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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는 쉬었지만 이번주는 서무의 슬픔 새로운 에피소드를 올려본다. 35편!!

 

지난 에피소드에서 단추는 딸기 아가씨들로 변모한 미녀 3인방과 함께 바자회 부스를 운영하며 행복한 한때를 보냈고 왕재수는 이와 반대로 경매에 팔려 무시무시한 이리나에게 끌려가는 등 고난을 당했는데... 과연 이번 편에서는 딸기 아가씨들과 무지개 아줌마의 방해(!!) 없이 단추와 왕재수가 간만에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

 

그럼 재미있게 읽으세요~

 

 

** 중반부에 나오는 페치카는 러시아식 벽난로이다.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어느덧 베르닌도 3년차 직원이 되고 왕재수도 신작을 성공적으로 발표하는 등 가브릴로프 극장 감독으로서 자리를 잡은 듯하다. 그러나 직원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스페호프 국장은 다닐 베르닌이 서무 일에만 매진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에피소드 27. 밀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18
* 에피소드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별장 : http://tveye.tistory.com/3938
* 에피소드 29. 보랴의 생일 파티 : http://tveye.tistory.com/3957
* 에피소드 30.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78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1부) : http://tveye.tistory.com/3994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2부) : http://tveye.tistory.com/4013
* 에피소드 32. 왕자님과 호위 기사들 : http://tveye.tistory.com/4033
* 에피소드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1부) : http://tveye.tistory.com/4062
* 에피소드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2부) : http://tveye.tistory.com/4079
* 에피소드 33-1. 도자기 인형 : http://tveye.tistory.com/4098
* 에피소드 34. 딸기 아가씨들과 자선 바자회 : http://tveye.tistory.com/4140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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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35

 

 

 

 

 

서무의 슬픔

- 4월의 눈보라 -

 

 

 

 

 

 

 

바자회가 끝난 후 베르닌은 그야말로 산더미 같은 일에 파묻혔다. 매일 야근을 했고 주말에도 출근을 했다. 왕재수의 신작 때문에 계속 극장에 붙어 있었던 동안 다른 직원이 분담해서 처리했던 업무들은 여기저기 펑크가 나 있었고 스페호프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자 노발대발했다. 어쨌든 분장 상 베르닌의 업무이니 담당자가 모두 수습하라고 명령했다. 베르닌은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힘든 것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주말 내내 출근해서 녹초가 된 베르닌이 월요일 주간회의를 마친 후 터벅터벅 사무실로 내려가고 있는데 스페호프가 그를 국장실로 호출했다. 또 무슨 트집을 잡으려는지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국장이 예상치 않은 말을 했다.

 

 

“ 자네 바쁘겠지만 당장 검은 숲에 가줘야겠네. ”

 

“ 예? 무슨 일인가요? ”

 

“ 우리 안전가옥들 말일세. 보안 상태가 엉망이야. 얼간이 필로모프에게 일임했던 내 잘못이지. 글쎄 일요일에 가족과 함께 검은 숲에 드라이브를 갔다가 우연히 안전가옥 중 하나를 지나치게 되었지 뭔가. 그런데 자물쇠가 다 망가져 있고 안도 엉망이었어. 최근 누군가가 들락거린 게 분명해! 아무리 요즘 안전가옥을 이용하지 않는다 해도 그렇지. 내 이 일은 절대 그냥 넘어 가지 않아. 필로모프와 요원 지원팀에게 책임을 물을 거야. ”

 

 

 

베르닌은 망가진 자물쇠 얘기에 얼마 전 납치된 왕재수를 찾아 안전가옥들을 쑤시고 다녔던 게 생각나서 뜨끔했다. 들키면 어쩌지 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스페호프가 말을 이었다.

 

 

하여튼! 자네에게 안전가옥 자물쇠 수리와 내부 정리를 맡기겠네. 이것이야말로 가장 급한 일이야! ”

 

“ 하, 하지만... 제 업무는 서무와 야스민 감시인데 어째서... ”

 

“ 현장요원과 지원팀에겐 아침에 이미 근신 조치를 내렸기 때문에 업무에 투입시킬 수 없는 상황이야. 그러니 행정직에게 맡겨야 하는데 다른 직원들은 현장 업무와는 거리가 멀고, 자네는 야스민 감시를 하면서 비공식적으로 이미 현장요원의 길에 들어서 있지 않은가. 안전가옥 관리는 기밀 업무야.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지금 자네뿐이네. 그러니 영광스럽게 알고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게. 갈리나에게는 이미 자네에게 열쇠와 안전가옥 배치도를 내주라고 지시해 놓았네. 필요한 물품들도 갈리나가 내줄 걸세. 자물쇠 수리도 필요하지만 도청장치도 새로 부착해야 하니 시간이 꽤 걸릴 거야. 오늘은 검은 숲 쪽 안전가옥들을 처리하고 내일 시내 쪽을 마저 처리하게. 이것은 잡일이 아니야. 당과 KGB 미션을 수행하기 위한 중요한 업무일세! 그럼 어서 갈리나에게 가보게. 이상! ”

 

 

 

 

 

*   *   *

 

 

 

 

 

베르닌은 울며 겨자 먹기로 갈리나에게서 모든 물품을 수령하고 장부를 적었다. 곧장 차를 몰고 검은 숲으로 가려다가 마음을 바꿔서 집으로 향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자기 집이 아니라 왕재수의 집으로.

 

 

11시였지만 왕재수는 아직 자고 있었다. 월요일이라 극장 휴일이었기 때문이다. 베르닌이 깨우자 왕재수는 졸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웅얼댔다.

 

 

“ 너 왜 벌써 왔어? 잘린 거야? 벌목공... ”

 

아니야! 넌 왜 맨날 나만 보면 벌목공 타령이니. ”

 

“ 너 잘리면 벌목공 시킨다고 했잖아... ”

 

“ 어휴, 국장은 괜히 그 얘기 해가지고... 하여튼 아니야. 나 지금 검은 숲 가는데 너 빨리 일어나. 온천 데려다 줄게. 그 근처 지나가거든. ”

 

“ 으응... 온천 지난주에 갔다 왔잖아. ”

 

“ 의사 선생님이 너 매주 온천 가서 스파 치료 받으라고 했잖아. 내일부터는 다시 애들도 지도해야 되고 주말까지 발레 공연 올라가니까 시간 없잖아. 어차피 나 지금 검은 숲에 가야 하니까 데려다줄게. 반나절 동안 온천하고 치료 받고 내 차 타고 돌아오면 되잖아. 가자. ”

 

“ 으응... 온천은 좋은데 나 너무 졸려. ”

 

차에서 자!

 

 

스타브로프로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왕재수를 매주 1회 이상 온천 요양소에 보내라는 특명을 받은 베르닌은 이런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베르닌이 강경하게 나오자 왕재수는 졸음이 가득한 눈으로 잘 알아들을 수도 없는 원망을 늘어놓으면서도 침대에서 기어 나왔다. 대충 얼굴에 물을 끼얹고 양치질을 하면서도 온천은 혼자 가면 재미없다는 둥, 반나절만 하고 오는 게 무슨 온천이냐는 둥 종알댔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얇은 셔츠를 집어 드는 것을 보고 참견했다.

