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햇살이 뜨겁고 더운 날이었다. 우리는 탁 트인 광장 구석에 앉아 더위와 햇살에 지쳐 나가떨어졌고 이때 나는 근방의 카페를 열심히 검색해서 이곳을 찾아냈다. 맥도날드 방향 어딘가를 지나서 구글맵을 따라 찾아가니 카페가 나왔다. 우리는 커피와 차, 머랭케익을 먹었다. 아늑하고 예쁜 곳이었다. 한번쯤 다시 가고 싶은 곳이다. 내가 다시 바르샤바 구시가지에 가게 될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하여튼 예쁘고 아늑한 카페니까 이쪽 놀러가시는 분들은 한번쯤 들러보세요.
바르샤바 구시가지를 따라 걷다 보면 조그만 기념품 시장이 나온다. 그런데 이것이 딱히 폴란드 쪽 기념품으로 특화된 건 아니어서 헌책, 터키나 중동 쪽 간식거리와 세공품, 숄, 인형 따위를 판다. 마트료슈카도 있고 헌책에는 러시아어로 된 책도 많았다. 바르샤바 도심에서 왜 자기네들의 기념품이나 특산품만 파는 게 아니라 할바와 중동 세공품을 그것도 입구에서 제일 잘 보이는 자리에서 파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하여튼 할바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반가웠다. 우리 나라에선 할바 구하기가 쉽지 않고 또 할바도 여기저기 맛은 천차만별이라. 여기서는 시식을 해보니 입맛에 맞아서 피스타치오와 향신료가 든 할바 한 통을 샀는데 양이 너무 많아서 아직도 냉동실에 잔뜩 남아 있다. 위 사진 가운데 약간 상단에 쌓여 있는 둥근 통이 바로 할바가 든 통들.
입구는 이렇다. 바르샤바에 놀러가신 분들이라면 거의 대부분은 이 길을 지나치게 됨. 노비 쉬비아트에서 <왕의 길>을 따라 왕궁 광장으로 가시는 길이라면 대로 오른편에 있는 이 조그만 시장에 들러보세요. 대신 너무 기대하지는 말고... (아마 나는 할바를 건졌기 때문에 좋은 기억으로 남은 듯)
지난 가을, 바르샤바 여행 첫날 찍었던 사진들 몇 장. 엄밀히 얘기하면 도착한 다음날이지만, 시차 때문에 도착한 날 밤엔 숙소 근처 노비 쉬비아트 거리 초입의 코페르니쿠스 동상 앞에서 아이스크림 먹으며 수다떨다 들어온 게 전부라서 제대로 여행을 한 건 그 다음날 아침부터였다. 영원한 휴가님과 함께 종일 돌아다녔던 하루였다. 사진은 아침에 막 나와서 숙소 근처부터 시작해 구시가지 왕의 길, 그리고 점심을 먹었던 자피에첵까지.
이 기마상은 분명 설명까지 읽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누구의 어떤 조각상이었는지 완전히 백지 ㅠㅠ 어쩐지 영원한 휴가님은 기억하실 거 같은데... 나는 참으로 게으른 여행자임. 바르샤바는 특히 거리 이름도 명소 이름도 제대로 모르고 또 기억하려는 의지도 없이 돌아다녔다. 어쨌든 첫 숙소인 소피텔 뒷길로 나가면 바로 나타나는 조각상이라 자주 봤다.
막상 쏘다닐 땐 별로 그런 생각을 안했는데 여행에서 돌아와 사진들을 보니 내 막눈으로는 바르샤바와 빌니우스는 어딘가 조금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다. (구시가지 한정) 물론 바르샤바는 전쟁 때 파괴되어 구시가지가 실지로는 거의 모두 재건된 쪽이기 때문에 빌니우스의 '실제' 고풍스러움과는 다르지만, 지금 사진들을 보니 어딘가 묘하게 닮았다. 바르샤바와 빌니우스가 거리적으로도 상당히 가깝기도 하고 두 나라가 역사적으로도 연결고리가 있어서 그런가. 하긴 유럽은 여기저기 다 비슷비슷한 느낌이긴 하다만 그래도 그 일반적인 닮은 느낌보다 조금 더 닮은 느낌이랄까.
