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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1. 2. 17:44

눈의 여왕 Снежная Королева (01) 2021. 11. 2.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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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0. 17. 22:23

잠시 - 글을 마치고 about writing2021. 10. 17. 22:23

 

 

 

 

주말 동안 무척 집중해서 계속 썼고 조금 전에 글을 마쳤다. 6월부터 거의 넉 달 동안 쓴 글이다. 이제 글을 닫고 잠시 마음을 가다듬는 시간이다. 

 

 

 

사진은 @dshved 의 그루지야 트빌리시 풍경이다. 같은 사람의 손에서 나오더라도 소설을 쓰는 방식이나 과정은 글의 종류에 따라, 그리고 인물에 따라 달라진다. 거의 언제나, 새로운 뭔가를 경험한다. 하지만 동시에 비슷한 과정의 어떤 고양감이 생겨난다. 그 마지막 고양감에 대해서는, 때로는 표현하지 않고 그냥 놔둬야 한다. 그래서 이 사진으로 오늘을 마무리한다. 퇴고는, 숨을 돌린 후. 아마도 내일이 지나고, 바쁠 테니까 아마도 다음 주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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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21. 10. 16. 20:05

깃털과 자작나무와 맥도날드 about writing2021. 10. 16. 20:05

 

 

 

 

계속 쓰고 있다. 이제 열페이지 가량만 더 쓰면 마무리하지 않을까 싶다. 

 

 

발췌한 부분은 후반부, 그것도 가장 최근에 쓴 파트 중에서. 맥도날드와 피자헛, 지나랑 미샤의 입맛 등등. 

 

 

위의 사진은 페테르부르크 바실리예프스키 섬의 맥도날드이다. 지하철역 바로 맞은편에 있다. 나에게는 추억의 장소인데 오랜 옛날부터 쥬인과 자주 가던 곳이다. 게다가 유명한 곳이다. 이제는 러시아 컬트 영화로 대접받는 영화 브랏(brother)에서 주인공 다닐라(세르게이 보드로프)가 당시 페테르부르크의 로컬이자 소위 노는 여자애인 케트와 이야기를 나누는 곳임. 몇년 전 가서 저 사진 찍었던 날은 흐려서 사진이 너무 하얗게 나왔는데 실제로는 좀더 짙은 색이다. 저 외양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비슷한데 내부는 물론 많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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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는 맥도날드나 피자헛 등 소위 미국 냄새나는 음식들이라면 무엇이든 좋아했고 맛있는 것을 먹을 때 진심으로 행복해했다. 단것도 아주 좋아했는데 특히 세베르의 모코 케익과 발샤야 코뉴셴나야 거리의 도넛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갈런드는 처음 지나를 봤을 때 우아하고 자그마한 모습에 팅커벨 같다며 한 번 놀라고, 그토록 가냘픈 그녀가 치즈 토핑을 세 배로 추가한 두툼한 피자를 순식간에 흡입하는 모습에 두 번 놀랐다고 농담을 한 적이 있었다. 지나는 ‘요정도 먹어야 살 거 아니야!’ 라고 항의했지만 그래도 남자 무용수들이 가득한 자리에서 대놓고 그런 말을 듣자 자못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는데, 미샤가 ‘지나는 많이 먹어도 돼, 깃털 같으니까’ 라고 편을 들어주자 금세 얼굴이 펴지면서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한쪽은 깃털이고 한쪽은 자작나무지’ 하고 게냐는 생각했다. 무대에 본격적으로 올라가던 시절은 이미 지났지만 미샤는 여전히 온전한 무용수의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바쁜데도 아침저녁으로 스트레칭과 기본 연습을 빼먹지 않았고 틈날 때마다 스튜디오에서 혼자 춤을 추기도 했다. 식생활은 그리 풍성하지 않았다. 지나와는 달리 패스트푸드나 피자, 단것도 입에 잘 대지 않았다. 심지어 차에도 설탕을 넣지 않았다. 지나는 ‘저 바보는 옛날부터 저랬어, 그나마 지금은 좀 나아진 거지.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녀석이야. 애초부터 살찌는 체질도 아닌데. 모코도 한 조각 이상 먹어본 역사가 없어. 나보다 더 좋아하면서’ 하며 혀를 내둘렀다. 미샤는 애초부터 자작나무처럼 날씬하고 유연한 몸을 타고 나서 다이어트를 할 필요가 별로 없는 사람이었고 본인도 그런 사실을 아는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먹는 것에 연연하는 적이 없었고 바쁠 때는 뭘 먹어야 한다는 것도 잘 잊어버리는 편이어서 지나와 키라가 툭하면 이거 먹었냐 저거는 먹었냐 하고 잔소리를 했다. 발레단의 마사지스트인 빅토르마저 합류해 걸핏하면 미샤에게 한 번만 더 식사를 거르고 오면 돼지비계를 세 겹으로 얹은 부체르브로드를 먹이겠다고 협박을 했다. 미샤는 왜 자기 주변에는 항상 이렇게 뭘 먹으라고 종용하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지 모르겠다고 피곤해했다. 게냐는 삼시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으면 아무도 참견하지 않을 거라고 말해 주려다 자신마저 잔소리를 추가하는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대신 이따금 스튜디오 근처의 빵집에서 사과파이를 사 갔다. 미샤는 단것을 딱히 즐기지 않았지만 예외적으로 모코 케익과 사과파이만은 좋아했다. 제대로 구운 사과파이만. 맥도날드의 애플파이나 체리파이는 ‘파이’ 축에 끼지 못했다.

 

 

 

 얼마 전 막내 단원인 이라의 생일에 미샤는 그녀가 그렇게도 노래를 불렀던 맥도날드에서 모든 단원들과 스태프들을 모아놓고 생일 축하 파티를 열어주었다. 점원들이 와서 노래를 불러주자 이라는 너무 행복한 나머지 테이블 위로 올라가 춤을 출 기세였다. 미샤는 이라와 동료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며 좋아했고 먹고 싶다는 메뉴는 전부 시켜 주었지만 막상 본인은 버거나 감자튀김에는 손을 대지 않았고 신상품이라고 다들 궁금해했던 나무열매파이와 체리파이만 절반씩 갈라 이라와 나눠 먹었다. 그러고는 이상한 기름 맛이 난다고 했다. 갈런드는 그에게 인생의 낙을 너무 모른다고 놀려댔다.

 

 

 

 

 

 

 

 

 

 

... 글에 따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미샤가 이라와 단원들을 데려가 파티를 열어준 맥도날드도 바로 저 맥도날드. 글의 배경이 되는 시기에 미샤의 발레단 스튜디오가 바실리예프스키 섬에 있기 때문에. 저 당시(90년대 후반)엔 맥도날드가 '레스토랑'이라고 불렸고 젊은이들의 꿈의 직장이었으며 거기서 생일 파티하는 건 어린애가 아니더라도 엄청 행복한 일이었다. 

 

 

나는 수업 마치고 쥬인이랑 저 맥도날드에 가서 밤까지 죽치고 앉아 빅맥세트를 먹으며(당시엔 모든 버거 세트 가격이 동일했으므로 무조건 빅맥을 먹어야 이득이었음) 온갖 수다를 떨곤 했다. 그리고 이 글의 배경이 되는 1997년엔 아직 KFC는 페테르부르크에 오픈하지 않은 시점이었다. 한마디로 맥도날드가 최고였다. 피자헛도 있었는데 거기는 너무 비싸서 쉽사리 가기 어려웠음. 

 

 

 

 

 

 

 

내부는 이제 이렇게 변했다. 여기도 키오스크가... 옛날엔 쥬인이랑 여기 줄서서 빅맥세트 시키고 케찹을 1루블인가 10루블 주고 사면서(이때 화폐개혁이 있었던 시기라 아직도 당시 케찹 가격이 헷갈림 ㅋㅋ) '어떻게 케찹을 돈 주고 팔 수가 있어 나쁜넘들' 하고 슬퍼했었다 :)

 

 

 

 

 

 

 

몇년 전 다시 갔을 땐 맥치킨세트로(이젠 세트별로 가격이 다름 ㅜㅜ) 근데 정말 이상하게도 통틀어 모든 맥도날드 중 이 바실리예프스키 맥도날드가 제일 맛있다! 다시 갔을 때도 그렇고... 추억보정인가 싶다가... 나는 그래도 맛없는 건 얄짤없는 타입이라 정말 여기가 더 맛있는 건지도... 하기도 함. 그런데 이런 인생의 낙을 모르는 미샤 ㅎㅎㅎ

 

 

 

 

 

 

문제의 케찹. 근데 요즘은 그냥 세트 시키면 주는 것 같다. 옛날엔 1루블 더 주는 게 너무 아까워서 쥬인이랑 케찹 한개만 시켜서 나눠먹었다. 

 

 

 

 

 

 

창 너머로 이렇게 동네 풍경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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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21. 10. 9. 22:46

결국은 엠티비와 무즈티비 about writing2021. 10. 9. 22:46

 

 

 

 

꾸준히 쓰고 있다. 이 글에서 주인공은 판탄카-모스크바 대로-풀코보 공항-모스크바 대로-네프스키 대로-바실리예프스키 섬으로 계속해서 이동하는데, 특히 모스크바 대로의 비중이 많다. 그래도 이제는 네프스키 대로로 들어서고 있으므로 뭔가 큰 숙제를 해치운 기분이다 :)

 

 

발췌한 부분은 글의 전반부. 게냐가 막 모스크바 대로로 접어들었을 때. 지굴리, 라다는 둘다 러시아 자동차. 