 

 

“ 따뜻하게 입어라, 오늘 엄청 추워. 어제까진 따뜻했는데... 비 쏟아질 것 같은 날씨야. 바람도 많이 불고. ”

 

“ 4월인데... 여기는 레닌그라드보다 따뜻한 줄 알았는데... ”

 

“ 꽃샘추위가 한 번씩 온단 말이야. 영하로 내려갈 때도 있어. 스웨터랑 두터운 재킷 입어. ”

 

 

왕재수는 잠이 덜 깨서 그런지 별로 저항하지 않고 스웨터를 겹쳐 입고 두툼한 재킷을 걸쳤다. 니트 스카프도 맸다. 목욕 용품을 챙기더니 비틀거리면서 베르닌을 따라 나섰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데 하늘이 어두컴컴해지면서 습하고 세찬 바람이 몰아쳤다. 막 배나무 거리를 빠져나가는데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왕재수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 지금 눈 오는 거야? ”

 

“ 어, 그러네... 에이, 진짜 가는 날이 장날이네. ”

 

“ 시골도 다 똑같아... 레닌그라드도 해 쨍쨍 났다가 갑자기 눈보라 몰아치는데. 시골 가면 날씨 좋으니까 요양해서 몸 좋아질 거라고 거짓부렁만 하고... 나쁜 아저씨들... ”

 

“ 야! 여긴 레닌그라드보다 공기가 좋잖아! 그 동네처럼 음습하지도 않고! ”

 

“ 눈 오잖아... 많이 올 거 같아. ”

 

“ 온천하면 좋을 거야. 너 눈 올 때 온천에 들어가는 거 좋다며. ”

 

“ 하긴 그렇긴 해. 너도 같이 가면 안 되니? ”

 

“ 난 안 돼. 국장이 짜증나는 일을 줬거든. ”

 

 

베르닌은 대충 이야기를 해주다가 그래도 안전가옥은 KGB 기밀인데 이렇게 왕재수에게 말해줘도 되나 하고 순간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왕재수는 별 관심 없어 보였다. 별 쓸데없는 일을 다 시킨다고 국장을 욕했을 뿐이었다.

 

 

점심시간이 다 된데다 왕재수도 빈속에 나와서 추울 것 같았기 때문에 베르닌은 대학교 근처 카페에 들렀다 가기로 했다. 뜨거운 차와 치즈빵, 조그만 그릇에 든 살랸카와 게살과 쌀밥이 섞인 샐러드를 주문했다. 왕재수는 아니나 다를까 차만 마시고 다른 것은 안 먹으려고 했다. 베르닌은 수프와 빵과 샐러드 중 최소 두 가지를 먹지 않으면 차는 한 방울도 마실 수 없다고 협박했다. 왕재수는 독재자라느니 악마라느니 하고 짜증을 냈지만 살랸카를 먹고 조그만 치즈빵도 두 개 먹었다.

 

 

“ 너 왜 샐러드 안 먹어? 게살 쌀밥 샐러드 좋아했잖아. ”

 

“ 차갑잖아. 추워서 먹기 싫어. ”

 

“ 추위 잘 안 타면서. ”

 

“ 그러게. 근데 오늘은 먹기 싫어. 추워. 빨리 온천 들어가고 싶어. ”

 

 

베르닌은 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왕재수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 열은 안 나네. 빈속이라 추운 거야. 수프 다 먹어. ”

 

“ 너는 안 먹어? ”

 

“ 치즈빵도 네 개나 먹었고 너 덕분에 샐러드도 내가 다 먹어야 되잖아! ”

 

“ 문 고치고 청소하려면 많이 먹어야 하잖아. 고기 같은 거 시켜먹어. ”

 

“ 난 아까 나오면서 닭꼬치도 한 개 먹었어. 수프 다 먹었니? 잘했구나, 이제 차 마셔. ”

 

 

왕재수는 차를 마신 후에야 좀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베르닌은 안전가옥에서 일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피곤이 몰려왔다. 일하다 먹으려고 물 한 병, 초코바 두 개를 샀다. 그 와중에 카운터의 아가씨가 왕재수를 보더니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사과를 세 알이나 건네주었다.

 

 

카페를 나오니 눈보라가 본격적으로 몰아치고 있었다. 금방 그칠 것 같지 않았다. 굉장히 추웠다. 순간 베르닌은 국장의 명령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국장에게 볶이는 게 무섭기도 했고 그간 하도 몸과 마음을 혹사당해서 온천 요양소에 한 달쯤 처박아놔도 모자랄 것 같은 왕재수를 보니 측은해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   *   *

 

 

 

 

 

검은 숲으로 접어들었을 때 베르닌은 자신의 결심을 매우 후회하고 있었다. 눈보라는 멈추지 않았다. 태풍처럼 몰아치던 바람은 약간 잦아들었지만 대신 눈발이 더욱 굵어지더니 왕재수의 말에 따르면 ‘아기 주먹만한’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공중에서 포크레인으로 눈을 쏟아 붓는 것 같았다. 수도원을 지나친 후에는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앞이 안 보일 지경이었다. 운전이라면 베르닌을 무한 신뢰하는 왕재수조차도 걱정이 되었는지 그냥 차 돌려서 나가면 안 되느냐고 물었다.

 

 

“ 어... 그러는 게 좋을 것 같긴 한데 문제는 지금 차를 돌릴 수가 없어. 길이 너무 좁아서 옆으로 빠져야 하는데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바퀴에 체인도 안 감았고... ”

 

“ 그러면 지금 체인 감으면 안 돼? ”

 

“ 겨울 지나고 트렁크에서 체인 빼버렸어... 조금만 더 가보자. 길 좀 넓어지면 차 돌려볼게. 아무래도 안 되겠다. 앗, 너 안전벨트 왜 안 맸어! 길 미끄럽단 말이야! ”

 

“ 벨트하면 너무 답답해서... 묶이는 거 싫어. ”

 

“ 벨트는 안전을 위해서 매는 거잖아. 누가 널 묶는 게 아니야. ”

 

“ 그래도 싫은데... ”

 

 

베르닌이 확 째려보자 왕재수가 울상을 지으며 안전벨트를 주섬주섬 맸다. 그 사이에도 눈은 계속 쏟아져서 타이어가 푹푹 파묻히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 아이 참, 이거 꼭 그때 같아. 얼음물에 빠졌을 때. 그때도 눈 와서 엔진 멈췄잖아. 또 그러면 어떡해. ”

 

“ 아니야, 그러고 나서 엔진 고쳤으니까 멈추진 않을 거야. 조금만 더 가면 차 돌릴 수 있는 길 나올 거야. ”

 

 

그때 눈의 무게 때문에 앞에 있던 나무의 가지가 부러지면서 앞창을 철썩 때렸다. 어찌나 세게 쳤는지 창에 금이 갔다. 베르닌은 놀라서 핸들을 옆으로 꺾었지만 그것은 그의 실수였다. 눈 때문에 타이어가 미끄러지더니 차가 빙그르르 돌며 옆으로 내달았다. 다행히 뒤집어지지는 않았지만 차체가 심하게 옆으로 기울더니 거세게 돌면서 미끄러져 옆에 있던 커다란 전나무를 들이받았다. 끼이익 콰쾅 소리가 울려 퍼졌고 무거운 것이 확 달려들며 덮치는 느낌이 났다. 한순간 베르닌의 눈앞에 별이 번쩍하더니 암흑처럼 캄캄해졌다. 왕재수의 비명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온 것 같았다.

 

 

 

으아아, 다닐!

 

 

 

비명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정신을 차렸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다리가 너무 아팠다. 뭔가 무거운 것이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끙끙거리며 베르닌은 다리를 빼내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너무 아팠다.