여기는 폴란드가 자기네 전통음식이자 최고의 상징 중 하나라고 내세우는 <피에로기>를 파는 음식점. 자피에첵이라는 곳인데 체인이라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그러나 나에게 피에로기는 독특한 점은 전혀 없고 그냥 수많은 만두와 그 친척들 중 하나로 느껴질 뿐이었다 ㅎㅎㅎ 맛은 좋았는데 이것저것 먹어볼 마음에 잼과 과일이 든 바레니키 스타일의 피에로기와 군만두 스타일의 피에로기를 한접시씩 시키고 엄청 짜디짠 양배추 수프(이것은 정말 폭망이라 사진도 올리기 싫어서 제외함)까지 시켜버려서 결국 엄청 많이 남겼다. 남은 건 싸왔는데 다 못먹음.
별로 안 많아 보이는데 왜 그러느냐고 하신다면... 흑흑, 많았습니다. 아래쪽에 보이는 소스는 양파와 돼지고기를 졸여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소스로 빌니우스에서 먹었던 체펠리나이에 곁들여준 토핑이랑 맛이 비슷했다.
여행의 좋은 점 중 하나는 누가 청소를 해주고 아침밥도 준다는 것이다. 물론 요금에 따라 아침밥을 안 주는 곳도 있는데 이럴 때는 늦잠을 자고 맘껏 게으름피우다 대충 때울 수 있다는 또다른 장점이 생긴다. 호텔이 아닌 숙소에 묵으면 청소를 안 해주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또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어 택한 곳일테니 그러려니 한다. 어쨌든 제일 좋은 건 아침밥도 주고 청소도 해주는 아늑한 호텔에 묵을 때이다. 각 호텔마다 나름대로의 <청소해 주세요>와 <방해하지 마세요> 태그가 있는데 그 태그가 예쁜 곳들은 마음에 많이 남는다. 보통은 앞면은 '청소해 주세요' 뒷면은 '방해하지 마세요'가 적힌 종이 태그를 많이 쓰지만 안 그런 곳들도 있고 그런 곳 태그들은 또 신기하게도 다른 데보다 예쁘다.
바르샤바의 이 호텔은 <청소해 주세요>는 이렇게 가죽 케이스에 카드를 넣어서 걸어두게 되어 있었고 <방해하지 마세요>는 방 안에서 버튼을 눌러 불이 들어오게 해놓는 구조였다. 버튼을 눌러놓으니 편하긴 한데 제대로 눌러놓은 건지 좀 헷갈려서 나같은 아날로그 인간은 '아 그래도 어차피 ‘청소해 주세요’도 카드 걸어놓는데 ‘방해하지 마세요’도 카드가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저 빨간 가죽 케이스와 카드도 예뻤으므로. 저것을 우리집에도 가져와 걸어두고 싶었지만 일회성 종이 태그가 아니고 가죽 케이스라 당연히 그러지는 못하고 '예쁜데...' 하는 마음만 가득.
그런데 돌아와서 노동 폭풍에 시달리다보니 그저 '아아 청소해주는 우렁이 있으면 좋겠다'로 수렴됨. 흑흑 집에 가도 아무도 청소 안해줘. 아침밥 안줘 엉엉.
2차대전 이후 재건된 도시라서 그런지 바르샤바 구시가지는 그리 크지 않고 또 말끔하다. 어딘가 약간 어색한 느낌도 든다. 작은 골목도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다. 그래서인지 바르샤바는 골목 산책보다는 공원이 더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어쩌면 내가 갔던 9월 하순이 정말 여름처럼 덥고 날씨가 화창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늘이 없는 구시가지 광장이나 도로변은 볕이 너무 뜨거웠다. 그래도 지금은 날씨가 스산해서 그런지 저 햇볕 쨍쨍 들어오던 구시가지 거리 산책하던 때가 그립다.
