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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발췌한 글은 12년 전에 썼던 단편의 후반부이다. 나는 2000년대 초반에 어떤 인물들을 데리고 여러 가지 실험을 하며 글을 썼는데 단편과 장편들, 중편들이 하나의 우주 속에서 여러 갈래로 뒤섞여 있었다. 그 중 약 30여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옴니버스 시리즈가 있었는데 아마 오래전 내가 운영하던 영화 카페와 문학 카페에 드나들던 분들은 읽은 적도 있을 것이다. 시리즈의 제목은 a star-child 였다. 오스카 와일드의 the star child에 대한 오마쥬 제목이었다.

 

 

이 시리즈의 번외편으로 썼던 크리스마스 옴니버스 단편 중 하나를 작년 성탄절 즈음 발췌한 적이 있다. 그건 여기 : http://tveye.tistory.com/4287

 

 

그 단편 시리즈는 내게 여러 가지 의미로 중요했는데, 나는 그 시리즈에서 사람들의 관계를 주로 다뤘다. 배경은 1980년대 초반 뉴욕이었다. 주인공은 열여섯 살짜리의 미나라는 소녀였는데 그녀는 본명 대신 길거리에서 만난 로커 청년 커트로부터 선물받은 카르멘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시리즈는 카르멘과 커트, 그리고 그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였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의 관계들이 깊어지고 또 확장되는 양태를 다뤘다.

 

 

그리고 내가 다시 살려내 지금도 쓰고 있는 본편 우주의 미샤가 제일 처음 등장했던 것도 실은 이 시리즈에서였다. 미샤의 이야기들과 이 카르멘과 커트의 세계는 하나의 원형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사실은 러시아 민담의 무수한 변용들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미샤는 이 시리즈의 제5편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 5편에서 미샤는 뉴욕 쪽 발레단과 협업을 통해 뉴욕에서 이반왕자와 불새를 모티브로 한 발레를 안무하고 춤을 춘다. 미샤의 본편 우주에서 그 발레는 그가 무대에서 보여준 마지막 춤이 된다. 그리고 시리즈의 19편에서 미샤는 다시 한번 등장한다. 지금 쓰고 있는 미샤의 본편 우주는 사실 그 시기 직후부터 전개되는 이야기들이다.

 

 

생각해보니 그 19편에서 미샤와 뉴욕 발레단의 안무가 주드 헤이즈가 나누는 대화를 예전에 발췌했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다시 글을 쓰기 몇달 전이었고 미샤에 대해 떠올리며 그에 대해 다시 글을 쓰지 못해 안타까워 하고 있었다.  그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1242

 

 

여기 발췌한 이야기에는 미샤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은 26번째 이야기였던 'not enough'의 후반부이다. 제목은 당시 좋아하던 our lady of peace의 노래에서 따왔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네 명이다. 주인공 중 하나인 커트는 30대 중반의 옛 락 스타이며 지금은 더 이상 노래를 하지 않는다(그랬기 때문에 나는 미샤라는 인물을 제일 처음 등장시켰을 때 바로 이 사람과 만나게 만들었다. 사실 미샤와 커트는 여러 가지 면에서 통하는 곳이 있는 사람들이다. 어떤 면에서는 완전히 반대이지만) 그는 펑크 락 스타였고 정키였으며 게이 정체성을 가진 인물이다. (그의 모델은 내가 무척 좋아했던 영화 벨벳 골드마인의 주요 배역인 커트 와일드였는데 점차 내 시리즈의 커트는 그와는 완전히 독립된 새로운 인물이 되었다) 발췌문의 첫 이야기에서 독백하는 것이 바로 커트이다.

 

 

그리고 두번째 이야기부터 심리적 화자로 등장하는 인물은 그의 애인인 그레이라는 청년이다. 그는 이른바 아이비 리그 정치학과 대학생이고 상류층이며 커트를 만나기 전까지는 보수적이고 건전한 '미국 청년'이었다. 그는 커트를 만난 순간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른다.

 

 

나머지 두 인물, 가브리엘과 차르는 커트의 지인들이다. 가브리엘은 커트의 오랜 애인이자 친구이며 유명한 포르노 배우이고 차르는 뉴욕 거리의 흑인 갱이다.

