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라스 카페의 옛날 이름은 차이카이다(러시아어로는 갈매기, 리투아니아어로도 그러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하여튼 갈매기 로고가 여전히 그려져 있음) 이 카페는 내가 여태 가급적 기피해온 토토리우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쉽게 가기 어려웠던 것 같음. 게디미나스 대로에서 빌니아우스, 요가일로스 거리로는 잘 빠져서 올라갔는데 이 토토리우는 거리가 넓고 좀 응달이고 오르막이라서. 그리고 메뉴나 리뷰 등을 보니 비건 메뉴가 많았다. 그런데 나는 채식도 좋아하긴 하지만 디저트에 있어서는 비건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아니 여기도 디저트 엄청 맛없는 거 아니야?’ 하는 마음이 들어서 더 미루고 있었던 건지도! 하지만 빌니우스 카페들 중 평점 수위에 있는 곳이라 궁금하긴 했고 오늘 가보게 되었다. 숙소에선 그리 멀지 않았다. 토토리우 거리에서도 조금만 걸어올라가면 됐다.
카페는 빨간색과 흰색 위주로 아기자기 귀여웠고 빈티지, 레트로 풍으로 꾸며져 있었다. 스피커를 테이블로 사용한다든지 낙서들을 붙여 놓는다든지, 빨강하양 땡땡이 컵을 놔둔다든지 조그만 소품들과 엽서들을 장식해둔다든지 등등... 귀여워서 사진들이 굉장히 예쁘게 나왔다. 하지만 이 거리 자체가 그늘진 곳이라 그런가, 엄청 밝고 따뜻해보였지만(그리고 사진도 내가 빛을 많이 써서 밝게 나왔지만) 사실은 좀 추웠다. 안쪽 창가 자리가 비어서 거기 앉았는데 거기가 아늑하고 예뻐보였지만 볕이 들지 않고 쌀쌀해서 나중엔 스카프를 도로 맸다. 대신 장점은 커피보다 차의 종류가 많다는 것! 빌니우스에서 이런 곳이 거의 없다. 블랙티도 히말라얀 블랙, 얼그레이, 랍상소총, 푸에르(보이차)가 있었고 녹차도 종류가 5가지, 각종 허브티들이 있었다. 비건디저트와 허브티 등 건강에 좋은 쿨한 이미지로 가는 카페인가 싶다. 브런치를 하는 곳이라 음식 냄새가 좀 많이 났지만 일요일 11시 반에 왔으니... 히말라얀 블랙이 혹시나 다즐링일까 하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으나 보통 아삼, 얼그레이를 기본으로 갖춰놓으니까 전자일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런 곳에 랍상소총이 있다니 하는 호기심과 놀라움에 그만 이놈을 시키고 말았다. (랍상소총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 그 훈연 향이 너무 강해서 사실 안 좋아하는데...) 그리고 디저트로 포피씨드 케익이 있어 그것을 시킴.
랍상소총은 역시나 역시나 셌다. 아아 내가 왜... 너무 강해서 절반쯤만 마셨다. 사실 향만 극복하면 맛은 괜찮다만... 케익은 맛있었다. 케익을 먹고 강하디 강한 랍상소총을 찔끔찔끔 마시면서 나도 카페에 비치된 메모지에 항상 가지고 다니던 3색 볼펜으로 간단히 스케치를 해서 낙서판에 한 장 붙여두었다. 여기는 로컬들도 많이 오고 한국인지 일본인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한국분 같은 여자분도 한 분 앉아 계시는 것이 역시 잘 알려진 카페였다. 그런데 나는 이번 한번 정도면 족한 것 같다. ‘인스타그래머블’하긴 한데 내 취향만큼 아늑하진 않아서. 토토리우 때문인가, 랍상 때문인가... 혹시 히말라얀 블랙이나 얼그레이를 시켰으면 더 좋았을지도.
너무 웃겼던 것. 영원한 휴가님이 ‘오늘 키라스 점원이 일기 쓸 거 같다. 마스터 오브 마스터가 와서 아침에 랍상을 시켰다’ 라고 얘기하셨다. ㅎㅎ 아무도 안 시키는 랍상소총 시킨 동양의 마스터 ㅋㅋㅋ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랍상소총이 있으면 다즐링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 그리고 기문도 있으면 참 좋을텐데 ㅎㅎㅎ
카페 사진 여러 장. 여기는 예쁘기 때문에 사진 많이 찍음. 그런데 내가 폰에서 노출을 좀 올려놓고 찍기 때문에 실제 카페 내부보다 환하고 따스하게 나온 편이다. 맨 위 사진이 내가 앉은 창가 자리. 보기엔 아늑해보이는데... 추웠음. 무서운 랍상소총 기다리며...
카운터 쪽 자리들. 차라리 이쪽에 앉았으면 더 따뜻했을 것 같긴 하다.
안쪽. 내가 앉은 창가 옆쪽.
문제의 랍상소총님. 저 컵은 귀엽긴 했는데 손이 작은 나에게는 무겁고 손잡이가 커서 들고 마시기가 매우 불편했다. 창가 주전자 뒤에서 부리 벌리고 있는 빨간 새가 이 카페 로고. 아마 얘가 그 갈매기였나보다.
낙서들 주렁주렁. 내가 그린 것도 저기~
이거. 근데 금방금방 다른 낙서로 가려질 것 같음.
알록달록 귀엽다.
엽서도 팔고, 사진에는 위에 조금만 나오고 잘렸지만 에코백도 팔았는데 저 빨간 갈매기가 넘 크게 그려져 있어서 딱히 당기진 않았다. 갈매기를 조금 작게 그리고 여백을 많이 뒀으면 더 이뻤을 거 같은데.
외관은 이렇다.
... 아, 여기 좋은 거 하나 기억났다. 음악. 약간 앰비언트/전자음악 비슷한 노래들이 나와서 편했음.
커피 원에서 나와서 우주피스를 떠나 다시 구시가지로 들어갔다. 가다가 점심을 먹어야지 하면서 나오긴 했는데 티라미수를 먹었더니 허기가 가셔서 생각보다 또 많이 걸었다.
가는 길에 축복의 성모 정교 성당에도 들어가서 잠깐 기도를 하고(빌니우스에서 제일 큰 정교 성당이라고 한다), 문학 골목에도 들렀다. 이 골목에는 리투아니아 문학인 101명(그 사이 늘어났을지도...)에 대한 조그만 타일과 글귀, 소개, 그림 등이 벽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문학 골목 쪽은 그늘이 져서 추웠다. 골목에서 나와 좀 걸어 올라가자 필리에스 거리 끝 무렵과 디조이 거리가 다시 나왔다. 이때 드디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정교 성당인 성 파라스케베 성당 문이 열린 것을 발견. 사원에 들어가 초를 켜고 기도를 했다. 여기는 매우 작은 성당이다. 나는 크고 화려한 성당보다 여기가 더 좋다. 2년 전 빌니우스에서 돌아왔을 때도 가장 마음에 남았던 곳은 이곳이었다.
디조이 쪽은 역시 따뜻했다. 이때쯤 ‘아 배고픈데’ 상태가 되었고 다리도 무지 아팠다. 좀 걷다가 보키에치우 거리로 접어들었는데 체인 레스토랑에 들어갔더니 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토요일이라 그런가보다. 배고픈 와중 며칠 전 영원한 휴가님이 엘스카 가는 길에 있는 조그만 중식당을 알려준 게 기억났다. 빌니아우스 거리 중간에서 좁은 옆골목을 통과하면 곧장 나오는 방향에 있어서 그리로 갔다. Asia Tasty라는 곳으로 여기는 흔히들 보는 해외의 중식당과 비슷한데 런치 메뉴가 7.5유로로 저렴했다. 그러나 내가 늦게 와서인지 주말이어서인지 수프 추가는 안된다고 했다 흐흑... 하여튼 나는 가지탕수를 시켰다. 밥과 양배추 샐러드가 같이 나왔는데 내가 생각한 가지탕수와는 달리 너무 잘게 썰려서 튀김옷 절반, 가지는 물컹한 식감만 느껴져서 아쉬웠지만 너무 배고픈 상태라 나름대로 맛있게 먹고 또다시 기사회생.
드로가스에 잠깐 들러 비누를 샀다. 챙겨온 미니 비누는 거의 다 썼기 때문에. 이 호텔은 핸드솝만 있고 비누가 없다. 그래서 제일 저렴하고 조그만 무향 비누(0.95유로)를 사서 들어옴. 방에 들어오니 3시 반 즈음이었는데 엄청 다리 아프고 피곤했다. 하지만 좋은 날씨가 너무 아까웠다. 그리고 드로가스에 없어서 못 산 티슈도 사고팠고 계속 가려다 다른 데 가느라고 안 갔던 카이프 카페에도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책과 아이패드를 챙겨서 다시 나갔다. 중간에 서점과 옷가게들을 구경하고 H&M과 COS가 있는 쇼핑몰도 구경했다(여기에도 스코니스 이르 크바파스가 있었다) 그리고는 리미에 가서 티슈를 사고 그 옆 후라칸에 다시 가고픈 마음을 꼭 누르고 ‘카이프 안가봤으니까 그래도 가봐야지’ 하며 카이프 카페로 갔다. 그 사이에 유로코스에 들러 나뚜라 시베리카의 다른 샤워젤도 하나 사서 가방이 엄청 무거워짐...
카이프 카페는 그냥 그랬다. (그래서 별도 포스팅도 없음) 궁금했던 리투아니아 카페 체인 블록깨기를 했다는 정도로 의의를... 여기는 우리나라로 치면 이디야랑 좀 비슷한 느낌이었다. 카페인이 스타벅스, 후라칸이 스타벅스 리저브 매장 느낌이라면 카이프는 이디야 느낌이랄까. 이제 베로 카페 하나 남았는데 거기는 가까이 있긴 한데 통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안 든다. 내부가 어두워 보여서 그런가보다... 하여튼 여기서 서머 바이브라는 이름의 레모네이드를 마셨다. 매장이 그리 편안한 느낌은 아니었다. 심지어 아이패드 스케치 하다가 그것도 망쳐서 오늘은 스케치 없음 흑... (커피 원 로고 그리는 게 너무 힘들어서 포기)
카이프에서 나와 이제 호텔로 귀가. 오늘은 청소가 잘 되어 있었고 시트와 베갯잇도 갈아놓았고 책상 아래 먼지도 없었고 계속 안 채워주던 헤어컨디셔너도 새것을 가져다놓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주말에 일하시는 분이 더 잘해 주시나보다 흑흑... 목욕을 하고 머리를 감고 말리고 빨래를 하고 좀 쉬다가 누룽지 좀 남은 것과 즉석국을 섞어서 저녁을 먹었다.
오늘은 많이 걸었다. 12,922보, 8.6킬로. ‘좋은 날씨는 돌아오지 않는다’ 라고 나 혼자 내세운 슬로건 때문에... 근데 다리가 아프긴 하다. 평지가 아닌 곳과 돌길이 많아서. 하지만 내일은 또 흐려지고 오후부턴 비가 온다고 하니까... 날씨 복불복 때문에 해만 나면 막 걷게 됨. 하긴 뻬쩨르에서도 그랬지.
맨 위 사진과 이 사진이 문학 골목.
성 파라스케베 사원. 기도하고 나오면서 출입문 밖에서 살짝 찍음.
튀김옷 절반이지만 나를 허기에서 구해준 가지 탕수 런치.
그래도 리투아니아 체인 카페들은 다 가봐야지 하는 맘에 오늘 드디어 들러본 카이프 카페. 숙소 바로 앞에 있어서 엄청 가깝다는 것만 장점. 근데 이 핑크 레모네이드 색깔이 이쁘고 빛이 잘 들어와서 사진은 또 예쁘게 나왔네.
어제 종일 비 온 후 오늘은 하늘이 파랗고 맑게 개었다. 아침엔 안개가 끼어 있었으나 곧 걷혔다. 최고 기온은 12~13도 전후라고 했다.
새벽에 깼을 때 양쪽 발가락이 아팠다. 요즘 양말을 신고 자서 뭔가 발이 불편한가. 좀 주물러주자 아픈 게 가셨다. 쥐난 것과는 다르게 물집잡혔을 때 욱신거리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그 이후는 괜찮았다. 하여튼 그래서 4시 반쯤 깼다가 뒤척이며 도로 잠들어서 8시 좀 넘어 깨어났다. 주말엔 조식이 11시까지라서 좀더 침대에 달라붙어 있다가 ‘아휴 날씨 좋으니까 나가야돼’ 하고 힘을 모아서 일어났다.
조식을 간단히 먹고 옷을 든든히 껴입은 후(기모 스타킹, 히트텍, 반팔 롱 원피스에 짚업, 숏패딩과 스카프) 방을 나섰다. 어제 검색해보니 우주피스 초입부에 자잘하고 귀여운 걸 파는 앤티크 가게가 있다고 해서 거길 가기로 했는데 정오에 연다고 했다. 피나비야에서 차를 마실까 했지만 시간이 애매해서 ‘그럼 젤 가까운 엘스카에서 카페인과 햇볕을 충전하고 우주피스로 가야겠다’ 고 결정.
엘스카는 손님이 무척 많았다. 주말이라 그런가 보다. 브런치를 하는 곳이라서 더 그럴지도. 자리도 없어서 전에 앉았던 자리 앞의 노란 테이블에 앉았고 나중에 다른 여자분도 합석했다. (두개가 붙어 있는 테이블이었다) 손님도 많았고 조용한 분위기는 아닌데다 목적지도 있었기에 나도 카푸치노만 한 잔 마시고 30분만에 일어났다.
엘스카에서 우주피스까지는 구글맵으로 찾아가기 쉬운 경로였다. 한적한 거리들을 따라 쭉 걸어갔다. 그늘은 싸늘하고 바람 불면 추웠지만 햇살 아래로 들어가면 따스해서 완연한 가을 날씨였다. 한국에도 물론 이런 가을 날씨가 있는데(오히려 더 좋은데) 맨날 일하느라 새벽 출근 저녁 늦게 퇴근하니 이렇게 파란 하늘 아래 걷는 기회가 거의 없다 ㅜㅜ
2년 전 왔을 때 두 번 들렀지만 우주피스는 내가 딱히 좋아하는 동네는 아니었다. 우주피스를 좋아하기엔 너무 게으르고 또 나이를 먹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미묘하게 느껴지는 상업적 기운도 딱히 취향에 맞지는 않았다. 하지만 날씨 좋을 때 조그만 강을 건너 우주피스로 들어가자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찍어둔 앤티크 가게(이름은 uzantis 라고 했다)에 들어갔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맘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빈티지 찻잔 맘에 드는 거 있으면 살까 했다만 그리 많진 않았고 그냥 그랬다.
원래 이 도입부만 들렀다가 우주피스 헌법 쪽만 힐끗 보고 나오려 했는데 헌법 본 후 날씨가 좋아서 결국 언덕을 조금 올라갔다. 지난번 봤던 그 우주피스 고양이 쪽까지 올라갔다가(근데 막상 괭이 동상은 안 봤음) 내려와서 지친 채 커피 원에 들어가 따뜻한 백차와 맛있는 티라미수로 기사회생. 커피 원 얘기는 앞에 따로 올림.
