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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5. 5. 17:39

구름 속의 뼈 (Part 1) about writing2023. 5. 5. 17:39

 

 

 

 

이 글은 작년 한 해 동안 조금씩, 꾸준히 썼다. 약 100페이지 가량이고 호흡도 조금은 더 긴 편이라 단편이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아서 그냥 중편이라고 부르고 있다. 제목은 '구름 속의 뼈'. 제목에 대해서는 이전에 이 writing 폴더의 어느 발췌글에서 몇 줄 써보기도 했다. 더 잘 맞는 다른 제목이 떠오른다면 바꿀 마음도 여전히 있다. 

 

 

 

소설은 1997년 11월, 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은 젊은 무용수인 예브게니 카르사비예프, 애칭은 게냐. 그리고 그의 옛 여자친구이자 노브이 루스키(소련 붕괴 후 급속도로 부를 축적한 비즈니스맨-신흥 러시아인-을 가리키는 당시 신조어였다)와 결혼한 리디야(애칭은 리다, 리도츠카)이다. 그리고 소설에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둘의 대화와 게냐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미샤. 이 셋의 이야기를 다룬다. 공간적으로는 페테르부르크 바실리예프스키 섬 변두리의 바닷가 쪽 동네인 프리모르스카야 지구의 프리발티스카야 호텔에서 시작해 호텔 근처에 있는 아파트, 그리고 바실리예프스키 섬 중심가에 있는 미샤의 발레단 스튜디오, 네바 강변, 마지막으로는 아브보드느이 운하 근방에 있는 게냐의 원룸 아파트로 이동한다. 나는 지난 2년 동안 이 90년대 말을 다룬 글을 세 편 썼다. 시간적으로는 이 이야기가 중간에 위치하지만 쓴 건 가장 나중이었다. 전체적으로 이 세 편의 소설들은 촉망받는 젊은 무용수인 게냐가 자기 장래에 대해 고민하고 또 예술가로서든 애인으로서든 또는 이해할 수 없는 또 다른 측면에서든 미샤와의 관계에 대해 의문하고 헤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당시 시대와 사회적 배경이 스며든다. 그것은 내가 직접 겪었던 시기이기 때문에 예전 글들과는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묘사된다. 

 

 

 

이 중편은 총 5개의 파트로 이루어진다.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 아니었으나 쓰면서 자연스럽게 파트를 매기게 되었다. 대부분은 공간적 이동을 따른다. 1, 2만 빼고. 

 

 

 

일년 동안이나 느릿느릿 썼던 글이라 쓰는 도중에 파편들을 발췌한 적이 많다. 어쨌든 파트 1 전문을 올려본다. 초반에 언급되는 에브로파, 아스토리야, 네프스키 팔라스는 페테르부르크 중심가의 고급 호텔들이다. 그리고 이야기가 진행되는 프리발티스카야 호텔은 바실리예프스키 섬 외곽의 바닷가에 있는 4성 호텔이다. 나는 오래 전 그 호텔 근처의 기숙사에서 살았다. 리다와 게냐가 재회하는 프리발티스카야 호텔의 2층 카페에도 이따금 가곤 했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구름 속의 뼈

Кисти в Облака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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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711, 프리발티스카야 호텔, 페테르부르크

 

 

 

