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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루크 루지마토프'에 해당되는 글 23

  1. 2020.03.29 디아나와 악테온 클립 2개(슈클랴로프 & 오스몰키나, 루지마토프 & 레즈니나) 2
  2. 2016.12.25 런던에서 걸려온 전화 18
  3. 2016.11.05 미샤의 신입 시절, 싸움의 이유, 붉은 장미와 하얀 눈 44
  4. 2016.10.20 흑해의 여름, 춤추는 아이, 달빛 아래의 레나 46
  5. 2016.10.05 폭군 파트너 여왕, 병실의 미샤와 지나이다의 대화 38
  6. 2016.08.28 천사가 날개로 쓰다듬고 지나간 사람, 렐랴의 인터뷰 54
  7. 2016.08.22 미샤의 몇 가지 논리, 다들 똑같아지면 재미없음, 싫지 않은 것과 보통과 별로 사이 48
  8. 2016.06.25 파루흐 루지마토프 옛 사진 득템
  9. 2016.06.23 6.22 수요일 밤 : 엽님과 조우, 미하일로프스키 극장 잠자는 미녀, 파루흐 루지마토프의 카라보스! 석양 보며 엽님과 산책
  10. 2016.05.15 잠시 : 교조주의, 강령으로서의 예술, 세 개의 메모 - 쓰던 순간, 1년 후, 3년 반 후 55
  11. 2016.05.05 발레 화보들 : 비슈뇨바, 테료쉬키나, 김기민, 바리쉬니코프, 트와일라 타프, 루지마토프, 이반첸코, 레베제프, 슈클랴로프 10
  12. 2016.03.13 간만의 무용수 화보 몇 장 : 비슈뇨바, 루지마토프, 아실무라토바, 옵차렌코, 슈클랴로프, 테료쉬키나, 쉬린키나 6
  13. 2015.10.30 라 바야데르 - 망령의 왕국과 파이널(아실무라토바 & 루지마토프) 영상 클립 2
  14. 2015.09.10 루지마토프 & 비슈뇨바 '라 바야데르' 파이널 클립 2
  15. 2015.06.09 간만에 루지마토프, 슈클랴로프 화보 몇 장(+ 자하로바, 로파트키나, 쉬린키나, 소모바) 2
  16. 2015.01.11 월요병을 달래는 루지마토프, 로파트키나, 슈클랴로프 화보 몇 장 10
  17. 2014.12.16 러시아 무용수 화보 몇 장 : 로파트키나, 폴루닌, 루지마토프, 바이무라도프, 슈클랴로프, 노비코바, 비슈네바 6
  18. 2014.10.14 리허설 중인 무용수 화보 몇 장 : 비슈네바, 루지마토프, 슈클랴로프
  19. 2014.09.21 알브레히트 - 루지마토프(리허설), 슈클랴로프 + 오시포바, 쉬린키나 영상 클립
  20. 2014.08.18 월요병을 달래는 무용수들 사진 : 비슈네바, 루지마토프, 슈클랴로프
  21. 2014.08.16 '젊은이와 죽음' 클립(파루흐 루지마토프 & 디아나 비슈네바), 루지마토프에 대해
  22. 2014.05.28 루지마토프와 슈클랴로프 화보 몇 장
  23. 2014.04.27 라 바야데르를 춤추는 루지마토프와 마할리나 화보 한 장

 

 

 

월요병을 달래기 위한 발레 영상 두개. 발레 에스메랄다의 디아나와 악테온 2인무. 둘다 오래된 영상이다.

 

 

먼저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와 예카테리나 오스몰키나 페어. 십여년도 더 전의 영상이라 발로쟈 얼굴이 완전 애기 같음 :) 오스몰키나도 풋풋하다. 이 영상 볼때마다 생각하는 건데 저런 귀여운 악테온이면 차마 사슴으로 만들 수도 없고 사냥개 풀어놔서 물어죽이게 할수도 없을 것 같다. 발로쟈의 춤사위는 아직 애티가 배어 있어 좀 파닥거리는 느낌인데 그래도 생기 넘치고 귀엽다. 마지막의 스플릿 점프 보는 게 특히 즐겁다.

 

 

 

 

이건 그보다도 훨씬 옛날 영상이다. 90년대 무대인데 파루흐 루지마토프와 라리사 레즈니나가 춘 디아나와 악테온임. 두 영상 중에서 고르라면 발로쟈에 대한 팬심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쪽을 고른다. 루지마토프가 무대 위에서 갖는 무용수로서의 카리스마와 몸을 쓰는 방식, 동작의 유연함이 너무나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이 무대는 이 사람의 최상 컨디션은 아닌것처럼 보이지만 존재 자체로 무대를 사로잡는 무용수이다.

 

이게 사실 둘을 비교할 수가 없는게 발로쟈가 춘 건 아직 병아리에 가깝던 시절이라 당연히 원숙미 자체가 다른데, 그래선지 발로쟈가 지금 시점에서 이거 한번만 다시 취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긴 그러면 악테온의 소년스러운 매력이 반감되려나... 그래도 꽃돌이님은 동안이니까 다시 춰도 어울릴 것 같은데... 디아나는 테료쉬키나가 춰주면 딱 좋겠구만.

 

:
Posted by liontamer
2016. 12. 25. 21:02

런던에서 걸려온 전화 about writing2016. 12. 25. 21:02

(알티나이 아실무라토바 & 파루흐 루지마토프. 1985년)

 

(마린스키 극장 내부 모형)

 

 

오랜만에 글을 조금 발췌한다. 다시 쓰기 시작해야 하는데 요즘 너무 바쁘고 또 정신적 여유가 없어 언제 시작할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쓰기는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 것이다.

 

..

 

지난번에 미샤의 런던 에피소드를 몇번 언급한 적이 있다. 하나는 그가 런던에서 그쪽 예술가들의 아지트에 가서 젊은이와 죽음을 추는 이야기였고 하나는 같은 시기에 그가 런던 페스티벌에 참가하고 옛 친구이자 대사관 직원인 알리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에피소드였다. 두 에피소드의 링크는 포스팅 맨 아래에 적어두었다.

 

아래 이야기는 위 두 이야기가 속한 파트의 전반부이다. 런던에 간 미샤와 레닌그라드에 남아 있는 트로이, 그리고 그에게 걸려온 전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디나 로쉬는 파리 오페라 극장의 프리마 발레리나이며 이 이야기에서 미샤를 런던 페스티벌에 초청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일린은 미샤의 친구이자 안무가로 런던 페스티벌에서 미샤가 춘 '페트루슈카'를 안무했다.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는 미샤의 후원자이다. 율리야는 미샤의 어머니이다.

 

'로미오'는 알리사를 비롯한 트로이의 친구들이 미샤를 부르는 애칭이다. 줄리엣은 그의 파트너인 지나이다의 애칭.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미샤 야스민은 런던에서 뜨거운 환대를 받았다. 안무가인 일린에게는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고 다른 극장 관계자도 마찬가지였다. 대신 문화국장인 포노마레바와 담당직원 하나가 함께 갔다. 키로프 무용수 개인이 그런 서방 유럽의 페스티벌에, 그것도 경쟁 부문에 참가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지만 마침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를 비롯한 당 위원 두 명이 영국 측과 몇 가지 협약을 맺기 위해 런던에 갈 예정이었으므로 미샤의 런던행도 문화교류 일환으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스비제르스키는 포노마레바와 미샤를 모스크바로 부른 후 자신과 같은 비행기에 태워갔다.

 

 

 개막일에 미샤가 디나 로쉬와 함께 춘 돈키호테에 대한 관객들의 환호가 너무 뜨거워서 축제에 대한 관심도 함께 치솟았다. 한동안 경색되어 있던 런던과 모스크바의 관계도 스비제르스키의 방문과 함께 화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 언론도 키로프 간판스타의 참가를 집중 조명했다. 미샤는 빠듯한 일정 때문에 로쉬와 충분한 호흡을 맞춰보지는 못했지만 둘 다 기본기가 뛰어난 무용수였기 때문에 별다른 실수는 없었다. 게다가 돈키호테는 키로프의 자랑거리였고 남자 무용수의 화려한 테크닉과 눈부신 도약을 한껏 뽐낼 수 있는 레퍼토리였기 때문에 그는 두드러지게 눈에 띄었다.

 

 

 경쟁 부문이 시작되기도 전에 인터뷰가 줄을 이었다. 당국에서는 지난 파리 인터뷰 같은 문제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미샤에게 절대로 통역 없이 얘기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포노마레바가 신신당부했기 때문인지 스비제르스키가 협박했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미샤는 통역에게 모든 것을 맡겼고 지난번처럼 열성적으로 끼어들지도 않았다.

 

 로열 발레단의 스타 무용수 몇 명이 미샤를 극장으로 초청해 함께 세션을 진행한 후 런던의 명소 구석구석을 안내해 주었다. 물론 통역과 요원이 동행하는 공적인 프로그램이었다. 소련 대사관에서 주최한 리셉션에도 가고 스비제르스키가 주관하는 행사에도 끌려갔다. 겉으로는 런던 시내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지만 요원 두 명과 통역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은 언론 홍보용 제스처일 뿐이었다.

 

 미샤의 성격이나 과거 비행들을 잘 알고 있는 포노마레바는 내심 불안해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지만 그는 페트루슈카를 출 때까지 얌전하게 잘 견뎠다. 도망치지도 않았고 인터뷰에서 사고를 치지도 않았다. 둘째 날 대사관 측에서 조직위가 잡아줬던 숙소를 일방적으로 취소하고 ‘영국 정보부의 도청으로부터 깨끗한’ 다른 호텔로 변경한 후 아무런 통보도 없이 그의 짐을 모두 옮겨버렸을 때에도 폭발하지 않았다.

 

 

 왕립극장 무대에서 페트루슈카 독무를 췄을 때 놀랍게도 영국 관객들이 미샤의 키로프 첫 지젤 무대와 매우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 우울한 춤에 이입해서 눈물을 흘리거나 소리 내어 우는 관객들이 많았다. 지푸라기 인형 페트루슈카가 죽어 넘어졌을 때 공포로 실신한 여자도 있었고 음악이 끝난 후에도 미샤가 잠시 일어나지 않자 무대로 올라가보라고 소리를 지른 관객도 있었다. 관객들 뿐만 아니라 페스티벌 관계자 대부분도 돈키호테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에너지 넘치는 도약과 화려한 테크닉을 상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페트루슈카는 생각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결국 스타니슬라프 일린의 의도가 성공했던 셈이었다.

 

 심사위원들은 별 이견 없이 그 춤에 좋은 상을 주었다. 외교적 의도라고 비꼬는 우익 언론도 있었지만 조직위와 페스티벌 참가자들 사이에는 별다른 논란도 없었다. 로쉬는 훌륭한 춤 앞에서는 이념이나 국경 따위가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는 모범적이면서도 단호한 코멘트로 우익 언론의 비난을 묵살했다.

 

 페트루슈카를 춘 다음날 미샤는 BBC를 비롯한 미디어와 일간지 인터뷰에 응했고 로쉬와 함께 유력 예술 잡지의 표지 사진도 촬영했다. 대사의 생일 파티에도 잠깐 참석했다.

 

 

 그리고 끈이 툭 끊어졌다. 미샤는 다음날 새벽 연기처럼 사라졌다.

 

 

*    *   *

 

 

 알리사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정오 무렵이었다. 그때 트로이는 오후 강의 때문에 막 집을 나가려던 참이었다. 수화기를 들자 교환수가 딱딱한 목소리로 런던에서 걸려온 전화를 연결하겠다고 통보했다. 집으로 그런 전화가 걸려온 적은 한 번도 없었으므로 얼떨떨해져 있는데 알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알랴! 무슨 일이야? 잘 지내? ”

 

“ 전화 오래 못해. 도청되기 전에 끊어야 해. 묻는 말에 대답만 해. ”

 

“ 무슨, 무슨 일인데? ”

 

“ 로미오. 런던에서 가고 싶어했던 곳 없어? ”

 

“ 어... 왕립극장? 대영박물관? 세인트폴 성당? ”

 

“ 그런 뻔한 데 말고. ”

 

“ 락 클럽? ”

 

“ 대낮이잖아. ”

 

“ 대체 무슨 일인데? ”

 

“ 없어졌어. 새벽에 사라졌어. 빨리 찾아내야 해. 대사관이랑 요원들이 알아채기 전에. ”

 

 

 트로이는 멍하게 수화기를 들고 서 있었다. 그녀는 잠시 미샤가 갈만한 곳이나 런던의 지인들에 대해 캐물었지만 그는 런던에 대한 일이라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알리사의 목소리는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고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 아, 어쩌지. 다들 곧 알아챌 거야. 그 전에 돌려놔야 해! ”

 

“ 어떻게, 어떻게 그자들이 아직 모를 수가 있어? ”

 

“ 내가 막고 있어. 감기 기운 때문에 누워 있다고 보고했어. 세시에, 세시에 스비제르스키가 올 거야. 더는 못 숨겨. 어쩌면 좋지? ”

 

 

 트로이는 알리사가 울음을 터뜨릴까봐 겁이 났다. 너무 비현실적이라서 미샤에 대한 생각은 제대로 떠오르지도 않았다.

 

 

 갑자기 알리사가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 끊어야겠다. 회선 추적당할 거 같아. 혹시 모르니까 너 준비하고 있어. ”

 

“ 뭐, 뭘? ”

 

“ 로미오가 남으려고 하면, 설득해. ”

 

“ 설득이라니, 여기서 어떻게? ”

 

“ 전화로. 엄마도 불러. 걔한테는 엄마 외엔 일가친척 없어. 줄리엣, 그 아가씨도 불러. 무조건 돌아오게 설득해야 해. ”

 

“ 알랴! ”

 

 

 전화가 툭 끊겼다.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기계적으로 수화기를 내려놓고 창가로 갔다. 별다른 논리도 없이 빗장을 지르고 커튼을 쳤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공포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두개골과 이마를 아주 무거운 것으로 짓누르는 듯 멍할 뿐이었다. 마취 주사를 쑤셔 넣은 듯 희미한 얼얼함 외에는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입술을 움직였을 때 그는 어딘가의 책에서 읽은 구절을 되뇌었다.

 

 

“ 쇼크 상태에 빠진 사람은 일시적인 마비 증세를 겪는다. ”

 

 

그는 자신이 영어로 중얼거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 후 또 다른 구절들이 구토하듯 밀려나왔다.

 

“ 그가 그토록 가볍고 즐거운 걸음걸이로

지나쳐 갈 때면 기묘한 마음이 들었다

그토록 슬픈 눈으로 나날을 응시할 때도 그랬다

그토록 무거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생각에 놀랍기만 했다.

 

 

이게 뭐지?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아니, 헛소리라니! 이건 와일드잖아. 미샤가 알았으면 내 목을 자르려고 들 걸. 감히 오스카 와일드 시를 헛소리라고 지껄이다니. 어떤 꼬마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만큼이나, 블라지미르 세묘노비치만큼이나 숭배하는 공작새 같은 작자. 그나마 영국 놈이라 이름과 부칭으로 부를 수 없으니 다행이야. 이건 레딩 감옥의 발라드잖아. 어떻게 이 부분을 외고 있었지?

 

 

 트로이는 한 손으로 자기 뺨을 거세게 때렸다. 싱크대 수도꼭지 아래 머리를 대고 물을 틀었다. 얼음장 같은 찬물에 소스라치듯 정신이 돌아왔다.

 

 

 그는 전화기 앞으로 가서 다이얼을 돌렸다. 학교에 전화를 해서 독감에 걸렸다고 둘러대고 수업을 취소했다. 잠깐 지나이다에게 전화를 해야 할지 망설였지만 그만두었다. 율리야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마음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뜬금없이 루빈슈테인 거리의 의사가 눈앞에 스치고 지나갔다. 욕을 하며 이마를 문지르자 이번에는 회색 고양이 같은 스타니슬라프 일린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구역질나는 인간이라면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떠올랐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그 비뚤어진 애는 일린 따위보다는 차라리 루빈슈테인 의사의 말을 더 잘 들을 것이다. 트로이는 미샤가 자기 말에 귀를 기울일 거라고는 애초부터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반쯤 비어 있는 보드카 병에 손을 뻗었다. 막 뚜껑을 열고 들이키려다 고개를 저으며 병을 한 쪽으로 밀어버렸다. 가스렌지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물을 끓였다. 평소의 세 배쯤 되는 분량의 찻잎을 쏟아넣었다. 거의 커피처럼 새까맣게 변한 찻물을 이 빠진 컵에 부은 후 레몬이나 설탕도 넣지 않고 뜨거운 것도 모른 채 마셨다. 씁쓸하고 얼얼한 맛이 혀와 입천장에 흐릿하게 돌았다.

 

 

 몇 시간 동안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꼼짝도 하지 않고 전화기 앞에 앉아 있었다. 그때 그의 머리 속에는 오직 단 두 문장만이 되풀이되어 울려 퍼졌을 뿐이었다.

 

 

그 애가 남을까? 돌아올까?

 

 

 다른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지도 않았고 설령 알리사가 전화를 연결해준다 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미샤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 그를 비롯해 이곳에 남은 지인들에게 벌어질 우울한 일들에 대해서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전화벨이 다시 울렸을 때 갑작스럽게 어떤 끔찍한 생각이 이마와 콧속을 타고 스멀거리며 기어 내려와 혓바닥을 쿡쿡 찔렀다.

 

 

 그자들이 널 죽일 거야. 가만 놔두지 않을 거야.

 

 

 몸을 부르르 떨면서 트로이는 수화기를 잡아챘다. 다시 교환수의 기계적인 안내 멘트가 들려왔다. 잠시 후 알리사의 목쉰 음성이 멀리서 들려왔다.

 

 

“ 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

 

“ 아무 일, 아무 일 없는 거야? ”

 

“ 별 일 아니었어. 걱정시켜서 미안해. 괜히 전화했었어. ”

 

“ 지금 같이 있어? ”

 

“ 응. ”

 

 

 알리사는 먼젓번처럼 예고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트로이는 깊은 숨을 들이쉬었고 식탁 위에 밀어놓았던 병을 집어 남은 술을 모두 마셔버렸다.

 

 

...

 

 

트로이가 중간에 떠올리는 구절은 오스카 와일드의 장시 ‘The Ballade of Reading Gaol’ 제 2부 6연이다. 원문은 아래와 같다.

For strange it was to see him pass

With a step so light and gay,

And strange it was to see him look

So wistfully at the day,

And strange it was to think that he

Had such a debt to pay.

 

..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는 도스토예프스키, 블라지미르 세묘노비치는 브이소츠키이다. 미샤는 존경하는 인물을 이름과 부칭으로 부르는 버릇이 있다.

 

..

 

포노마레바를 전전긍긍하게 만들었던 파리 인터뷰와 디나 로쉬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5040

 

..

 

페트루슈카는 원래 미하일 포킨이 발레 뤼스에서 안무했던 작품이지만 이 소설에서 나는 그 작품을 모티브로 안무가 스타니슬라프 일린이 친구인 미샤를 위해 별도로 안무해준 약 10여분 가량의 짧은 독무 작품으로 개작했다. 이 소설에서 미샤는 이 페트루슈카를 가지고 런던의 댄스 페스티벌에 초청을 받고 그랑프리를 받는다(물론 이 페스티벌은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행사임)

 

..

 

http://tveye.tistory.com/5178 : 알리사가 해준 이야기(페트루슈카, 미샤와의 대화)

http://tveye.tistory.com/2390 : 알리사가 해준 이야기(미샤는 어디에 있었나, 젊은이와 죽음)

 

..

 

 

안드리스 리에파. 1980년대. 해외 잡지 표지. 볼쇼이 시절.

 

 

백스테이지의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최근 상하이 투어 당시.

 

 

마린스키 극장 좌석. 이번에 갔을때 찍음.

 

역시 마린스키 극장의 유명한 샹들리에.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전에 이 about writing 폴더에 트로이의 관점에서 기술된 미샤의 첫 시즌과 그의 돈키호테 무대 데뷔, 폐렴으로 인한 입원 등에 대한 에피소드를 발췌한 적이 있다. 아래 이야기는 같은 사건에 대한 미샤의 오랜 후원자이자 애인인 고위직 당 간부 드미트리 마로조프의 회상이다.

 

물론 트로이와 마로조프는 서로 다른 곳에 존재하고 또 다른 식으로 미샤와 관계를 맺고 있으며 다른 방식으로 이 해프닝을 마주한다. 트로이가 아는 것을 마로조프는 모르고 마로조프가 아는 것을 트로이는 모른다. 미샤는 당사자이므로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언제나처럼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이 다 그럴테지만.