 

 

 

사진은 Igor Nik. 눈 내리는 페스텔랴 거리 풍경을 찍은 건데 발췌한 부분과는 별 상관이 없지만, 저 문단 다음부터는 줄창 눈이 내리기 시작하므로 글 전체의 분위기랑 약간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올려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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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 오후였기 때문에 아직 러쉬 아워는 아니었지만 모스크바 대로로 접어든지 몇 분도 되지 않아 갑자기 차가 밀리기 시작했다. 앞을 내다보니 단속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무슨 차든 간에 경찰들에게 털리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게냐는 경험으로 경찰들이 외제 차를 보면 돈을 더 뜯어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루블은 먹히지도 않았다. ‘이래서 이 차 가지고 오기 싫었어’라고 생각하며 그는 급하게 속도를 줄이고 점퍼 안주머니에 들어 있는 여권 복사본과 달러 몇 장을 확인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경찰들이 그의 차를 불러세우지 않았던 것이다. 더 좋은 미끼가 있었나 하고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지굴리와 라다, 폭스바겐이 줄줄이 멈춰선 채 경찰들과 실랑이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단속에 걸리지 않았고 소모적인 승강이도 기분 나쁜 뇌물 상납도 없었으며 길도 다시 잘 뚫렸으므로 게냐는 기분이 나아졌다. 라디오에서는 젊은 남자가 속사포 같은 영어를 쏟아내고 있었다. 게냐는 가수 이름 몇 개 외엔 거의 알아들을 수조차 없었다. 아마 갈런드가 미샤를 위해 맞춰둔 채널인 것 같았다. 미샤는 영어 실력이 좋은 편이었고 불어는 더욱 수준급으로 구사했다. 단원들이 부러워하면서 외국어를 잘하는 비법을 좀 알려달라고 조르면 ‘지금 너희가 영어 공부할 때냐, 춤 잘 추는 게 우선이지. 모두 연습실로!’라는 식으로 대꾸했지만 정말로 꾸짖는 것은 아니었다. 대체로 미샤는 무용수들에게 화를 내는 적이 거의 없었다. 외국어 비법에 대해서도 끈질기게 물어보면 억지로 공부하지 말고 재미있는 걸 읽거나 영화를 보라고 했다. 단원들은 ‘말도 안 돼, 이미 잘하는 사람이니까 저렇게 쉽게 얘기하지’라고 투덜거렸다. 지나의 말로는 분명히 학창 시절에 둘이서 같이 외국 잡지를 구해 읽고 음반을 밀수하고 미국 라디오 방송을 몰래 듣다가 걸려서 벌을 받곤 했는데 자기는 여전히 외국어라면 까막눈이고 미샤는 옛날부터 잘했다는 것이었다. 미샤는 집에서도 원어 방송을 듣거나 잡지를 읽곤 했는데 진지하게 공부를 하는 건 전혀 아니었다. 그저 습관이 되어서 그렇다고 했다. 게냐는 자신도 매일 들어보면 ‘습관이 되어’ 귀가 뚫릴까 하며 미샤와 외국 방송을 같이 보기도 했지만 별로 진전이 없었고 영어든 불어든 여전히 소음 공해로만 들렸기 때문에 결국 둘이 함께 있을 때 가장 자주 틀어놓는 채널은 엠티비와 그 러시아식 짝퉁인 무즈티비가 되었다.

 

 

 

 

 

 

 

 

 

무즈티비(муз-тв, 원어에 가깝게 발음하면 무즈떼베)는 MTV 비스무레한 러시아 음악채널이다. 뮤직비디오를 줄창 틀어줬다. 나도 심지어 지금도 러시아에 가면 주로 저런 채널을 틀어놓곤 한다. 특히 이 글의 배경이 되는 시기에는 더욱 그랬다. 기숙사의 좁은 방에 달아둔 텔레비전에서 제일 많이 봤던 것은 엠티비와 무즈티비였음. 노어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오에르테나 엔테베 등 뉴스가 많이 나오는 채널을 봐야 좋았겠지만 결국은 좋아하는 가수들이 나오는, 혹은 재밌는 뮤비가 나오는 음악채널로... :) 내 방에서 보기도 하고 쥬인 방에 가서 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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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연휴 동안에도 조금씩 꾸준히 쓰고 있다. 이제 게냐랑 지나가 드디어 모스크바 대로를 빠져나왔음!  

 

 

발췌한 에피소드는 지나가 파리에 가기 직전, 그리고 파리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이야기임. 디나 로쉬는 미샤와 지나의 오랜 지인이자 파리 오페라 발레단 출신의 무용가. 보리스 아사예프는 7~80년대에 미샤가 극장에서 춤췄을 때 예술감독을 맡았던 사람. 루키얀은 마사지사. (물론 모두 내가 만들어낸 사람들) 

 

 

 

지나가 너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데... 게냐와 미샤의 대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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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잠시 파리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나이다는 디나 로쉬가 조직위원장을 맡은 모던 발레 페스티벌에 참여해 미샤가 그녀를 위해 안무해준 신작을 췄고 부대 프로그램인 마스터 클래스를 일주일 동안 진행했다. 방송 녹화도 했고 무용 전문가들의 국제 세미나에 패널로 나갔다. 파리 오페라 극장의 지젤 무대에도 올라갔다. 미샤가 4주 동안 파리에 다녀오라고 해서 친한 사람들도 만나고 맛있는 프랑스 요리를 먹고 실컷 놀 수 있으려니, 여름에 못 간 휴가를 뒤늦게 즐길 수 있겠다고 들떴는데 페테르부르크에 있을 때 못지않게 빡빡한 일정이었다며 혀를 내둘렀다. 그러면 그렇지 그 악마가 그렇게 순순히 자기를 쉬게 해줄 리가 없는데, 디나 로쉬나 미샤나 다 한통속에 워커홀릭이란 사실을 깜박 잊은 자신이 바보였다고 툴툴댔다.

 

 

 

 물론 말만 그렇지 지나 역시 그 워커홀릭 부류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게냐가 ‘그래도 재미있었죠?’ 하고 묻자 지나는 솔직히 말하면 세미나 빼고는 다 나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그런 세미나는 말발 좋은 미샤에게나 어울리지 자기는 몸으로 때우는 쪽이 편한데 주제도 너무 딱딱하고 통역까지 붙어서 피곤하기 그지없었다고 한숨을 쉬었다. 오히려 지젤은 오랜만에 춘 배역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수월했고 파리 오페라 발레단 파트너와도 합이 좋았다는 것이다. 그녀 나이의 무용수가 아직도 고전 발레를 완벽하게 출 수 있다는 것은 웬만한 자기 관리 없이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좀 걱정이 되었는지 지나는 파리로 출발하기 전날까지 지젤 2막을 연습하다가 미샤에게 불평을 했었다. 

 

 

 

 “ 나 올해는 클래식은 거의 안 췄는데! 그 무대까지 엮어주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 내 나이가 몇인데! 파리 가르니에는 몇 번밖에 안 서봐서 무대도 불편한데. 내 발가락 다 빠지겠다! ”

 

 “ 그래도 지젤은 괜찮아. 잠자는 미녀나 키트리는 아니잖아. ”

 

 “ 뭐야? 그러니까 오로라나 키트리는 힘 딸려서 안 될 것 같으니까 지젤로 잡아줬다는 뜻이야? 나 늙었다는 얘기지? ”

 

 

 

 미샤는 지나가 발칵 화를 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허리를 붙잡아 아다지오 동작을 도와주면서 느긋하게 대꾸했다.

 

 

 

 “ 아니, 내가 언제. 그 반대야. 여왕님이야 언제나 원기왕성하지, 그쪽 애들이 힘이 모자라서 감당을 못하는 거지. 파리 가르니에는 잠자는 미녀나 돈키호테는 별로잖아. 지젤이 제일 나아. 너한테도 잘 어울리고. ”

 

 

 

 

 지나는 금세 누그러진 게 분명했지만 미샤에게 그렇게 호락호락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게냐 쪽을 바라보며 ‘너 같으면 나랑 뭘 출 거야?’ 라고 물었다. 게냐는 이럴 때 뭐라고 하는 쪽이 외교적으로 적당할지 가늠할 수가 없어서 그냥 솔직하게 돈키호테라고 대답했다. 지나는 누가 뭐래도 최고의 키트리였으므로 발레학교 시절부터 그녀와 돈키호테 무대에 올라갈 수 있기를 간절히 빌었다고. 그런데 소원이 반만 이루어져서 몇 년 전 마린스키 첫 시즌 때 지나가 키트리를 췄던 무대에 올라가기는 했지만 바질 대신 투우사 역을 받았기 때문에 아쉬웠다고 털어놓았다. 다행히 그 대답에 지나는 완전히 기분이 풀려서 ‘너랑은 언제든지!’ 하고 게냐에게 키스를 해주고는 미샤와 30분 정도 연습을 더 하고서 가방을 꾸리러 갔다.

