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4 목요일 밤 : 어두운 아침의 카페, 챈들러, 윗동네 투어, 중식당과 왕대형, 교훈을 얻는 토끼, 카페 많이, 남은 여행은 2024 riga_vilnius2024. 10. 25. 04:12
오늘은 여행 온 이래 가장 부지런했던 하루였다. 아침 8시 안되어 일어났고 목욕을 한 후 8시 45분에 방을 나섰다. 호텔 조식 대신 어제 갔던 카페 mon.에서 아침을 먹어보기로 했다. 여기는 영원한 휴가님이 아이들을 등원시킨 후 가끔 들르는 곳이라고 하여 일찍 조우해보기로 함.
날씨는 흐리고 우중충했다. 어제 바람 불어서 떨었던 기억 때문에 몇겹으로 껴입고 기모 스타킹을 신고 코트에 새로 산 스카프까지 두르고 나왔기 때문에 별로 춥지는 않았지만 기압이 낮고 몸이 무거워지는 날씨였다. 비온다는 예보는 없었지만 보키에치우 거리 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가느다란 비 몇 방울이 천천히 떨어졌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게디미나스 대로와 빌니아우스 거리, 보키에치우 거리 등 도로와 넓은 거리를 걷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출근 시간대의 게디미나스 대로는 차들로 붐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대로에 차들이 밀려 있는 걸 처음 봤다. 흐려서 길은 어둑어둑했다. 페테르부르크에서도 그렇고 물론 서울에서도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또 다른 느낌이기도 했다.
어둑어둑한 아침이면 일찍 연 카페들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불빛들이 가장 매혹적이다. 사진은 몬 카페로 가는 길에 찍은 카페인의 창문. 엄청 들어가고 싶게 생겼다!
이런 풍경을 보면 챈들러가 생각난다. 챈들러는 <기나긴 이별>에서 늦은 오후/이른 저녁의 바가 좋다는 이야기를 등장인물의 대화를 빌어 굉장히 멋지게 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여서 오후의 한적하고 따스한 바에서 칵테일 한 잔 하는 것을 좋아한다. 바에 대한 이러한 나의 기분을 카페로 치환하면 아마 그건 이런 어두운 아침의 불빛이 어른거리는 카페에 대한 마음과 비슷할 것이다. 예전에도 두어 번 발췌했지만 다시 올려본다. 레이먼드 챈들러. <기나긴 이별> 이건 읽어도 읽어도 명문임.
“I like bars just after they open for the evening. When the air inside is still cool and clean and everything is shiny and the barkeep is giving himself that last look in the mirror to see if his tie is straight and his hair is smooth. I like the neat bottles on the bar back and the lovely shining glasses and the anticipation. I like to watch the man mix the first one of the evening and put it down on a crisp mat and put the little folded napkin beside it. I like to taste it slowly. The first quiet drink of the evening in a quiet bar – that’s wonderful.”
발걸음을 재촉해 상당히 긴 빌니아우스-보키에치우 거리를 지나 미칼로야우스 거리로 접어들어 몬으로 갔다. 영원한 휴가님은 먼저 오셔서 더블 에스프레소를 시키신 후 내가 나눔한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10억>(줄여 부르는 제목)을 읽고 계셨다. 이 책에 대해서라면 할 얘기가 너무 많다 :)
몬에서 아침을 먹은 후 나왔는데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너무 졸려서 방으로 들어가 좀 눈을 붙일까 하다가 일찍 나온 게 아까웠고 영원한 휴가님이 집 근처 그릇 상가에 가셔야 하는데 그 근처에 자주 가시는 카페가 있다고 하셔서 따라갔다. 오르막길을 따라 쭉 올라가니 며칠전 공원 계단을 따라 올라가서 타마고와 막시마를 발견했던 그 윗동네 쪽이었다. 그래서 나는 빌니우스의 관광지가 아닌 주택가와 회사와 상가가 있는 동네도 가보게 되었다. 빌니우스 주거지, 오피스 지대 투어라고 해야 하나 :) 그릇 도매상에도 들어가 보았다.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음식점용 식기와 물건들을 파는 곳이었다. 이 주변은 블라디보스톡에서 처음 묵었던 루스키 섬의 마린스키 극장 근처 아파트 지대를 조금 연상시켰다. 아래 사진이 그 식기 가게.
브루에서 나왔는데 아직 이른 오후였다. 날씨 때문에 너무 졸렸다. 좀 걸어가서 테이스트 맵에 갈 것인가 방에 들어갈 것인가 갈팡질팡하다가 영원한 휴가님이 여기가 중국대사관 근처라 근처에 중식당들이 있다고 하셔서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갔다. 이 식당은 Pekino Antis, 즉 베이징 덕이라는 곳인데 내부 스타일이 정말 서울의 우리 회사 근처의 자주 가는 오래된 중식당이랑 닮아서 친근했다. 외관은 이렇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큰 덕을 보고 영원한 휴가님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가는 길에 영원한 휴가님은 옛날에 여기서 중국인들 중 좀 ‘대형’ 같은 스타일의 음식점 사장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던 얘기를 해주셨다. 그런데 그분이 이 식당 사장이었다. 우리가 막 들어갔을 때는 런치타임이라 자리도 거의 만석이었다. 안내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사장 아저씨가 막 나가려다 우리, 정확히 말하면 영원한 휴가님을 발견했고, 영원한 휴가님은 유창한 중국어로 아저씨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장 아저씨는 엄청 사근사근하고 친절했다. 옛날에 만난 건 기억을 정확히 못하는 것 같았지만 중국어를 너무 잘하는 영원한 휴가님 때문에 반가우셨던 건지 아주 친절하게 우리를 안내하고는 여러 가지 이야기도 나누시고(나는 못 알아듣고 ㅎㅎㅎ) 우리는 런치 메뉴 먹으려 했는데 ‘그러지 말고 메뉴책에서 하나 골라서 밥이랑 먹어. 내가 살게’ 라고 하심. 그리고는 실제로 메뉴책을 가져와서 우리가 고를때까지 기다렸고 좀 매운 거 얘기하다가 소고기 코너에서 SICHUAN BOILED BEEF (水煮牛肉)를 고르자 (아니면 사장님이 추천해준건가... 영원한 휴가님이 고르신 것 같음) ‘후회하지 않을 것이야~’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이 점심을 공짜로 먹었다! 이게 다 영원한 휴가님의 은덕이 아닌가! 유창한 중국어! 인덕! 감동!