문을 열고 로비로 들어가자 언제나처럼 비누와 세제, 수증기 냄새가 뒤섞인 후끈한 공기가 덮쳐왔다. 리다는 목욕탕에 온 것 같아서 좋다고 했다. 여기는 들어오면 따뜻하고 널찍하고 깨끗하고, 젠체하는 사람들도 없고. 에브로파나 아스토리야에선 이런 냄새가 안 나거든. 그러니까 여기가 제일 좋아. 그러면 나는 그 말을 그대로 믿곤 했다. 리다와 사귀던 시절엔 주머니 사정 때문에 그런 최고급 호텔에는 거의 발을 들여놓았던 적이 없었고 기껏해야 극장 행사 때문에 몇 차례 끌려갔던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이후 미샤와 이따금 그 두 호텔 카페에 들르게 되면서 리다의 말이 절반쯤은 옳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에브로파와 아스토리야는 이렇게 대놓고 사우나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로비는 항상 북적거리고 외국인들과 양복을 빼입은 비즈니스맨들과 번쩍거리는 베르사체 셔츠에 트레이닝 바지를 입은 노브이 루스키, 백금발로 염색하고 가짜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모피를 걸친 창녀들이 우아하게 오간다. 공기는 후끈하다기보다는 약간 서늘하고, 무겁게 깔리는 고급 향수 냄새와 하이힐이 매끄러운 바닥에 또각거리며 부딪치는 소리, 거의 한 덩어리로 뭉쳐져 알아들을 수 없는 소음으로 느껴지는 영어와 외국어들과 우리말과 전화벨 소리, 트렁크 바퀴가 구르는 소리가 온통 뒤엉킨다. 밝고 우아하고 동시에 돈 냄새가 넘쳐나서 어딘가 조금 천박하게 느껴진다. 미샤가 업무 미팅이나 인터뷰 장소를 다른 곳으로 잡으면 더 좋았겠지만 두 곳 모두 네프스키 한가운데와 이삭 광장 맞은편이라는 위치상의 엄청난 장점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잘 모르고 또 이해하고 싶지 않은 어떤 비즈니스 전략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라면 갈런드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설명해줄 준비가 되어 있을 테지만 나는 물론 그 자본주의 장광설에 자진해서 코를 처박을 생각은 없었다. 그저 어느 날 딱 한 번, 미샤에게 미팅 약속이 아닐 때는 굳이 여기서 차를 마시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고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을 뿐이었다. 에브로파와 아스토리야는 이름값만큼 차 한 잔 값도 비쌌고 그렇다고 그만큼 맛이 훌륭한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미샤는 자기 정도 되는 사람이면 매일같이 최고급 호텔에서 차를 마시는 법이라고 당연한 답을 하는 대신 눈을 둥그렇게 떴고 잠시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에 잠겼다. 한 번도 그런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마침내 그는 그러고 보니 그렇네, 집 앞 카페가 더 나은 것 같아, 몇 배는 싸고. 바깥으로 운하도 보이고. 그냥 습관이 돼서 그런가 봐. 옛날부터 자주 왔거든. 지나도 그렇고. 전엔 여기가 그렇게 비싸지 않았어. 국립대 다니는 애들도 자주 왔고라고 말했다. 그럴 때면 나는 그와 나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시간과 인식의 거리를 깨닫고 내심 놀라곤 한다. 그건 공식적인 일의 영역과는 다른 층위의 거리이다. 스튜디오와 극장에서 그는 명확하게 리더이며 윗사람이다. 동시에 그런 위계와는 아무 상관 없이, 나와 같은 무용수다. 미샤가 무대에 올라가는 일이 별로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를 언제나 무용수라고 생각한다. 일상에서도 미샤는 딱히 어른처럼 구는 적이 없어서 내게는 그가 소위 옛날 사람이란 생각이 잘 들지 않는다. 이따금 이런 말을 들을 때에야 비로소 아 그렇군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뭐 단어만 놓고 치자면 리다도 국립대 다니는 애들에 속했다. 그저 시대가 다를 뿐이다. 리다는 일부러 에브로파에 가서 편지를 부쳤다. 순전히 그곳의 호사스러운 레스토랑에 드나드는 같은 학부의 부잣집 여자애들에게 꿀리지 않으려고. 에브로파에서는 외국인 관광객과 비즈니스맨을 대상으로 달러를 갈취하기 위해 요금이 몇 배로 비싼 특송 우편센터를 차려놓고 있었는데 길만 건너면 우체국이 있었고 리다에겐 딱히 편지를 보낼만한 외국의 친척이나 지인이 없었으므로 이건 정말 바보짓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너 도쿄에 다녀온 적 있잖아. 그쪽 아는 사람 주소라도 줘라고 했고 결국 나는 도쿄문예회관과 발레 마스터클래스에서 딱 한 번 만났던 그쪽 안무가에게 새해 인사 엽서를 써야 했다.

