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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발췌한 이야기는 21년 겨울에 마무리했던 단편 <눈의 여왕>의 도입부 몇 페이지이다. 나는 21년부터 22년까지 90년대 후반의 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나의 오랜 주인공인 미샤가 등장하는 세 편의 소설을 썼다. 아주 짧은 단편 <판탄카의 루키얀>, <눈의 여왕>, 그리고 세 편 중에서는 가장 길고 심리적으로 복잡한 중편 <구름 속의 뼈>였다. <판탄카의 루키얀>은 97년 10월의 어느 비가 많이 오는 날, 후자의 두 편은 그로부터 한 달 뒤, 역시 비와 눈이 오는 날의 페테르부르크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이었다. 이후 나는 작년 가을부터 올 초까지 이 97년 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하는 단편 <4월의 로켓>을 하나 더 썼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단편은 앞의 세 편보다 몇 달 전인 4월에 일어난 이야기를 다뤘다. 
 


 
이 90년대 시리즈에서 미샤는 단독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대신 새로운 심리적 화자들 뒤로 빠져 있고 좀 다른 식으로 존재했다. 소설들은 소련 시절의 키로프-90년대 현재의 마린스키 극장 마사지사인 루키얀, 미샤의 발레단 수석무용수이자 그와 미묘한 관계를 맺고 있는 청년 게냐(덜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제냐라고 불린다), 그리고 게냐가 사는 허름한 아파트의 이웃이자 창녀인 마냐의 시점에서 전개되었다. 중간의 <눈의 여왕>과 <구름 속의 뼈>는 쌍둥이 같은 소설이고 아주 긴밀하게 뒤얽혀 있으며 시간 차도 이틀 밖에 나지 않는다(후자가 더 먼저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다른 단편들도 느슨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인물과 이야기들도 서로 다른 식으로 조응한다. 
 
 


<눈의 여왕>과 <구름 속의 뼈>를 이끌고 가는 실질적 주인공은 20대 초반의 남자 무용수 게냐 카르사비예프이다. 그는 마린스키 극장에서 몇년 춤추다가 고전발레와 그 조직 내의 한계에 부딪치고 새롭고 유의미한 무언가를 찾아서 미샤의 발레단으로 이적했다. 이 90년대는 이미 페레스트로이카와 소련 붕괴가 일어난 이후이며 7~80년대에 무수한 억압과 고통을 겪었던 미샤는 이제 자신의 발레단을 꾸렸고 국제적으로도 상당한 성공을 거둔 상태이다. 이 소설들은 미샤의 성공이나 고군분투나 실질적인 극장과 예술 자체를 다루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 시리즈는 관계와 감정에 대한 이야기들이었고 아직은 미숙하고 그만큼 열렬하면서도 조금은 결벽적이고 또 모호하기 짝이 없는 게냐의 고민을 다뤘다. 앞의 3편에서 드러나지 않던 미샤의 속내에 대해서는 마냐의 시선으로 전개된 <4월의 로켓>에서 조금씩 언급되었다. 
 


 
발췌한 에피소드는 <눈의 여왕>을 시작하는 이야기였다. 이 글은 내게 많은 의미가 있었지만 시작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게냐를 차에 태워서 공항으로 이어지는 모스크바 대로로 보냈다. 그리고 좋은 차, 괜찮은 차, 너무나도 소련다운 낡은 차, 아주 근사한 차에 대한 이야기들로 소설을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미샤 정도로 잘 나가는 예술가이자 셀레브리티라면 당시 자본주의가 범람하던 혼란스러운 페테르부르크에서 반드시 몰아야 할 것처럼 보이는 허세 넘치는 메르세데스로 시작해서 그때만 해도 상당히 괜찮은 차로 평가받았던 도요타, 미샤의 친구이자 화가인 키라가 몰고 다니는 낡은 소련 시절 자동차 지굴리, 그리고 미샤보다도 훨씬 선배 예술가가 몰았던 빈티지 포르셰. 하지만 중요한 건 물론 차 자체가 아니라 다른 것들이고 게냐도 차들을 빗대어 다른 이야기를 한다. 
 


