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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차를 마시면서 아주 옛날에 마린스키 극장 샵에서 샀던 니나 알로베르트(Nina Alovert)의 발레 화보집을 다시 뒤적여 보았다. 세월이 어찌나 빠른지... 21세기가 되기 전에 나온 얇은 사진집이다. 그래서 제목도 저렇게 되어 있고, 이 화보집에서 말하는 today는 90년대의 마린스키이다. 6~70년대 키로프에서부터 90년대 후반까지를 아우르는 흑백 화보집인데 지질도 얄팍하고 좋지 않지만(90년대에 나온 책이니...) 내로라하는 무용수들이 다 담겨 있다. 속표지의 저 우아한 여인은 90년대를 주름잡았던 '여왕님' 율리야 마할리나. 

 

 

 

 

이건 미래의 발레리나들, 즉 당시 한창 떠오르던 신진들이다. 파 드 카트르를 추고 있는 네명의 젊은 발레리나들인데 순서대로 소피야 구메로바, 울리야나 로파트키나, 마야 둠첸코, 그리고 디아나 비슈뇨바이다. 이 당시엔 로파트키나랑 비슈뇨바는 유명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풋풋하던 시절이었다.

 

 

 

 

표지는 유일무이한 미하일 바리쉬니코프. 망명 전에 찍은 사진.

 

 

 

당시 내가 무척이나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는 파루흐 루지마토프.

 

 

 

 

이건 발레리나 찻잔이 아니고, 예브게니 오네긴의 타치야나가 그려진 찻잔. 근데 의상이 쫌 발레리나 같아서 오늘은 이 찻잔에 마심.

 

그리고 나의 첫사랑, 예브게니 이반첸코. 이 당시엔 아주 젊었던 데다 막 떠오르기 시작한 신성이라 무대 사진도 아니고 연습실 사진 :) 그런데 나는 이 사진을 보고는 '아아 해골 머리띠까지 정말 너무 멋있다.... 역시 멋있다...'하고 눈에 콩깍지가 끼어 어쩔 줄 몰라 했었다. 지금 봐도 멋있음. 쥬인은 '거봐 얘는 막내라서 무대 화보도 못 얻고 우아한 극장에서 해골이나 두르고 이러고 있다' 하고 나를 놀리곤 했음.

 

 

사실 이 당시에도 이 사람은 키 크고 체격도 근사하고 딱 왕자 스타일이라 맨날 아다지오만 추고 왕자님을 춰서 발레 관람 초짜이던 나는 '잉잉 바질은 왜 안 춰주는거야, 왜 넌 맨날 졸린 아다지오만 추는 거야 엉엉' 하고 슬퍼했었다. 이제는 나이가 꽤 많지만 그래도 여전히 마린스키 무대에 올라와주고 있어 너무 좋다. 아무래도 첫사랑이니까! 그래서 마린스키 갔다가 이 사람과 발로쟈 슈클랴로프가 같은 무대에 올라오는 날이면 나는 그야말로 더블로 계 타는 날이다 :)

 

 

그건 그렇고.. 다시 봐도 저 해골 머리띠 완전 내 스타일임~

:
Posted by liontamer
2018. 1. 27. 23:12

생일 축하해요 미하일! dance2018. 1. 27. 23:12





오늘은 미하일 바리쉬니코프의 70번째 생일이다.



생일 축하해요 미하일!!!



당신 때문에 러시아어 전공하게 된 거 한번 더 얘기해도 되죠? ㅎㅎ








:
Posted by liontamer
2017. 1. 28. 23:14

생일 축하해요 미하일! dance2017. 1. 28. 23:14

 

 

 

바쁘고 정신없어서 알면서도 하루 놓쳤다만... (그러고 보니 작년에도 하루 늦었음 ㅠㅠ 이맘땐 항상 바빠서) 1월 27일은 유일무이한 무용수인 미하일 바리쉬니코프의 생일이었다. 어제로 그는 69살이 되었다.

 

나로 하여금 러시아어 전공하게 만든 두 사람 중 하나. 여전히 당신을 좋아하고 존경합니다. 여전히 근사하고 멋지고 당당한 분, 소련과 이데올로기로 묶어둘수 없었던 자유로운 예술가. 단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무용수'!! 당신 무대를 꼭 보고 싶어요.

 

생일 축하해요, 미샤!!

(내 글의 주인공 이름은 당신 이름에도 살짝 기대고 있죠. 그 동네에서 제일 흔한 이름이긴 하지만)

 

 

 

 

 

 

 

아주 오래전. 레닌그라드. 바가노바 아카데미 시절. 연습 중인 소년 미하일 바리쉬니코프. (가운데)

 

 

 

:
Posted by liontamer

 

 

 

 

(사진은 프라하 로레타 사원에서 내가 찍은 것들)

 

 

..

 

 

아래 글은 가끔 발췌했던 트로이와 미샤가 등장하는 장편의 중반부 에피소드 중 하나이다. 지난번에 지나이다가 병실의 미샤를 면회하러 온 이야기(http://tveye.tistory.com/5309)를 올린 적이 있는데 이 에피소드는 그 이야기 직전에 있었던 일과 미샤의 회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미샤는 사적인 일로 운나쁘게 부상을 입고 트로이의 아파트에서 밤을 보낸다. 트로이는 그를 보살펴주고 발췌본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미샤의 오랜 애인이자 주치의인 유리 아스케로프(미샤가 부르는 애칭은 유라)가 들러서 그를 치료해주고 돌아간 직후이다. 트로이는 진통제 약물에 취한 미샤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기억들을 들춰낸다. 그리고 미샤가 몇년 전에 있었던 일을 얘기한다. 발레학교를 졸업하기 몇달 전 겪었던 일에 대해.

 

..

 

 

나는 이 소설을 2012년 겨울부터 2013년 초까지 썼다. 당시 나는 몸이 아파서 잠시 일을 쉬고 있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좀 힘든 일들이 있기도 했다. 물론 지금과는 좀 다르지만. 그리고 2012년 겨울은 '그' 2012년 겨울이었다. 

 

이 소설을 마친 후 얼마 있지 않아 잠시 프라하에 가 있었다. 거기서 이 소설과 현재의 가브릴로프 본편을 잇는 프리퀄을 구상해 쓰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아래 에피소드 중 후반부에서 KGB 심문관 그라도프의 독백 일부를 발췌하며 이런 메모를 남긴 적이 있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들이 몇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집단으로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수학여행을 비롯해 교련, 운동회, 매스 게임 등등을 모두 싫어했다. '우리'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집단주의의 횡포를 견딜 수가 없다. 아니, 이게 꼭 횡포가 아닐 수도 있다. 순기능적인 면이 강조될 때도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횡포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내겐 그게 횡포였다.

 

직장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인데. 그나마 우리 회사는 그런 면이 꽤 덜한 편이라 다행이지만. 그래도 부임해오는 임원에 따라 가끔 주말 산행이 생겨나기도 했다. 나는 '조직 문화'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이러한 단체행동이 사실은 강압이며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굳이 주말이 아니라 해도, 본래 회사에서 봄이나 가을에 정례적으로 개최하는 체육대회나 산행도 좋아하지 않는다. 게을러서 그런 것도 있지만, 난 줄을 서서 다 같이 뭔가를 하는 것을 견딜 수가 없다. 그리고 집단 행동을 함으로써 단결력이 강화되고 '우리'라는 끈끈한 정이 생겨난다는 말을 믿지도 않는다. 그래본 적이 없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상당히 개인주의적인 성향이며 단점이라고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 집단 행동을 통해 '우리'라는 이름의 뜨거운 결속력을 획득하고 팀으로서 거듭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쪽에 포함되지 않았다. 단 한번도. 아마 내가 소련 시절에 태어났다면 정치 이념이나 먹고살기 힘든 사회나 그런걸 다 떠나서 그 망할 놈의 집단주의 때문에 미치거나 수용소에 끌려갔을 것 같다.

 

작년부터 쓰고 있는 시리즈의 주인공에게도 그런 성향이 어느 정도 존재한다. 물론 그는 나와는 꽤 다른 인물이지만, '우리'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집단주의를 견뎌내지 못하는 것은 비슷하다. 그래서 보안위원회의 어느 인물은 어느 날 그 애를 불러다놓고 이런 말을 한다. '애'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것이 저 당시 주인공은 아직 학교를 졸업하기 전이었다.

 

 

... 그런데 내가 아주 미워하는 애들이 있어. 정말 마음에 안 드는 놈들, 이토록 선량하고 교양 있는 나조차도 그런 녀석들은 아주 싫다는 생각이 들 정도야. 그건 말이지, 혼자 다니는 놈들이야. 모두가 노래할 때 혼자 침묵하는 녀석, 다같이 컨베이어 벨트를 돌릴 때 혼자 뒤돌아 서 있는 녀석, 동지들끼리 모여 차를 마실 때 길거리로 사라지는 녀석. 가끔 가다 보면 꼭 그런 인간이 있어. 차라리 떠들고 선동하는 놈들이 나아, 왜냐하면 그것들은 항상 여럿이 모여 있으니까. 그리고 무리 짓는 인간들은 언제나 소비에트의 품에 안길 준비가 되어 있는 놈들이야. 문제는 바로 혼자 다니는 애들이야. 도무지 집단에 끼어들지 않는 놈, 미제 자본주의자들의 타락한 정신을 따라가는 놈. 줄을 서는 게 싫다는 이유로 빵과 우유를 사러 가지 않고 꼬박 며칠 동안 처자식을 굶기는 놈, 존경하는 레닌 동지와 레오니드 일리치 동지를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시해버리는 건방진 놈들. 차라리 소리 높여 욕하는 놈들이 훨씬 나아. 언제나 혼자 있으려고 하는 놈들, 자기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정하며 이 세상에서 혼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정신 나간 놈들, 그런 놈들이 제일 나빠....

 

 

저 자의 장광설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물론 저 설교가 주인공을 바꿔놓지는 못한다. 저때 꽤 혼이 나고 고생을 하게 되지만 그래도 그 애는 여전히 '혼자 다니는 놈'으로 남는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저날 메모의 전문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1948 (2013.3.22 금요일 저녁 : 여행 준비 중, 혼자, 우리, 집단, 샐러드 등등)

 

 

..