일단 오늘의 1부는 여기까지. 사진 몇 장.
오늘은 노랑 테이블 위의 빨강 러브라믹스 엘스카. 이건 내가 좋아하는 배색은 아니다만 그래도 또 귀엽네.
엘스카에서 우주피스 가는 길에 Ignoto 거리를 지났다. 그런데 민트 비네투 가느라 지난번부터 이 거리를 몇 번 지났는데 오늘에야 깨달음. 여기 가로등 램프들 모두 알이 비어 있어! 장식인 걸까 아니면 옛날 램프 프레임만 놔두고 불 켜는 건 포기하게 된 것인가... 그래서 램프 프레임 사이로 건너편 사원 십자가를 집어넣어 찍어보았다. 그치만 램프가 있는 편이 더 좋은데...
우주피스로 들어가는 다리 입구. 날씨가 좋아서 예뻤다. 하지만 이 다리에도 여지없이 자물쇠들이 주렁주렁... 도대체 자물쇠 매다는 걸 첨 생각해낸 사람은 누구일까ㅠㅠ
우주피스 골목 벽면 낙서 중 한 컷. 노어 낙서가 많았다. 가운데 해님 위에 굵은 글씨로 '웃어, 바보야' 라고 적혀 있다.
우주피스 헌법. 각국어 버전으로 쭈욱 새겨져 있다. 한글 버전도 있음. 재작년에 왔을 때 영원한 휴가님께서 구시가지 구경시켜주시면서 여기 데리고 왔었다. 이 헌법에선 12, 13번이 재밌음. 특히 13번. 근데 고양이가 과연 정말 주인을 꼭 도와주기는 할까???
우주피스 골목에 매달려 있는 해파리들. 근데 이건 예쁘다기보단 좀 기괴해보였다. 그래서 스티클리우가 아니라 우주피스에 달려 있나보다. 흐느적흐느적...
오늘 날씨가 좋아서 그동안 미뤄놨던 우주피스에 다녀왔다. 우주피스까지는 숙소에서 걸어가기가 조금 멀기도 하고 또 좀 오르막길이라 팍 지치게 된다. 배도 고프고 너무 피곤한 상태였기에 원래는 빌니아우스의 피나비야에 가서 차 마시려던 계획을 수정하여 '아 몰라 눈앞에 있는 커피 원 가...' 하며 천사상 맞은편의 Coffee 1 카페에 갔다.
여기는 재작년에도 우주피스 갔다가 더위에 지친 채 들러 야외 테이블에 앉아 쉬었던 곳이다. 그때 야외 자리가 별로라 '아 그냥 안에 앉을 걸' 하고 후회했었는데 이제 10월이라 야외 테이블은 치워져 있었다. 카페 내부는 작아서 테이블이 몇개 없었다. 점원이 매우 친절했다. 첨엔 입구 쪽 나무 테이블(문제의 그 야외 테이블과 같은 종류로 듬성듬성 판자 테이블 ㅠㅠ) 밖에 없어 속상했지만 나중에 자리가 나서 제일 안쪽의 바 테이블로 옮겼다. 그런데 이쪽은 아늑하긴 했지만 테이블이 너무 높아서 먹기가 불편했다 흐흑... 위 사진이 그 옮겨온 바 테이블.
재작년엔 그닥 훌륭한 기억이 없었던 곳이었는데 오늘 티라미수를 시켜보고는 '엇, 맛있잖아!' 하고 갑자기 이곳에 대해 이미지가 좋아졌다 :) 어쩌면 안에 앉아서 그랬을지도... 오전에 카푸치노를 마시고 왔기 때문에 여기선 따뜻한 백차를 시켰는데 잎차 백을 잘 꺼낼 수 있도록 나무 꼬챙이(아 갑자기 이걸 뭐라고 부르는지 생각이 안 남)에 끼워줘서 편했다. 이런 디테일 맘에 든다.
맛있었기에 단독 샷 차지한 티라미수. 뻑뻑하지 않고 크림이 부드러운 스타일이었음. 아마 이때 너무 피곤하고 다리 아프고 지친 상태라 당분이 쫙 스며들어서 맛있었던 건지도...
첨에 앉았던 입구 쪽 테이블. 맘에 안 들었던 그 듬성듬성 판자 테이블이 다시... 그래서 안쪽 자리 났을 때 옮겼는데 테이블이 그렇게 높을 줄이야 흐흑...
나중에 다른 테이블들도 자리가 나서 옮기고팠지만 두번이나 움직이는 게 귀찮아서 그냥 있었다. 잠시 후 또 손님들이 엄청 들어왔다. 엄청 귀여운 깜장 포메도 들어왔는데 그 사진은 못 찍었음. 너무 귀여웠는데...
숙소 바로 옆 골목에 꽃을 파는 키오스크가 두개나 있다는 것을 오늘 발견했다. 거리에서 꽃 파는 할머니들도 비오는데도 나와 있었다만 꽃의 종류가 제한되어 있어 아쉬웠던 차에 키오스크가 있어 들어가 보았다. 종류는 이것저것 있었지만 한송이씩 살 수 있는 건 장미와 튤립 정도였다. 한단씩 따로 묶어 팔고 있는 이 프리지아가 이뻐서 샀다. 우스운 건 살 때는 이게 프리지아인 줄 몰랐다는 것이다. 한국에선 노랑, 하양, 드물게 보라색 프리지아만 사봤기 때문에 이런 꽃분홍색은 본 적이 없었으므로. 하여튼 이뻐서 골랐는데 한단에 10유로나 해서 '윽, 역시 비싼데. 할머니들한테 사는 게 훨씬 낫다' 고 생각하며 툴툴대며 들고 왔다. 그러나 향기를 맡고 프리지아임을 깨닫자 '프리지아 봄 꽃인데 지금 살 수 있으니 비싸다 생각하지 말자' 고 마음을 고쳐먹음. 온 방 안에 프리지아 향기가 가득하다.
꽃병이 없어서 2리터 생수병을 잘라서 꽂아두었다. 병이 조금 크긴 하지만 아무래도 우리 집이 아니니 다 갖출 수 없음. 일주일 넘은 저 마트리카리아 닮은 들국화도 잘 살아 있다. 꽃가루를 너무 많이 떨어뜨려서 흠이지만.
..
어제 열두시 반 넘어서 늦게 잠들었다. 그런데 새벽 5시 반에 깨버렸고 또 뒤척이다 꾸역꾸역 도로 잠들었다. 깨어나니 너무 피곤하고 계속 졸렸다. 다가오는 붉은 군대와 날씨 때문인 것 같다. 바깥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계속 자고 싶었지만 조식을 먹기 위해 또 꾸역꾸역 내려갔다. 오늘은 카페에 가기 위해 홍차 대신 녹차를 마셨다. 하루에 섭취할 수 있는 카페인 함량에는 한계가 있는데 조식 테이블에서 맛도 없는 티백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로 용량을 깎아먹는게 슬퍼서.
11시 즈음 방을 나섰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지난주 목요일에 빌니우스 도착했던 때 날씨 같았다. 그나마 바람이 불지 않아 그렇게 춥진 않았다. 아니면 내가 히트텍에 롱 후드 티에 니트 바지, 숏패딩까지 입고 나왔기 때문일지도. 비가 오니 멀리 가지 않고 숙소에서 길 건너 400미터만 걸어올라가면 있는 후라칸 커피에 가기로 했다. 이 옆에 리미 슈퍼도 있으니 일거양득이라고 생각하며. 이 후라칸에 대한 얘기는 별도 스케치와 글을 올렸으니 여기는 생략.
후라칸에서 나오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커피 향이 가득 배었다. 비는 좀더 많이 쏟아지고 있었다. 리미 슈퍼에서 물과 컵라면을 샀고 물이 무거워서 드로가스에 가려던 것을 포기하고 짐을 내려놓으러 방으로 돌아가다가 저 꽃을 샀다.
방에 돌아오니 배가 고파서 컵라면을 먹었다. 원래는 짐 풀어놓고 근처에 뭘 먹으러 가거나 숙소에서 더 가까운 카페인 caif에 가려 했으나 비 오고 피곤하고 만사가 귀찮아졌다. 그래서 컵라면을 먹은 후 심지어 샤워하고 머리도 감았다. 이른 오후에 돌아와 방에서 쉬니 좋았다. 원래 이것이 집토끼 본능인데 여태 매일매일 잘도 돌아다녔지. 며칠 전 스코니스 이르 크바파스에서 산 다즐링 Risheehat 퍼스트플러쉬 올해 햇차도 우려 마셨다. 향긋하고 좋았다. 이건 전에 로네펠트에서도 직구했었는데 햇차가 아니었기 때문인지 이만큼 맛있지는 않았다.
책을 읽고 쉬었다. 저녁에 일을 마친 영원한 휴가님이 잠깐 들렀다 가셨다. 식사를 하긴 시간이 애매해서 견과와 초콜릿 코팅된 아이스크림 바를 사서 먹었다. 그런데 역시 견과와 초콜릿, 바닐라는 배신하지 않는 맛임.
오늘은 4,370보, 2.5킬로. 집토끼!
내일은 날씨가 맑고 해가 난다고 하니 기대해봐야겠다. 기온은 좀 떨어지겠지만 그래도 해가 나고 하늘이 파래지면 살 것 같음. 오늘 메모는 이 정도로 마무리. 꽃과 티타임 사진 몇 장.
이 호텔의 시그니처 문양이 이건데... 티타임 사진을 찍자 너무 현란해서 눈이 아프네 흐흑... 사진에는 좀 안 어울리는 것으로... 재작년 방에서는 채도 낮은 푸른색이었는데 이 방은 갈색이라 더 그렇다.
후라칸 커피도 이 동네 체인이다. 여기는 약간 별다방 리저브 매장 느낌이 좀 나는데 카페인보다는 좀더 있어보이고 분위기도 좋다. 하니 앤 손즈 피라미드 티백을 주고 아삼과 얼그레이 중 고를 수 있다. 전에는 영원한 휴가님과 보키에치우 거리에 있는 후라칸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다.
오늘은 아침부터 내내 비가 내려서 멀리 돌아다니지 않고 숙소에서 400미터 거리의 제일 가까운 후라칸에 갔다. 얼그레이와 블랙포레스트 주문. 차는 나쁘지 않았다. 대로변으로 난 통창에 붙어 있는 높은 테이블에 앉아 스케치도 하고 비오는 거리와 사람 구경도 좀 했다. 카페 사진 몇장 아래. (다른 구석들도 좀 찍고팠는데 비와서 그런지 점점 손님들이 늘어나서 못 찍음)
역시 올해 초에 마친 90년대 단편 <4월의 로켓> 중에서 발췌. 후반부의 이야기이다. 마냐는 미샤를 자기 방에 데려와 따뜻한 허브차를 끓여준 후 배가 고파서 빵에 마가린을 발라서 먹는다. 바똔은 러시아식 흰빵, 바게트랑 조금 비슷한데 그만큼 맛있지는 않다. 더 크고 두툼하다. 흘롑은 흑빵. 그러다가 마냐는 미샤에게도 빵을 한 조각 주면서 어떤 부체르브로드 샌드위치를 좋아하는지 궁금해 한다.
제냐, 겐카는 모두 이 90년대 이야기의 주요 인물인 게냐(본명 예브게니)의 애칭. 리디야는 게냐의 옛 여자친구. 애칭은 리다. 전에 ‘구름 속의 뼈’ 중편 발췌문에 몇 번 등장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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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샤가 다시 기침을 조금 했어요. 나는 그에게 라마를 바른 바똔을 한 조각 건네주면서 말했어요.
“ 뭘 좀 먹으면 나을 거예요. ”
그는 빵을 받아서 먹었어요. 잼은 올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라마를 발라준 빵을 먹고 내가 끓여준 차를 마시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았어요. 미샤는 빵을 손으로 잘라서 차랑 번갈아 가며 한 입씩 먹었어요. 툴라 비스킷은 먹는 척만 했었는데 마가린 바른 빵은 곧잘 먹네요. 예의를 차리는 건지 정말 입에 맞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신사적인 건 그 자체만으로도 좋은 것 아니겠어요?
“ 그래요, 맛있네요. 이건 당신 말대로 흘롑보다는 바똔에 더 어울리겠어요. 더 부드러우니까요. 바똔도 정말 오랜만에 먹어요. ”
“ 그럼 아침엔 뭘 먹어요? ”
“ 그냥 부체르브로드랑 차 한 잔 정도. ”
“ 부체르브로드에는 뭘 얹어 먹나요? 난 항상 그런 게 궁금하더라고요. 사람들이 빵에 뭘 얹어서 먹는지. 수프는 뭘 좋아하는지. 커피에는 크림을 넣는지 안 넣는지. 홍차에는 설탕을 몇 숟가락 넣는지. 잼은 딸기랑 사과랑 나무열매 중에 뭐가 좋은지. 나는 정통파예요, 부체르브로드는 역시 햄이랑 오이가 제일 맛있거든요. 그리고 흘롑보다는 바똔이 더 좋아요. 어릴 때부터 흘롑의 그 시큼한 맛이 싫었거든요. 엄마한테 맨날 혼났어요. 입만 고급이라고, 흰 빵 타령한다고. ”
“ 난 흘롑이 더 좋던데. 하긴 어릴 때부터 세뇌돼서 그런 건지도 몰라요. 선생님이 바똔이랑 버터는 먹지 말라고, 홍차에 설탕도 넣지 말라고 했거든요. 무용수는 살이 찌면 안 되니까요. 그래서 곧이곧대로 맨 흑빵에 치즈만 얹고 버터랑 잼은 안 바르고 차에도 아무것도 안 넣어 마셨는데 나중에 보니까 내 친구들이랑 동료 무용수들은 버터에 설탕에 케이크까지 먹을 건 전부 다 먹고 있더라고요. 근데 난 습관이 돼서 지금도 아침엔 흑빵에 치즈랑 사과만 얹어서 대충 먹어요. 누가 해주거나 사 먹을 땐 연어 올린 게 좋지만. 난 게으르거든요, 늦게 일어나니까 아침은 잘 안 먹을 때도 많고. ”
“ 난 발레리나들만 다이어트하는 줄 알았는데. 그럼 제냐도 그렇게 먹어요? 그 키에 그렇게만 먹고 어떻게 버틴담, 젊은 남자애가. ”
“ 우리 때나 그랬지 요즘 애들은 안 그런 것 같아요. 우리 무용수들도 보니까 이것저것 다 먹어요. 겐카는 시리얼을 더 좋아하더라고요. 아마 걔는 라마도 좋아할 거예요. ”
나는 미샤와 제냐가 함께 장을 보는 모습을 상상했어요. 제냐는 라마와 시리얼, 우유랑 초콜릿, 스메타나와 콜라, 햄과 다진고기, 달걀과 잼, 감자, 양파, 당근, 절인 오이, 깡통 연유 뭐 그런 걸 사겠지요, 나처럼. 그 옆에서 미샤가 흘롑과 사과랑 치즈를 담고 훈제연어 앞에서 망설이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려고 하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어요. 이 사람이 헐어빠지고 접은 자국이 가득한 슈퍼마켓 비닐봉지를 들고 있는 건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거든요. 제냐는 그런 봉지에 우유랑 시리얼 같은 걸 담아서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몇 번 봐서 괜찮은데. 하긴 제냐는 스물도 안 됐을 무렵부터 봤고 이 사람처럼 우아하고 부티 나는 타입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제냐는 내가 주는 담배를 받아서 피운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차는 리디야가 왔을 때랑 미샤가 왔을 때 두 번 끓여다 줬지만 예의상 조금 마셨지 좋아하지는 않았어요. 라마 바른 바똔은 먹겠지요, 하지만 내가 발라주는 건 받아먹지 않을 거예요. 그럴 일이 아예 없을 테니까요.