바르샤바의 어느 외곽 동네. 우리는 대사관에 갔다가 버스를 반대 방향으로 탔다. 구글 맵을 보니 목적지로부터 점점 정거장이 늘어나고 있어 잘못 탔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참 후에야 내렸다. 거의 두배쯤 더 올라와버렸고 내린 동네는 황량했다. 버스가 이따금 휭휭 달렸고 주변 풍경은 오래전 러시아에서 지낼때 기숙사가 있던 동네랑 비슷했다. 혹은 블라디보스톡의 어느 주택가라든지. 날씨가 우중충하고 흐렸고 습한 바람이 불어서 더 그런 느낌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파란 차와 검은 차로 좀 가려져 있긴 하지만, 사진 속 저 가게들 앞에서 내렸는데 저것이 왼편은 과일가게, 오른편은 빵집이었다. 가게가 예뻐서 잠깐 구경을 했다. 빵집에는 맛있어보이는 일반 식사빵들이 있었고 과일도 싱싱해 보였다. 그런데 이때 우리는 공복이라 너무 배가 고팠던 상황이라 여기서 빵이나 과일로 요기를 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이미 전날 밤 메뉴를 열심히 검색해둔 빈센트에 가고자 하는 목표의식이 강했음) 그래서 '아깝다' 하면서 길을 건너서 반대편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노비 쉬비아트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런데 다 지나고 보니 그냥 저 빵집에서 빵이라도 한두 개 사볼 걸 그랬다. 과일가게에서 서양배랑 자두랑 복숭아라도 좀 살 걸. 아, 근데 복숭아는 못 본 것 같다. 자두는 많았는데... 다시 바르샤바에 가게 될지는 모르겠다만, 하긴 다시 가더라도 저 동네에 갈 일은 없을 것 같긴 하다. 동네 이름도 모름. 대신 그 덕분에 저 빵집과 과일가게가 기억에 확실하게 남겠지.
이번 바르샤바 여행에서 바깥에 나가 브런치를 먹었던 건 두 번이었다. 두번째 숙소인 래플스는 조식 포함 요금밖에 없어서 아침을 꼬박꼬박 내려가서 먹었지만 첫 숙소인 소피텔은 복지포인트를 전량 투입해 예약을 한 거라서 요금 비교 끝에 조식 포함 대신 좀더 널찍한, 아니 좀더 고층에 있는 방을 골랐다. 그래서 첫 숙소에 머무는 동안은 아침밥을 해결해야 했는데,사흘은 방에서 빵, 컵라면, 차와 커피 등으로 먹고 이틀은 밖에서 먹었다. 여기는 영원한 휴가님과 함께 갔던 노비 쉬비아트 거리의 프렌치 베이커리 카페 '빈센트'. 첫날 저녁에 여기서 레몬 커드 크루아상과 자두 패스트리를 사와서 다음날 아침에 방에서 먹었는데 전자는 그냥 그랬고 후자는 맛있었다. 며칠 후 자기 전에 우리는 '내일은 대사관에 가야 하니 후딱 다녀와서 브런치는 이 근처 괜찮은데서 먹을까요~' 하다가, 내가 이곳의 메뉴를 검색해보았다. 그랬더니 브런치 메뉴가 많아서 여기에 가기로 했다.
아침에 공복으로 택시를 타고 대사관에 가서 일을 처리하고, 배고픈 우리는 빨리 돌아가 밥을 먹고팠다. 그러나 버스 노선도를 착각한 나의 실수로 거꾸로 가는 방향을 타는 바람에 이상한 곳에서 내린 우리는 하는 수 없이 다시 버스를 타고 꾸역꾸역 열몇 정거장을 되돌아왔다. 토피엘 거리(뭔가 이런 이름이었는데 정확하진 않음)에서 내려서 노비 쉬비아트까지 걸어가는데 날씨도 뭔가 흐리고 우중충하고 배고프고 힘들었다. 이렇게 배고프고 힘든 상태로 가면 브런치가 맛있을 거야~ 하며 힘을 내어 빈센트까지 갔다. 그리하여 영원한 휴가님은 샥슈캬와 카푸치노, 나는 오믈렛과 홍차를 시켰다. 비주얼이 이쁘고 좀 음습한 날씨라 따뜻한 국물 비스무레한 게 먹고파서 나도 샥슈카 시킬까 했지만 안익은 달걀을 극복하지 못해 그냥 오믈렛을 시켰음.