 

 

내가 왜 지금 이 에피소드를 발췌하고 있는 것일까? 사실 이 에피소드는 이 소설에서 가장 우울한 파트 중 하나이고, 또 내밀한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블로그에 올리거나 타인에게 공개하는 건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은 이 이야기가 그때도, 지금도, 아마 이후에도 내겐 중요하다. 여러 측면에서 그렇다. 아마 나는 의사에게 그냥 이 이야기를 소리내어 읽어주고 싶었던 적이 있기도 했을 것이다. 한번쯤은. 물론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글쓰기란 아주 사적이고 내밀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여기에 올리고 있는지, 솔직히 나도 머리 아프다.

 

모범적으로 말해보자면, 아마 글쓰기가 양날의 검이며 사적인 행위인 동시에 타인을 향한 외침이기 때문이겠지.

 

 

..

 

 

 

언급되는 이름 순서대로. 여기서 표트르 일리치와 레오니드 일리치를 빼고는 모두 내가 만들어낸 인물들이다. 루뱐카와 프시후슈카는 실재했고.

 

표트르 일리치는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이다. 미샤는 존경하는 역사 속 인물을 이름과 부칭을 붙여 부르는 버릇이 있다.

 

루뱐카는 모스크바의 KGB 본부 속칭이다.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는 몇차례 언급되었고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도 등장했던 공산당 고위 간부이다. 모스크바 쪽 의원이며 KGB 출신으로 미샤의 후원자이자 정부이다.

 

베리야는 스탈린 시절 비밀경찰의 권력자로 온갖 횡포와 수탈, 어린 소녀들에 대한 농락 등 각종 범죄를 자행한 인물이다.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 마로조프는 레닌그라드 쪽 의원으로 역시 고위 당 간부이며 미샤가 소년 시절부터 관계를 맺어온 사람이다. 이 사람의 시점으로 전개된 단편을 몇번 발췌한 적이 있다. 그라도프가 그를 추기경이라고 부르기는 하는데 진짜 추기경은 당연히 아니고 정치계에서 그가 가진 별명 중 하나이다. 서리의 왕도 마찬가지이다.

 

니콜카는 미샤의 정부 중 하나이다.

 

레오니드 일리치 동지는 당시 소련 최고 권력자인 당 서기장 브레즈네프의 이름이다.

 

세르게이 야스민은 미샤의 아버지이다.

 

프시후슈카는 정신교화 수용소이다.

 

 

..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청동기사상. 사진은 alex gouliaev)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30분 쯤 후 미샤가 깨어나 부엌으로 왔다.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남아 있던 식은 차를 정신없이 마셨다. 갈증이 가시지 않는 듯 식탁 위에 놓여 있는 보드카 병을 움켜쥐더니 입으로 가져갔다. 트로이는 술병을 뺏지도 않고 놔두었다. 이미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지치고 취해서 내버려두고 싶었지만 미샤가 싱크대로 가서 수돗물을 그대로 마시려고 했기 때문에 의자에서 일어나 저지해야 했다.

 

 

“ 더 토하고 싶어? ”

 

“ 석회질이 마약을 걸러내 줄 거야. ”

 

“ 대신 누가 좋아하는 작곡가처럼 콜레라에 걸려 죽겠지. ”

 

“ 내 앞에서 표트르 일리치를 모독하면 안 되지. 그리고 이건 운하 물이 아냐, 권위 넘치는 레닌그라드 수도국에서 틀어주는 물이야. ”

 

 

트로이는 싱크대를 자기 몸으로 가로막았다. 가스렌지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물을 끓이면서 두통을 견디지 못해 보드카를 한 병 더 땄다. 이고리와 코스챠가 지난번에 싸들고 왔던 술이었다. 미샤가 손을 뻗지 못하게 하려고 손을 높이 쳐들어 병째로 마셨다. 미샤는 술에 흥미를 잃은 듯 끓인 물을 컵에 따르고 식을 때까지 기다렸다. 다시 평소처럼 침착한 모습으로 되돌아온 것 같았다. 이른 새벽이었기 때문에 부엌에 깔려 있던 어둠 위로 푸르스름한 빛이 스며 들어오기 시작했다.

 

 

물을 마신 후 미샤가 의자 옆 바닥에 앉았다. 트로이의 무릎에 기대면서 생각난 듯 말했다.

 

 

“ 좋지 않아, 그렇게 많이 마시는 건. ”

 

“ 많이 마시는 게 아니야. 네가 술이 약한 거지. ”

 

“ 충분히 많이 마시고 있어. 이고리보다 더 심해. ”

 

“ 난 걔들처럼 매일 마시지 않아. ”

 

“ 곧 매일 마시게 될지도 몰라. ”

 

“ 너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야. 게다가 난 춤을 추는 인간도 아니잖아. ”

 

“ 아... ”

 

 

미샤가 침묵했다. 뜨겁게 달아오른 머리를 기댄 채 두 팔로 의자 다리와 그의 무릎을 끌어안았을 뿐이었다. 그 포옹이 너무 세차고 부드러워서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갑자기 울고 싶었다.

 

“ 그때 모스크바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

 

 

그는 차마 루뱐카라고 묻지 못했다.

 

 

미샤가 대답해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약 기운에서도 어느 정도 풀려나 있었고 평소 같으면 결코 보여주지 않았을 모습을 드러낸 것을 수치스러워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조금 전에 던졌던 그의 정부들에 대한 쓸모없는 질문들처럼. 차라리 그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볼쇼이에 갔었어, 계약하자고 해서. 문화국에서도 불렀고... 스비제르스키도. ”

 

“ 스비제르스키는 그때부터 알았어? ”

 

“ 아니, 71년인가 콩쿠르 때부터. 그때 후원자였거든. 그래서 그 개자식이 콩쿠르 출신 애들을 모아서 크레믈린 궁전 강당에서 춤을 추게 만들었어. 이틀 연속으로. 문화국 간부들이랑 자기 서클 패거리들 앞에서. 자기 집에서 파티도 하고. 거기서도 춤추게 시키고. ”

 

“ 왜 집에까지 데려가서 그런 걸 시키는 거야? ”

 

“ 그놈들 많이들 그래. 요즘도 가끔 가, 별장들에. 나만 그런 거 아냐, 극장에 있으면 그런 일이 많아. ”

 

“ 베리야 같은 놈들. ”

 

“ 꼭 그런 건 아냐. 그냥 여흥이 필요해서 부르는 경우가 더 많아. 다행히 난 여자가 아니니까 같이 자야 하는 일은 훨씬 덜하지만. ”

 

“ 그럼 볼쇼이는 잠깐이고 내내 당 간부들에게 끌려다닌 거야? ”

 

“ 음, 그래야 했는데 두 번째 날 크레믈린 무대에 안 갔어. "

 

“ 뭐라고 핑계를 대고? ”

 

“ 무슨 핑계가 필요해, 난 학생이었는데. 아직 발레 단원도 아니었는데. 그놈들에게 그럴 권리가 어디 있어. ”

 

“ 그럼 말도 안하고 그냥 숨었어? ”

 

숨지는 않았어. 트레치야코프에도 가고 전에 알던 사람들도 만나고 아르바트에서 놀았어. 내가 어디 있는지 다 알았을 걸. 어두워지니까 누가 나타나서 스비제르스키 집 파티에 데려갔으니까. 심지어 내가 제일 빨리 도착했어. ”

 

“ 그럼 파티에서는 춤춰야 했겠네. ”

 

“ 안 췄어. 도망쳤어. ”

 

 

미샤가 무의식적으로 입을 막았다. 다시 역겨워지는 것 같았다.

 

 

춤추는 것도 모자라서 그 위선자들 옆에 앉아 귀염 받으며 밥 먹고 헛소리 듣고 기념사진까지 찍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았어. 그래서 의상으로 갈아입으러 갈 때 빠져나와서 정원사 자전거 훔쳐 타고 시내로 돌아왔어. 레닌그라드 역으로 가려고 했는데 가방이랑 지갑을 전부 거기 놔두고 와서 할 수 없이 숙소로 돌아간 거야. 그때 무임승차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자전거를 팔아치울 수도 있었는데 그날 밤에는 생각을 못했어. ”

 

“ 그래, 가방 챙겨다 준 사람은 있었어? ”

 

“ 없었어. 아침에 자전거를 팔면 되겠다는 생각이 나서 역으로 가려고 하는데 경찰이 들이닥쳐서 차에 태웠어. ”

 

“ 자전거 훔쳐서? ”

 

 

미샤가 그의 무릎을 더 꽉 끌어안았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세게.

 

 

“ 이제 그만하자. 졸려. ”

 

“ 얘기해봐. 그럼 훨씬 나아질 거야. ”

 

“ 뭐가? 얘기한다고 변하는 것도 없는데. 기분이? ”

 

“ 그래, 기분이. ”

 

“ 글쎄. 그냥 다시 기절하게 해줘. ”

 

“ 원한다면 귀 막고 있을게. 저쪽에 가서 얘기해. ”

 

“ 왜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해야 돼? ”

 

“ 그럼 네 기분이 좀 나아질 거야. ”

 

“ 교회에 가서 고해하는 것처럼? ”

 

“ 그래. ”

 

“ 사제도 없이 종탑에 대고? ”

 

“ 어차피 무신론자라며. ”

 

“ 문학적 표절인데. ”

 

“ 난 푸쉬킨이 아니니까 좀 봐줘. ”

 

“ 난 푸쉬킨보다 널 더 좋아해. ”

 

 

 

트로이는 의자에서 내려왔다.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미샤의 머리를 감싸안고 성한 쪽 뺨에 입을 맞췄다. 한 손으로 어깨와 등을 쓸자 손바닥에 붕대가 만져졌다. 니콜카를 죽여버렸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유리 아스케로프도. 스비제르스키도. 그리고 마로조프, 이름과 부칭으로 불리는 그 도살자를. 더 이상 물어보지 못했던 다른 무수한 정부들과 애인들을. 그들 모두가 미래에서 온 살인자들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미처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존재를 파괴하고 상처 입히고 마침내 울게 만들고 손에 닿지 않는 곳으로 영영 도망쳐버리게 만들지도 모르기 때문에.

