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5

« 2024/5 »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series : 서무의 슬픔'에 해당되는 글 52

  1. 2015.05.07 서무의 슬픔 20편에 이어 : 바질의 화려한 춤들(사라파노프, 루지마토프, 슈클랴로프, 바실리예프, 폴루닌 등) 2
  2. 2015.05.07 서무의 슬픔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58
  3. 2015.04.30 서무 19편에 이어 : 마린스키 발레 돈키호테 영상 클립 몇 개와 사진 몇 장(포노마료프, 노비코바, 슈클랴로프, 테료쉬키나 등) 4
  4. 2015.04.30 서무의 슬픔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52
  5. 2015.04.23 서무의 슬픔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53
  6. 2015.04.16 서무의 슬픔 #17. 운수 좋은 날 54
  7. 2015.04.10 서무의 슬픔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44
  8. 2015.04.01 서무의 슬픔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31
  9. 2015.03.26 서무의 슬픔 #14. 한밤중의 침입자 26
  10. 2015.03.19 서무의 슬픔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29
  11. 2015.03.13 서무의 슬픔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25
  12. 2015.03.08 서무의 슬픔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19
  13. 2015.03.03 서무의 슬픔 #10. 벨라 등장! (+ 강아지 사진 몇 장) 35
  14. 2015.02.24 서무의 슬픔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20
  15. 2015.02.17 서무의 슬픔 번외편 2 : 등장인물 20문답(스페호프, 코즐로프, 렐랴) 18
  16. 2015.02.16 서무의 슬픔 번외편 1 : 등장인물 20문답(베르닌, 왕재수) 16
  17. 2015.02.11 서무의 슬픔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26
  18. 2015.02.07 서무의 슬픔 #7. 보고서의 악몽 22
  19. 2015.02.04 서무의 슬픔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21
  20. 2015.01.31 서무의 슬픔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12
  21. 2015.01.27 서무의 슬픔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쿠키 사진 몇 개) 20
  22. 2015.01.23 서무의 슬픔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13
  23. 2015.01.20 서무의 슬픔 #2. 당직실의 귀신 10
  24. 2015.01.18 서무의 슬픔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10
  25. 2015.01.17 서무의 슬픔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8

 

앞서 올린 서무의 슬픔 20편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http://tveye.tistory.com/3708)와 관련해..

발레 돈키호테에서 바질이 보여주는 화려한 춤들 영상 몇 개 더 소개.

 

 1. 1막의 바질과 꽃파는 처녀들 3인무 클립

 

: 6명의 러시아 무용수들 춤 모음~ 이건 전에 한번 소개한 적 있는 영상이다.

순서대로 이반 바실리예프, 레오니드 사라파노프, 빅토르 레베제프.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안드레이 메르쿠리예프, 그리고 세르게이 폴루닌. 다들 바질을 해석하는 스타일이 조금씩 다르고 동작도 다르기 때문에 같은 파 드 트루아라도 전부 느낌이 다르다. 

이 6명 중에서 내 개인적인 취향은 사라파노프 바질이 제일 깔끔하고 맘에 든다. 바실리예프나 메르쿠리예프의 바질은 내 취향보다는 너무 서커스 같아서... 슈클랴로프는 몇년 전 클립이라 지금보다 훨씬 소년 같은데, 이 사람은 테크닉보다는 번져나오는 생기와 해맑은 기운이 좋다.

 

 

 

2. 3막. 바질의 자살 쇼~ 바질 역 무용수의 통통 튀면서도 능글맞은 연기력이 매우 중요하다. 먼저 레오니드 사라파노프와 올레샤 노비코바 버전.

 

블라지미르 포노마료프의 돈키호테 연기를 잘 보세요~ 단추청년 베르닌, 하를람피 푸고비체프는 이렇게 연기를 해야 함 :)

 

 

 

 

 

3. 바질의 자살 쇼 하나 더. 옛날 영상이라 화질이 안 좋다만.. 아마 89년인지 90년대 초반일 것이다. 바질은 바로 파루흐 루지마토프. 키트리는 타치야나 체레호바. 말이 필요없는 톱이다!  여기 돈키호테도 위의 2006년과 마찬가지로 블라지미르 포노마료프.

 

 

 

 

4. 그리고 결혼식 2인무 중 바질과 키트리의 화려한 솔로와 파이널.

먼저 사라파노프와 노비코바. 사라파노프는 정말 깔끔한 테크닉을 보여준다!!! 좀 얄미운 밤톨같이 생기긴 했지만 춤을 너무너무 잘 추니 다 용서되는 바질이다!!

 

 

 

 

 

5. 결혼식 2인무 하나 더. 마지막이니 역시 사심을 담아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파트너는 빅토리야 테료쉬키나.

 

이건 팬이 찍은 거라서 구도가 좀 나쁘다... 나야 슈클랴로프의 팬이고 그를 무척이나 예뻐하지만 확실히 테크닉으로 보면 4번의 사라파노프가 한 수 위이다. 슈클랴로프는 turner보다는 jumper 쪽이라 그런지 가끔 피루엣이나 푸에테가 좀 불안정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이 사람의 도약과 쾌활한 에너지는 영상으로는 다 전달이 되지 않는다. 무대에서 그가 뛰어오르고 춤추고 웃기 시작하면 같이 즐거워진다.

테료쉬키나는 아주 훌륭한 키트리이다. 난 노비코바가 김기민씨와 춘 키트리를 무대에서 봤는데 개인적으로는 키트리 쪽은 테료쉬키나가 한 수 위라는 생각이 든다. 노비코바는 키트리 치고는 너무 청순하고 파워가 좀 떨어지는 편이고 테료쉬키나는 키트리처럼 화려하거나 메흐베네 바누처럼 강렬한 역이 어울린다.

 

 

 

 

 

사족으로 서무 시리즈에서 왕재수, 즉 본편의 미샤가 추는 바질은 기본적인 테크닉이나 스타일은 파루흐 루지마토프와 레오니드 사라파노프 쪽에 가깝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레닌그라드 바가노바 아카데미 출신에 정통 키로프 무용수였기 때문인데, 아마도 그의 바질은 사라파노프의 깔끔한 테크닉에 루지마토프의 양성적이고 표범같은 움직임이 결합된 스타일이었을 것이다. 사모두로프처럼 가볍게 뛰어올랐을테고.

 

본편의 미샤는 진지한 성격이라는 평을 듣는 인물이지만 의외로 무대에서는 희극적인 역할도 잘 소화해서 바질 역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설정했다~)

 

 

:
Posted by liontamer

 

본편으로 돌아가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서무의 슬픔 시리즈는 계속된다~

 

20편은 지난 19편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에서 그대로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드디어 공연은 코앞으로 닥치고.. 무대라면 아무 것도 모르는 베르닌은 과연 돈키호테 역을 잘 소화해 낼 수 있을지! 그리고 왕재수는 스페호프의 방해공작을 물리치고 제대로 공연을 올릴 수 있을지~~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그러던 어느날, 왕재수는 야심차게 고전발레 돈키호테를 리메이크해 무대에 올리려고 하고 스페호프는 공연을 망치기 위해 갖은 술수를 동원해 배역을 맡은 무용수들을 시골에 보내버린다. 이에 왕재수는 베르닌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과연 왕재수는 공연을 제대로 올릴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생애 최초로 무대에 올라가게 된 베르닌, 예명 하를람피 푸고비체프는 문제의 돈키호테를 소화해 낼 수 있을 것인가!!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20

 

 

 

서무의 슬픔

-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토요일에 베르닌은 든든하게 아침 식사를 한 후 10시쯤 극장에 갔다. 어디로 가야 하나 두리번거리다 제1 연습실로 갔다. 남녀 군무 연습이 한창이었는데 슬며시 들어가자 이즈마일로프가 그에게 손짓을 했다.

 

“ 하를람피, 자넨 3연습실로 가게. 감독님이 2막 지도해준다고 하니까. ”

 

 

그래서 베르닌은 3연습실로 갔다. 왕재수는 주역과 중요 조역 무용수들을 데리고 동작을 교정해주고 있었다. 언제 그렇게 피곤해했느냐는 듯 활기차게 박자를 세고 이해할 수 없는 프랑스어 용어를 쏟아내면서 무용수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토냐는 이미 멋쟁이 감독님에게 넋이 빠지도록 반해버린 것 같았다. 토슈즈가 찢어져 달아날 정도로 열심히 돌고 뛰었다. 메인 투우사로 발탁된 가릭도 어제보다 훨씬 몸놀림이 유연해지고 보자기도 휙휙 잘 돌렸다. 다른 무용수들도 열심이었다. 잠시 후 베르닌을 발견한 왕재수가 가까이 오라고 했다.

 

 

너 이리 와. 산초랑 맞춰보는 건 좀 있다 티무르 보리소비치가 봐줄 거고, 인형극장 뒤집는 거랑 풍차 장면 먼저 나랑 해 보자. 풍차 매달리는 건 미리 해봐야 되니까 지하로 내려가서... 토냐, 막심은 아직 연락 없어? ”

 

“ 네, 아직이요. 이상하네요. 전화도 안 받고... 분명히 오늘 8시까지 온다고 했거든요. 저 아직 1막이 잘 안돼서 감독님 오시기 전에 먼저 맞춰보기로 했는데... ”

 

“ 알았어. 일단 솔로 파트 연습하고 있어. ”

 

 

왕재수는 베르닌을 데리고 지하의 무대 아래로 갔다. 베르닌은 거대한 풍차 모형을 보고 깜짝 놀랐다. 가까이서 보니 엄청나게 컸다. 뒤쪽에는 복잡한 장치가 되어 있었다. 왕재수가 뭔가를 만지작거리자 풍차가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입을 벌리고 구경하다 문득 겁이 났다.

 

 

“ 야, 여기 매달리란 말야? 이거 엄청 크잖아! 되게 높아!

 

“ 응, 근데 반쯤 돌아가다가 커튼 내려올 거야. 걱정하지 마. 뒤에 매트도 다 깔아놓을 거니까. 이렇게 하는 거야. ”

 

 

왕재수가 음악을 틀더니 소품용 창을 들고 풍차로 돌진하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는 날개 끝의 손잡이에 팔을 걸치더니 어깨와 가슴을 기대고 매달렸다. 한 손으로는 창을 휘두르고 나머지 한 팔과 몸으로 날개에 의지한 채 온몸을 퍼덕이며 천천히 올라갔다. 반쯤 올라갔을 때 왕재수는 창을 던지더니 훌쩍 뛰어내렸다. 베르닌은 그가 다칠까봐 급하게 뛰어갔지만 물론 숙련된 왕재수는 가볍게 착지했다.

 

 

“ 어... 난 너처럼 못 내려와... ”

 

“ 네가 올라갈 땐 아까 정도에서 멈추면서 막이 내릴 거야. 그리고 나면 날개가 도로 내려오니까 넌 그냥 매달려 있기만 하면 돼. 혹시 놓치더라도 뒤에 매트 다 깔아놓으니까 위험하지 않아. 한 번 해보자. 풍차는 내가 조작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

 

 

그래서 베르닌은 풍차로 돌진해 날개에 매달렸다. 막상 매달리니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날개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생각보다 빠른 것 같고 몸이 붕 뜨는 것이 무서워서 도저히 왕재수처럼 창을 휘두르고 몸을 버둥거릴 수가 없었다. 죽은 듯이 뻣뻣하게 매달려 있는데 잠시 후 풍차가 멈추더니 거꾸로 내려왔다. 바닥에 내려오자 좀 싱겁다는 생각이 들면서 무서워했던 자신이 창피했다.

 

 

“ 생각보다 쉽지? 이번엔 한번 움직이면서 해봐. ”

 

 

베르닌은 왕재수의 독려를 받아가며 연습을 했다. 오히려 마임을 하는 것보다 더 쉬웠다. 다섯 번 만에 꽤 잘 소화했다는 칭찬을 받았고 내친 김에 인형극장 부수는 연기도 배웠다. 그것도 생각보다 잘 된 것 같았다.

 

 

“ 음, 넌 의외로 폭력적인 연기를 잘 하는구나. 국장한테 맺힌 게 많아서 그런가. 하긴 저번에 보니까 의자도 잘 휘둘렀지. 잘했어. 이제 티무르 보리소비치한테 가서 나머지 배워. 오후에 다 같이 리허설해 볼 거야. ”

 

“ 어, 그래. 근데 넌 맨날 나보고 바보 멍충이라 하면서 극장에선 안 그러는구나. ”

 

“ 애초부터 넌 프로가 아니니까 기대치가 낮거든! ”

 

“ 야, 그럼 역시 내가 못한다는 거네. ”

 

“ 아니야, 기대했던 것보다는 훨씬 나아. ”

 

 

베르닌은 왕재수에게 교묘하게 조종당하는 느낌이었지만 어쨌든 뿌듯하기도 했고 재미도 있었으므로 슬슬 신이 나서 빠르게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왕재수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터벅터벅 따라왔다.

 

 

“ 야, 조심해. 거기 계단 턱 튀어나왔어. 앗, 그럴 줄 알았어! ”

 

 

베르닌은 발을 헛디딘 왕재수를 급하게 붙잡아주었다.

 

 

“ 너 왜 그래? ”

 

“ 불안해서 그래. 막심이 안 와서. ”

 

“ 막심이 누구야? ”

 

“ 바질. ”

 

“ 아, 어제 그 말총머리 남자애? ”

 

“ 응, 되게 열심인 애거든. 벌써 왔어야 되는데. ”

 

“ 어제 늦게까지 연습했잖아. 피곤해서 늦잠 자는 거 아닐까? ”

 

“ 스무 살밖에 안된 앤데. ”

 

 

계단을 다 올라왔을 때 류드밀라가 헉헉거리며 뛰어왔다.

 

 

미셴카! 큰일났어요!

 

“ 왜 그래요, 류다? ”

 

“ 방금 의사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막심이 아침에 병원으로 찾아왔대요. 근데 들어오자마자 막 토사곽란하고... 배가 아프다고 바닥에 뒹굴더래요. 의사 선생님은 일단 응급조치를 해줬대요. 근데 계속 토한대요. 좀 전에 정신 차리자마자 막 당신을 찾더래요. 울면서 극장에 가야 한다는 걸 의사 선생님이 못 가게 막고 전화하셨어요. ”

 

 

베르닌은 왕재수가 기절할까봐 걱정이 돼서 급하게 그의 팔을 잡았다. 갑자기 전날 저녁 스페호프가 한 가지 잊은 게 있지만 밤에 처리할 거라고 했던 말이 퍼뜩 생각났다.

 

 

왕재수는 기절하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더니 제일 가까운 사무실로 들어가 스타브로프의 병원에 전화를 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더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울고 싶어진 베르닌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 어떻게 된 거야? 막심 많이 아파? 못 온대? ”

 

급성 식중독이래. 막심 말로는 어젯밤까진 괜찮았고 새벽에 목말라서 우유를 한 잔 마셨는데 맛도 이상하지 않았대. 의사 선생님이 그러는데 우유에 나쁜 게 섞여 있었던 것 같다고. 자세한 건 피 검사 해봐야 한대.

 

“ 뭐야? 그건 독살 시도... ”

 

“ 그 정도로 심각한 건 아닌데 하여튼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어야 한대. 죽이기까지 하면 일이 너무 커지니까 딱 며칠 아플 정도만 약물 썼겠지. 더러운 놈들. 다 나 때문이야. 불쌍한 막심. 얼마나 아플까. ”

 

 

왕재수는 매우 상심한 것처럼 보였다. 의자에 주저앉더니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한숨을 쉬었다. 베르닌은 어쩔 줄을 몰랐다.

 

 

“ 저... 야, 그거 네 잘못 아니야. 우리 국장이 나쁜 거야. 자책하지 마. 막심 괜찮아질 거야. ”

 

그냥 공연 접을 걸 그랬나봐. 괜히 애들 끌려가서 눈 치우게 해서 근육 미워지게 만들고, 막심은 아프고. 너네 국장은 나 때문에 그러는 건데 공연히 애꿎은 애들만 고생하고... 어중이떠중이들 억지로 무대에 올리고... ”

 

야, 뭐가 어중이떠중이야! 네가 그렇게 말하면 지금 저 위에서 땀 빼고 발이 닳게 연습하는 애들은 뭐가 되니! 어제 토냐 보니까 처음으로 주역 맡았다고 엄청 좋아하던데! 애들 실력 좀 떨어지면 어때! 열심히 하잖아! 너 믿고 그렇게 죽어라 하고 있는데! 넌 천재라서 그런 거 몰라! 재능 좀 없어도 열심히 하면 그 걸로도 족하다고 한번이라도 생각해주면 안 돼? ”

 

 

왕재수는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안 돼. 재능은 재능이야. 열심히 하는 건 당연히 중요하지. 90퍼센트까지는 커버할 수 있어. 그치만 나머지 10퍼센트는 안된다고. 그 10퍼센트 때문에 무대가 달라져. ”

 

“ 공연 보러 오는 사람들은 90퍼센트만 돼도 기뻐할 거야! ”

 

“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야, 다닐. 이건 더하기 빼기 산수가 아니거든. ”

 

난 그런 거 몰라! 위에서 애들 죽어라 연습하는 것만 알아! 나도, 나도 웃기는 이름 달고 연습하잖아. 근데 네가 이러면 어떡하니. 한 번만 더 쟤들 어중이떠중이라고 해봐. 한 대 팰 거야!

 

“ 언제는 나 때릴 데 하나도 없다고 하더니. ”

 

 

왕재수가 목을 울리며 쿡쿡 웃었다. 베르닌은 이 와중에 웃는 왕재수 때문에 더럭 겁이 났다. 스트레스 때문에 머리가 이상해졌나 싶었다. 하지만 왕재수는 고개를 들더니 훨씬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 점심 먹어야겠어. 같이 가자. ”

 

“ 어... 아직 점심시간 안됐어. 열한시 반인데. ”

 

“ 좀 일찍 가지 뭐. ”

 

 

왕재수는 밖으로 나가더니 류드밀라를 불렀다.

 

 

“ 류다, 위에 있는 사람들한테 열두 시 되면 점심 먹으러 가라고 해요. 한 시 반부터 다시 연습 시작한다고. 그리고 다섯 시에 스페이스 리허설 하는 거 스태프들한테 다시 환기시켜 주고요. 드레스 리허설은 내일 열 시예요. ”

 

 

 

*    *    *

 

 

 

 

왕재수는 베르닌과 함께 자주 가던 박물관 앞 식당에 갔다. 그러더니 지금껏 베르닌이 봐온 중 가장 많은 음식을 주문했다. 마카로니 샐러드에 살랸카, 구운 감자, 쇠고기찜, 우유, 심지어 초콜릿 무스까지 주문했다. 베르닌은 이 녀석이 왜 자기한테 묻지도 않고 2인분을 시키나 했지만 왕재수는 그에게 뭘 먹을 거냐고 물었다.

 

 

“ 어... 나, 나는 감자수프랑 사과소스 돼지구이. 근데 너 왜 이렇게 많이 시켜? 누가 또 와? ”

 

“ 안 와. 내가 다 먹을 거야. ”

 

“ 으잉? ”

 

 

음식이 나왔다. 왕재수는 먹기 시작했다. 부지런히, 꼭꼭 씹어서 열심히 먹었다. 무슨 숙제를 하는 아이처럼 순서대로 점진적으로 꾸역꾸역 먹었다. 왕재수가 쇠고기찜을 먹다가 목에 걸려 기침을 하기 시작했을 때 베르닌은 우유를 밀어주고 접시를 빼앗았다.

 

 

너 그만 먹어!

 

“ 언제는 많이 먹으라고 하더니! ”

 

“ 이렇게 많이 안 먹었었잖아! 너 지금 스트레스 받아서 막 먹는 거잖아! 이러다 탈 나! ”

 

“ 아니, 탈 안 나. 다 필요한 만큼 계산해서 먹는 거야. ”

 

“ 진작 좀 이렇게 먹었으면 참 좋았겠네! 너 설마 지금 그 초콜릿 무스까지 먹으려는 거야? ”

 

“ 왜, 먹고 싶어? 잘라줄게 먹어. ”

 

 

왕재수가 포크로 초콜릿 무스를 반토막내서 베르닌 앞으로 밀어주었다.

 

 

“ 아니, 내가 달라는 게 아니고... ”

 

“ 먹어둬. 오후에 연습 많이 해야 할 테니까. 무용수들이랑 합도 맞춰봐야 하니 당분이 필요할 거야. ”

 

 

베르닌은 디저트를 먹었다. 엄청나게 맛있었다. 혀가 녹는 것 같았다. 왕재수는 무스를 한 입에 긁어먹은 후 물을 한 모금 꿀꺽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을 하고 나왔다. 극장으로 돌아오면서 베르닌이 짜증을 냈다.

 

 

“ 야, 너 왜 내 것까지 돈 내? ”

 

“ 내가 고용한 배우라서. ”

 

“ 출연료도 안 주면서 밥 한 끼 사주는 걸로 때우냐! ”

 

“ 출연료 줄 거야. 하를람피 푸고비체프 앞으로. ”

 

“ 엥, 정말? ”

 

“ 당연하잖아! 배우로서 무대에 출연하는데 당연히 대가를 받아야지! ”

 

“ 어... 난 그냥 땜빵이잖아. ”

 

아니야! 넌 땜빵이 아니야. 그런 마음가짐 따위 버려! 너는 돈키호테야. 그 역 피땀 흘려 연습해서 당당히 얻은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무대 올라가! 자기가 땜빵이란 생각하면 정말 땜빵밖에 안 돼!

 

“ 그런가... 근데 자꾸 푸고비체프라고 하면 웃겨서... ”

 

“ 웃지 말란 말이야. 이거 봐, 포스터랑 팸플릿 벌써 나왔어. 너 이름 인쇄되어 있잖아. 돈키호테 : 하를람피 푸고비체프. ”

 

“ 어, 정말이네. ”

 

 

베르닌은 홀린 듯이 포스터를 응시했다. 포스터의 중앙에는 바질과 키트리가 화려한 포즈를 취하고 서 있었지만 배경으로는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의 실루엣이 그려져 있었다. 아랫단에 배역과 무용수들 이름이 씌어 있었는데 토냐와 막심에 이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무려 세 번째에 있었다. 베르닌은 멍해졌다. 물론 자신의 진짜 이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황홀했다.

 

 

왕재수가 그의 등짝을 탁 쳤다.

 

 

“ 야, 정신 차려. ”

 

“ 와, 나 이런 적 한 번도 없었거든. 학예회 때도 연극이나 발표회 같은 거 안 나가봤어. 나보고 책상물림이니까 못할 거라고 역을 안 줬어. ”

 

“ 흥, 바보들, 좋은 기회 놓쳤네. 너 잘만 하는구만. ”

 

 

베르닌은 포스터와 팸플릿을 한 장씩 챙겼다. 둘둘 말아서 가방에 넣어놓고 연습실로 갔다. 왕재수는 그에게 조금 쉬다가 이즈마일로프에게서 추가 지도를 받고 산초를 비롯한 나머지 무용수들과 모든 장면을 하나하나 맞춰보라고 했다.

 

 

“ 어, 근데 1막도 그렇고, 3막 자살 쇼 때도 그렇고 바질이 있어야 내가 연기를 할 수 있잖아. 막심 못 온다며. ”

 

“ 다른 애 넣을 거야. 연습시켜서. 오늘 스페이스 리허설 때까진 일단 안톤한테 바질 역할 해달라고 할거니까 그 사람이랑 맞춰봐. ”

 

“ 어, 그 안무 선생님? 마흔다섯은 되지 않았어? ”

 

“ 그러니까 그림만 맞춰보라는 거지. 연습하고 있어, 난 토냐 지도 좀 해줄 테니까. 걔 올 때까지 눈 좀 붙여야겠어. 있다 봐. ”

 

 

왕재수는 감독실로 가더니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먹고 나서 절대 곧장 눕지 않는 애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조금 불안했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있든지 몸이 아주 힘들든지 둘 중 하나였다. 어쨌든 왕재수가 조금이라도 자는 것은 좋은 일이란 생각에 그는 옷걸이에서 코트를 내려서 이미 잠든 왕재수의 몸 위에 덮어주고 나왔다. 문득 정오에 스페호프에게 전화하는 것을 잊었다는 생각이 났다. 드라마 극장 앞 전화를 쓰라고 했지만 다 귀찮았다. 못된 국장은 꼴도 보기 싫었다. 사무실 전화로 다이얼을 돌렸다.

 

 

스페호프는 공연이 어떻게 되고 있느냐, 바질 역을 구했느냐 하고 물었다.

 

 

“ 어, 그 바질이란 게 남자 주인공이라면... 그 역 맡은 무용수가 아프다고 하네요. 입원해서 못 올 것 같답니다. 그래서 야스민이 굉장히 충격을 받고... 지금은 소파에 드러누워 있어요. ”

 

하하하, 바로 그것이야! 됐어! 이제 됐어! 제깟 게 아무리 기를 써봤자, 주인공들이 다 없는데 뭘 어쩌겠나! 그럼 내일 공연은 취소되겠군! ”

 

“ 취소할 것 같지는 않고요. 무용수들에게 연습은 계속 시킬 모양입니다. ”

 

“ 뭐라고? 분명히 끌어다 쓸 놈들도 다 떨어져서 이제 죽었다 깨나도 방법이 없다고 레베진스키가 그랬는데! 연습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바질인지 뭔지 하는 놈팽이가 없는데! ”

 

“ 춤 가르쳐주는 선생이 하나 있는데 그 사람으로 쓴대요. ”

 

“ 선생이라면 나이가 많을 텐데? ”

 

“ 예, 40대 중반쯤 됐어요. 머리도 벗겨지고... ”

 

“ 흥, 그럼 잘해보라고 하게! 그런 어중이떠중이들 데리고 억지로 공연 올려봤자 엉망일 테니. 거지같은 무대를 보고 나면 그놈 떠받들고 귀여워하던 의원들도 이제 정신을 차리고 그 불여우 녀석을 헌신짝처럼 버리겠지. 차라리 공연 그대로 올라가는 게 우리한테는 더 좋아. 그럼 그 자식 이제 퇴물 된 거 알고 크레믈린에서도 손 뗄 테니까. 그러고 나면 그 불여우를 쥐도 새도 모르게...

 

“ 어,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이만 끊어야겠습니다. 사람들이 오는군요. ”

 

 

베르닌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굉장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국장은 왜 그렇게 왕재수를 미워할까 싶었다.

 

 

‘ 싸가지가 없어서 그렇지 나쁜 앤 아닌데. 자기 일은 열심히 하고. 하긴 국장은 자기한테 고분고분하게 굴어도 들들 볶으니... ’

 

 

그는 1연습실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도를 받고 연습을 하고 다른 무용수들과 맞춰보았다. 키트리에게 반해서 어설프게 춤을 추는 장면과 숲속 요정 나라 장면은 토냐가 올 때까지 한참 기다려야 했다. 토냐는 왕재수에게서 개인 지도를 받고 난 여파로 얼굴이 온통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게 옆에서도 느껴질 정도였다.

 

 

5시 스페이스 리허설 때 베르닌은 처음으로 극장 무대에 올라가 보았다. 기분이 묘했다. 무대 배경도 없고 의상도 걸치지 않은 상태였지만 이미 흥분이 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근 2시간 30분 동안 연습을 하고 나니 공연의 흐름을 알 것 같았다. 스페이스 리허설은 중간 중간 왕재수의 코멘트로 중단되긴 했지만 그래도 큰 무리 없이 흘러갔다. 바질 역을 안톤이 추느라 모양새가 좀 이상하긴 했다. 리허설을 마친 후 가릭이 불안하게 물었다.

 

 

“ 감독님, 막심은 못 오나요? 식중독이라면서요. ”

 

“ 올 거야. 내일. 하지만 다들 비밀로 해줘. ”

 

“ 어, 왜요? ”

 

“ 그래야 더 이상 문제가 안 생겨. ”

 

“ 예. ”

 

 

베르닌은 무용수들이 스페호프의 공작에 대해 어디까지 눈치를 채고 있을지 궁금했다. 분위기를 보니 어느 정도 알고는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무용수들은 이제 그와도 친해져서 걸핏하면 ‘하를람피, 이쪽으로 와서 초콜릿 먹어요!’, ‘하를람피, 결혼했어요? 애들 몇 살이에요?’ 등등 말을 걸어왔고 ‘당신 외모만 보면 우리 원래 돈키호테 역 하던 선배보다 더 잘 어울려요’ 라고 칭찬을 하기도 했다. 그들은 베르닌이 무용수나 배우 출신이 아닌 일반인이라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뻣뻣하다고 타박하는 대신 가능한 한 도와주려고 애썼다. 호기심 많은 무용수들은 그의 직업이 뭔지도 궁금해 했다. 베르닌은 벌목공이라고 둘러댔다.

 

 

스페이스 리허설을 마친 후 왕재수는 무용수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집에 들어가 쉬라고 했다. 의욕에 찬 무용수들은 모두 밤늦게까지 남아서 더 연습하겠다고 아우성을 쳤지만 왕재수는 단호했다.

 

 

“ 아니, 이제 가서 쉬어야 돼. 잘 자고 쉬어야 내일 무대에서 잘 할 수 있어. 빨리 가서 자. 오늘은 다른 데로 새지 말고 무조건 가서 씻고 자! ”

 

 

왕재수는 슬며시 다가온 베르닌에게도 이즈마일로프에게서 30분만 더 동작 교정 받은 후 가서 자라고 했다.

 

 

“ 너는? ”

 

“ 난 오늘 극장에 있어야 해.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자. ”

 

“ 안 돼! 어제도 바닥에 쓰러져 자는 거 내가 데려왔었는데. ”

 

“ 오늘은 로만이 있어줄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

 

“ 다른 애들은 집에 다 보내면서 왜! ”

 

“ 너네 국장이 또 무슨 짓할지 모르니까 극장에 남아서 지켜봐야 돼. ”

 

“ 그럼 나도 있을 거야! 너 혼자 남는다고 뭘 할 수 있다고! ”

 

“ 제발 집에 가서 쉬어라. 무대를 위해서니까. 아마추어나 초짜들이 제일 많이 하는 실수가 그거야. 전날까지 미친 듯이 연습하고 흥분해서 밤잠 다 설치고 막상 무대에 올라가서는 백지가 된다고. 그냥 가서 자. 이건 감독으로서의 명령이야.

 

“ 야! 난 KGB지 배우가 아닌데 왜 네 명령을 들어야 되니? ”

 

“ 너는 지금 다닐 베르닌이 아니라 하를람피 푸고비체프니까 그렇지. 하를람피는 배우야. 그러니까 내 지시에 따라야 돼. ”

 

 

베르닌은 할 수 없이 왕재수의 지시에 따랐다. 이즈마일로프에게서 특히 어색한 부분을 교정 받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나가면서 보니까 왕재수는 토냐와 꽃 파는 처녀 역 발레리나들을 데리고 한창 열띠게 연습을 시키고 있었다. 저러다 탈나지 싶었지만 어쩔 수 없어서 그냥 돌아갔다.

 

 

 

*    *    *

 

 

 

 

마침내 일요일이 되었다. 베르닌은 일찍 일어났다. 어쩐지 입맛도 없고 뱃속이 울렁거렸다. 따뜻한 차 한 잔만 마시고 집을 나섰다. 날씨는 꽤 싸늘했다. 극장 계단을 올라가는데 자기도 모르게 돈키호테처럼 팔을 휘두르며 휘적휘적 걷고 있었다.

 

 

연습실은 텅 비어 있었다. 아직 8시도 되지 않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무대 쪽으로 가보자 그쪽은 10시의 드레스 리허설 때문에 스태프들이 무대 배경을 설치하고 조명을 손보고 청소를 하는 등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왕재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감독실로 가보았다.

 

 

감독실은 비어 있었지만 복도 끝에 있는 욕실 문이 열려 있었다. 혹시나 해서 힐끗 훔쳐보자 왕재수가 등을 돌린 채 간이욕조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기도라도 하나 싶었지만 무신론자라고 얘기했던 게 생각났다. 헛기침을 했다.

 

 

“ 어, 음... 너 좀 잤어? ”

 

“ 아. 너 왔구나. 밖에서 좀 기다릴래? ”

 

 

베르닌은 간이욕조에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을 보고 식겁했다.

 

 

“ 어! 야, 코피 나는 거야? ”

 

“ 아이 시끄러워. 조용히 좀 해. ”

 

“ 엄청 많이 나잖아! ”

 

 

베르닌은 급하게 휴지를 뜯어왔다. 코를 틀어막아 주려고 했다. 왕재수는 휴지를 빼앗아서 코를 감싸 누르며 투덜댔다.

 

 

“ 막아봤자 지금 소용없어. 그냥 이러다 멈출 거야. ”

 

이 바보천치야. 공연 한번만 더 올렸다간 사람 죽겠다! 자기 몸 축나는 건 생각도 안 하냐!

 

“ 나 이거 과로해서 나는 거 아니야. 넘어지는 바람에 코를 찧었어. 아파 죽는 줄 알았네. 그나마 내 잘생긴 콧대가 무사해서 망정이지. ”

 

“ 뻥치지 마! ”

 

“ 진짜야. 스텝이 꼬여서... ”

 

“ 스텝이 왜 꼬여! 애들 잡아주고 가르쳐주기만 하면서! ”

 

“ 언제부터 춤 잘 알았다고. 아, 이제 멈췄다. ”

 

 

왕재수는 찬물로 얼굴을 닦고 감독실로 나왔다. 베르닌은 욕조를 물로 씻어 내린 후 따라 나왔다. 의심스러운 눈으로 왕재수를 훑어보았다. 얼굴이 창백했지만 그렇다고 어디가 많이 아파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목이 늘어난 티셔츠에 운동복 바지를 입고 있는 것을 보니 더럭 걱정이 됐다. 차려입는 것에 목숨을 거는 놈이 저런 옷을 걸치고 있다니!

 

 

“ 너 막 일어난 거야? 그래서 잠옷 입고 있는 거야? ”

 

“ 아니, 나 6시에 일어났어. 8시 됐니? 우리 카페 열었겠다. 아침 먹으러 가야겠어. 너도 같이 가자. ”

 

 

왕재수는 옷을 갈아입거나 재킷을 걸치지도 않고 그대로 1층 카페에 내려갔다. 카운터로 가더니 속사포처럼 주문을 했다.

 

 

“ 우유 한 잔, 연어 샌드위치 한 개, 보르쉬 한 그릇, 사과 한 알, 차 한 잔. 초코바 두 개. 계산은 달아놔요. 이 사람도 같은 걸로. ”

 

“ 어, 나는 칼바사 샌드위치... ”

 

“ 하나는 칼바사 샌드위치로 바꿔줘요. ”

 

 

왕재수는 낡은 쟁반에 음식을 한 아름 담아서 창가 테이블로 갔다. 맨 먼저 보르쉬를 먹었다. 몇 숟갈 만에 보르쉬를 해치운 후 투덜댔다.

 

 

“ 에이, 진짜 맛없어. 깡통에 들어 있는 거 데워주는 것도 모자라 물까지 타고. 어떻게 변하지가 않는지. 우리 극장 카페 개선 좀 하라 해야겠어. 극장장이랑 얘기해야지. ”

 

“ 맛없는 줄 알면서 왜 시켰냐. 그것도 내 것까지... 진짜 맛없네. ”

 

“ 철분 섭취하려고. 아침에 피 봤잖아. ”

 

“ 난 코피 안 났는데! ”

 

“ 그래도 먹어둬! 아침에 뜨끈한 국물 좀 먹어야 몸이 풀리고 땀도 나. ”

 

 

아침을 먹은 후 왕재수는 연습실로 올라갔다. 스트레칭을 했다. 평소보다 훨씬 오랫동안 했다. 베르닌이 이제껏 보지 못한 동작들도 차근차근 했다. 잠시 후 로만 코즐로프가 악보와 바이올린을 옆에 낀 채 불쑥 들어왔다. 일자 눈썹에 콧수염을 붙이고 있는 베르닌을 보더니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인사를 했다.

 

 

안녕하시오, 하를람피 푸고비체프.

 

“ 안녕하세요... ”

 

“ 허, 이 녀석 진짜 감쪽같네. 이름은 또 어디서 그런 걸 주워 붙였나. ”

 

“ 어, 내 얼굴 알아보겠어요? 들키면 안 되는데... ”

 

“ 아니, 우리 비둘기가 말해줘서 안 거야. 그 눈썹이 신의 한 수인데. ”

 

 

왕재수가 끼어들어 둘의 대화를 끊었다.

 

 

“ 로만, 연주 좀 해줘. ”

 

“ 어느 장면? ”

 

“ 솔로 전부. 그리고 1막의 3인무랑. 그거부터 해줘. ”

 

“ 너 정말 괜찮겠어? 무대 한참 안 올라갔잖아. 다치면 어쩌려고. ”

 

“ 그러게! 몸 다 굳었는데. 내 명성에 누가 되겠지. 에휴, 할 수 없지. ”

 

 

코즐로프는 혀를 차더니 바이올린을 들었다. 왕재수가 몸을 곧게 펴고 섰다. 심호흡을 했다. 베르닌은 대체 쟤가 왜 저러나 싶었다. 코즐로프가 바이올린을 켜는 순간 왕재수가 움직였다. 점프를 하고 앞으로 달려 나가며 발을 구르고 빙글 돌고 경쾌하게 춤을 췄다. 음악이 귀에 익었다. 잘 보니 1막에서 바질이 꽃 파는 처녀들과 추는 3인무였다. 왕재수가 어찌나 가볍게 추는지 저절로 어깨가 들썩였다. 춤은 금방 끝났다.

 

 

“ 한 번 더 해줘? ”

 

“ 아니, 이건 괜찮아. ”

 

“ 다음 갈까? ”

 

“ 음, 결혼식 솔로부터 해줘. 불안해. ”

 

“ 알았어. 셋 세고 간다. ”

 

 

음악과 함께 왕재수가 춤을 추기 시작했을 때 베르닌은 멍해졌다. 왕재수는 너무나 가볍게 훌쩍 뛰어올랐고 공중에서 나사처럼 회전을 했고 다리를 탁탁 맞부딪쳤다. 나중에는 연습실 전체를 빙글빙글 돌며 가로질러 뛰었다. 마지막으로는 그 자리에서 다리를 뻗으며 힘차게 돌았는데 키트리의 32회 푸에테인지 뭔지를 출 때보다 훨씬 더 박력 있었다.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있었다. 연주를 마친 코즐로프도 활을 내려놓고 짝짝 박수를 쳤다. 왕재수는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우와, 진짜 멋있다! 나 네가 이 정도로 잘 추는 줄 몰랐어! 맨날 말만 들었지... 막심이랑 안톤이 추던 거랑 완전 비교돼. 이야.

 

 

왕재수는 숨을 몰아쉬며 근심스럽게 중얼거렸다.

 

 

“ 날 걔들이랑 비교하면 안 되지. 아아, 큰일이다. 몸이 무거워. 이런 꼴로 무대에 올라가다니... 오늘 보러 오는 사람들 전부 키로프에서 내가 이거 추는 거 닳도록 봤는데. 완전 실망하겠어. ”

 

야, 잠깐! 그게 무슨 소리야? 무대에 올라가다니? ”

 

 

왕재수가 일어나 앉았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으면서 대꾸했다.

 

 

“ 막심은 못 올 거야. 공연은 올려야 돼. 그래서 내가 출 거야. 토냐랑은 어제 따로 맞춰봤어. ”

 

“ 어... 그렇구나! 바질이 없는 게 아니었네. 네가 있었구나! ”

 

“ ‘내가 있었구나’가 아니지. 난 은퇴했는데... 난 이 극장 감독이지 무용수가 아니라고! ”

 

“ 그래도, 네가 올라간다니 진짜 다행이다! 넌 우리 나라에서 제일 잘 추는 무용수... ”

 

“ ...였지. 그리고 말은 바로 하자. ‘우리 나라’가 아니고 ‘전 세계’에서였어. 지금은 아니야. 나 마지막으로 무대 올라갔던 게 1년 전이야. 몸이 다 굳었어. 이건 정말 자살 행위야. 이런 꼴을 관객에게 보여 줘야 하다니... ”

 

 

왕재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베르닌은 그가 왜 그렇게 우울해 하는지, 어째서 수심에 잠기는지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았다.

 

 

“ 야, 너 그러지 마. 나 태어나서 이런 거 처음 봤어. 진짜 장난 아냐. 춤 보면서 심장 떨리는 거 처음이었어. 관객들도 좋아할 거야. 당신도 한 마디 해봐요! ”

 

 

코즐로프는 바이올린을 한쪽으로 얌전하게 밀어놓고는 왕재수에게 와서 꼭 안아주고 어깨를 토닥토닥 해주었다. 그리고는 등을 쓸어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 우리 아기가 원래 실력이 안 나와서 속상한 거구나. 1년이나 쉬었는데 이 정도로 출 수 있는 게 대단한 거야. 다시 연습하면 금방 옛날처럼 될 수 있을 거야. 오늘은 공연 올리는 게 제일 중요한 거니까 네 실력이 성에 안 차도 마음을 비워. 그래야 세상 사는 게 좀 편해진다. 무대는 앞으로도 계속 올라갈 수 있잖아. ”

 

아니야, 무대는 항상 한 번뿐이야! 제대로 못 추고 세상 편하게 사느니 잘 추고 힘들게 사는 게 백 배 나아.

 

“ 그건 우리 아기가 아직 아기라서 그런 거야. 예술가는 아기로 남아도 상관없지만 너는 이제 감독이니까 계속 그렇게 아기처럼 굴면 못써. ”

 

“ 흑... ”

 

 

왕재수가 코즐로프의 품에 안겨서 훌쩍훌쩍 울었다. 옛날만큼 실력이 안 나오는 게 속상한 건지 스페호프의 방해공작에 맞서 공연을 올리는 게 힘들어서 그런 건지 베르닌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했다. 국장이 이 사실을 알아서는 절대 안 된다! 마지막까지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그것도 왕재수가 주인공을 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는 헛기침을 했다.

 

 

“ 저, 난 티무르 보리소비치에게 갈게. 10시에 드레스 리허설 가면 되지? ”

 

“ 의상부터 챙겨 입어야 돼. 어제 네 사이즈에 맞게 수선은 다 한 거 같은데 혹시 모르니까 지금 가서 입어봐. 있다 보자. ”

 

 

왕재수가 언제 울었냐는 듯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코즐로프의 품에 꼭 안겨 있었다. 베르닌은 연습실을 나왔다. 잠깐 박물관 앞으로 가서 전화를 했다. 스페호프가 받았다.

 

 

“ 자네 웬일인가, 아직 10시도 안됐는데 빨리 전화를 했군. 그래, 어떻게 됐나? 오늘 공연을 올리긴 올리나? ”

 

“ 예. ”

 

“ 배역은 어제와 그대로고? ”

 

“ 그런 것 같습니다. 아침에 보니까 야스민이 많이 아픈 것 같더라고요. 코피도 엄청 흘리고. ”

 

암, 그래야지! 제깟 게 아무리 잘난척한다 해도 오냐오냐 자란 애송이가 어떻게 이 모든 재앙을 다 견딘담. 꼬마가 아프다는 건 나도 들었네. 분명 화병이 난 게지! 오죽하면 오후에 의원님들이 오실 때도 극장장이 직접 수행하고 극장 견학을 시킬 예정이라는군. 원래 그놈이 하게 되어 있었거든. 아주 잘됐지 뭔가! 오늘만 지나면 끈 다 떨어지고 그 조그만 불여우를 완전히 매장시켜버릴 수 있을 거야! 하여튼 며칠 동안 수고 많았네, 다닐. 나는 5시 공연에 맞춰서 가겠네. 그 망할 녀석이 나한테는 초대장도 안 보냈더군. 하지만 극장장이 내 자리도 의원님들 옆으로 빼놓았지. 있다 보세! ”

 

 

 

10시에 베르닌은 의상을 차려입고 드레스 리허설에 들어갔다. 무대 배경도 설치되어 있고 오케스트라도 들어오는 등 관객만 없다 뿐이지 모든 것이 진짜 공연과 흡사했다. 리허설 시작 직전 왕재수가 무용수들을 모아놓고 막심의 불참과 자신이 바질을 출 거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전날 미리 맞춰봤던 토냐와 꽃 파는 처녀 역의 두 무용수를 제외하고는 다들 금시초문이었기 때문에 깜짝 놀랐지만 곧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드레스 리허설은 스페이스 리허설보다 훨씬 진짜 같았지만 관객이 없어서 그런지 베르닌은 한결 안정되었다. 놀랍게도 무용수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실수도 훨씬 줄어들었다. 아마 왕재수가 무대 한가운데 나와 바질을 춰주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한결 의지가 되는 기분이라고 떠들었다. 일단 무대 위로 올라오자 베르닌은 아직도 서툰 마임을 순서대로 소화하고 키트리와 어설픈 춤을 추고 집시 인형극장에 뛰어들고 풍차에 매달리느라 왕재수가 뭘 어떻게 추는지 제대로 볼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왕재수가 토냐와 2인무를 추고 나중에 솔로를 출 때마다 백스테이지로부터 환호성이 들려왔다. 왕재수는 심지어 의상을 차려입지도 않고 운동복 차림으로 끝까지 췄다.

 

 

리허설이 끝난 후 왕재수는 무용수들에게 다가가서 마지막으로 몇 가지 교정을 해 주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절대 극장에서 나가지 말 것이며 연습실에서 휴식을 취하라고 했다. 점심은 연습실로 가져다 줄 테니 그것만 먹으라고 신신당부했다. 무용수들이 연습실로 이동한 후 베르닌이 물었다.

 

 

“ 점심을 시켰어? 어디서? ”

 

“ 박물관 앞 식당. ”

 

“ 어, 그랬구나. 국장이 또 음식에 뭐 탈까봐 그랬구나. ”

 

“ 응. 너도 딴 거 먹지 마. 나 이제 의상 맞춰봐야 돼. 옛날보다 근육이 줄어서 큰일이야, 안 멋있어 보일 텐데... 장식 좀 많이 달아 달라 해야겠어. 아... 난 왜 그렇게 죽어라고 다이어트를 했을까. 흐흑... ”

 

“ 바이올린 아저씨에게 잘 보이려고. ”

 

“ 그러게. 근데 아까 로만이 그러는데 나 근육 붙은 게 더 좋대. 에이... ”

 

“ 너무 걱정하지 마. 넌 예쁘잖아. 의상 입으면 멋있어 보일 거야. ”

 

“ 응, 내가 예쁜 거야 알지. 그치만 무대 올라갈 땐 지금보단 더 체격이 있는 게 낫거든. 작아 보이면 안 돼. ”

 

“ 너 안 작잖아. 키도 그 정도면 괜찮고 비율도 좋잖아. 아까 토냐랑 추는 거 보니까 커 보이던데. ”

 

“ 응. 근데 무대가 크니까 잘못하면 작아 보이거든. 전에는 내 카리스마로 커버해서 관객들은 다 나 180 넘는 줄 알았어. 근데 지금은 모르겠어. 에이, 걱정해봤자 무슨 소용이야. 그냥 해야지. ”

 

 

베르닌은 왕재수가 의상을 맞춰보는 내내 곁에 있었다. 나와서도 계속 옆에 딱 붙어 있었다. 왕재수가 투덜댔다.

 

 

“ 야, 연습실 가서 애들이랑 같이 있어! 귀찮아 죽겠네. 나 원래 공연 시작 전에는 혼자 있어야 한단 말이야. ”

 

“ 안 돼! 국장이 정보 입수하면 너한테도 해코지할 거란 말이야! 나 없다고 생각하고 할 거 해! ”

 

 

왕재수는 한숨을 쉬었지만 베르닌이 붙어 있게 내버려두었다. 4시에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국회의원들이 도착했을 때 왕재수는 수트로 갈아입고 잠깐 로비로 나가서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하지만 의원들이 그를 포옹하고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았냐느니, 극장을 구경시켜달라느니 하는 얘기를 쏟아내려고 했을 때 그는 딱 잘라 말했다.

 

 

“ 극장장님이 안내해 주실 겁니다. 저는 공연 준비 때문에 들어가 봐야 해서요. 끝나고 뵙죠. ”

 

그게 사실인가? 로비에 붙어 있는 알림 보니까 자네가 오늘 바질을 춘다고... 생각지도 않았는데 이게 웬 횡재인지!

 

“ 예. 원래 주역이 아파서요. 그럼 이만. ”

 

 

 

왕재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분장실로 가버렸다. 베르닌은 급하게 따라갔지만 왕재수가 단호하게 그를 밀어냈다.

 

 

“ 넌 저쪽으로 가. 3번으로. 이제 금방 공연 시작하니까 분장도 해야지. ”

 

“ 아니, 안 돼. 여기서 분장할 거야. 곧 국장이 올 거라고. 무대 올라갈 때까진 안심 안 돼. 너 보고 있어야 돼. ”

 

“ 아, 진짜 감시요원 노릇 제대로 하네. 맘대로 해! ”

 

 

그때 타치야나가 들어왔다. 베르닌에게 먼저 분장을 해 주었다. 베르닌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얼굴에 파운데이션과 파우더를 바르고 눈화장이란 것을 하고 블러셔니 셰이드니 하는 것을 칠하게 되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니 너무나도 어색했다.

 

 

“ 저, 타치야나 드미트리예브나... 화장이 너무 진한 거 같아요. 아이라인도 너무 두껍고. 이상해요. 웃길 거 같아요. ”

 

“ 관객석에서 보면 괜찮아. 무대 분장은 원래 그런 거야. 걱정하지 마. ”

 

“ 그런가... ”

 

 

타치야나는 베르닌의 등을 탁 치더니 웃으면서 왕재수 쪽으로 갔다. 머리를 손질해 주고 분장을 해주면서 아주 만족해했다.

 

 

“ 30년 동안 여기서 일했는데 이렇게 수월한 사람은 처음이네. 우리 감독님은 어쩜 이렇게 조금만 손대도 확 사는지. 원래 잘생긴 건 알았지만 딱 무대 체질이네. 콧대도 세울 필요도 없고. 아이라인만 그리고 볼살만 좀 부풀릴게. 요 며칠 야위어가지고. ”

 

“ 파운데이션 한 톤 낮춰 주세요. ”

 

“ 아니 왜? 이렇게 하얗고 고운 피부를? 다른 애들은 더 하얗게 해달라고 난리인데. ”

 

토냐보다 하얗게 보이면 안 되니까요. 2인무 출 땐 발레리나가 살아야 하는데 제 미모가 튀면 안 돼요. ”

 

 

베르닌은 왕재수에게 ‘너 자기만 잘나 보이고 싶어 하는 놈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왕재수가 눈을 감고 명상인지 뭔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분장을 마친 후 왕재수는 1막의 바질 의상으로 갈아입었고 스트레칭을 좀 했다. 그리고는 다시 화장대 앞에 앉았다. 목에 걸고 있던 십자가 목걸이를 풀더니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눈을 감은 채 오랫동안 가만히 있었다. 무신론자라고 했지만 베르닌이 레닌그라드에서 목걸이를 가져다 준 날부터 왕재수는 단 한 번도 그걸 목에서 푼 적이 없었다. 베르닌은 눈을 감았고 신앙심도 없었지만 어쨌든 기도를 했다.

 

 

하느님, 제가 실수 안 하게 해주세요. 풍차 잘 매달리게 해 주세요. 국장한테 안 들키게 해 주세요. 제발 공연이 무사히 끝나게 해 주세요. 저 녀석이 옛날만큼 못 춰도 높은 분들이 못 알아차리게 해 주세요. 공연 꼭 잘 끝나야 돼요. 안 그러면 쟤가 울 거예요. 저 싸가지 없는 놈이 아픈데 죽어라고 노력하고 있어요. 코피도 막 쏟아놓고 넘어졌다고 거짓말도 했어요. 쟤 오랜만에 춤 춰보려고 밥도 많이 먹고 초콜릿도 막 먹었어요. 그러니까 도와주세요. ’

 

 

기도를 하니 어쩐지 마음이 편해졌다. 그때 첫 번째 벨이 울렸다. 왕재수가 일어섰다.

 

 

“ 가자, 무대 나갈 준비하게. ”

 

 

 

*    *    *

 

 

 

 

다닐 베르닌, 아니 하를람피 푸고비체프의 생애 첫 무대 데뷔는 흥분과 우왕좌왕으로 점철되었다. 무대에 등장한 순간 그는 멍해졌다. 분명 드레스 리허설을 해봐서 괜찮을 것 같았는데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프롤로그에서 기사가 되리라 다짐하고 떠나는 장면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는데 본격적인 1막에서 그가 갑옷을 입고 냄비를 머리에 쓰고 긴 창을 들고 산초와 함께 휘적휘적 나오자 관객석에서 박수가 일었다. 머리가 핑 돌았다. 조명은 또 왜 이렇게 눈부신지, 음악은 어째서 이렇게 빨리 흘러가는 것 같은지 이해가 안 갔다. 한순간 그는 어느 쪽으로 움직여야 할지 백지가 되었다. 다행히 키트리 아빠 역 무용수가 그를 콕콕 찔러서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구석으로 이동했다. 그래도 걱정했던 키트리 둘시네아 착각 장면과 키트리 손잡고 춤추기는 다행히 그럭저럭 큰 실수 없이 해냈다. 몸이 엄청나게 뻣뻣했을 뿐이었다.

 

 

사실 그가 실수를 했어도 관객들은 몰랐을 것이다. 관객들은 바질을 추는 왕재수 때문에 완전히 흥분했다. 포스터와 팸플릿에는 여전히 막심의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고 주역이 바뀌었다는 내용은 오로지 극장 로비와 홀 앞에 붙은 종이에 손으로 갈겨 쓴 게 전부였지만 원체 왕재수가 유명한 무용수였기 때문인지 대부분은 그가 나오자마자 믿을 수 없다는 듯 웅성거리며 소리를 질러댔다. 왕재수가 한 번 뛰어오를 때마다, 한 바퀴 돌 때마다 박수를 쳤다. 토냐를 두 번이나 한 손으로 번쩍 들었을 때는 함성도 나왔다.

 

 

투우사 춤도 큰 환호를 받았다. 가릭이 망토를 휘두르며 무대를 휘젓자 여자들이 꺅 하고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쳐댔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돈키호테를 관객이 얼마나 좋아하는데‘ 라고 말한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1막을 마친 후 베르닌은 보드카에 취한 듯 황홀해졌다. 흥분이 되어서 백스테이지에서도 펄쩍 뛰고 휘적휘적 걸어 다니고 창을 휘둘렀다. 완전히 돈키호테가 된 기분이었다. 다른 무용수들도 흥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 보였다. 그때 왕재수가 다가왔기 때문에 다들 1막에서 저지른 실수에 대해 꾸중을 들을 줄 알고 좀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왕재수는 전혀 꾸중을 하지 않았다. 밝게 웃으며 격려를 해줬을 뿐이었다.

 

 

다들 잘했어! 너희는 3막 준비하고. 집시들, 요정들 이쪽으로. 하를람피, 풍차 돌진 준비됐지? 커튼 내려오면 잽싸게 준비해서 1분 만에 배경 올리고 요정 가는 거야. ”

 

 

베르닌은 아직도 어떻게 무대 배경이 그렇게 휘리릭 바뀌는지 신기했지만 물론 물어볼 겨를은 없었다. 2막에 올라갈 생각을 하니 더욱 흥분이 됐다. 베르닌으로서는 무용수들이 많이 나오고 그 사이에 끼어 밀려다녀야 하는 1막이나 근엄한 연기를 해야 하는 3막에 비해 2막이 제일 재미있었다. 폭력적인 연기를 잘한다고 왕재수에게서 칭찬까지 받지 않았는가!

 

 

베르닌은 인형극장 뒤집어엎는 연기를 실감나게 해냈다. 드디어 대망의 풍차 돌격을 할 차례였다. 그는 창을 꼬나 쥐고 으아아아 하고 소리를 지르며 풍차로 내달았다. 기세 좋게 풍차 날개에 매달렸다. 한 손으로 창을 휘두르며 발버둥을 쳤다. 풍차가 돌아가며 베르닌이 위로 올라가기 시작하자 관객들이 ‘우와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베르닌도 신이 났지만 그때 풍차가 엄청나게 빨리 돌기 시작했다. 연습할 때보다 세 배는 빠른 것 같았다. 심지어 중간에 멈추지도 않았다. 베르닌은 너무나 놀라고 어지럽고 두려워서 비명을 지를 뻔 했지만 꾹 참았다. ‘국장! 국장이 그런 거야!’ 란 생각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풍차가 휙휙 돌며 순식간에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베르닌은 악착같이 매달려 보려 했지만 원심력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튕겨져 나갔다. 머리가 어딘가에 부딪치는 것 같았다. 관객들의 박수와 함성이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베르닌은 정신을 잃었다.

 

 

잠시 후 베르닌은 눈을 떴다. 막이 내려와 있었고 그는 백스테이지 쪽으로 옮겨져 있었다. 무용수들이 걱정스럽게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한목소리로 외쳤다.

 

 

“ 하를람피! 하를람피, 정신 차려요! ”

 

 

베르닌은 눈을 떴다. 그때 무용수들을 밀어젖히고 왕재수가 달려왔다. 그의 곁에 털썩 주저앉더니 두 손으로 베르닌의 머리와 얼굴을 거칠게 쓰다듬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너 괜찮아? 미안해. 진짜 미안해. 다 나 때문이야... 아... 으흑... 어떡하면 좋아, 엉엉... ”

 

“ 어... 나 괜찮아. ”

 

 

“ 뭐가 괜찮아, 그 높은 데서 튕겨 나왔는데... 흑... 그 개자식이 풍차 손 댈 거란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 잘못했어, 정말 잘못했어. 너 끌어들여서 미안해. 미안... 아... 공연 접을게. 중단할게. 잘못했어. 다들 나 때문에 끌려가고 아프고 다치고... 이제 안 할게. 공연 접을게. 엉엉...

 

 

왕재수가 베르닌의 두 손을 와락 부여잡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괴롭게 몸부림쳤다. 베르닌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 나 진짜 괜찮아. 매트 위로 떨어졌어. 혹만 조금 난 거야. 1분 지나지 않았어? 요정 장면 가야 하잖아! ”

 

“ 아니야, 중단할 거야. 지금 내가 무대 위로 올라가서 관객들한테 얘기할 거야. 더 이상 너희들 다치게 놔둘 수 없어. 엉엉... ”

 

안 다쳤다고! 그리고 네가 그랬잖아! 공연은 올라가야 하는 거라고! 관객과의 약속이라며! 얘들 다 연습했잖아! 너도 그 몸으로 지금 바질 추잖아! 빨랑 요정들 내보내고 오케스트라에 얘기해! 나도 지금 나갈 거야!

 

 

왕재수가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그 와중에도 베르닌은 왕재수가 분장을 손봐야 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무용수들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 감독님. 저희 진짜 괜찮아요. 공연 나갈래요. 겨우 몇 분밖에 안 지났으니까 관객들도 모를 거예요. 풍차처럼 위험한 거 이제 안 나오잖아요. 저희 조심해서 할게요. 저희 이렇게 신나는 공연 처음이에요. ”

 

 

왕재수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 아휴, 누가 너희들 걱정돼서 그러는 줄 알아? 무대 사고 나서 내 명성에 누가 될까봐 그러지! 알았어, 1분 내로 막 올릴 거니까 요정들 빨리 가서 준비해. 하를람피, 너도 나가서 꿈꾸는 포즈로 누워 있고. 가! ”

 

 

그래서 베르닌은 다시 무대로 나갔다. 음악이 다시 연주되었고 막이 서서히 올랐다. 다행히 관객들은 갑자기 화사한 요정 나라가 나타나자 아무런 의심도 없이 ‘와아...’ 하고 감탄을 내뱉었다. 베르닌은 한쪽에 앉아 있다가 요정들 사이를 천천히 헤집고 팔을 허우적거리며 다니는 등 느릿느릿한 연기만 하면 됐다. 뒤통수가 좀 띵하고 바닥에 부딪친 팔다리가 아팠지만 그나마 매트 위로 떨어져서 심하게 아프지는 않았다.

 

 

2막이 끝나자 왕재수는 곧장 의료요원을 불렀다. 다행히 베르닌의 생각대로 다친 곳은 거의 없었다. 멍만 좀 들었을 뿐이었다. 왕재수가 이를 딱딱 부딪치면서 화를 냈다.

 

 

너네 국장 가만 안 둘 거야! 나쁜 자식!

 

“ 어, 제발 또 이상한 짓 저지를 생각은 하지 마. ”

 

너 검은 숲에 가서 뱀 껍질 파와! 곱등이랑 바퀴벌레랑 쥐랑 다 잡아와서 국장실에 풀어!

 

“ 알았어. 공연 끝나고 그렇게 할게. ”

 

뱀 껍질 많이많이 파와!

 

 

 

3막이 되었다. 관객들은 왕재수의 자살 쇼를 너무너무 좋아했다. 왕재수가 죽은 척하고 누워 있다가 토냐의 손에 뽀뽀를 쪽 하고, 돈키호테 베르닌의 종용에 못 이겨 키트리 아빠가 결혼을 허락하자마자 폴짝 뛰어 일어나자 커다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베르닌도 덩달아 신이 났다.

 

 

결혼식 장면이 되었다. 하객 역의 솔리스트들이 열심히 춰서 박수를 받았다. 토냐는 32회 푸에테를 무리 없이 췄다! 갈채도 많이 받고 환호도 받았다. 그리고 왕재수가 바질의 솔로를 추기 시작하자 다들 넋이 나갔다. 첫 번째 점프에서 다들 숨을 죽였다.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이 흘렀다. 두 번째 점프에서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고함과 환성을 지르고 휘파람을 불었다. 무대를 가로지르며 날아다니듯 뛰기 시작하자 미친 듯이 박수를 치고 브라보를 외쳐댔다. 난리가 났다. 음악 소리가 하나도 안 들렸다. 마지막 푸에테에서는 다들 기립했다. 베르닌은 스페호프가 VIP석에 앉은 채 ‘기립이라니! 저 불여우 반동분자에게 웬 호강이란 말이냐!’ 라고 욕설을 퍼붓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았고 속으로 쿡쿡 웃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이 되었다. 베르닌, 아니 하를람피 푸고비체프, 아니 돈키호테는 위엄 있게 바질과 키트리를 축복한 후 산초를 거느리고 먼 길을 떠났다. 무대를 떠나 백스테이지로 돌아오자 베르닌은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막이 내리는 동시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왕재수가 활짝 웃으며 무용수들을 칭찬했다.

 

 

“ 다들 정말 잘했어! 며칠 만에 일취월장했어! 연습 많이 하면 스네고로드 간 애들 돌아오더라도 진짜 주역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죽어라고 연습해라! 그리고 하를람피! 잘했어. ”

 

“ 맞아, 잘했어! 잘했어요! 무용수도 아닌데! 일반인인데 진짜 잘했어요! ”

 

“ 맞아맞아! ”

 

 

베르닌은 찡했다. 막 눈물을 흘리려는데 왕재수가 등짝을 찰싹 갈겼다.

 

 

“ 야! 인사해야지! 나갈 준비해! ”

 

 

그래서 베르닌은 무대 인사를 하러 나갔다. 영광스럽게도 그는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나가게 되어 있었다! 인사를 하자 관객들이 큰 박수를 보내 주었다. 휘파람도 불어주었다. 너무나 행복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왕재수와 토냐가 나오자 극장이 떠나갈 듯한 환호가 일었다. 공연 때보다 조명이 밝아져서 VIP석에 있던 높으신 분들이 일어나 박수를 치고 있는 게 보였다. 스페호프로 추정되는 검은 그림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관객들을 헤치고 밖으로 나가는 것도 보였다.

 

 

다시 한 번 인사를 하고 나자 안내원 아주머니들이 꽃다발을 바리바리 싸들고 무대로 나왔다. 토냐와 가릭에게 꽃다발을 한두 개씩 전해주었다. 그러더니 왕재수에게 나머지 꽃을 모두 주었다. 꽃에 파묻혀 얼굴이 안 보일 지경이었다. 왕재수는 자기 팔로 껴안을 수 있는 꽃다발을 모조리 모아서 토냐에게 바쳤다. 더욱 큰 박수갈채가 일었다. 베르닌도 박수를 치고 있는데 안내원 아주머니가 그에게 다가와 빨간 장미가 가득한 꽃다발을 하나 건네주었다. 베르닌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 엥? 이걸 왜 저한테 주시나요? ”

 

이건 당신한테 온 거예요. 하를람피 푸고비체프라고 카드도 있잖아요.

 

 

베르닌은 얼떨떨해졌다. 장미 꽃다발을 꼭 껴안았다. 황홀했다. 하마터면 다 같이 인사를 하다가 발을 헛디딜 뻔 했다. 커튼콜이 계속 반복됐다. 예전에 베르닌은 왕재수를 감시하느라 울며 겨자 먹기로 공연을 보게 될 때마다 저 망할 놈의 커튼콜은 왜 하는지, 왜 끝날 것 같으면서도 다시 막이 올라가고 무용수들이 우르르 나와 다시 인사를 하는지 이해가 안 갔지만 막상 무대에 올라와보니 커튼콜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수와 환호를 받는 것이 너무나 행복했다.

 

 

마침내 커튼콜이 끝났다. 막이 내려왔고 홀에는 불이 밝게 들어왔다. 관객들이 물밀 듯 빠져나갔다. 왕재수는 무용수들을 하나하나 토닥여 주었다. 마지막으로 베르닌에게 다가오더니 와락 포옹을 했다.

 

 

“ 고마워, 덕분에 공연 끝냈어. ”

 

이거 봐, 나 꽃 받았어!

 

“ 좋겠구나, 꽃도 받고. ”

 

“ 근데 누가 준 걸까? 나 여기 나오는 거 아무도 모르는데. ”

 

“ 그러게. 꽃이 남았나보네. ”

 

“ 아니야! 여기 내 이름 쓴 카드도 있어! 어, 근데 이거 네 글씨 아니야? ”

 

 

베르닌은 카드를 펼쳐 보았다. 딱 한 줄 씌어 있었다. 소리 내어 읽었다.

 

 

‘첫 무대 축하’, 야 이거 네가 준 거구나! 내 데뷔 축하해주려고! 고마워! ”

 

내가 왜! 바빠 죽겠는데 왜 그런 짓을 하니! 하여튼 좋겠구나, 꽃 받아서. 난 빨리 씻고 의원 아저씨들한테 인사하러 가야 돼. 고생했으니까 그만 들어가서 푹 쉬렴. 내일 삭신이 쑤실 걸. 잘 자! ”

 

 

왕재수는 급하게 분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베르닌은 복도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왕재수가 분장을 모두 지우고 말갛게 된 얼굴로 나왔다. 수트 차림이었지만 재킷은 팔에 걸치고 있었다. 셔츠 칼라 사이로 목걸이가 힐끗 보였다. 금색의 조그만 십자가가 반질거리는 것을 보니 또 손에 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 너 아직 안 갔어? 분장도 안 지웠네. 옷도 안 갈아입고. 그러다 감기 걸린다. 빨리 씻고 들어가서 쉬어. ”

 

“ 응, 이제 들어갈 거야. 저기, 있잖아. ”

 

“ 왜? ”

 

“ 너 계속 무대 올라가면 안 돼? 오늘 진짜 멋있었어. 빈 말이 아니야. 그런 거 처음 봤어. 관객들도 좋아했잖아. ”

 

“ 칫, 여긴 시골이니까 그렇지. 그런 걸 언제 봤겠니. ”

 

“ 시골 관객들한테 네 춤 계속 보여주면 안 되는 거야? ”

 

“ 나 은퇴했다고 했잖아. 오늘은 공연 빵꾸날까 봐 억지로 올라간 거야. ”

 

“ 은퇴 무르면 안 돼? ”

 

“ 쳇, 아무 것도 모르면서. ”

 

 

왕재수는 툴툴거렸지만 기분이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베르닌에게 빨리 가서 자라고 했을 뿐이었다.

 

 

베르닌은 분장을 지웠다. 일자 눈썹을 지우고 콧수염을 떼어냈다. 샤워를 했다. 극장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하를람피 푸고비체프와 돈키호테는 사라지고 그는 다닐 베르닌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눕자 아직도 짜릿하게 남아 있는 흥분과 함께 텅 빈 듯한 허무함이 몰려왔다. 그래서 그는 물병에 꽂아서 부엌 식탁에 올려두었던 꽃다발을 침실로 가져왔다. 나이트 테이블 위에 병을 내려놓았다. 풍성하게 피어 있는 빨간 장미꽃들과 카드를 보자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그는 행복하게 잠이 들었다.

 

 

 

 

 

 

 

FIN

- 2015. 4. 9 ~ 4. 12 -

 

..

 

 

왕재수가 올리는 돈키호테는 기본적으로는 키로프 극장(현 마린스키) 버전을 따르고 있다. 풍차에 사람 매달리는 얘긴 전에 얘기했듯 극장마다 다른데, 인형을 쓰는 곳들도 많다.

 

..

 

 

베르닌은 당연히 티팬티를 입었다! 그런데 이거 쓸 때는 그냥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서 묘사를 안했는데 19편에 달아주신 댓글들을 보고 좀 아까웠다. 티팬티 에피소드 넣을 걸 ㅎㅎㅎ

 

글에는 빠졌지만, 베르닌은 드레스 리허설 때 의상 담당자가 가져다준 티팬티와 타이츠에 매우매우 당황하고.. 그나마 돈키호테 역은 타이츠 위에 짧은 하의를 겹쳐 입어 불행중 다행이 되었다. 그는 왕재수에게 티팬티 안 입으면 안되느냐고 애걸하고 싶었겠지만 알다시피 그때 왕재수는 갑작스럽게 무대에 올라가느라 정신도 없고 매우 스트레스 받는 상황이므로 착한 베르닌은 꾹 참고 그냥 입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얼마나 불편했을꼬 ㅎㅎ)

 

공연 끝난 후... 왕재수는 그에게 기념으로 그 티팬티를 가지라고 했을 거고... 이리하여 베르닌은 하를람피 푸고비체프라는 예명과 티팬티를 기념으로 얻게 되었다... 이건 원글에는 없는 내용이니 디렉터스 컷인가 ㅎㅎ

 

..

 

 

서무 시리즈는 기본적으로 코미디 풍자이기 때문에 완전 초짜 베르닌이 3일 연습해서 돈키호테 역을 어떻게든 해냈다만.. 사실 현실에서는 많이 힘든 일이다 :) 돈키호테가 결코 쉬운 역이 아니라서... 뭐 모르지. 베르닌이 사실은 연기 천재였던 걸지도!!!

 

..

 

 

공연을 올리는 왕재수의 마음가짐이라든지, 바질을 준비하는 왕재수와 코즐로프의 대화는 서무 시리즈라 조금 가볍고 때로는 우습게 표현했지만 사실 이쪽은 본편의 미샤와 더 맥이 닿아 있다.

 

본편 우주에서도 바질은 미샤에게 특별한 역 중 하나였다. 이전에 about writing 폴더에 발췌했던 글(http://tveye.tistory.com/3594) 에서도 미샤가 폐렴을 무릅쓰고 바질 데뷔 무대를 추는 내용이 나온다.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내가 설정한 미샤의 경력 노트에서 이 사람은 발레학교 시절에도 국제 콩쿠르에서 바질 역으로 상을 받은 적이 있다. 미샤는 소년 시절 콩쿠르 입상 경력이 많은데 바질, 알리 등 화려한 역을 추곤 했다.

 

왕재수가 19편에서 얘기했듯 돈키호테는 남성 무용수들의 화려한 춤이 눈에 들어오는 발레이다. 특히 바질의 춤은 관객들을 아주 사로잡는다. 화려하고 역동적이어서 결혼식 솔로에서 바질이 그랑 주테(두 다리를 쫙 뻗고 공중을 가로질러 점프하며 무대를 한 바퀴 도는 것)를 시작하면 관객들이 박수를 치며 즐거워한다.

 

내 인생 첫 돈키호테는 오랜 옛날 마린스키 무대에서 본 거였는데 그땐 기본지식이 없어서 그런 장면이 나오는줄도 몰랐기에 결혼식 장면에서 바질(아래 첨부한 영상의 뱌체슬라프 사모두로프가 췄다)이 펄쩍 날아오르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는데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다. 내 인생에서 공연 보고 그렇게 흥분했던 적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모든 관객들이 말 그대로 박수를 치고 환호하고 기립했다.

 

이후 많은 공연들을 보았지만 그토록 관객들이 흥분하고 모두가 혼연일체가 됐던 때는 없었던 것 같다. 아마 그때가 90년대였고 아직 러시아 관객들은 소련식으로 발레를 보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소련 시절 관객들의 반응은 지금 러시아 관객들 반응보다 훨씬 열정적이었다) 본편과 이 20편에서 미샤(=왕재수)가 바질을 출 때 관객들이 박수치고 환호하고 발 구르는 장면은 저때의 경험에서 그대로 가져왔다.

 

 

..

 

 

19편과 20편 쓸 때는 물론 민쿠스의 돈키호테 음악을 많이 들었다 :)

 

유튜브에서 발레 돈키호테를 검색하시면 여러 극장들의 여러 영상들이 많이 나오니 궁금하신 분들은 한번 찾아보셔도 좋을 듯. 추천하는 것은 2006년 마린스키 버전. 깨끗한 테크니션이자 원더키드인 레오니드 사라파노프와 그의 아름다운 아내인 올레샤 노비코바가 바질과 키트리, 그리고 최고의 연기파 돈키호테인 블라지미르 포노마료프가 나온다. 요즘은 이반 바실리예프와 나탈리야 오시포바의 돈키호테도 많이들 좋아하지만 나는 모스크바보다는 페테르부르크 쪽 입맛이라 전자가 더 좋다.

 

조금 아쉬우니 다음 포스팅에서 바질의 화려한 춤 영상 클립을 몇 개 소개하도록 하고..

여기서도 바질의 춤 아주 짧은 클립 두 개만.

 

먼저 바질이 키트리의 두 친구인 꽃파는 아가씨들과 추는 짧은 3인무. 1막이다. 짧지만 신나서 내가 아주 좋아하는 춤이다. 20편에서 왕재수가 연습실에서 코즐로프에게 제일 먼저 켜달라고 해서 춰보는 춤이기도 하다.  

 

사심을 담아~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가 추는 버전~

 

 

 

 

두번째는 위에서 말했던 뱌체슬라프 사모두로프가 춘 결혼식 바질 솔로 중 첫번째 춤이다. 90년대 녹화본이라 화질은 나쁘지만 가볍고 통통 튀는 춤이 일품이다. 이 영상은 전에도 올린 적이 있다. 이건 갈라 콘서트나 콩쿠르 수상 무대인 것 같다. 사모두로프는 이것으로 국제콩쿠르 수상도 했었다.

 

이 사람은 말 그대로 jumper였다. 바질 역은 정말 최고였다. 얼마나 가볍고 탄력있게 날아오르는지. 내 인생 첫 바질이라 그런지 정말 잊지 못할 것이다. 이 사람은 이후 로열발레단으로 건너갔다가 지금은 러시아 어느 극장(아, 갑자기 이름 생각이 안나ㅠㅠ)의 예술감독이자 안무가로 활동 중이고 겨기서 선보인 작품으로 올해 황금 마스크 상도 탔다.

 

 

 

 

다른 무용수들의 바질 영상은 다음 포스팅에.. (http://tveye.tistory.com/3711)

 

..

 

이야기는 21편으로 이어진다.

 

..

 

댓글은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비타민이에요 :)

 

 

 

:
Posted by liontamer

 

앞서 올린 서무의 슬픔 19편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http://tveye.tistory.com/3692)과 관련하여...

 

베르닌이 덜컥 떠맡게 된 발레 돈키호테의 '돈키호테' 배역이란 대체 어떤 연기를 해야 하는가! 여기 사진 몇 장과 돈키호테가 나오는 부분을 발췌한 영상 클립 몇 개를 올려본다 :) 모두 마린스키 발레단의 돈키호테이다.

 

먼저 화보 몇 장. 출처는 모두 Mariinsky Theatre 홈페이지.

 

 

돈키호테 등장 장면.

 

마린스키 버전에선 이렇게 진짜 말을 타고 나오고 산초는 당나귀를 타고 나온다. 그러나 많은 극장들에서는 말과 당나귀를 출연시키기 어려우니 모형 말을 타고 나오기도 하고 가끔은 돈키호테와 산초가 그냥 걸어서 등장한다.

 

 

 

이건 먼젓번 포스팅에서도 올렸던 사진.

 

 

환상 속에서 숲속 요정과 꿈의 여인 둘시네아(키트리가 1인 2역을 연기한다)를 만나 행복해하는 돈키호테.

 

 

 

돈키호테의 환상 속에서 펼쳐지는 숲속 요정 장면.

사실 나는 이 꿈속 요정 씬이 좀 쥐약이라... ㅋㅋ 아무리 돈키호테를 많이 봐도 이 요정 장면은 좀 괴롭다. 아마 내가 오글거리는 걸 안 좋아해서 그런 것 같다. 여기서 큐피드 역의 귀엽고 작은 발레리나가 종종대며 춤을 추는데 그 귀여움을 못 견딤 ㅎㅎㅎ

 

 

이것이 투우사 망토춤~~~

내 개인적으로는 돈키호테에서 아무리 다른 애들이 잘춰도 투우사가 망토를 멋지게 못 휘두르면 그것은 앙꼬없는 찐빵이다!!!!

왕재수가 가릭에게 망토 멋지게 휘두르라고 야단치는 부분의 춤이 바로 이 사진에 나오는 장면이다 :)

 

 

 

빠지면 섭섭한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바질 역을 추고 있음. 파트너는 빅토리야 테료쉬키나 :)

 

그러면 이제 베르닌, 아니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연기해야 할 돈키호테가 나오는 영상 클립 몇 개만~ 다들 몇 분 안되는 짧은 클립이니 한번 보셔도 좋을듯. 재미있어요~

 

 

 

1. 공연 시작. 프롤로그. 기사가 되어 환상의 여인 둘시네아를 찾기 위해 떠나는 돈키호테와 그의 하인 산초~

 

돈키호테는 마린스키 발레단 최고의 연기파 배우 블라지미르 포노마료프. 이 사람은 진짜 최고다. 돈키호테, 라 바야데르의 브라만 등등...

여기 올리는 동영상 클립에 나오는 돈키호테는 모두 이 사람이 연기한 버전이다.

여기 발췌한 영상 클립은 중간의 슈클랴로프와 테료쉬키나가 나오는 클립 빼고는 모두 2006년에 마린스키에서 올린 레오니드 사라파노프와 올레샤 노비코바가 주역으로 나온 돈키호테의 발췌 클립이다.

단추야, 이렇게 연기해야 한단다. 잘 할수 있겠니?

 

 

 

 

2. 대망의 돈키호테 등장 씬~

 

말 타고 근엄하게 등장하심.

다행히 서무 시리즈에서 왕재수가 가브릴로프 극장을 위해 준비하는 돈키호테는 극장 무대도 작고 규모나 예산 상황 등도 모두 대도시보다 딸리기 때문에 진짜 말과 당나귀는 안 나온다. 베르닌은 걸어 나오면 된다 :)

 

 

 

 

3. 돈키호테가 키트리를 둘시네아로 착각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그 장면.

 

나의 사심을 담아~ 이건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가 바질, 빅토리야 테료쉬키나가 키트리를 춘 버전에서 발췌.

바질은 키트리랑 알콩달콩 놀려고 장미꽃도 주고 신나려는 찰나.. 갑자기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르는 노인네 돈키호테가 나타나 키트리에게 절을 하고.. 키트리는 냉큼 그와 춤을 추고 바질이 준 꽃은 휙 던져버리니..

열받은 바질... 질투에 휩싸이지만 곧 질투는 질투로 받아치고.. 키트리의 친구를 집적대는 모션을 취한다. 이에 키트리는 '어머 바질 왜 저래~' 하면서 금세 바질을 끌어당기고.. 삐쳤던 바질은 키트리의 뽀뽀 한방에 헤벌레 하며 도로 '내 사랑~' 모드.

1막에서 내가 좋아하는 장면이다. 바질의 삐치는 연기가 포인트인데 슈클랴로프는 이걸 꽤 귀엽게 잘 한다 :)

 

서무 19편에서 베르닌이 돈키호테 마임이랑 연기가 너무 어렵다고 한탄하자 왕재수가 한번 해보라고 시켜보는 장면이 바로 이 장면이다.

사실 어렵다.. 돈키호테 역이 결코 쉬운 역이 아니고.. 배우로서의 역량이 필요하다. 하지만 어쩌겠나.. 왕재수는 마음이 급하고, 키큰 땜빵은 오로지 우리 단추 뿐~~

 

 

 

 

 

4. 집시들의 야영지에서 인형극장 뒤집어엎고 풍차에 돌격하는 돈키호테

 

바질과 키트리는 집시 야영지로 사랑의 도피를 하고.. 집시들이 그들을 맞아준다. 돈키호테와 산초도 온다. 집시들은 그들에게 인형극장 연극을 보여준다. 돈키호테는 연극을 실제로 착각하여 나쁜놈이 숙녀를 괴롭힌다 생각해 작은 무대를 뒤집어엎는다. 그리고는 풍차를 보고 괴물이라 착각, 돌진한다!!

 

이건 마린스키 버전인데 인형극장 장면에서 어린이들이 나와 연기를 한다.

풍차 돌격 장면도 극장별로 꽤 다르다. 옛날에는 마린스키 무대에서도 풍차에 사람이 직접 매달렸던 걸로 난 기억하는데(내가 본 무대는 그랬던듯) 이 영상에선 그냥 돌격만 하고 딸려올라가진 않는다. 미하일로프스키 발레는 무대를 보니 풍차 돌격 후 돈키호테 모양의 인형이 날개에 매달려 날아간다.

서무 시리즈에선 왕재수가 극의 스펙터클과 재미를 위해 풍차에 직접 사람을 매달리게 한다 :) 베르닌의 최고의 도전!!!!

 

 

 

 

 

5. 이건 보너스. 32회 푸에테를 추는 키트리.

 

돈키호테에서 가장 유명한 씬이라면 역시 마지막 결혼식의 바질과 키트리의 춤이다. 바질의 춤이 원체 화려해서 주목을 받지만 키트리가 추는 이 32회 푸에테도 백미.

물론 다른 고전발레에도 32회 푸에테가 종종 나온다. 하지만 제일 유명한 건 역시 백조의 호수에서 흑조 오딜이 추는 32회 푸에테와 이 돈키호테의 키트리가 추는 32회 푸에테이다. 신난다~

 

키트리를 추는 발레리나는 올레샤 노비코바 :)

 

서무 19편에서 토냐가 이걸 못춰서 자꾸 25회로 줄여달라고 하고 엉덩방아를 찧는 것이다. 그래서 왕재수가 (남자의 몸으로 ㅎㅎ) 이 춤을 직접 시연해서 토냐에게 뭐가 잘못됐는지 가르쳐준다~ 물론 왕재수는 토슈즈를 신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발가락 끝으로 서서 돌지는 않았겠지만~ 그의 춤은 명불허전~

 

 

** 태그의 돈키호테 나 발레 돈키호테 를 클릭하면 전에 이 발레에 대해 올렸던 리뷰와 메모, 동영상 클립들과 사진들을 여럿 볼 수 있다.

 

** 과연 우리의 단추남 베르닌, 예명 하를람피 푸고비체프는 위에 나온 클립에서처럼 돈키호테를 멋지게 소화할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왕재수는 스페호프의 방해공작을 물리치고 공연을 제대로 올릴 수 있을지... 그건 다음주의 20편에서~~

 

:
Posted by liontamer

 

조금 우울했던 18편에 이어, 서무의 슬픔 19편은 다시 베르닌과 왕재수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19편에서는 이제껏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던 극장 예술감독이자 발레단의 리더, 그리고 왕년의 최고 무용수였던 왕재수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우리의 단추청년 베르닌이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번 편에는 왕재수가 감독으로 있는 극장이 주요 배경이라 발레 얘기가 좀 나오는데 발레에 대해 잘 몰라도 조금씩 상상하며 읽을 수 있도록 쉽게 풀어서 써보려고 했다.

 

 

... 제목의 '푸고비체프'는 러시아어 '푸고비차'에서 왔다. 단추라는 뜻이다 :)

 

.. 도입부에서 왕재수가 언급하는 '당직실 귀신'에 대한 얘긴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의 그 귀신 얘기다 :0 (http://tveye.tistory.com/3437)

왕재수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건 바퀴벌레 곱등이 뱀껍질. 그리고 베르닌이 무서워하는 건 당직실 귀신~~

 

 

그럼 재밌게 읽으세요~~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어느덧 2월말이 되고, 왕재수는 시골과 바퀴벌레 곱등이 뱀껍질의 괴로움을 이겨내며 예술감독으로서 극장과 발레단을 제대로 이끌어보려고 애를 쓰는 중이지만, 불여우가 항상 눈엣가시였던 스페호프 국장이 드디어 방해공작을 위해 발벗고 나서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19

 

 

 

서무의 슬픔

-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2월말이 되자 왕재수는 굉장히 바빴다. 집에 들어오는 날이 거의 없었다. 월요일에 베르닌은 밤중에 극장으로 왕재수를 데리러 갔다. 그 날은 공연도 없는 날인데 왕재수는 무대 도면을 펼쳐놓고 무슨 작업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는 도면을 둘둘 말아 한쪽에 던져버리고 왕재수에게 패딩을 뒤집어씌운 후 억지로 끌고 나와 차에 태웠다. 한 번만 더 극장에서 자거나 밤을 새기만 하면 검은 숲에 가서 뱀 껍질도 모자라 겨울잠을 자고 있는 뱀들을 파내와 감독실 여기저기에 풀어놓겠다고 협박을 했다. 왕재수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지 부르르 떨면서 항의했다.

 

 

“ 이 악마! 너무해! 치사하게, 남의 약점을 잡아서 막 협박하고... 너한테 당직실 귀신 데려다 주면 좋냐? ”

 

“ 난 의사한테 쉬라는 말 들은 적 없거든! 너 정말 말 안 들을래? 의사 할아버지가 과로하지 말고 밥 많이 먹고 일주일에 사흘만 출근하랬잖아. ”

 

“ 많이 먹고 있잖아! 요즘은 삼시세끼 다 먹는단 말이야. 너 아니면 로만이 챙겨주잖아! 그리고 지금은 사흘 출근 불가능해. 일주일에 공연이 여섯 번 있는데 그 중 발레가 네 번이야. 애들 연습도 시켜야 하고 신작 준비도 해야 하고, 일요일에는 돈키호테도 새로 올린단 말이야. 중요한 사람들도 오고. 그러니까 지금은 어쩔 수 없어. 일요일 지나면 의사 선생님 말대로 할 거야. 진짜야. 뱀은 안 돼, 제발... 어헝... ”

 

 

왕재수는 화를 내다가 결국 울먹이면서 베르닌의 어깨를 잡고 매달렸다. 어지간히 뱀이 무서운 모양이었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고 소매로 왕재수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 알았어, 징징대지 마. 뱀이 뭐 그리 무섭다고. 그래도 잠은 꼭 자야 돼. 다음 주엔 무조건 쉬는 거야, 알았어? ”

 

“ 으응. 일요일 공연만 잘 끝나면 한숨 돌리니까 그렇게 할게. ”

 

“ 일요일에 모스크바랑 레닌그라드에서 국회의원들이랑 문화국 간부들 온다면서. 그거 보러 오는 거지? ”

 

“ 누가 KGB 아니랄까봐 잘도 아네. ”

 

“ 중요 인사들이 오니까 당연히 알아야지. 지금 그것 때문에 국장이 얼마나 예민한데. 의회도 KGB도 아니고 극장 따위를 그것도 일요일에 당일치기 방문하고 가버린다고 짜증냈어. 우리 시 지금 현안이 얼마나 많은데 그건 관심도 없고 딴따라 공연이나 보러 온다고. ”

 

흥, 너네 국장은 얼간이야. 그 사람들이 이 촌 동네에 무슨 관심이 있어서 오는 줄 아니? 그 사람들 전부 내 후원자들이었어. 내 공연은 다 챙겨봤다고. 이번에 올리는 것도 이 동네에서는 초연이나 다름없으니까 겸사겸사 보러 오는 거야. 나 체포당하게 해놓고 시골에 처박아놓은 것도 찔리니까 얼굴이라도 볼 겸. ”

 

“ 일요일 게 왜 초연이야? 너 신작은 4월에 올린다며. ”

 

“ 응. 일요일에는 돈키호테야. 그게 원래 고전발레에서는 중요한 레퍼토리인데 우리 극장은 5년 동안 안 올렸대. 복잡하고 애들 실력도 안 되고 인기도 없어서 전임감독이 빼 버렸다잖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지. 관객들이 돈키호테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재미있고 신나서 제일 인기 많은 레퍼토리인데. 애들은 가르치면 되는 거고, 실력이 안 되는 건 애들이 아니라 전임감독이었겠지.

하여튼 그거 손봐서 5년 만에 다시 올리는 거야. 규모도 있고 화려한 작품이라 손이 많이 간단 말이야. 무용수들 테크닉 자랑하는 작품이라 애들 연습도 더 많이 시켜야 되고. 그러니까 뱀 풀지 마. 뱀 풀면 너 정말 예술 탄압이야!

 

“ 어... 뭔가 어렵구나. 하여튼 알았어. 중요한 공연이라 이거네. 그래도 극장에서 밤샘하면 진짜 안 돼. 내가 다 확인할 거야. 그리고, 너 오늘 아침부터 저녁까지 먹은 거 다 대봐!

 

“ 어... 아침엔 극장 카페에서 우유랑 바나나, 차 한 잔. 점심 땐 박물관 앞 식당에서 대구 커틀릿하고 비트 샐러드... ”

 

“ 좋아, 커틀릿 잘했어. 지방질을 좀 섭취했구나. 저녁은? ”

 

저녁은... 저...

 

“ 저녁은? ”

 

“ 어... 아직... ”

 

뭐? 지금 밤 11신데! 점심 먹고 그럼 지금까지 아무 것도 안 먹었단 말이야? 저녁 굶은 거잖아! 그래놓고 무슨 삼시세끼를 챙겨먹어! ”

 

“ 아참, 먹었어! 먹었단 말이야! 진짜야. 애들 지도하는 것 때문에 얘기하다가 티무르 보리소비치가 삶은 감자 한 개 줬어. 그거랑 요구르트 먹었어. ”

 

야! 그게 간식이지 밥이야?

 

“ 감자가 엄청 컸는데... ”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피곤해서 자겠다는 왕재수를 억지로 자기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식탁에 앉혀 놓고는 인스턴트 닭고기 수프를 데워서 흑빵을 한 조각 곁들여 들이밀었다. 왕재수는 밤늦게 뭘 먹으면 얼굴 붓는다고 툴툴댔지만 어쨌든 먹었다. 국물을 다 먹나 안 먹나 베르닌이 감시하자 울상이 되어 하소연했다.

 

 

“ 이거 정말 아니야. 넌 감자랑 요구르트 보고 간식이라고 무시하지만 그게 훨씬 건강식이야. 이건 인스턴트잖아... 나트륨도 많이 들어 있고... 그러면서 무조건 밥 챙겨먹어야 된다고... ”

 

“ 인스턴트고 뭐고 넌 동물성 음식, 지방질을 섭취해야 돼! 하루에 두 끼 이상! ”

 

“ 네가 무슨 의사야? 레프 사벨리예비치도 식사량 늘리라고만 했지 동물성이니 지방질이니 얘긴 안 하셨어! ”

 

“ 아니, 다른 의사가 그랬어! 살 빠졌으니까 고기 먹으라고 했어! 그때 레닌그라드에서 그 유리인지 뭔지 하는 의사가 그랬단 말이야. 그러니까 잔말 말고 주는 대로 다 먹어!

 

 

왕재수는 잠잠해졌다. 풀이 죽어서 접시를 들고 수프 국물을 꿀꺽 마셨다. 남은 건더기도 긁어 먹었다. 먹여 놓으니 혈색도 돌고 덜 피곤해 보였다. 운동하고 잔다는 것을 윽박질러서 곧장 잠자리에 들게 만들었다.

 

 

“ 고칼로리의 짜디짠 걸 먹었으니 운동이라도 좀 하고 자야 한다고! ”

 

“ 웃기지 마! 기껏 먹은 거 왜 땀 빼서 도루묵 만들어! 너는 최소한 5킬로 이상 더 늘려야 돼. 그냥 자! 안 그러면 고양이, 곱등이, 바퀴벌레... ”

 

“ 흑... 나빠... ”

 

 

왕재수는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베르닌을 쳐다보았지만 순순히 자러 갔다. 베르닌도 설거지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    *    *

 

 

 

 

금요일 오전이었고 베르닌은 미친 듯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왕재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지금 극장에 좀 와줘, 다닐. ”

 

“ 엉? 무슨 일 있어? 나 지금 바쁜데... ”

 

“ 극장에 와줘. 부탁이야. ”

 

“ 어... 알았어. 점심 때 잠깐 들를게. 나 할 일이 많... ”

 

“ 아니, 안 돼. 지금. 조퇴하고 와. 제발. 부탁... ”

 

“ 무슨 일인지 말해주면 안 돼? ”

 

“ 오면 얘기해줄게. 제발... ”

 

 

왕재수의 말투가 평소와 달랐고 심지어 ‘부탁’이란 단어까지 썼기 때문에 베르닌은 슬며시 불안해졌다. 아무래도 극장에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다. 할 일이 많았지만 일단 모두 미뤘다. 직원의 외출이나 조퇴는 담당 부서장의 결재 권한이었지만, 베르닌은 총괄서무였고 스페호프가 서무란 월요일이나 금요일에 휴가나 조퇴를 하면 안 된다고 귀가 닳도록 얘기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국장에게 갔다. 스페호프는 누군가와 열심히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렇지, 잘했네! 이제 됐어. 그 자식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 줄 수 있겠군. 그나마 남은 끈도 떨어지게 되겠지. 그러면 이제 마음 놓고 없애버릴 수 있을 거야! 스네고로드 쪽을 잘 감시하게! ”

 

 

전화를 끊고 나서 스페호프는 베르닌을 힐끗 바라보았다.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 아, 다닐. 마침 잘 왔군. 그렇지 않아도 올라오라고 할 참이었는데. ”

 

“ 어, 국장님... 무슨 일이라도... ”

 

“ 자네 지금 당장 시립극장으로 가보게. 그 불여우가 일요일 공연을 준비하고 있을 거야. 일요일까지 극장에 붙어 있게나. 준비 상황부터 일요일 공연까지 모든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보고해 주게. 이건 비밀 임무니까 서면 자료는 남기지 말고, 하루에 두 번, 정오와 오후 5시에 내 자리로 전화를 해주게. 전화는 드라마 극장 앞 공중전화를 이용하도록. 알다시피 난 주말에도 출근하니 개의치 말고 전화하게. ”

 

“ 어, 예... 그런데 뭘 보고해야 할지... ”

 

일요일 공연! 그게 어떻게 되어 가는지! 그 자식이 우왕좌왕하는 꼴을 보고하란 말이야. 그리고 혹시라도 그 불여우가 크레믈린이나 레닌그라드 쪽에 전화를 걸지나 않는지도 꼼꼼히 감시하게. 이것은 중요한 임무일세. 어서 가 보게! ”

 

 

그래서 베르닌은 극장으로 갔다. 감독실로 갔지만 비어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왕재수의 비서인 류드밀라가 아는 척을 했다.

 

 

“ 아, 다냐. 왔군요. 미샤가 연습실로 와 달래요. ”

 

“ 연습실이요? ”

 

“ 2층 오른쪽 윙의 제1 연습실로 가면 돼요. 빨리 가보세요, 아까부터 10분마다 전화해서 묻고 있어요. 당신 왔냐고. ”

 

 

베르닌은 2층으로 갔다. 제1 연습실은 복도 끝에 있었는데 아주 넓었다. 레오타드 차림의 무용수들이 바글거렸다. 오른편 구석에서는 나이 든 남녀 두세 명이 무용수들을 몇 명씩 데리고 이것저것 동작을 지도하고 있었다. 왕재수는 왼쪽에 있었다. 빨간색의 커다란 보자기를 들고 있는 남자 무용수들 예닐곱 명을 좌우로 몰아가며 호통을 치고 있었다.

 

 

망토 좀 똑바로 못 돌려? 1막 하이라이트가 뭔데! 투우사 망토춤이라고! 다른 거 아무리 잘 춰도 소용없어, 망토 제대로 못 돌리면 허사란 말이야! 너, 가릭! 어깨를 더 젖혀야지! 자, 음악! ”

 

 

베르닌은 눈을 둥그렇게 뜬 채 건장한 남자들이 빨간 보자기를 휙휙 휘두르며 춤추는 것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왕재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 됐어, 있다가 다시 한 번 볼 거니까 저쪽 가서 연습해와! 가릭 너는 두 배로 연습해. 한 시간 후에도 이 모양이면 넌 빼버릴 거야! 그리고 토냐! 이리 와봐. 32회 푸에테 다시 해보자. ”

 

아우, 감독님. 아무리 해도 안 돼요... 25번으로 살짝 줄여주면 안 될까요? 아잉...

 

 

붉은 곱슬머리의 인형 같은 발레리나 토냐가 속눈썹을 깜박거리며 애교를 부렸다. 왕재수는 서릿발처럼 매섭게 그녀를 야단쳤다.

 

 

어디서 지금 누구한테 아잉이야! 25회 푸에테란 건 들어본 적도 없어!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게 아니고 네가 자꾸 균형을 잃어서 안 되는 거야. 이걸 잘해야 나중에 오딜도 출 거 아니야! ”

 

“ 어머나, 감독님. 정말이에요? 저 이거 잘 하면 백조의 호수 나갈 수 있는 거예요? ”

 

“ ‘잘’ 해야 생각해보는 거지! 키트리도 못 추면서 오데트랑 오딜을 어떻게 추려고 그래! 지금처럼 휘청거려서는 멀었어. ”

 

“ 아아, 저 잘해볼게요. 이거 잘해서 꼭 백조도 추고 말겠어요. ”

 

 

토냐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회전 수를 세어보았다. 30번쯤 돌고는 토냐가 비틀거리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왕재수가 일으켜주었다. 엄청 혼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부드럽게 북돋워주었다.

 

 

“ 아까보다 훨씬 나아졌네. 30번 돌았잖아. 다시 해봐. 회전축을 고정해야지. 발레학교에서 배웠잖아. ”

 

“ 배우긴 했는데요, 그게 벌써 한참 전이고... 극장 와서는 몇 년 동안 군무랑 조역만 시키니까 32회 푸에테는 출 기회가 없어서 다 까먹었어요. ”

 

“ 까먹는 게 어디 있어, 자전거나 수영이랑 똑같은 거지. 일단 시선부터 고쳐야 돼. 지금 내가 하는 거 잘 보면 뭐가 다른지 알 수 있을 거야. 그 부채 좀 줘봐. 카챠, 피아노 좀 다시 쳐줘요. ”

 

 

갑자기 연습실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져서 베르닌은 깜짝 놀랐다. 삼삼오오 연습하던 무용수들과 지도교사들 전부 그쪽으로 몸을 돌리고 왕재수에게 시선을 집중하는 것이었다. 왕재수가 쿵짝거리는 피아노 반주에 맞춰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자 베르닌도 멍해졌다. 왕재수는 채찍질하듯 다리를 뻗었다 구부렸다 하면서 세차고 빠르게 연속 회전을 했고 심지어 부채도 휙휙 폈다 접었다 하는 것이었다. 나중엔 무용수들이 소리 내어 숫자를 셌다. 30번을 넘게 도는데 몸이 전혀 기울어지지도 않았고 동작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베르닌은 발레 무대를 몇 번 보긴 했지만 그렇게 정확하고 동시에 음악과 완전히 일치하는 연속회전은 처음이었다. 32를 외치자마자 무용수들이 짝짝짝 박수를 치고 와 하고 환호를 했다.

 

 

“ 우와, 진짜 장난 아니다! ”

 

“ 너무 멋있어요, 꺅! 감독님 사랑해요~ ”

 

“ 완벽해요! 브라보! ”

 

 

왕재수는 벌컥 짜증을 냈다.

 

 

너희들 누가 여기 보고 있으래! 연습하라 했잖아! 가뜩이나 시간도 없는데. 투우사! 거기 군무! 무희! 꽃 파는 처녀들, 빨랑 연습 안 해? ”

 

 

무용수들이 화들짝 놀라며 다시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왕재수는 언제 화를 냈느냐는 듯 토냐에게 이제 좀 이해가 가느냐고 물었다. 토냐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다시 돌게 시켰더니 정말 이번에는 넘어지지도 않고 그렇게 많이 기울어지지도 않고 서른두 번을 다 돌았다. 왕재수가 칭찬을 해주더니 느낌을 잊지 않도록 지금 더 연습하라고 했다.

 

베르닌은 감명을 받았다. 왕재수의 푸에테도 근사했지만 토냐를 잘 어르고 달래는 기술에도 감탄했다. 남자 무용수들은 쥐 잡듯 하면서 여자에겐 상냥하다니 좀 어이가 없기도 했다. 그때 왕재수가 그를 발견했다. 금세 얼굴이 밝아졌다.

 

 

“ 아, 다닐! 왔구나! 다행이다! ”

 

“ 뭐가 다행이야? 연습 때문에 엄청 바빠 보이는데 날 왜 부른 거야? ”

 

“ 우리 잠깐 얘기 좀 하자. 티무르 보리소비치! 애들 연습 좀 시켜주세요. 저쪽 투우사 애들 끝나면 집시들 춤 좀 봐주시고요. 안나 니콜라예브나, 무희 칼춤이랑 메르세데스 상체 동작 교정 부탁드려요. 전 10분만 얘기 좀 하고 올 테니까. 야, 가릭! 망토 놓치지 말고!

 

 

 

*    *    *

 

 

 

 

왕재수는 베르닌을 데리고 1층으로 내려가더니 구불구불한 복도를 돌아 분장실로 갔다. 문을 잠그더니 번개같이 화장대 위로 기어 올라가 거울 후면과 천정, 전등 주위를 살폈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 야, 너 뭐해? 도청장치라도 찾냐? 여긴 없어. 감독실, 접견실, 극장장실에만 있어. 여기 도청 보고서도 내가 받아서 정리하잖아. ”

 

“ 바보. 더 있어. 백스테이지에 두 개 있고 로열박스에 하나, 제2 연습실에 하나 있다고. 스페호프가 매수한 녀석이 지난주에 추가로 붙여놨어. 있는 거 다 알면서 모르는 척 해주는 거라고. 그래야 그 개자식이 안심하지. 분장실에도 하나쯤 있을 법한데, 여긴 메인이 아니니까 없을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

 

왕재수는 방 안 전체를 샅샅이 뒤진 후 고개를 끄덕였다.

 

 

“ 됐다. 이제 얘기하자. ”

 

“ 대체 뭔데 그래! 바빠 죽겠는데 불러내더니 도청장치나 검사하고! ”

 

“ 너 나 좀 도와줘. 지금 너 밖에 없어. 부탁이야. ”

 

“ 어... 뭔데? ”

 

“ 도와준다고 약속해줘. 제발. ”

 

“ 뭔지를 알아야 약속을 하지! ”

 

“ 너 나 안 도와줄 거야? 나 정말 큰일이란 말이야. 제발... ”

 

 

왕재수가 울상이 되어 그를 쳐다보았다. 또 사슴 같은 눈망울이 되어 눈물을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그거 하지 말라고 했잖아! 나한텐 안 통한다고!

 

“ 접때 보니까 쪼금 살짝 통하는 것 같던데... ”

 

“ 아니야! 안 통해! 솔직히 말을 해줘야 도와주든 말든지 할 거 아냐! ”

 

“ 일요일 공연. 거기 좀 출연해 줘. ”

 

“ 뭐야?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

 

“ 역이 하나 비어. 너 말고는 도저히 생각이 안 나. 제발 부탁이야. 제발... 너네 국장이 공연 망치려고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임기응변으로 지금 다 때려 막는 중인데 죽어도 하나가 해결이 안 돼. 너뿐이야, 다닐. 부탁이야. ”

 

 

베르닌은 완전히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다가 스페호프가 그를 비밀 모니터링 요원으로 급파한 것이 생각났다.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보았지만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 일요일 공연 얘기야? 그거 잘 준비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 무슨 역이 빈다는 거야? 우리 국장은 또 뭐고? 뭘 때려 막아? ”

 

“ 일요일 공연에 모스크바랑 레닌그라드에서 국회의원들 온다고 했잖아. 내 후원자들이었다고. 내가 여기 애들 손봐서 올리는 돈키호테 궁금해서 오는 거잖아. 너네 국장이 그 꼴 보기 싫어서 제대로 방해공작 펴고 있단 말이야. 이번 달 내내 검열국이랑 손잡고 장난 아니었어. 그래도 내 능력으로 잘 헤쳐 왔는데 그 자식이 막판에 제대로 한 방 먹였다고. 일요일 공연 못 올릴 지경까지 갔었어. 지금도 억지로 땜질하고 있는 거야. ”

 

“ 어, 난 이해가 안 되는데. 우리 국장은 공연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알지도 못하는데 뭘 어떻게 방해한다는 거야? 아까 보니까 무용수들 열심히 연습하고 있던데. 검열국에서 이념 문제로 걸어서 승인 안 해준다는 거야? 그 신작처럼? ”

 

“ 아니, 이건 고전 발레라서 이념 문제가 나올 여지가 없어. 볼쇼이랑 키로프에서도 최고 인기 레퍼토리거든. 그런 걸로 안 되니까 그 자식이 머리를 굴렸어. 문화국이랑 농업국을 매수해서 일요일 출연 주역들하고 주요 조역들을 집단농장 투어에 보냈단 말이야. ”

 

“ 어, 나도 그거 알아. 무슨 협조 공문 있었어. 근데 그건 화요일에 갔다가 벌써 돌아온 거 아냐? 공연은 일요일이잖아. ”

 

“ 화요일에 갔었지. 원래대로면 어제 돌아왔어야 돼. 어쩐지 불길해서 내가 걔들 못 가게 하려고 극장장한테 얼마나 화를 냈는데. 극장장이 날 어르고 달래면서 자매도시에서 요청한 건데 어떻게 안 보내느냐고, 애들 목요일 저녁에 돌아오니까 걱정 말라고 애걸을 했어. 난 끝까지 안 보내려고 했는데 그러면 애들 서류에 빨간 줄 간다고 해서 할 수 없이 보냈거든. 근데 그게 다 너네 국장 음모였단 말이야. 애들 지금 거기서 못 나와. 일요일까지 꼼짝도 못해. ”

 

“ 아니, 왜? 어디로 갔는데? ”

 

“ 스네고로드! ”

 

“ 헉, 스네고로드? 맙소사... ”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야 왕재수가 왜 국장의 음모 운운하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스네고로드는 가브릴로프에서 기차로 10시간, 버스로는 15시간 거리에 있는 조그만 집단농장 촌이었다. 시골 동네라 공항은 물론 없었다. 제일 가까운 공항이 가브릴로프 공항이었다. 거기까지 가는 교통수단은 기차와 버스뿐이었다. 커다란 산을 네 개 넘어야 했다. 문제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폭설이 밥 먹듯 오는 동네라는 거였다. 한 번 눈이 오면 어마어마하게 왔고 걸핏하면 도로가 막혀서 고립되곤 했다.

 

 

“ 뉴스 봤어. 거기 지금 눈 장난 아니던데. 수요일 밤부터 어마어마하게 내리고 있잖아. 주말까지 온다던데. ”

 

“ 그러니까. 다 알고 보낸 거야. 더러운 놈들. 길 다 막혔어. 눈이 2미터가 넘게 왔대. 심지어 거기 농장들도 무슨 축대가 무너지고 가축이 파묻혀서 주민들 손이 모자라서 우리 애들도 전부 동원돼서 눈 치우고 있대. 아아... 무용수들이 심지어 눈까지 치우고... 근육 미워지는데. 걔들 죽었다 깨나도 일요일까지 못 돌아와. 더러운 스페호프 자식... 아... ”

 

 

왕재수가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탄식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내 잠도 못 자고 쉬지도 못하면서 공연을 준비했는데 타격이 클 것 같았다. 문득 그는 몇 달 동안 왕재수를 감시하면서 주워들었던 게 생각났다.

 

 

“ 어, 근데 원래 한 작품에는 두 명 이상 캐스팅하지 않아? 오늘 빅토르가 나오면 내일 데니스가 나오고. ”

 

“ 응. 네 말이 맞아. 백조의 호수처럼 자주 올라가는 건 주역이 여러 명 있어서 돌아가면서 맡아. 이번 것처럼 처음 올라가는 건 일단 더블 캐스팅으로 두 명 준비하고는 있었어. 더 하고 싶어도 원체 애들 역량이 딸려서 어려웠거든. 근데 망할 놈들이 대역까지 다 데려갔어. 바질, 키트리, 투우사, 무희, 요정, 돈키호테... 그나마 바질 대역 하나는 남아서 불행 중 다행이야. 군무진도 3분의 1이나 데려갔어. 땜빵 못하게 하려고 한 거야. ”

 

“ 어... 근데 바질은 뭐고 키트리는 뭐야? 투우사는 뭐고? 돈키호테가 주인공 아니야? ”

 

“ 휴... ”

 

 

왕재수는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굉장히 지친 듯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 그래, 뭐... 발레 모르면 그럴 수도 있지. 발레 돈키호테의 주인공은 바질이라는 이발사하고 키트리라는 선술집 딸이야. 둘이 좋아하는 사이인데 바질이 가난하니까 키트리 아빠가 딸을 나이 많고 멍청한 부자한테 시집보내려고 하는 거야. 그래서 바질은 키트리를 잃느니 죽어버리겠다면서 칼로 자살하는 척 하거든. 바질이 죽은 줄 알고 키트리 아빠가 둘의 사랑을 허락하니까 바질이 짠하고 살아나는 거야. 그래서 마지막에 키트리랑 바질이 결혼하고 다들 축하해주면서 끝나.

너도 잠자는 미녀나 호두까기 같은 건 봤잖아. 마지막에 주역 남녀가 결혼식 춤 멋있게 추는 거. 거기에 투우사랑 거리의 무희, 메르세데스가 근사한 춤도 추고. 집시들도 나오고 키트리 친구들 바질 친구들 등등이 군무도 추고 그래. 중간에 돈키호테가 보는 환상 속에서는 요정들도 나오고. 근데 너네 국장은 발레랑 담 쌓아서 바질이 주인공이란 건 몰랐나봐. 바질 역 한 명은 남겨놨더라고. ”

 

“ 그렇구나. 아 복잡해. 근데 아까 보니까 애들 데리고 연습하고 있었잖아. 어떻게 된 거야? 다 끌려갔다며. ”

 

“ 억지로 땜빵하고 있는 거야. 남은 애들 중에 그나마 좀 될 거 같은 애들 뽑아서 부랴부랴 연습시키고 있다고. 군무 모자라는 건 발레학교 고학년들로 채워서 맨 뒤에 세울 거야. 메인 투우사도 군무 투우사 중에서 그나마 젤 키 크고 스타일 좋은 애로 급조하고. 그게 가릭이야. 근데 너무 뻣뻣해서 다른 애로 갈아야 할지 고민이야. 하여튼 걜 뽑아내는 바람에 투우사도 원래 8명인데 6명으로 줄여버렸어. 키트리랑 무희랑 메르세데스랑 숲속 여왕이랑 어제 대역 뽑아서 어찌어찌 땜질하고 있는데 진짜 절망적이야. 그나마 바질이 있어서 다행이야, 초연 시키려던 앤 아니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으니까. 돈키호테는 원래 주역들만 좀 잘 춰주면 그래도 커버되거든. ”

 

“ 어, 그럼 어쨌든 땜질해서 공연은 올릴 수 있는 거잖아. 근데 왜 그렇게 다급하게 전화한 거야? 국장한테서 정보 빼내달라고? ”

 

“ 아니, 그게 아니고. 다른 역은 어떻게든 제2솔리스트랑 코리페에서 뽑아서 다 쑤셔 넣었는데 하나가 죽어도 안 돼. 그래서 네가 필요해. 그 역 좀 맡아 줘, 제발. ”

 

야, 난 춤이라곤 한 번도 춰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대역을 맡니!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

 

아니야, 그 역은 춤 안 춰. 마임만 좀 하면 돼. 진짜 중요한 역이야. 제발. ”

 

“ 춤도 안 추는데 뭐가 중요한 역이라는 거야? 대체 뭔데? ”

 

돈키호테.

 

엥, 돈키호테? 그럼 주인공... 너 미쳤냐?

 

“ 어휴, 너 내 말 제대로 안 들었지. 주인공은 바질이랑 키트리라니까. 여기서 돈키호테는 춤 안 춰. 그냥 얘기를 이끌고 가는 사람이야. 돈키호테가 처음에 환상의 여인 둘시네아를 그리면서 기사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길을 떠나는 걸로 시작하는 거야. 그래서 스페인의 어느 마을 광장에 왔다가 바질이랑 키트리의 사연을 알게 되는 거고. 나중에 바질이 자살 쇼 했을 때 걔들을 도와서 키트리 아버지에게 결혼 허락하라고 협박해서 둘의 사랑을 이루어주는 역할이란 말이야. 춤은 없어. 그냥 갑옷 입고 창 들고 위엄 있게 걸어 다니고 손가락질 좀 하고 요정들 환상 볼 때 팔 뻗으며 허우적거리고 결혼식장에서도 바질이랑 키트리 축복해주면 된다고. 중간에 집시들 장면에서 연극을 진짜로 착각하고는 인형극장 뒤집어엎고 풍차에 달려드는 연기만 조금 하면 돼. 안 어려워. 넌 잘 할 수 있어. ”

 

“ 아니, 잠깐! 누가 한대? 그리고 안 어려운 거면 다른 사람 시키면 되잖아, 왜 할 사람이 없다는 거야! 심지어 춤도 안 춘다며. ”

 

“ 중요한 조건이 하나 있어. 돈키호테는 키가 커야 해. 위엄도 있어야 하고. 근데 지금 남은 애들 중엔 키 큰 애가 없어. 큰 애들은 투우사 춰야 되거든. 나머지는 다 스네고로드에 끌려갔고. 드라마 극장에서 빌려볼까 했는데 거기도 지금 연수 가서 딱 맞는 사람이 없어. 아무리 안 돼도 180은 넘어야 한다고. 너밖에 없어, 다닐. 넌 키도 크고 어깨도 넓고 허우대도 좋잖아. 딱 돈키호테야.

 

“ 싫어. 나 그런 거 못해. 학교 다닐 때도 연극 한 번 안 해 봤는걸. 알잖아, 나 책상물림인 거. ”

 

“ 괜찮아, 그냥 무대에만 올라가주면 돼. ”

 

“ 야, 바이올린 아저씨 있잖아! 키 엄청 크잖아! 그 인간 시켜! ”

 

로만은 절대 안 돼. 그 사람은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잖아. 가뜩이나 우리 오케스트라는 실력이 별로인데 돈키호테는 너무 오랜만에 연주하는 거라서 로만이 빠져버리면 진짜 덜컹거릴 거야. 무용수들 안 그래도 지금 다 초짠데 음악 삐걱거리면 더 망한다고. 부탁이야, 다닐. 네가 안 도와주면 이 공연 못 올려. 나 이거 올리려고 진짜 노력했어. 땜빵으로 들어온 애들도 처음으로 중요한 역 맡았다고 엄청 의욕 충천해 있다고. 제발. 나 정말... ”

 

 

왕재수가 베르닌의 손목을 붙들고 매달렸다. 얼굴이 창백하고 눈이 퀭했다. 왕재수가 다른 건 몰라도 극장 쪽 일이라면 죽어라고 노력한다는 것을 아는 베르닌은 그만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 어, 알았어. 진짜 그냥 올라가기만 하면 되는 거지? ”

 

“ 고마워, 다닐! 진짜 고마워! 올라가기만 하면 돼. 분장 좀 하고. 연기는 지도 좀 받으면 되고... 풍차 매달리는 것만 잘하면 돼. ”

 

앗, 잠깐! 왜 말이 달라지는데! 연기 지도는 뭐고 풍차 매달리는 건 뭐야! ”

 

“ 그럼 무대 위에 올라가서 뻣뻣하게 서 있을래? 극 전개를 위해 최소의 연기는 해야지. 걱정하지 마, 티무르 보리소비치가 잘 가르쳐줄 거야. 풍차는... 돈키호테니까 풍차랑 싸우는 장면이 잠깐 있어. 그냥 소품용 창 들고 풍차로 돌진해서 끝을 붙잡으면 풍차가 돌아가면서 조금 올라갈 거야. 많이도 안 올라가. 반쯤 올라가면 커튼 내려올 거거든. 좀 과장되게 허우적대기만 하면 돼. ”

 

“ 어... 나 자신 없어... ”

 

“ 아니야, 할 수 있어. 나 사실 맨 처음에 너 봤을 때부터 돈키호테 세워보고 싶었어. 돈키호테는 이상주의자에 착한 사람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너랑 어울려. 잘 할 수 있어. ”

 

“ 으응, 너 지금 나 칭찬하는 거야? ”

 

“ 칭찬까지야. 그냥 이미지가 비슷하단 얘기야. ”

 

“ 근데 왜 돈키호테는 대역이 없어? 춤도 안 추는 역인데? ”

 

“ 그게... 스페호프도 너처럼 생각했나봐. 제목이 돈키호테니까 돈키호테가 주인공인 줄 알았는지 더블 캐스팅된 애들 두 명 다 스네고로드로 보내버렸어. 멍청이. 다행이지 뭐. 바질만 있으면 그래도 최악의 재앙은 아니니까. ”

 

“ 바질이 그렇게 중요해? 원래 여주인공이 제일 중요한 거 아니야? ”

 

“ 돈키호테는 좀 달라. 투우사들도 나오고 남자들 춤이 볼만하거든. 특히 바질이 화려한 테크닉을 많이 보여줘. 점프도 하고 회전도 하고 여자를 막 한 손으로 들고. 그래서 바질만 잘 뛰고 투우사가 망토만 잘 돌려줘도 공연 체면은 살릴 수 있거든. 스페호프가 그걸 몰라서 다행이야. ”

 

 

베르닌은 스페호프의 명령을 생각했다. 갑자기 불안해졌다.

 

 

“ 저기, 있잖아. 국장이 이 공연 망치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잖아. 난 너 감시요원인데... 내가 너 도와서 무대 올라가는 거 들키면 나 잘릴 거야. 벌목공도 못하게 될... ”

 

아니야! 절대 그런 일 없게 할 거야! 분장하면 돼! 넌 줄 모르게 해줄게! 그건 걱정하지 마! ”

 

“ 하지만... 정말 나인 줄 모를까? ”

 

“ 모른다니까. 너 전에 나타샤 보러 파티 갔을 때 내가 꾸며주니까 국장이 못 알아봤다고 했잖아. 무대 분장은 훨씬 더 정교하다고. 투구도 쓰고 콧수염도 달 거라서 진짜 못 알아봐. 우리 무용수들도 못 알아보게 해줄게. 혹시라도 스파이가 있을지 모르니까... 지금 나랑 분장사한테 가자. 콧수염 붙이고 눈썹만 좀 그려놔도 넌 줄 모를 거야. ”

 

 

왕재수는 전화를 했다. 잠시 후 나이든 분장사인 타치야나가 나타났다. 왕재수가 빠르게 설명을 하자 타치야나가 끄덕끄덕했다. 베르닌의 얼굴을 잠시 살피더니 연필과 붓을 꺼내 눈썹 위로 슥슥 문질렀다. 아주 짙은 일자 눈썹을 만들어 놓았다. 머리털 위로 스프레이를 좍좍 뿌려서 검은 머리를 희끗희끗하게 바꾸었다. 그러더니 콧수염을 붙였다. 10분 만에 손뼉을 딱 쳤다.

 

 

“ 됐네! 감쪽같지? 완전 딴 사람 됐어. ”

 

“ 정말이네요, 역시 누님 실력은 대단해요. 비밀로 해주시는 거 알죠? ”

 

“ 당연하지, 우리 미셴카가 부탁하는데. 일요일 공연 땐 제대로 분장할 거니까 얘 부모님이 와도 못 알아볼 거야. ”

 

 

베르닌은 거울을 보았다. 새치가 가득한 머리칼에 일자 눈썹, 콧수염을 기른 어딘지 우스꽝스러운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열 살은 늙어보였다! 베르닌은 이왕 분장을 해주는 김에 좀 잘생기게 바꿔주면 안되나 싶었지만 어쨌든 스페호프가 못 알아볼 거라는 생각은 들었다. 타치야나가 나간 후 왕재수가 베르닌을 찬찬히 뜯어보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 생각보다 더 괜찮네. 무대 분장하면 진짜 돈키호테 같겠어. 그럼 이제 이름을 지어야지. ”

 

“ 이름이라니? ”

 

“ 네 이름 그대로 쓰면 국장한테 들키잖아. 주역들은 프로그램 팸플릿이랑 포스터에도 이름 박혀. 지금 빨리 정해야겠다, 오늘 오후에 인쇄 맡길 거니까. ”

 

“ 춤도 안 추는데 왜 내 이름까지 들어가? ”

 

“ 그래도 중요 인물이니까 이름 들어가야 돼. 그리고 애들이랑 같이 연습도 해야 되는데 네 이름 부를 순 없잖아. 걔들도 넌 줄 몰라야 되는데. ”

 

“ 아, 그럼 예명이구나. 뭐라고 해야 멋있을까. ”

 

 

베르닌이 잠시 멋진 영화배우들을 떠올리며 이름을 궁리하고 있는데 왕재수가 손뼉을 딱 쳤다.

 

 

푸고비체프! 하를람피 푸고비체프!

 

야! 그게 뭐야! 절대 싫어! 어디서 그런 이름을... ”

 

“ 왜! 딱인데! ”

 

“ 예명인데 멋있게 지어야지! ”

 

안 돼! 이름 멋있으면 눈에 띈단 말이야. 시골이니까 촌스럽게 지어야 돼! ”

 

그래도 푸고비체프가 뭐야! 어째서 성에 단추가 들어가는데!

 

“ 됐어, 그냥 푸고비체프 해. 돈키호테는 원래 코믹한 역이니까 이름도 좀 웃긴 게 좋아. ”

 

 

베르닌은 항의했지만 왕재수는 굽히지 않았다. 결국 두 손을 든 베르닌은 이름이라도 건져보려고 애걸했다.

 

 

“ 푸고비체프도 모자라서 하를람피가 뭐야... 완전 할아버지 이름이잖아. ”

 

“ 푸고비체프랑 어감도 딱 맞고 좋은데 뭘. 싫으면 아파나시, 니키포르... ”

 

으윽, 그것도 다 촌스러운 이름이잖아. 이름은 그냥 내 이름 쓰면 안 돼? ”

 

“ 안 돼! 꼬리 잡히면 안 되잖아! 하를람피, 아파나시, 니키포르... 아, 그래. 판텔레이몬! 네 개 중에 골라! ”

 

“ 야, 넌 대도시에서 왔다고 으스대는 놈이 어떻게 그런 촌티 나는 이름들만 쏙쏙 뽑아내는 거야! ”

 

“ 아 정말, 나 시간 없어. 애들 가르쳐야 돼! 너도 당장 가서 티무르 보리소비치한테 연기 배워야 되고. 그냥 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 끝!

 

 

졸지에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베르닌은 울상이 되어 왕재수를 따라 연습실로 갔다.

 

 

 

*    *    *

 

 

 

 

왕재수는 베르닌을 지도 교사이자 발레마스터인 티무르 이즈마일로프에게 넘겨주었다. 일반인이라 연기나 춤은 전혀 모르니 돈키호테를 소화할 수 있도록 속성으로 지도해달라고 했다. 이즈마일로프는 체구도 작고 온화한 인상에 이미 예순도 넘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내심 안심했다. 설마 왕재수처럼 사람을 들들 볶겠느냐 싶었다.

 

그러나 첫인상은 사기였다. 이즈마일로프는 그야말로 호랑이 선생이었다! 베르닌은 자세부터 교정을 받아야 했다.

 

 

“ 전 춤을 안 추는데 왜... ”

 

“ 춤을 추든 마임을 하든 무대에 올라가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세가 똑바르고 꼿꼿해야 돼! 어깨가 왜 이리 구부정하담. 똑바로 펴고 고개 들고! 걸을 때도 마찬가지야! 다리를 이렇게 들어! 기사답게! ”

 

 

베르닌은 몇 시간 동안 자세와 걸음걸이 교정을 받았다. 그 이후 기본적인 마임을 배웠다. 엄청나게 어려웠다. 무대로 볼 때는 그냥 지나쳤던 손동작과 몸짓들에 그렇게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니 놀라웠다. 그는 책상물림이라 암기는 금방 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머리와 몸이 따로 논다는 데 있었다. 이즈마일로프는 그를 가르치랴 동시에 다른 무용수들을 교정하랴 정신이 없었다.

 

베르닌이 절망하고 있는데 바질과 키트리를 데리고 연습하던 왕재수가 힐끗 그를 보더니 옆으로 왔다.

 

 

“ 잘 돼가? ”

 

“ 아니, 나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나 때문에 공연 망치면 어떡해. 다른 사람 구하면 안 되니? 마임은 배웠는데 나 너무 몸이 뻣뻣한 거 같아... 생각처럼 안 돼. ”

 

“ 한 번 해봐. 키트리 만나서 둘시네아로 착각하는 장면. ”

 

 

베르닌은 쭈뼛거리다가 토냐를 상대로 동작을 시연했다. 너무 어색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왕재수는 유심히 지켜보았다.

 

 

음, 넌 몸이 뻣뻣한 게 문제가 아니야. 동작이 너무 작아서 그래. 무대에서는 네 생각보다 두 배로 동작을 크게 해야 돼. 표정도 그렇고. 이거 봐. ”

 

 

왕재수가 토냐를 바라보더니 깜짝 놀랐다가 홀린 표정을 지었고 무릎을 꿇으며 절을 한 후 그녀의 손등에 키스를 했다. 베르닌은 그가 멋진 왕자님이 아니라 꿈에 취해 머리가 살짝 이상해진 노인네 돈키호테처럼 보이는 것에 깜짝 놀랐다.

 

 

“ 웃기게 보일까봐 걱정하지 말고 다시 해봐. 웃기게 보이면 더 좋은 거야. 무대는 현실이 아니야. 아무도 너를 몰라. 그러니까 마음을 그냥 놔.

 

 

이상하게 왕재수의 그 말이 위로가 되었다. 베르닌은 다시 해보았다. 왕재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 잘했어. 아까보다 훨씬 나아. 이쪽으로 와서 거울 보면서 연습해. 네 모습을 보면서 하면 어디를 어떻게 고쳐야 할지 보일 거야. ”

 

 

베르닌은 왕재수에게서 칭찬을 들어본 적이 거의 없었던 데다 아무리 봐도 자신의 연기가 엉망이었으므로 좀 멍해졌다. 하지만 용기가 생겼다. 그래서 다시 열심히 연습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왕재수는 바쁘게 연습실을 오가면서 무용수들에게 차례로 동작을 가르치고 연습을 시키고 교정하고 뭔가 베르닌은 이해할 수 없는 용어로 지시를 내렸다. 프랑스어가 난무했다. 무용수들은 강행군에 지쳐서 허덕댔지만 의외로 왕재수의 지시에 잘 따르는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새 다섯 시가 되었다. 왕재수는 무용수들에게 저녁을 먹고 오라고 했다. 퇴근은 없었다! 최소 일곱 시까지 모두 모이라고 했다. 키트리와 투우사, 바질은 심지어 여섯 시까지 오라는 것이었다. 무용수들이 한숨을 쉬며 우르르 몰려나간 후 베르닌은 왕재수의 곁으로 갔다.

 

 

“ 야, 넌 밥 안 먹어? ”

 

“ 별로 생각이 없어. 너 빨리 가서 먹고 와. 있다가 꿈 속 요정 장면이랑 바질 자살 쇼 연기 좀 가르쳐줄게. ”

 

“ 너 그러다 쓰러져. 당장 밥 먹으러 가자! 극장이랑 박물관 사이에 있는 그 식당 가면 되잖아. ”

 

시간이 없어. 선술집이랑 결혼식, 요정 장면에서 사람이 줄었으니까 안무랑 무대 배치를 조금씩 수정해야 돼. 아무도 없을 때 머리 좀 굴려보려고. ”

 

안 돼! 굶고서 무슨 머리를 굴려! 지금 밥 먹으러 안 가면 나 무대 안 올라가! 뱀 껍질...

 

“ 미워... ”

 

 

왕재수는 손등으로 이마를 문지르더니 할 수 없이 베르닌을 따라 나갔다. 베르닌은 왕재수를 식당에 앉혀놓고 주문을 한 후 급하게 드라마 극장 앞 공중전화로 갔다.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스페호프가 받았다.

 

 

“ 그래, 어떻게 됐나? 불여우는 어떤가? ”

 

“ 어, 저... 완전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무슨 스네고로드가 어떻고 주역들이 다 못 나오고 하면서... ”

 

그래! 그래야지! 공연은 취소한다던가? ”

 

“ 저, 그건 아닌 것 같고요. 연습을 하고는 있습니다만... 잘 안 되는 분위기입니다. ”

 

“ 알았네. 제깟 게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봤자. ”

 

 

스페호프는 몇 가지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베르닌은 진땀을 흘리며 대충 둘러댔다.

 

 

좋아. 계속 감시하고 내일 다시 전화로 보고하게. 그러고 보니 하나 놓친 게 있긴 한데 뭐 문제없어. 그건 밤에 해결될 테니까. 수고하게. ”

 

 

그는 전화를 끊고 식당으로 돌아갔다. 어딘지 찜찜했지만 너무 배가 고팠기 때문에 음식이 나오자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살랸카와 햄 치즈 롤을 미친 듯이 흡입했다. 그러다 왕재수를 보니 역시나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베르닌은 엄격한 말투로 경고했다.

 

 

“ 그거 다 먹어. 지금. ”

 

“ 많이 먹었어. ”

 

“ 뭐가 많이 먹어! 게살 샐러드랑 흑빵 한 조각밖에 안 시켰잖아. 한 숟갈 밖에 안 떴잖아! ”

 

“ 다닐, 공연 망치면 어떡하지. ”

 

으잉? 너 그 걱정 때문에 못 먹고 있는 거야? 너 천재잖아. 여태 잘했잖아. ”

 

“ 나야 천재지. 하지만 공연은 나 혼자 하는 게 아니잖아. 이건 그러니까... 축구팀 전체가 다 빠져서 2군도 아니고 3군으로 경기에 내보내는 거 같은 거야. ”

 

“ 너 축구 모르잖아! 축구랑 달라. 걱정 말고 먹어. 할 것도 많은데 먹어야 기운을 차리지. 이러다 네가 아프기라도 해봐, 공연 진짜 못 올려. ”

 

“ 그렇긴 하지. ”

 

 

왕재수는 게살 샐러드를 긁어 먹고는 버터도 없이 흑빵을 맨 입에 쑤셔 넣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공연 때문에 그렇게 수심에 잠긴 모습을 처음 봤기 때문에 의아했다.

 

 

“ 너 높은 사람들 오는데 망칠까봐 걱정돼서 그래? 이번에 잘하면 레닌그라드로 돌아갈 수도 있는데 안 될까봐? ”

 

“ 아니. 기껏 이런 걸로 날 돌려보내 주지야 않겠지. 그건 기대도 안 해. 그보다도... 공연이란 건 관객들을 위한 거야. 5년 만에 처음 보여주는 건데... 극장에 와주는 사람들한테 발레도 재미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열심히 준비했던 건데 망치고 싶지 않아. 그것도 더러운 KGB 앞잡이랑 검열국의 개들 때문에 접고 싶진 않단 말이야. ”

 

“ 꼭 내 앞에서 그렇게 말해야겠냐. 나 KGB인데. ”

 

“ 너는 다르지. ”

 

 

왕재수는 자기 앞에 놓인 우유 컵은 무시하고 베르닌의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 베르닌은 그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 너 차 그만 마셔. 아까도 계속 마시는 거 봤어. ”

 

“ 아니 왜 이제 차까지 못 마시게 하는 거야! ”

 

“ 의사가 카페인 줄이고 우유 마시랬잖아! ”

 

“ 어떻게 그런 것까지 다 알아? 앞잡이... 앞잡이. ”

 

“ 의사 선생님이 너 책상 앞에 써놓고 갔잖아! ”

 

“ 일요일까지만 좀 봐줘. 비상사태니까. 차라도 안 마시면 정신 못 차릴 것 같아. 밥 먹으니까 너무 졸려. ”

 

“ 그렇겠지. 쉬어야 되는데 강행군하고 있으니. 너무 완벽하게 해낼 생각을 버리면 되잖아! 정 안 되면 그냥 공연 미뤄. 그 후원자들한테 사정 얘기하면 이해해 줄 거고. ”

 

너는 이 바닥 사람이 아니니까 이해 못해! 공연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건 내 책임이야. 문제가 일어나면 그걸 해결하는 것도 감독이 해야 할 일이고. 공연은 취소할 수 없어. 관객과의 약속이고...

 

“ 아, 어려워. 맨날 싸가지 없게 굴고 자기만 아는 놈이 그놈의 공연 얘기만 나오면 거품을 무니. 하여튼 우유 마셔. 걱정하지 말고. ”

 

 

왕재수는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차 대신 우유를 마셨다. 극장으로 들어가는 길에 베르닌은 키오스크에서 사과를 한 알 샀다. 옷자락에 슥슥 닦아서 왕재수에게 먹으라고 주었다. 왕재수는 지저분하다면서도 사과를 반으로 쪼개서 한쪽 먹고 남은 한쪽은 베르닌에게 주었다.

 

 

“ 난 밥 많이 먹었어. 너 다 먹어. 그래야 무용수들한테 또 소리 지르지. ”

 

“ 오늘 봄이 왔으면 좋겠어. 그럼 눈 녹아서 주역들이 돌아올 텐데. ”

 

“ 지금 애들 열심히 연습하잖아. 걔들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주역들 돌아오면 바꾸겠다고 그렇게 쉽게 얘기하고. ”

 

“ 걔들한테야 당연히 고맙지. 하지만 무대는 고마운 걸로만 되는 게 아니니까. 실력이 우선이라고. 에이, 걱정해봐야 무슨 소용이야. 연습하면 되겠지. 하여튼 들어가자. 고마워, 하를람피. ”

 

야! 그 이름 좀 부르지 마. 아까 네가 소개해줬을 때 애들 다 웃었어!

 

“ 그러니까 성공이지. ”

 

 

베르닌은 왕재수와 함께 연습실로 갔고 또 열심히 이것저것 배웠다. 열 시가 되었을 때 왕재수가 그에게 집에 가라고 했다.

 

 

“ 너는! ”

 

“ 난 요정 군무만 좀 더 잡아주고 갈게. 티무르 보리소비치가 태워다 주신댔으니까 빨리 가. 내일도 연습할 거 많으니까 빨리 가서 쉬어. ”

 

 

 

그래서 베르닌은 집에 갔다. 샤워를 하자마자 그대로 뻗었다. 곤하게 자다가 새벽 두 시에 퍼뜩 깼다. 왕재수의 집으로 가보았다. 물론 텅 비어 있었다.

 

 

“ 에이, 이 망할 자식. ”

 

 

그는 차를 몰고 극장으로 갔다. 연습실 불은 다 꺼져 있었기 때문에 감독실로 가 보았다. 왕재수가 소파도 아니고 카펫 바닥에 엎드려서 자고 있었다. 요정 군무 배치도를 휘갈겨 그려놓은 종이가 옆에 나뒹굴고 있었다. 베르닌은 그의 어깨를 살살 흔들면서 깨워보았다.

 

 

“ 야, 일어나. 집에 가게. ”

 

“ 으응... 나 안 자. 일하고 있어. ”

 

“ 뭐가 일하고 있어! 미쳤냐, 이러다 또 얼마나 아프려고! ”

 

“ 안 잔다고... ”

 

“ 잠꼬대도 어쩌면 이렇게 진짜같이 하냐. ”

 

 

베르닌은 왕재수를 코트로 둘둘 말아서 등에 업고 차로 갔다. 찬바람을 맞으면서도 깨지 않는 것을 보니 정말 피곤했던 것 같았다. 왕재수를 침대에 뉘어주고 이불을 덮어준 후 베르닌은 자기 방으로 돌아갔고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FIN

- 2015. 4. 5 ~ 4. 9 -

 

 

 

...

 

이야기는 20편으로 이어진다. 과연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베르닌이 제대로 무대에 올라가 돈키호테 역을 소화할 수 있을지!!!

 

..

 

맨처음에 언급했듯 푸고비차 는 노어로 단추란 뜻이다. 그러므로 푸고비체프는 '단추남'~ (진짜 있는 성이다!)

하를람피를 비롯해 왕재수가 언급하는 이름들은 다들 좀 노티나는 이름들임 :)

 

..

 

스페호프가 공연을 망치려고 무용수들을 보낸 곳인 '스네고로드'는 러시아어로 '눈'을 나타내는 '스네그'와 '도시'를 나타내는 '고로드'를 합성해 내가 만든 이름이다. 한마디로 눈의 도시!! 그러니 폭설에 갇힐 수밖에 :)

 

..

 

왕재수가 준비하고 있는 발레 '돈키호테'는 우리 나라에서도 국립발레단이나 유니버설발레단이 종종 공연한다. 고전발레라면 하얀 의상 입은 발레리나들이 우아하게 포즈 취하는 좀 지루한 무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진입장벽을 낮추기 위해 권해드리는 발레이다. 일단 음악도 흥겹고, 스페인풍 의상과 춤도 신나고, 망토를 펄럭이는 투우사들은 남성적이고 화려하고, 군무도 신이 나고, 주역인 바질과 키트리의 춤도 흥겹고 화려하다.

 

미하일 바리쉬니코프가 미국으로 망명해서 ABT에서 돈키호테를 올리고 지금도 성황리에 공연되고는 있지만, 각국 내노라하는 발레단이라면 이 레퍼토리를 보유하고 있지만 그래도 최고는 역시 마린스키 발레단이다. 오죽하면 옛날부터 마린스키의 트레이드마크로 백조의 호수와 돈키호테를 꼽았을까.

 

이 시리즈와 본편에서 왕재수 미샤는 마린스키 극장의 소련 시절 이름인 키로프 극장 출신의 톱스타였기 때문에 물론 마린스키 버전의 돈키호테를 준비하고 있다. 당연히 촌도시 가브릴로프 극장의 수준은 키로프와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ㅠㅠ

 

원래 본편의 가브릴로프 이야기에서도 미샤는 극장 레퍼토리를 확장하고 관객들의 발레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오랫동안 사장되어 있었던 돈키호테를 부활시킨다... 사실 아직 그 부분까지는 쓰지도 못했는데 대신 서무 시리즈에서 쓰고 있네. (이게 뭐야.. 엉엉 주객전도) 물론 본편에서는 돈키호테 올릴 때 이런 스네고로드 사건이나 무용수 땜빵 등은 안 일어난다만..

 

..

 

베르닌이 맡게 되는 돈키호테가 어떤 모습인지, 그는 어떤 연기를 해야 하는지 등은 이 다음 포스팅에 따로 사진과 영상을 올려보겠다~

그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694

 

여기서는 사진 하나만~~

 

요런 모습. 중간에 있는 키 큰 검정옷 차림 남자가 돈키호테. 마린스키 발레단의 바짐 벨랴예프.

왼편 키작고 땅딸막한 남자는 산초. 오른편 노란색 의상의 우스꽝스러운 남자는 키트리에게 청혼하는 부유한 얼간이 가마슈.

 

..

 

 

댓글은 언제나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

 

 

:
Posted by liontamer

 

이제 목요일이다. 이틀만 버티면 주말이다. 매우 힘든 일주일을 보내고 있다만. 월요일이 돌아오듯 서무 시리즈도 돌아와서 이제 18편이다. 쓰고 보니 많이도 썼네.

 

서무 시리즈도 재미로 쓰고는 있지만 회가 거듭되다보니 시리즈의 당연한 특성상 인물도 늘어나고 관계도 확장된다. 에피소드별로 내용이나 스타일, 무게, 문체, 장르 등등이 조금씩 다르기도 하고. 특히 18편은 이전 에피소드들과는 성격이나 양태가 조금보다는 더 다른 편이다.

 

어쨌든 18편~ 많은 직장인들에게는 괴로움의 상징인 회식! 심지어 각자 회비를 걷는다... 당일 통보 회식!!! 총괄서무인 단추청년 베르닌은 물론 회비도 걷어야 하는 입장이다. 합동회식을 하기로 했는데 그나마 옆부서가 알렉산드라가 근무하는 대외교류부라서 다행인 건지 아닌건지...

 

(제목과 에피소드 도입부에 나오는 선술집 이름인 '메드베지'는 러시아어로 '곰'이란 뜻이다)

(사샤, 사셴카는 모두 알렉산드라의 애칭이다)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그러던 어느날, 베르닌이 서무로 근무하는 감시분석부는 옆부서인 대외교류부와 합동회식을 하게 되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18

 

 

 

 

 

서무의 슬픔

-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그 날도 베르닌은 자질구레한 일들로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오후 4시가 되었을 때 감시분석부장이 책상을 탁탁 두들겼다.

 

“ 자, 주목! 오늘은 모두 퇴근 후 메드베지로 집합. 부서 간 친목 도모를 위해 오늘 대외교류부와 공동 회식을 하기로 했네! 회비는 각 5루블. 5시 정각에 다 정리하고 나올 것. 개인 사정으로 빠지는 것은 용납되지 않네! 서무는 지금 회비를 걷을 것. 대외교류부 쪽은 그쪽 서무가 걷을 거고, 다닐 자네가 총괄이니까 전체 비용을 관리하게. 이상! ”

 

베르닌은 술자리를 딱히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부서 회식은 예외였다. 선배들은 계속 폭탄주를 권했고 ‘내가 젊었을 때는‘으로 시작되는 비슷비슷한 레퍼토리가 끝도 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미 얼마 전 발따예프 등 세 명을 모시고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출장을 가서 평생 마실 술을 다 먹고 온갖 고생을 했기 때문에 더욱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전 부서가 다 참석하는데 심지어 막내인 그가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그는 극장에 전화를 했다. 왕재수에게 회식 때문에 오늘은 데리러 못 가고 저녁도 못 챙겨준다고 했다. 수화기 너머로 실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오늘 블린 구워준다더니... ”

 

“ 내일 해줄게. ”

 

“ 알았어. ”

 

“ 야, 너 내가 안 챙겨준다고 저녁 굶으면 바퀴벌레 곱등이를...

 

 

왕재수는 이미 전화를 끊은 후였다. 베르닌은 조금 걱정이 되어서 코즐로프에게 전화를 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바이올린 깡패야 왕재수처럼 사무실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오케스트라 연습실에 있을 테니 별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 회비를 걷으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어서 왕재수에 대해서는 곧 잊어버렸다.

 

대외교류부 쪽 회비를 수령하기 위해 옆방으로 가보니 알렉산드라가 분주하게 책상 사이를 돌아다니며 돈을 걷고 있었다. 베르닌은 곧 되겠거니 하고 기다렸는데 마지막 책상에 앉아 있는 만년과장 아나톨리 타라카노프가 알렉산드라에게 짜증을 냈다.

 

 

“ 지금 돈 없다고 했잖아. 누가 매일 지갑을 가득 채우고 다니나? 그런 건 싱글 여직원이나 그런 거지,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허덕이는 남자가 월말에 무슨 돈이 있나! ”

 

“ 아나톨리 표도로비치, 그러면 어떻게 하나요. 전부 5루블씩 내라는데. ”

 

“ 일단 네가 내! 서무잖아! 나중에 줄 테니까! ”

 

“ 지난번 회식 때도 5루블 내드렸는데 갚지 않으셨잖아요. ”

 

“ 몰아서 주면 되잖아! 너 지금 날 의심하는 거야? 허참, 그깟 5루블에 선배를 아주 도둑놈 취급을 하는군! 이래서 여자애들이란. ”

 

“ 제가 여자란 것하고 회비하고 무슨 상관인가요? ”

 

“ 남자애들은 쪼잔하지 않거든! 네 선배님! 하고 제깍제깍 회비를 내준단 말이야! 남자들 사이에선 돈보다 의리거든! 어련히 알아서 줄까 하고 달라는 말도 안 해! ”

 

 

알렉산드라는 타라카노프를 빤히 노려보았다. 그녀가 물러설 기색을 보이지 않자 타라카노프는 버럭 화를 냈다.

 

 

“ 뭘 그렇게 쳐다보고 있는 거야! 좀 빌려달라고 했잖아! ”

 

“ 저도 없어요, 5루블. 제 거 내고 나니 돈이 없거든요. ”

 

“ 혼자 사는 여자가 쓸 데가 어디 있다고 지갑에 10루블도 없어! 난 모르니까 다른 애들한테 빌려서 메꾸든지. ”

 

 

알렉산드라는 화가 잔뜩 난 것 같았지만 다행히 옆자리에 앉아 있던 세묜 모브린이 주머니를 뒤지더니 5루블을 꺼내 주었다.

 

 

“ 자, 사셴카. 내가 빌려줄게. 아나톨리 표도로비치, 천천히 갚으시죠. ”

 

“ 그렇지! 이래야지! 동기인데 이렇게 차이가 나서야! 역시 여자들이란. ”

 

 

알렉산드라는 돈을 봉투에 쑤셔 넣더니 고개를 홱 돌리고 나가버렸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며 복도로 따라 나갔다. 회비도 받아야 했지만 알렉산드라가 걱정이 되어서였다. 알렉산드라는 탕비실로 들어가더니 문을 닫아 버렸다. 베르닌은 바깥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알렉산드라가 나왔다.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베르닌을 보더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 아, 다냐. 맞아, 우리 쪽 회비 줘야 되는데. 너 보고 한꺼번에 관리하랬지. 그냥 내가 할까? 너 안 그래도 바쁘잖아. ”

 

“ 아니에요, 선배님. 저한테 주세요. 저희 부서 사람들이 더 많잖아요. ”

 

 

알렉산드라가 봉투를 건네주었다. 한숨을 폭 쉬었다.

 

 

“ 정말 싫다. 그것도 퇴근 한 시간 전에 갑자기 회식이라니... 오늘 원래 약속도 있었는데... ”

 

“ 어, 그럼 선배님 먼저 가시면 안 되나요? 선약이 있는 거잖아요. ”

 

“ 개인 사정으로 빠지는 거 용납 안 된다고 부장이 난리였어. ”

 

“ 하긴, 우리도 그랬어요. 그럼 얼굴만 가서 비추고 먼저 가시면... ”

 

“ 나 지난번 회식 때도 집안일 때문에 먼저 나갔다가 엄청 욕먹었거든. 오늘까지 그러면 정말 찍힐 거야. 안 그래도 우리 부서는 여직원 나 하나뿐이라서 걸핏하면 여자라서 그렇다고 욕먹거든. ”

 

“ 아, 그 부서는 그런 게 또 있군요. 이해가 안 되네. 여자인 거랑 무슨 상관이지? 아까 아나톨리 선배도 말도 안 되는 트집 잡더니. 우리 부서는 다 남자들뿐이라 그런 분위기인 줄 몰랐어요. 등록부서랑 현장부서엔 그래도 여직원들 많아서 좀 나을 텐데. 선배님, 그래도 1차만 하고 가실 수 있게 문가에 앉으세요. ”

 

“ 고마워, 다냐. 슬슬 정리하고 갈 준비하자. 제발 오늘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사람들 이상한 짓 좀 하지 말고. 난 회식이 제일 싫어. 국장 설교보다 더 싫어. ”

 

어휴, 전 국장 설교가 세상에서 제일 싫은데... 회식은 그에 비하면 양반... ”

 

 

알렉산드라는 희미하게 웃더니 자기 부서로 돌아갔다. 베르닌도 회비 봉투와 함께 자리로 돌아와 업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   *   *

 

 

 

메드베지는 볼쇼이 대로와 배나무 거리 교차로 근처에 있는 선술집으로 KGB와 의회 직원들이 자주 이용하는 곳이었다. 이름 그대로 홀 벽에는 곰 가죽이 하나 걸려 있었고 깔개도 있었다. 아무래도 KGB 쪽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다 보니 일반인 손님들은 꺼리는 곳이었다. 스페호프도 좋아하는 장소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내심 국장이 회식에 끼겠다고 나타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모든 부서원들이 똑같은 마음이었는지, 스페호프가 시 의회 의장과 저녁 약속이 생겨서 다른 식당에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들 환호성을 질렀다.

 

 

대외교류부장과 감시분석부장은 학창 시절부터 동기 사이인데다 성격도 잘 맞아서 툭하면 의기투합하는 사이였다. 스페호프에 대해서야 KGB 내의 모든 간부들 및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뿌리 깊은 반감을 품고 있었지만 물론 국장의 카리스마에 대들만큼 배포가 크지는 않았다. 이제껏 블라지미르 스페호프에게 대들었던 유일한 인물은 바냐 투레츠키 뿐이었지만 그는 이미 퇴사해서 전설의 서무로 남았고 베르닌이 보기에 그 전설은 영영 깨지지 않을 것 같았다.

 

두 부장은 오른팔로 여기는 부하 직원들을 하나씩 옆에 앉혀 놓고 모두에게 건배를 제의한 후 신나게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다른 직원들도 긴 테이블에 둘러앉아 파도타기를 하기 시작했다. 운 나쁘게도 베르닌은 출장을 다녀온 후 이상하게 친한 척하는 발따예프와 특별감사 때 그를 아주 힘들게 했던 두블린스키 사이에 앉아 있었다. 그는 원래 알렉산드라와 함께 문가에 앉을 생각이었다. 자신의 키와 체구로 가려주면 그녀가 눈에 띄지 않고 중간에 살짝 나갈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들어가자마자 발따예프에게 걸려들어서 질질 끌려갔고 문가에 앉으려던 알렉산드라도 대외교류부 직원들이 그래도 여자가 있어야 분위기가 산다고 떠들어대는 통에 중간 자리로 붙들려갔다.

 

 

베르닌은 한참동안 선배들 사이에 끼어서 술을 마시고 술을 따라주고 뻔한 레퍼토리를 듣고 때때로 술을 더 시키고 안주를 시키러 가는 등 정신이 없었다. 발따예프는 레닌그라드 출장 때 갔었던 마지막 선술집, 즉 목걸이와 그곳의 근사한 감자튀김에 대해 뻥을 10배는 섞어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베르닌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싶었지만 꾹 참고 일어나 혹시 술이 모자라지 않나 살핀다는 핑계로 다른 테이블 쪽을 돌았다.

 

 

그러다가 알렉산드라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아나톨리 타라카노프가 그녀에게 계속 말을 걸고 있었는데 같은 부서 직원들도 끼어서 웃고 있었기 때문에 얼핏 보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빈 술병을 치우러 가까이 가서 대화를 듣자 그렇게 기분 좋은 내용은 아니었다. 술이 들어가 얼굴이 불그스름해진 타라카노프가 알렉산드라를 집적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 우리 사셴카는 언제 시집을 가려고 그러는지. 여자 나이 서른이면 볼 장 다 본 건데 참 걱정이네. 어리고 예쁜 여자애들이 득실대는데 어쩌려고 그러나. 좋은 값 쳐줄 때 갔어야 되는데. ”

 

“ 맞아, 사샤도 빨리 결혼해야 할 텐데. 남자들이 눈이 삐었나, 이만하면 동안이고 귀여운데 왜 남자가 안 생길까. 우리 회사쯤이면 직장 좋지, 안정적이지 괜찮은데. ”

 

 

그러자 타라카노프가 혀를 찼다.

 

 

“ 귀여우면 뭘 해, 하고 다니는 걸 좀 보게. 일단 얘는 입고 다니는 걸 고쳐야 돼. 맨날 스웨터에 바지에, 아니면 치마도 너무 통 넓은 거. 다리도 다 가리는 두꺼운 스타킹에, 그 투박한 단화는 또 뭔지. 가뜩이나 키도 작으니 신발도 뾰족구두를 신어야 조금이라도 늘씬해 보이고 다리도 예뻐 보일 판에 여학생도 아니고... 화장도 잘 안 하고. 그러니 남자들이 못 알아보지! ”

 

“ 제가 어떻게 하고 다니든 제 마음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아나톨리 표도로비치. ”

 

 

알렉산드라가 싸늘하게 말했다. 무척 화가 난 표정이었다. 하지만 타라카노프는 개의치 않았다. 즐겁게 말을 이었다.

 

 

“ 내가 말이야, 저번에 건강 검진하러 갔을 때 보니까 사셴카가 대기실에서 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진짜 볼만하더라고. 밤에 같이 있으면 남자들이 은근히 좋아할 타입인데 그 좋은 걸 다 가리고 있으니 원. 애가 작아서 눈에 안 띄어서 그런 거지 좀 꾸며놓고 노출 좀 시켜놓으면 글래머라니까. ”

 

 

다른 남자 직원들이 맞장구를 쳤다.

 

 

“ 그래그래, 맞아! 알렉산드라가 은근히 몸매가 좋아. 지난번에 우리 행사 때문에 원피스를 입고 왔는데 다리도 예쁘고 볼륨도 있고 아주 눈이 즐겁더라고! 너 평소에도 그렇게 좀 입고 다녀. 그래야 딴 부서 어린 여자애들한테도 안 꿀리지. ”

 

“ 그러니까, 옷 좀 신경 쓰고 성격만 좀 고치라 이거지. 선배들한테 틱틱대고 까칠하게 굴고. 애교도 없고. 계집애가 좀 눈웃음도 치고 목소리도 상냥하게 내고 애교 좀 부리면 어련히 남자들이 잘해주려고! 우리한테도 좀 귀엽게 굴면 얼마나 우리가 잘 도와주겠어! ”

 

 

알렉산드라가 낮게 쏘아붙였다.

 

 

“ 저는 일하러 직장에 오는 거지 선배님들에게 애교 부리러 오는 게 아니에요. 제 일만 잘하면 되는 거죠! ”

 

“ 꼭 인기 없고 애인 없는 여자들이 저런다니까. 이봐, 사셴카. 난 정말 네가 여동생 같아서 하는 말이야. 귀여워서 그런다니까. 다 널 위해서 하는 충고니까 내 말 들어. 그래야 노처녀 신세에서도 탈출하고 선배들에게 귀염도 받지. 옷도 이런 거 입고 다니지 말고. 볼륨이 이렇게 빵빵한데 왜 가리고 다니냐는 거지. ”

 

 

타라카노프가 알렉산드라를 툭툭 쳤다. 미묘하게 가슴 언저리를 건드렸기 때문에 알렉산드라가 확 째려보았지만 아까 돈을 빌려주었던 모브린이 재빨리 술병을 들었다.

 

 

“ 어, 다들 술잔이 비었네요! 채워 드릴 테니 다 같이 건배하시죠. 사셴카가 알면 알수록 진짜 귀여운 앤 건 맞아요. 저희 동기라서 잘 알거든요. 우리 사셴카를 위해 건배! ”

 

 

모브린 덕에 분위기가 좀 나아지는가 싶었지만 건배를 한 후 타라카노프가 알렉산드라의 어깨를 다시 토닥거리며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 너 내 말 그냥 흘려듣지 마, 다 너 좋으라고 해주는 말이니까. 계집애가 그렇게 뻣뻣하게 굴면 승진도 못해. 봐봐, 너 동기들 다 승급했는데 너만 아직도 서무나 하고 있고 말야. 여자가 좀 나긋나긋한 맛도 있고 귀염 부릴 줄도 알아야지. 회식도 툭하면 빠지고 말이지. 사회생활 그렇게 하면 쓰겠어? 선배들하고 술도 가끔 마셔주고. 이거 봐, 한 잔 마시니까 얼굴도 빨개지고 훨씬 귀여워지잖아. 이래야 남자들이 잘해주지. 예쁜 척 좀 하고 다니란 말이야. ”

 

 

알렉산드라는 이를 악물고 꾹 참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타라카노프가 어깨를 껴안고 뺨을 비비며 한 손으로 허벅지를 움켜쥐었을 때는 참지 못했다. 베르닌이 이건 너무 심하다 싶어서 그 느물거리는 선배를 떼어놓으려고 다가갔을 때 알렉산드라가 두 손으로 타라카노프를 홱 떠밀었다.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 그만 좀 하라고요! 지저분하게 왜 이러는 거예요! 선배면 다야? 왜 성희롱이에요! ”

 

“ 아니, 얘가 왜 이래! 취했나, 감히 선배한테 소리 지르고 밀치고! 술자리에서 여자가 이 정도는 해줘야 술맛이 나지! 조직생활 처음 하는 것도 아니고. 너 남자랑 안 놀아봤어? 기껏 귀여워서 좀 툭툭 친 거 가지고! 이런 거 가지고 난리를 치면 애인이랑 잠자리는 어떻게 하나? ”

 

 

타라카노프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버럭 고함을 치더니 알렉산드라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뺨에 얼굴을 마주 대며 등을 쓰다듬고 몸을 비벼댔다. 베르닌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뒤에서 타라카노프를 붙잡고 확 잡아당겼다.

 

 

“ 아나톨리 표도로비치, 왜 이러시나요. 많이 취하셨네요! ”

 

뭐야, 너는! 에이, 재미없게!

 

 

타라카노프가 성을 내며 베르닌을 밀어내려고 했다. 물론 베르닌은 놓아주지 않았다. 타라카노프를 꽉 붙들고 있는데 알렉산드라가 벌떡 일어나더니 있는 힘껏 그의 뺨을 후려쳤다. 부들부들 떨면서 눈물을 글썽이며 소리쳤다.

 

 

당신 고발할 거야! 이 더러운 인간! 참을 만큼 참았어! 한두 번도 아니고 당신 같은 개자식은 쓴 맛을 봐야 돼!

 

뭐야? 이 조그만 계집애가 대체 뭐라는 거야! 술자리 망쳐놓고 뭐? 개자식? 지금 선배한테 뭐라 했어!

 

 

타라카노프가 분통을 터뜨리며 솟구쳐 일어나려는 것을 베르닌이 두 팔로 꽉 끌어안고 막는 동안 동료 직원들과 대외교류부장이 주위로 다가왔다. 부장이 알렉산드라를 꾸짖었다.

 

 

아니, 이게 웬 소란이야! 기분 좋게 회식하는 자리에서 왜 선배에게 막말을 하고 손찌검까지 하나! 하여튼 여자애가 성질이 더러워서... ”

 

 

알렉산드라는 부장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의자를 콰당탕 넘어뜨리고 테이블에 부딪치면서 홀을 나가버렸다. 타라카노프가 욕설을 퍼부었지만 돌아보지도 않았다. 알렉산드라가 나간 후 직원들이 삼삼오오 타라카노프 곁으로 다가왔다. 모브린이 베르닌에게 그만 놔주라면서 어깨를 툭 쳤다.

 

 

“ 안돼요, 아나톨리 표도로비치가 많이 취했어요. 알렉산드라 선배를 따라 나가서 또 싸움을 걸면 어떡해요. ”

 

“ 싸움은 무슨. 둘 다 그냥 취해서 그런 건데. 그러려니 하고 넘겨. 자고 나면 다 잊어버릴 거. 술자리가 그렇지 뭐. 빨리 놔드려. 덩치도 커가지고 그렇게 꽉 잡고 있으면 선배님 어깨에 멍들어. ”

 

“ 하지만... 알렉산드라 선배는 취하지 않았어요. 이건 아나톨리 표도로비치가 잘못... ”

 

“ 웬 과민반응이야. 술자리에서 일어난 일에 잘못이 어디 있담. 자, 분위기가 좀 꿀꿀해졌네요. 잔이나 채우시죠. 아직 술도 많이 남았는데. ”

 

 

모브린이 술병을 들자 다들 그래그래 하며 자리로 돌아갔고 잔을 들었다. 타라카노프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씩씩거리며 재수 없는 계집애니 못돼먹은 년이니 하고 욕을 하고 있었지만 부장이 ‘아나톨리 자네도 진정하고 한 잔 하지’ 라고 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잔을 채워달라며 내밀었다. 발따예프가 베르닌을 불렀다.