 

 

 

 그날 밤 게냐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면서 미샤는 ‘그래도 나보고 지나랑 하나만 추라고 하면 지젤일 텐데. 지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배우니까’ 라고 말했다. 게냐는 미샤가 전적으로 그녀의 기량과 예술적 강점에 초점을 맞춰서 얘기하는 것이 놀랍다고 생각했다. 극장에서든 평론가들이든 발레 애호가들이든 하나같이 미샤와 지나의 호흡이 가장 뛰어났던 무대라면 지젤이나 돈키호테보다는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70년대에 보리스 아사예프가 재안무했던 라 바야데르를 최고로 쳤다. 거기서 미샤가 췄던 솔로르는 지젤의 알브레히트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강렬해서 지금도 자주 회자되곤 했다. 하지만 미샤는 그 라 바야데르는 솔로르를 위해 안무된 것이었고 지나는 지젤에서 더 돋보였다고 말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게냐는 미샤가 상대 발레리나들을 장식품처럼 취급하며 자기 혼자 무대를 장악했다는 소문들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궁금했다. 매주 찾아오는 루키얀에게 슬며시 물어보았을 때 그는 ‘무슨 소리, 저 친구 여자들에겐 깍듯했지. 사내애들끼리 물고 뜯은 거지’ 라고 대꾸했다. 하지만 그 나이 든 마사지사는 미샤에게 약한 구석이 있었으므로 별로 믿음이 가지는 않았다.

 

 

 

 

 

 

 

 

 

 

.. 파리 오페라 발레단에 대한 미샤와 지나의 이야기들은 철저한 바가노바식 트레이닝을 기초로 다져진 당시 러시아 무용수들의 관점 :) (그런데 사실 나도 페테르부르크 발레들을 좋아하므로 취향이 좀 그런 편이다. 누레예프가 파리 오페라 발레단을 맡아 재안무한 여러 작품들도 사실 딱히 맘에 드는 건 별로 없음) 이 이야기는 199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지나는 이미 40대 초반에 접어든 나이라 정통 클래식은 예전만큼 추지 않는다. 미샤가 잠자는 미녀나 키트리는 아니지 않느냐고 했을 때 지나가 발끈하는 건 그 발레들이 길기도 하고 체력과 기술적 측면에서도 빡센 편이라는 것을 본인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잠자는 사자를 건드린 격 ㅋㅋ) 

 

 

 

 

맨 위 사진은 지젤을 추는 디아나 비슈뇨바 화보. 아래는 마린스키 발레단의 지젤 군무 화보. 

 

 

 

 

 

 

 

 

 

 

 

 

 

 

 

지젤 화보를 위에 올렸으니 마지막으로는 돈키호테의 멋진 키트리 화보를 하나 찾아서 넣을까 하고 사진첩들 뒤지다가... 이건 똑같이 스페인풍이긴 하지만 돈키호테가 아니라 파키타의 커튼콜 사진이다만... 몇년 전 빅토리야 테료쉬키나의 이브닝 공연에서 파키타를 춘 후 뽀뽀하는 테료쉬키나와 슈클랴로프님 모습이 너무 귀엽고 따뜻하고 이뻐서. 딱 오랜 세월 파트너로 춤춘 사이에서 나오는 친밀한 사랑스러움이라 이 사진을 대신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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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주말과 쉬는 날이면 꾸준히 열심히 쓰고는 있는데 아직 네프스키 대로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중반부의 문단 두 개 발췌해 본다. 패션지에 대한 게냐의 생각 +

 


위의 사진은 이 이야기가 펼쳐지는 시간적 배경인 1997년도 보그에 실린 화보. 1997년 4월호에 실린 크리스찬 디오르 화보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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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잡지와 사진작가들은 미샤에게 사족을 못 썼다. 미샤는 패션계에도 지인이 많았다. 파리와 밀라노에서도 행사 초청이 끊이지 않았는데 바쁘다는 이유로 거의 참석은 하지 않았지만, 이번처럼 해외에서 모스크바나 페테르부르크까지 찾아오는 경우는 종종 스케줄을 잡았다. 패션업계 사람들은 미샤가 어떤 스타일이건 옷을 제대로 입을 줄 안다고들 떠들어댔다. 스튜디오에서 목이 늘어난 티셔츠와 슬랙스 차림으로 찍힌 스냅 사진마저도 ‘그런지 룩의 정석’이라는 멘트와 함께 잡지 뒷장에 실리는 지경이었다. 게냐도 근사한 옷을 싫어하지는 않았으나 패션 잡지들이라면 질색이었다. 세상이 멸망해도 상관없다는 투의 무심한 표정으로(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마약을 한방 찌른 표정으로) 괴상한 옷들을 입고 한껏 허세를 부리고 있는 모델들의 화보들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보그나 엘르, 그리고 이들을 어설프게 따라 하며 우후죽순 생겨난 러시아 패션지에 실리는 기사들의 문체가 역겹고 간지러웠다. 어떻게 저런 식의 문장을 구사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그는 그쪽 업계 사람들이 실제로는 그보다 더한 말투를 쓴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말았다.

 

 

 

 

언젠가 게냐는 미샤가 구슬려서 엘르 촬영에 동참했는데 그건 그의 인생 최대의 재앙 중 하나였다. 집에 돌아왔을 때 게냐가 다시는 패션지 촬영 같은 건 하고 싶지 않다고 짜증을 토로하자 미샤는 발레 화보는 곧잘 찍으면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건 다르죠. 일이니까’ 라고 대꾸했을 때 미샤는 ‘그래? 춤 빼고 나머지가 다 일 아니고?’ 라고 진심으로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이러니 대화가 길게 이어질 리가 없다. 하여튼 게냐가 싫다는 티를 제대로 냈기 때문인지 미샤는 그 이후부터는 그를 잡지나 광고 촬영에 연결해주지 않았다. 갈런드는 아쉬워했다. ‘그런 걸 많이 해야 더 유명해지지. 돈도 더 벌고’ 라고 솔직하게 충고를 했다. 게냐는 자신의 일은 무대에서 춤을 추는 거라고 대꾸했지만 갈런드가 이해해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저 당시 나도 페테르부르크에 갔었고 패션잡지는 좀 비쌌기 때문에 초기에 물가가 잘 와닿지 않던 시절에만 보그와 엘르, 마리 끌레르 부류의 잡지 중 두어 권을 사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 중 한 권에는 당시 제5원소 이후 한참 핫하게 뜨기 시작했던 밀라 요보비치 화보가 실렸는데 빨강 파랑 까망 셀로판 테이프 같은 것으로 몸을 칭칭 감은 화보여서 '예쁘긴 한데 참 패션이란 이상해' 라고 생각했던 기억도 난다 :)

 



이후엔 '패션지 따위 집어치워!' 하면서 매주마다 나오는 쩰레빅(텔레비전 방송 주간 편성표 + 연예계 소식이 담긴 옐로페이퍼 주간지 ㅋㅋ)을 사서 읽는 것으로 전환됨 ㅎㅎㅎ

 


구글링해서 나온 1997년도 보그 잡지 화보 두 장으로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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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계속 쓰고 있다. 주인공인 게냐는 풀코보 공항에서 지나를 픽업해서 다시 모스크바 대로로 나왔고 지금은 둘의 대화 파트를 쓰는 중이다. 아무래도 인물이 하나 더 늘어나면 쓰기가 더 수월해진다. 대화가 들어가면 더.

 

 

 

짧은 문단 두 개를 발췌해본다. 이건 전반부라 아직 게냐가 풀코보 공항에 도착하기 전, 모스크바 대로를 혼자 주행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이지만 언급되는 에피소드 자체는 그 전의 이야기라 지나와 미샤도 등장한다. 나에게 이 단편을 쓰는 과정은 아주 오래전 처음 만들어냈던 인물과 다시 만나고 그에 대해 조금씩 더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사진은 파루흐 루지마토프의 리허설 장면. 사진사는 캡션에 나와 있듯 Marina Bakano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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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냐는 미샤와 오랜 시간 대화를 주고받는 적이 거의 없었고 논쟁을 하는 경우는 더욱 드물었다. 그는 이따금 미샤의 유머 감각에 적응이 되지 않았고 때로는 은근히 화가 치밀 때도 있었지만 대놓고 받아치거나 곧이곧대로 ‘무슨 소리인지 알아먹기 어렵군요’ 라든지 ‘내 생각은 다른데요’ 라고 말한 적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상대가 미샤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게냐는 누구와 이야기를 하든 마음속의 생각이나 감정을 언어로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어려웠다. 이성적으로는 토론과 말싸움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두 가지 모두 피로감을 유발한다는 점에서는 별다를 게 없었고 차라리 침묵하는 쪽이 편했다. 