미샤는 빵을 아주 천천히 먹었어요. 그 한 조각을 꼭 빵 한 덩어리를 먹듯이 천천히, 꼭꼭 씹어서 먹었지요. 하지만 보기 싫게 깨작거리는 건 아니었어요. 그건 꼭 아까 그 마지막 담배 한 모금을 말보로 한 갑 전체처럼 피운 거랑 비슷했어요. 그러자 나는 다시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어요. 말보로는 다 피웠지만 사르바르가 잊고 간 터키산 담배가 침대 귀퉁이에 놓여 있었어요. 담배를 한 개비 꺼내자 미샤가 다시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었어요. 역시 한 방에 불꽃이 확 일었어요.
.......
마냐가 발라주는 ‘라마’는 저 당시 엄청나게 인기 많았던 마가린. 너도나도 저것을 빵에 발라 먹었다. 나랑 쥬인도 매일매일 바똔에 저 라마를 발라 잼을 척척 얹어서 먹으며 좋아했다 :) 이 발췌문 앞에 저 라마에 대한 대화가 따로 나온다. 그래서 이 단편을 마치고 제목을 정할 때 ‘라마’를 제목에 넣을까 고민하기도 했었다. ‘말보로, 허브차, 라마’ 뭐 이런 식으로. 이 단편에서 중요한 소재 세 가지라서. 근데 이런 명사 열거는 블로그 메모나 잡문 제목으로는 좋지만 이 단편 제목으론 딱히 마음에 안 들어서 4월의 로켓으로 정했다. (이 제목도 100% 맘에 드는 건 아니어서 나중에 고칠지도 모른다)
부체르브로드는 흔히 말하는 오픈 샌드위치인데 소련 시절에도 그랬고 지금도 러시아에서 많이 먹는다. 마냐의 말대로 가장 기본은 햄이나 칼바사와 오이 조합이고 미샤가 먹고 싶어하는 연어 올린 건 조금 고급 조합. 사과랑 치즈는 자주 먹는 조합은 아니다만 무용수 출신인 미샤가 좋아한다. 예전에 썼던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서 미샤의 코믹 버전인 왕재수가 이걸 먹곤 함. 흑빵에 올린 게 제일 클래식이다만 버터에 연어알 듬뿍 올려주는 건 바똔에 올리는 게 더 어울린다. 이것도 좀 호화스러운 버전. 극장에 가면 카페에서 샴페인과 이 연어알 부체르브로드를 판다. 뭐 요즘이야 원체 먹을 게 풍요로우니 이런 게 호화스럽고 그렇지도 않다만. (물론 제일 호화스러운 건 캐비어 얹은 것)
이게 햄 오이 부체르브로드.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서 단추 베르닌이 좋아했다. 좋아한 나머지 모스크바 에피소드에서는 KGB 비밀요원 일류샤가 만들어준 햄 오이 샌드위치도 아무 의심없이 덥석 받아먹는다.
이게 연어 얹은 부체르브로드. 근데 좀 촌스럽고 소련이나 90년대 러시아 느낌 나는 부체르브로드 사진 찾아서 올리려 했는데 구글링하니까 요즘 나오는 이쁘고 맛있는 이미지들이 판을 치네 ㅎㅎㅎ 그나마 햄 오이 부체르브로드는 좀 촌스러운 걸 찾아서 올린 건데. 맨 위 사진은 오늘 조식에서 내가 먹은 것. 흰빵, 흑빵. 미니 사과. 치즈, 잼, 스메타나 다 가져와서 찍었는데 이 글에서 마냐랑 미샤가 보통 먹는 거랑은 역시 안 비슷함.
사진은 오늘 가봤던 문구점 Raštinė 안에 있는 카페. 빌니우스는 서점 안쪽 창가에 테이블 몇 개와 커피 카운터로 소박하게 자리잡은 카페들이 왕왕 있는데, 여기는 일본 문구를 주로 파는 아기자기한 문구점이다. 그리 넓지는 않고 전체적으로 화이트톤에 카운터와 창가 테이블 일부는 하얀 욕실 타일로 되어 있다. 영원한 휴가님이 알려주셔서 오늘은 여기 가보기로 하고 나왔는데, 가긴 갔지만 제일 처음 갔던 곳은 여기가 아니었으니...
엄청 피곤하게 잤다. 8시 좀 안 되어 깼는데 7시간 가량 잔 것 같다. 온몸이 너무 쑤시고 아팠다. 그날이 다가오고 있긴 하다. 머리도 아프고 졸리고... 몸도 무겁고. 침대에 누워 잠깐 업무메일과 부서 단톡을 확인하고 급한 사안에 대해 답신을 보내준 후 ‘아아 밥 먹으려면 일어나야 해’ 하며 혼신의 힘을 다해 일어났다. 따뜻한 물에 잠깐 몸을 담근 후 조식을 먹으러 갔다.
밥을 먹고 올라왔는데 너무너무 졸리고 다시 눕고만 싶었다. 그러나 오늘까지만 기온이 19~20도고 내일은 비 오고 그 후부턴 다시 추워진다는 예보가 있으니 ‘안돼, 따뜻한 날씨 아까워’ 하면서 꾸역꾸역 기어나갔다.
아앗 그런데 이럴 수가! 분명히 일기예보에는 19~20도라고 되어 있었는데... 바람이 불고 음습해서 으슬으슬한 거였다! 해가 나지 않고 흐렸던 것이다. 11시 좀 넘어서 나왔는데 원래는 저 문구점 카페 Raštinė에 갔다가 근처 거리들을 돌아다니고 새로운 식당을 발굴하려고 했었다. 저 카페 아니면 토토리우 거리의 Kiras 카페에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Raštinė도 문제의 네버엔딩 필리모 거리를 따라 쭉 올라가야 했고... 이 거리가 어제도 생각했다만 날씨 안 좋을 땐 좀 춥고 우중충하다. 게디미나스 대로로 나왔을 때부터 ‘어 왜케 추워’로 시작, Jogailos 거리로 꺾어서 필리모 거리 가는 길에 금세 으슬으슬 추워지고 바람이 불어대서 ‘아아 나 지금 따뜻한 데 들어가야 한다. 문구점 못 간다’ 상태가 됨.
반팔 티셔츠에 후드 달린 롱 카디건 걸치고 나왔는데 스카프를 여미고 후드를 뒤집어쓴 채 ‘그래그래 매일 가면 어때’ 하며 급하게 제일 가까운 엘스카로 뛰어 들어감. 흑흑, 며칠만에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버린 엘스카. 생각해보니 숙소랑 가깝고 아늑하고 빛도 잘 들어오고 그림도 그리고, 옛날의 카페 에벨이랑 여러 모로 비슷하다. 에벨만큼 빈티지풍의 안락함은 아니지만. (그러고보니 에벨은 디저트도 맛있긴 했다 ㅎㅎ)
그런데 참 신기하게 엘스카에 들어가자 오늘은 해가 들지도 않았는데 따뜻해서 카디건도 벗고 나중엔 스카프도 벗었다. 라디에이터는 아직 안 튼 것 같은데. 춥고 머리가 너무 아파서 아무래도 조식 먹을 때 차를 너무 조금 마셔서 카페인 부족인가 싶고 또 디저트가 별로 없는 곳이니 다시 플랫 화이트를 시킴. 여기 와서 1일 1커피 중. 나중에 한국 돌아가서도 커피 마시는 거 아니야? 하지만 사실 차가 더 좋긴 하다. 여기서 차를 맛있게 우려주는 곳이 별로 없어서 그렇지. 오랜만에 현금 결제를 하려 했는데 잔돈이 부족하다고 하여 카드 결제를 했다. 확실히 어디나 요즘은 현금보다는 카드인가보다. 그때 내 동전지갑을 보고 점원이 ‘동전지갑 넘 귀엽다’고 했다. 쥬인이 옛날에 일본에 갔다가 선물로 사다준 지갑인데 뿌듯했음 :) 오늘은 플랫 화이트에 설탕을 넣었다. 설탕 넣은 플랫 화이트를 마시자 귀신같이 두통이 사라짐. 정말 카페인과 당분 부족이었나봐 ㅠㅠ 잠깐 몸만 녹이고 나가려 했으나 스케치를 한 장 그리느라 한시 다 되어 카페에서 나왔다. 화정 우리 집 앞에 엘스카가 있으면 좋겠다. 내가 차리고 싶은 스타일 카페인데, 엘스카랑 카페 에벨...
몸을 녹인 후 엘스카에서 나오니 해가 좀 나왔고 아까보다 따뜻해서 ‘와 정말 그래도 20도인가봐’ 하며 필리모 거리를 따라 걷기 시작. 근데 바람이 불었다 안 불었다, 따뜻했다 안 따뜻했다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절대적 기온 자체는 낮지 않았는데 구름이 많이 끼어서 해가 찔끔 나왔다가 도로 들어가기를 반복했고 바람이 불어서 그런 것 같았다. 하여튼 쭉 걸어올라가자 문구점 카페가 나왔고 거기 들어갔다. 딱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내부는 아니었고 메뉴도 적어서 구경만 하고 나갈까 했는데 창가 테이블이 비어 있는 걸 보니 또 앉고 싶어졌다. 디저트는 거의 없고 차도 별로 기대되진 않아서, 그리고 커피 마시고 나왔더니 목이 말라서 유리병에 든 생강 레모네이드를 시켰다. 생강향이 강해서 맛있었다. 여기도 엘스카처럼 교차로에 있었다. 필리모 거리와 트라쿠 거리였던 것 같다. 통창 너머로 트롤리버스 구경, 사람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여기서도 엄청 대충 크로키를 두 장 그리고(그게 오늘 첨 올렸던 토끼 옷차림 2탄 스케치) 나왔다.
점심을 먹긴 해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잠시 방심 상태가 되었다. 트라쿠 거리를 지나 올라가면 필리에스 거리가 나온다고 해서 그쪽으로 꺾어 쭉 올라가면서 주변 구경, 음식점 구경을 했다. 그러다 점점 배고파지고 또 추워져서(바람이 또 씽씽), 필리에스 케피클렐레에 가서 블린을 먹기로 했다. 여기는 재작년 빌니우스에 왔을 때 제일 먼저 갔던 음식점이다. 그때 버섯블린과 딸기잼 블린이 맛있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도 극도로 배고플 때였음. 근데 그때처럼 식사용 1개, 단 것 1개를 시켰어야 했는데 오늘 넘 배고프고 또 닭고기 든 게 궁금해서 닭고기 든 블린, 버섯시금치 블린을 시키는 바람에 용량 과다... 그리고 닭고기 든 블린은 생각보다 맛이 없었다. 러시아에서 먹었던 스메타나와 채썬 양배추 등이 들었던 상큼하고 맛있는 블린을 상상했으나 자잘한 닭고기와 당근 필링은 치킨수프 맛이 너무 강해서 뭔가 좀 안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힝... 그러고 보니 피나비야의 치킨 키비나이도 좀 그랬음. 여기서는 닭고기 소가 들어있는 블린이나 피나비야는 안 시키는 걸로... 버섯은 실패하지 않음. 결국 두 장은 너무 많아서 좀 남긴 채 죄책감을 느끼며 나왔다. 흑흑, 왜 내 위장을 과다평가한 거야.
일단 숙소로 돌아갔다가 옷을 좀 갈아입고 근처 카페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대성당 광장을 지나 게디미나스 대로로 갔다. 여전히 더웠다 추웠다 했음. 바람 불고 그늘 쪽이면 춥고, 해 나면 따뜻하고 반복. 이 와중 결국 대로변의 베네통 매장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입어보다가 지난주에 찍어뒀던 롱 스커트를 지름. 그때도 추운 날이었는데 이후 따뜻해져서 ‘역시 추워서 공연히 그랬나보다’ 라 생각하며 잊고 있었던 것이 오늘 되살아났음. 그래도 40% 할인 중이라 수지맞은 거라고 스스로를 세뇌함. 근데 따뜻한 재질이었고 편한 스타일이라 여기 뿐만 아니라 귀국해서도 잘 껴입고 다닐 것 같아서 잘 산 것 같다.
옷을 샀더니 가방이 무거워졌다. 숙소로 들어가 잠깐 폰을 충전하면서 읽을 책까지 챙겨서 다시 나갈 준비를 했다. 숙소에서 가까운 체인 카페인 Caif 카페라는 곳에 가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옷을 입고 스카프까지 매서 막 나가려는 순간 급피곤해졌고 레모네이드와 블린의 여파로 배가 불러서 카페에 가도 아무것도 못 마실 것 같았다. 그래서 다 포기하고 욕조에 물을 받아서 목욕을 하고는 침대로 기어 들어가 한동안 쉬었다. 그리고는 배가 꺼진 후에야 햇반으로 저녁을 간단히 먹었다. 4시 반에 들어온 거니까 엄청 여유있다고 생각했으나 어째선지 오늘도 이 시간에 메모를 적고 있네... 하긴 업무 필수교육을 이수하라고 해서 그걸 챙겨봤구나... 엘스카 스케치도 그리다 만 부분 조금 마무리하고.
벌써 빌니우스에 온지 일주일도 더 지났다. 지난주 목요일에 왔으니까. 아아아, 아직 한참 남았다고 생각했지만 벌써 10월 10일이야 엉엉. 아마 한 달밖에 못 쉬는 데다 돌아가면 엄청 빡세게 일해야 한다는 걸 아니까 자꾸만 매일 이렇게 기어나가려고 애쓰는 것 같음. 원래는 집토끼라 방에만 있어도 만족하는데. 갑자기 슬퍼하며 오늘 메모 마무리.
오늘은 3.8킬로, 6.163보. 날씨 여파.
추가) 아참, 필리에스 거리로 걸어가다가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 속보를 듣고 깜짝 놀랐고 또 기뻤다. 축하합니다!!!
엘스카. 저기 앉아있는 분이 어딘가 아주 약간 바리쉬니코프를 닮으셔서(코 때문인가 분위기 때문인가) 두어번 힐끗 보게 되었다.