 

 

프리발티스카야 호텔은 당연히 에브로파나 아스토리야와는 다르다. 위치도 바실리 섬 외곽이고 가격도 더 저렴하다. 물론 창녀들은 많았다. 그건 어디나 마찬가지니까. 이쪽 투숙객들은 훨씬 실용적인 사람들이고 외국인들은 운동선수들이나 무슨 대회에 참석하는 단체 손님들, 패키지여행을 온 핀란드인들이나 독일인들이 대부분이다. 사업가들도 있겠지만 에브로파와 아스토리야, 네프스키 팔라스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보다는 급수가 낮다. 혹은, 굳이 전략적으로 허세를 부리지 않아도 될 만한 사람들이다. 차림새도 한결 검소하다. 가끔은 아시아 쪽 관광객이나 사업가들도 보인다. 리다는 호텔 로비에서 동양인들을 발견하면 저 사람은 일본, 저 사람은 한국, 저 사람은 대만 쪽인 것 같아하고 정확하게 찍어냈다. 그리고는 어떻게든 곁에 가서 말을 걸어보곤 했다. 나와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일본어를 전공하고 있었지만 거기 더해 한국어까지 열성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수교 이후 그쪽 전망이 밝다는 거였다. 발레학교에 일본과 한국에서 온 여자애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툭하면 놀러 오려고 해서 난감했다.

 

 

이른 오후였기 때문에 로비는 조용하고 한산했다. 리다의 말대로 이곳은 따뜻하고 널찍하다. 냄새도 다르다. 하지만 그러니까 제일 좋아에 해당되는 건 아니다. 그냥 괜찮은 4성 호텔이고 미샤의 말에 따르면 소련 올림픽 스타일의광활하고 어둑어둑하고 휑한 괴물이다. 하긴 70년대 말인지 80년대 초에 세워진 호텔이니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미샤는 이 호텔 개소식에도 참석했고(그의 표현대로라면 끌려갔고’), 요즘도 해외 방문객들이 여기 묵으면 종종 만나러 간다. 물론 지리적 이점 때문이다. 우리 발레단 스튜디오가 바실리 섬에 있으니까. 하지만 그는 이 호텔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미샤야 첫인상과는 달리 양질의 잠자리나 식사를 따지는 사람은 아니니 이른바 고급호텔 수준에 들어맞지 않아서라기보다는 볼품없이 커서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이곳을 좋아했었다. 이렇게 과거형으로 기술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리다와 사귀던 시절에는 여기 오는 것이 특별했고 좋았다. 로비의 목욕탕 냄새와 리도츠카의 이세이 미야케 향수 냄새가 뒤섞이는 것도 좋았고 비록 방을 잡지는 않았지만 넓은 호텔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좋았다. 높은 바깥 계단을 따라 로비로 올라가면서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 것도. 리다와 헤어진 후에는 웬만하면 이곳에 들르지 않았다. 두세 번 미샤를 픽업하러 갔을 뿐이었고 그때에도 로비에 들어가는 대신 밖에 주차를 하고 기다렸다.

 

 

 