 

 

 

 예외란 춤에 대한 주제뿐이었다. 지나이다는 그가 미샤와 신작 리허설 도중 자신의 솔로 파트에 대해 언쟁을 벌이는 것을 보고 족히 10분 동안 웃고 또 웃었다. 짜증이 난 미샤가 ‘넌 왜 웃는데!’  하고 소리치자 지나는 ‘이런 날도 오는구나 싶어서. 아사예프가 너 때문에 리허설 집어치웠던 거 생각 안 나? 그 착한 스탄카에게도 바락바락 우기고. 옛날에 못되게 군 거 이제 벌 받는 거야. 아주 잘하고 있어, 겐카’  하고 웃어댔다. 게냐는 키로프에서도 전설로 남아버린 미샤의 건방지고 무례한 태도를 자신의 조심스러운 반발과 동일시하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지나가 너무 즐거워했고 미샤조차도 ‘그런가? 할 말이 없네’ 라고 대답한 후 그의 의견을 대폭 수용해줬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아사예프는 미샤가 키로프 극장에서 춤추던 시절의 발레단 예술감독이다. 미샤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지만 그의 재능을 아껴서 항상 저 녀석은 그냥 골칫거리가 아니고 '우리' 골칫거리라고 칭하곤 했다. 스탄카는 미샤의 절친한 벗이자 볼쇼이 극장 안무가 출신인 스타니슬라프 일린의 애칭이다. 물론 모두 내가 만들어낸 인물들이라 실존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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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계속 쓰고 있다. 아직 주인공 게냐는 풀코보 공항에서 빠져나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주차장까지는 나왔다 :) 지난번 발췌했던 풀코보 공항 씬(https://tveye.tistory.com/11065)에 이어, 게냐가 공항까지 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장면 몇 문단 발췌해 봄.



사진은 2010년 풀코보 공항 국제선 터미널. 역시 리노베이션 전의 옛 모습이다. 글에 등장하는 건 입국장, 사진은 출국장. 왜 이렇게 터미널이 썰렁하냐면 이때가 비수기인 2월 무렵이었음. (엄청 추웠음 ㅠㅠ) 그래도 이 사진들은 2010년이니까 공항이 나름대로 깔끔해보인다만 발췌한 단편은 9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공항은 당연히 더더욱 우중충했음.



발췌한 장면은 아래 접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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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분쯤 후 지나이다가 나왔다. 두 개의 커다란 여행 가방을 거의 온몸으로 밀면서, 거의 팔꿈치 언저리에 핸드백을 대롱대롱 달고 다른 한 손에는 쇼핑백까지 들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틀어 올린 붉은 머리는 반쯤 풀어져 마구 흘러내리고 있었고 화장기 없는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짐에 파묻힌데다 심지어 혼자인 자그마한 여자를 보고 신이 난 짐꾼들과 불법 택시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가기 직전에 게냐가 마중객들을 헤치고 앞으로 가서 그녀를 불렀다. 지나이다는 놀라서 펄쩍 뛰었다.

“ 어머, 겐카! 깜짝이야! ”

게냐는 옆으로 다가오던 호객꾼들을 고개를 저으며 쫓아버리고는 지나이다에게서 트렁크들을 빼앗고 생각보다 묵직한 면세 비닐백도 같이 몰아 쥐었다. 지나는 가쁜 숨을 헉헉 내쉬며 푸념했다.

“ 도대체 이 망할 놈의 공항엔 카트가 있을 때가 없어. 간신히 한 개 발견했는데 새파란 양아치 꼬마가 낚아채 갔어. ”

“ 카트라서 다행이죠. 전 지난번에 들어올 때 컨베이어벨트에서 가방도 날치기당했는데. ”

“ 맞아, 기억나. 그래도 가방 찾았잖아. ”

지나의 말대로 찾기는 찾았다. 가방만. 안은 몽땅 털렸다. 키라는 그래도 귀중품은 없었으니 망정이라며 상심한 게냐를 다독였고 동료들은 가방을 몽땅 털어간 그 망할 놈의 좀도둑들은 싸그리 대로변에서 총 맞아 죽을 거라고 욕을 해주었다. 미샤는 어차피 가방 안에는 선물용 초콜릿 상자 몇 개를 제외하면 꿰매야 하는 무용화 더미와 구겨진 의상들, 빨랫감들밖에 없으니 그걸 털어간 놈들도 실망했을 거라고 했다. 게냐가 ‘그러니까 기분 나쁘단 말이에요’ 라고 투덜대자 조금만 기다리면 잃어버린 타이츠랑 무용화가 발레광들의 경매 시장에 나타날 테니 갈런드를 시켜서 도로 구해오면 된다고 농담을 해서 결국 키라에게 ‘그걸 위로라고 하는 거야?’ 하고 한 대 쥐어박혔다.






..




맨 아래 문단에서 언급되는 갈런드라는 인물은 미샤의 발레단에서 운영국장을 맡고 있는 미국인임. 그 전에는 미샤의 해외 에이전트였다가 결국 발레단에 자리잡아버렸음.



2010년 풀코보 공항 사진 두 장 더. 사실 떠날 때는 짐 부치고 정신없이 수속 밟고 엄청 지친 상태가 되기 마련이므로 공항 사진 찍어놓은 건 거의 없다. 입국해서 짐 찾고 나올 때는 더더욱 정신없으므로 찍어둔 사진이 아예 없음. 근데 풀코보 공항이 14년에 리노베이션된 걸 생각하면 이 옛날 공항 사진들 좀 찍어둘 걸 하고 이제야 좀 아쉽다.


그리고 이제는 뻬쩨르의 풀코보 공항에서도 아주 쉽게 카트들을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다 :) 주변에서 짐 잃어버리는 일은 종종 있었고... 나도 옛날에 모스크바 공항에 처음 도착했을 때 컨베이어 벨트에서 누군가가 내 짐을 가져가서 못 찾고 한시간 넘게 헤매다 간신히 다른 벨트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가방을 찾아냄. 그러나 게냐와는 달리 내 짐은 정말로 허름한 이민가방 스타일의 천가방이라 안도 무사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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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8. 21. 20:18

쓰는 중 - 풀코보 공항에서 about writing2021. 8. 21. 20:18

 




사진은 2013년 9월, 페테르부르크 풀코보 국제선 공항. 14년에 신공항이 개장했으므로 이 사진은 내가 마지막으로 디뎠던 구청사의 모습이다. 2층까지 있는데 저녁 무렵 찍어서 푸르스름한 빛의 덕을 좀 보았을 뿐 엄청 작아서 갈 때마다 버스 터미널을 떠올리곤 했다. 그나마도 이때는 카페와 식당이라도 한두개 입점을 했지만 맨처음 이곳에 발을 디뎠던 옛날에는 진짜 우중충 그 자체였다. 지금 쓰고 있는 글이 9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바로 이 구 풀코보 공항이 등장한다. 물론 이쪽은 출발하는 쪽이고, 도착 홀은 다른 방향에 있다만. 후자는 더욱 좁고 우중충했음.


이 공항에 도착해(드디어 모스크바 대로를 벗어나서 ㅋㅋ)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주인공에 대한 문단 하나 발췌해 봄. 그런데 이 주인공은... 이 공항에서 나오면 다시 모스크바 대로를 주행해야 한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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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컴컴하고 비좁은 공항의 딱딱한 의자에 앉아 게냐는 마리니나의 신간 추리소설을 읽고 종이컵에 담긴 타르처럼 진한 싸구려 커피를 한잔 마셨다. 눈보라 때문에 비행기가 줄줄이 연착되고 있었다. 커피를 다 마신 후에는 책을 패딩 점퍼 주머니에 집어넣고 뻣뻣해진 몸을 좀 풀려고 공항 안을 두어 바퀴 돌았다. 거무스름한 바깥 유리문 너머로 여전히 잿빛 안개가 회오리치고 있었다. 아니치코프 다리의 거대한 청동 말 조각상들 아래서 촬영을 하고 있을 미샤가 좀 안됐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하긴 미샤는 운하에서 불어오는 칼바람과 눈보라를 정면으로 맞으면서도 ‘드라이아이스를 안 써도 되겠네’ 하며 농담을 하고 있을 게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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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7. 3. 21:51

쓰는 중 - 다 잘할 수는 없는 노릇 about writing2021. 7. 3. 21:51

 

 

 

지난 주말부터 예전에 구상해놓았던 단편을 쓰기 시작했다. 주인공은 게냐라는 남자 무용수이다. 장난으로 그린 스케치들에 몇번 농담조로 등장했었는데 사실 글에서는 그런 타입은 아니다. 배경은 90년대 후반, 페테르부르크이다. 5월에 마쳤던 단편에서 한 달 정도의 시간 차를 두고 있다. 