고대하던 브런치. 극도로 피곤하고 배고픈 상태라 그랬는지 매우 맛있게 먹었다. 저 바게트와 버터도 맛있었다. 빵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저 네 조각을 다 해치움. 오믈렛은 그냥 평범했지만 그래도 배고파서 정신없이 맛있게 먹음.
영원한 휴가님이 시킨 카푸치노. 왜 에스프레소 대신 카푸치노인가, 공복이라 속쓰릴까봐 그런가 하고 물었더니 아침이랑 드실 땐 양이 좀 많은 쪽이 좋아서 카푸치노 시키셨다고 했던 것 같음(아니 이 기억도 지금은 가물가물. 아마 그러셨던 듯함.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대답이라 아 그렇구나 하고 재밌어했던 것 같음)
이건 우리가 앉았던 야외쪽 테이블들. 우리보다 부지런한 분들이 먼저 먹고 간 흔적들. 하긴 우리가 열한시를 꽤 넘겨서 왔던 것 같긴 하다(길 헤매느라고 ㅠㅠ)
여기는 번호표를 이렇게 손으로 대충 쓴 것을 주었다. 엄청 성의없어 보이지만 또 이것이 매력.
밥 기다리면서 심심해서 설탕 접시도 찍고... 기념으로 여기 설탕 한봉지 챙겨온 것 같은데 긴가민가. 집에 가서 확인해봐야겠다.
맛있어보이고 비주얼도 화려한 샥슈카.
그에 비해 뭔가 빈약해 보이는 오믈렛. 너무 기다랗게 말아놔서 그런 듯함.
맛있었던 바게트 :) 이 집은 프렌치 베이커리였지만 크루아상이 별로여서 실망했는데 바게트가 맛있어서 조금 만회함. (배고파서 그랬을지도)
홍차를 정신없이 마시고 기사회생.
이 카페에는 에클레어들이 있었고 에클레어를 사랑하는 나는 배가 이미 불렀지만 그래도 불굴의 의지로 이것을 주문해보았다. 그런데 슬프게도 이 에클레어는 별로 맛이 없었다. 슈가 두꺼웠고 크림은 반쯤 굳어 있었음. 비주얼만 귀여웠다. 결론은 이곳은 브런치가 빵과 디저트보다 낫다는 것인가...
좀 쌀쌀했지만 야외에 앉아서 이렇게 조식 먹는 사이에 날씨가 좀 풀리기 시작했다. 영원한 휴가님과는 이날 여기서 브런치를 먹은 후 저녁엔 또 이 근처에 있는 그루지야 식당에 가서 힌칼리와 가지 요리를 먹었다. 그 얘기는 나중에 따로~ 이때가 한달 반 정도밖에 안됐는데 너무 오래 전인 것 같다. 다시 여행가고 싶다.
여기는 아마도 바르바칸 성벽과 신시가지 사이의 어딘가였던 것 같다. 도착 다음날이었고 나는 영원한 휴가님과 함께 바르샤바 구시가지부터 여기저기를 쏘다녔는데 그러다 다리가 아파서 신시가지의 마리 퀴리 동상 맞은편 벤치에서 쉬었다. 아마도 그 근처 어딘가에서 발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아름다운 건물, 푸른색들이 너무 예뻐서 함께 바라보았다. 근처에는 타일 장식이 된 또다른 푸른색 건물이 있었다. 이쪽이 더 고풍스러워서 예뻤다. 날씨가 좋아서 하늘도 파랬다. 서로 다른 색조의 푸른색들이 가득한 바르샤바의 한 순간.
지난 바르샤바 여행 때는 두 군데의 숙소에 머물렀는데 첫 5일은 소피텔, 나머지 4일은 그 맞은편에 있는 래플스였다. 후자는 이른바 럭셔리 호텔이라는 곳으로 여러가지 세심함과 화려함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맘에 드는 점도 있고 조금 아쉬운 점도 있었다만 어쨌든 여행가서 쉬니까 좋았다.
