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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메모 (2016. 9. 11, 프라하)



나는 3년 반 전 겨울에 갑자기 프라하로 떠났고 그때의 이야기는 2013년 프라하 메모 폴더에 기록되어 있다. 그곳으로 떠난 이유에 대해서는 이따금 about writing 폴더에도 쓴 적이 있다.



아마도 나는 가장 밑바닥에 있을때 두 가지 장소를 떠올리는 것 같다. 하나는 페테르부르크이고 하나는 프라하인데 이 두 도시는 서로 다른 의미에서 내게 중요한 곳이고 또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어쩌면 전자에서 나는 글을 쓰고 싶어지고 후자에서 나는 글을 쓰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전자에서는 그저 사랑하게 되고 후자에서는 그 이유를 찾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래 발췌한 이야기는 2012년 10월말부터 2013년 1월까지 썼던 장편의 중후반부이다. 나의 주인공 미샤가 등장하는 본편 우주에 속한 장편인데 전에 여러번 발췌한 적이 있는 소설이다. 미샤의 친구이자 애인인 영문학 강사 안드레이(친구들이 부르는 이름은 트로이)가 심리적 화자로 등장한다. 여기에는 트로이의 친한 친구인 알리사가 나오는데 당시 나는 그녀에 대해 쓰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했었다. 전에 알리사가 나오는 에피소드도 몇번 올린 적 있다. 기계벌레와 불가코프,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에피소드가 제일 길었던 것 같다.



이 에피소드는 런던 대사관에서 근무하게 된 알리사가 그쪽으로 투어를 온 미샤와 만난지 얼마 후 휴가를 받아 레닌그라드에 잠깐 돌아오면서 트로이의 아파트에 묵고 대화를 나누는 이야기이다. 미샤가 런던에 갔을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예전에 '젊은이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발췌한 적이 있다. 그 얘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2390


이번 에피소드에서 알리사는 미샤의 공연을 본 이야기, 그리고 미샤와 자신이 나누었던 대화에 대해 얘기한다.



나는 이 소설을 마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프라하로 떠났다. 그곳에서 가브릴로프 본편을 쓰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고 프라하와 카를로비 바리를 걷다가 그 본편의 프리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른 이야기를 썼다. 수용소와 클리닉에서 미샤가 겪는 이야기였는데 그 글은 프라하에서 시작해 한국에서 마무리했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저 소설을 다시 뒤적였고 이 에피소드에 이르렀을 때 아래와 같은 메모를 적었다. 그리고 그당시의 나는 아마도 옳았던 것 같다. 지금, 3년이 지난 후 이곳, 다시 프라하에서 나는 저 당시의 나와 공감하고 있으니까.









첫번째 메모 (2013. 3. 9, 프라하)



 어젯밤에 잠깐 1월에 마쳤던 글을 좀 뒤적였다. 지금 쓰는 글과의 연결 고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새 글과의 연관성은 별로 없지만 어쩐지 지금 내게 필요한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어 발췌한다. 사실 저 대화를 쓸 때도 알고 있었다. 저건 너무 개인적인 대화라고. 물론 렌즈를 통해 걸러지고 재구성된 대화이며 등장인물들의 상황 역시 허구의 집합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에는 매우 개인적인 뭔가가 스며들어 있다고. 그래서 아마도 프라하든 페테르부르크든, 그 어느 곳으로 떠나든 난 저 부분을 다시 읽게 되었을 때 이 생각을 하게 될 거라고.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아파트 안을 한 바퀴 둘러본 후 알리사가 무심하게 말했다.


 

 “ 오랜만에 와서 그런가, 구조가 좀 바뀌었네. 소파도 옮기고. 창가가 썰렁한데. 불편하지 않아? ”


 “ 별로. 창 밖 보면서 생각하기 편해. ”

 


 그녀는 별 말 없이 빈 침실로 가방을 끌고 들어갔다. 미샤가 자고 간지는 한 달이 훨씬 지나 있었고 아침에 트로이는 청소를 하면서 혹시 그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지 구석구석 살폈다. 하지만 알리사라면 아주 작은 단서에서도 쉽게 사실을 유추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옮겨진 소파와 텅 빈 창가 앞 공간처럼.

 


 알리사는 30분 정도 욕조에 몸을 담근 후 피곤했는지 잠시 눈을 붙였다. 그녀가 자는 동안 트로이는 어머니가 남겨두고 간 오래된 요리책을 뒤져보며 제대로 된 살랸카를 끓여보려고 무한한 노력을 했다. 그러나 살랸카는 보르쉬나 양배추 수프보다도 훨씬 어려운 요리로 판명되었다. 한참 후 불을 끄고 접시를 꺼내고 스메타나가 든 병을 찾고 있는데 알리사가 눈을 비비고 나와 물었다.