 

 

배경은 1981년, 핼로윈 밤이다. 커트는 뉴욕 밤거리 퀴어 서브 컬처가 응축된 어느 뒷골목의 클럽으로 그레이를 데려간다. 클럽의 이름은 비비안즈 레이크인데 물론 가상의 공간이다. 핼로윈이기 때문에 그곳은 근사하게 분장한 젊은 남자들로 가득하다. 그곳에서 그들은 커트의 지인인 가브리엘과 차르를 만나고 그레이는 의혹과 고통, 질투심에 휩싸인다. 그리고 오로지 육체와 섹스 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그 클럽의 어둠 속에서 이질감에 사로잡힌다. 왜냐하면 그는 모범생이며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온 인간이기 때문이다.

 

 

발췌한 이야기는 맨 마지막 부분 일부이다. 몹시 취한 커트는 마음에 드는 음악이 나온다면서 그레이에게 플로어로 나가 춤을 추자고 하고 그레이는 거절한다. 그러자 가브리엘의 남자친구인 차르가 그와 함께 플로어로 나간다. 첫번째 이야기는 커트의 독백, 두번째부터는 그레이의 시점으로 이어진다.

 

 

이야기에서 언급되는 황금의 용이나 악마는 커트가 오랜 애인이자 친구인 가브리엘에게 붙인 별명, '가브리엘의 괴물'은 커트가 차르에게 붙인 애칭이다.

 

 

내가 왜 갑자기 십몇년 전에 쓴 이 글을 뒤적이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강남역 살인사건 때문일 수도 있다. 이 끔찍한 혐오와 증오, 몰이해와 모든 것이 뒤엉켜버린 사회에 대한 슬픔 때문일 수도 있다. 하여튼 나는 오래전 이 글을 쓸때도 슬펐고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그래, 음악이야. 단지 그뿐이야. 좋은 음악. 단 한 번도 이런 음악에 무관심해본 적은 없어. 헤로인 따윈 이런 음악의 대용품에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꿈꾸곤 하지. 진정 변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야. 예쁘장한 남자애들과 미끈한 카우보이 마초들이 가죽옷을 잘 차려입고 메이크업을 하고 허리를 빙빙 돌리면서 레이크의 지하계단을 내려오는 이유도 실은 그것뿐일지도 몰라.

 

 

일단 이 어둠 속에 머리를 들이밀고 미친 듯이 술을 퍼마시고 미친 듯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다보면 모든 건 똑같아져. 어제와 오늘, 내일을 구분할 수 없어지는 거야. 엉덩이 아래를 움켜쥐는 거칠고 뜨거운 그 손길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어. 마치 모든 시간이 정지해버린 것처럼, 아니,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레이크의 어둠은 우릴 속이지. 존재하는 거라곤 애초부터 사악하고 강렬한 욕망뿐인 것처럼, 오로지 어둠 속의 육체만이 진실한 것인 양 우릴 속이는 거야. 실은 그 육체들조차 모두가 변하고 있는데, 1분 전의 숨결과 1분 후의 숨결이 서로 다른 것처럼.

 

 

레이크에 드나드는 풋내기들은 그런 걸 몰라. 아무것도 모르고 속아 넘어갈 뿐이야. 그 환상을 현실이라고 믿으면서. 그런데 난 지금 속는 걸 알면서도 술을 마시고 음악에 몸을 맡기고 있어.

 

 

가끔은 속고 싶어질 때가 있어. 지독한 거짓말이란 걸 알면서도 그걸 철석같이 믿어보고 싶어. 때로는 거짓말을 믿으며 죽고 싶어. 무대 위에서 내가 그랬던 것처럼. 우스운 일이지.

 

 

가브리엘이 말했어, 인간들은 30살이 넘으면 자기 목숨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거라고, 자살 따윈 젊은 애들만 할 수 있는 거라고. 난 그때 개같은 나이프로 개같이 가슴을 쑤셔 대서 좆같은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지. 가브리엘은 내게 비겁하게 때를 넘겨버렸다고 했어, 애초부터 무대에 올라갈 필요도 없었다고 했어, 갈증으로 고생하는 인간은 무대에 올라가면 안 된다고, 자기처럼 카메라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뒹굴기만 하면 된다고 했어. 그는 내가 아무 말도 듣지 못하고 바보처럼 잠들어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건 아니야. 잠들어 있으면서도 들을 수 있는 말이 있어. 가브리엘이 하는 말 같은 건 전부 다 들린다구.

 

 

난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어. 그래, 난 내 목숨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가 없다고.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난 단 한 번도 내 목숨이 내 것이라고 여겨본 적이 없다고. 그 악취 나는 웨인 카운티의 철제 침대에 묶여 가시관을 쓰고 하얀 빛을 쬐기도 전부터 내 목숨은 내 것인 적이 없었다고. 그러니까 난 지금껏 허세를 부리며 살아온 거라고. 마치 내 목숨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듯 무대에 올라갔고 내 목숨이 내 것인 양 노래를 불러왔다고.

