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우하 (알리사와 미샤의 이야기) about writing2019. 4. 7. 21:01
지난달에 몇 주 동안 주말에 쓴 아주 짧은 단편을 올려본다. 제목은 '핀란드 우하'. 우하는 생선 수프이다. 각종 생선과 야채를 넣어 끓이는데 보통 우하라고 하면 맑은 국물의 수프이다.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대구지리나 복지리 같은 것. 정석으로 끓이자면 생선뼈와 머리로 육수를 내고 비린내를 날리기 위해 보드카도 들어간다. 핀란드식 우하는 크림을 넣어서 끓이는 생선 수프이다. 나는 맑은 우하를 좋아하지만 몇년 전 페테르부르크에서 진눈깨비 오던 날 길을 잃고 헤매다 꽁꽁 얼었을 때 어느 카페에 들어갔다가 핀란드 우하를 먹고 몸이 녹았던 기억이 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핀란드 우하와 너무나도 친절했던 청년 데니스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단편은 아주 짧다. 12폰트로 A4용지 9~10페이지 가량. 플롯도 거의 없다.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었는데 몇주 전 저녁에 아무런 기승전결 없이 그저 단어 몇개와 한두 줄의 대화를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나는대로 대화들을 적어나갔고 거기서부터 시작했다. 어떤 글들은 그냥 그렇게 시작된다.
짧은 파편 스케치이다. 사실 독립적인 이야기라고 볼 수는 없다. 오랫동안 쓰고 있는 미샤와 레닌그라드, 가브릴로프 우주에 속해 있다. 이 글의 배경은 1970년대 초, 소련 레닌그라드이다. 예전에 썼던 레닌그라드 장편(미샤의 친구 트로이가 심리적 화자로 나온다)과 배경이 같고 등장인물도 그 글에 나왔던 알리사와 미샤이다. 화자는 알리사. 애칭은 알랴. 트로이와 가장 친한 친구이고 레닌그라드 국립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트로이와 함께 문학 모임을 조직해 외국 문학을 읽고 사미즈다트(지하문학)와 금지문학들을 돌려보며 토론하는 인물이다. 친구들과는 달리 노멘클라투라 집안의 딸이고 어릴 때는 정치가인 아버지를 따라 외국 생활을 좀 했다. 알리사에 대한 이야기들은 예전에 몇번 발췌한 적이 있다.
아래 글에 이름만 언급되는 갈랴, 료카, 코스챠, 이고리, 스베타 등은 모두 이 문학 모임 멤버들이다. 이 글에서 미샤는 아직 발레학교 학생이다. 아파트 주인은 갈랴와 료카 부부이다. 예전에 쓴 레닌그라드 장편은 트로이와 미샤가 갈랴의 아파트에서 열리는 문학모임에서 만나는 것으로 시작했었다.
어느 눈보라 치는 겨울 밤, 갈랴의 아파트에서 문학 모임이 열린다. 다들 만취해 뻗는다. 알리사 혼자 깨어 있다. 그리고 미샤가 문을 두드린다. 이야기는 짧고 가볍다.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핀란드 우하
“ 문 열려 있었는데. ”
“ 예의를 지키느라. ”
“ 예의바른 꼬마는 새벽 한시에 남의 집 문을 두들기지 않아. ”
“ 그래도 소리치지는 않았잖아. ”
“ 빨리 들어와. 얼어 죽겠네. ”
“ 그래야겠지. 발로 먹고 살아야 되잖아. ”
“ 음, 굳이 안 그래도 당이 먹여 살려주긴 할 거야. 소련 시민인데. ”
찻물을 올리려고 보니 주전자도 없고 빈 냄비도 없었다. 전부 설거지통에 쌓여 있었다. 아니, 주전자는 아까 이고리가 깔고 앉아 찌그러뜨렸다. 료카는 하고많은 살림살이 중 하필 주전자냐며 울상을 지었다. 갈랴가 탈린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저 주전자를 도로 펴놓든지 아니면 어디서 하나 구해 오라고 투덜거렸다. 초인종 고장 난 건 아무렇지도 않아 하면서 기껏 주전자 하나에 세상 무너진 것처럼 구는 게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물을 끓이기가 어렵게 되자 나도 이고리를 한대 쥐어박고 싶어졌다. 그렇다고 설거지를 하기는 더 싫었다. 렌지 위에 있는 냄비 뚜껑을 열어보니 저녁에 스베타가 가져왔던 생선 수프가 좀 남아 있었다. 박박 긁으면 한 접시 정도 나올 것 같았다. 크림이 굳어서 엉겨 있었기 때문에 물을 좀 부었고 숟가락으로 살살 저으며 데우기 시작했다.