어두컴컴한 로비 바에서 페테르부르크 타임즈를 뒤적이며 오렌지 주스인지 칵테일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음료를 마시고 있던 여자 하나가 내게 눈길을 던지더니 환한 미소를 지었다. 메이크업 스타일은 별로 창녀처럼 보이지 않았다. 립스틱 색도 연했고 마스카라도 칠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니스커트 아래로 뻗어 내린 두 다리는 스타킹도 없이 완전히 맨살이었고 영자 신문이 거꾸로 뒤집혀 있었다. 내 시선과 마주치자 여자는 다시 미소를 지었고 무릎 위에 놓여 있던 핸드백을 톡톡 쳤다. 금칠이 벗겨진 체인이 달린 가방은 완전히 열려 있었고 내 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안에 들어 있던 빨간색과 금색으로 반짝이는 조그만 물건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미끄러져 내렸지만 쏟아지지는 않았다. 안쪽 버클에 걸린 모양이었다. 크기나 모양, 포장지의 재질을 보니 꼭 콘돔 같았다. 그때 여자가 얼굴을 붉히며 가방을 잡아채 버클을 잠갔고 세 번째로 미소를 던졌다. 거의 완벽한 미소였다. 순식간에 몇 배는 아름다워 보였고 완전히 진실하게 보였다.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순수하게 감정을 표시하는 여학생 같았다. 하지만 거기 넘어가기에는 나는 무대 위의 미소가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장례라도 치르는 거니? 웃어! 얼굴을 다 열어! 푸른 눈이 유리하지. 애매한 색이면 별로지만. , 까만 눈은 언제나 먹고 들어가니까 괜찮아. 입술 한쪽이 말려 올라가지 않도록 조심해. 광대뼈 힘 빼고!  독설가인 옐레나 바실리예브나는 무대에서 제대로 웃지 못하면 다 헛수고라면서 항상 저 레퍼토리를 쏟아냈고 안나는 그 수업이 끝나면 콧잔등에 주름을 잡고 입술을 떨며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중얼거리곤 했다. 한번은 멋모르고 ? 네 눈은 까맣잖아. 까만 눈은 먹고 들어간다고 해주면 칭찬 아니야?’ 라고 물었다가 안나가 그게 어떻게 칭찬이냐고 왈칵 눈물을 쏟아서 당황한 적도 있었다. 나에게 푸른 눈이 유리하다고 말한다면 그건 칭찬이지만 자기 같은 외국인 유학생에게 검은 눈 운운하는 건 차별적 발언이라는 거였다. 나는 안나에게 너만큼만 무대 위에서 자연스럽게 웃을 줄 안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내가 자기를 달래려고 거짓말을 한다면서 더 심하게 토라졌다. 정말 진심이었는데. 리다에게 그 얘기를 하면서 뭐가 문제인지 묻자 그녀는 멍청이. 걔한테 이랬어야지. 네 눈은 정말 예쁘다고, 까만색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예쁘다고. 무대 위에서 웃는 거랑 진짜로 웃는 거 둘 다 제일 예쁘다고라고 말했다. 나는 리다에게 넌 걔를 모르니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거야. 걘 평상시엔 아예 안 웃는다고라고 대꾸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아마 그녀가 옳으리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리다는 여자고, 나는 여자들의 마음을 잘 모르니까. 하긴 남자라고 다를 것도 없지만.

 

 

영자 신문을 거꾸로 든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의 미소는 까다로운 옐레나 바실리예브나조차도 합격점을 줄 만한 것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아무런 호감을 느끼지 않았고 설령 마음에 든다 해도 창녀와 놀아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마 내가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선 것은 순전히 그 능숙한 미소에 대한 직업적 호기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자는 눈꺼풀을 무겁게 깜박였고 내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나는 곧 자신이 바보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바를 지나쳐 2층으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나는 자기도 모르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안경을 끼고 정장을 차려입은 비즈니스맨 스타일의 중년 남자가 로비 바로 걸어가더니 스스럼없이 두 팔을 벌려 그 여자를 포옹했다. 여자는 반가워하며 파슈카!’ 하고 외쳤고 둘은 서로의 뺨과 입술에 친밀하게 키스를 퍼부었다. 나는 두 배로 바보가 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러니까 창녀가 아니라 그냥 애인을 기다리는 평범한 여자였다. 내게 추파를 던진 것이 아니라 남자친구가 들어오지 않을까 하며 로비를 바라보고 있었고, 우연히 시선이 마주치자 그저 미소를 띠었던 것뿐이다. 자기 미모에 자신 있는 여자들이 흔히 그러듯. 핸드백에 들어 있던 건 빨간색과 금색으로 포장된 초콜릿 캔디였을 것이다. 아무리 창녀라 해도 콘돔을 그런 식으로 한주먹씩 핸드백에 마구 쑤셔 넣을 리가 없다. 거꾸로 들고 있던 페테르부르크 타임즈는, 그냥 허세를 부리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국립대 기숙사 근처에 있는 호텔이고 외국인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니까. 똑똑하고 멋져 보이고 싶어서. 리다가 에브로파에 가서 엽서를 부치던 것처럼. 하지만 그녀의 마지막 미소만은 잘 모르겠다. 마음 한구석으로는 여전히 그게 숙련된 창부의 미소인 것만 같았다.