 
사진 속 차는 바로 지굴리 :) 구글링해서 찾았는데 너무나도 내 기억 속의 옛 지굴리와 비슷한 느낌이라 올려봄. 주변 풍경마저도 찰떡. 이 지굴리는 미샤의 본편을 패러디한 외전 서무의 슬픔 시리즈(동명의 별도 폴더 참고)에서 주인공 단추청년 베르닌이 굴리는 낡은 차종이기도 하다(그나마도 후반부 에피소드에선 눈보라에 미끄러져 나무 들이받고 박살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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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스크바 대로로 나왔을 때 게냐는 속도를 더 올렸다. 그는 이 차를 끌고 나오는 것이 좀 부담스러웠지만 지나이다를 데리러 공항에 가겠다고 하자 미샤가 불쑥 그럼 내 차 가져가라고 말한데다 그날따라 다른 차를 구할 수도 없었다. 업무용 차량은 무대 디자이너를 비롯해 이미 세 명이나 줄을 서 있었고 그가 가장 마음 편하게 빌리곤 했던 키라의 지굴리는 정비소에 들어가 있었다. 미샤에게는 차가 두 대 있었으니 그중 하나를 써야 한다면 그나마도 상대적으로 검소한 도요타 SUV 쪽이 나았지만, 봉기 광장과 아니치코프 다리 쪽에서 화보 촬영이 있다면서 미샤가 그 차를 타고 가 버렸다. 게냐는 어떻게든 차를 바꿔보려고 미샤에게 보그 촬영이잖아요. 그럼 있어 보이는 차를 몰고 가요. 도요타는 내가 가져갈 테니까라고 말해 보았다. 미샤는 다 찌그러지고 유리창이 두 개쯤 깨진 지굴리 정도는 돼야 그런 촬영장에 갈 때 있어 보이는거라고 대꾸했고 보그 따위보다는 여왕님이 훨씬 중요하니 잔말 말고 큰 차를 가져가라고 했다. 그리고는 어차피 난 운전도 안 하잖아라는 말과 함께 회오리처럼 아래층으로 사라져버렸다.

 

 

 

 적어도 마지막 말만큼은 맞았다. 미샤는 운전대를 잡는 일이 드물었다. 언젠가 안나는 그가 감독님이고 높으신 분이기 때문에 기사가 운전해주는 고급 차가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라고 비아냥거렸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미샤는 운전 솜씨가 형편없었다. 교통 신호를 부지기수로 위반했고 차선도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다. 과속에 대한 감각도 아예 없었다. 세상에는 절대로 운전대를 맡길 수 없는 종류의 인간이 있는 법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라면 발레단 스태프들과 무용수들뿐만 아니라 주변 모두의 의견이 일치했기 때문에 웬만하면 누구든 자원해서 운전을 해줬고 걸리적거리기만 하는 미샤를 뒷좌석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

 

 

 

 마지막으로 미샤가 직접 차를 끌고 나갔던 것은 몇 주 전에 길에서 주워서 잠시 돌봤던 고양이를 키라에게 데려다주러 갔을 때였다. 다른 경우였다면 게냐가 대신 갔을 테지만 그 망할 놈의 고양이는 그를 너무 싫어해서 보기만 하면 하악질을 하며 위협을 해댔다. 게냐도 고양이라면 질색이었던데다 그 녀석이 덤벼들어서 두 번이나 피를 봤기 때문에 집이든 차 안이든 같은 공간에 있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미샤가 고양이와 인간 양측의 평화를 위해나선 것이었다. 미샤는 어찌어찌 키라가 사는 동네까지는 무사히 도착했지만 역시나 주차를 하다가 사이드미러를 날려 먹었다. 키라에게 귀가 닳도록 잔소리를 듣자 그래도 면허증은 있는데. 당과 국가가 발급해준 거니까 어쨌든 자격은 있는 거 아냐라고 투덜거렸다가 본전도 찾지 못했다. 하지만 미샤가 이렇게 불평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보통은 자신의 운전 실력이 엉망진창이라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오히려 게냐가 보기에는 하기 싫은 운전을 남이 해주니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미샤는 차 자체에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자기 차 종류도 제대로 외지 못해서 보통은 까만 거’, ‘파란 거라고 불렀고 그나마 좀 더 세심할 때는 큰 차일본 차로 구분했다. 게냐는 최상위 기종의 메르세데스 벤츠를 까맣고 큰 차라고 부르는 건 미샤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미샤는 그 차를 자기가 고른 것도 아니었다. 절친한 사업가인 안톤 트리포노프가 이제 이놈은 지겨워졌고 애초부터 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라는 이유로 작년에 미샤에게 넘겨준 것이었다. 겨우 석 달밖에 사용하지 않았으니 새 차나 다름없었고 유행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벼락부자 비즈니스맨의 취향대로 오디오부터 시트까지 최고급으로 내장되어 있었다. 벼락부자 비즈니스맨이라는 건 미샤가 트리포노프를 부르는 별명이었는데, 상대방은 면전에서 그런 말을 듣고도 화를 내기는커녕 부자라는 걸 알아줘서 고맙지 뭐야라고 대꾸하며 싱글거리곤 했다.