 

시간적 배경은 1974년 4월. 미샤가 키로프 극장에 들어간지 반년이 조금 넘은 시기이다. 그는 이미 해적의 알리와 지젤의 알브레히트로 공전의 성공을 거두고 이른바 원더키드로 관객들과 평론가들을 사로잡기 시작했을 무렵이다. 키로프 발레단의 유명 무용수들은 소련 각 도시를 도는 국내 투어를 떠나고 미샤도 거기 합류한다. 아래 이야기는 투어에서 돌아온 미샤를 레닌그라드 근방의 도로에서 자기 고급차에 태워주는 드미트리 마로조프의 회상으로 시작한다.

 

세레브랴코프와 마할린은 모두 가상의 인물이다. 세레브랴코프와 미샤의 악연에 대해서는 몇번 발췌한 적이 있다.

니나 크류코바 역시 가상의 인물로 당시 키로프 극장의 톱스타 프리마 발레리나이다. 옛날로 따지면 나탈리야 두딘스카야나 갈리나 울라노바, 요즘으로 따지면 스베틀라나 자하로바나 울리야나 로파트키나, 디아나 비슈뇨바처럼 극장을 대표하는 발레리나인데 소련 시절이라 지금의 자하로바나 로파트키나보다 위상이 더 높았다.

율리야 야스미나는 미샤의 어머니이다.

 

 

맨 위 사진은 마린스키 극장 무대에 드리워진 막. 아래 사진은 차이코프스키 파 드 두를 추는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를 백스테이지에서 찍은 것. 돈키호테 사진들은 전에 많이 올려서.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다리 좀 뻗어도 되나요? 누워도 되면 더 좋겠는데... ”

 

 

 그건 미샤의 키로프 첫 시즌 봄이었다. 그때 그는 키예프와 사라토프를 거쳐 페름까지 이어진 3주 동안의 국내 투어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나는 레닌그라드 진입로에서 미샤를 태웠다. 커다란 가방을 들고 버스에서 내린 그 아이의 옷은 먼지투성이에 온통 구겨져 있었다. 투어 도중에 독감에라도 걸렸는지 연신 기침을 하고 있었다. 발레학교 시절부터 그 아이는 대놓고 자존심을 세우며 내가 보낸 차를 타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 날만은 예외였다. 물론 그는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넓고 푹신한 뒷좌석에 몸을 눕히더니 두 다리를 쭉 뻗고 두 손으로 무릎을 이리저리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 꽤 지쳤나보군. ”

 

 “ 3주 내내 버스로 끌려 다녔거든요. 엔진이 세 번 고장나고 타이어가 네 번 터졌어요. 페름에선 공연 30분 전까지도 그 고물 버스 안에 처박혀 있어야 했죠. ”

 

 “ 어쩌겠나, 인민예술가 정도 되면 대우가 좀 나아지겠지. ”

 

 

 건방진 꼬마는 코웃음을 치려고 했지만 꼴사납게 밀려오는 기침 때문에 때를 놓쳤다. 충혈된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머리는 이미 까치집처럼 헝클어져 있었고 뺨은 열에 들떠 사과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왼쪽 광대뼈 언저리는 파랗게 멍이 들어 부풀어 있었다.

 

 간신히 기침이 멎었을 때 나는 그에게 손수건을 주었다. 미샤는 눈과 코를 닦은 후 손수건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다.

 

 

 “ 그 버스 안에는 인민예술가 한 명에 공훈예술가 두 명이 있었다고요. ”

 

 “ 그럼 불평하지 말아야지. ”

 

 

 더워서 벗어놓았던 캐시미어 스웨터를 그 아이의 목과 가슴 위로 덮어준 후 나는 광대뼈의 상처에 대해 물었다. 이미 반쯤 졸고 있었던 미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후 차에서 내릴 때가 되었을 때에야 내키지 않는 어조로 대꾸했다.

 

 

 “ 존경하는 인민예술가께서 남겨주신 흔적입니다. ”

 

 “ 이런 짓을 할 만한 건 세레브랴코프인 것 같은데. ”

 

 “ 그깟 공훈예술가 따윈 그럴 배짱이 없죠. ”

 

 

 싸움을 건 쪽은 세레브랴코프였다. 단순한 선배들의 위계 잡기일 수도 있었고 들어온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주역을 독차지하다시피 한 경쟁 상대에 대한 질투일 수도 있었다. 미샤는 선배 무용수의 도발에 모욕적인 발언으로 맞섰고 과히 우아하지 못한 싸움이 벌어졌다. 그들을 떼어놓은 건 대선배인 알렉세이 마할린이었다.

 

 

 “ 마할린이 자넬 쳤다고? 그 온순한 친구가? ”

 

 “ 발레단에 온순한 인간 같은 건 없어요. ”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 어쨌든 불평하지 말아야겠군. 인민예술가에게 맞은 거라면. ”

 

 “ 불평 같은 건 안 해요. 별로 아프지 않았거든요. ”

 

 

 그날 밤 미샤는 스몰니의 내 아파트에 머물렀다. 다음날 아침 돌아갈 때는 내 스웨터를 입고 갔다. 모자까지 받아 썼다. 아마 외투를 줬다면 그것도 망설임 없이 입고 갔을 것이다.

 

 잠시 후 나는 산책을 하려고 나왔다가 현관에서 몇 발짝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 아이를 발견했다. 이른 봄이었지만 변덕스러운 레닌그라드 날씨답게 새벽부터 폭설이 쏟아졌기 때문에 미샤는 발목까지 차오른 눈 위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미끄러져 넘어진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새하얀 눈 위로 새빨간 핏방울이 루비처럼 점점이 흩뿌려져 있었다. 페름에서 싸움이 붙었을 때 마할린은 그 아이의 코와 광대뼈 사이를 가격했던 것이다. 요행히 코뼈가 부러지거나 내려앉지는 않았다. 심지어 콧등이 부어오르지도 않았다. 그저 눈 위에 앉아 코피를 펑펑 흘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 이런데도 아프지 않았다고? ”

 

 “ 아프지는 않아요. 숨쉬기가 불편할 뿐이지. ”

 

 

 그나마 얼굴이 망가지지 않았으니 다행이었다. 물론 알렉세이 마할린에게는 더욱 더. 며칠 동안 나는 그 작자를 고별 공연도 없이 은퇴시키고 말겠다는 충동에 시달렸다.

 

 

 나는 오전 연습에 가야 한다고 우기는 미샤를 기사의 차에 태워 병원으로 보냈다. 간단한 치료로 끝날 줄 알았지만 검사가 이어졌고 병원에서는 그 자리에서 미샤를 입원시켰다. 마할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코 때문이 아니라 폐렴 때문이었다.

 

 이틀 째 되던 날 그는 간호사에게는 말도 하지 않고 병실에서 기어나가 리허설과 정례 수업에 참석하고 그 다음날 밤에는 예정대로 무대에 올라가 춤을 췄다. 돈키호테였고 파트너는 니나 크류코바였다. 그녀는 미샤의 표현대로라면 ‘존경하는 인민예술가’였고 오랫동안 세레브랴코프의 파트너였다.

 

 

 무용계에서는 한동안 크류코바가 미샤를 낙점한 것에 대해 떠들어댔지만 그날 돈키호테 공연에서 그녀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아직도 그날 밤 관객들의 환호와 충격 어린 열광을 기억한다. 그랑 파이널의 코다 무렵에는 천둥처럼 울려대는 갈채와 신음 소리, 숨이 멎는 듯한 비명들 때문에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전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미샤가 솔로를 마쳤을 때 무대로 날아든 꽃들 때문에 크류코바는 하마터면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 했다. 커튼콜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나는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야 했다.

 

 

 극장 밖은 꽃다발과 편지와 선물을 한 아름 안고 진창으로 부츠를 더럽히며 줄지어 있는 팬들로 가득했다. 주차장 한켠에는 얇은 봄 코트를 입고 머리를 스카프로 감싼 율리야 야스미나가 그 열광적인 남녀들을 힐끗거리며 서 있었다. 아들을 보러 온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를 서류의 사진으로밖에 본 적이 없었지만 흐릿한 가로등 램프 불빛 아래에서도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창백한 얼굴과 빛나는 검은 눈, 길고 미끈한 목과 호리호리한 실루엣, 초조함과 행복감이 뒤섞인 표정.

 

 

 그날 밤 팬들도 율리야도 그를 만나지 못했다. 투우사를 췄던 동료가 분장실에 갔다가 고열로 의식을 잃은 채 바닥에 뒹굴고 있는 미샤를 발견했다. 그 고집쟁이는 40도까지 열이 치솟는 것도 모르고 춤을 추러 올라갔던 것이다. 혼비백산한 다닐로프가 자기 차로 그를 병원에 싣고 갔다고 들었다.

 

 

 나는 다음날 병원에서 율리야를 보았다. 그녀는 내가 누구인지 몰랐고 나도 굳이 인사를 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복도에 선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를 감싸고 있는 긴 손가락 사이로 결혼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잠시 나는 그녀에게 세르게이 야스민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침묵했다. 그녀가 과거 속에서 살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니 어쩌면 그건 미샤가 얘기하는 어둠이었을지도 모른다.

 

 

 미샤는 폐렴으로 입원해 있던 열흘 동안 일곱 번 병원을 빠져나가 연습과 수업에 참석했고 심지어 지젤 무대에도 예정대로 올라갔다. 단 한 번도 너그럽다는 평을 들어본 적이 없는 크류코바는 자신의 스포트라이트를 빼앗아간 어린 파트너를 질투하기는커녕 지젤을 비롯해 이후 백조의 호수까지 같이 췄다. 광대뼈의 멍은 얼마 가지 않아 사라졌고 콧대는 멀쩡했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나는 그에게 대체 왜 세레브랴코프의 도발에 화를 내며 싸움으로 맞섰느냐고 물었다. 고분고분하거나 얌전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상대에게 언성을 높이거나 화를 내는 적이 거의 없는 애였으니까.

 

 

 “ 제가 배역을 얻으려고 니나와 잤다고 몰아붙여서요. 정말로 화가 났던 건 아니에요. 화를 내야 정상인 상황이라 그랬던 거죠. ”

 

 

 나는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에게 정말 크류코바와 잤느냐고 물었다.

 

 

 “ 파트너와 자면 신뢰가 깨져요. 그런 식으로 춤추고 싶지는 않아요. ”

 

 “ 신뢰 대신 다른 게 생길 수도 있지. 이를테면 사랑이라든가. 키로프에도 커플 무용수들 여럿 있지 않나. ”

 

 “ 전 사랑으로 춤추는 인간이 아니에요. ”

 

 

...

 

 

 

폐렴에 걸린 미샤가 병실을 빠져나가 돈키호테 무대에 올라갔다가 쓰러져 도로 실려간 이야기와 세레브랴코프와의 싸움 얘기는 트로이의 이야기에 다른 식으로 좀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 얘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594 (미샤의 첫 번째 시즌, 돈키호테, 축구팀과 군대처럼 등)

 

여기 발췌한 에피소드의 일인칭 화자인 드미트리 마로조프와 미샤의 이야기는 전에 두어군데 다른 내용을 발췌한 적이 있다. 사실 나는 몇년 전 다시 글을 쓰고 미샤를 되살려내면서 바로 이 이야기를 쓰는 것으로 시작했었다. 그래서 이 단편은 내겐 좀 특별하다.

 

전에 발췌했던 마로조프의 이야기들은 아래 :


마지막 동작이 완성되지 않은 춤, 운하를 건너는 미샤 : http://tveye.tistory.com/4485 

그가 읽었던 불가코프의 문장, 비행기에서, 거장과 마르가리타 :  http://tveye.tistory.com/4572

 

..

 

 

 

마린스키 극장(소련 시절 키로프 극장)

 

 

 

난 사실 여기 발췌한 저 소설을 쓸때 이런 이미지로 시작했다. 그건 아주 붉은 장미와 하얀 눈이었다.

하얀 눈 위에 쏟아진 붉은 피에 대해 쓸때도 마찬가지였고 저 단편 전체를 쓰는 내내 나는 장미에 대해 생각했다. 장미와 눈. 그래서 원래 이 단편의 에피그라프를 장미나 눈에 대한 시로 할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그렇게는 하지 않았다.

아쉽게도 하얀 눈 위에 핀 빨간 장미 사진은 찍어본 적이 없어서... 이번 페테르부르크 갔을때 찍었던 이삭 광장의 붉은 장미 사진으로... :)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미하일 바리쉬니코프. 사진은 nina alovert.

 

 

돈키호테를 추는 파루흐 루지마토프. 사진은 nina alovert.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전에 미샤와 트로이, 그들의 친구들이 여름에 여럿이 모여 기차를 타고 흑해에 놀러가는 장면을 발췌한 적이 있다. 그 이야기에서 그들은 기차 안에서 왁자지껄 떠들고 술을 마신다. (http://tveye.tistory.com/4671)

 

흑해로 놀러간 이 친구들은 이 장편의 도입부에서부터 함께 등장하는데, 모두들 비밀 문학 서클의 일원이다. 이 서클은 트로이와 그의 절친 알리사, 그리고 두어명이 주도하여 만든 것으로 금지된 외국 문학을 번역해 돌려 읽거나 반체제 작가, 지하출판물 등을 읽는 모임인데 주로 레닌그라드 국립대학교와 여타 다른 대학들의 외국어 전공 학생, 문학 전공자 등이 참여하고 있다. 미샤는 지인의 소개로 이 서클에 들렀다가 트로이와 친해지게 되었다.

 

그중 소설에 꾸준히 등장하는 인물들은 트로이와 친한 친구들로 료카와 갈랴(둘은 부부이다. 주로 둘의 집에서 모임이 개최된다), 이고리(영화학교 출신. 렌필름 촬영기사), 코스챠, 스베타(미샤를 처음에 데리고 온 친구), 타냐(발레 애호가) 등이다. 그리고 미샤의 팬이라서 억지로 서클에 끼어든 레나라는 소녀가 있다. 이 친구들이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은 전에 몇번 발췌한 적이 있다. 다같이 썰매타러 가서 논다든지, 표절작가 쥬진스키에게 이고리가 시비를 걸어 싸우는 이야기라든지, 갈랴와 료카의 어린 딸이 메밀죽 먹기 싫다고 트로이에게 떠넘긴다든지...

 

여기 올리는 이야기는 전에 올렸던 흑해 가는 기차 이야기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에피소드이다. 이야기의 주역은 미샤를 짝사랑하던 소녀 레나와, 물론, 주인공인 미샤이다. 그리고 다른 여인이 하나 더 있다. 그건 이야기 속에서.

 

 

시간적 배경은 1973년 여름. 미샤는 발레학교를 막 졸업하고 키로프 발레단에 입단해 데뷔를 앞둔 시점이다. 친구들과 함께 잠깐 흑해에 헤엄치러 놀러 갔을 때이다. 흑해는 예로부터 러시아 최고의 여름 휴양지였다.

 

 

** 위의 사진은 흑해가 아니고 페테르부르크(옛 레닌그라드)의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강변 풍경이다. 작년 여름에 내가 찍은 것이다. 흑해는 안 가봐서 ㅠㅠ

 

 

** 이 에피소드는 아주 약간 15금 정도의 묘사가 있는데 그나마 그것도 여기 올리면서 내가 자체검열로 좀 수정했음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그들은 알리사 아버지의 인맥으로 해변 근처의 방 세 개 달린 아파트를 싸게 빌렸다. 임신한지 얼마 안 된 갈랴와 료카 부부에게 방을 하나 주고 나머지는 기차를 타고 왔을 때처럼 남녀로 나눴다. 날씨는 아주 좋았고 해변은 사람들로 붐볐지만 그래도 수영을 하고 노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매일매일이 레닌그라드에서는 백야의 여름 중 운 좋은 며칠 동안만 누릴 수 있는 찬란하고 뜨거운 날씨였다. 비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다들 실컷 헤엄을 치고 일광욕을 했다. 알리사는 약한 피부를 보호하려고 어마어마한 양의 수입산 선크림을 발랐지만 별 소용이 없어서 사흘 째 되는 날 코끝이 홀딱 벗겨지고 어깨와 팔이 빨갛게 달아오르며 물집이 잡히고 말았다. 갈랴가 속상해 하는 알리사를 욕실로 데려가 얼음으로 마사지를 해주고 시장에서 구한 연고를 발라주었다. 미샤는 알리사만큼 피부가 흰 편이었지만 선크림 덕분인지 타고 난 것인지 조금 그을렸을 뿐 아무리 햇볕을 쬐고 다녀도 전혀 화상으로 고생하지 않아 여자들의 부러움을 샀다.

 

 

 긴 금발의 인형 같은 레나는 해변에서 인기가 좋았다. 또래 소년들부터 2~30대 남자들까지 다채로운 유혹이 쏟아졌다. 레나는 밀려드는 데이트 신청을 도도하게 거절하기도 하고 가끔은 보란 듯이 잘생긴 남자를 골라 팔짱을 끼고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한번은 적어도 서른 살은 된 것 같은 콧수염 기른 남자의 추근거림을 받아들여 바에서 시끄러운 재즈 음악에 맞춰 춤까지 췄다.

 

 

 그 바에는 트로이 일행도 모두 와 있었다. 물론 미샤도 있었다. 레나가 왜 그러는지는 뻔했고 타냐와 갈랴는 애가 타서 미샤를 들들 볶았다. 네가 리드를 하지 않으니 레나가 저런 사기꾼 같은 남자와 춤을 추고 있지 않느냐, 분명 유부남일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레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느냐  등등 수다스러운 어미새 두 마리처럼 떠들어댔다. 트로이는 그들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그보다 먼저 미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처럼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리는 적이 없는 애였지만 몹시 귀찮았는지 입술이 가느다랗고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일행은 미샤가 콧수염 기른 남자로부터 레나를 데리고 나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곧장 연주자들 곁에 앉아 있던 거구의 여자에게 가서 춤을 청했다. 여자는 짙은 화장에 유행이 지난 얼룩덜룩하고 폭이 넓은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아무리 적어도 마흔 살은 넘어 보였다.

 

 

 친구들이 어이가 없어 입을 딱 벌리고 있는 동안 미샤는 그 여자와 시끄러운 재즈 연주에 맞춰 키로프 무대에서는 결코 볼 일이 없을 춤을 췄다. 알고 보니 여자는 연주자들의 매니저였고 몇 년 전까지 바와 클럽을 전전하며 춤을 췄던 경력이 있었다. 자신들의 매니저가 오랜만에 젊은 파트너를 만나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연주자들은 신이 나서 모든 박자를 무시하고 씽씽 달리는 즉흥 연주를 시작했다. 그건 더 이상 재즈가 아니라 소러시아 민요와 고파크와 소련 군가를 합쳐놓은 듯한 미친 소음으로 변했고 홀은 귀를 찢는 음악과 마루를 걷어차는 발소리와 박수와 휘파람과 고함 소리로 광란과 혼돈의 도가니에 빠졌다. 미샤는 90킬로는 너끈히 나갈 것 같은 거구의 여자를 발레리나 파트너를 다루듯 가볍게 빙글빙글 돌렸고 서너 차례는 공중으로 띄웠다. 감탄과 비명, 환호와 갈채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짙은 화장으로 얼굴 윤곽을 제대로 알아보기도 힘든 여자는 연신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고 소리를 지르며 미샤의 리드에 맞춰 미친 듯이 춤을 췄다.

 

 

 한참 춤이 격렬해졌을 때 여자의 구두 한 짝이 벗겨져 트로이가 앉아 있는 의자 앞까지 날아왔다. 갈랴가 얼굴이 창백해져서 트로이의 어깨를 두들겼다.

 

 

 “ 그만, 그만하라고 해. 빨리 데리고 나와. ”

 

 

 트로이는 갈랴가 레나에 대해 얘기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레나는 이미 테이블에 돌아와 있었고 타냐의 팔에 안긴 채 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 광란의 춤을 힐끗힐끗 쳐다보고 있었다. 콧수염 기른 남자는 어디론가 쫓아버린 후였다.