 

 

“ 이봐, 다냐! 자넨 왜 남의 부서 일에 간섭하고 그러나! 빨리 자리로 돌아오란 말이야! 우리 안주 다 떨어졌으니까 오면서 칼바사 좀 더 시키고! ”

 

 

베르닌은 주방 쪽으로 가서 안주를 더 시켰다. 그리고는 슬쩍 밖으로 나가 보았다. 혹시나 알렉산드라가 있나 술집 주위를 한 바퀴 돌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베르닌은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고 걱정이 되었다. 알렉산드라는 항상 그에게 잘해주는 선배였다. 입사 초기에 아무 것도 몰라서 헤매고 툭하면 스페호프에게 불려가 행정의 기본에 대해 설교를 듣고 부서장에게 깨질 때도 알게 모르게 그의 업무를 도와주고 서무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조곤조곤 알려줘서 항상 고마운 마음이 있었다. 운이 나빠서 6년째 서무를 맡고 있는데다 남자들만 있는 대외교류부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것 같긴 했지만 타라카노프가 저런 식으로 못살게 군다는 건 전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베르닌은 버스 정류장으로 가볼까 했지만 그때 담배를 피우러 나왔던 두블린스키가 그를 발견하고는 등짝을 철썩 때렸다.

 

 

“ 야! 서무가 여기 나와 있으면 어떡하냐! 이제 1차 파장하는 분위기니까 가서 돈부터 내고! 2차는 알료누슈카 이바누슈카로 가기로 했으니까 빨랑 가서 자리 잡아놔! ”

 

 

그래서 베르닌은 결국 돈을 치른 후 2차를 갔고 거기서 폭탄주 몇 잔을 연속으로 마시고 또 무슨 게임에서 져서 특제 폭탄주를 한 사발 원 샷한 후 화장실에 가서 두 번 토하고 비틀거리며 자정이 넘어 귀가했다.

 

 

 

*    *    *

 

 

 

 

다음날 베르닌은 알람 소리에 끙끙거리며 깨어났다. 숙취 때문에 죽을 지경이었다. 술도 깨지 않았고 어지러워서 도저히 차를 가지고 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왕재수의 집으로 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답이 없었다. 혹시나 해서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았다. 텅 비어 있고 침실에도 잠잔 흔적이 없는 걸 보니 간밤에는 코즐로프의 아파트에서 잔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극장까지 못 태워다 준다는 얘기에 왕재수가 짜증을 냈을 테니까.

 

 

베르닌은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붙잡고 간신히 출근했다. 심지어 검열국에 들러 스페호프가 시킨 사적인 자료 심부름까지 하고 가야 했다. 게다가 거기서 마주친 주브치크가 지난번 출장 얘기를 늘어놓으며 붙잡는 바람에 시간이 더 걸렸다. 그는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사무실에 도착했다.

 

 

막 자리에 와서 앉았는데 사무실이 시끌시끌했다. 부장이 자리를 비우긴 했지만 평소보다 훨씬 소란스러웠기 때문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간간이 알렉산드라와 타라카노프의 이름이 들려왔기 때문에 결국 그는 옆자리의 콜로긴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았다.

 

 

“ 아, 너 늦게 와서 모르는구나. 대외교류부 지금 발칵 뒤집혔거든. 어제 회식 때 너 있었지? ”

 

“ 예, 제가 회비도 걷고 계산도 했잖아요. 2차 때 너무 마셔서 지금도 힘들어요. ”

 

“ 알렉산드라 그 계집애가 아주 보통내기가 아니더라고. 그 맹랑한 게 감사실에 아나톨리를 성희롱으로 찔렀어. 아예 진정서도 내고 인민재판 회부까지 요청했더라고. 술자리에서 일어난 일 가지고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을 하니 허참 앞으로 회식이나 하겠나. 여직원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

 

 

베르닌은 대외교류부로 가보았다. 역시 시끌시끌했다. 알렉산드라는 보이지 않았다. 타라카노프는 부장과 면담 중이라고 했다. 그나마 안면이 있는 모브린에게 물었다.

 

 

“ 저, 알렉산드라 선배는 어디 있나요? ”

 

“ 몰라. 등사실에 갔나. ”

 

“ 어떻게 되는 건가요? 감사실... 인민재판... ”

 

“ 재판은 무슨 재판이야. 그런 거 가지고 인민재판까지 가면 우리 KGB 체면이 뭐가 되라고. 사셴카가 어제 좀 예민해서 발끈했던 건데... 잘 달래면 풀어질 거야. 자네도 모른 척하고 있어. ”

 

 

그때 대외교류부장이 나왔다. 모브린에게 손짓을 하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 걔 어디 갔어? ”

 

모르겠습니다. 20분 전쯤 서류 가지고 나갔는데. 등사하러 간 것 같네요. ”

 

“ 감사실에 또 가 있는 거 아냐? 자네가 점심이라도 먹으면서 얘기해서 취하시켜. 그래도 자네 동기잖아. 직원들 사기 띄워주려고 없는 돈에 회식도 한 건데 계집애가 웬 소란인지... ”

 

“ 너무 걱정 마시죠, 말씀대로 제가 잘 얘기해보겠습니다. 사샤가 어린애도 아니고 조직 생활 한두 해 한 것도 아닌데 얘기하면 알아듣겠죠. 오후에 부장님께 가보라고 하겠습니다. ”

 

“ 젠장, 이래서 여직원은 받는 게 아니야. 감시분석부처럼 남자들만 있어야 조용한데. 계집애가 항상 매사에 모나게 굴더니만. 골치 아파 죽겠네. ”

 

 

베르닌은 복도로 나갔다. 등사실로 가보았다. 비어 있었다. 탕비실에도 가보았지만 알렉산드라는 없었다. 건물 전체를 돌아보았지만 그녀를 찾을 수가 없었다. 감사실에 있나 싶어 슬며시 그 앞으로 가보았지만 문도 열려 있고 감사부장과 직원들은 일찍 점심을 먹으러 갔는지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너무 걱정이 되어서 바깥으로 나가 보았다. 서무들의 안식처인 배추밭 쪽으로 가니 알렉산드라가 넓적한 돌멩이 위에 걸터앉아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있었다. 검정고양이는 사료를 먹다가 베르닌을 보고는 초록색 눈을 가늘게 치켜뜨고 천천히 다가왔다. 베르닌은 호주머니를 뒤졌지만 줄 게 없었다.

 

 

“ 어, 미안. 미셴카. 오늘은 없는데. 아직 점심시간 전이라 못 챙겼어. ”

 

“ 냐아옹... ”

 

 

고양이는 기대한 적도 없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는 사뿐사뿐 걸어서 배추밭 너머로 사라졌다. 그는 머뭇거리며 알렉산드라의 곁으로 다가갔다. 알렉산드라는 얼굴이 창백했고 뺨이 쏙 들어가 있었다. 눈도 퉁퉁 부어 있었다. 한숨도 못 잔 것처럼 보였다.

 

 

“ 저, 선배님. ”

 

“ 안녕, 다냐. ”

 

“ 괜찮으세요? 어젠... ”

 

“ 괜찮아야지 어쩌겠어. ”

 

“ 얘기 들었어요. 감사실... ”

 

“ 감사부장이 나한테 쓸데없이 일 키우지 말래. 별 거 아닌 걸로 들쑤셔서 괜히 회사 소문만 안 좋게 나고 중견직원 앞길 막는다고. ”

 

“ 쓸데없이 일을 키우다니요? 어제 다들 봤는데. 아나톨리 표도로비치가 백번 잘못한 거잖아요. 가만히 있는 선배님을 집적대고 계속 나쁜 말도 하고. 그게 어떻게 선배님 탓인가요. ”

 

“ 그냥 술자리에서 남자들 취해서 하는 말에 예민하게 군다고, 나보고 그 사람한테 욕하고 손찌검까지 하지 않았냐면서 내 잘못도 크니까 그냥 넘어가라는 거야. ”

 

“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감사부장이 그런 말을 했다고요? ”

 

“ 감사부장. 우리 부장. 우리 부서 사람들 전부. ”

 

“ 말도 안 돼... ”

 

“ 증거도 없다고... ”

 

“ 증거가 없다니요? 거기 있었던 사람들이 몇 명인데. 선배님 부서랑 우리 부서 사람들이 다 봤잖아요. ”

 

“ 다들 모른 척할 거라서... ”

 

“ 저도 봤는데요. 처음부터 듣진 못했어도 아나톨리 표도로비치가 옷 얘기할 때부터 들었어요. 성희롱 발언하고 손도 댔잖아요. 선배님, 제가 증인 서드릴게요. ”

 

“ 고마워, 다냐. ”

 

 

알렉산드라는 갑자기 감정이 북받친 듯 흑 하더니 울기 시작했다. 조그만 어깨를 떨면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엉엉 울었다. 베르닌은 당황했다. 어쩔 줄 몰랐다. 왕재수가 울어도 당황스러운 판에 여자가 울면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감이 안 잡혔다. 쭈뼛거리며 서 있다가 주머니에서 구겨진 손수건을 꺼내 알렉산드라에게 내밀었다.

 

 

“ 어... 저... 선배님... 저... ”

 

 

알렉산드라가 손수건을 받아서 눈과 코에 댔다. 심호흡을 하며 진정하려 했지만 자꾸 눈물이 나는 듯 계속 흑흑 흐느껴 울었다. 너무 서럽게 울어서 베르닌은 절로 속이 상했고 타라카노프의 멱살을 쥐고 끌어내 두들겨 패주고 싶었다. 한참 울다가 알렉산드라는 간신히 진정했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는데 눈물콧물이 너무 많이 나와서 수건을 두 번이나 꾹꾹 짜야 했다.

 

 

“ 미안해, 다냐. 윽... 흑... 미안. 이러면 안 되는데. ”

 

“ 아니에요, 선배님. 속상할 땐 울어야 된댔어요. 괜찮아요. ”

 

“ 회사에서 울면 얕보여서 안 되는데... 안 그래도 맨날 여자라서 하찮게 보이는데. 엉엉... ”

 

 

알렉산드라는 서러움이 솟구치는지 다시 몸을 떨면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그녀가 너무 안 돼 보여서 꼭 안아주고 싶었지만 어제 타라카노프의 행동을 생각하니 오해받을 수도 있을 것 같아 꾹 참았다.

 

 

“ 선배님, 안 그래요. 하찮게 안 보여요. 선배님이 일도 얼마나 잘하고 저한테도 얼마나 많이 가르쳐주셨는데요.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

 

“ 넌 착하니까 그렇지. 윗사람들은 안 그래. 선배들, 동료들도 마찬가지야. 알잖아, 우리 회사 군대문화에 남자 위주인 거. 국장부터... 여자 간부는 하나도 없고 공채도 여직원은 거의 없어. 이 사람들에게 여직원은 커피나 타고 등사나 하고 도장만 찍어주는 존재일 뿐이야. 난 공채로 들어왔는데, 우리 기수에서 성적도 제일 좋았는데 다른 남자애들에겐 처음부터 주요 업무 맡기고 나한테는 서무 하라는 거야. 그때도 왜 그러는지 물었더니 원래 서무는 여자가 하는 거라고 했어. 그러더니 작년에 남자 후배가 들어왔는데도 서무는 여자 업무라면서 그대로 6년째... 툭하면 차 끓이고 커피 타오라고 시키고... 내 동기들 세묜까지 다섯 명이나 되는데 걔들은 벌써 승급하고... 이해할 수가 없어서 부장에게 면담까지 했는데 내 업무가 서무라서 평가 점수를 잘 줄 수가 없다는 거야. 그러면 다른 업무를 맡게 해달라고 했더니 그것도 안 된대. 여자라서. ”

 

“ 어... 그래서 6년째 서무였단 말이에요? 전 선배님이 막내라서 그런 건 줄 알았어요, 후배가 안 들어와서. ”

 

“ 후배가 있어. 다른 지부에서 왔는데 3년차라 후배거든. 근데 남자라서 곧장 주무를 맡더라고. ”

 

“ 그랬구나... 너무한데요. ”

 

“ 그리고 부장들은 내가 예민하게 군다고 하지만 타라카노프는 어제만 그랬던 게 아니야. 6년 동안 내내 그랬어. 신입 직원 환영회할 때부터 옆에서 계속 술 권하고 러브 샷 하자고 하고 술 먹여달라고 하고... 그땐 나도 조직 생활도 처음이고 너무 당황해서 가만히 있었거든. 회식 때마다 항상 옆자리 앉아서 집적대고... 등사실이나 우편보관함 앞에서 마주치면 손으로 이렇게 벽을 짚고 못 빠져나가게 하고서 바짝 들이대고... 건드리고... 더러운 말도 얼마나 많이 했는데. 다른 남자 선배들도 그런 적 많아. 툭하면 여자가 이래야지 저래야지 하면서... 지나가면서 훑어보고 집적대고... 술자리 가면 옆에서 술 따라달라고 하고. 회식만 하면 타라카노프가 화장실 갈 때마다 따라와서 취한 척하면서 기대고 팔 두르고... 내가 작으니까 만만해보여서 더 그런 거야. ”

 

“ 뭐라고요? 어제 그게 처음이 아니었단 말이에요? 어떻게 그럴 수가... ”

 

“ 그러니까 이제 더는 못 참아. 부장들이 뭐라고 하든... 진정서는 취소 안 할 거고, 그 더러운 인간 인민재판에 회부해서 벌 받게 할 거야. ”

 

“ 선배님, 제가 도와드릴게요. 필요한 거 다 말씀해 주세요. 어제 제가 목격한 것만으로도 엄연히 성희롱에 해당돼요. 저 법학과 나왔잖아요. 일단 서류부터 작성할게요. ”

 

“ 고마워, 다냐. 일단 감사실 쪽에서 먼저 내부 절차를 밟아야 돼. 필요하면 얘기할게. 정말 고마워. 아무도 내 편 안 들어줬는데 너 밖에 없구나. ”

 

 

알렉산드라가 또 울먹거렸기 때문에 베르닌은 가슴이 아팠다. 정의감이 용솟음쳤다. 기필코 그녀를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알렉산드라가 너무 초췌해 보였기 때문에 점심이라도 같이 먹으러 가자고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다냐. 나 지금 입맛이 없어. 샌드위치 싸왔으니까 있다가 배고프면 먹을게. 너 얼른 가서 점심 먹어. ”

 

 

베르닌은 왕재수에게 하던 대로 바퀴벌레 곱등이 협박을 써볼까 했지만 여자한테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할 수 없이 그녀를 남겨두고 구내식당으로 갔다. 식당에서도 다들 그 얘기를 하려나 싶었는데 의외로 조용했다. 회식에 가지 않았던 부서들에서는 모르는 것 같았다. 베르닌은 잠자코 비계와 힘줄이 섞여 있는 커틀릿과 건더기가 두어 개 떠 있는 양배추 수프를 배식 받아서 먹기 시작했다. 커틀릿은 구내식당에서는 특식에 가까웠으므로 평소 같았으면 신나 하며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겠지만 어쩐지 입맛이 없었다. 숙취 때문인가 싶었다. 따뜻한 수프를 후루룩 마시자 속은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대충 점심을 먹은 후 그는 극장에 전화를 해 보았다. 왕재수 대신 비서인 류드밀라가 받았다.

 

 

“ 미샤는 단원들이랑 점심 먹으러 갔어요. ”

 

“ 아, 그래요. 알겠습니다. 아침은 먹었나... 혹시 아세요? ”

 

“ 안 먹었어요. 아침에 제가 출근해서 보니까 감독실에서 자고 있더라고요. 피곤해 보여서 안 깨웠는데 11시에 부스스 일어나더니 저한테 화냈어요. 애들 연습시켜야 되는데 늦잠 자게 놔뒀다고. ”

 

“ 어... 어제 극장에서 잤단 말이에요? ”

 

“ 네. 요즘 바빠서 가끔 극장에서 주무세요. 그래서 제가 시설팀에 얘기해서 밤에 감독실 쪽만 난방 돌려 달라고 했어요. 좀 걱정이긴 하네요. 계속 저러면 몸이 남아나지 않겠어요. ”

 

“ 오늘 공연 있어요? 몇 시에 끝나요? ”

 

“ 있어요, 잠자는 미녀. 3막짜리니까 10시 반쯤 끝나겠네요. ”

 

 

전화를 끊고 나서 베르닌은 더욱 기분이 좋지 않았다. 분명히 의사가 과로하지 말라고 했는데 매일 출근도 모자라 극장에서 자다니! 코즐로프 쪽을 들들 볶아볼까 고민하다가 점심시간이 다 끝나서 다시 일을 하러 갔다. 하지만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는 옛날에 공부했던 기억을 되살려 책상 아래 쌓아두었던 법전과 각종 판례집, 인민재판 사례집을 들춰보았고 전날 메드베지에서 있었던 일들을 시간 순서대로 하나하나 정리했다. 타라카노프와 주변 사람들의 언행도 생각나는 대로 모두 기록했다. 진술의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 주변 정황도 간략하게 묘사했고 대화도 시간 순서대로 기록했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 그는 대외교류부에 가보았다. 알렉산드라는 캐비닛들을 돌면서 서류철 작업 중이었다. 조그만 손을 놀려가며 두꺼운 서류뭉치들에 구멍을 뚫고 표지를 달고 노끈을 끼우고 있었다. 전부 다른 사람들이 담당하는 사업에 대한 서류들이었지만 모두 알렉산드라를 못 본 체 하고 있었다. 타라카노프는 자리에 버티고 앉아 손톱을 깎으면서 계속 입에 담을 수 없는 비속어를 지껄이고 있었는데, 이름을 부르지는 않았지만 누가 들어도 알렉산드라를 지칭하는 것이 분명했다. 베르닌은 알렉산드라의 곁으로 갔고 서류철 끼우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자기가 정리한 자료들을 건네주었다.

 

 

“ 선배님, 저... 이거... 제가 정리해봤어요. 감사실에서 증거 자료 얘기하면 이거 제출하세요. 그리고 저 정말 증언해줄 수 있으니까 위에서 증인 요구하면 제 이름 얘기하세요. ”

 

“ 다냐... 고마워. 근데 너 이래도 되니. 괜히 너 휘말리게 하기 싫어. ”

 

“ 휘말리는 거 아니에요. 사실을 말하는 것뿐인데 뭐가 휘말리는 거예요. 힘을 내세요. ”

 

“ 고마워... ”

 

 

베르닌은 서류철 작업을 좀 더 도와주고 싶었지만 대외교류부 사람들이 계속 자기들 쪽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알렉산드라에게 방해가 될 것 같아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는 야근을 한 후 10시 반에 맞춰서 극장 앞으로 갔다. 마침 커튼콜을 마치고 무용수들에게 한바탕 꾸지람을 늘어놓은 후 나오고 있는 왕재수를 복도에서 붙들었다.

 

 

“ 야! 너 어제 왜 극장에서 잤어! ”

 

“ 오늘 공연 때문에. ”

 

“ 이거 맨날 올리는 공연이잖아, 신작도 아닌데 왜! ”

 

“ 네가 어제 안 왔잖아. ”

 

“ 그렇다고 극장에서 자냐! 너 정말 죽을래? 앞으로 여기서 자면 고양이, 쥐, 바퀴벌레, 곱등이, 뱀 껍질 다 풀어놓을 거야!

 

“ 이 악마... 어젠 나 혼자 안 있었어. 로만이랑 있었어. ”

 

“ 그럼 그 집 가서 자야지 왜 여기서 자! 추운데! ”

 

“ 안 추워. 로만이랑 꼭 껴안고 있으면 얼마나 뜨끈뜨끈한데. 그리고 신작에 쓸 음악 때문에 둘이 할 얘기도 많았어. ”

 

“ 못살아... 하여튼 집에 가자! ”

 

“ 오늘은 로만한테 가서 잘 거야. ”

 

“ 어 그래? 정말이지? 여기서 자면 안 돼! 바이올린 아저씨한테 확인한다! ”

 

 

마침 그때 코즐로프가 다가왔다. 아파트에 데려가서 잘 거라고 확인을 해주었다. 베르닌은 괜시리 짜증이 나서 코즐로프에게도 화를 냈다.

 

 

“ 의사 선생님이 말하고 간 거 당신이 잘 챙긴다더니! 앞으로 이 자식 한번만 더 극장에서 자게 놔두면 당신 책임이에요! ”

 

“ 어휴, 이 망할 놈의 스파이 나부랭이. 알았으니까 빨랑 집에나 가! 네가 난리 안 쳐도 내가 어련히 알아서 챙길까! ”

 

“ 안 챙겼잖아요! 아무리 난방해 줘도 극장은 집이 아닌데... 소파도 불편하고... 그리고 당신 어쩌자고 감독실에서 쟤랑 놀아날 생각을 해요! 들키면 어쩌려고! 도청 장치 있는 거 알잖아요. 내가 담당자니 망정이지... ”

 

“ 야, 넌 우리가 같이 있으면 맨날 그 짓만 하는 줄 아냐? 우리 어젠 신작 얘기하느라 밤 샜어! 추우니까 그냥 꼭 안고 누워서 얘기했을 뿐이야! 넌 참... 얜 진짜 천잰데 네 녀석은 예술이랑은 담 쌓은 녀석이니 그런 건 모르고 맨날 놀아나는 생각만 하니... ”

 

“ 으윽, 누가 그런 생각을 해요! 그런 말은 이 녀석이 하니까 그러는 거지. 하여튼 알았어요. 너 내일은 어떻게 할 거야? 데리러 와 말아? ”

 

“ 데리러 와. 내일은 로만이 동기들 모임 있댔어. 내일 블린도 구워줘. ”

 

“ 블린을 나한테 맡겨놨냐! ”

 

“ 네가 어제 안 해줬잖아. 술 마시러 간다고... ”

 

“ 알았어. 극장에 남지 말고 지금 빨리 가! ”

 

 

그래서 왕재수는 코즐로프의 차를 타고 갔고 베르닌은 혼자서 집으로 돌아왔다. 알렉산드라 생각에 무거운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   *   *

 

 

 

다음날 정신없이 일하고 있는데 감사실에서 그를 호출했다. 들어갔더니 감사부장과 사내 고충처리 담당자 이그노리로프, 대외교류부장이 앉아 있었다. 감사부장이 그에게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 자네가 알렉산드라 크롤리코바의 증인을 자청했나? ”

 

“ 어, 그 성희롱 건이라면, 예. ”

 

“ 이 자료도 자네가 정리한 건가? ”

 

 

감사부장이 두툼한 종이뭉치를 홱 던졌다. 베르닌은 종이들을 넘겨보았다. 앞은 알렉산드라가 직접 작성한 서류였다. 진정서 양식에 맞춰서 기록되어 있었다. 지난 6년간 타라카노프가 그녀에게 지속적으로 가해온 폭언과 성희롱 발언, 근무지와 술자리에서 해온 추행에 대해서도 길게 적혀 있었다. 내용을 훑어보기만 해도 화가 났다.

 

 

“ 예, 뒤의 절반쯤은요. 수요일 밤에 메드베지에서 있었던 일을 시간 순서대로 기록했습니다. 뒤에 첨부한 것은 관련 법규와 판례들입니다. 물론 잘 아시겠지만... ”

 

“ 자네 혼자만 목격자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나? ”

 

“ 주장이 아니라 사실을 기술한 건데요. ”

 

“ 허참, 답답하기는... ”

 

 

감사부장이 나직하게 욕을 했다.

 

 

“ 자네 지금 뭐하자는 건가. 같은 남자끼리 술자리에서 일어나는 일도 이해 못 하나? 얘기 들어보니까 그냥 가벼운 농담 좀 하고 취해서 가볍게 스친 정도였던데 알렉산드라가 노처녀 히스테리인지 아니면 생리라도 하고 있었는지 민감하게 반응해서 이렇게 된 거 아닌가. ”

 

“ 제가 거기 쓴 내용을 읽어 보셨을 텐데요. 가벼운 농담이 아니라 성희롱 발언이었습니다. 그리고 취해서 가볍게 스친 게 아니라 다분히 의도적인 추행이었고요. 알렉산드라 선배가 싫다는 의사를 밝혔는데도 얼굴을 비비고 껴안고 몸을 만졌다고요. 다른 분들은 아나톨리 표도로비치와 같은 부서라서 불편하니까 모른 척하고 있겠죠. 당장 부장님께서도 그 자리 계셨잖아요. 알렉산드라 선배의 얘기나 제 기록에 잘못된 게 어디 있나요? ”

 

 

베르닌은 대외교류부장 쪽을 보며 물었다. 부장은 발끈했다.

 

 

뭣이? 아주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애송이 주제에 왜 남의 부서 일에 이래라 저래라야! 너 예전부터 그 계집애랑 친하게 지낸 거 모르는 줄 알아? 둘이 무슨 그렇고 그런 사이라도 되냐? 들어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들이 꼭 조직 분위기를 흐린다니까! 아나톨리가 뭘 얼마나 집적댔다고. 나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정말 별 거 아니었어! 농담 조금 한 것 가지고. 어디서 건방지게... ”

 

 

베르닌은 기가 막혔다. 부장이라는 인간이 부하 직원을 대놓고 차별하는 것도 모자라 엄연한 가해자를 감싸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 고충처리 담당자인 이그노리로프가 슬슬 달래듯 말했다.

 

 

“ 다닐, 자네가 아직 사회 경험이 별로 없어서 그러는 거야. 원래 회사에서는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일어나는 법이야. 지금 이렇게 일을 크게 만들면 좋을 거 하나도 없어. 아나톨리가 몇 년째 승진 못하고 있는 거 알잖아. 3월에 승진 심사 있는데 이번엔 딱 아나톨리 차례란 말이야. 이 일이 커지면 승진은커녕 서류에도 줄 그어져서 앞으로도 힘들어져. 알렉산드라처럼 싱글에 젊은 여자애야 죽었다 깨나도 그런 거 이해 못한단 말이지. 처자식 딸린 40대 가장이 승진도 미끄러지고 주변에서 손가락질 받으면서 어떻게 버티란 말인가. ”

 

“ 처자식 딸린 40대 가장이면 애초부터 후배 여직원에게 부적절한 짓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

 

“ 그러니까 지금 내가 얘기하잖아! 술자리였고 취해 있었다고. 알렉산드라 걔가 원래 좀 까칠하고 신경질적인 거 다 알고. ”

 

“ 아니에요, 알렉산드라 선배는 신경질적이지 않아요. 성실하고 상냥해요. 후배들에게도 얼마나 잘 해줬는데요. 그리고 선배님은 인사부서 소속에 직원 고충처리 담당자잖아요. 그러면 공정하게 사안을 판단해야지 왜 무조건 아나톨리 표도로비치의 편만 드시는 건가요? ”

 

“ 아니, 이 친구가 정말 건방지기 짝이 없군! 애초부터 알렉산드라 걔가 행실을 똑바로 하고 다녔으면 왜 그런 일이 있었겠나! 아나톨리에게 물어보니 걔가 자기 옆에 와서 앉고 술도 따라주고 애교도 부리고 하니까 자기도 술김에 조금 실수한 것 같다고 하던데!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나? 계집애가 끼를 부렸으니까 그런 거지!

 

“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옆에서 다 봤는데요! 절대 그렇지 않았어요. 알렉산드라가 옆에 가서 앉은 게 아니라 그쪽 부서 선배들이 억지로 끌어다 앉혔어요. 술도 따르라고 강요하고요. 알렉산드라 선배는 피해자인데 어째서 다들 선배에게 잘못이 있는 것처럼 몰아가나요? ”

 

 

감사부장이 헛기침을 했다.

 

 

“ 그래서, 자네 지금 여기 적은 게 전부 사실이라고 주장하겠다 이건가? ”

 

“ 주장이 아니라 사실을 기술한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

 

“ 자네 정말 왜 이러는지 모르겠군. 국장님이 매일같이 책상물림에 답답한 녀석이라고 하던 이유가 있었어. 왜 이렇게 상황 파악을 못하나. 이게 그냥 알렉산드라와 아나톨리 두 사람의 문제로 끝날 줄 아나? 이 문제가 불거지면 그 자리에 있었던 부서장들도 곤란해져.

그뿐인가, 가뜩이나 요즘 모스크바 본부에서 연방 지부들에 대한 감사가 강화되고 있는데 여기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있다는 얘기가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나. 자네 지난달에 특별감사 받아봐서 알잖아. 그보다 더 심하게 탈탈 털 거란 말이야. 몇 명 옷 벗어야 될지도 몰라. 그냥 잘 무마하고 화해하고 넘어가면 될 일을 왜 크게 만든단 말인가. 요즘 우리 가브릴로프도 수도 쪽에서 못된 물이 들어온 애들이 많아서 가뜩이나 당과 KGB를 스탈린주의의 온상이 어쩌고 하며 공격하고 선동하는 일이 잦은데 말도 안 되는 성희롱 소문까지 퍼져보게. 회사 이름에 먹칠할 셈인가.

알렉산드라 걔도 그렇지. 이렇게 되면 누가 걜 데리고 일하려고 하겠나! 언제 또 히스테리 부리며 선배에게 누명 씌울지 모르는데. 자네라고 괜찮을 거 같나? 20년 된 선배 하나 매장시키는데 발 벗고 나선 건방진 막내라고 낙인찍히고... 자넨 알렉산드라와는 또 다르잖나. 학벌도 더 좋고 군필자에 요즘 그 반동분자 녀석 감시하는 중요 업무까지 맡아서 앞으로 국장이 키워주려고 하는 와중에 왜 이렇게 판을 뒤집으려고 하냔 말이야. 국장조차도 아직 진정서를 정식으로 수리하지 않았어, 당사자끼리 잘 화해시키라는 특명을 내렸단 말이야. 그런데 자네가 이렇게 눈치 없이 끼어들다니. 일단 국장이 이걸 수리하게 되면 정식 기록에 남게 되고 타라카노프를 인민재판에 세워야 한단 말이네. 회사와 당의 명예에도 크나큰... ”

 

“ 부장님, 회사와 당의 명예만 중요하고 알렉산드라 선배의 명예는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요? ”

 

아니, 이 녀석이 그래도 말귀를 못 알아듣고... 에이, 답답해. 알았네! 일단 나가보게! 허참, 아무리 고지식하다 해도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니까. 괜히 끗발도 없는 여직원 편들어주다 자네 앞길 막힐 거 생각도 해야지. 답답한 녀석 같으니... ”

 

 

베르닌은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며 감사실을 나왔다. 그런데 복도에서 세묜 모브린이 기다리고 있었다.

 

 

“ 자네 나 좀 봐. ”

 

“ 어, 웬일이신가요, 선배님. ”

 

“ 나랑 담배 한 대 필까? ”

 

“ 전 담배 안 피우는데요. ”

 

“ 하여튼, 잠깐 바람이라도 쐬자고. ”

 

 

베르닌은 내키지 않았지만 모브린을 따라 나갔다. 모브린은 건물 밖으로 나가서 배나무 아래 벤치에 앉더니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연기를 빨아들였다가 훅 내뿜었다. 그리고는 친근한 어조로 말했다.

 

 

“ 자네 이제 3년차지? ”

 

“ 어, 예... 햇수로는. 들어온 지는 2년 좀 넘었고요. ”

 

“ 응, 그럼 아직 원칙주의가 남아 있을 때니까 이해해. 아직 20대고. 근데 이번 일 말이야. 증인을 자청했다고 들었는데 사실 자네가 나서지 않는 게 사셴카를 위해서도 훨씬 낫거든. 자네를 위해서도 그렇고. ”

 

“ 그건 어째서죠? ”

 

“ 사셴카가 내 동기라서 잘 아는데, 걘 좀 결벽증이거든. 그러니까 상사한테 잘 보이지도 못하고, 선배들에게도 틱틱거리는 편이야. 가뜩이나 우리 부서에선 유일한 여직원이라 나머지 부서원들과 비교가 안 될 수가 없는 상황이야. 신체 능력도 떨어지고 출장 같은 거 갈 때 방도 같이 못 쓰니까 여비도 더 들고. 단합대회 같은 거 갈 때도 1차만 하고 자꾸 빠지려고 해서 부장도 별로 안 좋아해. 근데 여기서 이렇게까지 문제를 일으키면 걘 정말 앞길 완전히 막힌단 말이야. 알지? 우리 동기 중에 걔만 승급 못한 거. 이번에 아나톨리 선배만 승진 심사 대상인 거 아니야. 사셴카도 마찬가지라고. 근데 이 난리를 쳐놨으니 당연히 승급은 안 될 거고... 앞으로도 안 될 거라고. 우린 공무원이잖아, 최소 20년은 다녀야 하는데 한순간의 화를 못 참아서 왜 긴 앞날을 망치냐고. ”

 

“ 아니에요, 한순간의 화가 아니었어요. 입사하고 지금까지 6년 동안 괴롭혔다고 했어요. ”

 

“ 자넨 여자 말을 곧이곧대로 다 믿나? 아나톨리 선배 입장에선 생각 안 해? 그 선배는 원래 후배들에게 허물없이 대하는 타입이야. 악의가 있어서 그러는 건 절대 아니라고. 취하면 좀 풀어지는 사람이라 그렇지, 솔직히 러시아 남자치고 술 먹고 목석같은 사람이 어디 있나. ”

 

“ 선배님은 알렉산드라와 동기인데 왜 아나톨리 표도로비치 편을 드시는 건가요? ”

 

“ 동기니까 그렇지! 이 바보야, 사셴카를 위해서 그러는 거라니까! ”

 

아니에요, 알렉산드라 선배를 위한다면 도와주고 진실을 밝혀줘야죠. 동기가 이러고 있는 거 알면 알렉산드라 선배는 더 속상하겠네요. 이럴 거면 제가 동기 없이 혼자 들어온 게 다행이네요. ”

 

“ 자네 정말... 내가 솔직하게 말하는데, 사셴카는 그렇다 치고, 자네도 내년이면 승진 심사 대상에 들어갈 텐데 지금 윗분들에게 이렇게 찍히면 답 없어. 국장도 보고받고 엄청 화냈다고 했어. ”

 

“ 선배님, 말씀 마치셨으면 전 들어가겠어요. 금요일이라서 일이 엄청나게 밀려 있거든요. ”

 

 

베르닌은 혀를 차는 모브린을 남겨두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알렉산드라를 위해 증언을 하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   *   *

 

 

 

오후 늦게 스페호프가 그를 국장실로 호출했다. 또 배추밭 고양이 얘길 하려나 걱정이 되었다. 최근 고양이들이 발정기인지 밤마다 배추밭에 모여들어 시끄럽게 울어대고 있었다. 게다가 이 구역의 지배자인 검정고양이 미셴카가 짝짓기를 독점하고 싶은 건지 다른 수놈들을 마구 할퀴고 잡아 뜯어서 매일같이 소란스러웠다. 베르닌은 고양이들의 짝짓기 장소를 옮겨줄 방안을 고심하며 국장실로 올라갔다.

 

 

스페호프는 그가 들어오자마자 이마를 잔뜩 찌푸린 채 본론으로 들어갔다.

 

 

“ 자네가 크롤리코바의 진정서에 첨부한 서류는 공적으로 접수할 수 없으니 그리 알게. 반려야. ”

 

“ 예? 어째서인가요? 양식에 맞게 작성했고 법규와 판례도 기재했는데요. 있었던 일만 기재했고 저의 주관적 판단은 완전히 배제했는걸요. ”

 

“ 자넨 당사자도 아니고, 그 부서 직원도 아니니까. 참견할 자격이 없단 말이네. 대체 정신이 있나 없나, 무마를 시켜도 모자랄 판에 눈치 없게 끼어들어서 일을 키우긴. 행정의 기본 중 하나는 연공서열을 존중하는 거야. 어디 감히 20년 된 선배를 밀고하려는 건가. 젊은 친구가 벌써부터 못된 짓만 배워가지고. 하여튼 인민재판은 없을 거야. 증언도 필요 없고. 마음 같아선 자네의 버릇없는 행동에 징계라도 내리고 싶지만 치기어린 마음에 돼먹지 않은 기사도를 발휘한 걸로 알고 이걸로 접겠네. 앞으로는 조심하게.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생각이란 걸 좀 하고. ”

 

“ 접다니요? 알렉산드라 선배가 진정서를 제출했고 인민재판을 요구했으니 당연히 절차에 따라 증인이 필요하고... ”

 

“ 재판은 없을 거야. 크롤리코바가 진정을 취소했으니까. 당사자끼리 화해했고 다 잘 끝났어. 공연히 자네가 설레발만 떨지 않았으면 더 깔끔했을 텐데. 하여튼 그렇게 알게. 자네 부서장에게도 다 마무리됐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해뒀네. 앞으로는 조심하게. 쯧쯧, 요즘 좀 업무 역량이 나아지나 싶었더니만... 명심하게, 자네에게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해도 모자란단 말이야. 서무 업무도 그렇고 그 불여우 감시도 그렇지. 며칠 전에도 검열국 쪽에서 별도 보고가 들어왔더군. 그 녀석이 준비하는 신작에 이념적 문제가 있다고 말이야. 심지어 검열국 직원들에게 폭언을 하고 성질까지 부렸다는데 어째서 그쪽 보고는 빼먹었나? ”

 

“ 그 충돌 건은 보고서에 요약해서 올렸는데요, 그리고 검열국 쪽 얘기는 과장된 거였고요. 그 신작은 무용수들에게 새로운 동작을 익히기 위해 만든 거라서 이념적인 내용은 전혀 없고 남녀가 밀고 당기며 연애하는 얘기더라고요. 제가 극장장과 발레마스터, 무용수들, 오케스트라 쪽 사람들에게도 확인해봤습니다. 이념적인 작품은 아니었어요. ”

 

“ 허, 그래? 그렇다 치지. 그래도 검열국 쪽 보고는 무시하면 안 돼. 그 불여우는 옛날부터 전적이 화려하니까. 작년에 뉴욕에서도 얼마나 당돌한 짓을 했는지 아나? 온갖 반체제적인 내용에 심지어 야하기 그지없는 것을 작품이라고 만들어서는, 검열요원에겐 그런 내용 싹 빼고 보여준 다음에 정작 무대에선 그런 지저분한 걸 췄단 말이지! 파리에서도 별의별 짓을 다 하고. 예술이니 뭐니 하며 우기고 말이야. 예술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앞으로는 검열국 쪽 보고도 하나하나 다 챙기도록 하게. 그 자식은 정말 골칫거리야. 크레믈린에서 또 끼어들기 전에 빨리 없애버려야 할 텐데. 하여튼 그쪽은 자넬 믿네. 나중에 이 문제는 따로 얘기하도록 하세. 그만 들어가 보게. ”

 

 

베르닌은 알렉산드라와 타라카노프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스페호프의 심기가 좋지 않아 보였기 때문에 그대로 국장실을 나왔다. 터덜터덜 내려오는데 등록부서 앞에 여직원들이 나와서 떠들고 있었다. 그 사이에 있던 리자와 마주쳤다.

 

 

“ 다냐, 또 국장실에 불려갔던 거예요? 또 혼났어요? ”

 

“ 아뇨. 일 때문에요. 근데 여긴 왜 다들 나와 있어요? ”

 

“ 아, 방금 인사부서에서 들었는데요, 알렉산드라 언니가 우리 부서로 온대요. 그런 얘기 없었는데 갑자기 발령이 나서 웬일인가 싶어요. 하여튼 우린 좋죠 뭐. 언니가 일도 잘하고 후배도 잘 챙겨주니까. 전 언니랑 친했거든요. ”

 

뭐라고요? 등록부서로 발령? 언제요?

 

“ 월요일 자래요. 언니 방금 왔다 갔어요. 우리 부장님한테 인사도 하고. 짐도 벌써 옮겨놨어요. 인수인계는 월요일에 하기로 했고요. ”

 

 

베르닌은 얼떨떨해졌다. 너무 어이가 없었다. 그는 대외교류부에 가 보았다. 타라카노프가 동료들과 큰 소리로 떠들고 있다가 베르닌을 발견하더니 증오 어린 시선을 던지며 입을 다물었다. 모브린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돌렸다. 알렉산드라의 책상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배추밭으로 갔다. 알렉산드라가 거기 있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넓적한 돌멩이에 걸터앉아 있었다. 고양이는 눈에 띄지 않았다. 사료 그릇은 비어 있고 물그릇에만 반쯤 물이 남아 있는 걸 보니 이미 밥을 먹고 간 것 같았다.

 

 

“ 선배님, 어떻게 된 거예요? 인사이동이라니. 그리고 감사실 진정 낸 것도 취소하셨다면서요. ”

 

“ 응. 다냐, 미안해. 나 도와주려고 그렇게 애썼는데. 미리 얘기라도 할 걸. 아까 너무 경황이 없어서. ”

 

“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국장이 그러던데요, 아나톨리 표도로비치랑 화해하셨다고. ”

 

“ 응. 그렇게 됐어. 그냥 그렇게 가기로 했어. ”

 

“ 그냥 그렇게라니요... 그럼 아나톨리 선배는 하나도 징계 안 받고... 어째서 선배님이 다른 부서로 가셔야 하는데요? 등록 부서는 선배님 전공하고 맞지도 않고... 원래 대외교류부 쪽 지원하셨잖아요. 그 부서는 지금 업무보다 더 단순 업무인데... 이건 좌천이나 마찬가지잖아요. ”

 

“ 차라리 그 부서가 나아. 여자애들도 많고. ”

 

“ 그렇지 않아요... 거긴 정말 스태프 부서인데... 선배님은 대외사업 쪽... ”

 

“ 어차피 대외교류부에서도 서무나 하고 있었는데 뭐. 걱정해줘서 고마워. ”

 

 

알렉산드라는 어제처럼 울지도 않았다. 얼굴은 창백했지만 표정은 무심했고 목소리도 건조했다. 베르닌은 속이 터질 것 같았다.

 

 

“ 정말 화해하신 거예요? 아니면 국장이 협박한 건가요? ”

 

“ 협박이라니. ”

 

“ 저 다 알아요! 아침에 감사실에서 불러서 갔는데 감사부장이랑 대외교류부장이랑 고충처리 담당자가 저한테 막 증언 서류 취소하라고 협박했어요. 좀 전에는 국장도... ”

 

“ 그랬구나. 미안해, 다냐. 내가 내 성질을 못 이겨서 소란피우고 너한테까지 피해 주고... 정말 미안해. 이제 해결된 거니까 더 이상 신경 쓰지 마. 고마웠어. ”

 

해결된 거 아니잖아요! 선배님이 그냥 포기한 거잖아요, 눈감아주고... 위에서 협박해서... ”

 

“ 어쩔 수 없었어, 다냐. 국장이랑 감사부장이 인민재판해 봤자 나만 손해라고 하루종일 설득했거든. 재판해서 타라카노프 처벌해봤자 그 사람은 잠깐 징계만 먹은 후 승진할 거고 나는 이 동네도 아니고 저쪽 시베리아 쪽 지부로 전출시킬 거라고 했어. 회사 입장에선 20년 된 남자 중견직원이 더 필요하다는 거지. 그리고 국장 말이 맞아. 일 크게 만들었다가 나도 그렇고 괜히 너한테까지 불똥 튀잖아. 국장이 자기 방으로 나랑 타라카노프 불렀어. 그 작자가 나한테 사과했어. 거짓 사과지만 어쨌든... 그렇게 마무리된 거야. ”

 

“ 그게 어떻게 마무리예요. 협박인데... 선배님, 이렇게 물러나시면 안돼요. 그리고 잘못한 건 아나톨리 표도로비치인데 좌천시키려면 그 사람을 보내야지 왜 선배님을 등록부서로 보내요! 이건 보복성 인사... ”

 

“ 일이 이렇게 됐는데 한 부서에서 마주치며 얼굴 붉히는 것도 그러니까. 난 차라리 잘됐어. 등록부서에는 여자애들도 많으니 지저분하게 구는 놈들은 덜하겠지. 등록부장 말로는 거기 지금 서무는 나보다 후배 여자애니까 나한테는 다른 업무 줄 거래. ”

 

“ 하지만... ”

 

“ 다냐, 고마워. 나 위해서 나서준 거 안 잊을게. 그러니까 이제 이 얘긴 그만 하자. 주말 잘 보내. ”

 

 

알렉산드라는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나더니 배추밭을 떠나 사무실 쪽으로 가버렸다. 베르닌은 멍해져서 한동안 찬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   *   *

 

 

 

 

베르닌은 화가 나고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타라카노프는 말할 것도 없고 국장을 비롯한 간부들과 대외교류부 직원들, 아니 회식 현장에 있었던 모든 동료들이 가증스러웠다.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가해자가 이토록 확실한 상황에서 결국은 피해자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심지어 더 하위 부서로 좌천까지 당하다니 정말 더러운 노릇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알렉산드라의 태도였다. 그렇게 오랫동안 괴롭힘을 당했으면서, 그렇게 분노해서 감사실에 진정을 하고 인민재판을 요청했으면서 어째서 막판에 그렇게 쉽게 포기해버렸는지 이해가 안 갔다. 답답하고 속상했다.

 

 

그는 화가 나서 씩씩거리다가 시계를 보고 화들짝 놀라 급하게 차를 몰고 극장으로 갔다. 왕재수가 모자도 쓰지 않고 주차장 계단에 앉아 있었다. 그는 급하게 빵빵 하고 경적을 울렸다. 차에 올라탄 왕재수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 야! 추운데 왜 거기 앉아 있어! 감독실에서 기다렸어야지! 모자도 안 쓰고, 패딩도 안 입고 또 그 얇은 코트 입고! ”

 

“ 네가 금방 올 줄 알았지. 그리고 패딩은 안 돼! 오늘 외부에서 손님들도 왔었는데 패딩 입은 꼴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고! ”

 

“ 에잇, 정말 너란 놈은... ”

 

“ 왜 성질내. 늦게 와 놓고. 오늘 블린 구워주는 거야? ”

 

“ 아니, 나 오늘 블린 같은 거 구울 기력이 없어. 선택해. 냉동 펠메니 삶아주는 거랑, 요 앞 식당에서 먹고 들어가는 거. ”

 

“ 펠메니. ”

 

“ 엥? 너 그 식당 좋아했잖아. 닭가슴살이랑 샐러드... 딴 것들도 맛있던데. 집에 가면 진짜 그 냉동 펠메니 삶아주는 거 밖에 없어. ”

 

“ 집에서 밥 먹고 싶어. 계속 식당 밥 먹었더니 질려. ”

 

“ 펠메니도 공장에서 나온 거잖아. ”

 

“ 그래도 네가 삶는 게 더 낫단 말이야. ”

 

“ 말도 안 돼. 삶는 건 다 똑같지. ”

 

“ 너 귀찮아서 그러는 거야? ”

 

귀찮아! 당연하잖아! 여태 그렇게 밥을 해다 바쳤는데 안 귀찮으면 그게 사람이냐? 오늘은 일도 많았고 피곤하다고. 내가 네 종도 아니고. ”

 

“ 언제는 연어랑 새우랑 채소랑 구워주더니... 생선가게에서 특별이용권 받았으니까 맛있는 거 해줄 거라고 뻥만 치고. 오늘은 펠메니 삶아주는 것도 싫다고... ”

 

야, 어떻게 매일 네 비위를 맞추고 사냐!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 거지! 다들 천재다 예쁘다 해주니까 팔자 늘어져가지고... 넌 보통 인민들이 얼마나 고생하며 사는지 하나도 몰라!

 

“ 왜 소리 질러. 난 사람들이 나한테 소리 지르는 거 너무 싫어. 펠메니 삶기 싫으면 관둬. 차려줄 필요 없어. 난 저녁 안 먹어도 돼. ”

 

“ 그 얘기가 아니잖아! 저녁은 또 왜 안 먹는데! ”

 

“ 네가 요리하기 싫다며. 보통 인민들이 고생한다며. 나도 별로 입맛 없어. 원래 저녁 꼬박꼬박 챙겨먹었던 것도 아닌데 뭐. 펠메니도 별로야. 공장제는 맛없어. 안 먹어. ”

 

“ 의사가 많이 먹어야 된다고 했잖아! 펠메니 싫으면 지금 내려. 저기 식당에서 먹고 가게. ”

 

“ 싫어. 식당 안 가. ”

 

 

왕재수는 그 말까지만 하고 입을 꽉 다물었다. 베르닌은 지치고 피곤해서 왕재수와 입씨름하기 싫었기 때문에 묵묵히 차를 몰았다. 하지만 강을 건너 배나무 거리로 접어들자 내심 기분이 좋지 않았고 슬그머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왕재수가 창밖만 바라보며 입술을 꼭 깨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코즐로프에게 애 끼니 잘 챙겨 먹여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던 게 생각나면서 가슴 한구석이 찔렸다. 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어가면서 베르닌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야, 펠메니 삶아줄 테니까 먹어. ”

 

“ 됐어. 배 안 고파. ”

 

“ 뭘 배 안 고파, 아까 배에서 꼬로록 소리 나는 거 들었는데. ”

 

“ 물 마셔서 그래. 배 안 고파. ”

 

“ 미안해, 오늘 회사 일이 힘들어서 그랬어. 펠메니 삶는 건 안 어려워. 그러니까 저녁 먹자. 너 요즘 계속 과로하고 있잖아. ”

 

 

왕재수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표정은 좀 풀린 것 같았다. 베르닌의 집으로 순순히 따라 들어왔다. 하지만 베르닌이 냉동실에서 펠메니를 꺼내자 봉지를 뺏아서 도로 넣었다.

 

 

“ 됐어. 나 그냥 사과랑 요구르트 먹을래. ”

 

“ 그게 무슨 밥이야! ”

 

“ 배만 채우면 됐지. 물 끓이고 삶고 차리는 거 귀찮잖아. ”

 

“ 내가 하지 네가 하냐? ”

 

“ 너 힘들다며. ”

 

“ 언제부터 그런 거 신경 썼다고! 고양이 쥐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

 

“ 오늘은 너 진짜 기분 안 좋아 보이니까 그렇지. 국장이 또 자른다고 협박한 것처럼. 벌목공... ”

 

아니야! 벌목공 운운 없었어! 공연히 또 사고 칠 생각하지 마! 그리고 나도 배고파. 먹어야겠어. ”

 

 

베르닌은 물을 끓이고 펠메니를 삶았다. 스메타나를 곁들여 접시에 담았는데 아무래도 뭔가 허전해서 양배추와 당근을 썰어 마요네즈에 버무려 샐러드도 만들고 오이와 고추피클도 좀 꺼냈다. 왕재수는 배 안 고프고 입맛 없다더니 정신없이 만두를 먹었다. 샐러드도 토끼라도 된 양 포크로 쓸어 담아 막 먹었다. 피클도 집어먹었다. 딱 보니 점심도 안 먹은 게 분명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잘 먹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자신은 영 입맛이 나지 않았다. 만두 몇 개만 스메타나에 찍어먹고 오이피클 두 개를 먹은 후 포크를 내려놓았다. 왕재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너 다 먹었어? ”

 

“ 응. ”

 

“ 왜 이렇게 조금 먹어? 어디 아파? ”

 

“ 아니, 입맛이 없어서 그래.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어. ”

 

“ 역시 스페호프 그 자식이 자른다고 했구나. 벌목공... ”

 

아니라고!

 

 

왕재수가 다 먹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식탁을 치웠다. 차를 우려주고 무가당 초콜릿 캔디를 몇 알 건네주었다. 그러다가 베르닌은 답답한 심정을 이기지 못하고 사흘 전의 회식부터 시작해 알렉산드라와 타라카노프, 자신의 증인 자청과 간부들의 협박, 알렉산드라의 좌천 등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간단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원체 분하고 답답해서 그런지 봇물 터지듯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왕재수는 보통 그가 횡설수설하기 시작하면 ‘아 지겨워!’ 하면서 중간에 끊고 나가버리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끊지도 않고 끼어들지도 않고 베르닌이 떠들게 내버려두었다. 그러면서 차도 마시고 초콜릿도 먹었다. 보나마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는 게 분명했지만 어쨌든 베르닌은 왕재수가 듣든 말든 말이라도 하면 좀 속이 시원해질 것 같아서 전부 다 얘기했다.

 

 

마침내 베르닌이 이야기를 마치자 왕재수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물었다.

 

 

“ 그래서 화난 거야? ”

 

“ 그래. ”

 

“ 누구한테 화난 건데? ”

 

전부! 타라카노프 그 개자식이랑... 국장, 감사부장. 이그노리로프. 대외교류부장. 그 부서 인간들 전부! 그리고, 그리고... 알렉산드라 선배도 너무 답답해. 끝까지 갔어야지! 고발해서 재판에 세웠어야지. 내가 그렇게 자료도 다 정리해주고 증인도 서주겠다고 했는데. 결국 손해만 보고... 알렉산드라도 바보 같아. 그리고는 어떻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렇게 평온한 표정으로 나한테 이제 이 얘기 하지 말자고... 여자들은 정말 모르겠어. ”

 

“ 너 다시는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 마. ”

 

“ 응? 뭐가? ”

 

“ 알렉산드라가 잘못한 것처럼 얘기하고 있잖아. ”

 

“ 아니야! 성희롱은 분명히 타라카노프가 잘못했어. 협박한 건 간부들 잘못이고. 근데 알렉산드라도 이해가 안 가니까 그렇지. 6년 동안 그랬다잖아. 그럼 맨 처음에 그 개자식이 그랬을 때 주변에 말했어야지. 그때 문제를 제기했어야지. 꾹꾹 참고 말 안 했기 때문에 다들 몇 년 동안 타라카노프가 그럴 땐 좋다고 가만있다가 왜 이제 와서 난리를 치냐고 하는 거라고. 잘못된 일이 있으면 당연히 문제를 제기했어야지. 심지어 자기가 피해자인데... ”

 

그러니까! 너 그렇게 얘기하지 말라고! 왜 약자에게 잘못을 돌려! 알렉산드라는 약자잖아. 제일 비겁한 게 약자한테 잘못을 돌리는 짓이야.

 

 

왕재수가 정색을 했기 때문에 베르닌은 움찔했고 어쩐지 억울해서 항변했다.

 

 

“ 하지만... 알렉산드라는 왜 그랬던 걸까? 나 솔직히 이해가 안 가. 처음에야 놀라서 말 못했다지만 몇 년 동안 그랬다잖아. 진작 좀 대들지. ”

 

“ 너는 국장이 들들 볶고 괴롭힐 때 대들었어? ”

 

“ 어... 아니... ”

 

“ 똑같은 거야. 그것보다 더 심한 거라고. 그 여자 위치에서 저항하기가 쉬운 줄 알아? 세상에 더러운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권력이 뭐 별거냐? 나보다 조금이라도 위에 있고 조금이라도 힘세면 그게 다 권력이지. 그 여자가 뭘 더 어떻게 할 수 있었겠어. 심지어 너도 협박했다며. 그럼 그놈들이 알렉산드라 불러서 네 얘기도 했을 걸. 뻔하잖아. 고발 취소 안 하면 그 여자 좌천시키는 것도 모자라 너한테도 불이익 줄 거라고 협박했겠지. 걘 너한테 피해 주기 싫었을 거고. 그냥 그런 거야. ”

 

“ 아... 그래. 나보고 앞길 막힐 거라고 하긴 했지만... 그치만... ”

 

 

베르닌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너무나 속이 상했다.

 

 

“ 불쌍한 알렉산드라. 어떻게 하지. 나 그만두고 싶어. 뻔히 더러운 수작 벌어진 거 다 알면서 아무 것도 못하고...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

 

“ 뭘 어떻게 하니. 더러운 놈들 안 보고 살아야지. 내가 제일 잘나면 돼. ”

 

“ 야, 너야 천재니까 그런 말이 쉽게 나오지. 나나 알렉산드라는 너처럼 잘나지 않았잖아!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데? ”

 

몰라! 그 방법을 알았으면 내가 지금 시골에 와 있겠니?

 

 

왕재수가 찻잔을 쨍 하고 내려놓더니 일어섰다. 안색이 창백해지면서 까만 눈에 불꽃이 이글거렸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깜짝 놀랐다. 왕재수는 한 손으로 가슴을 탁 치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그게 다 그런 거란 말이야. 나보다 센 놈이 짓밟을 때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비웃는 것밖에는 없어. 근데 그것도 때로는 안 되거든. 그럼 포기할 수밖에 없는 거야. ”

 

“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돼! 그건 자본주의 양키들이나 그러는 거야! 우리 선조들이 왜 혁명을 했는데. 잘못된 건 고치고 뒤집어야지! 약자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해야지!

 

 

왕재수는 가만히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검은 눈에 이글거리던 불꽃은 사라지고 없었다. 졸리고 지쳐 보였다.

 

 

“ 혁명으로 끝나는 게 아니니까 그렇지. 혁명을 한 놈들이 결국은 다시 윗자리에 올라간다니까. 인간이란 게 원래 그래. 뭘 바라니? ”

 

 

베르닌은 말문이 막혔다.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그 순간 왕재수가 아플 때 크레믈린 아저씨에 대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온천에서 했던 얘기도. 그는 입을 벌렸다 다물었고 다시 벌렸다. 그리고 목구멍을 철사로 쑤시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 너 그래서 그런 거야? ”

 

“ 뭐가? ”

 

“ 투레츠키. 가만히 있었던 거. ”

 

“ 웬 투레츠키. 너 정말 바냐한테 무슨 억하심정 있냐? 툭하면 걔 얘기야. ”

 

“ 알았어, 투레츠키는 아니라고 쳐. 하지만... 그 인간. 크레믈린에 있다는 그 아저씨. 너도 그랬던 거야? ”

 

“ 뭘 그랬다는 거야? 아 머리 아파. 졸려. ”

 

“ 타라카노프가 알렉산드라에게 그랬던 것처럼. 싫은데 못살게 굴고... ”

 

“ 몰라. 기억 안 나. 난 자러 갈 거야. ”

 

“ 나쁜 짓 하고 이상한 사진 찍었다고 했잖아. 그때 알릭 얘기하다가. 내가 그런 명령 받은 줄 알았다고. 크레믈린 아저씨도 그랬다고 했잖아. ”

 

“ 얜 대체 왜 이렇게 쓸데없는 소릴 다 기억하는 거야. 그거 다 헛소리야. 에이, 그때 온천 괜히 갔어. 피곤해 죽겠네. ”

 

“ 하지만... 너도... ”

 

 

베르닌은 다시금 솟구치는 분노를 느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너는 우리 같은 일반인도 아니잖아. 천재잖아. 엄청 잘 나가는 애였잖아. 완전 스타였잖아. 외국에서도 다 알아줬다며. 근데 어떻게 그놈이 나쁜 짓하게 놔둘 수가 있어? 네가 싫으면 싫다고 했어야지 왜 그 사람 마음대로 하게 놔둬? 아무리 국회의원이라도 그렇지. 네가 대놓고 문제 제기했으면... ”

 

이 바보 멍충아. 내가 천재면 뭐하고 잘 나가면 뭐해. 그 인간 한 마디면 그 자리에서 모가지 날아가는데. 그 사람이 손 하나만 까딱하면 다리 부러지고 근육 끊어질 거 뻔히 아는데, 다시는 춤 못 추게 될지도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싫다고 해! 아무도 내 편 안 들어줄 거 뻔한데 무슨 대놓고 문제를 제기해. 내가 무슨 고위직 집안 출신도 아니고. 그거 다 환상이야. 천재에 스타니까 내 말 먹힐 거라는 거. 내가 몇 번을 말해, 그랬으면 내가 시골에 와 있겠냐? ”

 

 

왕재수는 흥분한 말투로 빠르게 쏘아붙이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베르닌은 당황해서 가만히 있었다. 머릿속이 빙빙 돌았다. 울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만 또렷하게 들었다. 하지만 왕재수는 울지도 않았다. 빨개졌던 얼굴도 금세 정상으로 돌아왔다. 완전히 누그러진 목소리로 덧붙였을 뿐이었다.

 

 

“ 바보 멍충이. 그러니까 펠메니 남은 거 다 먹으란 말이야. 안 먹으면 너만 손해라고. ”

 

“ 삶은 지 한참 돼서 식었잖아. 다 불어터졌어. ”

 

“ 그건 네 팔자고. 하여튼 난 간다. 잘 자. ”

 

 

왕재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베르닌은 소파에 내팽개쳐진 왕재수의 코트와 가방을 발견하고 뒤따라갈까 하다가 그만뒀다. 어차피 왕재수는 토요일에도 출근하니까 아침에 태워다 주러 가면서 갖다 주면 될 것 같았다.

 

 

그는 싱크대 위에 올려두었던 남은 펠메니를 선 채로 모두 먹어치웠다. 양배추 샐러드도 먹었다. 설거지를 했다. 머릿속은 여전히 빙빙 돌았다. 그는 착잡한 마음으로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FIN

- 2015. 3. 30 ~ 4. 5 -

 

 

 

-----

 

 

18편은 이렇게 끝난다. 좀 찝찝하긴 하지만 뭐 인생이 그런 거라서.

 

 

..

 

 

알렉산드라가 겪는 일들 중 일부는 내가 실제로 겪었던 일들에서 소재를 따왔다. 물론 조금씩 변형시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저 정도로 심각한 일에 휘말린 건 아니지만. 저런 일이 일어나는 곳은 상당히 많다.

 

알렉산드라에게 내가 여성 사무직 노동자로서 겪었던 일들이 좀 투영되어 있긴 하지만 물론 그녀는 허구의 인물이다. 스타일도 나랑은 좀 다르지만.. 하여튼 조금은 닮은 면도 있다. 하긴 그렇게 따지만 난 단추랑 제일 닮은 거잖아!! 단추가 겪은 일들을 생각하니 그렇네!!

 

 

..

 

 

후반부에서 왕재수가 정색을 하며 쏟아놓는 얘기들은 사실 본편에 더 가까운 얘기들이라.. 하여튼 서무 시리즈도 본편에서 태어난 거니까 뒤로 갈 수록 어쩔수 없다.

 

 

..

 

 

스페호프가 왕재수의 뉴욕 공연에 대해 떠드는 내용은 본편과 맥이 닿아 있다. 뉴욕 공연은 '불새', 파리 공연은 '니진스키 트리뷰트'에 대한 얘기인데 본편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이다. 뉴욕에서 올렸던 불새에 대한 짧은 언급과 초창기 리허설에 대한 미샤의 친구 일린의 회상 장면은 전에 about writing 폴더에 발췌한 적이 있다. 그건 여기 : http://tveye.tistory.com/3613

 

..

 

 

좀 우울한 에피소드였기 때문에. 기분 전환용으로.

등장인물 이름들을 지을 때 가끔은 여기저기서 빌려오기도 하고(특히 무용수나 예술가들 이름에서 잘 따온다), 인물의 성격을 풍자하기 위해 특정 형용사나 명사에서 파생시키기도 한다. 러시아 성들 자체가 형용사나 명사에서 나온 것들이 많아서 그렇게 무리수는 아니다. 이번 편이 특히 그렇다.

 

먼저 알렉산드라를 집적대는 아나톨리 타라카노프. 타라칸은 노어로 바퀴벌레란 뜻이다.

 

알렉산드라의 성인 크롤리코바. 크롤릭은 산토끼란 뜻이다 (ㅎㅎ)

 

고충 처리 담당자인 이그노리로프. '무시하다'란 뜻의 이그노리로바찌 란 동사에서 따왔다.

 

발따예프에 대해서는 전에 얘기한 적 있다. '발따찌'(수다떨다)란 동사에서 왔다.

 

 

..

 

 

덧붙여서.. 주요 인물들 성 몇 개도.. 이 사람들 성이야 서무 시리즈 나오기 전에 본편 구상할 때 나온 거라서 위와 같이 웃긴 건 아니고...

 

 

우리의 주인공 단추청년 다닐 베르닌. '베르느이'란 형용사는 '성실한, 믿음직한, 충성스러운' 이란 뜻이다 :)

 

 

본편의 주인공이자 서무 시리즈의 왕재수인 미하일 야스민. 이 사람이야 십몇년 전에 처음 구상한 인물이라서.. 그의 성인 야스민은 다들 알겠지만 꽃 이름이다. 영어로는 재스민. 노어로는 야스민인데 뭐 이 사람 성격이나 외모가 재스민 꽃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렇다고 장미니 아이리스니 수선화니 이런 건 노어 이름이 좀 이상하기도 하고... 

우크라이나 계열 성이 가끔 ~in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본편에서 미샤의 아버지 쪽 혈통에 백러시아/우크라이나 쪽 피가 섞여 있어서 이런 성을 가졌다. 러시아에서도 그렇게 흔한 성은 아니고 보통은 꽃 이름이다.

 

 

렐랴 비슈네바의 성인 비슈네바는 전에 얘기한 적 있지만 마린스키의 프리마 발레리나인 디아나 비슈네바에서 따왔다. 액센트가 뒤에 있으니 원래 발음은 디아나 비슈뇨바가 맞지만..

 

하여튼 렐랴의 성은 액센트가 앞에 있어서 비슈뇨바가 아니고 비슈네바이다.'비슈냐'가 버찌/체리란 뜻이고 '비슈네브이 사드'는 '벚나무동산'이란 뜻이다. 체호프의 유명한 희곡 제목 말이다. 우리나라엔 벚꽃동산으로 번역됐지만. 원래는 벚나무 정원에 더 가까울 듯. 그래서 본편과 서무 시리즈에서 렐랴가 간행하는 문예지 제목도 '비슈네브이 사드'이다. 자기 성을 따기도 했고 :)

 

 

그리고 이건 좀 웃기지만.. 로만 코즐로프. 코젤은 염소란 뜻이다 :) 열받으면 들이받는다~

 

 

.. 근데 위의 성들 다 실재하는 성이다. 진짜다!!

 

 

...

 

 

이야기는 19편으로 이어진다. 19편은 이렇게 우울하지 않아요~

 

 

 

.. 댓글은 저에게 언제나 큰 힘이 됩니다 :)

 

 

:
Posted by liontamer

 

본편으로 돌아가려고 노력 중이지만 원체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지 어찌어찌 서무의 슬픔 시리즈는 계속되고 있다. 오늘은 17편이다.

 

과연 우리의 불운한 단추청년 다닐 베르닌에게도 운수 좋은 날이란 것이 있을까? 그 해답은 이번 편에~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선배들을 모시고 대도시 출장을 다녀온 후 베르닌은 다시 서무의 일상을 계속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그의 자리로 스페호프 국장이 전화를 해 오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17


 

 

서무의 슬픔

- 운수 좋은 날 -

 

 

 

 

 

그날 베르닌은 아침부터 운이 좋았다. 전날 타자기 전원 차단을 깜박하고 간 것 때문에 벌벌 떨며 출근했으나 놀랍게도 주차장에는 국장 관용차가 보이지 않았다. 보통 스페호프는 한 시간 전에 출근해서 KGB 건물 전체를 순시하고 업무 시작 직전이 되면 서무를 불러서 이런저런 지적사항을 전달하기 때문에 국장의 차가 없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리에 앉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 예, 다닐 베르닌입니다. ”

 

전화 멘트 똑바로 하지 못하나? ‘안녕하십니까, 가브릴로프 KGB 지국 감시분석부서 다닐 베르닌입니다‘ 라고 해야 할 것 아닌가! ”

 

“ 어, 예... 죄송합니다. 국장님, 그런데 왜... 국장실로 올라갈까요? ”

 

“ 아닐세. 오늘 내 휴가를 좀 내주게. 열이 펄펄 끓고 몸이 움직이지 않는군. 아무래도 회식 때 필로모프 녀석에게 독감이라도 옮은 것 같아.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미치겠군. ”

 

어... 그러셨군요. 독감이면 푹 쉬셔야죠. 병원 예약이라도 잡아드릴까요? ”

 

“ 됐네! 병원은 무슨! 오늘 하루만 쉬면 나아지겠지. 하여튼 휴가니까 그리 알고, 어제 지시한 사항들은 모두 정리해서 내일 아침에 보고하게. 다른 부서에도 공지해주고. ”

 

 

스페호프가 전화를 끊었다. 베르닌은 뛸 듯이 기뻤다. 모든 부서 서무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 행복한 소식을 알렸다. 삽시간에 건물 전체에 화기애애하고 느긋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베르닌은 드물게 여유로운 오전을 보냈다. 국장이 지시한 사무실 환경 미화 건은 이미 전날 야근을 해서 보고서를 만들어 두었으므로 일상적인 서무 업무와 금주의 왕재수 감시 보고서 작성 외에는 가외 업무도 없었다. 그리고 왕재수는 요즘 극장과 집 외에는 따로 가는 곳도 없었기 때문에 감시 보고서 쓰는 것도 아주 수월했다. 요 며칠 코즐로프가 와서 자고 갔지만 물론 그 응응에 대한 부분은 베르닌의 임의대로 전부 생략해버렸고 그의 방문 목적도 자신과의 모스크바 정보 교환이라고 둘러댔다.

 

극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스페호프가 매수한 스태프 하나가 베르닌에게 매주 짧은 브리핑을 하고 있었다. 그건 내부 고발 증거가 남을까봐 구두로만 진행했다. 베르닌은 그 내용들도 간략하게 골자만 정리해서 추가했다. 젊은 감독에 대한 시기질투에서 비롯된 허위 고발내역은 대충 삭제하고 실제로 충돌이 일어난 부분만 간단하게 적었다.

 

‘ 근데 얘는 아직도 극장 사람들하고 부딪치네. 단원들은 말 잘 듣는 것 같던데. 하긴 극장이야 우리랑 다르니까 내가 신경 쓸 건 아니지. ’

 

 

 

*    *    *

 

 

 

11시가 되자 알렉산드라가 서무 업무 회의를 빙자해 각 부서 서무들을 휴게실로 불러 모았다. 주말에 고향에 다녀왔다면서 말린 살구를 한 봉지씩 나눠주었다. 서무들은 따뜻한 차에 살구를 곁들여 먹으며 오랜만에 국장 없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정말 여유로웠다. 베르닌은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출장에서 벌어진 일들을 얘기해주었고 다들 혀를 내두르며 그를 위로해 주었다. 역시 같은 입장이라 서무의 슬픔을 절절하게 이해해 주었다.

 

 

30분쯤 후 그들은 회의실을 나왔다. 자기 부서로 돌아가는 길에 베르닌은 등사실에 들렀다가 리자와 마주쳤다. 리자는 눈과 코가 빨개진 채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 어, 리자.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

 

“ 흑흑... 발따예프 선배가 아까 등록 서류 때문에 내려왔다가 처리가 늦는다고 막 화내고 소리 질러서요. ”

 

“ 엥, 왜요? 그 선배는 일도 안 하는데 웬 등록 서류를 당신한테 떼어 달라고 하고 화를 내요? ”

 

“ 자기 아는 사람이 이번에 이직을 준비한다고 우리 쪽에서 관리하는 신원 조회 서류를 갱신해야 하니까 빨리 해달라고 갈구더라고요. 근데 보니까 그 사람 여권도 어제 날짜로 만료됐고 사진도 10년 전 거라서 다 바꿔야 하는 거였어요. 필요한 서류 다 준비해 와야 해 줄 수 있다고, 최소한 일주일은 걸린다고 얘기해줬더니 막 성질내면서 나한테 선배가 해달라면 후딱 해줘야지 왜 말대답이냐면서 막 화내고... 소리 지르고... 흐흑, 쓸모없는 계집애라 그러고 어린 게 일 못한다고 그러고... ”

 

“ 아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람. 증빙 서류가 있어야 뭘 해주죠. 절차와 원칙이 있는 건데! 진짜 억울했겠네요. 그리고 그런 험한 말을 하다니! 리자, 마음 쓰지 말아요! 그 사람이 나쁜 거예요! 그 사람 진짜 나쁜 선배예요! ”

 

“ 막 장부를 뒤집어엎고 책상을 탕탕 치고 일 똑바로 하라고 고함치고... 우리 엄마아빠도 나한테 소리 한 번 안 질렀는데 엉엉... 나 집에 가면 엄청 귀염 받는 딸인데 흐흑... 하도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해서 무서워서 도망 왔어요. 오후까지 해결 안 해 놓으면 국장한테 얘기해서 잘라버리겠다고 막 고함치다 갔어요. 그것도 원래 당사자가 직접 와야 되는데 자기 친구라고, 출장 같이 다녀온 사이니까 빨리 해줘야 된다고... ”

 

“ 어, 그거 누군데요? ”

 

“ 무슨 주브치크가 어쩌고... ”

 

“ 어, 나 그 사람 알아요. 이번에 출장 같이 갔어요. 검열국 선전부장. 나한테 사진이랑 인적 증빙 서류 다 있어요. 그때도 여권 곧 만료된다 해서 내가 정신없이 임시 서류 만들었거든요. 모스크바랑 레닌그라드 가면 임시 등록해야 해서... 내가 갖다 줄게요. 울지 마요. ”

 

 

베르닌은 급하게 사무실로 갔다. 지난 주 출장 때 만들었던 서류철을 꺼냈다. 주브치크의 임시 등록용 증빙서류들을 한 뭉치 껴안고 등사실로 갔다. 리자는 아직도 훌쩍이고 있었지만 베르닌이 서류들을 건네주자 곧 울음을 그쳤고 딸꾹질을 하면서도 웃었다.

 

 

“ 어머, 정말 필요한 게 다 있네요! 고마워요 다냐! 이걸로 대충 해치워서 그 인간 얼굴에 집어 던져야지! ”

 

“ 리자, 당신 진짜 착하네요. 나 같으면 안 해줄 거예요. 아니면 최소한 주브치크에게 전화해서 한 마디 해줬을 것 같아요. 본인이 와서 요청해야지 어떻게 친분을 이용해 이런 식으로 스리슬쩍 넘어가려고 해요. 그리고 발따예프 선배가 지껄인 건 마음 쓰지 말아요. 그 인간 원래 자기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다른 사람 배려는 눈곱만큼도 없고... ”

 

“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당신 이번에 그 선배랑 출장 다녀왔죠? 알만하네요. 무지 고생했겠네... 알렉산드라 언니가 지난주에 당신 걱정하면서 발따예프 선배 엄청 욕했어요. 저번에 감사관 왔을 때도 당신한테 다 뒤집어씌웠다면서요. 나쁜 인간... 일단 이것부터 갖다 놓고. 벌써 점심시간이네요. 우리 같이 점심 먹어요. 이 인간들 다 꼴 보기 싫으니까 구내식당 가지 말고 나가서 먹고 오는 게 어때요! 항아리 닭고기 먹으러 갈까. 어제 먹긴 했지만 또 먹어도 괜찮은데. ”

 

“ 어, 그래요. 나가서 같이 먹어요. 항아리 닭고기 식당은 자주 가니까 새로운 데 가보는 게 어때요? 이번에 괜찮은 데 하나 알게 됐거든요. 극장 쪽에 있는데요, 항아리 닭고기 식당이랑 별로 안 멀어요. ”

 

 

베르닌은 리자를 데리고 왕재수가 발굴한 극장 근처 식당에 갔다. 점심시간에도 사람이 많았다. 줄을 서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점원이 베르닌을 보더니 ‘어, 그 꽃미남 감독님 친구 아니에요? 이쪽으로 오세요’ 라고 하며 구석에 있는 조그만 테이블을 내주었다.

 

메뉴판을 보고 베르닌은 전에 먹어봤던 살랸카와 쇠고기 롤, 왕재수가 시켰던 스메타나 닭가슴살이 맛있었다고 설명해주었다. 리자는 새로운 걸 먹어보자면서 양파 수프와 사과 소스로 조린 돼지고기 요리를 시켰다. 베르닌은 살랸카와 키예프식 치킨 커틀릿을 시켰다. 음식은 모두 아주 맛있었다. 나이프로 고기를 잘라 오물오물 씹더니 리자가 방긋 웃었다.

 

 

“ 어머, 다냐. 당신 의외네요. 이렇게 귀여운 식당도 알고, 심지어 줄 안 서고 자리도 얻고. 음식도 엄청 맛있어요. 맨날 구내식당에서만 밥 먹고 이런 맛집은 전혀 모르는 융통성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

 

“ 어... 맛집은 잘 몰라요. 근데 여기가 왕재수, 아니 미샤가 자주 오는 데라서요. 저번에 같이 와서 먹어봤는데 맛있더라고요. 가격도 안 비싸고요. ”

 

“ 아, 그러면 그렇지. 근데 당신들 아직도 뜨거운 사이인가보네요. 아침에 하고 저녁에 하고 밤에... ”

 

“ 으으, 리자. 우리 진짜 그런 사이 아니라니까요. 그거 다 헛소문이란 말이에요. 난 여자 좋아한다고요! 걔도 따로 애인 있고요! ”

 

“ 그래요? 근데 저번에 그 사람 물에 빠졌을 때 당신이 울고불고... ”

 

“ 그럼 애가 빠져죽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안 당황해요! 걘 겉으로만 잘났지 완전 애기란 말이에요. 잠시라도 한눈팔면 금세 사고를 치니... ”

 

“ 근데 당신은 그 꽃돌이 감독님 아니더라도 그런 의심 받을만하단 말이에요. 입사하고 나서 데이트하는 것도 한 번도 못 봤고 여자들한테도 목석처럼... ”

 

“ 아니에요! 나, 나도 데이트 한 적 있어요. 처음에... 잠깐 사귀던 여자 있었는데 입사하고 국장이 하도 일을 많이 시켜서 2주일도 안돼서 깨졌단 말이에요. 그리고 나서는 너무 바빠서 여자 만날 시간도 없고... 난 점점 책상물림만 되고... 그러다가 그 자식! 그 자식 감시 업무 때문에 갑자기 이상한 소문까지 나서... 흐흑... ”

 

 

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정말요? ”

 

“ 그렇다니까요! 사실 저번 모스크바 사람들 왔던 파티 때... 그때 옛날에 잘 될 뻔 했던 여자도 왔었거든요. 그래서 다시 잘 될 뻔 했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

 

“ 왜요? 왜 잘 안 됐어요? 그 여자가 이미 딴 남자가 생겼어요? ”

 

“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었는데요, 때를 놓쳤나 봐요. 다시 만나니까 예전 같은 마음이 안 생기더라고요. ”

 

“ 그렇구나. 근데 아무래도 그건 그 꽃돌이 감독님 때문인 것 같은데. 맨날 그렇게 예쁘고 근사한 꽃미남을 옆에 두고 있어서... ”

 

“ 꽃미남이면 뭐해요! 난 여자가 좋다니까요! 근데 이제 여자 만나기는 글렀어요. 맨날 야근만 하지, 주말에도 일하지. 시간 나면 맨날 그 왕재수 녀석 출퇴근에 밥해주고 청소해주고 뒷바라지하지... 툭하면 국장한테 불려가서 가외업무만 받지. 가뜩이나 책상물림에 재미없다고 여자들한테 인기 없었는데 갈수록 더 그럴 거 같아요. 결혼이나 할 수 있을지. 흑... 나이도 꽉 찼는데... 저번에도 부모님 뵈러 갔더니 언제 장가 가냐고 타박하시더라고요. ”

 

“ 책상물림은 맞지만 인기 없는 건 아닌데. ”

 

“ 내가 무슨 인기가 있어요. 대학 때도 여자들 만나면 계속 버벅거리고. 그때도 인기 하나도 없었어요. 책상물림이라고... ”

 

“ 그래요?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은데. 당신 처음 들어왔을 때 우리 부서에서 오랜만에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고 좋아했었는데. 그땐 풋풋하고 귀엽다고도 했는데.

 

“ 에... 누가요? 나이 많은 선배님들이나 그랬겠죠. ”

 

“ 선배들은 여자 아닌가요? 하여튼 다냐, 너무 자학하지 말아요. 당신 생각처럼 나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당신은 착하잖아요. 배려심도 많고 남 뒤통수도 안 치고. 분명히 좋은 여자가 생길 거예요. ”

 

“ 어, 고마워요. 근데 나 별로 안 착한데... 사람들이 자꾸 오해를... ”

 

“ 아니에요! 당신은 착해요! 난 알아요! ”

 

“ 어떻게 알아요? ”

 

“ 그때 강아지 주워왔을 때 잘 돌봐줬잖아요. 그리고 꽃돌이 감독님이랑 그런 사이도 아닌 거라면 정말 잘해주는 거잖아요. 출퇴근시켜줘, 밥해줘, 매일 돌봐줘... ”

 

“ 그건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에요! 공무라고요! 국장이 저한테 맡겼잖아요, 그 자식 감시 업무... 일거수일투족 감시해야 되니까 출퇴근에 밥까지 다 챙기라고... ”

 

“ 누가 공무를 그렇게 마음에서 우러나서 열심히 해요! ”

 

“ 마음에서 우러나긴요! 전부 할 수 없이... ”

 

“ 아닌 거 같은데. 저번에도 극장 앞에서 우연히 보니까 밥 안 챙겨먹는다고 야단치고 막 샌드위치도 싸다 주고... 진짜 걱정하는 거 같던데. 난 그거 보고 당신이랑 꽃돌이 감독님이랑 진짜 사귀는 줄 알았어요. ”

 

“ 진짜 아니라고요. ”

 

“ 아유, 알았어요. 정색하긴. 근데 그 사람 정말 애인 있어요? ”

 

“ 있대요. ”

 

“ 에이... 그럼 나랑 소개팅은 물 건너간 거네. ”

 

“ 리자, 그런 싸가지 없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놈은 별로 도움 안돼요!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생긴 줄 아는 놈인데! 당신 예쁘다고 해주고 아껴주는 남자를 만나야죠! ”

 

“ 요즘 세상에 어느 남자가 그런 말을 해줘요! 나 예쁘다고 해준 건 우리 엄마아빠밖에 없는데! ”

 

“ 엥? 당신은 예쁘잖아요. 귀엽고. ”

 

“ 어머, 정말요? 되게 웃기다. 당신 그런 말도 할 줄 알아요? ”

 

 

리자가 깔깔 웃었다. 베르닌은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그래도 솔직하게 말했다.

 

 

“ 객관적으로 볼 때 우리 회사에서 제일 예쁜 편이라고요. ”

 

“ 음, 그건 내가 여직원 중 제일 어리기 때문이겠죠! ”

 

“ 아닌데... 알렉산드라 선배는 나보다 나이 많아도 예쁜데. ”

 

“ 어머, 당신 되게 웃겨요, 다냐. 안 그런 줄 알았는데 여직원들 외모를 다 재고 있었군요! ”

 

“ 그게 아니라... 내 말은... 그러니까 나이랑 상관없다고요! ”

 

“ 됐어요. 누가 뭐래요. 근데 그런 얘기 하는 거 보니까 당신 정말 꽃돌이 감독님이랑 그런 사이 아닌가 보네요. 여자 얼굴 따지고. ”

 

 

점심 시간이 이미 다 지났기 때문에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베르닌은 계산을 하려고 했으나 리자는 서류 문제를 해결해준 보답으로 자기가 사겠다면서 급하게 쪼르르 달려가 돈을 치러버렸다.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도 리자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사무실로 들어가면서 리자는 앞으로도 종종 같이 점심을 먹자고 했다.

 

 

 

*    *    *

 

 

 

밝고 귀여운 리자와 맛있는 점심까지 먹어서 그런지 베르닌은 내내 기분이 좋았다. 오후에는 급한 일도 없어서 그동안 미뤄뒀던 서류철 표지 작업을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향긋한 꽃 냄새가 풍겨왔다. 고개를 드니 눈부신 미모의 렐랴가 책상 옆에 선 채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 어, 안녕하세요.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오랜만이네요! ”

 

“ 와, 당신 완전히 서류철 기계 같네요! 구멍 뚫는 것부터 노끈 꿰는 것까지 오차도 하나도 없고 진짜 정확해요. 이런 거 처음 봤어요. ”

 

“ 아, 이거요? 별 거 아닙니다. 하도 서류철을 많이 해서 눈감고도... ”

 

근데 당신 모스크바 법대 나왔다면서요. 성적도 좋았다면서, 당신 같은 엘리트를 이런 잡일로 낭비하다니 스페호프도 참 이상한 사람이라니까요. ”

 

“ 어, 서류철 만들기는. 음, 서무의 업무... 행정의 기본... ”

 

“ 뭐가 행정의 기본이에요, 그냥 잡일이지. 다냐, 지금 바빠요? ”

 

“ 아뇨. 별로 안 바쁩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

 

“ 당신네 국장이 우리 잡지에 무슨 정보 처리 승인을 추가로 받으라고 어제 공문 보냈더라고요. 그거 안 받으면 다음호 발간 무기한 중지시킬 거라잖아요. 근데 대체 아무리 읽어봐도 뭘 받으라는 건지 이해가 안 가요. ”

 

“ 공문이요? 전 그런 거 보낸 적 없는데. 이상하네요, 보통 언론사에 보내는 국장 공문은 제가 발송 처리하는데. ”

 

“ 지난주 금요일에 보낸 거던데... ”

 

“ 아, 지난주엔 제가 출장을 가느라 자리에 없었어요. 혹시 그 공문 가져오셨나요? ”

 

“ 여기요. ”

 

 

렐랴가 핸드백을 열더니 두 번 접은 서류를 꺼내서 건네주었다. 스페호프가 봤다면 신성한 공문을 접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행정의 기본 운운 불을 뿜었을 것이 뻔했다.

 

 

“ 아, 이거 별로 중요한 거 아닙니다. 검열국에 요청하시면 돼요. 그쪽에서 서류에 도장을 하나 찍어줄 건데요, 그것만 첨부해서 저희 쪽으로 ‘정보 처리 승인 완료’ 공문을 보내주시면 됩니다. ”

 

“ 그럼 또 일주일 걸릴 거잖아요! 접수번호 따고 발송번호 따고 우체국에 가고 공문 왔다갔다... ”

 

“ 어, 원래는 그렇게 해야 하는데... 오늘 국장이 없으니까 제가 검열국에 전화해 드릴게요. 잠깐만요. ”

 

 

베르닌은 검열국 담당부서에 전화를 해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고 수화기를 내려놓은 후 렐랴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다.

 

 

“ 됐습니다. 있다가 검열국 가셔서 서류 받아 가시면 돼요. 공문만 만들어 놓으세요. 그럼 내일 아침에 제가 출근하면서 당신 사무실에 들러서 공문이랑 서류 가지고 와서 처리해드릴게요. ”

 

“ 어머나, 다냐. 정말 고마워요! 난 당신이 또 행정이 어떻고 하면서 꽉 막힌 소리를 할 줄 알고 걱정했는데... 당신네 국장은 정말 문화예술 탄압에 맛 들린 것 같아요. 미샤한테도 그렇게 못되게 군다면서... 아주 예술계에 소문이 파다하더라고요. 신작 안무도 검열국 쪽 사람들 보내서 이것저것 간섭하고, 진보적인 예술가들이랑 의견이라도 나눌까봐 만나지도 못하게 한다고... ”

 

“ 어, 그래요? 전 처음 듣는 얘긴데요. 헛소문 아닐까요? 제가 걔 감시요원인데 어떻게 저도 모르게 그런 일이 있겠어요. ”

 

“ 아유, 다냐. 당신 왜 이렇게 순진해요. 당신은 극장 쪽 일은 모르잖아요. 온종일 극장에서 그 사람 곁에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루의 태반은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서. 아까 신작 리허설하는 거 취재하려고 극장 갔었는데 오늘도 검열 요원 두 명이나 거기 있던데요? 하도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으니까 미샤가 화나서 리허설도 중단해 버리더라고요. 내가 말리지 않았으면 크게 싸웠을 거예요. 미샤가 엄청 화냈어요. 그 사람 그러는 거 처음 봤어요. 화나니까 진짜 멋있더라고요. 눈이 이글이글 타면서 더 잘생겨 보이고...

 

 

베르닌은 렐랴의 마지막 두 문장은 무시하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 싸웠다고요? 혹시 그 사람들이 때리고 그런 거 아니죠? ”

 

“ 아뇨. 언성이 높아지고 그 사람들이 협박하니까 남자 무용수들이 다 몰려와서 미샤 편을 들고 예술 탄압하지 말라고 대들어서 다행히 주먹질 같은 건 없었어요. 알잖아요, 우리 극장 무용수들 덩치 좋은 거. 근데 아마 무용수들이 도와주지 않았어도 그 사람들 주먹질하진 못했을 거예요. 미샤가 화내니까 옆으로 다가가지 못하더라고요. 무서워서. ”

 

“ 무서울 리가... 화내봤자 막 울고 삐치기나 하는 앤데. ”

 

 

베르닌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렐랴는 사무실을 한 바퀴 휙 둘러보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오늘은 전화도 안 울리고 자리도 많이 비어 있네요. 원래 수요일엔 많이 바쁜 것 같더니. ”

 

“ 아, 오늘 국장이 휴가라서요. 한결 여유가 있어요. ”

 

“ 독재자. 당신네 국장 너무 싫어요. 인상도 음침하고 매일 꽉 막힌 소리만 하고... 그럼 당신도 별로 안 바빠요? 나 출판문화국 미팅까지 시간 좀 남는데. 차 한 잔 줄 수 있어요? ”

 

“ 그, 그럼요! 휴, 휴게실이 비어 있으니까 그리로 가시죠. 거, 거기 의자가 좀 편해요. ”

 

“ 왜 갑자기 그렇게 말을 더듬어요? 누가 보면 데이트라도 하자고 한 줄 알겠네. ”

 

“ 어,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게 아니고... 어... 하여튼 가시죠. ”

 

 

베르닌은 휴게실로 렐랴를 안내했다. 그날따라 낡은 소파가 더욱 마음에 안 들었지만 별 수 없었다. 그는 누군가가 흘리고 간 빵 부스러기를 급하게 털어내고 제일 깨끗해 보이는 쿠션을 가져와 푹 꺼진 등받이 안쪽에 괴어주었다.

 

렐랴는 소파에 앉더니 늘씬한 다리를 꼬았고 목덜미로 흘러내린 풍성한 갈색 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 올려 눈 깜짝할 사이에 구슬 박힌 예쁜 핀으로 고정시켰다. 베르닌은 넋을 놓고 그 유려한 손놀림을 바라보았다.

 

 

“ 다냐, 뭐해요? 차 준다더니 뭘 그렇게 멍하게 보고 있어요? ”

 

“ 어... 아닙니다. 저... 여자들이 머리 올리는 게 신기해서. ”

 

“ 어머. 당신 정말... 아유 싱거워. ”

 

 

렐랴가 소리 내어 웃었다. 베르닌은 렐랴가 웃는 모습이라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싫증나지 않을 것 같았지만 억지로 사모바르에서 뜨거운 물을 떠왔다. 찻잔에 차를 우렸다. 뭔가 간식이 없나 뒤졌지만 국장이 없는 날이라고 다들 신이 나서 휴게실을 들락거렸으므로 먹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베르닌이 실망하고 있는데 렐랴가 바스락거리더니 상자 두 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둘 다 리본으로 곱게 포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조그만 유리병도 한 개 꺼냈다.

 

 

“ 어, 그게 뭔가요? ”

 

“ 어제 파이랑 케익 구웠거든요. 이건 나무열매 파이. 검은 숲에서 따온 열매들로 만든 거예요. 그리고 이건 나폴레옹 케익. 가을에 수확한 배를 설탕과 꿀에 조려서 얹었어요. ”

 

“ 우와,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정말 대단해요. 나폴레옹 케익이라니... 어떻게 그런 걸 다 만드나요? ”

 

“ 우리 외가 쪽이 귀족 가문이었던 거 알잖아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던 레시피가 있어요. 비법은 신선한 버터를 듬뿍 쓰는 거죠. 이거 미샤한테 전해주세요. 파이랑 같이. ”

 

“ 어, 근데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사실은 걔는... 저, 걔는 무용을 해서 그런지 단 걸 잘 안 먹거든요. 앞으로 걔한테 이런 거 만들어 주시고 싶으면 사과파이를 구워주세요. 사과파이는 잘 먹어요. ”

 

“ 아, 미셴카가 몸매 관리하는 건 나도 알아요. 근데 예전에 발레 잡지에서 파트너가 했던 인터뷰 보니까 나폴레옹 케익은 먹는대요. 레닌그라드에 유명한 제과점이 있는데 미샤가 거기 나폴레옹 케익이 너무 맛있어서 못 참고 한 판 다 먹은 적 있다던데요. 그래서 며칠 동안 연습량을 무지 많이 늘렸다고 하더라고요. 그거 생각나서 구운 거예요. 만드는 김에 나무열매 파이도 한 판 구웠고요. 이건 단 거 아니니까 괜찮을 걸요. ”

 

 

분홍색 리본이 달린 두 개의 상자를 건네주면서 렐랴가 덧붙였다.

 

 

“ 케익이랑 파이 둘 다 꽤 크니까 미샤랑 나눠먹어요. ”

 

“ 어, 하지만 이건 걔 먹으라고 당신이 손수 구운 거잖아요. 왜 제가... ”

 

“ 그래야 미셴카가 가책 없이 먹을 거 아녜요. 원래 다이어트할 땐 그렇거든요, 옆 사람이 먹어야 죄책감이 분담돼서 먹기 편해요. ”

 

“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

 

“ 그렇다고 당신이 다 먹으면 안돼요! ”

 

“ 네, 그럼요. ”

 

 

베르닌이 들떠 있는데 렐랴가 유리병을 내밀더니 뚜껑을 열었다.

 

 

“ 자, 이건 지금 먹어요. ”

 

“ 어, 이건 뭐예요? ”

 

“ 우유 푸딩이에요. 차랑 먹으면 맛있어요. ”

 

“ 이것도 직접 만드신 건가요? ”

 

“ 네. 우리 편집실 직원들 나눠주고 남아서 가져왔어요. ”

 

“ 저, 감사합니다. 근데 당신은 안 드시나요? ”

 

“ 지독하게 감기에 걸렸거든요. 벌써 사흘짼데 나아지질 않아요. 냄새도 못 맡고 맛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뜨거운 차만 마실래요. 설탕이나 두 숟가락 타 주세요. ”

 

“ 저런. 설탕보다는 꿀이 낫겠네요. 잠시만요. ”

 

 

베르닌은 찬장을 뒤져 꿀을 찾아냈다. 뜨거운 차에 꿀을 녹여주자 렐랴가 방긋 웃었고 베르닌의 뺨에 뽀뽀를 했다.

 

 

“ 고마워요, 다냐. 친절하기도 하지. ”

 

 

베르닌은 심장이 멈추고 두 다리가 다 풀리는 것 같았다! 너무너무 황홀해서 기절할 것 같았다. 렐랴가 먹으라고 건네준 우유푸딩도 탱글탱글한 식감에 맛도 달콤했지만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렐랴는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를 홀짝 마시더니 시계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미샤랑 꼭 나눠먹어야 해요! 오늘 극장에서 기분 안 좋았을 테니까 꼭 잘 달래주세요. 내일 아침에 공문 가지러 꼭 와주고요! ”

 

“ 그럼요, 물론이죠! 저,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저... ”

 

“ 뭐죠? ”

 

“ 아, 아니에요. 조심해서 가세요. 내일 아침에 뵐게요. ”

 

“ 안녕! ”

 

 

렐랴가 떠난 후 베르닌은 자리로 돌아왔다. 남은 서류철 표지 작업을 계속했다. 바보처럼 계속 실실 웃으면서. 정말 신나는 하루가 아닐 수 없었다.

 

 

 

*    *    *

 

 

 

 

베르닌은 정시에 퇴근했다. 국장의 휴가가 이토록 그의 인생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리라고는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게다가 귀여운 리자와 점심을 먹은 것도 모자라 가브릴로프 최고의 미인인 렐랴와 차를 마시고 맛있는 우유푸딩도 먹고 근사한 케익과 파이까지 얻어오고... 심지어 렐랴가 뺨에 뽀뽀까지 해주었으니 그의 인생에 이토록 운 좋은 날도 드물었다.

 

 

그의 행운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빵을 사려고 잠깐 차를 세웠는데 얼어붙은 눈 더미 사이에서 10루블 지폐를 발견했다. 주인을 찾아주려고 했지만 지갑도 아니고 지폐 한 장이라 불가능했다. 행인들이 지나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누가 잃어버렸는지는 알아낼 수가 없었다. 조금 가책이 되었지만 어쨌든 10루블이 하늘에서 떨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주운 돈으로 식재료를 사서 왕재수에게 맛있는 거나 만들어주면 가책도 좀 가실 것 같아서 그는 흑빵을 산 후 옆에 있는 생선 가게에 갔다. 왕재수가 좋아한다는 건 알지만 가격이 비싸서 한 번도 사본 적이 없었던 새우와 연어를 샀다. 막 전표를 끊고 계산을 하려는데 갑자기 펑 소리가 나면서 조그만 폭죽이 터지고 점원들이 박수를 쳤다. 어리둥절한 베르닌은 하마터면 지갑을 떨어뜨릴 뻔 했다.

 

축하합니다!

 

“ 엥? 뭐죠? ”

 

“ 오늘이 우리 생선 가게 50주년이라 어업조합에서 50번째 손님에게 특별이용권을 제공하기로 했거든요! 당신이 50번째예요!

 

“ 어, 특별이용권... 그게 뭔데요? ”

 

“ 우리 가게 공짜 이용권이죠. 총 세 번으로 분할해 쓸 수 있고요, 생선 5마리까지 가능하고요, 종류는 상관없어요. ”

 

“ 어, 감사합니다. 그럼 오늘 산 것도 되는 거예요? ”

 

“ 아뇨, 오늘 건 이미 전표를 끊었으니 안 되고요. 내일부터 쓸 수 있어요. 축하합니다! ”

 

 

베르닌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뭔가에 당첨이 되어 봤다. 게다가 가게 점원들이 친절하게 서비스를 해주다니,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너무나도 신이 났다. 생선 종류는 상관이 없다니, 그러면 연어나 철갑상어, 대게 등 비싼 놈을 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 근데 대게는 생선이 아니라서 안 되나? 나중에 물어봐야지. 그 녀석이 대게도 좋아하던데. ’

 

 

정말 운이 좋은 날이었다. 베르닌은 휘파람을 불며 집으로 들어왔다. 그날은 마지막 수요일이었다. 극장에서는 어린이와 학생들을 대상으로 5시에 공연을 올리는 날이었다. 그러니 왕재수도 8시 전에 돌아올 것이다. 코즐로프도 같이 오겠거니 싶어서 베르닌은 넉넉하게 저녁을 준비하기로 했다.

 

 

 

*    *    *

 

 

 

 

그는 연어와 새우 요리를 위해 사진이 실려 있는 생선요리책을 펼쳤다. 어제 왕재수가 가져다 준 책이었다. 베르닌은 맨 처음에 그 책을 보고 깜짝 놀랐다.

 

 

“ 야, 이거 불어로 돼 있잖아! 내가 이걸 어떻게 읽어! ”

 

“ 뒷장에 우리 말 번역 있어. ”

 

“ 근데 나한테 왜 이런 걸 사다 주는 거야? ”

 

“ 난 고기보다 생선이 더 좋은데 가만 보니까 넌 생선 요리를 많이 안 해본 거 같아. 그래서 좀 배워서 나 해주라고. ”

 

그러니까 나 부려먹으려고 사온 거구나!

 

아니야! 알아두면 너한테도 유익한 거니까 그렇지! ”

 

“ 뭐가 유익해, 너 먹고 싶은 거 해달라는 거네. 근데 너 이 책 어디서 구했어? 이거 우리 동네 서점에서는 안 팔 텐데. 어, 이거 프랑스에서 나온 거네. 이거 망명 러시아인이 쓴 거 아냐? 야, 이거 금지 서적... ”

 

“ 요리책이 무슨 금지 서적이야! ”

 

“ 하여튼... 야! 너, 너 나 출장 갔을 때 거기 갔었어? 엉? ”

 

“ 어디? ”

 

투레츠키! 이거 거기서 구한 책이지! 척 보면 알아! 이런 거 구할만한 데가 거기밖에 더 있냐! ”

 

“ 알면서 왜 묻니? 근데 이거 바냐한테서 얻은 거 아냐. 보랴가 준 거야. 내가 부야베스도 좋아하고 해산물 좋아하니까 보면 좋아할 거 같다고 줬어. 보랴 착해. 멋있고.

 

“ 너, 너... 거기 가지 말랬잖아! 투레츠키 그 자식 위험하다고 했잖아! ”

 

“ 바냐가 아니라 보랴가 준 거라니까. ”

 

하여튼! 그 자들 다 똑같아! 앞으로는 거기 가지 마! 보랴고 뭐고 그놈도 만나지 말고!

 

“ 아 지겨워. 다들 나한테 이거 하지 마라, 누구 보지 마라. 으윽! ”

 

 

어쨌든 왕재수는 그에게 프랑스에서 출간된 생선요리책을 떠맡겼고, 베르닌은 페이지를 넘겨서 연어와 새우로 만들 만한 요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오븐에 집어넣기만 하면 된다는 설명을 보고 혹해서 해산물 야채 구이 레시피를 읽어보았다.

 

별로 어렵지 않은 것 같아서 그는 열심히 준비를 했다. 오븐용 쟁반에 손질한 연어와 새우들을 깔고 왕재수가 주말에 사왔던 토마토를 좀 잘라서 넣고 마늘과 양파도 썰어서 넣었다. 야채를 많이 넣으면 좋을 것 같아서 감자도 잘라서 깔았다. 올리브유가 없어서 해바라기씨유를 뿌렸다. 둘 다 기름이니 별 차이 없겠지 싶었다. 레몬도 썰어서 생선 위에 올렸다. 오븐에 넣고 30분 동안 구우라고 되어 있었다. 만들어 놓고 왕재수가 오면 살짝 데우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예열을 하고 오븐 다이얼을 돌렸다.

 

서서히 맛있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좋은 책이었다. 건달 투레츠키의 동업자인데다 깡패가 분명했지만 그래도 보랴가 요리 쪽에는 일가견이 있는 게 분명했다.

 

 

오븐을 켜고 10분쯤 지났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베르닌은 문을 열어주었다. 왕재수가 목도리로 얼굴을 칭칭 감은 채 씩씩거리며 들어왔다.

 

 

“ 왜 너 혼자 와? 바이올린 아저씨는? ”

 

“ 악기에 문제가 있어서 수리공한테 갔어. 시간 오래 걸린다고 아예 그 집에서 잔대. ”

 

“ 어, 그럼 너 어떻게 왔어? 차도 안 가져갔었잖아. 설마 걸어온 거야? 이렇게 추운데? ”

 

“ 의사 선생님 차로. ”

 

“ 의사 선생님은 또 왜! 너 또 아팠어? ”

 

“ 아, 뭘 자꾸 꼬치꼬치 물어. 으윽! ”

 

 

왕재수는 왈칵 화를 냈다. 목도리를 한 손으로 풀어서 내팽개쳤다. 그리고는 코트 단추를 풀더니 한 손으로 낑낑대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

 

 

“ 너 왜 그래? 왜 한 손만 써? 이것도 무슨 춤 연습이야? ”

 

“ 왼팔 다쳤어. ”

 

“ 엥? ”

 

 

베르닌은 왕재수의 코트를 벗겨주었다. 정말 왼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심지어 붕대 위로 희미하게 피가 배어나와 있었다. 베르닌은 깜짝 놀랐다.

 

 

“ 야, 너 괜찮아? 심하게 다친 거 같은데... ”

 

“ 아니야, 많이 다치진 않았어. ”

 

“ 그치만 붕대도 이렇게 두툼하게 감고. 피까지 비치는데... ”

 

“ 근육은 괜찮아. 심한 상처는 아닌데 살갗이 찢어져서 피가 좀 많이 나서 그래. ”

 

“ 뭐야? 너 피부 엄청 챙기잖아. 흉터라도 남으면 어떡해! ”

 

그러게, 내 백옥 같은 피부에 이런 흠집이 나다니... 그래도 의사 선생님이 지혈해주고 드레싱 해줘서 흉은 지지 않을 거라고 걱정하지 말래. 선생님 아니었으면... 으윽... ”

 

“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쩌다 이랬어! ”

 

시골이라서 그렇지 뭘 어쩌다 이래! 아, 정말... 속상해 죽겠네. 오늘 진짜 재수 옴 붙었나봐. 으윽! ”

 

 

왕재수는 부르르 떨더니 소파에 몸을 던지고 벌렁 드러누웠다. 분을 참을 수 없는지 계속 씩씩거렸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심지어 욕까지 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심한 욕설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으므로 깜짝 놀랐다.

 

 

“ 어, 너 왜 그래. 극장에서 많이 힘들었어? 아니면 많이 아픈 거야? 붕대 갈아줄까? 피 배어나오는 거 같은데... ”

 

“ 아니야, 붕대는 자기 전에 갈면 된다고 했어. 아, 나쁜 자식들. 에잇! ”

 

“ 저... 너 검열국 사람들 때문에 그래? 오늘 극장에 와서 간섭했다면서. ”

 

“ 잘도 아네. 역시 감시 요원이라 다 아는구나. 너도 다 똑같아. 앞잡이! ”

 

 

베르닌은 싸잡혀 비난을 받는 게 속이 상했지만 왕재수가 화를 내는 것도 이해가 갔기 때문에 꾹 참았다. 왕재수는 생각할수록 분한지 숨을 몰아쉬며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 도대체 그 사람들이 얼마나 심하게 굴었기에 그러니? 너 원래 이렇게 욕 안 하잖아. 너 같은 천재를 몰라줘서 그러는 거라고 비웃고 끝냈잖아. ”

 

“ 오늘은, 오늘은 전부 다 엉망이니까 그렇지... ”

 

“ 왜? 다른 일도 있었던 거야? ”

 

“ 어... 아침부터... 오늘 진짜 이상해.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아침에 정신 차리려고 극장 카페에 갔는데 아르카지 그 인간이 내 식성 뻔히 알면서 차에 설탕을 잔뜩 타서 준 거야! 얼마나 단지 혀가 마비되는 줄 알았어! 그때부터 다 꼬였어. 가뜩이나 오늘 리허설에 공연에 정신없는 날인데 아침부터 레베진스키가 면담 좀 하자고 들어오더니 우리 극장에 내 신작이 안 어울린다고 헛소리를 하는 거야. ”

 

“ 레베진스키가 누구야? ”

 

“ 있어, 철밥통 안무가. ”

 

“ 아, 생각났다. 그 사람 너 오기 전까지 실세였어. 너 안 왔으면 원래 이번에 감독 유력 후보였다고... ”

 

그 인간 완전 얼간이야! 레퍼토리도 몇 개밖에 모르고 안무가라고 이름만 달았지 십몇 년 동안 자기가 안무한 거라곤 어린이 발레 5분짜리 딱 하나밖에 없는 허풍선이라고! 그러면서 내가 뭐 하려고만 하면 그건 우리 극장에 안 어울리느니, 우리 애들 능력으로는 못 한다느니 트집만 잡고 애들 연습도 방해하고! 진짜 확 잘라버리고 싶은데 극장장이 그 자식을 감싸고돌잖아! ”

 

“ 어, 그렇구나. 그래서 오늘도 너한테 불평불만 늘어놓은 거야? ”

 

“ 그냥 불평만 했으면 무시할 수 있는데 이 자식이 갑자기 나한테 설교를 하잖아! 자기가 나보다 스무 살이나 더 많으니까 인생 선배로서 훈계 좀 하겠다면서, 어린 게 인생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가뜩이나 나 반동분자라서 애들한테 나쁜 물 들일까봐 다들 걱정하는데 왜 그렇게 안하무인이냐고, 이번 신작도 완전 양키놈들 스타일 아니냐고, 인생 경험 많은 자기 얘기 들으라고 막 헛소리를 하는 거야! 바보 멍충이 개자식이... ”

 

“ 그래서, 싸운 거야? ”

 

“ 그런 얼간이하고 뭘 싸워. 하도 개소리를 해대니까 지겨워서 그냥 음악 크게 틀어버렸어. 그랬더니 자기를 무시한다는 둥 나보고 싸가지 없는 놈이라는 둥 감독이면 다냐는 둥 소리 지르더니 두고 보자면서 나가버리더라고. 완전 기분 잡쳤어. ”

 

“ 그랬구나. 그래도 잘했어. 그런 사람하고 소리 높여 싸워봤자 득 될 거 없으니까. ”

 

“ 근데 그 자식이 검열국에 전화를 한 거야. 내 작품에 이념적 문제가 있다고 찔렀어. 그래서 그거 리허설하고 있는데 검열국 개자식들이 둘이나 와가지고 막 방해하고 시비 걸고... 이번 거 정말 그런 내용 아니란 말이야. 그냥 남자애들이랑 여자애들이 서로 좋아했다가 싸웠다가 다시 좋아하고 뭐 그런 진짜 통속적인 내용이라고. 우리 애들이 하도 기본기도 없고 고전 발레 몇 개밖에 모르니까 새로운 동작들 좀 배워보라고 일부러 재밌게 만든 건데 그걸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고... 그래서 대판 싸우고 리허설도 중간까지밖에 못 했어. ”

 

“ 그랬구나, 진짜 화났겠다. 근데 너... 그 사람들한테 뭐라고 했어? 설마 꼬투리 잡힐 말 한 거 아니지? ”

 

뭘 뭐라고 해! 앞잡이들, 병신들, 얼간이들! 예술이랑 담 쌓은 멍청이들이라고 해줬지. 꼬투리 잡든 말든!

 

“ 야, 아무리 화나도 참아야지. 또 이상한 누명 쓰면 어쩌려고 그러니. 가뜩이나 넌 반체제주의자라고 낙인도 찍히고... 그것도 검열국에서 온 사람들한테 그러면 어떡해. 공공기관 쪽 사람들 앞에선 특히 조심해야지! 나니까 가만히 있는 거지 딴 데서는 말조심하라고 했잖아. ”

 

“ 으윽, 숨 막혀!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 바보를 바보라고 말도 못하니? ”

 

 

왕재수는 팔을 다친 것도 잊은 듯 두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쳤다. 그러다가 금방 왼팔을 부여안고 끙끙댔다.

 

 

“ 아야... ”

 

“ 팔은 왜 다친 건데! 그 사람들하고 주먹질했어? 그건 아니라며... 무용수들이 막아줬다며. ”

 

“ 너 어떻게 그런 것까지 다 알아? 극장에 도청기 말고 카메라도 달았어? ”

 

“ 아니. 아까 렐랴가 왔다가 얘기해주더라고. 취재 때문에 갔었다며. ”

 

“ 아, 맞다. 렐랴 왔었는데 한 마디도 못했어. 그 난리가 나서. 좀 미안하네, 가는 것도 몰랐어. ”

 

“ 너 이거 심각해. 그 사람들이 팔 이렇게 만든 거야? 정말 그런 거면 내가 문제 제기할 거야. 넌 우리 소관으로 돼 있으니까 검열국에서 너한테 손대면 안 된다고 할 거야. 그것도 폭행이라니,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

 

“ 어, 가만 안 둔다니 고맙긴 한데 그 자식들이 그런 거 아니야. 오늘 공연 때문에 오후에 드레스 리허설했거든. 근데 그때 수리 공사할 때 그 인부 자식들 기억나? 그 개자식들 보드카만 퍼마시고 뺀질대더니 무대 쪽 마무리를 제대로 안 하고 간 거야! 발레리나들 의상 다 입고 그쪽에 서 있는데 배경 장치 톱니가 툭 튀어나오면서 막 돌아가는 바람에 하마터면 애들 크게 다칠 뻔 했어! ”

 

“ 헉, 정말 큰일 날 뻔 했구나! 너 그 장치에 다친 거야? ”

 

“ 응. 그거 멈추다가... ”

 

그걸 왜 네가 멈추니! 무대 장치 담당자 있을 거 아냐! 기술자한테 맡겨야지 왜 네가... ”

 

“ 그럴 겨를이 없었단 말이야! 그게 엄청 크고 무거운 수레바퀴 같은 건데 고정 장치가 빠졌는지 갑자기 막 돌아가면서 굴러 와서 애들 덮칠 뻔 했단 말이야. 내가 잽싸게 몸으로 막았는데 계속 톱니가 돌아가서 팔이 좀 찢어졌어. ”

 

“ 이 멍청아! 다른 사람들보고 얼간이라고 할 거 하나도 없어! 그냥 소리 질러서 애들 피하게 했어야지! 그걸 왜 네가 막아! 네가 무슨 힘이 있다고 수레바퀴를 멈추니! 삐쩍 말라서 갈대 같은 게... 거기 깔렸으면 어쩔 뻔 했어! ”

 

“ 야, 넌 무대가 어떤 건지 몰라서 그래! 그 상황에서 소리만 지르면 다 해결되는 줄 아니? 몇 분의 일초 만에 사고 난단 말이야! 그럼 레이스 쪼가리 하나 달랑 걸친 가냘픈 여자애들이 떼거지로 톱니에 깔리는 거 보고만 있으란 말이야? 난 심지어 무용수도 아니고 감독인데! 걔들 다 내가 책임져야지!

 

 

베르닌은 매우 감명을 받았다. 왕재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 왜! ”

 

“ 어, 아니... 그냥. 난 네가 맨날 자기 생각만 하는 줄 알았어. ”

 

내 생각하는 거야! 애들 다치면 무대도 엉망 되고! 그럼 내 어마어마한 명성에 누를 끼치잖아! 어휴! 망할 놈의 시골... 극장도 엉망, 무대도, 장치도 다 엉망이야! 덕분에 팔만 다치고... 피 철철 나고... ”

 

“ 그래서 의사 선생님 왔던 거야? ”

 

“ 응. 난 그냥 극장 의료실에 가려고 했는데 여자애들이 호들갑 떨면서 의사 선생님한테 전화해서 막 울고불고... 그래서 의사 선생님 와서 나만 막 혼내고... 오늘 완전 재수 옴 붙었어. 우리 애들 너무 간이 작아. 리허설 때 검열국 놈들 때문에 그 난리치고, 무대 장치 때문에 또 난리... 그러고 났더니 애들이 놀라서 몸이 다 굳어가지고... 공연도 완전 망했어. 빅토르 그 자식이 문제야. 들어 올리는 건 이제 되는데 여자를 제대로 돌려주지를 못해. 놓쳐서 레나가 넘어졌어... 제일 중요한 순간에 엉덩방아 찧고... 관객들 다 웃고... 진짜 창피했어. 죽고 싶었어. 으윽... 어떻게 왕자란 놈이 공주를 넘어뜨려! 그 자식 앞으로 한 달 동안 역 다 뺏고 특훈이야! ”

 

“ 야, 너 의사 선생님이 일주일에 3일만 출근하고 절대 과로하지 말라고 했잖아. 근데 심지어 다치기까지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집에 와서도 일 생각만 하고 있냐! ”

 

“ 그럼 무슨 생각을 하니! 가뜩이나 시골이라 다른 거 할 것도 없는데. ”

 

“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쉬어야지! 생각 너무 하면 몸에 나빠! ”

 

“ 어휴, 너까지 똑같은 말만 해! 아까도 의사 선생님이 붕대 감아주면서 혼냈는데. 유라도 그러고... ”

 

“ 유라가 누구야? ”

 

“ 있어, 그런 사람! ”

 

 

베르닌은 문득 레닌그라드에서 만났던 의사가 떠올랐지만 입을 다물었다. 왕재수는 실컷 떠들고 나자 분이 풀린 건지, 아니면 지친 건지 한결 누그러졌다.

 

 

“ 근데 엄청 맛있는 냄새 나. 이거 무슨 냄새야? ”

 

“ 어, 맞다. 나 오늘 진짜 운 좋은 날이었어. 국장도 휴가에 리자가 점심 사주고, 나보고 그렇게 별로인 남자는 아니라고 하고. 렐랴가 와서 같이 차도 마시고. 돈도 줍고, 생선 가게에서 이벤트에도 당첨되고. 돈 주운 김에 너 좋아하는 연어랑 새우 사왔어. 그 요리책에 레시피 있더라고. 해산물 야채 오븐 구이래. 나도 처음 해 본 건데 맛이 있을지 모르겠네. ”

 

우와, 연어랑 새우? 정말? 해산물 야채 구이 나 진짜 좋아하는데. 이런 시골에서 그런 호화스런 음식을 먹을 수 있다니! ”

 

 

왕재수는 화났던 것도 잊고 소파에서 구르듯 달려 내려갔다. 부엌으로 가서 오븐 문을 열어보았다. 베르닌은 음식이 새까맣게 탔거나 완전히 망했을까봐 전전긍긍했지만 왕재수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탄성을 질렀다.

 

 

우와! 그럴싸한데! 전에 먹어본 거랑 비슷하게 생겼어. 레몬도 얹었네. 꺼내봐! 빨리 먹어보자!

 

 

베르닌은 쟁반을 꺼냈다. 좀 뭉개지고 감자가 들러붙긴 했지만 그래도 요리책의 사진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색깔도 분홍 빨강 하양 노랑 등 화려했고 새우 때문인지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가 솔솔 풍겼다. 소금을 약간 뿌린 후 쟁반 째 들고 가서 식탁에 올려놓았다. 왼손을 쓰기 불편한 왕재수를 위해 연어를 한입 크기로 잘라 주고 새우 껍질도 전부 까 주었다. 왕재수가 좋아했다.

 

 

“ 아, 나 정말 여기선 새우 못 먹는 줄 알았어. 시골이라... ”

 

“ 야, 우리도 있을 건 다 있어! 바깥에서 식료품 트럭 들어오잖아! ”

 

“ 그래도 여긴 바다가 없으니까 해산물은 비싸잖아. ”

 

“ 그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과일이랑 야채는 너네보다 훨씬 낫지 않아? ”

 

“ 응, 과일은 더 맛있어. 특히 사과. 그래서 사과파이가 맛있나봐. ”

 

 

왕재수가 맛있게 먹는 것을 보자 베르닌은 기분이 좋았다. 처음 만든 음식인데, 그것도 프랑스 요리책에 나온 음식인데 성공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역시 운이 좋은 날이었다.

 

 

 

맛있는 저녁을 먹고 나자 왕재수는 기분이 좀 나아진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베르닌은 렌지에 찻물을 얹은 후 렐랴가 준 파이와 케익 상자를 들고 왔다.

 

 

“ 이거 렐랴가 너 먹으라고 어제 구웠대. 차랑 같이 먹어. ”

 

“ 나 단 거 안 먹잖아. ”

 

“ 한 조각만 먹어봐. 일부러 너 좋아하는 나폴레옹 케익 구운 거래. ”

 

“ 나폴레옹? 렐랴 대단하다. 만들기 어려운 거라던데. ”

 

 

왕재수가 처음으로 렐랴의 솜씨에 관심을 보였다. 베르닌이 분홍색 리본을 풀자 근사한 나폴레옹 케익과 나무열매 파이가 나타났다. 부드러운 황금빛 서양배 슬라이스가 얹혀 있는 케익은 윤기가 자르르 돌았다. 선명한 빨간색과 보라색 나무열매들이 빼곡하게 뿌려져 있는 파이도 정말 근사해 보였다. 베르닌은 감탄을 멈출 수가 없었다.

 

 

“ 진짜 렐랴는 대단해.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니까. 똑똑하지 세련됐지 요리도 잘하지... 어떻게 세상에 그렇게 완벽한 여자가 있을 수가...

 

“ 렐랴가 그 정도까지야? 난 잘 모르겠던데. 레닌그라드에서도 그런 스타일 많이 본 것 같은데. ”

 

“ 야, 너 지금 도시 놈이라고 자랑하냐? 나도 모스크바에서 공부했다고! 모스크바에도 세련된 여자들 많았어. 근데 렐랴가 제일 예쁘단 말이야! ”

 

“ 어, 왜 성질내. 누가 렐랴 안 예쁘대? 난 그냥, 내 취향엔 너무 글래머... ”

 

“ 야! 넌 맨날 삐쩍 마른 발레리나들하고만 다녀서 그렇지! 렐랴가 얼마나 완벽한데! 완전 여신 같은... ”

 

“ 아, 그럴지도 모르겠네. 나한테야 글래머가 무슨 소용. 근데 그렇게 좋으면 잘 좀 해보지 왜 맨날 뒤에서 예쁘다고만 하고 말도 못 거니? ”

 

“ 올라가지 못할 나무라서... 렐랴 엄청 인기 많아. 쫓아다니는 남자만도 한 트럭에 전부 무슨 정치인에 공장장에 노멘클라투라 가문에... 나 같은 게 어떻게 감히 그런 여자를 넘보니. 내 주제가 있지. ”

 

네가 뭐! 어때서! 학벌 좋아, 키 커, 뭐가 딸려! 촌스럽긴 하지만 그거야 꾸미면 되는 거고! 얼굴은 그냥 그렇지만 남자가 얼굴이 전부는 아니잖아. 근데 너 책상물림이라 뽀뽀는 못할 거 같다... 그건 좀 치명적... ”

 

야, 넌 내 편을 들어주는 거니, 아니면 나 별로라고 확인사살 하는 거니! ”

 

“ 너는 별로 아냐. 별로는 바냐 같은 놈이 별로지. ”

 

“ 투레츠키 안경 벗으니까 엄청 잘생겼던데... ”

 

“ 에이 그깟 게 뭐가 잘생겼어! 얍삽한 자식... 바냐 그놈보단 네가 백 배 나아! 보랴라면 몰라도... ”

 

 

베르닌은 리자에 이어 왕재수도 자기 편을 들어줘서 굉장히 기뻤으나, 그 마지막의 ‘보랴’ 운운에 김이 팍 샜다. 역시 왕재수가 남자를 보는 미적 기준은 뭔가 이상했다. 믿을 게 못 됐다. 그래서 고개를 저으며 나폴레옹 케익을 한 조각 잘라서 왕재수의 접시에 덜어주었다.

 

 

“ 먹어. 너 이거 좋아한다며. 렐랴가 일부러 너 먹으라고 만든 거래. ”

 

“ 맞아, 나 이거 진짜 좋아해. 학교 다닐 때부터 좋아했어. 근데 어떻게 알았을까? 여긴 시골이라 이런 거 못 먹을 줄 알았는데. 렐랴한테 고맙다고 전해주렴. ”

 

네가 직접 얘기해. 전화하든 만나든. 그 정도 성의는 좀 보여라. 렐랴가 그렇게 너 좋다고 이것저것 해다 바치는데. 그게 얼마나 영광인지 아냐? ”

 

“ 싫어. 하나 받아주기 시작하면 여자가 희망을 갖는단 말이야. 사귈 것도 아닌데 그러면 안 돼. ”

 

“ 그래도 렐랴는... ”

 

“ 알았어! 나중에 극장에서 만나면 고맙다고 할게! ”

 

 

왕재수는 포크로 케익을 크게 잘랐다. 베르닌은 이미 나무열매 파이를 입 안 가득 물고 있었다. 정말 맛있었다. 온몸이 녹아버릴 것 같았다. 왕재수는 케익을 입 안에 넣었고 두 눈을 감은 채 천천히 맛을 음미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안색이 변하면서 화들짝 놀랐다.

 

 

우욱, 이게 뭐야! 우웩!

 

 

왕재수는 입 안의 내용물을 접시 위에 그대로 퉤퉤 뱉어 버리더니 부르르 떨고 펄쩍 뛰었다. 간신히 컵을 집더니 꿀꺽꿀꺽 물을 마셨다. 하지만 곧 안색이 안 좋아지더니 손으로 입을 막고 ‘우욱’ 하면서 화장실로 뛰어갔다. 베르닌은 멍해져서 쟤가 대체 왜 이러나 하고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왕재수가 손등으로 입을 닦으며 돌아왔다.

 

 

“ 야, 지저분하게 이게 무슨 짓이야! 렐랴가 정성스레 구워준 케익을 그것도 접시에 뱉지를 않나... 레닌그라드에선 식사 예절을 이렇게 배웠냐!

 

“ 우욱... 이거... 이거 대체 뭐야! 뭘 넣은 거야! 으아 속 뒤집혀... ”

 

“ 왜 그래? 맛이 이상해? ”

 

“ 이건 나폴레옹이 아냐! 이렇게 역한 건 처음 먹어봐! 이상한 기름 냄새 나고... 우욱... ”

 

 

베르닌은 포크로 케익 귀퉁이를 잘라서 먹어보았다. 동물성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살짝 역하면서도 미끄덩미끄덩하고 느끼하면서도 어딘가 구수한 게 익숙한 맛이 감돌았다. 그는 조금 더 먹어보았다. 입 안에 케익을 넣고 이리저리 굴리며 크림을 녹여 보았다. 고개를 끄덕였다.

 

 

“ 아... 네 말 맞아. 이거 돼지기름이네. 엄청 많이 넣었네. 네 입맛엔 안 맞겠다. ”

 

“ 돼지기름... 으윽, 어째서... 어째서 케익에 돼지기름이 들어가는데! ”

 

“ 렐랴 감기 걸려서 냄새 못 맡는다더니.. 신선한 버터 잔뜩 써서 만들었댔는데 버터랑 돼지기름이랑 헷갈렸나보다. 돼지기름 굳어 있으면 색깔도 비슷하고... ”

 

“ 으으, 속 울렁거려 미칠 거 같아. 오늘 진짜 끝까지 왜 이러니... 야, 넌 왜 그 끔찍한 걸 계속 먹는 거야? ”

 

“ 어, 난 괜찮아. 이것도 맛있어. ”

 

“ 냄새 장난 아니잖아! 한 입 넣는데 정말 내장이 다 뒤집히는 줄... ”

 

“ 우린 어릴 때부터 음식에 돼지기름 많이 넣어 먹어서 괜찮은데. 이것도 은근히 구수하고 중독성 있는걸. 역시 렐랴는 대단해. 버터 대신 돼지기름 넣었는데도 이렇게 맛있다니. ”

 

“ 으아, 정말 너... 그건 렐랴한테 콩깍지가 껴서 그런 거야! 우욱... 나 그만 갈래. 속 안 좋아. 토할 거 같아. 시골 싫어, 흐흑... ”

 

 

왕재수는 냄새도 맡기 싫은 듯 손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나가버렸다. 베르닌은 혀를 찼고 설거지를 한 후 여유롭게 쉬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    *    *

 

 

 

한밤중에 베르닌이 곤하게 자고 있는데 누군가가 침실 문을 똑똑 두들겼다. 꿈인 줄 알고 무시했지만 노크 소리가 계속 나서 베르닌은 괴로워하며 눈을 떴다.

 

 

“ 누구세요? ”

 

“ 저... 나야. 나 들어가도 돼? ”

 

“ 으엉? ”

 

 

베르닌은 나이트 램프를 켰다. 간신히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문을 여니 하얀 잠옷 차림의 왕재수가 베개를 들고 서 있었다. 베르닌은 꿈인가 싶어 눈을 비볐다.

 

 

“ 어... 너 뭐야.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

 

흑... 나 너무 무서워. 오늘만 여기서 자면 안 돼? 엉엉... 혼자 못 자겠어. ”

 

“ 뭐가 무섭다는 거야? 왜 그러는데! 혹시 누가 왔었어? 수상한 사람이라도? 아니면 투레츠키 그 자식이... ”

 

“ 흑흑... 너무 무서운 꿈 꿨어. 나쁜 놈들이 와서 막 때리고 무섭게 하고 깜깜한 데 가둬놓고... 엄청 깊고 캄캄한 동굴 같은 데 갇혔는데 눈알이 주렁주렁 달린 뱀이 나와서 날름날름하면서 잡아먹으려고 하고... 막 바퀴벌레랑 곱등이가 사방에서 쏟아지고... 도망치려고 했는데 움직이지도 못하고 뱀이 옷 속으로 막 기어들어오고... 근데 아무리 깨도 다시 꿈속이고, 계속계속 때리고 가두고 뱀 나와. 엉엉... 무서워. 소리 질렀는데 아무도 안 와. 목소리도 안 나와, 흐흑...

 

“ 어, 너 가위 눌렸구나. 하루종일 운 나쁘고 고생했다더니 그래서 꿈자리도 안 좋았나보다. 이제 괜찮아. 깼으니까 그런 꿈 안 꿀 거야. ”

 

“ 아니야... 아까도 깼다가 다시 잤는데 또 무서운 꿈 꿨어. 무서워... ”

 

 

왕재수가 훌쩍훌쩍 울었다. 베르닌은 왕재수를 일단 침실로 데리고 들어와서 침대에 앉혔다. 램프 불빛 아래에서 보니 얼굴이 파랗게 질린 데다 눈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 눈도 퀭했고 뺨도 쑥 들어가 있었다.

 

 

“ 어, 몇 시간 만에 왜 이렇게 얼굴 살이 쑥 빠졌냐! ”

 

“ 아까 계속 토했어. 그 기름 케익... 흐흑... 너무 아팠어. ”

 

“ 난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어휴... 가만 있어봐. ”

 

 

이마를 짚어보자 열도 났기 때문에 베르닌은 해열제를 가져왔다. 생각난 김에 팔의 붕대도 갈아주었다. 붕대 안쪽에 피가 많이 묻어 있었다.

 

 

“ 야, 너 이거 자기 전에 갈면 된다더니 안 갈았구나! ”

 

“ 어... 아까 토하느라 까먹었어. ”

 

“ 상처에서 열이 나서 아픈 거잖아! 그래서 꿈도 안 좋게 꾼 거야! ”

 

“ 아야... ”

 

“ 가만히 있어. 어, 많이 찢어졌었구나. 꿰맸잖아. 몇 바늘이나 꿰맨 거니. 이래놓고 별 거 아니라고. ”

 

“ 춤 출 땐 뼈도 부러지고 근육 상한 적도 있었는데 이 정도면 별 거 아닌 거지. 아야!

 

“ 그럼 별 거 아니라면서 아프다고 엄살은 왜 부려! ”

 

별 거 아닌 거랑 아픈 건 다르단 말이야!

 

 

붕대를 갈아주고 해열제를 먹인 후 베르닌은 물에 적신 수건으로 왕재수의 이마와 얼굴을 닦아 주었다. 왕재수는 아직도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이따금 부들부들 떨면서 나쁜 놈들과 동굴과 뱀과 바퀴벌레가 무섭다며 훌쩍훌쩍 울었다.

 

 

“ 야, 이제 진정해. 그거 꿈이야. 괜찮아. 나도 여기 있잖아. ”

 

“ 그치만 누우면 또 나올 거야... ”

 

“ 이제 안 나와. 붕대도 갈고 약도 먹었잖아. 꿈 안 꾸고 잘 거야. ”

 

“ 무서워, 엉엉. 로만 보고 싶어. 왜 하필 오늘 바이올린은 망가뜨려서... 집에 가기 싫어. 혼자 있기 싫어. ”

 

“ 어휴, 이거 완전 애기가 따로 없어! 우리 집에서 재워 줄 테니까 무서워하지 말고 자! ”

 

“ 그치만... 무서운 꿈 꾸면 옆에 누가 있어야 잘 수 있는데. 흑흑... ”

 

내가 있어줄 테니까 자라고!

 

“ 너는 꼭 안고 못 자잖아... ”

 

“ 어휴, 안아주기까지 해야 되냐! 그건 좀 심하잖아! ”

 

“ 소리 지르지 마, 엉엉... 무서워... 꿈에서도 막 그놈들이 소리 질렀어. ”

 

 

왕재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훌쩍거렸다. 생각할수록 무서운지 눈물콧물을 줄줄 흘리며 울었다. 베르닌은 처음에는 자다 깨서 짜증이 났지만 왕재수가 서럽게 우는 걸 보니 안됐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깨를 안아주고 등을 토닥토닥하며 달래 주었다.

 

 

“ 괜찮아, 다 꿈이라니까. 이제 자자. ”

 

“ 또 나오면... ”

 

“ 에이, 이제 안 나와. 내가 옆에 있어줄게. ”

 

“ 넌 옆에 누워서 못 자잖아. 난 무서울 땐 꼭 안아줘야 자는데. ”

 

어휴, 해줄게! 안아주면 되잖아! 너 잠들 때까지만!

 

 

베르닌은 왕재수를 침대에 뉘어주고 옆으로 기어들어갔다. 전에 몸살이 나서 오한으로 괴로워할 때 왕재수가 안아주고 녹여줬던 게 생각났다. 엉거주춤하게 옆으로 누워서 한 팔로 왕재수의 몸을 감싸주었다.

 

 

“ 됐지? 이제 자. 하나도 안 무섭네. 자고 나면 아프지도 않고 기분도 좋아질 거야. 자자. ”

 

“ 다닐, 나 오늘 정말 힘들었어. 왜 이렇게 나쁜 일만 생길까... ”

 

“ 누구나 그런 날이 있는 거야. 오늘 액땜했으니까 내일은 괜찮을 거야. ”

 

“ 칫, 그때 뱀 껍질 나왔을 때도 액땜했으니 좋아진다 했잖아. 근데 하나도 좋은 일 안 생기고... 시골... ”

 

“ 이제 생길 거야. 나 오늘 엄청 운 좋은 날이었으니까 내 행운 너한테 나눠줄게. 내 행운 받아서 너도 좋아질 거야. ”

 

“ 가뜩이나 맨날 국장한테 들들 볶이기나 하고 벌목공도 못한다고 질질 짜면서 그깟 쥐꼬리만한 행운 누굴 나눠준다고... ”

 

야, 그래도 너 나눠줄 만큼은 있어!

 

“ 칫, 나한테는 엄청 많이 줘야 되는데! 난 천재니까... ”

 

“ 내 거 먼저 조금 가져가고 딴 사람들한테서도 받으면 되잖아. 넌 인기 많으니까 다들 나눠줄 거야. ”

 

“ 맨날 유치한 말만 하고... ”

 

 

왕재수는 두려움이 많이 가셨는지 고양이처럼 팔다리를 쭉 폈다가 다시 웅크렸다. 베르닌의 어깨를 베고 몸을 기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꼭 사모바르처럼 뜨끈뜨끈했다. 열이 나서 그런가 하고 걱정이 좀 됐지만 점차 더 따끈해지는 것을 보니 잠이 와서 그런 것 같았다. 베르닌은 자유로운 왼팔을 쭉 뻗어 램프 불을 껐다. 어깨가 살짝 저렸지만 움직이면 간신히 진정된 왕재수가 놀라서 또 울까봐 가만히 있었다. 잠들었나 싶었는데 짙은 어둠 속에서 왕재수가 졸린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 고마워. ”

 

“ 뭐가? ”

 

“ 쥐꼬리만한 행운 나눠줘서. ”

 

“ 끝까지 쥐꼬리래. ”

 

“ 저녁은 맛있었어. ”

 

“ 그래. 주말에 다른 거 또 해줄게. 생선가게 특별이용권... ”

 

“ 나 오늘만 이러는 거야. 진짜야. ”

 

“ 알았어. 누가 뭐래. ”

 

“ 그러니까 가지 말고 있어, 응? ”

 

“ 어... 너 잠들면 소파로 가려고 했는데... ”

 

“ 나 잘 때도 있어주면 안 돼? 그래야 꿈 안 꾸지. ”

 

“ 알았어. ”

 

 

왕재수는 안심하고 잠들었다. 베르닌은 소파로 옮겨갈까 하다가 왕재수가 또 악몽을 꿀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냥 침대에 남아 있었다. 서서히 졸려왔다. 그런데 밤중이라 그런지 출출하기도 했다. 남아 있는 나폴레옹 케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 맛있었는데 이 녀석은 왜 그렇게 질색을 할까. 심지어 토하기까지 하고. 너무 오냐오냐 컸다니까. 바보, 돼지기름이 얼마나 맛있는데.

 

 

하여튼 잘된 일이었다. 왕재수는 입도 안 댈 테니까 남은 나폴레옹 케익은 그가 다 먹을 수 있었다. 역시 운 좋은 날이었다.

  

 

 

 

 

 

FIN

- 2015. 3. 26 ~ 30 -

 

 

----

 

베르닌이 만든 해산물 오븐 구이는 엄밀히 말하자면 프랑스 요리라기보단 지중해 근방이나 해산물이 풍부한 동네에서는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요리에 가깝다. 베르닌이 쓴 재료야 소련에서 긁어모은 거니까 신선도도 좀 떨어지고 종류도 별로 다양하지 않다만..

 

베르닌이 만든 것과 재료는 좀 다르지만 하여튼 이런 거다. (출처는 구글)

 

 

 

 

 

 

 

 

 

 

 

 

나도 이거 좋아해서 이번 주말에 만들어볼까 생각 중. 얼마 전부터 해먹고팠는데 우리집 오븐에 들어갈만한 커다란 트레이가 없어서...금속 트레이는 있는데 그건 씻기가 귀찮아서..

 

..

 

왕재수와 나폴레옹 케익 이야기는 사실 예전에 내가 동대문의 어느 러시아 빵집에서 샀다가 피를 본 나폴레옹, 일명 '기름케익' 사건에서 소재를 따왔다 :) 그 얘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2011

 

 

 

그 기름케익 사진.

 

 

렐랴의 명예를 위해서 얘기하자면.. 그녀가 원래 기름케익을 만드는 사람은 아니고.. 원래는 이렇게 근사하게 만드는데 ㅠㅠ

 

 

 

(페테르부르크의 디저트 카페 고스찌의 서양배 나폴레옹 : http://tveye.tistory.com/2052)

 

..

 

 

이야기는 18편으로 이어진다 :) 그건 다음주에..

 

 

..

 

 

댓글은 언제나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추가

 

가엾은 리자님과 치즈홍차님께서 궁금해하셨던 사과소스 돼지고기 구이 사진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3663

 

** 추가 2

베르닌이 왕재수에게 만들어준 해산물 야채 오븐 구이, 토끼 작가 버전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3665

(재료 등 거의 단추가 만든 것과 흡사..)

 

:
Posted by liontamer

 

일주일의 중간. 수요일이다. 이번주는 너무 바쁘고 정신이 없다.

그래도 서무 시리즈 16편 올려본다.

지난 15편에서 베르닌은 갑작스럽게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 출장에 가라는 명령을 받고 울며 겨자먹기로 준비를 했다. 16편은 거기서 곧장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드디어 베르닌이 촌동네 가브릴로프를 벗어나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소련 최고의 대도시로 향한다~!! 그러나 그의 역할은... 짐꾼이었다 ㅠㅠ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그러던 어느 날 베르닌은 고참들의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 출장에 끼게 되고... 계획에 없던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출장을 가게 되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16

 

 

 

서무의 슬픔

-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자명종이 울렸을 때 베르닌은 제발 꿈이기를 빌었다. 하지만 야속한 시계는 계속 울어댔고 그는 할 수 없이 낑낑대며 눈을 떴다. 연이은 야근과 주말 출근으로 피로가 가시지 않아 정신없이 꿈을 꾸며 자던 중인데다 평일보다 1시간 30분이나 일찍 깨어났기 때문에 정말 죽을 맛이었다. 한겨울에 새벽 5시 반 기상이라니 너무나도 끔찍했다.

 

잠시 그는 따뜻한 이불 속에 누운 채 무겁게 감겨오는 눈꺼풀과 싸우며 10분만 더 자면 안 될까 하고 매우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그 순간 머릿속에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출장과 지역별 공산당원 교육 정책, 발따예프와 바라노프스키, 주브치크가 줄줄이 떠올랐고 그는 몸서리를 치며 벌떡 일어났다. 주브치크와 발따예프와 바라노프스키를 집 앞으로 줄줄이 데리러 가야 했다.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주브치크의 집 앞에는 6시 30분까지 가기로 되어 있었다. 전날 베르닌은 용기를 내어 KGB 건물이나 의회 건물 앞에서 다함께 모여서 출발하는 것은 어떠냐고 제의했지만 셋 모두 정색을 하며 ‘그렇게 이른 시각부터 차를 몰고 오거나 버스를 타고 올 수는 없다, 원래 그런 건 막내가 차로 집에서부터 공항까지 모시는 거다!’ 하고 그에게 훈계를 해대서 결국 이렇게 되고 만 것이다.

 

 

그는 끙끙대며 이불 속에서 빠져나왔다. 맨발로 바닥을 밟자 냉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급하게 슬리퍼를 신고는 졸려서 눈도 반밖에 못 뜬 채 비틀거리며 욕실로 갔다. 양치질을 하는 동안에도 꾸벅꾸벅 조느라 하마터면 칫솔에 입천장을 찔릴 뻔 했다. 너무너무 귀찮았지만 몸이 욱신욱신 쑤셔 와서 할 수 없이 샤워를 했다. 뜨거운 물을 뒤집어쓰자 그나마 약간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샤워로 정신을 차린 것도 잠시일 뿐, 물기를 닦아내자 다시금 소름이 돋으면서 어서 빨리 이불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새 속옷을 주워 입고 얼굴에 대충 싸구려 스킨을 찍어 바르려다 마침 왕재수가 온천 요양소에서 여분으로 챙겨왔다며 줬던 남자 화장품 파우치가 눈에 띄었다. 대도시에 출장을 가는데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도 해야 하니 조금이라도 좋은 거 바르고 외모를 단장해보자 싶어 파우치를 열었다.

 

그런데 스킨 하나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스킨처럼 보이는 물병이 세 개나 됐다. 그리고 로션 같은 것도 두 개나 있었다. 쫀득한 질감의 생크림 같은 것도 있고 심지어 조그만 향수 스프레이까지 있었다. 뭘 어떻게 발라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온천을 하고 나온 왕재수가 얼굴에 이것저것 톡톡 두들겨 바를 때 주의 깊게 지켜볼 걸 후회가 됐지만 별 수 없었다. 그냥 액체가 든 병 중 하나 찍어서 발랐다. 그랬더니 피부가 엄청나게 따가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급하게 가까이 있는 로션으로 추정되는 물질을 마구 발랐더니 통증이 좀 가셨다. 그래서 이왕 고급 화장품으로 단장하는 김에 다 바르자 싶어 크림도 발랐다. 그랬더니 얼굴이 하얘지고 미끌미끌해서 굉장히 불편하고 부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오랜만에 모스크바에 가니까 이 정도는 해줘야 된다는 생각에 휴지로 닦아내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그는 옷을 입은 후 정신을 차려보려고 진하게 우린 차를 마시고 버터와 잼을 잔뜩 바른 흑빵을 두 조각 먹었다. 차를 마시자 몸이 따뜻해졌고 달콤한 잼 덕분에 머리가 좀 맑아지는 것 같았다. 빵을 한 조각 더 먹고 싶었지만 시계를 보니 이미 6시가 다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코트를 걸치고 가방을 든 채 집을 나섰다. 추웠기 때문에 패딩 점퍼를 입고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원고 발표도 해야 하고 다른 기관들에서 온 우수 공산당원들이 득실거릴 테니 가브릴로프 KGB의 명예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 그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아파트 현관문 안쪽에 왕재수가 서 있었다. 평소처럼 근사한 코트를 걸치고 있었지만 밑단 아래로 파자마 바지가 보이는데다 머리도 까치집처럼 헝클어져 있는 것을 보니 침대에서 막 기어 나온 것 같았다. 심지어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왕재수가 일어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믿어지지 않았던 베르닌은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하지만 꿈이 아니었다. 왕재수가 그를 보더니 손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 어, 너 여기서 뭐해?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난 거야? ”

 

“ 너 지금 출장 가는 거야? 비행기 타러 가? ”

 

“ 비행기는 좀 있다 타고... 같이 가는 사람들 데리러 가야 돼. ”

 

“ 레닌그라드에 며칠 있어? 계속 그 사람들이랑 같이 있어야 돼? ”

 

“ 어, 아마도... 고참 선배에 간부들이라 시중들어야 할 것 같아. ”

 

“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돼? ”

 

“ 부탁? 뭔데? ”

 

“ 저... ”

 

 

왕재수가 머뭇거렸다. 입을 떼기가 어려운 듯 한참 망설이다가 코트 주머니에서 얄팍한 봉투를 하나 꺼냈다.

 

 

“ 이것 좀 전해줄 수 있어? ”

 

“ 어... 편지야? 어머니한테 드리는 거야? ”

 

“ 아니야. 우리 엄마한테는 못 쓴다고 했잖아. 저... 아니, 됐어. 공연히 불편해지고 문제만 생길 거야. 잊어버려. ”

 

 

왕재수가 봉투를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으려고 했기 때문에 베르닌은 손을 뻗어 봉투를 낚아챘다.

 

 

“ 줘, 전해줄 테니까. 누구한테 주면 되는데? 근데 너무 멀면 못 전해줄지도 몰라. 레닌그라드에 있는 사람인 거지? ”

 

“ 안 멀어. 도심이야, 네프스키랑 가까운 쪽이거든. 근데 아무래도 안 되겠어. 그냥 없었던 걸로 하자. ”

 

“ 뭘 없었던 걸로 해. 새벽부터 일어나서 나 기다리고 있었잖아. 중요한 것 같은데. 어디에 있는 누구한테 줘야 하는지만 말해줘. 전화번호 같은 거 있으면 더 좋고. ”

 

“ 전화번호는 몰라. 나 원래 그런 번호 잘 못 외우거든. 체포됐을 때 수첩이고 뭐고 다 뺏겨서 엄마 번호밖에 기억 안나. ”

 

“ 그럼 어떻게 찾아? ”

 

“ 주소는 알아. ”

 

“ 어... 너 혹시 이거 무슨 비밀문서 같은 거야? ”

 

“ 비밀문서면 못 전해줘? ”

 

“ 나 공무원이잖아. 그것도 KGB... ”

 

“ 하긴 그래. 내가 미쳤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한테... 그냥 잊어버려. ”

 

“ 아냐. 주소 줘. 네가 보내는 비밀문서라고 해봤자 극장이랑 아르마나 얘기밖에 더 있겠냐. ”

 

“ 고마워. ”

 

 

왕재수는 다시 머뭇거리더니 베르닌의 곁으로 바짝 다가오더니 귀에 대고 소곤소곤 주소를 말해 주었다. 베르닌은 귀가 너무 간지러웠기 때문에 몸을 움츠렸다.

 

 

“ 야,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나 못 외운단 말이야. 가뜩이나 레닌그라드는 지리도 모르는데. 나 아무한테도 말 안 할 거니까 걱정 마! ”

 

“ 그래도... 수색당하면 어떡해. ”

 

“ 야, 나한테 수색 권한이 있는데! ”

 

“ 그런가... ”

 

 

왕재수는 베르닌에게 레닌그라드 지도를 꺼내달라고 하더니 거기에 표시를 해주었다. 정말 네프스키 대로 근처였다. 이름도 써 주었다.

 

 

“ 어, 병원이네? 유리 아스케로프. 이 사람은 누구야? ”

 

“ 거기 의사야. 내 주치의. ”

 

“ 주치의? 너 그런 것도 있냐? ”

 

“ 바보. 무용수들은 부상당하는 일이 많아서 전담 의사가 필요하단 말이야. 특히 나처럼 스타는 더더욱. ”

 

“ 알았어. 근데 너 어디 또 아픈 데 있어? ”

 

“ 자꾸 물어볼 거면 그냥 없었던 걸로 하자. ”

 

“ 아냐. 전해 줄게. 뭐 받아와야 돼? ”

 

“ 아니. 그냥 주기만 하면 돼. 고마워. ”

 

 

베르닌은 가방을 열고 안주머니에 봉투를 넣은 후 지퍼를 채웠다. 그리고 문득 생각나서 왕재수에게 폭풍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야, 너 누가 맨발로 나오래! 엄청 추운데. 그 코트 별로 두텁지도 않은데 파자마 위에 입어봤자! 그리고 나 없는 동안은 꼭 바이올린 아저씨 집 가서 자! 밥도 꼬박꼬박 먹고! 제대로 먹었나 안 먹었나 나중에 확인해서 삼시세끼 안 챙겨먹었으면 너네 집이랑 극장 사무실에 바퀴벌레랑 곱등이 풀 거야. 그리고 온천 갔을 때 내가 준 그 패딩! 이번 주 춥댔어. 영하 10도 밑으로 내려가는 날은 무조건 패딩 입어. 안 그러면 뱀 껍질 주워올 거야! 그리고...

 

“ 악마, 살인자! 바퀴벌레도 모자라서 뱀 껍질은 정말 너무해! 패딩 입으면 되잖아! 근데 너 얼굴에 뭐 바른 거야? 왜 이렇게 희끄무레하지? ”

 

“ 어, 이거... 그때 온천에서 네가 준 화장품... 크림... ”

 

“ 아휴, 바보... 이거 나이트 크림인데... 마사지 팩이라고! 자기 전에 바르는 건데... ”

 

“ 어, 아침저녁으로 바르는 게 다른 거야? ”

 

“ 으으... 가만히 있어봐. 꼭 무대 분장한 것 같네. ”

 

 

왕재수는 코트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베르닌의 얼굴을 살살 닦아냈다. 그리고는 반대편 주머니에서 무슨 조그만 분무기 같은 걸 꺼내더니 얼굴에 대고 칙칙 뿌려주었다. 향기도 좋고 촉촉했다.

 

 

“ 됐다. 잘 다녀와. 난 이제 잘래. 너무 졸려. ”

 

“ 그래. 밥 잘 챙겨먹고 있어. ”

 

 

왕재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베르닌은 자신도 도로 집으로 들어가 자고 싶었지만 한숨을 쉬며 주차장으로 갔다.

 

 

 

*   *   *

 

 

 

출장은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베르닌은 비행기 안에서 워크숍 원고를 준비하려고 했지만 발따예프와 주브치크와 바라노프스키가 계속해서 모스크바에서 어떻게 해야 잘 놀 수 있을 것인가를 주제로 심도 깊은 수다를 떨었고 중간중간 베르닌을 쿡쿡 찌르며 적극적인 대화 참여를 요구했다. 한번은 베르닌도 답답해서 하소연을 했다.

 

 

저, 30분만이라도 절 가만히 내버려두시면 안 될까요? 오늘 지역별 발표가 있잖아요. 선배님들께서 저보고 발표하라 하셨는데 저는 전혀 모르는 내용이기 때문에 지금 공부를 해서 원고를 적어야 해요. 내리면 곧장 버스로 이동해야 하고 워크숍 장소로 가야 하는데... 정말 시간이 없습니다. ”

 

무슨 그런 발표를 신경 쓰나! 그런 거 준비해오는 팀 아무도 없어! 그 일정표를 곧이곧대로 믿다니, 이 친구 정말 책상물림이군. 표트르 자네 말이 딱 맞아. 어휴, 가이드나 제대로 할지 원. ”

 

“ 하지만.. 분명히 지역별로 10분씩 주제 발표를 하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레닌과 스탈린,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의 경제 모델에 따른 우리 시의 공산당원 교육 정책에 대해... ”

 

“ 10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가면 맨 처음에 모스크바 의회 쪽에서 고위급 인사 하나가 와서 인사말 하고, 그러면 사회자가 지역별로 하나씩 자기 소개 시키고... ”

 

“ 자기 소개요? 그럼 기관 소개도 같이 해야 하겠네요. 어쩌지, 자기 소개는 준비 안 했는데... ”

 

“ 어이구, 이 멍충이... 그냥 이름하고 소속만 말하면 돼. 이백 명 넘는 사람들이 모이는데 어느 세월에 줄줄이 자기 소개에 기관 소개를 늘어놓나. 주제 발표고 뭐고 그건 다 그냥 일정표에만 있는 거야. A로 시작하는 동네 두어 군데만 대표로 발표하고 나면 사회자가 시간 관계상 이만 끝내고 나머지는 자료집으로 대체한다고 할 거라고! ”

 

“ 어, 그래요? 그럼 다행인데... 자료집이면 더더욱 원고가 있어야 하잖아요. 전 그냥 메모해서 읽을 용도로 생각했는데 책자에 들어가는 거면 원고를 써야 하고 그러니까... ”

 

“ 으윽, 정말 답답한 녀석일세! 표트르, 왜 하필 이런 놈을 데려온 거야! 책자는 벌써 다 나왔다고! 가면 나눠 줄 거야! 시간표하고 참여 기관명하고 다른 잡동사니들 적혀 있는 프로그램 책자 줄 거라고! ”

 

“ 하지만 그러면 자료집으로 대체한다는 얘긴... ”

 

“ 그건 그냥 하는 말이고! 으윽, 혈압 올라. 표트르, 이 친구 사무실에서도 이러나? 어지간히 선배들 괴롭히겠군. ”

 

“ 너무 우리 다냐에게 뭐라 하지 말게. 아직 젊어서 그러니까. 우리 회사 막내라서 고참들이 좀 오냐오냐 해줘서 그렇지. 요즘 애들은 다 이런다네. 다냐만 그런 게 아냐. 우리 젊었을 때는 어땠나. 척하면 착! 선배들 말씀은 하늘이었지. 그땐 직장도 참 인간적이었는데 이젠 갈수록 젊은 애들은 자기만 알고 선배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지. 그렇다고 일을 잘 하는 것도 아니니... 내참, 회사 얘기니 밖에 가서 이런 말 남부끄러워서 할 수도 없고. 하지만 의회나 검열본부는 우리랑 한솥밥 먹는 사이니까 그나마 이런 얘기라도 하는 거야. 그쪽은 사정이 어떤가? ”

 

“ 말도 말게. KGB가 그러는데 우리라고 안 그러겠나! 그나마도 자네 쪽은 스페호프 국장이 워낙 꼬장꼬장하고 원칙을 수호하는 사람이니 좀 나을 걸세. 우리는 이번에 온 의장이 또 얼마나 젊은 애들을 끼고 도는지 아나? 간부들과 20년 이상 된 직원들은 마주치기만 하면 호통치고 박살내는 게 기본인데 젊은 애들만 보면 싱글싱글 웃고 농담 따먹기도 하고 밥도 얼마나 잘 사주는지. 그게 바로 직원들 길들이기지! 낙하산으로 내려와서 아주 그런 쪽으로는 머리가 비상하다니까! 원칙과 정의를 수호하는 간부들과 고참들은 껄끄러우니까 제거 대상이고 멋모르는 어린놈들만 자기편으로 포섭하는 거지! ”

 

“ 어쩌면 그렇게 우리 검열국과 똑같나! 우리는 아예 젊은 것들이 자기들끼리 서클을 만들더니 모여서 한다는 게 매일같이 선배들 욕하고 어떻게 하면 일을 덜 할까, 어떻게 하면 야근을 안 하고 선배들 뒷바라지 안 하고 튈까 이런 궁리만 한다네! ”

 

 

세 남자가 침을 튀기며 젊은 직원들을 욕하는 동안 베르닌은 기회다 싶어 열심히 원고를 썼다. 자료집으로 대체할 가능성이 많다는 생각은 들었다. 바라노프스키를 비롯한 저 셋은 철밥통들이니 이런 일에 워낙 경험이 많을 테니까. 하지만 출장 결과보고서를 쓰게 되어 있으니 분명 스페호프의 패턴 상 그에게 주제 발표 원고를 첨부하라고 명령할 게 뻔했다. 한참 원고를 쓰고 있는데 비행기가 착륙을 했다.

 

 

 

공항에 도착한 후부터 베르닌은 선배들의 짐꾼이 되었다. 양 손으로는 바라노프스키와 주브치크의 트렁크를 끌고 왼쪽 어깨에는 자신의 가방을, 오른쪽 어깨에는 발따예프의 가방을 둘러멨다. 그러자 자꾸 왼쪽에서 가방이 줄줄 흘러내려서 아주 불편했다. 무거운 것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다. 세 남자는 발걸음도 가볍게 앞장서면서 빨리빨리 오라고 타박을 했다.

 

짐이 너무 무거운데다 시내까지 들어가는 교통편이 별로 좋지 않았으므로 베르닌은 택시를 타려고 했다. 하지만 발따예프가 정색을 했다.

 

“ 자네 미쳤나? 출장비도 조금밖에 안 나오는데 택시라니! ”

 

“ 공항에서 워크숍 행사장까지 이동하는 교통비는 주최측에서 지급해주는 것으로 되어 있던데요? 택시비 기준으로 책정되어 있었어요. 공항에서 시내가 상당히 멉니다. 짐도 많고... 버스에는 사람이 많아요. ”

 

“ 허참, 요즘 젊은 것들은 정말 배가 불렀다니까. 전쟁을 안 겪어봐서 그래. 우리 식비도 공무원 여비 규정에 맞춰서 엄청 조금 주잖아! 여기까지 와서 그래 술 한 잔 하고 모스크바 맛집은 가봐야 할 것 아닌가! 크레믈린도 구경하고! 그러려면 다른 비용을 아껴야지! ”

 

“ 어... 저... 술 마시고 맛집 가고 관광하는 건 사적인 거니까 출장비가 아니라 사비로 하는 거 아닌가요? 전 그렇게 생각했는데. ”

 

“ 아아, 표트르. 저 녀석 입 좀 틀어막게. 저거 완전 고문관이로구만. ”

 

 

별 수 없이 베르닌은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를 타러 갔다. 승객들이 무척 많았다. 가방 4개를 들고 버스를 타려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게다가 베르닌은 이번 출장의 총무였으므로 4인의 차비까지 계산해서 내야 했다. 차비를 꺼내다 가방을 우르르 떨어뜨려 차장의 눈치를 받았다. 차장은 심지어 베르닌에게 짐을 4개나 가지고 있으니 가방 요금을 추가로 받아야 한다고 했다.

 

 

“ 저, 제 건 하나뿐입니다. 저쪽에 있는 저 세 분의 가방들이고요, 제가 한꺼번에 들고 있는 것뿐이에요. 추가 요금은 억울하죠. 1인당 가방 하나는 허용되잖아요. ”

 

“ 그럼 자기 짐은 자기가 들어야지 왜 당신이 혼자 들고 있는 건데! ”

 

“ 그게... 다들 나이 드신 선배들이라 짐을 운반하기가 버겁다 하셔서 젊은 제가 짐꾼 노릇을 하고 있는 거라서요. ”

 

“ 아니, 오늘 왜 이렇게 짐꾼들이 많아. 아침부터 꼭 이렇게 서너 명이 같이 타는데 젊은 애 하나가 짐을 다 들고 있고, 추가 요금 내라고 하면 판에 박은 듯 똑같이 얘기한다니까! 진짠지 거짓말인지. ”

 

“ 진짭니다. 어... 그럼 그 사람들도 다 저희처럼 워크숍 참가자들인가 보네요. 각 지역에서 다 온다고 했거든요... ”

 

“ 아니, 그놈의 워크숍 한번만 더 했다가는 처녀총각들 어깨 다 내려앉고 허리도 부서지겠네! 가방이 한두 개도 아니고! 자기 아들딸이면 이렇게 했겠나! 인간들이 양심머리가 있어야지! ”

 

 

나이 지긋한 뚱뚱보 아주머니 차장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화를 냈다. 베르닌은 차장이 자기편을 들어줘서 고마웠지만 행여 발따예프 일행이 그 말을 들을까봐 겁이 나서 횡설수설 얼버무렸다.

