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스펠 Coffee Spells, 카페 외의 다른 것들 2024 riga_vilnius2024. 10. 22. 03:27
커피 스펠은 필리모 거리에 있다. 엘스카에서도 두세 정거장을 더 가야 한다. 여기서 좀더 올라가면 할레스 투르구스 시장과 새벽의 문이 나오니 숙소에서는 꽤 떨어져 있고 구시가지 관광지와도 떨어져 있다. 필리모 거리는 넓고 쭉 뻗어 있고 트롤리버스들과 자동차가 휙휙 지나다니는 거리로 구시가지만 놓고 보면 대중교통이 제일 많이 다니는 넓은 도로인 것 같다. 나는 이 거리를 걸어가면 페테르부르크의 리고프스키 대로가 좀 생각나곤 한다. 게디미나스 대로가 네프스키 대로라면(그만큼의 상징성과 매력은 없다만) 필리모는 좀 썰렁하고 관광지는 없고 버스랑 차가 많이 다니는, 그리고 기차역으로 이어지는 길이라는 면에서. 그러나 물론 나는 리고프스키 대로를 좋아해본 적이 없고 자주 걸어다니지도 않았으며 어쩌다 거기 가게 되면 '으으 여기는 힘든 곳...' 하고 괴로워했는데 필리모는 엘스카 때문에, 그리고 다른 동네들로 갈 때 이어지는 길목이 되기 때문에 거의 매일 가는 곳이 되었다!
하여튼 이 커피 스펠은 재작년에 처음 왔을 때 영원한 휴가님이 적어주신 빌니우스 구시가지 쪽의 가볼만한 카페 리스트에 들어 있었는데 그땐 짧게 머물렀고 숙소에서도 가깝지 않은데다 관광지 쪽도 아니어서 결국 못 갔다. 커피 스펠과 테이스트 맵이 그런 곳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꼭 가봐야지 했는데 위치도 그렇고 이래저래 가는 게 쉽지 않았다. 그리고 구글맵의 사진을 보니 테이블과 의자가 좀 식당 같은 느낌이었고 브런치 위주로 바뀌어서 음식 냄새가 날것 같고 볕이 잘 안 드는 위치일 것 같아서 차일피일 미뤘다. 그러다가 '뭐 나 가고 싶은 데만 가지뭐, 엘스카랑 이딸랄라, 후라칸만 가도 뭐 어때' 하게 되었다가... 여행이 일주일밖에 안 남게 되자 '그래도 안 가보면 나중에 돌아갔을 때 아 그래도 가볼걸 하고 아쉬워할거야' 란 생각에 오늘 분연히! 버스를 타고 커피 스펠에 갔다.
여기는 정말 카페가 있을 법하지 않은 곳에 있다. 썰렁한 필리모 거리 한복판...보다는 조금 더 위에 있는데 건너편에는 시나고그가 있다. 그래서 창 너머로 시나고그가 보이는 것만이 이 카페의 위치적 장점인가 싶다. 영원한 휴가님 말씀으론 이 카페가 첨 생겼을 땐 테이블 위에 램프를 놓아두어서 어두운 겨울 아침에 지나가다 보면 창 너머로 램프 불빛이 새어나와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하셨는데 그 마음에 이입이 많이 된다. 어둡고 추운 겨울의 이른 아침, 컴컴한 건물들 사이로 창문을 희미한 오렌지빛으로 물들이며 스며나오는 램프 불빛만큼 사람을 끌어당기는 게 또 있을까?
카페 내부는 미니멀리즘과 식당 테이블의 결합처럼 느껴졌다. 맨벽과 바닥으로 이루어져 있고 장식도 거의 없었다. 카운터 뒤에 거대한 녹색과 청색 계열의 패널 같은 게 덧대어져 있는 것이 인테리어의 전부였다. 나는 그게 장식 패널이라 생각했는데(나올 때까지 끝끝내) 영원한 휴가님이 그건 이 건물의 옛날 벽면 일부를 그대로 유지한 채 카페가 들어온 거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듣고 사진을 잘 보니 정말 옛날 벽이었다. 칠 벗겨진 자리까지 그대로... 아아 나는 정말 뭘 보고 다니는 건가... 그런데 이 카페의 유일한 인테리어처럼 느껴지는 게 바로 이 옛날 벽임. 나에게는 좀 춥고 썰렁한 느낌이었다.
나는 카푸치노를 시켰다. 커피 스펠이라고 하니까 좀 궁금해서. 그리고 점심을 먹어야 하므로 커피를 조금만 마시고 디저트 같은 건 안 먹으려고. 카푸치노는 조금 썼지만 아주 진하지는 않았다. 설탕 투하.
카페는 조금 추운 편이었다. 처음엔 한적했지만 12시 무렵이 되자 사람들이 이어서 들어왔다. 대부분은 브런치를 먹었다. 팬케이크 종류와 베이글류, 샥슈카 등의 브런치가 많은데 사람들은 보통 팬케이크를 주문하는 것 같다. 나는 처음에는 홀에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가 시나고그가 잘 보이는 창가의 높은 바 테이블로 기어올라가 앉았다. 그쪽은 의자에 등받이가 없어 불편했지만 어차피 오래 앉아 있지는 않을 거라서. 근데 역시 책을 읽기엔 테이블이 나에겐 좀 높았다. 맨 위 사진이 기어올라간 창가 테이블. 대부분의 사람들은 브런치를 먹었으므로 아래 테이블들에 앉았다.