 

 

 “ 왜? 잘 추고 있는데. ”

 

 “ 잘 추고 있다니, 어떻게 그런 소릴 해.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르는 저런 늙은 여자랑... 레나 때문에 저러는 거잖아. 이제 됐으니까 빨리 끌고 나와. ”

 

 “ 레나 때문이라니, 쟤는 그냥 춤을 추는 거야. 가만히 놔둬. ”

 

 

 트로이는 미샤를 끌고 나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취해 있었고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그는 광녀처럼 웃고 소리치며 홀에서 춤추고 있는 그 거구의 여인이 되고 싶었다. 저 여자는 자기 손목을 낚아채 회오리처럼 빙빙 돌리고 허공으로 밀어붙이는 저 낯선 상대가 누구인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을 맞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할까? 그런 춤의 상대가 될 수 있다면 알량한 연주단 매니저 따위, 공동아파트의 방 몇 칸 따위, 배급표 따윈 헌신짝처럼 내팽개쳐도 아깝지 않다는 걸 알고 있을까?

 

 

 알리사가 트로이의 뺨을 가볍게 찰싹 때리고 물을 한 잔 주었다.

 

 

 “ 너 완전히 취했어. 물 좀 마셔. ”

 

 

 트로이는 컵을 제대로 잡지 못해 바닥에 떨어뜨렸다. 유리컵이 소리를 내며 깨졌지만 이미 다른 테이블 손님들 몇몇도 취해서 술잔을 내던져 깨며 흥분해 노래를 부르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눈에 띄지도 않았다.

 

 

 거구의 여자가 차오르는 숨을 견디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미샤는 여자가 자빠지지 않도록 재빨리 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받치더니 공주님을 모시듯 피아노 옆 의자로 데려갔다. 연주자들이 색소폰으로 흐느끼는 듯한 신파 멜로디를 연주하는 동안 그는 여자를 의자에 앉히고 두툼한 손등에 열성적으로 키스를 했다. 휘파람과 박수와 고함 소리가 더 커졌다. 화장이 다 녹아내려 얼굴이 온통 시커멓고 새빨갛게 얼룩진 여자가 미샤를 껴안고 입술이 달아날 정도로 세게 키스를 퍼부었다. 트로이는 여자가 그 자리에서 미샤의 무릎에 올라앉아 치마를 걷어 올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신이 혼미했다. 그가 알리사가 준 물을 마셨었나? 아니, 컵을 떨어뜨려 깨버렸지.

 

 

 여자가 미샤를 놔주었다. 그녀는 욕정으로 몸을 떨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황홀하게, 믿을 수 없을 만큼 행복에 겨워서. 트로이는 여자가 미샤를 다시 한 번 끌어당겨 안았을 때 귓가에 하염없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 착하기도 해라... 고마워. 정말 고마워. ”

 

 

 미샤가 녹초가 된 여자에게 정중한 인사를 하고 홀에서 걸어 나왔다. 테이블 쪽으로는 오지도 않고 곧장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레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

 

 

 

 트로이는 그 날 어떻게 숙소로 돌아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아마 친구들이 그를 부축해 데려온 것 같았다. 그렇게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취했던 것이다.

 

 

 그는 너무 목이 말라서 새벽에 깨어났다. 트윈 침대 위에 코스챠와 료카가 신발도 벗지 않고 엎드려 자고 있었다. 카펫 위에는 담요로 몸을 둘둘 만 이고리가 누워 코를 골고 있었다. 자신은 소파 위에 누운 채 바닥에 다리를 반쯤 늘어뜨리고 있었다. 아마 그가 너무 커서 침대에 눕히기에는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미샤는 없었다.

 

 

 그는 물을 마시러 어두컴컴한 부엌으로 나갔다. 머리가 너무 아파서 두통약이라도 한 알 삼키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갈랴를 깨워야 했다. 포기하고 테이블 위에 있는 주스 팩을 뜯어서 단숨에 마시고 나자 갈증과 두통이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화장실에 가려고 거실 쪽으로 나왔다가 그는 반쯤 열려 있는 안쪽 방문 사이로 울음 섞인 목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을 들었다. 갈랴와 료카의 방이었다. 혹시 임신 초기의 갈랴에게 어딘가 이상이 생긴 건 아닐까? 그러고 보니 그녀는 바에서도 안색이 좋지 않았었다. 걱정이 된 트로이는 문가로 다가갔다. 막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찰나 그는 료카가 자기들 방에서 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료카는 갈랴와 함께 있지 않은 거지?

 

 

 그는 문 뒤에 멈춰 섰다. 갈랴가 아니었다. 울고 있는 건 레나였다. 작은 침실 한가운데, 카펫도 깔려 있지 않은 마루 위에 서서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커튼이 없는 방이었기 때문에 창문으로 달빛이 쏟아져 들어와 램프를 켜놓은 듯 환했다. 침대 곁 의자에 미샤가 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이 너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갈랴는 아픈 것이 아니었다. 료카와 짜고 방을 내준 것이다. 레나와 미샤를 위해.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그는 빨리 몸을 돌려 방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발이 딱 붙어 버린 것처럼 꼼짝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어둠 속에 가려진 채 열린 문 너머로 멍하게 침실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나는 하얀색의 짧은 원피스 잠옷을 입고 긴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채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이따금 밀려나오는 울음 때문에 어깨가 들썩거렸다. 하지만 트로이는 레나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의 시선은 미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미샤는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머리는 엉망으로 뒤엉켜 검은색으로 물들인 월계관이라도 씌워놓은 것 같았다. 바에서 입고 있던 옷차림 그대로였다.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얼굴과 목은 시커멓게 번진 마스카라와 붉은 립스틱 자국으로 온통 얼룩져 있었다. 바에서 춤췄던 여자가 남겨놓은 흔적이었다. 그 얼굴을 닦지도 않고 어디를 쏘다니다 들어왔는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구겨진 얇은 셔츠 소매는 어깨 바로 아래까지 걷어 올리고 있었다.

 

 

 레나는 그를 나무라고 있었다. 화를 내다가 울다가 또 낮게 웃기도 했다. 트로이는 레나가 그렇게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었다. 그렇게 달빛 아래 하얀 잠옷을 입고 조그맣게 속삭이고 있으면 인어처럼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도. 그 침실 마루 위에서 달빛을 받으며 서 있는 작은 소녀는 너무나 매혹적이어서 빨간 머리와 에메랄드 눈동자의 지나이다 세도바조차도 아무런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얇은 잠옷 사이로 날씬한 몸매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미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레나에게 뭐라고 한두 마디 했지만 언제나처럼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였기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레나가 고개를 저으며 달려가 미샤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한 팔을 허리에 두르며 몸을 밀착시켰다. 다른 손을 들어 미샤의 지저분한 얼굴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어쩌면 화장품 얼룩을 닦아주려고 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미샤가 얼굴을 옆으로 돌리자 레나는 어깨를 세차게 튀기더니 반쯤 뛰어오르듯 발끝으로 서서 그의 턱을 감싸 쥐고 입술에 키스를 했다. 절망적이고 서툰 키스였다. 레나는 키스를 해 본 적이 별로 없는 애였다. 하지만 미인이었고 인어였다. 미샤는 레나를 떠밀지 않고 입맞춤을 받아주었다. 트로이는 그 애가 여자를 품에 안고 제대로 된 키스를 하는 것을 처음으로 보았다. 로미오가 아니었다. 무대 위의 순진해빠진 소년은 절대로 그런 키스를 할 수 없었다.

 

 

 입술을 뗀 후 미샤는 레나의 포옹을 풀지도 않고 그녀의 귓가에 조용히 뭐라고 속삭였다. 레나가 몸을 떨었다. 그녀는 팔을 풀고 미샤에게서 두 발짝 물러났다. 날카롭게 숨을 몰아쉬더니 발을 한번 굴렀다. 그리고 긴 머리채를 두 손으로 흐트러뜨리며 격하게 외쳤다.

 

 

 “ 나도, 나도 다른 애들 못지않게 해줄 수 있어! 나하고 사귀어 달라는 것도 아냐. 그래달라는 게 아니라구! ”

 

 

 레나가 숨을 쌕쌕거리면서 팔을 들어 올려 잠옷을 벗었다. 하지만 단추가 머리에 걸려 잘 벗겨지지 않았다. 흐느껴 울면서 레나는 머리에 걸린 잠옷 단추를 거칠게 잡아 뜯었고 술 취한 여자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옷을 벗어 내팽개쳤다. 달빛 때문에 작고 날씬한 레나가 은백색 조각상처럼 반짝거렸다. 트로이는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레나가 조그만 체구치고는 몸매가 좋다고 생각했다.

 

 

 레나는 다급한 나머지 부끄러움도 잊어버렸다. 그녀는 발레리나라도 된 양 두 팔을 앞으로 길게 뻗으며 미샤에게 다가가 목을 감고 매달렸다. 어깨와 가슴을 미샤의 셔츠 앞자락에 문지르며 귀 아래와 목덜미에 뜨겁게 입을 맞췄다. 트로이는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왜 몸을 움직일 수 없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지러웠고 온몸이 불덩어리처럼 타들어갔다.

 

 

 그때 미샤의 목소리가 들렸다.

 

 

 “ 이러지 마, 후회하게 될 거야. ”

 

 “ 아니야. 그렇지 않아. ”

 

 “ 크세니야. 그 여자 이름이야. 아까 홀에서 춤춘 여자. 같이 있었어. 내일도 같이 있을 거야. 그러니까 이러지 말자. ”

 

 

 레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갑작스럽게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

 

 

 “ 그 여자? 그 코끼리 같은 여자? 그 늙은 여자? 같이? 같이 있었다니? 그 여자랑 뭘 어쨌는데? ”

 

 “ 크세니야랑 잤어. 내일도 갈 거야, 그 여자가 원하면. ”

 

 

 레나가 미샤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두 손으로 가슴팍을 떠밀며 발로 걷어찼다.

 

 

 “ 나가! 꺼져버려! ”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찢어진 잠옷으로 몸을 가리며 비극 여배우처럼 울부짖었다.

 

 

 “ 그냥 싫다고 할 수도 있었잖아! 왜 그런 지저분한 말을 하는 거야? 넌 감정도 없어? 끔찍해! 끔찍하고 더러워! ”

 

 

 미샤는 잠시 아무 말 없이 레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얼굴에는 연민이나 미안함, 혹은 분노 따위의 감정이 전혀 떠올라 있지 않았다. 하지만 검은 마스카라와 붉은 립스틱으로 온통 얼룩져 있었으므로 설령 울고 있다 해도 보이지 않을 터였다. 그는 한숨조차 쉬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미안해. ”

 

 

 그리고는 침대 위로 올라가 창문을 열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

 

 

재즈 밴드 매니저이자 옛 댄서 크세니야와 미샤의 이야기는 이 흑해 에피소드 후반부에 좀더 이어지는데 레나의 이야기와는 좀 별개라서 올리지 않았다.

 

..

 

 

(가엾은) 레나가 등장했던 이야기들은 아래 링크. 소설 속에서 아래 순서대로 전개된다.

 

http://tveye.tistory.com/4050 : 썰매를 타러 간 미샤와 트로이, 그리고 친구들

http://tveye.tistory.com/4947 미샤와 지나이다의 졸업 무대

http://tveye.tistory.com/4671 흑해로 가는 기차, 새로 온 인간, 새로 온 천사

 

 

 

..

 

 

무용수들 사진 몇장.

 

 

 

아르춈 옵차렌코

 

 

디아나 비슈뇨바

 

이반 바실리예프

 

 

아래 세장은 밴드 즉흥 연주에 맞춰 신나게 팔짝거리며 춤추는 미샤와 크세니야를 생각하며 올려봄. (하긴 크세니야는 많이 팔짝거리진 못했겠지만 ㅠㅠ)

 

 

파루흐 루지마토프.

사진은 nina alovert.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이게 위 에피소드에서 잠깐 언급된 고파크.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지 민속춤)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예브게니야 오브라초바. 돈키호테.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사진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습하고 있는 볼쇼이의 아르춈 옵차렌코와 마린스키의 디아나 비슈뇨바)

 

..

 

 

전에 본편 중 몇가지 이야기를 발췌하면서 미샤의 키로프 발레단 시절 파트너 발레리나인 지나이다와의 이야기를 두어번 소개한 적이 있다.

(지나이다와 미샤의 수첩 대화 : http://tveye.tistory.com/4924
지나이다와 미샤의 졸업 무대 : http://tveye.tistory.com/4947)

 

트로이에게 가장 친한 친구인 알리사가 있듯 미샤에게는 파트너인 지나이다가 있는데 물론 서로의 관계는 각각 다르다. 알리사와 지나이다의 개인적 성격도 다르고 스타일도 다르다. 그런데 그 소설을 쓰면서 항상 그런 생각을 했다. 친구를 사귄다면 지나이다 같은 애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어.

 

발췌한 이야기는 1975년 9월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미샤가 키로프에서 세번째 시즌을 막 맞이했을 때 즈음이다. 그는 생각지 않은 부상으로 잠깐 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그리고 파트너인 지나이다가 이 소식을 듣고 병실에 찾아와 그를 들들 볶는다.

 

* 다닐로프와 아사예프는 소설 속 키로프 극장의 행정감독과 예술감독, 아스케로프는 미샤와 오래전부터 관계를 맺어온 병원 의사이다. 폴리나와 세레브랴코프는 발레단 동료 무용수들이다.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는 발레학교 시절 미샤와 지나이다의 은사이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미샤는 부상을 입은 것을 극장 관계자 외에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자기 어머니에게도 숨겼다. 물론 극장에도 사실대로 얘기한 것은 아니었다. 버스에서 넘어져 다쳤다고 둘러댔는데 세레브랴코프를 비롯한 그의 적들은 기뻐했고 나머지 동료들은 걱정했으며, 무대 외의 공간에서 미샤 야스민이란 이름이 거론되기만 하면 머리를 감싸쥐는 가엾은 다닐로프는 아스케로프가 내려준 면회 금지령 때문에 이틀 동안 속을 태우다가 병실로 들이닥쳤다. 풋내기처럼 넘어져서 다치다니 믿을 수가 없다면서 조심성 없는 행동과 자기 관리 부족에 대해 꾸짖기도 하고 그간의 징계가 좀 심했다는 것은 자기도 인정하지만 어쨌든 이제 조치가 다 풀렸으니 무대에 올라가기만 하면 되는데 왜 이렇게 운이 없느냐며 탄식하기도 했다.

 

 

 보리스 아사예프를 설득해 개막 공연 배역을 핀스키에게 넘긴 장본인으로서 가책을 느꼈기 때문인지, 미우나 고우나 저 골칫거리가 극장의 간판스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인지는 모르지만 다닐로프는 미샤에게 자기가 타던 차까지 주고 갔다. ‘네가 예뻐서 주는 줄 아느냐, 어차피 오래되어 바꿔야 하는 참에 잘됐다, 곧 수석무용수가 될 인간이 걸어 다니고 버스를 타고 다니다 넘어져서 다치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극장의 명예를 이렇게 실추시킬 셈이냐’ 등등 잔소리를 늘어놓으면서.

 

 물론 미샤는 퇴원 후 곧장 다닐로프에게 차를 돌려주러 갔다. 다닐로프는 예의를 모르는 놈이라고 그를 호되게 야단친 후 갑자기 급료를 인상해 주었고 한 달 후에는 수석무용수로 승급시켰다. 타마라의 정보가 사실로 판명된 것이다.

 

 

 다닐로프를 비롯한 극장 관계자들은 의심을 품지 않았지만 지나이다는 달랐다. 그녀는 미샤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병원으로 찾아왔다. 아스케로프가 면회 금지라며 쫓아내려고 하자 파트너는 보호자나 마찬가지라며 버럭 소리를 질러서 의사 선생을 당황하게 만든 후 당당하게 문을 밀어젖히고 병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때 미샤는 수혈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잠들어 있었고 트로이도 옆자리의 빈 침대에 누워 졸고 있었다. 지나이다는 붉은 머리의 여왕처럼 불쑥 들어오더니 트로이는 본 척도 않고 미샤의 뺨을 톡톡 쳐서 깨웠다. 눈을 뜨고 지나이다를 발견한 미샤는 놀라지도 않았다.

 

 

 “ 지나, 안녕. ”

 

 “ 얼마나 있어야 돼? ”

 

 “ 음, 일주일? ”

 

 “ 거짓말하지 마. 어깨에 금 갔잖아. ”

 

 “ 아, 나도 몰랐던 사실인데. ”

 

 “ 방금 엑스레이 나온 거 보고 왔어. ”

 

 

 미샤는 지나이다의 정보력에 진심으로 감탄하는 것처럼 보였다. 트로이는 옆 침대에 앉아 그 유명한 커플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구경했다. 미샤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상대가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었다. 그는 지나이다를 먼발치에서 볼 때마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혹되곤 했고 정상적인 남자들이라면 모두가 그녀에게 목을 매달 거라고 생각했다.

 

 

 “ 그럼 열흘? 걱정 마, 10월까진 괜찮아질 거야. ”

 

 “ 바야데르 말고 딴 것도 있잖아! 백조는 어떻게 할 건데! 그게 더 먼저잖아. ”

 

 “ 그건 너랑 추는 거 아니잖아. 폴리나 리보브나야. ”

 

 “ 멍청하긴, 차라리 내가 낫지. 폴랴가 얼마나 뚱뚱한지 몰라? 그 여잔 백조가 아니고 거위야! 아까 보니까 그 와중에 더 찐 것 같던데. 그 어깨로는 못 들어. 월말까진 어림도 없어. ”

 

 “ 폴리나는 키가 큰 거지 뚱뚱한 게 아냐. 테크닉도 좋아. ”

 

 “ 그래, 180짜리 여잘 한번 잘 들어봐. 남편 위세로 아직까지 무대에 남아 있는 여자 따위. ”

 

 “ 봄에도 같이 춘 거 기억 안나? 괜찮았어. ”

 

 “ 지금 어깨만 다친 게 아니잖아. ”

 

 

 지나이다가 모포를 휙 걷더니 수혈의 여파로 아직도 핏자국이 군데군데 남아 있는 환자복과 목에 감긴 붕대를 발견했다. 녹색 눈이 화학 약품이라도 쏟아부은 것처럼 확 불타올랐다.

 

 

 “ 너 넘어진 거 아니지? ”

 

 “ 왜? 넘어졌어. 버스에서 밀려서 떨어졌어. ”

 

 “ 내가 바보야? 10년이나 널 봤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남한테 떠밀려서 이렇게 다칠 수 있다는 걸 믿으라고? ”

 

 “ 무슨 일에든 처음이 있기 마련이야. ”

 

 “ 수혈 받았잖아! 누가 넘어졌다고 수혈을 받아! 그렇게 많이!

 

 

 지나이다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빽 질렀다. 트로이는 그녀가 병원의 누구를 닦달해 이 모든 것을 알아낸 것인지 그저 놀랍기만 했다. 아스케로프조차도 그녀 앞에서는 상대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미샤는 서릿발 같은 파트너 앞에서 변명을 늘어놔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했는지 전략을 바꿨다.

 

 

 “ 비밀로 좀 해줘, 지나. 안 그러면 다닐로프가 나 자를 거야. ”

 

 “ 언제 그런 거 신경이나 썼어? 그때도 페테르고프에 안 가서 이렇게 된 거잖아. 개막도 뺏기고, 너 때문에 나도 같이 밀렸잖아. ”

 

 “ 잘못했어. ”

 

 “ 월말까지 못 나오면 나 울리얀하고 춰야 될지도 몰라! 그 인간이 이번 솔로르 역 얼마나 눈독 들였는지 알아? 아사예프한테 얼마나 작업하고 다니는지 아냐고! ”

 

 “ 나간다니까. 절대로 네가 세레브랴코프와 출 일은 없을 거야. ”

 

 “ 당연하지, 날 그 병신하고 같이 추게 만들면 넌 진짜 끝장일 줄 알아. 대가리에 똥만 들어찬 그 수탉 같은 자식. ”

 

 “ 극장에선 그런 말 쓰지 마, 아가씨가 그러면 더 미움 받을 테니까. ”

 

 “ 자기 걱정이나 하시지. ”

 

 

 지나이다가 가까스로 흥분을 가라앉히고 침대에 앉았다. 모포를 다시 끌어당겨 목 아래까지 덮어준 후 이제 얼굴을 보며 갑자기 걱정스럽게 물었다.

 

 

 “ 입술에 흉 지는 거 아니지? ”

 

 “ 실밥 뽑으면 괜찮을걸. ”

 

 “ 목은? ”

 

 “ 잘 안보일 거야. ”

 

 “ 모스크바에 진짜 괜찮은 의사 있어. 전화해 줄게. 흉터 안 생기게 해 줄 거야. ”

 

 “ 대충 파우더로 가리지 뭐. ”

 

 

 트로이는 그 프로 의식이 결여된 대답에 지나이다가 다시 폭발하는 게 아닌가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그녀는 화를 내지 않고 가방에서 얇은 노트와 복사본 테이프 몇 개를 꺼냈다.

