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전야
(1974.12.31 ~ 197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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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챠
오전 10시 30분, 안드레예프스키 시장
며칠 동안 갈랴는 코스챠에게 제발 30일 밤에는 술 마시지 말라고 귀가 닳도록 신신당부를 했었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그래그래 하고 웃으며 그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리고 문제의 밤이 되었다. 코스챠가 기분 좋게 보드카를 꿀꺽 들이키려는 순간 갈랴가 잔을 뺏으며 초를 쳤다.
“ 오늘 밤엔 마시지 말랬잖아! 내일 아침 일찍 시장에 가야 한다니까! ”
“ 료카는 마시고 있잖아! 왜 나만... ”
“ 네가 운전을 해 줘야 되니까! 차는 너한테만 있잖아. ”
“ 차 안 가져왔단 말이야. ”
“ 너 약속했잖아, 같이 장 보러 가기로. 파티에 아무것도 안 가져오는 대신 운전해 주기로 했잖아. ”
“ 취했을 때 무슨 약속을 못 해. 사람이 어떻게 그러냐, 코앞에서 잔을 뺏고. 이게 날강도지 뭐야. ”
“ 알았어, 그럼 딱 한 잔만 마셔. 그리고 집에 가는 거야. 내일 아침에 차 가지고 시장으로 와. 내일은 사람 많을 테니까 빨리 와야 돼.”
“ 겨우 한 잔. 병에 저렇게 많이 남아 있는데. 어차피 자고 나면 술은 다 깨는데. ”
하지만 갈랴는 양보하지 않았다. 료카도 모르는 척하며 ‘난 릴렌카 기저귀 갈아줘야 돼’ 하면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코스챠는 억울함에 북받친 눈으로 료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재는 게 편이라는 둥 결혼 안 한 사람 서러워서 어디 살겠냐는 둥 투덜거렸지만 결국 자기 몫의 보드카 딱 한 잔만 마시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아침에 그는 근처에 사는 타냐를 태우고 시장으로 갔다. 시장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주차도 한참 걸렸다. 솜씨 좋게 새치기를 해서 차를 세워놓고 나오니 갈랴가 장바구니를 들고 하염없이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코스챠는 전날 밤의 슬픔이 새삼 떠오르며 부아가 치밀었다.
“ 야, 열 시까지 오라면서 넌 삼십 분이나 늦게 오냐! 나보고는 차 가지고 일찍 와야 되니까 술도 마시지 말라고 해놓고. ”
“ 다 계산한 거야. 어차피 주차하는데 그 정도 걸릴 거니까 시간 맞춰서 온 거지. ”
코스챠는 뭐라고 항의를 해보려 했지만 갈랴를 말로 이길 자신도 없었고 또 가만히 생각해보니 틀린 얘기도 아니어서 그냥 납득했다. 그저 보드카 딱 한 잔밖에 못 마시고 쫓겨난 것만이 서러울 뿐이었다. 트로이라도 옆에 있었으면 자기 역성을 들어 주었을 텐데 싶었지만, 그 녀석은 장 보는 일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해서 지난 몇 년 동안 단 한 번도 새해 파티 준비를 도와준 적이 없었다. 하지만 트로이에게는 다른 면에서 장점이 많았으므로 코스챠는 그를 용서하기로 했다.
그래도 이게 벌써 몇 년째인가, 이제 이렇게 짐꾼과 운전기사 노릇을 하는 것은 막내인 미샤가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심지어 그 꼬맹이는 술도 안 마시니 더욱 안성맞춤일 텐데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지만 그런 말을 했다가는 발레 광팬인 타냐가 어디 감히 왕자님에게 허드렛일을 시키려고 하느냐며 두들겨 패려고 할 것 같아 다시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들은 함께 가게와 좌판들을 돌며 새해 파티용 먹거리들을 샀다. 엄밀히 말하자면 갈랴와 타냐가 장을 보았고 코스챠는 짐을 들어주고 길을 뚫어주었다. 중간중간 훈수도 두었다.
“ 갈린카, 비네그레트 샐러드 만들어줄 거지? 난 올리비에보다 그게 더 좋은데. ”
“ 그건 스베타가 만들어 온다 했어. ”
“ 귤 좀 더 사면 안 돼? ”
“ 또 귤 던지고 뭉개려고! ”
“ 누가 귤을 던져! 소중하게 쌓아놓고 한알 한알 까먹을 건데! ”
코스챠가 제2의 억울함에 사로잡힐 찰나 타냐가 끼어들어 작년에 취해서 귤 던지기 서커스를 했던 것은 이고리였다고 정정해 주었다. 올리비에 샐러드용 감자와 달걀, 오이에 구이용 거위 한 마리와 사과, 연어알 통조림, 빵과 치즈, 칼바사 햄까지 사고 나자 코스챠는 허리가 휘고 어깨가 부서질 것 같았다. 거위를 구울 생각이었으면 전날 미리 사 놓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미리 구워 놓은 닭을 사서 그냥 데워먹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 어차피 닭이나 거위나 맛은 비슷비슷할 텐데 하고 코스챠가 투덜거리자 갈랴가 자꾸 불평하면 거위를 한 마리 더 살 수도 있다고 협박했다. 그나마 술은 손님들이 가져오기로 했으니 다행이었다.
