔가를 호소하는 꿈을 꿔서 엄청 피곤하게 일어났다. 지금은 기억이 잘 안 남. 흐흑, 꿈에서 그런 슬픈 상황이 되면 너무 싫어. 뭐 실제가 아니라서 다행이긴 하지만.
오늘은 며칠 만에 조식을 먹으러 내려갔다. 사실 오늘도 근처 카페에 가서 조식 먹어볼까 했는데 토요일이라 어디든 만석일 것 같고 또 일어나기가 너무 귀찮아서 꾸무럭거리다가 ‘아, 그래도 호텔 조식엔 과일이 있잖아’ 라는 생각에 내려감. 그런데 오늘의 멜론은 덜 익은 부분이 너무 많아서 많이 잘라내고 먹어야 했고 귤을 한 알 가져와서 방금 까먹었는데 너무 시었다. 오렌지를 줄 때는 달았는데 ㅜㅜ
날씨가 다시 춥고 우중충해졌다. 흐리고 습하고. 내리누르는 날씨. 오늘 해가 난다는 예보도 있었는데 햇살은 하루 종일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 모레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어딜 갈까 하다가(웬만한 가고 싶었던 곳들은 다 클리어했다. 주로 카페들이지만. 우주피스는 한번밖에 안 가고) 첨엔 ‘그래도 돌아가면 무적 카페가 생각날지도 몰라’ 하며 테이스트 맵에 마지막으로 다시 들러볼까 했다. 그러나 여기도 브런치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뜩이나 사람 많은데 더 많겠네’ 하며 포기. 일단 가까운 엘스카로 가보았다. 엘스카에서 운좋게 자리를 잡아서 카푸치노를 한 잔 마시고 손님이 너무 많아서 일찍 일어났다.
어디를 갈까, 트라쿠 거리에 가볼까 하고 있는데 마침 영원한 휴가님도 트라쿠 거리의 도서관에 나오신다고 하여 거기서 잠시 보기로 했다. 먼저 도착해서 트라쿠에 있는 드로가스에 들어가 구경을 하다 핸드크림을 두 개 더 샀음. 뭔가 이번 내 기념품은 옷, 스카프, 핸드크림, 카페 종이컵들... 종이컵 외엔 다들 리투아니아산도 아니야 ㅜㅜ
그리고는 새벽의 문 후라칸에 가려다 자리가 마땅치 않아 카페인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제 곧 돌아가야 하니 무척 아쉬웠다. 카페인에서 나온 후 영원한 휴가님은 귀가하시고 나는 그 근처의 공터 같은 곳에 조그맣게 열린 벼룩시장 좌판을 구경했다. 상인들은 모두 러시아어로 얘기하고 있었고 물건들도 소련시절(로 추정), 90~2000년대 러시아와 동구권의 자잘한 것들, 그리고 오래된 책들 등이었다. 나는 이런 것들을 보다가 귀여운 걸 건지는 것을 좋아하는데 별로 건질만한 건 없었다. 그런데 보석함 같이 생긴 녀석 뚜껑에 트로이츠키 다리의 가로등 램프와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사원이 그려져 있어서 한동안 그놈을 구경하긴 했다. 너무 상태가 안 좋았고 딱히 쓸만한 곳도 없어서 사지는 않았음. 그리고 해골반지들이 있어 그것도 조금 구경... 책들과 신문들은 정말 오래된 것들이 많았고 소련시절 노어 신문도 있었는데 구경만 하고 그냥 나왔다.
낙타 옆에 있는 동그란 놈이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사원과 트로이츠키 사원 램프 그려진 보석함.
해골반지도 잠깐 구경.
이때쯤 빗방울이 아주 약하게 떨어지다가 잠깐 조금 굵어졌다가 도로 사그라들었다. 잠깐 우산을 펼쳤다가 디조이 거리로 들어갔을 때 접었고 부모님과도 통화를 했다. 아빠는 오늘 새로운 장어집을 발굴하여 맛있게 드시고 오셨고 몸도 나아지셨다고 하여 한시름 놨다. 엄마는 매년 쌀을 주문해서 먹는 순천의 농부 아저씨에게 내가 먹을 쌀도 보내라고 연락해두었다고 한다. 다음 주에 내가 도착할 때쯤 쌀도 올 거라고. 사실 여기 오기 전에 쌀이 거의 다 떨어졌었는데 어차피 여행가니까 안 사야지 했었는데 엄마토끼 덕분에 새 쌀을 먹게 되겠네. 그 쌀이 맛있다.
