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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라하에 와서 새 글을 시작하긴 했는데 조금밖에 못 썼다. 아무래도 처음 방에 의자가 없기도 했고 중간에 료샤랑 레냐가 와서 놀기도 했고... 편한 글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쉽게 쓸 수가 없다. 하루에 반페이지에서 한페이지밖에 못 쓰고 있다. 아마 나는 신변잡기를 쓰는 게 드라마틱한 사건을 쓰는 것보다 어려운 타입인가 보다. 후자 같은 경우는 정말 몰입하면 하루에 10~20페이지 정도 쓰기도 하는데....


 간만에 전에 썼던 본편 중 짧은 에피소드 발췌. 전체 에피소드는 아니고 도입부만. 역시 3년 반 전에 마무리했던 미샤와 트로이의 이야기에서 중후반부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1976년. 미샤는 키로프 발레단 수석무용수이다.



 언급되는 아사예프는 당시 키로프 발레단 예술감독, 알렉세이 파블로비치는 발레학교 시절 미샤의 은사, 카라바노프는 미샤의 발레 파트너인 지나이다의 약혼자이자 트로이의 학교 동료 교수이다. 니나 크류코바는 키로프 발레단의 오래된 최고 스타 발레리나(현재의 울리야나 로파트키나나 옛날의 갈리나 울라노바 같은 급), 마할린은 그녀의 동료 파트너이자 인민예술가이다. 딤카 아르부조프는 키로프 오케스트라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이다 물론 이들은 모두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다.



견과가 올라간 모코 케익에 대한 얘기는 전에 지나이다와 미샤의 수첩 대화와 카페 세베르에 대해 쓴 글에서 올린 적 있다. 여기 : http://tveye.tistory.com/4924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크레믈린 행사를 마치고 돌아온 후 열흘 만에 미샤는 다시 해외 투어를 떠났다. 동베를린과 마드리드, 로마였다. 아사예프는 그를 뉴욕을 비롯한 북미 투어 팀에 넣고 싶어 했지만 당국에서는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유럽 투어를 떠나기 사흘 전 미샤는 보안위원회 지부에 불려가 온종일 사상 재교육을 받았고 다음날은 근교의 집단농장에서 개최된 콤소몰 행사에 끌려갔다. 그런 일에 동원될 때면 언제나 그렇듯 우울하고 지친 모습으로 돌아온 미샤에게 트로이는 그가 도망치지 않고 행사를 견뎠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당분이 가득한 뭔가를 먹을 자격이 있다고 달랬다. 미샤는 알렉세이 파블로비치의 이름을 운운하는 대신 트로이가 주는 대로 설탕을 녹인 차를 마시고 견과가 올라간 모코 케익을 두 조각 먹은 후 매일 밤마다 하던 운동과 스트레칭도 모두 거르고 시끄러운 락 음악을 좀 듣다가 자버렸다.

 


*   *   *



 
 미샤는 해외 투어를 마치고 공항에서 곧장 트로이의 집으로 왔다. 카라바노프에게 집을 구하는 동안 자신과 지나이다의 아파트에 와 있으라고 얘기해두었기 때문이다. 카라바노프의 질투심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트로이가 새로 쓰는 논문 때문에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을 잔뜩 껴안고 돌아왔을 때 미샤는 이미 아파트에 와 있었다. 커다란 트렁크와 소파 사이의 카펫 바닥에 모로 누운 채 둘둘 말린 재킷을 베고 잠들어 있었다. 재킷 외에는 옷도 벗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운동화도 한 짝은 그대로 신고 있었다. 트로이는 그를 깨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얇은 담요만 덮어 주었다. 뭔가 이상해서 자세히 봤더니 머리 색깔이 바뀌어 있었다.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제대로 된 미용사의 손을 거친 것이 아니고 꼭 페인트를 뒤집어쓴 것 같았다. 재킷과 카펫 바닥 위에도 붉은 얼룩이 점점이 묻어 있었다. 공연용 스프레이를 뿌린 후 머리를 감지 않은 건가 싶었다.



 30분 쯤 후 미샤가 일어났다. 기계적으로 스트레칭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가 소파에 앉아 자료를 뒤지고 있는 트로이를 뒤늦게 발견하고 반가워했다. 눈에 띄게 좋아하는 표정이라 트로이는 웃었다.



