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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한 달 전에 서무의 슬픔 26편을 올린 후 번외편으로 러시아 민담 패러디 곱사등이 흑염소 편을 올렸고 이후 바쁜 업무와 러시아 여행으로 잠시 휴지기가 있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서무 27편!

 

사실 본편을 써야 하는데 어쩌다보니 외전인 서무 시리즈의 늪에 빠져서 어느덧 27편까지 왔다... (지금은 29편 쓰고 있음)

 

전에도 몇 번 얘기한 적이 있지만 서무 시리즈도 후반부로 오다보니 점점 본편 색채가 짙어지고 있어서... 어서 빨리 본편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긴 하다만...

 

27편에서는 우리의 단추청년 베르닌이 KGB 요원으로서 어떤 임무를 부여받게 되는데... 과연 그 임무는 무엇일지. 그리고 책상물림 단추가 요원 활동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궁금하신 분들은 이번 편을 읽어주세요~

 

** 도입부에서 언급되는 시계탑 사건은 24편, 독사과 사건은 21~22편에 나온다. 얼음물 사건은 9편이다. 베르닌이 언급하는 권총 규격 보고서 얘긴 3편에 나왔다.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어느덧 4월초로 접어들고, 왕재수는 신작 발표 준비에 여념이 없고 베르닌은 감시 업무와 서무 업무에 매진하고 있는 중인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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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27

 

 

 

 

서무의 슬픔

- 밀사 베르닌 -

 

 

 

 

 

4월 초가 되었다. 왕재수의 신작 공연이 다가오자 스페호프는 점점 심기가 불편해져서 매일 아침마다 베르닌에게 전날의 왕재수 감시 결과를 브리핑할 것을 요구했다.

 

 

“ 어제는 수석 안무가인 레베진스키가 야스민의 신작 안무가 너무 파격적이라고 지적해서 잠깐 의견 충돌이 있었습니다. 파격적이라고 했던 부분은 무용이 음악을 따라가지 않고 불협화음이 일어나는 부분과 여자 무용수들이 남자 무용수를 들어 올리는 부분이었습니다. 야스민은 후자의 경우 이미 자신을 비롯해 연방의 여러 창작 발레에서도 선보인 적이 있는 동작이며 국제 발레 무대에서는 이미 오래된 시도라면서 레베진스키의 지적을 일축했습니다. 무용과 음악의 불협화음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 대신 레베진스키에게 19세기를 살고 있는 모양이라면서 비아냥거렸습니다. 이에 레베진스키가 화를 내며 나가버렸지만 야스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연습을 진행했습니다. 무용수들은 전반적으로 야스민의 편을 들었고 이후 순조롭게 연습에 참여했습니다. 이상입니다. ”

 

“ 골치 아프군. ”

 

“ 예, 뭐가요? ”

 

“ 그 망할 놈의 무용이란 것 말야! 대체 들어도 들어도 지루하고 머리만 아프니. 불협화음이고 나발이고. 중요한 건 그 불여우 자식이 윗분들에게 잘 보이려고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것이지! 레베진스키를 그런 식으로 깔아뭉개는 것을 보니 이제 극장이 완전히 자기 손아귀에 들어왔다고 기고만장한 게 틀림없어. 에잇, 그 시계탑에서 완전히 끝냈어야 했는데. 자네가 그렇게 몸까지 내던졌는데도 실패하다니.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은 놈이야. 파이프를 타고 내려오지를 않나, 눈더미로 뛰어내리지를 않나. 계집애처럼 생긴 놈이라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틀렸어. 분명 그 불여우는 스비제르스키한테서 현장 요원들이나 받는 훈련을 받은 거야. 그러니까 얼음물에 빠져도 살아나고 불을 질러도 살아나지! 불여우 녀석이 그 무자비한 작자의 무릎에 앉아서 꼬리만 치고 뒹굴기만 한 게 아니었던 거야! 자네도 앞으로 조심하게, 그 녀석이 언제 돌변해서 자넬 해치우려 들지 모르니... 아무래도 자네에게도 일신의 안전을 위해 현장 요원 교육을 좀 시켜야 할 것 같아. ”

 

 

베르닌은 갑자기 가슴 한 구석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시계탑과 눈더미, 연기와 불길이 떠올랐다. 그는 꽉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 시계탑이요? 그때 화재 났던... 그게 우연이 아니었다는 말씀이신가요? ”

 

“ 허허, 자네도 알면서 그러나. 그 자식이 매일 다섯 시에 시계탑 전망대에 석양을 보러 올라간다는 얘기를 레베진스키에게서 들었지. 그래서 인부 하나를 매수해서 불씨를 남겨두고 오게 한 건데 타이밍은 잘 맞았다만 그 녀석이 그렇게 날랜 놈일 거란 생각은 못했지. 하필 그때 자네가 따라들어 가다니, 그때는 그놈이 크레믈린에 고해바칠까봐 일부러 입 다물고 있었네만 사실 자네가 따라 들어갔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나는 정말로 감동했다네. 그놈을 끝까지 따라가서 해치우려고 위험을 무릅쓰다니... 그 녀석만 남겨두고 밧줄을 타고 내려온 것까지 정말 더할 나위 없었네만... 자네 잘못은 하나도 없네. 오히려 표창감이지. 그놈이 현장 요원 뺨치는 재난 대응 능력을 갖췄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나. 갈대처럼 삐쩍 말라서 계집애처럼 반반한 얼굴에 의원님들 침대로나 기어드는 꼬마를...

하여튼 다닐, 기밀사항들이라 내가 자네를 공개적으로 포상하지는 못하고 있네만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네. 잊지 않음세, 자네의 이 헌신적인 노력을. 이런 자네를 서무로 키우려고 했다니... 물론 서무도 아주 중요한 직무이지만 자네라면 서무와 현장요원을 겸할 수 있는 재원으로 키우고 싶군.

 

 

베르닌은 다른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멍하게 되풀이했을 뿐이었다.

 

 

“ 화재. 일부러. 죽이려고. ”

 

“ 그렇지. 하지만 뭐 그놈이 죽을 거라고까지는 생각 안 했어. 불이 그렇게 잘 붙을 거란 기대는 안 했거든. 독사과처럼 좀 겁을 주는 용도였지. 운 좋게 불이 잘 옮겨 붙어서 그놈을 해치울 수 있다면 물론 더 좋다고 생각했지만... 원래 자네에게 레베진스키나 그 인부가 귀띔을 해주기로 되어 있었는데 동선이 엇갈렸는지 못 들었던 모양이군.

하여튼 위험을 무릅썼던 자네의 용기는 늦었지만 정말 칭찬해 주고 싶네. 뭐 한동안은 그런 시도를 하기 힘들 거야. 독사과와 시계탑의 간격도 사실 너무 촘촘했거든. 벨스키야 온순한 편이고 정치 경력도 그렇게까지 오래 되지는 않았으니 모르고 넘어가겠지만 스비제르스키는 완전히 여우에 호랑이거든. 그 작자는 현장 요원 출신에 해외 스파이 지국 총괄에 우리 보안위원회를 십몇 년 동안 주무르며 가지고 놀았던 인간이니 얼마나 눈치가 빠른지 몰라. 가뜩이나 독사과인지 시계탑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얘기가 새어들어 갔는지 요 며칠 동안 그 불여우에게 직접 전화까지 했더군. 세 번이나! 그 작자의 전화는 도청도 할 수 없단 말이야. 들키면 말 그대로 모가지인데다 기술력도 우리보다 한 수 위니까. 그러니 이제 신작 발표까지는 함부로 그 불여우를 제거할 수가 없단 말일세. 자네도 조심해야 해. 그건 그렇고 그놈은 아직도 자네를 신뢰하고 있나? ”

 

“ ... 예. 그런 것 같아요. ”

 

“ 아직도 아침 저녁 밤으로 해주고 있겠지? ”

 

“ 아니오, 그건 좀... ”

 

“ 그래, 피곤하긴 하겠지. 하지만 그것도 자네 임무 중 하나이니 잠자리도 소홀히 하면 안 되네. 그래야 그 불여우의 신뢰를 계속 유지하고 스비제르스키의 의심으로부터 우리 지국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어. 그럼 오후에도 극장에 가 보게. 고생이 많군. ”

 

 

사무실로 돌아온 후 베르닌은 산더미처럼 밀린 일을 하느라 허덕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국장의 말을 무한재생하고 있었다. 온몸이 떨리고 괴로웠다. 지금 일이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았다.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 왕재수의 곁에 붙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국장이 인부를 매수해 불까지 지르게 했다니 이것은 독사과 이상으로 심각한 문제였다. 가책도 되고 걱정이 되어서 미칠 것 같았다. 너무 심란한 나머지 그는 서류철에 노끈 구멍을 두 개나 잘못 뚫었다.