 

 

 “ 자, 어제 맞춰보다 만 거.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가 동선 다시 짜줬어. ”

 

 “ 이렇게 가는 거 싫다며. ”

 

 “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의견이니까 그렇게 가 줄게. ”

 

 “ 왜 내 의견은 안 받아줘, 같은 건데. ”

 

 “ 그땐 네가 재수 없게 말했잖아. ”

 

 “ 넌 문 잠갔잖아. ”

 

 “ 그렇다고 그냥 가는 게 어디 있어!

 

 

 지나이다는 잠깐 발칵 화를 냈다가 갑자기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 어제 나가다가 그런 거야? 내가 문 안 잠갔으면 이런 일 없었을지도 모르겠네. ”

 

 “ 아냐, 절대로. ”

 

 

 미샤가 지나이다의 손을 잠깐 잡아 흔들었다. 그때 트로이는 미샤가 왜 파트너와 친구를 같은 선상에 두면서 신뢰에 대해 말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문득 알리사가 사무치도록 그리워졌다.

 

 

 지나이다는 알리사처럼 울음을 터뜨리거나 포옹을 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에메랄드 녹색 눈을 반짝이면서 한동안 자기 파트너를 책망과 걱정이 섞인 표정으로 내려다보다가 가방을 집어들고 일어났다.

 

 

 “ 참, 12월에 파리에 투어 간대. 브뤼셀이랑 암스테르담도. 제발 이번엔 말썽피우지 마. 말 잘 들으면 백조랑 지젤 둘 다 줄지도 몰라. ”

 

 “ 누구 말을 잘 들으란 거야? 아사예프? ”

 

 “ 전부 다. 특히 내 말을 잘 들어야 돼. ”

 

 “ 그건 별로 어렵지 않네. ”

 

 “ 우리 일린이랑 작업하게 될지도 모른대. ”

 

 “ 누구, 볼쇼이의 그 일린? ”

 

 “ 그래, 그 일린. 그러니까 제발 착하게 굴어. 나 정말 일린이랑 일해보고 싶었어. ”

 

 “ 어떻게 아사예프가 일린을 받았지? ”

 

 “ 아직 안 받았어. 다닐로프가 구워삶고 있는 중이야. 일린이 오면 새 작품을 하게 될 거야. 그러니까 빨리 일어나. ”

 

 “ 올해 듣는 유일한 희소식이군. ”

 

 

 미샤가 처음으로 웃었다. 지나이다는 안심한 듯 그의 머리를 살짝 두들기더니 나가버렸다.

 

 

 “ 연습실에서 내쫓길 만하네. 진짜 여왕님 같은데. ”

 

 “ 폭군이야. 화내면 아무도 못 건드려. ”

 

 “ 그래도 네 편 들어주잖아. ”

 

 “ 파트너니까, 열 살 때부터 알았어. ”

 

 “ 파트너 되기 전에 지나 사귄 적 없어, 정말? ”

 

 “ 왜 그런 걸 물어? ”

 

 “ 모두가 궁금해 하는 사실인걸. ”

 

 “ 없어. 지나는 동료야. ”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여자애들과 사귄 적이 없어. 그런 건 못해. 속이기 싫어. 걔들도, 나도. ”

 

 “ 어릴 땐 잘 모르잖아. 난 여자애들을 먼저 만났어. ”

 

 “ 난 어릴 때부터 알았어. ”

 

 

 미샤는 진통제 때문에 다시 속이 울렁거리는 듯 심호흡을 하더니 베개에 얼굴을 반쯤 파묻었다. 한동안 말이 없었기 때문에 트로이는 그가 자는 줄 알고 침대에 흩어진 노트와 테이프를 치우기 시작했다.

 

 

 “ 넌 아마 결혼을 하게 될 거야, 안드레이. ”

 

 “ 그게 무슨 뜻이야? 왜 그런 말을 하지? ”

 

 “ 정상적으로 살고 싶어 하니까. ”

 

 

 트로이는 미샤의 얼굴에서 베개를 치웠다. 반쯤 감겨 있는 눈을 노려보면서 격하게 말했다.

 

 

 “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의사 선생 말이 맞아, 넌 사람 마음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

 

 “ 미안. 화내지 마. ”

 

 

 미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손으로 다리의 상처 부위를 누르며 다치지 않은 쪽으로 돌아누웠다. 트로이는 병원 밖으로 나가 저녁이 될 때까지 네프스키 뒷길 구석구석을 걸었다.

 

 

 

..

 

 

결국 미샤는 지나이다의 말을 잘 들었을 것이다. 이후 파리 투어에 가기 때문이다 :0 일린도 볼쇼이에서 오게 된다. 그 이야기들은 중후반부에서 펼쳐진다. 이 소설을 비롯해 또다른 소설들에 나오는 일린의 이야기는 이 폴더에 몇번 따로 발췌한 적이 있다. 일린에 대한 얘기들은 여러번 올렸으니 링크는 생략.

미샤의 파리 투어에 대한 서구의 반응이 어땠는지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5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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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이다가 미샤에게 너때문에 개막 공연 밀렸다면서 페테르고프 얘기를 하는 부분은 전에 올렸던 단편 illuminated wall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그 단편에서 미샤는 페테르고프 권력자의 별장에 초청을 받아 춤을 추러 가야 하는 상황에서 제멋대로 행동했다. 전체 이야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385

그리고 그 단편에 대해 지난 여름에 카잔 성당 앞 벤치에서 아이스크림 먹으며 레냐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레냐의 반응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4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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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너 무용수들 사진 몇장.

 

 

황금노예를 추는 파루흐 루지마토프. 조바이다 역의 상대 발레리나는 언뜻 얼굴 윤곽을 보면 일제 리에파나 이르마 니오라제를 닮았는데 정면 얼굴이 아니라서 좀 긴가민가하다... 마할리나와 아실무라토바는 아니고... 자하로바도 아니고...

(고백하자면 루지마토프에 눈이 멀어 상대역이 분간 안갑니다 흐흑 ㅠㅠ)

 

 

 

라 바야데르를 추는 파루흐 루지마토프와 율리야 마할리나(..옆얼굴과 체형, 키로 추정...)

 

위의 이야기에서 지나이다가 개막 공연 밀렸다고 다 너때문이라고 하는 공연이 바로 라 바야데르 얘기다. 이 소설에서는 예술감독 아사예프가 라 바야데르를 좀 다른 식으로 리메이크해 시즌 개막공연으로 올리는데 미샤와 지나이다가 주역인 솔로르와 니키야로 낙착되었다가 지나이다의 비난대로 미샤의 말썽 때문에(ㅜㅜ) 다른 날로 공연일정이 밀려버린다...

 

(내가 지나이다였으면 미샤 얼굴 세번은 할퀴었을듯 ㅋ)

 

 

 

한동안 뜸했기에... 이제부터는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스페셜

사진은 모두 alex gouliaev

예카테리나 콘다우로바와 함께 젊은이와 죽음 리허설 중.

 

 

 

사진은 alex gouliaev

예카테리나 콘다우로바와 함께 젊은이와 죽음 리허설 중.

 

 

캡션대로 사진은 alex gouliaev

라트만스키 발레 신데렐라를 연습하는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와 디아나 비슈뇨바.

이 발레는 우리나라에도 dvd로 나와있습니다. 라트만스키와 두 무용수의 팬들이라면 추천~

 

 

역시 캡션대로 사진은 alex gouliaev

라트만스키 발레 신데렐라를 연습하는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와 디아나 비슈뇨바.

 

 

 

이것도 alex gouliaev.  

라트만스키 발레 신데렐라의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와 디아나 비슈뇨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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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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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새로운 글을 구상하면서 원래 써오던 글인 가브릴로프 본편은 잠깐 미뤄두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야 하는 글인 건 변함이 없다. 그래서 새 글 구상을 하면서 동시에 이전에 좀 써둔 가브릴로프 본편을 훑어보고도 있다. 많이 쓰진 않아서 총 4개 장으로 이루어진 1부를 마치고 2부 첫장을 쓰다 중단되어 있다(그 다음부터는 이것의 패러디 외전인 서무의 슬픔 시리즈만 줄창 써서 ㅠㅠ) 

 

어제 본편 훑어보다 1부 3장에서 잠깐 생각을 돌이켜보았다. 3장에서는 지방 소도시 가브릴로프 극장에 예술감독으로 부임한 미샤가 감독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하는 이야기를 다뤘었는데 이 장의 후반부는 이 도시의 특권층(노멘 클라투라)이자 나름대로 유력한 문예지 편집장인 렐랴가 미샤를 찾아가 인터뷰를 하는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렐랴는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도 꾸준히 등장하는 인물이라 아마 서무 시리즈를 보신 분들은 친숙하실 것이다(미샤를 사모하여 맨날맨날 과자랑 케익 구워다 바치고 잼 만들어주고... 막상 실속은 없는 가브릴로프 최고 미녀로 등장했음) 렐랴의 성인 비슈네바는 물론 내가 좋아하는 무용수 디아나 비슈뇨바에게서 따왔는데 액센트 위치만 바꾸어서 비슈뇨바 대신 비슈네바로 만들었다. 본편의 렐랴는 서무 시리즈에서처럼 코믹한 인물은 아니고... 이 인물을 데리고 전에 가브릴로프 추리외전도 쓴 적 있다. 거기선 무려 주인공으로 탐정 역할도 했었다만...

 

기존에 쓴 본편 우주의 여러 글에서 미샤가 자신의 예술관이나 관객에 대한 태도 등에 대해 직접적으로 얘기한 것은 매우 드물다. 물론 단편 하나와 장편 하나에서 그가 서방/소련 언론과 인터뷰를 한 내용을 두어번 쓴 적은 있지만 그 맥락은 달랐다. 그때까지 미샤는 안무가라기보다는 무용수였다. 그리고 안무가이자 감독의 입장에서 인터뷰를 하는 것은 이 가브릴로프 본편이 처음이고 훨씬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게 된다. 하지만 '직접적'이라는 것이 언제나 '더 솔직한', 혹은 '더 자세한'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렐랴의 인터뷰 장면을 발췌해 본다. 관객을 대하는 미샤의 자세가 좀 나온다. 이 글을 쓸때 나는 작가이자 관객이었는데 그 둘 중 어느쪽이 우선한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작가가 '이렇게' 쓴다고 해서 그가 '이렇게' 믿는다고 규정하는 것은 언제나 조금은 위험한 일이다.

 

초반에 언급되는 '먀흐킨'은 가브릴로프 극장의 극장장이자 시 의회 의원이며 렐랴의 외삼촌이다. (렐랴는 집안이 매우 좋다) 이 먀흐킨도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몇번 등장했다. 제일 큰 비중으로 나왔던 건 34편의 딸기 아가씨들과 바자회 에피소드였음. '비슈네브이 사드'는 벚꽃 동산이란 뜻으로(체호프의 유명한 희곡 제목이기도 함) 소설 속에서 렐랴가 편집장으로 있는 문예지 제목이다. 류다는 미샤의 비서인 류드밀라이다(이 사람도 서무 시리즈에 꾸준히 나왔음)

 

 

위의 사진은 6월에 마린스키 구관에서 내가 찍은 것.

 

 

 

이건 마린스키 브 콘탁테 페이지에 올라왔던 사진. 마린스키 극장 위에서 내려다보고 찍은 광경. 가운데 거대한 것은 샹들리에!!

 

 

사진사는 캡션에 있듯 Podorozhny. 볼쇼이 극장. 백스테이지에서 바라본 무대 연습 장면.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물론 렐랴는 자신이 제대로 된 저널리스트이며 문화예술 애호가라고 생각했다. 예술계 인사를 인터뷰할 때는 정치적 문제나 이념, 사생활 등으로 인한 선입견은 배제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녀가 미샤 야스민을 인터뷰하러 갔을 때 마치 생일 선물을 받으러 가는 어린 아이처럼 설레는 마음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원래 취임식 당일에 사전 인터뷰를 진행하려고 했지만 미샤가 일정이 빠듯해서 겨우 두 개의 인터뷰에만 응한 데다 문예지보다는 텔레비전 방송사와 연방 홍보국의 입김이 더 셌기 때문에 포기했다. 그리고 렐랴에게 필요했던 것은 겨우 2~3분짜리 홍보 인터뷰가 아니라 비슈네브이 사드 10월호 커버스토리에 어울리는 심도 깊은 대담이었다. 그 인터뷰는 약 한 시간 동안 진행되었는데 절반은 렐랴의 생각대로,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오후 2시에 그녀는 사진사 한 명을 대동한 채 녹음기와 노트를 들고 미샤를 만나러 갔다. 극장은 썰렁했다. 사람도 없었다. 비서실조차 비어 있었다. 처음에 렐랴는 다들 젊은 감독에 맞서 파업이라도 하는 건가 하고 깜짝 놀랐지만 곧 그날이 월요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극장 휴일이었다. 약속 날짜를 착각했나 하는 불안감도 잠깐, 렐랴가 노크를 하자 미샤가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렐랴는 무대의 마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조명과 의상, 메이크업의 트릭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알았다. 달리 배우들에 대한 기사에서 ‘ㅇㅇ는 무대 위에서의 카리스마와는 달리 사석에서는 아주 평범한 모습이라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라는 문구가 자주 등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먀흐킨조차도 첫날 미샤와 만나고 돌아온 후 호기심에 가득 찬 렐랴의 질문에 약간 마뜩치 않은 어조로 대꾸했다.

 

 

 “ 그렇게 눈에 띄는 친구는 아니었어. 생각보다 작아, 자작나무처럼 야윈 게 데니스 체격의 반 밖에 안 될 거 같더라니까. 전에 무대에서 봤을 때는 꽤 크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애가 어떻게 발레리나들을 들고 돌렸는지 모르겠더구나. 게다가 너무 어려 보여서 깜짝 놀랐단다. 데뷔한지 7~8년이 다 됐으니 스물다섯은 넘겼을 텐데 학생처럼 보였어. 렐렌카 너보다 더 어려보이더구나. 하긴 우리 수석 남자애들보다 더 젊지. 류다가 옆에서 보더니 새 감독님은 인형처럼 곱상하다고 농담을 할 정도였어. 생긴 것도 그렇고 말수도 적은 게 기 센 극장 사람들을 어떻게 휘어잡을지 좀 걱정이 될 지경이었단다. 뭐 나름대로 강단 있는 친구라니까 지켜보긴 해야겠지... ”

 

 

 눈앞에서 미샤 야스민을 마주 대했을 때 렐랴는 먀흐킨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반쯤 이해했다. 그녀의 외삼촌은 여러 극장들을 거쳐 온 데다 최근 몇 년 동안은 시 의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자를 평가할 때 당당한 풍채와 큰 목소리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사복 차림의 미샤는 극장장의 말대로 앳된 대학생처럼 보였지만 그건 아주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렐랴는 그가 움직이는 방식에 매료되었고 레닌그라드 액센트와 차분한 말투에 대해서는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렐랴는 비슈네브이 사드의 특집 기사를 다음과 같은 거창한 문장으로 시작했다.

 

 

 ‘ 그런 식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곁을 스쳐지나가는 순간 그는 민첩하고 유연한 짐승처럼 보인다. 그는 삐걱거리는 복도와 낡은 사무실, 낙엽이 쌓여 있는 좁은 길, 일상적인 모든 공간을 순식간에 극장 무대로 변형시킨다. 그가 입을 열면 정확하고 또렷한 발음과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 결코 충돌 관계에 놓여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는 마치 칼날에 벨벳을 두른 것처럼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그의 무대를 연상시킨다. ’

 

 

 미샤는 비교적 진지하게 인터뷰에 임했지만 렐랴의 모든 질문에 답변한 것은 아니었다. 키로프와 볼쇼이 시절 무대에 대해, 기존 안무작에 대해서는 그래도 성실하게 답했지만 발레 팬인 렐랴는 이미 예전 인터뷰를 통해 아는 이야기들이었다. 렐랴는 해외 유명 극장들에서의 공연과 뉴욕 발레단과의 협업에 대해서도 물었지만 미샤는 무용수로서든 안무가로서든 좋은 경험이었다는 대답 한 마디로 피해갔다. 그녀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내용은 어차피 검열국에 넘어가기 전에 자신이 모두 편집할 테니 너무 조심스러워할 필요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초면부터 그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꾹 참았다.

 

 

 그래서 그녀는 화제를 바꾸었다. 레닌그라드에서 살다가 지방 소도시로 옮겨와서 답답하지 않은지, 가브릴로프의 첫 인상이 어떤지 가벼운 질문을 던졌다. 미샤는 나무가 많고 강이 아름다워서 좋다고 대답했다. 다분히 정치적인 답변이라고 생각한 렐랴는 첫 번째 질문을 되풀이했다.

 

 

 “ 음, 여기는 레닌그라드나 모스크바와는 물론 완전히 다르죠. 전 지금까지 조용한 곳에서 지내본 적이 거의 없어요. 숲이 많은 곳에서도. 전 언제나 새로운 환경에 고무되곤 해요. 답답함을 느낄 겨를이 없죠. 도처에 모르는 것들이 가득하니까요. 지금은 할 일도 굉장히 많고요. ”

 

 “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리 가브릴로프에는 싸움꾼과 성자 밖에 없다는 옛말이 있거든요. 아주 다혈질에 공격적인 성미거나 아예 온순하거나 둘 중 하나고 중간은 없다고요. 전형적인 시골 사람들의 특징이죠. ”

 

 “ 그런가요? 전 사람들은 어디나 같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차이를 잘 모르겠던데. ”

 

 “ 레닌그라드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예의를 차리고 외교적인 미사여구를 구사한다던데 사실인 것 같네요. ”

 

 

 미샤는 가볍게 웃었다. 하지만 렐랴의 말을 부정하려 들지는 않았다. 렐랴가 새로 맡은 감독직에 대해, 극장에 대한 전반적 의견과 발레단에 대한 생각을 물었을 때는 원론적이고 짤막한 답변만 했다. 렐랴가 신임감독의 어려움이나 극장 내부 인사들의 텃세 여부에 대해서 꼬치꼬치 물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 아직 2주도 안돼서요. 지금으로서는 할 얘기가 별로 없군요. ”

 

 “ 하지만 매일 공연을 보고 계시잖아요. 그것도 백스테이지가 아니라 관객석에서. 사실 그 소식도 꽤 신선했거든요. 이제껏 그런 예술감독은 없었어요. ”

 

 “ 극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대를 봐야 하니까요. 아마 제가 무용수였다면 다른 식으로 행동했을지도 모르죠. ”

 

 “ 무대는 백스테이지에서도 볼 수 있잖아요. 감독이나 연출가들은 보통 그렇게 하지 않나요? ”

 

 “ 시간이 좀 지나면 저도 그렇게 할 거예요. ”

 

 “ 왜 지금은 그렇지 않죠? 아직 우리 극장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셨다는 건가요? 볼쇼이나 키로프 같은 큰 극장 무대에도 작품을 올리셨잖아요. 그에 비하면 가브릴로프 극장은 규모도 작고 레퍼토리도 단순한데. 연출도 여러 번 해보셨으니 무대의 구조나 동선은 한두 번만 봐도 전부 파악하실 수 있지 않나요? ”

 

 “ 제가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던 것 같군요. 전 극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대를 봐야 한다고 말했죠. 그건 관객을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어요. ”

 

 “ 어떤 사람들이 우리 공연을 보러 오는지? ”

 

 “ 네. 그리고 그들이 어떤 식으로 공연을 보는지. 극장이라는 공간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이야기하고 보고 느끼는지. 그 모든 것이 중요해요. 관객과 소통하지 않는 무대는 절반만 열려 있는 공간이에요. 극장은 예술가의 자기만족과 독백만을 위한 장소가 아니니까요. ”

 

 “ 좀 의외네요. 전 당신이 엘리트주의자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예술가들 대부분이 그렇죠. 관객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은 보통 하지 않잖아요. 관객들이 자신의 예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슬퍼하는 경우가 더 많은데. ”

 

 “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건 이성의 영역이죠. 이해하지 못하고도 사랑할 수 있고 슬퍼할 수도 있어요.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반응할 수도 있고요. 그들로 하여금 뭔가를 느끼게 만들 수 없다면 그건 실패한 공연이에요. ”

 

 “ 백조의 호수나 지젤이라면 모르지만 관객들이 호두까기 인형을 보면서 어떤 감정적 고양을 느끼지는 않잖아요. ”

 

 “ 하지만 즐거워하죠. 아기자기한 무대에 감탄하는 사람들도 있고 발레리나들의 화려한 의상과 움직임을 모방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도 있고요. 감정적 고양이란 꼭 거창하고 드라마틱한 것만은 아니에요. 예술계의 많은 사람들이 가끔 빠져드는 함정이 있죠. 장엄하고 영웅적인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추구하지 않으면 예술가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거라고 믿어버리는 것. 그건 일종의 도그마예요. 기본적으로 예술이란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고 거기에는 진정성이 필요해요. ”

 

 “ 호두까기를 보면서 웃는 어린아이들과 잠자는 미녀를 보면서 그 구조적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발레 애호가들이 원칙적으로는 동일하고 평등한 관객이라는 것인가요? ”

 

 “ 네. ”

 

 “ 그건 가브릴로프 극장 예술감독으로서의 가치관인가요, 아니면 무용수이자 창작자인 미하일 야스민의 믿음인가요? ”

 

 “ 감독으로서의 저와 예술가로서의 저 사이에는 몇 가지 차이가 있겠죠. 하지만 관객에 대한 제 태도는 전자든 후자든 변함없을 거예요. ”

 

 “ 그것이 당신이 무대에서 그 수많은 관객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비밀인가요? 그들 모두를 이해하고 동등하게 대하려고 했다는 것? ”

 

 “ 조금은요. ”

 

 “ 그럼 나머지는 뭐죠? ”

 

 “ 그건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워요. ”

 

 “ 그런가요? 보통 그런 힘을 가리켜 재능이라고들 하죠. 우리 가브릴로프에서는 천사가 날개로 쓰다듬고 지나갔다고 해요. ”

 

 

 미샤는 다시 소리 없이 웃었다. 렐랴는 그가 재능에 대한 칭찬 앞에서 점잔을 빼거나 겸손한 척 고개를 젓지 않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하긴 학창 시절부터 귀가 닳도록 들어왔을 얘기일 것이다.