 

 

“ 으으... ”

 

“ 정신 들어? ”

 

“ 어... 응... 너 괜찮아? ”

 

“ 나 괜찮아. 너도 괜찮을 거야. 잠깐만 가만히 있어. ”

 

 

베르닌은 왕재수의 목소리와 말투가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평상시 같으면 짜증내고 꾸짖을 게 뻔한데 지금은 너무 침착하고 온순한 말투였기 때문이다. 왕재수는 무슨 문제가 있을 때만 그런 식으로 말하는 놈이었다.

 

 

베르닌은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서서히 시야가 밝아졌다. 차는 옆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채 전나무에 범퍼를 박고 있었다. 다리가 아픈 것도 당연했다. 운전석 쪽 문짝이 반쯤 떨어져 나와 그의 두 다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깨진 창문 파편이 반짝이고 있었는데 그 중 몇 개에 발목도 벤 것 같았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나마도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곳은 다치지 않았다.

 

 

“ 너는... 넌 괜찮아? 안 다쳤어? ”

 

“ 응. 네가 벨트 채워줘서 안 다쳤어. 어깨만 좀 부딪친 정도야. 어휴, 진짜 시골이야. 웬 눈이 이렇게 오는지... 너 머리는 괜찮아? 어지럽진 않아? ”

 

“ 응. 근데 다리... ”

 

“ 가만히 있어. 내가 문짝 떼어줄게. 지금 함부로 움직이면 다리 더 다쳐. ”

 

 

왕재수가 안전벨트를 풀고는 차 밖으로 나갔다. 옆으로 돌아서 운전석 쪽으로 왔다. 낑낑거리며 차를 옆으로 좀 밀어내서 공간을 확보했다. 그리고는 문짝을 잡아당겨서 바깥으로 열었다. 아래가 반쯤 떨어져나갔기 때문에 다 열리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베르닌은 다리를 빼낼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다리를 빼내자 너무 아파서 소름이 돋았다.

 

 

“ 으윽... 너무 아파. 못 움직이겠어. 부러졌으면 어떡하지... ”

 

 

베르닌은 더럭 겁이 났다. 왕재수는 베르닌의 발목과 다리를 꾹꾹 눌러보고 만져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안 부러졌어. 삔 거야. 어느 쪽이 더 아파? ”

 

“ 왼쪽. ”

 

“ 그래, 그쪽이 더 심하게 끼어 있었으니까. 거긴 뼈에 금 갔을 수도 있겠다. 억지로 움직이면 안 돼. 가만히 있어. ”

 

 

왕재수는 운전석 시트를 뒤로 젖혔다. 베르닌의 두 다리를 조심스럽게 펴고는 무릎과 발목에서 반짝거리는 유리 파편을 털어냈다. 손수건을 꺼내서 피가 맺혀 있는 오른쪽 발목부터 동여맸다.

 

 

“ 유리가 박힌 건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냥 좀 벤 거야. 일단 지혈해야 되니까 묶어놓을게. 피 많이 안 나니까 금방 멎을 거야. ”

 

 

왕재수는 베르닌에게 다리를 조금씩 움직여 보게 했다. 오른쪽은 그래도 구부리거나 움직일 수 있었지만 왼쪽은 너무 통증이 심했다. 왕재수는 밖으로 나가더니 굵은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왔다. 베르닌의 왼쪽 무릎 아래에 나뭇가지를 대고 자기 스카프로 묶어 고정시켰다.

 

 

“ 나랑 자리 바꿔야 돼. 너 지금 운전하면 안 되니까. ”

 

“ 네가 어떻게 운전을 하니. 멀쩡한 길에서도 들이받으면서. ”

 

“ 그래도 여기 빠져나가야 되잖아. 눈도 이렇게 많이 오는데 어떻게 여기 그냥 있어. 창문도 깨지고 문짝도 반쯤 떨어져서 바람도 들어오고 네 차 난방도 안 되잖아. ”

 

“ 그건 그렇지만... ”

 

 

베르닌은 혹시나 해서 시동을 걸어보았다. 걸리지 않았다. 그러더니 엔진 쪽에서 불길한 퍽 소리와 푸시시 소리가 났다.

 

 

“ 고장 났어. 너무 세게 박았나봐. 눈이 빨리 그쳐야 할 텐데. ”

 

“ 안 그칠 것 같아. 하늘 좀 봐. ”

 

 

왕재수의 말이 맞았다. 하늘은 완전히 잿빛이었다. 바람은 좀 덜했지만 함박눈은 점점 더 심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공기도 아주 차가웠다.

 

 

“ 여기서 온천은 멀어? ”

 

“ 응, 한참 더 가야 돼. ”

 

“ 그러면 안전가옥인지 뭔지 하는 건? 너 거기 간다 했잖아. 가까이 있으면 그런 데라도 들어가 있으면 안 될까? ”

 

“ 안전가옥도 훨씬 더 가야 돼. 앗, 잠깐! 그래... 안전가옥 가는 길에 벌목공 숙소가 하나 있었어. 이 근처였던 거 같은데... 잠깐만 기다려봐. ”

 

 

베르닌은 안전가옥 지도를 꺼냈다. 얼마 전 왕재수를 찾아 안전가옥들을 쑤시고 다닐 때 벌목공 숙소 하나를 지나친 적이 있었다. 그의 기억이 맞다면 분명 이 근처였다.

 

 

“ 맞아, 전나무에 빨간 리본이 달려 있었는데... 그 나무 옆에 있었는데... 눈 때문에 안 보이네... ”

 

빨간 리본 달린 전나무 찾으면 되는 거야? ”

 

 

왕재수가 밖으로 나가더니 잽싸게 차 위로 기어 올라갔다. 지붕 위로 올라가더니 매처럼 주변을 살폈다. 펄쩍 뛰어오르기까지 해서 차가 심하게 흔들렸다. 갑자기 왕재수가 환호했다.

 

 

찾았다! 서쪽이네. 그쪽으로도 길 나 있어? ”

 

“ 응. 근데 이렇게 차가 제대로 다니는 길은 아니고, 벌목공들이 낸 오솔길 같은 거 있었어. ”

 

“ 그래, 그러면 거기로 가자. ”

 

그치만... 여기서 보는 거랑 거리가 다를 거야. 많이 걸어야 할 텐데... 나는 지금 못 걸을 거 같아. 나 그냥 여기 놔두고 너만 가. 거기 사람들 있으면 도와 달라 하면 되잖아. ”

 

“ 미쳤냐, 눈이 이렇게 많이 오는데 너 여기 놔두고 갔다가 얼어 죽으라고? 차 위에서 빨간 리본 전나무 보이는 걸로 대충 계산하면 그냥 걸어가면 15분 거리밖에 안 돼. 근데 지금은 눈도 오고 너도 다리 못 쓰니까 적어도 30분쯤은 걸리겠다. ”

 

 

베르닌은 대체 어디서 그런 계산이 나오는지 이해가 안 갔지만 왕재수가 운동 신경과 마찬가지로 공간과 방향 지각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를 걱정하게 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 그래도... 날 어떻게 데려가려고 그러니. 너 나 업고 못 가. 지금 눈까지 오잖아. 지난주에 입원도 했으면서. ”

 

안 업어! 근육 미워져. 썰매 태워서 갈 거야!

