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년쯤 전에 나는 가브릴로프 본편을 시작했다가 잘 풀리지 않아서 그 본편에 삽입될 에피소드 하나를 독립된 단편으로 먼저 썼다. 지방 소도시인 가브릴로프의 시립극장 예술감독으로 부임한 나의 주인공 미샤가 그곳 오케스트라의 실력자이자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인 로만 코즐로프와 의견 충돌을 일으킨 후 하룻밤을 보내고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는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코즐로프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코즐로프는 이 본편의 외전 격인 서무의 슬픔 시리즈 때문에 어린 애인에게 폭 빠진 다혈질의 흑염소 아저씨(ㅜㅜ)이자 바이올린 깡패로 등극하게 되었지만 원래 본편에선 그런 막가파 캐릭터는 아니었다(아무래도 서무 시리즈 때문에 코즐로프가 제일 웃기게 변한듯... 손해봤어 ㅠㅠ)
하여튼 그 에피소드는 생각보다는 좀 길어서 실제 본편이 씌어졌을 때는 좀 손을 봐야 할테지만 지금으로선 그냥 독립적인 단편으로 존재하고 있다. 제목은 매우 단순하게도 '밤'(night) 이었는데 다른 제목을 굳이 붙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누군가가 누군가를 만나 밤을 보내고 사랑에 빠지는 무수한 이야기 중 하나일 뿐이니까. 우습지만 이 이야기를 처음 발췌했을 때 후반부에 둘이 사과파이 먹는 장면을 인용했기 때문에 종종 '사과파이 단편'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있다. (서무 시리즈에서 왕재수가 사과파이를 좋아하는 걸로 설정된 건 사실 이 단편 때문이다)
이 단편은 전에 사과파이 에피소드나 미샤가 백조 솔로를 추는 씬, 그리고 전반부 1~2장 전체를 발췌한 적이 있다. 그냥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술을 못 마시는 미샤가 보드카를 실컷 퍼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어 코즐로프의 집에서 밤을 보내는 얘기다. 어떤 이야기들이든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간단해지는 법이다.
아래 발췌한 부분은 거의 후반부이다. 이 이야기 앞뒤 에피소드도 전에 발췌한 적 있다. 그 링크들은 이야기 아래에 따로...
초반에 언급되는 게오르기 벨스키는 미샤를 후원하는 공산당 고위 간부로 예전에도 종종 언급된 적이 있다. 수감된 미샤를 빼내 가브릴로프로 보내는데 큰 공헌을 한 사람이다. 중간에 언급되는 아르카지는 이 이야기에서 극장 카페 매니저로 등장하는 인물이고(서무 시리즈에도 나왔다. 보르쉬에 물타는 사람. 이 이야기에서는 보드카에 물을 탄다. 물타기 전문가 ㅋㅋ), 나중에 언급되는 딤카 아르부조프는 물론 가상의 인물로 내가 만들어낸 사람이다.
맨 위의 사진은 연습실의 파루흐 루지마토프. 사진사는 캡션대로 marina bakano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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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입은 후 미샤는 거실로 갔다. 내겐 묻지도 않고 티 테이블을 옆으로 밀어놓더니 스트레칭을 했다. 동작 하나하나가 유연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문득 자식이 춤을 추는 걸 보고 싶어졌지만 춰달라고 하지는 않았다. 얼간이처럼 보일 테니까.
그 애는 단 한번, 왼쪽 발끝으로 선 채 오른쪽 다리를 길게 내뻗었을 뿐이었다. 낯간지러운 말이지만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포즈였다. 지금껏 그런 깨끗하고 근사한 동작을 본 적이 있나 싶었다. 하긴 오케스트라 핏에 들어가 있으면 연주자는 무용수의 동작을 볼 수 없다. 그건 지휘자의 몫이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빌어먹을 저 꼬마는 나에게 연주를 바꿔달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아침이 되자 더 이상 부아가 치밀지 않았다. 그깟 연주 바꿔주면 그만이다. 저런 동작을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다. 그럴 자격이 있는 놈이었다. 분명 바닥을 딛고 있는데도 자식은 날아오르는 새처럼 보였다. 왜 양키들과 유럽 부르주아들이 자식을 낚아채려고 했는지 이해가 갔다. 우리 연방 관객들이 그 애를 볼 때마다 천사라고 불렀던 이유도.