 

 

 그녀는 하루 앞으로 다가온 오디션에 대해서도 물었다. 미샤는 레베진스키에게 했던 대답을 짧게 되풀이했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극장을 어떤 식으로 이끌어나갈지 물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레퍼토리를 다양화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을 뿐이었다. 15년에 달하는 파벨 쿠즈네초프의 재임 기간 동안 극장이 정체 상태에 빠졌고 쇠퇴기에 접어들었다는 평이 많은데 이를 어떤 식으로 타개할 생각인지, 키로프를 가브릴로프 극장의 이상적인 발전 모델로 생각하고 있는지 물었을 때 미샤는 잠깐 침묵했다가 천천히 대꾸했다.

 

 

 “ 그건 아직 모르겠군요. 시즌이 좀 지나봐야 알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 극장은 키로프와는 다르죠. 역사도 문화도, 무용수들의 성장 배경이나 기질도 달라요. 같은 도시가 어디에도 없듯이 극장도 마찬가지예요. 극장을 빵 찍어내듯 똑같이 만들 수는 없어요. 그래서도 안 되고요. ”

 

 “ 사람들은 어디서나 같다고 생각하신다면서요, 도시와 극장은 어째서 다른가요? ”

 

 “ 글쎄요. 어쩌면 사람들이 결국 같지 않은지도 모르죠. ”

 

 

 미샤는 수수께끼 같은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공식적인 인터뷰를 끝낸 후 렐랴는 호기심을 견디지 못하고 개인적인 질문을 몇 개 던졌다. 좋아하는 색깔이라든지, 음식이라든지, 작가라든지, 이상형이라든지, 혹시 레닌그라드에 연인이 남아 있는지도 살짝 떠보았다. 미샤는 대부분의 질문을 침묵이나 미소로 넘겼다. 그가 사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렐랴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마지막으로 농담을 섞어 물었다.

 

 

 “ 사무실로 절 안내하신 이유는 접견실 문이 잠겼기 때문인가요? 월요일이라 아무도 출근을 하지 않아서? 지금까지 극장장이나 감독 인터뷰는 항상 접견실에서 했었거든요. 아니면 접견실의 권위적인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을지도 모르겠네요. 전 항상 거기 들어가면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인테리어도 그렇고 좀 제정 시대 느낌이... ”

 

 “ 아뇨. 전 어디든 별로 상관없는데 어제 세탁 때문에 접견실 커튼을 모두 벗겨냈다고 해서요. 햇빛도 강하게 들어오고 살충제도 잔뜩 놨으니 오늘은 들어가지 말라고 류다가 당부해서요. 운 나쁘면 바퀴벌레들을 밟게 될 거라고 경고하더군요. ”

 

 

 렐랴는 하마터면 크게 웃음을 터뜨릴 뻔 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농담인지 진지하게 얘기하는 건지 구분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마친 후 그 유명한 스타를 직접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 사진사 주보프의 간곡한 부탁으로 무대와 발코니 좌석에서 추가로 사진을 찍느라 15분 정도가 더 소요되었다. 주보프는 요청이나 지시도 없이 그저 계속해서 셔터를 눌러댔을 뿐이었다. 심지어 미샤는 별다른 포즈를 취하지도 않았다. 가만히 서 있거나 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그건 놀라운 일이었다. 세묜 주보프는 시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사진사였지만 예술가적 자존심이 센데다 까다롭기 그지없는 사람이라 심지어 유명 인사들에게조차 이렇게 앉아라 저렇게 머리를 돌려라 하며 들들 볶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때 주보프는 술에 취한 듯, 필름 구입예산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린 것처럼 셔터를 연속으로 눌러댔다. 꼭 기관총 사수 같았다. 나중에 현상된 사진들을 보고서야 렐랴는 주보프가 왜 미샤에게 그렇게 관대했는지 이해했다.

 

 

 “ 그런 피사체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지. ”

 

 “ 하긴 그 사람 진짜 미남이긴 했어요. 마음 같아서는 20페이지 쯤 늘려서 이 사진들 전부 컬러로 싣고 싶네요. ”

 

 “ 그런 것과는 좀 달라. 외모가 아무리 잘 나면 뭘 하나, 당장 우리 극장에도 얼굴만 예쁘고 나머지는 나무토막 같은 애들이 태반인데. 이 친구는 특별한 경우야. 그건 타고 나는 거지. 가뭄에 콩 나듯 그런 사람이 있어. 렌즈가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사람. 춤추는 걸 찍었어야 했는데... ”

 

 

 주보프는 못내 아쉬워했다. 아라베스크 포즈를 취해달라는 그의 유일한 부탁을 미샤가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했기 때문이다.

 

“ 전 이제 춤을 추지 않아서요. ”

 

 주보프는 그 유명한 포즈를 찍기 위해 당장이라도 미샤의 발아래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지만 렐랴는 키로프 시절 사진을 한 장 가져다 쓰면 된다고 그를 부드럽게 진정시켰다. 사실 그녀도 실망했지만 콧대 높은 예술가의 변덕에 간섭해봤자 좋을 일이 없다고 마음을 달랬다.

 

 

 

 

...

 

 

 

무용수들 사진 몇 장.

먼저 루돌프 누레예프. 주보프는 이 사람 앞에서도 넋을 잃고 셔터를 눌러댔을 것이다.

 

 

루돌프 누레예프. 햄릿 중에서.

 

 

블라지미르 말라호프. 사진은 캡션에 있듯 nina alovert. 이 사람의 포즈도 정말 아름답다.

 

 

 

 

90년대 키로프-마린스키 시절의 율리야 마할리나. 마린스키 극장 좌석에 앉아서.

사진은 캡션에 있듯 nina alovert

 

 

 

역시 사진은 nina alovert

피사체로서의 매력이 넘치는 무용수로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카리스마를 내뿜는 젊은 시절의 파루흐 루지마토프.

 

위의 누레예프, 말라호프, 루지마토프 모두 각각 서로 다른 면에서 무용수로서의 미샤에게 조금씩 영감을 준 인물들이다.

 

 

 

파루흐 루지마토프 한 장 더. 사진은 캡션에 있듯 nina alovert

 

 

 

팬심으로,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사진도 한 장. 젊은이와 죽음. 사진은 alex gouliaev

 

 

 

이건 내가 이번 6월에 마린스키 구관에서 찍은 사진들 몇장. 관객으로서 찍은 사진들 :)

 

 

 

 

 

 

 

 

이 사진은 볼쇼이 무용수인 아르춈 옵차렌코와 디아나 비슈뇨바. 몇달 전 마린스키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함께 췄는데 이건 백스테이지에서 찍은 리허설 장면이다.

 

 

 

프리드리만 보겔.

 

 

 

이건 내가 폰으로 찍은 사진. 여기는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예전에 맡은 업무 때문에 하루종일 여기 있었던 적이 있는데 그때 찍음... 여러 모로 힘들었기 때문에 당시의 기억은 지우고 싶다만... 덕분에 백스테이지와 분장실, 음향, 조명 등 이것저것 많이 훑었고 그것만으로도 내겐 수확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

 

렐랴와 먀흐킨, 미샤 등이 코믹한 패러디 버전으로 등장해 복작거리는 외전 에피소드들이 궁금하시면 서무의 슬픔 시리즈 폴더를 보세요~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아주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약 2년쯤 전에 나는 가브릴로프 본편을 시작했다가 잘 풀리지 않아서 그 본편에 삽입될 에피소드 하나를 독립된 단편으로 먼저 썼다. 지방 소도시인 가브릴로프의 시립극장 예술감독으로 부임한 나의 주인공 미샤가 그곳 오케스트라의 실력자이자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인 로만 코즐로프와 의견 충돌을 일으킨 후 하룻밤을 보내고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는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코즐로프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코즐로프는 이 본편의 외전 격인 서무의 슬픔 시리즈 때문에 어린 애인에게 폭 빠진 다혈질의 흑염소 아저씨(ㅜㅜ)이자 바이올린 깡패로 등극하게 되었지만 원래 본편에선 그런 막가파 캐릭터는 아니었다(아무래도 서무 시리즈 때문에 코즐로프가 제일 웃기게 변한듯... 손해봤어 ㅠㅠ)



하여튼 그 에피소드는 생각보다는 좀 길어서 실제 본편이 씌어졌을 때는 좀 손을 봐야 할테지만 지금으로선 그냥 독립적인 단편으로 존재하고 있다. 제목은 매우 단순하게도 '밤'(night) 이었는데 다른 제목을 굳이 붙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누군가가 누군가를 만나 밤을 보내고 사랑에 빠지는 무수한 이야기 중 하나일 뿐이니까. 우습지만 이 이야기를 처음 발췌했을 때 후반부에 둘이 사과파이 먹는 장면을 인용했기 때문에 종종 '사과파이 단편'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있다. (서무 시리즈에서 왕재수가 사과파이를 좋아하는 걸로 설정된 건 사실 이 단편 때문이다)



이 단편은 전에 사과파이 에피소드나 미샤가 백조 솔로를 추는 씬, 그리고 전반부 1~2장 전체를 발췌한 적이 있다. 그냥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술을 못 마시는 미샤가 보드카를 실컷 퍼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어 코즐로프의 집에서 밤을 보내는 얘기다. 어떤 이야기들이든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간단해지는 법이다.



아래 발췌한 부분은 거의 후반부이다. 이 이야기 앞뒤 에피소드도 전에 발췌한 적 있다. 그 링크들은 이야기 아래에 따로...



 초반에 언급되는 게오르기 벨스키는 미샤를 후원하는 공산당 고위 간부로 예전에도 종종 언급된 적이 있다. 수감된 미샤를 빼내 가브릴로프로 보내는데 큰 공헌을 한 사람이다. 중간에 언급되는 아르카지는 이 이야기에서 극장 카페 매니저로 등장하는 인물이고(서무 시리즈에도 나왔다. 보르쉬에 물타는 사람. 이 이야기에서는 보드카에 물을 탄다. 물타기 전문가 ㅋㅋ), 나중에 언급되는 딤카 아르부조프는 물론 가상의 인물로 내가 만들어낸 사람이다.



맨 위의 사진은 연습실의 파루흐 루지마토프. 사진사는 캡션대로 marina bakano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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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옷을 입은 후 미샤는 거실로 갔다. 내겐 묻지도 않고 티 테이블을 옆으로 밀어놓더니 스트레칭을 했다. 동작 하나하나가 유연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문득 자식이 춤을 추는 걸 보고 싶어졌지만 춰달라고 하지는 않았다. 얼간이처럼 보일 테니까.

 


  그 애는 단 한번, 왼쪽 발끝으로 선 채 오른쪽 다리를 길게 내뻗었을 뿐이었다. 낯간지러운 말이지만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포즈였다. 지금껏 그런 깨끗하고 근사한 동작을 본 적이 있나 싶었다. 하긴 오케스트라 핏에 들어가 있으면 연주자는 무용수의 동작을 볼 수 없다. 그건 지휘자의 몫이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빌어먹을 저 꼬마는 나에게 연주를 바꿔달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아침이 되자 더 이상 부아가 치밀지 않았다. 그깟 연주 바꿔주면 그만이다. 저런 동작을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다. 그럴 자격이 있는 놈이었다. 분명 바닥을 딛고 있는데도 자식은 날아오르는 새처럼 보였다. 왜 양키들과 유럽 부르주아들이 자식을 낚아채려고 했는지 이해가 갔다. 우리 연방 관객들이 그 애를 볼 때마다 천사라고 불렀던 이유도.

 


 나는 이제 벨스키가 그 아이를 구해내려고 했던 이유도 알 것 같았다. 게오르기 벨스키. 이 촌 동네에서 자라나 어마어마하게 출세한 남자. 우리 극장 발레리나를 어머니로 둔 남자. 그래서 극장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정치국 의원. 미샤가 그 대단한 의원님의 침대를 데워주는 노리개였든 아니든 그건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아름다움은 흔한 것이 아니다. 평생 한번 볼까 말까한 것이다. 그런 희귀한 재능을 가진 아이가 눈앞에 있다면, 정신병자들이 득실거리는 수용소에서 죽어가게 된다면 내가 벨스키라 해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무대를 직접 본 것도, 제대로 된 연속 동작을 본 것도 아니면서, 그저 완전히 정지한 채 날아오르는 그 포즈 하나밖에 보지 못했으면서도 나는 그 아이의 모든 것을 용서했다. 순식간에 홀려버렸다. 숭배하게 되었다. 우스운 것은 아무리 유명하고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를 들었을 때도 그런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역시 나는 음악가가 아니라 그저 연주자 나부랭이에 불과했다.

 


  “ 회전. 푸에테라고 하나? 그거 보고 싶은데. ”

 


나도 모르게 속마음을 불쑥 입 밖에 내버렸다. 미샤는 왼쪽 허리와 허벅지를 주무르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 미안. 이제 못해. ”


 “ , 무대 안 올라가서 몸이 굳어서? 방금 아라베스크는 좋았는데. ”


 “ 중심이 여기 와야 하거든. 힘이 안 들어가. ”

 


 그 애의 손이 왼쪽 골반 위에 놓였다. 바지와 허리끈과 셔츠로 가려져 있었지만 그 뱀처럼 부풀어 오른 상처가 그대로 보이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끔찍한 살인 충동을 느꼈다. 그자들 전부. 상처를 만들어 놓은 자들, 저 몸을 망가뜨린 놈들, 저 꼬마를 체포하고 더러운 짓을 자행한 놈들을 하나하나 찾아내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 충동이 너무나 뜨겁고 격렬해서 나는 몸을 떨었다.

 

 미샤는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계속해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무심하게 덧붙였을 뿐이었다.

 


  “ 몸이 굳기도 했지. 오래 안 췄어. 2월에 은퇴했으니까. ”


  “ 오래는 무슨. 그래봤자 반 년 밖에 더 돼?


  “ 부상당했을 때도 그렇게 오래 쉰 적 없었어. ”


  “ 나으면 굳은 것도 다 풀리겠지. 그럼 우리 무대에 올라갈 거야? ”


  “ 아니. 은퇴했다니까. ”


  “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주제에 잘도 떠드는군. 음악도 못 따라가는 우리 무용수들 때문에 돌아버릴 지경 아니야? 그 꼴을 한 달만 더 보면 열 받아서 직접 올라가겠다고 나서겠지. 그 성깔에 그러고도 남을 게 뻔해. ”


  “ 걔들 헐뜯지 마. 도와주면 나아질 거야. ”


  “ 그럼 다들 너처럼 출 수 있게 되나? 그렇게 믿는 건 아니잖아. ”


  “ 다들 나처럼 추면 재미없잖아. ”


  “ , 혼자 잘나야 하는데 그게 안돼서? ”


  “ 당신은 옆에 있는 바이올리니스트와 똑같이 연주하면 좋아? ”



 잠깐 말문이 막혔다. 내겐 드문 일이었다. 미샤는 내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았는지 바닥에 주저앉아 다리를 완벽하게 일직선으로 뻗었다. 나는 언제나 남자 무용수들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신체적으로 불가능한 동작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잠시 후 그 아이는 오른쪽 무릎을 꺾어 다리를 옆으로 들어올렸다. 왼쪽도 반복했다. 다섯 번쯤 반복했을 때 낮게 신음하며 한 손으로 다시 그 왼쪽 골반의 상처를 가볍게 눌렀다. 그래도 멈추지는 않았다. 일어나서 다시 무릎을 구부렸다 폈고 연속으로 스트레칭을 몇 개 했다.


 

  “ 매일 그렇게 해? ”


  “ 일어나면. ”


  “ 은퇴했다면서. ”


  “ 그거랑 달라. ”


  “ 글쎄, 다른 것 같지 않은데. 무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


  “ 그냥 운동하는 거야. 움직여야 하거든. 많이. ”


  “ 그건 우리 의사 선생의 처방인가? ”


  “ 절반쯤은. ”

 


 미샤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얼굴이 사과처럼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기껏 샤워까지 해놓고 도로 땀을 흘리는 짓을 하다니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어쨌든 무용수였던 놈이니까 나와는 사고방식이 완전히 다를 것이다. 나는 그 아이가 다른 동작들을 더 보여주기를 기다렸다. 춤을 추지 않는다 해도 좋았다. 최소한 그 아라베스크라도 한 번 더 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미샤는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몸을 길게 뻗은 채. 두 팔을 옆으로 벌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자식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힘이 들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스트레칭과 기본 동작만으로도 힘이 든다는 사실에 화가 난 건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 일어나는 게 좋을 걸, 그 카펫 더러워. ”


  “ 괜찮아, 당신 옷이니까. ”


  “ 그렇게 힘들어? 하긴 빈속에 몸을 그렇게 많이 움직였으니 힘들기도 하겠군. ”


  “ 아니, 어지러워. 다 깬 줄 알았는데. 역시 밀주였어. ”


  “ 아르카지가 물 탔다고 몇 번을 말해. ”


  “ 또 토하면 당신 화낼 거야? ”


  “ 언제 남이 화내는 거 신경이라도 썼나? 자기밖에 모르는 애송이가. ”


  “ 당신이 화내는 건 별로야. ”


  “ ? ”


  “ 화나면 팰 거잖아. 아팠다니까. ”

 


 농담을 하고 있었다. 이제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자식은 농담을 제대로 할 줄 몰랐다. 제대로 된 러시아 놈이 아니었다.

 


  “ 어차피 가는 데마다 더럽힌 거 여기 토한다고 뭐가 달라진다고. ”


  “ 카펫은 여분 없을 거 아냐. ”


  “ 난 부르주아가 아니라서. ”


  “ , 낡은 단어. ”

 


 미샤는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았다. 이제 토하려나보다 싶어 티 테이블 위에 있던 쟁반을 낚아채 입가에 대 주었지만 자식은 살짝 잠긴 목소리로 부드럽게 속삭였다.


 

  “ 바이올린 켜, 로만. ”


  “ 내가 왜. ”


  “ 듣고 싶으니까. ”


  “ 미안하지만 여긴 극장이 아니라서, 감독님 명령은 안 통해. ”


  “ 부탁하는 건데. ”


  “ 삼류 연주 들어서 뭐해. ”


  “ 왜 그런 식으로 말해? 싫지 않았다니까. ”


  “ 싫지 않다는 건 보통이란 얘기고 그건 별로란 뜻이야. ”


  “ 난 별로인 사람한테는 부탁 안 해. ”



  나는 바이올린을 가져왔다. 활을 잡다가 자식이 바이올린을 켤 줄 아는지 문득 궁금해져서 물어보았다.

