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동네에 갔다가 떠올라서 : 스타차일드 에피소드 서두 발췌 등 about writing2019. 1. 6. 23:16
며칠 전에 이문동에서 영원한 휴가님과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왔다. 그 동네는 예전에 쥬인과 꽤 오래 살았던 곳인데 직장도 이사를 가고 나도 이사를 가면서 근 7년 이상 가지 않았었다.
이번에 가니 역이 좀 바뀌고 출구도 몇개 더 생겨 있었다. 내리자마자 영원한 휴가님과 재회하는 기쁨에 젖어 건널목이 아직도 있는지 확인을 못했다. 이쪽은 전철이 지상으로 다니기 때문에 건널목이 있다. 예전에 살 때 종종 그 건널목을 건너가야 했다. 원래부터 개발이 안된 곳인데다 전철 건널목까지 있어 짤랑짤랑 종도 울리고 되게 구식/옛날 기분이 느껴지는 동네였다.
그 건널목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억이 있다. 어느 겨울 아침 출근길에 그 건널목 앞에서 길을 건너려다 어떤 생각을 했었다. 별거 아니고 좀 우스운 생각이었지만 찬란한 아침 햇살 탓에 약간 환각에 취한 기분이 들었다.
아래 글은 그 순간을 겪고 나서 며칠 후 쓴 스타차일드 단편의 서두이다. 글은 그 순간의 이미지에서 시작한다. 철도 건널목 앞에 멈춰선 카르멘이 햇살을 받으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한다. 사실 내가 겪은 순간을 재생시킨 것이었다. 그 생각과 환상은 사실 이 글 전체의 플롯과는 큰 연관이 없다. (이 단편 자체는 조금 진지했고 사람들의 관계에 대한 얘기였다) 하지만 글이란 것은, 특히 단편이란 것은 이따금 그런 식으로 시작되곤 하는 것이다. 작은 이미지. 환각. 빛. 건널목의 종소리. 뭐 그런 거.
위의 사진은 당연히 그 이문동 건널목은 아니고...(살던 동네라 막상 그 건널목 찍은 적이 없음) 몇년 전 6월 페테르부르크의 어느 카페 창가에 앉아서 찍은 것이다. 회상하고 있는 순간과 발췌한 글과는 달리 햇살은 전혀 없고 사실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음습했었다. 이때 너무 몸이 아팠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죄어와서 괴로워하며 카페에 들어가 앉아 뭔가 케익 한조각을 먹고 허브 티를 좀 마셨던 기억이 난다. 마린스키 극장에서 직선으로 쭈욱 내려와 센나야 광장 반대방향으로 꺾으면 나오는 카페였다. 카페 이름은 무려 '프라하'였다. 건널목 사진 찾다가 못 찾고 그냥 이 사진 이미지도 어딘가 통하는 것 같아 올려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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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바랜 붉은 포석이 깔린 좁은 골목을 걷던 카르멘의 귓가에 요란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전철이 들어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골목을 지나 거리로 뛰어나갔다. 자동차와 버스들이 줄지어 멈춰 있었고 전철 한 대가 철도 건널목을 지나가고 있었다.
습관처럼 카르멘은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이었고 미끄러지듯 건널목을 지나가는 전철의 지붕 위로 햇살이 빛나고 있었다. 빨리 뛰기만 하면 아슬아슬하게 그 전철을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처럼 운이 없었다. 반짝이는 지붕을 인 전철은 쏜살같이 건널목을 지나 플랫폼으로 들어가 버렸고 그녀가 길을 채 반도 건너기 전에 차단기가 올라가면서 멈추어 있던 자동차와 버스들이 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욕설을 내뱉으며 카르멘은 재빨리 발을 움직여 중앙선까지 갔다. 하지만 차들이 너무 빨리 지나갔기 때문에 더 이상 발을 내디딜 수가 없었다. 멈춰 있었던 차들이 일단 좀 빠져나가면 마저 길을 건너야 할 것 같았다.
눈이 부셔왔다. 전철 지붕에 반사되던 햇살이 이제 곧장 길 저편으로부터 날아오고 있었다. 동쪽 하늘이 온통 창백한 금빛으로 타는 듯 했다.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아침 햇살이었다. 심지어 하늘과 차도, 인도의 구별조차도 사라졌다.
