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6 일요일 밤 : 여전히 고민 중, 어젯밤 있었던 일, 레냐는 바리쉬니코프가 고맙단다, 바에서 그루셴카, 친구야 고마워 2016 petersburg2016. 6. 27. 03:50
(사진은 이탈리얀스카야 거리에 있는 어느 공원. 햇빛 쬐며 한가롭게 책 읽는 모습이 좋아서 찍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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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몸이 많이 힘든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여기 와서도 매일 게으름피운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하루에 한번 이상은 꼭 나다녔기 때문인지 아침엔 참 피곤하고 몸이 무겁다. 여전히 자다가 3~4시간 후면 반드시 깨어나고 그 이후에도 1~2시간마다 깨고 있다. 자고나면 머리도 아프다.
돌아갈 때가 거의 다 되었다. 수요일 오후 비행기로 떠난다. 이곳으로 떠나올때는 정말 아무 생각도 할수 없었다. 그때는 떠나와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견딜수가 없었다. 너무 괴로웠고 숨이 막혀 미칠 것 같았다.
이곳에서 어느 정도 숨도 쉬고 자가치유를 진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오늘 비오는 거리를 잠깐 걸어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글쎄, 나는 7월말까지 병가를 얻었고 이제 그건 한달밖에 남지 않았다. 한달은 금세 지나갈 것이다. 그러면 나는 돌아가게 될 가능성이 아주 크다. 그런데 또 어떻게 생각하면 당시 나의 행동으로 인해 향후의 입지나 상황이 그닥 좋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뭐 어떤가 싶지만 하여튼 기분이 좋은일은 아니다. 돌아간다고 생각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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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 호텔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료샤가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레냐는 오후 내내 나랑 노느라 잠들어 있었다) 그 정도로 너를 힘들게 하고 피를 말리고 괴롭게 하는 회사에 왜 돌아가야 하느냐고.
그래서 나는 모르겠다고, 아마 돈을 벌어서 자신의 삶을 지탱하고 아마 곧 나이드실 부모님에 대한 책임감을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라고, 그리고 아마도 나는 다른 일을 시작하기가 두려운 것 같다고 대꾸했다. 나와 다른 인생을 살아온 료샤로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그는 내게 무엇을 하든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자신에 대해 좀더 관대해지라고, 자신의 능력을 좀 믿어보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경제적'으로서의 내 능력에 대해서는 아무 자신이 없고 그것때문에 회사를 그만둘 수가 없는 것 같다고 대꾸했다.
료샤는 다시 한번 나에게 회사를 떠나라고 했다. 뻬쩨르에 남든지 다른 곳으로 가든지 뭘 하든지 그건 내 선택이겠지만 하여튼 그 망할놈의 회사에 남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정말 모르겠다. 갑자기 속상하기도 하고 우울해져서 좀 울었다. 료샤가 매우 당황했고 사과를 했다. 여자 울리는 나쁜 놈아 엉엉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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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함과 피곤함의 여파로 몸살이 나서 늦게 일어났고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에 가는 건 너무 더워서 실패했다.
대신 오후에 판탄카로 나가 바리쉬니코프 사진전시를 봤다. 료샤와 레냐도 같이 갔다. 레냐는 아직 전시를 보기엔 어리지만 내 손을 꼭 잡고 들어갔는데 직원은 별 말 안했다.
오히려 료샤는 '흠, 이 사람은 늙었구만. 그래서 타이츠 안 입었구나' 라는 망발을 하고 레냐는 '이 사람이 그렇게 유명해? 쥬쥬는 이 사람 좋아해?' 하고 물어보는 등 진지했다 :) 그래서 나는 레냐에게 '난 옛날에 이 사람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 러시아에 가보고 싶게 됐고 러시아어를 배우고 싶게 됐단다. 그래서 뻬쩨르에 오게 되었어'라고 대답해주었고 레냐는 무지 좋아했다. '우와 이 사람이 아주 고마운 사람이구나!' 하면서 기뻐했다 ㅋㅋ
전시를 보고 나왔는데 너무 후덥지근했다. 산책을 좀 하고 싶었지만 내가 너무 피곤해해서 료샤가 우리를 데리고 유럽호텔에 갔다. 내가 좋아하는 로비 바에 갔다. (전에 여기서 료샤랑 낮에 벨리니 마신 후 취해서 꿈나라로 간 적 있음 ㅠㅠ) 술 마시는 바라서 레냐 같은 어린이는 못 들어갈텐데 하고 걱정했지만 보호자가 있어서 괜찮다고 했다. (괜찮은 건지 료샤가 뭐라뭐라 설득을해서 괜찮아진건지 도통 모르겠음)
술 마시면 안되는데 바에 왔더니 너무너무 뭔가 마시고 싶었다. 날씨가 더워서 그랬던 것 같다. 바텐더에게 독하지 않고 좀 달콤하고 약한 칵테일 추천을 받았다. 내가 원했던 건 안나 아흐마토바. 마야코프스키, 그루셴카 중 하나였는데(전부 작가나 시인, 문학 캐릭터 이름 따서 만든 이 바의 메뉴들이다) 아흐마토바는 독하고 마야코프스키는 보드카에 후추가 들어가서 맵고 시다고 했다. 그래서 서양배와 라임이 들어간 달콤하고 약한 그루셴카를 마셨다.
(그루셴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중 하나이다. 굉장히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료샤는 내가 적극 권하여 블루 벨벳 마가리타를 마셨다(내가 마가리타를 좋아하는데 요즘은 데킬라 때문에 독해서 못 마시니 그가 마시는 것을 보고 대리만족 ㅋㅋ) 그리고 레냐는 산딸기와 크랜베리로 만든 모르스를 마셨다.
내가 아점으로 크루아상 한조각 밖에 먹고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비프 스트로가노프도 먹었다. 레냐는 어린이용 치즈버거를 드심 ㅋㅋ 그리고는 나의 그루셴카를 너무나 궁금해하며 탐내서 심히 괴로웠다. 냄새만 맡게 해주자 '엑 술냄새 나' 하면서 다행히 고개를 돌려버렸음. 참 다행이다 ㅠㅠ
그루셴카는 달콤하고 약하고 시원했다. 끝맛이 슬며시 독했지만 그래도 취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살짝 나른해질 뿐이었다.
다 먹은 후 나오자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레냐를 엄마네 집에 데려다 줘야 할 시간이었다. 레냐는 안 가려고 했다. 엄청 툴툴댔고 찡찡댔다. 급기야 날 따라 한국에 가겠다고 했다 ㅠㅠ 그래서 내가 수요일에 돌아가기 전에 또 보기로 약속하고 어르고 달랬다.
레냐를 먼저 데려다 준 후(그 동안 나는 근처 카페에서 쉬고 졸고 있었다) 료샤가 다시 나를 호텔까지 데려다주었다. 호텔 바에서 차 한잔 더 마시고 들어왔다.
친구야,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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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답이 있으면 좋을텐데 인생에 답이 없는게 좀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