 


  “ 조금. 학교 다닐 때 키로프 연주자한테 배웠어. ”


  “ 누구? ”


  “ 딤카 아르부조프. ”

 


 잠시 내 귀를 의심했다. 잘 아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드미트리 아르부조프, 키로프 오케스트라 수석. 역시 놀던 물이 달랐다.


 

  “ 화려한 이름이군. 그래서 그렇게 잘난 척 한 거야? 그냥 전업하시지. 내 자리 내줄까? ”


  “ 기본만 배웠어. ”


  “  , 음악도 잘 안다고 뻐기더니. 연주 쪽 재주는 없었나? ”


  “ 활 쓰는 건 안 맞더라고. 춤 출 때 쓰는 근육이랑 달라서 연습하고 나면 어깨가 많이 당겼어. 피아노는 좀 나았어. ”


  “ 끝까지 못한다는 말은 안 하는군. ”


  “ 못해, 바이올린은. 그래도 들을 줄은 알아. ”



  나는 뒷골이 띵하도록 부담감을 느꼈다. 그러다가 어차피 차원이 다른 놈이니 내가 뭘 어떻게 하든 삼류로 들릴 게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홧김에 아무 거나 켜기 시작했다.






...




전에 발췌했던 이 이야기의 여러 토막들에 대한 링크는 아래. 포스팅 순서가 아니라 이야기 속의 시간 순서에 따라 재배열함.



맨 앞 부분(Night : 코즐로프와 미샤의 이야기 중에서) : http://tveye.tistory.com/4118

 

숙취로 고생하는 미샤와 차이코프스키에 대한 대화 : http://tveye.tistory.com/3253

 

발췌본 바로 앞 이야기(아침, 여분의 수완, 바느질) : http://tveye.tistory.com/3465

 

발췌본 바로 다음 이야기(백조 솔로를 추는 미샤) : http://tveye.tistory.com/3146

 

사과파이를 먹는 코즐로프와 미샤 : http://tveye.tistory.com/3165

 



..



아라베스크를 비롯한 무용수 화보 몇 장.





미샤의 움직임이나 육체적 특성을 지닌 모델 중 하나인 블라지미르 말라호프.




블라지미르 말라호프




블라지미르 말라호프




역시 블라지미르 말라호프. 빈사의 백조 추는 중.





프리드리만 보겔.

이 사람은 연기력이 별로라 딱 내 취향의 무용수는 아닌데 포즈나 몸의 선이 아름다워서 화보는 항상 근사하다.




프리드리만 보겔 한 장 더. 연습실.




이고리 콜브.




그리고 팬심으로 역시 지나칠 수 없는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화보 두 장. alex gouliaev의 사진. le parc




슈클랴로프.

절친인 유리 스메칼로프가 안무한 나르키소스를 위한 레퀴엠 중.


마지막은 궁극의 백조, 울리야나 로파트키나.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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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6. 6. 25. 18:54

파루흐 루지마토프 옛 사진 득템 dance2016. 6. 25. 18:54




어제 마린스키 샵에서 찾아낸 루지마토프 옛 사진 세장. 넷에서도 본적 없는 사진이라 반가웠다.

침대에 올려놓고 폰으로 찍어서 화질은 별로다만 그래도 기뻐서 올려본다.







:
Posted by liontamer

 

 

시간이 많이 늦어서 오늘은 짧은 메모만..

늦게 일어나 어제 부셰에서 사온 빵과 체리로 아점 먹고 오후 2시쯤 버스 타고 판탄카 근방의 시티은행에 가서 돈을 좀 찾았다.

 

 

 

..

 

그리고는 이삭성당 근처 아스토리야 호텔 앞에서 블로그 이웃님이신 엽님과 반갑게 조우했고 함께 청동기사상을 보러 간 후 어제 예약해둔 고스찌에 가서 점심 겸 저녁을 먹고 차를 한잔 마셨다.

 

엽님은 페테르부르크에 처음 오셨기 때문에 운하 따라 마린스키까지 데려다 드렸다.

 

..

 

그리고 나는 버스를 타고 미하일로프스키 극장으로 갔다. 나는 오늘 잠자는 미녀 공연이 있었다.

 

 

 

안젤리나 보론초바와 이반 자이체프가 주역이었는데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파루흐 루지마토프가 카라보스를 추심!!! 그런 일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기원했는데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짐 :)

 

 

 

 

리뷰는 나중에 따로 쓰려고 한다만... 일단 아주 짧은 메모만 남기자면.

나초 두아토 안무의 잠자는 미녀는 동작이나 안무가 꽤 다른 부분도 많았다. 오로라의 춤이 특히 그랬는데 의외로 난 나쁘지 않게 봤다(원래 오리지널 잠자는 미녀의 오로라 춤을 별로 안 좋아함 ㅜㅜ) 다만 데지레 왕자가 조금 더 병풍처럼 처리되고 결혼식 솔로도 덜 화려해서 그건 아쉬웠다. 두아토의 잠자는 미녀는 오로라가 소녀에서 성인 여성이 되는데 더 초점을 맞추었고 그래선지 오로라가 완전히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서 가뜩이나 분량 적고 병풍 같은 왕자는 더 병풍이 되어 아쉬웠고... 제일 아쉬운 건 파랑새 솔로를 대폭 축소하고 그냥 2인무로 만든 거였다. 이럴수가.. 파랑새를 그렇게 만들면 어떡합니까 허헝...

 

하지만 다 떠나서 어깨 드러나는 드레스 입고 카라보스 추신 파루흐 루지마토프!!!! 당신을 다시 무대에서 보게 되어 너무나 영광이고 행복했어요... 어흑, 너네 카라보스 왜 초대 안했니! 저렇게 멋있는 카라보스를 초대 안했으니 오로라 따위 물레바늘에 찔려도 괜찮앗!

 

 

 

루지마토프를 거의 십년만에 다시 무대에서 보니 너무 반갑고 행복했다. 고마워요 파루흐... 엉엉..

 

그래서 커튼콜 때도 왕자고 공주고 다 필요없이 오로지 루지마토프만 열심히 찍음. 1야루스(3층) 사이드라 멀긴 했지만... 아아, 저분이 나오는줄 알았다면 유리지갑 먼지가 되어도 앞줄 끊었을 것을 허헝..

 

..

 

공연 끝나고 나와서 그리보예도프 운하와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 쪽으로 쭉 걸어서 호텔 쪽으로 갔다. 엽님도 공연 끝나고 청동기사상 쪽으로 가셔서 석양 보신다 해서 나도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함께 네바 강변을 거닐고 궁전광장을 지나 네프스키 초입으로 갔다. 전에 bravebird님이랑 같이 산책하던 기억이 났다. 엽님은 숙소가 네프스키 위쪽이라 트롤리버스를 태워드린 후 나도 호텔로 돌아왔다. 돌아오니 자정이 좀 넘었다.

 

(석양 사진은 오늘 딱 두 장만. 맨 위 사진까지 세 장. 나중에 석양 스페셜로 한번 올려보겠다)

 

..

 

배고파서 남은 체리 다 까먹었다. 이제 자야겠다. 즐겁고 알찬 하루였다.

 

내일도 날씨가 좋기를...

 

.. 근데 너무 걸어서 그런가 오른쪽 발가락 사이에 물집이 잡혀 피얼룩이 져 있었다. 깜놀! 악 ㅠㅠ 연고 바르고 자야겠다. 하긴 구두 신고 돌바닥 많이 걷긴 했지. 내일은 공연도 없으니 운동화 신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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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3년 반 후의 메모, 2016.5.14>

 

   

나는 아래 발췌한 에피소드를 3년 반 전, 2012년 12월에 썼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고서 몇달 후. 가장 바닥에 내려가 있을 때였다. 미샤를 되살려낸 후 두번째로 쓴 소설이었다. 소설의 심리적 화자는 그의 친구이자 애인인 안드레이 트로이츠키, 일반적으로는 트로이 라고 불리는 인물이었지만 진짜 주인공은 미샤였다. 이 소설의 에피소드들은 전에도 여러번 이 폴더에 발췌한 적이 있다.

 

발췌한 에피소드는 소설의 중후반부인 3부 14장 끝부분이다. 저 부분을 쓸때 나는 어느 정도 화가 나 있었고 어느 정도는 매우 지치고 슬픈 상태였다. 하지만 동시에 굉장히 솔직하기도 했다. 허구라는 렌즈를 통해 왜곡될 수 있을만큼만 왜곡시킨 정도로.

 

이 글을 쓴 바로 다음날 남긴 짧은 메모와 1년이 지난 후 쓴 역시 짧은 메모가 있는데 그것도 같이 올려본다. 그러니까 이건 하나의 에피소드에 대한 세가지 메모가 달려 있는 셈이다. 쓴 직후, 1년 후, 그리고 3년 반 후.

 

미샤와 트로이의 대화에서 언급되는 '지나'는 미샤의 발레학교와 키로프 발레단 시절 파트너 발레리나인 지나이다를 가리킨다. '세레브랴코프'는 미샤의 키로프 발레단 선배이자 일종의 라이벌이다. 세레브랴코프에 대한 에피소드는 전에 돈키호테와 페름 저수지 사건 등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그 이야기들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3594, http://tveye.tistory.com/4597

 

대화에 역시 언급되는 '스탄카'는 전에 여러번 발췌된 이야기들에 등장한 스타니슬라프 일린을 가리킨다. 볼쇼이 안무가이고 미샤의 친구이다. '아스케로프'는 미샤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의사인 유리 아스케로프이다.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이 폴더에 두어번 발췌했고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서도 한번 등장시킨 적 있다.

 

둘의 대화에서 나온 '안드레이'는 미샤가 트로이를 부르는 이름이다. 트로이는 자기 본명을 싫어해서 친구들 사이에서 트로이란 애칭으로 통하지만 미샤는 사적 자리에서는 항상 그를 본명으로 부른다.

 

 .. 맨 위의 사진은 라트만스키 안무의 신데렐라를 추는 디아나 비슈뇨바. 사진은 Mark Olich.

그 아래 그림은 러시아 화가 니콜라이 게의 '겟세마네 동산의 그리스도'.

 

 

 

<1년 후의 메모, 2013.11.7>

 


나는 이 부분을 거의 일 년 전 이맘때 썼다. 이 소설에서 미샤가 자신의 춤에 대해 직접 이야기하는 장면은 이 부분 밖에 없다. 그는 죽음과 성, 권력과 사회적 억압, 이데올로기와 젠더, 그리고 이 모든 외부에서 온 어둠과 더불어 자기 내부에서 비롯되는 어둠을 마주하며 춤춘다. 그건 그가 춤을 추는 이유인 동시에 춤을 포기한 이유이기도 했다.


본질적으로 저 소설은 재능에 대한 이야기였고 그건 성적 갈망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건 미샤가 아니라 친구이자 애인인 트로이였다. 심지어 저 순간, 미샤가 자기 입으로 솔직하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순간에도 트로이는 그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트로이는 창작자가 아니었고 그의 사랑은 이해를 기반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아래 발췌된 에피소드를 쓰고 난 직후, 그러니까 2012년 12월에 적었던 메모는 맨 아래에 있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트로이의 팔을 베고 누워 담배 연기를 천정으로 길게 뿜어낸 후 미샤가 말했다.

 

 

“ 지나가 그러더라, 세레브랴코프의 낯짝을 한방 날려주고 나면 모든 게 나아질 거라고. ”

 

“ 그 아가씨답네. ”

 

“ 정말 나아질 거라고 생각해? ”

 

“ 글쎄. 진작 했어야 하는 거 아냐? 좀 늦었지. 그리고 넌 누굴 제대로 쳐본 적도 없잖아. ”

 

“ 그건 그래. 스탄카가 그때 끼어들어줘서 다행이야. 정말 그 자식 치고 싶지 않았거든. ”

 

“ 열받았다면서 어떻게 치고 싶은 마음이 안 들 수가 있어? ”

 

“ 모르겠네, 하여튼 난 누굴 패고 싶었던 적은 별로 없어. 그래봤자 별 소용없잖아. ”

 

“ 지나 말이 맞을지도 몰라. 주먹질을 한번 하거나 적어도 욕이라도 해주면 그 자식도 한풀 꺾일 거야. 그런 놈들은 항상 그래. 네가 계속 내버려두니까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

 

“ 뭐, 나타샤? 계집애 같다는 말? 그건 춤 때문이야. 그러니까 두들겨 패봤자 해결이 안돼. ”

 

“ 세레브랴코프는 왜 그렇게 네 춤을 싫어해? ”

 

“ 그는 교조주의자야. 가장 끔찍한 게 뭔지 알아? 그건 자기 예술을 강령처럼 믿는 것, 그걸 다른 모두에게 강요하는 거야. 우리의 잘난 공산주의와 일당 독재와 집단주의처럼. 근데 세상 어디에도 그렇게 단순한 건 없어. 예술은 더 그래. 아니, 내게는 춤 말고 다른 걸 얘기할 자격이 없지. 울리얀 세레브랴코프에게 자기가 내키는 대로 추라고 해, 난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 작자의 참견은 받고 싶지 않아. 그자는 자기 강령을 따라 깃발을 휘두르며 춤을 추고 나는 내 몫의 허공으로 나가면 돼. 길을 잃든 헛디디든 추락하든 그건 온전히 내가 감당할 무게일 뿐이야. 난 그자의 이상과 꿈을 믿지 않아. 춤이 종교가 될 수도 없고 규율이나 원칙이 될 수도 없어. 공산주의자였던 적도 없고 소비에트 이념을 믿어본 적도 없는 내가 왜 그 얼간이의 질서를 따라야 해. ”

 

“ 세레브랴코프의 질서는 뭔데? ”

 

“ 그는 자기 고환으로 춤을 추지. ”

 

 

땀이 식으면서 한기가 드는 듯 미샤가 옆으로 돌아누우며 트로이에게 몸을 밀착시켰다. 필터 언저리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카펫 귀퉁이에 문질러 끈 후 나머지 연기를 트로이의 가슴팍에 천천히 불어 날렸다. 트로이는 미샤의 코트를 끌어당겨 활짝 펼친 후 서로의 몸을 덮었다. 담배 연기 사이로도 코트 안쪽에 배어 있는 낯익은 고급 향수 내음과 은밀하게 깔려 있는 체취를 맡을 수 있었다. 젖은 숲의 흙 냄새, 그리고 딱히 규명하기 힘든 쏘는 듯하고 무겁고 달콤한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후자는 처음에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몸 구석구석에 키스를 하거나 혀와 이로 빨아 당겼을 때 그 냄새가 났다. 그 냄새를 맡을 때마다 트로이는 사라토프의 할머니가 직접 만들어 유리병 속에 채워놓았던 끈끈하고 짙은 색깔의 꿀을 생각했다. 숲의 꽃과 나무에서 채취해 만든 그 꿀은 너무 진하고 독했기 때문에 할머니는 어린 손자가 아무리 졸라도 몇 방울 이상은 결코 주지 않았다. 아주 아플 때만 홍차에 한 숟가락을 통째로 녹여 주었다. 어린 시절 트로이는 그 차를 마실 때마다 심하게 취해서 24시간을 내리 잤다.

 

 

“ 그럼 넌? ”

 

아, 나도 그런 부분이 있지. 어쨌든 사내자식이니까. 하지만 전부는 아냐. ”

 

 

코트 아래에서 몸을 좀 더 바짝 붙여오며 미샤가 약간 졸린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세레브랴코프가 날 미워하는 이유는 내가 자기 자리를 빼앗는 게 두려워서가 아냐. 내가 무대 위에서 그 굳건한 남성성의 환각을 쉽게 무시하기 때문이지. 신사적이고 기사도 넘치고 파트너를 견고하게 지지해 주는 남자, 필요한 순간 검을 빼들고 달려가 적을 무너뜨릴 준비가 되어 있는 남자, 언제나 확신과 신념에 가득 찬 남자, 왕자님, 기사, 귀족, 깃발 든 혁명가, 전쟁터의 장군, 여자를 지켜주는 남자, 당의 기치를 앞장서서 체현하는 진짜 남자. 반듯하고 우아하며 강인하고 흔들림 없는 파트너.

그렇게 추는 게 어렵지는 않아, 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은 거기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지. 난 연습을 많이 했어, 엄청나게 혹독하게 배웠어. 꼭 춰야 한다면 그렇게 추겠지. 그게 바로 키로프의 기본기라는 거니까. 남자 무용수의 기본기.

그런데 말야, 안드레이. 그 모든 건 사실 고환과 음경과 정액으로 이루어진 환상에 지나지 않아. 발레리나들이 유방과 질과 눈물로 우아하고 연약한 공주님의 환각을 만들어내듯 남자 무용수들도 마찬가지야. 세레브랴코프의 가차 없는 남성성이 빚어낸 질서 맞은편에 발레리나들의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아성이 도사리고 있어. 난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어. 그건 단순한 섹스의 문제가 아냐. 성이란 건, 아니 인간이란 건 그렇게 이분법으로 설명할 수가 없어. 한편에는 빛, 한편에는 어둠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과 몸이 완전하게 분리되어 있다면 행복할 텐데.

안드레이, 어쩌면 그건 인간 전체에 대한 얘기가 아닌지도 몰라. 그저 나 자신에 대한 얘기일 뿐인지도 몰라. 난 사람 마음을 모른다면서. 그러니 인간에 대해서도 함부로 얘기해서는 안되겠지. 난 틈새로 들어가고 바닥도 출구도 없는 안개 속에서 춤을 춰. 내가 원해서 그렇게 하는 게 아냐, 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 그곳에서 난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냐, 마음도 아니고 몸도 아냐. 그곳에는 빛이 있고 어둠이 있겠지. 황혼도, 수면도, 어쩌면 눈보라도. 하지만 난 단지 움직임일 뿐이야. 계속해서 뛰고 날고 떨어지고 넘어지는 것 뿐이야. 멈추면 사라질 테니까. 거기 고통이 있어, 두려움이 있어. 나는, 난 멈추게 될까봐 두려워. 사라지고 싶지 않아. 세레브랴코프는 그런 공포를 이해하지 못할 거야. 그는 강령을 선택했으니까. ”

 

 

미샤는 더 이상 트로이에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았다. 교회 종탑을 마주하고 고해하듯 나직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고백이 너무나 괴롭고도 개인적이어서, 또 한없이 조용하고 부드러워서 트로이는 마음을 뒤흔드는 감동과 죄책감을 느꼈다. 동시에 그의 말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어 고통스러웠다. 그는 춤을 춰본 적도 없고 단 한 번도 진정한 재능을 가진 예술가인 적이 없었으니까.

 

 

아마도 스타니슬라프 일린은 이해할지도 모른다. 모스크바에서 온 그 안무가, 스탄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미지의 남자. 어쩌면 유리 아스케로프도 전부 이해해 줄지도 모른다. 어릴 때부터 미샤를 알았으니까, 미샤는 움직일 수 없는 그 무서운 순간 아스케로프가 곁에 와주기를 원했으니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아스케로프는 미샤의 춤에 관심이 없었다. 춤 나부랭이라고 비하했고 미샤에게 하잘것없는 춤을 포기하고 그만 내려오는 게 낫다고 꾸짖었다. 그자는 오직 미샤에게 성적으로 완전히 반해 있을 뿐이다. 어쩌면 마음 속 깊이 품고 있는 사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온전히 그 아이의 몸과 마음에 대한 욕망과 애정일 뿐 춤과 재능에 대한 갈망은 아니었다. 그 루빈슈테인 거리의 의사는 그만큼 복잡하고 음울한 남자가 아니었다.

 

 

미샤는 갑작스럽게 말을 뚝 끊었다.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있던 생각을 토로한 것이 부끄러워서 그럴 수도 있었고 졸려서 그랬을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울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아스케로프와는 달리 트로이는 미샤가 우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 후 트로이는 쑤시고 결리는 몸을 거실 바닥에서 일으켰다. 미샤는 그가 일어난 것도 모르고 고른 숨소리를 내며 깊게 잠들어 있었다. 그는 코트 째로 미샤를 쓸어안아 침대로 데려갔다. 옷을 치우고 모포를 덮어주면서 트로이는 그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목덜미의 상처는 다시 하얀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허벅지의 칼자국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랫배와 허리, 골반과 옆구리 구석구석에 찍혀 있는 트로이의 손자국은 반쯤은 자주색이고 반쯤은 검붉은 색으로 변해 일그러진 꽃처럼 옆으로 퍼지며 증식하고 있었다.