 

 

미샤가 코끝으로 그의 귀를 가만히 비볐다. 때로 그에게는 그런 조그만 동물 같은 면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트로이는 표현하기 힘들 만큼 강렬하게 밀려오는 보호 본능을 느꼈다. 그건 애정보다 더 원시적이고 깊은 감각이었는데 어쩌면 결코 생겨나지 않을 그 자신의 아이와 마주하게 될 때에야 느낄 수 있는 감정일지도 몰랐다.

 

 

미샤가 딱딱한 부엌 바닥에 길게 누웠다. 여전히 트로이의 귀와 목덜미 사이에 머리를 묻은 채 몸을 꼭 밀착시켰다. 두툼하게 감겨진 붕대가 와 닿았다, 비정상적인 열기가 발산되는 맨몸도. 잠옷을 찢어 내던진 후 그는 짧은 복서 팬티 하나 밖에 입고 있지 않았다. 트로이는 담요를 가지러 일어나는 대신 자기가 입고 있던 제니트 티셔츠를 벗어 그에게 덮어씌웠다. 미샤는 셔츠를 입혀주도록 잠깐 머리와 팔을 들었을 뿐 다시 그에게 바짝 기댔다. 다치지 않은 쪽 다리로 그의 다리를 감았다. 한순간 트로이는 아스케로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 같으면 할 거야, 그것도 오늘. 그래서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때 아스케로프의 그 말을 떠올리지 않았다면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미샤의 부어오른 입을 자신의 키스로 막고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그 애의 마음속 깊은 곳으로 다시 몰아넣었을 것이다. 그 열기가 깊게 찔린 상처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 애의 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안았을 것이다. 오로지 위안과 평온을 위해. 그것도 미샤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위안을 위해, 귓가에 웅웅거리는 니콜카의 고함 소리들을 잠재우고 전신으로 부드럽게 스며들 이기적 평온함을 위해서. 그건 그와 어둠 속의 그림자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때마침 유리 아스케로프의 말이 떠올랐고 그는 그 타오르는 애의 몸을 취하지 않았다, 그의 그림자들도 함께 정지했다.

 

 

 

*    *    *

 

 

 

거긴 일반적인 사무실이나 다름이 없었어. 책상이 있고 의자가 있었어. 서랍과 캐비닛이. 회색 벽이 있었어. 그림도 걸려 있었지. 말레비치 모사품이. 거기 그자가 기다리고 있었어. 성은 그라도프. 이름은 몰라. 직위도 계급도. 채찍을 몇 갈래로 꼬아서 맨 위에 이콘 후광처럼 둥그런 머리를 얹어놓은 것처럼 보였어. 그런데 그 실루엣 밖에는 기억이 나지 않아. 키도, 체격도, 얼굴도, 아무 것도. 기억나는 건 채찍 위의 이콘 후광뿐이야. 건드리면 굴러 떨어질 것처럼 보였어.

 

 

심지어 목소리조차 기억나지 않아. 그는 낮고 툭툭 긁히는 어조로 말했는데 그 모든 말들은 타자기로 찍어내는 단어들처럼 하나하나 튀어나와 지루한 공산주의 선언문처럼 눈앞의 잿빛 벽에 등사되는 것 같았어. 나는 그의 말을 듣는다기보다는 읽었어. 어쩌면 그건 주사 때문이었을지도 몰라. 그자의 사무실에 들어오기 직전에 비서실에 앉아 있던 어떤 여자가 내 소매를 걷더니 바늘을 찔러 넣었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마치 검역이나 예방접종 같았어.

 

 

그는 맨 처음에 내게 왜 볼쇼이와의 계약을 망설이느냐고 물었어. 그 질문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어.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 대답했어. 아직 졸업식도 하지 않았고 다른 극장들과의 면담도 많이 남아 있다고. 그러자 그자가 말했어. 레닌그라드에 남고 싶은 이유가 드미트리 마로조프 때문이라면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했어. 모스크바로 온다면 게르만 스비제르스키가 기꺼이 새 후원자가 되어줄 거라고 했어.

 

 

그때 난 그자를 한 대 치려고 했던 것 같아. 내게 그런 이름들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야? 난 결코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에게 내 무대를 봐달라고 한 적이 없어. 만일 그 서리의 왕이 단 한번이라도 학교나 극장에, 콩쿠르에 내 이름을 비추며 압력을 가한 적이 있었다면 난 다시는 그를 보지 않았을 거야. 나와 춤 사이에는 그 어떤 것도 없었어. 스비제르스키는 또 뭐란 말야, 그자가 크레믈린 무대를 억지로 만들어내고 자기 파티에 와서 춤추게 강요한다고 해서 거기 끌려간 애들 전부가 그자의 노예가 되는 건 아니잖아. 걔들은 그저 명령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을 뿐이야. 그 역겨운 인간이 지폐와 금붙이를 쌓아놓고 꼬드긴다 해도 결코 그런 놈을 후원자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을 거야.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내 주먹은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날아갔어. 그라도프는 웃기만 했어. 그리고는 캐비닛을 열고 서류철을 꺼냈어. 상투적이지, 안 그래? 꼬박 10분 동안 그는 내 서류를 읽었어, 라디오 방송처럼. 별로 재미있는 내용은 아니었어. 그는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에 대한 부분은 읽지 않았어, 어쩌면 아예 적혀 있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유라에 대해서는 단 한 줄, 시립병원의 외과의라고 언급했어. 하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는 너도 알 수 있을 거야. 그 몇 개의 단어만으로도 한 인간을 서류에서 지워버릴 수 있어. 그리고 서류에 존재하지 않는 인간은 인생에서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 거지.

 

 

나는 그들이 증거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어. 그라도프는 그저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내 행적을 짜맞추고 있을 뿐이었어. 그래서 난 그 부분에 대해서는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처럼 굴었어. 내게는 여자 친구들이 많았어. 학교 파트너들도. 그라도프도 그걸 알고 있었어. 그는 별로 흥분하거나 동요하지도 않고서 나중에 확인해보자고 했어. 그런데 그 ‘나중에’란 말이 갑자기 너무 무섭게 느껴져서 난 깜짝 놀랐어. 난 협박에 민감한 편이 아니야,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 그런데 그 순간에는 너무 무서워서 기절할 것 같았어.

 

 

그건 내 몸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야. 다리가 뻣뻣하게 굳어지고 있었어. 그제야 난 내가 그라도프의 말을 듣고 있지 않고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 그의 얼굴은 이콘 후광처럼 단번에 그려 넣은 하나의 원에 지나지 않으며 그 원은 여러 갈래로 꼬인 채찍 위에 얹혀서 좌우로 까딱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 난 다시 한 번 손을 들어올려 보려고 했어. 하지만 팔이 너무 무거워서 아래로 축 처지기 시작했어.

 

 

그라도프가 내게 의자에 앉으라고 했어, 자기 사무실에서는 누구나 서 있어야 하지만 내겐 특별히 허락해주겠다고 했어. 그런 말을 듣고 의자에 앉을 놈은 세상에 없을 거야. 그런데 난 앉았어. 마치 내 몸이 나와 분리되어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는 것 같았어.

 

 

그자가 서랍을 열더니 다른 서류를 꺼냈어. 낡고 오래된 종이 뭉치를. 그는 직인이 찍힌 그 서류 앞장을 내게 잠깐 보여주었어. 그리고 내 출신 성분에 대해 말했어. 12년 전 오늘 체포되어 사라진 세르게이 야스민의 서류를 읽었어. 그의 죄목과 재판정에서의 그의 항변, 수용소에서의 불복종과 징계, 치료, 그리고 죽음에 대해 연대기를 읽듯 기술했어. 그때쯤 난 이미 앉아 있는 게 아니라 엎드려 있었어. 의자가 아니라 바닥에.

 

 

그라도프가 다가왔어. 의자에 앉았어. 이콘 후광이 이제 위아래로 까딱거리며 여러 겹의 원으로 변했어. 서류 뭉치로 내 머리를 건드렸어. 종이 한 장이 바닥에 떨어져 바스락거렸어. 난 아마 영원히 그 빛바랜 종이 위에 떠올라온 글자들을 기억하겠지, 갈색의 둥근 커피 얼룩이 핏자국처럼 번져 있는 그 조서의 맨 윗줄에 씌어 있는 이름을. Е 모음이 반쯤 비스듬하게 걸려 있고 М의 끝부분이 반쯤 잘려나간 형태로 타이프된 세르게이 야스민이란 이름을.

 

 

후광을 얹은 채찍이 천천히 몸을 흔들면서 노래하듯 말하기 시작했어. 그건 장조였어, 그것도 4분의 2박자짜리 경박한 춤곡이었어.

 

 

 

 

아,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동지. 난 언제나 당과 사회를 비판하고 선동을 일삼는 놈들에겐 연민을 느끼지. 뭐 그놈들을 미워해본 적은 없어, 왜냐하면 그런 놈들 대부분은 구제불능의 알콜 중독자이며 수탉처럼 제 잘난 맛에 취해 사는 얼간이들이기 때문이지.

 

물론 그놈들은 몽땅 잡아들여야 해, 대부분은 재판에 회부할 필요조차 없어. 많은 경우 술병을 빼앗으면 얘기는 끝나. 어떤 놈들은 두들겨 패주면 되고, 어떤 놈들은 좀 귀찮긴 하지만 수용소에 처넣어 버릇을 고쳐주면 돼. 다들 정신을 차려. 선동자들이 가장 쉬워. 나사를 반대로 돌려주기만 하면 최고의 프로파간다 기술자가 될 수 있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내버려둔다 한들 큰 문제도 없어. 가끔 몇 놈을 붙잡아 들여 본보기를 보여주면 될 뿐, 그냥 떠들게 내버려둬도 괜찮아. 골치 아프게 굴면 그냥 미국 따위 제국주의자 놈들에게 추방해버리면 돼.