 


 “ 이게 무슨 냄새야? ”


 “ 살랸카... 로 믿고 먹어. ”



 둘은 식탁에 마주앉아 살랸카로 추정되는 수프와 끓는 물에 쪄낸 펠메니를 먹었다. 수프를 떠먹으며 알리사가 웃었다.

 


 “ 버터를 빼먹었네. 토마토 퓨레는 너무 많이 들어갔고. ”


 “ 처음 해 본 거니까 용서해. ”


 “ 추정 안 해도 살랸카 맞아. 맛있어. ”

 


 저녁을 먹은 후 알리사가 런던에서 사온 고급 차와 쿠키를 꺼냈다. 찻잎에서 부드럽고 근사한 향이 났다. 그녀는 주전자에 물을 끓인 후 직접 차를 우려서 트로이에게 따라주었다.

 


 “ 커피 더 좋아하는 건 알지만, 좋은 차니까 마셔봐. ”


 “ 부르주아가 마실만한 차네! ”


 “ 노예처럼 노동해서 사온 거니까 괜찮아. 레몬 넣을래? ”


 “ 아니. 그냥 마실게. 향이 좋은데. ”


 “ 원래 설탕 넣지 않았어? ”


 “ 요즘은 잘 안 넣어. ”

 


 차를 마신 후 그들은 소파로 가서 그간 있었던 일들에 대해 잠시 얘기를 나눴다. 알리사는 대사관에서 하는 일에 대해서는 자세한 말을 하지 않았고 런던 날씨와 소일거리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았다. 트로이에게 강의와 논문에 대해, 그들의 오래된 모임에 대해서 물었다. 이고리와 쥬진스키가 싸운 얘기를 해주자 알리사가 쿡쿡 웃었다.


 

  “ 그 떠벌이 쥬진스키가 완전히 한 방 먹었겠네.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 걸. 이고리는 역시 화끈해. ”


  “ 그 화끈한 남자한테 반한 아가씨가 생겨서 아마 5월쯤 결혼할 거야. ”


  “ , 5월이야... 그럼 보러 올 수가 없잖아. ”


  “ 미리 축하해주고 가면 되지. ”


  “ 그래도... 아 속상해. ”


 

 알리사가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무릎을 베고 누운 그녀는 한없이 부드럽고 가냘프고 작아서 트로이는 처음으로 알리사를 다른 성을 가진 존재로 인식했다. 아무리 소년처럼 머리를 짧게 자르고 편한 말투로 얘기해도 그녀는 완벽하게 다른 존재이며 영원히 반대편 세상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녀의 여성성이 트로이를 놀라게 하고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감동하게 했다.


 

 알리사가 부드럽게 말했다.


 

 “ 너 공항에서부터 물어보고 싶은 거 참고 있었지? ”


 “ ? ”


 “ 그때 내 전화. 로미오 말야. ”


 “ . ”


 “ 걔 만났어? 돌아온 후에? ”


 “ 아니, 공연 준비 때문에 엄청나게 바쁠 걸. 아마 지금쯤 잠도 못 자고 일할 거야. ”


 “ 그렇게 계속하면 못 버틸 거야. 걘 좀 쉬어야 해. ”


 “ 그런 말 했다간 본전도 못 찾을 걸. 자기 체력이 제일 좋다고 믿는 앤데. ”


 “ 체력이야 우리보다 백배는 좋겠지. ”


 

그녀는 창가의 텅 빈 공간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 연습실 같아. 좁긴 하지만. ”


 “ 그래? ”


 “ . 걔 들르면 여기서도 춤춰? ”


 

 트로이는 잠깐 침묵했다. 하지만 대답하지 않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 걘 어딜 가나 춰. ”


 “ 그렇겠지. ”


 

 알리사는 손등으로 눈꺼풀을 가볍게 비볐다. 갑작스럽게 피로한 목소리로 그녀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난 개막일 공연은 보지 못했어. 포노마레바 하나만으로도 골치 아픈데 스비제르스키에 코조프까지 고위직이 둘이나 왔잖아. 그자들 뒤치다꺼리부터 시작해 정신이 없었어. 나중에 리셉션에 왔을 때도 얼굴 마주치기도 힘들었어. 담당자한테 부탁해서 현지 프로그램이라도 좀 고쳐주려고 했었지. 우리 무역 사절단 지부 방문 같은 거 빼고 현대미술 갤러리나 셰익스피어 극단 배우들 미팅 그런 걸로. 어차피 위원들이 자기 행사에 끌고 가느라 무산됐지만. 둘째 날엔 우리 쪽 보안 책임자가 갑자기 도청이 어쩌고 음모가 어쩌고 헛소리를 해서 걔 숙소를 바꿔야 했지. ”