 

 

그런데 결국은 가브리엘이 옳았어. 언제나처럼. 하느님은 말씀으로 용과 천사를 만들고 이후에야 숨을 불어넣어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언제나 용과 천사는 인간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 난 노래를 그만뒀어. 무대에 올라가는 것도 집어치웠어. 그는 내가 침묵하게 될 거라고 했어. 그리고 난 침묵했어. 그것만큼 쉬운 일은 없었어. 그런데 쉬운 일만큼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도 없어.

 

 

핼로윈, 귀신 가면과 사탕을 팔아먹기 위해 만들어낸 날. 가브리엘이 괴물을 거느리고 레이크에 나타난 건 바보 같은 농담에 불과해. 귀신 들린 밤 따윈 존재하지 않아. 유령은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내부에 있어.

 

 

가브리엘의 괴물은 더럽게 춤을 못 추지만 심장이 떨려올 만큼 멋진 친구야. 하지만 그가 좋은 음악이라고 한 건 진심이 아니야. 그는 음악이 뭔지도 몰라. 그는 다만 어둠 속에서 홀로 춤추는 것만큼 끔찍한 일은 없다는 걸 이해했을 뿐이야. 가브리엘의 괴물은 무척 동정심이 많은 친구지. 맘만 먹으면 에메랄드 앨리에 모여든 무리 전부를 죽여 버릴 수 있는 놈을 두고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느냐고 하겠지만 그건 사실이야.

 

 

나의 그레이는 해적처럼 차려입고 혼을 빼놓는 미소로 레이크의 어둠을 밝히고 있어. 그 누구도 내가 그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없을 거야. 하지만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게 있어.

 

 

갈증으로 고생하는 인간. 하지만 죽어야만 하는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거라곤 단 한 잔의 물 뿐이야. 이르든 늦든 언젠가는 물을 다 마셔버리게 돼. 누군가는 단숨에, 누군가는 한 방울씩, 누군가는 목구멍에, 누군가는 말라버린 대지에 쏟아 붓겠지. 가브리엘은 그걸 이해하지 못할 거야. 어쩌면 그의 괴물은 이해하겠지. 하지만 이름이 두개 있는 친구, 어둠 숲의 주인이자 황금의 용인 녀석은 절대 이해할 수 없어.

 

 

나의 그레이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런 미소를 짓고 가장 아름다운 검은 눈으로 날 바라보곤 하지. 그리고 그럴 때면 난 아무 것도 믿고 싶지 않아. 그에게 주어진 것 역시 단 한 잔의 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아무것도 충분하지 않다는 걸.

 

 

때로는 거짓말을 믿으며 죽어야만 해. 그레이 역시 언젠가는 그걸 알게 되겠지. 하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야.

 

 

 

*   *   *

 

 

 

 

음악은 무척이나 길었다. 그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는 커트와 차르를 볼 수가 없었다. 그는 가슴을 에는 듯한 질투를 느꼈다.

 

 

하지만 그는 플로어로 내려가 차르를 밀어젖히고 커트를 끌어낼 수는 없었다. 그는 단 한 번도 그런 짓을 해본 적이 없었다. 마치 커트와 이상한 얘기를 나누는 가브리엘에게 욕설을 퍼붓거나 주먹질을 할 수 없었던 것처럼. 

 

 

가브리엘은 그에게 잔을 내밀었다. 단 한 번도 비열하고 비신사적인 행동을 해본 적이 없는 그레이는 그 잔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잔을 부딪쳤고 말없이 술을 들이켰다. 쓰디쓴 알콜이 불처럼 목구멍을 태웠다. 눈물이 고일만큼 독한 술이었다. 바텐더는 그와 가브리엘이 다른 남자들처럼 곧 밀실을 찾아 들어가리라고 생각한 것일까?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온몸에 전류를 흐르게 하는 강렬한 술. 레이크의 바텐더에게 있어 그는 가브리엘 던컨의 앞에 무릎을 꿇고 언제라도 서비스를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젊은 그루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커트와 함께 있는 그의 모습 역시 별다를 게 없을지도 모른다.

 

 

가브리엘은 기침을 했다.

 

 

“ 술인지 타르인지 구분이 안 가는걸. ”

 

 

그레이는 눈을 깜박였다. 가브리엘 던컨은 눈으로 웃고 있었다.