 

 

 

 트리포노프는 이따금 미샤나 지나이다와 식사를 하곤 했는데 한번은 게냐도 초대를 받아서 그의 호화스러운 별장에 간 적이 있었다. 미샤와 트리포노프는 벼락부자니 마피아니 하는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처럼 보였다. 그러나 게냐가 샴페인을 두어 잔 마셨을 때 지나이다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저런 농담은 저 바보만 할 수 있는 거야. 넌 엄두도 내지 마. 저 사람하고 눈도 마주치지 마라고 심각하게 경고했다. 이후 게냐는 트리포노프가 진짜마피아이며 예전에 도심의 어느 고급 호텔에서 일어났던 총격전의 배후로 거론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트리포노프가 마피아라는 사실에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어차피 모든 노브이 루스키는 마피아였으니까. 지나가 그를 어린애 취급한다는 것에 조금 기분이 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미샤에게는 어쩐지 화가 났다. 아마 그래서 이 메르세데스를 끌고 나오는 데에 더 거부감이 들었는지도 몰랐다.

 

 

 

 게냐는 트리포노프가 미샤에게 이 차를 얼마에 넘겨준 것인지 전혀 몰랐다. 아마 공짜로 줬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혹은 기부 따위의 형식적인 절차를 거쳐 거의 상징적인 금액만, 그것도 서류상으로만 주고받았을지도 모른다. 트리포노프는 발레단에도 공식적으로 후원을 여러 번 했다. 자기는 혁신적이고 세련된 젊은 기업가니까 마린스키나 볼쇼이를 후원하는 것은 촌스럽고 미샤의 발레단 쪽이 훨씬 쿨하다고 했다. 트리포노프는 실험영화제를 개최하는가 하면 현대 미술 갤러리를 두 개나 운영했으니 그 모든 행동에는 충분히 일관성이 있었다. 그가 미샤를 숭배한다는 것도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옛날부터 팬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게냐는 트리포노프의 일관성을 좀처럼 믿을 수가 없었고 그가 미샤를 쳐다보는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딱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트리포노프의 눈빛에는 아주 기분 나쁜 뭔가가 있었다. 그 불쾌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그는 마침내 미샤에게 차를 인수한 데 들어간 비용이나 절차에 대해 조목조목 물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막상 그 트리포노프 말인데하고 입을 열었을 때는 그 궁금증이 너무나 유치하게 느껴졌고 자기도 모르게 차에 대한 질문 대신 팔라스 호텔, 그 사람 짓이라면서요?’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미샤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고 아니. 그건 다른 놈들이지. 트리포노프는 나쁜 놈이지만 도살자는 아니야라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마치 게냐의 마음속 깊은 곳을 꿰뚫기라도 한 듯 불쑥 덧붙였다. ‘사람을 재수 없게 쳐다보기는 하지. 모든 것에 값을 매기니까

 

 

 

 게냐는 미샤와 오랜 시간 대화를 주고받는 적이 거의 없었고 논쟁을 하는 경우는 더욱 드물었다. 그는 이따금 미샤의 유머 감각에 적응이 되지 않았고 때로는 은근히 화가 치밀 때도 있었지만 대놓고 받아치거나 곧이곧대로 무슨 소리인지 알아먹기 어렵군요라든지 내 생각은 다른데요라고 말한 적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상대가 미샤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게냐는 누구와 이야기를 하든 마음속의 생각이나 감정을 언어로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어려웠다. 이성적으로는 토론과 말싸움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두 가지 모두 피로감을 유발한다는 점에서는 별다를 게 없었고 차라리 침묵하는 쪽이 편했다. 예외란 춤에 대한 주제뿐이었다. 지나이다는 그가 미샤와 신작 리허설 도중 자신의 솔로 파트에 대해 언쟁을 벌이는 것을 보고 족히 10분 동안 웃고 또 웃었다. 짜증이 난 미샤가 넌 왜 웃는데!’ 하고 소리치자 지나는 이런 날도 오는구나 싶어서. 아사예프가 너 때문에 리허설 집어치웠던 거 생각 안 나? 그 착한 스탄카에게도 바락바락 우기고. 옛날에 못되게 군 거 이제 벌 받는 거야. 아주 잘하고 있어, 겐카하고 웃어댔다. 게냐는 키로프에서도 전설로 남아버린 미샤의 건방지고 무례한 태도를 자신의 조심스러운 반발과 동일시하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지나가 너무 즐거워했고 미샤조차도 그런가? 할 말이 없네라고 대답한 후 그의 의견을 대폭 수용해줬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춤에 대한 얘기였고 이 경우와는 완전히 달랐다. 노브이 루스키와 갱, 고급 차. 전혀 중요하지 않았고 침묵을 깰 가치도 없었다. 그저 하잘것없는 생각들일 뿐이었다. 그래서 게냐는 자신이 미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렇게 값을 매기며 쳐다보는 장사꾼과 도살자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라고 대꾸했을 때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그리고 미샤가 별로 없지. 자기 손에 피를 묻히느냐 남이 해주기를 기다리느냐의 차이 정도. 그런데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인간들은 언제나 있었어. 옛날에도. 지금도. 그러니까 트리포노프가 특별히 나쁜 놈은 아니야. 대놓고 값을 매기는 게 차라리 솔직하지. 당의 이름으로 순결한 척하면서 위선 떠는 것보다는이라고 대답했을 때는 더 놀랐다. 그 내용 때문도 아니었고 미샤가 그의 공격적인 질문에 전혀 화를 내지 않고 심지어 아주 진지하게 답변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미샤가 평소와는 달리 천천히 대답했고 중간중간에는 생각에 잠겨 말을 끊었으며 두 눈에 고통스럽고 격렬한 불꽃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게냐는 자리를 피하고 싶어졌고 어떻게 해야 이 대화를 중단할 수 있을지 마음이 산란해졌다. 다행히 그날은 목요일이었고 미샤에게 마사지를 해주러 온 루키얀이 도착했기 때문에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끝났다.

