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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 28. 17:01

마지막 말보로, 제목 + about writing2024. 1. 28. 17:01

 

 

 

 

2주 전에 마친 글을 퇴고 중인데 당초 생각했던 것만큼 많이 손을 보고 있지는 않다. 발췌한 파트는 글의 중반부. 새벽에 옥상에서 마주친 마냐가 미샤와 함께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다. 이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냐의 1인칭으로 전개된다.

 

 

발췌한 파트에 등장한 이름 몇 개는 모두 마냐, 미샤와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다. 사르바르는 마냐의 깡패 기둥서방. 제냐는 이전에 계속 썼던 이 90년대 페테르부르크 이야기의 주인공인 게냐. 본명은 예브게니이고 제냐가 가장 흔한 애칭이다. 본인은 스스로도 그렇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는 제냐보다는 게냐라고 불리는 편을 선호한다. 그래서 마냐는 당연히 그를 제냐라고 부른다. 마냐와는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 바냐는 게냐의 남동생. 리디야는 게냐의 옛 여자친구이다. 일년 전쯤 마쳤던 단편 <구름 속의 뼈>에서 '리다'라는 애칭으로 등장했었다. 그 이야기는 여러 차례 일부를 발췌했었고 전문도 올려두었다(암호가 걸려 있긴 한데 읽다보면 나옴) 이 이야기는 그 <구름 속의 뼈>보다 6~7개월 쯤 전인 97년 4월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글은 접어둔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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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어요. 수명이 다 됐는지 불이 잘 켜지지 않았어요. 핏핏거리며 파란 불꽃이 잠깐 번쩍이다 꺼져버렸어요. 미샤가 내 손에서 라이터를 받아들더니 한 번에 켜서 담배에 불을 붙여줬어요. 나는 라이터를 잘 켜는 남자를 좋아해요. 그런 남자들은 가스렌지에도 불을 잘 붙이죠. 보답으로 나는 그에게 한 대 피우라고 권했어요. 아, 좋아요, 좋아. 사실 그 사람이 담배 피우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었어요. 틀림없이 멋질 테니까요. 하잘것없는 놈들은 담배를 피워도 추접스러워 보이지만 잘생긴 남자들은 안 그래요. 그야말로 섹시하죠.

 

 

 미샤는 고맙다고 하면서 담배를 받아들었어요. 사르바르나 손님들에게 하듯 내 담배로 불을 붙여주고 싶었지만 어쩐지 쑥스러워서 그냥 라이터를 건네주었죠. 그는 이번에도 불을 한방에 붙였어요.

 

 

 우리는 난간 벽에 기대앉아 담배를 피웠어요. 시멘트 바닥을 깔고 앉은 채 등에 벽이 닿자 두려움이 가셨어요. 이제 떨어질 일이 없을 테니까요. 코끝에는 아직도 화약 냄새가 약간 남아 있었지만 담배를 깊이 빨아들이자 온몸을 어루만지는 듯한 특유의 그 알싸한 독기가 스며들면서 말보로 냄새로 바뀌었어요. 그러고 보니 이것도 바냐가 가져다준 거네요. 이제 말보로는 다 피우고 없어요. 그러자 미샤에게 내 마지막 말보로 한 대를 건네줬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아깝다기보다는 뿌듯했어요. 두 번째 모금을 더 깊이 빨아들였다가 내뱉으면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틈타 나는 미샤를 훔쳐보았어요. 역시 기대 이상으로 멋졌어요. 담배를 끼운 손가락도 길고 근사했고 연기를 빨아들였다가 천천히 뿜어내는 모습은 꼭 프랑스 영화배우 같았어요. 아니, 정말 영화배우인가? 바냐가 영화 어쩌고 하는 말도 해줬던 것 같은데. 아 맙소사, 모든 게 뒤죽박죽이에요. 그 애송이가 하는 얘길 좀 잘 들어둘걸.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 생각해서 무시했었거든요. 그러자 또 위장이 콕콕 쑤셨어요.

 

 

 그런데 미샤는 두 모금밖에 피우지 못했어요. 기침을 심하게 했거든요. 세 번째로 빨아들였을 때 목에 걸린 듯 괴로워했어요. 프랑스 영화배우처럼 피운다는 말은 취소예요. 아까웠는지 담배를 버리지는 못하고 그대로 한 손에 쥔 채 한 손으로는 입을 막고 한참 기침을 했어요. 나는 모르는 척하고 계속 담배를 피웠지만 좀처럼 기침이 멎지 않자 그 사람 등을 가볍게 쓸어주면서 손에서 담배를 빼앗았어요. 

 

 

 “ 바보같이. 담배 피울 줄 모르면서. ”

 

 

 미샤는 기침을 하느라 대답을 하지 못했어요. 하긴 말보로가 독하긴 하죠. 난 아직 반쯤 남아 있는 내 담배를 바닥에 비벼 껐어요. 가뜩이나 피우지도 못하는 담배를 빨다가 기침을 하는 사람에게 내 연기를 마시게 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아 맞다! 남자들은 이런 꼴 보여주는 거 엄청 싫어하는데. 그것도 여자 앞에서는. 괜히 담배를 줬나 봐요. 아앗, 그러고 보니 담배 못 피운다고 확인 사살까지 해버렸네요. 정말 난 왜 이 모양인지...

 

 

 간신히 기침이 멎었을 때 미샤가 숨을 몰아쉬고는 바닥에 구겨서 버린 내 꽁초를 바라보며 아쉬워했어요.