 

 

 

왕재수가 차 뒤로 갔다. 잠시 달그락거리고 끙끙대더니 차 트렁크 문짝을 떼어냈다. 문짝을 눈 쌓인 바닥 위로 내던지더니 베르닌에게 벨트를 풀어달라고 했다. 자기 벨트도 풀었다. 또 잠시 달그락거리고 탁탁거리더니 문짝 양쪽에 벨트를 연결해서 고리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베르닌을 부축해서 밖으로 끌어냈다.

 

 

“ 너 이 위에 앉아. 내가 끌고 갈 거야. ”

 

“ 무거운데 어떻게 끌고 가... 나 80킬로 넘는데... ”

 

“ 다이어트 좀 하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아직도 80킬로... 으윽... ”

 

 

왕재수는 투덜대면서도 베르닌을 문짝 위에 앉혔다. 그리고는 시험 삼아 벨트를 잡아당겨 끌어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 길이가 모자라네. 끌고 가기 힘든데... ”

 

“ 저기, 트렁크 안쪽에 밧줄 뭉치 있을 거야. 저번에 발따예프 이사 간다고 도와줄 때 쓰고 넣어놨어. ”

 

 

왕재수는 좋아하면서 밧줄을 찾아냈다. 또 꼼지락꼼지락 벨트와 밧줄을 연결하더니 매듭을 짓고 고리를 만들어서 멜빵처럼 자기 몸에 얽어맸다. 그리고는 문짝 썰매를 끌기 시작했다.

 

 

“ 으윽, 진짜 무거워! 살 좀 빼! ”

 

“ 미안해. 저, 내가 팔로 이렇게 눈을 헤치면서 가볼까? ”

 

“ 아니야! 가만 있어! 너는 그냥 힘 빼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게 나 도와주는 거야! ”

 

 

베르닌이 앉아 있는 문짝을 질질 끌고 가면서 왕재수는 이따금 ‘시골’ 운운하며 투덜댔지만 곧 입을 다물었다. 눈이 너무 많이 왔기 때문이다. 베르닌은 눈 때문에 앞이 하나도 안 보였다. 왕재수의 뒷모습조차도 흐릿했다. 왕재수는 10분쯤 기세 좋게 나아가다가 숨을 헐떡이며 잠시 멈춰 섰다. 그러더니 나뭇가지에 쌓인 눈을 움켜서 정신없이 먹었다. 베르닌은 너무나도 미안한 마음에 아픈 것도 다 잊었다.

 

 

“ 있잖아... 너 혼자 뛰어가면 금방 거기 도착할 거 아냐. 거기서 사람들 불러오면 되잖아. 나 여기 놔두고... ”

 

아니, 같이 갈 거야! 힘들어서 멈춘 거 아니야. 목 말라서 그런 거야. 아, 알았다.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무거웠구나. ”

 

 

 

왕재수는 밧줄과 벨트를 만지작거리며 길이를 조절하더니 다시 문짝 썰매를 끌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훨씬 속도가 빨랐다. 베르닌은 아무 것도 안 보였고 길도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지만 왕재수는 놀랍게도 정확하게 벌목공들의 오솔길을 찾아내서 나아갔다. 두어 번 깊게 쌓인 눈에 푹 빠져서 넘어질 뻔했지만 금세 다시 일어났다. 트렁크 문짝은 작고 좁았기 때문에 베르닌은 간신히 앉아 있었다. 아픈 쪽 다리는 왕재수가 문짝에 동여매서 그나마 나았지만 오른쪽 다리는 질질 끌렸다. 너무나 추웠고 눈 때문에 머리가 멍멍해서 베르닌은 하마터면 깜박 잠들 뻔했다. 왕재수가 소리를 질렀다.

 

 

야! 자면 안 돼! 다 왔어, 저기 빨간 리 보이잖아! 아, 저기구나! 나무 뒤에 통나무집 있다! ”

 

 

베르닌은 눈을 비볐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함박눈 때문에 희끄무레한 잿빛 커튼이 드리워져 있는 것 같았다. 다시 눈을 비비자 빨간 리본이 보였고 그 뒤로 통나무집이 보였다. 졸음이 사라지면서 순간 다시 발목과 다리의 통증이 되살아났다. 왕재수는 문짝 썰매를 통나무집 앞까지 끌고 갔다. 그리고는 밧줄 멜빵을 벗어던지고는 곧장 문으로 달려가 쾅쾅 두들기며 사람을 불렀다. 아무런 답이 없었다.

 

 

“ 그래, 없을 줄 알았어. 사람 있었으면 연기가 났을 거야. 근데 아까도 빨간 리본만 보이고 연기는 안 났거든. ”

 

“ 그럼 어쩌지... 문 잠겼을 텐데. ”

 

“ 열면 되지 뭐. ”

 

 

왕재수는 핀을 꺼내지도 않았다. 문고리와 빗장을 조금 딸깍거리는가 싶더니 발로 문을 차서 열었다. 베르닌은 투레츠키가 왕재수에게도 동업을 제의했던 이유가 이런 건가 하는 뜬금없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   *   *

 

 

 

 

 

 

벌목공 숙소는 비어 있었다. 일기예보를 보고 일찌감치 철수한 모양이었다. 통나무집은 작았지만 있을 건 다 있었다. 조그만 광 같은 방이 딸린 부엌과 거실이 하나로 붙어 있었고 침실은 따로 없이 구석에 작은 철제 침대 세 개가 놓여 있었다. 광문 높은 곳에는 엽총도 한 자루 걸려 있었다. 페치카 벽난로가 있었고 옆에는 장작이 잔뜩 쌓여 있었다. 현관 맞은편의 작은 문을 열자 화장실과 사우나가 딸린 작은 별채가 앙증맞게 붙어 있었다. 왕재수는 현관 밖에서 눈을 떨어냈다. 베르닌의 머리와 어깨, 옷에 잔뜩 내려앉은 눈도 모두 털어준 후 그를 부축해 침대로 데려갔다. 베르닌을 앉히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 너한테는 침대 너무 좁구나. 잠깐만. ”

 

 

왕재수는 옆에 있던 침대를 하나 더 끌어다 붙여놓았다. 베르닌에게 잠시 앉아서 숨 돌리라고 한 후 왕재수는 찬장을 열어보았고 고개를 저으며 광을 열었다. 뭔가를 한참 뒤적뒤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에는 조그만 구급상자가 들려 있었다.

 

 

“ 벌목공들 숙소라서 다행이다. 안전가옥인지 뭔지였으면 약상자 없었을 거 아니야. ”

 

 

왕재수는 베르닌의 신발과 바지를 벗기면서 투덜댔다.

 

 

“ 에이, 응응도 아닌데 남의 바지 벗기는 거 재미없어. ”

 

“ 야! 너는 이 상황에서도 그런 생각이 드냐! ”

 

“ 그러면 안 드냐! 난 신체 건강하고 욕구가 왕성한 젊은 남자인데!

 

“ 보통의 욕구 왕성한 젊은 남자는 남자 바지 벗기면서 그런 생각 같은 거 안 하거든요! ”

 

난 ‘보통’으로 살아본 적 없거든요!