 

 

 

*   *   *

 

 

 

 

오후에 베르닌은 극장으로 갔다. 언제나처럼 비서인 류드밀라가 그를 맞아 주었다. 이제는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대답을 해주었다.

 

“ 우리 감독님 오늘 점심은 잘 챙겨 먹었어요. 극장장님하고 의회 의장님이 오셔서 같이 드셨거든요. ”

 

“ 어, 다행이네요. 지금 연습해요? ”

 

“ 아니요, 리허설은 한 시간 후예요. 안에 계시니까 가보세요. ”

 

“ 엥, 정말요? 연습실 아니면 창고니 무대니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느라 바쁜 애가 웬일로 감독실에 있지? ”

 

“ 책을 좀 봐야 한다던데요. 하여튼 너무 방해하지 마세요. 감시고 뭐고 가만히 앉아만 있으라고요! 또 독사과 따위 먹게 하지 말고! ”

 

“ 독사과는 제가 그런 게 아니잖아요. ”

 

“ 어쨌든 스페호프가 배후에 있는 거잖아요! ”

 

“ 어, 그건... 저, 레베진스키는 나왔나요? 어제 걔랑 싸웠잖아요. ”

 

“ 나오긴 했는데 백조의 호수 군무 지도하고 있어서 연습실에 있어요. 아마 이제 감독님 신작 연습할 땐 안 들어갈 거예요. 뭐 그 인간이랑 미셴카랑 싸운 게 한두 번이 아니라서 말이죠. 하여튼 옛날부터 능력도 없었던 사람이 계속 감독 자리 욕심만 내더니... 괜히 밸이 꼴리니까 우리 감독님한테 못되게 굴고 여기저기 헐뜯고 다니기나 하고. ”

 

 

베르닌은 류드밀라에게 레베진스키를 잘 감시하라고 말할까 하다가 괜히 왕재수의 입장이 난처해질까봐 꾹 참았다. 감독실 문을 똑똑 노크했다.

 

 

“ 야, 나야. 들어간다. ”

 

 

아무 대답이 없었다. 자나 싶어서 베르닌은 조심스럽게 문을 밀고 들어갔다. 왕재수는 등을 돌리고 선 채 전화를 받고 있었다. 별다른 말은 하지도 않고 계속 듣기만 하는 것 같았다. 베르닌은 의아했다.

 

 

‘ 저 녀석 원래 감독실로 걸려오는 전화는 안 받는데. 걸지도 않고. 도청 때문에 싫다고... ’

 

 

한참 가만히 듣고 있다가 왕재수가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뭐라고 두어 마디 했다. 그리고는 전화를 끊더니 베르닌 쪽을 힐끗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파로 가서 벌렁 드러누웠다. 쿠션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누운 채 심호흡을 여러 번 했다. 잠을 못 잤나 싶어서 커튼을 쳐주려고 창가로 가다가 베르닌은 소파 곁에 멈춰 섰다.

 

 

“ 어, 야... 너 울어? ”

 

“ 내가 왜. ”

 

“ 눈물이 뚝뚝... ”

 

“ 먼지 들어가서 그래. ”

 

“ 먼지투성이 쿠션으로 얼굴을 누르고 있으니까 그렇잖아! ”

 

 

베르닌은 왕재수의 얼굴에서 쿠션을 치워 주었다. 왕재수가 얼굴을 옆으로 돌리더니 눈을 깜박깜박하면서 손등으로 급하게 뺨을 문질렀다. 베르닌은 혀를 찼다.

 

 

“ 눈물만 닦는다고 되는 줄 아냐, 콧물도 줄줄 흘리고 있는데! ”

 

“ 감기 걸렸나보지! ”

 

“ 아니잖아. 무슨 일 있었어? 설마 바이올린 아저씨가 바람이라도... ”

 

“ 아니야. 로만이랑은 아무 일 없어. ”

 

“ 그럼 방금 전화 때문이야? 누군데? ”

 

“ 너랑 무슨 상관이니. ”

 

좋아, 그럼 나 도청 녹음된 거 들어본다!

 

“ 맘대로 해. 어차피 그 사람 전화는 도청 안 된댔어. ”

 

 

베르닌은 손수건을 꺼내서 왕재수의 뺨과 코를 닦아 주었다. 왕재수는 심호흡을 하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소파 구석에 나뒹굴고 있던 책을 집어 들어 펼치더니 열심히 읽는 척 했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 거꾸로 들었잖아. ”

 

“ 뭐가! 네가 어떻게 알아, 이거 불어로 된 건데! ”

 

“ 야, 내가 아무리 불어를 몰라도 글자 거꾸로 뒤집힌 건 알아! ”

 

“ 에이... ”

 

 

왕재수는 책을 내려놓았다. 입술을 꼭 깨물었지만 눈가에 다시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 모스크바에서 전화 온 거지? 그 크레믈린 아저씨... ”

 

“ 어휴, 다른 때는 책상물림이면서 쓸데없을 때만 머리 잘 돌아가. ”

 

“ 무슨 일 있어? 너 원래 그 아저씨랑 통화하면 막 애교부리잖아. ”

 

“ 내가 언제. ”

 

“ 지난번에도... 나 권총 규격 보고서 써야 했을 때도 그 아저씨한테 전화해서 애교부리고... 그러니까 그 아저씨가 한방에 해결해줬잖아. 너 되게 귀염 받잖아. ”

 

“ 바보, 그건 네가 국장한테 볶이니까 불쌍해서 그랬던 거지. 아저씨도 내가 안 하던 짓 하니까 놀라서 금방 들어준 거야. 그 인간 툭하면 나보고 애교 부려보라고 했거든. 안 해서 맨날 혼났어. ”

 

“ 엥, 그래? 너 바이올린 아저씨한텐 맨날 애교 부리잖아. ”

 

“ 로만은 진짜 좋으니까 그렇지! 좋아하면 무슨 짓을 못해! ”

 

“ 아... 그렇구나... 난 네가 원래 그런 줄 알았어. ”

 

“ 뭐가. 원래 아무한테나 꼬리친다고? ”

 

“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기분 나빠하지 마. 그게 아니고 난 네가 원래 애교가 많은 줄 알았어. ”

 

 

왕재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가로 가더니 커튼을 젖히고 바깥을 내다보았을 뿐이었다. 어깨가 축 처진 게 보기만 해도 수심이 가득해 보였다. 마음이 쓰인 베르닌이 곁으로 갔을 때 왕재수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 우리 엄마 많이 아팠대. 한 달 가까이 병원에 계셨대. 나 전혀 몰랐어. ”

 

“ 아, 그랬구나... 지금은 괜찮아지신 거야? ”

 

“ 응, 좀 나아지셨대. 나쁜 놈들, 아무도 나한테 말 안 해줬어... ”

 

 

베르닌은 왕재수의 등을 토닥토닥해 주었다. 왕재수가 손등으로 눈을 다시 닦았다. 왕재수는 레닌그라드에 있는 가족이나 친구에 대해 얘기한 적이 거의 없었다. 딱 한번, 베르닌이 출장을 갔을 때 엄마가 걱정할까봐 편지 따윈 안 쓴다고 얘기했던 게 전부였다.

 

 

“ 그래도 좀 나아지셨다니까 다행이네. 이제 날씨도 따뜻해질 테니까 괜찮아지실 거야. ”

 

“ 우리 엄마는 여름 좋아하는데... 아직 한참 남았어. 레닌그라드는 여기보다 추워. ”

 

“ 에이, 4월 금방 갈 거야. 어머니한테 전화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저, 아니면 너 지금 레닌그라드로 전화해 볼래? 어머니한테. 내가 보고 안 하면 되잖아. ”

 

“ 네가 보고 안 한다고 그놈들이 모르겠니? ”

 

“ 국장한테 여기 전화 내용 보고하는 게 나거든. ”

 

“ 바보. 너네 국장은 얼간이니까 상관없어. 다른 놈들도 다 아는 게 문제지. 우리 엄마한테도 도청 붙여 놨는걸. 그 인간이 방금 나한테 그랬어, 엄마한테 전화하게 해줄 수 있다고. 레닌그라드로 잠깐 보내주겠다고, 엄마 만나게 해준다고. 그래서 싫다고 했어. ”

 

“ 엥? 그 크레믈린 아저씨가 얘기해준 거야? 어머니 편찮으셨다고? 전화하게 해주고 만나게까지 해준다고 했으면 좋다고 해야지 왜 거절을 해! 게다가 레닌그라드! 아무리 잠깐이라도... 너 진짜 돌아가고 싶어 했잖아. ”

 

