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2 화요일 밤 : 토요일 같은 여행, 엘스카와 슈가무어, 마음 속 깊은 고마움, 유레카와 디페쉬 커피, 조식 딜레마 2024 riga_vilnius2024. 10. 23. 03:32
새벽에는 비가 왔다. 종일 날씨가 흐렸지만 그렇게 춥지는 않았다. 스웨터와 치마, 기모 스타킹에 코트, 스카프를 두르고 나왔더니 더울 정도였다. 대신 습기 때문인지 좀 답답하고 계속 졸렸다.
다시 새벽에 두어 번씩 깨기 시작했다. 돌아갈 때가 다가와서 그런가보다 흐흑... 사실 새벽에 깨면 한국은 시차 때문에 이미 오전에서 낮이므로 업무 관련 단톡방에 이것저것 올라오고 있고, 그걸 안봐야 되는데 나도 모르게 체크를 해보게 되니 더 자다 깨나 싶음. 하여튼 오늘은 조식 먹으러 내려가기 귀찮았지만 그래도 내려가서 남은 쌍화차를 타서 마시고 아침도 챙겨 먹었다. 방에 올라와서는 곧장 나가는 대신 업무 메일들을 확인하고 너무 졸려서 침대로 들어가 책을 좀 읽다가 12시가 다 되어갈 무렵 일어나 나갔다.
오늘은 2시에 슈가무어에 애프터눈 티를 예약해두었으므로 그 외의 특별한 일정은 없었고 날씨가 꾸무룩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닐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엘스카로 가서 책을 읽었다. 점심 먹기가 애매해서 안 먹었는데(애프터눈 티세트는 양이 많고 샌드위치도 주므로) 대신 엘스카에서 우유 든 디카페인 카푸치노를 마셨다. 그리고 영원한 휴가님이 좀 일찍 나와주셔서 엘스카로 먼저 와주셔서 고마웠다.
우리는 엘스카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시간이 되어 슈가무어로 이동했고 애프터눈 티를 마셨다. 그건 별도로 올렸으니 생략. 날씨도 그렇고 슈가무어가 좀 공기가 답답했는지, 아니면 탄수화물과 당분이 차의 카페인을 압도해서 그랬는지 졸리고 더워서 우리는 밖으로 나와 보키에치우 거리의 벤치에 앉아 바람을 쐬었다.
돌아갈 날이 다 되어가는데 이제 하고 싶은 거 남은 건 없는지 영원한 휴가님이 물어보셨다. 딱히 막 이거 해야 되는데 못했다는 건 없는 것 같다. 트라카이랑 카우나스에 가려다 안 가긴 했는데 사실 그건 내가 정말 가고 싶었다면 언제든 갈 수 있었고 지금도 갈 수는 있다만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아마 이번에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건 쉬는 것, 일을 안 하고 그냥 마음에 드는 카페를 발견하고 하루에 조금씩 걷고 카페에서 카페로 옮겨가며 그냥 시간을 보내는 것,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던 듯하다. ‘뭔가를 하는 여행’보다는 ‘하지 않는’ 여행이 필요했던 것 같다. 일 때문에 너무 지치고 닳아 있었기 때문에, 돌아가면 다시 그런 일상으로 복귀해야 하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토요일 같은 여행’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일에 지쳐 녹초가 되면 토요일에는 집에서 그냥 뻗어서 목욕을 하고 차를 마시고 책을 읽으니까. 그러니 이번 여행은 토요일 같은 여행, 하지 않는 여행에 가깝다. 그리고 오랫동안 머무르는 동안 항상 옆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정보도 주시고 함께 해주시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소중하다. 아마 프라하에 갔다면 이런 느낌은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영위하는 일상 속에 들어와 짧은 기간도 아니고 여러 날 동안 머무르는 친구에게 마음을 쏟아주시는 분이 있어 고맙고 감사하다. 그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큰 마음과 온기라는 것을 온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사실은 알기에. 그러고보면 나는 날씨보다는 친구 운이 좋은게 아닐까 싶다.
보키에치우와 트라쿠 거리를 좀 걸었고 이후 영원한 휴가님과 헤어진 나는 어디로 갈지 좀 방황했다. 오늘은 컵룸 카페에 자리가 있어서 거기 들어갈까 했으나 슈가무어 여파로 그때까지 배도 부르고 졸려서 뭔가를 더 마실 수는 없을 것 같아서 근처를 좀 걷다가 리미에 가서 부서원들에게 줄 초콜릿을 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리미보다 좀더 위쪽에 있는 디페쉬 카페에 가볼까. 여기도 한번은 가봐야 덜 아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도미닌코누 거리와 우니베르시테토 거리를 지나(우왕 내가 이제 거리 이름들을 외우고 있어!) 게디미나스 초입으로 갔다. 그런데 디페쉬 카페는 의외로 만석이었고 카운터의 점원은 한명 뿐이라 정신이 없어 주문받기까지 한참 걸렸다. 그래서 나는 포기함. 딱히 뭘 마시고 싶은 상태가 아니었고 아무리 봐도 ‘아 여기는 그냥 내가 앉아서 뭘 마실 곳은 아닌가보다’ 라는 마음이 됨. 여기랑 베로 카페가 그런 듯. 내일은 아우구스타스와 바르보라 카페를 재도전해볼까 싶다.