 

 

 

 

*    *    *

 

 

 

 

 

 

 

 

 

그들이 비비안즈 레이크로부터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는 새벽 1시였고 커트는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취했다. 분명 아침이 되면 무시무시한 숙취로 고생하게 될 것이다. 그의 눈동자는 완전히 풀려 있었고 그레이의 팔에 매달리지 않고서는 한 발짝도 제대로 떼어놓지 못했다.

 

 

그레이는 커트를 부축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에메랄드 앨리는 스트립 바들과 게이 클럽들, 그리고 기묘한 모텔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는 이곳을 어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커트는 어지럼증을 느끼는 것 같았고 조금 걷다가 가로등에 머리를 기대며 멈춰 섰다.

 

 

“ 괜찮아? ”

 

 

커트는 대답하는 대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분명 마지막에 마신 술 때문일 것이다. 가브리엘과 차르가 자리를 뜬 후에도 커트는 몇 잔이나 더 마셨던 것이다.

 

 

“ 잠깐만 기대 있어. 약 사올 테니까. ”

 

 

그레이는 조금 전에 지나쳐 온 드럭 스토어를 가리키며 말했다. 커트는 그의 말을 알아들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놓았다.

 

 

약국은 앨리 모퉁이에 있던 섹스 숍을 연상시켰다. 핑크빛과 붉은빛 네온이 휘황했고 색색의 콘돔과 윤활유 튜브와 용도를 상상도 할 수 없는 도구들이 진열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에메랄드 앨리 전체에 감도는 기운이 이곳에도 스며 있었다. 어딘지 값싸고 천박한 창부 같은 느낌. 그는 한동안 현기증을 느끼며 핑크빛 드럭 스토어 안에 서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 역시 과음한 것 같았다.

 

 

깊은 숨을 들이쉰 후 그레이는 카운터로 갔다. 하지만 무슨 약을 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아는 거라곤 아스피린과 축구선수 시절 복용했던 몇 가지 진통제뿐이었지만 이런 경우에는 별 효과가 없을 것 같았다. 보통 커트는 숙취로 괴로워하는 밤이면 욕실의 캐비닛에서 이상한 핑크색 알약을 꺼내 삼키곤 했지만 그건 처방전이 없으면 약국에서 살 수 없는 종류의 약이었다. 적어도 그레이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가 커트의 상태를 대충 설명하기도 전에 카운터의 점원이 플라스틱 병에 든 짙은 갈색 물약과 녹색 캡슐을 몇 알 건네주었다. 가격은 아스피린의 네배였고 그레이는 혹시 이 낯선 시럽과 알약이 불법 마약은 아닐까 의심했다. 에메랄드 앨리의 드럭 스토어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그는 재킷 주머니에 약을 쑤셔 넣고 약국을 나왔다. 늦가을에 접어들고 있었고 밤 공기가 싸늘하게 목덜미를 스쳤다. 소매 없는 재킷만 걸친 커트가 감기에 걸릴까봐 걱정이 된 그레이는 빠른 걸음으로 가로등 쪽을 향해 걸어갔다.

 

 

“ 커트? ”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커트는 혼자가 아니었다.

 

 

세 명의 스킨헤드들이 커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레이는 가죽 재킷을 입은 스킨헤드들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이 소위 ‘호모 새끼’에게 어떤 욕설을 퍼붓고 어떤 끔찍한 짓을 하는지 들어 알고 있었다. 커트의 옛 드랙 퀸 친구 하나는 밤거리에서 나치 펑크들에게 린치를 당해 한쪽 귀가 잘려나갔다고 했다.

 

 

커트는 가로등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아 있었다. 그레이는 흐릿한 가로등 불빛에 비추어진 그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커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레이는 이성을 잃었다. 그는 고함을 지르며 달려가 세 명의 스킨헤드들에게 달려들었다. 뭔가 딱딱한 것이 주먹에 부딪치며 으스러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가 그의 배와 무릎을 쳤다. 하지만 아픈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주먹을 휘둘렀고 손에 잡히는 놈의 재킷 칼라를 휘어잡고 상대의 머리를 가로등에 마구 부딪쳐댔다. 그때 그가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리겠어!’ 하고 소리치고 있었는지 아니면 ‘더러운 자식들, 가만 안 두겠어!’ 하고 외쳐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기억나는 거라곤 커트가 피를 흘리고 있다는 것, 나치 기장이 달린 가죽 재킷 차림의 스킨헤드들이 그의 커트에게 더러운 손을 댔다는 것뿐이었다.