 

 

 

 차라리 미샤가 새 차를 샀으면 좋았을 것이다. 미샤는 트리포노프가 차를 넘겨주기 전부터 큰 차를 한 대 사야겠다고 말하곤 했다. 발레단 스튜디오와 사무실이 시내에서 떨어져 있으니 업무용 밴으로는 모자란다는 것이다. 맞는 얘기였다. 이전에도 미샤에게는 도요타 외에도 차가 한 대 더 있었다. 그것도 아주 멋진 빈티지 포르셰였다. 운전도 못 하면서 왜 그런 스포츠카를 샀느냐고 묻자 자선 행사라서 어쩔 수 없었어라고 대꾸했다. 아주 존경하는 프랑스 안무가 세자르 모렐의 사망 1주기를 맞아 에이즈 기금 마련 자선 경매가 열렸을 때 옛정과 일종의 상징적 제스처로 그 차를 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모렐은 오래전 미샤를 뮤즈로 삼아 지금까지도 그의 최고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을 세 개나 안무해줬고 미샤가 조국과 당에 대한 반역죄명으로 수감되었을 때 구명을 위해 모스크바까지 날아왔던 인물이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상징은 상징일 뿐이어서 미샤는 결국 도요타와 포르셰 모두 발레단 스태프와 무용수들, 지인들이 자기 차처럼 끌고 다니도록 내버려 두었고 본인은 키라의 지굴리를 얻어타고 다녔다. 포르셰에 대해서는 모두가 근사하다며 부러워했지만 정작 본인은 그 차를 타고 다닌 적도 거의 없었고 예쁘기만 하지 짐도 별로 안 들어가고 사람도 많이 못 태우고 아무 짝에 쓸모가 없으니 빨리 처분하고 큰 차로 바꿔야겠다라고 투덜거리곤 했다. 그래도 모렐 생각에 마음이 불편했는지 항상 세자르도 용서해 줄 거야란 말을 덧붙였다.

 

 

 

 그 포르셰는 게냐도 종종 잘 끌고 다녔었다. 사기꾼이자 장사치인 안톤 트리포노프와는 달리 세자르 모렐은 진짜 거장이었고 게냐 역시 그를 존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샤는 트리포노프로부터 큰 차를 인수하면서 마에스트로 세자르를 배신하고 그 포르셰를 정말로 처분해버렸다. 그것도 팔아치운 게 아니라 파리의 모렐 재단에서 운영하는 극장 박물관에 기증했다. 게냐는 미샤의 재정 상태에 대해 정확히 알지도 못했고 애초부터 경제 개념도 탁월한 편은 아니었지만, 빈티지 포르셰를 샀다가 기증할 정도라면 굳이 트리포노프 같은 인간이 쓰던 차를 건네받지 않더라도 충분히 새 메르세데스를 살만한 능력이 있을 거란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한때 뉴욕에서 미샤의 에이전트로 활동했다가 지금은 발레단 운영국장으로 아예 페테르부르크에 자리를 잡아버린 폴 갈런드는 미샤가 가만히 있어도 금은보화가 들어오는 행운의 별 아래에서 태어났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미샤는 행운의 별이 아니고 붉은 별이겠지하고 특유의 담담하고 명확한 어조로 대꾸했지만 미국인인 갈런드에겐 통하지 않을 농담이었다. 곁에 있던 다른 스태프들만 배를 부여잡고 웃어댔을 뿐이었다.