 “ 영국 정보부에서 도청을 해? 뭐하러? 아무 것도 모르는 무용수를 도청해서 뭘 해. ”


 “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나야 뭐 정보가 제한되어 있으니까. 하여튼 그날 밤에 통화한 게 처음이었어. 런던에 왔는데 내 얼굴을 못 봐서 섭섭하다고 해서 페트루슈카는 꼭 보러 가겠다니까 좋아하더라. ”


 “ 숙소 바꾼 건? 도청 얘기 했어? ”


 “ 아니, 그건 담당자가 따로 얘기했을 테니까. 난 그냥 불편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만 했어. ”


 “ 상관없다고 했겠지.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쓰는 애야. ”


 “ 글쎄, 신경 쓰는 것 같았어. 호텔보다는 자기 방을. 전화 끊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프리츠카야와 방을 바꿔주면 안되느냐고 묻더라구.”


 “ 프리츠카야가 누구야? ”


 “ 포노마레바 따라온 문화국 꼬맹이. 말단이라 안뜰 쪽 싱글 룸이었어, 연습이나 스트레칭은커녕 트렁크랑 의상 넣을 자리도 빠듯한 방이었지. 디럭스 스위트를 받은 애가 그 방과 바꿔달라고 하더라고. “


 “ 바꿔줬어? ”


 “ 아니, 말도 안 되잖아. 내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방은 스비제르스키가 준 거야. 의원님께서 선의를 베푸신 걸 어떻게 바꿔. 게다가 그 높으신 분 바로 옆방이었는데. ”

 


트로이는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리사가 잠깐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갈색 눈에 우울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 그리고 나서는 또 계속 바빴어. 페트루슈카도 간신히 보러 갔어. 그 공연 정말 훌륭했지. 우는 사람도 많았어. 걘 타고난 배우야. 셰익스피어 극단 미팅 취소시킨 인간들이 한심스러웠어. 네가 같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 무대 좋아했을 텐데. ”


연습할 때 한번 봤어. 우울한 춤이었지. ”


    “ 아니, 그건 아주 훌륭한 춤이었어. 너 알지, 내가 그런 쪽에 별로 관심 없는 거. 난 연극을 더 좋아했잖아, 그것도 코미디나 풍자. 발레나 오페라 같은 건 인위적이고 낯간지러워서 별로라고 생각했어. 그나마 로미오가 아니었다면 보러 갈 마음도 안 들었을 거야. 그런데 그건 달랐어. 트로이, 걔는 달라.

     난 항상 언어를 사용하는 예술가가 가장 강력한 마법을 발휘한다고 믿었어. 언어는 2차적으로 창조된 것이며 춤이나 노래 같은 원시적인 표현보다 훨씬 복잡하고 정교한 단계를 거치니까. 문학이야말로 가장 우월한 장르이며 가장 발전된 예술 양태라고 생각했었지. 그래서 아빠의 반대를 무시하고 문학 쪽을 골랐던 거였어. 내게 공부에 대한 열망이나 문학에 대한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었어. 난 그저 그 놀라운 장르에 대해 내 나름대로 경의를 표하고 싶었을 뿐이야. 되게 철없었지? 넌 내가 공부하는 걸 엄청나게 좋아하는 줄 알았었잖아. 그런데 그날 왕립극장에서 그 무대를 보면서 난 내가 틀렸다는 걸 알았어. ”


 

 그녀는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트로이의 곁에 똑바로 앉았다.


 

    “ 있잖아, 그 작품 자체가 아주 근사하거나 새로운 건 아니었어. 영국인들에게는 감정이 흘러넘치는 특이한 안무라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내겐 그 스타일이 낯익었어. 그건 아주 러시아적이었어. 그 안무에는 과잉과 흥분, 감상주의, 그 세 가지가 모두 들어 있었으니까. 너도 알다시피 난 그런 특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래서 여길 떠났던 건지도 모르지.