공간 감각 없는 자에게 너무 큰 도전이었던 창가 테이블 스케치 ㅎㅎ 오늘은 내가 원래 앉던 무지개 테이블(2개짜리)이 차 있어서 그 앞의 1개짜리 테이블에 앉았다. 이 자리도 좋았는데 콘센트가 없는 것만 아쉬웠다.
나왔더니 볕이 좀 들어서 이렇게 야외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생겨나 있었다(들어갈 땐 추워서 야외 텅 비어 있었음) 근데 여기가 따뜻해도 믿으면 안됨. 필리모 거리로 들어가면 또 응달이...
여기가 문구점 내부. 내 취향보단 너무 차갑고 미니멀리즘 스타일이긴 했지만 의외로 창가 자리가 앉아 있기 편했다.
문구점 카페 창 너머로 바깥 구경. 길 건너는 사람들.
교차로와 트롤리버스도 구경. 빨간 옷 입은 사람이랑 빨간 버스 지나갈 때 잽싸게 한 장 찍음.
트라쿠 거리에서 필리에스 거리까지 가는 길. 도미니코누 거리를 지나게 되어 예전에 내가 예쁘다고 생각했던 재건축 안된 옛 건물을 다시 보게 됨.
다시 찾은 필리에스 케피클렐레. 위장에 대한 과다평가로 두 장이나 시킨 블린(흑흑...) 아래가 버섯시금치, 위가 치킨. 소스는 뭐 줄까 해서 스메타나 추가.
방에 돌아와서. 4일에 한번씩 시트를 갈아준다. 오늘은 시트를 갈아줬고 락스 냄새도 좀 나서 만족... 하려다가 책상 아래에 어제 봤던 먼지가 그대로 있는 걸 발견 ㅠㅠ 진공청소기를 구석구석 안 돌려주나보다. 어제도 발목에 뭔가 조그맣게 자국인지 두드러기인지 약간 돋아서 간질거렸기 때문에 좀 걱정하다 긴 양말 신고 잤는데 -_- 벌레가 아니기를 바라며. 그 이후 더 생긴 건 없다만. 하여튼 책상 아래 먼지는 내가 물티슈로 닦아냈음. 힝...
날씨가 추운 건 아니었는데 바람 불고 으슬으슬해서 나오자마자 목적지를 버리고 제일 가까운 엘스카로 피신. 몸 녹이면서 내 자리에서 보이는 구석 모습 스케치. 역시 똥손에게는 그리기 고난이도 카페야... 특히 벽이 모두 하얀 회칠벽이기 때문에 스케치에는 흰색으로 놔둘수 없어 애매한 아주 연한 청회색을 칠하게 되니 더 그렇다. 사실은 저 창가 바 테이블 아래(의자 세개 안쪽)에 검정색 라디에이터가 있는데 그거까지 그리기 너무 힘들어서 생략함. 저번 스케치에선 테이블 생략, 여기선 라디에이터 생략 ㅎㅎㅎ
새벽의 문을 지나면 사원들이 여럿 있는데 그중 정교 성당이 하나 있어 전에도 들렀고 이번에도 들렀다. 여기에도 긴 의자가 놓여 있다. 이 사원은 꽤 크다. 기도를 하고 나왔다. 그러고보니 성 파라스케베 사원에 가야 하는데. 내일 가야겠다. 전에 두번 실패한 건 내가 너무 일찍 갔기 때문이었다. 그 사원은 정오부터 연다는 것을 알게 되었음.
엄숙한 정교 사원. 그런데 빌니우스의 정교 사원은(리가도 마찬가지였지만) 너무 밝다. 오늘 햇살이 많이 들어와서 더 그런가.
이 사원 안뜰을 거닐다 보면 옆쪽 울타리 너머로 예쁜 연못이 있다. 여름에 왔을 땐 저기서 미니 분수가 졸졸 흐르고 있어 영상도 찍어두었는데 지금은 그냥 연못만 호젓하게 거울처럼 빛나고 있었다.
새벽의 문 거리를 따라 내려와(평일 오후라 그런지 사람이 없고 매우 한적했다) 디조이 거리에 접어들었다. 어떤 루트로 오든 여기 오면 지치는 건 똑같은가보다. 구 시청사 앞의 벤치에 주저앉았는데 의외로 벤치가 편했고 햇살이 따끈따끈해서 물을 좀 마신 후 멍때리며 한동안 앉아 있었다. 먹은 게 별로 없어 배도 고프고 차도 마시고팠다. 바로 옆으로 꺾으면 보키에치우 거리라서 슈가무어에 가기로 했다.
단언할 수 있다. 여기 케익이 제일 맛있다. 다른 곳보다 비싸고 좀 젠체하는 느낌은 있지만 케익이 맛있으니 다 용서됨. 홍차도 잎차로 우려준다. 다즐링이 없는 건 아쉽지만 얼그레이를 잘 우려주었고 이번에 시켜본 저 복숭아 크림치즈 케익도 엄청 맛있었다. 안에는 복숭아잼이 들어 있고 겉은 화이트 초콜릿 코팅이 되어 있음. 정성이 들어갔고 맛있으니 비싸도 그냥 인정하기로... 그래도 5유로니까 우리나라의 케익 생각하면 비싼 것도 아니다. 프라하의 ippa cafe의 케익이 딱 이런 식인데 생각해보니 거기는 여기보다 훨씬 비쌌음.
그건 그렇고 지난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배고프고 지치고 힘들 때 슈가무어에 왔으므로 그 후광효과도 있는 것 같긴 하다. 당분으로 눈이 번쩍 뜨인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그래도 난 맛없는 건 끝까지 맛없단 말이야.
영원한 휴가님이 학교와 유치원을 마친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셨다. 이 분수는 예전에도 아이들과 조우했던 곳으로 동전을 주워서 '돈 폰타나스'(돈 분수)라고 우리끼리 부르고 있는 곳이다. 2년만에 아이들이 부쩍 컸고 너무너무너무 귀여웠다! 아이들과 다같이 지난번에 갔던 근처 루드닌쿠 거리의 비르주 두오나에 갔다. 초코 카눌레, 기본 카눌레, 잼 든 미니 디저트, 브라우니, 조그만 키쉬 타르트, 주스, 에스프레소 등을 시켜서 먹었다. 이후 놀이터에서 조금 쉬었다. 오늘 정말 귀여움 한도치 초과 :)
이 비르주 두오나는 점원도 친절하고 가게도 예쁘고 아늑하다. 그리고 빵도 맛있다.
이후 우리는 필리모 거리 교차로에서 헤어졌다. 나는 다시 필리모 거리를 따라 머나먼 횡단(길긴 정말 길었다 ㅜㅜ)을 하여 게디미나스 대로의 숙소로 돌아왔다.
이 사진은 새벽의 문 갈 때 찍긴 했지만 어쨌든 필리모 거리 사진이므로 여기에... 볕 드니까 따스하고 이뻐보이지 우중충한 날씨엔 역시 황량할듯.
게디미나스 대로에 진입해 숙소 근처에 왔을 때 갑자기 너무 배고팠고 뭔가 챙겨먹기에는 귀찮고 게을러져서 맥도날드에 가서 빅맥을 한개 테이크아웃해 와서 방에서 먹었다. 오랜만에 먹었더니 배고파서 그런지 맛있었음. 그리고는 목욕을 하고 머리를 말리고(머리가 자동으로 마르면 참 좋겠다) 쉬다가 오늘의 메모를 적고 있다. 오늘은 10,922보, 6.2킬로. 대부분 필리모 거리 횡단 때문임. 그리고 새벽의 문도 갔고. 활동 반경이 아주 다양한 건 아니었으나 일단 필리모가 길었다 :)
오늘은 정말 따뜻했었다. 겉옷은 가을 점퍼를 입었는데 안에 두겹 껴입었더니 나중엔 땀이 날 정도였다. 돌아와서 빨래를 하면서 '아, 그 간이세탁키트 가져올걸' 하고 후회했다. 흑흑... 쿠야가 빨래 좀 해주면 좋은데. 호텔이라 청소해주고 밥주지만 빨래는 돈을 추가로 내야 하니 매일매일 저녁마다 내가 하고 있음. (빨래 미뤄두지 못하는 성격...)
며칠 잘 자다가 오늘은 새벽 5시 즈음 깨어나서 한참 못 자고 뒤척이다 약간 새잠 들어 불량수면. 아마 벨리니 때문인 것 같다. 역시 알콜은 안돼... 너무 피곤하고 한없이 게을러져서 오늘은 조식도 걸렀다. 어제 조식 먹을 때 챙겨왔던 삶은 달걀 1알과 미니 서양배 1알을 먹었다. 오전에 일찍 업무를 마친 영원한 휴가님이 피나비야에서 아몬드 크루아상과 버섯 키비나이를 사서 들르셔서 그것을 맛있게 먹었다.
한시 무렵 함께 엘스카로 갔다. 오늘은 어제보다도 더 따스했다. 놀랄만큼 좋은 날씨였고 심지어 더웠다. 19도~20도까지 올라갔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래서 엘스카 야외테이블에 앉았다. 카푸치노와 미니 땅콩버터 크림케익(비건이라고 한다), 영원한 휴가님은 플랫 화이트를 시키셨다. 내가 차를 시키지 않고 어제에 이어 커피를 시킨 이유는 여기가 디저트가 다양하지 않고 또 차도 어쩐지 근사할 것 같진 않아서, 그리고 어제 마신 플랫 화이트가 괜찮았기 때문에 카푸치노도 도전해본 것이다. 확실히 테이스트 맵보다는 부드러운 맛이었다. 10월에 빌니우스에서 야외 테이블에 앉게 되다니 정말 감동이었음. 일조량이 확실히 많은 카페였고 변색렌즈 안경 대신 선글라스로 바꿔 낀 채 앉아 있었다. 주변은 필리모 거리 등 교차로라 풍경이 그리 아름답진 않았지만 그래도 바깥에 앉아 있으니 기분이 좋았다.
이후 영원한 휴가님은 아이들을 챙기러 가시고 나는 '이렇게 날씨가 좋으니 새벽의 문에 다시 가봐야겠다' 라고 결심. 새벽의 문은 숙소에서 먼데다 전에 왔을 때도 오르막길에 더위로 고생한 기억 때문에 좀처럼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었다. 새벽의 문과 우주피스가 딱 그런 곳이다. 맵을 찍어보니 엘스카가 있는 필리모 거리를 쭉 따라서 계속 올라가다 시장을 지나 꺾으면 새벽의 문이라 가는 길도 쉬워서 마냥 걷기 시작했다. 필리모 거리는 정말 길다. 네버 엔딩... 그래도 오늘은 날씨가 좋았기에 이 거리가 황량하지 않았고 걸어갈만 했다.
시장(할레스 투르구스)이 나타나서 거기도 들렀다. 시장에 가면 딱히 사는 건 없지만 그래도 잠깐 구경하는 건 즐겁다. 전에 여기서 체펠리나이를 먹었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아마도 고려인이 하시는 건가 싶은 '한국 반찬가게'에도 잠깐 들어가보았다. 러시아에서 파는 한국 반찬들도 그렇지만 역시나 채썬 당근김치, 장아찌 등 미묘하게 변형된 반찬들이 좀 늘어서 있었다. 진열대에는 한국 라면 몇개, 김 등이 있었는데 너무 텅 비어 있어서 '아, 꽉꽉 채워주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레스 투르구스에서 새벽의 문은 가까웠고 이쪽 루트로 오니 오르막이 아니라서 그럭저럭 올만 했다. 그리하여 나는 새벽의 문을 전과는 반대편 방향에서 통과하게 되었다. 그 다음 이야기는 2부에서. 여기까지의 사진 몇 장.
반짝반짝 엘스카 앞 야외테이블들. 저 중 하나에 앉아 카푸치노 마심.
여기가 할레스 투르구스 시장 내부.
한국 반찬 가게.
이걸 보니 옛날에 페테르부르크에서 바실리 섬의 안드레예프 시장에 갔을 때 거기서 '까레이스키 살랏'(한국 샐러드)란 이름으로 당근김치를 파는 걸 보고 고춧가루로 버무려놓았으니 정말 김치 같을 줄 알고 사왔다가 피봤던 기억이 났다. 기름으로 마리네이드되어 있음 :) 우리 나라에서도 동대문운동장 쪽 중앙아시아/러시아 식당에서 내준다.
오늘의 네버 엔딩 메모에 괴로워하다가 ‘아, 홀리 도넛 얘긴 따로 올렸다!’ 하며 갑자기 기뻐진 채 오늘의 2부 메모. 오늘은 사실 7,079보, 4.7킬로밖에 안 걸었는데 전체 범위가 길지 않았을 뿐 오밀조밀하게 카페들과 작은 거리들을 밀도있게 왔다갔다한지라 이야기가 많다. 오늘은 완전히 카페 투어의 날이었다. 날씨가 좋았고 볕 좋은 엘스카, 기억에 좋게 남아 있던 민트 비네투, 벨리니를 마시고 싶어 들어간 홀리 도넛까지 세군데나 들렀다. 엘스카에만 좀 오래 있었고 나머지 두 곳은 1시간, 30분 정도만 있긴 했지만.
민트 비네투에서 나와서 빌니우스 대학이 있는 우니베르시테토 거리 쪽으로 갔다. 이쪽이 고적한 골목인데 이번에는 아직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는 길에 잠시 스티클리우 거리로 빠져보았는데 오래된 베이커리 카페인 포뉴 라이메가 현관 장식 교체 공사를 하는 걸 목격. 이번엔 또 어떤 엄청난 장식을 달아놓으려나...
우니베르시테토 거리로 접어들었다가 잠깐 대학교 교정에도 들어갔다. 성당 전망대에서 무서웠던 기억에 그냥 교정만 잠깐 산책하고 나왔다. 여기 교정은 평화롭고, 벤치에 앉아 있는 (아마도 학생들일) 청년들을 보면 예뻐보이고 기분이 좋다. 옛날 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교정이 생각나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학교에서 나와 근처에 있는 ‘유레카’라는 서점에도 들러보았다. 여기는 좀 스노브 느낌이 드는 서점이고 점원들 포함 자기들 서클끼리 즐거워보이는 곳인데 외국문학 책들이 많다. 거기 맞다, 긴스버그 에코백과 티셔츠 걸려 있는데 미남이 아니라서 안 샀던 곳 ㅎㅎ 2년만에 왔는데도 똑같은 에코백과 티셔츠가 걸려 있어서 좀 아쉬웠다. 긴스버그는 얼굴 프린트보다는 그냥 그의 멋진 시 몇 구절을 적어두면 좋을 텐데. (역시 미모중심주의 ㅜㅜ) 하여튼 그래서 아무것도 사지 않고 나왔다.
그 옆에는 재작년 묵었던 켐핀스키 호텔이 있는데 여기는 얼마 전 힐튼 호텔 체인으로 넘어가서 더 이상 켐핀스키가 아니고 ‘그랜드 호텔 빌니우스’로 바뀌었다. 현관의 꽃장식은 여전했지만 그네가 없어져서 뭔가 좀 아쉬웠다. (하지만 인테리어는 그네 없는 쪽이 훨씬 나아...)