코스챠가 짐보따리를 차에 내려놓고 돌아왔을 때 갈랴와 타냐는 이미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차를 마시며 설탕을 잔뜩 뿌린 푹신푹신한 도넛을 먹고 있었다. 장을 다 봤기 때문에 관대해진 갈랴가 코스챠에게 먹고 싶은 걸 다 골라오라고 했다. 그래서 코스챠는 갓 튀겨내 뜨끈뜨끈한 양고기 체부렉과 버찌잼이 가득 든 피로슈카 파이를 담아와서 눈 깜짝할 사이에 몽땅 먹어치웠다. 갈랴가 혀를 찼다.
“ 차 한 모금씩은 마시면서 먹어야지. 체하려고. ”
“ 체부렉은 뜨거울 때 먹어야 한단 말이야. 타냐, 그 도넛 안 먹을 거면 나 줘. 엇, 메도빅도 샀구나. 나 그것도 먹을래. ”
“ 안돼. 딱 하나밖에 안 남은 거 간신히 낚아챈 거야. 이건 트로이 줘야 돼. 넌 그냥 도넛 먹어. ”
“ 나도 메도빅 좋아하는데! 너무하잖아. ”
“ 넌 도넛이랑 버찌잼 파이를 더 좋아하잖아. 걔는 메도빅을 제일 좋아한단 말이야. ”
“ 하긴 그렇지. 에이, 까탈스러운 놈. 그럼 카르토슈카는 먹어도 돼? ”
“ 응. 많이 샀어. 미샤도 이 집 카르토슈카는 먹더라고. 별로 안 달다고. ”
“ 웩, 그럼 난 안 먹어. 걔가 안 달다고 할 정도면 ‘진짜로’ 안 단 거잖아. ”
“ 두 종류야. 거기 노란 크림 얹힌 건 달아. 안에 잼도 들어 있고. 그거 먹어. 근데 다 먹으면 안 돼. 잼 들어 있는 건 스베타가 좋아하니까. 아니면 있다가 집에 가서 모코 케이크 먹어. 이고리가 저번에 그거 노래를 불러서 료카가 어제 사다 놨거든. ”
잔소리는 많아도 친구들이 좋아하는 거라면 뭐든 기억하는 갈랴가 놀랍다고 생각하며 코스챠는 도넛 한 개와 노란 크림 얹은 카르토슈카를 추가로 해치웠다. 그러다가 퍼뜩 생각나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근데 양귀비씨 빵은 없네. ”
“ 그거 먹는 사람이 없잖아. ”
“ 알랴가 좋아하는 건데... 알랴가 없다고 안 사면 너무 매정하잖아. ”
언제나처럼 ‘알랴는 떠났잖아. 이제 그만 잊어, 코스칙’이란 대사가 뒤따를 것이라 생각했지만 갈랴는 손을 뻗어 코스챠의 목도리에 묻은 가루 설탕을 털어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 그러고 보니 진짜 그렇네. 나가면서 양귀비씨 빵도 사자. 많이는 말고. 딱딱해지면 맛없으니까. ”
“ 갈린카, 알랴는 우리보다 더 늦게 새해를 맞겠지? ”
“ 그렇겠지. 여기 시간이 더 빠르니까. ”
“ 알랴는 쓸쓸하겠다. 우리도 없고. 거기, 그렇게 멀리. 혼자서 새해라니. ”
“ 혼자는 무슨. 대사관에서 새해 파티하겠지. 그쪽 친구들도 많이 생겼을 거야. ”
“ 다르잖아, 거기는 여기랑. 친구들도. 우리가 아니잖아. ”
“ 전화라도 해볼래? ”
“ 일요일에 했었어. 겨우 30초. 그나마도 연결이 안 좋아서 끊어졌는데 교환수가 하도 딱딱거려서 다시 걸지도 못했어. ”
“ 무슨 얘기 했어? ”
“ 그냥, 딱 두 마디. 잘 지내 알랴? 응, 잘 지내. 거기서 끊겼어. ”
“ 그럼 다 괜찮은 거야. ”
“ 안 괜찮아. 알랴 목소리가 너무 달랐는걸. 팍 가라앉아서... 끊기고. ”
“ 국제전화니까 그렇지. 있다가 나랑 전화국에 가보자. 거기서 걸면 좀 낫더라. ”
코스챠는 알리사가 오늘은 집이 아니라 대사관에 있을 거라고, 그리고 그런 대단한 곳으로는 전화 연결을 해 주지 않을 것이고, 해 준다 해도 분명 도청될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느니 차라리 새해 카드를 쓰는 게 나을 것이다. 하지만 도넛을 한 개 더 먹는 동안 전화도 도청하는 마당에 카드라고 뜯어보지 않겠느냐는 지극히 정상적인 논리회로가 머릿속에서 작동되었고 결국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코스챠가 목에 걸린 마지막 도넛 한 조각을 넘기기 위해 식은 차를 꿀꺽꿀꺽 마시는 동안 갈랴와 타냐는 카운터로 가서 양귀비씨 빵을 다섯 개나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