 

 

 

 

*  *  *

 

 

 

 

 

리다는 먼저 와 있었다. 그녀는 약속에 늦는 건 여자의 특권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지냈던 3년 동안 리다는 대체로 시계처럼 정확했다. 오히려 늦거나 약속을 어긴 건 내 쪽이 몇 배는 많았다. 주로 수업이나 공연 스케줄 때문이었다. 그럴 때면 리다는 불같이 화를 냈지만 그래도 내가 사과를 하면 받아주었고 뒤끝도 없었다. 오히려 그 순간을 즐기기 위해 내가 늦기를 바랄 때도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비밀을 가르쳐줄게, 겐카. 남자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거야말로 여자의 진정한 무기야이별을 통보하던 날 리다는 그렇게 말하고는 오랫동안 웃어댔다.

 

 

 

우리는 언제나 2층 카페에서 만났다. 로비 바보다는 이쪽이 더 아늑하고 한적했다. 홀 구석 창가에 있었기 때문에 낮에는 빛이 들어와서 1층보다 훨씬 밝았고 소파도 크고 푹신했다. 별도의 디저트나 샌드위치 대신 커피나 차 한 잔만 시키는 정도라면 가격도 무난했다. 원한다면 칵테일이나 맥주를 마실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사람이 별로 없었고 바텐더도 손님에게 무관심했기 때문에 한참 앉아 있어도 눈치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가끔 근처의 조그만 식료품 가게에서 주전부리를 사 가곤 했다. 리다가 가장 좋아했던 건 트윅스 초코바와 조그만 노란색 봉지에 든 이상한 스낵이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과자는 감자칩처럼 생겼지만 튀겨서 기름기가 배어 나온다는 것과 짭짤한 것 빼고는 맛은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가격이 매우 싸다는 것 외의 이점은 없어 보였지만 리다는 그 정체불명의 과자를 가리켜 싸구려 칩시(чипсы)’라고 불렀고 쓸데없이 비싼 레이스(LAYS)의 훌륭한 대체물이라 했다. 마치 가짜 LSD처럼. 나는 리다의 표현대로 장기간의 세뇌 교육 때문에과자를 먹는 건 기피했지만 그녀와 트윅스를 반으로 나눠 먹는 건 좋아했다. 매대에 트윅스가 없을 때, 그러니까 운이 좋을 때는 내가 선호하는 피크닉 초코바를 고를 수도 있었다. 트윅스의 찐득한 캐러멜 시럽보다는 피크닉의 땅콩 쪽이 더 좋았다. 리다는 내게 그 와중에도 나이트를 고르느냐고 핀잔을 줬다. 나이트는 다크 초코잖아. 난 그냥 초코가 더 좋단 말이야. 다크로 눈속임한다고 뭐가 달라져? 어차피 초콜릿 먹는 거. 다이어트 콜라 시키는 거랑 똑같잖아.

 

 

옥에 티는 이 홀과 카페가 이따금 단체 손님들의 행사 장소로 쓰인다는 거였다. 그럴 때면 천을 씌운 테이블이 줄줄이 깔리고 하키나 축구 유니폼을 입은 운동선수들이 돌아다니기 때문에 오붓한 데이트는 완전히 물 건너간다. 리다는 어차피 여기서 섹스를 할 것도 아닌데 뭐 어때. 너보다 몸 좋은 남자들이 우글거리는 게 싫은 거지?’ 라고 나를 놀려댔지만 사실 본인이야말로 사람 많은 걸 질색해서 2층에 올라올 때마다 케이터링 테이블이 깔려 있는지 아닌지부터 확인하곤 했었다.