 

 

스킨헤드 펑크들은 당황했다. 그들은 다만 핼로윈 기념으로 마약 칵테일을 섞어 먹고 무리지어 거리를 쏘다니다가 에메랄드 앨리로 접어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만취 상태로 가로등에 기대 있는 호모를 하나 발견했을 뿐이었다. 길게 늘어뜨린 금발머리에 몸에 착 붙는 가죽 바지, 그리고 반쯤 녹아내린 짙은 아이라인의 잘빠진 호모 새끼가 하나 있었다. 분명 더러운 게이 바에서 놀아났거나 매춘부 거리에서 손님들을 낚고 돌아오는 길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지저분하고 재수 없는 호모 새끼에게 시비를 걸었고 잇달아 주먹질을 해주었을 뿐이었다. 그 금발머리 호모 새끼에게 6피트를 훌쩍 넘기는 운동선수 같은 체격의 성질 더러운 호모 애인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에겐 다행히도 다른 골목으로 접어들었던 나머지 무리가 소란을 듣고 나타나 주었다. 모두들 취해 있었기 때문에 이성을 잃었고 더러운 호모 새끼들은 가만 둬선 안 된다고 악을 써댔다.

 

 

그레이는 손등으로 눈을 닦았다. 눈앞이 흐렸다. 그는 상대가 몇 명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싸움을 해본 적이 없었다. 쿼터백으로 몇 차례나 학교를 우승으로 이끈 적이 있었지만 그건 언제나 운동장에서 이루어지는 정정당당한 게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는 처음으로 살기를 느꼈다. 스킨헤드 펑크들은 너무나 많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커트는 여전히 가로등에 기댄 채 주저앉아 있었다. 머리를 감싸고 있던 두 손은 바닥에 내려와 있었고 입가의 피는 멎어 있었다. 하지만 관자놀이 부근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머리를 맞은 모양이었다.

 

 

커트는 눈을 반쯤 뜬 채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꿈꾸는 듯한 눈, 어딘가 홀린 듯한 눈이었다. 하지만 그건 취기 때문이 아니라 머리를 맞아 정신이 몽롱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그레이를 도와주지도 않았고 싸움을 말리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멍하게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스킨헤드 펑크들이 그와 커트를 둘러쌌다. 그레이는 나이프가 둔한 금속빛을 내뿜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승리감에 젖어 더러운 호모 새끼들을 죽여 없애겠다고 외치고 있었다. 도취된 눈, 피에 취한 웃음이었다.

 

 

그레이는 오직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그토록 증오하고 경멸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남자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폭력과 살인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직 그 이유만으로도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거라곤 자신의 등 뒤에 커트가 있다는 사실, 커트가 피를 흘리고 있다는 사실, 그 누구도 커트에게 피를 흘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 뿐이었다. 심지어 그는 팔목을 파고드는 칼날의 아픔도 느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서로를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서로를 진정으로 미워하지도 않으면서도 미워한다고 믿으며 칼을 휘두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결코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커트가 오래 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도. 그는 다만 그들로부터 커트를 막아서야 한다는 것만 알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들이 좁혀 들어왔다. 여전히 그레이는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모든 것이 비현실적인 환상처럼 느껴졌다. 마치 핼로윈의 모든 유령들과 악마들이 에메랄드 앨리의 어두컴컴한 뒷골목으로 쏟아져 나온 것 같았다. 그리고 어렴풋한 어둠 속에서 그는 비늘을 사각거리는 거대한 황금빛 용과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진 얼굴의 괴물을 본 것 같았다. 그는 눈을 깜박였다.

 

 

차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미쳐 날뛰는 스킨헤드 펑크들을 향해 곧장 걸어왔을 뿐이었다. 그의 손에는 아무런 무기도 없었다. 오직 화상을 입은 듯 일그러진 검은 얼굴과 동공이 크게 확대된 왼쪽 눈동자뿐이었다. 스킨헤드들이 그가 누구인지를 깨닫는 데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마약 칵테일과 끓어오르는 살의조차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패잔병들처럼 달아났다. 마치 짙은 유령의 안개가 골목 너머로 스러져 버리는 것 같았다.

 

 

.. 2004년 4월, Not Enough 중에서 ..

 

 

 

 

 

 

 

 

 

 

..

 

 

저 글을 쓸 때 나는 그레이보다는 커트에게 더 가까웠던 것 같다. 아마 나는 항상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저 우주 속에서 그레이는 언제까지나 <사람들이 서로를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서로를 진정으로 미워하지도 않으면서도 미워한다고 믿으며 칼을 휘두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결코 알지 못했다> 의 세계에 있을 것이고 커트는 <죽어야만 하는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거라곤 단 한 잔의 물 뿐이야. 이르든 늦든 언젠가는 물을 다 마셔버리게 돼>의 세계에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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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