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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4. 21:51

잠시 : 글, 사과 파이 등 about writing2014. 10. 4. 21:51

지난주에 끝낸 글 퇴고 중인데, 앞선 오늘 메모(http://tveye.tistory.com/3164)에서 잠깐 얘기했듯 거의 마지막 부분에 주인공과 화자가 함께 늦은 점심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 사과파이가 나오는데 덕분에 오늘 사러 갔었다.

 

지금 내 상황에서 사과파이를 먹는 것은 식이요법을 마구 무너뜨리는 짓이라 반쯤 농담조로 '사과파이 대신 버섯 샐러드나 보르쉬나 먹일걸' 하고 투덜댔지만, 사실 이 글에서는 그게 사과파이여야만 했다. 뭐 논리적으로야 다른 나무열매 파이가 될수도 있고 심지어 잼을 가득 얹은 케익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주 달콤한 무엇인가라면 되는 거였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쓰는 사람의 구상과 사고 구조 속에서 그건 사과파이여야 했다. 

 

지난번 잠깐 발췌했던 글(http://tveye.tistory.com/3146)과 같은 소설이다. 거기서는 화자가 주인공의 청에 따라 바이올린을 켰다. 여기 발췌한 부분은 그 이후 이어지는 내용이다. 중간에 좀 생략된 부분들이 있긴 하지만.

 

화자는 지방의 소도시 시립극장 오케스트라 바이올리니스트. 이름은 로만 코즐로프. 주인공인 미샤는 그 극장의 신임 예술감독으로 부임한지 한달 정도 된 상태이다.

 

글에 나오는 '칼바사'는 러시아식 소시지의 일종으로 기름기가 많고 꽤 짭짤한 편이다. 짙고 어두운 붉은색의 밀도높은 소시지를 잘라보면 단면에 하얀색 기름이 송송 박혀 있다. (난 못 먹는 음식이었다 ㅋㅋ) 러시아식 오픈 샌드위치인 부체르브로드 위에 올라가는 경우가 많다.

 

* 이 글을 무단으로 발췌, 인용, 전재, 배포하지 마세요 *

 

...

 


 미샤가 소파에 기대어 다시 조는 동안 나는 칼바사와 치즈를 얹어 간단한 샌드위치를 만들고 통조림을 따서 토마토 수프를 데웠다. 뭐든 먹여야 취기에서 좀 풀려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도 무척 배가 고팠지만 요리를 하기에는 만사가 귀찮았다. 그래서 볼코프가 손녀의 솜씨라며 가져다주었던 사과파이에 연유를 잔뜩 끼얹었다. 여섯 살짜리처럼 구는 놈이니 분명히 입맛도 그럴 것이다.

 

 자식은 아무 것도 먹지 않으려고 했다. 두들겨 패겠다고 협박해서 식탁으로 끌고 왔다. 샌드위치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하긴 그렇게 계속 토했으니 기름진 칼바사가 당기지 않을 만도 했다. 그래서 수프를 먹으라고 강요했다. 어쨌든 토마토 수프는 숙취 해소에 좋기 때문이다. 미샤는 수프를 한 숟가락 삼킨 후 투덜거렸다.

 

 “ 그건 진짜 토마토 얘기지. ”


 “ 가짜 토마토도 있나? ”


 “ 우리 공장에서 나온 통조림은 전부 가짜라고. ”


 “ 어쩌면 저렇게 입에서 나오는 소리 하나하나가 전부 잡혀갈 내용인지. ”


 “ 잘됐네, 누구는 말 때문에 잡혀가고 누구는 폭행으로... ”


 “ 난 그런 적 없어. ”


 “ 전형적인 가해자의 논리를 구사하시는군. ”


 “ 심신상실자의 증언은 아무도 안 믿어줘. ”


 “ 심신상실자? 내가? ”

 

 미샤가 숟가락으로 그릇을 땅 쳤다. 그 돼먹지 못한 식사예절에 뒤통수를 한 방 갈겨줄까 하다 참았다.

 

 “ 떡이 되게 취했었잖아. 기억이나 제대로 나나? ”


 “ 기억하고 말 게 어디 있어. 당신이 팼겠지. 그러니까 멍도 들고 이렇게 아픈 거지, 설마 내가 자해를 했겠어? ”


 “ 정말 기억 못하는군. 술 마시면 원래 그래? 필름 끊기고 기억 못해? ”


 “ 중요한 건 기억해. ”

 

 미샤는 수프를 한 모금 더 삼켰고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덧붙였다.

 

 “ 아마도. ”

 

 어디까지가 중요한 것인지 묻고 싶었다. 그리고 간밤의 일을 어디까지 기억하는지. 알콜로 엉망이 되어버린 저 귀엽고 조그만 머릿속에서 간밤부터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을 하나하나 꺼내보고 싶었다.

 

 반쯤은 내 협박에 질려서, 반쯤은 관성적으로 미샤는 수프를 다 먹었다. 하지만 사과파이는 거부했다.