 

 

 

맨 처음 리다와 함께 여기 왔을 때 나는 아직 학생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콩쿠르나 마스터클래스 참여 때문에 학교에서 단체로 투어를 간 적은 여러 번 있었고 물론 외국 경험도 있었지만, 호텔에 묵는다 해도 여럿이서 방 하나를 썼고 항상 우리를 양떼처럼 몰아대는 인솔자가 있었기 때문에 카페나 부대시설을 이용해본 적은 없었다. 그나마 묵었던 호텔도 집단 기숙사 같은 곳이 대부분이었다. 리다는 이미 대학생이었고 나보다 두 살 연상인데다 유행에 대한 여자애 특유의 세련된 감각이 있었다. 서너 번째 데이트 무렵 그녀는 스몰렌카 운하를 산책하다가 다짜고짜 나에게 호텔에 가자고 했고 내가 당황하자 방이라도 잡자고 할까 봐? 우리가 그럴 돈이 어딨니. 커피 한 잔만 마시러 가는 거야라고 대꾸하며 소리 내어 웃었다. 리다는 호텔 2층에도 카페가 있고 바텐더가 있으며 가죽 소파에 앉아 커피와 차를 마실 수 있다는 사실, 시장이나 슈퍼마켓, 스톨로바야 카페보다는 더 비싸지만 그래도 맘먹으면 가끔은 들를 수 있을 정도의 가격대로 호텔이라는 공간과 그 분위기를 점유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매혹되어 있었고 나에게도 그 흥분과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어 했다. 물론 나는 금세 감염되었다. 열여덟 살도 되기 전이었고 극장에 들어가기도 전이었으니까, 그저 좁은 아파트에서 엄마와 동생과 부대끼며 살던 때였고 매일 트롤리버스를 타고 조드쳬고 로시 거리로 통학하며 언제나 죽어라고 춤을 췄지만 내 미래가 어떻게 될지 생각하면 모든 것이 아득했던 시기였으니까. 그러니 내가 프리발티스카야 호텔 2층 카페에 처음 들어섰을 때 완전히 새롭고 즐거운 세계, 어른들의 공간으로 들어온 기분이 든 건 어쩌면 당연하다. 리다는 나보다 훨씬 경험이 많은 편이었지만 집안 형편은 엇비슷했고 언제나 새로운 것, 멋진 것, 있어 보이는 것에 목말라 있었다. 나는 다른 곳에서 데이트하는 것도 좋았고 때로는 그냥 함께 강변을 걷거나 좁은 침실에 계속 같이 틀어박혀 있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리다는 언제나 그래도 호텔 카페가 제일 좋아라고 했다. 디스코텍이나 록클럽보다 호텔이 더 쿨하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리다에게 그건 내가 무대 위에 올라가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던 것 같다. 바깥으로 나가면 우중충하고 습하고 어두운데다 진창이 가득한 거리와 끝없이 오르는 물가, 텅 빈 진열대와 좌판에 살충제를 놓고 파는 노파들과 불법 복사 테이프들과 매연뿐이지만, 높은 돌계단을 따라 올라와 로비의 무거운 문을 통과하면 후끈한 목욕탕 냄새와 함께 깨끗하고 광활한 공간이 펼쳐지고 마치 외국이나 다른 세계에 온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푹신하고 커다란 가죽 소파에 파묻혀 서로의 어깨를 기대고 앉아 호텔 바텐더가 가져다주는 커피와 홍차를 마시며 별 뜻 없는 대화를 나누고 이따금 손을 잡고 키스를 하고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몸을 밀착시키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우리가 묵고 있는 방으로 올라가 사랑을 나눌 것만 같고, 그건 반드시 스위트룸이지 일반 노메르’(номер)는 아니며 다음날이면 메르세데스나 BMW가 우리와 트렁크를 풀코보 공항으로 실어다 줄 것이며, 우리는 아에로플로트가 아니라 에어프랑스나 델타 에어라인 같은 외국 비행기에 올라 비즈니스석으로 갈 것이다. (1등석까지는 차마 이르지 못했던 것을 보니 리다의 상상력에도 어느 정도 현실적 제동이 걸렸던 것 같다)

 

 

 