 

 

그런데 내가 아주 미워하는 애들이 있어. 정말 마음에 안 드는 놈들, 이토록 선량하고 교양 있는 나조차도 그런 녀석들은 아주 싫다는 생각이 들 정도야. 그건 말이지, 혼자 다니는 놈들이야. 모두가 노래할 때 혼자 침묵하는 녀석, 다같이 컨베이어 벨트를 돌릴 때 혼자 뒤돌아 서 있는 녀석, 동지들끼리 모여 차를 마실 때 길거리로 사라지는 녀석. 가끔 가다 보면 꼭 그런 인간이 있어. 차라리 떠들고 선동하는 놈들이 나아, 왜냐하면 그것들은 항상 여럿이 모여 있거든. 그리고 무리 짓는 인간들은 언제나 소비에트의 품에 안길 준비가 되어 있는 놈들이야.

 

문제는 바로 혼자 다니는 애들이야. 도무지 집단에 끼어들지 않는 놈, 미제 자본주의자들의 타락한 정신을 따라가는 놈. 줄을 서는 게 싫다는 이유로 빵과 우유를 사러 가지 않고 꼬박 며칠 동안 처자식을 굶기는 놈, 존경하는 레닌 동지와 레오니드 일리치 동지를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시해버리는 건방진 놈들, 차라리 소리 높여 욕하는 놈들이 훨씬 나아. 언제나 혼자 있으려고 하는 놈들, 자기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정하며 이 세상에서 혼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정신 나간 놈들, 그런 놈들이 제일 나빠.

 

그런데 그런 놈들 중에서도 더 악질적인 애들이 있어. 그건 바로 뭔가 내세울 게 있는 인간이야. 혼자 다니는 놈들 대부분은 병신들이야, 열등감에 사로잡힌 우울증 환자에 지나지 않아. 그런데 가끔 가다 뭔가 잘못된 경우가 있어. 누가 봐도 잘난 놈인데, 미래에 소비에트 영웅이 될 수도 있고 당으로부터 훈장을 받을 수도 있을 만큼 재능이 뛰어난 놈인데 궤도를 잘못 탄 거지.

 

난 그런 놈들을 오랫동안 유심히 관찰했어. 애초부터 우리 안에 끼어 있어야 정상인데 가족이나 환경을 잘못 만나면 그렇게 되는 거라고 결론을 내렸어. 예를 들어, 당원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교육을 잘 받고 콤소몰 경력도 나쁘지 않았던 남자가 당과 서기장과 국가 정책을 비방하며 선동을 일삼는 거야. 맨 처음엔 알콜 중독자가 아닌가, 나사를 조여주면 우리 쪽으로 돌아올 선동가 타입이 아닌가 의심을 해보지만 재판과 심문 결과 그자는 혼자 다니는 놈에 더 가깝다는 게 밝혀지지. 그런 인간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수용소의 강제 노동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어. 그래서 그자는 프시후슈카로 후송되지.

 

그럼 그런 인간을 아버지로 두고 자란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걸까? 운 좋게 어릴 때 아버지가 체포되었으니 완전한 악영향을 받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분명히 영향이 있었을 거야. 이미 얼룩이 튀어버린 거야. 그래서 엇나가기 시작하지. 이탈을 반복하고 춤을 핑계로 피오네르 활동과 이념 교육은 완전히 무시하지. 아마 콤소몰에도 가입하지 않으려고 버티겠지. 집단의 신성함 자체를 무시하고 언제나 혼자 생각하고 혼자 머리를 쳐들고 걸어가지. 그런데 재능이 있어, 그것도 눈을 의심할 만큼 분명하고 강력한 재능이. 그런 애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애들이라면 평생 영광으로 생각할 크레믈린 무대와 의원님의 초청을 헌신짝처럼 무시하고 달아나는 젊은이는 과연 우리에게 필요하기나 한 존재일까?

 

혹은, 이 건방진 녀석은 그저 자기를 후원하는 어마어마하게 높은 자리에 계신 각하의 위세를 믿고 까불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거라면 일은 간단하지, 각하들은 도처에 존재하며 언젠가는 권좌에서 내려오게 되어 있으니까. 그리고 높으신 분들이야 그런 꼬마들이 조금만 나이를 먹거나 미모가 손상되자마자 다른 애들로 갈아타는 게 습관처럼 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아무리 봐도 잘 모르겠어,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야스민 동지. 네가 어느 쪽인 건지. 아, 넌 그렇게 불리는 걸 싫어한다면서. 볼쇼이에 낸 서류에도 이름을 줄여 기재했던데. 부칭은 약자조차 쓰지 않았더군, 미샤 야스민. 그 볼품없이 짧은 이름이 전부였어. 그게 반동으로 체포되어 죽은 아버지 이름과 연관되는 게 싫어서라면 칭찬할 만한 일이겠지. 그런데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단 말이야.

 

그래, 널 뭐라고 불러야 할까. 미샤라고 부르기는 싫은데. 내가 아는 수많은 미샤들은 전부 모범적이고 착하고 순종적인 남자들이었지. 그건 보수적이고 영웅적인 소련 인민들의 이름이야. 차라리 미하일루슈카나 미슐랴는 어때? 그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는 어떻게 부르나, 귀여워하며 미셰츠카라고 부를까? 상투적으로 꼬마 비둘기, 작은 태양? 아니면 무대 위의 천사라고? 그래, 아마도 천사라고 부르겠지, 그게 높으신 분 성향에 더 맞을 테니까. 하긴 이름 따윈 아예 부르지도 않을 수도 있어. 그 얼음의 제왕은 자길 놀라게 하는 애들을 좋아하지. 그중 예쁜 애들은 데리고 자고. 계집애든 사내애든 관계없이.

 

오해하지 마, 미하일루슈카. 난 추기경 각하에겐 전혀 악감정이 없어. 우리도 그런 분은 건드리지 않아. 하지만 우리가 그 사람을 받들어 모신다고 해서 너까지 가만히 내버려둘 거라고 믿는다면 그건 오산이야.

 

 

 

 

그라도프가 내 팔을 잡아 일으켰어. 분명 발이 땅에 닿는 게 보였어, 내 발로 걷고 있는데도 다리에 감각이 하나도 없었어. 잿빛 벽 구석에는 문이 하나 더 있었어. 그는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어. 작은 직사각형 문이 열리자 냉기와 어둠이 뻗어 나왔어. 그 어둠이 너무나도 농밀하고 새까매서 냄새와 질감이 그대로 느껴질 정도였어. 왜 내 발이 바닥을 딛는 것은 느껴지지 않으면서 그 어둠의 촉감은 그토록 생생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어. 그러나 그 어둠은 내게 낯익었어.

 

 

내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어. 잠시 어둠 속에 잠겼을 때 그라도프의 숨결이 오른쪽 귓가에 와 닿았어. 건조하고 차가운 바람 같은 숨결이었어. 그는 내게 혼자 움직여 보라고 했어. 걸어보라고, 무대 위에서처럼 회전하고 뛰어올라보라고 했어. 그럴 수 있겠느냐고 물었어. 난 물론 그 개 같은 놈의 말을 무시하려고 했지. 그런데 내가 움직이지 않은 건 그놈의 명령에 불복종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어, 난 말 그대로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어. 심지어 내 힘으로 서 있는 것도 아니었어. 그라도프가 내 양쪽 어깨를 꽉 잡은 채 벽에 기대어 세워 놓고 있는 거였어.

 

 

도처에 어둠이 있었는데 그 어둠은 안팎에서 밀려나오고 있었어. 그때 그라도프가 스위치를 올려 불을 켰지. 그 방은 먼젓번 사무실보다 작았고 정방형이었어. 그건 끔찍한 방이었어. 온통 흰색으로 칠해진 방. 바닥조차 흰색이었어. 벽에는 결박 도구가 고정되어 있었고 이상한 모양의 의자가 하나 있었어. 스위치들과 전선들이 보였어. 방 한가운데에는 크롬으로 도금된 듯한 직사각형의 기다란 테이블이 놓여 있었어. 그리고 또다시, 그 어둠이 밀려들었어. 눈부신 형광등 빛과 정방형의 흰색들 사이에 그 어둠이 있었어.

 

 

안드레이, 나는 그게 뭔지 잘 알아. 그 어둠이 뭔지. 하지만 생각하고 싶지 않았어. 어쩌면 난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계속해서 춤을 추고 있었던 건지도 몰라. 그런데 그라도프가 그걸 알았던 걸까? 그럴 리가 없잖아, 그놈은 그저 독창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관료에 지나지 않아. 그놈이 협박에 사용한 문구들은 모두가 이전에도 신물 나게 써먹었던 표현에 지나지 않아, 분명 그놈들에게는 복사해 돌리는 심문 매뉴얼이 있을 거야. 그라도프는 그 어둠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 그 작자는 그저 약물을 썼을 뿐이야. 날 겁주기 위해. 길을 들이기 위해. 혹시라도 미래에 드러날지도 모르는 반항의 싹을 꺾기 위해. 그게 전부야. 하지만 왜 그런 공력을 들이는지 알 수가 없었어, 아직 졸업조차 하지 않은 내게, 극장 계약도 하지 않은 내게. 아마도 내 행동에 꼭지가 돌아버린 스비제르스키가 친분이 두터운 KGB 심문관을 매수해 내 버릇을 고쳐주라고 했던 걸지도 모르지. 아니면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를 실각시키기 위한 무수한 시도들의 일부였을지도.

 

 

그라도프가 약물에 대해 말했어. 우리 아버지에 대해 말했어. 프시후슈카에서 아버지에게 놓은 주사에 대해, 정신 교정 약물에 대해 설명했어. 우리 아버지는 2년을 채우지 못하고 죽었어, 시체를 발견한 간수는 심장 발작이라고 보고했지. 그때 그는 이미 한쪽 다리와 두 팔을 쓰지 못했어. 정신은 완전히 나가 있었어. 그라도프는 그게 약물 때문은 아니었다고, 그저 우리 아버지가 특이 체질이었을 뿐이며 그건 아마도 심장 발작이 아니라 정신병으로 인한 자살이었을 거라고 했어.

 

 

볼쇼이에 대해 대답한 이후 처음으로 난 입을 열었어. 그 개자식에게 헛소리 집어치우라고 했어. 우리 아버지를 죽인 것은 그 자신이 아니라 그 잘난 당과 소비에트 권력이라고 말했어.