래플스에서 꼭 하나만 갖고 싶다면 뭘 고르겠느냐고 물었다면 아마 저 꽃병이었을 것 같다. (나머지 값비싼 것들은 뭔가 자가검열로 지워진 듯하고 꽃병은 그래도 좀더 접근이 쉬워서 그런가) 조식 레스토랑 테이블에 놓여 있는 저 꽃병이 무척 예뻤다. 모양도, 재질도, 그리고 컬러도 너무너무 내 취향이었다. 여기는 내부 인테리어를 돌체 앤 가바나 뭐 그런것들로 해놓은 곳이니 아마 저것도 알고보면 럭셔리 화병이었을 확률이 큼. 어쨌든 저 꽃병 너무 이뻐서 정말 갖고 싶었다.
그런데 사실 막상 나보고 꽃병을 사라고 하면 저런 모양의 꽃병은 절대 사지 않는다. 물을 갈아주기도 어렵고 내부 세척은 더욱 귀찮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에 있는 꽃병이라고는 주둥이가 좁지 않은 유리 화병들이 대부분... 로모노소프에서 전에 사온 귀여운 도자기 꽃병도 주둥이가 좁아서 잘 쓰지 않게 된다. 오히려 탄산수나 생수 유리병 따위를 막 섞어 쓰고 있음. 저런 아름다운 꽃병은 남이 살림살이를 돌봐주는 인생에서나 상용하는 것으로(흐흑 갑자기 좀 슬퍼)
그러고보니 작년 빌니우스 여행 때 켐핀스키 호텔에서도 그 방의 양치컵이 너무 이뻐서 갖고 싶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빌니우스에서 봤던 모든 찻잔이나 컵들 중 그게 제일 맘에 들었었다 ㅎㅎㅎ 아래 잠깐 다시.
" 저 자리에 두니까 원래 여기 있었던 것처럼 보여서 놔두고 갈까봐 걱정인데요. " 라고 영원한 휴가님께서 말씀하셨다. 다과와 티포트, 컵과 물병을 놓아두는 저 진열대 한가운데 살포시 놓아둔 하늘색 러브라믹스 티포트 얘기였다. 영원한 휴가님은 저 티포트를 빌니우스의 필리모 거리에 있는 엘스카 카페에서 골라 상자에 꼭꼭 넣어 캐리어에 태우고 이른 아침버스로 국경을 넘어 바르샤바까지 가져오셨다. 내가 프라하의 헤드샷 커피를 따라서 샀던 똑같은 색깔의 찻잔에 맞춰서.
이 사진을 찍기 전날 오후 우리는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더위와 습기에 지쳐 조금 일찍 숙소로 돌아왔다. 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대신 편안한 호텔 방에서 티타임을 하기로 했다. 이케아 느낌이 물씬 나는 타원형의 하얀 테이블 위에 호텔 방에 비치되어 있던 찻잔과 접시를 세팅하고 전기포트에 물을 끓이고, 빌니우스에서 온 23년산 퍼스트플러쉬 다즐링을 저 러브라믹스 포트에 정성들여 우렸다. 빌니우스의 또다른 카페에서 온 초콜릿 팅기니스와 바르샤바의 저렴한 슈퍼마켓 체인인 비에드론카에서 사온 너무 익은 무화과 두 알을 곁들여 차를 마셨다. 바르샤바에서 매일 차를 마셨지만 그 순간의 티타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차를 마신 후 나는 러브라믹스 티포트를 저 자리에 올려두었다. 너무 딱 들어맞았고 심지어 그 뒤에 있는 메뉴바 안내문마저도 보라색이라 컬러까지 잘 어울렸다. 그래서 '원래 여기 있는 것처럼' 보여서 숙소 옮길 때 놔두고 갈까봐 걱정이었다. 이틀 후 나는 숙소를 옮겼고 티포트를 뽁뽁이로 싸서 상자에 잘 넣어서 다음 숙소로 가져갔다. 바르샤바 공항에서 인천공항으로, 그리고 화정으로 비행기와 택시를 타고 잘 귀가했다. 나랑 티포트 둘다.
