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젠 자정 되기 전에 누웠는데 새벽에 몇번 깬 후 오늘도 늦게 일어났다. 계속계속 졸렸다.
돌아가기 전까진 오늘만 날씨가 좋다고 해서 원래 오늘 수도원이나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에 갈까 했지만 생각보다 날씨가 좋지 않았고 다리도 많이 아팠다. 어제 바리쉬니코프 전시를 보고 와서 그런가 오늘은 어쩐지 러시아 박물관 생각이 나서 거기 가기로 했다. 며칠 전 사다놨던 에클레어와 체리로 아점을 때우고 나와서 버스를 탔다.
오늘은 월요일이라 그런지 사도바야 거리에서 판탄카로 돌아나가는 길이 굉장히 밀렸다. 버스 안에서 고생한 후 내렸는데 날이 싸늘했다. 그래도 판탄카 쪽 가판대에서 아이스크림 한개 사먹었다. 이제 마로제노예 먹을 수 있는 날도 거의 없네... 한국 돌아가면 다시 아이스크림은 쳐다보지도 않는 생활이 시작되겠지. (원래 유지방 소화를 못시켜서 아이스크림을 못먹는데 페테르부르크에선 많이 돌아다녀서 그런지 아니면 여기 아이스크림이 유지방 함량이 낮은지-맛은 안 그런데- 배가 안 아픈 편이다)
오늘 먹은 건 에스키모 크렘 브륄레. 맛있었다.
..
일년만에 러시아 박물관에 다시 왔다. 박스트는 올해 150주년인가 뭔가여서 투어를 갔기 때문에 그림이 아예 통째로 없어 슬펐지만 니콜라이 게의 못봤던 그림이 몇점 나와 있는 등 또 나름대로의 수확이 있었다.
금발의 가브리엘과 브루벨의 악마를 다시 봐서 행복했다.
두어시간 쯤 전시를 본 후 나왔다. 날씨가 싸늘했다. 카톨릭 성당 뒤에 있는 클래식 음반가게에 가서 글리에르의 청동기사상이 있느냐 물었지만 주인 남자는 자기가 이 가게를 하는 동안 그 음반이 들어온 적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는 컴퓨터로 모든 카탈로그를 검색해본 후 매우 유감스럽게도 없다고 했다. 어디서 이 음반을 구한다지... 나중에 네프스키로 나가서 다른 클래식 음반 가게에도 갔지만 없었다. 후자는 전보다 음반이 더 줄어들어 있었다. 전에는 지휘자별로 되어 있어 페도토프와 테미르카노프도 종종 득템했건만 왜 퇴행한거야...
자리가 있으면 징게르 카페에서 이른 저녁이나 먹을까 했지만 역시 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하긴 성수기니 이른 아침 아니고서는 이 카페에서 자리 잡기가 쉽지 않다... 올해는 포기해야 하려나싶다.
그냥 우리 호텔 9층 식당에서 전망이나 보며 저녁먹어야지 하고 버스를 탔는데 사람이 너무너무 많은데다 너무 피곤했다. 갑자기 너무 어지럽고 피곤해서 그냥 이삭 성당 앞에서 내렸다. 곧 집에 돌아가니까 아스토리야에 가서 밥을 먹고 말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아스토리야 호텔에 갔다. 마침 그때 료샤가 전화를 해왔다. 일끝났다면서 박물관에 있으면 데리러 온다 해서 '배고파서 아스토리야에 가고 있었어'라고 하자 되게 신기해했다.
료샤 : 나 지금 아드미랄쩨이스까야 지나고 있어.
(이삭성당에서 제일 가까운 지하철역임)
나 : 엥, 너네 사무실 그쪽 아니잖아.
료샤 : 미팅이 W호텔 쪽이었어. 마치고 나가고 있었어. 도로 간다.
(W호텔도 이삭성당 근처에 있음)
나는 너무 피곤해서 먼저 아스토리야 카페에 들어갔다. 아스토리야 호텔은 얼마 전인지 재단장을 해서 로비의 카페 로툰다와 다비도프 바, 그리고 안쪽의 아스토리야 카페로 구분이 되었는데 후자는 이름이 카페인 것이지 하얀 테이블보와 초, 꽃이 깔려 있는 레스토랑이다. 나도 로툰다에만 가보고 후자엔 가본적이 없었다. 어쩐지 테이블보가 좍 깔려 있는게 좀 부담스러워서. 그런데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그냥 가봐야지 했는데 마침 료샤가 와서 덜 뻘쭘... (왜냐면... 난 오늘 박물관 가려고 빨간 운동화를 신고 왔기 때문이지... ㅠㅠ)
(아스토리야는 마린스키와 행사를 많이 하고 그랜드 호텔 유럽은 미하일로프스키와 행사를 많이 하는 편이다)
다행히 빨간 운동화와 파랑하양 체크무늬 로브 원피스를 대충 입은 나 대신 내 친구 료샤는 무슨 미팅에 다녀오느라고 양복을 잘 빼입고 민망하기 짝이 없는 번쩍번쩍 시계를 차고 있었다. (제발 그런 시계 좀 차지 마 엉엉...) 나는 보르쉬와 처음 보는 생선인 깜발라(지중해에 사는 하얀 고기라고 해서 시켜봄) 구이, 크랜베리 모르스를 주문했고 료샤는 뭘 잔뜩 먹고 왔다면서 탄산수만 주문하려고 해서 내가 눈치를 줬다.