“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 그렇지. 그 인간이 나랑 엄마를 위해서 레닌그라드에 보내준다는 게 아니니까. 또 더러운 짓 시키려고... 베를린에서 무슨 외교관인지 뭔지가 레닌그라드에 온다고... 가서 그놈이랑 놀아주면 엄마한테 하루 보내주겠다고 하잖아. 그래서 싫다고 했어. ”

 

 

베르닌은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로서는 연방을 좌지우지하는 높은 사람들의 정치질과 온갖 모략, 지저분한 뒷공작들이 너무나 낯설었다. 왕재수에게 높은 곳에 있는 아저씨들이 여럿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게 어떤 의미일지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사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로서는 그 아저씨들도 제2, 제3의 코즐로프 같은 존재라고 믿는 것이 더 마음이 편했다. 왕재수를 귀여워해주고 애교를 받아주고 천재에 예쁜 꼬마라면서 오냐오냐 해주는 아저씨들. 그냥 그게 전부라고 믿고 싶었다. 왕재수는 나이 많은 아저씨들을 좋아하는 취향이니까 그 정치인들과도 나름대로 즐겼던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던 건지도 몰랐다. 이제 베르닌은 몹시 기분이 좋지 않았고 마음이 무거웠다. 위로해 주려고 했는데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 ‘’는 뭐야... 전에도 그런 일 있었던 거야? ”

 

“ 응. 여러 번. ”

 

“ 그땐 갔었어? ”

 

“ 응... ”

 

 

베르닌은 어색하게 왕재수의 어깨에 팔을 둘러 주었다. 왕재수는 한동안 베르닌에게 머리를 기대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닐, 우리 엄마 계속 아프면 어떡하지? 나 그냥 간다고 할 걸 그랬나봐. ”

 

“ 아니야, 안 간다고 한 거 잘했어. 어머니는 괜찮으실 거야. 가책 느끼지 마. 그런 거 어머니가 아시면 네가 와도 기뻐하지 않으실 거야. ”

 

“ 나 엄마한테 그런 거 한 번도 얘기한 적 없어. 그런 짓 하고 다닌 거 엄마가 알면 안 되는데. 나 체포돼서 엄마가 진짜 많이 슬퍼했댔어. 그래서 아프게 된 건가봐. 나 때문에 아픈 건데 내가 고집부리고 안 가면... ”

 

 

왕재수가 창가 아래 벽에 등을 기대며 웅크리고 앉았다. 항상 전신을 곧게 펴거나 펄쩍펄쩍 뛰어오르는 습관이 있는 애가 그렇게 몸을 움츠리자 굉장히 낯설게 보였다. 베르닌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 고집부리는 거 아니야. 안 가는 게 맞는 거야. 얼굴 한번 안 본 사람한테 가서 그런 일 하라고 하는 놈이 나쁜 거야. 내가 어머니에게 전화할 수 있게 도청 안 되는 회선 따줄게. 오늘은 어렵겠지만 내일까지 한번 노력해볼게. ”

 

“ 고마워, 다닐. ”

 

 

왕재수가 일어나더니 스트레칭을 했다. 다시 평온한 표정을 되찾았다. 심지어 베르닌의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까지 했다.

 

 

“ 또 손목 토시를 하고 왔네. 내가 언제 너네 집 가서 토시들 다 태워 버릴 거야.

 

야, 이 토시가 얼마나 편한데! 이거 안 하면 소매 금방 더러워진단 말야! 넌 사무직의 슬픔을 모른다고! 특히 서무!

 

“ 토시랑 아가일 무늬 셔츠들! 다 태워버리고 파묻어버릴 거야! ”

 

“ 그럼 난 뭐 입고 출근하냐! 내복 바람으로 나가라고! ”

 

“ 너 아직도 내복 입어? 4월인데! ”

 

우리 사무실 춥단 말이야! 그리고 내복이나 너네 애들이 입는 타이츠나! ”

 

“ 어떻게 타이츠랑 내복을 비교할 수 있냐! 타이츠는 무대 의상이야, 제작 단가도 더 비싸다고! 자기도 지난번에 입어놓고... ”

 

“ 하긴 그게 내복보다 더 불편하긴 하더라. 하여튼 타이츠 입고 무대 올라가던 놈이 남의 토시랑 셔츠랑 내복 가지고 뭐라 할 자격 없다고! ”

 

너 한번만 더 타이츠 모독하기만 해봐!

 

 

왕재수가 진짜로 얼굴을 빨갛게 붉히면서 푸르르 화를 냈다. 그러다가 시계를 보더니 깜짝 놀랐다.

 

 

“ 나 연습실 가야 돼. 리허설 전에 데니스랑 타마라 동작부터 잡아주기로 했어. 정신이 하나도 없네. ”

 

 

베르닌은 왕재수를 따라 연습실로 갔다. 그나마 손목 토시와 타이츠 얘기로 왕재수가 다른 데 관심이 쏠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리허설을 한 시간 정도 지켜보고 있는데 레베진스키가 슬며시 들어왔다. 왕재수는 무용수들 연습시키느라 정신이 팔려서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신작 연습할 때는 이제 안 들어오겠다더니 왜 왔나 싶어서 의아해하고 있는데 레베진스키는 왕재수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베르닌에게 바짝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춰서 속삭였다.

 

“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가 지금 당장 사무실로 돌아오랍니다. ”

 

“ 예? 국장이? 근데 왜 당신이 이 얘길... ”

 

“ 극장에서 믿을만한 건 나 뿐이니까 그랬겠죠. ”

 

“ 난 당신 안 믿는데... ”

 

“ 하긴 우리가 제대로 접선했던 적이 없으니... 못 믿겠으면 전화를 해보든가요. 극장 밖 공중전화로 하랍니다. ”

 

 

베르닌은 반신반의하며 연습실을 나갔다. 극장 밖에 있는 공중전화로 가서 스페호프에게 전화를 걸었다. 국장은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명령했다.

 

 

“ 다닐, 지금 당장 돌아오게. 5호실로 오도록. ”

 

 

 

 

*   *   *

 

 

 

 

 

베르닌은 5호실에 들어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5호실은 지하 문서고 옆에 있었지만 이중문을 열고 들어가야 했고 일반 직원들에게는 출입금지 구역이었다. 스페호프와 현장요원들만 드나드는 곳이었다. 건물 설계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비밀 장소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그런 곳이 있는지도 몰랐었다. 지난 특별 감사 때 다른 선배들의 자료를 정리해주다 알게 되었는데 현장요원들의 무기 따위가 보관되어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 스탈린 시절 고문실로 악명 높았던 6호실도 허물어버렸다는 공식 발표와는 달리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건 꽤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이후 일에 짓눌려서 금세 잊어버렸다.

 

 

베르닌이 막 지하로 내려가려는데 나이든 현장요원인 글리셰프가 그에게 다가왔다. 말없이 주머니 속으로 열쇠 꾸러미를 밀어 넣었다. 베르닌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 이게 뭔가요? ”

 

“ 5호실 열쇠. ”

 

“ 국장님이 먼저 가 계신 거 아니에요? ”

 

“ 문 닫으면 자동으로 잠기게 되어 있어. 열쇠 없으면 안 열려. ”

 

 

글리셰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휙 가버렸다. 현장요원들은 언제나 무게를 잡고 잘난 척 하곤 했다. 행정요원들과는 말도 섞지 않았다. 베르닌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지하로 내려갔다. 문서고를 지나니 무거운 이중문이 나타났다. 열쇠로 문 두 개를 열고 들어가자 회색으로 칠해진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좁은 방이 나타났다. 등 뒤에서 문이 스르르 닫히더니 철컥 하고 잠겼다. 구석에 조그만 책상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거기 스페호프가 앉아서 안경을 치켜 올리며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다.

