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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리투아니아는 서머타임이 종료되었다. 새벽 4시에서 3시가 되고 한국과의 시차는 6시간에서 7시간이 되었다. 간밤에 잠들면서 ‘아 그럼 원래 알람대로 해도 1시간 버는 거네’ 하고 좋아했는데 어째선지 새벽 3시 반쯤 깨버렸다. 폰의 시간도 자동으로 적용이 되어 있었다. (네이버는 계속 서머 타임 시간으로 나오다가 여기 시간으로 오전이 지나서야 이 변화가 적용되었다) 하여튼 한 시간마다 계속 자다 깨다 하다가 8시 전에 일어났다. 어쩌면 돌아갈 때가 되어서 그런지도 몰라 흑흑...
 
 
실질적으로는 여행의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니(물론 내일도 저녁 비행기라 오후까진 시간이 있지만) 아쉬웠다. 그래서 호텔 조식을 거르고 어제 ‘어 저기 보르쉬도 주네’ 했는데 만석이라 못갔던 필리에스 거리의 Karstos galvos 카페에 오픈시간인 9시에 맞춰 가보기로 했다. 홀리 도넛에서 시르니키와 벨리니, 엘스카에서 오믈렛이나 샥슈카도 생각해봤지만 다 무겁게 느껴졌고 어쩐지 엘스카에서는 음식보다는 커피와 차의 기억만 남기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아침에 따끈한 수프를 먹고팠다(한국인은 국물!) 그래서 8시 40분쯤 숙소를 나섰다.
 
 
실제로는 어제보다 한시간 늦어진 시간대이지만, 아침 9시 전의 게디미나스 대로는 매우 한적하고 스산했다. 비가 왔기 때문에 바닥이 젖어 있었고 일요일이라 차도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리고 안개가 끼어 있었다. 우리 숙소에서 대성당 광장까지는 꽤 걸어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천천히 걷고 있는데 토토리우 후라칸을 지날 무렵 대성당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분명히 재작년에 왔을 때도 저 종소리를 들었는데, 밝은 여름날에 듣는 종소리와 안개낀 늦가을 아침에 텅 빈 대로 너머로 들려오는 종소리는 많이 달랐다. 종소리가 아름다워서 천천히 들으면서 걸어갔다. 영상도 찍었는데 도로의 소음이 겹쳐서 종소리는 잘 들리지 않아 아쉽다. 그리고 대성당 광장에 진입했을 때 기적의 포석 스테뷰클라스를 찾아서 포석을 밟으며 세 번 돌고 소원을 빌었다. 행운이 함께 하기를.
 
 

Karstos galvos 카페에서는 보르쉬와 키쉬, 페퍼민트 티로 아침을 엄청 알차게 먹었다. 양이 많아서 보르쉬와 티는 남겼다. 이 얘기는 따로 올렸으니 생략. 그리고는 비르쥬 두오나에서 하얀 팅기니스를 사고파서 필리에스와 디조이를 지나 루드닌쿠 거리로 갔다. 그런데 일요일이라 그런지 하얀 팅기니스는 없고 초코 팅기니스와 캐러멜 팅기니스만 있어 아쉬웠다. 캐러멜은 안 먹어봤으므로 그것을 한 조각 샀다. 엄청 달 것 같아서 한 조각만 삼. 이후 보르쉬와 키쉬 때문에 입가심을 하고 또 카페인도 충전하고 싶어서 거기서 제일 가까운 이딸랄라 카페에 갔다. 한시간 쯤 차를 마시고 책을 읽은 후 하루를 일찍 시작한 여파로 갑자기 졸려서 일단 숙소로 돌아갔다. 
 