     그 무대가 그토록 뛰어났던 건, 아니, 그토록 마음을 뒤흔들었던 건 전적으로 그 춤을 춘 게 로미오였기 때문이야. 걔는 무대에서 조명을 받으면서 공연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문을 열어. 바깥과 안으로 동시에 열리는 문을. 수없이 많은 문들을. 뭔가 아주 끔찍한 걸 보여줘. 보고 싶지도 않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뭔가를. 그런데 그게 문 밖으로 나오면 변해. 그건 언어로는 절대 표현할 수 없어. 난 사람의 몸으로 그런 짓을 할 수 있다는 걸 상상도 할 수 없었어. 그건, 트로이, 악령을 불러냈는데 그게 눈앞에 나타난 순간 성모로 변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 내가 춤에 대해 조금만 더 잘 알았다면... 조금이라도 춰봤다면 다른 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텐데...

     그 페트루슈카 때문에 난 너무 흔들렸어. 아마 그게 내가 잘 아는 애가 아니었다면, 꼬맹이 때부터 봐온 친구가 아니었다면 순식간에 사랑에 빠졌을지도 몰라. 숭배했을 거야. 그걸 보고 나니 갑자기 겁이 났어. 우린 그런 애를 붙잡아놓을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이 덮쳐왔어. 물론 그건 아주 잠깐이었지. 갈채와 꽃다발을 받으며 인사하러 나온 로미오를 보니까 다시 행복해졌거든. 내가 아는 애라서. 우리 친구라서. ”

 


 이제 알리사는 소파에서 일어나 트로이의 앞을 왔다갔다 걷기 시작했다. 반쯤 무의식적인 것 같았다.

 


     “ 난 어떻게든 로미오를 만나고 싶었어. 얼굴을 보고 그 춤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어. 우습지만 지금까지 널 몰라봐서 미안하다고, 그 춤 때문에 널 존경하게 됐다고 얘기해주고 싶었어. 시상식까지 아직 사흘이나 남아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어. 

      다음날도 걔는 바빴지. 자기 공연은 다 끝났지만 뭔가 행사가 많았어. 저녁에 우리 대사 생일 파티가 있었지. 난 거기서 로미오를 만날 수 있었어. 그렇게 수트를 갖춰 입고 머리까지 잘 빗고 있는 걸 보니 좀 우습더라. 우리랑 있을 땐 그런 적 거의 없었잖아. 파리에서는 리셉션 때 타이는커녕 가죽 재킷을 입고 왔었다고.

     대사는 걔한테 아주 친절했어. 발레나 문화 행사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니까 아마 스비제르스키에게 잘 보이고 싶었기 때문일 거야. 그쪽 라인으로 갈아타고 싶어 하고 있거든. 높은 분들한테 붙잡혀서 시달리는 걸 보니 불쌍했어, 그래서 기회를 보다가 대사와 코조프, 포노마레바가 다른 쪽으로 갔을 때 잽싸게 걔를 데리고 뒤뜰 정원으로 나갔어. 워낙 추워서 아무도 나올 생각을 안 할 테니까.

    우린 눈 쌓인 정원 구석에서 얘기를 나눴지. 그 페트루슈카 무대에 대해, 런던에 대해. 하지만 낯이 뜨거워서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차마 입 밖에 꺼낼 수가 없었어. 로미오는 피곤해 보였어. 그렇게 습하고 추웠는데도 눈이 감기는 것 같더라구. ”


 “ 술 때문이었을 걸. 높으신 분들이 못살게 굴었다면서, 한잔씩 줬겠지. ”


     “ 맞아. 그때 이고리가 많이 놀렸었잖아, 술 못 마신다고. 하여튼 그때 정원으로 프리츠카야가 나왔어. 로미오를 부르러 나온 거였어. 스비제르스키가 찾는다고 했어, 얘기할 게 있다고. ”


 “ 그래서, 다시 들어갔어? ”


     “ 내가 프리츠카야에게 얘기했어, 과음해서 잠시 바람 쐬고 있으니까 좀 있다 갈 거라고. 그 바보가 들어간 후에 내가 걔한테 피곤하면 지금 내 차로 호텔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지. 난 로미오가 그렇게 고마워하는 걸 처음 봤어. 알다시피, 좀 건방진 애잖아. ”


 “ 그렇게 빼돌리면 위에 밉보이는 거 아냐? ”


 “ 로미오는 대놓고 묻더라. 잘리는 거 아니냐고. 그래서 난 처세를 잘하니까 괜찮다고 해줬어. ”


 “ 정말 괜찮아? ”


 “ 알게 뭐야, 그 구역질나는 인간에게 걜 보내기 싫었어. ”



 알리사는 헛기침을 하더니 부엌으로 가서 맥주를 한 병 꺼냈다. 목이 타는지 병째로 몇 모금 마셨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갈색 눈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취해서가 아니었다, 화가 나 있었던 것이다.