그리고는 게디미나스 대로로 들어섰다. 리미에 잠깐 들렀다가 ‘벨리니...’ 하면서 빌니아우스 거리로 다시 들어가 홀리 도넛에 갔다. 그 얘긴 따로 올렸으니 생략. 그 이후에야 숙소로 돌아왔다. 5시 즈음이었다.
씻고 좀 쉬다가 간단히 저녁을 먹었다. 햇살을 많이 받기도 했지만 벨리니 때문에 얼굴이 계속 빨갛게 달아오르고 열이 나서 잠시 창가에 앉아 바람을 쐬고 창 너머를 바라보며 쉬었다. 분명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 다시 정신없는 노동에 파묻히게 되면 바로 이 순간이 가장 그리울 거란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는 이 메모들을 쓰는 중인데 네버 엔딩... 헉헉, 이제야 다 썼네. 내일도 날씨 좋으면 좋겠다.
오늘은 대학 교정을 걷다가 아주 희미하게 뭔가 ‘쓰고 싶은’ 것이 어른거렸는데 아직 손에 잡히지는 않는 상태이다. 부디 빨리 잡혀 주기를...
1부랑 홀리 도넛에 사진들 많이 올려서 이 2부는 사진을 몇 장만 첨부하고 마무리.
햇살이 좋고 따뜻한 날씨라 사람들이 벤치에 앉아 있었다.
빌니우스 대학 교정. 재작년에도 봤었나 기억이 잘 안나는데 조그만 분수가 있었다. 그리고 나무 아래 앉아 노트북으로 뭔가 공부하는지 작업하는지 열심히 집중하고 있는 학생(...인가? 여기는 남자들이 수염을 많이 길러서 정말 모르겠음)도 보기 좋았다.
이정표인 대성당을 지나서...
방에 돌아와서는 벨리니 때문에 취하고 더워서 창가에 앉아 바람 쐬었음. 여기까지가 오늘의 메모 끝.
사진은 오후에 들렀던 민트 비네투 카페. 외국인 커플이었는데 창가에 앉아 있는 모습이 이뻤다.
..
자정 즈음 잠들었고 온갖 꿈을 꿨다. 이따금 꾸는 패턴인 ‘우리 집인데 우리 집이 아닌 건물’, ‘문이 이상하거나 남의 집을 통과해서 들어가야 하는 집’, ‘건물에서 나가야 하는데 계단이 이상하고 사다리로 연결되거나 아주 나가기가 어려운 입구로 변한 곳’ 등이 다 등장해서 피곤했다.
8시 되기 전에 퍼뜩 깼는데 회사의 갑님(대충 이사진에 가까움)으로부터 부재중 전화와 연락 달라는 문자가 두어 시간 전 와 있었다. 이 갑님은 우리 부서 업무와는 큰 연관이 없는 분이지만 요즘 회사 상황이 워낙 이상하므로 더럭 걱정이 되었다. 억지로 잠을 깨려고 노력하고 물을 마시고 목을 가다듬은 후 전화를 해보았는데 받지 않으셔서 문자를 드렸다. 비몽사몽 업무메일도 확인해봤는데 부서 업무회의록에 역시나 요즘 좋지 않은 정황에 대한 기록이 있어 더욱 걱정이 되어 윗분께도 카톡으로 혹시 무슨 일이 있는가, 이 갑님에게서 이런 연락이 왔는데 뭘까 하고 물어보았다. 윗분도 모르는 건 마찬가지. 그때 갑님에게서 휴가 중이란 걸 들었다, 전화 안 해줘도 된다는 답이 왔다. 그래서 업무 통화는 안 해도 됐지만 뭔가 매우 찜찜한 채 일어나야 했다.
그래서 잠이 딱히 모자라진 않았지만 기분 좋지 않은 채 멍하게 깨어나 샤워를 하고 조식을 먹고 왔다. 아침엔 안개가 한치 앞도 안 보일 정도로 뿌옇게 끼어 있었다. 조식 먹고 와서 도로 침대에 들어가 좀 누워 있었는데 열한시쯤 창밖을 보니 하늘이 파랗고 해가 나고 있었다! ‘아니 이렇게 해가 난다면 당연히 나가야 하는 거 아닌가! 볕이 잘 드는 엘스카로 가야지~ 거기 인기 많은 카페니까 오후가 될수록 붐빌테니 지금 가야겠다!’ 하고 갑자기 맘이 급해져서 후다닥 나갔다.
엘스카는 숙소에서 400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게디미나스 대로를 따라 조금 걷다가 Jogailos 거리를 끼고 올라가면 필리모 거리와의 접점 교차로에서 마주치게 된다. 영원한 휴가님이 여기가 빌니우스에서 제일 일조량 많은 카페일 거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오늘 내가 체험으로 깨달음. 오 정말이야. 정말 빛이 많이 들어온다. 숏패딩을 벗고 그 다음엔 짚업과 스카프를 벗었는데도 창가 테이블(이틀 전 찍었던 그 무지개 테이블)에 볕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 따끈따끈 더웠다.
조식 테이블에서 차를 마셨고 여기는 디저트가 별거 없었으므로 플랫 화이트를 시켜보았다. 커피 잘 못 마시는 나로서는 카푸치노보다 더 연하고 라떼보다는 양이 적은 이게 제일 나은 것이었다! 원두는 브라질과 온두라스 중 고르라 해서 산미 없는 쪽인 전자를 택함. 그런데 내가 주문을 똑바로 못한 건지 러브라믹스가 아니라 테이크아웃용 종이컵에 나와서 ?? 했지만, 종이컵이 또 나름대로 이뻐서 오히려 좋다고 생각했다. 플랫 화이트는 매우 연하고 부드러워서 이 정도라면 나도 마실 만했다.
평일 이른 시간이라 카페에 손님이 별로 없었고 내가 좋아하는 2층과 무지개 테이블이 비어 있어 ‘진짜 좋다!’ 하며 얼른 거기 앉았다. 여기 앉아서 정면으로 보이는 카페 풍경을 스케치했다. 스케치하는 동안 빛이 많이 들어와서 꼭 히터를 틀어놓은 듯 따뜻했고 색칠할 때도 눈이 부셨다. 햇빛 받지 말랬는데... 변색렌즈 안경 끼고 있었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며 정당화. 흑흑 나는 이렇게 밝고 환한 카페가 좋은데... 화창한 날씨가 좋고... 햇빛 받지 말라니 너무해. 카페 스케치는 따로 올림. 인스타 스토리에도 올렸더니 엘스카에서 자기네 스토리에 올려주며 넘 이쁘다고 해줘서 뿌듯해졌다 :)
온몸이 따끈따끈 데워진 채 한시 쯤 엘스카에서 나왔다. 바깥 바람이 선선했고 햇살은 따스해서 정말 좋은 날씨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을 날씨였는데 여기서 이런 날씨를 맛보다니 흑흑 감동이었다. (10월의 우중충한 날씨를 대충 아는 터라 전혀 기대 안 했었음)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고 며칠 안 먹었던 쌀밥이 먹고파서 빌니아우스 거리의 Wok to Walk에 다시 가서 돈부리를 주문했다. 여기 돈부리는 흰밥에 달걀프라이, 메인과 야채토핑과 소스를 얹어주는데 나는 닭고기와 데리야키 소스를 고르고 달걀은 다 익혀달라고 했다. 가쯔오부시까지 얹어줘서 또 좋았음. 돈부리가 매우 맛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 흔히 먹는 돈부리와는 다른 맛이었다. 내가 데리야키 소스를 골랐기도 하고 양파도 우리나라 일식집에서 주는 길고 얄팍하게 썰어서 푹 익혀주는게 아니라 좀 큼직하게 아삭거리는 놈들이라 꼭 간짜장밥 같은 맛이 좀 났다. (달걀프라이도 얹혀 있고) 미소수프랑 같이 매우 맛있게 먹고 나왔다.
그리고는 날씨가 좋으니 민트 비네투에 가야겠다고 결정했다. 왜냐하면 민트 비네투는 성 Ignoto 거리를 따라가야 하는데 그 길이 재작년의 경험을 비추어 볼 때 좀 오르막인데다 재개발이 안되어 황량한 길이기 때문이다. 우중충한 날씨에 걸어가면 좀 춥고 음울할 것 같았다. 구글맵을 찍어봤더니 심지어 웍에서 가까워서 좋아하며 걸어갔다. 빌니아우스 거리에서 걸어가니 오르막이 아니어서 더 좋았다(재작년엔 숙소에서 곧장 가느라 토토리우 거리를 따라 쭉 올라갔었다)
민트 비네투는 당시 피나비야를 제외하곤 유일하게 두 번 간 카페였는데 헌책들이 많고 구석 자리들이 좀 도서관 같아서 좋았다. 이번엔 전에 앉지 않았던 쪽 구석으로 들어갔다. 자리는 좋았는데 확실히 여기는 응달이긴 했다. 센차를 시켰는데 아이스는 안된다고 했다. 그런데 이 녹차에서 시나몬 향이 강하게 났다. 뭐지, 재작년에 마셨을 땐 안그랬는데. 티포트에 시나몬차를 우렸었나... 하여튼 시나몬 냄새 나는 센차를 마시며 여기서도 스케치를 했다. 그게 토끼 옷차림 스케치. 이렇게 카페들을 돌아다닐 줄 모르고 아이패드만 가져온데다 와이파이가 잘 안돼서 본의아니게 두 카페에서 다 스케치. 그런데 민트 비네투는 전에 왔을 때가 더 마음에 들었다. 뭔가 여기는 환대하는 느낌이 별로 없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스케치하기는 좋은 곳이다.
오늘 간 곳들이 많아서 너무 길어지는지라 오늘도 두 파트로 나눠서 올린다. 1부는 여기까지. 여기까지의 사진들은 아래.
종이컵에 담아준 플랫 화이트와 겨우 두번만에 '내 자리' 로 각인된 무지개 테이블의 엘스카.
실제로는 이렇게 이쁘고 볕이 잘 들어온답니다. 테이블 다 없앤 대충대충 스케치와는 비교불가 ㅎㅎㅎ 엘스카 사진이 좀 많다. 빛 들어오는 카페 내부가 이뻐서.
출입문 앞. 나갈 때 보니 여기도 우크라이나 응원문구가 붙어 있었다. 전쟁이 빨리 끝났으면...
이렇게 무지개테이블에서 스케치를...
웍에서 먹은 간짜장밥 맛 나는 맛있었던 돈부리. 추천!!! 가쯔오부시도 올려주고 좋았다!
민트 비네투 가는 길. 햇살이 좋아서 오늘은 공원 벤치고 야외 테이블이고 삼삼오오 다들 밖에 앉아 있었다.
성 Ignoto 거리. 여기가 사실 날씨 안 좋으면 우중충할텐데 하늘이 파랗고 햇살이 쨍하니 이쁘고 고적하다.
오늘은 날씨가 너무 좋았다. 카페를 3곳이나 돌아서 그야말로 카페 투어를 한 날이었다. 귀가하면서 마지막으로 들른 카페는 빌니아우스 거리에 있는 홀리 도넛. 나는 도넛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재작년에 왔을 때에도 여기 들를 생각이 없었는데 어제 어쩌다 슬쩍 들어가보니 벽에 붙은 메뉴판에 칵테일이 몇개 있고 거기 벨리니가 들어 있어서 의외였다. 벨리니를 내주는 바가 의외로 별로 없다. 그래서 오늘 돌아오면서 들러서 벨리니를 시켜보았다. 역시나 진열장의 도넛들은 당기지 않았고(오후 늦은 시각이라 그나마 얼마 없었음), 벨리니 가격이 싸지 않았으므로 이것만 시킴. 오랜만에 벨리니 마셨더니 맛있었다. 아마 점심 때 웍에서 짭짤한 돈부리를 먹었기 때문에 더 맛있었을지도. 그런데 벨리니도 역시 알콜이라 약간 취기가 돌았고(술 잘 못 마시는 자), 호텔에 돌아와서도 내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다.
검색해보니 여기는 브런치 메뉴가 많다고 한다. 지금 호텔은 조식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아침 먹으러 갈 일은 없을 테지만 하여튼 메뉴 사진과 리뷰를 보니 맛있어 보였음. 도넛만 하는 게 아니었구나, 무시해서 미안해 홀리 도넛아. 벨리니까지 내주는데...
내부 사진 몇 장. 아늑한 스타일은 아니지만 또 너무 빈약한 스타일도 아니다. 전체적으로는 옐로우 톤인데 여기와 잘 어울린다.
도넛은 거의 다 나가고 텅텅... 그래도 저렇게 바가 있어서 좋다.
금방 마시고 나갈 거라 문 안쪽 바 테이블에 앉았다.
바깥 모습은 이렇다. 그런데 입구에 식물이 무성한 화분을 여럿 놔둬서 은근히 진입로가 좁았음.
오랜만에 스케치. 오전에 볕 좋을 때 엘스카에 가서 카페 풍경 그림. 그런데 엘스카는 여태까지 스케치했던 모든 카페들을 통틀어 제일 어려웠다. 2층 카페인데다 디테일이 너무 많아서... 그래서 내 무지개 테이블과 저 갈색 소파 사이의 테이블들은 생략함. 그랬더니 뭔가 무지개 테이블만 동동 뜬 것 같지만 ㅎㅎ 원래 모습보다 50분의 1쯤으로 간소화, 대충대충이 되었습니다만 사진들도 많이 올렸으니 본모습과 예쁨은 그 사진들로 봐주세요~
요즘 자정 즈음 잠든다. 시차 적응은 다 했고 새벽에 깨는 건 여전하지만 그래도 좀 뒤척이다 다시 잠들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은 6시 반쯤 깨서 뒤척이다 다시 잠들었고 8시 반에 일어나 대충 씻고 조식을 먹고 왔다. 평일엔 조식 시간이 10시까지라 의도치 않게 부지런한 생활 중. 우리 나라였다면 쉬는 주말엔 거의 정오까지 침대에 달라붙어 있는데.... 그래도 누가 밥을 주는 건 좋다. 청소해주는 것도.
오전에 영원한 휴가님이 방에 들르셔서 며칠 전 사놓았던 마카롱과 어제 조식 테이블에서 가져온 팅기니스, 방에 있는 캡슐 커피 등을 먹고 쉬다가 두시 즈음 늦은 점심을 먹으러 숙소 근처에 있는 ’bonocosi’라는 이탈리아 식당에 갔다. 늦은 시각이라 손님이 거의 없었다. 배가 많이 고파서 마르게리타 피자 30센티 짜리와 파르메지아노 멜란자네, 즉 가지 요리를 시켰다. 피자는 너무 크니까 남기면 싸가야겠지 했는데 끝의 도우를 잘라내고 치즈 든 부분은 다 먹음. 가지도 간만에 먹으니 맛있었다.