(사진을 잘 보면 영원한 휴가님과 내 여행가방도 한구석에 나란히 나와 있음. 티포트는 저 가방 두 개를 다 섭렵했음)
빌니우스 선물 한보따리. 팅기니스 두 덩어리와 수제 자두잼은 이때 냉장고에 들어가 있어서 이 떼샷에서 빠졌음 ㅜㅜ 왼편 상단의 박스가 저 티포트가 든 상자.
잊을 수 없는 바르샤바 카페 자이칙 분점 개장 인증 샷 :)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저때 홍차를 매우 잘 우렸음!
나에게 있어 만족스러운 여행은 수많은 파편들과 반짝이는 빛들, 나직한 소음과 부드러운 바람의 기억들로 남는다. 아픈 다리, 갈증, 혼란, 허기, 짜증 등의 기억들은 쉽사리 녹아 없어진다. 대체로 좋은 것들이 남는다. 정말 나쁜 것들은 각인되어 잊혀지지 않지만 웬만한 것들은 흐려지고 약해진다.
오랫동안 남는 아주 작은 조각들은 의외로 숙소에서 온다. 아마도 내게 여행은 무엇보다도 휴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나 스스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노력과 돌봄으로 방에서 쉴 수 있다는 것이 좋아서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행에서 찍은 호텔 방의 작은 순간들을 좋아한다. 그런 사진들에는 물론 예쁘거나 근사하거나 새로운 뭔가는 없다. 하지만 약간의 안락함과 또 약간의 불편함이 공존하는 그 순간들을 떠올리면 다시 여행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나는 비행기나 공항보다는 호텔에서 온전한 여행자의 기분을 맛보는 것 같다.
간판이나 메뉴판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렇다고 옆을 두리번거리거나 위를 올려다보는 편은 아니어서 길거리에 놓여 있는 애들이나 눈높이 근처에 있는 녀석들 위주로 보게 된다. 손글씨나 직접 그린 그림이 가미되어 있으면 더 눈여겨 본다. 이건 바르샤바 중심가, 구시가지 가는 길에서 발견.
그런데 이 녀석은 딱히 예뻐서라기보다는 '우와 정말 정성들여서 썼구나' 라는 마음이 들어서 찍어둠. 너무 이렇게 반듯반듯한 글씨체는 손글씨의 자유분방이 덜해서 내 타입은 아니지만, 분필로 저렇게 반듯하게 글씨를 써놓고 심지어 색칠도 저렇게 꼼꼼하게... 균일한 저 빗금들까지... 진짜 정성들여 쓰셨군요, 모범상을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이 카페에 들어가지는 않았음 ㅎㅎㅎ)
이때 너무 더워서 목도 마르고 뭔가 마시고 싶어 허덕이고 있었지만, 정성들여 쓴 저 녀석을 무시하고 바로 옆에 있는 미니 까르푸 가게에 들어가 물을 사 마셨다. (그 가게에서는 첫날 영원한 휴가님과 함께 피에로기 군만두 찐만두의 여파로 목말라 괴로워하며 사과복숭아 주스와 리치 주스를 사마셨었고 또 며칠 후엔 더워서 아이스크림 사먹음. 그러고보니 세번이나 간 드문 곳이네. 사진 한장 없이 뜬금없이 까르푸 매점 얘기로 마무리)
첫날 구시가지에 갔을 때 들렀던 조그만 기념품 시장. 그 시장에서 나중에 할바를 한 통 샀다. 왼편에는 헌책들을 쌓아놓고 파는 좌판이 있었는데 무심코 눈을 돌렸을 때 도스토예프스키가 눈에 들어왔다. 저 초상은 힐끗 봐도 결코 헷갈릴 수 없다. 잘 보면 아래에는 불가코프 책도 깔려 있고. 이 책방은 나중에 안쪽을 훑어보니 옛날 공산주의 시절에 대한 책들, 그리고 러시아어로 된 책들이 많았다. 오랜 역사, 소련과 그 이후,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현재 러시아와 폴란드의 관계를 생각하며 뭔가 묘한 마음이 되었다.