 

 

아마 미샤가 무대에 올라가야 하지 않았다면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그의 몸에 깨끗하게 남아 있는 하얀 살갗 구석구석 전부를 붉고 검은 자국으로 뒤덮었을 것이다. 이마와 뺨과 턱도 예외 없이, 부드러운 눈꺼풀과 입술조차 피해가지 않고. 할 수만 있다면 머리카락과 눈동자와 치아와 혓바닥 위에, 살갗 아래 혈관과 근육과 신경 위에도 자국을 냈을 것이다. 해독할 수도 없는 문자를 써내려갔을 것이다. 그런 순간에도 차마 자기 이름을 쓸 용기는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서랍 속에 숨어 있는 노트와 수첩과 종이쪽지 위에 잉크 범벅이 되어 도사리고 있는 단어와 구절들이었을 것이다. 그 어눌하고 수치스러운 언어들은 그 찬란하게 타오르는 애에게 닿는 순간 녹아내려 사라질 것이다. 아무런 자국도 남기지 못할 것이다.

 

 

 

..

 

 



<쓰고 난 다음날 : 교조주의, 강령으로서의 예술, 2012.12.7>



어제 저 주제에 대한 부분을 쓰면서 내가 겪었던 몇가지 좌절과 절망스러웠던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물론 저 글의 주인공이 살아가는 사회는 지금 서울과는 많이 다르다. 그는 천박한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메가폴리스가 아니라 전체주의와 집단주의가 지배하는 70년대 공산사회의 레닌그라드에서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점은 존재한다.


 
.. 중략 ..


 
여전히 난 예술이 강령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믿는다. 나의 가치관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표현 양태는 무수하게 존재하며 어느 한가지만 옳다고 우기는 것은 교만이며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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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우울한 얘기였으니까 무용수들 화보 몇 장.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저 글을 쓸때 가졌던 느낌과 약간은 비슷한 사진들을 골라봤다.

 

 

 

 

 

세르게이 폴루닌.

 

 

마린스키 무용수들. 슈클랴로프와 테료쉬키나, 스코릭, 김기민씨 등이 섞여 있다.

웨인 맥그리거의 인프라 추는 중. 재작년에 마린스키 무대에서 이 작품 보고 반했었다.

 

 

미하일 바리쉬니코프

 

 

 

매우 유명한 사진. 루돌프 누레예프.

 

 

 

파루흐 루지마토프.

 

 

 

파루흐 루지마토프

 

 

 

울리야나 로파트키나.

사진은 Mark Olich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젊은이와 죽음.

사진은 Alex Gouliaev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젊은이와 죽음. 한장 더.

사진은 Alex Goulia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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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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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무용수들 화보 여러 장. 마음의 위안을 위해.

 

최근 마린스키 라 바야데르 무대에 오른 디아나 비슈뇨바. 사진조차도 숨을 멎게 할만큼 아름답다.

 

 

 

환상의 배역. 솔로르는 김기민씨, 감자티는 빅토리야 테료쉬키나, 니키야가 디아나 비슈뇨바!!

아아, 나도 가서 보고 싶었지... 테료쉬키나의 감자티는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녀의 니키야는 최고였는데 감자티도 궁금하다! 이 사진만 봐도 두 여자 사이에서 불꽃이 파바박!!

(그런데 내겐 항상 테료쉬키나가 좀 강인한 이미지라 그런지 이 사진을 보면 오냐오냐 자란 감자티 공주님 느낌보다는 좀더 표독스러워 보인다!! 그래도 보고 싶구나, 테료쉬키나와 비슈뇨바의 불꽃 튀는 사랑 싸움!)

 

 

 

김기민씨가 솔로르를 췄다.

기민씨의 솔로르는 영상만 보고 실제 무대를 못 봐서 무척 궁금하다. 나야 표현력 넘치는 슈클랴로프의 솔로르를 가장 좋아하긴 하지만 그래도 기민씨 솔로르 영상들은 하나같이 멋졌다. 게다가 비슈뇨바 니키야와 함께 추다니... 여름에 꼭 가서 김기민씨 무대를 다시 볼 수 있기를...

 

 

 

매우 내 맘에 드는 리허설 사진.

 

첨엔 슬쩍 보고 앗, 솔로르 의상이 블랙으로 바뀌었단 말인가! 하며 눈이 동그래졌는데 잘 보니 리허설 중인 사진. 근데 김기민씨라서 그런지 검정색 아랍 팬츠와 탑 차림의 솔로르도 멋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하긴 아랍 팬츠라면 다 좋아하니..)

 

 

 

이제.. 내 인생을 바꿔놓은 문제의 인물 중 하나. 미하일 바리쉬니코프.

 

이 사진은 영화 백야 당시 안무를 맡았던 트와일라 타프와 함께 리허설할 때 찍은 것이라 한다. 그래! 그 영화 때문이라고요... 날 러시아어 전공하게 만든 영화, 그렇게 만든 남자!!! 책임져요!

 

 

 

위에 이어 바리쉬니코프와 타프의 리허설 장면 하나 더.

 

 

 

미하일 바리쉬니코프, 바가노바 시절.

 

연습실 풍경은 언제나 나를 매료시키는데 게다가 바리쉬니코프의 소년 시절...

 

 

 

그래서 연습실 사진 하나 더.

이건 파루흐 루지마토프. 1990년대 잠깐 ABT 갔을 때.

 

 

 

라이몬다를 추는 빅토리야 테료쉬키나와 예브게니 이반첸코

역시 왕자나 기사 역 파트너 맞춤형의 기품을 지닌 이반첸코... 이제 나이가 많이 들어서 점프 등의 기량이야 많이 사그라들었지만 파트너로서는 여전히 훌륭했다. 당신 내 첫사랑 무용수였죠. 나의 첫 발레.

 

 

 

 

아마도 지그프리드로 추정되는 의상을 입은 이 사람은 자태와 외모가 심히 아름답고 매력적인 빅토르 레베제프. 그러나.. 나는 이 사람의 자태와 외모에 혹해 작년 초에 미하일로프스키 라 바야데르를 비싼 표를 끊어 보러 갔다가 완전히 망했던 기억이 있다. 이 사람은 자태는 더할나위 없는 왕자님에 피루엣과 상체 움직임은 좋았으나... 연기력이 완전히 나무토막! 발연기!! 솔로르가 저렇게 발연기를 하다니!!!! 그때도 열받아 리뷰에 남겼지만... 저런 솔로르라면 니키야에게 그냥 저런놈 뻥 차버리고 브라만이랑 살라고 소리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다시 가서 보면 연기 좀 늘었으려나.. 그땐 너무 실망해서 멕시코 연속극에 나와 발연기하는 미남 배우 같다는 생각까지 했는데 ㅠㅠ

 

근데 이 사람이 옛날 내가 키우던 토리랑 비슷한 화이트 포메라니언+스피츠 계열의 강아지를 키워서 종종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그리하여 나는 이 사람이 아니라 그 강아지를 보려고 이 사람을 팔로우하게 되었다 :) 그리고... 화보는 역시나 멋있다. 제발 연기력 좀 키워주세요...

 

 

 

 

그래서... 외모와 연기력을 모두 갖춘 궁극의 발로쟈 사진 몇 장으로 마무리.. (왜 안 그러겠어..)

 

돌아온 탕자를 추는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사진은 ALEX GOULIAEV

 

 

 

역시 사진은 ALEX GOULIAEV

젊은이와 죽음을 추는 슈클랴로프.

이 사람 이 무대 다시 보고 싶다. 참 좋았었지. 다시 이 무대 보게 될 기회가 있을까 모르겠다.

 

 

 

Le Parc를 추는 슈클랴로프. 상대 발레리나는 율리야 스체파노바.

사진은 ALEX GOULIAEV

근데 나는 아무리 봐도.. 슈클랴로프는 이 여자 저 여자를 후리고 다니는 마성의 카사노바로 안 보이고 이 여자 저 여자에게 홀라당 넘어가서 순정을 바치는 로미오로 보인다... 그래선지 올레샤 노비코바와 춘 유명한 파이널에서도 이 사람이 섹시하긴 한데 그렇다고 또 그 느낌은 아니어서 조금 아쉬웠다 :)

 

 

 

마지막은 지그프리드를 추는 슈클랴로프. 뒷모습만 나온 오데트 역 발레리나는 테료쉬키나.

사진은 ALEX GOULIA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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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저녁. 마음의 위안을 위해 오랜만에 무용수 화보 몇 장.

디아나 비슈뇨바. 출처는 아마도 인스타그램이었던 듯.

 

 

 

이건 좀 오래된 사진. 알티나이 아실무라토바 & 파루흐 루지마토프. 코르사르.

루지마토프는 최고의 알리였다!

 

 

 

아르춈 옵차렌코.

이 사람은 볼쇼이 무용수이다. 나야 볼쇼이보다는 마린스키 쪽을 더 좋아하긴 하지만 그래도 매력있는 무용수라 종종 관심 갖고 지켜보는 중. 외모가 상당히 누레예프를 연상시키는데 그래선지 최근 누레예프의 모델로 영화를 찍었다고 한다. 러시아어 이름이 꽤 어려운데 제대로 발음하면 아르쬼 옵차렌꼬 정도 되려나.. 영어식으로는 아르티옴 오프차렌코 라고 하려는지..

 

 

 

그리고 역시 빠질 수 없는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사진 두 장.

사진은 svetlana bogdanova.

빅토리야 테료쉬키나와 함께, 라 바야데르의 니키야와 솔로르 추는 중.

테료쉬키나의 니키야는 더할나위 없이 훌륭하고, 슈클랴로프의 솔로르는 얼마 안되는 '용서해주고 싶은' 솔로르이다.

 

 

 

마지막은 사랑하는 아내 마리야 쉬린키나와 함께 춘 로미오와 줄리엣.

사진은 캡션에 있듯 jack devant.

최근 둘이 마린스키 무대에서 처음 로미오와 줄리엣을 췄는데 반응이 아주 뜨거웠다. 흑, 작년 겨울에 이 둘의 로미오와 줄리엣 보려고 도쿄에 갔었는데 슈클랴로프가 부상당하는 바람에 쉬린키나와 스쵸핀 페어로 봐서 아쉬웠다만.. 하여튼 쉬린키나를 재평가하게 되었던 무대였다. 그전까지는 영상을 봤을 때도 그렇고 실제 무대를 몇 번 봤을 때도 그렇고 난 쉬린키나를 별 재능 없는 무용수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쉬린키나는 줄리엣과 쉬린 역에는 아주 잘 어울렸다. (오로라나 라이몬다 등 정교한 테크닉과 파워가 필요한 역들은 아무래도 아직 모자란다만...) 나도 이 둘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고 싶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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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라 바야데르 포스팅은 어제의 김기민씨 황금신상 클립(http://tveye.tistory.com/4152)에 이어 90년대 마린스키에서 올린 무대의 3막 망령의 왕국 군무와 파이널 클립이다. 전에도 몇개 올렸지만 오늘은 다른 버전. 군무와 파이널의 두 무용수 춤이 조금씩 나온다(너무 적어서 감질나지만)

 

알티나이 아실무라토바와 파루흐 루지마토프가 니키야와 솔로르를 춘다. 내가 제일 처음 봤던 라 바야데르에서 솔로르를 춘 게 루지마토프였다. 루지마토프가 탁월하게 해석한 역할이기도 한데 슬프게도 그 당시 나는 이른바 발레 블랑, 특히 유령 나오는 군무와 아다지오는 견딜 수 없었던 발레 초보였기에... 라 바야데르 망령들 보다가 거의 유체이탈하느라 루지마토프 솔로르가 얼마나 근사한지 그 진가를 미처 몰랐다... 아까워...

 

발췌된 클립은 조각조각 편집되어 있어 좀 아쉽긴 하지만... 옛날 영상이라 화질도 별로지만 그래도 무용수들은 근사하다. 아실무라토바와 루지마토프 모두 최고 :)

 

 

 

.. 이 클립을 보면 심지어 마린스키인데도 군무를 보면 앞에서 바들바들 떠는 무용수가 하나 있어 맘이 조마조마한데.. 이 망령의 왕국 군무가 상당히 대규모인데다 까다로워서 이걸 잘 소화하는 게 정말 쉽지 않다. (심지어 페테르부르크에서는 그래도 마린스키 다음간다고 평가받는 미하일로프스키의 라 바야데르도 무대를 보러 갔더니 망령 군무가 너무 엉망이라 큰 충격을 받은 적도 있었음 ㅠㅠ)

 

그래도 최근 가서 봤을 땐 역시 마린스키였다... 군무가 훌륭했다. 후들대는 무용수 없었음. 라 바야데르는 볼때마다 느낀다. 이건 마린스키가 최고다.

 

그런데 전에 봤을땐 유니버설이나 국립발레단 군무는 나쁘지 않았다. 괜찮았었다. 내일 유니버설 망령들은 어떨지 모르겠네... (아직도 망령들 하나하나 내려올땐 음악의 힘으로 보는데 ㅠㅠ 이 와중에 앞에 있는 망령이 후들후들 떨고 비틀거리면 너무너무 조마조마해서 괴롭단 말이야...)

 

 

** 이전에 올린 망령의 왕국 파이널 영상 포스팅들은 아래

디아나 비슈뇨바 & 파루흐 루지마토프 : http://tveye.tistory.com/4035

류보프 쿠나코바 & 파루흐 루지마토프 : http://tveye.tistory.com/2276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 빅토리야 테료쉬키나 : http://tveye.tistory.com/3099

레오니드 사라파노프 : http://tveye.tistory.com/2808

(여긴 니키야는 안 나오고 솔로르만 교묘하게 편집됨)

 

** 태그의 라 바야데르를 클릭하면 이전에 올린 이 발레에 대한 많은 포스팅과 리뷰를 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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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영상 하나. 이전에 디아나 비슈뇨바가 페이스북에서 공유했던 클립이다. 바로 파루흐 루지마토프와 함께 춘 마린스키 라 바야데르의 파이널 영상!

 

한때 부부였고 뜨겁게 사랑하는 사이였던 루지마토프와 비슈뇨바가 춘 솔로르와 니키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아직 30대의 젊은 루지마토프와 20대 초반의 앳된 비슈뇨바를 볼 수 있다. 아마도 90년대 후반인 듯.

 

개인적으로 나는 비슈뇨바보다는 마할리나나 아실무라토바의 니키야가 더 취향이라.. 아무래도 이 영상에서의 비슈뇨바는 아직 연륜이 부족해서 그런지 니키야의 춤이 그렇게 눈에 들어오지는 않고... 루지마토프야 워낙 수퍼스타였기 때문에 이 사람의 존재감이 더 크다. 원체 솔로르가 그의 대표 배역 중 하나이기도 했고.

 

조금 아쉬운 건 비슈뇨바도 중간에 살짝 삐끗하고, 루지마토프도 좀처럼 안 그러는데 여기서는 마지막 포즈에서 팔을 좀 삐끗... 그래도 희귀한 영상이니 볼 수 있는 게 어딘지.. 화질은 안 좋지만.. 그래도 커튼 콜과 꽃 받는 장면도 나오고.. 러시아 관객들이 브라보 외치는 소리도 들리고.. 잘 들으면 거의 끝 부분에선 관객들이 '이제 집에 가자'라고 하는 말도 들린다 :)

 

 

 

 

파루흐 루지마토프의 사진이나 춤 클립은 이전에도 여러번 올린 적이 있고 그의 춤에 대한 메모도 여러번 남겼다. 내가 무척 좋아하는 무용수이다. 사실 다시 글을 쓰면서 주인공인 미샤를 무용수로서 재구성할 때 루지마토프의 야수 같으면서도 우아한 움직임도 모델 중 하나로 포함시켰다. (미샤의 육체적 특성이라든지 춤추는 방식, 무대 위에서의 존재감 등에 대해서는 루지마토프를 비롯해서 모델 무용수가 몇 명 있다)

 

** 루지마토프가 류보프 쿠나코바와 춘 라 바야데르 클립 다른 버전은 여기. 옛날 필름이라 화질이 매우매우 나쁘지만.. http://tveye.tistory.com/2276

 

**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와 빅토리야 테료쉬키나가 춘 파이널은 여기. 위의 영상과 비교해보면 느낌이 다르다.

http://tveye.tistory.com/3099

 

 

** 태그의 라 바야데르를 클릭하면 이 발레의 다른 영상 클립들이나 리뷰, 사진들을 볼 수 있다. 파루흐 루지마토프를 클릭하면 이 사람에 대한 예전 포스팅들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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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하기도 하고... 메르스 때문에 공연히 불안한 나날이다.

마음의 위안을 위해 오랜만에 좋아하는 무용수 사진. 파루흐 루지마토프와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사진 몇 장.

 

먼저 루지마토프. 그의 최고 배역 중 하나인 세헤라자데의 황금노예.

사진 속 상대는 스베틀라나 자하로바.

사진사는 캡션에 나와있듯 Natasha Razina

 

 

루지마토프의 황금노예 사진 하나 더. 상대는 울리야나 로파트키나.

 

 

 

그냥 가면 아쉬우니.. 화질은 안 좋지만 하나 더... 의상을 보니 탱고 안무로 춤출 때인가 싶은데..

 

 

 

그리고 역시 빠질 수 없는 (꽃돌이)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몇 장.

이건 최근 그의 instagram에서... 

라트만스키 안무 신데렐라에서 왕자를 추는 중. 이 왕자 역에 정말 잘 어울린단 말이지..

신데렐라와 그의 왕자 역할에 대해서는 전에 몇번 짧게 얘기한 적이 있다. 태그의 '발레 신데렐라'나 '라트만스키 신데렐라'를 클릭하면 나옴.

사진사는 alex gouliaev

 

 

이건 유리 스메칼로프가 작년에 안무했던 카메라 옵스쿠라의 한 장면. 나보코프의 원작을 각색했다.

영상으로 봤는데 아주 맘에 드는 작품이었다.

마그다 역의 발레리나는 슈클랴로프의 아내인 마리야 쉬린키나, 가운데가 슈클랴로프, 오른쪽의 늘씬한 남자는 안무가이자 무용수인 유리 스메칼로프.

이 발레는 중년 남자를 주인공으로 하기 때문에 슈클랴로프가 그 미모와 육체적 아름다움을 모두 가리고 콧수염과 초라한 외모, 통 넓고 우중충한 의상을 입고 나온다.. (ㅠㅠ 그래서 팬의 마음으로는 이 사람이 반라에 황금빛 타이트한 바지를 입고 나왔던 올해의 오르페우스가 더 맘에 들었지...) 하지만 이 카메라 옵스쿠라에서 그의 드라마틱한 연기는 아주 좋았다.

카메라 옵스쿠라에 대해 작년에 쓴 메모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2740

 

 

 

이제부터는 alex gouliaev의 사진 세장.

지젤.

지젤 역은 아내인 마리야 쉬린키나.

 

 

역시 지젤의 알브레히트. 상대역도 역시 쉬린키나.

이건 영상만 봤는데 쉬린키나야 아직 여러 가지로 부족한 면들이 있어서... 슈클랴로프는 언제나 자기 아내와 사랑의 듀엣을 추고 싶어하지만 나로서는 이 사람이 다른 탁월한 발레리나들과 파트너로 출 때가 더 좋다. 하지만 둘이 아무래도 서로 진짜 사랑하는 부부라서 그런지 듀엣의 감정선은 좋았다.

 

 

 

마지막으로 백조의 호수. 상대는 알리나 소모바.

둘이 동갑내기 바가노바 동창이다 :) 최근 마린스키 잠자는 미녀 3D를 찍기도 했다. DVD 빨리 나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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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루흐 루지마토프.

사진사는 이미지에 나와 있는대로 Marina Bakanova

연습실의 무용수 사진은 언제나 날 끌어당긴다.

 

 

 

울리야나 로파트키나.

사진사는 Mark Olich.

 

 

나의 월요병을 달래주는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도 세 장.

백조의 호수.

오데트에게 와서 '잘못했어, 나 속은 거야, 너만을 사랑해~' 하고 애원하는 지그프리드 추는 중,

내가 오데트라면 절망해서 울다가도 저렇게 애절한 표정을 지으며 넙죽 엎드리는 지그프리드를 보고 용서해줘버릴지도 ㅠㅠ

(결론 : 지그프리드가 예쁘면 용서.. 하긴 지그프리드는 순진해서 속아넘어간 거고... 나야 못돼먹은 알브레히트와 솔로르도 얘처럼 이쁘기만 하면 좀 용서해주려고 하니 뭐...)