 

 

“ 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젊어 고생은 사서 고생... 막내, 서무... ”

 

“ 어이구, 헛소리하는 것까지 똑같네. ”

 

 

차장은 혀를 차며 다른 승객들 쪽으로 갔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버스는 빙글빙글 이어지는 원형의 도로를 달려 시내로 진입했다. 몇 년 만에 모스크바 시내가 보이자 베르닌은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찡해지면서 감상적인 기분에 젖었다. 그러나 그 순간 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던 바라노프스키가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듯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다닐! 이쪽으로 와서 설명을 좀 해줘야지 뭐하나! 이제 크레믈린인가? ”

 

“ 어, 아니요. 크레믈린은 완전 도심에 있어서 한참 가야 해요. 이 버스는 그쪽으로는 가지도 않고요. 내려서 갈아타야 합니다. 그리고 저희는 먼저 워크숍 행사장에 가야 해서 방향이 다른데요... ”

 

“ 그럼 저건 뭔가? 볼쇼이 극장인가? ”

 

“ 볼쇼이도 크레믈린이랑 그쪽 동네 근처에 있어서요... 지금 보시는 건 그냥 동네 극장 같은데요... ”

 

“ 아, 그럼 여기가 아르바트 거리인가? 거리도 넓고 화려하구먼. 역시 모스크바야. 우리 가브릴로프와는 비교가 안 되는군. ”

 

“ 저, 겐나디 안드레예비치. 아르바트도 도심에 있어서요... 여기는 아직 외곽 쪽입니다. 그냥 거주지 쪽이에요. 이 버스는 아르바트 쪽으로도 안 갑니다... ”

 

“ 아니, 자넨 무슨 일을 이 따위로 하나! 어차피 버스 타고 시내로 들어가는 거, 당연히 크레믈린, 아르바트 따위는 보면서 가야지! 그런 루트로 들어가는 버스를 탔어야 할 거 아닌가! 심지어 갈아타라고 하지를 않나! ”

 

“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닙니다. 시내 들어가는 버스는 이거 하나밖에 없거든요. 그리고 저희는 행사 시작 시간에 맞춰서 가야 하니 중간에 시내 구경할 틈이 없어요. 처음에 명단 등록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관광은 오늘 저녁이나 내일... ”

 

“ 저녁이라니! 겨울이라 해도 금방 지는데 저녁 되면 어떻게 구경을 하나! 알겠네! 일단 행사장에 가서 명단 등록만 하고 나오는 거야! 곧장 크레믈린으로 먼저 가고, 그 다음엔 볼쇼이 극장 앞에 가서 사진 한 방 박고, 그리고는 아르바트, 그리고 참새 언덕으로... ”

 

 

베르닌은 버스를 멈추고 바라노프스키의 엉덩이를 발로 걷어차 내쫓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 예, 알겠습니다. 일단 명단 등록부터 하시지요. 두 정거장 후에 내려서 갈아타야 합니다. ”

 

 

발따예프 일행이 우르르 내린 후 베르닌이 혼자 낑낑대며 가방들을 들고 내리는데 뚱뚱한 차장 아주머니가 옆으로 와서 도와주었다. 그리고는 베르닌의 등짝을 툭툭 두들겨 주었다.

 

 

“ 총각, 고생하네. 어휴, 군대 간 우리 아들 생각나서 미치겠네. 저런 인간들 비위 다 맞춰줄 필요 없어! 우리가 왜 혁명을 했는데! 저 작자들이 어디서 부르주아 행세야! ”

 

“ 저... 감사합니다. 근데 혁명을 해도 높은 사람은 끝까지 높은 사람, 서무는 끝까지 서무... ”

 

“ 에이그... 밥이나 잘 챙겨먹고 다녀. ”

 

 

 

*   *   *

 

 

 

행사장은 각 지역에서 온 우수 공산당원들로 우글거렸다. 주최측에서 제공하는 점심을 구내식당에서 먹은 후 베르닌은 명단 등록을 하면서 자료집과 숙소 열쇠를 받았지만 그 사실을 선배들에게 얘기해야 할지 망설였다. 열쇠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분명 워크숍이고 나발이고 대번에 숙소로 직행해서 짐을 푼 후 관광을 나가자고 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쇠를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 있는데 이럴 때만 매의 눈을 자랑하는 발따예프가 잽싸게 다가왔다.

 

 

“ 오, 방 열쇠를 받았구먼. 그럼 이제 숙소로 가지!

 

“ 저, 선배님. 근데 최소한 개회식 마치고 지역별 소개는 하고 가야 하지 않을까요? 돌아가면서 소개한다는데 우리 쪽만 빠지면 모양새가 좀... ”

 

“ 으으, 답답해! 우린 피곤해 죽겠단 말이야! 자네도 우리 나이 돼 보라고! 새벽부터 일어나 비행기 타고 왔지, 심지어 무거운 짐 들고 만원버스 탔지, 뼈마디가 시려 죽을 지경이네! ”

 

“ 하지만 최소한 지역별 소개 때는 자리를 지켜야죠, 그것까지 빠지면 지적당할 거고 그럼 우리 가브릴로프 체면이 뭐가 되나요. ”

 

 

발따예프와 베르닌이 티격태격하자 주브치크가 재판관처럼 근엄하게 말했다.

 

 

“ 뭘 그런 걸 가지고 골치를 썩여. 아직 시작하려면 20분 남았군. 다닐! 자네가 지금 우리를 숙소까지 데려다주는 거야! 우린 호텔에 짐 풀고 눈 좀 붙이고 있을 테니 자네가 우리 대표로 참석하게! 딱 우리 지역 소개까지만 끝내고 숙소로 오는 거야! 그리고 크레믈린으로 직행하는 거지! ”

 

 

베르닌은 저항해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숙소는 행사장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였다. 그는 다시 가방 4개를 둘러메고 질질 끌며 호텔로 향했다. 그러나 짐을 풀기가 무섭게 셋은 또다시 방이 너무 좁다느니, 시설이 낡았다느니 하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베르닌은 급하게 자기 가방에서 볶은 땅콩과 청어 통조림, 보드카 한 병을 꺼내서 선배들 앞에 갖다 바쳤다.

 

 

“ 이거라도 드시면서 조금만 쉬고 계세요. 저는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

 

“ 쯔쯔, 노티 나게 웬 땅콩이야. 젊은 사람이... 하여튼 보드카는 잘 챙겨왔구먼. 유일하게 오늘 잘 한 일이네. 지금 1시니까 아무리 늦어도 2시까지 돌아오게! ”

 

“ 예. ”

 

 

베르닌은 잠시라도 그들과 떨어질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급하게 행사장으로 돌아갔다. 놀랍게도 아까 그렇게 득시글대던 사람들이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지역별 기관 소개와 자기 소개가 시작되었다. 마이크를 잡고 인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베르닌 또래의 남녀였다. 한 지역에서 두 명 이상 인사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다들 ‘저희 ㅇㅇㅇ시에서는 모모 기관, 모모 협회에서 아무개와 아무개, 또 아무개가 참여하였습니다만 제가 대표로 인사드립니다’ 로 급하게 인사를 마치고 들어갔다.

 

베르닌이 유심히 보니 대표로 인사드린다고 말하고 들어간 사람들의 옆자리는 모두 텅 비어 있었다. 바로 자신처럼! 어느 동네나 똑같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조금 안심하고 베르닌도 앞사람들처럼 ‘저희 가브릴로프 시에서 온 참가자는 시 의회 홍보부장 겐나디 바라노프스키, 검열국 선전부장 비탈리 주브치크, KGB 감시분석 차장 표트르 발따예프, 그리고 같은 부서의 저, 다닐 베르닌 총 4명입니다. 대표로 인사드립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라고 인사를 후다닥 마치고 들어왔다. 잘 보니 아무도 인사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심지어 얼굴도 쳐다보지 않았다.

 

 

소개의 시간이 끝나자마자 지역별 주제 발표가 시작되었다. 베르닌은 혹시나 해서 조바심을 내며 주제 발표를 지켜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라노프스키의 말이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아르한겔스크 대표가 레닌과 스탈린,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의 경제 모델에 따른 공산당원 교육 정책에 대해 5분쯤 발표하고 나자 사회자가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앞으로 나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 다들 아르한겔스크 대표에게 박수 보내주시죠. 훌륭한 발표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홀을 둘러보니 연방 각 지역에서 여기까지 오시느라 다들 많이 피곤하신 것 같습니다. 개회식과 자기 소개가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으니 나머지 지역들에서 준비해온 내용은 자료집으로 대체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30분 휴식하겠습니다. 휴식 후에는 조별 토론을 진행하겠습니다. ”

 

 

조별 토론이란 각 지역별로 팀을 짜서 우수 공산당원의 필수 자세와 미션을 주제로 토의하는 것이었다. 다음날 오전에 모여서 지역별로 결과를 발표한 후 모스크바 세션은 마무리된다는 거였다. 지역별로 이곳저곳에 흩어져서 자유롭게 토론하라는 지시였다. 분명 어느 팀도 행사장에 남지 않을 게 뻔했다. 토론은 더욱더 마찬가지였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시계를 보니 2시 5분 전이었기 때문에 그는 숙소로 돌아갔다. 마음 같아서는 나 몰라라 하고 모스크바 강변으로 나가 혼자 돌아다니고 싶었다. 이제 겨우 출장 첫날이라니 정말 막막했다.

 

 

 

*   *    *

 

 

 

베르닌은 하루종일 모스크바 시내를 돌아다니며 선배들의 관광 가이드 노릇을 하고 저녁까지 먹이러 갔다. 다행히 코즐로프가 추천해준 식당은 아저씨들 입맛에 딱 맞는 곳이었다. 베르닌은 보드카를 들이 밀었던 이후 두 번째로 칭찬을 받았다. 셋은 미친 듯이 음식을 흡입했다. 베르닌은 도통 입맛이 없어 모래를 씹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제야 좀 쉬려나 싶었지만 신이 난 발따예프 일행은 모스크바 야경을 보러 나가자고 난리였고 베르닌은 그들을 데리고 강변으로 갔다. 야경이야 근사했지만 칼바람이 불어와서 30분 후에는 숙소로 돌아와야 했다.

 

 

이제야 좀 발 뻗고 쉬려나 했지만 물론 그것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베르닌과 발따예프의 방에서 술판이 벌어졌다. 모두가 알아주는 주당이었다. 베르닌은 계속 술시중을 들고 안주를 마련해야 했다. 베르닌이 대충 나흘 치를 계산해 챙겨온 보드카와 맥주는 그날 밤 몇 시간 만에 모두 동이 났다. 그나마 알렉산드라의 충고대로 술과 안주를 챙겨왔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눈치 없는 놈, 책상물림 운운하며 또 엄청나게 깨질 뻔했다.

 

 

마침내 잠자리에 들었을 때 베르닌은 너무 힘들어서 토할 것 같았다. 아니, 실지로 새벽 4시에 깨서 화장실로 달려가 토했다. 원인은 밤늦게까지 선배들과 마신 보드카와 맥주, 싸구려 와인 때문이었다. 그는 술이 약한 편은 아니었지만 종일 짐꾼이자 가이드로 너무 혹사당한데다 세 가지 술을 섞어먹다 보니 그만 속이 뒤집어지고 만 것이다. 선배들은 그에게 조직 생활을 잘 하려면 술을 잘 마셔야 한다며 계속해서 술을 권했다. 바라노프스키는 보드카에 맥주와 와인을 섞어서 폭탄주를 제조했고 베르닌에게 원 샷을 강요했다. 그러니 멀쩡할 리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같은 방을 쓰는 발따예프는 토하지도 않고 트럭 경적을 울리듯 코를 골며 잘만 자고 있었다.

 

 

실컷 토한 후 베르닌은 현기증에 휩싸여 뒤늦게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러나 발따예프가 6시에 일어나 그를 깨우며 배고파 죽겠다고 못살게 굴었다. 베르닌은 너무 괴로워서 끙끙대며 저항했다.

 

 

선배님... 제발, 저 새벽에 토해서 너무 힘들어요. 한 시간만 더 잘게요. ”

 

“ 젊은 놈이 왜 이렇게 술이 약해! 숙취는 뭘 먹어야 낫는 거야! ”

 

“ 선배님, 조금만 기다리셨다가 식당 내려가서 조식 드세요... ”

 

“ 조식은 7시 반부터잖아! 난 지금 배고파 죽겠는데! 옆방에서도 벌써 깼어. 비탈리랑 겐나디도 배고프다고 먹을 거 찾는다고! 자네가 총무잖아! 아침에 먹을거리를 준비해놨어야지! ”

 

 

하는 수 없이 베르닌은 억지로 일어났다. 그 사이에 주브치크와 바라노프스키도 배고파 죽겠다며 불쑥 들어왔다. 베르닌은 가방을 탈탈 털어서 슬라이스 치즈 한 봉지와 흑빵 한 덩어리, 간밤에 먹고 남은 햄 반 토막, 딸기잼과 사과 한 알을 찾아냈다. 신문지 위에 우르르 쏟았다.

 

 

“ 저, 이거라도 들고 계세요. 전 한 시간만 더... ”

 

아니, 이 녀석이! 어디 선배들한테 신문지를 내밀어! 이렇게 주면 어떻게 먹으란 말이야! 우리가 무슨 찌꺼기 처리반이야? 먹을 수 있는 걸로 만들어 놓으란 말야!

 

 

베르닌은 순간 심오한 살의를 느꼈다. 그리고 이 인간들에 비하면 왕재수의 투정은 아주 귀여운 수준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심지어 왕재수가 그리울 지경이었다. 음식 투정은 해대지만 바퀴벌레 곱등이로 협박하면 요즘은 항아리 닭고기도 먹고, 평소에도 보르쉬 한 그릇, 생선 한 토막만 준비해주면 되고 사과파이만 물려주면 모든 게 해결되지 않는가! 그리고 왕재수는 자주 먹지도 않고 많이 먹지도 않는다! 이 인간들처럼 걸신들린 듯 한 시간에 한 번씩 먹을 것 타령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왕재수는 술도 못 마시니 이 또한 훌륭했다!

 

 

그는 졸음과 숙취로 머리가 깨질 것 같았지만 어쨌든 비행기에서 챙겨온 플라스틱 나이프로 흑빵을 썰었다. 그나마도 세 조각이 나와서 다행이었다. 빵에 딸기잼을 바른 후 치즈를 한 장씩 얹고 그 위에 햄을 썰어 올렸다. 사과를 얇게 썰어서 햄 위에 또 얹었다. 부체르브로드 샌드위치가 완성되자 발따예프가 고맙다는 말도 없이 제일 큰 샌드위치를 덥석 집어 입안으로 우겨넣었다. 나머지 둘도 급하게 먹기 시작했다. 베르닌에게는 먹어보라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음료수를 챙겨놓지 않았다고 타박을 했을 뿐이었다.

 

 

아침부터 샌드위치를 급조하느라 잠이 달아난 베르닌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며 피로를 달랬다. 생각해보니 워크숍에서는 지역별로 어제의 토의 결과를 발표하게 되어 있었다. 될 대로 돼 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가브릴로프를 호명하면 벌떡 일어나서 ‘저희는 모스크바 구경을 하고 술을 퍼마시느라 팀별 토론을 생략했습니다’ 라고 고백할 심산이었다. 그러나 호기 있게 결심한 것과는 달리 조식을 먹으러 내려갔을 때도, 워크숍 홀로 이동했을 때도 계속 ‘근데 우리만 토론을 안 한 거면 어떡하지...’하고 걱정이 돼서 머리가 더 지끈거렸다.

 

 

숙취가 심해서 그는 따뜻한 차 한 잔밖에 입에 댈 수가 없었다. 텅 빈 속과 지끈거리는 머리로 그는 워크숍 홀로 갔다. 선배들은 물론 따라오지 않았다. 아침을 먹자 이제 배가 불러서 졸려온다, 레닌그라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하니 자기들처럼 연배가 있는 사람들은 체력을 비축해야 한다, 방에서 좀 쉬고 있을 테니 너 혼자 가서 마무리하고 오라고 했다. 대환영이었다!

 

역시 홀에 모인 사람들도 전날 앞에 나와서 인사를 했던 젊은이들뿐이었다. 다들 눈이 퀭했고 뺨이 쑥 들어가 있었다. 영원히 운 없는 아르한겔스크 대표가 전날 토론 결과를 5분 동안 발표한 후 사회자가 역시나 여독도 안 풀렸을 테고 또 오후에 레닌그라드로 이동해야 하니 나머지는 자료집으로 대체하겠다고 한 후 모스크바 일정 종료를 선언했다. 가브릴로프가 A로 시작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리고 레닌그라드행 비행기 시간에 맞춰 오후 3시에 홀 앞에서 공항 가는 버스를 제공하겠다는 예기치 않은 발표에 베르닌은 정말 눈물이 날 만큼 고마움을 느꼈다. 사회자를 안아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    *    *

 

 

 

물론 레닌그라드에서도 모스크바와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심지어 더 심했다. 레닌그라드는 구경거리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베르닌이 모스크바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레닌그라드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다는 거였다. 선배들을 데리고 이곳저곳 찾아다니기는 했지만 툭하면 길을 잃어서 엄청나게 욕을 먹었다. 그나마도 왕재수가 지도에 표시해준 곳들 덕에 큰 위기들은 모면했다.

 

 

사실 베르닌은 왕재수가 추천한 식당에 대해서만은 크나큰 두려움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야채와 닭가슴살, 기름기는 전혀 없는 요리만 가득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건 기우였다. 운하 뒷골목에서 길을 잃어 헤맨 후 화가 머리끝까지 났던 선배들은 왕재수가 추천한 맛집에 들어가자마자 금세 얼굴이 풀리며 헤헤 웃기 시작했다. 웨이트리스가 너무나도 예쁜 여자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친절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요리는 정통 러시아식이었고 충분히 기름지고 달콤한 메뉴도 많았다. 맛도 괜찮았고 가격 또한 비싸지 않았다. 그리고 이웃 테이블들에 앉아 있는 손님들도 모두 어찌나 맵시가 뛰어나고 외모가 아름다운지 발따예프와 주브치크, 바라노프스키는 연신 입에 음식을 쑤셔 넣으면서도 멍하게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느라 베르닌을 구박하는 것도 잊었다. 그래서 베르닌은 출장을 온 후 처음으로 식사다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나오면서 보니 벽에 키로프 극장과 드라마 극장 유명인들의 사진과 사인이 든 액자들이 걸려 있었는데 제일 가운데에 왕재수의 사진도 있었다. 극장 쪽 사람들이 찾는 맛집인 것 같았다. 그래서 손님들이 다들 스타일이 좋은 게 분명했다. 다음에 간 식당과 카페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맛있는 음식과 예쁜 점원, 스타일 좋은 손님들의 3박자가 고루 갖춰져 있었다.

 

 

식사는 그렇게 해결을 했지만 관광은 역시 너무 힘들었다. 왕재수의 추천 리스트에는 어쩐지 빠져 있었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선배들을 데려갔으나 그들은 그림과 조각상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고 박물관이 너무 커서 어지럽다는 둥, 다리가 아프다는 둥 불만만 늘어놓았다. 궁전광장과 이삭 성당 앞에서는 사진만 한 장씩 찍은 후 다들 배고프다고 밥을 먹으러 가자고 난리였다. 고스치니 드보르에 쇼핑을 하러 갔더니 물건 값이 비싸다며 시골에서 왔다고 바가지 씌우는 거냐고 마구 화를 내서 점원과 싸움이 붙을 뻔한 것을 베르닌이 간신히 말렸다.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쪽으로 걸어가며 베르닌이 ‘이곳이 도스토예프스키가 사형 선고를 받고 갇혀 있었던 곳입니다’ 등등 열심히 역사적 사실을 설명해주었으나 셋은 물론 도스토예프스키고 19세기 문학이고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일제히 다리 건너 사원의 반짝이는 금빛 첨탑을 배경으로 늘어선 후 베르닌에게 사진을 찍으라고 난리를 쳤고 사진을 찍자 휙 돌아서며 그만 술이나 한 잔 하러 가자고 했다.

 

 

“ 저, 요새 안으로는 안 들어가실 건가요? 저 안에 볼만한 게 많은데... ”

 

뭐하러 봐! 사진 찍었으면 됐지!

 

“ 저 안에 옛날 감옥도 있고 홍수 때 잠겼던 표시도 있고... ”

 

옛날 감옥은 우리 가브릴로프에도 있는데 뭐하러!

 

“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가 갇혔던... ”

 

도스토예프스키고 나발이고 그놈이 밥 먹여주나!

 

 

워크숍 참석은 모스크바와 똑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금요일에는 레닌그라드 시 의회와 KGB 지부 견학이 잡혀 있었다. 셋 다 가기 싫어했지만 이것만은 빠질 수가 없었다. 레닌그라드 측에서 고위 간부들이 참석하게 되어 있는데다 바라노프스키는 의회 쪽이었고 발따예프와 베르닌은 당연히 KGB 쪽에 참석을 해야 했다. 검열국은 양쪽 모두 해당이 되었으므로 주브치크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죽상이 되어 견학을 하러 갔다. 가서는 간부들의 인사말을 듣고 시설 내부를 한 바퀴 돌고 단체 사진을 찍었다. 베르닌은 레닌그라드 KGB도 자신들처럼 관료제가 기승을 부리는지 궁금했고 스파이 양성으로 이름난 곳이니 특별 노하우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지만 물론 질문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견학을 모두 마친 후에는 의회 구내식당에서 집단으로 점심을 먹었다. 발따예프가 조그맣게 투덜댔다.

 

 

“ 경비 아끼려고 구내식당에서 먹이다니! 이런 거나 먹으려고 이 먼 곳까지 날아온 줄 아나... 이런 걸로 절약한 돈은 우리에게 일비로 더 줘야지! 맛도 형편없어! ”

 

“ 어, 선배님. 전 맛있는데요. 우리 구내식당보다 훨씬 나은데요? 우리는 소시지도 두 개밖에 안주는데 여기는 세 개예요! 그리고 메밀죽에 버터도 얹어주는데요. ”

 

“ 시끄러워, 누가 출장까지 와서 메밀죽 먹고 앉아 있냐! ”

 

 

 

그리고 밤마다 술판이 벌어졌다. 보드카. 맥주. 싸구려 와인. 각종 안주들. 폭탄주. 끝없이 반복되는 ‘내가 젊었을 때는 말이야~’의 향연. 금요일 밤이 되자 베르닌은 그들의 레퍼토리를 줄줄 욀 지경이 되었다. 이미 사흘 연속 새벽에 토하고 숙취로 시달리던 터라 금요일 밤에는 베르닌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소리쳤다.

 

 

선배님들, 전 먼저 자겠어요! 잠이 너무 모자랍니다! 안주는 여기 모두 준비해 놨고요, 술도 여기 있습니다. 술이 모자라면 이제 사비로 구입해야 합니다, 내일 점심 저녁 식사비를 제외하곤 이제 경비를 다 써서요.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

 

“ 아니, 저 놈이 어디서 버르장머리 없이! 선배들이 술을 마시면 당연히 옆에서 술도 따라주고 얘기도 나누고 해야지!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얘기들인데! ”

 

“ 예, 그건 그런데요 제가 너무 졸려서... 오늘도 못 자면 아무래도 내일 선배님들을 모시고 다닐 수 없을 것 같다고요... ”

 

“ 자기는 어디서 잔다는 거야! 이 방에서 술 먹을 건데! 우리 오늘 끝까지 가려고... ”

 

“ 괜찮습니다. 전 잘 수 있어요! ”

 

 

선배들의 따가운 시선과 욕설을 뒤로 하고 베르닌은 침대에 몸을 던졌다. 담요로 몸을 둘둘 말고 휴지조각을 뭉쳐서 귓구멍에 꽉꽉 틀어막았다. 손수건으로 안대를 만들까 생각하는 순간 이미 깊은 잠에 빠졌다.

 

 

며칠 동안 쌓인 피로와 숙취로 베르닌은 코를 골며 이따금 발길질까지 해대며 잤다. 새벽에 퍼뜩 너무 목이 말라 깨어나서 주위를 둘러보니 주브치크와 바라노프스키, 발따예프가 너나 할 것 없이 고주망태가 되어 카펫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선배들을 하나하나 부축하거나 업어서 침대에 눕혀주거나 최소한 이불이라도 덮어줬을 테지만 이미 질릴 대로 질린 베르닌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 몰라. 난 아무 것도 못 본 거야. 꿈이야! ’

 

 

그래서 그는 물만 한 모금 꿀꺽 마시고 도로 침대로 기어들어가 이불을 칭칭 감고 다시 잠들었다. 약 두어 시간 동안 그는 매우 복잡한 꿈을 꾸었다. 족히 4~5가지는 됐는데 그 모든 꿈은 저 꼴 보기 싫은 진상 선배들을 네바 강에 떠밀어버리는 것으로 동일하게 끝났다. 막 마지막 꿈에서 발따예프를 강물에 거꾸로 처넣고 있는데 알람이 울렸고 그는 괴로워하며 꼼지락거리다가 문득 너무나도 행복한 생각이 들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구나! 오늘 저녁에 돌아가는구나! ’

 

선배들은 아직도 곯아떨어진 채 바닥에 누워 코를 골고 있었다. 진상들에게 나흘 넘게 시달리며 학습한 결과 눈에 보일 때만 잘하면 된다는 만고의 진리를 뒤늦게 깨달은 베르닌은 자기 이불과 옆 침대의 이불을 모두 끌어내려 그들의 몸 위에 아무렇게나 덮어 주었다. 그리고 샤워를 하러 갔다.

 

 

 

*    *    *

 

 

 

토요일은 워크숍이나 견학 일정이 없었다. 저녁 6시에 호텔 앞에서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게 되어 있었다. 베르닌은 선배들을 데리고 다시 가이드 노릇을 하며 시내를 돌아다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선배들은 연일 술을 퍼마시고 진탕 논 후유증으로 다들 상태가 시들시들했다. 그리고 찍을 만한 곳에서는 사진을 다 찍었다는 생각에 이곳저곳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도 사라진 것 같았다. 그저 낮부터 어딘가에 처박혀 술을 마시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보였다.

 

그래서 베르닌은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사실은 왕재수가 알려준 마지막 방법이었다. 차 안에서 지도에 표시를 해주다가 왕재수가 웃음기도 없이 이렇게 말했었다.

 

 

빗, 물병, 이제 목걸이야.

 

“ 엥, 그게 무슨 소리야? ”

 

“ 그런 거 있잖아. 옛날 얘기. 마귀할멈한테 잡혀간 남자가 거기 하녀랑 둘이 도망가는 거. 마귀할멈이 쫓아오니까 빗 던지고 물병 던지고 목걸이 던지잖아. ”

 

“ 어... 기억난다. 빗 던지니까 가시나무숲 생기고, 물병 던지니까 호수 생기고. 그래도 쫓아오니까... ”

 

“ 그래, 목걸이 던지니까 불이 나서 마귀할멈 거기 타 죽잖아. ”

 

“ 근데 그거 목걸이 아니었던 거 같은데... ”

 

“ 어쨌든! 뭔들 무슨 상관이야! 불만 나고 마귀할멈만 퇴치하면 되지! 하여튼 여기 식당이 빗, 여기 전망대가 물병, 그리고 여기가 목걸이라고! ”

 

 

왕재수의 비유가 유치한 건지 아니면 예술적 감성인 건지 베르닌은 지금도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레닌그라드 출장에서 왕재수의 충고가 실패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므로 ‘목걸이’를 들이대기로 했다.

 

 

“ 선배님들. 많이 피곤하시죠? 공항 가려면 아직 네 시간이나 남았는데 이제 슬슬 앉아서 한 잔 하시며 쉬시면 어떨지. ”

 

“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근데 문제는 우리가 이제 돈이 별로 없어. 총무란 놈이 재정 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주머니도 가벼운데 어딜 가서 네 시간 동안 즐겁게 술을 마신담. 가뜩이나 여긴 대도시인양 거들먹거리면서 우리한테 바가지 씌우는 놈들밖에 없는데. ”

 

“ 저, 제가 좋은 곳을 한 군데 알아놨거든요. 여기서 별로 멀지도 않고요, 보드카가 반값이랍니다. 물을 타지도 않고요. ”

 

“ 엥, 그런 데가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런 곳이 다 있지? ”

 

“ 쉿... 이건 비밀입니다. 다 방법이 있다는 군요. 하지만 비밀이 새어나가면 연수를 온 우수 공산당원들이 너도나도 몰려들기 때문에 저희만 살짝 가야 합니다. 남들에게 얘기해서도 안 되고요. ”

 

“ 물론이지! 미쳤다고 우리가 이 좋은 정보를 남들과 공유하나? 어서 가세! 빨리 안내하게! ”

 

 

그래서 베르닌은 선배들을 데리고 왕재수의 ‘목걸이’로 갔다. 그곳은 그리보예도프 운하 뒷골목의 낡은 건물 지층에 있는 선술집이었다. 분위기는 어두컴컴했지만 촌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여기저기 밀수품들이 가득했고 외국 음악들이 흘러나오는 곳이었다. 아마도 바냐 투레츠키 같은 인물이 운영하는 곳 같았는데 레닌그라드답게 취향은 훨씬 세련된 것 같았다. 그 건달 투레츠키에게도 거리낌 없이 드나들던 왕재수니 이곳도 단골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카운터 뒤로 가면 밀수품을 암거래하는 창고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발따예프 일행은 그런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하긴 눈치 챈다 해도 지금은 반값 보드카가 훨씬 중요했다. 메뉴를 보니 정말 반값이었다. 베르닌은 선배들을 앉혀 놓은 후 잽싸게 카운터로 갔다. 남은 경비를 탈탈 털어서 보드카와 맥주와 크바스, 짭짤해서 조금만 먹어도 안주거리로 충분한 칼바사와 오이피클, 그리고 소금에 절인 돼지비계를 주문했다. 그리고는 왕재수가 적어준 마법의 주문인 ‘그런데 정말 눈이 예쁘고 피부가 고우시네요’ 란 문장을 억지로 주워섬겼다. 그러자 카운터에 앉아 있던 50대의 뚱보 아주머니는 매우 기뻐했고 ‘어머나, 총각. 보는 눈이 있네. 내가 왕년엔 레닌그라드 남자들을 얼마나 울렸는지...’ 라면서 요리사에게 감자튀김을 서비스로 주라고 지시했다!!

 

 

안주가 산더미처럼 쌓인 접시와 술병들이 좍 나타나자 발따예프와 바라노프스키, 주브치크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고 굉장히 기뻐했다. 베르닌의 어깨를 툭툭 쳤다.

 

 

“ 잘했네, 잘했어! 자네 며칠 동안 죽을 쒔지만 마지막으로 만회하는군! 어서 앉게! 공항 갈 때까지 여기서 퍼마시자고! ”

 

“ 저, 선배님. 저는 숙취 때문에 한 모금만 더 마시면 토할 거예요. 그러면 선배님들 입맛도 떨어지고... 가뜩이나 아까운 술인데 선배님들 더 드세요. 저는 요 근처에 아는 사람이 살아서요, 온 김에 잠시 얼굴만 보고 돌아오겠습니다. 버스가 6시에 출발하니 늦어도 5시 반까지는 여기로 오겠습니다. ”

 

 

의외로 선배들은 야단을 치거나 저지하지 않았다. 베르닌이 빠지면 1인당 돌아가는 술의 양이 늘어난다는 사실이 가장 큰 이유 같았다. 그리고 다들 감자튀김이 쌓여 있는 접시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왕재수가 이 ‘목걸이’를 추천해주면서 ‘거기 감자튀김 보면 아무도 불평 못해’ 라고 한 이유가 있었다. 베르닌이 감자튀김은 얼마냐고 묻자 왕재수가 그 마법의 문구를 가르쳐줬다. 그 감자튀김은 정말 근사했다. 두툼한 막대 모양 튀김들이 피라미드처럼 쌓여 있었다. 황금빛으로 윤이 돌았고 겉은 바삭바삭했고 속은 촉촉하고 포실포실했다. 거기에 스메타나와 꿀, 마늘을 섞은 소스가 큼직한 접시에 잔뜩 담겨 있었는데 소스만 먹어도 맛있을 것 같았다. 베르닌은 감자튀김을 두어 개 집어먹은 후 그 자리에 철퍽 주저앉아 튀김만 흡입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그 선술집을 나왔다.

 

 

 

*    *    *

 

 

 

베르닌은 버스를 타고 네프스키 대로를 따라 몇 정거장 가다가 내렸다. 인접한 골목으로 꺾어져 조금 걷자 시립병원 건물이 보였다. 접수계로 가니 서류를 달라고 했다. 베르닌이 여권과 임시등록 서류를 건네주자 접수원이 장부에 적었다.

 

“ 어디가 아파서 오셨나요? ”

 

“ 어... 저... 저는 내과에 좀... 저... ”

 

“ 서류 보니 외지에서 오셨군요. 그럼 원래 진료 받던 의사는 없겠네요. ”

 

“ 아니, 그게요. 저는 진찰을 받으려는 게 아니라 누굴 좀 만나야 해서... 그러니까 의사인데... 내과... ”

 

“ 오늘 토요일이라 내과든 외과든 한 분씩밖에 없어요. 독감 철이라 환자도 많아서 좀 기다려야 할 거고요. ”

 

 

베르닌은 난감했다. 토요일이란 사실을 잊었던 것이다. 그럴 줄 알았으면 금요일에 빠져나왔어야 했다. 어쨌든 물어나 보자 싶었다.

 

 

“ 저, 전 유리 아스케로프라는 의사 선생님을 찾아왔는데요. ”

 

“ 아, 유라. 오늘 당직이에요. 진료 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근데 어디가 아프신 거죠? 독감인가요? ”

 

“ 어, 예. 아마도... ”

 

 

친절한 접수원은 알아볼 수 없는 글씨를 휘갈긴 서류 두 장을 떼어주더니 그에게 2층 내과로 가라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베르닌은 2층으로 올라갔다.

 

 

대기실에는 정말 환자가 많았다. 간호사 하나가 그를 보더니 서류 한 장을 빼앗아서 가지고 들어갔다. 베르닌은 환자들 사이에 끼어 앉아 차례를 기다리며 꾸벅꾸벅 졸았다. 무척 피곤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감자튀김이나 몇 개 더 먹고 올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한 시간 쯤 후 간호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 베르닌! 다닐 베르닌! 들어오세요! ”

 

 

진료실로 들어가자 피로에 절어 퀭한 얼굴의 의사가 구겨진 하얀 가운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40대 초반 정도로 보였는데 꼭 의대생이나 인턴처럼 잠이 모자라 보였다. 어쩌면 면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갈색 곱슬머리가 마구 헝클어져 있는데다 안경은 왼쪽 다리가 구부러져 비스듬하게 걸려 있었다. 의사는 베르닌을 보더니 가까이 오라고 했다. 그리고 외모와는 달리 의외로 상냥한 말투로 물었다.

 

 

“ 다닐. 어디가 안 좋은가요? ”

 

“ 어, 저... 그러니까 저는... ”

 

“ 흠, 목소리가 많이 쉬었는데. 숨결 섞이는 걸 보니 기관지도 문제가 있고. 청진기 좀 대 봅시다. 얼굴도 벌건 게 열도 나는 것 같군. 마리야, 환자 체온 좀 측정해 줘요! ”

 

 

베르닌이 미처 뭐라 말하기도 전에 간호사가 그의 겨드랑이 사이에 체온계를 쑤셔 넣었다. 잠시 후 기계적으로 숫자를 뇌어 주었다.

 

 

“ 선생님, 38도네요. ”

 

“ 음... ”

 

 

의사가 청진기를 대 보았다. 숨을 이렇게 쉬어라 저렇게 쉬어라 지시를 좀 하더니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베르닌의 맥을 짚어 보았다. 눈꺼풀에 등을 비춰보았고 입을 벌려서 혓바닥의 상태와 목구멍을 관찰했다. 그러더니 침대에 누워보라고 했다. 얼떨결에 베르닌이 눕자 배와 가슴, 등을 샅샅이 만져보고 눌러보았다.

 

 

으윽, 아파요!

 

“ 거긴 원래 누르면 아픈 데니까 엄살 부리지 말고. 여기도 아파요? ”

 

으악, 거긴 더 아파요!

 

“ 음. 원래 위염과 역류성 식도염이 있었나요? ”

 

“ 어, 그게... 조금이요. ”

 

“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최근 신체적으로 아주 고생했거나 스트레스가 심했던 게 틀림없어. 여기 장 부분도 딱딱하게 뭉쳐져 있다고요. 폐 소리를 들어보니 독감은 아닌 것 같은데, 무리해서 후두염이 왔군요. 그래서 열이 나는 거야. 게다가 맥이 많이 약해요. 당신 나이에, 이전에 앓았던 질병도 없다면 이건 꽤 심각하다고요. ”

 

“ 심각하다니요? 제가 혹시 무슨 병에라도... 저도 모르는 심각한 병에... ”

 

“ 직장에서 많이 힘든 일을 하나보죠? 당신 몸 상태를 보니 육체노동은 아니고 사무직인데. 정신적 스트레스가 엄청난 모양이군요.

 

“ 앗, 선생님. 정말 명의인가 보네요! 저 맞아요, 사무직인데요. 서무. 막내... 이번에 윗분들 모시고 출장.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매일 밤새고 술 먹고 가이드, 워크숍에 안 들어오고... ”

 

 

베르닌은 서럽기도 하고 자신의 고생을 알아주는 의사가 고맙고 반가워서 횡설수설 떠들기 시작했다. 의사는 잠시 그의 하소연을 듣고 있다가 손바닥으로 책상을 탁 쳤다.

 

 

“ 일단 후두염 약을 사흘 치 처방해줄 테니 밥 먹고 30분 후에 먹어요. 규칙적으로 먹고, 많이 자고, 손을 깨끗하게 씻고! 그리고 가급적 야근은 하지 말고 회사의 모든 일을 내가 다 처리해야 한다는 망상은 버려요! ”

 

“ 아니, 근데 야근을 안 할 수도 없고요... 저는 서무라서 회사의 모든 일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위치... ”

 

무슨 서무가 부서장도 아니고 대표도 아닌데 회사의 모든 일을 해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담! 당신이 펑크를 내도 그건 하잘것없는 펑크에 불과해요. 맡은 업무의 중요도 자체가 다르다고요! 그러니까 내가 모든 짐을 져야 한다는 의무감 따윈 버려요! 그래야 심신이 건강해지지! ”

 

“ 어... 국가의 녹을 먹는 시립병원 의사 선생님이 그렇게 얘기해도 되나요? 우린 모두 소련 시민... 모두가 평등하고 서로에 대해 책임이 있는... ”

 

헛소리 집어치워요. 웬 고리타분한 이념 교육이람! 내가 무슨 공산당원도 아니고 계도 위원도 아닌데! 난 의사니까 사람 건강에 대해서만 얘기하면 됐지! 일만 실컷 하다 아프면 누가 책임져 줄 것 같아요? 당신 몸 당신이 챙겨야지! 선배들이고 나발이고 그냥 길거리에 내버리고 당신 하고 싶은 거 하다 돌아가요!

 

“ 어... 어... 어디서 많이 들어본 논리... ”

 

“ 그리고 운동 좀 하고. 최소한 하루에 30분은 움직여요! 피부 상태를 보니 기름진 음식 좋아하고 최근 술도 많이 먹었군. 단백질 섭취를 늘리고 지방질과 당분은 좀 줄이는 게 좋겠군요. 토요일만 아니면 피도 뽑고 전체 검진을 해봤으면 좋겠는데... 집으로 돌아가면 근처 병원 가서 꼭 검진 받아보는 게 좋겠어요. ”

 

“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

 

“ 아픈 데가 더 있나요? ”

 

 

베르닌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봉투를 꺼냈다. 자기도 모르게 주변을 한 바퀴 둘러봤다. 간호사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봉투를 의사에게 내밀었다.

 

 

“ 저, 제가 사실 부탁을 받아서요. 이거 전해주라고. ”

 

“ 누구한테 부탁을 받았다는 거죠? 이게 뭔가요? ”

 

 

의사는 봉투를 받는 대신 갑작스럽게 의심에 가득 찬 눈초리로 베르닌을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수작이지? 당신 혹시 KGB 아냐? 이 더러운 앞잡이... 또 무슨 음모를 꾸미려고!

 

“ 어... 그게요... KGB... 아닌 건 아닌데. 그게 아니라, 제가 가브릴로프에서 왔는데, 거기 왕재수, 아니 야스민이란 애가 있는데, 제가 여기 출장 온다니까 전해달라고 부탁을... ”

 

“ 누구라고요? ”

 

“ 미하일 야스민. 당신이 주치의라고... ”

 

 

의사가 그의 손에서 봉투를 낚아챘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봉투를 찢었다. 내용물을 꺼내려다 베르닌을 힐끗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서서 창가로 갔다. 베르닌은 헛기침을 했다.

 

 

“ 저,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

 

“ 잠깐 거기 있어요. ”

 

 

그래서 베르닌은 어색함을 무릅쓰고 남아 있었다. 그때 코즐로프와 나눴던 얘기가 문득 떠올랐다. 갑자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 아프다고 했는데. 의사 선생님이 극장에도 왔다 가고, 애 진찰하면서 바이올린 아저씨는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고... 전에 강에 빠졌을 때도 그 선생님이 나 엄청 야단쳤는데. 국장한테 꼬투리 잡힐까봐 그 좋아하는 바이올린 아저씨도 안 보려고 하는 애가 공연히 이런 위험한 걸 부탁했을 리가 없어. 주치의라고 했지. 많이 아픈 거야... 나 때문이야. 강에 빠져서 더 악화됐나봐. 전부 나 때문이야... ’

 

 

왕재수가 전해달라고 부탁한 것은 의료 차트가 분명했다. 가브릴로프의 담당 노의사 스타브로프는 매달 왕재수의 정기 검진 결과를 KGB와 모스크바 본부에 제출하고 있었지만 베르닌은 그게 아주 기본적인 차트일 뿐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스페호프가 전에 노의사를 욕하면서 ‘그 늙은 여우가 수작을 부린다니까. 크레믈린 의원님들에게만 진짜 정보를 빼돌리고 우리한테는 전부 숨기고 있어’ 라고 화를 냈기 때문이다. 노의사가 괜히 식사량을 늘리라는 둥, 일주일에 사흘만 출근하라는 둥 메모를 붙여놓고 간 게 아니었다. 게다가 고문도 받고 죽을 뻔 했던 게 불과 몇 개월 전이니 괜찮을 리가 만무했다. 그러자 베르닌은 자신이 그런 고문을 총지휘한 KGB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고통스럽게 느껴지면서 온몸이 떨렸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막 베르닌이 ‘걔가 많이 아픈가요? 어떻게 해야 되나요? 약 좀 처방해 주세요. 낫게 해 줄 수 있는 거죠? 우린 시골이라 안 되지만 여긴 대도시고, 당신은 심지어 주치의니까 걔 이제 안 아프게 해 줄 수 있는 거 맞죠?’ 하고 하소연을 하려는데 의사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봉투를 가운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그 와중에 종이 한 장이 툭 하고 떨어져서 베르닌 쪽으로 굴러왔다. 베르닌은 오랫동안의 서무 생활로 몸에 밴 정리벽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허리를 굽혀 그것을 주웠다.

 

 

사진이었다. 사실, 베르닌도 잘 아는 사진이었다. 며칠 전 검은 숲의 온천에 갔을 때 그가 찍어준 사진이었으니까. 온천과 마사지로 신이 난 왕재수가 요양소 뒤뜰에서 팔짝팔짝 뛰고 있을 때 충동적으로 슬쩍 찍은 사진이었다. 현상한 사진을 건네주었을 때 왕재수는 ‘어휴! 누가 도촬하래! 완전 웃기게 나왔잖아. 이렇게 안 예쁘게 나온 사진 누가 보면 내 미모를 의심한단 말이야!’ 라고 투덜대면서 사진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 어, 난 이 사진 괜찮은데. 잘 나왔잖아. 빵끗빵끗 웃고 있고. ”

 

“ 야, 난 우주 최고 꽃미남에 세계 최고 무용수란 말이야. 지켜야 할 이미지란 게 있어! 카리스마 뭐 그런 거! 이렇게 바보같이 웃고 있는 거 팬들이 보기라도 하면 어쩌라고! ”

 

 

사진 속의 왕재수는 두 팔을 벌린 채 펄쩍 뛰어오르고 있었다. 얼굴 전체로 웃고 있었다. 눈밭에 비친 햇살 때문인지 아니면 웃느라 그런 건지 두 눈은 반달 모양으로 절반쯤 감겨 있었다. 필름을 현상했을 때 베르닌은 어쩐지 그 사진을 갖고 싶었지만 물론 그 바보 같은 생각을 무시하고 왕재수에게 사진을 가져다주었다.

 

 

의사는 무표정하게 베르닌이 건네준 사진을 받아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베르닌의 머릿속은 백지가 되었다. 기계적으로 그가 ‘그만 가볼게요’ 라고 말했을 때 의사가 입을 열었다.

 

 

“ 약 받아가고, 식후 30분 잊지 말고, 최소 다음 주만이라도 야근은 하지 말아요. ”

 

“ 어, 예... ”

 

 

베르닌이 뻣뻣해진 몸을 돌려 나가려고 했을 때 의사가 그를 불러 세웠다. 가운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목에서 뭔가를 풀어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조그만 십자가가 달려 있는 목걸이였다. 체온 때문에 아직도 따스했다.

 

 

“ 이것 좀 전해줘요. ”

 

“ 어, 네... 뭐라고 해 줄 말이라도... ”

 

“ 살 빠졌으니까 고기 먹고, 많이 움직이고, 생각은 하지 말고, 많이 자라고 해줘요. ”

 

“ 어, 그게 전부인가요? ”

 

 

의사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베르닌은 인사를 하고 진료실을 나왔다. 문을 닫으려고 돌아섰을 때 그는 의사가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사진을 집어 드는 것을 보았다. 유리 아스케로프, 시립병원 의사, 헝클어진 갈색 머리의 그 안경잡이 남자는 베르닌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았다. 기껏해야 170센티도 안 될 것 같았다. 널찍한 어깨는 앞으로 살짝 굽어 있었고 가운 소매 밖으로 빠져나온 손목에는 꼭 곰처럼 갈색 털이 무성했다. 베르닌의 몸 여기저기를 만져보며 정확한 진단을 내렸던 의사의 손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투박해 보였다. 의사는 사진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베르닌은 소리 없이 문을 닫고 복도로 나왔다.

 

 

 

*    *    *

 

 

 

 

6시에 베르닌은 고주망태가 된 선배들을 버스에 태우고 공항으로 향했다. 놀랍게도 비행기는 전혀 지연되지 않고 7시 30분 정시에 이륙했다. 선술집에서 실컷 퍼마신 발따예프와 바라노프스키와 주브치크는 완전히 곯아떨어졌고 덕분에 베르닌도 눈을 붙일 수 있었다.

 

 

가브릴로프 공항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였다. 베르닌은 공항 주차장 한구석에 세워두었던 자기 차를 도로 끌고 나왔다. 선배들을 태웠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발따예프는 그를 껴안았고 바라노프스키는 이렇게 재미있는 출장은 정말 처음이었다고 좋아했고 주브치크는 다음 주에 뒤풀이 겸 모여서 한 잔 하자고 소리쳤다. 베르닌은 네네 하고 대답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내가 미쳤냐!’ 하고 투덜댔다. 다시는 상종하고 싶지 않은 인간들이었다. 코즐로프가 스페호프에 대해 퍼부었던 욕설이 절로 떠올랐다. 밤길 조심해라, 등짝에....

 

 

마지막으로 발따예프를 내려준 후 베르닌은 집으로 향했다. 온몸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자정이 다 되어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댔다. 토요일 밤이었기 때문에 주차장이 만원이라 안쪽으로 한참 들어가야 했다. 그나마도 술과 안주들을 다 먹어 치운데다 선배들의 짐이 없어서 가방은 아주 가벼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베르닌은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쌓여 있는 설거지와 엉망으로 어질러놓고 나온 집, 그리고 며칠 간 쌓인 먼지와 냉기를 생각하며 좀 우울한 생각이 들었다. 쓸쓸했다. 멀리 떠났다 돌아와 텅 빈 집에 들어서는 순간은 언제나 그랬다. 강아지 벨라, 아니 뜨보록이 떠올랐다. 투다다닥 하며 달려와 품으로 뛰어올라 준다면 쓸쓸한 마음은 가실 텐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베르닌은 문 앞에서 한참동안 열쇠를 찾느라 꿈지럭거렸다. 그때 문이 열렸다. 자기가 집을 비운 동안 주택관리국에서 크나큰 결단을 내려 아파트 현관문들을 모조리 자동문으로 바꿔준 건가 싶어 베르닌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물론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문은 수동으로 열린 것이었다. 왕재수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 너 왔구나. ”

 

“ 어, 너 왜 여기 있어? ”

 

“ 집에 오랜만에 왔더니 먹을 게 없어서. 너네 집 찬장에서 수프랑 빵 꺼내 먹었어. ”

 

“ 어 그래. 잘했네. 근데 나 이전부터 궁금했는데... 너 우리 집에 어떻게 들어오는 거야? 난 너한테 열쇠 줬던 기억 없는데. 경비 아저씨한테 얻은 거야? ”

 

“ 열쇠가 무슨 필요. 너네 집 문 정도는 머리핀으로도 금방 따는데.

 

“ 뭐야? 정말이야? 여태 그럼 머리핀으로 우리 집 문을 땄단 말야? ”

 

“ 머리핀일 때도 있고 그냥 옷핀일 때도... ”

 

“ 야, 그건 불법이잖아! 남의 집 문을... ”

 

“ 너도 우리 집에 잘 드나들잖아! 열쇠도 있고! ”

 

“ 그건... 난 KGB! 너 감시요원이니까 당연히 너네 집 열쇠 있는 거지! 난 공무잖아! 근데 너는... ”

 

공무로 문 따고 들어오는 게 더 나쁘지!

 

“ 대체 그런 짓은 어디서 배운 거야! 머리핀으로 문을 따는 거! ”

 

“ 문 따는 거 되게 쉬운데. 그런 걸 굳이 배우기까지 할 필요가... ”

 

“ 어휴, 말을 말자. ”

 

 

베르닌은 가방을 현관에 내던지고 코트를 벗었다. 안에 껴입은 양복 재킷과 셔츠를 벗고 있는데 왕재수가 혀를 찼다.

 

 

“ 너 몰골이 왜 이 모양이야. 얼굴 완전 팍 삭았네. 이 옷은 대체 며칠 동안 입고 다닌 거니. 가뜩이나 구식 양복인데 주름 때문에 더 구식으로 보여. 구두도 완전히 수명 다 됐네. 레닌그라드는 진창이 많아서 이런 구두 신고 다니면 안 되는데 그 얘기 해주는 걸 깜박했네. 어깨에 그 자국은 뭐야? 왜 이렇게 멍이 들었어? ”

 

“ 어, 이거... 선배들 짐가방 메고 다니느라... ”

 

그런 걸 뭐하러 들어 주냐! 어디 강물에 집어던져 버리지.

 

“ 야, 너도 네 가방 나한테 막 들라고 하면서! ”

 

“ 그 쓸모없는 작자들하고 내가 같냐! 난 무용수잖아! 난 무거운 거 들면 근육이 미워지잖아!

 

“ 너 은퇴했잖아! ”

 

“ 그래도! 그리고 내가 뭐 얼마나 가방 들어 달라 했다고! 칫. ”

 

 

왕재수가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소파로 갔다. 팔걸이에 올려놨던 우유팩을 집어 들어 길게 한 모금 마셨다. 그걸 보자 베르닌은 갑자기 목이 굉장히 말랐다.

 

 

“ 나 우유 좀 남겨주면 안 돼? ”

 

“ 촌스럽게 먹던 걸 달라고 하니. ”

 

“ 그치만 냉장고에 우유 그거 하나밖에 안 남아 있었단 말이야. ”

 

“ 그거 유통기한 한참 지나서 상해 있었어! 세수도 못할 지경이었다고. 버리고 새로 산 거란 말이야. 냉장고에 우유 있으니까 새 거 꺼내먹어! ”

 

“ 어, 그래? ”

 

 

베르닌은 냉장고 문을 열었고 깜짝 놀랐다. 안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한 달 째 쌓아두었던 유통기한 지난 먹거리는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우유팩 네 개와 대용량 케피르 한 팩, 개봉하지 않은 스메타나 튜브 한 개, 치즈와 소시지, 햄, 사과, 요구르트, 감자 샐러드 한 팩, 달걀 6개, 오렌지 주스와 조그만 초콜릿 케익이 들어 있었다. 베르닌은 홀린 듯이 손을 뻗어 초콜릿 케익을 꺼냈다. 왕재수가 뒤에서 야단쳤다.

 

 

“ 뭐야, 우유 마신다며! 왜 그걸 꺼내니, 한밤중에! ”

 

맛있겠다. 엄청 맛있겠다. 우유랑 먹으면 더 맛있겠다. 먹을래.

 

“ 야! 지금 먹으라고 사온 거 아니야! 밤중에 먹으면 너 더 살쪄! ”

 

“ 몰라몰라. 아 맛있겠다. 나 엄청 힘들었으니까 먹어도 돼! ”

 

 

베르닌은 내복 셔츠바람으로 소파에 철퍽 주저앉아 숟가락으로 초콜릿 케익을 퍼먹기 시작했다. 왕재수가 컵에 우유를 따라서 건네주었다.

 

 

야, 넌 그냥 팩 째 마시더니 왜 내 건 컵에 따르는 거야! 설거지 생기게. ”

 

“ 네가 너무 걸신들린 듯이 먹으니까 체할까봐 그렇지! 좀 천천히 먹어. 누가 보면 사흘은 굶은 줄 알겠네. ”

 

“ 재수 없는 놈들 모시고 다니느라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몰랐단 말이야. ”

 

 

왕재수는 ‘바보 멍충이’로 추정되는 단어를 종알거리면서 거실 바닥에 드러누워 두 다리를 공중으로 쭉 뻗었다. 팔을 뻗기도 하고 다리를 교차하기도 하고 신기한 포즈들을 반복했다. 보통 그가 자기 전에 하는 스트레칭 동작들과는 좀 달라보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케익을 퍼먹다가 시선을 빼앗겼다.

 

 

“ 그거 뭐야? 춤추는 거야? ”

 

“ 이번 신작. 근데 애들이 움직임을 소화 못 해서 좀 쉽게 바꾸고 있어. ”

 

“ 그게 쉬운 거야? 다리 찢어지겠다. 저번에도 빅토르인지 뭔지가 막 비명 지르고... ”

 

“ 기본기가 없어서 그래. 연습 좀 더 하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애들이 너무 게을러. 자신감도 없고. 연습하면 될 만한 놈들도 그런다니까. ”

 

“ 너는 옛날에 못하는 동작 없었어? ”

 

“ 당연히 있었지. ”

 

“ 그런데 왜 애들을 그렇게 들들 볶아! ”

 

난 연습해서 전부 해냈으니까!

 

 

연달아 서커스에나 나올 법한 동작을 빠르게 해낸 후 왕재수가 일어나 앉았다. 숨을 몰아쉬더니 베르닌의 손에서 컵을 빼앗아 남은 우유를 전부 마셔 버렸다.

 

 

“ 야, 먹던 거 달란다고 촌스럽다더니! ”

 

“ 아까워? ”

 

“ 그게 아니고... 참, 너 나 없는 동안 어디서 잤어? ”

 

“ 로만 집에서. ”

 

“ 또 일 많다고 극장에서 잔 거 아냐? ”

 

“ 이틀쯤은 그래야 했는데 로만이 하도 야단쳐서 그냥 계속 그 사람 집에 가서 잤어. ”

 

“ 밥은? 삼시세끼 다 먹었어? 또 풀 쪼가리에 사과 한 알, 토마토 수프 이런 거나 먹은 거 아냐? ”

 

“ 먹었어! 꼬박꼬박! 심지어 로만 때문에 그 항아리 닭고기도 두 번이나 먹었단 말이야! 너 로만한테 대체 뭐라고 한 거야! 로만도 너처럼 똑같이 협박하잖아! 바퀴벌레 곱등이... 우씨... ”

 

 

베르닌은 뿌듯했다. 코즐로프에게 비법을 가르쳐준 보람을 느꼈다. 왕재수는 계속 툴툴거리더니 현관 쪽으로 몸을 돌렸다.

 

 

“ 하여튼 난 이제 간다. 잘 쉬어. ”

 

“ 가긴 어딜 가. ”

 

“ 어딜 가다니? 집에 가야지. 잠잘 시간인데. ”

 

너 나한테 물어보고 싶은 거 있잖아. 그래서 우리 집 와 있었던 거 아냐? ”

 

“ 배고파서 왔다고 했잖아. 빵 먹으려고... ”

 

“ 그래서 우리 집 냉장고 가득 채워놓고... ”

 

“ 그래야 내일 너한테 밥 얻어먹지! ”

 

“ 이거 받아. ”

 

 

베르닌은 바닥에 내팽개쳤던 코트의 안주머니를 뒤져서 목걸이를 꺼냈다.

 

 

“ 그게 뭐야? ”

 

“ 오늘 갔었어. 편지 전해줬어. 그 사람이 너 주래. ”

 

 

베르닌은 왕재수의 손바닥 위에 십자가 목걸이를 놓아 주었다. 왕재수는 눈을 깜박였다. 갑자기 벙어리가 된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더니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 베르닌은 급하게 말을 이었다.

 

 

살 빠졌으니까 고기 먹고, 많이 움직이고, 생각은 하지 말고, 많이 자래. ”

 

“ 바보. 시골이니까 당연하잖아. ”

 

“ 내가 한 말 아냐, 그 사람이 전해 주라고 한 거야. ”

 

“ 옛날부터 그랬지. 똑같은 말만 하고. ”

 

 

왕재수는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목걸이를 오른손으로 꼭 쥔 채 멍하게 서 있었다. 그러다가 옆에 베르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퍼뜩 놀라며 급하게 신발을 신었다.

 

 

“ 하여튼 고마워. 잘 자. ”

 

“ 잠깐만. ”

 

 

베르닌은 왕재수의 손에서 목걸이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그리고 뒤로 가서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왕재수는 베르닌이 잠금쇠를 채워주는 동안 가만히 있었다. 들릴락 말락 하게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 무신론자인 거 뻔히 알면서. 촌스럽게. ”

 

“ 어차피 시골이니까 좀 촌스러워도 되잖아. ”

 

“ 그래. 시골... ”

 

 

왕재수는 잠시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숨을 훅 들이마셨다. 딸꾹질을 하듯 잔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문을 밀고 나갔다. 돌아보지도 않고 가 버렸다.

 

 

베르닌은 소파로 돌아갔고 남은 초콜릿 케익을 전부 해치웠다. 달콤한 것을 먹고 나자 짭짤한 감자 샐러드도 먹고 싶었지만 꾹 참고 욕실로 갔다. 양치질을 두 번이나 하면서 감자 샐러드의 유혹을 뿌리쳤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오자 출장 내내 쌓였던 피로가 파도처럼 몰려왔다. 그는 침대로 직행했고 며칠 만에 꿈도 꾸지 않고 깊고 깊은 단잠에 빠져들었다. 일요일이 남아 있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FIN

- 2015. 3. 18 ~ 26 -

 

 

-------

 

 

베르닌이 출장에서 겪은 일들은 좀 과장되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내가 직접 겪은 일들에서도 소재를 가져왔다. 나는 예전 업무 특성상 상사들을 모시고 해외 출장을 간 적이 여러 번 있는데 베르닌과 마찬가지로 살의를 느낀 적도 있긴 있... ㅠㅠ

 

..

 

짐꾼 노릇을 하며 고생한 베르닌... 어쨌든 모스크바 크레믈린의 성 바실리 사원 사진 두 장. 전에 올렸던 거지만.. 아름다운 사원이지만 물론 베르닌의 눈에 그런 건 들어오지 않는다 ㅠㅠ

 

 

그리고 레닌그라드..는 지금의 상트 페테르부르크이므로 러시아 폴더로 가면 그곳 사진들을 많이 볼 수 있음 :) 그래도 그냥 넘어가면 섭섭하니..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사진 두 장.

 

 

베르닌이 선배들을 세워놓고 사진 찍어준 곳. 대충 이런 배경으로 찍어줌.

 

 

이 다리를 건너가야 요새 안으로 들어가는데.. 물론 선배들은 다리 앞에서 사진만 한 방 찍고 즉시 돌아섬 ㅋㅋ

 

..

 

후반부에 등장하는 레닌그라드 병원 의사 유리 아스케로프는 본편 우주에도 등장한다. 레닌그라드 대학 강사 트로이가 심리적 화자로 나오는 장편에 등장한다. 미샤는 소년 시절부터 그와 알아왔다. 미샤에게는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이다.

얼마 전 about writing 폴더에 발췌했던 미샤의 키로프 첫 시즌과 돈키호테에 대한 글에 이 사람이 잠깐 등장한다. 그 얘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594

 

 

..

 

그럼 다음 이야기는 17편으로.. 그건 다음주에.

 

..

 

댓글은 언제나 큰 힘이 됩니다 :)

 

 

:
Posted by liontamer

 

서무 시리즈는 어쨌든 계속되고...

원래 14편까지만 쓰고 본편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몇가지 생각난 것도 있고, 머리를 정리할 것도 있어서 몇 편 더 쓰고 있다. 지금은 18편을 막 시작했는데 아마 18편까지 쓰면 잠깐 멈추고 다시 본편으로 들어갈 것 같다.

 

13~14편에서 베르닌이 온천 요양소에 가느라 답답한 사무실을 벗어나 있었다면 15편에서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온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부터 국장의 호출을 받는데...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왕재수와 함께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에 다녀온 후 베르닌은 쌓여 있는 업무에 매진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월요일 아침부터 스페호프 국장이 그를 호출하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15

 

 

 

서무의 슬픔

-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특별 감사와 금요일 휴가 때문에 미뤄놓았던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서 베르닌은 일주일 내내 야근을 하고 있었다. 주말 출근으로 매우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간신히 출근한 월요일 아침에 갑자기 스페호프가 그를 호출했다. 당장 국장실로 올라오라는 것이었다. 베르닌의 머릿속에 아직 흑표지와 노끈 작업을 해 놓지 않은 1982년도 문서 접수 대장과 외출부, 근태기록 장부 등등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고양이 미셴카를 위해 배추밭에 몰래 가져다 놓은 물그릇과 사료 그릇, 책상 위에 쌓아놓고 퇴근했던 서류철들, 진흙 얼룩이 튄 주차 표지판 등등도 주루룩 떠올랐다.

 

국장이 호통 치면 뭐라고 변명해야 하나 괴로워하며 베르닌은 국장실로 터벅터벅 올라갔다. 가뜩이나 요 며칠 동안 업무 스트레스도 심한데다 온천에 다녀온 후 이상하게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더 피곤했다.

 

국장실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나처럼 스페호프가 책상 앞에 앉아 안경 너머로 날카로운 눈을 번득이며 야단을 칠 거라고 생각했던 베르닌은 회의 테이블 앞에 국장을 비롯해 네 명의 남자들이 둘러앉아 있는 것에 살짝 놀랐다. 같은 부서의 철밥통 선배인 표트르 발따예프를 제외한 나머지 둘은 잘 모르는 얼굴이었다. 하나는 머리가 반쯤 벗겨진 뚱뚱한 남자였고 다른 하나는 희끗희끗한 턱수염을 기른 안경잡이 남자였다. 둘 다 발따예프와 비슷한 연령대인 40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이쪽으로 와서 앉게. 인사하지. 이 친구가 다닐 베르닌, 우리 막내 직원일세. 표트르와 같은 감시분석부 소속이지. 이쪽은 겐나디 바라노프스키. 우리 시 의회 홍보부장이고 여기는 비탈리 주브치크. 검열국 선전부장이야. ”

 

베르닌은 쭈뼛거리다 인사를 했다. 그러고 보니 대머리 뚱보인 바라노프스키는 지난번 체육대회 때 독수리팀 응원석에서 본 기억이 났다. 의장 근처에 앉아 있었던 것 같았다. 주브치크는 완전히 초면이었다. 발따예프는 싱글싱글 웃고 있었는데 베르닌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제껏 저 뺀질거리는 게으름뱅이 선배가 자신을 보며 웃었던 적이 없었는데...

 

그리고 그 예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스페호프가 만족한 얼굴로 선언했기 때문이다.

 

“ 그럼 이걸로 됐군. 넷이니 숙소 쓰기도 딱 맞고, 출장 명령과 보고도 다닐이 하면 되고. 경비 관리도 그렇고. 여러 모로 딱 들어맞아. 역시 표트르가 경험과 연륜이 있어서 이런 쪽은 해결책을 잘 생각해낸다니까. 뭐 별로 신경 쓸 건 없네, 다닐. 출발은 내일 아침이고 돌아오는 비행기는 토요일 저녁이야. 여기 도착하면 자정이 다 되겠군. 그래도 다음날은 일요일이니 참 좋은 일정이지. 아직 출장명령서가 올라가지 않았으니 당장 그것부터 처리하게. 그리고 회계부서에 경비도 요청하고. ”

 

“ 어, 저... 국장님. 전 대체 무슨 말씀인지... 출장이요? 내일 아침? 경비? 비행기라뇨? ”

 

“ 자네 표트르에게서 얘기 못 들었나? ”

 

“ 예? 무슨 얘기... ”

 

 

발따예프가 느물느물 웃었다.

 

 

“ 아, 그러고 보니 금요일에 얘기한다는 게 제가 너무 바빠서 깜박 잊었군요. 큰 문제는 없겠죠. 어차피 이 친구야 막내라서 며칠 자리 비워도 부서에 별 타격도 없고 티도 안 날 테니. ”

 

“ 국장님, 제가 출장을 가나요? ”

 

 

베르닌이 하도 얼빠진 표정으로 쳐다보자 성질 급한 스페호프가 혀를 찼다.

 

 

“ 허 참, 표트르 자네도 답답하군. 미리 얘기를 해줬어야지! 그래야 다닐이 이번 주 서무 업무를 미리 정리해놓을 거 아닌가! 뭐 됐네. 오늘 몰아서 하면 될 테니까. 내일부터 금요일까지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 개최되네. 화, 수는 모스크바, 목요일은 레닌그라드야. 금요일에는 레닌그라드 시 의회와 KGB 지부 견학이 있고 토요일은 저녁 비행기 타기 전까지는 자유 시간일세. 우리 쪽에서는 표트르와 자네, 의회에서는 겐나디, 검열국에서는 비탈리가 참석하게 되었네. 영광인 줄 알게! ”

 

“ 어... 하지만 전 우수 공산당원으로 선정된 적이 없는데요. 보통 이런 연수는 중견 직원들이나 간부들이 가시는 거 아닌가요? 왜 제가... ”

 

그러니까 영광이지! 행정의 기본도 아직 덜 된 자네가 이 쟁쟁한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 가다니! 자네 같은 책상물림에게 언제 그런 기회가 주어지겠나! 심지어 모스크바에! ”

 

저... 전 모스크바 대학을 나왔는데요. 모스크바에서 5년 넘게 살았는데... ”

 

“ 그렇지! 바로 그거야!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네가 모스크바 지리를 잘 안다는 것이지. 자네 물론 레닌그라드에도 가봤겠지? ”

 

“ 어, 레닌그라드요? 거긴 그냥 며칠 관광만... ”

 

“ 어쨌든 좋아. 잘된 일이야. 우리 지국에는 똑똑하고 유능한 애들은 많은데 의외로 모스크바 물을 먹은 사람은 드물어서. 표트르나 겐나디, 비탈리도 모스크바 다녀온 게 삼십 년 전 소년단원 시절이라 지금은 하나도 모르겠다더군. 그러니 자네가 선배들을 잘 보필하게. ”

 

“ 저,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전 이번 주에 할 일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그 연수 워크숍이란 건 작년에 다른 분이 가셨을 때 출장 경비를 정산해 드리느라 프로그램 책자를 본 적이 있는데, 저처럼 신참에게는 맞지 않는 내용들만 가득하던데요... ”

 

“ 아니, 다른 직원들은 읍소를 해서라도 연수를 가고 싶어 하는데 자넨 대체 뭔가! 특혜를 베풀어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어쨌든 이만 마치겠네. 등록부서와 총무부서에 가서 장부를 쓰고 비행기 티켓과 업무 추진용 전도금을 수령하게! 그리고 오늘 주간회의는 어김없이 10시 30분에 개최되니 시간 맞춰 올라오고. 이상일세! ”

 

 

*    *    *

 

 

 

베르닌은 얼떨떨해져서 내려왔다. 총무부서와 등록부서에 가야 하나 싶었지만 30분 후 주간회의가 시작될 예정이라 아무래도 시간이 빡빡할 것 같았다. 그는 출장이라면 근교 도시 밖에 가본 적이 없었다. 가장 최근의 출장이란 작년 9월에 왕재수를 인계받으러 기차역에 다녀온 것이었다. 그 몇 차례의 출장도 모두 업무와 관련된 당일치기였다.

 

이번 일은 고지식한 그로서도 찜찜했다. 무엇보다도 발따예프가 끼어 있다는 점이 그랬다. 발따예프는 20년 넘게 근무한 철밥통으로 엄청난 수다쟁이였고 가능한 한 모든 일을 미루고 남에게 떠넘기는데 도통한 인물이었다. 베르닌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항상 자기가 할 일을 슬쩍 떠넘겼고 바빠서 정신없을 때도 툭하면 말을 걸어서 쓸데없는 수다를 떨었다. 그 수다의 90퍼센트는 모두가 ‘내가 말이야’, 혹은 ‘나는...’으로 시작했다. 동료들 대부분은 발따예프가 ‘나’로 시작되는 수다를 떨기 시작하면 조용히 얼굴을 찌푸리며 자리를 피할 궁리를 했다. 그 정도의 짬밥이 안 되는 베르닌으로서는 매일같이 그 지겨운 자기 타령을 들어줘야 했다. 항상 바쁜 그로서는 심히 귀찮고 짜증나고 방해되는 일이었다.

 

 

그때 알렉산드라가 엄청나게 두꺼운 서류철들을 한 아름 껴안고 낑낑거리며 복도를 지나쳐가는 게 보여서 베르닌은 얼른 다가가 서류철 대부분을 들어 주었다.

 

 

“ 고마워, 다냐. 헉헉... ”

 

“ 아니, 이렇게 무거운 걸 어떻게 혼자서 다 나르시는 거예요? 다른 부서원들은요? ”

 

“ 알면서 그러니. 원래 서류철들은 서무가 나르는 거잖아. 어휴, 아침부터 부장이 갑자기 작년 서류들을 찾아서... 뭐가 필요한지 말도 안 해주고 무조건 다 가져오라는 거야. ”

 

“ 정말 그 부서 분들도 너무하시네요. 선배님은 엄청 자그마하시잖아요! 힘도 약하고 손목도 건드리면 부러질 것처럼 가느다란데 이 무거운 서류철들을 혼자서 다 들고 오게 시키다니! 이럴 땐 자존심 세우지 마시고 옆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하셔야죠! ”

 

“ 나 도와달라고 했었어. 서류철 너무 많으니까 조금만 같이 옮겨주면 안 되냐고. 근데 다들 모른 척하잖아. 게다가 아나톨리 선배가 들으란 듯이 서류철 그까짓 거 어차피 종이라서 별로 무겁지도 않고 양이 많으면 여러 차례 나눠서 들고 오면 되는데 뭘 유난 떠느냐고 역시 이래서 여자는 안 된다고 떠드는 거야. 너는 이런 거 몰라, 다냐. 여자라서 안 된다는 말 듣느니 차라리 내 손목이 부러지는 게 나아. ”

 

“ 아나톨리 선배 나빠요. 전에 사무실 이동할 때 자기 짐도 전부 후배들 시켜 나르게 해 놓고. 여자라서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요! 이건 그냥 근력 문제잖아요. 조금만 힘 합치면 금방 할 수 있는 건데... ”

 

 

베르닌은 사무실까지 서류철들을 날라 주었다. 알렉산드라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더니 아직 남아 있다며 다시 문서고로 향했다. 베르닌도 따라갔다.

 

 

“ 너 할 일 많을 텐데 여기서 이래도 되니? 많이 안 남았으니까 내가 살살 옮길게. ”

 

“ 아니에요, 곧 주간회의 올라가야 하니까 다른 일 하기도 애매해요. 근데 선배님 혹시 우수 당원 연수 워크숍 가보셨어요? 모스크바랑 레닌그라드에서 하는 거? ”

 

“ 어휴, 그거 말도 마. 나 신입 때 딱 그거 걸려서 얼마나 고생했다고. ”

 

“ 아, 선배님도 신참 때 가신 거예요? 그럼 제가 잘못 생각했던 거네요. 전 거긴 중견 직원만 가는 건줄 알았는데... 갑자기 저보고 내일 그 연수에 가라는 거예요. 근데 왜 고생하셨어요? ”

 

“ 앗, 너 거기 따라가는 거야? 분명 발따예프 선배 짓이구나! 아유 그 사람 정말 밉상이다. 진짜 재수 없게 됐네. 너 따까리 시키려고 그러는 거야. 그거 보통 나이 많은 아저씨들 보내주는 거거든. 연차 좀 오래되면 순서대로 포상처럼 돌아오는 거야. 근데 모양새는 어쨌든 출장이라서, 명령서도 써야 하고 보고서도 좀 빡세게 써야 돼. 워크숍 결과보고서를 50페이지 쯤 써야 하거든. 그리고 경비 관리부터 시작해서 할 게 많은데 나이 많은 선배들은 뺀질뺀질해서 그런 거 진짜 안 하려고 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온갖 잡일 시켜먹을 후배를 하나 붙이는 거라고. 그나마 멤버가 괜찮으면 좀 나은데... 발따예프 선배 말고 또 누구 있어? ”

 

“ 어... 의회 홍보부장하고 검열국 쪽 또 무슨 부장이요. ”

 

“ 어우, 정말 망했네. 심지어 간부들이야? 그럼 진짜 손 하나 까딱 안 할 텐데. 발따예프 선배는 술도 많이 마시잖아. 너 진짜 힘들겠다. 그나마 나 때는 페름 쪽이라서 크게 돌아다닐 일은 없었는데 모스크바랑 레닌그라드라니... 관광부터 시작해서 전부 네가 다 시켜줘야 할 텐데. ”

 

“ 어, 그래서 국장이 잘됐다 한 건가? 저 모스크바 대학 나왔잖아요. ”

 

“ 아 맞다, 너 모스크바에서 공부했지. 아, 다냐... 넌 왜 이렇게 매사에 운이 없니. 너 완전 따까리에 가이드에 비서 되는 거야. 다녀와서도 정산부터 시작해서 결과보고서 작성에 주간회의 때 발표까지 해야 돼. ”

 

“ 아아, 그런 거였군요. 전 또 국장이 제가 고생한다고 특별대우라도 해 준 줄 알았어요. ”

 

“ 누가, 우리 국장이? 다냐, 너 아직도 너무 순진해. 하여튼 네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 모스크바랑 레닌그라드 지도 잘 챙기고. 분명히 그 사람들 워크숍엔 출석 체크만 하고 온종일 관광하고 술만 퍼마실 게 뻔해. 너보고 가이드 하라 하고 술 사오라 하고 밤새 자기들 자랑 늘어놓으며 술 마시겠지. 넌 그나마 모스크바는 좀 아니까 낫겠다. 난 그때 페름에 처음 갔는데 아저씨들이 나보고 가이드 못한다고 진짜 구박하는 거야. 레닌그라드도 알아? ”

 

“ 아뇨. 레닌그라드는 박물관하고 궁전 밖에 안 가봤어요... 큰일이네. 레닌그라드에서 사흘이나 있어야 되거든요. ”

 

“ 아참, 너 걔한테 물어보면 되겠네. 너 동거남. 꽃돌이. 걔 레닌그라드에서 왔잖아. 미리미리 괜찮은 데랑 아저씨들 데리고 갈만한 데 다 물어봐, 그래야 가서 너 고생 안 해. ”

 

“ 어... 걘 제 동거남이 아니거든요! ”

 

“ 다냐, 나한테는 숨기지 않아도 된단다. 난 이해해. ”

 

“ 진짜 아니에요, 리자도 그러더니 선배님도... 아아... ”

 

 

 

*    *    *

 

 

 

알렉산드라의 말이 옳았다. 온종일 베르닌은 출장 준비 때문에 미친 듯이 바빴다. 발따예프는 말 그대로 아무 것도 해 놓은 게 없었다. 베르닌은 비행기 표를 수령하고 전도금을 신청하러 총무부에 갔지만 서류 첨부가 하나도 안 돼 있어서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출장명령서 결재가 나지 않은 상황에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출장명령서를 작성하려니 출장자들의 인적 증빙 자료가 필요했다. 그는 발따예프와 바라노프스키, 주브치크와 자신의 여권 사본과 재직 증명서류를 모두 떼어왔고 출장명령서를 작성했다. 당일 내로 결재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전표를 여러 장 끊고 도장을 여기저기에서 받은 후 간신히 비행기 표와 얼마 안 되는 전도금을 수령했다. 비행기 표는 총 12장이나 됐다. 가브릴로프-모스크바, 모스크바-레닌그라드, 레닌그라드-가브릴로프 편도 티켓이 각 4장씩이었다.

 

 

연수 프로그램 주최측에 전화를 해서 명단을 확인했더니 자기 이름이 빠져 있어서 그것을 해결하는 데 또 한참 걸렸다. 그나마 리자가 임시 등록에 필요한 서류들을 챙겨주지 않았다면 진땀을 뺐을 것이다. 그리고는 한숨 돌리고 있는데 어리숙한 후배가 걱정이 됐는지 알렉산드라가 와서 현지 숙소 예약 상황도 꼭 확인하라고 조언을 해주고 갔다. 알렉산드라가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 했다. 모스크바는 방이 두 개 예약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과 여권번호만 추가로 불러주면 됐지만 레닌그라드는 주최측의 실수인지 호텔 측의 착오인지 방이 아예 없었다. 통사정을 했지만 니즈니 노브고로드에서 온 팀과 8인용 방을 같이 쓰는 수밖에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이 사실을 얘기하자 발따예프는 길길이 날뛰었다. 의회와 검열국 간부까지 같이 가는데 감히 8인용 방이라니, 그것도 다른 도시에서 온 사람들과 방을 같이 쓰라니 될 말이냐, 자기들이 무슨 피오네르나 콤소몰도 아닌데 말도 안 된다, 당장 해결하라고 호통을 치고 엄포를 놨다. 베르닌은 꼬박 한 시간 동안 주최측과 통화를 했고 읍소 끝에 간신히 원래 호텔 인근의 다른 숙소에 방을 두 개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알고 보니 워크숍 첫날에는 각 팀별로 주제 발표를 10분씩 하게 되어 있었다. 말이 10분이지 베르닌으로서는 전혀 모르는 주제였다. 레닌과 스탈린,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의 경제 모델에 따른 도시별 공산당원 교육 정책을 요약 발표하라는 거였다. 내용상 의회나 검열국 쪽에서 준비해야 할 것 같아서 바라노프스키와 주브치크에게 전화를 했다. 자료 준비가 되어 있느냐, 누가 발표를 하느냐고 물었더니 둘 다 똑같은 대답을 했다. 그런 건 원래 막내가 준비해서 발표하는 거라고 했다. 베르닌이 그럼 밑자료라도 달라고 했지만 물론 묵살당했다.

 

괴로워하며 베르닌은 교육국과 선동본부, 시립도서관에 전화를 했다. 자료를 가지러 갈 시간이 없어서 또다시 읍소를 하며 한 시간 동안 전화로 설명을 듣고 간신히 밑자료를 정리했다. 아무래도 비행기 안에서 발표 원고를 써야 할 것 같았다.

 

 

출장 준비도 모자라 자리를 비우는 4일 동안의 서무 업무도 미리 정리해야 했다. 정신없이 일하다 퇴근 시간도 지나고 어느덧 6시가 되었을 때 알렉산드라가 베르닌에게 그냥 집에 가라고 충고했다.

 

 

“ 어, 하지만... 아직 할 게 너무 많아요. ”

 

“ 그냥 가. 너 없는 동안 내가 급한 건 막아줄게. 가서 가방도 챙겨야 하고 모스크바 지도랑 레닌그라드 지도도 다시 봐야 할 거 아냐. 새벽 비행기잖아. 그리고 오늘 들어가면서 가게 들러서 간식 좀 챙겨. 아저씨들 비행기랑 시내 들어가는 버스 안에서 먹을 거 없으면 너 막 구박할 거야. ”

 

“ 고마워요, 선배님... ”

 

“ 부디 무사히 다녀오기를 빌게. ”

 

 

그는 책상을 정리하고 출장에 필요한 서류들을 모두 챙겼다. 발따예프는 이미 5시가 되자마자 퇴근한 후였다. 나가려다 관성적으로 극장에 전화를 해보았다. 온천에 다녀온 후 지난 일주일 내내 베르닌과 마찬가지로 왕재수도 굉장히 바빠서 얼굴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금요일에 출근할 때 딱 한 번 태워다 줬을 뿐이었다. 극장 수리가 끝났기 때문에 발레 공연들이 연속으로 올라갔고 신작도 준비하느라 바쁜 모양이었다. 코즐로프의 집에서 먹고 자는 것 같았다. 그날은 월요일이라 극장 휴일이었기 때문에 바이올린 깡패의 침대에서 나뒹굴고 있을 게 뻔했지만 어쨌든 혹시나 해서 전화를 걸었다.

 

 

의외로 왕재수가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 어, 너 오늘 출근했어? 극장 쉬는 날이잖아. ”

 

“ 할 게 많아서. ”

 

그럼 오늘 바이올린 아저씨한테 가서 자는 거지? 나 이제 퇴근하려는데. ”

 

“ 아니, 나 오늘 집에 갈 거야. 데리러 와. ”

 

그래서 베르닌은 차에 시동을 걸었고 강을 건너 극장으로 향했다.

 

 

 

*     *    *

 

 

 

왕재수는 로비의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안색도 표정도 좋지 않았다. 베르닌을 보자 그나마 표정이 좀 누그러졌다. 제일 처음 한 말은 오늘 저녁이 뭐냐는 거였다.

 

 

“ 어 글쎄... 나 계속 야근해서 집에 아무 것도 없는데.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들어가다 사가지 뭐. 눈 녹아서 생선 트럭 들어왔으니까 대구라도 사볼까? ”

 

그럼 줄 서야 되잖아. 집에 가서 만들려면 한참 걸리고. 그냥 먹고 가자. ”

 

“ 너 아무 데서나 안 먹잖아... ”

 

“ 저쪽 박물관 뒤에 먹을 만한 데 찾았어. 너 좋아하는 살랸카도 있던데. ”

 

 

그래서 베르닌은 왕재수와 함께 근처의 조그만 식당에 갔다. 예술가로 보이는 사람들로 꽉 차서 자리가 없는 것 같았지만 점원은 왕재수를 보자 반색을 했고 순식간에 마법처럼 창가 쪽 자리를 내주었다. 베르닌은 살랸카와 쇠고기 롤을 시켰다. 왕재수는 스메타나 소스에 재운 닭가슴살 구이와 버섯 샐러드를 주문했다. 그리고는 크랜베리 주스와 우유를 추가하더니 베르닌에게 뭘 마실 거냐고 물었다.

 

 

“ 어... 나는 탄산수. 근데 너 웬일이야? 평소보다 많이 시키네. 주스에 우유까지. 보통은 그냥 차 마셨잖아. ”

 

“ 단백질과 비타민이 필요해. ”

 

“ 그건 당연한 거긴 한데... 왜 갑자기? ”

 

“ 근력이 떨어졌어. 애들 동작 잡아주는데 팔이 좀 후들거리더라고. 오후 되면 막 졸리고. ”

 

“ 그래, 너 여태 너무 조금 먹었어. 이제라도 깨달아서 다행이다. ”

 

 

음식이 나왔다. 까탈스러운 왕재수가 고른 식당답게 굉장히 맛있었다. 베르닌은 너무 지쳐 있었기 때문에 정신없이 살랸카를 흡입했다. 고기조각과 칼바사 햄, 절인 오이채 등 가득 들어 있는 건더기를 순식간에 건져먹고 뜨끈뜨끈한 국물을 쭉 들이마셨다. 콧잔등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마침 그때 쇠고기 롤이 나왔다. 저렴한 가격에 비해 양도 많았다. 감자 팬케이크 위에 조그만 롤이 열 개나 쌓여 있었다. 그는 롤 두 개를 포크와 나이프로 집어 왕재수의 접시에 얹어 주었다.

 

 

“ 야, 이것도 먹어. 단백질이야. ”

 

“ 내가 돼지냐. 이걸 어떻게 다 먹어. ”

 

“ 네가 시킨 건 닭가슴살이잖아. 기름기도 좀 먹어야지! 바이올린 아저씨가 좋아하는 몸매 아직 안 된 것 같은데! ”

 

 

왕재수는 베르닌을 째려보더니 쇠고기 롤을 포크로 푹 쑤셔서 한 입에 그대로 우겨넣었다. 그때 스메타나를 끼얹은 닭가슴살 요리가 나왔다. 쇠고기 롤 못지않게 양이 많았다. 볶은 야채도 잔뜩 곁들여져 있었다. 왕재수는 고기를 3분의 1쯤 잘라서 베르닌의 접시에 탁 내려놓고 야채도 절반쯤 퍼 주었다. 베르닌은 이러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항의하려다 냄새가 너무 좋아서 일단 먹었다. 엄청나게 맛있었다. 전혀 퍽퍽하지 않고 부드럽고 촉촉했다.

 

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음식을 먹었다. 왕재수는 샐러드까지 다 먹고 우유를 마시고 크랜베리 주스도 전부 마셨다. 왕재수가 이제껏 그렇게 많이 먹는 걸 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어쩐지 성취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상하게 섭섭하기도 했다. 그래서 식당을 나오면서 묻기까지 했다.

 

 

“ 너 그동안 내 요리 솜씨가 형편없어서 잘 안 먹었던 거야? 난 그것도 모르고 네가 원래 조금씩 먹는 줄 알았네. ”

 

“ 옛날에 춤 출 땐 많이 먹었어. 지금은 운동량이 그때보다 적잖아. 뭐 여기 음식이야 시골이라 무조건 기름 들이부으니 좀 느끼하긴 하지만. ”

 

 

차에 타면서 왕재수가 덧붙였다.

 

 

“ 그래도 네가 만드는 건 나쁘지 않아. ”

 

“ 정말? 너 그냥 그렇게 말하는 거지! 나 삐칠까봐. ”

 

“ 네가 삐치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멍충이. 맛없었으면 내가 계속 집에서 저녁 먹었겠냐! ”

 

“ 어... 나 조금 감동할 것 같아. ”

 

“ 뭘 감동해. 맛있다고는 안 했어! 맛없지는 않다고 한 거지! ”

 

“ 그게 그거 아니야? ”

 

아니야! 맛있는 건 맛있는 거고! 맛없지는 않은 건 그럭저럭 먹을만하다는 뜻이야! ”

 

“ 어, 그래... 그럼 저 식당은 맛있는 거고 내가 해주는 밥은 그럭저럭인 거구나... ”

 

“ 저 식당이라고 뭐 특별하니! 그냥 비슷해! 많이 먹은 건 의사 선생님이 그러라고 해서야! ”

 

“ 어, 너 설마 의사 선생님한테 어떻게 하면 바이올린 아저씨가 원하는 몸매를 만들 수 있냐고 물어본 거야? 엉덩이 탱글탱글... ”

 

“ 바보 멍충이. ”

 

 

베르닌은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왕재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낌새가 좋지 않아서 슬며시 물어보았다.

 

 

“ 너 극장에서 무슨 일 있어? ”

 

“ 있지. 매일! 애들이 너무 못해서... ”

 

“ 그런 거 말고. ”

 

“ 없어. ”

 

“ 그럼 아픈 거야? 의사 선생님은 왜 찾아갔는데? ”

 

“ 그건 정기검진이라 간 거고. 나 원래 매달 검진 받잖아. 너네 KGB에 차트도 내고. ”

 

“ 그럼 왜 그렇게 심기가 안 좋은데? 역시 시골이라... ”

 

“ 그래. 시골은 정말 싫어. ”

 

 

잠시 후 베르닌은 본론을 꺼냈다.

 

 

“ 나 내일 시외 출장 가거든. 갑자기 고참들 따까리 하라고 끼워 넣어서 오늘 그거 준비하느라 죽는 줄 알았어. 하여튼 토요일까지는 없으니까 너 저녁 못 챙겨준단 말이야. 내일 극장에도 못 데려다 줄 거야. 새벽 6시에 출발해서 사람들 픽업해서 공항으로 가야 돼. 그러니까 바이올린 아저씨한테 데려다 달라고 그래. 그 집에서 자는 게 차라리 낫겠네. ”

 

“ 어, 출장? 어디 가는데? ”

 

“ 모스크바랑 레닌그라드... ”

 

“ 아, 좋겠다. ”

 

“ 좋은 거 아니야. 고참들 시중들고 별의별 허드렛일 다 해야 되거든. 아, 너 혹시 레닌그라드에서 꼭 가야 하는 곳이나 맛집 알아? 엄청 나 갈구는 고참들을 모셔야 해서... ”

 

“ 그런 아저씨들은 박물관이나 극장 같은 건 싫어할 거 아냐. ”

 

“ 응, 안 좋아할 거 같아... ”

 

 

왕재수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베르닌에게 지도를 달라고 했다. 베르닌이 가방에서 꼬깃꼬깃한 레닌그라드 지도를 꺼내자 십년 전 지도라고 타박을 하더니 몇몇 군데에 동그라미를 치고 이름을 적어 주었다.

 

 

“ 여기는 아저씨들이 좋아하는 선술집... 여기는 예쁜 여자들이 많이 오는 레스토랑. 음, 인류학박물관은 신기한 게 많아서 아저씨들도 싫어하지 않더라고. 그리고 여기는 운하 유람 보트 타는 데... 근데 지금은 추우니까 운하 얼어서 보트는 안 다니겠구나. 그리고 여기는... ”

 

 

한참 설명을 해준 후 왕재수는 한숨을 쉬며 창밖을 다시 바라보았다. 눈망울이 서글퍼 보여서 베르닌은 어쩐지 미안해졌고 괜히 얘기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저... 너 거기 가족들 있지 않아? 내가 편지라도 전해줄까? ”

 

“ 촌스럽게 웬 편지. ”

 

“ 그래도 여기서는 못 보내잖아. 보내도 국장이 검열하고. ”

 

“ 됐어. 우리 엄마 밖에 없는데 뭐. 엄마랑은 여기 올 때 전화했어. ”

 

“ 어머니가 걱정하실 거 아냐. ”

 

“ 엄마한테 편지 쓰면 뭐... 아무 말도 못하잖아. 시골 너무 싫고요, 바퀴벌레랑 곱등이 나오고요 이런 말 쓰면 엄마가 슬퍼할 거고! 그렇다고 시골 너무 좋아요.. 라고 하면 거짓말 하는 거 뻔히 다 아니까 엄마가 또 슬퍼한다고. 그냥 안 쓰고 안 보내는 게 제일 나아. ”

 

“ 어... ”

 

“ 그러니까 됐어. ”

 

 

베르닌은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가만히 차를 몰았다. 이따금 그는 자신이 KGB 요원이 된 것을 후회하곤 했는데 지금이 바로 그 때였다.

 

 

 

*   *   *

 

 

 

아파트 앞에 도착해서 차를 세우다가 베르닌은 건물 현관 앞에서 서성대고 있는 로만 코즐로프를 발견했다.

 

 

“ 어, 저 깡패... 아니, 바이올린 아저씨. 너 보러 왔나보다. ”

 

“ 에이 참, 오지 말라니까! ”

 

 

왕재수가 짜증을 냈다.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베르닌에게 명령조로 말했다.

 

 

“ 너 가서 로만한테 집에 가라고 해. ”

 

“ 엥? 여기까지 너 만나러 왔는데 왜? 너네 싸웠어? ”

 

“ 아니. 근데 여기로는 오지 말라고 했단 말이야. 너네 국장이 협박했다고 했잖아. 오지 말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는데 말을 안 들어... ”

 

“ 하지만... ”

 

“ 빨리 가서 말해. 바깥 춥단 말이야. 계속 저기서 기다렸을 텐데. 로만 감기 걸려. ”

 

 

베르닌은 할 수 없이 차에서 내렸다. 코즐로프가 그를 발견하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왜 너만 오냐, 극장에 전화했더니 같이 나갔다고 했는데. ”

 

“ 저... 집에 가래요. ”

 

“ 뭐야?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귀염둥이 아기는 어디 있어!

 

“ 당신 집에 갈 때까지 그냥 차에 있겠대요. ”

 

대체 왜! 너네 둘이 혹시 정말!

 

 

바이올린 깡패가 폭주할 징조가 보여서 베르닌은 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 아니에요! 그런 거 절대 아니라고요! 그게 아니고, 당신 감시받는다고... 괜히 밀고 당할까봐 그런대요. ”

 

“ 감시꾼은 너잖아! ”

 

“ 아니에요. 난 그런 거 보고 안 한단 말이에요! 내가 보고서에 썼으면 벌써 당신 잡혀갔게요! ”

 

“ 하긴... 어휴, 저 고집쟁이! 그럼 우리 집에 계속 있지 아침에도 부득부득 의심받는다고 나가더니... 가뜩이나 극장 애새끼들 가르치랴 있는 레퍼토리 뜯어고치랴 신작 준비하랴 계속 과로하고 아프면서 왜 말을 안 듣는 거야! 한참 아파서 입원했을 때도 못 오게 하더니, 저번에는 무슨 멍멍이를 주워 와서 집에 있어야 한다고 하고! 똥개 주인 찾아준 다음에는 또 감시당하니까 오면 안 된다고 하니... ”

 

“ 우리 국장이 전화해서 협박했대요. 주변 사람 감시해서 의심스러우면 체포한다고... ”

 

망할 놈의 KGB! 나 그런 거 상관 안 해! 더러운 개자식!

 

“ 어... 목소리 좀 낮추시죠... 누가 들으면... ”

 

시끄러워!

 

 

코즐로프는 차로 갔다. 문을 벌컥 열고 왕재수를 끌어냈다.

 

 

“ 어휴, 집에 가라고 했잖아. ”

 

안 가! 갈 거면 너 데려갈 거고, 안 그러면 나도 너네 집 올라갈 거야! ”

 

“ 오늘은 당신 집 못 가. 나 오늘 집에서 할 게 많아서 온 거야. 내일 지휘자랑 무대감독이랑 미팅하기로 했는데 책을 좀 봐야 한단 말이야... ”

 

“ 지휘자면 오케스트라 쪽이잖아! 나랑 같이 준비하면 되겠네! ”

 

“ 하지만 스페호프가... 앞잡이들이... ”

 

그깟 KGB 나부랭이들이 뭐가 무서워!

 

“ 당신 잡혀간단 말이야. ”

 

“ 잡혀가면 뭐! 나 감옥 전에도 가봤어! 하나도 안 무서워! ”

 

아니야! 감옥 무서워! 안 돼!

 

 

왕재수가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코즐로프의 가슴을 홱 떠밀었다. 코즐로프는 원체 큰 탓에 심하게 밀려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휘청거렸고 귀염둥이 비둘기의 예상치 않은 폭력 행사에 깜짝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 너 뭐하는 거야! 주먹질이라도 할 셈이야? ”

 

“ 가라니까 안 가고... ”

 

 

왕재수가 다시 떠밀었다. 이번에는 코즐로프가 힘을 주고 버티면서 도리어 두 손으로 마주 밀었다. 반동 때문에 왕재수가 뒤로 밀려나다가 바닥에 철퍽 주저앉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껴 울었다.

 

 

“ 가라니까 왜 안 가. 엉엉, 당신 감옥 가는 거 싫어. 잡아가는 거 싫어. 나랑 같이 있는 거 들통 나면 감옥 보낸다 했단 말이야. 어엉... 나도 같이 있고 싶은데. 혼자 자는 거 싫어. 꼭 안겨서 자고 싶은데 그러면 잡아간댔어. 어흑... 나 때문에 감옥 가는 거 싫어. ”

 

 

코즐로프가 왕재수를 부둥켜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어르고 달랬다.

 

 

“ 괜찮아, 괜찮아. 우리 귀염둥이 비둘기 내 강아지가 나 잡혀갈까봐 무서워서 그랬구나. 나 안 잡혀가. 아무나 감옥 보내는 거 아니야. ”

 

“ 모스크바에서도 사람 패서 감옥 갔었잖아, 엉엉... ”

 

“ 그땐 그냥 유치장에 몇 주 정도... ”

 

“ 국장이 내 주변 사람 잡아 가둘 거라 했단 말이야. 윗사람들 무서워서 나 직접 건드리지 못하니까... ”

 

“ 나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 아니거든! 그 족제비 같은 스페호프 따위 내가 한 손으로 잡아 비틀 수 있단 말이야! 하나도 겁 안 나! ”

 

“ 수갑 채우고 주사 놓는데 무슨 힘으로 잡아 비틀어! ”

 

 

코즐로프는 귀염둥이 아기를 껴안고 둥기둥기 달래보려고 했지만 이번만큼은 먹히지 않았다. 왕재수는 좀처럼 진정하지 않고 계속 울다가 코즐로프한테 빨리 가라고 삿대질을 하고 발로 차기까지 했다. 마침내 베르닌이 왕재수를 뒤에서 안고 끌어당겨서 코즐로프로부터 떼어놓았다.

 

 

“ 야, 좀 진정해. 사람들 관심 없다가도 네가 이렇게 소리 지르고 우는 거 보면 뭔가 싶어서 더 보고 일러바치겠다. ”

 

 

왕재수가 화들짝 놀라며 울음을 그쳤다. 훌쩍이면서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 그럼 어떻게 해. 어엉... 로만이 안 간다잖아. ”

 

“ 그러게. 당신도 고집만 부릴 게 아니네요. 우리 국장이 좀 사이코라서요. 한 번 이거다 싶으면 집착이 장난 아니거든요. 당신 이러는 거 눈치 채면 분명히 감옥 보낼 거예요. 그게 행정의 기본이라서. ”

 

보내라지! 그 자식 보고 밤길 조심하라 해라. 뒤통수를 부숴버리든가 등짝에 칼 꽂든가 해줄 테니!

 

“ 난 공무원에 보안요원이거든요! 내 앞에서 그런 말 하면 체포할 수도 있다고요! ”

 

“ 그럼 너부터... ”

 

“ 유치하게 이러지 좀 말아요. 아 피곤해. 나 내일 일찍 출장도 가야 되는데 집에도 못 들어가고 이게 뭐야. 이렇게 해요! 너! 넌 지금 너네 집으로 가! 그리고 당신! 당신은 우리 집으로 가요!

 

“ 엥, 그게 무슨 소리야! ”

 

“ 당신 알리바이가 뭔지도 모릅니까? 어차피 같은 건물이고 쟤랑 나는 위 아래층이니까 당신은 일단 우리 집으로 들어갔다가 2-30분 있다 쟤한테 가라고요! 그럼 행여 아파트 들어가는 거 목격돼도 나한테 왔다고 할 수 있잖아요! 나도 보고서 그렇게 쓰면 되고! ”

 

“ 하지만... 내가 왜 너한테 가냐. 우린 아무런 친분 관계가 없는데. 오히려 더 수상하지. ”

 

“ 어... 음. 당신 모스크바 음악원 나왔잖아요! 그쪽 오케스트라에도 있었고! 나도, 나도 모스크바 대학교 나왔고. 난 내일 모스크바 출장도 가야 하니 당신한테 그 동네 지리 좀 물어보려는 거죠! ”

 

“ 너 모스크바 출장 가냐? 그럼 우리 아기 밥은 누가 해주고 출퇴근은 누가 시켜 주냐! ”

 

“ 아휴, 그건 당신이 좀 해요! ”

 

“ 내가 해주는 밥보다 네가 해주는 게 더 맛있다잖아! 너한테 가서 보르쉬랑 생선찜 레시피 좀 받아 오랬는데. ”

 

“ 어, 정말요? 맛없지 않은 거지 맛있진 않다고 했는데. 그러니까 그 보르쉬 레시피는요... ”

 

다들 뭐하는 거야! 바보 멍충이!

 

 

왕재수가 왈칵 소리를 지르더니 베르닌의 옆구리를 쥐어박았다.

 

 

“ 레시피는 무슨 레시피! 깡통에 든 거 데워주는 거잖아! ”

 

“ 아니야! 그러니까, 보통 땐 그렇지만 전에 너 폐렴 걸렸을 때, 그러니까 벨라 때문에 강에 빠졌을 때, 그때는 진짜 고기 사와서 육수도 내고 비트 썰어서 양배추랑 토마토 페이스트랑... ”

 

뭣이? 강에 빠지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귀염둥이가 강에 빠져? 그래서 폐렴까지? 너 그냥 감기라고 했었잖아! ”

 

아, 시끄러워! 머리 아파! 이제 됐어! 나 집에 갈 거야! 당신, 당신은 얘네 집으로 가!

 

“ 어, 그, 그래. 그럼 30분 있다 너네 집으로 가면 되지? ”

 

“ 몰라! ”

 

 

왕재수는 푸르르 화를 내더니 혼자서 휙 들어가 버렸다. 코즐로프는 잠시 멍하게 서 있다가 베르닌을 보고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 어쨌든 고맙다. KGB 앞잡이라고 욕했는데 도와줘서. ”

 

“ 도와주는 거 아니에요. 죄 없는 사람 잡혀가는 거 나도 싫어요. ”

 

“ 쟤가 너 부려먹고 틱틱대도 너무 미워하지 마라. 쟤 요즘 극장에서 힘들거든. 금요일엔 의사도 왔다 갔어. 과로한다고 야단치고. ”

 

“ 그랬구나... ”

 

“ 우리 아기가 성격이 좀 그렇다. 방금도 고맙다고도 안 하고. 네가 이해해라. 워낙 오냐오냐 떠받들려 산 애라 그래. ”

 

“ 알거든요! 쟨 좋아도 절대 좋다 안 해요! 방금도, 맛있으면서 맛없는 건 아니라고 하고... 어휴! 맛있다 해주면 어디 덧나나!

 

“ 맛있다던데. 네가 해주는 게 레닌그라드에서 엄마가 해주던 것만큼 맛있는데 국장이 맨날 잡일 시켜서 야근하느라 밥 얻어먹기 힘들다고 툴툴대던데. ”

 

“ 엥... 설마... ”

 

 

베르닌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궁금했지만 왕재수에게 물어본들 절대 대답을 안 해 줄 게 뻔했으므로 포기했다.

 

 

“ 그건 그렇고 너 정말 모스크바 출장 가냐? 이번엔 또 누구 뒤치다꺼리를 하려고 모스크바에 간담. ”

 

“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아저씨들 데리고 갈만한 데 없나요? ”

 

“ 너도 거기서 공부했다며! 뭘 나한테 물어! ”

 

“ 그거야 난 젊은이, 당신은 아저씨니까... 당신이 더 잘 알 것 같아서. ”

 

“ 나 모스크바에 있을 땐 너 또래였거든! ”

 

“ 어 그런가... 하여튼 얘기 좀 해줘요. 일단 올라가죠. 추운데. ”

 

 

 

*   *   *

 

 

 

 

코즐로프는 모스크바에서 돌아온지 거의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베르닌보다 더 도시 구석구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투덜거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후배를 부려먹는 아저씨들의 특성에 대해서도 꿰고 있었다. 베르닌은 혹시 이 인간도 오케스트라에서 후배들을 그렇게 갈구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했지만 스페호프를 죽어라고 미워하고 툭하면 KGB와 공산당을 욕하는 걸 보면 그렇게 권위적인 성격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30분 정도 모스크바 뒷골목에 대한 정보를 교환한 후 코즐로프는 왕재수에게 가보겠다며 일어섰다. 베르닌은 조금 걱정이 되어서 코즐로프에게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는 이 건물에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알리바이를 만들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나는 대로 왕재수 돌보기 매뉴얼을 주워섬겼다.

 

 

“ 쟨 꼭 당신 집에서 재워야 돼요. 혼자 있으면 저녁도 안 먹어요. 내가 안 데려다 주면 여기로 오지도 않고 극장에서 잔대요. 그리고 밥은... 음, 아까 이콘 박물관 뒤에 있는 식당 갔는데 거기 맛있었어요. 쟤도 잘 먹더라고요. 어설프게 뭐 만들어주려고 하지 말고 그냥 거기 가서 같이 저녁 먹어요.

그리고 쟤 추운데도 멋 부린다고 아르마나인지 에르미인지 뭔지 하는 종잇장 같은 코트들만 입거든요. 모자도 별로 보온도 안 되고 모양만 좋은 것들만 득실득실해요. 근데 일기예보에서 이번 주에 한파 온다고 했으니까 아침에 꼭 패딩 입혀서 내보내요. 저 녀석은 패딩 입히면 아주 죽는 줄 안다니까요. 그럴 때는 바퀴벌레나 곱등이를 풀겠다고 협박하면 잘 먹혀요.

그리고 할 수 없이 집에서 해먹어야 할 때는 이것저것 고민하지 말고 생선 한 마리 사서 쪄주거나 닭가슴살 구워서 레몬이나 뿌려주면 잘 먹어요. 근데 기름을 쓰면 또 죽는 소리를 하니까 반드시 찌거나 오븐에 구워야 돼요. 근데 당신 부엌에 오븐 있어요? 난 없었는데 쟤가 자기 거 갖다 주더라고요. 오븐 없으면 그냥 찌는 게 나아요.

그리고 저번에 말했지만 까먹었을까봐... 쟤 밀크 초콜릿 안 먹어요, 무가당 초콜릿이어야 해요. 제일 안전한 건 사과파이... ”

 

 

코즐로프가 혀를 찼다.

 

 

“ 불쌍한 녀석. 우리 아기 잘 챙겨주는 건 좋은데 너 좀 불쌍하구나. ”

 

“ 뭐가요! 나 안 불쌍한데! ”

 

“ 창창한 나이에 애인을 품에 끼고 놀면서 그런 거 챙겨줘도 모자랄 판에... 연애나 제대로 하냐? 너 누구랑 자 본 거 얼마나 됐냐. ”

 

“ 뭐라고요? 왜 그런 걸 물어요! 그건 실례... ”

 

“ 에휴, 말 안 해도 뻔하지. 불쌍한 녀석... 우리 오케스트라에 괜찮은 여자애들 몇 명 있는데 소개라도 해주랴? 취향 말해봐라. ”

 

“ 어... 그럴 필요 없어요. ”

 

아, 그럼 사내애가 좋냐? 그쪽은 좀 구하기 힘든데. 우리 아기가 워낙 드문 애라서 그 정도 급은 당연히 없고... 우리 동네는 시골이라 괜찮으면서도 이쪽 취향인 사내애 구하는 건 계집애보다 백배쯤 어렵... ”

 

으악, 됐거든요! 첫째, 난 여자 좋아하고요! 둘째, 너무 바빠서 여자 사귈 시간이 정말 없어요! ”

 

“ 쯧쯧. 그건 다 핑계지. 우리 아기가 레닌그라드 있을 때 얼마나 바빴는지 넌 상상도 못할 거다. 그래도 문어발처럼 사내들을 거느리고... ”

 

“ 으윽... 별로 알고 싶지 않네요! 근데 당신은 툭하면 의심하고 질투하면서 걔가 레닌그라드에서 문어발 연애했던 건 괜찮아요? ”

 

“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지금 나만 보면 되는 거야! ”

 

 

베르닌은 코즐로프의 논리가 신기했지만 토를 달지는 않았다. 대신 아까부터 계속 마음에 걸리던 것을 물었다.

 

 

“ 금요일, 의사는 왜 왔던 거예요? 극장까지... ”

 

“ 남아서 일하다가 술 먹고 뻗어서. ”

 

“ 엥, 술이라뇨! 걔 술 입에 안 대는데. 마시면 곧장... ”

 

“ 걔 신작 때문에 요즘 자정 넘어서까지 남아 있어. 목마르다고 컵에 든 거 주스인 줄 알고 마셨는데 그게 누가 따라놓고 잊은 샴페인이었던 거지. 김빠진 거긴 한데, 한 컵 다 마시고 완전히 맛이 가서 드러눕더라니까. 그나마 내가 남아 있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그 추운 마룻바닥에 밤새 누워 있었을 거 아냐! 그러니 내가 여기까지 안 오게 됐냐. 언제 무슨 일 있을지 모르는데... ”

 

“ 그래서 당신이 의사 선생님 부른 거예요? ”

 

“ 전화로 어떻게 해야 되는지 물어봤는데 노인네가 한밤중에 극장까지 와주더라고. 귀염둥이 깨워주고 돌봐준 것까진 좋았는데 애한테 얼마나 야단을 치는지! ”

 

“ 그럼 다른 데 아픈 건 없는 거예요? ”

 

“ 몰라. 환자의 사생활이라고 날 못 들어오게 하더라고. 야단치는 소리밖에 못 들었어. 예순도 한참 넘은 노인네한테 우리 불타는 사이니까 내가 보호자라고 말할 수도 없잖아. 나중에 보니까 ‘과로하지 말 것, 식사량 50% 늘릴 것, 일주일에 3~4일만 출근할 것’ 하고 아예 애 책상 앞에 잉크로 적어놓고 갔더라고! ”

 

 

베르닌은 점점 걱정이 되었다.

 

 

“ 근데 오늘도 극장 노는 날인데 출근하고... 같은 극장에 있으니까 당신이 좀 잘 챙겨요. ”

 

“ 극장에서는 우리 친한 척 안 해. 공연 끝나고도 안 가고 있으면 그땐 같이 있지만. 하여튼 내일부터는 그 세 가지 내가 감시할 테니 넌 걱정하지 말고 출장이나 잘 다녀와. ”

 

“ 알았어요. ”

 

 

 

코즐로프가 왕재수의 집으로 간 후 베르닌은 가방을 꾸렸다. 막상 자신의 짐은 별로 없는데 다음날 모스크바 워크숍에서 발표해야 하는 ‘레닌과 스탈린,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의 경제 모델에 따른 도시별 공산당원 교육 정책’ 때문에 챙겨온 자료들에 아저씨들 가이드를 위해 챙긴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지도, 관광책자, 알렉산드라의 충고대로 극장 가는 길에 식료품 가게에서 잔뜩 산 자질구레한 과자와 안주거리 때문에 가방은 터져 나갈 지경이었다. 왕재수와 코즐로프의 사랑싸움을 말리고 또 코즐로프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스트레스가 되살아났다. 특히 발따예프와 한 방을 쓰게 될 것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그는 두어 시간 동안 가이드북을 읽고 코즐로프와 왕재수가 알려준 장소들을 표시했다. 그리고 공산당원 교육 정책에 대한 자료를 좀 읽다가 걷잡을 수 없이 졸려서 결국 잠자리에 들었다. 까무룩 잠이 들면서 그는 발따예프도 바라노프스키도 주브치크도 없이 자기 혼자 출장을 가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한숨을 쉬었다.

 

 

 

 

 

 

FIN

- 2015. 3. 14 ~ 18 -

 

 

--

 

 

15편에서 출장을 준비하느라 베르닌이 겪는 일들은 상당 부분 내가 예전에 겪었던 일들에서 따온 것이다. 상전들을 모시고 간 출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16편에서...

 

  ..

 

 

여기 등장하는 발따예프란 인물은 노어의 ‘발따찌’란 동사에서 이름을 따왔다. 예전에 같이 노어 전공한 친구(쥬인)가 아이디어를 준 이름이다. 발따찌는 노어로 ‘수다 떨다’란 뜻의 동사이다 :) 서무 시리즈의 사무실 인물들이 가끔 그렇듯 이 사람도 예전에 나와 같이 일했던 실존인물들 두어 명을 조합했다. 누군지는 물론 비밀~~

   

..

   

 

왕재수가 베르닌을 데려가는 작은 식당은 지난 2월 내가 페테르부르크에서 우연히 발견했던 카페 두셰브나야 꾸흐냐를 조금 모델로 하고 있다. 특히 거기서 왕재수가 먹는 닭가슴살 요리 :)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535

 

   

..

   

 

불쌍한 단추청년 베르닌의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출장기는 16편에서. 그건 다음주에~

   

 

..

 

 

댓글은 언제나 힘이 됩니다 :)

 

 

:
Posted by liontamer

 

서무 시리즈도 어느새 꽤 길어져서, 오늘 올리는 것이 14편째이다. 16편까지는 마무리되어 있는데, 이제 많이 바빠져서 뒷이야기들이 또 언제 나올지는 잘 모르겠다.

 

어떤 종류의 이야기들이든, 장편이나 시리즈는 일종의 특징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야기가 길어지면 작가는 등장인물들과 특정한 종류의 유대를 맺게 되는데 그것은 단편과는 또 다른 종류이며 이러한 유대는 점차 복잡해진다. 이것은 텍스트 내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인물과 인물들 사이에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종류의 관계들이 생겨난다. 물론 일반적인 경우, 작가는 시리즈나 장편을 구상할 때는 그런 가능성들을 염두에 둔다. 텍스트의 내외부에서 확장되는 관계와 새롭게 구축되는 우주들에 대한 가능성을 어느 정도는 예측하며 글을 시작하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즐겁게 쓰기 시작한 서무 시리즈인데.. 쓰다 보니 점점 작가의 본 성격도 나오고, 본편과도 조금씩 뒤섞인다. 역시 본편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쓰기 시작한 거라서 그런가보다.

 

하여튼 그건 그거고... 그건 쓰는 사람이 해결해야 할 문제고.

어쨌든 서무 시리즈는 내 입장에선 쓰기 편하고 쓰기 즐겁고 마음의 위안도 된다.

 

 

14편은 지난 13편에서 곧장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왕재수의 비명 소리를 듣고 뛰어간 베르닌은 머리에 충격을 받고 정신을 잃고... 그 이후..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1년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신년 특별감사가 마무리된 후 스페호프의 오해로 베르닌은 온천 요양소 티켓을 얻는다. 왕재수와 함께 요양소에 간 베르닌은 온천과 마사지를 만끽한다. 그러나 행복감도 잠시, 한밤중에 누군가가 침입해 오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경고까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 14편에는 가벼운 폭력 묘사가 있음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14

 

 

서무의 슬픔

- 한밤중의 침입자 -

 

 

 

 

 

 

 

다닐 베르닌은 책상물림이었다. 그건 확실했다. KGB에 입사한 그의 대학 동기들 대부분은 현장요원을 지망했다. 현장요원이 되면 모두가 선망하는 해외 지사로 파견되어 유럽에서 스파이 활동을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국어 강습도 따로 받았고 특수 훈련도 받았다. 하지만 베르닌은 그런 쪽으로는 전혀 야망이 없었다. 외국어에는 재능이 없었고 달리기는 곧잘 했지만 운동신경이 특출한 것도 아니었고 특히 누군가를 두들겨 패는 데는 영 소질이 없었다. 군대에서도 키와 체격 때문에 가끔 권투나 삼보 대회에 끌려 나가곤 했지만 항상 예선에서 흠씬 두들겨 맞고 탈락하곤 했다. 그러니 그가 우수한 학교 성적에도 불구하고 현장요원보다 급수가 떨어지는 행정요원 시험을 본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물론 입사 후 연수원에서 기본 훈련은 받았다. 군필자였으니 총도 다룰 줄은 알았지만 별로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하마터면 사격 훈련에서 탈락할 뻔 했다. 기본 호신술 시험에도 통과해야 했는데 교관이 베르닌에게 허우대만 멀쩡하지 왜 이렇게 둔하냐고 대놓고 야단까지 쳤다. 성실한 교관은 그에게 나머지 공부까지 시켰고 결론을 내렸다.

 

“ 넌 둔한 게 아니고 사람 패는 걸 무서워하는 거야! ”

 

“ 교관님, 사람 패는 건 나쁜 거잖아요... 그걸 어떻게 좋아합니까! ”

 

“ 그건 민간인이나 하는 말이고! 넌 국가의 녹을 먹는 보안요원이 될 거잖아! 언제 어디서 당과 연방을 위협하는 반동분자들을 상대하게 될지 모르는데 그놈들의 총칼 앞에서 절대절명의 위기를 오갈 때도 사람 패는 거 나쁘다고 이렇게 빌빌거릴래! ”

 

“ 전 그런 게 싫어서 행정요원 시험을 본 거라고요! ”

 

“ 행정요원이고 뭐고 이건 공통 훈련이야! 통과 못하면 연수원에서 내쫓을 거야!

 

 

책임감 강한 교관의 눈물겨운 노력 덕분에 베르닌은 사격과 호신술 훈련을 통과했다. 하지만 그건 이미 2년도 더 된 일이었고 입사 후에는 매일같이 국장의 호통과 산더미 같이 몰려드는 서류 작업과 서무 업무, 각종 잡일에 시달리느라 사격이나 호신술은커녕 조깅이나 수영조차 못하고 살아왔다. 이제는 탄창을 갈아 끼우는 방법조차 가물가물할 지경이었다.

 

 

뒤통수가 깨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며 어둠 속에서 정신이 들었을 때 베르닌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를 나머지 공부시키면서 호통을 치던 그 교관의 얼굴이었다. 그게 누군지, 왜 생각나는지조차 몰랐다. 한참 후에야 그는 그게 연수원 교관이라는 사실을 기억했고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아서 ‘꺼져...’ 라고 입 안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현기증과 욕지기가 몰려왔다. 하마터면 누운 채로 토할 뻔 했다. 왜 이렇게 머리가 쿡쿡 쑤시고 아픈 건지, 왜 온몸이 천근만근 무겁고 움직일 수도 없는 건지, 사방은 왜 이렇게 캄캄한 건지, 속은 왜 뒤집힐 것처럼 울렁거리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끙끙거리며 일어나보려고 했지만 한참 꿈틀거리고 꼼지락거린 끝에야 자신이 의자에 앉아 있으며 심지어 뭔가로 묶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늘한 공포가 밀려들었고 그 순간 모든 것이 기억났다. 그는 총 소리를 들었고 복도로 나갔고... 창문이 열려 있었고 발자국을 보았다. 왕재수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고... 방문이 잠겨 있었고... 누군가가 뒤에서...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눈을 마구 깜박거렸다. 주위는 칠흑처럼 어두웠다.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는 목쉰 음성으로 속삭이듯 왕재수의 이름을 불렀다.

 

“ 미하일... 미샤... ”

 

대답 대신 바로 옆에서 희미한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굉장히 조그맣고 뭉개진 소리였지만 분명히 왕재수의 목소리였다. 아주 약간 안도하며 베르닌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다행히 상체는 옆으로 틀 수 있었다. 너무 어두워서 보이는 거라곤 침대로 추정되는 거대하고 판판한 물체 위에 옆으로 누워 있는 사람의 형체뿐이었다. 기다란 팔다리와 날씬한 몸매의 윤곽을 보니 왕재수가 분명했다.

 

“ 야, 너 괜찮아? ”

 

여전히 대답 대신 ‘으으으...’ 하는 신음 소리만 가냘프게 들려왔다. 크게 다쳤든지 입이 막혀 있든지 둘 중 하나인 것 같았다. 두 쪽 모두 결코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베르닌은 공포에 사로잡힌 채 몸부림치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도와주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사람 살려요! 도와줘요! 여기...

 

그런데 아무리 기억을 짜내려고 해도 자신들의 방이 몇 호실이었는지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포기하고 생각나는 것만 외쳐댔다.

 

“ 여기 5층... 사람 살... ”

 

누군가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베르닌의 뒤통수를 철썩 갈겼다. 털이 숭숭 난 손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조용히 해! 한번만 더 소리 지르면 가만 안 둬! ”

 

“ 으, 으으으!!! ”

 

“ 시끄러워! 아 정말 귀찮은 놈들이네! 너도 입 막히고 싶냐! ”

 

“ 으오우으으으... ”

 

남자가 뒤통수를 다시 한 번 갈겼다. 그렇게까지 세게 때린 것은 아니었지만 위협을 가하기에는 충분했다. 베르닌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남자가 손을 떼어내며 짜증스러운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 아 정말... 이 자식들은 대체 뭐야. 왜 남의 방에 들어와 가지고... 배고파 죽겠는데... 캄캄해서 보이지도 않고... ”

 

베르닌은 용기를 짜내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속삭였다.

 

“ 저... 그럼 불 켜시면 되잖아요... ”

 

“ 아까처럼 소리 지르려고! 내 얼굴 보고 몽타주인지 뭔지 그리려고! ”

 

“ 아니요... 안 그럴게요. 소리도 안 지르고 얼굴도 안 볼게요. 안 보이는 쪽으로 고개 돌리고 있으면 되잖아요. ”

 

“ 하긴. 뭐 어때. 입 못 놀리게 하면 되지. 야, 불 켤 거니까 소리 지르기만 하면 가만 안 둬! ”

 

베르닌은 끄덕끄덕했다. 남자가 그의 곁을 지나 반대편으로 갔다. 묵직한 발소리를 들으니 덩치가 큰 남자 같았다. 잠시 후 꽝 소리가 나더니 남자가 욕설을 내뱉었다.

 

“ 아야! 에이씨! 망할 놈의 방구석, 왜 이렇게 걸리적거리는 게 많아! 대체 스위치는 어디 있는 거야! ”

 

그러더니 부스럭부스럭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노란 불빛이 확 퍼졌다. 스탠드 램프를 켰는지 그렇게 밝은 빛은 아니었지만 어둠에 젖어 있던 베르닌은 눈이 부셔서 자기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았다. 곁에서 다시 ‘우으으’ 하는 가냘픈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베르닌은 간신히 눈을 떴다. 온통 노랗고 불그스름하게 보였다. 그는 생각대로 의자에 묶여 있었다. 커튼 띠로 추정되는 알록달록한 끈으로 허리가 결박된 데다 두 팔도 의자 뒤로 묶여 있었다. 아마 책상 앞에 있던 의자를 끌어다 놓은 것 같았다. 의자는 침대에 딱 붙어 있었다. 그는 왕재수가 괜찮은지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공포와 호기심을 억누를 수가 없어 눈을 가늘게 뜨고 방 안을 먼저 훑어보았다. 그들이 투숙했던 방이 맞았다. 문가의 옷걸이에 왕재수의 근사한 코트가 걸려 있으니 확실했다. 책상과 화장대 사이에 문제의 침입자가 있었다. 등을 돌린 채였기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베르닌이 추측한대로 덩치가 꽤 컸다. 키는 왕재수와 비슷한 정도였지만 체격이 드럼통처럼 딱 벌어져 있었다. 머리털을 짧게 깎았기 때문에 울퉁불퉁한 두상이 더 눈에 띄었다. 심지어 왼편에는 조그맣게 땜통까지 있었다. 검정색 패딩을 걸치고 있었는데 아직도 눈 녹은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남자는 베르닌의 가방을 정신없이 뒤지고 있었다. 베르닌은 ‘강도야!’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묶여 있는데다 무슨 짓을 당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꾹 참았다. 한참 가방을 뒤지더니 남자가 조그맣게 휘파람을 불었고 뭔가를 꺼내서 부스럭부스럭 소리를 냈다.

 

“ 어휴, 이거라도 있어 다행이네. 배고파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

 

부스럭거리는 소리나 냄새로 미루어보아 식당에서 요리사가 왕재수의 미모에 기분이 좋아져서 야식으로 먹으라고 챙겨준 청어 샌드위치인 것 같았다. 남자가 게걸스럽게 샌드위치를 먹어치우는 동안 베르닌은 깊은 숨을 들이쉬었고 그제야 왕재수 생각이 났다.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묶여 있는 팔 때문에 어깨가 빠지는 것처럼 아팠다.

 

왕재수는 침대 위에 모로 누워 있었다. 시트에 휘감겨 있어 전신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한쪽 팔은 침대 모서리에 묶여 있었고 다른 쪽 팔은 등 뒤로 묶여 있었다. 심지어 양쪽 발목마저 가운 끈으로 칭칭 감긴 상태였다. 베개와 시트 사이에 파묻혀서 이마와 눈은 보이지도 않았다. 입에는 손수건으로 재갈이 물려져 있었다. 그러니 끙끙대는 신음 소리밖에 못 낸 것도 당연했다. 베르닌은 걱정스럽게 속삭였다.

 

“ 야... 너 괜찮아? 안 다쳤어? 내 말 들려? ”

 

“ 흐으.... ”

 

왕재수가 그의 말을 듣고 몸부림쳤다. 하지만 사지가 전부 묶여 있었기 때문에 허리와 무릎을 꿈틀거렸을 뿐이었다. 버둥거릴 때마다 끈이 죄어들어와 굉장히 아파 보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급하게 말했다.

 

“ 그냥 가만히 있어. 괜찮을 거야. 괜찮아. ”

 

“ 으... ”

 

왕재수가 고개를 흔들며 계속 꿈틀거렸다. 꽁꽁 묶인 데다 말도 못하게 됐으니 답답하고 괴로운 것 같았다.

 

“ 몸부림치지 말고 내 쪽 좀 봐봐. 괜찮은지 좀 보게... ”

 

“ 으으으... ”

 

 

그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왕재수가 몸부림을 멈추고 고개를 좀 쳐들었다. 베르닌은 잠시 온몸의 잔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뺨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는데다 코피라도 흘렸는지 코 아래부터 턱까지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나마 출혈은 멈춘 건지 핏자국이 말라붙고 있긴 했다. 원래의 예쁘장한 얼굴을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였다. 얼음장처럼 몸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베르닌이 속삭였다.

 

 

“ 피... 저놈이 그런 거야? 다른 데도 맞았어? ”

 

“ 으으... ”

 

 

하긴 입이 막혀 있으니 왕재수에게는 물어봤자 소용이 없었다. 몰골을 보니 두들겨 맞고 결박당한 것 같았다. 베르닌은 이를 악물었다. 너무 화가 치밀어서 고함을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마침 청어 샌드위치를 전부 해치운 남자가 몸을 돌리며 베르닌 쪽으로 다가왔다.

 

 

“ 야, 먹을 거 더 없냐? 마실 건 없어? ”

 

“ 마실 거... 어디 있는지 말해줄 테니까 쟤 좀 풀어줘요. ”

 

“ 안 돼! 저 자식은 절대 안 돼! 얼마나 버둥거리는데! 저 녀석 진짜 장난 아니야. 발길질에 늑골 나갈 뻔 했단 말이야! ”

 

“ 제발... 쟤 많이 아팠단 말이에요. 일부러 온천 데리고 온 건데. 피 나도록 때렸잖아요.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저렇게 꽁꽁 묶어놓으면 피도 안 통한단 말이에요. 제발 다리라도 풀어줘요. 아니면 팔 하나라도... ”

 

“ 다리는 죽어도 안 돼! 애새끼가 축구선수라도 되는지 얼마나 발길질이 세찬지 알아! 나 정말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

 

“ 저러다 마비되면 어떡해요... 쟤 축구선수 아니에요. 무용수란 말이에요. 저렇게 묶어놓으면 진짜 몸에 안 좋단 말이에요... 근육이라도 잘못되면 어떻게 해요... 제발... ”

 

“ 에이씨, 어쩐지... 걷어차는 게 장난 아니더라니... 그래도 다리는 안 돼! 팔 하나만 풀어줄 거야! ”

 

“ 재갈도 풀어주세요. ”

 

“ 안 돼! ”

 

“ 제발요... 쟤 소리 안 지를 거예요. 저처럼 가만히 있을 거예요. 그치? ”

 

“ 으으으... ”

 

“ 소리 지르는 게 문제가 아니고! 저 자식은 물어뜯는단 말이야! 아까 물려서 얼마나 아팠는지 알아! 입은 막아놓을 거야! 너도 그만 입 닥쳐! ”

 

 

베르닌은 일단 입을 다물었다. 남자가 다가왔다. 램프 불빛에 얼굴이 정면으로 비춰졌다. 놀랍게도 앳된 얼굴이었다. 기껏해야 20대 중반으로 보였다. 왕재수 또래인 것 같았다. 심지어 이마와 뺨에는 여드름 자국까지 있었다. 갈색 눈에 살짝 내려앉은 주먹코, 아랫입술이 두툼한 입, 턱에 자리 잡은 조그만 보조개까지 영락없이 평범한 동네 청년처럼 보였다. 하지만 평범한 동네 청년이라면 사람을 뒤에서 갈기고 꽁꽁 묶고 협박을 일삼지는 않을 것이다. 남자는 베르닌이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뚜벅뚜벅 다가오더니 왕재수의 몸을 옆으로 홱 뒤집었다. 아팠는지 왕재수가 재갈 사이로 뭉개진 신음을 토해냈다.

 

“ 살살 좀 해요. 팔 부러지겠어요... ”

 

“ 시끄러워! 넌 뭔데 자꾸 이 자식 편을 들고 난리야! 애인이라도 되냐! 찝찝하게! 에이, 가뜩이나 이 새끼 때문에 좋다 말았는데! ”

 

“ 좋다 말다니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

 

“ 어휴, 몰라도 돼! ”

 

 

남자는 화를 버럭 내더니 잠깐 망설이다가 등 뒤로 묶여 있던 왕재수의 왼팔을 풀어주었다. 왕재수가 부르르 떨더니 그 즉시 허리를 홱 비틀며 윙 하고 왼팔을 휘둘렀다. 남자는 급하게 피했지만 뺨 언저리를 얻어맞았다.

 

 

에잇,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애새끼 왜 이렇게 성깔이 더러운 거야! 다시 묶어 버릴까 보다! ”

 

“ 으... 으으으! ”

 

“ 미하일... 야... 미셴카... 제발 가만히 있어. 제발... 위험하단 말이야. 가만히 있어, 응? 내 말 좀 들어. 그래야 너도 안전해. 제발... ”

 

 

베르닌은 겁이 나서 애원하듯 속삭였다. 왕재수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 몸을 뒤틀며 끙끙거리고 자유로워진 왼쪽 팔꿈치로 매트리스를 꿍꿍 찧어댔지만 베르닌이 그렇게 애원하자 서서히 얌전해졌다. 남자는 한숨을 쉬며 물러났다.

 

 

“ 아휴 짜증나... 되는 일이 없네. 간신히 여기까지 왔는데... 야, 마실 거 어딨어! 이 자식 풀어줬잖아! ”

 

“ 저... 저기 있는 내 패딩 주머니에... 주스 있어요. ”

 

 

남자는 후다닥 옷걸이로 달려갔다. 베르닌의 패딩 점퍼 주머니를 뒤져 오렌지 주스 팩을 꺼내더니 모서리를 뜯어서 벌컥벌컥 마셨다. 굉장히 배고프고 목이 말랐던 모양이었다. 그 사이에 베르닌은 엉덩이와 다리를 이용해 의자를 조금씩 움직였고 왕재수 쪽으로 몸을 완전히 틀었다.

 

 

“ 너 괜찮아? 저 사람한테 덤벼들면 안 돼. 위험하니까. 괜찮을 거야. 말귀 아예 못 알아먹는 거 같진 않아. 그러니까... ”

 

“ 우우... ”

 

 

왼팔이 풀린 왕재수는 아까보다는 몸을 똑바로 펴고 있었다. 몸 여기저기 엉켜 있던 시트도 한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다른 곳은 다친 데가 없는지 보려고 뻣뻣한 고개를 굽혔고, 순간 불길처럼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뱃속이 왈칵 뒤틀려왔다. 왕재수의 매무새는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잠옷 앞섶이 갈기갈기 찢어져서 맨몸이 완전히 드러나 있었고 목덜미와 가슴에는 심하게 할퀸 상처가 나 있었다. 게다가 하얀 피부 위로 몇 개나 찍혀 있는 붉은 손자국들은 누가 봐도 움켜쥔 자국이 분명했다. 이것도 모자라 파자마는 허리 밴드가 터진 채 무릎 아래까지 끌려 내려가 있었고 속옷도 벗겨져서 골반과 허벅지 사이에 걸쳐져 있었다. 왼쪽 허벅지에도 보라색으로 피멍이 들어 있었다.

 

 

으아아, 이 더러운 자식! 용서 못해! 가만 안 둘 거야!

 

 

베르닌은 용솟음치는 분노로 제정신을 잃었다. 눈앞에 시뻘건 불꽃이 번쩍번쩍했다. 그는 미친 듯이 몸부림치며 의자에 묶인 채로 펄쩍펄쩍 뛰었다. 깜짝 놀란 남자가 후다닥 달려와 베르닌을 덮쳤다. 고함을 지르지 못하도록 입을 틀어막으면서 어떻게든 제압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베르닌의 육체는 이성의 굴레로부터 해방되면서 국가 보안요원으로서 연마해왔던 괴력을 발현시킨 것이 틀림없었다. 앉은 채로 회오리처럼 돌아 의자를 마구 휘둘렀다. 아마 연수원에서 호신술을 가르쳤던 교관이 이 광경을 봤다면 ‘바로 그거야! 주변 물체를 이용해 상대를 제압하는 기술!’ 하고 뛸 듯이 좋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베르닌은 어쨌든 책상물림에 가까웠기에 결국은 균형을 잃고 와장창 쿠당탕 소리를 내며 의자 째로 구르고 넘어졌다.

 

 

정신이 들었을 때 베르닌은 바닥에 뒤집혀 넘어져 있었다. 여전히 의자에 묶인 채였다. 여전히 화가 나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어디선가 나직하고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왕재수인가 싶어서 와락 걱정이 되어 고개를 돌렸지만 왕재수는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침대에 묶인 채 등잔만큼 커진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대체 어디에서 나는 소리인가 두리번거리는데 왕재수가 턱짓으로 그의 아래쪽을 가리켰다. 알고 보니 의자 아래 그 침입자가 깔려 있었고 괴로워하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 으아아... 제발 좀 살려줘... 나 죽네... ”

 

시끄러워! 엄살 피우지 마, 나쁜 자식... 죽여 버릴 거야!

 

“ 으아아... 사람 살려... ”

 

이 더러운 자식! 맛 좀 봐라!

 

 

베르닌은 몸을 옆으로 마구 뒤틀며 아래에 깔린 남자를 의자로 더욱 더 세게 짓이겼다. 남자가 죽는 소리를 하며 어떻게든 몸을 빼내려고 꿈틀거렸다. 베르닌은 더 세게 짓눌렀다.

 

 

“ 으어어... 제발 그만해. 뼈 부러지겠어... 잘못했어. 때린 거 미안해. 으아아.. 풀어줄 테니까 제발 그만... ”

 

“ 시끄러워! 가만 안 둬! 죽여 버릴 거야! 이 더러운 놈아! 감히, 감히 그런 더러운 짓을 하다니... 진짜 용서 못해! ”

 

“ 미안해, 잘못했어... 팬 거 미안해. 묶은 거 미안해. 일부러 그런 거 아냐... 너네가 자꾸 소리 질러서... 아야... 으아... ”

 

“ 그게 문제야, 지금! 이 개자식! 더러운 강간범 같으니!! 너 같은 놈은 감옥도 아까워! 없애버릴 거야!! ”

 

 

베르닌이 더욱 치솟는 분노로 의자를 쿵쿵 내리찧자 남자가 괴롭게 소리를 질러댔다.

 

 

“ 으아아...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뭐가 강간범이야... 나 그런 놈 아냐... 진짜야... 오해야! ”

 

“ 뭐가 아니야, 이 나쁜 놈아!! 쟤한테 나쁜 짓 했잖아!! 아무리 쟤가 여자보다 예뻐도 그렇지... 이 짐승 같은 놈! 죽여 버릴 거야! 크아아!

 

“ 아니야, 아니야... 오해야... 으악, 야! 꼬맹아! 네가 말 좀 해줘... 으악! ”

 

“ 말을 어떻게 해! 쟤 입 네가 틀어막았잖아! 두들겨 패서 코피도 내고 옷도 찢어발기고 꽁꽁 묶고! ”

 

“ 으악, 아니야! 틀어막은 건 물어뜯어서 그런 거야... 나 그런 짓 안 했어! 아악, 진짜야! 잠깐만... 내가 쟤 풀어줄게... 제발... 네가 나 이렇게 작살내면 너네 풀어줄 사람 아무도 없어. 지금 이 건물에 사람 없단 말야. 1층에 경비 할아버지 하나밖에 없어. 직원들은 다 별채에서 잔단 말이야. ”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폭주하던 베르닌은 문득 정신이 들었다. 그 말도 맞는 것 같았다. 그는 온몸에 힘을 더 주면서 호통쳤다.

 

 

“ 그럼 내 팔부터 풀어줘! ”

 

“ 흑... 너 너무 무서워. 풀어주면 나 더 심하게 팰 거잖아. ”

 

“ 네놈이 우리 패고 묶은 건 생각 안 하냐! 빨랑 안 풀어? ”

 

“ 싫어싫어. 흐흑... 진짜 재수 옴 붙었네. 뭐 이런 놈들이 다 있어. 엉엉... ”

 

 

베르닌이 다시 화가 치밀어서 이 망할 강간범을 죽여 버리고 말겠다는 생각에 의자 아래로 뻗어 내린 두 발로 아래 깔린 놈을 마구 걷어차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왕재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야, 그만 해. 그러다 진짜 죽이겠다! ”

 

 

깜짝 놀라서 베르닌이 고개를 돌렸다. 침대 위에 왕재수가 일어나 앉아 있었다. 발목은 아직 묶여 있었지만 두 팔은 모두 풀려 있었다. 한 손으로는 손수건을 쥐고 있었다. 재갈이 물려 있던 자국이 선명했지만 그래도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 어... 팔 어떻게 풀었어? ”

 

“ 저 바보가 내 팔 하나 풀어줬잖아. 어휴, 매듭을 너무 꽉 묶어놔서 한 손으로 풀기 힘들었어. 아파 죽겠네. ”

 

“ 너 괜찮아? 괜찮은 거야? 으흑... 미안해...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너 놔두고 나가지 않았어야 했는데... 내가 있었으면 그런 일 안 당했을 텐데... 흑... 어떡하지... 미안해... 어흑... ”

 

“ 그래! 너 진짜 나빠! 내가 나가지 말랬잖아! 아휴! 하여튼 이제 그만 좀 해. 웬 사람을 그렇게 두들겨 패니. 야만스럽게. 진짜 저질이야. ”

 

“ 하지만... 너 지금 누구 편 드는 거야! 이 자식이 너한테 그런 짓을 했는데... 완전 강간범에 개자식... ”

 

“ 웬 강간범. 아니야, 그런 거. 너 왜 혼자 소설 쓰니. 그런 일 없었어. ”

 

“ 너... 너... 흑... ”

 

 

베르닌은 갑자기 법대 시절 들었던 범죄심리학 수업이 떠오르면서 속이 상하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흐느끼며 더듬거렸다.

 

 

“ 흑흑... 불쌍한 녀석... 너무 끔찍한 일을 당해서 자기 회피에 들어갔구나...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막 자기를 세뇌하면서. 어흑... 괜찮아, 네 잘못 아냐. 이 개자식이 나쁜 거야. 내가 죽여 버릴 거야. 엉엉... 어떡하지... 바이올린 깡패랑 같이 오게 하는 건데... 흐흑... 괜히 내가 온천 데리고 와서 나쁜 일 당하게 만들고... 어엉... 엉엉... ”

 

“ 얘가 진짜 왜 이러니. 왜 혼자 울고불고 난리야. 소설 좀 쓰지 마.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아휴, 답답해... ”

 

“ 뭐가 아니야... 흐흑... 옷도 다 벗겨지고 몸에 그런 상처까지... 흑... ”

 

아니라고! 아 참, 옷은 저놈이 벗긴 거 맞구나. ”

 

뭐야! 역시 사실이었어! 이 개자식, 죽여 버릴 거야!

 

 

베르닌이 다시 폭주하기 시작하자 왕재수가 발목이 묶인 채 데구르르 굴러서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는 낑낑대며 두 손으로 베르닌이 묶인 의자를 잡아당겼다. 아래 깔려 있던 남자가 헉헉대며 간신히 옆으로 몸을 굴려 피했다. 코피를 뚝뚝 흘리며 남자가 하소연했다.

 

 

“ 나 진짜 그런 거 아니야. 억울해. 나 강간범 아니야... 그리고 얜 여자도 아니잖아. 내가 왜 사내 녀석한테 그런 짓을 하니. 너네 패고 묶은 건 맞지만 그것도 일부러 그런 거 아니란 말이야. 난 그냥 류바 만나러 온 건데... 오늘 밤에 만나기로 해서 산 넘고 물 건너 몰래 여기까지 온 건데... 류바는 어디 가고 왜 너네들이 여기 있는 거야... 엉엉... 막 두들겨 패고 의자로 짓찧고... 무서워. 엉엉... ”

 

 

화가 나서 몸부림치던 베르닌의 귓가에 단어 하나가 들어왔다. 잠시 그는 그 단어를 언제 들었나 의문했다. 왕재수는 그보다 훨씬 머리가 잘 돌아가는 것 같았다. 갑자기 손뼉을 딱 쳤기 때문이다.

 

 

“ 아, 너 류바 만나러 온 거였어? 네가 알릭이구나! 무슨 운전병인가 뭔가. 장교들 따라와서 데이트하려 했는데 장군인가 뭔가 온대서 도루묵 됐다고... 맞지? ”

 

“ 어, 맞아... 너 어떻게 알아? 어... 역시 너 류바랑! ”

 

 

남자가 부르르 떨더니 갑자기 화를 내면서 왕재수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왕재수가 짜증을 내면서 남자의 뺨을 찰싹 후려쳤다.

 

 

“ 어휴, 그만 좀 해! 아까 그렇게 아프게 했으면 됐지 또 난리야! 가뜩이나 지금 다닐이 열 받아서 난린데! 너 나 한 번만 더 손대면 진짜 재미없을 줄 알아! 아까부터 패주고 싶은 거 팔 근육 미워질까봐 꾹 참고 있는 건데! ”

 

“ 하지만... 네가 류바를 어떻게 알아! 나랑 류바 얘기까지 어떻게 다 아냐고! 오늘 밤 데이트는 우리끼리 몰래 약속한 건데! ”

 

“ 류바가 아까 말해줬으니까 그렇지! 데이트할 줄 알고 좋아했는데 취소돼서 엄청 실망하고 있었단 말이야. 근데 넌 어떻게 온 거야? 장군 갔어? ”

 

“ 아니, 그게... 흐흑... ”

 

“ 야, 울지 마! 어휴, 촌스러워. 정말 시골 애들은 왜 이 모양이야. 빨랑 나 묶은 것부터 풀어줘. 매듭을 어떻게 맨 거야, 발목은 죽어도 안 풀리네. ”

 

“ 풀어주면 아까처럼 발로 찰 거잖아... 얼마나 아팠는데. ”

 

“ 더 아프고 싶냐? 너 나 안 풀어주면 쟤가 또 의자로 두들겨 팬다! ”

 

“ 흑흑, 안 돼. 저놈은 순한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무서운 거야. 덩치도 커가지고 의자 휘두르는데 너무 무서웠어. 엄청 아팠어. 뼈 다 부러지는 줄 알았네. 쟤 뭐야, 격투기 선수야? 흐흑... ”

 

“ 징징대지 말고 빨랑 나부터 풀어줘! 나 이렇게 오래 묶여 있으면 근육이 미워진단 말이야! ”

 

“ 으응, 알았어. ”

 

 

남자는 훌쩍훌쩍 울면서 왕재수에게 기어왔다. 떨리는 손으로 왕재수의 발목에 칭칭 감겨 있는 가운 끈의 매듭을 느슨하게 풀었다. 그리고는 혹시라도 왕재수가 걷어 찰까봐 미처 끈이 다 풀리기도 전에 후다닥 옆으로 굴러서 피했다. 왕재수는 두 손으로 발목과 종아리를 주무르면서 투덜댔다.

 

 

“ 어휴, 근육 뭉친 것 좀 봐! 야만인! 으아, 내 백옥 같은 살결에 쓸린 자국 난 것 좀 봐! 너 진짜 혼내줄 거야! 난 몸매랑 얼굴로 먹고 사는데! ”

 

“ 미안해. 너 얼굴로 먹고사는 앤 줄 몰랐어. 고의가 아니었어. 엉엉... ”

 

“ 피 안 통해서 저려 죽겠어. 좀 주물러봐! ”

 

“ 응, 알았어. ”

 

 

남자가 코를 훌쩍이며 왕재수의 발목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잠시 멍해져 있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대체 뭐하는 짓이야!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 발목 주물러주는 건 또 뭐냐고! 강간범 주제에 아니라고 하고! 넌 대체 왜 저놈 편을 들어주는 거야! 그리고 난 안 풀어 주냐? 나도 팔 저려 죽겠단 말이야! ”

 

“ 으앙... 저 사이코가 또 막 성질내. 또 나 때릴 거 같아. 무서워... ”

 

누가 사이코야! 으아아!

 

 

베르닌이 다시 폭주할 찰나 왕재수가 옆으로 기어왔다. 결박에서는 풀려났지만 아직 다리가 저려서 일어나기가 힘든 것 같았다. 의자에 묶인 채 옆으로 누워 있는 베르닌의 뒤로 가서 손목과 허리에 묶인 끈을 풀어주었다. 베르닌은 간신히 몸을 굴려서 일어나 앉았다. 어지럽기도 하고 손목과 팔, 다리, 허리가 너무 아팠다. 온몸이 저려서 찌릿찌릿했다. 왕재수가 그의 팔목을 문지르듯 마사지해주었다.

 

 

“ 아... 아야... ”

 

“ 가만히 있어봐. 어휴, 세게도 묶어놨었네. 자국 엄청 깊게 났잖아. 많이 아팠겠다. 연고라도 발라야겠어. 이 방에는 없으려나? ”

 

“ 내가 문제가 아니고... 너! 너 다쳤잖아... 피도 나고... 상처... 그리고, 그리고... 흐흑... 나쁜 짓... 어흑... ”

 

 

베르닌은 죄책감과 가슴을 에는 듯한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왕재수를 와락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 흐흑... 불쌍한 녀석. 잘 나가다가 감옥 가고 고문 받고, 다쳐서 춤도 못 추고 시골에 끌려온 것도 모자라서 이게 웬 날벼락이니... 엉엉... ”

 

“ 아니, 그게... 나 그거 아니라니까... ”

 

“ 엉엉, 뭐가 아니야... 너 그렇게 자기 몸을 아무렇게나 생각하면 안 돼. 가뜩이나 바이올린 깡패랑 그러는 것도 걱정이었는데. 크레믈린 아저씨한테도 그렇게 막 나쁜 짓 당하면서 살았다 그러고... 심지어 저런 더러운 놈한테 겁탈... 엉엉, 그래놓고 아무 일도 아니라 그러고... 흑흑, 이 불쌍한 녀석아. 엉엉... 내가 저놈 가만 안 둘 거야. 크레믈린 아저씨도 혼내 줄 거야. 이제 너 그렇게 살지 마. 내가 너 건드리는 놈들 용서 안 할 거야, 으엉엉... 국장이 뭐라 하든 상관없어. 국장도 내가 혼내줄 거야. 으앙... ”

 

 

베르닌이 목을 놓아 우는 동안 왕재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쁜 일을 당한 후 뒤늦게 찾아온 심리적 충격 때문인가 싶어 더더욱 겁이 난 베르닌은 간신히 눈물을 훔치며 품 안에 있는 왕재수를 조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왕재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상당히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핏자국으로 범벅이 된 얼굴이 너무 불쌍해 보여서 소맷자락에 침이라도 뱉어서 닦아주려는데 왕재수가 갑자기 베르닌의 이마와 뺨에 연이어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두 팔로 베르닌을 껴안고 잠시 가만히 있었다. 베르닌은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당황해서 멍해졌다.

 

 

잠시 후 왕재수가 베르닌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손등으로 눈과 코를 쓱쓱 닦더니 소파로 올라가 벌렁 드러누웠다. 두 다리를 쭉 펴면서 베르닌과 침입자 쪽을 쳐다보았다.

 

 

“ 어휴, 피곤해. 온천까진 좋았는데 뱀 껍질부터 이상하더라니. 야, 알릭!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건지부터 말 좀 해봐. 제대로 말 안 해 주면 쟤가 또 팰 줄 알아. 그리고 다닐! 너 어디든 좀 앉아. 눕든가. 가뜩이나 신체 나이는 40대인 게 그렇게 의자를 휘두르고 난리를 쳤으니... 하긴 넌 미워질 근육도 없으니까 뭐. ”

 

“ 아니야! 나 안 앉을 거야! 너 데리고 병원 갈 거야! 그리고 저 자식 경찰에 넘기고... 아니지, 내가 체포할 거야! 나 KGB! 보안요원! 무단 침입한 강간범 체포할 권한이 있어!

 

“ 글쎄 그게 아니라고!! 일단 앉아! 설명해 줄 테니까! ”

 

 

그래서 베르닌은 일단 침대에 앉았다. 알릭이란 이름의 침입자는 쭈뼛거리며 도망치고 싶어 했지만 왕재수가 확 째려보자 어째선지 기가 팍 죽어서 카펫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알릭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     *     *

 

 

 

알릭은 왕재수의 생각대로 류바의 남자친구였다. 검은 숲 너머에 있는 군 부대에서 대대장의 운전병으로 복무하고 있었고 나이는 베르닌이 생각한 것보다도 더 어려서 스물한 살밖에 되지 않았다.

 

 

“ 나 원래 이 동네 토박이야. 할아버지 아빠 삼촌 전부 이쪽에서 벌목공으로 일해. 나도 학교 다닐 때부터 틈틈이 그쪽 일 도와드렸거든. 류바랑은 고등학교 때부터 커플이었어. 졸업하고 나서 류바는 여기 취직하고 난 가족들이랑 벌목 쪽 일하고. 원래 류바 스무 살 되는 생일날 결혼하자고 옛날부터 그랬는데, 그게 작년 5월이었거든. 근데 막 결혼 준비하고 있었는데 나 갑자기 영장 나오고 징집돼서 완전히 망한 거야. ”

 

“ 미뤄달라고 하면 안 되나? ”

 

 

왕재수의 순진한 질문에 알릭이 한숨을 쉬었다.

 

 

“ 너도 어른 돼봐... 군대는 다 끌려가는 거야. 노멘클라투라 가문이거나 줄 있거나, 둘 중 하나 아니면 그냥 가야돼. 너도 곧 가게 될 거야...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만 성년이 되면... ”

 

“ 음, 난 군 면제라서 그런 거 잘 몰라. 학교 다닐 때부터 콩쿠르에서 상을 많이 받았거든. 훈장도 여러 번 받고. ”

 

“ 으잉? 면제? 훈장? 뭔 소리야, 너 학생 아냐? ”

 

“ 아니야! 나 엄청 유명한 무용수에 감독... 우주 최고 꽃...

 

“ 그나마 고향 쪽 부대로 갔으니 잘 간 거네, 뭘. 난 연방 변두리 공화국에 딸린 이상한 부대로 갔다고! ”

 

 

아직 분을 삭이지 못한 군필자 베르닌이 왕재수의 ‘우주 최고 꽃미남이자 세계에서 제일 잘 나가는 대천재’ 레퍼토리를 가로막으며 툭 내뱉었다. 알릭이 흠칫 놀라며 웅얼거렸다.

 

 

“ 어, 그건 그러니까... 그렇지만... ”

 

“ 운전병이라며. 그럼 윗분만 모시면 되니까 좀 낫잖아. 행군 같은 것도 덜 하고 웬만한 훈련 할 때도 대대장 옆에 있으니까 일반 병사보단 훨씬 낫지. 나 군 생활할 때도 걔들 얼마나 부러워했었는데. 대대장만 잘 만나면 휴가도 잘 받고! ”

 

“ 아니야, 우리 대대장은 정말 너무 힘들단 말이야. 난 제1 대대장 운전병인데 그 인간 완전 사이코야. 걸핏하면 기합이야. 무슨 대대장이 직접 기합을 주니. 근데 이 작자는 그런다니까! 휴가는 정말 꿈도 못 꿔. 그 인간이 공무 말고도 하도 돌아다니는 일도 많고 애인도 많아서 걸핏하면 차를 쓴단 말이야. 그리고 부하들이 쉬는 꼴을 못 봐. 정기 휴가 나갈 때도 얼마나 들들 볶는데, 저번에는 휴가 나가는 날 아침에 갑자기 자기 사적인 일로 차 써야 한다고 못 가게 했어. 대체 운전병도 있었는데 내가 운전해야 승차감이 더 편하다고 무조건 내가 있어야 된다는 거야... 류바가 서너 번 면회도 왔었는데 고참들이 하도 못살게 굴고 자기들 먹을 건 안 싸 왔냐, 자기들한테 여자 친구 소개 안 시켜 주냐 들들 볶아서 류바가 겁먹고 요즘은 못 와.

그래서 나 진짜 오늘만 고대하고 있었단 말이야... 오늘 우리 사단 장교들 전부 여기서 워크숍인지 뭔지 하기로 했잖아. 말이 워크숍이지 그냥 다 모여서 새해 기념 야유회 하기로 한 거야. 온천하고 술 먹고 놀고... 우리 대대장도 오니까 나도 당연히 따라오는 거고. 윗분들 한번 술 먹고 놀면 장난 아니거든. 이럴 땐 우리도 따로 모여서 술 먹으라고 해줘. 그러니까 난 밤에 살짝 류바랑 만나기로 했었단 말이야. 류바가 엄청 기뻐하면서 5층에 좋은 방 하나 빼놓는다고, 자기 거기서 기다릴 테니까 오라고 했었어. 503호실... ”

 

“ 아, 그게 이 방이구나. ”

 

 

왕재수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베르닌은 왕재수처럼 세상 편하게 이야기를 들을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날카롭게 추궁했다.

 

 

“ 장교들 워크숍 취소됐잖아! 장군이 와서! 근데 넌 어떻게 온 건데! ”

 

“ 그러니까... 갑자기 장군이 온다 해서 발칵 뒤집히고 온천은 당연히 다 취소되고... 완전 망한 거야. 우리 어제부터 장난 아니었어. 눈 다 치우고 나무 심고 꽃 심고... 이 한겨울에 파릇파릇한 나무 찾고 장군 들어오는 타이밍 딱 맞춰서 활짝 필 꽃들 찾느라 죽는 줄 알았어. 장군이 연못 보면서 술 마시는 거 좋아한대서 웅덩이 파고 물 채우고 얼까봐 온수 주입하고 가짜 연잎 만들어서 띄워놓고 정자 만들고 난리도 아니었단 말이야. 난 오늘 밤에 류바랑 사랑을 속삭일 것만 기다리면서 간신히 하루하루 버티고 있었는데 진짜 미칠 것 같았어. 하도 난리가 나서 전화도 못하고... 류바는 하염없이 나 기다릴 텐데. 흑흑... 류바는 진짜 예쁘니까 안 그래도 인기도 많고 노리는 남자들도 많은데... 이러다 딴 남자한테 뺏길까봐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았어. ”

 

 

베르닌은 ‘걱정도 팔자야! 류바 별로 안 예뻤어!’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놀랍게도 왕재수는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알릭을 쳐다보면서 ‘응, 응. 그래서?’ 하고 계속 묻고 있었다.

 

 

“ 그래서 오후에 장군이 왔는데, 부대 한 바퀴 돌고 나더니 장교들 불러서 계속 술판인 거야! 전에도 그런 적 있대. 한 번 마시기 시작하면 사흘 연속 마신대. 그래서 병사들은 오히려 좋아하는 거야. 자기들끼리 술 퍼마시고 노느라 우리한테는 아예 신경도 안 쓰니까. 심지어 여자들도 부른 것 같더라고. ”

 

“ 맞아. 그런 술판 벌어지면 끝장 볼 때까지 마셔. 나 군대 있을 때는... ”

 

“ 어휴, 또 시작이야, 군대 얘기... 그런 건 너네 둘이 따로 얘기해. 그래서, 대대장들은 술 마시고, 너는? ”

 

 

왕재수가 탁 끊었다. 알릭은 이상하게도 왕재수의 말이라면 금세 고분고분해져서 온순하게 말을 이었다.

 

 

“ 다들 부어라마셔라 정신도 없고 병사들도 놀자판 됐거든. 나도 애들이랑 축구하다가... 생각해보니까 밤에 살짝 나갔다 와도 모를 거 같더라고. 고개 하나랑 강 하나만 건너면 되니까... 그래서 점호 끝나고 밤에 살짝 빠져 나온 거야. 류바 보려고... ”

 

“ 뭐야, 그럼 탈영이잖아! 미쳤어! ”

 

 

베르닌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알릭이 황급히 베르닌의 입을 막았다.

 

 

“ 야, 조용히 해... 나 그런 거 아냐. 괜히 오해받게... 나 총도 다 놔두고 나왔어. 나 진짜 류바랑 밤만 보내고 새벽에 돌아갈 생각이었단 말이야. 우리 못 본지 석 달도 넘었어. 그래서 막 고개 넘고 눈길 달려서 왔는데... 흐흑... 문은 다 잠겨 있고... 밖에서 아무리 류바 불러도 대답도 없고. ”

 

“ 류바 모스크바 갔어. 남자친구 오기로 했는데 취소돼서 열 받아서 주말 근무 바꿨대. 밤 기차 타고 모스크바에 놀러간댔어. 아까 7시 좀 넘어서 갔단 말이야. ”

 

 

베르닌은 왕재수가 그런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기억하는 것에 놀랐다. 남의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릭은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쳤다.

 

 

“ 정말? 아... 그랬구나. 그래서 류바가 없었던 거구나... 흑흑... 그럼 난 뭐한 거니... 삽질. 흐흑... ”

 

뭘 하긴 뭘 해! 탈영병 된 거지! 멍충이! 네가 전화 안 해도 어차피 예약이 다 취소됐으니까 류바도 너 못 온다는 거 알았을 거 아냐! 그러니까 모스크바에 갔지! ”

 

 

베르닌이 윽박지르자 왕재수가 그를 확 째려보았다.

 

 

“ 자꾸 갈구지 마. 얘기 좀 듣게. 아까 총 소리도 났는데. 넌 총 안 가져왔다며. 그럼 그건 무슨 소리였어? ”

 

“ 문이 다 잠겨 있어서 들어갈 구멍을 찾고 있는데 경비 할아버지가 저쪽에서 순찰 돌면서 오잖아. 숨다가 돌멩이에 걸려서 울타리에 부딪쳤거든. 소리도 크게 나고 그쪽에 오리들이 모여서 자고 있었는지 푸드득 푸드득 날아가고 시끄러우니까 아저씨가 놀랐는지 총을 쏘더라고. 근데 그거 공포탄이야. 그 할아버지 탄창 채우는 일 없거든. ”

 

“ 아, 그 총 소리가 그거였구나... 진짜 놀랐는데. ”

 

“ 거봐, 너 나가지 말랬잖아. 괜히 나가서... ”

 

 

왕재수가 베르닌을 나무랐다. 베르닌은 억울해서 대들었다.

 

 

“ 야, 그럼 총 소리가 나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니! 혹시라도 정말 무장 강도라도 들었으면 큰일이잖아! ”

 

“ 그래도 내 옆에 있었어야지! 나 혼자 놔두고 나가면 어떡해! 너 심지어 몰래 나가려고 나 막 재웠잖아! ”

 

“ 밖에 다른 사람들도 있으니까 그랬지... 다친 사람 있을까봐. ”

 

“ 딴 사람 다치는 건 걱정되고 나 다치는 건 걱정 안 되냐! ”

 

“ 돼! 걱정된단 말야! 아까도 얼마나 놀랐는데! 복도에 갔더니 창문은 열려 있지, 발자국은 있지. 근데 방에서 네가 갑자기 비명 지르고... ”

 

“ 저기... 근데 너네는 대체 무슨 관계야? 형제야? ”

 

아니야!!!

 

 

왕재수와 베르닌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 하긴, 형제치곤 너무 안 닮았다. 너네 좀 이상해. 남자들인데 꼭 사귀는 것처럼... 쳐다보는 것도 그렇고 걱정하는 것도 그렇고. 나랑 류바처럼... ”

 

야,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린 그냥 아는 사이고... 온천 와서 그냥 방만 같이 쓰는 거야!!! ”

 

 

베르닌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왕재수도 맞장구쳤다.

 

 

“ 그래! 나는 사귀는 사람 있어! 얘는 없지만... 하여튼 아니야! ”

 

 

알릭은 황급히 사과했다.

 

 

“ 어, 미안... 너네가 변태란 뜻이 아니었어. 난 그런 게 아니고... ”

 

“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남자끼리 응응응 하면 무조건 변태냐! 다들 꼴 보기 싫어! 에잇! ”

 

 

왕재수가 갑자기 화를 내더니 벌떡 일어났다. 줄줄 흘러내리는 파자마를 움켜쥐고 욕실로 들어갔다. 씩씩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잠시 후 물소리에 파묻혔다. 그 사이에 베르닌은 알릭을 훈계했다.

 

 

“ 너 그런 생각 있어도 입 밖에 내지는 마. 세상이 얼마나 복잡한줄 아냐. 나중에 사회 나와 보면 알 거야. 별의별 사람이 다 있어. 그리고 누가 누구 좋아하고 누가 누구랑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더라고. 그냥 그 사람 자체가 어떤지가 중요해. 그러니까 너랑 다르다고 함부로 변태니 뭐니 하고 욕하면 안 돼. ”

 

“ 으잉,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사내끼리 그런 거 하면 당연히 변태지. 아 찝찝해... ”

 

시끄러워, 한 번만 더 그런 말 하면 의자로 또 패줄 거야!