 

 

“ 국장님, 부르셨습니까. ”

 

“ 거기 앉게. ”

 

 

베르닌은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았다. 밀폐된 지하 공간이라서 그런지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스페호프가 고개를 들더니 딱딱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네 지금 모스크바로 가줘야겠어. 출장명령서는 글리셰프가 대신 써줄 걸세. 하지만 모스크바행은 비밀이야. 자넨 오늘부터 2박 3일간 스네고로드에 가축 전염병 예방요원으로 협조 출장을 가는 것으로 되어 있네. 돌아와서 누가 묻거든 그렇게 답해야 하네. 스네고로드 쪽과는 말을 다 맞춰놨으니 걱정할 거 없어. ”

 

“ 예? 모스크바요? 스네고로드... 비밀... 대체 왜... ”

 

“ 중요한 기밀문서를 전해야 하네. 필로모프나 글리셰프를 보내려고 했지만 모스크바 본부에서는 우리 현장요원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꿰뚫고 있어. 이번 일은 그쪽이 알아서는 절대 안 되네. 그래서 기존 요원들은 보낼 수가 없어. 가장 의심받지 않을만한 위치에 있는 직원, 그리고 동시에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직원을 보낼 수밖에 없네. 그것이 바로 자네야. 이번 일은 상당히 위험한 임무일세. 하지만 난 자네를 신뢰하네. 이번 임무를 제대로 수행한다면 자네는 제대로 된 현장요원으로 거듭날 수 있을 거야. 물론 자네는 9밀리 마카로프를 다룰 수 있겠지. 요원 연수도 받았고 작년에 그 불여우 인계 때문에 사격 재훈련도 받았으니. 여기 자네의 권총이 있네. 여분의 탄창은 없네. 흔적을 남겨서 좋을 일이 없으니까. 자네가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총을 쓰게 될 일이야 당연히 없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 ”

 

“ 어, 저... 권총까지... 대체 이게 무슨 임무인가요? 기밀문서라니, 무슨 내용인지... 누구에게 전하라는 건지... ”

 

“ 내용은 자네가 알 것 없네. 오히려 알면 더 위험하지. 밀사는 자신이 전하는 문서의 내용을 몰라야 해. 그래야 모두가 안전해져. 문서는 암호로 작성되어 있기 때문에 만의 하나 문제가 생겨서 자네가 붙잡히고 문서를 압수당하게 된다 해도 그들이 그 내용을 해독할 수는 없어. 행여 자네를 고문하게 된다고 생각해보게. 자네는 제대로 된 현장요원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 즉시 발설해버리게 될 걸세. 그러니 당연히 자네는 내용을 몰라야 하네. 아, 그렇게 긴장할 것 없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난 어디까지나 원칙적인 얘기를 한 것뿐이니까. 그자들도 자네에 대해서는 파악하지 못할 거야.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지, 그 불여우의 감시요원을 직접 보낼 거라고는 상상도 못할 테니까. ”

 

 

베르닌은 멍했다. 그나마 마지막의 ‘불여우’ 얘기에 정신이 좀 들었다.

 

 

“ 저, 국장님. 이번 임무가 야스민과 관련된 일인가요? ”

 

“ 그 불여우와도 관련은 있지. 타겟은 그놈이 아니지만. 더 알 것 없네. 내가 그랬잖나, 자네가 모르는 편이 모두가 안전하다고. 자네는 지금 공항으로 가게. 두 시간 후 출발하는 모스크바 행 비행기를 타는 거야. 여기 자네가 쓸 여권이 있네. 자네는 학생으로 위장하는 거야. 도착하면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기숙사 3동으로 가게. 글리셰프가 이미 모든 것을 다 처리해 두었네. 수위에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온 수학과 신입생 표트르 트뵤르도피로고프라고 말하면 자네를 기숙사 방으로 인도해 줄 걸세. 오늘 밤은 거기서 자도록 하게. 내일 아침 9시에 학교를 나와서 정문에서 제일 가까운 빵집으로 가는 거야. 흑빵 한 덩어리와 버찌잼 파이 한 개를 사서 종이 봉지에 넣어달라고 하게. 아침에는 줄을 서야 하니 빵을 사서 나오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그리고 이제부터가 중요한 부분이야. 흑빵을 반으로 가르되 끝까지 가르지는 말고 그 사이에 이 봉투를 집어넣은 후 다시 빵을 하나로 합쳐놓고 봉지에 집어넣게. 빵집에서 두 블록을 내려가면 공원이 나오지. 10시에 분수대 앞 벤치로 가서 앉게. 레닌동상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벤치여야 해. 옆에 봉지를 내려놓고 앉아서 비둘기에게 빵 귀퉁이를 떼어서 던져주게. 모이를 주는 것처럼. 그러고 있으면 중년 여자 하나가 유모차를 밀고 산책하러 와서 자네 곁에 앉을 거야. 여자도 자네와 같은 빵 봉지를 가지고 있을 걸세. 이때 암호를 확인해야 하네. 여자가 먼저 ‘회색 비둘기는 많은데 흰 비둘기는 요즘 찾아보기 힘들군요’ 라고 말할 거야. 그럼 자네는 ‘조금 전까지 한 마리가 있었는데 날아갔어요’라고 대답하게. 친절하게 얘기할 필요는 없어. 얼굴을 볼 필요도 없고. 귀찮은 듯이 대꾸하는 거야. 여자가 먼저 일어날 걸세. 그때 여자가 빵 봉지를 바꿔쳐서 가져갈 거야. 

자네는 여자가 떠난 후 곧장 일어나지 말고 3분 정도 더 앉아 있다가 빵 봉지를 들고 일어나게. 그러면 임무 완수일세. 하지만 곧장 공항으로 가면 안 돼. 오히려 의심을 받을 수 있으니. 모스크바 지리는 자네도 잘 알고 있을 테니 학교 쪽이든 아르바트든 학생들이 잘 가는 동네에 가서 놀게. 돌아오는 비행기는 4시에 뜰 거야. 그러니 시간 맞춰서 공항으로 가게나.

일단 모스크바에 도착하면 여기 돌아올 때까지 절대 여기로 전화를 하지 말게. 모스크바에서도 지인을 만나거나 연락을 해서는 안 돼. 돌아오면 곧장 집으로 돌아가게. 내게 전화할 필요는 없어. 다음날은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집에 처박혀 있게. 2박 3일간 스네고로드 출장으로 되어 있으니까. 금요일에 출근하면 곧장 여기 5호실로 내려오게. 보고는 그 때 하는 거야. 자네가 임무를 완수하면 그 즉시 나는 모스크바에서 그 소식을 받게 될 테니 금요일에 자네 얘기를 들어도 늦지는 않아.

만의 하나 모스크바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그럴 리가 없겠지만 공원 접선이 실패한다면 내 자리가 아닌 당직실 번호로 전화를 하게. 접선에 실패했을 때는 연결음이 두 번 울리면 끊고 다시 걸게. 이것을 세 번 반복하면 되네. 통화는 하지 않는 거야. 접선은 성공했지만 미행이 붙은 것 같다면 상대가 받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4월인데 아직 춥네요’라고 말하게. 그러면 모스크바 쪽에 있는 내 심복이 자네를 도우러 갈 걸세. 자, 전부 이해했나? “

 

 

베르닌은 심호흡을 했다. 수첩에 메모라도 하고 싶었지만 스페호프가 기밀사항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암호도 헷갈렸고 자기 가명도 헷갈렸다. 결국 자기가 해야 할 일은 빵집에서 흑빵을 사서 그 안에 봉투를 집어넣고 봉한 후 빵 봉지를 바꿔치게 하는 것이 전부였으니 그렇게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뭔가 계속 찜찜했다.

 

 

“ 저... 그런데 권총은 왜 필요한가요? 말씀대로라면 그냥 빵 봉지만 들고 공원에 가서 앉아 있으면 되는 일인데. ”

 

“ 다른 때 같으면 아무런 위험성이 없겠지만 아무래도 호랑이가 연루된 일은 매사에 조심하는 게 좋지. 권총을 쓸 일은 물론 없을 거야. 하지만 만일을 위해 가져가게. 그렇다고 함부로 총질을 해서는 안 돼. 문서를 빼앗길 위기에 처했을 때만 쓰게. 그리고 주변에 사람이 있으면 절대 총을 쏴서는 안 돼. ”

 

“ 호랑이요? 동물원과 관계된 일인가요? ”

 

“ 자네 정말... 많이 나아졌다 생각했는데 그 고지식한 기질은 여전하군. 이번 임무는 고위직과 연관되어 있어. 실세이지만 연방과 정부에 큰 해악을 끼치고 있는 자야. 그자가 알게 될 일은 없을 테지만 그래도 만의 하나를 대비해 조심하라는 거야. 행여 임무 수행에 실패하거나 그자의 부하들에게 붙잡힌다 해도 절대 이번 일에 대해 입 하나 뻥긋해서는 안 되네! 자네는 그저 모스크바에 공부하러 온 블라디보스토크의 표트르 트뵤르도피로고프인 거야. 혹시라도 그자들이 자네의 정체를 이미 알아챘다면 모스크바에 바람 쐬러 놀러왔다고 하게. 다른 말은 일절 해서는 안 돼. 이건 공무야. 보안요원으로서의 신성한 임무라고. 알아들었나? ”

 

“ 어... 예... 그런데 그자들에게 붙잡히면 저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

 

“ 그럴 일은 전혀 없네! 그리고 붙잡힌다 해도 내가 꺼내줄 거야! 걱정 말고 다녀오게! 여기 비행기 표와 여권, 여비, 현장 업무추진비가 있네. 두 시간 후 비행기이니 어서 공항으로 가게. 글리셰프가 태워다 줄 걸세. 그럼 성공을 빌겠네. 잘 다녀오게. ”

 

 

 

 

*   *   *

 

 

 

 

베르닌은 기밀문서와 함께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했다. 권총 때문에 검색대에서 걸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스페호프가 손을 미리 써두었는지 가브릴로프 공항에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외교관 출구를 이용했고 검색도 받지 않았다. 기밀문서는 편지봉투 안에 들어 있었는데 두께가 얄팍한 걸 보니 분량이 많지 않은 것 같았다.