 

 

왕재수는 급하게 바깥 별채에 가서 비누를 가져왔다. 좁은 싱크대에서 손을 박박 씻었다. 베르닌의 오른쪽 발목에 묶었던 손수건을 풀고는 피가 멎었다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독을 했다. 유리에 벤 상처가 너무 따가워서 베르닌은 비명을 꾹 참았다. 거즈를 벤 상처에 대고 반창고를 붙인 후 왕재수는 이제 왼쪽으로 옮겨갔다. 부어오른 발목과 종아리를 살피더니 다시 조심스럽게 꾹꾹 누르면서 아픈 곳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 아야, 거기 아파. ”

 

삔 거네. 이쪽 뼈 좀 어긋난 것 같아. 맘 같아서는 내가 맞춰주고 싶은데. ”

 

“ 너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

 

“ 나 무용수였잖아. 밥 먹듯 다치고 밥 먹듯 마사지하고. 마사지해주던 아저씨한테 많이 배웠어. 그리고 안무 시작하면서 해부학도 좀 배웠고. 극장에 있을 땐 동료들 삐끗하면 가끔 응급처치 해주고 그랬어. ”

 

“ 그러면 나한테도 해주면 되잖아. 왜 망설이는데? ”

 

“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너 더 아프면 어떡해. ”

 

“ 무용수들한테는 해줬다며. 그땐 그런 생각 안 했을 거 아냐. ”

 

“ 다르지! 걔들이랑은 춤추는 게 우선이니까. 걔들도 나 믿었고. 근데 너는... 모르겠네. 너 더 아플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

 

“ 나도 너 믿어. 아파도 할 수 없지 뭐. 지금도 아픈걸. ”

 

 

왕재수는 잠깐 베르닌을 빤히 쳐다보더니 발목을 잡고 아무런 경고도 없이 홱 비틀었다.

 

 

으아악!

 

“ 아플 거라고 했잖아. ”

 

으악, 이렇게 아플 줄은 몰랐어!

 

“ 한 입으로 두말 하지 마! ”

 

 

왕재수는 베르닌의 발목을 손바닥으로 살살 문질러 주었다. 여전히 아팠지만 놀랍게도 아까처럼 꼼짝달싹 못할 정도는 아니었고 심지어 조금씩 움직일 수도 있었다. 베르닌이 일어서 보려고 하는데 왕재수가 막았다.

 

 

“ 안 돼. 혹시라도 잘못될 수도 있으니까 일어나면 안 돼. 그냥 앉거나 누워 있어야 돼. ”

 

 

그리고는 왕재수가 붕대를 아주 단단하게 감아 주었다. 붕대를 감자 통증이 둔해졌다. 왕재수는 둘둘 말려 있던 담요를 펼쳐서 베르닌의 맨 다리를 덮어주고 그의 뺨과 이마에 난 유리 상처를 소독해주었다.

 

 

“ 그래도 다행이다, 스치면서 조금씩 찢어진 정도라서. 유리 조각 눈에라도 들어갔으면 어쩔 뻔 했니. 진짜 큰일 날 뻔 했어. ”

 

“ 내가 운전 실수해서 그래. 그래도 너 안 다쳐서 다행이다. ”

 

아니야! 네가 운전 실수한 거 아니야! 네 차가 후져서 그래!

 

“ 야, 그래도 내가 아끼는 차란 말이야. 어휴, 수리비 진짜 많이 나오겠네. 트렁크 문짝까지 떼어냈으니... 눈 맞아서 완전히 고장 나면 어쩌지. ”

 

잘됐네! 이 기회에 새 차 사! 어휴, 망할 놈의 지굴리. 옛날에 폐차시켰어야 하는 고철이잖아!

 

“ 야, 내가 너처럼 잘 나가는 극장 임원이냐! 난 말단 사무직이라고! 그 지굴리도 얼마나 큰맘 먹고 장만했던 건데! ”

 

“ 내 차 줄게 그거 끌어! ”

 

“ 내가 왜 네 차를 끌어! ”

 

“ 어차피 나 출퇴근시켜줘야 되잖아! 난 운전도 안 하는데. 아, 근데 여기 춥다... 통나무 사이로 바람 들어와... 문 쪽으로는 눈도 들이치네. ”

 

“ 벌목공들도 하루 이틀씩만 묵는 곳이라 그래. 여기는 다차랑 비슷해서 난로에 불 넣어야 따뜻해져. 너 페치카에 불 피워봤어? ”

 

“ 아니. 다차는 많이 가봤지만 당연히 내가 피우진 않았지. 난 어딜 가나 시중만 받았단 말이야! ”

 

“ 에휴, 어련하겠냐. 내가 피울게. 팔만 좀 잡아줘. ”

 

“ 안 돼! 너는 움직이면 안 돼! 어떻게 하는지 알려줘! ”

 

 

 

다행히 광에 성냥이 있었다. 왕재수는 그래도 베르닌의 지시를 더듬더듬 따랐다. 굴러다니던 잡지 몇 장을 뜯어 불을 붙여서 페치카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장작을 넣고 잡지로 열심히 부채질을 했다. 처음에는 불이 제대로 올라오지 않았다. 장작을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기 때문이다. 베르닌이 참을성 있게 장작 쌓는 법을 알려주자 왕재수는 괴로워하면서도 하나하나 따라했다. 오랜 시간 끝에 마침내 난로에 불이 일었다. 왕재수는 빈 침대 하나를 질질 끌어다 난로 앞에 갖다 놓고는 베르닌을 부축해서 그쪽으로 앉혔다. 그리고는 다른 침대도 전부 끌어다 놓았다. 몸이 따뜻해지자 살 것 같았다.

 

 

둘은 불을 쬐며 잠시 멍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왕재수가 조그만 창문 너머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 눈이 더 많이 오네... 안 그칠 것 같아. ”

 

“ 그러네. 오늘은 여기서 자야 할 수도 있겠다. ”

 

“ 내일 아침엔 나갈 수 있을까? 나 극장 가야 하는데. 할 거 진짜 많은데. ”

 

“ 나도... 일 진짜 많이 밀려 있어. 망할 놈의 국장. ”

 

“ 온천 가려고 나온 건데 이게 뭐야. 시골... ”

 

 

왕재수가 한숨을 폭 쉬더니 기침을 콜록콜록 했다. 춥다면서 보풀이 잔뜩 인 담요를 뒤집어쓰고 난롯가에 바짝 다가앉았다. 베르닌은 걱정이 되었다.

 

 

‘ 저 녀석 원래 추위 나보다 훨씬 잘 견뎠는데. 신작 준비 때문에 너무 무리했나봐. 납치까지 겪고. 아까도 눈이랑 바람 다 맞으면서 나 태운 썰매 끌고 오고... 저러다 또 폐렴 도지면 어떡하지. ’

 

 

왕재수는 잠깐 불을 쬐더니 일어났다. 찬장을 뒤지더니 좋아하며 플라스틱 컵에 들어 있는 홍차 티백들을 찾아냈다. 주전자를 들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 수돗물 그냥 받아서 끓여도 되나? ”

 

“ 어... 글쎄. 검은 숲 쪽 물은 깨끗하긴 한데... 수도 파이프가 문제야, 녹이 슬어서. 나는 괜찮지만 너는 함부로 마시면 안 될 거야. 의사 선생님이 너한테 살균한 거 먹으라고 했잖아. 차라리 밖에 가서 눈을 떠오는 게 나을 거야. ”

 

“ 에이... 물도 가려 마셔야 되고 레닌그라드랑 똑같네. ”

 

“ 레닌그라드는 공기가 나빠서 눈도 못 받아먹을 걸! ”

 

“ 칫. ”

 

 

왕재수는 주전자를 들고 밖으로 나가서 눈을 떠왔다. 하지만 어떻게 물을 끓여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통나무집에는 가스렌지도 없었고 버너도 없었기 때문이다. 베르닌은 페치카를 가리켰다.