 

 

베르닌이 협박하자 알릭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때 왕재수가 머리에서 물을 마구 떨어내며 나왔다. 피투성이였던 얼굴도 깨끗하게 닦아낸 후였다. 밴드가 터진 파자마 허리춤에 옷핀을 꽂고 있었다. 왕재수는 아직 화가 잔뜩 나 있는 것 같았지만 알릭이 눈을 둥그렇게 뜨며 ‘우와, 아깐 몰랐는데 너 진짜 잘생겼구나! 영화배우 같아. 너처럼 잘생긴 애 처음 봐!’ 라고 감탄하자 금세 누그러졌다.

 

 

“ 하여튼. 경비 아저씨는 공포탄 쐈고. 안 들켰어? ”

 

“ 응, 들키지는 않았어. 그래서 약속한 대로 부엉이 소리를 막 냈거든. 근데 아무리 신호를 보내도 류바가 안 나오는 거야. 문도 안 열어주고... 5층 창문은 불도 다 꺼져 있고. 시간도 늦었으니 내가 안 올 줄 알고 류바가 자나보다 싶었어. 그래서 창문으로 들어온 거야. ”

 

“ 5층까지 기어 올라왔다고? 너 몸놀림 둔하던데? ”

 

“ 아니, 마침 창고 앞에 사다리가 있더라고. 그래서 그거 타고 올라왔어. 근데 눈이 쌓여서 하마터면 미끄러질 뻔 했어. 복도로 들어오긴 했는데 캄캄해서 어디가 503호인지 모르겠는 거야. 그래서 좀 헤맸어. 근데 어디서 문소리도 나고 발소리도 나서 깜짝 놀라서 문 열린 방에 잠깐 숨었다 나왔어. 그 방은 502호더라고. 살금살금 나와서 보니까 옆방이 503호인 거야. 노크를 했는데 대답은 없고, 문은 밀어보니까 열리더라고. 들어와 보니까 이쪽 침대에 사람이 누워 있잖아. 그래서 난 당연히 류바라고... ”

 

“ 야! 넌 남자랑 여자도 구별 못 하냐! ”

 

“ 캄캄해서 잘 안 보였단 말야. 그리고 불 켜면 혹시라도 경비 아저씨가 밖에서 알아볼까봐... 그리고 류바는 나보다 키도 크고 늘씬하단 말이야. 머리도 짧고. 몸매도 비슷한 거 같고 해서 난 류바인 줄 알고... ”

 

“ 잠깐! 말은 바로 하자. 난 우주 최고 꽃미남에 뭇 남성과 여성들을 넋 나가게 했던 몸매의 소유자라고. 류바와 비교하면 안 되지! ”

 

 

왕재수가 알릭을 노려보면서 아주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대놓고 얘기하진 않았지만 왕재수 역시 류바가 별로 미인이 아니라고 생각한 게 분명했다. 알릭은 얼떨떨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횡설수설 사과를 늘어놓았다.

 

 

“ 어, 미안... 하긴 네가 더 예쁘긴 하다. 어떻게 여자보다 더 예쁘지? 그래도 난 류바가 제일 좋아. 하여튼 난 진짜 류바인 줄만 알고... 너무 좋아서 침대로 기어들어가서... 그랬던 거야. 그냥 그거라고. ”

 

야! 뭐가 그냥 그거야! 뭘 그랬던 거냐고! 이 개자식! 그러니까 맞잖아! 강간범! 죽여 버릴 거야!

 

 

꾹꾹 참으며 끝까지 듣고 있었던 베르닌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솟구쳐 일어나 알릭에게 달려들었다. 막 알릭의 얼굴을 짓이겨놓으려고 하는데 왕재수가 뒤에서 그의 허리를 껴안고 질질 끌어당겼다.

 

 

“ 아유, 얘가 정말 오늘 왜 이래. 국장한테 너무 볶여서 그러나. ”

 

“ 뭐가! 다 밝혀졌잖아! 이 자식이 자는 널 덮친 거잖아! 류바인 줄 알고! 고의가 아니었으면 뭐해, 일은 다 저질러놓고! 아까 이놈이 그랬잖아, 너 때문에 좋다가 말았다고! 그게 그 얘기 아냐! ”

 

 

알릭이 훌쩍훌쩍 울면서 변명했다.

 

 

“ 아니야, 안 저질렀어. 하마터면 할 뻔 했지만 안 했어. 진짜야. 그러니까 좋다가 만 거지. 근데 첨엔 진짜 류바인 줄 알았어. 향기가 너무 좋았단 말이야. 그렇게 좋은 냄새가 나는데 어떻게 남자라고 생각하냐! 살결도 얼마나 매끈매끈하고 부드러웠는데... ”

 

“ 그거야 온천을 했으니 그렇겠지! ”

 

“ 나 원래 피부 완전 좋거든! ”

 

 

왕재수가 베르닌의 옆구리를 확 쥐어박았다. 알릭은 왕재수가 자기 편을 들어주는 것 같자 안도하며 말을 이었다.

 

 

“ 하여튼 그래서... 너네도 알잖아, 나 석 달 동안 못했는데... 남자들만 우글거리는 부대에 있다가 그것도 사랑하는 여자랑 오랜만에 한 침대에 눕게 됐는데 이성 찾게 됐냐! 너무 흥분돼서 꼭 껴안고 뽀뽀했는데 쟤가 가만히 있었단 말이야. 그래서 더더욱 류바라고 생각하고 옷을... ”

 

“ 넌 왜 또 가만히 있었는데! 저놈이 그렇게 뽀뽀하고 몸을 더듬는 것도 몰랐단 말야? ”

 

 

베르닌이 왕재수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왕재수가 억울하기 그지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 난 자고 있었어! 온천도 했지 마사지도 받았지 뱀 때문에 놀랐지 정말 피곤했단 말이야. 알잖아, 난 원래 새벽잠이 많단 말이야. 알람 맞춰도 못 일어나는데... 막 꿈꾸면서 자고 있었어. 근데 갑자기 손이 안으로 쑥 들어오잖아. ”

 

“ 안으로? 어디 안으로!! ”

 

 

왕재수가 잠자코 파자마 안쪽을 가리켰다. 베르닌이 잠깐 멍해졌다가 욕을 하면서 의자를 집어 들려고 했을 때 급하게 알릭이 소리쳤다.

 

 

“ 아니, 그러니까! 나도 놀랐단 말이야! 으악, 나 때리지 마. 맹세코 거기까지밖에 안했어. ”

 

“ 거기까지가 뭔데!!!! ”

 

“ 그러니까... 뽀뽀하고... 여기랑 여기 만지고... ”

 

 

알릭이 쭈뼛거리며 가슴팍과 허벅지 안쪽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베르닌이 폭주할까봐 잽싸게 덧붙였다.

 

 

“ 근데 여기가 판판하잖아! 그리고 여기에... 없어야 할 게 있잖아! 나도 진짜 놀랐단 말이야! 깜짝 놀라서 손 빼려는데 갑자기 얘가 깨서 비명을 지르잖아. 그냥 소리만 지른 줄 알아? 막 주먹 휘두르면서 발길질을 하는데 나 정말 갈비뼈 다 나가는 줄 알았어. 소리 듣고 사람들 오면 나 무단침입에 탈영 죄까지 덮어쓸까봐 너무 무서웠어. 그래서 할 수 없이... ”

 

“ 그래서 애를 패고 묶었단 말이야? 그 덩치에! 한 줌밖에 안 되는 애를! 저 조막만한 얼굴을 피범벅을 만들고 몸에 생채기 낸 것도 모자라서 팔다리를 그렇게 꽁꽁 묶고... 옷은 다 벗겨놓고! 이 개자식아! ”

 

아니야! 억울해! 난 옷만 벗겼어. 그것도 류바인 줄 알고 그랬던 거야. 생채기는... 쟤가 하도 몸부림쳐서 엎치락뒤치락하다 긁혀서 그런 거야. 난 쟤한테 걷어차여서 갈비뼈 최소 금갔단 말이야! 피난 것도 쟤 아니야, 나야! 쟤가 들이받아서 코 깨지는 줄 알았어! 코피가 얼마나 많이 났는데! ”

 

 

알릭이 자기 코를 가리켰다. 유심히 보니 콧구멍 아래에 피가 말라붙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왕재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 누가 덮치래. 다 자업자득이지. ”

 

“ 그럼, 그럼 넌 괜찮은 거야? 피 안 났어? 다른 데 다친 덴 없어? ”

 

“ 없다니까. 가슴팍 좀 긁힌 거랑 저 자식이 묶어서 내 백옥 같은 살결에 흠집난 거. 그 정도야. 어휴, 평소 같으면 저렇게 둔한 앤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데 자다가 깨서 몸이 잘 안 움직이잖아. 그리고 쟤가 뚱뚱해서 몸무게로 깔아 누르니까 꼼짝을 못하겠더라고. 막 버둥거리니까 저 녀석이 날 묶잖아. ”

 

“ 나 처음에 너 팔 하나밖에 안 묶었어! 근데 네가 계속 발길질하고 난리치니까 할 수 없이 묶은 거야. 그 와중에 밖에선 저 녀석이 막 고함지르면서 문 부수려고 하고. 진짜 정신없었단 말이야. ”

 

 

베르닌이 알릭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 시끄러워, 얘 입까지 틀어막았잖아! 얘가 소리 지른 건 한 번밖에 못 들었어! ”

 

“ 그건... 못 움직이게 깔아 누르니까 얘가 막 날 물어뜯잖아. 나 살점도 뜯겨나갔어! 진짜 미친 놈 같았단 말야. 하도 난리를 쳐서 이렇게 가냘픈 애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무슨 특공훈련 받은 놈인 줄 알았다고! 근데 지금 보니까 완전 계집애처럼 생겨서... 군 면제... ”

 

 

베르닌은 왕재수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지만 왕재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어나더니 다시 욕실로 들어갔다. 잠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왕재수가 조그만 상자를 들고 왔다.

 

 

“ 이 요양소 나쁘지 않네. 구급상자도 있고. ”

 

 

왕재수는 상자를 뒤져서 연고를 꺼냈다. 베르닌의 손목을 끌어당겨서 끈에 쓸린 상처에 연고를 발라 주었다. 면봉에 소독약을 묻히더니 뒤통수 어딘가를 살살 눌렀다. 머리의 상처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베르닌은 갑작스러운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 아 따가워!!! ”

 

“ 가만히 있어. 그래도 피는 많이 안 났어. 세게도 때렸네. ”

 

 

마지막은 알릭을 째려보면서 한 말이었다. 알릭은 풀이 죽어서 사과했다.

 

 

“ 미안해. 너 묶어 놓자마자 쟤가 들이닥쳐서... 쟨 심지어 덩치도 커서 한방에 제압하지 않으면 큰일 날 거 같아서 그랬어... ”

 

“ 뭘로 때린 거야? 이거 주먹으로 팬 거 아닌데. ”

 

“ 저... 미안해... 레닌... ”

 

 

알릭이 쭈뼛거리며 문가의 카펫을 가리켰다. 레닌 흉상이 박살난 채 나뒹굴고 있었다. 여기저기 석고 가루가 하얗게 묻어 있었다. 왕재수는 한숨을 쉬었지만 베르닌은 분명 그 순간 그 까만 눈이 반짝 빛나는 것을 보았다. 애초부터 맘에 안 들었던 레닌이 박살난 게 내심 즐거운 게 틀림없었다.

 

 

“ 저런 걸로 사람 머리를 내리치면 어떡해. 큰일 날 뻔 했잖아. 얘가 머리가 단단해서 망정이지. ”

 

“ 미안해. 진짜 미안해. 나 정말 고의가 아니었어. 체포당할까봐 그랬어. 그리고 분명히 류바가 있어야 하는데 침대에 웬 남자가 있으니까... 순간 류바가 바람난 줄 알았어. 딴 남자랑 놀아나는 줄 알고 눈이 뒤집혔어. 미안... 나 정말 나쁜 놈 아니야. 강간범 그런 것도 아냐. 때린 거 미안, 묶은 거 미안... 흑흑, 나 고발하지 마. 엉엉... ”

 

그럼 어떡해! 너 분명 탈영한 거잖아! 너네 부대에 전화할 거야!

 

 

베르닌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소스라친 알릭이 울면서 그나마 자기 말을 잘 들어준 왕재수의 어깨를 와락 껴안고 매달렸다.

 

 

“ 흐흑, 제발... 나 보내줘. 영창 무서워. 군대도 싫은데 영창을 어떻게 견뎌. 나 총도 안 가져왔잖아. 류바 보려고 온 건데... 류바도 없고. 어헝... 감옥 가기 싫어, 엉엉... ”

 

 

베르닌이 알릭을 홱 밀쳐서 왕재수로부터 떼어놓았다.

 

 

시끄러워. 어딜 또 껴안고 난리야! 한 번만 더 얘 건드렸단 봐! 그리고 얜 그런 거 결정할 권한 없어! 나한테 있다고! 나 KGB! 국가 보안요원이란 말야! 사정은 안됐지만 넌 탈영했잖아. 법대로 해야지! 나 법학 전공...

 

 

알릭이 사색이 되어 울음을 터뜨리려는데 왕재수가 끼어들었다.

 

 

“ 다닐, 이제 그만 해. ”

 

“ 뭘 그만 해!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아. 하지만 법이란 게 있어! 정상 참작은 좀 될 거야. 그래도 원칙은 지켜야지! 그리고... 그리고... 너 다쳤잖아! ”

 

“ 안 다쳤다니까. 코피도 쟤가 난 거라고 했잖아. ”

 

“ 생채기 났잖아! 묶인 자국 나고... 너 피부 엄청 챙기잖아. 묶여서 근육도 미워지고... 추행당하고... 아무리 고의가 아니어도... ”

 

“ 연고 발라서 금방 가라앉을 거야. 이제 그만하고 얘 가라고 하자. ”

 

“ 가라니! 어딜 가라고! 탈영병을! ”

 

“ 총도 안 가져왔잖아. 여자 친구 보고 싶어서 온 거잖아. 류바도 없고 불쌍하잖아. 아직 날 밝으려면 많이 남았으니까 지금 서두르면 대대장인지 뭔지한테 안 들키고 돌아갈 수 있을 거야. ”

 

“ 하지만... ”

 

“ 영창 간대잖아. 그거 감옥 아니야? 감옥 나빠. 사람 괴롭히고 아프게 한단 말이야. 얘 별로 잘못한 것도 없는데 감옥 가면 불쌍하잖아. 대대장이 사이코라며. 너도 맨날 너네 국장 사이코라면서 괴로워하잖아. ”

 

“ 그거랑은 달라... ”

 

“ 뭐가 달라. 군대나 너네 KGB나. 권력 자랑하고 마초 흉내 내고 사람 괴롭히는 데잖아. 당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여기 온천이잖아. 우리 쉬러 온 거잖아. 그러니까 그냥 보내주자. ”

 

“ 하지만... ”

 

“ 나 감옥에 있을 때 너무 무서웠어. 매일매일 심문하고 때리고 나쁜 짓 하고 주사도 놓고. 얼마나 아팠는데. 근데 그거보다 더 싫었던 게 뭔지 알아? 너네 국장 닮은 멍충이들한테 맨날 끌려가서 말도 안 되는 설교만 계속 듣는 거였어. 영창도 그럴 거잖아. ”

 

“ 어... 그거랑은 좀 다를 거야. 넌 정치범이었잖아. 엄청 중요한 죄수였다며. 그래서 사상 교화 받느라 그랬겠지. 군대 영창은 좀 달라. ”

 

“ 어쨌든. 잘못도 없는 사람 감옥 가는 거 싫어. 보내주자. ”

 

 

베르닌은 입을 벌렸다. 원칙과 법규, 보안요원 서약을 생각했다. 팔과 다리가 꽁꽁 묶이고 입이 막히고 옷이 벗겨진 채 버둥거리던 왕재수의 모습이 떠오르자 다시금 몸이 떨려왔다. 절대 안 된다고 하려는데 왕재수가 심각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어서 온몸이 굳는 것 같았다. 차라리 속눈썹 깜박깜박하면서 바이올린 깡패에게나 쓰던 수작을 부리면 나을 것 같았다. 싸가지 없는 반동분자 주제에 안 하던 표정을 짓고 안 쓰던 말투를 쓰니까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 보내주는 거야. 그렇지? ”

 

 

왕재수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의문문의 탈을 썼을 뿐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왕재수, 싸가지 없는 놈, 반동분자, 반체제주의자 등등의 욕설을 해줘도 시원찮을 판인데 베르닌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스페호프의 얼굴이 생각났다.

 

 

“ 알았어. 너 빨리 가. ”

 

“ 고마워. 진짜 고마워. 나 얼른 갈게. 패서 미안해. 묶어서 미안해. ”

 

 

알릭이 후다닥 일어났다. 급하게 나가려는데 왕재수가 붙잡더니 얼굴과 팔의 상처에 연고를 발라주었다. 거의가 베르닌에게 두들겨 맞은 상처였지만 왕재수가 물어뜯은 자국도 있었다.

 

 

뺨은 찢어져서 좀 꿰매야겠다. 부대 돌아가면 의무실인지 뭔지 꼭 가봐. ”

 

“ 고마워. 너 착하구나. 난 그것도 모르고 류바랑 놀아나는 줄 알고... ”

 

 

왕재수는 ‘대체 어떻게 그런 끔찍한 상상을!’이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자기 가방을 뒤져서 유산지로 꼭꼭 싼 꾸러미를 하나 건네주었다.

 

 

“ 이게 뭐야? ”

 

“ 사과파이. 아까 배고프다고 했잖아. 가면서 먹어. ”

 

“ 아아... 사과파이. 단 거 먹어본지 진짜 오래됐어. 진짜 고마워! 안 잊을게! 나중에 제대해서 사회 나오면 꼭 은혜 갚을게! 류바랑 나랑 결혼할 때 꼭 부를게... 흐흑... ”

 

“ 촌스럽게 왜 또 훌쩍거리는 거야. 빨리 가. 날 밝기 전에! 그리고 뽀뽀 연습이나 좀 해. 너 진짜 못하더라. 류바 불쌍해! ”

 

“ 으응. ”

 

 

마침내 알릭이 떠났다. 베르닌은 시계를 보았다. 새벽 3시였다. 겨울이니까 서두르면 해가 뜨기 전에 부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베르닌은 어쨌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     *

 

 

 

베르닌이 박살난 레닌 조각들을 치우는 동안 왕재수는 묶여 있던 여파로 몸이 너무 쑤신다면서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그리고는 팬티 바람으로 나와서 베르닌을 순간 소스라치게 했다.

 

 

“ 어... 야! 너 왜 옷 안 입고! ”

 

“ 나 입고 잘 옷이 없어. 잠옷 다 찢어졌잖아. ”

 

“ 그래도... 추운데 어떻게 그러고 자냐! 잠깐만 기다려! ”

 

 

베르닌은 급하게 자기 옷을 뒤져서 티셔츠를 한 장 꺼내주었다. 왕재수는 너무 촌스럽다고 툴툴댔지만 결국 베르닌의 티셔츠로 갈아입고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막 베르닌도 침대로 들어가면서 불을 끄려는데 왕재수가 발딱 일어나 앉았다.

 

 

“ 왜 그래? ”

 

“ 구급상자... ”

 

뭐? 너 다친 데 있었구나, 근데 그 자식 보내주려고 괜찮은 척 한 거지! ”

 

그게 아니고. 너 머리. 붕대 감고 자야 돼. 안 그러면 베개에 상처 쓸려. ”

 

“ 나 괜찮은데. ”

 

“ 너는 뒤통수가 안 보이잖아. 피도 나고 짓물렀단 말이야. ”

 

 

왕재수가 구급상자를 다시 뒤졌다. 붕대를 가져와 베르닌의 머리에 감아 주었다.

 

 

“ 어, 너 붕대 잘 감는구나. 의외네. 이런 거 못할 거 같은데. 군대도 안 다녀왔잖아. ”

 

“ 군대가 뭐 그리 잘났다고 다들 군대 타령이람. 나 무용수였잖아. 이 바닥은 부상당하는 일이 많아서 붕대쯤은 껌이지. ”

 

“ 그렇구나... 다리는 괜찮아? 아까 근육 다 뭉쳤다고... ”

 

“ 아직 좀 뭉쳤는데 자고 나서 온천하면 괜찮아질 거 같아. ”

 

“ 다행이다. ”

 

 

 

왕재수가 침대로 돌아간 후 베르닌은 램프를 껐다. 너무 피곤했지만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뭔가가 그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마침내 그는 조심스럽게 왕재수를 불렀다.

 

 

“ 야, 자? ”

 

“ 아니. 근데 졸려. ”

 

“ 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 ”

 

“ 뭔데? ”

 

“ 너 왜 알릭이 건드렸을 때 가만히 있었어? ”

 

“ 자고 있었다고 했잖아. ”

 

“ 아니야. 너 자고 있지 않았어. 최소한 그 자식이 기어들어왔을 땐 분명히 깼어. ”

 

“ 아냐, 나 자고 있었어.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

 

“ 아까, 알릭한테 그랬잖아. 뽀뽀 연습하라고. 진짜 못한다고. ”

 

“ 근데, 그게 뭐? 걔 진짜 뽀뽀 못해. 침만 막 묻히고. 불쌍한 류바... ”

 

“ 너 처음에 그랬잖아. 자느라고 알릭이 기어들어온 것도, 건드리는 것도 몰랐다고. 파자마 속으로 손 집어넣어서 깼다고 했잖아. ”

 

“ 맞아! 자다가 그래서 깼어. ”

 

“ 앞뒤가 안 맞잖아. 알릭은 뽀뽀부터 했다고 했어. 좋은 냄새 났다고. 처음에 껴안고 뽀뽀하고 그 다음에 옷 벗기고 만졌다고 했단 말이야. 자고 있었다면서 뽀뽀 못하는 건 어떻게 알아! ”

 

“ 어... 그런가... 에이, 둔한 주제에 어떻게 그런 머리는 잘 돌아가지? 야, 근데 너 지금 나 추궁하는 거야? ”

 

“ 아니. 그게 아니고... ”

 

“ 그러니까 내가 꼬리쳤다 이거 아냐! ”

 

“ 아니야. 절대 그런 게 아니야! 난 그냥... 왜 가만히 있었냐고! 그 자식이 건드렸을 때 깨어 있었잖아. 나 너 힘센 거 알아. 운동천재잖아. 처음에 달려들었으면 그 녀석 둔하니까 네 힘으로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어. 근데 한참 건드리게 놔둔 거잖아. ”

 

“ 아, 젠장. 몰라. 기분 좋았나보지 뭐. ”

 

“ 너는 대체... 넌 정말... ”

 

 

베르닌은 주먹으로 매트리스를 쾅 내리쳤다.

 

 

너 정말 왜 그러는 거야! 그때... 그때 투레츠키 그 자식이 건드릴 때도 가만히 있었잖아! 왜 그러는데! 그러다 진짜 나쁜 짓 당한단 말이야... 좋아하지도 않는 놈들이 건드리면 못하게 해야지 왜... 나 정말 너 때문에 돌아버리겠어! 왜 그렇게 살아, 왜! ”

 

“ 어... 너 화난 거야? ”

 

“ 답답해서 그래! 어휴! ”

 

“ 나한테 화내지 마. ”

 

“ 어떻게 화를 안 내냐! 너 분명히 내가 안 들어왔으면 그 자식이 나쁜 짓해도 가만히 있었을 거잖아! ”

 

“ 아니야, 안 그래! 걔 내 취향 아니란 말야! 그리고 내가 내 몸 어떻게 굴리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아, 피곤해. 나 잘 거야. ”

 

“ 상관있단 말야! ”

 

“ 뭐가! 왜 상관있어! ”

 

“ 나는... 나는... 그러니까... 너 감시요원... 보고서 써야 되고... ”

 

“ 쳇. 바보 멍충이. ”

 

 

 

왕재수가 담요를 끌어올리며 홱 돌아누웠다. 찬물을 끼얹은 듯 침묵이 흘렀다. 베르닌은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에 한숨을 쉬었고 어떻게든 잠을 청해보려고 했다. 그때 왕재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나는 너라고 생각했어. ”

 

“ 뭐? ”

 

“ 넌 줄 알았다고. 그래서 가만히 있었어. ”

 

 

베르닌은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너무 충격을 받아서 눈을 깜박거렸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그런 줄 알았다고? ”

 

“ 밖에 나갔었잖아. 복도 돌아보고 다시 들어온 줄 알았어. ”

 

“ 하지만... 나라고 쳐도... 왜 가만히 있었던 건데! ”

 

“ 너인 줄 알았다고 했잖아. ”

 

 

왕재수가 고집스럽게 되풀이했다. 베르닌은 미칠 것 같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 어떻게, 어떻게 나라고 생각할 수가 있어? ”

 

“ 방도 같이 쓰니까 너밖에 들어올 사람 없었고. 뽀뽀도 엄청 못해서. 너 책상물림이잖아. 애인도 별로 안 사귀는 거 같고. ”

 

“ 그게 문제가 아니고... 나였으면, 그럼 그런 짓 해도 된다는 거야? ”

 

“ 응. ”

 

“ .... 왜? 왜? ”

 

“ 뭘 새삼스럽게 묻니? 전에 얘기했잖아. 너 조기출근 늦게 퇴근 벌칙 받았을 때, 늦게 출근 조기퇴근이 직장인의 로망이라고 징징대서 내가 해결해줬잖아. 너네 국장한테... ”

 

“ 야, 그게 해결이냐! 그때 네가 나랑 아침에 하고 저녁에 하고 밤에 한다고 뻥쳐서 나 정말 지금까지 얼마나 헛소문에 시달리는 줄 알아!! ”

 

“ 내가 그때 그랬잖아. 내가 해주지도 않으면서 거짓말해서 기분 나쁜 거면 해줄 수 있다고. ”

 

“ 어... 하지만! 내가 언제 해 달랬어! 나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 난 여자가 좋다고!!! ”

 

누가 뭐래. 나도 그런 줄 알았지. 넌 나타샤 좋아하고 렐랴 좋아하니까 그런가보다 하고 있었지. 근데 침대로 기어들어오니까... 또 아닌가보다 했지. ”

 

“ 야! 그게 말이 되냐! 그리고... 좋아, 그렇다 쳐! 나라고 생각했다 쳐!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해! 나라고 괜찮은 게 어딨냐고! 내가 바이올린 아저씨도 아니고! 너랑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그렇게 아무 남자나 건드리게 놔두면 안 된... ”

 

“ 너는 아무 남자가 아니잖아. ”

 

“ 뭐? ”

 

 

왕재수는 입을 다물었다. 베르닌은 너무 어지럽고 정신이 없었다. 불을 켜야 하나 싶었다. 저 골치 아픈 녀석을 일으켜 앉혀 놓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빙빙 꼬지 말고 제대로 말해보라고 추궁하고 싶었다. 동시에 겁도 났다. 그때 왕재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 난 네가 국장 명령을 받은 줄 알았어. ”

 

“ 뭐? 국장 명령? 그건 또 무슨 소리야! ”

 

“ 온천 온 거. 국장이 보낸 거잖아. ”

 

“ 어...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

 

“ 여기 높은 사람들 오는 요양소야. 난 이런 데 많이 다녀서 척 보면 알아. 아까 류바도 그랬어, 너 여기 올 순번 아니라고. 근데 심지어 갑자기 금요일 휴가에, 주말 이용권까지. 너 같은 말단은 그런 특권 죽었다 깨나도 못 얻어. 그러니까 국장이 손을 쓴 거야. 그 앞잡이 사이코가 순수한 호의로 너한테 그런 걸 베풀어줄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이건 명령이었겠지. 특별 이용권을 내주고 나랑 같이 온천 가라고 한 거야. 감시든 뭐든 뭔가 목적이 있었겠지.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뭐 난 상관없어. 온천 좋아하니까. 네가 무슨 음모 꾸밀 그릇이 되는 애도 아니고. ”

 

“ 아... 어... 이용권은 국장이 준 거 맞지만... 그런 거 아니야. 진짜 그런 거 아니었어... 난 사실... 투레츠키... ”

 

“ 근데 아까 알릭이 들어와서 막 더듬고 뽀뽀할 땐 진짜 넌 줄 알았어. 그래서 생각했지. 아, 이거구나. 스페호프가 이러라고 명령했나보다... ”

 

“ 국장이 왜 그런 명령을 해! ”

 

“ 몰라. 내가 알게 뭐야, KGB 앞잡이 속셈을 내가 어떻게 다 아니. 사진이라도 찍어놓고 싶었나보지 뭐. ”

 

“ 그런,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단 말이야? 너 미쳤어? ”

 

“ 바보 같은 생각 아니야. KGB 있는 놈들은 가끔 그런 짓 한단 말이야. 옛날에 모스크바 아저씨도 나한테 그렇게... ”

 

“ 절대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그리고... 좋아, 진짜 아니지만 설령 그렇다 쳐! 내가 국장 명령 받고 널 추행... 덮친다고 쳐! 그걸 알면서도 왜 가만히 있냐고! ”

 

그럼 어떻게 하니. 내가 못하게 하면 넌 국장한테 혼날 거 아냐. 임무 수행 못했다고. 그럼 또 징징댈 거고 잘리니 마니 벌목공도 못하게 될... ”

 

 

베르닌은 왕재수를 두들겨 패서 입을 틀어막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머리가 아팠다. 눈꺼풀이 뜨거웠다. 속이 울렁거렸다.

 

 

“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그 자식이 만지작거릴 때 알았어. 너 아니라는 거. ”

 

“ 그건 어떻게 안 거야? 캄캄했잖아. ”

 

“ 손. 너는 손 크고 두툼하잖아. 서류 작업해서 손가락 끝에 굳은살도 있고. 대신 털은 없잖아. 근데 여기로 손이 쑥 들어왔는데 털이 숭숭 돋아 있더라고. 손도 작고. 그래서 깜짝 놀라서 소리 지른 거야. ”

 

“ 나 국장 명령 받은 거 아니야. 아프다고 뻥쳤더니 국장이 온천 이용권 준 거야. 애초부터 내가 갈 생각도 아니었어. 너랑 바이올린 아저씨 보내려고 한 거였어. 너 폐렴 때문에 아팠잖아. 그리고... 너 금요일에 투레츠키한테 간다고 해서 그랬어. 그 자식이 찝찝하게 구니까 혹시라도 안 좋은 짓 할까봐. 거기 가느니 온천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랬던 거야. 국장 명령 아냐. 행여 그런 명령 내린다 해도 절대 그런 거 안 해! 내가 국장이야? 나 절대 사람을 그런 식으로 다루진 않아! 아무리 네가 싸가지 없는 놈이라 해도 그런 짓은 안 한단 말이야! ”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잠이 싹 달아났다. 한참 동안 말없이 천정을 쳐다보며 누워 있었다. 왕재수도 말이 없어서 잠들었나 싶었는데 어둠 속에서 조그만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너 화났어? ”

 

“ 조금. ”

 

“ 미안. 국장이 명령했다고 오해해서. 그때 그 자식이 전화로 협박해서 내가 민감해져 있었나봐. ”

 

“ 아니야. 우리가 너 감시하니까... 우리가 나쁜 거야. ”

 

“ 그건 그래! 너네 나빠! ”

 

“ 앞으로는 못하게 해. ”

 

“ 뭐를? ”

 

“ 누가 그러든! 넌 그렇게 잘난 척하면서 왜 더러운 짓 당해도 가만히 있는 거야! 바이올린 아저씨나 네 맘에 드는 남자 아니면 못 건드리게 하란 말이야. 하지 말라고 말하든가, 패든가! ”

 

“ 근데 난 하다 보면 웬만하면 또 좋아져서... 특히 성감대를 살살 만져주면... ”

 

“ 농담하지 마! 너 분명히 그랬잖아, 취향 아닌 애랑 안 한다고! ”

 

“ 그건 그런데 또 안 그럴 때도 있어서... ”

 

“ 약속해. 이제 안 그런다고! ”

 

“ 아휴, 시골뜨기. 책상물림. 그게 약속한다고 되냐. ”

 

“ 약속하라고. 안 그러면 창밖으로 밀어버릴 거야. ”

 

“ 알았어. 약속할게. 나 이제 잘래. 너무 졸려. 배도 고프네. 괜히 사과파이 줘버렸어. 아침에 차랑 곁들여 먹으려고 가져온 건데. 아깝다... ”

 

“ 카페에 사과파이 있었어. 내일 거기 가서 먹자. ”

 

“ 으응... ”

 

 

왕재수는 졸린지 뭐라고 웅얼거리더니 곧 잠이 들었다. 베르닌은 몇 분 정도 더 천정을 쳐다보며 복잡한 머리를 정리해보려고 했지만 곧 무거운 졸음이 쏟아졌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FIN

- 2015. 3. 9 ~ 3. 13 -

 

 

 

---

 

14편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다음 이야기는 15편에서. 그건 다음주 쯤..

 

**

 

베르닌의 보안요원 연수 얘기라든지, 알릭의 군대 얘기 등등은 사실 소련의 KGB 훈련이나 군 제도와 완전히 일치하는 건 아니고, 이 시리즈가 원래 재미로 쓰는 거다 보니 우리 나라 얘기라든지 이것저것 내가 섞었다. 그래도 기본적인 골자는 비슷하다.

 

**

 

14편은 지금까지의 서무 에피소드들과는 기술이나 접근 방식이 달라서 사실 본편이나 전에 쓴 추리소설 외전에 더 가깝다. 왕재수의 성격이나 말투도 그렇고. 코미디보다는 정극에 가깝다. 그래서 이 에피소드를 쓰고 나서는 이 시리즈의 정체성에 대해 좀 생각해보게 되었다. 근데 뭐... 별로 중요하지는 않다. 어차피 내가 좋아서 쓰는 시리즈인데 뭐.

 

사실 여기서 왕재수와 베르닌은 막판에 자기들끼리 추리를 해대면서 살짝 홈즈와 왓슨 티를 내고 있기도 하다 :) 똑똑한 왕재수와 고지식한 베르닌 ㅠㅠ

 

**

 

그럼 다음 이야기는 15편에서. 15편에서는 베르닌이 새로운 미션을 받게 되고.. 또 고생문이 열린다~ (근데 난 왜 좋아하고 있지 ㅋㅋ)

 

** 댓글은 언제나 힘이 됩니다 :)

 

 

:
Posted by liontamer

 

우여곡절 끝에 어느새 13편까지 온 서무의 슬픔 시리즈.

 

12편에서 특별감사로 단단히 고생을 한 우리의 말단 직장인이자 고지식한 단추눈 청년 다닐 베르닌. 그는 반드시 금요일 휴가를 내야만 한다.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매우 피곤한 목요일이다. 아직 주말이 되려면 하루가 더 남아 있다. 고생바가지 베르닌과 남을 잘 부려먹지만 예쁘니까 다 용서되는 왕재수의 이야기로 조금이라도 힘을 내시길~~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1년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신년 특별감사를 마친 후 베르닌은 심신도 지친데다 왕재수가 전설의 서무를 찾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어떻게든 금요일 휴가를 내고 싶어 안달이다. 과연 무시무시한 스페호프는 그의 휴가원을 통과시켜 줄 것인가...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13

 

 

서무의 슬픔

-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베르닌은 금요일에 왕재수가 바냐 투레츠키의 암시장에 가지 못하도록 보르쉬와 생선찜과 사과파이를 준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월요일까지 따뜻했던 날씨가 돌변해 화요일부터 다시 눈보라가 몰아쳤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매주 수요일마다 다른 도시에서 식료품을 싣고 들어오던 트럭들이 폭설 때문에 강 너머에서 막혀버렸다. 갑작스러운 추위로 주민들이 텃밭에서 재배해 팔던 야채도 모조리 얼어버렸기 때문에 그 흔한 비트나 양파 한 알 구할 수가 없었다.

 

생선 가게에 갔더니 트럭이 안 와서 꽁꽁 얼어붙은 동태 토막 몇 개와 게 다리 몇 개만 남아 있었는데 상태가 좋지 않았다. 왕재수는 원래부터 입맛이 까다로운데다 특히 생선의 경우 선도를 따졌고 조금이라도 비린내가 나면 안 먹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생선찜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게다가 동네 빵집은 ‘기술적인 문제’로 일주일간 휴무라는 쪽지를 내걸고 문을 닫아버렸다. 그나마도 흑빵과 샌드위치 등속은 다른 매점에서도 팔고 있었지만 사과파이나 케익을 파는 곳에 가려면 강을 건너야 했다. 즉, 보르쉬와 생선찜과 사과파이는 모두 불가능했다.

 

만두라도 빚어볼까 했지만 정육점에도 고기가 없었다. 양고기만 남아 있었는데 베르닌은 이제껏 왕재수가 양고기를 먹는 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기껏 힘들여 만두 빚고 쪄놨는데 양고기 싫다면서 안 먹으면 말짱 도루묵일 테니까.

 

베르닌은 목요일 내내 사무실에 앉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먹을 것으로 붙들어놓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어쨌든 왕재수가 투레츠키에게 가는 것만은 막고 싶었다. 투레츠키가 그에게 잘 대해주긴 했지만 건달이나 다름없었고 왕재수에게 집적대는 태도도 심상치 않았다. 왕재수야 아저씨들과 아무데서나 응응을 즐기는 놈인데 자기가 왜 이렇게 과민반응하나 싶기도 했지만 투레츠키만은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코즐로프에게 가서 얘길 할까 싶었지만 그는 바이올린 깡패와는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왕재수가 암시장에 드나든다는 사실을 여기저기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금요일 휴가는 결재를 받은 상태였다. 감시분석부장은 감사 때 베르닌이 엄청나게 고생을 한데다 하마터면 선배들의 잘못을 모두 뒤집어쓸 뻔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차마 그의 휴가원을 반려하지 못했다. 오후에 직원들의 근태에 대해 관심이 지대한 스페호프가 직접 베르닌을 호출하는 불상사가 벌어지기는 했지만.

 

“ 자네 왜 갑자기 휴가를 냈나? 그것도 금요일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 ”

 

“ 예? 저... 그게... ”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서무가 금요일에 휴가를 내다니! 서무가 지켜야 할 첫 번째 미덕은 월요일과 금요일에 가급적 휴가를 내지 않는 것이야! 어디서 언제 외부 자료 요구가 들어올지 모르고... ”

 

아, 저... 그때 강 건너다 빠졌을 때 제가 좀 다쳐서... 온천에 좀 가려고... ”

 

베르닌은 어버버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생각나는 대로 둘러댔다. 그러자 스페호프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 다치다니! 언제 말인가! 아니, 혹시 그때? 불여우 암살하려고 강에 밀어 넣다가... 그때 자네도 빠졌단 말인가? 많이 다쳤었나? ”

 

“ 어... 그렇지는 않은데요. 얼음 사이에 끼어서... ”

 

그랬군! 당과 국가를 위해 헌신하며 그 반동분자를 처치하려다 부상을 당했었던 거군! 그런 몸으로도 일주일 넘게 감사를 받으며 야근을 했구먼. 자네야말로 진정 우리 공산당과 소비에트의 모범청년이었어. 그 망할 불여우를 죽이려다 낭패를 봤군. 쯧쯧, 얼음 사이에 끼어서 다쳤다면 뼛속까지 한기가 스몄을 텐데 온천에 가야지. 암, 온천에 가야 하고말고. 그런데 온천에 가려면 요양 허가증이 있어야 할 텐데 그건 받았나? ”

 

“ 어, 저... 아직 못 받았습니다만... ”

 

“ 아니, 허가증도 없이 어떻게 온천에 가려고 했나! 잠깐 기다려보게! ”

 

 

스페호프는 총무부서에 전화를 해서 요양소 허가증에 대해 몇 마디 물었다. 그러더니 호통을 한번 치고, 잠시 후 다시 누그러진 목소리로 몇 마디 나눈 후 전화를 끊었다.

 

 

“ 흠, 자네 차례는 아직 멀었더군. 하지만 당을 위해 그렇게 노력하다 부상을 당한 건데 당연히 특별 이용권을 내줘야지!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2박 3일 이용권을 내주라고 했네. 총무부에 가서 받아가게. 요양소가 어디 있는지는 알지? ”

 

“ 아, 예! 감사합니다! ”

 

“ 온천에 푹 담그고 마사지도 받고 반드시 나아서 오게! 몸을 잘 관리해야 하네, 그래야 조만간 그 불여우를 제대로 처치할 수 있지. 참, 이용권은 2인용일세. 그 불여우를 데려가는 것도 좋겠군! ”

 

“ 예? 아니, 왜 걔를... ”

 

“ 그래야 그 녀석이 자네를 더 신뢰하게 될 것 아닌가! 온천도 같이 하고 친한 척하면서 돌봐주란 말일세. 아침에도 하고 저녁에도 하고 밤에도 해주는 건 기본이지. 그래야 조만간 더더욱 손쉽게... ”

 

“ 어... 예... ”

 

 

베르닌은 살짝 얼이 빠져서 국장실을 나왔다. 휴가를 허락받았을 뿐만 아니라 선배들에게만 차례가 돌아가는 특별 요양소 이용권까지 얻다니 꿈만 같았다. 검은 숲 깊은 곳에 있는 온천 요양소는 가브릴로프 주민들에게는 최고의 휴양지였고 다른 도시 노멘클라투라들도 찾아오는 곳이었다. 특히 이런 한겨울에는 이용권 구하는 것이 더욱 하늘의 별 따기였다. 마침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재수와 코즐로프에게 온천 이용권을 주는 것이다! 그러면 왕재수가 투레츠키에게 가지 않을 것이고 그는 굳이 왕재수를 돌봐주지 않고도 3일 연휴를 즐길 수 있다! 한 마디로 일석이조였다!

 

그는 총무부에 가서 이용권을 수령했고 쌓인 일을 그대로 미뤄둔 채 정시에 퇴근했다. 곧장 극장으로 차를 몰고 갔다. 극장은 계속된 폭설과 수도관 파열 때문에 주말까지 모든 공연이 취소된 상태였다. 하지만 왕재수는 계속 출근하고 있었다. 파이프 수리 중인 지하실과 기관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수리공들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화요일부터는 공연이 올라갈 수 있게 해놓으라고 불벼락을 내리고 있었다. 야단을 치다가 이따금 기침도 했다. 안색이 안 좋아보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왕재수의 팔을 잡아끌고 1층으로 올라왔다.

 

“ 왜 그래! 공사하는 거 봐야 된단 말이야! ”

 

“ 지하실 공기도 안 좋고 습하고 추운데 거기 얼마나 있었던 거야! ”

 

“ 한 시부터. ”

 

미쳤냐! 너 폐렴 두 번이나 걸렸었잖아! 도지면 어쩌려고 그래. 그리고 네가 기술자도 아니면서 옆에서 본다고 뭐가 해결돼? 윗사람이 닦달하면 잘 되던 것도 더 안 된단 말이야. 그냥 기술자들한테 맡기고 넌 집에 가! 공연도 어차피 다 취소되고 발레단 애들도 하나도 안 나왔구만 너 혼자 뭐하는 거야! ”

 

“ 발레단 애들 나왔었어! 점심때까지 3층 연습실에서 내가 연습시키고 돌려보냈단 말이야. 그리고 나는 무용수가 아니라 감독이잖아. 극장이 이 꼬라지가 됐는데 당연히 남아서 지켜봐야지! 가뜩이나 애들 수준도 별로인데 시설까지 이 모양이니... 걸핏하면 파이프 터지고 물 새고. 난방도 안 되고. 이러니 관객들이 외면하지. 아, 머리 아파. 속상해. ”

 

“ 뭘 관객들이 외면해. 요즘 맨날 매진이던데! ”

 

“ 그건 내 이름값 때문이지 진짜 공연 보러 오는 게 아니란 말이야. 공연도 엉망, 극장도 엉망... ”

 

“ 너 여기 관객들 수준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냐? 우린 여태 이 정도 공연들도 잘만 봤는데. ”

 

좋은 거 보여주면 관객 수준은 올라가게 돼 있단 말이야! 욱, 콜록콜록... ”

 

왕재수가 심하게 기침을 했다. 베르닌은 어쩐지 속이 상했고 답답해졌다.

 

“ 야, 너 오늘 뭐 먹었어! 점심 먹었어, 안 먹었어? ”

 

“ 먹었어, 극장 카페에서. ”

 

“ 뭐 먹었는지 대! ”

 

“ 게살 샐러드, 요구르트... ”

 

“ 아침엔! ”

 

“ 사과... ”

 

“ 사과 몇 개? ”

 

“ 한 개... ”

 

“ 그게 전부야? 간식은! 간식 안 먹었어? ”

 

“ 간식 먹을 시간이 어디 있어! 애들 연습시키느라 정신없었어. 아직도 점프하다 자빠지는 놈들이 태반이라고. 그리고 인부들이 하도 게으름피우고 보드카 마시면서 딴 짓을 해대서 옆에서 감시해야 했단 말이야. ”

 

“ 너 이리 와. 안되겠어. ”

 

 

베르닌은 왕재수를 질질 끌고 가서 차에 태웠다. 곧장 항아리 닭고기 식당으로 향했다. 2인분을 주문했다. 싫어하는 왕재수에게 억지로 항아리를 들이밀고 살코기를 포크로 푹 찍어서 손에 쥐어주었다.

 

 

“ 먹어! 이거 다 먹기 전까지는 집에 못 가. ”

 

“ 아, 진짜 싫어! 월요일에도 발렌티나 누나랑 오느라고 먹기 싫은 거 억지로 먹었단 말이야! ”

 

“ 국물까지 다 닦아먹기 전까진 못 일어날 줄 알아라. ”

 

“ 하지만... ”

 

“ 먹으라고 했다. 안 먹으면 감독실하고 너네 집 침실에 고양이 풀어서 바퀴벌레랑 곱등이 물어오게 할 거야.

 

“ 악마. 살인자... ”

 

 

왕재수는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저항도 못하고 포크에 꽂혀 있는 살코기를 먹었다. 베르닌이 흑빵에 국물을 잔뜩 묻혀서 건네주자 멍하게 그것도 먹었다. 고양이와 바퀴벌레와 곱등이가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닭다리를 밀어주자 처량한 눈으로 베르닌을 쳐다봤다.

 

 

“ 기름... 껍질 벗기고 먹으면 안 돼? ”

 

안 돼. 껍질 다 먹어!

 

“ 나 기름기 많으면 속 울렁거려서 못 먹어. 진짜야. 거짓말 아냐, 제발 바퀴벌레는 안 돼... 어헝... ”

 

“ 그럼 기름덩어리만 떼어내. 두께 5밀리 이상만. ”

 

“ 너 이상해졌어. 밥 먹는 것도 막 간섭하고. 5밀리는 또 뭐야... ”

 

 

왕재수는 포크와 나이프로 노란 기름덩어리를 제거한 후 껍질이 붙어 있는 닭다리를 발라 먹고 나머지 살코기와 감자와 당근을 건져 먹었다. 이미 자기 몫을 다 해치운 베르닌은 왕재수가 제대로 먹는지 안 먹는지 감시했다. 건더기는 다 먹었지만 국물이 절반 이상 남아 있었다.

 

 

“ 마셔. ”

 

“ 지방질... 나트륨... ”

 

“ 고양이 풀 거야. ”

 

왕재수는 베르닌을 노려보더니 조그만 항아리를 기울여 국물을 조로록 마셨다. 매우 기분 나쁜 표정이었지만 뺨에는 발갛게 혈색이 돌아왔고 눈도 다시 반짝거렸다.

 

“ 너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월요일엔 발렌티나 누나가 반가워서 그 방에 들어갔던 거야! 이런 느끼한 거 안 사줘도 된단 말이야! ”

 

“ 누가 뭐래. 하여튼 너 아직 다 안 나은 거 같아. 온천에나 가. ”

 

“ 온천? 여기 온천 있어? 하긴 시골이니까. ”

 

“ 야, 자꾸 시골 타령 하지 마! 우리 가브릴로프 온천은 연방에서도 유명하단 말이야! 온천이 몸에 얼마나 좋은데! ”

 

“ 나도 알아! 나 온천 진짜 좋아해. 무용수들 온천이랑 마사지 사족 못 써. 예전엔 우리 아저씨들이랑 카를로비 바리에 온천하러 다녔단 말이야. ”

 

“ 여기도 고위층이랑 공무원만 가는 요양소 있어. 나 이번에 이용권 생겼는데 내일부터 일요일까지야. 너 거기나 다녀와. 바이올린 깡패랑 같이 가면 되겠네. ”

 

“ 아. 로만이랑 가면 진짜 좋겠다. 근데 로만은 여동생이 결혼한대서 못가. 그 집 대가족이라 뭔가 다들 모여서 잔치하고.. 만두 빚는대. ”

 

“ 쳇, 옛날 사람... 또 모여앉아서 만두 예쁘게 빚는 여자 타령하겠군.

 

“ 나 온천 가고 싶은데... 꼭 내일 가야 하는 거야? 다음 주는 안 돼? ”

 

“ 이용권 기간이 있어서 내일부터 일요일까지야. ”

 

“ 그럼 안 되겠네... 그냥 너 가. 난 내일 바냐한테나 가보지 뭐. 내일 좋은 거 들어온다고 했는데. ”

 

“ 앗, 안 돼! 너 그냥 나랑 가자. 온천... ”

 

“ 나야 상관없지만... 넌 금요일에 출근하잖아. ”

 

“ 휴가 얻어서 괜찮아. 그럼 짐 다 챙겨놔. 내일 아침 7시에 출발하게. ”

 

“ 어... 그렇게 빨리? 12시쯤 가면 안 돼? 바냐한테 들렀다가... ”

 

“ 안 돼! 눈 와서 길도 막히고 힘들어. 아침에 가야 물이 좋지! ”

 

“ 하긴 그렇겠다. 알았어. 신난다! ”

 

 

*     *     *

 

 

금요일 아침 7시에 베르닌은 왕재수를 데리고 온천 요양소로 떠났다. 요양소는 드넓은 검은 숲 지대에서도 북쪽 외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베르닌의 걱정과는 달리 요양소 가는 길은 눈이 많이 녹아서 그렇게 운전이 힘들지는 않았다. 아마 노멘클라투라 계층이 많이 이용하는 요양소라 일찌감치 제설작업을 해서 그런 것 같았다. 오히려 구시가지보다 제설이 잘 된 길도 있었다.

 

요양소에 도착하니 9시였다. 로비는 벽에 모자이크 장식도 되어 있고 조각상들도 많아서 제법 호화스러웠다. 총까지 차고 제법 그럴싸해 보이는 제복 차림의 경비원도 하나 있었다. 비록 문가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긴 했지만. 카운터로 갔더니 주근깨투성이의 빨간 머리 여직원 하나가 껌을 씹으며 앉아서 잡지를 읽고 있었다. 베르닌이 바로 앞까지 갔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몇 분 기다리다가 베르닌은 헛기침을 했다.

 

“ 저, 요양소 예약한 사람인데요. 오늘 오전부터 일요일까지... ”

 

“ 아직 접수 시간 안 됐어요. 기다려요. ”

 

“ 언제부터인데요? ”

 

“ 10시요! ”

 

“ 눈 때문에 서둘러서 일찍 왔는걸요. 바깥도 춥고. 지금 자리에 계시는데 접수만 해주시면 안 되나요. ”

 

“ 안 돼요! 10시부터 시작이라고요. 누가 빨리 오래요? 그냥 거기 앉아서 기다려요! ”

 

“ 저... 이 로비는 너무 추운걸요. 같이 온 친구가 폐렴에 걸린 적이 있어서 추운 데 오래 있으면 안 돼요. 열쇠만 주시면 방에 들어가 있을게요. ”

 

그거야 당신들 사정이죠! 난 10시부터 근무라고요. 기다려요!

 

베르닌은 화가 나서 항의를 하려고 했다. 그때 로비 여기저기를 구경하고 있던 왕재수가 다가와서 물었다.

 

“ 왜? 접수 지금 안 되는 거야? ”

 

“ 응. 10시부터래. ”

 

지금 해주시면 안돼요? 여기 너무 추워요.

 

여자는 짜증을 왈칵 내려고 했지만 왕재수를 보더니 갑자기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말을 더듬었다.

 

“ 아... 어, 원래는 안 되는데... 로비가 춥죠. 음... 이름이 어떻게 되죠? ”

 

“ 야, 네 이름으로 예약한 거 아냐? ”

 

“ 다닐 베르닌이요. ”

 

“ 베르닌. 아, 보안위원회. 흥! 그렇군요. 당신 젊군요, 아직 여기 올 순번이 아닌 것 같은데. 흠... 그리고 당신은요? ”

 

 

베르닌은 여자의 말투가 자신과 왕재수를 대할 때 180도 다를 수 있다는 사실에 매우 감탄했다.

 

“ 야스민이요. 미하일 야스민. ”

 

“ 야스민, 야스민... 앗, 당신! 맞아, 어쩐지 어디서 본 것 같았어! 어머나! 백조의 호수... 텔레비전에서 봤어요! 어머! 어쩐지 오늘 꿈자리가 좋더라니! 우와, 당신 실물이 더 멋있네요! 사인 좀 해주세요! ”

 

왕재수는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 태연하게 사인을 해 주었다. 여자는 완전히 무장 해제되어 황홀감에 잠긴 눈빛으로 어디선가 카메라를 찾아내더니 사진을 같이 찍자고 통사정을 했다. 왕재수가 승낙하자 여자는 베르닌에게 카메라를 들이밀며 빨리 찍으라고 명령했다. 베르닌은 슬슬 짜증이 치밀었지만 사진을 찍어 주었다. 여자는 뛸 듯이 좋아했고 묻지도 않았는데 술술 떠들었다.

 

 

“ 전 류바예요. 짜증내서 미안해요. 원래 오늘부터 일요일까지 저쪽 군부대에서 장교들이 여기로 신년 단합대회를 하러 오기로 되어 있었거든요. 남자친구가 1대대장 운전병이라서 같이 오면 밤에 데이트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무슨 장군이 특별 시찰을 나온다고 해서 다 취소된 거예요. 불쌍한 알릭. 주말만 고대하고 있었을 텐데. 그래서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홧김에 주말 근무는 바꿔버렸어요. 장교들 예약이 취소돼서 오늘 손님이 아무도 안 올 줄 알았거든요. 내일부터는 마르파 아줌마가 있을 거예요. 제가 얘기해 놓을게요, 잘 챙겨주라고. 세상에, 이렇게 유명한 분이 오시다니. 그것도 이렇게 미남일 줄이야!

 

 

베르닌은 너무나도 지루해서 빨리 열쇠나 달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왕재수는 싸가지 없는 성격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여자의 말은 중간에 끊는 법이 없었다. 류바가 떠드는 걸 다 들어준 후 그녀가 청하는 대로 사인도 한 장 더 해주었다. 류바가 친구들에게 전화해 자랑할 거라고 하자 왕재수는 베르닌이 지금까지 본 적도 없는 환한 미소와 부드러운 눈빛을 동시에 발산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쉿, 제가 여기 와 있는 건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면 안 될까요? 저는 여기 쉬러 온 거라서요. ”

 

“ 어머나, 물론이죠! 그래요, 좋아요... 저만 간직할게요! 아아, 어쩜 좋아. 난 남자친구가 있는데... 당신 너무 멋있어요. 잠깐만요, 열쇠 드릴게요. 어차피 장교들도 예약 취소했고 주말엔 두 분이랑 노인네들 몇 명밖에 손님 없으니까 좋은 방으로 드릴게요. 음, 그래... 5층으로... 장교들한테도 안 내주고 살짝 남겨뒀던 방인데... 여기 열쇠요. 식당은 1층에 있고요, 식사 시간은 8시, 12시, 6시예요. 어머, 근데 일찍 나오느라 아침도 못 먹었겠군요. 카페로 가시면 간단한 스낵이 있어요. 손님 없다고 아줌마 놀고 있을 텐데 제가 전화해 드릴게요. 온천은 저쪽... ”

 

 

류바는 시설 설명을 아주 친절하게 늘어놓았다. 심지어 카운터도 비워놓고 둘을 방까지 안내해 주기까지 했다. 베르닌은 이제껏 그렇게 좋은 방에 묵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널찍한데다 윤이 나는 나무 마루가 깔려 있었고 침대 아래에는 푹신한 카펫이 놓여 있었다. 심지어 거실까지 딸려 있었다! 요양소는 제국 시절 귀족의 별장이었기에 벽에도 모자이크 장식이 되어 있었고 그림도 많이 걸려 있었다. 화장대와 옷장, 콘솔도 있었다. 외국인들이나 묵는 고급 호텔처럼 보였다. 양쪽에 하나씩 놓여 있는 침대도 상당히 폭이 넓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베르닌과는 달리 왕재수는 가방을 바닥에 집어던지더니 근사한 가죽소파에 주저앉아 다리를 쭉 펴며 투덜댔다.

 

“ 망할 놈의 레닌. 저거 부수면 너네 국장이 나 잡아가겠지? ”

 

눈을 돌려보니 책상 위에 레닌 석고 흉상이 있었다. 베르닌은 고개를 저었다.

 

“ 괜히 그런 짓 하지 마. 가뜩이나 국장이 너 싫어하는데. ”

 

왕재수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무리 봐도 레닌이 맘에 안 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곧 또 들떠서 소리쳤다.

 

“ 우리 빨리 뭐 좀 먹고 온천 하러 가자! ”

 

 

*     *     *

 

 

베르닌은 입사 이래 처음으로 아무 생각 없이 너무나도 편안하고 즐겁게 휴양을 즐겼다. 과연 특권층 위주로 돌아가는 요양소라 그런지 시설도 좋았고 온천수는 따뜻하고 매끌매끌했다. 검은 숲에는 다른 온천 지대도 있었고 노천 온천도 몇 군데 있었지만 이곳은 급이 틀렸다. 온천에 몸을 담가본 것이 얼마만인지 기억도 안 날 지경이었다. 기껏해야 항상 피로에 절어 늦게 귀가한 후 녹물 냄새 나는 수돗물로 샤워를 하고 잠들 뿐이었으니까.

 

뜨끈뜨끈한 온천에 들어가 사지를 쭉 늘어뜨리자 온몸이 노곤해지면서 천국에 온 기분이었다. 야근과 감사로 인해 누적된 피로와 스트레스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 같았다.

 

왕재수는 과연 무용수 출신이라 온천에 많이 다녀본 듯했다. 온천에 좀 들어가 있더니 어딘가로 마사지를 받으러 간다며 사라졌다. 한 시간 쯤 후 다시 나타나서 베르닌을 잡아끌었다.

 

“ 야, 여기 마사지랑 스파 괜찮아. 가서 좀 받아. ”

 

“ 내가 노인네냐, 마사지를 받게. ”

 

“ 넌 좀 받아야 돼. 맨날 책상 앞에 앉아 있기만 하잖아. 척추도 휘었고 어깨도 구부정하고... 전신 마사지 좀 받아. 잘해주더라. ”

 

베르닌은 내키지 않았지만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 마사지사가 여자라서 1차로 기절초풍했고 아주머니가 몸 여기저기를 꾹꾹 누를 때마다 너무 아파서 2차로 크나큰 고통을 겪었다. 비명을 질러대자 마사지사가 투덜댔다.

 

“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엄살이야! 가만히 있어! 많이도 뭉쳤네. ”

 

“ 아... 으악! 아악! 너무 아파요! ”

 

“ 여기 뭉쳐서 그런 거야! 운동 부족이구만. 나이는 젊은데 몸은 벌써 40대는 된 것 같네! 어휴, 척추도 휘었어! 쭉쭉 좀 펴 봐! ”

 

으아악!

 

 

공포의 마사지가 끝난 후 베르닌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걸어 나왔다. 왕재수가 발그레해진 얼굴로 공용 풀 맞은편의 의자에 앉아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베르닌은 원망에 가득 찬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 너 때문에 죽는 줄 알았어! 뼈가 다 부러지는 것 같았어! ”

 

“ 시원하고 좋잖아. 근육도 다 풀리고. ”

 

“ 나랑 너랑 같냐! 넌 몸 쓰는 직업이고 난 사무직인데! ”

 

“ 그러니까 더더욱 받아야지. 난 척 보면 알아. 너 지금 심각해. 이제부터 운동해야 돼. 마사지도 꼬박꼬박 받고. 안 그러면 신체 나이는 40대로 전락한다고! 나중에 디스크도 생기고 관절도 안 좋아질 거야. ”

 

베르닌은 마사지사의 말이 생각나서 뜨끔했다.

 

“ 어쨌든... 기껏 온천해서 풀렸는데 마사지 때문에 삭신이 쑤시잖아. ”

 

왕재수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우유를 한 팩 건네주었다.

 

“ 어, 웬일로 네가 나 먹을 걸 챙겨놨냐! ”

 

“ 내가 왜! 우유 사러 갔더니 카페 아줌마가 나 예쁘다고 두 개 준 거야! ”

 

“ 하긴 그랬겠지. ”

 

베르닌은 팩을 뜯어서 우유를 마셨다. 목욕 후 마시는 차가운 우유가 꿀맛이었다. 시원하고 고소하고 달콤했다.

 

왕재수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요양소 뒤뜰로 나가더니 팔짝팔짝 뛰고 잠깐 발레 스텝까지 밟았다. 그 해맑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베르닌은 저 싸가지 없는 녀석이 틱틱대지만 않고 매일 저러고만 있으면 자신도 한결 편해질 텐데 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좀 춥긴 했지만 하늘도 파랬고 햇살도 쨍해서 좋은 날씨였다. 왕재수는 숲으로 산책을 하러 가고 베르닌은 방에 올라가서 쉬기로 했다.

 

“ 너 아무리 늦어도 5시까지는 들어와야 돼. 여긴 숲속이라 금방 캄캄해지니까. 저녁도 6시에 먹어야 하고. ”

 

“ 알았어. ”

 

“ 야, 잠깐! 스웨터 바람으로 나가면 어떡하냐! 패딩 입어!

 

“ 나 패딩 없잖아! 그놈의 패딩 타령! ”

 

“ 안 돼! 패딩 입어! ”

 

베르닌은 왕재수를 끌고 자기 방으로 갔다. 이럴 줄 알고 챙겨온 여분의 패딩 재킷을 억지로 입히고 머리에 모자를 씌우고서야 놔주었다. 왕재수는 매우 툴툴거리면서 방을 나갔다. 혹시나 나가다가 패딩을 벗어 버릴까봐 베르닌은 산책로 입구까지 쫓아가서 감시했다. 왕재수가 매우 짜증을 냈다.

 

“ 어휴, KGB 앞잡이! 감시꾼! ”

 

“ 그거 벗기만 해. 고양이 불러다가 방에 풀고 바퀴벌레를... ”

 

“ 악마. 살인자! ”

 

 

*    *    *

 

 

베르닌은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갓 세탁해 볕에 잘 말려서 보송보송한 시트 위에 몸을 던지고 따뜻한 담요를 덮었다. 창문 사이로 부드러운 햇빛이 스며들어왔다. 평일에 온천욕을 한 후 오후 햇살을 받으며 푹신하고 깨끗한 침대에 누워 낮잠을 잘 수 있다니, 꿈만 같았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는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누운 채 이 평온한 여유를 천천히 즐겨보려고 했지만 1분도 안 되어 깊은 단잠에 빠져들었다.

 

두어 시간 후 베르닌은 상쾌한 기분으로 깨어났다. 보통 낮잠을 자고 나면 느껴지는 두통조차도 없었다. 몸이 살짝 쑤시기는 했지만 오히려 개운한 느낌이었다. 인생은 살만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고 심지어 특별 이용권을 내주게 한 스페호프에게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다.

 

방 안은 이미 어둑어둑했다. 베르닌은 램프 스위치를 켰고 시계를 보았다. 5시 반이 다 되어 있었다. 그는 퍼뜩 방 안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옆 침대는 오전과 마찬가지로 비어 있었고 시트도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아무리 봐도 왕재수가 들어온 기색이 없었다. 산책하고 와서 카페에 갔나 싶어 내려가 보았다. 하지만 카페에도 식당에도, 체력 단련실에도, 마사지실에도 왕재수는 없었다. 카운터로 내려가서 류바에게 혹시 왕재수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느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 아뇨, 아까 산책하러 나간 후에 안 들어왔어요. 안 그래도 얼굴 보고 퇴근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저 오늘 밤에 기차 타고 모스크바 놀러 가기로 했거든요. ”

 

“ 안 들어왔다고요? 캄캄해지는데... ”

 

 

걱정이 된 베르닌은 패딩을 입고 손전등을 챙긴 후 밖으로 나가 보았다. 이미 해는 진 후였고 어스름이 짙게 깔리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분명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아주 맑은 날씨였는데...

 

“ 길 잃은 거 아니야? 큰일이네. 도시에서 온 애라 숲에서 날 저물면 길 못 찾을 텐데. ”

 

스멀거리는 불안감을 억누르며 베르닌은 숲으로 가보았다. 아직은 푸르스름한 빛이 깔려 있었지만 곧 캄캄해질 게 뻔했다. 침엽수들과 자작나무들 사이로 좁은 산책로가 이어져 있었지만 인적은 없었다. 베르닌은 급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점점 어두워져서 손전등을 켰다. 15분쯤 걸어서 꽤 안쪽으로 들어왔는데도 왕재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베르닌은 문득 겁이 났다.

 

“ 발이라도 헛디뎠나? 여기 웅덩이도 많은데 빠진 건 아니겠지? 아니면 안으로 들어가다가 완전히 길 잃은 걸지도 몰라. 북쪽으로 가면 개간도 덜 돼서 엄청 험한데... 큰일났네. 같이 갈 걸... ”

 

베르닌은 자신을 탓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깟 낮잠 두어 시간 자 보겠다고 가뜩이나 도시에서 온데다 깊은 숲이라면 아무 것도 모르는 애송이를 혼자 내보내다니 자신이 너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갈라진 얼음 사이로 풍덩 빠져서 물속으로 가라앉던 왕재수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등줄기가 서늘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어떡하지... 어떡해, 무슨 일 생겼으면 어쩌지... 나 때문이야. 어떡하지... ”

 

눈물을 글썽이며 베르닌은 손전등을 켜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왕재수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정신없이 뛰었다.

 

“ 야! 너 어디 있는 거야! 내 말 들려? 나야, 다닐! 들리면 소리 좀 쳐봐! ”

 

눈송이가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다. 습한 바람이 점점 차가워졌다. 아무래도 다시 눈보라가 몰아칠 모양이었다. 공포에 질린 베르닌은 그제서야 요양소로 돌아가 수색 인력을 요청할 생각이 들었다. 그때 멀리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다니이일! ”

 

분명히 자신의 이름이었다. 왕재수의 목소리였다. 베르닌은 환청인가 의심했지만 목청껏 왕재수를 부르자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이 들려왔다. 베르닌은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미친 듯이 뛰었다. 잠시 후 그의 시야에 왕재수가 들어왔다. 왕재수는 커다란 그루터기 위에 쪼그려 앉아 있었는데 두 팔로 무릎을 꼭 껴안고 덜덜 떨고 있었다. 다행히 패딩은 입고 있었다. 모자까지 그대로 눌러쓰고 있었다. 베르닌은 안도와 함께 긴장이 탁 풀리면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야! 너 왜 이렇게 사람을 놀라게 만들어! 거기서 뭐하는 거야, 안 들어오고!! 지금 몇 신줄 알아? 해도 다 졌잖아! 왜 내 말 안 듣고! 길 잃은 줄 알았잖아! ”

 

“ 다닐... 흐흑... ”

 

“ 어... 왜 그래, 왜 울어? 너... 다친 거야? 그래서 못 일어나고 앉아 있는 거야? 응? ”

 

“ 어... 흐흑... 다닐... 엉엉... ”

 

왕재수는 고개를 들어서 그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뭔가에 소스라치게 놀란 듯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며 엉엉 울었다. 어스름 속에서도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는 게 보였다. 얼마나 몸을 떠는지 베르닌조차 몸이 떨려올 지경이었다.

 

“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어떻게 된 거야! 다친 거냐고! ”

 

“ 어흑... 아... 으어어... ”

 

왕재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베르닌은 공포와 함께 걱정이 치솟아서 급하게 왕재수 곁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2미터쯤 앞으로 왔을 때 왕재수가 급하게 손을 내저으며 소리쳤다.

 

안 돼! 가까이 오지 마! 그냥 거기 있어! ”

 

“ 왜 그러는 거야! 대체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왜 말을 못해! 너 혹시... ”

 

순간 온갖 나쁜 종류의 일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와중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바냐 투레츠키의 얼굴이라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버럭 소리쳤다.

 

“ 그 자식, 그 나쁜 자식이 그런 거야? 여기 왔었어? 투레츠키, 그 자식이 나쁜 짓 한 거냐고! 겁내지 말고 말해,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

 

흐느껴 울던 왕재수가 그 와중에도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 바냐는 왜... 무슨 소리야... 어헝... 앗,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잖아! 아악, 안 돼! 아악!

 

왕재수가 다급하게 비명을 질러댔다. 일어서지도 못하고 두 손을 뻗어 마구 흔들며 베르닌에게 저리 가라고 난리를 쳤다. 그 와중에 몸이 크게 휘청했지만 악착같이 그루터기 위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를 썼다. 베르닌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왕재수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려고 했다.

 

다닐, 안 돼! 큰일 나! 거기... 으윽, 으.... 무서운 거... 악!

 

“ 뭐야, 뭐가 있다고 그러는 거야! 대체 뭐냐고! ”

 

배, 뱀.....

 

 

왕재수는 힘겹게 그 단어를 내뱉더니 하얗게 질려서 두 손으로 다시 얼굴을 가렸다. 금방이라도 기절해 뒤로 넘어질 것 같았다. 베르닌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루터기 바로 아래에 울긋불긋하고 기다란 뭔가가 보였다. 손전등을 비춰보자 얼룩덜룩하고 커다란 뱀이 도사리고 있었다. 베르닌도 순간 깜짝 놀랐지만 전등을 샅샅이 비춰도 뱀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용기를 내어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왕재수가 비명을 지르며 베르닌을 떠미는 시늉을 했다.

 

“ 안 돼, 오지 마... 물어... 뱀이 물어... 너 물려... 으흑... 안 돼애애!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는 왕재수를 무시하고 베르닌은 손전등을 바짝 들이댔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었다.

 

“ 야, 진정해. 괜찮아. 이거 뱀 아니야. ”

 

“ 뭐가 아니야... 뱀인데... 거기 그렇게 딱 똬리 틀고 앉아서 나 막 째려보면서... 조금만 움직이면 물려고... 으흑... ”

 

“ 이거 뱀이 허물 벗어놓고 간 거야. 진짜 뱀 아니야. 괜찮아. ”

 

“ 아니야, 뱀 맞아! 막 기다랗고 미끈미끈하고 징그럽고... 흐아악!

 

반신반의하며 그루터기 아래를 힐끗 쳐다 본 왕재수는 손전등 불빛 때문에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 뱀의 형체를 보고 끔찍하게 비명을 질렀다.

 

“ 아니라니까! 너 수업 시간에 안 배웠냐? 뱀 허물 벗잖아. 허물 뭔지 몰라? 껍질. 이거 그거라고! 그리고 지금 이렇게 추운데 뱀이 어떻게 나오니. 뱀은 겨울잠 잔단 말이야. 그루터기 밑에 허물 벗어놓고 간 거네.

 

베르닌은 근처에 뒹굴고 있는 나뭇가지를 주웠고 그것으로 뱀 허물을 집어서 멀리멀리 안 보이는 쪽으로 휙 던져버렸다. 왕재수는 베르닌이 나뭇가지로 껍질을 건드리는 순간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며 숨이 넘어가는 듯한 신음을 내뱉었고 그대로 기절해서 그루터기 뒤로 굴러 떨어졌다. 허물을 처리한 베르닌은 급하게 왕재수에게 갔다. 다행히 눈 더미 위로 떨어져서 다치지는 않았다. 베르닌이 어깨를 감싸서 일으키자 왕재수는 뱀이라도 와서 공격한 줄 알았는지 비명을 지르며 거세게 몸부림쳤다.

 

으아악!!!

 

“ 야, 정신 차려! 나야. 이제 그거 없어. 내가 치워버렸어. ”

 

“ 뱀 갔어? ”

 

“ 뱀 아니라니까! 껍질이라고 몇 번을 말해! 어휴, 이 바보 멍충이. 어떻게 살아 있는 뱀하고 그냥 껍데기도 구분 못 하냐! ”

 

“ 정말 뱀 아니었어? 정말 껍질이었어? ”

 

“ 그래! ”

 

“ 왜... 왜 여기 껍질 벗고 간 건데... 어헝... 뱀은 왜 그러는 건데! 이해가 안 돼... 뱀 싫어... 징그러워... 미워... 흐흑... 시골... ”

 

“ 뱀이 무슨 죄야! 뱀은 원래 숲에 살면서 때가 되면 껍데기 벗고 때가 되면 겨울잠 자러 가는 짐승이라고! 왜 애꿎은 뱀을 모함하냐! ”

 

“ 뱀은... 뱀은... 너무 징그럽고... 우욱... ”

 

왕재수가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다시 흐느껴 울었다. 너무 놀라고 얼이 빠져서 그런 것 같았다. 얼굴은 하얗고 입술은 파랬다.

 

“ 흐흑... 나 진짜 뱀인 줄 알았어... 산책 마치고 막 돌아오고 있었는데... 그루터기에 걸려 넘어질 뻔 했는데 딱 보니까 눈앞에 뱀이 있잖아. 너무 무서웠어... 꼼짝도 못하고... ”

 

“ 옆으로 돌아서 왔으면 됐잖아. ”

 

“ 아니야... 옛날에 본 영화에서 독사가... 막 똬리 틀고 혀를 날름날름 하면서 째려보고 있다가 사람이 살짝 움직이니까 전광석화처럼 휘리릭 달려들어서 송곳니로 확 물었어... 그 사람 독 퍼져서 그 자리에서 막 소리 지르다 죽었어... 으흑... 뱀... 너무 무서워. 징그러워... 낼름낼름...

 

“ 하긴 너 도시에서 왔으니까 뱀 제대로 본 적 없었겠구나. 바보야, 아까 그거 독사도 아니야. 하나도 안 위험한 뱀인데. 벌목공들은 막 목에 걸고 다니고 먹이도 주고 그래. 보면 재수 좋다고. ”

 

“ 뱀이 어떻게 재수가 좋아... 무서워... ”

 

“ 저 뱀이 나오면 나무가 잘 자라고 홍수도 안 난대. 행운이래. 그러니까 너도 올해 재수 좋을 거야. ”

 

베르닌은 조금이라도 왕재수를 진정시키려고 잽싸게 덧붙였다.

 

“ 뱀 봤으니까 올해 레닌그라드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너 새해 운 좋아지라고 뱀이 껍질 놔두고 간 건데 왜 그렇게 울고불고 난리야. ”

 

“ 그런 거야? 정말 나 시골에서 나갈 수 있어? 그러라고 뱀이 두고 간 거야? ”

 

“ 그렇다니까! 이제 그만 일어나. 캄캄해졌잖아. 눈도 오고. 빨리 가서 저녁 먹자. ”

 

“ 으응... ”

 

왕재수가 부들부들 떨면서 일어났다. 하지만 너무 놀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추운데 너무 오랫동안 그루터기 위에 웅크리고 있어서 그런 건지 무릎이 풀리면서 다시 주저앉았다. 눈발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할 수 없이 왕재수의 앞으로 가서 등을 들이댔다.

 

“ 야, 업혀. 가자. ”

 

“ 싫어... 나 일어날 수 있어. 내가 걸어갈 거야. ”

 

“ 지금 못 일어나잖아. 여기 얼마나 그러고 있었어? ”

 

“ 모르겠어... 해 지기 전부터... ”

 

“ 에휴... 두 시간은 그러고 있었던 거네. 몸이 얼어서 그런 거야. 일단 업혀. 가다가 괜찮아지면 걸어가. ”

 

왕재수는 두어 번 일어나보려다가 포기하고 베르닌의 등에 찰싹 업혔다. 평소와는 달리 몸이 아주 뻣뻣했다.

 

“ 진짜 놀랐나보구나. 참 이해가 안 된다니까. 귀신도 안 무서워하면서 왜 벌레랑 뱀 같은 건 그렇게 무서워하는지. ”

 

“ 몰라. 보기만 하면 몸이 안 움직여. 너무 무서워. 으흑... 시골... ”

 

“ 네가 자꾸 시골 타령하니까 자꾸 그런 게 나타나는 거야! ”

 

“ 아까는 나 재수 좋으라고, 시골에서 빠져나가라고 뱀이 껍질 두고 갔다더니 왜 지금은 반대로 말해? ”

 

“ 어휴... 너 재수 좋으라고 뱀이 껍질 두고 간 거 맞아! 네가 맨날 시골 싫고 무섭고 운운하니까 뱀도 지겨웠겠지! 그래서 이거 보고 빨리 그 잘난 레닌그라드인지 나발인지로 꺼지라고 두고 간 거야! ”

 

“ 둘러대는 것도 되게 못해. 책상물림... ”

 

“ 시끄러워! 배고파 죽겠네. 빨리 걸어갈 거니까 꽉 잡고 있어. ”

 

“ 나 안 무거워? ”

 

“ 안 무거워! 콩알만한 게 삐쩍 말랐잖아! 뭐가 무거워! 그때 아프고 나서 뼈만 남았잖아! ”

 

“ 이렇게 큰 콩알이 어딨어! 나 지난 주랑 이번 주에 열심히 운동해서 다시 살 좀 찌운 건데... 로만이 좋아하는 만큼은 아직 아니지만 엉덩이도 탱글탱글하게... ”

 

“ 제발 그쪽 얘기는 하지 말자! ”

 

 

*     *     *

 

 

숲을 거의 빠져나왔을 때 왕재수가 이제 걸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해서 베르닌은 그를 내려주었다. 왕재수는 아직 좀 비틀거렸지만 팔을 잡아주자 점점 정상으로 돌아왔다. 막상 진정되자 부끄러웠는지 베르닌에게 머뭇거리며 뱀 껍질 얘기는 보고서에 쓰지 말라고 했다.

 

“ 웬일이냐 너? 지금 나한테 부탁하는 거야? ”

 

“ 아니, 그게... 그런 것까지 쓸 거야? 이 KGB 앞잡이... ”

 

“ 부탁하면서 자꾸 욕할 거야? 그럼 써야지. 자세하게... 울었다는 거랑 나한테 업혀 온 것도 쓸 거야! 국장이 되게 좋아하겠다. ”

 

“ 안 돼... 쓰지 마. 그런 얘기 새어나가면 극장 애들 나 무시하고 말 안 듣는단 말이야. 간신히 말 좀 통하게 됐는데. 제발... ”

 

“ 넌 극장에서 체면 세우는 게 제일 중요하냐? ”

 

“ 체면 때문이 아니야! 극장이 총체적으로 엉망이라고 했잖아. 그나마 지금 할 수 있는 건 애들 실력 조금이라도 올려놓는 건데 난 걔들보다 나이도 어리고 딴 데서 온데다 심지어 낙하산이라면서 처음에 엄청 말 안 들었단 말이야. 그나마 내가 천재라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벌써 난 바지감독으로 전락했을 거라고! 내가 왜 로만이랑 사귀는 거 극장에서 티 안 내는데... 그러니까 뱀 껍질 얘기 하지 마, 응? ”

 

왕재수가 그렇게 정색을 하면서 얘기하는 게 거의 처음이었으므로 베르닌은 조금 놀랐고 감명을 받았다.

 

“ 어, 알았어. 얘기 안 할게. 근데 그거랑 바이올린 아저씨랑 사귀는 거 티 안 내는 건 무슨 관곈데? ”

 

“ 나 여태껏 극장에서는 한 번도 누구 사귄 적 없었단 말이야. 윗사람한테 특혜 받는다고 오해받을까봐. 근데 심지어 감독 돼서 예술가랑 사귀면 그 사람한테 특혜 준다고 반대로 오해받을 거 아냐. 나도 그렇게 되는 거 싫고 로만도 괜히 오해받으면 싫단 말이야. ”

 

“ 엥. 너 그런 생각도 할 줄 아는구나. 난 또 맨날 그 아저씨랑 응응응 하는 데 정신 팔려서 그런 상식적인 생각은 하지도 않는 줄 알았지. ”

 

그건 상식이 아니고 내가 싫어서 그런 거야! 제일 싫어, 상식 어쩌고 하는 거. 공산당 독재 국가에서 상식이 어딨냐, 전부 지배를 위한 세뇌... ”

 

“ 밀고! 체포! 고문! ”

 

“ 압... ”

 

 

왕재수는 입을 다물었다. 요양소에 돌아오자 이미 7시가 다 되어 있었다. 류바는 코트를 입고 가방을 든 채 현관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재수를 보더니 달려와서 두 팔로 와락 포옹하고 뺨에 뽀뽀를 했다.

 

“ 아유, 5분만 더 기다리고 가려고 했어요. 기차 놓칠까봐. 수색대라도 보내야 하나 싶었네요. 길 잃었던 거예요? ”

 

“ 어... 조금이요. ”

 

“ 잘 쉬다가 가세요! 다음에 또 와요. 미리 예약만 해주면 제가 계속 있으면서 잘 챙겨줄게요. 그럼 다음에 봐요! ”

 

 

류바가 차를 몰고 떠난 후 베르닌은 왕재수와 함께 식당으로 갔다. 이미 저녁 식사 시간은 지나 있었지만 류바가 부탁해 놓은 덕에 요리사가 뜨끈뜨끈한 버섯 수프와 쇠고기 커틀릿을 준비해 주었다. 커틀릿은 좀 기름진 편이었지만 아주 맛있었다. 추위에 떨고 뱀 껍질에 놀랐던 왕재수도 정신없이 마지막 한 점까지 흡입했다.

 

저녁을 먹은 후 베르닌은 소화를 좀 시킬까 하고 운동실로 내려가 역시 온천을 하러 온 할아버지들과 탁구를 좀 쳤다. 왕재수는 스트레칭을 하고 근력 운동을 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눈 깜짝하지도 않고 푸시업과 스쿼트를 연속으로 몇십 개 해내는 데 1차로 놀라고 그 야윈 애가 들어 올리는 아령의 무게에 2차로 놀랐다. 저런 녀석이 뱀 껍질을 보고 마비되고 바퀴벌레를 보고 기절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왕재수가 ‘오늘은 피곤하니까 이 정도로 몸만 살짝 풀고 들어가서 자야겠어’라고 했을 때 3차로 놀랐다. 그게 몸만 살짝 푼 거라니!!!

 

베르닌이 방으로 돌아왔을 때 왕재수는 이미 곯아떨어져 있었다. 거실에서 잘까 하다가 어차피 침대도 따로 떨어져 있고 왕재수가 아플 때 자기 집에 와서 잔 적도 있으므로 뭐 어떠냐 싶기도 했다. 침대로 기어들어가자 분명 낮잠을 잤는데도 금세 졸음이 쏟아졌다. 베르닌은 불을 끄고 1분 만에 잠이 들었다. 온천은 참 좋다고 생각하면서... 내일도 종일 온천을 오락가락하면서 쉬고 맛있는 걸 먹으며 또 쉴 생각을 하니 잠결에도 기분이 너무 좋았다.

 

 

*     *     *

 

 

새벽에 베르닌은 탕 하는 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잠시 후 창 너머로 어디선가 불꽃이 반짝 일더니 다시 한 번 탕 소리가 들렸다. 놀란 베르닌은 후다닥 램프를 켰다. 제일 먼저 옆 침대를 보았다. 비어 있을까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다행히 비어 있지 않았다. 왕재수도 소리를 들은 듯 두 손으로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아 있었다. 멍하게 베르닌을 쳐다보면서 웅얼거렸다.

 

“ 이게 무슨 소리야? ”

 

“ 총 소리 같아. ”

 

“ 사냥하는 거야? 숲이잖아... ”

 

“ 아니야, 지금 사냥철 아니야. 나가봐야겠어. 너 여기 꼼짝 말고 있어. ”

 

“ 어딜 가려고? 왜 나가! ”

 

“ 총 소리 났잖아. 무슨 일인지 가봐야지. ”

 

“ 네가 왜... ”

 

“ 나 보안요원... 공무원... ”

 

“ 가지 마. 뭔지 모르지만... 가지 마. ”

 

 

왕재수가 아직도 잠이 덜 깬 채 중얼거렸다. 베르닌이 일어나서 옷을 입자 뭔가 심각한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무릎으로 기어와서 소매를 잡고 늘어졌다.

 

 

“ 너 총 없잖아. 가지 마. 여기 있어. ”

 

“ 아니야, 가봐야 돼. 여기 지금 노인 몇 명밖에 없잖아. ”

 

“ 경비 아저씨 있었어... ”

 

“ 경비원은 1층에 있었잖아. 우리 층에는 없단 말이야. 아무 일 아닐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좀 보고 올게. 문 잠그고 있어. ”

 

“ 아무 일 아니라면서 왜 문 잠그고 있으라 해. ”

 

“ 그래야 네가 공연히 무서워하지 않지! ”

 

“ 나는 네가 안 갔으면 좋겠어. ”

 

“ 그냥 복도로 나가서 살짝 보고만 올게. ”

 

“ 그치만 진짜 총 소리였으면 어떻게 하려고... ”

 

“ 괜찮아. 여기 골프채도 있네. 이거 들고 갔다 올게. ”

 

“ 아니야, 그러는 거 아니야. 가면 안 돼. ”

 

 

왕재수가 두 손으로 눈을 비비면서 매달렸다. 감겨 있는 눈을 보니 아직도 비몽사몽인 것 같았다. 왕재수는 원래 새벽에 깨우면 절대 못 일어나는 타입이었다. 그 사이에 환청인지는 모르지만 바깥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나고 발소리도 나는 것 같아서 마음이 급해진 베르닌은 램프 불을 끄고 왕재수를 도로 침대로 밀어 눕히며 이불을 덮어 주었다.

 

 

“ 너 지금 꿈꾸는 거야. 아무 데도 안 가. 빨리 자라... ”

 

“ 어... 아니야. 너 가지 마. 그때도 내 말 안 들어서 강에 빠져놓고... ”

 

“ 응, 안 가. 너 꿈꾸는 거야. 얼른 자. ”

 

 

왕재수가 도로 잠드는 것 같았기 때문에 베르닌은 골프채를 휘어잡고 살며시 나갔다. 문을 닫은 후 복도로 살금살금 발걸음을 내디뎠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벽에 달린 작은 램프만 깜박거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잘못 들었든지 아니면 밀렵꾼이 숲에서 사냥을 하는 소리였던 게 분명했다. 혹시나 해서 그는 직각으로 방향을 꺾어 다른 쪽 복도 끝까지 가보았다. 비어 있었다. 다른 객실 문도 모두 닫혀 있었다. 다행이다 싶어서 그는 몸을 돌렸다.

 

 

그때 그는 희미하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왼쪽 목덜미 쪽으로 차디찬 바람이 불어 들어왔기 때문이다.

 

 

“ 바람이라니... 대체 어디서... ”

 

 

그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복도 왼쪽에는 창문들이 있었다. 그리고 창문 하나가 활짝 열려 있었다. 그는 창가로 다가가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간밤에 내린 눈이 창틀에 쌓여 있었다. 그리고 거기 손자국과 발자국이 움푹 패여 있었다. 흠칫 놀라 복도 바닥을 찬찬히 살폈다. 발자국이 이어지고 있었다. 눈 녹은 물이 고여 있었다. 잠시 베르닌은 그게 자기 발자국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슬리퍼는 바짝 말라 있었다.

 

‘ 누가 바깥에서 들어온 거야... 창문을 넘어 왔어. 하지만 누가! ’

 

 

그때 복도 저편에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아악!

 

 

그 목소리는 낯익었다. 불과 몇 시간 전 숲에서 들었던 끔찍하고 다급한 비명 소리였다. 베르닌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화들짝 놀랐고 발을 구르며 복도를 가로질러 달려갔다.

 

미셴카! 미하일!

 

목청이 터져라 왕재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베르닌은 미친 듯이 뛰었다. 방문을 밀어붙였다. 잠겨 있었다. 분명히 그는 문을 잠근 적이 없었다. 왕재수는 그때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야! 내 말 들려? 대답해! 미하일! 미하일!!!!

 

 

대답이 없었다. 적막뿐이었다. 베르닌은 발을 굴렀다. 십 미터 쯤 뒤로 물러났다. 전속력으로 달려가 온몸으로 방문을 들이받았다. 문이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열리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들이받았다. 쾅 하고 문이 열렸다. 그는 옆으로 고꾸라지며 쿠당탕 넘어졌다. 하지만 아픈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베르닌은 정신없이 몸을 일으켰다. 방 안은 칠흑처럼 캄캄했다. 손을 휘저어 스위치를 찾으려고 애쓰면서 그는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미하일! 미하이이일!

 

 

손에 스위치가 닿았다. 막 스위치를 찰칵 하고 올리려고 했을 때 등 뒤에 기척이 느껴졌다. 돌아서는 순간 뭔가 무거운 것이 머리를 내리쳤다. 베르닌은 비틀거렸지만 간신히 고개를 돌렸다. 고함을 지르려고 했을 때 다시 머리에 둔중한 타격이 느껴졌다. 그는 입을 벌렸고 숨을 몰아쉬었고 한 발짝 나아갔다. 그리고 암흑이 내리덮였다.

 

 

   

 

 

FIN

2015.3.2 ~ 3.7

 

------

 

 

다음 이야기는 14편에서..

 

특권층이 이용하는 요양소는 실제로 소련 시절에 많았다. 인민이 이용하는 요양소들도 있었지만. 어쨌든 이용권을 받아서 요양소에 가는데, 이렇게 온천과 스파가 있는 곳도 있고 치료를 받는 곳도 있다. 당시 특권계층(노멘클라투라), 당 간부, 고위층 등이 이용하는 요양소는 물론 더 호화스러웠다.

 

베르닌과 왕재수가 간 온천도 아주 호화스러운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수준급 시설은 갖춘 곳이다. 이 13편을 쓸 때 카를로비 바리의 온천에 갔던 것을 좀 떠올리면서 썼다. 물론 같지는 않지만. 블로그 내에서 '카를로비 바리'로 검색하면 그 동네 포스팅들을 많이 볼 수 있다.

 

..

 

추위 등으로 식료품 공급이 중단되고 품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나도 옛날에 러시아에 있을 때 겪은 일이다. 그땐 뭣때문인지 모르겠는데 갑자기 동네 전체에서 양파를 구할 수가 없었다. 평소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 양파가 막상 구할 수 없게 되자 왜 이렇게 쓸 데가 많은지... 모든 음식에 양파가 들어가는 거였다!!! 그래서 엄청 고생하고, 엄청 비싸게 주고 양파를 샀는데 나중에 다시 제 가격으로 돌아왔다.

 

게다가 소련 시절엔 원래 식료품이나 물자가 더 귀했고 줄 서서 구매를 해야 했으니 더 피곤했을 듯하다. 물론 이것도 지역차가 있긴 했지만.

 

..

 

'기술적인 문제'(쩨흐니체스까야 쁘라블레마, 또는 쩨흐니체스까야 쁘리치나)로 휴무라는 문구는 러시아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는 문구이다. 보통 예고 없이 문을 닫거나 뭔가가 작동이 안되거나 담당자가 없을때 써먹는 만능 문구임.. (이 문구 너무너무 싫다!)

 

..

 

류바가 처음에 10시부터 접수니까 안된다고 꼬장부리는 건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러시아에서는 비일비재한 일인데 소련 시절엔 공산주의/사회주의 체제라 더욱 심했다.

 

..

 

기존 서무 에피소드들은 한 편 당 완결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번 13편은 좀 다르게 끝냈다. 그러니 뒷이야기는 14편을 봐야 한다. 그 이야기는 다음주에..

 

..

 

댓글은 언제나 큰 힘이 됩니다 :)

 

 

:
Posted by liontamer

 

어느 새 가브릴로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본편보다 더 많이 써버려서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 서무의 슬픔 시리즈.

 

12편은 2월에 러시아에 다녀온 후 썼다. 0편에서 11편까지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웃자고 쓴 농담거리들인데, 12편도 물론 농담이긴 하지만 분위기는 좀 다르다. 문체나 인물에 대한 접근방식도 이전 에피소드들과는 약간 다르게 썼다.

 

12편에서는 가브릴로프 KGB 지국에 모스크바 본부에서 보낸 특별 감사관들이 들이닥친다. 서무인 베르닌은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암담하기만 한데...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1년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신년이 되어도 베르닌의 격무는 계속되고. 그러던 어느날 모스크바 KGB 본부에서 특별감사를 나온다는 흉흉한 소문이 들려온다. 서무인 베르닌에게 크나큰 시련이 닥쳐오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12

 

 

 

 

서무의 슬픔

-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1월 하순으로 접어들 무렵 날벼락이 떨어졌다. 모스크바 KGB 본부에서 특별 감사를 나온다는 것이었다.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는 발칵 뒤집혔다. 보안위원회 내에 감사부서가 있기는 했지만 사안이 중대했으므로 스페호프 국장이 직접 회의를 소집했다. 각 부서장과 선임 직원, 그리고 각 부서 서무들을 모두 호출했다.

 

스페호프는 한 시간 동안 사안의 중대성에 대해 떠들었다. 감사부서에서 모든 준비 작업과 감사 실사를 총괄하되 부서장들은 3일 내로 최근 5년간의 모든 기밀 서류철과 공개 서류철들을 재분류하고 정리할 것이며 혹시라도 누락된 서류가 없는지 꼼꼼하게 살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회계부서에는 특명을 내려 모든 장부와 영수증들을 밤새 재확인하도록 했다. 서무들에게는 5년치 근태기록부와 출장보고서들, 업무추진비 영수증들과 직원 검진 및 요양 내역들, 모든 캐비닛 열쇠와 자물쇠 상태를 점검하고 10년치 생산 문서 목록과 자료실에 보관된 실제 문서를 대조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이 모든 작업을 3일 내에 완료해야 했다. 스페호프는 이것으로도 모자라 방송실로 갔다. 국장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각 담당 직원들은 모두 자신의 업무와 관련된 서류철과 장부, 기밀 자료들을 완벽하게 점검해야 하며 앞으로 사흘간은 감사 준비 업무를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입사하고 2년을 갓 넘긴 베르닌은 여지껏 외부 특별 감사를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왜 그렇게 모두가 난리법석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선배들과 다른 부서 서무들은 모두 한숨을 푹푹 쉬었고 그 즉시 달려가 서류철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베르닌이 멍해져서 그 난리를 지켜보고 있는데 20년차인 발따예프가 혀를 찼다.

 

“ 또 시작이구먼. 이번엔 또 누굴 잡아 죽이려고. 에휴... ”

 

“ 그게 무슨 뜻인가요? 잡아 죽이다니요? ”

 

“ 자네 감사 안 받아봤나? ”

 

“ 작년에 저희 내부 정기 감사는 받았죠. 그때처럼 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안 그래도 아까 국장이 업무추진비 영수증이랑 근태기록부, 출장보고서 같은 거 챙기라던데 그건 작년 내부 감사 때 다 한 번씩 체크했었거든요. 그거 하느라 이틀 밤 샜는데 그나마 그때 해놔서 지금은 일이 한결 수월하겠네요. 그때 감사부장님이... ”

 

“ 어이구, 이 순진한 책상물림 같으니... 내부 감사는 우리끼리 하는 거니까 그냥 짜고 치는 거고! ”

 

“ 짜고 치다니요! 저 그 때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감사부장님도 저 불러서 자료 제대로 정리해야 한다고 얼마나 설교를 하고... 선배들 근태기록부랑 휴일근무내역서도 더 제대로 작성해줘야 한다고 귀가 닳도록... ”

 

“ 자네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구먼. 외부 감사는 차원이 달라. 그것도 모스크바 본부에서 나오는 거라니... 감사철도 아닌데 뜬금없이 웬 특별 감사! 그건 다 목적이 있는 거야. 아예 뭔가를 정해놓고 털기 위해 나오는 거라고. 맘먹고 달려들면 뭔들 안 걸리겠나. 털어서 먼지 안 나는 게 어디 있다고! 그게 뭔지 애초부터 알면 다행인데, 망할 놈들이 결코 처음엔 그걸 안 가르쳐주거든. 일단 며칠 동안 우리 전체를 탈탈 털고 들들 볶은 다음에 진을 다 빼놓고 본론으로 들어간단 말이야. 그리고는 쾅!

 

쾅!은 뭔가요? ”

 

“ 어이구 답답아... 뭐긴 뭐야. 몇 명 잡아다 죽이는 거지. 지적! 징계! 감봉. 직위 박탈. 정직. 해임. 뭐 그런 거란 말이야! 잘못한 일에 대해 책임을 묻는 거지! ”

 

“ 그럼 그건 윗분들한테 해당되는 거 아닌가요? 저희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잖아요. 특히 저요. 저는 완전 말단이잖아요. 매일매일 꼬박꼬박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서류도 다 만들고... 제가 결정한 일은 하나도 없는데요. ”

 

“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하겠지. 무식하면 편하다니까. ”

 

“ 저 안 무식하다고요! 다들 잊고 계시는데 저 우리 시립 고등학교 전체 2등 졸업이고요! 모스크바 대학교 법학과를... ”

 

 

발따예프는 혀를 차며 그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자기 자리로 가 버렸다. 미친 듯이 자기 캐비닛을 뒤지더니 지저분하게 엉켜 있던 서류들을 꺼내 펑펑 소리를 내며 구멍을 뚫고 표지에 끼워 노끈으로 묶었다. 그리고는 표지에 연도와 제목을 써 갈기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선배들이 모두 비슷한 짓을 하고 있었다. 몇몇은 몇 년도 무슨무슨 서류가 없어졌다고 울상을 짓다가 누렇게 바랜 종이뭉치를 어디서 찾아오더니 문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다 쓰더니 서무인 베르닌에게 79년도 문서 접수대장과 발송대장, 보안위원회 직인 상자를 찾아오라고 명령했다.

 

“ 그거 지금 문서 위조하는 거 아닌가요? 벌써 3년 전 날짜잖아요. 그때 문서 없어졌다고 지금 3년 전 날짜로 새로 만드는 거잖아요. 걸리면... ”

 

“ 이 멍충아, 어떻게든 만들어놔야 하는 거야! 서류가 비면 그 즉시 끝장이야! 당장 대장이랑 상자나 가져와! 너도 빨리 네 서류 확인해보고! ”

 

“ 저요? 저는 입사 후 꼬박꼬박 하루도 안 빼먹고 제 서류들은 전부... ”

 

“ 흥, 그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지! 너 혼자 아무리 꼬박꼬박 다 해놓으면 뭐해! 너 입사한지 2년 좀 넘었지? 감사는 최소 3년에서 5년치를 본다고! 너 전임자가 해놓은 서류들도 다 봐야 한단 말이야! 근데 네 전임은... 그렇지, 그 뻔뻔스러운 바냐 투레츠키! 서류 잘 찾아보는 게 좋을 거야. 바냐 그 자식 엄청 뺀질거렸거든. ”

 

“ 투레츠키요? 그 사람은 저 들어오기 전에 퇴사했는데... ”

 

“ 그러니까 더 문제지! 그놈이 빼먹은 서류들이 뭔지조차 알 수 없을 테니. 하여튼 잘 해보라고! ”

 

 

베르닌은 일단 스페호프가 지시한 모든 사항들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훨씬 많이 걸렸다. 그나마도 근태기록부나 영수증, 업무추진비 따위는 매일같이 확인해온 사항들이라 좀 나았다. 최악은 10년치 생산 문서 목록과 자료실의 실제 문서를 대조하는 일이었다.

 

그는 다른 서무들과 함께 손전등을 들고 문서 보관실로 내려갔다. 먼지가 풀풀 피어오르고 각종 벌레들이 출몰하는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왕재수였다면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기절했을 것이 분명했다. 유경험자인 대외교류부 서무 알렉산드라가 친절하게도 미리 준비한 마스크들을 나눠주지 않았다면 탁한 공기 때문에 잠시도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베르닌은 마스크를 쓰고 손전등을 비춰가며 목록과 문서철들을 대조하기 시작했지만 한 시간쯤 지나자 눈알이 빠질 것 같았고 산소도 부족해서 너무나도 괴로웠다. 이미 다른 서무들은 견디지 못하고 하나하나 밖으로 나간 후였다. 베르닌은 하필 비밀서류가 엄청나게 많은 감시분석부 소속이었다. 그 말은 문서고 안쪽에 있는 기밀 문서고에도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는 두 개의 묵직한 자물쇠를 각각의 열쇠로 열었다. 빨간 줄이 쳐져 있는 기밀 문서고의 문지방을 넘었다. 먼지가 풀풀 피어올랐다. 밀랍 봉인이 찍혀 있는 서류철들의 제목과 목록을 대조했다. 30분쯤 지났을 때 베르닌은 극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아마 잠깐 정신도 잃었던 것 같았다. 왜냐하면 퍼뜩 눈을 떴을 때 그는 책꽂이 사이에 주저앉아 있었고 먼지 구름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그는 반쯤 기어서 기밀 문서고를 빠져나왔다. 하마터면 자물쇠 채우는 것도 잊어버릴 뻔 했다.

 

 

그는 헉헉거리며 뒤뜰로 갔다. 배추밭 근처로 가서 맑은 공기를 정신없이 들이마셨다. 먼저 나와 바람을 쐬고 있던 알렉산드라가 걱정스럽게 그를 바라보더니 물을 한 컵 주었다.

 

“ 다냐, 문서고에 그렇게 오래 들어가 있으면 큰일 나. 공기가 얼마나 안 좋은데. 거기서 옛날에 서무 하나가 쓰러져서 식물인간 된 적도 있대. ”

 

“ 식물인간이요? 대체 왜! ”

 

“ 왜긴 왜야. 지금처럼 감사 기간에 자료 찾으러 갔는데 아무리 찾아도 문서가 안 나오니까 한참 뒤지다가... 산소 부족에 지하에서 올라오는 유독 가스 때문에 질식해서. 10년인가 병원에 누워 있었을 걸. ”

 

“ 그게 언제예요? 스탈린 시절인가요? ”

 

“ 스탈린은 무슨. 지금처럼 똑같이 브레즈네프 시절이지. 아마 60년대 말이었을 거야. 하여튼 감사는 나빠. 아랫사람들만 죽어난다니까. 특히 서무. 우리 부서는 후배 충원이 안돼서 난 벌써 6년째 서무야. 정말 죽겠어. ”

 

“ 그래도 대외교류부는 국장이 총애하는 부서잖아요. 서류도 우리만큼 많지 않고. ”

 

“ 총애하면 뭐해, 그거야 다 선배들 몫이지. 난 6년차인데도 우리 부서에선 막내라니까! 정말 지겨워. 언제까지 남의 근태기록부 작성해주고 초과근무내역서 만들어주고 업무추진비 대신 정산해줘야 하는지! 자료란 자료는 다 수합해야 하고... 감사도 그래! 정작 담당자들은 다 따로 있는데 결국 자료 만들고 감사실 올라가는 건 서무들이라니까! ”

 

“ 감사실에도 저희가 올라간단 말이에요? 어떻게 그러나요? 저희는 개별 업무에 대해서는 모르는데 질문하면 답변을 할 수가 없잖아요. ”

 

“ 그게 그렇게 되더라고. 다들 책임을 지고 싶어 하지 않거든. 추궁당하고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그 사람이 징계를 받거든. 그러니까 만만한 서무가 올라가서 당하는 거야. 이거 진짜 충고인데, 다냐. 그쪽 부서 감사받을 때 너한테 자료 가지고 올라가라 하면 정말 웬만하면 못 간다고 버텨. 안 그러면 징계 100프로야. 심지어 네 전임 서무는 그 악명 높은 바냐 투레츠키... ”

 

“ 대체 투레츠키가 어땠길래 다들 그런 말을 하죠? ”

 

“ 그런 서무는 세상에 없었지. 바냐는 아무 것도 안 했어! 얼마나 뺀질거렸는지. 국장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지. 설교를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결국 잘라버렸어. ”

 

“ 인사기록부에는 자진 퇴사한 걸로 되어 있던데요? ”

 

“ 말이 자진 퇴사지. 국장이 내쫓았어. 머리에 권총을 들이대고 당장 사직서를 쓰든지 아니면 총알을 맞든지 둘 중 하나라고 협박했다니까. ”

 

“ 으악, 그건 살해협박... ”

 

“ 근데 아무도 투레츠키 편을 안 들었다는 게 더 놀랍지! 다들 국장이 오죽하면 그랬겠냐고 했다니까! 국장 재수 없는 거 다 알잖아, 그런데도 다들 이해가 간다는 분위기였어. ”

 

“ 그래서 제가 전에 술자리에서 제 전임자 얘길 하니까 다들 화제를 돌렸군요. ”

 

“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이름이거든. 최고의 뺀질이... 젊은 애가 어찌나 뺀질대는지. 걘 감사실에서도 빠져나갔어. 유일한 인물이지, 감사실에 불려 올라가서도 징계 안 받고 무사했던 서무는. ”

 

“ 어떻게 국장이 그렇게 들들 볶는데도 버틸 수 있었을까요? 전 이해가 안 되네요.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진짜 장난 아니잖아요. ”

 

“ 몰라. 나도 이해 안 돼. 아무도 이해 못 해. 그래서 존경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니까. 하여튼 전설의 서무 바냐 투레츠키야. ”

 

“ 그 사람 지금은 뭐해요? ”

 

“ 글쎄. 퇴사하고 나서 어디 무슨 신문사 같은 데 들어갔다가 또 쫓겨났다던데. 지금은 잘 모르겠네. ”

 

베르닌은 국장의 장광설을 무시하고 뺀질거릴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바냐 투레츠키는 가히 전설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고 그의 절반이라도 닮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 날 그는 자정이 다 되어 퇴근했다.

 

 

 

*     *     *

 

 

 

감사가 시작되자 베르닌은 발따예프와 알렉산드라의 경고가 무엇을 의미했는지 생생히 알게 되었다. 본부에서 나온 감사관은 총 세 명이었는데 그 중 직급이 가장 높은 총괄 감사관은 발렌티나 푸카레바라는 나이 지긋한 여자였다. 꼬챙이처럼 마른데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무시무시한 인상이었고 목소리 또한 카랑카랑했다. VIP만 모시는 접견실이 특별 감사 사무실로 꾸며졌다. 국장실 바로 맞은편이었다. 의전을 중시하는 스페호프는 공항까지 직접 마중을 나갔고 푸카레바와 실무 감사관 두 명을 깍듯하게 모셔왔다. 그러나 국장이 근사한 오찬을 함께 하며 분위기를 파악해보려고 했을 때 푸카레바는 쌀쌀맞은 목소리로 감사관들에게 접대나 향응을 제공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고 대꾸했다. 점심이든 저녁이든 자신들이 알아서 해결할 테니 다시는 함께 밥이나 술을 먹자는 말을 꺼내지도 말라고 경고했다.

 

실무 감사관들 또한 푸카레바 못지않게 고압적이고 무시무시했다. 아모소프는 베르닌 또래의 젊은 남자였고 카마로프스키는 40대 초반의 중견 감사관이었는데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악질이었다. 도착하고 30분도 되지 않아 첫 번째 요구 자료 목록이 날아왔다. 베르닌은 감시분석부 해당 목록을 보고 기절초풍했다. 설마 정말 10년치 자료를 요구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장부와 기밀 서류를 모두 뒤져 통계자료를 계산해 내야 했다. 심지어 기한은 다음날 오전이었다. 서무 관련 자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선배 직원들의 업무와 관련되어 있었다. 베르닌은 선배들에게 가서 요구 자료 목록을 보여주고 다음날 오전 10시까지 수합할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다들 꽁무니를 뺐다.

 

 

“ 그건 서무가 해야지! ”

 

“ 아니에요, 이건 전부 내용을 알아야 만들 수 있는 자료들이라고요. 심지어 감사 자료잖아요, 내용이 정확해야 하는데 제가 어떻게 만듭니까! ”

 

“ 당연히 서무가 하는 거야! 자료 취합은 서무 담당이잖아! ”

 

“ 하지만... ”

 

“ 지금 그러고 있는 시간에 자료 찾겠다! ”

 

“ 아아, 정말 너무 하시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밑 자료들은 찾아올 테니 내용 확인과 작성은 각자 담당자들이 하셔야 해요! ”

 

 

베르닌은 별 수 없이 10년치 장부를 뒤졌다. 기밀 문서고에 다시 갔다. 밤을 새서 밑 자료들을 모두 모았다. 다음날 오전에 담당자들에게 내용을 공유했다. 담당자들은 툴툴대면서도 어쨌든 자료를 작성했다. 취합이 완료되었을 때 감시분석부장이 그에게 자료를 제출하고 오라고 했다.

 

 

하지만... 이건 거의가 표트르 키릴로비치와 세르게이 드미트리예비치 업무 관련 자료인데요... 저에게 질문이라도 하면 하나도 대답을 못할 텐데... ”

 

“ 일단 제출만 하고 오는 거야, 이 답답한 친구야! 자료 뒤적거리다가 궁금한 게 있으면 감사관이 전화를 할 거야. 그때 담당자가 올라가면 된다고! 썩 가서 제출하고 오지 못해! 벌써 마감 시간이 다 됐잖아. 자료 늦게 제출하면 미운털 박혀서 엄청 괴롭힌단 말이야! ”

 

베르닌은 울며 겨자 먹기로 수십 개의 서류철과 100페이지가 넘는 자료뭉치를 들고 감사실로 올라갔다. 푸카레바는 예카테리나 여제처럼 창가에 앉아 다른 서류철을 들춰 보느라 그에게는 눈조차 돌리지 않았다. 카마로프스키가 딱딱거리며 말했다.

 

 

그 책상 위에 내려놔요!

 

“ 예! ”

 

 

베르닌은 서류철들을 먼저 쿵 하고 내려놓은 후 자료 뭉치도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손등으로 이마의 땀방울을 닦으며 인사를 하고 막 나가려는데 카마로프스키가 그를 멈춰 세웠다.

 

“ 가긴 어딜 가요! 감시분석부. 여기가 가장 요주의 부서야! 목록 대조 좀 해봐야겠어. ”

 

카마로프스키는 15분 동안 그를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세워놓은 채 제출된 서류철과 요구 목록을 대조했다. 그러더니 자료 뭉치를 펄럭펄럭 넘기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쏘아붙였다.

 

이건 뭐야. 어째서 이런 중대한 사안이 감시분석부장 전결로 끝난 거지? 심지어 일상감사마저 생략했군! 이건 지국장까지 결재를 받아야 할뿐만 아니라 심지어 모스크바 본부에서도 승인을 받아야 했어! 당장 그 이유를 말해 봐요!

 

“ 어... 저, 그건 제 담당 업무가 아니라서요. 그게... 그건 표트르 키릴로비치, 그러니까 두블린스키가 담당... ”

 

“ 그럼 담당자가 왔어야지! 당신은 대체 뭔데! ”

 

“ 어... 전 서무... ”

 

“ 좋아, 그럼 이건 두블린스키인지 뭔지 하는 작자가 직접 올라와서 답변하라고 하고. ”

 

“ 예, 지금 불러오겠습니다. ”

 

가긴 어딜 가!

 

 

카마로프스키는 구내 전화번호부를 훑더니 수화기를 들었다. 곧장 두블린스키를 호출했다. 그리고는 다시 자료 뭉치를 뒤졌다.

 

 

“ 얼씨구, 잘하는 짓이군. 이것도 당국 승인이 필요한 건데 내부 결재로만 끝내버렸어. 77년이라. 그때 한참 여기서 말 안 들을 때였지. 어디 한번 답변해 보시지! ”

 

“ 저, 77년이라면 저는 입사 전인데요. 이건 세르게이, 그러니까 불라노프 담당 업무... ”

 

“ 대체 당신이 아는 건 뭐야! 어디서 이런 머저리를 올려 보내서 내 시간을 낭비하는 거야! 당장 담당자 불러와! ”

 

“ 예... 구내 전화번호는 475... ”

 

“ 필요 없어! 답답해빠진 당신 얼굴 보고 있으니 더 짜증이 나! 그냥 내려가서 담당자 올라오라고 해! ”

 

 

베르닌은 얼이 빠진 채 감사실을 나갔다. 복도에서 두블린스키와 마주쳤다. 두블린스키는 ‘그것도 하나 제대로 답변 못해서 날 호출하냐!’ 하고 주먹을 흔들어대며 들어갔다. 사무실로 가서 불라노프에게 감사관 얘기를 전달하자 그 역시 벌컥 화를 냈다.

 

 

“ 이 천치야! 대충 대답하고 뭉갰어야지! 꼭 선배까지 올라가게 만들어! ”

 

“ 하지만 저는 정말 하나도 모르는 내용을 묻는단 말이에요. 빨리 올라가보세요. 감사관이 화냈어요. ”

 

“ 에잇, 정말 아무짝에 쓸모없는 자식 같으니! ”

 

오후에 감사실에서 전화가 왔다. 추가 자료를 왕창 요구했다. 주로 오전에 카마로프스키가 질문했던 내용들과 관련이 있었다. 하지만 거기 더해 서무 관련 서류도 추가되었다. 외부 발송 문서 목록들이었는데 문제는 그게 몇 년치 자료를 포함하고 있다는 거였다. 아무리 찾아도 딱 78년에서 79년 목록이 비었다. 울상이 된 베르닌이 캐비닛을 몽땅 어지르고 있는데 발따예프가 혀를 찼다.

 

“ 찾아봤자야. 78년, 79년. 그 투레츠키 자식이 서무일 때잖아. 그럼 목록 없어. ”

 

“ 뭐라고요? ”

 

“ 목록만 없나, 서류도 없어. 알아서 해결해. ”

 

“ 어떻게 그럴 수가... ”

 

“ 뭘 어떻게 그래. 위조를 하든 만들어내든 이실직고하든. ”

 

“ 그건 그 당시 담당 부서장이... 아, 지금 정보부장. 그분이 올라가서 설명을 해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

 

“ 웃기고 있네. 감사장에 간부가 왜 올라가냐, 그것도 전임 부서장이. 이건 지금 담당자가 해결해야 할 문제야. 그러니까 자네! 알아서 하라고! ”

 

 

베르닌은 온몸의 피가 다 마르는 기분이었다. 그는 문서 수발을 총괄하는 총무부서로 내려갔다. 4년 전 발송철을 몽땅 뒤졌다. 우편요금 영수증철을 모조리 뒤져서 간신히 당시 감시분석부에서 발송한 문서들의 제목과 날짜, 수신처를 찾아냈다. 그 목록들을 만들기 위해 다시 밤을 샜다.

 

 

다음날 아침에 목록을 제출하자 무시무시한 카마로프스키는 왜 이렇게 자료를 늦게 가져왔느냐고 불호령을 내렸다. 감사관을 뭘로 보는 거냐고 야단을 쳤고 징계를 받고 싶어 안달이 났느냐고 비꼬았다. 옆에서 새파랗게 젊은 아모소프가 맞장구를 쳤다. 베르닌이 쭈뼛거리며 대답을 못 하자 더욱 무섭게 혼냈다. 스페호프는 아무것도 아닐 지경이었다. 목구멍까지 자기는 죄가 없고 전임 서무가 목록을 안 만들었다는 말이 밀려나왔지만 어쨌든 누워서 침 뱉기였으므로 꾹 참았다. 계속 야단을 맞다가 추가 요구 자료를 또 잔뜩 떠맡고 내려왔다.

 

 

 

*    *    *

 

 

 

이러한 일이 반복되었다. 나흘째가 되었을 때 베르닌은 수면 결핍과 극심한 스트레스, 감사관에 대한 공포, 그리고 그가 요구 자료와 추궁에 시달리든 말든 동료 그 누구도 책임져 주지 않고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너무나 시달린 나머지 헛것을 보기 시작했다. 간신히 눈을 붙였을 때도 카마로프스키의 호통과 아모소프의 이죽거림, 예카테리나 여제처럼 눈을 치뜨며 그를 쏘아보는 푸카레바의 얼음장 같은 표정, 나 몰라라 하는 동료들의 모습이 수백 수천 조각으로 그의 주변을 에워싸고 마구 짓눌러댔다. 식사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뭔가를 먹으면 속이 울렁거리면서 토할 것 같았다. 위염과 장염에 시달렸다. 얼굴에 뾰루지가 잔뜩 돋아났다.

 

시달리고 있는 것이 베르닌만은 아니었다. 다른 부서 서무들도 들들 볶이고 있었다. 운 나쁘게 걸린 담당자들도 고생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자료를 취합하고 일일 수감일지를 작성하고 제출해야 하는 것은 서무들이었다. 특히 베르닌은 총괄 서무라 더 심했다. 금요일이 되었을 때 알렉산드라가 서무들에게 배추밭으로 나오라고 쪽지를 전달했다.

 

 

초췌한 몰골로 배추밭에 모인 서무들에게 알렉산드라가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 본부 쪽에서 들은 정보인데, 이번 감사는 특정 타겟이 없대. 그냥 모스크바에서 지방 보안위원회들 군기 잡으려고 하는 감사래. 요즘 서기장이 오늘 내일 하잖아. 그래서 조만간 주요 인사 라인이 바뀌기 전에 겸사겸사 하는 거래. 하필 우리가 제일 첫 타자라서 자잘한 문제들로 이것저것 걸어서 몇 명 징계 먹이고 갈 거래. ”

 

“ 차라리 국장을 날리려고 하는 거라면 나을 텐데... ”

 

“ 그러게. 보통은 그런 걸로 오잖아. 근데 국장 날리려는 건 아닌가봐. 지난번에 크라베츠 날아간 후로 우리 국장도 끈 떨어져서 위태위태한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닌가봐. 특히 지금 위험한 게 일반 문서 관리 쪽하고 감시분석 쪽이래. 전자는 딱 서무 업무야. 공직기강으로 걸고 넘어지려나봐. 감시분석이야 뭐 감사 단골 메뉴니까... ”

 

베르닌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서무인데다 심지어 감시분석부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서무들도 괴로워했지만 그나마도 베르닌만큼 심한 상황은 아니어서 약간 안도하기도 했다.

 

“ 다냐,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너는 신참이니까 크게 징계 받지는 않을 거야. 그냥 지적받는 정도고 최악이면 한두 달 감봉일 거야. ”

 

“ 하지만 너무 억울해요. 난 시키는 거 다 했는데... 없는 서류도 다 만들었고... 우리 부서에서 지적당한 건 전부 선배들 업무인데 다들 저한테 가서 자료 제출하게 하고 수감 서류에 사인하게 만들었어요. 다들 책임 안 지려고... ”

 

맙소사, 다냐. 사인을 했단 말이야? 네 책임이라고? ”

 

“ 제대로 읽지도 못했어요. 감사관들이 막 무슨 종이를 들이밀면서 담당자 사인하라고... ”

 

“ 너는 담당자가 아니잖아! 왜 네가 사인을 해! ”

 

“ 선배들이랑 부장에게 가져갔는데 다들 무시하면서 빨리 저한테 사인해서 내라고 하잖아요. ”

 

“ 그래도 안 했어야지... 사인까지 하면 어떻게 하니. 빼도 박도 못하게... 너네 부장이랑 선배들 정말 너무하네. 너한테 다 뒤집어씌운 거잖아. 어쩌면 좋니. 아아, 너도 정말 고지식해서 탈이야. 어쩌면 그러니... 아아, 투레츠키라도 여기 있었다면... ”

 

“ 그 사람 때문에 더 징계 받게 생겼는걸요. 그 사람이 서류 안 만들어 놓고 간 것들 위조한 거 아무래도 걸릴 것 같아요. ”

 

“ 하지만 투레츠키는 징계 안 받았어. 걘 진짜 실수투성이에 징계 받아 마땅한 항목들도 많았는데 감사관이랑 10분 면담하더니 그대로 빠져나왔다고. 네가 걔 반만 닮았어도... 어쩌면 좋니... 투레츠키한테 특별 교육이라도 받았다면 좋으련만... ”

 

 

마음 착한 알렉산드라가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다. 다른 서무들도 동병상련에 젖어 베르닌을 위로했지만 자기 코가 석자라 급하게 사무실로 돌아갔다. 베르닌은 망연자실하게 배추밭에 주저앉아 있다가 터벅터벅 들어갔다.

 

 

사무실로 돌아오니 감사실에서 날아온 공문이 놓여 있었다. 감사는 화요일에 종료될 예정이며, 월요일 오전에 주요 담당자 몇 명과 대면 질의를 실시하겠다는 것이었다. 명단이 나와 있었는데 베르닌의 이름도 있었다. 그는 11시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름 옆에는 몇몇 항목들이 적혀 있었다. 하나는 문서 발송과 관련된 서무 업무였고 나머지는 전부 선배들의 업무였지만 그가 수감 서류에 사인을 해버린 사항들이었다. 아마 그 항목들을 가지고 추궁한 후 최종 징계 결정을 내리려는 것 같았다. 그건 마치 기소장이나 다름없었다. 베르닌은 눈앞이 아찔했다. 운 나쁘면 잘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

 

그는 가방을 주섬주섬 챙겼다. 아직 퇴근 시간 전이었지만 멍하게 사무실을 나왔다. 입사 후 처음으로 무단 조퇴를 했다. 세상이 다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깨를 떨어뜨리고 나가는 베르닌을 동료나 선배 그 누구도 붙잡아 주거나 위로해 주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원래 그런 거니까.

 

 

*    *    *

 

 

 

춥고 바람 부는 거리로 나오자 눈물이 솟구쳤다. 서럽고 두려운 마음에 훌쩍훌쩍 울면서 베르닌은 한동안 길거리를 쏘다녔다. 억울해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잘리면 다른 직장을 알아봐야 할 텐데 뭘 해먹고 살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2년 넘게 KGB에 다녔지만 한 일이라곤 아무 짝에 쓸모없는 서무 업무에 왕재수의 가정부 노릇뿐이었다. 식당에 취업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전교 2등에 법학 대학 우수 졸업이라는 자신의 학벌을 생각하니 너무나 서글퍼져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느새 퇴근 시간이 넘었고 길거리도 어둑어둑해졌다. 터덜터덜 집 쪽으로 걸어가는데 뒤에서 알렉산드라가 그의 어깨를 탁 쳤다.

 

“ 다냐! 어휴, 한참 찾았네. ”

 

“ 어, 선배님... ”

 

“ 너 월요일 면담자 명단에 있더라.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내가 아까 수소문했거든, 투레츠키 지금 어디 있는지 찾았어. 너 걔한테 한번 가보렴. 어쨌든 네 전임이잖아. 사정 말하고 노하우 좀 알려달라고 해봐. 적어도 징계 수위는 좀 낮출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

 

“ 투레츠키... 전설의 서무... ”

 

“ 그래그래. 내가 바냐한테 전화도 해놨어. 내일 오후 두 시에 약속 잡았어. 그러니까 거기 가서 잘 좀 물어봐. 혹시 아니, 걔한테 방법 배워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 자, 여기 걔 사무실 주소야. ”

 

“ 그 사람 내일 토요일인데도 일을 하나요? ”

 

“ 응, 주말이 제일 수지맞는대. 무슨 암시장 물건들 거래하나봐. 대신 보안위원회 몰래 하는 거니까 너도 절대 비밀 지켜줘야 해. 알았지? ”

 

“ 네... 정말 감사합니다, 선배님. 선배님뿐이에요, 흐흑... ”

 

“ 바냐는 보드카하고 청어를 좋아해. 그러니까 스탄다르트 한두 병하고 청어 통조림 좀 챙겨가. ”

 

“ 네... ”

 

 

베르닌은 식료품 가게에 가서 줄을 섰고 비상금을 털어 스탄다르트 보드카 두 병과 청어 통조림 한 캔을 샀다. 피로가 누적되어 무척 졸렸다. 감사 때문에 밤을 새느라 일주일 만에 들어온 집은 먼지와 설거지 거리가 쌓여 엉망이었다. 그나마 왕재수를 챙겨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폐렴으로 며칠 고생하다 회복된 후 왕재수는 무슨 신작을 준비한다면서 줄곧 극장에 붙어 있었고 바이올린 깡패의 아파트에서 밤을 보내는 것 같았다. 그는 혹시나 해서 왕재수의 집에 가보았다. 아파트는 역시나 텅 비어 있었다. 차디찬 햄 샌드위치를 씹으며 도청 테이프를 돌려보니 아무 소리도 녹음되어 있지 않았다. 왕재수도 일주일 내내 집에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나마 일을 좀 던 셈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스페호프가 감시 업무 소홀이라고 야단을 쳤겠지만 특별 감사 때문에 난리가 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국장도 그 ‘불여우’에 대한 일은 잊고 있는 듯했다.

 

샌드위치를 반쯤 먹다 말고 그는 목이 메어서 맥주를 한 잔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리고는 속이 상해서 흐느껴 울다가 옷도 벗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진 채 필름이 끊기듯 깊게 잠들었다.

 

 

*    *    *

 

 

 

토요일 오후 두 시에 그는 알렉산드라가 알려준 주소를 찾아갔다. 바냐 투레츠키의 사무실은 구시가지의 작가 공방들 뒤편에 있는 낡고 허름한 건물 2층에 있었다. 어두컴컴한 아치와 뜰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자 문 앞에서 군복 조끼 차림에 담뱃진으로 잔뜩 절어 있는 험상궂고 덩치 큰 남자가 그를 가로막았다. 무슨 일로 왔느냐고 눈을 부라렸다.

 

“ 어... 저... 바냐 투레츠키와 두 시에 약속을 했는데요. 그러니까, 알렉산드라가... ”

 

“ 꼬락서니가 수상한데? 이거 혹시 짭새 아냐?

 

“ 예? 아니, 저... ”

 

“ 아무래도 짭새 같은데! 주머니에 삐쭉 나온 그건 뭐야! ”

 

“ 아니, 이건 그냥... ”

 

남자는 베르닌의 코트 주머니를 뒤져서 청어 통조림을 찾아냈다. 금세 얼굴이 누그러지더니 통조림을 자기 주머니로 밀어 넣었다.

 

“ 흠흠, 진작 보여줄 것이지. 두 시에 바냐와 약속을 했다고? 들어가 봐. ”

 

“ 어, 그거 투레츠키한테 주려고... ”

 

“ 바냐 게 내 거고 내 게 바냐 거야! 아니꼬운 거 있나? ”

 

“ 아, 아니요... ”

 

 

베르닌은 그나마 보드카는 안 들킨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의 문을 하나 더 열자 그야말로 잡동사니로 가득한 우중충한 사무실이 나왔다. 무슨 중고 시장 같았다. 별의별 물건들이 다 있었다. 낡은 트랜지스터부터 수입 세탁기, 누렇게 바랜 외국 잡지와 책들, 통조림들, 꼬부랑 글씨가 붙어 있는 주스와 소스병, 아기 유모차에 무슨 전기드릴까지 없는 게 없었다. 그것들이 질서정연하게 정돈되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마구 널려 있었다.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물건들을 비집고 들어가자 창가에 엄청나게 야한 새빨간 1인용 가죽 소파가 놓여 있었고 훈장이 덕지덕지 달린 노란 재킷을 입은 젊은 남자 하나가 앉아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었다. 자그마한 키에 삐쩍 마른 남자로 붉은 기 도는 금발 머리를 기름을 발라 올백으로 넘기고 가느다란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금테 안경 너머로 초록색 눈이 이따금 번쩍번쩍 빛났다. 그 인상이 너무 얍삽하고 교활해 보여서 베르닌은 순간 몸을 돌려 나가고 싶었지만 그때 남자가 그를 발견하더니 손을 흔들었다.

 

 

“ 어이, 처음 보는 얼굴인데? 뭐 찾아? ”

 

“ 어... ”

 

“ 아니면 뭐 가져왔나? ”

 

“ 아뇨... 저, 바냐 투레츠키를 찾아왔는데요. 저는 다닐 베르닌... ”

 

“ 아, 다닐. 사셴카가 얘기한 바보가 자네였군. 그렇게 바보같이 서 있지 말고 앉아. ”

 

“ 당신이 바냐... 전설의 서무... ”

 

“ 전설까지야. ”

 

“ 알렉산드라를 사셴카라고 부르는 걸 보니 친하셨나 보네요. ”

 

“ 난 누나들하고는 다 친했지. 앉으라니까. ”

 

 

베르닌은 아까부터 앉으려고 했지만 대체 어디에 앉아야 할지 알 수가 없어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소파는 1인용이었고 의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기 때문이다. 투레츠키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옆에 쌓여 있는 잡지더미를 가리켰고 그는 할 수 없이 책 위에 앉았다. 보드카 두 병을 내밀자 투레츠키가 뛸 듯이 좋아했다.

 

 

“ 자네 뭘 좀 아는군! 한 잔 할까! ”

 

“ 아뇨, 저... 이건 당신 드시라고 선물로... ”

 

“ 보드카를 혼자 무슨 재미로 마셔! 눈앞에 보드카가 있으면 따야지! 청어 통조림만 있으면 딱인데. 그렇지, 분명히 보랴가 하나쯤 갖고 있을 거야. 보랴! 청어 좀 가져와! ”

 

군복 조끼 입은 거구의 남자가 불쑥 들어오더니 뚜껑을 딴 청어 통조림과 잔 세 개를 건네주었다. 투레츠키는 능숙하게 보드카를 따더니 세 개의 잔에 모두 술을 따랐다. 신나게 건배를 하고 한 입에 보드카를 털어 넣었다. 베르닌은 낮술을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어쨌든 따라 마셨다. 보랴는 청어를 맨손으로 움켜서 입에 쑤셔 넣더니 보드카를 한 잔 더 마시고 휙 나가버렸다. 투레츠키는 맛깔스럽게 술을 마시고 청어를 먹었다. 베르닌은 두 잔째 마시면서 멍하게 투레츠키를 쳐다보다가 노란 재킷에 덕지덕지 달려 있는 것들이 훈장이 아니라 조잡한 에나멜 배지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별과 줄무늬가 그려진 것을 보니 미국산인 것 같았다. 심지어 주머니칼까지 목에 걸고 있었다.

 

보드카를 연달아 넉 잔쯤 마시고 난 후 기분이 좋아진 투레츠키가 자랑을 늘어놓았다.

 

“ 난 말이지, 엄청 잘 나가고 있어. 여기 없는 물건이 없다니까. 모스크바에서 구할 수 있는 건 나한테서도 전부 구할 수 있지. 여기 없는 것도 말만 하면 일주일 내에 구해다 줄 수 있어. 자네 나랑 동업하는 게 어때? 안 그래도 요즘은 손이 모자라서 말이야. 보랴도 괜찮긴 한데 주먹이 앞서서 말이지. ”

 

“ 저... 제의는 감사한데요... 전 당장 월요일에 감사관에게 불려가서 징계를 받을 판이라... ”

 

“ 쳇, 그 망할 놈의 KGB! 그건 정말 내 인생의 흑역사라니까! 꽃 같은 내 인생을 그따위 팍팍한 먼지구덩이에서 2년이나 낭비했다니! 무슨 서류니 감사니... 심지어 그 왕꼴통 스페호프! 그거 완전 초특급 사이코에 개자식이었는데. 그 작자 아직도 있나? ”

 

“ 예... ”

 

“ 여전히 초특급 사이코에 개자식인가? 서무들 들들 볶고? ”

 

“ 네... 특히 저를... ”

 

“ 에이, 말 놔. 우리 나이도 비슷한 거 같은데. 나 올해 스물아홉이라고. ”

 

“ 어, 나도 여름에 그렇게 되는데... ”

 

“ 그럼 동갑이네. 말 놔, 말 놔. 다냐! 건배! ”

 

둘은 건배를 하고 보드카를 한 잔씩 더 마셨다. 베르닌은 어쩐지 마음이 좀 편해졌다. 투레츠키는 자기가 밀수해오는 물건들을 가리키며 출처가 다양하다고 설명하고 다시 한 번 그에게 동업을 제의했다. 베르닌은 쭈뼛거리며 물었다.

 

 

“ 근데 난 보안위원회 소속인데 뭘 믿고 동업을 하자는 거야? 이런 거 불법이잖아. 걸리면 큰일... ”

 

“ 너 나 찌를 거야? 우리 동갑인데! 친구 먹었는데 설마! 정말 그럴 거야? ”

 

“ 아니. 나 그런 짓 절대 안 해. 그래도... ”

 

“ 그럼 된 거지! 난 너 얼굴 보자마자 딱 감이 왔어. 얜 믿을 수 있는 놈이구나! 그러니까 동업하자는 거지~! 나 여태 한 번도 배신당한 적 없어. 이쪽으로는 촉이 뛰어나거든. 내 인생 유일한 실수는 너네 그 KGB 입사했던 거라고. 서무 같은 소리... 쳇. 지금 나 엄청 잘 나가. 이거 벌이도 짭짤하고 예쁜 여자들은 그냥 딸려와. ”

 

“ 어, 고마워. 생각 좀 해볼게. 근데 난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먼저 이것부터 좀 해결해야 하거든. 그러니까 특별 감사... ”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들어왔기 때문에 베르닌은 제풀에 뜨끔해서 입을 다물고 급하게 그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심장이 떨어질 만큼 놀랐다. 왕재수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거구의 보랴가 문을 열어주었는데 그에게 딱딱거리던 것과는 달리 문가에 쌓여 있는 잡동사니들을 한쪽으로 밀어주면서 비단결 같은 어조로 너무나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었다.

 

 

“ 조심해야지, 자칫 걸려 넘어져서 그 고운 피부에 흠집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니. ”

 

“ 고마워, 보르카. 있다가 저녁 해줄 거야? ”

 

“ 그래그래. 너 좋아하는 거 들어왔어. 부야베스 만들어 줄게~ 정통 마르세유 식으로. ”

 

“ 사프란도 구했어? 부야베스엔 그거 들어가야 되는데. ”

 

“ 그럼, 너 해주려고 내가 구했지~ 볼일 보고 나와. 같이 우리 집 가자. ”

 

“ 응. ”

 

 

베르닌은 너무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보랴가 나간 후 왕재수는 잡동사니들 사이를 우아하게 헤집고 창가로 걸어왔다. 투레츠키가 손을 흔들며 윙크를 하더니 돼먹지 못한 영어를 지껄였다.

 

“ 오우, 프리티! 뷰우티! 굿 애프터누운~ 컴 온~ ”

 

“ 안녕, 바냐. ”

 

“ 새로 들어온 거 그쪽에 있어. 예쁜이 오늘은 나 줄 거 없어? ”

 

“ 오늘은 없는데. 너무 바빠서 계속 집에 못 들어갔어. ”

 

“ 노래 테이프도 없는 거야? ”

 

“ 응. 다음에 가져다줄게. ”

 

“ 내 사전에 공짜는 없는데. ”

 

“ 외상 달아놔. ”

 

“ 외상 같은 소리. 나 그렇게 허술하게 장사 안 하는데. ”

 

 

그러더니 투레츠키가 푹신한 소파에서 일어나서 왕재수에게 갔다. 베르닌은 너무 놀라고 얼이 빠져서 멍하게 서 있었다. 왕재수는 그를 보고서도 전혀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암거래상을 찾아왔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일이니 당연한 것 같기도 했다. 그 순간 투레츠키가 왕재수를 꼭 끌어안고 엉덩이를 움켜쥐듯 어루만지며 입술에 키스를 찐하게 세 번이나 했다. 베르닌이 그 추행 장면에 기겁을 하며 손에 잡히는 대로 보드카 병을 움켜쥐고 휘두르려고 했을 때 투레츠키가 휘파람을 불며 왕재수의 뺨에 또 뽀뽀를 했다. 심지어 혀를 쭉 내밀어 왕재수의 뒷목덜미를 핥기까지 했다!

 

 

“ 아유, 정말 계집애들보다 더 귀엽다니까. 향기도 어쩌면 이렇게 좋니. 거기 신문이랑 다 있으니까 너 보고 싶은 대로 다 보고 가. 내가 너 보여주려고 어제 오후에 막 들여온 따끈따끈한 거야. ”

 

“ 이번 주 신문이야? ”

 

“ 그럼. 그저께 주간지도 있지. 나야 불어는 까막눈이지만. ”

 

“ 알았어. ”

 

 

왕재수는 추행을 당한 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잡지 더미 사이를 비집고 반대편으로 들어가더니 프랑스어로 된 신문 한 뭉치와 영어로 된 신문, 잡지 한 뭉치를 끌어내렸다. 왕재수가 햇볕이 잘 들어오는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다리를 뻗으려는 것을 투레츠키가 금세 어딘가에서 접이의자를 꺼내주더니 그 위에 무릎담요까지 몇 겹으로 개켜서 얹어 주었다. 왕재수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의자에 앉더니 열심히 외국어 신문과 잡지들을 넘기며 읽기 시작했다. 베르닌 쪽으로는 눈 한 번 돌리지 않았다.

 

 

소파 쪽으로 돌아온 투레츠키가 입맛을 다시면서 중얼거렸다.

 

“ 쟨 진짜 귀엽다니까. 해달라는 거 다 해주고 싶게 만들어. 계집애였으면 벌써 내가 홀랑... ”

 

“ 저... 너 쟤 누군지 알아? ”

 

“ 미셴카? 그럼. 몇 달 전부터 왔는데. 진짜 끝내준다니까. 좋은 물건도 많고 외국 물정도 많이 알아. 외국 신문들은 다른 애들 같으면 집에 숨겨놓고 사전 찾아가며 한 시간 두 시간씩 읽는데 쟤는 그냥 앉은 자리에서 후딱 읽어치우고 놓고 가니까 진짜 깔끔해. 나한테는 딱 좋지. 내가 처음부터 동업하자고 꼬셨는데 싫다더라고. 손에 먼지 묻히는 거 싫다나. 하긴 쟨 저렇게 귀여우니 땀 흘리는 짓 안 해도 뭔들 안 풀리겠니. ”

 

“ 쟤가 뭐하는지도 아는 거야? ”

 

“ 아니. 나 그런 거 관심 없어. 나는 훌륭한 거래상이야. 여기 오는 손님들에 대해 철칙이 있어. 아무 것도 안 물어봐. 특히 개인 정보는 더더욱! 잘못해서 나나 보랴가 잡혀가도 손님에 대해 아는 게 없으면 불 것도 없잖아. 쟤는 근데 너무 예쁘니까 좀 궁금하긴 하더라. 보랴는 좀 아는 것 같던데. 둘이 가끔 놀더라고. ”

 

“ 가끔 놀아... 맙소사... 바이올린 아저씨도 모자라서... ”

 

“ 왜? 너 쟤 알아? 관심 있어? 너 그런 취향이야? ”

 

“ 아니. 아니야... 절대. 저... 그 특별 감사 말인데. 너의 노하우... ”

 

 

베르닌은 간신히 본론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서무로서의 고통과 임박한 징계의 공포에 대해 설명했다. 투레츠키는 잠시 그의 하소연을 듣더니 지루한 듯 하품을 했고 보드카를 한 잔 더 따라 마셨다. 그리고는 베르닌의 어깨를 툭 쳤다.

 

 

“ 에이, 너 진짜 고지식하구나. 그러니까 스페호프한테 들들 볶이지. 뭘 그런 걸 걱정하냐. 애초부터 자료 다 찾고 만들어준 것부터가 잘못이야. ”

 

“ 어떻게 안 찾고 안 만들어... 난 서무인데. ”

 

“ 서무가 뭐. 지금이 무슨 농노 시대냐? 노동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랬어. 선배란 것들은 원래 그런 것들이야. 서무가 버릇을 잘 들였어야지! 네가 너무 오냐오냐하면서 다 해주니까 그것들이 당연한 줄 알고 다 너한테 시켜먹는 거라고. 아예 배 째고 안 했어야지. ”

 

“ 어떻게 안 해. 난 막내인데... ”

 

“ 누군 막내 아니었냐. 그냥 안 하면 되는 거야. 급한 놈이 우물 파게 돼 있어. 네가 안 하면 맘 급한 담당자가 다 하게 된다고. ”

 

“ 하지만 국장이... ”

 

국장이 떠들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그자가 널 죽일 것도 아니고 월급 깎을 것도 아닌데. 그냥 귀나 한 번 씻어주면 그만이지. ”

 

“ 바냐. 스페호프가 너한테 총 겨누고 사표 쓰라고 한 거 사실이야? ”

 

“ 아, 그거? 그 총에 총알도 없었어. 내가 다 빼놨거든. 어차피 그때쯤 그만두고 싶었던 차라 잘됐지 뭐. 그때 그만뒀으니 내가 지금 이렇게 출세를 했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놀고 싶은 대로 놀고 여자들도 잘 꼬이고. 가끔 저렇게 귀여운 애로 눈요기도 하고. ”

 

“ 하지만... 난 당장 월요일 아침 열한 시에 루뱐카 본부 감사관 면담이 있어. 그 면담 끝내고 징계하려는 거래. 선배들 잘못에 대해서도 내가 책임 있다고 사인까지 했단 말이야. 최소 정직, 아니면 잘릴지도 몰라... ”

 

차라리 그냥 사표 내버려. 내 밑에 와서 일해. 월급 잘 쳐줄게. 그깟 말단 공무원 월급보다 훨씬 짭짤할 걸. ”

 

“ 저... 날 믿어줘서 정말 고마운데 난 책상물림이라 이런 일은 소질이 없어. 난 그저 월요일 감사를 잘 넘기고 싶은데... 너 전설의 서무잖아. 그때 감사 어떻게 빠져나간 거야? 제발 방법 좀 가르쳐 줘. 응? ”

 

“ 음... 세 가지 방법이 있는데... 셋 다 넌 좀 힘들 것 같아. ”

 

“ 왜? 세 가지나 있는데 왜 난 힘들어? 제발 방법 좀 알려줘. 응? 나 노력해 볼게. 일요일도 있으니까 계속 준비하면... ”

 

 

투레츠키는 한숨을 쉬었다.

 

 

“ 넌 그게 문제야, 다냐. 뭐든지 준비하고 연습하고. 그게 책상물림의 특징이야. 그런 걸로 되는 게 아니라고. 전설적인 서무는 타고 나는 거야. 근데 넌 성격이 고지식해서 어려울 것 같아. ”

 

“ 노력할 테니까 제발 좀 가르쳐 줘. 제발... ”

 

좋아. 1번. 아무 것도 모르는 시늉을 하는 거야. 눈을 끔벅끔벅하면서 감사관이 무슨 말을 해도 바보 이반처럼 멍 때리면서 ‘전 신입이라서 아무 것도 모르는데요’라고... ”

 

“ 나 그거 벌써 했었어. 감사관이 나보고 머저리라고 했어. 나 진짜 그 업무 내용을 전혀 몰랐거든. ”

 

“ 그걸 끝까지 밀어붙였어야지! ”

 

“ 근데 선배들이 하도 난리를 쳐서 계속 자료를 취합하고 작성 제출하다 보니까 어느새 나도 내용을 다 알겠더라고. 감사관이 부를 때면 꼭 선배들이 안 보여서 내가 대신 올라가고... 그러다가 조금씩 답변도 해버렸어. ”

 

“ 그것 봐! 벌써 1번은 끝났네. 그나마 너는 그게 제일 가능성 있었는데. ”

 

“ 2번은... ”

 

“ 2번이 효과가 아주 좋지. 바로 거래야.

 

“ 거래라니? ”

 

“ 동료를 팔아넘기는 거지. 가급적 선배로. 윗선일수록 더욱 좋은 거야. 감사관들은 월척을 원하거든. ”

 

“ 하지만 뭘 팔아넘긴다는 거야? 난 너처럼 밀수를 하는 것도 아니고 선배들이랑 그런 거래를 한 적도 없는데. ”

 

“ 답답하긴. 너 서무잖아. 여태 선배들이랑 간부들 근태기록부나 초과근무내역서, 출장보고서 같은 거 다 네가 써줬을 거 아냐. 업무추진비도 네가 정산하고. 그런 거 하면서 약점 잡아놓은 거 없어? 출장 안 갔으면서 갔다고 하고 여비 타갔다든지. 업무추진비로 술 먹었다든지. 아니면 업무 처리하면서 뇌물 받았다든지. 내가 기억하기로 너네 KGB는 그런 일이 횡행했지. 그런 거 몇 개 물증이랑 같이 꽉 쥐고 있다가 감사관한테 흘리는 거야.

 

선생님, 저처럼 피라미 잡아가봤자 별 소득도 없으시잖아요. 제가 괜찮은 정보를 하나 드리죠. 이건 내부 기밀인데요, 저는 서무라서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관님들이 마침 오셨으니 내부 고발을 하고자 합니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제 안위를 지켜주신다는 약속이 필요합니다.

 

뭐 이런 거지. 영화 안 봤냐? 이런 거 진짜 잘 통하거든. 난 감사 두 번 받았는데 첫 번째 감사 땐 이걸로 해결했지. 그땐 정보부장을 팔아넘겼어. 꽤 쏠쏠했지. 심지어 나중에 감사관이 술도 한 잔 사줬어. ”

 

 

베르닌은 입을 딱 벌렸다. 머릿속에 잠깐 수많은 초과근무내역서와 출장보고서, 뇌물의 현장 등등이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난 그건 도저히 못할 거 같아. 어떻게 동료를 팔아넘기니. 나 그건 못해... ”

 

야, 네가 사느냐 남이 사느냐 이런 문제야. 이건 절대절명의 순간이라고! ”

 

“ 그래도 그건 도저히 안 되겠어. 마지막은... ”

 

“ 흠. 이건 2번보다 더 효과가 좋지. 두 번째 감사 때 제대로 써먹었고. 근데 넌 안 될 거야. ”

 

“ 왜? 왜 안 되는데? ”

 

“ 1번이랑 2번은 노력으로 되는데 3번은 그런 걸로는 안 돼. ”

 

“ 뭔데? 노력해서 안되는 게 어디 있어. 제발 가르쳐줘, 바냐. 우리 동갑이잖아. 보드카도 나눠 마시고. 제발... ”

 

“ 음... 3번은 말이야. ”

 

 

투레츠키가 갑자기 소파에서 일어섰다. 멀끔하게 빗어 넘겼던 머리를 두 손으로 마구 흐트러뜨렸다. 고개를 숙이더니 금테 안경을 벗어 재킷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홱 쳐들고 베르닌을 올려다보며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간절하게 속삭였다.

 

선생님,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선생님 한 마디에 제 운명이 달려 있어요. 제발... 저 잘리고 싶지 않아요. 제 모든 게 선생님께 달렸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네?

 

 

베르닌은 감전된 듯한 충격을 받았다. 안경을 벗은 바냐 투레츠키는 놀랍게도 굉장한 미남이었다. 머리를 흐트러뜨리자 웨이브진 금발 머리가 부드럽게 흘러내렸고 초록색 두 눈은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에메랄드 같았다. 애들 동화에 나오는 왕자님처럼 생긴데다 눈물을 글썽거리는 것이 어딘가 굉장히 불쌍해 보여서 꼭 안아주면서 위로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솟구쳤다. 순간 베르닌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장면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자식은 분명 누군가를 연상시켰다. 하는 짓도 그렇고 태도도 그렇고 외모도... 그러니까...

 

 

그때 잡동사니들 사이로 왕재수가 걸어 나왔다. 둘이 무슨 짓을 하는지 전혀 관심 없는 표정으로 곁을 스쳐가며 투레츠키에게 인사를 했다.

 

 

“ 갈게. 다음에 봐. ”

 

예쁜이 가니? 금요일에 좋은 거 들어올 거야. 네 맘에 쏙 들걸. ”

 

“ 봐야 알지. 별로면 돈 안 줄 거야. ”

 

“ 에이, 금요일에 오는 건 진짜 좋은 거야. 돈 안 주면 너 정말 가만 안 둔다. 아까 정도로는 못 넘어갈걸. 확 덮쳐서 잡아먹는다. ”

 

“ 싫어. 너랑은 안 해. 너 내 취향 아니야. ”

 

“ 서릿발 같기도 하지. 하여튼 귀엽다니까. 잘 가, 주말 잘 보내! ”

 

 

왕재수가 문을 열고 나갔다. 베르닌은 문 너머로 거구의 보랴가 왕재수의 어깨를 껴안고 복도로 나가는 것을 힐끗거렸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투레츠키가 머리를 빗어 넘기고 안경을 쓰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뺀질거리는 어조로 돌아왔다.

 

“ 자, 3번. 할 수 있을 거 같냐? ”

 

“ 아니... 안 될 거 같아. 그건 엄청 미남이어야 되는 거잖아. ”

 

“ 미남은 아니어도 되는데, 연기를 잘 해야 돼. 그리고 눈이 크고 감정이 풍부해야 되는데 넌 그게 안 되니... 그냥 2번 연습해서 가는 게 나아. ”

 

“ 너 그래서 안경 끼는 거야? 너무 잘생겨서? ”

 

“ 그렇지. 이런 짓 하면서 먹고 살기엔 내가 너무 쓸데없이 미남이라서. ”

 

“ 알렉산드라가 너한테 잘해줬던 것도... ”

 

“ 그래, 누나들은 다 나한테 잘해줬다니까. ”

 

“ 그렇구나. 전설의 서무란 건... 그냥 잘생겼기 때문이었어.

 

“ 그건 아니지. 내 능력 90%에 미모 10%인 거지. 이봐, 다냐. 너무 실망하지 마. 2번 방법을 연습해서 해보고. 실패하면 미련 없이 사표 던지고 나한테 오는 거야! 나랑 같이 이 업계를 평정하는 거지! ”

 

“ 난 책상물림이라고 했잖아. 그리고... ”

 

“ 그리고 뭐? 또 맘에 걸리는 게 있어? 불법이라서? ”

 

“ 아니... 그것보다... 너 너무 손님한테 막 대하는 거 아니야? ”

 

“ 내가? 난 손님을 왕처럼 대접해! 기밀도 다 지켜주고! 개인정보도 안 물어본다 했잖아! ”

 

“ 그치만. 아까 걔... 막 추행하고... ”

 

“ 추행은 무슨 추행! 귀여우니까 좀 쓰다듬어준 거지. ”

 

“ 아니야. 너... 걔가 허락도 안 했는데 막 껴안고... 입술에... ”

 

“ 야, 장난으로 뽀뽀 몇 번 한 걸 가지고. ”

 

“ 그거 뽀뽀 아니었어. 막 입 벌리고 혀도 이렇게 들어가고... 그거 진짜 키스였잖아. 심지어 엉덩이도 만지고... 핥기까지... 강아지도 아닌데. ”

 

“ 어휴, 너 정말 답답하다. 당사자는 가만히 있는데 왜 네가 난리야. 너 걔한테 관심 있냐? 그럼 금요일에 와. 내가 소개시켜 줄 테니까. 나 참. ”

 

“ 아니야, 나 그런 거 아냐. 나 여자 좋아해. 근데 하여튼 아까 그건... ”

 

그거 뭐! 걔가 돈 안 줬잖아. 우린 돈 아니면 물물교환인데 오늘은 걔가 물건도 안 가져왔잖아. 그러니까 다른 거라도 줘야지. 여긴 단순해.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게 있는 거라고! 예쁜 애는 그 정도로도 내가 넘어가주니까 오히려 이득이지. ”

 

“ 너 저기... 걔한테 더 심한 짓도 했어? ”

 

너 지금 나 추궁해? 짭새 노릇하는 거야? ”

 

“ 아니야. 그런 게 아니고... 그냥... 좀 마음에 걸려서. 걔 나이도 어려 보이고... 생긴 것만 그렇지 순진한 애일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

 

너 정말 고지식하구나. 더 심한 짓이란 게 뭔지 모르겠네. 그래봤자 뭐. 뽀뽀 좀 하고 좀 쓰다듬고. 아, 뭐 옷 속으로 손 집어넣고 좀 어루만지긴 했네. 조그만 게 얼마나 피부가 고운지. 그게 전부야. 됐냐? 근데 금요일에 또 오늘처럼 돈도 안 가져오고 물건도 안 가져오면 진짜 확 깔아 눕히고 홀랑 잡아먹을 거야. 사내애라도 워낙 예쁘니까. ”

 

 

베르닌은 하마터면 보드카 병으로 투레츠키의 머리를 냅다 내리칠 뻔 했다. 투레츠키는 방금 자신이 죽음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베르닌에게 다시 술을 권했을 뿐이었다. 베르닌은 심호흡을 했고 보드카를 한 잔 더 받아 마신 후 다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투레츠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투레츠키가 아쉬워했다. 보드카가 아직 좀 남아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 친구야, 성공을 빌어. 안되면 사표 내고 나랑 동업을... ”

 

“ 어 그래. 어쨌든 고마워. ”

 

“ 금요일에 와. 어떻게 됐는지 얘기해 줘. 아까 걔도 올 거니까 소개시켜 줄게. ”

 

“ 어, 아니 됐어. 나 갈게. 장사 잘 해. ”

 

 

투레츠키는 손을 흔들어 주었지만 사무실 밖으로 따라 나오지는 않았다. 복도는 비어 있었다. 보랴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왕재수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 사프란인지 뭔지를 넣고 부야베스인지 나발인지를 만들어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베르닌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고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갔다.

 

 

 

*    *    *

 

 

 

월요일에 베르닌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출근했다. 1번은 이미 물 건너갔고 3번은 그와 같은 단추눈으로서는 불가능했다. 그리고 2번은 도저히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즉 전설의 서무가 가르쳐준 방법들은 다닐 베르닌 같은 책상물림에게는 무용지물일 뿐이었고 그에게 남은 거라곤 무시무시한 감사관과의 면담과 징계, 그리고 잘리는 일 뿐이었다.

 

10시 반에 감시분석부장이 그를 불렀다. 베르닌은 혹시라도 담당 부서장이 자신을 위해 조금이라도 힘을 써주려나 싶었지만 부장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을 뿐이었다.

 

“ 감사관이 얘기하면 허튼 소리 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듣고 있다가 내려와. 괜히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다른 직원들 팔지 말고.

 

“ 부장님, 그런데 전 정말 억울합니다. 이건 전부 선배님들 업무인데 왜 제가 이렇게... ”

 

원래 조직 생활이란 게 그런 거야. 우리도 다 초창기엔 그랬어. 그나마 자네는 신참이니까 감사관들도 심하게 징계 안 줄 거야. 그리고 지적받아도 최종 징계는 우리 내부에서 내리는 거니까 사정 봐서 조금 감해 줄 거야. 감봉까진 어쩔 수 없겠지만. 다 이러면서 배운다 생각해. ”

 

 

베르닌이 이번 감사에서 배운 거라곤 조직 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수밖에 없다는 암담한 사실 뿐이었다. 동료 직원들은 모두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특히 감사 지적 업무 담당자인 두블린스키와 불라노프는 꼬투리를 잡히고 싶지 않았는지, 아니면 베르닌과 마주치기가 껄끄러웠는지 일찌감치 당일 출장을 나가버린 후였다.

 

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 억울했던 나머지 그는 잠시 투레츠키의 2번 방법을 심각하게 고민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차곡차곡 모아놓은 물증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설령 있다 해도 동료들을 팔아넘길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러느니 그냥 자기가 뒤집어쓰는 게 낫다고 결론을 내렸지만 눈앞이 캄캄했고 심장이 답답하게 죄어왔고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울렁거렸다.

 

 

마침내 11시가 되었다. 베르닌은 어깨를 떨어뜨린 채 천천히 3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아주 잠깐 그는 국장실로 들어가 스페호프에게 도움을 요청할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국장은 특별 감사 기간 내내 쥐죽은 듯 조용했고 심지어 주간회의조차도 진행하지 않았다. 부서장과 동료들도 그를 외면하는 판에 1인자인 국장이 그에게 신경을 써줄 리가 없었다. 오히려 더욱 앞장서서 그를 늑대 밥으로 던져줄 것이다.

 

 

감사실 문은 닫혀 있었다. 그는 노크를 한 후 힘겹게 문을 열었고 쭈뼛쭈뼛 안으로 들어갔다. 감사장 내부 배치가 좀 바뀌어 있었다. 책상이 하나밖에 없었다. 카마로프스키와 아모소프는 양쪽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 책상이 떡하니 놓여 있고 발렌티나 푸카레바가 예카테리나 여제처럼 버티고 앉아 있었다. 앞선 면담자였던 정보부서 서무가 눈물을 글썽이며 서류 뭉치를 쥐고 베르닌의 곁을 지나 뛰쳐나갔다. 푸카레바가 우렁차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다음! 당신 이름과 소속은?

 

“ 다닐 베르닌... 감시분석부 서무입니다. ”

 

“ 흠, 다닐 베르닌. 아, 감시분석부. 이번 감사에서 제일 문제 많은 부서! 당신이 그 베르닌이군! 먼저 그 77년 사업 건인데! ”

 

 

푸카레바는 필기체로 휘갈겨 쓴 서류를 좍 펼치더니 수십 개의 지적사항들을 줄줄이 읽어 내려갔다. 짱짱하게 틀어 올린 머리 때문에 더욱 더 치켜 올라간 무시무시한 새파란 눈으로 베르닌을 똑바로 쏘아보더니 천둥처럼 쩡쩡 울리는 음성으로 소리쳤다.

 

 

이건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짓이군! 젊은 요원이 벌써부터 이런 문제를 일으키다니! 이건 여기 지국뿐만 아니라 연방 전체 보안위원회에 크나큰 해악을 끼칠 수 있는 문제야! 당신 같은 작자는 그냥 잘라서도 안 되고 완전히 블랙리스트에 올려서 다시는 공직에 발을 못 들여놓도록 단단히 맛을 보여줘야...

 

 

베르닌이 현기증으로 기절하려는 순간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푸카레바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구야! 중요한 면담 중에! 꺼져!

 

 

아랑곳없이 똑똑 하는 소리가 두 번 더 난 후 문이 열렸다. 베르닌은 어질어질한 가운데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근사한 검은색 코트에 엷은 푸른색의 캐시미어 스카프를 느슨하게 두르고 희미하게 광이 나는 가죽 부츠를 신고 부드럽게 흐트러진 검은 머리를 휘날리며 왕재수가 사뿐사뿐 걸어 들어왔기 때문이다. 낯선 외부인의 출몰에 놀란 카마로프스키와 아모소프가 ‘당신 누구야! 여긴 출입 금지야!’ 하고 소리치며 그를 내쫓으려고 했을 때 푸카레바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깜짝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어머나, 이게 누구야!