 

 

사실 봉투보다도 총 때문에 내내 좌불안석이었다. 그에게 있어 총이란 군대에 있을 때와 요원 연수를 받을 때나 만져본 것일 뿐 이렇게 민간인들 사이에서 소지하고 다니는 물건이 아니었다. 문서 봉투는 안주머니 속에 쑤셔 넣었지만 대체 이놈의 권총은 어디에 숨겨야 할지 골치가 아팠다. 요원 연수를 받을 때도 그런 실용적인 지식을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 현장요원들은 배웠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행정직이 아닌가!

 

 

처음에 베르닌은 권총을 벨트와 허리춤 사이에 꽂고 재킷으로 가려 보았다. 그랬더니 벨트가 축 처지면서 하마터면 허리 밴드가 찢어질 뻔 했다. 그래서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고 또 재킷으로 가려 보았다. 주머니가 불룩 튀어나와서 누가 봐도 이상해 보일 것 같았다. 게다가 걸을 때마다 권총이 걸리적거렸고 심지어 중요부위를 툭툭 건드리기까지 했다! 너무 불편해서 결국 그는 화장실에 가서 총을 꺼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무슨 띠라도 하나 구해서 안쪽에 차고 있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는 총을 안주머니에 집어넣고 재킷 단추를 꼭 잠그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기밀문서와 총이 한 주머니에 들어 있어 뭔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또 들었다. 그래서 다시 화장실로 가서 문서 봉투를 꺼냈고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은 후 옷핀으로 주머니를 봉해버렸다. 그나마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길이의 재킷을 입고 와서 다행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그는 내내 불안에 떨었다. 스페호프는 왜 하필 자신에게 이런 임무를 맡긴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책상물림에 굼뜨기로 소문난 인물인데 현장요원들이나 맡는 임무를, 그것도 기밀문서를 전하는 일을 맡기다니! 베르닌은 그 새해에 왕재수를 데리고 얼어붙은 강을 건넜던 것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국장에게 오해를 산 덕분에 왕재수를 비호한다는 의심에서는 벗어난 것까지는 좋은데 팔자에 없는 현장요원 노릇을 하게 되다니! 아무래도 고위직이 연관되어 있는 임무 같은데 내용을 모르니 더욱 답답했다. 실수를 해서 빵 봉지를 제대로 바꿔치지 못하면 어쩌지 하고 생각하니 걱정이 돼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차라리 다시 발따예프 일당을 수발해 모스크바에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공항에 내려서 버스를 타러 가는 와중에도 경찰들이 눈에 띄자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는 어엿한 KGB였고 신분증도 있었으니 경찰들에게 검문을 받아도 위험하지는 않았지만 맡은 임무가 있어 그런지 굉장히 긴장이 됐다. 모스크바 시내로 진입해 학교에 도착하자 이미 캄캄한 밤중이 다 되어 있었다.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야 그의 모교였고 학창 시절에는 기숙사에서 살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익숙한 곳이었지만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졌다. 간신히 기숙사 3동으로 갔더니 늦은 시각이라 정문이 닫혀 있었다. 스페호프가 이런 얘기는 해준 적이 없었다. 원래 이 시간에는 수위에게 학생증을 제시해야 들어갈 수 있었다. 무거운 문을 똑똑 노크했더니 잿빛 머리의 뚱뚱한 수위가 나왔다.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더니 통금 시간이 지나서 들여보내 줄 수 없다고 했다.

 

 

어, 저... 저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막 도착해서요... 비행기 시간 때문에... ”

 

“ 블라디보스토크? 흠, 거기서 오기로 한 녀석이 하나 있긴 하지. 자네 이름이 뭔가? ”

 

“ 저... 표트르 트뵤르도피로고프요. 수, 수학과예요. ”

 

“ 여권 좀 내놔봐. ”

 

 

베르닌은 떨리는 손으로 위조 여권을 내밀었다. 그의 사진이 붙어 있었고 가명과 여권 번호도 기재되어 있었지만 긴장이 되어 다리가 후들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수위는 대충 여권을 훑어보더니 심드렁하게 말했다.

 

 

“ 이렇게 늦게 올 줄은 몰랐네. 따라와. ”

 

 

수위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서도 베르닌의 머릿속에는 별의별 생각이 오고갔다. 수위가 자기를 복도에서 두들겨 패는 것부터 시작해서 방문을 열면 악당들이 매복해 있다가 그에게 총을 쏘는 상상까지 들었다. 심장이 너무 쿵쿵거려서 수위가 들을까봐 겁이 났다. 기숙사 엘리베이터라 원체 좁아서 수위와 거의 딱 붙어 서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위는 그에게 별로 관심이 없어보였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수위가 앞장서더니 문 하나를 열고는 열쇠를 건네주었다.

 

 

“ 창문은 고장 나서 안 열릴 거야. 내일 학생처에 등록부터 하고 시설 관리 사감에게 고쳐 달라고 하게. ”

 

 

수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베르닌은 잠시 멍하게 서 있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예전에 지냈던 기숙사와 비슷한 구조였다. 문을 열자 좁은 직사각형의 방이 하나 덜렁 나타났다. 가방을 내려놓고 옷을 벗고 싶었지만 공동 부엌과 화장실, 욕실은 복도 끝에 있었다. 잠시라도 방을 비운 사이에 누가 들어와 수색을 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에 일단 방문을 다시 잠근 후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본 후 공동욕실로 갔다. 너무나도 샤워를 하고 싶었지만 긴장이 풀리지 않았고 혹시라도 습격을 당할까 두려워서 그냥 손만 씻고 세수와 양치질만 했다. 발은 물수건으로 닦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으로 돌아온 베르닌은 문부터 꼭꼭 걸어 잠갔다. 불안한 나머지 창가에 붙어 있는 책상을 문 앞으로 옮겨놓았다. 창문은 수위의 말대로 고장이 나서 열리지 않았다. 공기가 답답했지만 그래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바깥에 창살이 쳐져 있는 건 더욱 다행이었다. 커튼을 친 후 한숨을 쉬며 딱딱하고 좁은 침대에 주저앉았다. 너무 털썩 주저앉은 나머지 하마터면 침대 합판이 내려앉을 뻔 했다. 분명 왕재수가 옆에 있었다면 ‘그러니까 살 좀 빼라고 했잖아!’ 하고 구박했을 게 뻔했다. 베르닌은 너무 긴장이 된 나머지 왕재수의 잔소리가 그리울 지경이었다.

 

 

‘ 그러고 보니 그 자식 어머니 걱정으로 많이 괴로워하고 있을 텐데. 내가 도청 안 되는 회선 따주기로 해놓고 여기 와 있으니... 오늘 같은 날은 혼자 있지 말고 바이올린 아저씨한테라도 가서 자면 좋으련만. ’

 

 

눈물이 글썽글썽하던 왕재수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그는 일단 안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베개 아래에 쑤셔 넣고 재킷을 벗었다. 날아갈 것처럼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재킷과 셔츠를 벗어 의자에 걸쳐놓고 바지 주머니에서 옷핀을 빼냈다. 반으로 접힌 봉투를 꺼냈다. 잠시 베르닌은 봉투를 뜯어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곧 ‘내가 미쳤지, 왜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국장 말이 맞아, 알면 나한테만 더 불리해져’ 라는 생각에 봉투를 도로 접어서 바지 주머니에 넣고 옷핀으로 봉했다. 벗은 바지를 의자에 걸쳐놓으려니 또 괜히 불안해졌다. 결국 바지도 착착 개켜서 베개 아래로 쑤셔 넣었다.

 

 

시계를 보니 이미 자정이 다 되어 있었다. 불을 끄려니 슬며시 무서웠다. 불을 켜고 잘까 했지만 또 곰곰 생각해보니 바깥에서 불 켜진 창을 보고 의심을 하며 침입해올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는 불을 끄고는 좁은 침대로 올라가 누웠다. 학생 때도 침대가 좁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지금 다시 눕자 대체 이런 열악한 침대에서 어떻게 몇 년 동안 잤는지 놀라울 지경이었다. 스프링은 물론 없고 합판 위에 손바닥 두께의 매트리스를 깔아놓고 시트를 덮어씌운 수준이니 등이 배기고 불편한 게 당연하긴 했다. 게다가 베개 아래에 바지와 권총을 모두 쑤셔 넣었더니 뒤통수도 엄청나게 배겼다. 잠자리도 불편한데다 다음날의 임무가 너무 걱정이 되어서 베르닌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   *   *

 

 

 

 

베르닌은 새벽이 다 되어서야 잠이 들었고 그나마도 악몽에 시달리느라 제대로 눈을 붙이지도 못한 채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7시였다. 머리도 지끈지끈 아프고 배도 고팠다.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고 권총을 다시 재킷 안주머니에 집어넣은 후 복도로 나갔다. 그는 대충 세수와 양치질을 하고 머리에 물을 묻힌 후 나왔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재킷 안주머니의 권총과 바지 주머니의 봉투 때문에 꿈도 꿀 수 없었다.