 

 

 “ 다 안 피웠는데. 나 때문에. ”

 

 “ 그깟 말보로. ”

 

 “ 말보로가 그깟인가? ”

 

 

 미샤는 잔기침을 하면서도 웃었어요. 내 손에는 아직 담배가 한 개비 더 쥐어져 있었어요. 미샤가 세 번도 못 피우고 실패한 그 마지막 말보로. 나는 두근대는 가슴으로 한번 시도해보기로 했어요. 자기가 피우던 담배를 내가 입술로 가져가 마저 피워도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건 이 남자가 신호를 받아주는 거죠. 그러면 난 가만히 그의 손등을 쓰다듬을 거고 곧 더 아래로 손을 가져갈 거예요. 보통은 그렇게 하지요. 말을 하기 쑥스러워하는 남자들이 있거든요. 제대로 된 유혹을 받고 싶어 하는 남자들도 있고요. 대부분은 곧장 흥정을 하고 지퍼를 내리지만요.

 

 

 미샤는 내가 자기 담배를 마저 피우게 내버려 두지 않았어요. 한 손을 뻗어 담배를 낚아챘거든요. 하지만 못돼먹게 거절한 건 아니었어요. 부드럽게 말했지요.

 

 

 “ 감기에 옮을 거예요. ”

 

 “ 정말 감기예요? 못 피우는 게 아니고? ”

 

 “ 잘 못 피워요. 그래도 기침만 안 나오면 한두 개비는 괜찮은데. ”

 

 

 신호가 통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조금 실망했지만 거짓말 같지는 않았어요. 아까부터 계속 기침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춤을 출 때부터. 그 춤을 본 게 벌써 한참 전의 일 같았어요. 꿈이었을지도 몰라요. 미샤는 고개를 돌리고는 다시 기침을 했어요. 그렇군요, 거짓말은 아니었어요. 가슴이 쿵쿵 울리는 기침이었거든요. 문득 걱정이 됐어요.

 

 

 “ 감기 걸렸으면서 왜 한밤중에 나온 거예요? 옷도 이렇게 얇게 입고. ”

 

 “ 좀 답답했거든요. 바람 쐬고 싶었어요. ”

 

 

 하긴 그래요, 나도 사르바르 때문에 빡치고 가슴이 너무 갑갑해서 올라온 거니까요. 창문을 열 수도 있었을 텐데. 문득 나는 그가 제냐의 방에 있었을 거라고, 창문을 열어서 찬바람이 들어오면 제냐가 깰까 봐 신경이 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냐와 내 방은 거의 완전히 똑같거든요. 기다란 직사각형 모양의 원룸 끝에 아주 좁은 베란다로 나가는 창문이 달려있어서 창을 열면 그대로 바람이 들어와요. 우리 층이랑 걔네 층은 주인이 같으니까요. 방 다섯 개짜리 코무날카 두 개를 조각조각 쪼개서 세를 놨는데 당연히 화장실과 샤워부스가 딸린 쪽이 더 비싸죠. 나는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샤워부스가 딸린 방에 살고 있어요. 차를 권하러 들렀을 때 보니 제냐네 방도 나랑 똑같았어요. 훨씬 더 썰렁하긴 했지만요. 아무래도 사내애가 사는 곳이고 제냐는 집에 자주 들어오는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침대도 내 것보다 작았어요. 제냐는 그렇게도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데. 그 방에는 소파도 없었어요. 의자 몇 개랑 식탁만 있었죠. 아마 제냐는 그 좁은 침대에서 그 금발머리 리디야를 꼭 끌어안고 자곤 했겠죠. 

 

 

 

 

 

 

 

 

 

..

 

 

 

 

 

말보로에 대한 얘기는 그 뒤에도 좀 이어진다. 

 

 

 

나는 이 단편을 상당히 즐겁게 썼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표현이다만. 어쨌든 작년 여름까지 썼던 코스챠와 알리사의 이야기인 <프티치예 말라코>보다는 이 글을 쓰기가 더 수월했고 쓰는 재미도 더 있었다. 아마 전자가 겉으로는 더 가벼워보이지만 사실은 무거운 편이었고 당시 여러가지 생각으로 마음이 산란했기 때문에. 그리고 후자는 인물들 자체에 대한 접근이 더 쉬웠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훨씬 편한 화법을 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제를 붙여두었는데 아직 퇴고를 다 마치지 않았고 제목도 최종 결정은 하지 않았다. 쓰는 내내 <마냐와 미샤>라고 불렀고 이따금 짧게는 그냥 <마냐>라고 불렀다. <구름 속의 뼈>를 쓰는 내내 <게냐와 리다> 혹은 그냥 <리다>라고 불렀던 것처럼. 제목을 그냥 다 이렇게 붙여버리면 좀 편할 것 같은데. 제목 짓는 게 제일 어려움. 이 단편 제목을 그냥 쉽게 <말보로, 허브차, 라마> 비슷하게 붙여버릴까 싶기도 했지만 그러지는 않을 것 같다. 

 

 

 

 

 

 

 

 

 

사진은 지난 가을, 바르샤바의 어느 이름 모를 언덕의 공원. 발췌한 글과는 장소도 시간도 낮과 밤도 완전히 다르지만. 하여튼, 이때 이 공원의 나무 그늘에 앉아 싸늘한 바람을 맞으며 자두를 먹었다. 말보로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구름과자 연기가 피어올랐다. 위에 발췌한 파트는 처음부터 상세하게 구상해둔 장면이긴 했지만, 여행에서 돌아와 시간이 흐른 후 이 부분을 쓰는 동안 저 공원 생각이 조금 났었다. 

 

 

 

 

 

 

 

아마 이 때와 바람은 비슷하게 싸늘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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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