폴란드는 뭔가 예쁘게 꾸며서 잘 팔아먹는 자본주의 상술이 아직 발달하지 않은 것 같다. 곳곳에 예쁜 것들도 아예 없지는 않은데 기념품들은 어딘가 허술하다. 나도 이제 나이도 먹고 매사 귀차니즘이 발동되어 예전처럼 이것저것 귀여운 것들을 사오는 일도 거의 없어졌고 또 이곳의 가장 유명한 기념품이라면 역시 폴란드 도자기겠지만 이건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구할수 있다보니 '찻잔 사야 해' 하고 악착같이 찾으러 다니지도 않았다(그런데 결국 우연히 발견한 가게에서 이쁜거 하나 사긴 했음)
어쨌든 명소나 기념품을 이쁘게 포장해 팔아먹는 기술이 별로 없는 동네라, 기념품 쇼핑이라고는 마지막날 산 그나마 귀여운 스케치 엽서 두장, 그리고 위에서 얘기한 찻잔 하나가 전부였다. 이 사진은 첫날 구시가지 기념품샵에서 발견해 좀 우스워서 찍어둔 양말들. 폴란드에서 그나마 가장 메인으로 밀고 있는 게 바로 이것들이다. 즉, 유명인은 3명이다. 쇼팽, 퀴리부인, 코페르니쿠스. 그리고 저 폴란드 만두, 피에로기. 맨 아래는 문화과학궁전 그림 양말인데 이건 호불호가 갈리니 패스. 영원한 휴가님은 나에게 저 양말 3종 사가라고 했는데 좀 웃기고 귀엽긴 했지만 위대하신 분들을 양말로 신고 깔아뭉개려니 뭔가 쉽지 않았다 ㅎㅎㅎㅎ
쇼팽이야 원체 유명하니 좀더 노력해서 멋지게 팔아먹어도 될텐데 너무 제대로 된 물건이 없어서 뭔가 홍보와 디자인을 좀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또 생각해보면 이런게 폴란드의 매력인가 싶다. 너도나도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는. 그리고 피에로기는 사실 좀 우스운 느낌이 많이 든다. 왜냐면 저거 그냥 만두라서 ㅠㅠ 어느 나라에 가도 웬만하면 자기네 식 만두가 있는데 유독 폴란드는 이 피에로기야말로 폴란드의 전통음식이라고 엄청 밀어붙이는 느낌이었다. 맛은 러시아 펠메니나 우리나라 만두와 크게 다르진 않고, 필링이 좀더 다양하다. 과일 들어간 디저트용도 많고(근데 이건 러시아도 그렇다. 러시아에서는 고기 든 건 펠메니, 과일 든 건 바레니키라고 한다만) 찐 것과 기름에 구운 것 둘다 있는데 나와 영원한 휴가님은 첫날 전문점에서 두가지를 다 시켰다가 양이 너무 많아서 배가 터지는 줄 알았음. 그날 우리는 점심땐 피에로기를 먹고 저녁엔 베트남 식당에서 스프링롤을 먹고 이틀후엔 그루지야 음식점에서 그동네식 만두인 힌칼리를 먹어서 사흘 동안 만두 파티였음. 아마 앞으로 한동안 만두는 못 먹을 것 같다. 그리고 러시아어로 피로그는 속이 든 파이이고 만두는 펠메니인데 폴란드에서는 만두를 피에로기라고 해서 첨엔 좀 헷갈렸다.
심지어 만두모양 냉장고 자석까지. 근데 이것도 잘 보면 정말 대충 만들었다. 아니, 만두 자석 만들 거면 좀 윤도 내고 더 귀엽게 만들 수도 있을텐데 그냥 밀가루 반죽 색깔로 철푸덕...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적인 폴란드 :) 근데 이런게 또 어쩐지 귀엽다. (하지만 예쁘지 않아서 결국 하나도 안 샀다. 미감 앞에선 냉정한 토끼의 마음 ㅋㅋ) 저 만두 자석은 아예 글씨가 하나도 씌어 있지 않은 민자도 있다. 그건 아마 구매자가 직접 쓰라는 건가 싶기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