디페쉬에 가기 전에 우니베르시테토 쪽에서 유레카 서점에 다시 가보았다. 오늘은 문이 열려 있었다. 영어 서적들 쪽을 구경해보았는데 라인업을 보니 아 이런 쪽 취향의 서점이구나 하고 끄덕끄덕. 좀 폴 오스터 풍이랄까. 그리고 일본 문학들이 좀 있다. 오스터가 있으니 당연히 무라카미 하루키가 있고. 도스토예프스키 영역본이 좀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영미권 작가의 소설이 있으면 영어로 된 걸 한 권 정도 사볼까 했는데 딱히 눈에 띄진 않았음. 아아 신에게는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소설 세 권이 있사옵니다. 그리고 엽서랑 티셔츠는 2년 전이랑 구색이 거의 같아서 살만한 게 없었음. 다행이라 해야 하나 ㅎㅎㅎ
디페쉬 카페 실패 후 리미 옆의 토토리우 후라칸을 힐끗 살펴보았다. 어제의 후라카나스가 혹시 오늘은 여기 와 있지 않나 궁금해서. 후라카나스는 없었고 차분한 여자 점원 두명이 있었다. 하긴 후라카나스는 여기는 좀 맘에 안 들 거야. 토토리우 후라칸은 바쁘고 정신없고 외국인도 많이 오거든... 후라카나스가 행복하게 일하는 쪽이 나아 ㅎㅎㅎ
그래서 그냥 리미에 가서 티셰 2리터들이 한병, 그리고 부서원들에게 줄 초콜릿 2상자를 샀다. 그리고 그 사이 배가 좀 꺼졌고 뭔가를 챙겨 먹기가 너무너무 귀찮아서 들어가는 길에 맥도날드에 들러 치킨버거를 1개 테이크 아웃해 와서 방에서 대충 먹었음.
그래서 오늘은 슈가무어 애프터눈 티가 메인이 되었음. 6,779보. 4킬로.
내일부터는 천천히 가방 꾸릴 생각을 해볼까 싶은데 으악 너무너무 하기 싫어 엉엉... 그리고 기념품도 아직 다 안 샀어... 문제는 뭘 사러 가면 내가 사고 싶은 것만 보게 된다는 데 있음. 흑흑 월요일에 떠나니까 그래도 5일 반이나 남았으니 평소의 여행이랑 비교하면 아직 많이 남았다고 스스로를 달래보며... 내일은 아우구스타스와 바르보라 카페, 필리에스 거리의 기념품가게 등에 가볼까 싶지만 어디까지나 지금의 생각일 뿐. 내일은 내일의 기분으로 결정을... 아마 엘스카나 이딸랄라에도 다시 들를 것 같음.
근데 맨날 카페 생각만 하고 어디에서 뭘 먹어야 할지는 잘 모르겠음. 그렇게 보면 지금 호텔에서 조식을 신청해놓은 게 좀 지겹긴 하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 같다. 아마 아파트를 얻었으면 청소도 안하고 밥도 더 안 챙겨먹었을 것 같음. 아, 솔직히 말하자면 아침에 조식 먹으러 내려가기 너무 귀찮다. 방에 그냥 누워서 침대에 누워 빈둥거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다. (바로 그것이 토요일의 집토끼 모드이기 때문이지) 그래서 들어오는 길에 피나비야나 로마눔이나 비르쥬 두오나 같은 곳에서 빵을 사와야지 하고 매일매일 나갈 때마다 생각하지만, 막상 들어올 때는 다른 것들을 사서 가방이 무겁거나, 피나비야에 가면 좋아하는 빵은 이미 나가버렸거나, 로마눔은 숙소에서 더 올라가야 해서 귀찮거나 등등 하여튼 게으름뱅이의 이유가 하나씩 꼭 생겨서 그냥 들어오게 되고... 결국은 ‘아 아침거리 없어... 지금 안 먹으면 나가서 또 제대로 챙겨먹어야 되는데 너무 귀찮아... 그냥 조식 먹으로 내려가’ 로 귀결됨. 뭐지, 이게 좋은 건가? 좋은 것 같기도 하고...
맨 위 사진과 바로 아래 사진은 슈가무어에서 나온 후 보키에치우 거리 벤치에 앉아 바람 쐬면서 찍음. 햇볕 쨍할 때와 컬러도 분위기도 많이 다르답니다. 아마 돌아가면 우리 나라도 슬슬 이렇게 되기 시작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이번 10월은 예전에 비해 따뜻하고 해도 많이 나서 날씨 운이 좋다고 영원한 휴가님이 나에게 말씀하심. 내 경험으로 비춰봐도 정말 맞는 것 같다!
트라쿠 거리의 컵룸 카페. 반대편에는 '지금 아니면 언제 커피 마시겠니' 문구, 이편에는 '커피 마시고 싶지' 라는 문구라고 한다. 흐흑, 빌니우스 넘버원 커피의 패기를 돌려줘봐. 그렇게 적혀 있었으면 내가 오늘 다시 들어갔을지도 모르는데 ㅎㅎ
도미닌코누 거리. 왼편은 스시 라운지라는 일식집인데 호박 장식 가득.
들어가봤지만 바쁜 점원과 만석 테이블로 이번에도 앉지 못하고 나온 디페쉬 카페. 아 지금 잘보니 디페쉬 카페가 아니라 디페쉬 커피구나. 하여튼 그냥 여기는 이제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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