그리고는 빌니아우스 거리의 스코니스 이르 크바파스에 다즐링 햇차를 사러 갔다. 작년에 사다주셨던 오렌지 밸리 퍼스트플러쉬는 이번에는 없었고 다른 다원 차들만 들어와 있었다. 전에 사보긴 했지만 이번엔 햇차이고 품질도 좋아서 다즐링 Risheehat를 100그램 사고 티백 다즐링도 샀다. 빌니우스 카페들에는 다즐링 내주는 곳이 거의 없고 방에 비치된 홍차 티백이 맛없어서... 내일은 이 잎차를 우려 마셔봐야겠다.
빌니아우스에서 보키에치우 쪽으로 걸어갔고 영원한 휴가님이 근처 도서관에 데려가 주셔서 구경을 하고 스트루가츠키, 펠레빈 책도 들춰보았다. 이후 영원한 휴가님은 유치원을 마친 아이들을 픽업하러 가시고 나는 다시 게디미나스 대로 쪽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빌니아우스 거리에 있는 유로코스 라는 드럭스토어에 갔다. 여기도 드로가스랑 비슷해서 올리브영 같은 곳이었는데 물건들이 또 달랐다. 이쪽이 좀더 품질이 나은 것들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나뚜라 시베리카가 있어 깜짝 놀랐다. 이게 러시아 브랜드라 블라디보스톡이나 뻬쩨르 갈때마다 샀는데 어떻게 여기 있지? 하며 좋아하다 샤워젤을 하나 샀다. 숙소에 비치된 샤워젤은 좀 높이 달려 있고 펌핑이 잘되지 않아 불편해서. 나중에 꼼꼼히 보니 노어는 하나도 없고 ‘시베리아에서 생겨나 유럽에서 만듭니다’ 라고 적혀 있고 생산지도 에스토니아로 되어 있었다. 흠, 몇 년 전 나뚜라 시베리카 창업자가 세상을 떠났다고 러시아 뉴스 트윗에서 봤는데 그 이후 회사가 에스토니아 쪽으로 넘어간 건가. 아니면 유럽에서 장사를 하기 위해 에스토니아 쪽 지부를 활용하는 건가. 잘 모르겠다. 하여튼 반가웠다.
추위는 많이 가라앉았는데 머리가 너무 아팠다. 조식 테이블에서 마신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티백 외엔 방에서 녹차 한두 모금이 전부라 아무래도 카페인 부족 같았다. 그래서 빌니아우스에 있는 홀리 도넛에 들어가봤는데 오후 늦은 시각이라 그런지 도넛이 거의 없고 장사 접는 분위기라(여름엔 복작거렸는데) 일단 방에 돌아와 가방을 내려놓은 후 책을 들고 근처 카페인에 갔다. 여기가 제일 만만한게 확실히 별다방을 벤치마킹하는 곳 같다. 가을이라고 펌프킨라떼 이런 것도 나왔다. 카페는 꽉 차 있었고 나는 홍차 한잔과 라즈베리 에클레어를 시켰다. 이 에클레어는 아이싱이 다 갈라지고 맛이 별로라 실패였다. 역시 클래식한 초코 에클레어가 제일인 것 같다.
하여튼 카페인과 당분이 들어가자 놀랍게도 두통이 가셨고 카페에 앉아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을 끝까지 다 읽었다. 이 책은 아주 여러 번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가슴을 무겁게 울리는 뭔가가 있다. 이들의 작품 대부분이 그런 것처럼. 나는 지금껏 읽은 이들의 소설들 중 ‘월요일은 토요일에 시작된다’를 제일 좋아하지만 그건 너무나 즐겁기 때문이고(웃음이 필요하다), 실제로 ‘소설 작품’으로서는 이 소설을 가장 좋아한다. 짧지만 페이소스가 있고 내려치는 듯한 파워가 있다. 원숙한 작가들에게서 나올 수 있는 소설이다. 영원한 휴가님은 이 책이 빌니우스의 좋은 카페들을 다 가봤다고 하신다. 조그맣고 가벼운 문고본이라 정말 그렇다. 테이스트맵, 엘스카, 이딸랄라, 카페인 등등등. 이제 이걸 다 읽었으니 리가에서 산 스트루가츠키 형제 원서들을 읽어야 하나 싶지만... 아악 생각만 해도 머리아파...
책을 다 읽고 방으로 돌아왔다. 나뚜라 시베리카 샤워젤로 목욕을 해보았는데 매끌매끌하고 좋았다. 쉬다가 좀전에 vpn을 켜고 업무 체크를 했다. 지금이 사실 여러 가지로 피곤하고 어려운 시기라 체크해줘야 할 일들이 꽤 있었다. 메일 몇 통을 보내놓고 자료를 좀 보고, 내가 올해 개인정보 관련 교육을 안 들어서 10월 중 무조건 동영상 교육 이수를 해야 한다는 메일에 괴로워하며 그것을 켜놓고 있다. 그런데 여기 인터넷 연결이 안 좋은데다 해외라 그런지 자꾸 끊어진다. 엉엉... 내일 다시 시도하기로 미뤄놓고 오늘의 메모를 적는 중.
오늘은 4.2킬로, 7,504보. 의외로 어제보다 조금 더 걸었네. 내일은 해가 날 것 같기도 한데... 오르막길과 약간 황량한 코스의 압박으로 아직 안 간 민트 비네투 혹은 파우피스에 가볼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파우피스는 아무래도 볼트를 타고 갈 것만 같아 ㅎㅎ
방에서 캡슐로 내려마신 에스프레소(나 말고 영원한 휴가님 ㅎㅎ)
이탈리아 식당. 장사가 잘 돼야 할텐데 하고 걱정되는 여유로움...
엄청 크다고 놀랐으나 다 먹음 ㅎㅎㅎ
여기는 가지를 길게 잘라주지 않고 둥글게 썰어주었는데 먹기는 더 편했다. 토마토 소스는 거의 없었다.
보키에치우로 이어지는 작은 골목에서.
낙서들.
뱅크시 스타일이지만 뱅크시는 아니겠지 :)
카페인. 여러 카페를 섭렵한 소중한 문고본 소설. 그리고 비추천 라즈베리 에클레어. 무조건 초코를!
내가 가장 최근에 썼던-그리고 완성했던- 글은 올해 1월 중순에 마친 <4월의 로켓>이라는 단편이다. 단편치고는 좀 길고 중편이라기엔 짧은데, 이 글은 그전까지 썼던 게냐와 미샤의 1990년대 페테르부르크 3부작의 남매 같은 소설이다. 왜 남매 같은 소설이냐고 한다면, 이 글의 주인공이자 화자는 게냐가 아니라 그의 이웃인 마냐이기 때문에. 그리고 마냐는 게냐가 1인칭 화자로 등장했던 3부작의 마지막 중편인 <구름 속의 뼈> 후반부에 아주 잠깐 등장했던 인물이지만 나름대로 그 소설의 주제와 이미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었기 때문에. 앞의 3부작에서는 미샤가 마사지사 루키얀이나 무용수이자 연인인 게냐의 눈으로 묘사될 뿐 직접적으로 앞에 나서지 않지만 이 이야기에서는 마냐와 딱 둘이서 등장해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기 때문에.
이 소설은 아주 즐겁고 쉽게 썼다. 종반부를 쓸 때 너무 바쁘고 가정사와 회사 일 등 여러 가지로 힘들어서 기력이 좀 모자라긴 했지만. 쓰는 즐거움이 큰 소설이었다. 이 글을 마친 후 집안일도, 회사 일도 더욱 힘들어지고 머릿속이 산란해져서 집중이 되지 않았고 새로운 글 자체를 시작할 수 없어 무척 우울하고 속상했다. 뭔가를 쓰고 있다는 것과 쓰지 않고 있다는 것 사이에는 크나큰 간극이 있다. 이것은 잘 써지는지, 재미있는지 아닌지와는 또 다른 얘기다. 본질적으로 쓰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읽는 인간, 이야기하는 인간, 행동하는 인간 이전에 쓰는 인간인 것 같다. 그래서 뭔가를 쓰고 있지 않을 때는 충만함이 사라지고 텅 비고 어딘가 불행하다. 이건 기본적으로 소설에 대한 얘기로, 에세이나 잡문과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여행을 나와 있고 잠시 일에서 떨어져 있으니 다시 뭔가 쓸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아직은 새로운 뭔가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쓰다가 중단해둔 글도 두엇 있고 쓰고 싶었던 글도 있지만 아직 손과 가슴에 와닿는 것이 없다.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아래 발췌한 에피소드는 이 소설의 초반. 동거하는 포주 사르바르에게 두들겨맞고 기분을 잡친 채 아파트 옥상에 담배를 피우러 올라왔던 마냐는 옥상에서 춤을 추고 있는 미샤를 발견한다. 일년 전쯤 미샤가 게냐에게 들렀을 때 마냐가 그를 발견하고 ‘저 사람 누구야, 너무 멋있어. 섹스 사말룟이야, 로켓이야!’라고 외치고 할머니 풍의 허브차를 끓여준 적이 있다. 이 도입부에서도 마냐는 그의 이름이 기억 안나서 로켓, 섹스 사말룟(사말룟은 비행기란 뜻이다)이라고 부르고 있다. 특히 로켓. 이 이야기는 로켓과 불꽃놀이, 담배와 차,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글에 언급되는 ‘제냐’는 게냐의 다른 애칭이다. 바냐는 게냐의 동생으로 사이가 좋지 않다. 마냐와는 이따금 자는 관계. 예전에 이 소설 중간중간을 조금씩 발췌했던 적이 있다. 바냐에 대한 언급, 그리고 이 파트 이후 중반부에서 함께 말보로 담배를 피우는 마냐와 미샤에 대한 이야기 등등.
마냐는 마리야의 애칭이다. 마리야 루스타모브나는 이름과 부칭을 함께 부르는 것이다. (루스탐의 딸 마리야) 보통은 존대를 할 때 부칭을 쓴다.
사진 출처는 캡션에 적혀 있듯 pavel demichev. 사실 이 발췌문과 딱 들어맞는 사진은 아니다만(마냐는 외진 곳에 살고 있으므로 옥상에 올라간들 저렇게 아름다운 풍경이 보이지는 않을테니) 그래도 마음에 들어서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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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에 들어 있는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면서 나는 여전히 숨을 죽인 채 문가에 서 있었어요. 로켓은 난간에 기댄 채 어두컴컴한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어요. 아까보다 더 차갑고 센 바람이 불어왔고 로켓이 다시 기침을 했어요. 추워서 그럴지도 몰라요. 재킷도 없이 긴 소매 셔츠만 걸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하얀 날개처럼 보였던 거겠죠. 그때 로켓이 움직였어요. 다시 춤을 추려나 했지만 그게 아니었어요. 잠깐 허리를 굽히는가 싶더니 난간 위로 훌쩍 올라가는 거예요! 난 너무 놀라서 비명을 질렀어요. 그 사람이 뛰어내리려는 줄 알았거든요. 나도 모르게 옥상을 가로질러 난간 쪽으로 달려갔어요. ‘여보세요!’인지 ‘잠깐만요!’인지 하여튼 뭐라고 외치면서 두 팔을 쭉 뻗어서 로켓을 와락 붙들었어요. 너무 다급하게 낚아챈 나머지 한 손으로는 그 사람 셔츠 자락을 잡았지만 다른 손은 허리 아래, 아니, 엉덩이인가 허벅지 어딘가를 움켜쥐었던 것 같아요. 아니에요, 맹세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어요! 어떻게든 떨어지지 않게 잡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거든요. 우리 아파트는 이래 봬도 10층 건물이에요. 옥상에서 떨어지면 즉사라고요. 사실 벌써 몇 명이나 떨어져 죽었어요. 마약 하다가 떨어진 놈도 있고 자살한 계집애도 있고. 사르바르 말로는 총 맞아 죽은 놈도 하나 있었대요.
로켓이 어찌나 빠르게 몸을 홱 틀면서 뒤를 돌아보았는지 내가 쥐고 있던 옷자락이 뜯어질 뻔했어요. 정말 깜짝 놀란 표정이었어요. 아 맙소사, 그때 난 깨달았어요. 이 사람 그냥 난간에 걸터앉아 바깥 구경을 하려던 거였나 봐요! 내가 바보처럼 굴었던 거예요. 게다가, 게다가 난 아직도 그 사람 옷이랑 허리 아래, 아니, 엉덩이인가 허벅지인가 하여튼 몸 어딘가를 손가락이 부러져라 꽉 움켜쥐고 있었거든요. 로켓도 한동안 뻣뻣해진 채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어요. 눈이 동그래진 걸 보니 정말 놀랐던 것 같아요. 근데 나도 놀라고 창피해서 정신이 없었어요. 바보, 얼간이, 천치! 안 그래도 제냐가 얘길 했을 거잖아요. 자길 덮치려고 안달이 난 여자가 불쑥 나타나 엉덩이를 움켜잡고 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할 거예요! 아, 그러고 보니 아직도 내 손이 거기에! 난 급하게 손을 떼면서 변명했어요.
“ 아, 아.... 미안해요, 떨어지는 줄 알고... ”
로켓은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아니, 이 민망한 상황에서 내가 그렇게 말을 했으면 뭐라고 대꾸를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괜찮다고 하거나, 성을 내거나. 하여튼 반응을 해줘야죠. 근데 그 사람은 그냥 가만히 있었어요. 아까처럼 날 빤히 쳐다보고 있었을 뿐이에요. 그래도 동그래졌던 눈이 원래대로 돌아온 걸 보니 놀랐던 건 가라앉은 듯했어요. 대신 한 대 맞은 것처럼 얼굴이 확 굳어졌다가 금세 가면을 씌워놓은 듯 무표정해졌어요. 차라리 계속 눈이 동그래진 채였으면 좋았을걸. 아니면 화를 내면 나았을 텐데. 난 너무 창피해서 마구 횡설수설했어요.
“ 그러니까, 담배 피우러 나왔는데. 있잖아요, 그 난간 위험하거든요. 금도 가고... 바람 불어서,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정말 무슨 일 나는 줄 알고, 지난주에도 601호 류샤가 거기서 떨어져... ”
갑자기 로켓이 웃었어요. 멍해져 있다가 뒤늦게 정신이 든 것 같았어요. 아니, 정신을 차린 건 그 사람이 아니라 나였겠죠. 그 사람이 웃으니까 정말 눈이 부셨거든요! 말문이 탁 막히더니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어요. 그제야 내가 그 사람이랑 거의 가슴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서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러니까, 손만 뗐을 뿐 몸은 꼼짝달싹 못 하고 그대로 굳어져 있었던 거예요. 급하게 뒤로 물러섰을 때 로켓이 말했어요.