 

 

그라도프는 화를 내거나 꾸짖지도 않았어. 단지 여전히 툭툭 긁히는 목소리로 자기는 여전히 우리 아버지가 자살했다고 믿는다고 했어. 스스로 목을 매거나 뛰어내리지 않았다고 해서 타살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세르게이 야스민은 어리석은 짓을 저질러서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간 것 자체에 책임이 있다고 했어. 자신은 언제나 그 약물의 효과에 감탄하곤 했다고 말했지. 만일 그 약물이 듣지 않았다면 그건 우리 아버지의 체질에 문제가 있었을 뿐이라고. 내가 믿지 않는 것 같은데 한번 실험을 해보자고 했어.

 

 

그리고 그자가 다시 주사를 놨어. 이마에. 그는 실험을 통해 확인하고 싶은 게 몇 가지 있다고 했어. 내게 기분이 어떤지 물었어. 손가락을 움직여보라고 했어, 원한다면 눈이라도 깜박여 보라고 했어.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 이콘 후광과 겹쳐진 채찍이 점점 사악하고 거대한 그림자로 변하고 있었어. 입술도 혀도 움직이지 않았어. 살아있는 박제가 된 것 같았어. 정말 박제가 맞았던 건지도 몰라. 그라도프가 나를 벽에 세워놓은 채 짐승 껍질을 벗기듯 옷과 신발을 모조리 벗겼는데 맨살에 공기가 와 닿는 순간 온몸이 그 자리에서 불타 없어지는 것 같았어. 너무나도 아프고 쓰라려서 견딜 수가 없었어.

 

 

 

 

 

...

 

 

 

미샤의 회상은 조금 더 계속되는데 일단 여기까지만... (좀 우울한 얘기들이라)

 

 

그라도프에 대한 미샤의 회상 중 아주 짧은 문단을 먼저 발췌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가브릴로프 본편 프리퀄인 미샤의 수용소 이야기와 함께 발췌했다(나의 이 우주에서 미샤는 여기 발췌된 그라도프와의 기분나쁜 심문 이후 약 8년만에 정신교화 수용소에 수감된다) 그때 발췌했던 얘긴 여기 :

http://tveye.tistory.com/4748  수용소, 심문자들, 유령들, 인체발화, 다시 세 개의 메모

 

이 수용소 프리퀄에 대해서는 전에 몇번 발췌한 적이 있다. 링크는 아래.


<2부 : 게오르기 벨스키와의 면회>

불과 바람, 물과 돌 : http://tveye.tistory.com/4502

 

<3부 : 스타니슬라프 일린과의 면회>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을때, 수용소 면회실에서의 조우 : http://tveye.tistory.com/4521

푸에테와 이반 왕자와 불새 : http://tveye.tistory.com/3613

농담에 약한 주인공, 타협, 장식품 애완견 샴페인 캐비아 : http://tveye.tistory.com/4468

견딜 수 있을만한 압력, 눈을 돌리고 넘어갈 수 있을만한 더러움 : http://tveye.tistory.com/4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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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무용수 사진 몇장.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와 미하일 바리쉬니코프.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청동기사상. 사진은 alex gouliaev)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청동기사상. 사진은 alex gouliaev)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젊은이와 죽음. 사진은 alex gouliaev)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젊은이와 죽음. 사진은 alex gouliaev)

 

 

 

미하일 바리쉬니코프. 사진은 nina alov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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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아주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판탄카 운하변에 위치한 k갤러리에서 로버트 휘트먼의 'Baryshnikov by me'라는 사진전시가 개최되고 있어 거기 다녀왔다. 입장료는 100루블. 생각보다는 소규모 전시였다. 90년대부터 2015년까지 미국 사진작가 휘트먼이 바리쉬니코프의 패션, 광고, 일상, 여행, 리허설 등의 사진을 찍은 것들인데 인터뷰 필름을 보니 뻬쩨르의 k갤러리 측에서 사진을 보고 전시를 제의해서 성사되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무대 사진들은 없다. 휘트먼의 인터뷰를 보니 바리쉬니코프는 자기보고 춤추라는 사진작가를 싫어한다고 했다. 그럴수도 있겠다 싶다. 그리고 바리쉬니코프 자신도 꽤 사진을 잘 찍는 사람이기도 하고...

 

90년대 이후부터 찍은 것들이라 사진 속의 바리쉬니코프는 이미 나이든 예술가의 모습이다. 주름진 얼굴과 손이 역력하다. 하지만 그의 눈은 매처럼 번득이고 몸짓 하나하나가 살아 있다. 나이든 바리쉬니코프의 모습조차도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당신, 내 인생을 바꾼 사람 중 하나였죠. 유일무이한 예술가. 미하일 바리쉬니코프.

 

갤러리에서 찍은 사진들 올려본다. 전시된 모든 사진은 Robert Whitman의 작품들.

 

 

 

여기가 전시장인 k갤러리. 판탄카 운하변에 있다.

 

 

별도의 리플렛 없이 이렇게 조그만 엽서 크기 전단으로 대신.

 

오픈했을 땐 무용수들도 많이 보러 왔었는데 나는 개막날을 놓쳐서 ㅠㅠ 그때 왔으면 유명 무용수들 많이 봤을텐데 아쉽다.

 

아래부터는 Whitman의 사진들 찍은 것. 화보집 있으면 사고팠는데 안 팔았음.

 

 

 

폰으로 소리없이 찍느라 화질은 그냥 그렇다만... 사진들은 좀더 있었는데 나나 관객들이 많이 반사된 사진들은 뺐다.

 

고마워요, 미하일. 존재해줘서 고마워요.

 

:
Posted by liontamer

 

 

 

<첫번째 메모 : 2016.5.21>

 

 

지난주에 발췌했던 강령과 교조주의에 대한 이야기에 세번의 메모를 덧붙였는데 오늘 올리는 글도 비슷하다. 다만 두개의 글에 대한 세개의 메모라는 것이 좀 다를 뿐이다.

 

 

첫번째 글은 2013년 2월부터 두달 동안 프라하에 체류할 때 쓴 것이다. 지금 쓰고 있는 가브릴로프 본편의 프리퀄에 해당한다. 그 소설은 나의 주인공 미샤가 정신교화 수용소에 끌려가 겪는 일과 그 이후 클리닉, 면회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루고 있다. 순서대로 1부, 2부, 3부로 구성된다.

 

 

여기 발췌한 글은 1부 초중반부에 해당한다. 1부는 의대생 출신의 수용소 간수이자 약물 심문관 라브로프의 조수인 이오시프 흘레브니코프라는 청년의 심리적 관점에서 서술된다(이름이 너무 길고 어려운가ㅠㅠ) 2부는 미샤의 후원자 중 하나인 당 고위직 의원 게오르기 벨스키, 3부는 미샤의 친구 스타니슬라프 일린의 관점에서 서술되는데 이 두 파트는 이전에도 두어번 발췌해 올린 적이 있다. 1부는 처음이다.

 

 

그리고 아래에 짧게 인용된 두번째 글은 2012년 겨울부터 2013년 1월까지 썼던 소설의 중반부에 해당된다. 플롯 전개상 일일이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이유로 인해 모르핀에 취한 미샤가 친구이자 애인인 트로이에게 자신의 첫 수용소 기억을 털어놓는 장면 일부이다. 첫번째 글과 두번째 글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물론 시간적인 배경은 다르지만. 두번째 글에서 언급되는 미샤의 회상은 첫번째 글보다 약 8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앞서 언급했듯 첫번째 글의 심리적 화자는 간수이자 심문 조수인 이오시프 흘레브니코프이다. 파벨 슈스코프와 데미얀 라브로프는 둘다 정신교화 수용소의 심문관으로 전자는 심리조작과 교화, 후자는 약물교화를 책임지고 있다. 33번은 미샤에게 매겨진 죄수 번호이다. 슈스코프가 말하는 'ШЛ. No 2'는 '슈스코프-라브로프 요법'이라는 정신교화 프로그램들 중 하나이다. 둘의 성 약자를 딴 것이다.

 

 

슈스코프가 중간에 언급하는 슈로프스카야는 이전에 트로이와 친구들 에피소드에서 몇번 등장했던 알리사의 성이다.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인 1981년 즈음 그녀는 런던의 러시아 대사관에서 KGB 요원으로 일하고 있다.

 

 

흘레브니코프의 독백에 등장하는 토냐는 그의 옛 여자친구이다. (서무 시리즈에 나오는 발레리나 토냐와는 다른 인물이다. 노어 이름 짓기 귀찮아 ㅠ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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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슈스코프가 어떤 식으로 교육을 진행하는지 전혀 몰랐다. 그쪽에 대한 임무는 담당 죄수를 슈스코프의 교육실까지 호송하고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 라브로프의 방으로 다시 데리고 오는 데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슈스코프에게는 별도의 보조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흘레브니코프와는 달리 전문가들이었고 하잘것없는 간수 신분이 아니었다. 주워듣기로는 파벨 슈스코프의 재교육은 폴츠키의 사정없는 물리적 폭력보다, 그리고 라브로프의 끔찍한 화학 실험보다 더 지독하다고 했다. 어떤 정치범 하나는 프로그램 시작 사흘 만에 그 재교육실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라브로프의 마약을 계속 맞겠다고 울부짖으며 소동을 피우기도 했다. 흘레브니코프는 그놈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센터 내에서 가장 음산하고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인물은 소장인 글루크도, 새디스트인 라브로프도, 뼈와 근육을 손대지 않고도 최악의 고통을 선사하는 데 도가 튼 폴츠키도 아니고 바로 파벨 슈스코프였기 때문이다.