 

방에 돌아와 팅기니스를 꺼내놓고 가방을 어떻게 꾸릴 것인가 생각하며 조금 쉬었다가 영원한 휴가님이 1시쯤 잠깐 나오실 수 있다고 하여 버스를 타고 테이스트 맵에 갔다. 하루하루 시간을 내주시고 만나고 이야기들을 나누며 보낸 나날들이 꿈같고 감사하고 소중하다. 돌아가면 실제로 가장 그리운 건 엘스카, 이딸랄라, 테이스트 맵 등 물질적 실체나 휴식이나 여행이라는 개념 자체보다는 함께 했던 시간들과 온기가 되겠지. 이번 여행 내내 나는 오랜 옛날 생각도 많이 했다. 혼란스러우면서도 빛났던 청춘 시절과 그 당시 걸어 다녔던 서울의 거리들과 기억들. 영화, 책, 음악, 마음.
 
 
영원한 휴가님께서 귀가하신 후 나는 내리막길과 공원을 지나 엘스카에 들렀다. 테이스트 맵과 엘스카 이야기도 따로 올렸으니 생략.
 
 
오늘은 아침 일찍 하루를 시작해 카페를 4곳이나 갔다. 엘스카에서 나와서 숙소로 일찍 들어갔다. 다른 곳에 더 갈 수도 있는 오후였지만 가방도 꾸려야 했고 이래저래 여행을 좀 정리해보고 싶었다. 방에 돌아오니 3시 반 무렵이었다. 트렁크와 기내 캐리어를 끄집어내고 대충 머릿속에서 테트리스를 먼저 해본 후 옷과 물건들을 분류해서 압축팩과 작은 가방 등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사실은 본격적으로 테트리스를 하기 전에 급피곤해져서 침대에 잠시 누워 쉬었다. 이제 이렇게 남이 청소해주고 정리해준 방에 들어가는 것도 안녕이네. 그런데 오늘 시트를 갈아줘서 행복했다. 내일 떠나는데 뭔가 덤으로 선물 받은 기분이랄까. 환경에는 좀 미안했지만(여기는 시트를 4일에 한 번 정도 갈아줌)
 
 
가방을 열심히 꾸리다가 배가 고파져서 전에 리미에서 사다놓았던 두부와 컵라면, 햇반 마지막 남은 걸 조금씩 같이 먹었다. 거대 리미에서 샀던 김치가 아주 조금 남아 있어 그것을 먹으려고 열어봤더니 곰팡이가 피고 변해서(하긴 제대로 된 김치는 아니었어) 그것과 남은 음식물, 포장지 등을 들고 잠깐 호텔 밖으로 나가서 거리의 쓰레기통에 버렸다. 여기는 거리에 쓰레기통이 많아서 좋다. 우리 나라는 왜 이렇게 쓰레기통들을 다 없앴을까ㅠㅠ  10월 3일에 비맞으며 도착했을 때 ‘우와 스물다섯 밤이나 자고 간다~’ 하고 좋아했는데 어느새 오늘이 스물다섯번째 밤이네.
 
 
가방 테트리스를 대충 마치고 목욕을 했다. 아직 다 마친 건 아니다. 이 메모를 다 쓴 후 노트북도 뽁뽁이로 싸서 트렁크에 넣어야 하고(귀찮아서 항상 트렁크에 넣고 부침), 잠옷과 화장품, 최소한의 세면도구도 내일 아침에 마저 챙겨야 한다. 곧장 가는 게 아니고 내일 바르샤바에서 하룻밤 자고 가기 때문에 기내 캐리어에도 옷과 세면도구, 화장품을 분산해야 함. 그래도 얼추 거의 다 꾸렸으니 아침에 후다닥 하면 된다. 방에서 쉬다가 시간맞춰 체크아웃하고 오후에만 카페에 들를지, 아니면 오전에 나갔다가 들어와 체크아웃하고 오후에 다시 돌아다닐지는 아직 모르겠다. 아무래도 전자가 될 것만 같지만 하여튼 일찍 일어나고 일찍 아침도 먹고 가방도 일찍 꾸리기 완료하려고 한다.
 
 
오늘은 10,992보. 5.8킬로. 빨리 들어온 것치곤 꽤 많이 걸었다.
 