“ 고마워요, 마리야 루스타모브나. ”
세상에,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잖아! 딱 한 번 봤는데. 그런데 어떻게 내 부칭까지 알고 있는 걸까요? 내가 말했었나? 그랬을지도 모르죠, 하여튼 그때 난 완전히 만취한 여자처럼 굴었거든요. 게다가... 이렇게도 정중하다니. 레닌그라드에 올라온 이래 부칭까지 불려본 적이 처음인 것 같아요. 난 그냥 마냐인데. 마리야나 마샤라고도 안 해요. 다들 마냐라고 해요. 아빠만 날 만카라고 불렀죠. 이렇게 깍듯하게 마리야 루스타모브나라고 하다니. 난 당황하면서도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어요. 이게 뭔가요. 왜 이러는 거죠? 난 급하게 침을 꿀꺽 삼키고는 바보처럼 실실 웃으면서 말했어요.
“ 그냥 마냐라고 불러요. ”
“ 아, 맞아. 그때도 그렇게 얘기했는데 잊었네요. ”
로켓이 눈을 감았다 뜨더니 다시 살짝 웃었어요. 그러자 그 사람 이름이 퍼뜩 생각났어요.
“ 미샤. 맞죠? 날 기억하고 있었네요? ”
“ 기억하죠. 차도 같이 마셨는데. ”
그리고 툴라 비스킷. 아껴뒀던 과자도 들고 갔었죠. 사실 그때 미샤는 차만 마시고 과자는 먹지 않았어요. 그건 기억나요. 딱 한 입, 그것도 귀퉁이만 잘라서 먹었죠. 하지만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마리야 루스타모브나라니, 세상에. 제냐가 정말 입이 무거운 녀석이란 게 증명됐네요. 내가 뭐하는 여자인지 전혀 말을 안 했나 봐요. 물론 언제 어디서든 해주고 싶다고 한 것도, 섹스 사말룟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던 것도 전해주지 않았던 게 분명해요! 망할 샌님 같으니. 그래도 지금 봐서는 차라리 다행이에요. 미샤가 날 어엿한 숙녀처럼 대우해주고 있으니까요. 부칭까지 챙겨 불러주고. 꼬박꼬박 존대를 하고. 어째선지 사내놈들이고 계집년들이고 날 보면 초면에도 무조건 반말을 하는데 말이에요. 내가 구르는 바닥이 그래서 만나는 인간들도 다 비슷비슷한 것들이라 그렇겠지만요. 아, 하긴 제냐도 나한테 말을 놓지 않아요. 대신 마냐라고 부르죠. 걔는 내 부칭 따윈 관심도 없을 거예요, 들었어도 잊어버렸겠죠. 제냐는 좀 냉정하다고 해야 하나, 주변에 무심한 타입인 것 같아요. 바냐는 안 그런데. 기분 좋을 땐 립스틱도 가져다주고 손톱만한 미니어처 향수도 갖다주면서 ‘마냐, 아줌마도 돈 벌려면 가꿔야지. 좀 찍어 바르면 지금보다는 예뻐 보이겠지’ 하고 농을 걸곤 해요. 못돼먹은 애송이지만 세심한 구석이 있죠. 바냐 생각을 하자 갑자기 위장이 콕콕 찌르는 듯 쑤셨어요. 망나니 자식들이 잘해주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니까요.
미샤는 아직도 난간에 걸터앉아 있었어요. 몸만 뒤로 틀고 있을 뿐 다리는 난간 아래에, 허공에 나가 있었어요. 어쩐지 뒷목덜미가 오싹한 느낌이 들었어요. 류샤 때문이에요, 601호 그 계집애. 바로 여기쯤에서 떨어졌을 테니까요. 이쪽 난간이 좀 낮거든요. 이라 아줌마는 걔가 스스로 뛰어내렸다고 했어요. 구두를 벗어놓은 걸로 봐서 누가 민 것 같지는 않다고. 이유는 아무도 몰라요. 빚을 졌는지 남자한테 버림받은 건지 뭐였는지. 걔는 마약 같은 건 안 했는데. 심지어 사내들이랑 어울리는 것도 본 적이 없었어요. 하긴 걔는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애였으니까 내가 못 본 게 많겠지요. 학교 선생이었는데, 멀쩡한 직장에 다니던 아가씨였는데. 나랑은 대놓고 말을 섞진 않았지만 그래도 마주치면 인사는 꼬박꼬박 했었는데. 치마를 입은 여자애가 구두를 벗고 난간 위로 올라가려면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요. 아마 기어 올라가야 했을 거예요. 류샤는 나보다도 키가 작았으니까요. 미샤는 구름처럼 훌쩍 올라갔는데. 그러자 또다시 목덜미 솜털이 곤두서고 온몸이 떨려와서 난 그 사람의 옷자락을 잡아당겼어요.
“ 그만 내려와요. 바람이 많이 불어요. ”
“ 여기가 시원하고 좋은데. 탁 트여 있고. ”
“ 안 내려오면 나도 올라갈 거예요. ”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아마 걱정이 됐기 때문일 거예요. 아까 춤추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어요. 여전히 그 사람이 뛰어내리거나 헛디뎌 떨어질 것 같아서, 아니, 그보다는, 우스운 소리지만, 날아가 버릴 것 같아서 두려웠어요. 춤출 때 꼭 그런 느낌이 들었으니까요. 옥상 바깥으로 휙 날아가는 것도 전혀 이상해 보일 것 같지 않았어요. 심지어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지도 않았어요. 로켓처럼 위로 계속해서 솟구쳐 올라가거나 새처럼 허공에 팔랑팔랑 떠 있을 것만 같았어요.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런 건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러면 이 모든 게 꿈이라는 거잖아요.
미샤가 손을 내밀어 내 팔목을 꽉 잡으면서 말했어요.
“ 혼자 올라오긴 힘들걸요. 잡아줄게요. ”
미샤는 무슨 인형이나 강아지를 안아 올리듯이 날 난간 위로 올려주었어요. 아주 힘이 셌어요. 오른손만으로 날 끌어올렸거든요. 왼손은 내 허리에 살짝 댔을 뿐이었어요. 그리고 손이 정말 따뜻했어요. 한순간에 나는 난간 위에 앉아 있었어요. 이 위에 올라와 본 적은 처음이었어요. 사실 난간 근처에는 잘 가지도 않아요. 고소공포증까지는 아니더라도 높은 곳을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 데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머리가 엉망이 되거든요. 대신 벽에 기대어 앉는 건 좋아하지요.
바람은 잠잠해져 있었어요. 난간 윗면은 생각보다 폭이 넓어서 걸터앉기 편했어요. 하지만 발밑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적응이 되지 않았어요. 그나마 어두컴컴해서 아래가 거의 내려다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무섭지는 않았어요. 아마 미샤가 여전히 내 팔을 꽉 잡고 있어서일지도 몰라요. 미샤는 내 곁에 바짝 붙어 앉아서 정면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주 잠깐이었지만 이 남자가 사실은 완전히 미친놈이라서 나랑 같이 뛰어내리려 하거나, 혹은 날 확 떠밀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공포심에 사로잡혔어요. 잘생기고 섹시하다고 해서, 목소리가 근사하다고 해서, 손이 따뜻하다고 해서 믿을만한 남자라는 뜻은 아니지요. 자고 싶은 거랑 믿을 수 있는 사람이란 건 다르니까요. 나는 원체 산전수전을 다 겪었단 말이에요.
...
이 뒤로는 마냐가 자기가 겪은 ‘산전수전’에 대해 언급하는 얘기가 나오는데 발췌가 길어지기도 하고 약간 19금이라 여기서 줄인다.
엘스카 커피는 필리모 거리와 다른 거리가 만나는 접점 삼거리 모퉁이에 있다. 재작년 필리모 거리를 걸어내려오며 신호 기다리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며 ‘와 저사람들은 앉아 있고 나는 걸어가고 있네, 나는 힘들다’ 라고 생각했고 ‘한번 들어가볼까‘ 했는데 외관은 엄청 미니멀리즘 같아서 안 들어갔었다. 그런데 돌아온 후 영원한 휴가님이 이 카페 화장실에 보위 사진이 있다고 하고 작년엔 여기서 러브라믹스 티포트도 사다주셔서 궁금해졌다. 숙소에서 멀지도 않았다. 테이스트 맵에서 숙소로 내려오는 길에 있기 때문에 오늘 밥 먹은 후 들러보았다. 이미 커피를 마셨으니 좀 과한가 했지만 올리비에 샐러드가 차가웠고 또 내려오는 길이 추웠던지라 카페로 쏙 들어가게 되었다.
어머나 그런데 여기가 너무 좋은 게 아닌가. 지금까지 빌니우스에서 갔던 곳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카페로 꼽히게 되었다. 아마 스타일 때문인 것 같다. 왜냐하면 커피를 마신데다 디저트는 별로 맛있어 보이지 않아서 홍차 대신 추위를 달래기 위해 핫초콜릿을 마셨기에 음료가 어떨지는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이곳 내부 인테리어와 분위기가 딱 내가 좋아하는 카페 취향이었다.
돌아와서 사진들을 보면서 깨달았다. 아, 여기는 본치 카페를 좀 닮았구나. 색채도, 몇몇 종류의 테이블과 의자, 소파를 배합한 스타일도, 조명도, 걸려 있는 그림들도. 과하지 않으면서도 아늑하고 빛이 잘 들어서 정말 내가 좋아하는 타입의 카페였다. 카페 에벨의 편안함과 아늑함, 본치 카페의 스타일리쉬함이 섞여 있다고 해야 하나.
여기도 사람 많은 곳이라 아래쪽 홀에 앉았으면 덜 좋았을 거 같은데 마침 내가 반단 정도 복층으로 올라갔을 때 맨 안쪽 창가 자리가 나서 얼른 그리로 들어감. 앉고 나서 보니 이 자리가 제일 좋은 자리였다! 안쪽 콘센트도 있고 창가에 딱 붙어서 바깥 구경도 할 수 있고 홀 전체가 다 내려다보이고, 심지어 내 테이블도 노트북이나 태블릿 스케치, 책 읽기 좋은 단단한 목재 빈티지에 연한 무지개색 컬러가 들어가 있었다.
엘스카는 무지개가 상징인 것 같다. 재작년에도 지나가면서 이 무지개 무늬(깃발이었는지 장식이었는지 가물가물)를 봤어서 기억에 남았음. 그러고 보니 여기는 블라디보스톡의 카페마랑도 좀 비슷하다. (카페마에 무지개 테이블이 있다. 그리고 스타일도 비슷함) 역시 취향이란 한결같은 듯하다.
화장실에 가봤는데 이번엔 보위 사진은 없고 각종 낙서 스티커, 바스키아와 키스 헤링 모사 낙서가 있었다. 그리고 빨간 잔에 코코아를 줘서 더 좋아짐 :)
맘에 드는 카페의 테이블에 앉아 무척 좋아하는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소설을 읽으니 행복했고 여행 와서 휴식하는 느낌이 딱 들어서 좋았다. 카페 에벨에서 느꼈던 기분이랑 좀 비슷했다. 앉아서 글 쓰고 싶어지는 카페였다. 그런데 이 자리가 아니면 그만큼 좋지는 않으려나.
내가 앉아 있는 동안에도 손님이 무지 많이 왔다. 내 옆자리 테이블엔 귀여운 갈색 푸들을 데려온 여인들이 앉았는데 푸들이 얌전하게 담요 깔고 엎드려 있다가 뭔가를 보고 웡웡 짖었다. 아 이것도 코기가 있었던 카페 에벨이랑 비슷하네.
여기는 숙소에서도 가까우니 가기 전까지 여러번 들를 것 같다. 그런데 홍차가 맛있지는 않을 것만 같음. 핫초콜릿은 나쁘진 않았는데 우유가 많이 들어서 연했다. 그리고 별로 뜨겁지 않고 미지근했다. 우유를 넣어줘서 그런가보다. 라떼도 그렇고 우유 온도를 너무 높게 하면 비린내가 나기 때문에 스팀밀크 넣을 때 좀 미지근해진다는 얘길 어디선가 읽었음. 나는 보통 우유 든 음료를 안 마시고 한국에선 밀크티도 아이스만 마시니까(그리고 아이스 딸기라떼 정도만) 이건 다 주워들은 얘기임.
맘에 드는 이쁜 카페니까 사진 많이. 또 가야지.
창 너머. 이건 첨에 앉은 자리.
외관. 바깥만 보고 미니멀리즘이라 착각했는데 지금 보니 창문과 조명 비치는 것도 좀 본치랑 비슷했네. 왜 미니멀리즘이라 생각했었지? 아마 저 야외 테이블과 의자 때문에 첫인상이 그랬나보다(그래서 그때 안 들어갔나보다)
내가 득템한 명당자리~ 파스텔톤 무지개컬러 빈티지 테이블~
이렇게 보니 정말 본치 카페 닮음. 미니 본치.
빨간 잔~ 역시 빨간색은 배신하지 않음.
왼편이 내 코트. 여행 온다고 지른 후드 달린 코트인데 저거 안 가져왔으면 진짜 추웠을듯. 내 취향 컬러가 아니라서 고민했었는데 풍덩해서 편하다.
그림들도 과하지 않아 좋음. 작은 그림들엔 판매가도 붙어 있었다. 카페 옆엔 갤러리도 있어서 혹시 연관되어 있나 궁금했다.
테이스트 맵은 빌니우스에서 꽤 유명한 로스터리 카페라고 한다. 재작년에 첨 왔을 때 영원한 휴가님께서 카페들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추천 리스트를 짜주셨는데 관광지와는 좀 떨어져 있어 가보지 못했던 곳이다. 이번에도 ‘아 걸어가기 좀 힘들거 같은데’ 하다가 볼트를 타고 가보았다.
커피가 유명한 곳이니 나도 커피를 시켜보았다. 사실 조식 먹은지 얼마 안되어 차를 마시기 어려웠고(차를 마시면 케익이 먹고픈데 배가 불러서), 일년에 한번쯤 여행 와서 커피 맛있다는 곳에서는 카푸치노를 마셔보게 된다. 카페 에벨이나 헤드샷 커피, 카페마, 카페 첸트랄 뭐 그런 곳들처럼. 커피 잘 못마시는 나에게는 라떼가 더 낫지만 양도 많고 우유가 많이 들어있는지라 ‘그래도 카푸치노가 더 클래식하지 않나’ 라는 나만의 –좀 신빙성 없는- 기준으로 카푸치노를 시켰다.
사람이 엄청 많았다. 카페 입구가 좁았고 홀과 홀을 잇는 복도도 좁아서 사람들이 바글거렸고 셀프서비스도 아니다 보니 잔을 나르는 점원들이 고생이었다. 나는 2층으로 올라갔다. 천정이 낮은 복층 구조인데 다닥다닥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이 카페는 미니멀리즘 스타일로 되어 있어 인테리어 자체는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또 창가 쪽 구석 테이블에 짱박히자 콘센트도 있고 책 읽기는 나름 편해서 아이패드 가져왔으면 스케치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스케치 안 한지도 엄청 오래됨.