 

 

슈스코프는 완전한 대머리에 광택 없는 조그만 단추 같은 갈색 눈과 끝이 치켜 올라간 얇은 입술의 조그만 남자였는데 전신이 둥글었고 무두질한 양가죽을 뒤집어쓴 듯 반질반질하고 부드러웠다.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흘레브니코프는 그 매끄럽고 부드러우며 아무런 음률 변화가 없는 단조로운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소름이 끼쳤고 전혀 깜박이는 일이 없는 듯한 그 조그맣고 둥근 눈을 보면 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마치 아주 오래된 흑백 만화에서 일어나 나온 사람처럼 완벽한 잉크로 그려진 선과 매끄러운 감촉만을 지닌 채 피도 살도 무게도 없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뱀 같기도 했는데 그렇게 느낀 건 흘레브니코프 뿐 만이 아니어서 죄수들은 그를 코브라라고 불렀다. 사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간수들도 종종 그 별명을 불렀다. 그리고 죄수들 못지않게 그를 두려워했다.

 

 

그건 글루크나 라브로프를 향한 감정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였다. 사람들은 글루크를 경멸했고 라브로프는 혐오했다. 그러나 슈스코프만은 두려워했다. 보그단조차도 슈스코프 앞에서는 설설 기었고 사상 재교육은 받아 본 적도 없으면서도 그 음습하고 어두운 교육실 얘기만 나오면 남몰래 부르르 떨곤 했다. 그 교육실에 들어갔다 나온 정치범들은 며칠 이상 버티지 못했다. 대부분 얌전해졌고 일시적인 효과에 지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어쨌든 뜨거운 충심과 후회로 가득한 선언문을 몇 장씩 쓰고 모범수로 탈바꿈하는 노력을 보여주었다. 물론 그게 모두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일 리는 없었다. 그 변모의 밑바닥을 지배하고 있는 건 윤리적 개심이라기보다는 공포였다.

 

 

33번은 그런 축에 속하지 않았다. 그는 슈스코프 앞에서 단 한 번도 고개를 숙이거나 공포에 떤 적이 없었다. 물론 흘레브니코프는 그 어두컴컴한 교육실 안에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그 안에서 33번이 어떻게 구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나왔을 때도 33번은 다른 죄수들처럼 울거나 공포에 질리거나 분노에 차 고함을 지르지 않았다. 복도나 라브로프의 방, 혹은 센터 내의 다른 곳에서 슈스코프와 마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흘레브니코프는 파벨 슈스코프의 그 광택 없는 조그만 눈을 똑바로 응시하는 죄수를 그전까지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슈스코프가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도 그 전까지는 본 적이 없었다.

 

 

그때 33번은 재교육실이 아니라 라브로프의 방에 있었다. 라브로프는 슈스코프나 폴츠키와는 달리 자신의 교육실을 언제나 ‘방’이라고 불렀다. 흘레브니코프는 ‘실험실’이란 표현이 더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프로그램을 시작한지 닷새 째였고 라브로프는 칸막이 뒤로 자리를 비킨 후였다. 표면적으로는 그날의 칵테일 제조를 위해서였지만 실은 슈스코프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오전에 진행된 사상 재교육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던 것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슈스코프가 자신의 교육실을 떠나 그것도 라브로프의 방에 들어오는 일은 거의 없었으므로 흘레브니코프는 자신과는 관계도 없으면서도 공연히 긴장했다. 행여 폭력성 발작을 일으킬 경우 재빠르게 제압하기 위해 33번의 뒤에 서 있긴 했지만 사실 그건 불필요한 행위였다. 첫날의 소동 이후 라브로프는 약물을 주사할 때마다 33번의 양 손목에 모두 수갑을 채웠기 때문이다.

 

 

슈스코프는 수갑을 쓰지 않았다.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죄수를 결박하거나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의 프로그램에서 육체적 폭력은 오로지 1단계에서만 찾아볼 수 있었다. 그것도 보그단 같은 대리인을 통해서만 이루어졌다. 슈스코프 자신은 결코 죄수에게 손을 대지 않았고 욕설이나 비속어를 쓰는 일도 없었다. 결코 서두르는 적도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파벨 슈스코프가 약간 상기된 얼굴로 갑자기 불쑥 들어와 33번의 성을 호명했을 때 흘레브니코프뿐만 아니라 라브로프마저도 놀랐다. 라브로프가 약물을 섞으러 들어갔을 때 슈스코프는 그 자리에 선 채 낮은 목소리로 몇 가지를 묻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는 33번을 자리에 앉히는 것도 잊었다. 키가 작은 슈스코프는 언제나 죄수를 앉힌 후 위에서 내려다보곤 했는데 지금은 깜박임도 없는 조그만 단추 같은 눈을 위로 향한 채 33번의 창백하고 갸름한 얼굴에 구멍이라도 뚫을 듯 날카로운 시선을 내쏘고 있었다.

 

 

흘레브니코프는 물론 슈스코프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가능한 한 빨리 그 섬뜩한 인물이 용건을 마치고 나가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33번은 슈스코프의 질문에 거의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않았고 두어 번 아주 짧게 ‘아니오’, ‘모릅니다’ 라는 단어를 내뱉었을 뿐이었다. 그러자 슈스코프의 목소리가 변했다. 요철 없는 부드러운 실크 같던 목소리가 사라지고 역시 매끈하지만 차디찬 알루미늄 같은 음성이 울려나왔다. 완벽하게 단조롭고 차가운 말투였지만 깊은 곳 어딘가에 증오와 분노가 스며들어 있었다. 흘레브니코프조차도 고개를 돌려 슈스코프 쪽을 힐끗 쳐다봤을 정도였다.

 

 

“ 그래, 정말 아는 게 없다고 우기고 싶은 모양이군. 르 몽드도, 타임즈도, 그 우스꽝스러운 구명위원회도. 그 방송 말이야, 네가 이송된 날짜까지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던데. 비공개 재판 정보도. 그런데도 전혀 모른다고? 본부에 줄을 대고 있는 놈이 없다고? 그 슈로프스카야는 어때? 뛰어난 요원이지, 네 친구잖아. ”

 

 

그때 처음으로 33번이 몸을 희미하게 떨었다. 하지만 그건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그 검은 눈에 다시 그 파란 불꽃이 일었기 때문이다.

 

 

“ 그 여잔 대사관 직원이에요.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건 5년 전이고. ”

 

“ 아, 대사관 직원. 정말 그렇게 믿었던 건 아니잖아. 그랬을 리가. 넌 똑똑하잖아, 그 바닥에서 보기 드물 정도로. 애초부터 직업을 잘못 택했어. 작가가 되지 그랬나, 아니면 물리학자라도. 안 그래도 파리에서 널 솔제니친, 사하로프 운운하며 헛소리를 하고 있으니까. 어차피 이제 그 몸은 쓰지도 못하게 될 텐데. ”

 

 

이제 슈스코프의 매끄러운 목소리에는 노골적인 증오가 뒤섞이고 있었다.

 

 

“ 어떨까, 런던에 소환장을 보내면. 그 여자와 마주앉아 보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지. ”

 

“ 소환해봤자 달라질 건 없어요. 정말 모르는 일이니까. ”

 

“ 상관없어. 누구든 하나는 잡아들여야 할 테니까. ”

 

 

그때 흘레브니코프는 그 빨간 불빛을 보았다. 한순간 라브로프의 방 전체로 페인트를 끼얹은 듯, 화재가 난 듯 이글거리는 붉은색 그림자가 밀려드는 것 같았다. 30센티미터 이상 떨어진 뒤에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흘레브니코프는 33번의 몸에서, 수갑이 채워진 채 미동도 없이 똑바로 서 있는 그 야윈 몸에서 달궈진 쇠처럼 뜨거운 열기가 폭발하듯 번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마치 그놈이 횃불처럼 순식간에 확 타올라 사방으로 불꽃을 내뿜을 것 같았다.

 

 

슈스코프도 그 빨간 불빛을 본 것이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아무런 광채도 감각도 없는 그 둥근 눈에 붉은 그림자가 반사되면서 당혹스러운 분노가 스멀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33번의 입에서 발음이 또렷하고 명료하며 아주 침착하고 건조해서 마치 라디오 방송을 연상시키는 음성이 밀려나왔을 때 그 분노는 슈스코프의 광대뼈와 입술 언저리까지 퍼져 나갔다.

 

 

“ 아, 당신들은 항상 그런 식이지. 일단 약한 자를 제물로 삼지. 그런 연결 고리가 없으면 만들어내면 그만이야. 그 여잔 희생양으로 삼기엔 너무 뻔한 인물이라는 생각은 안 드나? ”

 

 

흘레브니코프는 슈스코프가 33번의 얼굴을 내리칠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파벨 슈스코프는 오른손을 거의 어깨 높이까지 들어올렸다. 반질반질하고 매끄럽던 얼굴 전체가 바싹 구겨진 양피지처럼 쭈글쭈글하게 주름졌다. 갈색의 구슬을 박아 넣은 듯한 두 눈이 순간 파삭 하는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날 것 같았다. 그는 슈스코프가 그토록 평정을 잃은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파벨 슈스코프는 잠시 손바닥을 들어 올린 채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다섯 개의 뭉툭하고 통통한 손가락이 부채처럼 활짝 펼쳐져 희미하게 꿈틀거렸다. 33번은 여전히 붉은 불빛을 켠 까만 눈으로 그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흘레브니코프는 그 미친놈이 타고 있다고 생각했다.

 

 

‘ 타고 있어, 불타고 있어. 인체발화에 대한 얘길 토냐가 해준 적이 있었는데. 난 그걸 믿어본 적이 없었지. 저 자식 타고 있어, 완전히 타버릴 거야. 재도 안 남기고 불타 없어질 거야. 오 하느님, 실험실에 불이 옮겨 붙을 거예요. 센터가 다 타버릴 거예요. 토냐, 저 자식 타고 있어. 코브라는 왜 저렇게 심호흡만 하면서 손을 파닥이고 있는 거지? 아, 저 미친놈. ’

 

 

 

마침내 슈스코프가 들어 올렸던 손을 내렸다. 일그러졌던 얼굴에서 주름이 사라지며 다시 부드러운 가죽을 뒤집어씌운 듯 매끄럽게 변했다. 그는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고 33번의 주위를 아주 천천히 반 바퀴 돌았다. 왼쪽으로 돌아왔을 때 슈스코프는 멈추었고 오른손 검지와 중지로 그 젊은 죄수의 목을 가볍게 눌렀다. 맥이 뛰는 곳 바로 위를.