“ 창문 열면 되는데. ”
“ 집안까지 시베리아로 만들 셈이야? ”
“ 아 그러면 안 되지. 마가단... ”
“ 투정하지 말고 그냥 먹어. 꽁꽁 얼었잖아. ”
“ 난 그냥 우하가 좋은데. 크림 넣은 건 별로야. ”
“ 맑은 우하는 노인네나 보드카 마실 줄 아는 사람들한테 어울리는 거야. 넌 아니잖아. ”
“ 뭐가 아니야? ”
“ 보드카, 못 마시잖아. ”
“ 무슨 소리. 마실 수 있어. 세 잔까지는 거뜬해. 많이 봤으면서. ”
“ 거짓말 안 통해. ”
“ 뭘? ”
“ 나. 술 못 마시는 거. ”
“ 처음부터. ”
“ 다들 모르던데. ”
“ 난 ‘다들’이 아니야. ”
“ 안드레이도 모르던데. ”
“ 트로이라고 불러. 걔 그 이름 싫어해. ”
“ 난 좋은데, 그 이름. 안드레이 공작은 별로지만 우리 안드레이는 좋아. ”
“ 모레 무대 올라가야 돼. 크림은 좋지 않아. 고지방. ”
“ 그냥 먹어, 그깟 지방질 이틀이면 다 녹아 없어져. 핀란드 우하가 얼마나 맛있는데. 크림 들어 있어서 부드럽고 고소해. 몸도 따뜻해질 거야. 연어랑 대구가 들어 있어. 파슬리랑 우끄롭도. 스베타네 할머니가 끓여놓은 거 몰래 한 냄비 퍼왔댔어, 우리는 아까 다 한 그릇씩 먹었어. ”
꼬마는 수프를 한 숟갈 떠서 먹었다. 까만 눈에 구슬 같은 광채가 돌았다.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먹어보니 맛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미샤가 뜬금없이 물었다.
“ 가봤지. 가깝잖아. 너는? ”
“ 엄마가 그러는데 어릴 때 아빠랑 엄마랑 같이 갔었대. 기억은 안 나. 너는 핀란드가 좋았어? ”
“ 글쎄. ”
“ 그러면 어디가 좋았어? 넌 어릴 때 외국에 살았잖아. 여기저기. ”
“ 나는 런던이 좀 나았어. 암스테르담은 싫었고. ”
“ 왜? 난 가보고 싶어, 암스테르담. 여기처럼 운하도 있고. ”
“ 그래서 싫었어. ”
“ 도시가? 사람들이? ”
“ 사는 게. ”
“ 그땐 어렸잖아. 어떻게 그래? ”
“ 인생은 어른이든 어린애든 똑같은 거야. ”
“ 아니, 사는 거 말고. 지루하다는 거. 애들일 땐 시간이 빨리 가는데. 모든 게 빨리 달아나. 안 가본 곳들도 너무 많아서 매일 새롭게 길을 잃기에도 시간이 모자라. 엄마랑 아빠, 친구들도 있고... ”
“ 그거랑 지루한 건 다른 거야. ”
“ 뭐가 다르지? 문학적인 표현인 거야? ”
“ 아마도. ”
“ 흐음. ”
한 잔 더 따라주었을 때 미샤가 노래하듯 부드럽게 말했다.
“ 아니, 크림 든 우하도 보드카랑 어울려. 수 쓰지 말고 다 먹어. ”
“ 나 사실 노인네 입맛인데. ”
“ 웃기지 마, 아이스크림 좋아하면서. ”
“ 알랴는 엄마 같구나. 우리 엄마도 그랬는데. 내가 으깬 감자 먹기 싫다고 우니까 감자 다 안 먹으면 아이스크림 안 준다고 했었지. 아빠가 그거 몰래 먹어줬어. 아이스크림도 사주고. 어떤 날은 하루에 두 개나 사주셨어. 에스키모. 플롬비르. 너무 좋아서 밤에 잠이 안 올 정도였어. 아빠랑 아이스크림, 어느 쪽이 더 좋은지 헷갈리기까지 했어. 매일이 그런 하루라면 어떻게 지루할 수가 있어? 핀란드에도 아이스크림이 있겠지, 런던에도, 암스테르담에도. 아빠도. 그러면 모든 게 빨리 달아날 거야. 잠도 못 잘 거야. 날아다닐 거야. 지루한 게 뭔지 난 모를 거야. ”
“ 뭘? ”
“ 건배. 알랴를 위해. 건강을 위해. 푸쉬킨을 위해. 우리 그렇게 하잖아. ”
“ 나중에. 다같이 마실 때. ”
“ 하긴 두 잔밖에 안 마셨으니까. 그럼 푸쉬킨은 남겼네. ”
“ 이제 몸 녹았지? ”
“ 응. 따뜻해졌어. 졸려. ”
“ 너 잠은 잘 자니? ”
“ 잘 때도 있고 못 잘 때도 있어. ”
“ 오늘은 잠 잘 올 거야. 핀란드 우하도 먹고 보드카도 마셨으니까. ”
“ 좋아. 잠이 오면 정말 좋아. ”
“ 저쪽으로 가서 자. 소파 하나 비었어. ”
“ 나중에. 다같이. 안드레이도 오면. 남은 한잔 같이. 푸쉬킨을 위해. 그때는 맑은 우하. ”
꼬마는 취해서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거의 잠꼬대였다. 부엌 구석의 낡은 소파로 데려다 주자 금세 인사불성이 되어 잠들었다.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던 코스챠의 재킷을 주워서 덮어주자 담요라도 되는 양 두 손으로 옷깃을 꼭 쥐고 목까지 끌어올리며 쌕쌕 숨소리를 냈다.