나는 이제 벨스키가 그 아이를 구해내려고 했던 이유도 알 것 같았다. 게오르기 벨스키. 이 촌 동네에서 자라나 어마어마하게 출세한 남자. 우리 극장 발레리나를 어머니로 둔 남자. 그래서 극장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정치국 의원. 미샤가 그 대단한 의원님의 침대를 데워주는 노리개였든 아니든 그건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아름다움은 흔한 것이 아니다. 평생 한번 볼까 말까한 것이다. 그런 희귀한 재능을 가진 아이가 눈앞에 있다면, 정신병자들이 득실거리는 수용소에서 죽어가게 된다면 내가 벨스키라 해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무대를 직접 본 것도, 제대로 된 연속 동작을 본 것도 아니면서, 그저 완전히 정지한 채 날아오르는 그 포즈 하나밖에 보지 못했으면서도 나는 그 아이의 모든 것을 용서했다. 순식간에 홀려버렸다. 숭배하게 되었다. 우스운 것은 아무리 유명하고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를 들었을 때도 그런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역시 나는 음악가가 아니라 그저 연주자 나부랭이에 불과했다.
“ 회전. 푸에테라고 하나? 그거 보고 싶은데. ”
나도 모르게 속마음을 불쑥 입 밖에 내버렸다. 미샤는 왼쪽 허리와 허벅지를 주무르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 미안. 이제 못해. ”
“ 왜, 무대 안 올라가서 몸이 굳어서? 방금 아라베스크는 좋았는데. ”
“ 중심이 여기 와야 하거든. 힘이 안 들어가. ”
그 애의 손이 왼쪽 골반 위에 놓였다. 바지와 허리끈과 셔츠로 가려져 있었지만 그 뱀처럼 부풀어 오른 상처가 그대로 보이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끔찍한 살인 충동을 느꼈다. 그자들 전부. 상처를 만들어 놓은 자들, 저 몸을 망가뜨린 놈들, 저 꼬마를 체포하고 더러운 짓을 자행한 놈들을 하나하나 찾아내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 충동이 너무나 뜨겁고 격렬해서 나는 몸을 떨었다.
미샤는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계속해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무심하게 덧붙였을 뿐이었다.
“ 몸이 굳기도 했지. 오래 안 췄어. 2월에 은퇴했으니까. ”
“ 오래는 무슨. 그래봤자 반 년 밖에 더 돼? ”
“ 부상당했을 때도 그렇게 오래 쉰 적 없었어. ”
“ 나으면 굳은 것도 다 풀리겠지. 그럼 우리 무대에 올라갈 거야? ”
“ 아니. 은퇴했다니까. ”
“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주제에 잘도 떠드는군. 음악도 못 따라가는 우리 무용수들 때문에 돌아버릴 지경 아니야? 그 꼴을 한 달만 더 보면 열 받아서 직접 올라가겠다고 나서겠지. 그 성깔에 그러고도 남을 게 뻔해. ”
“ 걔들 헐뜯지 마. 도와주면 나아질 거야. ”
“ 그럼 다들 너처럼 출 수 있게 되나? 그렇게 믿는 건 아니잖아. ”
“ 다들 나처럼 추면 재미없잖아. ”
“ 아, 혼자 잘나야 하는데 그게 안돼서? ”
“ 당신은 옆에 있는 바이올리니스트와 똑같이 연주하면 좋아? ”
잠깐 말문이 막혔다. 내겐 드문 일이었다. 미샤는 내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았는지 바닥에 주저앉아 다리를 완벽하게 일직선으로 뻗었다. 나는 언제나 남자 무용수들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신체적으로 불가능한 동작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잠시 후 그 아이는 오른쪽 무릎을 꺾어 다리를 옆으로 들어올렸다. 왼쪽도 반복했다. 다섯 번쯤 반복했을 때 낮게 신음하며 한 손으로 다시 그 왼쪽 골반의 상처를 가볍게 눌렀다. 그래도 멈추지는 않았다. 일어나서 다시 무릎을 구부렸다 폈고 연속으로 스트레칭을 몇 개 했다.
“ 매일 그렇게 해? ”
“ 일어나면. ”
“ 은퇴했다면서. ”
“ 그거랑 달라. ”
“ 글쎄, 다른 것 같지 않은데. 무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
“ 그냥 운동하는 거야. 움직여야 하거든. 많이. ”
“ 그건 우리 의사 선생의 처방인가? ”
“ 절반쯤은. ”
미샤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얼굴이 사과처럼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기껏 샤워까지 해놓고 도로 땀을 흘리는 짓을 하다니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어쨌든 무용수였던 놈이니까 나와는 사고방식이 완전히 다를 것이다. 나는 그 아이가 다른 동작들을 더 보여주기를 기다렸다. 춤을 추지 않는다 해도 좋았다. 최소한 그 아라베스크라도 한 번 더 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미샤는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몸을 길게 뻗은 채. 두 팔을 옆으로 벌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자식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힘이 들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스트레칭과 기본 동작만으로도 힘이 든다는 사실에 화가 난 건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 일어나는 게 좋을 걸, 그 카펫 더러워. ”
“ 괜찮아, 당신 옷이니까. ”
“ 그렇게 힘들어? 하긴 빈속에 몸을 그렇게 많이 움직였으니 힘들기도 하겠군. ”
“ 아니, 어지러워. 다 깬 줄 알았는데. 역시 밀주였어. ”
“ 아르카지가 물 탔다고 몇 번을 말해. ”
“ 또 토하면 당신 화낼 거야? ”
“ 언제 남이 화내는 거 신경이라도 썼나? 자기밖에 모르는 애송이가. ”
“ 당신이 화내는 건 별로야. ”
“ 왜? ”
“ 화나면 팰 거잖아. 아팠다니까. ”
농담을 하고 있었다. 이제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자식은 농담을 제대로 할 줄 몰랐다. 제대로 된 러시아 놈이 아니었다.