카푸치노는 반 잔쯤 마셨다. 이미 수차례 읽었던 책이라 가볍게 넘겨가며 읽었다. 오늘은 스트루가츠키가 아니라 하루키의 잡문집을 들고 왔다. 그 이유는... 맨 아래에도 사진이 있지만 여기가 문앞에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푸틴 쿨하다 생각하면 들어오지 마라' 고 적혀 있기 때문이다. 너무 단언적인 그 명령에 사실 '전쟁도 푸틴도 싫지만 이런 건 좀 불편하다' 라는 느낌에 커피 스펠에 오는 걸 미루게 된 것도 좀 있다. 하여튼 소심한 나는 '푸틴 편이라고 오해되면 우째, 노어로 된 책 들고 가서 당당히 못 읽겠어, 무싸와' 라는 생각에 우리말로 된 책 들고옴. 흑흑...
그리고 여기서 나는 막판에 화장실에 갇혀서 못나오는 줄 알았다. 빌니우스 카페들은 화장실에 가면 문 잠그고 열때 가끔 고생을 하는데, 여기도 그랬다. 분명히 한번 돌려서 잠갔는데 나가려고 아무리 돌려도 열리지 않음. 한번 돌려도 두번 돌려도 세번 돌려도 안 열리고... 침착하자, 다시 해보자, 열릴 것이다 하고 정말 스무번을 돌려도 안 열림. 허헉, 소리쳐야 하나... 열어달라고 도움을 요청? 밖에서 손잡이를 뽀개야 하나... 정말 너무 안열려서 고생고생했는데 어쩌다 막판에 열렸다. 이게 어쩌면 잠긴 건 열렸는데 내가 요령이나 힘이 없어서 손잡이와 문을 힘차게 팍 열지 못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그런 곳들도 많기 때문이다. 대체로 문이 무겁고... 하여튼 그래서 커피 스펠은 '화장실에 갇힐 뻔한 곳'으로 마지막 인상이 남아버릴 뻔 했는데 나갈 때 결국 그 '푸틴 좋으면 들어오지 마' 로 각인되었음. 이 카페는 나에게는 한번쯤 들르고 족한 카페로 남을 것 같다. 아래 사진들.
이게 필리모 거리 따라서 올라가다 보이는 모습. 간판도 작고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래도 오늘 오후까진 생각보다 해가 나서 좋았다.
내부. 첨에 앉았던 홀의 테이블. 설탕 투하 전의 라떼 아트가 살아있는 카푸치노.
정말 별 장식 없는 내부 공간. 나는 이 의자들이 너무 식당 느낌이라 맘에 안 들었는데, 생각해보니 프라하의 카피치코도 의자가 좀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카피치코는 좀 아기자기한 스타일이라서 다르긴 하다. 그리고 여기는 벽에 콘센트가 많았다.
카운터 뒤의 옛날 벽. 저렇게 버젓이 벗겨진 칠과 벽돌 등등 '나 옛날 벽이오' 하고 있고 심지어 안으로 들어가 있는데! 나는 저것을 장식 패널이라고 착각하고(패널이었으면 튀어나와 있어야 하는데)
가려져서 뭔지는 안보이지만 월요일 오전에 브런치를 먹으며 즐거운 사람들.
그런데 여기서 인상깊었던 점 하나. 내가 창가 테이블로 기어올라갔을 때. 특이하게 이 아래 벽에 콘센트와 함께 가방걸이가 있었다! 옷걸이라기에는 너무 낮게 달려 있어서 이것은 가방걸이가 분명했다. 우와 이건 너무 좋다! 안그래도 '가방을 바닥에 놓으면 부자가 될 수 없다!'라는 리투아니아의 전승에 대해 몇년 전 영원한 휴가님께 들은 이래 바닥에 가방 놓는 게 너무 신경쓰였는데... 그래서 빈 의자에 놓거나 심지어 내 등 뒤에 가방을 놓아야 했는데... 이거 세심하고 좋다. 커피 스펠에서 제일 맘에 들었던 건 바로 이거였습니다 :)
반쯤 마신 후 일어나면서 찍은 창가 사진. 이쪽에서 보면 시나고그가 안 보임.
하루키 잡문집은 어제도 얘기했듯 편차가 심한데, 특히 음악에 대한 얘기들은 좀 피곤하다(어쩌면 나랑 취향이 달라서 그럴테지만 이 사람은 재즈 얘길 하면 좀 스노브처럼 변함. 내용보다는 문체가...) 그러나 역시 글쓰기나 번역에 대한 쪽으로 가면 재미있다. 이 파트는 '언더그라운드'를 집필하는 과정과 인터뷰에 대한 이야기인데 사진의 저 부분은 읽을 때마다 '흐흑, 이입돼...' 상태가 되어서 찍어둠.
내부 모습 한 컷 더.
이게 그 푸틴 관련 문구. 영원한 휴가님이 '거기 이런 문구 적혀 있어요' 라고 말씀해주셔서 좀 그랬는데 들어갈 땐 이걸 못봐서 '그 문구 이제 없어요' 라고 알려드렸다. 그런데 나오면서 보니 여전히 있었다. 심적으로는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지만 아마도 저 문구의 단정적인 스타일 때문에 '쿨하다 생각하지 않고 전쟁도 푸틴도 지지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의 명령조 문구를 보면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막 생기진 않는걸' 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 같음. 그리고 맞은편엔 시나고그가 있고... 시나고그에는 가자에서 납치된 사람들을 돌려달라는 내용으로 추정되는 전단들이 붙어 있는데(아닐지도 모름. 자세히 안 봤음) 그렇게만 보기엔 또 팔레스타인에서 학살되고 있는 생명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니 여러 모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간판 사진으로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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