디조이에서 필리에스 쪽으로 가면서 성 파라스케베 정교 사원에도 들러 기도를 하고 나왔다. 지금까지 충만했던 여행에 대해 감사하고 남은 여행의 마무리도 잘되기를, 무사히 평안하게 귀가하고 또 앞날도 모든 것이 좋고 잘되기를.
필리에스에서 뭔가를 먹을까 했는데 치즈케익을 먹어서 배가 별로 고프지 않았다. 필리에스 초입에 Karstos galvos 라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카페가 있는데 너무 알록달록하고 의자가 안 편해 보여서 항상 그냥 지나쳤었다. 나쁘지 않고 많이 노력한다고 영원한 휴가님이 말씀해주셨었는데. 근데 메뉴에 보르쉬가 있고 연어나 치킨키쉬가 있어서 여기서 점심을 먹어볼까 싶어 들어가보았지만... 역시나 역시나 만석! 하긴 브런치 카페인데다 심지어 필리에스 거리에 토요일 두시 무렵이니... 그래서 포기하고 게디미나스 대로로 접어들었다. 이때쯤 좀 춥기도 하고 피곤했다. 그래서 그냥 리미에 들렀다가 방으로 갔다.
대성당 광장을 지나 게디미나스 대로의 리미로... 10월 초에 왔을 땐 햇살도 나고 나무도 좀 푸릇푸릇한 기운이 있었는데 이제 낙엽도 많이 떨어짐. 한국에 돌아가면 사무실 앞 공원도 이렇겠지.
리미에서 나는 절인 비트 병조림을 샀다. 영원한 휴가님의 꿀팁으로! 나는 여태 몰랐는데 보르쉬를 맛있게 끓이려면 그냥 생 비트가 아니라 절인 비트를 넣고, 사워크라우트를 넣으면 된다고 어제 알려주셨다! 아니 그랬던 건가? 어쩐지 집에서 아무리 레시피대로 끓여도 새빨갛게만 나오고 그 깊은 맛이 안 나서 ‘왜 내가 끓이면 그 맛이 안 날까’ 하고 슬퍼했는데... 오, 일리 있어! 난 생비트 썰어서 도마 다 빨갛게 물들이고... 생양배추 썰어서 넣고... 육수는 좋은 소고기로 냈는데도 그 깊은 맛이 안 나서 스스로를 한탄했었는데! 그래서 마리네이드된 비트 병조림 진열대로 가서 톡으로 막 물어보며 500그램짜리 하나를 사보았다. 사워크라우트는 한국에서도 파니까... 아아 우리나라에도 이런 거 팔면 좋겠는데. (혹시 파나? 컬리에는 비트라페 뭐 그런것만 있던데 좀 달라보임) 그래서 좀전에 가방 꾸릴 때 마지막 남은 뽁뽁이로 이 유리병을 잘 쌌음. 생각보다 이번에 뽁뽁이를 안 챙겨왔네. 역시 짐꾸리느라 정신없어서 부피 줄이느라 그랬나보다. 사진은 비트, 오이 등 병조림들 진열대. 맨 위에 있는 놈들 중 하나를 샀습니다.
그리고 이건 아시아 식품 진열대. 거대 리미에는 너구리랑 순 라면도 있었지만 여기는 김치 신라면만 있다. 볼때마다 ‘대체 저건 무슨 맛일까’ 궁금해서 돌아갈 때 하나 사갈 생각이었는데 영원한 휴가님이 맛없다고 말씀해주셔서 안 샀음. 사실 신라면도 별로 안 좋아해서. 생각해보니 재작년 겨울에 프라하의 중국인 수퍼에서 샀던 ‘신라면 HOT’ 이란 컵라면도 무지무지 맛없고 진짜 매웠음. (이렇게 매운 걸 유럽인들이 어찌 먹는단 말이냐 하고 놀랐었음) 사실 트라쿠 거리에는 중국인이 하는 아시아식품점도 있는데 거기는 한국식품들이 꽤 있는 것 같다. 들어가보지는 않았음.