“ 어차피 가는 데마다 더럽힌 거 여기 토한다고 뭐가 달라진다고. ”
“ 카펫은 여분 없을 거 아냐. ”
“ 난 부르주아가 아니라서. ”
“ 아, 낡은 단어. ”
미샤는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았다. 이제 토하려나보다 싶어 티 테이블 위에 있던 쟁반을 낚아채 입가에 대 주었지만 자식은 살짝 잠긴 목소리로 부드럽게 속삭였다.
“ 바이올린 켜, 로만. ”
“ 내가 왜. ”
“ 듣고 싶으니까. ”
“ 미안하지만 여긴 극장이 아니라서, 감독님 명령은 안 통해. ”
“ 부탁하는 건데. ”
“ 삼류 연주 들어서 뭐해. ”
“ 왜 그런 식으로 말해? 싫지 않았다니까. ”
“ 싫지 않다는 건 보통이란 얘기고 그건 별로란 뜻이야. ”
“ 난 별로인 사람한테는 부탁 안 해. ”
나는 바이올린을 가져왔다. 활을 잡다가 자식이 바이올린을 켤 줄 아는지 문득 궁금해져서 물어보았다.
“ 조금. 학교 다닐 때 키로프 연주자한테 배웠어. ”
“ 누구? ”
“ 딤카 아르부조프. ”
잠시 내 귀를 의심했다. 잘 아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드미트리 아르부조프, 키로프 오케스트라 수석. 역시 놀던 물이 달랐다.
“ 화려한 이름이군. 그래서 그렇게 잘난 척 한 거야? 그냥 전업하시지. 내 자리 내줄까? ”
“ 기본만 배웠어. ”
“ 왜, 음악도 잘 안다고 뻐기더니. 연주 쪽 재주는 없었나? ”
“ 활 쓰는 건 안 맞더라고. 춤 출 때 쓰는 근육이랑 달라서 연습하고 나면 어깨가 많이 당겼어. 피아노는 좀 나았어. ”
“ 끝까지 못한다는 말은 안 하는군. ”
“ 못해, 바이올린은. 그래도 들을 줄은 알아. ”
나는 뒷골이 띵하도록 부담감을 느꼈다. 그러다가 어차피 차원이 다른 놈이니 내가 뭘 어떻게 하든 삼류로 들릴 게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홧김에 아무 거나 켜기 시작했다.
...
전에 발췌했던 이 이야기의 여러 토막들에 대한 링크는 아래. 포스팅 순서가 아니라 이야기 속의 시간 순서에 따라 재배열함.
맨 앞 부분(Night : 코즐로프와 미샤의 이야기 중에서) : http://tveye.tistory.com/4118
숙취로 고생하는 미샤와 차이코프스키에 대한 대화 : http://tveye.tistory.com/3253
발췌본 바로 앞 이야기(아침, 여분의 수완, 바느질) : http://tveye.tistory.com/3465
발췌본 바로 다음 이야기(백조 솔로를 추는 미샤) : http://tveye.tistory.com/3146
사과파이를 먹는 코즐로프와 미샤 : http://tveye.tistory.com/3165
..
아라베스크를 비롯한 무용수 화보 몇 장.
미샤의 움직임이나 육체적 특성을 지닌 모델 중 하나인 블라지미르 말라호프.
블라지미르 말라호프
블라지미르 말라호프
역시 블라지미르 말라호프. 빈사의 백조 추는 중.
프리드리만 보겔.
이 사람은 연기력이 별로라 딱 내 취향의 무용수는 아닌데 포즈나 몸의 선이 아름다워서 화보는 항상 근사하다.
프리드리만 보겔 한 장 더. 연습실.
이고리 콜브.
그리고 팬심으로 역시 지나칠 수 없는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화보 두 장. alex gouliaev의 사진. le parc
슈클랴로프.
절친인 유리 스메칼로프가 안무한 나르키소스를 위한 레퀴엠 중.
마지막은 궁극의 백조, 울리야나 로파트키나.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