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체르브로드에 뭘 얹어 먹는지 궁금한 마냐 about writing2024. 10. 11. 04:45
역시 올해 초에 마친 90년대 단편 <4월의 로켓> 중에서 발췌. 후반부의 이야기이다. 마냐는 미샤를 자기 방에 데려와 따뜻한 허브차를 끓여준 후 배가 고파서 빵에 마가린을 발라서 먹는다. 바똔은 러시아식 흰빵, 바게트랑 조금 비슷한데 그만큼 맛있지는 않다. 더 크고 두툼하다. 흘롑은 흑빵. 그러다가 마냐는 미샤에게도 빵을 한 조각 주면서 어떤 부체르브로드 샌드위치를 좋아하는지 궁금해 한다.
제냐, 겐카는 모두 이 90년대 이야기의 주요 인물인 게냐(본명 예브게니)의 애칭. 리디야는 게냐의 옛 여자친구. 애칭은 리다. 전에 ‘구름 속의 뼈’ 중편 발췌문에 몇 번 등장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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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샤가 다시 기침을 조금 했어요. 나는 그에게 라마를 바른 바똔을 한 조각 건네주면서 말했어요.
“ 뭘 좀 먹으면 나을 거예요. ”
그는 빵을 받아서 먹었어요. 잼은 올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라마를 발라준 빵을 먹고 내가 끓여준 차를 마시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았어요. 미샤는 빵을 손으로 잘라서 차랑 번갈아 가며 한 입씩 먹었어요. 툴라 비스킷은 먹는 척만 했었는데 마가린 바른 빵은 곧잘 먹네요. 예의를 차리는 건지 정말 입에 맞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신사적인 건 그 자체만으로도 좋은 것 아니겠어요?
“ 그래요, 맛있네요. 이건 당신 말대로 흘롑보다는 바똔에 더 어울리겠어요. 더 부드러우니까요. 바똔도 정말 오랜만에 먹어요. ”
“ 그럼 아침엔 뭘 먹어요? ”
“ 그냥 부체르브로드랑 차 한 잔 정도. ”
“ 부체르브로드에는 뭘 얹어 먹나요? 난 항상 그런 게 궁금하더라고요. 사람들이 빵에 뭘 얹어서 먹는지. 수프는 뭘 좋아하는지. 커피에는 크림을 넣는지 안 넣는지. 홍차에는 설탕을 몇 숟가락 넣는지. 잼은 딸기랑 사과랑 나무열매 중에 뭐가 좋은지. 나는 정통파예요, 부체르브로드는 역시 햄이랑 오이가 제일 맛있거든요. 그리고 흘롑보다는 바똔이 더 좋아요. 어릴 때부터 흘롑의 그 시큼한 맛이 싫었거든요. 엄마한테 맨날 혼났어요. 입만 고급이라고, 흰 빵 타령한다고. ”
“ 난 흘롑이 더 좋던데. 하긴 어릴 때부터 세뇌돼서 그런 건지도 몰라요. 선생님이 바똔이랑 버터는 먹지 말라고, 홍차에 설탕도 넣지 말라고 했거든요. 무용수는 살이 찌면 안 되니까요. 그래서 곧이곧대로 맨 흑빵에 치즈만 얹고 버터랑 잼은 안 바르고 차에도 아무것도 안 넣어 마셨는데 나중에 보니까 내 친구들이랑 동료 무용수들은 버터에 설탕에 케이크까지 먹을 건 전부 다 먹고 있더라고요. 근데 난 습관이 돼서 지금도 아침엔 흑빵에 치즈랑 사과만 얹어서 대충 먹어요. 누가 해주거나 사 먹을 땐 연어 올린 게 좋지만. 난 게으르거든요, 늦게 일어나니까 아침은 잘 안 먹을 때도 많고. ”
“ 난 발레리나들만 다이어트하는 줄 알았는데. 그럼 제냐도 그렇게 먹어요? 그 키에 그렇게만 먹고 어떻게 버틴담, 젊은 남자애가. ”
“ 우리 때나 그랬지 요즘 애들은 안 그런 것 같아요. 우리 무용수들도 보니까 이것저것 다 먹어요. 겐카는 시리얼을 더 좋아하더라고요. 아마 걔는 라마도 좋아할 거예요. ”
나는 미샤와 제냐가 함께 장을 보는 모습을 상상했어요. 제냐는 라마와 시리얼, 우유랑 초콜릿, 스메타나와 콜라, 햄과 다진고기, 달걀과 잼, 감자, 양파, 당근, 절인 오이, 깡통 연유 뭐 그런 걸 사겠지요, 나처럼. 그 옆에서 미샤가 흘롑과 사과랑 치즈를 담고 훈제연어 앞에서 망설이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려고 하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어요. 이 사람이 헐어빠지고 접은 자국이 가득한 슈퍼마켓 비닐봉지를 들고 있는 건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거든요. 제냐는 그런 봉지에 우유랑 시리얼 같은 걸 담아서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몇 번 봐서 괜찮은데. 하긴 제냐는 스물도 안 됐을 무렵부터 봤고 이 사람처럼 우아하고 부티 나는 타입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제냐는 내가 주는 담배를 받아서 피운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차는 리디야가 왔을 때랑 미샤가 왔을 때 두 번 끓여다 줬지만 예의상 조금 마셨지 좋아하지는 않았어요. 라마 바른 바똔은 먹겠지요, 하지만 내가 발라주는 건 받아먹지 않을 거예요. 그럴 일이 아예 없을 테니까요.