 
내일 바르샤바 공항 옆 호텔에서 하룻밤 자고 그다음날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때문에 ‘그래도 여행 완전히 마지막 날은 아니야’ 라는 기분이다. 시간이 많을 때는 레이오버가 좋은 것 같다. 이런 경우는 이제 거의 없겠지만. 이렇게 한 달이나 시간을 내서 여행을 온 건 정말 오랜만이다. 마지막으로 긴 여행을 했던 건 2016년이었다. 그전에는 페테르부르크나 프라하에서 몇 달 머무른 적도 있었지만, 2016년에는 여러 가지 힘든 일들 때문에 휴직을 하고 페테르부르크에서 3주, 프라하에서 3주, 이후 겨울에 복직을 앞두고 다시 페테르부르크에 갔었다. 그 이후에는 매년 잠깐씩 휴가를 내고 여행을 갔다. 코로나 때문에 한동안 못 나가다 2022년에 빌니우스에 왔다. 그전에는 리투아니아에, 빌니우스에 오게 될 거라고 상상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 인연이 이번에는 한달 가까이 머무르도록 이어졌다.
 
 
빌니우스는 어떤 도시였어? 어떤 느낌이었어? 라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어려울 것 같다. 페테르부르크나 프라하는 나에게 명확한 개념과 실체가 있고 느낌이 있다. 그런데 빌니우스는 철저하게 타자로 머물렀고 동시에 매일을 토요일처럼 보낸 곳이었다. 어쩌면 이 도시는 나에게 도시보다는 사람으로 기억될 것 같은 곳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정말 너무 바쁘고 힘들게 일하다가 어렵게 한 달의 무급휴직을 얻는데 성공했다. 원래는 근속휴직이라 3달까지 쓸 수 있지만 이나마도 정말 어렵게 얻어냈다. 중간중간 업무도 체크하고 일을 약간 하긴 했지만 그래도 내 생각보다는 일을 많이 안 했고 (노력하여) 단톡과 메일의 업무내용들도 정말 중요한 상황이 아니면 가능한 넘겼다. 일을 하지 않고 그것으로 골치썩이지 않고 하루하루 보내는 것은 너무 좋고 쉽고 적응이 잘된다. 하지만 돌아가면 다시 빡세게 일해야 한다. 연말과 내년 초 인사 시즌이 되면 이 휴직의 여파가 어떻게 밀어닥칠지 사실 조금 걱정이 되지만 그래도 나는 헤쳐나갈 수 있을 거야. 리가와 빌니우스에서 보낸 한 달로 몸과 마음을 충전했고 그 힘은 생각보다 더 깊은 곳에 자리잡아줄 거라고 믿어본다.
 
 
글은 전혀 쓰지 못했다. 사실 매일매일 돌아다녔고(단 하루도 숙소에만 있었던 적이 없음!) 그날그날의 감각과 경험을 기록하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여기서 남긴 메모들은 모두가 깊은 생각보다는 순간의 경험과 묘사로, 그러니까 기록으로서의 메모들이 되었다. 생각들도 있었다. 하지만 기록이 우선한다. 그리고 때로는 너무 많은 생각들을 하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를 걷고 오늘은 어느 카페를 가고 어느 책을 읽고 언제 친구와 만나고 무엇을 먹을지,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일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것이 정말로 필요하다. 여기 와서 나는 걱정과 생각의 양과 깊이가 줄었고 매일 많이 걸었고 잠도 한국에서와 비교하면 많이 잤다. 이 모든 것이 감사하고 기쁜 경험이다. 축일 같은 여행이라기보다는 토요일 같은 여행. 그런데 사실 여행이란 축일보다는 토요일인 편이 더 좋다.
 
 
그리고 여행을 마무리하면서 무엇보다도 내가 빌니우스에 오게 되고 또 다시 오게 된 가장 큰 이유를 주셨고 항상 손을 내밀어주시고 곁에서 함께 해주신 영원한 휴가님께 깊은 마음과 감사를 보내드린다. 이런 것은 말이든 글이든 표현하기 어렵다. 고마워요. 또 만나요.
 