 

 

“ 저기 위에 고리 있잖아. 거기 주전자를 걸면 돼. ”

 

“ 아, 그렇구나. ”

 

 

물은 금방 끓었다. 왕재수는 스카프로 손잡이를 감싸서 조심조심 주전자를 내렸지만 차를 우리는 일생일대의 대과제에 직면하자 공포에 질리고 말았다. 잔뜩 울상이 된 왕재수의 얼굴을 보자 어쩐지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베르닌은 꾹꾹 참으면서 차는 자기가 우려 줄 테니 컵과 설탕만 좀 찾아오라고 했다. 왕재수가 좋아라고 이 빠진 머그 두 개와 설탕 깡통, 숟가락을 가지고 왔다.

 

 

베르닌은 침대에 앉은 채 주전자에 홍차 티백을 넣고 우렸다. 싸구려 티백이라 금방 진해졌기 때문에 3분이 미처 되기 전에 티백을 빼냈다. 컵에 차를 각각 따른 후 숟가락으로 설탕을 펐다. 왕재수에게 묻지도 않고 양쪽 컵에 모두 설탕을 가득 부었다. 왕재수가 눈이 등잔만해지면서 막 성질을 부리려는 찰나 베르닌이 엄하게 말했다.

 

 

“ 지금은 설탕 넣어서 마셔야 돼. 눈 맞아서 춥잖아. 빨리 몸을 데워야 된단 말이야. 에너지도 필요하고. 잔말 말고 주는 대로 마셔. ”

 

“ 악마. 독재자. ”

 

 

그러면서도 왕재수는 설탕 잔뜩 넣은 차를 후후 불어가며 마셨다.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조그맣게 한숨을 포르르 내쉬기도 하고 목을 울리며 ‘아이, 뜨거워’ 하고 종알거리기도 하고 눈웃음을 짓다가 나직하게 외국어로 된 노래를 두어 소절 흥얼대기도 했다. 베르닌은 발목도 퉁퉁 붓고 삭신이 쑤셨지만 왕재수가 그러는 것을 보니 어쩐지 기분이 좋아져서 폭설로 숲속에 갇힌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마저 슬며시 들었다. 왕재수가 그렇게 해맑은 미소를 짓고 노래를 불렀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가물거렸다. 왕재수가 찻잔을 내려놓더니 담요에서 빠져나왔다.

 

 

“ 이제 따뜻해. 땀 나. ”

 

“ 거봐, 설탕 넣은 차 마셔서 그런 거야. 추우면 있다가 다시 타줄게. ”

 

“ 좀 움직여야겠어. 80킬로 끌고 오느라 근육이 뭉쳤어. ”

 

 

왕재수는 스웨터를 벗더니 셔츠 바람으로 좁은 거실을 왔다갔다 했다. 그러더니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엎드린 채 왕재수가 두 다리를 180도로 찢으며 몸을 앞으로 접는 것을 경이로운 눈으로 구경했다. 볼 때마다 너무나 신기했다. 왕재수는 한참 동안 스트레칭을 하더니 간단한 스텝을 밟으며 춤을 조금 췄다. 베르닌의 눈에도 익은 동작이었다. 얼마 전 올렸던 신작에 나온 동작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니스와 가릭이 췄을 때보다 훨씬 가볍고 우아해 보였다. 넋을 놓고 보다가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그때 바질 멋있었는데. 그거 다시 보여주면 안 되니? ”

 

“ 그건 좁아서 안 돼. ”

 

“ 도는 것만이라도... ”

 

“ 내가 무슨 서커스꾼이냐. ”

 

 

투덜대면서도 왕재수는 기분이 별로 나쁘지 않았는지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한쪽 발로 서서 다른 쪽 다리를 바깥으로 차면서 기운차게 돌았다. 베르닌은 박수를 짝짝 쳤다.

 

 

“ 와, 진짜 멋있어. 다시 봐도 대단해. 그때 관객들도 진짜 좋아했는데. ”

 

“ 관객들은 원래 이런 거 좋아해. 높이 뛰고 빨리 도는 거. 근데 이런 건 수명이 있으니까... 나이 들면 힘 딸려서 못해. ”

 

“ 넌 아직 어리잖아. ”

 

“ 그래봤자 스물다섯 넘었잖아. 예전만큼 높이 못 뛰어. ”

 

“ 그건 수용소 때문... ”

 

“ 그거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야. 무용수들은 일 년 일 년이 달라. 그래도 서른까진 눈에 안 띄지만 그 나이 넘어가면 테크닉이랑 연기로 더 벌충해야 돼. ”

 

“ 그렇구나. ”

 

“ 뭐 나랑은 상관없는 얘기지만. 난 은퇴했으니까. ”

 

“ 은퇴 무르면 되잖아. ”

 

“ 칫, 바보 멍충이. 아무 것도 모르면서. ”

 

 

왕재수는 다시 느릿느릿한 동작을 추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엎드려서 춤을 구경하다가 난롯가의 온기에 온몸이 노곤해져서 스르르 잠이 들었다.

 

 

 

 

 

*   *   *

 

 

 

 

 

 

깨어나니 이미 컴컴해져 있었다. 시계를 보니 저녁 7시였다. 발목은 여전히 부어 있었다. 그때 왕재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찬바람과 함께 눈발이 날려 들어왔다. 왕재수가 재채기를 하면서 머리와 어깨에서 눈을 떨어냈다.

 

 

“ 앗, 너 어디 갔다 오는 거야! ”

 

“ 차에 가서 우리 가방 가지고 왔어. 아무래도 오늘 여기서 자야 할 것 같아서. ”

 

“ 위험하게 혼자 나갔다 오면 어떡하니. 이렇게 추운데. 눈도 많이 오고. ”

 

그러니까 더 캄캄해지고 추워지기 전에 갔다 온 거야. 눈 계속 와. 차도는 다 얼었고 오솔길 쪽도 금방 얼어붙을 거 같아. 눈이 여기까지 쌓였어. 이거 봐. ”

 

 

 

왕재수가 허벅지 아래까지 젖어버린 바지를 가리켰다.

 

 

 

“ 너 빨리 옷 벗어라. 감기 걸린단 말이야. 바지는 이쪽으로 줘, 말리게. ”

 

 

왕재수는 바지와 양말, 신발을 전부 벗어서 페치카 앞 의자에 널었다. 그리고는 급하게 침대로 올라와서 담요를 뒤집어썼다. 베르닌은 비틀거리면서 고리에 걸려 있던 주전자를 내렸다. 왕재수가 함부로 걷지 말라고 흘겨보았다.

 

 

“ 괜찮아. 오른쪽 발로 디디면 조금씩은 견딜만 해. ”

 

 

차를 우려주고 설탕을 타 주자 왕재수가 후후 불며 급하게 마셨다. 춥긴 추웠던 모양이었다. 뺨과 코가 빨갰다.