 “ 그렇게 반가워하는 얼굴은 처음 봐. ”


 “ 자고 일어났을 때 네가 옆에서 책을 보고 있으면 좋아. ”


 “ 왜? ”


 “ 좋은데 이유가 필요해? ”



 미샤가 트로이의 무릎에 쌓여 있는 책과 논문 뭉치들을 흥미롭게 내려다보았다. 그는 언제나 트로이의 공부에 관심이 많았지만 문학 이론서나 논문을 직접 읽지는 않았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너무 어려워, 네가 얘기해주는 게 더 좋아’ 라는 말을 주문처럼 사용해 트로이가 그것들을 설명해주도록 만들었다. 아마 이콘 복원가나 딤카 아르부조프, 그 외 수많은 지인들에게서도 그런 식으로 다른 분야의 지식을 얻어낼 것이다.



 잠시 후 미샤는 그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를 한 후 샤워를 해야겠다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 트로이가 머리를 어루만지자 생각났다는 듯 외쳤다.



 “ 아, 손대지 마. 빨간 거 묻을 거야! ”


 “ 벌써 묻었어. 이게 뭐야? 염색약이야? ”


 “ 페인트. 그래도 유성은 아니야. ”


 “ 왜 머리에 빨간 페인트로 물을 들였어? ”


 “ 로마 호텔에서 나오는데 공산주의 반대자가 달려들어서 끼얹었어. ”


 “ 너한테? 하고많은 단원들 중에 왜 하필이면 널? ”


 “ 차라리 나였으면 좋았게. 니나를 노린 거였어. 오토바이로 칠 뻔 했어. 상상이 돼? 니나한테 그런 짓을 하다니! ”



 미샤는 소름이 끼치는 듯 몸을 떨었다. 정부에게 칼을 맞고 앙숙 무용수와 치고받고 싸워서 어깨가 반쯤 내려앉고도 자기 몸에는 별 신경도 쓰지 않는 주제에 크류코바가 페인트를 뒤집어쓸 뻔 했다고 분노하는 미샤를 보니 좀 우스웠다. 규정된 남성성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애였지만 어릴 때부터 받은 교육이 너무 뿌리 깊었기 때문인지 미샤는 여자들에 대해서는 언제나 깍듯했고 소위 기사도에 가까운 태도를 지켰다. 항상 아웅다웅하면서도 지나이다가 원하는 것은 전부 들어주곤 했다.



 과격한 이탈리아 민주주의자 청년은 오토바이에 ‘소련 공산당을 추방하라’로 추정되는 글귀가 적힌 깃발을 매달고 호텔 앞으로 득달같이 달려왔다. 애초부터 공격 대상은 니나 크류코바였는데 그건 전날 뉴스에서 키로프 발레단의 공연을 다루면서 인민예술가이자 대스타인 그녀와의 인터뷰를 짧게 내보냈기 때문이었다. 크류코바는 마할린과 이야기를 나누며 나오고 있었고 미샤는 아사예프와 함께 바로 뒤에 있었다. 그 이탈리아 청년이 선동적인 구호를 외치며 오토바이를 크류코바 쪽으로 곧장 몰고 왔을 때 미샤가 잽싸게 그녀를 낚아채 사고를 면했다. 공격자는 분노로 으르렁거리며 미리 준비해 온 빨간 페인트를 한 통 가득 퍼부었는데 크류코바를 감싸고 넘어진 미샤와 급하게 그를 부축하려고 했던 마할린이 그 희생자가 되었다.



 “ 그래서 그자는 잡혀갔어? ”


 “ 호텔 경비원들이 끌고 간 것 같아. ”


 “ 너 안 다쳤어? ”


 “ 범퍼에 살짝 들이받혔어. 멍만 좀 들고 괜찮아. ”



 미샤가 바지를 내리고 오른쪽 허벅지를 보여주었다. 시퍼렇게 퍼져 있는 멍을 보고 트로이가 한숨을 쉬었다.