사진은 Svetlana Avvakum

 

.. 음, 근데 써놓고 보니 이거 1막인 것 같네.. 검은색 상의를 보니 오데트 만날 때인 것 같다. 3막에선 하얀 옷 입는데.. 뭐 갈라쇼 할땐 흑조 2인무 출때 검정색 상의 입기도 한다만..

근데 넌 왜 이렇게 애절한 표정인 거니..

(답 :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ㅠㅠ)

 

 

슈클랴로프 한 컷 더.

귀엽다~ 오딜이 되어 마구 속여넘기고 싶다!

 

 

마지막은 라 바야데르의 솔로르 추는 중.

사진사는 Alex Gouliayev.

 

.. 그러니까 솔로르는 나쁜 놈이지만 얘가 추면 용서해주고 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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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야나 로파트키나.

사진사는 alex gouliaev

 

 

이슬롬 바이무라도프.

잠자는 미녀의 카라보스 역. 사진은 캡션에 있는 대로 svetlana avvakum

 

 

그리고 세르게이 폴루닌 사진 세 장.

이번 내한 무대를 못 봐서 아쉬운 마음에..

이 사람의 외모에는 상당히 강렬한 매력이 배어 있는데, 위의 잡지 화보는 무대 위에서의 모습과는 꽤 다르다.

 

 

역시 폴루닌. alex gouliaev의 사진.

 

나는 개인적으로 무대 위에서의 폴루닌을 볼때 가끔 파루흐 루지마토프를 떠올릴 때가 있다. 그건 그의 춤 때문이 아니라 외모 때문이다. 물론 폴루닌이 루지마토프보다 더 깎아놓은 것처럼 잘생겼고 윤곽선이나 얼굴형도 좀 다르긴 하지만 날카로운 눈매와 콧날의 모양새, 옆모습이 때로 젊은 시절 루지마토프를 연상시킨다.

 

 

이 사진도 좀 그런 느낌이다. 알리를 추는 폴루닌. 사진사는 역시 alex gouliaev

 

 

 

그래서 루지마토프 옛날 사진 한 장.

디아나 비슈네바와 함께.

 

 

그리고 역시나 이제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울리야나 로파트키나와 함께. 곱사등이 망아지 :)

 

 올레샤 노비코바와 함께. 프렐조카주의 le parc 리허설 중.

사진사는 캡션에 나와 있듯 alex gouliaev

 

 

이 사진도 alex gouliaev

신데렐라를 추는 디아나 비슈네바와 슈클랴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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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도 몇번 얘기한 적이 있지만 연습실이나 분장실의 무용수들 사진 보는 걸 좋아한다. 무대만큼이나 매력적이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pointe magazine에 실린 사진.

 

디아나 비슈네바.

 

 

 

역시 디아나 비슈네바.

 

 

 

 

이건 최근 비슈네바 페이스북에 올라온 사진. 한여름밤의 꿈 리허설 중인 듯.

 

 

 

 

파루흐 루지마토프. 몇 년 전인 듯. 나이가 50이 넘었고 얼굴 보면 많이 늙으셨지만 그래도 몸은 여전히 유연하다.

 

사진은 marina bakanova.

 

 

이건 리허설 때는 아니고, 분장실인지 대기실에 앉아 멍때리며 기다리고 있는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댄스 오픈 때. katya kravtzova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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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젤, 특히 알브레히트에 대해서는 전에도 여러 번 쓴 적이 있다. 얄미운 배역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매력적인 역할이기도 한데, 아주 오래 전 처음 발레를 보기 시작했을 때 크라소프스카야가 쓴 니진스키 전기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읽은 적이 있다. 사실 카르사비나의 회상록에서 발췌된 내용인데, 지젤을 함께 추기 위해 연습할 때 니진스키가 카르사비나에게 협력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카르사비나가 "이제 알브레히트가 나에게 다가와야 해요" 라고 하면 니진스키는 다가오지 않고 "난 안 가요, 여기서 이렇게 출 거예요" 라고 우겼다는 것이다. 니진스키가 해석한 알브레히트는 지젤을 배신했다가 참회하고 그녀에 대한 사랑으로 구원받는 고전적 알브레히트가 아니라 일종의 몽상가였다. 자신만의 꿈을 찾아 헤매는 남자.

 

물론 카르사비나는 그의 해석을 이해하지 못했고 당연히 화가 났는데 그게 얼마나 마음에 맺혔는지 나중에 누레예프와 폰테인을 보고는 폰테인에게 "당신은 참 운이 좋군요, 내 파트너는 니진스키였는데.." 라고 했다나.

 

무용수에 따라 알브레히트를 해석하는 방식은 꽤나 다르다. 나는 언제나 '알브레히트 나쁜놈!'을 부르짖는 주인공 이입형(+불쌍한 힐라리온 이입형) 관객이기 때문에, 2막에서 슬프게 참회하고 가능한한 온몸을 던지는 드라마틱한 알브레히트를 선호하긴 하지만 이런 나에게도 귀족적이고 도도한 알브레히트를 사랑하게 만들어버리는 무용수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파루흐 루지마토프다.

 

루지마토프도 자기도취형 무용수란 평을 많이 들었고 발레리나와의 파트너십에 있어서 몇몇 발레리나들은 '자기만 알고 자기만 멋있어 보이려는 최악의 파트너'란 악평을 늘어놓기도 했다(마할리나나 아실무라토바는 그런 식으로 얘기 안했지만) 이 사람이야 원체 존재감이 강력한 무용수이기도 하고, 춤추는 스타일도 아주 진지하고 번쩍이는 타입이라.. 그의 알브레히트는 매우 우아하면서도 섹시하고 동시에 꼿꼿하고 도도했다.

 

그래서 2막에서 미르타와 윌리들에게 둘러싸여 죽음의 춤을 추어야 하는 순간에도 이 사람은 죽어야 할 운명에 순응하거나 지젤의 사랑에 기대어 구원을 바라는 유약한 청년이 아니라 끝까지 고개를 쳐들고 자기 힘으로, 그러니까 자신의 춤으로 자신을 구원하든지 아니면 차라리 파멸해버릴 것 같은 남자로 보였다. 그런데 내 생각으로는 알브레히트를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서 재수없는 놈으로 보이지 않으려면 큰 재능과 내공이 필요하다.

 

아래는 파루흐 루지마토프가 2막 알브레히트 솔로를 연습하는 짧은 클립. 1990년대. 원래 다른 작품 리허설 필름인데 마지막 부분에 잠깐 나온다, 혼자서 알브레히트 춰보는 장면. 정말 근사하다. 좋지 않은 화질, 비디오 촬영 등의 악조건을 전부 잊게 만든다. 특히 그의 몸놀림은 너무나 우아해서 인간의 육체가 어느 정도로 아름다운지, 그리고 어떤 식의 표현으로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지 되새기곤 했다. 무용수이자 안무가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글을 써왔는데, 처음에 그 인물의 무용수적 특질을 설계할 때 루지마토프의 이러한 움직임도 짜 넣었다. 특히 아래 클립이 포함된 리허설 비디오는 꽤 많이 봤다.

 

 

 

그리고 좀 다른 스타일. 그러니까 구해주고 싶은 알브레히트를 추는 무용수 중 하나로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가 있다. 이 사람은 외모도 소년다운데다 아주 간절하고 애처롭게 알브레히트를 표현한다. 이 알브레히트는 지젤이 없다면 힐라리온처럼 윌리들에게 둘러싸여 순식간에 잡아먹히고 뜯기고 죽어버릴 것처럼 불쌍해 보인다. 이것도 자칫 잘못하면 '아무 짝에 쓸모없는 연약하고 사내답지 못한 자식 같으니!' 란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슈클랴로프는 그 유약함과 간절함, 그리고 지젤을 향한 사랑 사이에서 꽤나 줄타기를 잘 한다.

 

먼저 아내인 마리야 쉬린키나와 함께 췄던 후반부. 이 사람의 아내 사랑은 워낙 지극하니.. 클립을 봐도 간절한 사랑이 퐁퐁 넘치는데 슬프게도 쉬린키나는 아무리 잘 봐주려 해도 별로 재능이 뛰어난 것 같지 않다. 움직임도 그렇고.. 그래도 슈클랴로프의 알브레히트는 꽤 볼만하다.

 

 

 

쉬린키나의 지젤이 아쉽다면 바로 아래에는 나탈리야 오시포바가 있다. 오시포바야 뭐 워낙 유명하고 뛰어난 발레리나니 별다른 설명이 필요없다. 사실 내 취향의 지젤이라기엔 좀 기운차고 몸매도 근육질이긴 하지만 그래도 참 잘 춘다. 바실리예프가 그렇듯 오시포바도 가끔 내겐 운동신경 과잉으로 느껴질 때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훌륭하다. 여기서 슈클랴로프의 알브레히트는 쉬린키나와 췄을 때와는 살짝 느낌이 다르다.

 

조금 아쉬운 것은 이 동영상이 오시포바 팬께서 찍은 거라.. 둘이 같이 출 때면 열심히 오시포바를 클로즈업하여 알브레히트를 추고 있는 슈클랴로프가 가끔 잘린다는 것. 흐흑..

 

 

about writing 폴더에 발췌한 글에서 나의 주인공이 키로프에서 알브레히트로 데뷔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알브레히트는 아주 재수없고 도도한 유혹자에서 정말 살려주고 싶을만큼 격렬하고 고통스럽게 춤추는 젊은이로 변모한다. 그 부분을 쓸때 아마도 내 머릿속에 떠올랐던 이미지 중 일부는 루지마토프의 저 움직임, 그리고 슈클랴로프 식의 저 간절함일 것이다. 물론 그것들은 일부이며 글쓰기가 그렇듯 언제나 변형되고 재구성된다.

 

그 발췌 내용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3128

 

태그의 지젤을 클릭하면 이전에 올렸던 이 작품에 대한 리뷰나 사진들, 그리고 동영상 클립들을 많이 볼 수 있다.

 

* 니진스키와 카르사비나에 대한 웹진 기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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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무색하게.. 라는 말보다는 오히려 한살 한살 들어갈수록 더 성숙하고 아름다워지는 디아나 비슈네바.

 

사실 비슈네바가 막 스타로 크고 있던 90년대 후반에 무대에서 봤을 때는 지금만큼 근사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었다. 물론 그때도 아주 예쁘고 반짝반짝 빛나는 무용수이긴 했지만 그래도 연륜과 함께 더욱 매력적으로 변하는 발레리나라는 생각이 든다.

 

아래 비슈네바 화보 두 장 더.

 

전에도 몇번 쓴 적 있지만 이 사람 이름의 노어 원 발음은 디아나 비슈뇨바. 맨 뒤 e에 우다레니예(강세)가 있어서 비슈뇨바 라고 발음해야 맞다. 그런데 아무리 아무리 교정해서 쓰려고 해도 잘 안된다.. 그냥 비슈뇨바보다 비슈네바가 더 예쁘게 들려서 입에 붙었나보다... 영어 표기는 그냥 비슈네바라고 하고 있고. 그래도 공식적인 글을 쓸 때는 비슈뇨바라고 해야겠지.. (심지어 나는 노어 전공자인데 ㅠㅠ) 자꾸 비슈네바라고 하는 데 양해를..

 

 

 

 

 

지금 마린스키를 대표하는 프리마 발레리나를 두 명만 꼽으라고 한다면 울리야나 로파트키나와 디아나 비슈네바라고 할 수 있다. 둘은 스타일도 다르고 무용수로서의 특질도 다르다. 난 둘 다 좋아한다. 어떻게 그런 무용수들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둘다 이제 나이가 적은 편은 아니지만 어쨌든 아직은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보다는 더 상징적인 존재들이다. 춤도 그렇고..

 

 

 

 

이 사람은 물론 유일무이한 파루흐 루지마토프.

 

'1981년, 졸업'이라고 씌어 있는 것을 보니 당시 바가노바 아카데미 사진인 듯. 1963년생이니 얼추 맞는 것 같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팬심 가득한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사진 몇 장. 월요병이니까 뭐 어때.

 

빅토리야 테료쉬키나와 함께. 백조의 호수 중 흑조 2인무 추는 중.

 

사진사는 Natasha Razina. 사진에 캡션도 들어 있다.

 

 

 

 

역시 백조의 호수.

 

사진사는 Mark Olich

 

 

 

 

이건 라 바야데르. 내가 제대로 찍고 싶었던 그 코끼리 타고 등장하는 2막 씬. 영상에서 캡처했다 :)

 

 

 

이것도 라 바야데르. 3막 망령의 왕국에서 마지막 솔로 출 때. 최근 본 라 바야데르 무대에서 이 솔로를 출 때 정말 근사했다. 얼마나 높이 날아오르는지. 그리고 또 표정은 얼마나 간절하고 진실한지. 춤도 잘 추지만 열정적인 배우라서 좋다.

 

 

 

그리고 이건 알렉세이 라트만스키가 안무한 신데렐라.

 

이 사진은 몇 년 전 무대이다. 파트너는 예브게니야 오브라초바. (둘이 잘 어울렸다고요 ㅠㅠ) 슈클랴로프는 이때 머리에 웨이브를 잔뜩 넣고 나와서 가뜩이나 동안인데 더 귀엽게 보인다. 오브라초바도 귀여운 인상이라 둘이 사춘기 신데렐라와 왕자처럼 보임.

 

 

 

역시 신데렐라. 2막 무도회 장면. 등장해서 점프할 때. 찍사는 Natasha Razina.

 

헤어스타일을 보니 위의 오브라초바와 출 때 당시인 듯... 이 사진은 최근 마린스키 런던 투어에서 신데렐라로 파이널 공연했을 때 마린스키 페이스북에 올라온 것이다.

 

나도 이 사람이 추는 신데렐라를 직접 무대로 보고 싶다 ㅠ.ㅠ 영상만으로는 아무래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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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루지마토프와 비슈네바가 췄던 젊은이와 죽음 영상 클립. 아쉽게도 이게 비슈네바 등장/퇴장 부분까지만 편집되어 있어 앞부분과 아주 중요한 뒷부분은 잘렸지만.. 그래도 둘의 춤은 아주 근사하다.

 

이 당시에는 아직 둘이 헤어지기 전이었던 것 같다. 90년대 후반에 페테르부르크에 있다가 돌아올 때가 되었을 때 몇 달 더 있다 가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품었는데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루지마토프의 젊은이와 죽음 광고가 붙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못 보고 돌아와서 무척 슬펐었다. 그 당시 췄던 클립인 것 같다.

 

젊은이와 죽음은 내가 무척 좋아하는 작품이다. 내가 러시아어를 전공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전에 바리쉬니코프, 누레예프, 슈클랴로프 버전 영상 링크도 올린 적 있는데 위의 루지마토프 버전과 비교해 보면 다들 느낌이 다르다.

 

루지마토프의 춤을 보면서 다시금 느끼는 것은, 이 사람은 정말 유일무이한 무용수라는 것이다. 물론 바리쉬니코프와 누레예프는 길이 남을 위대한 무용수이다. 하지만 이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루지마토프의 육체는 아주 유연하고 가볍고 채찍처럼 휘감겨든다. 이 작품 같은 경우도 다른 무용수들이 췄던 버전과 비교해보면 이 사람이 몸을 쓰는 방식은 상당히 느낌이 다르다.

 

중앙아시아 출신인데다 상당히 가부장적이며 남성적인 사고 방식을 지녔고 전성기 내내 자기본위적이라는 평을 들었던 나르시스트이지만, 무대 위에서 뒤틀리고 날아가고 뛰어오르는 루지마토프의 육체는 일반적인 마초 남성 무용수와는 달리 매우 양성적이고 우아하고 부드럽고 가볍다. 저런 육체와 도약과 움직임 앞에서는 오직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2년 전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무용수이자 안무가 주인공을 되살려 냈을 때 루지마토프의 움직임과 그 육체적 특성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디아나 비슈네바. 이 당시는 아직 한창 젊을 때라 성숙한 느낌은 덜하지만 그래도 볼만하다. 둘의 케미스트리도 좋고...

 

관련 사진 몇 장.

 

 

 

 

 

** 이전에 올렸던 젊은이와 죽음 에 대한 포스팅들은 아래..

 

국립발레단 젊은이와 죽음(김용걸) : http://tveye.tistory.com/2403

젊은이와 죽음에 대한 얘기 + 누레예프, 바리쉬니코프, 슈클랴로프 영상 : http://tveye.tistory.com/2389

젊은이와 죽음을 추는 슈클랴로프 짧은 클립 : http://tveye.tistory.com/2087

젊은이와 죽음에 대해 삽입한 짧은 글 : http://tveye.tistory.com/2390

 

** 사족

 

이전에 페테르부르크에서 간만에 극장 박물관에 갔을 때였다. 박물관 다 돌고 내려와 샵에 갔다가 점원 할머니와 이런저런 얘길 나눴다. 누레예프 책갈피랑 이런저런 책을 권해주시고 비슈네바 엽서를 권해주셔서 루지마토프 엽서 없나요? 했더니 할머니가 무지 반가워했다.

 

" 아, 그 사람 건 지금 없는데.. 루지마토프를 좋아해? "

" 네, 옛날에 여기 살때부터 좋아했어요. 그 사람 무대 너무 멋졌어요. "

" 훌륭한 무용수지. 좋은 사람이고. 정말 훌륭해. "

 

할머니는 계속해서 '훌륭한'이란 형용사를 반복했다.

 

" 여기 자주 왔는데.. 요즘은 조금 뜸하지만. 지금 어디 사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래도 매년 와. 좋은 사람이지. "

 

극장과 박물관에서 일하는 할머니들과 얘기하는 건 가끔 참 즐겁다 :)

 

** 태그의 파루흐 루지마토프 를 클릭하면 그간 이 사람에 대해 올린 글이나 영상, 사진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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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5. 28. 22:44

루지마토프와 슈클랴로프 화보 몇 장 dance2014. 5. 28. 22:44

 

 

피곤한 수요일. 심신의 위안을 위해.

 

오랜만에 파루흐 루지마토프의 옛 화보 몇 장.

 

 

 

 

 

** 파루흐 루지마토프의 세헤라자데와 황금노예에 대한 포스팅은 여기

http://tveye.tistory.com/2777
http://tveye.tistory.com/2774

 

 

 

그리고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

 

지난 마린스키 발레 페스티벌에 올라간 유리 스메칼로프의 '카메라 옵스쿠라'(http://tveye.tistory.com/2740) 리허설 사진.

파트너는 안나 라브리넨코.

출처는 마린스키 극장 브 콘탁트.

이 사진 보면서 생각한 것 :

발로쟈, 그 패션 감각은 좀 웃긴 걸.. 파란 무늬 스카프(반다나인가..)에 샛노란 티셔츠 :0

 

 

그리고 이건 곱사등이 망아지.

뒷모습만 나왔지만 파트너는 울리야나 로파트키나. 역시 키크고 늘씬한 로파트키나 :)

찍사는 Mark Olich.

사진만 봐도.. 저렇게 귀여운 바보 이반이라면 그냥 따라간다니까요 :))

 

** 곱사등이 망아지에 대한 이전 리뷰와 영상 클립은 아래를..


http://tveye.tistory.com/2796
http://tveye.tistory.com/2789

 

 

** 태그의 파루흐 루지마토프와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를 클릭하면 이들에 대한 이전 포스팅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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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다녀온 후 자고 일어났더니 하루가 다 가 버려서...

마린스키 미하일 포킨의 밤 세번째 리뷰는 내일 올리고, 대신 파루흐 루지마토프와 율리야 마할리나의 라 바야데르 화보 한 컷. 이번에 갔을 때 미하일로프스키 극장에서 레오니드 사라파노프와 폴리나 세미오노바가 추는 라 바야데르 봤었는데 그 리뷰는 마린스키 리뷰 올리고 나서... (대체 언제 ㅠㅠ)

 

루지마토프의 라 바야데르 2인무 영상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2276

오래돼서 화질이 매우 안 좋긴 하지만 그래도 그의 탁월하고 아름다운 춤을 볼 수 있다.

 

마할리나의 니키야 화보 : http://tveye.tistory.com/2077

 

루지마토프의 솔로르 화보(내가 좋아하는 하얀 의상 입었다~) : http://tveye.tistory.com/2294

 

태그의 파루흐 루지마토프를 클릭하면 그의 화보나 옛날 춤 영상을 몇 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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