 

 

“ 가방은 뭐하러 가지러 갔니. 오늘 밤만 자면 괜찮을 텐데. 그 가방에 뭐가 있다고. ”

 

바보, 눈 오는 거 보니까 우리 잘못하면 내일도 못 나간단 말이야. 여기 전화도 없잖아.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차는 들어오지도 못해. 그나마 내가 운동 신경이 좋으니까 눈 헤치고 걸어온 거지. 나 여기 온 거 아무도 모르잖아. 그렇다고 스페호프가 너 찾으러 사람 보내겠냐? ”

 

“ 그런가... 내 가방엔 망치랑 자물쇠랑 서류 뭉치랑 뭐 그런 거밖에 없어. 별 필요도 없는 건데... 네 가방엔 뭐 있는데? ”

 

“ 수건, 비누, 칫솔, 샴푸, 화장품, 속옷이랑 셔츠, 양말... ”

 

“ 으윽, 그럼 별로 도움 되는 거 아니잖아! 먹을 게 있어야지! 그런 걸 가지러 눈 맞으면서 밖에 갔다 왔단 말이냐! ”

 

“ 야, 온천 가려고 나온 거니까 당연히 목욕 준비만 해가지고 왔지! 그리고 밖에서 자니까 당연히 속옷이랑 양말은 갈아입어야 할 거 아니야! ”

 

“ 어휴, 말을 말자. 먹을 게 필요한데... ”

 

“ 먹을 거 있어. 너 잘 때 찾았어. 찬장이랑 광에 통조림이랑 잼이랑 비스킷 있더라고. ”

 

 

 

왕재수가 찬장 쪽으로 가서 뭔가를 한 아름 안고 왔다. 절인 비트와 오이 피클이 들어 있는 유리병, 딸기잼이 반쯤 들어 있는 병과 하얀 비계가 송송 박힌 칼바사 햄 한 덩어리와 마른 비스킷 봉지, 청어 통조림, 노란 치즈 한 덩어리였다.

 

 

“ 다른 건 없어? ”

 

“ 몇 개 더 있긴 한데 그건 다 불에 데워야 하는 거더라고. ”

 

“ 그래도 너 오늘 눈 맞고 떨었으니까 뜨거운 거 먹어야 돼. 수프 통조림 같은 거 없었어? ”

 

“ 있어, 아르카지가 쓰는 그 인스턴트 보르쉬 깡통. 맛없을 거 같아서... ”

 

“ 그건 아르카지가 물 타서 맛없는 거야. 나도 인스턴트 쓰잖아. 그거랑 싱크대에 있는 냄비 가져와. 내가 데울게. ”

 

 

 

왕재수는 찬장에서 보르쉬 깡통을 가지고 왔다. 베르닌은 깡통을 뜯어서 냄비에 보르쉬를 붓고 페치카의 고리에 주전자 대신 냄비를 고정시켰다. 장작을 좀 더 넣었다. 인스턴트 보르쉬가 끓는 동안 왕재수가 싱크대에서 찾아낸 칼과 포크, 숟가락, 이 빠진 사기 접시 두 개를 가져왔다.

 

 

 베르닌은 침대에서 담요를 걷어내고 잡지를 뜯어 종이를 몇 장 깐 후 청어 통조림과 피클 병을 땄다. 햄은 두툼하게 두 조각 자르고 치즈도 얄팍하게 몇 조각 잘라냈다. 비스킷도 몇 개 꺼냈다. 마침 보르쉬가 끓었기 때문에 냄비 째로 올려놓았다. 식사 매너를 중시하는 왕재수는 냄비 째 수프를 먹어야 한다는 사실에 부아가 치밀었는지 차를 마시던 컵을 대충 씻어서 들고 왔다.

 

 

“ 나 여기 수프 따라줘. ”

 

“ 어휴, 진짜 가지가지 하네. ”

 

 

어쨌든 베르닌은 왕재수의 컵에 보르쉬를 가득 부어 주었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저녁을 먹었다. 배고픈 것도 몰랐는데 막상 먹기 시작하니 정신없이 먹었다. 폭설과 바람 때문에 고생을 해서 무척 지쳐 있었던 게 분명했다. 왕재수도 투정하지 않고 보르쉬를 다 긁어먹고 치즈와 청어를 먹고 심지어 비계가 박혀 있는 칼바사 햄까지 조그맣게 잘라서 한 조각 먹었다. 비스킷 한 개에는 잼까지 얹어서 먹었다. 정말 배고팠던 모양이었다. 하긴 일어나자마자 베르닌에게 이끌려 나와서 카페에서 살랸카와 치즈빵 약간을 먹은 게 전부니 그럴 만도 했다. 베르닌도 아무 생각 없이 음식을 흡입했다. 배가 차자 몸이 따뜻해지면서 눈앞이 좀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눈을 맞고 돌아와 덜덜 떨던 왕재수도 뺨에 혈색이 돌고 눈에 생기가 돌아와서 훨씬 나아 보였다.

 

 

다 먹고 나서 왕재수는 주전자에 물을 끓였다. 그리고는 양동이에 받아놓은 찬물에 끓인 물을 부었다.

 

 

“ 너 뭐해? ”

 

“ 대충 씻긴 해야 되잖아. ”

 

“ 어휴, 우리 집에서는 씻지도 않고 픽픽 쓰러져서 잘만 자더니 왜 여기까지 와서 갖은 깔끔을 다 떠는 거야! 목욕통에라도 들어갈래? ”

 

“ 누가 샤워한대! 그냥 물수건으로 닦기만 할 거야! 눈 맞고 땀 흘리고 진짜 찝찝하단 말이야. 너도 닦아야 돼! 거울 없어서 그렇지 너 얼굴 지금 장난 아니야. 다치고 눈까지 맞았는데 잘 씻고 자야 돼. 안 그러면 병균 옮아서 아프단 말이야. ”

 

“ 유리에 벤 거랑 타박상인데 웬 병균... ”

 

“ 있어! 병균 있단 말이야! 아휴! 난 온천 가려고 했는데. 지난주엔 로만이랑 온천에서 사랑을 불태우며 좋았는데... 어헝, 로만 보고 싶어... 내가 이러고 있는 거 알면 맨발로 뛰어올 텐데.

 

“ 야, 그 아저씨가 진짜 맨발로 뛰어오면 좋겠냐? 추운데 미쳤니 위험한데 왜 왔니 하고 길길이 날뛰고 혼낼 거잖아! 안 봐도 눈에 선하네! ”

 

“ 바보 멍충이! 그래서 네가 지금 애인이 없는 거야! 칫... ”

 

 

투덜거리면서도 왕재수는 조그만 바가지에 더운 물을 뜨더니 현관문 근처에서 세수를 했다. 심지어 자기 가방에서 꺼낸 비누까지 썼다. 추위에도 불구하고 문을 열더니 문턱 밖으로 나가서 발까지 씻고 물을 버렸다. 문을 닫더니만 갑자기 스웨터와 셔츠를 훌렁 다 벗고는 심지어 마지막 속옷까지 벗으려고 해서 베르닌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왜 다 벗는 거야! 그냥 물수건으로 닦기만 하면 되잖아! ”

 

“ 응, 닦을 거야. 그래도 다 닦아야 조금이라도 개운하잖아. ”

 

“ 으윽!!! 그러면 사우나 들어가서 닦든가! 양동이 들고 가서 거기서 씻으면 되잖아! 왜 여기서 홀랑 벗는 거야! ”

 

“ 사우나 아까 가봤는데 엄청 조그맣고 음침하단 말이야. 구멍도 있고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나는 게 100% 쥐 있단 말이야! 목욕하고 있는데 쥐랑 벌레랑 뱀이라도 들어오면 어떡해... 그건 그렇고 너 왜 그래! 내가 홀랑 벗든 말든! 나랑 응응 할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 ”

 

“ 그래도! 칸막이도 없는 통나무집에서 홀랑 벗은 사내 녀석을 보고 싶진 않단 말이야!!! ”

 

쳇, 그럼 눈 감고 있어라! 내가 목욕하는 거 일생에 한번 곁눈질로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철야 기도하는 놈들이 깔렸는데 복에 겨워가지고. 쳇. ”

 

 

그래서 왕재수가 물수건으로 몸을 닦는 동안 베르닌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왕재수는 자기 몸 하나 건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수건을 철벅철벅 빨더니 물기를 대충 짜서는 베르닌에게 던져 주었다.