리다는 안쪽 창가에 앉아 있었다. 예전에 항상 앉던 자리였다. 리다는 우리 자리라고 불렀고 이따금 다른 손님이 거기 앉아 있으면 몹시 기분 상해했다. 다른 곳에 자리가 많아도, 창가의 다른 자리가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자리에 앉았던 손님이 일어나고 다시 그 자리로 옮겨갈 때까지는 계속 뾰로통해져 있었다. ‘주문 좀 외워봐, 저 사람들 빨리 가라고. 아니면 기도라도 해. 다음엔 너네 엄마 성상이라도 가져와 봐라고 내 귀에 대고 속닥거렸다. 내가 신앙이 독실한 건 너네 엄마잖아. 우리 엄마는 세례도 안 받았을걸이라고 대꾸하면 그래도 너희 엄마는 굉장히 독실하게 생기셨잖아, 이콘에 나오는 성모처럼 고상하시던데라고 농담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말을 늘어놓으며 우리 자리에 앉아 있는 애꿎은 손님들에게 레이저 광선 같은 따가운 눈빛을 쏘아댔다. 양쪽 엄마들의 신앙 덕인지 리다의 저주 어린 눈빛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금세 자리를 되찾곤 했다. 그 자리가 사각지대라 바텐더의 눈에 가장 띄지 않는 방향이긴 했다. 특히 창가를 향해 나란히 앉으면 리다는 내 어깨에 머리와 몸을 거의 완전히 기대곤 했기 때문에 소파에 푹 파묻혀서 더 그랬다.

 

 

 

리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창문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하지만 소파에 파묻혀 있지는 않았다. 꼭 무용수처럼 등을 꼿꼿이 세우고 있었고 머리 색도 바꿨기 때문에 목과 어깨의 익숙한 실루엣이 아니었다면 처음에는 다른 사람이라고 착각할 뻔했다. 나는 천천히 그쪽으로 갔다. 리다는 기척을 느꼈을 테지만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갑작스럽게 종아리와 무릎에 희미한 경련이 이는 듯했다. 뭐라고 인사를 해야 할지, 어디로 가 앉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름을 부르려니 목구멍이 꽉 달라붙는 것 같았다. 예전처럼 옆자리에 붙어 앉는 건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데 맞은편 소파에는 그녀의 핸드백과 코트가 놓여 있었다.

 

 

우리는 리다가 결혼한 후에도 몇 번 본 적은 있었지만 그건 모두 극장에서였다. 그만둔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으니 아마도 우연이었겠지만 그녀는 나의 마린스키 마지막 무대를 보러 왔었고 심지어 안내원을 통해 꽃도 전해주었다. 정작 사귈 때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그리고 미샤의 발레단으로 이적한 후의 첫 공연과 갈라 무대에도 왔다. 그때는 남편과 함께 왔으므로 별다른 이야기를 나눌 일은 없었다. 그녀의 남편은 노브이 루스키 중에서도 언론 쪽에 발을 걸치고 있어 문화적 자기 포장을 할 줄 아는 세련된 부류에 속했고 미샤와도 잘 아는 사이였다. 심지어 공연 후원도 여러 차례 했기 때문에 우리 리셉션과 기자간담회에도 참석했다. 그를 내게 소개해 준 것도 리다가 아니라 미샤였다. 미샤는 나와 리다의 옛 관계를 몰랐다. 하지만 안다 해도 별로 신경 썼을 것 같지 않다. 미샤는 상대방의 사생활이나 과거에 대해 캐묻는 타입이 아니었다. 사실 질투나 집착이 뭔지 제대로 알기나 할까 싶다. 그런 사람이 그토록 격렬하고 폭발적인 작품들을 안무하고 정서적으로 도저히 눈을 돌릴 수 없는 무시무시한 인물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리다의 남편은 나와 그녀가 몇 년 동안 사귄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리다의 말에 따르면 그는 철저한 사업가였고 매사를 계산해서 합리적으로 판단했다. 아내의 철없던 여학생 시절 연애질에는 관심도 없을뿐더러 나 정도의 풋내기는 자기 같은 거물 비즈니스맨에게는 경쟁 상대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봤던 건 작년 이맘때 무소르그스키 극장에서였다. 미샤의 푸쉬킨 연작 중 마지막 작품인스페이드의 여왕초연이었고 나는 게르만을 췄다. 그는 시장과 국회의원 두엇, 방송사 부사장과 함께 로열석에서 공연을 관람했고 커튼콜이 끝났을 때는 리다와 함께 백스테이지에 들러 미샤와 이야기를 나누기까지 했다. 리다는 남편이 나를 비롯한 주역 무용수들과 사진을 찍는 동안 뒤로 물러서 있었고 내겐 의례적인 인사 외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한밤중에 불쑥 전화해서 잔뜩 취한 목소리로 너 그 역 잘 어울리더라. 여태 봤던 무대 중에 제일 좋았어. 마린스키 버린 보람이 있네, 좋겠어라고 말하고는 툭 끊어버렸을 뿐이었다. 뜬금없는 전화는 그렇다 치고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예전에 그녀는 내 공연을 종종 보러 오곤 했지만 제대로 된 평을 해준 적이 없었고 내가 물어보면 자기는 전문가가 아니니 그런 걸 기대하지 말라고 했었다. 심지어 마음에 들었다거나 좋았다거나 별로였다는 얘기조차 거의 하지 않았는데. 그 이후 나는 리다와 마주친 적이 없었다. 그녀의 남편은 여전히 공연을 보러 왔지만 리다는 따라오지 않았다.