 

부엌 쪽으로 돌아 나오니 이른 시간이었지만 가스렌지에서는 이미 찻물이 끓고 있었고 남학생 몇 명이 싱크대 앞에 선 채 햄과 오이를 얹은 부체르브로드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배가 고파서 그런지 엄청 맛있어 보였다. 베르닌을 발견한 학생 하나가 붙임성 좋게 인사를 했다.

 

 

“ 안녕, 처음 보네. 대학원생인가? ”

 

“ 어, 어... 어제 도착해서... ”

 

“ 너 모스크바 출신 아니구나? 난 일류샤라고 해. ”

 

“ 어... 난 표, 표트르. ”

 

“ 이거 하나 먹어볼래? 식당 것보다 맛있어. 빵이 안 말랐거든. ”

 

“ 고마워. ”

 

 

베르닌은 샌드위치를 하나 받아먹었다. 굉장히 맛있었다. 곱슬머리에 살짝 들려올라간 코, 발그스름한 뺨 등 척 봐도 스무 살도 안 돼 보이는 일류샤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시종일관 빙긋빙긋 웃었고 친구들과도 농담을 주고받으며 재미있어 했다.

 

 

“ 우린 법학과야. 너는? ”

 

“ 나, 나는 수학과... ”

 

“ 어휴, 엄청 어렵겠다. 무슨 공식에 문제에 그런 것만 풀어야 되는 거 아니야? 샌드위치 하나 더 먹어. ”

 

어, 고, 고마워... 나는 이제 가봐야 할 거 같아. 만나서 반가웠어, 일류샤. ”

 

“ 그래, 잘 가. 앞으로 종종 보자. 수학 골치 아프면 법대로 옮겨. 법학이 지루하긴 해도 보람 있거든. ”

 

“ 응, 분명 그럴 거야. ”

 

 

베르닌은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기숙사를 나왔다. 뜻하지 않게 법학과 후배를 만나서 샌드위치를 얻어먹었더니 무겁던 마음이 약간 나아지는 것 같았다. 일류샤야 그에게는 까마득한 후배일 테지만...

 

 

‘ 나도 공부할 땐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법학이 지루하긴 해도 보람 있는 공부라고... 그래서 KGB도 들어온 건데... ’

 

 

끝없는 서무 업무와 스페호프가 생각나고 독사과와 시계탑이 떠오르자 베르닌은 마음이 무거웠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무엇인지 알게 된 것 같았다. 후배인 일류샤에게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빌었다.

 

 

그는 찬바람을 쐬면서 교정을 좀 거닐었다. 그래도 부체르브로드를 두 쪽 먹었더니 정신이 좀 들었다. 어느덧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학교를 나왔다. 스페호프가 얘기한 빵집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학창 시절 종종 이용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곧 그의 차례가 되었다. 먼저 주문을 했다.

 

 

“ 흑빵 한 덩어리, 버찌잼 파이 하나 주세요. ”

 

“ 흑빵 어떤 종류요? 모스콥스키, 보야르스키, 곡물 박힌 거, 밀가루랑 섞인 거, 어떤 거요? ”

 

 

베르닌은 순간 당황했다. 너무나 당연한 질문이었지만 머릿속으로 계속 흑빵 한 덩어리와 버찌잼 파이만 외고 있었기 때문이다. 점원이 그를 째려보고 있었기 때문에 간신히 더듬거리며 대꾸했다.

 

 

“ 모, 모스콥스키요. ”

 

 

점원이 전표를 찢어서 건네주고 등 뒤의 진열대에서 모스콥스키 흑빵과 파이를 꺼내는 동안 베르닌은 옆 칸으로 가서 전표를 내밀고 돈을 냈다. 영수증을 받아서 보여주고 빵과 파이를 받았다. 그러다 뭔가 이상해서 도로 계산대로 갔다.

 

 

“ 어... 저... 종이 봉지를 주셔야 하는데... ”

 

그럼 처음부터 얘길 했어야죠! 종이 봉지는 10코페이카를 더 내야 돼요!

 

“ 예... 여기 10코페이카 드릴게요. ”

 

 

그래서 베르닌은 다시 전표를 끊고 10코페이카를 내고 영수증을 보여주고 갈색 종이 봉지를 받았다. 빵 봉지를 껴안고 빵집을 나왔는데 대체 어디로 가야 사람 눈에 띄지 않고 흑빵을 갈라 봉투를 숨길지 알 수가 없었다. 스페호프도 그런 얘기는 해준 적이 없었다.

 

 

‘ 아아, 뭐가 이렇게 복잡해... 현장요원들도 다 이런 식으로 하나? 설마 해외 나가는 스파이들도 이렇게 어설픈 방법을 쓰는 건 아니겠지? 꼭 흑빵 속에다 봉투를 숨겨야 하는 이유가 대체 뭐야... ’

 

 

결국 그는 도로 학교로 들어갔다. 정문에서 제일 가까운 화장실로 가서 문을 걸어 잠근 후 흑빵을 꺼내서 반으로 쪼갰다. 힘 조절을 못해서 하마터면 끝까지 다 갈라질 뻔 했다. 바지 주머니를 봉하고 있던 옷핀을 뽑은 후 봉투를 꺼냈다. 바지와 베개에 눌린 데다 반으로 접혀 있어서 봉투는 쭈글쭈글하게 주름이 가 있었다. 심지어 봉투 겉면에는 얼룩도 있었다. 아무래도 주머니 안에 쑤셔 넣었던 초콜릿 포장지 때문인 것 같았다. 중요한 기밀문서를 이런 식으로 보냈다고 모스크바 쪽 수신자가 스페호프에게 화를 내지나 않을까 걱정이 됐다. 그러면 국장은 자신을 들들 볶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는 손수건에 침을 묻혀서 봉투의 얼룩을 문질러 보았지만 자국은 더 지저분하게 번질 뿐이었다. 결국 그는 포기하고 봉투를 빵 사이에 쑤셔 넣었다. 그런데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빵 부스러기가 포슬포슬 일어났고 봉투를 넣었더니 빵이 양쪽으로 벌어졌다. 낑낑거리다가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 아, 그렇구나. 빵을 위에서부터 반으로 가르면 안 되는 거였어... 칼 같은 걸로 가운데에만 금을 그어서 봉투를 쑤셔 넣었어야 하는데. 어휴, 국장은 왜 이런 얘기는 안 해준 거야... 난 현장요원이 아니잖아. 내가 빵에 봉투를 어떻게 넣는지 알 게 뭐야. ’

 

 

결국 베르닌은 봉투를 한 번 더 접은 후 흑빵 안쪽으로 깊숙하게 쑤셔 넣었다. 그리고는 있는 힘껏 빵을 양쪽에서 밀어붙여 꼭 눌렀다. 그러자 빵이 붙었다. 너무 눌러 대서 원래 부피의 절반으로 줄어들어버렸지만 어쨌든 옆으로 벌어지지는 않았다. 급하게 봉지에 쑤셔 넣고 흑빵 위에 버찌잼 파이를 얹었다. 허둥거리다 하마터면 봉지 째 바닥에 떨어뜨릴 뻔 했다. 그나마 변기 뚜껑을 닫아놔서 다행이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베르닌은 학교를 나왔다. 빵과 씨름하느라 시간을 보냈더니 이미 10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급하게 걸어서 블록 두 개를 지나 공원에 갔다. 그런데 레닌 동상 정면의 벤치에 하필 할머니 하나가 앉아서 비둘기에게 빵을 주고 있었다! 다른 벤치는 전부 비어 있었다. 베르닌은 난감했다. 할머니가 자리를 비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지, 아니면 옆의 다른 벤치에 앉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 어휴, 왜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법은 안 가르쳐준 거야... 난 행정직인데. 이럴 땐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할머니가 베르닌 쪽을 보더니 손짓을 하며 ‘이봐, 젊은이’ 하고 그를 불렀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 어... 왜 그러시죠? ”

 

“ 불 좀 있나? ”

 

“ 저... 죄송합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아서요... ”

 

“ 에이, 요즘 젊은이들은 참 재미없게 산다니까. 노인네 담뱃불 하나 빌리기도 쉽지 않으니... ”

 

 

할머니는 툴툴대며 일어나더니 엉덩이를 툭툭 털고 느릿느릿 공원을 떠났다. 베르닌은 주위를 둘러본 후 벤치에 얼른 앉았다. 옆자리에 접선자가 앉아야 하니 자리를 비워놔야 할 것 같아서 귀퉁이에 앉았다가 또 아까 그 할머니 같은 사람이 올까봐 걱정이 되어서 다시 옆으로 좀 더 가서 앉았다. 빵 봉지를 옆에 내려놓자 가슴이 쿵쿵쿵 뛰었다. 멍해진 베르닌은 심호흡을 했고 자기도 모르게 자꾸 주변을 둘러보았다.

