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부터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수술을 여러 번 하셨고 그때도 너무 힘들었는데 그것이 올 겨울에도 이어졌다. 지난주에는 아버지를 입원시키고 의사와 상담도 했는데 너무 심란했었다. 일단 이번주에 담석수술은 잘 끝나서 퇴원을 하셨고 가장 걱정스러운 문제의 용종에 대해서는 연초 별도 진료를 통해 제거수술과 검사 날짜를 잡는다고 한다. 엄마도 올해 여기저기 아프셨고 항상 마음이 쓰인다. 부디 내년에는 부모님이 건강하고 행복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용종도 아무 문제가 없기를.
그리고 나에 대해서라면, 회사에서 내내 힘들고 어려웠다. 어쨌든 정치적 사회적 변화에 민감한 업계에서 일하는데다 작년부터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그 변화가 올해는 더욱 직접적으로 몰아닥치게 되었다. 몇년 전 이것과 비슷한 상황에서 너무 힘이 들었고 심각하게 마음을 앓고 다쳤는데 그 양상이 되풀이되면서 더 악화되고 있는 분위기라 과연 앞으로 어떻게 자신을 추스르며 앞날을 설계해 나가야 할지 아직도 판단이 서지 않는다. 올해는 특히 연초와 봄에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정말 심각하게 그만둘 고민을 했고 이것 때문에 우울감이 매우 악화되어 의사에게 추가로 찾아가기도 했다. 간신히 그런 마음을 다스렸을 때는 직원들이 너무 심하게 속을 썩였다. 금쪽이와 독버섯이라고 적곤 했는데 일일이 여기 적기 어려워 말을 아꼈지만 정말 최악의 경우들이었다. 거기에 최고임원이 정말 감당하기 힘든 과제들을 퍼부었다. 이 모든 것들을 어떻게든 하나하나 헤쳐왔다. 그것만으로도 정말 스스로를 아끼고 대견하게 여겨야 한다. 너무 자신에게 가혹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이제 내년 초에는 조직개편과 인사이동도 기다리고 있고, 이미 서울에서 몇년간 일한 터라 아무래도 본사로 다시 발령받게 될 가능성이 좀 크다. 거기에 더해 지금 맡고 있는 업무 자체에도 정치 사회적 변화로 크나큰 시련이 몰려오고 있다. 여러가지로 환란과 시련의 시기이다. 단순히 일 자체가 고되고 힘들다면 어떻게든 버텨나갈 수 있을 것이다(그런데 사실 이것도 이제는 기력이 딸려서 좀 힘들다) 그러나 본질적인 가치가 훼손되고 견딜 수 없는 종류의 압력이 가해진다면 계속해서 남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새로운 일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생각, 앞날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어떻게든 버티고는 있지만 내년 초에 닥쳐오는 변화와 시련을 생각하면 사실 머리가 어지럽다.
나이를 한살 한살 먹어가고 일터에서, 삶에서 경험들이 쌓여가지만 진정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스스로를 지켜나가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여전히 미숙하고 불안하고 두렵다. 직장에서는 일정한 지위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고 선배이자 상사로 자리잡고 있지만 마음속은 여전히 집단과 사회와 '우리들'에 속하는 것이 어렵고 고통스럽다. 그것도 이런 시기에는 더.
그래도 올해 좋은 일도 있었다. 여행을 두 번 다녀왔다. 프라하와 바르샤바. 프라하에는 엄마와 다녀왔다. 엄마와 다녀온 첫 해외여행이었고 둘이서 열흘 정도 함께 내내 붙어 있었던 것도 성인이 된 이후에는 처음이었다. 이 여행은 99% 엄마에게 맞춘 것이었기에 내 여행은 아니었다. 하지만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여행을 하면서 그동안 몰랐던 것들도 많이 알게 되었고 엄마와 좀더 돈독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바르샤바 여행도 특별했다. 후반부에는 혼자 다녔지만 첫 며칠은 영원한 휴가님과 만나서 방도 함께 쓰고 같이 다니며 즐거웠다. 나는 혼자 하는 여행에 너무 익숙해져 있지만 그래도 본질적으로는 좋은 친구와 함께 다니는 여행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글도 두 편 썼다. 뭐 엄밀히 말하자면 후자는 아직 마치지 못했지만 몇 페이지만 더 쓰면 되니까. 작년에는 한 편밖에 못 썼는데 올해는 <프티치예 말라코>를 여름에 마친 후 가을에는 지금의 단편을 쓰기 시작했으니 일년 동안 거의 내내 쓰고 있었던 셈이다. 물론 봄에 너무 힘들 때는 도저히 소설을 쓸 기력이 나지 않아 음식에 대한 단문을 몇개 쓰며 버텼지만. 단문과 소설은 쓰는 방법과 마음가짐, 쓰는 즐거움과 깊이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재작년과 작년에는 게냐라는 인물을 데리고 그의 혼란스럽고 무거운 마음들을 따라갔는데 이 3부작, 즉 <판탄카의 루키얀>과 <눈의 여왕>, <구름 속의 뼈>는 쓰는 재미가 있기는 했지만 많이 지치는 작업이었다. 특히 작년에 쓴 <구름 속의 뼈>가 그랬다. 아무래도 그 인물이 나의 과거에 더 가까웠고 이미 나는 그 시기를 지나갔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에 비해 올해에는 조금 더 가벼운 인물들을 전면으로 가져왔다. 프티치예 말라코는 오랜만에 아주 순수하고 단순한 인물을 내세웠다. 비록 그 뒤에는 언제나 방황하고 언제나 괴로워하는 알리사와 그녀의 일그러진 거울과도 같은 미샤가 등장하지만 그래도 코스챠를 데리고 쓰는 글은 한결 가벼웠다. 사실 깊이 들어가면 그 글은 코스챠보다는 알리사에 대한 글이었고 순간순간 나 자신의 목소리를 여러 겹의 렌즈로 재구성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쓰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10월부터 시작해 이제 마지막 몇 페이지를 남겨놓고 있는 지금의 글(아직 제목을 정하지 않아서 가제로는 <마냐와 미샤>라고 부르고 있다)은 더 그렇다. 마냐는 코스챠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겪었고 훨씬 밑바닥에 있는 인물이지만 역설적으로 최근 몇년 동안 써온 글의 등장인물들 중에서는 가장 이야기를 끌어내기 쉽고 순수하다. 분명 코스챠가 더 투명한 인물이지만, 사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있어 투명함과 순수함은 조금 다른 의미일 때가 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올해 쓴 이 두 편의 소설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코스챠와 알리사, 마냐와 미샤의 관계는 어떤 면에서는 닮았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그것이 지금의 내가 찾고 싶었고 또 하고 싶은 이야기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는 여전히 쓰는 행위가 아주 소중하고 내밀한 그 무엇이다. 그래서 올해 너무나도 힘든 일이 많았지만 그래도 내가 계속해서 글을 썼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