 


     “ 가까운 거리긴 했는데 길이 많이 밀렸어. 차 안에서는 아무 얘기도 안 했어, 앉자마자 자더라구. 이상하게 옛날에 기차 타고 흑해에 갔을 때가 생각났어. 레나랑 연결해주려고 누나들이 괴롭혀서 걔 객실에 안 들어가고 통로에서 잤잖아. 그때 넌 글을 쓰고 있었지. ”


 “ 난 기억 잘 안 나는데. ”


 “ 기억할 수 있을 거야. 넌 로미오에 대한 건 아무 것도 잊지 않아. ”

 


트로이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가만히 있었다.


 

    “ 도착했을 때 미샤가 잠깐 들어왔다 가라고 했어. 좋은 방이었지. 장미가 얼마나 많은지 깜짝 놀랐어. 욕실에까지 꽃이 넘쳐났어. 영국 사람들이 보냈대, 그런 사람들까지 숙소를 알아낸 걸 보면 화이트홀 도청을 피해 옮겼다는 얘긴 핑계에 지나지 않아. 처음으로 걔가 끓여주는 커피를 마셨지. 진짜 의외였어. 갈랴가 만들어준 것보다 훨씬 맛있었어. 

      우린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얘기했어. 아직도 내가 빌려줬던 번역 노트들을 기억하더라. 시 같은 건 난 구절도 가물가물한데 걘 다 외고 있었어. 난 춤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지만 걔는 자기 얘기는 별로 안 했어. 나에 대해 물었지. 런던에서 내가 어떻게 사는지, 일은 힘들지 않은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음악을 듣는지. 사람들과는 잘 지내는지.

     난 하마터면 울 뻔 했어. 왜냐하면, 트로이. 걔가 정말로 묻고 있었던 건 내가 그곳에서는 덜 외로운지, 조금이라도 자신에 대한 엄격함을 놓고 관대해졌는지, 그래서 자신을 조금이라도 사랑하게 됐는지에 대한 거였으니까. 난 그 일상적인 질문들에 대답했고 파블릭과 헤어진 후 런던으로 떠나오지 않았다면 아마 견딜 수 없었을 거라고 덧붙였어. 그러자 미샤가 말했지, 파블릭과 헤어진 건 내 잘못이 아니며 많은 사람들이 사랑 없이 결혼한다고. 그러니까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다고 했어. 파블릭에 대해서도, 나 자신에 대해서도.

     트로이, 지금까지 내게 그런 말을 그렇게 대놓고 했던 사람은 없었어. 미샤는 아무런 연민도, 훈계하는 태도도 없이 그냥 뉴스를 읽어주듯이, 사실을 통보하듯이 그렇게 말했어. 나는 그 아이를 끌어안고 키스를 해주고 싶었어. 실컷 울고 싶었어. 참느라고 혼났어, 그래도 난 다섯 살이나 많은 누나에 가방끈도 더 길잖아. 춤 밖에 모르는 건방진 꼬마 앞에서 체면을 구길 수야 없지. ”

 

 알리사가 농담을 하며 조그맣게 웃었다. 눈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트로이는 그녀가 더 이상 로미오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 난 네가 미샤를 싫어했다고 생각했는데. ”


 “ 싫어했던 건 아냐. 우리 곁에 있어서는 안 되는 애라고 생각했을 뿐이지. ”

 


그녀는 이유를 생략했다.




..




* 페트루슈카는 원래 미하일 포킨이 발레 뤼스에서 안무했던 작품이지만 이 소설에서 나는 그 작품을 모티브로 안무가 스타니슬라프 일린이 친구인 미샤를 위해 별도로 안무해준 약 10여분 가량의 짧은 독무 작품으로 개작했다. 이 소설에서 미샤는 이 페트루슈카를 가지고 런던의 댄스 페스티벌에 초청을 받고 그랑프리를 받는다(물론 이 페스티벌은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행사임)




** 떠벌이 쥬진스키와 이고리의 싸움에 대한 얘기도 전에 올린 적 있음.

쥬진스키는 표절 소설가였다. 그건 여기 : http://tveye.tistory.com/3825






** 미샤가 커피를 잘 타게 된 이유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4206






(이 사진은 다닐 심킨)





위의 에피소드들은 아래의 앞선 이야기들과 연관되어 있다.


http://tveye.tistory.com/5040 : 파리의 알리사와 미샤

http://tveye.tistory.com/5064 : 예술가의 세가지 정점

http://tveye.tistory.com/5016 : 기계벌레와 불가코프에 대한 알리사의 말, 떠나는 알리사

http://tveye.tistory.com/4671 : 흑해로 가는 기차 안에서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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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