..
짐이 무거워져서 방으로 들어왔다. 그랬더니 좀 배가 고파졌는데 점심 챙겨먹으러 나가기는 또 귀찮아서 남아 있던 햇반을 데워 리미에서 사온 통조림 참치랑 자잘한 것을 같이 먹었다. 그리고는 오늘은 가방도 좀 꾸려야 하므로 잠깐만 나갔다가 일찍 들어오기로 하고 4시쯤 다시 나갔다. 생각보다 오늘 많이 걸었기 때문에(새벽의 문이 확실히 좀 멀다) 빌니아우스 거리까지만 갔다.
피나비야에 서양배 코티지 치즈 패스트리가 있나 보러 갔다. 오, 이거 원래 제일 먼저 떨어지는데 주말이라 그런가 새로 구워서 내놓은 게 보였다. 근데 손님이 또 무지무지 많았다. 내 앞 손님은 케익 두 개를 가리켰고 점원이 진열장에서 홀케익을 꺼내서 잘라주었다. 이 정도 크기? 더 크게? 하고 손짓으로 물어보면서. 무게를 재서 계산. 아니 그렇구나... 조각의 크기가 정해져 있는 게 아니구나... 나도 저렇게 시켰으면 됐을 것을 괜히 그때 이상한 파블로바 시켜서 폭망했네. 근데 이때 이미 배가 불러서 케익 먹을 위장은 안되고, 사실 서양배 패스트리가 있어서 차 마시고 갈까 했지만 만석이라 자리도 없었음.
이 패스트리의 가격은 3.4유로이다. 그런데 카드로 계산을 하고 막 나오려는데 점원이 조심스럽게 나를 불러서 카드결제기가 문제가 있는지 결제가 다 안돼서 다시 해달라고 요청함. 생각해보니 아까 리미에서도 승인과 취소가 반복되었었음. 내 카드에 문제가 있나 했는데... 이게 아마 카드결제를 할 때 ‘서명을 해주십시오’가 뜨는 결제기가 있고 그런거 없이 다 됐다는 결제기가 있는데 전자는 보통 영수증에 사인을 해주거나, 점원이 뭔가 ‘취소’를 눌러서 서명없이 결제가 되도록 하는 것 같다. 근데 후자의 경우 뭘 잘못 조작하면 결제 자체가 취소가 되는 것 같다(...고 내가 추정함) 왜냐하면 두 번이나 재결제를 해도 다시 취소가 되었으므로... 점원이 당황하며 혹시 나에게 애플페이를 쓰냐고 물어봄. 동전지갑을 탈탈 털자 3.25유로가 있었다. 어쩌죠, 모자라는데... 했더니 괜찮다고 그것만 달라고, 약간 할인이라고 대답함. 점원도 방법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패스트리를 들고 나와서 빌니아우스 거리를 벗어났을 때 퍼뜩 생각남. 아니, 나 5유로짜리 지폐 있었는데. 근데 막 카드 결제 안되고, 애플페이 물어보고 하니까 당황했는지 동전밖에 생각이 안 났음... 하여튼 15센트 할인(..인가?)은 그렇다 치고 내 카드에 문제가 생겼나 싶어 걱정했는데 그 이후 다른 가게들은 무리없이 결제가 되어서 위의 서명 취소 버튼 오작동 때문인 것 같다고 나 혼자 추정함.
이후 숙소 앞 이키에 들러 0.5리터짜리 물 한병과 아이스크림 한 개를 샀다. 점심을 세시 즈음 먹은 터라 뭔가 애매해서 스트라치아텔라처럼 바닐라에 초코 박혀 있는 콘을 사먹고 좀전에는 15센트 할인받은 서양배 코티지 치즈 패스트리를 먹음. 이게 밥보다 칼로리는 더 높은 거 아닌가ㅜㅜ
이게 그 아이스크림. 맛은 무난했다.