카푸치노는 내 입맛엔 좀 쓰고 강했는데 여기는 설탕도 곁들여 주지 않았다. 커피부심이 엄청난 곳인가보다. 아래층에 가서 설탕 한봉지 가져왔는데 ‘정말 넣고 싶냐?’ 라고 적혀 있어서 ‘너무해’ 란 생각이 들었음. 근데 이탈리아에서도 카푸치노 시키면 설탕 준단 말이야, 아니면 넣으라고 옆에 쌓여있고... 다들 넣던데... 설탕을 한봉지 넣었더니 카푸치노가 매우 맛있어짐 ㅎㅎ 커피에 대한 조예는 없지만 맛있는 카푸치노라는 결론을 내림. 근데 나는 이것보다는 조금 더 부드러운 카페 에벨 쪽이 더 좋긴 하다. 아마 내가 홍차도 부드러운 다즐링을 좋아하기 때문일지도.
책 읽고 있으니 아이들이 자유시간을 갖는 틈새 타임에 영원한 휴가님께서 들러주셨다. 에스프레소 마끼아또를 시키고 전에 내가 궁금해했던 파리 브레스트를 디저트로 시켜오심.
그런데 파리 브레스트 분명 뻬쩨르 카페 사진에선 엄청 이뻤는데 여기 나온 디저트는 납작하고 안 예뻤다 ㅎㅎ 크림은 아주 달달했다. 둘이 나눠먹어 다행이었음. 에스프레소 마끼아또가 맛있다고 하셨다. 이 카페에 자주 오시진 않으나 오시면 ‘아 여기 커피는 맛있다’라고 생각하게 되신다고 함. 나라면 ‘아 여기 차 맛있다’ 라고 생각하면 (가까울 경우) 자주 올 텐데 :)
여기도 러브라믹스 잔들을 썼다. 특이한 건 여기는 검정색 잔들을 쓴다는 것. 이것까지 정말 미니멀리즘이다. 그런데 여기는 검정색 잔이 잘 어울렸다. 내부 인테리어는 미니멀리즘이라 막 아름답진 않았고 또 사람이 많아서 사진 찍기가 어려웠기에 커피랑 잔 사진들 대부분으로 테이스트 맵 마무리. 커피 좋아하시는 분들은 빌니우스에 오시면 꼭 들러보세요~
이게 내 카푸치노. 설탕 넣기 전.
대기 번호. 손님이 많은데다 1층 홀 두개, 복층에도 자리가 있어 점원들이 고생... 근데 홀이 여럿이라도 넓진 않음.
디저트 진열장. 나는 카푸치노만 시켰는데 (커피 맛있는 데는 디저트 맛없다고 하셨던 영원한 휴가님 말씀이 기억나서), 이때도 파리 브레스트가 궁금했는지 사진에 들어가 있음 ㅎㅎ
이건 에스프레소 마끼아또. 클로즈업해서 캐푸치노랑 같아보이지만 맨 위 사진 보면 큰게 내 카푸치노, 작은게 이거.
생각보다 안 이쁘고 덜 맛있었던 파리 브레스트. 내가 뻬쩨르 카페 인스타에서 보고 이상을 품게 된 놈은 뭔가 하얀 크림이 몽실몽실 들어 있고 이쁜 비주얼이었는데 ㅎㅎ
앞 테이블들 손님들이 다 마시고 남겨둔 검정 잔이 이렇게 도열해 있으니 또 미니멀리즘 어울리고 이쁨. 근데 정말 작은 테이블들이 이렇게 다닥다닥이라 좁긴 했다.
사진은 오늘 늦은 점심 먹은 후 두번째 카페 가는 길에 발견한 꽃집 장식. 참으로 무심하고 무성하다. 빌니우스 건물들에는 조화 꽃장식이 많은데 하나같이 엄청 무성하고 스타일 과잉이라 깜짝 놀라게 된다. 이녀석은 그런 꽃들은 아니지만 그 무성함과 막 모아두는 느낌은 비슷함. 문 앞에도 호박과 갈대 장식이 되어 있었는데 아마 가을/핼로윈 느낌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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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많이 걸어서 너무 피곤했는지 9시까지 자고 또 잤다. 7시쯤 깼다가 도로 자기를 반복했는데 여행 와서 제일 많이 잤다. 더 자고 싶었는데 조식 먹으러 내려가야 해서 9시에 억지로 일어났음. 조식 신청을 해놓으면 끼니 챙기기가 수월해서 좋긴 한데 아침에 맘껏 게으름피울 수가 없다. 이러다 어떤 날은 안내려갈지도...
오늘은 다시 흐려지고 싸늘했다. 기온 자체가 아주 낮지는 않았으나 음습하고 흐린 날씨였다. 빌니우스 와서 이틀 연달아 많이 걸었으므로 오늘은 움직임을 최소화하기로 하고 재작년에 왔을 때 영원한 휴가님이 추천해주신 카페 중 안 가봤던 ‘테이스트 맵’ 에 가보기로 했다. 커피가 맛있는 곳으로 로컬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이다. 그런데 구시가지 쪽은 아니어서 길찾기가 좀 까다로웠고 많이 걸어야 하는 것 같아서 나는 ‘에이 볼트 불러~’ 하며 택시를 타고 갔다. 볼트로는 5분밖에 안 걸렸다. 숙소가 있는 게디미나스 대로를 따라가다가 꺾어서 공원 곁을 지나 쭉 올라가니 나왔는데 오르막이라 걸어서 갔으면 고생했을 듯(돌아올 땐 내리막이니까 걸어왔는데 추웠다)
카페 얘기는 따로 올리기로 하고... 카페에 앉아 책을 좀 읽고 있으니 영원한 휴가님께서 잠깐 들르셨다. 자택에서 그렇게까지 멀진 않아서 킥보드를 타고 오셨다고 함. 빌니우스에서 다시 보니 또 반가웠다.
카페에서 나와 근처의 정교 성당(성 콘스탄틴과 미하일 성당이라고 했다)에도 들어가 보았다. 성당은 정교 성당치고는 외관이 덜 화려했고(크기는 했지만), 내부에는 의자도 있고 조명이 밝아서 약간 카톨릭 성당이랑 섞인 느낌이었다. 그러고보니 새벽의 문 근처 정교 성당도 좀 그런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내가 가고 싶었던 우크라이나 음식점이 근처라 거기까지 안내해주신 후 귀가하셨다. 일요일이라 가족들 챙겨야 하는데 얼굴 보러 나와주셔서 고마웠다.
음식점 이름은 ‘보르쉬’였다. 당연히 보르쉬를 먹어야지~ 그런데 여기는 식당이 작지도 않은데 카운터 점원이 하나 뿐이었고 그나마 자리에도 잘 없어서 들어간 후 주문받을 때까지 15분 이상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다른 테이블 손님들도 마찬가지... 그리고 메뉴는 생각보다 많지 않아서 수프 외에는 펠메니, 치킨 키예프, 치킨 타바카, 거위구이, 달달한 블린, 그리고 올리비에 등 샐러드 정도였다. 그래서 보르쉬 작은 거랑 새우랑 연어 든 올리비에를 시켰다. 보르쉬는 맛이 깊고 맛있었는데 상당히 기름졌다. 나는 기름기가 덜하고 야채가 더 많고 비트 색이 더 빨간 걸 선호하긴 하지만 그래도 따뜻하고 맛있었다. 그러나 보르쉬를 다 먹고 나서도 한참 기다려서야 올리비에가 나와서 그사이 배가 찼고 수프 없이 올리비에만 먹기엔 좀 추웠다. 우리나라처럼 음식이 한번에 다 나오면 참 좋겠는데 ㅎㅎ 그래서 올리비에는 좀 남겼다.
샐러드를 먹고 나서 나왔더니 다시 추웠다. 거슬러 올라가다 필리모 거리를 쭉 따라 내려가면 두 번째로 가려던 엘스카 커피, 그리고 숙소가 있는 게디미나스 대로가 나오는 루트였는데 구글맵을 찍었더니 지름길을 알려줘서 공원을 가로질러 내려가게 되었다. 근데 이 길이 상당히 추워서 괴로웠음. 기억을 더듬어보니 재작년에도 이 필리모 거리는 넓고 바람불고 좀 힘들었다. 이웃 거리도 좀 그랬는데 아마 버스가 다니는 도로변이라 그런가보다. 응달 쪽은 이미 나뭇잎이 노랗게 변해 있었고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공원을 지나자 엘스카 커피가 나왔다. 나는 이 엘스카 커피가 무척 마음에 들어서 또 갈 것 같다.
엘스카에서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소설을 4분의 3쯤 읽은 후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드로가스에 들러 바디로션과 립밤을 샀다. 수면양말도 사려고 했으나 한 켤레에 5.99유로나 해서 ‘우왁 넘해’ 하며 안 삼. 바디로션은 종류가 별로 없어서 무난한 뉴트로지나를 샀는데 세가지 종류가 있었다. 내가 산 이것보다 좀더 보습 잘되는 ‘아주 건조한 피부용’ 시카 바디로션이 있어 고민하다가 그런 건 흡수가 빨리 안돼서 이걸 샀는데 막상 목욕하고 발라보니 그냥 그거 살걸 그랬다. 내 피부가 그렇게 건조하진 않은데... 물 자체가 석회질이 있어 그럴지도.
목욕을 하고 좀 쉬다가 누룽지 따위로 간단히 저녁을 먹고 이제 오늘의 메모를 적고 있다. 오늘은 볼트를 타고 갔던데다 카페 두 곳, 식당 한 곳이 전부라 다리가 안 아프고 좋다. 발품 파는 건 다리 아프고 힘든데 역시 자본의 힘이란...
간밤에 예전에 쓴 글들을 좀 뒤적여보았다. 올해는 글을 쓰지 못해서 불만족스러운 나날이다. 연초부터 아빠가 아프시고 회사 업무도 너무 힘들어서 작년에 시작한 글을 1월에 마친 이래 새 글을 전혀 쓰지 못했다. 여기 와서 뭐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오늘 메모는 이렇게 줄인다. 사진들 아래 몇 장. 사실 오늘은 거의가 카페 사진들이라 나머지 사진은 별로 없음. 걸어내려오는 길은 좀 황량하고 썰렁했고 추워서 사진 찍기 어려웠음.
오늘은 3.3킬로, 5,370보. 확실히 볼트 덕분.
이게 성 콘스탄틴과 미하일 정교 성당.
지름길 공원.
보르쉬. 뽐뿌슈까 빵을 준대서 ‘오 좋아 제대로야’ 하고 좋아했지만 마늘버터로 구운 브리오슈가 아니라 모닝빵 타입이었고 마늘기름을 따로 줌.
새우와 연어 든 올리비에. 좀 짰다. 난 기본 올리비에로 저렴하게 내주는게 좋은데 레스토랑들은 항상 거기에 소고기니 새우니 추가해 비싸져서 아쉽다.
숙소에 돌아오니 3시 즈음이었다. 청소가 되어 있어 좋았고 해가 나서 방 안에 햇살이 가득한 것도 좋았다. 물론 눈 때문에 홑겹 커튼과 암막커튼 약간을 쳐야 했지만.
너무너무 배고파서 컵라면이랑 키비나이를 세팅해서 정신없이 먹음. 가벼운 조식 먹은 후 콩알만한 슈 하나가 전부에 이미 3시라 너무 배고팠다. 오 근데 저 컵라면이 의외로 맛있었다! 국물도 진하고 건더기도 엄청 많고 라면도 우리나라 컵라면보다 더 많이 들어있고. 전혀 맵지는 않았지만 국물이 진하고 우리나라 컵라면보다 조미료인가 향신료인가 하여튼 그런 맛이 더 강했다. 떨고 들어와선지 맛있게 먹었다. 키비나이는 좀 아쉬웠다. 닭고기만 들어있어서. 버섯 든 거 살걸... 닭이랑 버섯 같이 넣어주면 더 맛있었을텐데. 하지만 컵라면 국물이랑 잘 어울렸음.
첨엔 어제처럼 좀 쉬었다가 근처 카페에 가서 책 읽을까 했었지만 네시간 남짓 동안 8킬로 넘게 걷고 들어온 터라 다시 나가지 않을 것 같아서 들어오는 길에 숙소 근처에 있는 조그만 Lo Cafe 라는 마카롱 카페에서 마카롱 두개를 테이크아웃해왔었다. 나는 마카롱을 별로 즐기지는 않는데 카페가 귀여워서 궁금했고 마카롱은 작으니까 부담이 없어서.
오늘 나의 실패는 리미 슈퍼에서 사온 차였다. 그냥 티백 사려 했는데 슈퍼에도 다즐링은 없었다. 스코니스 이르 크바파스에서 나온 종이포장 잎차가 있었는데 리가의 파루나심 카페에서 마셨던 차에 적혀 있던 단어를 떠올려보면 분명 '백차'로 추정되는 차가 있어 그걸 샀으나 방에 와서 뜯어보니 각종 빨간 열매와 꽃잎이 섞여서 엄청 가향 티였다 ㅠㅠ 그래서 방에 있는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티백을 우려야 해서 좀 아쉬웠음. 하여튼 방에서 다시 조그만 티타임 +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책을 읽으며 좀 쉬었다.
어제 슈퍼에서 라즈베리 사온 걸 깜박 잊고 있었다. 라즈베리는 달지 않고 좀 시었다 ㅠㅠ 그래서 50프로 할인을 했나. 하여튼 방에 있는 티백과 찻잔 활용. 마카롱은 라즈베리 플롬비르와 시트러스 두 개였는데 이게 우리나라처럼 뚱카롱이라 신기했다. 마카롱이 커서 플롬비르만 먹고 시트러스는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우리나라 뚱카롱이랑 똑같음. 신기신기.
쿠야에게 마카롱과 라즈베리 대접. 빈대 나올까봐 쫄고 켐핀스키보다 좀 소박해진 방에 뚜떼해졌던 쿠야는 이제 좀 기분이 나아진 것처럼 보임. 그건 그렇고 간밤엔 불 끄고 잤는데 물린 데가 없었다. 빈대는 없는 것 같고 아무래도 물이 건조해서 그런것 같다. 오늘 피곤해서 바디로션을 못 샀는데 내일 드로가스에 가서 보습 잘되는 로션을 사야겠다.
차 마신 후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고 머리를 감고 말린 후 침대에 들어가 좀 쉬었다. 간신히 잠들지는 않았다. 일찍 들어왔으니 오늘의 메모도 빨리 쓰고 스케치도 하고 책도 읽으려 했는데 어째선지 금세 또 밤 열시가 다 되어가네... 아, 이 메모들 쓰기 전에 업무메일을 확인했다. 회사에 온갖 피곤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ㅠㅠ 나와 있어서 좋긴 한데 마음 한구석은 불편하다. 상황이 언제 좋아질지 모르겠네.
오늘 날씨는 좋았으나 내일은 낮부터 또 비가 온다고 한다. 내일은 전에 영원한 휴가님이 추천해주셨던 카페 리스트들 중 한두곳에 가보는 걸로... 비오면 볼트를 불러 타고 가야지. 이렇게 기나긴 오늘 메모 끝. 2부는 순전 방에서 뭐 먹은 얘기만 있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