 

 

 

뭐라고 아는 척을 해야 할지 망설이며 서 있는데 리다가 이제 뜸을 들일만큼 들였다고 여겼는지 뒤를 돌아보며 방긋 웃었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

 

 

안녕, 겐카. 오랜만이네. ”

 

안녕. ”

 

왜 그렇게 바보같이 서 있어? 앉아. ”

 

 

 

그녀는 맞은편 소파에 올려두었던 핸드백과 코트를 자기 옆의 빈자리로 옮겨서 나의 고민을 해결해주었다. 나는 테이블을 돌아서 그녀의 맞은편으로 갔다. 코트를 벗어 내려놓으면서 그냥 입고 있을 걸 그랬나 후회했다. 오래 앉아 있을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내는 따뜻했고 리다는 반소매 니트 차림으로 맨팔을 내놓고 있었기 때문에 겉옷을 입고 있는 것도 너무 어색하게 보일 것 같았다. 그냥 머플러를 풀지 않는 것으로 절충했다. 막 앉으려는데 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을 내 어깨에 감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키스 안 해줄 거야? ”

 

남의 여자한테 그러면 안될 것 같은데. ”

 

피차 마찬가진데 뭐. ”

 

 

 

리다는 내 입술과 뺨에 힘차게 입을 맞췄고 나도 그녀에게 가볍게 키스를 했다. 딱 인사하는 정도로. 누구도 트집 잡을 수 없을 만큼 의례적인 키스. 그러자 숨쉬기가 좀 편안해졌고 나는 소파에 앉았다. 리다와 잠시 눈을 마주쳤지만 그녀의 얼굴이 한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메뉴판을 잡았다. 오랜만에 왔더니 가격과 메뉴가 조금 바뀌어 있었다.

 

 

아직 안 시켰구나. 커피 마실 거지? ”

 

아니. 난 페리에. 라임으로. ”

 

탄산수 싫어했잖아. ”

 

탄산수는 싫어. 페리에는 좋지. ”

 

 

 

 

에비앙도 같이 시켜줄까?’ 하고 묻고 싶었지만 이제 그런 스스럼없이 짓궂은 농담을 주고받을 사이는 아닌 것 같아서 나는 잠자코 라임 향 페리에와 홍차를 주문했다.

 

 

 

 

 

 

 

 

 

 

...

 

 

 

 

 

 

 

 

 

 

맨 위 사진과 바로 위 사진은 겨울과 초가을이라는 시간적 차이 때문에 확연하게 달라 보이지만, 둘 다 프리발티스카야 호텔 가는 길 정류장 근처이다. 아쉽게도 사진들은 90년대 말에 찍은 건 아니고 2010년~2012년에 내가 찍었다. 날씨 안 좋을 때 찍힌 사진은 사실 90년대 말과 큰 차이가 없게 느껴지긴 한다. 

 

 

 

 

 

 

 

 

2000년대 들어와서 프리발티스카야 호텔은 파크 인 체인에서 인수해서 사진을 잘 보면 파크 인 로고가 보인다. 사진은 바닷가 쪽 뒤에서 찍었다. 왼편 아파트 단지 어딘가에 리다가 결혼 전까지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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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