나 : 야아, 뭐라도 하나 먹어야지 ㅠㅠ
료샤 : 나 배부른데... 손님들이랑 이것저것 먹었어.
나 : 나 혼자 먹는 거 뻘쭘하잖아 ㅠㅠ
료샤 : 뭐가 뻘쭘해. 아무데나 들어가서 혼자 잘 시켜먹으면서!
나 : 동행 있는데 혼자 먹는 건 싫단 말이야 ㅠㅠ 빨랑 아무거나 하나 골라. 케익이라도...
료샤 : 독재자! 그러면 나는 햄버거 먹을거얏!
나 : 엥, 배부르다며!!
료샤 : 그래도 먹고 말겠다! 여기 햄버거 맛있단 말임...
그리하여 나의 독재로(ㅜㅜ) 료샤는 수제버거와 탄산수를 시키고(ㅋㅋ 다 먹고 배터졌을 거야 ㅠㅠ)...
이곳 보르쉬도 맛있었다. 빵도 맛있었고 깜발라 구이는 감자 퓨레와 짭짤한 양송이 구이가 올라가 있어 맛있었다. 고수만 없었음 딱 좋았을텐데 왜 자꾸 고수를 넣어주나요 허헝..
료샤는 배부르다더니 자기 버거를 몇입에 다 해치우시고는 내 깜발라 구이도 뺏아먹고, 짠 거 먹었더니 단 게 먹고 싶다면서 내 모르스도 반이나 뺏아 마셨다. 뭐냐 너!!! 돼지!!!
..
밥을 먹고 나서 료샤가 호텔까지 데려다 주었다. 내가 좀 걷고 싶어해서 차는 아스토리야 쪽에 놔두고 운하를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날이 싸늘했다. 빗방울이 곧 떨어질 것 같은 날씨였다. 체크무늬 로브 원피스는 7부 소매이긴 한데 얇은 편이라 바람 불어 좀 추웠다. 그래서 친구가 기사도 정신을 발휘해 재킷을 벗어주었는데 나는 평소같으면 '됐어!' 할 것을 오늘은 추워서 냉큼 받아 입었음. '엥, 너 왜 오늘은 거절 안해!' 하고 료샤가 눈을 둥그렇게 뜸. 미안하다 친구야 나도 추워서 살고 보려고 그랬어 ㅠㅠ 그래도 너는 80킬로 넘으니까 좀 괜찮겠지??
그래도 재킷 빌려준게 고마워서 방에 같이 와서 친구에게 따뜻한 차 한잔 우려줌. 새로 산 로모노소프 그젤 찻잔에 ㅋㅋ 아스토리야에서 준 초콜릿 곁들여서 우려주니 좋다고 잘 마셨다. 체리를 씻어 컵에 쏟아놓으니 나보고 대체 여기 와서 체리를 얼마나 많이 먹은 거냐고 묻는다. 그래서 '몰라, 매일매일 먹고 있어. 아침저녁으로...'라고 대꾸했다.
밤이라서 나는 잠 안 올까봐 차 대신 근처 베이커리에서 사왔던 모르스를 마시고 있다. 냉장고에 넣어두어서 시원하다. 모르스를 꺼내는 나를 보고 료샤가 또 혀를 찼다. 모르스는 대체 얼마나 많이 마시고 있는 거냐고 한다. 그래서 '체리처럼 하루에 한번 이상씩 먹어'라고 대꾸했다. 그러고보니 나는 여기 와서 매일매일 체리랑 모르스를 먹고 있나보다... 돌아가면 못먹잖아...
그 얘길 했더니 료샤가 '음, 나도 한국에 가면 노란색 맥심만 맨날 마실지도 모르니 이해해주마' 라고 했다. 그래, 그거야!!
..
이제 모레 돌아간다... 자고 나면 하루 남는 거네... 근데 내일 뇌우가 치고 비 오고 바람 분다고 한다...
** 이번 페테르부르크 얘기들을 '2016 페테르부르크' 폴더를 만들어 거기 옮겨놨다. 중간중간 끼어 있었던 공연과 춤 얘긴 그대로 DANCE 폴더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