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몇년 전의 글들, 일부, 알리사 about writing2019. 3. 31. 22:42
어젯밤 마친 글은 알리사의 1인칭 시점으로 썼다. 아주 짧고 가볍고 조용한 미니 단편이었다. 알리사는 예전에 트로이에게 자기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지만 서술자로 나선 적은 없었다.
아마 몇주 전 무의식적으로 단어 하나와 대화 몇개를 떠올리고 곧 그녀를 불러내 쓰기 시작한 것은 언제 어느 순간이든 내가 알리사와 뭔가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말 역시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쓰는 순간이면 그게 어느 누구가 되었든 작가는 그 인물과 어떤 것이든 무엇이든 최소한의 일부를 공유하게 되기 때문이다.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찻물을 올리려고 보니 주전자도 없고 빈 냄비도 없었다. 전부 설거지통에 쌓여 있었다. 아니, 주전자는 아까 이고리가 깔고 앉아 찌그러뜨렸다. 료카는 하고많은 살림살이 중 하필 주전자냐며 울상을 지었다. 갈랴가 탈린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저 주전자를 펴놓든지 아니면 어디서 하나 구해 오라고 투덜거렸다. 초인종 고장 난 건 아무렇지도 않아 하면서 기껏 주전자 하나에 세상 무너진 것처럼 구는 게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물을 끓이기가 어렵게 되자 나도 이고리를 한대 쥐어박고 싶어졌다. 그렇다고 설거지를 하기는 더 싫었다.
...
우린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얘기했어. 아직도 내가 빌려줬던 번역 노트들을 기억하더라. 시 같은 건 난 구절도 가물가물한데 걘 다 외고 있었어. 난 춤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지만 걔는 자기 얘기는 별로 안 했어. 나에 대해 물었지. 런던에서 내가 어떻게 사는지, 일은 힘들지 않은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음악을 듣는지. 사람들과는 잘 지내는지.
난 하마터면 울 뻔 했어. 왜냐하면, 트로이. 걔가 정말로 묻고 있었던 건 내가 그곳에서는 덜 외로운지, 조금이라도 자신에 대한 엄격함을 놓고 관대해졌는지, 그래서 자신을 조금이라도 사랑하게 됐는지에 대한 거였으니까.
..
찌그러진 주전자에 대한 단락은 어제 마친 글에서, 아래의 대사는 몇년 전 쓴 글에서 발췌했다. 둘다 화자는 알리사이다.
어제 마친 글은 퇴고를 마치고 맘이 내키면 이 폴더에 전문을 올려보겠다. 겨울밤 알리사와 미샤가 나누는 대화로 이루어진 스케치 파편이다.
'about writing'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크림을 넣은 생선수프와 흑빵 (0) | 2019.04.09 |
---|---|
핀란드 우하 (알리사와 미샤의 이야기) (8) | 2019.04.07 |
오랜만에 (0) | 2019.03.30 |
꼭 가보고 싶었던 카페 + 트로이의 이름 (2) | 2019.03.06 |
극장으로 가는 길, 나는 그와 같이 걷는다 (2) | 2019.0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