 

 

주인공은 게냐이지만 미샤도 여전히 등장한다. 이 글은 게냐가 차를 끌고 나와 모스크바 대로로 진입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초반부 두어 문단을 발췌해 본다. 이 부분은 게냐보다는 미샤에 대한 얘기이다. 고양이 사진은 이야기 중에 냥이에 대한 언급이 있어서 그냥 지나가려니 이쁜 이미지를 하나 올려보고 싶어서. 사진은 @krasa_altaya_catt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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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샤는 운전 솜씨가 형편없었다. 교통 신호를 부지기수로 위반했고 차선도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다. 과속에 대한 감각도 아예 없었다. 세상에는 절대로 운전대를 맡길 수 없는 종류의 인간이 있는 법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라면 발레단 스태프들과 무용수들뿐만 아니라 주변 모두의 의견이 일치했기 때문에 웬만하면 누구든 자원해서 운전을 해줬고 걸리적거리기만 하는 미샤를 뒷좌석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

 

 

 

 마지막으로 미샤가 직접 차를 끌고 나갔던 것은 몇 주 전에 길에서 주워서 잠시 돌봤던 고양이를 키라에게 데려다주러 갔을 때였다. 다른 경우였다면 게냐가 대신 갔을 테지만 그 망할 놈의 고양이는 그를 너무 싫어해서 보기만 하면 하악질을 하며 위협을 해댔다. 게냐도 고양이라면 질색이었던데다 그 녀석이 덤벼들어서 두 번이나 피를 봤기 때문에 집이든 차 안이든 같은 공간에 있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미샤가  ‘고양이와 인간 양측의 평화를 위해’  나선 것이었다. 미샤는 어찌어찌 키라가 사는 동네까지는 무사히 도착했지만 역시나 주차를 하다가 사이드미러를 날려 먹었다. 키라에게 귀가 닳도록 잔소리를 듣자  ‘그래도 면허증은 있는데. 당과 국가가 발급해준 거니까 어쨌든 자격은 있는 거 아냐’ 라고 투덜거렸다가 본전도 찾지 못했다. 하지만 미샤가 이렇게 불평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보통은 자신의 운전 실력이 엉망진창이라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오히려 게냐가 보기에는 하기 싫은 운전을 남이 해 주니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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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5. 29. 21:36

판탄카의 루키얀 2021. 5. 29.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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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5. 23. 22:29

글을 마친 직후, 메모 about writing2021. 5. 23. 22:29

 

 

 

지난 2월부터 석 달 동안 써온 글을 조금 전에 마쳤다. 짧은 단편이지만 새로운 인물을 다루기도 했고 또 그간 많이 바빠서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이 글은 가슴 설레며 몰입하는 종류의 글쓰기에 속하지 않았다. 수다를 떨며 따뜻한 차를 마시고 책을 읽듯 썼다. 

 

 

언제나처럼, 다 쓰고 나면 일단 여기서 멈춘다. 퇴고와 제목 붙이기 등 여러가지 일은 미뤄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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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5. 22. 17:58

쓰는 중 - 불공평한 세상의 고양이 about writing2021. 5. 22. 17:58

 

 

 

 

이번 주말에는 열심히 써서 이 단편을 끝내고 싶은데 너무 피곤해서 집중이 잘 안되고 있음. 두어 페이지만 더 쓰면 될 것 같은데. 

 

 

 전반부의 짤막한 장면 하나 발췌해 봄. 마사지사 루키얀(미샤가 부르는 애칭은 루카 아저씨), 미샤, 그의 발레단에서 주역을 맡고 있는 무용수 게냐(본명은 예브게니), 그리고 고양이 한 마리가 등장한다. 그래서 sns에서 건진 멋있는 고양이 사진 한 장도 같이 올려봄. 글에 등장하는 고냥이는 저렇게 위엄있고 늠름한 외양은 아님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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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이는 미샤가 쓰다듬어주자 기분 좋게 가르랑거렸지만 루키얀이 다가가자 털을 뻣뻣하게 세우며 하악질을 해댔다. 루키얀이 섭섭한 표정을 짓자 미샤가 웃었다.

 

 

 “ 삐치지 마세요, 루카 아저씨. 누구는 할퀴었다고요. 피도 나고. ”

 

 “ 그 불쌍한 희생자가 누군지 말 안 해줘도 알겠네. 목욕시켜주고 말려주고 먹여주다 당했겠지. 그러는 동안 자넨 언제나처럼 이렇게 우아하게 앉아서 손 하나 까딱 안 했을 거잖아. 근데도 웅덩이에서 건져줬다는 사실만으로 이 꼬마 악마한테 사랑받고. 세상이 너무 불공평해. 그렇지, 예브게니? ”

 

 “ 그런 것 같아요, 루키얀 보리소비치. ”

 

 

 게냐가 손등에 붙어 있는 반창고를 내려다보며 고양이에게 당한 아픔이 되살아난 듯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미샤는 휘파람을 불었다.

 

 

 “ 고양이랑 잘 지내는 방법을 몰라서 그래요, 둘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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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미하일 불가코프가 태어난지 130주년째 되는 날이다. 지금 쓰고 있는 단편에 불가코프 얘기가 조금 나오기 때문에 기념으로 한 문단을 발췌해 본다. 루키얀은 일전에 메모에 남겼듯 키로프 극장의 마사지사. 발췌한 문단은 루키얀의 70년대 회상의 일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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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사지실에서 거장과 마르가리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책의 원주인이 미샤라는 것도 밝혀졌다. 미샤는 그 책을 몇 년 전 누군가로부터 선물 받았다면서 ‘작년에 지나에게 빌려줬었는데 아마 레냐한테 간 것 같고 그다음에는 잘 모르겠네요. 뭐 언젠가는 돌아오겠죠’ 라고 대꾸했다. 그는 루키얀에게 불가코프의 다른 소설도 몇 권 빌려주었다. 제대로 된 책도 있었고 사미즈다트 복사본도 있었다. ‘개의 심장’이나 ‘운명의 알’은 루키얀의 취향이 아니었지만 ‘백위군’은 좋았다. 미샤는 ‘거장과 마르가리타’ 다음으로는 ‘젊은 의사의 수기’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는데 루키얀은 그게 좀 의외라고 생각했다. 미샤는 ‘의사가 나오는 건 웬만하면 다 재미있으니까요’ 라고 설명하다가 ‘아, 닥터 지바고는 빼고. 그건 별로’ 라고 덧붙였다. 닥터 지바고를 인생 소설로 손꼽고 있던 루키얀은 마치 자기가 공격당한 듯 슬며시 부아가 치밀었고 마음속으로 ‘이 건방진 꼬마 녀석,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취향이라니까’ 하고 투덜댔지만 언제나 그렇듯 미샤의 반짝거리는 까만 눈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풀려서 금세 웃어버렸다.

 

 

 

 

 

 

 

 

 

...

 

 

 

 

인용된 책 제목들은 마지막의 닥터 지바고 빼고는 모두 불가코프의 소설들이다. 닥터 지바고는 뭐 원체 유명한 소설이지만, 하여튼 작가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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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4. 24. 21:45

쓰는 중 - 쿠폴과 별들 about writing2021. 4. 24. 21:45

 

 

 

 

 

 

 

 

주말마다 조금씩 쓰고 있다. 속도는 별로 붙지 않지만 가벼운 소품이고 이제 후반부로 접어들었으니 5월 안으로는 다 쓰지 않을까 싶다. 

 

 

글의 앞부분 일부 발췌. 루키얀은 지난번 발췌문에 덧붙였듯 키로프 극장 마사지사이다. 

 

 

 

 

맨 위는 Andrei Mikhailov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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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봄 날씨로 따뜻했던 전날을 비웃기라도 하듯 기온이 15도 가까이 급강하하며 엄청난 눈보라가 몰아쳤던 3월의 어느 목요일이었다. 정말 최악의 날씨였다. 운하를 따라 걷기에는 더욱 그랬다. 얼음처럼 딴딴한 눈발과 칼바람이 마구 휘몰아쳤다. 대체 왜 이런 데로 이사를 왔느냐고 툴툴대다  ‘하긴 차가 두 대나 있는 사람에게 버스 정류장이니 지하철역이니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담’ 하고 자가 결론을 내리려는데 미샤가 언제나처럼 농담인지 진담인지 도대체 알아먹을 수 없는 어조로, 망할 놈의 라디오 방송 아나운서처럼 명확한 발음으로 대답했다.  ‘창밖으로 트로이츠키 사원이 보이거든요’

 

 

 

그 어처구니없는 대꾸에, 그리고 반쯤은 그 말투 때문에 부아가 치민 루키얀은  ‘그게 안 보이는 데가 어디 있어! 로모노소프 다리 쪽에서도 보이는데! 우리 극장 옥상에서도 보여!’ 하고 버럭 소리쳤다. 미샤는 웃지도 않고 찬찬히 덧붙였다.  ‘하지만 정면으로 보이는데. 쿠폴 네 개가 다 보인다고요. 얼마나 가까운지 몰라요. 이쪽으로 와서 한번 보세요. 별을 만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

 

 

 

트로이츠키 사원 풍경 두 장 더. 

 

 

 

 

 

 

 

 

사진은 @kopinoo_piter 

 

 

러시아 정교 사원은 한겨울에 흰눈으로 쿠폴이 반쯤 뒤덮였을 때가 가장 예쁜 것 같다. 트로이츠키 사원도 물론 예외는 아니다. 별들이 좀 가려지긴 하지만 :) 판탄카 운하도 꽁꽁 얼어붙어 눈으로 새하얗게 뒤덮여 있으니 더욱 아름답다. 