 

“ 발렌티나 누나! ”

 

“ 어머나, 미셴카! 정말 너니?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어떻게 여길! 오오, 이게 얼마만이야! ”

 

 

푸카레바가 책상 앞으로 뛰쳐나왔다. 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의자도 쿠당탕 넘어뜨리고 구두도 한 짝 벗겨졌다. 왕재수가 잽싸게 푸카레바의 팔을 붙잡고 허리를 부축해 주었다. 푸카레바는 왕재수를 꼭 껴안고 뺨과 입술에 뽀뽀를 퍼부으며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유, 미셴카! 진짜 반갑네!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대체 어떻게 된 거야! ”

 

“ 저 작년부터 여기 와 있어요. 여기 시립극장 감독으로... ”

 

“ 어머나, 시골로 유배 보냈다더니 그게 여기였구나. 나쁜 작자들. 아무 죄도 없는 비둘기 같은 너를 모함해서 감옥 보내고 고문하더니... 그때 너 구해주려고 우리가 서기장한테 얼마나 탄원서를 냈는데. ”

 

“ 덕분에 가석방됐어요. 누나 덕분이었군요. 고마워요. ”

 

 

왕재수가 푸카레바를 자기 품에 와락 껴안고 다시 뽀뽀를 해 주었다. 푸카레바는 그야말로 정신을 못 차렸다. 황홀한 눈빛으로 왕재수를 올려다보면서 뺨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 어린 것이 얼마나 고생을 하고... 그때 너 모함한 놈들 지금 다 작살났어. 알지? 게르만이 한 놈은 시베리아 보내고 한 놈은 숙청, 다른 놈은... ”

 

“ 들었어요. 근데 그러면 뭐해요, 전 여기 시골에... ”

 

“ 그러게 말이야. 어떻게 너 같은 애를 이런 시골바닥에 처박니. 너 몸은 괜찮아? 어머나, 살 빠졌네. 얘 마른 것 좀 봐. 얼굴도 더 하얘지고. ”

 

“ 저 좀 아팠어요. 고문당해서... ”

 

“ 나쁜 놈들! 그 짓거리 가담한 놈들 다 잘라버려야 돼! 걱정 마, 누나가 복수해 줄게. 그쪽 다 특별 감사 걸어버려야지! 그런데 여긴 웬일이니? ”

 

“ 아, 저 뭔가 서류 갱신을 해야 한다고 해서 왔어요. 근데 현관에 보니까 무슨 감사 기간이라고 종이가 붙어 있는데 거기 누나 이름이 있더라고요. 등록부서에 물어보니까 누나 맞는 거 같아서 얼굴이라도 보려고 올라왔어요. ”

 

“ 잘했어, 잘했어! 어머, 어쩜 너무 좋다. 그때 크레믈린 축제 때 보고 일 년 만이네. 살 빠졌어도 여전히 멋있구나. 그래, 여기 극장 감독이라고? 혹시 오늘 무대 올라가? 오늘 극장 가면 너 추는 거 볼 수 있는 거야? ”

 

“ 누나, 저 지금 춤 못 춰요. 그때 고문당한 거 다 안 나아서 못 춰요. ”

 

뭐야! 이 몸이 어떤 몸인데!!! 감히 이 아름다운 다리에 손을 대서 춤을 못 추게 만들었다고! 정말 용서가 안 되는구나! 수용소부터 시작해서 그쪽 교화 담당자들 전부 다 감사 걸어서 잘라 버릴 거야! ”

 

 

푸카레바는 발을 구르면서 화를 냈다. 심지어 흐느껴 울기까지 했다. 베르닌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멍하게 서 있었다. 카마로프스키와 아모소프도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다가 자리에 앉아 서류철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왕재수가 푸카레바를 어린애 어르듯 안아주고 뺨에 키스를 하고 달랬다.

 

“ 아니에요, 누나. 괜찮아요. 저 금방 다 나을 거예요. 근데 지금 뭐하시던 거예요? 쟤는 왜 부르셨어요? ”

 

“ 아, 오늘이 감사 마지막 날이거든. 징계 건 때문에. 아주 악질인 녀석이 있어서 추궁하고 있었어. 당신! 뭘 그렇게 넋 놓고 있는 거야! 당장 똑바로 못 서!

 

 

쩌렁쩌렁한 호통에 베르닌은 퍼뜩 놀라 차려 자세로 섰다. 왕재수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푸카레바의 손을 꼭 잡았다.

 

 

“ 어, 이상하네. 쟤 완전 말단인데. 쟤 아무 것도 몰라요. 쟤가 뭘 할 줄 안다고 징계를 해요? ”

 

“ 네가 몰라서 그래. 저 인간이 감시분석부 소속인데 중요한 일들을 처리하면서 별의별 비리를 다 저지르고 절차도 다 무시하고 온갖 잘못을 저질렀단다. 공무원 자격이 없는 놈이야. 잘라버려야 해. 누나가 하는 일이 그런 거잖니. ”

 

“ 아니에요, 누나. 저 쟤 알아요. 맨날 허드렛일만 하는데. 무슨 서무인지 뭔진데요, 간판에 페인트칠하고 시계 건전지 갈고 우편 심부름이나 하는 앤데 무슨 중요한 일을 처리하고 잘못을 할 수가 있어요? 그리고 쟤 우리 집에서 집안일 해주는 앤데. 맨날 아침저녁으로 저 데려다주고 밥해주고 청소해주는 게 일이에요. 누나 뭐 잘못 아는 거 아니에요? ”

 

“ 어, 하지만... 여기 분명히... 담당자... ”

 

“ 쟤 담당은 허드렛일하고 배추밭 관리, 고양이 밥 주기랑 바퀴벌레 퇴치, 그리고 제 집사 노릇이에요. 분명히 그 종이에 뭔가 잘못 썼을 거예요. ”

 

“ 하긴 2년 전에 입사했다고 했으니 책임을 지래야 질 수도 없었겠네. 흠... 유르카, 감시분석부에 전화해서 부장 올라오라고 해. ”

 

“ 누나, 아직 한참 남은 거예요? 저 배고픈데. 오랜만에 누나랑 만났는데 누나는 일만 하고... 누나랑 맛있는 것도 먹고 차도 마시고 얘기도 하고 싶은데...

 

“ 아유, 우리 미셰츠카. 어쩜 너는 이렇게 말도 예쁘게 하니. 네가 이러면 누나가 일을 할 수가 없는데... ”

 

“ 에이, 누나.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면서요. 대충 그만 끝내고 저랑 나가면 안돼요? 누나 기름진 거 좋아하시잖아요. 저희 극장 근처에 항아리 닭고기 식당 있는데요, 무지무지 맛있다고 형님누나들이 엄청 좋아해요. 거기 가서 점심 먹고 저랑 차 마시고 산책 가요. 숲길 산책로가 근사해요. ”

 

“ 그래그래, 그러자. 어차피 감사도 다 끝났는데 뭐. 같이 가서 점심 먹고 그간 회포라도 풀자. ”

 

“ 저, 발렌티나 이바노브나. 감시분석부장을 올라오라고 할까요? ”

 

 

카마로프스키가 망설이며 묻자 푸카레바가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됐어. 어차피 여긴 피라미 조직이니까. 그냥 아까 면담한 데까지만 하지 뭐. 대충 지적사항 정리해서 공문 때리고 오늘 철수하지. 자네들은 서류 정리하고 오후에 먼저 모스크바 올라가. 난 오랜만에 만난 친구랑 얘기 좀 하고 저녁에 갈 테니까. ”

 

“ 그럼 이 베르닌이란 작자는... ”

 

아유, 그냥 놔둬. 목록에서 지워버려. 우리 미셴카 허드렛일 해주는 애라잖아. 가뜩이나 우리 미셴카는 왕자님처럼 모셔줘야 하는데, 이런 시골에 와서 힘들 텐데 저런 애라도 붙여줘야지. 당신 그만 들어가 봐. 앞으로도 얘 뒷바라지 잘하고! ”

 

“ 네, 네! 안녕히 가십시오! ”

 

 

베르닌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뒷걸음질쳐서 나왔다. 문 너머로 푸카레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럼 너 현관에서 기다릴래? 누나는 이거 서류만 좀 정리하고 코트 입고 나갈게. 한 10분 걸릴 거야. ”

 

“ 네! 제 차로 가요. 시동 걸어놓을게요. 그래야 누나 따뜻하죠. 주차장으로 천천히 나오세요. ”

 

아유, 정말 우리 미셴카는 매너가 최고라니까. 곧 갈게.

 

 

 

*    *    *

 

 

 

베르닌은 사무실로 돌아가는 대신 건물 밖으로 나왔다. 주차장으로 갔다. 찬바람을 쐬니 정신이 좀 들었다. 놀랍게도 왕재수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극장에서 내준 임원용 차라 좋은 차였고 워낙 쓰지를 않아 반짝반짝했다. 전에 한번 나무에 들이받았다고 했지만 수리를 했는지 멀쩡했다. 왕재수가 내려와서 막 차에 타려는 것을 베르닌이 붙잡았다.

 

 

“ 야, 너 어떻게 가려고 그래? 운전 못하면서. 차는 어떻게 가져왔어? ”

 

“ 나 운전할 줄 알아! 서툴러서 그렇지. 항아리 닭고기 가게까지는 몰고 갈 수 있어. 눈도 다 녹았잖아. ”

 

“ 어... 그래. 근데 진짜 고마워. ”

 

“ 뭐가? ”

 

“ 저... 그 감사. 너 아니었으면 나 잘렸을지도 몰라. 고마워. ”

 

“ 설마 발렌티나가 너 잘랐겠냐. 그 누나 얼마나 착한데. ”

 

“ 너는 어떻게 모스크바 특별 감사관을 아는 거야? 고위직인 거 같던데. ”

 

“ 아. 나 볼쇼이에도 있었잖아. 크레믈린 행사에도 자주 가고. 우리 아저씨가 파티 자주 열어서 거기서 만났어. 저 누나가 발레 무지 좋아하거든. 나한테 엄청 잘해줬어. 공연할 때마다 보러 와서 꽃도 주고. ”

 

“ 그랬구나... 너 정말 등록 때문에 온 거야? ”

 

“ 아, 지난주부터 리자가 계속 전화하더라고. 등록 갱신해야 한다고. 바빠서 미루고 있다가 오늘 온 거야. 온 김에 누나도 보고. ”

 

“ 어, 그래... 고마워. ”

 

“ 자꾸 뭐가 고맙다는 거야? 그만 들어가. 추운데 셔츠 바람으로 밖에서 뭐하는 거야! 게다가 그 손목토시! 너 정말 구제불능이야! 그거 하고 돌아다니지 말랬잖아! 아휴 촌스러워. ”

 

“ 너 그때 토요일에... ”

 

“ 토요일 뭐! ”

 

“ 그때 투레츠키랑 나랑 하는 얘기 들었던 거야? 나 감사 받아서 잘릴지도 모른다는 얘기? 그래서 와준 거야? ”

 

“ 웬 뚱딴지같은 소리야! 나 감사가 뭔지도 몰라. 누나 보러 들어온 건데 마침 네가 거기 있어서 방해되니까 빨랑 누나랑 밥 먹고 싶어서 둘러댄 거야. 그만 가! ”

 

“ 운전도 못하는데, 팔 근육 미워져서 운전하면 안 된다면서 차 가지고 오고... 너 항아리 닭고기 느끼해서 안 먹잖아. 근데 그 여자랑 그 식당 간다고 하고... 시골이라 꼴도 보기 싫다면서 산책로 근사하다고 하고... ”

 

“ 나야 싫지! 그래도 발렌티나 누나는 원래 시골이 고향이라 이런 거 좋아한단 말이야. 그리고 차는... 나도 가끔 운전 연습하는 거야! ”

 

“ 어, 그래... 그래. 고맙다. ”

 

“ 얜 자꾸 왜 뜬금없이 고맙대. 빨랑 들어가, 그 손목토시 좀 내버리고! ”

 

“ 저기... ”

 

“ 뭐, 또! ”

 

“ 거기.. 투레츠키... 거기 드나든지 오래됐어? ”

 

“ 어휴, 또 감시꾼 행세야! 그래, 몇 달 됐다! 나도 숨 좀 쉬고 살자! 나 거기서 아무 짓도 안했어. 그냥 외국 신문이랑 잡지 좀 보고 좋은 레코드 같은 거 들어오면 한두 개 들어보는 게 전부야! 그걸로 또 너네 국장한테 일러바치기라도 할 거야? ”

 

“ 아니, 아니야... 나도 갔었는데 뭐... 그게 아니고. 너 저기... 앞으로는 거기 혼자 가지 마. 나랑 같이 가든지 바이올린 아저씨라도 불러서 같이 가. ”

 

“ 아니 왜! 아 귀찮아! 이제 신문도 혼자 못 보러 가게 하니! ”

 

“ 그게 아니고... 그 투레츠키, 걔가 좀 손버릇이 나쁜 거 같아. 저.. 그때도 너한테 집적대고... ”

 

“ 뭐, 뽀뽀한 거? ”

 

그거 뽀뽀 아니었잖아... 바이올린 아저씨가 하는 것처럼 키스했잖아. 다 들었어. 옷 속에 손도 집어넣었다며. 그 사람 위험해. 너한테 흑심 있는 것 같았단 말이야. 너 조심해야 돼. 나쁜 짓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래. ”

 

“ 아유, 진짜 시어머니가 따로 없어! 하여튼 알았어! ”

 

“ 아니면 너도 좋아서 받아주는 거야? 그런 거면 미안... 나 그런 쪽은 진짜 잘 몰라서... ”

 

아니야! 나도 걘 싫어! 나도 취향이란 게 있어! 그 자식 너무 얍삽하게 생겨서 완전 내 취향 아니야! 뺀질거리고. 보랴는 괜찮은데. 멋있고. ”

 

 

베르닌은 대체 이놈의 취향이란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발렌티나 푸카레바가 나왔다. 왕재수가 차 문을 열어주고 깍듯하게 푸카레바를 앉혀준 후 운전석에 탔다. 왕재수가 운전석에 앉다니 정말 낯선 광경이었다. 심지어 푸카레바는 빨간 립스틱까지 새로 칠하고 있었다!

 

 

왕재수의 차가 미끄러져 나간 후 베르닌은 배추밭 쪽으로 갔다.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심호흡을 했다. 시계를 보니 11시 반이었다. 사무실로 돌아갈까 아니면 좀 이르지만 구내식당에 내려가 점심을 먹을까 하다가 그냥 바닥의 넓적한 돌멩이 위에 걸터앉았다. 주변을 힐끔거리던 검정고양이 미셴카가 베르닌을 발견하고는 모른 척하며 슬며시 다가왔다. 베르닌은 호주머니를 뒤져서 아침에 먹으려고 쑤셔 넣었던 샌드위치를 꺼냈고 소시지만 발라내서 던져주었다.

 

고양이가 소시지를 먹는 동안 베르닌은 손목토시를 떼어내 배추밭 한켠에 집어던지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까 4번 방법이 있었던 거였다. 그런데 또 곰곰 생각해보니 4번은 3번과 겹치는 것 같기도 했다. 왕재수야말로 미모 90%에 노력 10%가 분명했다.

 

 

이 모든 것이 어쩐지 불공평했지만 어쨌든 징계 위기에서 벗어났으므로 베르닌은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리고 금요일에는 반드시 휴가를 내고 왕재수가 좋아하는 생선찜과 보르쉬와 사과파이를 준비하리라 마음먹었다. 필요하면 만두도 빚어서 찌고 바이올린 깡패도 불러서 거한 저녁을 대접하기로 했다. 무가당 초콜릿과 홍차도 필수로 준비할 것이다. 맛있는 음식과 바이올린 깡패가 있다면 왕재수도 그 망나니 같은 투레츠키의 소굴에 가지 않을 테니까. 앞으로도 못 가게 막을 것이다! 하여튼 그놈은 위험한 놈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애를 얼굴 예쁘다고 추행하다니 용서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친 김에 암거래 현장을 고발하고 잡아넣어버릴까 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하지만 보드카도 나눠마셨고 동갑인데다 친구까지 먹었으니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서 그건 포기하기로 했다. 어쨌든 바냐 투레츠키는 전설의 서무였으니까.

 

 

   

 

 

FIN

2015. 2. 27 ~ 3. 2

 

 

----

 

시리즈는 13편으로 이어진다. 지금까지 쓴 건 14편까지인데, 이제 심기일전해 주말부터는 본편을 다시 써보려는 중이다. (그래도 스트레스 받으면 또 서무 시리즈 쓰고 있겠지 ㅠㅠ)

 

..

 

12편에 등장하는 바냐 투레츠키는 이제껏 이 시리즈에 나왔던 인물들과는 좀 다른 유형이다. 이 인물에 대한 묘사나 접근방식은 사실 러시아 문학에서는 낯설지 않은 뺀질이 사기꾼 이야기들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도스토예프스키를 비롯 소련 시절 일리프 & 페트로프의 소설도 그렇고 이런 타입 인간들이 종종 나온다. 일종의 오마쥬랄까.

 

..

 

여기 나오는 특별 감사와 베르닌의 고초는 상당 부분 내가 예전에 겪었던 일들에서 가져왔다. 물론 소설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변형되긴 했지만. 투레츠키가 제시하는 3가지 방법도 일부는 실화. 물론 2번의 뇌물이니 동료 팔아넘기기니 하는 건 적어도 내가 겪은 것은 아니다, 내가 다니는 동안 우리 회사에서 벌어진 것도 아니고. 하지만 어디든 생길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다.

 

 

..

 

 

바냐 투레츠키의 암시장을 찾는 왕재수의 이야기는 좀 웃기게 변형되긴 했지만. 어쨌든 본편 우주에서도 미샤는 암시장이나 지하출판계를 자주 이용한다. 특히 지하출판, 자가출판 문학들 쪽에는 조예가 깊다. 발레학교 시절부터 비밀문학 서클에 드나들곤 한다.

투레츠키의 암시장은 물론 공산주의/사회주의 체제인 소련에서는 불법이다. 걸리면 잡혀간다!

 

 

..

 

 

12편 마무리에서 베르닌이 금요일에 휴가를 내겠다고 했는데.. 그게 어떻게 될지는 13편으로... 그건 다음주에..

그럼 이제 힘을 내서 본편으로 돌아가 왕재수 대신 진지한 미샤를 데리고, 그리고 고지식한 책상물림이 아닌 능력있고 유들유들한 다닐 베르닌을 데리고 다시 글을 써봐야겠다.

 

댓글은 언제나 힘이 됩니다 :)

 

 

 

:
Posted by liontamer

 

애초에 서무의 슬픔 시리즈를 쓰게 된 것은 본편이 잘 안 풀리는데다 회사에서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자기 치유와 풍자를 위해 시작한 건데.. 요즘은 주객이 전도되어 이게 더 잘 써진다 -_- 그 이유는 회사에서 점점 더 피곤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튼, 내가 힘들수록 단추청년 베르닌을 들들 볶으며... (단추야 미안)

 

그러고보니 벌써 11편까지 왔네.. 11편은 9편과 10편을 읽어야 내용이 잘 이어진다. 베르닌과 왕재수가 9편에서 구출해서 10편에서 덜컥 돌봐주게 된 강아지 벨라가 계속 등장한다. 나 혼자 제일 예뻐야 직성이 풀리는 왕재수는 이놈의 멍멍이가 못마땅하기만 한데...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직장인인 베르닌은 역시나 스페호프 국장에게 시달리고 있으니...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1년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그러던 어느날 강아지 한 마리를 떠맡게 된 베르닌... 강아지 뒷바라지 하랴 까다로운 왕재수 수발 들랴 여념이 없는데.. 가뜩이나 멍멍이를 귀찮아하는 왕재수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이 와중에 스페호프 국장은 서무들을 모두 호출하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11

 

 

 

서무의 슬픔

-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목요일에 스페호프가 갑자기 부서별 서무들을 모두 호출했다. 요 며칠 동안 강아지 벨라 때문에 빨리 집에 들어가고 있었던 베르닌은 혹시 국장이 밀려 있는 일을 저버리고 꼬박꼬박 칼퇴근한 자신을 본보기로 혹독하게 비판하지 않을까 겁이 났다. 서무 몇 명이 국장실로 모여들자 스페호프는 그들에게 반듯하게 자를 대고 그어놓은 상자와 표 몇 개가 들어 있는 서류 양식을 나눠주면서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 신년이니 전 직원 대상으로 일대 일 면담을 진행하도록 하겠네. 양식은 총 세 가지일세. 하나는 올해 자신의 담당 업무계획. 하나는 자기 계발 계획. 마지막은 나와의 면담 후 그 결과를 정리하여 제출하는 양식이지. 이것은 전 직원이 작성해야 하네. 서무는 이 양식들을 모두 등사하여 직원들에게 배포하도록 하게. 처음 두 자료의 작성 기한은 내일 저녁 5시까지. 5시까지 서무는 부서원들에게서 이 두 자료를 수합해 부서별, 직원 이름별 순서대로 정렬하여 나에게 제출하게. 면담은 월요일부터 시작하겠네. 오전 주간회의를 마치고 오후 1시부터 시작될 예정이야. 여기 면담 순서표가 있네. 선임부서인 감시분석부가 제일 첫 타자일세. 에, 그러니까... 감시분석부 직원들은 알파벳 순서대로 하면... 이 부서에 A로 시작하는 성은 없으니까... 그렇군. 베르닌. ”

 

“ 네? 네!

 

오늘 저녁에는 벨라와 왕재수에게 뭘 먹여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베르닌은 자기 이름을 듣고 화들짝 놀라 등을 꼿꼿하게 펴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스페호프는 혀를 끌끌 찼다.

 

“ 군대라도 되나,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른담. 자네가 1번일세. 월요일 1시. 올해의 업무 계획에 대해 2장 이내로 작성할 것이며 이에 덧붙여 자기 계발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도 1장 이상 작성하게. 자네 같은 경우에는 반드시 행정 역량 배양에 대한 중장기 로드맵이 간단하게나마 제시되어야 해. 알겠나? 그럼 이만 가보게. ”

 

 

베르닌은 세 장의 각각 다른 양식들을 가지고 나왔다. 평소에는 다른 서무들에게 양보했을 테지만 오늘은 빨리 집에 가고 싶었기 때문에 동료들을 제치고 제일 먼저 자료를 등사했다. 잽싸게 달려가 부서원들에게 자료를 나눠주고 국장의 명령을 전달했다. 다들 한숨과 욕설을 내뱉었다.

 

 

“ 으아... 정말 이 국장은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시무식에 그 회의도 모자라서... 어휴... ”

 

“ 작년 연말 내내 부서 성과보고서 쓰느라 그 난리를 쳐놓고... 그때 내년 계획서도 냈잖아. 개인별 계획서를 뭘 또 내래... 심지어 무슨 자기 계발... 집에 가야 자기 계발을 하지 맨날 사무실에 늦게까지 붙잡아놓는데 어떻게 그런 짓을 하냐고. ”

 

“ 끝나고 나서 결과보고 하라는 건 또 뭐야... 어휴, 이 양식들 좀 봐. 선 밖으로 삐져나가지 말라고 메모까지 붙여놨어. 글씨도 크게 써서 메울까봐 일일이 줄까지 그어놨네... ”

 

“ 주간회의 때도 숨 막혀 죽겠는데 일대 일 면담이라니... 보나마나 18세기 고어와 레닌의 일화를 인용하면서 설교하고 훈계하겠지... ”

 

“ 잠시라도 우리가 마음 편하게 쉬는 꼴을 못 보니 원... 월요일부터 그것도 우리 부서가 제일 먼저 시작이라니. 주말에 나와서 이거 작성하라는 거야 뭐야. ”

 

“ 알파벳 순서면 자네가 1번이구먼... 자네도 참 안됐네, 다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심지어 1번이라니 엄청 스트레스 받겠어. ”

 

저요? 전 대충 쓸 건데요. 잘 쓰나 못 쓰나 어차피 혼날 게 뻔한데요 뭐. ”

 

 

그러자 발따예프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자네 같은 책상물림이 그런 말을 하다니! 내 귀가 잘못됐나? 자네 혹시 요즘 연애하나? ”

 

“ 그건 또 무슨 소린가요? ”

 

“ 원래 연애를 하면 다른 일에 무뎌지지 않나. 일도 소홀히 하고. 안 그래도 요즘 칼퇴 하던데... 아, 하긴. 자네 그 불여우랑 사귄지 몇 달 됐지. 에이 찜찜해, 아침에 하고 저녁에 하고 밤에 하고. 요즘은 그 녀석이랑 더 많이 하게 됐나보군. 그래서 일찍 가고 일도 대충 하는 거로군. 다냐, 내 말 듣게. 아무리 예뻐도 그놈은 사내 녀석이야. 자네 앞날에 좋을 거 하나 없단 말이야. 국장이 감시하라고 붙여놓았으니 떨어져 있을 수도 없고... 그 자식이 워낙 불여우로 소문났으니 자네 나이에야 넘치는 혈기에 계집애보다 예쁘장한 놈이 엉겨들면 참기 힘든 것도 이해는 가네만... 제발 그 녀석하고 응응응을 즐기는 짓은 그만두게. 자네 어쩌려고 그러나, 장가도 가야 할 텐데. 어휴... ”

 

아아... 제발요! 전 그 자식하고 진짜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아악 진짜 미치겠네. 다 헛소문이라고요! ”

 

“ 우겨봤자... 다 아는 거... ”

 

 

베르닌은 한숨을 쉬며 자리로 돌아왔다. 찬찬히 살펴보니 국장의 요구자료 양식은 정말 짜증이 날 정도였다. 그는 대충 아무렇게나 문장을 지어내 표 안에 쑤셔 넣었다. 업무 계획에는 작년에 세운 서무 중장기 계획과 왕재수 감시 스케줄을 휘갈겨 썼다. 자기 계발 계획은 타이프 능력 강화, 비품 장부 정리 능력 배양, 도청 장치 부착 기술 습득 따위를 향후 5개년 중장기계획으로 대충 만들었다. 어차피 아무리 잘 써도 스페호프는 화를 낼 게 뻔했다. 전 같았으면 머리를 짜내고 고민하고 주말에도 나와서 계획서를 창작했을 테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빨빨거리며 뛰노는 귀여운 벨라에 대한 그리움 90%와 폐렴 후유증으로 온종일 밥도 안 먹고 잠만 자려고 하는 왕재수에 대한 걱정 10% 뿐이었다.

 

 

5시가 되어 직원들이 우르르 퇴근했다. 베르닌은 책상 위에 서류를 흩어놓은 죄로 1시간 초과근무를 한 후(벌칙 기간이 아직도 일주일이나 남아 있었다) 급하게 사무실을 나섰다.

 

 

 

*     *     *

 

 

 

베르닌은 비트 한 덩어리와 양배추 반 통, 쇠고기 약간, 시든 오렌지 한 알과 생강, 레몬 두 알, 강아지용 고무공을 사서 귀가했다. 열쇠로 현관문을 열기 전부터 그의 발소리를 알아들은 벨라가 투다다닥 하며 뛰어나와 문 앞에서 헥헥거리며 팔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자 벨라가 ‘왕! 왕왕!’ 짖으며 베르닌에게 풀쩍 뛰어 달려들었다. 딴에는 품까지 뛰어오르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베르닌은 컸고 벨라는 조그만 강아지였으므로 무릎 언저리까지 뛰어오른 게 전부였다.

 

 

“ 우리 벨라 집 잘 보고 있었어? 심심했지? ”

 

“ 알알알! 왕왕~! 멍멍! ”

 

“ 오오 그랬어~ 이제 오나 저제 오나 기다렸구나~ 배고팠구나~ 오빠가 밥 줄게~ ”

 

베르닌은 벨라를 안고 집으로 들어갔다. 벨라는 종이봉투에 들어 있는 쇠고기 냄새에 정신을 못 차렸다. 코로 들이받고는 자꾸 봉투를 찢으며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 쉿, 벨라! 안 돼! 이건 너 먹을 거 아니야! 네 건 어제 삶아놨어. 그거 사료에 섞어줄게 기다려! ”

 

“ 멍! 멍멍멍! ”

 

“ 이건 사람 먹는 거야. 저 싸가지 없는 오빠가 아프니까 수프 끓여주려고 사온 거야. 너는 사료랑 삶은 고기 먹자~ ”

 

“ 왕왕왕! ”

 

 

벨라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베르닌이 쇠고기를 꺼낸 후 종이봉투를 버리자 잽싸게 물고 달아나 봉투를 핥다가 발기발기 찢고 난리를 쳤다. 어찌나 시끄러웠는지 자다가 깬 왕재수가 침실에서 짜증을 내며 소리쳤다.

 

 

개! 조용히 좀 해! ”

 

“ 어, 너 깼구나. 좀 어때? ”

 

“ 개 좀 조용히 시키면 안 돼? 아아, 저놈은 정말 온종일 짖어... 귀가 먹을 지경이야. 한숨도 못 잤어... 우유배달부 지나가면 짖고... 신문 돌리는 소리에 또 짖고... 밖에서 애들 노는 소리 들리면 또 짖고... ”

 

“ 강아지는 밖에서 뛰어놀아야 하는데 집에 가둬놓으니 답답해서 그렇지... 네가 안 아팠으면 잠깐 산책이라도 시켜주라고 했을 텐데. ”

 

“ 나 산책할 기운도 없는데 무슨 놈의 똥개를 산책시켜. ”

 

“ 너 속은 괜찮아? 어제 많이 토했잖아. ”

 

“ 의사 선생님이 아침에 들렀다 가셨어. 생선 먹였다고 너 욕했어. ”

 

너 때문에 일부러 기름 안 쓰고 쪘는데 그래도 먹으면 안 되는 거였대? ”

 

“ 목도 붓고 열이 나니까 생선도 으깨서 줘야 했는데 통째로 줬다고... ”

 

“ 난리났구만. 어휴... 으깨고 짓이겨서 이유식 만들어 갖다 바쳐야겠네. ”

 

누가 해 달랬어? 나 저녁 안 먹을 거야. 어차피 입맛도 없어. 쳇. ”

 

“ 먹어야 나을 거 아니야. 어젯밤에도 열 올라서 끙끙 앓더니. ”

 

“ 내가 언제! ”

 

“ 수프는 괜찮대? ”

 

“ 응, 보르쉬 먹으래. 비타민이랑 단백질... ”

 

“ 알았어. 보르쉬 끓여줄게. 비트랑 고기 사왔어. 지금 육수 끓이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계속 누워 있으면 더 힘드니까 좀 일어나 있어. ”

 

“ 싫어. 똥개가 자꾸 엉긴단 말이야. ”

 

“ 그렇게 벨라가 싫으면 너네 집으로 가. ”

 

“ 나도 가고 싶어! 근데 그 바퀴벌레... 아아... ”

 

 

왕재수가 입술을 실룩거리는 것이 아무래도 또 ‘시골’ 운운하며 한바탕 서러움을 표출할 기세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급하게 말을 돌렸다.

 

“ 아니면 바이올린 아저씨한테 가든지... 그러고 보니 그 인간 뭐냐! 네가 이렇게 아픈데. 입원까지 했었는데 왜 코빼기도 안 비추는 거야! 데리고 놀 땐 언제고 지금 아프니까 응응응 못 한다고 안 오는 거야? 나쁜 놈!

 

“ 로만 욕하지 마! 내가 오지 말라고 했어. ”

 

“ 왜! ”

 

“ 새해 들어서 너네 국장이 나 감시 강화할 거라고 했단 말이야. 꼬투리 잡히기만 하면 형량도 늘리고 진짜 감옥에 넣는댔어. 말 안 들으면 나랑 가까운 사람도 다 찾아내서 가만 안 둔댔어. 로만은 전과도 있어서 나랑 놀다 변태라고 잡혀가면 골치 아프단 말이야. 그래서 우리 집으로는 절대 오지 말라고 했어. 우리 집엔 도청 마이크 있잖아. 너네가 설치한 거... 우리가 응응응하는 소리 녹음되면... ”

 

“ 도청 마이크 있긴 한데... 그 도청 내용 듣고 정리해서 보고서 쓰는 거 내가 담당이야... 그런 거 안 쓰니까 걱정하지 마. 듣기도 싫어서 그런 소리 나오면 내가 다 지워버렸어. ”

 

“ 그래도... 국장이 전화해서 엄청 갈궜어. 나쁜 자식, 가만 안 둘 거야. ”

 

“ 국장이 너한테 전화했었어? 언제? ”

 

“ 물에 빠진 날 아침에... ”

 

“ 아, 시무식 했던 날. 근데 왜 전화를 했지? ”

 

“ 그 자식이 나보고 자기 사무실로 오라고 했는데 내가 안 갔거든. 새해니까 와서 서류도 갱신하고 자기한테 사상 재교육 받아야 된다나. 미쳤냐, 극장 일도 바빠 죽겠는데 그 멍청한 놈한테 가서 무슨 교육을 받아. 안 간다 했더니 열 받아서 전화하더니 막 협박하더라고. ”

 

“ 아... 너한테도 그랬구나... 올해 계획이랑 자기 계발 계획 얘기하려고 했나보다. 우리도 월요일부터 그거 할 거라서... ”

 

자기 계발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난 이룰 거 다 이룬 몸이야. 전 세계 극장에서 날 다 아는데! 난 브레즈네프에 영국 여왕에 프랑스 대통령에 미국 상원의장도 만났어! 웬 거지발싸개 같은 철밥통 KGB 앞잡이가 나한테 자기 계발 운운 교육 운운이야! 하여튼 그 자식이 열 받아서 막 욕하고 별의별 개소리를 다 늘어놓더라고. 그러더니 두고 보라면서 끊잖아... ”

 

“ 그랬구나... ”

 

 

베르닌은 스페호프가 암살 운운했던 날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마음이 무거웠지만 왕재수에게 그런 얘기까지 할 수는 없어 가만히 있었다.

 

 

“ 하여튼 너무 걱정하지 마. 그 깡패 얘긴 보고서에 한 번도 안 썼으니까. 거실로 좀 나와 있어. 육수 다 끓은 거 같으니까 수프도 금방 될 거야. ”

 

“ 싫어, 똥개가 자꾸 무릎에 올라오고 슬리퍼 물어뜯어. ”

 

“ 그렇게도 벨라가 싫으냐? 귀엽기만 한데... ”

 

“ 그냥 가만히 한쪽에 앉아 있으면 신경 안 쓰고 괜찮은데 자꾸 성가시게 하잖아. ”

 

“ 벨라는 강아지인데 어떻게 가만히 앉아 있니! 그래도 너 예쁘다고 달라붙는 거잖아. 나한테는 그렇게 오지도 않아. 밥도 내가 주는데... ”

 

 

왕재수는 얼굴을 찡그렸지만 더 투덜거리지 않고 일어나서 거실로 나왔다. 예쁘다고 해주면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게 분명했다.

 

 

베르닌이 보르쉬를 끓이고 레몬생강차를 만드는 동안 왕재수는 소파에 멍하게 앉아 있었다. 벨라가 투다다닥 하고 달려와 무릎에 뛰어오르려고 하자 마침 옆에 놓여 있던 잡지를 말아서 엉덩이를 탁 때리며 꾸짖었다.

 

개! 가만히 있어! 올라오지 마! ”

 

“ 끼이잉 끼이잉... ”

 

 

벨라가 한 번 더 뛰어올랐다. 왕재수가 다시 잡지로 엉덩이를 때렸다.

 

 

개! 혼날 줄 알아! ”

 

“ 이이잉... 낑... ”

 

“ 야, 벨라 때리지 마! ”

 

“ 오냐오냐하니까 더 이러는 거잖아! 버릇 들여야 할 거 아냐. 야, 개! 누가 그렇게 이빨 드러내래! ”

 

“ 벨라! 이름 있잖아, 벨라! 왜 개라고 하는 거야! ”

 

“ 개니까 개라고 하지! 그리고 이거 수놈이라 했잖아! 벨라가 뭐야! ”

 

“ 에휴, 말을 말자. 하여튼 벨라 때리지 마. 저거 봐, 벌써 기죽었네. 꼬리도 내리고 눈치만 보잖아. ”

 

“ 조용해져서 좀 낫네. ”

 

 

베르닌은 혀를 차며 부엌으로 돌아갔다. 뭉근하게 끓인 보르쉬를 그릇 두 개에 옮겨 담고 스메타나를 한 스푼씩 얹고 파슬리를 뿌렸다. 자신이 먹을 소시지를 데치고 왕재수를 위해 메밀죽을 조금 데웠다.

 

 

“ 야, 와서 밥 먹어. ”

 

 

왕재수가 식탁 앞에 와 앉았다. 보르쉬를 천천히 먹었다. 메밀죽도 두어 숟가락 먹었다. 먹는 데 한 나절은 걸리는 것 같았지만 베르닌은 어제 일을 생각하면서 재촉하지 않고 꾹 참았다. 왕재수가 수프를 절반도 못 먹고 숟가락을 놓았을 때도 심호흡을 하며 잔소리를 삼켰다.

 

벨라는 왕재수에게 혼났던 것도 금세 까먹은 듯 다시 식탁 아래로 와서 간절한 눈으로 베르닌을 올려다보며 꼬리가 떨어져라 흔들어댔다. 베르닌이 소시지 조각을 조금 잘라 주자 게 눈 감추듯 해치웠다. 왕재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기 때문에 베르닌은 마침 알맞게 달여진 레몬생강차를 한 잔 가져다주었다. 이번만큼은 꿀을 두 숟가락이나 듬뿍 넣었다.

 

 

“ 이거 마셔. ”

 

“ 다 봤어, 꿀 잔뜩 넣는 거. 안 먹어. 알잖아, 나 몸매 관리 때문에 차에 설탕이나 꿀 안 넣는 거! ”

 

“ 지금은 꿀 먹어야 돼. 그래야 목이랑 폐에도 좋고 기침도 가셔. 어차피 너 지금 너무 살 빠져서 단 거 먹어도 돼. 몸이 종잇장 같잖아. ”

 

“ 너 자꾸 나보고 말랐다 하는데 진짜 나 벗은 거 안 봐서 그런 거라니까! 나 몸은 날씬해도 필요한 데는 근육 다 붙어 있고 엉덩이가 얼마나 탱글탱글하고 근사한데... 허벅지는 두툼... ”

 

“ 아니야, 거울 좀 봐! 이제 진짜 말랐다니까! ”

 

 

왕재수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거울을 보았다. 과연 무용수 출신답게 정말 유연했다. 몸을 완전히 옆으로 틀어서 이리저리 확인했다. 손을 뻗어 몸 여기저기를 샅샅이 만져보기까지 했다. 베르닌은 어쩐지 좀 민망해서 고개를 돌리고 벨라의 앞발을 만지며 놀아주었다.

 

마침내 왕재수가 식탁으로 돌아왔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레몬생강차에 꿀을 두 숟가락 더 들이붓더니 채 식지도 않은 뜨거운 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다가 기침을 했다.

 

 

“ 천천히 마셔야지. 꿀 그렇게 많이 넣으면 독해서 기침 나온다고. ”

 

“ 기침 하지 말라고 꿀 먹으라며! 왜 많이 먹었더니 기침 나오는 거야... ”

 

“ 너무 달아서 독하니까 그렇지! ”

 

“ 정말 엉덩이가 납작해진 거 같아... 나 정말 심각해? 그렇게 말라 보여? ”

 

“ 나한테 그런 거 묻지 마... 바이올린 아저씬 작고 마를수록 좋아한다며! ”

 

“ 아니야... 로만이 날씬한 거 좋아하긴 하는데 엉덩이는 탱글탱글해야 좋다고 했어... 나처럼... 어떡하지. 어떻게 다시 돌려놓지... ”

 

“ 나 그런 거 몰라... 난 사내자식 엉덩이에 관심 없어! 그런 얘기 하기도 싫고 듣기도 싫어... ”

 

“ 빨리 나아서 다시 운동하고 몸 만들어야겠다... ”

 

“ 그러니까 잘 먹어야지. 앞으로 내가 주는 대로 다 먹어!

 

 

왕재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자신의 미모가 손상됐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인지 꿀꺽꿀꺽 차를 마시고는 베르닌이 까준 오렌지도 반쪽 먹었다. 평소 같았으면 싱싱하지 않다느니 역시 시골이라 수입산 과일은 기대하면 안 된다느니 했을 텐데 말없이 오렌지를 씹으면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속눈썹에 벌써 눈물이 두어 방울 그렁거리고 있었다.

 

우는 왕재수만큼 피곤한 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급하게 설거지를 하러 갔다. 벨라가 투닥투닥 쫓아왔다가 더 이상 나올 게 없다는 사실에 실망하고는 도로 왕재수 곁으로 갔다. 그러다가 아까 잡지로 맞은 것을 떠올렸는지 슬슬 뒷걸음질쳤고 몇 분쯤 후엔 그 사실을 또 잊은 듯 다시 왕재수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왕재수는 오렌지를 먹다가 그 꼴을 보고는 혀를 찼다.

 

 

“ 저거 진짜 멍청한 똥개야... 지능이 낮은가봐. 하긴 그러니까 그 추위에 얼음 위에 올라앉아 있었겠지. ”

 

“ 의사 선생님이 쟤 아직 6개월도 안 됐다고 했어. 어려서 그런 거야. 크면 말귀 다 알아먹을 거야. 훈련도 받고... ”

 

“ 아니야, 될 놈은 애초부터 싹수가 보여. 저건 그냥 바보야. 나 발레학교 때도 그랬어. 안 될 애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돼. 그냥 그런 거라고. ”

 

“ 너 천재라고 자랑하냐? 너 같은 놈은 노력하는 일반인의 맘 따위 몰라. ”

 

“ 그런 거랑 좀 틀려! 나도 노력했어. 엄청나게 노력했단 말이야! 어깨 부서졌을 때도 무대 올라갔어! 근데 노력 가지고 안 되는 것도 있단 말이지. 우리 극장에도 그런 애들 있는데 골치 아파 죽겠어. ”

 

그래도 옆에서 잘 끌어주란 말야! 너 천재라고 다른 애들 무시하지 말고. ”

 

“ 끌어줘서 되는 놈이 있고 안 되는 놈이 있어. 바로 이런 놈. 똥개...

 

벨라 한번만 더 모욕하면 너네 집으로 내쫓을 거야.

 

“ 칫, 자기 집에서 벌레 안 나왔다고 유세하고... ”

 

 

왕재수는 일어나서 몸을 천천히 움직였다. 스트레칭도 하고 거실을 돌아다니며 걷기도 했다. 하지만 몇 분 후 어지러운 듯 소파로 가서 철푸덕 주저앉았다. 벨라가 머뭇머뭇 소파 아래로 다가갔지만 뛰어오르지는 않았다. 소파 위에 잡지가 나뒹굴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재수는 다리를 길게 뻗더니 심심한 듯 노래를 흥얼거렸다. 베르닌은 잠깐 귀를 기울여보았지만 알아먹을 수 없는 말이었다.

 

 

“ 그건 또 어느 나라 말이야? ”

 

“ 바보. ”

 

“ 내가 왜 바보야. 나도 학교 다닐 때 우등생이었어. 난 대학도 나왔는데! ”

 

“ 데이빗 보위란 말이야. ”

 

“ 그게 누구야... ”

 

“ 칫, 모스크바에서 대학 나왔다더니. 내가 아는 모스크바 애들은 파티 가면 보위 노래 틀어놓고 나랑 같이 놀았는데. 책상물림... ”

 

“ 그거 양키들 노래지? 그런 거 들으면 KGB에서 경고 들어와. 누적되면 자아비판도 해야 되고 청년재판에도 회부... ”

 

양키 아니거든! 영국 사람이거든!

 

“ 하여튼... 근데 노래는 좋네. ”

 

“ 당연하지! 그리고 내가 부르니까. ”

 

 

베르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왕재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노래를 계속 불렀다. 생각보다 노래를 잘 했다. 춤을 출 때나 노래를 부를 땐 그렇게 싸가지 없는 애송이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벨라가 꼬리를 치더니 살며시 소파 위로 올라가서 왕재수의 곁에 찰싹 달라붙었다. 왕재수는 무의식적으로 잡지를 집어 들고 내리치려고 했지만 벨라는 눈을 사르르 감으며 황홀하게 노래를 듣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노래가 후렴의 절정부에 이르렀을 때는 왕재수의 무릎에 머리를 비비면서 ‘이이잉 끼이잉’ 하고 조그맣게 콧소리를 냈다. 왕재수가 노래를 멈추자 벨라가 무릎을 살짝 들이받으며 ‘으응 으응 멍멍!’ 하고 앙탈 부리는 소리까지 냈다. 다시 노래를 부르자 놀랍게도 조용해져서 가만히 있었다.

 

 

노래를 마친 후 왕재수가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벨라를 내려다보았다.

 

 

“ 똥개 주제에 웃겨, 노래도 듣고. ”

 

“ 벨라가 그 노래 좋아하는 거 같아. ”

 

“ 누구보다 낫네, 노래도 들을 줄도 알고. ”

 

“ 이상하다, 며칠 전에 내가 샤워하면서 노래 불렀을 땐 막 잡아먹을 듯이 짖었는데... ”

 

 

베르닌은 고개를 갸웃했고 뜻 모를 배신감을 느꼈다. 강아지 키워봐야 다 소용없다는 생각이 왈칵 들었다. 차라리 고양이가 낫다 싶었다. 그래도 검정고양이 미셴카는 밥 주면 보답한답시고 쥐와 참새, 곱등이라도 물어다주는데...

 

그래도 왕재수의 무릎에 머리를 들이대고 재롱을 부리는 벨라를 보니 서운함이 눈 녹듯 스러졌다. 왕재수는 벨라가 얌전해져서 그런 건지 아니면 자기 노래를 알아줘서 기분이 풀려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개!’ 하고 소리 지르거나 잡지로 때리지 않았다. 대신 소파에 누운 채 노래를 몇 곡 더 흥얼거렸다. 크게 부르고 싶어도 목이 아파서 못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식으로 부르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직하고 조그맣게 불렀다.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 노래였다. 베르닌은 설거지를 했고 왕재수가 먼지 때문에 폐렴이 도질까봐 걱정이 되어 물걸레로 청소를 하면서 노래를 들었다. 굉장히 듣기 좋았다. 꼭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처럼 들렸다.

 

 

청소를 하고 다 마른 빨래를 개켜 정리한 후 벨라와 좀 놀아보려고 거실로 돌아왔더니 강아지는 왕재수의 허벅지를 베고 잠들어 있었다. 왕재수도 소파에 길게 뻗어서 쌕쌕거리며 자는 중이었다. 베르닌은 내키지 않았지만 왕재수를 깨웠다.

 

 

“ 야, 너 약 먹고 자야 돼. ”

 

“ 머...거써... ”

 

“ 언제! ”

 

“ 청소...하때... ”

 

“ 침대 가서 자! ”

 

“ ㅇㄱㅎㅇㄴ... ”

 

 

베르닌은 왕재수를 깨우는 것을 포기했다. 성가신 이 녀석을 소파에 놔두고 자기 침대를 되찾을까 했지만 패딩 입히고 강 건너게 하다가 물에 빠져서 아픈 거라고 생각하니 또 가책이 들었다. 그래서 세상모르고 잠든 왕재수를 침실까지 안고 가서 침대에 눕혀 주었다.

 

그 와중에 깨어난 벨라가 왕재수의 무릎에 매달려 안 떨어지는 것에 베르닌은 다시 한 번 배신감을 느꼈지만 자신은 누구처럼 예쁘지도 않고 달착지근한 향내를 풍기는 것도 아니고 노래를 잘 하는 것도 아니니 포기하고 한숨을 쉬며 소파로 가서 잠이 들었다.

 

 

 

*    *    *

 

 

 

금요일에 베르닌은 며칠 동안 밀린 일들을 해치웠다. 금주의 왕재수 도청 보고서를 정리했다. 다행히 이번 주에는 왕재수가 물에 빠지고 폐렴에 걸려서 바이올린 깡패와 응응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임의로 삭제할 내용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오후 3시부터 감시분석부 사무실을 돌면서 개인별 업무계획서와 자기계발 계획서를 걷었다. 선배들이 아우성을 쳤다. 아직 멀었다는 사람들도 있고 쓸데없는 일을 시킨 스페호프에 대한 성질을 베르닌에게 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거 어떻게 하는 거지? 이렇게 하는 거 맞나?’ 하고 물어보는 경우와 ‘자네가 그냥 대충 좀 써줘!’ 라고 반쯤 명령하는 경우가 제일 많았다.

 

 

예전 같았으면 일일이 다 설명해주거나 선배들의 계획서를 전부 받아와 대신 써줬겠지만 베르닌은 빨리 퇴근해서 벨라와 놀고 싶었기 때문에 딱 잘라 말했다.

 

 

국장이 전 직원 대상으로 각각 올해의 업무 계획에 대해 2장 이내로 작성할 것이며 이에 덧붙여 자기 계발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도 1장 이상 작성하라고 했습니다. 제가 써주면 필체가 들통 나 안 됩니다. 5시까지 수합해서 책상에 올려놓으라고 했어요. 안 되면 안 된 대로 그냥 걷어갈 거예요!

 

 

다들 아우성이었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막내 녀석이 벌써부터 못된 버릇만 들어서 선배들을 협박한다, 본시 서무란 것은 부서원의 모든 자료를 작성해주는 법인데 이게 무슨 짓이냐 등등 원성이 빗발쳤다. 베르닌은 마음 한구석이 매우 불편했지만 그래도 안 된다고 맞섰다.

 

 

안됩니다! 전 5시에 자료 수합해 제출한 후 경찰서에도 가봐야 한다고요! 4시 55분에 와서 자료 다 걷을 거예요. 그때까지 안 되는 분들은 국장에게 가서 개별 보고하세요! ”

 

“ 저런 싸가지 없는 놈을 봤나... 불여우랑 놀아나기 시작하더니 못된 짓만 배웠네! 요즘 젊은 것들은 참... 말세야 말세! ”

 

 

베르닌은 괴로운 마음으로 자리에 돌아왔다. 그냥 전처럼 선배들의 보고서를 다 써줄까 망설였다. 가뜩이나 국장에게 들들 볶이는 것도 힘든데 앞으로 선배들마저 자신을 괴롭히고 왕따 시키면 어쩌나 하고 전전긍긍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4시 55분에 그는 부서원들의 계획서들을 모두 수합할 수 있었다. 개발세발 써 갈긴 계획서들이 태반이었지만 어쨌든 미제출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선배들은 베르닌에게 눈을 부라렸지만 어쨌든 업무계획서와 자기계발 계획서를 모두 내던졌다.

 

베르닌은 부서원들 성의 알파벳 순서대로 자료를 정렬한 후 종이 서류철에 끼워서 ‘감시분석부’ 라고 쓰고 부서원들 명단과 번호표를 첨부해 국장실로 갔다. 스페호프는 자료를 보더니 서류철을 펼쳐서 내용물을 읽기 시작했다. 맨 앞에 있는 것은 알파벳 순서가 제일 앞인 베르닌 자신의 보고서였다. 막 스페호프가 트집을 잡으려는 태세를 갖추기 직전 베르닌은 잽싸게 선수를 쳤다.

 

 

“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그럼 저는 월요일 1시에 1번으로 면담에 응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경찰서에 가봐야 해서요. 주말 잘 보내십시오! ”

 

 

스페호프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 놀라운 표정에는 여러 가지가 함축되어 있었다.

 

 

1. 베르닌이 정시에 퇴근한다.

2. 국장이 자료를 펼쳤는데 지적사항을 말하기도 전에 퇴근 인사를 한다.

3. 베르닌이 주말 인사를 한다 = 베르닌이 주말에 출근하지 않는다!

4. 베르닌이 국장의 답변을 기다리지도 않고 서둘러 국장실을 나가버린다!!!!

 

 

스페호프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베르닌이 며칠 전 그 반동분자 불여우를 강에 빠뜨려 죽이려고 했던 사실을 떠올리고 꾹 참았다. 어쨌든 고지식한 녀석이니 자신의 지령을 잊을 리 없으며 종국에는 그 녀석이 자신의 뜻대로 불여우를 처치해 줄 거라고 위안했다.

 

 

 

*     *     *

 

 

 

베르닌은 경찰서에 들렀다. 혹시 벨라를 찾으러 온 사람이 없었는지, 혹은 신고된 건 없었는지 물었다. 담당 경찰관은 고개를 저었다.

 

 

“ 다른 동네에서 왔나 봐요. 주인 못 찾을 거예요. 그냥 키워요. 아니면 유기견 수용소에 넘기든가. ”

 

“ 제가 전단지도 만들어서 붙였는데요... 그래도 연락이 없나요? ”

 

“ 바람이 많이 불어서 전단지 같은 건 다 떨어졌을 거예요. ”

 

 

베르닌은 경찰서를 나왔다. 별로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벨라를 자기 식구로 맞이해서 예뻐해 주며 키워야겠다고 다짐했다.

 

 

집에 돌아오니 거실 소파에 비스듬하게 기댄 왕재수가 무릎에 벨라를 앉혀놓고 털을 빗겨주면서 한 손으로는 등을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심지어 애들 동요까지 불러주고 있었다. 그러다가 베르닌이 들어오자 화들짝 놀라며 언제 그랬냐는 듯 벨라를 무릎 아래로 밀어버리고는 시치미를 뗐다.

 

 

“ 어, 너 빨리 왔구나. 아휴, 들어오면 왔다고 말을 해야지. 도둑놈인줄 알았네! ”

 

“ 너 벨라랑 놀아 주는 거야? 털도 빗겨주고... ”

 

내가 왜! 벼룩 있을까봐 검사한 거야! 세균 옮길까봐! ”

 

“ 어, 벨라가 어제보다 털이 더 하얗네. 목욕시켰어? ”

 

“ 때 타서 꼬질꼬질한 게 걸레 같았잖아! ”

 

“ 어제까지 엉덩이 끌고 다니면서 바닥에 비비고 긁더니 지금은 안 그러네. 목욕시켜서 그런가? 나도 시켜줬었는데 계속 그러더니. ”

 

“ 넌 이 똥개 항문낭 안 짜줬잖아! ”

 

“ 그게 뭐야? ”

 

“ 있어! 개 엉덩이에 있는 작은 주머니 같은 거. 목욕시킬 때 그거 꼭 짜줘야 돼. 그거 짜면 냄새나는 물이 찍 나오거나 끈적한 게 나와. 꼬박꼬박 짜줘야 위생을 유지할 수 있고 개도 거기 안 가려워 해. ”

 

“ 어, 너 개 안 키워봤다면서 어떻게 그런 전문적인 지식을 알아? ”

 

볼쇼이에서 마리야 누나가 개 키웠다고 했잖아. 맨날 개 얘기만 했다니까! 내 앞에서 그거 짜는 것도 몇 번 보여줬어. 우윽... ”

 

“ 그래도 너 기특하다. 지저분한 거 싫어하면서 그런 것까지 해주고... 너 사실은 벨라 귀여워하는 거였구나! ”

 

아니야! 똥개를 내가 왜! 자꾸 카펫에 엉덩이 끌고 다니니까 지저분한 거 묻힐까봐 찝찝했단 말이야! 그래서 욕실 가서 짜줬더니 더러운 거 나와서 막 묻고... 할 수 없이 씻긴 거야! 아 정말 싫다... 똥개... ”

 

“ 근데 털도 빗겨주고... 귀 뒤쪽 털은 리본으로 묶어주기까지 했네. 어, 이 분홍색 리본... 렐랴가 준 버찌잼 병에 달려 있던 거... 수입 리본이랬는데. 엄청 고급... 벨라를 이렇게 예쁘게 치장까지 시켜주다니. ”

 

“ 털이 내려와서 개 눈을 찌르고 있었단 말이야! 치장은 무슨! 나 예쁘게 꾸밀 기력도 지금 없는데 똥개를 내가 왜!

 

“ 어, 벨라 먹을 고기 다 떨어졌는데 밥그릇에 삶은 고기가 있네, 그것도 곱게 찢어서 무슨 레스토랑 요리처럼 세팅했네. 물그릇에 부어 놓은 건 심지어 우유네! 집에 우유 없었는데. 네가 벨라 주려고 사온 거야? 고기도 삶고? ”

 

무슨 똥개한테 주려고 우유를 사니! 나 원래 저녁엔 보습하고 피부 관리하려고 우유로 세수하는 거 몰라? 몸도 좀 나아진 거 같아서 바람도 쐬고 산책도 하려고 나간 김에 가게 가서 우유 사온 거란 말이야! 나 먹고 나 세수할 우유 산 거야! 근데 좀 애매하게 남아서 버리느니 아까우니까 똥개 물그릇에 부어놓은 거라고! ”

 

“ 그럼 고기는... 고기도 너 먹으려고 산 거야? ”

 

아니야! 이거, 이거... 어제 네가 끓여놓은 보르쉬... 아까 배고파서 데워먹었는데 목이 아직 부어서 고기는 먹기 힘들었어. 버리려다 이것도 아까우니까 그냥 멍멍이한테 준 거야! 음식물 쓰레기 치우는 셈 치고! ”

 

“ 근데 물에 싹 씻어줬는데? 개가 비트랑 야채 냄새 싫어할까봐 고기에서 수프 국물 다 씻어준 거 아니야? ”

 

아니야! 보르쉬는 빨간색이니까... 그 안에 든 고기도 빨간색이라서 기껏 씻겨놨는데 개털에 빨간 물 들까봐 씻어준 거야! 나 저 멍멍이한테 관심 없어! ”

 

“ 그랬구나, 넌 벨라한테 관심 없는데 그냥 어쩌다 보니 고기도 남고 우유도 남아서 준 거구나. 근데 고기 씻어서 밥그릇에 세팅까지 했으면 벨라 먹으라고 주지 왜 식탁 위에 올려놓은 거야? ”

 

“ 쟤 오후에 간식 먹었단 말이야. 저녁은 우리 먹을 때 줘야지. 아무리 똥개라도 계속 먹일 수는 없잖아! 돼지처럼 되라고! ”

 

“ 간식? 무슨 간식? 나 그런 거 준비 안 해놨었는데? ”

 

 

베르닌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소파 구석에 놓여 있는 노란색의 봉지를 발견했다. 겉에 ‘개 비스킷’이라고 씌어 있었다.

 

 

“ 어... 개 비스킷... 네가 사온 거야? 벨라 주려고? 너 진짜 세심하구나, 난 개 비스킷 같은 거 있는 줄도 몰랐어. ”

 

아냐! 우유 계산하는데 지폐밖에 없었단 말이야. 계산원이 잔돈 없으니 거스름돈 못 준다고 해서 열 받아서 눈에 띄는 거 산 거야! 돈 맞추려고! ”

 

“ 우유보다 개 비스킷이 더 비쌀 거 같은데... ”

 

“ 하여튼! 자꾸 말 시키지 말고 저녁밥 만들어줘! 나 잘 먹어야 돼, 그래야 약도 먹고 운동도 하고 몸도 다시 만들어서 탱글탱글한 엉덩이도 되찾고 로만한테 예쁨 받는단 말이야! ”

 

 

베르닌은 비죽비죽 나오는 웃음을 꾹 참고 부엌으로 갔다. 이틀 전 왕재수가 남겼던 생선을 잘게 토막 내 우하 수프를 끓였다. 보르쉬 끓이고 남았던 양배추를 한 장 한 장 떼어내 데쳤고 거기에 삶은 감자를 곱게 으깨서 곁들였다. 버터는 소화가 안 될까봐 제외하고 대신 설탕과 소금, 식초를 약간 뿌렸다. 그리고 왕재수에게 맞추느라 이유식 같은 음식만 먹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 햄과 치즈를 얹은 흑빵을 두 조각 추가했다.

 

 

식탁에 앉기 전에 왕재수가 삶은 고기가 담겨 있는 밥그릇을 내려주었다. 벨라가 혀를 빼물고 헥헥헥 하며 득달같이 달려와 코와 주둥이를 들이밀려고 했을 때 왕재수가 호통치며 그릇을 치웠다.

 

 

개! 누가 그러랬어! 기다려!

 

“ 끼이이이잉... 낑낑... 끼낑... 아응 아응... ”

 

기다려!

 

“ 끼웅.... ”

 

 

벨라는 하염없이 슬픈 눈으로 왕재수와 밥그릇을 번갈아 쳐다보았지만 왕재수가 베르닌과는 달리 절대 밥을 안 줄 것처럼 굴자 체념하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렸다. 왕재수가 밥그릇을 내려놓자 또 미친 듯이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그러자 왕재수가 또 그릇을 치웠다.

 

 

“ 안 돼! 기다리라 했잖아! 먹어 해야 먹는 거랬잖아! ”

 

“ 끼이잉... 끼웅... ”

 

“ 야, 그냥 줘... 벨라 아직 애기란 말이야. 눈 앞에 고기가 있는데 얼마나 먹고 싶겠어. ”

 

“ 너 같은 놈들 때문에 똥개가 더 똥개 된단 말이야! 개! 기다려!

 

다시 밥그릇을 내려놓자 놀랍게도 벨라가 콧잔등을 실룩거리고 훌쩍거리면서도 주둥이를 들이밀지 않고 기다렸다. 왕재수가 흡족한 듯 말했다.

 

 

“ 됐다. 먹어! ”

 

 

벨라가 미친 듯이 고기를 흡입하는 동안 베르닌은 고개를 저으며 투덜댔다.

 

 

“ 너 이제 보니 우리 국장이랑 좀 비슷한 거 같아. 말 못하고 힘 약한 짐승을 괴롭히고, 막 명령하고... ”

 

“ 개랑 인간이랑 같냐! 개는 서열에 따라 행동하는 동물이야! 지금 이런 거 똑바로 안 해놓으면 머리 위로 기어오른단 말이야! 너는 이미 저놈보다 서열도 아래야! ”

 

“ 저렇게 귀엽고 조그만 강아지한테 서열 운운하다니! 말도 안 돼! ”

 

“ 저 책에 다 나와 있단 말이야! ”

 

“ 무슨 책? ”

 

“ 저거! 네가 빌려다 놓은 거. 개 기르는 법! ”

 

“ 너 그 책도 읽은 거야? 벨라한테 잘 해주려고? ”

 

아니야! 아프니까 계속 누워 있어야 되고 심심했단 말이야. 재밌는 책 보려면 우리 집에 가야 하는데 바퀴벌레 때문에 못 가니까 할 수 없이 저거 본 거야! 옆에 굴러다녀서! ”

 

“ 어 그래... 그랬겠지. 아,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네. 내가 아침에 출근하면서 너네 집 들러서 살충제 쳐놓고 왔어. 아마 이제 바퀴벌레 다 죽고 없을 거야. 밥 먹고 나랑 같이 올라가보자. ”

 

“ 으으, 싫어. 살충제 먹고 바퀴가 나와서 죽어 있으면 어떡해... 그 까맣고 빤딱빤딱한 배를 뒤집고 다리를 까딱까딱하고 있으면... 나 그거 못 버린단 말이야. 윽... 입맛이 딱 떨어지네. 아 괴로워. ”

 

“ 내가 치워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밥이나 빨리 먹어. 너도 너네 집에서 자는 게 더 편하잖아. 벨라도 안 괴롭히고, 침대도 여기보다 훨씬 넓고 푹신하고... ”

 

 

그러나 이미 왕재수는 바퀴벌레 생각에 입맛이 딱 떨어진 것 같았다. 생선 수프를 조금 뜨다가 감자 퓨레를 한 숟갈 먹고, 양배추를 한 장 먹은 후 크게 한숨을 쉬더니 몸서리를 쳤다. 안색이 안 좋은데다 두 눈에 먹구름이 가득한 것이 보나마나 머릿속에서는 ‘시골...’이란 한 마디가 무한 반복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마침내 베르닌은 호통을 쳤다.

 

 

빨리 먹어! 엉덩이 탱글탱글해져야 한다며! 어제보다 더 납작해졌어! 바이올린 아저씨가 싫어할 거야! ”

 

“ 아아... 너도 로만도 다들 너무해. 시골... ”

 

 

왕재수는 그래도 수프와 퓨레를 다시 먹기 시작했다. 데친 양배추도 두어 장 더 집어 먹었다. 먹고 나니 뺨에 혈색도 돌아오고 눈빛도 훨씬 나아졌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집으로 갔다. 왕재수는 쭈뼛거리며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다.

 

 

“ 야, 넌 귀신 나오는 당직실에도 잘만 들어가더니 왜 너네 집에 못 들어가고 이러는 거야! ”

 

“ 바퀴벌레... ”

 

“ 없어! 없다니까! 살충제 쳐서 있었던 것들도 다 죽었어! ”

 

“ 네가 먼저 가서 확인해줘, 제발. ”

 

 

그래서 베르닌은 왕재수를 현관에 세워놓고 자기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벨라가 꼬리를 치며 쪼르르 따라왔다. 그는 살충제를 제일 많이 뿌려놨던 부엌으로 먼저 갔다. 바닥에 바퀴벌레가 두 마리 죽어 있었다. 휴지로 싸서 버렸다. 거실과 침실, 그리고 옷장을 넣어놓는 방으로 가보았다. 바퀴벌레는 없었지만 곱등이로 추정되는 벌레가 한 마리 죽어 있었다. 그것도 휴지로 싸서 버렸다. 결벽증에 가까운 왕재수를 위해 벌레 시체 있던 곳과 살충제 뿌렸던 곳을 물걸레로 닦았다. 휴지로 싼 벌레 시체들을 모조리 태웠다.

 

 

“ 야, 다 치웠어. 이제 아무 것도 없어. 들어와도 돼. ”

 

“ 벌레 많았어? ”

 

“ 아니, 두어 마리 있었어. 조그만 거. 약 먹고 죽어서 다 태워 버렸으니까 이제 괜찮아. 얼른 들어와. 아침에 난방도 돌려놔서 따뜻해. ”

 

“ 으응... ”

 

 

왕재수가 머뭇머뭇 들어왔다. 하지만 부엌 쪽은 차마 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벨라는 신이 났다. 처음 들어와 보는 왕재수의 집은 베르닌의 집보다 더 넓었고 근사했기 때문이다. 부엌도 들어가 보고 욕실과 거실도 탐험했다. 소파에도 기어 올라갔다. 평소 같았으면 ‘개!’ 하고 소리쳤을 테지만 왕재수는 신경이 곤두선 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 다닐. ”

 

“ 왜? ”

 

“ 이상한 소리 안 들려? ”

 

“ 무슨 소리? ”

 

“ 이 소리... 득득득 하고 벽 긁는 소리... ”

 

“ 난 안 들리는데. ”

 

“ 아니야, 들려. 침실 쪽에서 나는 거 같아. 벽지 긁는 소리 있잖아, 벌레 소리야. 벽하고 벽지 사이를 기어 다니면서 긁는 소리란 말이야. 여기 제일 처음 왔을 때 저 소리 듣고 얼마나 소름끼쳤는지 알아? 나... 정말... ”

 

“ 에이, 너 예민해져서 환청 듣는 거야. 아무 소리도 안 들려. ”

 

“ 하지만... ”

 

 

그때였다. 벨라가 갑자기 ‘알알알알알!’ 하고 짖더니 침실로 득달같이 내달았다. 전광석화처럼 달려가 벽 쪽으로 펄쩍 뛰어올랐다. 그 순간 베르닌도 뭔가 시커먼 얼룩 같은 것을 발견했다. 왕재수가 비명을 지를 겨를도 없이 벨라가 투다다닥 하며 앞발을 들어 그것을 내리쳤다. 벽을 뿔뿔뿔 기어가던 바퀴벌레가 툭 떨어졌다. 벌레가 미처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벨라가 다시 앞발로 일격을 가했다. 그러더니 왼쪽 발로 몸통을 누르고 오른쪽 발로 마구 벌레를 내리쳐 다리를 하나하나 떼어내는 것이 아닌가!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던 왕재수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베르닌의 등 뒤에 숨어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벨라의 현란한 사냥 기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리 절반을 떼낸 후 벨라가 바퀴벌레를 입으로 가져가려고 했기 때문에 그제야 정신이 든 베르닌이 달려가 벌레를 휴지로 감싸 빼앗았다.

 

 

“ 그만, 벨라! 먹으면 안 돼! ”

 

“ 왈왈! ”

 

“ 이거 더러워, 먹으면 안 돼! ”

 

“ 알알알알! ”

 

 

장난감을 빼앗겨 서운하다는 듯 벨라가 짖어댔다. 베르닌은 급하게 벌레를 휴지로 싸서 태워버렸다. 돌아와 보니 왕재수가 물수건으로 벨라의 주둥이와 앞발을 닦아주고 있었다. 다 닦아준 후에는 품에 꼭 껴안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을 퍼부었다.

 

 

잘했어, 개야! 잘했다, 아 착하다! 기특하다! 너 살충견이구나! 개야, 진짜 장하다. 귀엽다, 우리 개!

 

“ 이름 있잖아. 벨라. ”

 

개야, 강아지야, 멍멍아, 잘했다! 우유에 고기 말아줄게!

 

 

왕재수는 바퀴벌레가 사라진 자기 침실에서 자겠다고 했다. 하지만 또 벌레가 나올까봐 무서우니 그날 하룻밤만 개를 놔두고 가면 안 되느냐고 부탁까지 했다. 베르닌은 벨라를 빌려주고 자기 집으로 돌아와 단잠을 잤다.

 

 

 

*    *    *

 

 

 

토요일에는 기온도 오르고 햇살도 따스했기 때문에 베르닌은 벨라를 데리고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스타브로프의 병원에 다녀온 왕재수가 원반 한 개를 들고 뒤늦게 합류했다.

 

 

“ 그건 뭐야? ”

 

“ 원반. 똥개 훈련시키게. ”

 

“ 똥개 아니야, 어제 벌레 잡는 거 봤잖아. 벨라 원래 사냥개인가봐. ”

 

“ 사냥개는 무슨, 체구도 작은데. 그냥 잡종이라니까. 하여튼 개니까 원반 던지면 물어오겠지 뭐. 야, 개! 물어와! ”

 

 

왕재수가 원반을 휙 던졌다. 그러나 벨라는 바퀴벌레에게 달려들던 순발력과 공격성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원반에는 관심도 없었다. 오히려 왕재수에게 폴짝 뛰어올라 다시 뽀뽀를 퍼부었다.

 

 

“ 으윽, 이 똥개! 역시 멍청해! 원반 물어오라니까! ”

 

 

원반을 주워온 베르닌이 이번에는 자신이 던져보았다. 벨라는 원반이 날아가든 말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계속 왕재수 곁을 맴돌며 꼬리를 치고 재롱을 부렸다.

 

 

둘은 스무 번쯤 돌아가며 원반을 던지고 소리치며 벨라를 몰아댔지만 강아지는 결국 단 한 번도 원반을 물어오지 않았다. 지친 왕재수가 베르닌의 패딩 점퍼 소매를 붙잡으며 숨을 헐떡였다.

 

 

“ 똥개... 멍청이... 나 이제 집에 가고 싶어. 너무 힘들어, 저 멍청한 멍멍이 훈련시키다가 나 쓰러지겠어. ”

 

“ 웅... 벨라는 이런 쪽으로는 재능이 없나봐. 그래도 얼굴은 귀여우니까... ”

 

“ 귀엽긴 뭐가! 그냥 시골 멍멍이... 그래도 벌레는 잡을 줄 아니까 밥 축내기만 하는 건 아니니 참는다. ”

 

“ 벨라는 내가 키우는 데 네가 뭘 참아. ”

 

“ 어쨌든! 저게 자꾸 나한테 엉기잖아. ”

 

너 솔직히 말해, 벨라 귀엽지? 어젯밤에 침대 위에서 네 옆에 재워줬지? ”

 

아냐! 내가 왜 멍멍이를 침대 위에 재워! 거긴 나랑 로만이랑 꼭 껴안고 사랑을 불태우는 우리만의 공간... ”

 

“ 너 아침밥 먹으러 왔을 때 다 봤어, 머리카락에 개털 붙어 있었어. ”

 

아냐! 그럴 리가 없어!

 

“ 네 머리 새까맣잖아! 벨라 털은 하얘서 금방 눈에 띄는 걸. ”

 

“ 똥개... 또 나 잘 때 올라왔겠지. ”

 

 

 

둘은 벨라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왕재수는 아직 다 낫지 않은 상태에서 원반 때문에 너무 흥분해서 기력을 소진했는지 자기 집까지 가지도 못하고 베르닌의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벨라는 그 즉시 왕재수의 품으로 파고들어 촉촉하게 젖은 콧등을 그의 뺨에 비벼댔다. 왕재수는 귀찮다고 투덜댔지만 강아지를 떠밀지는 않았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베르닌은 혹시 국장인가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지난 일주일 동안 계속 정시퇴근하고 일은 잔뜩 쌓아놓고 왔으니 국장이 트집을 잡으려고 전화를 한 것 같았다. 떨리는 가슴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 여보세요... ”

 

다행히 국장은 아니었다.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베르닌은 잠시 전화에 귀를 기울였고 고개를 끄덕였다.

 

“ 네, 지금 오시면 돼요. 여기 주소 아시죠? 네, 전단지에 있는 그 주소. ”

 

 

전화를 끊은 후 베르닌은 왕재수 쪽으로 돌아섰다.

 

 

야, 기적이야! 벨라 주인이 나타났어. 내가 붙인 전단지 봤대. 잃어버린 지 열흘 가까이 돼서 한참 찾아다녔대. ”

 

“ 그래서? ”

 

“ 지금 오라고 했어. 구시가지 쪽에서 전화했다니까 아마 20분 내로 올 거 같아. 정말 다행이다, 벨라야... 주인이 진짜 반가워하더라. ”

 

“ 주인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요즘 사기꾼이 얼마나 많은데. ”

 

“ 아니야, 강아지 특징 얘기하는 거 보니까 딱 벨라야. ”

 

“ 전단지에 사진도 넣고 특징도 썼을 거 아냐. 그거 보고 누가 못 읽어. ”

 

“ 그런가... 그래도 진짜 주인 같았어. 엄청 흥분했더라고. 일단 와보면 알겠지. 우리 벨라, 주인 그리웠지? 아휴, 근데 너무 섭섭하네. 주인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어. 야, 너도 그렇지? 벨라랑 정들었잖아. ”

 

 

왕재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 내가 왜. 난 똥개 귀찮아. 빨리 치워버렸으면 좋겠네. ”

 

“ 넌 왜 이렇게 피도 눈물도 없니. 에휴, 하여튼 손님 오니까 집 좀 치워야겠다. 빗자루가 어디 갔더라... ”

 

 

 

베르닌은 열심히 집을 치웠다. 청소를 다 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달려 나가 문을 여니 30대의 갈색 머리 남자와 귀엽게 생긴 금발의 어린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아이는 기껏해야 예닐곱 살 밖에 안 돼 보였다.

 

 

“ 안녕하세요, 전화 드린 사람인데요... 개 잃어버린... ”

 

“ 아, 들어오세요. 전 다닐이라고 해요. ”

 

“ 예... 전 료샤라고 해요. 얘는 제 아들 레냐예요. 사실은 아들내미가 강아지 주인이에요. 엄청 예뻐했는데 며칠 전에 산책 나갔다가 잃어버려서 얼마나 울고불고 했는지... 강아지가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

 

“ 그랬군요. 레냐, 많이 걱정했겠구나. 강아지 금방 데려올게요. 먼저 차 한 잔 하고 계세요. 레냐는 우유 줄게. ”

 

“ 초코우유 있어요? ”

 

“ 어쩌지, 초코우유는 없는데... ”

 

“ 그럼 그냥 우유 먹어줄게요! ”

 

 

베르닌은 료샤와 레냐를 거실 소파로 안내했다. 차 한 잔과 우유 한 컵을 가져다 준 후 벨라를 데리러 갔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벨라가 보이지 않았다. 이름을 부르고 집안 구석구석을 뒤져도 없었다. 곰곰 생각해보니 벨라가 왕재수 뒤를 따라간 것 같았다. 전화를 했다. 왕재수가 받았다.

 

 

“ 야, 혹시 벨라 거기 있어? ”

 

“ 응. 나 따라왔어. ”

 

“ 좀 데려올래? 주인 왔어. ”

 

“ 사기꾼 아니야? ”

 

“ 아니야, 아빠랑 귀여운 남자애야. 벨라 데리고 지금 빨리 와. ”

 

“ 알았어. ”

 

 

잠시 후 왕재수가 들어왔다. 거실로 곧장 가더니 소파에 앉아 있는 료샤와 레냐를 꼭 범죄자를 훑듯이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린 레냐가 먹다 남은 우유가 담긴 컵을 왕재수에게 내밀었다.

 

 

“ 우와, 진짜 잘생긴 형아다. 이거 마셔. ”

 

“ 어른한테 네가 먹던 거 주는 거 아니야, 레냐야. 죄송합니다. ”

 

 

료샤가 아들을 저지하며 사과했다. 왕재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베르닌은 아무리 봐도 벨라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왕재수를 쿡 찔렀다.

 

 

“ 야, 벨라는? ”

 

“ 가만 있어봐. 이 사람들이 진짜 주인인지 어떻게 알아! ”

 

“ 저, 개를 보면 알 것 같은데요... ”

 

“ 당신, 이름이 뭐죠? ”

 

“ 료샤요. ”

 

“ 개를 어디서 잃어버렸죠? ”

 

“ 어, 저... 어디였더라. 레냐, 어디서 잃어버렸니? ”

 

“ 놀이터. 우리 집 앞 놀이터. ”

 

“ 그 ‘우리 집’이 어딘데요! 주소 대봐요! ”

 

“ 아... 저는 레냐랑 같이 안 살아서요. 레냐는 엄마랑, 그러니까 제 전 마누라랑 사는데... 거기 주소가, 아 그렇지. 아브리코트 거리...

 

“ 주소 가지고 횡설수설하는 게 수상해. 거리 이름에 어째서 살구가 들어가는데! 그리고 애가 엄마랑 산다면 엄마랑 왔어야지 왜 당신이랑 같이 오는데! ”

 

“ 어... 그건요. 이라는, 그러니까 제 전 마누라, 애 엄마는 개를 너무 싫어해서... 그놈의 똥개 잃어버렸으니 잘됐다고 하는 마당이라... ”

 

“ 개의 인상착의를 말해봐요! ”

 

“ 하얀색이고요, 귀가 처졌고 주둥이가 짧고 눈이 까맣고... ”

 

“ 그런 거 말고! 그건 얘가 붙인 전단지 사진에 다 나와 있잖아요! 그 개만의 신체적 특징 말이야! 키, 몸무게, 다리 길이, 보폭, 달리기 기록, 털이 눕는 방향, 흉터나 얼룩 유무, 항문낭의 생김새!

 

 

베르닌은 기절초풍했다. 왕재수를 쿡 찔렀다.

 

 

“ 야, 너 뭐해! 그런 것까지 어떻게 다 알아! 지금 무슨 취조해? 우리 취조실에서도 그렇게는 안 해! ”

 

시끄러워! 주인이면 그 정도는 알아야지! 빨리 말해 봐요!

 

 

척 봐도 어리숙해 보이는 료샤는 당황하면서도 기억을 짜내려고 애썼다.

 

 

“ 어... 키는... 이만큼... 엄청 작으니까. 몸무게는 한 3킬로 되려나. 다리는 이 정도. 보폭까진 모르겠는데... 빨빨거리고 뛰어다니니까 이 정도? 그치, 레냐야? ”

 

“ 아빠, 보폭이 뭐야? ”

 

“ 아... 넘어가자. 달리기는, 시간 안 재봐서 모르겠는데 먹을 거 보면 엄청 빨라요. 털이 눕는 건 잘 모르겠네. 털이 어쨌든 복슬복슬해요. 흉터, 얼룩... 그건 모르겠는데... 항문낭은 다른 개들이랑 비슷하게 생겼... ”

 

그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걸 보니 당신 사기꾼이 분명해! 어린애까지 동원해서 거짓말을 하다니! 썩 꺼져!

 

 

왕재수가 서릿발처럼 차갑게 소리치더니 홱 돌아섰다. 료샤는 주눅이 들어서 더듬거렸다.

 

“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제가 키우는 개가 아니라서 그래요. 전 작은 개는 안 좋아해서, 특히 멍청한 개는 안 좋아해서요. 그러니까 전 크고 늠름한 장군 타입의, 족보 있는 셰퍼드를 키우는데...

 

“ 누가 셰퍼드 물어봤어요? 썩 나가요! ”

 

“ 아빠, 저 형아 왜 화내? 우리 뜨보록 왜 안 데려다줘? ”

 

“ 뜨보록? 그건 또 뭐야! ”

 

“ 강아지 이름이요... 흰색이라 레냐가 뜨보록이라고 지었어요. ”

 

흥, 뜨보록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야, 이 사람들 완전 사기꾼이야! 내보내! ”

 

“ 너 왜 그러니... 주인 맞는 거 같은데. 일단 벨라 데리고 와봐. 얼굴 보면 알 거 아니야. 보여주지도 않고 무조건 우기면 어떻게 해... ”

 

뭘 데려와! 사기꾼한테 왜 개를 보여주니!

 

“ 저 사기꾼 아니에요. 뜨보록 찾으러 온 건데... 개를 주운 건 이 분 같은데 왜 당신이 이렇게 절 쥐 잡듯 추궁하는지 모르겠네요. ”

 

시끄러워요! 얜 순진해서 아무 말이나 다 믿는다고요! 사기꾼이 분명하니까 이제 그만 돌아가요! 안 그러면 신고할 테니까! ”

 

“ 으앙, 아빠... 이 형아 미워... 우리 뜨보록 자기가 키우려고 막 우리 쫓아내.. 앙앙... 뜨보록, 앙앙... ”

 

아 시끄러워, 울지 마! 난 애들 우는 게 제일 싫어! 빨리 집에 가!

 

엉엉, 뜨보록... 앙앙... 뜨보로오오옥!!!

 

 

그때였다. 현관문을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킹킹, 헥헥, 헐떡헐떡, 그리고 투닥투닥 소리가 났다. 베르닌이 문을 열어주자 벨라가 우다다다 달려왔다.

 

 

알! 알알알알알알! 멍멍멍! 왕왕왕왕왕왕! 앙앙앙앙앙!

 

 

시끄럽게 우짖으며 벨라가 곧장 레냐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미친 듯이 머리를 처박고 비벼대고 레냐의 얼굴을 침 범벅이 되도록 핥았다. 꼬리가 떨어져라 흔들었다.

 

 

뜨보록! 뜨보록! 으앙, 어디 갔었어! 앙앙! 뜨보록!!

 

 

베르닌은 료샤와 레냐, 벨라를 번갈아가며 보았다. 누가 봐도 벨라가 뜨보록인 게 분명했다. 벨라는 레냐의 품에 안겨 행복하게 낑낑거리고 있었다. 료샤가 손을 내밀자 마구 핥았지만 곧 다시 레냐에게로 돌아갔다. 베르닌과 왕재수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베르닌은 헛기침을 했다.

 

 

“ 그러니까, 얘 이름이 뜨보록이었군요. 전 하얀색이라 벨라라고 부르고 있었어요. 그래도 주인을 찾아서 다행이네요. ”

 

“ 고맙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우리 애가 열흘 동안 얼마나 울고불고 개를 찾았는지... 진짜 다행이네요.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

 

“ 보답은요. 벨라가 주인을 찾았으니 그걸로 충분해요. 얼른 데리고 돌아가세요. 레냐야, 앞으로는 강아지 소홀히 하면 안 돼. 알았지? ”

 

“ 네! 고맙습니다! ”

 

 

베르닌은 레냐에게 왕재수 쪽을 가리켰다.

 

 

“ 저 형한테도 인사하렴. 저 형아가 뜨보록 구해 주고 목욕도 시켜주고 굉장히 잘해줬단다. ”

 

싫어! 저 형아는 미워! 뜨보록 자기가 키우려고 막 우리 아빠한테 뭐라 했어! 막 안 주려고... ”

 

“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저 형아는 개 별로 안 좋아해. 그냥 주인 아닌 사람들이 뜨보록 데려가면 안 되니까 걱정해서 그런 거야. ”

 

그런 거야? 그럼 무지 고마워요.

 

 

왕재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료샤와 레냐의 인사도 받아주지 않고 휙 돌아서 나가버렸다.

 

 

베르닌은 벨라와 작별 인사를 했다. 벨라는 베르닌의 뺨에 코를 비벼대며 뽀뽀를 해주었지만 금방이라도 레냐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어 안달이었다. 마침내 료샤와 레냐가 벨라, 아니 뜨보록을 안고 떠났다.

 

 

 

베르닌은 잠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며칠 동안 정들었던 벨라가 떠나니 무척 허전하고 서운했다. 하지만 그래도 벨라가 진짜 주인을 찾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자기가 키웠어도 사무실에 데려가지도 못하니 벨라는 외로웠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레냐가 개를 잃어버려서 얼마나 애가 탔을지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짠했다. 여러 모로 다행이었다.

 

 

잠시 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재수의 집으로 가보았다. 문이 잠겨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감시요원이었으므로 열쇠를 꺼내 문을 땄다.

 

 

“ 야, 나야. 들어간다. ”

 

 

대답이 없었다. 혹시 바이올린 아저씨가 왔나 싶어 경계하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은 비어 있었다. 침실로 가보니 왕재수가 몸을 웅크린 채 등을 돌리고 누워 있었다. 자나 싶었지만 잘 보니 어깨를 들먹이고 있었다.

 

 

“ 어... 야, 너 아파? 다시 아픈 거야? ”

 

가... 너네 집.

 

“ 목소리는 왜 그래... 폐렴 도진 거 아니야? ”

 

 

왕재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베르닌은 걱정이 되어 조심스럽게 왕재수의 어깨를 자기 쪽으로 돌렸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왕재수가 소리 없이 흐느껴 울고 있었다.

 

 

“ 어... 너 많이 아프구나... 병원 갈래? ”

 

“ 아니야. 안 아파. 나 좀 놔둬. ”

 

“ 하지만... ”

 

가라니까!

 

“ 너 왜 그래... 혹시 벨라 때문에 그래? ”

 

아냐! 그깟 똥개 내가 뭐! 나쁜 똥개... 어떻게 그래! 거들떠도 안 보고... 윽... 으흑... 예쁘고 좋은 냄새 난다고 엉겨 붙을 땐 언제고... 윽... 끅... ”

 

 

왕재수가 서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엉엉 울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심히 당황했다.

 

 

아니, 야... 너 지금 벨라한테 삐친 거야? 진짜 주인이 왔으니 당연하잖아. ”

 

“ 누가 뭐래! 어차피 잘됐어! 난 똥개 진짜 싫어. 세균덩어리... 멍청하고, 원반도 못 물어오고. 지저분... 시끄럽고. 으흑... 엉엉... 어엉... 멍멍이... ”

 

 

왕재수가 우는 동안 베르닌은 가만히 기다렸다. 마침내 제풀에 지친 왕재수가 울음을 그치자 머뭇거리며 물었다.

 

 

“ 사과파이 먹을래? ”

 

“ 줘. ”

 

“ 차도 마실래? ”

 

“ 설탕 타지 마. ”

 

“ 엉덩이 아직 납작한데... ”

 

“ 타... ”

 

 

그래서 베르닌은 뜨거운 차에 설탕을 두 숟가락 듬뿍 넣은 후 사과파이와 함께 왕재수에게 가져다주었다. 왕재수는 차를 마시고 사과파이를 한 판 해치운 후 베르닌에게 그만 가라고 했다. 그래서 베르닌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면서 베르닌은 다시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벨라가 없으니 정시퇴근도 주말 휴일도 없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토요일 밤인데도 불구하고 월요병이 엄습해 왔다. 게다가 월요일에는 국장과의 일대 일 면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한숨만 푹푹 쉬다 불편하게 잠이 들었다.

 

 

 

 

 

 

FIN

- 2015.2.8 -

   

----

 

 

그렇게 벨라 이야기들이 끝난다 :)

스페호프가 요구하는 업무/자기계발 계획서는 모두 올 초 내가 실제로 겪은 일을 소재로 하고 있다 ㅠㅠ

 

..

 

눈치챈 분들도 있겠지만 벨라의 모델은 내 친구 료샤의 7살 아들 레냐가 키우는 잡종 똥개 뜨보록이다. 그래서 여기에도 등장시켰다 :) 원반 안 물어오는 것부터 멍청한 것, 그러나 얼굴 예쁜 것 등등... 뭐 개 종류는 좀 다르지만. 벨라의 외모는 10편에서 얘기했듯 내가 키웠던 강아지 토리에게서 따왔다. 실제의 뜨보록은 비글과 발바리를 섞은 것처럼 생겼다. 흰색이지만 귀와 눈가에 조그만 갈색 얼룩이 있다.

 

제목인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이란.. 레냐가 사는 동네인 '아브리코트' 거리의 아브리코트가 살구란 뜻이다. 이 이름의 유래는... 예전에 내가 지금 쓰는 가브릴로프와 미샤가 등장하는 본편 구상하면서 거리 이름 만들어 낼때 원어민인 료샤에게 미샤가 사는 거리인 '그루셰바야 거리' 이름이 어떠냐고 물어봤는데(그루샤는 노어로 서양배 란 뜻이다. 미샤가 사는 거리는 오래전 배나무가 우거졌던 곳이라 그렇다 ㅋㅋ) 그때 료샤가 막 웃으면서 이상하진 않지만 배나무 거리라니! 그냥 살구나무 거리가 어떠냐, 자긴 살구가 배보다 좋다..라고 했던 적이 있어서 여기 등장시킨 것이다.

 

어쨌든 료샤와 레냐 덕에 10~11편이 나왔으므로 보답(..인가 ㅋㅋ)의 뜻에서 막판에 둘을 등장시켰음. 작가로서의 양심에 따라 료샤에게 얘기해줬다. 자세한 내용들을 설명하긴 힘들어서 그냥 개와 너희 둘이 찬조출연한다고 했더니 료샤는 매우매우 좋아했음.. (이렇게 어리숙하게 나온 걸 알면 기절초풍할 거야 ㅠㅠ)

 

..

 

벌레 잡는 살충견 벨라 얘긴 전부 내가 키운 강아지 토리의 실화이다. 옛날에 살던 집이 지상 1층이고 낡아서 벌레가 무지 많았는데 토리가 진짜진짜 벌레를 잘 잡았다! 그래서 내가 살충견이라 부르며 이뻐했다.

왕재수가 벨라를 '개!', '강아지!' 하고 부르는 건 사실 내가 토리를 부르던 여러 애칭 중 하나이다. 말 안 들으면 '개!' 하고 혼내고 귀여울 땐 '개야~~~' 하고 이뻐해주고 '강아지야~' 라고도 불렀음 :) 닭살 돋지만... 개 한번 키워보라고요!! 그렇게 되나 안되나!! 엄청 이쁜 내 강아지 내 새끼... 그립다 토리야..

 

..

 

중간에 왕재수가 부르는 노래는 영국 가수 데이빗 보위의 노래들이다. 본편 우주에서도 미샤는 당시 소련에서는 금지되었던 서방 세계의 락 음악이나 영화들, 문학들을 좋아해서 지하출판이나 암시장, 비밀클럽 등등에서 그것들을 항상 입수하고 듣고 공유한다. 가끔은 영문이나 불문으로 된 텍스트들을 번역해 공유하기도 한다.

젠더와 성적 억압에 저항하는 인물, 그리고 기존 성적 질서에 이반하는 퀴어 캠프의 일원답게 미샤는 데이빗 보위를 좋아해서 본편 시리즈중에서도 보위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지나가듯 한번 넣은 적이 있다. 제목을 명기하진 않았지만 그때 그 애가 불렀던 건 보위의 the man who sold the world였다.

 

이 11편에서 왕재수가 베르닌과 벨라에게 불러주는 노래는 아마도 보위의 초창기 노래들, 그러니까 지기 스타더스트 이전이나 그 당시의 노래들인 space oddity나 life on mars, 아마도 the man who sold the world도 있었을 것이다. 궁금하신 분들은 유튜브에서 데이빗 보위와 노래 제목으로 검색해보세요. 나도 아주 좋아하는 가수, 좋아하는 노래들이다 :) 더 맨 후 솔드 더 월드는 내가 arts 폴더에 너바나 커트 코베인 버전으로 영상도 올렸다.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1250

 

..

 

왕재수가 아픈데도 불구하고 로만 코즐로프를 자신에게 못 오게 한 이유는 농담처럼 서술되어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꽤 심각해질 수 있는 문제이기도 했다. 소련 시절 이성애에 반하는 행위는 금지되어 있었고 걸리면 성도착으로 체포될 수 있었다. 수용소에 가기도 했다. 본편 우주에서야 좀 진지하게 이 문제를 언급하기도 한다만 이건 서무 시리즈니까 그냥 넘어가자..

 

..

 

시리즈는 12편의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로 이어진다. 벨라가 나왔던 에피소드들과는 느낌이 꽤 다른 얘기다. 어제 13편 완결하고 거기 이어지는 14편 쓰는 중. 이거 다 쓰고 나면 제발 본편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

 

그럼 12편에서... 댓글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

 

 

:
Posted by liontamer

 

심신이 피곤할 때 이상하게 잘 써지는 서무의 슬픔 시리즈 ㅠㅠ

지난주에 러시아 다녀와서 원래 본편에 다시 매진하려 했는데 피곤하기도 하고 자꾸 스트레스를 받으니 집중이 안돼서 대신 서무 12편을 썼다 ㅜㅜ 12편에서는 특히 단추를 많이 괴롭히고 기분이 정화되었...(미안해 단추야)

 

서무 시리즈는 원래 매 에피소드마다 완결되는 옴니버스 형식인데 이번 10편은 9편(http://tveye.tistory.com/3524)과 내용상 연결되고 있다. 그러니까, 눈보라가 몰아치고 얼어붙은 강을 건너고 퐁당 빠지고 등등... 갖은 우여곡절 끝에 베르닌과 왕재수가 구출(?)해 온 강아지가 10편에도 나온다.

 

이미 왕재수 집사 노릇하느라 이골이 난 우리의 단추 청년 베르닌.. 과연 강아지의 집사마저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리고 얼음물에 풍덩 빠졌던 왕재수는 과연...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1년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그러다 새해가 오고, 눈보라 속에서 얼어붙은 강을 건너다 베르닌과 왕재수는 길 잃은 강아지를 한 마리 구조한다. 그리고....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10

 

 

서무의 슬픔

- 벨라 등장! -

 

 

 

 

 

전날의 눈보라 소동으로 늦잠을 잔 베르닌은 그만 지각을 했고 스페호프에게 불려가 엄청나게 꾸중을 들었다. 이미 전날 책상과 의자 아래가 지저분하다는 이유로 2주일 간 1시간 초과근무 벌칙을 받은 상태에서 1주일간의 조기출근 벌칙이 추가되었다.

 

오후에 국장이 다시 그를 호출했다. 베르닌은 또 무슨 트집을 잡아서 벌칙을 주려나 하고 쭈뼛거리며 국장실에 들어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페호프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 자네 어째서 그 얘길 하지 않았나? ”

 

“ 무슨 얘길... ”

 

“ 그 불여우 말일세!! 입원했다는 얘길 조금 전에 들었네. 자네와 강을 건너다 빠졌다면서. 죽을 뻔했다고 말이지. ”

 

“ 아, 예... 죄송합니다. 그렇게 위험한 짓은 하지 않았어야... ”

 

“ 잘했네, 잘했어! 책상물림인 줄만 알았는데 자네가 알고 보니 배짱도 있고 국가에 대한 충성심도 두텁구먼! 그 반동분자를 쥐도 새도 모르게 처치하려고 했다니...

 

“ 예? 처치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

 

“ 그렇지! 밖에서는 항상 그렇게 대답하게! 혹시라도 크레믈린에 있는 그 불여우의 후원자들이 알게 되면 자넬 죽여 버릴지도 모르니... 이 방은 안전하니 괜찮네. 우리 둘만 있을 땐 솔직하게 말해도 좋아. 그렇지 않아도 내가 그놈을 없애버리려고 지령을 내리려다 항상 망설였는데 자네가 어떻게 내 마음을 그렇게 잘 알고 시도를 했나! 정말 놀랍군, 고지식한 책상물림이었던 자네가 어엿한 암살 요원의 자질을 갖추게 되다니! 정말 잘했네. 눈보라 속에서는 흔적이 남지 않으니 강으로 가서 살얼음 쪽으로 몰고 가 빠뜨려 죽이려고 했던 전략은 아주 훌륭했네.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뭐 자네는 암살 훈련을 정식으로 받지 않았으니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네. 시도 자체가 훌륭한 일일세! 아아, 다닐. 난 사실 걱정하고 있었다네. 자네가 그 불여우에게 푹 빠져서 아침에 하고 저녁에 하고 밤에도 하고 당직실에서도 하면서 점점 반동분자 물이 들고 당에 대한 충성심을 저버리게 될까봐 늘 걱정이었네. 그런데 그건 기우였군! 자네는 그 불여우에게 잘해주는 척 하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거였군! 앞으로도 그렇게 하게! ”

 

베르닌은 너무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버버 하고 말을 더듬었다.

 

“ 어... 저... 저 국장님, 그러니까... 지금... 제가 걜 죽이려고 했다고... ”

 

“ 내 앞에서는 숨기지 않아도 된다니까 그러는군. ”

 

“ 앞으로도 걜 죽일 기회를 노리라고... ”

 

“ 쉿,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일세. 난 원래 다른 요원을 투입하려고 했는데 비밀 유지를 위해서는 자네가 맡아주는 게 역시 안심이 될 것 같군. 하지만 조심해야 하네. 저 불여우는 워낙 뒤를 봐주는 윗분들이 많아서. 일단 지금은 한 발 물러서야 해. 애송이가 입원까지 했으니 분명 크레믈린에 정보가 들어갔을 거야. 한동안은 전처럼 잘 돌봐주는 척하게. 아침에 하고 저녁에 하고 밤에도 해주는 것도 계속하도록. 그러다 안전해지면 내가 다시 신호를 주겠네. 그때 그놈을 쥐도 새도 모르게...

 

“ 하지만... 우린 모스크바 본부도 아니고 살인면허 같은 것도 없고... 걔는 전혀 위험인물이 아닌데... ”

 

“ 그렇지, 항상 그렇게 얘기하도록 하게! 아아,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군. 드디어 자네가 행정의 기본을 익혔어. 행정의 기본이란 국가와 당에 충성하는 것이지! 체제에 거역하는 놈들을 가차 없이 처단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네. 기특하기도 하지. 상으로 아침에 내렸던 조기출근 벌칙은 면제해 주겠네. 그만 가보게. ”

 

 

 

베르닌은 무거운 마음으로 국장실을 나왔다. 조기출근 벌칙에서 면제된 것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국장이 그런 무서운 생각을 하고 있다니 너무나 놀라웠다. 혹시라도 국장이 자기에게 왕재수를 죽이거나 해를 끼치라고 명령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오금이 저렸다.

 

‘ 지금이 레닌 스탈린 시대도 아닌데 어떻게 사람을 암살하는 걸 저렇게 쉽게 얘기하지? 그것도 저 철딱서니 없는 애를... 싸가지 없긴 해도 나쁜 앤 아닌데... 강아지도 구해줬는데... ’

 

베르닌은 자리로 돌아왔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결국 그는 마음속으로 깊게 다짐했다. 국장이 혹시라도 정말로 왕재수를 죽이라고 하면 크레믈린에 있다는 그 아저씨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겠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그는 크레믈린에 있는 높은 분들에게 연락할 방법도 몰랐고 행여 안다 한들 그 대단한 사람들이 말단 직원인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일 리도 없었다. 정 안되면 바이올린 깡패에게라도 얘기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쩐지 코즐로프를 떠올리자 좀 든든해졌다.

 

 

*      *      *

 

 

베르닌은 초과근무 1시간만 하고 퇴근했다. 왕재수를 보러 곧장 병원으로 갔다. 하지만 의사가 병실에 못 들어가게 막았다.

 

자니까 방해하지 마!

 

“ 어... 괜찮은지 확인만 하고 갈게요. ”

 

안 괜찮아! 얼음물에 빠져서 폐렴 도졌어. 애가 온종일 얼마나 아팠는지 알아! 간신히 재워놓은 거야. 부스럭거리면 또 깨니까 들어갈 생각은 하지도 마. ”

 

“ 그럼 병원에 오래 있어야 돼요? ”

 

“ 최소 사흘은 있어야 할 것 같으니 그렇게 알아. 내일까지는 면회 금지니까 와봤자 소용없어. 밖에서 병균 묻혀오면 어쩌려고! ”

 

“ 선생님, 저는 병균의 온상이 아닌데요... 손도 깨끗이 씻고 들어왔어요. ”

 

KGB 나부랭이는 전부 병균 박테리아야!

 

“ 그런 말씀 함부로 하지 마세요. 국장이 알면 잡아갈지도 몰라요. ”

 

아니 이놈이 어디서 감히 국장 운운이야! 여기가 무슨 KGB 고문실이라도 되는 줄 알아! 꺼져! ”

 

 

과연 노의사 스타브로프는 왕년에 시베리아 수용소 생활을 두 번이나 한 사람이라 KGB에 대한 증오가 어마어마했다. 베르닌은 오후에 국장이 했던 무서운 말을 떠올리자 풀이 죽었고 의사에게 대드는 대신 터벅터벅 병원을 나왔다. 왕재수가 생각보다 많이 아프다는 말에 기분이 좋지 않았고 강을 건너자고 했던 것에 가책을 느꼈다.

 

 

그는 아파트 옆에 있는 식료품 가게에 갔다. 웬일로 줄이 굉장히 짧아서 10분 만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까탈스러운 왕재수가 없으니 마음 놓고 느끼하고 기름진 음식을 해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돼지비계와 칼바사 햄을 샀고 정육점 아주머니에게 부탁해서 쇠뼈와 짜투리 고기를 싸게 얻었다.

 

 

집에 돌아와서 그는 돼지비계와 햄, 통조림 토마토, 버터 듬뿍, 야채 약간을 투하해 기름기가 둥둥 뜨는 살랸카 수프를 끓였다. 수프를 곁들여 흑빵에 버터를 무지무지 많이 발라서 그 위에 잼도 잔뜩 얹어 먹었다. 차에 설탕도 두 숟가락이나 녹여 마셨다. 왕재수가 봤다면 기절초풍할 저녁 식사였다.

 

에이, 그 녀석 없으니까 진짜 좋네. 나 먹고 싶은 대로 실컷 해 먹을 수 있고. 눈치도 안 보고. 식기들 일일이 안 차리고 냄비 째로 갖다놓고 먹어도 뭐라 하는 녀석 없고. 아이 평화로워. 아이 편해. 설거지도 내일 해야지! ”

 

저녁을 먹은 후 그는 짜투리 고기를 삶아 기름기를 제거하고 쇠뼈를 고아 국물을 냈다. 그리고는 혀로 입천장을 톡톡 치면서 강아지를 불렀다.

 

“ 벨라야! 우리 벨라, 이리 온. 맛있는 거 줄게~ 이리 와~ ”

 

이제나저제나 하며 침을 흘리고 있던 강아지가 꼬리를 치며 달려왔다. 얼음 위에서 발견했을 때는 거무스름한 색이었지만 따뜻한 물로 씻기고 말려주자 놀랍게도 강아지는 눈처럼 하얀 색이었음이 밝혀졌다. 그래서 베르닌은 강아지에게 하얀 털색을 따서 벨라라는 이름을 붙여주고는 간밤에도 한 침대에서 데리고 잤다. 의사는 강아지가 6개월 정도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귀여움을 받고 자란 강아지인지 낯가림도 없었고 베르닌을 졸졸 따라다녔다.

 

베르닌은 조그만 강아지가 추위에 떨며 고생했으니 몸을 보신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쇠뼈를 곤 국물에서 기름을 모두 걷어내고 후후 불어 식혀서 벨라에게 한 숟갈 한 숟갈 떠먹여 주었다. 벨라는 엄청 잘 먹었다. 삶은 고기를 찢어주자 순식간에 홀랑 먹어치우고는 베르닌을 숭배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배를 뒤집으며 발라당 드러누워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다. 강아지가 너무 귀여워서 베르닌은 잠자리에 들 때까지 벨라를 데리고 놀았다.

 

“ 우쭈쭈쭈, 우리 강아지~ 우리 벨라~ 엄마 아빠랑 헤어져서 슬프지? 내가 주인이랑 가족들이랑 다 찾아줄게~ 그때까지 나랑 있자~ 아 예뻐라~ ”

 

벨라는 혀로 베르닌의 뺨을 핥으며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래서 베르닌은 강아지의 온기 속에서 아주 기분 좋게 잠이 들었다.

 

 

*     *     *

 

 

다음날 베르닌이 돌아와 보니 벨라가 시무룩하게 몸을 말고 누워 있었다. 거실과 방 여기저기에 실례를 해놓은 것도 모자라 화분의 잎사귀도 몽땅 다 뜯어놓았고 휴지도 마구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벨라야, 왜 이랬니! 이러면 못써!

 

벨라는 하염없이 슬픈 눈망울로 베르닌을 바라보며 낑낑대더니 곧장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베르닌은 화를 내는 대신 어질러진 집을 모두 치웠고 벨라에게 밥을 준 후 도서관에서 빌려온 ‘개 기르는 법’이란 책을 꺼내보았다. 필요한 부분을 찾아내 소리 내어 읽었다.

 

 

개는 주인을 매우 따르는 동물이다. 집에 혼자 내버려두면 우울증으로 고통을 받는다. 여기저기 실례를 하거나 말썽을 부리며 주인의 관심을 끌려고 한다. 상태가 심해지면 늑대처럼 구슬프게 짖기도 하고 시름시름 앓게 된다.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벨라가 불쌍했다. 가엾은 강아지를 집에 혼자 놔두면 안 되는 거였다. 그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 할 수 없지. 사무실에 데려가야지. ’

 

 

다음날 베르닌은 벨라를 몰래 사무실로 데려갔다. 벨라를 넣어둔 조그만 박스를 자기 의자 아래 감춰둔 채 일을 했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베르닌이 이따금 몸을 굽혀 박스 안에 있는 벨라와 놀아주었다. 밥도 주고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하지만 몇 시간 후 따분해진 벨라는 낑낑거리기 시작했다. 자꾸만 박스 바깥으로 기어나오려고 했다.

 

“ 쉿, 벨라... 조용히 해. 사람들한테 들키면 큰일나... ”

 

“ 끼이잉... 끼이잉... ”

 

“ 쉿... 조용히... ”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지나가던 리자가 낌새를 챈 것이다.

 

 

“ 다냐, 이게 무슨 소리에요? 어머낫, 강아지!

 

“ 리자... 제발 쉿... ”

 

“ 어머어머, 얘 진짜 귀엽다. 새로 들인 거예요? ”

 

“ 아뇨, 그게 아니고... 그저께 나랑 왕재수, 아니 미샤랑 강에 빠졌잖아요. 그때 구해준 강아지예요. 주인 찾을 때까지만 데리고 있는 건데... 너무 어려서 집에 혼자 놔두니까 힘들어하는 거 같아서 살짝 데려온 거예요. 근데 가만히 있으라고 해도 말을 안 들어요. ”

 

“ 개가 무슨 금붕어나 십자매예요? 박스 안에서 얌전하게 있게... 개는 산책도 시켜주고 놀아줘야 해요. 바깥 공기도 쐬어야 하고. 이렇게 가둬놓으면 병나요. 차라리 뒤뜰에 데려다놔요. 그 배추밭 옆에. 거기 바람막이도 있고 해도 잘 들어서 따뜻해요. ”

 

“ 뜰에 풀어놨다가 도망치거나 길을 잃으면 어떻게 해요. 가뜩이나 길 잃은 강아지인데... ”

 

“ 목줄 길고 느슨하게 매 주면 되죠. 이리 줘요, 내가 뒤뜰에 묶어 놓고 올 테니까. ”

 

“ 국장한테 들키면... ”

 

“ 경비원 아저씨한테 얘기해 놓을게요. 국장 오는 기색 있으면 경비실에 숨겨달라고... ”

 

“ 고마워요, 리자. 그때 차 태워준 것도 그렇고 정말 친절하고 착한 거 같아요. ”

 

“ 고마우면 그 꽃돌이 감독님이랑 소개팅 좀... ”

 

“ 나도 그렇게 해주고 싶은데 걔가 좀... ”

 

“ 흥, 됐어요. 농담이에요. 그 사람은 당신 거잖아요. 칫, 운도 좋아. 단추 눈이면서 무슨 재주로 그렇게 멋있는 남자를 낚았담. 아 맞다, 아침에 하고 저녁에 하고 밤에 해 준댔죠... 그러고 보면 당신도 대단해요. ”

 

“ 나 진짜 그거 아니에요 ㅠㅠ ”

 

 

리자는 깔깔 웃으며 벨라를 품속에 집어넣고 뒤뜰로 갔다. 베르닌도 불안해서 따라갔다. 알고 보니 리자는 어릴 때부터 개를 여러 마리 키워본 베테랑이었다. 배추밭 옆의 기둥에 기다란 끈을 잡아매더니 벨라의 목에 솜씨 좋게 매어 주었다. 끈이 길어서 벨라는 꽤 넓은 반경 안에서 움직일 수 있었다. 리자는 벨라의 곁에 물그릇과 밥그릇도 놓아주고 어디선가 뼈다귀와 바람 빠진 고무공도 주워다 주었다.

 

“ 예쁘다, 벨라야~ 놀고 있어. 우리가 자주 올게~ ”

 

벨라는 땅을 파헤치느라 신이 나서 베르닌과 리자가 사무실로 돌아가도 본척만척했다. 베르닌은 한 시간마다 뒤뜰로 나가보았고 벨라와 조금씩 놀아주었다. 벨라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힘든 일을 하면서도 전만큼 스트레스가 심하지 않았다. 어차피 남아서 하나 안 하나 일은 밀리게 되어 있다고 생각하며 야근도 하지 않고 초과근무 1시간만 마친 후 벨라와 함께 귀가했다. 강아지 덕분에 인간다운 생활을 하게 된 것 같아 심히 기뻤다.

 

 

그러나 벨라와의 행복한 사무실 생활은 사흘 만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일의 발단은 가끔 나타나는 검정 도둑고양이 미셴카였다. 고양이는 그 날도 베르닌이 챙겨주는 사료와 생선 찌꺼기를 먹으려고 배추밭 근처에 나타났다가 웬 하얀 강아지를 발견했다. 무시무시하게 발톱을 드러내며 하악거리는 커다란 고양이 때문에 깜짝 놀란 벨라는 왈왈 짖어댔다. 그러나 이 구역의 지배자이자 깡패로 산전수전 다 겪은 검정고양이 미셴카에게 벨라는 한주먹거리도 되지 않았다.

 

한바탕 난리가 났다. 캭캭, 야옹야옹, 왈왈왈, 멍멍멍, 깨갱깨갱 등등 끔찍하고 현란한 소음이 일었다. 뒤뜰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놀란 베르닌이 달려갔을 때는 이미 검정고양이 미셴카가 벨라를 깔고 앉아 발톱을 세운 앞발로 강아지의 토실토실하고 복슬복슬한 엉덩이를 마구 후려치고 있었다. 벨라가 죽는 소리를 하며 깨갱거렸다.

 

으악, 미셴카! 이게 무슨 짓이야! 저리 가!

 

야아아아옹!!!!

 

 

베르닌이 삿대질을 하며 벨라를 안아들자 고양이는 엄청나게 서럽고 분한 표정으로 그를 째려보더니 소맷부리를 확 할퀴고 가버렸다.

 

“ 벨라야 놀랐지, 미안 미안. 아휴, 배추밭은 위험해서 안 되겠다... 도로 사무실로 데려가야겠네. ”

 

“ 끼잉끼잉... ”

 

 

하지만 운이 없었다. 벨라를 사무실로 데리고 들어오다가 스페호프와 떡하니 마주치고 만 것이다. 국장의 두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 자네, 그게 대체 뭔가? ”

 

“ 예? 예...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인형... ”

 

개 아닌가!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사무실에서 왜 지저분한 개를 끌어안고 있는 거냔 말일세! ”

 

“ 저... 길 잃은 강아지인데 주인 찾을 때까지만 임시로 제가... 어려서 집에 두면... 우울증... 말썽... 늑대처럼 짖고... ”

 

“ 웬 횡설수설이람. 하여튼 근무지에 짐승을 반입하면 절대 안 되네! 가뜩이나 도둑고양이를 아직도 퇴치하지 못해 골치 아파 죽겠는데 어디서 강아지 새끼까지 데려와서! 당장 갖다 버리게!

 

“ 하지만 이 추운 날씨에 강아지를 어떻게 버립니까... 이렇게 어린데... ”

 

그럼 안락사시키든가!!

 

“ 아아,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국장님은 피도 눈물도 없나요... 이렇게 귀여운 강아지를... ”

 

“ 내 눈엔 근무 질서를 어지럽히는 쓸모없는 생물일 뿐이야! 당장 처리하고 오게! ”

 

 

베르닌은 강아지를 안고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며칠 전 강아지 습득 신고를 했던 경찰서에 가서 혹시 주인이 나타났느냐고 물었다.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는 대답만 들었다. 일말의 기대를 품고 스타브로프의 병원에 가보았다. 의사에게 강아지를 맡아줄 수 있는지 물었다. 노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 나도 맡아주고 싶지만 병원에는 환자가 많아. 개가 병균을 옮길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위험하네. 그리고 마누라가 비염이 심해서 어려워. 그냥 집에 데려다놓고 정시에 퇴근하도록 하게. 그게 개한테도 좋고 자네한테도 좋아. ”

 

“ 하지만 전 항상 노예처럼 일하느라 늦게 들어오는걸요... ”

 

“ 망할 놈의 KGB에 뭐 그렇게 충성할 필요가 있다고! ”

 

별다른 수확 없이 베르닌은 집으로 향했다. 품에 안긴 벨라의 해맑은 까만 눈동자를 보자 마음이 무거웠고 서글펐다. 강아지 한 마리 사무실에서 마음껏 뛰놀지 못하는 세상이 미웠다.

 

 

*     *     *

 

 

집으로 들어오자 벨라는 목이 말랐는지 물그릇에 머리를 처박았다. 한참 물을 먹더니 피곤했는지 곧장 소파로 올라가 잠이 들었다. 베르닌은 한숨을 내쉬고는 밥그릇에 사료를 채워놓고 다시 사무실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침실 문이 열려 있었다. 도둑이라도 들었나 싶어서 침실로 가보았더니 왕재수가 침대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 깜짝 놀란 베르닌이 조심스럽게 나가려고 했지만 기척에 왕재수가 깨어났다.

 

“ 어, 너 왔구나. 벌써 밤인가? 나 많이 안 잔 것 같은데. ”

 

“ 너 퇴원한 거야? ”

 

“ 응. 아침에. ”

 

“ 근데 왜 너네 집에 안 가고 여기서 자고 있는 거야? ”

 

“ 우리 집 너무 추워. 난방 고장 난 거 같아. ”

 

“ 아... 내가 가스 밸브 잠가놨었어. 사람 없는데 난방 돌아가면 낭비잖아. 밸브 틀어놓으면 따뜻해질 거야. 너 이제 괜찮아? ”

 

응, 의사 선생님이 병실도 좁고 불편하니까 퇴원하는 게 낫대. 근데 이번 주는 출근하지 말고 무조건 집에서 쉬어야 한대. 다시는 강 건너지 말래. ”

 

“ 선생님이 너 엄청 혼냈지? ”

 

“ 왜 혼나? 멋모르고 강 건너다 큰일 날 수 있다고 수심이랑 얼음 분포도랑 그려가면서 친절하게 설명해주셨어. 매일매일 옆에 와서 열도 내려주고 수프도 떠먹여주고 자장가도 불러서 재워주셨어. 의사 선생님 진짜 친절하고 완전 좋아. ”

 

“ 엥... 그 할아버지가 그런 면이... 너 혹시 그 선생님하고도... ”

 

“ 뭐가? ”

 

“ 그러니까... 응응응을... 성교를... ”

 

악, 너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의사 선생님 모독하지 마! ”

 

“ 너 참 이상하다... 맨날맨날 아무 남자나 다 덥석덥석 끌어안고 성교 어쩌고 침대 어쩌고 하면서 왜 그 의사 선생님이랑 그런 사이냐고 물어보니까 화내지? ”

 

“ 의사 선생님이잖아! 엄청 착한 할아버지잖아! ”

 

 

대체 그 기준이 뭔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었지만 베르닌은 어쨌든 왕재수가 퇴원했다는 데 마음이 놓였다.

 

 

“ 밥은 먹었어? ”

 

“ 병원에서 먹고 왔어.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야? ”

 

“ 어... 아직 낮이야. 나 다시 사무실 가야 돼. 잠깐 들른 거라서. 야근 안하고 올게. 저녁 뭐 먹고 싶어? ”

 

“ 별로 입맛이 없어. 그냥 잘래. ”

 

“ 잘 먹어야 빨리 낫는데... 내가 저녁에 너 좋아하는 생선찜 해줄게. ”

 

“ 그걸 어떻게 믿니. 너 회사 가면 야근이잖아. 분명히 한밤중에 오겠지. 배고프면 그냥 바나나랑 요구르트나 먹을래. ”

 

“ 아니야, 나 오늘 일찍 올 거야. 나 요즘 계속 일찍 왔어. ”

 

“ 그 못된 국장이 개과천선이라도 했어? 아니면 잘렸나? ”

 

“ 아니, 그게 아니고... ”

 

 

베르닌이 강아지 얘기를 하려고 했을 때 마침 잠에서 깬 벨라가 투다다닥 하고 침실로 달려 들어왔다. 꼬리를 치며 베르닌에게 뛰어오다가 왕재수를 발견하더니 ‘왕!’ 하고 짖으며 잽싸게 침대 위로 뛰어올라가 왕재수의 무릎에 찰싹 올라앉았다. 왕재수가 기겁을 했다.

 

악, 이게 뭐야! 저리 가!

 

벨라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왕재수의 품으로 팔짝팔짝 뛰어오르면서 목덜미고 얼굴이고 닿는 곳마다 혀로 할짝거리고 뽀뽀를 해댔다. 경악한 왕재수가 부들부들 떨면서 몸부림쳤다.

 

 

저리 가! 저리 가! 아악, 야! 너 왜 보고만 있는 거야! 이것 좀 치워줘! ”

 

“ 왜 그래, 벨라가 너 기억하나봐. 반가워서 그러는 거야. 좀 안아주고 인사해줘. 아는 체 해달라고 그러는 거잖아. ”

 

“ 기억은 무슨 기억! 어디서 이런 지저분한 멍멍이가 굴러들어온 거야! 아악, 빨리 좀 떼어줘! 나 이런 거 너무 싫어! 아 더러워! 으악, 이게 막 핥아... 침까지 묻히고... 우웩! 아악!

 

왕재수가 너무 법석을 피웠기 때문에 베르닌은 벨라를 그의 품에서 떼어내 꼭 안고 머리를 쓸어주었다.

 

 

“ 벨라야, 저 오빠는 네가 무서운가봐. 그러니까 방금처럼 막 뛰어오르면 안 돼. 알았지? ”

 

“ 오빠라니! 난 인간인데! 내가 왜 지저분한 똥개의 오빠여야 돼! 벨라는 또 뭐야! 으윽! 대체 왜 집구석에 개가 들어와 있는 건데! ”

 

“ 너 기억 안나? 그 강아지. 그때 얼음 위에 있던 애야. 네가 구해줬잖아. ”

 

“ 얼음... 아, 그 똥개... 거짓말하지 마! 그 똥개는 거무튀튀한 색깔이었는데 이건 하얗잖아! ”

 

“ 그거 때타서 그런 거였어. 목욕시키니까 하얀색이더라고. 그래서 이름도 지어줬어. 벨라... ”

 

벨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개한테 웬 벨라!

 

“ 하얀색이니까... ”

 

“ 벨라는 레르몬토프 소설 여주인공 이름이란 말이야!! 예쁜 여자한테나 붙여주는 이름이라고! 개는 멍멍이! 바둑이! 누렁이! 흰둥이! 뭐 그렇게 부르는 거야! 게다가 이거 수컷이잖아!!! 이거 안 보여, 이거? 여기 이거! ”

 

 

 

왕재수가 부르르 떨면서 벨라의 뒷다리 사이에 달려 있는 콩알만한 뭔가를 가리켰다. 베르닌은 깜짝 놀랐다.

 

“ 어... 그러네... 너무 작아서 몰랐어. 암컷인줄 알았는데... 그래도 강아지니까 그냥 벨라라고 부르자... 벌써 이름도 입에 뱄는데... ”

 

“ 알아서 해, 벨라든 나발이든... 제발 갖다 버려... 아니면 경찰서에 갖다 주든가!! 집안에서 개 따윌 키우다니! 순전 세균 덩어리란 말야! ”

 

“ 야, 너 왜 이렇게 피도 눈물도 없냐! 국장이랑 똑같은 소릴 하네. 경찰서에 신고했단 말이야, 주인 찾아줄 때까진 데리고 있을 거야. 안 그러면 유기견 수용소로 끌려가서 안락사 당한단 말이야. 그리고 여기 우리 집이야! 내가 내 집에서 개 키우겠다는데 네가 왜 그래! ”

 

“ 그치만... 난 맨날 여기서 저녁도 먹고... 차도 마셔야 되고... 지금 우리 집 난방도 안 되고 추운데... 지금 나 보고 여기 오지 말라는 거야? 똥개 한 마리 때문에!!! ”

 

“ 아니, 그게 아니고... 너 왜 그렇게 흥분해. 벨라 귀엽잖아. 얘 깨끗해. 내가 목욕시켜줬어. 이거 봐, 네가 자기 구해준 거 알고 이렇게 꼬리치잖아. 생명의 은인이라고 좋아하는데 너무 그렇게 화내지 마. ”

 

꼴도 보기 싫어! 난 개든 고양이든 짐승은 싫단 말이야!

 

 

왕재수가 바들바들 떨었다. 얼굴이 새빨개졌다. 흥분해서 소리를 지른 탓에 심하게 기침을 했다.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베르닌은 왕재수에게 물을 떠다 주었고 살살 달랬다.

 

 

“ 계속 여기 있을 거 아니란 말이야. 주인 찾으면 돌려보낼 거야. 그렇게 싫으면 문 닫고 있어. 회사 갔다 와서 내가 데리고 있을게. ”

 

“ 안 돼, 저놈 내보내든지 너 회사 가지 마... 저놈이랑 둘이 못 있어... ”

 

“ 그렇게 싫으면 너네 집으로 가면 되잖아. ”

 

“ 우리 집 춥다니까! 그리고... 그리고... 나 우리 집 못가... ”

 

왜? 가스 밸브 열면 금방 따뜻해질 거야. 나랑 같이 가자. 난방 틀어줄게. ”

 

“ 아까... 아침에 갔는데... 부엌에서 바퀴벌레 나왔어. 나 분명히 우리 집에선 음식도 안 해 먹고 깨끗하게 사는데, 맨날 소독약 뿌리는데 대체 그 벌레는 어디서 나온 거야... 시골... 집에 올라가기 싫어... 아... 집에는 바퀴벌레... 여긴 멍멍이... 아... 시골... ”

 

 

왕재수가 깊이 탄식하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껴 울었다. 베르닌은 한 대 패줄까 하다가 왕재수가 아직 아프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참았다. 당직실에서 곱등이와 쥐를 보고 기절했던 것도 생각났다.

 

 

“ 야, 울지 마. 네가 깨끗하게 해놓고 살아도 밖에서 유입되는 벌레는 어쩔 수 없는 거야. 내가 저녁에 와서 벌레 있나 없나 봐 줄 테니까 그동안 여기 있어. 벨라 무서우면 얘는 거실에 묶어놓을게. ”

 

“ 누가 멍멍이 따위 무섭대. 그냥 싫은 거지... ”

 

“ 그래도 네가 구해줬잖아. 그 위험한 상황에서도 강아지 구해서 주머니에 넣어주고 지퍼까지 채워줘 놓고 왜 이제 와서 그러니... ”

 

“ 내가 구하고 싶어서 구했냐. 네가 빠져서 간신히 꺼내놨는데 갑자기 저 똥개가 얼음 위에 가만히 있다가 미친놈처럼 나한테 막 달려오잖아. 아까처럼 막 품으로 파고들어서 얼굴 핥아대니까 너무 싫어서 주머니에 쑤셔 넣은 거란 말이야... 저 녀석 나오지 말라고 지퍼 채우다가 미끄러져서 빠진 거야. 우씨, 생각해 보니까 다 저 녀석 때문이야. 그 물 얼마나 차가웠는데... 나 정말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패딩도 쟤 때문에 더 무거워져서 막 가라앉고... 아우, 어디서 저런 게 나타나서... ”

 

“ 근데 벨라는 너 좋은가봐. 내가 안고 있는데도 자꾸 너한테 가려고 이렇게 몸부림치고 난리잖아. 얘 잘 봐봐, 얼굴도 되게 귀엽고 재롱도 잘 떨어. 맘 풀고 좀 친해져봐. 무서운 거 아니라며. ”

 

안 무서워. 그냥 찝찝해!

 

“ 야! 넌 그 험상궂은 바이올린 아저씨랑은 물고 빨고 별 짓 다하면서 훨씬 작고 귀엽고 목욕까지 시켜서 깨끗한 강아지가 와서 재롱떠는 건 뭐가 찝찝하다는 거야! ”

 

“ 여기서 왜 로만이 나오는데! 멍멍이랑 내가 응응을 할 건 아니잖앗!!!! 그리고... 그리고 로만이 뭐가 험상궂어. 얼마나 멋있는데! ”

 

 

베르닌은 마침내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사무실로 빨리 돌아가야 하는데 왕재수가 칭얼대니 미칠 것 같았다. 그는 벨라를 안고 거실로 가서 소파 팔걸이에 목줄을 맸다. 벨라의 곁에 신문지와 물그릇, 밥그릇을 놓아 주었다.

 

 

“ 착하지, 벨라야. 몇 시간만 집 보고 있어. 내가 빨리 돌아와서 풀어줄게. 저 나쁜 오빠가 욕해도 신경 쓰지 말고 있어. 알았지? 아 착하다, 아 이뿌다, 우리 강아지... ”

 

그거 수놈이라고 했잖아! 오빠 아니라고!

 

 

방 안에서 왕재수가 버럭 소리쳤다. 베르닌도 맞받아 소리를 질렀다.

 

 

시끄러워! 넌 어떻게 스물다섯 살이나 먹어가지고 그렇게 자기만 알고 유치원생처럼 구냐! 너 때문에 벨라 묶어놨으니까 미안한 맘을 좀 가져보란 말야! 나 올 때까지 그 방에 꼼짝 말고 있든지 너네 집으로 올라가든지 둘 중 하나야! ”

 

“ 난 아픈데... 얼음물에도 빠졌는데... 폐렴도 걸리고... 너 진짜 나빠... 똥개 때문에 날 구박해... ”

 

 

왕재수가 방 안에서 칭얼대고 하소연하는 것을 뒤로 하고(그리고 벨라의 낑낑거림을 역시 뒤로 하고) 베르닌은 아파트를 나와 사무실로 돌아갔다. 머리가 더욱 지끈거렸다.

 

 

*     *     *

 

 

강아지 생각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던 베르닌은 초과근무 1시간도 무시한 채 정시에 퇴근했다. 돌아오다 식료품 가게에 들러 생선을 한 마리 샀다. 벨라를 위해 짜투리 고기도 얻었다. 그러다 보니 또 마음이 약해져서 옆에 있는 빵집에서 사과파이도 한 조각 포장했다.

 

“ 야, 나 왔어. ”

 

이상하게 집이 조용했다. 툴툴대더니 자기 집으로 돌아갔나 싶었다. 그런데 평소 같으면 왕왕거리며 반갑게 뛰쳐나왔을 벨라조차 기척이 없었다. 베르닌은 살짝 걱정이 되었다. 거실을 보니 목줄만 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 어... 저 자식이 설마 우리 벨라를 내다 버린 거 아냐! ’

 

 

왕재수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거라는 불안감에 사로잡힌 베르닌은 부엌과 욕실에 가보았다. 텅 비어 있었다. 혹시나 해서 침실로 가보았다. 왕재수가 담요로 몸을 둘둘 말고 등을 돌린 채 자고 있었다. 그런데 벨라도 거기 있었다. 왕재수의 어깨에 착 달라붙어서 쿨쿨 자고 있는 게 아닌가!

 

“ 싫다고 틱틱댈 땐 언제고... 그래도 나 없을 땐 강아지한테 잘 해주네... ”

 

 

베르닌은 어쩐지 감동을 받았다. 둘을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부엌으로 나왔다. 짜투리 고기를 삶고 왕재수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생선을 쪘다. 기름을 두르지 않고 유산지로 감싸서 담백하게 조리하는 방법이었다.

 

‘ 앓느라 살도 더 빠졌으니 기름기 좀 먹어야 할 텐데... 조금만 기름지면 질색팔색을 하니... 우리 벨라는 내가 주는 대로 다 먹는데... ’

 

막 생선이 다 쪄졌을 무렵 방 안에서 왕재수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으악! 너 왜 여기 있어! 아악! 저리 가! 악!

 

멍! 멍멍! 끼이잉 끼이잉.... ”

 

베르닌은 렌지의 불을 끈 후 침실로 갔다. 왕재수가 벽에 등을 딱 붙인 채 베개를 마구 휘저으며 벨라를 쫓아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벨라는 왕재수가 자기와 놀아주는 줄 알았는지 더욱 흥분하며 팔짝팔짝 뛰었다. 지친 왕재수가 기침을 하면서 베개를 내려놓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훌쩍 뛰어 그의 품으로 쏙 파고들었다. 어김없이 입술과 뺨에 뽀뽀를 퍼부었다. 왕재수가 몸서리를 치며 벨라를 팔꿈치로 밀었다. 차마 손으로 집어 들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베르닌은 얼른 벨라를 안아들었다.

 

 

“ 아아, 정말 왜 똥개까지 이렇게 달라붙는 거야... 줄은 어떻게 풀었어... ”

 

네가 풀어준 거 아니야? 난 네가 일부러 침대에 같이 재워준 줄 알았어. ”

 

“ 내가 왜... 난 이 방에서 한 발짝도 안 나갔단 말이야... 계속 잠만 잤는데... 저게 침대에 올라와서, 내 옆에... 으윽... ”

 

“ 어... 벨라가 진짜 네가 좋은가봐. 나한테는 그렇게 안 왔는데. 내가 불러야 오고... 침대에는 내가 안고 올라가지 않으면 혼자서는 절대 안 올라왔었는데. ”

 

“ 똥개 새끼가 날 왜 좋아하는 거야... 난 멍멍이가 아니란 말이야... ”

 

“ 그러게. 왜 너한테 그렇게 엉기지. 막 구박하는데... 리자한테 물어볼까. ”

 

 

베르닌은 리자에게 전화를 했다. 벨라가 왜 자꾸 왕재수한테 엉기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 그러니까, 걔는 벨라를 엄청 싫어하거든요. 막 구박하고... 근데도 벨라는 자꾸 엉겨들어요. ”

 

“ 어머, 다냐. 그거 몰라요? 개들도 사람 얼굴 따지는 애들 있어요. 예쁘고 젊으면 더 좋아해요. 그때 벨라 보니까 노약자는 막 무시하고 성질도 사납던데요. 당신보다 나한테 더 잘 엉겼잖아요. 수놈이라 여자한테 더 잘 엉길 거예요. 꽃돌이 감독님은 여자는 아니어도 예쁘니까 당신한테보다 더 많이 달라붙을걸요. 그리고 좋은 냄새 나면 더 엉겨요. ”

 

“ 개한테 좋은 냄새면 고기 냄새, 뼈다귀 냄새 아니에요? ”

 

“ 그런 냄새도 좋아하지만 달콤한 냄새도 좋아해요. 혹시 그 사람 향수 그런 계열 쓰는지 물어봐요. 향수 안 쓰면 좀 덜할 거예요. ”

 

 

베르닌은 끄덕끄덕한 후 전화를 끊었다. 자기 코로 확인하기 위해 왕재수의 곁으로 다가가 냄새를 맡아보았다. 왕재수가 화들짝 놀랐다.

 

너 뭐해! 왜 킁킁거려! 개한테 옮은 거야? ”

 

“ 어, 리자 말이 맞네... 달콤한 냄새 나. 너 향수 쓰지 마. 그럼 벨라가 안 올지도 몰라. ”

 

“ 그게 무슨 소리야? ”

 

 

리자의 말을 그대로 전달해 주자 왕재수의 얼굴이 죽상으로 변했다.

 

“ 나 지금 향수 안 뿌렸어... 집에 와서 샤워하고 계속 잤단 말이야. 그거 내 체취야. 알잖아, 나 원래 체취 좋은 거... 내 향기에 남자들이 전부 혹하는데... 어째서 인간도 아닌 멍멍이까지 달라붙는 거야... 망했다. ”

 

“ 맛있는 냄새라고 생각해서 계속 뽀뽀하고 핥나보다... ”

 

“ 그럼 어떻게 해야 돼... 얼굴 예쁘고 좋은 향기 나는 게 죄야? 망할 놈의 똥개 새끼가 예쁜 건 또 알아가지고... ”

 

 

왕재수는 툴툴거렸지만 슬쩍 보니 아까만큼 노발대발한 것 같지는 않았다. 역시 예쁘다는 말에 약간 마음이 풀린 것 같았다. 그래서 베르닌은 그 틈을 타 벨라를 데리고 나가서 삶은 고기와 사료, 물을 먹였다. 그리고는 저녁을 차렸다.

 

“ 야, 밥 먹어. ”

 

“ 안 먹어. 입맛 없어. ”

 

“ 의사 선생님이 약 줬어, 안 줬어? ”

 

“ 줬어. ”

 

“ 식후 30분에 먹으라고 했지? ”

 

“ 어... ”

 

안 먹으면 의사 선생님한테 이른다.

 

“ 에이. ”

 

 

왕재수는 터덜터덜 식탁 앞으로 왔다. 포크로 생선 귀퉁이를 조금 잘라내 깨작거리며 씹었다.

 

 

퍽퍽 좀 먹어라. 약 먹어야 되잖아! 집에 와서 계속 잠만 잤다며. 너 지금 살 엄청 빠졌어. 그때도 말라서 바람에 밀려서 물에 빠진 거잖아. 너 먹으라고 생선도 샀단 말이야. 요즘 생선 비싼데... ”

 

“ 고무 씹는 것 같아. 맛도 하나도 모르겠다고. ”

 

“ 아직 안 나아서 그런 거야. 그래도 다 먹어. 그래야 나으니까. ”

 

“ 이 생선 비싸? ”

 

“ 그래. 창꼬치고기, 비싼 거란 말이야. ”

 

“ 너는 서무라서 월급도 적은데 왜 비싼 걸 사오니. ”

 

야! 너 지금 나 무시해? 너 물고기 한 마리 사 먹일 돈은 있다고!

 

“ 알았어. ”

 

 

왕재수는 갑자기 나이프로 생선을 토막 내더니 포크로 푹푹 쑤셔서 막 먹었다. 표정을 보니 맛도 모르고 무작정 먹는 것 같았다. 반쯤 먹다가 생선이 목에 걸려 기침까지 했다.

 

 

“ 천천히 먹어. 물 좀 마시고. ”

 

“ 응. ”

 

 

남은 생선에 다시 포크질을 하는 왕재수의 괴로운 표정을 보고 베르닌은 혀를 차며 접시를 끌어당겼다.

 

“ 됐다. 그만 먹어라. ”

 

“ 다 먹을 거야, 비싼 거랬어. ”

 

“ 레닌그라드에선 맨날 레스토랑 가고 외제만 먹었다며 이게 비싸봤자. ”

 

“ 그래도 네가 사온 거잖아. 비싼데. ”

 

“ 남은 걸로 내일 수프 끓이면 되니까 억지로 먹지 마. 차나 마셔. 사과파이 줄게. ”

 

 

왕재수는 차만 마시고 사과파이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베르닌은 정말 걱정이 됐다. 그 좋아하는 사과파이를 안 먹다니!

 

 

“ 너 많이 아파? ”

 

“ 아니. 아프진 않은데 입맛이 없어. 똥개가 자꾸 엉기니까 소름 돋아서 더 입맛이 뚝 떨어졌어. ”

 

“ 자꾸 똥개 똥개 하지 마. 잃어버린 주인은 얼마나 속이 타겠어. 그리고 쟤 똥개 아냐. 저렇게 눈처럼 하얗고 예쁘고 귀여운데 왜 똥개야... 저거 종류는 모르겠지만 분명 순종이야. 비싼 개라고. ”

 

“ 순종은 무슨 순종! 귀가 축 처졌잖아. 말귀도 하나도 못 알아먹어. 하지 말라 해도 더 하고! 딱 봐도 잡종 발바리인데... 아까도 보니까 신문지 있는데도 카펫 위에 똥오줌 갈기고... ”

 

“ 넌 개에 대해 하나도 모르잖아! ”

 

“ 너보단 많이 알아. 볼쇼이 있을 때 같이 추던 마리야 누나가 개 키워서 맨날맨날 개 얘기밖에 안 했단 말이야. 저거 똥개야. 완전 잡종. ”

 

“ 아니야! 벨라는 순종이야!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귀여운 귀족견이라고! ”

 

“ 완전 콩깍지가 꼈네. 몰라, 나한테 안 오게만 해줘. 나 잘래. ”

 

“ 약 먹고 자야지! ”

 

“ 시어머니... ”

 

 

왕재수는 알약과 시럽을 먹은 후 침대로 도로 가더니 순식간에 잠들었다. 베르닌은 이게 자기 집인데 왕재수에게 침대를 뺏겼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조금 우울했지만 그래도 환자니까 참기로 했다. 소파에 주섬주섬 자리를 펴고 있는데 벨라가 또 침실로 들어갔다. 침대 위로 팔짝 뛰어올라 왕재수 곁에 자리 잡으려는 것을 간신히 베르닌이 데리고 나왔다.

 

 

“ 어휴, 벨라야. 쟨 너 안 좋아하는데 왜 그렇게 엉기는 거야. 너도 강아지 체면이 있지. 이리 와, 아픈 애 귀찮게 하지 말고. 나랑 소파에서 자자. 너 어제까진 나랑 잘 잤잖아. 이렇게 배신하는 거 아니다, 너. 아무리 개라지만 의리를 지켜야지... ”

 

 

벨라는 꼬리를 치며 베르닌의 뺨을 핥았다. 배를 내놓으며 발라당 뒤집어져 애교를 부렸다. 베르닌은 그 귀여움에 슬슬 녹아버릴 것 같았다. 주인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잠깐 들었다. 그는 벨라를 꼭 껴안고 좁은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     *     *

 

 

 

새벽에 베르닌은 낑낑대는 소리에 깼다. 벨라가 낑낑대면서 그의 옷자락을 물어 당기고 있었다.

 

“ 벨라야, 왜 그러니? 배고파? ”

 

왕! 왕! 왕왕왕왕!

 

“ 야, 한밤중에 그렇게 짖으면 이웃집 사람들 깨잖아. 쉿... ”

 

왕왕! 왕! 왕!

 

벨라가 발을 구르더니 베르닌의 옷자락을 물고 늘어졌다. 앞발로 바닥을 탁탁 치면서 침실 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그러더니 투다다다 침실로 뛰어갔다.

 

 

헉, 벨라야! 거기 가면 안 돼! 걘 너 싫어한다니까... 깨기라도 하면 또 계속 짜증낼 거라고! ”

 

 

베르닌은 급하게 벨라의 뒤를 쫓아갔다. 침실에 들어가다가 뭔가가 발에 걸려 넘어질 뻔 했다. 불을 켜보니 왕재수가 카펫에 엎드린 채 숨을 몰아쉬면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벨라가 옆에서 팔짝팔짝 뛰면서 근심스럽게 왕재수를 봤다가 베르닌을 봤다가 낑낑대기를 반복했다.

 

 

“ 어... 야, 너 왜 그래. 많이 아파? ”

 

“ 나 토하고 싶어... 숨 막혀... 으으... ”

 

 

베르닌은 왕재수를 데리고 화장실로 갔다. 등을 두들겨서 토하게 해준 후 따뜻한 물을 먹였다. 열이 많이 나서 해열제도 먹였다.

 

 

“ 아까 생선을 너무 억지로 먹었나보다... 미안해, 속에서 안 받는데 내가 먹으라 했던 건가봐. ”

 

“ 흑... 생선 비싼 건데 토했어... 엉엉... ”

 

“ 괜찮아. 나중에 또 먹으면 되지. 약 먹었으니까 괜찮아질 거야. 벨라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다. ”

 

“ 똥개가 왜... ”

 

“ 벨라가 너 아픈 거 알고 나 깨웠어. 안 그랬으면 나 그냥 잤을 거야. ”

 

“ 칫, 또 내 옆에 와서 자려고 했구나... 똥개... ”

 

 

왕재수는 조그맣게 투덜대더니 침대로 올라가 누웠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또 토하거나 아플까봐 좀 걱정이 됐기 때문에 옆에 남아 있었다. 왕재수는 벨라가 기어 올라와 머리맡에 몸을 말고 자리를 잡았는데도 아무 말도 안 했다. 열이 나서 눈치를 못 챈 것 같기도 했다. 베르닌은 따뜻한 물수건으로 왕재수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주다가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 근데 너는 왜 잡혀갔던 거야? 반동분자라고 재판받았잖아. 서류 보니까 테러나 외국 스파이 노릇 같은 건 안 한 거 같던데. 왜 너보고 반동분자에 체제 전복을 기도했다는 거야? 파리에서 나쁜 짓 했어? ”

 

“ 나 반동분자 아니야. 친구들이랑 놀러 나간 건데 막 잡아갔어. ”

 

“ 친구들이 테러리스트... ”

 

“ 아니야! 그냥 나처럼 춤추는 애들이었어. 노래하는 애들이랑. 나는 천재라서 해외 투어를 많이 다녀서 외국에 친구들이 많았단 말이야. 그래서 파리에서도 친구들 만나서 밤에 놀았던 건데 막 체포하고 고문... 다 미워. 시골에나 보내고... ”

 

“ 무단이탈하니까 그렇지. 망명할까봐 그랬나보다. ”

 

“ 나 망명 못해. 망명하면 모스크바에 있는 우리 아저씨가 끝까지 쫓아와서 손봐준다고 그랬단 말이야. 그 아저씨가 나 못 도망가게 하는 거 윗사람들 다 알아. 나 외국에서 놀러나갔던 거 한두 번도 아닌데 이번에 괜히 잡아다가 못살게 굴고... 시골 보내고. 진짜 싫어. ”

 

“ 야, 잠깐... 너 그 모스크바 아저씨랑 좋아하는 사이 아니었어? 손봐준다는 건 뭐야?

 

“ 아유, 그 아저씨 얼마나 무서운데.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사람들 모가지 뎅강뎅강 떨어져. 옛날에 엄청 많이 죽였댔어. 말 안 들으면 나한테도 얼마나 무섭게 구는데. 나 갈비뼈도 몇 번 나갔었어. 저번에 혼났을 땐 팔도 막 부러졌어. 엄청 아팠어. ”

 

그럼 진짜 나쁜 놈이잖아! 바이올린 깡패는 아무 것도 아니었네! 그런 악당을 우리 아저씨라고 좋다고 하냐! 일찌감치 정리해, 그런 놈은! ”

 

“ 그게 내 맘대로 되냐. 바보. 근데 그래도 그 아저씨 밤일을 진짜 잘해... ”

 

“ 아아, 너는 정말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이니... 왜 이렇게 사는 거야... 너 천재잖아. 예쁘고 인기도 많잖아. 왜 그런 놈들하고 얽혀서... ”

 

그래! 똥개도 있고 바퀴벌레도 있고... 시골... ”

 

 

왕재수는 투덜대다가 갑자기 잠잠해졌다. 약 기운에 잠든 것 같았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고 소파로 돌아갔다. 벨라가 자기를 버리고 왕재수 곁에서 자는 게 섭섭했지만 체념했다. 강아지마저도 얼굴을 따지다니 참 불공평한 세상이었다.

  

 

 

 

 

 

FIN

- 2015. 2. 1 -

 

---

 

이야기는 11편으로 이어진다. 그건 주말이나 다음주 초에.

 

'벨라'란 이름은 트와일라잇의 그 오글거리는 여주인공 이름이 아니고! 사실 왕재수 말이 맞다. 미하일 레르몬토프의 유명한 소설 '우리 시대의 영웅' 1부 여주인공 이름이 '벨라'이다. 엄밀히 얘기하자면 이 여주인공 이름과 강아지 이름 벨라는 'e'모음 철자가 좀 틀린데.. 발음상 비슷하니 넘어가자. 베르닌이 강아지에게 벨라란 이름을 붙여준 이유는 물론 그런 문학적인 이유가 아니고, 러시아어로 '하얗다'는 뜻의 형용사가 '벨르이'이고 여성형은 '벨라야'인데 여기서 따온 것이다.

왕재수가 강아지 이름 가지고 특히 울컥하는 이유는... 사실 본편 우주의 미샤가 레르몬토프를 좋아하는데다 키로프 시절 저 '우리 시대의 영웅'을 가지고 안무도 하고 벨라라는 여주인공을 등장시키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서무 시리즈니 넘어가자 :)

 

--

 

10편은 강아지가 투다닥거리는 우스운 에피소드로 쓰기 시작했지만 막판엔 좀 우울하게 끝났는데.. 이게 서무 시리즈이긴 하지만 어쨌든 왕재수가 시골 동네로 유배 좌천된 배경은 본편 우주와 통하는 데가 있어서... 쓰다 보니 그렇게 됐다. 단추를 안 괴롭히면 얘를 괴롭히게 되어 있음 ㅠ

본편에서의 미샤는 훨씬 심각한 상황도 겪고, 체포되었을 때도 왕재수의 얘기보다 좀더 복잡하긴 하다. 원래 반체제적인 인물이기도 하고.. 안무하고 춤췄던 작품들도 당국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들이 많았고, 그리고 저 크레믈린 쪽 아저씨로 지칭되는 인물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와도 훨씬 복잡하게 얽혀 있다. (writing 폴더에 올렸던 jewels에서도 이 사람 얘기가 에벨리나와의 대화 속에서 언급된다. 그 소설에서도 미샤는 이 사람 파티 갔다가 일 저지름 -_-) 이 인간이 두들겨패고 괴롭히고 운운하는 것도 본편 쪽은 좀더 복잡하고 우울한 편이지만.. 뭐 이건 서무 시리즈니 넘어가자~ 그래도 왕재수는 누구에게나 귀염둥이 우리 아기니까 :)

 

--

 

 

강아지 벨라 얘기나 외모는 사실 옛날에 내가 키웠던 사랑스런 강아지 토리에서 좀 따왔다. 토리는 화이트 포메라니언으로 여기 나오는 벨라보다야 훨씬 똑똑했지만 ㅎㅎ 벨라는 포메라니언은 아니지만 그래도 비슷하게 생겼다고 가정했다.

 

화이트 포메라니언은 요렇게 생겼다. 이 사진 출처는 구글링. 내가 키웠던 토리랑도 비슷..

 

 

 

그리고 내가 키웠던 사랑스런 토리 사진 몇 장 :) 토리는 아기 때 데려와 몇년동안 나랑 살다가 나중에 사정이 여의치 않아 부모님 친구댁으로 입양갔고 이후 그 집과 함께 뉴질랜드로 이민가서 널따란 풀밭에서 뛰놀며 고기반찬 먹고 결혼해 애기 낳고 나보다 팔자좋게 살게 되었다. 어흑... 보고 싶다 토리야... 사랑해..

 

 

 

우리 토리 아기 때. 이 사진 보고 입양하러 갔었다. 2개월...

 

 

 

토리 아기 때~

벨라는 6개월 정도이므로 물론 이것보다는 더 크다 :0 그리고 벨라는 순종 포메라니언도 물론 아니니..

 

 

배냇털 아직 빠지기 전이라 솜털이 보송보송.. 우리 토리는 정말정말 귀여웠다.

 

왕왕거리고 멍멍, 낑낑, 왈왈거리는 등 벨라가 짖는 소리들은 거의 모두 내가 키웠던 토리에게서 따왔음 :) 그리고 우리 토리도 사람 엄청 차별했다 ㅎㅎ

 

저렇게 조그만 강아지였던 우리 토리는 성견이 되어 이렇게 되었다...

 

 

사진 속에선 털을 깎아줘서 원래 포메처럼 복슬복슬하진 않다.

 

 

이것도 털 깎아줬을 때. 포메의 특징은 이렇게 방실방실 활짝 웃는 표정을 잘 짓는다는 것이다. 강아지가 갑자기 저런 표정을 지으면 나는... 완전히 무장해제되고 만다 ㅎㅎㅎ

 

토리야 보고 싶다..

그래서 이번 10편은 우리 토리에게 바친다 :)

 

그럼 11편을 기대하세요~ 댓글도 달아주시고요 :) 우리 토리의 미모 찬양이라든지 ㅎㅎㅎ

(토끼 작가 역시 단추와 마찬가지로 강생이라면 사족을 못씀...)

 

 

.. 사족 : 하지만 왕재수는 벨라보다 자기가 더 예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
Posted by liontamer

 

페테르부르크에서 어제 돌아와서 아직 시차 적응도 안되고 머리도 안 돌아간다. 다시 출근을 하니 참으로 피곤하고 괴로웠다. 아아, 진짜 돌아오기 싫었다.

 

자리 비운 동안 번외편으로 등장인물들의 20문답 인터뷰를 올렸었는데 다시 본 에피소드들로 돌아와서.

 

9편부터 11편까지는 한참 바쁘고 스트레스를 받던 1월말에서 2월 즈음에 쓴 것들이다. 오늘 너무 피곤한 몸으로 귀가하던 중 12편이나 13편 아이디어도 좀 떠올랐는데 좀 생각을 해봐야 할듯.

원래 휴가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면 곧장 본편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머리가 쿡쿡 쑤셔서 진지하게 집중하려면 아무래도 며칠 지나야 할 것 같다. 그러니 아마도 이 시리즈 한두 편을 더 쓴 후에나 본편으로 돌아갈 수 있을 듯.

 

에피소드 8이 새해 전야의 이야기를 다뤘다면 9편부터는 연도가 1982년으로 바뀐다 :)

 

새해 휴가를 마치고 업무에 복귀한 우리의 단추 청년 다닐 베르닌. 그리고 언제나처럼 극장 감독직을 수행하면서도 시골 타령을 그치지 않는 왕재수, 단추의 감시 대상자이자 그의 주인어르신. 이들의 신년은 어떻게 시작될 것인가!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의 소도시, 지리적으로는 레닌그라드(지금 이름은 페테르부르크)에서 동북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가브릴로프의 한겨울은 과연 어떨 것인가~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1년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어쨌든 시간은 흘러 이들은 새해를 맞이하게 되고... 가브릴로프 KGB 행정요원들은 지독한 휴가 후유증을 앓으며 업무에 복귀,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스페호프 국장의 시무식과 설교였다. 그리고 가브릴로프에는 눈보라가 몰아쳐 오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9 

 

 

서무의 슬픔

- 눈보라와 패딩 코트 -

 

 

 

 

 

신년 휴가가 끝난 후 가브릴로프 KGB 직원들은 너도나도 ‘일하기 싫어’ 증후군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휴가 내내 늦잠자고 뒹구는 데 익숙해져서 도통 업무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보드카를 퍼마시고 기름진 음식을 진탕 먹고 놀았기 때문에 배탈이 나서 병가를 낸 직원도 다섯 명이나 나왔다. 이런 명절 후유증에 시달리지 않는 인물이 딱 한 사람 있었으니 바로 블라지미르 스페호프 국장이었다.

 

과연 스페호프는 행정의 귀감이자 모범 공산당원다웠다. 그는 신년 출근 첫날에도 정각 8시에 사무실에 도착했다. 건물 정문 쪽 진입로에 덜 녹은 눈이 약간 쌓여 있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청소부들을 다그쳐 당장 치우게 했다. 약 30분 동안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경내를 돌며 모든 것을 샅샅이 관찰했다. 그리고는 9시가 되자 3층부터 1층의 모든 사무실과 휴게실을 매와 같은 눈으로 순시했다.

 

10시에 시무식이 열렸다. 웬일로 국장의 연설은 20분 만에 끝났다. 다들 국장도 명절 후유증으로 피곤한가보다 하며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스페호프가 덧붙였다.

 

“ 10시 30분부터 주간회의를 진행하겠네. 다들 회의실로 직행하도록. 서무는 근태기록부를 지참하게. 이상! ”

 

베르닌은 근태기록부를 들고 주간회의에 갔다. 시무식은 빙산의 일각이었음이 증명되었다. 직원들이 모두 둘러앉자 스페호프는 느닷없이 모두들 수첩을 덮으라고 한 후 올해 보안위원회가 나아가야 할 길과 직원들의 마음자세에 대해 한참 설교를 늘어놓았다. 시무식 연설의 자세한 버전이었다. 이후 그는 전 직원들에게 돌아가면서 올해의 다짐에 대해 한 마디씩 해보라고 강요했다. 자기 차례가 왔을 때 베르닌은 국장이 좋아할만한 문장을 기계적으로 주워섬겼다.

 

“ 저는 올해 행정의 기본을 잘 익혀 보안위원회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직원이 되겠습니다. ”

 

그렇지! 이제야 발전의 기미가 보이는군. 다들 잘 알고 있겠지, 다닐이 작년까지 얼마나 우매하고 답답한 책상물림이었는지. 기본 역량을 익히지 않으면 아무리 일을 해도 발전이란 것이 없단 말일세!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역량은 바로 행정 능력이며 이를 배양하기 위해서는 기초 중의 기초인 서무 업무를 잘 수행해야 하네! 물론 자네는 아직 멀었지. 그러나 자네가 이를 바탕으로 서서히 성장해나갈 수 있도록 내가 특별히 배려하여 그 불여우의 감시 업무를 추가 분장해 줬던 것이야. 올해는 양자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도록 하게. 그렇게 하여 자네의 능력이 일취월장하면 이제 더 중요한 업무를 추가로 맡기도록 하겠네. 자네의 건투를 비네! ”

 

베르닌은 국장의 연설을 단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올해 가외 업무를 또 맡기려고 하는구나!!

 

 

오글거리는 한 마디 시간이 끝난 후 스페호프는 베르닌에게 근태기록부를 펼치게 했다. 그리고 오전에 지각한 직원들을 하나하나 거명하며 기록부에 커다랗게 X 표시를 하게 했다.

 

“ 올해부터는 단 1분이라도 지각할 경우 일주일 간 1시간 조기출근일세. 오늘은 첫날이니 특별히 아량을 베풀어 3일 조기출근으로 해주지. 책상 위에 서류를 흩어놓거나 의자 아래에 잡동사니를 늘어놓을 경우에는 일주일 간 1시간 초과근무일세. 여기 해당되는 직원들은... ”

 

스페호프가 또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직원들은 흙빛이 되어 신음했다. 대부분 둘 중 하나에는 걸려들었기 때문이다. 주간회의를 시작했을 때 매우 저기압이었던 국장은 회의가 끝날 무렵이 되자 눈에 띄게 기분이 좋아졌다. 가뜩이나 설교를 늘어놓고 아랫사람들을 들들 볶기 좋아하는 사람이 열흘 넘도록 신년 휴가 때문에 그 짓을 못했으니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을지 눈에 선했다. 회의를 통해 묵은 욕망을 마음껏 발산했으니 기분이 누그러질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의를 마치자 이미 점심시간이었다. 베르닌은 구내식당으로 터벅터벅 내려갔다. 선배들과 동료들이 날벼락 같은 조기출근, 초과근무 벌칙에 대해 떠드는 동안 그는 묵묵히 식판에 담긴 삶은 마카로니와 양배추 당근 샐러드, 소시지를 먹었다. 리자가 감탄하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 다냐, 왜 화도 안 내요? 서류 흩어진 거랑 의자 아래 종이상자 놔둔 것 때문에 초과근무 도합 2주일 받았잖아요. 근데 꿋꿋하게 밥만 먹네요. 오늘따라 진짜 맛도 없는데. ”

 

“ 난 어차피 매일 야근하니까 초과근무 벌칙 받으나 안 받으나 똑같아요. 그리고 구내식당 밥이 언제 맛있었나요. 그냥 배 채우는 용도예요. 밥을 먹어야 힘이 나고 그래야 국장이 떠맡긴 산더미 같은 일을 할 수가 있죠. 안 먹으면 머리도 안 돌아가고 손도 안 움직이는걸요. ”

 

“ 어휴, 책상물림... ”

 

“ 책상물림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서무라서 그런 거라고요! 당신이 한번 서무 해 봐요! ”

 

“ 어머, 내가 왜요! 난 엄연히 등록부서 직원이라고요! 내 업무는 등록자들 서류에 도장 찍어주는 건데!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났네. 그 사람 있잖아요, 꽃미남. 극장 감독님. 내일 등록 서류 갱신해야 하니까 사무실로 와달라고 해주세요. ”

 

“ 직접 전화하면 되잖아요. 담당자면서. ”

 

“ 당신들 같이 살잖아요! 게다가... 당신들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 아침에 하고 저녁에 하고 밤에... ”

 

“ 아아... 그건 정말 오해라니까요! ”

 

“ 다냐, 내 앞에서까지 그렇게 잡아뗄 필요 없어요. 난 신세대잖아요. 이런 말 국장이 들으면 혼내겠지만 난 열린 마음의 소유자라고요. 사랑에 남녀 구분이 어디 있나요. 좋으면 그럴 수도 있지. 그 사람 엄청 예쁘니까 뭐 충분히 그럴 수 있겠죠. ”

 

우리 진짜 그런 사이 아니라고요!! 난 남자 안 좋아해요!! 걔랑 나는 진짜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 강력한 부정은 긍정이라던데... ”

 

“ 아니라고요! ”

 

“ 아휴, 알았어요. 그럼 오히려 잘됐네. 다냐, 나 그 사람이랑 소개팅 좀 시켜줘요. 그 사람 진짜 꽃미남에 옷도 잘 입고 몸매도 끝내주고 목소리도 좋고, 저번에 체육대회 때 보니까 운동도 잘하고... ”

 

“ 꿈 깨요, 리자! 걘 여자한테 관심 없어요. ”

 

“ 저것 좀 봐. 결국 사귀는 거 맞네요. 아닌 척하다가 소개시켜달라니까 돌변하는 것 좀 봐. 흥. ”

 

리자는 툴툴거리며 식판을 들고 다른 쪽 자리로 가버렸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며 남은 양배추와 마카로니를 다 긁어먹고 일어섰다. 쌓여 있는 일을 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    *    *

 

 

베르닌은 원래 밤늦게까지 남아서 밀린 일을 하려던 계획이었지만 오후부터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눈 폭풍이었다. 초과근무 벌칙을 받은 직원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5시에 정시 퇴근을 해도 집에 가기 어려운 마당에 한 시간 늦게 나가면 도로는 꽉 막힐 게 뻔했고 그렇다고 눈보라를 뚫고 걸어가는 것은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직원들은 제비뽑기를 했고 운 나쁘게 걸린 발따예프가 총대를 멨다. 국장실로 올라가서 눈보라가 너무 심하니 초과근무는 다음날부터 하면 안 되겠느냐고 처량하게 부탁했다. 국장은 고개를 저었다. 원칙은 원칙이니 걸린 사람들은 모두 6시에 퇴근하라고 했다.

 

벌칙을 받은 직원들이 6시에 우르르 몰려나간 후 베르닌은 더 남아 일을 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전화가 울려댔다.

 

“ 예, 보안위원회 다닐 베르닌입니다. ”

 

“ 나 언제 데리러 올 거야? ”

 

베르닌은 대체 이 녀석은 왜 이렇게 당당한지 이해가 안 됐지만 솟구치는 짜증을 꾹 누르며 대꾸했다.

 

“ 나 야근해. 너 오늘 그냥 바이올린 아저씨랑 같이 들어가는 게 어때? ”

 

“ 나도 그러고 싶은데 로만은 아파트 수도관이 다 터져서 지휘자 할아버지 집으로 피신했어. 그러니까 데리러 와. 안 그러면 나 극장에서 자야 되는데 오늘은 너무 추워. ”

 

“ 그냥 너도 지휘자 할아버지 집으로 가면 안 되냐... ”

 

“ 그 영감은 오라고 했는데, 거기 가면 난 분명 솟구치는 욕망을 견디지 못하고 로만이랑 뒹굴게 될 거라고. 할아버지 그거 보고 심장마비라도 오면 어떡하니. ”

 

“ 그래, 심장마비 오겠지. 상상도 못한 민망한 짓이니... 그것도 70살이 다 된 보수적인 노인이니... ”

 

“ 그게 아니고... 우리의 격렬한 응응을 구경하다 흥분해서 자칫 노인네 몸에 탈이라도... ”

 

“ 아아, 제발 그만해라... 모두가 너 같은 건 아니란 말이야. 데리러 갈 테니까 옷이나 따뜻하게 입고 있어. 밖에 진짜 추워. 무조건 털 달린 엄청 두꺼운 패딩 입어야 돼. 멋 부린답시고 평소처럼 아르마나인지 뭔지 그런 코트 입지 마! ”

 

“ 아르마니! 아르마나가 아니고. 어째 그렇게 학습이 안 되니. ”

 

“ 시끄러워! 패딩 입고 목도리 하고 모자 둘러쓰고 있어! 지금 갈 테니까! ”

 

 

베르닌은 차를 몰고 극장으로 갔다. 보안위원회 사무실과 그들의 아파트는 둘 다 신시가지에 있었지만 극장은 구시가지에 있었기 때문에 왕재수를 출퇴근시켜주기 위해서는 매일같이 강을 건너는 짓을 해야 했다. 눈보라가 살짝 잦아들어서 다행이었다. 베르닌은 훌륭한 운전 실력을 발휘해 꽉 막혀 있는 차들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 1시간 만에 극장 앞에 다다랐다. 평소에는 20분이면 도착할 거리였지만 이 정도면 선방이었다.