부신 눈을 깜박이며 카르멘은 멍하게 길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한순간 그녀에게는 이 모든 것이 환상처럼 느껴졌다. 마치 환상의 도시에서 환상의 도로를 건너다 환상의 자동차들이 만들어낸 벽에 갇힌 것 같았다. 이 모든 것들은 창백한 황금빛 햇살로 만들어진 신기루여서 그저 발을 내딛기만 하면 공기를 통과하듯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카르멘은 실지로 발을 내디디려고 했다. 그 순간 거대한 트럭 한 대가 귀청이 떨어져나갈 듯한 경적을 울리며 그녀의 곁을 쌩 하고 스치고 지나갔고 카르멘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아침 출근 도로의 한가운데 홀로 서 있었다.
카르멘은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다시 종소리가 울리기를 기다렸다. 더 이상 태양은 마법을 부리지 않았고 자동차와 버스들은 중앙선에 서 있는 작은 소녀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바쁘게 지나갔다.
부신 눈을 깜박이며 카르멘은 질주하는 바퀴 달린 기계들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 맹렬한 물결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는 꼼짝도 하지 않고 중앙선 위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자 카르멘은 이미 오래 전에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수학 증명 문제가 생각났다. 그녀는 수학적 공간에서는 선과 마찬가지로 점도 면적이나 무게를 지니지 않는다는 문제를 증명해야만 했었다. 이제 이른 아침의 도로 한가운데 서서, 카르멘은 자신의 육체가 평행으로 그어진 어떤 선 위에 찍힌 점과 같아서 면적도 없고 무게도 없으며 그 외의 모든 물질적 특성과도 무관한 것은 아닐까 하고 의문했다. 그녀의 육체가 추상적인 개념으로 변화했다면 바퀴 달린 기계들이 무슨 힘으로 그녀를 깔아뭉갤 수 있겠는가.
막 카르멘이 이 미친 이론에 따라 발을 내디디는 순간 다시 종이 울렸고 멀리서 전철이 들어왔으며 차단기가 내려갔다. 그녀는 무사히 길을 건너 전철역 계단을 올라갔다.
출근 시간이었기 때문에 전철 안은 매우 혼잡했다. 카르멘은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남자들의 넓은 어깨 아래 파묻힌 채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며 꾸벅꾸벅 졸았고 흐릿하게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그녀는 레스와 함께 뭔가를 먹으며 중앙선 위에 서 있는 사람은 기계들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대해 열띠게 토론하고 있었다. 레스는 중앙선 자체의 중립성을 의심했고 카르멘은 애초부터 선이라는 것은 점과 마찬가지로 중립적인 거라고 우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끊임없이 뭔가를 먹고 있었다. 무리도 아닌 것이 그녀는 언제나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 ... 2003년 1월, Emerald Cell 중에서 ...
이 단편은 스타차일드 시리즈의 스물세번째 이야기였다, 전체 30여개 에피소드들 중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했던 이야기였는데 저 서두 때문은 아니었지만 하여튼 그게 좀 영향을 미친 것 같기도 하다. 전철 안에서 졸다가 카르멘은 누군가와 마주치게 된다.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간다.
** 여기 about writing 폴더에 스타차일드 에피소드들 몇개를 발췌 혹은 전문을 올린 적이 있다. 링크는 아래. 블로그에 올린 순서가 아니라 에피소드 순서대로 배열했다.
Lipstick traces(ep.3) : http://tveye.tistory.com/8556
open up and bleed(ep.14) : http://tveye.tistory.com/7072
staying in the dark(ep.20) : http://tveye.tistory.com/5413
Incomparble blind(ep.25) : http://tveye.tistory.com/8448
Not enough(ep.26) : http://tveye.tistory.com/4774
The stars my destination(ep.27) : http://tveye.tistory.com/8536
크리스마스 파편(데본 펠) : http://tveye.tistory.com/4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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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리즈 전체 제목인 스타차일드는 많이들 짐작하신 대로 오스카 와일드의 단편 The Star Child 에서 따온 것이다. 와일드 작품들 중에서는 그 단편과 젊은 왕, 어부와 그의 영혼, 살로메, 레딩 감옥의 발라드. 이 다섯 작품을 가장 좋아한다. (역시 나는 재기 넘치는 문장들보다는 드라마틱한 쪽을 더 선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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