 
내일 빌니우스에서의 하루를 잘 마무리하고 바르샤바로, 그 다음날 한국으로 무사히 평안하게 잘 돌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며 남은 가방을 좀 꾸리고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 아 그러고보니 10월 여행인데 이 동네의 원래 10월 날씨를 생각하면 정말 생각보다 햇볕을 많이 받았고 파란 하늘도 많이 봤다. 이것도 행운이었다!

 
 
 
... 카페 제외한 오늘의 사진 몇 장으로 마무리.
 
 
 
 

 
 
 
이건 게디미나스 대로 따라 걷다가 종소리 들으며 잠깐 멈췄을 때 찍었음. 정말 한적하다. 
 
 
 

 
 
(위 사진은 루드닌쿠 거리 가던 중 발견함. 날씨 때문인가 묘한 유머가 느껴졌다. 원래 농담으로 쓴 건 아니겠지?)
 
 

 
 
청소해주고 시트도 갈아준 방! 이 방 너무너무 그리울 것 같다. 저 침대가 생각보다 크고 넓고 편함.
 
 

 
 
 
이쪽에선 안 찍어본 것 같아서. 이런 그림이 걸려 있다. 재작년에 묵었던 방에도 비슷한 그림이 걸려 있었던 것 같다. 
 
 
 

 
 
테이스트 맵에서 나와서 엘스카까지 걸어가는 길에 찍은 사진들. 날씨는 스산했지만 많이 춥진 않았다(내가 막 껴입긴 했지만)
 
 

 
 
다음주쯤이면 여기는 낙엽이 다 질 것 같다. 
 
 

 
 
 

이 운동화는 겨울용 방수 운동화이다. 예전에 한 켤레 사서 매우 유용하게 잘 신은 후 이번 여행을 오면서 다시 한 켤레 샀다. 그런데 그사이 절판이 되었는지 구하기가 힘들어서 여러 사이트를 뒤져 간신히 득템했다. 오기 전에 딱 한번 길들이려고만 신었는데 매일매일 8천보 이상, 많이 걸을 땐 1만보에서 1만3천보까지 걸어다녔고 축축한 낙엽과 흙도 많이 밟아서 한국에서 일하러 다니는 반년 동안 걷는 만큼은 닳았을 것 같다. 푹신하고 따뜻하고 비도 안 새고. 여행을 지켜줘서 고마워 운동화야. (구두도 한 켤레 가져왔지만 역시나 우리 호텔 레스토랑 갔을 때 빼곤 한번도 안 신음. 꼭 그렇다. 트렁크 자리만 차지하고 흑흑)
 
 
코트도 '10월이면 거긴 추울거야, 경험으로 알잖아? 그러니까 가볍고 따뜻한 새 코트가 필요해'라고 스스로를 세뇌해 질렀는데(다른 코트들도 있으니 정말 자기 정당화였음 ㅎㅎ) 내가 좋아하는 컬러는 아니었지만 여기서 정말 요긴하게 잘 입었다. 이거랑 숏패딩 두개 사서 가져왔는데 줄창 입고 다녔음. 가을 점퍼와 롱 카디건은 초장에 몇번 입고 안 입게 되었음. 치마도 추워졌다고 여기 매장에서 샀는데 이것도 정말 잘 입고 다녔다. 한국 가서도 잘 입겠지. 편하고 따뜻하고. 

 
 
 

 
 
우리 숙소 앞. 숙소가 정말 대로변에 있다. 쇼핑하기 편하고 버스 타기도 편하다. 구시가지에서는 좀 멀지만... 
 
 
 

 
 
 
짐 꾸리기 전에 나를 쳐다보던 쿠야로 오늘의 메모 정말 마무리. 쿠야랑 같이 와서 좋았다. 다음에도 또 같이 가자 :) (일단 집에 가면 목욕부터 하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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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