 “ 오토바이에 받히고서 한다는 말이 멍만 들고 괜찮다고? 내일 병원에 꼭 가라. ”


 “ 괜찮아, 가벼운 타박상이야. 니나가 받혔으면 뼈가 박살났을 거야. 완전히 정면이었거든. 나쁜 자식. ”


 “ 그래, 니나는 페인트 세례에서 무사했어? ”


 “ 다행히! ”



 뿌듯한 듯 활짝 웃는 그 얼굴을 보니 더 이상 화도 낼 수가 없었다. 트로이는 대체 왜 보통 사람에게는 평생 한두 번 생길까 말까 한 나쁜 일들이 자기 앞에 있는 애에게는 그렇게 연이어 일어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 그래도 머리에만 묻었네. ”


 “ 아냐, 온몸에 다 뒤집어썼어. 진짜 빨갱이가 따로 없었어. 그 인간 목표가 반쯤 달성된 거지. 그나마 마할린은 등짝에만 뒤집어썼고. 비행기 시간이 빠듯해서 씻지도 않고 공항까지 갔어. 차에서 얼굴은 좀 닦았지. 난 그냥 탑승하려고 했는데 아사예프가 욕을 하면서 날 붙잡는 거야. 그 꼴로 어떻게 비행기를 탈거냐고. 그래서 ‘왜요, 적위군 같잖아요.’ 라고 했다가 더 욕먹었어. ”


 “ 그럼 감독한테 그런 말을 하고도 욕을 안 먹을 줄 알았어? ”


 “ 이상하군, 서방 제국주의자의 공격에 저항한 진짜 공산주의 애국자로 표창이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럼 내 서류도 좀 나아질 텐데. ”


 “ 그런 걸로 나아질 거였으면 애초에 뉴욕에 보내줬겠지. 그래도 옷은 갈아입었네. ”


 “ 트렁크를 부쳐버려서 옷이 없었어. 그래서 아사예프가 로마 공항에서 한 벌 사줬어. 그 인간 화장실까지 따라 들어와서 내가 얼굴을 씻는지 안 씻는지 감시했어. 머리도 감으라고 닦달했는데 탑승 시간이 다 돼서 그것까진 못했어. ”


 “ 용케 비행기 화장실로 끌고 가지는 않았네. ”


 “ 그러려는 낌새가 보였어. 자기 옆자리에 끌어다 앉히는 거야! 타자마자 자는 척 했지. 비행기 화장실은 너무 좁단 말야. 물도 잘 안 나오고. ”



 트로이는 말썽쟁이 수석무용수를 챙겨야 하는 아사예프가 안됐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밀려나왔지만 꾹 참았다. 미샤가 옷을 다 벗고 돌아섰다. 뒷목덜미와 팔꿈치와 손목 뒤에도 빨간 얼룩이 잔뜩 묻어 있었다.



 “ 너 왼쪽에 아직 운동화 신고 있어. ”


 “ 아, 어쩐지 불편하더라니. ”


 “ 얼마나 피곤했으면 신발도 다 안 벗고 바닥에서 잤어? ”


 “ 공항에 내려서 약을 좀 잘못 먹었어. 노란 건 한 알만 먹어야 했는데. 집에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겠어. ”



 한동안 끊었던 진통제를 다시 먹은 것을 보니 오토바이에 들이받힌 게 아프긴 했던 모양이었다. 트로이는 욕조에 그를 밀어 넣고 물을 틀었다. 온수는 나오지 않았지만 더운 여름이었기 때문에 미샤가 레닌그라드 수도국을 향해 퍼붓는 현란한 비난을 들을 수 없다는 게 좀 안타까웠다.




...





자다가 깼을 때 네가 옆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좋아... 라는 말은 오랜 옛날 기숙사에서 쥬인이 나에게 했던 말이다. 낮잠 자고 일어났을 때 내가 옆의 허름한 침대에 앉아 책 읽고 있으면 누군가가 자기를 지켜보고 있어준 것 같아 좋다고 했다.



나도 종종 쥬인이 했던 그 말을 떠올린다. 그래서 이 소설에도 삽입했다. 물론 미샤는 쥬인이 아니고 나도 트로이가 아니지만 :)



..


맨위 사진은 빨간 페인트나 책 읽는 거랑은 관계가 없고... 그냥 내가 생각하는 미샤의 어떤 이미지랑 비슷한 느낌이라서 올려봄 :0 다른 사진들도 올려보고 싶지만 와이파이가 시원찮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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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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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