 

 

 

 

 

 

 

 

이건 밤 풍경. 사진은 @photo_surkhaev

 

 

이삭 성당 꼭대기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함. 트로이츠키 사원은 쿠폴이 상당히 거대하기 때문에 도심에서는 좀 높이 올라가면 웬만하면 눈에 잘 보인다. 이삭 성당과 카잔 성당의 쿠폴도 그렇다. 하여튼 이렇게 여기저기서 잘 보이니 루키얀이 '그게 안 보이는 데가 어딨어!' 라고 할만도 함^^; 

 

 

이 사원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와 결혼했다. 원래 이름은 이즈마일로프 사원이지만 트로이츠키 사원이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하다. 2006년인가 2007년에 화재가 나서 쿠폴과 성당이 불탔는데 그때 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이 울부짖으며 너무나 슬퍼했었다. 이후 다시 복구되었다. 저 쿠폴 불타는 걸 당시에 라이브저널에서 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이 사진과 글로 생중계를 해줘서 나도 그거 보며 엄청 안타까워하며 발을 동동 굴렀었다.

 

 

내가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원 중 하나. 아마 미샤도 그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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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중 : 대문자 T의 극장 about writing2021. 4. 17. 22:45

 

 

 

 

 

 

 

 두어 달 전부터 조그만 단편을 하나 쓰고 있다. 내내 바쁘고 집중하기 어려워서 시작한지는 꽤 됐지만 막상 진도는 잘 나가지 않는다. 내용은 아주 가볍다. 애초에 구상했던 글이 있는데 예전에 써온 글들과는 시간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그리고 새 인물도 나오기 때문에 워밍업으로 더 짧은 글을 먼저 쓰게 된 것이다. 

 

 

 

 어제랑 오늘 계속 마린스키가 그리워져서 마침 기분과도 잘 맞는 것 같아 글의 일부를 발췌해 본다. 아주 조금. 시간적 배경은 이제 90년대 후반이다. 루키얀은 키로프 극장에서 한때 미샤와 같이 일했던 마사지사이다. 예전에 쓴 글에 몇번 이름이 나온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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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째선지 루키얀은 미샤가 극장 바로 근처에 살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것도 지나이다와 함께 살았던 그 아파트에. 대체 언제 이사를 간 거냐고 투덜댔을 때 미샤는 어이없어하거나 짜증을 내지도 않고  ‘81년이요. 그때 가브릴로프에 갔잖아요’ 라고 대꾸했다.

 

 

 루키얀은 잠시 침묵했다가  ‘난 어쩐지 자네가 계속 극장에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라고 불쑥 말했다. 미샤는  ‘있었죠. 계속. 레닌그라드에’ 라고 대답했고 루키얀은 기분이 나아졌다. 그가  ‘레닌그라드’라고 했기 때문에, 그리고  ‘극장에 돌아오지는 않았는데’ 라고 덧붙이지 않았기 때문에. 크류코프 운하와 니콜스키 사원을 끼고 서 있는 에메랄드 녹색 건물. 대문자 T의 극장. 루키얀에게는 여전히 하나뿐인 극장. 분명 미샤에게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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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 23. 22:58

밤의 작은 조각 about writing2021. 1. 23.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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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리사는 열두 시 종이 치기 전에 홀에서 나왔다. 정원은 텅 비어 있었지만 램프 불빛들 때문에 캄캄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창문과 창문 사이의 좁은 벽에 기댄 채 담배를 피웠다. 안에서 숫자를 세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박수와 환성이 터져 나왔다. 돌림노래처럼. 울타리 너머에서도 여기저기서 환호가 들려왔고 폭죽이 터지면서 빨강과 파랑, 보라색과 노란색의 불꽃들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사라지고 또 치솟았다. 그녀는 불꽃들 사이로 담배 연기를 내뿜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붉고 푸른 폭죽 불빛들은 자신만의 방법이 있었다. 계속해서 달아나며 치솟고 꺼져버렸다. 연기는 가느다란 회색 얼룩을 남기며 어둠 속으로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그녀는 중간에 꺼버린 담배를 휴지통에 버렸고 심호흡을 하며 차갑고 음습한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리고 화약과 담배는 바람과 어둠을 타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그 냄새도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으로. 하지만 무감동하게, 그저 교과서에 적힌 공식을 읽듯이.

 

 

 

 

 

 

... 작년 가을에 마친 단편 말미에서 발췌했다. 새해 전야의 여러 이야기를 담고 있는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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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전야 05. 유리 아스케로프  (0) 2020.10.24
:
Posted by liontamer
2020. 10. 31. 22:23

새해 전야 07. 알리사 2020. 10. 31.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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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0. 29. 20:54

새해 전야 06. 트로이 2020. 10. 29.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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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0. 24. 17:12

새해 전야 05. 유리 아스케로프 2020. 10. 24.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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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0. 17. 23:45

새해 전야 04. 지나 2020. 10. 17.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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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0. 15. 16:40

새해 전야 03. 베라 2020. 10. 15.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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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0. 13. 21:13

새해 전야 02. 게르만 스비제르스키 2020. 10. 13.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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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0. 10. 23:24

새해 전야 01. 코스챠 about writing2020. 10. 10. 23:24

 

 

 

 

 

 

 

 

 

이 글은 작년 12월 30일에 블라디보스톡의 kafema 카페에서 처음으로 구상했고, 5월부터 쓰기 시작해 지난 9월에 마친 옴니버스 단편이다. 연말과 새해 시즌에 구상한 새해 이야기였다. 하지만 12월말에 블라디보스톡의 그 카페에서 호텔에 돌아와서는 유명한 소련 시절 새해 영화인 '운명의 아이러니'를 보느라 글을 제대로 구상하지 못했고 훌쩍 새해를 맞아버렸다. 시기가 지나자 김이 좀 샜고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는 전혀 다른 글을 아주 집중해서 쓰느라(그건 4월에 마쳤다) 이 글은 미뤄두었다. 그러다 5월의 어느 바쁜 날 낮에 혼자 점심을 간단히 먹은 후 한적한 티룸에서 쉬며 수첩에 글쓰기 메모를 하다가 다시 이 글을 되살려냈고 곧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국 새해 시즌을 한참 지나 5월부터 써서 추석이 다 되어갈 때쯤 글을 마치게 되었다.

 

 

배경은 1974년 12월 31일, 소련의 레닌그라드이다. 에피소드 중 알리사가 등장하는 이야기만 런던에서 전개된다. 내가 쓰고 있는 미샤와 레닌그라드 우주에 속해 있는 얘기들이다. 소설은 총 일곱개의 작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인물들은 서로 이어져 있기도 하고 모르는 사이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가볍고 짧은 장면과 대화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등장인물에 따라 무게나 분위기가 좀 달라지는 면도 있다.

 

 

제목은 한참 고민했지만 그냥 처음에 붙였던 가제를 그대로 가져가기로 했다. 멋없는 제목이다만 뭔가 오글거릴 정도로 예쁜 제목을 붙이는 것도 별로 맘에 들지 않아서. 사실 '귤과 샴페인'이란 제목을 붙일까 하기도 했었다만 ㅋㅋ

 

 

일곱개의 에피소드 제목과 주인공은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에피소드들 역시 새해 전날 아침부터 밤까지 시간 순서대로 전개된다. 이 중 몇몇 이름들은 전에 이 글쓰기 폴더에 발췌한 글들에 등장한 적이 여러번 있다. 발췌하진 않았지만 거의 모두는 트로이의 레닌그라드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이다. 이 단편의 배경이 그 소설과 시간/공간적으로 겹치기 때문이다.

 

 

1. 코스챠 (미샤와 트로이의 문학 서클 친구)

 

2. 게르만 스비제르스키 (정치인)

 

3. 베라 (시립병원 의사)

 

4. 지나 (키로프 극장 무용수, 미샤의 파트너)

 

5. 유리 아스케로프 (시립병원 의사)

 

6. 트로이 (레닌그라드 대학교 강사)

 

7. 알리사 (미샤와 트로이의 문학 서클 친구. 트로이의 절친)

 

 

 

원래는 이 글의 후기를 따로 적어보려 했지만 퇴고를 마친지도 한달 가까이 흘렀고, 또 글의 성격상 굳이 후기 노트가 필요하지는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오늘은 가장 가볍게 썼던 첫번째 에피소드 전문을 올려본다. 12월 31일 아침, 절친한 문학 서클 동료들인 코스챠와 갈랴, 타냐가 새해맞이 파티를 위해 시장을 보러 가는 이야기이다.

 

 

에피소드에 언급되는 료카는 갈랴의 남편이다. 료카, 스베타, 이고리, 트로이, 미샤, 알리사 등 언급되는 이름들은 모두 이 문학 서클 멤버들. 릴렌카는 갈랴와 료카의 어린 딸. 알랴는 알리사의 애칭. 갈린카는 갈랴의 애칭(갈랴도 갈리나의 애칭이다)

 

 

 

글은 아래 접어두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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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전야

(1974.12.31 ~ 1975.1.1)

 

 

 

 

 

 

 

 

- 1 -

코스챠

 

 

 

 

 

오전 10 30, 안드레예프스키 시장

 

 

 

며칠 동안 갈랴는 코스챠에게 제발 30일 밤에는 술 마시지 말라고 귀가 닳도록 신신당부를 했었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그래그래 하고 웃으며 그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리고 문제의 밤이 되었다. 코스챠가 기분 좋게 보드카를 꿀꺽 들이키려는 순간 갈랴가 잔을 뺏으며 초를 쳤다.