 

 

 

 하긴 주변 사람들도 마에스트로가 남긴 포르셰를 모는 것을 즐기면서도 제각각의 논리로 미샤에게 제대로 된 좋은 차를 타야 한다고 강권하긴 했다. 갈런드는 감독님 체면도 있고 전략적으로 볼 때 더 나으니까’, 발레단 마사지스트는 몸을 챙겨야죠. 의사도 그러라고 했고’, 지나는 좋은 차를 사면 거기서라도 좀 자겠지’, 그리고 키라는 큰 차를 사서 날 좀 태워주는 게 어때. 내 지굴리 폐차시키고 싶은데 너 때문에 계속 굴려야 하잖아라고 마지막 못을 박았다. 그런데 트리포노프가 넘겨준 진짜 좋은 차로 바꾼 후에도 미샤는 걸핏하면 키라의 지굴리에 올라탔고 자기 차 두 대도 여전히 발레단 사람들에게 내줬으므로 변한 건 거의 없었다. 게냐는 이럴 거라면 장식용으로나마 포르셰를 그냥 놔두는 게 나았으리라고 생각했다. 결국 트리포노프보다는 모렐이 그의 마음을 덜 불편하게 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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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별은, 소련과 공산당, 혁명 뭐 이런 것들의 상징이라... 소련 시절엔 여기저기서 장식으로도 많이 쓰였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야 전부 미샤 농담에 웃지만 미국인인 갈런드야 당연히 ??? 할 수밖에.



 
모스크바 대로는 모스크바에 있는 게 아니라 페테르부르크에 있다. 이 대로를 타고 쭉 올라가면 모스크바 방향이므로 그렇게 불린다.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역 이름은 '모스콥스키 역'이다. 반대로 모스크바에는 '레닌그라드스키 역'이 있다) 모스크바 대로를 타고 가다가 꺾으면 페테르부르크의 풀코보 공항이 나온다. 
 



 
중간에 언급되는 고양이는 첫 단편 <판탄카의 루키얀>에서 미샤가 웅덩이에서 건져온 새끼고양이 슬론이다. 노브이 루스키(신흥 러시아인)와 마피아에 대해서라면, 아마도 소련 붕괴로부터 2000년대 초까지 러시아를 관통하는 주요 키워드라 들어본 분들도 많을 것 같다. 노브이 루스키는 소련과 공산주의 붕괴 후 몰려들어온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속에서 범죄와 결탁해 급격하게 부를 축적한 비즈니스맨들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물론 러시아식 마피아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팔라스 호텔의 모델은 네프스키 팔라스 호텔이다. 이 호텔은 지금도 있긴 한데, 예전에는 고급호텔이었고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90년대 중후반에 실제로 마피아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저 호텔 앞을 지나갈때면 몸을 움츠리곤 했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 게냐는 여러 모로 미샤와는 많이 다르다. 어떤 면에서는 결벽적이고 훨씬 폐쇄적이며 자기 고뇌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아주 오래전, 미샤보다 이 인물을 먼저 구상했었는데 시간이 지난 후 글을 시작했을 때 나의 주인공은 미샤가 되었고 게냐를 되살려내는 데는 훨씬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 90년대 시리즈가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링크로 가보세요. 먼저 이 에피소드가 포함된 <눈의 여왕> 전편은 아래. 비번이 있는데 궁금하신 분은 더 아래 링크의 <구름 속의 뼈> 마지막 파트인 pt 5로 가시면 비번을 보실 수 있습니다. 

moonage daydream :: 눈의 여왕 Снежная Королева (01) (tistory.com)

눈의 여왕 Снежная Королева (01)

tveye.tistory.com

 
 


 
<눈의 여왕>과 쌍둥이처럼 연결되어 있는 소설 <구름 속의 뼈>는 여기. 파트1~2는 공개, 파트 2 끝부분에 나머지 파트 비번이 들어 있다. 
moonage daydream :: 구름 속의 뼈 (Part 1) (tistory.com)

구름 속의 뼈 (Part 1)

이 글은 작년 한 해 동안 조금씩, 꾸준히 썼다. 약 100페이지 가량이고 호흡도 조금은 더 긴 편이라 단편이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아서 그냥 중편이라고 부르고 있다. 제목은 '구름 속의 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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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탄카의 루키얀 링크는 아래. 비번은 fontanka
 
moonage daydream :: 판탄카의 루키얀 (tistory.com)

판탄카의 루키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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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