 

 

‘ 안 돼... 이렇게 자꾸 옆을 두리번거리면 더 수상해 보일 거야. 태연하게 있어야 돼. 난 그냥 산책하다가 잠깐 벤치에 앉아서 쉬는 거야. 아참, 그렇지. 비둘기한테 빵을 주라고 했지... ’

 

 

베르닌은 급하게 빵 봉지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런데 흑빵 위에 버찌잼 파이를 얹어놓았다는 것을 깜박한 나머지 그만 손에 잼이 찐득찐득하게 묻고 말았다. 손수건에 침을 묻혀서 대충 닦았지만 아주 찜찜했다. 흑빵 귀퉁이를 떼어냈더니 빵이 다시 옆으로 벌어지려고 해서 다시 손으로 꼭꼭 눌러야 했다.

 

 

빵조각을 떼어내서 던져주자 비둘기들이 모여 들었다. 빵을 쪼아 먹는 새들을 보고 있으니 왕재수 생각이 났다.

 

 

‘ 그러고 보니 오리한테 먹이 주는 건 봤는데 비둘기한테 주는 건 못 봤네. 비둘기는 안 좋아하나? 아침 출근은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네. 분명히 밥도 안 먹었겠지. 오늘도 집에는 밤에나 도착하니까 저녁 못 챙겨주는데. 그 녀석 요즘 신작 때문에 계속 무리하던데 밥이라도 잘 먹어야 하는데 로만이나 류다한테 얘기라도 해놓고 올걸... 어제도 내가 데리러 올 줄 알고 기다렸을 텐데. 또 극장에서 잔 거 아니야? 전화도 못 하고... ’

 

 

그는 왕재수 생각을 하느라 잠시 불안하던 것도 잊었다. 긴장이 풀려서 비둘기들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달칵거리는 바퀴 소리가 났다. 순간 가슴을 뻣뻣하게 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곁눈질을 했다. 스카프로 머리를 감싼 중년 여인 하나가 유모차를 밀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그의 곁에 앉으며 빵 봉지를 내려놓았다. 베르닌은 차마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 유모차 쪽을 보았다. 조그만 아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누워 있었는데 베르닌은 그렇게 못생기고 심술궂게 생긴 아기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여자가 담배를 꺼냈다. 아기 얼굴에 연기를 뿜어도 되나 하고 베르닌이 의문하고 있는데 여자가 무뚝뚝하게 말을 걸었다.

 

 

“ 불 있어요? ”

 

 

베르닌은 매우 당황했다. 분명히 회색 비둘기 흰 비둘기 암호를 얘기해야 하는데 어째서 불 있느냐고 묻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 어... 아까 그 할머니도 불 있느냐고 했는데... 설마 암호가 바뀐 건가? 아니면 이 여자가 접선자가 아닌가? 그냥 우연히 비슷한 스타일인 건가? ’

 

 

여자가 짜증스럽게 다시 물었다.

 

 

“ 불 있느냐고요. ”

 

“ 저, 아니요. 전 담배 안 피워서요. 죄송해요. ”

 

“ 흠. ”

 

 

여자는 호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베르닌이 황당해 하고 있는데 여자가 연기를 내뿜더니 비둘기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회색 비둘기는 많은데 흰 비둘기는 요즘 찾아보기 힘들군요.

 

아, 어... 조금 전까지 한 마리 있었는데 날아갔어요.

 

 

베르닌은 심장이 뛰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입 안이 바짝 말랐고 머릿속에서 천둥이 치는 것 같았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유모차의 아기를 어르고 달래며 노래를 불러 주었다. 베르닌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손에 쥐고 있던 빵을 더욱 잘게 부숴서 비둘기들에게 던져 주었다. 잠시 후 여자가 반쯤 탄 담배를 벤치 귀퉁이에 짓이겨 끄더니 꽁초를 휙 던져버리고는 일어섰다. 빵 봉지를 옆구리에 끼더니 베르닌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유모차를 밀면서 가버렸다.

 

 

베르닌은 꼼짝도 못하고 죽은 듯이 앉아 있었다. 여자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후 더듬더듬 손을 뻗어 빵 봉지를 집었다. 떨리는 손으로 봉지 안에 손을 넣었다. 버찌잼 파이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흑빵을 만져 보았다. 반으로 갈라져 있지 않았다. 온전한 덩어리였다. 자기도 모르게 ‘휴우’ 하고 한숨이 새어나왔다.

 

 

잠시 후 베르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돌덩이 하나가 떨어져 나간 기분이었다. 다 끝났다는 생각에 날아갈 것 같았다. 마치고 나니 별 것도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빵 봉지를 집어 들고 빠른 걸음으로 공원을 빠져나갔다.

 

 

 

 

*   *   *

 

 

 

 

베르닌은 아르바트 거리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주변에 있으면 어쩐지 의심을 살 것 같아서였다. 미행을 당할지도 모르니 직행 버스 대신 중간에 내려서 갈아타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문서를 전달하고 나니 불안감은 거의 다 가셨고 아무리 생각해도 미행이 따라붙은 것 같지도 않았다. 하긴 스페호프의 말이 옳았다. 누가 봐도 평범한 타입에 책상물림인 그를 비밀문서를 전달하는 KGB 요원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돌이켜보면 빵 봉지를 바꿔친 접선자도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여인이었다. 누가 봐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봉투를 직접 전달한 것도 아니고 빵 안에 숨겼으니 들킬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베르닌은 가브릴로프에 돌아갈 때까지는 조심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버스를 갈아타려고 내렸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 아르바트는 너무 번화하니까 다른 데를 가야겠다. 그래,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에 가야지. 거기는 지하철을 타고 가야 하니까. 오늘은 평일이니까 오전에 사람도 별로 없을 거고. 역에서 미술관 가는 길도 한적하고. 거기 있다가 공항으로 가면 되겠어. ’

 

 

그는 지하철역으로 갔다.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으로 가기 위해서는 지하철도 갈아타야 했다. 미로처럼 뻗은 넓고 어두운 지하철역으로 내려가자 마음이 한결 놓였다. 한 정거장을 간 후 환승을 했다. 승객은 별로 없었다. 싸늘한 지하철 좌석에 앉자 배가 고파왔다. 봉지에서 버찌잼 파이를 꺼내서 먹었다. 꿀맛이었다. 파이를 다 해치운 후에야 이 봉지를 계속 들고 다니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 두고 내릴까 하다가 친절한 누군가가 빵 놓고 내렸다며 따라올 것 같아서 할 수 없이 봉지를 들고 내렸다. 누가 볼까 심장을 졸이며 휴지통에 빵 봉지를 던져 넣고는 급하게 몸을 돌려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갔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역에서 나온 베르닌은 어쩐지 점점 빨라지는 발걸음으로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을 향해 걸었다. 4월 초의 모스크바는 따뜻했고 햇살도 밝았다. 시계를 보니 11시가 좀 넘어 있었다. 꼭 옛날에 학교 다니던 때 같았다. 모처럼 휴강이 되었을 때 동기들과 함께 놀러 나갔을 때가 생각났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럴 때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에 갔던 기억은 없었다. 맨 처음 모스크바에 왔을 때 그래도 유명한 곳이니 가봐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딱 한 번 갔을 뿐이었다.

 

 

미술관은 한적했다. 관람객은 거의 없었다. 도슨트를 따라다니며 설명을 듣는 중학생들이 한 무리 있었을 뿐이었다. 베르닌은 학생들을 피해서 다른 전시실로 갔다. 그는 원래 미술에는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그림을 봐도 별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전날부터 밀서 전달 임무 때문에 너무 불안에 떨었던 터라 텅 빈 전시실에서 알록달록한 색깔이 칠해진 그림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멍하게 이 전시실 저 전시실을 돌아다니다가 그는 거대한 그림 앞에 멈춰섰다. 짙은 청색과 흰색과 검은색이 섞여 있는 여자의 초상화였다. 깃털 날개가 달려 있고 하얀 드레스를 입은 검은 머리의 예쁜 여자였는데 베르닌도 책에서 본 기억이 났다. 유명한 그림 같았지만 제목은 생각나지 않았다. 어쩐지 그림에 눈이 계속 갔다.