미샤는 빵을 아주 천천히 먹었어요. 그 한 조각을 꼭 빵 한 덩어리를 먹듯이 천천히, 꼭꼭 씹어서 먹었지요. 하지만 보기 싫게 깨작거리는 건 아니었어요. 그건 꼭 아까 그 마지막 담배 한 모금을 말보로 한 갑 전체처럼 피운 거랑 비슷했어요. 그러자 나는 다시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어요. 말보로는 다 피웠지만 사르바르가 잊고 간 터키산 담배가 침대 귀퉁이에 놓여 있었어요. 담배를 한 개비 꺼내자 미샤가 다시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었어요. 역시 한 방에 불꽃이 확 일었어요.
.......
마냐가 발라주는 ‘라마’는 저 당시 엄청나게 인기 많았던 마가린. 너도나도 저것을 빵에 발라 먹었다. 나랑 쥬인도 매일매일 바똔에 저 라마를 발라 잼을 척척 얹어서 먹으며 좋아했다 :) 이 발췌문 앞에 저 라마에 대한 대화가 따로 나온다. 그래서 이 단편을 마치고 제목을 정할 때 ‘라마’를 제목에 넣을까 고민하기도 했었다. ‘말보로, 허브차, 라마’ 뭐 이런 식으로. 이 단편에서 중요한 소재 세 가지라서. 근데 이런 명사 열거는 블로그 메모나 잡문 제목으로는 좋지만 이 단편 제목으론 딱히 마음에 안 들어서 4월의 로켓으로 정했다. (이 제목도 100% 맘에 드는 건 아니어서 나중에 고칠지도 모른다)
부체르브로드는 흔히 말하는 오픈 샌드위치인데 소련 시절에도 그랬고 지금도 러시아에서 많이 먹는다. 마냐의 말대로 가장 기본은 햄이나 칼바사와 오이 조합이고 미샤가 먹고 싶어하는 연어 올린 건 조금 고급 조합. 사과랑 치즈는 자주 먹는 조합은 아니다만 무용수 출신인 미샤가 좋아한다. 예전에 썼던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서 미샤의 코믹 버전인 왕재수가 이걸 먹곤 함. 흑빵에 올린 게 제일 클래식이다만 버터에 연어알 듬뿍 올려주는 건 바똔에 올리는 게 더 어울린다. 이것도 좀 호화스러운 버전. 극장에 가면 카페에서 샴페인과 이 연어알 부체르브로드를 판다. 뭐 요즘이야 원체 먹을 게 풍요로우니 이런 게 호화스럽고 그렇지도 않다만. (물론 제일 호화스러운 건 캐비어 얹은 것)
이게 햄 오이 부체르브로드.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서 단추 베르닌이 좋아했다. 좋아한 나머지 모스크바 에피소드에서는 KGB 비밀요원 일류샤가 만들어준 햄 오이 샌드위치도 아무 의심없이 덥석 받아먹는다.
이게 연어 얹은 부체르브로드. 근데 좀 촌스럽고 소련이나 90년대 러시아 느낌 나는 부체르브로드 사진 찾아서 올리려 했는데 구글링하니까 요즘 나오는 이쁘고 맛있는 이미지들이 판을 치네 ㅎㅎㅎ 그나마 햄 오이 부체르브로드는 좀 촌스러운 걸 찾아서 올린 건데. 맨 위 사진은 오늘 조식에서 내가 먹은 것. 흰빵, 흑빵. 미니 사과. 치즈, 잼, 스메타나 다 가져와서 찍었는데 이 글에서 마냐랑 미샤가 보통 먹는 거랑은 역시 안 비슷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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