 

 

 오늘 밤엔 마시지 말랬잖아! 내일 아침 일찍 시장에 가야 한다니까! ”

 

 료카는 마시고 있잖아! 왜 나만... ”

 

 네가 운전을 해 줘야 되니까! 차는 너한테만 있잖아. ”

 

 차 안 가져왔단 말이야. ”

 

 너 약속했잖아, 같이 장 보러 가기로. 파티에 아무것도 안 가져오는 대신 운전해 주기로 했잖아. ”

 

 취했을 때 무슨 약속을 못 해. 사람이 어떻게 그러냐, 코앞에서 잔을 뺏고. 이게 날강도지 뭐야. ”

 

 알았어, 그럼 딱 한 잔만 마셔. 그리고 집에 가는 거야. 내일 아침에 차 가지고 시장으로 와. 내일은 사람 많을 테니까 빨리 와야 돼.”

 

 겨우 한 잔. 병에 저렇게 많이 남아 있는데. 어차피 자고 나면 술은 다 깨는데. ”

 

 

 

 

하지만 갈랴는 양보하지 않았다. 료카도 모르는 척하며 난 릴렌카 기저귀 갈아줘야 돼 하면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코스챠는 억울함에 북받친 눈으로 료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재는 게 편이라는 둥 결혼 안 한 사람 서러워서 어디 살겠냐는 둥 투덜거렸지만 결국 자기 몫의 보드카 딱 한 잔만 마시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아침에 그는 근처에 사는 타냐를 태우고 시장으로 갔다. 시장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주차도 한참 걸렸다. 솜씨 좋게 새치기를 해서 차를 세워놓고 나오니 갈랴가 장바구니를 들고 하염없이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코스챠는 전날 밤의 슬픔이 새삼 떠오르며 부아가 치밀었다.

 

 

 , 열 시까지 오라면서 넌 삼십 분이나 늦게 오냐! 나보고는 차 가지고 일찍 와야 되니까 술도 마시지 말라고 해놓고. ”

 

 다 계산한 거야. 어차피 주차하는데 그 정도 걸릴 거니까 시간 맞춰서 온 거지. ”

 

 

 

 

코스챠는 뭐라고 항의를 해보려 했지만 갈랴를 말로 이길 자신도 없었고 또 가만히 생각해보니 틀린 얘기도 아니어서 그냥 납득했다. 그저 보드카 딱 한 잔밖에 못 마시고 쫓겨난 것만이 서러울 뿐이었다. 트로이라도 옆에 있었으면 자기 역성을 들어 주었을 텐데 싶었지만, 그 녀석은 장 보는 일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해서 지난 몇 년 동안 단 한 번도 새해 파티 준비를 도와준 적이 없었다. 하지만 트로이에게는 다른 면에서 장점이 많았으므로 코스챠는 그를 용서하기로 했다.

 

 

그래도 이게 벌써 몇 년째인가, 이제 이렇게 짐꾼과 운전기사 노릇을 하는 것은 막내인 미샤가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심지어 그 꼬맹이는 술도 안 마시니 더욱 안성맞춤일 텐데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지만 그런 말을 했다가는 발레 광팬인 타냐가 어디 감히 왕자님에게 허드렛일을 시키려고 하느냐며 두들겨 패려고 할 것 같아 다시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들은 함께 가게와 좌판들을 돌며 새해 파티용 먹거리들을 샀다. 엄밀히 말하자면 갈랴와 타냐가 장을 보았고 코스챠는 짐을 들어주고 길을 뚫어주었다. 중간중간 훈수도 두었다.

 

 

 갈린카, 비네그레트 샐러드 만들어줄 거지? 난 올리비에보다 그게 더 좋은데. ”

 

 그건 스베타가 만들어 온다 했어. ”

 

 귤 좀 더 사면 안 돼? ”

 

 또 귤 던지고 뭉개려고! ”

 

 누가 귤을 던져! 소중하게 쌓아놓고 한알 한알 까먹을 건데! ”

 

 

 

 

코스챠가 제2의 억울함에 사로잡힐 찰나 타냐가 끼어들어 작년에 취해서 귤 던지기 서커스를 했던 것은 이고리였다고 정정해 주었다. 올리비에 샐러드용 감자와 달걀, 오이에 구이용 거위 한 마리와 사과, 연어알 통조림, 빵과 치즈, 칼바사 햄까지 사고 나자 코스챠는 허리가 휘고 어깨가 부서질 것 같았다. 거위를 구울 생각이었으면 전날 미리 사 놓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미리 구워 놓은 닭을 사서 그냥 데워먹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 어차피 닭이나 거위나 맛은 비슷비슷할 텐데 하고 코스챠가 투덜거리자 갈랴가 자꾸 불평하면 거위를 한 마리 더 살 수도 있다고 협박했다. 그나마 술은 손님들이 가져오기로 했으니 다행이었다.

 

 

 

코스챠가 짐보따리를 차에 내려놓고 돌아왔을 때 갈랴와 타냐는 이미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차를 마시며 설탕을 잔뜩 뿌린 푹신푹신한 도넛을 먹고 있었다. 장을 다 봤기 때문에 관대해진 갈랴가 코스챠에게 먹고 싶은 걸 다 골라오라고 했다. 그래서 코스챠는 갓 튀겨내 뜨끈뜨끈한 양고기 체부렉과 버찌잼이 가득 든 피로슈카 파이를 담아와서 눈 깜짝할 사이에 몽땅 먹어치웠다. 갈랴가 혀를 찼다.

 

 

 차 한 모금씩은 마시면서 먹어야지. 체하려고. ”

 

 체부렉은 뜨거울 때 먹어야 한단 말이야. 타냐, 그 도넛 안 먹을 거면 나 줘. , 메도빅도 샀구나. 나 그것도 먹을래. ”

 

 안돼. 딱 하나밖에 안 남은 거 간신히 낚아챈 거야. 이건 트로이 줘야 돼. 넌 그냥 도넛 먹어. ”

 

 나도 메도빅 좋아하는데! 너무하잖아. ”

 

 넌 도넛이랑 버찌잼 파이를 더 좋아하잖아. 걔는 메도빅을 제일 좋아한단 말이야. ”

 

 하긴 그렇지. 에이, 까탈스러운 놈. 그럼 카르토슈카는 먹어도 돼? ”

 

 . 많이 샀어. 미샤도 이 집 카르토슈카는 먹더라고. 별로 안 달다고. ”

 

 , 그럼 난 안 먹어. 걔가 안 달다고 할 정도면 진짜로 안 단 거잖아. ”

 

 두 종류야. 거기 노란 크림 얹힌 건 달아. 안에 잼도 들어 있고. 그거 먹어. 근데 다 먹으면 안 돼. 잼 들어 있는 건 스베타가 좋아하니까. 아니면 있다가 집에 가서 모코 케이크 먹어. 이고리가 저번에 그거 노래를 불러서 료카가 어제 사다 놨거든. ”

 

 

 

 

잔소리는 많아도 친구들이 좋아하는 거라면 뭐든 기억하는 갈랴가 놀랍다고 생각하며 코스챠는 도넛 한 개와 노란 크림 얹은 카르토슈카를 추가로 해치웠다. 그러다가 퍼뜩 생각나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근데 양귀비씨 빵은 없네. ”

 

 그거 먹는 사람이 없잖아. ”

 

 알랴가 좋아하는 건데... 알랴가 없다고 안 사면 너무 매정하잖아. ”

 

 

 

 

언제나처럼 알랴는 떠났잖아. 이제 그만 잊어, 코스칙이란 대사가 뒤따를 것이라 생각했지만 갈랴는 손을 뻗어 코스챠의 목도리에 묻은 가루 설탕을 털어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진짜 그렇네. 나가면서 양귀비씨 빵도 사자. 많이는 말고. 딱딱해지면 맛없으니까. ”

 

 갈린카, 알랴는 우리보다 더 늦게 새해를 맞겠지? ”

 

 그렇겠지. 여기 시간이 더 빠르니까. ”

 

 알랴는 쓸쓸하겠다. 우리도 없고. 거기, 그렇게 멀리. 혼자서 새해라니. ”

 

 혼자는 무슨. 대사관에서 새해 파티하겠지. 그쪽 친구들도 많이 생겼을 거야. ”

 

 다르잖아, 거기는 여기랑. 친구들도. 우리가 아니잖아. ”

 

 전화라도 해볼래? ”

 

 일요일에 했었어. 겨우 30. 그나마도 연결이 안 좋아서 끊어졌는데 교환수가 하도 딱딱거려서 다시 걸지도 못했어. ”

 

 무슨 얘기 했어? ”

 

 그냥, 딱 두 마디. 잘 지내 알랴? , 잘 지내. 거기서 끊겼어. ”

 

 그럼 다 괜찮은 거야. ”

 

 안 괜찮아. 알랴 목소리가 너무 달랐는걸. 팍 가라앉아서... 끊기고. ”

 

 국제전화니까 그렇지. 있다가 나랑 전화국에 가보자. 거기서 걸면 좀 낫더라. ”

 

 

 

 

코스챠는 알리사가 오늘은 집이 아니라 대사관에 있을 거라고, 그리고 그런 대단한 곳으로는 전화 연결을 해 주지 않을 것이고, 해 준다 해도 분명 도청될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느니 차라리 새해 카드를 쓰는 게 나을 것이다. 하지만 도넛을 한 개 더 먹는 동안 전화도 도청하는 마당에 카드라고 뜯어보지 않겠느냐는 지극히 정상적인 논리회로가 머릿속에서 작동되었고 결국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코스챠가 목에 걸린 마지막 도넛 한 조각을 넘기기 위해 식은 차를 꿀꺽꿀꺽 마시는 동안 갈랴와 타냐는 카운터로 가서 양귀비씨 빵을 다섯 개나 샀다.