 

 

‘ 어, 근데 이 그림 누구 좀 닮은 거 같아. 왜 이렇게 낯익지. 내 주위에 저렇게 생긴 여자는 없는데. ’

 

 

베르닌은 고개를 갸웃했다. 제목과 화가 이름을 보려고 앞으로 다가가려는데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브루벨, 백조 공주. 학창 시절에 공부를 제대로 안 했나보군. ”

 

 

베르닌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말쑥한 수트 차림의 중년 남자가 하나 서 있었다. 거의 코즐로프만큼 키가 컸는데 체격은 훨씬 더 컸다. 어딘가 매를 연상시키는 외모의 풍채 좋은 남자였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마 그의 두 눈 색깔이 서로 달라서 그런 것 같았다. 오른쪽 눈은 푸른색이었고 왼쪽 눈은 갈색이었다. 베르닌은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소름이 오싹 끼쳐오는 것을 느꼈다. 모른 척하고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뭔가에 사로잡힌 듯 눈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남자가 목을 울려 웃었다.

 

 

“ 아니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나? 닮긴 닮았지. 그것도 많이. 뭐 그 자식도 알 거야. 한두 번 들은 얘기도 아니고. ”

 

“ 저... 무슨 말씀이신지 전혀 모르겠군요. 아무래도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만. ”

 

 

남자가 다시 웃었다. 이번에는 소리 없는 미소였다. 그때 베르닌은 갑작스럽게 깨달았다.

 

 

저 그림, 그 자식 닮았어... 많이...

 

 

그리고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며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나 이 사람 알아... 텔레비전에서 본 적 있어... 분명히 본 적 있어.

 

 

온몸에서 피가 빠져 달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베르닌은 몸을 돌렸다. 거의 본능적으로 행동했다. 전시실을 빠져나왔다. 남자는 쫓아오지 않았다. 잰걸음으로 미술관을 나온 후 주변을 살펴보았다. 장바구니를 들고 가는 노파 한두 명 뿐이었다. 뒷골목 쪽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뛰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 당직실... 당직실로 전화하라고 했어. 암호가 있었는데... 신호 두 번 가면 끊으라고 했나? 아니야, 그건 접선에 실패했을 때야. 미행 붙었을 때 하는 말이 있었어. 뭔가 추운 거랑 연관된 거였는데... ’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일단 지하철역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지하철을 타고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그러다가 지하로 내려가면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와 전차를 번갈아가며 타다가 공항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막 버스 정류장 쪽으로 가려고 골목을 돌았을 때 누가 그의 어깨를 탁 쳤다.

 

 

“ 어, 표트르! 여기 웬일이야? 수업 끝났어? ”

 

 

베르닌은 깜짝 놀라 멈춰 섰다. 곱슬머리의 앳된 청년이 그를 보고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침에 기숙사 부엌에서 샌드위치를 건네준 법학과 후배 일류샤였다.

 

 

“ 어, 어... ”

 

“ 어디 가? 혹시 트레치야코프? 나 지금 거기 가는 길인데. 같이 갈래? ”

 

“ 어, 아니야... 난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다음에 봐. ”

 

“ 에이, 아쉽네. 그럼 잘 가. ”

 

 

베르닌은 일류샤가 골목을 돌아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는 다시 뛰려다가 건너편 골목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를 발견했다. 전화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스페호프가 미행이 붙으면 모스크바의 심복을 보내주겠다고 했었다. 암호가 아직도 생각이 잘 나지 않았지만 일단 부스로 갔다.

 

 

막 주머니에서 전화 토큰을 꺼내고 있는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거 시내 전화야. 가브릴로프로는 전화 안 될 걸. 너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구나. ”

 

 

베르닌은 불에 덴 듯 부르르 떨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일류샤가 서 있었다. 여전히 해맑게 웃고 있었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물으려고 했을 때 일류샤가 다가왔다. 베르닌은 일류샤가 한 손을 들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아무 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일류샤가 그의 관자놀이를 내리쳤다. 베르닌은 뒷걸음질치려고 했지만 등에 전화 부스 벽이 와 닿았다. ‘잘됐네, 쓰러지지는 않겠어’ 라는 생각이 들었고 동시에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란 생각도 들었다. 아마 ‘샌드위치 같은 거 받아먹으면 안 되는 거였어!’라고 자책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곧 눈앞이 캄캄해졌고 베르닌은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FIN

- 2015. 6. 24 ~ 6. 30 -

 

 

...

 

 

 

과연 베르닌은 무사할 것인가! 그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28편에서...

 

..

 

 

이번 편은 내용상 스파이 첩보 소설과 하드보일드 장르 소설의 문체를 좀 섞어서 썼다. 점점 서무 시리즈는 내 맘대로 이 장르 저 장르 잡탕 놀이터로 변하고 있음^^;  

 

 

..

 

 

스페호프가 베르닌에게 부여한 가명인 표트르 트뵤르도피로고프에 대해.

 

'트뵤르드이'는 '단단한', 딱딱한', '굳은'이란 뜻의 형용사이고 '피로그'는 '파이'란 뜻이다. 그래서 트뵤르도피로고프는 '딱딱하게 굳은 파이'란 뜻이 내재되어 있다. 내가 만들어낸 성이지만 분명 어딘가에 이런 성도 있긴 있을 거다. 실제로 트뵤르도흘레브니코프(딱딱한 빵)란 성이 있기 때문이지...

 

그리고 일류샤는 러시아 남자 이름인 '일리야'의 애칭이다. 러시아 이름들은 별로 많지 않아서 동명이인이 참 많다. 대신 성이 아주 다양함.

 

 

..

 

왕재수가 크레믈린 아저씨의 명령에 대해 얘기하는 장면은 다분히 본편 색채가 짙은데, 본편 우주에서 미샤는 후원자이자 지배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의 지시에 따라 국내외 주요인사와 그런 일을 수행한 적이 좀 있다. 왕재수가 어머니에 대해 걱정하는 장면도 본편 우주의 미샤와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가져왔다. 본편 우주에서 미샤는 어릴 때 아버지를 잃었기 때문에 어머니에게 자신의 일로 걱정을 끼치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성격으로 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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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묘사하고 있는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기숙사에 대한 얘기는 실제와는 다를 수 있다. 나는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기숙사에서는 지내본 적이 없고 페테르부르그 국립대학교 기숙사에서 지냈기 때문에 여기서의 묘사는 그곳 기숙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공동부엌과 욕실을 쓰는 기숙사도 있고 각 방별로 욕실과 부엌이 딸려 있는 기숙사도 있었다.

 

베르닌이 침대에 주저앉다가 합판이 내려앉을 뻔 한건 내 실제 경험에서 가져왔다. 오랜 옛날 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기숙사에서 지낼때 어느 춥고 힘든날 녹초가 되어 돌아와 침대에 주저앉았는데 침대가 반토막으로 내려앉았다! (내가 엄청 무거워서가 아님!! 워낙 침대가 좁고 열악해서 그런 것임...) 놀라서 침대를 해체해보니 아주 얇은 매트리스 아래 합판이 이어져 있었는데 그 합판이 반토막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청테이프로 합판을 붙인 후 다시 매트리스를 깔았고 이후 몇달 동안 그 위에서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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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밀리 마카로프는 러시아제 권총이다. 총기에 관심 많으신 분들이라면 잘 알듯. 28편에서 이 권총 사진도 한번 올려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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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치야코프 미술관은 모스크바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관이다.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나 러시아 박물관만한 규모는 아니지만 유명한 그림들이 많다.

 

베르닌과 미지의 남자가 조우하게 된 청색과 흰색, 검은색의 아름다운 여인 초상화는 미하일 브루벨의 '백조공주' 이다. 이 그림에 대해서는 전에 두어차례 포스팅한 적이 있고 about writing 폴더에 올렸던 본편 우주의 단편 Jewels에서도 화자 라라가 미샤를 놓고 백조공주랑 닮았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 링크들은 아래..

http://tveye.tistory.com/3394  : 단편 Jewels 04편 중에서

http://tveye.tistory.com/1819 : 브루벨의 악마와 백조공주 이미지

 

그래도 아쉬우니 백조공주 이미지를 여기 다시...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그림이기도 하다. 이미지 파일은 크기도 작고 색채도 어두운데, 실제 그림은 정말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본편의 미샤를 구상할 때 이 사람이 브루벨 그림의 악마와 백조공주를 연상시키는 타입이라고 설정했는데, 실질적으로는 백조공주를 더 닮았을 거라고 내밀하게 생각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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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음 이야기는 28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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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