 

 

“ 너도 발이라도 닦아! 세수는 할 수 있으니까 이 바가지에 받아놓은 물로 하고! ”

 

나는 다쳤는데! 난 안 할 거야! ”

 

다쳤으니까 해야 한다고 했잖아!

 

 

왕재수가 마구 째려보았기 때문에 베르닌은 할 수 없이 바가지에 담긴 따뜻한 물로 세수를 하고 손도 깨끗이 씻었다. 셔츠를 벗어서 수건으로 몸도 닦았다. 바지까지 벗으라고 할까봐 내심 ‘뭐라고 핑계를 대며 안 닦지...’ 라고 고민했지만 왕재수는 물수건으로 발을 깨끗이 닦으라고 했을 뿐이었다.

 

 

어쨌든 왕재수의 말이 옳았다. 대충이라도 먼지와 땀을 닦아내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았다. 왕재수는 페치카에 장작을 더 집어넣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 이거 얼마나 가는 거야? 아침까지 불 안 꺼질까? ”

 

글쎄. 그렇게 오래 가진 않을 거야. 중간에 장작 더 넣어줘야 할걸. 내가 새벽에 장작 더 넣을 테니까 넌 걱정 말고 자. ”

 

“ 시골... 난방도 안 되고... 장작으로 불을 피우다니 정말 별로야. ”

 

“ 야! 여긴 숲속이잖아! 레닌그라드도 숲으로 나가면 똑같을걸! ”

 

“ 몰라! 나는 시중만 받았다고 했잖아. 별장도 엄청 호화스러운 데만 다녔단 말이야. 무슨 공작에 대공에 그런 사람들이 쓰던 별장이라 다들 궁전 같았어. ”

 

“ 너는 어떻게 그런 궁전 같은 별장만 다녔어? ”

 

“ 몰라서 묻냐, 우리 아저씨들... 다 고위층이었잖아. 넌 상상도 못할 거야, 그 인간들 얼마나 삐까하게 해놓고 사는지... 그래놓고 인민들한테는 공산주의가 어쩌고 평등이 어쩌고... 양키들 보고 부르주아라고 욕하고... 그 아저씨들 완전 황제에 귀족들만큼 사치스러워. 그런 게 바로 그 잘난 공산주의랑 소련의 실체란 말이야. 평등 좋아하네. 집은 말할 것도 없고 별장에 가도 하인에 하녀에 요리사에... 다 더러운 놈들이야. ”

 

“ 너 시중 받는 거 좋아하잖아. 화려한 거랑 근사한 것도. 그러면서 뭘 더러운 놈들이라 그러냐. 귀족적이고 사치스러운 거 너도 좋아하면서. ”

 

“ 달라! 나는 좋은 건 좋다고 해. 나쁘다고 안 해! 근데 그 작자들은 나쁘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한테는 못하게 하고 탄압하면서 자기들은 뒤에서 다 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더러운 놈들인 거야! ”

 

“ 그런가...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근데 너 진짜... 제발 부탁이다. 나하고만 있을 땐 괜찮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선 절대 그런 말 하지 마. 나 정말 너 때문에 조마조마해 죽겠어. 너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하겠지만 방금 한 말도 밀고하면 그 자리에서 다시 체포된단 말이야. ”

 

“ 지겨워. 독재자들, 더러운 놈들. 나 잘래. ”

 

“ 바지 말랐어, 입고 자. 셔츠도 입고. ”

 

“ 난롯불 이렇게 뜨거운데? 더워. 나 원래 벗고 자잖아. ”

 

“ 나는 몰라, 네가 벗고 자는지 입고 자는지! 알고 싶지 않아! 여긴 숲이라 밤에는 굉장히 추울 거란 말이야. 불 꺼지면 어쩌려고 그래. ”

 

“ 네가 중간에 장작 넣어준다고 했잖아. 계속 따뜻할 텐데 뭐. ”

 

옷 입고 자! 안 그러면 의사 선생님한테 또 밀고할 거야!!!!

 

“ 악마. ”

 

 

왕재수는 투덜거리면서 셔츠와 바지를 입었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침대를 난롯가 앞으로 바짝 가져다 놓았다.

 

 

“ 너는 여기서 자. ”

 

“ 싫어! 덥단 말이야! 네가 여기서 자! ”

 

“ 너 아침부터 춥다고 했잖아! 좀 전에도 눈 맞고 들어오고. 너 한번만 더 감기나 폐렴 도지면 의사 선생님이 내 목 졸라 죽일 거란 말이야! ”

 

 

왕재수는 더운 거 질색이라고 투덜대면서도 결국 베르닌의 뜻대로 난롯가 앞 침대에 올라가 누웠다. 베르닌은 자기 침대에 붙어 있던 여분의 침대를 떼어서 왕재수의 침대 쪽으로 밀었다.

 

 

“ 그 침대 왜 움직이는 거야! 너 두 개 붙이고 자라니까. ”

 

“ 너 자다가 뒤척거리잖아! 좁은 침대에서 자다가 떨어질까 봐 그래. ”

 

안 떨어져! 덩치 큰 네가 두 개 붙이고 자! 80킬로 주제에. 난 어차피 침대 두 개 붙여도 소용없어. 가운데 붙은 자리가 배겨서 못 잔단 말이야! ”

 

어휴, 호강에 북받친 놈! 완두콩 공주!

 

내가 왜 공주야! 난 사내인데!!! 왕자님이란 소린 많이 들었어도!

 

“ 으윽... 시끄러워. 빨리 자! ”

 

 

왕재수는 결국 여분의 침대를 베르닌 쪽으로 도로 밀어놓고는 담요도 제대로 덮지 않고 벌렁 드러누웠다. 베르닌이 야단을 치자 툴툴거리며 담요를 끌어다 딱 무릎 위에서 가슴 아래까지만 덮었다. 이불 제대로 덮으라고 더 잔소리를 하려다가 난롯불이 뜨겁긴 했으므로 베르닌은 일단 만족했다. 창밖은 여전히 내리는 눈 때문에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침에는 제발 눈이 그치기를 빌며 베르닌은 불을 끄고 침대로 올라갔다. 오후에 그렇게 잤는데도 무거운 졸음이 몰려왔다. 그는 발목에 둔한 통증을 느끼며 곧 곤히 잠들었다.

 

 

 

 

... to be continued...

 

 

 

 

 

....

 

 

이야기는 36편으로 이어진다.

 

원래 이 이야기는 35편 하나로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 분량이 좀 길어져서 흐름에 따라 두 편으로 나누었다. 36편은 지금 후반부 작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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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두콩 공주 얘긴 다 아시겠지만... 공주님인지 아닌지 시험해보기 위해 겹겹이 쌓은 매트리스 아래에 완두콩 딱 한 알을 넣었더니 곱게 자란 진짜 공주님은 밤새 등이 배겨서 잠을 설쳤다는 옛날 이야기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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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이 내리는 가운데 숲속 통나무집에 갇힌 단추와 왕재수는 어떻게 될까요~ 다음 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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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가져가거나 복사, 전재, 도용하지 말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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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