 

 “ 먹어두는 게 좋을 걸. 사과도 숙취 해소에 좋아. 통조림도 아니고. 볼코프 손녀가 직접 따서 만든 거라고. 꽤 맛있어. ”


 “ 단 거 잘 안 먹거든. ”


 
 의외였다. 나는 관찰력이 꽤 좋은 편이었고 특히 사람들의 식성에 대해서는 틀린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 남자 무용수들도 그런가? 발레리나 계집애들처럼 몸매 관리하고 음식 조절하고? ”


 “ 사람에 따라 달라. 안 그런 애들이 더 많지만. 난 학교 다닐 때부터 안 먹었어. 춤에 방해될까봐. ”


 “ 어차피 은퇴했다면서. 그냥 먹어. 속이 울렁거릴 테니까. 당분이 도움이 될 걸. ”


 “ 당신은 꼭 내 친구처럼 말하는데. ”


 “ 참 놀랍군, 친구가 다 있다니. 그 성깔에. ”


 “ 있어. 많지는 않지만. ”

 

 미샤는 잠시 침묵했다가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 좀 닮았어. 교회 첨탑처럼 큰 것도. ”

 

 어쩐지 그 말은 오케스트라 때문에 낚았다는 말보다 더 기분이 나빴지만 또 한 대 팼다가는 자식이 영영 나가버릴 것 같아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다.

 

 미샤는 포크로 사과파이를 조금 잘라서 먹었다. 그래도 연유는 한쪽으로 긁어냈다. 나는 그 애가 파이를 먹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조그만 파이 조각을 지독하게 천천히 먹었다. 남은 파이를 한꺼번에 입 안으로 밀어 넣고 싶었지만 참았다. 자식이 눈을 가늘게 뜨며 행복하게 웃었기 때문이다.

 

 “ 당신 말이 맞네.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 먹어봐. ”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 나는 심장 한 구석을 칼로 베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뱃속이 뭉클거렸다. 팔을 뻗어 그 애를 껴안고 싶었다. 뺨을 쓰다듬고 싶었다.

 

 “ 사과가 좋기 때문이지, 여기 숲에서 난 건 레닌그라드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될 걸. ”


 “ 이렇게 단 건 정말 오랜만에 먹어. ”


 
 파이 접시를 앞으로 밀어주자 미샤는 나머지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뜨거운 차를 주자 좋아했다. 하지만 차에 설탕을 넣지는 않았다. 레몬조차 넣지 않았다. 연유를 계속 접시 귀퉁이로 밀어내고 있었다. 마침내 나는 남은 파이를 포크로 끌어당겨 연유를 잔뜩 묻혀 주었다. 자식은 좋아하는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처럼 원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한번쯤 먹어봐도 괜찮을걸. 어차피 단 거 먹고 있잖아. ”

 “ 차원이 다르잖아. ”


 “ 단 걸 먹는 것도 배워야 할 거야. 여기서 겨울을 나려면. ”


 “ 레닌그라드도 추워. ”


 “ 그땐 감독이 아니었겠지. 춤만 추면 됐잖아. ”


 “ 감독이 된 거 하고 설탕이 잔뜩 들어 있는 연유를 먹는 게 무슨 관계가 있는데? ”


 “ 뭐든 처음이 있다는 얘기지. ”


 “ 볼셰비키 식 논리인데. 대전제를 아무 데나 다 이입하는. ”


 “ 어쨌든 먹어봐. 더 맛있을 테니까. ”

 

 미샤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한없이 부드럽고 조용한 눈빛이었다. 아직 취기에 잠겨 있는 눈. 자식이 영영 술기운에서 깨어나지 않기를 빌고 싶을 정도였다.

 

 미샤는 남은 파이를 전부 먹었다. 연유와 함께. 너무 달아서 속이 뒤집힐 것 같다고 툴툴거렸지만 끝까지 먹는 걸 보니 내심 맛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 애가 파이를 먹는 동안 나는 샌드위치를 전부 해치우고 설탕을 탄 차를 마셨다. 미샤는 한참 먹다가 뒤늦게 파이를 반 토막으로 잘라 내게도 먹으라고 했다. 볼코프가 통째로 한 판 가져다 줘서 많이 남아 있다고 하자 좋아하는 눈치였다.

 

 미샤는 어두워질 때까지 우리 집에 머물렀다. 점심을 먹고 난 후에는 더 이상 토하거나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내내 취해 있었다.

 

...

 

소설은 이후 한 페이지 정도 더 지속된다. 하지만 실질적인 에피소드는 여기서 끝난다. 나는 이제껏 이 주인공을 놓고 단편이나 중편, 장편 등 몇 편의 글을 썼지만, 이 사람이 뭔가를 먹는 장면을 쓴 적은 별로 없다. 뭐 몇 차례 있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쓴 적은 없다. 어쩌면 그래서 사과파이여야 했던 건지도 모른다.

 

소설의 배경은 1981년이고 당시 주인공은 스물여섯 살을 앞두고 있다. 다소 까칠하고 다혈질인 화자 코즐로프는 마흔 살이다. 이미 40대로 접어든 소도시 바이올리니스트의 시점으로 글을 전개하는 것은 즐거우면서도 어딘가 슬픈 일이었다. 아마 내가 더 이상 이전처럼 젊은 심장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이미 미샤보다는 코즐로프의 나이에 더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코즐로프가 사과파이에 연유를 끼얹는 것은 사실 생각하면 좀 괴로운 일인데... 무지무지 달콤한데다 어딘지 참 촌스러운 맛일 것 같긴 하지만.. 글의 배경이 물자가 풍족하지 않은 소련 시절이라서(ㅜ.ㅜ) 그리고 러시아 사람들은 단 것을 아주 좋아한다. 연유와 잼도 좋아한다. 고백하자면 나도 블린에 연유를 흠뻑 끼얹어 먹는 걸 좋아했었다.

 

** 결국 사와서 먹어버린 사과 파이 : http://tveye.tistory.com/3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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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