 

감독실로 가보니 왕재수는 차이코프스키인지 모차르트인지 베르닌으로서는 구분도 잘 안 가는 클래식 음악을 시끄럽게 틀어놓고 한 손으로 허공을 휘저으며 이러 저리 몸을 꼬고 있었다. 베르닌은 좀 기다려 주려고 했지만 왕재수가 자기가 온 것도 모르고 계속 그 이상한 동작들을 늘어놓는데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오디오를 꺼버렸다.

 

“ 야! 집에 가자! ”

 

“ 아휴, 이 무식한 인간! 너 때문에 망했어! 거의 다 됐는데! ”

 

“ 집에 데려다 달라며! ”

 

“ 신작 안무 중이었단 말이야. ”

 

“ 그렇게 이상하게 꼼지락거리는 게 작품이란 말이야? ”

 

“ 처음엔 원래 그렇게 보이는 거란 말이야. 에잇... ”

 

“ 그럼 계속해라. 난 간다. ”

 

“ 안 돼, 나 데려가. 여기 너무 추워. 오늘은 공연도 없고 극장 예산 승인이 아직 안 떨어졌다고 난방도 안 해주잖아. 그런 게 어디 있어... ”

 

“ 공연이야 사업 예산이니까 난방급탕비가 잡혀 있겠지만 공연 없을 때 쓰는 난방은 극장 운영 예산이니까 그건 기관 경상비 항목에 해당돼. 그러니까 시 의회 승인이 없으면 쓸 수 없는 돈이거든. 지금 의회 의원들 다들 크림으로 시찰 가서 이틀 후에나 돌아오니까 그때까진 공연 없으면 난방 안 될 거야. ”

 

 

베르닌은 왕재수가 예산에 대한 자신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왕재수는 전혀 다른 결론을 내렸다.

 

 

“ 그러니까 시 의원들이 전부 놀러 나가서 극장 난방을 안 해준다는 거네! 나쁜 인간들! 모스크바에 있는 우리 아저씨한테 이를 거야! ”

 

“ 너네 아저씨란 인간도 국회의원이잖아! 더 높은 사람... 가재는 게 편이니까 다 똑같다고. 세금으로 외유 가고... ”

 

“ 하긴, 우리 아저씨들이 나 데리고 여기저기 많이 다녔지. 비엔나에 베니스에 파리에... 알았어. 가자. ”

 

야! 왜 코트를 꺼내고 있는 거야! 패딩 입어!

 

“ 나 패딩 없어. 촌스러운 건 안 입어. 어차피 너 차로 갈 거잖아. ”

 

“ 내 차 지금 난방 안 된단 말이야. 밖에 얼마나 추운데! 폐렴 나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

 

“ 그러니까 이제 면역력이 생겼으니 괜찮다고! ”

 

 

베르닌은 경비실로 내려갔다. 거구의 경비원으로부터 여분의 패딩 코트를 빌려와서 왕재수에게 억지로 뒤집어씌웠다. 시커멓고 거대하고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패딩 코트에 왕재수가 경악을 했다.

 

아악, 이게 뭐야! 이런 끔찍한 물건을 몸에 걸칠 수는 없어! 이것은 패션 테러야!

 

베르닌은 아랑곳하지 않고 왕재수에게 패딩 코트를 입힌 후 지퍼를 올리고 단추를 채웠다. 코트에 달려 있는 거대한 털모자를 뒤집어씌웠다. 목도리를 잡아채 얼굴을 칭칭 감았다.

 

“ 그만 좀 해! 너무 두꺼워서 움직이기도 힘들어. 이 옷 나한테 너무 크단 말이야! 펭귄이 된 것 같아! 뒤뚱뒤뚱... ”

 

“ 나가봐라, 나한테 고마워하게 될 테니까. ”

 

“ 어휴, 시어머니... ”

 

 

*    *    *

 

 

극장에서 나오자 눈보라가 몇 배로 강력하게 몰아치고 있었다. 시동도 한참 만에 걸렸다. 왕재수는 차에 들어오자마자 털모자를 벗고 패딩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베르닌이 경고했다.

 

“ 좋은 말 할 때 그냥 입고 있어라. 차 난방 안 된다고 했다. ”

 

“ 숨 막힌단 말이야. 나 원래 몸도 뜨거운데... 난 피 끓는 젊은 남자라고! 너처럼 책상물림 노인네가 아니란 말이야! ”

 

“ 야! 나 너랑 세 살 차이밖에 안 나거든!! ”

 

“ 넌 내복 입잖아! 난 안 입어! ”

 

“ 내복 안 입는 게 자랑이냐? 우리 동네는 겨울에 엄청 춥단 말이야. 내복 안 입으면 감기 걸리고, 몸도 아프고 돈도 들어가고! ”

 

“ 그러니까 노인네 같다는 거지! ”

 

“ 툭하면 아픈 게 누군데! 오죽하면 맨 처음에 너 아파트 배정해 줄 때도 의사 선생 병원 옆에... ”

 

“ 야! 내가 원래 아팠냐! 내가 원래 얼마나 튼튼한 체질이었는데! 다 너네 KGB니 공산당이니 하는 놈들이 나 잡아다가 나쁜 짓해서 그렇게 된 거지! 아 생각하기도 싫어! 너희들 다 나쁜 놈들이야! 나 감옥에 넣고 막 아프게 고문하고 시골에 보내고! 생각해보니 너도 한 패! 스파이, 끄나풀, 앞잡이! 미워!

 

 

왕재수가 갑자기 서러움이 북받쳤는지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홱 고개를 돌렸다. 곰곰 떠올려보니 엄청나게 억울하고 화가 난 모양이었다. 특히 마지막의 ‘시골에 보내고란 구절에서는 눈물까지 왈칵 글썽거렸다. 베르닌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히고 마음 한구석은 또 불편해져서 아무 말도 없이 차를 몰았다.

 

 

차는 빽빽한 눈보라를 뚫고 거북이걸음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베르닌의 차는 낡은데다 난방 장치도 고장 났기 때문에 틈새로 칼바람이 스며들어왔다. 왕재수는 재채기를 했지만 패딩 코트 단추를 채우지는 않았다. 바람이 더 세게 불어 들어오자 재채기를 연달아 세 번을 더 했다. 한번만 더 하면 주먹다짐을 해서라도 단추를 채워버려야겠다고 베르닌이 생각했을 때 갑자기 차가 푸쉬시 하는 소리를 내더니 우뚝 멈췄다. 시동이 꺼져버린 것이다.

 

“ 어, 왜 이러지? ”

 

베르닌은 다시 시동을 걸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푸르르푸르르 하는 소리만 나고 차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베르닌은 모자를 뒤집어쓰고 눈보라 속으로 나갔다. 덮개를 열어보았다. 플래쉬를 비춰가며 엔진과 부품을 살폈다. 곧 그는 별로 기쁘지 않은 결론에 도달했다.

 

 

운전석으로 돌아온 베르닌은 여전히 고개를 돌리고 토라져 있는 왕재수의 패딩 후드를 잡아당겼다.

 

“ 야, 모자 쓰고 단추 채워. 내려야 돼. ”

 

“ 쳇, 그래. 나 같은 반동분자는 차 태워주기도 아깝다 이거지. 알았어! 누가 이깟 후진 차 타고 싶대! 내리면 되잖아! ”

 

“ 엥, 그건 또 무슨 소리야! ”

 

“ 촌스러운 패딩도 못 벗게 하고... KGB 앞잡이라서 맨날 감시하고 보고서 쓰는 주제에 차 태워준다고 유세하고. 그러더니 또 내리래... ”

 

“ 내가 언제 유세했어! 내 차 후져서 난방 안 되니까 너 감기 걸릴까봐 그런 거잖아! 근데 내리긴 내려야 돼! 빨리 옷 입어! 너무 추워서 차 고장 났어. 엔진도 얼고 부품도 하나 터졌어. 지금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정비사도 못 불러. 그렇다고 안에 계속 앉아 있을 수도 없잖아, 난방도 안 되는데. 강만 건너면 버스 탈 수 있을 거야. 빨리 나가자. ”

 

뭐야? 엔진이 얼어? 차가 얼마나 후지면 엔진이 다 어니! 아아, 시골... ”

 

“ 나 저번 뉴스에서 레닌그라드에서 전차들 엔진 얼어서 줄줄이 멈춰선 거 봤어. 승객들 다 내려서 걸어가던데. ”

 

“ 그건 전차잖아! ”

 

“ 어쨌든! 레닌그라드도 엔진 얼잖아! 거기도 춥잖아! 툭하면 시골타령만 하지 말고 빨랑 패딩 단추 채우고 모자 써! 지금 눈보라 장난 아냐. 걸어가야 한단 말이야! ”

 

“ 에이, 극장에 남을걸. ”

 

 

왕재수는 단단히 삐친 것 같았지만 어쨌든 패딩 코트의 지퍼와 단추를 모두 채우고 후드를 뒤집어썼다. 밖으로 나오자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한 치 앞도 안 보일 지경이었다. 바람이 어찌나 세게 부는지 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뒤로 떠밀리는 기분이 들었다. 어린아이들이나 여자들이었다면 벌써 바람에 휩쓸려 날아갔을 것 같았다. 세찬 바람을 정면으로 맞자 심지어 왕재수도 두어 번 넘어질 뻔 했지만 베르닌이 붙잡아서 간신히 몸을 가눌 수 있었다.

 

“ 야, 너 안 되겠어. 내 팔짱 껴. ”

 

“ 싫어. 내가 왜 KGB 앞잡이 도움을 받니! 내 몸은 내가 건사... 으악! ”

 

때마침 몰아친 폭풍 탓에 왕재수는 입 안 가득 눈을 잔뜩 물고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베르닌은 혀를 차며 그를 일으켜 주었다.

 

“ 이거 봐. 맨날 다이어트하고 난리치더니 너 지금 벌 받는 거야. 너무 말라서 자꾸 바람에 휩쓸리는 거라고! ”

 

“ 아니야! 내가 하체 힘이 얼마나 좋은데! 두툼한 허벅지로 버티면 되는데 이 망할 놈의 패딩! 둔해 죽겠어! 이 옷 너무 크고 빵빵해서 제대로 걸을 수가 없단 말야! 펭귄처럼 뒤뚱뒤뚱... 으악! ”

 

왕재수가 또 넘어졌다. 베르닌은 왕재수를 일으킨 후 억지로 팔짱을 꼈다. 왕재수는 툴툴댔지만 바람이 점점 거세지는데다 패딩 코트 때문에 혼자서는 제대로 걷기가 힘든 듯 결국 베르닌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뒤뚱뒤뚱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 다리까지 못 가겠다. 한참 돌아가야 하는데 눈이 너무 많이 와. 그냥 강 건너가자. ”

 

“ 강 잘 얼었어? ”

 

“ 응, 지금은 추우니까 꽝꽝 얼었지. 그래도 너 나한테 잘 붙어 있어. 방향에 따라서 살얼음인 쪽도 있거든. ”

 

“ 누구 무시하냐, 나도 레닌그라드에서 네바 강 얼면 잘 건너다녔거든! ”

 

“ 아항, 레닌그라드도 시골이구나! 겨울에 강도 얼고! ”

 

“ 아니야! 레닌그라드는 시골 아니야! 대도시야! 네바 강은 근사해! 여기 강이랑 달라! ”

 

“ 여기도 도시란 말이야! 너도 시립극장 감독... ”

 

 

그때 눈보라가 정면으로 소용돌이치듯 몰아쳐서 베르닌은 입을 꾹 다물고 왕재수를 꽉 붙든 채 얼어붙은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수면 위로 눈이 쌓여 있었기 때문에 생각만큼 미끄럽지는 않았다. 발을 쿵쿵 굴러보니 왼쪽 얼음이 좀 약한 것 같아서 베르닌은 왕재수를 데리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이 힘겨웠다. 바람이 너무 세찬데다 딴딴한 눈발이 얼굴에 그대로 부딪쳐 와서 꼭 총알 세례를 받는 기분이었다. 눈물과 콧물이 줄줄 쏟아졌지만 흘러내릴 겨를도 없이 꽁꽁 얼어붙었다. 눈가와 콧구멍 속에서 작은 얼음 결정들이 빠지직 빠지직거렸다. 그나마 왕재수가 착 달라붙어 있어서 움직임은 둔해도 추위는 한결 덜했다. 왕재수도 처음에는 툴툴댔지만 이제 입을 꽉 다물고 베르닌의 팔을 꼭 낀 채 얼어붙은 강을 건너는 데 집중했다.

 

3분의 2쯤 건너왔을 때 베르닌은 희미한 울음소리 같은 것을 들었다. 처음에는 윙윙대는 바람소리를 착각했다고 생각했지만 잘 들어보니 가냘프게 킹킹대는 소리였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왼쪽 저편에서 작고 거무스름한 물체가 낑낑대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조그만 강아지였다. 얼어붙은 수면 위로 쌓인 눈과 몰아치는 눈보라 때문에 사방이 새하얬기 때문에 꼭 잉크 얼룩을 떨어뜨려 놓은 것처럼 보였다. 베르닌은 좀 더 자세히 보려고 왼쪽으로 다가갔다. 왕재수가 팔을 잡아당겼다.

 

“ 너 왜 그쪽으로 가? 거기 왼쪽이야. ”

 

“ 잠깐만. 저기 강아지 있어. 길 잃었나봐. 미끄러워서 못 나오고 갇힌 것 같아. 구해줘야겠어. ”

 

“ 그냥 놔둬, 그쪽 얼음 약하다며. 잘못 디디면 빠져! ”

 

“ 개를 저렇게 놔두고 어떻게 그냥 가. 두고 가면 얼어 죽을지도 몰라. ”

 

“ 공권력에 신고하면 되잖아! 그런 거 하라고 세금 내잖아! ”

 

“ 나 보안요원... 공무원... 강아지 구해줘야 돼. ”

 

“ 아 진짜 이 망할 놈의 KGB 나부랭이! 넌 책상물림이라며! 서무인지 뭔지라며! 건너가서 경찰이나 소방대원 부르라고! 강아지는 가벼우니까 저기 좀 놔둬도 괜찮아. 얼음 안 깨져. 너는 무거워서 그쪽으로 가면 얼음 깨진단 말이야! ”

 

“ 괜찮아, 저쪽은 수심 안 깊어. 좀 놔봐, 금방 가서 강아지 데려올게. ”

 

“ 안 돼! 가지 말라니까! ”

 

 

왕재수가 끈질기게 말렸다. 베르닌이 버럭 화를 냈다.

 

 

“ 야! 넌 피도 눈물도 없냐! 너 혼자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야? 아무리 천재에 얼굴이 예쁘면 뭐하냐! 동정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 조그만 강아지 혼자 얼음 사이에 갇혀서 주인도 잃고 엄마도 잃고 저렇게 불쌍하게 울고 있잖아. 우리가 버리고 가면 얼마나 무섭고 슬프겠어! 강아지 구해줘야 돼! ”

 

“ 강아지랑 나랑 무슨 상관! 안 돼! 가지 마! 못 가! 너 빠지면 나 혼자 어떡하라고! 나 바람 불어서 여기 혼자 못 건너간단 말이야! ”

 

“ 야! 넌 내가 물에 빠지는 게 걱정이 아니라 너 혼자 강 못 건널까봐 걱정하는 거야? 이 왕재수! 왕 싸가지! 이거 놔! ”

 

“ 안 돼! 못 가! 안 돼! ”

 

 

왕재수가 악착같이 매달렸다. 두 팔로 베르닌의 허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 탓에 왕재수가 휘청거리는 틈을 타서 베르닌은 그를 홱 떠밀어 엉덩방아를 찧게 한 후 재빨리 강아지가 있는 쪽으로 갔다. 왕재수가 뒤에서 ‘안 돼!’ 하고 소리를 질러댔지만 무시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가냘프게 깨갱대고 있던 강아지가 희망의 눈빛을 반짝이며 베르닌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일어나지도 못하는 것을 보니 너무 추워서 이미 몸이 다 얼어버린 것 같았다. 베르닌은 저만치에서 팔을 뻗었지만 강아지가 꼼짝달싹 못하는 탓에 손끝조차 닿지 않았다.

 

“ 착하지, 강아지야. 잠깐만 기다려. 내가 구해줄게. 옳지. ”

 

베르닌은 발끝을 들고 살금살금 얼음 위를 디디며 걷기 시작했다. 몇 발짝만 더 가면 강아지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막 오른발을 내디디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지지직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두리번거리는데 발밑의 얼음이 쫙 소리를 내며 와장창 깨졌다.

 

“ 엇, 얼음이... ”

 

아차 하는 순간 베르닌은 발을 헛디디고 깨진 얼음 사이로 휘청거리며 빠져버렸다. 버둥거리며 빠져나오려고 하는데 무릎인지 발목인지 어딘가가 얼음 사이에 걸려서 나올 수가 없었다. 허우적거리는데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안 돼! 다닐! 다니이이일!

 

 

베르닌은 왕재수가 그렇게 다급하게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을 처음 들었다. 아니, 곰곰 생각해보니 두 번째였다. 연말 호두까기 공연 끝나고 여자들에게 머리카락 뜯길 때...

 

그때 왕재수가 그의 팔목을 덥석 붙잡았다. 얼음 위에 엎드린 채 죽을힘을 다해 그를 끌어당겼다.

 

“ 잠깐만 기다려! 내가 꺼내줄게! 야압! ”

 

“ 어... 저기... 야, 잘못하면 너도 빠져. 조심해! ”

 

“ 아 무거워... 이 망할 놈의 패딩... ”

 

“ 괜찮아, 놔줘. 내가 혼자 나올 수 있어... ”

 

“ 어떻게 혼자 나와... 얼음 사이에 끼었잖아! 둔탱이! 덩치는 커가지고... 가만히 있어, 꺼내줄 테니까! ”

 

“ 그러니까... 네가 날 어떻게 꺼내, 난 너보다 크... 으악! ”

 

 

베르닌은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왕재수가 베르닌이 끼어 있던 얼음을 한쪽 발로 두들겨 부수면서 동시에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 그를 홱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베르닌은 무슨 투포환처럼 붕 날아서 단단한 얼음 위로 내팽개쳐졌다.

 

잠시 베르닌은 멍하게 누워 있었다. 돌덩이처럼 딱딱한 얼음에 뒤통수를 그대로 부딪쳐서 머리가 아프고 어질어질했다. 눈앞은 온통 하얗고 두터운 눈보라 안개로 빽빽하게 가로막혀 있었다. 몇 초 동안 정신줄을 놓고 있다가 베르닌은 비명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몸을 홱 틀었다. 그를 끌어내고 숨을 고르던 왕재수가 세찬 폭풍 때문에 주르르 미끄러지더니 깨진 얼음 사이로 철퍽 빠져버린 것이다.

 

앗, 야! 조심해! 앗!

 

베르닌은 급하게 팔을 뻗었지만 왕재수가 워낙 갑작스럽게 빠졌기 때문에 미처 붙잡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둘의 몸무게가 홱 쏠렸기 때문인지 아까보다 얼음이 더 와장창 깨져서 왕재수는 베르닌처럼 얼음 사이에 낀 것도 아니고 물속으로 풍덩 빠져버리고 말았다. 왕재수는 어푸어푸 하면서 금세 수면 바깥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하지만 헤엄쳐 나오지는 못하고 계속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자꾸만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 헉, 너 수영 못해? ”

 

“ 패딩... 못 움직... 꼬르륵...

 

베르닌은 물속으로 뛰어들어 왕재수를 건져내려다가 자기 몸무게 때문에 얼음이 더 깨져버리면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급하게 목도리를 벗었다. 목도리는 이미 눈과 물 때문에 꽝꽝 얼어붙어 있었다. 목도리 끝을 잡고 왕재수 쪽으로 휙 던지며 소리쳤다.

 

야! 이거 잡아! 끌어당길 테니까 꽉 잡아!

 

다행히 왕재수가 목도리를 붙잡았다. 베르닌은 낑낑거리며 목도리를 잡아당겼다. 패딩 사이사이로 물이 들어가서 빵빵하게 부풀어 올라 꼭 열기구처럼 거대하고 동그랗게 변한 왕재수가 반쯤 둥둥 떠올라서 끌려왔다.

 

간신히 안전한 얼음 위로 왕재수를 끌어올렸을 때는 베르닌도 녹초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추위와 피로를 느낄 겨를도 없었다. 흠뻑 젖은 왕재수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그대로 뻗어버렸기 때문이다.

 

“ 너 괜찮아? 내 말 들려? ”

 

왕재수가 대답이 없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더럭 겁이 났다. 얼핏 보니 숨도 안 쉬는 것 같았다. 가슴을 누르자 물을 주르륵 토해내고 또 주르륵 토했다. 인공호흡을 해줘야 하나 걱정하고 있는데 왕재수가 부르르 떨더니 기침을 하면서 코를 훌쩍거렸다. 말은 한 마디도 안 했다. 축축하게 젖은 얼굴이 하얗다 못해 파랬다.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괜찮아? 야, 말 좀 해봐... 너 말 못해? 응?

 

흐.... 추.... 추ㅇ....

 

춥다는 말 같긴 했지만 제대로 확인할 수가 없었다. 왕재수가 덜덜 떨더니 기절했기 때문이다. 베르닌은 급하게 왕재수의 부츠와 흠뻑 젖은 바지를 벗겨냈다. 패딩 코트도 벗길까 하다가 눈보라가 너무 심해서 일단 놔뒀다. 그리고 자신의 패딩과 카디건과 스웨터와 내복 면 셔츠를 벗었다. 너무 추워서 도로 스웨터를 입은 후 면 셔츠로 왕재수의 얼굴과 목과 다리와 발의 물기를 급하게 닦아주었다.

 

“ 이 바보... 내가 빠진 데는 수심 얕았단 말이야. 가만 있었으면 나 혼자 올라왔을 텐데 호들갑떨다가 빠지고 그러니... 내 부츠 방수 장화야, 네가 촌스럽다고 한 내 바지도 방수복이라서 난 하나도 안 젖었단 말이야... 바보 멍청이. 어련히 내가 잘 알아서 나올까봐... 이것 좀 봐. 멋 부린다고 방수도 안 되는 스웨이드 부츠 신어서 다 젖었잖아... 어휴, 내복도 안 입고... 동상 걸리면 어떡할 거야... 야, 정신 좀 차려봐. 지금 자면 안 돼. 이렇게 추운데 잠들면 너 진짜 큰일 나... 어휴, 이 왕재수 같으니... 이걸 어떡하지... ”

 

베르닌은 횡설수설하며 그나마 물기를 닦아낸 왕재수의 다리와 발을 자기 카디건으로 감쌌다. 왕재수는 죽은 듯이 늘어져 있었다. 베르닌의 헛소리를 야단치지도 않고 툴툴대지도 않고 시골 운운하며 짜증을 내지도 않았다. 베르닌은 그 마지막 이유 때문에 더더욱 겁이 났다. 평소 같았으면 벌써 시골이라 얼음이 깨진다는 둥 촌스럽다는 둥 판에 박힌 레퍼토리를 줄줄 늘어놓고도 남았을 텐데. 베르닌은 왕재수의 속눈썹과 코, 입술 주위에 빽빽하게 달라붙어 있는 얼음 결정들을 손으로 훑어 떼 냈다. 그리고는 그를 들쳐 업고 정신없이 눈보라를 헤치며 달리기 시작했다. 얼음이 깨질까봐 무서웠지만 이따금 발을 굴러서 두께를 확인해가며 계속 뛰었다.

 

마침내 강기슭에 도착했을 때 베르닌은 왕재수를 잠깐 내려놓고 숨을 쉬는지 확인해 보았다. 숨은 쉬고 있었다. 콧김이 얼어붙고 있는 걸 보니 그건 확실했다.

 

“ 조금만 참아, 여기만 올라가면 돼. 너 내 말 들려? 자면 안 돼! ”

 

아무래도 왕재수는 그의 말을 듣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저체온증으로 크게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서 미칠 것 같았다. 그는 다시 왕재수를 들쳐 업고 정신없이 도로 쪽으로 기어 올라갔다. 버스나 택시가 눈보라를 뚫고 나타나주기를 빌면서.

 

 

*    *    *

 

 

버스는 오지 않았다. 택시도 마찬가지였다. 절망한 베르닌은 도로변을 따라 무작정 뛰었다. 문을 연 건물이 있으면 달려 들어가려고 했지만 워낙 대로변인데다 그쪽에 있는 건물들은 전부 회사들이라 직원들은 모두 퇴근했고 문은 꽉 닫혀 있었다. 병원은 집 근처에 있었다. 눈이 오지 않아도 20분 이상 가야 하는 거리였다.

 

베르닌이 점차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공포에 사로잡혔을 때 갑자기 희뿌연 눈보라 속에서 헤드라이트가 번쩍이더니 빵빵 하는 소리가 들리고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창문이 살짝 열리더니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다냐! 길바닥에서 대체 뭘 하는 거예요! 빨리 타요!

 

리자였다. 세상에 하느님이든 레닌의 가호든 뭔가가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베르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급하게 왕재수를 뒷좌석에 밀어 넣고 자기도 올라탔다. 문을 닫자마자 리자가 차를 출발시켰다.

 

 

“ 고마워요! 당신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 ”

 

“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차는 어쨌어요? ”

 

“ 엔진이 얼어서 멈췄어요. ”

 

“ 아... 하긴... 아까 표도르 차도 그랬어요. 그래서 내 차 타고 전부 항아리 닭고기 식당 가서 저녁 먹었어요. 데려다 주고 나도 집에 가는 길이에요. 근데 저 사람 누구에요? 왜 이렇게 젖었어요? ”

 

“ 어... 왕재수... 아니, 미샤요. 강 건너오다가 얼음이 깨져서 빠졌어요... 미안한데 수건 같은 거 있어요? ”

 

“ 어머낫, 그 꽃돌이 감독님! 어쩌면 좋아! 여기 손수건 있어요. 너무 많이 젖어서 손수건 가지고는 안 되겠네. 잠깐만요... ”

 

 

리자는 손수건을 꺼내주고는 두르고 있던 숄까지 던져주었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패딩과 스웨터와 셔츠를 서둘러 벗기고 숄로 몸의 물기를 모두 닦아냈다. 그리고는 자기 스웨터를 벗어서 입혀 주었다. 리자가 혀를 차며 자기 코트를 건네주었다.

 

 

“ 다냐, 당신 감기 걸려요... 위에 아무 것도 안 입고. 이거라도 걸쳐요. ”

 

어... 난 괜찮아요. 내 패딩 다시 입으면 돼요. 이거 그럼 얘한테 좀 걸쳐놓을게요. 그래도 돼요? 나중에 빨아다 줄게요. 숄이랑...

 

“ 그런 걱정 하지 마요. 안 빨아줘도 돼요. 꽃돌이 감독님 몸에 닿았던 거라고 하고 암시장에 팔아야지! ”

 

“ 헉... 그런 짓하면 안돼요! 우린 공무원인데! ”

 

“ 아휴, 농담이잖아요! 책상물림... ”

 

 

베르닌은 왕재수의 몸을 리자의 코트로 감싸준 후 다리와 발에 남아 있는 물기를 마저 닦았다. 그리고 동상에 걸리지 않도록 아직도 얼음장처럼 차가운 발을 손으로 계속 문질러 주었다.

 

 

리자는 알고 보니 운전 솜씨가 아주 훌륭했다. 도장 찍는 일만 할 줄 아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정신을 잃은 왕재수를 위해 그들을 자기 집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스타브로프의 병원까지 데려다 주었다. 베르닌이 뒷좌석을 적셔놔서 미안하다고 사과하자 그런 생각 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는 베르닌이 흠뻑 젖은 왕재수의 옷가지들을 주워 모으려고 하자 그냥 놔두라고 했다.

 

“ 내가 내일 사무실로 가져다줄게요. 빨리 의사 선생님한테 데리고 가기나 해요. 그 패딩만 가져가면 되겠네요. 패딩은 금방 마를 테니까 나올 때 입혀주면 될 거예요. ”

 

“ 어... 하지만 당신은 스무 살밖에 안된 미혼녀... 외간 남자가 입었던 옷가지를 놔두고 가기가... ”

 

“ 아휴, 진짜 고지식하다니까... 아, 당신 질투하는 거군요! 사랑하는 꽃돌이 감독님이 입었던 옷을 내가 만지는 게 싫은 거죠? 당신 너무해요, 미남을 수중에 넣은 것도 모자라서 옷도 내주기 싫어요? 나 이 옷들 말려서 꼭 껴안고 잘 거예요! ”

 

“ 저, 리자... 나랑 얘는 진짜 그런 관계가 아니고... ”

 

“ 아유, 됐어요. 다 봤는데 이제 와서 뭘 그런 변명을... 사랑하는 그이가 어떻게 될까봐 걱정돼서 아주 두 눈이 쏟아질 것 같던데... 나 당신 눈 그렇게 커진 거 처음 봤어요, 다냐. 단추 같았는데 아깐 아니더라고요. 하여튼 빨리 의사 선생님한테 가 봐요. 내일 봐요~! ”

 

 

베르닌은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었지만 왕재수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데다 이를 딱딱 부딪치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내렸다. 한 팔에는 왕재수에게서 벗겨낸 패딩 코트를 끼고 등에는 왕재수를 들쳐 업고 급하게 병원으로 들어갔다.

 

 

*    *    *

 

 

병원에서는 곧 왕재수의 몸을 녹여주고 응급처치를 해주었다. 한숨 돌리고 나자 정의감에 불타는 늙은 의사 스타브로프는 베르닌을 매섭게 혼냈다.

 

 

이 얼간이 같은 놈아! 정신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이 추위, 이 눈보라에 미쳤다고 애를 데리고 강을 건너! 이 망할 KGB 스파이 놈아! 이거 스페호프가 명령한 거지! 애 빠뜨려 죽이라는 지령 받고 한 짓이지!! ”

 

“ 아니에요, 선생님! 엔진이 얼어서 그랬어요. 다리까지 가는 게 너무 멀었다고요. 저 강은 겨울마다 다들 잘 건너다니잖아요.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저도 빠졌단 말이에요. ”

 

“ 네놈은 KGB 스파이니까 빠지든 말든 내 알 바 아냐! 멀쩡하잖아! ”

 

“ 아아, 선생님. 저도 사람인데 왜 저한테는 야단만 치고 이 녀석 편만 들어주시는 거예요... 설마 선생님마저 예쁜 애들만 좋아하시는 건가요? 제 눈 단추 같아서 차별하시는 거예요? 의사가 그래도 되는 거냐고요... ”

 

“ 아니 이게 웬 헛소리야. 예쁜 건 뭐고 단추는 또 뭐람. 얘는 네놈들이 고문해서 여기저기 아프잖아!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항상 조심해서 곱게 다뤄줘야지! 어디 눈보라를 맞히고 강을 건너고 물에 빠뜨려! 전에는 보드카 먹여서 인사불성을 만들더니! 이게 다 네놈과 스페호프의 음모가 분명해! ”

 

“ 진짜 아니에요. 아아 억울해... ”

 

“ 시끄러워! ”

 

 

베르닌은 너무 억울했지만 그래도 왕재수가 몸이 녹아서 한결 나아진데다 안색도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아 마음이 좀 놓였다. 그래서 의사에게 혼날까봐 무서운 마음을 억누르고 쭈뼛쭈뼛 물어보았다.

 

 

“ 저... 얜 이제 괜찮은 건가요? 깨어나면 집에 데리고 가면 되나요? ”

 

“ 몸 녹여줘서 동상 위험은 없는데 기관지에 물이 들어가서 염증 생길 수도 있으니까 일단 입원이야! 그렇게 알고 네 녀석은 돌아가! ”

 

“ 일어난 거 보고 갈게요... ”

 

“ 마음대로 해. 한번만 더 이런 일 생기면 가만 안 둬! ”

 

 

베르닌은 늙은 의사에게 ‘혹시 선생님도 이 녀석의 우리 아저씨 명단에 들어가 계세요?‘ 하고 묻고 싶었지만 두들겨 맞을 것 같아서 그만 두었다.

 

 

의사가 나간 후 베르닌은 30분 정도 왕재수의 곁에 앉아 있었다. 왕재수는 열이 나는지 얼굴이 빨개져서 쌕쌕거리며 자다가 퍼뜩 눈을 떴다.

 

“ 아, 너 일어났구나! 좀 괜찮아? ”

 

“ ... 시골 싫어... 물에 빠지고... ”

 

“ 이제 괜찮아. 병원이야. 좀 자고 나면 나아질 거야. ”

 

“ 패딩... ”

 

“ 어... 미안해 ㅠㅠ 난 너 추울까봐 그 패딩 빌려온 건데. 그거 때문에 네가 물에서 못 나올 줄 몰랐어. 미안... ”

 

“ ... 패딩... ”

 

“ 미안하다고 했잖아. 왜 자꾸 패딩 타령이야. 안 그래도 나 벌써 의사 선생님한테 엄청 혼났어 ㅠㅠ ”

 

“ ... 패딩, 내 패딩 줘... ”

 

“ 싫다고 계속 뭐라 하더니 왜 자꾸 패딩을 달래... 얘가 정말 왜 이러지? 혹시 머리가 잘못 된 건 아니겠지... 의사 선생님 불러와야 하나... ”

 

“ ... 으으... 패딩! 패딩 가져와! ”

 

 

베르닌은 왕재수가 열이 나서 헛소리를 하는 것 같아 더럭 겁이 났다. 흥분하면 더 해로울 것 같아서 일단 병실 한쪽에 던져두었던 패딩 코트를 들고 왔다. 방수 재질이라 겉은 거의 말라 있었지만 여전히 빵빵하게 부풀어 있었고 안쪽으로 물을 먹었는지 꽤 무거웠다. 패딩을 껴안고 왕재수의 눈앞에 들이댔다.

 

“ 자, 여기 가져왔어. 봤지? 이제 안심하고 자라. ”

 

“ ... 주머니... ”

 

“ 주머니는 또 왜! ”

 

“ 안쪽... 주머니... ”

 

 

베르닌은 왕재수의 머리가 이상해지는 게 아닐까 걱정하면서 패딩 코트를 뒤집었다. 안쪽에 정말 주머니가 있었다. 지퍼가 채워져 있었는데 이상하게 주머니가 불룩했다.

 

 

“ 어? 안에 뭐가 들었나? ”

 

 

베르닌은 지퍼를 열어보았다. 주머니 안에 거무스름하고 조그만 강아지가 몸을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엇! 강아지! 아까 그 강아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 강아지였다. 베르닌은 급하게 강아지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놀랍게도 강아지의 털은 별로 젖지도 않았고 몸은 따뜻했다. 손으로 감싸주자 강아지가 콧소리를 내며 부드럽게 낑낑댔다.

 

 

“ 아... 어떻게 강아지가 이 안에 있지? 네가 구한 거야? 언제? ”

 

 

왕재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강아지를 보더니 안심했는지 도로 잠든 것 같았다. 베르닌은 멍해졌다.

 

 

‘ 그랬구나. 얘가 나 꺼내주고 나서 강아지를 구한 거구나. 강아지 구해서 추울까봐 안주머니에 넣고 지퍼도 채워줬구나. 그러다 얼음 깨져서 빠진 건가보다... ’

 

 

안주머니는 방수천으로 되어 있었고 왕재수가 지퍼를 채워놓았던 덕분에 물이 스며들지 않았기 때문에 강아지는 멀쩡했다. 사실 그와 왕재수보다도 더 멀쩡한 것 같았다.

 

 

베르닌은 의사에게 강아지를 데리고 갔다. 노의사는 여기가 동물병원인줄 아느냐고 투덜댔지만 화난 기색은 아니었고 강아지를 정성껏 진찰해 주었다. 다행히 강아지는 놀라고 지치고 허기졌을 뿐 다친 곳은 없었다. 우유를 데워주자 할짝할짝 핥아먹고는 사르르 잠이 들었다. 강아지 구하려다 물에 빠진 거였다고 설명하자 노의사 스타브로프도 눈에 띄게 누그러졌고 베르닌에게 저녁 안 먹었으면 사택에 가서 수프라도 한 그릇 먹고 가라고 했다.

 

베르닌은 강아지를 데리고 스타브로프의 집으로 갔다. 의사의 아내인 마르가리타가 맛있는 생선수프와 샌드위치를 차려줘서 든든하게 먹었다. 병실로 내려와 보니 왕재수는 깊게 잠들어 있었다. 바깥을 보니 눈보라는 이제 그쳐 있었다. 그래서 베르닌은 집으로 돌아갔고 강아지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거기까지는 좋았으나 눈보라에 시달리고 물에 빠지고 왕재수를 업고 뛰느라 너무 피곤해서 깊게 자는 바람에 베르닌은 다음날 알람 소리를 듣지 못해 늦게 일어나 지각, 국장에게 귀가 닳도록 설교를 듣고 1주일 동안 조기출근하게 되었다. 그래도 좋은 일은 하나 있었다. 점심시간에 리자가 왕재수에게 먹이라고 뜨끈뜨끈한 항아리 닭고기를 사다 준 것이다. 물론 왕재수는 느끼하다고 안 먹을 게 뻔했다. 베르닌은 매우 행복했다. 항아리 닭고기는 참 맛있었다.

 

 

 

FIN

- 2015. 1. 29 -

 

 

-------

 

 

몰아치는 눈보라와 꽁꽁 얼어붙은 강 위를 걸어 건너는 건 전부 내가 페테르부르크에 살 때 실제로 겪었던 일들이다. 다행히 나는 강물에 빠지진 않았지만...

 

물론 엔진이 얼어 차가 멈춘 것도 마찬가지인데, 내 경우는 전차였다. 영하 30도로 내려간 날 낡은 전차가 중간에 멈춰버렸고 승객들은 아무런 환불도 받지 못한 채 내려야 했다. 어떤 사람들은 정류장에서 다음 차를 기다렸지만, 너무너무 추워서 도저히 기다릴 엄두가 안 났기 때문에 나와 친구는 기숙사까지 걸어서 돌아갔다. 그러다 중간에 버스가 와서 탔던 것 같기도 하다. 하여튼 무지무지 추웠었다.

 

이번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페테르부르크도 추운 곳이라 겨울이 되면 네바 강이 꽁꽁 얼어서 그 위로 사람들이 걸어다닌다. 예전에는 썰매도 탔었다. 이 도시는 바다도 얼어붙는다. 그 얘기는 전에 Petersburg diary 폴더에 '얼어붙은 바다 위에서' 란 제목으로 올린 적 있다. 궁금하신 분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716

 

네바 강에 가면 '얼음 위로 걸어다니지 마시오!'라는 표지판이 있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참 꿋꿋하게 그 위로 잘도 걸어가닌다. 나도 옛날에 새해 즈음 친구랑 네바 강 걸어서 건넜었는데 기분이 묘했다. 온통 새하얗게 얼어붙은 네바 강의 빙원 너머로 불덩어리처럼 새빨갛게 이글거리는 태양이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내 인생에서 가장 환상적인 장면 중 하나다.

 

하여튼 얼어붙은 강 위를 건너는 건 위험하다! 베르닌과 왕재수처럼 풍덩 빠질 수도 있으니 다들 주의하세요!!

 

가브릴로프야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소도시이지만, 그래도 이 9편의 배경 사진 몇 장을 따로 올렸다.

왕재수의 고향이자 출신 도시인 레닌그라드, 현재 이름 페테르부르크의 얼어붙은 네바 강과 그 위를 건너는 사람들, 그리고 깨진 얼음 사진. 여기 : http://tveye.tistory.com/3525

 

생각해보니 얼어붙은 강 위를 건너는 사람들 사진은 며칠 전 페테르부르크에 있을 때도 올렸다. 그건 여기 : http://tveye.tistory.com/3508

 

.. 여기 등장하는 노의사 레프 스타브로프는 본편에도 등장한다. 나름대로 중요 인물이다 :)

 

이야기는 10편으로 이어진다. 그건 주말이나 다음주 초에...

 

 

:
Posted by liontamer

 

서무의 슬픔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두번째. 역시 예약 포스팅.

베르닌과 왕재수(http://tveye.tistory.com/3492)에 이어 이번에는 스페호프 국장, 바이올린 아저씨 코즐로프, 그리고 렐랴!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스페호프 국장

 

 

 

이름 : 블라지미르 스페호프

 

현직 :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KGB) 지국장

 

경력 : 국가기밀.

 

20문답 : 답변 거부

 

<답변 거부 사유>

 

1. KGB 국장으로서 보안서약서에 서명한 바 있음

 

2. 공문으로 정식 요청하지 않은 건임

 

3. 토끼라는 유관기관명은 들어본 적이 없음

     

 

 

 

 

 

로만 코즐로프

 

 

 

이름 : 로만 코즐로프

 

현직 : 가브릴로프 시립극장 오케스트라 수석 바이올리니스트

 

경력

- 가브릴로프 예술대학 및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음악원 졸업

- 모스크바 청년궁전 오케스트라 바이올리니스트

* 그 외 비슷비슷한 규모의 오케스트라 바이올리니스트 활동 다수

 

 

1. 별자리 : 사수자리

 

2. 나이 : 40세

 

3. 신장과 체중 : 195센티미터, 88킬로

 

4. 머리색 + 헤어스타일

갈색 머리. 무성하게 자라는 편이지만 항상 잘 빗어서 단정하게 정리한다.

 

5. 눈 색깔 : 짙은 푸른색

 

왕재수 : 내가 좋아하는 색이야~ 난 갈색 머리에 푸른 눈이 좋아~ 레닌그라드에서 어릴 때부터 사귄 의사 선생님도 딱 갈색 머리 푸른 눈~!

 

코즐로프 : 뭐야? 어릴 때부터? 의사? 그건 또 누구야! 크오오오! 넌 지금도 어린데! 더 어릴 때부터면 그건 뭐야! 미성년자 성추행! 용서하지 않겠다, 쿠오오오!

 

왕재수 : 아유, 그 사람 여기 없잖아. 흥분하지 마. 난 자기가 젤 좋아~ 뽀뽀 쪼옥~

 

코즐로프 : 우리 아기는 너무 귀여워~ 뽀뽀도 잘해~ 아유 귀여워~

 

 

6. 당신의 패션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템은?

하얗고 빳빳하게 다림질한 셔츠 칼라

 

왕재수 : 맞아, 당신은 깔끔한 스타일을 고수하지! 연주복 입으면 멋있어!

 

코즐로프 : 음흠, 귀염둥이에게 잘 보이려면 앞으로도 연주복 패션을 고수해야겠군~

 

왕재수 : 아니야, 나는 당신이 아무 것도 안 입은 게 제일 좋아~~

 

코즐로프 : 아유, 귀여운 것. 어쩌면 말도 이렇게 귀엽게 하누~ 와락~

 

 

7. 가장 좋아하는 음식

 

코즐로프 : 난 직접 빚은 펠메니 등 정성이 들어간 음식이 좋아. 요즘은 구시가지에 생긴 식당에서 내주는 항아리 닭고기가 맛있더군.

 

왕재수 : 옛날 사람 ㅠㅠ 만두 빚는 파트너가 좋다 하고 -_-

 

코즐로프 : 너처럼 예쁜 앤 그런 거 안 해도 돼~ 우리 비둘기 손엔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할 거야~~

 

 

8. 당신의 시그니처 칼라는?

 

코즐로프 : 흰색과 검은색. 연주할 때 보통 그렇게 입지.

 

왕재수 : 그래서 좀 로트바르트 닮음. 키도 크고...

 

코즐로프 : 그거 칭찬이야?

 

왕재수 : 응...

 

코즐로프 : 뭔가 얼버무리는 것 같은데! 로트바르트 그거 부엉이 아냐?

 

왕재수 : 아휴, 우리 아저씬 너무 눈치가 빨라.

 

 

9. 취미 : 청소. 정리.

 

왕재수 : 우리 아저씨 결벽증이랑 정리벽 있음 ㅠㅠ

 

코즐로프 : 그래야 이 험한 세상에 세균 감염 안 되고 이상한 서류나 책자 나왔다는 혐의로 체포 안 당하지! 내 몸 내가 지켜야지!

 

왕재수 : 난 자기만 믿고 갈래~~~

 

 

10. 데이트 상대에게서 제일 먼저 보는 것

 

코즐로프 : 여자는 몸매.

 

작가(토끼) : 당신 양쪽 다 좋아하잖아. 남자는?

 

코즐로프 : 남자는 눈빛, 허벅지. 목소리.

 

작가(토끼) : 어째서 남자 쪽이 더 까다롭니!

 

코즐로프 : 그게 원래 그런 거야! 나 은근히 상대 가려! 근데 가뜩이나 시골이라 괜찮은 남자 구하기 힘들어... 우리 아기는 정말 하늘에서 톡 떨어진 천사야~ 다 갖췄잖아!

 

왕재수 : 맞아. 내 두툼한 허벅지~~~

 

코즐로프 : 아유, 예쁘기도 하지. 와락~

 

 

11. 왕재수와 베르닌이 물에 빠진다면 누구를 먼저 구하겠는가.

 

코즐로프 : 말이라고 하냐! 내가 그 KGB 앞잡이를 왜 구하니! 그깟 놈은 빠져죽게 내버려두고 우리 귀염둥이 구할 거야!

 

작가(토끼) : 아까 얘는 단추 구할 거랬는데...

 

왕재수 : 저거 진짜... 토끼찜 해먹을 거야 -_-

 

 

토끼 : (화들짝) 쟨 진짜 해먹을 거 같아...

 

 

12. 당신의 매력 포인트는?

 

코즐로프 : 난 잘 모르겠는데 나한테 모여드는 여자들은 내가 옷발이 잘 받아서 멋있대. 남자애들은...

 

왕재수 ; 까칠한 게 매력이야! 그리고 잠자리가 끝내줘!

 

코즐로프 : 맞아. 그건 그래. 나 좀 잘해.

 

 

13. 가브릴로프에서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곳은?

 

검은 숲의 햇살 잘 드는 잔디밭

 

 

14. 좋아하는 음악/가수/작곡가 등등

 

코즐로프 : 이런 얘기 나오면 클래식에 바이올리니스트 누구누구라고 답해야겠지만. 됐네 됐어! 지겹다! 나한테 음악은 밥벌이야! 클래식 나부랭이 좋다고 하는 거 다 허세만발임!!! 특히 차이코프스키 같은 거!

 

왕재수 : 어, 난 차이코프스키 좋은데... 나도 허세만발 ㅠㅠ 으앙...

 

코즐로프 : 우리 아기는 춤도 잘 추고 예쁘니까 허세 아니야~

 

왕재수 : 그래! 난 밥벌이 때문에 예술 하는 거 아냐! 난 천재 예술가!

 

코즐로프 : 그래, 넌 모차르트. 난 살리에리(크흑...)

 

 

15. 어렸을 적 장래희망

 

장래희망 그런 거 별로 없었음. 그냥 바이올린 좀 잘 켜니까 이걸로 밥벌이해야지 했음. 소련에서 무슨 장래희망.

 

 

16. 영화에 출연하게 된다면 맡고 싶은 역할

 

코즐로프 : 영화는 무슨 영화! 귀찮아!

 

왕재수 : 표트르 대제! 키 크고 위엄 있게 생겼잖아!

 

코즐로프 : 아유, 우리 아기는 나를 황제처럼 모시는구나!

 

왕재수 : 로트바르트 분장 한 번만 시켜보고 싶다...

 

코즐로프 : 그거 부엉이 마왕이라는 거 나 알거든!

 

 

17.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것

 

KGB 나부랭이들. 공산당. 하여튼 꽉 막힌 작자들. 권력자들. 전부!

우리 아기 눈에 피눈물 내고 저 백옥같은 몸에 흠집 내는 개자식들은 전부 작살내주겠다!

 

 

18. 지금 하고 싶은 것

 

귀염둥이 우리 아기를 확 쓸어안고 그 자리에서...

 

 

19. 지금 입고 있는 것

 

정장 셔츠하고 바지 입고 있었는데... 지금은... 우리 아기가 와서 무릎에 앉았고, 그래서 지금은... 뭐...

 

 

 

20. 작가에게 한 마디

 

코즐로프 : 나 원래 이런 캐릭터 아니지 않았어? 본편에선 원래 까칠하고 좀 음침하고 정치적인 인물 아냐? 나 왜 귀염둥이한테 넋놓고 바보같이 굴지? 왜 걸핏하면 주먹 휘두르고 폭주하지? 나 좀 이상해!

 

작가(토끼) : 본편에서도 너 걔한테 푹 빠져...

 

코즐로프 : 뭐 우리 아기는 예쁘니까 빠지는 건 빠지는 건데... 하여튼 뭔가 사기당하고 있는 기분이야!

 

 

 

 

 

렐랴

 

 

 

이름 : 릴리아나 비슈네바

 

현직 : 월간 문예지 비슈네브이 사드 편집장

 

경력

- 가브릴로프 시립대학교 불문학과 졸업

- 문예지 편집장 및 일간지 칼럼니스트, 가브릴로프 문화채널 패널 활동 중

 

 

1. 별자리 : 쌍둥이자리

 

2. 나이 : 23

 

3. 신장과 체중 : 168센티미터. 숙녀의 체중은 묻는 것이 아니에요!

 

4. 머리색 + 헤어스타일

윤기 나는 짙은 밤색. 풍성하게 물결치며 부드럽게 곱슬거리는 긴 머리

 

5. 눈 색깔 : 부드러운 회색

가브릴로프 남자들로부터 안나 카레니나처럼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칭송을 받고 있음

 

6. 당신의 패션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템은?

몸매의 곡선과 빼어난 각선미를 드러낼 수 있는 원피스.

 

7. 가장 좋아하는 음식

 

렐랴 : 정통 러시아 요리를 좋아하죠. 블린, 비프 스트로가노프 등등. 전 요리를 아주 잘해요. 제가 만드는 음식은 모두 맛있어요. 제가 달리 가브릴로프에서 제일가는 신붓감이란 말을 듣는 게 아니죠! 그 중에서도 제가 잘 만드는 것은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아이스크림, 각종 속이 들어간 작은 파이들. 전 러시아 정통 만찬도 자신 있어요.

 

작가(토끼) : 맞아. 그래서 전에 쓴 스핀오프 추리소설은 네가 만찬을 개최하는 것으로 시작했지. 심지어 네가 주인공. 그 근사한 만찬에는 열두 명의 손님이 초청되는데... 만찬의 목적은 사실 너의 미모와 요리 솜씨를 과시하여 누구를 유혹해보려고...

 

렐랴 : 토끼! 숙녀에게 너무 무례하잖아! 그거 비밀인데...

 

작가(토끼) : 뭐가 비밀... 만찬에 온 손님들 애초부터 다 눈치 채고 있었음.

 

렐랴 : 그래도 모르는 척 해 줘야지!

 

작가(토끼) : 너 누구한테 육탄 돌진했잖아~

 

렐랴 : 아악, 조용히 못해! 꺅!

 

베르닌 : (렐랴랑 인터뷰한다기에 슬쩍 들어왔음) 육탄 돌진이라니요... 저렇게 아름답고 조신하고 세련된 렐랴가 그럴 리가 없어요 ㅠ 어, 근데 스핀오프 추리소설이라면 거기 나도 나온다며... (왕기대) 혹시 그 대상이 나???

 

렐랴 : 어머나, 다냐! 꿈도 야무지시네요! 거기서 분명 토끼가 이렇게 썼잖아요!

“렐랴는 베르닌의 조그맣고 광택 없는 까만 단추 같은 눈을 아주 싫어했고 그의 촌스러운 매너와 그보다 더 엉망인 옷차림은 더욱 싫어했다. 이미 서른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꼭 풋내기 대학생 같은 몰골이었다”

어딜 언감생심 날 넘보고!

 

베르닌 : 으앙, 거짓말... 으앙... 나 왜 지금 시리즈에서보다 더 못나게 나와?

 

작가(토끼) : 단추야, 힘내. 그래도 그 스핀오프 추리소설에서 너 아주 중요한 인물이야.

 

베르닌 : 중요한 인물이면 혹시 살인범 아냐? 으앙...

 

작가(토끼) : 그건 스포일러니까 비밀이지롱~

 

베르닌 : 안돼! 나 살인범 안 할 거야! 왕재수 저 자식 살인범 시켜! 엉엉...

 

 

8. 당신의 시그니처 칼라는?

렐랴 : 저의 눈빛을 더욱 고혹적으로 보이게 하는 부드러운 푸른색~

 

 

9. 취미 : 요리. 문예 살롱 운영

 

렐랴 : 저의 사무실과 아파트는 가브릴로프 문화예술인들의 요람~ 저는 19세기 러시아 귀족부인처럼 이들을 후원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은 제 문예지와 칼럼, 방송을 통해 띄워주죠!

 

작가(토끼) : 소련이지만 노멘클라투라 특권계층이라 저런 부르주아 행태가 가능...

 

렐랴 : 흥, 그보다는 내가 예쁘기 때문이지!

 

작가(토끼) : 너 그 스핀오프 말고 본편에서도 누구 꼬시려고 이 살롱을 더욱 활성화시키잖아.

 

베르닌 : 본편이라면... 거기선 내가 좀 멋있게 나올 거 같으니까(메피스토펠레스에 열정적..) 그 대상은 혹시 나?? (다시 한 번 왕기대...)

 

렐랴 : 전 잘생긴 남자 좋아해요.

 

베르닌 : 토끼야, 나 본편에선 좀 잘생기게 나오는 거지?

 

작가(토끼) : 단추야, 이건 렐랴 인터뷰인데 왜 자꾸 네가 끼어드니 ㅠ 그것도 대답하기 힘든 질문만 하고...

 

 

10. 데이트 상대에게서 제일 먼저 보는 것

패션 센스와 매너

 

베르닌 : 확인사살 ㅠㅠ

 

렐랴 : 당신 옷 입는 거랑 매너 같은 거 미셴카한테 좀 배워요!

 

베르닌 : 미셴카가 누구지... 아, 미샤... 왕재수 ㅠㅠ 흐흑..

 

 

11. 왕재수와 베르닌이 물에 빠진다면 누구를 먼저 구하겠는가.

 

렐랴 : 왕재수가 누구예요?

 

작가(토끼) : 미샤.

 

렐랴 : 어머, 그 멋진 남자를 왜 왕재수라고 하는 거죠! 분명 그이를 질투하는 못난 남자들의 모략이야!

 

베르닌 : 나 질투 안 해요! 안 못났어요 ㅠㅠ 걔 왕재수 맞아요...

 

작가(토끼) : 렐랴야, 누구 구할 거냐고!

 

렐랴 : 당연히 우리 꽃돌이 감독님 미셴카 아니겠어요? 다냐는 KGB 요원이니까 알아서 잘 헤엄쳐 나오겠죠!

 

베르닌 : 어,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그래도 제 생각 조금은 해주고 있네요. 감동!!!

 

 

 

12. 당신의 매력 포인트는?

렐랴 : 그것은 바로... 지성을 수반한 미모!

 

작가(토끼) : 잘 보면 얘도 왕재수 못지 않게 자뻑...

 

렐랴 : 어머, 자뻑이라니. 그런 비속어 쓰면 못써, 토끼야!

 

작가(토끼) : 너 자꾸 그러면 이상하게 만들어버린다! 단추처럼 고생시키고.

 

 

13. 가브릴로프에서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곳은?

 

렐랴 : 저의 아름답고 세련된 편집장 사무실~ 그리고 검은 숲 벚꽃 동산에 있는 우리 외가의 별장~

 

작가(토끼) : 저 봐. 소련인데 엄청 좋은 별장 갖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물자 부족해서 난리인데. 노멘클라투라 특권계층 철딱서니 없는 아가씨 같으니.

 

렐랴 : 나 토끼찜 아주 잘 만든단다~

 

 

토끼 : 나처럼 귀여운 토끼를 쪄먹으려 하다니..

 

 

14. 좋아하는 음악/가수/작곡가 등등

쇼팽. 모차르트. 러시아 대중 발라드 가요.

 

15. 어렸을 적 장래희망

대문호. 최고의 저널리스트.

 

16. 영화에 출연하게 된다면 맡고 싶은 역할

렐랴 : 안나 카레니나(다들 내 미모랑 어울릴 거 같다 해서)

 

17.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것

촌스러운 패션, 무매너!

 

18. 지금 하고 싶은 것

꽃돌이 감독님 미샤와의 근사한 데이트~

 

 

19. 지금 입고 있는 것

검정 레이스 칼라가 달린 하이 웨이스트의 프랑스제 원피스와 하얀 모피가 달린 푸른색 코트, 늘씬한 다리에 꼭 맞는 검정색 가죽 부츠.

 

 

20. 작가에게 한 마디

 

렐랴 : 나 너무 실속 없는 캐릭터인 것 같아. 말로만 동네에서 젤 예쁘고 인기 많은 여자라고 하면 뭐해. 잘 보면 맨날 단추한테 야단만 치고, 꽃돌이 미셴카한테는 온갖 선물 다 갖다 바치고 들이대는데 얻는 건 하나도 없어. 이 시리즈는 아무리 봐도 그 바이올린 아저씨 때문에 나랑 꽃돌이의 러브러브는 텄어. 그러니까 그 스핀오프 추리소설이든 본편에서든 나랑 꽃돌이랑 이루어줘!! 안 그러면 토끼찜 해 먹을 거야!

 

작가(토끼) : 너 원래 본편 구상할 때 되게 싸가지 없고 철딱서니 없는 캐릭터로 설정했었는데 지금 성격 많이 바뀐 거야. 나한테 고마운 줄 알아!

 

렐랴 : 차라리 싸가지 없고 철딱서니 없으면서 꽃돌이랑 이루어지는 게 더 낫단 말이야! 이게 뭐야! 나 이 시리즈 유일한 여자 캐릭터인데 여주인공은커녕 바이올린 아저씨보다도 비중 없어!

 

작가(토끼) : 이 시리즈에선 왕재수가 제일 예쁜 애니까 여자 캐릭터 비중이 낮아지는 건 어쩔 수 없잖아. 바이올린 아저씨는 왕재수가 좋아하니까 중요해... 그리고 바이올린 아저씨는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야(자기 고백)

 

렐랴 : 어머 웬일이니. 토끼 주제에 꽃돌이랑 깡패 아저씨를 좋아한대 -_-

 

작가(토끼) : 자꾸 툴툴대면 너 단추랑 결혼시킨다!

 

베르닌 : 진짜? 진짜? 그럼 나 이 시리즈 붙박이할래!

 

렐랴 : 아악!!!! 토끼악마!!!

 

 

토끼 : 메롱~

 

 

 

   

FIN

- 2015. 2. 10 ~ 11 -

 

 

.. 하여튼 이렇게 등장인물 20문답을 끝내고.. 웃자고 쓰긴 했지만 본편이랑 통하는 내용들도 있다 :) 

돌아오면 서무의 슬픔 시리즈 9편. 눈보라와 패딩 코트 올려보겠다 :)  

 

다들 가벼운 마음으로 설 연휴 맞이하시길.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Posted by liontamer

 

서무의 슬픔 시리즈

등장인물 20문답

 

 

 

 

<이런 걸 왜 쓰고 있느냐면...>

 

본편도 잘 안 풀리고 회사에서 스트레스 받아서 재미로 쓰기 시작했는데 어느덧 서무의 슬픔 시리즈가 11편까지 전개되었다. 언제 끝날지는 나도 모름... 쓰고 있으면 스트레스는 풀리는데 요즘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그런가, 여태 쓴 서무 에피소드를 다 합치면 200페이지가 넘고 이것은 작년 10월에 시작한 가브릴로프 본편보다 훨씬 많은 분량이다! 주객전도되면 안 되는데...

 

그래서 이번 페테르부르크 행을 기점으로, 다시 심기일전하여 진지하게 본편으로 들어가 보려고 한다. 뭐 그래도 회사 일로 스트레스 받으면 또 단추남 베르닌과 왕재수 미샤의 티격태격 에피소드를 쓰고 있겠지. 사실 본편 우주에서는 그렇게 우습고 실없는 캐릭터나 사건도 거의 없고, 미샤의 레닌그라드 우주를 다룬 기존 이야기들도 대부분 진지하다 보니 오랜만에 다 내려놓고 그냥 가볍게 쓰는 게 내게도 좋았던 것 같다. 자기 치유도 되고.

 

하여튼, 그래서 잠시 쉬어가는 겸, 서무의 슬픔 시리즈 등장인물별 20문답을 적어봤다. 사실 이런 것은 오래 전에 다른 등장인물들과 다른 배경으로 쓰던 시리즈에서 한 번 해봤다. 그 시리즈도 이렇게 동일한 인물들을 가지고 옴니버스 단편을 묶은 거였는데 물론 서무의 슬픔처럼 농담 모음은 아니었다. 근데 거기에도 미샤가 나왔다. 이 이야기들의 다섯 번째 에피소드에서 미샤가 제일 처음 등장했기 때문에 내겐 뜻 깊은 시리즈이다. 거기서는 등장인물들을 놓고 나중에 30문답을 해봤는데 미샤도 있었다. 물론 거기서야 미샤의 답변은 시종일관 진지하게 서술되지만. 이건 단추남과 왕재수의 서무 시리즈니까 미샤가 아니라 왕재수!!! 그는 결코 진지하게 참여하지 않는다!!

 

.. 페테르부르크 가 있는 동안 예약 포스팅으로 설 연휴 직전인 16일, 17일 이틀에 걸쳐 쪼개 올려본다. 16일에는 베르닌과 왕재수의 문답, 17일엔 스페호프, 코즐로프, 렐랴의 문답.

 

인터뷰 대상 : 베르닌, 왕재수, 스페호프, 코즐로프, 렐랴

인터뷰어 : 작가(토끼=나)

특별출연 : 쿠마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그럼 그 20문답의 문항들은...>

 

 

20 Questions

 

 

 

이름 :

현직 :

경력 :

 

1. 별자리

2. 나이

3. 신장과 체중

4. 머리색 + 헤어스타일

5. 눈 색깔

6. 당신의 패션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템은?

7. 가장 좋아하는 음식

8. 당신의 시그니처 칼라는?

9. 취미

10. 데이트 상대에게서 제일 먼저 보는 것

11. ..와 ..가 물에 빠진다면 누구를 먼저 구하겠는가.

12. 당신의 매력 포인트는?

13. 가브릴로프에서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곳은?

14. 좋아하는 음악/가수/작곡가 등등

15. 어렸을 적 장래희망

16. 영화에 출연하게 된다면 맡고 싶은 역할

17.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것

18. 지금 하고 싶은 것

19. 지금 입고 있는 것

20. 작가에게 한 마디

 

 

다닐 베르닌

 

 

이름 : 다닐 베르닌

 

현직 :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KGB) 지국 감시분석부 소속 행정요원, 총괄서무

 

경력

-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법학과 졸업(입학 당시 마을에 현수막 붙음)

- 현재 직장이 첫 직장임. 전공을 바탕으로 정보 분석 업무에 투입되어 나라와 시민들을 위해 봉사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으나 이해할 수 없는 서무 노릇만 줄창 하고 있음

 

 

1. 별자리 : 게자리

 

2. 나이 : 28세

 

3. 신장과 체중 : 183센티미터, 78킬로

 

베르닌 : 아니야. 나 80킬로까진 진짜 아니야... 비록 요즘 야근과 스트레스 때문에 자꾸 밤에 뭘 주워 먹어서 동그래지긴 했지만... 비록 옆구리살이 삐져나오고 뱃살이 조금 접히려고 하지만 그래도 아직 80킬로는 아닐 것이야. 근데 체중계 올라가본지 꽤 됐으니 잘 모르겠다... 아아, 서무의 슬픔이여...

 

4. 머리색 + 헤어스타일 :

검은색. 관자놀이와 정수리 부근에 스페호프와 왕재수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생긴 새치가 드문드문 있다.

동네 이발소에서 자른 짧은 머리. 주로 고등학생이나 대학 신입생 스타일 머리를 고수한다. 머리 감고 빗질 안 해도 되기 때문에 편하다.

 

5. 눈 색깔 :

광택 없는 검은색.

종종 단추눈이라고 불린다. 본인은 매우 듣기 싫어하는 말이다.

 

베르닌 : 쫌! 나 단추 아니야! 단추눈은 곰인형한테나 달린 거라고! 이를테면 저 토끼가 애지중지하는 곰팅이 쿠마라든지...

 

쿠마 : (인터뷰어인 작가 토끼의 품에 안겨 있다가 버럭!) 나 단추눈 아니거든! 나 헝겊 동그랗게 오려붙인 눈이야!

 

 

내가 얼마나 귀여운데! 내 귀여움에 폭 빠진 토끼는 유리지갑도 폭발했어! 나 알고보면 왕재수 과야. 너 같은 단추 과 아니야!)

 

 

6. 당신의 패션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템은?

 

베르닌 : 패션이란 게 대체 뭔지 ㅠㅠ 아이템은 또 뭐야...

 

작가(토끼) : 네가 평소 고수하는 차림새에서 가장 중요하거나 마음에 드는 게 뭐냐고...

 

베르닌 : 아, 손목토시!! 사무실에서 계속 서류작업하고 때로 자 대고 칼질도 많이 하니까 매우 유용하지. 그런데 전에 손목토시 떼는 거 깜박하고 나갔더니 왕재수가 기절초풍을 하면서 날 마구 혼내지 뭐야. 남자는 스타일이 중요하다면서 국장 못지않게 일장연설을 하는 거야... 아이고 두야... 그 자식도 서무의 슬픔을 몸소 겪게 된다면 손목토시가 아름답게 느껴질 것이 분명해!

 

7. 가장 좋아하는 음식

항아리 닭고기. 뜨끈한 살랸카 수프 등등 기름기 많고 구수한 음식!

 

베르닌 : 난 이런 음식을 좋아하는데 왕재수 자식 맨날 밥 해 먹이느라 막상 내가 먹고 싶은 건 못 해 먹어. 기름진 음식이 올라오면 무용수니 몸매 관리니 뭐니 하면서 난리를 치는 통에 피곤해서 포기해...

 

8. 당신의 시그니처 칼라는?

 

베르닌 : 시그니처 칼라가 뭐지? 이 문답 너무 어렵다. 자꾸 반동분자처럼 꼬부랑 말을 쓰고...

 

왕재수 : (마침 밥 먹으러 들어왔다가 끼어듬) 이 멍충이. 너의 매력을 십분 드러낼 수 있는 너만의 색깔, 너한테 잘 어울려서 네가 고집하는 색깔 그런 거!! 아유, 바보야.. 남자는 칼라를 통해 이미지 메이킹을...

 

베르닌 : 더 모르겠다...

 

왕재수 : 내가 알아! 얘 시그니처 칼라는 겨자색과 회색이 교차되어 어우러진 색이야. 주로 아가일 무늬에 들어가는 색이지. 얘 맨날 그런 스타일에 그런 색깔 입어. 엄청 촌스럽지만 뭐 어쨌든.

 

베르닌 : 어, 그거... 그게 때도 안 타고 참 괜찮아. 저번에 의류공장 견학 갔을 때 괜찮아서 다섯 벌 한 세트 샀어. 너 한 벌 줄까?

 

왕재수 : 됐거든요!!! 아가일 무늬는 남성 패션의 적이라고!!!

 

 

9. 취미

낮잠(점점 낮잠 잘 시간이 없어지고 있음).

수영(입사 후 여름에도 헤엄치러 못 감 ㅠㅠ)

 

 

10. 데이트 상대에게서 제일 먼저 보는 것

 

베르닌 : 어... 나는... 착한 마음씨.. 그리고 살림 솜씨!

 

왕재수 : 웃기시네, 얼굴이잖아!

 

베르닌 : 아니야... 아니야... 나 여자 얼굴 별로 안 따져. 진짜야.

 

왕재수 : 아, 얼굴은 두 번째고 첫 번째는 몸매! 얘는 가슴이 빵빵하고 몸매가 글래머인 여자 좋아해!

 

베르닌 : 너 왜 그래 ㅠ 나 그런 거 아니야..

 

왕재수 : 뭘 아니야. 렐랴 좋아하잖아.

 

베르닌 : 렐랴는 좋지만... 렐랴는 마음씨가 곱고 상냥하고 요리를 잘하니까 좋은 거야.

 

왕재수 : 뻥치시네. 남자들 다 똑같음. 예쁘면 장땡이지. 울 아저씨들이 날 왜 좋아하는데~

 

베르닌 : 야! 넌 여자 아니잖아!

 

왕재수 : 어쨌든!~ 난 여자보다 더 예쁘니까~

 

 

11. 왕재수와 렐랴가 물에 빠진다면 누구를 먼저 구하겠는가.

 

베르닌 : 당연히 렐랴!! 말이라고!

 

왕재수 : 너 나 안 구하면 감시의무 소홀로 크레믈린에 있는 울 아저씨한테 이를 거야! 그리고 당직실 귀신도 도로 불러올 거야!

 

 

12. 당신의 매력 포인트는?

 

베르닌 : 당당한 키와 체격!

 

왕재수 : 땡! 단추눈!!

 

베르닌 : 단추 단추 하지 말라고!

 

왕재수 : 단추눈 귀여운데...

 

 

13. 가브릴로프에서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곳은?

 

즐라타야 강가의 모래사장과 잔디밭. 따뜻할 때 햇살 쬐면서 누워 있거나 수영하면 완전 좋음. 그런데 입사 이후 가본 적이 없음 ㅠㅠ

 

 

14. 좋아하는 음악/가수/작곡가 등등

알라 푸가쵸바

 

 

15. 어렸을 적 장래희망

법조계 인사.

 

 

16. 영화에 출연하게 된다면 맡고 싶은 역할

 

베르닌 : 나는, 나는... 2차 대전 파일럿!! 전투를 승리에서 이끌고 민간인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영웅 역할!

 

왕재수 : 그럼 주인공이네? 감독들 자기 영화 주인공 캐스팅할 때 엄청 얼굴 따지는데...

 

베르닌 : 세상이 너무 불공평해...

 

 

17.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것

 

서무 업무!!!! 고양이 학대. 반동분자 감시. 체육대회. 나쁜 국장.

 

 

18. 지금 하고 싶은 것

정시퇴근 ㅠㅠ

 

19. 지금 입고 있는 것

아가일 무늬 스웨터. 황토색 면바지. 손목토시.

 

 

20. 작가에게 한 마디

 

베르닌 : 작가고 나발이고... 나 좀 그만 괴롭혀. 제발! 나 본편으로 돌아갈래. 본편에서는 나 이렇지 않다며... 뭔가 메피스토펠레스가 어떻고 열정적이고 어쩌고 했잖아. 거기선 서무 아닐 거 아냐... 나 들들 볶는 국장도 없을 거 아냐... 이 시리즈 나 너무 싫어. 본편 갈래... 엉엉...

 

 

작가(토끼) : 어... 본편에도 너네 국장은 나온단다 ㅋㅋㅋ

     

 

 

 

 

왕재수

 

 

이름 : 미하일 야스민

,, 그냥 미샤라고 불러주면 됨! 아니면 꽃미남이라든지..

 

현직 : 가브릴로프 시립극장 예술감독

 

경력

- 레닌그라드 발레학교(바가노바 아카데미) 졸업

- 레닌그라드 키로프 극장 수석무용수, 안무가

-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 수석무용수, 안무가

- 각종 국내외 댄스 페스티벌 연출 및 감독 역임

- 무수한 국내외 무용/예술 관련 콩쿠르 및 어워드 수상

- 공훈예술가 서훈

(... 이건 몇 년 전 받았다가 감옥 가면서 박탈당함 ㅜㅜ)

 

 

1. 별자리 : 전갈자리

 

2. 나이 : 25세

 

3. 신장과 체중 : 177센티미터, 61킬로

 

베르닌 : 너 177 안 되는 거 같던데?

 

왕재수 ; 아니야!

 

베르닌 : 나 감시요원이라서 너 서류 봤는데... 176.6인가 7...

 

왕재수 ; 반올림!!!

 

베르닌 : 반올림하면 180도 되겠네. 나도 끝자리 버리면 180... 우리 키 같네!

 

왕재수 : -_- 멍충이... 그래도 난 다리가 기니까 ㅠㅠ

 

베르닌 : 너 너무 말랐어. 다이어트 그만해. 기름기도 좀 먹고.

 

왕재수 : 나 춤출 땐 원래 더 나갔었어! 근데 너네가 고문해서 죽을 뻔 했잖아! 아파서 근육량이 줄어서 그런 거야!

 

베르닌 : 웃기시네, 바이올린 깡패한테 잘 보이려고 다이어트해서 그런 거잖아!

 

왕재수 : 너 로만한테 내 몸무게 얘기하면 죽을 줄 알아!

 

 

4. 머리색 + 헤어스타일

칠흑 같은 검은색. 화관처럼 살짝 흐트러진 풍성한 검은 머리.

 

왕재수 : 나 원래 머리 더 길고 멋있었는데 감옥 가서 끔찍한 죄수복 입고 머리도 깎였어 ㅠ 되게 가위질 못하는 놈한테 걸려서 진짜 열 받았어. 근데 아프고 나서 그런가 머리 빨리 안 길어, 지금 스타일 진짜 맘에 안 들어. 시골이라 괜찮은 미용실도 없어. 아, 시골 싫어. 남자는 헤어스타일이 중요한데. 칫.

 

5. 눈 색깔

 

왕재수 : 호수처럼 깊고 밤하늘처럼 아름다운 검은 눈!!! 긴 속눈썹이 화룡점정! 나의 이 아름다운 눈에 반한 남녀들이 줄을 서고 볼쇼이에서는 검은 눈의 천사라고 칭송을 받았으며 무수한 연애편지에 당신의 보석 같은 검은 눈에 넋을 잃고 빠져들고 말았어요라는 글귀가 넘쳐났지!

 

베르닌 : 근데 너나 나나 똑같이 까만 눈인데 왜 너는 호수처럼 깊고 밤하늘처럼 아름답고 보석 같은 눈이고 나는 단추눈이야 ㅠㅠ 작가 미워.

 

왕재수 : 다이아몬드랑 흑연은 둘 다 탄소로 되어 있지만 결합구조에 따라 갈린다지..

 

베르닌 : 왕재수. 반동분자. 싸가지...

 

 

6. 당신의 패션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템은?

 

왕재수 : 패션의 완성은 얼굴! 하지만 이것은 1단계일 뿐. 진정 중요한 것은 완벽한 몸매와 비율이라고 할 수 있지. 일단 미모가 받쳐주기 때문에 난 아무 헝겊 쪼가리나 걸쳐도 다 예쁘지만... 극장에 나갈 때는 어쨌든 감독이니까 좀 얌전하게 입으라는 말을 들어서 심플하게 무채색 계열의 핏이 잘 맞는 옷이나 바랜 진으로 기본 세팅을 하고 여기에 스카프나 멋진 신발로 액센트를 가미하지.

 

베르닌 : 그게 얌전하게 입은 거야? 완전 날티 나. 맨날 아르마나 입고...

 

왕재수 : 아르마니!!!!!

 

베르닌 : 스카프는 에르미..

 

왕재수 ; 에르메스라고, 이 바보야!!!

 

베르닌 : 뭔지 모르지만 역시 넌 부르주아 반동분자...

 

 

7. 가장 좋아하는 음식 :

제대로 육수를 내어 끓인 따끈한 보르쉬, 담백한 생선찜. 사과파이.

 

 

8. 당신의 시그니처 칼라는?

 

왕재수 : 내가 좋아하는 색은 기본적으로는 검은색과 진홍색이야. 전자는 내 머리와 눈 색깔에 맞고, 후자는 내 하얀 피부와 찰떡궁합이지. 하지만 어두운 녹색이나 청회색도 자주 활용해. 무대 올라가던 시절에는 특히 라 바야데르나 해적의 세루리언 블루 의상이 굉장히 잘 어울렸지. 보통 나처럼 미모가 뛰어나고 피부가 곱고 흰 사람은 무슨 색이나 잘 어울리는 법이거든. 심지어 분홍색마저 잘 소화하지만 개인적으로 그건 좀 별로야.

 

베르닌 : 그래도 렐랴가 짜준 그 분홍색 목도리는 예뻤는데.

 

왕재수 : 그거 두툼해서 수도관 싸매면 딱이었는데 좀 아깝다... 근데 너 왜 그거 안 두르고 다녀? 렐랴가 한 땀 한 땀 떠서 좋다면서.

 

베르닌 : 분홍색이라서 ㅜㅜ

 

왕재수 : 하긴 넌 피부가 칙칙하니 분홍색은 쥐약이겠다.

 

베르닌 : 싸가지 없는 놈...

 

 

9. 취미

락음악 감상, 안무하기, 독서, 파티에서 춤추고 놀기

 

 

10. 데이트 상대에게서 제일 먼저 보는 것

 

왕재수 : 큰 키와 두툼한 손과 골격 구조!

 

베르닌 : 골격 구조는 왜!

 

왕재수 : 그래야 어떻게 응응응을 할지 견적이 나옴!

 

베르닌 : 너는 대체!! 그럼 두툼한 손은!

 

왕재수 : 난 두툼하고 거친 손으로 쓰다듬어주는 게 좋더라고.

 

베르닌 : 나 키 크고... 손 두툼하고 맨날 서류작업해서 거친데... 으윽..

 

왕재수 : 넌 단추눈이니까 거기서 무효!

 

베르닌 : 단추 단추 하지 말라고!!!

 

왕재수 : 이상하네. 너도 나랑 하고 싶었어? 근데 왜 아닌 척.

 

베르닌 : 아니야! 아니라고! 바이올린 아저씨한테 가!

 

왕재수 : 그러니까 로만은 키도 크고 골격 구조도 완전 딱이야! 손은 거칠기보단 섬세한 타입이지만 대신 악기 연주자라 그런가 손재주가 끝내줘! 그 손으로 어루만지면...

 

베르닌 : 알고 싶지 않아, 너와 바이올린 아저씨의 응응에 대한 얘긴...

 

 

11. 코즐로프와 베르닌이 물에 빠진다면 누구를 먼저 구하겠는가.

 

왕재수 : 단추!!

 

베르닌 : (감동) 어, 정말? 진짜? 고마워... 정말 의외네. 나를 구하다니.. 내가 여태 널 너무 오해했나봐...

 

왕재수 : 로만이 수영을 엄청 잘 하더라고.

 

베르닌 : 나도 수영 잘해. 동아리도 하고 대회에도 나갔는데..

 

왕재수 : 그럼 아무도 안 구해! 내 몸 하나 건사하면 됐지!

 

작가(토끼) : 안 돼... 한 사람 골라야 돼! 음, 코즐로프와 베르닌이 둘 다 쥐가 나서 수영을 못한다면?

 

왕재수 : 이 토낀 뭐니... 아 귀찮아. 몰라, 자기 살 길 자기가 개척하라 해.

 

작가(토끼) : 그래도 하나만 골라보렴~ 예쁜 네가 하나만 골라보렴~

 

왕재수 : (예쁘다고 해서 기분 좋아짐) 단추!

 

베르닌 : 오오...

 

작가(토끼) : 왜?

 

왕재수 : 단추가 밥을 더 잘해...

 

 

12. 당신의 매력 포인트는?

 

왕재수 : 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반짝반짝 다 예쁜데 어떻게 하나만 고르지...

 

베르닌 : 그래도 잘난 얼굴이지 뭐. 맨날 얼굴값 하는 놈 ㅠㅠ

 

왕재수 : 근데 내 몸매가 또 끝내주는데...

 

베르닌 : 네 몸매 따윈 알고 싶지 않아!

 

 

13. 가브릴로프에서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곳은?

왕재수 : 이따위 깡시골에 무슨 좋아하는 곳이 있어!!! 으윽..

 

 

14. 좋아하는 음악/가수/작곡가 등등

 

클래식 : 차이코프스키.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라벨. 바그너. 말러 등등

대중음악 : 블라지미르 브이소츠키. 데이빗 보위. 루 리드. 도어스 등등

 

 

15. 어렸을 적 장래희망

우주비행사. 무용수

 

 

16. 영화에 출연하게 된다면 맡고 싶은 역할

 

왕재수 : 나 발레 필름 많이 찍었어. 그리고 무용수 시절에 렌필름이랑 모스필름 감독들이 자꾸 로맨스 영화랑 사극 영화 찍자고 러브콜 보내서 거절하느라 죽는 줄 알았어.

 

베르닌 : 우와, 그냥 찍지...

 

왕재수 : 크레믈린에 있는 울 아저씨가 찍지 말랬어.

 

베르닌 : 왜?

 

왕재수 : 난 가뜩이나 예뻐서 인기 많은데 더 인기 많아지면 아저씨가 내 스토커들 관리하기 힘들다고.

 

베르닌 : 스토커들을 왜 그 아저씨가 관리해? 그 관리란 건 무슨 뜻이야?

 

왕재수 : 자꾸 꼬치꼬치 묻지 마. 모르는 게 약이야.

 

 

17.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것

검열! 예술가 탄압! 공산주의! 독재! 고문!! 시골!!!!!!!!!!!!!!!!!

(+ 바퀴벌레, 곱등이, 쥐 ㅠㅠ)

 

18. 지금 하고 싶은 것

로만이랑 화끈하게 응응응을...

 

19. 지금 입고 있는 것

목욕 가운.

 

20. 작가에게 한 마디

 

왕재수 : 야, 토끼! 나 본편 안 갈래. 어차피 본편도 시골, 여기도 시골이면 이 시리즈가 더 나은 거 같아. 집사도 있고... 나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고. 본편 가면 자꾸 폼 잡고 갖은 고생 다 하고 온갖 진지한 얘기만 해야 되고... 본편 시리즈에선 나 막 고문도 받고 심지어 칼로 손목도 그었댔어. 정말 저질이야. 빨랑 이 시리즈 다음 회 써줘. 내가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로 금의환향하는 걸로! 그리고 단추는 데려갈래. 도시에서도 집사는 필요해. 있으면 편할 거 같아.

 

베르닌 : 내가 왜!!! 난 본편 갈 거야! 나 이 시리즈 너무 싫어!!

 

작가(토끼) : 실컷 떠들어라. 어차피 너네는 내 노리개! 단추 너는 이 시리즈에서 내 업무 스트레스를 푸는 용도! 왕재수 너는 본편에서 나의 창작 열망을 대리하여 영원히 고통 받는 존재!

 

왕재수 : 야, 단추야! 저 토끼 유리지갑 좀 밟아버려! 국세청 좀 데려와.

 

베르닌 : 난 서무라서 힘이 없어. 크레믈린의 너네 아저씨한테 부탁해 ㅠㅠ

 

작가(토끼) : 크레믈린 아저씨도 내가 만들었지롱~ 내 손가락 하나면 모가지!

 

왕재수, 베르닌 : 악마... 토끼악마...

 

 

 

토끼 : 이렇게 귀여운 나에게 토끼악마라니!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은 내일, 스페호프와 코즐로프와 렐랴의 답변으로 이어진다.

얘들 등장 비중은 단추와 왕재수보다 적지만 이들이 풀어놓는 의외의 이야기를 놓치지 마세요~ ㅋㅋ

 

 

 

 

 

 

 

:
Posted by liontamer

이번 주는 금요일에 잠시 여행을 떠나기 때문에, 수요일에 서무의 슬픔 시리즈 8편을 먼저 올려본다. 전에 writing 폴더에 따로 올렸던 부활절 단편 Jewels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기념일 픽션이다. 바로 새해 전야 :) 이 글을 쓴 시점도 12월 말이었다.  

 

러시아도 새해가 큰 명절이다. 노어로는 ‘노브이 고드’라고 하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는 ‘스 노브임 고돔’(С НОВЫМ ГОДОМ!)이다. 12월 31일 밤에는 전통적으로 가족들이나 친구들, 연인들끼리 모여 텔레비전으로 0시 종 치는 것을 보고 종 치는 순간 샴페인을 쨍 하고 부딪치며 ‘스 노브임 고돔~’을 외친다.  

 

아주 오래 전, 맨 처음 러시아에 가서 연수할 때 기숙사에서 새해를 맞았는데, 그때 유학생들끼리 모여서 저렇게 샴페인 따고 놀았다. 굉장히 재미있었고 아직도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 

 

그런데 우리의 단추 베르닌은 과연 어떻게 새해를 맞이할 것인가.. 새해엔 원래 애인이랑 샴페인도 따고 찐하게 키스도 해야 하는데... 해답은 이번 에피소드에~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1년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하루하루 시간은 지나가고, 드디어 업무에 찌든 베르닌에게도 숨 쉴 틈이 생겼으니 그것은 바로 신년 휴가! 그러나 잠시라도 집사를 가만 놔두지 않는 주인어른 왕재수께서는 새해 전야에도 그를 호출하였으니...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러시아에서는 서양식 크리스마스인 12월 25일이 아니라 정교식인 1월 7일을 성탄절로 지낸다. 물론 소련 시절엔 정교 신앙에 대한 탄압이 있어 대놓고 즐기지는 않았겠지만. 호두까기 인형도 그래서 연말 메뉴이다. 마린스키(소련 시절 키로프)에서도 호두까기 인형 시즌이 되면 바가노바 발레학교 학생들이 무대에 오른다.

이 에피소드에서는 촌동네 시립극장 예술감독이 되어버려 모든 게 성에 안 차는 왕재수가 발레단을 다잡아가며 새해 전야에 호두까기 인형을 무대에 올리고 있다 :) 무대와 무용수들에 대해 왕재수가 하는 얘기는 본편의 미샤와 비슷한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만.. 하여튼~ 본편의 미샤는 보통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

 

** 여기 등장하는 만두는 러시아식 만두인 '펠메니'이다. 펠메니에는 만두소라든지 피의 모양에 따라 종류가 여러 가지 있는데 공장 만두를 많이 먹긴 하지만 역시 직접 빚은 게 더 맛있긴 하다.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8 

 

 

 

서무의 슬픔

-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12월 31일이었고 가브릴로프 역시 여느 소련 도시와 다름없이 축제 분위기였다. 광장에는 거대한 트리가 세워졌고 너도나도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과 0시 종 울리는 걸 보면서 샴페인 잔을 부딪칠 생각에 들떴다.

 

몇 년 째 솔로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다닐 베르닌이 이 날을 고대했던 이유는 지극히 단순했다. 12일간의 신년 휴가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31일에 종무식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직행해서 밀린 잠을 자고 사흘쯤은 집에 콕 박혀서 뒹굴면서 텔레비전이나 보다가 심심해지면 즐라타야 강가에 얼음낚시나 가고 또 심심하면 썰매나 타러 가야지 하며 설렜다. 12일 동안 지긋지긋한 서류 업무도, 각종 서무의 잡일도 할 필요가 없고 끔찍한 스페호프 국장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자 훨훨 날아오를 것 같았다. 일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고 아무 생각 없이 빈둥거리며 실컷 놀아야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종무식은 1시간가량 지속되었다. 대부분은 인사말 하기 좋아하는 스페호프 국장의 설교 때문이었다. 국장의 연설이 계속되자 직원들 태반은 설마 저 인간이 저녁까지 우리를 붙잡아 놓으려나 하고 공포에 떨기 시작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스페호프는 가족들과 함께 흑해로 여행을 떠나기로 되어 있었고 11시에 연설을 마쳤다. 다들 신나게 강당을 뛰쳐나갔다. 총괄 서무라는 이유로 베르닌이 강당을 정리하고 있는데 국장이 곁으로 다가왔다.

 

“ 어,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 그래, 자네도 복 많이 받게. 신년에는 좀 빠릿빠릿한 직원이 되어 보게. 그리고 행정의 기본도 잘 연마해서 타의모범이 되길 바라네. ”

 

“ 예... ”

 

“ 참, 자네 휴가라고 주어진 일을 등한시하면 안 되네. ”

 

“ 예? 주어진 일이라뇨? 보고서들은 모두 마쳤고 사무실 달력들도 모두 바꿔놓았고 업무추진비 정산도 며칠 전 다 끝냈고 서류철들도 신년용으로 싹 바꿔서 제목도 다 써놓았고 주차장 전구 나간 것도 다 갈아놨고... ”

 

그런 거 말고! 자네 본연의 업무 말이야!

 

“ 제 본연의 업무는... 저, 서무 업무는 다 했는데... ”

 

“ 자네 감시분석부 소속 아닌가? 그 불여우!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휴가 동안에도 그놈 감시는 철저히 해야 해. 매일 그놈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혹시라도 수상한 짓을 하는 경우 당장 흑해로 장거리 전화를 하게. 내가 비행기를 타고라도 날아올 테니! 뭐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 어차피 아침에 하고 저녁에 하고 밤에도 하는 사이니 휴가 때도 계속 같이 뒹굴 테고... 에이 찝찝해. 사내 녀석이랑... ”

 

“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새해 휴가라고요! 전 그 자식의 집사도 아니고 경호원도 아닙니다! 새해에도 그 자식 뒤치다꺼리를 하고 보고서까지 매일 쓰라니요... 제발 새해에는 업무분장을 좀 바꿔주시면 안됩니까? 저는 서무 업무만으로도 일이 넘쳐납니다. 거기에 부서 업무에 자료작성 업무까지... 그 와중에 걜 감시까지 해야 하니 퇴근해서도 쉴 시간이 전혀 없어요. 내년이면 저도 3년차가 되니 제발... 저도 더 이상 신입직원이 아니잖아요. 아니면 서무 업무라도 제외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

 

“ 이게 웬 헛소리람. 그건 모두 자네가 당연히 해야 할 업무야! 자네의 주무는 감시업무야! 감시부서에 소속되어 있으니 당연하지. 서무란 당연히 해야 하는 부수적인 업무에 불과해! 자네가 아직 기본이 부족해서 부업무에 매달려 쩔쩔 매는 것뿐이지! 그리고 내년 예산도 동결, 우리 정원도 동결이기 때문에 향후 일 년 간 공채 모집은 없을 예정이네. 그러니까 자네는 계속 막내 직원이고 당연히 서무는 계속 맡아야 해. 겨우 3년차가 된다고 벌써부터 군기가 빠져가지고... 10년 20년 다니고 있는 선배들을 생각해보게! 어디 그깟 3년 가지고 명함을 내밀어. 내 말 명심하게! 그 불여우에 대해서는 뒹굴고 놀지만 말고 제대로 된 보고서를 써 내도록! 그럼 난 이만 가네, 비행기 시간이 다가와서. ”

  

 

*    *    *

 

무척 화가 났지만 어쨌든 국장의 명령을 어길 만큼 배짱이 좋지는 못한 베르닌은 할 수 없이 저녁에 극장으로 갔다. 망할 놈의 왕재수는 하필 극장 예술감독이었던 탓에 일 년의 마지막 밤에도 공연을 지휘하고 있었다. 연말 단골메뉴인 호두까기 인형이었다. 극장은 가족들과 어린아이들로 미어터졌다. 게다가 송년 공연이랍시고 로비에는 커다랗고 화려한 트리가 세워지고 쿠키와 사탕들이 가득 담긴 접시들이 좍 늘어서 있어 어린애들의 꺅꺅거리는 소리와 과자를 잡아채다 싸우고 우는 소리가 어우러져 시장통 같았다.

 

공연 시작 30분 전에 백스테이지로 가보니 왕재수가 스태프들과 무용수들을 역시나 쥐 잡듯 잡고 있었다. 조명 감독을 들들 볶은 후 이번에는 무대 효과 담당자를 닦달했다.

 

“ 드라이아이스를 그쪽에서 투입하면 연기가 무용수들 얼굴을 다 가리잖아! 무슨 램프의 요정이냐? 이건 호두까기야. 눈송이 요정들이란 말이야! 안개는 많이 필요 없어! 대신 눈을 잘 뿌려야 할 거 아냐! 누가 그렇게 뿌리래! 무대 전체에서 이렇게 방사형으로 쏟아져야 관객석에서 볼 때 더 화려하고 예뻐 보이지! 아니, 그렇다고 그렇게 많이 들이부으면 무용수 얼굴을 다 가리잖아! 으아, 정말 생각 좀 하면서 해! 기계적으로 드라이아이스 던져 넣고 스프레이로 눈 뿌려대지 말고!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려보란 말이야! 발레가 뭐야, 특히 호두까기! 첫째도 예뻐야 하고 둘째도 예뻐야 해! 아이들이 보고 ‘우와 환상적이다!’ 하고 감탄해야 한단 말이야. 그렇지. 바로 그거야! 있다가 공연할 때도 그 방향으로 뿌려야 해. ”

 

간신히 합격한 무대 스태프가 식은땀을 닦으며 물러서기가 무섭게 왕재수는 이번에는 주역 무용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너! 왕자! 그게 왕자의 몸놀림이냐? 하나도 안 멋있잖아. 엉거주춤한 게 어디 새우잡이 어선에서 그물 치다 온 놈 같잖아! 누가 피루엣 하다가 그렇게 휘청거리래. 중심 못 잡아? 그리고 여자 똑바로 못 들어? 허리를 제대로 못 받쳐주니까 여자 다리가 처지잖아! ”

 

눈물 쏙 빠지게 혼나던 왕자 역의 빅토르가 자기 파트너 레나를 가리키며 미약한 목소리로 항의했다.

 

“ 저, 그게요... 얘가 요즘 실연당하고 스트레스 받는다고 너무 많이 먹어서 잔뜩 쪘다고요. 가뜩이나 큰 앤데 이제 너무 무거워서 똑바로 들기가 힘들어요. 제 잘못이 아니에요. 얘가 다이어트를 안 해서... ”

 

베르닌이 봐도 여주인공 레나가 통통하고 키와 체격이 크긴 했다. 자존심이 상한 발레리나가 막 손톱을 세우고 덤벼들기 직전 왕재수가 빅토르의 뒤통수를 찰싹 내리쳤다.

 

시끄러워! 어디서 핑계야! 2인무는 무조건 사내놈 책임이야! 파트너가 40킬로든 100킬로든 상관없어, 사내놈이 잘 들어주고 돌려주면 되는 거야! 그깟 몸무게가 뭐가 중요해! 무대 위에서 여자 파트너는 무조건 공주야, 무조건 네가 푹 빠진 상대라고! 반하면 무슨 짓을 못해, 한 손으로도 들고 펄쩍펄쩍 뛰어야지! 한번만 더 여자 핑계 대봐, 확 잘라버릴 거야!

 

빅토르는 너무나 억울했는지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하소연했다.

 

“ 알겠어요, 감독님. 알겠는데요... 근데 진짜 감독님은 몰라서 그래요. 감독님은 천재라서 제일 좋은 극장에서 실력도 최고 좋은 여자들하고만 췄잖아요. 파트너들도 다 엄청 날씬하고 하늘하늘했잖아요. 쟤는 차원이 다르다고요. 최소 60킬로는 너끈히 넘겨요. 지금은 감독님보다도 더 나갈지도 몰라요... 저 너무 억울해요. 감독님도 쟤랑 춰보면 그런 말 안 나올 거라고요... 한번 들어 올릴 때마다 허리가 부러지는 것 같아요. ”

 

“ 미치겠네. 이 멍충이. 아, 이래서 시골은 답이 없다니까. 파트너 몸무게가 중요한 게 아니고 네 녀석이 못 춰서 그런 거라니까! 어휴... 이거 봐봐! ”

 

화가 나서 날뛰던 왕재수가 한두 번 몸을 풀더니 갑자기 레나를 번쩍 들어올렸다. 다리를 쫙 편 레나의 허리를 가볍게 받치고 빙글빙글 돌았다. 베르닌은 그 유연하고 우아한 동작에 깜짝 놀랐다. 빅토르의 말대로 레나는 거의 왕재수만한 키에 체격은 더 튼실해 보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왕재수는 그 덩치 큰 레나를 한손으로도 받치고 펄쩍 뛰었다.

 

순식간에 두 눈이 하트로 가득 찬 레나를 내려놓고 왕재수가 빅토르를 무섭게 째려보았다. 할 말이 없어진 빅토르는 쭈뼛거리며 사과를 했다.

 

“ 저... 제가 잘못했어요. 근데 진짜 잘 추시네요. 그냥 저 대신 무대 올라가시면 안 될까요. 레나도 그쪽이 더 좋을 것 같은데. ”

 

“ 이게 어디서 사보타지야! 송년 무대에서 왕자 추는 게 얼마나 영광인 줄 몰라? 나도 맘 같아선 갈아치우고 싶네! 내가 추든가. 어휴... ”

 

왕재수가 빅토르의 자세를 교정해주는 동안 베르닌은 뒤에서 스태프들과 다른 무용수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유심히 듣고 수첩에 적었다. 생각 외로 욕설이 아니라 감탄이었다. 알고 보니 지난 체육대회 이후 왕재수의 팬들이 많이 생긴 모양이었다. 남자들은 단순했기 때문에 왕재수가 신체적 능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에 어쨌든 감독 자리를 그냥 꿰찬 건 아니라고 인정하기 시작했고 여자들은 그저 그의 미모를 흠모하고 또 흠모할 뿐이었다.

 

기적적으로 빅토르가 레나를 똑바로 들 수 있게 되자 왕재수는 이제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갔다. 박자가 어떻고 무용수 솔로가 어떻고 하며 기관총처럼 지시를 쏟아냈다. 지휘자 할아버지는 한숨을 쉬었고 단원들은 입을 벌린 채 괴로워했다. 그리고 성깔 더럽지만 어쨌든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인 코즐로프는 왕재수가 무슨 말을 해도 귀엽다는 듯 만면에 웃음을 띠고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하지만 그조차도 왕재수의 화살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로만! 마지막 왕자 솔로 때 그렇게 축축 늘어지게 연주할 거야? 꼭 장송곡 같잖아. 30% 정도 빠르게! ”

 

코즐로프는 혀끝까지 ‘아이구 우리 귀염둥이 비둘기야~ 30%고 50%고 네가 원한다면 전부 해 주마~’ 라고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동료들 시선 때문에 꾹 참고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겨우 모든 지시를 마치고 공연 시작 10분 전이 되자 왕재수가 한숨을 쉬며 복도로 나오더니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그러더니 베르닌을 발견했다. 눈을 반짝 빛냈다.

 

“ 아, 너도 공연 보러 왔구나? 자리 어디야? ”

 

“ 어, 나 자리 없어. 표 살 시간이 없었거든. 난 그냥 너 감시...

 

“ 2층 로열박스에 자리 하나 남아. 거기 가서 봐. ”

 

“ 아니, 그렇게 안 해줘도... 그리고 거긴 엄청 좋은 자리... 우리 국장 같은 사람이나 앉는... ”

 

흥, 너네 국장이 발레가 뭔지 알기나 한대? 내가 감독이니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오늘 공연 괜찮을 거야. 우리 애들 전보단 훨씬 잘 추거든. ”

 

“ 아까 보니까 빅토르를 쥐 잡듯이... ”

 

“ 혼내야 실력이 늘지. 기본기가 너무 안 돼 있다니까. 여자 몸무게 타령이나 하고. 진짜 촌스러워. 자, 이 표 가져가. 끝나고 나 태워다 줄 거지? ”

 

내가 꼭 태워다 줘야 돼? 오늘 밤 바이올린 아저씨랑 같이 보낼 거 아냐? ”

 

“ 로만은 오케스트라 애들이랑 뒤풀이하고 열한 시 반에 오기로 했어. 그리고 나 끝나자마자 집으로 빨리 가야 돼. 아홉시에 끝나고 곧장 갈게 시동 걸어놔. 알았지? ”

 

“ 어. 알았어. ”

 

베르닌은 왕재수가 쥐어준 표를 들고 로열박스로 갔다. 2층 맨 앞 가운데의 아주 좋은 자리였다. 그는 발레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어쨌든 음악도 좋았고 무대도 예쁘고 화려해서 두 시간 가까이 재미있게 공연을 보았다. 눈송이 요정들이 나올 때 드라이아이스 안개도 적당했고 인공 눈도 방사형으로 예쁘게 뿌려졌다. 2막에서 빅토르는 레나를 잘 들어 올렸고 왕자 솔로를 출 때 음악도 빠르고 흥겨웠다. 이 정도면 까다로운 왕재수가 만족했으려나 싶었다.

 

 

*   *   *

   

왕재수는 평소 공연이 끝난 후에도 스태프들과 무용수들에게 그날의 코멘트를 하고 앞으로 고칠 사항을 지적하느라 늦게 내려오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정말 아홉시에 주차장으로 왔다. 그러나 그가 간과한 것은 공연을 보고 나온 관객들도 주차장으로 몰리는 때란 거였다. 왕재수를 발견한 여자 관객들이 꺅꺅 소리를 지르며 사인을 해달라고 몰려들었다.

 

“ 어머, 대박이야! 실물이 더 잘생겼어! ”

 

“ 아유, 진짜 꽃미남이네! 꺅! ”

 

“ 나 오빠 팬이에요! 옛날부터 좋아했어요! 왜 우리 무대엔 안 올라와요? 꺄아악, 결혼해 줘요! ”

 

“ 어머어머, 속눈썹이 나보다 더 길어! 피부에서 빛이 나! ”

 

왕재수는 처음에는 짜증을 꾹 눌러 참고 보통 렐랴에게 지어주곤 하던 영업용 미소와 함께 사인을 해주었다. 그러나 소문을 듣고 더 몰려온 여자들에게 둘러싸여서 급기야 머리카락도 뜯기고 기습 포옹과 키스 등 격렬한 스킨십을 당하기 시작하자 비명을 지르며 베르닌을 찾았다.

 

“ 다닐, 나 좀 구해줘! 제발 살려줘! ”

 

베르닌은 가만히 있으려고 했지만 왕재수가 너무 애절하게 그를 찾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차 문을 열고 나갔다. 보안위원회 신분증을 쳐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 KGB입니다! 다들 해산! 안 그러면 불법집회와 폭행죄로 체포할 겁니다! ”

 

사람들이 깜짝 놀라 홍해처럼 갈라졌다. 그 틈에 베르닌은 왕재수를 낚아채서 차로 데리고 갔다. 막 문을 닫는데 바깥에서 성이 난 여자들이 욕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 주로 예술가를 탄압하는 스탈린주의자니, 더러운 KGB 스파이니 하는 내용이었다. 베르닌은 무척 억울했지만 어쨌든 차를 출발시켰다.

 

“ 야, 너 괜찮아? ”

 

“ 헉헉... 잊고 있었어, 여자들 무서운 거. 죽는 줄 알았네. ”

 

왕재수가 사색이 된 얼굴로 거울을 보면서 까치집이 된 머리를 매만지고 구겨진 스카프와 코트를 바로잡았다. 손수건을 꺼내 얼굴 여기저기 찍혀 있는 립스틱 자국을 지웠다.

 

“ 야, 뒷목덜미에도 있어. ”

 

“ 으, 소름끼쳐. 정말 예쁜 것도 죄라니까. ”

 

“ 소름끼쳐? 나 같으면 은근히 기분 좋을 거 같은데. 다 네 팬들이고... 아까 보니까 예쁜 여자들도 많던데. ”

 

“ 예쁜 여자가 나한테 무슨 소용... 너 속도 좀 더 내면 안 돼? ”

 

“ 더 올리면 속도위반인데. ”

 

“ 나 빨리 가야 돼. 시간 없어. ”

 

“ 왜? 바이올린 아저씬 늦게 온다며. ”

 

“ 그래봤자 두 시간밖에 없는데... 아, 미치겠네. 너 나 좀 도와줘. ”

 

“ 뭘 도와줘? ”

 

“ 만두... ”

 

“ 웬 만두? 펠메니? ”

 

“ 응. 나 만두 만들어야 돼. ”

 

“ 아, 너 새해 음식 준비하는 거구나. 맞아, 우리 동네는 새해 되면 만두 먹어. 나도 어릴 때 31일에 온 가족이 모여서 만두 빚고 설날 되면 쪄서 먹고 수프에도 넣어 먹고... ”

 

“ 에잇, 망할 놈의 시골... 왜 하필이면 만두를 먹는 거야... 그냥 샌드위치나 먹으면 될 것을. 에잇... ”

 

“ 야, 너 지금 우리 동네 전통 무시해? 그 잘난 레닌그라드에서는 샌드위치 쪼가리나 먹나보지? ”

 

“ 아니, 우리도 가끔 만두 먹긴 했는데. 난 만들어먹은 적은 없단 말이야. 남들이 나한테 해다 바쳤지... 아, 왜 만두야. 아 머리 아파... ”

 

“ 그냥 사다 먹어. 요즘은 만드는 집 별로 없을 걸. 하긴 지금은 가게 문 다 닫았겠다. 우리 집 냉동실에 전에 사먹고 남은 거 반 봉지쯤 있는데 먹고 싶다면 줄게. ”

 

“ 공장에서 나온 만두는 안 돼. 아아... ”

 

“ 왜 이렇게 까다롭니. 전에는 그거 삶아줘도 잘만 먹더니. ”

 

“ 로만이... 너랑 비슷한 말을 하면서... 자기 어릴 때 온 가족이 모여앉아 만두 빚고... 텔레비전으로 0시 종 치는 거 보면서 샴페인 건배할 때 자기는 반죽 갖고 놀고... 종 치고 나면 엄마가 만두 쪄줬다고. 그때 너무 좋아서 자기는 어른 되면 꼭 만두를 잘 빚어주는 여자랑 결혼해야겠다고 다짐했다잖아.

 

“ 그 바이올린 아저씨 의외로 소박하네. 근데 그 인간은 여자 안 좋아하잖아. 결혼은 무슨. ”

 

“ 그게... 정체성을 자각하면서 여자랑 결혼해야겠다는 마음은 없어졌는데 만두를 잘 빚어주는 파트너에 대한 깊은 로망은 남았대... ”

 

“ 젠장, 가부장주의 깡패 같으니. 만두를 잘 빚어야 한다고 하질 않나. 엄청 날씬하고 어린 애를 밝히지 않나. 진짜 재수 없네. ”

 

“ 너 지금 로만 헐뜯는 거야? ”

 

“ 그렇잖아! 깡패 아저씨 주제에. 그냥 내 냉동만두 가져가서 삶아줘. 네가 빚었다고 하면 되잖아. ”

 

“ 근데 로만이 엄청 눈썰미가 좋거든. 눈치도 빠르고. 공장 만두인 거 금방 알아챌 거야. 간신히 내 미모로 묶어놨는데 만두 못 빚는다고 버림받긴 싫단 말이야. ”

 

“ 그깟 만두 못 빚었다고 버릴 놈이라면 애초부터 헤어지는 게 낫지! ”

 

“ 싫어. 내가 그랬잖아, 로만이 잠자리가 진짜 끝내준다니까. 버림받기 싫단 말이야. 근데 나 요리 하나도 못하는 거 알잖아. 여태 남이 해준 것만 먹었는데 이게 웬 날벼락이니. 어제 요리책도 샀는데 아무리 봐도 진짜 하나도 모르겠어. 만두는 심지어 반죽도 해야 되고 소인지 뭔지도 만들어야 된다 하고... 제발 좀 도와줘. 안 그러면 나 정말 큰일이야. ”

 

왕재수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베르닌을 바라보면서 사슴 같은 눈망울을 깜박깜박했다. 속눈썹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 야, 울지 마! 알았어. 나도 만두 안 빚어봤지만... 하여튼 뭐 어렵겠냐. 그냥 밀가루 반죽해서 밀고 고기 간 거 넣으면 되겠지 뭐. 재료는 있어? ”

 

“ 응. 요리책에 나온 거 어제 다 사다 놨어. ”

 

“ 만두 빚는 것만 도와준다! 삶는 건 네가 해! ”

 

“ 삶으면 안 돼. 쪄야 된대.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지만. 찌는 것까지 도와줘. 응? ”

 

“ 싫어, 0시 종 치는 것까지 너랑 보고 싶진 않단 말이야. 그것도 그 바이올린 깡패까지 같이 있는 자리에서! ”

 

“ 0시 종 치기 전에 찌는 것까지 다 끝내면 되잖아. 제발 좀 도와줘. 너 요리 잘 하잖아. 여기서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네가 제일 잘 한단 말이야. ”

 

“ 흠흠... 내가 자취를 오래 해서 요리를 좀 하긴 하지. 그래, 그깟 만두 뭐가 어렵겠어. 해줄게! 해줄 테니까 제발 속눈썹 좀 그렇게 깜박거리지 마. 내 눈이 다 시큰거려. ”

 

“ 이상하다, 안 통하네... ”

 

“ 당연하지! 난 사내자식 수작에 안 넘어가! 그런 건 바이올린 아저씨한테나 하란 말이야! ”

 

“ 칫. ”

 

 

*    *    *

  

 

베르닌은 먼저 냉장고를 살폈다. 재료는 모두 있었다. 혹시나 해서 요리책을 펼쳐보고 순서를 훑었다.

 

“ 야, 너 반죽할래, 아니면 만두소 만들래? ”

 

“ 나 둘 다 할 줄 몰라. ”

 

“ 시간이 없으니까 동시에 해야 되는데. 너 칼질 할 줄 알아? ”

 

“ 아니, 못해. 사과도 못 깎아. 무용수는 함부로 칼 같은 거 손대면 안 돼. 흉터 생기면 큰일난단 말이야. ”

 

“ 어련하겠냐. 그럼 반죽해. 양파 썰고 고기소 만드는 건 내가 할 테니까. ”

 

“ 반죽 어떻게 해야 돼? ”

 

“ 거기 밀가루 두 컵 넣고, 물 넣어가면서 반죽하면 돼. ”

 

왕재수가 커다란 사발에 밀가루와 물을 부어 반죽을 하는 동안 베르닌은 현란한 칼솜씨를 발휘해 양파를 다지고 갈아놓은 고기의 핏물을 뺀 후 조금 더 곱게 다졌다. 막 양파와 고기를 섞고 있는데 왕재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 이거 반죽 맞아? 왜 자꾸 죽처럼 되지? ”

 

으악, 너 물 얼마나 넣은 거야!

 

“ 어... 이만큼... ”

 

왕재수가 바가지를 보여주었다. 족히 밀가루 양의 두 배는 될 것 같았다. 베르닌은 기절초풍했다. 사발은 밀가루 풀어놓은 물로 가득했다.

 

“ 이 바보야, 밀가루가 무슨 분유나 코코아인 줄 아니? 수프 끓일 것도 아닌데 물을 이렇게 많이 넣으면 어떡해! ”

 

“ 네가 밀가루 두 컵이라고만 하고 물은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말 안 해줬잖아... ”

 

“ 에휴... ”

 

베르닌은 사발을 밀어놓고 새 그릇에 다시 밀가루를 두 컵 쏟았다. 물을 조금씩 부어가며 농도를 맞췄다. 손으로 조물조물 반죽을 했고 살짝 묽은 것 같아 밀가루를 약간 더 넣었다. 마침내 완벽한 반죽이 되었다. 왕재수는 감탄했다.

 

“ 우와, 반죽이다! 아이 신기해. ”

 

“ 시간 없으니까 빨리 만두피 만들어. 일단 내가 반죽 밀어줄게. ”

 

“ 어떻게 만들어야 돼? ”

 

“ 이렇게 조금씩 떼어서 동그랗게 만든 다음에 눌러서 얇게 펴는 거야. 만들고 있어. 만두소 완성하고 양념 좀 하게. ”

 

“ 응. 신난다. ”

 

베르닌은 열심히 고기와 양파를 섞고 소금과 후추를 뿌려 양념을 했다. 면보에 싸서 수분을 쫙 빼냈다. 대충 소를 완성한 후 만두피가 몇 개나 되는지 돌아봤다가 또 기절초풍했다.

 

“ 악, 만두피를 이렇게 다닥다닥 쌓으면 어떡해! "

 

“ 왜? 차곡차곡 쌓아놔야 순서대로 고기 넣기도 편하고... ”

 

“ 어휴... 다 달라붙어서 못 떼잖아... 밀가루도 중간 중간 뿌려줘야 안 달라붙는 건데... ”

 

“ 네가 말 안 해줬잖아... 밀가루는 반죽할 때 두 컵 넣으랬는데 지금은 또 중간 중간 뿌리래. 어려워. 어헝...

 

왕재수가 울먹거렸다. 야단맞은 것 때문이라기보다는 베르닌이 만두피들을 들어 올리자 모두 찰싹 달라붙어 있는데다 떼어내려고 하면 좍좍 찢어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그런 것 같았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면서 만두피들을 도로 뭉쳐서 반죽 덩어리로 만들었다.

 

“ 울면 뭐하니, 다시 만들자. 나랑 같이 하면 빨리 할 수 있을 거야. ”

 

“ 으응... 흑흑... 만두 너무 어렵다. 로만은 왜 만두 빚는 파트너를 원하는 거야... 침대에서만 잘해주면 되지 어째서... ”

 

“ 그 아저씨 옛날 사람이라서 그래. 원래 우리 동네가 좀 보수적이거든. 현모양처 스타일 여자가 인기 많아. 렐랴가 왜 인기 많겠냐. 얼굴도 예쁘지만 살림도 잘하고 요리도 잘해서... ”

 

난 여자가 아니야! 사내잖아! 내가 왜 현모양처처럼 돼야 해. 얼굴 예쁘고 허벅지 두툼해서 밤일 잘하면 됐지 왜... 아아, 로만 너무해. ”

 

“ 종알대지 말고 빨랑 만두피나 만들어. 그 깡패 열한시 반에 온다며! ”

 

“ 압. ”

 

베르닌은 열심히 만두피를 만들었다. 왕재수도 열심히 만들었다. 만두피가 도로 달라붙을까봐 겁이 났는지 밀가루를 너무 많이 뿌려서 저지해야 했다.

 

“ 30개만 하자. 너네 둘이 먹을 거면 충분하겠지. ”

 

“ 로만은 덩치가 커서 많이 먹는데. 그리고 너도 먹어야지. ”

 

“ 난 너네랑 같이 안 있을 거라니까! ”

 

“ 그래도 같이 만들어놓고 너 안 먹으면 어떡해. 싸가서라도 먹어야지. 50개 만들자. ”

 

“ 조그만 게 손은 또 왜 그렇게 크담. 40개만 해, 그럼. ”

 

만두피를 다 만든 후 베르닌은 고기소가 담긴 그릇을 가져왔다.

 

“ 이제 만두 빚는 거야. 피를 이렇게 오목하게 해서 가운데 소를 넣고 이렇게 조물조물 돌려서 이렇게 뒤집으면 돼. ”

 

“ 응. 알았어. ”

 

어느새 열한 시가 다 되어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급해진 베르닌은 재빠르게 만두를 빚어나갔다. 그러다가 불안해서 왕재수를 보니 역시나 엉망이었다. 만두 크기는 들쭉날쭉했고 반수 이상은 소를 너무 많이 넣어서 빵빵하게 부풀어 있었다.

 

야, 잠깐! 이렇게 소를 많이 넣으면 어떡하니!

 

“ 많이 넣어야 맛있지. 만두피 너무 두꺼우면 싫단 말이야. ”

 

“ 그래도 이렇게 많이 넣으면 익힐 때 옆구리 다 터져! 속이 다 삐져나온단 말이야. 하나도 안 예쁘고 지저분해져. 윽, 여기 몇 개는 벌써 터졌네. ”

 

“ 안 돼, 만두 예뻐야 돼... 로만이 만두 예쁘게 빚는 여자가 좋다고... 아악, 정말 싫다. 난 공훈예술가... 세계 최고의 무용수... 우주 최고 꽃미남... 어째서 내가 만두 예쁘게 빚는 여자 따위에 맞춰줘야 하지... 악!

 

“ 시끄러워. 시간 없어. 잘못 만든 건 내가 땜질할 테니까 넌 가서 만두 찌기나 해. ”

 

“ 찌는 건 어떻게 하는 거야? 냄비에 물 넣어서 끓이다가 만두 넣어? ”

 

“ 으윽, 이 바보야. 그건 삶는 거고! ”

 

“ 그럼 기름 둘러서... ”

 

“ 그건 굽는 거야! ”

 

“ 하나도 모르겠어. 아, 머리 아파. ”

 

왕재수가 또 울음을 터뜨릴 기세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급하게 그의 손목을 붙잡고 같이 렌지 앞으로 갔다. 큰 냄비를 꺼내 물을 3분의 1쯤 채운 후 찜기를 올렸다.

 

“ 어, 그게 뭐야? ”

 

“ 찜기야. 이 위에 만두를 올려놓고 뚜껑을 닫고 끓이는 거야. 그러면 아래에 있는 물이 끓으면서 수증기가 올라와서 그 온도로 만두가 익는 거야. 이게 찜이야. 삶는 건 만두를 물에 직접 빠뜨리는 거고. ”

 

“ 아, 사우나 같은 거구나. ”

 

“ 응. 그래도 원리를 이해했구나. 기특하네. ”

 

칭찬을 받자 왕재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처음으로 눈을 반짝거리며 웃었다. 얼굴에 밀가루를 잔뜩 묻히고 있어 우스꽝스러웠지만 닦아줄 시간도 없었다. 베르닌은 자기가 빚은 만두에 왕재수가 빚은 것 중 옆구리가 안 터진 것까지 20개를 먼저 가져와서 찜기에 올린 후 뚜껑을 닫고 가스불을 켰다.

 

“ 자, 난 아까 옆구리 터진 거 땜빵할 테니까 넌 이제 부엌 좀 치우고 샴페인이랑 세팅하렴. 바이올린 아저씨 곧 오겠네. ”

 

“ 으응. 고마워. 너 진짜 대단해. 너 아니었으면 만두 실패했을 거야. ”

 

“ 아직 끝난 거 아니니까 일단 다 하고 보자. ”

 

왕재수는 후다닥 부엌을 치웠다. 베르닌은 터진 만두들의 속을 좀 덜어내고 다시 끝을 여며서 땜빵했다. 그 사이에 첫 번째 만두가 다 쪄졌다. 포크로 찔러보니 다 익은 것 같았기 때문에 베르닌은 거실에서 테이블을 세팅하고 있던 왕재수를 불렀다.

 

“ 야, 다 익었어. 맛 좀 봐. ”

 

왕재수가 우다다 달려왔다. 김이 펄펄 오르는 만두를 입안에 쏙 집어넣더니 잠시 후 뜨겁다고 비명을 지르며 도로 뱉었다. 후후 불어주자 다시 입에 넣고는 오물오물 씹더니 반색을 했다.

 

우와, 진짜 맛있다. 전에 먹던 거랑 달라. 하나도 안 느끼하고... ”

 

“ 수제 만두라서 그렇지. 기계로 만든 거랑 당연히 다르지. ”

 

“ 아, 그래서 로만이 만두 만들어 먹던 거 그리워했던 거구나. ”

 

왕재수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포크로 만두를 한 개 찍어서 베르닌의 입 안에 넣어 주었다. 베르닌은 자기가 만들었지만 진짜 맛있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만두를 찜기에 올려놓고 다시 불을 올렸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왕재수가 뛰어나가서 문을 열자 로만 코즐로프가 불쑥 들어왔다. 리본 달린 상자를 현관에 내려놓고는 왕재수를 와락 껴안고 입술과 뺨 여기저기에 찐하게 키스를 퍼부었다.

 

“ 우리 귀염둥이 비둘기~ 많이 기다렸지? 미안미안, 그래도 아직 열두시 안됐으니 다행이다. 늦을까봐 엑셀 막 밟았지. ”

 

“ 나 있잖아, 만두 빚었어. ”

 

왕재수가 급하게 말했다. 자랑하고 싶어 좀이 쑤시는 게 분명했다.

 

“ 만두? 네가? 너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너 요리 못하잖아. ”

 

“ 배웠어! 내가 내가 반죽도 하고... 아니, 반죽은 아니고... 저기, 만두피 만들고, 고기 넣고 이렇게 이렇게 돌리고 뒤집어서 빚었어. 그리고 삶은 거 아니야. 물에 빠뜨린 거 아니고, 냄비에 이렇게 찜기 올려서 쪘어! ”

 

코즐로프는 밀가루가 잔뜩 묻어 있는 왕재수의 얼굴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다시 뽀뽀를 퍼부었다.

 

“ 아유 그랬어? 우리 아기가 만두도 빚을 줄 알고 진짜 못하는 게 없네. 요 조막만한 예쁜 손으로 만두를 빚다니! 내가 어릴 때 만두 먹었던 얘기해 준 거 기억하고 있었구나. 기특하기도 하지. 아이고 예뻐라~ 내 강아지 내 귀염둥이~ 내가 밤에 침대 부서져라 안아줄게! ”

 

베르닌은 점점 닭살이 돋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에 헛기침을 하며 왕재수를 불렀다.

 

“ 흠흠... 야, 난 이만 가볼게. 가스불 10분 있다 꺼라. ”

 

아니, 네놈은! 이 망할 놈의 스파이 자식이 왜 여기 있는 거야!

 

코즐로프가 주먹을 불끈 쥐며 고함을 질렀다. 왕재수가 급하게 가로막았다.

 

“ 어, 화내지 마. 얘가 만두 빚는 거 도와줬어. 나한테 다 알려줬어. 있잖아, 다닐이 요리 진짜 잘해. 반죽도 다 해주고, 만두피 만드는 거랑 만두 빚는 거 다 알려줬어. 찌는 거랑 삶는 것도 알려주고. 얘 아니었으면 당신 올 때까지 만두 다 못 만들었을 거야. 진짜야. ”

 

뭐라고! 저 자식이랑 같이 만두를 빚었다고! 너 정말 정신이 있는 거야? 만두는 가족이랑 빚는 거야!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이랑! 그러니까, 나랑 빚었어야지! 저놈이랑 만두를 만들다니! 너 진짜 저놈 좋아하는 거야? 전부터 수상쩍었어! 달리기도 져 주고! 크아아! 용서할 수 없어. 너 이놈의 스파이 새끼, 가만 안 둬!

 

코즐로프가 주먹을 휘두르자 왕재수가 기겁을 해서 그를 껴안았다.

 

“ 아이 참, 왜 그러는 거야! 내가 도와달라고 해서 해준 건데. 내가 몇 번을 말해, 난 키 크고 나이 많은 아저씨가 좋다고 했잖아. 쟨 내 취향 아니란 말이야. 눈도 단추 같고... ”

 

자꾸 단추 단추 하지 마! 나도 사내자식 관심 없는데!

 

베르닌은 투덜대며 현관 쪽으로 갔다.

 

“ 실컷 고생해서 만두 빚어줬더니만. 스파이에 단추에. 에잇. 난 간다. 하여튼 새해 복 많이 받아라. 만두 잘 먹고. ”

 

막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코즐로프가 억센 손으로 그의 어깨를 휘어잡았다.

 

“ 뭡니까, 진짜 한 판 하고 싶어요? 경고해두는데 KGB 요원에게 주먹질을 하면 폭행죄에 공무 방해죄도 같이 걸릴 수 있... ”

 

“ 가긴 어딜 가. 곧 0시 종 칠 텐데. ”

 

“ 그러니까요! 난 집에 갈 겁니다! 맘 편하게 텔레비전 보면서 새해 맞으려고요! ”

 

“ 누가 새해를 청승맞게 혼자 맞냐! 갈 때 가더라도 종 치는 건 같이 보고 가! 건배도 하고! ”

 

“ 아니, 안 그래도 되거든요! 깡패 아저씨와 왕재수 비둘기 사이에 끼어서 건배 같은 거 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

 

“ 나도 KGB 스파이 새끼랑 샴페인 쨍하고 싶지는 않거든! 그래도 0시 종은 0시 종이고 새해는 새해니까! 만두까지 빚어놓고 어떻게 그냥 가냐! 쟤 요리 못하는 거 다 아는데. 뻔할 뻔자 네가 다 만들었겠지. 그래놓고 그냥 가면 억울하지. ”

 

왕재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억울해했다.

 

“ 너무해, 로만... 나도 같이 만든 거 맞는데... 만두피도 만들고 안에 고기도 넣고... 저기 저 삐뚤어진 만두들은 내 건데...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요리 못한다고... 전부 다닐이 했다 그러고... 어헝... ”

 

코즐로프는 화들짝 놀라며 왕재수를 꼭 껴안고 뽀뽀를 하며 달랬다.

 

“ 그럼 그럼, 우리 귀염둥이 네가 다 한 거지. 저 스파이 새끼가 혼자 청승맞게 새해 맞을까봐 불쌍해서 그렇게 말한 거야. ”

 

“ 내가 다 한 거 아니야. 쟤가 반죽했어. 첨에 내가 물을 너무 많이 부어서 다시 해줬어. 만두피는 밀가루를 안 뿌려서 다 붙었는데 쟤가 다시 해주고... 저기, 만두소도 쟤가 만들고... 어헝, 거의 다 쟤가 한 거 맞아. 엉엉, 난 요리에 소질이 없나봐. 당신은 만두 잘 빚는 예쁜 애가 좋댔는데 난 예쁘기만 하고 만두 못 빚어. 나 이제 버림받아. 으앙... ”

 

왕재수가 엉엉 울자 베르닌은 머리가 아팠지만 코즐로프는 크게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그를 품에 꼭 껴안고 둥기둥기 달랬다.

 

“ 아유 그랬구나. 우리 귀염둥이가 나한테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만두 빚은 거구나. 만두 잘 빚었어. 처음 한 건데 이 정도로 한 거면 소질 엄청난 거야. 그리고 만두 못 빚어도 돼, 요리 하나도 못해도 돼. 이 정도로 예쁘면 딴 거 아무 것도 못 해도 다 용서되는 거야. 그깟 만두가 대수니? 너처럼 고운 애는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혀도 돼. 내가 널 왜 버리니, 눈에 넣어도 안 아프겠구만. 확 집어삼켜버리고 싶구만. 그러니까 그만 뚝~ ”

 

왕재수가 귀신같이 눈물을 뚝 그치고는 코즐로프에게 폭 안겨서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베르닌은 이제 정말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코즐로프가 다시 그를 붙잡았다.

 

“ 좋은 말로 할 때 앉아라. ”

 

“ 아니, 난 둘의 불꽃 튀기는 사랑을 방해하고 싶지 않... ”

 

“ 닥치고 종 칠 때 코르크나 제대로 따! ”

 

마침 그 때 텔레비전에서 크레믈린과 붉은 광장이 비춰지더니 시계가 뎅 하고 울리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에서도, 윗집 아랫집 옆집에서도 환호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베르닌은 엉겁결에 샴페인을 땄다. 펑 하고 코르크가 튀어나가며 샴페인 거품이 치솟았다. 코즐로프와 왕재수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 와! 새해다! ”

 

“ 새해 복 많이 받아! ”

 

“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스파이야! ”

 

“ 어... 새해 복 많이 받아요... 너도... ”

 

셋은 샴페인이 가득 담긴 잔을 들어 건배를 했다. 코즐로프와 왕재수가 입술이 떨어져라 키스를 하는 동안 베르닌은 샴페인을 쭉 들이키고 나서 부엌으로 갔다. 가스 불을 껐다. 두 번째 만두는 더욱 예쁘게 잘 익어 있었다. 접시에 만두를 담고 스메타나와 파슬리를 곁들인 후 쟁반에 담아 거실로 돌아왔다. 왕재수는 이제 코즐로프의 무릎에 앉아 있었다. 이미 불꽃 튀는 애정행각이 시작되는 중이었다. 달아오른 코즐로프는 샴페인을 입 안 가득 머금더니 왕재수에게 키스를 하며 술을 먹여주었다. 둘의 입술이 밀착된 순간 베르닌이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 안 돼! 그건 안 돼! ”

 

하지만 이미 늦었다. 멋모르고 키스에 취해서 샴페인을 받아 마신 왕재수는 곧 눈을 깜박거리더니 옆으로 픽 쓰러지고 말았다. 코즐로프가 깜짝 놀라 왕재수를 껴안으며 소리를 질렀다.

 

“ 헉, 너 왜 이러니! 괜찮아? 말 좀 해봐 아가야! 정신 차려! ”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 안 된다고 했잖아요. 얘 술 못 마신단 말이에요. 전에도 보드카 들어 있는 쿠키 먹고 응급실 실려 갔는데... 사귀는 사이면서 그것도 몰라요! ”

 

“ 보드카 못 마신다고만 했지 샴페인 가지고도 맛 가는 줄은 몰랐지... 병원에 데려가야 하나? ”

 

“ 아뇨. 약한 술이니까 그냥 재우면 괜찮아질 거예요. 좀 안됐네. 나이도 많은 아저씨한테 잘 보이려고 만두 빚어보겠다고 그렇게 난리를 쳤는데 보람도 없이... ”

 

“ 너 지금 나 비꼬는 거지! ”

 

“ 그럼 안 그러게 됐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당신 나이도 많고 내세울 것도 별로 없으면서 애를 손아귀에 넣고는 맨날 조련하고. 가뜩이나 마른 애를 놓고 어리고 날씬한 애가 좋다느니 허벅지가 두툼하니 살이 쪘니 하면서 다이어트하게 만들고... ”

 

뭐야? 우리 귀염둥이가 다이어트를 한단 말이야?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하는 조그만 인형 같은 것이 어딜 뺄 게 있다고... ”

 

“ 사과파이 한 판 다 먹을 수 있는데 당신한테 들키면 안 된다고 맨날 꾹꾹 참고... ”

 

사과파이 그깟 한 판 못 먹는 게 바보지! 우리 귀염둥이는 두 판 먹어도 예쁘기만 하겠구만... 어휴... ”

 

코즐로프는 한숨을 푹푹 쉬더니 왕재수를 소중하게 안아들고 침실로 갔다. 침대에 뉘어주고 이불을 덮어주고 이마에 뽀뽀를 해주고는 도로 거실로 나왔다. 베르닌은 어쩐지 혼란스러웠고 머리가 아파졌다.

 

“ 그럼 이제 난 갑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죠. ”

 

“ 만두 먹고 가. ”

 

“ 싫어요. 무슨 만두까지. 그것도 당신하고. ”

 

“ 만두 쪄놓은 거 놔두면 다 불어. 맛도 없고. 많이도 쪘구만. ”

 

“ 그러게요. 쟤가 당신 많이 먹는다고... 나보고도 싸가라고 했는데 아까 정신이 없어서 다 쪄버렸네... ”

 

“ 그러니까 먹고 가라고. 만두는 원래 같이 먹는 거야. ”

 

갑자기 베르닌은 배가 고팠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래서 코즐로프와 함께 만두를 스메타나에 꼭꼭 찍어서 먹었다. 남은 샴페인도 나눠 마셨다. 다 먹은 후 베르닌이 일어서자 코즐로프는 더 붙잡지 않았다. 대신 현관에 내려놨던 리본 달린 상자를 풀더니 초콜릿을 한 움큼 꺼내서 쥐어 주었다.

 

“ 이런 거 안 줘도 돼요! ”

 

“ 몇 개 되지도 않아. 더 주고 싶어도 우리 아기 줘야 하니까 이것만 주는 거야. 가져가서 먹어라, 불쌍한 스파이야. ”

 

“ 내가 왜 불쌍해요! ”

 

“ 새해도 혼자 맞아야 하고. 스페호프한테 들들 볶이면서 살고. KGB 노릇이나 하며 살아야 하니 불쌍하지. ”

 

나 안 불쌍하거든요! 그리고 이 초콜릿 쟨 먹지도 않네요. 쟨 이렇게 달달한 밀크 초콜릿 안 먹어요. 무가당 다크 초콜릿만 먹는다고요. ”

 

“ 어 그런가... ”

 

“ 쟨 달달한 건 사과파이만 좋아해요. 앉은 자리에서 한 판 다 먹고... ”

 

“ 에잇, 그럼 사과파이 사오는 건데. ”

 

“ 창가에 한 판 있어요. 내가 오다가 샀어요. ”

 

“ 너 왜 나보다 쟤 식성을 더 잘 알아. 기분 나빠! ”

 

“ 난 가정부니까 그렇죠! 맨날 밥해주고 청소해주고... ”

 

하긴 그렇기도 하겠다. 불쌍한 놈... 그만 가서 자라. 새해 복 많이 받고. ”

 

나 안 불쌍하다고요!

 

베르닌은 코즐로프가 억지로 안겨 준 초콜릿 상자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밀가루를 대충 씻어내고 초콜릿을 두어 개 집어먹은 후 잠자리에 들었다. 새해에는 제발 업무분장이 바뀌기를 빌면서.

   

 

 

 

FIN

2014. 12. 27 ~ 28

 

 

------

 

**  왕재수가 빅토르를 쥐잡듯 야단치는 장면은 좀 과장되긴 했지만.. 사실 페테르부르크 발레 전통은 남녀 듀엣, 특히 아다지오를 중시하며 여성 파트너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남성 파트너에게 있다.

본편의 미샤 역시 고전 발레의 엄격한 성적 구분과 보수적인 전통을 여러 가지로 허물어온 인물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바가노바 발레학교에서 정통 트레이닝을 혹독하게 받았기 때문에 여성 파트너에 대한 기사도와 책임의식은 아주 강한 편이다. (그래서 본편 우주의 이야기들 속에서 미샤는 한번은 180이 다 되는 체격 좋은 발레리나와 백조의 호수를 추다가 이전에 다쳤던 어깨를 더 삐끗해 부상으로 고생하게 되지만, 사람들이 뚱뚱한 여자 들어올리다 다쳤다며 불쌍해할때마다 열심히 그녀를 변호하고 자기가 실수해서 그런거라고 답변한다)

 

** 새해 전야에 만두 빚는 풍습은 그냥 내가 웃자고 쓴 거다 :) 근데 러시아도 좋은 날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 펠메니 만두 빚는 풍습이 있긴 있다.

 

** 만두 얘기가 나왔으니 펠메니 사진 몇 장 :) 전에 올렸던 사진들이지만.

 

 

 

요게 찌기 전~

 

 

이건 동대문 러시아 음식점 깔린까에서 먹었던 펠메니 :)

 

 

이건 페테르부르크 돔 끄니기 2층의 유명한 Singer 카페에서 먹었던 펠메니. 이제 돼지고기 알레르기 때문에 그림의 떡... 쇠고기 들어 있는 건 먹을 수 있으려나..

 

 

사진 하나 더~

 

몇년 전에 썼던 펠메니에 대한 얘긴 여기 : http://tveye.tistory.com/231

 

 

** 이야기는 9편의 '눈보라와 패딩 코트'로 이어진다. 이건 아마도 돌아와서 올릴 듯. 그러나 중간에 심심하니 등장인물들의 번외 문답을 예약 포스팅으로 걸어놓고 가겠다~ 아마도 다음주 초,16일과 17일에 두 파트로 나눠서 올라갈 듯.. 커밍 쑨~ 단추와 왕재수의 20문답과 뭔가 허술한 인터뷰~

 

 

:
Posted by liontamer

토요일이지만 별로 토요일 같지 않은 피곤한 하루였다.

 

'서무의 슬픔' 7편 올려본다. 이번 편은 작년 연말 내가 겪었던 일에서 소재를 그대로 따왔다. 뭐 이 시리즈야 매 에피소드마다 내 실생활에서 아이디어를 여기저기서 따오긴 한다만...

 

가엾은 노동 기계이자 잡일 담당에 집사 노예인 우리의 다닐 베르닌은 과연 블라지미르 스페호프의 드높은 기대치를 충족시키는 보고서를 써낼 수 있을 것인가!!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1년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연말이 닥쳐오고... 블라지미르 스페호프 국장은 일년을 정리하여 모스크바 본부로부터 제대로 된 성과 인정을 받기 위해 직원들을 들들 볶기 시작하는데... 오고야 만 보고서의 시즌!!! 이는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총괄 서무에게는 가혹한 시기였으니...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이 시리즈의 배경은 1980년대 초반 소련의 지방 소도시이므로 스페호프가 자와 컴퍼스를 사용하고 베르닌이 등사를 하는 아날로그식 보고서 작성을 너무 비웃지 마시길..

 

*** 당년도 성과보고서니 익년도 업무계획서니 하는 것은 물론 소련 공공기관, 특히 이런 KGB에서는 이런 형태로 진행하지는 않을테고... 그냥 그렇게 넘어가자~ (사실은 베르닌이 아니고 작년 내 얘기, 흐흑... )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7 

 

 

서무의 슬픔

- 보고서의 악몽 -

 

 

 

 

 

11월말이 되자 스페호프 국장은 종일 바빴다. 자를 대고 줄을 긋고 작도기와 컴퍼스를 써서 원과 반원과 타원을 그리고 색연필과 파스텔을 동원, 다양한 색칠을 했다. 마침내 서무인 베르닌을 호출했다. 당년도 KGB 부서별 성과보고서 양식과 익년도 업무계획 양식이 하달되었다. 이후 국장은 전 직원을 강당에 집합시키고 연설을 시작했다.

 

“ 모스크바 본부에서 연초에 공지한 바 있어 전원이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이 일은 매년 이맘 때 쯤이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연례행사라고 할 수 있네. 마치 농부가 봄에 씨앗을 뿌리고 여름과 가을에 땀을 흘려 곡식을 잘 가꾸고 추수하듯이 우리들도 잘 영근 성과물들을 이 보고서에 잘 담아야 하는 것이지.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 여러분이 한 해 동안 사업을 추진하면서 피땀 흘려 노력한 내용들이 고스란히 이 보고서에 잘 담겨져야 한다는 말이네. 

그러나 매년 반복되는 일이지만 작성을 위한 시간은 항상 부족하기만 한 법이야. 다만 이런 상황은 우리 지국뿐만 아니라 연방 전체 KGB가 비슷할 것일세. 따라서 짧은 시간에 좋은 보고서가 나오기 위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 집중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네.  

오전 중 서무가 각 부서에 작성 양식을 배포할 예정이야. 먼저 작성일정을 꼼꼼하게 검토하고 계획을 짜게. 올해 성과보고서는 당장 시작하고, 내년 계획서는 부서별 검토회의 후 각각의 목표를 확정하겠네. 부서별로 나온 성과보고서와 업무계획서는 남은 20일 동안 각각 총 4회의 검토회의를 진행할 예정이야. 즉, 이 보고서들은 도합 8회의 검토를 거쳐 작성될 것이네. 다들 보고서 작성에 만전을 기하도록. 

그리고 서무는 일정표에 따라 매 일정마다 각 부서의 보고서들을 모두 취합하여 깨끗하게 편집 제본한 후 내게 제출하도록. 이상일세! ”

 

베르닌은 모든 양식을 부서별로 2매씩 등사하여 배부한 후 일정표를 게시했다. 직원들은 한숨을 쉬었고 욕을 하기 시작했다. 각 부서들은 국장 호출 전에 보고서 틀을 짜기 위해 사전 회의를 하느라 바빴지만 베르닌이 소속된 감시분석부만은 달랐다. 당연히 막내이자 서무인 베르닌에게 모든 일을 떠넘겼다. 늘 있는 일이긴 했지만 이번만큼은 그도 난감하기 그지없어 선배들에게 하소연을 했다.

 

“ 다른 건 제가 작성한다지만 각 담당자별 통계 자료까지는 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래야 자료 가공을 하고 분석을 해서 이 끔찍한 양식을 채워 넣을 수 있... ”

 

“ 통계? 원래 그런 건 서무가 관리하는 거잖아! ”

 

“ 아니, 그러니까... 예산과 집행 실적이야 제가 뽑아낼 수 있다지만 담당자별로 올해 작성한 보고서들이 있잖습니까. 감시 대상자 목록부터 시작해서 도청 실태, 체포율과 재판 수감 내역 증가율, 도청 증가로 인한 실제 범죄율 하락 내역 등등... 그건 선배님들 업무... ”

 

“ 그 자료들은 전부 찾아보면 있잖아! 서류철 다 뒤져보면 나오는 것들인데 뭘 우리한테 이거 내놔라 저거 내놔라야. ”

 

“ 하지만 그건 너무 맨땅에 헤딩하는 짓인걸요. 담당자들은 30분만 투자하면 다 나오는 자료들인데 제가 모든 것을 맡아서 하면 각각의 업무 추진 배경부터 시작해 모든 내용을 다 읽고 파악해야 하고 또 하나하나 과정을 추적해야 하니 도저히 일정에 맞출 수가 없어요. 심지어 제가 추출한 자료들이 맞는 것인지조차 모르고요. 각자 100만큼의 노력만 들이면 되는 일을 저 혼자 하게 되면 1억만큼의 노력이 소요될 텐데... 너무나 비효율적이잖아요. ”

 

“ 이런 당돌한 녀석을 봤나. 들어온 지 2년밖에 안된 풋내기가 벌써부터 선배들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서 우릴 가르치려 들어! 심지어 우리한테 자기가 할 일을 시켜먹으려고까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내가 신참이던 시절에는 보고서는 당연하고 선배들 커피 심부름부터 시작해 그분들 집 앞 눈까지 다 치워주고 출퇴근까지 다 시켜줬단 말일세! 요즘 젊은 것들은 호강에 겨워서 원... 이런 좋은 회사가 어디 있다고. 급여 꼬박꼬박 잘 나와, 공무원이니 대접받아, 안정성 있어. 고맙게 다니면서 하라는 일이나 잘 할 것이지 벌써부터 선배들한테 대들고 게으름을 피우려고 해! ”

 

“ 게으름이라니요, 전 매일 야근한다고요. 주말에도 나오고... 그리고 집 청소하고 출퇴근시켜주는 거라면 저 벌써 몇 달째 하고 있는 거 모르세요? 그 왕재수... 차 우려주지 밥해주지 청소해주지 비위맞춰주지... ”

 

“ 아, 말 한번 잘했네. 그 불여우! 그건 경우가 아주 다르지. 우리가 모르는 줄 아나? 아침에 하고 저녁에 하고 밤에도 하고... 그건 자네가 그 꼬마한테 폭 빠져서 돌봐주는 거잖나! 심지어 당직실에서도 응응응을... ”

 

“ 아니에요! 그건 다 오해란 말입니다! 정말 아니에요! 그땐 귀신이... 고양이가, 쥐랑 바퀴벌레를... ”

 

아니긴 뭐가 아냐. 체육대회 때도 우리 애들이 그 불여우 짓뭉갰더니 자네가 울면서 그 자식 안아주던 거 다 봤어! 어휴 찝찝해라. 말세야 말세. 아무리 곱상하게 생겨도 그렇지 사내자식을 안고 뽀뽀하고 물고 빨고.. ”

 

“ 아아 억울해... 진짜 아니라고요. 저는 아니에요! 제발 걔랑 저를 이상하게 엮지 말아 주세요. 우리는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요. 전 그냥 그 자식의 감시요원이자 운전기사이자 가정부... ”

 

“ 아닌 척 할 거 없어. 회사에서는 다 아는 일인데 이제 와서 뭘 그래. 하여튼 빨랑 보고서나 쓰란 말이야. 선배들한테 일 떠넘기고 그 불여우랑 놀아나려고 수작 부리지 말고! ”

 

얼이 빠진 베르닌이 뭐라고 항의를 하기도 전에 선배들은 휭 하고 자리를 떠 버렸다. 다들 구시가지에 맛있는 항아리 닭고기 식당이 생겼다고 일찍 점심을 먹으러 나가 버린 것이다.

 

점심 부대에 합류하려고 뛰쳐나가던 등록부서의 리자가 문득 그를 발견하고는 불쌍하다는 듯 다가왔다.

 

“ 다냐, 같이 가서 항아리 닭고기 먹어요. 거기 맛있대요. 기름기도 엄청 많고 국물도 뜨끈해서 먹고 나면 기력 회복된대요. 체육대회 때 걸린 감기 아직 다 안 나았잖아요. ”

 

“ 괜찮아요, 전 그냥 구내식당에서 먹을래요. ”

 

“ 구내식당은 맛도 없고 전에 사모바르에서 바퀴벌레도 나왔잖아요. 간만에 다들 회식하는 건데 같이 가요. ”

 

“ 항아리 닭고기 식당은 너무 멀더라고요. 다녀오면 점심시간이 다 끝날 거예요.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안 되겠어요. 빨리 대충 먹고 보고서 자료를 뒤져야 하거든요. ”

 

“ 아휴, 책상물림. 일벌레... 알았어요. ”

 

리자가 나가버린 후 베르닌은 혼자 구내식당에 내려가 지독하게 맛없는 메밀죽과 불어터진 소시지를 10분 만에 해치웠다. 그리고 사무실로 올라와 서류철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    *    *

 

 

보고서 제출 마감일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베르닌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쓰러지고 말았다. 성과보고서와 업무계획서 검토회의를 각각 3차례씩 진행했고 마지막 회의를 1회씩, 도합 2번을 앞두고 있었다. 감시분석부의 보고서는 일주일 전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마무리했고 다른 부서들의 보고서도 모두 취합하여 국장의 요구대로 깔끔하게 제본해 제출했지만 국장은 검토회의 때마다 계속 수정을 요구했고 베르닌은 다른 부서 서무들과 함께 밤을 새서 각 자료를 수정한 후 다시 제본을 했다. 그는 부서 서무일 뿐만 아니라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총괄 서무이기도 했기 때문에 결국 모든 마무리는 그의 몫이었다.

 

게다가 스페호프는 계속해서 그를 들들 볶았다.

 

“ 편집 좀 제대로 못 하나! 여기도 오타가 있군! 행간도 틀렸어! 이 표는 또 왜 이 모양인가! 색깔을 제대로 맞춰야 할 것 아닌가! ”

 

“ 아아, 국장님. 4차 검토회의에서 또 내용을 왕창 수정하실 게 뻔한데 지금 이렇게 하나하나 모양을 고쳐놓으면 무슨 소용이... ”

 

“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매 회의마다 각 버전마다 틀을 잘 맞춰야 할 것 아닌가! ”

 

“ 하지만 이건 저희 내부 검토용이고 본부 제출본도 아닌데... 어차피 편집하고 고칠 텐데... ”

 

시끄러워!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 모르나!

 

베르닌은 그 보기 좋은 떡을 만들기 위해 너무 고생을 해서 막상 떡을 먹기도 전에 체할 거라고 대들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는 매일 새벽까지 일하고 때로는 사무실에서 밤을 새며 보고서를 작성 편집했다. 근무 시간에는 원래 업무를 처리해야 했으므로 보고서 작업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토요일에도 혼자 출근해 밤을 새며 4차 검토회의용 성과보고서와 업무계획서 초안을 만들었다.

 

 

일요일 아침 8시에 그는 콧물을 줄줄 흘리며 눈보라를 그대로 맞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필 차도 고장났기 때문이다. 난방도 안 되는 사무실에서 한 시간 정도 눈을 붙인 게 전부인데다 계속 말라빠진 비스킷과 차가운 통조림 수프로 끼니를 때운 탓에 이미 몸이 얼어 있었던 베르닌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영하 15도의 날씨에 눈보라를 맞고 돌아오느라 심한 독감에 걸리고 말았다. 간신히 집에 들어왔을 때 그는 젖은 옷을 미처 다 벗지도 못하고 소파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베르닌은 몇 시간 동안 끙끙 앓았다. 너무 추워서 몸이 덜덜 떨렸지만 옷을 갈아입거나 침실로 가서 이불을 뒤집어쓸 기력이 없었다. 열이 펄펄 끓었다. 이가 딱딱 부딪쳤다. 온몸이 떨어져 나가는 듯 아팠다. 몽롱하게 잠이 들었다 깨어났다 반복했다. 살풋 정신을 잃을 때마다 눈앞에서 성과보고서와 업무계획서와 표와 예산과 통계 숫자들이 춤을 췄다. 스페호프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1차, 2차, 3차, 4차 보고서와 계획서들을 그의 면전에 집어던지며 행정의 기본에 대해 설교를 해댔다.

 

마침내 그는 어떻게든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가기로 했다. 목이 너무 말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파에서 내려와 몇 발짝 걷지도 않아 현기증으로 비틀거리다 카펫 위에 그대로 뻗어버렸다. 엉금엉금 기어가려고 했지만 몸이 철썩 달라붙는 것 같았고 머리가 빙빙 돌았다. 다시 기절한 것 같았다.

 

어렴풋하게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는 낯익은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조그맣게 이어졌다.

 

“ 아휴, 너 왜 복도 창문 다 열어놨어! 눈이 다 들이쳤잖아. 현관문도 열어놓고. 어디서 이렇게 바람이 들어오나 했네. ”

 

왕재수의 목소리였다. 그간 저 녀석에게 얼마나 시달렸으면 아픈데 꿈에서까지 나타나 바가지를 긁나 싶어서 베르닌은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 아아... 제발 이제 그만... 국장도 모자라 쟤까지 꿈에 나오다니... ”

 

“ 어, 너 뭐야. 운동해? 왜 바닥에 엎드려 있어? ”

 

“ 으으... 꿈인데도 어쩌면 저렇게 현실적인 대사를... ”

 

“ 야, 너 자는 거야? 술 취했어? ”

 

갑자기 누군가가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베르닌은 괴로워하며 억지로 눈을 떴다. 눈앞에 까맣고 하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곧 그림자는 까만 머리에 하얀 스웨터를 입은 왕재수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 우욱, 이건 꿈이야. ”

 

“ 뭐가 꿈이야. 취했구나. 맨날 늦게 오고 집 안 오더니 일하느라 그런 게 아니고 술 퍼마시느라 그런 거였구나! ”

 

“ 아니야, 술 아니야... 나, 계속 야근. 눈 맞고... 나 불쌍... 우욱... ”

 

베르닌은 갑자기 속이 너무 울렁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쿨럭쿨럭 기침을 하다가 그만 토하고 말았다. 왕재수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 으악, 너 지금 토하는 거야? ”

 

“ 보면 모르냐... 우웩... ”

 

“ 아이 참, 이게 뭐하는 거야! 아휴, 카펫에 왕창 토했네! ”

 

“ 상관 마, 내 카펫인데... 우애액... ”

 

한참 토하고 났더니 그래도 정신은 조금 돌아오는 것 같았다. 눈을 뜨자 왕재수가 그의 곁에 쪼그려 앉아 손으로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 하지 마, 정신 사나워... ”

 

“ 열 많이 나나봐, 얼굴이 벌개. ”

 

“ 그럴 수밖에 없잖아. 독감에 토하고... 아깐 추웠는데 지금은 너무 더워. ”

 

“ 대체 뭘 먹은 거야, 식중독이야? 아이 지저분해라, 토한 거 색깔이 빨갛고 초록색이고 얼룩덜룩해. 내 속도 다 울렁거리네. ”

 

“ 사흘 째 통조림 토마토 수프만 먹었단 말이야... 울렁거린다면서 왜 옆에 앉아서 그런 걸 보고 있냐... 빨랑 집에 가. 귀찮아. 좀 놔둬. 우욱... ”

 

베르닌은 다시 토했다. 왕재수가 몸서리를 치면서 벌떡 일어나 나가버렸다.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구급상자에서 감기약이라도 꺼내달라고 할 걸 하는 후회가 막심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엎드린 채 베르닌은 다시 비몽사몽 상태로 빠져들었다. 왕재수가 왔던 꿈을 꾼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이라면 아리따운 렐랴나 나타나지 왜 하필이면 왕재수인가 싶어 아픈 와중에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때 입가에 축축한 수건이 와 닿았다.

 

“ 아 차가워! 이게 뭐야! ”

 

“ 가만히 좀 있어. 좀 닦게. 지저분하게 이게 뭐니, 토한 거 다 묻히고. ”

 

왕재수가 젖은 수건으로 그의 입과 턱을 슥슥 닦았다. 그리고는 다른 수건을 그의 이마에 대 주었다. 처음에는 아주 차갑게 느껴졌지만 점차 미지근해졌고 나빴던 기분도 조금 나아졌다. 그때 왕재수가 그의 부츠와 양말을 벗기면서 투덜댔다.

 

“ 너 눈 맞으면서 걸어왔구나! 그럼 들어오자마자 신발부터 벗었어야지. ”

 

“ 내버려둬! 카펫 내 거라 했잖아. 남이야 흙탕물로 더럽히든 토하든! ”

 

“ 카펫 얘기가 아니고! 독감 걸렸다면서 젖은 걸 신고 있으면 어떡해! 아휴, 코트도 안 벗고... 이러니까 열이 나지! 바보 멍청이. ”

 

“ 나 바보 멍청이 아니야. 너무 아파서 부츠랑 코트 벗을 기운이 없었단 말이야... ”

 

“ 그러면 병원에 가든가! ”

 

“ 일요일이잖아. 나 아침에 집에 왔단 말이야. ”

 

“ 아유 정말 꽉 막혀가지고! 그럼 나한테 전화라도 했으면 됐잖아! ”

 

“ 너한테 전화하면 뭐, 너처럼 게으른 녀석이 날 데리러 나왔겠냐? 운전도 못하는 게. ”

 

“ 나 운전 못하는 거 아니야! 서툰 거지! ”

 

“ 그게 그거잖아! 아, 자꾸 말 시키지 마. 또 울렁거려. 야, 뭐하는 거야! ”

 

“ 가만히 좀 있어! 어휴, 많이도 껴입었네. ”

 

베르닌은 저항하려고 했지만 손끝 하나 까딱하기 힘들어서 왕재수가 코트와 스웨터와 셔츠와 바지와 내복을 벗기는 동안 투덜대기만 했다.

 

“ 추워! 내복은 그냥 놔둬! ”

 

“ 내복까지 다 젖었단 말이야! 너 진짜 저 눈 다 맞고 걸어왔구나. 로만도 눈 온다고 침대에서 진짜 나가기 싫어했는데. ”

 

“ 그냥 바이올린 아저씨랑 놀지 여긴 왜 온 거야... ”

 

“ 로만 오늘 저녁에 오페라 무대 있어서 연주하러 갔어. 근데 날씨 때문에 아무래도 오늘 관객들도 못 올 거 같아. 계속 이러면 극장에 전화해서 공연 취소시켜야지. 그럼 로만도 집으로 다시 오겠지 뭐. ”

 

“ 넌 좋겠다, 감독이니까 전부 네 맘대로 할 수 있고. 직원들 부려먹고 명령하고... 보고서도 쓰라고 하겠지. 계획서도 쓰라고 하고... 아아... ”

 

“ 웬 보고서. 우린 춤 잘 추고 노래 잘 하면 되는데. 그리고 나 직원들 안 부려먹어! ”

 

“ 뻥치지 마. 저번 행사 때 무용수랑 연주자들 들들 볶는 거 다 봤어. ”

 

“ 그건 부려먹는 게 아니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못 하니까 바로잡아 준 거지! 난 감독이잖아! ”

 

“ 쳇, 우리 국장도 나한테 잔소리할 때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

 

“ 너네 국장은 나쁜 놈이고! ”

 

“ 뭐가! 너 하는 짓이랑 똑같은데. ”

 

“ 난 너 안 괴롭히잖아! ”

 

“ 네가 날 안 괴롭힌다고? 네가 제일 많이 괴롭혀... 그렇다 치자... 그럼 우리 국장은 나 괴롭히니까 나쁜 놈인 거야? ”

 

“ 그렇지! 툭하면 야근시키고 이상한 걸로 들들 볶잖아. 무슨 권총 규격이 어떻고 주차 표지판이 어떻고 심지어 내 방에 도청장치 설치하라고 하고. 달리기 못하면 자른다고 하고, 파티에도 못 가게 하고! 난 그런 짓 절대 안 해! ”

 

“ 하긴 넌 노는 거 좋아하는 날라리니까... ”

 

투닥대는 동안 왕재수는 베르닌에게 새 내복과 잠옷을 입히는데 성공했다. 마른 옷으로 갈아입자 불쾌하고 축축한 느낌이 가시면서 몸이 약간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 너 계속 울렁거려? ”

 

“ 어... 이제 좀 나아. 다 토했나봐. ”

 

“ 일어날 수 있어? ”

 

“ 응. ”

 

베르닌은 억지로 일어나려고 해 보았다. 그러나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왕재수가 어깨를 잡아 주었지만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 에이. 할 수 없지. 가만히 있어 봐. ”

 

베르닌이 움찔하기도 전에 왕재수가 뒤에서 그의 겨드랑이 사이로 두 팔을 불쑥 끼워 넣더니 그를 비스듬하게 일으켰다. 그리고는 한 팔을 빼서 허리를 휘감고는 거대한 감자 자루라도 옮기는 것처럼 베르닌을 질질 끌고 침실로 갔다.

 

“ 어... 야, 됐어. 내가 걸어갈게. 놔라... ”

 

“ 걸어가는 거 좋아하네. 가만히 있어, 힘 빼고. ”

 

“ 어떻게 가만히 있어. 나 무거운데... 너처럼 마른 애가... ”

 

“ 말 시키지 마, 으윽... ”

 

왕재수는 숨을 몰아쉬면서 베르닌을 침실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허리를 안고 번쩍 들어서 침대 위에 내려놓고 머리 아래로 베개를 들이밀어 주었다.

 

“ 헉헉... 야, 너 다이어트 좀 해. 아까 보니까 이건 근육 무게도 아니고 그냥 살이야. 5킬로는 빼야겠다. ”

 

내가 다이어트할 시간이 어디 있니, 맨날 야근하고 밤 새는데... 운동할 시간은 없고 책상 앞에 앉아 일만 하면서 잡히는 대로 먹으니까 그렇지. ”

 

“ 그러니까 너네 국장 나빠! 남자는 몸매가 중요한데 자꾸 일을 시키니까 너처럼 되는 거잖아! ”

 

“ 야, 너 지금 나 뚱뚱하다고 비웃는 거야? ”

 

“ 아니, 뚱뚱한 수준은 아직 아니지만. 그래도 위험 단계란 말이야. 저번에 파티 갔을 때보다 더 찐 거 같아. 뱃살도 잡히고. ”

 

“ 내버려 둬! 누구처럼 말라빠진 꼬마 좋아하는 변태 아저씨랑 사귈 것도 아닌데 뭐 어때! ”

 

“ 여자들도 늘씬하고 예쁜 남자 좋아하는데... 왜 여자들이 나한테 줄을 섰겠니. 아 지겹다... 어제도 렐랴가 나한테 목도리 떠다 줬어. 추우니까 폭 싸고 다니면서 자기 생각하라나. 근데 분홍색 꽈배기 무늬가 들어 있지 뭐야. 나 분홍색 싫어하는데... 뭐 나야 피부가 원체 하얗고 고우니 분홍색도 잘 받긴 하지만 그래도 싫은데. 수도관이나 싸매 놔야겠어. ”

 

뭐, 뭐라고? 렐랴가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떠준 목도리로 수도관을 싸매겠다고? 너 미쳤냐!

 

“ 여기도 겨울 춥던데? 싸놓지 않으면 수도관 얼잖아. ”

 

“ 그건 못 쓰는 수건으로 싸면 되잖아, 왜 렐랴의 마음이 담긴 목도리를... 넌 정말 호강에 북받친 놈이야! 이 동네 남자들은 렐랴가 만든 거라면 목도리는커녕 행주 쪼가리라도 품에 껴안고 설레서 잠도 못 잘 텐데! ”

 

“ 쳇, 그럼 너 주면 되잖아. 잠깐만 기다려. ”

 

왕재수가 방을 나갔다가 잠시 후 분홍색 꽈배기 무늬가 들어 있는 하얗고 폭신한 목도리를 가져왔다. 베르닌의 목에 둘러 주고는 이불을 덮어 주었다. 목도리는 따뜻했고 달착지근한 향내도 났다. 베르닌은 정신이 몽롱해졌다. 향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아... 렐랴가 뜬 거라 그런지 향기도 진짜 좋다. 달콤하고 기분 좋아. ”

 

“ 그거 내가 두르고 있었던 건데? 내 향기일 걸. 로만이 아침에 날 홀랑 벗겨 놓고 그 목도리만 둘러주고 역시 예쁘다고 감탄을... ”

 

악, 도로 가져가! 이상한 짓 한 거 싫어. ”

 

“ 두르고만 있었는데 이상한 짓이래... ”

 

“ 그래도 찜찜해! ”

 

“ 뭐야? 내가 찜찜해? 더러워? 나 되게 깨끗한데. 매일 샤워도 꼬박꼬박 하고 비누도 좋은 거 쓰고 바디 오일이랑 로션도 외제 쓰는데... 너무해. 태어나서 처음 들어봐, 찜찜하다니. 난 여태 예쁘다는 말만 들었는데... ”

 

왕재수는 부루퉁해지더니 목도리를 홱 벗겨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베르닌은 어쩐지 미안해져서 웅얼거렸다.