(제목의 왕대형은 그 사장님에게 내가 붙인 이름. 왕씨라고 한다)
이것이 그 메뉴. 좀 간이 세서 짜긴 했지만 매콤했고 야채도 꽤 들어 있어서 밥이랑 맛있게 먹음. 흑흑 감동과 동시에 부러움과 존경으로 가득참. 우왕 외국어 왜 이렇게 잘하시는 것인가... 나, 나도 분명히 고등학교, 대학교 때 중국어 아주 조금 했는데 왜 하나도 모르고 ‘친구’, ‘한국인’, ‘고마워요’ , ‘광저우’ 밖에 못 알아듣나 엉엉... 너무너무 멋있다. 이 에피소드의 교훈은 ‘외국어를 잘하면 가다가 밥이 나온다!’로...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을 읽다 보면 잭 런던의 틀니 에피소드에서 어떤 일에서 교훈을 얻어내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다른 에세이에서도 자기는 뭔가 교훈 찾기를 좋아한다고 함- 사실 나도 좀 그런 편이다. 그래서 오늘도 교훈을 얻고..)
아침 일찍부터 점심까지 계속 함께 새로운 동네 투어와 중식당까지 함께 해주신 영원한 휴가님은 타마고로 빠지는 골목에서 나와 헤어졌다. 넘넘 감사했다. 나는 테이스트 맵과 엘스카, 숙소 중 고민하다(원래는 숙소로 가는 버스를 타려 했는데 버스가 막 떠나서) 지난번의 루트를 따라 공원을 가로질러 엘스카에 갔다. 위 사진은 공원 가는 길. 엘스카는 1층은 꽉 차 있었고 내가 좋아하는 2층은 자리가 있었다. 무지개 테이블 하나짜리에 앉아서 설탕 넣은 카푸치노와 비건 브라우니를 시켰다. (짭짤한 중식 점심 때문에 또 단게 먹고 싶어짐) 이리하여 나는 엘스카의 비건 디저트 4종을 모두 클리어하게 되었다. 브라우니는 뭐 비건이라 그냥 그랬다. 땅콩케익이 제일 맛있었던 걸로... 엘스카에서 부모님과 통화를 하고 사진을 좀 정리했다.
그리고는 아침에 일찍 나올 때 몬에 갔다가 다시 들어올 것 같아서 ‘청소해 주세요’를 걸어놓지 않고 나왔는데 3시까지 걸어놓으면 청소를 해주기 때문에 얼른 방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남이 맨날맨날 내 방 청소해주는 기회가 이제 별로 없을 거잖아' 하며) 3시 직전이었기 때문에 양치질을 하고 하루키 잡문집만 집어넣고 도로 나와서 게디미나스 대로를 가로질러 바닥분수 근처의 후라칸에 가서 책을 읽었다. 그 얘기는 따로 썼으니 생략.
후라칸에서 나와 맞은편 리미에 갔다. 이 리미는 처음 가보는데 지하에 있었고 원래 가던 리미보다는 작았다. 물만 두 병 샀는데 무거웠던 고로 또다시 숙소에 들러 물을 내려놓았다. 이때가 4시 30분 정도였다. 피곤하긴 했지만 여행이 다 끝나가기도 하고 너무 아쉬워서 숙소에서 제일 가까이 있는 백스테이지 카페 분점에 갔다. 이곳은 추억의 코아아트홀을 생각나게 하는 곳이었다. 여기서는 오늘의 사진들을 정리했다. 오늘 카페를 5곳이나 클리어해서 기록을 세움.
6시쯤 방에 돌아와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 씻었다. 그리고 오늘의 메모를 다 적으니 또 열시가 되었네! 오늘부터 가방을 좀 꾸려볼까 했는데 내일로 미루려고 한다. 정말 가방 꾸리는 건 너무너무 싫다 흐흑...
내일은 원래 해가 난다고 했는데 지금 보니 그사이 예보가 바뀌어서 또 계속 흐리다고 나옴. 흐흑... 윗동네 카페도 가봤으니 이제 남은 사흘 반 동안은 여유 있게 보내려고 한다(그런데 과연 그렇게 될지는 모르겠음) 엘스카, 이딸랄라, 후라칸 중 한두곳 정도. 그런데 예기치 않은 경험을 하게 되는게 여행이니까 또 모르지. 아니면 오늘 빡세게 다닌 결과 내일이나 모레는 방에서 뻗어있을지도 모르지만... 아까워... 이제 월요일 저녁에 비행기를 타러 가야 해 엉엉...
오늘은 13,808보. 8.2킬로. 빌니우스 와서 제일 많이 걸은 것 같은데 긴가민가. 제일 많이 걸었거나 두 번째로 많이 걸었음.
엘스카 사진 두 장으로 마무리. 오늘은 엘스카에 잠깐만 앉아 있었던 터라 사진도 두 장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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