 

 

“ 아주 좋아, 미하일. 계속 그렇게 멀쩡한 척 하고 있어. 허세 부려봐. 만사가 잘돼가고 있는 것처럼. 무서운 것도 없고 다 괜찮은 것처럼. 아프지도 않은 것처럼. 이토록 태연하고 침착한 연기를 할 수 있다니, 진작 인민예술가 쯤 달아줬어야 할 걸 그랬지. 하긴 훈장도 두어 개 받았지, 공훈예술가 직함도. 다 박탈당한 게 문제지만. ”

 

 

그는 라브로프의 칸막이 쪽에 힐끗 시선을 던지며 더욱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 안됐지만 난 알아, 지금 아프다는 거. 네가 무서워한다는 것도. 모든 프로그램들에는 예외가 존재하지. 과학자들과 심리학자들, 의사들은 그걸 잘 알아. 그 예외들이 반응하는 법칙도. 넌 'ШЛ. No 2'의 예외지. 그런데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아? 그 프로그램의 효과가 아예 없다는 게 아냐. 설마 그럴 리가. 그저 다르게 작용한다는 것뿐이지. 넌 아마 내 앞에선 끝까지 버틸 수도 있을 거야. 사상 재교육 따위 끝까지 무시하겠지, 거기선 네 목을 비틀고 죽인다 해도 아마 두려워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애초부터 그렇게 생겨먹은 놈이니까. 그런데 이 방에서는 다르지.

 

난 알고 있어, 넌 내 교육보다 약물 교화를 더 두려워해. 정신이 나가버리는 것보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걸 더 끔찍하게 생각하지. 아, 지금은 좀 견딜 만하겠지, 마지막 주사로부터 24시간이 지났으니까. 아픈 것도 덜하고 다리도 뜻대로 움직이겠지. 잘 알잖아, 곧 다시 아파질 거야. 어지러워질 거고 열이 오르고 마비될 거야. 울게 될 거야. 아무도 널 위해 와주지 않아. 파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든 그건 너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네가 여기서 팔다리가 잘리든 숨이 넘어가서 관에 실려 나가든 이제 그놈들은 절대 모를 테니까.

 

네 교화나 개심 따위 사실 관심 없어. 백만에 한 놈 꼴로 끝까지 안 넘어오는 놈이 있어. 그게 너라고 해도 놀랍지 않아. 상관도 없고. 우리끼리니까 좀 솔직하게 얘기해줄까? 난 네가 넘어오지 않는 편이 더 좋아. 그래야 이 방에 계속 집어넣을 수 있으니까. 난 너 같은 놈을 좋아하지 않아. 넌 우리에겐 아무런 쓸모도 없는 인간이야. 네 그 알량한 재능 따윈 우리에겐 그냥 쓰레기야, 아니, 쓰레기보다 더 나쁘지. 더럽고 유해한 것도 모자라 전염성까지 갖췄으니까. 그건 박멸해야 할 해충이나 다름없어. 그냥 허세 부려, 그렇게 고개 쳐들고 괜찮은 척 버티고 있어. 난 네 시체를 치우는 걸 정말 보고 싶으니까. 그땐 이미 꼼짝도 할 수 없을 거야, 눈썹 하나 움직이지 못하겠지. 네 아비처럼. ”

 

 

 

그 순간 33번의 눈에서 불빛이 꺼졌다. 빨간 불빛과 파란 불꽃 모두, 한 순간에 전구가 터진 것처럼 완벽하게 모든 광채와 열기가 사라졌다. 하지만 흘레브니코프는 그게 슈스코프의 말 때문이라기보다는 칸막이 뒤에서 라브로프가 나왔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흘레브니코프는 슈스코프의 그 부드럽고 음산한 장광설 중에서 딱 한 가지만 제대로 이해하고 공감했다. 33번은 슈스코프보다 라브로프를 더 두려워했다. 아니, 그 약물을.

 

 

그는 33번이 첫인상처럼 부드럽고 가냘픈 타입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아주 단단하고 강한 몸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보그단은 그 곱상한 얼굴에 눈이 멀었던 게 분명했다. 날씬하고 사지가 긴 그 몸은 사실 강철과 채찍에 가까웠다. 흘레브니코프는 토냐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열심히 체육관에 다니던 시절에도 그렇게 섬세하고 단단한 근육으로 치밀하게 조직된 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약물 프로그램을 시작한지 사흘 째 되던 날 라브로프가 그의 어깨와 등에 찬물을 쏟아 부었을 때 33번은 거의 호흡이 멎을 만큼 괴롭게 경련을 일으키며 나뒹굴었다. 2단계. 흘레브니코프는 입 안으로 중얼거렸다. 기말시험을 앞둔 의대생처럼. 모든 감각이 수십 수백 배로 예민해지는 단계. 스쳐지나가는 입김조차 칼날처럼 파고드는 통증으로 변형되는 단계. 차디찬 물을 뒤집어썼을 때 33번은 아무리 그게 물이라고 현실을 인식해보려고 애써도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그건 차라리 황산을 뒤집어쓴 듯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차갑다기보다는 뜨거웠을 것이고 그보다는 아팠을 것이다. 뼈와 가죽을 태워 들어가는 것처럼. 라브로프가 물을 마저 쏟아 부었을 때 33번은 기절했는데 3단계로 돌입해 독방으로 옮겨지기 전에 그런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라브로프가 보는 앞에서는 더더욱.

 

 

“ 정말 실망이야, 잘 버틸 줄 알았는데. 넌 심지어 안경잡이 인텔리겐치야 나부랭이들보다 더 금방 나가떨어지잖아. 그런 몸을 갖고도. 이제 겨우 사흘밖에 안됐는데. ”

 

 

흘레브니코프는 라브로프가 다소 과장된 표현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전 대상자들에게는 3일 연속으로 그 약물을 주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라브로프의 실망에도 일리는 있었다. 33번은 다른 정치범보다 반응 속도가 빠른 편이었고 약 기운에서 풀려나는데도 더 오래 걸렸다. 보통 미성년자이거나 신체가 허약한 경우 그럴 가능성이 많았지만 물론 그는 양쪽 모두 해당되지 않았다. 라브로프의 명령에 따라 흘레브니코프는 그 성가신 죄수를 독방으로 옮겼다. 흠뻑 젖은 옷을 벗긴 후 보풀이 가득한 얇은 모포를 대충 뒤집어씌우면서 그는 왜 라브로프가 ‘그런 몸을 갖고도’ 라고 비아냥거렸는지 깨달았다. 그렇게 탄탄하고 강해 보이는 몸을 갖고도. 그때에야 흘레브니코프는 그 미친놈이 두 손만 가지고 보그단을 병신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납득했고 동시에 라브로프의 약물 칵테일은 체질량 지수나 근력과는 별도로 작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라브로프가 칸막이 뒤에서 나왔을 때 슈스코프가 손짓을 했다. 둘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는데 흘레브니코프는 단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프로그램에 대한 전문 용어와 자신들만의 속어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슈스코프가 완벽하게 평정을 찾은 모습으로 방을 나갔다. 33번에게는 눈 한 번 돌리지 않았다. 라브로프는 다시 칸막이 뒤로 들어갔고 10여 분 후에 나와서 자신의 실험 대상자 곁으로 다가왔다.

 

 

“ 그래, 파리에서 그렇게 난리란 말이지. 그런데 당사자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누가 정보를 실어 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거지? 뭐 그럴 수도 있겠지. 난 파벨처럼 널 과대평가하지 않으니까. 그래봤자 너 별로 똑똑하지도 않잖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더 모르겠지. 그전까지는 매사가 아주 쉬웠을 테니까.

 

파벨이 믿어주지 않는다고 너무 억울해할 것 없어. 이제 진짜 아무 것도 모르게 될 거야. 그럼 파벨도 더 이상 널 의심하지 않을 걸. 아니, 어쩌면 귀여워하게 될지도 몰라. 아주 착해질 테니까. 이제껏 내가 이걸로 실패한 적은 없었거든. 파벨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화학이 언제나 심리학에 우선해. 난 너 바꿔놓을 거야, 미셰츠카. 착한 애가 되고 나면 나한테 감사하게 될 걸. 난 극장 좋아해. 파벨과 달라. 널 잘 만져서 다시 태어나게 해줄 거야. 그럼 정말 나한테 감사하게 되겠지. 모스크바에서 다시 불러줄지 누가 알아? 그럼 난 네 무대 보러 가서 감동해 울지도 몰라. 그러니까 먼저 착해져야지, 안 그래? ”

 

 

그날 라브로프는 새 칵테일을 만들었다. 흘레브니코프는 약물의 색깔을 보고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마 33번도 알았을 것이다. 바늘을 찔러 넣고 천천히 약물을 주입했을 때 33번이 처음으로 욕을 했다. 아주 낮아서 짐승들이나 낼 수 있을 것 같은 소리였다. 아랫배와 흉곽 안쪽 어딘가에서 밀려올라오는 조그맣고 낮은 울음소리 같았는데 자음은 거의 모두 뭉개져 있었다. 1단계는 5분으로 급속하게 축소되었다. 2단계와 3단계는 거의 동시에 왔다. 라브로프가 촉매제를 추가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날 라브로프는 투약 회수를 2회로 늘렸다. 주임 의사는 매우 바쁘고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저녁의 두 번째 주사는 흘레브니코프에게 일임했다. 매우 바쁘지만 하찮은 인물인 이오시프 흘레브니코프는 물론 명령에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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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와 첫번째 메모 : 2013.3월~5월>

 

 

라브로프와 슈스코프는 그 전형성에도 불구하고 쓰는 즐거움이 적지 않은 인물들이었다. 거의 언제나, 재수 없는 인물에 대해 쓰는 것이 고결한 인물을 그리는 것보다 흥미롭고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전에 1부를 쓰는 도중에 슈스코프에 대한 메모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 적이 있다. 1부를 마칠 때까지 그 인물의 성격은 거의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잠깐 발췌해 본다.

 

 

이 글을 위해 나는 수용소에 존재하는 인물들 몇명을 새로 만들었다. 그 중 하나가 1부의 심리적 화자인 흘레브니코프이다.(흑빵이란 어근 가진 그 사람) 발췌한 부분에 등장하는 파벨 슈스코프는 일종의 사상 재교육관이다.