 

“ 아니, 그게 아니고... 너는 안 더러워. 깔끔해. 저기, 너는 예쁜 게 맞는데... 그냥 나는 남자애가 하고 있었던 건 좀 찜찜... ”

 

“ 알았어. ”

 

왕재수는 목도리를 도로 주워들었지만 베르닌에게 매어 주지는 않았다. 침대 한 구석에 던져 놓더니 커튼을 쳐 주었다. 그리고는 따뜻한 물이 담긴 컵과 알약을 두 알 주었다.

 

“ 이거 먹고 좀 자. 감기약이야. ”

 

“ 응, 고마워. ”

 

왕재수가 침실 문을 닫고 나간 후 베르닌은 약을 먹었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불편하게 잠이 들었다.

 

 

*    *    *

 

 

한 시간 쯤 후 베르닌은 너무 추워서 깨어났다. 방 안이 시베리아 같았다. 추워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이빨이 딱딱 부딪쳤다. 창문이 열려 있나 했지만 문은 꼭 닫혀 있었고 커튼도 두텁게 쳐져 있었다. 심지어 나이트 테이블 위에는 김이 펄펄 나는 주전자도 놓여 있었다. 그런데도 너무 추웠다. 베르닌은 괴로워하며 이불을 하나 더 꺼내 덮으려고 몸을 일으켰지만 갑자기 기침이 너무 심하게 나와서 기절하는 줄 알았다. 족히 5분 가까이 쉬지 않고 기침을 해댔다. 가슴이 너무 뻐근해서 죽을 것 같았다.

 

기침 때문에 괴로워서 두 손으로 늑골을 부여잡고 뒹굴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왕재수가 들어왔다.

 

“ 아유, 이게 웬 난리야. 이제 기침까지 하네. 가만히 좀 있어 봐. ”

 

등을 살살 쓸어준 후 왕재수가 입에 컵을 대 주었다. 따뜻한 물을 마시자 기침이 조금 가라앉았다.

 

“ 고마워, 쿨럭쿨럭... ”

 

“ 진짜 가지가지 한다. 허우대는 멀쩡해가지고 감기는 왜 이렇게 심하게 앓는 거야. ”

 

“ 너도 20일 연빵으로 야근하고 밤새고 계속 일만 해봐... ”

 

너네 국장 나빠. 내가 혼내줄 거야.

 

“ 제발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 네가 혼내준다고 하면 무서워. 또 이상한 짓을 해서 날 곤경에 처하게 하려고. ”

 

“ 칫, 내가 하는 건 다 이상한 짓이래. 아까 찜찜하다고도 하고. ”

 

“ 콩알만 한 게 뒤끝까지 있어... 쿨럭쿨럭... 아 추워... 너무 추워. 지금 난방 되는 거 맞아? ”

 

“ 라디에이터 절절 끓는데... 내가 좀 전에 관리실 가서 온도 더 높여놔서 지금 완전 사우나 수준인데. 너 추워? ”

 

“ 응, 너무 추워. ”

 

왕재수는 그의 입에 체온계를 물리더니 잠시 후 눈금을 확인하고 혀를 찼다.

 

“ 너 열이 너무 많이 나서 추운 거야. 아까 약 안 먹었어? ”

 

“ 먹었는데 기침하다 토했어. ”

 

“ 아유, 이마는 불덩어리 같은데 다른 데는 얼음장처럼 차갑네. 여기 감기 엄청 독하구나. 역시 시골이라 그런 거야. 싫다, 시골 감기... ”

 

“ 감기에 무슨 시골이 있고 도시가 있... 쿨룩쿨룩... 아, 추워... 미안한데 나 이불 좀 더 갖다 줄 수 있어? 저 장롱 안에... ”

 

“ 이불 다 꺼내온 거야. 아까 너 자면서 추워해서 있는 거 다 덮어줬어. 우리 집에서도 하나 가져온 건데. 그렇게 추워? ”

 

“ 시베리아 눈밭에서 홀랑 벗고 구르는 것 같아. ”

 

“ 시베리아 가본 적도 없으면서. ”

 

베르닌은 이를 딱딱 부딪치면서 이불을 더 세게 끌어당겼다. 그러고 보니 이불을 네 겹으로 덮고 있었다. 그래도 오한이 가시지 않았다. 갑자기 왕재수가 셔츠를 벗더니 바지도 훌렁훌렁 벗었다. 양말도 벗고는 팬티 바람이 되었다. 베르닌은 혼비백산했다.

 

“ 어, 야! 너 왜 갑자기 옷을 벗어? 안 추워? ”

 

“ 시끄러워. ”

 

왕재수가 침대 위로 올라오더니 이불 속으로 불쑥 기어들어왔다. 베르닌이 너무 놀라 고함을 지르기도 전에 그의 곁에 모로 눕더니 두 팔로 어깨와 허리를 휘감고 껴안았다. 그리고는 온몸을 찰싹 붙여 왔다.

 

으, 으악! 이게 무슨 짓이야! 악! 너, 너... 나 이런 거 아니라고 분명히! ”

 

“ 어휴, 진짜 차갑네. 이러니까 춥지. 너 평소에 운동 좀 하고 몸에 좋은 것 좀 먹어. 신부님한테 가서 약초라도 처방받든가. 피 끓는 나이에 왜 이렇게 몸이 차갑니. 그러니까 감기도 독하게 걸리지. ”

 

“ 놔! 떨어지란 말이야! 나 이런 거 싫어해! 난 여자가 좋단 말이야. 사내랑 이런 거 안 해, 으아... 제발 바이올린 아저씨한테 가... 이 변태야, 아파서 꼼짝도 못하는 날 덮치고 싶니? 악! ”

 

“ 시끄러워, 덮치긴 뭘 덮쳐! 너 내 취향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너 몸이 너무 차갑잖아. 가만히 좀 있어. 금방 따뜻해질 거야. ”

 

“ 아니, 그러니까... 너 지금... ”

 

“ 그냥 가만히 있어. 좀 있으면 체온 올라갈 거야. 나 원래 몸이 뜨겁거든. 나 안고 있으면 금방 따뜻해진다고 아저씨들이 엄청 좋아했어. ”

 

“ 너 내 몸 녹여 주려는 거야? ”

 

“ 응. ”

 

“ 어... 그게... 안 그래도 되는데. 어... 따뜻하다.

 

“ 이제 덜 춥지? ”

 

“ 으응... ”

 

“ 원래는 응응응을 해야 금방 따셔지는데. 그거 안하니까 넌 완전히 따셔지려면 시간 좀 걸리겠다. 많이 추우면 얘기해, 해줄 수 있으니까 ”

 

“ 어, 아니야... 제발 그것만은. ”

 

“ 맘대로 해라, 네가 춥지 내가 춥니. 하여튼 재워줄 테니까 가만히 자. ”

 

베르닌은 꼼짝도 못하고 무거운 이불 속에서 왕재수에게 안겨서 가만히 누워 있었다. 굉장히 불편하고 기분이 이상하고 찜찜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몸은 점점 따뜻해졌고 노곤노곤해졌다. 쿡쿡 쑤시던 사지도 점점 부드럽게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기침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았고 두통도 좀 가시는 것 같았다. 왕재수는 진짜 따뜻했다. 사모바르를 껴안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왕재수는 그의 목덜미와 어깨 사이에 머리를 들이밀고 기다란 두 팔과 다리로 그의 몸을 찰싹 감은 채 달라붙어 있었다. 점점 몸이 따스해지면서 졸음이 밀려왔다. 옆눈으로 슬쩍 보니 왕재수는 심지어 이미 잠들어 있었다. 고른 숨소리를 내며 새근새근 잠든 걸 보니 기가 찼다.

 

“ 이게 뭐야, 내 몸 녹여주고 재워준다더니 자기가 자고 있네. 내 어깨에 침도 흘리고... 이렇게 자면 불편할 텐데. ”

 

베르닌은 왕재수의 머리를 살짝 들어 베개에 내려놓아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포옹을 풀어야 했는데 왕재수가 워낙 찰싹 밀착해 있는데다 그 상태가 아주 따뜻하고 편안했기 때문에 귀찮았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몸이 후끈해지면서 꼭 온천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도 무슨 아로마 온천 같았다. 따끈따끈한데다 달착지근하고 좋은 냄새가 났다.

 

“ 어 이거 진짜 맞네, 목도리에서 나던 냄새. 그거 렐랴 향수가 아니었네. ”

 

베르닌은 몽롱한 가운데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또 동시에 대체 왜 자기가 생각만 해도 찜찜하게 사내애한테 안겨 있는데 기분이 좋은지, 왜 왕재수에게서 좋은 냄새가 난다는 생각을 해도 더 이상 찜찜하지 않은지 의문하자 그게 또 찜찜해지려고 했지만 결국 어쨌든 기분이 좋다는 결론과 함께 잠이 들었다.

 

 

*    *    *

 

 

베르닌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머리도 아프고 콧물도 줄줄 흘렀지만 더 이상 춥지는 않았다. 기침도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방 안은 이제 뜨끈뜨끈했고 베르닌은 네 겹이나 겹쳐 덮고 있는 이불이 무거운데다 좀 답답해서 꼼지락거리며 일어나 앉았다. 문득 생각나서 옆을 보았지만 비어 있었다. 베개에 왕재수가 쓰는 외제 샴푸 냄새와 그 달착지근한 향내가 배어 있었기 때문에 꿈은 아닌 것 같았다. 온몸이 오글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스페호프나 사무실 선배들이 봤다면 또 무시무시한 헛소문이 퍼질 게 뻔했다. 여기가 그의 집이라 정말 다행이었다.

 

시계를 보니 저녁 다섯 시가 다 되어 있었다.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신 후 그는 기운을 끌어 모아 침대에서 내려섰다. 기분은 한결 나았지만 아직 어질어질했다. 그래도 싸들고 온 일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거실은 어두컴컴했고 텅 비어 있었다. 왕재수는 자기 집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하긴 공연 취소시킨다고 했으니까 지금쯤 바이올린 깡패와 침대에서 뒹굴고 있을 게 뻔했다.

 

불을 켠 후 그는 코트를 찾기 시작했다. 코트 주머니에 4차 검토용 성과보고서 초안 서류를 쑤셔 넣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까 왕재수가 코트부터 시작해 옷가지를 벗겨준 후 어디에 치워놨는지 알 수가 없었다. 카펫 위에도, 소파에도 없었다. 옷장에도 없었다. 아래층에 내려가서 물어봐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현관문을 열고 왕재수가 들어왔다. 찬바람이 휭하고 불어 들어오는 걸 보니 바깥은 더 추워진 것 같았다. 심지어 눈도 계속 내리는 모양이었다. 왕재수가 모자와 코트를 벗어 눈을 마구 털어냈기 때문이다. 털모자를 쓰고 있었는데도 머리가 젖어 있었다. 강아지처럼 머리를 부르르 흔들어 눈을 털어내고서야 왕재수가 그를 발견했다.

 

“ 너 일어났구나. 좀 괜찮아? ”

 

“ 어... 아까보다 훨씬 나아. 너 어디 갔다 왔어? ”

 

“ 아, 밖에. 엄청 춥다. 눈도 무지 많이 와. 진짜 여긴 시골이라니까. ”

 

“ 레닌그라드도 왕 춥고 눈 펑펑 오는 거 다 알아. 거기 날씨가 여기보다 훨씬 안 좋잖아! ”

 

“ 그래도 거긴 시골 아니잖아! ”

 

왕재수가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안으로 들어왔다. 거실로 가는 게 아니라 부엌으로 갔다. 또 뭘 먹고 싶어서 저러나 싶어 베르닌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쫓아갔다.

 

“ 야, 지금 너 먹을 거 없어. 나 며칠째 집에 못 들어왔었거든. 방금 일어나서 아무 것도 못해놨어. 밥도 지금 해야 돼. 한 시간은 있어야 될 거야. 그냥 소파에 앉아 있어, 차나 좀 우려 줄 테니까. ”

 

“ 뭔 소리야. 너 아프잖아. 너나 앉아. 먹을 거 줄 테니까. ”

 

“ 먹을 거라니? ”

 

왕재수가 카디건을 열어젖히더니 안에 품고 있었던 꾸러미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겹겹이 싼 보자기를 풀자 조그맣고 둥그런 항아리가 나타났다. 뚜껑을 열자 김이 포르르 올라왔고 왕재수는 만족한 듯 활짝 웃었다.

 

“ 아, 됐다. 안 식었다! 역시 난 몸이 뜨거워~! ”

 

“ 그게 뭐야? 웬 항아리? 어, 되게 맛있는 냄새 난다. ”

 

“ 웅. 그러냐? 다행이네. 입맛은 남아 있나보구나. 먹어. 뜨끈한 거 먹으면 훨씬 나아질 거야. ”

 

“ 이게 뭐야? ”

 

“ 항아리 닭고기. 오늘도 그 집 앞에 사람들 줄 서 있더라고. 아휴, 난 줄 서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어. 이게 뭐 그렇게 맛있다고 다들 두 시간씩 줄을 서서 사먹는지. 눈도 펑펑 내리는데. 글쎄 줄 서서 들어갔더니 포장은 안 된다잖아. 부탁했더니 요리사 아줌마가 나 귀엽다고 몰래 한 그릇 싸줬어. ”

 

“ 항아리 닭고기... 어, 그거 구시가지에 생긴 그 식당 말이야? 너 거기까지 갔다 왔어? 거기 먼데... 너네 극장보다 더 멀잖아. 눈 오는데 어떻게... ”

 

“ 차 가지고 가려고 했는데 주차장에서 나오자마자 배나무에 들이박았어. 아 진짜 운전 너무 싫어. 그래서 그냥 걸어갔다 왔어. 눈 진짜 많이 와, 역시 시골... ”

 

“ 심지어 줄 서서 사왔단 말이야? 네 성깔에? 맙소사... 너 왜 그랬어. ”

 

“ 이게 감기에 엄청 좋대. 로만도 며칠 전에 감기기운 있었는데 지휘자 할아버지랑 같이 그 식당 가서 먹고 오더니 땀 흘리고 금방 나았다고 나보고도 먹으라고 억지로 데려갔었어. 생각나서 갔다 왔어. ”

 

“ 아... 진짜 고마워. 너 이렇게 착한데 그것도 모르고 난 맨날 너보고 왕재수라고... 흑... ”

 

“ 촌스럽게 왜 또 훌쩍거리는 거야. 빨랑 먹어. 식기 전에. ”

 

왕재수가 숟가락과 포크, 접시를 건네주었다. 베르닌은 조그만 항아리 안을 들여다보았다. 닭다리와 살코기, 감자와 당근이 노란 기름기가 둥둥 떠 있는 진한 국물 사이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잘게 썬 푸르스름한 허브도 잔뜩 뿌려져 있었다.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자 몸이 금세 따뜻해졌다. 구수한 기름기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부었던 편도선도 부드러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닭고기도 푹 익어서 부들부들한 것이 저절로 뼈에서 떨어져 나왔다. 감자는 포근포근했고 당근마저 달착지근했다. 정신없이 고기를 발라먹고 국물을 흡입하고 있는데 왕재수가 혀를 차며 흑빵을 밀어주었다.

 

“ 좀 천천히 먹어. 얹히면 어쩌려고 저런담. 빵이랑 같이 먹어. ”

 

“ 진짜 맛있어. 나 계속 통조림이랑 비스킷만 먹었거든. 너무 맛있어서 눈물 날 거 같아. ”

 

“ 칫, 역시 넌 시골 사람이야. 기름이 그렇게 많은데 맛있니? 난 느끼해서 못 먹겠던데. 로만이 먹으라 해서 억지로 몇 숟갈 먹다가 도저히 안돼서 포기했더니 한 대 쥐어박더라고. ”

 

“ 그 아저씨 진짜 깡패야. 넌 원래 기름진 거 안 먹어서 그러는 건데 왜 쥐어박고 난리야. 너한테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

 

“ 그치! 그래도 그냥 가만히 있었어. 성감대를 콕콕 쥐어박는 재주가 있거든, 로만이... 그래서 밥 먹자마자 집으로 가서 침대로... ”

 

“ 제발 침대 얘긴 하지 말자. ”

 

정신없이 먹다가 베르닌은 문득 왕재수를 쳐다보았다.

 

“ 넌 안 먹어? ”

 

“ 느끼해서 싫어. ”

 

“ 그래도... 계속 내가 밥 안 챙겨줬는데 요즘 뭐 먹고 살았어? ”

 

“ 로만이 이것저것 먹여줬어. 아까도 요구르트랑 사과랑 먹었어. ”

 

“ 그건 밥이 아니잖아. ”

 

“ 괜찮아, 좀 있다 닭가슴살 구워놓은 거 먹을 거야. ”

 

“ 이거 닭다리라도 한 개 먹어. 국물 안 먹으면 덜 느끼할 거야. ”

 

“ 싫어. 1인분 밖에 안 되는데 너 다 먹어. 다 먹어야 약 먹고 낫지. ”

 

그래서 베르닌은 항아리 바닥에 고인 국물까지 흑빵으로 싹싹 닦아서 몽땅 해치웠다. 다 먹고 나자 몸이 후끈후끈해지면서 땀이 나고 어쩐지 아주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왕재수가 알약과 빨간색의 시럽을 주었다.

 

“ 자, 약 먹어. 이 시럽 먹으면 안 토할 거야. 무슨 위장 장애에 좋다나. 아까 의사 선생님 집에 들러서 받아왔어. ”

 

“ 그 할아버지? 오늘 쉬는 날일 텐데 집에까지 갔어? ”

 

“ 응, 근데 선생님이 환자 안 데리고 오고 나만 왔다고 짜증냈어. 너 증상 듣더니 뜨거운 거 먹이고 땀 빼면 나아질 거라고 하더라고. ”

 

베르닌은 알약을 먹고 시럽을 마셨다. 기분 탓인지 다 나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이제 일을 해보려는 생각이 들었다.

 

“ 너 혹시 아까 내 옷 치웠어? ”

 

“ 응. ”

 

“ 어디 있어? ”

 

“ 세탁실에. 다 젖어서. ”

 

“ 내 코트도? ”

 

“ 아니, 코트는 드라이해야 하잖아. 우리 집에 갖다놨어, 내 옷들 맡길 때 같이 맡기려고. ”

 

“ 아, 그랬구나. 나 그 코트 필요해. ”

 

“ 왜? 그거 드라이해야 돼. 엄청나게 젖었어. 얼룩도 많더라. ”

 

“ 그 안에 일할 거 들어 있어. 서류 싸들고 왔는데 오늘 밤까지 오타랑 내용 검토해서 내일 새벽에 사무실 가서 고쳐야 돼. 지금 성과보고서랑 업무계획서 만들고 있거든. 가지고 와야겠다. ”

 

“ 그럼 내가 갖다 줄게 그냥 있어. ”

 

왕재수가 잠시 후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코트를 들고 왔다. 베르닌은 코트를 받아 들고 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나 아무리 뒤져도, 심지어 안주머니를 탈탈 털어도 서류가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철렁해진 베르닌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 너 혹시 아까 코트 치울 때 주머니에 들어있던 서류 못 봤니? 한 100페이지 쯤 되는 거, 얇은 종이에 타이핑해서 둘둘 말아놓은 건데. ”

 

“ 어, 그 종이뭉치? ”

 

“ 응, 맞을 거야. 그거 어디에 있어? ”

 

“ 어... 그거... 저... ”

 

왕재수가 머뭇거렸다. 베르닌은 갑자기 겁이 더럭 나서 정색을 하며 다시 물었다.

 

“ 너 그거 봤지? 어디 놔뒀어? 빨리 말해봐. ”

 

“ 어... 있잖아. 너 그거 꼭 필요한 거야? 없으면 어떻게 돼? ”

 

“ 어떻게 되다니! 그거 없으면 나 내일 국장한테 목 졸려 죽을지도 몰라. 어디 있는지 빨리 말해줘! ”

 

“ 저기... 그거 있잖아. 난 그게 그렇게 중요한 종이인 줄 몰랐어. 저... 그거 아까 다 젖고 너무 더러워져서 그냥 버렸는데... ”

 

“ 뭐야? 버리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서류를 왜 버려!! 너 지금 농담하는 거지? ”

 

“ 서류인 줄 몰랐어. 종이뭉치가 다 젖어서 너덜너덜하게 다 찢어지고 잉크 얼룩 투성이라서 그냥 쓰레기인 줄 알았어. 너 아까 토했잖아. 심지어 거기 떨어져서 진짜 더러워졌단 말이야. 그래서 아까 카펫 치우다가 걸레에 말아서 같이 갖다 버렸어... ”

 

“ 갖다 버려? 내 서류를?? 어디에!! 휴지통에? 저 휴지통? ”

 

“ 아니. 집 안 휴지통에 버리면 습기 차고 냄새날까봐 아파트 쓰레기 투입구에 버렸어. 저... 그 소각장... ”

 

뭐야? 아악!

 

베르닌은 정신이 혼미했다. 버럭 고함을 질렀다.

 

너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남의 중요한 서류를 손대다니! 내용도 안 보고 심지어 소각장에 밀어 넣을 수가 있냐고! 정신이 있는 거야? ”

 

“ 저기... 난 서류인 줄 몰랐다니까. 내가 그랬잖아, 우리는 춤만 잘 추고 노래만 잘 부르면 된다고... 서류는 잘 몰라. 일부러 그런 게 아냐. 진짜 몰랐어, 너무 더러워서... ”

 

왕재수가 어쩔 줄 몰라 했다. 더듬거리면서 변명을 했다. 베르닌은 너무 화가 나서 정신이 몽롱했다. 충격으로 비틀거리다 주저앉았다. 왕재수가 깜짝 놀라 그를 부축해주려고 했다. 베르닌은 울화가 치밀고 앞이 캄캄해서 분에 겨워 왕재수의 팔을 뿌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 저리 가! 아무 짝에 쓸모없는 바보 멍청이! 어떻게 서류랑 그냥 종이도 구분 못하고... 아아 난 이제 망했어! 끝장이야, 국장이 날 죽일 거야! 잘릴 거라고! ”

 

“ 어... 미안해. 진짜 화난 거야? 저기...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는데? 너네 국장한테 내가 가서 얘기할까? 너는 다 했는데 내가 버린 거라고 얘기할게. 그러면... ”

 

“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넌 조직 생활을 안 해 봐서 몰라! 맨날맨날 일등만 하고 천재 소리 듣고 대접받고 높은 자리만 꿰차며 살아서 이런 거 모른다고! 너 같은 게 서무의 슬픔을 어떻게 알아!

 

“ 미안... 화내지 마. 서무의 슬픔 잘 몰라서 미안... 나 천재라서 미안해... 저기, 그래도 그렇게 소리 지르지 마. 기침 도져... ”

 

왕재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베르닌은 쿨럭쿨럭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가슴이 뻐근하고 숨이 턱턱 막혔다. 폐가 터질 것 같았다. 왕재수가 아까처럼 등을 쓸어주려고 했지만 베르닌은 속이 상하고 화가 치밀어서 홱 떠밀었다. 생각보다 너무 세게 밀었는지 왕재수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콰당 소리가 났다. 화가 난 와중에도 조금 걱정이 돼서 일으켜줘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왕재수가 자기 혼자 일어나 앉았다. 코를 벌름거리고 입술을 실룩거리더니 금세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먹거렸다.

 

“ 너무해... 나는, 나는 정말 걱정돼서 그랬던 건데. 종이뭉치 너무 더러워서 그냥 놔두면 세균 옮을까봐 그런 건데. 더러운 거 놔두면 카펫에 나쁜 균 다 묻고 공기 중에도 떠다니고... 너 아프니까 깨끗하게 치우려고 한 건데. 흐흑... 막 화내고 소리 지르고 떠밀고... 때리려고... ”

 

“ 어... 야... 울지 마. 내가 너 때린 건 아니잖아. ”

 

“ 떠밀었어. 때리려고 주먹도 쥐고... 무서운 표정 짓고... 엉엉... 나 때리는 거 싫어. 감옥에서도 나쁜 아저씨들이 막 때렸어. 이상한 주사 놨어. 나 너무 아파서 맨날 울었어. 어헝... 근데 너도 때려. ”

 

“ 아니야... 진짜 아니야. 화난 건 맞지만 때리려고 그런 거 아니야. 떠민 것도 일부러 그런 거 아냐... 너무 열 받아서 나도 모르게... ”

 

“ 아까는 나 때릴 데 하나도 없다고 해놓고 막 밀어서 넘어뜨렸어. 종이 버렸다고 계속 소리 질러. 어헝... 나 천재라고 막 화내. 여기 시골... 주변에 아무도 없어. 쥐도 있고 바퀴벌레도 있어. 놀러갈 데도 없어. 흐흑... ”

 

왕재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훌쩍훌쩍 울었다. 갑자기 서러움이 북받쳤는지 흑흑 흐느끼다 아예 목을 놓아 울었다. 베르닌은 당황한 나머지 어쩔 줄을 몰랐다.

 

“ 야, 그만 울어. 내 서류 버려놓고 뭘 잘했다고 네가 울어... ”

 

“ 맨날 서류 얘기만 하고... 우리 극장 사람들도 내가 무슨 얘기하면 서류 때문에 안 된다 하고... 그깟 서류가 뭐라고 다들 난리야. 시커멓게 잉크 칠한 종이쪼가리밖에 더 돼? 엉엉... ”

 

왕재수가 소매로 눈과 코를 닦으면서 일어났다. 계속 흐느껴 울면서 현관으로 갔다. 문을 열면서 힐끗 돌아보았지만 이런 난감한 상황에 당황한 베르닌이 돌멩이처럼 굳어져 앉아 있자 더 심하게 울면서 나가버렸다.

 

 

*    *    *

 

 

베르닌은 한동안 멍하게 주저앉아 있었다. 지금이라도 사무실에 가서 3차 검토회의 자료를 뒤져 다시 4차 회의 자료 초안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전혀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머리가 아프고 뒤죽박죽이라 자료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화도 나고 답답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식탁 의자에 걸쳐진 코트를 보자 더 우울해졌다. 그래서 그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거실로 갔다.

 

복잡한 머리를 정리할 겸 청소나 하려고 빗자루와 걸레를 가져왔다. 그런데 카펫이 아주 깨끗했다. 분명히 아까 눈 녹은 흙탕물과 토사물로 잔뜩 더럽혀놨는데 얼룩은커녕 먼지조차 없었다. 구석을 보니 대형 헤어드라이어가 한 개 뒹굴고 있었다. 옆에는 이상한 꼬부랑글씨 상표가 붙어 있는 세제통과 분무기, 심지어 방향제까지 있었다. 외제인 걸 보니 왕재수가 가져온 게 분명했다. 소파에 묻어 있던 흙탕물 자국도 말끔히 지워져 있었다.

 

‘ 그랬구나... 나 자는 동안 카펫이랑 소파랑 다 청소했구나... 세균에 오염되면 더 악화될까봐... 벌레 지나간 자리는 더럽다고 밟지도 못하는 앤데 내가 토한 것도 다 치우고 드라이어로 말려놓기까지 했구나. ’

 

베르닌은 갑자기 너무너무 가책이 들었다.

 

‘ 그 철딱서니 없는 애가 나 아프다고 돌봐주고 침대에 뉘어주고 몸도 녹여줬는데... 기다리는 거 제일 싫어하는데 줄 서서 항아리 닭고기도 사다 주고 약도 받아다 줬는데 고마워하지도 않고 화만 냈구나. 소리 지르고 떠밀고 울리고... 나 진짜 나쁜 놈이었어. 그깟 서류가 뭐라고... 못된 국장 때문에 내가 정신이 나갔나봐. 사람이 중하지 서류가 중해? ’

 

가슴을 치며 자책하고 있는데 갑자기 현관문이 열렸다. 왕재수가 헉헉 숨을 헐떡이며 들어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시커멓게 검댕으로 물들어 있었다. 옆구리에 거무죽죽한 종이뭉치를 끼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고 현관에 선 채 종이뭉치를 흔들면서 베르닌을 불렀다.

 

야, 찾았어! 이거 맞지? ”

 

“ 어... 어, 너 그거... ”

 

“ 맞나 안 맞나 봐봐! 으윽, 더 이상은 못하겠다. ”

 

베르닌은 왕재수의 손에서 종이뭉치를 받아들었다. 온통 시커멓게 얼룩져 있었다. 펼쳐보니 4차 검토회의용 성과보고서 초안 제목과 날짜, 그리고 현란하게 줄이 그어진 표가 보였다. 종이 여기저기에 지저분한 흙탕물과 토사물 얼룩이 가득했다. 귀퉁이는 젖어서 찢어져 있었고 너덜너덜했다.

 

“ 어, 맞아... 너 이거 어떻게 찾았어? 버렸다면서... ”

 

“ 쓰레기 소각장 갔다 왔어. 오늘 일요일이라서 아직 안 태웠더라고. 근데 다른 쓰레기가 너무 많아서 한참 찾았어. ”

 

“ 쓰레기 소각장... 거기 갔었단 말이야? 거기 진짜 크고 엄청 더러운데... 거기 들어가서 쓰레기 뒤진 거야? ”

 

“ 응. 그래도 한 시간 만에 찾았어. 일요일이라 다행이야. ”

 

“ 너처럼 깔끔 떠는 애가 쓰레기를 막 뒤지고... ”

 

“ 그럼 어떡해. 너 잘린다며. 국장한테 목 졸린다며. 서무의 슬픔이란 게 있다며. 이제 서류 찾아서 괜찮은 거야? 이제 목 안 졸려? 안 잘리는 거지? 서무의 슬픔 없는 거지? ”

 

어흑, 내가 잘못했어... 너는 왕재수가 아니야. 너는 왕 착한 애야, 흐흑... 미안해... ”

 

베르닌은 왕재수를 와락 끌어안으며 흐느껴 울었다. 왕재수는 몸서리를 치면서 그를 밀어냈다.

 

“ 야, 하지 마. 나 엄청 더러워. 세균 옮아. 너 아픈데. ”

 

“ 그깟 세균 좀 옮으면 어때, 흐흑... ”

 

“ 왜 울지? 기뻐해야 되는 거 아니야? 이제 이 서류 가지고 일할 거야? 또 밤새고 일해서 무슨 검토회의 자료인가 뭔가 만들어? 내일 국장하고 회의해? ”

 

아니야, 나 일 안 해! 이깟 서류가 다 뭐야! 에잇!

 

베르닌은 종이뭉치를 북 찢어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왕재수가 깜짝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 너 뭐해! 중요한 서류라면서! ”

 

“ 이깟 서류 하나도 안 중요해! 시커멓게 잉크 칠한 종이쪼가리야! 자르려면 자르라지! 더 이상 이렇게는 못 살아! ”

 

“ 어... 난 왜 쓰레기장에서 저걸 뒤져왔니... ”

 

“ 미안해, 진짜 미안해. 너한테 화내고 소리 지르고 때릴 데 하나도 없는데 막 밀치고 무섭게 해서 미안해. 잘못했어. ”

 

“ 칫, 그래. 너 나한테 진짜 잘못한 거야. 내가 천재로 태어나고 싶어서 천재가 된 것도 아닌데 막 뭐라 하고. ”

 

“ 근데 너 역시 재수 없긴 해. ”

 

“ 괜찮아, 울 아저씨들이 난 예쁘니까 괜찮댔어. ”

 

베르닌은 왕재수가 검댕을 씻어내는 동안 오랜만에 가스 불을 올리고 수프를 끓였다. 왕재수가 좋아하는 생선 수프를 끓이고 싶었지만 냉장고에 들어 있는 게 별로 없어 그냥 양배추 수프를 끓였다. 냉동실에 있던 칠면조 고기를 탕탕 잘라내 굽고 감자 샐러드를 만들었다. 왕재수는 음식 투정을 하지 않고 정신없이 먹었다. 쓰레기를 뒤지느라 몹시 허기졌던 모양이었다. 차를 우려주자 무가당 초콜릿 캔디도, 사과파이도 없이 허겁지겁 마셨다. 혹시나 해서 렐랴가 선물했던 잼을 퍼주자 그것도 막 먹었다.

 

차를 다 마신 후 왕재수는 바이올린 깡패가 올 시간이 됐다면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베르닌은 갈갈이 찢어진 서류를 잠시 슬픈 눈으로 내려다보았지만 곧 그것을 전부 쓸어서 버렸고 왕재수가 가져다 준 약을 먹은 후 곧장 침대로 기어들어가 깊은 단잠에 빠졌다.

 

 

*    *    *

 

 

월요일에 베르닌은 아주 일찍 일어나 새벽 출근을 했다. 3차 검토회의 자료를 뒤져가며 다시 4차 회의 초안을 만들었다. 회의에서 국장은 어떻게 된 게 마지막 검토회의 자료가 이렇게 허술할 수가 있느냐며 베르닌을 사정없이 질책하고 자르겠다고 협박을 늘어놓았다. 베르닌은 그냥 가만히 있었다. 국장은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다가 결국 시간도 없었고 어차피 마지막 손질을 할 사람도 총괄 서무인 베르닌 뿐이었으므로 포기하고 이틀 내에 모든 작업을 완료할 것을 지시했다.

 

베르닌은 다시 이틀 밤을 샜고 100페이지짜리 업무 성과보고서와 역시 100페이지짜리 업무 계획서 최종본을 완성했다. 국장은 표지 디자인과 쪽 번호 글씨체까지 하나하나 간섭한 후에야 인쇄를 허락했다. 각각 50부를 인쇄 제본했다. 최고급 용지를 썼다. 국장은 그 중 각 5부씩에 서명을 하고 가브릴로프 KGB 지국 직인을 찍은 후 특급 공문서라는 딱지를 달아 우체국에 속달 배송을 의뢰하게 했다. 기일을 맞춰 보고서를 제출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모스크바 본부의 심의와 연방 지국 평가, 그리고 포상뿐이라고 의기양양해 했다.

 

이틀 후 모스크바의 루뱐카 KGB 본부로부터 전보가 한 장 날아왔다. 벌써 심의가 끝나고 우수 지국 표창이 결정됐나보다 하고 스페호프 국장은 기쁨에 들떴다. 우편물 수합 담당이라 전보를 받아들고 온 베르닌에게 봉투를 뜯고 소리 내어 읽어보라고 했다. 그래서 베르닌은 시키는 대로 했다.

 

 

“ 수신 :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지국장

 

귀 지국의 발전을 기원함.

귀 지국에서 제출한 성과보고서 및 업무계획서는 분량 초과로 심의 대상에서 제외, 즉각 폐기되었음을 통보함.

향후 동 보고서는 모스크바 표준 양식에 의거해 각각 5페이지 이내로 작성하고 임의의 양식 및 편집을 추가하지 말 것을 강력히 권고함.

 

모스크바 보안위원회 성과관리국장 ㅇㅇㅇ. “

 

 

스페호프 국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는 전보용지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집어던졌고 베르닌에게 그만 나가보라고 명령했다. 그날 국장은 두통으로 조퇴했고 다음날 3일의 병가를 내서 모두에게 어린이날을 선사했다.

 

베르닌은 국장의 병가에 맞춰 자기도 처음으로 3일 휴가를 냈다. 이제야 피로를 풀고 실컷 쉬며 놀 생각에 들떴다. 그러나 그의 첫 휴가는 어이없이 지나가버리고 말았다. 눈보라를 맞으며 두 시간 동안 줄을 서서 항아리 닭고기를 사오고 세균이 득실거리는 쓰레기 소각장에서 서류를 찾느라 녹초가 되었던 왕재수가 뒤늦게 폐렴에 걸려서 사흘 동안 끙끙 앓았기 때문이다. 바이올린 깡패는 하필 무슨 연수 때문에 모스크바에 가 있었고 왕재수는 극장에 아픈 게 알려지면 무시당한다는 이상한 논리를 내세우며 입원을 거부했다. 그래서 베르닌은 사흘 내내 왕재수의 곁에 붙어 앉아 베이비시터처럼 내내 간호를 해야 했다. 까탈스러운 왕재수를 간호하는 게 엄청나게 피곤해서 차라리 보고서를 한 번 더 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베르닌은 꾹 참았다. 어쨌든 왕재수는 그에게 렐랴가 짜준 목도리를 줬고 그 목도리는 엄청나게 따뜻한데다 좋은 냄새도 났기 때문이다.

 

   

 

 

 

FIN

2014. 12. 12 ~ 15

 

  ------

 

 

** 왕재수가 베르닌을 위해 사다 준 항아리 닭고기는 전에 writing 폴더에 발췌한 본편 우주의 미샤와 트로이의 이야기에도 잠깐 등장한다. 거기서는 닭고기 수프라고 썼다. 그 얘긴 여기 : http://tveye.tistory.com/3183

 

 이 시리즈에서는 항아리 닭고기로 격상시키면서 내가 야채 등 건더기를 더 추가시켰는데, 원래는 예전에 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식당에서 내 친구들이 가끔 사먹었던 조그만 단지에 든 닭고기 요리이다. 기름기 많은 수프 국물에 잠겨 있는 닭다리 요리로 심대하게 느끼하였으나 느끼한 거 잘 먹는 친구는 흑빵으로 싹싹 닦아가며 해치웠고 이거 먹으면 몸이 뜨끈해진다고 좋아했었다 :) 나야 베르닌보다는 왕재수의 식성에 가까운 편이라서 ㅋㅋ

 

** 연말에 보고서들 쓰느라 진짜 열받았었는데, 이 글은 3차와 4차 검토 사이에 쓴 거다. 여기선 4차 검토회의로 끝나는 걸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6차까지 갔다. 물론 업무계획서는 또 별도이니.. 하여튼 계속 회의하고 계속 고치고.. 삽질의 연속이었음 -_-

 

*** 이야기는 8편의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으로 이어진다~ 그건 아마도 주중에..

 

:
Posted by liontamer

아직 주말이 되려면 꽤 남았고 심신은 피곤하고..

위안을 위해 서무의 슬픔 시리즈 6편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올린다.

이 시리즈 쓰는 건 업무 스트레스 풀기 좋긴 한데, 막상 본편 쓰기가 어렵네.. 지금 서무 11편 쓰고 있긴 한데, 이거 마치면 당분간 다시 본편에 매진해야겠다. 근데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자꾸 받으니 ㅠㅠ

어쨌든 새 에피소드가 추가될 때마다 이 폴더 두번째 포스팅인 '등장인물 소개와 시리즈 목차'에 목차 추가 수정하고 있다. 포스팅한 후에는 링크도 올리고..(http://tveye.tistory.com/3428)

쓰고 보니 시리즈 중 이번 에피소드가 제일 길다... 그래도 대화가 많아서 분량 자체가 많지는 않다.

 

** 지금까지의 간단한 줄거리 **

   

1981년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가브릴로프에 새로 부임해 온 시 의회 의장은 야심차게 체육대회를 제안하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이번 편에 언급되는 가브릴로프 공공기관들, 그러니까 삼림국, 예산심의국, 출판문화국, 식품관리국 등등은 정확한 소련 시절 공공기관 명칭들이 아니고 내가 대충 만들어낸 것이다. 뭐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는 기관들이야 있었겠지만 어쨌든... ***

 

*** 새로 언급된 인물들 중 먀흐킨, 필로모프, 데니스는 본편에도 나온다 :) ***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6 

 

 

 

 

서무의 슬픔

-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전날 밤부터 베르닌은 비가 내리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기상이변이 일어나 눈보라가 몰아친다면 금상첨화였다. 마침 사흘 째 평년보다 기온도 낮았고 하늘도 우중충했으므로 그의 소망이 전혀 실현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다. 어쨌든 이미 10월 하순에 접어들고 있었으니까.

 

그를 이토록 전전긍긍하게 만든 것은 바로 토요일로 예정된 가브릴로프 공공기관 종합 체육대회였다. 원래 가브릴로프 KGB와 시 의회는 매년 친선 체육대회를 열어왔다. 말이 체육대회지 사실은 축구 한 게임 뛴 후 잔디밭에 둘러앉아 너도나도 보드카를 퍼마시며 늘어지는 야유회였다. 그 축구라는 것도 평균 연령대 40세 이상의 배 나온 남자들이 슬렁슬렁 뛰며 공을 차대는 조기축구회 수준이었다. 매년 체육대회 예산은 여유 있게 잡혀 있었으므로 최소한의 모양을 갖추기 위해 축구경기를 하나 끼워 넣은 것이다.

 

입사 2년차인 베르닌은 작년 대회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경기에 나가면 이기든 지든 특별수당을 받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출전은 고참들의 몫이었다. 심지어 스페호프 국장마저 출전했다. 나머지는 열심히 박수부대 노릇을 한 후 샤실릭을 구워먹고 밤중까지 보드카를 퍼마시며 놀았다. 그리 나쁜 기억은 아니었다. 신참이자 서무라는 이유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술심부름을 한 것 외에는. 작년 같은 체육대회라면 그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몇몇 직원들은 휴일에 대회를 한다고 툴툴댔지만 어차피 그는 격무 때문에 토요일에도 출근하는 처지였으므로 상관없었다.

 

문제는 얼마 전 군 출신의 시 의회 의장이 새로 부임하면서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란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며 공공기관 종합 체육대회를 개최하겠다고 선언한 데 있었다. 정력적인 의장은 심지어 직접 공공기관들을 분류해 두 개의 팀을 구성하는 의욕까지 보였다. 팀 이름까지 지었다. 군대 출신답게 독수리 팀과 호랑이 팀이었다. 독수리 팀에는 주요 행정 기관들, 즉 가브릴로프 시 의회와 KGB, 예산심의국, 삼림관리국, 식품관리국 등이 포진되었다. 호랑이 팀은 언론과 문화 관련 기관들로 구성되었다. 교육국, 출판문화국, 검열국, 그리고 가브릴로프 극장과 민속 극장이었다. 의회 의장은 중립을 지키겠다면서 빠졌기 때문에 독수리 팀의 사령관은 KGB 국장인 스페호프가 맡게 되었고 호랑이 팀은 보나마나 질 게 뻔하다고 생각한 기관장들이 너도나도 독이 든 성배를 거부한 나머지 감투 쓰는 것을 좋아하는 가브릴로프 극장장 먀흐킨이 맡게 되었다.

 

완벽주의자이자 호승심으로 가득찬 독재자 스페호프는 체육대회 승리를 위한 특별 TF를 구성했다. 모든 잡무에서 빠져본 적이 없는 베르닌도 끌려 들어갔다. 사전 훈련을 위한 특별 예산을 편성했고 붉은색 상의와 흰색 하의로 이루어진 운동복과 운동화를 새로 구입했다. 각 기관들로부터 후보 선수 명단을 제출받은 후 면밀히 검토해 대표 팀을 꾸렸다. 독수리와 호랑이의 기량은 누가 봐도 압도적인 차이가 났다. 시 의회야 나이든 의원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삼림관리국과 KGB가 있었다. 전자는 광대한 가브릴로프의 숲을 관리하고 벌목공들을 지휘하는 곳이라 힘 좋은 남자들이 많았다. KGB야 현장 요원들이 있으니 말이 필요 없었다. 문화니 예술이니 출판이니 하며 비실비실하기 짝이 없는 책상물림들과 계집애 같은 예술가들로 이루어진 호랑이 팀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애초부터 모든 종류의 문화예술을 경멸하는 스페호프는 이번 기회에 그 바보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며 굉장한 의욕을 보였다.

 

“ 그 약골들을 밟아버려야 해! 이기는 건 당연한 거고, 단 한 경기에서도 패하면 가만 두지 않겠네! ”

 

스페호프는 세심하게 명단을 검토했다. 조기축구회 아저씨들은 단 한 명도 팀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각 기관에서 젊은 피들이 대거 수혈되었다. KGB에서는 몇몇 여직원들을 제외하고는 28세의 다닐 베르닌이 막내였다.

 

“ 에 또... 그렇지. 자네는 축구, 높이뛰기, 공굴리기, 농구, 100미터 달리기, 투포환, 이어달리기... 전 종목에 출전하도록. ”

 

“ 국장님, 저는 농구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요. ”

 

“ 상관없어. 180이 넘는 애들이 필요해. 우리 팀은 다 좋은데 의외로 키 큰 놈들이 별로 없단 말이야... 일단 들어가서 리바운드를 전담하도록. 필요하면 레이업 정도는 할 수 있겠지. ”

 

“ 그런데 리바운드가 뭔가요? ”

 

“ 농담하는 거겠지? ”

 

국장의 눈초리가 너무나 매서웠기 때문에 베르닌은 등줄기가 오싹했다. 그래서 급하게 허풍을 쳤다.

 

“ 아... 하하하, 농담이었습니다. 리바운드를 전담하겠습니다... 저... 그런데 축구는 좀 해봤지만 제가 달리기는 자신이 없어서요. ”

 

“ 자네 기초 체력 시험 기록 보니까 100미터를 11초대에 뛰던데? ”

 

“ 아니, 그건 입사 전이고요... 지금은 운동을 전혀 안 해서요. 매일 야근하느라 운동은커녕 산책할 시간조차... ”

 

“ 시끄러워! 필로모프 빼고는 자네 기록이 제일 좋아. 그 친구가 하필 맹장염에 걸릴 게 뭔지... 100미터 대표로 나가게. 그리고 이어달리기는 마지막 주자로 뛰는 거야. 축구는 원톱 스트라이커. 그리고 키가 크니 높이뛰기쯤은 껌이겠지. 어깨가 넓으니 투포환도 잘 할 거고. ”

 

“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어째서 제가 모든 경기에 다 나가야 하는 거죠? 저는 행정직이잖습니까... 현장 요원들도 많은데... ”

 

“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애들이 전부 골골거리지 뭔가. 글리셰프는 격투 연습하다가 팔을 삐었다지를 않나, 스포츠 만능이었던 콜랴는 하도 술을 많이 마셔댄 덕에 지방간 증세가 심해져서 요양소에 갔지. 에멜리얀은 이제 나이가 너무 많아서 뛰는 게 시원찮더군. ”

 

“ 국장님께서 가장 총애하시는 안드레이는... ”

 

“ 그 친구는 사격 전문이야. 스나이퍼라서 막상 이렇게 몸을 쓰고 뒹구는 일에는 맞지 않아. 그리고 언제 다들 이렇게 늙었는지... 필로모프를 빼면 제일 젊은 놈이 서른다섯이더군! 망할 필로모프 녀석은 대체 뭘 잘못 퍼먹고 맹장염이람. 힘 잘 쓰는 놈들은 삼림국에서 전부 채웠으니 자넨 날렵하게 뛰어다니며 우리 독수리 팀의 승리를 견인하게! 가장 젊은 친구니까 그 정도는 당연히 해내야지! 암, 그렇고말고!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란 말이 맞네. 정부의 슬로건을 지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행정의 기본이야. 이번 대회에서 그 약골 호랑이 팀을 이기지 못하면 전부 자네 책임으로 알겠네! ”

 

“ 아니,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저는 원래 수영 외에는 잘하는 운동이 없어서... 차라리 수영 선수로 뽑아주시면 안될까요? 종목을 추가해서... ”

 

“ 야외에서 하는 대회인데 웬 수영! ”

 

“ 그러니까... 즐라타야 강을 횡단한다든지... ”

 

“ 10월말에 강을 헤엄쳐 건너겠다고? 얼어 죽고 싶나? ”

 

“ 하지만... 축구에 달리기에 공굴리기, 높이뛰기에 리바운드에 심지어 투포환이라니... 자신이 별로 없습니다. ”

 

“ 젊은 놈이 왜 이렇게 패기가 없어! 그 따위 자세로 KGB 요원이라니, 덩치가 아깝군! 이런 글러먹은 책상물림 같으니. 군대를 보내야 하나. ”

 

“ 군대는 벌써 다녀왔는걸요... ”

 

“ 군대에도 다녀온 놈이 이렇게 나약한 소리를 지껄여? 설마 밤이고 낮이고 손에 잉크를 묻히며 기사나 써대는 놈들과 계집애처럼 타이츠나 입고 엉덩이를 살랑대는 무용수 녀석들도 못 이기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런 놈이라면 강에 빠져죽어야지! 전승무패가 목표일세! 한 경기라도 지면 각오하게. 그럴 리는 없겠지만 1백만분의 1로 대회에서 패하기라도 하면 자넨 모가지야!

 

“ 아니, 저는 행정직으로 시험을 보고 입사했는데 어째서... ”

 

“ 시끄럽네! 당장 나가서 축구 연습이나 하게! ”

 

스페호프는 심지어 대회 일주일 전부터는 출전 선수들에게서 업무도 모두 면제해 주었다. 베르닌조차도 서무 업무를 면제받았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만큼 국장이 승부욕에 불타고 있었으니 정말이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베르닌도 독수리 팀이 대회에서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상대 팀이 너무 약골이었으니까. 애초부터 의회 의장과 스페호프가 자신들의 승리를 위해 양 팀을 구성했고 경기 종목을 편성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국장의 말대로 전승무패할 자신은 없었다. 축구나 투포환, 공굴리기 따위야 삼림국 덩치들이 있으니 괜찮았지만 달리기 같은 건 어쩐지 무용수들이 다리가 기니까 더 잘할 것 같았다. 최소한 한 경기 정도는 내주게 될 것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사실 그가 국장의 말대로 책상물림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스페호프에게 엄살을 부리기는 했지만 그는 운동신경이 나쁘지 않은 편이었고 대학 시절에는 축구도 꽤 했다. 문제는 입사 후 2년 동안 너무나도 격무에 찌든 나머지 체중은 불어나고 몸이 둔해졌다는 데 있었다. 2년 동안 운동이라곤 해본 적이 없었다. 최근에는 뱃살이 슬며시 접히고 옆구리살이 만져질 정도였다. 격무와 야근으로 인한 야식, 수면 부족 때문에 만성 식도염과 위염에 시달리고 있었다.

 

대회 직전 일주일 동안 베르닌은 축구, 높이뛰기, 공굴리기, 농구, 100미터 달리기, 투포환, 이어달리기 연습에 너무 지쳐서 차라리 서무로 되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특히 축구는 더 그랬다. 삼림국의 덩치 큰 녀석들은 힘은 좋았지만 단순무식해서 전략이란 걸 몰랐다. 베르닌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지만 원톱 스트라이커는커녕 공을 발끝에 대보지도 못했다. 승부욕 강한 불곰 같은 삼림국 대표들이 너도나도 골을 넣어 영웅이 되고 싶어 안달이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는 후방 수비수로 밀려났다. 달리기는 아무리 뛰어도 옛날 기록이 나오지 않았다. 탈진한 나머지 집에 가면 그대로 뻗어버렸다.

 

 

스페호프는 대회 이틀 전에 베르닌을 상대 팀의 연습장으로 급파했다. 두 팀 모두 비밀 유지를 위해 출전 선수 명단을 공개하지 않았다. 마침 극장 앞 레닌 광장에서 호랑이 팀의 연습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국장은 베르닌에게 그쪽으로 가서 정보를 좀 긁어모아 오라고 했다.

 

“ 뻔히 제가 독수리 팀 쪽이란 걸 다 아는데 들어오게 할까요? ”

 

“ 아무도 자넬 위협적으로 생각 안 할 걸세! 누가 봐도 얼간이 책상물림이잖나! 바로 그것이 우리의 전략이지. 알고 보니 얼간이가 에이스였다! 삼형제 중 바보 이반인 것이지! ”

 

“ 별로 칭찬 같지 않은데요... ”

 

“ 시끄러워. 빨리 다녀와! 정 의심하면 그 불여우를 보러 왔다고 하게! 다 알지 않나, 자네와 그 불여우... 아침에 하고 점심에 하고 저녁에... ”

 

“ 국장님, 정말 그건 오해입니다. 저희는 진짜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요. 아아 억울해... ”

 

“ 썩 다녀오지 못해! ”

 

그래서 베르닌은 울며 겨자 먹기로 레닌 광장으로 향했다.

 

 

*   *   *

 

 

광장은 한산했다. 호랑이 팀이 축구 연습을 하고 있었다. 나무 뒤에 숨어서 지켜보니 별로 위협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체격 조건도 훨씬 떨어지는데다 서로 공을 넣겠다고 아옹다옹하던 독수리 팀과는 정반대로 아무도 나서지 않아서 공이 자기 혼자 굴러가기 일쑤였다. 저 정도면 괜찮겠다 싶었다. 몰래 사진을 찍고 있는데 옆에서 누가 어깨를 툭 쳤다.

 

“ 어, 너 여기서 뭐해? ”

 

베르닌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후다닥 카메라를 등 뒤로 감추었다. 옆을 보니 왕재수였다.

 

“ 아, 나... 그냥 지나가다 들렀어. 어, 그러니까... 너 밥은 먹었어? ”

 

“ 내 밥 챙겨주려고 들른 거야? ”

 

“ 어... ”

 

“ 며칠 동안 방치하더니만. 출퇴근도 안 시켜주고... 맨날 한밤중에 들어오느라 내 밥도 안 챙겨주더니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담. ”

 

“ 어... 알잖아, 나 서무인 거. 국장이 자꾸 괴롭혀서 바빴어. 너 그래서 요즘 끼니 거른 거야? 설마 또 극장 사무실에서 잤어? 그 바이올리니스트 깡패 또 어디 갔어? ”

 

“ 안 갔어. 이번 주는 계속 로만이 집에 와 줬어. 밥도 해주고 차도 우려주고 출퇴근도 시켜줬어. 근데 로만은 침대 기술만 좋지 음식 솜씨는 참 별로야. 차도 대충대충 우려주고 운전도 너보다 못해. 넌 언제 안 바빠지는 거야? ”

 

“ 체육대회 끝나면 좀 나아질 거 같아. ”

 

“ 왜? 너도 거기 나가? ”

 

“ 아, 아니! 난 책, 책상물림이라서 안 나가... 국장이 날 무시하잖니. ”

 

“ 으응... 키도 크고 체격도 좋은데 이상하네. 나 같으면 너 쓸 텐데. ”

 

“ 고, 고맙구나. 근데 그게 무슨 뜻이야? 너희 팀 선수들은 네가 뽑아? ”

 

“ 아니, 극장장이 뽑긴 하는데... 자꾸 경기마다 우리 발레단 애들을 집어넣잖아. 다리 길고 체력 좋다고... 그래서 극장장이랑 한바탕 했어. ”

 

“ 왜? 그나마 너네 팀은 무용수들이 제일 낫지 않아? 나이도 젊고 체격도... 너네 맨날 왕자 추는 애, 데니스인지 뭔지 걘 키도 187인가 그렇고 엄청 딱 벌어지고... ”

 

“ 아휴, 정말 너도 아무 것도 모르는구나! 운동할 때 쓰는 근육하고 춤 출 때 쓰는 근육은 다르단 말이야! 특히 축구 같은 거 잘못하면 다리 망가지고 근육이 미워져서 큰일 나. 이 와중에 무슨 축구니 농구니 달리기니 투포환까지... 가뜩이나 우리 애들은 춤도 못 춰서 연습 많이 시켜야 되는데 이 바쁜 시기에 어째서 체육대회인지 나발인지를 하는 거야... 무용수들은 그런 거 안 해봤단 말이야. 나도 축구는 하나도 몰라. ”

 

“ 아, 그렇구나... 무용수들은 허우대만 멀쩡하지 운동은 안 되는 거구나. ”

 

“ 우리 애들 못 나가게 하느라 극장장이랑 얼마나 싸웠는지 알아? 아유 머리 아파... 이게 무슨 스탈린 시절 복고주의람. 군기나 잡고 애들 다 불러 모아서 뺑뺑이 돌리고! 공연도 취소해버리고. 심지어 토요일이라니! 극장은 토요일에 관객이 제일 많은데! ”

 

“ 너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 다시 잡혀가면 어떡하려고 그래. 또 감옥 가고 고문 받고 싶냐? 나니까 가만히 있는 거지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가면 너 밀고 당한다. ”

 

왕재수는 퍼뜩 놀라며 주위를 살피고는 입을 다물었다. 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베르닌은 주머니를 뒤져 갱지로 싸 놨던 사과파이 반 조각을 꺼내주었다.

 

“ 자, 먹어. 점심 때 선수들 특식으로 나온 디저트였는데 절반 남겨왔어. ”

 

“ 너는 선수 아니라면서 왜 특식을 받았어? ”

 

“ 어... 누가 안 먹는다면서 줬어. ”

 

다행히 왕재수는 사과파이에 정신이 팔려서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 왕재수가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파이를 먹는 동안 베르닌은 슬슬 정보를 캐냈다.

 

“ 그럼 무용수들은 거의 안 나오는 거네? 데니스도 안 나와? ”

 

“ 응. 내가 못 나가게 했어. 걔 당장 내일 백조의 호수 춰야 되는데 부상이라도 당하면 어쩌라고. ”

 

“ 그럼 다른 남자애들은 나와? ”

 

“ 아휴 너 진짜 발레랑 담 쌓았지! 발레에 남자들도 많이 나온단 말이야. 주인공만 추는 거 아니야. 솔리스트들도 있고 군무진도 있고... 전부 무대에 나와서 춤추고 연기해야 해. 다 못 나가게 했어. 드라마 하는 애들만 내보냈어. 오케스트라도 거의 못 나가. 악기 다루는데 손 다치면 끝장이잖아. ”

 

“ 그럼 호랑이 팀은 극장 쪽은 거의 안 나오는 거네. 출판문화국이랑 검열국이랑 교육국 정도네. ”

 

“ 응. 근데 출판국 애들은 다들 무슨 터널증후군인지 뭔지 때문에 손목을 잘 못 쓴대. 검열국 애들은 하도 서류 검열을 많이 해서 안경 벗으면 장님 수준이라고 걱정하더라고. 그나마 교육국 애들로 채운 거 같아. 극장장이 나한테 막 화냈어. 가뜩이나 차출할 애들 없는데 내가 고집 부려서 무용수들 못 나가게 한다고. 칫, 그깟 놈의 체육대회가 대수야? 마초 군국주의자들 같으니. 승부에 이기는 게 그렇게 중요해? 그러니까 맨날 그렇게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 ”

 

“ 밀고... 고문... ”

 

“ 압... ”

 

왕재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정보를 술술 알려준 왕재수가 고맙기도 하고 어쩐지 귀엽기도 해서 베르닌은 다시 주머니를 뒤져 무가당 초콜릿 캔디를 건네주었다. 사탕을 먹으며 좋아하는 왕재수를 뒤로 하고 그는 사무실로 복귀했고 스페호프에게 호랑이 팀의 선수 구성안에 대해 보고했다. 스페호프는 매우 좋아했다.

 

“ 잘됐군! 아주 잘됐어! 데니스 보그다노프가 안 나온단 말이지? 그 팀에서는 그놈 하나만 경계했었는데... 어서 운동장으로 가서 연습을 계속하게! 특히 리바운드! 자네 농구는 형편없더군. 리바운드를 지배하는 자가 경기를 지배한단 말일세! 리바운드 1천개와 레이업 슛 2만개를 연습하게! ”

 

체육대회 전날 밤 베르닌은 과도한 연습으로 몸살이 나고 말았다. 팀의 에이스 노릇을 하며 전승무패를 견인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는데 몸살이 나다니 정말 울고 싶었다. 호랑이 팀이 오합지졸이라 다행이긴 했지만 그래도 모든 종목에서 승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비나 우박, 눈보라가 몰아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    *    *

 

 

베르닌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체육대회 당일은 날씨가 아주 화창했다. 기온도 평년보다 높았다. 그리하여 다닐 베르닌은 실낱같이 남아 있던 신앙을 완전히 버리게 되었다.

 

대회는 시립대학교 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오른편은 빨간색과 흰색 의상의 독수리 팀 응원단이, 왼편은 검은색과 금색 의상의 호랑이 팀 응원단이 자리 잡았다. 주민들도 많이 보러 왔다. 장장 20분에 달하는 의장의 개회사 후 경기가 시작되었다.

 

첫 종목은 거대한 공굴리기였다. 몸 풀기용 게임이었다. 호랑이 팀은 출판문화국 직원들이 출전했고 독수리 팀은 식품 관리국 직원들과 베르닌이 나섰다. 베르닌은 이미 출판문화국 직원들이 터널 증후군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팀원들에게 박자를 세면서 천천히 공을 밀고 가기만 하면 처음에 좀 뒤처져도 이길 거라고 알려주었다. 그의 전략은 들어맞아서 호랑이 팀 선수들은 손목이 아파서 호들갑을 떠느라 결국 운동장 반대편까지 공을 놓치고 말았다. 독수리 팀은 가뿐하게 승리했다.

 

그 다음은 농구였다. 베르닌이 개인적으로 가장 두려워하는 종목이었다. 죽어라고 연습한 끝에 레이업 슛은 연마했지만 리바운드만은 도통 되지가 않았다. 그래도 덩치 좋은 삼림국 직원들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다행이었다.

 

상대 팀 선수들은 대부분 오합지졸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 로만 코즐로프가 끼어 있다는 것이었다. 195센티미터의 바이올린 깡패는 팔을 휘저으며 위협적으로 돌진했다. 분명히 악기 연주자들은 손이 생명이라고 왕재수가 그랬는데 어째서 저 깡패 아저씨는 황소처럼 돌진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코즐로프의 키가 너무 커서 다들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가뜩이나 리바운드가 형편없는 베르닌은 키 큰 코즐로프 때문에 단 한 개도 성공하지 못했다. 코즐로프에게 떠밀릴 때마다 코트 바깥에서 스페호프가 욕설을 퍼부었다.

 

“ 이 얼간이 천치 같으니! 리바운드를 지배하는 자가 경기를 지배... ”

 

줄줄 흐르는 콧물과 연달아 터지는 재채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베르닌은 열심히 뛰었다. 다행히 후반이 되었을 때 코즐로프는 연달아 저지른 파울 때문에 퇴장 명령을 받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바이올리니스트는 모든 것이 의회와 KGB의 음모라느니, 승부 조작이라느니 모함이라느니 심판을 매수했느니 하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대며 코트에 뻗대고 주저앉았다. 아무도 그를 끌어낼 수가 없어 난감할 지경이었다. 사실 마지막 파울은 누가 봐도 독수리 팀의 잘못이었기 때문에 코즐로프로서는 억울할 만도 했다. 스페호프가 마취총을 투입시켜야겠다고 의장과 은밀하게 속닥거리기 시작했을 때 왕재수가 코트로 나와서 바이올리니스트의 팔을 잡고 질질 끌고 나갔다. 키다리 깡패는 소리를 지르며 반항했다.

 

이거 놔! 경기를 조작하다니, 용서할 수 없어!

 

“ 올림픽도 아니고 동네 공놀이인데 왜 그렇게 흥분해. 당신 내일 연주도 해야 되잖아. 빨리 나와. ”

 

“ 귀염둥이 비둘기 너는 가만히 있어! 부정부패가 이루어졌단 말이야! ”

 

“ 지금 안 나오면 나 삐칠 거야. ”

 

코즐로프는 금세 한풀 꺾여서 순순히 퇴장했다. 구경꾼들은 새로 온 예술 감독의 권위가 대단한 모양이라고 수군거렸다. 나이도 어리고 풋내기라서 극장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줄 알았는데 삐치겠다는 말도 안 되는 협박에도 저 깡패가 겁을 먹다니 대단한 카리스마라고 입을 모았다.

 

어쨌든 코즐로프가 퇴장한 후 상황은 일변했다. 독수리 팀은 곧 역전했고 베르닌은 드디어 리바운드라는 것을 한 개 성공시켰다. 경기는 10점 차이로 승리했다.

 

2대 0이 되자 스페호프는 뛸 듯이 좋아했다. 심지어 베르닌에게 콧물을 닦으라고 손수건까지 건네주었다. 베르닌은 기침을 하면서 죽어가는 목소리로 애걸했다.

 

“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분위기를 보니 저희가 가뿐히 이길 것 같은데 저는 이제부터 빠지면 안될까요? 너무 아파서요. ”

 

“ 무슨 소리야!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모르나! 계속 뛰면 감기도 달아나고 말끔히 나을 걸세! 게다가 이번 경기는 100미터 달리기잖아! 11초 주파의 실력을 보여야지!! 다른 애들은 전부 12초도 못 끊어. ”

 

그래서 할 수 없이 베르닌은 코를 훌쩍이며 스타트 레인으로 갔다. 각 팀별로 4명이 출전하게 되어 있었고 베르닌은 가운데 4번 레인이었다. 놀랍게도 금색 티셔츠에 검정색 반바지를 입은 왕재수가 터벅터벅 걸어와서 그의 옆자리인 5번에 섰다.

 

“ 어, 너 뭐야? 경기 나와? ”

 

“ 응. ”

 

“ 왜? 너 왜 나와? 근육 미워진다며... 무용수들은 다 안 나온다며. ”

 

“ 극장장이 집어넣었어. 무용수들 다 못 나오게 했으니까 나라도 뛰래. ”

 

왕재수는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 너도 무용수잖아!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추는... 다리 다치면 어떡하라고! ”

 

“ 나 연초에 은퇴했잖아. 무용수 아니고 감독이니까 뛰어야 한대. 나이도 어리니까 무조건 뛰래. 아 정말 싫다... 강제로 이런 거 시키고 공산당 행사에 동원하고. 열 받아. ”

 

“ 그냥 대충대충 뛰고 들어가. 너 못 뛰어도 아무도 욕 안할 거야. 어차피 기대도 안 하고. 고문당해서 몸도 다 안 나았잖아. ”

 

“ 아 정말 귀찮아. 근데 언제 뛰어야 하는 거야? ‘준비’ 하면 뛰어? ”

 

“ 아니, 그때 뛰면 부정출발로 실격당해. 총 쏘면 뛰어. ”

 

“ 총이라니! ”

 

“ 공포탄이야. 너 정말 이런 거 한 번도 안 해봤구나. ”

 

“ 달리기 하면서 총까지 쏘다니. 정말 저질이야. ”

 

그때 ‘준비’ 소리가 들려왔다. 베르닌은 급하게 자세를 취했다. 왕재수는 다들 몸을 구부리자 대체 왜 이런가 싶어 멀뚱멀뚱 주위를 둘러보며 무슨 패션모델이나 되는 마냥 금색과 검정색 운동복 맵시를 뽐내며 서 있었다. 총 소리가 탕 하고 울리자 선수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뛰쳐나갔다.

 

베르닌은 미친 듯이 뛰었다. 젖 먹던 힘을 다해 달렸다. 폐가 타고 내장이 다 튀어나올 것 같았다. 50미터까지 선두를 유지했다. 그런데 순식간에 금색과 검정색의 무슨 회오리 같은 것이 그의 곁을 쌩 하고 스쳐지나갔다. 깜짝 놀라 그는 더 죽어라고 뛰었다. 정신없이 결승선을 통과했다. 그러나 이미 상대팀 선수는 눈 깜짝할 사이에 골인한 후였다. 운동장이 환호와 충격의 비명으로 가득 찼다. 스페호프가 경악에 가득 차 고함을 질렀다.

 

2등이라니! 이건 뭔가 잘못된 거야! 심지어 저 불여우한테 밀리다니! ”

 

베르닌은 숨을 헐떡이며 주저앉아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왕재수가 측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수건을 건네주었다.

 

“ 웬 땀을 그렇게 흘리니. 겨우 그거 뛰어놓고. 너 운동 부족인가 봐. ”

 

“ 방금, 방금 그거 너였어? ”

 

“ 뭐가? ”

 

“ 내 옆으로 뛰어간 거... 회오리. 1등한 애. ”

 

“ 아, 그거? 너네 왜 그렇게 못 뛰어? 모래주머니라도 찼니? ”

 

“ 너 대체 100미터 몇 초에 뛰는 거야? 10초대야? 나... 11초... 그러니까 지금은 아니지만 2년 전에는 그랬는데. ”

 

“ 몰라. 그런 거 몇 초에 뛰는 게 중요해? 나 원래 뜀박질은 잘 했어. 버스랑 지하철 타면 떠밀릴까봐 맨날 극장까지 뛰어다녔거든. 레닌그라드는 여기처럼 촌동네가 아니라서 버스가 만원이란 말이야. ”

 

베르닌은 입을 딱 벌렸다. 이로써 전승무패 목표는 깨지고 말았다. 스페호프가 저편에서 이를 갈며 그를 노려보는 게 느껴졌다. 남은 경기를 모두 이겨야만 그나마 만회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다음 종목은 높이뛰기였다. 베르닌은 별로 자신 없는 종목이었고 심지어 가로대를 쓰러뜨려서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삼림국 직원 보리스가 중학교 때까지 높이뛰기 선수였기 때문에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역시나 보리스는 훌륭했다. 다른 선수들보다 족히 5센티는 더 높이 뛰었다.

 

호랑이 팀의 마지막 선수는 왕재수였다. 왕재수는 운동화 끈을 고쳐 매면서 계속해서 툴툴거렸다.

 

“ 달리기에 나가라 높이뛰기에 나가라... 집단농장에 끌려가서 농활하는 거랑 뭐가 다르담. ”

 

베르닌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갑자기 예전에 텔레비전으로 봤던 왕재수의 공연 영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슨 왕자인지 뭔지를 추는데 꽤 높이 뛰었던 것 같았다. 몸이 가벼워서 잘 뛸 것 같았다. 그래도 왕재수는 키가 그렇게 크지 않으니 185센티의 보리스보다는 불리할 것이다. 그 순간 왕재수가 다다다 하고 도움닫기를 하더니만 붕 하고 뛰어 올랐다. 가뿐하게 바를 넘었다. 순식간에 보리스의 기록과 동점이 되었다.

 

보리스는 이를 악물고 5센티를 더 올려서 성공했다. 왕재수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15센티를 높여달라고 했다. 모두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급하게 왕재수를 붙들었다.

 

“ 너 제발 그만해. 15센티 올리면 올림픽 수준이야. 가로대에 걸리면 다리 다칠지도 몰라. 넌 심지어 정면뛰기로 뛰잖아. 그거 잘못하면 가로대 타고 앉아서 크게 다쳐. 차라리 보리스처럼 배면뛰기를 하든가. ”

 

“ 배면뛰기? 아, 아까 쟤가 하던 거? 뒤로 넘는 거? 보기 흉하잖아. 무용수는 죽어도 폼이 중요해! 그리고 난 맨날 정면으로 도약해서 다른 건 잘 안 돼. ”

 

“ 그건 발레잖아! 이건 스포츠야, 다르단 말이야! 다치면 어떡하라고. ”

 

“ 아휴 왜 이렇게 잔소리가 많아. 그냥 뛰면 되지. 뭐가 어렵다고. ”

 

왕재수는 발칵 화를 내더니 끝내 높이를 낮추지 않고 그대로 뛰었다. 베르닌은 무슨 로켓이 날아가는 줄 알았다. 왕재수가 얼마나 높이 뛰었는지 구경꾼들은 소리조차 못 질렀다. 가로대는 멀쩡했다.

 

보리스는 사색이 되었다. 도전을 포기했다. 높이뛰기도 호랑이 팀의 승리로 돌아갔다. 순식간에 2대 2가 되고 말았다.

 

스페호프가 고함을 지르며 선수들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 이런 천치 같은 것들아! 밥은 왜 먹고 사냐! 다른 놈도 아니고 저 계집애 같은 불여우한테 지다니! 창피한 줄 알아야지! 한번만 더 졌다가는 전부 모가지야! ”

 

베르닌은 쭈뼛쭈뼛 나섰다.

 

“ 국장님, 아직 투포환이랑 축구, 이어달리기가 남아 있습니다. 전부 이기면 됩니다. 노여워 마십시오... ”

 

“ 아까 그 꼬마가 100미터 뛰는 거 안 봤나! 이어달리기는 위험해! 남은 두 개를 전부 이겨야 해! 하는 꼬라지를 보니 저 녀석이 남은 경기 세 개에 다 나올 것 같은데! ”

 

“ 예... 나머지는 승리가 가능합니다. 투포환은 어차피 힘을 쓰는 종목이라... 왕재수, 아니 야스민은 출전을 못 할 겁니다. 달리기나 높이뛰기와는 다르니까요. 몸도 하늘하늘하고. 축구는 제가 물어봤습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답니다. 규칙도 전혀 모르고요. 그러니까 저희가 이길 겁니다. ”

 

베르닌은 삼림국 덩치들과 함께 투포환 경기에 나갔다. 호랑이 팀에서도 그나마 덩치 큰 선수들 세 명이 나왔다. 그런데 맨 뒤에 왕재수가 터덜터덜 따라 나왔다. 큰 선수들 사이에 끼자 더 가냘프고 날씬해 보였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 왜 투포환까지 나오는 거야? 이것도 극장장이 끼워 넣었어? ”

 

“ 응. 괜히 달리기랑 높이뛰기 잘했나봐. 너네들이 그렇게 못할 줄 몰랐어. 대충 하나만 하고 도망가려고 했는데 망했어. ”

 

“ 다른 경기도 다 나와? ”

 

“ 응... 이어달리기까지 다 뛰래. 진짜 귀찮아. ”

 

“ 설마 축구도? ”

 

“ 아니, 그건 못한다고 했어. 아무 것도 모르잖아. 하긴 극장장이 축구는 자살골 넣을지도 모른다면서 들어가지 말랬어. 근데 자살골이 뭐야? ”

 

“ 있어, 그런 게. 너 투포환이 뭔지는 알아? ”

 

“ 공 던지는 거 아니야? 한 번도 안 해봤어. 아, 진짜 싫다. 나 옛날에 어깨 부상당해서 진짜 힘들었는데. 극장장한테 어깨 아파서 안 된다고 했는데 축구랑 이거 둘 중에 하나 선택하라고 협박하잖아... 축구는 진짜 싫어. 흙먼지 잔뜩 먹고 막 넘어지고 걷어 채이고. 그래서 투포환 한댔어. ”

 

“ 이거 그냥 공 아니고 쇠공인데... 꽤 무거워. 너 잘못하면 다칠지도 몰라. 던지는 방법도 모르잖아. 그냥 기권해. 어깨도 아프다면서. 몸도 그렇게 가냘파서 어떻게 이걸 던지려고... ”

 

“ 대충 던지고 들어가지 뭐. ”

 

왕재수는 잔뜩 풀이 죽은 채 한쪽 구석에 앉아서 다른 선수들이 포환을 던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베르닌은 시 의회 의장이란 놈에게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휴일에 이런 대회를 하는 것도 모자라 저 가냘프고 날씬한 왕재수에게 포환까지 던지게 만들다니. 심지어 고문을 받아서 춤도 못 추게 된 애한테 정말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왕재수의 말이 옳았다. 이것은 마초 군국주의의 부활이었다!

 

베르닌은 생각보다 포환을 아주 멀리 던졌다. 매일같이 사무실 비품들을 나른 보람이 있었다. 최고의 기록이 나왔다. 스페호프가 그토록 기뻐하며 그의 이름을 연호한 것은 처음이었다. 다행히 경기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좋아하고 있는데 왕재수가 마지막으로 나오더니 빙그르르 돌면서 윙 하고 팔을 휘둘렀다. 쇠공이 진짜 포탄처럼 휙 하고 날아갔다. 운동장 전체를 가로질러 날아가 학교 유리창을 박살냈다. 호랑이 팀이 3대 2로 앞서게 되었다.

 

베르닌은 반쯤 울먹이면서 왕재수를 붙들었다.

 

“ 투포환 못한다고 했었잖아. ”

 

“ 내가 언제 못한댔어. 해본 적 없댔지. ”

 

“ 그게 그거잖아. ”

 

“ 너네들 던지는 거 보고 자세 배워서 이제 할 줄 알아. ”

 

“ 어깨 아프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던져. 자작나무처럼 날씬한 녀석이 대체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오는 거야. ”

 

“ 나 되게 힘센데. 밥 먹고 하던 일이 맨날 발레리나들 번쩍번쩍 드는 거였잖아. 그리고 이거 힘으로 하는 거 아니던데? 전신의 스냅을 이용해서 이렇게 돌면서 던지는 거잖아. ”

 

“ 아아, 대체 너는 못하는 게 뭐야... 어헝. 축구도 잘 하는 거 아니야? ”

 

“ 축구는 진짜 하나도 몰라. 하기도 싫어. 그건 안 나갈 거야. 근데 너 왜 그렇게 울어? ”

 

“ 몰라... 망했어. 너 때문에 나 잘릴지도 몰라. 국장이 오늘 독수리 팀 못 이기면 각오하라고 했는데 넌 왜 갑자기 툭 튀어나와서 이렇게 다 이겨버리는 거야. 허헝... 왜 겉보기처럼 비실거리지 않고 올림픽 선수처럼 뛰는 거냐고. ”

 

“ 나 운동신경 원래 되게 좋은데. 둔하면 춤 못 춰. 말해줬잖아, 내 두툼한 허벅지 근육. 춤도 잘 추고 침대에서도 끝내주고 당연히 운동신경도... ”

 

“ 흐흑 제발 침대 얘긴 그만해... 어헝... 잘리기 싫어. ”

 

“ 아휴 촌스러워. 누가 체육대회 때문에 잘린다고. 나 축구는 안 나간다고 했잖아. 울지 마. ”

 

“ 이어달리기 나올 거잖아, 흐흑... ”

 

“ 우리 애들 전부 너네보다 못 뛰어서 어차피 너네가 이길 거야. 그만 좀 울어, 아 창피해. ”

 

베르닌은 훌쩍훌쩍 울면서 독수리 팀 천막으로 돌아갔다. 천막 안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선수들을 들들 볶고 있던 스페호프가 이를 갈더니 베르닌을 쏘아보았다.

 

“ 그 불여우가 축구 경기에 안 나오는 게 확실한가? ”

 

“ 예... 안 나온답니다. 축구는 하나도 모르고 흙먼지 뒤집어쓰고 걷어채이는 게 싫다고... 자살골이 뭔지도 모르더군요. ”

 

“ 그래? 좋아. ”

 

스페호프는 결연하게 일어섰다. 본부석으로 가더니 의장과 한참 속닥거리고 돌아왔다.

 

“ 좋아. 마지막 기회야! 축구는 반드시 이겨야 하네! 호랑이 팀 선수 명단을 바꿔쳤어! 그 불여우가 선발로 나오게 만들었네! ”

 

선수들이 경악해서 비명을 질렀다.

 

“ 으악, 국장님... 그 꼬마가 또 훨훨 날아서 해트트릭이라도 기록하면 어쩌라고요! 걘 운동천재라고요! 축구 한 번도 안 해 봤다 해도 금방 터득할 게 분명해요. 아예 발도 못 들여놓게 해야... ”

 

“ 이런 머저리들! 내 깊은 뜻을 모르겠나? 설령 우리가 축구를 이긴다 해도 3대 3 동점, 결국 이어달리기에서 승부가 결정되네! 명단 보니까 저놈이 마지막 주자야! 아까 100미터 뛰는 거 안 봤나? 저 불여우가 나오면 이어달리기는 100% 우리가 진다고 봐야 해! 그래서 저놈을 축구 경기에 밀어 넣는 거야! 전쟁 때는 등 뒤에서 칼을 꽂아도 용납되네! 이건 전쟁이야! 여기서 저 불여우를 두들겨 팰 수는 없지만 일단 경기장에서는 짓밟든 걷어차든 모두 경기의 일환이야! 태클 거는 척하면서 밟아버려! 운 나쁘면 페널티 하나 받으면 돼! 어차피 축구는 우리가 유리하니까! 내 말 알아들었나? 저놈이 이어달리기에 못 나오게 만들란 말이야! ”

 

모두가 반색을 하며 ‘네!’ 하고 소리쳤다. 베르닌만 빼고. 베르닌은 속이 울렁거렸다. 가냘픈 왕재수가 불곰 같은 삼림국 덩치들에게 짓밟히는 것을 상상하니 끔찍해서 토할 것 같았다. 하지만 국장 말대로 이어달리기에 왕재수가 나오면 질 게 분명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 베르닌은 너무 괴로웠다.

 

 

*    *    *

 

 

왕재수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막판에 생각지도 않게 호명되어 떠밀려 나온 데다 축구는 정말 하나도 모르는 게 분명했다. 주변에서 덩치 큰 남자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공을 차대고 걸핏하면 옆에서 밀어붙이니 넋이 나간 것 같았다. 삼림국 덩치들이 본격적으로 밀어붙이지도 않았는데 제풀에 몇 번이나 넘어졌다.

 

골 점유율은 독수리 팀이 압도적으로 높았지만 점수는 전혀 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팀플레이란 간 곳 없고 덩치들이 서로 골을 넣겠다고 아우성이었기 때문이다. 서로 티격태격하는 와중에 공이 또르르 굴러왔고 베르닌은 운 좋게 주워 먹기 식으로 골을 하나 넣었다. 원톱 스트라이커 노릇을 해낸 것이다!

 

베르닌이 셔츠를 뒤집으며 세레모니를 하자 앞선 경기들 때문에 기가 죽어 있었던 독수리 팀 응원단이 들끓었다. 기뻐서 펄쩍펄쩍 뛰고 있는데 왕재수가 눈물이 글썽글썽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면서 하소연했다.

 

“ 나 축구 너무 싫어. 지저분해, 무서워, 우악스러워. 자꾸 넘어져. 사람들이 자꾸 밀어. 다리 다칠 거 같아. 나가고 싶어. 나 좀 빼주면 안 돼? ”

 

어... 나는 선수라서 그런 권한이 없어. 감독이 교체 사인 보내거나 부상당하지 않으면 못 나가. 너네 감독한테 빼달라고 해야 돼. ”

 

“ 극장장이 분명히 경기 나가지 말라 했는데 아까 따졌더니 그냥 뛰어야 한대. 의장이 나 집어넣어야 한다고 그랬대. ”

 

“ 어, 저기... 너 있잖아. 그냥 저기 너네 팀 골대 앞에 가 있어. 자꾸 사람들 많은 데로 오지 말고. ”

 

“ 알았어. 흐흑, 축구 싫어... 무서워. ”

 

왕재수는 훌쩍훌쩍 울면서 호랑이 팀 골대 앞으로 갔다. 베르닌은 그나마 거기 있어야 삼림국 덩치들에게 짓밟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높이뛰기에서 실패한 나머지 승부욕이 더더욱 불타오른 보리스가 미친 듯이 공을 몰고 내달았다. 중거리 슛을 날렸다. 물론 어처구니없는 뻥 슛이었기 때문에 공은 골대를 맞고 튕겨나갔다. 호랑이 팀 골키퍼가 공을 주워서 마침 골대 근처에 있던 왕재수에게 가볍게 툭 차 주었다. 왕재수는 넋 놓고 있다가 공이 앞에 오자 어쩔 줄 몰라 했다.

 

“ 난 몰라, 왜 나한테 공을 주는 거야. 어떻게 해... ”

 

“ 이 바보야, 공이 오면 차야지 뭘 어떻게 해! ”

 

여차하면 공을 빼앗아 슛을 날리려고 골대 근처에 도사리고 있었던 베르닌이 자기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행히 삼림국 덩치들은 태클 기회를 엿보려고 한쪽으로 모여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배신 발언을 듣지 못했다. 왕재수는 화들짝 놀라더니 홱 돌아서서 독수리 팀의 골대를 향해 냅다 공을 걷어찼다. 베르닌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렇게 길고 강력한 장거리 슛을 본 적이 없었다. 과연 무용수 출신이라 그런지 두툼한 허벅지의 힘이 좋아서 그런지 원래 운동천재라서 그런지 알 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왕재수는 호랑이 팀 골대에서 독수리 팀 골대까지 단 한 방에 골을 넣었다.

 

다들 경악해서 말을 잃은 사이에 호랑이 팀 공격수 두 명이 또 공을 빼앗아서 몰고 왔다. 당연한 듯 왕재수에게 공을 패스했다. 왕재수는 이제 망설이지도 않고 전광석화처럼 공을 찼다. 이번에는 골키퍼가 몸을 날렸지만 슛이 어찌나 센지 손에 맞고도 골이 되었다. 난리가 났다. 스페호프가 본부석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고함을 질렀다.

 

“ 밟아! 이 천치들아, 잘리고 싶나! 그 불여우한테 해트트릭이라도 내 줄 셈이야? ”

 

베르닌은 어떻게든 말려보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삼림국 덩치들은 해고의 공포에 휩싸였고 공을 빼앗으려는 척하다가 왕재수를 떠민 후 심판의 시야를 방해하며 걷어찼다. 흙먼지 속에서 왕재수가 처절하게 비명을 질러댔다. 심판은 휘슬을 불었고 파울을 범한 보리스에게 옐로카드를 한 장 주었다.

 

베르닌은 급하게 왕재수에게 달려갔다. 왕재수는 몸을 동그랗게 말고 옆으로 누운 채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미처 베르닌이 왕재수를 일으켜 주기도 전에 응원석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로만 코즐로프가 분노에 가득 차서 경기장으로 뛰어들었다. 닥치는 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보리스의 코뼈를 부숴놓았다.

 

“ 이 개 같은 놈들, 다 죽여 버리겠어! 감히 우리 아기를 저렇게 만들다니! 저 조그만 귀염둥이 몸에 흠집을 내다니! 너 죽고 나 죽자! ”

 

“ 으악, 제발 진정해요... 선수도 아니면서 이렇게 들어오면 어떡해요! ”

 

“ 시끄러워, 이 스파이 새끼! 너도 한 패야! 우리 아기가 골 넣는 게 그렇게 밸이 꼬여? 다 죽여 버리고 말겠다! ”

 

바이올린 깡패의 폭주로 보리스를 비롯해 독수리 팀 덩치 서너 명이 코피를 줄줄 흘리며 나가떨어졌다. 대부분 전치 3주 이상의 부상을 입었다. 마침내 심판이 삑삑삑 하고 휘슬을 불었다. 경기를 중단시켰다. 코즐로프의 난입을 문제 삼아 호랑이 팀에게 실격패를 선언했다. 온순하던 호랑이 팀 응원석도 들끓었다. 신문지와 돌멩이가 날아왔다. 먀흐킨이 의장에게 항의했다. 애초부터 독수리 팀 편이었던 의장은 규칙을 따른 것뿐이라며 계속 이랬다가는 이어달리기도 취소하고 호랑이 팀을 실격시킨 후 우승 메달은 독수리 팀에게 수여하겠다고 협박했다. 하는 수 없이 먀흐킨은 입을 다물었다.

 

코즐로프가 끌려 나간 후 베르닌은 한쪽에 아직도 쓰러져 있는 왕재수를 안아서 들것에 뉘었다. 손수건으로 얼굴에 묻은 흙먼지와 눈물 콧물을 닦아주자 왕재수가 눈을 반짝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 이제 다 끝난 거야? ”

 

“ 너 괜찮아? 병원 가보자. 다리 부러졌으면 어쩌지... 미안해, 진짜 미안해.. 흐흑, 내가 비열한 놈이야. 어헝... 나 살아보겠다고 걔들이 너 밟게 놔뒀어. 엉엉. 바이올린 깡패 말이 맞아. 이렇게 아기 같은 애가 밟을 데가 어디 있다고... ”

 

“ 나 안 다쳤는데? ”

 

“ 뭘 안 다쳐, 그렇게 짓밟혀 놓고. 흐흑, 내가 죽일 놈이지. ”

 

“ 걔네들 되게 둔해. 막 헛발질만 하고, 내가 요리조리 뒹굴면서 피하니까 하나도 못 맞췄어. 먼지 때문에 잘 보지도 못하던데. 나 안 다쳤어. ”

 

베르닌은 멍해졌다. 급하게 왕재수에게서 흙먼지를 털어낸 후 팔다리를 비롯해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정말 멀쩡했다. 무릎이 좀 까진 정도였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울컥 화가 치밀었다.

 

“ 그럼 왜 그렇게 비명 질렀어! 왜 안 일어나고 그렇게 쓰러져 있었냐고!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바이올린 아저씨 정신 나가서 애들 패는 거 못 봤어? ”

 

“ 어, 그게 로만이었어? 난 너네들끼리 싸우는 줄 알았지... 아휴 바보 아저씨. 너무 다혈질이라니까. 나 괜찮은데. 빨리 가서 뽀뽀해 줘야겠다. 그 아저씨 날 너무 예뻐해서 탈이야. ”

 

“ 야, 내 질문에 대답 안 했잖아! 왜 다친 척 했냐고! ”

 

“ 그래야 축구 안 하지! 다쳐야 나갈 수 있다면서. 진짜 나가고 싶었단 말이야. 그깟 공놀이가 뭐가 재밌다고 다들 난리인지... ”

 

“ 두 골이나 넣어 놓고서! ”

 

“ 그건 그냥 차니까 들어간 거야. 하나도 안 어렵더구만. 재미도 없고. 그물 속에 공 차 넣는 게 뭐가 어렵다고. ”

 

왕재수는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서 호랑이 팀 천막으로 갔다. 화가 나서 씩씩거리고 있는 코즐로프의 팔목을 붙잡고 천막 뒤로 사라졌다.

 

 

*   *   *

 

 

종일 이어진 공공기관 종합체육대회는 양 팀의 점수가 3대 3이었기 때문에 마지막 경기인 이어달리기로 승패가 결정 날 판이었다. 독수리 팀의 천막은 이어달리기에 나갈 선수 6명의 몸을 풀어주고 스페호프의 지시를 듣느라 분주했다. 국장은 이미 승리감에 취해 있었다.

 

“ 이제 됐어! 그 불여우 다리를 박살냈으니 걱정할 건 하나도 없지! 남은 건 우승뿐이야! 아예 한 바퀴는 앞서 골인해서 저놈들을 뭉개주란 말이야! 감히 대 KGB가 버티고 있는 독수리 팀에게 대들다니, 건방진 녀석들! ”

 

다들 신이 났다. 베르닌만이 불안과 공포에 질린 채 머뭇머뭇 말을 꺼냈다.

 

“ 저, 국장님... 그런데 방금 본부에 물어보니 왕재수, 아니 야스민도 최종 주자로 나온답니다. ”

 

“ 더 잘됐군! 진짜 뛸 놈이 없는 모양이지. 다리 다친 놈이 나오니 얼마나 좋아! 그 재수 없이 오똑 솟은 콧대를 보란 듯이 눌러주란 말일세! ”

 

“ 아니, 그게요... 걔가 별로 다친 것 같지 않더라고요. 뼈는 안 부러진 것 같아서... 아까처럼 잘 뛸지도... ”

 

“ 뭣이!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분명히 보리스가 슬개골을 짓밟아서 부숴놨다고 했는데! 허벅지 근육도 최소한 파열이라고 했는데! 그런 놈에게 지고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 같나! 지면 다들 모가지야!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저 따위 계집애 같은 반동분자 꼬마한테 육상으로 농락당한 것도 모자라서 골도 두 개나 먹고... 다리까지 다친 놈에게 계주에서 패하면 다들 줄서서 강에 뛰어들 채비나 해야지! 전부 모가지에 벌목공으로도 일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주겠어!

 

베르닌은 줄줄 흐르는 콧물을 닦으면서 출발선 쪽으로 갔다. 그는 마지막 주자였다. 앞선 선수들은 모두 1바퀴씩 돌고 최종 주자만 1바퀴 반을 뛰게 되어 있었다. 머리가 아프고 어깨가 무거웠다. 속도 울렁거렸다. 차마 국장에게 왕재수가 하나도 안 다쳤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곧 다가올 해고의 물결에 대해 같은 팀 선수들에게 귀띔을 해 줄 수도 없었다.

 

‘ 다들 땀 빼며 연습했는데... 정말 큰일 났네. 처자식이 있는 사람들인데. ’

 

그때 호랑이 팀 응원단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일었다. 흙먼지 범벅에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금색과 검정색 운동복을 걸친 왕재수가 무릎에 붕대를 감고 내키지 않는 얼굴로 천천히 걸어 나왔기 때문이다. 호랑이 팀 치어리더로 자원봉사 중인 렐랴가 뛰쳐나와 왕재수를 와락 껴안더니 팔목에 자기 스카프를 매어 주고 지저분한 얼굴에 키스까지 해 주었다.

 

“ 우리 미셴카! 당신은 우리 호랑이 팀 영웅이에요! 다쳤는데 이렇게 끝까지 나와서 팀을 위해 뛰다니! 너무 감동적이에요! 힘내요! ”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선수 아닌 사람은 트랙에 들어오시면 안되는데요. ”

 

“ 어머나, 다냐! 당신 또 질투하는군요! 속 좁은 사람 같으니. ”

 

렐랴는 베르닌에게 삿대질을 하며 꾸짖은 후 진행요원에게 이끌려 응원석으로 돌아갔다. 왕재수는 렐랴가 들어간 후 손목에 묶여 있던 스카프를 풀어서 얼굴에 묻은 먼지를 닦았다. 베르닌은 참지 못하고 야단쳤다.

 

“ 야, 그건 렐랴의 마음이 담긴 스카프인데 그걸로 얼굴을 닦냐! ”

 

“ 그럼 어떡해. 옷도 더러운데 얼굴이라도 깨끗해야지. 난 미모로 먹고 사는데 이게 뭐야. 정말 싫다. 체육대회 같은 거 만든 놈들 미워! ”

 

“ 무릎에 왜 붕대 감은 거야? 아까 괜찮다며. ”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리며 베르닌이 물었다. 왕재수는 무릎을 툭툭 치면서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 좀 까졌는데 빨간 약 발랐더니 보기 싫어서. 별로 아프진 않아. ”

 

“ 그러냐. 다행이구나. 우린 다 잘렸군.

 

“ 뭐? ”

 

“ 아니야. 안 다쳐서 다행이라고. 비신사적으로 밟은 거 대신 사과할게. ”

 

“ 네가 왜? 나한테 공 차는 것도 가르쳐줬는데. 근데 이번에도 총 쏘면 뛰는 거야? ”

 

“ 아니... 총 쏠 때 뛰는 건 제일 첫 주자만 그렇고. 앞의 주자가 너한테 저 막대기를 건네주면 그걸 쥐고 뛰는 거야. 너하고 나는 마지막 주자니까 한참 기다려야 돼. 막대기는 떨어뜨리면 다시 주워서 쥐고 뛰어야 돼. 우리는 한 바퀴 반을 뛰어야 돼. ”

 

“ 아 피곤해. 아까는 총 쏠 때 뛰라더니 이젠 무슨 막대기를 들고 뛰래. 지겹다. 내가 마지막이면 빨리 뛰어야 빨리 끝나겠네? ”

 

“ 어... 그렇겠지. 아아...

 

“ 너 왜 그렇게 한숨을 쉬어? 아이 지저분해. 콧물 나오는 것 좀 봐. 정말 하나하나 다 챙겨줘야 한다니까. ”

 

왕재수가 스카프를 뒤집어서 베르닌의 코를 슥슥 닦아 주었다.

 

“ 으악, 먼지 닦은 것도 모자라서 내 콧물까지 닦으면 어떡해! ”

 

“ 괜찮아, 뒤집었잖아. 먼지 안 묻은 데로 닦았어. ”

 

“ 그 얘기가 아니고 렐랴의 마음이... ”

 

“ 넌 왜 맨날 렐랴 마음 타령이야. 그깟 여자 마음이 뭐가 중요해. 내가 그 아가씨랑 응응을 할 것도 아닌데. ”

 

“ 시끄러워. ”

 

베르닌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불안감을 느끼며 스트레칭을 했다. 그래도 다른 선수들은 모두 호랑이 팀보다 잘 뛰니까 희망은 있었다.

 

총성이 울리고 드디어 계주가 시작되었다. 경기가 중반부로 접어들었을 때쯤 베르닌의 공포는 거의 사라졌다. 뚜껑을 열어보니 호랑이 팀 선수들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넘어지기도 하고 바통을 놓치기도 했다. 마침내 베르닌에게 바통이 왔을 때 독수리 팀은 이미 반 바퀴를 앞서고 있었다. 호랑이 팀 응원단은 초상집 분위기였지만 왕재수가 바통을 받아들자 마지막 희망에 불타 온 힘을 다해 소리를 지르며 응원하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죽어라고 달렸다. 땀과 콧물을 줄줄 흘리며 미친 듯이 뛰었다. 그런데 한 바퀴를 거의 다 돌았을 때 갑자기 지축이 흔들리는 듯한 함성과 갈채 소리가 울려 퍼졌다.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 왕재수가 다리에 모터를 단 것처럼 붕 소리를 내며 전력 질주해 오고 있었다.

 

베르닌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왕재수는 무슨 축지법을 쓰는 것 같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거리가 좁혀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베르닌을 따라잡았다.

 

‘ 으악, 이건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럴 수가! 쟤 미친 거 아냐? 사람 맞아? 어떻게 반 바퀴를 따라잡아! ’

 

베르닌은 이를 악물었다. 있는 힘을 다 끌어내어 내달렸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폐가 부풀어 펑 터질 것 같았다. 그때 왕재수가 그를 추월했다. 나비처럼 훨훨 날아 그의 곁을 지나갔다.

 

“ 안 돼... 안 돼애애애... 으아.... ”

 

베르닌은 울부짖었다. 바통을 쥔 손을 마구 휘저으며 정신없이 달렸다. 왕재수는 이미 결승선 근처까지 가 있었다. 이제 다 끝났다. 모가지. 강에 밀어 넣기. 벌목공도 못 해먹고 쫓겨나는 사람들. 완전히 망했다. 눈물콧물 범벅이 되어 베르닌은 돌덩이 같은 다리를 이끌며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 어쨌든 일단 골인이나 하고 보자 하며 계속 뛰었다. 눈물과 먼지 때문에 앞도 하나도 안 보였다. 어찌어찌 골인을 하고 주저앉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동료들이 달려와 그를 얼싸안고 소리를 지르고 박수를 치고 기뻐했다. 갑자기 사람들이 그를 공중으로 헹가래쳤다. 스페호프가 그의 등짝을 후려치며 ‘잘했네, 잘했어!’ 하고 소리쳤다. 국장이 그에게 칭찬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이것이야말로 꿈이 분명했다.

 

보리스가 그를 와락 껴안았다.

 

“ 다냐, 우리가 해냈어! 우승했어! 우리 안 잘려도 돼! 먹고 살 수 있어! 흑흑, 난 딸린 처자식이 다섯이라고! 말은 안 했지만 진짜 걱정했어. 흐흑, 정말 무서운 하루였어! ”

 

“ 어... 우승? 우리가? 이어달리기 이긴 거야? ”

 

“ 응, 이겼어! 막판에 진짜 심장이 쫄깃했어. 어휴... 그래도 너 덕분에 이겼다. 너 다시 봤어. 책상물림인 줄 알았는데... 얼간이가 에이스였어! ”

 

“ 어떻게 이기지? 왕재수, 아니 야스민이 그렇게 잘 뛰었는데. 나 추월당했었는데... 내가 먼저 들어왔다고? ”

 

“ 아, 그 불여우. 진짜 다행이었어. 결승선 앞까지 그 싸가지 없는 꼬맹이가 막 뛰었는데, 막 골인하기 직전에 무릎을 움켜쥐고 주저앉았어. 바통도 놓치고 못 일어나서 의료진이 와서 데리고 나갔어. 그래서 네가 먼저 들어온 거야. ”

 

“ 아 그랬구나... ”

 

“ 나도 한몫했지! 내가 안 밟았으면 그 자식이 끝까지 뛰었을 거 아냐. 불여우 자식 들것에 실려 갈 때 붕대 푼 거 보니까 무릎이 시뻘건 게 피범벅이더라고. 정말 너네 국장은 선견지명이 있다니까. ”

 

‘ 괜찮다고 했었는데... 안 아프다고... 거짓말이었구나. 아픈데도 괜찮은 척 하고 경기에도 나왔구나... 피가 철철 나는 걸 참고 뛰었던 거구나. ’

 

베르닌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섰다. 호랑이 팀 천막으로 가 보려고 했지만 그때 시상식이 개최되었다. 독수리 팀은 우승 깃발을 받았다. 경기에 출전한 선수들은 특별 수당을 받았다. 베르닌은 무려 MVP로 뽑혀 의장과 악수를 하고 의회 구내식당용 1개월 치 식권과 레닌 전집을 상품으로 받았다. 경기에도 지고 수당은커녕 상품 하나 못 받은 호랑이 팀에서는 휘파람을 불며 야유를 보냈다. 렐랴를 비롯해 호랑이 팀 응원단이 한 목소리로 거세게 항의했다.

 

“ 너무하잖아요! 우리 꽃돌이 감독님은 100미터 달리기, 높이뛰기, 투포환에서 우승했고 축구도 두 골이나 넣었는데! MVP를 못 준다면 최소한 특별상이라도 줘야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

 

“ 시끄럽소! 승부의 세계는 냉혹한 것! 아무리 작은 경기들에서 이기면 뭘 하나, 결국 우승은 못 했는데. 아니꼬우면 내년에 우승하시오! 다들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을 배양하시오! ”

 

의장이 단칼에 잘랐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호랑이 팀은 욕을 하면서 우르르 나가버렸다. 의장과 스페호프와 독수리 팀만이 신나게 보드카를 마시고 샤실릭을 구워먹고 승리를 만끽했다. 베르닌은 보드카를 한 잔 받아 마신 후 너무 지쳐서 천막 구석에 드러누워 잠들어 버렸다.

 

 

*    *    *

 

 

베르닌이 깨어났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잔디밭 여기저기에 술에 취한 동료들이 드러누워 있었다. 집에 돌아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니 조금 개운하긴 했지만 대신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침대에 몸을 던지려다 그는 혹시나 하고 위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초인종을 눌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병원에 있나 싶었지만 문을 밀어 보았더니 스르르 열렸다.

 

“ 야, 집에 온 거야? 나 들어간다. ”

 

들어가니 왕재수가 소파에 앉아 사과파이 한 판을 껴안고 맨 손으로 퍼먹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헐렁한 가운만 입고 무릎에는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까만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따금 훌쩍거리면서 파이를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

 

“ 으악, 너 이게 뭐야. 포크랑 접시도 없이... 너 원래 예쁜 식기에 세팅해서 먹는 거 좋아하잖아. 왜 이렇게 울어. 많이 아파? ”

 

“ 남이야 어떻게 먹든 무슨 상관이야. 어헝... ”

 

왜 이렇게 불쌍하게 울고 있는 거야? 아프면 병원에 가야지 왜 혼자 앉아서 궁상스럽게 울면서 파이를 먹고 있니! ”

 

“ 엉엉... 로만이... 어헝... ”

 

“ 뭐, 그 바이올린 깡패? 그 자식이 어쨌는데! 무슨 짓을 했길래! 귀엽다고 물고 빨 때는 언제고 왜 널 울려! ”

 

“ 흑흑, 다 뽀록났어. 엉엉... ”

 

“ 뭐가... 너 사과파이 한 판 다 먹을 수 있는 거? 몸무게? ”

 

“ 아니... 그것까지 들통 나면 큰일 나. 너 제발 입 좀 다물어. ”

 

“ 그럼 대체 뭐야! ”

 

“ 저... 농구... 심판 매수한 거. ”

 

“ 그게 무슨 소리야? 농구? 아까 경기? 무슨 매수? ”

 

“ 막판에 로만 퇴장당한 거... 내가 그런 거야. 심판한테 부탁했어. ”

 

“ 네가? 왜! 그 인간 너네 팀이었잖아! ”

 

“ 로만은 우리 오케스트라 수석이잖아! 바이올리니스트인데 손 다치면 어떻게 해! 내일 당장 공연인데. 아저씨가 너무 다혈질이라서 경기에만 나가면 눈이 뒤집혀서 손 다치든 말든 발광을 하는데 어떻게 그냥 놔둬. 그래서 심판을 매수... ”

 

“ 뭐야? 그래서 같은 팀 뒤통수를 친 거야? 바이올린 아저씨는 그래서 화난 거고? ”

 

“ 아니... 처음엔 내가 자기 다칠까봐 그랬다고 하니까 오히려 좋아하면서 ‘귀여운 내 강아지, 정말 날 사랑하는구나. 우리 아기는 착하기도 하지’ 하면서 쓰다듬어줬는데... 그만 어떻게 심판 매수했는지 들통 나서... ”

 

“ 어떻게 매수했는데! 돈 먹인 거야? ”

 

“ 저... 그게 아니고... 그 심판 아저씨가 의회 경비원인데... 저번부터 나보고 귀엽다고 해서. 엉덩이 한 번만 만지게 해 주면 된다고 해서 옳다구나 하고 그렇게 해줬거든. 암말 안하기로 약속했는데 그 아저씨가 술 먹고 신나서 막 자랑하는 걸 로만이 들어버렸어. 그래서 완전히 망했지 뭐야. 로만이 다 좋은데 질투심이 좀 많거든. 심판 아저씰 막 패려고 해서 못하게 했더니 나보고 아무한테나 꼬리친다고 야단치고... 달리기 져줬다고 너한테도 흑심 있는 거 다 안다고 또 막 소리 질러서 불똥이 이상하게 튀고 난리도 아니었어. 로만은 눈치가 너무 빠르다니까. 완전 망했어, 흐흑... ”

 

“ 잠깐 잠깐! 달리기 져줬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너 무릎 아파서 넘어진 거 아니었어? 그래서 실격패... ”

 

“ 무릎? 좀 까진 거라니까. ”

 

“ 무슨 소리야! 붕대 풀었더니 피범벅이었다고... 일어나지도 못해서 들것에 실려 나갔다면서! 그래서 내가 골인하고 우리가 우승... ”

 

“ 아 맞다... 어 그렇지. 응응, 네 말이 맞아. 나 피범벅... 무릎 다쳤어. 넘어져서 실격패. 들것... 못 일어나고... ”

 

왕재수가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평소 전혀 당황하는 일이 없는 싸가지 없는 놈이었으므로 더더욱 의심스러웠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가운을 걷어 올리고 무릎에 감긴 붕대를 낚아챘다. 왕재수가 소리를 질렀다.

 

“ 야, 하지 마! 왜 남의 가운을 벗기고 그래! 이런 건 성교를 할 때만... ”

 

“ 시끄러워! 너 무릎 멀쩡하잖아! 피범벅은 어디로... ”

 

“ 누가 피범벅이래! 내가 아까 그랬잖아, 까져서 빨간 약 발랐더니 보기 싫어서 붕대 감았다고! ”

 

“ 빨간 약... ”

 

“ 샤워했더니 약도 다 씻겨나가고 괜찮아졌단 말이야. 껍데기 벗겨진 거 긁힐까봐 붕대 감아 놓은 거야. 도로 감아놔! ”

 

“ 그럼 다리 아파서 넘어진 거 아니었어? 져준 거... 너 솔직히 말 안 해! 일부러 넘어진 거였어? 져준 거였단 말야? ”

 

“ 아휴, 그래! 져줬다! 그럼 어떡하니! 눈물콧물 짜면서 모가지가 어떻고 벌목공이 어떻고 강에 뛰어들고 하면서 네가 난리를 치는데. 그깟 달리기가 뭐라고 울고불고. 그렇게 우는데 어떻게 그냥 놔두니? ”

 

“ 아아, 이럴 수가... ”

 

베르닌은 탄식했다. 울음을 터뜨렸다.

 

“ 난, 난 또 내가 잘 달려서 팀을 우승시킨 줄 알았... ”

 

“ 너 왜 또 우는 거야? 아 정말 지겨워! 이기면 이긴다고 울고 져주면 져줬다고 울고... ”

 

“ 너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경기에서 이기고 싶은 건 모든 사내들의 본성이야! 어떻게 그런 실력을 갖추고도 나한테 져줄 수가 있냐고! ”

 

“ 어휴, 코딱지만 한 촌동네에서 운동회하면서 이기는 게 무슨 대수라고! 내가 무슨 운동선수도 아니고. 애들 공연만 잘 하게 하면 됐지. 마초 군국주의자들이 만든 공산당 행사에서 그깟 경기 이겨봤자 뭐가 중요하니. 하여튼 다들 촌스럽다니까. 스탈린 앞잡이... ”

 

“ 밀고! 체포! 고문! ”

 

“ 압. ”

 

왕재수가 화들짝 놀라며 다시 입을 다물었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눈물을 닦아주고 바닥에 쏟아진 사과파이를 주워 담아 주면서 물었다.

 

“ 바이올린 아저씨는 어떻게 눈치 챈 거야? 네가 져 준 거. ”

 

“ 어, 그거? 들것에 실려 왔을 때 로만이 너무 놀라서 날 안고 병원으로 냅다 뛰었거든. 의사 선생님이 피 아니라고, 빨간 약이라고 하면서 나 다친 데 없다고 말해줘서 다 들통 났어. 그때부터 막 의심하기 시작해서 농구 매수도 들통 나고... 어헝... 로만은 왜 그러는 걸까. 왜 자꾸 의심하지? 난 키 크고 나이 많고 밤일 잘하는 아저씨가 좋은데. 너는 진짜 내 취향도 아닌데. 눈도 단추 같고... ”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왕재수가 다시 서럽게 울자 가책이 느껴졌다.

 

“ 울지 마. 내려가서 밥 먹자. 너 좋아하는 보르쉬 끓여줄게. 블린도 구워주고. 어... 차도 우려 줄게. ”

 

“ 보르쉬랑 블린이 무슨 소용이야, 로만이 나 버렸는데. 어헝... 이제 누구한테 안아달라고 하지, 엉엉... ”

 

“ 야! 그깟 깡패가 뭐 잘났다고 그렇게 목을 매냐! 다른 아저씨들 찾으면 되잖아! 그 심판 아저씨랑 놀든가! ”

 

“ 아니야, 아니야... 로만은 틀려. 밤일을 엄청 잘한단 말이야. 어헝... ”

 

“ 시끄러워! 뚝 그쳐! 내려가서 밥 먹어! 다른 아저씨들 찾아줄 테니까 제발 울지 말란 말이야! 아 정말 미치겠네... ”

 

베르닌이 억지로 왕재수를 일으키려고 했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바이올린 깡패 로만 코즐로프가 불쑥 들어왔다. 질풍같이 달려 들어오더니 베르닌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왕재수를 와락 껴안더니 마구 키스를 퍼부었다.

 

“ 아이구 우리 귀여운 아기, 내 강아지 내 비둘기. 내가 잠깐 미쳤지. 이렇게 조그맣고 예쁜 우리 귀염둥이에게 성질을 부리다니! 이 고운 눈에서 눈물이 나게 만들다니. 어유 내가 미쳤지. 내가 잘못했다 귀염둥아. 우리 이쁜아. 나 생각해서 심판 매수하고 혹시라도 내가 경기 깽판 부렸다고 KGB 놈들한테 체포될까봐 저 스파이 놈한테 져 준 거 다 알면서도 순간 눈이 뒤집히고 말았네. 미안해 우리 천사야. 인형 같은 너에게 못할 짓을 했구나. 아이고 우리 아기 눈 퉁퉁 부은 것 좀 봐. 많이도 울었네. 내가 밤새 안아줄 테니까 눈물 뚝! ”

 

코즐로프가 왕재수를 안고 침실로 들어가 버린 후 베르닌은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먼지와 콧물이 묻은 렐랴의 스카프를 조물조물 손빨래해서 창가에 널었다. 혼자서 보르쉬를 끓이고 블린을 구웠다. 마침 MVP 상품으로 받은 레닌 전집이 있었기에 냄비 받침 대신 요긴하게 쓸 수 있었다. 그래도 냄비 받침은 건졌으니 나름대로 보람 있는 하루였다.

   

   

 

FIN

2014. 11. 29 ~ 30

 

--------

 

이 에피소드는 사실 내 러시아 친구 료샤와의 대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쓴 것이다. 배나무 거리에 사는 그 불쌍한 남자(=미샤=왕재수)에 대한 피상적인 팩트만 얻어들은 료샤가 제발 그 불쌍한 젊은이에게 축구라도 시켜주라고 들들 볶아서 :) 본편에서는 내용상 안 맞지만 여기선 가능할 것 같아서 ㅎㅎ

료샤와의 그 얘긴 여기 : http://tveye.tistory.com/3249, http://tveye.tistory.com/3386

료샤가 미샤를 '배나무 거리의 불쌍한 남자'로 인식하게 된 계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187

 

..

 

스페호프가 계속해서 소리치는 '리바운드를 지배하는 자가..' 운운하는 얘긴 많이들 아시겠지만 슬램 덩크에서 차용했다 :) 헉, 그런데 슬램 덩크 모르는 분들도 있겠지.. 세대 차이 ㅠㅠ

 

..

 

시리즈는 7편 '보고서의 악몽'으로 이어진다. 그건 며칠 후에~

그럼 이제 나는 본편으로 돌아가서...

철딱서니 없는 베르닌과 왕재수를 진지한 캐릭터로 다시 돌려놓고 ㅠㅠ (잘 안돼 흐흑..)

 

:
Posted by liontamer

 

참으로 긴 일주일이었다. 여러 가지로 힘들어서 녹초가 되었다.

스트레스와 피로를 달랠 겸 서무의 슬픔 5편 올려본다.

우리의 고지식한 책상물림 청년 다닐 베르닌은 과연 가고 싶은 파티에 갈 수 있을 것인가...

 

 

**  지금까지의 간단한 줄거리 **

 

1981년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는 나름대로 자기 입장에서는 베르닌을 도와주려고 애쓰는데... 별 도움은 안 되는 것 같고 베르닌의 일상은 고되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날 베르닌은 소싯적에 짝사랑하던 아름다운 여인 나타샤가 파티에 온다는 소식을 입수하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5편에 등장하는 모스크바 쪽 사람들은 모두 가상의 인물들이다. 마타 하리보다 예쁘다는 알렉산드라 피르멘스카야, 볼쇼이의 프리마 발레리나 마리야 아브라모바 등등 모두 실재하지 않음 :)

참고로 이 시리즈에서 종종 언급되는 '루뱐카'란 단어는 모스크바에 있는 국가보안위원회(KGB) 본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나라 안기부가 남산으로 호칭되었듯, KGB 본부도 모스크바의 루뱐카라는 동네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곤 했다. 무시무시한 곳이었고 불쌍한 미샤도 거기 끌려가서 고초를 좀 겪었지만 뭐 이 시리즈는 웃자고 쓰는 거라서 그런 심각한 얘긴 안 나온다 :)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5

 

 

 

서무의 슬픔

- 무도회에 간 베르닌 -

 

 

 

 

베르닌이 뭔가를 간절하게 원하는 적은 별로 없었다. 스페호프 국장 아래에서 일하는 서무의 특성상 매일 과중한 업무에 짓눌려 그럴만한 여유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 저녁 시 의회 대강당에서 개최되는 파티만큼은 꼭 가고 싶었다. 모스크바 KGB 본부와 가브릴로프 시 의회가 무슨 협약을 체결한 기념으로 그쪽 보안위원회와 중앙의회 관계자들, 심지어 볼쇼이 극장 무용수와 가수들까지 30여명이 내려왔고 시에서는 대규모의 축하 파티를 열기로 한 것이다.

 

물론 베르닌은 평소 그런 파티에 가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보통은 윗사람들이 우글대는 탓에 아주 지루하고 우중충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 온 KGB 쪽 사람들은 거의가 2~30대의 젊은 요원들이었다. 그리고 그가 모스크바에서 공부하던 시절 친하게 지냈던 동료들도 여러 명 있었다. 특히 대학 시절 잠깐 사귈 뻔 했던 금발 미녀 나타샤도 얼마 전 모스크바 본부 요원으로 특채되었고 이번 파티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것이다. 가브릴로프 쪽 참석자들은 시 의회와 KGB 직원들, 그리고 극장 관계자들과 예술가들이었다.

 

파티는 금요일 저녁 8시부터였다. 정상적인 직장인이라면 당연히 아무런 어려움 없이 참석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심지어 극장도 일찌감치 이 날은 공연을 아예 비워버렸다. 의회나 보안위원회와는 관계가 없었지만 볼쇼이에서 온 예술가들을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닐 베르닌은 정상적인 직장인에 해당되지 않았다. 1주일 내내 밤 10시까지 야근하고 있었고 그나마 못한 일들은 주말에 몰아서 해야 할 지경이었다.

 

물론 그도 초대장을 받았다.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모든 현장 요원과 행정 요원들이 파티 초청 대상이었다. 다들 아침부터 차려입고 난리였다. 모스크바에서 온 미녀 스파이 출신 여자 요원들이 어떻고, 볼쇼이 발레리나가 어떻고 하며 다들 가슴 설레 했다. 베르닌은 파티에 무척 가고 싶었기 때문에 그날 아침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국장실로 들어갔다.

 

근태기록부와 업무추진비 청구서, 공유지 배추 현안사항 검토 보고서 등 서류를 한 아름 내려놓으며 베르닌은 스페호프 국장의 눈치를 살폈다. 국장은 별로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휘파람을 불며 서류들을 휙휙 넘겼다. 저기압일 때는 서류 한 장 한 장, 단어 하나하나를 걸고넘어지며 그를 들들 볶기 때문이다. 국장은 별다른 트집도 없이 서류 전부에 사인을 해주었다. 아마 미녀 요원들이 참석하는 파티를 생각하니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분위기를 놓칠세라 베르닌은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 저어, 국장님. 오늘 저녁 파티 말인데요... ”

 

“ 아, 우리 파티. 알렉산드라 피르멘스카야가 온다더군. 자네 그 여자 모를 거야. 런던에서 날리던 스파이였지. 마타 하리는 비교도 안될 만큼 미인이야. 그러고 보니 걜 마지막으로 본 게 벌써 3년 전이군. ”

 

“ 그렇군요. 친하셨나 보군요. 저, 제 동료들도 왔더라고요. 모스크바에 있을 때 친했던 사람들인데. 대학 동기도 오고... ”

 

“ 친구들은 자네처럼 한심한 수준이 아니었나보군, 루뱐카 본부에 채용된 걸 보니. ”

 

“ 꼭 그런 건 아니고요... 공부는 제가 더 잘했습니다만. 저, 그래서 말인데 저도 오늘 파티에 가려고 하는데... ”

 

“ 아, 자네도 가고 싶다... 그래, 물론이지. 자네도 우리 요원인데 당연히 갈 수 있지. 초청 명단에 들어 있다면... ”

 

“ 들어 있습니다. 제 이름도 들어 있거든요. ”

 

“ 그래, 그럼 가게나. ”

 

베르닌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이렇게 쉽게 허락을 받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최소 한 시간 이상의 설교를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 대신 일은 마무리하고 가야지. 심지어 금요일이니... 어디 보자, 지금 처리가 안 된 일들이 뭐더라. 음, 공유지 배추 문제는 현안사항 검토만 있고 해결 방안이 없군. 해결 방안을 최소한 5가지를 제시하고 보건의회와 보안위원회의 공유지 문제에 대한 중장기 로드맵도 첨부하게.

그리고 당직실 앞에 자꾸 도둑고양이가 벌레와 쥐를 물어다 놓던데 고양이 퇴치 방안에 대해서도 5가지 이상, 각각 소요예산안을 첨부하도록.

그리고 주차장의 안내 표지판은 페인트가 다 벗겨지고 기름때가 앉아서 참 꼴 보기 싫더군. 표지판의 때를 닦아놓든지 새것으로 교체해 놓게. 글씨 색깔도 파란색으로 해놨더니 눈에 잘 띄지 않고 금방 더러워지더군. 오렌지색으로 바꾸고.

그리고 요즘 직원들이 전화를 받을 때 안내 멘트가 천차만별이야. 모스크바 본부에서 쓰는 멘트를 조사해 전화 인사 매뉴얼을 다시 제작하여 전 직원들 자리에 붙여 놓게.

음, 그리고 이 업무추진비 청구서 말인데. 이번엔 그냥 넘어가겠네만 양식이 완전히 바뀌어야 하네. 서명 란과 영수증 붙이는 란의 크기도 조절해야 하고 자리도 서로 바뀌어야 보기 좋을 것 같군. 그리고 업무추진비는 10월 현재부터 내년 상반기까지 월별 청구 예상 목록을 작성해서 기본계획을 수립하여 보고하게.

에, 또... 그렇지. 그 망할 놈의 불여우가 있지. 그 자식 사무실의 도청장치를 새것으로 갈아야 해. 그 여우같은 것이 전화기와 액자 뒤에 붙어 있던 장치를 망가뜨렸더군. 감시 부서에 얘기해서 제일 성능 좋은 걸로, 특수 기구를 사용하지 않고는 떼어내거나 교란시킬 수 없는 장치로 바꿔달라고 하게. 그건 반드시 오늘 중 교체해야 해. 아무래도 그 싸가지 없는 꼬마가 자꾸 크레믈린에 전화를 걸어서 날 모함하고 있는 것 같단 말이야.

뭐 이 정도일세. 별로 많지는 않군. 오늘 중 전부 처리할 수 있겠지. 하나라도 안 되면 파티는 꿈도 꾸지 말게. 암, 안되지. 일이 남아 있는데 그것도 서무가 그걸 미뤄놓고 파티에 가다니.

 

베르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풀이 죽어 국장실을 나왔다.

 

 

*    *    *

 

 

8시가 되었을 때 사무실에 남아 있는 것은 베르닌 한 명뿐이었다. 그는 하루종일 허리가 휘도록 일했다. 공유지 배추 해결방안과 중장기 로드맵은 소설에 가까운 보고서를 만들어냈고 고양이 퇴치 방안에 대해서는 보건의회와 야생동물 보호협회에 들러 억지로 다섯 가지를 짜냈다. 20년째 버티고 있는 철밥통 고참이자 언제나 말만 많고 하는 일은 없는 발따예프가 어깨 너머로 보고서를 넘겨다보면서 충고했다.

 

“ 아니, 뭘 그런 걸 갖고 의회니 협회니 드나들고 그렇게 골치를 앓아?  1. 고양이를 때려죽인다. 2. 쥐약 섞은 생선을 놓는다. 3. 유년부, 소년부, 청년부, 일반부 대상으로 고양이 사냥 콩쿠르를 개최해 시상한다. 4. 고양이 서식지를 찾아내 불을 지른다. 5. 고양이가 올만한 길목에 끈끈이 덫을 놓는다.  3분만에 다 나오잖나. 예산만 계산하면 되겠구먼. ”

 

“ 그런 잔인한 방법은 안 되지요! 선배님 방법은 전부 고양이를 죽이는 거잖아요! ”

 

“ 아니, 그럼 고양이 퇴치 방안이면 고양이를 죽여야지! 그것들을 살려놓으려고 하니까 이렇게 낑낑거리고 있는 거 아냐! 허참, 미련하기는. ”

 

“ 고양이가 불쌍하잖아요! 특히 저 검은 고양이 미셴카... 맨날 여기 와서 밥도 얻어먹고... 귀엽고... ”

 

“ 귀여운 게 밥 먹여주나? 그리고 누가 진짜 죽이랬나? 보고서라는 건 그냥 보고서지, 누가 그걸 실행하는 적 있냐고. 자네가 그래서 국장한테 볶이는 거야. 워낙 고지식해야 말이지... 책상물림이니 원... 난 이만 가네. 예쁜 여자들 보러 파티에 가야지. 하는 꼴을 보니 자넨 오늘 파티는커녕 밤을 새겠군. ”

 

 

5시가 되어 모두 퇴근한 후 베르닌은 주차장으로 가서 안내 표지판을 물걸레로 닦기 시작했다. 찌든 때는 지워지지 않았다. 홧김에 그는 하얀 페인트통과 오렌지색 페인트 통을 가져왔다. 표지판을 온통 흰색으로 다시 칠했다. 그러나 그는 손재주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흰 페인트가 여기저기 뭉치고 말았다. 그리고 원래 있던 글씨를 흰 페인트가 다 덮어버렸기 때문에 반듯하게 다시 ‘주차장은 오른쪽입니다’라는 글씨를 오렌지색으로 써야 했는데 자를 대고서도 선 하나 똑바로 못 긋는 그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 시간 동안 끙끙대다가 그는 괴로워하며 표지판을 발로 걷어차 버렸다. 페인트 냄새를 너무 맡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말라빠진 샌드위치를 먹으며 그는 전화 인사 매뉴얼을 새로 만들었고 수십 장을 등사해 직원들 자리에 하나하나 붙여 놓았다. 업무추진비 정산 양식을 다시 만들었다. 그리고 10월 현재부터 익년 상반기까지의 월별 기관 업무추진비 집행 예상액을 산출하여 목록을 만든 후 이를 첨부하여 기본계획을 작성한 후 국장실 책상 위에 곱게 내려놓았다.

 

시계를 보니 이미 8시 반이었다. 아직 도청장치와 문제의 표지판이 남아 있었다. 표지판은 아무래도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주말에는 문을 여는 가게도 없으니 포기하고 월요일에 국장에게 제대로 깨지는 수밖에 없었다. 감시부서 직원들은 모두 파티에 가버렸기 때문에 그는 직접 장부를 작성한 후 물품보관실에 가서 최신식 도청장치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엔지니어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쪽 지식은 별로 없었지만 어쨌든 장부 번호를 대조해 모스크바에서 직송된 초소형 도청장치 두 개를 찾아냈다. 둘 다 부착자의 지문 인식으로만 제거될 수 있다고 씌어 있었다. 설명서를 열심히 읽어보았지만 수화기를 해체해 내부에 마이크를 설치하는 것부터가 너무 어려웠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하며 베르닌은 차를 몰고 다리를 건너 구시가지의 극장으로 향했다. 그나마 극장 사람들도 모두 파티에 가서 다행이었다. 아무리 왕재수가 극장 직원들에게 미움을 받는다 해도 어쨌든 자기네 감독의 사무실에 도청마이크를 설치하러 온 KGB 요원을 보고 기분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     *     *

 

 

극장은 역시 텅 비어 있었다. 청소부나 경비 요원조차 안 보였다. 그는 곧장 감독실로 갔다. 놀랍게도 사무실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망할 놈의 왕재수는 에너지 절감이 뭔지도 모르는 녀석이었다. 분명 잘 차려입고 파티에 가느라 정신이 팔려서 불 끄는 것도 잊었겠지 하고 투덜대면서 베르닌은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회의 테이블 위에 커다란 종이를 펼쳐놓고 이상한 기하학적 그림을 그리고 있던 왕재수가 고개를 들더니 반색을 했다.

 

“ 어, 오랜만이잖아! ”

 

“ 아... 어... 그래. ”

 

“ 이번 주는 바쁘다고 태워다주지도 않고... 맨날 늦게 온다고 밥도 안 해 주고. ”

 

“ 너 바이올린 아저씨 집에서 계속 잤잖아. ”

 

“ 네가 늦게 오니까 그렇지. 나도 밥은 먹어야 하잖아. ”

 

베르닌은 머뭇거렸다. 차마 왕재수가 보는 앞에서 도청장치를 설치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화제를 돌렸다.

 

“ 너 왜 남아 있어? 파티 안 가? ”

 

“ 무슨 파티? ”

 

“ 의회에서 여는 파티. 모스크바에서 다 왔잖아. 볼쇼이에서도 오고. 너네 쪽 사람들도 다 갔잖아. 난 당연히 너도 간 줄 알았지. ”

 

“ 아, 그거. 난 파티 안 좋아해. ”

 

“ 설마. 그런 데 엄청 많이 다녔을 거 같은데. ”

 

“ 어휴, 그런 파티가 얼마나 지겨운지 알아? 맨날맨날 이 의원님 저 의원님, 무슨 시장, 무슨 장관, 무슨 대사가 여는 파티가 어떻고... 가기 싫어도 맨날 불려가고. 가면 맨날 춤추라 하고 춤 안 추면 술 마시라 하고 예쁘다고 감탄하고. 여자애들은 자꾸 사귀자고 들이대면서 안아 달라 하고 아저씨들은 막 집적대고. 진짜 질색이야. ”

 

“ 그럼 너 오늘 그 파티 안 가? 볼쇼이에서 같이 췄던 여자도 왔던데? ”

 

“ 어, 마리야랑 에벨리나랑 왔다더라. 상관없어. 별로 친하지도 않았고. ”

 

“ 배부른 소리하고 있네. 그래도 가봐. 난 가고 싶어도 못 가는데. 대학 때 나랑 사귈 뻔 했던 나타샤도 오는데... 진짜 다시 만나고 싶었는데. ”

 

“ 넌 왜 못 가? 의회랑 KGB에서 공동 주최하는 파티 아냐? ”

 

“ 일이 너무 많아서. 국장이 던져준 일을 다 끝내야 파티에 갈 수 있는데 아직 다 못했어. 못 갈 것 같아. 벌써 9시잖아... ”

 

“ 많이 남았어? ”

 

“ 어, 두어 가지... ”

 

“ 여긴 왜 왔어? ”

 

“ 어? 아... 어... 너네 혹시 남는 주차 표지판 없어? ”

 

도청장치를 주머니 속에 꼭꼭 밀어 넣으며 베르닌은 급한 대로 둘러댔다. 그리고 하얀 페인트와 오렌지 페인트의 비극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 으응, 그래서 네 바지에 그렇게 페인트가 튀어 있었구나. 우리도 남는 건 없을 텐데. 아, 저걸로 하면 되겠네. ”

 

왕재수는 사무실 한켠에 세워져 있는 ‘감독실’ 입간판을 끌고 왔다.

 

“ 그건 복도에 세워놓는 거 아냐? 왜 안에 넣어놨어? ”

 

“ 아휴, 닭살 돋아. 감독이 무슨 벼슬이야? 명패 붙어 있는 것도 모자라서 웬 입간판. 사람들 지나가다 걸려서 넘어지기나 하고. 치우라 하려고 했는데 다들 파티 가버려서 일단 여기다 넣어놨어. 이거 가져가. ”

 

“ 크기는 비슷한데... 감독실이라고 씌어 있잖아. ‘주차장은 오른쪽입니다’하고 화살표가 그려져 있어야 하는걸. 하얀색이랑 오렌지색이어야 하고. ”

 

“ 뭐가 어려워, 대충 칠하면 되지. 저쪽 작화실에 페인트 있어. 좀 들고 와, 무거우니까. 알지? 난 무거운 거 들면 근육 미워지잖아. ”

 

베르닌은 무거운 입간판을 들고 왕재수를 따라 작화실로 갔다. 왕재수는 페인트통과 붓을 꺼내더니 순식간에 간판을 흰색으로 다시 칠하고는 거대한 선풍기를 틀어 페인트를 말렸다.

 

“ ‘주차장은 오른쪽입니다’? 화살표도 오른쪽? ”

 

“ 응. ”

 

“ 어휴, 촌스러워... ”

 

왕재수는 붓에 오렌지색 페인트를 묻히더니 휘리릭 글씨를 쓰고 화살표를 그렸다. 찍어낸 듯이 반듯했다. 얼룩 하나 없었다.

 

“ 다 됐네. 마르면 가져가. ”

 

“ 어, 고마워. 너 대단하다. 간판업자가 그린 것 같아. ”

 

“ 너 어떻게 나한테 간판업자 운운할 수가 있어? 업자가 만들면 그냥 간판이지만 내가 손댄 거니까 이건 예술작품이라고!

 

“ 어, 그래... 넌 참 재수 없는데 그래도 능력은 좋은 거 같아. 고마워. ”

 

“ 이거 갖다놓으면 다 끝나는 거야? 그럼 너 파티 갈 수 있어? ”

 

“ 어... 아니. 하나 더 남긴 했어. ”

 

“ 뭔데? 말해봐, 도와줄 테니까. ”

 

“ 아니, 그게... ”

 

베르닌은 너무 찔려서 말을 더듬었다. 왕재수가 표지판까지 그려주며 도와줬는데 자기는 도청장치를 설치하러 왔다는 사실에 큰 가책을 느꼈다. 두어 발짝 뒤로 물러서다가 그만 주머니에서 도청장치들이 툭 떨어졌다. 호기심 많은 왕재수는 잽싸게 그것들을 주웠다.

 

“ 아니, 야... 그거... ”

 

“ 어, 이거 도청마이크! 너 이거 여기 달려고 온 거구나!

 

“ 아니야... 여기 달려고 한 거 아니야... ”

 

“ 뭐가 아니야. 전화기랑 액자 뒤에 달려고 온 거지? 나 도청하려고! ”

 

“ 저... 고의가 아니야. 나도 그런 거 하고 싶지 않았는데 국장 명령이라서 어쩔 수 없었어. 어... 진짜 미안해. ”

 

“ 칫, 난 또 나 혼자 저녁 안 먹고 있을까봐 온 줄 알았지. ”

 

“ 저녁 안 먹었어? ”

 

“ 그럼 어떻게 먹어. 너도 없고... ”

 

“ 바이올린 아저씨 있잖아. ”

 

“ 로만 그 파티에 끌려갔어. 끝날 때까지 연주해야 된대. ”

 

“ 그렇구나. 너는 삼시세끼 꼬박꼬박 챙겨먹어야 하는 앤데... 가뜩이나 남이 안 챙겨주면 먹지도 않고. 안 그래도 말랐는데 더 마르면 안 될 텐데. 저기, 내가 샌드위치라도 만들어다 줄까? ”

 

“ 됐어. 너 빨리 파티 가야 하잖아. ”

 

“ 아니야, 나 파티 못 가. 일도 남았고... ”

 

“ 뭐, 그 도청마이크? 설치해. ”

 

“ 어, 정말? 너 그런 거 싫어하잖아. ”

 

“ 상관없어. 지금 붙여놔. 너 국장한테 검사받고 나서 월요일에 도로 떼면 되니까. ”

 

“ 이거 네 맘대로 못 떼는 거야. 최신식이라서 설치자 지문 인식 없이는 제거 못해. ”

 

“ 아, 그래? 그럼 내가 붙이면 되겠네. 줘봐. ”

 

왕재수는 베르닌의 손에서 도청마이크를 낚아챘다. 자기 사무실로 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수화기를 해체하고 무슨 코일들을 잡아당기더니 거기 초소형 마이크를 연결하고는 다시 수화기를 조립했다. 그리고는 벽의 그림 액자를 들어내더니 나사못을 한 개 빼내고는 안쪽의 코일들에 남은 마이크를 연결했다.

 

“ 됐네. 너네 쪽에서 스위치 올리면 다 들릴 걸. 만족하냐? ”

 

“ 넌 어떻게 이런 걸 다 할 줄 알아? ”

 

“ 우리 모스크바 아저씨가 KGB 실세... 매일 침대에서 날 안고 만지작거리면서 이런 얘기를... ”

 

성질 더러운 바이올리니스트도 모자라 무시무시한 고위직 의원의 품에 안겨서 귀여움을 받고 있는 왕재수의 모습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베르닌은 급하게 그의 입을 막으며 사과했다.

 

“ 어쨌든 미안하다. 나도 이런 짓 하게 될 줄 알았으면 이 직장에 안 들어왔을 텐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

 

너 그렇게 떠들 시간 있어? 파티 가고 싶다며. 이제 다 됐잖아. 빨리 가. ”

 

“ 아니... 어차피 못 가. ”

 

“ 왜? ”

 

“ 바지에 페인트도 잔뜩 묻었고... 셔츠도 다 구겨지고... 나 양복 이거 한 벌밖에 없거든. ”

 

“ 아휴, 촌스럽게 누가 파티에 양복을 입고 가니? 이 옷도 유행 지난 지 십 년은 된 것 같은데. 너 이거 고등학교 졸업식 때 샀던 거지? ”

 

“ 어, 어떻게 알았어? 그러고 보니 십 년 전이네. 그리고 파티에 온 거 국장이 보면 날 죽이려고 할 거야. ”

 

“ 왜? 하라는 일 다 했잖아. 표지판도 만들고 도청마이크도 붙이고. ”

 

“ 그래도 국장은 어떻게든 트집을 잡을 거야. 그 사람은 내가 자기 눈앞에서 즐겁게 노는 꼴 못 봐. ”

 

“ 그럼 국장이 널 못 알아보면 되는 거겠네. ”

 

“ 어떻게 날 못 알아봐. 같이 일하는데. 맨날 툭하면 자기 방으로 불러서 눈을 마주보며 설교를 늘어놓는데. ”

 

“ 변신하고 가면 되잖아. 어차피 이렇게 촌스러운 꼴로 파티 가면 재미도 없어. 이리 와봐. ”

 

왕재수는 베르닌을 소파에 앉혀놓더니 한쪽에 있는 캐비닛을 열었다. 베르닌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서류용 캐비닛이 아니라 옷장이었기 때문이다. 옷들이 빽빽하게 걸려 있었다. 자신의 집에 있는 옷보다 훨씬 많은 것 같았다.

 

“ 너 왜 옷을 여기다 전부 놓고 다녀? ”

 

“ 전부는 무슨. 가끔 여기서 잘 때도 있으니까 그냥 몇 벌만 가져다 놓은 거야. 똑같은 거 다시 입기 싫잖아. ”

 

“ 이게 몇 벌 가져다 놓은 거라고!! 여자들도 이렇게 옷 많이 안 사겠다. ”

 

“ 내가 산 거 아니야. 다 선물 받은 거야. 나는 워낙 예쁘고 맵시가 좋으니까 외국 디자이너들도 막 자기들 신상이라면서 갖다 주고... 팬들도 갖다 바쳤거든. 아휴, 여긴 시골이라서 이제 예쁜 옷 갖다 주는 사람이 없어. ”

 

베르닌은 입을 딱 벌렸다. 역시 왕재수는 그와는 딴 세상에 사는 게 분명했다. 문득 그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 가끔 여기서 잔다고? 여기 소파에서? ”

 

“ 응. ”

 

“ 왜? ”

 

너 야근해서 나 안 태워다 줄 때랑 로만이 다른 일 때문에 못 재워줄 때. ”

 

“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집이 없는 것도 아닌데! ”

 

“ 캄캄할 때 혼자 강 건너서 집까지 걸어가는 거 싫단 말이야. 난 운전도 엉망이고. 전에도 차 몰고 가다가 배나무 들이받았어. ”

 

“ 그래서 여기서 잔단 말이야? 극장은 밤에 난방도 안 되는데! 너 그때 고문당한 거 다 낫지도 않았잖아! 툭하면 아프잖아. 그것도 저 소파에서? 너 다리 길어서 저 소파에 맞지도 않겠다! ”

 

“ 아유, 정말 왜 이렇게 잔소리야! 남이야 어디서 자든 말든! 나 원래 옛날부터 노숙도 잘 하고 아무데서나 잘 잤거든! ”

 

“ 노숙이라니!! 미쳤냐? ”

 

“ 공원에서 멋있는 아저씨들이랑 몰래몰래 성교를 하고서 여럿이 꼭 껴안고 낙엽 더미 속에서... ”

 

“ 헉, 그만해! ”

 

왕재수는 혀를 날름하더니 옷장을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는 옷을 한 아름 안고 베르닌에게 다가와 명령했다.

 

“ 야, 옷 벗어. ”

 

“ 뭐? 왜!! 너, 너... 나 그런 거 아닌 거 알지? 그러니까 나는... ”

 

“ 옷 갈아입어야 파티에 가지! 벌써 9시 반 넘었잖아! 빨랑 갈아입어야 그 나타샤인가 뭔가도 보고 춤도 출 거 아니야. ”

 

“ 그래서 네 옷 입고 가라고? ”

 

“ 국장이 넌줄 몰라야 한다며. 여자한테도 잘 보이고. ”

 

“ 내가 네 옷을 어떻게 입냐? 난 180 넘는다고. 사이즈도 너보다 크고! ”

 

“ 괜찮아, 바지 길이는 맞을 거야. 넌 허리가 길고 난 다리가 길잖니. 그리고 이 옷들은 품이랑 허리가 좀 크게 나와서 어차피 나한테는 안 맞아. 버리려다가 아르마니라서 아까워서 놔뒀던 거거든. ”

 

“ 아르마니가 뭐야? ”

 

“ 있어, 그런 게. 좋은 거야. 빨랑 그 누더기 벗고 갈아입어. ”

 

그래서 베르닌은 옷을 갈아입었다. 청회색의 실크 셔츠와 짙은 색의 착 붙는 진을 입고 부드러운 가죽 느낌이 일품인 근사한 벨트를 맸다.

 

“ 답답해... 너무 꽉 끼어. ”

 

“ 끼는 게 아니고 딱 맞는 거야. 네가 여태 너무 헐렁한 옷만 입어버릇해서 그래. 남자는 핏이 잘 맞아야 멋있어 보인다고. ”

 

“ 하나도 안 편해. 셔츠도 너무 끼고 바지도 벨트 안 해도 될 거 같아. ”

 

“ 그 벨트는 멋으로 하는 거야! 셔츠는 지금이 딱 좋아. ”

 

“ 넥타이 할까? ”

 

“ 윽, 이 셔츠에 넥타이는 안 되지! 너 정말 패션하고는 담 쌓았구나. 이런 차림에는 이렇게 스카프를 매야 멋있는 거야. 그리고 이 재킷 입어. ”

 

재킷 길이가 너무 짧아... 이 지퍼는 뭐야? 주머니도 아닌 게 왜 달렸지? ”

 

“ 지퍼는 장식이야. ”

 

“ 이런 게 멋있는 거야? ”

 

“ 응, 훨씬 낫네. 근데 너 머리가 너무 엉망이야. ”

 

왕재수는 이상한 병을 꺼내서 손에 크림 같은 걸 쭉 짜내더니 그걸 베르닌의 머리털에 바르고 조물조물 만지작거리더니 가르마를 바꾸고 뒷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그리고는 서랍에서 이상한 팔레트 같은 걸 꺼내더니 베르닌의 얼굴 여기저기에 붓질을 했다.

 

“ 으악, 뭐하는 거야? ”

 

“ 너 맨날 야근하느라 피부가 너무 안 좋아. 여기 잡티랑 뾰루지랑... 컨실러로 가려주는 거야. ”

 

“ 이런 건 여자들이나 하는 거잖아! ”

 

“ 괜찮아, 눈에 안 띄게 해줄게. 남자는 피부가 좋아야 먹고 들어간다고. 아, 이제 대충 됐다. 그래도 구제불능일 줄 알았는데 키가 있어서 꾸며놓으니 괜찮네. 야, 그렇게 어깨 구부정하게 하지 마. 머리 들고 어깨 펴고. 그렇지, 걸을 때도 정면을 보고 당당하게. 그래야 키랑 어깨가 돋보이고 멋있어 보이지. 훨씬 낫네. ”

 

“ 너무 어려워... ”

 

“ 처음에만 그런 거야. 다 됐으니까 빨리 가라. ”

 

“ 너 정말 안 가? ”

 

“ 난 안 가. 파티 싫어. 일하던 거 마저 할 거야. ”

 

“ 그게 일하는 거였어? 난 낙서하는 줄 알았네. ”

 

“ 진짜 무식하다니까, 예술에 대해선 하나도 모르고. 신작 무대 동선 짜는 거야. 나 할 거 많아. 빨리 가. 잘 놀아라. 나타샤 잘 꼬셔. ”

 

“ 고마워. ”

 

베르닌은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극장을 나섰다. 복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니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는 급하게 차를 몰고 시 의회 대강당으로 향했다.

 

 

*    *    *

 

 

강당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극장 오케스트라가 계속해서 대중적인 춤곡을 연주하고 있었고 나름대로 잘 차려입은 남녀들이 모여 춤을 추기도 하고 담소를 나누기도 하며 흥겨운 분위기였다. 베르닌은 쭈뼛거리며 슬며시 들어갔다. 언제나처럼 모두에게 무시당하며 투명인간 취급받을 게 뻔했으므로 잽싸게 사람들 사이를 누비고 지나가 나타샤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자들이 하나둘 그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남자들도 눈을 둥그렇게 떴다.

 

“ 저 남자 누구야? 모스크바에서 왔나? ”

 

“ 어머, 이 동네는 시골인 줄 알았는데 어쩜 저렇게 세련된 남자가 다 있지? 아르바트보다 물이 더 좋네. ”

 

어머, 저 남자 키도 크고 완전 스타일 좋아. 소개시켜 달라고 하고 싶다. ”

 

처음에 베르닌은 그게 자신을 가리키는 말인 줄도 모르고 대체 어디에 그렇게 멋있는 남자가 있는지 두리번거렸다. 그때 하필 스페호프 국장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공유지 배추와 표지판과 업무추진비, 전화 매뉴얼과 도청마이크에 대해 설교를 늘어놓고 감히 파티에 올 엄두를 내다니 서무의 기본 자세가 안 됐다는 호통을 칠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베르닌이 몸을 움츠렸는데 놀랍게도 국장은 그를 그대로 지나쳐갔다. 표정을 보니 그를 전혀 못 알아본 것 같았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능력에 새삼 감탄했다.

 

그때 난생 처음 보는 미인이 그에게 다가와 춤을 청했다. 알고 보니 화제의 인물인 미녀 스파이 알렉산드라 피르멘스카야였다. 정말 예뻤지만 눈매가 좀 올라가서 그의 취향은 아니었다. 그는 나타샤와 렐랴가 더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물론 내색하지는 않았다. 피르멘스카야는 춤을 춘 후 투덜댔다.

 

당신 춤은 못 추는군요. 하긴 이 동네 사람이니... 스타일만 좋은 거였어. ”

 

“ 혹시 나타샤 아직 남아 있나요? ”

 

“ 나타샤? 아, 그 신참. 걔 알아요? ”

 

“ 동창이라서... ”

 

“ 저쪽에 있네요. 얘 나타샤! 멋쟁이가 널 찾는다! ”

 

피르멘스카야는 나타샤를 데려다 주고 다른 남자들 사이로 사라졌다. 베르닌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나타샤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미인이었다. 그러나 긴 금발을 늘어뜨리고 풍만한 가슴을 반쯤 드러낸 채 엉덩이를 흔들며 다가오는 나타샤를 보자 베르닌은 낯선 기분이 들었다.

 

“ 처음 뵈어요, 전 나타샤라고 해요. 모스크바 KGB 본부에서 왔죠. 당신은 혹시 극장 쪽? ”

 

“ 나타샤, 나야! 나 기억 안나? 같이 학부 다녔잖아. 다닐. 다닐 베르닌. ”

 

어머, 다냐? 어머나 세상에... 너 어쩌면 이렇게 변했니. 못 알아봤잖아. 어머어머, 너 정말 환골탈태했다! 이렇게 멋있는 남자인 줄 알았으면 그때 안 찼을 텐데... 그땐 너무 촌스럽고 눈도 단추 같다고 생각했거든. 내가 잘못 봤었던 거구나. 와, 진짜 멋있어졌다. 헤어스타일도 끝내준다. 어머, 혹시 이 재킷은 베르사체 아니야? ”

 

“ 아르마니래... ”

 

어머나, 해외 스파이로 빠져도 손에 대볼까 말까 하다던 그 아르마니! 게다가 이 스카프... 이건 에르메스잖아! 어머 세상에...

 

베르닌은 에르메스가 뭔지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나타샤가 풍만한 가슴을 비벼대며 바짝 몸을 붙여왔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어쩐지 우울해져서 물었다.

 

“ 그때 내 고백 안 받아준 거, 공부하느라 시간 없다고 했었잖아. 그거 아니었던 거야? 내가 촌스러워서 그랬어? ”

 

아, 그때... 뭘 그런 걸 기억하고 그래. 옛날은 옛날이고 지금이 중요하지. ”

 

“ 내 눈 단추 같아서 그랬던 거야? ”

 

“ 지금은 아니야. 멋있어. 어쩜 피부도 이렇게 좋아졌니. 광이 나네. 너 모스크바 안 올라와? 지금 어디 살아? 너네 집에 커피 마시러 가도 돼? ”

 

“ 어... 나중에 시간 되면. 근데 저쪽에서 날 찾는 거 같아. 있다 다시 봐. ”

 

베르닌은 나타샤를 조심스럽게 밀어붙이고 다른 쪽으로 피했다. 너무나 울적했다. 왜 그런지 자신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테이블 쪽으로 가자 맛있는 음식들이 잔뜩 차려져 있었다. 각종 샌드위치와 꼬치구이, 훈제연어 샐러드와 과일즙과 사과파이, 초콜릿 케익 등 평소에는 실컷 먹기 힘든 요리가 가득했다. 꼬치를 한 개 해치우고 훈제연어를 몇 조각 우물우물 씹다가 베르닌은 문득 왕재수 생각이 났다.

 

‘ 그러고 보니 걔가 좋아하는 거네. 고기보다 생선을 더 좋아하던데. 저 사과파이. 바이올린 깡패 때문에 다이어트 한다더니 사과파이는 앉은 자리에서 한 판 다 먹었지. 단 거 안 먹는다고 우기더니만. ’

 

사과파이는 참 맛있었다. 울적하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먹고 있는 동안에도 쉴 새 없이 여자들이 다가와 그에게 말을 걸었다.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놀라운 것은 가브릴로프 KGB 직원들 중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거였다. 심지어 같은 사무실의 리자는 그를 모스크바에서 온 요원으로 착각하고 데이트를 신청하기까지 했다. 렐랴가 왔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웠다. 하긴 렐랴는 원체 눈썰미가 좋으니 그에게 왜 왕재수 옷을 훔쳐 입고 왔느냐고 화를 낼지도 몰랐다.

 

사과파이를 먹은 후 과일즙을 마시고 있는데 번쩍거리는 목걸이를 늘어뜨리고 붉은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자그마하고 날씬한 여자가 다가왔다. 심지어 베르닌조차도 그게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인민예술가이자 볼쇼이의 프리마 발레리나인 마리야 아브라모바였다. 텔레비전에도 많이 나왔고 왕재수와도 여러 번 같이 무대에 올라갔던 적이 있었다. 이미 40살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여전히 예뻤다. 그가 인사를 하자 아브라모바가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파티에서 마주친 여자들 중 그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역시 볼쇼이 발레리나라 콧대가 높은가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아브라모바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 당신 여기 KGB라면서요? ”

 

“ 아, 네. 혹시 도와드릴 일이라도? ”

 

“ 뺨 한 대만 때려줘도 돼요? ”

 

“ 어... 아니요... 안되는데요. 대체 왜 그러시죠? 제가 실수라도 했나요? ”

 

당신들이 미샤를 여기 못 오게 했잖아요!

 

“ 미샤가 누구지... 아, 왕재수... 아니, 야스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긴가요. 걔는 지금 바빠요. 신작 무대 동선을 그린대요. 파티도 엄청 싫어한다고... ”

 

“ 파티를 싫어해요? 걔가? 우리 귀염둥이 미셴카가? 핑계도 좀 댈만한 걸 대야지! 걔가 얼마나 잘 노는 앤데. 파티만 왔다 하면 순식간에 가운데로 뛰어나가 스테이지를 장악하고... 테이블 위에 올라가서도 추고. 다들 몰려들어서 예쁘다고 칭찬해 주면 좋아하고. 걔 체포된 후에 우리 한 번도 못 봤어요. 당신들이 걔한테 모스크바랑 레닌그라드로는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시외로 전화도 못하게 하고 도청이나 해대고... 우리가 걔 만나게 해달라고 신청서류를 얼마나 많이 넣었는지 알아요? 당신들이 전부 묵살했잖아요! 당국의 승인이 없어 안 된다고! 어제 간신히 걔랑 통화했어요. 그것도 무슨 선을 따서 몰래 전화하는 거라고 하던데요! 도청마이크가 하도 많이 숨겨져 있어서 그거 다 떼어 내느라 힘들었다고. 걔 어제 나랑 전화하면서 막 울었어요. 자기도 파티 가고 싶은데 못 가게 한다고. 나랑 에벨리나랑 볼쇼이 친구들이랑 다 보고 싶은데 얼굴도 못 본다고 얼마나 서럽게 우는지 내 가슴이 다 찢어졌단 말이에요! ”

 

“ 어... 왕재수는 파티 싫다고 했는데. 지루해서 안 가는 거랬는데. 당신이랑 에벨리나랑 하나도 안 친하다고... 나 보고 잘 놀고 오라고 했는데. ”

 

“ 안 친하다니! 우리가 얼마나 친했는데. 나랑은 파트너였다고요! 우리 집에서도 얼마나 많이 재워줬는데. 누나 누나 하면서 얼마나 잘 따랐는데! 어제도 ‘누나, 나 파티 가고 싶어. 누나 보고 싶어’ 하면서 어찌나 울던지. 양심이 좀 있어 봐요! 더러운 KGB 같으니! 애를 잡아가고 고문한 것도 모자라서 이런 촌구석에 처박아 놓고 친구가 와도 못 만나게 하고 파티에도 못 가게 하다니! 도청이나 해대고! 심지어 무슨 감시요원까지 붙였다면서요. 걔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출퇴근도 같이 하고 아예 집에 같이 살면서 먹는 것 자는 것까지 다 감시한다고... 그 더러운 감시요원이란 인간 마주치기만 하면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 아니, 그게... 그 감시요원이란 사람도 아마 명령을 받아서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걸 거예요. 그리고 그게 감시가 아니고... 왕재수, 아니 야스민을 가정부처럼 잘 보살펴 주는... ”

 

“ 역시 가재는 게 편이라고 역성드는 것 좀 봐! 진짜 한 대 때릴 거야! ”

 

아브라모바가 빨갛게 칠한 긴 손톱을 세우며 달려들려고 해서 베르닌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다행히 볼쇼이에서 온 일행이 그녀를 진정시키며 다른 쪽으로 데려갔다. 베르닌은 구석으로 몸을 피한 후 한숨을 쉬었다.

 

 

*     *    *

 

 

베르닌이 작은 보따리를 들고 문을 열었을 때 왕재수는 소파에 누워 음악을 듣고 있었다. 베르닌으로서는 처음 듣는 시끄러운 음악이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 가사인 걸 보니 암시장에서 구한 레코드인 것 같았다. 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그림이 펼쳐져 있었다. 베르닌을 보자 왕재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 어, 너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이제 겨우 열한 시밖에 안됐는데. ”

 

“ 끝나서 온 거야. ”

 

“ 끝나긴, 원래 지금이 제일 재밌을 땐데. 모스크바 애들 원래 새벽까지 노는데. ”

 

“ 파티 재미없다더니. ”

 

“ 그러니까, 나 말고, 노는 애들 말이야. 난 재미없어. 지루해. 근데 너 정말 왜 벌써 온 거야? 나타샤 못 만났어? ”

 

“ 만났어. ”

 

“ 어, 근데 안 통했어? 그럴 리가... 내가 꾸며줘서 안 통한 적 없는데. 심지어 아르마니인데... 그 여자 혹시 여자 좋아하는 거 아냐? ”

 

“ 좋아했어. 나보고 멋있다고 했어. 아르마니 좋대. ”

 

“ 역시 그렇지? 근데 왜 벌써 왔어? 보통 그러면 커피 마시러 집에 가자고 할 텐데. 그리고 나면 침대로... ”

 

“ 그런 분위기긴 했는데 내가 별로 안 내켰어. ”

 

“ 아, 나타샤가 못 본 사이에 역변한 거야? 아니면 이미 결혼해서? 애 엄마 된 거야? ”

 

“ 그냥. 너무 옛날 일이라 그런지 다시 보니까 예전 같지 않더라고. 생각보다 별로 안 좋아했었나봐. ”

 

“ 그럼 딴 여자들이랑 잘 해보지. 같이 놀자던 애들 없었어? 이렇게 하고 갔으면 있어야 되는데. ”

 

“ 있었어. 많았어. ”

 

근데 왜 그냥 온 거야! 바보... 멍석 깔아주면 못 놀고. 국장한테 들켰어? ”

 

“ 국장이 못 알아보더라. ”

 

“ 에이. 그럼 새벽까지 남았어야지. 하여튼 너도 참 재미없다. 하긴 그렇게 야근을 많이 했으니 피곤했겠구나. 아, 너 나 태워다 주려고 들른 거구나! 잘됐다! 집까지 태워줘. ”

 

베르닌은 말없이 주섬주섬 보따리를 풀었다. 갱지로 대충 덮어 놓은 종이접시 몇 개와 과일즙이 든 유리병을 꺼냈다.

 

“ 그게 뭐야? ”

 

“ 너 저녁도 안 먹었잖아. 좀 먹어. ”

 

“ 어, 이거 연어야? 어디서 났어? ”

 

“ 테이블에 많이 남아서 싸온 거야. ”

 

“ 아휴, 촌스럽게 파티 음식을 싸오고 그래. 진짜 창피하게. ”

 

“ 내가 창피하지 네가 창피하냐? 그냥 먹어. ”

 

왕재수는 좋아하면서 레몬을 쭉쭉 짜더니 훈제연어를 입 안으로 마구 밀어 넣었다. 정신없이 먹는 걸 보니 배가 고팠던 모양이었다.

 

“ 야, 천천히 먹어. 목메잖아. 과일즙 마셔가면서 먹어. 아무도 안 뺏아먹으니까. ”

 

“ 이거 닭꼬치야? ”

 

“ 그래. 넌 양고기 안 좋아하잖아. 닭고기로 골라왔어. ”

 

“ 맛있다. 근데 식었어. ”

 

“ 데워다 줘? ”

 

“ 아니. 그냥 먹을래. 식어도 맛있어. ”

 

“ 도대체 마지막으로 뭘 먹은 게 언제야! 너 점심도 안 먹었지? ”

 

“ 오늘 바빴어. ”

 

“ 바쁘긴 뭐가 바빠. 하루종일 방에 처박혀서 우느라고 안 먹었겠지.

 

“ 뭐? ”

 

“ 아니야. 아무 것도. ”

 

“ 우와, 이거 사과파이야? ”

 

“ 그래. 맛있더라. ”

 

“ 나 이거 다 먹어도 돼? 너 안 먹어? ”

 

난 많이 먹고 왔어. 너 다 먹어. 좋아하잖아, 사과파이. 한 판은 껌이잖아. ”

 

“ 누가! 그 큰 걸 내가 어떻게 다 먹어! ”

 

“ 내숭 떠는 건 바이올린 아저씨 앞에서나 하셔. 사과파이 한 판 다 해치우는 거 전에 다 봤거든! ”

 

“ 에이... ”

 

왕재수는 입을 삐죽거리다가 사과파이를 집어서 먹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세 조각을 먹어치운 후 갑자기 근심스러운 눈망울로 그를 쳐다보았다.

 

“ 너 말하면 안 돼. ”

 

“ 뭘? ”

 

“ 로만한테. 나 사과파이 한 판 먹을 수 있는 거. ”

 

“ 다 큰 사내자식이 기껏 사과파이 한 판 먹는 게 뭐가 어때서! ”

 

“ 그래도... 로만은 나 그런 거 몰라... ”

 

“ 야, 너 그 못돼먹은 깡패한테 왜 그렇게 쩔쩔 매는 거야! 너처럼 성깔도 더럽고 재수 없는 녀석이 그 아저씨한테는 왜 그렇게 구는데! 어리고 예쁜 애 손아귀에 넣었으면 됐지 그 자식은 자기 분수도 모르고 왜 그렇게 난리야! ”

 

“ 네가 몰라서 그래. 로만이 침대에서 엄청 끝내주거든. 그래서 그 아저씨하고는 깨지기 싫단 말이야. ”

 

“ 에휴, 말을 말자. 너랑은 모든 얘기가 침대로 끝나니... ”

 

“ 원래 그런 거야. 파티도 그렇고. 바보, 기껏 차려 입혀서 보내놨더니 여자들이랑 놀지도 못하고 침대로 가지도 못하고 한 시간 만에 돌아오기나 하고. 아깝다. 파티... ”

 

“ 너 솔직히 말해. 파티 가고 싶었지? ”

 

“ 아니. 내가 왜? 지루하다고 했잖아. ”

 

“ 아브라모바가 그러는데 너 파티 가면 장난 아니게 놀았다던데? 스테이지를 장악하고 막 테이블 위로도 올라가고... ”

 

“ 에이, 그건 젊었을 때지. ”

 

“ 놀고 있네, 지금은 그럼 늙었냐? 스물다섯 밖에 안 된 게. ”

 

“ 너 그것도 로만한테 얘기하면 안 돼. 그 사람 나 스물두 살인 줄 알아. ”

 

“ 뭔 소리야. 너 취임식 때 극장장이 너 나이 다 얘기했잖아! ”

 

“ 그런가... 그럼 다 들킨 거네. 아, 망했다. 하여튼. 너네 파티는 뻔할 뻔자 재미도 없었을 거야. 시골 파티니까 음악도 되게 별로였을 거고. 그러니까 하나도 가고 싶지 않았어. ”

 

“ 아브라모바한테 누나 누나 하면서 찰싹 붙어서 스테이지를 장악하면서 춤추고 싶지 않았다는 거지? ”

 

“ 당연하지! ”

 

“ 테이블 위로 뛰어올라가서 추고 싶지도 않았던 거지? ”

 

“ 어... ”

 

“ 하긴 지금은 못 추겠구나. 스물다섯 살이나 먹어서. 늙어서. 테이블 위에 올라가면 헛디뎌서 떨어지겠네. ”

 

왕재수는 테이블을 힐끗 보더니 입술을 삐죽거렸다. 금세 사슴 같은 눈망울이 되었다. 베르닌은 종이접시와 유리병, 무대 동선이 그려진 종이를 소파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 노래가 흘러나오는 오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 물론 이런 근본 없는 노래에 맞춰서는 못 추겠지. 클래식 아니면 너 못 추잖아. ”

 

“ 뭐가! 나 절대음감인데! 못 추는 음악 하나도 없어! 내가, 내가 이걸로 안무도 했었는데! ”

 

“ 말도 안 돼. 그래도 테이블 위에선 못 출걸. ”

 

왕재수가 발칵 화를 내더니 테이블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는 레코드가 다 돌아갈 때까지 족히 30분 가까이 미친 듯이 춤을 췄다. 베르닌은 소파에 앉아 음악을 들으면서 열심히 구경했다.