FIN
2019.3.9 ~ 3.30
..
미샤와 알리사의 대화에서 언급되는 단어 몇개.
마가단은 스탈린 시절 악명높은 강제노역수용소가 있었던 곳이다.
예세닌과 브로드스키는 러시아 시인. 에스키모와 플롬비르는 러시아 아이스크림 종류이다. 전자는 초콜릿 입힌 하드 아이스크림, 후자는 유지방이 높은 둥글고 부드러운 아이스크림 콘.
트로이가 본명인 안드레이란 이름을 싫어하고 이 이름을 택하게 된 유래는 예전에 발췌한 적이 있다. 여기 : https://tveye.tistory.com/7043
'알랴, 건강. 푸쉬킨을 위해' 라는 말은 전에 쓴 글들에서 유래했다. 갈랴의 문학 모임 멤버들의 습관이다. 보통 러시아인들은 건배할 때 첫잔부터 순서대로 여인을 위해 건배하고, 이후에는 건강, 그 다음엔 성공이나 뭐 이것저것 순서대로 하는데(물론 때에 따라 다르다) 이 친구들은 아무래도 문학 모임이다 보니 세번째 건배는 항상 '푸쉬킨을 위해!' 하고 외치는 버릇이 있다. 이 건배사는 미샤의 입에도 붙어 있기 때문에 예전에 쓴 단편 Frost 에서도 미샤가 비행기 안에서 드미트리 마로조프와 술을 마실 때 써먹는다.
알리사에 대한 발췌본 몇개는 여기 :
https://tveye.tistory.com/5016 (알리사와 기계벌레, 불가코프와 도스토예프스키)
https://tveye.tistory.com/5178 (문을 여는 사람, 악령과 성모)
https://tveye.tistory.com/5040 (파리의 알리사)
맨위에서 언급했던 그 카페 '두셰브나야 꾸흐냐'에서 내 몸을 녹여주었던 핀란드 우하. 이때 에피소드는 여기 : https://tveye.tistory.com/3535
언젠가 이 우하와 카페, 데니스에 대해 단편이나 에세이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대신 이 미니 단편을 쓰게 되었다.
이건 내가 집에서 끓였던 약식 핀란드 우하.
크림을 넣어 끓이는 핀란드 우하 레시피에 대해 전에 번역해 올린 적이 있다. 여기 : https://tveye.tistory.com/3538
갈랴와 료카의 아파트. 현재의 페테르부르크, 소련 시절 레닌그라드의 바실리예프스키 섬 쉡첸코 거리에 있다. 내가 예전에 지냈던 기숙사가 있던 동네이고 이 아파트는 그 근처에 있다. 이 건물 어딘가에 트로이와 알리사네 모임 아지트인 갈랴네 집이 있다. 이건 여름에 가서 찍은 사진이라 햇살이 좋고 밝게 나왔지만 겨울엔 물론 춥고 어둡다.
이 동네와 아파트들에 대한 사진들은 여기 : https://tveye.tistory.com/8509
이런 창문들 중 하나가 갈랴네 집 창문일 것이다.
겨울의 그쪽 동네. 이 겨울 풍경은 몇년 전 찍은 거지만 사실 레닌그라드 시절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about writing'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맑은 우하(미샤와 내가 좋아하는 버전) (2) | 2019.05.04 |
---|---|
크림을 넣은 생선수프와 흑빵 (0) | 2019.04.09 |
어제와 몇년 전의 글들, 일부, 알리사 (2) | 2019.03.31 |
오랜만에 (0) | 2019.03.30 |
꼭 가보고 싶었던 카페 + 트로이의 이름 (2) | 2019.03.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