 

저자의 원형은 1월에 마친 장편에서 잠깐 등장한 루뱐카 KGB 본부의 그라도프 라는 인물이다. 그라도프는 환각에 취한 주인공의 기억 속에서 기술되기 때문에 다분히 환상적이며 일종의 캐리커처에 가까웠다. 그 일그러진 만화 같은 인물을 좀더 동글동글하게 빚어서 뭉쳐내고 확장시킨 인물이 파벨 슈스코프이다. 저 사람은 꽤나 중요한 인물이지만 그렇게 많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의 짝패이자 2인자이며 약물 교화를 진행하는 주임 의사인 라브로프가 훨씬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런 성격의 두 분신이 존재하는 경우 진짜는 언제나 슈스코프 같은 인물이다.

(2013.3.15)

 

 

나는 ‘진짜’라는 표현을 썼지만 어쩌면 라브로프가 슈스코프의 덜돼먹은 유령이듯 파벨 슈스코프도 ‘Nights With No Shadows’에 등장했던 심문관 그라도프의 뒤틀린 시뮬라크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들 전형적이고 가학적인 꼭두각시들, 전체주의의 메아리 유령들로 얼기설기 구축된 피라미드 맨 위에는 아마도 게르만 스비제르스키가 있을 것이다. 그 사악한 인물이야 성격이 좀 다르긴 하지만.

(2013.4.2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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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래의 두번째 글은 위의 메모에 등장한 모스크바 KGB 루뱐카 본부의 심문관 그라도프에 대한 미샤의 뒤틀린 기억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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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긴 일반적인 사무실이나 다름이 없었어. 책상이 있고 의자가 있었어. 서랍과 캐비닛이. 회색 벽이 있었어. 그림도 걸려 있었지. 말레비치 모사품이. 거기 그자가 기다리고 있었어. 성은 그라도프. 이름은 몰라. 직위도 계급도. 채찍을 몇 갈래로 꼬아서 맨 위에 이콘 후광처럼 둥그런 머리를 얹어놓은 것처럼 보였어. 그런데 그 실루엣 밖에는 기억이 나지 않아. 키도, 체격도, 얼굴도, 아무 것도. 기억나는 건 채찍 위의 이콘 후광뿐이야. 건드리면 굴러 떨어질 것처럼 보였어.

 

심지어 목소리조차 기억나지 않아. 그는 낮고 툭툭 긁히는 어조로 말했는데 그 모든 말들은 타자기로 찍어내는 단어들처럼 하나하나 튀어나와 지루한 공산주의 선언문처럼 눈앞의 잿빛 벽에 등사되는 것 같았어. 나는 그의 말을 듣는다기보다는 읽었어. 어쩌면 그건 주사 때문이었을지도 몰라. 그자의 사무실에 들어오기 직전에 비서실에 앉아 있던 어떤 여자가 내 소매를 걷더니 바늘을 찔러 넣었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마치 검역이나 예방접종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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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광을 얹은 채찍이 천천히 몸을 흔들면서 노래하듯 말하기 시작했어. 그건 장조였어, 그것도 4분의 2박자짜리 경박한 춤곡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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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글이 수록된 수용소 프리퀄에 대해서는 이전에 ABOUT WRTING 폴더에 몇번 발췌한 적이 있다. 그 링크는 아래.

 

 

<2부 : 게오르기 벨스키와의 면회>

불과 바람, 물과 돌 : http://tveye.tistory.com/4502

 

<3부 : 스타니슬라프 일린과의 면회>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을때, 수용소 면회실에서의 조우 : http://tveye.tistory.com/4521

푸에테와 이반 왕자와 불새 : http://tveye.tistory.com/3613

농담에 약한 주인공, 타협, 장식품 애완견 샴페인 캐비아 : http://tveye.tistory.com/4468

견딜 수 있을만한 압력, 눈을 돌리고 넘어갈 수 있을만한 더러움 : http://tveye.tistory.com/4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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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얘기였다만...

 

아래 사진은 명확히 위의 글들과 연관은 없지만 흘레브니코프가 인체발화와 짐승에 대해 생각하는 장면과 조금 느낌이 비슷해서 올려본다. 미하일 바리쉬니코프. 그는 1970년대 중반 미국으로 망명했다. 라트비아태생. 아직도 러시아에는 돌아와 공연한 적이 없다. 누레예프는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레닌그라드와 우파를 방문했고 키로프 무대에도 올라간 적이 있었다.

 

이 사진은 정말로 마음을 사로잡는다.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노 무용수의 얼굴에 새겨진 연륜과 여전히 타오르는 불꽃, 치열한 시선. 그는 미하일 바리쉬니코프이고 역시 유일무이한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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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진짜 우울했으니까, 조금 마음을 달래는 사진 :)

 

본편의 미샤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산짐승이나 숲고양이, 표범 등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지녔지만 본편 패러디인 서무의 슬픔 시리즈의 왕재수는 오리지널 미샤보다 무엇이든 조금씩 귀여워지고 어린애 같아지기 때문에... 단추 베르닌 역시 그를 고양이 같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눈에 비친 왕재수 미샤의 고양이 이미지는 이런 것...

 

 

이 사진 처음 본 순간 기절할만큼 귀엽다고 생각했다 >.<

진짜 고양이는 아니고 표범, 살쾡이 등등 고양이과 친척 동물들 중 하나의 새끼임.. 아아, 저 눈 좀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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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아주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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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소련 시절 박해를 받은 후 미국으로 망명했던 시인 이오시프 브로드스키와 역시 같은 소련 레닌그라드 출신으로 망명했던 무용수 미하일 바리쉬니코프. 1985년 사진. 좋아하는 사진이다. 아마 영어식으로는 조셉 브로드스키라고 통용되는 듯.

 

작년에 바리쉬니코프는 리가의 극장에서 브로드스키를 소재로 한 공연에 출연하기도 했다.

 

문학과 무용, 두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거장들이 빛 바랜 사진 안에 함께 있는 것을 보면 기분이 묘하다.

 

개인적으로 브로드스키의 작품은 딱히 내 취향은 아니지만 같은 망명 작가이자 그의 지인이었던 세르게이 도블라토프는 아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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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 28. 06:23

미하일 바리쉬니코프, 생일 축하해요 dance2016. 1. 28. 06:23





하루 늦긴 했지만..

1월 27일은 유일무이한 무용수 미하일 바리쉬니코프가 태어난 날이다. 올해로 68세가 되었지만 여전히 무대에 올라간다. 최근엔 이오시프 브로드스키를 소재로 한 연극에 출연.


생일 축하해요, 미샤.




이오시프 브로드스키와 바리쉬니코프 옛 사진도 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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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은 모차르트 생일이기도 하고 레닌그라드가 2차대전 당시 약 3년의 끔찍한 봉쇄에서 풀려난 날이기도 해서 타임라인이 여러가지로 복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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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올라온 사진. 옛날에 어느 스크랩북에서 이 사진 첨 보고 엄청 갖고파했던 기억이 난다. 이젠 클릭 한번이면 이미지 저장이 되니 참 좋은 시대인가...


사진은 Guy Bourdin


미하일 바리쉬니코프. 나에게 러시아어 전공하게 만든 두사람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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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 18. 14:58

춤, 무용수들, 극장 사진 몇 장 dance2015. 10. 18. 14:58

 

 

마음의 위안을 위해.

마린스키 발레단 '곱사등이 망아지' 홍보 이미지. 왼편에 있는 여왕 역은 알리나 소모바.

러시아어를 아신다면 이 무대 세트 자체로 '곱사등이 망아지'라는 러시아어 제목을 형상화하고 있는 게 보이실듯. 재기넘치고 발랄한 이미지이다.

 

 

 

미하일 바리쉬니코프. 최근.

1948년 1월생이니 올해로 67세이지만 여전히 춤을 춘다. 여전히 근사하다.

이번에 소련 시절 미국으로 망명했던 시인 브로드스키를 소재로 한 작품 무대에 올랐다. 아침에 꽤 장문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무용수로서도 위대하지만 굉장히 똑똑하기도 한 사람이다.

내게 러시아어를 전공하게 했던 두 사람 중 하나.

 

 

 

이 사람은 마린스키 발레단의 신예 무용수 다비드 잘례예프.

사진은 '아가씨와 건달' 중 주인공 건달을 추는 모습.

 

 

 

 

 

위안을 위해 슈클랴로프 화보 몇 장.

저승 세계의 오르페우스, 유리 스메칼로프 안무.

사진은 Irina Tuminene

출처는 슈클랴로프의 인스타그램.

 

 

 

사진은 alex gouliaev.

신데렐라의 왕자를 추는 중. 출처는 슈클랴로프의 인스타그램.

 

 

 

라이몬다. 빅토리야 테료쉬키나와 함께.

사진은 Matt Masin.

 

 

 

라이몬다.

옥사나 스코릭과 함께.

이 아름다운 극장은 마린스키.

 

 

 

이건 마린스키 극장 브 콘탁테 페이지에서.

마린스키 신관 무대 백스테이지. 발레 '카니발' 시작 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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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5. 7. 2. 23:09

미하일 바리쉬니코프 사진 세 장 dance2015. 7. 2. 23:09

 

 

너무 힘든 하루였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위안을 위해 미하일 바리쉬니코프 사진 세 장

출처는 사진의 서명대로 Russian Imperial Ballet.

 

내가 좋아하는 연습실 사진 두 장과 도약하는 사진 한 장을 골라봤다.

 

당신 때문에 러시아어 전공하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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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5. 3. 23. 21:48

미하일 바리쉬니코프, '카르멘' 중에서 dance2015. 3. 23. 21:48

 

 

 

매우 힘든 월요일이니 피로를 달래기 위해.. 아끼는 영상 하나 올려본다 :)

최고의 무용수!! 미하일 바리쉬니코프의 '카르멘' 클립.

브라보!!

 

.. 당신 때문에 노어 전공했다고요 흐흑....

(엄밀히 말하면 당신이랑 도씨 아저씨.. 내 인생 책임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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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