방에 돌아와 목욕을 한 후 너무 하기 싫은 일, 즉 가방 꾸리기를 좀 했다. 아직 테트리스까진 아니고 일단 옷들을 추가로 모아서 압축팩에 넣었다. 내일과 모레 입어야 할 옷이 남아 있어서 다 넣을 수는 없고, 추우니까 내일까진 코트를 입어야 할 것 같다. 코트 부피가 있으니 어차피 테트리스는 내일 밤에 해야 할 듯. 빨래도 오늘까지만. 그리고 뽁뽁이로 싸야 할 것들을 좀 쌌다. 사실 이번에 별로 뭘 산 건 없어서 그냥 내일 밤에 다 쑤셔넣으면 될 거 같긴 하다. 근데 별로 안 샀는데도 자잘한 게 있긴 있네... 물론 부피 큰 옷도 있다. 스웨터, 치마, 카디건. 그리고 스카프. 스웨터는 부피가 크니까 일단 먼저 압축팩에 넣었는데 치마는 내일 입을 것 같아서 놔둠. 저 치마는 바르샤바행 비행기 탈 땐 그냥 입고 탈까 생각 중인데 치마를 입으면 공항에서 가방 끌기가 불편할 것 같기도 함. 일단 내일...
이번 여행에 대해 찬찬히 생각하며 쓸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다. 내일 밤에 정리하는 게 좋겠는데 아마 가방 테트리스를 하느라 짬이 나지 않을지도. 그런데 오늘은 이미 졸리네... 참, 내일부터 리투아니아는 서머타임이 종료되어 한국과의 시차가 6시간에서 7시간으로 바뀐다. 그럼 바르샤바랑은 8시간 차이가 나겠네.
오늘은 11,079보. 6.4킬로. 별로 한 건 없는 것 같지만 엘스카에서 필리모-트라쿠-새벽의 문-다시 숙소로 오느라 그 반경이 생각보다 좀 길었고 또 오후에 빌니아우스에도 한번 더 다녀왔다. 아아 이제 내일 지나면 월요일 오후엔 공항으로 떠나야 해. 내일 뭘 할지 아직 생각은 못했는데... 월요일엔 체크아웃 후 아마 엘스카에 들르겠지. 내일이나 월요일 중 이딸랄라도 한번 더 가야겠다. 지금은 그 정도... 아아 아쉬워.
이건 순서대로 카페인, 후라칸, 엘스카의 종이컵들. 카페인 컵은 오늘 영원한 휴가님이 계산을 하시면서 점원에게 친구가 기념품으로 갖고파하는데 컵 하나만 주세요 하고 부탁해서 얻어주셨다. 넘 감사해요! 엘스카 컵은 초반에 컵이 다 떨어졌는지 저기다 플랫 화이트 담아줬던 건데 방에 가져와서 잘 씻다가... 저 기사 그림이 물에 번져버림. 흑흑... 얘네들 잘 넣어서 가져가려는데(빗이나 자질구레한 거 담아놔야지), 은근히 저게 다 찌그러질 것 같아서 심지어 얘들은 트렁크도 아니고 기내 캐리어에 넣어갈 것 같다! 종이컵들의 출세! 쿠야랑 같이 ㅋㅋ
이 방에서 오래 묵었다. 한 호텔에서 이렇게 오래 지내본 건 처음이다. 보통은 한달 이상 있을 땐 기숙사, 혹은 아파트를 빌렸고 짧은 기간이더라도 호텔을 두어번 바꾸곤 했으니까. 그런데 짐이 많기도 했고 바르샤바에서 레이오버하면서 하룻밤씩 서로 다른 공항 근처 호텔에서 자고, 또 리가에서도 다른 호텔에서 자는지라 빌니우스에서도 중간에 조금 더 좋은데로 한번 옮길까 했던 마음이 줄어들었다. 평이하게 보내기 좋은 공간이었다. 돌아가면 많이 그리워질 것 같다. 매일매일 청소해 주세요를 걸어두고 나갔음. 침대도 편하고 넓다. 이제 오늘이랑 내일 밤 이틀만 자면 이 방이랑도 이별이네. 인사는 월요일에 떠날 때 하는 걸로.
'2024 riga_vilniu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요일 오전의 이딸랄라, 독서 (2) | 2024.10.28 |
---|---|
Karštos galvos 보르쉬와 키쉬 아침 (0) | 2024.10.28 |
새벽의 문 근처 카페인 (0) | 2024.10.27 |
엘스카와 새 이키 설탕 (0) | 2024.10.27 |
쿠야도 잘 자 2 (2) | 2024.10.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