 

 

 

 

 

 

 

...

 

 

 

글에서 언급되는 먹거리들에 대한 짧은 메모

 

 

 

체부렉 чебурек  : 양고기를 넣고 기름에 튀긴 파이.

맨 위 사진이 바로 체부렉이다.

그런데 이야기가 소련 시절이니 좀더 촌스러운 사진이 필요했지만 구글에서 너무 화사한 사진을 찾아버렸다 ㅋㅋ

코스챠는 제일 먼저 이것을 집어 덥석 해치우고 소련 시절부터 지금까지 인기많은 간식이지만 내 입맛엔 너무 기름져서 난 거의 안 먹는다. 내 친구 료샤는 이걸 매우 좋아한다.

 

 

 

 

 

도넛 пышки : 일반적인 미국식 도넛도, 우리나라 도나스도 아닌 '쁘이슈끼'.

 

 

 

 

 

 

 

단수는 쁘이슈까 라고 하여 a 로 끝나지만 이것을 한개만 먹는 사람은 거의 없으므로 보통 복수로 쓴다.

 

소련 통틀어 가장 유명한 쁘이슈끼 가게는 레닌그라드 발샤야 코뉴셴나야 거리에 있는데 지금도 문전성시를 이루는 유서깊은 곳이다. 이 에피소드에서 코스챠와 친구들은 시장에 있는 작은 간이 빵집에서 쁘이슈끼를 사먹고 있지만 평소에는 그 유명한 가게에도 종종 갔을 것이다.

 

쁘이슈끼는 일반적 도넛보다 훨씬 부들부들하고 푹신푹신하고 기름지고 가루설탕이 잔뜩 묻어있다. 보통 타르처럼 진한 커피와 같이 먹는다. 레닌그라드/페테르부르크 로컬들의 소울 푸드 중 하나인데 역시 이것도 내 입맛에는 너무 기름져서 나는 한개 이상 먹기 어렵다. (료샤는 이것도 매우 좋아해서 나에게 '넌 역시 관광객일 뿐이야! 쁘이슈끼가 기름져서 못먹겠다니 정말 모욕적이다!' 라고 했었다)

 

 

 


카르토슈카 картошка : 이것은 내가 여러번 언급한 적이 있으므로 사진 없이 넘어간다.

초콜릿과 코코아 가루, 밀가루 등으로 반죽해 만드는 쫀득한 경단 같은 것인데 매우 아주 맛있다 :)

 

 

피로슈카 파이 : 안에 잼이나 각종 소를 넣어 구워낸 조그만 파이. 커다란 파이는 피로그(пирог)라 하고 조그만 것들은 지소체를 써서 피로죡(пирожок)이나 피로슈카(пирожка)라고 한다. 나는 사과파이를 좋아한다. 

 

 

 
메도빅 медовик  : 이것도 내가 아주 여러번 언급했으므로 넘어간다. 체코에서는 메도브닉, 영어식으로는 허니 케익.

 

 

 

 


비네그레트 샐러드 винегрет : 스뵤클라(비트), 완두콩, 감자 등 야채들에 식초 드레싱을 쳐서 만드는 새콤한 샐러드.

이 사진도 너무 쫌 화사하게 나왔다 ㅎㅎ 법랑 냄비에 가득 쌓아놓은 사진 찾고 싶었는데...

 

 

 

 


올리비에 샐러드 оливье : 이것도 여러번 언급한 적 있다. 러시아 새해 음식 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 감자, 달걀과 마요네즈가 주재료이고 여기에 완두콩이나 햄, 오이 등이 추가로 들어간다. 제대로 만든 올리비에 샐러드는 무척 맛있다.

 

:
Posted by liontamer
2020. 10. 1. 21:54

코냑과 카르토슈카 + 우정의 증거 + about writing2020. 10. 1. 21:54

 

 

 

 

추석이 다 지나가기 전에, 명절 기분과 함께 얼마 전 끝낸 글에서 몇 문단 발췌해봄. 비록 추석은 아니지만 새해를 다루고 있는 글이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즐겁고 알콩달콩한 명절 파티 분위기인 여섯번째 에피소드에서 조금 가져와봤다. 우리와는 달리 가족친지가 모이는 명절이 아니고 절친들끼리 모여 술 마시고 노는 분위기의 얘기긴 하지만 :)

 

 

여섯번째 이야기에서는 트로이와 그의 문학 서클 친구들이 아지트인 갈랴와 료카 부부의 아파트에 모여 새해 파티를 하고 있다. 미샤가 뒤늦게 합류한다. 아래는 미샤가 갈랴에게 가져다 준 코냑에 대한 묘사로부터 이어진다.

 

 

카르토슈카는 소련 시절부터 지금까지 러시아 사람들이 좋아하며 즐겨 먹는 디저트이다. 쫀득한 초콜릿 경단 같은 맛이다.

 

 

발췌문은 접어두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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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코냑은 아무런 설명 없이도 훌륭했다. 보드카와 싸구려 샴페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몸이 금세 따뜻하게 달아올랐고 달콤하고 강렬한 향이 코와 목을 부드럽게 훑고 지나갔다. 미샤는 코냑 대신 갈랴가 가져다준 나무열매 모르스를 마시고 올리비에 샐러드를 먹었다. 트로이는 이고리의 손에서 병을 빼앗아 마지막 남은 코냑을 따랐다. 반 잔 정도 나왔다. 그는 코스챠와 이고리의 애절한 시선을 무시하면서 잔을 미샤에게 건네주었다.

 

 

 

 자기가 가져온 건데 한 방울도 입에 안 대면 섭섭하잖아. ”

 

 

 

미샤는 고개를 저었다. 극장에서 이미 한도 초과로 마셨기 때문에 자신의 알콜 저항력은 열두 시 종 칠 때 마실 샴페인 딱 한 잔만큼만 남았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이고리가 뒤에서 손을 쭉 뻗어서 잔을 낚아채더니 코스챠에게 뺏길세라 훌쩍 마셔버렸다. 코스챠는 누가 코냑을 그렇게 교양 없게 꿀꺽꿀꺽 들이키냐!’하고 투덜대면서도 미샤에게 크림과 잼이 없는 카르토슈카를 가져다주었다. 미샤는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갈린카가 너 먹으라고 고른 거란 말이야. 이건 안 달아서 너 말고는 먹을 사람도 없어라는 코스챠의 말에 졌다는 표정을 지으며 포크로 초콜릿 카르토슈카의 귀퉁이를 잘라서 먹었다. 그리고는 친구들의 시선이 다른 쪽으로 향했을 때 트로이의 소매를 잡아당기면서 남은 카르토슈카를 빨리 먹어치워 달라고 했다.

 

 

 

 네 거잖아. 난 아까 메도빅 먹었어. 갈랴에게 성의를 보여 봐라. ”

 

 그래서 반이나 먹었잖아. 너도 우정의 증거를 대봐. ”

 

 반은 무슨. 병아리 눈물만큼 잘라 먹었네. ”

 

 

 

어쨌든 트로이는 미샤가 떠맡긴 카르토슈카를 두 입 만에 먹어치웠다. 쫀득하고 맛있었다. 코스챠와 갈랴의 말대로 별로 달지도 않았다. 코냑을 마신 직후라 더 그런지도 몰랐다.

 

 

 

..

 

 

 

사진의 카르토슈카는 페테르부르크의 오래된 명소인 '세베르' 카페의 역시 유명한 그 카르토슈카. 위에 얹혀 있는 노란 크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물론 모양도 맛도 북극곰 그려진 저 파란색 종이 포장지도 그대로. 나랑 쥬인은 저것을 매우매우 좋아했다. 몇년 전 세베르에서 테이크아웃해 와 호텔 방에 앉아 티백 차 우려 마시며 같이 먹을 때 찍어놓은 사진이다. 사진 속 방은 그랜드 호텔 유럽.

 

 

갈랴가 미샤를 위해 골라온 카르토슈카는 세베르의 저 녀석이 아니고 진한 다크 초콜릿 맛의 당도가 낮은 카르토슈카였지만... 미샤는 그것도 달다고 트로이에게 떠넘기고... 정통 카르토슈카에는 잼이 안 들어가는데 이 소설의 에피소드 중 하나에서 갈랴가 두 종류의 카르토슈카를 사면서 '노란 크림 올라가 있고 잼 든 거는 너네들 거, 이쪽 건 달지 않으니까 미샤 거' 하고 고르는 장면을 넣었다. 그래서 코스챠가 '이건 안 달아서 너 말고는 먹을 사람도 없어' 라고 하는 것임.

 

 

이거 쓰면서 무지무지 카르토슈카 먹고 싶었음 크흑... 옛날에 저 레시피까지 구해서 집에서 도전해보았으나 보기좋게 실패했던 아픈 기억도 있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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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