 

“ 와, 너 진짜 잘 추는구나. 헛디디지도 않네. ”

 

“ 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잘 노는데! 이런 나를 못 가게 하다니. ”

 

“ 어딜 못 가게 해? ”

 

“ 아니야! ”

 

베르닌은 웃었고 춤춰서 덥고 목이 마르다는 왕재수에게 과일즙을 한 잔 더 따라주었다. 그리고 왕재수가 남은 사과파이를 다 먹어치울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럭저럭 괜찮은 하루였다. 아파트 앞에 도착했을 때 왕재수가 과도하게 춤을 춘 후유증으로 곯아떨어져서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들쳐 업고 올라가야 했던 것만 빼면. 역시 끝까지 속을 썩이는 놈이었다. 어쨌든 표지판을 그려준 걸 생각해서 베르닌은 그날만큼은 왕재수를 용서해주기로 했다.

 

 

 

- FIN -

2014.11.16

 

----

 

 

  

이게 나름대로 신데렐라 패러디로 쓴 거긴 한데..

신데렐라 : 베르닌

계모 : 스페호프

새언니 : 발따예프 외 동료들

요정대모 : 왕재수

왕자 : 나타샤(!)

 

하여튼 이야기는 6편의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으로 이어진다. 그건 다음주 중에..

 

왕재수가 사과파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가끔 언급했던 코즐로프와의 이야기에 나온다.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165

 

그리고 사과파이 사진 두어 개는 아래 링크..

http://tveye.tistory.com/3416
http://tveye.tistory.com/3457

 

 

:
Posted by liontamer

 

피곤하기 그지없는 화요일 밤. 아직 주말까지는 한참 남았다.

그 피곤을 조금이나마 달래기 위해.. 서무의 슬픔 에피소드 4편 올려본다.

4편에서는 드디어 이제껏 대화에서만 언급되었던 바이올린 아저씨 로만 코즐로프가 전면에 등장한다 :)

 

 

**  지금까지의 간단한 줄거리 **

 

1981년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는 나름대로 자기 입장에서는 베르닌을 도와주려고 애쓰는데... 별 도움은 안 되는 것 같고 베르닌의 일상은 고되기만 하다.

그리고 유명 무용수이자 톱스타였다는 왕재수는 극장 감독이라고는 하는데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베르닌으로서는 알 수조차 없다. 과연 그는 훈장까지 받은 프로페셔널이 맞는 것인가...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4

 

 

서무의 슬픔

-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그 날 베르닌은 일진이 좋지 않았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인지 수도관이 얼어서 아침부터 물이 나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왕재수의 집으로 올라가 문을 두들겼지만 답이 없었다. 감시요원답게 그는 열쇠를 꺼내 문을 따고 들어갔다. 어차피 왕재수도 슬슬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었으니까.

 

“ 야, 나 욕실 좀 쓸게. 우리 집 수도관 얼었어. ”

 

침실 문은 꼭 닫혀 있었고 물론 대답도 없었다. 자나보다 싶어서 베르닌은 급하게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양치질을 했다. 굉장히 바쁜 하루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나오다가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시립극장 바이올리니스트인 로만 코즐로프가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 뭘 쳐다봐, 스파이 자식아. 빨리 꺼져! ”

 

“ 어... 당신 왜 여기... 그러니까, 원래 여기로는 안 오는 걸로... ”

 

“ 난 안 온 거야. 스페호프한테 꼬아 바치면 죽을 줄 알아. ”

 

“ 난 그런 짓 안 해요! ”

 

“ 꺼져! ”

 

“ 내가 왜요! 여긴 우리 집... 이 아니고 왕재수 집인데 나는 아침저녁으로 여기 와서 집안일을... 이 아니고, 어쨌든 걜 아침마다 출근시켜주는... ”

 

“ 뭐, 왕재수? 이 스파이 자식이 지금 누구 보고 그렇게 부르는 거야, 설마 우리 귀염둥이를 보고 왕재수라고! ”

 

“ 당신 눈에야 귀엽겠지만 내 눈엔 왕재수라고요! ”

 

그러자 코즐로프가 벌떡 일어나 주먹을 휘두르며 그에게 다가왔다. 깡말라서 별 거 아닌 줄 알았던 바이올리니스트는 일어서자 어마어마하게 컸기 때문에 베르닌은 움찔했다. 게다가 주먹도 엄청나게 울퉁불퉁해 보였다. 베르닌이 뒤로 물러서면서 KGB 요원을 두들겨 패면 폭행죄로 입건될 수 있다고 웅얼대고 있는데 왕재수가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왔다.

 

“ 아휴, 아침부터 왜 이렇게 시끄러워. 어, 너 왔구나. 벌써 나갈 시간이야? 잠깐만 기다려. ”

 

“ 뭘 기다려? 저 새끼 내려가라고 해! 넌 내 차로 데려다주면 되잖아. ”

 

코즐로프가 화를 버럭 냈다. 베르닌은 차라리 잘됐다 싶었지만 왕재수는 그를 해방시켜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 당신 차 타고 가면 우리 사이 소문나잖아. 그냥 쟤랑 같이 갈래. ”

 

“ 소문은 무슨 소문! 어차피 같은 극장에서 일하는데! ”

 

“ 안 돼 안 돼, 당신 잡혀가면 큰일나. ”

 

그러면서 왕재수가 코즐로프의 허리를 껴안고 온갖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베르닌은 토할 것 같아서 급하게 말했다.

 

“ 야, 나 10분 후에 출발할 거야! 갈 거면 그때까지 나와! ”

 

그리고는 코즐로프의 따가운 시선을 뒤로 하고 그 집을 뛰쳐나갔다.

 

극장에 내려주고 차를 돌려 나가려고 하자 왕재수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 아침 안 먹어? 우리 카페 오늘 아침에 삶은 소시지랑 메밀죽 나온대. 너 그거 좋아하잖아. ”

 

“ 나 빨리 가야 돼. 오늘 엄청 바빠. ”

 

“ 으응, 불쌍하구나. 알았어, 밤에 봐. ”

 

“ 오후에 올 거야. ”

 

“ 왜? ”

 

“ 너네 오늘 무슨 행사하잖아! 우리 국장이 연설도 하고. 나 차출돼서 행사 보조해야 돼. ”

 

“ 아, 그거... 네가 할 게 뭐가 있어? 행사는 우리 극장에서 준비하는 거야, 우리 애들이 다 할 건데. 너네 국장은 그냥 와서 2분 동안 스피치만 하고 내려가는 건데. ”

 

“ 흥, 2분이 아닐 걸. 국장은 마이크 잡았다 하면 안 놓는다고. ”

 

“ 무슨 소리야, 큐시트도 다 써놨고 너네 국장은 구색 맞추기로 넣어놓은 건데. 시간 초과하면 안 돼, 인사말 하는 사람들이 일곱 명이라고!! 그거 끝나고 곧장 공연 시작하는데 10팀이 나와야 돼. 딱 8시에 끝나면 리셉션인데 거기서 모스크바 의원들은 건배 제의만 하고 다시 비행기를 타야 해서 시간 늘어지면 안 된다고! ”

 

베르닌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왕재수를 쳐다보았다.

 

“ 너도 일을 하긴 하는구나. 맨날 노는 줄 알았는데, 행사 일정을 그렇게 꿰고 있다니. 심지어 진짜 진지하네. ”

 

“ 나 일해! 엄청 열심히 한다고! 내가 감독이잖아! 너는 이런 행사를 진행해 본 적이 없어서 몰라. 1분만 늘어져도 다 어그러진단 말이야. 너네 국장한테 헛소리 늘어놓지 말라고 전해. 2분 넘어가면 절대 안 돼. ”

 

“ 내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 난 보조라고! ”

 

“ 알았어, 그만 가. ”

 

왕재수는 손을 내저으며 급하게 자기 사무실로 올라가 버렸다. 카페에서 아침 먹자고 하더니 까맣게 잊은 것 같았다.

 

 

*   *   *

 

 

 사무실에 들어오니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선배 직원들의 근태기록부와 초과근무 내역서를 수합하여 결재문서를 만들고, 도장이 비뚤어지게 찍혔다고 국장에게 반려당한 세계 전도 구입 전표를 다시 요청하는 문서를 만들고, 마침내 저녁 극장 행사 프로그램을 펼치려는데 국장실에서 한바탕 깨지고 나와 시뻘겋게 달아오른 선배 직원이 그에게 이제 네 차례니 빨리 들어가는 게 좋을 거라고 경고했다.

 

국장실로 들어가자 아니나 다를까 국장은 매우 저기압이었다. 오늘따라 멀끔한 양복을 차려입고 머리도 잘 빗어 넘기고 있었지만 얼굴은 죽상이었다.

 

“ 자네 서무의 역할이 뭐라고 생각하나? ”

 

“ 예? 서무란... 저어... 자료를 취합하고 우리 지부의 업무추진비를 관리하고 직원들의 근태를 관리하고... ”

 

“ 서무란 행정의 기본이야! 올바른 서무로 육성되지 않는 이상 제대로 된 행정인은 결코 될 수 없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겠나? ”

 

“ 글쎄요... 제가 또 무슨 실수라도... 문서의 구두점을 틀렸을지도... 아니면 첫 줄을 7칸 떼어야 했는데 8칸 떼었을지도. 아니면 업무추진비 영수증을 풀로 붙여야 하는데 클립을 써서... ”

 

베르닌이 자아비판을 하기 시작하자 국장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뭐야? 8칸? 클립! 용서할 수 없는 일이군. 됐네, 그건 내일 다시 얘기하지. 이건 또 다른 문제일세. 어제 머리가 아파 바람도 쐴 겸 경내를 한 바퀴 둘러보았는데, 두 가지가 눈에 띄었네. 첫째. 당직실로 내려가는 계단 맞은편에 걸려 있는 시계가 멈춰 있었네. 당장 건전지를 교체하게. 서무는 언제나 사무환경을 신경 써야 해. 다른 곳도 매일 둘러봐야 하네, 분명 어딘가 미흡한 곳이 있을 거야. 게다가 두 번째. 건물 뒤의 텃밭 말인데, 청소부들이 남는 시간에 거기 배추를 재배하고 있는 모양이야. ”

 

“ 그 텃밭은 당국의 허가를 받은 것이고 저희와는 관할이 달라서요. 청소부들에게 할당된 토지라서 보건의회 소속입니다. ”

 

“ 누가 뭐라고 했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야. 어제 보니 배추가 누렇게 시들어가고 있었네. 청소부들에게 무슨 활용 계획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렇게 방치해서 버릴 거라면 사료 공장에 기증을 하든지 우리 직원들에게 나누어 주든지 방법을 강구해야 하네. 그건 물론 서무의 역할이지. 그리고 그 땅을 그렇게 활용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도 재검토해보게! 보건의회에 검토보고서를 제출하는 거야! 이 두 가지는 사소할 수도 있지만 첫 번째는 내부 고객만족, 두 번째는 인력 운영과 공유지 및 공유지 재배 물건의 처분 문제와도 연관될 수 있다는 말이네. ”

 

“ 국장님, 텃밭은 저희 소관이 아니라니까요! 공유지라 해도 저희 쪽 공유지가 아니고 보안위원회는 그 땅과 재배 작물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시계는... 아무도 그 계단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당직을 하지 않으니까요. 어차피 제가 매일 야근을 하니까 당직 명령은 허울뿐이고 다들 그냥 5시에 퇴근한다고요. 행정 낭비예요. 차라리 그 시계를 없애버리는 것은 어떨까요? 그러면 쓸데없는 건전지 비용도 절약하고... ”

 

“ 행정의 알파벳도 모르는 주제에 행정 낭비라는 단어를 남용하다니! 썩 나가지 못해! 오늘 중 보안위원회와 보건의회의 공유지 텃밭 문제 재검토 보고서를 올리고 시계 건전지를 교체하여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 내게 보고하게! ”

 

“ 저는 오늘 4시에 극장에 가야 하는데요... 그 문화 행사 보조... ”

 

“ 오전에 끝내면 되지 않나! 그리고 2시에 다시 내 방으로 오게. 행사 때문에 할 말이 있으니까! ”

 

 

베르닌은 지하 계단으로 내려갔다. 시계를 떼어냈다. 회계팀으로 달려가 물품 구입 요청서를 써서 제출하고 도장을 받은 후 건전지를 사러 잡화점에 갔다. 30분 동안 줄을 서서 건전지 두 개를 요청하고 지급 요청 전표를 끊고 돈을 내고 영수증 전표를 받았다. 돌아와서 회계팀에 전표를 제출한 후 시계에 건전지를 끼우고 시간을 맞춰서 도로 지하 계단에 붙여 놓았다.

 

그리고는 텃밭에 가서 배추의 상태를 확인했다. 막 배추 하나를 뽑아보려는데 청소부 대표가 다가와서 자기들이 수프 끓여먹으려고 익히고 있는 배추를 왜 손대느냐고 버럭 화를 냈다. 엄연히 보건의회 소속 텃밭인데 왜 KGB에서 눈독을 들이느냐, 배추가 먹고 싶으면 직접 재배를 하든지 식료품 가게에 가서 줄을 서서 사 먹어라 하고 소리를 질렀다. 베르닌은 공유지의 재검토에 대해 말할까 하다가 피곤해서 그냥 예예 하고는 사무실로 돌아왔다.

 

 

*    *    *

  

 

베르닌은 4시 반에 극장에 도착했다. 로비부터 시작해 계단, 카페, 무대와 홀, 백스테이지 모두 사람들이 좍 깔려 있었고 뭔가를 뚝딱뚝딱 만드는가 하면 한쪽에서는 무용수들이 리허설을 진행하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연주자들이 깽깽거리는 소리를 내며 악기를 짓이기고 있었다. 마이크를 시험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조명을 체크하는지 무대 위로 붉고 파란 빛이 왔다갔다했다. 여기저기서 소음이 일었고 사람들을 호명하는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정신을 가다듬자 수트를 쫙 빼입은 왕재수가 무대와 오케스트라 핏을 바람처럼 오가며 사람들에게 뭐라뭐라 지시를 내리는 것이 보였다. 꼭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다시금 저놈이 일을 하긴 하는구나 싶었다.

 

정신없는 와중에 베르닌을 발견한 왕재수가 환하게 웃었다.

 

“ 너 왔구나! 잘됐다, 이리 와봐! ”

 

“ 나 왜? ”

 

“ 우리 도와주러 온 거 아니야? 나 좀 도와줘. ”

 

“ 나 너네 도와주러 온 거 아니야. 국장이 보낸 거야. 행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스크린하고 보고서 써야 돼. 나는 그냥 여기 구석자리에 앉아서 계속 모니터링하다 갈 거야. ”

 

“ 그럼 할 일 없는 거잖아. 하나만 도와줘. ”

 

“ 국장이 5시 45분에 온단 말이야. 수행해야 돼. ”

 

“ 지금 하나만 해주면 돼. ”

 

“ 뭔데? ”

 

“ 방송에서 취재 온다고 들이닥쳤는데 나 지금 인터뷰해줄 시간이 없어. 네가 대신 좀 해줘. ”

 

“ 내가 어떻게 인터뷰를 해! 나는 여기 일은 하나도 모르는데! ”

 

“ 이거, 프로그램에 다 있어. 그냥 이거 보면서 읽어주면 돼. ”

 

“ 너네 쪽 사람 시키면 되잖아! ”

 

“ 우리 애들은 다 바빠. 그냥 나인 척 하면서 인터뷰 해줘. ”

 

“ 그걸 누가 믿냐! 네 얼굴은 온 국민이 다 아는데!!! “

 

“ 괜찮아, 내가 카메라맨한테 얘기해놨어. 뒷모습만 잡아달라고. 너도 머리 까맣잖아. 프로그램에 동그라미쳐 준 것만 순서대로 읽어. 어차피 내가 쓴 거니까 그냥 대독만 하는 거야. ”

 

베르닌은 울며 겨자 먹기로 프로그램을 받아들었다. 왕재수가 가리킨 대로 감독실에 가보니 카메라맨과 기자들이 죽치고 있었다. 눈에 익은 국영채널 지역뉴스 기자도 보였다. 쭈뼛거리며 들어가자 이미 얘기를 들었는지 기자가 그에게 소리쳤다.

 

“ 질문하면 그냥 하나씩 읽어요! 얼굴 안 잡을 테니까. ”

 

“ 정말 이래도 되는 건지... ”

 

생방 아니에요. 자막 깔고 화면은 무대 배경으로 돌릴 거니까 상관없어요. 어차피 국회의원들 때문에 사람 얼굴은 정면으로 잡지도 않을 거예요. ”

 

“ 난 왕재수, 아니 야스민과 목소리도 다른데... ”

 

“ 오케스트라 음악에 많이 묻힐 거니까 괜찮아요! ”

 

그래서 베르닌은 프로그램을 펼쳐놓고 기자의 질문에 더듬거리며 대답을 했다.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극장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프티파와 이바노프의 안무와 20세기 모던 댄스의 혁신에 대해, 프로파간다 발레의 특성과 안무에 적용되어야 하는 해부학 이론에 대해 줄줄이 늘어놓았다. 이걸 다 왕재수가 썼다면 천재임이 분명했다.

 

어쨌든 대충 인터뷰를 마친 후 그는 식은땀으로 흥건해진 이마를 닦으며 복도로 나왔다. 그때 낯익은 향수 냄새가 확 풍겨왔다. 돌아보니 렐랴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 안녕하세요,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여기는 웬일로... ”

 

“ 왜 당신이 인터뷰를 하는 거예요! 난 미샤 인터뷰하러 온 건데! ”

 

“ 왕재수, 아니 야스민이 대신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너무 바빠서요. ”

 

“ 쿠키는요? ”

 

“ 어... 아, 그 쿠키. 전해줬어요. 잘 먹던데요. ”

 

“ 편지 얘긴 안 해요? ”

 

“ 어... 글쎄요, 그런 얘기까진. ”

 

“ 당신 쿠키 먹었어요, 안 먹었어요? ”

 

“ 저... 조금... 근데 걔가 먹으라고 준 거예요. ”

 

“ 알았어요. 근데 나는 미샤와 꼭 인터뷰를 해야겠어요. 지금 그 사람 어디 있어요? 데려다 주세요. ”

 

걔 지금 정신없어요. 아마 못할 거예요. 그러니까 방송에도 절 내보냈죠. ”

 

“ 방송이랑 다르잖아요. 내 문예지는 가브릴로프에서 제일 부수를 많이 찍는다고요! 게다가 수준도 높고요.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난 미샤랑도 잘 알고. ”

 

“ 하지만... 왕재수가 엄청 예민해요. 일곱 명이 인사말을 해야 하고 10개 팀이 올라가야 한대요. 1분이라도 늘어지면 큰일난다고... ”

 

“ 5분만요. 잡지 마감에 맞추려면 꼭 지금 인터뷰를 해야 한다고요. 다냐, 도와줘요. 제발요. 난 편집장이에요. 우리 잡지가 중요해서 그래요. 내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 아니라고요. ”

 

렐랴가 인형처럼 예쁜 회색 눈을 깜박이며 간절하게 올려다보자 베르닌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 어, 그래요. 따라오세요. ”

 

렐랴를 아래 세워놓고 베르닌이 무대 위로 올라가서 사정을 얘기하자 왕재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절했다.

 

“ 안돼. 지금 최종 리허설 중이야. ”

 

“ 5분만 내주면 되잖아. ”

 

“ 무용수들 움직임이 이상하고 조명도 틀어졌어. 하잘것없는 잡지 인터뷰할 시간 없어. ”

 

“ 하잘것없다니! 렐랴의 잡지란 말이야. ”

 

“ 그러니까! 별 내용도 없고 잘난 척만 하는 계집애들 잡지란 말이야. ”

 

“ 딱이네, 너랑 똑같네. 가서 좀 해줘라. 렐랴가 기다리고 있다고. 잼도 주고 쿠키도 줬잖아. 편지는 읽었냐? 물어보던데. ”

 

“ 무슨 편지? 아, 뭔가 분홍색 봉투에 있던 그거? 냄비 받침으로 쓰다가 수프 엎질러서 버렸어. ”

 

“ 뭐야? 넌 진짜 싸가지 없는 자식이야! 여자의 마음을 그렇게 헌신짝처럼 버리다니! ”

 

“ 나한테 여자의 마음이 무슨 소용이야! 정말 지겨워. 아무 생각 없는 여자들이 맨날 와서 매달리고 편지랑 선물 밀어 넣고 잘생겼다고 꺅꺅거리면서 안아달라고 찡찡대고... 릴리아나 페트로브나도 마찬가지... ”

 

“ 이 재수 없는 개자식, 지금 렐랴를 모욕한 거야! ”

 

“ 내가 왜 개자식이야? 틀린 말 한 것도 아닌데. 좀 내려가, 너 때문에 리허설이 중단되고 있잖아. ”

 

베르닌은 너무 화가 나서 왕재수의 멱살을 휘어잡았다. 한 대 패려고 하는데 렐랴가 깜짝 놀라서 뛰어올라와 그의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 어머나, 다냐! 이게 무슨 짓이에요! 왜 미샤랑 싸워요? 그만둬요! ”

 

“ 놔두세요, 이 자식은 좀 맞아야 돼요! 자기만 잘난 줄 아는 왕재수... ”

 

“ 무대 위에서 그러면 어떡해요... 리허설도 다 중단됐잖아요! 아무리 예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도 그렇지... ”

 

“ 아니, 전 그게 아니고... ”

 

“ 미안해요, 미샤. 제가 인터뷰를 너무 하고 싶어서 다냐에게 부탁했는데 이렇게 바쁜 줄 몰랐네요. 끝나고 꼭 부탁해요. ”

 

베르닌은 왕재수의 멱살을 놔주었다. 그런데 왕재수는 언제 틱틱댔느냐는 듯 눈웃음을 치면서 부드럽게 대꾸하는 것이었다.

 

“ 알겠어요,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행사 마치고 리셉션에서 얘기해요. 지금은 바빠서 이만. ”

 

렐랴는 방긋 웃으며 왕재수의 뺨에 키스를 하고는 베르닌의 팔을 낚아채 아래로 내려왔다.

 

“ 아휴, 다냐!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요! 미샤가 지금 얼마나 예민하겠어요. 높은 사람들도 많이 오고 큰 행사인데. 심지어 멱살까지 잡고! 안 그래도 당신 KGB라고 다들 곱지 않게 보는데! ”

 

“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당신 지금 왕재수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서 그래요! 그 자식 진짜 싸가지 없고 나쁜 놈이라고요! ”

 

“ 어머, 다냐. 설마 질투하는 거 아니죠? 남자들은 정말 왜 그런지 몰라, 좀 멋있는 남자가 있으면 꼭 헐뜯고... ”

 

“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다시는 제게 왕재수에 대한 걸 부탁하지 마세요! 얽히기 싫은 놈이에요! ”

 

“ 싫어요, 그래도 당신이 제일 친하잖아요. ”

 

“ 안 친해요. 그 자식이랑 제일 친한 건... 로만 코즐로프예요! 바이올리니스트! 맨날 붙어 다녀요, 앞으로는 그 사람에게... ”

 

“ 싫어요, 로만 오시포비치는. 인상도 음침하고 말투도 까칠해요. 당신이 제일 착하고 상냥해요. 난 당신이 더 좋아요. ”

 

베르닌은 뭔가 휘말리는 기분이 들었다. 왕재수와 대화할 때와 비슷한 익숙한 기분이었다. 문제는 거기서 도저히 빠져나갈 수도 없고 어쩐지 그래그래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는 것이다. 예쁜 애들은 다 그런가 싶었다.

 

렐랴는 자신의 문예지에 대한 일장연설을 늘어놓은 후 베르닌에게 다시 뭔가를 쥐어주었다. 이번엔 예쁜 포장지로 싸여 있는 작은 유리병이었다. 또 잼인가 싶었지만 별장에서 직접 채취해 가공한 꿀이라고 했다. 잼도 안 먹는데 꿀이라고 먹겠느냐고 하려다가 왕재수가 안 먹으면 자기가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냥 받았다. 병만 받아 호주머니에 쑤셔 넣자 렐랴가 혀를 차며 분홍색 봉투도 밀어 넣었다.

 

“ 편지요... ”

 

“ 아, 편지. 네... 그런데요,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

 

“ 왜요? ”

 

“ 저... 왕재수, 아니, 야스민 말인데요... ”

 

“ 또 헐뜯으려는 건가요? ”

 

“ 아뇨, 그게 아니고... 저, 걔는 여자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 ”

 

“ 알아요, 미샤는 보통 사람과 다르잖아요. 천재 예술가예요! 언제나 자신의 내면과 예술적 성취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뇌하느라 힘들어 해요. 여기 오기 전까지 고초도 많이 겪었잖아요. 그러니까 이해해요, 여자에게 관심 못 보이는 거... 하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옆에서 잘 돌봐주고 아껴줘야 해요. 그러면 언젠가는... ”

 

베르닌은 왕재수의 이른바 ‘아저씨’들과 성질 더러운 바이올리니스트가 떠올랐지만 차마 순진하고 귀여운 렐랴에게 충격을 주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고 말았다.

 

 

렐랴가 유관단체와 언론사 쪽 좌석으로 이동한 후 베르닌은 할 일이 없어 멀뚱멀뚱 리허설을 지켜보고 있었다. 왕재수는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조명 기사에게 소리를 지르는가 하면 무용수들 사이로 달려가더니 맨 앞에 선 남자의 다리를 붙잡고 좍 찢어댔다. 무용수가 비명을 질러댔다.

 

“ 으악, 감독님! 도저히 안 되겠어요! 이건 사내들은 신체조건 상 안 되는 동작... 으악! ”

 

“ 뭐가 안돼! 그냥 찢어! 어깨를 낮추고 다리를 이렇게 뒤로 찢으면 되는데 뭐가 어려워! 이렇게 하면 되잖아, 나처럼! ”

 

“ 으악, 당신은 천재니까 되는 거고요! ”

 

“ 내가 천재인 건 나도 알아! 근데 이건 바보라도 할 수 있는 거라고! ”

 

“ 아, 아악! 사람 살려! ”

 

“ 이게 무용수야 나무토막이야! 됐어, 다 찢었네. 돌아! ”

 

“ 으악, 찢고 있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어떻게 돌아요! ”

 

“ 원래 도는 동작이잖아! 찢는 건 거들 뿐! 돌아야지! ”

 

“ 아악, 십년 넘게 췄어도 이런 동작은 처음... ”

 

당연하지, 내가 만든 거니까. 내가 스무 살 때 안무해서 열화 같은 성원과 찬사를 받고 해외에도 가지고 나가고 훈장도 받은 훌륭한 작품이라고. ”

 

“ 으윽, 이건 당신만 할 수 있는 동작... ”

 

“ 시끄러워! 빨랑 돌아! ”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광경이었기에 베르닌은 고개를 돌렸다. 남자 무용수는 처절한 비명을 질러댄 끝에 마침내 왕재수가 원하는 대로 동작을 구사한 것 같았다. 참으로 놀라웠다. 왕재수는 정말 천재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자기와 있으면 바보 같은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게다가 자기와 있어도 싸가지는 없지만 일할 때는 싸가지 없는 걸 넘어서서 무섭다는 사실에도 놀랐다. 앞으로는 심기를 건드리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한바탕 활화산 같은 폭발이 지나간 후 왕재수가 무대 전체를 다시 한 번 점검하는 동안 베르닌은 좁지만 푹신한 의자에 몸을 파묻고 한숨을 쉬었다. 국장이 도착하기까지는 15분 정도 남아 있었다. 잠시라도 숨을 돌리며 공유지의 배추 문제를 생각해보려고 했는데 갑자기 뒤통수에 따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모르는 척 하려고 했는데 억센 손이 뒷덜미를 홱 낚아챘다.

 

“ 야, 나와. ”

 

“ 왜 그러시는 거죠? 전 행사 모니터링 중입니다. 공무 중이라고요. ”

 

“ 공무 좋아하네, 우리 귀염둥이 감시질이나 하고 있는 주제에. 당장 안 나와? 그럼 여기서 하지. ”

 

위협을 느낀 베르닌이 미처 몸을 돌리기도 전에 코즐로프가 주먹을 날렸다. 의자들 사이에 서 있었던 코즐로프가 다리를 약간 헛디디지만 않았어도 얼굴을 정통으로 맞아 코뼈가 박살날 뻔 했다. 쿠당탕 소리를 내며 베르닌이 옆으로 넘어졌다. 근처에 있던 스태프들은 깜짝 놀랐지만 싸움을 건 쪽이 극장에서도 성질 더럽기로 소문난 코즐로프인데다 당하는 쪽이 얄미운 KGB 요원이란 사실을 깨닫자 다들 나 몰라라 했다. 베르닌이 비명을 질렀다.

 

“ 이게 무슨 짓이에요! 대체 왜! ”

 

“ 입 다물어, 개자식아! ”

 

코즐로프는 무대 위에 있던 왕재수가 그쪽을 쳐다보는 것을 눈치 채고 급하게 베르닌의 멱살을 휘어잡은 채 끌고 나갔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다시 바닥에 그를 패대기쳤다. 발로 마구 걷어차려는 것을 베르닌이 KGB 입사 당시 3일간 받았던 기초 훈련을 떠올리며 간신히 옆으로 굴러 피하자 코즐로프는 더욱 화를 냈다.

 

“ 이 자식이 감히 피해? 가만 안 두겠어, 작살내 주겠어! ”

 

“ 대체 왜 이러는 거냐고요! 고발할 겁니다! 이건 폭행에 공무 방해죄... ”

 

“ 네놈이 우리 귀염둥이 멱살을 잡고 두들겨 패려고 했잖아! ”

 

“ 안 팼어요! 그냥 멱살만 잡았다가 금방 놔줬다고요! ”

 

“ 그리고 온갖 험한 말을... ”

 

“ 뭐가요! 싸가지 없는 놈한테 싸가지 없다고 한 게 뭐가 잘못이라고! ”

“ 뭣이,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고 착해빠진 우리 귀염둥이를 보고 싸가지 없다고? 인형처럼 조그만 우리 아기를 어디 때릴 구석이 있다고 주먹을 휘두르지를 않나... ”

 

“ 대체 왜 다들 이 모양인지! 렐랴도 그렇고 당신도! 그 왕재수한테 넋이 나간 건 그렇다 쳐요! 그렇다고 왜 날 이렇게 들들 볶느냐고요! ”

 

“ 네놈이 우리 아기를 괴롭혔잖아! 매일 감시하고! ”

 

“ 뭘 감시해요! 국장이 가외업무를 준 거라고요, 초과근무수당도 안 나와요! 사무실에서 뼈 빠지게 혹사당하고 아침저녁으로 저 자식 출퇴근시키고 집에 가면 해먹이고! 감시가 아니라 가정부라고요! 아기는 무슨 아기! 그 자식 나이가 몇 살인데! 뭐가 순진하고 착해빠져요, 응응을 하는 아저씨들이 몇 명인데! 그리고 조그맣긴 뭐가! ”

 

“ 조그맣지! 인형처럼 조그만 것이 아장아장... ”

 

“ 놀고 있네. 저렇게 큰 인형이 어디 있답니까! 척 봐도 175는 훨씬 넘겠구먼, 몸무게도 아무리 안 나가도 60킬로는 넘을 텐데! 아장아장 같은 소리. 다리가 저렇게 길쭉한데 휘적휘적 걸으면 몰라도 뭐가 아장아장! ”

 

“ 이 자식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우리 귀염둥이를 비방해! ”

 

코즐로프가 다시 주먹질을 했다. 억울함을 견디지 못한 베르닌이 맞받아 주먹을 휘두르자 바이올리니스트는 더욱 화를 냈다. 기껏해야 악기나 연주하는 인간이 왜 이렇게 포악하고 힘이 센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러다 죽겠다 싶어 베르닌이 고함을 지르며 도움을 요청하려는데 갑자기 왕재수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휴, 대체 뭐하는 짓이야! 당장 안 일어나! ”

 

신기하게도 미친 듯이 주먹질을 하던 코즐로프는 왕재수의 한 마디에 금세 벌떡 일어났다. 베르닌은 코피를 닦으면서 왕재수에게 하소연을 했다.

 

“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저 사람이 괜히 와서 시비 걸고 멱살 잡고 두들겨 패고... 너는 스물다섯도 넘었는데 아기라고 하고 너 키가 이만한데 조그만 인형이라고 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고... 그리고 너 솔직히 아무리 날씬해도 60킬로 넘잖아, 키가 있는데... "

 

“ 조용히 해! 한번만 더 로만 앞에서 몸무게 얘기 했단 봐! ”

 

왕재수가 베르닌의 옆구리를 쥐어박았다. 그리고는 코즐로프를 확 째려보면서 꾸짖었다.

 

“ 15분 후 시작인데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수석이란 인간이 복도에서 노닥거려? 오케스트라 애들 지금 다 퍼져 있단 말이야! 조율도 해야 하고 군기도 잡아야 하는데 당신이 이러고 있으면 어쩌라고! 당장 안 들어가? ”

 

“ 어, 그래.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구나. 걱정 마, 우리 비둘기야. 내가 오케스트라 꽉 잡을 테니까 그쪽은 걱정하지 마. 가서 숨이나 좀 돌리렴. ”

 

“ 오케스트라 아까 리허설할 때 보니까 클라리넷 소리 이상했어. 한 번 더 체크해. ”

 

“ 아유, 우리 아기는 역시 절대음감이야. 클라리넷 이상한 건 또 어떻게 알아챘누. 아까 내가 체크했어. ”

 

“ 알았어. 아참, 그리고 왜 애꿎은 애를 패는 거야! ”

 

“ 아까 이 자식이 너 멱살 잡았잖아. ”

 

“ 아니야, 내 칼라에 벌레가 붙어서 털어준 거야. 바보, 앞으로는 절대 얘 패지 마. 내 말도 얼마나 잘 듣는데. 밥도 잘 해주고. ”

 

“ 너 설마 이 자식에게 마음이 있는 건 아니겠지? ”

 

“ 왝, 난 키 큰 아저씨가 좋아. 쟤는 진짜 취향 아니야. 눈도 단추 같고. ”

 

“ 그렇지? 우리 아기는 역시 내가 제일 멋있는 거지? ”

 

“ 응응. 빨리 들어가! ”

 

코즐로프가 오케스트라 대기실로 사라진 후 왕재수가 베르닌에게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코피를 닦고 나서 베르닌이 물었다.

 

“ 왜 거짓말했어? ”

 

“ 뭐? ”

 

“ 벌레 털어준 거 아니었잖아. ”

 

“ 안 그랬으면 로만이 너 작살냈을 걸. ”

 

“ 언제 나 걱정했다고. ”

 

“ 왜, 난 맨날 너 걱정해. 국장 때문에 맨날 야근한다고 징징대고, 귀신 나왔다고 울고 권총 규격 때문에 징징대잖아. 너는 맨날 챙겨줘야 하잖아. 갓난아기처럼. ”

 

“ 뭐라고? 너 설마 정말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

 

“ 응. ”

 

“ .... 그 말은 기분 나빠. ”

 

“ 뭐가? ”

 

“ 단추... ”

 

“ 너는 눈이 단추 같잖아. ”

 

“ 단추 눈은 봉제 인형한테나 달려 있는 거야. ”

 

“ 봉제 인형 귀엽잖아. ”

 

“ 아니, 그러니까 그게... 뭔가 이상하잖아! ”

 

“ 너랑 노닥거릴 시간 없어. 가서 시작 준비해야 돼. ”

 

왕재수가 바람같이 사라졌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도로 홀에 들어가 앉아 있으려고 했지만 그때 스페호프가 도착해서 급하게 수행하러 나갔다.

 

 

*    *    *

 

 

행사는 생각보다 규모가 크고 화려하게 진행되었다. 모스크바에서 국회의원들도 왔다. 인사말에 이어 10개 팀의 갈라 공연도 원활하게 흘러갔다. 리셉션 파티도 잘 끝났다. 한마디로, 성공한 행사였다. 모두가 행복했다. 단 한 사람, 스페호프 국장을 제외하고는.

 

인사말이 문제였다. 왕재수의 말대로 총 7명이 인사말을 하게 되어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온 정치국 의원이 제일 첫 번째, 그 다음은 서기국 의원, 그 다음은 내무부 국장, 그 다음은 모스크바 문화예술국장, 그 다음은 가브릴로프 시 의회 의장, 여섯 번째가 가브릴로프 KGB 국장인 스페호프, 마지막이 가브릴로프 출판문화국장이었다. 모두에게는 각 2분이 주어졌다. 총 14분이었다.

 

문제는 이런 거였다. 정치국 의원은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의 인사말은 5분 동안 이어졌다. 그 중 왕재수에 대한 칭찬이 3분을 차지했다. 정치국 의원보다는 덜 중요하지만 그래도 아주 중요한 서기국 의원도 비슷하게 인사말을 늘어놓았다. 3분 동안 이야기했다. 그리고 내무부 국장, 문화예술국장... 마침내 시 의회 의장이 인사말을 마쳤을 때 시간은 1분밖에 남지 않았다.

 

스페호프 국장은 앞에 나서서 사회를 보고 잘난 척하고 인사말 하는 것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예의 가브릴로프 시의 역사부터 시작했다. 온갖 고어와 프랑스어 문장들을 인용했다. 그리고 KGB가 시 문화예술에 공헌한 사례를 들기 시작했을 때 마이크가 꺼졌다.

 

적막이 감돌았다.

 

 

국장은 소리가 나오지 않는 마이크를 툭툭 때려보더니 당황하여 백스테이지 쪽 스태프에게 손짓을 해댔다. 그때 국장을 비추고 있던 조명도 꺼졌다.

 

 

잠시 후 다시 불이 들어왔다. 국장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서 다시 VIP 좌석에 앉아 있었다. 가브릴로프 출판문화국장이 올라가서 마지막 인사말을 했다. ‘신사숙녀 여러분, 이 행사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출판문화국에서는 후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라는 두 문장이 끝나자 다시 마이크가 꺼졌다.

 

7명의 인사말은 총 14분 동안 진행되었다.

 

스페호프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공연이 시작되었을 때 씩씩거리더니 뭐라고 욕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욕설을 채 두 마디도 내뱉기 전에 모스크바 정치국 의원의 경호원 두 명이 다가와서 그를 정중한 척, 하지만 눈에 띌 정도로 세게 양쪽 팔을 붙들고 복도로 데리고 나갔다.

 

베르닌은 급하게 따라나갔다. 국장은 분노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욕설을 퍼부으며 길길이 날뛰었다.

 

“ 감히 나에게 이런 치욕을 주다니! 용서할 수 없어! 극장 의전 담당자 누구야! 없애버리고 말겠다!

 

그때 왕재수가 나왔다.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

 

“ 좀 조용히 해, 공연에 방해돼. ”

 

“ 이 따위 짓을 하다니! 이런 거지같은 행사가 어디 있어! 담당자 불러와! ”

 

“ 당신 마이크 내가 껐어. ”

 

“ 뭣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감히 내 마이크를! ”

 

“ 인사말 총 시간이 14분인데 앞에서 13분을 썼어. 당신한테 40초 주고 출판문화국장한테 20초 줬어. 이 정도면 배려해 준 거야. ”

 

“ 그럼 앞에서부터 시간 잘랐어야지! ”

 

“ 모스크바는 가브릴로프보다 의전 상 우위에 놓여 있기 때문에 다 인정해 줘야 했고. 여기는 시 의회 의장, 당신, 출판문화국장인데 의장은 눈치가 빨라서 1분밖에 안 했어. 그러니까 아주 공평해. 60초, 40초, 20초. 의전 상 배분한 거야. 아예 끊어버리려다가 40초 준 거니까 고맙게 생각하고 그만 조용히 해줬으면 좋겠어. 자꾸 시끄럽게 굴면 모스크바에서 온 우리 아저씨한테 얘기해서 당신 입 다물게 시키라 할 거야. ”

 

 

베르닌은 국장이 분노로 왕재수의 목을 비틀어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국장은 풀이 죽었고 한숨을 쉬며 등을 돌려 나가버렸다. 베르닌은 쫓아나가려고 했지만 국장은 버럭 화를 냈다.

 

“ 따라오지 말게! ”

 

“ 하지만... ”

 

“ 남아서 행사 모니터링해! 끝까지! ”

 

“ 저, 리셉션 파티까지요? ”

 

“ 당연하지! 저 재수 없는 불여우가 혹시 범법을 저지르지 않는지 확실하게 감시해! ”

 

그래서 베르닌은 남았다. 파티에도 갔다. 파티에는 온갖 맛있는 음식들이 즐비했다. 렐랴가 어깨가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 행사가 끝나자 기분이 누그러진 왕재수는 렐랴와 3분 정도 인터뷰도 해주었다. 렐랴는 베르닌에게 샴페인도 한 잔 권했다. 아주 행복한 하루였다. 공유지의 배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만 빼면 완벽했다.

 

그리고 그날의 가장 큰 행복은, 집에 도착했을 때 왕재수가 그에게 렐랴가 준 꿀을 먹으라고 떠넘긴 거였다. 두 번째 행복은, 왕재수가 국장의 마이크를 꺼버린 거였다. 세 번째 행복은 스페호프가 두통이 심해서 다음날 휴가를 내겠다고 연락해 온 것이었다. 참 운 좋은 하루였다.

 

 

 

 

- FIN -

2014.10.22

 

 

-----

 

** 시리즈는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으로 이어진다. 그건 주말에...

 

 

** 전반부에서 베르닌이 건전지 사러 잡화점 가서 줄 서서 기다리고 전표 끊고 돈 내고 또 전표 끊고 하는 건 아마 러시아에서 생활해보신 분들이라면 이해하실 듯.. 지금이야 러시아도 자본주의 문화가 퍼져서 저런 곳이 별로 없지만 예전엔 저랬다. 줄 서는 건 일상. 이 코너에선 물건 사겠다고 전표 끊고, 그거 가져가서 저 코너에서 물건 요청, 또 여기서는 돈 지불, 저기서는 지불 전표에 도장, 또 여기서는 물건 받기 등등~

학교에서 등록금 낼 때도 이 사무실 가서 이 절차 밟고 저 사무실 가서 저 절차 밟고.. 중간에 또 커피 브레이크라고 쉬고... 또 어느 담당자는 휴가라 안 되고.. 등록금 한 번 내는 것도 한 나절! 운 나쁘면 며칠에 걸쳐서 처리해야 했다. 지금이야 많이 나아졌겠지 :)

 

** 바이올린 아저씨 로만 코즐로프는 이 시리즈에서 대책없는 깡패 같은 거친 남자로 나오긴 한다만.. 뭐 이 사람이 본편에서도 좀 까칠하고 폭력 성향이 조금 있긴 하지만 저런 남자는 아니다. 저렇게 닭살 멘트를 폭탄처럼 쏟아놓는 사람은 더더욱 아님 :) 하긴 여기 나오는 인물들 전부 본편의 원래 성격과는 많이 차이가 있다. 이건 그냥 웃자고 쓰는 얘기들이라서....

로만 코즐로프와 미샤에 대한 얘기는 writing 폴더에. 링크는 아래..

http://tveye.tistory.com/3146

http://tveye.tistory.com/3165

http://tveye.tistory.com/3253

  

***

 

댓글에서 지난 3편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http://tveye.tistory.com/3444) 때문에 쿠키 드시고 싶으셨다는 분들이 계셔서..

렐랴가 만든 쿠키랑 똑같지는 않지만 러시아 쿠키 사진 몇 장으로 눈 위안이라도... ㅠㅠ

러시아에서는 쿠키를 뻬체니예(печенье)라고 한다. 수제 뻬체니예 사진들..

 

 

 

 

 

 

 

 

 

두번째랑 이 네번째 쿠키를 섞어 놓은 게 아마 렐랴가 만든 쿠키랑 비슷할 듯..

 

그리고 이렇게 예쁘게 포장을 해서... 사모하는 왕재수에게 갖다 바침(베르닌을 시켜서..)

렐랴야, 다 소용없어 ㅠㅠ (그냥 나 줘..)

 

 

 

:
Posted by liontamer

 

주말에 자리를 비울 것 같아서.. 금요일 밤에 서무의 슬픔 3편 올려본다.

만국의 직장인들이여 유리지갑들이여 말단들이여 사무직들이여 봉기하라 ㅠㅠ

 

 

**  지금까지의 간단한 줄거리 **

 

1981년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는 나름대로 자기 입장에서는 베르닌을 도와주려고 애쓰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3편 시작에 앞서 **

- 에피소드 3에 언급되는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는 실존인물이다. 그러나 권총규격이니 운운하는 스페호프 국장의 얘기는 전부 그냥 웃자고 쓴 얘기..

- 베르닌과 왕재수가 렐랴를 '릴리아나 페트로브나'라고 부르는 건 러시아어의 존칭 개념임. (렐랴는 애칭, 릴리아나 페트로브나는 본명 + 부칭)

- 보르쉬는 비트 수프, 펠메니는 러시아식 만두이다.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하지 말아주세요 *

  

------

 

 

<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3

 

 

서무의 슬픔

-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10월 초가 되었을 때 베르닌은 업무에 찌들어 죽을 지경이 되었다. 애초부터 일이 많았지만 9월에 가브릴로프 시 의회와 공공기관들 내부에서 대대적으로 조직 개편이 일어나는 바람에 KGB에서는 새로 들어온 사람들의 서류를 탈탈 터느라 여념이 없었고 그 덕에 말단이자 비서이며 서무인 베르닌의 업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 것이다. 그 와중에 왕재수도 시립극장 감독으로 부임해오고 그 감시 업무까지 떠맡게 되었으니 베르닌은 몸이 열 개라도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그 날도 베르닌은 산더미처럼 서류를 쌓아놓고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국장이 근교 도시로 출장을 가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서무가 조금이라도 노는 꼴을 볼 수 없었던 국장은 전날 어마어마한 업무 리스트를 하달하고는 다음날 자정까지 자기 책상 위에 완료된 서류들을 모두 올려놓으라고 엄포를 놓고 떠났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목록이 길게 이어졌다.

 

직원 외출부를 작전요원 및 감시요원, 행정직원별로 서류철 3개 만들기, 대외용 외출부 기재 칠판을 역시 요원별로 3개 만들기, 국장실에 걸어놓을 세계 전도 구입하기(사이즈는 120센티미터 x 60센티미터, 대륙별 색깔 구분 필수), 내무부에서 실시하는 연방 보안위원회 지국별 고객 만족도 조사 대비를 위한 전화 응대 매뉴얼 만들기(제정신이 박힌 일반인이라면 아무도 KGB에 전화하지 않으므로 아무 짝에 쓸모없는 매뉴얼이었다), 국장실 캐비닛에 비치할 다과 리스트 만들기 및 다과 구입하기, 전표 처리하기, 선배 직원들의 초과 근무 내역 작성 및 근태기록부 대조하기, 선배 직원들의 출장 내역 정리 및 출장비 지급하고 전표 처리하기...

 

이것도 모자라 맨 뒷장에는 작전요원에게 배부되는 권총 규격의 중장기 로드맵을 작성하라는 특별 과제가 주어져 있었다. 전날 국장실에서 목록을 전달받아 읽던 베르닌은 참다못해 항의했다.

 

“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대체 권총 규격의 중장기 로드맵이란 건 뭡니까? 모스크바 표준으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까, 38구경... ”

 

“ 이런 근시안적인 천치 같으니. 그래서 자네가 발전이 없는 거야. 대체 언제가 되어야 제대로 된 행정가가 되겠나. 행정의 기본이란 향후 10년을 내다보고 중장기 계획을 만들어서 닥쳐올 감사에 대비하는 것이야. 지금이야 38구경이지. 하지만 요원들의 신체적 조건은 변화하기 마련이야. 45구경으로 바뀔 가능성은 생각 못하나? 게다가 미제 양키들이 38구경을 쓰고 있지. 국가적 자존심 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단 말일세! 아직까지야 안드로포프가 KGB를 장악하고 있으니 변동이 없겠지만 서기장은 오늘내일 하고 있고 그자가 죽으면 안드로포프가 자리를 낚아챌 거야. 그럼 KGB 수장도 바뀔 거고, 전체 질서가 재편될 가능성이 크지. 그런 와중에 권총 규격이라고 안 바뀌겠나! 제발 꼭대기에 달고 있는 그 머리란 걸 좀 써 보게! ”

 

“ 권총은 국영 공장에서 대량 생산합니다! 권총 규격을 바꾸기 위해서는 생산 제조 라인이 다 바뀌어야 하고 그건 단순히 KGB 수장의 변덕에 의해 좌우되기에는 너무나 많은 비용을 요구하는 짓이란 말입니다. 효율성 측면에서 아무런 이득이 없습니다. 게다가 규격이 바뀌는 순간 작전요원들의 훈련에도 변화를 주어야 하고 사격 교관들도 새로운 훈련을 받아야 하니 이 또한 대규모의 추가 비용을 초래합니다. 게다가 45구경은 38구경보다 훨씬 무겁습니다, 해외 비밀요원들이 사용하기에는 은폐도 어렵고 특히 여성 요원들에게는 큰 짐이 될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 권총 규격의 중장기 로드맵이란 건... ”

 

“ 비용이라니! 효율성이라니! 어디서 그런 자본주의적인 발상을 지껄이고 있는 건가! 자네 수용소에 가고 싶나! 밖에서는 절대 그런 말은 입도 뻥긋하지 말게! 자넨 정말 운이 좋은 줄 알아! 그나마 내가 부하들을 아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벌써... ”

 

국장은 족히 20분 가까이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베르닌을 혼내고 훈계했다. 마침내 국장실에서 나왔을 때 베르닌은 너무 지쳐서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직실 귀신이라도 다시 나타나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물론 자신이 혼자 있을 때 말고... 이왕이면 국장실로 가서 얄미운 국장을 혼내줬으면 했지만 전에 보니 귀신도 상당히 사람의 외모를 따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리고 예쁘장한 왕재수를 그렇게 좋아했나 싶었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귀신이 자기한테도 귀엽다고 했던 게 떠올라서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어쨌든 국장은 출장을 떠났고 가브릴로프 작전요원들과 감시요원들은 모두 강가에 피크닉을 나가서 샤실릭을 구워먹으며 뒹굴었고 사무실 행정직원들도 너도나도 어딘가로 사라져 농땡이를 치며 행복을 만끽했다. 그야말로 어린이 주간이었다.

 

오로지 말단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만이 햇살 찬란한 가을날에 어두컴컴한 사무실에 남아 외출부 서류철을 3개 만들고 대외용 외출 칠판 3개와 색깔이 들어간 세계 전도 구입 요청 서류를 작성하고 전화 응대 매뉴얼을 끄적거리고 선배들의 초과 근무 내역을 창작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는 권총 규격의 중장기 로드맵이 대체 무엇인지, 국장이 요구하는 로드맵이란 38구경에서 45구경으로의 1차 진화에서 끝나는 것인지 아니면 무슨 생화학 캡슐을 장착한 신무기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브레즈네프 서기장과 안드로포프 위원장의 권력 승계 구도를 예측해 환경 분석까지 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머리가 터져버릴 지경이었다.

 

격무 때문에 너무 골치가 아프고 힘들어서 베르닌은 이 빠진 머그에 뜨거운 물을 붓고 굴러다니던 홍차 티백을 담갔다. 그리고 손에 잡히는 대로 유리병 뚜껑을 열고는 티스푼으로 잼을 마구 퍼먹기 시작했다. 카페인과 당분을 섭취하자 그나마 두통이 조금 가시는 듯했다. 게다가 잼이 아주 맛있어서 순식간에 유리병을 절반쯤 비웠다. 다 먹어치우려다가 야근할 때를 대비해 좀 남겨놔야겠다는 생각에 내키지 않는 손을 뻗어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는 다시 선배들의 초과 근무 내역을 지어내면서 출근부를 대조하고 있는데 갑자기 하이힐 소리가 또각또각 들리더니 강렬한 향수 냄새가 확 끼쳐오면서 세찬 바람이 휙 하고 불어왔다. 베르닌이 상대방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책상 위로 구겨진 서류 몇 장이 회오리처럼 내동댕이쳐졌다.

 

대체 이게 무슨 헛소리예요! 당장 취소하지 못해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KGB 나부랭이들 같으니! 문화가 뭔지 예술이 뭔지 한 마디도 이해 못하는 야만인들 주제에 감히 내 잡지 발간을 방해하다니! ”

 

고개를 들자 렐랴 비슈네바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씩씩거리며 발을 구르고 있었다. 렐랴는 월간 문예지 비슈네브이 사드 편집장으로 나이는 겨우 스물세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굉장한 노멘클라투라 가문 출신인데다 가브릴로프에서도 손꼽히는 미녀였다. 지금 보니 성깔도 손꼽힐 것 같았다.

 

“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왜 그러십니까? ”

 

“ 뭘 왜 그래요! 이거 당신이 보낸 거잖아요! 당신 이름 적혀 있잖아요, 다닐 베르닌!! 우리 잡지 발간일은 매월 15일이라고요! 당장 내일 나가야 하는데 무슨 절차를 안 지켰으니 당월호 발간 불가, 검열국 재승인 요망... 이게 무슨 헛소리냐고요! ”

 

베르닌은 구겨진 서류를 펼쳐 보았다.

 

“ 아, 난 또 뭐라고요... 잡지 뒤표지에 인쇄하는 문구 하나가 잘못됐더군요. ‘본 인쇄물은 가브릴로프 시 의회 및 출판문화국, 보안위원회의 검열 및 승인을 거쳐 출판되었습니다’라는 문구 말입니다. 보안위원회가 출판문화국보다 상위기관이기 때문에 순서가 바뀌어야 합니다. 사실 시 의회와는 동급이지만 그거야 알파벳 순서상 의회가 앞으로 와도 별 문제없고... ”

 

렐랴는 더욱 폭발했다.

 

그런 하잘것없는 이유 때문에 내 잡지 발간을 막았다고요? 보안위원회고 검열국이고 다 그 밥에 그 나물인데 뭐가 먼저 온들 어때서요! ”

 

“ 뭐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국장이 이런 문제에 너무 민감해서요... ”

 

“ 그리고 그깟 문구 순서가 문제라면 당신이 좀 바꿔줄 수도 있었잖아요! 아니면 전화해서 인쇄소에 넘기기 전에 문구만 바꾸라고 귀띔해줬으면 이런 바보짓을 안 해도 되잖아요! ”

 

“ 그게 말입니다... 저도 전화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그때 국장이 불러서 행정 절차를 지켜야 하는 이유와 서무의 기본자세에 대해 한 시간 동안 설교를 하고... 당신 문예지의 이 문구를 예로 들면서 올바른 처리 방법에 대해 떠들어댔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 ”

 

“ 그러니까, 지금 내 잡지가 당신 국장의 변태적 강박관념 때문에 희생양이 됐다는 얘기잖아요! 당신 왜 그렇게 융통성이 없어요? 국장한테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꾸하고 서류 처리 대신 나한테 전화를 해줬으면 별 문제 없이 풀렸을 거 아녜요!!! ”

 

“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그건 절차를 완전히 무시하는 행위라고요. 그리고 당신은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그러는 거고요! 제가 당신에게 몰래 전화를 했다는 게 들통나면 국장은 제 살점을 도려내고 뼈를 갈아서 길거리 도둑고양이한테 던져줄 거라고요! ”

 

베르닌은 억울한 마음에 언성을 높였지만 렐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 그러니까 몰래 했어야죠! 이왕 이렇게 된 거 잘잘못을 따지자는 게 아니니까, 빨리 이 사태를 해결해 줘요! ”

 

“ 해결 방법은 간단합니다. 문구를 수정해서 다시 검열국에 승인 요청을 하시는 거죠. 검열국에서 통과가 되면 저희 쪽으로 넘어올 거고 그럼 제가 발간 승인 공문을 기안하고... 국장 결재가 완료되면 저희 쪽 문서 발송 담당자에게 요청해서 발송철에 기재하여 번호를 딴 후 당신 사무실로 서류를 발송해드리지요. 그런데 오늘이 수요일이군요... 검열국 통과는 빠르면 내일... 저희 쪽으로 넘어오면 목요일 저녁... 그런데 국장이 출장을 갔으니 금요일 오전에 결재를 받고... 발송 담당자를 거치면 금요일 오후. 그러면 우체국이 문을 닫으니 다음 주 월요일이면 승인 확정이 되고, 발간은 화요일... ”

 

조금 누그러진 것 같았던 렐랴는 다시 펄펄 뛰었다.

 

“ 화요일이라뇨! 문구 하나 수정하는 데 어째서 일주일이 걸린단 말인가요! 잡지 발간일은 내일이에요! 이건 나와 독자들 사이의 약속이라고요! 검열국엔 내가 가서 얘기하겠어요! 한 시간 내로 서류에 도장 받아서 가져올 수 있다고요! 그럼 여기선 당신이 해결해주면 되잖아요! 국장 도장 어딨는지 몰라요? 도장 대신 찍어주고! ”

 

“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당신은 행정 절차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위임 전결 규정이란 게 있어요. 제가 국장 대신 도장을 찍을 수는 없다고요! 그리고... 우리는 도장 안 씁니다. 서명을 한다고요! ”

 

“ 당신 서무라면서요! 국장 서명 어떻게 생겼는지 알잖아요, 대충 똑같이 그리면 되죠! ”

“ 그건 범죄 행위라고요! 국장이 알면 제 목을 쳐서 남은 피 한 방울까지 다 짜버릴 거예요. 어찌어찌 서명을 위조한다 쳐도.. 지금 문서 발송 담당자가 자리를 비워서 발송이 안돼요. ”

 

“ 그깟 서류철에 기재하고 번호 따는 게 왜 담당자가 따로 필요해요! 그것도 지금 당신이 그냥 해주면 되잖아요. 1분도 안 걸릴 텐데! ”

 

“ 담당자가 돌아와서 서류철을 보면 난리를 칠 거예요... 제 권한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어차피 서류철에 기재를 해도 우체국에... ”

 

“ 대체 왜 우체국이 필요해요! 다리 하나 건너면 우리 사무실인데! 그리고 내가 직접 왔잖아요. 나한테 서류 건네주면 끝인데 무슨 우편 발송이 필요하냐고요! 아아 답답해! ”

 

렐랴가 두 손으로 가슴을 쾅쾅 쳤다. 온통 사과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뜨거운 콧김을 내뿜었다. 회색 눈동자가 분노로 반짝반짝 빛나는 걸 보니 정말 예뻤다. 왜 가브릴로프 남자들이 그렇게 이 여자에게 목을 매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잠시 베르닌이 그녀의 미모에 감탄하고 있는 동안 렐랴는 심호흡을 하더니 조금 진정되었다.

 

“ 휴... 고지식한 당신에게 아무리 말해봤자 알아들을 리도 없고.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해요. 자, 빨리 문서부터 새로 만들어요. 국장 서명이랑 발송철 기재도 해요. 그 동안 난 검열국에 가서 수정본으로 승인 문서를 받아올 테니. 자, 빨리! ”

 

“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지금 보안위원회의 규정을 어기고 있는 겁니다. ”

 

“ 그래서 정말 안 해주겠다는 거예요? 내일 잡지가 나와야 한다니까요! 설마 정말 내 부탁을 안 들어주겠다는 거냐고요! ”

 

렐랴가 다시 콧김을 내뿜으며 소리를 지를 기세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재빨리 서류를 낚아챘다.

 

“ 알았습니다, 알았어요! 지금 해 드릴 테니까 빨리 검열국에 다녀오세요. 하지만 이건 비밀입니다. 이런 편법을 썼다는 게 발각되면 국장이 절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요. ”

 

렐랴는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자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베르닌의 손목을 꼭 쥐었다.

 

“ 고마워요, 다냐! 화내서 미안해요. 당신한테 화난 게 아니에요, 내일이 발간일인데 이런 일이 생겨서 그런 거예요. 당신네 국장은 워낙 예술이랑은 담을 쌓아서 애초부터 우리 잡지에 초를 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거든요. 그래도 당신이 담당자라 다행이에요. ”

 

“ 저, 그런데 손목을 좀... 타이프를 쳐야 해서요. ”

 

렐랴는 샐쭉해진 눈으로 베르닌을 흘겨보더니 손목을 놔주었다. 베르닌이 발간 승인 문서를 타이핑하는 동안 렐랴는 책상에 쌓여있는 산더미 같은 서류를 훑어보았고 혀를 찼다.

 

“ 다냐, 이게 다 뭐예요? 다 당신 일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가고 왜 혼자 남아서 이렇게 일에 파묻혀 있어요? ”

 

“ 예... ”

 

“ 왜 그러는 건데요? 일을 다 같이 해야지 왜 당신 혼자... ”

 

“ 서무라서요. ”

 

“ 당신 불쌍하네요. 스페호프 너무 못됐어요. ”

 

베르닌은 어쩐지 가슴이 뭉클했다. 감동이 밀려왔다. 얼굴도 예쁜 여자가 마음도 곱다는 생각에 울컥해서 하마터면 ‘승인하오니 만전을 기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문장을 ‘만전을 기해주시기 바람’이라고 오타를 칠 뻔 했다. 막 타이핑을 마치고 국장 사인을 위조해 그리려는데 갑자기 렐랴가 뭔가를 홱 낚아채더니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물었다.

 

“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다닐? 대체 왜 이게 여기 있는 건지 설명해 봐요. ”

 

베르닌은 영문을 알 수 없어 렐랴를 빤히 바라보았다. 렐랴는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채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뚜껑이 반쯤 열린 작은 유리병이 쥐어져 있었다.

 

“ 어, 그거요? 버찌잼인데요. 차 마실 때 곁들여 먹는 거. 차 한 잔 드릴까요? 같이 먹으면 맛있어요. ”

 

“ 누가 몰라요, 버찌잼인 거! 대체 이게 왜 여기 있냐고 묻잖아요! ”

 

“ 그러니까요, 잼은 차에 곁들여 먹으면 맛있고... 일하다 보면 머리도 아프고 힘드니까 뜨거운 차를 마시면 힘이 나고. 그래서 갖다 놓은 거죠. 차 마실 때 같이... ”

 

그. 러. 니. 까. 대체 왜 이걸 당신이 갖고 있냐고요!!!!! ”

 

“ 아니,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저는 잼을 먹으면 안 되나요? 아무리 제가 당신들이 경멸하는 KGB 직원이라지만 잼을 먹으면 안 된다는 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가뜩이나 국장에게 들들 볶여서 이렇게 시달리고 있는데... ”

 

“ 이건, 이건 내가 만든 잼이라고요! 검은 숲에서 직접 따서 먼지를 다 걸러내고 레몬즙과 수입 설탕을 넣어서 오래오래 끓여서 만든 수제 버찌잼이란 말이에요! 게다가 이 유리병... 이 뚜껑, 이 분홍색 리본.... 이 병을 구하려고 내가 얼마나 힘이 들었는데... ”

 

“ 와,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정말 대단하군요. 이 잼을 직접 만들었다니. 이렇게 맛있는 잼은 처음 먹어봤어요. ”

 

“ 그렇겠죠! 내가 만든 거니까! 내가 궁금한 건 왜 이게 여기 있냐는 거예요! 이건 내가, 내가 미샤에게 준 거란 말이에요! 선물한 거라고요! 왜 이게 여기... 당신, 소문대로 그 사람 감시하는 게 맞죠? 그 사람 집에 숨어들고 도청하고 물건도 가져가고! 잼까지!!! ”

 

“ 미샤가 누구지? ....아, 왕재수... 아니, 야스민. 맞아요, 이거 그 자식이 준 거예요. 물건을 가져가다니요, 전 그런 짓 안합니다! 그놈이 먹으라고 준거라고요! ”

 

“ 거짓말! 이건 선물인데... 설마 미샤가 그럴 리가 없어요! 내가 포장지로 예쁘게 싸서 선물이니까 내 생각하면서 먹으라고 준 건데... 그 사람 먹으라고 밤새 만든 잼인데... 당신이 그냥 가져온 거죠!! 매일매일 그 사람 집에 드나들며 감시하고 못살게 굴고 물건도 가져가고! ”

 

“ 제가 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잼은 야스민이 준 거고요. 제가 그 자식 집에 매일 드나드는 건 맞아요. 다 업무 때문이죠. 얼마나 지겨운지 아십니까? 국장이 절 그 자식 감시자로 붙이는 바람에 전 이사까지 했어요. 그 자식 아래층으로... 아침저녁 차로 출퇴근시켜주지, 밥도 해서 먹이고 설거지까지 해주지, 차도 우려주지... 전 정말 노예처럼 살고 있다고요! 사무실에서는 국장에게 들들 볶이고 집에 가면 여섯 살짜리나 다름없는 왕재수를 돌봐야지. 진짜 미칠 것 같다고요! ”

 

“ 왕재수라니, 말이 너무 심하잖아요. 그렇게 멋진 남자에게. 당신 지금 질투하는 거죠? 하긴 온 동네 남자들이 전부 그이를 질투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네요. 잘생겼지 젊고 유능하지. 세련미가 넘치고 옷도 잘 입고... ”

 

“ 30분만 같이 있어 보세요, 탁아소 어린애처럼 유치한데다 진짜 왕재수란 걸 알게 될 테니! ”

 

“ 질투 그만 해요! 정말 미샤가 당신한테 이 잼을 줬단 말이에요? 대체 왜 그랬을까... 그럼 미샤는 한 입도 안 먹은 거예요? 그렇게 내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걸까요? 그래서 내가 만든 건 입에도 대기 싫었을까요? 아아.... ”

 

렐랴의 아름다운 회색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 고였다. 베르닌은 어쩐지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아 마음이 심히 불편했다.

 

“ 저, 그런 게 아니고요... 왕재수, 아니 야스민은 원래 잼을 안 좋아하나 봐요. 그래서 어제 제가 차 우려주면서, 잼이 맛있어 보이니 접시에 좀 담아줄까 하고 물었는데 자기 버찌잼 안 먹는다고... 그냥 가져가서 먹으라고 주더라고요. ”

 

“ 아아... 그럼 미샤는 원래 버찌잼을 못 먹는데 내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웃으면서 받아준 거군요. 정말 착하기도 하지... 그렇게 잘생긴 남자가 마음까지 비단결이라니... ”

 

베르닌은 렐랴가 품은 환상이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왕재수에 대해 조금이라도 나쁜 말을 하면 피곤해질 것 같아서 꾹 참았다. 대신 옆 사무실에서 문서 발송철을 가져와 번호를 딴 후 위조한 승인 문서를 렐랴에게 건네주었다.

 

“ 여기 있습니다. 대신 꼭 검열국에서 문서를 받으세요. 그거 없으면 나중에 문제가 아주 커질 수 있으니 잊으면 안 됩니다. ”

 

“ 고마워요. 덕분에 내일 잡지를 발간할 수 있게 됐군요. 아참 그리고... ”

 

렐랴는 핸드백에서 뭔가 바스락거리는 물건을 꺼냈다. 금색 포장지로 싸여 있는 작은 상자였다.

 

“ 이거 미샤에게 좀 전해 주세요. ”

 

“ 이게 뭔데요? ”

 

“ 쿠키예요. 직접 구운 거예요. 잼은 안 먹는다고 했으니... 이 편지랑 같이 전해줘요. 뜯어보면 안돼요! ”

 

“ 제가 왜 그런 짓을 하겠어요! ”

 

“ 감시요원이니까... ”

 

“ 전 그런 짓 안 합니다! 여자 편지를 뜯어 읽는 비겁한 짓은 안 해요! ”

 

“ 알았어요, 고지식한 사람이니까 편지는 뜯어 읽을 것 같지 않군요. 근데 당신 아무래도 쿠키는 먹어버릴 것 같단 말이에요. ”

 

“ 안 먹어요! 그대로 야스민한테 전해주면 되잖아요. 절대 안 먹어요. 이제 됐나요? ”

 

“ 네. 꼭 전해줘야 해요. 이거 버찌잼보다 더 공들여 구운 쿠키라고요. 유기농 밀가루로 반죽하고 벨기에에서 공수한 초콜릿을 녹여 넣었어요. 별장에서 직접 증류한 보드카에 크랜베리와 호두를 한 달 동안 절였다고요. 가엾은 미샤... 대도시에서 좋은 데서만 자고 좋은 거 입고 좋은 것만 먹고 살다가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으니... 내 쿠키는 파리에서 먹던 것만큼 맛있을 거예요. 미샤가 꼭 먹고 기분 좋아졌으면 좋겠어요. ”

 

베르닌은 쿠키 상자를 받았다. 렐랴가 온 진짜 이유는 잡지 발간 건보다는 쿠키 상자 때문이라는 것도 뒤늦게 깨달았다. 어쩐지 섭섭한 기분이 들었지만 왜 그런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새로 타이핑한 서류를 소중하게 한 팔로 낀 채 렐랴가 뺨에 가볍게 키스를 했을 때 베르닌은 다시 기분이 좋아졌고 왕재수에 대해서도 한없이 관대해져서 오늘은 야근하지 말고 빨리 돌아가 쿠키 상자를 전해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    *

 

 

베르닌은 권총 규격 중장기 로드맵 과제를 싸들고 정시에 퇴근했다. 강을 건너가 극장에 들러 왕재수를 태웠다. 왕재수는 심기가 불편한지 차에 타자마자 스카프로 얼굴을 칭칭 감고 몸을 웅크린 채 창밖만 바라보았다. 내릴 때 얼핏 보니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왕재수가 너무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아서 베르닌은 쿠키 상자를 건네주는 것은 미루고 조심스럽게 저녁 먹으러 올 거냐고 물었다.

 

“ 아니. ”

 

“ 너 어제 저녁도 안 먹었잖아. ”

 

“ 그깟 저녁밥 좀 안 먹으면 어때. ”

 

“ 맘대로 해라. 네가 배고프지 내가 배고프냐. ”

 

왕재수는 찬바람이 쌩쌩 부는 태도로 휙 올라가버렸다. 베르닌은 귀찮은데 잘됐다 싶어서 자기 집으로 갔다. 가스렌지에 인스턴트 보르쉬를 데우고 냉동 펠메니를 삶았다. 그러나 막 먹으려고 보니 평소처럼 2인분을 만들어서 양이 너무 많았다. 먹고 남길까 했지만 펠메니는 시간이 지나면 끈적해지고 맛이 없어지는 음식이라 별 소용이 없었다. 결국 베르닌은 계단을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 왕재수는 곧 문을 열어주었다.

 

“ 너 왜 누군지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열어? ”

 

“ 그러면 안 돼? ”

 

“ 도둑이면 어쩌려고! ”

 

“ 도둑이 여기 어떻게 와. 감시 카메라가 주렁주렁 달렸는데. 네가 도청 마이크도 달아놨잖아. 밑에 너도 살고. ”

 

“ 너 지금 비꼬는 거야? 내가 그런 거 아니잖아. 국장이 시킨 거잖아. ”

 

“ 왜 올라왔어? ”

 

“ 내려와서 밥 먹어. ”

 

“ 안 먹는다고 했잖아. ”

 

“ 네 거까지 만들었단 말이야. 빨리 내려와. ”

 

왕재수는 한숨을 쉬더니 베르닌을 따라 내려왔다. 여전히 스카프로 얼굴을 칭칭 감고 있었다. 그릇에 보르쉬를 부어주고 펠메니 접시를 밀어주면서 베르닌이 투덜댔다.

 

“ 식탁 앞에서 그 스카프는 뭐야. 풀고 빨리 먹어. ”

 

왕재수는 스카프를 풀고 포크로 펠메니를 푹 쑤셔서 맨입으로 한 개를 집어먹었다.

 

“ 스메타나 있잖아, 찍어 먹어! ”

 

“ 먹으래서 펠메니 먹잖아. 왜 이렇게 못살게 구는 거야... ”

 

“ 제대로 먹으란 말이야! 보르쉬도 좀 퍽퍽 퍼먹고. 펠메니도 스메타나 찍어서 두 개씩 먹어! ”

 

“ 나 입맛이 없다고 했잖아. 왜 자꾸 먹으래. ”

 

“ 어제 저녁도 안 먹고, 오늘 아침에도 카페 갔을 때 차만 마시고 안 먹었잖아! 그러다 쓰러진다고! ”

 

“ 안 쓰러져. 점심 때 양상추랑 당근이랑 토마토에 구운 닭가슴살이랑 우유를 먹었어. 잘 먹고 있단 말이야! ”

 

“ 그게 뭐야! 그것만 먹고 어떻게 살아! 네가 무슨 토끼냐? ”

 

“ 토끼는 초식동물이야. 닭가슴살을 먹지 않아. ”

 

“ 어쨌든! 왜 그렇게 조금 먹는 거야! 가뜩이나 마른 게! ”

 

“ 안 말랐어! ”

 

왕재수가 갑자기 화를 냈다. 얼굴을 빨갛게 붉히더니 눈물을 글썽글썽했다.

 

“ 어, 어... 너 울어? 내가 뭘 잘못 말했어? ”

 

“ 아니야. ”

 

“ 극장에서 무슨 일 있었어? 또 사람들이 나쁜 소리하고 욕해? 어리다고 말 안 들어? ”

 

“ 그건 맨날 있는 일인걸. ”

 

어쩐지 왕재수가 불쌍해진 베르닌은 그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들기며 달래주려고 했다. 왕재수는 위로를 해주자 참았던 서러움이 울컥 터진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훌쩍훌쩍 울었다. 베르닌은 이상하게도 정의감이 용솟음쳐서 버럭 소리쳤다.

 

“ 누구야, 누가 괴롭혀! 다 말해! 내가 보고서에 다 쓸게!

 

“ 보고서에 쓰면 뭐... 뭐가 달라져. ”

 

“ 뭐 그건 그렇지만... 너 모스크바랑 레닌그라드에 아저씨들 있잖아. 괴롭히는 놈들 일러바치면 되잖아. ”

 

“ 이건 그렇게 안 돼... 일러바치면 큰일나. ”

 

“ 왜? 대체 무슨 일이야, 어떤 놈인데! ”

 

“ 로만이.. 그저께 침대에서 나보고... 요즘 살찐 것 같다고. ”

 

“ 뭐, 그 바이올린 아저씨? 침대...(무시하자) 너보고? 살쪘다고? 그 인간 미친 거 아니야? ”

 

“ 그 사람은 엄청 날씬한 애들 좋아해. ”

 

“ 너는 날씬하잖아! 날씬한 것도 아니고 말랐어! ”

 

“ 너 나 벗은 거 안 봤잖아. 나 안 말랐어. ”

 

(내가 왜 너 벗은 걸 봐야 하냐) 말랐어! 누가 봐도 말랐다고! ”

 

“ 로만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대. 근데 처음 잘 때도 벗은 거 보고 생각보다 근육질이라고 그러더니... 그저께는 여기 공기가 좋은가보다고, 나 살찌고 있다고... 막 허벅지를 꼬집으면서... ”

 

“ 허벅지는 왜? ”

 

“ 되게 하늘하늘하고 날씬하고 예쁜 앤 줄 알았는데 허벅지가 두툼해서 만지면 엄청 딱딱하다고... 그럼 나보고 어떡하란 말이야... 내가 여자야? 허벅지가 보들보들하게? 난 엄연히 사내라고! 그리고 나는 무용을 해서 허벅지가 두툼해. 춤추느라 거기 근육이 발달해서 그런 거야. 살쪄서 그런 게 아니란 말이야. 흐흑... ”

 

“ 그럼 너 그것 때문에 계속 굶고 있었어? ”

 

“ 굶은 거 아니야, 식이요법하는 거야. ”

 

“ 근데 너는 되게 날씬하고 예쁜데... ”

 

“ 고마워, 흐흑... 근데 로만은 더 날씬하고 더 예뻐야 좋은가봐. ”

 

“ 아니 그 인간은 지 생각은 안하고! 나이도 많은 아저씨가! ”

 

“ 그치? 그리고 바보 같아. 내가 왜 그렇게 밤일을 잘하는데... 다 이 두툼한 허벅지에서 나오는 건데! 여기 근육 줄어들면 지금만큼 좋지도 않을 건데 바보 같이... 내가 해주면 좋아서 죽으려고 하면서, 자꾸자꾸 하고 싶어 하는 주제에... 멍청한 남자... ”

 

“ 야,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말란 말이야... 그럼 얼굴은 왜 가리고 있었던 거야? ”

 

“ 어... 다이어트를 했더니 피부에 뾰루지가 났어. 너무 기분 나빠. 여기... ”

 

왕재수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서 왼쪽 뺨 아래를 가리켰다. 눈을 아주 가늘게 뜨고 샅샅이 살펴보니 모래알보다도 작게 돋아난 빨간색 뾰루지가 보였다.

 

“ 이거? 보이지도 않잖아! 겨우 이런 거 갖고 그 난리를 쳤단 말이야? ”

 

“ 보여! 나는 피부가 하얘서 이런 거 금방 눈에 띈단 말이야. 그리고 작은 거 하나 생기면 금방 번질지 어떻게 알아... 남자는 피부가 중요해. 넌 이 피부가 그냥 유지되는 줄 알았어? 내가 어릴 때부터 얼마나 피부 관리를 했는데... 우유로 세수하고 분장 지울 때 클렌징도 진짜 신경 쓰고 보습도 잘해주고 자외선 차단 크림도 꼬박꼬박... ”

 

“ 말을 말자... 빨리 먹어. 하나도 살 안 쪘어. ”

 

“ 하지만 로만이... ”

 

“ 아, 그 망할 바이올린 아저씨! 넌 그렇게 잘난 척하고 다니면서 왜 남자 말을 곧이곧대로 다 믿는 거야! 귀여우니까 농담한 거 아냐! ”

 

“ 그런가? 막 뽀뽀해주긴 했어, 허벅지랑 또... ”

 

“ 그만해! ”

 

베르닌은 자꾸 이상한 쪽으로 휘말리는 것 같아서 손을 휘저으며 왕재수의 입에 스메타나를 적신 펠메니를 쑤셔 넣었다. 왕재수는 펠메니를 삼키고 나서 보르쉬를 한 숟갈 떠먹고 맛있다고 좋아하더니 또 불쑥 물었다.

 

“ 나 귀여워? ”

 

“ 뭔 소리야! ”

 

“ 네가 그랬잖아. 로만이 농담한 거라고, 나 귀여워서. ”

 

“ 누가 내가 그렇대!! 그냥 그 인간 입장에서 그럴 거란 얘기지! 그 인간은 나이도 많고 변태니까! 너는 하나도 안 귀여워. 재수 없어, 싸가지도 없고 엄청 귀찮게 구는 왕재수야! ”

 

실컷 야단을 치다가 베르닌은 왕재수가 또 우는 게 아닌가 싶어 슬쩍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왕재수는 울지도 않았고 전혀 화난 것 같지도 않았다. 열심히 스메타나에 펠메니를 꼭꼭 찍어서 먹고 있었다. 보르쉬도 깨끗하게 먹어치웠다. 다 먹고 나자 안색도 훨씬 나아지고 눈도 반짝거려서 훨씬 나아보였다.

 

식탁을 치우고 나서 베르닌은 차를 우렸다. 그리고는 문득 생각나서 쿠키 상자를 가져왔다.

 

“ 자, 누가 너 주래. ”

 

“ 누가? ”

 

“ 렐랴. ”

 

“ 어... 왜 너한테 갔지? ”

 

“ 일 때문에 왔다가 전해달라고 줬어. 너 그 버찌잼 렐랴가 준 거 왜 말 안했어? 내 자리에 있는 거 보고 엄청 화냈단 말이야. ”

 

“ 그게 릴리아나 페트로브나가 준 거였나? 나 그런 거 기억 잘 못해. 하루에도 그런 거 열 개 스무 개씩 받는단 말이야. 단 거 먹지도 않고. ”

 

“ 이건 먹어야 돼. 렐랴가 직접 구웠대. 무슨 벨기에 초콜릿에 유기농에 크랜베리에 어쩌고... 너 엄청 좋아하는 거 같았어. ”

 

“ 과자야? 나 과자 안 먹는데... ”

 

“ 시끄러워! 먹어야 해! 여자가 정성을 다해 구운 쿠키를 안 먹다니 그런 인간 말종이 어딨어! ”

 

“ 여자가 정성을 다해 구운 쿠키를 꼭 먹어야 하는 거였으면 난 지금쯤 1천 킬로는 나갔을 걸! 춤출 때 그런 거 진짜 많이 받았단 말이야! ”

 

“ 입 닥쳐. 다른 여자도 아니고 렐랴가 구운 거니까 꼭 먹어야 돼! 나한테 신신당부했단 말이야, 너 먹이라고! ”

 

“ 아 귀찮아. 릴리아나 페트로브나가 뭐가 그렇게 특별해서 꼭 먹어야 한다는 거야... 싫은데. 살찌고... ”

 

“ 뭐가 그렇게라니! 그 여자는, 그 여자는 특별하단 말이야! ”

 

“ 뭐가 특별해? ”

 

“ 어, 그러니까... 똑똑하고... 세련되고, 예쁘고... ”

 

“ 나는 어차피 여자랑 잠도 안 자는데 예쁜 게 무슨 소용... 나만 예쁘면 되는데... ”

 

이 왕재수! 당장 먹지 못해!

 

베르닌이 버럭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왕재수는 깜짝 놀라서 급하게 포장지를 뜯었다. 상자를 뒤집어서 윤기가 자르르 도는 초콜릿 쿠키를 식탁 위에 와르르 쏟았다. 베르닌은 쿠키를 하나 집어서 왕재수의 입에 그대로 쑤셔 넣었다.

 

“ 아... 달아. 진짜 달아! ”

 

“ 시끄러워, 더 먹어! ”

 

“ 벌써 두 개나 먹었어. 제발 그만. ”

 

“ 안 돼! 세 개는 더 먹어야 돼! 렐랴의 마음이 담긴 쿠키야! ”

 

“ 나는 렐랴의 마음은 별로 필요가... 으읍... ”

 

왕재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쿠키 다섯 개를 먹었다. 그리고는 괴로워하며 차를 꿀꺽꿀꺽 마셨다. 달아서 미칠 것 같다, 뾰루지가 번지고 더 살쪄서 로만이 또 놀리면 어떻게 하느냐 운운하면서 투덜댔다. 쿠키는 정말 근사해 보였다. 달콤한 초콜릿 냄새와 향긋한 버터 냄새가 감돌았고 크랜베리와 호두가 쏙쏙 박혀 있었다. 왕재수는 베르닌에게 남은 쿠키를 다 먹으라고 했다.

 

“ 안 돼. 난 안 먹어. ”

 

“ 왜? 너 이런 거 좋아하잖아. ”

 

“ 렐랴가 너 먹이라고 했어. 내가 버찌잼 먹었다고 화냈어. ”

 

“ 내가 다 먹었다고 하면 되잖아. ”

 

“ 거짓말하기 싫어. ”

 

“ 그건 뭐야? ”

 

“ 어 이거... 권총 규격 중장기 로드맵... 자정까지 다 만들어야 하는데 손도 못 댔다. 국장이 나 괴롭히려고 준 거야... 아무래도 못 할 거 같아. 일부러 나 엿 먹으라고 준 거라서 어떻게 만들어도 혼낼 거야. ”

 

“ 무슨 뜻이야, 권총 규격 중장기...? ”

 

그래서 베르닌은 대충 설명을 해 주었다. 왕재수는 굉장히 지루해했다. 심지어 중간에 설명을 끊었다.

 

“ 알았어. 하여튼 KGB랑 관계있는 거네. 좀만 기다려. ”

 

그러더니 왕재수가 전화기 쪽으로 갔다. 수화기를 들더니 잠시 후 평소와는 싹 달라진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애교를 부리며 속삭였다.

 

“ 게르만 알렉세예비치, 전데요~ 루뱐카에서 쓰는 권총 있잖아요... 아, 그런 게 아니고요. ....아니에요, 저 매일매일 너무 외로워요~ 의원님의 손길이 그리워요~ ”

 

베르닌은 속이 울렁거려서 급하게 싱크대 쪽으로 가서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연애 전화를 할 거라면 자기 집에서 하지 어째서 여기 내려와서 시외전화요금이 청구될 짓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갔다.

 

설거지를 다 하고 나자 왕재수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 야, 됐어. 그거 하지 마. 다 해결됐어. ”

 

“ 뭐가? 어떻게? ”

 

“ 모스크바에 있는 우리 아저씨한테 전화했어. 권총 규격 뭐 그런 거 신경쓰지 마. ”

 

“ 너네 아저씨하고 권총 규격의 중장기 로드맵이 무슨 상관인데! ”

 

“ 우리 아저씨가 KGB 실세잖아. 앞으로 10년 간 38구경으로 통일하고 절대 안 바꾼다고 내일 전국 KGB 지부에 공문 보낸대. 됐지? ”

 

베르닌은 크나큰 존경심과 고마움을 느꼈다. 왕재수를 우러러보게 되었다. 너무나 고마워서 칭찬을 해주려고 했는데 갑자기 왕재수가 기침을 하더니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 너 왜 그래? 뭐 잘못 삼켰어? ”

 

“ 아... 어... 으아... ”

 

왕재수는 제대로 된 말도 못했다. 눈물을 흘리고 기침을 하면서 비틀거리더니 베르닌의 목을 와락 껴안고 매달렸다.

 

“ 야, 왜 이래! 이런 짓은 바이올린 아저씨한테나 가서 해! 가뜩이나 국장이 오해하고 있는 마당에! ”

 

“ 쿠키... 우욱... ”

 

왕재수가 베르닌의 어깨를 반쯤 할퀴면서 머리로 들이받았다. 그러더니 베르닌의 가슴에 무겁게 기대듯 쓰러지고 말았다.

 

“ 야! 왜 이래! 정신 차려! 야! ”

 

혼비백산한 베르닌은 기절한 왕재수를 들쳐 업고 아파트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근처에 있는 레프 스타브로프의 병원으로 데려가 응급실에 뉘었다. 기절한 왕재수는 열이 펄펄 끓었다. 손발도 경련했다. 코피도 쏟았다. 너무 놀란 베르닌이 망연자실해 있는데 스타브로프가 왔다.

 

“ 레프 사벨리예비치! 큰일 났어요! 왕재수가, 아니, 야스민이 이상해요! 고문 후유증 때문에 발작했나 봅니다! 빨리 어떻게 좀 해 주세요! ”

 

“ 이 골치 아픈 자식, 또 술을 마셨군! 마시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하는지! 어휴! ”

 

노의사는 왕재수에게 주사를 한방 찔러 넣었다. 지혈도 해주고 얼음찜질도 해 주었다. 잠시 후 왕재수는 훨씬 나아져서 얌전하게 잠이 들었다. 베르닌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 깨기만 해봐, 이 자식 혼내줘야지. 알콜 알레르기가 있는 놈이 왜 술을 마신 거야! 네놈도 그렇지, 애한테 술을 먹이고! ”

 

“ 술이라니요. 그런 적 없는데요. ”

 

“ 뭐가 없어, 딱 보드카 쇼크인데! ”

 

베르닌은 곰곰 생각해보았다. 귓가에 렐랴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이거 버찌잼보다 더 공들여 구운 쿠키라고요. 유기농 밀가루로 반죽하고 벨기에에서 공수한 초콜릿을 녹여 넣었어요. 별장에서 직접 증류한 보드카에 크랜베리와 호두를 한 달 동안 절였다고요.

 

 

베르닌은 왕재수를 병원에 뉘어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테이블에 아직도 그대로 쏟아져 있는 초콜릿 쿠키들을 몽땅 먹어 치웠다. 어차피 왕재수는 먹으면 큰일 나니까 더 먹으면 안 되는 운명이었다. 그리고 렐랴가 온 정성을 다해 구운 쿠키니까 방치하면 그녀의 마음을 무시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왕재수가 먹긴 먹었다, 다섯 개나 먹었다. 그러니까 베르닌은 왕재수와 렐랴 양쪽을 위해, 마음의 평화를 위해 남은 초콜릿 쿠키를 전부 먹어치운 것뿐이다.

 

그리고 초콜릿 쿠키는 정말 맛있었다. 버찌잼보다 훨씬 더!

 

 

 

 

 

FIN

2014.10.16

 

-----

 

 

바이올린 아저씨 로만 코즐로프에 대한 얘기와 본편의 발췌내용에 대한 링크는 2편 말미에..(http://tveye.tistory.com/3437)

 

블로그 내에서 '보르쉬'와 '펠메니'로 검색하면 그 음식들에 대한 사진이나 포스팅을 볼 수 있다 :)

 

이야기는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로 이어진다. 그건 다음주에..

4편에서는 이른바 '프로페셔널'로서 '일'이란 걸 하는 왕재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
Posted by liontamer

앞서 올린 0편, 1편에 이어.. 서무의 슬픔 시리즈 에피소드 2.

과연 가엾은 직장인이자 집사 다닐 베르닌은 이 험한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을까..

 

(** 에피소드 2에 나오는 정치국이니 국방위원이니 하는 사람들은 모두 가상의 인물들임. 안드로포프만 빼고)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하지 말아주세요 *

  

------

 

 

<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2

 

서무의 슬픔

- 당직실의 귀신 -

   

 

 

블라지미르 스페호프가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연방 보안위원회 국장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온 후 가브릴로프 KGB 지부에는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연방 회의에는 최근 2~3년 간 정치국의 음모에 가담하느라 바빠서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던 게르만 스비제르스키가 돌연 나타났고 각 지역 국장들을 피눈물이 나도록 질책했으며 특히 스페호프를 탈탈 털었다고 한다.

 

스비제르스키는 공식적으로는 더 이상 KGB 소속이 아니었지만 안드로포프 총국장 뒤에 있는 진짜 실세였으므로 모두들 꼼짝없이 당했다. 그것까지는 알겠지만 대체 스페호프가 왜 털렸는지 베르닌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곳은 촌구석이라 별로 중요하지 않은 동네이기 때문이다.

 

차를 마시면서 그 말을 하자 왕재수가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 그건 말이지, 너네 국장이 크라베츠 라인이라서 그래. ”

“ 크라베츠가 누구야? ”

“ 이번에 숙청당해서 시베리아로 좌천된 국방위원. ”

“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

“ 어, 그 사람이 날 재판에 걸었거든. 감옥도 보내고 막 고문도 하고. 나 엄청 아팠어. 그래서 우리 아저씨가 열 받아서 그런 거야. 스페호프는 그 사람 측근이었거든. ”

“ 아저씨? 스비제르스키랑 너랑 친척이야? ”

“ 아휴, 침대를 같이 쓰는 거라고. 아참, 너는 그렇게 말하면 이해 못하지. 성적 교합을... ”

“ 야, 그만해! 그럼 스비제르스키가 크라베츠를 좌천시켜서.. ”

아니야, 이 아저씨는 무조건 죽이려고 했는데 다른 아저씨가 끼어들어서 좌천시켰어. 그 아저씨는 레닌그라드에 있는데, 물론 친척은 아니고, 성적... ”

 

베르닌은 무가당 초콜릿 캔디를 왕재수의 입에 쑤셔 넣어 그 낯 뜨거운 이야기를 가로막았다. 어쨌든 상황을 거의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고난이 전부 왕재수 때문이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스페호프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직원들을 들들 볶았고 어마어마한 업무 지시를 하달했다. 중력과 비례하는 관료제 법칙에 따라 그 모든 업무들은 서무이며 말단인 베르닌에게 집중되었다. 주로 아무 짝에 쓸모없는 일들이었는데 어차피 베르닌이 하는 일들은 다 그런 종류였으니 놀라울 것도 없었다. 왕재수의 국장 면담 덕에 한동안 1시간 늦게 출근, 조기 퇴근하던 기쁨도 국장이 모스크바에 다녀온 후 완전히 사라졌다. 하긴 그 이상한 면담 때문에 국장에게는 억울하게도 일종의 변태 노예 같은 것으로 각인되었으니 늦게 출근 조기 퇴근도 그리 반갑지 않았지만.

 

베르닌은 너무 짜증이 났지만 왕재수에게 이게 다 너 때문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또 무슨 짓을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왕재수는 처음 생각만큼 나쁜 놈은 아닌 것 같았다. 자기한테 잘해주는 사람한테는 애교도 부렸고 나름대로 친절도 베풀었다. 문제는 그게 인간의 친절이라기보다는 고양이의 보은에 가깝다는 것이다. 고양이는 모든 것을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는 짐승인데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먹이를 바친답시고 죽은 쥐를 물어다 놓지 않는가.

 

짜증이 북받쳐서 베르닌은 사무실 뒤뜰에 종종 출몰하는 못돼먹은 검정 도둑고양이를 왕재수의 이름을 따서 미셴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돌을 던지고 두들겨 패주고 싶었지만 할퀴며 달려들까봐 꾹 참았다. 오히려 가끔 소시지 조각이나 청어 꼬리를 던져주었다. 어쩐지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게 불쌍하고 자주 보다 보니 얼굴도 귀여운 것 같아서. 그러다가 검정고양이가 보은을 한답시고 정말로 죽은 쥐와 참새를 물어다 놔서 기겁을 했다.

 

 

*   *   *

 

 

그날도 베르닌은 혼자 남아 야근을 하고 있었다. 벌써 일주일 째 새벽에 귀가하는 중이었다. 일이 너무 많아서 2시간 조기 출근에 자정 이후 귀가하게 되어 아침에 태워다 줄 수도 없고 저녁에 차 우려 주러 갈 수도 없게 됐다고 통보하자 왕재수는 전처럼 화내거나 원망하지도 않고 담담하게 사태를 받아들였다.

 

“ 뭐 할 수 없지. 알았어. ”

“ 뭐야, 왜 그렇게 침착해! 억지 안 부려? 아침에 어떻게 출근하려고. 너 운전 엉망이잖아. 극장까지 걸어가려고? ”

“ 아니, 로만이 태워주기로 했어. 아침에 너 안 오면 그냥 이제부터 그 사람 집에서 자려고. 차도 그냥 그 아저씨한테 우려달래지 뭐. 틱틱거려서 좀 짜증은 나지만. ”

“ 그 멀대같은 바이올리니스트? 아저씨라고 부르는 걸 보니 혹시... ”

“ 아, 우리 같이 잔지 좀 됐어. 그러니까 성적... ”

“ 그만해. 알았어. 잘됐구나. 이제 나 괴롭히지 마. ”

 

베르닌은 어쩐지 기분이 나빠져서 도로 사무실로 돌아왔다. 귀찮았던 거 잘된 일인데 왜 섭섭한지 알 수가 없었다. 화가 나서 검정고양이에게 돌을 던졌다가 미셴카가 발톱을 드러내며 덤비는 통에 옷자락만 된통 찢어졌다.

 

 

어두컴컴한 사무실에 혼자 앉아 아무리 눈이 빠져라 일을 해도 도무지 줄어들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이미 자정이 넘어 있었지만 본 업무는커녕 국장이 가외로 던져준 수많은 정리사항들에 선배들이 떠넘긴 일들까지 산더미같이 쌓여 있어 며칠 밤을 더 새도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고 어깨도 뻐근하고 속도 울렁거렸다. 마침내 베르닌은 통조림 수프라도 까서 먹으려고 당직실로 갔다. 당직실은 비어 있었다. 원래 모든 직원들이 순서대로 당직을 서게 되어 있었지만 선배들은 어차피 베르닌이 매일 야근을 하니까 굳이 남을 필요 없다면서 다들 집에 가 버렸다.

 

찬장에서 깡통을 꺼내 장부에 번호와 이름, 숫자를 적고 야근 특식용 카테고리에 체크를 한 후 베르닌은 따개로 뚜껑을 땄다. 막 수프를 후루룩 마시려는데 뭔가가 어깨를 꽉 잡아 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요사스러운 냉기가 감돌았다. 기분이 좋지 않아 뒤를 돌아보려는데 퍽 소리가 나면서 천정의 등이 꺼졌다.

 

전구가 나갔는지 두꺼비집 문제인지 알 수가 없어 어둠 속을 더듬거리며 벽 쪽으로 가는데 뭔가가 스르르 나타나 베르닌의 얼굴을 철썩철썩 때렸다. 너무 놀라서 베르닌이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나자 그것의 형체가 보였다. 산발한 머리에 희끄무레한 얼굴의 기다란 남자가 서 있었다. 사실 서 있다고 하기도 어려운 것이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갈가리 찢긴 죄수복을 걸쳤는데 드러난 몸 여기저기에는 하얀 뼈가 그대로 불거져 있고 살가죽이 뜯겨 나가고 피멍과 고름이 가득했다. 무릎 아래로는 아무 것도 없었고 쇠사슬 족쇄만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한 마디로 귀신이었다. 눈알이 빠져 달아난 눈구멍에서 피와 진물을 줄줄 흘리며 귀신이 음산하게 흐느꼈다.

 

“ 내 다리 내놔~ 이 개자식들아. 내 다리 내놔~ ”

 

베르닌은 기절초풍했다. 통조림 깡통을 내던지며 비명을 질렀다.

 

“ 으악, 저리가! ”

“ 너네들이 나 고문해서 다리도 자르고 가죽도 벗기고 죽였잖아! 무릎 시려! 나 꼴 보기 싫다고 지옥에서도 안 받아줘. 다리 내놔! 너 가죽 나 줘, 눈알도 나 줘~ ”

“ 나 아니야, 내가 안 그랬어! 으아악, 살려줘요!! ”

“ 줄 때까지 맨날맨날 올 거야! ”

 

베르닌은 너무 무서워서 몸부림치며 미친 듯이 도망쳐 나왔다. 창 너머로 보니 당직실 어둠 속으로 하얗고 시퍼런 불빛이 번쩍번쩍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베르닌은 그 길로 주차장으로 달려가 차에 올라탔다. 공포 때문인지 시동도 잘 걸리지 않았다. 조바심에 계속 시동을 걸고 있는데 건물 바깥으로 하얗고 시퍼런 불빛이 둥둥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다리 없는 귀신이 차 앞으로 불쑥 나타나 창문을 두들겼다.

 

“ 다리 내놔~ 가죽 내놔~ 눈알 내놔~ ”

“ 아아악! ”

 

베르닌은 미친 듯이 엑셀을 밟았다. 레이서처럼 차를 몰아 그 무시무시한 곳을 빠져나갔다. 귀신은 KGB 바깥으로는 나올 수 없는지 정문 울타리까지 쫓아 나와 회오리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계속해서 끔찍한 몰골로 다리를 내놓으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    *    *

 

 

두려움과 충격으로 반쯤 넋이 나간 베르닌은 미친 듯이 차를 몰았다.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집이 아니라 극장 앞에 와 있었다. 왜 거기로 왔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창 너머로 불빛이 보였기 때문에 혼자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후들후들 떨리는 무릎을 붙잡고 기어가듯 극장으로 들어갔다.

 

“ 어, 너 웬일이야? ”

 

하필 남아 있던 것은 왕재수였다. 무대 의상들과 각종 장신구들을 감독실 여기저기에 벌려놓고 이상한 스케치와 메모가 널려 있는 노트를 읽던 중이었다. 매일 빈둥빈둥 노는 줄 알았는데 늦게까지 남아 일하는 모습을 보자 놀라울 지경이었다.

 

“ 어, 난 그냥... ”

“ 나 데리러 왔어? 아이 참, 안 그래도 되는데. ”

“ 아니 그게 아니고... ”

“ 잘됐다, 나 차 좀 우려 줘. 로만은 티백만 담갔다 빼주고 되게 달달한 잼만 퍼줘서 별로야. 네가 해주는 게 제일 맛있어~ ”

“ 야, 내가 무슨 네 종이냐? 농노 해방된 지가 언젠데.. 흐흑... ”

 

베르닌은 엉엉 울기 시작했다. 긴장이 풀리면서 귀신 생각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베르닌이 울자 왕재수가 얼굴을 찌푸렸다.

 

“ 너 또 왜 울어? 진짜 촌스럽다니까. 국장이 또 뭐라 했어? ”

“ 아니야, 그게 아니야... 당직실... 귀신... 어헝, 다리 주기 싫어. 가죽 주기 싫어. 내 눈알... 엉엉... ”

 

왕재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베르닌이 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한참 후에야 진정된 베르닌은 왕재수가 준 물을 꿀꺽꿀꺽 마시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눈물과 콧물을 닦았다. 그리고는 자초지종을 얘기해 주었다. 왕재수는 혀를 찼다.

 

“ 바보야. 뭘 그런 걸 가지고 울고 그래, 촌스럽게. ”

“ 그럴 줄 알았어! 귀신 따위 안 믿을 줄 알았다고. 나도 안 믿었어. 근데 있는 걸 어떡하란 말야! 지하에 고문실도 있고 스탈린 때 하도 많이 고문해 죽여대서 귀신 있다는 소문은 옛날부터 들었어. 근데 왜 하필 나한테 나타나서... ”

“ 나 귀신 믿어. 옛날부터 보고 싶었는데. ”

“ 허세부리지 마! 아아 이제 어쩌지... 내일까지 끝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다 놔두고 와버렸어. 다리랑 가죽이랑 눈알 줄 때까지 계속 나타난대. 야근은 계속 해야 하고... 큰일났네. 너무 무서워... 그렇다고 일을 안 하면 국장이 날 죽이겠지. 아아... 내 팔자야... ”

 

베르닌이 푸념하고 있는데 왕재수가 갑자기 일어나 재킷을 입고 스카프를 맸다. 그리고는 바닥에 깔려 있던 망토에 온갖 잡동사니를 밀어 넣고 주섬주섬 보따리를 싸더니 명령했다.

 

“ 야, 이거 들어. ”

“ 싫어! 국장이 시킨 일도 모자라서 너네 물건까지 옮기란 말이야? 너 정말 양심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 아무리 싸가지 없다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날 부려먹어야겠어? ”

“ 툴툴대지 말고 빨리 들어. 난 무거운 거 함부로 들면 안 돼, 근육이 미워진단 말이야. ”

베르닌은 보따리를 짊어졌다. 엄청나게 무거워서 허리가 휠 것 같았다.

 

“ 어디로 가져가면 되는데? 창고? ”

“ 아니, 네 차에 실어. ”

“ 나 너 안 태워다 줄 거야! 짐까지 옮기라고... ”

“ 우리 집 가는 거 아니야. 너네 사무실 가는 거지. ”

“ 왜!!! ”

“ 귀신 때문에 무섭다며. 내가 쫓아줄게. ”

“ 네가 어떻게! ”

“ 하여튼 가자. ”

“ 싫어 싫어... 다시 가기 싫어. 귀신이 내 가죽 벗기고 다리 잘라갈 거야. ”

“ 아이 참, 그럼 넌 그냥 차 안에 있어. 나만 들어갔다 오면 되지 뭐. ”

 

 

...

 

 

베르닌은 왕재수와 함께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건물 밖에서 보니 창 너머로 아직도 하얗고 퍼런 불빛이 번쩍번쩍했다. 오금이 저리고 다리가 풀려서 베르닌이 주저앉자 왕재수가 한숨을 쉬면서 어깨를 토닥거렸다.

 

“ 겁도 진짜 많네.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

 

그리고는 왕재수가 보따리를 짊어지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베르닌은 잠시 공포로 멍해져서 차 안에 앉아 있다가 문득 가책이 들었다.

 

‘ 저렇게 가냘픈 아이에게 저 무거운 걸 혼자 들고 가게 하다니... 근육이 미워질 텐데... 아파트에서 바퀴벌레만 봐도 소리치면서 달려오던 놈인데 그런 화초 같은 자식을 귀신한테 내던지다니... ’

 

너무너무 가기 싫었지만 왕재수가 걱정이 되기도 했고 고마운 마음에 각종 복잡한 감정이 들어서 베르닌은 용기를 내어 당직실로 가보기로 했다. 무서운 마음에 나뭇가지를 꺾어 대충 십자로 엮은 후 주머니에 꽂았다.

 

 

당직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기운을 짜내 문틈으로 안을 엿보자 왕재수와 귀신이 소파에 앉아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심지어 귀신은 왕재수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훌쩍훌쩍 울기까지 했다.

 

“ 그랬구나, 그놈들이 다리도 자르고 눈알도 파먹고 가죽도 벗기고 내장도 도려냈구나. 엄청 미워져서 슬펐겠다. 남자는 외모가 중요한데. ”

“ 응응, 나 원래 되게 잘생겼었는데. 여자들이 줄섰는데 고문당해서 미워지고 추해졌어. 그래서 죽었는데 지옥에 갔더니 못생겼다고 안 받아줘. 지옥 물을 흐린다고... 흑흑, 그래서 구천을 떠돌아다녀. 강물에 비친 내 얼굴 보고 나도 놀라, 엉엉. 다리도 없고 눈깔도 없고 살가죽도 없어. ”

“ 괜찮아 괜찮아. 다시 예쁘게 해줄게. 이리 와. ”

 

그러더니 왕재수가 보따리를 풀고는 각종 무대 의상을 꺼내 귀신에게 입혀주기 시작했다. 곱슬곱슬한 금발 가발을 씌우고 튜닉을 입힌 후 오페라 황제용 구슬 박힌 기다란 벨벳 가운을 입혀서 다리가 나오지 않도록 잘 가려주었다. 얼굴에도 분장용 파우더를 발라 핏자국을 감춰주고 눈구멍에 유리눈알을 박아주고 안경도 씌워 주었다. 마지막으로 망토를 둘러주자 귀신은 아주 흡족해 했다.

 

“ 와, 나 엄청 멋있는 것 같아! 이제 지옥 가면 문 열어주겠지? ”

“ 그럼. 서로 데이트하자고 줄 설 걸. ”

“ 고마워, 이쁜아. 얼굴도 고운데 마음은 더 곱네. 잊지 않을게. ”

“ 이제 다시는 여기 오지 마. 알았지? ”

“ 그치만 예쁘고 착한 너 보러 다시 오고 싶어. ”

“ 나 여기 안 살아. 여기 오면 또 나쁜 놈들이 고문하려고 할지도 몰라. 그 옷이랑 안경이랑 눈알이랑 다 뺏아 갈지도 몰라. 절대 오지 마. ”

“ 아까 왔던 애도 귀엽던데... 눈도 단추 같고... ”

“ 걔도 여기 안 살아! 절대 오지 마! 망토 뺏기고 싶니? ”

“ 안 돼, 간신히 다시 잘생겨졌는데... 다시는 안 와야지. 고마워 이쁜아. 복 받을 거야~ ”

 

귀신이 퍽 소리를 내며 허공 어딘가로 사라졌다. 베르닌은 크나큰 감명을 받았다. 달려 들어가 왕재수를 와락 껴안고 환호했다.

 

“ 와, 너 진짜 용감하다!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내가 널 여태 오해하고 있었어. 얼굴만 믿고 아무 짝에 쓸모없이 놀기만 하는 애라고... 미안해. ”

“ 흠, 뭘 이런 걸 가지고... 앞으로 또 나타나면 나 불러. 근데 아마 안 올 거야. 다른 귀신들이랑 데이트하러 다니느라 바빠서. ”

 

갑자기 베르닌은 왕재수가 가슴에 폭 안겨서 기대어 있는 것을 깨닫고 당황해서 머뭇머뭇 포옹을 풀고는 뒤로 물러났다.

 

“ 어, 저기... 그러니까. 나 시동 걸어 놓을 테니 내려와. ”

 

그리고는 왕재수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후다닥 뛰어나갔다. 괜히 오해를 사서 또 이상한 소문이 퍼질까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거라고는 침대와 성적 교... 밖에 없는 놈이니 항상 헛소문을 조심해야 했다. 더 이상 저녁에도 하고 밤에도 하고 아침에도 해주는 정력적 노예라는 루머를 듣고 싶지 않았다.

 

 

차에 시동을 걸고 기다리는데 건물 안에서 무서운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아악!

 

베르닌은 깜짝 놀라 미친 듯이 달려갔다. 훨씬 더 다급하고 공포에 찬 비명이 두어 번 더 울리더니 뚝 끊겼다. 왕재수의 목소리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너무 놀란 베르닌이 당직실로 뛰어들었을 때 검은 그림자가 바람처럼 휙 지나쳐갔다. 하지만 시선을 돌릴 겨를도 없었다. 왕재수가 바닥에 기절해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왕재수의 얼굴이 너무 새하얗게 질린데다 숨도 제대로 못 쉬는 것 같아서 베르닌은 공포에 질렸다.

 

“ 정신 차려! 너 왜 그래? 그놈이 다시 온 거야? 너 공격한 거야? ”

 

뺨을 찰싹찰싹 때리자 왕재수가 잠깐 눈을 떴다. 두려움에 질려 축구공처럼 커진 눈으로 베르닌을 쳐다보며 횡설수설했다.

 

“ 버, 벌레... 쥐... 아악! ”

 

주변을 둘러보니 과연 문지방에 죽은 쥐 두 마리와 커다란 바퀴벌레와 곱등이 시체가 널려 있었다. 그리고 복도 저편에 검정고양이 미셴카가 도도하게 웅크리고 앉아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 헉, 미셴카! 또 쥐를 물어왔구나! 나 이런 거 안 먹는다니까... ”

 

고양이가 못마땅한 듯 날카롭게 야옹거렸다. 베르닌은 왕재수를 깨워보려고 애썼다.

 

“ 야, 정신차려. 고양이가 물어다 준 거야. 밥 주니까 고맙다고 사냥해 온 거라고. 다 죽은 건데 뭐가 무섭다고! ”

“ 무서워. 으앙... ”

 

왕재수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간신히 일어나려다 문지방에 널려 있는 쥐와 벌레 시체를 보고는 다시 비명을 지르며 기절했다. 기절한 것도 모자라 숨도 못 쉬고 경련까지 일으켰다. 공포로 쇼크를 일으킨 것 같았다. 왕재수가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와락 걱정이 된 베르닌은 급하게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헤치고 심장 마사지를 하면서 인공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왕재수는 제대로 숨을 쉬기 시작했지만 눈을 뜨기만 하면 쥐와 벌레를 목격하고 다시 울면서 몸부림쳤다.

 

“ 무서워, 으앙... ”

 

베르닌은 빗자루를 가져와 쥐와 벌레 시체를 쓸어서 버렸다. 쓰레기통에 처넣고 있는데 고양이가 다가와서 원망스럽게 야옹야옹 울더니 발톱으로 할퀴고 가버렸다.

 

“ 야, 미셴카! 나 원망하지 마! 사람은 이런 거 안 먹는단 말이야. 또 이런 거 물어오면 밥 안줘! ”

 

손을 씻고 돌아오니 왕재수가 일어나 앉아 있었다. 아직도 무서운지 손등으로 눈을 닦으며 계속 훌쩍훌쩍 울었다.

 

“ 울지 마. 쥐랑 벌레 이제 없어. 다 버렸어. 일어나. 가자. ”

“ 나 못 걸어가. ”

“ 왜! ”

“ 바닥에 쥐랑 벌레 있었어... 고양이가 복도에서부터 그것들 물고 막 달려왔어. 바닥에 흘린 거 다시 갖고 놀았어. 바닥 더러워. 못 밟겠어. ”

“ 악! ”

 

할수 없이 베르닌은 왕재수를 들쳐 업고 복도를 지나 주차장까지 갔다. 차 안에 내려놓자 왕재수가 몸서리를 쳤다.

 

“ 시골은 정말 싫어... 쥐도 있고 바퀴벌레도 있고... ”

“ 뻥치시네. 레닌그라드에도 쥐랑 바퀴벌레 다 있잖아! ”

“ 여기만큼 안 크단 말이야! 여기는 바퀴벌레가 쥐만 하고 쥐가 고양이만 해! 고양이는 개만 해! ”

“ 알았어, 그랬다 해. 귀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게 어떻게 쥐랑 바퀴는 그렇게 무서워하냐. ”

“ 쥐랑 바퀴는 더럽잖아! 징그럽고... 막 세균도 옮기고! ”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귀신에게서 구해준 게 고마웠기 때문에 더 이상 타박 주지 않고 시동을 걸었다.

 

“ 극장으로 데려다 줘? ”

“ 집에 갈래. 쥐 때문에 기분 잡쳤어. ”

“ 알았어. ”

 

아파트 앞에 도착했을 때 왕재수가 불쑥 물었다.

 

“ 너 왜 그랬어? ”

“ 뭐? ”

“ 왜 고양이한테 내 이름 붙였어? ”

“ 아니야, 네 이름... ”

“ 맞잖아. 미셴카라고 불렀잖아. 왜 나한테는 이름도 안 부르면서 고양이는 내 이름으로 불러? ”

“ 내가 붙인 거 아니야! 사무실 사람들이 그렇게 불러서 나도 입에 익은 거야! 나 고양이 싫어해! ”

고양이한테는 밥도 주고 예뻐해 주고 잘해주면서 나한테는 소리만 질러. ”

“ 시끄러! 빨리 들어가! ”

“ 내일 아침에 태워다 줄 거야? ”

“ 바이올리니스트가 태워다 준다며! 그 집에서 잔다며! ”

“ 로만 오늘 어디 갔어. 모레 돌아와. 그래서 극장에 있었어. 집 오기 힘들어서. ”

“ 알았어, 태워다 주면 되잖아. 빨리 들어가! ”

 

왕재수가 집으로 올라간 후 베르닌은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 남은 일을 계속할까 했지만 귀신 때문에 놀라고 기절했던 놈 때문에 놀란 가슴이 아직도 벌렁거려서 그냥 귀가했다. 꿈속에서도 다리와 가죽과 눈알을 달라고 소리치던 귀신과 죽은 쥐에 놀라 엉엉 우는 왕재수가 자꾸 나와서 잠을 설쳤다.

 

 

*    *    *

 

 

다음날 베르닌은 두 시간 일찍 출근해 간밤에 미뤄뒀던 일을 계속했고 8시 반에는 다시 아파트로 가서 왕재수를 태워 극장까지 데려다 주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밀린 일을 계속 하고 있는데 10시 쯤 국장이 그를 호출했다. 또 무슨 야단을 치고 설교를 늘어놓으려나 잔뜩 긴장한 베르닌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국장실로 갔다. 복도에서 다른 직원들과 마주쳤는데 다들 수군거리며 눈을 피해서 또 무슨 일인가 싶었다.

 

국장은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그를 쏘아보더니 밑도 끝도 없이 말했다.

 

“ 오늘부터 다시 조기 퇴근하게. 출근 시간도 늦추고. ”

“ 아니, 왜요? 지시하신 일들이 산더미라 가뜩이나 야근하고 있는데... ”

“ 산더미였지. 그런데 자세히 보니 자네는 야근을 하는 게 아니라 즐기고 있더군. 신성한 KGB 사무실에서 그런 짓을 하게 둘 수는 없지! 암, 그럴 수 없고말고! ”

“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

“ 내가 모를 줄 알고! 한밤중에 당직실에서 그 여우같은 꼬마하고 놀아나는 거 다 아네! ”

“ 놀아나다니요!!! 대체 어디서 그런 헛소문을... ”

“ 간밤에도 그랬지 않나! 알렉산드르가 잊고 간 물건 때문에 새벽에 왔다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했네! 당직실 바닥에 애새끼를 눕히고 옷을 벗기고 입술이 닳아 없어져라 키스를 하고... 참 입에 담기도 민망해서 원! 앞으로 그런 짓은 집에서 하게! 자택근무로 쳐 줄 테니까! ”

“ 그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에요! 그 자식이 바퀴벌레 때문에... 고양이가! ”

“ 변명은 필요 없어. 당장이라도 모가지를 치고 싶지만 그러면 또 그 불여우가 모스크바에 쪼르르 달려가 일러바치겠지. 세상에 저녁에 하고 밤에 하고 아침에 하는 것도 모자라 새벽에 당직실에서까지 놀아나다니. 자네 정말 대단하군. 존경하고 싶어질 지경이야. 책상물림 주제에 이상한 쪽으로 능력이 있다니까. 당장 나가게. 그 불여우 생각하면 골치가 깨질 것 같으니까... 오늘부터 조기 퇴근해! ”

 

 

베르닌은 아무 말 없이 국장실을 나왔다. 계속 일을 하다가 1시간 조기 퇴근했다. 극장에 가서 왕재수를 태워 돌아왔고 아파트에 올라가서는 차를 우려 주었다. 무가당 다크초콜릿 캔디도 주었다. 저녁도 차려주고 설거지도 해주었다.

 

왕재수는 간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베르닌은 ‘난 네가 정말 싫다’라고 말해주려다 꾹 참았다. 어쨌든 귀신 나오는 당직실에 앉아 야근하는 것보다는 아주 조금은 낫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3편은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드디어 여자 캐릭터 등장~ 그건 주말에..

 

** 전반부에 베르닌과 왕재수의 대화 속에 등장하는 멀대 같은 바이올리니스트 로만은 writing 폴더에서 두어번 발췌했던 그 사과파이 얘기(http://tveye.tistory.com/3165, http://tveye.tistory.com/3146)의 화자. 물론 이 시리즈에서는 좀 웃기게 바뀌었지만..

 

 

 

 

 

:
Posted by liontamer

 

본격적인 시리즈는 이 1편부터 시작..

사실 이걸 제일 먼저 썼고 앞서 올린 에피소드 0은 전체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뒤늦게 끼워넣은 프리퀄..

뭐 독립적인 에피소드들이긴 하지만 어쨌든 등장인물 소개와 0편부터 순서대로 읽는 게 앞뒤 연결이 되긴 한다.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하지 말아주세요 *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1

 

 

서무의 슬픔

-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베르닌은 타자기 전원 차단을 잊고 갔다가 국장의 불시 보안점검에 걸려서 2주간 조기출근하게 되어 아침에 극장까지 태워다 줄 수 없게 됐다고 왕재수에게 통보했다. 왕재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 일찍 안 가면 어떻게 되는 거야? ”

 

“ 뭐가 어떻게 돼. ”

 

“ 일찍 안 가면 되잖아. ”

 

“ 상사의 명령인걸. ”

 

“ 일찍 안 가면 국장이 때려? ”

 

“ 때리진 않지. ”

 

“ 점심을 안 줘? ”

 

“ 우린 구내식당에서 각자 사먹어. ”

 

“ 월급이 안 나와? ”

 

“ 월급은 나라에서 주는 거잖아. ”

 

“ 근데 뭐하러 일찍 가? 가지 마. 그냥 평소대로 해. ”

 

“ 야, 너는 조직 생활을 안 해봐서 몰라!! ”

 

“ 왜 안 해. 나도 나라에서 주는 돈 받으며 극장에 나갔는데. 나는 천재 무용수라서 승급도 빨리 하고 훈장도 받고.. 내 맘대로 늦게 갔는데. ”

 

“ 분명 뒤에선 다 욕했을 거야! ”

 

욕하는 건 욕하는 거고. 아무도 안 때렸어. 점심도 주고 월급도 줬으니 장땡이지. ”

 

베르닌은 곰곰 생각해 보았다. 어쩐지 왕재수의 말이 전부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조기출근 대신 왕재수를 극장까지 태워다 주고 커피도 한 잔 얻어 마신 후 평소와 같은 시각에 출근하였다. 국장은 하룻강아지 같은 초짜가 자신의 명령을 어겼다고 심히 분노하게 되었고 그 결과 한 달 간 조기출근하게 되었다.

 

 

돌아온 베르닌은 화가 나서 왕재수에게 이게 다 너 때문이라고 울부짖었다. 왕재수는 그의 폭발을 지켜본 후 침착하게 말했다.

 

“ 한 달이나 2주나 똑같은 거야. 일찍 가지 말고 계속 평소처럼 행동해. ”

 

“ 야, 그러면 1년간 조기출근하게 된다고! ”

 

“ 계속 버티면 포기할 거야. ”

 

“ 안 그래! 국장은 안 그래! 나쁜 사람이라서 안 그래! ”

 

“ 그러면 1시간 빨리 가는 대신 1시간 빨리 퇴근하렴. ”

 

“ 야, 넌 진짜 아무 것도 몰라! 그게 그렇게 되면 처벌이냐? 우리 국장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인간이야! 늦게 출근, 조기퇴근은 모든 직장인의 꿈이자 파라다이스라고! 그런 일이 나한테 일어날 리가 없잖아! 아아... 정말 못살겠어. 죽고 싶어. 국장 때문에 자살하고 싶단 말이야.. 너무 힘들어. 흐흑..”

 

베르닌이 쌓이고 쌓인 설움을 이기지 못해 엉엉 울자 왕재수가 흠칫 놀랐다.

 

“ 촌스럽게 왜 우는 거야. 차나 우려주고 그만 내려가! ”

 

베르닌은 훌쩍훌쩍 울면서 포트에 차를 우리고 찻잔을 세팅해 주었다. 왕재수가 좋아하는 대로 손잡이를 왼쪽으로 돌려놓고 무설탕 다크초콜릿 캔디도 두 개 놓아주었다. 그리고는 계속 울면서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왕재수는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고 무설탕 다크초콜릿 캔디를 먹었다. 그러나 촌스럽지만 자기 말도 잘 듣고 어딘가 귀여운 스파이가 우는 것을 보니 왕재수는 어쩐지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 감히 내 꼬봉을 울리다니! 국장, 가만 두지 않겠어! ’

 

 

*    *    *

 

 

다음날 저녁에 베르닌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왕재수의 방에 올라왔다. 너무 멍해져서 포트와 찻잔을 가지고 오는 것도 잊었다.

 

“ 국장이 면담하자고 불러서 되게 걱정하면서 갔거든. 근데 내일부터 한 시간 늦게 출근하고 한 시간 빨리 퇴근하래. 앞으로 계속 그러래. ”

 

“ 잘됐구나. ”

 

“ 잘된 걸까? 왜 그러는 걸까? ”

 

“ 나 빨리 차 우려 줘. 어제 그 초콜릿 캔디랑. 그거 맛있었어. ”

 

국장이 왜 그러는 걸까? 갑자기 그러는 게 수상해. 면담하면서 그 얘기하는데 날 이상한 눈으로 곁눈질하면서 한숨까지 쉬었어. 나 자르려는 거 아닐까? ”

 

“ 뭘 잘라. 늦잠 자고 빨리 퇴근하니 잘됐네. 내일부터 다시 나 태워다 줘. 홍차는 언제 줄 거야? 초콜릿 캔디 안 남았어? ”

 

“ 아무래도 국장이 나 자르려나봐.. 그간 밉보이긴 했지. 어떡하지? 뭐 먹고 살지? 큰일 났네.. 잘리고 싶지는 않아! 흐흑... ”

 

베르닌이 다시 훌쩍훌쩍 울기 시작하자 왕재수는 매우 당황했다.

 

“ 너 왜 울어? 늦게 출근, 빨리 퇴근하고 싶은 거 아니었어? ”

 

“ 흑흑... 그 무시무시한 사이코가 자비를 베풀 리가 없잖아. 분명히 속셈이 있는 거야. 나한테 아주 끔찍한 일이 일어날 거야... 월급을 반으로 깎는다든지, 자른다든지, 고문실에 보낸다든지.. ”

 

“ 고문실에는 진짜 중요한 사람이나 가는 거야(나 같은 사람 -_-), 너 같은 바보는 안 가. ”

 

“ 고문실 무서워, 으앙... ”

 

“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늦게 출근, 빨리 퇴근하는 게 직장인의 꿈이자 파라다이스라며! 기껏 자기 생각해서 그렇게 만들어줬더니 왜 우는 거냐고!! ”

 

“ 만들어주다니? 네가? 뭘 만들어줘? ”

 

“ 내가 아침에 너희 국장한테 내 방으로 오라 했단 말이야. ”

 

“ 국장을 오라가라 하다니! 심지어 극장에 있는 네 사무실까지 오라 했다고! 국장이 왔단 말이야? ”

 

“ 그럼 제까짓 게 어떻게 안 와. 내가 부르는데. ”

 

베르닌은 잠시 존경이 가득한 눈으로 왕재수를 바라보았다. 스파이에게 존경받는 것 따윈 별로 바라지 않았지만 그래도 왕재수는 조금 뿌듯해서 어깨를 으쓱했다.

 

“ 국장 왜 오라 했어? ”

 

“ 앞으로 너 조기출근 시키지 말라고. ”

 

“ 그 말을 들을 리가 없잖아. 우리 국장은 타 기관에서 업무 협조를 구할 때도 폰트와 자간과 모든 형식을 맞춰 쉬프트 탭을 필수로 지정해서 수십 장의 공문을 보내지 않으면 안 들어준다고! 너 그런 거 모르잖아! ”

 

“ 그게 뭐야? 그런 거 다 필요 없어. ”

 

“ 그럼 어떻게 한 거야? ”

 

“ 너는 지금 나를 위해 심대한 봉사를 수행하고 있으니 KGB 국장 따위의 잡무에 시달릴 시간이 없다고 알려줬어. ”

 

“ 그래, 심대한 봉사이긴 하지. 차도 우려주고 밥도 해주고.. 설거지도 해주고 청소도 해주고 아침저녁으로 태워다 주고 ㅠㅠ 나는 노예야. ”

 

“ 그런 거 말고. 그건 당연히 해줘야 하는 거니까 국장한테는 안 먹혀. ”

 

“ 그럼 뭐? ”

 

“ 밤마다 나랑 침대가 부서지도록 해주고 있고 아침에 일어나서도 해줘야 하기 때문에 조기출근은커녕 늦게 출근해야 한다고 알려줬어. 그리고 가능하면 조기퇴근해서 저녁 먹기 전에 나랑 또 해야 한다고 했어. 그러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근무 시간 줄여달라고 했어. ”

 

그게 무슨 소리야! 침대가 부서지도록 뭘 하는데? 저녁 먹기 전에 뭘 또 하고? 너하고 뭐를 해? ”

 

왕재수는 베르닌이 그냥 감탄사를 내지르는 줄 알았지만 계속해서 그 질문을 반복하는 것을 보고 순진한 스파이가 정말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 침대가 부서지도록 섹스를 한다고. 아, 너는 그게 뭔지도 모르는 거구나. 책상물림이랬지. 그것은 우리 말로는 성교라는 것이야. 성교란 보통 남녀나 남남, 여여, 혹은 3인 이상의 이성, 혹은 동성이 번식이나 쾌락 추구를 목적으로 특정 부위 이상을 노출하여 결합하는 일종의 물리적 화학적 행위로, 해부학적으로는....

 

설명을 절반도 늘어놓기 전에 베르닌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워서 그런가보다 싶었는데 베르닌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 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너 지금 내가 너랑 그런, 그런... 응응응을 하는 관계라고 국장한테 말했다는 거야? 그것도 밤마다, 아침마다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저녁 먹기 전에 또!!! ”

 

“ 응. ”

 

“ 왜 그런 거짓부렁을 늘어놓는 거야!!!! ”

 

“ 어.. 나도 좀 무리수란 건 알지, 저녁에 하고 밤에 하고 아침에 하는 건 제아무리 나라도 좀 버거워. 근데 그 정도로는 얘기해놔야 국장이 네가 너무 많이 하느라 힘들겠구나 하고 근무 시간을 줄여줄 것 아니겠니. ”

 

“ 지금 그 얘길 하는 게 아니잖아!!! ”

 

“ 왜 화내? 국장이 납득했어. 나는 중요 인물이기 때문에 그 인간은 내가 원하는 건 다 맞춰줘야 하거든. 안 그러면 모스크바에 있는 우리 아저씨들이 화나서 국장 네놈 모가지를 날릴 거라고 협박했더니 끄덕끄덕하면서 알았대. 앞으로 너한테 절대 잡무 안 시킬 거라고 했어. 1시간 늦게 출근, 1시간 조기퇴근시킬 거고 쉬프트 탭인지 뭔지 안 해도 되게 한댔어. 매일 허리가 빠지도록 봉사하다니 힘들겠다고 너 불쌍하다고까지 했는걸. 다 나 덕분이야. ”

 

아아악!

 

베르닌은 펄쩍펄쩍 뛰더니 얼굴이 빨개졌다가 파래졌다가 하얘졌다가 했고 어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엉엉 울었다. 왕재수는 대체 이 스파이가 왜 그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 기다렸다. 차도 마시고 싶고 초콜릿 캔디도 먹고 싶었기 때문에 스파이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마침내 베르닌은 진정했다. 퉁퉁 부은 눈으로 왕재수를 쳐다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쟁반을 가져와서 차를 우려주고 다크초콜릿 캔디도 주었다. 왕재수가 차를 마시는 동안 베르닌은 계속 한숨을 쉬며 앉아 있었다.

 

“ 왜 한숨 쉬어? 다 잘됐잖아. 이제 국장이 괴롭히지도 않을 거고, 조기출근과 야근도 없을 거야. 직장인의 꿈이자 파라다이스가 이루어졌잖아. ”

 

“ 나는 네가 정말 싫어. ”

 

“ 왜 싫지? 내가 다 해결해줬는데. ”

 

“ 저녁에 하고 밤에 하고 아침에 하다니... ”

 

아, 알았다. 너 내가 거짓말해서 화났구나. 해주지도 않으면서 국장한테 그렇게 말해서. 그래서 삐친 거구나! 괜찮아, 그런 건 지금부터 해도 돼. 앞으로 그렇게 해줄게. 음, 저녁에 하고 밤에 하고 아침에 하면 내가 좀 힘들 거 같은데. 나 아직 다 안 나았거든. 극장 가서 졸지도 몰라. 그러니까 우리 일단 밤에만 하고 아침에 늦잠 안자면 아침에도 하자. 나중에 내가 체력이 좀 회복되면 저녁에도 하고~ ”

 

 

베르닌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방을 나가버렸다.

 

왕재수는 천천히 남은 차를 마시고 무가당 다크 초콜릿 캔디를 먹었다. 사실 스파이가 자기 취향은 아니었고 딱히 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말 잘 듣고 불쌍하고 어딘지 귀여운 친구니까 못된 국장으로부터 구제해 주기 위해서는 그 정도 해줄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스파이는 차도 우려주고 집안일도 해주고 극장까지 태워주기도 하는 착한 애니까.

 

 

---------

 

 

에피소드 2는 당직실의 귀신 이야기. 그건 주중이나 주말에..

 

 

:
Posted by liontamer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하지 말아주세요 *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0

 

 

 

서무의 슬픔

-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소비에트 연방 국가보안위원회 가브릴로프 지국장인 블라지미르 스페호프는 매주 월요일 오전 10시 30분부터 정확하게 1시간 동안 주간회의를 주재하곤 했다. 서무 업무를 맡고 있는 다닐 베르닌은 그의 모든 지적사항과 하달사항을 정확히 정리해 회의 종료 후 30분 내에 시내의 모든 KGB 요원들에게 전달해야만 했다.

 

스페호프 국장은 당의 명령을 최우선시하는 인물이었다. 원칙을 어기는 자를 용납하지 않았다. 또한 누군가가 어떠한 사소한 일로 자기 눈 밖에 나는 경우, 그는 주간회의를 이용해 반드시 그 요원을 질책하고 미묘하게 모욕을 주었다. 이따금 자아비판을 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좋아하는 것은 다름 아닌 설교였다. 특히 보안위원회와 같은 공공기관의 행정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두세 시간을 연달아 강의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입사 2년차인 다닐 베르닌은 감시분석부서 소속이었고 행정직 중에서는 막내였기 때문에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전체 서무 업무를 맡고 있었다. 모스크바 법대 출신인데다 소싯적에는 똑똑하다는 평을 받았지만 막상 KGB 밥을 먹게 되자 그는 스페호프 국장의 주요 타겟이 되었다. 업무 능력도 모자라고 행정의 기본이 도대체 되어 있지 않은 풋내기에 책상물림이라면서 들들 볶였다. 베르닌은 언제나 과로와 야근에 시달렸고 서무라는 미명 하에 온갖 잡일을 도맡고 있었기 때문에 내심 매우 억울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매일 전 직원의 근태기록부를 관리했고 소속부서와 기관 전체 업무추진비를 정산했으며 국장의 지시사항을 정리해 하달하고 처리내역을 꼬박꼬박 보고하는 한편 각 사무실들의 비품 현황을 관리했다. 매달 선배 직원들의 초과근무 내역과 현장 요원들의 비용 청구 현황을 정리 보고했으며 문서철들을 만들고 서고를 관리하고 각종 자료들을 수합했다. 모스크바 본부나 시 의회 등 외부 기관에서 날아오는 각종 요구 자료들을 작성해 국장의 확인을 받아 제출했고 그 외 무수한 행정 업무와 국장의 변덕에서 비롯된 가외업무들을 수행했다. 이 모든 것들은 서무 업무에 해당되었는데 베르닌은 입사 이래 2년 동안 대체 서무란 것이 무엇인지 의문을 품었고 마침내 귀에 붙이면 귀걸이, 코에 붙이면 코걸이 식으로 아무 거나 모두 ‘행정’이란 미명 하에 서무 업무가 되고 전부 자기 일이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9월 첫째 주 주간회의도 처음에는 평소와 다름없이 진행되었다. 국장은 어마어마한 설교를 늘어놓았고 요원 몇 명을 질책했다. 운 좋게 질책과 자아비판을 피해 간 베르닌이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있구나 하고 좋아하고 있는데 갑자기 국장이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 그리고 업무분장 일부가 변경되었으니 서무는 회의가 끝나면 변경 내용을 반영해 분장표를 신규 작성하고 내게 결재를 받은 후 모스크바 본부로 속달 발송하도록. 변경 내역은 다음과 같네.

다음 주에 모스크바 본부에서 우리 쪽으로 이송되는 정치범이 있다는 건 다들 알고 있겠지. 무슨 발레인지 연극인지 하던 딴따라인데 아주 악질이야. 세상이 망하려는 징조임이 분명하다만, 이놈은 어마어마한 반동분자에 체제 전복 기도 혐의로 7년형을 받았는데 윗분들의 귀여움을 받아서 어떻게 잘 빠져나왔다더군. 그런 놈은 죽을 때까지 수용소에 처박아놓고 강제노동을 시켜야 정신을 차리는 건데 감옥에서 풀어준 것도 모자라 우리 시립극장 감독인지 나발인지 감투까지 안겨줬어!

하여튼 그 재수 없는 반동분자 애송이의 관리를 우리 기관이 맡게 되었으니 다들 그리 알도록. 그리고 자네! ”

 

수첩에 낙서를 하며 졸음을 쫓고 있던 베르닌은 국장이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 예? 아, 국장님. 예! ”

 

“ 그 자식 감시 업무를 자네에게 분장하기로 했네. 회의 끝나는 대로 내 방으로 오게. ”

 

“ 예? 뭐라고요! 반동분자... 체제 전복... 감독, 7년... 아니, 그러니까... 저보고 유배 죄수를 감시하라고요? 왜 제가? 저는... ”

 

“ 뭐라고 웅얼대는 거야! ”

 

“ 블라지미르 파블로비치, 저는 이미 맡은 업무가 있는데요. 서무에... ”

 

“ 서무는 당연히 하는 거고! 자네 감시분석부서 소속이잖아! 여태 능력 미달로 제대로 된 주무를 못 맡았으니 이번에 자네의 전문성 강화와 능력 배양을 위해 특별히 중요 업무를 맡겨주는 거야! 고맙게 생각하도록! 이만 회의를 마치겠네. 자넨 당장 내 방으로 튀어와! ”

 

 

*    *    *

 

 

베르닌은 항의를 해보려 했지만 물론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업무 분장은 당연히 국장의 권리였다. 울며 겨자 먹기로 베르닌은 모스크바 KGB 본부 수용소에서 이송되어 온다는 반동분자 정치범의 감시업무를 맡게 되었다. 스페호프는 애초부터 반체제주의자를 아주 싫어했는데 이번에 온다는 죄수는 특히 더 싫어하는 것 같았다.

 

“ 그 자식이 크레믈린에 줄이 있단 말이야! 그래서 특별히 잘 관리해달라고 압력이 들어오고 있단 말일세! 심지어 파리에서 도망치려다 잡혔다지! 그런 건 그 자리에서 사살해버렸어야 했는데! 수용소에서도 버릇 좀 고쳐주려고 아주 슬쩍 손만 댔는데 불여우 같은 애새끼가 죽는다고 엄살 피우면서 나뒹구니까 높은 분들이 그 즉시 고급 병원으로 옮겨주고 금이야 옥이야 보살핀 끝에 법정 판결도 무시하고 가석방을 시켜주고 우리 쪽으로 보낸 걸세! 모스크바 정치국에 계신 분들이 그 애새끼를 얼마나 감싸고도는지 그런 범죄자 나부랭이를 시에서 제일 좋은 아파트에 배정하고 잘 돌봐주라고 모스크바 본부 이름으로 공문까지 보냈지 뭔가!

하여튼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자네가 그 자식을 잘 감시하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해서는 아침부터 밤까지 곁에 딱 붙어 있어야 해! 같은 아파트 이웃에 자네 방을 배정했으니 그놈이 오기 전까지 이사를 완료하게! 그놈 사무실과 아파트 구석구석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도록 했으니 매일같이 대화 내용을 전부 기록하고 보고하도록! 그리고 그놈이 무슨 수상한 행동을 할지 알 수가 없는데다 우리 시의 순진한 젊은이들에게 나쁜 물을 들일 수도 있으니 출퇴근, 식사 등등도 자네가 옆에서 모두 컨트롤하게! ”

 

베르닌은 미약하게 항의했다.

 

“ 저... 국장님. 그건 현장요원이 해야 할 일 같습니다만... 게다가 이사까지 하라니. 그리고 출퇴근과 식사를 제가 컨트롤하라니 그게 무슨 뜻인가요? 설마 제가 옆에서 그걸 다 챙겨주란 말씀이신가요? ”

 

“ 당연하지 않나! 그놈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차로 극장 출퇴근을 책임지게! 집안에서도 무슨 음모를 꾸밀지 모르잖나! 게다가 그놈 소문이 얼마나 안 좋은지 아나! 사생활이 지저분하다는 얘기가 파다해! 이놈저놈 무릎에 냉큼 올라앉지를 않나... 에이 찝찝해. 그놈이 집으로 이상한 인간들을 끌어들이지 않는지 감시해야 한다는 말이네! ”

 

“ 하지만... 그럼 제 사생활은요... ”

 

“ 뭐 사생활? 자네 지금 감히 사생활 운운하나? 자넨 국가의 녹을 먹는 공무원이야! KGB 요원이란 말일세! 당과 연방을 위해 충성하고 행정의 기본을 갈고닦아 훌륭한 소련 청년이 되어야 할 것 아닌가! 어디 그런 미제 자본주의자 같은 소릴 지껄이나! ”

 

 

9월 10일에 베르닌은 기차역으로 나갔다. 모스크바 본부 소속 KGB 요원들로부터 그 무시무시하고 위협적인 반동분자 테러범을 인계받기 위해서였다. 전날 그는 현장요원으로부터 두 시간 동안 사격 재교육을 받은 후 권총까지 한 자루 챙겼다. 체제 전복을 기도했다는 정치범이란 놈은 위험인물이 분명했으므로 여차하면 그 무서운 죄수를 제압해야 한다는 불안감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요원들이 나타났다. 베르닌에게 서류뭉치를 들이밀고 서명을 강요했다. 그리고는 로모 카메라로 사진을 한 방 쾅 찍은 후 반동분자 정치범 인계 절차가 완료되었다고 선언했다. 막 모스크바 요원들이 떠나려고 했기 때문에 어리둥절해진 베르닌이 물었다.

 

“ 잠깐만요. 무슨 절차가 완료됐다는 겁니까? 서명만 했지 정작 사람은 넘겨주지 않았잖아요. ”

 

“ 당신 옆에 있잖아요! 아까부터 거기 앉혀 놨구만. 빨랑 데려가요. 우리도 집에 가고 싶으니까. 기차 타고 종일 달려온 것도 피곤한데 도로 타고 가야 하니 어휴 피곤해... 하여튼 우린 갑니다! ”

 

베르닌은 어안이 벙벙했다.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개를 돌려 두리번거렸지만 커다란 트렁크 위에 앉아 있는 사내아이 하나뿐이었다.

 

“ 얘, 미안한데 혹시 저 사람들이랑 같이 온 남자 못 봤니? 무시무시한 인상에 수갑 찬... ”

 

“ 수갑은 왜 차는데? ”

 

“ 응, 그러니까... 위험인물이라, 아니, 넌 몰라도 돼. 국가 기밀이거든. ”

 

“ 국가 기밀이라면서 나한테 막 물어봐도 돼? ”

 

“ 어, 원래는 안 되는데... 그 남자 놓치면 큰일나거든. 국가를 전복하려 들었던 죄수라서 꼭 찾아내야 돼. 그 사이에 도망갔으면 정말 큰일인데.. 기차역을 폭파할지도 몰라. 아아, 어쩌지... 난 행정직, 책상물림... 국장한테 전화해서 스나이퍼를 배치해달라고 해야 하나... ”

 

“ 기차역 폭파하면 사람 죽잖아. 왜 그런 짓을 하는데? ”

 

“ 그러니까 위험인물이지! 어휴, 내가 왜 너랑 이런 얘길 하고 있지. 이럴 때가 아니야, 빨리 찾아야 돼. 너 혹시 여기 공중전화 어디 있는지 아니? ”

 

“ 나 여기 사람 아니야. 모스크바에서 열네 시간 기차 타고 왔어. 어딜 봐서 내가 이런 촌 동네 주민처럼 보인다는 거야! 시골에 끌려온 것도 열받아죽겠는데 웬 단추눈 스파이까지 붙어서 귀찮게 구는 거야. ”

 

“ 뭐, 단추눈? 너 지금 나보고 하는 말이야? 조그만 게 버르장머리 없이 어른한테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고 보니 보자마자 반말 까고! ”

 

“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눈도 딱 단추같이 생기고. 너 스파이 맞잖아, KGB 끄나풀! 나 끌고 가려고 온 놈! ”

 

“ 뭐? ”

 

베르닌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그의 눈앞에는 아무리 잘 쳐줘봤자 갓 고등학교를 졸업했을까말까 한 사내아이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앉아 있었다. 가볍게 흐트러진 까만 머리칼에 하얀 얼굴, 긴 속눈썹에 반짝반짝 빛나는 까만 눈, 오똑 솟은 콧대와 그려놓은 듯한 입술이 어찌나 곱상한지 남장한 여자애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베르닌은 기절초풍했다.

 

“ 설마... 네가 그 정치범! 반동분자! 7년형! ”

 

“ 되게 듣기 싫은 소리다... ”

 

베르닌은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뒤적거렸고 인적사항을 읽었다.

 

“ 이름 : 미하일 야스민. 레닌그라드 출신. 평소에는 미샤라고 불린다... ”

 

“ 맞긴 한데 너한테 별로 이름 불리고 싶지 않거든. ”

 

“ 어... 난 테러범이라길래 되게 무지막지하고 험악한 놈일 거라고... ”

 

“ 누가 테러범이야! 난 무지무지 잘 나가던 예술가야! 키로프와 볼쇼이 수석무용수에 엄청 끝내주는 안무가였다고! 세상에서 제일 춤 잘 추는 무용수! 재수 옴 붙어서 이상하게 꼬인 거야! 나 같은 천재는 원래 투기하는 놈들이 많단 말이야. 게다가 예쁘기까지 하니 더 꼬인 거라고! 에잇... 빨랑 차나 끌고 와. 여기 추워. 웬 바람이 이렇게 부는지. 하루종일 기차 타고 오느라 잠도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었어. 빨리 집으로 데려다 줘. 아, 내 팔자야. 이런 시골로 끌려오다니. ”

 

“ 어... 수갑은 왜 안 차고 있는 거야? ”

 

“ 너 내 말 못 들었어? 나 엄청 유명한 무용수였다니까! 수갑 함부로 채우면 손목에 무리가 오고 자국 생긴단 말이야! 이게 어떤 몸인데! 가뜩이나 감옥에서 괴롭혀서 많이 상했구만. 너 나한테 수갑 채울 생각 꿈에도 하지 마! 내 몸에 손끝 하나라도 대면 크레믈린에 있는 우리 아저씨들한테 전화해서 너 혼내 주라 할 거야! ”

 

“ 어, 그러니까... 굳이 수갑 채울 생각은... 안 채워도 너 정도면 뭐... ”

 

베르닌은 안도감에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이 녀석은 외모나 말투, 호리호리하고 날씬한 몸매 어디를 봐도 육체적 위협이 될 것 같지 않았다. 권총과 곤봉을 쓸 일은 전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자꾸만 짜증이 치미는 건 견딜 수가 없었다.

 

“ 하여튼 가자. 난 다닐 베르닌이야. 널 담당할 보안위원회 요원이야. 그러니까 내 말 잘 들어야 돼. 여기서 지켜야 할 것들 정리해놓은 서류 줄 테니까 다 읽고 꼭 지켜야 해! ”

 

“ 뭘 지켜. 나 여기 극장 감독 맡으라던데. 공연만 잘 올리고 애들만 잘 키우면 되지. 담당은 무슨 담당. KGB 스파이 꼴 보기 싫어. 집까지만 태워다주고 앞으로 얼씬도 하지 마! ”

 

시내로 들어오는 차 안에서 베르닌은 점점 부아가 치밀었고 이 애송이는 진짜 싸가지 없는 왕재수란 결론에 도달했다.

 

 

*    *    *

 

 

일주일이 지났을 때 베르닌은 미쳐버릴 지경이 되었다. 물밀 듯 쏟아지는 각종 서무 업무는 더욱 늘어났고 국장은 툭하면 그를 들들 볶았다. 그 와중에 유배수이자 정치범인 미샤인지 뭔지 하는 놈을 감시해야 했는데 이것이야말로 최악이었다. 국장의 명령과 크레믈린 측의 각별한 관심 때문에 베르닌은 정말 아침부터 밤까지 그 놈을 감시해야 했다. 온종일 사무실에서 격무에 시달리는 것도 모자라 도청 내용을 분석해야 했다. 극장에도 뻔질나게 드나들며 내부 동향을 파악하고 그 싸가지 없는 녀석이 어떤 식으로 극장을 운영하는지, 스태프들과 사무국 직원들, 무용수들 사이에서는 어떤 소문이 도는지 전부 파악해야 했다.

 

그나마 그건 분석 업무니까 그의 현업과 관계가 있다고 위안을 삼을 수도 있었다. 가장 끔찍한 것은 아침저녁으로 그 녀석을 차에 태워 출퇴근시켜줘야 한다는 것과, 심지어 집에 돌아오면 저녁 식사까지 챙겨줘야 한다는 거였다. 맨 처음 국장은 저녁에도 그 놈을 감시해야 하니 식당에 가면 따라가서 함께 밥을 먹으라고 명령했지만 문제는 그 애송이가 식당 밥을 아주 싫어한다는 데 있었다.

 

“ 그냥 좀 먹어! 여기 고급 아파트에 딸린 식당이라서 밥 진짜 잘 나오는 데란 말야! 다른 데 구내식당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알아? ”

 

“ 기름기가 너무 많단 말이야! 어휴, 역시 여긴 시골이야. 빵이든 고기든 샐러드든 아무데나 무조건 기름을 한 국자씩 들이붓잖아! 저 수프에도 돼지비계가 둥둥 떠 있어! 난 엄청 끝내주는 무용수 출신이잖아. 단백질과 비타민과 칼슘을 섭취하고 지방질은 제한하는 식사에 익숙해져 있어! 이런 건 못 먹어! ”

 

화가 난 베르닌은 국장에게 낱낱이 보고했다가 욕만 바가지로 먹었다.

 

“ 이 얼간아! 그런 것까지 나한테 얘기해야 되겠나! 밥을 해서 먹이면 될 거 아냐! 에잇 정말 어디서 그런 재수 없는 애새끼가 굴러 들어와서... 가뜩이나 정치국 의원들 품에서 놀아나던 불여우라 찝찝해 죽겠구만. ”

 

“ 국장님, 전 요리사도 아니고 가정부도 아닌걸요. 이미 격무에 시달리... ”

 

“ 시끄러워! 당장 나가! 요리사고 가정부고 다른 요원 투입할 예산도 없고 남는 인력도 없어! 자네가 다 해결해! ”

 

결국 베르닌은 그 재수 없는 녀석의 저녁 식사까지 챙겨주게 되었다. 그는 격무에 시달리고 있었으므로 애송이에게 밥을 차려준 후에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 야근을 하거나, 아예 집으로 일을 싸와서 밤늦게까지 해야 했다.

 

 

*    *    *

 

 

어느 날 아침 그는 거듭된 야근으로 너무 피곤하고 짜증이 나서 애송이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야, 오늘은 못 태워다 줘! 너 혼자 가! ”

 

“ 나 혼자 못 가는데. ”

 

“ 왜 못 가! 너도 차 있잖아! 극장에서 준 거! 좋은 차잖아! ”

 

“ 나 운전 못해. ”

 

“ 뻥치지 마! 면허증 있잖아! 너 서류에서 다 봤어! ”

 

“ 면허는 땄지만 운전은 거의 안 해봤단 말야! 그리고 나 운전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해. 팔 근육에 무리가 가서 별로야. 무용수는 팔 근육을 잘 관리해야 해. 잘못 쓰면 근육이 미워져. ”

 

“ 악! ”

 

베르닌은 간신히 참았다. 싸가지 없는 꼬마를 차로 극장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날따라 차도 밀렸고 공사 때문에 길도 덜컹거렸다. 차에서 내리면서 반동분자가 투덜댔다.

 

“ 너무 운전이 험해. 허벅지 근육 다 뭉치는 줄 알았네. ”

 

주먹이 올라가는 것을 꾹 참고 베르닌은 사무실로 갔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허리가 휘도록 일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저녁이었다. 극장에 전화를 했더니 비서가 감독님은 머리가 아프다며 오후에 일찍 퇴근했다고 했다. 웬일로 데려다 달라고 호출을 안 했나 의아했지만 잘됐다 싶어 베르닌은 구내식당에서 샌드위치로 대충 저녁을 때운 후 집으로 돌아갔다.

 

막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받아보니 반동분자 애송이였다.

 

“ 왜! 나 오늘은 너 저녁 안 차려줄 거야! 시간도 벌써 지났고! ”

 

“ 나 차 좀 우려 줘. ”

 

“ 뭐야? ”

 

“ 홍차! 차 좀 우려 달라고! ”

 

“ 야,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냐! 밥 해주는 것도 감지덕지지 무슨 차까지 우려달래! ”

 

“ 칫, 알았어. 되게 뻣뻣하게 구네. ”

 

전화를 끊은 후 베르닌은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앉아 있었다. 절대 그 집에 가지도 말고 해주지도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고 있는데 갑자기 경보기가 삑삑 울렸다. 복도로 나가보니 반동분자 애송이의 집에서 연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깜짝 놀란 베르닌은 다급하게 뛰어나가 꼬마의 집 현관문을 두들겼다.

 

“ 야! 문 열어! 불 난 거야? 빨리 열어! ”

 

문이 열리지 않자 베르닌은 덜컥 겁이 났다.

 

“ 어... 야! 너 괜찮아? 야! 대답 좀 해봐! ”

 

공포에 휩싸인 베르닌은 자기 방으로 뛰어올라가 열쇠꾸러미를 가져왔다. 정신이 없다 보니 어느 열쇠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 열쇠 저 열쇠 다 집어넣고 철컥철컥 돌리는 와중에도 반동분자 꼬마가 연기를 들이마시고 질식해 쓰러져 있는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 아아... 그냥 아까 가볼 걸. 같이 있었으면 괜찮았을 텐데. 난 입사 때 특수훈련도 받았으니까 불 끌 수 있었을 텐데. 안 돼, 그 자식 재수 없긴 해도 이건 아니잖아. 제발... ”

 

마침내 문이 열렸다. 베르닌은 애송이의 이름을 부르며 정신없이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연기는 부엌 쪽에서 나고 있었다. 뛰어 들어가니 가스렌지 위에서 주전자가 연기와 그을음을 내뿜고 있었다. 급하게 불을 껐다. 주전자 안에는 물이 하나도 없었다. 다행히 불이 옮겨 붙은 곳은 없었다. 그러나 꼬마가 보이지 않았다.

 

“ 야! 너 어딨어! 내 말 들려? 야! ”

 

“ 나 여기 있어. ”

 

소리는 거실에서 들려왔다. 허겁지겁 달려가 보니 반동분자 꼬마가 티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한 손으로는 티포트를 잡고 한 손으로는 찻잔을 쥐고 있었는데 포트 주둥이에서 시꺼먼 액체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 야, 너 멀쩡하잖아! 왜 문 안 열었어! ”

 

“ 손이 두 개 밖에 없는데 어떻게 나가서 문을 여니! 네가 나보고 차 우리라며! 그래서 차 우리고 있었단 말이야! ”

 

“ 뭐야! 부엌에서 그 난리가 난 것도 몰랐어? 불 날 뻔 했잖아! ”

 

“ 엄청 냄새 났어. 아랫집에서 요리 태운 거 아냐? ”

 

“ 주전자에서 물 따라냈으면 렌지 불을 껐어야지! ”

 

“ 나 물 처음 끓여봤단 말이야! ”

 

“ 어휴, 말을 말자. 야! 너 지금 뭐해! 계속 붓고 있으면 어떡해! 차가 다 쏟아지잖아! ”

 

“ 잘 안 우려져... 벌써 세 번이나 해봤는데 시꺼멓게만 나와... 마셔보면 엄청 쓴 맛만 나. 티백도 다 터지고 가루가 둥둥 떠. 아... 흑흑... ”

 

갑자기 반동분자 꼬마가 찻잔과 포트를 와락 엎지르더니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한숨을 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 싸구려 티백이야! 여기 매점에선 이런 거밖에 안 팔아! 찻잔도 되게 조잡하고 이도 나갔어. 티포트도 완전 두꺼운 사금파리야! 난 세상에서 제일 얇고 우아한 로모노소프 찻잔에만 마셨었는데. 다들 나한테 차 우려다 바치고 무가당 초콜릿도 주고 날 위해 티타임 해줬는데... 나 이런 거 해본 적 없단 말이야. 차도 영국산이랑 프랑스산이랑 스리랑카산 고급 잎차만 우려 줬는데 여긴 그런 거 없어. 툭하면 찢어지는 싸구려 티백... 안에 들어 있는 것도 찻잎도 아니고 무슨 화약가루 같은 최악의 싸구려... 아아, 시골... 아, 죽고 싶어. 못 참겠어. 아... 흑...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왜 내가... 돌아가고 싶어. 시골 싫어... ”

 

베르닌은 멍해졌다. 무슨 말인지 전부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꼬마가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으며 정신적으로 매우 약해져서 폭발 직전이란 사실만은 이해했다.

 

“ 어, 그래... 네가 뭐 얼마나 잘못을 했겠냐. 기껏 춤이나 추던 애가... 서류 다 읽어봤는데 너 테러범도 아니고 진짜 나쁜 짓은 하나도 안 했더라. 그냥 외국에 투어 갔을 때 몇 번 놀러 나가고 금지 서적 읽고 나쁜 노래 듣고 그런 정도였는데 좀 심하게 벌 받았더라. 너 엄청 잘 나가던 애라며, 훈장도 받고 팬들도 많고... 그러다 갑자기 감옥 가고 고문도 받고 우리 동네로 와서 많이 힘들었겠지. 근데 어쩌겠냐, 그게 인생이지. 그러니까 힘내고 울지 마. 저기, 야... 내가 그래도 너보다 몇 살 더 먹었고 인생도 좀 더 알거든. 그니까 내가, 저기, 힘든 거 있으면 다 터놓고 얘기해. 내가 도와줄게. 야... ”

 

“ 흑... 차 좀 우려 줘. ”

 

“ 알았어. 우려 줄 테니까 울지 마. ”

 

베르닌은 행주를 가져와서 엎질러진 찻물을 모두 닦았다. 포트와 찻잔을 가져가 싱크대에서 헹궜다. 태워먹은 주전자를 깨끗이 씻은 후 가스렌지에 올려 물을 끓였다. 티포트에 뜨거운 물을 붓고 티백을 담근 후 몇 차례 들어 올렸다. 주머니 안에 가득 차 있는 분쇄 찻잎을 점핑시켜 차가 잘 우러나오게 했다. 그 사이에 뜨거운 물을 약간 부어 찻잔을 미리 데웠다. 잠시 후 그는 티백을 빼냈다. 찻잔에 차를 부었다. 설탕을 한 스푼 넣어 녹였다. 쟁반에 찻잔을 올려놓고 받침에는 잼을 조금 퍼서 세팅했다.

 

차를 가져다주자 반동분자가 눈물을 닦고는 찻잔을 들었다.

 

“ 어, 안 까맣다... 홍차 색깔이다. 붉은 기 도는 예쁜 갈색이네. 싸구려 티백인데 어떻게 이렇게 잘 우렸지? ”

 

“ 네가 티백을 너무 오래 담가놔서 그랬던 거야. ”

 

“ 으응. ”

 

꼬마는 차를 호로록 마셨다. 다 마신 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베르닌은 불안한 마음에 자꾸만 그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또 울거나 정신적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일까봐 걱정이 됐다. 예술가란 인간들은 종종 우울증에도 시달리고 그게 악화되면 심지어 자살할 수도 있다는 얘길 어디선가 주워 읽은 기억이 났다. 싸가지 없는 녀석이지만 그래도 안됐다는 생각에 좀 더 신경써주고 잘해줘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있는데 꼬마가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 이건 정말 아니야. ”

 

“ 어... 그래, 너 지금 상황이 별로 안 좋은 건 이해하는데... 그래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지 어쩌겠어. 그러니까 자꾸 우울해하지 말고 나쁜 생각 하지 말고 힘을 내. ”

 

“ 차에 설탕을 넣다니... 이건 정말 아니란 말이야. ”

 

“ 뭐? ”

 

“ 쳇, 뭐 여기 사람들은 전부 설탕 넣어 마시니까 그렇다 치자. 근데 넌 이제부터 알아둬. 난 몸매 관리 때문에 차에 설탕 안 넣으니까 감안하도록 해. 잼도 설탕 든 건 안 먹어. 그리고 세팅할 때 찻잔 손잡이는 왼쪽으로 해주면 좋겠어. 난 차 마실 때는 왼손잡이거든. 앞으로는 기억해줘. 그래도 설탕 빼곤 차는 나쁘지 않게 우린 것 같아. 저녁밥도 네가 해준 게 제일 나은 거 같고. 뭐 운전은 좀 험하지만 시골이라 길이 안 좋으니까 내가 이해해야겠지. 그럼 이제 가보렴. 피곤해서 좀 자야겠어. 설거지는 내일 와서 해줘. 잘 자렴. ”

 

 

베르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어섰다.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 싸가지 없는 반동분자를 왕재수라고 부르기로 가슴깊이 맹세했다.

 

그는 자신의 팔자를 한탄하며 뒤척이다 새벽에야 잠이 들었고 그 결과 늦잠을 자서 다음날 지각, 국장에게 엄청난 질책을 받고 하루종일 자아비판을 하게 되었다. 그러느라 근무 시간 내에 서무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늦게까지 야근을 했다.

 

돌아와서는 왕재수에게 설탕을 뺀 차를 우려서 찻잔 손잡이가 왼쪽으로 가도록 세팅을 해주었다. 설거지도 해 주었다. 국가의 녹을 받아먹으며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는 노동자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법이다.

 

  

 

 

FIN

- 2015. 1. 16, liontamer -

 

 

** 손잡이 왼쪽으로 돌려준 로모노소프 찻잔 : http://tveye.tistory.com/3430

 

 

:
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